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고전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고전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14/11/03

쿠드랴프카의 차례 - 요네자와 호노부 / 권영주 : 별점 3점

쿠드랴프카의 차례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에 참가한 고전부는 문집 "빙과"를 달랑 30부만 인쇄하려 했는데, 마야카의 실수로 200부가 인쇄되어 배달되었다. 고전부는 3일간의 축제 기간 중 200부 판매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던 중, 축제에 참가한 단체를 대상으로 장난같은 물건을 훔치는 "십문자" 괴도 사건과 얽히게 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고전부 시리즈 세 번째 작품. 학교 축제를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등장인물별로 1인칭 시점의 묘사가 이어지는 전개가 독특합니다. 덕분에 탐정역의 호타로는 "에너지 절약"이라는 신조에 맞는 여전한 삶과 모습이지만, 다른 고전부원들에 대한 비중과 묘사가 상당히 커지고 캐릭터별로 명확한 역할이 부여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주변인에 머무르는 듯했던 후쿠베입니다. 이른바 데이터베이스라는 역할에 충실한데 퀴즈 경연대회에서 준우승, 요리 대회에서 팀을 이끌어 우승하는 등의 활약으로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주위에 강하게 어필하며, 본인 스스로도 호타로에게 자극받아 사건 해결에 뛰어들 결심을 하는 등 확실히 "성장했다"는걸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큰 주제 중 하나인 ‘기대’라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고전부원인 셈이지요.
‘기대라는 것은 체념에서 나오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담감보다 크다’는 문장은 후쿠베–오레키는 물론 안죠 하루나와 코치 아야코, 구가야마와 다나베 지로의 관계에도 대입되는 개념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기대’라는 말로 포장해봤자 결국 ‘질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
마야카도 단순한 잔소리꾼이 아니며, 만연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선배에 대항하는 강한 자기 주장과 요리 대회에서의 활약이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반면 치탄다의 비중은 조금 애매했습니다. 그녀도 나름대로 부탁과 협상 등의 노력으로 성장한 것은 물론, 요리 대회에서의 활약상(기세두부)은 눈부시지만 실제로 고전부의 문제 해결이나 십문자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영화 상영하는 곳에서의 합동 판매는 실력자 이리스 선배와 안면이 있었던 덕분일 뿐이며, 그 외에는 벽신문부와의 교섭 등에서 실패만 거듭했으니까요. 십문자 사건이 불거진 후에는 그녀의 노력은 사실상 불필요했지요.

이러한 고전부원들의 활약에 더하여 추리물로도 괜찮습니다. "십문자" 사건이 일본어 50음도와 엮인 암호라는 설정은 딱히 새로울건 없지만, 풀어나가는 방식이 나쁘지 않았을 뿐더러 디테일한 소재와 복선을 잘 활용한 전개가 요네자와 호노부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앞부분에서 언급된 동인 만화 "저녁에는 송장이"가 주요 단서로 활용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호타로의 추리뿐 아니라 그림을 그린 것이 누군지를 찾아내는 치탄다와 마야카의 활약, 필명인 안신인 타쿠하가 "아지무"라는 것을 밝히는 데이터베이스 후쿠베의 활약 등 고전부원들의 힘이 합쳐지는 모습도 인상적으로 그려지고요. 오랜만에 ‘4위일체’ 활약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몇몇 부분은 조금 아쉽습니다. 가장 아쉬웠던건 범행의 목적입니다. 십문자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까지의 추리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범행 목적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와닿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인물이 노력하지 않는 천재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는 동기야 이해가 되지만, 반쯤은 범죄에 가까운 행동을 취해가며 알릴 내용은 아니니까요. 또한 "쿠" 순서를 건너뛴 것이 이미 잃어버린 것이라는 식의 연결도 논리적으로 무리라 생각됩니다. 해당 작품의 원작 줄거리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구가야마는 이해했을 수 있으나, 독자에게는 극도로 제한적인 정보에 불과했으니까요. 공정한 정보 제공 측면에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는 핵심 증거인 학원제 가이드 설명 페이지를 마지막에 공개한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들은 앞부분에 소개된 가이드만을 기준으로 추리를 진행했는데, 실제로는 다른 구성을 가진 페이지가 있었다는 건 반칙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전부의 위기처럼 묘사되는 문집 200권도 판매가격 기준으로만 보면 약 4만 엔, 부원 1인당 부담은 1만 엔 수준으로, 큰돈이긴 해도 엄청난 위기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어른이라면 한 번의 술값 정도라서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물이라는 청춘 드라마적 전개에 더해, 일상계 추리물로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여러모로 다소 아쉬움은 있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읽는 재미 하나만큼은 정말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고전부원들의 시각으로 그려지는 학원제의 디테일, ‘빨간 클립 작전’을 연상시키는 "볏짚 프로토콜", 요리 시합에서의 긴장감과 드라마틱한 승부 같은 잔재미도 풍부하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0/11/29

리라장 사건 - 아유카와 데쓰야 / 김선영 : 별점 3점

리라장 사건 - 6점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시공사

리라장이라 불리는 건물에 일곱 명의 학생이 피서차 방문했다. 서로 친구들이었지만 각자의 사연으로 갈등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대상으로 한 무서운 연쇄 살인극이 시작되는데...

아유카와 데쓰야의 1958년도 발표 작품입니다. "필독 본격 추리 30선"이나 "동서 미스터리 베스트 100" 같은 리스트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전 본격물이지요. '판타스틱'에서 주최한 이벤트 덕분에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인물들에게 닥친 연쇄 살인이라는 기본 설정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전형적인 일본 고전 본격물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도 1958년이라는 발표 시기 때문에, 기존 고전 본격물과의 차이점도 몇 가지 눈에 띄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리라장'이라는 장소의 존재입니다. 보통 이런 유형의 연쇄 살인은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클로즈드 서클' 형태로 전개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경찰이 수시로 오갑니다. 심지어 경찰이 리라장에서 함께 거주하기까지 하는 파격적인 설정을 선보입니다. 경찰의 수사 과정이 탐정보다 훨씬 비중이 높고, 반대로 탐정은 니조와 호시카게 류조의 두 명을 등장시키면서도 이들의 매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묘사도 특이했고요.

이런 점을 본다면 고전 본격물에서 트릭의 핵심만 남겨두고 작위성을 덜어낸, 고전 본격물에서 근대 사회파 추리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를 드러내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1950년대로 여전히 고전 본격물 쪽에 더 치우쳐져 있지만,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 다카기 아키미쓰의 "야망의 덫" 등 장르의 주류가 점차 사회파 미스터리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과도기적인 모습에서 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우선, '리라장'이라는 장소와 스페이드 카드로 대표되는 작위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용의자가 축소되고 특정될 수밖에 없는 외딴 별장의 휴가 여행을 범행 무대로 삼기보다는, 도쿄에서 사고로 위장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인게 당연한데 말이지요. 탐정 캐릭터의 매력이 희박한 것도 고전 본격물에서 중요한 요소가 빠진 느낌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핵심인 알리바이 트릭은 명성에 걸맞게 훌륭한 편이지만, 살로메 - 유키타케 살인 사건 이후에는 그렇게 정교하게 짜여 있지는 못합니다. 사건의 전개도 우연과 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요. 예를 들면, 알리바이부터가 경찰 수사의 부실함이 원인이었고, 하나 씨의 증언을 경찰들이 초반에 무시한 것, 하나 씨의 증언을 남편이 듣지 못한 것, 니조가 조사를 핑계로 입을 다물면서 사건이 이어지게 된 것 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찰이 상주하는 리라장에서 연쇄 살인이 계속 벌어진다는 것은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특히 마지막 사건의 경우, 범인이 아비코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애초에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경찰에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가능 범죄를 또 저지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기본이 되는 트릭 자체는 상당한 수준이며, 초반부 살로메-유키타케 사건까지는 몰입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야기가 너무 확장되면서 사족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졌고, 무리한 전개가 많아진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런 점에서 명성과 기대에는 살짝 미치지 못했네요. 물론, 기대가 너무 컸던 탓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니조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마무리했더라면 더욱 괜찮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최근 읽은 책 중에서 책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판형도 마음에 들고 표지 디자인도 세련되었으며, 앞부분의 등장인물 소개, 중간중간 포함된 약도, 뒷부분의 해설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옛날 추리 문고 스타일이 떠오르는데,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2012/06/13

변호 측 증인 - 고이즈미 기미코 / 권영주 : 별점 3점

변호 측 증인 - 6점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검은숲

고아에 스트립댄서 출신인 나미코는 재벌가의 방탕한 외아들 야시마 스기히코와 결혼에 성공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녀의 시아버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모든 것을 포기한 남편 스기히코에게 아내 나미코는 사건의 진상을 깨우쳤다고 공언한 뒤, 옛 동료가 소개한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이 작품이 데뷰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잠깐 조사해봤더니 첫 남편이 "이쿠시마 지로"였다는 것, 만취하여 사고사로 죽었다는 것 등 작가의 일대기도 흥미롭더군요.

250여페이지라는 짤막한 길이도 적당하고 읽는 맛도 잘 살아있는 소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고전적"인 스타일이라는 점입니다. 1960년대에 발표된 작품인데 스타일은 그보다 더 이전의, 고전 본격물 황금기 시대를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괴퍅한 노인의 죽음과 난봉꾼 아들의 환영받지 못한 결혼의 조합이라는 설정부터가 고전 본격물스럽지요. 수많은 작품에서 익히 보아왔던 설정이기도 하고요. 거기에 더해 감옥 안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은 "처형 6일전"이나 "환상의 여인"이 떠오르며, 나미코의 시점과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한 전개는 코넬 울리치의 향기가 짙게 느껴집니다.
묘사도 그러합니다. 벽난로, 바 스툴, 프랑스식 창문, 테라스옆 골담초 덤불... 묘사 만으로도 영국 시골 마을 별장이 떠오를 정도거든요.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꾸면 고전 황금기 시대 작품이라고 해도 속아넘어갈 정도로 완벽한 고전 스타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전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고전적인 본격 추리물이 아니라 주인공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반전을 그린, 서술 트릭의 원조격 작품이라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반드시 속는다!"라는 말 하나만큼은 적절하다 생각될만큼 트릭의 완성도도 높은 편이에요.

그러나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둘러싼 수많은 절찬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쓰여진 시대를 감안한다면' 걸작이라는 평가인 듯 싶고, 저 역시 이 평가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현재에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반전만 해도 뭔가 한방 모아서 터트리기는 하는데, 폭발력이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충격적이라고 하기에는 좀 심심하고, 기대했던 법정 장면에서의 드라마가 약한 탓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완성도는 높지만 지금 읽기에는 딱히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 것도 아닌데다가, 작중 변호사의 입을 통해 밝혀지듯 경찰의 부실한 수사도 사건을 키우는데 한몫 했다는 점에서 딱히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그래도 후대에 평가받을 만한 점은 분명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꼭 시대를 초월할 필요는 없죠. 그 나름대로 즐길거리만 있으면 되니까요. 책도 이쁘게 잘 나온 편이라 마음에 드네요. 추리소설 입문자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3/12/06

애욕의 고전소설 - 서귤 : 별점 2.5점

애욕의 고전소설 - 6점
서귤 지음/이후진프레스

서귤 작가가 국내 고전 소설들을 읽고 그린 만화 에세이. 제목 그대로 연애담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고전을 배웠는지 온갖 19금 묘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게 핵심이고요.

날 것 그대로의 고전 해석이 빛납니다. 판서, 정상을 지낸 홍 아무개가 낮잠 중에 기막힌 태몽을 꿨지만 부인이 동침을 허락하지 않자 노비를 범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뒤, 한마디로 '미친 새끼'라고 일갈하는 식이지요.
작가가 바라보는 시각도 독특해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흥부와 놀부의 처지를 설명하며, 이를 둘 사이의 프리스타일 랩 배틀로 형상화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야한 내용들도 다른 책들에 비하면 굉장히 직접적으로, 대놓고 설명해주고 있는게 마음에 들더군요.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미처 제대로 읽지 못한 고전에 대한 소개도 반가웠습니다. 사씨남정기가 그것인데, 악녀 교채란에 대한 설명이 참으로 실감납니다.

하지만 작가의 우울증과 같은 개인 이야기도 많고, 깊이있는 내용이라고 보기 힘들다는건 감점 요소였습니다. 작가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가격도 과한 편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5/01/06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워싱턴 어빙 외 / 한동훈 : 별점 3점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6점 워싱턴 어빙 지음, 한동훈 옮김/태동출판사

이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는 아마도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고전 본격 황금기, 클래식 미스터리는 사족을 못 쓰는 애호가입니다. 이런저런 고전들은 많이 읽은 편인데 평균적으로 괜찮게 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다 저의 취향 때문이죠.
 그러나 아주 오래전 읽었었던 예전에 읽었던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이 심하게 기대 이하라서 나름의 기준점을 최소한 19세기 말 이후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지금 읽기에는 심하게 낡았다고 여겼거든요. 이 책 역시 대부분 작품이 19세기 후반 발표된, 기준점 통과가 간당간당해서 그동안 읽지 않았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 완전 대박입니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했어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과 견줄만한,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명탐정들 -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의뢰인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과학 탐정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 시리즈 단편들은 완성도를 떠나 존재만으로도 반가웠을 뿐더러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결산", "위험천만한 게임"이라는 "걸작"이라 칭해도 부족함없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된 볼륨도 마음에 들고요. 발표된 시기를 감안할 때 지금 읽기에는 낡아버리거나 시대착오적인 작품도 있고, 고전적 작법으로 쓰여져 지금 기준의 완성도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운 작품도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고전을 읽을 때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세금과도 같은 것이죠. 가이 포크스나 보르시치와 같은 고유명사를 잘못 번역한 옥의 티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번역도 무난한 편입니다.

그래서 수록 작품 평균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본격물 미스터리 애호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책인데 고전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는 하네요. 그래도 최소한 걸작이라 말씀드린 저 세작품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서는 절판되었으나 e-book은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울버트 웨버, 혹은 황금의 꿈" 

"슬리피 할로우" 등으로 유명한,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명이라는 워싱턴 어빙의 작품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평범한 네덜란드 출신 배추농부 울버트 웨버가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는 내용인데, 떠벌이가 지껄이는 듯한 구전문학같은 묘사가 볼거리입니다. 울버트의 보물을 찾기 위한 헛된 노력이 해적들의 은밀한 행동과 결합되어 전개되는 독특한 전개, 블랙코미디 느낌도 많이 전해주는 유쾌함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울버트가 부동산 재벌이 된다는 난데없는 결말과 같은 두서없는 전개, 구전문학스러운 묘사 등은 너무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약간 호러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장르 문학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하기도 하고요. 최소한 "미스터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부동산이 최고라는 교훈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차라리 시사풍자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길쭉한 궤짝"

에드거 엘런 포우의 단편. 친구가 애지중지 돌보는 궤짝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낡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나 흥미로왔어요. 

다만 선장의 말을 빌어서 마무리하지 말고, 마지막 침몰 직전 상황에서 진상이 드러나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예를 들자면 관 뚜껑이 열리고 아내의 시체가 등장하는 "어셔가의 몰락"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걸작 단편입입니다. 무허가 3류 도박장에서 주인공이 도박으로 거금을 딴 뒤 술에 취하고 몽롱한 채로 도박장 방 하나를 빌려 잠을 자다가 침대 천장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주인공이 술에 취하는 과정의 생생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침대 지붕이 내려오는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읽다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에요. 잠이 오지 않아 세밀하게 관찰했던 벽에 걸린 그림 속 인물의 깃털 유무에서 모골송연한 범죄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과정도 매끄럽고요. 짧은 글이지만 정교하게 복선이 짜여져 있는 덕분이지요. 

한마디로, 이 작품을 읽은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작품집을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근대 추리소설의 시조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거장의 작품다왔달까요. 별점은 5점입니다.

"꿈속의 여인"

조금 흔해빠진 괴담이랄까... 자신의 생일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나타나는 여인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품고 살아가는 마부 아이작의 이야기입니다. 

별다른 극적 반전도 없고 여인의 정체도 알려주지 않는 등 불친절한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앞선 작품은 걸작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장이라고 항상 걸작만 쓰는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아이작의 과거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우며 꿈과 현실을 잇는 과정의 묘사만큼은 볼만했던 만큼 별점은 2.5점입니다.

"공주의 복수"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의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에 "문간의 검은 가방"이라는 단편이 소개되었던 시리즈이지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루시에 쿠니에르라는 아가씨의 실종 사건을 그리는데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어요. 러브데이의 추리가 불완전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사가 드루스 소령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지나친 억측입니다.
뭐 이 부분은 눈빛에서 살기를 느끼는 무림 고수와 같은 재주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 쳐도, 사건 관계자들이 모인 상황에 난입하여 "모자 가게"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의 비약입니다. 그녀를 빼돌린 드루스 부인과 그윈 부인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모자를 쳐다보았다? 이게 모자 가게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냥 눈둘데가 없는 것인지도 불명확하고 그 모자 가게에서 산 모자인지도 확실치 않으니까요.

주로 관찰을 통해 추리하는 러브데이 브룩과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위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루시에 캐릭터, 셜록 홈즈의 라이벌치고는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쓰여진 점 등은 특이하지만 추리적으로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천국의 물가에서"

아주아주 약간 고딕 호러 분위기가 나기는 하는데 실상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입니다. 주인공 케언공이 라마스 양에게 청혼할 때의 대사는 재미난데 그 외에는 별다른게 없는 고전 할리퀸 로맨스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목사 서재의 피웅덩이"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시리즈 단편입니다. 목사관 서재에 피웅덩이를 남긴채 목사가 사라진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로, 충격적이면서도 기발한 인간 소실 트릭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상은 트릭이고 뭐고 없이 서재에서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 지하실에 숨겼다는게 결론이라서 맥이 빠집니다. 이래서야 명탐정이 딱히 등장할 필요도 없죠. 자세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더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에요. 아무리 피가 응고하였더라도 아무런 흔적없이 시체를 옮기는 작업을 성공했을리는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가 순전한 우연 - 범인이 시체를 옮길 때 우연히 팽이가 떨어져 그것을 돌리게 된 것 - 이라 추리적인 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양치기 캐릭터는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었고요. 

셜록 홈즈처럼 현장을 아주 철저하게 조사한 뒤 단서를 찾아내어 사건을 해결하는 뮬러의 활약은 그럴듯했습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별점은 2점입니다. 홈즈 시대 추리소설의 단점만이 극대화된 작품이었어요.

"범죄구성 사실" 

엉클 애브너 시리즈로도 유명한 멜빈 데이비스 포스트의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사교계의 총아인 사무엘 월콧이 사실은 리차드 워렌이라는 인물로, 월콧의 아내와 공모하여 그를 죽인 뒤 신분을 가로챈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월콧 (워렌)이 아내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계획을 돕는다'는 나름 충격적인 설정으로 고객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랜돌프 메이슨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에요. 페리 메이슨의 선구자적인 캐릭터죠.

또 완벽하게 시체를 없앨 경우 범죄 사실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사망 사실과 그 사망을 가능케 한 폭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 당시에 소설로 발표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이른바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이 법의 헛점이 많이 알려진 덕인지 이런저런 정황 증거를 통해 범죄 사실이 입증된다면 유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체를 없애는 과정의 디테일도 좋아요. 황산을 이용하여 시체를 녹여 없애는 방법인데 소설처럼 깔끔하게 모든 흔적을 단시간내에 없애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묘사가 잔혹하면서도 생생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부족함이 없지는 않으나,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쌍벽의 탐정"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으로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서사, 그리고 제법 그럴듯한 범죄 및 트릭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완성도는 좀 처집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치 스틸맨이 어머니를 버리고 모욕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와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재능(냄새 맡기)을 어필하는 전반부와 호프 캐넌의 은광 부락에서 벌어진 폭사사고를 다룬 후반부로 나뉘는데, 두 이야기가 잘 결합되지도 않을 뿐더러 지루한 탓입니다. 

특히 전반부 이야기는 설득력도 낮고 이렇게 길게 설명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장황해요. 후반부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플린트 버크너에게 살의를 품은 노예와 같은 영국 소년 페트락 존스가 범행을 결심하는 과정, 거기에 아치 스틸맨이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의 특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실종된 아기를 찾아내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플린트 폭사사건 이후 페트락의 친척 아저씨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단서를 이용하여 범인을 지목하고 아치 스틸맨과 추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난잡하게 전개됩니다. 

마크 트웨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정교한 과학적 트릭 - 초가 타는 시간을 이용하여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알리바이를 만듬 - 이 등장하는 것은 인상적이지만 아치 스틸맨이 현장 조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한 만큼 완전 범죄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아요.

물론 셜록 홈즈의 패러디물을 쓰기도 했던 작가의 작품답게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지없이 망가지는 장면은 재미있었고 그 외에도 셜록 홈즈 스타일에 대한 통렬한 패러디, 예를 들어 "탐정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탐정 곁에서 일을 꾸미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등은 인상적이고 재미있긴 했습니다. 미국적인 정취와 무식함 (집단 린치를 포함하여)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부가적인 장점도 존재하고요.

그러나 단점이 더 부각되는 작품이라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더 짧게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작가의 욕심이 과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블랙 핸드"

제목을 한글로 풀이하면 "흑수단". 제목 그대로의 범죄단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시리즈 중 한편입니다. "과학 탐정"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직접 개발한 도청 장치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영향을 짙게 느껴지는데 1인칭 화자가 파트너로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기묘한 사건의 의뢰, 독자가 그 사용법을 알 수 없는 장치의 등장,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홈즈 시리즈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별게 없습니다. 유괴 사건에서 아이를 은닉한 장소를 도청 장치를 통해 듣고 경찰에게 알려준다는 방법이 전부니 말이죠.

그런대로 잘 쓰여지기는 했지만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탁상시계"

"독화살의 집"이라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을 쓴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는데 환상특급을 보는 듯한 내용이라 기대와 영 달랐습니다. 장르 구분을 하자면 판타지에 가까왔달까요. 시간을 불특정하게 14분간 멈추는 능력이 있는 탁상시계로 벌인 완전범죄 이야기로 시간이여 멈춰라! 류의 내용이라 추리적으로는 건질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시계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반전도 없어서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만년 2인자의 질투심이라는 동기는 충분히 설득력있기는 하고, 이런 류 아이디어의 원조인지도 궁금하긴 한데, 상술한 이유로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산"

퍼시벌 와일드의 단막극. 극작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 출간된 작품은 단편집 두 권밖에 없지요. 때문에 자료로서도 귀중한데 작품의 수준도 아주 높습니다. 딱 두명의 등장인물이 이발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빚어지는 극도의 서스펜스가 놀라울 정도에요. 이발사 킬번이 과연 그의 딸을 농락하고 버린 손님 존의 멱을 딸 것인가?와 존이 시간제한이 있는, 전 재산이 걸린 경매에 참석할 수 있는가?라는 두가지 드라마를 긴장감넘치게 선보이면서도 킬번이 존을 12년 동안 뒤쫓고 지금의 찬스를 만들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는 솜씨도 탁월한 덕분입니다.

아울러 마지막 반전 - 존이 이야기한 경매시간과 이발소 시계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에 대한 대사 - 까지 확실하고요. 이런 작품이 1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니 고개가 숙여질 뿐이네요. 별점은 5점입니다!

"위험천만한 게임"

프로 사냥꾼 레인스포드는 우연히 조난당하여 러시아 출신 부호 자로프 장군의 섬에 표류하였다. 자로프 장군은 사냥에 미친 인물로 극도의 긴장감을 위해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고 레인스포드도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건 게임에 참여하는데..... 

어딘가의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던 걸작입니다. 인간 사냥이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실제 사냥 게임에 대한 설정 - 3일이라는 시간 제한 및 자로프 장군이 사거리 짧은 피스톨을 장비했다는 핸디캡 등 - 이 탁월할 뿐 아니라 두 명의 대결에 대한 묘사가 긴장감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반전도 기가 막혀요. 바다로 뛰어든 레인스포드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라 성까지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인데 예상을 깨는 맛이 있었거든요. 별점은 5점입니다. 

한 남자가 협박 때문에 생명을 건 모험에 뛰어들어 성공한 뒤 협박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은 스티븐 킹의 단편 "벼랑 끝에 선 사나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새 출발"

잘 모르는 작가의 종말 이후를 그린 SF로 문명이 모두 사라진 뒤, 이전 문명의 기억을 지닌 자가 미개집단의 종교인과 충돌한다는 설정의 작품입니다. 

설정부터 많이 접해보았던 것으로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네요. 종교인이 믿는 신의 존재가 식기세척기였다는 반전은 있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여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고요.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진부했어요. 시대가 너무 흐른 탓이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2014/09/15

백화점의 교수형 집행인 오사카 케이키치 7가지 미스터리 - 오사카 케이키치 / 곽은숙 : 별점 2.5점

백화점의 교수형 집행인 - 오사카 케이키치 7가지 미스터리 - 6점
<오사카 케이키치> 저, <곽은숙> 역/그래출판

"감방"에서 이 작가의 "세 광인"이 마음에 들었다고 리뷰를 올렸었죠. 그래서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보았는데, e-book으로 출간되어 있더군요. 퍼블릭 도메인 작품인 덕분이겠지요? 가격도 2,000원으로 착해서 주저 없이 구입했습니다.

참고로 "감방"에서는 오오사카 케이키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오사카 케이키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찾아보니 "오오사카" 쪽이 맞는 번역이네요. 그런데 위키를 보니 작가의 인생도 정말 드라마같습니다. 태평양전쟁에 징집되어 출정 전 은사인 고가 사부로에게 장편소설 원고를 맡겼는데, 오오사카는 루손 섬에서 병사했고 고가 사부로 역시 급사해 버린 탓에 원고가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안타깝습니다...

하여튼, 이 책은 제목 그대로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입니다. 일상계 소품 한 편을 제외하고는 고전 황금기 스타일의 정통 본격물들입니다. 

수록작 전체의 별점 평균을 낸다면 2.5점 정도인데, 별점 3.5점 이상의 작품이 두 편이나 있으며 고전 황금기 스타일을 충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독서였습니다. 이런 작품이 전전(1945년 이전)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탄탄한 기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고요. 고전 황금기 본격물 애호가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런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보다 많이 소개되길 바라며 리뷰를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 리뷰에서는 항상 그렇지만,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꼭두각시 재판"

20여 년 동안 법정 정리로 일해온 화자가 겪었던, 무려 세 건의 재판에서 핵심 증인으로 활약한 요정 여주인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법정물로 볼 수 있는데 요정 여주인이 사건 피해자나 용의자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면서도 유·무죄 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만드는 증언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설득력 넘치게 그리고 있습니다. 복선 및 단서 제공 역시 적절했고요. 무엇보다도 이런 류의 도박을 그린 작품은 본 적이 없는데 너무 가볍게 소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아이디어가 돋보였어요.

조금 낡은 구성과 언젠가는 꼬리가 밟힐게 분명했다는 단점은 있지만, 그야말로 숨어있는 보물 같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향수 신사"

여고생 구루미가 기차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신사가 은행강도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을 알고 벌이는 작지만 용감한 행동을 그린 작품.

거의 대부분이 구루미의 심리 묘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1. 여행 중 앞좌석에 앉은 신사를 불쾌하게 생각한다.
2. 손가락이 하나 없다는 큰 특징을 알게 된 후 왜 그 사실을 숨길까?를 궁금해한다.
3. 우연히 신문기사를 통해 은행강도 사건의 용의자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어떻게 할지를 고민한다.

라는 순서로 전개됩니다.

여고생이다 보니 딱히 용감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된 사촌에게 줄 결혼 선물을 이용하여 명확한 증거를 남긴다는 재치가 돋보이네요. 딱히 대단한 트릭이나 추리가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귀여운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백화점의 교수형 집행인"

탐정역으로 아오야마 교스케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표제작.

노구치라는 백화점 점원이 교살된 채 추락사한 사건을 가지고 사체의 상태와 범행 현장에서 아래의 단서들

1. 범인은 힘이 셀 것이다.
2. 범행은 옥상에서 일어났다.
3. 흉기는 길고 거친 표면을 가진, 밧줄과 같은 것이다.
4. 동기가 없다.

을 끌어내어 진상을 밝혀낸다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주어진 증거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고전 황금기 시대 본격물 스타일에 충실한 작품이죠. 나름 과학적인 트릭이 사용된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일단 트릭이 너무 작위적이었어요. 애드벌룬 안에 목걸이를 숨길 당위성도 좀 부족하고요. 이렇게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움직임이 자유로웠다면 범인이 통제 가능한 다른 수를 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차라리 땅에다 파묻던가... 여튼 이래서야 트릭을 떠올리고 억지로 작품을 끼워 맞춘 결과물로 보일 뿐입니다.

전개에 있어서도 피해자 노구치가 목걸이를 훔치지 않았으리라 주장한 귀금속 코너 주임의 증언은 너무 심각한 오류를 독자에게 불러일으키기에 공정해 보이지 않았고요. 아울러 번역도 조금 아쉬웠습니다. 피해자의 사체에서 끌어낸 정보로 추리가 시작되는데 어려운 법의학 용어가 많이 등장할 뿐더러 주요 단서가 되는 특징도 지나치게 직역이라 이해가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조사해보니 작가의 데뷔작이던데, 뭔가 보여주고 싶은 의욕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장례식 기관차"

운행 중 유별나게 역살(사람을 치는 것) 사고가 많은 기관차가 어느 날부터 매주 돼지를 들이받는 사고를 일으키는 이유는?

사고가 많은 기관차라는 독특한 소재와 기발한 동기가 결합된 본격물. 돼지 역살 사고가 결국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는 전개까지도 어떻게 보면 고전적인 작품이죠.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추리, 진상 모두 비약이 너무 심하다는 단점이 조금 거슬렸습니다. 예를 들어 복잡한 도구를 이용하여 돼지를 선로에 잡아놓는 범인의 행동에서 범인이 이 도구를 판매한다는 추리를 끌어낸다든가, 범인의 동기가 역살 사고 때 "화환을 사러 오는" 오사센 기관사를 자주 보기 위해서라는 것 등입니다. 첫 번째 추리는 당연히 말도 안 되죠. 누구나 상상 가능한 쉬운 방법이 있는데 손에 넣기 쉽다고 구태여 복잡한 방법을 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두 번째의 동기도 범인이 스스로 움직여 자살이 가능했다면, 그게 불가능했더라도 아버지가 업고서라도 근처로 나가보는 식으로 오사센의 얼굴을 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테고요.

형식과 전개는 마음에 들지만 이러한 비약 때문에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위키피디아에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이해가 잘 되지는 않습니다...

"꽃다발 속의 벌레"

역시나 전형적인 고전 황금기 스타일 본격물. 한 재산가가 절벽에서 추락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홈즈 스타일의 탐정역인 오츠키 변호사의 활약이 볼거리인데 현장의 발자국을 조사하여 "범인은 여성"이라고 추리하고, 떨어져 있던 사과껍질은 범행 당시 떨어진 것이며 방향이 왼쪽이라 왼손잡이가 깎은 것이라는 것을 밝혀내며, 경찰이 놓친 얇은 조각이라는 주요 증거를 발견하는 식입니다.

또 진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는, 체구도 작은 연약한 여성이 어떻게 격투 끝에 피해자를 절벽 밑으로 밀어 떨어뜨릴 수 있었는가?라는 것에 대한 해답이 위의 단서들로 밝혀지는 결말도 아주 좋았습니다. 깎는 위치에 따른 사과껍질의 방향성 같은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아쉬운 점이라면 농부라는 목격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인데 농부의 규칙적인 생활에 대한 언급 정도를 해 주었더라면 더 나았을겁니다. 아울러 동기 역시도 썩 와닿지는 않았어요. 이래서야 범인이 너무 명백하니까요. 사실 경찰이 원고 조각을 회수한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지요.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앞선 두 편의 본격물보다는 훨씬 정교하고 합리적인, 추리의 과정과 트릭만큼은 수준 이상의 본격물로 고전 황금기 걸작과 겨룰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칸칸충 살인사건"

아오야마 교스케가 재등장하는 단편.

앞선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의 비중이 낮은 단순한 살인극이지만 피해자 키사부로의 시체 상태로 범행 장소는 물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추리해내는 교스케의 모습은 명탐정이라 불러도 손색없어 보입니다. 조선소의 구조를 실제 추리에 응용한 디테일도 나쁘지 않았고요.

허나 내용이 워낙 단순해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별로 없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리고 G.Y라는 이니셜이 어떻게 "야마다 히로노스케"의 이니셜이죠? 번역 오류인가... 여튼 세세한 부분이 좀 아쉽네요.

"등대귀"

시오마키 등대의 불이 갑자기 꺼지고 당직인 도모다 간수에게 닥친 끔찍한 사건. 성인 두 명이 들어도 움직이기 어려운 큰 바위를 등대 꼭대기로 옮긴 계획의 진상은?

임해시험소의 아즈마야 소장이 탐정역으로 등장하여 등대의 기계장치를 이용한 트릭을 밝혀내는데, 등대라는 장소의 특수성에 복잡한 장치 트릭이 더해진 것이라서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등대의 구조를 독자가 머릿속에 그리면서 추리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탓입니다. 동기도 정신병적인 것이라 너무 쉽게 간 느낌이고요.

완고한 옛날 사무라이 같은 카자마 간수의 거짓말을 잡아내는 소소한 활약은 좋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2/09/04

대단한 밀실 트릭! 신비로운 고전 걸작 5편 소개 (from 'honto')

일본의 전자책 서점 honto에는 책 전문가인 북 큐레이터가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선정하여 소개해주는 서비스 '북트리'가 있습니다. 그 중 밀실 트릭 고전 걸작 소개입니다. '고전 걸작'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고전이면서도 트릭면에서 나무랄데없는 좋은 작품들입니다. 이런 류의 추천치고는 일본 작품 비중이 비교적 낮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이 서비스를 좀 더 이용해 보아야겠네요.

1. <<모르그 거리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밀실에서 일어난 범행이라는 수수께끼, 홈즈의 원형이라고 불리우는 명탐정 듀팽, 논리적인 해결, 의외의 범인 등의 요소로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의 막을 연 작품.

2. <<노란 방의 비밀>>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원작자로도 유명한 저자가 그려낸 '완벽한 밀실'인 노란 방에서의 범행, 거기에 두 개의 인간 소실 수수께끼까지 더해져 있다. 고전 모험 활극의 향기도 느껴지고, 밀실 추리물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는, 올 타임 베스트에 단골 선정되는 명작.

3. <<유다의 창>> 존 딕슨 카
엘러리 퀸, 크리스티 여사님과 함께 황금 시대 (골든 에이지) 삼대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딕슨 카의 작품. 밀실의 거장이라고도 불리운 카의 작품답게 밀실 살인과 법정 미스터리가 결합되어 있다. 밀실에서 피해자와 함께 있었던 피고를 명탐정인 법정 변호사 헨리 메리베일경이 변호하는 내용으로, 아주 유명한 트릭이 사용되었지만 트릭을 알아채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

4. <<혼진 살인사건>> 요코미조 세이시
명탐정의 대명사 긴다이치 코스케의 데뷰작. 열쇠도 없고, 장지문으로 만들어져 밀실에는 적합하지 않은 일본 가옥을 무대로 한 최초의 밀실 추리물로도 유명한 불후의 명작.

5. <<문신 살인 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타카기 아키미츠의 데뷔작으로 명탐정 카미즈 교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유명 문신가의 문신을 한 3자매 중 한 명이 토막난 사체로 밀실에서 발견된다. 쌍둥이 자매, 토막난 시체, 욕실이라는 밀실에서의 살인이라는 본격 추리물의 재료가 가득한 작품. 트릭도 훌륭하다.

2010/08/02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 아와사카 쓰마오 / 권영주 : 별점 4점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 8점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시공사

“아 아이이치로”라는 독특한 이름의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의 첫 단편집입니다. 여러 일본 미스터리 추천 리스트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징은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등장하며, 황당한 사건이 연이어 펼쳐지는 가운데 유머와 슬랩스틱을 연상케 하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두드러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당한 사건들에도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며, 독자에게도 탐정 아이이치로와 동일한 수준의 정보가 제공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고전 본격 추리물의 원칙과 상당히 유사한데, 작품의 수준 역시 절대 뒤처지지 않습니다.

8편의 단편들은 심리 트릭, 밀실 트릭, 공간 이동 트릭, 암호 트릭, 원격 살인 트릭 등 다양한 유형의 트릭을 활용하고 있어 고전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특히 매력적입니다. 잘생기고 번듯하지만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주인공 아 아이이치로도 독특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마치 현대에 환생한 브라운 신부와도 같은 느낌인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방심할 때 의외의 한 방을 날리는 모습이 닮아 있습니다.

시리즈물이지만, 아 아이이치로를 제외한 모든 단편들이 각기 다른 공간과 장소에서 다른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을 내세운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상천외한 사건과 절묘하게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뛰어난 구성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70년대 후반 일본에서 새롭게 창작된 브라운 신부 파스티쉬 작품 같은 느낌입니다. 특히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진상을 밝혀낸다는 설정은 “브라운 신부의 옛날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독특한 등장인물, 황당한 사건, 공정한 추리, 그리고 의외의 결말이라는 고전적인 요소들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정교한 추리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근래 보기 드문 좋은 작품집입니다. 고전 추리 단편집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며, 유쾌함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1978년에 발표된 작품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고전적인 느낌이 강해,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부분도 존재합니다. 솔직히 말해, 해설을 읽기 전까지는 2차대전 전 작품인 줄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분위기가 취향에 맞지 않는 독자라면 다소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별점은 4점입니다.

2017/03/19

벙어리 목격자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3점

벙어리 목격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어리석은 낙천주의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쉽게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게 보통이었다. - 에밀리 아룬델이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묘사

살인의 특징은 살인자의 기질을 암시해 주기 때문에 범죄의 실마리를 잡는 데 있어 필수야. - 포와로.

마켓 베이싱의 리틀 그린 하우스에 거주하는 부유한 노부인 에밀리 아룬델은 조카들과 함께 한 부활절 연휴 때 계단에서 떨어져 다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애견 밥이 가지고 놀던 공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챈 에밀리 아룬델은 포와로에게 편지를 보냈고, 무려 두 달 이 지나서야 이를 받은 포와로는 마켓 베이싱으로 향했지만 에밀리 아룬델은 이미 한 달 전에 사망했다...

몸 속 필수 영양소 중 하나인 고전 본격물 성분이 많이 부족해져서 집어든 여사님 장편입니다. 제게는 탄수화물급 영양소거든요. 바로 전 읽었던 "도서관의 살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제대로 된 고전 본격물을 선택했습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물이더군요. "도서관의 살인"과 마찬가지로요.

포와로가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이유인 노부인의 의뢰 편지가 그녀가 사후 발송되었다는 도입부부터 무척 흥미롭습니다. 뒤이어 다양한 등장인물의 증언들로 진상에 접근해 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다운 공정함을 자랑하고요. 무엇보다도 고전 본격물의 핵심인 동기 부여와 이에 따라 용의자들이 속출하는 전개가 대단합니다. 주요 관계인인 찰스와 테레사 남매, 벨라와 타니오스 부부 모두 유산 상속에 혈안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누구 한 명 용의선상에서 빠지지 않는 덕분입니다. 심지어 찰스와 테레사의 어머니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이라는 설정까지 갖췄으며, 그 외 등장인물 모두 수상한건 마찬가지에요. 이미 유산을 상속받은 로슨 양이 심령술에 빠진 이상한 노처녀로 그려지는 식으로요. "도서관의 살인"에서 가장 부족했던게 바로 이겁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하지만 이러한 점은 본격물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탁월한건 증언과 인물 묘사가 결합되어 독자를 교묘하게 함정에 빠트리는 전개입니다. 놀랍게도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증언은 모두 진실이에요. 하지만 말을 한 사람이 워낙 수상한 탓에 독자들 모두 "이 사람 말은 못 믿겠는데?"라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뒤이은 증언들도 부정하게 되어 결국 진상에 이르지 못하게 되지요.
찰스 아룬델이 한 말이 대표적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에밀리 아룬델을 만났을 때, 그녀가 수정한 유언장을 보여주었다는 증언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모두 찰스가 돈 때문에 심한 짓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에밀리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유언장을 미리 보았다는 증언은 자신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에밀리를 죽일 동기가 없다고 위장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게다가 여동생 테레사와의 다툼은 증언의 신빙성을 더욱 떨어트리고요.
이야기 전체가 이런 구성이라서 저는 함정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세세한 디테일로 범인을 드러내는 점도 본격물스럽습니다. 타니오스 부인이 테레사를 따라, 하지만 보다 저렴하게 옷을 구해 입었다는 묘사와 에밀리 아룬델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 주치의 그레이너 박사가 후각을 상실했다는건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설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뭐 하나 허투르게 활용되지 않아요. 로슨양이 거울로 본 브로치는 이니셜이 반전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은 아나벨라 타니오스의 약자다, 브로치는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싸져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테레사 패션을 따라하는 벨라가 서슴없이 구입했다. 벨라는 화학 교수의 딸로 인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너 박사는 인 중독의 뚜렷한 징후인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모두 추리에 이용되니까요. 심지어 아무 의미 없어보였던 로슨 양의 강령회 관련 증언까지도요. 그녀는 에밀리 양이 강령회 때 빛나는 심령체에 의한 "후광을 둘렀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모두가 정신나간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포와로는 그것이 '인관성 호흡'이라는 것을 간파하거든요. 이런게 본격물이죠!

트릭도 괜찮습니다. 간이 나빴던 피해자에게 인을 투여하여 간견병과 별 차이 없는 예후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어요. 로널드슨 의사의 자연사 확진 판정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기는 하나 에밀리가 평소 유사 증상을 오래 앓고 있던 환자라 충분히 걸어볼만 한 도박이었으니까요. 피해자가 자주 먹던 캡슐 중 하나에 투입하여 일종의 시한 장치를 만든 것도 그럴듯했고요.

또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완역판이라 주장하는 판본으로 읽었는데, 확실히 번역도 한층 높은 완성도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포와로의 프랑스 어를 섞는 말버릇도 맛깔나게 잘 살려 놓았으며, 헤이스팅스와의 재담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거든요. 헤이스팅스가 이렇게나 유머러스하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등장인물들을 모두 수상쩍게 그리는 묘사가 과해서 읽는 내내 짜증이 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실제 범인은 아니지만 제발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포와로의 추리가 진상에 도달하여 진범을 밝혀내기는 하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심약한 타니오스 부인이 시체를 재검시하자는 포와로의 주장에 겁을 먹고 자살을 하지만, 실제 재검시를 했어도 사인을 밝히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설령 실제 사인이 밝혀졌다고 해도 타니오스 부인이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요. 로슨양이 거울을 통해서 목격한, 타니오스 부인이 계단에 장치를 설치했다는 증언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을거에요. 마침 범인이 딱 좋게 자살했을 뿐, 제대로 범인을 옭아매었다고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뭐 이런 점도 본격물이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장, 단점 모두 고전 본격물스러운 작품입니다. 저와 같이 고전 본격물 성분(?)이 부족해 지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책 뒤 소개글처럼 "훌륭한 평균작품보다도 잘못 쓴 크리스티 작품이 더 낫다" 이니까요. 이 작품은 잘 못 쓰지도 않았고요.

2022/03/18

완전살인 - 크리스토퍼 부시 / 남정현 : 별점 2점

완전살인 - 4점
크리스토퍼 부시 지음, 남정현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런던의 주요 신문사와 경시청에 '마리우스'라고 자칭한 인물이 '완전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가 배달되었다.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 속에 마리우스가 지정한 날짜에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부유한 독신 노인 토머스 리치레이였다. 토머스 리치레이가 결혼을 앞둔 탓에, 유산 상속을 받지 못할 위기에 빠진 조카들이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네 명 모두 알리바이가 완벽했었다.
줄랑고 회사 사장인 프랜시스 웨스튼 경은 회사의 새로운 중핵이 될 비밀 탐정부를 키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완전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자 회사의 두뇌 역할을 맡고 있는 수재 루드빅 트레버스와 전 형사부장 존 프랭클린을 투입하는데...


크리스토퍼 부시가 1929년에 발표했던 고전. <<고전 추리, 범죄 소설 100선>>에서 추천하였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추리 소설의 초창기 황금기 발표작다운 면모를 과시합니다. 추천받을만한 요소가 몇 가지 보이더군요.
첫 번째는 트릭을 추리해내기 위한 단서 제공이 공정하다는 점입니다. 범인 프랭크 리치레이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던 트릭은 변장한 대역을 내세웠던 겁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단서 모두는 작품 맨 앞 프롤로그 부분에서 제공됩니다. 대역이었던 플래이스가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와 영화배우 진 앨런의 대역을 찾는 오디션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 단서였거든요. 플래이스의 편지에서 사용되었던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암호 트릭도 인상적이었고요.
두 번째는 다양한 용의자를 드러내고,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계속 등장시켜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전개입니다. '마리우스'가 보낸 편지에서 시작해서, 범행이 일어나기 전 피해자 토머스 리치레이를 방문했던건 누구인지? 토머스 리치레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협박장을 쓴 T.W.리처드는 누구인지? 등이 그러합니다.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수수께끼가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야말로 고전 본격 황금기 작품의 기본은 해 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두뇌 역할의 부르주아 루드빅 트레버스와 발로 뛰는 유능한 수사관 존 프랭클린의 컴비 탐정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두 명이 컴비로 등장할 경우, 보통 한 명은 평범한 일반인 시각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두 명 모두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꽤 신선했습니다. 이들이 사건에 뛰어든게 '회사 선전'을 위해서였다는 것도 굉장히 현대적인 동기였고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추천할만한 고전 명작이냐고 물으신다면, 제 답은 '아니오'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오래 된, 유통기한이 지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목의 '완전 살인'을 예고한 마리우스의 편지입니다. 괜히 경찰의 주목을 끌 이유는 없는데, 프랭크 리치레이가 왜 이런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범행을 널리 알려야 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아요. 경찰의 시선이 분산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이왕 살인을 저지르니, 사회적인 반향도 불러 일으켜보자고 여겼던걸까요? 하지만 프랭크는 자신의 완전 살인을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불쌍한 대역 배우 플래이스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만 잔혹한 범죄자입니다. 이런 사명감같은걸 가질만한 인물이 아니에요. 또 이 때문에 여론이 크게 움직였다는 묘사도 딱히 없고, 경찰도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은 등, 한 마디로 흥미를 자아내기 위한 목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핵심 알리바이 트릭이 단지 변장이었다는 것도 다소 맥빠지는 요소였습니다. 또 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찰리 채플린 급의 유명 배우 대역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다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에요. 이 탓에 루드빅 트레버스의 주목을 끌고 말았지요. 프랭크가 자기와 꼭 닮은 누군가 - 플래이스 - 를 발견한 뒤 범행 계획을 꾸몄다는데 더 설득력 높았을 겁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프랭크 리치레이를 몰아세운 뒤, 그가 자멸하는걸 노렸던 호워튼 총경과 존 프랭클린의 작전도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플래이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프랭크의 알리바이가 조작되었다는걸 증명할 수 없었기에 플래이스가 프랭크에게 살해당했다는 거라도 증명했어야 했는데, 시체조차 찾지 못했으니 이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프랭크가 둘에게 추궁당한 직후 곧바로 범인임을 자백할 이유역시 마땅치 않았습니다. 프랭크 본인 말대로 시한부였다면 더더욱요. 어차피 오래 못 살텐데, 뭐하러 범행을 인정한단 말입니까? 도주 후 시체로 발견되는 과정도 쉽게 흘러간 느낌이라 별로였고요.
차라리 호워튼 총경과 존 프랭클린의 선량했던 프랭크를 물에 빠트려 죽인 뒤, 범인임을 자백했다며 죄를 뒤집어 씌우는게 더 현실적인 전개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번역의 질이 심하게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 출간 버젼이라 걱정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번역은 정말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앞서 괜찮았다는 암호 트릭이 사용된 편지는 나쁜 번역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지요. 번역 때문에라도 도저히 권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인건 분명한데,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기는 여러모로 역부족이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작가와 작품이 잊혀진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이런 류의, 명성은 약간 남아있지만 지금은 그 생명을 고해버린 작품은 이젠 그만 읽어야겠습니다.

2018/03/31

고양이 발 살인사건 - 코니 윌리스 / 신해경 : 별점 3점

고양이 발 살인사건 - 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SF 쪽에서는 명성이 높은 코니 윌리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입니다.
코니 윌리스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수록작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데다가, 밝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통 SF라기 보다는 약간의 SF 설정이 가미된 작품들로 일상 - 홈 드라마이자 사회 비판물인 "말하라, 유령", 본격 추리물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로맨틱 코미디 첩보물 "절찬 상영중",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SF "소식지", 로드무비 "동방박사들의 여정", 일상 드라마인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로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친숙한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클리셰, 설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장르문학, 컨텐츠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점이에요. 그만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아래 상세 리뷰에서 처럼 별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저도 크리스마스 관련된 이야기를 몇 번 써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수준 차이가 엄청나네요. 반성하게 됩니다.

"말하라, 유령" 

이혼남으로 책이 유일한 취미인 서점 직원 그레이의 유일한 낙은 크리스마스에 딸 젬마와 보낼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점의 사인회와 전처 때문에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그레이는 서점 직원으로 임시 채용된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는데...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꾸만 엇나가는 그레이와 사람을 개과천선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판타지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며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 바쁜 백화점 서점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압권이에요. 이래서야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딸 젬마가 좋아하는 소공녀, 그 외에도 디킨스와 월터 스콧의 작품이 많이 인용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완벽한 크리스마스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건 의외였습니다. 마지막에 유령들이 뭔가의 슈퍼 파워로 딸 젬마를 그레이에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끝나버리거든요. 돈이 최고고(작 중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것), 유령들은 힘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결말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사회 비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게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씁쓸하네요. 디즈니 작품과 비슷한 가족 판타지로 위장된 탓에 이런 갭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딸아이 아빠로서 젬마는 최소한 행복해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양이 발 살인사건" 

세계 최고의 탐정 투페는 크리스마스에 친구 브리들링스 대령과 함께 마웨이트 장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건을 의뢰한 샬롯 발라디 부인이 영장류를 연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소로 사람의 말이 가능한 고릴라 달타냥, 추리소설도 좋아하는 똑똑한 침팬치 하이디가 하인으로 일하는 등 연구 실적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동생 제임스는 영장류를 증오하여 자신이 유산 상속을 받으면 모두 쫓아낸다고 공언한 상태. 다행히 그들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알리스테어 경은 치매로 난폭한 바보가 되었지만, 앞으로 수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투페 컴비는 다른 손님들, 기자인 루트거스와 폭스양, 지역 경찰 유스티스 경사, 알리스테어 경의 간호사 파치트리 양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의뢰하는 수수께끼가 단지 영장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 투페는 당장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 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든 정황이 고릴라 달타냥의 범행임을 암시했는데....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컴비를 빼닮은 탐정 컴비가 등장하고, 전형적인 영국 장원을 무대로 하는 클로즈드 써클 미스테리입니다.

일단, 고전 본격물에 대한 높은 이해가 돋보여요. 탐정 컴비의 묘사는 물론 장원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모두가 동기가 있고 수상쩍은 등 여사님 작품에서 보았었던 그런 느낌으로 묘사되거든요.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 캐릭터를 쏙 빼 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전형적입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 그대로에요. 무엇보다도 추리에 있어서 영장류의 지능이 높다는 설정으로 독특함과 재미를 안겨다 주는 부분이 탁월했습니다. 이 설정이 단지 재미 요소가 아니라 진짜 반전의 핵심 요소인 덕분입니다. 영장류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알리스테어 경을 살해하고 제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SF가 가미된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물로 추리와 재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시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실 거에요. 별점은 5점!입니다.

"절찬 상영중"

"크리스마스 소동" 이라는 고전 영화를 보기 위해 애쓰는 사라와 그녀가 그 영화룰 왜 못 보는지를 설명해주는 전 애인 잭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사라가 방문한 영화관 시네드롬은 온갖 영화 관련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는 일종의 테마 파크인데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손님들이 밀어닥친 탓에 난리도 아닌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상황 묘사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영화를 보지 못한 이유도 아주 그럴듯해요. 영화를 만든다고 사기를 친 뒤 시네드롬에 돈을 좀 쥐어줘서 아무도 못보는 환상의 상영관을 확보한 후 제작비를 쓴 것처럼 꾸미는 제작사의 음모이고, 이는 백 개도 넘는 상영관을 모두 채우는 건 무리였던 시네드롬에게도 필요했던 사기라는 진상인데 생각도 못했네요.

이러한 내용을 소비자 사기국에서 근무하는 잭의 화려한, 영화를 방불케하는 첩보 작전처럼 풀어나가는 것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라에게 사 준 티셔츠가 카메라 부착형이라는 아이디어 등 디테일도 볼거리이며, "백만 달러의 사랑", "아이 러브 트러블", "위기의 암호명" 등 비슷한 영화들의 장면 장면과 엮이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거든요.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 첩보극이라는 장르 공식에 굉장히 충실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지요. 그 외 다수 영화들의 인용, 묘사도 흥미로운데, "디워"가 원작에도 언급되는건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망한 영화도 매니아가 따라붙고, 온갖 매체에서 흥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설정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잭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소식지"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착해졌다. 이를 처음 눈치챈 건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가 흠모하는 이혼남 게리였다. 둘은 곧 착해진 사람들이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다른 악영향없이 착해지기만 한 탓에 이를 밝히고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착해진 사람들의 몸 관절이 이상해지는 부작용을 알아낸 주인공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수를 박멸하고자 직장과 집의 온도를 올렸다(모자를 벗게). 다행히 기온이 올라 이 소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변주된 "신체 강탈자의 습격 (바디 스내쳐)" 입니다. 기생수의 부작용이 착해지는 거라니 정말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이변을 눈치채지만 착해지는 게 과연 무슨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도 웃음을 자아내고요.

하지만 디테일이 좀 지나쳤습니다. 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과유불급이랄까요? 제목이기도 한 가족들 간의 '소식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의 이변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품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지역별 편차가 있고 이유는 기온이다!를 드러내려면 TV나 신문 등의 뉴스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등장인물들도 너무 많은데, 이 역시 주인공과 게리가 잘 되게 만드는 식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마무리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 

눈보라가 휘몰아쳐 도로가 통제되는 와중에서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예수를 찾아나선 목사 멜과 친구 BT,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여성 캐시 3인의 여정이 그려진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동방박사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온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백인 목사, 흑인 과학자, 전직 영어 교사인 여성 3인이라는 파티 구성도 나름 완벽해서 눈길을 끌고요.

그러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실제로 동방박사가 겪었음직한 고뇌(이게 계시가 맞는지? 내가 미친건 아닌지? 와 같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드라마적 재미는 별로 없어요. 독백과 종교적 고뇌로 가득찬 작품이 애초에 재미있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 계시와 유사한 카니발 조명과 예수일지도 모르는 카니발 운전사 등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계시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일종의 추리 과정이라도 동반되었더라면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세 명이 카니발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는지, 그들을 방해하는 헤롯왕의 수하들은 누구인지 등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마무리 되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모험이 시작되자마자 이야기가 끝나는, "반지의 제왕" 1부와 같은 수준의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냐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책 뒤에 작가가 꼽은 크리스마스를 다룬 최고의 영화, 책, TV 시리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 중 최고는 "러브 액츄얼리"를 꼽고 있더군요. 이 작품은 작가가 나름대로 변주한 "러브 액츄얼리" 입니다. 족 모임을 위해 오리를 구우려는 루크,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구엘의 양육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파일러, 남편과 사별하고 멕시코로 여행온 베브, 아내 마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워런,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식을 주장하는 친구 스테이시의 들러리로 여행 온 폴라,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대폭설을 연구하는 네이선 박사와 조수 진성 등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다양한 등장인물이 한 꼭지 씩 이야기를 선보이다가 마지막에 연결되는 결말인데 전개 방식이 똑같거든요. 대부분 해피엔딩이며 감동적인 이야기와 적절한 코미디가 섞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차이점이라면 이야기들 속 대 소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 폭설" 이라는 SF적인 설정이라는 것 뿐입니다.

모두 재미있고 따뜻하며,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도저히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다가 파멸한 불륜남 워런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아주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도 대폭설의 원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다운 발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반짝반짝한 작은 소품들이 모인 선물 상자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로 꼭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2019/02/03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 안나 캐서린 그린 외 / 위즈덤커넥트 : 별점 2점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 4점
안나 캐서린 그린 외/위즈덤커넥트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고전 단편을 소개하는 e-book 레이블 Mystr 컬렉션 시리즈에서 "럭키팩" 이라는 이름으로 내 놓은 합본집 중 한 권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격 명탐정들이 등장하는 고전 본격물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대여하기에 읽게 되었네요. 고전 본격물은 영원한 제 favorite이니까요. 대부분 저작권이 만료된 저작권 free 판권물로 보이는데 딱 한 편을 제외하고는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품들로 보입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경찰 뮐러라던가, 영국의 사립 탐정 존 벨은 탐정도 처음 들어보는 인물들일 정도입니다. 희귀하다는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지요.

그러나 국내에 그동안 소개되지 않은 이유도 알겠습니다. 그냥 작품의 수준이 기대 이하입니다. 탐정들도 매력적이지 않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그냥 몰랐던 탐정, 몰랐던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가치를 느끼기 힘든 시리즈였습니다. 저렴한 가격 외에는 이 시리즈를 구해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황금 총알 

혼 국장에게 펠너 교수의 집사 요한 더멜이 찾아왔다. 교수가 닫힌 서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 국장은 조 뮐러 형사와 함께 교수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닫힌 문을 열고 살해된 교수의 시체를 발견했다.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였고, 흉기인 총알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는 기묘한 상황에서 조 뮐러는 이 사건이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데...

오스트리아 비밀 경찰국 소속의 자비심 많은 천재 형사 조 뮐러 시리즈 단편으로 밀실 살인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거의 잊혀진 시리즈가 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재미와 완성도 모두 평균 이하거든요. 핵심 트릭이라 할 수 있는 밀실 살인 트릭은 열쇠 구멍이 넓어서 빛이 새어나오고 안의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총알도 통과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이디어인데, 발상은 신선하지만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야기에 잘 녹아든 것도 아니고, 독자에게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되지도 않고요. 추리물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뮐러가 이전에 맡았던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과의 관련성이 드러나는 부분 역시 작위적이라 아쉽습니다. '우연히' 옷이 찢어진 밀러가 요한으로부터 '우연히' 옷을 빌려입는데, 그 옷은 '우연하게도' 예전에 펠너 교수가 요한에게 선물한 것 중 하나였고, 그 때 '우연히' 트리스탄이라는 거대한 사냥개가 친근함을 표시한 상황에서 그 개의 주인이 니에프라는걸 알게 된다는 식으로 우연이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이상은 너무 많으니까요. 차라리 뮐러의 니에프 부인 자살 사건 수사가 함께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니에프를 찾아갔다가 개가 친근하게 구는걸 알고, 그 옷의 주인이 사냥개와 친했다는걸 알게되었다는 전개가 훨씬 나았을겁니다.

불쌍한 범인 니에프가 자살할 시간을 벌어줄 정도로 자비심이 많다는 뮐러 캐릭터 역시 별로였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 

그라우만 부인은 경찰을 찾아와 자신의 조카 알버트가 친구 사이더스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누명을 썼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체포된 이유는 사이더스가 살해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며, 그의 권총이 흉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온 뮐러에게 알버트는 사이더스가 오래전 큰 돈을 훔쳤던 전과가 있어서 자신이 돌보는 아가씨와의 약혼을 거절했으며, 사건이 일어난 밤 사이더스가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방문했다는 증거를 남기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알버트가 후견인인 엘레노라는 오히려 알버트가 자신과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뮐러의 수사를 통해 사이더스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된, 친구에게 쓴 편지가 거짓으로 밝혀진 후 - 그에게 친구가 없었기 때문 - 이 모든 것은 사이더스의 정교한 자살 계획이라는 진상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조 뮐러 시리즈인데 전편보다도 추리적으로는 더욱 별볼일 없습니다. 현대 독자라면 사이더스가 자살 계획을 꾸몄다는걸 너무나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조 뮐러의 독백은 장황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게다가 자살자가 자기에게 총을 쏘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총을 멀리 던진다는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러나 정황 증거만으로 누군가를 유죄로 만드는 사법 체계의 모순, 그리고 전과자가 갱생할 수 없다고 믿는 일반론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높은 편입니다. 이런 부분은 오히려 시대를 많이 앞서간 느낌이에요. 사이더스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고 했던 검찰청장 구스타프 슈미트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알버트는 심장병으로 결국 몇 개월 뒤 죽는다는 씁쓸한 결말까지도 현대적이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기대했던 고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지만, 기대 외의 사회파 추리물적인 가치와 현대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서 이전 작품보다는 좀 더 높이 평가받을만 합니다. 그래도 평균 이하 작품이라는건 변함은 없지만요...

아이비 코티지 살인 사건

예술가 개빈 킹스코트가 그의 저택 아이비 코티지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킹스코트는 머리에 난 상처로 죽었다. 현장을 방문해서 나무를 몇 그루 훔치려 했던 정원사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 상황에서 "나"는 사건을 수사한다는 지인 마틴 휴이트와 함께 현장을 찾는데...

셜록 홈즈와 그의 라이벌 시대인 고전 본격 단편물 황금기 탐정 중 비교적 알려진 편인 사립 탐정 마틴 휴이트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킹스코트가 묶었던 하숙집에서 그가 꾸몄던 나무 장식품들을 완벽하게 파괴하고 도망친 하숙인들 사건과 킹스코트 살인사건이 엮이는 전개가 꽤나 깔끔합니다. 하비 찰리트가 다이아몬드를 방에 숨긴 후, 킹스코트가 그 보석을 찾아내었다는 마틴 휴이트의 추리도 그럴싸하고요. 특히 도둑들이 킹스코트가 자고 있지 않을 때 만나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서랍장 안에 들어갈 만한 작은 물건이었다는 설명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물론 옛 하숙집 주민 중 한 명이 찰리트라는게 밝혀진다면 사건이 쉽게 해결되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하비 찰리트의 급작스러운 등장과 사망은 완성도를 조금 떨어트리는 요소입니다. 그래도 별점은 2.5점은 충분한 무난한 작품이에요. 후대에도 잊혀지지 않은 시리즈와 작품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연쇄 보석 도난 사건

제임스 노리스 경이 마틴 휴이트를 자신의 렌튼 크로프트 저택으로 초대했다. 이유는 저택에서 벌어진 보석 절도 사건의 해결을 위함이었다. 11개월 전 부터 무려 3건의 연쇄 보석 도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보석은 창문 외에는 모든 문이 잠긴 방 화장대에서 사라졌고, 남은 것은 불에 탄 성냥 하나 뿐이었다.
경은 방이 어두웠을 때 도둑이 성냥을 켜고 서둘러 화장대를 살핀 후 보석을 훔쳐 달아났을거라고 말했지만, 두 번째 사건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훨씬 귀한 반지를 남겨둔 채 싸구려 브로치가 도난당했다는 모순이 있었다.
그리고 
고가의 브로치가 사라졌던 세 번째 사건에서는 주인이었던 경의 처제가 방을 비운 것은 5분도 되지 않고,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으며 문은 열려 있었지만 바로 옆이 경의 딸 방이라 누군가 움직였다면 소리가 들렸어야 했다. 오직 남아있는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타버린 성냥 뿐이라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오래전 하서 추리문고 단편 모음집을 통해 읽었었던 걸작 "렌턴관 도난 사건"과 같은 작품입니다. 거의 밀실에 가까운, 사람은 드나들 수 없는 방에서 일어난 도난 사건을 해결하는 마틴 휴이트의 활약이 정말로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단서는 불에 탄 성냥개비 뿐이고요.
현장은 햇빛이 잘 드는 곳이라 불을 밝히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는게 드러난 후 성냥개비의 용도에 주목하여 추리하는 과정도 설득력 높고, 여기서 "앵무새"가 범죄에 사용되었다는 진상도 아주 그럴듯합니다.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 - 약간의 틈을 이용하여 방에 침입할 수 있는 건? 왜 한 번에 하나의 물건만 훔쳤는지? 왜 물건의 가치를 알 지 못했는지? 등등 - 도 상당히 공정한 편이라 이 정도면 홈즈 시대 고전 본격물 단편 중 최상급 수준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이미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으며, 이런 저런 추리 퀴즈에서 트릭이 소개되어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점인데 이는 시간이 오래 흐른 탓일 뿐 작품의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틴 휴이트라는 탐정의 매력이 떨어지는게 이 작품이 지금은 많이 잊혀진 이유가 아닐까 싶기는 하군요. 이대로 잊혀지기는 아까운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둥근 방

존 벨은 친구인 변호사 에드콤비로 부터 웬트워스가의 유일한 상속인 아치볼드의 기묘한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를 부탁받았다. 

아치볼드가 머물렀던 여관 주인 등의 증언으로 아치볼드의 방에서 유령이 나오며 그는 공포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드러났다. 존 벨은 수사를 통해 캐슬 여관에서 세 번이나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다는걸 알아냈고, 직접 캐슬 여관에 투숙할 계획을 세웠다. 캐슬 여관 주인 가족은 유령이 나와서 세 명이나 죽었다고 강하게 경고했지만 그는 결국 투숙에 성공했고, 하룻밤을 무사히 버텼다.
다음날 원래 제분소였던 여관 건물을 조사하던 존은 여관 주인 바인드로스와 부딪힌 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두번째 밤을 보내다가 방이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런던의 유명 탐정 존 벨 시리즈입니다. 존 벨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게 독특합니다. 대부분의 셜록 홈즈의 라이벌 시리즈물은 화자가 별도로 있었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읽다보니 탐정 스스로가 직접 위험에 뛰어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라 1인칭으로 쓰여진게 이해는 되더군요. 무엇보다도 '회전하는 방'에 갖힌 묘사에는 아주 딱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약간은 고전 모험물 느낌도 났습니다. 스케일이 큰 기계 장치 트릭 역시 이런 느낌에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하지만 제분소 건물, 회전하지 않지만 가동 가능한 물레방아 등의 조건이 무언가에 사용되었다는 내용은 좀 뻔했으며 회전 때문에 건강한 사람이 아무 상처없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정도의 고속 회전이라면 원심력으로 어딘가에 부딛혀서 상처가 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작품 속에서처럼 완전 범죄가 가능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또 무언가 조작이 있는 방에서 기묘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이 직접 방에 뛰어들어 죽을 고비를 넘긴다는 내용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는 이야기라 식상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시대를 뛰어넘을 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말하는 시바신

존 벨은 로리에 박사로부터 시바신에 빠진 에드워드 더시거라는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더시거의 조카딸 헬렌은 그가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조카 재스퍼 베그웰과 결혼하려는 이유가 삼촌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이상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더시거가 벌이는 시바 신상 앞에서의 기괴한 의식을 목격한 로리에 박사는 그가 미쳤다는걸 확신한 나머지, 존 벨에게 무언가 음모가 있는게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강령술사로 변장하여 로리에 박사와 함께 더시거의 저택으로 향한 존 벨에게 베그웰은 더시거 삼촌이 미쳐서 헬렌을 죽이려 한다고 경고했고, 더시거 역시 존 벨에게 시바 신이 자신에게 끔찍한 일을 명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 헬렌은 몰래 존 벨을 만나 재스퍼를 만난 두세달 전 부터 삼촌이 이상해졌다며, 재스퍼가 재산을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게 아니냐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타원형 회랑에서 소리가 전달되는 구조를 응용한 과학 트릭이 등장합니다. 특정 위치에서 나는 소리가 회랑 반대쪽 특정 위치에서만 들린다는 것으로, 저도 언젠가 기사에서 보고 트릭에 써 먹어야 겠다! 고 생각했었던 내용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수십년 전 작품에 사용된지는 꿈에도 몰랐는데,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나 봅니다.

하지만 과학적 트릭이 사용된 것 외의 작품의 완성도, 가치는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소리의 "촛점"이 맞아야만 들린다고 하더라도 더시거 혼자 환청을 들은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존 벨이 단 몇 시간의 조사만으로 우연이더라도 이 소리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전개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더욱 약화시키고요. 또 설령 환청을 들었다쳐도, 더시거 정도 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광기에 곧바로 사로잡혔다는 것 역시 쉽게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과학적 트릭 외에는 건질게 없는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저라면 좀 더 이 설정을 잘 활용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소모된게 아까울 뿐입니다.

동굴 속 유령

바이올렛 스트레인지는 뮤지컬을 보다가 특별한 한 명의 남자를 보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의 얼굴에 너무나 뚜렷한 우울함이 나타나 그 슬픔이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 남자 로저 업존이 바이올렛에게 사건 하나를 의뢰했다. 도박 때문에 가정이 파탄날 위기에 몰려 이혼 절차를 진행하던 중, 아내가 침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사건이었다. 죽음의 원인으로는 심장 질환이 거론되었지만, 시체 손목이 멍들어 있던 탓에 로저 업존에게 이런저런 추문이 덧붙여져 그는 거의 사회적으로 매장된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바이올렛에게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털어놓는다. 첫 번째는 아내가 죽은 날 아이의 양육권을 걸고 아내와 도박을 벌였다는 것, 두 번째는 그녀에게 패배한 후 도박을 벌이던 해안 지대 동굴에서 홀로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얼마 전 동굴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아내를 묶어 죽음에 이르게 한 후 시체를 옮겨 놓았다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여성 작가가 쓴 작품답게 복잡하고 여성스러운 심리 묘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별로인 작품입니다.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로저 업존의 증언이 대부분이며 바이올렛은 단 하루, 저택을 방문한게 전부입니다. 현장 검증이나 별다른 수사는 이루어지지도 않아요.
바이올렛의 분장쇼 한 번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결말도 어처구니 없지만 이 분장쇼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아서 추리물이라고 부르기 민망합니다.

아울러 충직한 아버지의 하인이 진범이었다는 진상도 그렇게 와 닿지 않습니다. 누가 범인이든 어차피 별로 중요한 상황도 아니고요. 솔직히 아버지 로저가 범인이었다 하더라도 이야기 전개와 결말에 별 차이가 있지 않았을겁니다. 곧 죽을 사람이니까요.

탐정이 추리를 하지 않고, 진범이 누군지 중요하지도 않은 작품이 좋은 추리소설일 수 없겠죠. 완벽하게 건질게 없는 워스트 중의 워스트로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눈먼 의사, 아내, 그리고 시계

하스브룩 씨는 5년 전 자신의 집 안에서 알 수 없는 사람에게 공격당해 총에 맞아 죽었다. 자기 전 집 안의 블라인드와 셔터는 철저하게 내려졌던 상태였다. 꾸준히 수사를 이어온 사립탐정 "나"는 당시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맹인 의사인 재브리스키가 하스브룩을 죽였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걸 알아낸다. 그러나 그의 미모의 아내는 그가 망상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결국 재브리스키는 경찰에 출두하지만 동기가 없다는 그의 말과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풀려났고, 재브리스키는 스스로 총을 쏘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걸 경찰에 증명하기 위한 실험에 뛰어들지만 과녁인 시계를 품은 아내를 쏘고 말았다...

사립탐정인 "나"라는 화자에 의한 사건의 첫 수사 보고서와 바이올렛 스스로 "나"로 지칭하고 쓴 수사 보고서가 혼재되어 전개되는 구조가 독특합니다. 질투에 사로잡힌 재브리스키가 집을 잘못 알고 하스브룩 씨를 쏘아 죽였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이를 위해 재브리스키는 맹인이며 사건 당일 극도의 흥분에 사로잡혔다는 묘사를 통해 그가 집을 잘못 찾은 이유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과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술에 취했을 때 아파트를 착각해서 다른 아파트 현관문에 먹히지도 않는 비밀번호를 여러번 눌렀던 적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더군요.

하지만 진상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제공되는 단서는 거의 없습니다. 재브리스키 부인에게 추근대던 남자가 현관문을 통해 도망쳤다는 정도? 그 외에 아무도 믿지 않는 재브리스키의 주장(권총은 길거리에 버렸는데 누가 주워간 것이다 등)이 사실이었다는건 너무 황당하고요. 또 바이올렛은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이래서야 탐정 없이 재브리스키의 1인극으로 그의 자백으로 이야기를 끝맺어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겁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좋은 설정, 재미있는 사건을 억지스러운 전개와 탐정 캐릭터의 개입으로 망쳐버린게 아쉽습니다.

2019/09/01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2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겐 가문의 현 당주인 할머니 야요이가 손녀 유카리가 실종된 사건을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맡겼다. 마침 호겐 가문의 본가가 있던 '병원 고개의 목매달은 집' 에서 기묘한 결혼 사진을 찍은 혼죠 사진관의 나오키치도 결혼한 부부의 조사를 요청했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두 사건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차렸다.
조사 결과 유카리를 유괴했던건 결혼한 신랑 야마우치 도시오였다. 놀라운건 그가 여동생이라고 데리고 다니다가 결혼한 고유키가 유카리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몇일 뒤, 야마우치 도시오의 목이 '병원 고개의 목매달은 집'에 매달린채 발견되는데...

꺄! 완전 취향 저격의 독서였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를 자극하는 고전적인 설정, 전개와 묘사가 아주 감탄스러운 수준이거든요. 각 챕터마다 곁들여진 짤막한 부제같은 단문도 옛스럽지만 참극! 공포! 저주! 악연! 증오와 원한의 불꽃! 배우는 모두 모였다! 같은 진부한 묘사도 눈길을 사로잡아요. 전화기조차 격렬하게 울릴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비련의 여주인공이 가혹한 운명 때문에 결국 총탄에 맞아 죽고, 그녀의 입으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까지 정말로 완벽합니다! 박수가 절로 나오네요.

그야말로 요코미조 세이시다운 설정과 묘사들도 애호가의 팬심을 자극합니다. 전형적인 "대부호 콩가루 집안의 복잡한 가정사가 낳은 비극" 이라는 동기부터요. 진부하다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낡아빠지긴 했지만 이런게 바로 요코미조 작품의 매력이지요.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될 때 까지 1권 분량의 2/3를 사용할 정도로 진행이 느린 것도 고전적입니다. 그러나 이를 원숙한 솜씨로 등장인물과 기묘한 사건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기 힘듭니다. 과연, 짬밥(?)은 날로 먹은게 아닌 셈이에요! 물론 호겐 가문과 이가사리 가문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4대째를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첫 단락은 과하긴 했습니다만... 

특유의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전해주는 묘사도 고전적이기는 한데, 작가 인생의 말년에 발표했던 쇼와 시대의 작품이라 그런지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묘사들이 눈에 뜨인다게 특이했습니다. 피해자인 야마우치 도시오가 재즈 악단 '앵그리 파이러츠'의 리더였다는 등 재즈 콤보 멤버가 사건의 주요 인물이라는 점부터 그러합니다. 또 앵그리 파이러츠의 멤버 중 한 명인 사가와 데쓰야는 애꾸눈인데 그의 안대는 시크하며, 그가 붉은 원색 코트를 입고 지휘를 하면 여자들이 모두 사로잡혔다는 묘사는 처절함마저 느껴질 정도에요. 재즈와 텔레비젼,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젊은 세대를 의식한 탓이겠지요. 그런데 젊은 세대의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도 보이기는 하네요.
 당대 풍광을 잘 느끼게 해 주는 묘사도 좋습니다. 전후 막 복구가 시작되던 분위기가 잘 느껴지거든요. 도쿄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도로가 확장되고 부흥하는 부분의 설명이 특히 볼 만 합니다.

현실성 여부를 떠나 팬으로 즐길 거리도 많아요. 몇 년, 아니 몇 십년이 지났지만 더벅머리에 머리를 긁적이고, 볼품없는 하카마에 낡은 회색 외투와 삿갓 모양 모자를 쓴 긴다이치의 행색이 대표적입니다. 비올 때 쓰는 박쥐 우산마저도 친숙합니다. 도도로키 경부나 와 같은 친숙한 등장인물도 반갑기는 마찬가지고요.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지라 일종의 후일담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도도로키 경부는 은퇴 후 잘 나가는 탐정 사무소 소장이 되었고 그의 아들은 경부보로 경찰에서 일하고 있으며, 거리의 양아치였던 다몬 슈는 잘나가는 나이트클럽의 매니저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요.
여기서 도도로키 경부가 생각 이상의 낭만파 꼰대라는 묘사도 재미있었어요. 지금 하는 불륜 조사같은 일 보다 긴다이치가 가져온 가슴이 뛰는 모험은 흥미로와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건방진 의뢰인과 예전에는 잔챙이 범죄자였던 다몬 슈와 함께 하는건 싫어하는데 이거야말로 꼰대죠. 전형적인 '왕년에 내가' 류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이런 완전 고전적인 즐거움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다는건 단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추리적으로는 완전 꽝이에요. 모두 3건의 살인 사건이 벌어져서 양적으로는 풍성한데 가장 비중이 높고 중요한, 모든 사건의 발단인 첫 번째의 야마구치 도시오 살인 사건부터가 엽기적인 사건 현장의 묘사 외에는 억지스럽고 엉망입니다. 우선 후더닛 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야마구치 도시오의 부인 고유키가 실종되었으니까요. 나중에 고유키가 아니라 혼죠 가문의 딸 유카리가 실종되었다는게 밝혀지지만 이 역시 사건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이미 둘이 닮았다는걸 앞 부분에서부터 자세히 밝히고 있어서 수수께끼도 뭐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동기와 같은 와이더닛 측면으로는 괜찮은가? 역시나 별 볼일 없어요. 야마구치 도시오에게 농락당하고 분노한 유카리가 반대로 그를 농락하려다 둘 다 죽게 되었다게 진상이거든요. 트릭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 젊은이들의 문란한 행각으로 벌어진 사고일 뿐입니다.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목을 풍경처럼 매달은 이유'가 정말 야마구치 도시오의 유언 때문이었다는 이유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고요.
그 외의 괜히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들은 거슬리기만 합니다. 고유키가 야요이를 설득해 시체를 없앤게 대표적입니다. 그 집은 폐가에 가까와서 사건이 바로 발각될 이유는 없었던 만큼 무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둘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처럼 위장하고 시간을 번 뒤 집을 아예 재건축 하는 형태로 갔어도 무방했을거에요. 야요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고요. 여러모로 사건을 억지로 만들기 위한 무리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세 번째, 요시자와 살인 사건은 추리적으로나 이야기적으로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범인의 분노로 인한 무차별 살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두 번째 사건만 후더닛, 와이더닛 측면으로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파티 참석자들 모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졌는데 이는 일종의 시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범행이 일종의 착각으로 벌어졌다는 의외성도 좋았고요.
문제는 사용한 트릭이 저자의 이전 작품인 "나비 부인 살인 사건"에 등장했었던 트릭이라는건데, 범인이 추리 소설을 통해 트릭을 익혀서 사용했다는 식으로 트릭의 자가 복제를 설득력있게 넘어가는 솜씨는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날로 먹은 듯 하지만 이 역시 거장의 재치겠지...요. 와이더닛 측면으로도 협박자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의 등장 인물들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 범위 밖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우선 범인 시게루부터 보자면, 아들 데쓰야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분노한다는건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살인까지 저지를만한 인물이라는 묘사가 그 전에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너무 갑작스러워요. 분노의 대상에 아내가 포함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요.
데쓰야가 도시오의 아들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 후 방황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에요. 어머니가 유카리, 아니 고유키라도 그가 호겐 이가라시 가문의 후손이라는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유카리는 엄연히 야요이의 손녀이고, 고유키는 데쓰야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방황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혼조 도쿠베에가 과거 유카리의 사체를 숨긴 뒤 이를 통해 호겐 가문을 협박해 왔다던가, 이를 효도 후사타로가 눈치채고 협박을 이어간다는 설정도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제일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무려 백만엔이나 되는 선금과 함께 사건을 의뢰받은 주제에 의뢰인이 죽도록 방관한 긴다이치의 무능함이고요.

이렇게 추리적으로는 너무 별 볼일 없기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캐릭터 설정도 기대 이하인 등 - 예를 들어 사가와 데쓰야는 최초 야마구치 도시오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될 정도로 격한 분노를 품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뮤지션으로 설명되는 식으로 - 솔직히 더 낮은 점수를 주어도 무방하긴 한데, 고전 애호가들은 여러모로 즐길 거리가 많기는 합니다. 최소한 저는 깔깔거리며 즐겁게 읽었답니다. 저 같은 고전 애호가 분들께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이 작품을 즐길 정도의 고전 애호가가 얼마나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2010/05/20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권영주 : 별점 2점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 - 4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한 지방 촌도시에 있는 바 에이프릴에 토요일 밤마다 다양한 사람들 - 비디오 가게 주인과 사진관 주인 부부, 신사복점 아들, 돌팔이 치과의사 - 이 모인다. 모이는 이유는 토요일 밤, 바를 찾는 슈겐도의 행각승 지장 스님에게서 재미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일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단편집입니다. 학생 아리스와 작가 아리스 이외의 시리즈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범죄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추리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흑거미 클럽"이겠지요. 에도가와 란포 단편에도 이러한 모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이 몇 개 있고요. 스님 탐정이라는 점에서는 "A 사이즈 살인사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전적인 설정을 도입한 작품답게, 수록된 일곱 편의 단편 모두 고전적이면서도 전형적인 퍼즐 미스터리이자 수수께끼 풀이입니다. "문제"편과 "해답"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성도 고전적이고요.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이런 고전적인 단편들을 좋아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첫 번째 문제는 설정입니다. "흑거미 클럽"은 클럽 회원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구석의 노인"같은 이야기 전달자와 탐정 등장 구조에서 한 단계 진보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화자와 탐정을 모두 행각승 지장 스님이 맡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간단한 의견을 약간 전달할 뿐, 하는게 거의 없어요. 때문에 지장 스님이 등장하는 3인칭 추리 단편으로 만드는 게 나았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슈겐도의 행각승이라는 주인공이자 탐정 지장 스님입니다. 강인한 체력에 무술도 어느 정도 갖추고, 술이나 고기도 사양하지 않는 - 좋아하는 칵테일이 "보헤미안 드림"(조사해봤는데 존재하지 않는 칵테일 같네요)일 정도로 - 만화같은 설정도 별로지만, 주인공이 스님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탓입니다. 앞서 언급한 "A 사이즈 살인사건"에서는 그나마 "선문답"이라는 형식을 통해 추리를 피력하는 등 스님 설정의 당위성을 가져가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떠돌이"라는 설정 이외에는 행각승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전체적인 분위기 모두가 소설이 아닌 TV 단막극에 더 어울리는 내용들이었고, 트릭들도 영상화되는 것이 더 깔끔하게 설명될 수 있을것 같아서 TV 시리즈를 소설로 만든게 아닌가하는 의심마저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미스터리 매니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고전 스타일 구현을 위한 무리한 욕심은 가상합니다만, 썩 잘 만들어졌다고 보기 힘듭니다. 이 작가는 소설가보다는 "원작가"로 활동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수록작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개인적 베스트로는 "독 만찬회"를 꼽습니다.

"지방 철도와 신데렐라" 

고전적인 구성과 더불어 독자에게 주는 정보도 공정한 정통 퍼즐 미스터리입니다. 상-하행선이 번갈아 운행하는 시골 기차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트릭이 등장하고요. 아이돌과 매니저가 등장하는 설정은 뻔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재미있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저택의 가장파티" 

벼락부자 졸부의 가장 파티장에서 배트맨 분장을 한 사람이 피해자를 찾아간 뒤, 다스베이더가 피해자와 배트맨의 시체를 발견한다는 내용입니다.

영상화되는 것이 더욱 어울릴법한 트릭으로 그다지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범인이 곧바로 밝혀졌으리라 생각도 들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절벽의 교주" 

사이비 종교 단체의 절벽 아래 수행장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이야기입니다. 

공들여 만든 자연적인 밀실을 무대로 한 밀실 살인물인데 설정부터가 억지스러워요. 트릭도 너무 만화같고요. 범행이 작품에서처럼 한 번에 성공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독 만찬회" 

가족 만찬회장에서 벌어진 독살 사건이라는 고전적 설정도 좋지만, 트릭이 굉장히 깔끔하고 기발해서 마음에 듭니다. 동기도 합당하고요. 우연에 의한 일종의 사고라는 문제가 있긴 한데 수수께끼 풀이로는 적당한 수준이었다 생각되네요. 뭐 이런게 더 현실적이기도 하겠죠.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을 때는 혼자" 

전직 야쿠자가 총에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의 도주로는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는 내용으로, 뭔가 거창한 밀실 트릭이 쓰였을 것 같은데 실상 알맹이는 별 게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범인이 중요한 단서를 간과했기 때문에 사건이 복잡해진 것 뿐이거든요. 좀 흔한 내용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깨진 유리창" 

일종의 순간 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피해자가 사망할 때가 아니라, 범인이 도주하고 나서 사망 시간을 조작하기 위해 유리창을 깼다는 것이지요. 어디서 많이 본 듯 싶어요. 

그러나 트릭이 정말로 조잡하고 유치한 수준입니다... 수사를 통해 곧바로 드러날 장치 트릭이라는 문제도 크지만, 안에서 깬 유리와 밖에서 깬 유리의 형태가 당연히 다를 것이라는 기본조차 망각하고 있는 탓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덴마 박사의 승천" 

우연히 만난 발명가의 괴상한 죽음의 진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자살 같지만, 현장까지 술에 취한 듯한 엉망진창의 피해자 신발 자국이 남겨져 있었다는건데, 수준을 떠나서 솔직히 반칙이었다 생각됩니다. 작위적이면서 억지스럽기도 했고요. 차라리 바 손님들의 아이디어가 진상보다 더 나았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8/06/03

스무고개 - 윤은조 : 별점 2점

삼촌의 집 관리와 포토샵 알바로 연명하는 백수 양여준에게 십년 전 '스무고개'로 연을 맺었던 PC 통신 동호회 당시 지인 '로매(로케이션 매니저)' 가 갑작스럽게 연락해왔다. 이유는 그에게 보내진 협박성 메세지 때문이었다. 과거 동호회에서 '총무' 라고 불리었던 양여준은 로매와 함께 동호회 경험을 되살려 사건 해결에 뛰어들었지만, 살인 사건과 로매의 실종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고 말았다. 여준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아는 최고의 추리력을 지닌 동호회의 창조자이자 리더 '여고' 형 김남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국내 최대, 최고의 미스터리 커뮤니티 사이트 '하우미 (Howmystery.com)' 의 운영자이신 decca님이 집필하여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장편보다는 중편 길이의 작품으로 1, 2부 구성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 전문가가 쓴 작품답게 현대물이지만 여러모로 고전 본격물 느낌이 강한게 특징으로, 단서들이 대체로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1부 관찰 놀이" 은 양여준의 설명으로 여고형이 진상을 알아낸다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과 동일한 방식입니다. 모든 정보가 탐정과 독자에게 거의 모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음은 물론이고요. "2부 탐정 놀이" 는 양여준과 로매가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흐름에 맞춰 함께 추리를 하는 방식이라 조금 다르지만, 공정성 측면에서는 비슷합니다.

이렇게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만드는 내용 외에도 오래 전 PC 통신 시대를 무대로 한 핵심 설정과 인간 관계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어 반갑더군요. 특히나 작 중 PC 통신 동호회의 주요 활동이었던 '관찰 게임' 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셜록 홈즈의 의뢰인 분석을 현대적으로 변주했다는 점에서 고전 본격물의 향취가 한껏 느껴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 놀이에 가까운 여흥으로 가능한, 설득력넘치는 아이디어였기 때문입니다. 이 관찰 게임만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어도 참 좋겠다 싶더라고요.

하지만 정작 이야기 자체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고 작위적이라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1부 "관찰 놀이" 부터 이야기하자면, 양여준의 삼촌이 유명한 추리 소설 수집가로 모든건 그의 집에서 희귀본을 훔치기 위해 로매가 벌인 연극이라는게 진상의 설득력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집의 번호를 카메라를 설치하여 알아낸다? 차라리 총무의 행동을 관찰하여 집을 비울 때 잠입하여 책을 훔치는 게 상식적입니다. 양여준이 경찰에 신고만 하면 그 집이 로매의 여친 김미영의 집이라는게 밝혀질테고, 그렇다면 로매가 엮여 있다는게 바로 드러날테니까요. 그리고 삼촌이 책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더라도 유력한 용의자가 로매가 될 게 뻔하다는 것도 문제에요. 아무리 동떨어진 사건이라도 두 사건을 엮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범인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까지 드러내고 무언가 하려고 한다는건 사실 이해하기 힘들어요.

2부 격인 "탐정 놀이" 의 경우는 더 심각합니다. 과거 여고형의 실종에 대한 진상은 설득력이 빵점인 탓입니다. 우선 아파트 밖에 나간다고 하고 실제로는 밖에 나가지 않고 사라졌다면 아파트 안에 있으리라 생각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왜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어차피 윗 층으로 가서 범행을 저지를거라면 그냥 계단으로 올라가면 되지 왜 줄사다리를 썼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CCTV 때문에? 그렇다면 올라가 사다리를 설치한 여고형의 누님은 찍혔을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 범행을 위해 로매와 총무를 끌어들인 것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관찰 놀이" 와 마찬가지로 경찰에 신고했다면 큰 일이 났을테고, 설렁 그렇지 않아도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이상한 사람에 대해 행방을 묻고 다녔나는 증언을 경찰이 접수하면 역시나 검거는 시간 문제였을 겁니다. 살인까지 저지르려는 인간이 이러한 위험 요소를 구태여 외부에서 불러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지가 않습니다.

유괴 사건에 대한 복수라고 하는 동기도 어설픕니다. 일단 범인이 유괴로 소소하게 먹고 살았다는 설정부터 문제에요. 유괴 사건은 대서특필하고 범인을 검거하고야 마는, 미제 사건일 경우 "그것이 알고 싶다" 등 다양한 매체에서 기억에서 잊혀질 때 쯤 다시 드러내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설득력이 빵점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피해 아동 한명이 사망까지 한 범행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차라리 체포된 후 십 수년의 징역을 마치고 나온 범인에게 복수했다는 식으로 풀어내는게 설득력은 더 높았겠죠. 아니면 이 때 범인이 문을 열었을 때 기절 시키고 그의 어린 아들을 유괴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고형과 그 누나가 키우고 있었다던가요. "1부 관찰놀이" 에서 총무가 고등학생 아들을 보고 놀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정작 추리물로서는 조금 미흡하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판타지나 무협 등 타 장르와 이종 교배한 괴이한 추리물이 범람하는 현 시점에서 보기 드문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고 추리 애호가로서 충분히 즐길거리도 많다는건 분명하니 추리물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지금은 네이버에서 무료로 읽으실 수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냥 PC 통신 시절, '관찰 놀이' 으로 소소한 추리를 즐기던 멤버들이 나이가 들어 또다시 뭉쳐 소소한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가벼운 일상계 이야기로 풀어내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관찰 놀이 아이디어가 그만큼 괜찮았기 때문인데, 작가님이 이 IP를 활용한 다른 아이디어도 있다고 하니 후속작을 기대해 봅니다.

2025/02/07

붉은 박물관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점

붉은 박물관 - 4점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한수진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사 1과의 데라다 사토시 경사는 수사 중 실수를 저질러 경시청 부속 범죄 자료관(붉은 박물관)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경시청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의 증거품과 수사 서류를 일정 기간 경과 후 관할 경찰서에서 받아와 보관하고, 그것을 조사 연구 및 수사관 교육에 활용하여 향후 수사에 도움이 되게끔 하는 곳이었다.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수집된 미해결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고, 데라다에게 직접 수사를 맡겨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정통 본격 추리 단편집. '붉은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가 안락의자 탐정으로, 기존 수사 기록과 데라다를 시켜 모은 정보로 미해결 사건을 추리해 낸다는 내용입니다.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드라마가 발표되었을 정도로 인기작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 미해결 사건에 대한 정보가 모이는 부서에서 사건을 추리한다는 설정은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와 똑같습니다. 딕슨 카의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과도 비슷하고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장르 성격도 동일합니다. 수록작들 모두 어느 정도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탐정이 독자들과 똑같이 단서를 제공받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인 덕분입니다. 덕분에 독자도 탐정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추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급해드린 고전 명작 수준은 아닙니다. 대부분 작품 속 트릭이나 범행 동기가 별로 현실적이지 않고, 억지스러운게 많은 탓이 큽니다. 트릭도 5편 중 한 편("죽음에 이르는 질문")을 제외하고는 'A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아니었다.'같은 사람 바꿔치기일 뿐이고요.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도 작위적이거나 우연에 기반한게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캐릭터들도 영 별로입니다. 탐정역인 박물관 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일본 컨텐츠에 나오는 쿨 뷰티 안경녀의 전형으로, 생생함을 느끼기 힘든 인물이었습니다. 열혈도 아니고, 사명감도 딱히 없어 보이는 미지근한 초식남 데라다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을 다시 불러온 의욕은 좋았지만, 완성도는 고전 걸작들에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빵의 몸값

1998년 2월 일어났던 나카지마 제빵 사장 살해 사건이 벌어졌다. 사장은 빵에 바늘을 집어넣은 범인에게 1억엔을 건네주려다 살해당했다. 밖에서 숨어있던 경찰들은, 현장인 저택 내부 방공호의 존재를 몰라 범인을 놓치고 말았다. 

현장인 폐허로 들어갔던건 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수사를 위해 차 안에 숨어있던 경찰 도리이였습니다. 그는 출발할 때 차고에서 가발과 안경, 마스크를 착용하여 사장으로 변장했고, 차 안에서는 1인 2역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사장으로 폐가에 들어간 뒤, 변장을 풀고 수사관인척 나타났고요.
사장이 다른 사람을 살해할 때의 알리바이를 만드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는 뺑소니 사고를 일으켜 사람을 사망케 했는데, 함께 있던 야스다가 자수하려고 해서 죽이려고 했던거지요. 하지만 사장은 야스다에게 반격당해서 죽어버렸고, 이 사실을 들은 도리이는 사장인 척 연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장과 도리이 경부가 바뀌었다는 트릭은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 - 협박범에게 돈을 건네주기 위해 이동하던 - 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부분 억지스럽습니다. 경찰이 뺑소니 사망 사고를 일으킨걸 숨기려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공범자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무려 1억엔의 돈이 걸린 협박 사건을 꾸며냈다? 알리바이는 경찰인 도리이 경부가 거짓말로라도 증명해주면 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을 꾸며낼 이유가 없어요. 그야말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허무맹랑한 설정 놀음일 뿐입니다.

트릭도 운에 너무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저택 안에 방공호가 없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야스다가 자살같은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더라면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아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수 일기

데라다 사토시는 1993년 9월 하치오지시 살인 사건 범인 다카미 교이치의 일기를 읽었다. '헤어졌던 애인 마이코가 살해당했다. 나는 몇 가지 단서를 토대로 범인이 오쿠무라 교수라고 추리했고, 교수와 담판을 짓던 끝에 그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일기장은 도둑맞았었는데 도둑이 경찰에 신고했고, 다카미는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가 차에 치어 죽었다.
히이로 사에코는 일기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챈 뒤, 데라다 사토시에게 재수사를 명령했다. 데라다는 명령대로 마이코의 부모님 집으로 찾아가, 오쿠무라 교수 살해 당시 알리바이를 물었다...

히이로 사에코가 일기에서 포착했던 '이상한 점'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꽤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음에도 흉기를 가져가지 않고 현장의 페이퍼 나이프를 쓴건 확실히 이상했어요. 에어컨을 껐다는 묘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체가 일기 내용대로 범행 뒤 무더위 속에 방치되었던게 아니라, 시원한 실내에 놓여 있었다면 사망 시각은 훨씬 이전이 될 테지요. 

결론적으로, 오쿠무라 교수는 일기보다 이전에 살해당했습니다. 오쿠무라가 일기를 조작하여 경찰에 보내면서까지 진범을 자처했던건, 진범이 마이코였기 때문이고요. 이틀의 시차를 둔 건, 마이코의 알리바이(이미 사망했음)를 확실하게 만들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보다야 낙후되었다 하더라도, 90년대 과학 수사가 무려 이틀 이상의 사망 시각 차이를 밝혀내지 못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운에 의지하고 있는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마이코 자살 사체가 발견되기 전, 다카미가 마이코의 집을 방문했다는걸 아무도 몰랐고, 하숙집에서 가짜 도둑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들키지 않았고, 오쿠무라 집의 에어컨 조작을 들키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에어컨 조작의 경우, 전기 사용량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이 공범자를 갈라놓을 때까지

데라다 사토시는 눈 앞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피해자 도모베 요시오가 사망하기 직전에, 25년 전 교환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을 들었다. 조사해보니 실제로 25년 전,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확실하여 해결되지 못했던 사건들이 있었다...

교환 살인을 소재로 한 작품은 흔한데("낯선 승객"), 데라다 사토시에게 죄를 고백한 도모베 요시오는 가짜였고, 도모베 마사요시 살인 사건의 진짜 청부인도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아내 마키코였다는 바꿔치기 트릭이 합쳐져 신선한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입니다. 마키코는 가짜 도모베 요시오인 사이토 아키히코와 초등학교 동창으로 범행을 모의했습니다. 마키코는 2년 전 도모베 요시오를 살해한 뒤, 사이토 아키히코를 대역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데라다가 들은건 도모베 요시오가 아니라 사이토 아키히코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25년 전 사건 조사를 할 때 혼돈을 일으켰던 것이고요.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 과정도 매끄럽고, 단서 제공도 가짜 도모베 요시오의 면허 취득 기간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운전 실력, 폐업 후 지방으로 내려간 상황, 근육질인 마키코의 체형(그래서 25년 전 여성 한 명을 살해하기 용이했다) 등 과할 정도로 제공됩니다. 

때마침 데라다 앞에서 교통 사고가 일어나고, 마침 피해자가 경찰에게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상황은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통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길

사진작가 에미리는 21년 전 부모와 이모를 잃었다. 세 명은 청산가리로 독살당했고, 집과 사체는 범인이 지른 불로 전소해버렸다. 이모의 연인이라는 남자 소행으로 보였지만, 사건은 해결되지 못했다. 사건에 대한 글을 잡지에서 읽은 히이로 사에코는 데라다에게 에미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지시했다. 

에미리의 친모 도모코는 친모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동생 아키코가 불륜을 저질러 에미리가 태어났지요. 그런데 둘 사이에 또 애가 생기자 복수심에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입니다. 에미리를 임신했을 때와 겹쳤던 아키코의 유학 및 실종 기간, 아키코의 애인 이야기는 도모코의 말 뿐이었다는 것, 도모코는 연장 보육 제도 이용도 고려했다는 등의 단서 및 이를 통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사건의 동기도 끔찍하지만 충분히 설득력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범행 동기와 과정만큼은 가장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했다기 보다는, 그나마 말이 되는 추리를 추가했을 뿐이지요. 그래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추리 퀴즈에 가까와 보이기도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질문

26년 전 발견되었던 피살체와 똑같은 상태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26년 전 사건의 피해자와 연령이 같았고, 사망 추정 시각 및 사체 유기 현장도 똑같았으며 심지어 흉기마저 일치했다. 이번에도 피해자 스웨터 소매에 피해자가 아닌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수사 1과는 동일범의 소행이라 여겨 자료관에서 26년 전 자료를 가져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사관이 범인일 수 있다는 감사팀의 지시를 받아 데라다는 홀로 사건 수사에 나섰다...

범인은 기자 후지노 준코였습니다. 그녀는 26년 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후쿠다 도미오를 살해했습니다. 후쿠다 도미오 소매에 묻은 피는 아버지의 피였습니다. 준코를 학대하던 아버지는 후쿠다를 끌어들였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입을 다물게 되었고요.
그리고 26년 후,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임을 확인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소매의 피는 DNA 조사를 할 테고, 이를 통해 가족 관계가 드러날걸 노렸던 겁니다. 

이를 드러내는 '26년 전 피가 묻었던 소매와 지금 피가 묻은 소매의 위치가 다르다'는 단서도 좋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어느 쪽 소매에 피가 묻었는지 전혀 공개되지 않아서, 범인은 이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팀 생각대로 수사팀 관계자가 범인이었다면, 26년 전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을테니 위치를 틀렸을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범인은? 피에 대한 경찰 조사 결과를 입수할 수 있는건 보도 관계자일테고, 관련되어 질문을 하는 관계자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비약이 심한 탓입니다. 보도 관계자가 범인일 수는 있지만 다른 가능성도 널려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DNA 분석 요원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기자회견을 맡는 수사관이 아닌 경찰 직원이라던가... 기자 회견장에서 후지노 준코가 DNA 조사를 물어본 것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추리 과정보다 더 큰 문제도 있습니다. 동기와 범행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DNA가 범행 당시 핏자욱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자수하고 그 증거로 혈흔이 아버지 것이라는걸 증명하는게 훨씬 간단한 해결책입니다. 억지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인 '정통 본격 추리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망작입니다.

2009/02/03

빅 보우 미스터리 - 이스라엘 장윌 / 한동훈 : 별점 4점

빅 보우 미스터리 - 8점
이스라엘 장윌 지음, 한동훈 옮김/태동출판사

런던 보우 가의 한 하숙집의 하숙인 아서 콘스탄트가 목이 베인 채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가 발견된 방 안은 완벽한 밀실 상태!

1892년, 즉 19세기 후반에 발표된 밀실 미스터리의 고전인 "빅 보우 미스터리"를 이제야 완독했습니다. 중편 길이의 표제작 외에 "유별난 교수형" 이라는 단편까지, 모두 2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내에 출간된지는 꽤 오래 되었는데 뒤늦은 감이 있네요. 추리 애호가를 자칭하는 저로서는 반성해야 할 부분이지요. 

하여튼, 일단 평하자면 추리사에 이름을 남긴 고전답게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상당히 기발하고 참신한 일종의 밀실 + 심리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지금 읽어도 무릎을 칠 만한 기발한 선구자적 아이디어인 덕분입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좀 낡아 보일 수 있고, 우연에 기대는 부분이 약간 있지만 흠이라고 보기는 어렵고요.
아울러 전편을 관통하는 유머와 풍자는 트릭보다도 더 큰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지금도 먹힐만큼 독특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가 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정통 추리물을 쓴 느낌이랄까요? 그만큼 유머러스함이 전편에 묻어나서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마지막의 반전도 19세기 후반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서 더욱 만족스러웠고요.
이렇게 유머와 추리적 완성도가 빼어나기에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가치있는 "고전" 이라는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덧붙이자면 부록처럼 실려있는 "유별난 교수형" 이라는 작품은 트릭은 지금 보기에는 너무 뻔해보이긴 하지만 역시나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넘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재미와 가치 모두 기대 이상이니까요.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추리소설 애호가시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소개된 것 자체가 상당히 놀라운 일인데, 앞으로도 계속 다른 고전 명작들이 번역, 소개되었으면 합니다.

2021/04/16

최후의 일격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5점

최후의 일격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9년 겨울, 작가로 갓 데뷔한 엘러리는 크리스마스부터 공현절까지 12일간 열리는 파티에 초대되어 인쇄업자 아서 크레이그의 저택으로 향한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젊고 매력적인 시인이자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이기도 한 존과 그의 약혼녀, 허영 가득한 여배우, 출판업자인 댄 프리먼 등을 비롯해 모두 12명.

모두가 파티 분위기로 들떠 있는 사이 저택은 폭설로 고립되고,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 초대 손님들에게 열두 별자리를 상징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넨다. 그리고 얼마 후, 초대받지 못한 13번째 손님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엘러리 퀸의 마지막 장편입니다. 말년의 엘러리 퀸이 고전 본격물의 향취를 되살리고자 의욕적으로 도전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부터가 엘러리 퀸 데뷰작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 직후니까요. 작품도 고전 본격물에 굉장히 충실합니다. 클로즈드 서클에 가까운 무대 설정과 부유한 주요 등장인물들, 기묘한 범행과 단서들 모두가요. 모든 단서는 공정히 제공되며, 심지어 '독자에의 도전'도 삽입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인용했다는 형태로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망작입니다. 고전 본격물의 단점만 집대성해 놓은 결과물이에요.

고전 본격물의 존재 가치가 멋진 트릭과 기발한 설정에 있다는건 분명합니다. 어떤 작품은 트릭과 설정만으로도 모든 단점이 덮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런 설정들은 '비현실성;을 강화한다는 문제가 큽니다. 기상천외할 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고요. 그나마 이런 설정들이 최소한의 현실성을 가지려면, 사용되거나 그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라도 명확해야 합니다. 작위적인 상황 연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의 예를 들자면, 범인이 피해자의 목을 잘라 T자 형으로 매단 이유는 피해자인척 하기 위해서 벌인 행동이었죠. 작위적이기는 하나, 말은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트릭도 변변치 않고, 설정들도 억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표적인건 범인이 12일에 걸쳐 20가지 선물을 예정된 피해자에게 보낸다는 설정입니다. 선물들은 폐니키아 알파벳이 유래한 사물들을 의미했습니다. 첫번째 '황소'는 알레프, A, 두번째 집은 베스, B 라는 식으로요. 이 경우 마지막 Z는 단검인 자인을 뜻하죠. 하지만 범인은 스무번째 선물이 전달되는 마지막 날, 단검으로 존을 살해한다는걸 미리 알리기 위해 선물을 보낸게 아닙니다! 범인 아서 크레이그는 존을 꼭 죽였어야 했어요. 파산을 막기 위해서요. 누군가 존의 죽음을 막거나, 자기 범행을 멈추어 주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선물을 보냈을까요?
이유랍시고 나오는건, 명탐정 엘러리 퀸이 선물은 페니키아 알파벳이고, 선물 카드 뒤에 그려진 그림은 교정용 기호를 쓴 거라 편지를 보낸건 이쪽 분야에 정통한 인쇄업 종사자 아서 크레이그라고 추리해내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너무 뻔한? 단서라서 명탐정은 아서 크레이그는 진범이 아니고 누명을 쓴 거라고 주장해 줄 걸 기대했다면서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어요. 이러니 명탐정들이 현대의 비웃음거리가 된 겁니다...
차라리 피해자만 아는 일종의 기호로 피해자의 두려움을 가중시키려고 했다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트릭을 알아채서, 자신의 범행을 멈추어 줄 것을 기대했다던가, 범인이 페니키아 알파벳에 집착하는 미치광이였다는 이야기가 조금 더 나았을 겁니다. 딱히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작품 속 설정보다는 말이 됩니다.

애초에 아서 크레이그가 선물을 보내면서, 열 두명이나 되는 손님이 모인 저택에서 12일 동안 파티를 즐기면서 시간을 끌 이유도 없습니다. 언제든 존을 죽이면 되요. 사고로 위장해서요. 실제로 작 중에서도 존은 2번의 큰 사고 - 승마 중 낙마, 과음 후 계단에서 추락 - 을 겪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범죄를 저지를 경우, 유산이라는 동기 때문에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 부분은 선물을 보낸 뒤 살해해도 어차피 똑같습니다. 구태여 복잡하고 번거롭게 단서만 늘린 셈이에요. 게다가 아무리 자기 저택이라지만, 경찰마저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려 12일 동안 몰래 선물을 놓아둘 수 있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선물을 놓아두다가 잡혔다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전개와 설정도 엉망입니다. 존3가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협박하는 장면은 볼썽사나울 지경입니다. 뭐 프리먼의 인쇄소를 손에 넣고자 했던건, 돈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허나 롤랜드 페인을 협박해서 존1이 쓴 시집에 대한 호평을 얻고자 한 건 설명이 안됩니다. 스스로가 존1이 될 생각이었을까요? 협박했다는 사실을 존1에게 숨긴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건 마찬가지고요. 물론 협박을 한게 존 1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협박대로 인쇄소와 시집에 대한 호평을 손에 넣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마디로 존을 죽이고 싶은 용의자를 만들기 위한 억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협박을 한 건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고 선물이 보내지고 난 이후이니, 이 둘을 용의자로 보기도 힘들어요.

아울러 작품 속 경찰들은 정말로 무능했습니다. 사건 이후 아서 크레이그의 재산 흐름만 확인했어도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건 별로 어렵지 않았을거에요. 이 정도 수사도 하지 않고 미해결 사건으로 덮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아예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존의 쌍둥이 형제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사실 존은 '세쌍동이'여서 존 2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나름의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 살아있는게 존 1이냐 존 3이냐는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 평가를 끌어올리기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제 정말 엘러리 퀸은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03/12/15

불연속 살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 유정 : 별점 1.5점

불연속 살인사건 사카구치 안고 지음, 유정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아내와 나는 여름을 산간마을에 있는 친구 집에서 보내게 된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배우, 화가 등 20여 명과 같이 지내게 되는데, 돌연 인기작가가 살해되면서 이후 차례로 7, 8명이 연달아 칼에 찔리거나 교살, 독살, 익사체로 죽어나간다. 범행방법도 제각각, 동기도 알 수 없는 이 연쇄살인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불연속 살인사건인가.

일본 고전 미스테리 걸작을 뽑을때 빠지지 않는 사카구치 안고의 불연속 살인사건입니다. 평소 헌책방을 뒤져 절판된 추리소설을 구해 읽는것을 좋아하지만 워낙 유명한 일본 정통(?) 고전 추리소설인지라 동서 추리문고의 따끈따끈한 새책으로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위의 줄거리와 같이 무려(!) 20여명에 가까운 등장인물들이 나온다는 것이 특징으로 화자역인 야시로 슨페이나 탐정역의 교세이 박사 두명 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개성에 가려 별로 돋보이지 않을 정도에요. 홈즈나 왓슨의 비중이 죽어나가는 조연들보다 낮은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요?  이름들도 "야시로 슨페이""우타가와 가즈우마""모치즈키 다카히토" 등등 외우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 앞부분의 등장인물 표를 계속 보게끔 만들더군요. (중반 이후부터는 번역과 교정 문제인 듯 이름이 잘못 표기된 부분이 꽤 눈에 띄더군요. 흐....)
또 여러 설정들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식이라는 것도 큰 특징으로 한 시골마을에 왕처럼 사는 구 귀족 출신의 부자와 그의 자식들,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친구들, 미친 의사와 간호원까지.. 어떻게 보면 "김전일"에 많이 나옴직한 시골 명문가와 비뚤어진 인간관계의 원형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김전일에 비하면, 이야기는 너무나 장황하고 사건보다는 심리묘사와 각종 상황묘사, 그리고 인물간의 대사에 치중하고 있어서 추리소설의 느낌이 많이 약합니다. 너무 대사가 많은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건인 "살인사건"마저도 이런 저런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묻혀 어영부영 넘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그러나 이건 약과일 뿐이고 더 큰 문제는 너무 많이 죽어서 결국 용의자가 좁혀진다는 것입니다. 저조차도 끝부분에서 트릭은 알아채지 못했지만 범인이 누군가인가 하는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거든요. 실질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 한명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 다했죠 머...^^ 
게다가 정통 고전파 명작 중 하나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정통파라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최소한 동요에 맞춰 사람이 죽어나간다던가, 이름 머릿글자 순으로 죽어나간다던가 하는 재미 정도는 더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결론내리자면 고전을 읽은 기쁨은 있지만 아쉬움도 큰 책입니다. 이 책은 분명 고전이고 발표 당시에는 뭔가 획기적이고 대단한 면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고 지루하기만 할 뿐이었어요.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나 작가의 이름값에 기댄 측면이 커 보이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뒷부분에 수록된 진슌신의 "얼룩화필"도 별로 신선하지 못했기에 본전 생각이 더 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