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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3

예스터데이 (2019) - 대니 보일 : 별점 2.5점

전 세계적인 정전이 12초 동안 벌어진 뒤, 무명 가수 잭 말릭은 자기 말고는 아무도 비틀즈를 알지 못한다는걸 깨달았다. 당황도 잠시, 잭은 자신이 기억하는 비틀즈의 곡들을 선보이며 화재를 불러 일으켰고, 세계적인 팝 스타 에드 시런의 눈에도 띄어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르며 명성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둘 수록 양심, 그리고 엘리와의 사랑을 고민하던 잭은 모든 곡들은 '비틀즈'가 썼다는 진실을 고백한 뒤 사랑하는 엘리와 함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다.

한 때의 귀재 대니 보일이 2019년 발표했던 청춘 로맨틱 음악 코미디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풍성한 비틀즈 음악을 스크린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스터데이", "Let it Be",  "She Loves You", "I Want To Hold Your Hand", "I Saw Her Standing There", "Back in the USSR", "Help!" 등의 명곡들이 이어지거든요. 몇몇 곡들은 장면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뮤지컬 같은 느낌까지 줍니다. 엘리가 잭에게 이별, 그리고 개빈과 만나고 있다는걸 고백한 직후 잭이 "Help!"를 열창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Help! I need somebody)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세상에서 비틀즈의 노래가 사라졌는데 나만 알고 있다!는 아이디어는 따지면 이세계 회귀물이나 전생물, 시간 여행물과 다를바 없지만 '음악'이라는 소재 선택이 아주 탁월한 덕분입니다. 만약 피카소의 그림을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서 피카소의 그림을 발표했다면? 솔직히 성공하기 힘들겠지요. 셜록 홈즈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는 세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홈즈 시리즈도 지금 읽기에는 낡은 이야기들이 많은 탓입니다. 하지만 명곡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비틀즈'의 곡이라는 점에서 다시 성공한다는건 굉장한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음악은 유튜브 등 현재의 플랫폼 환경과 잘 맞아 떨어지기도 하니까요. 당연히 '영화'라는 매체와도 잘 어울리고요.

전반적으로 띠고 있는 가볍고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분위기도 웃음을 주는 순간과 애틋한 감정을 담은 장면의 균형도 좋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건 캐스팅입니다. 어딘가 찌질하면서도 순수한 주인공 잭과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엘리 등 모든 인물들 캐스팅이 적절해서 자연스럽게 감정 이입을 이끌어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러닝타임이 다소 길게 느껴집니다. 에드 시런의 출연의 경우, 이야기 전개에 꼭 필요하지는 않았는데 차라리 삭제하는게 나았을겁니다. 에드 시런의 도움이 없었어도 비틀즈 음악으로는 성공할 수 있었을테고, 에드 시런이 비틀즈에 대항해 '살리에리' 포지션을 차지하기는 역부족이니까요.
주인공 외에도 비틀즈를 기억하는 인물이 두 명 등장하는 장면, 존 레논과의 만남 장면은 사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두 장면은 실제로 '비틀즈'가 존재했다는 의미라서 설정과 모순되는 탓입니다.

또 많은 비틀즈의 명곡이 등장하지만, 일부 곡은 선곡이 아쉽습니다. 에드 시런과의 작곡 대결에서 잭이 선보이는 "The Long and Winding Road"이 대표적입니다. 명곡이지만 일반 관객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이보다는 엔딩에 사용된 "Ob-La-Di, Ob-La-Da" 같은 친숙한 곡을 앞세우는게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위대한 비틀즈 음악을 현대적인 로맨틱 코미디 속에 풀어낸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음악적 즐거움과 상큼한 러브스토리도 장점이고요.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비틀즈 음악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은 볼 만한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조용필 노래를 모티프로 삼아 리메이크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2025/02/21

게임북 전용 e-Ink 게임기

자주 찾는 블로그인 자그니님 블로그에서 재미있는 기기를 소개하고 있더군요. 게임북을 즐길 수 있는 휴대용 e-Ink 게임기입니다. 
게임북은 제가 초등학교 때 인기를 끌었던 책입니다. 페이지마다 선택지가 있고, 선택에 따라 페이지를 이동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었지요. 이러한 게임북만을 위한 전용 e-Ink 게임기로 전자책 리더기와 비슷한 형태네요. 화면 크기는 7.5인치에 800*400해상도이고 게임은 SD카드로 별도 판매할 계획인 듯 합니다.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니, 아들에게 책을 읽힐 목적으로 만든걸 사업 모델로 확장한 것이더군요. 아직 양산된건 아니고, 시제품이 준비된 정도고요. 곧(3월 1일)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현 시점까지 게임북이 20개 밖에 준비되지 않은건 문제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 플랫폼이 정착되어 누구나 게임북을 만들고 유통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이보다는 일반 모바일 플랫폼 용으로 아이들을 위한 게임북 앱을 만드는게 더 시장성이 있을겁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응원하고 싶습니다. 게임북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 추억 탓도 있지만, 과거 게임북의 단점이었던 한정된 분량(책 한권)을 극복하고, IT 기기에 맞는 재미(인터랙티브한 동작과 사운드 효과 등)으로 재미를 선사해 준다면 어느 정도 반응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거든요. 아이들 영어 교육용으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최근 깡통 전자 사전이 다시 뜨는 것처럼 말이지요. 

과연 시장 반응이 어떨지, 크라우드 펀딩이 시작되면 눈여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2023/08/13

로켓맨 1~10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로켓맨 10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중학생 미즈나시 요우는 정보상 R의 일을 돕게 된다. 어린 시절 잊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서였다. 악당인줄 알았던 R은, 알고보니 스스로 로켓을 만들어서 우주로 가려는 꿈을 이루려 정보를 팔아 돈을 모으고 있었다.
R은 자기 사건을 도와준 댓가로 요우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지만, 요우의 과거는 R이 속한 정보조직 T.E의 핵심 비밀 슈타지 파일과 관련된 중요한 비밀이었다. 파일은 오래전, 요우의 어머니가 가지고 사라진 채였다.T.E의 우두머리 아이에네스의 명령으로 R과 싸워 이긴 요우는 R의 로켓을 대신 맡아 완성하는 조건으로 조직에서 일하게 되었다.

Q.E.D로 유명한 카토 모토히로의 초기 옴니버스 연작 단편 모험물.
Boy meet a Rocket man이라는 부제처럼, 로켓을 만들어 우주로 가려는 남자 R과 만난 왕따 소년 요우의 모험과 성장이 핵심입니다. 초, 중반부까지는 R과 엮여 R이 속한 조직인 T.E의 에이전트가 된 요우가 이런 저런 사건들을 맡아 해결하는 단편 옴니버스물입니다. 여러가지 사건들이 등장하는데 추리적으로 괜찮은 에피소드들이 눈길을 끕니다. 특히 밀실 트릭 두어가지는 꽤 잘 만들어졌습니다. 아래와 같이 문이 잠겨진 '느낌'을 전해주는 장치 트릭은 상당히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이 안경테의 다리를 쏘았을리 없다는 점에 착안해 일종의 밀실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도 좋았고요.
Q.E.D 작가답게 과학과 트릭을 결합한 이야기도 있는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유전 아래에 사는 외딴 마을 사람들이 몰살당한 사건의 원인을 파헤치는 이야기로, 유전에서 이산화탄소를 물에 녹여 배출하다가 의도치않게 유출 사고가 났다는걸 설득력있게 잘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Q.E.D 비슷하게 여러가지 정보를 알려주는 학습 만화로서의 가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판매하는게 주 업무인 덕분이지요. 그래서 당대 세계 정세 및 주요 사건에 대한 언급도 많습니다. 인상적이었던건 20여년 전 작품임에도 아직 현재 진행 중인 이슈들이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그리드 컴퓨팅을 활용한 해킹,수정란 밀매 등이 그러합니다. 무기 상인들의 행각이야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요.

중, 후반부는 R이 로켓을 만들어 우주로 가려는 이유와 T.E라는 조직에 얽힌 수수께끼를 알려주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결국 T.E와 거대 무기 거래 조직 도미니온 재단 사이에서 전면전이 벌어지고요. 그러나 전개와 설정 모두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단 수수께끼부터 살펴보면, 도미니온 재단은 과거 자동 무인 레이저 공격용 위성을 팔려고 했습니다. 기술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말이죠.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끝나던 시점이라 더 늦어지면 판매가 불가능해 질 수 있었기 때문에 도미니온 재단은 사람을 위성에 남겨두고, 자동화 위성인 것처럼 속이는 쇼를 벌였고 그 사람은 다시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R의 부친이었고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 큰 스캔들이 될게 뻔하니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전쟁 무기 상인이 한 명의 우주인을 위성에 남겨둔게 뭐가 그리 큰 스캔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유해를 찾기 위해 우주로 가려는 R과 T.E를 저지하기 위해 희생시킨 군인들 수가 훨씬 많아요. 그 희생은 왜 괜찮은걸까요?
이외에도 설득력 부족한 설정은 많습니다. 하긴, 애초에 13살 중학생인 미즈나시 요우가 T.E의 에이전트가 된다는 설정부터가 억지스러우니 더 말해 무얼하겠습니까.... Q.E.D의 토마는 MIT를 조기 졸업한 천재이고, 친구 중 한 명은 거대 IT 재벌 총수인 등 인맥도 화려합니다. 본인의 재산도 많다고 설명되고요. 하지만 미즈나시 요우는 학교에서조차 왕따를 당하는 평범 이하의 중학생입니다. 어머니가 T.E의 S급 요원이었고, 요우도 자질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Q.E.D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아동향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도미니온 재단에서 다른 위성을 구입해서 원래 위성에 추돌시킨다는 계획은 참고 보아온 독자의 의식을 아득하게 날려버립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T.E와 전투를 벌일 이유도 없습니다. 진작에 추돌시켜서 위성만 날려버렸으면 됐잖아요? 여태까지의 전투와 작전은 모두 헛짓거리였습니다!
아울러 도미니온 재단이 고용한 3인의 킬러 프랙탈, 제로, 인피니티와 아이에네스를 지키는 수호자 지하에 대한 설정은 지극히 유치했습니다. 프랙탈과 지하가 총기가 널린 전쟁터에서 칼과 기묘한 와이어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어요. 이 장면을 포함한 마지막 대결전은 이 작가가 액션 연출과 묘사에는 정말 재능이 없다는걸 깨닫게 해 주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 10권 정도로 연재가 마무리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던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절판된 탓에 중고 가격이 어마무시한데, 그 가격에 걸맞는 가치는 없습니다. Q.E.D에서 활용하면 더 좋았을 트릭이 아까울 따름입니다.

2023/07/26

이 삶을 다시 한번 - 도다 세이지 / 조은하 : 별점 1.5점

이 삶을 다시 한번 - 4점
도다 세이지 지음, 조은하 옮김/애니북스

마사토끼의 추천 글을 읽고 보게 된 작품. 아래의 유명한 <<양파와 인생>>이 수록된 책입니다. <<양파와 인생>>처럼 짤막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맛이 있는, 기묘한 맛에 가까운 쇼트쇼트 만화들이 수록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기승전결이 무난한 드라마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페이지로 구성된 짤막한, 쇼트쇼트라 부를만한 작품들 역시 반전이나 기묘한 맛 장르물보다는 삶과 인생에 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고요. 인스타 단상을 만화로 옮긴 느낌이랄까요? 짧고, 뭔가 있어보이지만 실제로는 별 알맹이 없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유명한 <<양파와 인생>>도 시인 칼 샌드버그의 원본이 있더라고요.

"인생은 양파와 같다. 한껍질씩 벗기다 보면 가끔 눈물이 난다. (Life is like an onion. You peel it off one layer at a time and sometimes you weep.)"

작화도 정성들여 열심히 그리기는 했지만 캐릭터 묘사나 뎃셍력, 터치 모두 좋지 않습니다. 아마추어가 단상을 홀로 SNS에 올리다가 주목을 끌어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의 작품들이에요. 프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완성도도 미흡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사토끼한테 그만 낚여야겠습니다.

2023/02/26

Chat GPT에게 추천받은 역대 최고의 단편 후더닛 미스터리 베스트 10

추리 역사상 가장 빼어난 후더닛 단편 베스트 10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대한 Chat GPT의 답변입니다.

저도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결과가 상당히 그럴싸합니다. <<비밀결사>>를 꼽은건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준수한 목록으로 보이네요. 못 읽어본 작품은 어떻게든 구해서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1. "모르그 거리의 살인 The Murders in the Rue Morgue" by Edgar Allan Poe - often considered the first detective story, this tale features the amateur detective C. Auguste Dupin solving a series of bizarre murders in Paris.
  2. "얼룩끈 The Adventure of the Speckled Band" by Arthur Conan Doyle - one of the most famous Sherlock Holmes stories, this whodunit involves a woman who fears for her life after her sister dies under mysterious circumstances.
  3. "푸른 십자기 The Blue Cross" by G.K. Chesterton - in this Father Brown story, the eponymous priest solves a case involving the theft of a priceless religious artifact.
  4. "비밀결사 The Secret Adversary" by Agatha Christie - while not strictly a short story, this novella features Christie's recurring detectives Tommy and Tuppence as they try to solve a mysterious kidnapping.
  5. "The Black Cat" by John Dickson Carr - this locked-room mystery features the detective Dr. Gideon Fell trying to solve a seemingly impossible murder.
  6. "The Case of the Late Pig" by Margery Allingham - in this Albert Campion story, the amateur detective must solve the murder of a wealthy pig farmer.
  7. "도둑맞은 편지 The Purloined Letter" by Edgar Allan Poe - another C. Auguste Dupin story, this whodunit involves the theft of a sensitive letter and the efforts to retrieve it.
  8. "부러진 검의 의미 The Sign of the Broken Sword" by G.K. Chesterton - in this Father Brown story, the priest investigates the murder of a retired colonel with a mysterious past.
  9. "The Second Gong" by Roy Vickers - this classic whodunit involves the murder of a wealthy businessman during a dinner party, and the detective's efforts to solve the crime.
  10. "검찰측 증인 The Witness for the Prosecution" by Agatha Christie - this twisty tale involves a man accused of murder and his wife, who may or may not be a reliable witness.

2023/01/06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3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2.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3 - 6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안녕하세요. 2023년 들어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1권2권에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지능범죄편이라는 부제 그대로 다양한 사기 범죄가 주제로 피해자들이 왜 속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하고 뻔한 사기도 있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담한 발상의 사기극도 등장합니다. 유명하고 잘 알려진 사건도 있지만, 잘 몰랐던 사건도 많아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범행에 대한 치밀한 수사로 범인을 잡아나가는, 수사물로서의 드라마가 느껴지던 1, 2권에 비하면 아무래도 그런 요소는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속아넘어갈만한 정교한 사기극은 거의 없고, 왜 속아넘어가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뻔하고 단순한 사기극이 많다는 점도 실망스러웠어요. 이게 현실이겠지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억에 남는 사건 몇 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행복팀 사건>>
심리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는 농아들을 속여 가스라이팅한 뒤,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군림하며 등쳐먹은 일종의 사이비 종교 사기극. 사이비 종교가 범죄로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울러 범인들 때문에 자살 등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량이 낮다는건 큰 문제로 보입니다. 이런 놈들은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모쪼록 자살과 가장 붕괴의 원인이 된 사기 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은 살인죄 이상으로 판결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대구 금호강 보험금 살인 사건>>
이 사건은 제가 봤던 <<그것이 알고싶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였습니다. 범인의 억울하다는 투서에서부터 시작해서, 범인 가족이 억울하다며 울면서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알고보니 그놈이 진범이 맞아서 황당했었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살던 15년 친구를 보험금때문에 살해하는 인간 말종이니 애초에 양심은 없겠지만, 아직도 무죄를 주장한다는데 입맛이 쓰더군요.
그나저나 생소했던 '법보행'이 결정적 증거였다는 것도 기억에 남은 요인으로 대체 얼마나 걸음이 특이하길래 주위 친구들이 모조리 알아볼까 싶은데, 걷는 모습을 자세하게 보고 싶네요.

<<로맨스스캠>>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범죄이지요. 책에서 범죄 흐름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주고 있는데, 앞으로 이런 범죄 방지를 하자는 차원에서 짤막하게 소개해드립니다.
1. 채팅 앱에서 자신을 여군 간호장교라고 소개한 아만다 앰버는 그 후 메일을 통해 연애를 하자고 접근해온다.
2. 앰버는 자신의 신분증이나 군부대에서 찍은 사진을 종종 보내옴으로써 자신을 믿게 만든다.
3. 메일에서 '자기' '남편' 등 애칭으로 A씨를 부르며 전역한 뒤 한국에서 결혼하자고 구애한다. 어느 날 시리아 내전 지역에 파병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작전 중 사망할 때를 대비해 상속자 이름을 적었는데 '미래의 남편인 당신의 이름을 적어냈다”고 한다.
4. 앰버는 “작전 지역으로 급히 이동해야 하는데 돈을 찾을 적당한 곳이 없다"며 경비와 생활비 명목으로 10만~100만 원을 요구한다.
5. 앰버는 시리아에서 수색 작전을 하다 동굴에서 숨겨둔 무기와 함께 달러 뭉치를 발견했다며, 자기 몫인 500만 달러를 일단 런던 보안업체의 개인 금고로 빼돌리고 그것을 다시 주한미군 기지로 옮기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거액의 비용을 요구한다. A씨는 통관비와 항공수송비를 모아 앰버에게 보낸다.
6. A씨는 달러가 든 가방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1만 달러를 건넨 뒤에야 가방을 넘겨받는다. 가방에 든 금고에서 검은색 종이만 가득 나온다.


<<인천 공인중개사 전세 사기 사건>>
이중 전세 계약 사기입니다. 집주인에게서 월세 계약을 위임받은 공인중개사가 세입자에게 자신이 집주인이라고 속여 전세 계약을 하고, 그 돈으로 주인에게 월세를 지급한 사건입니다. 등기부등본에서 근저당권 설정 항목을 삭제한 뒤, 근저당권 없는 매물이라고 속여 계약하기도 했고요. 그 외에도 보증금 뻥튀기 등 다양한 사기 행각이 이어졌습니다.
아울러 '전세 사기'를 피하는 방법으로
① 집주인을 만나 신분증, 주소지, 생년월일 확인
② 전세 대금은 주인 명의의 계좌에 직접 입금
③ 등기부등본은 앱 등으로 직접 뽑아 확인

하라고 알려주는데, 아쉽게도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저도 전세 계약을 몇 번 해 보았지만 본인 확인부터가 쉽지 않거든요. 실제 있었던 범행들처럼 대역을 내세우면 알아낼 방법이 사실상 없으니까요. 부동산 계약은 거액이 오가는 만큼 보다 명확한 본인 인증 거래가 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개선되는게 바람직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기 행각보다 더 큰 문제는 47명 전세자금을 떼먹었는데 고작 선고받은게 7년 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사기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죠.

<<온라인 암표>>
요새 꽤나 많이 회자되는, 온라인에서 암표를 팔기 위해 매크로를 이용해 표를 구입하는 방식이 소개됩니다. 특정 프로그램을 돌리는건데 캡챠까지 자동 해제하는 기능이 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각 예매처가 사용하는 캡차 문자와 이미지 꾸러미를 미리 매크로 프로그램에 입력해놨다가, 특정 문자나 이미지가 뜨면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꾸러미에서 가장 유사한 것을 찾아 보안 절차를 해제하도록 하는 단순한 DB처리 방식인데, 캡챠가 이렇게 쉽게 뚫리는건지 몰랐네요.

<<검사 사칭 대출 사기>>
유부남 사기범이 검사를 사칭해서 거액을 빌리고 결혼 약속까지 하는 식의 뻔한 사기라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자기가 거액을 빌려주고, 결혼할 사람 신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건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되요. 전화 한 통화면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공무원 사칭 사기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기다. 이런 사기가 여전히 통한다는 건 그만큼 한국 사화가 투명하지 않다고 보는 국민이 많다는 증거다."라는 마지막 마무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PC방 패보기 도박 사기>
대담한 발상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들은 당시 우리나라 PC방 컴퓨터의 66퍼센트 정도에 악성코드를 설치해서 사기 도박을 벌였는데요, 그 방법은 범인들이 5억원에 PC방 관리 프로그램 업체를 인수했던 것입니다! 범인 중 한 명이 개발자 출신으로 게임 회사를 운영할 정도로 IT계통에 정통했던 덕분이겠지만, 밝혀진 것만 40억원 정도를 패보기 도박으로 벌어들였다니 꽤나 남는 장사였던 셈이네요.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2022/12/10

도대체 무엇이 동기? 와이더닛을 만끽할 수 있는 걸작 미스터리들

* 언제나처럼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국내 소개된 작품은 3편인데, 다 좋은 작품들입니다. '와이더닛'에 촛점이 맞춰졌다기 보다는, 서정적이면서도 깊이있는 문학적인 묘사에 촛점이 맞춰진게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요.


'와이더닛', 즉 'Why done it'은 미스터리의 세계에서는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밝히는게 핵심인 미스터리 작품을 의미합니다. 불가능 범죄 상황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서, 미스터리 작품의 장점을 모아 놓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와이더닛 걸작을 소개해 드립니다.

"토오미 사건, 사토 마코토는 왜 목을 절단했을까?" 요미사카 유지 : 국내 미출간
80개가 넘는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범 킬러 사토 마코토의 이야기를 작가 요미사카 유지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쓴 미스터리. 다른 범행은 모두 완벽하게 저질렀는데 토우미 사건에서만 예외적으로 목을 자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플한 와이더닛이면서도 저자 특유의 비틀림이 더해진 작품.

"동기" 요코야마 히데오
"64" 등 장편 소설이 영화화되고 있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단편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이 단편집에는 4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각자만의 '왜?"를 능숙한 인물과 심리 묘사로 그려내고 있다. 저자의 세계관이 가득 담긴 주옥과 같은 4편의 단편들을 즐겨 보시길.

"칼과 우산" 이부키 아몬 : 국내 미출간
에도 막부 말기에서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격동의 교토를 무대로, 실존인물이었던 에토 신페이와 가공의 무사를 탐정역으로 하여 전개하는 연작 역사 미스터리. 사형 집행 당일 왜 죄수가 살해되었는지를 쫓는 "감옥사의 살인", 도서 추리물이자 우수한 와이더닛물인 "벛꽃" 등의 걸작이 수록되어 있다. 시대 배경을 살린 두 주인공의 관계 변화에도 주목하면 좋을 단편집.

"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우
주인공이 방문한 이국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과 수수께끼를 밝혀나가는 5편의 단편이 이어지는 연작집. 걸작인 "사막을 달리는 뱃길"을 시작으로, 이국의 풍경과 문화를 서정적이면서도 환상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수록작 모두 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매력적인 수수께끼로 가득 찬 좋은 와이더닛물이기도 하다.

"회귀천 정사" 렌조 미키히코
다이쇼에서 쇼와 시대를 무대로, '꽃'을 모티브로 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작 모두 선명한 와이더닛물로 렌죠 미키히코의 요염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에 대한 평가도 높은, 미스터리의 틀에만 담기에는 아까운 불후의 명작.

2022/11/27

로그 메일 - 제프리 하우스홀드 / 이나경 : 별점 2.5점

로그 메일 - 6점 제프리 하우스홀드 지음, 이나경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고위층 명사가 유럽 어딘가의 독재자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 진짜로 죽이려고 했던건 아니고, 심심풀이로 벌인 게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은 모진 고문 뒤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이 여전히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불명예를 걱정한 그는 국가의 도움을 받지않고 홀로 도주하여, 과거 추억이 어려있던 도싯 지방에 은신처를 마련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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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직전인 1939년 출간된 전설적인 서스펜스 스릴러.
사실 저는 제목만 보고 최첨단 IT 소재물이라고 착각해 왔었습니다. Log mail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알고보니 Rogue Male 이더라고요! 외톨이 수컷, 일본식 표현으로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와 비슷하겠지요? 일종의 사냥감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끔은 흉폭함과 야성을 드러내는 주인공에게 딱 들어 맞는 제목입니다.

하여튼, 여러 미스터리 랭킹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작품으로, 국내에는 상당히 늦은 2019년에 출간되었는데 명성답게 서스펜스, 긴장감은 발군입니다.
외국에서 망신창이 상태로 이름모를 낚시꾼, 그리고 영국 배의 일등 항해사 베이너의 도움을 얻어 귀국한 뒤, 도싯 지방의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에 위치한 은신처로 이동하기 위해 여행하는 부부로부터 사이드카가 달린 자전거를 구입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고, 은신처 위치가 좁혀질 위기에 처하자 경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른 곳을 은신처처럼 만들어 위장하고, 결국 외국 비밀 요원 퀴브-스미스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좁은 공간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과정 모두 읽는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러가지 잘 안배된 설정들도 긴장감을 더해줍니다. 대표적인게 주인공이 고문을 받아 '눈에 상처'를 입었다는 설정입니다.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탓에 원래 계획이었던 시골 마을에 몰래 숨어드는게 불가능해져버리니까요. 선글라스로 가려도 누구나 눈에 이상이 있다는걸 눈치채버리고 말거든요.
비교적 초반에 비밀요원 중 한 명을 죽이는 바람에 영국 경찰들에게도 쫓기게 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주인공의 눈 이상이 전국에 알려졌을 뿐더러, 외국 정보요원들 뿐만 아니라 영국 경찰들도 주인공을 체포하려 해서 이중고를 겪게 됩니다.

주인공의 실력과 의지, 인내력만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조력자 - 특히 미녀 - 를 만나 도움을 얻는 헐리우드 스릴러스러운 전개는 전무합니다. 처음 탈출할 때 외국인 낚시꾼과 일등 항해사 베이너가 선선히 도와주는 장면같이 운에 의지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허용 범위 안쪽입니다. 낚시꾼은 독재 반대파일 수 있으며, 베이너의 경우는 주인공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라는 설정 덕에 도와주었을 거라는 암시를 주는 식으로 합리적인 설명도 덧붙여져 있고요.

쫓고 쫓기는 대결 구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치밀하고 끈기있는 추적으로 주인공의 은신처를 알아낸 퀴브-스미스 대령은 라이벌로 손색이 없습니다.
더 놀라왔던건 만만치 않았던 영국 경찰의 수사력 묘사였습니다. 도싯 시골 숲 속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있던 주인공에게 거의 한끝발 차이로 육박해 올 정도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맞부닥치는 바람에 정면에서 도주극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대방들의 추적을 통해 원래 사냥꾼이었던 주인공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상황을 잘 알려주는 묘사들도 몰입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몇가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독재자 암살 시도가 그러한데요, 주인공은 일관되게 단지 자기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퀴브 -스미스에 의해 은신처에 산채로 감금당한 뒤에 갑자기 약혼했던 연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는 동기가 튀어나옵니다. 이럴거라면 처음부터 당당히 죽일 의도가 있었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이 남의 나라 지도자를 쏘려고 했다가 잡혔는데, 이게 왜 외교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게임에 불과했다는 말을 외국 정보부에서 선선히 받아들여서 사고사로 죽이려 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주인공은 상당한 고위층으로 보이기에, 당연히 좋은 협박거리(?)로 사용될 수 있었으니까요.

전체적으로 흥미로운건 사실이지만, 경찰 추적이 근처에 이른 탓에 가짜 은신처를 만든 뒤 그 곳에 숨어있다가 도주한 것처럼 꾸미는 장면은 과했습니다. 도주 경로와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경찰 바로 옆에 숨는 묘기를 부릴 것 까지는 없었어요. 은신처를 감추려다가 본인이 위기에 처하는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잖아요. 또 그렇게 잘 숨을 수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은신처에서 숨어 있는게 더 나았을테고요.
게다가 이 시도는 퀴브 -스미스에 의해 숨겨두었던 사이드카가 드러나, 은신처 바로 근처까지 퀴브 -스미스가 찾아왔을 때의 행동과는 반대라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퀴브 -스미스가 근처 농장을 다 뒤져서 오솔길이 은신처라는걸 알아냈다고 추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앞서 경찰이 나타났을 때 처럼 다른 곳으로 도주했다고 위장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도주했어야 했습니다. 시간도 충분했었고요. 하지만 은신처에 틀어박혀 숨어있는 방법을 택했다가 산채로 감금당하고 말지요.

주인공을 은신처에 가둔 퀴브 - 스미스가 바로 그를 죽이지 않고 회유하는 척 연기를 하는 장면도 이상했습니다.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를 영 모르겠더라고요. 영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한 목적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별로 대단한 서류가 아니라는건 주인공과 퀴브 -스미스의 대화로 이미 드러날 정도이고, 주인공 서명 정도를 위조하는게 그리 어려울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영국 정부와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도 21세기의 한국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명예가 예상된다는데, 도대체 무슨 불명예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주인공이 "사실 내가 아는 영국인 중에 그가 가져온 망할 문서에 서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거부하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고집 때문에 거부할 것이다."며 서명을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도 퀴브-스미스와의 마지막 대결이 아쉬웠습니다. 총이 없어서 고대 로마의 노포와 비슷한 무기를 직접 만들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퀴브 스미스가 환기구를 막았던 자루를 빼다가 주인공이 쏜 화살에 맞고 죽는건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주인공에게 총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환기구로 고개를 내민다는건 영 석연치 않았습니다. 물론 직전에 주인공이 서명을 하겠다며 퀴브-스미스를 구워 삶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총이 없다는걸 퀴브-스미스가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내용을 보강하던가, 아니면 퀴브-스미스가 예상하지 못한 무기를 사용하는 식으로 끌고가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최소한 주인공과 자웅을 겨룬 라이벌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명성의 이유는 잘 알 수 있지만, 지금 시점의 한국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낡은 느낌도 없지 않아서 감점합니다.
이런 작품은 아무래도 영화로 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과거 2번이나 - 그 중 한 편은 흑백 고전 영화 시대의 거장 프리츠 랑 감독이고, 또 다른 한편은 명배우 피터 오툴 주연 - 영화화 되었더군요. 곧 베네딕트 컴버비치 주연으로 다시 영상화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 기대되네요.

2022/02/26

세계를 매혹한 돌 - 윤성원 : 별점 3점

세계를 매혹한 돌 - 6점
윤성원 지음/모요사

보석과 주얼리가 주제인 책인데, 이전에 읽었었던 "보석 천 개의 유혹"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석과 주얼리의 유행과 디자인 변천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행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건, 얼마전에 읽었던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보석과 주얼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또 보석과 주얼리는 가격 때문에 사회 지도층이 관련될 수 밖에 없어서, 실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왔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단순한 보석, 주얼리 유행 통사가 아닌, 약간 미시사적인 측면도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국가별로 달랐던 유행의 이유는 그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베를린 아이언은 철로 만들어진 주얼리로 프로이센의 대 나폴레옹 해방전쟁 당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기념품이었습니다. 귀부인들이 군자금에 보태기 위해 금 주얼리를 기부하고, 철로 만든 베를린 아이언 주얼리를 대신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일 민족의식 발현이라는 속 뜻과 무관하게, 적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1 제정 몰락 후 왕정복고기에 문학, 건축 등 전 분야에서 중세 고딕 문화가 유행했던 탓에 베를린 아이언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왕정복고기에는 고가의 큰 보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현실도 한 몫 했었고요. 

반면 영국에서는 19세기에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낀 주얼리가 유행했습니다. 상류층이 19세기의 놀라왔던 예술, 문학, 과학 기술의 진보를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와 동일시했던 덕분이었습니다.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갈 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유행이었겠지요. 아울러 이 때 로마, 이집트, 헬레니즘 및 에트루리아 유적 발굴로 고고학적 복고 양식도 함께 유행했다고 합니다.

특정 아이템의 변천사도 흥미로왔습니다. 여성의 목을 감싸는 초커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로 유행이 시작되었었습니다. 색깔도 빨간색이었고요. 허나 19세기에 접어들며 검은색 초커는 매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네의 "올랭피아" 등으로 잘 알 수 있고요. 이후 영국 알렉산드라 왕세자비가 갑상선 수술 흉터를 감추기 위해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여러 줄 세팅된 폭넓은 초커를 착용하기 시작한 뒤, 19세기 말 ~ 20세기 초 유럽 상류층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네요. 지금의 문신 (타투) 유행과도 조금 비슷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문신은 범죄 등 안 좋은 이미지의 대명사였는데 요새는 인스타그램 셀러브리티 등을 통해 일종의 패션 아이템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초커의 유행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으로도 잘 알 수 있는데, 클림트의 그림 속 초커 실물은 나치의 압류 이후 사라졌다니 이 역시 하나의 흥미로운 역사 속 일화로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입니다.

이러한 흥미로운 역사 일화는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인류 역사상 안정과 번영을 가장 길게 누렸고, 그 어느 때 보다 탐미적이었던 '벨에포크' 시대에서 유행을 선도했던 사교계의 중심지 막심 레스토랑을 무대로 화려함을 뽐냈던 3대 고급 매춘부인 라 벨 오테로, 리안 드 푸지, 에밀리엔 달랴숑의 승부 이야기처럼요. 이 일화와 함께 소개되었던 당시 쥬얼리는 도판만 보아도 그 화려함이 남다른 수준이라 과연 '벨에포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 사교계를 주도했던 에스터 가문의 안주인 캐럴라인과 신흥 부호 밴더빌트 가문의 안주인 알바 밴더빌트의 승부와 거래 역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 외에도 벨에포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오스트리아 엘리자베트 황후와 그녀의 쥬얼리, 영국 메리 왕비가 혼란기에 수집했던 당대 유럽 왕실의 명품 쥬얼리들 이야기도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와 함께 소개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상징과도 같은 '블라디미르 티아라'가 어떻게 영국 왕실까지 흘러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독일 공주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셋째 아들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던 마리아 파블로브나 '미첸' 블라디미르 대공작 부인이 러시아 혁명 당시 몸을 피하면서 진짜 값비싼 보물을 블라디미르 궁전 비밀 장소에 숨겨두었었는데, 그녀의 친구였던 영국인 예술품 딜러 앨버트 스토퍼드가 노동자로 변장해서 궁에 잠입한 뒤 보물을 꺼내어 런던으로 빼돌렸다는, 혁명과 모험이 모두 들어가있는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를 메리 여왕이 구입하여 지금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공식 석상에 착용하고 나오게 되었다는건 참 많은걸 느끼게 해 주고요. Winners takes it at all 인 거겠지요? 

1차대전 후, 아르누보와 벨에포크 복고풍 로코코는 모두 옛 것이 되었고, 미래지향적이고 기하학적인 모티브의 디자인의 유행은 야수파, 입체파 등의 미술사조, 디자인의 바우하우스의 등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네요. 부족해진 남성들 대신 여성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쥬얼리 디자인이 많아졌다는 것도 눈에 뜨이고요. 인도 마하라자들의 어마무시한 쥬얼리 컬렉션들, 1922년 투탕카멘 발굴을 통한 동서양이 융합된 디자인의 유행과 2차 대전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주얼리 유행 테마들 소개도 볼만했습니다.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이아몬드 제국 드비어스의 탄생과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로 기억되는 성공 공식에 대한 설명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 광고를 누가 어떻게 집행했는지를 다루는 글은 처음 읽어보기도 했고요.

전문적으로 쓰여진 글로 보기에는 저자의 개인 경험과 개인 생각에 대한 비중이 높으며, 미시사 서적으로 보기에는 쓰여진 내용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재미도 있으면서 여러가지 자료적인 가치도 높은 책인 덕분입니다. 도판만 보아도 값어치는 충분히 합니다. 보석, 주얼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7/02

1달러의 세계 경제 여행 - 다르시니 데이비드 / 박선령 : 별점 4점

1달러의 세계 경제 여행 - 8점
다르시니 데이비드 지음, 박선령 옮김/센시오

"미국에서 소비자가 월마트에서 라디오를 구매할 때 쓴 1달러"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투자를 위해 나이지리아로, 나이지리아에서 쌀 수입을 위해 인도로, 인도에서 석유 매입을 위해 이라크로, 이라크에서 무기 구입을 위해 러시아로, 러시아에서 안정적인 보관을 위해 독일로, 독일에서 투자를 위해 영국으로, 영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통해, 여러가지 경제 활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경제학, 경제사 책입니다.

국가별로 집중하고 있는 항목이 다른데 조금 자세하게 설명드리자면, 중국에서는 중국이 어떻게 세계의 공장으로 기능하며 엄청난 저가 공세를 통해 달러를 빨아들이는지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 은행이 모든 달러를 보유하고, 환율을 통제하는 시스템이라 가능했었던 성장 모델이었으며, 중국도 한계를 느끼고 해외 투자를 다각화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아프리카는 중국의 나이지리아 투자 예를 통해 신흥국에 중국 외 국가가 왜 투자를 하지 않는지, 투자에 왜 달러가 사용되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여러모로 리스크가 많아서 매력적인 투자처는 아니지만, 중국은 석유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라네요. 나이지리아를 자국의 시장으로 성장시킬 마음도 있고요. 이 과정에서 중국 해외 투자에 대한 우려섞인 시각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달러를 쓰는 이유는, 당연히 나이지리아도 달러가 필요한 탓입니다. 이 책에서는 "인도의 쌀"을 구입하기 위해서라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인도는 식민 지배 탓에 전통적인 경제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오히려 IT 업종 쪽으로 특화되어 발전하고 있다는게 특이해서 기억에 남네요. 또 인도 농업은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하지만, 인프라 부족과 국가간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에 채산성이 좋지 않아서 인도인의 상당수가 굶주리고 있는 현실도 와 닿았고요.

이라크에서는 국제 유가에 대한 설명이 주입니다. 유가가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러시아는 무기 비즈니스로 시작하지만, 그동안 궁금했었던, 경제 규모도 크고 자원도 많으며, 군사력도 강한 러시아가 왜 석유 수출과 달러에 의존하는 처지인지?를 알려줘서 좋았습니다. 답은 해외 부채가 많고, 식료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라네요. 이 과정에서 자국 통화를 달러로 사용할 때의 문제점도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이어지는 독일 부분에서는 유럽 연합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상적으로만 보였는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쉽게 알려주는게 핵심이지요. 이 책에 따르면 유로의 금리가 유럽 연합을 주도하는 독일 등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게 가장 큰 문제로, 2008년 금융 위기 때 금융 경색에 빠진 소국들이 자국 금리를 인하하여 경기 부양을 하는 정책을 펼 수 없었다는군요. 중앙 정부가 있었다면 재정 위기에 빠진 지방 정부를 지원해 주었겠지만, 유럽 연합은 별도 정부를 지원하지도 않았고요. 같은 이해관계에서 출발했다 해도, 구성원 간 힘의 역학 관계에 따라서 통합이 오히려 작고 약한 구성원을 굴복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합이 능사가 아니라는건, 통일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우리 나라도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겠지요.

영국 부분을 통해서는 세계 금융의 수도답게 주식, 펀드, 외환 및 파생상품과 옵션 등 다양한 투자, 금융 상품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비중이 큽니다. 그 이후 브렉시트 이야기가 이어지고요.

마지막 미국 편은 경제 성장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적당한 물가 인상, 그리고 그에 발 맞춘 임금 인상이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내년에 가격이 오를게 확실하다면, 올해 물건을 구입할테고, 이로 인해 경기가 활성화 된다는 논리인데 정말 확 와 닿았습니다. 미국 연준의 선호 목표는 매년 물가가 2% 상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르면 생산성은 1.5~2%, 임금은 3.5~4% 인상이 이상적이고요. 대부분 대기업에서 연봉 계약 시 물가 상승률에 1.5% 정도롤 더하는게 이런 근거에 따른 것이더군요. 경제 위기 이후 미국, 영국 등에서는 더 이상 생산성이 올라가고 있지 않다는 현실도 읽다보니 체감이 되었습니다. 경제 위기 뒤 많은 기업들이 위기 경계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 고용을 선호하고, 신규 투자를 하지 않아서 일자리는 늘었지만 질이 떨어진 탓인데,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유익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는건 큰 장점인데, 절반 이상의 내용을 미국과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달러를 중심으로 세계 경제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는 때문이었겠지만, 유로에 대한 비중만큼 위안화와 엔화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거에요. 세계 경제 비중으로 따지면 중국과 일본 비중이 훨씬 클 테니까요. 석유와 무기 외 다른 상품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도 마찬가지로 아쉬웠고요. 아울러 이런 류의 책이 가진 기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최신 내용도 살짝 부족하다 느껴졌습니다. 책이 발표된 시점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럼프 이후 불거진 무역 전쟁 등의 이야기가 없거든요. 엇보다도 최근 분위기 상으로는 가상 화폐 이야기나 SNS의 영향력 이야기가 빠져 있는건 문제점이라고 생각될 정도였고요. 아울러 미국과 달러가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잡고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추가가 필요했고, 금리와 경제의 상관관계도 지금보다 자세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점에 비하면 이 정도 단점은 수긍할 만 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세계 경제에 대해 알고 싶은 초보자들이 읽으면 딱 좋을, 그럴 책입니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참 좋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지금 비트 코인을 법정 화폐로 하겠다는 국가가 등장한 모양인데, 그 나라 중앙 은행은 타 국가와의 거래를 통해 어떻게든 비트코인을 모으려는 목적이겠지요. 그러나 이 책에서 배운 이론에 따르면 환율을 국가가 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 통화로 삼기에는 심히 부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비트코인의 단기 부양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막대한 손해를 보지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2020/02/24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5)

쿠미카의 미각 1 - 6점
아키히로 오노나카 지음, 유유리 옮김/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식사가 필요없는 절약 근성 노력가 외계인 쿠미카가 지구에서 일하면서 서서히 음식에 길들여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쿠미카가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감각을 느끼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전개는 일견 독특해 보이지만 반대로 뒤집었을 뿐, 이세계에서 이종족에게 이쪽 요리를 대접한다는 판타지와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새롭고 맛있는 요리를 먹고 감탄하며 놀라는 묘사도 동일하고요. 이야기도 새로운 음식에 놀란다는 경험이 반복될 뿐입니다.

요리 관련 이야기보다는 한 푼이라도 아껴 모성에 돈을 보내야 하는 쿠미카의 설정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구입해서 요리를 하게 될 때의 감정 묘사나, 처음으로 여자 외계인들끼리 파자마 파티를 할 때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모습들은 아주 귀여웠거든요. 억지로 음식 이야기를 집어넣지 말고 이런 이야기로 그려나가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절박한 상황에서 열심히 일하며, 다행히 호흡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쿠미카에게 음식의 맛을 알게 해 그녀에게 불필요한 돈을 쓰게 만드는 치히로는 정말이지 사악한 악당이라 생각됩니다. 천벌 받을 놈 같으니라고.

[고화질] 마감의 미식가 - 6점
츠치야마 시게루/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작년에 유명을 달리한 만화가 츠치야마 시게루의 단권 완결 일상계 음식 만화입니다. 마감과 작가들과의 교섭, 접대에 시달리는 편집자 시노하라 카오루 (38)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그날 그날을 마감하기 위해 먹는 요리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과 구성을 보면 "고독한 미식가" 시리즈의 인기에 편승한 기획물로 보이네요.

그래도 이 작품만의 특징도 확실합니다. 주인공이 편집 업무를 하면서 만나는 작가들과의 에피소드가 많은데, 그러한 만남을 어떻게든 음식과 이어가며 드라마를 만드는 노력이 돋보이거든요. 약간이나마 기승전결이 있다는 점에서는 "고독한 미식가" 보다는 나은 측면이 있어요. 츠치야마 시게루의 연륜이 돋보이는 그림도 나쁘지 않고요.

등장하는 음식들은, 초반에는 주로 그날 자기 전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들입니다. 말 그대로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우리말로는 '야식'에 가까운 음식들로 모두 간편식에 가깝죠. 컵우동과 집에서 남은 카레를 섞어 만드는 카레 우동, 길거리 포장마차 라면, 편의점 오뎅 등이 그러하죠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기 전이 아니라 그날 업무를 마감한 뒤 먹는 음식으로 바뀝니다. 아마 간단한 야식만으로는 이야기를 끌고나가기 힘들었던 탓이겠지요. 그래서 제대로 된 식당에서 제대로 된 음식들을 먹게 됩니다. 선술집이나 규동집 등 좀 대충 먹는 음식도 있지만 중화요리집의 교자와 라멘이라던가 기리탄포 나베, 굴 나베 등 갖춰진 음식도 많아요.

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후속권이 이어지지는 않은게 아쉬울 뿐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주문 배달의 왕자님 1 - 6점
타카세 시호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배달 음식'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배달 음식과는 다릅니다. 주로 일본 각 지역 유명 맛집 대표 요리를 배달용으로 가공한 것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소재도 독특하지만 주인공인 이이다 역시 범상치 않습니다. 오타쿠 엔지니어로 사교성이 부족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으로 묘사되거든요. 배달음식으로 혼밥, 혼술을 즐기고 먹은걸 SNS에 '왕자님'이라는 닉네임으로 올리는게 유일한 취미고요. 그야말로 배달 음식과 딱 맞는 인물입니다.
야근이 잦고, 이런저런 독특한 인물들이 넘쳐나는 IT 업계의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소소하게 이이다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들도 좋았고요. 덕분에 극적인 드라마가 없더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이런게 오히려 현실적이겠죠. 평범한 회사원 인생에 뭐 그리 특별한 일이 있겠습니까.

등장하는 배달 음식들은 일본에 실존하는 음식들로, 상당히 흥미로운 음식들이 많습니다. 완성된 음식 외에도 재료 배달에 가까운 음식도 많은데, 이이다의 요리 솜씨가 제법 괜찮아서 항상 그럴듯한 요리들이 태어납니다. 완성된 음식들도 나름의 어레인지로 이런저런 변화를 선사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적당한 재미에 그림도 좋고, 음식과 요리들도 만족스럽습니다. 배달 요리도 한계가 있는 만큼, 적당한 시점에 완결을 내 준 것도 마음에 든 점이에요. 비슷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우리나라 특유의 '편의점 레시피'를 만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4)

2019/08/15

역향유괴 - 원샨 / 정세경 : 별점 1.5점

역향유괴 - 4점
원샨 지음, 정세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부호의 후손 즈덩런은 투자 은행 A&B의 IT 부서근무 중에 퀸타스 투자 계획에 관련된 기밀 자료가 납치(?)된 사건에 말려들었다. 투자 계획 컨설팅 팀원 중 한 명인 샤오루가 즈덩런에게 자료가 사라진 사실을 처음 알렸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유출되기를 꺼린 본부장 존은 팀원 모두와 즈덩런을 자료 몸값 지불일인 3일 뒤 까지 A&B 소유 아파트에 경찰과 함께 연금시켰다.
즈덩런은 사건에 샤오루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몇 가지 조사를 통해 이를 확신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적은 몸값에 주식 시장에서 한 몫 잡으려는 움직임도 없어서 범인의 목적이 무엇인지 혼란에 빠지는데...

시마다 소지 상을 수상한 중국 추리 소설입니다. 찬호께이의 작품들로 중국 추리 소설에 대한 기대가 커진 탓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A&B를 협박한 '기밀 문서(재무 자료)' 납치 사건은 즈덩런을 3일 동안 일종의 연락 두절된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는 진상, 반전은 좋습니다. 연락이 두절된 상태를 유괴된 걸로 위장하여 거액의 몸값을 받아내려는 계획이었지요. 즈덩런이 즈리 은행의 후예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별 의미없어 보였던 도입부의 '술 먹기 게임'의 벌칙 - 즈덩런을 의자에 묶어 놓은 것 - 때 찌은 사진을 이용하고, 중간에 즈덩런의 자는 모습을 찍은 걸 살아있다는 증거로 활용한다는 식으로 단서와 복선을 배치한 솜씨도 제법입니다.

기밀 문서의 몸값, 그리고 최종적으로 즈덩런의 몸값을 받아내기 위한 과정도 꽤나 합리적입니다. 먼저 백 명의 협력자들에게 인터넷 옥션에 콘플레이크 박스를 고가로 출품하게 하고, A&B가 이를 낙찰받는 방식으로 10만 달러를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콘플레이크 박스를 경찰이 A&B로 가져오게 만듭니다. 사실 박스 중 하나에는 즈덩런의 몸값인 5백만달러에 상당하는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었거든요. 다이아몬드는 박스 속 알람 시계가 울리는 혼란 와중에 챙기고요. 박스를 범인이 의도한대로 쌓아놓게 만드는 디테일, 백명 단위가 필요했던 협력자들 모집을 일종의 폰지 사기 방식으로 끌어모으고 다이아몬드도 폰지 사기 형태로 벌어들인 현금에 대응하여 기존 투자자에게 돌려주어 증거를 인멸한다는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 출신답게 시각적인 볼거리가 연상되는 장면도 많아서 즐겁습니다. 콘플레이크 박스 회수 작전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일종의 플래쉬 몹 처럼 회수자와 똑같은 복장을 차려 입는다는 묘사가 대표적이죠. 전개도 복잡하지 않고 깔끔한 편이라 쉽게 읽힌다는 장점도 큽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몇몇 장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A&B가 투자 성공을 위해 사력을 타하는 퀸타스의 사업이 너무 유치해서 몰입하기 힘듭니다. 차후 그들이 주력으로 내세운건 흔하디 흔한 IoT 서비스일 뿐인 탓입니다. 이런 서비스는 이미 전세계 모든 제조사가 하고 있으니까요.
진짜 핵심이라는 '초크' 프로젝트의 K 포인트 역시 마찬가지에요. 가상 세계에서 얻은 포인트를 현실 세계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다는 개념부터가 별로 새롭지 않습니다. 가상 세계에서의 적극적인 행동 - 별점을 준다던가 - 에 따른 보상이라는 점을 차별화로 내세우지만 자동으로 쌓이는 카드, 통신사 서비스보다는 오히려 뒤떨어진 개념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서비스는 퀸타스와 같은 소프트웨어, 휴대폰 제조 업체가 진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가상화폐를 만들었어요! 1K포인트는 1달러에요! 라고 이야기해봤자 쓸모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시장에서 그걸 받아줘야 성립되는 사업 모델인데, 이런 신규 통화가 시장에 자리잡는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이런 이유로 퀸타스의 사업 문제가 금융 위기를 불러 올 수 있다는건 영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야기 전개도 어설픕니다. A&B 사건을 맡은 T시의 탕푸 경감이 A시 경찰이 맡은 즈덩런 유괴 납치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유력 인사의 아들이 납치된 사건에서 그 아들이 다니는 회사에 관련 정보가 알려지지 않는다? 각 도시별 관할이 다르다는 언급 정도로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또 A시 경찰이 A&B 본사 건물을 감시할 때, 이들을 탕푸 경감이 체포했더라면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을거라는 문제도 있고요.

샤오루의 완벽해 보이는 범행 계획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상합니다. A&B는 단돈 4만 8천 달러만 손해본 걸로 - 5만 2천 달러는 폰지 사기 형태로 이전 참여자로부터 선입금을 받은 덕분 - 사건에서 손을 뗍니다. 투자 계획과 신용의 문제라 이 정도 손해는 입다물겠다는 A&B의 입장은 이해됩니다. 그러나 즈덩런 유괴 사기 사건은 상황이 달라요. 무려 5백만불을 손해 본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기대하는건 무리입니다.
진상이 드러나면 퀸타스 투자 위험성이 함께 밝혀지고, 연구 개발 증권의 흐름이 막혀 금융위기가 올 수 있기 때문에 함구한다는 설명도 말이 안됩니다. A시 경찰한테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샤오루의 일종의 폰지 사기 역시 협력자와 투자자가 많이 필요하다는 큰 약점이 있습니다. 연결고리가 많으면 많을 수록 한, 두 군데에서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건 백명 단위를 넘어가니까요. 단적인 예로 다이아몬드를 투자자들에게 전해주는 방법이 그러합니다. 직접 편지를 배달하던가, 최소한 누군가를 시켜야 하는데 백 명 이상에게 이런 짓을 하면 들키지 않는게 더 이상하지요. 사내 정보를 이용해 사기를 치려면 이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없이 차라리 퀸타스 문서를 인터넷에 뿌리고 주식으로 차익을 얻는게 더 손쉬웠을 겁니다.

깊이있는 캐릭터 형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심리 묘사도 얄팍한 캐릭터들 모두 전반적으로 수준 이하입니다. 대부호의 후손이자 컴퓨터 천재라는 즈덩런이 개중 최악입니다. 만화적인 설정부터 별로이며 무엇보다도 하는게 없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IT 관련된 지식 수준도 일반인들도 알고 있는 정도에 그치고요. 찬호께이의 "망내인" 속 아녜와 비교하면 초등학생 이하로 보일 정도에요. 다른 캐릭터들 모두 평면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불과하며, 천재 미형 악역인 샤오루 역시 뚜껑을 열고보면 사내 정보를 이용해 사기치는 사기꾼일 뿐입니다. 마지막에 'A&B'에서 더 배울게 없다'는 범인 샤오루의 뻔뻔함과 당당함에는 어이가 없어집니다. 모자라 보이는 개그 캐릭터 폴 형사는 대체 왜 나왔나 싶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고 핵심 아이디어는 반짝반짝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설정들 모두 설득력이 결여됐다는게 문제죠. 영화화되었다고 소개되는데, 나중에 한국에 소개된다면 영화로 보는게 훨씬 나은 선택일 듯 합니다.

2019/01/18

서치 (2018) Searching - 아니쉬 차간티: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빗 킴은 사랑하는 아내 파멜라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로 고등학생인 딸 마고를 키워 왔다. 하지만 딸과의 거리감을 강하게 느끼던 어느 날 밤, 급작스럽게 걸려온 딸의 전화를 자느라 받지 못했다. 결국 다음날이 되어서야 딸의 실종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의 부탁으로 딸의 SNS 계정에 접속한 데이빗은 그녀가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2019년 첫 감상한 영화네요. 얼마전 국내에서 개봉해서 깜짝 흥행한 스릴러로 짤막한 소개글이 아주 흥미로와서 관심이 있었는데, 오랫만의 출장길 비행기에서 감상하였습니다.

딸이 실종된 후 아버지가 그녀를 찾아 나선다는 설정은 뻔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돋보이는 이유는 현대인이 많이 사용하는 컨텐츠와 솔루션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의 행동은 페이스 타임, 각종 뉴스 화면, SNS 등 여러가지 메신저, 검색창 등으로 드러나거든요. 이 과정에서 정말로 최신 IT 트렌드는 다 등장하고요. 심지어 넷카마까지 나올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하지만 단지 트렌드에 편승하는 수준으로 그치는건 아닙니다. 데이빗의 개인적인 수사는 이런 편집이 아니었다면 관객에게 쉽게 설명되기 어려웠을거에요. 딸의 계정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과정, 각종 검색어를 통한 검색, 그 외의 개인 정보에 의지한 수사 과정은 해당 컨텐츠와 솔루션 화면의 적절한 활용으로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정도로 명쾌하게 전달됩니다.
그 외의 각종 전개들도 어떻게 이렇게 이어갈 수 있었는지 감탄이 나옵니다. 편집에 2년이나 걸렸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대표적인게 자신의 동생 피터와 마고의 관계를 의심한 데이빗이 설치한 몰래 카메라로 동생과의 갈등을 전개하는 장면입니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 로즈마리 빅의 아들이 마고를 절벽에서 밀어버렸기 때문에, 로즈마라가 사건을 덮기 위해 여러가지 공작을 펼쳐 범인까지 날조했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경찰이 피해자 가족을 어떻게 속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도 상당히 높고요. 물론 로즈마리가 데이빗을 속였다는 진상이 드러나는 상황은 우연에 가깝고, 별다른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지만 스릴러로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부녀지간,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제가 딸 하나를 키우는 아빠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각종 컨텐츠와 솔루션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아이디어에 너무 집착한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해피엔딩 정도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풀어주는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딸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부녀의 관계가 좋아졌다는걸 더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범인으로 날조한 희생양이 자살 직전 동영상을 남겼다는 설정도 무리수이며, 피터 킴과의 SNS 대화가 중반 이후에 드러나는 등 헛점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왜 경찰이 처음부터 마고의 노트북을 가져가서 조사하지 않았는지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괜찮은 스릴러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감상하지 않으신 추리, 스릴러 애호가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7/10/28

엔드 오브 왓치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엔드 오브 왓치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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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컴비 홀리와 함께 사설업체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던 빌 호지스는 의사로부터 췌장암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 "메르세데스 킬러" 브래드 하츠필드는 재핏이라는 게임기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이동하여 조종하는 능력을 손에 넣었고, 이 능력을 이용하여 세상과 빌 호지스에게 복수하려 했다. 
재핏 게임기와 관련된 기묘한 자살 사건, 특히 제롬의 여동생 바브라에게 닥친 자실 미수 등을 접하며 빌 호지스는 사건의 이면에 브래디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브래디는 담당 의사 배비노의 몸을 빼앗아 도주해 버렸다.
빌 호지스는 브래디의 음모를 막기 위해 생명을 걸고 마지막 승부에 나서는데...

스티븐 킹빌 호지스 3부작(요새 말로 트릴로지)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에는 병원에서 신비한 능력을 얹은 1편의 살인마 "미스터 메르세데스" 브래디 하츠필드가 재등장하여 빌 호지스와 숙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결말은 "끝"을 의미하는 제목 그대로고요. 시리즈는 정말 확실하게 끝납니다.

재미만큼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납니다. 그런데 다른 시리즈와 확실한 다른건, 이 작품은 추리물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1편은 2015년 에드거상 수상작답게 분명 추리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정교하지는 못했지만요. 2편은 빌 호지스 시리즈라고 부르기 민망할 뿐 범죄물로는 괜찮았고요. 허나 이번 편은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장르도 "싸이킥 호러 스릴러"라고 해야 합니다. 브래드가 손에 넣은 특별한 능력 - 염력과 재핏 게임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침투하여 그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 - 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니까요.
물론 빌 호지스가 브래디의 능력을 알아내는 과정은 수사 비스무레한 절차를 거치기는 하지만, 브래디의 능력이 상식을 초월했다는 것만 문제지 그의 행방과 음모를 추적하는 과정은 너무 뻔하고 단순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몇가지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브레디의 담당 의사가 수상하다! 녀석을 쫓아가자! 그냥 이게 전부거든요.

그래도 브래디의 능력은 설득력 있게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 않은 것을 있음직하게 그려내는 스티븐 킹의 특기가 잘 발휘되어 있지요. 단지 능력에 대한 묘사 뿐 아니라, 재핏 게임기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침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의 계획도 볼거리입니다.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후 게임기를 확산시켜 자살을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준다는 음모인데, 희대의 IT 전문가이자 정신병자 살인마인 브래디 캐릭터에도 잘 어울리는 설득력 높은 설정이었어요.

또 여러모로 열세였던 빌 호지스가 브레디의 최면 침투를 이겨내고 반격을 가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앞부분에 사용되었던 커다란 벨소리라는 복선이 적절하게 사용된 것은 정말이지 기가 막힌 명장면입니다! 너무나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 엔딩이지만 저는 마음에 들었어요. 아,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냥 통증 때문에 침투에 걸리지 않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를 위한 기지국 복선 역시 적절했고요.

다만 브래드의 음모는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문제 투성이이기는 합니다. 왜 최면에 게임기를 반드시 써야 하는지가 가장 의문이에요. 그냥 화면을 들여다보고 탭하는 것으로 최면에 걸릴 수 있다면,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유도하는게 훨씬 빠르고 저렴한 방법이잖아요? 사이트 뿐 아니라 앱 형태로 뿌리면 갯수 제한이 있는 게임기보다 훨씬 넓게, 멀리 확산시킬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게임기라는 특정 조건이 꼭 필요한 것으로 설명되지도 못한 탓도 큰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아울러 브레디의 자살 전염, 전파 계획은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좀 허무합니다. 대량 학살을 저지르려 했던 살인마가 개개의 사람들 마음 속 빈틈을 파고들어 자살을 유도 한다는게 너무 소박해 보였던 탓입니다. 피해자들이 주변인들을 죽이게끔 하는 장치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피해자가 고작 서너명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요.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제롬의 비중이 등장이 적다는 것도 별로였어요. 이럴바에야 등장하지 않고 그냥 홀리와 빌 컴비의 활약만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특히 이번 편에서 빌 캐릭터가 너무나 멋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통도 참아가며, 심지어 마지막에 오줌까지 싸 가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친구와 선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지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하는 정말 멋진 올드 히어로거든요. 지금은 멸종해버린 서부영화 주인공인 셈으로, 죤 웨인이 늙어서 형사 역할을 맡는다면 이련 역할이 정말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여튼, 늙은 죤 웨인의 최후의 활약을 뒤로하고 젊고 잘생긴 신예가 마무리를 짓는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교하지도 않고, 추리물로써의 가치는 낮지만 스티븐 킹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걸 새삼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킬링타임용 책을 찾으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타임슬립이 무엇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덧붙이자면, 빌 호지스 캐릭터가 정말로 멋지게 그려진 만큼 그의 젊은 시절 활약을 그린 프리퀄이 나와 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7/10/01

미저리 - 스티븐 킹 / 조재형 : 별점 3점

미저리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황금가지

격조했습니다. 바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통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연휴도 되었으니 다시 달려 봐야겠네요.

이 책은 최근 개봉한 "IT(그것)"의 대흥행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스티븐 킹의 대장편입니다. 한창 원숙한 필력을 뽐내던 1980년대 중반(1987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스티븐 킹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1990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영화화되었는데, 주인공 캐시 베이츠의 명연기로 일세를 풍미하기도 했지요. 영화를 오래전에 감상한 덕에 그간 읽어볼 생각을 하지는 못했는데, 연휴를 맞아 밀린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집어들었습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스티븐 킹의 스타일입니다. 작가의 특기 중 특기인 궁지에 몰리고 위기에 빠진 주인공의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전편에 걸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가공할만한 악의 덩어리 애니도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봄직한 크리쳐들, 그리고 싸이코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고요. 아울러 폴과 경찰 등에게 벌어지는 잔혹한 폭력을 상세하게 그려낸 고어 묘사로 말초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도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긴장감을 자아내는 솜씨가 일품이라 몰입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집 한 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전부라 스케일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상황과 심리 묘사를 통해 긴장감을 자아내는 전개가 아주 빼어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애니의 집에 젊은 경찰이 찾아왔을 때 폴의 심리 묘사 ("아프리카!!!!")는 정말 최고로 치고 싶어요. 말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행동해야 하는 딜레마의 순간을 이렇게 잘 표현한 작품은 달리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과연 거장은 거장이에요.

또 전형적이라고 하였지만, 확실한 차별화 요소들도 재미를 더합니다. 미친 광팬 애니에게 사로잡혀 그녀만을 위한 새로운 소설을 써야 하는 신세가 된 소설가 폴에 대한 설정부터가 아주 독특해요. 광팬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는 지금에는 딱히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분명 아주 참신한 이야기였음이 분명합니다. 비슷한 설정의 영화 "더 팬"이 발표된 것이 1997년이니까요.
게다가 애니가 단순히 세헤라자드에게 이야기를 듣는 왕이 아니라, "미저리"의 광팬으로 상세한 내용을 꿰뚫고 있다는 것도 효과적으로 활용됩니다. 폴이 대충 쓴 도입부만 가지고 '이야기가 불공정하다'고 지적하여 폴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일종의 편집자 역할을 한다는건데 이 역시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어요. 애니가 이야기하는 '로켓맨이 비행기 좌석 밑 낙하산을 발견하는 것'을 폴이 철지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생각하여 비웃다가, 결국 '공정하다'는 말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전개로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도 아주 그럴듯했고요. 애니와 폴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끄집어낸 명장면이라 생각됩니다.
탄탄한 캐릭터 설정으로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작가적인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지만 결국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폴의 심리묘사는 그 중에서도 아주 돋보였어요. 애니가 그냥 미친게 아니라 나름의 루틴, 철학과 삶이 있다는 것으로 보다 공포심을 이끌어내는 묘사도 훌륭했고요.

또 몇가지 장치를 통해, 폴이 애니에게 휘둘리는 것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도 좋습니다. 첫 번째는 자동차 사고로 폴의 두 다리가 박살나다시피 한것, 두 번째는 이 상처 때문에 애니가 공급해주는 진통제 노브릴에 폴이 중독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여기에 애니가 지닌 흉폭한 과거와 때때로 엿보이는 잔인한 행동 묘사가 더해져, 폴은 완벽한 애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킹의 최고작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작위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에요. 폴이 애니를 죽이기 위해 식칼을 하나 숨겨놓은 것이 들통나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하필이면 바로 그날 들통난다는게 쉽게 와 닿지는 않았어요. 애니가 저지른 과거의 범죄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가는 상황이 아니었고요.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애니를 제압하는 장면 묘사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돌아온 미저리" 원고를 태우는 것으로 충격을 준 뒤 습격하는데, 우연이 결합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쉽게(?) 결판이 날 것이라면 앞서 있었던 생고생은 대체 뭔가 싶거든요. 타자기로 근력을 조금 붙인 뒤 습격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뭘 해도 죽을거, 고생이라도 좀 덜 하는게 낫지 싶은데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애니의 환영에 시달리며, 소설가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결말은 완전 사족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대표작 중 한편이라고 칭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임에도 읽는게 전혀 힘들지 않는 몰입감을 선사해 주니까요. 재미 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킹의 쫄깃한 심리 묘사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7/03/26

전자 출판에 대비하는 나의 자세

저는 전자 출판에 대해 환영하는 편입니다. 물론 아직 책이 보유한 가치는 유효합니다. 소유만으로도 즐겁고, 인쇄 기법과 다양한 종이, 재료를 활용하여 시인성과 가독성을 높이며 눈을 편안하게 해 주니까요. 헌책 판매 등 재화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하지만 공간과 무게를 차지하며, 시간이 지나면 낡고 훼손된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전자 출판은 책과는 반대로 휴대와 소유가 간편하고 시간의 흐름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검색과 메모 추가가 용이하며 독서와 관리에 있어 다양한 설정이 가능하다는 것도 매력적이죠.
단점도 책과는 정반대입니다. 우선 그림이 많은 책은 디자인과 구성이 종이 책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집니다. 디자인의 기준이 종이책에 있는 탓으로, 덕분에 팝업북같이 종이책의 특성을 살린 편집은 전혀 살릴 수 없습니다. 포맷도 ePub, PDF로 나뉘어져 있으며, DRM이 판매 서점별로 적용되어 개인별로 하나의 플랫폼을 쓰도록 강제하는 단점도 큽니다. 책은 어느 서점에서도 구입하더라도 하나의 책장에 꽂아 놓고 누구나 볼 수 있는데, 전자 출판된 서적은 서점별로 혼자서만 볼 수 있는 책장을 구성해야만 하니까요. 저만해도 소소하지만 그동안 알라딘에서 약 50~60권, 리디북스에서 그 절반 정도 되는 전자 출판물을 구입했는데, 이 두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하나의 뷰어에서 관리하고 읽는건 불가능합니다. 결국 하나의 플랫폼, 서비스(제 경우는 알라딘)로 갈 수 밖에 없어요. 자신만 읽을 수 있기에 대여나 공유, 증여, 재판매도 불가하고요. 이러한 문제는 관리의 불편함과 함께 소장에 대한 만족감 측면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아울러 플랫폼 종속은 플랫폼 존폐 여부에 따라 개인 소유 전자책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IT 진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낡은 포맷이 되어 읽기 힘들거나 읽기가 불가능해 질 수 있다는 또다른 문제를 야기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가격입니다. 제작원가, 유통 등 비용을 모두 감안하면 종이책 정가보다는 40% 이상 저렴해야 하지 않을까요? 앞서 말씀드렸듯 전자 출판물은 구입 후에 재화로서 일체의 기능을 할 수 없으니까요. 물론 전자책은 각종 이벤트가 종이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벤트를 할거면 정가를 싸게 내 놓으란 말이지요.

이렇듯 장, 단점이 서로 명확하여 아직 어느쪽에 더 힘이 실린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거의 전국민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시대이니 만큼, 전자책이 보다 확산되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디지털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들이 성장하면 할 수록 더욱더요. 개인적으로는 적절한 가격에 더해 독자가 구매한 컨텐츠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된다면 전자책 확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전자 출판된 컨텐츠 판매자들이 개인에게 ePub 형태로 판매하고, 개인 인증이 된 단말에서만 사용하는 정도로만 DRM 정책을 가져가는 식으로요. 이 경우에는 앞서 말씀드린 플랫폼 종속에서 벗어나 어디에서 구입한 것이건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가 결합된다면 거의 게임은 끝나지 않을까 싶네요.

반대로 저렴한 가격, 합리적인 관리 방법이 선행되지 않으면 당장 확산되기는 어려워 보이기도 합니다. 저만해도 현재 시점에서 모든 도서 구입을 전자 출판된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무리에요. 제가 원하는 책이 모두 전자 출판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책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는 시기가 왔고, 언젠가는 전자 출판으로 이동할 것은 분명하기에 나름 준비를 좀 해 보려고 합니다. 생각하고 있는 방식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번째는 종이책 선구매 후 개인적으로 데이터화(예)하는 것입니다. 제 것으로 통합 관리할 수 있는 현존 유일한 방법이죠. 완벽한 텍스트 형태 추출이 불가하다는 문제는 있지만 이 부분은 데이터화만 하면 언젠가는 되리라 생각합니다. 유일한 문제는 시간 정도입니다.

두번째는 개인적으로 '데이터화가 힘들고, 엄청난 분량이 예상되는 책들은 하나의 인터넷 서점 플랫폼을 정한 후(제 경우는 알라딘입니다) 이벤트와 쿠폰을 적극 활용하여 구매한다'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만화책이 되겠습니다.

일단 이렇게 책장의 디지털화를 꾀할 생각인데, 보다 미래에는 모든 책들이 전자 출판으로 동시 출간되고, 전자 출판물을 구입하면 어떠한 플랫폼과 서비스에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돈 주고 산 내 책이니까요!

2016/06/29

이 사람을 보라 - 마이클 무어콕 / 최용준 : 별점 2점

이 사람을 보라 - 4점
마이클 무어콕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어렸을 때부터 기묘한 관심병과 자기 비하로 점철된 찌질한 인생을 살아온 칼 글로거는, 서점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된 과학자가 타임머신을 만든 것을 알게 되었다. 시간 여행자 지원 제안은 거절했지만, 오랜 시절 알아온 연인같은 섹스 파트너 모니카의 변절 후 즉흥적으로 시간 여행에 자원하여 예수가 십자가 형을 받기 1년 전으로 향하는데...

걸작으로 소문난 작품이죠. 이런 저련 소개 자료를 통해 관심이 가던 차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우선 카톨릭 -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뜨입니다. 이건 직전에 읽었던 "양심의 문제"와 비슷합니다. 허나 "양심의 문제"가 카톨릭 세계관의 확고부동함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이 작품은 어떻게보면 신성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정 반대의 시각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과학적 설정과 크게 관계가 없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고요. 시간 여행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 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 등 과학적 설정은 작품의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거든요.

하지만 확실히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난 듯 싶습니다. 외계인이 인류를 창조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무리없이 받아들여지는 시대에서 '예수는 미래에서 시간여행을 한 관심병자 찌질이였다'는 내용이 충격적으로 다가올리 없지요. 작품이 발표된 1969년 당시였더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 때만큼 종교적 신념이 굳건하지도 않으며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왔기에 딱히 대단한 이야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칼 글로거가 예수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것도 쉽게 예측 가능하기에 의외성을 찾기도 힘들었고요.

아울러 후대 전해진 성경 그대로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건 오류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을 구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성경 그대로야 하기 때문에 참수되도록 방치하고, 수제자들은 이름을 보고 뽑고, 제자 중 유다를 시켜 자기 자신을 고발케 하는 등의 모습이 그러한데 이는 타임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성경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현대인의 상식이기도 하고요. 외려 그가 역사를 바꾸었더라면 더 큰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칼이 정상인은 아니며 이 행동을 통해 그가 신이 아니라 가짜 흉내내기에 불과했다는 주제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번지수가 좀 틀렸습니다.
그나마도 완벽하게 성서 그대로도 아니에요. 특히 가장 어려울 부활을 대충 넘어간 것은 아쉽습니다. 그의 시체에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사람들에 의해 시체가 도난당해 사라졌기에 생긴 소문이라고 설명되는데 많이 부족했습니다. 후대에 그렇게 받아들였을 과학적인 무언가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고전 걸작답게 의외성을 포기한다면 생각할거리가 많긴 합니다. 예수의 신성을 모욕했다기 보다는, 그도 그냥 인간이었을 것이다는 의견에 시간 여행을 접목한 새로운 견해로 볼 수 있으니까요. 칼의 전 연인 모니카의 다음과 같은 대사처럼요. "과학 의식이 훨씬 더 우월한데 그걸 제치고 종교 의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종교는 지식의 그럴싸한 대체물이야. 하지만 이제 그런 대체물이 더는 필요가 없어. 칼, 과학은 사고 체계와 윤리를 형성할 수 있는 굳건한 바탕을 제공해준다고. 과학은 행동의 결과를 보여주고.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자신들이 쉽사리 알 수 있어 이제 더는 천국에서 내려주는 당근이나 지옥에서 휘갈기는 채찍 따위는 필요 없단 말이야." 말 그대로 과학이 종교를 만든 것이나 다름 없다는 해석인데, 작품 설정과 연계해 보면 나름 새로운 맛이 느껴집니다. 과학이 세상을 지배했던 60년대의 분위기도 잘 알 수 있고요.

작가의 필력도 대단합니다. 특히 우울증과 자기 혐오에 사로잡힌 무능력한 관심병자 칼 글로거에 대한 장황한 서사와 묘사가 압도적이에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고급스러우면서도 천박한 양 극단을 오가는 묘사는 확실히 영국 작품이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시간 여행 후 칼 글로거가 예수로 거듭나는 과정과 칼 글로거의 일대기를 병행하여 전개하는데, 중간중간 심리 묘사와 대사를 적절히 끼워넣는 솜씨도 일품입니다.
요셉의 아들 예수는 정신지체아였고 마리아는 창녀와 다를바 없는 여자였는 식의 약간의 반전도 나쁘지 않았으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를 It's a lie, It's a lie, It's a lie로 풀어낸 마지막 장면은 최고였습니다. 현대의 랩으로 응용해도 라임이 딱딱 맞아 떨어지죠. "잇츠어라이, 잇츠어라이, 옐로이옐로이, 사박타니..."

결론내리자면 장, 단점이 명확한 작품입니다. 물론 단점의 가장 큰 요인은 늦게 소개된 탓이라 마냥 감점하기는 어렵습니다. "양심의 문제"보다 나은건 분명하고요. 허나 개인적으로는 "도라에몽"보다 나은 점을 모르겠더군요.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더 큰 고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SF 팬이시라면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읽어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2015/12/20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수십 년 전, 80년대 초반 고민 상담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빈집이 된 지 오래인 나미야 잡화점에 3인조 빈집털이들이 숨어들었다. 그런데 잡화점에 고민 상담을 위한 편지가 들어왔다. 상담에 응하게 된 3인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현재의 나미야 잡화점이 1980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일상계 판타지 연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5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로 알고 있는데, 읽어보니 역시나 재미있더군요. 3인조 어설픈 빈집털이범들이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숨어든 잡화점에서 고민 상담글을 받은 뒤, 그 공간이 30여 년 전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이야기부터 눈길을 사로잡아 마지막 이야기까지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읽어버렸습니다.

사실 특정 공간이 시공을 초월해 연결된다는 아이디어는 그동안 많이 있어 왔습니다. 편지만 시간을 넘어 전달된다는 설정도 영화 "시월애"와 똑같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5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시대 배경이 거의 모두 다르지만, 나미야 잡화점 고민 상담과 아동 복지시설 "환광원"을 중심으로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독특한 구성으로 차별화됩니다.

상담이 중심인 작품답게 상담 과정의 디테일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특히 상담이 일종의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건 나쁘지 않았어요. 의뢰인이 상담 결과에 따르던, 따르지 않던 모두 나름의 행복을 찾는다는 점도 와 닿았습니다. 상담은 참고일 뿐, 답은 결국 자신이 찾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니까요.

아울러 80년대 배경의 이야기가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잔올스타즈의 음악 등 세부 묘사는 아련하면서도 추억을 불러일으켰거든요.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3인조 얼치기 범죄자들이 1장, 2장, 5장에 걸쳐 주요 상담자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얄팍한 상담글들이라 감동이나 깊이를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상담이 성공하는 것도 애초에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가능했을 뿐이고요 — 일본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다, 가쓰로는 사고로 죽지만 명곡을 남긴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80년대에 시작되어 90년대 초에 끝난다 등 —. 이래서야 제대로 된 상담이라고 보기 어렵지요.

이에 반해 4장에서의 나미야 할아버지의 직접 상담은 따뜻한 애정과 진지한 고민이 묻어나 확실히 비교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4장의 이야기만큼은 별점 5점을 줘도 될 만큼 마음에 들었어요. 상담에 따르지 않고 부모를 떠난 고스케가 나미야 잡화점 부활의 날에 동네를 방문한 뒤 우연히 부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게 되고, 그 뒤 감사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는 울컥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이야기를 비틀즈와 영화 "Let It Be"와 엮어 풀어내는 솜씨 또한 너무나 탁월했습니다. 70~80년대 감성에 더해진 감정을 건드리는 디테일한 묘사는 흡사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 하더군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새롭지만은 않은 설정을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변주하고 새롭게 풀어낸 솜씨는 탁월하며,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잘 팔리는 작품은 역시 이유가 있네요. 가슴 따뜻해질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이야기별 간략한 요약 및 연결고리는 아래에 설명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제1장 답장은 우유 상자에

얼치기 빈집털이 3인조는 잠시 숨어지내기 위해 찾아든 빈집 "나미야 잡화점"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달토끼"라는 닉네임의 의뢰인의 상담글을 받은 뒤, 나미야 잡화점이 뒤틀린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에 응하게 됩니다.

의뢰인의 고민은 암에 걸린 연인을 간호할 것인가, 아니면 둘의 꿈이었던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노력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일본이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것(보이콧)을 알기에 연인 옆에 있기를 강조하는 3인조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의뢰인 달토끼는 꿈을 위해 노력하고 결과를 받아들인 뒤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결말 이어집니다. 

이야기의 시작으로는 충분히 흥미로웠습니다. 무엇보다 3인조의 답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결심을 굳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지만(올림픽 선수 선발 탈락과 연인의 죽음), 오히려 스스로 더욱 값진 것을 얻었기에 감사한다는 달토끼의 말이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제2장 한밤중에 하모니카를

3인조가 아닌 가수 지망생 가쓰로(생선 가게 예술가) 시점의 이야기. 그의 고민은 가수가 되고 싶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있는 겁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명제에 어울리는 이야기랄까요. 뭔가 세상에 남겼다면 그 자체가 의미있는 삶이었다는, 약간은 고전적 사고방식이 담긴 이야기였습니다. 본인이 뭔가를 남긴다는 자각이 있었을 것 같지 않고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이 더 클 것 같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긴 했습니다만, 뭐 이런 삶도 있는 것이겠죠.

참고로 작품 전체의 관계도로 보자면, 1장의 3인조가 환광원 출신인데 2장의 가쓰로가 작곡한 노래가 환광원 출신 유명 가수 세리가 부른 노래의 오리지널이고, 가쓰로는 환광원 화재 당시 숨을 거둡니다. 이러한 사실을 3인조는 환광원 출신이라 잘 알고 있었기에 음악을 듣기 전에는 현실적이고 신랄하게 답변하지만(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듣고 난 후에는 전력으로 상담에 응하지요.

제3장 시빅 자동차에서 아침까지

나미야 할아버지와 아들 다카유키의 이야기로 나미야 할아버지는 자신이 상담한 미혼모의 사고사를 접하고 낙담합니다. 그러나 죽기 직전 나미야 잡화점이 시공을 초월해서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상담한 사람들에게 감사 편지를 받는데, 그 중 미혼모가 낳은 아이의 편지를 통해 안식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인격이 묻어나는 좋은 이야기. 잔잔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 중 가장 시공 이동을 잘 활용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품 관계도로는 여기서 나미야 할아버지가 백지 편지에 대한 상담글을 쓰는데 이 백지 편지는 5장에서 3인조가 시험삼아 넣은 편지입니다. 미혼모가 낳은 아이는 환광원 출신으로 2장에 등장하는 유명가수 세리의 친구이자 현재는 그녀의 매니저고요.

제4장 묵도는 비틀스로

비틀즈 매니아 폴 레논 고스케가 야반도주하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이야기.

앞서 말씀드렸듯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입니다. 오사카 만박이 열리고 비틀즈가 해체한 1970년대를 무대로 하여 비틀즈 매니아인 주인공 고스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요.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배경 묘사도 좋지만 고스케(폴 레논)의 고민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답글이 정말로 심금을 울립니다. 저 역시 아이 하나를 키우는 가장이기에 더욱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온 가족이 같은 배에 타고 있기만 하면 언젠가 함께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다. 아무리 현실이 답답하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멋진 날이 되리라.' 맞아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 가족은 아무리 힘들더라도 한 배에 타고 계속 항해해 나가야죠.

관계도로 보자면, 고스케가 위탁된 보육시설은 당연히 환광원이며, 환광원 화재 사건때 5장의 주인공 하루미를 만나게 됩니다.

제5장 하늘 위에서 기도를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환광원 출신의 하루미가 성공하는 내용입니다. 그녀는 3인조의 예언으로 큰 돈을 벌게 되지요.

그런데 3인조의 성장, 백지에 대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답변 - 백지이기에 모든 것은 너 마음먹기에 달렸다 - 은 너무 뻔해서 좀 지루합니다.

그래도 하루미와 3인조가 결국 엮이고, 3인조가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를 받는 대단원까지 깔끔하게 이어지는건 괜찮더군요.

관계도로는 하루미는 1장의 상담자 시즈코의 이웃사촌이자 3인조 강도행각의 피해자입니다. 또 환광원의 설립자와 나미야 할아버지가 과거의 연인이었다는 연결고리가 밝혀지며, 3장에서 쓴 나미야 할아버지의 백지 편지 답변을 3인조가 받게 됩니다.

2015/04/14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 - 로버트 A. 하인라인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 이정 외 : 별점 2.5점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 - 6점
로버트 A. 하인라인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이정 외 옮김/오멜라스(웅진)

이전에 읽은 1권에 이어지는 2권. 마찬가지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수록작품은 모두 13편입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화성의 오디세이 A Martian Odyssey" - 스탠리 와인봄 Stanley G. Weinbaum
"헬렌 올로이 Helen O' Loy" - 레스터 델 레이 Lester del Rey
"길은 움직여야 한다 The Roads Must Roll" - 로버트 하인라인 Robert A. Heinlein
"소우주의 신 Microcosmic God" - 테오도어 스터전 Theodore Sturgeon
"보로고브들은 밈지했네 Mimsy Were the Borogoves" - 루이스 패짓 Lewis Padgett
"오로지 엄마만이 That Only a Mother" - 주디스 메릴 Judith Merril
"스캐너의 허무한 삶 Scanners Live in Vain" - 코드웨이너 스미스 Cordwainer Smith
"화성은 천국! Mars is Heaven!" - 레이 브래드버리 Ray Bradbury
"즐거운 인생 It's a Good Life" - 제롬 빅스비 Jerome Bixby
"즐거운 기온 Fondly Fahrenheit" - 앨프리드 베스터 Alfred Bester
"친절한 이들의 나라 The Country of the Kind" - 데이머너 나이트 Damon Knight
"앨저넌에게 꽃다발을 Flowers for Algernon" - 대니얼 키스 Daniel Keyes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A Rose for Ecclesiastes" - 로저 젤라즈니 Roger Zelazny

SF계의 어마무시한 거장, 큰형님들의 대표 걸작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1권과 같습니다. 국내 소개 기준으로는 1권보다 이름값은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은데, 로버트 하인라인, 레이 브래드버리, 로저 젤라즈니가 묵직하니 중심을 잡아줍니다.

그런데 SF 작가들의 투표로 선정된 리스트이기 때문일까요? "최고작"을 모았다기보다는 역사적 의미까지 고려하여 선정된 느낌이에요.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가 그러합니다. 좋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동명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프로스트와 베타"를 꼽고 싶거든요. 디테일한 과학적인 설정, 냉전시대의 세계관 등 현실이 잔뜩 투영된 그간의 공상과학 소설과는 다른 서정적이고도 종교적인 주제를 미려한 문체로 그려낸, 순문학에 가까운 새로운 SF의 "효시"라는 장르 역사적 의미가 커서 선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서도 "화성은 천국!"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죠.

위에서 예를 든 작품들을 비롯하여 제 All time best이기도 한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처럼 다른 곳에서 소개된 작품이 많다는 점, 지금 읽기에는 낡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은 단점인데 이건 걸작선이라는 특징 및 작품 발표 시기를 볼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읽기 힘들었는데, 원작 자체가 어렵게 쓰이기는 했겠지만 번역하면서 조금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쓰는 배려가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저런 감점요소가 제법 있는데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는 강력 추천드립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들만 아래에 짤막하게 리뷰 남깁니다.


"화성의 오딧세이"

열흘간 소식이 두절되었던 화성 탐사대원 자비스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마크 트웨인이 화성을 무대로 한 SF를 쓰면 이런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유머러스한 분위기, 허풍 가득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모험, 거기에 지구인의 탐욕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다는 결말에서의 풍자가 그야말로 마크 트웨인 스타일인 덕분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스타일만 모방한 파스티시가 아닙니다.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동안 친구가 된 타조 외계인 "트윌"에 대한 묘사 같은 설정의 디테일도 뛰어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길은 움직여야 한다"

모든 도로를 움직이게 만들어 나라 전체를 발전시켰지만, 기술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대형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한 총감독관 게인스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분위기는 하드보일드 범죄물 스타일인데 게인스의 활약이 별다른 게 없으며 전개도 뻔하고, 결말도 허무해서 전체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도로가 움직인다는 황당한 설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굉장합니다. 도로에 대한 세밀한 설정과 묘사에서 그야말로 거장의 힘이 한껏 느껴집니다. 이런 매력적인 설정을 잘 살리지 못한 이야기는 아쉽습니다만 이 설정 묘사 하나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소우주의 신"

천재 과학자를 이용해 먹는 은행가가 과학자에게 색다른 동력 전송기를 만들게 한 뒤, 그것을 이용해 국가를 협박하고 과학자를 죽이려 합니다. 다행히 과학자에게는 그가 만든 새로운 생명체 네오테릭스들이 있었고, 네오테릭스들이 더 뛰어난 발명을 해서 과학자를 구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이 가득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악덕 기업가는 물론 기이한 피조물까지 생생한 캐릭터 묘사 역시 아주 일품이고요. 흡입력도 대단해서 네오테릭스가 과학자가 요청한 "방어막"을 만든다는 결말까지 손을 떼기 힘들 정도 였습니다. 재미만 놓고 따지자면 1권의 "투기장"과 비교될 만큼 최고였어요. 제 별점은 5점입니다.

"오로지 엄마만이"

방사능으로 돌연변이들이 태어난다는 내용으로 냉전시대 핵공포가 만연했을 때 쓰여진 듯 합니다. 아이가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돌연변이인데, 엄마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반전은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스캐너의 허무한 삶"

우주(작중에서 "위와 밖") 여행 시 느끼는 거대한 고통을 잊고, 우주를 정복하기 위해 스캐너라는 전문 직업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몸의 감각을 없애고 "하버맨" 상태가 되어 우주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크랜치"라고 불리는 행위를 통해 잠깐이나마 감각을 회복할 수 있고요.
그리고 이들은 고통 없이 우주를 여행하는 방법을 알아낸 애덤 스톤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들 직업의 위대함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그러나 스캐너 중 한 명인 마텔이 인류를 위해 그를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내용은 굉장히 간단한데 스캐너, 크랜치 등 작중 나오는 관련 설정이 아주 상세하게,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텔의 활약이 이러한 설정 묘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빈약하며, 결말이 허무할 정도로 시시하고 간단한 해피엔딩이라는건 단점이지만 압도적인 설득력에는 점수를 줄 수밖에 없네요. "길은 움직여야 한다"와 비슷하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즐거운 인생"

조물주급의 초능력을 지닌 아이 앤서니를 중심으로 가족, 마을사람들이 마을 통째로 이세계를 방황한다는 내용의 작품.

SF로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이 "아이"로 태어난다면 그것은 재앙일 것이라는 주제를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앤서니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전전긍긍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신 앞에 비굴한 현대인을 풍자한 것으로 보이고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서운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즐거운 기온"

인간에 가까운 다기능 안드로이드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추리물 스타일로 풀어낸 작품. 일종의 서술 트릭이 도입된 점도 특징입니다.

하지만 그냥 추리극 형태로만 풀어내는 게 깔끔했을 것 같아요. 밴덜루어와 안드로이드에게 서로를 구분할 수 없는 일종의 "투영" 현상이 일어났다는건 이야기에 넣을 필요가 없었거든요.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가 혼란스러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좀 더 짧고 깔끔하게 전개했더라면 보기 드문 SF 추리물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5/04/06

사상학 탐정 1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사상학 탐정 1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을 보는 특수한 능력이 있는 쓰루야 슌이치로가 탐정 사무소를 개업한 날, 사야카라는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청년 IT 재벌 아키라와 약혼했지만, 약혼자가 급작스럽게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한 후 자신의 주변에 떠도는 죽음에 이유가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아무런 사상도 보지 못한 쓰루야는 의뢰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가 약혼자의 본가인 이리야가에 함께 살게 된 후, 기이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고 그녀는 다시 쓰루야를 찾았다. 쓰루야는 그녀를 뒤덮은 섬뜩한 사상을 확인한 뒤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리야가를 방문했다. 그러나 기이한 사건은 멈추지 않고 아키라의 이복형 나쓰키부터 한 명씩, 차례대로 가족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을 볼 수 있다는 특수 능력의 소유자가 주인공으로, 주인공 쓰루야 슌이치로는 탐정이라는 직함을 걸고 있지만 별다른 추리력은 없습니다. 자신의 특수 능력과 일본 최고의 무녀인 할머니 아이젠에게서 배운 지식과 경험에 의존할 뿐입니다. 사건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이 아니라 ‘주술’의 영역에서 벌어지고요. 이런 점에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일본식 퇴마 판타지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만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뻔한 퇴마 배틀물은 아닙니다. 쓰루야의 능력은 사상을 보는게 전부로 다른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백귀야행"의 리쓰가 탐정 사무소를 열었다고 해도 될 정도에요. 쓰루야와 리쓰는 능력치도 거의 비슷하니까요. 실제 스물스물 움직이는 저주의 실체를 보고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거든요. 주술, 저주가 정말 일상 속에 있을 법한 것으로 그럴듯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 역시 "백귀야행"스럽습니다. 이렇게 설득력 넘치는 괴이 묘사는 민속 탐정 시리즈를 써왔던 미쓰다 신조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 특유의, "백귀야행"과는 다른 섬뜩한 묘사들도 볼거리이고요.

이러한 설득력 넘치며 섬뜩한 분위기에 더해 작가의 명성과 "탐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추리적인 부분도 나름 볼 만 합니다. 비과학적인 영역이기는 하지만, 주술과 저주에 적용된 일종의 법칙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덕분입니다. 부제 그대로 '13'에 관련된 법칙인데, 정교하게 짜인 복선과 함께 쓰루야의 메모를 중심으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여 두뇌 싸움을 벌이게 만드는 솜씨가 돋보입니다. 이리야가 전 당주 및 가족들의 취미와 엮은 자잘한 설정들도 흥미로웠고요.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점은 굉장히 빠르게 전개되는 현대적인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지루할 틈 없이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면서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고작 두 권 읽은 게 전부지만, 어렵고 복잡한 일본 민속 관련 지식을 고풍스럽고 무겁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탓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읽고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흡사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젊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 운운하며 누벨바그 운동(장 뤽 고다르로 대표되는)이 일어났을 때, 거장 르네 끌레망이 정말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태양은 가득히"를 발표한 일화가 떠올랐어요.

이렇듯 독특함과 재미를 모두 갖춘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13'에 관련된 법칙이 재미는 있지만, 합리적인 구조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설정에 맞춰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숫자만 들어가면 무엇이든 되기 때문에 단서들의 비약이 심하고, 억지스러운 전개도 제법 있고요. 작중에서도 언급되듯 나이 든 사람들만, 그것도 일본이라는 환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도 쉽게 공감하기 어렵게 만드는 점입니다. 사야카가 쓰루야에게 단서를 전해주려 애쓴다는 설정도 쓰루야의 무능함만 돋보이며, 혹 쓰루야가 정말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했을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단점입니다.

아울러 동기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작품에서처럼 사야카가 모든 저주의 흑막이라면, 그녀는 아키라 재산의 60%로 왜 만족하지 못했을까요? 설령 아키라의 배다른 형제를 모두 죽였다 치더라도 60%가 80%가 될 뿐 - 20%는 죽이고 싶지 않았던 아키라의 어머니 도시코의 몫이기에 - , 예를 들어 유산이 한 40억이라고 한다면 24억이 32억이된다... 본인까지 저주를 걸 정도로 의미가 있는 금액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방법적으로 무리수가 너무 많습니다. 저 같으면 그냥 형제들에게 저주를 걸고 어디 외국이라도 가 있었을겁니다. 사인이야 어차피 급성 심부전이니 수상하기는 해도, 증거는 없었을테니까요. 구태여 같이 저주에 걸려가며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과 동거할 이유는 없습니다.
쓰루야에게 사건을 의뢰한 이유도 사건이 언젠가 쓰루야나 아이젠 귀에 들어갈까봐 의뢰했다는 것인데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설령 귀에 들어갔다손 치더라도, 주인공이나 주인공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이리야 가문의 설정, 판에 박은 의붓형제 캐릭터인 나쓰키, 하루미 등은 고민이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자 미쓰다 시존의 새로운 모습을 알리는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무엇보다도 몰입해서 읽는, 재미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에스프레소라면 달달한 카푸치노같은, 아주 무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은 작품이니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 궁금하신 입문자분들께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