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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5

이상한 책들의 도서관 - 에드워드 브룩-히칭 / 최세희 : 별점 2점

이상한 책들의 도서관 - 4점
에드워드 브룩-히칭 지음, 최세희 옮김/갈라파고스

저자가 소장하고 있는 희귀하고 기묘한 책들을 소개하는 책. 사람의 실제 피부로 만들어진 책같이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책들이 가득합니다. 도판이 특히 빼어난 편으로 눈도 즐겁고,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중세와 근대 서양 서적이 중심을 이루지만, 중국의 갑골문과 잉카의 매듭책 키푸 같은 다른 문화권에서 유래된 책들도 포함되어 흥미를 더합니다. 후반부에 소개된 초소형 책들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고요.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책과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림책 "가장무도회"는 책 속의 암호를 풀면 보석 장식의 황금 산토끼가 묻힌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출간 후 3년 뒤 정답자가 나왔고, 황금 산토끼 역시 정말 존재했다는게 밝혀졌지요. 게다가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니, 아주 환상적인 판매 전략이었다 생각됩니다.
미국 저널리스트 마이크 맥그레이디가 저급하고 선정적인 소설의 인기를 풍자하기 위해 기획한 로맨틱 코미디 소설 "낯선 남자는 나체로 왔다"는 끝없이 섹스 장면만 이어지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출판 사기' 섹션은 더욱 흥미로왔습니다. 하워드 휴즈의 자서전을 가짜로 써 수십만 달러 계약을 따냈던 클리퍼드 어빙의 사기 사건이나, 히틀러의 일기를 무려 60권이나 날조한 독일의 콘라드 쿠야우 사건처럼 단순한 출판을 넘어 범죄적 성격을 띤 사례들을 소개해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도 눈에 뜨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책의 구성과 흐름에서 두서가 없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소장하거나 조사한 기묘한 책들을 나름대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책의 형태나 제작 방식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습니다.
또 대부분 흥미 위주로 소개하고 있어서 역사적 맥락이나 책의 의미를 깊이 다루는 내용도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피부로 만들어진 책과 같은 사례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단순히 기묘한 소재로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분량도 과도하게 할애되어 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희귀한 책을 화려한 도판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개하지만, 두서없는 구성과 얕은 깊이로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도 비슷한 정보는 쉽게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2023/06/17

설원의 독수리 - 마이클 모퍼고 / 보탬 : 별점 2점

설원의 독수리 - 4점
마이클 모퍼고 지음, 마이클 포맨 그림, 보탬 옮김/내인생의책

바니는 독일군 폭격으로 집을 잃고 어머니와 함께 이모가 살고 있는 콘월로 향하던 중, 기차 안에서 공습 감시원으로 활약했던 1차대전 참전 용사 아저씨를 만났다. 
기차가 독일군 공격을 피해 터널 안으로 숨어든 사이, 아저씨는 겁에 질린 바니를 달래기 위해 1차대전 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저씨의 친구 빌리는 전쟁 영웅으로 빅토리아 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빌리가 마지막 전투에서 살려주었던 독일 병사가 아돌프 히틀러였다! 빌리는 자신이 구해주었던 고아 소녀 크리스틴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보냈으나, 나중에 자기가 히틀러를 살려주었다는걸 알고 죄책감때문에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고 실패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저씨가 이야기를 마친 뒤, 어두운 터널 안에서 모자는 잠이 들었다. 그런데 기차가 다시 출발하고 난 뒤, 아저씨는 사라졌다. 기차 차장에게 물어보았으나 아저씨는 처음부터 없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니는 나중에 이모로부터 아저씨가 빌리였고, 그는 멀베리 공습 때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 영웅 헨리 텐디의, '아돌프 히틀러를 살려준 병사'라는 유명한 실화를 각색해서 만든 작품. "나와 마빈 가든"처럼 아이의 토론 수업 교재입니다. 
전쟁에 대한 참상, 그리고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릴 수 있는지와 한 사람이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알려줍니다. 

나쁘지는 않지만, 아동용 소설이라 어른이 읽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했습니다. 인간 드라마로 보기에는 빌리의 고뇌 등이 제대로 그려지지 못했고. 드라마 부분도 약한 탓입니다. 빌리가 히틀러를 살려주었다는 과거는 주변과의 갈등을 일으키지 못해서 극적 긴장감도 부족하고요. 전쟁물로는 디테일이 떨어지며, 암살물로는 정교함과 치밀함이 턱도 없습니다. 아무리 전 전쟁 영웅이라도, 히틀러라는 인물 암살을 이렇게 쉽게 시도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빌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결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편의적인 발상이었어요. 이미 죽었다면, 아마 암살 시도가 실패했을 때 죽었겠죠. 폭격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1/12/12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 별점 2.5점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 -상 - 6점
이미지프레임 편집부 엮음/길찾기

기동전사 건담의 시작을 알린 1년 전쟁을 실재 있었다고 가정하고 진지하게 접근한 책입니다. 전사라면 전사겠지만, 기본적으로는 2차 창작물인 셈입니다. 예전에도 살짝 관심은 있었는데, "섬광의 하사웨이"를 보고 내친김에 찾아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이미 절판 상태라 상, 하권 중 상권만 구할 수 있었기에, 상권만 읽어보고 리뷰를 남깁니다.

특징이라면 1년 전쟁에 관련된 설정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전쟁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상세한 전투 관련 분석이 돋보입니다. 전쟁 발발 정의 지구권과 콜로니 배치에서 시작되어, 전투의 추이라는 제목으로 일주일 전쟁, 루움 전투, 공국군 지구 침공 작전, 오데사 작전 설명으로 이어지는 첫 챕터부터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연방군과 지온군 함대 구성 및 이동 방향, 전투의 향방 등을 여러 전쟁사 책들과 비슷한 도판들을 이용하여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 전투에 대한 해석 뿐 아니라 콜로니와 미노프스키 물리학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같은 기본 설정에 대한 상세 설명은 물론 지온 공국 성립의 역사, 전쟁 시작 후 오데사 작전 까지의 이야기 및 모빌 슈츠와 각종 병기들, 지구 연방군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MS는 물론이고 전함과 육전용 장비들, 항공기 소개도 충실하고요. 이 중에서는 아울러 스페이스노이드의 주장, 지온 공국이 전쟁에 돌입하기까지의 공국과 연방군 정세 등 1년 전쟁 당시의 사회 환경과 이데올로기, 정세에 대한 분석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예컨데 2차 대전을 다룬 책이라고 친다면, 독일이 히틀러 집권 후 재무장을 하여 폴란드를 침공하고, 결국 프랑스까지 점령하는 과정을 지휘관들과 주요 전선에서 펼쳐진 작전들, 그리고 주요 전술과 주력 병기와 함께 소개하는 것은 물론 나치즘과 히틀러의 집권 과정, 영국과 프랑스 등 주변 주요 강대국의 정세를 이벤트별로 원인과 결과를 잘 알 수 있게 설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잘 알려진 설정이 대부분이라 새로운건 별로 없습니다. 이 책 출간 이후, 1년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했던 "디 오리진"이 출간된 탓도 컸고요. 그래도 진지한 역사서처럼 쓰여진 결과물을 보니 색다른 느낌도 들고,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어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 발표되었던 기획임을 짐작케하는, 시대착오적인 부분은 눈에 거슬렸습니다. 대표적인게 디오라마로 이루어진 화보였습니다. 디오라마 자체가 나쁜건 아니지만 촬영과 편집 모두 책의 컨셉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거든요. 밀리터리 풍의 화보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고요. 이왕 이렇게 책을 만들 거였다면, 장난감같은 프라모델 사진이 아니라 더 진짜같은 사진과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책의 내용도 오래전 발표된 책 답게 이른바 '정사'에 포함된 내용만 담겨 있어서 MS IGLOO라던가, The Origin같이 후대 추가된 설정과 이야기가 없다는 것도 불만스럽습니다. 그 탓에 볼륨도 가격에 비하면 영 시원치 않은 편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도판과 편집만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재간하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아틀라스 전차, 항공전사와 "2차대전 독일의 비밀무기"를 합치는 식으로요. 지금의 결과물은 재미는 있지만 딱히 하 권을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2021/05/28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 - 크리스터 요르젠센 / 오태경 : 별점 2.5점

나는 탁상 위의 전략은 믿지 않는다 - 6점
크리스터 요르젠센 지음, 오태경 옮김/플래닛미디어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의 평전... 이라고 생각하고 오래전에 구입했던 책입니다. 왠지 손이 가지 않아 몇 년 동안 묵혀두었다가 읽어 보았는데, '평전'이 아니어서 놀랐습니다. 출생과 죽음까지, 일대기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책의 2/3 이상은 롬멜이 지휘했던 주요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서 (전사)인 셈이지요. 

거의 모든 주요 전투에서 롬멜의 전략, 전술, 핵심 포인트와 승리, 패배 원인을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게 장점입니다. 이전 "아틀라스 전차전" 등과는 다르게 전투 과정을 생동감넘치게, 일종의 대하 사극처럼 묘사하고 있어서 이해하기도 쉬웠고요. 이를 뒷받침해주는 도판도 아주 좋습니다. 전투 상황, 투입 부대와 경로를 상세히 기입한 지도를 다수 수록한게 특히 마음에 듭니다. 실감 가득한 여러 스냅 사진들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롬멜과 해당 전선에서의 사진만 골라서 수록해 놓았는데, 책의 내용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롬멜이 토브룩을 확보하기까지의 빛나는 승리와 결국 아프리카를 포기하기까지의 아프리카 전선 이야기가 굉장히 상세한데, 덕분에 대략적인 당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던게 개인적으로는 수확이었습니다. 적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장비 등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전차대는 한 곳에 밀집대형으로 집중시키고, 사전에 슈튜카를 활용한 폭격을 활용하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전술과 속도전, 그리고 88미리 대공포를 활용하는 발상의 전환으로 극복하는 모습은 여러모로 인상적이더군요. 말 그대로 '사막의 여우' 다왔달까요.

그리고 롬멜에 대해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롬멜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했고, 본인의 능력도 컸지만 히틀러 덕분에 승승장구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심지어 아프리카에서 큰 실망을 맛보고도, 복귀 후 히틀러와 만난 뒤 다시 충성심을 가졌다니 놀랍기만 할 뿐이에요. 히틀러가 확실히 뭔가 카리스마같은게 있긴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롬멜 만세! 시각으로 쓰여진건 단점입니다. 아프리카에서의 패퇴를 극복할 수 없었던 장비 부족이라면서, 상대적으로 몽고메리 장군의 승리를 연합군의 막대한 물량 덕분이라고 폄하하는 듯한 논조를 보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롬멜이 부족한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지?가 설명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어요. 트리폴리에 항구 토브룩까지 확보한 상황이었다면, 해상에서의 보급 문제는 변명에 가까와 보였고, 정말 보급품이 부족하니 최대한 빨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겠다!가 목표였다면, 그 전략이 실패했을 때의 대책도 있어야 했어요. 엘 알라메인에서 패한 뒤 그냥 쭉 밀려서 아프리카를 내 주고 만 건 너무 허무했습니다. 

아울러 북아프리카 전선 최후의 순간, 새로 부임된 장군과의 알력으로 전선에 최신예 티거 탱크를 집중시키지 못했던 것, 마지막까지 총통의 명령을 받들어서 귀중한 병력을 낭비했던 것은 엄연히 롬멜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는 '원수' 였으니까요. 그러나 이 책에서는 히틀러에게 책임을 다 뒤집어 씌우고 있더군요. 공정한 시각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전선을 떠난 뒤, 대서양 방벽 건설을 진두지휘했다는 부분도 왜곡이 많아 보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롬멜만이 노르망디가 연합군 상륙 장소일 거라고 예측해서 최대한 방비를 강화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롬멜도 상륙 장소를 칼레로 예상했다는 기록이 더 많으니까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륙 작전은 연합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으니, 실패한 작전 지휘관임은 명백하고요.

또 앞서 전투 상황을 상세히 다룬 지도가 좋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를 포괄하는 해당 지역의 큰 지도도 함께 수록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거 같아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전투가 벌어진 장소가 계속 바뀌는데, 이를 큰 흐름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큰 지도가 필요했거든요. 또 지도가 대체로 작다는 것도 조금 불만스럽네요. "아틀라스 전차전"이나 "세계 항공전사"가 전투 관련 지도에 대해서는 압도적으로 빼어납니다. 비교도 안될 정도로요.

롬멜과 2차대전에서의 독일군 전차부대 전략과 전투, 아프리카 전선에 대해 이 만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은 드물다는 장점은 크지만, 이렇게 문제도 없지 않기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1/15

외국어 전파담 - 로버트 파우저 / 혜화 1117 : 별점 2.5점

외국어 전파담 - 6점
로버트 파우저 지음/혜화1117

외국어 전파 과정을 통해 시대별로 당대 패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알려주는 사회사,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책 속 저자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모어 외의 외국어를 개인이 배우는 이유는 '권력과 자본'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주장을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 잘 설명해 줍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층은 모두 모어 외 외국어로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귀족과 상인 세력이 성장하고, 제국이 붕괴되고 도시 국가가 융성하면서 고대 그리스어가 유행하게 됩니다. 유명한 메디치 가문이 고대 그리스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걸 지원하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문헌을 모은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카톨릭 교회 견제를 위해 고대 그리스 문화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 과정에서 금속 활자로 독일어 성경이 출간되며 라틴어 영향력은 더 줄어들었고,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대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 됨으로써, 영어와 프랑스어가 외국어에서도 패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의 영향하에 프랑스어도 밀려나 버렸습니다. 영어의 세계화는 외교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영어로 통일된 것으로 대표됩니다. 한국과 일본은 당대 동아한시아 최강국 중국 영향권하에서, 모어와는 다른 한자어를 지배계층이 열심히 배웠다는 측면에서는 이와 다르지 않겠지요.

이러한 유럽 중심의 흐름과 함께, 제국주의와 식민지 하에서 유럽 국가의 언어가 제 3세계로 어떻게 뻗어나갔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권력과 자본에 의한 외국어 학습이라는 맥락은 동일하고요. 침략과 선교를 위해서, 일단 유럽인들이 현지 언어를 배웠다는 시작만 조금 다를 뿐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빨간 리본"에서도 중국으로 향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인 '싼'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우는 장면이 등장했었죠. 그러나 일단 자리를 잡고 난 뒤에는 현지인들이 권력, 자본을 손에 쥐고자 침략자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 뒤에는 식민지의 피지배층이 독립을 꿈꾸는 민족의식을 생성하지 못하게끔, 침략자들이 해당 식민지의 모어를 의도적으로 말살시키려 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공식 언어로 침략자들 언어를 쓰는 간단한 정책에서부터, 아예 민족 고유의 이름까지 바꿔버렸던 일본 제국 주의처럼 강력한 정책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렇게 식민지를 '내국인화' 하려는 강력한 정책은 식민지와 지배국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서 그 예로 아일랜드와 조선을 들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한 발상이에요.
민족 고유 언어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가 극대화된 파시즘적인 발상과 이 때문에 세계 공용어를 꿈꿨던 에스페란토어 관계자들이 히틀러에게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도 비슷한 관점으로, 눈여겨 볼 만 했습니다. 꼭 필요한건 아니겠지만 화려한 도판도 여러모로 흥미를 자아냈고요.

그러나 이렇게 세계사 흐름과 동기화되는 언어 전파 과정은 굉장히 흥미로왔지만 책의 또다른 축인 '어떻게' 배우는지, 즉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내용은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문법을 참고하는 학습법은 1471년 시작되었으며, 17세기에 예문으로 단어를 설명했고, 19세기 말, 벌리츠가 말하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학습법을 크게 유행시켰고 이후 습득 이론, 청각 구두 교수법, 의사 소통 중심 교수법 등으로 진화했다는 내용 등인데, 우선 각 학습법의 차이가 명쾌하게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더라고요. 글보다 말이 중요하고, 독해보다 회화가 중요하다는 개념 정도만 이해될 뿐이었어요.

또 외국어 학습법과 외국어 전파 과정이 잘 연결된다는 느낌도 받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전파와 학습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처럼 세계사 흐름과 병행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어요. 세계사 흐름과 일치하여 머리에 쏙속 들어오는 외국어 전파 과정이 흐려질 뿐이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외국어가 전파되는 부분, 그리고 학습 방법의 진화 부분은 분리해서 따로 소개하던가, 외국어 전파 과정만 더 상세하게 서술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니다.

2020/02/23

그때, 맥주가 있었다 -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 이상원.장혜경 : 별점 2.5점

그때, 맥주가 있었다 - 6점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지음, 이상원.장혜경 옮김/니케북스

유럽의 기나긴 역사에서 맥주가 중요한 대목을 장식했던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소개해 주는 독특한 미시사, 음식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역사 속 맥주가 관련된 특정한 사건을 수 페이지 정도 소개한 뒤, 해당 사건과 관련된 현대의 맥주를 마지막에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된 스물 네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취지에 걸맞는 내용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연히 맥주 때문에 역사의 흐름이 바뀐 이야기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어떤 한 장면에서 맥주가 멋지게 등장하거나 활용된 정도를 기대한 정도이지요. 그러나 절반 이상의 이야기가 그렇지 못합니다. 단순히 유럽의 특정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때는 아마 맥주를 마셨을거다' 정도에 그치는 탓입니다. 

물론 추정 자체는 꽤 그럴싸 합니다. 문제는 사료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조금 맥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야기들은 단지 등장인물들이 맥주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거나, 맥주 회사가 관련되어 있는 정도에 그치고요. 예를 들자면 난센의 북극 탐험은 단지 링그네스 양조장에서 탐험 비용을 후원했을 뿐입니다. 히틀러가 맥주집에서 바이에른 정부를 실각시키고 제국 정부를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역사를 맥주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건 억지고요. 옥스퍼드 대학 문인들이 펍에서 열리는 문학 클럽에 참석하다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등을 발표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장소가 펍일 뿐입니다. 딱히 맥주와 관련이 있지는 않아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 장관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이야기나 체코 대통령 하벨의 이야기는, 그 둘이 술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는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많고 시기적으로는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현대까지, 장소로는 유럽 전역을 무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폭은 상당히 넓고 방대합니다. 덕분에 재미있는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들이 적지는 않은 편이에요.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자면, 30년 전쟁 당시, 목마른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농부로부터 맥주를 대접받은 후 커다란 루비가 박힌 금반지를 답례로 선사하고,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일화는 명백히 맥주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료로 증명되지는 않은 전설급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전설 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계속 맥주를 만들어 왔으며, 지금의 크로스티츠 양조장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양조 시설 중 한 곳으로 대표작인 '파인헤르베스 필스너'는 라벨에 구스타브 아돌프의 초상화를 담아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400년 이상 된 전설 속 맥주라니 마케팅으로는 더할 나위 없네요.
1836년, 유럽 대륙 첫 철도 운송 화물이 뉘른베르크 레데러 양조장에서 퓌르트로 보낸 맥주 두 통이었다는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레데러는 현재도 독일 리데베르거 그룹의 계열사로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를 계속 출시하고 있답니다.
파스퇴르가 맥주 양조 분야에서 독일을 물리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맥주가 중심입니다. 영국 위트브레드 양조장과 협력하여 최적의 열처리 온도가 섭씨 50~55도라는걸 알아내는 등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맥주에 관한 연구"라는 유럽 맥주 양조인의 경전과도 같은 책을 출간했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그의 맥주 실험의 가장 큰 수혜자는 프랑스가 아니라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양조장이라는게 재미있네요. 결국 칼스버그에서 파스퇴르의 꿈이었던 미생물없는 라거 맥주 효모 배양에 성공했다니 진짜 후계자인 셈입니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오줌싸게 소년 동상의 모델은 브라반트 공국의 수장인 어린 고드프리 3세로,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어린 나이로 출정했을 때 반란군을 향해 오줌을 싼 게 유래라는 설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 유모가 맥주를 마시고 수유를 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맥주를 마셔서 요의를 느꼈을 거라고 설명하는건 좀 억지스러웠지만, 나름 재미있었어요. 함께 알려주는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지 브뤼셀의 전통있는 맥주 '램빅'도 아주 입맛을, 아니 흥미를 돋구고요.
스웨덴의 미식가 전쟁 영웅 요한 아우구스트 산델스 역시 이전에는 알지 못했었던 인물입니다. 1808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핀란드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입니다. 다만 소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맥주 관련된 일화는 없습니다. 러시아 군 보급품을 털었을 때, 맥주도 함께 털었을거라고 추정하는게 전부죠. 그래도 지금 '산델스'라는 이름의 맥주가 산델스가 활약했던 핀란드 양조장 올비에서 양조되어 판매된다니 한 번 마셔보고 싶네요.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는 재미가 덜하지만, 1935년 투르 드 프랑스 경주에서 맥주 탓에 벌어진 순위 변경이라던가, 이탈리아 경제 성장기에 함께 발전한 페로니 맥주의 마케팅 전략, 아일랜드가 무섭게 성장하다가 리먼 사태 등으로 휘청일 당시, 카우언 총리의 기네스 맥주 사랑 등은 기억에 남네요. 특히 폴란드의 맥주 애호가 정당 이야기는 온갖 정당이 창궐하는 지금의 우리나라를 연상케 해서 제일 인상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획 의도대로 완벽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알게된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고, 저자들의 글 솜씨도 유쾌하기 때문이죠. 맥주 한 잔 하면서 읽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책에서 소개하는 맥주 리스트를 인용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파는 맥주는 한 개 씩 구입해서 마셔볼 예정입니다.

  1. 생 푀이엥 트리플 St-Feuillien Triple 벨기에 
  2. 칸티용 괴즈 100% 램빅 바이오 Cantillon Gueuze 100% Lambic Bio 브뤼셀 (벨기에)
  3. 아인베커 우어 보크 둔켈 Einbecker Ur-Bock Dunkel 아인베크 (독일) 
  4. 린데만스 파로 Lindemans Faro 블렌제비트 (벨기에)
  5. 우어 크로스티처 파인헤르베스 필스너 Ur-Krostitzer Feinherbes Pilsner 크로스티츠 (독일)
  6. 발티카 No.6 포터 Baltika No.6 Porter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7. A. 르꼬끄 포터 A. Le Coq Porter 타르투 (에스토니아)
  8. 올비 산델스 Olvi Sandels 이살미 (핀란드)
  9.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 Lederer Premium Pils 뉘른베르크 (독일)
  10. 위트브레드 베스트 비터 Whitbread Best Bitter 웨일스의 마고 (영국)
  11. 칼스버그 Carlsberg 코펜하겐 (덴마크)
  12. 링그네스 임페리얼 폴라리스 Ringnes Imperial Polaris 오슬로 (노르웨이)
  13. 그랭 도르주 뀌베 1898 Grain d'Orge Cubee 1898 릴 (프랑스)
  14. 레벤브로이 오리지널 Lowenbrau Original 뮌헨 (독일)
  15. 베를리너 킨들 바이세 Berliner Kindl Weisse 베를린 (독일)
  16. 크로넨버그 1664 Kronenbourg 1664 오베르네 (프랑스)
  17. 그래비타스 Gravitas 브릴 (영국)
  18. 스핏파이어 프리미엄 켄티시 에일 Spitfire Premium Kentish Ale 파버샴 (영국)
  19. 페로니 나스트라즈로 Peroni Nastro Azzurro 로마 (이탈리아)
  20. 크라코노시 스베틀리 레작 Krakonos Svetly Lezak 트루트노프 (체코)
  21. 지비에츠 Zywiec 지비에츠 (폴란드)
  22. 사라예브스코 피보 Sarajevsko Pivo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3. 기네스 드래프트 Guineness Draught 더블린 (아일랜드)
  24. 하이네켄 Heinek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19/11/11

요녀전설 1 - 호시노 유키노부 / 강동욱 : 별점 1.5점

요녀전설 1 - 4점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 강동욱 옮김/미우(대원씨아이)

좋아하는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집입니다.

요녀 (妖女)의 사전적 의미는 '요사스러운 여자'입니다. 요망하고 간사한 데가 있는, 한마디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아는 악녀를 뜻하지요. 제목만 보고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들어 조종하고, 그래서 파멸을 불러오는 여자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요녀'와는 관계없는 작품이 더 많습니다. 수록된 8편의 단편 중 제목에 값하는 작품은, 질투심 때문에 젊은 여인을 죽이려다가 파멸하는 귀족 여성이 등장하는 "메두사의 머리" 와 젊은 여성을 이용하는 늙은 흡혈귀 여성의 이야기인 "카르밀라의 영원한 잠" 두 편 뿐입니다.
조금 폭을 넓혀 본다면 일본 인형극 용 인형이 감정을 가져 연주가와 동반 자살한다는 "히다카가와", 설녀가 다가오는 빙하기에서 인간을 구하기위해 후손을 남기려 한다는 "만가"는 여성형 크리쳐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애보나 드라마에 가까와서 요녀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요녀 커트라인선인데, 나머지 작품들은 아예 '요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재미라도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고요. "월몽"은 카구야 히메의 SF 변주인데, 일본 전래 동화를 소재로 한 탓에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할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마을에 찾아온 여인과 화가를 마녀로 몰아 죽인다는 "로렐라이의 노래"는 히틀러와 엮은 결말이 영 억지스러웠고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마타 하리가 타이타닉호에서 라스푸틴과 추격전을 벌인다는 이야기인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이 루크레치아가 칸타렐라를 로마 시내에 뿌린 탓이라는 "보르자 가의 독약"은 간단한 줄거리 요약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내용이 어처구니를 쌈싸먹은 수준이라 아쉽습니다.
그래도 두 작품 중 "보르자 가의 독약"이 이야기의 완성도로는 조금 더 낫기는 합니다.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실제 역사를 가지고 노는 팩션 전개가 돋보이는 덕입니다. 문제는 루크레치아를 무슨 성처녀처럼 그린 것과 칸타렐라가 전염병의 숙주같은 존재였다는 설정입니다. 루크레치아가 오빠와 놀아나는 등 문란한 행각을 벌였다는건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고, 칸타렐라는 '삼산화비소' 였을거라는게 대부분 역사가들의 추측이니까요. 다 빈치의 등장과 결말 역시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제목에 부합하고 내용도 괜찮았던 작품은 "카르밀라의 영원한 잠" 딱 한 편입니다. 다른 작품들은 여러모로 완성도도 부족하고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2권이 있다는데 찾아보게 될 것 같지는 않네요.

2019/07/21

귀신나방 - 장용민 : 별점 1점

귀신나방 - 2점
장용민 지음/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로드웨이의 한 뮤지컬 극장에서 오토 바우만이 열일곱 살 소년을 살해했다. 소년은 좋은 부모에게 좋은 교육을 받은 흠잡을 것 없던 아이였다. 소년과 살인범은 아무 관계가 없어서 경찰은 살해 동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수백 명이나 되는 목격자 앞에서 소년을 죽인 오토 바우만은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사형 집행일을 사흘 앞둔 날 그는 갑자기 특별 면회 요청을 하는데, 상대는 과거 전도유망했던 기자 크리스틴이었다. 갑작스럽게 사형수와 인터뷰를 하게 된 크리스틴은 바우만으로부터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한국 작가 장용민의 장편 소설입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히틀러의 부활을 다루고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한국 작가가 섣불리 손 댈 소재는 아니라 생각했으니까요. 또 히틀러의 부활에 대한 창작물은 굉장히 많아서 차별화를 통한 비교 우위를 가져가기도 쉽지 않을테고요. 예를 들어 히틀러의 머리 (뇌)만 따로 보관했다가 다른 몸에 이식한다는 "모레", 클론을 만든다는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 있지요.
이 작품에서는 요제프 멩겔레의 뇌이식을 통해 젊은이로 거듭난다는 설정을 보여주는데 아니나다를까, 예상대로 차별화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방법만 조금 다를 뿐, 유대인 생체 실험을 통해 기술을 터득한 멩겔레가 주도하여 히틀러의 부활을 이끈다는 케케묵은 설정이 반복될 뿐입니다. 그나마 뇌이식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도 거의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래도 부활까지는 히틀러의 뒤를 쫓는 비밀 조직 아디 헌터와의 악연 등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부활 이후부터입니다. 아담 휘슬러로 새롭게 태어난 히틀러가 미국 정복(?)을 위해 일으킨 사건들과 여러 계획이 펼쳐지는데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탓입니다.
첫 번째로 아담은 시골 마을에서 6명이 죽는 참극을 일으킵니다. 일종의 심리 조작을 통해서요. 그런데 이 참극을 통해 그가 얻은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단한 능력을 보였다고 하기도 어려워요. 원래 사이가 좋았던 사람들끼리 다 틀어지게 만든 것도 아니고, 악감정이 있던 두 집안 사이에 불똥을 튀긴 정도니까요. 경제학 서적을 독파해가며 자본주의를 통달한 세기의 악마가 하는 일 치고는, 그리고 사악함을 드러내기에는 지나치게 소박합니다.

그 뒤 미국 연방 준비 위원회를 손에 넣겠다는 두 번째 계획은 그야말로 실소를 자아냅니다. 무려 800톤이 넘는 금괴의 댓가로 하는게 연방준비위원회 의장 밀턴의 비서가 되는 것 뿐입니다! 2019년 7월 현 시세로 금 1kg은 6천만원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48조의 현금성 자산으로 2019년 기준 세계 부자 순위 20위권이에요. 현금성이라 투자 시 자본 증식과 대출 가능 규모를 감안하면 몇 배가 될 수 있고요. 한마디로 스스로의 돈과 능력으로 세계 금융계를 지배할 수 있는데 고작 비서가 되는게 다라니 이게 말이나 될까요? 비서가 되려는 목적도 루 게릭 병으로 죽어가는 밀턴에게 뇌수술을 알선하는 댓가로 밀턴의 주식을 넘겨받으는건데, 이를 위해서는 구태여 비서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경로건 간에 자신이 히틀러라는걸 증명만 하면 죽기 직전인 밀턴이 알아서 접근해 왔을 테니까요.
게다가 연방 준비 위원회 주식을 소유한다고 그가 미국을 지배하는게 되는지도 의문입니다. 어차피 연방 준비 위원회 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상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문제도 있고요. 이보다는 차라리 세계를 지배하는 대기업 회장이 되려는 계획이 더 설득력이 높아요. 2019년 현 시점에서 연준 위원장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보다 세계 파워 랭킹 순위가 낮으니까요. 아니면 직접 미국 대통령에 출마하던가....

세 번째 계획인(두번째 계획에서 이어지는) 케네디 암살에 히틀러가 있었다는건 황당하고 어이없는 픽션의 정점입니다. 일단 케네디 암살의 이유는 그가 은본위의 새로운 화폐계혁을 단행하여 연준을 무력화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케네디에게 알려준건? 히틀러입니다! 연준의 권력을 먹으려는게 계획인데, 연준에 괜한 위험을 가하고 그걸 또 스스로 이겨낸다? 이 쯤 되면 이야기의 합리성을 논하는게 무의미해 보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암살이라는 무모한 계획은 리스크도 너무 크고요.

거기에 더해 무리수 설정도 너무 많습니다. 우선 옛 연인 에바 브라운, 그리고 그녀의 전생인 죠안나 이야기는 없으니만 못합니다. 사악한 카리스마만 희석될 뿐입니다. 등장하는 비중에 비하면 아무것도 하는게 없기도 하고요.
하기사, 죠안나 설정은 그나마 낫지 연쇄살인범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만든다는 설정은 어안이 벙벙합니다. 특수부대 출신 킬러들을 불러모아도 시원치않을판에 왠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UFC 파이터를 이길 수 있을까요? 게다가 연쇄살인범을 찾아내는 방법은 한니발 렉터를 표절한 천재 교수의 설명되지도 않는 수학 공식이고, 그들을 자기 부하로 만드는 방법은 히틀러가 혈혈단신 찾아가 말로 설득하는게 전부니 더 말을 해 무얼하겠습니까.

이와 반대편에 서 있는 경찰 바우만의 집요한 추적도 흥미를 자아내지 못하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고작해아 달라스 경찰서 형사인 그가 온갖 배후 정보에 손을 대 가면서 히틀러를 추적하는 과정부터가 설득력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히틀러라고 확신하고 쏴죽인 애덤이 사실 히틀러가 아니라 뇌수술을 받은 밀턴이라는걸 정작 조사를 시작한 지 몇일 되지도 않은 크리스틴이 밝혀낸다는 이야기도 당황스러워요. 바우만의 반평생은 대체 뭔가 싶거든요.
작위적인 전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케네디 암살 현장에서 모사드 요원이 바우만을 구해주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 정도 지켜봤으면 누가 흑막인지 당연히 알아채고 아담을 죽이거나 납치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총 한자루 전해주고 손을 터는건 영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히틀러는 살아있다는 극적인 진상이 귀신나방 이야기와 함께 드러나는 장면도 실소를 자아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기껏 자신이 살아있는걸 아는 사람을 다 죽여놓고 퓰리처 상까지 수상한 여기자 크리스틴 앞에서 살아있다는 암시를 남기고 떠난다? 그것도 직접 칵테일을 대접하는 등 있는대로 폼을 잡으면서?

이렇게 어디서 본듯한 설득력없는 설정, 전혀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계획들, 작위적인 수사, 개연성없는 전개라는 환장의 4종 셋트가 모인 망작으로 종이가 아까운 수준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가 희대의 망작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를 발표한지도 수 십년이 지났지만, 발전한 부분은 전무하네요. 앞으로 이 작가 작품을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19/06/30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 마틴 베일리 / 박찬원 : 별점 3점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 6점
마틴 베일리 지음, 박찬원 옮김/아트북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일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들의 탄생과 미술계에서의 위치, 그리고 현재 작품들의 상황이 어떠한지까지만을 집중해서 상세하게 알려주는 미술사, 미시사 서적입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유명하지만 그 작품들이 도대체 몇 점이나 되는지,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그리고 작품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 역시 비록 미술 대학을 졸업하여 디자인 쪽 업무를 하고 있지만, 창피하게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해바라기"라는 작품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주석 빼고 27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거의 모두를 "해바라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책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생은 거의 비중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해바라기"를 창작하는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해바라기" 창작 이후 자살까지는 몇 페이지로 끝날 뿐입니다.

그만큼 "해바라기"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단순히 정물화가 아니라 반 고흐가 굉장한 창작열과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그려냈고 본인 스스로도 살아 생전 엄청나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해바라기"의 창작 과정에 고갱이 깊숙히 개입했다는 등이 그러합니다. 해바라기 연작의 창작과 그 과정에서의 고갱의 역할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당대 인기 작가였던 고갱이 "해바라기"의 초기작인 "해바라기 두송이"를 보고 작품에 매료되었다.
  2. 이를 계기로 고갱은 고흐의 초대를 받아들여 아를의 '노란집'에서 몇 달간의 공동 창작 진행을 약속한다.
  3. 고흐는 고갱을 위해서 '노란집'을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는 '데코라시옹' (장식 계획)을 세우고 무려 네 점의 해바라기를 순식간에 그려낸다. 즉, 이건 고갱을 환영하기 위한 장식 용도였던 셈입니다. 
  4.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지만 그래도 고갱이 "해바라기"를 탐낸 탓에 고흐는 원래의 작품을 자가 복제하여 두 점의 카피까지 그린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고흐가 고갱을 위해 그린"해바라기"는 모두 일곱 개가 됩니다. "해바라기 세 송이", "해바라기 여섯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카피)",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카피 1)",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카피 2)" 순이죠. 고갱이 없었다면 이렇게나 많은 해바라기가 그려지지는 않았을테니, 고갱이 큰 역할을 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책에 따르면 고흐를 그냥 미친 사람 취급했고, 고흐가 그에게 준 작품들은 그냥 돈으로만 본 것 같긴 하지만 최소한 작품 보는 눈 하나만큼은 확실했네요.

또 왜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지도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당대에서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엄청나게 화려한 색깔과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라는데, 가끔 접하는 '광인들의 그림'을 보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당대 기준으로 보면 흑백 사진들 속에 혼자 컬러 사진이 놓여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사이즈도 높이가 90cm가 넘는 대작인데다가 임파스토라는 반 고흐 특유의 울퉁불퉁한 질감들도 이질적이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더해 주었을 테고요. 아, 이런 글을 읽을 때 마다 정말 당시 기준으로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반 고흐가 썼던 화려한 노란색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는데 당시 색깔로 감상한다면 그 충격은 훨씬 더할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디지털로 당시 색감을 구현한 이미지가 제공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흐가 죽은 직후부터 "해바라기"를 비롯한 작품들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입니다 그가 죽은 뒤 고작 10여년 뒤에 유명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작품을 구입할 정도였다니까요. 이러한 구매 과정을 거쳐 "해바라기" 들이 현재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후일담도 재미있습니다. 온갖 유명 인사들과 사건들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 때 히틀러와 괴링이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그래도 지금 다른 작품들은 전부 남아있어서 볼 수 있는데 딱 한 작품, "해바라기 여섯 송이"는 일본의 야마모토 코야타가 구매했지만 2차대전 공습으로 소실되었다니 아쉽습니다. "갤러리 페이크"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죠. 버블 경제 시절 일본 야스다 보험사가 무려 2,500만 파운드 (한화 약 400억)나 지불하고 구입한 "해바라기 열 다섯송이 (카피)"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야기고요. 위작 논란까지 있었기에 솔직히 미친 가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작품 전시 관람 수익만해도 구입 가격 이상일 뿐 아니라 지금 가치는 천억이 넘는다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또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동생 테오, 그리고 테오가 빈센트 사후 얼마 뒤 사망하여 미망인 요하나가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해바라기"중 "해바라기 열다섯송이 (카피)"만 남기고 판 이유가 무엇인지는 궁금해지네요. 개인적으로는 카피의 경우,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있는 느낌이라 오리지널이 더 나은데 그녀는 왜 카피를 남겼을까요? 단순히 개인 취향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요? 굉장히 궁금하지 않나요? 이를 소재로 픽션이 하나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그녀가 해바라기를 한 폭 남기고, 그 외 많은 작품들을 남겨서 그 덕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에 주요 작품들이 소장, 전시될 수 있었다니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다행인 셈이겠죠.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바라기"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는, "해바라기" 바이블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책입니다. 책의 완성도도 높아요. 전체 풀컬러에 도판도 완벽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실되었다는 "해바라기 여섯 송이" 컬러 이미지가 첫 수록된 책이기도 하고요. 재미는 물론 천재와 미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책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1/26

위작의 기술 - 노아 차니 / 오숙은 : 별점 4점

위작의 기술 - 8점
노아 차니 지음, 오숙은 옮김/학고재

역사적인 위조와 사기에 대한 논픽션입니다. 유명한 사건 위주로 나열했던 다른 책들과의 차이점은 위작을 만들고 위조하는 이유를 몇 가지 -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위조를 다룬 "천재성", 작품을 감정하는 사람들의 자존심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 에피소드들이 수록된 "자존심", 미술계와 전문가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위조가 시작된 이야기들을 다룬 "복수", 위조 경력이 밝혀진 후 오히려 부와 명성을 누린 사람들을 다룬 "명성", 순수하게 범죄 목적이었던 사건들인 "범죄", 여러 기회주의자들에게 이용된 딱한 위조꾼이 등장하는 "기회주의", 가장 강력한 동기인 돈에 얽힌 사건들인 "돈", 단순히 미술계가 아닌 정말로 큰 권력에 대한 이야기인 "권력" 순 - 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당연히 위작을 만드는 방법, 출처를 위조하는 방법 등 위작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갤러리 페이크"를 읽었다면 친숙한 여러가지 방법, 기술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림을 그린다면 상당히 유용할 정보도 많아요. 과거 사용된 카본블랙 잉크는 숯검정에 기름이나 풀, 고무질같은 고착제를 섞어 간단히 만들 수 있다던가, 유명한 위조꾼 헵번이 추천하는 거장의 작품을 베끼기 위한 이상적인 '위조꾼의 팔레트(연백, 옐로 오커, 크롬 옐로, 로 시에나, 레드 오커, 번트 시에나, 버밀리언, 로 엄버, 번트 엄버, 테르 베르데, 순수 울트라 마린, 아이보리 블랙의 12가지)' 같은게 그러합니다.

재미있는 실제 사건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스키아가 죽기 전 친하게 지내던 마약상 집 철문에 그림을 그리고 얼마 후 죽었는데, 마약상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증받으려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스키아 유산 관리 위원회에서는 진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진 바스키아의 죽음에 한 몫 했을 마약상에게 큰 돈을 쥐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 탓이 컸을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죽은 바스키아를 위해서는 공식 작품으로 인정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한 작품이라도 더 알려지는게 작가에게는 좋은 일일테니까요.
미술계 이외의 유명한 위조, 위작에 대한 소개도 충실해서 하워드 휴즈 자서전 위조나 가짜 히틀러 일기나 토리노의 성 수의 등 다양한 위작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중 콜럼버스 전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증거인 "빈란트 지도"가 위조임이 판명되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다만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위조하여 괴링에게 팔아넘긴 반 메헤렌 이야기 같이 다른 유사한 책들에 등장했던 유명 범죄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반 메헤렌이 재판에 회부된 후 오히려 괴링을 속였다는걸 실제로 새로운 그림을 그려 증명했으며, 덕분에 '나치 협력자'에서 '괴링에게 사기 친 남자'라는 평판을 얻어 대중의 영웅이 되었다던가, 괴링이 처형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등의 후일담이 실려있는 식으로 디테일이 압도적이라는 차이는 분명합니다. 특히나 사건들에 관련된 도판은 정말이지 다른 유사 도서와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강력한 장점이고요.

이렇게 재미와 현학적인 지적 욕구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책입니다. 동서고금의 유명 위작, 위조 사건에 대해 통사적으로 훝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유명 위작가들과 위조품에 대한 일람이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로 밝혀진 이야기는 후일담까지 충실하다는 점에서 위작, 위조에 대해 관심있으신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기도 하고요. 번역과 도판, 만들어진 책의 완성도도 최고 수준이기에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약간 감점한 이유는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타 도서에서 이미 소개되었던 이야기가 제법 있고, 분류도 아주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인데(자존심이고 뭐고 솔직히 돈이 가장 중요한 목적일 테니까요) 책의 가치를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2018/04/06

히틀러의 비밀 서재 - 티머시 W.라이백 / 박우정 : 별점 3.5점

히틀러의 비밀 서재 - 8점
티머시 W. 라이백 지음, 박우정 옮김/글항아리

히틀러가 남긴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의회 도서관, 공공 기록 보관소, 민간 보관소 등을 저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뒤져본 후, 히틀러가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영향을 끼쳤을 책들을 골라 소개하는 책입니다. 

'책이 수집가를 보존하며 수집가가 소멸된 뒤에는 그 삶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히틀러의 장서를 통해 히틀러라는 인물의 실체를 알려주려는 시도만큼은 무척 독특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게 이 리뷰를 쓰면서 제 책장을 쭉 훝어 보니, 정말 저라는 인물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책장이구나 싶더라고요. 요리 관련 서적 20%, 역사서 20%, 과학 관련 서적 10%, 장르문학 30%, 만화책 20% 정도의 구성인데 이 블로그 리뷰 비율과도 비슷하고 실제 제 관심사와도 같으니까요. 장서가 수집한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를 개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목차는 열개 항으로 나뉘며, 중요한 책도 열 권이지만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책들은 그 외에도 많은데 이 중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쳤거나 관심을 가졌던 책들을 분류하자면 크게 네 가지입니다.
우선 히틀러의 사상과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거나, 최소한 그러한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첫 번째입니다. 오스보른의 "베를린", 직접 쓴 "나의 투쟁",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쇠망", 권터의 "독일 민족의 인종적 유형론", 그리고 그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릴 수 있도록 한 스벤 헤딘의 "대륙 전쟁 속 미국" 등입니다.
두 번째는 히틀러라는 인물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혹은 히틀러에 대해 증언한 인물들이 관련된 책입니다. 히틀러의 정치 인생 초반에 그를 후원하고 이끌었던 유명 작가 에카르트의 "페르 귄트", 유명 영화인 레니 리펜슈탈이 선물한 "피히테 전집" 이 대표적입니다. "피히테 전집" 은 리펜슈탈과 히틀러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목적 외에도,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도 약간이나마 설명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분류와도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고요.
세 번째는 책 자체가 목적이나 수단이 되어 히틀러 주변에서 움직인 경우입니다. 히틀러가 싫어했다는 로젠베르크의 "20"과 이에 맞서 나치와 카톨릭을 결합시키려 했던 후달의 "민족사회주의의 기초"는 각각 책 소개와 함께 실제 히틀러 주변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일화가 함께 소개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총통이 실무, 그리고 공부를 위해 읽은 책입니다. "슐리펜",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전기와 각종 전쟁사나 전술 및 각종 무기 관련 서적들 처럼요.
이러한 책들을 히틀러의 성장 과정 순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그가 점차 어떤 사상, 철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상도 대략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역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하고요.

항상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후대 역사가의 사료를 통해서만 접했던 히틀러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반가왔습니다. 접근 방식이 신선한 덕분입니다. 용감하고 전우애 넘치는, 독일 제국에 충심을 다 한 군인, 생사의 기로에서 짧은 쾌락에 탐닉하지 않고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은 노력가, 제대로 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방대한 독서로 자신만의 이론과 세계를 완성하고 이를 토대로 누구와도 토론이 가능했던 천재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무기 관련 연감을 통독하여 후일 할더에게까지 한 방 먹였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독재자이고 살인자라고 해도 16,000권이 넘는 장서를 읽고, 중요한 내용은 기억하고 담아두었다가 써먹었다니 흉내도 내기 힘든 일이긴 하지요. 세계와 맞 상대할 수 있었던 제국을 십 년 이상 철권통치한 인물이 보통 인물일리야 없겠지만, 제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엄청난 노력가라는 점에서 탄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성기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신반인이더라고요. 물론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우생학을 결합시켜 유대인을 학살한 잔혹한 독재자의 모습, 스스로를 유럽 대륙의 구원자로 생각한 과대망상 독재자의 모습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독서법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책을 제대로 독파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특정 관념을 형성한 뒤, 책의 목차와 색인을 살펴 쓸만한 정보를 조금씩 모으는 방식입니다. 때로는 결론부터 읽기도 할 정도로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기보다는 필요한 정보만 집중적으로 습득하는 방식인데, 논문을 쓸 때의 방식과 비슷하네요. 스스로의 목표나 관념이 명확하다면 나름 효율적일 수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실제로 책의 목적, 그리고 광고 문구 - 1만 6000권 장서 중 단 열 권이 역사를 바꿨다 - 에 부합하는 내용인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소개되는 절반 가까이의 책들이 최상의 혈통인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관점, 이 때문에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는 반유대인주의 형성에 관련되어 있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몇몇 책들은 히틀러가 소장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읽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에요. 이래서야 저자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책을 선정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인물을 구체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고요.
물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허나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어요. 더 다양한 책들로 다양한 분석을 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임스 쿠퍼의 "가죽 장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카를 마이의 "사막 횡단", 스벤 헤딘의 모험담 등 평소 즐겼다는 모험 소설들도 여러 권 언급되는데, 이런 책들을 좀 더 분석하는 게 더 취지에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요? 아울러 서재에 각종 추리 소설도 꽂혀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데 과연 어떤 책이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최소한 제목 정도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이것도 추리 소설 홀대의 하나인지 궁금하네요.

그래도 한 인물을 다른 각도로 들여다 보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는 추천작입니다. 취지에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좀 어렵고, 신뢰성 측면에서도 다소 부족하지만 읽는 재미도 쏠쏠하니 히틀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5점 입니다.

덧붙이자면, 책장이 소유자에 대해 대략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요새는 사람들이 정말 책을 안 사고, 안 읽는 시대죠. 모든 컨텐츠 소비가 스마트 폰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수십년 뒤에는 "스마트 폰 로그로 분석한 누구누구" 와 같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8/01/13

전쟁터의 요리사들 - 후카미도리 노와키 / 권영주 : 별점 2점

전쟁터의 요리사들 - 4점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arte(아르테)

2차 대전 중, 미국 육군 제 101 공수사단 제 506 낙하산 보병연대 제 3대대 G중대 소속 조리병인 '키드' 오등 특기병이 조리병 동료인 에드, 디에고와 중간에 합류한 부상병 던힐, 의무병 스파크, 기관총병 라이너스, 통신병 와인버거 등과 함께 참혹한 전투를 거치는 와중에 마주친 소소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는 추리 소설입니다. 총 5개 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단편집이고요.

소소한 사건들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상계인데, 일상계로 보기에는 범죄의 스케일이 클 뿐 아니라, 2차 대전을 무대로 다양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라 동료와 관계자들이 수없이 죽어나가고 다치기 때문에 다른 일상계 작품들처럼 여유있고 한가롭지는 않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2차 대전 당시에 대한 묘사는 상당한 수준이기도 하고요. 고증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실감나게 그려진 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덕분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 마켓 가든 작전, 아르덴 대공세와 같은 주요 전투 모두에 투입되어 분투하는 키드와 동료들의 모습은 왠만한 전쟁 영화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2차 대전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전쟁에 대한 묘사 외에 건질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추리 소설과 요리" 관련 글을 쓰고 있기도 해서 관심을 가진 책인데, 정작 추리와 요리 부분은 별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쟁 소설" 로는 괜찮지만 "추리 소설" 로는 여러모로 부족해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추리 소설을 기대하시고 읽으시면 실망하실 가능성이 높다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제 1장. 노르망디 공수 작전" 

잘생긴 기관총병 라이너스가 예비 낙하산을 모으는 이유는? 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가 펼쳐지는 이야기의 도입부입니다. 화자인 키드와 탐정역인 에드 및 기타 주요 전우들이 소개되지요. 

추리적으로 주방이 더럽혀지는걸 참지 못하는 저택 주인이 야전 병원을 허락한 까닭은 무엇인지?와 저택 주인은 혼기가 찬 딸이 있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것, 낙하산 천 재질의 일부는 나일론이 아니라 명주이며 하얀색이다! 라는 일련의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순서대로 공정하게 제공하여 추리에 동참하기 쉽게 만든다는건 장점입니다.

그러나 저택 주인에게 저택을 임시로 사용하기 위한 허락의 댓가가 흰 명주천으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는 진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지나친 비약일 뿐더러 물자 무제한의 미군이 이렇게 바보같이 협상한다는건 비현실적이니까요. 그야말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억지설정에 불과해요. 때문에 추리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가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2장 군대는 위장으로 행진한다"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후방으로 잠시 이동한 주인공 일행이 분말 계란 도난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분말 달걀은 예전 다른 책에서 괜찮은 발명품으로 소개되었던 기억이 나는데, 작 중에서는 최악의 요리로 등장해서 이채로왔습니다. 하긴, 맛도 좋았다면 지금 널리 퍼졌어야 정상이겠죠.

하여튼, 600 상자나 되는 보급품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수많은 보급품이 쌓여져 있던 중 삐죽 튀어나온 상자열 이라는 특정 조건이 잘 맞아 떨어져야 하며, 완전 범죄보다는 범행을 드러내어 못된 상관에게 엿을 먹이려는 동기가 결합된 현실적 트릭과 범행이라는 점은 괜찮았어요.

하지만 범행 스케일에 비하면 동기의 설득력이 낮고, 인종차별 이야기는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이에요. 좀 더 깔끔하게 정리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제3장 굴뚝새와 솔개" 

마켓 가든 작전에 투입돤 주인공 부대의 처절한 전투가 펼쳐집니다. 착해빠진 주인공 키드조차 1편에서 친구가 된 보급병 오하라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저항 불가의 SS요원을 조준 사격하여 죽일 정도로 끔찍하게 묘사될 정도입니다. 그 외 많은 전우가 전사하고요. 이러한 전투 중에 미군을 도와준 미군에게 협력하는 네덜란드인 얀센 부부가 자살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민간인이 갑자기 튀어나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에드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게 됩니다.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얀센 부부의 유서는 그림 동화를 활용한 일종의 암호로 꽤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너무 작위적으로 동화에 억지로 끼워맞춘 느낌이에요. 애초에 이 방법을 영어로 적어 남길 필요도 없고, 암호를 풀어 복잡하게 열 필요도 없어요. 금고도 아닌 나무 완구인데 개머리판으로 두드려 부수면 그만이죠.
머리를 짧게 깎은 정체 불명의 민간인과 우유 한 컵 밖에 없던 비참한 부부의 상태를 연결하여 나치 부역자가 가족 내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전개도 나쁘지는 않지만 식상했고요. 무엇보다도 부부가 자살하는 상황은 완전히 이해 불가에요. 어린 딸 로테와 아들 테오를 위해서라면 더러워도 끝까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게 당연한데 말이죠. 이 점 하나 때문에라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제4장 유령들"

아르덴 공세 당시, 바스토뉴 사수에 투입된 주인공 부대가 투입됩니다. 그리고 동료 디에고가 들은 섬뜩한 유령 소리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놀라운건 탐정역인 에드가 전사한다는 전개입니다. 예상도 못해서 깜짝 놀랐네요.

그러나 이러한 충격적 전개에 비하면, 쌓여있는 독일군 병사 시체에 대검으로 칼을 꽂는 연습을 했다는 유령 소리의 진상은 영 별로에요. 동기 자체는 그럴듯하죠. 부상을 입은 것처럼 위장하여 후방으로 이송되려는 일련의 병사들이 있고, 그들을 적당히 다치게 하기 위해 연습했다는 이야기는 전쟁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시체에 대검을 꽂는게 정말로 연습이 되어 적당히 원하는 만큼만 다치게 할 수 있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대충 찌르고 결과를 하늘에 맡기는게 더 옳은 방법이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디에고가 마켓가든 작전 때문에 "외상형 스트레스 장애 (PTSD)"에 시달린다는 묘사도 진부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제5장 싸움의 끝" 

던힐이 독일인이라는게 밝혀져 스파이 혐의로 수감되는데, 키드와 전우들이 그를 탈옥시켜 가족과 함께 하게 해 준다는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림 동화에 정통하다, 공수부대원은 아이가 있으면 안되는데 있다고 한다, 독일군 통조림 조리 방법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던힐이 독일인이라는 단서는 이전 장에서도 계속 독자에게 공유되어 왔었지요. 눈치채기는 쉽지 않지만 꽤 정교한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탈옥 작전은 별게 없습니다. 이전 전투와 사건에서 얻은 인맥을 총 동원하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그냥 모든 살아남은 전우들이 모여 활약하는 일종의 에필로그성 이야기일 뿐이에요.

또 유대인 수용소의 참상을 그리는 장면은 진부함의 정점이며, 던힐을 축으로 전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나 기타 전쟁 범죄 등에 대해 일본인 작가가 쓸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되어 영 별로였습니다. 외려 키드의 처음 생각처럼 히틀러를 지지한 국민도 죄인이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게 맞지 않을까요? 뭐 하나 건질게 없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리고 정말 후일담이 이어집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노인이 된 키드가 다른 전우들과 함께 동독에 거주하던 던힐을 다시 만나는 내용으로 다른 전우들의 근황 모두가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전쟁과 삶, 죽음에 대해 조금 생각하게 만드는 키드의 생각이 펼쳐지는데 개인적으로는 사족이라 생각되네요. 평가할 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로테와 테오를 키드가 양육하게 되었고, 행복하게 산다는 정도만이 마음에 들 뿐입니다.

2016/10/03

러시아 유령 군함 사건 - 시마다 소지 / 김동주 : 별점 2점

러시아 유령 군함 사건 - 4점 시마다 소지 지음, 김동주 옮김, toi8.스즈키 쿠미 그림/영상출판미디어(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배우 레오나가 받은 기묘한 펜레터에 흥미를 갖게 된 미타라이는 이시오카와 함께 펜레터에 쓰여진 하코네의 호텔을 찾았다. 목적은 본관 1층 매직룸의 사진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19년, 하코네에 나타났던 "러시아 유령 군함"에 대한 사진과 함께 관련된 괴담을 들었다. 미타라이는 사건이 미국의 안나 앤더슨, 그리고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와 관련되었다는걸 알아냈고, 이후 몇 가지 조사와 추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시마다 소지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기나긴 연휴를 버티기 위해 별 생각 없이 집어들었습니다. 제목만 봤을 때에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국명 시리즈"류의 작품이라 여겼는데 읽어보니 "아나스타샤 황녀"를 소재로 한 작품이더군요.

자신을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던 미국인 안나 앤더슨은 유명하지요. 안나 앤더슨과 그녀의 미국 정착을 도운 남편 마나한의 비참하고 불행한 말년 - 집은 개와 고양이 배설물로 엉망인데다가 죽을 때까지 이런저런 심각한 정신병에 시달렸다 - 에 대해서는 처음 알게 되었지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안나 앤더슨의 주장과 수수께끼는 이미 많은 매체와 콘텐츠를 통해 상세하게 검증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안나 앤더슨의 주장의 진위는 이미 판명난 지 오래라 이미 쉬어버린 떡밥이기도 합니다. 거의 10년 전 DNA 검사를 통해, 그녀가 로마노프 황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안나 앤더슨이 진짜 아나스타샤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아직 안나 앤더슨 주장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던 2001년 작품이니 이건 문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잘 알려진 역사 속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재미의 핵심이고요.
그런데 이 부분에서 경쟁, 유사작과 차별화되는 이 작품만의 특징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안나 앤더슨 주장 중 가장 큰 맹점인 "왜 러시아어를 하지 못했는가?"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점입니다. 작중 미타라이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이론으로 '두개골 부상 당시 뇌손상을 입어 특정 언어에 대한 회화 능력을 잃고 극심한 정신병이 생겼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뇌에 대해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만큼 아이디어만큼은 정말 칭찬해주고 싶어요. 안나 앤더슨이 앓았던 정신병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되고요.
하지만 미타라이가 소설 속에서 강하게 주장한 "뇌의 모국어 담당 영역이 손상되고 외국어 담당 영역이 무사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라는 것 자체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전례가 없는 뇌손상이 가능했을까에 대해서도 회의적이고요. 뭐, 소설 속 재미있는 가설 중 하나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싶네요.

이것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러시아에서 탈출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도 신선했습니다. 바로 제목인 "러시아 유령 군함"입니다. 소설 속에서 1919년 하코네 호수에 나타난 러시아 군함을 의미하죠. 정체는 당시 존재했던 도르니에의 거대 비행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물에서 뜨고 내릴 수 있고,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등 나름 조건에 부합합니다. 게다가 날개, 프로펠러만 뺀다면 물 위에 떠 있는 배라는 것도 맞고요. 여러모로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탈출 시 제공된 로마노프 황제의 금괴를 이용했다는 설명도 그럴듯 했고요.

그러나 전개상의 헛점과 억지가 상당하다는 단점은 큽니다. 아나스타샤가 감금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어떻게 탈출하였는지는 정작 설명되지 않는 게 대표적입니다 구라모치와 독일로 향한 후 베를린에서 갑자기 착란을 일으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 역시 엉터리고요. 히틀러가 환영했다는데 자살 소동을 벌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러한 설정 구멍 전부를 정신 이상을 내세워 해결하려 한 건 여러모로 모양이 빠지고요.

또 아나스타샤와 황제 가족에게 닥친 잔인했던 능욕의 현장 묘사는 불필요했으며, 이후 아나스타샤가 성폭행으로 잉태한 아들이 일본에서 아나스타샤와 사랑에 빠졌던 일본군인 구라모치에게 입양되어 '네무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작중 설정대로라면 네무리가 로마노프 가문의 정통 후예임은 분명한 만큼, 당연히 일본 정부에서 관리했어야 하잖아요? 홀로 남은 러시아 황녀가 일본군인 구라모치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솔직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어요.

왜 미타라이 시리즈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미타라이가 다국어에 능통한 데다가 뇌과학 전문가, 그리고 직접 로마노프 왕가 유골 발굴까지 참여했다는 등 설정 비약이 너무 심하고, 이시오카 역시 정말 하는 게 없으니까요. 이럴 바에야 일본인은 일본 현지 후지야 호텔의 러시아 유령 군함 괴담과 사진을 미국 저널리스트 제레미에게 연결시키는 정도의 역할 정도만 수행하고, 제레미가 모든 것을 밝혀내는 전개의 스탠드 얼론물로 그려내는게 더욱 깔끔하고 보기도 좋았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시리즈에 욕심을 낸 탓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결과물이라 생각됩니다.

요약하자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역사 속 미스터리를 기발한 아이디어를 덧붙여 소설로 만들었다는 점은 인상적이기는 합니다. 설득력이 아주 높다거나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배울 게 많거든요. 그러나 단점이 너마누다ㅗ 명확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역사 속 미스터리를 다룬 "진리는 시간의 딸"이나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 실제 사건을 변주한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등 쟁쟁한 미스터리 실화소설 경쟁작에 비하면 완성도도 턱없이 부족하며,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이야기라 지금 읽기에는 시효가 다 되었다는 문제도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긴 하였으나 이러한 이유들로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15/02/23

히틀러의 성공시대 1,2 - 김태권 : 별점 3점

히틀러의 성공시대 1 - 6점
김태권 글.그림/한겨레출판
히틀러의 성공시대 2 - 6점
김태권 글.그림/한겨레출판

거의 1주일간 격조했습니다. 연휴 동안 블로그는 하지 못했네요. 다들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이번에 소개드릴 책은 독특한 시각으로 역사 만화를 풀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김태권 씨의 작품입니다. 연휴 기간 중 형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고요. 제목 그대로 "히틀러"의 성공시대, 그중에서도 정치인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그립니다. 1928년 총선에서 2.6%의 득표율에 그쳤던 나치당이 1930년에는 18.2%, 1932년에는 37.4%를 얻어 제1당이 되고, 결국 1933년 히틀러가 총리가 되는 과 정이죠.

이야기는 인물 중심으로 전개되며 히틀러를 비롯한 대권 경쟁자들과 괴벨스 등 나치당 인물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합니다. 일종의 군웅극 느낌도 살짝 있지만, 영웅적인 인물은 없고 대부분 무능하거나 꼼수에 능한 이기적인 인물들인 탓에 블랙코미디에 가깝습니다. 특히 히틀러는 실제로는 별다른 능력도 없고, 장황한 연설과 상식을 벗어난 무지 외에는 특별한 장점이 없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저 극우 세력에게 필요한 ‘기관총 앞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존재였던 셈이죠. 당시 극우 논객 에카르트가 말하길, “머리가 좋을 필요는 없다. 정치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업이니까.”에 어울리는요.

그나마 개중에 가장 똑똑했던 인물은 브뤼닝 총리였던 것 같습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재선시키고 히틀러에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슐라이허에 의해 실각하게 된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인물들이 (코믹하게) 등장하고 그들의 행보를 군웅극처럼 흥미롭게 그려낸 작가의 구성력은 대단했습니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다양한 도판들도 인상적이었고요.

무엇보다 당시 독일의 황당한 상황이 지금의 대한민국과 겹쳐지는 지점이 있어 놀라웠습니다. 정치권의 편가르기, 무능하고 소신 없이 캐릭터로 승부하는 정치인들,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극단적 사고방식 등 많은 부분이 닮았습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파시스트"의 전형적 책략이라는 점도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지요. 물론 지금의 대한민국은 정보 통제 사회는 아니란 점에서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김태권 씨의 작화와 유머감각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만화’로서는 완성도가 높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차라리 정적인 그림 해설서처럼 구성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고, 여백이 지나치게 많아 낭비처럼 느껴지는 점도 있었습니다. 분량과 가격 부담을 고려하면 편집에 좀 더 신경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 그리고 덧글 등을 통해 확인해보니, 편향된 시각이 드러나는 콘텐츠임은 분명한 듯합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었고, 별점은 3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유권자라면 한번쯤 읽어보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실감됩니다.

2014/03/10

발칙하고 기발한 사기와 위조의 행진 - 브라이언 이니스 / 이경식 : 별점 3.5점

발칙하고 기발한 사기와 위조의 행진 - 8점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이경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저명한 범죄관련 저술가 브라이언 이니스의 저서. 출간된지도 몰랐던 책인데, 알고나니 절판되었더군요. 작가의 명성 덕에 항상 읽고 싶다가, 운 좋게 중고 도서를 구하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역시나 내용은 명불허전! 총 8개 챕터로 고금동서의 다양한 위조와 사기에 대해 집대성하여 알려주는데 정말 기상천외하고 놀라운 사건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위조에 대한 여러 가지 기술을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모든 이야기가 재미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를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번째는 영국 1파운드 금화가 시장에서 20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지만, 원가는 9달러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위조하여 유통했던 베라하 사건입니다. 영국 당국이 그가 거주하는 스위스에 범인 인도 요청을 하였지만, 1파운드 금화는 영국에서 더 이상 법률적인 화폐가 아니라는걸 변호사가 증명하여 무죄로 풀려났다고 하네요. 심지어 영국 재무부에서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성격은 다르지만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와 왠지 유사하기도 한데, 지켜볼 일입니다.

그리고 하워드 휴즈의 자서전을 둘러싼 사기극도 흥미로왔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나름 영향력 있는 거부의 자서전을 날조해 출판할 생각을 하다니! 읽으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돈을 토해냈다는 이야기는 없고, 작가였던 어빙은 이후 이 사건을 다룬 "거짓말"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후일담을 보고 그럴 법도 하구나 싶었네요. 조금 고생해도 역시 돈이 더 중요한 것이겠죠.

사해 문서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이야기들도 재미있었어요. 일찍이 사기꾼과 연결되었던 샤피라라는 인물이 사해 지역 동굴에서 나온 양피지 조각을 대영박물관에 팔았지만, 샤피라의 전력과 조각들의 몇 가지 특징으로 위조범으로 몰린 뒤 자살하였는데, 과연 위조를 한 것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인지, 본인의 세계 최대 업적 중 하나가 폄하된 것에 대한 분개인지는 알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사해 쿰란에서 샤피라가 가지고 있던 양피지 조각 같은게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최초 공개되었던 15장의 양피지 조각은 모두 사라졌다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전설적 사기꾼 폰 루스티그가 알 카포네에게 친 일종의 "정직한 사기?"는 5만 달러를 주면 두 배를 만들어주겠다고 하고, 기간이 되자 작전이 실패했다며 1,000달러 지폐 50장, 5만 달러를 그대로 가져다 준 사기입니다. 알 카포네가 이유를 묻자 이 돈만 빼고는 알거지가 되었다고 고백했고, 이에 알 카포네는 다섯 장의 지폐를 뽑아서 건네주었다고 하네요. 이거야말로 범죄가 아닌 범죄, 그야말로 궁극의 사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기꾼 '옐로우 키드' 웨일의 사기 행각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하나는 영화 "스팅"의 실제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기입니다. 웨일은 얼뜨기 부자를 꼬드겼습니다. 전화 통보 담당자를 매수하여 경마 결과를 2~3분 늦게 알려주게 한 뒤, 그 사이에 마권을 사게 해 주겠다면서요. 그 뒤 마권 영업장을 가짜로 꾸며낸 뒤, 마권을 부자가 살 시점에 소동을 일으켜 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권을 못 산 건 부자 잘못이고, 전화 통보 담당자라던가 다른 동료들에게 줄 돈과 여러 손해 배상 명목으로 원금의 세 배 정도를 뜯어내었다고 합니다. 웃긴 건, 얼뜨기 부자가 돈을 뜯기고 나서도 웨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한번 더 합시다."

그 외에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들의 최신 정보를 접하게 된 것도 수확인데, 예를 들면 아나스타샤를 자칭한 안나 앤더슨의 정체는 역시나 아나스타샤가 아니라 폴란드 처녀였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는 등입니다. 이른바 "오파츠"라고 불리는 아즈텍의 수정 두개골에 현대의 연마기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더욱 자세한 설명 및 충실한 도판, 비교적 근래 출간된 책답게 후일담도 충실히 기술하고 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 에펠탑을 팔아넘긴 사기꾼의 말로, 히틀러의 일기를 위조한 사기꾼의 말로 등은 처음 본 것 같긴 합니다 -, 어렸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무슨 백과사전류에서 읽었던 것들부터 시작해서 다른 여러 책, 최근에는 "정말이야?"와 같은 책들에서 접했던 내용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이렇게 다른 책에서 접한 이야기가 많기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만, 결론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추리, 호러 계열 장르문학과 전문가 속성의 만화와 자료들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딱 맞는 책이었어요. "위조"와 "사기"라는 범죄의 전문가들 이야기일 뿐 아니라, 여러 이야기가 책 한 권에 담뿍 담겨 있는 단편집 속성도 갖추고 있으니까요. "갤러리 페이크"를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께서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쿠로사기"의 팬분들도 마찬가지에요.

2013/09/19

전쟁의 재발견 - 김도균 : 별점 2점

전쟁의 재발견 - 4점
김도균 지음/추수밭(청림출판)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전쟁을 몇 개의 테마로 묶어서 엮은 전쟁-미시사 서적.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장. 세계사를 뒤흔든 천재적 조직술_ 군대의 재발견
전장에서 꽃피운 사랑―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군대, ‘신성대’
수천 년 이어온 베트남 저항정신의 상징―고대 베트남의 여성 전사, 쯩 자매
오스만튀르크의 전성기를 구가한 ‘병정개미’―술탄의 친위대 예니체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향한 열망―미국 최초의 흑인 부대, 54연대
독일군의 밤잠을 설치게 한 ‘밤의 마녀들’―소련 여성 폭격기 연대
붉은 꼬리의 검은 조종사들―아주 특별한 흑인 비행대대, 터스키기 비행대
소련의 보이지 않는 사단―히틀러도 감쪽같이 속은 소련군의 동원 제도
일본의 피를 이어받아 미군을 위해 싸우다―일본계 2세로 편성된 미군의 442연대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소련의 죄수 부대, 형벌 대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귀신도 울고 가다―미국의 땅굴전 특수부대, ‘터널 래츠’
전사는 죽어서도 전사다―전사자의 여로
힘들고 지친 병사들의 로망, 핀업걸―전장의 엔터테인먼트

2장. 인류의 문명을 비약시킨 천재적 기술_ 무기의 재발견
세계 대변혁을 일으킨 작은 금속 조각―중세 봉건시대를 연 등자
스멀스멀 피어오른 노란 안개의 정체―영혼 없는 한 과학자의 비극과 독가스
대량 살상을 부른 속도에 대한 열정―보병을 참호 속으로 밀어 넣은 기관총
독일군의 오금을 저리게 한 철갑 괴물―지상전의 왕자, 전차의 탄생
‘크기’가 승패를 가른다―대함거포주의의 산물, 드레드노트
소리 없이 다가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다―해전의 필살 병기, 어뢰
전쟁을 가장 비인도적으로 만든 주인공―숨은 살인자, 지뢰
무인 폭격기, 미사일의 공포―나치 독일의 보복 병기, V-1과 V-2
빗나간 열정이 만든 인류 최대 재앙―현대판 ‘다모클레스의 칼’, 원자폭탄
군견 칩스가 훈장을 빼앗긴 사연―주인을 사랑한 군견의 죄
금강산도 식후경?―군 사기와 직결된 전투 식량의 역사
전장에서는 죽음에도 순서가 있다―야전 의료 시스템의 역사
‘뽕’ 맞은 전사들―전쟁의 우울한 이면, 약물

3장. 극한의 상황에서 꽃피운 천재적 리더십_ 전투의 재발견
한니발, 세계 최강 로마군을 전멸시키다―포위 섬멸전의 교과서, 칸나에전투
포위한 군대가 포위당하다―카이사르의 알레시아 공방전
‘신의 도리깨’, 유럽을 내리치다―유럽인의 황색 공포, 레그니차전투
십자가와 코란, 역사적인 첫 대결을 펼치다―레판토 해전
영국군 역사상 가장 졸렬한 전쟁―무능하기 그지없는 지휘관과 발라클라바전투
아메리카 원주민 최후의 저항―완벽한 승리와 치졸한 복수, 리틀빅혼전투
역사상 가장 값비싼 따귀 한 대―일파만파의 교훈, 타넨베르크전투
외로운 섬을 지켜낸 영국인 ‘최고의 시간’―‘나치 팽창’의 마지막 방어선, 영국전투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승리하다―명절의 허를 찌른 베트남전 구정 공세

4장. 인간을 극한으로 몰고 간 천재적 심리술_ 군가의 재발견
켈트인의 아련한 독립의 꿈―〈스코틀랜드 더 브레이브〉
레드 코트, 줄루 전사들의 창을 꺾다―〈할렉의 사나이들〉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국가―〈라 마르세예즈〉
한 급진주의자의 죽음이 부른 거대한 전쟁―〈존 브라운의 시신〉
파리를 핏빛으로 물들인 코뮌의 슬픈 봄―〈체리가 익을 무렵〉
피어보지도 못한 칠레 민중의 혁명가요―〈벤세레모스〉
영광과 피투성이는 한 끗 차이―〈라이저 위에 피〉
그림자 전사들의 연가―〈발라드 오브 그린베레〉

이렇게 총 4장으로 구분되는데 1장, 2장, 4장이 괜찮았어요.

1장에서는 술탄의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의 흥망성쇠를 그린 이야기는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이,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흑인 부대였던 54연대를 다룬 이야기는 영화 "글로리 - 영광의 깃발"이 떠올라서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소련의 형벌부대나 월남전의 미군 땅굴전 특수부대 터널 래츠 등이 인상적이었고요.

2장을 통해 고대 바이킹 전사 베르세르크의 종교 의식에 광대 버섯을 먹인 순록의 오줌이 사용되었다는걸 처음 알았네요. 광대 버섯의 암페타민이 축적되어 환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데, 중독자들이 들으면 꽤나 솔깃할 정보로 보입니다.

4장은 "군가"라는 주제부터 굉장히 이색적인데, 해당 군가가 발표된 시기와 이유를 상세하게 그리는 시도가 아주 좋았습니다. 노예해방론자인 광신자 브라운의 이야기를 다룬 "존 브라운의 시신",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의 최후를 그린 "벤세레모스" 등이 그중 마음에 들었고요. "군가"로 보기 힘든 노래가 함께 실려 있다는 점, 그리고 웨일즈의 군가를 다루면서 줄루 전쟁 이야기로 이어지는 "할렉의 사나이들"과 같이 군가와 실제 내용의 연관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약간의 단점은 있지만, 독특한 주제를 다루었기에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른 책에서 많이 접했던 유명 전쟁사 내용을 다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3장과 부실한 도판은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도판은 그렇잖아도 부실한데 한 장짜리 이미지를 4장으로 약간의 톤을 조절하여 복사하여 실어놓은 기이한 편집으로 실려 있어서 더 짜증났어요. 딱히 보기 좋은 것도 아니고 디자인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닌, 그야말로 삽질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4장 하나만큼은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주제이지만, 전반적으로 자료적인 가치는 낮습니다. 내용이 지나치게 간략하고 요약되어 있으며, 도판이 부실한 탓입니다. 진지한 전쟁사를 원하시는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짤막하게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로 적당한 책입니다.

2013/08/14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2 - 구마 겐고 외 / 권은희 : 별점 2.5점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2 - 6점
구마 겐고 외 지음, 권은희 옮김/까치

건물 하나당 한 장 분량의 짤막한 글과 사진으로 구성된 전편에 이어지는 건축물 관련 서적. 몰랐는데 아사히 신문 연재 컬럼이라고 하네요.

이 책의 장점은 아주 확실합니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진이 굉장히 멋지다는 점이죠. 글들은 4명의 작가가 나누어 썼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움이나 기묘함만을 설명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다르게 그 건축물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보는 후지모리 데루노부의 글이 가장 좋았습니다. 일본에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들의 건물이 제법 있다는 정보는 솔깃했고요. 여행 갔을 때 좀 알고 돌아볼걸...

그러나 건축물에 대한 정보 전달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점, 전편보다 참신함과 재미가 부족하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정보 부족의 경우, 이 책을 사진과 함께 하는 일종의 건축물에 대한 감상 중심의 에세이로 규정한다면 단점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두 번째 단점은 심각합니다. 에펠탑이나 런던의 유리 달걀 같은 관광지화된 유명 유적에다가 가우디, 르 코르뷔지에, 반 데어 로에,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의 대표작들은 이런저런 다른 매체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것들로, 이 책의 제목인 "불가사의한"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아트북 같은 책의 성격은 마음에 들지만 전편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에 든 건축물들을 몇 개 꼽아본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카이딘 황릉

베트남 최후의 황제 바오다이 바로 직전의 황제인 카이딘 황제의 능. 철근 콘크리트와 가우디 취향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지만 슬프고 품위가 없는 분위기라는 기묘한 건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긴타이쿄

그야말로 우키요에의 풍경 그림 같은 독특한 다리.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마구치현, 이와쿠니번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르세 미술관

1970년대 초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1968년 5월 혁명 후 이의가 제기되어 보존이 결정되고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건물. 워낙에 유명한 곳이라 내용은 잘 알고 있었지만, 20세기에 대한 이의제기가 관광 명소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씁쓸한 결말이 인상적입니다.

이탈리아의 몬테마르티니 박물관

히틀러의 전체주의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미래파를 후원하는 등 디자인 선진국다운 미의식의 소산이 보였다죠. 그래서인지 다른 국가의 오래된 건물을 박물관화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오르세 미술관처럼 역사적 건물 안에 근현대 미술품을 전시한 의외성이 특징이나, 이 미술관은 고대 조각을 수용했다는 독특함이 돋보입니다. 책에서는 이러한 것이 영원한 디자인 대국다운 면모라고 하네요.

스트로베리힐 빌라

고딕 호러 오트란트 성의 작가 호레이스 월폴이 자신의 고딕 취미를 반영하여 건축한 자택. 당시 기준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잔뜩 집어넣으려 노력한 것 같은데 사진만 보면 괴기스럽다기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 느껴집니다. 시대가 많이 변한 탓이겠죠.

긴자 라이온

1934년에 개업한 맥주 마니아의 성지. 건축적인 의미보다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보고 싶더군요. 사진만 보면 뭐... 그냥 강남 지하에 있는 맥주집 같긴 하지만요. 참고로 이 "긴자 라이온"은 대일본맥주의 직영 맥주홀로 1934년 개장하였으며, 연중무휴로 생맥주 한 잔은 25전이었다고 합니다.

2013/02/19

죽음의 샘 - 미나가와 히로코 / 권일영 : 별점 2.5점

죽음의 샘 - 6점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권일영 옮김/시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0년대 독일, 아이를 임신한 채 애인에게 버림받은 마르가레테는 생명의 샘이라는 뜻의 시설 '레벤스보른'에 몸을 맡겼다. 이곳은 나치 독일이 순수한 아리아인종, 즉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었다. 시설의 최고 책임자인 의사 클라우스 베셀만은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에리히와 그의 형 같은 존재 프란츠를 양자로 삼기 위해, 두 사람이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한 마르가레테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마르가레테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독일 패망에 즈음하여 연합군의 침공이 피난처를 덮치자 마르가레테는 자신의 아이 미하엘을 지키기 위해 프란츠와 에리히를 버리고 마는데....

나치 독일의 인체 실험을 주도했던 의사를 주요 소재로 다룬, 거의 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대 장편입니다. 그 동안은 일본 작가가 2차 대전과 관련된, 그리고 독일인들이 주인공인 작품을 쓴 것이라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접했던 주간문춘 미스터리 리스트에 실려있는 것을 알고 읽게 되었네요.

작품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는 클라우스 박사와 결혼한 마르가레테 시점으로 독일 3제국 패망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2부는 권터와 게르트 2명의 시점으로 1부 이후 15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나치 독일의 실험이나 잔당을 다룬 작품은 그동안 많이 접했었고, 특히나 광기의 의학 실험을 다룬 작품은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이나 "모레" 등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광기의 나치 의학 실험이 아니라, SS 출신의 의학 박사 개인의 욕심을 위해 벌어진 사건들이라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온갖 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거대한 서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주요한 등장인물은 몇 없을 뿐더러, 이 몇 명의 인물들이 거의 모두 우연으로 얽혀 있는 등의 작위적인 설정이 너무 강한 탓입니다.

예를 들면, 미하엘의 친부 권터는 몰락한 귀족의 후예인데 그가 물려받은 폐허가 된 성이 클라우스 베셀만이 노리는 지하 통로의 입구로 되어 있다든가, 마르가레테와 레벤스보른에서 인연이 있는 브리기테의 아들이자 클라우스의 아들일 수도 있는 게르트가 이런저런 우연으로 미하엘의 대부인 SS 출신 대령이 이끄는 국방 스포츠단에 입단하고, 우연한 기회에 프란츠와 에리히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는 식입니다. 우연도 이 정도라면 너무나 지나치죠.
무엇보다도 마지막 폐허가 된 성에서의 결전의 작위성은 정말이지 읽는 사람을 어처구니없게 만들어요. 대령이 마르가레테나 게르트 등 처음 가본 사람들이 척척 찾아내는 비밀의 방을 15년 동안 한 번도 찾지 않다가 하필이면 마지막 그 시점에 그곳을 덮치는 하등의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도 않으니까요.

또 클라우스 베셀만의 예술에 대한 집념이 초반부터 강하게 묘사되어 이후의 전개가 어느 정도 예측되는 등, 잘 짜여진 스릴러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게다가 이야기를 쓸데없이 길게 늘려 놓았습니다. 의학 실험이라 할 수도 없는 "거세"가 주요 테마라서 광기의 의학 실험 따위는 곁가지 이야기일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대관절 레나는 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2부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게르트와 헬무트로 대표되는 주변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런 것들만 들어내도 분량은 절반 이상 줄어들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클라우스 베셀만 박사가 악역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예술에 휩쓸려 우왕좌왕하는 모습만 보이는 것도 별로였어요. 빈 소년 합창단원에게 꽂힌 SS 친위대원의 사랑 이야기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물론 15년 뒤 만난 에리히는 사실 미하엘이며, 미하엘인 줄 알았던 소년은 클라우스와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반전이 있기는 합니다. 허나 이는 2부 시작되면서 마르가레테가 운 좋게(?) 미쳤다는 설정으로 이루어진 서술 트릭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고, 마지막 "후기를 대신하여"라는 챕터는 살짝 서늘한 느낌을 전해주지만 큰 한 방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일본인 작가가 쓴 작품이 아니라 권터가 쓴 작품의 일본어 번역본이라는 장치는 안 나와도 그만이었고요.

내용 자체가 불쾌하고 찜찜하나 계속 읽게 만든다는 점에서 흡입력은 있지만, 그저 그뿐,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 그냥 완독했다는 것에 만족하렵니다.

2012/01/12

퍼스트 어벤져 - 조 존스톤 : 별점 2점

작년에 개봉했던 마블 히어로 영화입니다. 감상 직후 작성했던 리뷰가 날아가 버린 줄 알고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백업본을 찾아내어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줄거리 요약은 필요 없으시겠죠?

이 영화의 두 시간여 러닝타임은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허약하지만 애국심은 넘치는 크리스 에반스가 신기술의 힘으로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초반부, 군 홍보 모델에서 벗어나 전쟁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중반부, 그리고 레드스컬과의 최후 결전을 다룬 후반부로요.

이 중 초반부는 제법 괜찮습니다. 허약하지만 애국심이 투철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크리스 에반스의 캐릭터를 여러 에피소드로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유머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반부 이후의 전개는 심각할 정도로 별로였습니다. 레드스컬의 세계 폭격 계획으로 대표되는 지구의 위기가 전혀 실감 나지 않아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에요. 또한, 캡틴의 친구 버키와 덤덤 더간으로 대표되는 용감한 미군 병사들만 있으면 캡틴이 필요 없을 정도로 히드라 군단의 전력이 형편없다는 점도 몰입을 방해했고요. 대단해 보였던 코스믹 큐브와 그에 관련된 신무기들도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고, 그런 신무기를 보유하고도 미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는 히드라 군단을 보고 있으면, 레드스컬이 대체 무엇을 믿고 히틀러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세계 정복을 꿈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스토리가 별로여도 액션이 멋지다면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장르이기에 위와 같은 단점이 반드시 결정적인 결함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레드스컬이 명배우가 연기했든 말든, 액션만 멋지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기대했던 캡틴의 활약이 부족했기 때문에 액션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병사 수준의 느낌이랄까요? 특유의 방패 던지기 장면 몇 개만 볼 만했을 뿐, 조금 힘이 세고 높이, 멀리 뛸 뿐이라서 과거 홍콩 영화 "동방독응" 같은 작품과 비교해도 더 나은 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캡틴의 액션이 십수 년 전 홍금보, 원표가 보여줬던 액션과 별반 다를게 없다면, 이 영화의 가치가 대체 무엇일까요?

게다가 마지막 레드스컬과 캡틴의 1:1 결투는 정말이지... 휴고 위빙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소모될 캐릭터는 절대 아닌데 말이죠.

밀리터리물과 슈퍼히어로물을 결합하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전쟁 장면도 부족했고 액션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점에서도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 3점, 중반부 1.5점, 후반부 1점의 평균입니다)

많은 분들의 평가대로, 이 영화는 단순히 거대한 "어벤져스" 예고편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조 존스턴 감독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물인 "로케티어"를 연출한 감독이라 나름 기대했는데,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이 부진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실망스러웠습니다. 다행히 흥행에는 성공한 듯하지만, "어벤져스"와는 무관한 독립적인 스토리로 속편이 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2009/05/08

Fantastique 판타스틱 2009.봄 - Vol.20 : 별점 4점

Fantastique 판타스틱 2009.봄 - 8점
판타스틱 편집부 엮음/페이퍼하우스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가이신 김내성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 기념 특집호입니다.

월간일때 몇번 뒤적이긴 했지만 이전에는 쟝르문학 전문이라도 SF 성향이 좀 강해서 별로 눈길이 가지는 않았는데 이번호는 구입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잘 기획된 특집호더군요. 추리소설 애호가로 그냥 지나치기 힘들어서 반드시 구입할 예정이였지만 형이 먼저 구입했길래 낼름 빌려다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김내성 선생님 특집은 총 4편의 단편 및 라디오 방송 대본, 그리고 김내성 선생님의 아들인 카이스트 교수 김세헌의 짤막한 추모담, 김내성 선생님의 일생을 총 망라한 연표, 재일한국인 리켄지의 김내성 선생님의 데뷰 당시 및 해방 후 한국 문단의 분위기를 통해 선생님의 장르문학에 대한 입장을 밝혀주는 역사성 짙은 에세이인 "데뷰시절의 김내성", 마지막으로 전봉관의 경성 스케치 시리즈라 할 수 있는 특집 에세이 "마인 속 경성과 경성문화"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만큼만 해도 팬으로서 굉장히 충실한 기분이 들 정도의 많은 분량 (220여 페이지) 이니 정말 대단하죠. 페이지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계간지의 위력일까요?

그러나 선생님 작품의 수준에 대해서는 항상 느껴왔던 아쉬움이 남네요. 아울러 추리물도 좋지만 한편 정도는 "비밀의 문" 에 실려있는 류의 변격물 취향 작품을 실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실려있는 작품을 보다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면, 제일 앞에 실려있는 "탐정소설가의 살인"은 일단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된다는 점에서 가치는 충분합니다. 실제 연극인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탐정소설가 "유불란"이 직접 극본을 쓴 뒤, 사건 주요 인물들을 주연으로 연극으로 상영하여 진상을 폭로한다는 설정도 충분히 재미있고요. 그러나 공들인 설정에 비해서 트릭이 조잡하고 결말이 너무나 유치할 뿐 아니라 유불란 탐정이 한마디로 ㅂㅅ으로 등장하기에 도저히 좋은 평을 해 줄 수가 없더군요.
두번째 작품인 "타원형의 거울"은 너무 많이 소개된 작품이라 좀 식상하죠. 물론 선생님의 기념비적인 데뷰작이자 대표작이라 빼긴 좀 어려웠겠지만 지도를 새로 그린 것 이외에는 새로운 점이 전혀 없어 지루했습니다.
네번째로 실려있는 "히틀러의 비밀"은 셜록 홈즈 시리즈 "여섯개의 나폴레옹 흉상"을 라디오극으로 번안한 작품인데 창작의 여지는 거의 없이 번안에 머물고 있어 평가하기가 난감하더군요. 약간의 창작이 들어간 범인과 피해자의 관계 등의 요소는 추리물로 보기 힘들정도로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한마디로 완성도가 낮습니다.
그나마 세번째 작품인 "연문기담"이 올드미스의 결혼을 위한 독특한 연애-사기담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연애편지의 진위에 대한 추리적 요소가 살짝 삽입된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트릭이라 하기에는 어렵지만 경쾌한 작품에 양념역할은 톡톡히 해 주거든요. 오헨리 필도 살짝 나는 것이 그간 알고 있던 김내성 선생님 작품과 분위기가 달라 무척이나 즐겁게 읽었답니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품의 수준이야 익히 알고 있었던 작품이고, 사실 이번 특집은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습니다. 방대한 내용 만큼이나 실속있는 내용이 가득하고, 추리소설과 추리소설가를 핵심으로 하는 당대 경성에 대한 자료들이라 경성을 무대로 한 추리소설을 창작하는 입장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특집임에 분명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전봉관의 "마인 속 경성과 경성문화" 가 제일 좋았던 것 같지만, 그 외의 글들 모두가 유익했다 생각되네요.

이번호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 김내성 선생님 특집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 중에서 눈여겨 본 것을 꼽아보자면, 먼저 코넬 울리치의 단편 "세시 정각"이 있습니다. 바람난 아내를 징벌하기 위해 아내가 잠깐 집을 비운 틈에 시한폭탄을 장치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서스펜스의 대가 다운 긴박한 상황의 연출이 일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결말부분이 너무 진부한 편이라 평작 수준에 머물고 말았네요. 이런 류의 단편은 워낙에 많이 있기도 하죠.
문영의 단편 무협소설인 "혈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적도인 "혈도"에 대한 강호의 소문과 그 소문의 원인을 다룬 짤막한 단편인데 의외의 요소가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문을 이용하여 돈을 번다는 시장논리가 처음으로 도입된 무협지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요.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스테레오 타입 -술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절망과 고독밖에 없는 무림 최고의 살수 - 이 아닌가 싶긴 한데, 셜록 홈즈 스타일 추리소설 창작가로서 할 말은 아니겠죠..^^;;
그 외에는 원사운드의 만화가 괜찮더군요. 신간소개 위주의 짤막한 만화로 그야말로 쉽게쉽게 막 그린거 같은데도 요점을 잘 짚고 있어서 빠져드는 맛이 있는 것 같아요. "인체모형의 밤"은 덕분에 구입 예정입니다.

결론적으로, 별 4점은 충분히 줄만한 가치가 있는 특집호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절반 정도는 눈이 잘 가지 않는 연재물이나 기획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과연 다음호를 사게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그나마 잘 나가는 듯 했던 판타스틱이 계간지 전환되었다니 (그리고 지금 보니 절판상태...;;)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추리 문학 전문 잡지의 꿈 역시 저~ 멀리 사라져 가는것 같네요. 1935년 김내성 선생님의 "타원형 거울"에 등장하는 추리잡지 "괴인"이 1만부가 팔리는데, 70여년 뒤의 대한민국은 1만부는 커녕 3천부도 소화하기 힘든 수준의 시장이 되어버렸으니 선생님께 죄송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