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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8

악연 1~6 (2025) - 이일형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재영은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직장 동료였던 폭력 조직 출신 조선족 장길룡에게 살인을 청부했다. 한 달 뒤까지 사채를 갚지 않으면 장기가 적출될 위기에 처해서 보험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인 사건 수사가 시작되었고, 장길룡은 경찰마저 살해한 뒤 박재영에게 돈을 요구했다. 궁지에 몰린 박재영은 장길룡을 살해하려했지만, 되려 습격당한 뒤 납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길룡과 함께 김범준에게 살해당했다. 호구 한의사 한상훈을 살해한 혐의로 수배 중이었던 김범준이 박재영으로 신분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최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최근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인데, 회사 동료 조문 차 장거리 버스 여행을 떠난 김에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생생한 등장 인물들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는 배우들의 연기가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빼어난 연기력을 보여주거든요. 그냥 욕설만 하는게 아니라 농담섞인 대사를 나누는 식으로 각본도 잘 받쳐주고요. 각본에서 시니컬한 블랙 코미디 정서가 묻어나는데, 제법 괜찮았습니다.

피해자인 의사 김주연을 제외하고는 주요 등장 인물들 모두가 이른바 '악연'으로 촘촘히 연결되었다는 설정도 눈에 띄네요. 박재영은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장길룡에게 청부를 의뢰하고, 장길룡은 교도소 동기였던 김범준을 범행에 끌어들입니다. 김범준은 박재영의 고등학교 선배이고, 사고로 입원한 박재영(으로 신분 세탁한 김범준)의 주치의 이주연은 고등학교 시절 박재영 일당에게 성폭행을 당했었는데 이는 김범준의 애인 이유정의 사주 때문이었고요. 마지막 장기 밀매 조직 소속 의사로 김범준의 장기를 적출하는건 김주연의 애인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총 6화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며 깔끔하게 마무리하였으며, 모든 악당들이 죽고 만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최종 빌런인 김범준은 산채로 장기를 적출당한다는 끔찍한 죽음을 맞는데, 작 중에서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정도로 통쾌했습니다.

김범준과 이주연이 공모해서 한상훈을 털어먹기 위해 짠 설계, 박재영이 장길룡을 살해하기 위해 준비한 휴대폰 알람(방심하게 만들려고), 한상훈이 자동차 정비소 이야기를 듣고 블랙박스 메모리를 뒤져 진상을 알아채는 장면, 김범준의 약병 바꿔치기 등 추리 및 범죄물로도 볼만했고요.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채, 장기 밀매, 보험 사기 등 자극적인 소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라 극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유치하다는 인상을 주는 탓이 큽니다. 사채빚을 못 갚아서 장기가 털린다는건 도대체 언제적 발상인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김범준이 박재영과 고등학교 선후배였고, 이주연의 애인이 장기 밀매 조직의 일원이라는 요소는 과도하게 작위적으로 느껴지고요. 아무리 '악연'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이야기는 익숙하고 결말도 뻔합니다. 박재영이 이주연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중요한 단서가 초반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박재영이 사실은 박재영이 아니라는 뜻이 되며, 그렇다면 그 정체는 이야기 흐름 상 김범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김범준이 마지막에 장기가 적출되며 죽음을 맞는다는건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요. 그래서 특별한 반전이나 여운이 남지는 못합니다. 제가 이런 장르물을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전개, 배우들의 연기는 좋은데 개연성 부족과 다소 뻔한 전개는 아쉽습니다. 그래도 분량이 짧다는 장점은 확실하고, 흥미로운 부분도 많습니다. 범죄 스릴러를 좋아하신다면 보셔도 괜찮을겁니다. 인기작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2024/10/25

끝없는 바닥 - 이케이도 준 / 심정명 : 별점 2점

끝없는 바닥 - 4점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토 은행의 융자 담당 대리 이기 하루카는 어느날 동료이자 친구 사카모토가 알레르기로 쇼크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카모토는 죽기 전, 이기를 만났을 때 “너, 나한테 빚진 거다?”라는 묘한 말을 남겼었다. 
사카모토의 업무를 인계받은 이기는 남겨진 자료에서 과거 도쿄 실리콘의 야나기바 사장이 관련된 수상한 입금 내역을 발견했다. 기타가와 부지점장의 방해에도 조사를 진행하던 이기의 앞에 누군가 나타나 흉기를 휘둘렀고, 융자과장 후루카와가 대신 칼에 맞아 쓰러졌다. 그 뒤 기타가와도 술에 취한 채 물에 빠져 죽어버렸다.
이기는 모든 사건이 도쿄 실리콘과 신에쓰 머터리얼간의 자금 흐름, 그리고 텐나인이라는 벤처 업체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흑막은 니토 상사에서 신에쓰 머터리얼로 파견되었던 재무담당 이사 야마자키였다.


이케이도 준의 데뷰작.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입니다. "한자와 나오키" 등 작가의 이름은 전부터 들어 왔는데, 작품을 읽어보는건 처음이네요.

재미는 있습니다. 사카모토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거대한 음모가 드러나는 과정이 치밀한 덕분입니다. 특히 자금의 흐름을 이용한 야마자키의 계획이 아주 볼만 했습니다. 신에쓰 머터리얼은 반도체 시장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지만, 무리한 투자로 자금난에 몰렸습니다. 그 탓에 니토 상사에서 신에쓰 머터리얼 투자를 주도했던 야마자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고요. 그래서 야마자키는 신에쓰 머터리얼의 하청업체이자 운명 공동체 도쿄 실리콘에게 신에쓰 머터리얼을 살리기 위함이라며 거액의 뒷돈을 받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반도체 업체로의 진출을 위한 로비 자금이라는 핑계였는데, 야마자키는 이 돈을 착복하고 신에쓰 머터리얼을 부도낸 뒤 새로운 회사 텐 나인 설립과 함께 신에쓰 핵심 기술자들을 모두 빼돌렸습니다. 텐 나인과 함께 니토 상사로 금의환향할 생각이었지요. 사카모토는 이 뒷돈의 흐름을 알아낸 탓에 살해당했고요.
이러한 복잡한 자금의 흐름을 밝혀내는 과정은 물론, 은행 내부의 파벌 다툼, 여러가지 시스템에 대한 설명과 같은 실무자만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상세하여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이케이도 준이 은행원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자금 흐름에 관련된 음모를 제외하고, 이야기는 엉성합니다. 첫 번째로, 사카모토에게 뒤집어 씌운 횡령은 사카모토가 아직 살아있던 한달 전 수차례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범인들이 사카모토를 어느 시점에 제거할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카모토가 언제 눈치챌지도 모르기 때문에 한달이나 되는 시간을 둔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두 번째로, 사카모토 살인은 알레르기를 이용한거라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기타가와 사건도 일단은 술에 취한 탓으로 처리되었고요. 하지만 융자과장 후루카와를 찌르고, 차를 빌려 고속도로에서 이기를 죽이려다가 일반인을 죽게 만든 범죄는 차원이 다릅니다. 엄연한 강력 사건이라서 경찰이 수사에 나설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건을 키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도쿄 실리콘의 수상한 자금 입금은 불법이 아니라고 작중에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문제가 되었더라도 기타가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면 끝났을테고요. 
그러나 이런 강력범죄를 저지른 탓에 결국 청부업자 리 료헤이가 범행을 저질렀다는게 경찰에게 밝혀져서 야마자키도 빠져나가는게 불가능해져 버렸습니다. 자금의 흐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 청부건으로 엮어 결국 체포되었겠죠.
이 억지스러운 강력 범죄 흐름 마지막에 야마자키가 니시나 사와코의 집에서 이기를 죽이려한건 비현실의 끝판왕 격입니다. 니시나 사와코는 공범도 아니었고, 사건 후에 입을 다물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데뷰작답게 다소 정리가 되지않은 부분들도 눈에 뜨입니다. 나오, 요코와 같은 여성 캐릭터들이 대표적입니다. 없어도 되고, 매력도 느끼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사소한 사건이 점점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상황에 휩쓸린 전문 직업인이라는 점에서 "스쳐 지나간 거리"와 비슷한데, 완성도는 그만 못합니다. "스쳐 지나간 거리"를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04/24

데드미트 패러독스 - 강착원반, 사토 : 별점 1.5점

데드미트 패러독스 - 4점
강착원반 지음, 사토 그림/놀

친 좀비파 귀족 아르테미아 가문의 외동딸 릴리는 부모님 사망에 따른 생명보험금을 지급받기 직전에 살해당했다. 보험회사 빅베일의 청부였다.
다행히 릴리는 좀비로 되살아났고, 변호사 골드는 그녀를 위해 빅베일에게 보험금 지급 소송을 걸었다. 사망한 그녀에게 그녀 본인의 생명보험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이었다.
이를 위해 전 왕실의사장 더미로부터 사망증명서까지 받아냈지만, 빅베일이 재판장과 배심원, 의사협회를 매수한 탓에 릴리는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골드의 계획이었다....


좀비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차별받는 좀비들을 위해 노력하는 변호사 골드의 활약을 그린 단편. 소갯글이 재미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그랬어요. 핵심인 재판 과정이 시시한 탓이 큽니다. 릴리가 죽음을 인정받지 못해서 본인의 사망보험금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을 살아있는 상태이니 수령하는건 당연하니까요. 별로 치밀한 계획이나 드라마가 있지 않아서 시시합니다.
좀비와 인간이 공존한다는 세계관도 어디선가 많이 보아왔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좀비가 익히 알고 있듯 사람을 잡아먹는다던가, 사람을 물어 전염시킨다는 설정없이 약간의 공격적 행동만 있는걸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좀비가 좀비답지 않으니, 인간 사회에 이종이 섞여 살아가면서('인간 세계에 섞여 사는 마족'같이) 차별도 받지만 서로 도움도 주며 공존한다는 흔해빠진 판타지 세계관과 변별력을 느끼기 어려워요. 좀비 존재에 따른 긴장감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골드의 동생인 좀비 실버에 대한 드라마도 뻔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작화는 괜찮았지만, 이렇게 단점이 훨씬 많아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2/16

61시간 - 리 차일드 / 박슬라 : 별점 2점

61시간 - 4점
리 차일드 지음, 박슬라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버스 사고로 사우스다코타의 한 시골 마을에 머무르게 된 잭 리처에게 마을 경찰 부서장 피터슨이 도움을 요청했다. 마약 거래 사건의 증인 재닛 솔터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잭은 군대 내 후임에게 전화하여 마약 거래를 하는 폭주족들이 머무는 옛 군사 시설의 용도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한편, 노부인 재닛의 경호를 맡아 분투하였다. 그러나 결국 피터슨과 재닛 모두 살해된 뒤에서야 리처는 범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범인은 경찰서장 홀랜드였다.
리처는 홀랜드를 처단한 뒤, 사건의 흑막인 사악한 마약상 플라토마저 없애기 위해 옛 군사 시설에서 한 판 승부를 준비하는데.....


전직 엘리트 군인인 거한 잭 리처가 활약하는 리 차일드의 베스트셀러인 잭 리처 시리즈 14번째 작품.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입니다. 이번 설 연휴는 '잭 리처 week'로 정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시골 마을에 있던 군사 시설에 2차 대전 때 지급되었던 환각제가 대량으로 보관되어 있었고, 시설의 원래 정체는 핵전쟁 이후 생존한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고아원이었으며, 육군 시설이 아니라 공군 시설이라서 잘 닦인 활주로가 함께 있었다는 등의 스케일 크면서도 대담한 설정이 돋보입니다.
잭 리처가 제대로 된 추리를 선보이는 것도 이채로왔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의 후임인 110 부대장 아만다를 도와 후드 기지에서 탈주한 대위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너무 멀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뉴스를 방송하는 곳, 그러면서도 경찰을 피해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곳으로 장소를 특정한 뒤 버스 터미널 옆 모텔에 머물고 있을거라고 추리하지요. 과장되기는 했어도 그럴듯했습니다.
피터슨 부서장을 살해한건 경찰이라는걸 곧바로 알아채고, 제닛 솔터마저 살해당한 뒤 범인이 홀랜드 서장임을 깨닫는 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초 사이렌이 울렸을 때 재닛 솔터의 집에 처음 나타난게 서장이었다는 등 서장이 앞서 범했던 실수들을 근거로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사실 주요 등장인물 중에서 범인이 될 만한 사람은 홀랜드 서장밖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의외성은 없었지만요(범죄행위에 가담했던 인상을 준 마이애미 출신 경찰은 떡밥치고는 너무 노골적이었어요).

이런 추리와 함께 곁들여지는 살을 에일듯한 사우스다코타 주의 겨울 묘사도 대단했습니다. 재닛 솔터의 사체를 목격한 잭 리처의 얼굴 피부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묘사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얼마나 추워야 공기중 미세한 얼음 알갱이들이 얼굴에 수천개의 상처를 내는게 가능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네요. 잭 리처가 '무숙자(無宿者)'임을 잘 드러내는, 갑작스럽게 방문한 마을에서 사건에 휘말린다는 도입부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제닛은 플라토의 부하가 마약을 거래하는걸 목격했다는 증언을 할 예정이었으며, 이를 통해 폭주족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약 조직의 우두머리 플라토는 제닛을 살해하려고 했고요. 그런데 제닛을 살해하면 상황이 바뀔까요? 마약 거래보다 살인이 훨씬 중죄이고, 심지어 증인에 대한 계획 청부 살인은 차원이 다른 범죄에요. 게다가 경찰 부서장 피터슨마저 살해했으니 이 정도면 지방 정부 중심의 단순 조사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정부 기관이 나서야 할 상황이에요. 이보다는 차라리 수감된 폭주족을 자살하라고 시키는게 더 나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플라토가 어차피 러시아인을 물먹일 생각이었다면, 제닛을 살해했다면서 말로 대충 떼우고 일을 진행했어도 됐습니다. 러시아인이 손에 넣은 마약 창고가 텅 비었다는걸 알게 되는게, 약속했던 목격 증인을 실제로는 살해하지 않았다는걸 알게 되는것보다 더 정도가 약하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어차피 신뢰를 잃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계획을 진행할 이유는 없어요.
전개 내내 언급되는 61시간이라는 시간 제한도 솔직히 왜 독자에게 알려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독자가 시간 제한 때문에 긴장을 느낄만한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플라토가 일방적으로 정한 시간이 흘러갈 뿐인 전개이고, 잭 리처가 시간 때문에 위기에 처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눈이 오지 않는 찰나에만 활주로에 플라토의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날씨는 미리 예측할 수 없고요. 그런데 어떻게 시간 제한을 사전에 정해 전개한단 말입니까? 이건 완전 넌센스입니다.

잔혹한 난장이 악당 두목 플라토도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글쎄요, 아무리봐도 잭 리처의 상대로 보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마약이 보관된 지하 벙커(?)의 높이가 낮아서 키가 작은 플라토가 조금 유리했다는 건 있지만, 애초에 가진 역량과 피지컬 차이를 뒤집을 수 있어 보이지 않았거든요. 플라토가 마약과 귀중품을 직접 수습하기 위해 나서는 것도 어이가 없었고, 이 와중에 배신자들이 나타나 그를 죽이려 한다는 전개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인기있는 헐리우드 영화 클리셰는 다 가져다 붙인 느낌만 들더군요. 플라토의 최후도 시시하기 짝이 없고요.

마지막에 플라토를 죽인 잭 리처가 어떻게 벙커에서 탈출해서 남은 잔당과 장비를 박살내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영 별로였어요. "탑건 매버릭"에서 훈련만 줄창하다가, 진짜 작전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않고 매버릭 부하 시점에서 '성공했다'고 언급하고 끝내면 어떻게 될까요? 난리가 날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무난하기는 한데,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2/12/04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국내에서 과학 수사를 통해 해결했던 여러 사건들을 정리한 논픽션. 2부 구성으로 모두 22건의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부는 특정 과학 수사 기법이 해결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어서, 해당 수사 기법에 대해 이해를 돕는 구성입니다. 현장 검증과 검시는 물론이고, 비산 혈흔 등 혈흔 형태 분석, DNA 분석, 프로파일링, 법 최면, 지문 감식, 지리 프로파일링 등이 등장하며, 수사 기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이고 전문가들에 대한 인터뷰 등 부가 자료들도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습니다. 사건도 밝혀진 모든 내용이 소개되고 있으며, 사건 현장 사진과 도해로 구성된 사건 상황 등 도판도 완벽합니다.
2부는 완전 범죄를 노렸지만, 수사관들이 끈질긴 수사로 밝혀낸 사건들이 담겨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소개는 1부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수준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4점. 우리나라 범죄를 다룬 논픽션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여,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해 드립니다.

첫 번째는 <<마포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입니다. 의사 남편이 만삭 부인을 살해했던 엽기적인 범행으로, 피고인 남편 측에서 캐나다 법의학 전문가까지 증인으로 불러 법정 다툼이 있었던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니, 남편 범행이 확실하더군요. 피해자의 목졸림 흔적과 얼굴과 몸의 멍자국, 저항하다 생긴 것으로 보인 손톱 밑의 남편 DNA 등 현장 증거가 뚜렸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남편 쪽에서 주장했던, "욕조에서 넘어져 죽은 것 같다"는걸 설명할 수 없는, 피해자 몸의 혈흔과 상처가 결정적인것 같아요. 욕조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양양 일가족 방화 사건>>은 무식한 범인이 교과서처럼 단서를 남긴 범행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현장 검증과 검시로 피해자 일가족 시신에서 수면제가 검출되어 누군가 방화를 저지른게 명백하다는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경찰 진술에서 필요도 없는 말을 해 가며 자살이 맞다고 주장했고, 결국 현장에서 발견된 차용증 등으로 동기마저 드러나버리고 말았지요. 범행 직후 소방차를 따라 다시 현장에 나타난 것까지, 하는 행동 모두가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단순 무식한 범인을 연상케합니다. 아울러 고작 2,0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어린 소녀가 포함된 네 명의 일가족을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에게 무기징역은 너무 관대한 선고였습니다. 능지처참하고 저잣거리에 효수를 했어야....
<<서울 광진구 주부 성폭행 사건>>은 그야말로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DNA 감식을 통해 드러난 범인은 범행 당시 수감 중이었지만, 과학수사관 권경사의 추리 덕분에 진범이 체포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수감 중인 용의자의 일란성 쌍동이라는 추리였지요.
<<60대 남녀 변사 사건>>은 단순 자연사로 보였지만, 현장 검증을 통해 몇 가지 이상한 정황이 포착되어 살인 사건이라는게 드러난 경우입니다. 현장에서의 구토 흔적과 기묘한 자살 시도 흔적, 그리고 자연사는 이불 한 장만 반듯이 덮고있는게 일반적인데 이불 두 장이 포개져 쌓여 있었던 것, 피해자 옷과 맞지 않았던 방에 떨어져 있던 단추 등이 단서가 되었습니다. 검시 결과도 살인 사건임을 증명해 주었고요. 현장 상황과 시신의 모습 등을 분석하는 과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안성 부부 살인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사건 해결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데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잔혹한 현장 모습으로 청부 살인이나 원한 살인이 의심되었지만 프로파일러들은 "돈을 목적으로 한 범죄이며, 근처에서 일어났던 침입 사건의 범인과 동일인물일 것이다. 침입이 발각되어 과도한 공격으로 피해자들을 살해했고,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몰린 사람이며, 피해자들은 물론 마을을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일 것이다"는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이는 실제 범인 모습과 일치했지요. 어떻게보면 좀 뻔한데, 현실은 픽션과는 엄연히 다르다는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양주 전원 주택 살인 방화 사건>>을 통해서 지문은 고온에서는 수분이 증발하면서 흔적 자체가 사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화재 현장에서는 '열 사각 지대'에서 집중적으로 지문을 채취한다는 등 실제 현장에서의 지문 감식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었고, <<의정부 연쇄 절도 사건>>은 이름도 생소한 '지리 프로파일링'을 접하게 해 주어 좋았습니다. 범죄가 발생한 장소와 시간을 토대로 범인이 머무는 곳과 다음 범행 장소를 예상하는 과학수사 기법이라는데, <<넘버스>>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던 적이 있지요. 실제 사건을 해결할 정도로 정립된 기법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2부의 <<고급 전원주택 연쇄 강도 사건>>은 완전 범죄를 노린 3인조 일당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고 전원 주택을 털었던 사건으로, 집에 설치된 폐쇄 회로 TV는 본체까지 뜯어서 들고갔고, 현장에 남긴 담배 꽁초도 어디선가 주워와 일부러 흘리는 등 굉장히 치밀하게 범행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범행 장소를 오간 차량이 없었다는게 특히 주목할만 합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전원 주택이 산과 가깝다는걸 이용하여, 목표지 인근까지 대포차로 이동한 뒤 야산에서 하루 노숙을 하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군요. 현장에 일부러 뿌린 꽁초 중 동일한 DNA가 검출된 탓에 덜미가 잡히고 말았지만, 정말로 대단한 지능범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산 교수 부인 살인 사건>>은 한 때 뉴스를 도배했던 사건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는 범죄 전문가 교수가 경찰과 두뇌 싸움을 벌인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사건 개요를 읽어보니 별다르게 머리를 쓴 부분은 없어서 놀랐습니다. 내세운 알리바이도 엉망이었고, 내연녀를 동원한 시체 유기도 곧바로 경찰에 발각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언변만 빼어날 뿐 일개 잡범 수준에 불과했어요. 차라리 앞서의 고급 전원주택 연쇄 강도 사건 범인들 수준이 더 높았습니다. 범인의 직업이 선입견을 만든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것도 일종의 미스디렉션이겠지요.

2022/08/20

시체 찾는 아이들 - 시모무라 아쓰시 / 최재호 : 별점 1.5점

시체 찾는 아이들 - 4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및 주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체포된 24살의 미청년 연쇄 살인범 아사누마 쇼고는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 8명의 피해자 중 미즈모토 유카는 자신이 살해하지 않았고, 진범은 자기가 죽여 '추억의 장소'에 묻었다는 폭탄 발언을 해 버렸다. 세간에서는 시체 찾기 소동이 일어났고, 휴직 중인 형사 노조미도 독단적으로 재수사에 나섰다. 그녀는 유카 사건에서 아사누마 쇼고가 아닌 다른 3인조를 범인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벌였었는데, 3인조 중 한 명인 히카루가 실종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인기 유튜버를 꿈꾸는 중학생 소타는 유튜버 니시얀, 세이와 함께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시체 찾기'에 나서는데.... 

미즈모토 유카 사건에 대해 추적하는 노조미와 소타 일행의 시체 찾기가 병행 전개되는데, 중반부까지는 두 이야기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병행 전개되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데, 나중에 소타 일행의 이야기는 노조미 이야기의 수년 전이며, 소타 일행 중 한 명인 세이가 아사누마 쇼고였다는 반전이 드러납니다. 아사누마 쇼고의 '추억의 장소'는 3인조가 시체를 찾아 나섰던 바로 그곳이었고요. 일종의 서술 트릭이기도 한데 꽤 괜찮아요. 잘 숨기고 있어서 반전에 대한 놀라움과 재미는 충분히 가져다 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서술 트릭 외에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캐릭터는 - 특히 연쇄 살인마 아사누마 쇼고 - 클리셰로만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뻔했고, 소타 일행의 시체 찾기와 노조미의 수사 모두 전개가 비현실적인 탓입니다. 이 중 시체 찾기는 "스탠 바이 미" 설정과 너무 유사한데다가 소타 일행 중 한 명인 고등학생 세이의 경우, 시종일관 비정상적인 사고 방식이 두드러지게 묘사됩니다. 일행의 목적지였던 치바의 '우는 아이 숲' 근처에서 만난 미모의 소녀 카호의 등장은 뻔하면서도 억지스러웠고요. 

굳이 변명한다면, 세이의 비정상적인 사고 방식은 그가 '살인마' 아사누마 쇼고라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서술 트릭 장면과 엮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호도 앞 부분 미즈모토 유카 사건에서 "남편이 살인을 청부했다"고 말했던걸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고요. 카호를 세이가 강간하려 했던 과정을 통해서, 그가 "믿어왔던 타인에 대한 절망"을 안겨주는걸 꿈꿔왔다는걸 드러내거든요. 이런 설명이 구태여 필요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러나 노조미 이야기는 이렇게 독자가 이해해 줄 구석이 전무합니다. 특히 그녀의 사건 추적 때문에 실종된 카네다의 부친인 변호사가 현직 형사의 납치 살해를 교사한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카네다의 부친이 이러한 대형 강력 범죄를 사주할 동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카네다가 미즈모토 유카 사건의 진범이라는건 이 시점에서는 밝혀지지 않았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를 납치해봤자 세간의 화제가 된 시체 찾기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시체 찾기가 성공하여 카네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한들, 카네다가 아사누마 쇼고가 살해한 유카 사건의 진범이라는 증거도 없고요. 변호사가 이런 기본적인 상황도 모른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노조미의 수사는 그 외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증거없이 직관에 의존하는 탓입니다. 애초에 3인조가 범인이라고 주장했던 근거부터가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사진 한 장 뿐이었지요. 아사나무 쇼코의 '추억의 장소'도 인터넷 시체찾기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읽고 떠올린 직감에 불과하고요. 이 직감은 정말 황당한데, '아사누마 쇼코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여서' 신빙성을 느꼈다네요. 사건 수사 중인 형사가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DC 인사이드의 사건 갤러리'를 읽다가 범인과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글에서 찾아냈다는 것과 똑같지요. 이렇게까지 막 나가면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어집니다.

소타 일행의 이야기도 세이가 주도했던 시체 찾기의 진상이 드러난 뒤 - 부정을 저지른 모친을 세이가 살해했는데 시체를 부친이 몰래 유기했다. 그 뒤 세이는 모친의 환청이 들려 시체의 목을 베려고 시체를 찾아나섰다 - 부터는 막 나갑니다. 세이가 니시얀과 소타를 시체 찾기에 끌어들인 이유부터 설명이 안되거든요. 작중에서는 미쳐버려서 어머니 시체를 찾아 목을 베려 했는데 , 혼자서는 힘들어서 동료가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니시얀과 소타가 시체를 찾는데 특별히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장비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이 둘을 왜 데리고 갔을까요?

또 아무리 미쳤다 한들, 사람을 죽이면 벌을 받는다는 기본적인 사회적인 상식을 망각했을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니시얀과 소타도 같이 죽이려고 했던 걸까요? 만약 그랬다면, 범행이 발각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텐데요? 게다가 니시얀의 희생으로 소타와 카호가 도주한 다음 이야기는 그야말로 가관이에요. 소타는 세이 모친의 시체를 발견했고, 모친을 세이가 죽였다는 것도 알고, 심지어 니시얀까지 죽었는데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무섭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자기를 구하려다가 친구가 죽었고, 살인자는 자기 얼굴을 알고 있는데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게 말이나 될까요? 니시얀도 단순 실종으로 처리된 이유를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소타가 니시얀이 죽는 상황을 방치했던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둘 사이에 절벽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소타가 당시 경찰에 신고만 했어도 이후 8명의 여성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소타가 "어릴 때 겁쟁이였다는 것을 처벌할 법은 없다" 고 노조미의 말을 듣고, 니시얀의 할머니를 찾아가 위안을 얻는 에필로그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니시얀이 아니라 8명의 여성과 그 가족에게 사죄하고, 평생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서술 트릭만큼은 괜찮았지만 그 외 다른 부분들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독자를 속이려다가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렸네요.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2/01/23

글록 - 폴 배럿 / 오세영 : 별점 3점

글록 - 6점 폴 배럿 지음, 오세영 옮김, 강준환 감수/레드리버

오스트리아의 자영업자 가스통 글록이 국방부 납품을 위한 새로운 권총을 1년 만에 만들어 납품에 성공한 뒤, 전 세계 권총 신업 패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관련되었던 다양한 인물들과 여러가지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는 논픽션입니다.

권총 글록이 아니라, 회사 글록의 성공담인데 과정은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성공을 꿈꾸는(많이 늦었지만) 직장인인 탓이지요. 책에 따르면 독창적인 구조로 새롭게 발명되었던 총으로 사격과 관리가 용이했다는게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총에는 문외한이었던 글록이 1년 만에 권총을 만들어 오스트리아 국방부 납품 경쟁에서 승리했던 비법은 "그는 처음 만들어 봤기 때문에 제대로 해냈다. 기존의 제조업체들은 NIH 증후군 때문에 새로운 디자인을 수용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기존 권총을 변형하면 되는데 굳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느냐는 고집이 있었다." (Not invented Here : 자체 개발한 것이 아닌 기술이나 제품을 배격하는 배타적인 조직문화)"백지에서 시작했다. 그는 고객인 군 전문가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고객이 요청하는 대로 수정해서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냈다. 그것도 적시에 해냈다."라는 건데, UX 디자이너로서 새겨들을만한 내용이었습니다. 암요, 고객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요.

하지만 뛰어난 발명품이라도 반드시 성공하는건 아닙니다. 성능면에서 앞섰던 베타가 VHS에게 졌던 역사처럼요. 심지어 글록은 플라스틱 사출물 구성품이 많고, 디자인이 별로였다는 약점도 있었습니다. 정말 못생기기는 했으니까요.

여기서 마케팅의 귀재 발터가 글록에 합류한게 대박의 시작이었던 걸로 설명됩니다. 경찰이 무장한 범인에게 다수 사망한 1986년 마이애미 총격 사건 이후 미국 경찰 전체를 대상으로 권총 교체 바람이 불었는데, 발터의 활약으로 글록 채택이 급증하게 되었거든요. 외부 안전장치가 없는 리볼버와 동일한 시스템을 채용했다는 구조적인 장점도 있었지만, 발터가 사격 교관들을 채용하여 글록에 대한 좋은 소문을 널리 퍼트렸던 덕분이지요. 글록을 구입하면 회사가 현장으로 교관을 파견하여 훈련을 도와주고, 다양한 보상 판매 정책을 실행한 것 역시 주효했었고요. 

헐리우드 진출도 빼 놓을 수 없어요. TV 시리즈 <<이퀄라이저>>에 첫 등장했는데, 이퀄라이저는 발터 PPK를 쓰다가 글록으로 바꿨다는 설정이었다네요. 발터는 "더티해리"로 대박을 친 S&W와 같은 역사를 만들어 주기 위해(아니면 제임스 본드의 발터 PPK) 다른 경쟁 총기업체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경쟁업체는 영화 관계자에게 정가를 청구했고, 악당이 사용하는걸 거부했지만 글록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처음 등장하게 된 영화가 "다이하드 2"입니다. 용병 테러리스트의 무기로 글록이 등장하지요. 여기서 브루스 윌리스가 내뱉는 대사 - "저놈들 내게 글록7을 쐈어요! 뭔지 모르죠? 독일에서 만든 세라믹 권총이라고요. 엑스레이 기계에 걸리지도 않고 당신 한 달 월급을 줘도 못 산다고요!" - 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뒤 총기 마니아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슈퍼 권총을 의미하는 저 대사 내용은 모두 엉터리였지만요. 이후 승승장구한 글록은 대중 문화 영역에서 독보적 입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로우 앤 오더"는 장편 글록 광고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요. 우리나라에서도 원빈이 "아저씨"에서 사용했고요.

이후 글록은 권총을 언급할 때의 고유 명사처럼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글록은 권총계의 구글로 현대의 권총을 처음으로 정의한 브랜드이며, 가스통 글록은 20세기의 콜트인 겁니다!

발터의 신박한(?) 마케팅은 끝이 없었습니다. 1989년, 미국 총기와 탄약 산업 주요 컨퍼런스 SHOT에서 신형 글록 20을 공개하면서, 스트리퍼 샤론 딜런이 직접 홍보하도록 만든 광고가 대표적입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그 광고입니다. "10점 만점의 인기 절정 (이 번역이 맞나요? 이 도시에서 가장 핫한 10! 이 맞지 않나....) SHOT 쇼에서 글록의 신형 10mm를 만나보세요." 라는 건데, 권총과 섹스를 결합한 전략은 잘 먹혀들었다고 합니다. 단순 홍보 뿐 아니라 실제 구매 대상자를 상대로 한 접대에서도요.

물론 글록에도 위기가 있었습니다. 1992년, 빌 클린턴 당선 이후 정부가 NRA와 대립하며, 여러가지 총기 규제 법안들이 발효되었던게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규제 법안 발효 직전, 앞으로 총을 못 살 수도 있다는 공포 심리에 의했던 총기 수요 폭증 효과도 보았고, 규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신제품 출시로 오히려 글록의 매출은 상승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담당자 쿠오모와 총기 업체와의 협상에서 S&W는 굴복하고 말았지만, 버텼던 글록은 NRA의 S&W 불매 운동의 수혜를 보았고요. 쿠오모는 글록이 합의하지 않으면 정부기관 매출 30%를 잃게될거라 협박했지만 글록은 굴복하지 않았고, 심지어 쿠오모 부처 감찰관실 감찰관도 글록을 구입했다니 애초에 이기는 게임이었던 겁니다. 부시 정권으로 넘어가서는 이런 규제는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러가지 주변 상황을 고려했던, 경영진의 현명했던 판단이 빛납니다. 여러가지 소송을 쏙쏙 빠져나갔던 기발한 아이디어들도 볼거리였고요.

이렇게 마케팅과 경영진의 협상과 판단에 따른 위기 탈출 등은 전형적인 기업 성공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NRA라는, 주요 소비자가 정치적 이익 단체이기도 한 비교적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요. 제가 어렸을 때 유행했었던, 도요타 등 일본 회사의 성공담을 그렸던 반쯤은 논픽션에 가까왔던 소설들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러나 뒤이어 이런저런 막장 드라마가 불거지며, 글록의 성공담은 "시마 과장"으로 돌변해 버립니다. 대표적인게 1999년, 가스통 글록의 암살 미수 사건입니다. 70세라는 나이 치고는 건장했던 글록이 암살범을 제압해서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이는 글록이 세금 탈루를 위해 고용했던 에베르트의 청부였다는게 밝혀지고, 이런저런 복잡한 돈의 흐름이 얽혀있는 영화같은 사건이었지요. 결국 글록은 구속된 에베르트는 물론이고, 글록의 성공을 위해 함께 했던 모든 직원들을 버리게 됩니다. 마케팅 귀재였던 발터는 진작에 회사를 떠났고, 미 정부의 규제에 맞서 현명한 판단을 했던 야누초 등 핵심 임원들 모두를요. 이 때의 동료들은 모두 말로가 좋지 못했다네요. 허나 가스통 글록은 82세 때 31살의 여성과 재혼했고, 여전히 거액의 재산을 누리며 잘 살았다고 합니다. 가스통 글록은 20세기의 콜트가 아니라, 현실 버젼의 시마 과장인 셈입니다. 시마 코사쿠보다 더 비열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입니다만.

글록의 성공담도 볼 만 했지만, "시마 과장" 스러웠던 막장 이야기들도 모두 흥미로왔습니다. 한 편의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문제는 '글록'이 이야기의 핵심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도판이나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글록의 시대별 변천 과정과 히트 모델, 경쟁사 모델 등을 도판으로 소개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해도 쉬웠을테고요. 그래서 약간 감점하여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총기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21/05/22

밤과 낮 사이 1 - 마이클 코넬리 외 / 이지연 : 별점 2.5점

밤과 낮 사이 1 - 6점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자음과모음(이룸)

영미권 장르소설 비평가와 편집자들이 선택한 최고의 단편 컬렉션이라는 책입니다. 장르 문학 단편을 좋아하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볼륨은 풍성합니다. 무려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에 열 여섯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본격 추리물, 범죄물, 스릴러, 액션물에 섬찟한 느낌을 전해주는 '기묘한 맛' 계열 등 수록 장르도 다양한 덕분입니다. 조이스 캐롤 오츠, 마이클 코넬리와 같은 유명 작가들 작품이 수록된 것도 반가웠고요.

하지만 워낙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서 작품별 편차가 큽니다. 첫 수록작인 "그들 욕망의 도구"처럼 좋은 작품도 있지만, 뻔한 설정과 전개를 보여준다던가, 심리 묘사에 치중할 뿐, 이야기 자체는 모호한 등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앤솔러지인데 선정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것도 조금 아쉬웠어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선정하여 출간한 것일까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대략 2.5점입니다. 1권과 거의 동일한 분량과 볼륨을 자랑하는 2권도 있는데, 읽어볼지 말지는 조금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 욕망의 도구" 

'나'는 죽기 전, 짐 오빠를 만나 그가 로니 언니를 이용했던 70년 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했다. 1931년, 아버지 가출 후 어려워진 가족을 위해 짐 오빠가 로니 언니에게 몸을 팔게 했었던 사건이었다...

끔찍했던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해서, 몸을 팔았던건 로니 언니가 아니라 짐 오빠 자신이었다는 충격적 반전까지 완벽했던 단편입니다. 탁월환 회상과 심리 묘사는 독자를 반전으로 이끄는 선입견을 잘 쌓아 올려주고요. 

아빠 실종에 관련된 설정은 지금 읽기에는 뻔하고, 짐 오빠의 고백 후 결말까지가 조금 늘어지는 감은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사소합니다. 단편의 맛을 잘 살린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밤과 낮 사이" 

표제작. 주인공이 겨우 열기구에 매달려 있고, 두 명이 열기구에서 떨어져 죽거나 불구가 되는 첫 장면부터 호기심을 자아내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주인공들이 뜬금없이 열기구에 매달리게 된 배경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결국 열기구 속 아이를 잃게 된 아버지이자 살인 강도인 브래들리가 주인공에게 복수심을 품고 습격해서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하지만 브래들리가 탈옥해서 주인공을 습격한 뒤의 이야기는 모두 작위적이라는건 단접입니다. “전적이 있는 은행 강도로 풀려난 지 고작 이삼 일 만에 기구를 탈취해서 도와주려던 착한 이웃을 죽게 만든 놈인데, 그래 그놈을 튀게 놔뒀다고요?”라는 주인공 말 처럼 쉽게 이루어진 브래들리의 탈옥, 브래들리가 탈옥 후 주인공 집을 바로 찾아와 주인공을 납치한 것, 마지막 죽기 일보 직전에 사라진 열기구를 발견하는 것 등 모두가 말이지요. 주인공이 브래들리가 3만달러라는 돈을 숨겨놓았을 코인 락커 열쇠를 강탈한 뒤 죽게 만든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또 주인공의 뉴요커 스타일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가득차 있는 작품이라면, 주인공은 보다 현실적으로 묘사하는게 나았을것 같습니다. 아니면 주인공이 3만 달러를 거의 손에 넣었지만, 로키 산맥 끝자락까지 몰고 왔던 머스탱이 고장나서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게 될 거라는, 쇼트쇼트스러운 결말로 마무리하던가요.

그래도 도입부만큼은 역대급이며 스릴과 서스펜스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환상특급"같은 TV 시리즈로 만들었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책 제본가의 도제" 

베네치아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미국인 졸리 매독스는 부유한 괴짜 노인 샌본과 친해진다. 그는 졸리와 여자 친구 루치아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데....

굉장히 뻔했던 작품입니다. 제목과 책 제본에 대한 장인 정신 가득한 묘사, 희귀 서적 수집가와 책 제본가가 루치아의 피부 문신을 열광적으로 바라보는 묘사 등에서 결말이 쉽게 예상된 탓입니다. 마지막에 졸리가 받은 선물이 인피로 제본된 책이라는것 역시도 뻔했고요. 

샌본과 제본가 주치니가 인피 제본 책을 졸리에게 선물할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졸리가 책 제본에 매력을 느껴 제자가 될 것을 결심할 거라는걸 알려줄만한 단서는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편의적인 전개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다른 재미도 느끼기 힘들어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차라리 졸리는 사실상 이용가치가 없고 루치아의 인피만 중요한 상황인 것 처럼 끌고 가서 결국 졸리가 체포되도록 만드는 결말이었더라면 더 나았을겁니다. 졸리의 여자친구 사체 (머리?)를 여행가방에 몰래 넣어 두는 식으로요.

"스킨헤드 센트럴" 

짐 부부는 아들을 잃은 뒤 시골 마을로 이사왔다. 그곳에서 스킨헤드 머리를 한 데일에게 집안 일을 시킨 뒤, 짐 아내의 패물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뒤, 데일의 동생 제이슨이 패물을 돌려주는데...

가정 폭력에 따른 범죄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뭘 말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더군요. 이야기가 명쾌하지 못해요. 동생 제이슨을 폭행한건 형 데일인지? 그렇다면 형 데일을 폭행해서 사과하게 만든건 그 아버지인지? 짐 부부 집에 데일이 불을 지르려고 한 이유는 무엇인지? 등이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또 형제의 아버지가 폭력 성향을 간직한채 10여년을 살아왔다고 해도, 데일이 저지른 범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애초에 데일은 절도를 저질렀고, 이는 맞아도 싼 짓이었으니까요. 때문에 아이를 매질했다고 짐이 이야기하는건, 그 아버지 말대로 오지랖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에 집에 불을 지른 데일을 육군 훈련소에 보내는 결말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당연히 경찰을 불렀어야 했습니다. 방화는 굉장한 중범죄니까요. 이미 성인이 된 데일은 그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합니다. 비교적 길게 설명되는 짐 부부 아들이 죽은 비참한 사고도 이야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데일 가족 이야기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요. 데일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이 역시 오지랖이죠.

좀 있어보이는 드라마를 쓰려고 했지만, 알맹이는 그닥인 모래성같은 이야기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심술생크스 여사 유감" 

늙은 노파가 온갖 사람들에게 심술궂은 편지를 보내는 취미가 있다는 설정은 고전 영국 추리 소설에 등장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전 속에서 이런 편지는 은근한 협박이나 스캔들 폭로였던 반면, 이 작품 속 생크스 여사의 편지는 훨씬 적나라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고전이 은근한 심리 서스펜스라면, 이 작품은 현대물답게 스플래터 하드고어물인 셈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 상황 묘사와 엮어서, 독자에게 이 노파는 죽어도 싸다는걸 확실히 알려주거든요. 살인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교사 시절 학생의 게이 성향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던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정말 치가 떨릴 지경이었어요. 진작에 살해당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니 말 다했지요. 마지막에 생크스 여사가 살해되지만, 동기를 가진 인물이 너무 많아서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끔찍한 범행'과 '처단' 자체의 자극적 쾌감에 비해 이야기가 평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재미를 주는 작품이란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첫 남편" 

잘 나가던 변호사 리오나드가 아내의 첫 남편 사진을 발견한 뒤, 자격지심과 질투로 오해를 만들고, 결국 첫 남편 야드만을 죽인다는 범죄극입니다. 비교적 분량이 긴데, 리오나드가 붕괴해가는 심리 묘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탓입니다.

긴 만큼 디테일한 묘사는 좋지만, 전개는 평이합니다. 리오나드가 야드만을 죽인다는 결말은 뻔했고요. 아내 발레리도 죽였을 거라는 암시가 살짝 등장하기는 하는데, 제대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야드만을 죽인 뒤, 그의 렌트카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차안에 있던 야드만의 애견에 의해 습격을 당해 죽거나 범행이 드러난다는 결말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금도 개 때문에 범행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우연히 지나가던 차량이 있었다는 작위적인 전개에 기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길이만큼 좋은 작품은 아니었어요

"운이 좋아" 

텔레파시 능력자 수키 스택하우스와 마녀 아멜리아 브로드웨이에게 보험 사업을 하는 그레그가 사건을 의뢰했다. 누군가 그의 사무실에 침입해서 서류철을 뒤졌는데, 누구인지 알아내 달라는 의뢰였다.

텔레파시 능력자, 마녀, 뱀파이어, 마술사 등이 나오는 판타지 범죄물로 그레그의 경쟁 업자 중 한명이 그레그의 비정상적인 행운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서류철을 뒤졌다는게 진상인데, 이를 수키 스택하우스가 더듬어 밝혀내는 과정은 꽤 재미있습니다. 이런저런 소동으로 뒤섞인 상황에 대한 정리도 깔끔하고 유쾌하게 묘사하며, 판타지적인 설정과 능력들을 조사 과정과 이야기에 잘 써먹고 있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만화스러운 설정만큼이나 만화스러운 전개는 아쉽습니다. 디테일을 챙기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게 많아요. 그레그가 주변 행운을 빨아들여서 사업이 잘 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거야말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 충분한 설정인데, 어떻게 동작하는지 설명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고 말거든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아버지날"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단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벌어졌던, 더운 날씨에 차 안에 방치되어 사망한 아이 사건이 그려집니다.

아이에게 장애가 있었고, 그 때문에 부모가 의도적으로 아이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게 진상인데, 아내와 남편을 분리시킨 뒤 심문하여 이를 이끌어내는 과정 묘사가 빼어납니다. 아내가 먼저 자백했다며 자백을 유도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이고요. 또 그냥 심증이 아니라 '이미 그만 둔 보모를 재 고용하는 광고를 내지 않은 점' 에 착안하여, 어차피 아이가 죽을걸 예상했다는 추리를 이끌어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부모 시점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범인의 동기가 치열하게 드러나지 않는 탓에, 드라마의 깊이가 부족했어요. 전개와 결말도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경찰 수사물로는 기본은 하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과연 저명한 해리 보슈 시리즈다웠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개 산책 시키기" 

토론토에 사는 부유한 미시 로라 프랜시스는 개 산책 중에 단역 배우 레이를 만난 뒤 불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레이와 함께 하기 위해 남편 로이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정부에게 남편 살인 청부를 맡기지만, 남편이 선수쳐서 정부는 죽고, 선수친 남편도 정부가 의뢰했던 살인 청부업자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딘가에서 많이 보아왔던 -헨리 슬레셔였던가요? - 뻔하디 뻔한 내용이라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포르노를 연상케 하는 로라와 레이가 벌이는 질퍽한 정사 장면 묘사는 그나마의 수준을 더 낮고 저렴하게 보이게 만들고요. 이럴 바에야 뻔해서 짝퉁스러운 반전을 끼워넣지 말고, 포르노에 가까운 싸구려 펄프 픽션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보다는 조금 더 볼 만한 부분이 있었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모자족인" 

부유한 의료기기 사업가 제더버그 마틴이 살해당했다. 스무살이나 어린 젊은 아내 나네트는 정체불명의 거한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데....

언니의 전 남자 친구인 카일 헤이에스 형사 밑에서 일하게 된 감식관 테스 캐시디가 주인공인 작품. 

단서, 증거, 동기 모두 애매하고 설명은 부족하지만, 본격 추리물입니다. 테스 캐시디가 몇 가지 단서와 정보를 가지고 귀납법 추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서는 두가지입니다. 고인이 생전에 불을 두려워했으며, 친아들이 반대하는데도 나네트가 화장을 고집한 이유가 첫 번째, 흉기인 도끼에 찍힌 커다란 엄지손가락 지문이 두 번째입니다. 테스는 도끼에 찍힌 엄지손가락 지문은 고인의 엄지발가락 지문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화장을 서두른 것으로 추리합니다.

이 엄지발가락 지문에 대한 추리를 우연히 테스가 알게 된 '모자족인' - 아이가 바뀌는걸 방지하기 위해 엄마의 손가락 지문과 어린아이의 엄지발가락 지문을 찍는것 - 과 연결시키는 전개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현대 법의학으로 발가락과 손가락 구분이 불가능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설령 구분이 불가능했다 치더라도, 동기가 있는건 나네트와 아들 스티븐 뿐이니 어떤 식으로든 범행은 드러났을테고요. 이런 점에서 현대물보다는 근대물에 더 적합했으리라 생각되네요. 아울러 테스와 상관과의 관계도 전개에는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뱁스"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한 뒷골목 싸구려 범죄극. 주인공이 스트리퍼 뱁스와 함께 마약 전달책을 찾아가 마약을 강탈해오는게 전부입니다. 온갖 비속어가 난무하지만 특기할 만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주인공이 때때로 '십자가'를 본다던가, 대학교를 나왔다던가 하는 기묘한 설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잠" 

묘지 관리인 그레이브 디거는 과거 마크 틴들이라는 과거 용병이었다. 실수로 포로가 되었었지만, 상관 월터 잭슨의 희생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묘지에 월터의 시신이 매장되게 되는데, 얼빠진 아르바이트생들이 시신을 모욕하자 그는 용병 마크 틴들로 돌아간다....

그레이브 디거가 용병으로 돌아온다는, 영화로 따지면 캐릭터 탄생을 알리는 도입부 격입니다. 그나마 마지막 각성은 조각내버렸다는 한 마디로 끝이고요. "존 윅"에 빗대어 보면, 자동차와 개의 복수는 하지도 않고, 다시 킬러로 각성해서 집에 쳐들어온 마피아 조직원을 죽이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완성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즐거운 응원단" 

고등학교 응원단에 미모의 호랑이 코치가 부임했다. 그녀는 단원들에게 맹훈련을 시켰는데, 단원 중 3명은 그녀가 스터드 하사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했다. 코치는 그녀들을 꼬드겨 친해지지만, 3명 중 한 명인 베스의 도발로 결국 트러블이 일어나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코치가 불륜을 저지른 뒤 아이들을 입막음 시키려고 억지로 친한척을 한건 알겠어요. 아이들 중 한 명인 베스가 계속 입을 놀리자 그녀를 견제한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코치라는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불륜남 친구들과 마약 파티를 벌인다? 한국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륜남 스터드의 친구 프라인이 베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결말도 뭔가 싶어요. 죽인 것도 아니고, 설령 이 자리에서는 죽였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게 뻔하잖아요? 볼짱 다 본 막장 인생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명되지 않고 답없는 전개와 결말을 그려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교차로" 

3인조 은행 강도인 잭 일당은 서부 텍사스 일대를 떠돌다가, 교차로에 있는 작고 낡은 주유소 겸 잡화점에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더브와 로이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둘은 충동적으로 가게 주인인 노부부를 살해한다. 둘은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두목 잭의 분노가 두려워, 잭에게도 총격을 가하는데....

서부 텍사스의 황량한 묘사, 그리고 작은 가게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묘사가 볼 만했던 범죄 액션극. 가게를 찾은 꼬마가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잭이 기사회생하고, 꼬마가 잭의 새로운 동료가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주어진 암시와 내용을 보면 잭은 악마이고, 나이가 들어 쓸모없어진 인간 부하들을 때때로 교체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별다른 내용은 없지만 액션 장면만으로도 별점 2점은 충분합니다.

"악마의 땅" 

소몰이꾼 출신으로 서던퍼시픽 철도탐정으로 일했지만 해고당한 형제는, 핑커튼 탐정사 취직을 위해 바바리 해안으로 향했다. 구스타프 형은 사람을 관찰해서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셜록 홈즈같은 취미가 있었다. 하숙집 주인 메그가 둘에게 수상쩍은 일자리를 제안했다. 구스타프는 동생에게 일행인걸 들키지 말자고 말했고, 찾아간 술집에서 갑작스럽게 구스타프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출판사에 보낸 원고에 대해 기묘한 독촉을 하는 편지에서 시작해서, 편지를 쓴 사람이 형 구스타프와 겪었던 사건으로 끝나는 작품.

사람이 술집에서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 본격물로 셜록 홈즈만큼 똑똑하다는 구스타프 형이 아니라, 힘쓰는 쪽인 동생이 추리를 하는 탐정과 이야기를 하는 화자 역할인 왓슨, 그리고 액션 담당인 브라운 신부의 동료 프랑보우 역할까지 수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경구를 떠올리며 추리하는 과정은 홈즈 팬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술집에서 급작스럽게 피아노를 친 이유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서이며, 좌, 우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위나 아래로 사라졌을 거라고 추리하는 식입니다. 결국 동생은 바닥에 문이 있다는걸 알아내고 형을 구해내게 되지요. 

또 소몰이꾼 1인칭 시점의 말투로 전개하는 묘사, 특히나 중간중간 삽입된 소몰이꾼 감성 유머가 아주 유쾌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근대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약간 무식한 막노동꾼 탐정이 등장하는 본격물이라는 점에서 "탐정 피트 모란"이 살짝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바닥의 문은 셜록 홈즈 운운하지 않아도 관찰만 한다면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되고, 메그의 술집에서 벌어진 다툼같은 불필요한 요소는 감점 요소이지만, 장점이 명확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보이는데 다음에는 구스타프 형이 활약하는 이야기도 읽어보고 싶네요.

"킴 노박 효과" 

제목은 주인공이 벌이는 사기의 명칭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가 애착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사랑에 빠지게 한 뒤 돈을 울궈내는 사기지요. "현기증"에서의 킴 노박 역할에서 따 와 붙인 이름이라고 하네요.

주인공의 킴 노박 효과 사기 생각이 이어지다가, 주인공이 정조역전세계처럼 나이든 과부들에게 킴 노박 효과를 일으키며 돈을 빼 먹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결말은 독특했습니다. 이게 바로 남녀평등이겠죠. 질퍽하면서도 상세하게 묘사된 범죄와 심리 묘사도 볼거리였습니다. 엘모어 레오나드의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하지만 '주교님'에게 사로잡힌 주인공이 빠져나온 뒤, 남창 역할을 하게 되는 결말은 설명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완벽한 범죄자였던 주인공을 몰락시키려면, 정교한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쉽게 약점을 잡혀버려서 인생이 막장에 몰려 버린다면, 앞서 대단해 보였던 사기와 범죄 행각에 대한 장황한 묘사도 힘을 잃을 수 밖에 없고 결국 이 작품은 시간 낭비에 불과해버리고 마니까요.

주인공과 성형외과 의사, 킴 노박 효과를 일으켰던 배우, 피해자 등의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괜히 복잡하게 보일 뿐, 이야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 킴 노박 효과도 의문스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옛날 사랑했던 애인이나 전처, 혹은 영화배우와 비슷한 외모의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게 과연 사기일까요? '그 사람이다!'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다른 사람이라는건 당하는 사람도 알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거짓말로 돈을 울궈내는건 사기일 수는 있지만, 이 정도면 추억에 대한 댓가로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들고 부자인 남자가 젊은 여자를 만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은 단편에 어울리지는 않았어요. 훨씬 길고 정교한 작품으로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2021/03/27

코핀 댄서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3점

코핀 댄서 - 6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컬렉터' 사건 이후 뉴욕 시경과 FBI의 수사 자문으로 일하는 전신마비 범죄학자 링컨 라임은 시카고 외곽 상공에서 폭발한 민간 제트기 사건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사망자는 거물급 무기상 필립 핸슨의 재판에 증언을 하기로 했던 조종사 에드워드 카니였다. 그러나 라임의 관심을 더더욱 끈 것은 이 사건에 청부살인업자 '코핀 댄서'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코핀 댄서에게 5년 전 부하들을 잃은 적이 있기에 댄서를 잡으려는 라임의 의욕은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이제 남은 핸슨 재판의 증인은 카니의 부인인 퍼시와 동료 헤일. 재판까지 정확히 45시간이 남은 상황, 링컨 라임은 최강의 암살자 코핀 댄서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자신의 손으로 댄서를 잡아들일 함정을 준비해야 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제프리 디버의 빅 히트한 전신마비 범죄학자 링컨 라임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링컨 라임과 살인청부업자 코핀 댄서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데,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흥미를 자아냅니다.

특히 링컨 라임과 동료들 시점과 살인을 실행하는 청부업자 스티븐 콜 시점을 오가는 구성에서 전해지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스티븐 콜의 현재 행동을 통해 그가 앞으로 범행을 어떻게 저지를지?를 궁금하게 만든 뒤, 이를 알아챈 링컨 라임이 간발의 차이로 이를 저지하려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는데, 뻔하기는 하지만 몰입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스스로는 전화도 걸 수 없는 링컨 라임이 범행 수법을 알았지만 전화를 거는데 실패해서 타겟 중 한 명이 희생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입니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이었다면 Siri로 쉽게 전화를 걸 수 있었을 텐데("스마트 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처럼요), 당시 음성 인식 기술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기도 했고요.
스티븐 콜이 링컨 라임이 장애인임을 알아챈 뒤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장면도 아주 멋졌습니다. 왜 링컨 라임이 강한지를 잘 알려주는 장면이었어요.

범죄학자, 법의학자이자 감식 전문가인 링컨 라임이 주인공다운 디테일도 압권입니다. 애밀리아 색스 등을 활용하여 수집한 미량 증거물들을 통해 스티븐 콜을 추적해 나아가는 묘사가 아주 빼어나요. 대체로 범행 과정을 검증하는 정도에 그치기는 하지만, 지문 인식이 불가능한 지문 조각을 긁어모아 하나의 지문을 만드는 등, 실제 수사에 활용하는 장면들도 제법 많은 편입니다. 스티븐 콜 범행에서도 폭탄의 디테일 등 볼거리가 아주 많고요.

허드슨 에어와 퍼시 플레이 시점으로 보여지는 여러가지 비행 관련 전문 정보들도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공항의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폭탄을 비행기 외부에 부착한다는, 공항 구조를 잘 활용한 아이디어처럼요. 공항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장면에서도 숨어있는 파일럿을 끌어내기 위해 비행기를 쏜다는 발상 등에서 많은 연구와 조사가 뒷받침된 티가 납니다. 무엇보다도 퍼시 플레이가 고도가 낮아지면 폭발하는 폭탄 때문에 마지막 비행에서 겪는 고군분투는 정말이지 인상적이었어요. 범인이 설정한 고도보다 높은 공항 (덴버)으로 향한다던가, 부족한 연료를 근처 사막이 태양빛을 받고 만들어낸 상승기류로 해결한다는 등의 아이디어들도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이야기를 빛내 줍니다. 이 이야기만 가지고도 한 편의 이야기가 충분히 될 수 있을 정도에요. 그만큼 드라마와 긴장감이 잘 살아있었습니다.

약간은 서술 트릭을 갖추고 있으며, 두 개의 반전이 존재해서 추리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야기 구조에서 링컨 라임과 시종일관 대등한 대결을 펼치던 또 다른 주인공 스티븐 콜은 '댄서'가 아니라는게 나중에 밝혀지거든요. 이건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이외에도 악덕 사업가 핸슨이 아니라 허드슨 에어 멤버 론 탤봇이 청부를 의뢰했다는 반전도 놀라왔고요.

그러나 반전에 지나치게 집착한 느낌을 전해주는건 조금 아쉬웠어요. 스티븐 콜이 그냥 댄서였어도 이야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텐데 말이지요. 론 탤봇이 사장 퍼시를 비롯한 3명의 소유주를 없애고 회사를 가로채려고 했다는 청부 의뢰 동기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론 탤봇의 횡령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단순 횡령과 살인 청부는 급이 다른 범죄인데 말이지요. 잘나가는 항공사의 경영진 중 한명으로 이익을 나누는 것 대비해서 얼마나 큰 이익을 보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동기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3명을 죽이려다가 경찰, 보안관을 포함하여 거의 20여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요. 미량 증거물로 그가 이 모든걸 꾸몄다는게 증명된다는 것도 무리였다 생각되고요. 끝까지 부인해서 법정까지 갔다면, 아마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겁니다.

또 이야기 전개에 억지가 많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댄서'가 색스에게 총상을 입고 체포되는 마지막 장면을 한 번 볼까요? '댄서'는 원거리 저격을 가장한 뒤, 뒤로 돌아가 기습하려는 작전이 들켜 체포되고 맙니다. 하지만 자리만 조금 높은 곳으로 이동해도 쉽게 색스와 퍼시, 롤랜드를 저격해서 쉽게 죽일 수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이길 수 있는 카드를 버리고, 질 수도 있는 별로 좋지 않은 카드를 선택할 이유는 없어요. '댄서'가 체포되게 만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합니다. 

댄서의 전지전능함을 과시하기 위한 설정들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댄서가 스티븐 콜에게 살인 청부를 재하청 준 뒤, 그를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댄서는 '조디'라는 약물중독 노숙자로 변장하고 스티븐 콜과 접촉하지요. 그런데 이 때 스티븐 콜이 만나자마자 그를 죽이지 않은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었습니다. 이후, 조디가 배신한걸 알아챈 스티븐 콜의 저격이 실패한 것도 우연이고요. '댄서'가 체포된 뒤 "모험 없는 인생은 없다. 그래도 난 대응책을 강구했다. 스티븐 콜의 잠재적 동성애 성향을 이용했다." 고 링컨 라임에게 떠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디'가 스티븐 콜의 동성애 성향을 알아챈 방법에 대한 설명도 없고, 그가 스티븐 콜의 취향이었다는 정보도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되짚어 생각해보면, 에드가 죽은건 어쩔 수 없었지만, 누군가 자신들 생명을 노린다는걸 알고 난 뒤에도 비행에 집착했던 퍼시 플레이 탓에 사건이 커진 탓이 너무 큽니다. 경찰과 FBI가 시키는대로 안전 가옥에 얌전히 있었다면, 사건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거에요. 퍼시는 회사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죽고 나서는 그런건 아무 필요가 없잖아요? 악당 론 탤봇이 회사를 차지했을 수는 있지만, 다른 친구와 경찰, 보안관 들의 희생은 없었겠지요. 그녀는 살아도 산게 아닐거에요.
링컨 라임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아멜리아 색스의 무모함, 그녀가 느끼는 질투심과 링컨 라임과의 러브 라인 등도 이야기에는 별로 도움이 된 것 같지 않네요. 지나치게 헐리우드 식이었달까요?

하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충분히 읽을만 하고, 링컨 라임이라는 캐릭터의 독특한 설정도 잘 써먹고 있으니까요. 영화화되기 좋은 내용인데, 영화 소식이 없는게 좀 신기하군요.

2020/10/11

개의 힘 1,2 - 돈 윈슬로 / 김경숙 : 별점 2.5점

개의 힘 1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개의 힘 2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 윈슬로의 대장편 범죄 소설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 해외편 무려 2위로 선정되어 있어서 관심을 두던 책입니다. 하지만 1, 2권 합쳐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기가 죽어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추석 연휴 집콕 동안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읽히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약 단속 국장 아트 켈러,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파트론 아단 바레라의 20여년에 걸친 악연과 대결을 그리는데, 실제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각색했습니다. 여러 카르텔, 여러 보스가 얽힌 이야기를 바레라 가족 중심으로 풀어내었을 뿐입니다.

우선 작품 내에서 콘도르 작전 당시 마리화나 재배지가 초토화되고, 당시 보스였던 돈 페드로의 사망, 뒤이어 티오 미겔 앙헬 바레라가 사업을 코카인 운송으로 바꾸며 조직 보스인 파트론이 되면서 조직을 3개로 나누는 건, 실제로 시날로아 카르텔이 아마도를 보스로 하는 후아레스 카르텔, 아레나요가 보스인 티후아나 카르텔, 그리고 엘차포가 보스인 시날로아 카르텔로 분리된 역사와 거의 흡사합니다.
여기에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이 생산한 코카인 유통을 도맡게 된 걸프 카르텔이 급성장하여 4대 조직이 되는데, 작품에서는 티오의 조카 아단 바레라가 지능적인 코카인 유통 혁신을 통해 카르텔 실권을 손에 쥐는 모습으로 그려지고요. 1985년 미국 요원 키키 카마레나 고문 살해 사건도 작품 안에서 어니 요원이 납치되어 고문받다가 살해되는 이야기로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아단, 라울 바레라 형제와 게로 멘데스 사이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항쟁은 시날로아 카르텔 보스 엘차포와 티후아나 카르텔 보스 아레나요 형제 간에 실제로 벌어졌던 전쟁을 거의 그대로 따 왔습니다. 대표적인게 아레나요 형제가 잘생긴 킬러 클라벨을 시켜서 시날로아 카르텔 2인자 엘구에로의 아내 레이하를 유혹하게 만든 겁니다. 레이하는 유혹에 넘어가 클라벨, 어린 아들, 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지만 클라벨에게 모두 살해되고 맙니다. 그 뒤 엘구에로는 레이하의 목과 아들, 딸이 다리에서 내던져지는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받게 되지요.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만 바뀐 채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아단 바레라가 사주한 킬러 파비안이 게로 멘데스의 아내 필라르를 유혹한 뒤 그녀와 아이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로요.

작품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후안 신부 살해 사건 - 공항에서 바레라에게 살해당하지만, 바레라와 게로 멘데스간 전쟁에 휘말려 죽은걸로 처리되는 - 도 아레나요 형제와 엘차포 간 총격전에서 티후아나 대교구장 포사다스 오캄포 추기경이 휘말려 사살된 사건과 똑같습니다. 작품에서는 후안 신부가 멕시코 정부와 여러 관계자가 마약 조직과 관계된 증거를 가지고 있어서 살해된 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실제로 오캄포 추기경 역시 티후아나 카르텔과 살리나스 대통령간 결탁에 대해 폭로하려다 살해된 걸로 알려졌지요. 게로 멘데스가 성형 수술을 받고 모습을 바꾸어 재기하려다가 아단 바레라 측 킬러에 의해 살해되는 이야기도, 후아레스 카르텔 보스 아마도가 1997년 성형수슬을 받다가 사망한 역사를 따 온 듯 하고요.

NAFTA 이후 멕시코 경제가 파탄나고, 마약 사범들이 나라를 거덜내는 과정도 실제 역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실제 카르텔간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엘차포는 체포된 뒤 멕시코 감옥에서 7년여간 편안하게 수감생활을 하다가 탈옥했다는 정도입니다. 작품에서 아단 바레라는 미국 정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연방 감옥에서 복역하는 결말이거든요.
그 외의 모든 디테일들, 예를 들어 은이냐 납이냐, 코카 콜라냐 펩시 콜라냐와 같은 협박 문구라던가, 마약 수송용 지하 땅굴, 대형 여객기 수송 등도 모두 실제 조직 이야기에서 따 왔으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렇게 실제 마약 카르텔 이야기를 극화했기 때문에 설득력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이럴거면 아트 켈러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구태여 소설로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마약 전쟁 이야기 외의 이야기는 모두 재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바레라를 뒤쫓는 아트 켈러 이야기만 해도 간단한 도청, 정보원에 의지할 뿐이고 기껏 티오와 아단을 체포해봤자 모두들 기가 막히게 빠져나가는 탓에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니까요.
또 소설로 만들면서 추가된 요소들도 거의 대부분 지루하고 뻔합니다. 이런 마약 전쟁의 뒷 배경에 중남미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걸 경계한 미국의 자금 투입과 원조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그랬으리라 짐작되는 설득력있는 설정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식상하지요. '케르베로스'. '레드 미스트' 운운하며 뭔가 있어보이게끔 노력은 하지만, 다른 이야기에서 흔히 보아왔던, 미국이 돈을 주고 키워낸 용병단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CIA 국장 존 홉스가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은폐하려고 난리를 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미국은 이미 그 이상의 추문을 수도 없이 들켰잖아요.
또 이 설정이 사실이라면, 아단 바레라가 콜롬비아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댓가로 마약을 손에 넣으려는건, 파멸의 지름길에 발을 담근 셈입니다. 구태여 들쑤셔서 체포할 필요도 없었어요. 아울러 어차피 미국이 돈을 대지 않아도, 바레라 가문이 멸족해 버려도 멕시코 마약 카르텔은 누군가 권력을 잡고 마약을 여전히 유통할 겁니다. 실제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요. 흑막이니, 음모니 하는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후안 신부와 유일하게 정의로운 멕시코 폭력 경찰 라모스 정도만 독특함과 생생함이 느껴질 뿐,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이며 단순한 탓입니다. 특히 실제 인물을 따오지 않은 창작 캐릭터들 문제가 심각해요. 고급 매춘부 노라를 한 번 볼까요? 그녀는 멕시코 대 지진 때 '우연히' 알게 된 후안 신부와 친분을 맺습니다. 그 뒤 '우연히' 만난 아단의 정부가 되는데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된 뒤, 여러가지 정보를 아트에게 제공한다는 설정입니다. 아단이 노라에게서 푹 빠져서 온갖 사업상 기밀을 전해주고, 심지어 사업 이야기에 동참시키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노라 설정에만도 우연이 여러개 겹쳐있지만, 티오와 게로 멘데스, 아단 바레라 모두 여자에게 푹 빠져서 파멸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아일랜드 낭만 킬러 칼란도 한 번 볼까요? 그는 우연히 킬러가 된 뒤, 멕시코에서 아단의 목숨을 '우연히' 구해주고, 아단과 게로 멘데스 전쟁에 끼어들어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되는걸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 뒤 '우연히' 받은 청부로 정보원이 된 노라를 보호하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에요. 마지막에는 아트를 죽이는 킬러로 고용되었다가 노라의 진심을 알고 고용주들을 쓸어버리고요. 이렇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거라면 솔직히 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게다가 칼란도 그렇고, 엘 티부론 파비안도 그렇고, 청소년 때 이미 타고난 킬러라는게 증명되었다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특수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애송이들인데 말이지요.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어야 할 아트 켈러도 이런 류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마약 전쟁에 대한 사명감으로 가족을 저버리고 일에 몰두한다는 설정인데, 별다른 매력이나 특이함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노라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정도만이 의외였어요. CIA 국장 존 홉스와 그의 오른팔인 인간 백정 군인 살 스카키 이런 작품에 나오는 악덕 CIA 국장과 그 부하와 전혀 다를 바 없어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지만 실화에 끼얹은 부분이 대부분 기대 이하, 함량 미달이라는 감점합니다. 흔하디 흔한 미국 음모론과 헐리우드식 설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각에 존재하는 높은 평가를 이해하기는 힘드네요. 이 작품보다 실화 논픽션이 훨씬 재미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일종의 종교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엘차요와 '라 파밀라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돈을 위해 살인하지 않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해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을 약탈하지 않을 것이지만, 죽어 마땅한 놈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마약을 재배하고 만들지만 절대로 마을과 멕시코 내부에는 판매하지 않고 미국에만 판다는 나름의 정의를 가진 기묘한 세력이거든요.

2020/01/10

Q.E.D iff 5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iff도 5권 째에 접어들었네요. 이번 권의 특징이라면 에피소드 두 편 모두 잔혹한 살인 사건(한 건은 미수입니다만)을 다루고 있으며, Q.E.D 특유의 현학적인 재미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추리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그런데 왠걸, 아주 좋았습니다! 직전 4권에는 간만에 괜찮은 에피소드가 수록되었었다고 소개했었는데 4권의 첫번째 이야기가 장타였면, 이번 5권은 이야기 두 편 모두 장타 이상, 심지어 두 번째 이야기는 홈런 수준입니다. 타점은 2점! 별점은 3점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이븐 Even"

대학생 아시카가 렌은 산에서 조난당한 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사고 현장에서 테시마에게 차였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어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병원에서 렌의 산소마스크를 벗기려던 누군가가 도주하다가 막다른 복도에서 사라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 뒤 가나의 탐문 조사를 통해, 렌을 찼다는 테시마가 렌에게 십여만엔의 돈을 빌렸다는걸 알아낸다. 이 사실을 가나에게 알려준 센도는 테시마가 그 빚을 갚지 않기 위해 렌을 죽이려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렌의 병문안을 왔던 또 다른 한 명인 코시모토는 테시마의 연인이었고, 테시마는 성인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렌의 독일어 노트가 독일어 시험을 볼 때 아주 유용했는데 독일어 시험지가 도난당했다는 사건 등이 연달아 밝혀졌고, 이를 토대로 토마는 진상을 추리해낸다.

등장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는 Q.E.D에서 흔하게 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 한 번의 증언이 전부가 아니라 가나의 탐문이 이어지면서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결국 세 명의 유력 용의자들이 모두 수상하게 만들어서 보다 정교한 느낌을 전해 줍니다. 테시마는 자신의 성인 클럽 아르바이트를 숨기기 위해, 코시모토는 연인에게 집적되는 남자를 죽이기 위해, 센도는 테시마를 살인범으로 몰기 위해서라는 동기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코시모토가 독일어 시험 문제를 훔치다가 렌에게 들켜서 그를 죽이려 했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게다가 가장 놀라왔던건 사건에 대해서는 세 명 모두, 즉 범인까지도 진실만을 이야기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렌이 테시마의 손수건 향을 맡고 있었다"는 코시모토의 증언은, 시험 문제를 훔치는 상황에서만 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정도입니다. 코시모토가 운동선수를 그만두고 MBA를 목표로 해외로 가려고 하는 상황도 마찬가지고요. 도주 목적이었던 것이지요.

등장하는 트릭은 변변치 않지만, 범인이 병원 막다른 목도에서 사라진 방법은 나름 그럴듯 했습니다. 옷을 집어 던진게 사람이 그 쪽 방향으로 뛰어간 것 처럼 보였다는 이유인데, 우연이라도 실제로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치게 머리를 쓴 작위적인 트릭보다는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였거든요. 코시모토가 마라톤 선수라는 설정을 활용한 트릭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그런데 세세한 문제가 몇 가지 눈에 띕니다. 가장 큰 문제는 병원에서의 살인 미수도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코시모토는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렌이 식물 인간이 된 게 아니라면, 언젠가 의식을 회복해서 코시모토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걸 증언할게 뻔하잖아요? 서둘러 해외로 도주하지 않은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이야기 결말을 보면, 토마의 추리 이후 머지않아 렌이 깨어나 사정청취를 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렌의 노트가 있으면 독일어 시험에 큰 도움이 되는건 모든 학생이 알고 있으며, 연인 테시마가 그 노트를 빌렸는데 왜 독일어 시험 문제지를 훔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토마의 주장도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렌의 실족이 살인 미수라는 주장에, 코시모토는 왜 렌의 자살 미수가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토마는 병실에 누군가 침입해서 렌을 죽이려 했다는게 증거라고 이야기하죠. 자살 미수였다면, 누군가 침입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 죽으려 했을거라고 단정하면서요. 그러나 바로 직전에 읽었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에 따르면, 자살을 실행했던 사람은 대부분 자살 시도 자체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통계적인 수준이지만, 토마의 단정은 섣부른 감이 없잖아 있는 셈이지요.

그래도 나름 합리적인 전개는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동안 졸작이 많았기에 이 정도면 평균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불완전한 밀실"

타카마츠씨가 밀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밀실 안에는 쓰러져있던 간호사 이타미 사요코가 곧바로 체포되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풀려났다. 미즈하라 경감이 진짜 범행 장소를 알아낸 덕분이었다. 또 다른 범행 장소가 일찍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는 1년 반 전 발생했던 클럽 화장실에서 하치오라는 여성이 살해된 사건 탓이었다.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었던 이타미 다케오는 가혹한 취조를 받은 뒤 자살했는데, 당시 검사가 타카마츠씨였고 이타미 사요코는 다케오의 모친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확한 동기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초, 중반부까지는 '불완전한' 밀실 살인의 수수께끼를 푸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결국은 복수극이었다는 전개가 독특한 작품입니다. 복수극이었기 때문에 범인인 이타미 사요코는 불완전한 밀실을 만든겁니다. 본인이 용의자로 체포되기 위해서였지요. 이 과정은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또 도화선이 된, 1년 반 전의 하치오 살인 사건은 시체가 아직 살아있는 것 처럼 위장한 뒤, 문 뒤에 숨었다가 구경꾼인 체 한다는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아주 현실적이에요. 복잡하지도 않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높으니까요.

물론 CCTV도 있었을 테고, 현장에 있던 구경꾼들의 명단을 경찰이 입수하지 않았을 이유도 없다는 것, 그리고 클럽에 중년 이상의 여성이 숨어들어간게 들통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이타미 다케오였는데,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가족이나 청부 살인을 의심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악덕 커리어 경찰 미야코가 이타미 다케오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증거까지 조작해가며 그를 몰아붙였다는 이유로 상쇄됩니다. 또 복수귀로 변한 이타미 사요코가 미야코 살해로 복수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면도 아주 좋았고, 이 모든걸 예상했던 것으로 보이는 미즈하라 경감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아울러 본편과는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토마가 경찰청의 타나바타 경위를 처음 만났을 때 '경찰청 형사 분이시죠?'라고 알아채고 묻는 장면도 기억에 남네요. 가나와 타나바타는 토마가 말투, 신발에 묻은 흙같은걸로 대단한 추리를 벌였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미즈하라 경감이 토마에게 연락했던 것입니다. 추리라는게 그렇게 대단한건 아니라는 반증으로 보여 흥미로왔어요.

신 캐릭터 타나바타 경위의 등장은 불필요했다는 점, 미야코의 증거 조작 등의 행각은 아무리 만화지만 지나치다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명확한 동기에 트릭도 안정적이며, 전개까지 발군인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2019/08/11

브루투스의 심장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1.5점

브루투스의 심장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한정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로, 1989년에 처음으로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범행이 먼저 등장하는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입니다.

작가 생활 초창기에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라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풍과는 사뭇 다른게 특징입니다. 흡사 70년대를 풍미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같았어요. 기차 시간표는 아니지만 상당히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과 재벌 가문의 문란한 생활, 출세를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 야심가, 등장인물마다 엮여 있는 콩가루같고 불우한 가정사 등 모든 설정이 흡사한 탓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서 거의 보기 힘든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인기를 얻기 전 무명 작가 시절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 시대의 인기작을 분석하고 따라해서 어떻게든 인기를 얻어보려 했던 결과물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답다 싶은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악녀 야스코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꽤나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 돋보입니다. 최초에 등장한, 3명이 실행하는 사체 이동 계획부터 꽤 흥미롭습니다. 오사카, 나고야, 도쿄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잘 계산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나오키의 말대로 2명이라면 모를까, 3명이 실행하는 계획은 경찰도 쉽게 예상하기 힘들었을테고요.
두 번째 범행인 만년필을 이용한 살인도 그럴듯합니다. 만년필 잉크를 넣는 곳에 청산가리 결정을 넣어 놓고 잉크를 넣으면 청산가스가 발생하여 사망한다는 트릭인데, 청색 잉크만 산성을 띄고 있어서 청산가스가 발생한다는 등의 과학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든요. 이공계 출신 작가다운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마지막에 다쿠야가 야스코를 살해한 방법도 기발하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미리 야스코의 방에 잠입해서 찻주전자 주둥이 안쪽에 청산가리를 발라 놓은 후, 저녁에 당당하게 방문해서 차를 직접 끓여마시게끔 유도하여 살해하는 계획으로 완벽하게 성공하니까요. 야스코도 이미 2명이나 살해된 상황이라 다쿠야를 조심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탄 차에 독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지요.

그러나 초기작인 탓인지 모두 헛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사체 이동 계획은 나오키가 나고야에서 오사카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신칸센을 탔어야 했고, 다쿠야 역시 이용한 차량을 처리할 때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다쿠야는 이 때문에 덜미를 잡히죠.
두 번째 청산가스 살인도 경찰이 현장 조사할 때 가스가 남아 있어서 들통난다는 점에서는 완벽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마지막 트릭 역시 다쿠야가 직접 야스코의 집을 방문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운 좋게 들키지 않았을 뿐이니까요. 

물론 사람이 만든 계획에 헛점이 있는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를 작중에서 형사들이 치밀한 수사를 통해 밝혀내는 것도 볼거리로 이런게 도서 추리 소설의 묘미이기도 하고요. 정작 문제는 이야기 자체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3명의 사체 이동 계획부터 애매합니다. 애초에 나오키가 고로의 약점을 잡아 청부 살인까지 시킬 수 있었다면, 그냥 고로를 시키면 됩니다. 알리바이고 뭐고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한 명이라도 적은게 낫잖아요? 이야기를 보면 고로와 나오키의 연결 고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 고로에게 청혼을 받은 나오키의 비서 유미에마저 모르니 완벽한 청부 살인이 되었을겁니다.

또 하시모토와 다쿠야를 끌어들이는 이유도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나오키가 트럼프 카드 마술이 특기라는 설정도 고로의 존재 때문에 말이 안됩니다. 그냥 뽑으면 되죠. 최악인 살인이 걸린다면 고로를 시키면 되니까요. 다른 살인을 뽑은 관련자에게 빚을 지게 만들 수도 있고요. 이런걸 대단한 단서인 것 처럼 흘릴 이유는 없습니다.

진범 고로가 야스코 대신 나오키를 살해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살의를 품을 만큼 원한이 깊었다는 설명도 없을 뿐더러, 그랬다면 진작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모를까 왜 이 때 저질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사체 이동 계획에 대한 종이가 차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시체가 야스코가 아니라 나오키였다'는 충격적인 설정을 제대로 설명할만한 합리적인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나오키를 죽인건 살인까지 시켜서 살의가 폭발했다고 치죠. 그러면 시체 이동 계획에 참여한 하시모토와 다쿠야까지 죽이려 한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었는지 먼저 간을 보는게 순서였을텐데 말이죠. 시체가 발견되어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된 마당에, 연이어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아무리 봐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수사 와중에 직접 나서서 야스코를 죽이고 마지막에 고로까지 살해하려한 다쿠야의 정신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류의 설정이 너무 과한 것도 문제입니다. 주인공인 다쿠야가 온갖 어려움을 혼자 힘으로 이겨낸 자수성가형 엘리트이자 야심가라는건 흔해빠지긴 했어도 봐줄만은 합니다.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의 근거로는 타당하고요. 그러나 니시나 나오키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후계자가 되었으며, 아버지 도시키를 증오한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3인 살인 계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로봇이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위장한다는 설정도 말이 안됩니다. 실제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로봇 '나오미'는 바로 폐기되고, MM 중공은 그 뒤로도 잘 나가고 있으니 무의미한 복수였어요. 차라리 로봇을 이용해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걸 널리 알리는게 더 효과적이었을겁니다.
니시나 가문의 딸 호시코의 방자한 행동이라던가, 니시나 도시키의 문란한 사생활 역시 콩가루 재벌집 설정을 드러내는 역할 뿐입니다. 특히 니시나 도시키와 야스코의 관계는 충분히 재미있게 가져갈 수 있는 소재였는데 이래저래 이상하게 소모된 느낌이에요. 

마지막의 열린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다쿠야가 고로의 존재를 눈치챈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쿠야는 고로를 살해할 이유는 없었어요. 경찰에 고로가 나오키를 죽였다고 알리면 그만이죠. 다쿠야가 시체 운반을 맡았던 이유는 예비 처남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고 하면 문제 없었을겁니다. 설령 3인 살인 계획의 증거인 연판장이 남아있었더라도, 이미 2 명은 확실하게 살해한 고로보다는 다쿠야 쪽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죠. 오히려 야스코 살인까지 고로가 뒤집어 썼을 거에요. 어차피 누가 죽였는지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쿠야가 만든 브루투스가 오작동하여 다쿠야를 죽인다는 결말은 솔직히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로봇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 소재도 아닌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등장해서 이야기를 끝맺는건 이상하다 싶었어요. 인간보다 로봇이 우수하다고 주장했던 다쿠야의 죽음으로는 어울린다 싶기도 한데, 그동안 뛰어난 엘리트의 모습을 보여왔으니 마지막 로봇을 이용한 범행도 멋지게 성공하는게 더 설득력은 높지 않았을까요?
그 외에도 세세한 문제점들이 많아서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재벌 가문과 야심가, 알리바이 트릭이라는 3위 일체는 이미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질릴 정도로 써 먹기도 했고요. 거장이 되기 위해 겪었던 시행착오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06/11

후쿠오카 살인 - 김성종 : 별점 1점

후쿠오카 살인 - 2점
김성종 지음/뿔(웅진)

국내 추리문학의 거목인 김성종 선생님의 근간입니다만, 단언컨데 그 동안 읽은 책 중에서도 최악을 다툴만합니다. 감히 '작품' 이라는 표현을 붙이기도 어려운 지경의 종이 무더기에요. 얼마전 "하카다 돈코츠 라멘즈"가 '나무야 미안해' 수준이라면 이건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수준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최악입니다.

지나와 봉수 부부, 세호와 서라 부부가 등장하고 그들이 각자 상대방 배우자들과 불륜을 저지른다는 시대착오적인 도입부 설정부터 가관입니다만, 유지나가 이세호를 시켜 서봉수를 죽이기 위한 일본 여행을 떠나는 본편이 시작되면서 더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먹고살기 힘든 인쇄소 사장에 불과해 보였던 이세호의 정체가 사실은 국내 위조 조직에서도 거물인 범죄자로, 과거 살인을 포함한 수 없이 많은 범죄를 저지른 변장의 달인이자 범죄의 황제라는 진상은 어이를 상실케 만듭니다. 알고 보니 옆집 남자가 팡토마고르고 13이었다는 건데, 이렇게 설정을 변경하려면 최소한의 설득력은 보장해 줬어야 합니다. 뜬금없기가 과거 김삼 화백 만화를 수준이에요.

더 웃기는 것은 이세호가 개중 나은 편이라는 겁니다. 여성들 캐릭터는 모두 삼류 성인 만화에나 나옴직한 색정광들로 이해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그 중에서도 형사 구밀라 캐릭터는 최악 오브 더 최악이에요. 섹스 중독증이라는 설정부터가 유치하지만,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는 상황은 뭐라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더블맨을 만나기 위해 먼저 위조업자 황사장과 관계를 갖고, 한국과 일본 양국 경찰에게 쫓기는 흉악범이 된 더블맨 이세호와 마지막에 관계를 갖는 식이니까요. 섹스 중독증에 걸린 이유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어렸을 때의 성폭행 때문이라는데 요새 삼류 성인만화도 이렇게 막 나가지는 않을것 같군요. 게다가 이 조교로 육노예를 만든다는 싸구려 성인물 설정을 구밀라 한명 뿐 아니라 미치코라는 다른 여성에게도 써먹는 건 정말이지 어안이 벙벙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최악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이세호가 일본에서 위조지폐를 구태여 쓴 행위부터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깟 잔돈푼이 뭐가 중요해서 청부살인을 앞두고 사건을 일으켰을까요? 자신의 위조 기술을 괴신했다기에는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서봉수가 유지나를 청부 살해하는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유지나와 이세호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에서 유지나를 죽일 하등의 이유는 없어집니다. 이혼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니까요. 게다가 유지나가 살해된 이후는 더 문제입니다. 적극적으로 피해자 남편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두 여성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섹스나 하려고 하는데 이건 말도 안되잖아요. 경찰이 자신을 찾아온 것도 잊어버렸단 말인가요?
서봉수가 문서라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대응도 최악입니다. 당연히 이세호의 불륜을 눈치채고 쳐들어온 것이라고 둘러댔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주역을 보는 것도 참 오랫만이에요.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도다이, 미치코가 유지나를 죽이기 위해 아무런 연고 없는 부랑자를 동원하여 일종의 자살 테러를 하는 정도인데, 이 역시 미치코와 범인간의 관계를 작위적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목처럼 일본 홋카이도에서 후쿠오카에 이르는 장대한 여정을 녹여낸 것 만큼은 나쁘지 않습니다. 등장하는 여행 코스도 꽤 그럴듯하고요. 허나 일본 여행 역시 결정적 문제가 있습니다. 작품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일본에서 살해하는게 여러모로 더 쉽다? 무슨 근거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일본도 나름대로 유능한 경찰력을 보유한 선진국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이 책을 읽으면 일본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무모한 행동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 여행 설정은 아무래도 일본에 대해서 잘 알고, 많이 가 봤다는 아는 척에 분량을 늘리기 위한 꼼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에 대해 장황하게 풀어내는 등 작품과 상관없는 작가 개인 생각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김성종 선생님이 척박한 한국 추리 문학을 어떻게든 일으켰던 이 바닥의 거목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항상 존경하고 있고요. 그러나 이 쓰레기만큼은 도저히 용서가 안되네요. 과거의 좋은 기억만 안고 가는게 훨씬 좋을 뻔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쓰레기만큼은 주의하시고 피하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2017/05/27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 - 키사키 치아키 / 박춘상 : 별점 1점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 - 2점
키사키 치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살인 청부회사의 신입사원 사이토는 인구의 3%가 킬러인 마굴 후쿠오카로 파견되어 첫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하카타 시장과 시장이 고용한, 무나가타를 리더로 하는 킬러 4인조, 다국적 마피아 화구회, 사립탐정 반바와 화구회에게 배신당한 킬러 린 시안밍간 싸움에 휘말리고 말았다.
킬러 린 시안밍은 어렸을 때 팔려와 화구회에 의해 킬러로 키워졌으나, 화구회의 리더 장에게 불만을 품던 와중에, 여동생 등 일가족은 모두 그에게 살해당했고 자신은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겨우 사지에서 벗어난 린은 복수를 위해 화구회가 지목한 타겟인 사립탐정 반바와 손을 잡는데... 

라멘에 대해 좀 정리할게 있어 뒤적이다가 충동적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그런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 말하기도 어렵네요. 일단 후쿠오카 인구의 3%가 킬러고, 누구나 킬러나 복수 대행업자를 고용한다는 설정이야 그렇다 쳐도, 내용 전개가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보통은 킬러가 등장하는 작품이라면 타겟을 어떻게 살해할지에 대한 고민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자칼의 날"이나 "피닉스"처럼요. "고르고 13"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이 작품 속 킬러들은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그냥 찾아가서 죽이고 끝! 입니다. 죽이는 것도 칼이나 손, 폭탄 등 주특기를 이용한다는 만화같은 설정이 전부고요. 이바노프가 린을 죽이려고 할 때 맨손만으로 죽이려고 하면서 강철같은 육체 어쩌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영화 "언터처블"도 안 봤을까요? '총싸움에 칼을 가지고 오는 멍청이가 어딨나'. 이바노프는 린에게 죽어도 쌉니다.
그나마 작전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복수 대행업자 지로가 초등학생 꼬마 미사키와 함께 다니면서 타겟의 경계심을 풀어놓는다는 것, 린이 이바노프에게 죽기 직전 사용하는 피스톨 나이프, 반바가 거미 모양 도청기를 활용하는 것 정도에 불과합니다.

또 킬러가 다수 등장하지만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는 전개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화구회 장이 구태여 킬러 시안밍을 자극한 후 사무실로 끌어들여 부하들을 그냥 버리는 패로 쓴다는 식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렇게나 모르다니. 작가는 그냥 액션 장면을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최소한의 설득력은 있었어야 합니다.  
킬러들이 대놓고 활개치는 이유를 시장이 경찰 등 하카타 시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역시 말도 안됩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킬러를 고용하면서까지 반대파를 숙청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경찰을 시켜 누명을 씌우고 쳐 넣으면 될텐데요.

마지막 반전이랍시고 들어간 니와카사무라이의 정체도 너무 뻔합니다. 반바의 조작질이 직전에 묘사될 뿐더러, 반바와 같은 주인공급 인물이 맥락없이 죽었다고 목만 달랑 등장할리 없으니까요. 게다가 완전히 설정 오류인게 이 정도의 실력자가 화구회의 의뢰를 받은 후 움직일 이유는 없습니다. 시게마츠의 의뢰를 받은 시점에 시장을 포함해서 나쁜 놈들을 그냥 다 죽여버리는게 낫잖아요?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이렇게 화구회와 시장 부하를 쓸어버리면 니와카사무라이가 배신했다는 것이 이 바닥에 쫙 퍼지는건 기정 사실일터라 '킬러를 죽이는 킬러'라는 설정에 반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는 것도 문제고요.

킬러들이 서로 엮이는 과정도 작위적이라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입니다. 시장의 변태 살인마 아들 유스케를 축으로 그가 벌인 범죄 때문에 이런저런 킬러들이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는데, 모든 이야기가 우연이에요. 사이토가 사건에 엮이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원래 사이토의 타겟인 무라세 준은 지로의 타겟이라는 것이 첫번째 이유인데 이것부터 말이 안되지요.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도대체 킬러 몇명이 달라 붙는건지... 사이토가 무라세 준으로 오해받아 지로에게 납치되어 죽을 뻔 하다가 안면을 트게 된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무라세 준이 유스케의 친구인데, 유스케와 함께 사람을 때려 죽여서 시장 부하 무나가타 4인조가 먼저 죽인다는 것도 황당합니다. 뒤이어 무나가타 4인조가 유스케의 다른 범죄를 만취한 사이토에게 뒤집어 씌우는 과정도 너무 작위적이고요. 이것 때문에 사이토가 지로에게 복수를 의뢰해서 지로가 무나가타 4인조를 노리게 된다는 이야기에 이르면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집니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야기 최고의 쓰레기 유스케가 맞는 비참한 최후 뿐인, 당위성을 생각하기 보다는 화끈한 액션을 즐기 위한 액션물입니다. 과거 스탤론이나 아놀드, 이후의 시걸, 최근의 제이슨 스탠덤 영화처럼요. 하지만 이런 액션물이 소설로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게다가 영화나 만화였어도 화면, 작화가 별로라면 혹평을 받아 마땅할 내용으로 소설로 읽기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종이 무더기에 불과했습니다. 요새 말로 하자면 '나무야 미안해' 급이에요. 감히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17/02/10

바텐더 - 윌리엄 래시너 / 김연우 : 별점 2.5점

바텐더 - 6점
윌리엄 래시너 지음, 김연우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떠돌이 바텐더 저스틴 앞에 정체불명의 노인 버디 그래클이 나타났다. 버디는 수 년 전 저스틴 어머니 살인 사건의 범인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자신이 청부를 받아 진행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가 의뢰했는지 알고 싶으면 1만불을 달라고 요구하는데....

바텐더가 오래전 살인 사건 진상을 찾아나선다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예전 어딘가에서 책 소갯글을 보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이지요. 제목과 간단한 줄거리 소개가 상당히 흥미로왔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법 두꺼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몰아쳐서 하룻만에 읽어버릴 정도로요. 이야기의 도입부부터 인상적입니다. 어머니의 살인범이 아버지라는걸 고발했던 기억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벗어났는데,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나타나 사실은 자기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밝힌다!는 이야기를 짧은 도입부 안에서 긴장감 넘치게, 완벽하게 서술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정말로 어머니를 죽인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도저히 다음 장을 안 읽을 수 없었습니다. 최근 읽었던 작품들 중 가장 괜찮았던 도입부였다 생각되네요. 

사건을 개인적으로 파고드는 바텐더 저스틴 나름의 수사 활동도 그럴싸합니다. 과거 로스쿨 출신이라는 배경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우직한 인터뷰, 탐문 중심의 조사만 벌이는게 무척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조사를 시작한 후 의미있는 단서를 손에 쥐게 되는 것도 이모와 형과의 인터뷰부터 였다는 점 역시 설득력 높은 전개였고요.

또 이 작품만의 특징인데, 제목에 걸맞게 칵테일 활용이 아주 탁월해서 눈길을 끕니다. 그 중에서도 모든 단락의 소제목을 칵테일과 다양한 술, 음료수 이름으로 구성한 것이 아주 괜찮았어요. 마구잡이로 붙인 것이 아니라 단락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내용에도 술이 적절하게 인용됩니다. 알콜 중독자 버디(던)을 낚기 위해 조니 워커 블루 라벨로 유혹한다던가, 아버지의 옛 불륜 상대 애니를 찾아간 저스틴이 그녀의 냉장고 속 다이어트 진저에일, 썩어가는 딸기, 말라 비틀어진 라임, 싸구려 보드카로 스트로베리 뮬을 만들어 준다는 식으로요. 해고된 저스틴이 친구 코디에게 총을 구입해달라며 최고급 데킬라 테존 아녜호를 주는 장면도 빼 놓을 수 없겠군요.
제가 칵테일, 술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라 더 즐길거리가 많았던 것 같은데, 여튼 이러한 요소들은 던이 코디에게 보험 사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복선 등에서 활용되는 디테일과 함께 작품의 짜임새를 높여줍니다.

그러나 추리, 범죄 소설로 볼 때 너무 별 볼일 없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첫 번째로, 아버지의 작전은 너무 별볼일 없습니다. 플린이 증언 철회를 하기 위해 그냥 두어도 되는데 왜 죽였을까요? 그를 죽이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비밀이 있는 진범이 있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게 과연 합리적인 시나리오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단순 사고로 처리될 위험도 있고, 결국 사람을 더 죽여야 하는 위험부담을 짊어져야 하니까요. 이보다는 플린 증언 철회를 통한 재심을 일단 시도해보는게 더 낫지요. 

또 아내의 불륜과 그에 따른 범행 조작 역시 증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재닛 모스가 몇년이 지난 후 죄책감으로 자살했다? 죽일만큼 미워한 여자가 죽었으면 두다리 쭉 뻗고 자면 잤지 자살했을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랬더라도 살인을 청부했다는 증거는 절대로 찾을 수 없었을테고요. 한마디로, 유죄 판결을 뒤엎을만한 증거는 전무합니다.

두 번째로, 버디 그래클(던)의 모든 행동이 말이 안됩니다. 제이크를 찾아와 자신이 범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도입부부터요. 왜 데릭이라는 유능한 하수인을 두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이 1만불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까요? 푼돈 벌이라도 하려는 의도였다고 칩시다. 그래도 저스틴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던이 협박, 회유 중에 데릭을 이용하여 제이크를 위협하는 것도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저스틴이 사건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굳히고 더 열심히 조사에 나서게 만드는 결과만 초래했으니까요. 성과는 없고 뭘 기대했는지도 알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럴 바에야 데릭을 시켜 빈집을 터는게 훨씬 나았을테지요. 그나마 여기까지야 괜찮다쳐도, 던이 최후의 순간에 애니의 집에 침입해서 칼부림을 한건 최악 중의 최악입니다.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역시나 없지만, 끔찍할 정도로 작위적인 탓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집에 살인범이 침입하지만 백마탄 왕자가 구해준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클리셰의 반복에 불과해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되는 죽은 어머니의 장신구들도 도대체 어디서 났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사건이 현재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중요한 증거품인데 이게 어디서 났을까요?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요소들이 많은 작품이 좋은 작품이기는 힘들겠지요.

저스틴 캐릭터 역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드보일드 황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냉소적인 성격과 입담은 나쁘지 않습니다. 허나 술이나 다른 자극적인 것 모두 입에 대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으며 오로지 명상과 요가로 자신을 다스리는 구도자적인 인물이라는 것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장황합니다. 사실 작품과 별 상관도 없는 설정인데, 그냥 너무 멋을 부린 느낌이에요. 구도자처럼 사는데 불구하고 여자는 왜 이렇게 밝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고요. 그냥 아픈 과거가 있는 바텐더 정도가 적당하지 않았을까요? "바텐더"의 사사쿠라 류 처럼 손님의 심리와 느낌을 잘 파악하는, 한마디로 '눈치'가 빠르다는 바텐더의 특기를 잘 살려 사건 수사와 연결했더라면 훨씬 더 제목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었을텐데, 책 속 묘사로는 바텐더의 기술과는 무관한 저스틴의 수도승같은 생활이 더 중요하게 묘사되어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던과 다른 청부업자들의 힘 센 도구 역할을 하는 데릭은 도무지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않아요. 너무 눈에 띌 뿐더러 범행도 지나치게 많이 저지르는데 그냥 공기와 같은 인물이라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건에서 손쉽게 빠져나가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비현실적인 인물을 이야기에 개입시키는 것보다는, 던과 데릭을 합쳐 실제로 몸을 써서 사람을 죽이는 보다 사악한 악당을 그려내는게 대결 구도에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지만 여러모로, 특히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한데, 개인적으로는 눈치빠른 바텐더와 미녀 단골 손님이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 이야기가 더 좋지않았을까 싶네요. "구석의 노인"의 변주처럼요.

2016/11/18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3점

천사들의 탐정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2014/01/24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 - 표창원 : 별점 3점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 - 6점
표창원 지음/지식의숲(넥서스)

유명했던 국내 사건들에 대해 소개해 주는 논픽션입니다. 시사저널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인데, 연재물을 꾸준히 읽고 갈무리까지 한 저에게는 별로 새로운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냥 한 권으로 모아서 다시 읽었다는 정도의 의미 뿐이지요.

그래도 한 권의 단행본인 덕분에 가지게 된 장점도 많습니다. 먼저 표창원 씨의 일관된 시각 - 범인은 엄정한 죄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 - 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미제사건인 제주도 여교사 사건 등을 재조명하여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천명하는 부분 등이 그러합니다.
또 부산의 한 교수가 아내 살해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변호사를 동원해서 20년 형을 선고받았던 사건, 유명한 시체 없는 사건의 피의자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이 대비되는 효과도 단행본이기에 지니는 장점이었고요.
연재물에서는 보지 못했던 짤막한 해외 사례 및 중간, 중간에 토막 상식처럼 들어간 표창원 씨의 생각도 눈여겨볼 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고 가치가 반감되는건 아닙니다. 사건 중에서는 애 키우는 아빠라 그런지 유괴사건들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모든 사건에서 유괴 초반에 이미 아이가 살해당하는 이유는, 범인도 처음에는 죽일 생각까지 없었는데 아이의 칭얼거림, 보챔 등의 행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치닫게 된다는 분석 등이 인상적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유괴범은 괴물이 아니라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아이에게 교육을 정말 잘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지강헌 사건의 이유가 이른바 사회보호법 때문에 556만원이라는 단순절도에도 무려 17년형을 선고받은 탓이 가장 컸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입니다. 저라도 미쳐버릴 형량이긴 하죠. 살인범도 한 20년형 선고받는 게 고작인 세상인데.... 어떻게 보면 현대의 장발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그러나 약간 아쉬운 부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사건의 주요 인물과 관계된 단체, 회사를 어떤 사건에서는 애매하게 등장시킨 부분인데 법률적인 문제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의아했거든요. 예를 들어 장영자 사건에서 사위와 며느리인 탤런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인데, 인터넷 좀 뒤져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이라 구태여 숨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아울러 사건의 범인들의 현재까지 취재하여 엄정한 심판이 이루어졌는지, 관계자들의 근황은 어떠한지까지 알려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이미 출소하였을 윤금이 사건의 범인인 케네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있는 수지킴 사건의 윤태식의 근황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윤태식의 경우는 얼마 전 여대생 청부살해 사모님과 같이 편안한 징역생활을 하고나 있지는 않은지 걱정도 되니까요.

여튼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범죄를 다룬 논픽션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책으로 범죄, 사건을 다룬 논픽션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 중에서도 이 글들을 아직 다른 매체로 접하지 않으신 분들께는 추천드립니다.

2011/10/31

철의 선율 - 데즈카 오사무 : 별점 3점

타쿠야는 여동생과 절친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살인 사건을 목격한 뒤, 사건의 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건은 친구 에디가 속한 마피아 조직 아르바니 가문의 청부였고, 타쿠야는 에디에 의해 양팔을 잃고 버려졌다. 그러나 타쿠야는 초능력을 이용해 강철 의수를 조종하는 능력을 얻은 뒤 복수를 시작한다...

표제작 중편 외에도 서스펜스 심리 멜로 "하얀 환영"과 타임슬립 로맨스 "레볼루션"이 실려 있는 데즈카 오사무 만화전집 문고본입니다. 우연찮게 구해서 읽게 되었네요. 

표제작인 "철의 선율"은 근래 "풀어헤드 코코"의 작가 요네하라 히데유키가 장편인 "다이몬즈"로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사실 별 기대를 한 것은 아닌데 상당히 괜찮더군요. 표지만 보면 초인물 같은데, 의외로 하드하고 진지한 복수극입니다. 복수를 위해 강철 의수를 조종하는 능력을 익혔지만, 의수가 타쿠야의 무의식 깊은 곳의 지시까지 받아들여 걷잡을 수 없이 살육을 펼친다는 아이디어가 무척 좋아요. 이 아이디어를 극대화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모두를 증오한다고 절규하는 타쿠야와 그를 둘러싼 에디, 경찰들의 뒤로 의수가 기어오는데 와, 정말 대단했습니다. 조금 설정을 더 보여주고 이야기의 밀도가 깊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 특히 에디의 개심은 이해가 잘 되지 않음 - 은 있지만, 지금도 먹힐 만한 멋진 복수극입니다. 

이어지는 두 편의 단편 중 첫 번째인 "하얀 환영"은 조난 사건에 휩쓸린 여주인공이 연인 노리오의 마지막 순간을 망막 속에 새긴 채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로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 즉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의 각막을 이식받은 소녀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 각막 속에 뭔가 새겨진다는 측면에서 말이죠. 그러나 우직한 분위기와 결말까지 깔끔했던 "블랙잭"에 비하면 초반부의 심리 서스펜스 분위기에서 순애물로의 전환이 너무 급작스러운 등 전개면에서 어설프고 너무 뻔한 느낌이 드는 등 많이 부족했습니다. 마지막 여운을 남기는 엔딩 정도만 괜찮았어요. 여러모로 평작 수준에서는 살짝 아래입니다.

마지막 작품 "레볼루션"도 소품입니다. 중상을 입은 아내 야스에가 정신이 든 뒤, 자신은 홋타 미치코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영혼 타임슬립물이지요. 그려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전공투 시대를 암시케 하는 몇몇 설정이 눈에 뜨입니다. 암울한 미래관도 뭔가 전공투 시대를 떠오르게 하고요. 그러나 딱히 새롭거나 인상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몇몇 장면은 독특했지만, 주인공이 그 고생을 하고도 아기의 이름을 테츠지라고 짓는 이유도 설명되지 않는 등 허술한 점도 많은 편입니다. 역시나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이렇듯 평범한 소품들이 감점 대상이기는 하나 핵심 중편 "철의 선율"이 시대를 넘어 지금도 재미와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근래 개작(리메이크)된 것이 이해가 됩니다. 개작된 작품은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증오의 감정으로 현실을 초월한다"가 갈수록 희석되어 뻔한 이능력 배틀물이 되어버린 탓에 읽다가 포기하기는 했지만...

2010/08/22

마인드 헌터 - 존 더글러스, 마크 올셰이커 / 이종인 : 별점 3점

마인드 헌터 - 6점
존 더글러스.마크 올셰이커 지음, 이종인 옮김/비채

프로파일러 존 더글러스의 회고록입니다. 저자는 FBI 수사지원부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며 수백 명의 연쇄 살인범을 검거한 경력자로, 책에서도 살짝 언급되지만 <양들의 침묵> 수사관의 모델이라는 전설적인 수사관입니다.

저자가 직접 수사과정에 참여했던 잔혹한 범행들에 대한 수사과정을 비롯하여 범인들과의 인터뷰와 분석 등 '프로파일링'이라는 기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리소설에 그대로 사용해도 괜찮을 듯한 소재들도 굉장히 많고요.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내의 청부살인으로 죽을뻔한 경찰 수사관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너무 잘 짜여져서 수사가 미궁에 빠질 수 있었지만, 결국 수사의 단서가 된 것이 '고액의 전화요금' 이라는 사소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잔혹한 사건 대부분에서 '프로파일링'을 통해 도출된 범인의 이미지와 범인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건 조금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현실적으로 100% 적중률은 아닐테니, 프로파일러의 실수담도 등장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죠... '회고록'이라는 책의 속성상 무리였을까요?

소설은 아니고 사건들이 토막토막으로 이어지는 논픽션 에세이기에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긴 하지만, 재미와 더불어 자료적 가치도 높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지만 회고록이기 때문인지 저자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아서 감점합니다. '프로파일링'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9/10/18

봇코짱 - 호시 신이치 / 윤성규 : 별점 3점

봇코짱 - 6점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지식여행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


일본 플레이보이지가 선정한 올타임 일본 미스테리 베스트100에 당당히 선정된 작품으로, 리스트를 접한 뒤 곧바로 구입한 책입니다. 호시 신이치 작품은 20여년전에 읽었던 "신선함을 드립니다" 이후에도 많은 단편 앤솔로지를 통해 접할 기회가 많긴 했지만 장단점이 너무 명확해서 선뜻 구입하기는 망설여졌었는데 제가 귀가 얇은 탓인지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이런 류의 리스트에 약해서 선뜻 지갑을 열게 되었네요.

하지만 작품은 역시나, 장단점이 너무나 명확한 호시 신이치의 전형적 작품들로 이루어진 책이었습니다.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뭐니뭐니해도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제일 크겠죠. 이른바 "쇼트쇼트"라는 콩트 형식으로만 수록 작품들이 이루어져 있기에 부담없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작가 특유의 의표를 찌르는 반전과 이른바 "기묘한 맛" 류의 독특함이 잘 살아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SF, 추리, 범죄 스릴러, 판타지 등 다양한 쟝르를 선보이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너무 많은 작품을 써내려가다보니 생긴 일이겠지만 유사한 분위기와 설정의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입니다. 작품의 주제도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진상" 이나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을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말이죠.... 또한 뒷끝이 좀 허무하고 씁쓸한 작품도 적지 않다는 것도 다작의 탓이 아닐까 싶네요. 덕분에 작품들의 편차도 제법 큰 편입니다.

그래도 간만에 접한 쇼트쇼트 작품집으로 충분히 쉽고 재미있게 읽었기에 나름 만족합니다. 책도 아주 이쁘고 나와서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왜 "일본 미스테리 올타임 베스트 100"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모든 작품이 쟝르문학이긴 해도 추리 성향을 띈 작품은 정말 몇개 안되거든요. 저처럼 추리쪽을 많이 기대하고 읽으신다면 실망하시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개를 소개합니다.

"봇코짱" - 표제작으로 바텐더가 만들어 가게 홍보에 사용한 미녀 로보트와 그녀에게 반한 남자, 그리고 예상을 깨는 결말을 다룬 이색 SF입니다. 굉장히 짤막한 쇼트쇼트임에도 너무나 단순한 남자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봐, 나와!" - 한 마을에 생긴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구멍, 그리고 그 구멍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너무나 끝없이 사용하는 인류 앞에 섬뜩한 반전이 펼쳐지는 SF로 "일본 SF단편 올타임 베스트" 에 선정되기도 한 좋은 작품입니다.

"살인청부업자입니다" - 추리성향의 쇼트쇼트로 이색 살인청부 비즈니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범죄" 자체를 확인할 수 없고 때문에 "범죄"로서도 성립하지 않는 너무나 완벽한 살인청부 비즈니스! 주인공의 직업이 드러나며 밝혀지는 진상과 반전이 깔끔한 작품입니다.

"포위" - 누군가 나를 죽이려한다는 것, 그래서 그 배후를 쫓는 주인공을 그린 쇼트쇼트입니다. 스릴러물에 흔하게 등장하는, "위기에 처한 주인공"에서 시작해서 주인공이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까지는 뻔하게 흘러가는데 진상과 반전이 굉장히 이색적이더군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통념을 깨는 결말이었거든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죽이고 싶어한다" 는 것. 충분히 설득력있고 무서운 내용이었어요.

"더위" - "더위"를 참지 못하고 여름마다 곤충 등을 죽이며 겨우겨우 버텨온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죽음의 대상도 업그레이드 되어 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기묘한 맛" 류의 섬뜩한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이러한 쟝르 전체를 놓고 따져보더라도 굉장히 높은 점수를 줄만한 명작이죠. 호시 신이치 작품 안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년축하손님" - 친구의 어려움을 무시한 한 부자에게 친구가 마지막으로 "환생"을 언급한다는 이야기. 짤막하지만 무난한 수준의 반전이 깔끔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친선키스" - SF와 SEX가 결합한, 농담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구인과 흡사한 외모의 외계인들을 만난 우주선 승무원들이 지구의 인사라 속이며 키스를 난무하는데 결국 마지막이 되어서 알게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웃기면서도 황당한 결말이 아주 놀라운 작품이었어요.

"추월" - 과거 자신에게 버림받고 자살한 여인의 모습을 보는 한 남자. 추리물 성향을 띄고 있는 쇼트쇼트로 이른바 트릭이라 할 수 있는 자살한 여인의 정체가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된 작품입니다. 짤막하지만 복선도 확실해서 설득력도 풍부한 등 이쪽 쟝르물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PS : 위 작품들 말고도 "이키가미"의 원조와도 같은 "생활유지청"이나 인간 욕망의 끝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거울" 같은 작품도 다른 매체에서는 걸작이라고 많이 소개하고 있더군요. 그 외에도 좋은 작품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