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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4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제목과 동일한 표제작을 포함하여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제목처럼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을 파악하여 범행을 증명하는 전개를 보이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편집이라 그런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에서처럼(주로 초기작) 억지스러운 동기나 인간관계가 등장하지 않고, 트릭과 추리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아울러 가가 "형사"에 어울리는, 그야말로 끈질긴 수사가 추리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참고삼아 해당 수사 내역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봅니다.

  • 첫번째 사건: 화분을 구입한 날짜에 대한 수사
  • 두번째 사건: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에 대한 목격 증언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을 알아냄, 담배를 피우지 않는 피해자 옷에 진하게 밴 담배 냄새에 대한 탐문 조사
  • 세번째 사건: 친칠라 고양이에 대한 증언, 피해자가 먹은 청어메밀 판매 장소 탐문을 통한 취식 시간 확인, 용의자의 단골 미용실에 대한 조사
  • 네번째 사건: 나오코 집 근처 가게들을 대상으로 한 탐문 조사
  • * 다섯번째 사건은 친구의 가정사에 대한 내밀한 추리 중심이라 경찰 수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핵심 사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고 나름 반전 요소들도 들어가 작품들의 복잡도와 재미를 더해줍니다. 두번째 사건에서 유타의 사체를 제한된 시간과 장소 안에서 들키지 않고 은닉하는 트릭, 네번째 사건에서 숨겨놓은 사체의 정체가 무엇인지?같은 요소가 대표적입니다.

가가 형사의 비중보다는 주인공, 화자 역할의 범인 비중이 더 크다는 점은 팬에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은 됩니다만(가가라는 캐릭터에 매료된 팬이라면 당연히 불호겠죠) 이 정도면 아주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로 꼽습니다.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유게 발레단의 발레리나 하야카와 히로코의 자살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발레단 사무국장 데라니시 미치요가 살해했다는게 진상이고요. 미치요의 거짓말은 히로코가 이사할 때 화분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화분은 사고 당일에 구입한 것으로 이사할 때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치요의 범행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화분은 히로코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트릭의 도구이기도 하고요.

발레단과 발레 공연, 연습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뒷받침된 묘사나, 단순 협박 (안무가가 미치요의 남편 데라니시 도모야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난이도 높은 무대를 삭제하고 마지막 공연을 한 히로코의 자존심, 즉 히로코의 요구에 응해 15년 전 무대가 가짜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을 감추기 위한 동기는 "잠자는 숲"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발레" 그 자체를 트릭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고요.

아울러 표제작이면서도 이 단편집의 주제이기도 한 "범인의 거짓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감추려면 좀 더 큰 거짓말을 하게 되지요(가가)"라는 말이 대표적이에요.

그런데 가가가 거짓말을 유도한 방법은 유치하고, 단지 말실수 한 것뿐인데 뭐 그리 큰 꼬투리가 될까 싶기는 했습니다. 증거는 결국 아무것도 없고, 버티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렇게 하면 단편으로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문제라고 지적하기는 어렵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발레에 대한 세밀한 조사가 바탕이 된 적절한 트릭과 합리적인 동기가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차가운 작열"

주부 다누마 미에코가 교살되고, 돌이 갓 지난 아들 유타가 실종된 사건의 진상은?

진상은 남편 요우지의 범행으로, 동기는 아내 미에코가 빠찡코를 하다가 차에 둔 아이를 찜쪄 죽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동기는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에서도 등장했던 것인데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피해자가 죽기 전에 입었던 빨간 티셔츠가 세탁기 안에 있던 겁니다. 요우지는 땀을 많이 흘려서였다고 말하지만, 빨간 티셔츠를 다른 빨래와 섞어서 빨아도 되는지? 와 같은 사소한 점에서 가가가 수상함을 느끼게 되는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데 유타의 옷차림을 기억하는 것 역시 괜찮은 착안점이었고요.

무엇보다도 다누마 요우지의 증언 중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것을 앞의 거짓말과 엮고 — 차의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그것 때문에 땀을 많이 흘려 옷을 갈아입었다는 해명 — 그것이 진상에 이르는 전개 -  즉 에어컨이 고장나 아기가 차 안에서 열사했다 -에는 정말 탄복했습니다. 아이 사체의 부취를 막기 위해 수지로 밀봉했다는 곁다리 트릭도 돋보였고요.

하지만 티셔츠에 담배 냄새가 배었는데, 집에 재떨이도 없고 부부는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상함을 느꼈다고 하는데, 이 정보가 독자에게는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서 공정함을 느끼기 힘들었던건 조금 아쉽습니다. 이 점 때문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읽을 가치는 충분한 좋은 작품입니다.

"제2지망"

이혼녀 미치코가 교제하던 남자 모리 슈스케가 집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은?

한마디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거짓말은 미치코가 댄스 교습을 마치고 샤워를 하지 않았다는 말로, 머리칼의 샴푸향을 가가가 눈치채서 그녀의 알리바이가 밝혀지게 되죠. 그런데 두 번째 사건과 마찬가지로 샴푸향에 대한 정보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 동기 설명도 부족하다는 단점이 너무 큽니다.

남자 목을 여자가 조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포장지 20미터 정도를 이용하여 창밖으로 체중을 걸고 뛰어내렸다는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별로였습니다. 어차피 밝혀져도 상관없는 것이었다면(범행 은닉은 미치코의 의도였고 리사는 아무 생각도 없었으니) 굳이 이런 수고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칼로 찌르거나 불을 지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모호한 동기, 불합리한 범행, 별볼일 없는 트릭 모두가 갖추어진 망작입니다.

"어그러진 계산"

사카가미 나오코의 남편은 얼마 전 역 앞에서 트럭에 치여 즉사했다. 그 와중에 불륜남 나카세 유키노부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가가와 만나는데...

나카세와 나오코의 과거, 그리고 범행 모의가 현재 시점에서의 수사와 서서히 교차되어 전개되며 결과적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만나 진상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추리적으로는 별로에요. 거짓말은 천장에서 흐르는 물에 대한 것이지만, 이건 가가가 사기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래도 집에 숨겨놓은 사체가 유키노부의 것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가가의 수사를 바탕으로 한 추리 — 냉동고에 대한 증언 → 약국 탐문을 통한 보냉제 구입 확인 → 편의점 탐문을 통해 매일 얼음을 구입한 것을 확인하고, 시체가 냉동되어 있다! 는 구성 — 은 합리적이고 설득력도 높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외적인 매력이 더 괜찮았던 작품이에요.

"친구의 조언"

가가의 친구 하기와라가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냈다. 가가는 그의 아내 미네코가 드링크제에 약을 탔다는 것을 추리해내는데...

단편집 다른 수록작들과는 다르게 가가의 일방적인 추리와 주장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일종의 가가 추리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추리하는 내용 대부분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높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하기와라가 출발 전 집에서 마신 음료를 따로 꺼낸 컵이라는 사소한 단서로 밝혀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아들 다이치가 그린 파란 물고기 그림을 바탕으로 동기와 범행을 추리해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밀봉된 비타민제 안에 수면제를 넣는 트릭도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했습니다.

다만 미네코가 아트플라워 교실 강사 구즈하라 루미코와 레즈비언 관계였다는 설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남자였다면 마지막 장면의 감정이 더 강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단점은 사소한 수준이고, 추리적으로 워낙 뛰어나서 별점은 3.5점. 이 단편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국내 출간된 가가 형사 시리즈는 현 시점에서 다 읽은 만큼 개인적으로 순위표를 작성해 봅니다.

  1. "거짓말, 딱 한 개만 더"
  2. "악의"
  3. "신참자"
  4. "붉은 손가락"
  5. "내가 그를 죽였다"
  6.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7. "졸업 : 설월화 살인 게임"
  8. "잠자는 숲"

2009/08/12

기세이혼센 살인사건 - 니시무라 교타로 : 별점 1점

 기세이혼센 (紀勢本線) 신구(新宮)역 근처에서 한 여성의 피살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21세의 하라구치 유키. 치명상은 가슴을 날카로운 흉기로 참혹하게 찔린 것이었으며 이마에 X자로 상흔이 남아있었던 상태. 사건 해결을 위해 신구 경찰서에 설치된 수사본부에 도쿄 경시청 수사 1 과 소속의 토츠가와(十津川)경감과 가메이(龜井)형사가 찾아오고 이 사건이 도쿄 세타가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도쿄에서의 피해자도 영어이니셜이 Y. H에다가 21세, 거기에 칼에 찔리고 이마에 자 형태의 상흔이 남아 있는 것이 동일했던 것. 반신반의하던 경찰앞에 구시모토 역에서 동일한 조건의 여성 피살체가 발견되며 사건은 점차 커져만 가는데....

여정 미스터리의 대가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입니다. "침대특급살인사건""히다다까야마에서 사라진 여인""일본살인여행" 에 이어 네번째네요.

이 작품도 역시나 일종의 여정 미스터리로서 간사이 쪽 열차 노선인 기세이혼센 (紀勢本線) 의 여러 역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잠깐 조사해봤더니 굉장히 긴 철도더군요.
그러나 내용은 굉장히 보잘것 없고 밀도가 떨어지는 졸작이었습니다. 복잡하기만 할 뿐 알맹이도 없고 추리적으로도 눈여겨볼만한 요소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총 7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결국 범인마저 토츠가와 경감에게 사살되는 등, 니시무라 교타로 작품치고는 나름 피바다 계열로 사건 자체는 풍성합니다. 그러나 등장하는 사건들이 "연쇄살인"의 살인범과 그 "연쇄살인"을 추종해서 모방범죄를 저지르는 살인범과 그 모방범죄를 저지르는 살인범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사건을 저지르는 살인범.. 이라는 식으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굉장히 뜬금없는 탓입니다. 
그나마 부가적인 연계 사건들을 잘 정리해서 전개했더라면 모를까, 이 작품에서는 연계 사건들은 왜 등장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겉돕니다. 사건들은 단지 극적인 전개를 위해서만, 그리고 이야기를 벌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느낌이에요. 원래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유일한 역할마저도 중반 정도 되면 모두 해결되어서 이야기에서 아예 퇴장해 버립니다. 독자로서는 이 연계 사건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심 사건인 연쇄 살인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로운가? 라는 것도 역시 아니올시다 입니다. 일단 21세의 영문 이니셜이 Y.H이며 눈 밑에 점이 있는 직장 여성을 노리는 연쇄 살인이라는 설정 자체는 뭐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사의 포커스는 누가 봐도 어떻게 해당 인물을 범인이 골라낼 수 있었을까? 라는 것이겠죠.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경찰들, 특히 나름 명탐정이라는 토츠가와 경감 조차도 이 점을 착안하지 못하고 거의 막판에 가서야 추리하여 결국 범인을 특정하는데 성공합니다. 그 전에는 그냥 탐문, 탐문, 탐문밖에는 없습니다... 
또 이러한 착안점에서 범인을 특정한 다음에는 추리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전개는 너무 쉽게 간거 아닌가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고요. 범인의 정체와 동기도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아빠진 진부한 설정이었어요.
한마디로 경찰이 조금만 더 머리를 써서 조사했더라면 진작에 해결되었을 사건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추리의 영역이 아니라 기본적인 "초동수사"의 문제지요. 이 정도면 직무유기에 가까운게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게다가 너무 우연과 감에 의지하는 전개가 많다는 것도 큰 단점입니다. 결국 범인의 최종 목표지점을 특정하는 것도 - "가까운 기세이혼센(紀勢本線) 중 K로 시작되는 곳" - 그냥 토츠가와는 "감"으로 "난키 시라하마"라 짐작하고 그곳에서 결국 범인을 잡게 됩니다. "K"로 시작되는 곳이라는 단서도 토츠가와의 "감" 앞에는 무력할 뿐이죠. 뒷부분에 "난키(南紀)라고 해도 좋을 고장이름을 기난(紀南)이라고 했다"는 식으로 빠져가나기는 하는데 이건 솔직히 반칙이죠. "서울의 옛 이름이 한성이었기 때문에 서울도 H로 시작하는 도시다!"라고 주장하는거하고 똑같잖아요...

마지막으로 항상 이야기하지만 "여정 미스터리"라는 소재에 어거지로 엮어볼려고 "기세이혼센" 과 "난키" 지방을 중심으로 다루는 설정 자체도 문제가 많아요. "삼단벽" 같은 해당 지방의 명소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건과는 별 상관없는, 단지 특이한 지방의 특이한 풍광일 뿐 실제로 사건은 이게 도쿄나 오사카라도 아무런 상관없거든요. 이래서야 "부산 살인사건"이라고 하고 해운대만 잠깐 나와준다던가, "제주도 살인사건"이라고 한 뒤 용두암만 잠깐 나와주는거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죠. 아무래도 작가의 여정 미스터리라는 쟝르에 대한 집착이 외려 화를 부른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관광가이드도 아니고... 시라하마 지방에서 돈이라도 받았나?

어떻게 된게 이 작가 작품은 읽으면 읽을 수록 재미가 없어지네요. 앞으로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했다는 "천사의 상흔"이나 일본 미스터리 문학상을 수상한 "종착역 살인사건" 정도의 작품이 아니면 찾아읽을 일은 없을것 같습니다. 별점은 1점. 그만큼이나 최근 읽은 작품 중 최악이었습니다. 엔간한 졸작은 수작으로 보일만큼 추리와 설정, 내용 모두 별로였어요.

2020/11/01

비틀거리는 소 - 아이바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2점

비틀거리는 소 - 6점
아이바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가와 신이치 형사는 미해결 사건인 나카노 역 앞 선술집 강도 사건 수사를 맡았다. 그는 외국인이 금품을 노린 강도 살인 사건이 아니라, 두 명의 피해자를 노린 계획 살인 사건이라는걸 알아냈다. 그리고 범인이 도주할 때 사용했던 차량 소유주를 알아내고, 소유주 아베 사나에의 정부인 가시와기 노부토모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시와기 노부토모는 유통 재벌 옥스 마트의 후계자로, 수사에 대한 여러가지 압력이 들어왔다. 그래도 다가와 형사는 상사 미야타 과장의 지지를 받아 노부토모를 체포하기 위한 증거를 모아 나가는데....

'현대 사회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르는 궁극의 사회파 미스터리!'라며 마쓰모토 세이초를 소환하는 소갯글에 흥미가 끌렸었습니다. 그런데 엘릭시르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네요. 좋은 책을 선사해주신 엘릭시르 담당자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미스터리 사전"에 따르면, '사회파 미스터리'는 사회 제도의 모순이나 심각한 사회 문제를 사건, 트릭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한 미스터리 작품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정의에 동의할 수는 없어요. '미스터리' 이기 때문에 사회 문제만 그리는건 적절하지 않지요. 제가 읽어왔던 다른 걸작 사회파 미스터리물 모두 사회 문제는 사건과 엮어 은근하게 드러납니다. "화차"에서의 사채와 개인 파산, "도끼"에서의 실업 문제, "제로의 촛점"에서의 전후 양공주 문제, "천사의 나이프"의 소년 범죄 문제, "붉은 손가락"의 치매 노인 문제 등이 그러합니다. 여러가지 사회 문제들이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걸맞게, 사건에 녹여져 있는 거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사회 문제 따로, 사건 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사회 문제를 사건, 이야기에 잘 녹여냈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이래서야 '사회파'일 수는 있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부족합니다.

옥스 마트가 지역 상권, 공동체를 집어 삼키는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대표적입니다. 이는 다가와 형사가 지방으로 탐문 수사를 가서 유령 상가를 보고 느끼는 감정들, 쓰루타 기자가 쓴 기사 등을 통해 자세히 그려집니다. 띠지에서도 소개될 정도로요.
그러나 옥스 마트가 무슨 로비를 해서 지방 도시에 출점을 했건, 임대 매장이 매상 부진에 시달리건 말건, 모두 곁가지 이야기에요. 선술집 살인 사건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옥스 마트 관계자를 악역으로 설정하는 역할 말고는 하는게 없어요.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지역 상점가가 무너진걸 옥스 마트 탓으로 돌리는 시선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터넷 쇼핑몰이 활성화 된다면? 어차피 모두 사양 산업입니다. 옥스 마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이유는 없어요. 

차라리 식품 안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조금 더 와 닿기는 했습니다. '싸고 좋은 음식은 없다'는 주장으로, 남의 이야기같지 않아서 공감이 갔습니다. 이를 위해 '걸레'라고 부르는 햄버거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소개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하지만 사건과 별 상관이 없다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이유로 사회 문제를 작품안에서 드러내는 역할인 쓰루타 기자 역시 선술집 살인 사건만 놓고 본다면 불필요했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는 사회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등장시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그녀가 잘 나가던 언론사를 그만두고 인터넷 매체에서 옥스 마트를 공격하는 기사를 쓴 원인이 되었다는 가정사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으며, 캐릭터도 전형적이라 별다른 매력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사건 이야기는 재미있느냐? 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선술집 강도 사건이 미궁에 빠진건 초동 수사가 잘못된 탓이거든요. 대단한 수수께끼가 있는게 아니에요. 약간의 수사만으로 강도가 아니라 수의사와 산업 폐기물 처리 업자를 노린 계획 살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피해자인 수의사와 산업 폐기물 처리 업자를 '소'와 연결하면 '광우병'과 관련된 범죄라는건 쉽게 떠올릴 수 있고요(제목이 스포일러이기도 합니다). 이를 대단한 수수께끼가 있는 것 처럼 포장하는건 무리입니다. 

또 이 모든건 탐문 수사로 단서가 드러나기에 추리의 여지도 없고, 범인이 가시와키 노부토모라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거대 유통 기업 총수 아들이 직접 2명이나 죽이는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그것도 개인적인 약점이 아니라 회사에 닥칠 위기를 막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건 영 와 닿지 않았거든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마트 후계자 쯤 되는 인물인데 말이지요. 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최소한 돈으로 회유하려는 시도부터 먼저 해 보았어야죠. 회사의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는 다키자와라는 인물도 존재하기 때문에 직접 나설 이유도 없고요. 범행 수법도 어설픕니다. 심지어 도주할 때 자기 차를 썼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요. 초동 수사가 지나칠 정도로 미비해서 잘 빠져나갔을 뿐으로 피해자 중 한 명이라도 살아남았다던가, 경찰에서 처음부터 다가와 형사같이 접근했더라면 2년 전에 이미 구속되었을 겁니다. 별다른 증거가 없는데, '역수'로 칼을 잡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백을 이끌어내는 장면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딱히 볼만한 부분이 없었어요. 마지막에 미야타 과장이 옥스 마트와 결탁하여, 사건을 치정 살인 사건으로 축소, 은폐하는 모습도 개인적으로는 불필요했다 생각되네요.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다가와에게 수사를 맡기지 않았으면 되잖아요? 이를 묵인하면서 뒤로 진상을 폭로하려는 다가와 형사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수사 과정에 대한 묘사 만큼은 좋았거든요. 특히 끈기있는 탐문 수사가 장기라는 다가와 신이치 형사의 수사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프렌치 경감'을 연상케하는, 우직하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덕분입니다. 수사 대상과 인간적인 친분을 먼저 쌓고, 항상 메모를 한다는 디테일도 잘 살아 있고요. 광우병이 연결 고리라는걸 너무 늦게 파악하는 등 추리력은 딱히 없어 보이지만요.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도 재미가 없지는 않아요. 한번 정도는 곱씹어볼만한 좋은 이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사회파 미스터리'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좀 더 미스터리에 밀결합하여 전개했어야 했습니다. 술집 강도 사건 수사는 이 작품 분량의 절반이면 충분했을거에요. 피해자 아카마 유아, 니시노 마모루와 '소', 그리고 범인 가시와키 노부토모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를 찾는 과정은 실제로 그 정도 분량에 그치니까요.
또 광우병은 후반부에 급작스럽게 등장하는데, 딱히 문제로 제기되지도 않습니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부산물을 불법적으로 섞어서 식품을 제조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언급은 등장하지 않거든요. 

결론적으로, '사회파 + 미스터리'가 아니라 '사회파 | 미스터리'인 셈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다가와 신이치 형사는 마음에 들은 만큼, 다른 작품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2010/11/12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 - 구지라 도이치로 / 박지현 : 별점 1.5점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 - 4점
구지라 도이치로 지음, 박지현 옮김/살림

시부야에 있는 니혼슈 전문 바 '숲으로 통하는 길'. 그곳에서 바의 마스터, 경시청 경부 구도, 술을 못하는 범죄 심리학자 야마우치는 자칭 '야쿠도시' 트리오를 이루며 다양한 화제로 수다를 나누다가, 매주 금요일만 나타나는 사쿠라가와 하루코라는 미모의 여성과 어울리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녀는 미궁에 빠진 사건을 듣고 곧바로 해결하는 알리바이 깨기의 명수였다...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과 유사하게, 니혼슈 전문 바를 무대로 한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설정 자체는 매우 고전적이지만, 니혼슈 바라는 공간적 특징을 살려 각 에피소드마다 맛있는 술과 요리, 안주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다양한 잡학 지식이 펼쳐지는 부분에서는 "심야식당"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추리 요소를 결합한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술과 요리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에피소드를 '...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설정하여 사건을 동화와 연결시킨 점도 나름대로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추리소설로는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트릭이 단순한 탓이 가장 큽니다. 모든 사건이 알리바이 트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대부분 우연과 운에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몇몇 트릭 장치는 지나치게 유치했고요. 게다가 '알리바이'만 강조될 뿐, 기타 현장 조사나 탐문 수사는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경찰이 보다 철저하게 수사했다면 쉽게 해결될 사건도 많습니다. 즉,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추리 퀴즈'에 가깝습니다.

또한 니혼슈와 다양한 요리뿐만 아니라, TV 드라마, 예능, 광고, 가수 등과 관련된 대화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비중이 크고, 이로 인해 사건 자체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집니다. 이러한 잡학 정보가 캐릭터들의 개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불필요한 요소였습니다.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작가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동화와 사건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동화 속 숨겨진 진실을 사건과 엮는 방식이 흥미롭기는 했지만, 기존에 출간된 "어른들을 위한 그림동화"와 같은 책들에서 다루어진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선함이 부족했거든요.

결론적으로, 읽기 쉬운 짧은 에피소드 구성과 술과 안주, 요리에 대한 묘사, 다양한 잡학 지식이 흥미로울 수는 있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차라리 요리책으로 나왔다면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정말 읽을 책이 없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가볍게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찾아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비밀"

등장 요리: 조개구이, 송이버섯구이 (숯불에 구워 간장으로 양념) 

등장 니혼슈: 아즈마이치 (東一), 하루가스미 (春霞) - 아키타현의 향이 풍부한 다이긴조슈 

사건: 도미사와 이시라는 과자 회사 사장이 자택의 간이 소각로에서 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두 명이지만,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로, 사망 시간을 조작하는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합니다. 트릭 자체는 유치하고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여러 단서가 모여 결말에 이르는 전개는 비교적 탄탄했습니다. 동화의 내용을 사건과 연결하는 방식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었고요.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빨간 모자의 비밀"

등장 요리: 날치 튀김 (신선한 미야케지마 산 날치와 참마를 다져 튀긴 요리, 레몬즙과 간장을 곁들여 섭취) 

등장 니혼슈: 사쿠라가와 (桜川) - 도호쿠 남부 지방에서 빚은 과일향이 나는 다이긴조슈

사건: 71세의 할머니와 21세의 손녀딸이 살해당했다. 사인은 모두 교살이며, 용의자는 손녀딸 이즈미의 남자친구 미타무라와 이즈미 계모의 애인인 백수 시모이였다. 그러나 시모이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사망 추정 시각의 공백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범인이 알리바이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즉, 순전히 우연과 경찰의 부주의한 수사로 인해 꼬였을 뿐인거지요. '시각 실인증'이라는 개념은 흥미로웠지만,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브레멘 음악대의 비밀"

등장 요리: 돼지고기 소시지 구이

등장 니혼슈: 아즈마이치 (東一), 오토코야마 (男山), 센주시라뵤시 (千壽白拍子) - 야마다니시키 100%를 원료로 시즈오카 효모로 빚은 술. 첫맛은 깨끗하고, 뒷맛은 산뜻함

사건: 악단 '사계'의 멤버 세 명이 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죽었다. 화재가 발생하기 전까지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기에 사고로 여겨지는데...

"명탐정 코난"에서도 사용된 팩스를 이용한 방화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정교하지 못하고, 기화하는 수면제라는 설정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신데렐라의 비밀"

등장 요리: 생굴 (간장과 레몬을 곁들여 섭취)

등장 니혼슈: 시라마유미 (白真弓) - 기후현 히다의 명주

사건: 캐슬 호텔 오너의 아들 조 다쿠야의 애인 요시노 리호코가 절벽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가 추락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기에 사망 시각은 확실했다. 그런데 유력한 용의자 조 다쿠야의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고전적인 시체 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경찰 수사가 부실하게 진행되었고, 알리바이 또한 범인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우연'에 의한 것이기에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백설공주의 비밀"

등장 요리: 애플파이, 자오우 산기슭에서 직송된 화이트치즈 (와사비 간장 소스), 샐러드를 곁들인 호로새 훈제구이 (마요네즈 소스)

등장 니혼슈: 시라유키 (白雪) - 효고에서 생산된 명주. 마쓰오 바쇼, 치카마츠 몬자에몬 등이 즐겨 마셨음

사건: 유키코는 계모 도모미로부터 살충제가 든 애플파이를 선물받았다. 그러나 파이를 먹기도 전에 둔기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차로 1시간, 오토바이로 30분이 걸리는 장소를 순간 이동하듯 이동하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연에 의지한 알리바이이며, 범인의 행동이 눈에 띌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점이 문제였습니다. 경찰 수사가 조금만 철저했다면 알리바이 없이도 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장화 신은 고양이의 비밀"

등장 요리: 광어회

등장 니혼슈: 메이보 (明眸) - 아이치현 세토산

사건: 채팅 사이트에서 바람잡이로 활동하던 네코다 마사미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인 가라바는 사망 추정 시간에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공원에서 데이트 중이었다는 알리바이 증명 사진을 경찰에 제출했다.

고전적인 트릭인 '시계 앞에서 찍은 사진'을 활용한 알리바이 조작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트릭이 조잡하고 유치한 수준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해당 시간대의 탐문 수사만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비밀"

등장 요리: 참치와 방어조림

등장 니혼슈: 히카리 백춘 (白春) 다이긴조 - 과일향이 나는 미주

사건: OL 노하라 유메코가 음독 자살했다. 그런데 그녀는 자살 직전까지 중학교 동창인 탤런트 히키다 신지에게 줄 스웨터를 뜨고 있었다.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범죄성이 낮고,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죽을 가능성이 적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치사량' 개념을 활용한 추리는 흥미로웠지만, 그 외의 요소들은 미흡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의 비밀"

등장요리 : 소 혓바닥 요리, 돼지고기 조림, 수제 로스햄, 흑돼지구이 - 사쓰마 자연 방목 흑돼지 로스를 간장에 절여 숯불에서 구운 것. 양파 슬라이스 곁들임

등장 니혼슈 : 와카다케 (若竹),

고시노칸바이 (越乃寒梅) - 매화의 명소에서 만들어진 니가타의 명주. 지방술 붐의 선두주자.

사건 : 보모 쓰키오리 아즈미 살해사건. 자택에서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직장 동료인 모토야 마사카즈였다.

경찰의 무능함이 부각되는 조잡한 알리바이 트릭입니다. 용의자 핸드폰 통화 내역이나 주변 탐문 수사만 했더라도 뻔하게 드러났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트릭의 핵심이 변장이라는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차라리 1:1 비율의 사진을 오려 붙였다고 하던가... 점수를 주기 힘든 졸작입니다. 구태여 점수를 주자면 1점입니다.

"꼬마 요정과 구둣방 할아버지의 비밀"

등장요리 : 도오바찜 - 돼지고기를 간장, 미린, 설탕을 넣고 푹 끓여 찐 요리. 슈토 (酒盜) - 토사 명물 가다랭이 젓갈. 기본 안주임.

등장 니혼슈 : 덴구마이 (天狗舞) - 이시카와 현의 저온 장기숙성 준마이슈

사건 : 지난 1년간 시부야를 휘저으며 보석만 훔치는 괴도 S89호가 '요정의 구두'라는 100캐럿 다이아몬드를 훔쳤다. 하루코는 S89호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편'이어야 하지만... S89호의 정체도 어이가 없을 뿐더러 증거라고 들이대는 것들도 설득력이 약해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가 전무합니다. 그냥 마지막 편이라는 의미 이외의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0/01/10

Q.E.D iff 5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iff도 5권 째에 접어들었네요. 이번 권의 특징이라면 에피소드 두 편 모두 잔혹한 살인 사건(한 건은 미수입니다만)을 다루고 있으며, Q.E.D 특유의 현학적인 재미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추리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그런데 왠걸, 아주 좋았습니다! 직전 4권에는 간만에 괜찮은 에피소드가 수록되었었다고 소개했었는데 4권의 첫번째 이야기가 장타였면, 이번 5권은 이야기 두 편 모두 장타 이상, 심지어 두 번째 이야기는 홈런 수준입니다. 타점은 2점! 별점은 3점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이븐 Even"

대학생 아시카가 렌은 산에서 조난당한 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사고 현장에서 테시마에게 차였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어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병원에서 렌의 산소마스크를 벗기려던 누군가가 도주하다가 막다른 복도에서 사라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 뒤 가나의 탐문 조사를 통해, 렌을 찼다는 테시마가 렌에게 십여만엔의 돈을 빌렸다는걸 알아낸다. 이 사실을 가나에게 알려준 센도는 테시마가 그 빚을 갚지 않기 위해 렌을 죽이려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렌의 병문안을 왔던 또 다른 한 명인 코시모토는 테시마의 연인이었고, 테시마는 성인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렌의 독일어 노트가 독일어 시험을 볼 때 아주 유용했는데 독일어 시험지가 도난당했다는 사건 등이 연달아 밝혀졌고, 이를 토대로 토마는 진상을 추리해낸다.

등장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는 Q.E.D에서 흔하게 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 한 번의 증언이 전부가 아니라 가나의 탐문이 이어지면서 계속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결국 세 명의 유력 용의자들이 모두 수상하게 만들어서 보다 정교한 느낌을 전해 줍니다. 테시마는 자신의 성인 클럽 아르바이트를 숨기기 위해, 코시모토는 연인에게 집적되는 남자를 죽이기 위해, 센도는 테시마를 살인범으로 몰기 위해서라는 동기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코시모토가 독일어 시험 문제를 훔치다가 렌에게 들켜서 그를 죽이려 했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게다가 가장 놀라왔던건 사건에 대해서는 세 명 모두, 즉 범인까지도 진실만을 이야기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렌이 테시마의 손수건 향을 맡고 있었다"는 코시모토의 증언은, 시험 문제를 훔치는 상황에서만 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정도입니다. 코시모토가 운동선수를 그만두고 MBA를 목표로 해외로 가려고 하는 상황도 마찬가지고요. 도주 목적이었던 것이지요.

등장하는 트릭은 변변치 않지만, 범인이 병원 막다른 목도에서 사라진 방법은 나름 그럴듯 했습니다. 옷을 집어 던진게 사람이 그 쪽 방향으로 뛰어간 것 처럼 보였다는 이유인데, 우연이라도 실제로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치게 머리를 쓴 작위적인 트릭보다는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였거든요. 코시모토가 마라톤 선수라는 설정을 활용한 트릭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그런데 세세한 문제가 몇 가지 눈에 띕니다. 가장 큰 문제는 병원에서의 살인 미수도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코시모토는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렌이 식물 인간이 된 게 아니라면, 언젠가 의식을 회복해서 코시모토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걸 증언할게 뻔하잖아요? 서둘러 해외로 도주하지 않은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이야기 결말을 보면, 토마의 추리 이후 머지않아 렌이 깨어나 사정청취를 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렌의 노트가 있으면 독일어 시험에 큰 도움이 되는건 모든 학생이 알고 있으며, 연인 테시마가 그 노트를 빌렸는데 왜 독일어 시험 문제지를 훔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토마의 주장도 틀린 부분이 있습니다. 렌의 실족이 살인 미수라는 주장에, 코시모토는 왜 렌의 자살 미수가 아니냐고 물어봅니다. 토마는 병실에 누군가 침입해서 렌을 죽이려 했다는게 증거라고 이야기하죠. 자살 미수였다면, 누군가 침입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 죽으려 했을거라고 단정하면서요. 그러나 바로 직전에 읽었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에 따르면, 자살을 실행했던 사람은 대부분 자살 시도 자체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통계적인 수준이지만, 토마의 단정은 섣부른 감이 없잖아 있는 셈이지요.

그래도 나름 합리적인 전개는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동안 졸작이 많았기에 이 정도면 평균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불완전한 밀실"

타카마츠씨가 밀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밀실 안에는 쓰러져있던 간호사 이타미 사요코가 곧바로 체포되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풀려났다. 미즈하라 경감이 진짜 범행 장소를 알아낸 덕분이었다. 또 다른 범행 장소가 일찍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는 1년 반 전 발생했던 클럽 화장실에서 하치오라는 여성이 살해된 사건 탓이었다.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었던 이타미 다케오는 가혹한 취조를 받은 뒤 자살했는데, 당시 검사가 타카마츠씨였고 이타미 사요코는 다케오의 모친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확한 동기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초, 중반부까지는 '불완전한' 밀실 살인의 수수께끼를 푸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결국은 복수극이었다는 전개가 독특한 작품입니다. 복수극이었기 때문에 범인인 이타미 사요코는 불완전한 밀실을 만든겁니다. 본인이 용의자로 체포되기 위해서였지요. 이 과정은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또 도화선이 된, 1년 반 전의 하치오 살인 사건은 시체가 아직 살아있는 것 처럼 위장한 뒤, 문 뒤에 숨었다가 구경꾼인 체 한다는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아주 현실적이에요. 복잡하지도 않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높으니까요.

물론 CCTV도 있었을 테고, 현장에 있던 구경꾼들의 명단을 경찰이 입수하지 않았을 이유도 없다는 것, 그리고 클럽에 중년 이상의 여성이 숨어들어간게 들통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이타미 다케오였는데,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가족이나 청부 살인을 의심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악덕 커리어 경찰 미야코가 이타미 다케오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증거까지 조작해가며 그를 몰아붙였다는 이유로 상쇄됩니다. 또 복수귀로 변한 이타미 사요코가 미야코 살해로 복수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면도 아주 좋았고, 이 모든걸 예상했던 것으로 보이는 미즈하라 경감의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아울러 본편과는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토마가 경찰청의 타나바타 경위를 처음 만났을 때 '경찰청 형사 분이시죠?'라고 알아채고 묻는 장면도 기억에 남네요. 가나와 타나바타는 토마가 말투, 신발에 묻은 흙같은걸로 대단한 추리를 벌였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미즈하라 경감이 토마에게 연락했던 것입니다. 추리라는게 그렇게 대단한건 아니라는 반증으로 보여 흥미로왔어요.

신 캐릭터 타나바타 경위의 등장은 불필요했다는 점, 미야코의 증거 조작 등의 행각은 아무리 만화지만 지나치다는 점은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명확한 동기에 트릭도 안정적이며, 전개까지 발군인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2020/12/12

탐정 혹은 살인자 - 지웨이란 / 김락준 : 별점 3점

탐정 혹은 살인자 - 6점
지웨이란 지음, 김락준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청은 한때 대만 연극계에서 잘 나가는 교수였지만 술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크게 상처 입혔던 사건을 계기로 교수직을 그만둔 뒤, 슬럼가같은 골목 워룽제로 옮겨갔다. 그리고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라는 일을 시작했다. 첫 의뢰인 린부인의 의뢰는 갑자기 남편을 미워하게 된 딸아이 행동의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미행과 탐문을 통해 린씨와 불륜 관계로 보였던 미스 추는 병원 대상으로 협박을 일삼던 범죄자였다는게 드러나고, 린부인은 이혼했다.

그 뒤 워룽제 주변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우청은 체포되었다. CCTV로 피해자들과 근처에 있었다는게 드러났으며, 결정적으로 범인이 우청으로 변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번째 사건에서 범인 스스로 변장을 드러내 우청은 풀려난다. 경찰과 수사에 함께 참여한 우청은 범행 장소가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정확히 4방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 범인의 변장 기술은 전문가에게 배웠을 거라는 것 등 여러가지 추리를 선보이고, 결국 범인이 자신을 추종하던 극작가 쑤훙즈라는걸 알아낸다. 그러나 경찰은 꼭꼭 숨은 쑤훙즈를 체포하지 못하고, 결국 다섯번째 범행이 벌어지는데....

"내 심경이 어땠냐 하면 좆나 엿같았습니다!"

중국 추리 소설은 몇 편 읽어보았지만 대만 추리 소설은 처음 읽어 보네요. 그런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에는 주인공 우청의 지분이 상당합니다. 독특하면서도 생생한 매력을 그야말로 '분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본인 실수로 스스로 루저의 길을 택했다는건 정신병을 앓는 탐정, 주정뱅이 탐정, 패배자 탐정 등 다른 루저 탐정들과 조금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살아있다!'는 걸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차이는 큽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는 다른 루저들과는 정 반대지요. 우청 역시 루저가 되는걸 선택한 뒤 워룽제 골방으로 숨어든건 혼자 우울하게, 어둡게 지내보겠다는 취지이기는 했습니다. 한데 뒤로 가면 갈 수록 경찰, 언론은 물론 범인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맞서 싸우면서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칩니다. 루저가 아니라 시민 영웅인 셈입니다.

또 우청은 사회에 대한 불만도 딱히 없고, 내면에 특별한 분노도 없습니다. 가족과도 그런대로 원만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루저의 길을 택한 평범한 우리 이웃이라서 현실감이 넘칩니다. 루저가 된 계기인 공황장애라는 병과 연극인들에게 상처를 준 '구이산다오' 사건 설명도 상세하고 현실적이고요. 어린 아이를 죽이거나, 믿었던 아내가 바람나서 도망갔다던가,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상황보다는 훨씬 와 닿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당연히 그냥 루저는 아닙니다. 명확한 주관이 있으며 추리력도 갖춘 실력자이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생각, 견해를 드러내는 언변과 재치도 대단하고요. 루저 탐정들이 보통 경찰 출신이라서 자연스럽게 먹고 살려고 탐정이 된 반면, 우청이 '사설 탐정'이 된건 지병 탓이라는 독특함도 눈에 뜨여요. 공황장애로 생긴 불면증으로 많은 책을 읽어서 사람 내면을 파악하는 기술을 습득했다는게 이유거든요. 스스로 추리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추리 소설을 셀 수 없이 많이 읽었고 타이완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는게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하지요. 한 마디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루저 탐정입니다. 이런 기묘한 캐릭터를 이렇게 잘 그려낸 작가에게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우청 탐정에 대한 여러가지 설정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린 부인, 천제루가 의뢰한 첫 번째 사건부터 흥미로운 부분이 있거든요. 미행과 탐문, 단도직입적 질문으로 답변을 끌어내어 해결되기 때문에 추리할 여지가 많지는 않지만, 린 선생이 받은 분재 동호회 회원 메일에 포함된 상품 번호가 날짜와 버스 번호, 내릴 정류장을 알리는 일종의 암호문이라는걸 찾아내는건 재미있었어요.

이어지는 본편 사건인 연쇄 살인 사건은 무려 다섯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라서 당연히 추리적으로 훨씬 풍성합니다. 우청이 체포되었을 때 당했던 부당한 처사를 이용하여 경찰 수사에 합류한다는 설정부터 괜찮습니다.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 연쇄 살인에 뛰어들어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경찰과 협조해야 하니까요.
이후 수사 과정에서 우청이 단서를 하나씩 짚어내는 과정도 볼만해요. 우청이 7월 7일 타이베이에 없었다는걸 증명한 뒤, 7월 7일 CCTV를 뒤져 자신으로 변장한 범인 행적을 추적하는 식으로요. 이를 통해 범인이 변장의 달인이라는걸 알아낸 우청은 이 정도 변장은 어딘가에서 배웠을 것이다!고 추리합니다. 그래서 관련 세미나와 강의를 뒤져 수강생 명단에서 범인 쑤훙즈를 찾아내게 되지요.

불교의 사상, 이론과 상징을 연쇄 살인 사건에 녹여낸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기독교 상징에 따라 일어난 작품은 있었습니다. 묵시록 예언을 따르는 식으로요. 동요그림, 수학 법칙, 음악, 바둑, 체스, 심지어 추리 소설에 따라 일어났거나, 주요 소재가 된 작품도 읽어 보았었고요. 그런데 불교라니! 그동안 제가 읽어왔던 거의 1000편에 가까운 추리 소설 중 이런 작품은 없었습니다.

불교적인 상징이 사용된건 피해자들이 선택된 이유가 만(卍)자에 해당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초 피해자들은 우청을 중심으로 위도, 경도가 정확한 정4방향 꼭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범인이 해당 위치에서 무작위로 희생자를 선택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좌우 대칭의 정사각형이 완성되었으니, 가운데 있는 우청만 남은 셈이지요.
그러나 5번째 사건이 일어난 위치를 확인하여 도형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불교의 만(卍)자를 그리고 있다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범인 쑤홍주가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우청을 깨우치게 만드는 종교적 목적이었고요. 물론 이는 불교 사상은 아닙니다. 불교를 믿었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세계에 사로잡힌, '우리에게는 현생만 있는데 현생은 지옥이라는' 정신병자 쑤홍주 자신만의 주장이지요. 하지만 이 주장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불교 사상에 닿아 있으며, 여러가지 소재를 통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핵심 키워드였던 금강경의 한 구절 - "마음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으면 머물러 있는게 아니니라" - 해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울림을 줍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기 위하면서 겉모습에 미혹된다는 거지요. 즉, 어떻게 사는게 편안한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일을 걱정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울고 웃는 거고요. 그래서 진짜 편안해지려면, 겉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불교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스쳐가듯 등장하는데, 모두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곁가지로 진행되는 황색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사회 지도층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풍자하는 장면들도 재미납니다. 우청이 범인으로 몰렸던 상황에서 언론의 부정확한 추측 보도와 취재 경쟁이 블랙 코미디처럼 묘사되거든요. 우청의 보복 고소에 대한 묘사도 속 시원합니다. "언론 건드려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에 언론이 사람 잘못 건드린 줄 알라고 하세요. 나는 공익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난 그저 법원에서 언론에 한 방 먹이고 싶을 뿐입니다." 라고 일갈하는데, 멋지더라고요. 이런저런 결탁으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지만, 고소라도 한 게 어딥니까. 우리 나라도 이런 고소, 그리고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 배상제가 일상화, 법죄화되면 좋겠네요.

잘 모르는 대만의 복잡한 도시 묘사, 이런저런 문화와 풍습들 묘사도 새로움이 많았습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뒤 족발 국수를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요. 서민적이고 사람사는 느낌 가득한 묘사도 정겨움을 더해 줍니다. 우청과 어머니의 관계는 물론, 우청과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 모두 서민적이고 정감가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거든요. 왁자지껄하면서 잔 정이 넘치는게 우리나라와도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수선스럽고 요란한 점은 옛날 보았던 홍콩 코미디 영화 정서와 비슷하다고 생각도 되네요.

그러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왜 쑤훙주가 우청을 함정에 빠트렸다가 바로 풀려날 수 있도록 범행을 저질렀는지부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요. 우청을 고난에 빠트리려면 그를 살인범으로 모는게 당연했을텐데, 너무 쉽게 혐의를 벗겨주는 느낌이거든요. 우청도 이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등장하지 않고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추리도 기발함은 있지만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아서 정교함을 느끼기 힘든건 마찬가지입니다. 범인 쑤훙주가 변장의 달인이라는게 전부니 어쩔 수 없지요.
경찰도 너무 하는게 없습니다. 우청과 동료들의 노력으로 범인이 쑤훙주라는게 드러난 이후에도 체포하지 못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무능해 보였고요. 쑤훙주의 집과 변장한 모습을 우청이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도 없어요. 대만의 치안이 심히 우려되더라고요.

마지막 결말은 지나치게 전형적입니다. 우청을 사로잡은 쑤훙주가 우청을 죽이기 전에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장황하게 설명한 뒤, 때맞춰 나타난 경찰에게 사살당하는데 여러모로 너무 시시했어요.

그래도 독특함, 신선함이 가득차 있는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우청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모로 영상물에 어울릴 듯 싶은데, 영화가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2017/06/16

어둠 속의 일격 - 로렌스 블록 / 박산호 : 별점 2점

어둠 속의 일격 - 4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9년 전, 일곱 건의 연쇄 살인을 저질렀던 얼음 송곳 살인마 피넬이 체포되었다. 그런데 피넬은 바버라 에팅거 사건 만큼은 자신의 짓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바버라 에팅거의 아버지 찰스 런던은 은퇴한 전직 경찰 매튜 스커더에게 이 사건의 진범을 찾아내 달라고 부탁하는데...

간만에 읽은 로렌스 블록매튜 스커더 시리즈 장편입니다. 그런데 매튜 스커더가 술독에 빠져 있는게 특이합니다. 그냥 마시는 커피조차 버번을 타서 먹을 정도이지요. 중반에는 술에 떡이 되는 묘사까지 등장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리즈 후기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800만가지 죽는 방법" 바로 직전인 1981년 작품이더군요. 세상 다 산것 같은 관록을 보여주는데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자식들이 손자들을 낳기 전까지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른다 (21p) - 의외로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놀랐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콜 중독 조각가 재니스가 알콜 중독자 갱생회에 간다고 통보하는데, 그 때문에 금주를 결심한게 아닐까 싶네요.
매튜 스커더 시리즈 치고는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260 페이지 정도밖에는 안되니까요.

하지만 짤막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묘사는 여전히 근사합니다. 특히 특정 상황에 대해 어떤 사물이나 소재를 빗대는 글들이 눈에 띱니다. 이혼한 아내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오래 키운 반려견이 안락사된다는 것을 듣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의 결혼 생활도 서서히 죽어갔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강하게 드러내거든요.
작품 내내 선보이는 매튜 스커더의 그야말로 고전적인, 발로 뛰는 수사 역시 인상적입니다. 사건 관계자들을 우직하게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 수사의 전부인데 그것도 아날로그 시대, 즉 핸드폰과 컴퓨터가 없는 시대가 무대라 공중전화, 전화번호부 및 기억력에 주로 의지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느끼게 해 줍니다.

다만 추리적으로는 별로입니다. 진범 버튼 하버메이어를 밝혀낸 과정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단지 자신이 살던 집 주소를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의심하는건 잘못이지요. 자식이 없다고 거짓말 한게 드러나는 장면은 괜찮았지만, 이 역시 증거로는 부족했어요.
더 큰 문제는 동기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입니다. 버튼이 아내를 죽음을 가장하여 살해하기 위해 예행 연습을 했다는게 진상인데, 왜 이혼을 하기 힘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내가 밉다 하더라도 이혼을 하기 힘든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현직 경찰 신분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는 손쉽게 이혼을 한 것으로 볼 때 더욱 설득력이 낮습니다. 게다가 버튼의 말 대로 매튜 스커더는 경찰도 아니고 어차피 증거도 없기 때문에 절대로 그를 체포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양심을 건드리며 자수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지만 이건 버튼이 착해서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마지막 버튼 아내에 대한 반전도 놀랍기는 하지만 솔직히 왜 나왔는지 잘 모르겠고요.

그래도 "사소한 점들을 모으고 여러 사람에게서 받은 인상들을 흡수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답이 마음속에 팍 떠오르죠."라는 매튜 스커더의 추리법이 설명되는 것 정도는 이채로왔습니다. 논리가 아니라 '직감'에 의존하는 방식인데, 전직 형사로 발로 뛰는 수사가 특기라 탐문과 끈기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경찰이라 생각했는데 일종의 천재형이라는게 의외였거든요.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한 추리법도 괜찮습니다. "의사의 아내가 살해됐을 땐. 남편이 범인이에요. 증거는 상관없어요. 항상 의사가 범인이에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울러 얼음 송곳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왔어요. 80년대지만 모두들 냉장고를 가지고 있고, 얼음 장수가 배달을 해 주는 것도 아니니 얼음 송곳은 살인 말고는 쓸데가 없다!는 논리로 실제로 하나 구입하러 가서 아주 가끔 하나 씩 팔릴 뿐이라는 증언을 듣는게 요지입니다. 이는 사건이 발생했던 9년전 철물점, 잡화점에서 얼음 송곳을 사간 사람을 탐문했어야 하는 논리로 귀결되는데 아주 그럴 듯 했어요. 본 편과는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아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짧다는 점과 묘사는 좋지만 '매튜 스커더' 시리즈로 보기에는 애매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좋다고 하기 어렵고요. 시리즈의 대표작도 아니니 딱히 읽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2/05/07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10)

남자의 면 - 4점
츠치야마 시게루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츠치야마 시게루 화백의 먹부림 만화입니다. 면과 라쿠고를 너무나 사랑하는 영업맨 이케다 멘타로가 이런저런 면 요리들을 먹으며 겪는 일화들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바와 우동, 냉면과 오키나와 소바, 나고야면 (기시면, 녹말소스 스파게티, 타이완 라면, 된장곰탕 우동), 라면, 야키소바 등 평범한 면들이 소개되며 에피소드들도 평범한 직장인들이 마주칠 법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내용도 모든 면은 다 맛있다! 류의 만만세 해피엔딩이 대부분이고요. 대기업 츠카모토 전기 회장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기는 하지만, "맛의 달인"처럼 면 요리로 모두가 하나된다는 결말입니다. 

약간의 특징이라면 주인공이 이케다 멘타로이기는 한데,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주체는 면 요리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케다 멘타로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건 초반의 두, 세 개 정도이며, 다른 이야기들은 전부 그냥 면 요리를 먹으면서 이야기가 생겨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장인 정신이 지나친 라면 가게를 '진검 승부' 하는 집이라며 마음에 들어해서 좋아하는 여직원을 데리고 갔지만, 즐겁게 먹는게 더 중요하다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다는 이야기처럼요.

하지만 역시나, 다른 요리, 먹부림 만화와 확실히 구분되는 무언가를 찾기 힘들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여섯 편의 에피소드만 남기고 사라졌겠지요. 면 요리 만큼은 정말로 맛있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 넘쳐나는 먹부림 만화 시장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미식가 탐정 료지 1,2" 블랙 잭을 닮은 요리사 아지사와 료헤이가 등장하는 만화 '더 쉐프' 시리즈의 작가 카토 타다시의 작품입니다. 만화 도서관 Z에서 무료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뭐 볼게 없나 하고 뒤져보다가 제목에 호기심이 동해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제목만 보았을 때에는 음식과 추리가 결합된, "절대미각 식탐정" 류의 추리물로 생각했었는데 아니더군요. 추리의 비중이 극히 낮습니다. 등장하는 탐정 소재 이야기 중 볼만했던건 부사장파와 전무파가 세력 다툼을 하는 회사에서 전무파의 핵심 인물인 개발부부장 뒷조사를 위해 그의 집에 잠입해서 PC를 열어보는 에피소드 뿐이거든요. 이를 통해 부장이 컬트 (사이비) 교단 핵심 관계자였다는게 드러나게 되지요. 북해도 출신 가출 소녀를 찾을 때, 사투리를 무심코 대답하게 만드는 작전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외에는 탐정 업무로 볼 만했던 내용은 없었습니다. 대부분 불륜 조사로 미행 후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을 찍는 정도이며, 그 외에는 아들 결혼 상대에 대한 상세 조사, 데릴 사위에 대한 탐문 조사 등이 전부입니다.

반면 음식, 요리 관련 이야기는 이야기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주인공 탐정 렌죠 료지부터가 일류 요리집 쥬가와의 주인 토가와의 아들로 요리에 굉장히 박식하고 능숙하다는 설정이니까요. 초반부는 그가 조사 및 탐문 과정에서 우연히 먹게 된 요리가 너무 형편없어서 한 마디 했다가 결국 그 요리를 업그레이드시켜준다는 전개가 많고요. 

하지만 이런 전개는 억지의 극치죠. 탐정이 이런 일을 해 줄 이유가 없잖아요? 작가도 억지라는걸 알았는지 뒤로 갈 수록, 탐정업 보다는 요리에 집중합니다. 요리 승부가 계속 펼쳐지는 식으로요. 문제는 흥미를 돋우는 효과는 있지만 작품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욱 하는 성격으로 승부를 한다고 해도 한 두번이지, 세 편 연속 요리 승부는 지나쳤어요. 

아울러 렌죠 료지와 그의 아버지에 얽힌 이야기는 "맛의 달인"과 흡사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렌죠 료지가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바로 발끈하며 비판하는 모습, 그리고 그의 목표가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만든 요리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는 등 캐릭터 설정도 "맛의 달인"과 거의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요리 만화 붐에 편승해서 이런저런 인기있는 소재를 가져다 썼지만 결과물은 영 신통치 않았던 망작입니다. 유일한 장점은 공짜로 봤다는 것 뿐입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9)

2022/02/25

종장 - 니콜라스 블레이크 / 정병조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나이젤 스트렌지웨이즈는 출판사 웬함 앤드 제랄딘사로부터 사건 의뢰를 받았다. 누군가 교정쇄를 손 대어 도레스비 장군 회고록의 삭제 필요 문구가 그대로 출간되었고, 그 결과 출판사가 고소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출판사 관계자들 대상으로 탐문 수사를 벌인 결과, 여류작가 밀리센트 마일즈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교정 담당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그녀 소설의 재출간을 반대했던 탓에, 교정쇄에 문제를 일으켜 프로더로오를 제거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의심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녀는 출판사 안에서, 그것도 프로더로오 바로 옆 사무실을 빌려서 자서전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도 충분했다. 그러나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에 밀리센트 마일즈는 살해당했고, 범인은 그녀가 쓰던 자서전 원고를 수정하고 달아났다. 교정쇄 사건이 살인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챈 나이젤은 수사 끝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데...

시인으로, 그리고 명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아버지로 유명한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작품입니다. 전설의 삼중당 추리문고에서 발간된 고전이지요. 지금은 절판된지 오래라 구하기도 힘들지만, 읽는 것도 만만치않게 힘들었습니다. 오래전 일본어 버젼을 번역한 듯한 낡은 문체와 장황한 묘사, 그리고 세로 쓰기 등이 지루하고 장황한 내용과 결합된 탓입니다. 

교정쇄에 손을 댄게 누군지 조사하는 초반부는 그야말로 지루함의 극치입니다. 중요한 등장인물만 해도 스티븐 프로더로오, 밀리센트 마일즈와 출판사 공동 경영자 3인 -아아더 제랄딘, 리즈 웬함, 바질 라일 -에 밀리센트 마일즈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까지 여섯 명이나 되는데, 이들에 대한 설명과 과거, 설정 모두를 대화를 통해서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끝없는 대화가 엉망인 번역으로 자연스럽지 않게 이어지니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게다가 정작 교정쇄를 누가 손 댔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는 이 부분에서는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밀리센트 마일즈를 바질 라일이, 스티븐 프로더러오를 리즈 웬함이 흠모하고 있었다는 정도의 인간 관계가 드러날 뿐입니다.

다행히 이 초반부를 극복하고, 밀리센트 마일즈가 살해된 다음부터는 꽤 재미있어집니다. 특히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해서 충격을 배가시키는 부분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범인이 그녀를 살해하고 자서전 원고를 직접 타자를 쳐서 수정하고 달아나는 장면을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처럼 묘사한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이러한 범인의 공작이 모두 경찰에 의해 곧바로 밝혀져 버린다는 전개가 아주 신선했거든요. 독자에게 모두 알려져버린 부분에 분량을 낭비하지 않는건 정말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를 피해자 지문이 타자기에 잘못 찍혀 있다는 등의 단서로 밝혀내는 추리 과정도 볼 만 했고요.

명탐정 나이젤의 수사와 추리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경찰은 밀리센트의 아들 시프리안 그리이드를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했습니다. 유산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도 있었고요. 그러나 나이젤은 남겨진 밀리센트 마일즈의 자서전 원고를 읽고, 또 이어지는 대화 중심의 탐문 수사를 통해 아아더 제랄딘과 스티픈 프로더로오 두 명에게 유력한 동기가 있다는걸 알아냅니다. 아아더 제랄딘은 밀리센트 마일즈를 강간하려다 실패했던 옛 과거에 덜미가 잡혀 있었고, 스티븐 프로더러오는 동생이 밀리센트 마일즈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의 변심으로 불행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기를 여러가지 단서와 증언을 조합하여 밝혀내는 나이젤의 모습은 명탐정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두 명 중 아아더 제랄딘이 더 유력한 용의자처럼 보이게 함정을 파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도 그럴싸했고요. 

또 이를 통해 교정쇄에 손을 댄건 스티븐 프로더로오라는게 밝혀지는 것도 깔끔합니다. 아들 포올이 학살당하게 만든 총독의 무능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는건 누가 봐도 확실한 이유가 되니까요. 이후 프로더로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낸 추리 역시 나쁘지 않아요. 사건 발생 전 이미 현장을 떠난게 확실했던 나이젤을 제외하면, 진범은 교정쇄를 손 댄 프로더로오일 가능성이 높았고, 여기서 출발해서 프로더로오의 알리바이 파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거든요. 사소했지만 연결 고리가 되는 단서들도 하나, 둘 씩 설명되고요.

이렇게 추리물적인 가치도 높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밀리센트 마일즈라는 독특한 악녀 캐릭터에 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동기들만 놓고 보면, 아아더 제랄딘이나 스티븐 프로더로오가 악당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읽다보면 모든건 밀리센트 마일즈의 계획이자 음모, 그리고 그녀의 악한 마음으로 생겨난 사건들이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녀는 타고난 거짓말장이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능숙했던 거지요. 살해당한 것도 교정쇄를 손댄걸 알고 프로더로오를 협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몇 개월에 걸쳐 그의 옆에서 일하면서 독설을 퍼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직자였던 스티븐 동생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낙태하겠다고 협박했다는건 정말 생각도 못했던 악행이었어요. 성직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지옥이 아니었을까 싶으니까요. 하여튼, 제가 보아왔던 모든 소설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했던 악녀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템포 자체가 느리다는건 중, 후반부도 마찬가지이며 억지도 많습니다. 우선 밀리센트 마일즈를 흠모했지만 잔인하게 거절당한 바질 라일이 범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건, 빼어난 묘사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일 수 있는 용의자를 여럿 내세우는건 본격 정통 추리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명에 그쳐야지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을 싸잡아 엮는건 무리에요. 

그 외에도 패륜아 시프리안 그리이드가 살인 사건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나이젤을 살해하려고 독을 사용했다는건 아예 설명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스티븐 프로더로오의 유력한 동기 중 하나로 제시되었던, 밀리센트와의 관계가 끝나버리고 더 이상 시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저자같은 시인이라면 모를까, 일반 독자에게 와 닿는 동기는 아니었고요.

아울러 나이젤이 스티븐 프로더로오를 범인이라고 확신한건, 주요 용의자들 대상으로 소거법을 벌인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 결과만으로는 프로더로오가 범인임을 확신하기는 힘들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이젤 외의 다른 인물들일 수도 있고, 심지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시프리안 그리이드도 여전히 범인일 수 있으니까요. 증거도 프로더러오의 알리바이가 무의미하다는걸 밝혀낸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이젤이 바질과 프로더로오를 데리고 범인의 살해 수법을 재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궁지에 몰린 프로더로오의 자살로 진상을 드러내기 위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이거든요. 작가도 이후 경찰 수사 등의 지루한 설명을 이어나갈 필요도, 의지도 없었을 것 같고요. 

문제는 이는 연극적이면서도 과장된 억지의 정점으로, 탐정의 깜짝쇼라는 클리셰의 저열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모로 해결 부분에서의 나이젤은 전혀 명탐정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 진부하고 지루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장점도 있고,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번역이 굉장히 아쉬웠는데, 제대로 된 번역으로 출간된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18/04/15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기린의 날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혼바시 다리에서 건축 부품 제조 회사 간부인 아오야기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 용의자 야시마 후유키는 도주 중 교통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경찰은 아오야기가 근무하던 공장의 산재 은폐가 동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가가는 사건의 진짜 동기가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수사를 계속하는데...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가가

히가시노 게이고가가 형사 시리즈 장편입니다. 니혼바시 다리 중간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된 중년 남성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읽기 편하다는 겁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지요.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 끄는 전개가 흡입력의 비결이고요.

  • 피해자 아오야기가 왜 사건 현장을 방문했는지?
  • 아오야기가 칠복신 신사 순례를 한 이유는?
  • 아오야기가 신사 순례 때 종이학을 접어 바친 이유는?
  • 종이학은 왜 노란색부터 접어서 바쳤는지?
와 같이 수수께끼 하나를 풀면 뒤이어 다른 수수께끼가 등장하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개는 오래 전 일간지 연재물을 연상케도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잘 짜여진 이야기로 작가의 치밀한 구상과 계산이 돋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아오야기 관련 수수께끼에 더해 유력 용의자 야시마에 얽힌 수수께끼도 마찬가지입니다.

  • 야시마와 아오야기의 관계는? 
  • 야시마는 어떻게 아오야기를 만났는지? 
  • 흉기인 버터플라이 나이프의 입수 경로는? 

같이 단계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산재 은폐, 오래전 발생한 안전 사고의 은폐, 의도하지는 않은 아오야기 살인 사건 은폐라는 세 종류의 은폐가 핵심이 되는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비밀은 없고, 진실은 밝혀진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스러운 결말도 마음에 들고요. 역시나 흥행을 아는 작가다왔습니다.
사건과 함께 나름대로 성장해 나가는 가가의 모습도 볼 만 합니다. 아버지의 평소 이야기와는 다르게 죽을 때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게 살아있는 사람의 의무라는 말은 아주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와는 다른, 전통적인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이 엿보인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우선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도쿄를 무대로 한 작품임에도 "신참자" 의 무대와 같은 니혼바시 주변, 이른바 칠복신 신사 순례길을 바탕으로 한 탐문 수사가 길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도쿄 사는 사람들에게야 별 거 아니겠지만 다른 지방, 타국의 독자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이 충만한 묘사들이라 절로 눈이 가더군요. 가가의 추천 요리집과 요리도 몇 개 등장하는데 그 중 메밀 국수는 저도 꼭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회파 미스터리 느낌도 강합니다. 산재 은폐와 이를 피해자 아오야기에게 뒤집어 씌우는 회사의 행태, 그리고 이 때문에 살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억울한 비난이 쏟아지게 만드는 잘못된 매스컴의 행태 묘사 때문입니다. 산재 은폐건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겉핥기 식으로 짚고 넘어가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만, 이를 깊숙히 파고들면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읽는 재미도 있고,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볼거리도 풍성한 작품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보다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수사만으로 거의 모든게 해결되어서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입니다.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찰 소설, 수사 소설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릴 정도에요. 용의자 야시마가 도주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이유부터 경찰 포위망에 걸렸기 때문이고, 이후의 이야기도 추리보다는 수사 결과에 따라 진행될 뿐이거든요. 피해자와 하야마의 접점이 공장이라는걸 알아낸 경찰이 탐문 수사를 갔을 때 동료가 몰래 고발해서 산재 은폐건이 부각되고, 아오야기와 하야마의 범행 당일 행적을 뒤쫓다가 결국 그 날 아오야기가 만난건 하야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가가와 마츠야마가 칠복신 신사 순례라는 피해자 행적 파악에 성공하지만 이 역시 추리라기 보다는 우직하게 발로 걸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사 과정도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가가와 동행하는 마쓰미야의 "헛걸음을 얼마냐 하느냐에 따라 수사 결과가 달라진다"는 대사가 와 닿을 정도로 발로 뛰는 꼼꼼한 수사의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하아먀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으리라 추리하여, 결국 하야마가 피해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밝혀내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짜릿하고 멋졌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은 진상입니다. 일단 범행 당일 피해자와 함께 있던 범인이 들통나지 않은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합니다. 카페에서 무려 2시간 정도나 함께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노출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니까요. 여기에 지나가던 하야마가 '우연히' 피해자가 죽어가는걸 보고 가방과 지갑을 들고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가 나서 의식 불명이 되어 죽었다? 이건 우주의 운이 다 모이기 전에는 불가능할 거에요.
피해자의 유품인 디카에 종이학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단 것도 의문이며, 핸드폰 기록만 확인하고 접속했던 블로그 URL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이학 사진과 '기린의 날개' 블로그를 피해자의 행적과 함께 이으면 알 수 없던 피해자 행동의 의미가 드러나 사건 수사의 또다른 핵심 축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이를 짚어내지 못한 건 단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편의적 전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는 칠복신 순례의 핵심이 '순산 기원' 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의 임신과 연계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피해자가 니혼바시 다리 기린 상까지 구태여 찾아가 죽은 것도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이럴 힘이 남아 있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기린상" 을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억지가 너무 지나쳤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단계 성장하는 가가 형사의 모습은 마음에 들고 이런저런 볼거리는 많지만 추리 소설로서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만큼 시리즈 팬이시라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0/12/18

빨간 리본 - 헨닝 망켈 / 홍재웅 : 별점 2점

빨간 리본 - 4점
헨닝 망켈 지음, 홍재웅 옮김/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외딴 마을 헤세발렌에서 열 아홉 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피해자들은 어린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을에 오래 살았던 노인들이었다.
이 뉴스를 접한 비르기타 로슬린 판사는 병가 중에 충동적으로 헤세발렌으로 향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기록들을 통해 피해자 중에 어머니의 양부모가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르기타는 미국 네바다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경찰이 중요한 정보라고 이야기해 준 빨간 리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아냈고 간단한 조사로 수상한 중국인 손님이 찍힌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정보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르스 에리크 발프리드손이라는 인물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던 탓이었다.
그 뒤 휴가를 얻어 친구 카린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던 비르기타는 수상한 중국인 손님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이다가 당한 강도 사건을 통해 중국 공산당 실력자인 훙취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훙취는 부정부패를 저질러 왔던 동생 야뤼에게 살해당했고,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가 비르기타에게 전해지는데...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 (헤닝 만켈)이 쓴, 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대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창조한 유명 탐정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는 아닙니다. 비르기타 로슬린이라는 헬싱보리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사가 주인공인 작품이지요.

2006년 1월, 한 마을에 사는 친족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려 열 아홉 명이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도입부는 흥미롭습니다. 왜 이런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동기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비르기타 로슬린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서류를 통해 피해자들이 '안드렌' 집안 사람들이라는게 이유일 거라고 추리합니다. 100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네바다의 안드렌 일가도 얼마 전 처참하게 살해된걸 알아내고요. 

여기까지 진행된 뒤, 갑작스럽게 1863년의 중국인 '싼'이 겪는 역정이 그려지는데, 흥미롭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속아서 미국으로 끌려간 뒤, 네바다에서 철로를 놓는 노역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동생 두 명을 잃고, 중국으로 귀향한 뒤 선교사들 때문에 결혼할 여자와 뱃속 아이마저 잃어 복수귀가 된다는,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엄청난 내용이거든요. "황비홍" 1편에서 '금산에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 뒤 노예로 팔아먹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빨간 리본의 출처, 에덴 호델 주인의 증언과 피해자 유품인 JA의 일기를 통해 사건 배후에 중국인이 있다는걸 알게 되면서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지게 됩니다. 중국인 '싼'의 후예인 냉혈한 야뤼가 철천지 원수인 안드렌 가문에게 복수를 집행했다는게 진상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합친건 아무리 무리수였습니다. 거의 150년 전, 증조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철로 노역 감독관 후손들을 죽인다는 동기부터가 전혀 와 닿지 않았으니까요. 어떻게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싼이 겪은 처절한 고생을 펼쳐놓기는 했지만, 이런 식이면 원수가 아닌 사람이 없을거에요
 물론 복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 일가를 모두 몰살시키는건 억지입니다. 미국 노예의 4~5대 쯤 되는 후손이 복수를 위해 노예선 선장이었던 백인 후손들을 몰살시킨다면, 미국에는 남아날 사람이 별로 없을거잖아요? 

게다가 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야뤼가 등장한 뒤부터는 이야기는 아예 다른 길로 향합니다. 중국 특권층이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빈부격차로 분노한 농민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로 농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장황하게 펼쳐지는 탓입니다.
계획에 대한 설명은 그럴듯합니다. 마오 시대부터 이어진 여러가지 정책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곁들여져 설득력이 높거든요. 관련된 자료 조사가 철저했던 듯 싶네요.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장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함이 잘 살아 있습니다. 아이를 업은채 50Kg이나 되는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아낙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아내의 황당무계한 권력욕으로 유명해진 무가베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장면을 통해 설명되는 짐바브웨와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설명도 충실했습니다. 또 이 계획이 식민지 주의의 재현이라며 반대하는 훙취와 야뤼의 대결도 볼만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본편 살인 사건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였다면 다른 작품에서, 다른 주제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별 상관도 없는 중국 이야기로 1/3 분량을 할애한 뒤, 누나인 훙취까지 제거한 야뤼가 비르기타를 죽이기 위해 직접 나서고, 훙취의 아들에게 암살당한다는 결말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작 중에서 야뤼는 전용 비행기까지 있는 거부이자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런 인물이 직접 외국에서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발상부터가 현실적이지가 않습니다. 사건을 사주했다는 증거도 없을 외국인 여판사를 중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직접 죽인다? 말이 될 리가 없지요.
몰래 커피에 유리 가루를 섞는다는 살해 방법도 불확실합니다. 많이 어설퍼 보였어요. 이보다는 초반부에 벌어진 헤셰발렌 사건을 직접 저질렀다는게 차라리 말이 될겁니다. 그 사건 피해자들은 납득은 잘 돼지는 않아도 가문의 원수라는 이유가 있기는 하니까요. 

전개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에덴 호텔에서 리우신이 야뤼의 사무실 주소를 적은 팜플렛을 두고 간 것, 마침 중국 베이징 여행을 간 비르기타가 그 건물을 탐문하다가 강도를 당한 것, 그래서 훙취와 만나게 된 것 모두가 우연입니다. 비르기타가 중국 여행만 가지 않았어도 야뤼가 런던에 나타나 죽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덧붙여, 주인공인 비르기타 판사의 행동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녀는 지나치게 경찰을 불신합니다. 그녀가 중국인이 배후에 있음을 알렸음에도 경찰이 무시한건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흉기까지 공개한 용의자가 등장했으니까요. 오히려 사건 담당 경찰 비바 순드베리는 사건 현장에 있던 중요 물건이었던 일기장을 훔친 그녀를 용서해주고 일기장을 빌려주는 등 도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비르기타는 경찰을 불신할까요? 판사가 경찰을 이렇게까지 불신해도 되는걸까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야뤼의 살의를 눈치채고 런던으로 도주하는 과정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알 수 없는 중국인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경찰이 움직일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 호텔 주인 스튜레 헤르만손이 수상한 중국인 투숙 후 살해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호텔 투숙객 장부가 없었졌고, CCTV라는 증거도 있고요. 스튜레 헤르만손이 전날 저녁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경찰 조사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수상한 중국인의 다음 목표가 비르기타라는 것도 합리적인 추리일테고요. 이런 상황에서 왜 경찰에게 연락하지 않고, 홀로 정체도 확실치 않은 중국인 여자 말만 믿고 런던으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 외에도, 비르기타가 소싯적 마오 사상에 경도된 극좌였다는 설정도 불필요했고 야뤼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기면서 스튜레 헤르만손을 살해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빨간 리본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고요. 살해 현장에 리본을 남길 이유는 나오지 않거든요. 구태여 해석해 보자면, 서구권이 노략질하고 약탈했던 중국이 복수자로서 돌아왔다는 상징적 의미이겠지만, 추리물 기준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단서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제법 빠른 시점에서 중국의 위협을 드러낸 식견은 높이 평가할 만 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된 드라마도 제법이었고요. 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디테일들 중에서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이라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6/11/18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3점

천사들의 탐정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2019/12/20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에드 멕베인 외 / 이리나 : 별점 2점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4점
에드 맥베인.로런스 블록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북스피어

미국 뉴욕에는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유명한 '미스터리 서점'이 있습니다. 유명 추리소설 편집자이자 비평가인 오토 펜즐러가 운영하는 서점으로 1979년에 문을 열었다니 올해로 40년이 되었네요. 이 책은 오토 펜즐러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서점 고객들에게 선물로 증정했던 소책자에 수록되었던 단편들을 모아 엮은 단편집입니다.

오토 펜즐러의 말에 따르면, 소책자용 이야기의 기준은 세가지였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이야기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할 것, 두번째는 당연하겠지만 미스터리를 포함할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적어도 몇몇 장면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어날 것이 그 기준입니다. 이 책이 국내 첫 출간될 당시, 책을 펴낸 북스피어가 이벤트삼아서 이와 유사한 조건의 꽁트를 모집했었습니다. 저의 짤막한 글도 다행히 선정되어 "작가의 수지"라는 멋진 책을 경품으로 증정받았었죠. 그러나 이벤트가 당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오토 펜즐러가 자신의 서점 고객용으로 준비한 글을 엮었던 "라인업" 같은 경우, 소설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생각하고 있다가 드디어 올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네요.

일단, 작가진은 굉장히 화려합니다. 오토 펜즐러의 유명세와 인맥 덕분이겠죠. 도널드 E 웨스크레이크, 로렌스 블록, 에드워드 C 호크, 에드 멕베인, 토머스 H 쿡, 메리 히긴스 클라크 등 제가 소개했었던 유명 작가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가득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오토 펜즐러가 고전 본격물 스타일의 탐정 역할을 소화하는 작품마저 있을 정도에요. 미스터리 서점이 사건의 무대가 되고, 서점 직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많고요. 오토 펜즐러가 내세운 기준 때문이겠죠. 마찬가지의 이유로 미스터리 서점에서 열리는 파티를 소재로 한 작품도 제법 되는 편입니다.

허나 이러한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 팬, 고객을 위한 서비스적인 묘사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볼만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완성도가 낮은 탓입니다. 오토 펜즐러가 내 건 조건들도 작위적으로 충족시킬 뿐이에요. 특히나 미스터리 서점에서의 흥청망청 크리스마스 파티는 영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희귀본을 수집하는 수집가가 자신의 서재에 술취한 손님들이 들어오는 파티를 연다는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솔직히 전체 평균내면 2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나마 반올림한 점수죠. 수많은 추리 작가, 추리 소설들이 인용되고 작품 속에서 활용되는 것을 보는 재미는 괜찮았지만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점수를 주기가 민망한 수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작가들의 명성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상황인데, 작가들 역시 단순한 팬 서비스 정도로 여긴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특정 작가의 팬이라도 마찬가지고요. 몇몇 괜찮은 작품이 있기는 하나 극소수거든요. 나중에 e-book으로 각 단편들이 분철되어 판매되면 고려해 보시길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에 소개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표지 디자인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크리스마스라기 보다는 할로윈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일러스트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서점 + 크리스마스 소품이라는 미국 원작 스타일 표지였다면 판매는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낌없이 주리라"

도둑 도트문더가 크리스마스날 맨해튼 호텔에서 고대 주화를 훔쳐 달아나다가 우연찮게 '미스터리 서점'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주인 오토와 다른 일행들의 착각으로 그들이 벌이는 포커판에 끼어든 도트문더는 정직하게 게임을 해서 240달러 정도를 땄다. 그러나 경찰이 출동하여 수상한 사람에 대해 탐문하는데....

걸작 "도끼"와 유쾌한 케이퍼 소설 "뉴욕을 털어라", 묵직한 복수극 "인간 사냥" 등으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단편. 좋은 단편도 여러 편 발표했기에 작품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마침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뉴욕을 털어라"의 주인공인 도둑 도트문더가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수수께끼는 딱 한가지, "왜 오토와 친구들은 도트문더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일까?" 인데 그 진상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거든요. 이유는 바로 도트문더가 240여달러의 돈을 땄기 때문이죠. 도트문더가 체포되면 포커판은 깨지고 돈도 다시 찾을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도트문더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오토와 친구들에게 돈을 잃어주기로 결심했다는 결말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포커판의 유지가 중요했다면, 240여 달러를 다시 잃는 것 보다 오토와 친구들의 돈을 모조리 따는게 게임을 끝내기에 더 현실적인 방법이니까요. 돈은 게임이 끝나고 공평하게 돌려주면 되잖아요? 돈을 다 따거나, 아니면 240여 달러를 다 잃거나 어느 쪽이건 게임이 끝날 때 오토와 친구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기도 하고요. 아울러 크리스마스날 일어난 사건일 뿐, 크리스마스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주제에 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쓴, 오토 펜즐러의 세 가지 기준에만 맞춘 졸작입니다.

"계획과 변주"

희귀 서적 중개인이 뉴욕에서 차례로 살해당했다. 파로아 러브 형사는 그들의 죽음이 대실 해밋의 잃어버린 원고인 "마른 여자"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고, 자신의 친구 오토 펜즐러를 찾아가 책 수집상 와일리 에머슨을 함께 찾아가 보자고 부탁했다. 와일리 에머슨이 "마른 여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와일리 에머스는 "마른 여자"라는 원고는 본 적도 없다며, 자신을 찾아왔던 수집가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오토는 와일리 에머슨이 썼다는 원고 뭉치를 들고 나오는데...

흑인 동성애자 형사 파로아 러브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저술한 조지 백스트의 파로아 러브 단편. 크리스마스가 배경이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주는 부분은 없습니다. 대실 해밋의 "마른 여자"라는 원고를 와일리 에머스가 숨긴채 가지고 있던 이유도 썩 납득이 되지 않고요. 원고를 쫓는 악랄한 무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차피 돈 받고 팔 생각이었다면 마찬가지 결과였을텐데 말이죠. 게다가 범인이 오토 펜즐러 서점의 매니저 알렉스였다는 진상도 뜬금없습니다. 나름의 복선이라고 등장하는건 찢어진 청바지와 원고를 노리는 도라를 배웅해 주었다는 것 뿐이라 억지스러웠어요.

한마디로 단편에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를 무리하게 펼쳐낸 느낌입니다. 조금 더 길게, 상세한 설명을 더하여 풀어냈어야 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녹슨 책갈피 도난 사건"

닉 벨벳은 크리스마스 주간에 고등학교 때 친구 찰스 오닐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의뢰는 오토 펜즐러에게 판매한 대량의 헌 책 속에 끼워진 금속 책갈피를 훔쳐와 달라는 것이었다. 닉은 택배기사로 변장하여 서점에 잠입한 뒤, 책갈피를 빼내오는데 성공하는데...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단편. 시리즈 캐릭터인 괴도 닉 벨벳이 주인공입니다. 확실히 제왕다운 작품이에요. 오토 펜즐러의 어떻게 보면 무리한 요구를 모두다 들어주면서 완성도까지 높은 수작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크리스마스라는 시즌을 유효적절하게 써먹고 있는게 눈에 뜨입니다. 크리스마스라 바빠서 닉의 변장이 잘 먹혔거든요. 오토 펜즐러가 대량의 추리 소설을 구입한 것과 그 탓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책갈피를 훔치게 되는 과정도 그럴듯합니다.

또 녹슨 책갈피를 거액의 수고비를 지불하면서까지 훔치게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도 인상적입니다. 사실 진상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요. 앞서 찰스의 여동생 마시의 남편이 목을 칼로 베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상세하게 설명되니까요. 그래도 '구리는 녹슬지 않는다. 이건 부식한게 아니다!'라는 닉 벨벳의 착안과 이를 통해 진상을 끌어내는 추리는 꽤 그럴듯합니다. 자수하라는 닉의 제안도 깔끔하고요.

무엇보다도 닉이 택배기사로 변장할 때, 위장을 위해 준비했던 여자친구의 추리소설들 중 한 권 - 놀랍게도 수 그래프턴의 "알리바이의 A" - 이 꽤나 값나가는 작품이었다는 결말이 아주 크리스마스답습니다. 오토 펜즐러씨가 횡재했다는 결말인데, 원고도 써 주고 덕담까지 해 준 셈이니 에드워드 D.호크는 상당한 대인배였던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 오토 펜즐러의 기획 의도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작품입니다. 완성도를 떠나 이 정도로 의도를 잘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역시 대가는 대가구나 싶네요.

"모작 살인 사건"

안 팔리는 아동 추리소설가 루페 페티코드는 자신의 교육 센터 창작 수업 수강생이 검토를 요청한 원고에 홀딱 반했다. 그 원고를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넘겨 선인세로 거액을 약속받은 루페는 원작자 도라 윔블러를 어쩔 수 없이 살해하는데...

잘 모르는 작가인 론 굴라트의 작품. 다른 누군가의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기 위해 원작자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는 많을겁니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럴듯한 동기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좋아보였던 도라 윔블러의 작품도 사실은 '도작' 이라는 진상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 덕분에 기존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옛 고전물을 떠올리게 만드는 걸작이라고 칭송받지만, 사실은 고전물의 모작에 불과했던 것이죠! 정말 유쾌하면서도 인상적인 반전이었습니다.

루페 페티코드의 나름 절박한 현실, 작가로서의 뒤틀린 긍지와 복수심이 만화적으로 과장되어 있는게 옥의 티이기는 합니다. 너무 스테레오 타입의 묘사였거든요. 반전 외의 모든 전개 역시 스테레오 타입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뻔했고요. 그래도 반전만으로 모든게 용서되는 작품. 별점은 3점입니다.

"이보다 더 어두울 순 없다"

네로 울프를 추종하는 탐정 레오 헤이그의 조수이자, 그가 해결한 사건들을 소설로 발표하는 칩 해리슨은 오토 펜즐러의 요청을 받아 '미스터리 서점'을 찾았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직후, 귀중한 코넬 울리치의 육필 원고가 도난당한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 때문이었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로 유명한 로렌스 블록의 단편. 매튜 스커더 시리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코믹한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특히 화자인 칩 해리슨의 거침없는 언변이 아주 돋보여요. 온갖 고전 추리소설을 비트는 독설, 그리고 오토 펜즐러가 흠모하던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지만 술 때문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상황을 풀어낸 전개도 유쾌하고요. 오토 펜즐러에게 장난치기 위해 쓴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에요.

문제는 로렌스 블록답지 않은 유쾌함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다는 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파티의 구실일 뿐 이야기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으며, 추리 역시 대단할게 없거든요. 용의자들을 불러 모아 순서대로 증언을 듣는걸로 사건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여섯명, 아니 일곱명의 용의자가 원고를 돌려보았으며, 마지막에 원고를 읽었던 연회업체 사장 진 보트레이가 오토 펜즐러의 침대 옆에 원고를 올려놓아 곧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진상은 허무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의 명성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졸작으로 로렌스 블록의 광팬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요정들의 선물"

보스턴에서 희귀 초판본 배달을 의뢰받고 오토 펜즐러의 '미스터리 서점'에 방문한 사설탐정 존 프랜시스 커디는 오토 펜즐러부터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그가 수집한 추리 소설가들의 소장품이 동일 가격의 돈이 들은 봉투와 바꿔치기 당한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세 명의 추리 소설가였다. 존은 세 작가를 차례로 탐문한 뒤, 진상을 알아낸다.

진상은 림프종으로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작가 모리가 꾸민 장난이었다는 소품으로 오토는 손해본게 실제로 없기 때문에 진지한 범죄가 아니라 장난이라는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토 펜즐러를 피해자로 삼은 생생한 추리 소설을 오토 펜즐러에게 선사한다는 건 추리 소설가가 세울법한 계획이구나 싶어 재미있었습니다. 모리의 시한부 삶이 다음 크리스마스를 맞지 못할 것 같다는게 도화선이 되었다는 설정은 필요없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지만요. 이 설정 때문에 밝고 유쾌할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가 좀 묵직해졌거든요.

그래도 미스터리 서점의 주인과 그의 친구인 추리소설가들이 벌일법한 크리스마스 장난과 선물이라 단편집 주제에 꼭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엄마가 산타클로스 아저씨를 죽였어요"

어느 바쁜 크리스마스 오후,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는 앨런의 앞에 맥스라는 꼬마가 나타나 산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기 시작했다. 

제목이 스포일러입니다! 제목이 다 망쳤어요. 맥스가 산타클로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할 때 부터 맥스의 엄마가 산타클로스를 죽였다는건 명백해집니다. 산타클로스의 정체가 대체로 아빠라는 점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동기도 대체로 짐작이 가고요.

물론 추리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 등장하는 전개는 볼만 합니다. 특히 서점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인 2급 형사 로지의 말이 기억에 남네요. '경찰 소설을 쓰는 작가 중에 정작 경찰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데, "87분서"> 시리즈로 일세를 풍미한 작가 스스로에 대한 자학개그로 느껴졌거든요. 역시 로지가 고양이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싫어한다면서 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고양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도 굉장히 와 닿았고요. "삼색털 고양이" 시리즈는 솔직히 첫 편을 제외하고는 엉망이었죠. "펠리데"는 괜찮았었지만요. 또 범죄물의 거장 에드 멕베인답게 맥스의 엄마가 서점에 나타나는 장면의 긴박감도 꽤 훌륭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제목만 조금 비틀어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더라면 훨씬 나았을텐데, 에드 멕베인답지 않은 안일한 구성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동방 박사의 간계"

오토의 손님 키티는 오토에게서 한 희귀본의 완벽한 표지를 가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 오토를 위해 희귀본을 완벽하게 만들어 선물하려던 키티는 그 남자 가토의 방에 잠입하여 표지를 빼내 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물용 희귀본 "바깥 화장실 가는 길"이 도난당한걸 알게 되는데... 

오토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두 도둑이 각자 서로의 희귀본과 표지를 훔친다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의좋은 형제"같은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완성도는 낮습니다. 전반적으로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왜 오토에게 귀중한 희귀본을 선물하려고 하는지, 키티와 가토는 직업이 도둑인지 등 기본 설정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거든요. 둘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려는걸 오토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고요. 또 오토가 둘이 그에게 선물하려던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흘린 정보로 둘이 각자 상대방이 가진 물건을 훔쳐내리라고 예상하는건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게 둘의 인연을 이어주려는 오토의 계획이었다니! 억지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했어요.

크리스마스, 선물, 해피엔딩 등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어울리는 소재들을 잔뜩 가져다 쓰기는 했지만 이래서야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내 목표는 신성하니"

윌슨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스터리 서점을 방문한다. 삼촌에게 고가의 책을 선물하려 한다는 핑계를 대고 오토 펜즐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목적은 선물 구입이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였다...

오토 펜즐러에게 원고를 퇴짜맞은 후, 복수심에 사로잡힌 작가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서스펜스 스릴러. 그러나 아쉽게도 긴장감이 잘 살아나지 않아서 서스펜스물로는 실격입니다. 정말로 윌슨이 오토 펜즐러를 죽이려고 했는지조차 모호하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그러나 마지막에 오토가 윌슨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써 내면 고료를 주겠다고 구슬리는 장면의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대단한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퇴짜를 놓은 평론가가 퇴짜를 맞은 작가에게 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느껴지거든요. 작가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잖아요?

그래도 별점은 1.5점입니다. 전개가 엉망이라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고양이 요정 스피릿"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찰서장 커디 맨검은 우연히 옛 인연이 있는 뉴욕 형사 로리를 만나 함께 오토의 미스터리 서점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가했다. 그리고 유명 작가 바트 웰스의 전처 클라우디아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미스터리 서점에 대한 떠들썩한 묘사는 볼거리입니다. 화자인 커디 맨검의 과장섞인, 허풍스러운 말투가 인상적인 탓으로 오토 펜즐러가 통이 커서 캐비어와 샴페인을 "전쟁과 평화"에서 보다도 많이 내 놓았다는 류의 말이 가득하기 때문이에요. 또 오토 펜즐러의 관심사, 미스터리 서점과 그곳에서 키우는 고양이에 대한 상세한 묘사 등은 작가가 오토 펜즐러를 속속들이 알고 있구나 싶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건은 너무나도 별볼일 없습니다. 장황한 파티,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 후 시체가 발견되고 사건이 해결되기까지는 달랑 2페이지 정도로 마무리되거든요. 고양이 스피릿이 바트 웰스의 바지에서 귀걸이를 발견하는게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러한 고양이의 도움이 없었어도 범인이 드러나는건 어렵지 않았을거에요. 흉기인 샴페인 병에 바트의 피가 묻어 있었고, 동기마저도 명확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주인공의 장황한 대사만 돋보일 뿐, 추리적인 부분에서 아무리 봐도 점수를 줄 부분이 없다면 추리 소설이 아니라 무슨 스탠딩 코미디와 다를 바 없지요.

"크리스마스가 남긴 교훈"

프리랜서 편집자 베로니카 크로스는 박봉 때문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며 부수입을 챙겨 왔다. 그녀는 토요일마다 서점에 나타나 싸구려 중의 싸구려 소설인 브루노 클렘의 페이퍼 백만 찾는 손님 해리에게 도대체 왜 브루노 클램 책을 읽는지를 묻는데... 

토머스 H 쿡의 단편. 심리 묘사의 대가다운 진중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또 누구나 가졌을 법한 질문, 이런 싸구려 책을 뭐하러 읽는가?에 대한 깊이있는 답도 인상적이고요. 베트남 전쟁에서의 무자비한 살인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는 해리에게는 싸구려 페이퍼백, 펄프 픽션이 일종의 스카치 위스키나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읽는다는게 그 진상인데, 이를 대단히 유려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고급 문학만 읽는 베로니카 역시 이런 류의 고통 - 강한 증오심으로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후려쳤던 것 - 을 잊기 위해 책으로 도피하는게 아닐까 싶은 결말도 돋보입니다. 결국, 수준을 떠나 문학은 마약이라는 결론이랄까요?

문제는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신간이 나오지 않는 브루노 클램의 책 대신, 시리즈가 많은 다른 싸구려 소설을 권해주고, 베로니카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원하는건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는 교훈을 얻는다는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딱히 흥겹거나 유쾌하지도 않고요. 또 미스터리라고 할 법한 내용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좋네요. 다른 졸작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후회하게 될 거에요"

미스터리 서점은 끔찍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토 펜즐러의 유일한 희망은 미스터리 소설을 수집하는 백작 부인이 찾는 "데인 가의 저주"를 찾아내어 판매를 성사시키는 것 뿐. 다행히 크리스마스에 책을 구하는데 성공하지만 백작 부인에게 건네기 전, 책을 분실해 버리고 마는데... 

오토 펜즐러의 아내라는 아동 도서 작가 리사 미쉘 앳킨슨의 이야기. 크리스마스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벌어진 미스터리라는 조건은 충족시키지만 완성도는 별로입니다. "데인 가의 저주"가 사라진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어요. 급료 없이 스티븐 킹의 신간 스릴러를 원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마지막 근무와 책을 숨기기 위해 스티븐 킹의 표지를 덮었다는 묘사가 합쳐지면 그 답은 너무나 뻔하잖아요. 게다가 백작 부인이 고가의 컬렉션을 오토 펜즐러에게 남기고 사고로 죽는다는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것도 순록이 끄는 썰매에 치어서 죽는다니,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도저히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긴 겨울의 한잠"

프리랜서 사진가였던 '나'는 오토 펜즐러의 도움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빠져나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맞은 첫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아래층 화장실을 방문했던 산타클로스의 시체를 발견한다. 산타클로스의 정체는 서점 직원 알란이었다. 

셜록 홈즈 원고가 동기인 고전 본격물 스타일의 정통 추리 단편. 오토 펜즐러가 직접 탐정역을 수행하는게 독특했습니다. 전개, 특히 셜록 홈즈와 비슷한 추리쇼를 펼쳐가면서 범인을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 등에서 고전 본격물을 잘 흉내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흉내에 그칠 뿐이라 아쉽습니다. 고전물 만큼의 정교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수께끼인 "왜 희귀본을 창고에 넣는다고 했던 알란이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채 살해되었는가?"부터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으니까요. 당연히 산타클로스가 알란을 죽이고, 옷을 갈아입힌게 뻔하잖아요? 그렇다면 산타클로스는 누구냐는 수수께끼가 남는데, 여기서 억지스럽게 이야기가 비약해 버리고 맙니다. 시체 발견이 계기가 된 튜바 연주자 더그가 범인으로, 그는 시체 근처에 떨어진 튜바의 밸브 오일을 감추기 위해 다시 현장을 방문했다는 설정인데 이건 말도 안되죠. 현장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면 다시 돌아가서 증거를 인멸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냥 도망가버리면 되지요. 현장의 튜바 밸브 오일이 그렇게 대단한 단서가 될 수도 없었을겁니다. 애초에 서점에 나타나지 않은걸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고전 본격물에 대한 팬심으로 조금은 후한 점수를 줍니다.

"콜드 리딩"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는 로저의 특기는 손님들을 파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책을 권해주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마스 이틀 전, 매들린 커크라는 아가씨가 나타났다. 유명 작가였던 할머니 매들린 커크 (동명이인)의 미발표 원고를 발견하고 그 값어치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로저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원고를 확인하기로 약속하는데, 원고를 빼앗기 위해 누군가 그녀를 습격한다. 로저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해낸다.

서점 손님을 보고 그들이 원하는 책을 추리해낸다는 로저의 특기는 재미있습니다. "시인장의 살인"에서 학생 식당 손님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추리 배틀을 펼치는 아케치 교스케와 하무라 유즈루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저는 별로였지만 존.D.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가 중요 소재로 등장하여 관련된 정보가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등 추리 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도 인상적이었고요.

문제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라는 일상계스러운 추리라면 모를까, 폭행 납치에 살인 미수까지 벌이는 범인을 추리하기에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범인인 맥도널드 팬을 특정하는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없지는 않고요. 그러나 단편 소설 분량에서 쉽게 풀어낼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크리스천 킬러"

지능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 죽이는 일에 충실한 킬러 사케시언은 독실한 크리스천. 어느날 자신의 타깃인 스티븐의 여동생을 진짜 천사로 착각한 뒤 살인을 그만두는데...

크리스천 킬러가 천사 분장을 한 타깃의 여동생을 만난 후 살인을 그만두지만, 또 다른 킬러의 살인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봐도 "레옹"이 떠오르지요? 우직한 킬러 사케시언, 살아있는 천사같은 헤일리 캐릭터도 딱 그러하고요. 마지막에 사케시언이 죽고 마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타깃인 인간 쓰레기 스티븐이 살아남는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딱 한가지, 사케시언이 죽기 전 진짜 천사를 보았다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 뻔하지만 극적인 전개에 이 결말을 더하면 평작 수준은 되다고 보여지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오토 펜즐러의 조건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작품이에요. 특별히 수수께끼가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칠십네번째 이야기"

미스터리 서점에서 칠십 세가지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을 구입한 주인공은 책에 수록된 "어셔가의 몰락"을 읽은 후,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아래층 한국인 편의점 주인을 트렁크에 넣어 땅에 파 묻는다... 

영미권 작품에 흔한, 1인칭 시점의 정신병자가 등장하는 사이코 스릴러. 하지만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이기는 한데, 지능지수가 너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어린 시절에 저질렀던, 동물들을 땅에 파묻던 행동을 범죄와 연결시키는데 발상이 지극히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동기도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라는 점도 그러하고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루스 렌들같은 심리 묘사를 선보였다면 나름 볼만한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묘사 역시 전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마지막 목격자로 오토 펜즐러와 서점 직원을 등장시킨 건 명백한 패착입니다. 지나치게 억지스러웠어요. 때문에 별점은 1점입니다.

"이름이 뭐길래"

전직 공중 곡예사 렉시 스미스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할머니의 유언으로 그녀가 퇴짜맞았던 원고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내 놓은 뒤, 친구 알비라의 사인회로 향했다. 사인회가 끝난 뒤, 사인회장이었던 미스터리 서점의 오토 펜즐러와 파티를 가지게 된 렉시는, 그곳에서 할머니의 작품 중 한 편이 유명 작가의 작품과 5년 전에 바꿔치기 되었다는걸 알고 경악한다. 

서스펜스 스릴러물로 유명한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단편. 작은 애완동물들을 사랑하고 추리 소설가를 지망했던 할머니 캐릭터 설정이 귀여웠던 작품입니다.

문제는 특별한 반전이 있는건 아니며, 할머니의 작품이 사실은 대단한 걸작들이었다는 결말이 지나치게 안일했다는 점이죠. 렉시가 전직 곡예사였다는 설정도 딱히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아니고요. 분쇄될 뻔 했던 봉투를 더 극적으로 회수했었어야 했어요.

그래도 크리스마스 특별 단편이니 이 정도는 눈감아줄 만합니다. 전개도 깔끔하고 시원시원해서 읽을 만 하고요. 완성도보다는 분위기가 적당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5/06/24

제 6계명 - 로렌스 샌더스 : 별점 3.5점

제6계명 1 로렌스 샌더스/고려원(고려원미디어)

빙햄 투자기관의 조사원 샘 토드는 손데커 박사라는 인물이 백만불의 후원금을 얻기 위해 신청한 연구의 조사를 위해 오지와 같은 시골마을 코번으로 떠난다. 손데커 박사는 그가 운영하는 요양기관과 연구소만이 마을을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탓에 쇠락해 가는 코번 마을을 그나마 지탱하는 유일한 인물로 남다른 카리스마와 설득력을 지닌 천재였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토드는 그가 하는 연구는 세포의 노화를 유발하는 X라는 요소를 배재하여 인간을 불멸, 불사의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하지만 토드는 요양소에서 불분명하게 사망한 인물들이 여럿 있다는 것과 요양소에서 일하던 노인이 어느날 알 수 없이 실종되었다는 사실 등 손데커 박사의 매력 뒤에 감추어진 수수께끼와 같은 여러 사건을 접한 뒤 박사와 그의 연구에 대한 의심이 깊어 가는데....


로렌스 센더스의 유명한 작품 "제 6계명" -살인하지 말라- 입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전에 이미 "앤더슨의 테이프"와 "피터 S의 유혹"이라는 작품 2개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특히 "피터 S의 유혹이)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고 시드니 셀던과 비슷한 통속소설 작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죠. 그래서인지 유명한 작품이고 구하기도 별로 어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그동안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번에 헌책방 쇼핑 도중 충동적으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정말 물건이네요!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한번에 쭉 읽어버리고 말았어요.

먼저 시니컬하면서도 냉정한 판단력의 주인공이 주로 탐문과 조사로 수사를 진행한다는 과거 전성기 시절의 하드보일드 공식에 충실한 묵직한 전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적인 부분과 스타일까지도 거의 유사하더군요. 그러나 단순한 모방작은 아닙니다. 기존 하드보일드의 사립 탐정이나 형사와 다른 다른 특이한 직업의 탐정이 주인공일 뿐더러 의학 스릴러라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소재가 더해져서 현대적이고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그리고 하드보일드 분위기의 작품치고는 그다지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가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원래대로의 공식이라면 중요 증인들이 중간중간 계속 죽어나가면서 이야기가 연결되겠지만 이 작품은 중요 증인 한명을 제외한다면 마지막 부분에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짐과 동시에 주범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한번에 죽어버린다는 점에서 새롭기도 하고 내용 전개도 보다 깔끔하게 느껴졌어요.

미친 과학자가 불멸, 불사의 존재를 연구하다가 파국을 맞는다는 전형적인 줄거리 역시 나름의 과학적, 의학적 설득력을 지니는 요소들을 첨가하고 있어서 좋았는데 특히 미지의 세포 조직인 "X"라는 존재를 규명하기 위한 과정과 그 결과물은 나름 쇼킹합니다. 아주 옛날에 읽었었던 "엔젤딕"이라는 이현세 만화의 "미완의 변태"편의 에피소드가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이현세씨가 이 작품을 읽고 모티브를 얻었으리라는 강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복잡한 인간관계를 묘사함으로써 (물론 이러한 사소하고 큰 상관없은 인물들의 캐릭터 묘사가 재미있어서 그다지 늘어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만) 소설이 필요이상 길어진 것 같은 느낌이 조금 들기는 하며 제가 무척이나 싫어하는 성적 묘사가 제법 등장한다는 것은 좀 아쉽네요. 뭐 그렇게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요.

어쨌건 결론적으로는 기대 이상의 작품이었습니다. 로렌스 센더스라는 작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전에 읽었던 작품들만 보더라도 실망스러운 부분은 많지만 그래도 "글재주는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 작품은 전작들의 아쉬운 부분을 거진 걷어내고 재미까지 덧붙여졌을 때의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네요. 그야말로 포텐터진 유망주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또다른 걸작 시리즈라는 "대죄" 시리즈도 한번 구해봐야겠습니다.

PS : 저는 마지막 엔딩에서 주인공이 애인에게 전화하는 장면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의 엔딩과 겹쳐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상한 연상이네요...^^

2004/01/16

르콕 탐정 - 에밀 가보리오 / 한진영 : 별점 2.5점

르콕 탐정 - 6점 에밀 가보리오 지음, 한진영 옮김/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파리의 한 술집에서 격투 끝에 살해된 세 남자의 용의자로 한 남자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20대 중반의 르콕이 등장한다. 르콕은 상관인 제브롤 경감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현장검증과 수사를 통해 체포된 사나이 메이가 사실은 뭔가 배경이 있는 인물이라고 추리한 뒤 세그뮬러 예심판사와 동료형사 압생트, 그리고 일종의 범죄 자문위원(?)인 타바레 등의 도움으로 진상을 밝혀내게 된다.

에밀 가보리오의 전설적인 추리소설. 포우 직후에 발표된, 19세기에 쓰여진 초창기 추리소설로 이 작품을 비롯해서 여러편의 작품을 발표한 가보리오는 현대 추리소설의 형성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셜록 홈즈도 르콕 탐정을 “그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존재야” 라며 폄하하는 장면이 있지만 코난 도일 경 스스로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한마디로 추리 역사상, 거의 추리소설의 아버지쯤 되는 작품으로 그동안 역사적인 가치로나 호기심으로나 항상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국일미디어에서 발행되었네요. 물론 저는 당장 샀습니다. 책도 묵직하니 무려! 500페이지 가까운 장편으로 기대하게 만들더군요.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아무래도 초기 작품 답게, 좀 지루하고 맥이 빠지는 편입니다. 초반부의 사건 현장만 분석해서 추리하는 르콕의 모습은 홈즈와 굉장히 유사하고, 나름대로 색다른 재미도 주지만 갈수록 사건 자체의 트릭 보다는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목적을 두고, 순전히 탐문수사에 의존하는 르콕의 수사 방식이 굉장히 지루하거든요. 르콕의 모든 행동들은 홈즈가 비판할 정도로 어설프기도 하고요.
마지막 부분에서 용의자를 도망치게 놓아주고 용의자의 뒤를 쫓는다는 방식도 순진하지만, 드러난 용의자의 정체를 몰라 고민하다가 탐정 타바레의 자문으로 쉽게 해결되는 결말부 같은 것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뭐 그 타바레의 추론 자체도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라서 더 맥이 빠지네요. 이렇다면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경찰 수사” 소설이라고 하는게 더 적당할 것 같아요.

원래 이 책은 2부작으로 2부째에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과거사, 그리고 그것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는데 2부는 추리소설보다는 뒤마식의 모험 소설에 가까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구성은 셜록 홈즈 장편 “주홍색 연구”나 “4인의 서명” 등에서 전반부에 사건이 벌어지고 후반부에는 범인의 회상으로 이루어지는 구성과 유사한 것 같은데 이 당시 추세였을까요?

어쨌거나 기작으로의 미덕과 역사적인 가치는 분명하지만, 그만큼 조금 어수룩하고 순진한… 현대독자들이 보기에는 부족한 점 또한 많습니다. (무려 100년도 전에 쓰여진 책이니까요)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겠지요. 이 책도 조금만 더 짧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지 읽기에는 역사적 가치 이외의 다른 재미를 찾기 힘들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물론 저로서는 이런 책이 나와주니 고맙기만 하다! 쪽이었지만, 사실… 많이 팔릴 것 같진 않네요^^ 그래도 꾸준히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욕심일까나..) 아울러 뒷부분의 정태원씨의 해설은 언제나처럼 좋았습니다. 차후에 국일미디어 책들이 많이 나오면 뒷 부분의 해설만 따로 모아서 책으로 내 놓아도 될 것 같아요.

2013/10/24

시간의 습속 - 마쓰모토 세이초 / 김경남 : 별점 3점

시간의 습속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도쿄 근교의 휴양지 사가미 호수에서 목졸라 살해당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교통문화정보" 신문의 발행인 겸 편집자 도이 다케오였다. 주변 인물을 탐문하던 경시청 수사1과의 미하라 기이치 경위는 굣코 교통의 전무 미네오카 슈이치가 수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미네오카 슈이치는 사건 당시 후쿠오카 근처 모지의 메카리 제사에 참석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미하라는 이전 사건으로 알게 된 후쿠오카의 도리카이 주타로 형사에게 미네오카의 알리바이를 문의했으나 수수께끼를 밝혀내지 못하던 중, 후쿠오카에서 정체불명의 사체가 발견되는데...

마쓰모토 세이초의 1961년도 발표작. "점과 선" 발표로 일약 인기작가가 된 세이초가 4년 후, "점과 선"이 연재되었던 월간지 "여행"에 다시 연재했던 작품입니다. "점과 선"의 주역인 미하라 - 도리카이 컴비가 다시 등장합니다. 세이초 작품으로는 유일한 속편이라고도 하네요.

전작과 같이 정통 알리바이 파헤치기 추리물입니다. 사건의 핵심인 미네오카 슈이치의 알리바이 트릭, 즉 "어떻게 그가 메카리 제사 사진을 찍을 수 있었나?"와 더불어 미네오카가 도쿄와 후쿠오카를 어떻게 오갔는지, 사건 당일 도이와 함께 있었던 여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현장을 빠져나갔는지, 후쿠오카에서 발견된 피해자는 누구이며 현장에 있던 여성용 양가죽 장갑은 무엇인지, 가짜로 발급한 정기권의 용도가 무엇인지 등 다양한 트릭 및 추리가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수준도 높습니다. 그 중 핵심 트릭인 알리바이용 사진 트릭은 필름 교체 및 재촬영, 조작이라는 복잡한 것인데 전문가적 지식을 활용하여 설득력이 충분할 뿐더러, 미하라 경위의 여러 가지 아이디어 - "TV를 찍은 것이 아닐까?" "예전 사진은 아닐까?" "영화 뉴스를 찍은 것이 아닐까?" 등 - 까지 검증해 주는 꼼꼼함이 돋보입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원래 사진을 촬영한 가지와라에게 들키지 않고 필름을 빼돌리는 방법 역시 기가 막히고요. 아울러 공범인 여성의 정체, 그리고 그 정체를 밝혀주는 단서가 되는 사체가 끼고 있던 장갑 역시 당시 시대를 앞서갔다고도 보여지는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미하라 경위의 직감에 의지한 추리와 도리카이 형사의 성실하고 꾸준한 수사도 전작 "점과 선" 못지 않게 잘 그려지고 있는 것은 전작의 팬으로 마음에 든 점입니다.

또 연재된 월간지가 "여행"인 탓이었을까요? 서두에 등장하는 모지의 메카리 제사를 비롯하여 사가미 호수, 그리고 그 외의 후쿠오카의 명승지를 소개하는 여정 미스터리로서의 모습도 보이는 것이 이채롭더군요. 심지어는 오사카로 출장 가는 형사들의 기차 여행까지 디테일하게 묘사될 정도니 말 다했죠. 어떻게 보면 예전 작품의 여유로움 같은 게 느껴지는 부분이라 괜히 흐뭇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제법 됩니다. 그중 가장 알 수 없었던 것은 애초에 미하라 경위가 왜 미네오카 슈이치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는지입니다. 알리바이가 누가 봐도 완벽한데 거기서 의심을 품고 파헤칠 생각에 집착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죠. 반대로 해석하면 무죄인 미네오카가 미하라 경위의 편집증적 망상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 문제는 피해자 도이가 최초에는 나름 인격자로 묘사되는 등, 동기를 드러내지 않은 탓입니다. 최소한 도이에게 흘러간 거금의 일부에 미네오카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사가 미네오카에게 집중되었다는 설명은 필요했습니다. 아니면 차라리 미네오카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확실하게 독자에게 보여주는 도서 추리물의 형태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리고 두 번째로 미네오카 트릭의 핵심인 메카리 제사 사진 공작도 조금 이상했어요. 원래 사진을 찍은 가지와라가 제사 당일에 컬러 슬라이드로 사진을 찍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요? 잡지에서 가지와라라는 이름만 보았을 뿐, 미네오카가 가지와라와 대면한 것은 사건 발생 얼마 전 딱 하루 만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무려 두 건의 살인사건을 저지르는 범행에 대한 확신을 얻어갔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싶거든요. 첫 대면 이후에도 지속적인 연락을 취했다는 정도의 부연설명이라도 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사회파 작가로 유명하지만 (뭐 본인은 그닥 좋아한 명칭은 아니라곤 해도) 정통 추리 분야에서도 탁월한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장편다운 꼼꼼하고 디테일한 묘사도 인상적이었고요.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감점했으나 추리 애호가라면, 특히 알리바이 파헤치기 류에 관심 있으시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12/07/01

프로파일러 노트 - 로이 해이즐우드 / 허진 : 별점 3점

프로파일러 노트 - 6점
로이 해이즐우드 지음, 허진 옮김/마티

FBI의 프로파일러 출신인 지은이 로이 해이즐우드가 실제 프로파일링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사건과 범인들에 대해 분석한 책입니다. 각 사건마다 상세한 설명 및 범인을 뒤쫓는 방법과 과정, 법정에서의 증언 및 판결까지 완결되도록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개요만 놓고 보면 "FBI 심리 분석관"과 유사하지만, 이 책에서는 프로파일러라는 직업과 여러 가지 범죄 이론 및 분석과 더불어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제 강력범죄들이 많이 소개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또한, 그 수사 과정이 디테일하게, 스토리가 있게 펼쳐지기에 흥미로운 범죄 - 사건 관련 논픽션을 읽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범죄자는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행동에 옮긴 환상을 매춘부들과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을 소개하며, 실제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한 사건에서 근처 매춘부들을 탐문하여 범인을 검거한 예를 드는 식입니다.
역시 비슷한 류인 "마인드 헌터"보다는 더 전문적이고,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요.

몇 가지 재미있는 내용을 소개해 드리자면, 어떤 의식적 범죄자들은 순응적 피해자, 주로 아내나 여자친구를 대상으로 자신의 환상을 실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응적 피해자의 다섯 단계 (가학적 변태성욕자가 단번에 알아보는)가 있다고 하네요.

1. 감정적 트라우마로 인해 쉽게 영향을 받는다. (경험이 없고 순진하고 우유부단하거나, 최근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거나...) 의존성 인격장애가 있다. 즉,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가 있는,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유형이다.

2. 유혹. 가학적 변태성욕자들은 표적으로 삼은 여성이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 후, 무자비한 행동을 가한다.

3. 두 번째 단계 이후 아내나 여자친구가 윤리적 범위를 넘도록 조종한다.

4. 여성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

5. 처벌. 여성을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다.

이 단계를 통해 한 여성을 만나 그녀를 사로잡은 뒤 일탈을 한 번 경험하게 만들고, 이후 그녀의 체중을 늘리는 등 사회적으로 고립시킨 후 완전히 마음대로 조종했던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추리소설을 쓴다면 꽤 도움이 될 만한 내용 중 하나는 "프로파일러는 범죄자의 시각으로 범죄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범죄자가 피해자를 숲 한가운데 2미터 정도 깊이에 묻었다면, 왜 그랬을까요? 범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첫째, 시체가 발견되지 않기를 원하고, 둘째, 필요한 육체적 노동을 신경 쓰지 않으며 (심지어는 즐길 수도 있고), 셋째, 분명히 야외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한 방송국에서 기획했던 살인마 잭의 프로파일링에 대한 내용은 추리 애호가로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국, 코스민스키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 하네요! 주요 용의자로 부각된 여러 인물들을 전문가들이 배제하는 이유가 합리적이어서 흥미롭게 읽혔고, 방송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도 많고, 유사한 서적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부분이 있기에 프로파일링과 범죄 수사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