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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5

가족의 탄생 - 도진기 : 별점 2.5점

가족의 탄생 - 6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해결사로 활동하며 먹고 사는 김진구에게 여자친구 혜미를 통해 의뢰가 들어왔다. 얼마 전 사고로 아내를 잃은 일식 요리사 이교준의 의뢰였다. 그는 아내의 사고에 두 처형이 관련되어 있다며, 갓난 자신의 딸 아름이 100억대인 장인의 유산을 독식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구는 젊은 새어머니의 유산까지 아름의 것으로 해 줄것을 약조하며, 이교준 명의의 3억짜리 집을 담보로 잡았다.

그러나 두 처형도 동생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며 이교준을 의심한 나머지, 이런 류의 범죄에 해박하다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을 고용하고, 김진구와 고진의 두뇌 게임이 시작되는데...

눈에 뜨일 때 마다 집어들고 읽게 되는 도진기 작가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해결사 김진구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함께 등장한다는게 특징이고요. 그러나 공동 주연 작품은 아닙니다. 각자의 의뢰인이 적대하는 관계라서,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맞붙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명탐정 코난괴도 키드' 라기 보다는 '소년 탐정 김전일지옥의 광대 타카토 요이치'에 좀 더 가까운 셈이지요.
이 중 주인공은 김진구입니다. 고진은 남고운, 남문영 자매로 부터 받은 '제부의 유산 상속을 막아달라' 라는 의뢰만 해결하고 빠지는 반면, 나머지 사건과 유산 상속 정리는 김진구가 해결해버리고, 작 중 비중도 두 배 가량 될 정도로 높으니까요.

그래도 남유정 사망 사건 해결은 나름 둘이 함께 힘을 합치기는 합니다. 이 사건에서 유산 상속 문제가 비롯된건 물론, 추리적으로 작품의 핵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처음에는 단순 교통 사고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교준이 동승하여 남유정이 운전하던 미니가 김순옥의 모하비와 추돌했고, 조수석에 탔던 이교준은 생명을 건졌지만 남유정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던 탓에 사망했으니까요. 그러나 이 사건은 이교준이 일으킨 살인 사건으로, 진구의 말에 따르면 '3중 방어막'이 쳐진 교묘한 계획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어막은 원래 알려진 바와 같이 살인 혐의를 찾아보기 힘든, 단순 교통사고로 보이도록 꾸민 겁니다. 그러나 이교준이 김순옥과 불륜 관계라는게 밝혀져 첫 번째 방어막은 뚫리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우니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두 번째 방어막은 '고의적인 충돌 사고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불륜을 목격한 남유정이 과속하여 추격하다가 모하비에 추돌하여 일어난 불행한 사고라는 주장이에요. 불륜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남유정이 고의적으로 추돌하게 만들었다는건 증명할 수 없어서 단순 사고로 처리될 수 밖에 없게 되지요.
그러나 남유정의 목에 교살 흔적이 남아 있어서 살인이라는게 밝혀진 뒤 마지막 방어막인 '정황의 방어막'이 등장합니다. 이교준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김순옥의 모하비에 타고 있어서 범행을 저지르는게 불가능했다는게 정황입니다. 하지만 진구는 남유정 목의 교살 흔적은 왼손잡이의 흔적인데, 가족 중 왼손잡이는 이교준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CCTV에 찍힌 모하비는 추돌 부위가 이미 부숴져 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모하비와의 추돌은 조작된 것이고,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을 목 졸라 죽인 뒤, 자기 무릎에 시체를 앉히고 전봇대에 추돌하여 사고를 위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3중 방어막이라는 말만 그럴듯하지, 그다지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애초에 실제 자동차 추돌 여부를 조사하지 않은 점, 사인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점, 꽤 장기간 불륜 관계였던 김순옥과 이교준의 관계를 밝혀내지 못한 점 등 사고 발생 시 수사에 나섰던 경찰의 무능이 확실한 탓입니다. 진구의 말 대로 조금만 파고들면 지나치게 많은 우연이 결합된 수상한 사건이라는걸 금방 알 수 있었을 테니까요. 최소한 명확한 사인은 검증했어야 합니다.

추리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고진과 진구가 사고 전 CCTV를 입수하여 이를 단서로 이교준의 공작을 증명하는게 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미니가 한 쪽으로 쏠린걸 과학 수사까지 이용하여 검증한 디테일은 좋지만, 이게 이교준의 범행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문제는 큽니다. 진구가 이교준이 범인이라며 쏘아붙이는 것들 - 범인은 남유정을 목졸라 죽이고는 미니에 싣고 달리다가 사고를 냈다, 이 살인자는 왼손잡이인데 가족 중 이교준만 왼손잡이다. 미니는 남유정 남편인 이교준의 불륜녀가 운전하는 모하비와 부딪혀 사고가 난다, 그 모하비는 CCTV를 통해 보니 사고 전에 이미 충돌 부위가 부서져 있었다 등등등 - 은 모두 정황 증거 뿐이에요. 왼손잡이라는게 그렇게 대단한 증거도 아니고요. 제 생각에 이교준이 유죄 판결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추리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유산 상속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법조인 출신 작가라 그런지, 현행법에 기초하여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잘 풀어낸 덕입니다. 고진과 진구의 활약도 대단하고요.

우선 고진이 의뢰에 따라 이교준의 친권을 박탈하여 아름이 몫의 상속분을 빼앗습니다. 이교준의 딸 아름이가 사실은 남유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아니라, 불륜녀 김순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라는걸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아름이의 친부임을 주장한 남유정의 불륜남 원경호 소동에서 유전자 감식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 증거를 확보한 거지요.
또 진구와의 조사 결과 공유를 통해,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 사망 후 남유정 - 원경호의 딸인 진짜 아름이를 자신과 김순옥 사이의 딸로 바꿔치고, 아름이를 입양 기관에 보냈다는 걸 알아냅니다. 아내가 죽은 뒤, 가사 도우미를 해고해서 아름이가 바뀐걸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할아버지는 장님이고, 다른 친척들은 아름이에게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이는 진구가 이교준의 집을 방문하는 제일 첫 장면에서, 부부의 사진은 있지만 아이 사진이 없는 복선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고진의 말에 따르면 친부가 아니더라도, 아름이는 부부 사이의 딸이므로 이교준이 친권자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자기 친딸과 바꿔치기하고 입양 기관에 보낸 사람에게는 친권 자격이 있을리가 없으니 친권 상실 청구를 하면 이교준은 아름이 몫을 못 받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유정 몫의 대습 상속은 유지되는데, 이 역시도 진구가 남유정을 살해한건 이교준이라는걸 밝혀내어 상속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앞선 순위나 동순위 상속인을 살해하면 상속권을 잃는 법 때문입니다. 결국 이교준은 빈털터리 신세가 됩니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의 전개인데, 그 뒤 다른 상속인들 모두의 상속권이 날아가버리는 전개는 예상치 못했네요. 새어머니 유재연이 낙태를 한게 발단입니다. 그녀는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갖지만 이런저런 부담감으로 낙태를 선택합니다. 이 낙태에 그녀를 미워하던 두 의붓딸 남고운, 남문영 자매가 진구의 권유로 모처럼 동행했고요. 그러나 유재연이 가진 아이가 남현호 할아버지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법률상으로는 엄연히 부부간의 아이이고 적법한 상속인입니다. 즉, 상속인을 살해한건 마찬가지라 그녀도 상속권을 잃고, 낙태에 동행했던 두 딸도 낙태를 도운 공범으로 상속 자격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즉, 남유정의 딸 아름이가 유일한 상속인이 되는 거지요.
이렇게 낙태가 상속을 막는다는건 정말이지 처음 접해보았는데, 완전 대박이네요. 법률에 대해 잘 아는 작가라 쓸 수 있던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의뢰대로 상속을 막은 진구가 의뢰인 이교준에게 당신이 살인범이라는걸 밝혀낸건 의뢰와 관계 없었으니 보수를 챙기겠다며 쿨하게 마무리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어요. 가족이 모두 파멸하는 결말인데, 워낙 많은 분량에 걸쳐 비호감을 끌어온터라 속 시원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또 자신만의 가족을 꿈꾸었던 이교준, 그리고 가족이지만 각자 자기 생각만 했던 남씨 일가족이 무너진다는건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과 묘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러나 이 유산 상속 과정가 전부 잘 짜여져 있는건 아닙니다. 콩가루 집안이 모두 몰락한다는건 지나치게 전형적인데다가, 남고운, 남문영 자매는 악인도 아니기에 결말이 썩 개운하지 않거든요. 막내 동생을 제부가 죽였다고 의심하여 제부에게 유산이 가는걸 막으려고 노력하는데, 의심이 사실로 밝혀졌으니 그녀들은 잘못한게 없습니다. 오히려 새어머니 유재연의 낙태를 도와준건 순전한 선의였기에, 유산 상속을 막으려는 악당 김진구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울러 김진구가 작중에서 벌인 활약과 행동은 모두 이교준의 범행을 밝혀내기 위함입니다. 이교준의 의뢰를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건 예상치 못했던 급작스러운 유재연의 임신과 낙태, 그리고 진구의 권유를 받은 남씨 자매가 낙태 수술에 동행했기 때문으로, 진구의 활약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걸 보면 그다지 정교하게 잘 짜인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부부가 모두 불륜을 저질러 같은 시기에 혼외자를 낳는다는 설정 역시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고, 우연과 작위적인 설정이 많이 결합된 전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낙태를 통해 기존 알고 있던 유산 상속의 상식을 깨 버린 아이디어 만큼은 높게 평가할 만 한데,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진짜 걸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덧붙이자면, 서두와 에필로그에 "정신자살"의 '이탁오 박사'를 등장시켜 다음 작품과 연결시키는 구성을 갖추고 있는데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2018/05/19

회랑정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임경화 : 별점 1.5점

회랑정 살인사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임경화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업가 이치가하라가 죽은 뒤, 유언장 공개에 참석하기 위해 이치가하라가 소유한 여관 "회랑정"에 일족이 모였다. 그런데 이치가하라의 친구 아내로 이 장소에 참석한 70대 할머니 혼마 기쿠요의 정체는, 반년 전 회랑정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로 연인을 잃고 자살했다고 알려진 기리유 에리코의 변장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녀는 복수를 위해 이치가하라의 유언장 공개 시 반년 전 사건의 진상이 담겨있는 기리유 에리코의 유언장을 공개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밤 유언장이 사라졌고, 이치가하라의 조카딸 유카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국내 한정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시리즈가 아닌 스탠드 얼론 작품으로 1991년에 첫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일본 고전 추리물의 형태를 많이 따라가고 있다는 특징이 눈에 뜨입니다. 초기작이라도 '가가 형사 시리즈' 류와는 다른, "십자 저택의 피에로""가면 산장 살인 사건" 과 유사한 류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십자 저택의 피에로", "가면 산장 살인 사건" 은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추리적으로는 꽤 볼만한 점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못힙니다. 이유는 독자를 속이려는 의도가 지나치다 못해 완전히 잘못되어 있는 탓입니다. 우선 초반 기리유 에리코는, 화상에서 죽지 않고 깨어난 후 연인 지로의 사체를 확인하고 오열합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연인의 떠올리며 복수를 위해 회랑정에 다시 찾아왔다는걸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요. 독자들도 탐정역인 기리유와 함께 진범을 찾기 위해 이치가하라 일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동기를 고민하고, 몇 안되는 단서를 조합하여 머리를 싸맵니다. 중반 이후 지로가 이치가하라의 친아들임이 밝혀지면서 부터는 범행 동기가 유산임이 명확해져서 이치가하라 일족은 더욱 의심스러워 집니다. 친아들이 있다면 다른 형제, 친척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앞 부분에서 기리유가 확인한 지로는 그녀의 연인이 아니었고, 그녀의 연인으로 알았던 지로가 사실은 진짜 지로를 죽이고 그녀까지 죽이려 했으며, 그 정체는 변호사의 조수 아지사와 히로미라는 것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 때문에 이 모든게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지로라고 속이고 대신 유산을 상속 받으려는 아지사와 히로미의 음모라는 것인데, 도대체 장황하게 앞 부분에서 복수 운운하며 여러가지 단서와 동기를 던져 놓고 고민한 게 만든 건 뭐였나 싶네요. 게다가 기리유가 자신이 알던 지로가 아지사와 히로미라는 걸 이미 오래전, 이치가하라의 장례식 때 알아챘다고 하는 장면은 정말 넋을 잃게 만듭니다. 흑막이 누구인지 아는데 복수 운운하며 200페이작 넘는 분량 동안 탐정 행위를 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독자를 속이려고 하는 의도가 지나치다 못해 억지스러워서 짜증스러울 정도입니다. 상식적으로 아지사와 히로미의 정체에 대해 안 시점에서 진범이 누군지 뭐가 중요할까요? 구태여 회랑정에 일족이 모였을 때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변장해서 찾아간 후 복수를 하는 게 당연하죠.

이렇게 이야기를 그려내려면 최소한 앞 부분에서 기리유가 지로의 사체를 확인할 때 굉장히 많이 타서 신원 확인이 어렵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관 지배인 고바야시 마호가 유카를 살해한 것이 기리유의 추리에 의해 밝혀진 후, 그에 따라 왜 아무런 동기가 없는(즉, 유산 상속과는 무관한) 그녀가 왜 이전에 지로와 기리유를 동반 자살을 위장해 살해하려 했는지? 에 대해 누군가의 사주가 있었다고 설명한 뒤, 아지사와 히로미가 마지막 순간에 등장했다면 적당히 이야기는 성립됩니다. 여기에 더해 두 명의 화자를 두어(가장 상식인인 나오유키가 적합했을 듯 싶습니다) 탐정 역을 번갈아 하게 했더라면 더욱 좋았을테고요.

그리고 이 마지막 장면을 제껴두어도 전개에 있어 동기와 용의자 구성도 정교한 편이 못됩니다. 이치가하라의 유산이 거액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범행 동기가 일족 모두에게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소스케는 국회 의원 출마를 예정 중이라 돈이 필요하다, 요코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 돈이 필요하다 등은 모두 추정일 뿐 사실로 밝혀지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오히려 일족 모두 그다지 돈에 궁핍하지 않다는 묘사만 있을 뿐입니다. 또 일족은 지로가 이치가하라의 친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도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 까지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입니다.

물론 속도감 있고 흡입력 있는 전개는 괜찮아요. 최소한 저 마지막 황당 장면 전 까지는 아주 흥미롭게 읽은 건 사실이거든요. 경찰이 기리유의 모발을 찾아낸 후 그녀가 점차 궁지에 몰리는 과정의 서스펜스도 좋고요. 추리적으로도 고바야시 마호가 유카를 살해한 범인이며, 과거 사건에서 공범임을 알아내는 장면도 그런대로 쓸만한 편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그냥 '숨어 있으려고' 그 방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왜 전혀 고민하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이 정도 장점으로 단점을 덮기는 무리입니다. 탐정이 누가 범인인지를 이미 아는 상황에서 공범자를 알아내기 위해 벌이는, 무의미한 사기극에 불과하니까요. 제 별점은 1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7/03/19

벙어리 목격자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3점

벙어리 목격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어리석은 낙천주의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쉽게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게 보통이었다. - 에밀리 아룬델이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묘사

살인의 특징은 살인자의 기질을 암시해 주기 때문에 범죄의 실마리를 잡는 데 있어 필수야. - 포와로.

마켓 베이싱의 리틀 그린 하우스에 거주하는 부유한 노부인 에밀리 아룬델은 조카들과 함께 한 부활절 연휴 때 계단에서 떨어져 다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애견 밥이 가지고 놀던 공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챈 에밀리 아룬델은 포와로에게 편지를 보냈고, 무려 두 달 이 지나서야 이를 받은 포와로는 마켓 베이싱으로 향했지만 에밀리 아룬델은 이미 한 달 전에 사망했다...

몸 속 필수 영양소 중 하나인 고전 본격물 성분이 많이 부족해져서 집어든 여사님 장편입니다. 제게는 탄수화물급 영양소거든요. 바로 전 읽었던 "도서관의 살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제대로 된 고전 본격물을 선택했습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물이더군요. "도서관의 살인"과 마찬가지로요.

포와로가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이유인 노부인의 의뢰 편지가 그녀가 사후 발송되었다는 도입부부터 무척 흥미롭습니다. 뒤이어 다양한 등장인물의 증언들로 진상에 접근해 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다운 공정함을 자랑하고요. 무엇보다도 고전 본격물의 핵심인 동기 부여와 이에 따라 용의자들이 속출하는 전개가 대단합니다. 주요 관계인인 찰스와 테레사 남매, 벨라와 타니오스 부부 모두 유산 상속에 혈안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누구 한 명 용의선상에서 빠지지 않는 덕분입니다. 심지어 찰스와 테레사의 어머니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이라는 설정까지 갖췄으며, 그 외 등장인물 모두 수상한건 마찬가지에요. 이미 유산을 상속받은 로슨 양이 심령술에 빠진 이상한 노처녀로 그려지는 식으로요. "도서관의 살인"에서 가장 부족했던게 바로 이겁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하지만 이러한 점은 본격물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탁월한건 증언과 인물 묘사가 결합되어 독자를 교묘하게 함정에 빠트리는 전개입니다. 놀랍게도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증언은 모두 진실이에요. 하지만 말을 한 사람이 워낙 수상한 탓에 독자들 모두 "이 사람 말은 못 믿겠는데?"라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뒤이은 증언들도 부정하게 되어 결국 진상에 이르지 못하게 되지요.
찰스 아룬델이 한 말이 대표적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에밀리 아룬델을 만났을 때, 그녀가 수정한 유언장을 보여주었다는 증언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모두 찰스가 돈 때문에 심한 짓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에밀리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유언장을 미리 보았다는 증언은 자신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에밀리를 죽일 동기가 없다고 위장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게다가 여동생 테레사와의 다툼은 증언의 신빙성을 더욱 떨어트리고요.
이야기 전체가 이런 구성이라서 저는 함정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세세한 디테일로 범인을 드러내는 점도 본격물스럽습니다. 타니오스 부인이 테레사를 따라, 하지만 보다 저렴하게 옷을 구해 입었다는 묘사와 에밀리 아룬델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 주치의 그레이너 박사가 후각을 상실했다는건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설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뭐 하나 허투르게 활용되지 않아요. 로슨양이 거울로 본 브로치는 이니셜이 반전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은 아나벨라 타니오스의 약자다, 브로치는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싸져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테레사 패션을 따라하는 벨라가 서슴없이 구입했다. 벨라는 화학 교수의 딸로 인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너 박사는 인 중독의 뚜렷한 징후인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모두 추리에 이용되니까요. 심지어 아무 의미 없어보였던 로슨 양의 강령회 관련 증언까지도요. 그녀는 에밀리 양이 강령회 때 빛나는 심령체에 의한 "후광을 둘렀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모두가 정신나간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포와로는 그것이 '인관성 호흡'이라는 것을 간파하거든요. 이런게 본격물이죠!

트릭도 괜찮습니다. 간이 나빴던 피해자에게 인을 투여하여 간견병과 별 차이 없는 예후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어요. 로널드슨 의사의 자연사 확진 판정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기는 하나 에밀리가 평소 유사 증상을 오래 앓고 있던 환자라 충분히 걸어볼만 한 도박이었으니까요. 피해자가 자주 먹던 캡슐 중 하나에 투입하여 일종의 시한 장치를 만든 것도 그럴듯했고요.

또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완역판이라 주장하는 판본으로 읽었는데, 확실히 번역도 한층 높은 완성도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포와로의 프랑스 어를 섞는 말버릇도 맛깔나게 잘 살려 놓았으며, 헤이스팅스와의 재담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거든요. 헤이스팅스가 이렇게나 유머러스하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등장인물들을 모두 수상쩍게 그리는 묘사가 과해서 읽는 내내 짜증이 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실제 범인은 아니지만 제발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포와로의 추리가 진상에 도달하여 진범을 밝혀내기는 하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심약한 타니오스 부인이 시체를 재검시하자는 포와로의 주장에 겁을 먹고 자살을 하지만, 실제 재검시를 했어도 사인을 밝히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설령 실제 사인이 밝혀졌다고 해도 타니오스 부인이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요. 로슨양이 거울을 통해서 목격한, 타니오스 부인이 계단에 장치를 설치했다는 증언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을거에요. 마침 범인이 딱 좋게 자살했을 뿐, 제대로 범인을 옭아매었다고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뭐 이런 점도 본격물이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장, 단점 모두 고전 본격물스러운 작품입니다. 저와 같이 고전 본격물 성분(?)이 부족해 지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책 뒤 소개글처럼 "훌륭한 평균작품보다도 잘못 쓴 크리스티 작품이 더 낫다" 이니까요. 이 작품은 잘 못 쓰지도 않았고요.

2021/10/29

Q.E.D Iff 증명종료 1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일상계 추리물은 없습니다. 조금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었어요. 한 편은 평균 이하, 한 편은 평균 이상으로 두 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들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 

라이메이가 유산 상속 입회에 끼어들었던 토마와 가나는 라이메이가 장남 만사쿠, 장녀 교우코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리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가문의 막내 토우카였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모두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은 이미 받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학문의 길을 택해서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체들에서 발견된 기묘한 메시지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게 밝혀지는데....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는 유클리드의 공리였습니다. 그냥 단서로만 남겨진건 아니에요. 트릭과 공리가 나름 연결된 것 처럼 보이니까요. 우선 만사쿠 살인 사건은 개천에 조명을 띄워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바늘 구멍 카메라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움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토마는 이를 유클리드 공리 중 점과 점의 연결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쿄우코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로프를 이용한 장치 트릭은, 공리의 직선과 원 표시를 로프와 호수와 대칭시킨 것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공리와 트릭을 연결한건 토마의 해석일 뿐.... 범인인 모모히코가 공리를 현장에 남긴 이유는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속셈이었을 뿐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트릭과 연결시킨건 토우카가 범인, 최소한 주요 관계자일 거라는 의심을 끝까지 끌고가려는 작가의 억지에 불과했어요. 토마가 없었다면 트릭과 연결되지도 못했을테니까요. 

공리를 현장에 남길 이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토우카가 범인임을 드러내려면, 차라리 이름을 남기는게 낫잖아요? 공리 따위를 남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트릭과 그렇게 설득력있게 연결되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애초에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유산 상속 입회에 불렀어야 했습니다. 토우카가 관련되었던 흔적을 남긴 정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우카의 딸 치도리가 변호사로 현장에 와 있었긴 했습니다만, 이는 경찰이 겨우 알아낸 사실입니다. 모모히코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명은 없어요. 설령 알고 있었다 쳐도, 치도리가 토마, 가나와 함께하던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에 관련된 대책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완성도 높은 살인 계획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범인이 모모히코라는걸 밝혀낸 단서는 그가 무심코 했던, "자기 옷이 아니라 아버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 뿐인데, 이 정도로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옷을 입으면 안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기가 당주가 되었으니, 기념삼아, 혹은 추모의 의미로 아버지 옷을 입는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런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유클리드 공리를 트릭과 엮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작품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습니다.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은 아직 볼 수 없다" 

204X년, 가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소에 AI가 폭주했다는 상담이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접수된 사건 조사에 나선 가나는 시스템 엔지니어 토마와 재회했다. 마찬가지로 폭주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토마는 산보용 로봇을 조사해서, 누군가 통신으로 조작에 개입했다는걸 알아냈다. 

이 회로를 가지고 제조사로 찾아간 토마와 가나에게, 제조사는 회사에 앙심을 품은 개발자 알슈가 멋대로 회로를 탑재시킨게 원인이라고 말했지만, 알슈의 동료 루이스는 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204X년을 무대로 한, 11권에 처음 등장했던 평행 우주 세계관SF 추리물. 토마는 산보 로봇에 회로를 재탑재하여, 알슈 박사와 대화를 시도하여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공지능 갈라테아가 폭주하자 제조사는 이를 없애려 했고, 알슈 박사가 갈라테아를 서버 째 들고, 로봇 안에 숨어 도망을 친게 진상이었지요. 토마는 로봇과 관련된 사건 - 이탈리아 요리점 로봇이 중화요리를 만든 사건, 사서 로봇이 부탁받지 않은 책을 꽂아 놓은 사건, 산보 로봇이 바다를 보러간 사건 등 - 모두가 아이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키우는 경험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갈라테아가 자아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라고 추리합니다. 폭주 사건들은 갈라테아가 좋아하는걸 우선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던 겁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던건 인공지능에 대한 색다른 이용 방법? 이었습니다 .인격이 생겨난 기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는 SF계에서 꽤 많이 보아왔던 화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제조사가 갈라테아를 원했던건, PC를 끄면 갈라테아는 "죽는다"는 상황이라,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처음 본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판단한 재판 결과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제조사와의 소유권 분쟁은 말이 안됩니다. 알슈 개인의 기술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던, 갈라테아는 제조사에서 월급을 받고 근무할 때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회사의 것이에요. 알슈는 회사 재산을 빼돌러 도망간 것에 불과하고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지, 알수 본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이를 판가름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색다르고 기발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워낙에 돋보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재판도 성립될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원을 꺼서 갈라테아가 죽는다면, 다시 전원을 넣었을 때 살아나는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2020/11/15

완전 범죄 연구 - 사노 요 / 김한경 : 별점 2.5점

일본 추리 작가 사노 요가 쓴 단편 6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이전 "금색의 상장" 리뷰에서 언급해 드렸듯, "금색의 상장"과 함께 국내에 유이한, 사노 요 단행본이기도 하지요.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구하지 못했던 차에, 우연히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발견하고 구입하였습니다. 가격은 배송료 제외하고 2만원으로, 1991년 발간 당시 정가는 210여 페이지에 3,500원이었지만 이 정도면 적절한 가격이라 생각합니다. 절판본 중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이 형성된 책도 많으니까요. 잠깐 찾아보니 "환영박람회" 1~4 권 셋트는 최소 160,000원에서 시작하네요.

하여튼, 읽어보니 그동안 구전되어 왔던 명성의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디어' 만큼은 확실히 좋았거든요.

그러나 완성도 측면에서는 다소 아쉽습니다. 좀 더 길게, 설득력있게 전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작품이 꽤 되거든요. 단편에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빼어나기 때문에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오랜 숙제를 끝낸듯한 후련한 기분은 보너스고요.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시체이동" 

"중앙일보" S 지국 지방판에 기묘한 기사가 실린다. 누군가 자동차 3대에 벌거벗은 마네킹을 가득 담고 이동했던 사건이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오이카와는 기사에 흥미를 보이고, 기사를 쓴 젊은 기자 사쿠라이에게 사건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사쿠라이와 중앙일보 지국 조사를 통해, 자동차 3대에 실렸던 마네킹 18개 중 17개가 별장지인 '학자촌'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오이카와는 마네킹 사건은 친구인 심리학 교수 이나무라 가즈히코와 관련되어 있다는걸 눈치채고 그를 추궁하는데...

이야기는 이나무라가 참석했던 대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대담에서 문학 평론가 시노다는 차로 시체를 산 속에 버리는건 완전 범죄에 가깝지만, 불시 검문이나 불의의 사고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나무라는 이에 동의하지요. 

문제는, 여기에서 마네킹은 벌거벗은 여성 사체를 위장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되는데 이건 말도 안됩니다. 사체를 버리러 가면서 구태여 이상한 티를 낼 이유는 없으니까요. 실제로 마네킹 운반자들은 무려 2번이나 검문을 받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목격되어 이동 경로도 곧바로 밝혀지고요. 이럴 바에야 불시 검문, 불의의 사고와 같은 예상치 못한 불운은 무시하고, 혼자서 차 트렁크에 시체를 넣고 이동하는게 훨씬 상식적이고 납득이 가는 행동일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결말까지 허술하지는 않습니다. 마네킹 관련 사건은 오이카와가 날조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동기는 이나무라가 오이카와의 횡령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오이카와는 이나무라를 독살한 뒤, 이나무라가 범행이 드러날까 두려워 자살했다며 완전 범죄를 완성시키지요. 말 그대로 '완전 범죄 연구'라는 표제에 딱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또 오이카와는 이나무라를 살인범처럼 보이도록 매스컴을 이용했는데 그 발상과 과정에 대한 묘사도 꽤 그럴듯했습니다. 기자가 기사로 자살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많이 있었지만 기자가 기사를 만들어서 있지도 않은 범행을 엮은 뒤, 그걸 남에게 뒤집어씌워 자살을 위장한채 죽인다는 이야기는 처음 봤네요.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하지만 이나무라가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이라는건, 오이카와의 주장 뿐입니다. 이나무라가 살해했다는 여대생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고요. 앞서 이야기한대로 마네킹 작전은 어이가 없었을 뿐 아니라, 고용한 학생과 자동차 번호로 이나무라가 주도했음이 뻔하게 드러날 겁니다. 조금만 조사가 이루어져도 이나무라가 살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는건 금방 드러났을 거에요. 그런 점에서 치밀한 계획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사건을 풀어가는 전개에 문제가 너무 많아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위장 자살"

K시에서 부정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요 증인이었던 시장 비서 자살 후 수사는 중단되었고, 시장은 구속되지 않았었다. 얼마 뒤, 도쿄에서 살던 K시 출신 아키코는 자살했다는 비서를 긴자에서 목격한 후 비서 나카바야시가 국회의원인 삼촌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아키코의 이모 사에코는 애인인 전직 기자 다자키 류이치와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자키는 비서가 비슷한 사람을 자신으로 위장하여 살해했다고 추리하는데...

다나카가 내놓은 추리는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뒷부분은 나름 반전이 있어서 신선했어요. 우선, 다자키 때문에 근무하던 은행에서 횡령을 저지른 사에코는 이 트릭을 그대로 이용하여 도주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침 자기와 꼭 닮은 카페 주인 도무라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도무라를 죽이고 자신이 자살한걸로 위장한 뒤, 다자키와 함께 도주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카바야시 비서건은 아예 조작이었고, 다자키와 아키코가 공모하여 사에코를 죽이려고 했다는 진상이자 반전이 드러납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나카바야시 비서 사건과 관련된 추리 모두가 아예 조작이었다는 발상이 인상적이에요. 아키코의 말 외에는 증거가 없는데,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어서 깜빡 속아 넘어갔습니다.

문제는 다자키와 아키코가 손을 잡고 사에코를 죽이려 한다는 전개에 의외성이 없다는 겁니다. 사진 한 장, 그리고 아키코와 다자키의 말 외에는 사에코와 꼭 닮았다는 도무라라는 여성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확실히 드러나지 않거든요. 이렇게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리도 없으니, 다자키와 아키코가 꾸민 계략이라는건 뻔합니다.
또 아키코와 사에코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사에코가 다자키에게 나카비야시 목격 증언을 이야기하게 해서 추리를 듣는 흐름도 좀 이상해요. 사에코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차라리 함께 사는 아키코와 사에코가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한다는게 더 설득력이 높지요.

모든게 거짓이라는 대담한 발상은 좋지만, 이렇게 전개에서 보이는 단점 때문에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증거 인멸" 

어느 날 작가인 나에게 미카미 노리코가 찾아 왔다. "반대급부" 라는 단편 속 주인공이 자기 아버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골 현청 만년 과장 구로카와가 간부후보생인 엘리트 다가가 저지른 음주 교통 사고를 자신이 낸걸로 뒤집어 쓰는 내용인데, 실제로 미카미 노리코의 아버지 미카미 조키치도 시골 현청 만년 과장으로 교통사고를 저지른 이력이 있었다. 미카미 조키치는 퇴직 후 일자리를 찾아 도쿄에 상경한 후 육교에서 투신 자살했고, 노리코는 아버지를 죽인건 교통사고를 실제 저지른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순수하게 창작한 작품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과 상당히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 우연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로 미카미 조키치 자살 사건이 아니라, 미카미 노리코가 살해당한게 진짜 핵심 사건이라는게 재미있었습니다. 

경찰이 이를 밝혀낸 추리도 합당합니다. 처음에 노리코는 원래 책을 읽지 않는 조키치 유품 속에서 이 책을 남편 유사쿠가 발견한 뒤 장인 어른 이야기 아니나며 건네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조키치는 책을 읽지 않는데 어떻게 이 책 속 단편이 자기 이야기란걸 알았을까요?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조사한 결과, 책에는 조키치의 지문이 묻어있지 않았습니다!
즉, 이건 노리코의 남편 유사쿠가 꾸민 거짓말이었습니다. 유사쿠는 장인어른이 자살한 사건을 이용하여 노리코를 움직이게 만든 뒤, 그녀를 살해하고 그 죄를 실제 작품 속 또다른 모델인 엘리트 공무원 이케다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겁니다.

'진짜처럼 보였던 이야기가 사실은 특정 인물의 말 외에는 증명할 도리가 없는 거짓말'이었다는건 이 단편집 수록작들 대부분에 해당되는 설정인데, 이 작품에서 특히 적절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정말로 자기가 쓴 소설같은 과거가 있었으며, 조키치는 그 사실이 폭로되는걸 두려워한 이케다가 살해한게 아닐까 하는 화자인 작가 생각으로 마무리되는 결말도 인상적이고요.

그런데 유사쿠가 별다른 조작없이 살인을 저질러 체포된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앞서 이 정도로 꼼꼼히 조작한 증거를 내세울 정도였다면, 실제 범행도 본인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교묘하게 저질렀어야 했는데 알리바이 하나 없이 체포되자마자 자백한다는건 많이 시시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유사쿠가 저지르는 범행만 더 꼼꼼하게 그려낸, 중편 정도 분량이었다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네요.

"살인계약" 

재계의 거물인 후나사와 료스케가 살해당했다. 공개된 유언장에는 여류 추리 소설가 에모토 유리노에게 7천만엔을 상속한다고 적혀 있었다. 경찰은 7천만엔을 받기 위해 에모토 유리노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재판에 회부했다. 밀회를 위해 가명으로 호텔에 드나든 탓에 그녀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데...

무고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완전 범죄를 완성시키는 범죄극입니다. 후나사와 료스케가 살해당한건, 에모토 유리노가 가지고 있는 비밀을 무효화 시키기 위해 저지른 자작극이라는게 진상이거든요. 회사를 손에 넣기 위해 비열한 수단을 동원했던 증거를 그녀가 몰래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노인성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료스케는 그녀를 살인범으로 몰고 죽습니다. 세상은 살인범이 가진 증거 따위는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고, 보기 좋게 성공합니다. 에모토 유리노가 빠져나갈 수 없는 개미 지옥에 빠졌다는 결말은 인상적이에요.

그러나 료스케가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는건 좀 설득력이 없고, 살인범이 가진 증거라도 회사에 치명적일 수는 있다는 점에서는 헛점이 보입니다. 이 쪽 바닥 걸작인 카트린느 아를레가 쓴 "지푸라기 여자"와 비교한다면, 에모토 유리노가 정말 무고하다고 보기도 힘들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완전 상속"

유산한 충격으로 아내가 자살한 미즈키에게 한 여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아내가 다카라이라는 남자 때문에 매춘을 하다가 자살했다고 알려 주었다. 미즈키는 경찰 시로다에게 이 사건에 대해 상담했고, 어떤 여성이 다카라이를 중상모략하는 전화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카라이가 정말로 살해당하는데...

중상모략하는 전화를 건 범인은 아내 아키요였습니다. 그녀는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서른 살 이상 차이나는 다카라이와 결혼했었습니다. 유산을 목적으로요.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암에 걸린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다카라이보다 먼저 죽으면 아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게 되기 때문에, 다카라이가 먼저 죽은 뒤 자신이 죽게끔 수를 쓴 겁니다. 억울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다카라이가 범인이라고 전화를 걸다 보면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다카라이를 살해할걸로 생각한거지요. 다카라이가 살해되면, 그 유산은 아내인 본인이 상속받고, 본인이 죽으면 아들에게 모든 유산이 상속되게 되니까요. 이는 제목 그대로 '완전 상속' 범죄인 셈입니다. 당시 수사 기술로는 전화를 누가 걸었는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으니, 아키요가 전화를 걸었다는걸 밝혀내는건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설령 전화를 걸었다는게 드러나더라도, 직접 범행을 저지른건 아니기도 하고요.

순전히 운에 의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아쉽지만, 계획만큼은 정말 비상했습니다. 약간의 설득력만 더하면 걸작이 될 수 있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심리 살인"

경찰인 나에게 조카딸 미나코가 찾아와 괴상한 편지,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며 도움을 청했다. 나는 미나코의 남편인 신용금고 이사 하야마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 않나 의심했고, 하야마가 어떤 여성과 아이를 몰래 만난다는걸 알게 되었다. 장난은 더욱 심해져 미나코가 자살 미수까지 저지른 탓에 나는 하야마를 직접 만나기도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신 착란을 일으킨 미나코가 하야마를 살해하는 사건을 저지르는데..

자신이 미친 걸로 위장해서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심신 미약 등으로 무죄 방면된 뒤 유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야마가 아니라 미나코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으며, 불륜남이 전화를 거는 등으로 조작에 협력한거지요.

증거를 잡을 수 없는 완전 범죄이기는 한데, 좀 뻔했습니다. 미나코에게 장난을 걸 사람이 없다면, 장난 자체가 조작이라는건 당연하니까요. 미나코에게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도 이미 나온 상황이고요. 경찰이 불륜남을 조사하지 않은건 직무유기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네요. 불륜이라는 동기도 식상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수록작 중 워스트로 꼽겠습니다.

2023/09/24

붉은 집 살인사건 - 도진기 : 별점 2점

붉은 집 살인사건 - 4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진은 암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빠 남성룡의 유산 상속에 대해 의뢰한 남광자를 만나러 우면동 붉은 집에 방문했다. 붉은 집 1층에는 서씨 가문, 2층에는 남씨 가문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진은 1순위 상속자인 남성룡의 딸 남진희가 모든걸 상속받기에 상속은 오빠와의 협의가 전부라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과거 있었던 2건의 사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과거 서씨 가문의 가장 서판곤이 남씨 가문의 모친 이분희와 재혼 후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백솔 사체로 발견되었던 사건과 서판곤의 아들이자 현재 서씨 가문의 가장 서태황의 아내 박은순이 강도에게 살해당했던 사건이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며, 뒤이어 다른 사건이 일어날거라 여겼던 고진의 직감대로 6개월 뒤 남진희가 실족사라는 형태로 사망했다. 고진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미모의 맹인 남진희에게 매료되었던 탓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것을 결심하고 친구이자 우면동관할서의 반장 이유현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과거 판사였던 도진기 씨의 데뷰작이자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첫 작품. 제목이 달라져서 몰랐는데, 10여년 전에 읽었던 <<어둠의 변호사>>와 같은 작품이더군요.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바뀐 제목에 낚여서 다시 완독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주요 트릭과 진상은 대충 잊어버렸던 터라 새롭게 읽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네요.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트릭과 두뇌 싸움, 복선이 가득하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크게는 아래와 같이 서형일이 만든 트릭 세 가지, 그리고 남성룡의 계획 두 가지가 눈에 뜨입니다.

서형일의 트릭
  1. 박은순 살해 당시 알리바이 트릭
  2. 남진희 사건을 일으킨 원격 조종 트릭
  3. 남진희 사건 당시 알리바이 트릭
남성룡의 계획
  1. 서형일의 다아잉 메시지를 이용하여 서태황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던 계획
  2. 서형일을 움직여 남진희를 살해하도록 만든 계획

서형일의 첫 번째 알리바이 트릭은 유럽 여행 중 살인을 위해 이미 한국에 들어왔지만, 유럽에 남아있던 지인애게 당일 한국 날씨를 확인하여 엽서를 보내도록 만든 것입니다. 단순히 '서형일의 필적'이 근거라는건 증거로 삼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지만, 한국 날씨 예보 종류는 몇 개 없기에 날씨에 대해서만 여러가지로 다르게 기입한 엽서를 준비해서 - 같은 내용으로 "맑음", "흐림", "비" 등으로 만들어 놓는 식으로 - 해당 날짜 예보에 맞는 엽서를 골라 보냈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인어공주 동상에 돼지 피를 뿌린 것도 서형일의 공범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현장에서 체포되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최대한 몸조심하면서 숨어다녀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조작까지 해 가면서 엽서를 만들어 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남진희 침실 구조를 이용하였습니다. 남진희가 수면제에 취한 틈에 침대 위치를 정 반대, 대각선 위치로 옮겨놓았던 겁니다. 원래 위치에서 문을 열면 거실로 나갈 수 있지만, 바뀐 위치에서 문을 열면 계단으로 추락하도록요. 수면제, 방의 구조 등 여러가지 단서와 상황을 잘 조합한 멋진 트릭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침대 위치를 옮기는 조작을 위해 사고 전날 부산으로 이동할 때 알리바이를 만든 트릭입니다. 상, 하행선 고속도로 휴게소를 오갔다는 다소 간단한 내용이지만 실행이 용이하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었어요.
 
남성룡의 첫 번째 계획은 서형일이 남긴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되었다는걸 알고 녹음기를 그대로 두었던 겁니다. 자신이 서형일의 친부라는건 아무도 모르니, 서형일의 양부 서태황이 죄를 뒤집어 쓸 거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진상과 동기 를 밝히는 핵심 소재가 된다는 정메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조종하기 위해 유언장 정보를 흘려 살의를 부추켰다는건 뻔했지만, 언제나 설득력을 보장하는 동기인건 분명하고요.

하지만 확실히 처음 읽었을 때 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일단 '잘 쓴' 작품은 아닙니다. 묘사가 튀는 부분이 많고, 고진과 이유현의 추리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진이 중심을 잡고 사건을 끌고가는 맛이 부족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별로입니다. 일본 변격물을 연상케하는 엽기 범죄가 명문가 - 서울대학교 교수와 2성 장군 집안이니... - 에서 이어진다던가, 맹인과 트랜스젠더가 혼재하는 복잡한 가족 설정들 모두가 비현실적이었거든요. 거의 마지막까지 서태황과 서두리를 악역으로 묘사하는건 '얘네들이 범인일거야! 그렇겠지?'라는 작가의 의도가 심하게 드러났고요.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피는 유전된다는 이론을 작품 전체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루할 뿐더러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전혀 찬동할 수 없어요.
그리고 본격 추리물을 추구한 작풍 탓이겠지만, 작 중에서 주요 정보를 노골적으로 알려주어서 추리하기 쉬웠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뭔가 상세한 묘사가 있거나 하면 금새 이게 단서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남진희가 추락사한 침실 현장에 대한 극도로 상세한 묘사, 그리고 박은순 사건 당시 서형일의 알리바이에 관련된 묘사들이 대표적입니다. 남진희 사건은 묘사만 보아도 트릭은 잘 몰라도 수면제로 깊이 잠든 남진희와 방의 구조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형일의 알리바이도 신문 기사를 통해 곧바로 가짜라는게 드러나고요. 날씨에 대해서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몰라도, 범인이 서형일이라는건 금방 알 수 있어요.
남진희 사건 때 서형일이 톨게이트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도 알리바이 조작일거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작품 발표 시기는 2000년대 이후인데, 이 때 고속도로 CCTV가 없었을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요. 무슨 차를 탔는지를 알면 고속도로를 이용한 서형일의 알리바이는 금방 깨트릴 수 있었을 겁니다. 이외에도 경찰 수사를 거의 없다시피 묘사한 것도 옥의 티입니다. 서형일은 유럽 여행에서의 알리바이, 고속도로 휴게소 알리바이 모두 협력자가 필요했습니다. 주변 인물과 연락 내용만 살폈어도 협력자를 알아내어 범행을 밝힐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그런 수사는 벌였어야 했는데 수사에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살해하고 그 죄를 서태황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된건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 다이잉 메시지(?)만 없었어도, 남성룡 역시 용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의가 넘쳤다 한들, 이렇게 무모하게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0여년 전 보다 감점하여 2점입니다. 데뷰작인 탓에 여러모로 욕심을 부린 티가 많이 납니다. 서형일의 억지스러운 알리바이 트릭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 빼고, 남성룡이 남진희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 - 아내가 떠나면서 자기 딸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 - 와 괜찮았던 남진희 원격 살해 트릭만 가지고 짧고 깔끔하게 다듬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24/09/21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의사 데지마 하쿠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암으로 잃었었다. 어머니 데이코는 병원 재벌 야가미가 후계자 야스하루와 결혼해서 이복동생 아키토를 낳았다. 이후 하쿠로는 야가미가와 연을 끊고 데지마 성을 쓰게 되었고, 어머니마저 16년 전 고향 집에서 사고로 죽고나서는 가족과 아예 멀어졌다.
그런데 동생 아키토의 아내라는 미녀 가에데가 나타나 아키토가 실종되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쿠로는 가에데를 도와 오랫만에 야가미 가문 사람들과 이모 준코 등 친척들을 만나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수수께끼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2016년에 발표했던 장편. 적당한 분량에 꽤 많은 수수께끼를 담아내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대충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성공한 사업가인 아키토의 실종
  2. 가즈키요의 기묘한 추상화와 야스하루의 연구
  3. 데이코 살해 사건의 진상
  4. 데이코가 물려받았다는 귀한 유산의 정체
여기에 야가미 가문의 유산 상속 문제, 그리고 데이코가 고향집의 존재가 더해져 이야기는 아주 풍성합니다.

핵심 수수께끼 중 하나인 가즈키요의 그림과 야스하루의 연구에는 뇌과학, 그 중에서도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사용되어 재미를 더해줍니다. 과학과 관련된 최신 소재를 작품에 녹여내는데 능숙한 히가시노 게이고답더군요. 뇌를 자극하여 의도적으로 서번트와 같은 천재를 만들어내는게 가능하다는 이론으로 하쿠로의 친부 가즈키요는 뇌종양에 걸린 뒤, 야스하루의 생체 실험에 가까운 치료를 받고나서 '서번트 증후군'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분포에 법칙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그림 '관서의 망'을 그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진상은 세 번째 수수께끼인 데이코 살해 사건의 진상, 그리고 네 번째 수수께끼인 데이코가 받은 유산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수학자였던 데이코의 동서(하쿠로의 이모부) 겐조가 그림을 알아보고 탐냈고, 이를 알아챈 데이코의 입을 막으려 그녀를 살해했던겁니다. 마지막 데이코가 받은 유산은 '관서의 망' 이고요.

또 겐조가 범인으로 드러날 때, 최소한 야스하루의 보고서를 고향집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던건 겐조밖에 없다는 추리는 아주 괜찮습니다. 유마가 보고서를 발견하기 전, 하쿠로가 왔을 때 보고서는 없었습니다. 보고서를 가져다 놓은 범인은 왜 진작에 가져다 두지 않있을까요? 그 이유는 고향집이 있다는걸 그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겐조밖에 없습니다. 하쿠로가 방문하여 진작에 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거짓말과 함께, 준코 이모에게 어머니의 유품인 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겐조는 16년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기에 앨범이 고향 집에 있었다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이코가 하쿠로에게 앨범을 줄 수는 없으니, 하쿠로는 고향 집에서 앨범을 가져왔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겐조는 고향집이 그대로 있다는걸 그날 알아챘고, 보고서를 건네주어 하쿠로 일행이 고향집에서 손을 떼게 만든 뒤 '관서의 망'을 독차지할 속셈이었던 겁니다. 꽤 잘 짜여진 추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수수께끼와 이와 관련된 설정들은 모두 별로입니다. 아키토가 실종된 이유부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겐조가 아키토를 납치하려 했는데 그걸 사전에 알아챈 경찰이 아키토가 실종된 척 하고 아키토의 아내를 가장한 수사관 가에데를 사건에 투입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공개 수사로 전환해서 주모자를 체포했어야죠. 그랬다면 데이코의 고향집과 '관서의 망'도 불타지 않고 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수수께끼는 거의 모두 겐조의 자백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 추리 소설로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안드는건 주인공 하쿠로입니다. 첫 눈에 가에데에게 반했다치더라도, 엄연히 동생의 아내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은 최악이에요. 심지어 동생은 실종 상태인데 말이지요. 야가미 가문의 유마가 가에데에게 추근거리는걸 불쾌해하고 방해하지만, 하쿠로도 그에 뒤지지 않게 추근거리는 상황이라는걸 본인만 모르더라고요. 동물 병원에서 일하는 가게야마와의 관계도 뭔가 싶고요. 한마디로 '발암' 캐릭터였습니다.
가에데도 만만치 않아요. 비현실적이며 애매한 탓입니다. 팜므 파탈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활약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목의 '위험한 비너스'는 가에데를 의미하는 듯 한데, 그 정도 비중과 현실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하쿠로라면, 그녀의 주장을 절대 믿지 않았을겁니다.
이런 별로인데다가 비현실적인 커플을 주인공으로 삼느니 아키토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키토가 재력과 힘을 손에 넣기 전인 중학생 쯤 시기에 어머니 살해 사건과 아버지 그림의 행방을 쫓는 이야기를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키도 크고 미남인데다가 천재이니까요. 하쿠로는 조력자가 어울리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기본적인 재미는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주인공과 기본 설정이 문제일 뿐이지요. 당연히 영상화되었던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네요. 영상물에 더 어울리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주연이 츠마부키 사토시!

2020/07/19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8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고화질]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8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전통의 시리즈 Q.E.D의 두 번째 시즌도 벌써 여덟 권째네요.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독특한 작품들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발표되면 좋겠네요.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해변의 목격자"

Q.E.D 시리즈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토우의 1인칭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무토우가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려지고 전개됩니다. 무토우는 거울을 보는 장면 정도에서만 등장할 정도지요.

이러한 1인칭 시점 덕분에 무토우의 목격 정보가 여러가지 조사를 거치면서 '누군가'로 덧칠되어 가는 전개가 빛을 발합니다. 기억이 조작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당사자 기억에 덧칠하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섬 소년들의 마돈나인 교우코가 비참한 희생자에서 옛 연인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가며 현실을 탈출하려는 악녀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1인칭 전개보다 더 잘 그려낼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트릭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앞서 여러가지 단서와 복선을 잘 활용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빚더미 때문에 궁지에 몰려 범행까지 저지른다는 동기도 설득력 높아서 만족스럽습니다. 이런 류의 범행에서 간과하기 쉬운, '범인역'으로 교우코의 옛 연인 구리바야시를 써먹는다는 점도 돋보였어요.

물론 교우코의 배가 수리 중이라 본토로 갈 수 없었다는 건, 수리하는 상황만 목격되었을 뿐이라 정말로 움직일 수 없었는지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사체를 숨긴 곳이 집 안에서 자리보전하고 있던 그녀 아버지의 병상 속이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짐작 가능하고요.
즉, 무토우의 조사 이후 구리바야시 범인설이 불거지기는 하지만 결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 (무토우)의 왜곡되어 가는 목격 증언 말고는 누가 봐도 교우코가 범인인 상황인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또 1인칭 전개라는 독특한 방식을 트릭 등에 활용하지 못한 것도 조금은 아쉽네요. 잘만 이용한다면 서술 트릭의 또 다른 형태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었을걸로 보이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추리와 재미 양 쪽에서 성과를 거둔, 좋은 에피소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흰 까마귀"

특별한 범죄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1, 2부 구성인데 1부는 전형적인 일본의 콩가루 집안 이야기 비슷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와누마의 애인도 유산 상속을 받는 4명 중 한명이며, 10억엔에 가까왔던 유산도 투자 실패 탓에 700만엔 밖에 남지 않았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이지요. 변호사와 애인이 만나는 걸 본 나머지 일족은 둘이 한 패로 유산을 빼돌린다고 생각하고요. 1부 마지막까지 변호사와 애인은 악당처럼 보입니다. 나머지 일족은 자신들의 돈을 찾기 위한 절박한 노력에 나서고요.

하지만 2부에서 일족들은 모두 무능한 기생충들이었고, 변호사와 애인이라는 여자가 우리 편(?)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납니다. 이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큰 딸, 그리고 가즈타 모두 자신들의 실수와 무능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는게 설명되거든요. 이 과정에서 1부에 등장했던 여러가지 복선들도 잘 사용되고 있어서 만족도가 높아요.

그러나 결국 일족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통장 확인만으로 남은 재산이 700만엔 밖에 안된다고 납득한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0억엔이나 되는 돈을 누가 은행 통장 하나에 그냥 넣어 둘까요? 일본 노인들에게는 보편적인 재산 관리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와누마 할아버지는 페루의 광산에까지 투자할 정도로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인데 통장 하나로 이 모든걸 관리한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놀라운 반전으로 끌고나가는 전개 과정의 설득력은 높은데, 통장 만큼은 납득하기 어렵기에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흰 까마귀'는 딱히 이야기하고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이와누마 할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토마와 나눈 말에서 따 온 것입니다. 일족이 재산이 700만엔 밖에 없다는걸 납득하게끔 증명해 달라는 할아버지의 부탁이 굉장히 어렵다는걸 빗댄 표현이지요. "흰 까마귀가 없다는걸 증명하는건, 다른 모든 까마귀가 희지 않다는걸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거든요. 가나가 흰 까마귀를 보고, 토마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나와 같은 세계에 있다! 고 생각하는 결말에서 써먹기는 하는데,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가나와 토마와의 관계가 한 걸음 더 나아간걸까? 싶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권을 지켜봐야겠네요.

2013/07/03

비로드의 손톱 - 얼 스탠리 가드너 / 박순녀 : 별점 2.5점

비로드의 손톱 - 6점
얼 스탠리 가드너 지음, 박순녀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페리 메이슨에게 이바 글리핀이라는 미모의 여성이 찾아와 사건을 의뢰했다. "스파이시 빗츠"라는 협잡 신문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으니, 이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페리 메이슨은 "스파이시 빗츠"의 실제 주인인 베르타를 찾아가 협박을 중단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리고 오히려 베르타의 아내가 이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바에게서 베르타가 살해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초기작이라고 합니다. 단 4일 만에 완성된 작품이라네요.

일단 굉장히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빨라 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는데요, 예를 들면 '스파이시 빗츠'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페리 메이슨이 알아내는 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게다가 그 인물은 바로 그날 밤에 살해되기까지 하니까요. 이렇게 빠른 호흡으로 쉴 틈 없이 사건이 전개되고, 해결을 위한 페리 메이슨의 작전도 줄기차게 이어지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당대의 인기작다운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추리적인 요소도 꽤 괜찮은 편입니다. 모든 증거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전개는 아니었어요. 이바에게서 자백을 이끌어내는 장면도 인상 깊었고, 베이츠의 젖은 몸, 닫힌 문 등의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도 충분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또한 캐릭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상당히 컸습니다. 주역 3인방인 페리 메이슨, 델라 스트리트, 폴 드레이크의 매력은 여전했고, 특히 이 작품에서의 페리 메이슨은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의 모습을 보여주어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유산 검인 장면 한 곳을 제외하면 변호 활동도 거의 나오지 않아, 굳이 직업이 변호사일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바 베르타가 정말 인상적입니다. 한마디로 어벙한 팜므 파탈인데요, 탐정에게 이렇게까지 무시당하는 팜므 파탈은 또 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어요. 유혹해도 무시당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다 되레 들통나고 망신당하는 등 한없이 찌질한 모습만 보여줘서 여러모로 신선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대리만족(?)도 느껴졌고요.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글리핀의 베르타 살인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차피 유산은 자신에게 돌아올 텐데, 굳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하녀 딸과의 관계가 드러나 유산 상속에 위협이 된다는 정도의 설명은 필요했을 것 같은데, 너무 간단히 넘겨버린 것 같습니다.

또한 페리 메이슨 시리즈에 공통된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사건 해결을 위한 메이슨의 연극과 공작이 지나치게 쉽게 성공하는 점, 대부분의 사건이 자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 아니지만, 당대의 인기작다운 재미는 충분했습니다. 더운 여름날,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한 심심풀이 독서로는 제격인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출간된 페리 메이슨 시리즈를 완독했기에 더 좋았고요.

덧붙이자면, 책 뒤 해설에서 얼 스탠리 가드너가 작가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소개되는데, 나름 감동적이었습니다. 바쁜 생활 중에도 하루에 최소 4,000단어의 소설을 써냈다는 점, 타자기를 너무 많이 쳐서 손톱이 빠질 정도였다는 점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만 대고 있는 저도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2019/11/18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1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31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카토우 모토히로의 시리즈 만화입니다. 지난 몇 년간 출간 자체를 잊고 살다가 찾아보니 꽤 많이 출간되어 있더군요. 주말에 몰아서 읽었는데, 리뷰는 천천히 한 권 씩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C.M.B와 Q.E.D는 서로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명백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구성 면에서 그러합니다. 거의 예외 없이 1권에 2편의 이야기라는 구성을 선보이는 Q.E.D와는 다르게, 보통 3~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짧기에 읽기 쉽다는건 장점이지만, 부족한 설명과 억지스러운 전개 때문에 완성도 면에서는 조금 부족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또 추리적으로는 여러모로 Q.E.D 보다는 부족한 작품들이 많은 것도 분명하고요. 이번 권도 장, 단점은 그대로입니다.

그래도 오랫만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래된 시리즈로 캐릭터는 식상하고 내용도 타성에 젖어있지만, 조금이나마 신선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재미는 나쁘지 않은 편이니까요. 추리적으로 완성도 높은 이야기도 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지옥혈"

도쿄 근교 시골 마을에서 산사태 발생 후 '지옥혈'이라고 불리우는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옥혈은 일본 전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사후 세계와 통하는 장소' 중 하나로, 그냥 전통적인 민속 풍습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6명이나 사라지자 방송국까지 출동하여 취재를 벌이는데...

산사태로 관광객이 줄었는데 마을에 갑자기 돈이 넘쳐난다는 설정만 보아도 무언가 수상하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억지로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는 행사가 진행된다는건, 이 행사에 맞추어 사건이 일어날거라는 것도 뻔하고요.

그러나 이를 '불법 산업 폐기물 투기'와 연결시키는 아이디어는 돋보입니다. 도쿄와 가까우며, 곧 메울 구멍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도 높고요. 무엇보다도 지옥혈과 관련된 일본 전설을 복선처럼 깔고, '그쪽 세계의 음식' 이라는 소재로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의 심리를 풀어내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수학과 과학보다 민속과 풍습, 전설 등을 이야기의 밑바탕에 깔고가는 C.M.B에 아주 잘 어울리기도 했고요.

C.M.B의 그간 부진을 충분히 만회할 만한 멋진 이야기였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고스트 카"

캠핌장 외길에 반년 전에 죽은 화가 이누야나가의 알파 로메오가 나타난 뒤 사라져 버리고, 다음날 캠핑장에 찾아온 신라와 친구들은 근처 숲에서 기묘한 상황에 놓인 알파 로메오를 발견한다. 겸사겸사 사건에 휘말린 신라 일행은 이윽고 이누야나기 씨의 복잡한 집안 사정과 유산 상속 등에 관련된 문제를 듣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유산 중에서도 핵심인 300호짜리 그림이 깜쪽같이 사라진 것. 아들 토라오와 요이치는 백부 네코지로를 의심하고, 네코지로는 토라오가 범인이라 확신하는데...

차가 숲 속에 떨어진 이유와 300호 그림이 사라진 사건을 엮은 진상은 괜찮습니다. 두 사건이 전혀 관계없는 것 처럼 전개하다가 마지막에 하나가 되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거든요. 네코지로의 횡령은 사실로, 이누야나기씨가 이런걸 다 알고 유산 배분을 했다는 결말 - 네코지로에게 물려준 아틀리에는 거액을 들여 축대를 수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 도 나쁘지 않아요. 나름 완벽한 해피엔딩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전개 외에는 모든게 함량 미달입니다. 초반부의 알파 로메오의 등장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차고가 움직인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범인인 백부 네코지로의 계획대로 잘 되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네요. 뭐 그래도 이전에 워낙 지뢰들이 많아서 이 정도만 되어도 고맙게 볼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돌아다니는 시체"

4인이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에서 주민 중 1명인 코노가 살해된다. 사체를 자신의 집에서 발견한 회사원 도이는 패닉 상태에서 유력한 용의자인 나카니시의 집으로 시체를 몰래 옮겨 놓는다. 나카니시도 또 다른 용의자인 츠다의 집으로 시체를 옮기고 츠다는 다시 도이의 집에 시체를 가져다 놓는다. 결국 이들은 모든 사건을 해결해준다는 소문을 믿고 신라에게 시체와 함께 찾아온다.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이 중에서 중요한 단서를 뽑아내어 진상을 밝혀낸다는 전형적인 Q.E,D 스타일의 작품. 이게 왜 C.M.B 에피소드로 등장했는지 잘 모르겠어요.C.M.B 특유의 박물학적인 이론도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신라도 어린아이와 같은 캐릭터성 없이 평범한 탐정 역할만 수행하여 전혀 차별화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다세대 주택 주민들 모두가 코노와 원한 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범인이 시체를 그 안에 숨겨놓는 것 정도로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다고 생각한건 말도 안되죠. 코노의 방에 시체를 돌려 놓는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잖아요? 일본 경찰이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말린 정도로 혐의를 씌워 체포할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요.

결론적으로, 시리즈 특유의 매력도 없고 추리적으로 억지스러운 평균 이하 졸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제 27회 탐정 추리 회의"

잡지사에서 상금 100만엔인 추리 게임 대회를 열었다. 사회자가 문제를 내면, 진상을 추리하여 정답자에게 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7년전에 실제로 일어났지만 미궁에 빠진 사건이 문제로 등장했다.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정답없는 사건이지만, 모든 수수께끼를 남김없이 밝힐 수 있는 해답이라면 정답을 인정한다는 조건이었다.
문제인 사건은 마술사 야마다 요시후미가 수조 탈출 마술을 펼치다 사망한 사건으로, 2명의 제자가 유력한 용의자였다. 둘 중 한 명은 후계자에서 탈락하여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수수께끼는 모두 세가지, 왜 요시후미는 예정대로 공연 직전에 후계자를 밝히지 않았는지? 누군가 마술 장치에 손을 댔다면 어떻게 감시를 피할 수 있었는지? 왜 무대 위에서 살해되었는지? 누전은 어떻게 일으켰는지? 신라는 사건의 진상을 풀 '경이의 방'으로 모두를 안내한다.

추리 게임 대회라는 형식을 빈 정통 추리물입니다. 진상은 공연 전 범인은 이미 요시후미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후미는 공연 전에 밝히기로 했던 후계자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고, 범인도 차분히 마술 장치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겁니다. 수조에 전기를 흐르게 한 건 이미 죽은 사체가 움직이게 만들어 사망 시간을 위장한 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었고요.

트릭만 놓고 보면 충분히 수긍할만해서 추리적인 완성도는 높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추리 게임 대회라는 설정과 전개 방식입니다. 추리 게임 대회는 요시후미의 딸이 범인을 밝혀내기 위한 일종의 추리쇼였다는건데 솔직히 말도 안되거든요. 무엇보다도 유력한 용의자인 야마사키 토모히데, 즉 쿠로츠 유우키가 본인이 범인인 사건이 문제로 출제된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평상시와 같은 논리로 의견을 주장한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수조에서 죽은 건지, 외부에서 살해당한 뒤 수조에 넣어진 것인지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등의 디테일도 눈에 거슬렸고요. 이렇게 억지스러운 게임 대회를 만드는 것 보다는, 마술 공연을 보던 신라와 타츠키가 현장에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하는 내용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거에요. 그랬다면 별점 4점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4/29

Q.E.D Iff 증명종료 17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17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도 오랫만이네요. 이번에는 나름대로(?) 강력 사건 한 편과 일상계(?) 한 편이 수록되어 있는 전통의 구성입니다. 그러나 두 편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포플러 장의 살인 게임" 

포플러 장에 토마와 가나를 포함해서, 댄서와 마술사, 용병 등 다채로운 직업의 사람 열 명이 모였다. 48시간 안에 저택에서 일어날 무언가에 대해 풀어내는 게임 참가 때문이었다. 상품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푸른 나비 브로치였다. 게임을 하는 동안 포플러 장은 봉쇄되며, 참가자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참가자 중 코가모와 하토야가 살해당했다. 그런데 그들이 살해당한 방은 밀실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알리바이가 있었다.

포플러 장은 유명 게임에서 반사회조직을 찾아내기 위해 회사가 만든 영역이었고, 푸른 나비 브로치는 게임에 사용되는 아이템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비현실적인 상황을 그럴듯하게 그려낸 전개와 묘사, 그리고 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기묘한 직업이 가장 큰 단서가 된다는 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밀실 트릭도 게임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고요. 피해자 두 명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칼로 찔러 죽인 뒤, 창을 잠그고 자살했던 겁니다. 그 캐릭터는 이번에 새로 만들었다는 설정이고요. 

추리적으로도 깔끔합니다. 병 간호를 핑계로 불참했던 저녁 식사 때 게임 참가자들이 했던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걸 단서로 토마는 주시마츠가 여러 캐릭터를 이용한다는걸 알아냈거든요.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의 캐릭터를 사용했다는 아이디어도 좋아요. 주시마츠는 다른 두 캐릭터를 이용하며 밀실 살인을 저지르고, 아이템이 담긴 가방을 훔쳤습니다. 그래서 세 명이 동시에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건은 형사임을 자처했던 카리카네가 이 사실을 알아낸 뒤, 주시마츠를 협박해서 실제 주소를 알아냈다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카리카네 역시 가방이 범행 동기라는걸 알고 있었던 등 범인밖에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진상이 너무 극단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애초에 게임 회사는 계정 주인의 신상 정보를 알고 있으니, 이런 복잡한 게임을 따로 벌이지 않아도 수상한 사람의 조사를 경찰에 의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약하고요. 

게임도 어디까지 자유도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평범한 게임이라면 직업별로 스킬이 있는게 당연하니, 밀실 트릭이 의미가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추리물로 기능하려면, 보다 정교한 설정이 필요했습니다.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두 개의 캐릭터가 아니라 세 개를 만든 것이었다!도 아이디어도 새롭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명탐정 키요시로 사건 노트"에서도 두 쌍동이가 아니라 세 쌍동이었다!는 트릭이 등장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메타버스 등 새로운 기술을 녹여낸 시도는 좋았지만, 설득력을 갖추는 데에는 실패했고 추리적으로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아서 감점합니다.

"트롤리 딜레마" 

토마와 가나가 휴식을 즐기던 바닷가 야키소바집 아르바이드생 이시카리 아유가 열사병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편모 가정 자녀로 아버지 쿠치무츠 고로 씨는 부자였지만 1년 전 캐나다에서 타고있던 선박 좌초 사고 이후 실종되었으며, 양육비 지원도 끊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토마는 고로 씨가 특별실종선고를 받게 되면, 사망한 것과 같이 처리되니 유산 분할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쿠치무츠 집안에서는 아유가 쿠치무츠 씨의 딸이 아니라며 유산 분할 및 DNA 제공도 거부했다. 심지어 쿠치무츠 가문에서 머리카락을 봉납해 왔었던 신사에 누군가 침입하여 쿠치무츠씨의 머리카락을 불에 태워버리고 마는데....

이전에 등장했던 변호사 키리시마 치도리가 재등장합니다.

제목의 트롤리 딜레마는 한 선로는 1명이, 다른 선로에는 5명이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선로로 폭주하는 기차를 유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런 저런 딜레마, 특히 사람 생명의 경중을 다루는 상황에서 많이 언급되는 문제이지요. 그러나 작 중에서 이 문제는 수 페이지를 할애해가며 설명하는 것 치고는, 내용과는 별 상관은 없습니다. 쿠치무츠 가문 4명의 자식과 아유 한 명의 대결 구도가 아닌 탓입니다. 아유에게 돈을 준다고 다른 4명의 자식들이 다 망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야기도 별로입니다. 쿠치무츠씨가 살아있었고, 화상 통화로 변호사와 가족이 참석한 회의에 화상 통화로 참여하여 장남에게 아유가 자기 딸이라며, 뒷 일을 부탁하는 걸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쿠치무츠씨는 이미 죽었으며, 유산 상속 분쟁은 모두 쇼였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상속세를 줄이기 위해 화상 통화를 조작해서 살아있던 것 처럼 꾸몄던 겁니다. 암으로 죽음을 예상하여 꾸준히 자식들에게 재산을 증여해왔는데, 죽은 시점이 너무 이르면 이미 증여한 재산에도 상속세가 부과되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듯하죠? 

허나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이런 조작극을 가족들과 변호사만 있는 장소에서 벌이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세금 징수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가족들이 쿠치무츠 씨가 살아있다고 우겨도 믿어줄리가 만무하니까요. 그리고 이 화상 통화 조작극을 위해 유산 분쟁에 대해 쇼를 벌인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이럴거면 그냥 변호사들과 가족들이 함께하는 자리만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요.

한마디로 설득력없는 이야기를 위해 이런저런 설정을 가져다붙이기는 했지만, 그리 성공적인 결과물은 아니었어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04/10/04

발렌타인의 유산 - 스텐리 엘린 : 별점 2.5점

발렌타인의 유산 - 6점 스탠리 엘린/고려원(고려원미디어)

크리스 몬트는 테니스 스타 플레이어였으나 갑작스러운 무릎부상으로 은퇴한 뒤 지금은 이런 저런 범죄에 연루되며 지루하고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신세. 그러던 어느날 위장 결혼의 댓가로 거금 5만달러를 제의받는다. 위장결혼의 이유는 엘리자베스라는 여인이 발렌타인이라는 인물로부터 갑작스럽게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으나 "남편이 있어야 한다는" 상속 조건 때문.
하지만 이 위장 결혼 때문에 크리스 몬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건에 직면하며 여러번의 고비를 넘긴 끝에 배후의 조직과 그 음모의 실체를 알게된다...

집 앞 영풍문고에 나들이 나갔다가 고려원미디어의 추리 문고본을 1,500원이라는 가격에 팔길래 충동구매한 3권 중 한권. "특별요리"의 작가 스텐리 엘린의 소설이고 워낙 "특별요리"를 재미있게 읽어서 먼저 읽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내용만 놓고 본다면 잘 짜여진 헐리우드 스릴러 영화같습니다. 밑바닥 생활을 하는 주인공에게 돈과 여자가 한꺼번에 굴러들어오게 되지만, 서서히 위험에 처하게 되고 결국 음모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사실 그간 흔히 볼 수 있었던 소재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 소설은 타고난 이야기꾼인 스텐리 엘린의 작품답게 이야기의 재미가 굉장히 잘 살아있어서 지루하다거나 유치하다는 생각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돈 5만달러가 걸린 잠깐의 위장결혼으로 생각했으나 의외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여러 난관을 혼자서 돌파하는 크리스의 활약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 사람은 별로 없을거에요.

하지만 기대했던 스텐리 엘린 특유의 반전이 약해서 좀 아쉬워요. 위장결혼의 조건 중 하나였던 "유언장"과 앞부분에 설정된 몇몇의 복선으로 꽤나 매끄럽게 후반 반전을 이끌어내고 또한 진정한 조직의 우두머리의 정체를 깔끔하게 밝혀내고는 있지만 약간 부족하다... 모자르다..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기대치가 높았던 탓도 있겠지만요.
또 흥미진진한 초, 중반부에 비해 끝부분이 약간 허무한 것도 약점입니다. 주인공의 원맨쇼같은 활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막판에 난데없이 국제경찰이 등장하며 모든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 해 주는 장면은 정말 황당하네요. 너무 이야기를 질질 끈다고 생각했던걸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대중소설 요소를 약간 빼고 진상이 밝혀지는 장면을 보다 강화했다면 역사에 남을 걸작이 될 수도 있었다고 보여집니다만 잘 짜여진 오락물 수준의 작품이었어요. 제가 워낙 "특별요리"라는 작품집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상이 강렬했던 탓인지 저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고요. 물론 워낙 싼 가격에 구입한 만큼 딱히 아깝지는 않습니다만...

2015/01/21

유괴 - 다카기 아키미쓰 / 이규원 : 엘릭시르 : 별점 2.5점

유괴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이규원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트 치과 의사가 유괴 살인을 저질러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기무라 사건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 그곳에 완전 범죄를 꿈꾸는 한 남자가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본다.
이윽고 고리대금으로 거금을 모은 이노우에 라이조의 아들이 유괴되고, 기무라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치밀함에 경찰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뒤, 라이조는 거금을 들여 범인에게 현상금을 거는데...

다카키 아키미쓰의 장편. 파계재판의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 시리즈로 실제 있었던 유괴 사건을 소재로 쓴 작품입니다. 범인이 유괴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재판을 방청하며 얻은 정보로 완전 범죄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는 내용이지요.

약간은 도서 추리소설 스타일로 전개되는데, 실제 사건과 거의 동일한 기무라 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이노우에 가문에서 일어난 유괴 사건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흥미진진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범행의 "동기"와 범행의 과정만큼은 이쪽 장르 경쟁작들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 만 합니다. 특히 고령인 라이조의 나이를 감안하여 유산 상속을 노렸다는 진짜 동기는 정말이지 무릎을 칠 만큼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아들이 있고 특정한 유언이 없다면, 라이조 사후 아들에게 전 재산이 상속되지만 아들이 없다면 아내와 동생과 같은 친권자 기준으로 분배됩니다. 그런데 아내와도 이혼을 한다면? 이라는건 작중 내내 강조되는 라이조의 재산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설득력이 느껴졌으니까요. 또 이 동기와 "실종 후 7년 동안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법적 조항이 맞물리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범행 과정 묘사도 실제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답게 생생합니다. 상세한 부분에서의 고민도 많이 느껴졌고요. 유괴 사건을 다룬 많은 작품들에서 제기되는 질문 - 결국 범인이 몸값을 어떻게 손에 넣을 것인가? - 에 대한 나름의 해석도 괜찮았습니다. 거짓말 탐지기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전해주는 등 당대 수사 기법에 대해 여러가지 정보를 전해주는 부분들도 마음에 들었어요. 거짓말 탐지기의 %에 대한 이야기나 부신 피질의 문제가 있으면 제대로 검사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고요.

또 당시 화제가 되었던 유괴 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점, 정신 감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견지하는 설정 등에서는 사회파적인 성격을 느끼게 해 주는데, 권말에 상당한 분량으로 수록된 '마사키 유괴 살인 사건'의 재판을 다룬 논픽션이 그 방점을 제대로 찍어줍니다. 논픽션으로서도 뛰어나지만 실제 작품과 여러모로 연결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 주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를 놓고 본다면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치밀하고 흥미진진했던 범행 과정의 묘사에 비교하면 후반부는 너무 쉽고 어설픈 탓입니다. 범인을 지목한 이유가 "범인이 기무라 재판을 방청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재판이 보도된 신문을 연구하는게 훨씬 안전하고 손쉬웠을텐데 구태여 방청을 한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범행이 성공한 이후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기무라의 운명을 알기 위해 방청을 계속했다는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범인이 관련된 장소에 당당히 얼굴을 내민다는 것도 비상식적인 행동이라 생각되고요.

이렇게 근거 없는 추리와 설명할 수 없는 범인의 무의미한 행동이 결합된, 그야말로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우연으로 보이는 전개는 또 있습니다. 다에코에게 불륜남이 때맞춰 전화하여 라이조에게 이혼 결심을 하게 만드는 장면, 오카 다미코의 죽음과 오카야마 도시오의 도주로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부분 등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햐쿠타니 센이치로와 그의 아내가 라이조가 내건 현상금에 눈이 멀어 사건에 뛰어든다는 동기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너무 억지로 시리즈로 끌고가려는 느낌이었달까요. 차라리 시리즈가 아니라 사건을 수사하던 에노모토 경위 그룹에서 햐쿠타니 센이치로와 같은 발상의 전환으로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는다는 식으로 풀어내는 게 어땠을까 싶어요. 아니면 최소한 햐쿠타니 센이치로가 기무라 재판에 방청객, 혹은 참고인으로 참여했다가 범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내용이라도 나와 주던가요.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어머니 다에코의 공작에 의해 범인으로 확정된다는 결말도 깜찍하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약합니다. 누군가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가장 유치한 수준의 공작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증거도 없는 인물의 집에서 유력한 단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바로 범인 취급을 해 버리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낭패를 볼 겁니다. 제가 봤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근거도 제법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본격 추리의 향취도 나면서도 사회파적인 느낌도 전해주는, 과도기의 교량 역할을 잘 해주고는 있지만 이러한 단점들로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아래에서 순위를 다툴만한 작품입니다.

2010/07/19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 마크 트웨인 / 김욱동: 별점 3점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 6점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문학수첩

마크 트웨인 단편집입니다. 총 5편의 단편과 왠만한 단편 길이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전에 읽었던 "뜀뛰는 개구리"와 유사한 성격입니다. 그런데 "퀸의 정원"에도 선정되었던 "뜀뛰는 개구리"보다 더욱 범죄소설에 가까운 작품이 많이 실려있어서 의외였습니다. 그래봤자 유머 소설의 범주를 벗어나는 작품은 별로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 단편집쪽이 더 "퀸의 정원"에 가깝다고 생각되네요. 혹 "퀸의 정원" 때문에 마크 트웨인을 찾아보시려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이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작품 중 베스트는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입니다. 하나의 사기극으로만 놓고 보아도 상당한 완성도의 작품이기 때문이죠. 또한 해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각 작품별로 정말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 해설만 읽어도 마크 트웨인에 대해서 어느정도 아는척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워스트는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 보기 어려운 허클베리 핀 이야기인 "귀신 이야기"를 꼽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13.5 나누기 5해서 2.7점이지만 반올림에 해설을 더해서)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
"정직"이 모토인 마을 해들리버그를 한방에 타락시킨 사나이의 이야기. 작전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거액을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라며 마을에 맡긴 뒤, 마을 유력자 주민들이 모두 그 돈의 주인이라고 나서게끔 꾸미는 것이거든요. 그야말로 "돈 앞에 장사없다"라는 것이죠.

나름 진지한 사기극이기도 한데 워낙에 분위기가 시끌벅적하고 유머러스할 뿐 아니라 끝까지 통쾌한 맛이 있어서 이 책의 베스트 작품으로 꼽고 싶네요. 그야말로 마크 트웨인 작품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4점입니다.

"100만 파운드 은행권"
과거 이원복의 "사랑의 학교"에서 인상적으로 봤었던 에피소드의 원작입니다. 우연히 빈털터리로 영국에 도착한 미국인에게 영국 부자 형제 2명이 100만파운드 수표를 맡긴 뒤 1개월 뒤에 다시 자신들을 찾아오라고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학교"에서의 만화적인 과장된 표현이 잘 어울릴법한 만화같은 내용에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같다는 느낌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결국 주인공이 마지막에 사기와 진배없는 행위로 한몫 잡는다는 결말은 좀 씁쓸하네요. 역시 있는놈이 더 한 법이겠죠. 그러고 보면 돈이 돈을 부른다는 주제의 이야기도 될 수 있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캘러베러스 군의 악명높은 점핑 개구리"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마크 트웨인의 출세작이라죠. 초간단 사기극인데 이전 리뷰 참고하세요.

참고로, 책 뒤의 해설에 따르면 동부와 서부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를 배경으로 한 깊이있는 사회 풍자가 들어있다고 합니다. 지금와서 한국 독자가 그러한 뉘앙스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별점은 2.5점입니다.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서로 사랑하는 메리 그레이와 휴 그레고리에게 장애물은 유산 상속 문제로 휴를 멀리하는 그레이 가문 사람들과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자칭 폰테인블로 백작입니다. 백작이 메리에게 열렬히 구애하기 시작하거든요. 그 와중에 휴를 싫어하는 메리의 백부 데이비드 그레이가 살해되고 휴가 곧바로 체포됩니다. 옷조각, 칼, 혈흔 등의 증거 때문이죠.

이 단편집의 표제작으로 원래는 마크 트웨인이 여러 유명작가들과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쓴다는 시리즈 형태로 기획한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희한할 정도로 정통 추리 소설같은 설정이 가득합니다. 복잡한 인간관계와 거액의 유산, 칼과 혈흔이라는 증거 등 이야기 자체는 고전 본격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중반부까지는 이런 기대에도 충분히 값 합니다.
그러나 막판에 갑자기 휴가 불쌍하다는 이유로 범인 중 한명이 자백해서 진범에 체포된다는 결말은 어떻게 보아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겠지요.

하지만 이 작품의 최대 매력은 마크 트웨인이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는 쥘 베르느 조크에 있습니다. 폰테인블로 백작이라 자칭하는 범인의 마지막 고백서를 통해 쥘 베르느가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폭로하고 있거든요. 뭐 그냥 보면 열등감이 폭발하는 모양새이긴 하지만 워낙에 농담을 즐겼던 작가이니 만큼 그러려니 해야죠. 그리고 추리적인 요소는 없다시피 하지만 딱 하나! 하늘에서 떨어진 이유에 대한 설명이 그런대로 합리적이고 내용과 부합하기에 만족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2001년에 미발표 원고가 발견되어 발표된 따끈따끈한 작픔으로 마크 트웨인의 작풍이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는군요.

"귀신 이야기"
허클베리 핀과 늙은이 짐이 폭우가 쏟아지던 시기에 한 동굴에 거처하면서 나누던 괴담인데 결말도 없고 내용에 대한 설명 역시 전무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는 힘드네요. 대관절 왜 실렸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미완성 잡문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2/02/26

어둠의 변호사 - 도진기 : 별점 2.5점

어둠의 변호사 - 6점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둠의 변호사라 불리는 고진은 남광자라는 여인에게서 오빠의 유산 상속과 관련된 의뢰를 받았다. 유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남씨 집안과 같은 저택 1층에 거주하는 서씨 집안 사이에서 벌어졌던 과거의 참극, 그리고 2년 전 살인사건에 대해 전해 듣고 흥미가 생긴 고진은 남씨 집안의 무남독녀 남진희를 만난 뒤, 시각장애가 있는 그녀를 돕기 위해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남진희가 살해당하는데...

오래전 남씨, 서씨 가문에서 벌어진 이분희 살인사건, 2년 전의 박은순 살인사건, 남진희 살인사건, 마지막의 서형일 살인사건까지 총 4건의 연쇄살인이 벌어지며, 의외의 진상과 함께 다양한 트릭이 사용된 한국 본격 추리물입니다.

복잡하고 치밀한 인간관계, 과거에서 이어진 비극, 악마적인 핏줄에 의한 범죄 등 여러 비현실적인 설정 - 요코미조 세이시가 떠오르네요 -을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에 녹여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가문이 얽히게 된 이유인, 전 남편이 도망간 뒤 아이들을 데리고 재혼한 이분희와의 관계라든가, 서형일을 입양시킨 이유 등은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보이거든요. 주요 등장인물의 설정, 주택 명의, 집을 나간 아버지, 죽은 어머니에 대한 설명 등도 상세하게 덧붙여 설득력이 높습니다.

트릭도 뛰어납니다. 이분희 사건의 진상도 놀랍고, 서형일 사건의 다잉 메시지도 설득력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박은순 사건과 남진희 사건 두 건에서 사용된 여러 트릭은 풍성하면서도 추리 애호가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굳이 흠을 잡자면, 박은순 사건에서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위조 여권 전문가’라는 특이한 전문가가 필요했다는 점, 그리고 현지에서 벌인 돼지피 사건은 경찰에 검거될 위험성이 컸다는 점(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위조 여권 등이 밝혀지며 모든 것이 끝장날 상황)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또한, 남진희 사건의 경우 별장의 설계 자체와 함께 수원 톨게이트에서의 소동 등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점도 감점 요소였고요.

그러나 이는 극의 흐름을 저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전개의 문제가 더 컸는데, 탐정 역할을 맡은 고진을 비롯해 용의자로 등장하는 서씨 가문의 형제들의 캐릭터가 천편일률적이었고, 주요 용의자들에 대한 수사가 지나치게 알리바이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현대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애매하게 빠져나가는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지루해집니다. 주요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를 독자들이 끝까지 가져가도록(특히 서두리) 구성한 것 같지만, 방식이 세련되지 못했어요. 차라리 서씨 가문의 형제들을 동시에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소거법 형태로 진행했더라면 더 흥미로웠을 겁니다.

단서 제공 방식도 공정하지 못합니다. 유언장의 첫 번째 버전이나, 서형일의 배낭여행 당시 친구의 행적 등 당연히 조사되었어야 할 단서들이 뒤늦게 등장하는데, 현대 경찰 수사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전개에 우연이 많이 개입된 것도 본격 추리물로서는 감점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더부살이하는 노인의 정체와, 그로 인해 밝혀지는 저주받은 핏줄의 정체가 우연히 밝혀지는 과정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했습니다.

그 외에, 판사 출신 작가가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음에도 법률적인 요소가 두드러지지 않는데, 단점은 아니지만 전문 분야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단점을 많이 언급했지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소설일 뿐만 아니라, 완성도와 트릭 면에서도 한국 추리소설 장르에 깊이를 더해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첫 장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놀랄 만한 수준이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가와 시리즈였습니다. 시리즈 후속작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2021/05/14

더블, 더블 - 엘러리 퀸 / 이제중 : 별점 2점

더블, 더블 - 4점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에게 신문기사가 담긴 편지가 도착했다. 라이츠빌에서 일어났던 루크 매캐비의 죽음, 루크의 유산 4백만 달러가 주치의 세바스티안 도드에게 상속된 것, 유산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하트 방적 공장 사장 존 스펜서 하트가 자신이 유용한 루크의 돈 때문에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4월 7일에는 마을에서 구걸을 했던 술꾼 톰 앤더슨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담긴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엘러리 퀸에게 톰 앤더슨의 딸 리마가 찾아와 아버지는 죽었을 거라며 사건 해결을 의뢰했고, 엘러리 퀸은 리마와 함께 십여년 만에 다시 라이츠빌로 향하는데...

엘러리 퀸 장편 중에서는 수작들이 많이 모여있는 '라이츠빌 시리즈'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이었던 국명 시리즈에 반해, 라이츠빌 시리즈는 범죄 드라마 성격이 강하다는게 특징이지만, 이 작품은 기존 라이츠빌 시리즈와는 조금 다릅니다.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범죄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도둑, 의사, 변호사가 차례로 죽는다'는 마더 구스 동요 중 한 편의 내용대로 살인 사건이 벌어지거든요.

그러나 확실히 라이츠빌 시리즈는 라이츠빌 시리즈에요. 이야기 자체는 전혀 본격물처럼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로 여겨진 탓에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도 않는 탓입니다. 경찰이 방관하는 동안, 탐정인 엘러리 퀸 역시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낸다던가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답게 인간 관계와 동기에 집중합니다.

덕분에 왜 동요가 사건과 연결되는지? 왜 범인이 엘러리에게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한, 와이더닛물로는 꽤 흥미로운 편입니다. 특히 동요와 사건과 연결되는 이유가 참신했어요. 범인 케네스는 죽음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서 유언장 쓰기를 미루던 도드 의사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순순히 유언장을 쓸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사건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두 건의 사망 사고의 피해자 직업에서 착안하여 톰 앤더슨을 죽이고, 니콜 자카르도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한 뒤 이 모든게 마더구스 동요 법칙에 따른 죽음으로 다음 차례가 도드 의사인걸 명심하게 만든 것이지요.
도드 의사가 오래 앓아온 신경증 탓에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게 전개와 묘사에서 계속 드러나서 설득력도 넘칩니다. 우발적인 죽음이 목표한 살인의 연결고리로 이용된다는 트릭은 제법 많이 보아 왔지만, 이 작품에서의 동기만큼은 신선하면서 설득력 높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허나 후더닛물로는 좋은 작품은 못됩니다. 범인은 케네스 아니면 리마일게 너무 뻔했으니까요. 그런데 리마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몰랐던 바깥 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을 수는 있습니다. 속박에서 풀려나기 위해서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을 죽일 동기는 없습니다. 때문에 범인은 케네스인 거지요. 도드 박사의 유산 4백만 달러는 동기로 차고 넘치잖아요. 세 번째 사건인 니콜 자카르 사살 사건은 어쨌건 케네스가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했고요. 

물론 도드 박사의 유언장이 공개된 뒤, 거의 모든 유산은 종합 병원에 기부되기 때문에 케네스의 동기는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도드 박사 뒤에 살해된 변호사 홀더필드, 양복장이 월더 형제 사건에서는 동기가 아예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도드 박사 살해까지는 케네스가, 그 뒤 범행은 리마가 저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도드 박사가 죽은 뒤 결혼했으니 뭔가 동기를 공유했을거라고 본 것이지요. 사실 뒷 부분은 여러모로 리마인게 더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동요 순서대로 '대장'이 마지막에 죽는다면, 이는 앞서 엘러리가 리마에게 말했듯 엘러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결말은 결국 케네스가 진범이라서 조금 맥이 빠졌습니다. 케네스의 자백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 그리고 그가 엘러리가 꾸민 리마 체포 쇼를 보고 자백했다는 결말도 좋은 후더닛 본격물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요.

국명 시리즈로 대표되는 엘러리 퀸 본격물처럼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단점도 큽니다. 동요와 사건을 무리하게 엮은 탓입니다. 동요 순서대로 변호사와 장사꾼 (양복장이)가 죽는 상황은 순전히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도드 박사가 유언장을 두 번 남겼다는 것도 우연이고, 이를 진작에 데이비드 월도가 밝히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변호사 비서 플로스가 때마침 라이츠빌을 떠났다는 것도 동요에 끼워 맟추기 위한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비서 플로스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게 그나마 말이 되었을 겁니다. 

엘러리 퀸에게 케네스가 편지를 보냈다는 설정은 억지의 정점입니다. 엘러리 퀸의 입으로 도드 박사에게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서라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케네스는 그냥 신문에 투고만 했어도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범이 탐정을 불러서 피해자가 죽는걸 예언하게 만들다니, 억지도 정도껏 해야죠.

캐릭터들도 현실적이지 않은, 만화같은 캐릭터들 뿐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산 속 움막에 살던 청순한 소녀 리마가 대표적입니다. 도드 의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경증 증상을 보인다는건 사건 동기 설명을 위해 필요했던 묘사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점치기를 시도한다는 설정 등 다른 캐릭터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고요. 엘러리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던 리마가 케네스와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라이츠빌 시리즈라면 아예 리마와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게 맞았을테고, 이왕 등장한거라면 팬들에게는 리마가 엘러리와 연결되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나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예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라이츠빌 시리즈의 장점보다는 기존 엘러리 퀸 시리즈의 단점이 더 불거진 망작입니다. 역시나, 유명하지 않은 작품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2005/07/04

Japan 미스터리 걸작선 1 - 한국, 일본 추리작가협회 추천 / 정태원 번역 : 별점 3점

J 미스터리 걸작선 1 - 6점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일본 추리 작가 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펴낸 책입니다. 그런데 선정을 한국 추리 작가 협회에서 했다는 점이 특이하네요. 예전에 읽었지만, 다시 구입했기에 읽고 리뷰 남깁니다.

낯선 작가의 낯선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 눈에 띄는데, 책 뒤의 설명을 보면 다른 단편선 등에서 이미 소개된 작품이 아닌 새로운 작품을 선정하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50주년 기념 앤솔로지라는 주제와는 좀 맞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그동안 소개된 작품들이 일본 추리 문학의 대표작에 더 가까운게 당연하잖아요. 또 이러한 기획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진짜 국내에 초역되는 작품들만 모아 놓았어야 했습니다. 정작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수록된 건 이상해요.
정통 추리나 스릴러가 아닌 환상문학과 호러, 그리고 SF에 가까운 작품까지 실려 있어 기준이 약간 모호하다는 것도 솔직히 잘 납득이 가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수록된 작품들도 특정 시대나 작가별로 편찬된게 아니라 무작위로 수록되어 있는데, 에드가상 수상작품집처럼 어느 정도는 목차에서도 시대순 같은 기준을 가지고 분류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한국 추리문학 협회가 선정한 일본 추리 단편이라는 기획 자체가 그냥 놓치기에는 너무 흥미로울 뿐더러 전체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까지 가져다 주는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로는 "광기의 계보", "정사의 배경" 그리고 "살의" 를 꼽겠습니다.
총 세 권이 발간되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건 이번에 구입한 이 1권 뿐인데, 언젠가는 2, 3권도 발견하여 책장에 추가하고 싶네요.

작품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아파트의 귀부인 - 아카가와 지로

새로 이사온 옆집의 미모의 귀부인이 하는 요리의 냄새를 알아 맞출 정도로 후각이 민감한 아내를 가지고 있는 구보는 옆집의 부인에게 호감을 느껴 아내가 집에 없는 틈에 옆집에 찾아간다. 

다른 앤솔로지에서도 많이 소개된 아카가와 지로의 단편입니다. 추리 문학이라기 보다는 반전의 맛이 있는 스릴러에 가까운데, 너무 뻔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군요.

2. 나체의 방 - 호시 싱이치

일본 단편의 거장 중 한명인 호시 싱이치(호시 신이치)의 작품입니다. 우연히 여러 남녀들과 복잡한 관계를 가지게 된 남자의 이야기로 상황 설정이 재미있고 여운을 주는 맛도 잘 살아있어서 역시나 단편의 거장이구나! 싶네요. 다만, 추리물은 절대! 아닙니다.

3. 나폴레옹 광 - 아토다 다카시

아토다 다카시의 초 유명 단편이지요. 제가 이전에 "Y의 거리" 소개 때에도 리뷰했기에 패스합니다. 

4. 고양이의 목 - 고마츠 사쿄

고양이를 키우면 죽는 미래의 어느 도시에서 일어나는 짤막한 이야기입니다. 고양이를 워낙 좋아하는 일본이라서 나올 수 있던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반전의 맛도 어느정도 있고 재미도 있지만 추리물도 아니고 호러도 아니고 SF도 아니고... 여러모로 좀 어정쩡한 느낌입니다.

5. 광기의 계보 - 후지이 레이코

초등학교 교사 게이코는 우연히 들춰본 학생 기누코의 일기를 통해 그녀의 계모가 기누코를 광기로 몰고 가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된다... 

여성작가의 느낌이 잘 살아있는 작품으로 일기를 주요 매개체, 단서로 하여 전개된다는 특이함에 더해 극적 반전까지 뛰어납니다. 약간의 호러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런데 왠지 영상물에 더욱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6. 3억엔의 악몽 - 니시무라 교타로

평범한 올드미스 여사원 교코는 어느날 찾아온 변호사에게서 자신이 친절을 베푼 한 노인에게 3억엔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변호사는 자신과 다른 인물을 착각하고 있었고, 교코는 유산을 상속받는 진짜 인물인 아리사와 나미코를 찾아가 담판을 지으려 하는데... 

여정 미스테리의 달인이라는 니시무라 교타로지만 이 작품은 의외로 "지푸라기 여자" 같은 인물 설정을 가진 완전 범죄물입니다. 조금 의외였달까요. 그러나 기발한 발상에 비해 전개가 뻔하고 치밀함이 많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7.얼굴 - 마츠모토 세이쵸

살인 사건을 저질렀던 배우 이노 료기치는 자신이 주연인 영화가 전국 개봉되기 전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이시오카를 살해하려 하는데... 

"거장" 세이쵸 선생의 작품입니다. 세이쵸 선생 단편은 대표작들에 비해 많이 격이 떨어지는 편인데 이 작품은 꽤 괜찮네요. 특히 범인이 배우이고 영화 개봉 때문에 목격자를 죽이려 한다는 설정은 참신합니다. 하지만 결말이 너무나, 너무나 심하게 아닙니다...

8. 정사의 배경 - 츠츠야 다카오

한 주부가 음독 자살했다. 그녀는 죽기 직전, Y타임즈의 독자 투고란에 과거의 애인에게서 협박받고 있다는 투고를 보내 상담을 의뢰한 상태였다. Y타임즈의 기자 소네는 단순 자살 사건은 아니라는 판단에 독자적인 조사를 개시하는데... 

잘 모르는 작가인데 작품이 굉장히 좋아서 놀랐습니다. 독자 투고와 음독 자살한 여인을 연결시키는 발상도 뛰어나지만 실제 사건의 트릭도 괜찮고 무엇보다 전개가 굉장히 깔끔합니다. 진범과 동기도 납득할 수 있고 단서도 공정한 편이고요. 이 단편집 최고의 단편 중 하나입니다.

9. 조건반사 - 오타니 요타로

여배우 미즈사와 미나코는 연기지도 담당 오모리 세이지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아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며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 알콜 중독으로 바닥으로 추락한 세이지를 거추장 스러워한 미나코는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른바 "조건반사"에 의한 다이잉 메시지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여기서처럼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네요. 때문에 기발하긴 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져 보입니다. 그래도 꽤 재미있었어요.

10. 벽 - 고다카 노부미츠

아내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벽속에 파묻히게 된 남자의 이야기. 이 한줄이 이 작품의 전부입니다....

11. 살의 - 다카키 아키미츠

옆집의 이마노 부부를 돌봐주던 타누마 변호사는, 이마노의 부인 준코가 질투로 저지른 살인 사건 변호를 맡게 되었다. 타누마는 그녀를 감형시켜 집행유예를 받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어느 날 이마노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는데... 

거장 다카키 아키미츠의 단편입니다. 

이른바 "살인을 하기 위한 살의의 정도를 법적으로 판단하는 잣대가 어디에 있는가?"가 이 작품의 핵심입니다.이 살의를 최소한으로 나타내기 위한 범인의 치밀함, 법의 헛점을 잘 꿰뚫고 저지른 범행이 아주 충격적입니다. 1952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는 보이지 않게 세련되고 꽉 짜여진 구성이 놀랍네요.

12. 소라 - 야마무라 마사오

추리물은 아닙니다. 못살던 시대의 불우한 가족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적나라하게 그린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입니다.

13. 무서운 선물 - 유키 소지

한 여자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키스했다가 저주(?) 받는 한 바람둥이의 이야기. 전해주는 꽃들의 꽃말로 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 전개는 괜찮지만 마지막에 저주니 어쩌니 하며 마무리하는 결말은 납득이 안됩니다...

14. 연습게임 - 후지무라 쇼타

가지키는 아내 구니코의 수다를 겨우겨우 참고 살다가 우연찮게 불륜을 저지른 상대 미와와의 달콤한 미래를 위해 그녀를 살해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아내와 몰래 만나기로 한 장소에 아내는 오지 않고, 오히려 다른 장소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어 가지키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함정에 빠지는 인물이 등장하는 "함정물"인데, 어차피 가지키는 아내 구니코를 죽이려 했으므로 그다지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네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반전의 여운을 남기기는 하지만 좀 약합니다.

15. 우물이 있는 집 - 미나카와 히로코

과거 자신이 유괴당한 집에 신혼여행을 오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전개가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흘러가는데,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미묘함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줄거리에 비해 결말이 시시해서 아쉽습니다.

16. 복안 - 소노 다다오

일본의 손다이크 박사라고 불리운다는 복안전문 범의학자 고이케 고로라는 캐릭터가 나와 두개골 복안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작품. 캐릭터 이외의 설정과 전개는 평이합니다.

17. 사랑 - 미야자키 준

동물 뇌세포를 집어넣은 육아 로봇이 저지른 아동 살해 사건 이야기. 아시모프 작품과 유사한 분위기지만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18. 산키치의 식욕 - 와타나베 게이스케

어려운 시대, 어렵게 살아가는 고학생 산키치가 우연히 주운 3엔으로 한끼를 해결하는 이야기. 이야기는 꽤 재미있고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만 순문학 단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작가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왜 이 단편선에 실려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19. 쇼윈도의 연인 - 요코미조 세이시

소설에 빠져드는 기이한 습성이 있는 청년 다마루 소진은 최근 간행된 소설 "쇼윈도의 연인"을 읽은 직후, 한 양품점 쇼윈도의 마케팅을 사랑하게 되는데...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요코미조 세이시의 단편이라는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작품도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외국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성도착적인 애정에 대해 다루는 듯 했는데, 급변하여 놀라운 반전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발표 시대를 감안한다면 정말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거장다운 작품입니다.

20. 범인은 누구인가 - 구사카미 진

쌍동이 중 한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한데 누구인지를 몰라 궁지에 몰린 경찰이 사건을 결국 해결한다는 이야기. "음악"을 주요 소재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지만 트릭과 설정은 마음에 들었어요.

21. 계단을 오르는 남자 - 마유무라 다쿠 

세계가 거대 빌딩화되어 엘리베이터가 기차처럼 다니는 세계. 한 남자가 25.000층의 건물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하고 그는 계단을 올라 새로운 층에 도착할 때마다 점차 여행자에서 모험가, 그리고 성자로까지 추앙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그가 꼭대기 층에 다다르게 되는 날이 오고 군중이 그를 보기 위해 운집한다... 

아이디어가 정말 기발합니다! 엘리베이터가 기차처럼 다니는 초고층 빌딩 사회에서 목적없이 그냥 계단을 오르는 남자가 주변 인물들에 의해 성자로까지 추앙받게 되는 과정이 묘하게 현실감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말은 너무나 시시해서 아쉽습니다. 좀 더 생각했더라면 정말 마음에 드는 걸작 단편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2020/07/04

머더 미스터리 Murder Mystery (2019) - 카일 뉴어첵 : 별점 1.5점

오래전 약속했던 유럽 여행을 드디어 떠나는 뉴욕 경찰(애덤 샌들러)과 그의 아내(제니퍼 애니스턴) 부부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한 가족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고령의 억만장자와 그의 가까운 가족들만 모이는 초호화 선상 파티! 꿈 같은 상황에 들떠있을 때, 억만장자가 살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게다가 그들 부부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며 악몽이 시작되는데... (넷플릭스 소개 인용)

더운 여름 생각없이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감상하게 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3일만에 3천만이 봤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어딘가에서 '정통 미스터리' 라고 소개된 글을 읽었기에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엄청나게 실망했습니다. 정통 미스터리라고 소개했던 글을 꼭 찾아서 분노의 댓글을 달고 싶을 정도로요. 일견 전형적인 미스터리물로 보일만큼 추리 소설의 온갖 설정들과 클리셰를 따라 하고는 있습니다만, 실제 내용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불과하며 미스터리로는 수준 미달의 이야기이었기 때문입니다. 정교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고, 이야기 전개는 구멍투성이거든요. 맬컴이 살해되고, 그의 아들 토비가 유서와 함께 자살한 시체로 발견된 이후에는 범인들이 추가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전무합니다. 닉과 오드리 부부가 사건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해도 범행이 드러날 이유는 없으니까요. 부부를 권총으로 죽이려 해 봤자,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만 드러내는 꼴입니다.

또 부부를 죽이려 할 때(그러다가 실수로 세르게이를 죽였을 때) 후안 카를로스가 실제로 범행을 저질렀다는건 더 말이 안됩니다. 맬컴을 살해한건 토비고, 토비를 죽인건 그레이스입니다. 카를로스는 그레이스를 부추키고, 범행에 도움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직접 범행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복수도 이미 완료되었는데, 복수 대상도 아닌 미국인 부부를 죽이기 위해서 직접 나선다? 이건 말도 안되지요. 

중간에 수지가 총을 들고 나타나서 닉과 카를로스를 협박하다가 독침에 맞아 사망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지는 왜 총을 들고 그들 앞에 나타났을까요? 앞선 범행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그녀가 맬컴과 결혼한 뒤에도 찰스 캐번디쉬와 관계를 지속했다는건 지금 시점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말이죠. 총질을 서로 해 대는 와중에, 부는 독침으로 사람을 죽이는 그레이스의 행각 역시 황당함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입니다.

이렇게 등장인물들의 무의미하고, 설명되지 않는 행동들로 점철된 영화가 제대로 굴러갈리 없고, 당연하게도 추리적으로도 건질건 전무합니다. 그나마 추리적으로 볼 만한건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첫 번째는 이야기의 도입부인, 콩가루 가족들만 모인 유람선 연회장에서 억만장자 맬컴이 살해당하는 장면입니다. 전형적인 영국식 본격물의 얼개를 잘 가져온 느낌이었어요.
두 번째는 그레이스가 맬컴의 사생아였지만 버림받았기 때문에, 유산과 복수를 목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그레이스의 동기입니다. 동기야 진부하고 전형적이지만, 이를 찰스, 세르게이, 대령 등 여러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어서 나름 미스터리의 원칙에 부합하거든요.

그러나 그 외 모든 부분은 빵점이에요. 맬컴 살인 사건부터 찬찬히 생각해 보면, 당연히 수지와 찰스 캐번디쉬는 범인이 아니에요. 둘이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는 증거가 뒤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수지가 전 재산을 상속 받게 되면, 언젠가는 둘의 재산이 될 테니까요. 구태여 범행을 저질러서 다른 사람들과 재산을 나눌 까닭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토비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고 불이 꺼지게 만들 수 있는건 승무원들을 고용하지 않은 이상, 자리를 비웠던 그레이스밖에는 없으니 공범은 그녀입니다. 토비가 죽었다면 범인은 그레이스일테고요. 동기가 있는 대령과 카를로스가 복수를 위해 벌인 범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령의 수족인 세르게이는 살해당하고, 그레이스와 대령은 알리바이가 확실하니 실행범은 카를로스라는 결론입니다. 즉, 그레이스와 카를로스가 공범인거죠. 

이렇게 유산이 누구에게 상속되는지만 확인해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닉과 오드리를 범인 취급하는 무능한 프랑스 경찰의 행각도 짜증나고, 그레이스의 이마에 난 상처가 그녀가 범인이라는 증거라는 클라이막스는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증거가 된 단 말입니까? 무슨 특별한 흉기나 장치에 의해 난 상처도 아니니 그냥 걷다가, 운전하다가도 다쳤다고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말이죠.

또 애덤 샌들러가 연기한 닉 캐릭터도 무척이나 비호감이었습니다. 능력도 없는데다가 색드립이나 일삼는 한없이 가볍고 경박한 캐릭터거든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애덤 샌들러 캐릭터인데, 이런 류의 캐릭터가 먹힌 것도 2000년대 초반까지가 아니었나 싶네요. 그래도 아내인 오드리가 추리 소설 매니아라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던 만큼, 아내의 도움으로 무능한 경찰 남편이 사건을 해결한다는 식으로 흘러갔더라면 봐 줄만 했겠지만 작품에서는 그런 설정도 전혀 살리지 못했습니다. 둘 다 실수만 연발하고 좌충우돌의 연속이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촬영 등 기술적인 완성도는 높지만 단점이 너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헐리우드 코미디 팬이라면 모를까, 추리 애호가 분들이라면 쳐다 보실 필요도 없습니다.

2022/03/18

완전살인 - 크리스토퍼 부시 / 남정현 : 별점 2점

완전살인 - 4점
크리스토퍼 부시 지음, 남정현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 런던의 주요 신문사와 경시청에 '마리우스'라고 자칭한 인물이 '완전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가 배달되었다.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 속에 마리우스가 지정한 날짜에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부유한 독신 노인 토머스 리치레이였다. 토머스 리치레이가 결혼을 앞둔 탓에, 유산 상속을 받지 못할 위기에 빠진 조카들이 유력한 용의자였지만 네 명 모두 알리바이가 완벽했었다. 줄랑고 회사 사장인 프랜시스 웨스튼 경은 회사의 새로운 중핵이 될 비밀 탐정부를 키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완전 살인' 사건을 해결하고자 회사의 두뇌 역할을 맡고 있는 수재 루드빅 트레버스와 전 형사부장 존 프랭클린을 투입하는데...

크리스토퍼 부시가 1929년에 발표했던 고전입니다. "고전 추리, 범죄 소설 100선"에서 추천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추리 소설의 초창기 황금기 발표작다운 면모를 과시합니다. 추천할만한 요소가 몇 가지 보이기도 하고요. 첫 번째는 트릭을 추리해내기 위한 단서 제공이 공정하다는 점입니다. 범인 프랭크 리치레이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던 트릭은 변장한 대역을 내세웠던 겁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단서 모두는 작품 맨 앞 프롤로그 부분에서 제공됩니다. 대역이었던 플래이스가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와 영화배우 진 앨런의 대역을 찾는 오디션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 단서거든요. 플래이스의 편지에서 사용되었던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암호 트릭도 인상적이고요. 

두 번째는 다양한 용의자를 드러내고,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계속 등장시켜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전개입니다. '마리우스'가 보낸 편지에서 시작해서, 범행이 일어나기 전 피해자 토머스 리치레이를 방문했던건 누구인지? 토머스 리치레이 주머니에 들어있던 협박장을 쓴 T.W.리처드는 누구인지? 등의 수수께끼가 계속 등장합니다. 수사 과정에서도 새로운 수수께끼가 드러나고요. 그야말로 고전 본격 황금기 작품의 기본은 해 줍니다. 

세 번째는 두뇌 역할의 부르주아 루드빅 트레버스와 발로 뛰는 유능한 수사관 존 프랭클린의 컴비 탐정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두 명이 컴비로 등장할 경우, 보통 한 명은 평범한 일반인 시각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두 명 모두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꽤 신선했습니다. 이들이 사건에 뛰어든게 '회사 선전'을 위해서였다는 것도 굉장히 현대적인 동기였고요.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추천할만한 고전 명작이냐고 물으신다면, 제 답은 '아니오'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오래 된, 유통기한이 지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목의 '완전 살인'을 예고한 마리우스의 편지입니다. 괜히 경찰의 주목을 끌 이유는 없는데, 프랭크 리치레이가 왜 이런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범행을 널리 알려야 했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아요. 경찰의 시선이 분산된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이왕 살인을 저지르니, 사회적인 반향도 불러 일으켜보자고 여겼던걸까요? 하지만 프랭크는 자신의 완전 살인을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불쌍한 대역 배우 플래이스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만 잔혹한 범죄자입니다. 이런 사명감같은걸 가질만한 인물이 아니에요. 또 이 때문에 여론이 크게 움직였다는 묘사도 딱히 없고, 경찰도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은 등, 한 마디로 흥미를 자아내기 위한 목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설정이었습니다. 

핵심 알리바이 트릭이 단지 변장이었다는 것도 맥이 빠집니다. 또 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찰리 채플린 급의 유명 배우 대역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다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에요. 이 탓에 루드빅 트레버스의 주목을 끌고 말았으니까요. 프랭크가 자기와 꼭 닮은 누군가 - 플래이스 - 를 발견한 뒤 범행 계획을 꾸몄다는데 더 설득력 높았을 겁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프랭크 리치레이를 몰아세운 뒤, 그가 자멸하는걸 노렸던 호워튼 총경과 존 프랭클린의 작전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플래이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프랭크의 알리바이가 조작되었다는걸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플래이스가 프랭크에게 살해당했다는 거라도 증명했어야 했는데, 시체조차 찾지 못했으니 이 역시 불가능했고요. 

프랭크가 둘에게 추궁당한 직후 곧바로 범인임을 자백할 이유 역시 마땅치 않습니다. 프랭크 본인 말대로 시한부였다면 더더욱요. 어차피 오래 못 살텐데, 뭐하러 범행을 인정한단 말입니까? 도주 후 시체로 발견되는 과정도 쉽게 흘러간 느낌이라 별로였고요. 차라리 호워튼 총경과 존 프랭클린이 선량했던 프랭크를 물에 빠트려 죽인 뒤, 범인임을 자백했다며 죄를 뒤집어 씌우는게 더 현실적인 전개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번역의 질이 심하게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 출간 버젼이라 걱정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번역은 정말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앞서 괜찮았다는 암호 트릭이 사용된 편지는 나쁜 번역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지요. 번역 때문에라도 도저히 권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인건 분명한데,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기는 여러모로 역부족이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작가와 작품이 잊혀진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이런 류의, 명성은 약간 남아있지만 지금은 그 생명을 고해버린 작품은 이젠 그만 읽어야겠습니다.

2025/11/29

내 시체를 찾아주세요 - 호시즈키 와타루 / 최수영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터리 작가 아사미는 개인 블로그에 불치병에 걸려 자살할 생각이니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글을 올리고 사라졌다. 뒤이어 블로그에 예약 갱신으로 시어머니의 치부와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벌였던 동반 자살극에 대한 진상을 그린 소설을 차례로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아사미의 남편 마사타카와 아사미의 편집자 사오리는 자신들의 불륜이 드러나지 않을까, 그리고 아사미가 다른 무언가를 고백할까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블로그 패스워드를 찾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마지막 갱신글로 동반 자살극의 진상과 사오리의 치부가 드러났다. 모든걸 잃은 사오리는 마지막 글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마사타카가 은거하는 별장으로 향하는데...

유명 작가의 자살과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블로그 글로 시작되는 구성이 인상적인 장편 범죄 복수 스릴러입니다. 

블로그 글, 마사타카, 아사미 시점을 오가면서 아사미가 정말로 자살한 것인지? 시체는 어디에 있는지? 라는 의문과 아사미 고교 시절 동반 자살극에 대한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전개는 흡입력이 뛰어납니다.
편집자 사오리가 마지막 블로그 글의 용어 선택이 평소와 다르다는 점을 알아채고 진상을 눈치챈 장면은 '편집자'라는 직업의 전문 지식을 활용한 추리라는 점에서 괜찮았고요.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는 낮습니다. 우선 주요 인물들의 설정부터 비현실적이에요. 모리바야시 아사미는 극단적인 학대를 겪은 뒤 고아로 자라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남편 마사타카는 데이트 강간을 일삼고 아사미에게 질투심을 품은 채 얹혀 사는 인간 말종입니다. 사오리 역시 아사미에게 집착한 나머지 마사타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설정이고요. 이렇게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과장되거나 극단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은 복수극으로 '아사미는 자살한게 아니라, 복수를 위해서 마사타카를 일부러 자극해 살인에 이르게 만들었다'인데, 복수로 보기에는 애매하고 부족합니다. 마사타카가 살인을 저지른 후의 계획이 전무한 탓입니다. 살인범으로 만든 뒤 파멸시키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범행을 덮어주기 위해 자살로 가장한 블로그 글을 올리기까지 하니까요. 이렇게 되면 마사타카는 뻔뻔하게 아사미 증쇄본 수익, 그리고 실종 신고 7년 후에는 남은 유산으로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데 이걸 복수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살해당하는 것만 목표였고 그 뒤는 상관없다’고 유서에 쓰여있는 걸로 퉁치고 끝내는데, 허무하기 짝이 없네요. 이보다는 정교하거나 복잡한 추가적인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아사미가 불러낸 사기꾼에게 속아 전 재산을 날린 마사타카의 어머니가 유산을 노리고 아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아사미가 실종 중에는 마사타카에게 유산이 상속될 수 없으니, 아들을 죽여봤자 헛짓거리였다!는게 밝혀지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물론 마사타카가 자살하기는 했지만, 이는 계획된게 아니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아사미가 사라진 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책은 큰 화제를 얻었고, 그에 따라 인세 수입도 늘어날 상황에서 마사타카같은 쓰레기가 극단적 선택을 한다는 것도 영 와닿지 않고요. 앞서 그의 내면을 묘사할 때 죄책감이 큰 인물로 그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중 마사타카가 아사미를 살해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의 작품 혹평에 대한 분노와 증오인데, 그게 사람을 죽일 정도의 결정적인 트리거라는 것 역시 잘 설명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소설 속 소설인 "하얀 새장 이야기"도 중반까지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흥미를 이끌지만, 결말은 결국 동반 자살로 귀결될 뿐이라 추리적 가치는 없고, 아사미의 성격이나 내면을 깊이 있게 드러내지도 못해서 왜 삽입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들 이야기 설정도 새로운게 없어서 시시하니까요.

그 외에도, 마사타카가 블로그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알아챈 방법도 대충이고, 사오리가 멍청하게 혼자 마사타카를 찾아가 살해당한 것도 비현실적이며, 아사미야 그렇다 쳐도 사오리 실종 이후에 경찰 수사가 시작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등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눈에 많이 띕니다. 사체 은닉도 그냥 잘게 나누어(?) 버렸다 정도로 넘어가는건 아니다 싶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흡입력 있는 출발과 일부 매력적인 장치는 있지만, 여러모로 비현실적이고 복수극으로도 미흡하여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