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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9

중세 유럽의 레시피 - 코스트마리 사무국 / 김효진 : 별점 1점

중세 유럽의 레시피 - 2점
코스트마리 사무국 지음,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주제에 대해 깊숙히 파고들어, 일반 상식 이상의 정보를 전해준다는 취지의 AK Trivia books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제목 그대로 중세 유럽 요리의 레시피 43개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시피 외에 중세 요리 및 저자의 중세 축제 체험기를 다룬 컬럼 몇 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고요.

특징이라면 중세 유럽의 레시피를 현대의 재료로 재현하는걸 중요한 포인트로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제인 "손쉽게 만들어 즐겁게 맛보는 중세 요리'에 충실한 셈이죠. 그래서 수록된 대부분의 레시피들이 실제로 현재, 그리고 가정 내에서 구현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맛이 짐작 가능해서 딱히 신선한 레시피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쿠민 수프'는 향신료 쿠민이 들어갈 뿐, 현재도 우리가 즐겨먹는 '달걀국'과 같아요. 버섯 수프 '펑거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닭 육수에 다듬은 버섯들과 파, 시나몬, 클로브, 후추를 넣고 끓이는 레시피와 결과물 사진을 보면, 닭 육수를 쓰기는 하지만 멸치 다시마 육수를 써서 만드는 버섯국과 별로 맛이 다를걸로 보이지 않습니다. '작은 새의 무덤' 이라는, 중세풍 이름의 요리도 그 정체는 다진 마늘, 소금, 후추와 버무린 닭다리살을 볶은 뒤 타임, 로즈마리를 넣고 레드 와인과 물에 조리는 와인 닭찜입니다. 이 정도라면, 우리가 흔히 먹는 닭가슴살 간장 조림에서 간장만 와인으로 대체하면 되는 수준이라 집에서도 충분히 만들어 먹을 수 있겠죠.
또 현대에 재현하기 위해 재료를 나름 응용한다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중세의 허니 토스트를 재현하기 위해 '식빵'을 쓰는 식으로요.

물론 현대에 중세 요리를 재현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나쁠건 없습니다. 문제는 내용의 깊이와 전문성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점이지요. 레시피 하나하나의 분량은 많아야 2페이지 정도에 머물 뿐으로, 정말 '레시피' 이외의 다른 정보가 거의 소개되지 않을 뿐더러, 레시피들의 출처들도 소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저자의 마음 속에서 그럴듯하게 꾸며낸 중세 유럽의 요리인지, 아니면 실존했지만 이를 현대에도 맛볼 수 있게 어레인지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전문성 측면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수록되어 있는 컬럼들도 중세 유럽의 장미, 백합, 제비꽃에 대해 알려주는 정도만이 괜찮았을 뿐 그 외에는 별볼일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쓸데 없는 저자의 중세 축제 체험기나 일본 내 중세 유럽 관련 행사에 대한 정보에 대한 사진과 비중이 높다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풀 컬러지만 재현한 음식들 한 컷씩만 실려있는 수준의 도판도 딱히 대단하지 않으며 책의 완성도도 그냥저냥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중세 유럽의 레시피를 현대에 재현한다는 취지 외에 건질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17,000원이라는 가격도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고요. 이쪽 분야에 관심이 지극히 많으시더라도,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2/08

오랑캐의 역사 - 김기협 : 별점 3점

오랑캐의 역사 - 6점
김기협 지음/돌베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역사서입니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를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유목 사회가 농경 사회와 공생하며 '그림자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농경 사회는 생산성이 높아 경제력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덕분에 대규모 정치 조직인 ‘국가’ 형태를 갖추기 쉬웠습니다. 반면, 유목 사회는 느슨한 연합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게 되면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수탈하거나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농경 사회의 제국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저자는 이를 ‘그림자 제국’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한반도가 독립 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설명됩니다. 농사에 유리한 한반도 남부에 국가가 형성되었고, 북부와 만주는 유목 세력의 땅이라 중국과 단절되었지요. 하지만 이 지역에 강력한 유목 세력이 융성했을 때, 한반도 남부 국가는 지속적인 압박과 수탈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 원나라, 청나라 시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재미있지요? 최근 이세계 전생 후 영지, 국가를 성장시키는 내용의 소설과 만화가 많은데,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목민 켄타우로스 부족에게 전생한 주인공이 기술과 병법, 종교 도입으로 오랑캐 정복 왕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요.

중국이 대항해 시대의 유럽과 달리 해양 진출이 적었던 이유도 설명됩니다. 중국은 이미 내륙에서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네요. 이는 대외 관계와 교역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었으며, 유럽이 적극적으로 신대륙을 탐험한 것과 달리, 중국은 상대적으로 대외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청나라 이후 유럽에 비해 문명이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고요.

유럽 중심 사관을 비판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과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은 인상적입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유지한 채 수백 년간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끌며, 특히 ‘중세 암흑 시대’라는 개념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와 닿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중세 시대에도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문명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단지 ‘유럽’만이 그 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저자의 주장들은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시되어 설득력도 높은데, 문제는 주장이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랑캐와 유목민, 그림자 제국 등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유럽 중심주의 비판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슬람 문명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인 구성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글도 어려운 편이고요.

더 큰 문제는 도판의 부족입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각 세력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도 당시의 지도가 거의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유목 세력의 이동 경로, 교역로, 세력권 등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 않다 보니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읽으면서 지도를 수시로 참고할 수 밖에 없었는데, 2만원을 훌쩍 넘는 책 가격을 생각해보면 주요 지도는 도판으로 반드시 추가되었어야 했습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다양한 시각은 흥미롭지만, 이러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구글 맵에서 연도를 입력하면 해당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광고가 많거나 느리거나 조작이 불편한 등 문제가 많았거든요...

2020/02/23

그때, 맥주가 있었다 -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 이상원.장혜경 : 별점 2.5점

그때, 맥주가 있었다 - 6점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지음, 이상원.장혜경 옮김/니케북스

유럽의 기나긴 역사에서 맥주가 중요한 대목을 장식했던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소개해 주는 독특한 미시사, 음식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역사 속 맥주가 관련된 특정한 사건을 수 페이지 정도 소개한 뒤, 해당 사건과 관련된 현대의 맥주를 마지막에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된 스물 네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취지에 걸맞는 내용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연히 맥주 때문에 역사의 흐름이 바뀐 이야기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어떤 한 장면에서 맥주가 멋지게 등장하거나 활용된 정도를 기대한 정도이지요. 그러나 절반 이상의 이야기가 그렇지 못합니다. 단순히 유럽의 특정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때는 아마 맥주를 마셨을거다' 정도에 그치는 탓입니다. 

물론 추정 자체는 꽤 그럴싸 합니다. 문제는 사료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조금 맥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야기들은 단지 등장인물들이 맥주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거나, 맥주 회사가 관련되어 있는 정도에 그치고요. 예를 들자면 난센의 북극 탐험은 단지 링그네스 양조장에서 탐험 비용을 후원했을 뿐입니다. 히틀러가 맥주집에서 바이에른 정부를 실각시키고 제국 정부를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역사를 맥주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건 억지고요. 옥스퍼드 대학 문인들이 펍에서 열리는 문학 클럽에 참석하다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등을 발표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장소가 펍일 뿐입니다. 딱히 맥주와 관련이 있지는 않아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 장관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이야기나 체코 대통령 하벨의 이야기는, 그 둘이 술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는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많고 시기적으로는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현대까지, 장소로는 유럽 전역을 무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폭은 상당히 넓고 방대합니다. 덕분에 재미있는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들이 적지는 않은 편이에요.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자면, 30년 전쟁 당시, 목마른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농부로부터 맥주를 대접받은 후 커다란 루비가 박힌 금반지를 답례로 선사하고,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일화는 명백히 맥주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료로 증명되지는 않은 전설급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전설 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계속 맥주를 만들어 왔으며, 지금의 크로스티츠 양조장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양조 시설 중 한 곳으로 대표작인 '파인헤르베스 필스너'는 라벨에 구스타브 아돌프의 초상화를 담아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400년 이상 된 전설 속 맥주라니 마케팅으로는 더할 나위 없네요.
1836년, 유럽 대륙 첫 철도 운송 화물이 뉘른베르크 레데러 양조장에서 퓌르트로 보낸 맥주 두 통이었다는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레데러는 현재도 독일 리데베르거 그룹의 계열사로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를 계속 출시하고 있답니다.
파스퇴르가 맥주 양조 분야에서 독일을 물리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맥주가 중심입니다. 영국 위트브레드 양조장과 협력하여 최적의 열처리 온도가 섭씨 50~55도라는걸 알아내는 등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맥주에 관한 연구"라는 유럽 맥주 양조인의 경전과도 같은 책을 출간했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그의 맥주 실험의 가장 큰 수혜자는 프랑스가 아니라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양조장이라는게 재미있네요. 결국 칼스버그에서 파스퇴르의 꿈이었던 미생물없는 라거 맥주 효모 배양에 성공했다니 진짜 후계자인 셈입니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오줌싸게 소년 동상의 모델은 브라반트 공국의 수장인 어린 고드프리 3세로,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어린 나이로 출정했을 때 반란군을 향해 오줌을 싼 게 유래라는 설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 유모가 맥주를 마시고 수유를 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맥주를 마셔서 요의를 느꼈을 거라고 설명하는건 좀 억지스러웠지만, 나름 재미있었어요. 함께 알려주는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지 브뤼셀의 전통있는 맥주 '램빅'도 아주 입맛을, 아니 흥미를 돋구고요.
스웨덴의 미식가 전쟁 영웅 요한 아우구스트 산델스 역시 이전에는 알지 못했었던 인물입니다. 1808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핀란드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입니다. 다만 소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맥주 관련된 일화는 없습니다. 러시아 군 보급품을 털었을 때, 맥주도 함께 털었을거라고 추정하는게 전부죠. 그래도 지금 '산델스'라는 이름의 맥주가 산델스가 활약했던 핀란드 양조장 올비에서 양조되어 판매된다니 한 번 마셔보고 싶네요.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는 재미가 덜하지만, 1935년 투르 드 프랑스 경주에서 맥주 탓에 벌어진 순위 변경이라던가, 이탈리아 경제 성장기에 함께 발전한 페로니 맥주의 마케팅 전략, 아일랜드가 무섭게 성장하다가 리먼 사태 등으로 휘청일 당시, 카우언 총리의 기네스 맥주 사랑 등은 기억에 남네요. 특히 폴란드의 맥주 애호가 정당 이야기는 온갖 정당이 창궐하는 지금의 우리나라를 연상케 해서 제일 인상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획 의도대로 완벽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알게된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고, 저자들의 글 솜씨도 유쾌하기 때문이죠. 맥주 한 잔 하면서 읽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책에서 소개하는 맥주 리스트를 인용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파는 맥주는 한 개 씩 구입해서 마셔볼 예정입니다.

  1. 생 푀이엥 트리플 St-Feuillien Triple 벨기에 
  2. 칸티용 괴즈 100% 램빅 바이오 Cantillon Gueuze 100% Lambic Bio 브뤼셀 (벨기에)
  3. 아인베커 우어 보크 둔켈 Einbecker Ur-Bock Dunkel 아인베크 (독일) 
  4. 린데만스 파로 Lindemans Faro 블렌제비트 (벨기에)
  5. 우어 크로스티처 파인헤르베스 필스너 Ur-Krostitzer Feinherbes Pilsner 크로스티츠 (독일)
  6. 발티카 No.6 포터 Baltika No.6 Porter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7. A. 르꼬끄 포터 A. Le Coq Porter 타르투 (에스토니아)
  8. 올비 산델스 Olvi Sandels 이살미 (핀란드)
  9.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 Lederer Premium Pils 뉘른베르크 (독일)
  10. 위트브레드 베스트 비터 Whitbread Best Bitter 웨일스의 마고 (영국)
  11. 칼스버그 Carlsberg 코펜하겐 (덴마크)
  12. 링그네스 임페리얼 폴라리스 Ringnes Imperial Polaris 오슬로 (노르웨이)
  13. 그랭 도르주 뀌베 1898 Grain d'Orge Cubee 1898 릴 (프랑스)
  14. 레벤브로이 오리지널 Lowenbrau Original 뮌헨 (독일)
  15. 베를리너 킨들 바이세 Berliner Kindl Weisse 베를린 (독일)
  16. 크로넨버그 1664 Kronenbourg 1664 오베르네 (프랑스)
  17. 그래비타스 Gravitas 브릴 (영국)
  18. 스핏파이어 프리미엄 켄티시 에일 Spitfire Premium Kentish Ale 파버샴 (영국)
  19. 페로니 나스트라즈로 Peroni Nastro Azzurro 로마 (이탈리아)
  20. 크라코노시 스베틀리 레작 Krakonos Svetly Lezak 트루트노프 (체코)
  21. 지비에츠 Zywiec 지비에츠 (폴란드)
  22. 사라예브스코 피보 Sarajevsko Pivo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23. 기네스 드래프트 Guineness Draught 더블린 (아일랜드)
  24. 하이네켄 Heinek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20/10/03

시계와 문명 -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 최파일 : 별점 3점

시계와 문명 - 6점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미지북스

'1300~1700년, 유럽의 시계는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라는 부제의 미시사, 문화사 서적인데 이전 "해상 시계"에서 느꼈던 지적인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책으로 기대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좋았던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럽에서 기계식 시계의 개발이 시작된건, 도시 문화의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는 도입부부터 흥미롭습니다. '종'을 울리는게 굉장히 중요했었던 당시 시대 문화가 결국 효율적으로 종을 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로 이어져, 그 결과 도시와 수도원에 '시계탑'이 설치되기 시작했다는 흐름인데 굉장히 그럴싸합니다. "노틀담의 꼽추"도 종을 치는게 주 업무였잖아요? 이를 정확한 기계로 대치하고자 한 건 풍차 등으로 기계적인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당시 분위기와 충분히 맞아 떨어지고요. 도시마다 경쟁적으로 '아름다운', 혹은 '놀랍고 기묘한' 시계를 장치하고자 한 것도 국가의 발전보다 '도시'의 발전이 더 에너지가 넘쳤던 시대 상황에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16세기를 지나면서 '수공업자' 들 중 시계공이라는 직업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원래 이들은 대장장이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계가 가정용, 휴대용으로 널리 확산되면서 독자적인 직업군을 이루게 되었다는, 시계공이라는 직업 자체의 역사적 흐름도 재미있습니다. 여러 도시들이 시계 산업을 시작하지만 결국 시계 산업을 주도한 곳은 영국과 파리, 그리고 제네바였는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시계 산업은 '시계공의 유입'과 관계가 깊었다네요. 제네바의 경우는 종교 개혁으로 특정 시기에 전 유럽에서 많은 시계공 유입이 벌어졌고, 영국 런던도 마찬가지로 외국 이주 숙련공이 정착한게 시계 산업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거든요. 특정 직업군 장인들이 모여 산업을 일으키고, 그게 현대까지 이어진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만은 종교 개혁 당시 시계공이 유출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불사조처럼 부활하여 18세기에는 시계 산업 세 축의 하나가 되었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데, 이유가 무척 궁금해집니다.

시계 자체의 역사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최초 '탈진기'에서 시작된 기계식 시계가 언제 조절장치로 폴리옷 대신 진자를 도입하였으며, 그래서 어떻게 고정밀 기기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잘 짚어주는 덕분입니다. 관련된 도판, 부록에서 설명해주는 시계의 원리와 진화 과정, 주석도 모두 완벽한 수준이고요.

이렇게 앞 부분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시계 발전 과정 설명을 마친 뒤, 동양, 특히 중국에 기계식 시계가 도입된 과정을 설명해주는데 이 역시 아주 재미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유럽의 시계사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서양과 양산된 생산물의 수준에서 전혀 뒤지지 않았던 중국이 왜 시계, 그리고 총기류는 자체 개발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중국의 정치 및 관료 체제가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수공업자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무역이 가능했던 대도시 외 대부분 지역 주민들은 외부와 고립되어 서양 신문물에 대해 알지 못했다' 등 여러가지 이유를 드는데 결론은 '중국이 유럽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발전시키는걸 당연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라는 겁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좀 허무하지요?

여기까지만 보면 굉장히 재미도 있고, 자료적 가치도 높은 책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은 프롤로그와 주석을 제외하면 100여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라는 겁니다.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담고 있는 내용도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뿐 입니다. 60여 페이지에 달하는 주석도 미주가 아니라 각주로 표기해서 본문 분량을 풍성하게, 깊이있게 만들어 주었어야 했고요.

그래도 재미있게, 흥미롭게 읽은건 분명한 만큼 별점은 3점입니다. 이런 류의 책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13/11/20

빈둥빈둥 환타스틱 유럽여행기 - 환타 (김환타) : 별점 2.5점

빈둥빈둥 환타스틱 유럽여행기 - 6점
환타(김환타) 지음/중앙books(중앙북스)

이글루스 블로거이신 김환타님이 블로그에 연재했던 유럽 여행툰 단행본.

블로그 연재 당시 꼼꼼히 챙겨보았는데 출판된 책으로 보니 또 다른 맛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만화로 그려진 관광여행기라는 점에서 "낢 부럽지 않은 네팔 여행기"와 여러모로 비교되는데 정보와 재미 측면에서는 "낢..." 쪽이 더 좋지만 그림과 일상성 측면에서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들더군요.

정보 전달 측면이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 부연 설명드리자면, "낢..." 쪽은 네팔 트레킹 여행에 대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되는지 적당히 알 수 있게 해 주지만 이 책은 유럽 여행에 대해 딱히 알려주는 것이 없습니다. 배낭이 캐리어보다 낫다, 이런 준비물을 챙겨라, 집시를 조심해라 등등의 내용은 이 책이 아니라 인터넷에 검색어 한 줄만 입력해도 나오는 정보들이잖아요? 재미 역시 마찬가지라서 빵 터지는 그런 맛은 부족한 편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작가의 젊은 미혼 여성 마인드를 따라잡기 힘든 탓도 크겠지만...

그러나 확실히 그림은 훨씬 마음에 들 뿐더러, 그야말로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일상성은 마음에 들었어요. 네팔 트래킹 여행보다는 유럽 배낭여행이 더 친숙한 덕이겠죠.

결론적으로 점수는 2.5점.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여행이 소재인 일상툰으로 추천드립니다.

그런데 정가 17,000원이라는 가격은 심히 부담스럽긴 하네요. 아무리 풀컬러라도 그렇지...

2024/07/19

미야자키 월드 - 수전 네이피어 / 하인해 : 별점 2.5점

미야자키 월드 - 6점
수전 네이피어 지음, 하인해 옮김/비잉(Being)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하여, "바람이 분다"까지의 일생과 각종 일화들을 주요 작품 평론과 함께 담고 있습니다. 평전과 평론이 합쳐진 구성이지요. 이 책을 통해 애니메이션 거장으로서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작품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 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군수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조부와 부친 덕분에 유복했지만, 결국 패배한 전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유년 시절 이야기는 이런저런 자료와 책에서 이미 접했었습니다. 그래서 애니메이터가 될 것을 결심하고 토에이 스튜디오에 입사한 뒤부터가 재미있었습니다. "걸리버의 우주여행" 마지막 장면을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안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로봇 공주가 쪼개지며 인간 공주가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미야자키 월드를 상징하는 장면과도 같다는데, 아이디어의 좋고 나쁨을 떠나 당시 일개 동화가 신분으로 강력하게 수정을 제안했고, 그게 반영되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이런저런 일화들이 많이 소개됩니다. 그 중 말괄량이 삐삐 장편 애니메이션을 위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을 만나러 갔지만 거절당했는데, 이 때 미야자키가 스케치를 준비했었고 후일 단행본으로 출간했다는데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책 제목은 "환영의 삐삐 롱 스타킹"이라니 구해봐야겠습니다. 삐삐와 초창기 미야자키는 너무 잘 어울렸을거라고 생각되거든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대체 왜 거절했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미래소년 코난"의 원작인 "무시무시한 해일" 소개도 반가왔습니다. 원작 내용이 어떠하며 얼마나 각색했는지가 항상 궁금했었기 때문입니다. 원작에서는 코난이 초반부에 공장 노예로 인더스트리아에 끌려오지만, 새와 대화할 수 있는 소녀 라나와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뉴오더를 탈출해 하이하버에 도착해서 또 한 번 거대한 지진이 닥치기 직전 친구들과 함께 쓰나미에서 사람들을 구해낸다고 하네요. 라나의 비중이 작고, 자연 재해가 중심이라는 점에서 소년 모험물인 미야자키 작품과는 아예 달라 보이네요.

상세한 작품별 평론들도 볼만합니다. 외국인이라 가질 수 있는 시각도 있고, 미야자키의 생애와 작품을 연결하여 내놓는 해석들도 참신하게 많은 덕분입니다. "칼리오스트로의 성" 속 루팡이 금욕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라는 해석이 대표적입니다. "붉은 돼지"는 "카사블랑카"의 판타지적 재해석이라는 것도 신선한 발상이라 생각되고요.
"라퓨타"가 개봉 당시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던가 하는 기타 정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판할 요소도 적지 않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2차 대전에서 받은 영향으로 작품에서 '인내를 통해 상실 앞에서 행동하고, 부족함 앞에서도 주변을 돌보고, 파멸 앞에서 다시 일어나라고 말한다'는건 실망스러웠습니다. 자기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이런 파멸에 놓였다는걸 제대로 알고 있는걸까요? 인내, 극복보다는 반성과 사과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부모에 대해 분노와 적개심을 품게 된 이유도 아버지 카츠지가 허풍이 심한 데다 무책임하며 방탕했고, 윤리 의식도 부족했기 때문이라는데, 당시 그렇지 않은 아버지가 과연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전쟁 통에 유복하게 생활할 수 있게 해 준 점에 대해 고마와했어야 합니다. 이 역시 실망스러웠던 부분입니다.

평론별로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아서 지루합니다. 유럽에 대한 동경, 강한 여성상 등은 평론마다 계속 반복됩니다. 동의하기도 어려워요. 일본인들이 동경한 꿈의 낙원으로서의 유럽을 보여주는건, 당시 '빠른 속도로 현대화하는 일본과 달리 전통과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유럽을 유토피아로 여긴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유럽을 무대로 한 작품을 많이 만든건 단지 비쥬얼적인 면에서 줄거리, 세계관과 어울린다는 이유가 가장 컸을텐데, 왜 이런 심층 심리(?)를 분석해서 주장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이런 책 치고는 도판이 부실한 것도 단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비판적인 시각보다는 좋은 면만 보려는 등 다소 편향된 느낌이 강해서 감점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팬이시라면 볼만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권해드리지는 않습니다.

2023/04/02

유럽의 시간들 - 루시 나이즐리 / 김보은 : 별점 2점

유럽의 시간들 - 4점
루시 나이즐리 지음, 김보은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부제는 '스물일곱 뉴요커 루시의 그림 여행 일기.' 얼마전 읽고나서 별점 4점을 주었던 <<맛있는 인생>>의 작가 루시 나이즐리의 유럽 여행기입니다. <<맛있는 인생>>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여행기는 보통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낢부럽지 않은 네팔 여행기>>처럼요. 그래서 주저없이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망스러웠습니다. '만화'로 보기 힘든 책이었던 탓이 큽니다. 기승전결이 없는 개인 일상을 기록했기 때문이에요. 부제처럼 '그림 일기' 인 셈이지요. 
물론 대부분의 여행기가 개인 일상입니다. 하지만 '만화'라면 여행에서 있었던 재미있었던 에피소드 중심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냈어야 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도 그런 부분이고요. 그러나 그런 에피소드는 단발성 컷에 그치고, 솔직히 별 재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행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스웨덴 남자 헨리크와의 짧은 연애 이야기, 연애 등에서 촉발된 스물일곱 나이로 떠올렸음직한 고민들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결혼은 어떻게 할까, 애는 낳을 수 있을까, 평범한 삶은 무엇일까 등등등.... 하지만 루시 나이의 두배 가까이를 산 제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고민들이라 공감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책 속에 답이 나옵니다. 작 중에 나오는 와인 축제 주최자 데니스는 말합니다. 스물 일곱은 '허락받은 나이'라고요. 경험하고, 실패하고, 여러가지를 시도해볼 수 있는 나이. 게다가 루시는 유럽 만화 축제에서 초대할 정도로 성공한 만화가라는 확고부동한 직업이 있습니다. 본인이 노력한다면 그쪽 일을 찾는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거에요. 그래서 솔직히 뭘 고민하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야기는 루시가 나이에 따른 인생의 단계가 있다는걸 깨닫고 끝나는데, 깨달음도 '계획' 보다는 '변화'에 방점을 찍은게 아직 어리다 싶었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살겠다.... 는 느낌이었거든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별로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08/08/11

813의 비밀 - 모리스 르블랑 / 성귀수 : 별점 2점

813의 비밀 - 4점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까치글방

대부호 케셀바흐의 호텔방에 뤼뺑이 침입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케셀바흐가 알고 있는 비밀에 대한 정보였다. 뤼뺑은 케셀바흐의 비밀금고에서 관련 문서를 입수한 뒤 철수했는데, 다음날 케셀바흐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청의 르노르망은 살인은 뤼뺑이 행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적 추리를 펼쳐 살인범 L.M에 대한 단서를 잡지만 주요 증인들이 연이어 살해당했고, 르노르망도 범인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한편 세르닌 공작으로 자칭한 뤼뺑은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고 유럽의 판도를 뒤바꿀 비밀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L.M의 음모에 빠져 샹떼-팰리스에 수감되는데...

너무 더워서 책 읽기가 힘드네요. 독서도 힘든 날씨에 여러모로 지친 머리를 식히고자 고른 책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기암성 이후 4년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뤼뺑의 모험을 그린, 500여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분량의 장편이지요. 뤼뺑 시리즈 중 가장 길다고 하네요. 그래서인지 이전과는 다른 거대한 스케일, 즉 유럽의 판세를 놓고 벌이는 뤼뺑과 악당 L.M의 한판 승부가 장황하게 펼쳐집니다.
20세기 초반 당시의 유럽 현황, 실제 있었던 역사 속에서 뤼뺑은 배후의 큰손으로 흡사 진나라의 여불위를 연상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러한 거대 음모를 가능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황제의 편지" 역시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기에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 내내 뤼뺑과 박빙의 대결을 펼치는 정체불명의 악당 L.M 이 다른 라이벌인 홈즈와 가니마르와는 차원이 다른 막강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추리물다운 요소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뤼뺑 시리즈는 괴도가 등장하는 범죄소설이기도 하지만 황금시대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완성도 높은 트릭이 등장하는 것이 매력적인 작품인데, 이 작품은 다른 시리즈와는 달리 그러한 트릭 없이 모험물에 가까운 분위기로 작품이 전개되고 있거든요. 813이라는 숫자와 "APOON"이라는 단어를 이용한 일종의 암호트릭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APOON의 경우 억지에 가까운, 트릭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수준의 간단한 장치일 뿐이었습니다. 시작부터 의문에 가까운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등 뭔가 있음직한 분위기를 보여주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성공한 것 같지 않네요. 마지막의 반전, 그리고 범인 L.M의 정체 역시 지금 읽기에는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결말이었습니다.

뤼뺑의 다양한 변장과 이중생활, 사생활(특히 딸까지 등장합니다!) 등이 디테일한 심리묘사 등을 통해 보여지는 것과 유럽을 대상으로 한 뤼뺑의 두뇌게임은 매력적이지만 길이에 비한다면 알맹이는 없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야기는 분명 재미있지만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기에는 뭔가 부족한, 모험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단지 모험물로만 본다면 괜찮기도 하지만 추리 애호가로서 평가했기에 별점이 좀 낮군요. 어쨌건 기대에 미치지는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2021/01/15

외국어 전파담 - 로버트 파우저 / 혜화 1117 : 별점 2.5점

외국어 전파담 - 6점
로버트 파우저 지음/혜화1117

외국어 전파 과정을 통해 시대별로 당대 패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알려주는 사회사,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책 속 저자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모어 외의 외국어를 개인이 배우는 이유는 '권력과 자본'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주장을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 잘 설명해 줍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층은 모두 모어 외 외국어로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귀족과 상인 세력이 성장하고, 제국이 붕괴되고 도시 국가가 융성하면서 고대 그리스어가 유행하게 됩니다. 유명한 메디치 가문이 고대 그리스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걸 지원하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문헌을 모은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카톨릭 교회 견제를 위해 고대 그리스 문화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 과정에서 금속 활자로 독일어 성경이 출간되며 라틴어 영향력은 더 줄어들었고,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대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 됨으로써, 영어와 프랑스어가 외국어에서도 패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의 영향하에 프랑스어도 밀려나 버렸습니다. 영어의 세계화는 외교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영어로 통일된 것으로 대표됩니다. 한국과 일본은 당대 동아한시아 최강국 중국 영향권하에서, 모어와는 다른 한자어를 지배계층이 열심히 배웠다는 측면에서는 이와 다르지 않겠지요.

이러한 유럽 중심의 흐름과 함께, 제국주의와 식민지 하에서 유럽 국가의 언어가 제 3세계로 어떻게 뻗어나갔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권력과 자본에 의한 외국어 학습이라는 맥락은 동일하고요. 침략과 선교를 위해서, 일단 유럽인들이 현지 언어를 배웠다는 시작만 조금 다를 뿐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빨간 리본"에서도 중국으로 향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인 '싼'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우는 장면이 등장했었죠. 그러나 일단 자리를 잡고 난 뒤에는 현지인들이 권력, 자본을 손에 쥐고자 침략자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 뒤에는 식민지의 피지배층이 독립을 꿈꾸는 민족의식을 생성하지 못하게끔, 침략자들이 해당 식민지의 모어를 의도적으로 말살시키려 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공식 언어로 침략자들 언어를 쓰는 간단한 정책에서부터, 아예 민족 고유의 이름까지 바꿔버렸던 일본 제국 주의처럼 강력한 정책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렇게 식민지를 '내국인화' 하려는 강력한 정책은 식민지와 지배국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서 그 예로 아일랜드와 조선을 들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한 발상이에요.
민족 고유 언어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가 극대화된 파시즘적인 발상과 이 때문에 세계 공용어를 꿈꿨던 에스페란토어 관계자들이 히틀러에게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도 비슷한 관점으로, 눈여겨 볼 만 했습니다. 꼭 필요한건 아니겠지만 화려한 도판도 여러모로 흥미를 자아냈고요.

그러나 이렇게 세계사 흐름과 동기화되는 언어 전파 과정은 굉장히 흥미로왔지만 책의 또다른 축인 '어떻게' 배우는지, 즉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내용은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문법을 참고하는 학습법은 1471년 시작되었으며, 17세기에 예문으로 단어를 설명했고, 19세기 말, 벌리츠가 말하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학습법을 크게 유행시켰고 이후 습득 이론, 청각 구두 교수법, 의사 소통 중심 교수법 등으로 진화했다는 내용 등인데, 우선 각 학습법의 차이가 명쾌하게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더라고요. 글보다 말이 중요하고, 독해보다 회화가 중요하다는 개념 정도만 이해될 뿐이었어요.

또 외국어 학습법과 외국어 전파 과정이 잘 연결된다는 느낌도 받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전파와 학습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처럼 세계사 흐름과 병행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어요. 세계사 흐름과 일치하여 머리에 쏙속 들어오는 외국어 전파 과정이 흐려질 뿐이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외국어가 전파되는 부분, 그리고 학습 방법의 진화 부분은 분리해서 따로 소개하던가, 외국어 전파 과정만 더 상세하게 서술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니다.

2021/07/02

1달러의 세계 경제 여행 - 다르시니 데이비드 / 박선령 : 별점 4점

1달러의 세계 경제 여행 - 8점
다르시니 데이비드 지음, 박선령 옮김/센시오

"미국에서 소비자가 월마트에서 라디오를 구매할 때 쓴 1달러"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투자를 위해 나이지리아로, 나이지리아에서 쌀 수입을 위해 인도로, 인도에서 석유 매입을 위해 이라크로, 이라크에서 무기 구입을 위해 러시아로, 러시아에서 안정적인 보관을 위해 독일로, 독일에서 투자를 위해 영국으로, 영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통해, 여러가지 경제 활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경제학, 경제사 책입니다.

국가별로 집중하고 있는 항목이 다른데 조금 자세하게 설명드리자면, 중국에서는 중국이 어떻게 세계의 공장으로 기능하며 엄청난 저가 공세를 통해 달러를 빨아들이는지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 은행이 모든 달러를 보유하고, 환율을 통제하는 시스템이라 가능했었던 성장 모델이었으며, 중국도 한계를 느끼고 해외 투자를 다각화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아프리카는 중국의 나이지리아 투자 예를 통해 신흥국에 중국 외 국가가 왜 투자를 하지 않는지, 투자에 왜 달러가 사용되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여러모로 리스크가 많아서 매력적인 투자처는 아니지만, 중국은 석유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라네요. 나이지리아를 자국의 시장으로 성장시킬 마음도 있고요. 이 과정에서 중국 해외 투자에 대한 우려섞인 시각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달러를 쓰는 이유는, 당연히 나이지리아도 달러가 필요한 탓입니다. 이 책에서는 "인도의 쌀"을 구입하기 위해서라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인도는 식민 지배 탓에 전통적인 경제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오히려 IT 업종 쪽으로 특화되어 발전하고 있다는게 특이해서 기억에 남네요. 또 인도 농업은 엄청난 생산량을 자랑하지만, 인프라 부족과 국가간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에 채산성이 좋지 않아서 인도인의 상당수가 굶주리고 있는 현실도 와 닿았고요.

이라크에서는 국제 유가에 대한 설명이 주입니다. 유가가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러시아는 무기 비즈니스로 시작하지만, 그동안 궁금했었던, 경제 규모도 크고 자원도 많으며, 군사력도 강한 러시아가 왜 석유 수출과 달러에 의존하는 처지인지?를 알려줘서 좋았습니다. 답은 해외 부채가 많고, 식료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라네요. 이 과정에서 자국 통화를 달러로 사용할 때의 문제점도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이어지는 독일 부분에서는 유럽 연합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상적으로만 보였는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쉽게 알려주는게 핵심이지요. 이 책에 따르면 유로의 금리가 유럽 연합을 주도하는 독일 등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게 가장 큰 문제로, 2008년 금융 위기 때 금융 경색에 빠진 소국들이 자국 금리를 인하하여 경기 부양을 하는 정책을 펼 수 없었다는군요. 중앙 정부가 있었다면 재정 위기에 빠진 지방 정부를 지원해 주었겠지만, 유럽 연합은 별도 정부를 지원하지도 않았고요. 같은 이해관계에서 출발했다 해도, 구성원 간 힘의 역학 관계에 따라서 통합이 오히려 작고 약한 구성원을 굴복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합이 능사가 아니라는건, 통일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우리 나라도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겠지요.

영국 부분을 통해서는 세계 금융의 수도답게 주식, 펀드, 외환 및 파생상품과 옵션 등 다양한 투자, 금융 상품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비중이 큽니다. 그 이후 브렉시트 이야기가 이어지고요.

마지막 미국 편은 경제 성장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적당한 물가 인상, 그리고 그에 발 맞춘 임금 인상이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내년에 가격이 오를게 확실하다면, 올해 물건을 구입할테고, 이로 인해 경기가 활성화 된다는 논리인데 정말 확 와 닿았습니다. 미국 연준의 선호 목표는 매년 물가가 2% 상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르면 생산성은 1.5~2%, 임금은 3.5~4% 인상이 이상적이고요. 대부분 대기업에서 연봉 계약 시 물가 상승률에 1.5% 정도롤 더하는게 이런 근거에 따른 것이더군요. 경제 위기 이후 미국, 영국 등에서는 더 이상 생산성이 올라가고 있지 않다는 현실도 읽다보니 체감이 되었습니다. 경제 위기 뒤 많은 기업들이 위기 경계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 고용을 선호하고, 신규 투자를 하지 않아서 일자리는 늘었지만 질이 떨어진 탓인데,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유익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는건 큰 장점인데, 절반 이상의 내용을 미국과 서구 유럽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달러를 중심으로 세계 경제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는 때문이었겠지만, 유로에 대한 비중만큼 위안화와 엔화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거에요. 세계 경제 비중으로 따지면 중국과 일본 비중이 훨씬 클 테니까요. 석유와 무기 외 다른 상품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도 마찬가지로 아쉬웠고요. 아울러 이런 류의 책이 가진 기본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최신 내용도 살짝 부족하다 느껴졌습니다. 책이 발표된 시점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럼프 이후 불거진 무역 전쟁 등의 이야기가 없거든요. 엇보다도 최근 분위기 상으로는 가상 화폐 이야기나 SNS의 영향력 이야기가 빠져 있는건 문제점이라고 생각될 정도였고요. 아울러 미국과 달러가 세계 경제의 패권을 잡고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추가가 필요했고, 금리와 경제의 상관관계도 지금보다 자세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점에 비하면 이 정도 단점은 수긍할 만 합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세계 경제에 대해 알고 싶은 초보자들이 읽으면 딱 좋을, 그럴 책입니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참 좋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지금 비트 코인을 법정 화폐로 하겠다는 국가가 등장한 모양인데, 그 나라 중앙 은행은 타 국가와의 거래를 통해 어떻게든 비트코인을 모으려는 목적이겠지요. 그러나 이 책에서 배운 이론에 따르면 환율을 국가가 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국가 통화로 삼기에는 심히 부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비트코인의 단기 부양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막대한 손해를 보지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17/03/12

치즈의 지구사 - 앤드류 댈비 / 강경이 : 별점 2점

치즈의 지구사 - 4점 앤드류 댈비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에서 간행한 음식들에 대한 미시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디자인, 제목이 마음에 들어 몇권 구입한지는 좀 되었지만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세계의 유명 치즈를 모아 놓은 치즈 보드를 가지고 각 치즈별 유래, 역사를 설명해 주는 챕터부터 시작됩니다. 12개의 치즈가 올라가 있는 치즈 보드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리와 모짜렐라라던가 고르곤졸라, 파르미자노 레자노, 체더 등 친숙한 치즈들이 많아 즐겁게 읽었습니다. 간혹 사먹는 브리가 중세 말 유럽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치즈 중 하나였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심지어 프랑스 사람들의 과장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영국 저자들도 인정했다니, 앞으로 더 열심히 먹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치즈'에 대해 통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4000년 경 중앙 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낙농업으로 전환이 일어나고 젖 짜기가 이루어진 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젖을 안정적이며 고정적인 식량원인 치즈로 만드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는 치즈의 시작, 그리고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치즈 역사가 소개됩니다.
기원전 3000년 이집트 지역 유물에서 발굴된 유기물 흔적이 치즈였다는 등 사료가 바탕이 된 상세한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당대 치즈 요리 레시피가 소개되는 것도 볼거리에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포싯 - 가루치즈를 와인에 섞어 만든 것 - 이 대표적입니다. "오디세이아"에서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을 환영하며 대접하는, 치즈와 보리죽, 노란 꿀을 프람니아 와인에 섞은 포싯은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하게 만든 음식이라 더 기억에 남는데, 레시피만 보면 약간 치즈 수프 비슷할 것 같네요.

세 번째 챕터에서는 '지속성과 다양성'이라는 주제로 온갖 다양한 치즈 제조법을 소개해 줍니다. 지역과 시대별, 재료별(양젖, 소젖, 염소젖 및 동물성과 식물성으로 구분되는 레닛 등) 로 구분된 다양한 치즈들이 소개되는데 이 역시 아주 상세합니다. 좋은 치즈의 여섯 가지 특징 등 읽을거리도 많고요.

마지막 챕터에서는 세계가 치즈를 소비하는 방법이 다루어지는데, 당연하겠지만 주로 다양한 음식들과 레시피 소개가 중심입니다. 시칠리아의 미식가 시안 아르케스트라토스의 레시피, 소크라테스의 채식 식단 등 다른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레시피가 가득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약처럼 먹었다는 일화나 치즈가 언어별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도 좋았고요.

그런데 전체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있지는 않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200여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읽기 힘들고 이해도 어려울 정도였어요. 이유는 통사적인 내용보다는 각각의 치즈를 중심으로 파고드는 내용이 많은 탓입니다. 통사적으로 접근한 챕터도 고대 이집트에서 로마까지의 초창기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고요. 이래서야 "~의 지구사"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치즈에 대해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만, 연대순으로 주요 변곡점마다 존재했던 치즈를 보다 상세하게 알려주는게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네요.

2025/03/14

기차 시간표 전쟁 - A.J.P. 테일러 / 유영수 : 별점 4점

기차 시간표 전쟁 - 8점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페이퍼로드

이 책은 1914년 7월 위기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원인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전쟁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저자는 전쟁이 단순한 외교적 실수나 강대국들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기차 시간표와 병력 동원 계획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주장합니다. 주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각국은 철도를 활용한 신속한 군대 동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동원을 빠르게 마쳐야 했고, 이에 따라 병력과 군수물자를 정해진 시간과 경로에 따라 이동시키는 계획이 점점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병력과 수천 대의 열차가 동원되는 만큼, 계획이 한 번 실행되면 중단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유럽 각국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고, 각국은 병력 동원을 상대국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는데, 일종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동원이 시작되면 이를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양면전 가능성을 고려해 먼저 프랑스를 공격해야 했고, 다른 나라들도 부분 동원만으로는 전면전에 대비할 수 없어 연쇄적으로 동원에 돌입했습니다. 결국, 상대를 위협하려던 동원 계획이 오히려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의 복잡했던 동맹 및 외교 관계도 전쟁 발발의 한 원인입니다. 유럽 열강 간의 동맹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독일과의 타협을 원했으나, 영국이 이를 반대하며 개입했습니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이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다른 열강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명확한 대응 방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는 발칸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독일이 터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점차 기울었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였고, 영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세르비아 정부는 발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군을 동원하면서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해야 한다는 압력이 강했습니다. 독일 황제는 세르비아가 제시한 조건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전쟁 준비가 진행된 후였습니다. 결국 1914년의 전쟁 위기는 단순히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강대국들의 경직된 대응으로 인해 확대된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대규모의 군사 동원이 곧바로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각국의 황당하고 순진했던 생각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탁상공론과 연구만 오갔던 무능했던 각국 군사 작전 계획들도 한 몫 단단히 했고요. 다들 말도 안되는 동원 계획 등으로 꿈만 꾸고 있었다는걸 잘 알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슐리펜이 여러 해 고심했던 슐리펜 계획 -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북부 프랑스로 진격하는 계획 - 은 프랑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던가, 슐리펜이 오랫동안 연구를 했음에도 프랑스가 어느 때인가 알아차리고 길을 막을 거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웃음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난건 외교를 맡은 관료들 책임이 크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연합국이 전범으로 지목했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야말로 '베오그라도 정지'를 제안하는 등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건설적인 시도를 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더라고요. 소위 군국주의 군주들을 온화하고 선의를 가진 이들이었으며, 정치가들이 말한 바를 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모든 결정권이 군주들에게 맡겨졌다면 전쟁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게 아이러니합니다. 

1차 대전 불씨를 당긴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왜 암살을 시도했는지 - 독일인과 마자르인들이 나머지 민족을 지배했는데, 마침 세르비아가 터키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었기 때문에 - 부터, 세르비아 장교들의 비밀 결사 '검은 손'이 암살범 프린치프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었고 -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수상 파시치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 처음 폭탄 투척 사건에서는 암살에 실패했었지만 대공이 부상자들을 방문하려고 병원으로 갈 때 암살당했다는 사건의 진행 과정과 결과는 물론 범인 일당에 대한 재판 결과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당은 사형당했지만, 미성년자였던 프린치프는 사형을 면했다고 하네요. 수백만 명이 죽은 미증유의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감을 안고 여생을 보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유를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주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도판도 충실하고, 책의 장정과 디자인 모두 빼어납니다. 다만 '기차 시간표'가 중요한 핵심 소재는 아니고 일종의 키워드로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의 시작까지만 다루고 있어서 관련된 인물들과 국가들의 결말은 다른 경로로 알아 보아야 한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1/01/17

향신료의 지구사 - 프레드 차라, 강경이 : 별점 2.5점

향신료의 지구사 - 6점
프레드 차라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기대가 컸던 "스파이스"에 큰 실망을 한 뒤 집어들게 된, 향신료를 주제로 한 식문화사, 미시사 서적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스파이스" 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주요 향신료 5개 - 시나몬cinnamon(석란육계), 클로브clove(정향), 블랙페퍼 blackpepper(흑후추), 넛메그 nutmeg(육두구), 칠리페퍼chilli pepper(고추)- 에 대한 상세한 설명부터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마음에 듭니다. 어떤 물건에 대해 설명하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려주는게 먼저인게 당연하니까요.
또 큰 세계사 흐름과의 연결도 잘 정리되어 있는 편입니다. 동서간의 만남, 신대륙의 발견에는 향신료가 주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라는걸 잘 알 수 있었거든요. 이러한 노력에 의해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로 진행되는 과정과 향신료 교역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주고요.

뒤이어 고대와 로마, 중세, 대항해시대, 산업혁명기, 현재에 걸쳐 각 시대별로 향신료가 어떤 향신료가 어떤 경로로, 무엇을 위해 누구에 의해서 유통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역시 핵심만 잘 짚고 있어서 깔끔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특히 "스파이스"에서는 설명되지 않았던 여러가지 사항에 대한 소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단순한 '선물' 정도만 전해주고 페퍼를 싣고 올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다 가마 일행부터가 캘리컷 힌두 지배자 사마린에게 보잘것없는 선물을 바쳤다고 하니까요. 선물이 통하지 않는다는걸 알고 난 뒤, 대포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요. 덕분에 포르투갈은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소비되는 페퍼 대부분의 공급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의 이슬람 항구를 함락할 수는 없어서, 주도권을 결국 네덜란드에게 내어 주고 맙니다.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홍해 길목의 항구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관할하에 있었을테니, 엄청나게 먼 항로를 거쳐 와야 하는 포르투갈 함대가 공략해서 정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을겁니다. 아울러 이 책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성공은 아시아 세력이 해상 무역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하고요. 당연히 홍해를 거친 육로를 통한 향신료 거래가 유통의 중심이었고, 포르투갈이 차지한건 전체 향신료 거래의 약 5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속이 다 시원하네요.

포르투갈 이후 네덜란드가 포르투칼의 동방 교역로를 차지할 수 있었던건 향신료 거래 시 현지 세력과 은화로 거래했기 때문이라는건 새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물론 네덜란드도 동인도 제도의 세 가지 주요 향신료는 반다 제도는 정복 후 노예화 과정을 통해 장악했지만요. 2006년 세계적인 사학자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가 유럽인의 열대지방 진출에 대해 요약한 말 그대로, “그들은 포옹으로 시작해서 학대로 태도를 바꾸더니 유혈 사태로 마무리했다." 인 셈이지요.
또 포르투갈처럼 네덜란드도 향신료 교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중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이 해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향신료 생산지역의 내륙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 세력이 공백 상태에 있었던 덕분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중국인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이지만 설명되어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유럽이 아시아에 진출하기 몇 세기 전부터 중국인은 향신료 교역망에 뛰어들어 페퍼, 클로브, 넛메그, 시나몬을 구해갔고, 아시아 내 교역은 서로간에 쉽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로 이루어져서 중국인은 원하는 향신료를 얻기 위해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페퍼는 베트남, 인도네시아에서 재배되었으니 중국은 굉장히 가까왔고, 시나몬과 넛메그는 중국에서 재배되었기 때문이지요. 만약 중국이 항로를 장악할 생각이었다면, 유럽과의 동서 대전이 훨씬 이른 시기에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어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사뭇 궁금합니다.

이후 향신료가 쇠퇴하는 과정은 "스파이스" 설명과 거의 같지만, 훨씬 깔끔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향신료 산업의 현재도 알려주면서 마침표를 찍는 구성도 마음에 들고요. 도판도 최고 수준인 등 책 자체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번역이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고, 주요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시대 향신료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문헌 번역 인용에 그칠 뿐이라 조금 아쉽습니다만, 이 정도면 기본은 된다고 생각되네요. '지구사' 시리즈는 항상 기본은 해 주는 것 같아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1/06

필요의 탄생 - 헬린 피빗 / 서종기 : 별점 3점

필요의 탄생 - 6점
헬렌 피빗 지음, 서종기 옮김/푸른숲

냉장고 도입에 따른 가정의 변화를 알려주는 과학사, 미시사, 인문학 서적.

냉장고 도입의 역사는 얼음과 아이스박스에서 시작됩니다. 가정 내에서 얼음을 사용한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되었더군요.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는 귀족들 계층에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일반 가정에도 보급되었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유명한 19세기 영국의 만국 박람회에 여러가지 제빙기의 등장 후 모든게 바뀌었습니다. 얼음을 언제든지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대가 열리자 저온 유통 체계가 자리잡아서 식료품 공급망에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식품들이 계절과 지역에 상관없이 전 세계 곳곳에서 값싸게 거래되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정용 냉장고가 도입된건 필연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유럽보다도 보급은 훨씬 빠르고 광범위 했습니다. 이유는 20세기 초 근교 주택이 성장하여, 미국의 주택 크기가 계속 커진 덕이 큽니다. 그래서 실내에 냉장고를 충분히 설치할 수 있었거든요. 반면 유럽의 주택 크기는 그대로라 냉장고 크기는 작을 수 밖에 없었을 뿐더러, 영국의 경우는 식품 저장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가정 내에 냉장고를 들이기가 여의치 않았다고 하네요. 1953년에도 영국 전체 가구의 5% 정도만 냉장고를 보유했다고 할 정도로요. 그러나 이후 신규 주택 단지에 냉장고가 기본 설치되고, 중앙 난방의 보급으로 식품 저장고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등의 이유로 냉장고 보급은 가속화되었습니다. 음식의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한 각종 첨가물이 금지된 것도 한 몫 단단히 했습니다. 건강을 강조한 광고도 이런 분위기를 이끌었고요. 심지어 1950년대 뉴질랜드에서는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은 우유를 파는게 범법행위에 해당하기도 했다니, 보급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인겁니다.

그 외에도 냉장고 문 안쪽에 선반을 단 발명 특허는 사장될 뻔 했다던가, 선반 특허를 반격했던 회전식 선반은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사장되었다, 냉장고 소리를 감추기 위해 라디오를 다는 발명도 있었다는 등 소개되는 냉장고 관련 잡학들도 재미있었어요. 그 중 냉장고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발명은 최근에서야 여러가지 센서와 칩으로 가능했을 기술같은데, 이미 1970년대에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이용해서 구현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냉장고'하나만으로 미국과 유럽의 주거 환경, 가정 내 상황, 그리고 미국의 교외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있다는게 인상적이었던 독서였습니다. 냉장고와 냉동 기술이 핵심 이유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영향을 미쳤다는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에 대해 깊이 파고 들면,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해 이해하기 쉬워진다는게 미시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3/06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제임스 노우드 프랫 / 문기영 : 별점 3점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6점
제임스 노우드 프랫 지음, 문기영 옮김/글항아리

서양의 많은 애호가에게 바이블처럼 읽힌다는 차에 대한 전문서이자 문화사 서적입니다.

1부에서는 차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차가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역사, 그리고 홍차 인기가 주춤했던 뒤 다시 인기를 끌게 된 현재 시점까지를 상세하게 서술하여 알려줍니다. 특징이라면 '기원' 부터 상세하게 통사적으로 서술해서 알려준다는 점이고요. 특히 미국인 저자에게는 불리했을 중국차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다는 데에서 공부의 깊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신농 황제가 차에 관심을 보였고, 기원전 1066년 윈난 성에서 생산된 차가 황제에게 공물로 바쳐졌다는 등 중국 고대사에서 시작하여 당나라 육우의 "다경"이후 송나라 채양의 "다록", 명나라에서 이전과 다른 녹차 가공법이 등장했다는 역사 소개가 상세하며, 심지어 "고문진보" 속 차에 대한 명시 '칠완다가'까지 번역하여 소개할 정도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차 전래가 불교 전파와 관련이 있다는 여러가지 설들과 그에 대한 해석도 재미있었습니다. 첫번째 설은 승려 감로가 1세기 경 인도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차를 들여왔다는 설로, 그가 심었다는 전설의 차나무 일곱 그루는 아직도 쓰촨성 멍딘 산에 남아 있다네요. 두번째 설은 달마 선사 눈꺼풀에서 차나무가 자라났다는 설인데, 달마 선사가 인도 출신이니 이 역시 차나무 인도 기원설을 의미하지요. 야생 차나무의 고향은 윈난성과, 인간이 차나무를 처음 재배한 곳으로 알려진 쓰촨 성 모두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 불교에서 명상과 술을 대신하기 위한 이유로 차를 이용했고, 그래서 승려들이 차나무 재배와 차 가공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꽤나 타당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당나라에서 육우 선사가 "다경"을 쓴 배경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테고요. 

'차 茶'라는 문자가 등장한 시기와 그 발음 및 일본 다도 문화의 역사, 그리고 일본 다도를 대표하는 센노 리큐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주로 오카쿠라 가쿠조의 "차에 관한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 많은데, 놀랍게도 국내에 e-book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네요. 이 책에 일본이 가루차를 거품내는 송나라 방식을 쓰는건, 자기들이 몽골 침략을 물리쳐서 차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거라는 해석이 나오는 모양인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센노 리큐 이후 센차 방식을 발전시킨 바이사오에 대한 설명도 빼 놓지 않고 있고요.

다음은 중국차가 유럽에 전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1610년 네덜란드가 최초로 차를 들여오면서 유럽에서 차가 확산되게 됩니다. 이후 17세기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이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와 네덜란드 교역 단절로 프랑스는 차 공급이 끊어졌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커피 수입이 단절된게 국가적 선호가 갈리게 된 이유라고 하네요. 그리고 영국에서 찰스 2세와 왕비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차 유행과 이 때문에 벌어진 영국 동인도 회사, 존 컴퍼니와 중국 무역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원래 중국차를 성공적으로 수입해서 유럽에 유통시킨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는데, 네덜란드는 중국 차의 미래를 과소평가해서 인도네시아 자와섬을 통한 중계 무역만 하다가 수요 폭증 때 중국과 직거래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고요. 그리고 보스턴 티 파티,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던 동인도 회사의 추악한 행위들과 아편 전쟁, 영국이 패권을 쥔 뒤 민싱 레인에서의 차 거래와 차 운반선들이 레이스를 펼치던 영광의 시대, 인도 아삼 지방에서의 차 재배 성공, 토머스 립턴과 실론 티의 성공 등이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기존 제국주의 사고방식과 다른 전통들이 모두 파괴된 뒤 그 자리를 값싼 '티백'이 차지하였고, 회사마다 가격 경쟁이 시작되어 고급 차들이 모두 시장에서 사라져버린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요. 다행히 지금 고급 차 시장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고 언급하며 차 역사 설명은 마무리됩니다. 그 외에는 차와 관련된 여러 유명인들, 그리고 '본차이나'로 대표되는 다기 제조에 대한 역사 등을 함께 소개해주고 있는데, 모두 재미있었어요.

반면 2부의 나라별 주요 차 소개는 특별히 와 닿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고, 인터넷 등에서 확인 가능한 정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희제가 '벽라춘'이라고 이름붙인 차 이름의 유래는 찻잎이 우러나는 동안 나선 모양으로 회전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저자 개인적인 견해는 괜찮았지만요. 그 밖에는 프랑스가 1825년 베트남에 최초의 차나무를 심었다고 자랑하지만, 옛날부터 차나무는 베트남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차는 이미 1,000년 전 부터 인도차이나 문화 일부였다며 일침을 가하는 것처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정도만이 눈에 뜨였습니다. 프랑스가 뭘 새롭게 한 건 없고, 오히려 창피해 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로, 비교적 공정한 견해라 할 수 있겠죠. 

그래도 2부 마지막에 실린 블렌딩과 차 브랜드 설명은 그런대로 유용했습니다 . 브랜드별 대표 차 명칭, 어떻게 블렌드되어 있고 어떤 맛인지를 대략적이나마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 그레이의 기원과 레시피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인상적이었고요. 

하지만 3부는 50페이지도 안되는 짤막한 분량인데다가 차를 어떻게 마시는게 좋은지 차 마시는 방법이 전부입니다. 도판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나은 점을 찾기는 어렵더군요. 도판이 없다면 최소한 유튜브 동영상 링크라도 포함해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2부와 3부는 그닥이었지만, 1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차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최소한 1부만이라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5/06/05

관 - 아르노 슈트로벨 / 전은경 : 별점 2.5점

- 6점
아르노 슈트로벨 지음, 전은경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바 로스바흐는 관에 갇히는 악몽을 꾸었는데, 실제로 몸에 상처가 나 있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이복동생 잉에가 관 속에 갇혀 생매장당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건을 지휘하게 된 쾰른 강력계 베른트 멩호프 경감은 본인 가정사,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동료들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파트너 유타 경위와 사건을 수사해 나가는데....

독일산 심리 스릴러. 보통 유럽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는데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동호회 하우미스터리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된 책입니다. 리뷰 전 먼저 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 분들께 감사 인사 전해드립니다.

그동안 유럽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어렵고 무겁다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러한 경향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요 네스뵈가 그러한 선입견을 깨 준 대표적인 작가고요. 이 작품 역시 최근 인기작답게 유럽, 독일산 느낌보다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릴러 느낌이 강합니다.

장점이라면 "산 채로 관에 갇히는" 상황을 그린 흥미로운 설정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맛, 빠른 전개, 무엇보다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기 힘든 재미입니다.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브리타가 에바와 동일인물이라는 깜짝 반전에 더해서 살아있는줄 알았던 마누엘마저 에바의 또다른 인격이었다는 반전입니다. 에바 - 브리타 시점 변화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 볼 수도 있네요.

관 속에 갇힌 느낌과 범행, 마지막 납치된 에바가 갇힌 곳 등에 대한 묘사도 생생합니다. 특히 마지막 묘사는 CSI의 "생매장" 에피소드 저리가라 할 정도로 박진감이 넘칩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심리 묘사 역시 제대로고요.

그러나 아주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건이 밝혀지게 되는 이유가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베른트 경감의 수사는 마누엘 생존설로 흐르는 방향으로 향했기에 진상을 알아내려면 오래 걸렸을겁니다. 그러나 마침 정신과 의사인 라이엔베르크 박사가 죽지 않고 살아난 덕분에, 그리고 대거라는 파티셰가 에바와 브리타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증언해서 진상을 알아내는데 이 모든 것은 우연에 불과합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대로 서술트릭처럼 시점 변화에 기반을 둔 반전 역시 범인이 노골적으로 남자라고 지칭되고 내용에서도 의도적으로 마누엘 생존을 강하게 언급해서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는건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최소한 범인의 성별은 숨겼어야 했습니다. 술집에서 여자를 낚아챈 것은 피해자가 레즈비언이었다는 설명으로 충분하지만 이런 점에서 아쉬움이 남네요. 참고로, 반전도 비록 저는 예상치 못했지만 영화 "아이덴티티"와 흡사해서 좀 뻔하다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 같고요.

사건의 핵심인 다중인격 설정도 문제가 많습니다. 우선, 에바가 브리타라는 다른 인격으로 삶을 영위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다중인격이라고 해도 아예 삶 자체를 다르게 사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요. 외르크 빕킹이 흑화한 에바를(남자로 오해했지만) 목격하고, 대거라는 파티셰가 에바 - 브리타를 모두 목격했기 때문에 정체가 드러나는 것도 순식간이었을겁니다.

무엇보다도 부유한 사업가와 재혼한 새어머니가 아이들을 학대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점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새어머니의 학대에서 비롯된 것인데, 전처 딸을 아동 성매매시키고, 작은 상자에 넣는 등의 학대를 자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전처 딸이야 그렇다쳐도 자신의 친아들마저 학대하고 죽인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인없는 결과만 있는 꼴이에요. 원인은 없지만 아동 성매매는 "돈"이 목적인 것처럼 보이기에 피해자 브리타를 부유한 가문의 딸인 에바와 연결하기도 어렵고요. 반전을 위해 사용된 반칙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외의 소소한 디테일들도 약간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에바의 아버지가 집 안에 도피처를 만들어 놓았다는 대사를 복선으로 이용한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경찰이 집 안을 수색했는데 불구하고 그것을 간과한 것, 베른트 경감을 싫어하던 우도가 급작스럽게 마음을 돌리고 화해하는 상황 등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베른트 경감의 조금 부족한 자제력에 대한 묘사도 딱히 필요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고요.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한 스릴러물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래저래 단점만 쭉 나열한 꼴인데 킬링타임용으로는 아주 우수합니다. 요 네스뵈도 그렇고, 요새 북유럽 쪽 신예 작가들 작품이 괜찮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3/07

비잔티움의 역사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 최하늘 : 별점 3점

비잔티움의 역사 - 6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급격히 비잔티움 제국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역사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로 정의합니다.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방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리스와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제국만 남게 된 4세기 이후를 비잔티움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고요.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9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각각 탄생, 영토 확장, 이슬람의 공세, 부활, 최대 전성기, 십자군 원정과 지방 분권화, 분열, 몰락, 멸망 등의 흐름을 따라가며, 각 시기별 황제들이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년 왕국’이라는 위상을 지녔던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건 황제들이 동시에도 여러 명이 존재했고, 배신과 찬탈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천 년이나 존속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고,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보다는 용병과 외교에 의존했던 덕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족 가문과 대립을 벌이면서도 정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권한이 강력했던 점(특히 전성기)도 주요 요인이었고요.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는 수십 년 전 기근 이후 판매된 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며, 거대 귀족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강력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서방 제국에서 흔히 있었던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투쟁도 비잔티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테고요. 

게다가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가끔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천재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끌어들여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체적인 강력한 군사력없이, 주변보다 앞선 우수한 문화와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용병 고용과 동맹, 외교로 버티는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처럼요. 그러고보면 중국 송나라와 비슷하게 많네요. 비단이 유명했다던가, 강력한 무기가 - 송나라는 화포,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 - 있었다던가 등등등.

하여튼,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는 ‘분열’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후계국 세 개(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트 제국)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다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강력했던 황권도 약화되었고, 귀족층에게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도시국가로 전락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문제에서 교훈을 얻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쇠퇴도 초래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얻은 무역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격히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제노바는 15세기 이후 사실상 무역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의 중심이 프랑스와 영국 등 보다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흥미로운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외에도, 불가르 제국처럼 낯설고 새로운 역사적 명칭과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이 실제로 대활약해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서로 보니까 굉장히 새로왔습니다. 슬라브권에서 널리 쓰이는 키릴 문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 콘스탄디노스(성직명 키릴로스)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슬라브어 선교를 위해 제작된 이 알파벳이 훗날 키릴 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생겼던건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총리대신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운명 이야기였습니다.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남자들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두 딸과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생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은행에 상당한 재산을 맡겨 두었었고, 딸 엘레니가 고생 끝에 결국 동생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냈다는군요. 이 정도면 대하 소설로 만들 법한 극적인 이야기아닐까요? '몰락 미녀 귀족 영애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갖은 노력 끝에 집안 재산을 되찾아 가족을 구해낸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주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때문이더군요. 기번은 이 책에서 비잔티움 문화를 ‘이민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는데,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훨씬 빠르게 그리스와 발칸 반도, 혹은 그 이상까지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폄하는 부당하지요. 서구 유럽이 중심이 된 근대사의 또다른 폐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황당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각 시기별 제국의 판도를 쉽게 이해하고, 주요 전장 및 도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도가 필수적인데, 기본적인 지도조차 부실하여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역사”에서도 지도가 부족했는데, 앞으로 이러한 역사서에서 지도 부실 문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전투나 영웅적인 활약, 스캔들 같은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건조하고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전달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누가 즉위했고, 어떤 일을 했다라는 서술이 이어질 뿐이거든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과 전투는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3/09/24

붉은 집 살인사건 - 도진기 : 별점 2점

붉은 집 살인사건 - 4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진은 암으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빠 남성룡의 유산 상속에 대해 의뢰한 남광자를 만나러 우면동 붉은 집에 방문했다. 붉은 집 1층에는 서씨 가문, 2층에는 남씨 가문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진은 1순위 상속자인 남성룡의 딸 남진희가 모든걸 상속받기에 상속은 오빠와의 협의가 전부라며 자리를 뜨려 했지만, 과거 있었던 2건의 사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 과거 서씨 가문의 가장 서판곤이 남씨 가문의 모친 이분희와 재혼 후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백솔 사체로 발견되었던 사건과 서판곤의 아들이자 현재 서씨 가문의 가장 서태황의 아내 박은순이 강도에게 살해당했던 사건이었다.
이는 우연이 아니며, 뒤이어 다른 사건이 일어날거라 여겼던 고진의 직감대로 6개월 뒤 남진희가 실족사라는 형태로 사망했다. 고진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미모의 맹인 남진희에게 매료되었던 탓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 것을 결심하고 친구이자 우면동관할서의 반장 이유현과 함께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과거 판사였던 도진기 씨의 데뷰작이자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첫 작품. 제목이 달라져서 몰랐는데, 10여년 전에 읽었던 <<어둠의 변호사>>와 같은 작품이더군요.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바뀐 제목에 낚여서 다시 완독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주요 트릭과 진상은 대충 잊어버렸던 터라 새롭게 읽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네요.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트릭과 두뇌 싸움, 복선이 가득하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크게는 아래와 같이 서형일이 만든 트릭 세 가지, 그리고 남성룡의 계획 두 가지가 눈에 뜨입니다.

서형일의 트릭
  1. 박은순 살해 당시 알리바이 트릭
  2. 남진희 사건을 일으킨 원격 조종 트릭
  3. 남진희 사건 당시 알리바이 트릭
남성룡의 계획
  1. 서형일의 다아잉 메시지를 이용하여 서태황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던 계획
  2. 서형일을 움직여 남진희를 살해하도록 만든 계획

서형일의 첫 번째 알리바이 트릭은 유럽 여행 중 살인을 위해 이미 한국에 들어왔지만, 유럽에 남아있던 지인애게 당일 한국 날씨를 확인하여 엽서를 보내도록 만든 것입니다. 단순히 '서형일의 필적'이 근거라는건 증거로 삼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지만, 한국 날씨 예보 종류는 몇 개 없기에 날씨에 대해서만 여러가지로 다르게 기입한 엽서를 준비해서 - 같은 내용으로 "맑음", "흐림", "비" 등으로 만들어 놓는 식으로 - 해당 날짜 예보에 맞는 엽서를 골라 보냈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인어공주 동상에 돼지 피를 뿌린 것도 서형일의 공범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현장에서 체포되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최대한 몸조심하면서 숨어다녀도 모자랄 판인데 이런 조작까지 해 가면서 엽서를 만들어 보낼 필요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남진희 침실 구조를 이용하였습니다. 남진희가 수면제에 취한 틈에 침대 위치를 정 반대, 대각선 위치로 옮겨놓았던 겁니다. 원래 위치에서 문을 열면 거실로 나갈 수 있지만, 바뀐 위치에서 문을 열면 계단으로 추락하도록요. 수면제, 방의 구조 등 여러가지 단서와 상황을 잘 조합한 멋진 트릭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침대 위치를 옮기는 조작을 위해 사고 전날 부산으로 이동할 때 알리바이를 만든 트릭입니다. 상, 하행선 고속도로 휴게소를 오갔다는 다소 간단한 내용이지만 실행이 용이하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었어요.
 
남성룡의 첫 번째 계획은 서형일이 남긴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되었다는걸 알고 녹음기를 그대로 두었던 겁니다. 자신이 서형일의 친부라는건 아무도 모르니, 서형일의 양부 서태황이 죄를 뒤집어 쓸 거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사건의 진상과 동기 를 밝히는 핵심 소재가 된다는 정메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조종하기 위해 유언장 정보를 흘려 살의를 부추켰다는건 뻔했지만, 언제나 설득력을 보장하는 동기인건 분명하고요.

하지만 확실히 처음 읽었을 때 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일단 '잘 쓴' 작품은 아닙니다. 묘사가 튀는 부분이 많고, 고진과 이유현의 추리가 중구난방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진이 중심을 잡고 사건을 끌고가는 맛이 부족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별로입니다. 일본 변격물을 연상케하는 엽기 범죄가 명문가 - 서울대학교 교수와 2성 장군 집안이니... - 에서 이어진다던가, 맹인과 트랜스젠더가 혼재하는 복잡한 가족 설정들 모두가 비현실적이었거든요. 거의 마지막까지 서태황과 서두리를 악역으로 묘사하는건 '얘네들이 범인일거야! 그렇겠지?'라는 작가의 의도가 심하게 드러났고요.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피는 유전된다는 이론을 작품 전체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고루할 뿐더러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전혀 찬동할 수 없어요.
그리고 본격 추리물을 추구한 작풍 탓이겠지만, 작 중에서 주요 정보를 노골적으로 알려주어서 추리하기 쉬웠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뭔가 상세한 묘사가 있거나 하면 금새 이게 단서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남진희가 추락사한 침실 현장에 대한 극도로 상세한 묘사, 그리고 박은순 사건 당시 서형일의 알리바이에 관련된 묘사들이 대표적입니다. 남진희 사건은 묘사만 보아도 트릭은 잘 몰라도 수면제로 깊이 잠든 남진희와 방의 구조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형일의 알리바이도 신문 기사를 통해 곧바로 가짜라는게 드러나고요. 날씨에 대해서 어떻게 조작했는지는 몰라도, 범인이 서형일이라는건 금방 알 수 있어요.
남진희 사건 때 서형일이 톨게이트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도 알리바이 조작일거라는게 너무 뻔했습니다. 작품 발표 시기는 2000년대 이후인데, 이 때 고속도로 CCTV가 없었을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요. 무슨 차를 탔는지를 알면 고속도로를 이용한 서형일의 알리바이는 금방 깨트릴 수 있었을 겁니다. 이외에도 경찰 수사를 거의 없다시피 묘사한 것도 옥의 티입니다. 서형일은 유럽 여행에서의 알리바이, 고속도로 휴게소 알리바이 모두 협력자가 필요했습니다. 주변 인물과 연락 내용만 살폈어도 협력자를 알아내어 범행을 밝힐 수 있지 않았을까요? 최소한 그런 수사는 벌였어야 했는데 수사에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남성룡이 서형일을 살해하고 그 죄를 서태황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녹음된건 우연에 불과합니다. 그 다이잉 메시지(?)만 없었어도, 남성룡 역시 용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의가 넘쳤다 한들, 이렇게 무모하게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0여년 전 보다 감점하여 2점입니다. 데뷰작인 탓에 여러모로 욕심을 부린 티가 많이 납니다. 서형일의 억지스러운 알리바이 트릭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 빼고, 남성룡이 남진희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 - 아내가 떠나면서 자기 딸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 - 와 괜찮았던 남진희 원격 살해 트릭만 가지고 짧고 깔끔하게 다듬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14/10/02

포르노 영화 역사를 만나다 - 연동원 : 별점 2.5점

포르노 영화 역사를 만나다 - 6점
연동원 지음/연경문화사(연경미디어)

포르노 영화의 역사를 다룬 미시사 서적입니다. 영화라는 산업의 초창기부터 음지에서 존재해 오다가 "딥쓰로트"의 흥행 성공과 함께 합법화 및 대형화되었고, 이후 비디오의 등장과 21세기로 이어지는 과정의 역사를 짚어줍니다. 실제 사람들의 생활을 바꾼 포르노의 이면이 인상적인데, 예를 들어 홈 비디오의 보급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이 포르노였다는 사실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역사와 함께 "딥쓰로트"나 "Devil in Miss Jones", "녹색 문 뒤에서" 같은 나름 의미 있는 작품에 대한 평가, 유명한 관계자들 이야기, 정치권의 탄압이라든가 범죄조직과 엮인 포르노 영화계의 뒷이야기, 부록으로 실린 유명 배우 린다 러브레이스, 존 홈즈, 치치올리나 등의 약력과 같은 흥미로운 소재가 가득합니다. 제가 어둠의 경로로 일찍이 감상했었던 유럽의 포르노 제국 프라이빗의 몇몇 작품 소개는 반갑기까지 했고요.

단점이라면 깊이 있는 분석은 없는 단순한 소개라는 점, 그리고 유럽 포르노 영화도 약간 소개되기는 하나 거의 미국 중심의 구성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일본 쪽 내용이 없는 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국내 현실상 도판이 상세하지 못한 것도 문제라 생각되지만, 이건 뭐 어쩔 수 없고요.

여튼 남자들이라면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영화 역사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봐도 실망하지는 않으실 것 같네요. 아주 오래전 영화 잡지 "키노"에 실렸던 전설적인 공포영화 소개 기사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확실히 하드코어와 하드 고어는 통하는 데가 있나 봅니다.

그나저나 책보다는 영상 매체 다큐멘터리가 훨씬 더 어울리는 내용이라 생각되는데, 저자가 인용한 히스토리 채널의 포르노그래피의 역사를 다룬 다큐도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