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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공정드래곤즈 1~3 - 쿠와바라 타쿠 : 별점 2점

[고화질] 공정 드래곤즈 03 - 4점
쿠와바라 타쿠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입니다. 백종원 씨를 비롯, 여러 셰프들이 스타덤에 오른지 오래이며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맛있는 것을 먹는 온갖 예능들도 넘쳐나고 있고, 무엇보다도 맛있게 먹는 모습만으로 스타가 된 사람들마저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만화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요리 만화는 등장한지 오래되긴 했습니다. 빵이나 카레, 중화요리, 초밥, 도시락, 와인, 술 등 요리사가 주인공이며 특정 요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만화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주로 주인공의 직업과 소재가 특이한 배틀물 - 고전 "맛의 달인"의 '완벽과 최고'의 대결처럼 - 에 머무른 작품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여러가지 다양한 장르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식과 요리를 소소한 일상, 인간 드라마와 결합시키거나, 평범한 음식을 실존하는 평범한 식당에서 평범하게 먹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전개하는 '음식을 소재로 한 소소한 일상계'입니다. 앞서는 "심야 식당", 그리고 뒤에는 "고독한 미식가"가 대표적인 예이며, 이외에도 영상화 된 작품만 해도 "하나 씨의 간단 요리", "와카코와 술", "라멘 너무 좋아 코이즈미 씨", "음식의 군사" 등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인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두 번째로 현재 음식 만화에서 작지만 확실한 인기를 몰고 온 분야는, 판타지 세계관과 음식 소재를 결합한 '이세계 미식물'입니다. 쿠이 료코"던전 밥" 에서 처음 선보인 이 장르는 "던전밥"처럼 이세계의 몬스터를 재료로 친숙한 음식을 만든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여, "이세계 주점 노부" 등 처럼 현대(그 중에서도 일본) 요리를 그러한 음식을 잘 모르는 이세계 주민에게 소개한다던가, 아예 현대 일본인이 이세계로 이동하여 자신의 요리 실력으로 현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든다는 "맛없는 밥 엘프와 유목생활", "이세계에서 카페를 개점했습니다" 등으로 아이디어가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른 '세계'가 아니라 현대 요리사가 전국시대로 타임 슬립한다는 "노부나가의 셰프" 와 같은 이야기도 유사 장르로 포함시킬 수 있을테고요.

서론이 좀 길었는데, 이 만화는 이러한 '이세계 미식물' 장르에 속한 작품입니다. 그 중에서도 원조 "던전 밥" 의 특징을 많이 따릅니다. 용을 사냥하는 용 사냥꾼들이 용을 재료로 이런저런 친숙한 음식들을 만든다는 점에서요. 이세계 전문직 종사자의 평범한 식단을 테마로 했다는 점에서는 '일상계 음식 만화'의 한 범주로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단순히 아류작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포룡선 퀸자자호를 타고 용을 사냥하는 사람들과 사냥 과정에 대한 디테일 - 용이라고 불리우긴 하지만 크툴루 신화 속 크리쳐가 연상되는 "용", 고전적인 비행선인데 용을 잡기 위한 다양한 장비(작살총, 봄랜스, 창과 이런저런 와이어, 후크들, 오토자이로)를 갖춘 퀸자자호, 포룡 과정에서 하늘에 떠 있는 퀸자자호 내부에서의 식사와 빨래와 같은 생활 묘사 등등등 - 이 펜터치 중심의 고전적이면서도 빼어난 작화로 그려져 있어서 큰 재미를 선사해 주는 덕분입니다.

그런데 1권은 용 사냥꾼이 용을 사냥하고 그 부산물을 조리해 먹는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2, 3 권부터는 세계관이 긴 호흡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나가더군요. 단편으로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2권은 용의 거래로 먹고 사는 마을 '퀀 시'에 기항한 퀸자자호가 마을에서 깨어나 폭주하는 용을 사냥하는 이야기에 승무원 지로의 짤막한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지며, 3권은 사냥 중 지상으로 떨어진 타키타가 지상의 사냥꾼에게 구조된 후, 자신을 따르게 된 새끼 용을 무리에게 돌려보내 준다는, 한 권에 한 편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구성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변화는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세계 미식물' 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 일상계 이세계 사냥 판타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이야기도 딱히 새롭거나 재미있지도 못합니다. 전형적인 설정의 전형적인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그나마 용잡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 어우러지는 2권은 조금 낫지만, 3권은 전형적인 나우시카류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고기에 푹 빠진 미카는 "던전밥"의 라이오스와 유사한 등, 퀸 자자호의 승무원들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한 뻔한 캐릭터라는 점이 더해져 식상해도 너무나 식상할 따름입니다.
용 고기가 무슨 색깔이며 구울 때는 어떻고, 날로 먹으면 어떤지 등 기본적인 특성조차 소개되지 않고 이런저런 요리를 선보인다던가, 뒤로 가면 갈 수록 특별한 요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전개를 보면 판타지 구루메 만화를 그려달라는 편집부의 요구를 따르는 척 하면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그려나가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네요. 뭐 이런 류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분명 많을테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3권까지는 그래도 어찌어찌 읽기는 했는데, 다음 권을 읽게 될 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러고보면 저와 같은 이세계 미식물 팬을 위해서 지브리에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를 활용하여 비슷한 컨텐츠를 내 놓으면 좋을 것 같네요. 나우시카 세계관에서 오무를 가지고 만드는 요리 등이 등장하면 참 재미있지 않을까요? 서둘러라 지브리!

2016/12/16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구이 료코 (쿠이 료코) / 김완 : 별점 3점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쿠이 료코 작품집 - 8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용의 학교는 산 위에"만큼의 긴 제목을 지닌 쿠이 료코의 단편집으로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용의 학교는 산 위에"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팬심으로 구입했는데 다행히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발상도 기발하며, 모두 길이에 걸맞는 완결성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랍 속 테라리움"과 비교하자면, 의외성은 덜하지만 완성도가 더 높은 편이에요. 쇼트쇼트와 일반 단편의 차이점처럼요.

작품별 편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쿠이 료코 팬들께는 적극 추천드립니다.

"용의 소탑"

바다 나라와 산 나라의 전쟁을 가로막는 국경 지대 용의 새끼가 부화하여 둥지를 떠날 때까지,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교류가 끊긴 양국은 기본적인 물자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고, 마침 산 나라에 포로로 잡혔던 청년 '사난'은 소금을 가져다 준다는 약조 후 풀려나는데...

전형적인 중세풍 세계관에 ''이 등장하는 식으로 약간의 판타지가 결합된 시대물로, 막강하면서도 기묘한 존재 탓으로 적대하던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는(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치듯이), 왕도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쿠이 료코스러운 변주가 딱 하나 들어간 덕분에 독특한 매력을 전해 줍니다. 바로 '교역'입니다. 전형적인 이야기에 딱 한 가지의 설정 추가로 독특함을 만들어 낸다는 점은 "던전밥"과 똑같네요. 결국 사난과 유르카가 하나가 된다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고요.

등장하는 크리쳐는 '용'이라기보다는 그리폰 같았다는건 조금 이해가 안되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인어금렵구"

누가 봐도 인어인 기묘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는 않아요. 인어가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고 싶어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라는, 한여름날 짧은 만남 이후 추억과 여운을 남기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전개는 전형적인 "보이 미트 어 걸" 그대로고요. 이 와중에 약간의 성장기 느낌을 전해주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그러나 "용의 소탑"이나 "던전밥"처럼 '인어'라는 설정이 추가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깁니다. 이 설정에 더해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서로 다르기에 마음을 전하기 힘들다'는 주제를 설득력 넘치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깔끔하면서도 흑백톤 위주의 작화 역시 이야기에 꼭 맞아 떨어져서 마음에 들었고요.

한마디로 익숙한 주제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가의 능력이 최고치로 발휘된 작품.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의 신"

중학교 입시를 앞둔 소녀가 갈 곳을 잃은 물고기 신을 어항에서 키운다는 이야기로 신은 별다른 능력이 없고, 소녀는 입시에서 떨어진다는 현실적이면서 일상적인 결말이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야기만 놓고 보면 딱히 대단할 것은 없는 소품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늑대인간이 주인공인 드라마로 남녀 관계가 아니라 모자 관계 설정이 신선했습니다. 늑대인간이 실제 인간 세계에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상세한 설정들도 인상적이고요.

단, 지나치게 일상계스러운 내용으로 주인공 케이타의 약간은 철없는 행동이 사건, 드라마의 전부라는 것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은 높았지만, 이만큼의 상세한 설정을 만들었다면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일푼 뱌쿠로쿠"

천재 화가 타카가와 뱌쿠로쿠가 무일푼이 된 후, 자신이 그렸던 사자, 호랑이, 용 등을 실체화시켜 큰돈을 벌고자 한다는 시대극 판타지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일본화를 모티브로 한 작화입니다. 붓을 주로 사용한 듯한데 정말로 빼어나고 시원시원한 구도도 돋보인 덕분입니다. 뱌쿠로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위작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한마디로 쿠이 료코라는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 자식이 어여쁘다고 용은 운다"

왕자 준이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용의 비늘을 얻으려 나섰다. 길 안내를 맡은건 마을 이방인 준이었다.
용을 잡으러 가는 험한 길에서 병사들은 계속 낙오되었고, 결국 부상당한 왕자만 남았을 때 준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기에 그것을 복수하려 한다는 것...

뻔한 복수극으로 의외성도 없고, 이야기도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의 알과 자식을 동일시하는 전개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누타니 일족"

초능력 가문 이누타니 일족의 집에 소년 탐정 도다이치 코우스케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실수로 일족의 초능력이 들통날 위기에 처해 그것을 숨기려 하나, 오히려 도다이치 코우스케는 연쇄 살인극으로 의심하며 겉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제목(원전은 "이누가미 일족"이지요)과 설정부터 여러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는 작품으로 다양한 초능력을 지닌 가족들의 행동을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진상을 추리하려는 탐정의 행동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오렌지로드"에서 초능력을 감추려는 카스가 패밀리의 노력이 겹쳐져 왠지 모를 향수가 느껴진 건 덤이고요.
강대한 힘을 과신하다가 화를 부른 상황에서, 가장 쓸모없을 줄 알았던 아리사의 ‘입고 있는 옷을 파자마로 바꾸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또 보통 소년 탐정이 사건에 뛰어드는 이유 — 자기와 관계도 없고 부탁한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애를 쓰지? — 에 대해 ‘자기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힘을 써야 할 때 쓴다’라는 슈퍼 히어로스러운 마인드로 알려주는 점도 괜찮았어요. 하기사 명탐정이 슈퍼 히어로와 다를 건 별로 없지요.
‘힘을 써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쓴다, 그러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주제 역시 여러모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다양한 장르물에 대한 깊은 이해에 더해 유쾌한 분위기, 적절한 반전, 심오한 주제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단점이라면 너무 짧다는 것과 결말이 약간 시시했다는 것 정도? 그래도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장르소설 애호가라면 이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16/08/20

용의 학교는 산 위에 - 구이 료코 / 김동주 : 별점 2점

용의 학교는 산 위에 - 4점
구이 료코 글.그림, 김동주 옮김/㈜소미미디어

"던전밥", "서랍 속 테라리움"의 작가 쿠이 료코의 단편집입니다. 전작들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기에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주저 없이 구입했습니다. 

"던전밥"보다는 "서랍 속 테라리움"과 같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무척 실망스럽습니다. 9편이라는 수록 작품의 수에서 알 수 있는 것 처럼 긴 호흡의 단편들이 많지만,  "서랍 속 테라리움"만큼 기발하거나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드문 탓입니다.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요.
예를 들자면 "대감산의 신부 찾기"는 전형적인 신화로 작가 특유의 변주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곤페이가 사실은 신이었다는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설득력 있게 드러나지 않는 전개 탓에 별로 와닿지 않았고요.
"용의 학교는 산 위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용이 실재하지만 용의 실용성이 극도로 낮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반전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용학부' 학생들 설정만큼은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대학생들의 다양한 시행착오도 나쁘지는 않고요. 하지만 제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이런저런 노력은 모두 벽에 막힌 상태에서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간단히 포기하지 않겠다"는 부장의 말로 마무리되는 건 너무 급작스러웠거든요. 딱히 결말을 생각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린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였어요.
그 외에 그림도 전작들에 미치지 못하며, 장르의 다양성이 부족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물론 용사가 피곤한 현실에 직면한 상황을 일상계처럼 담담하게 다룬 "귀향", 전형적인 진학 관련 청춘 로맨스인데 대상이 날개 달린 소녀라는 점에서 차별화되는 "진학 천사", 좀 뻔하지만 평균 이상은 되는 "쓰레기"처럼 기대에 부합하는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별점은 2점입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과 분량에 비해 비싼 가격으로 감점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지 않으셔도됩니다.

2020/08/01

현란한 유리 (絢爛たる流離) - 마쓰모토 세이초 / 이규원 : 별점 2점

현란한 유리 - 4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의 소유자들이 온갖 범죄에 휘말린다는 내용의 마쓰모토 세이초의 연작 소설입니다. 1963년에 연재된 작품을 모아서 출간했다니 비교적 초기작이지요. 그래서인지 대담한 시도와 아이디어들이 눈에 띕니다. '연작'이라는 구성과 12편 중 8편의 작품이 두 편 씩 이어지는 구조라는 점, '트릭'이 괜찮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시대별로 상세한 배경 설정과 묘사도 돋보였습니다. 고물이 돈이 되는 상황에서 불량품 철사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는 "티켓" 에서는 시대 상황이 범죄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작가의 조선 주둔군 시절을 바탕으로 한 "백제의 풀"과 "도망"은 경험없이는 쓸 수 없는 묘사들로 가득차 있고요.

그러나 이야기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아쉽습니다. 구태여 연작으로 엮을 필요가 없었던 이야기들도 많았기에, 12편의 이야기 수를 좀 더 줄이고, 다이아몬드 반지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더 좋있을 겁니다.

단편들 전체를 평균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들과 비교하면 많이 처집니다. 이 보다는 저도 몇 편 소개해드렸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무려 12편이나 되니 리뷰도 큰일이네요. 읽다 지치실듯.

"토속 인형" 

기타큐슈의 광산 재벌인 야쓰오 광업의 데릴사위 다다오와 딸 다에코 부부는 별거 상태로 지내다가, 불황으로 야쓰오 광업이 무너진 뒤 다다오는 취미인 토속 인형 수집품과 함께 도쿄의 다에코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다에코에게는 아버지의 유산이 많이 님아 있었던 덕분에 화려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에코가 취미로 배우는 '노' 관련된 사범들이 집에 드나들면서 다에코와 어울리는걸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던 다다오가 병으로 사망한 얼마 뒤, 다에코는 살인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다다오 유골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기 때문이지만, 다행히 변호사 기타야마의 활약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쇼와 초기 기타 큐슈 광산 재벌에 대한 묘사도 상세하지만, 정말 남의 눈과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듯한 완벽한 3인칭 묘사로 진행되는 부부의 관계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변호인의 변론이 아주 기가 막히거든요. 토속 인형 수집품에 독살스러울 정도로 도드라지는 빨간색 인형들이 있었는데 이 빨간색은 비소가 함유되어야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인형 수집품을 다다오와 함께 화장해서 비소가 검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과학 수사로는 비소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다다오의 유해인지, 인형 때문인지) 충분히 구분할 수 있겠지만, 1930년에는 불가능했을테니 무죄 판결을 받은건 당연해 보입니다. 어차피 형식적인 부부였는데, 금융적인 부분도 다에코가 전권을 쥐고 있고 다다오의 죽음으로 별로 얻어서 다에코가 살의를 품을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이를 법정에서 밝혀 무죄 판결을 끌어내기 때문에 괜찮은 법정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다다오 살해가 급작스럽게, 뜬금없이 일어난다는 점, 특별한 살해 동기가 없다는건 분명한 약점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살의를 품고 비소를 먹였는데, 그 이유가 불분명하니 답답하더군요.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부인의 쓰즈미" 

1편에서 활약한 기타야마 변호사가 다에코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다에코의 노 사범 중 한명인 쓰즈미 사범 오쿠라 고헤이였다. 그는 현장에서 도주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흉기인 비수에 강습용 쓰즈미의 끈이 감겨 있었기 때문에 범인으로 몰렸다...

비수가 여자 힘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깊게 꽂혀 있었고, 다에코는 흰 기모노를 입고 있었지만 혈흔이 전혀 묻어있지 않아서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결국 다에코가 범인이었다는게 밝혀진다는 이야기지요.

트릭은 간단합니다. 빨래용 대나무 장대 끝에 비수를 묶은 뒤 먼 곳에서 찌른거에요. 지렛대 효과로 더욱 강한 힘이 가해져 깊숙이 찔렀고, 먼 거리라서 흰 기모노에 피가 튀지 않았지요. 트릭의 밑밥을 깔기 위해 다에코가 몇일 전부터 이웃집에 '노' 강습을 권하러 갔다던가, 그날따라 계절과는 맞지 않는 흰 기모노를 입었다던가 하는 사전 준비도 설득력있게 묘사되며, 쓰즈미 사범 오쿠라 고헤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간단한 조작 - 단도에 쓰즈미 끈을 감아 둔 - 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범행이 작품에서처럼 성공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뼈 등이 있어서 한 방에 가슴을 찌르는건 먼 곳에서는 쉽지 않았을테니까요. 또 다에코가 범행을 자백한다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버려진 빨래용 대나무 장대에 경찰이 주목한 정도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살해 동기, 즉 남편을 살해한건 다에코가 맞으며 기타야마는 이를 가지고 다에코를 협박했기에 살해했다는 동기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에 다에코가 다시 처벌 받을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사부재리에 대해서는 기타야마가 다에코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동기 없이도 가까운 남자들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다에코라는 악녀의 최후를 그렸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 추리적으로나 내용면으로나 특별히 건질건 없습니다.

"백제의 풀"

일제 강점기 막판, 전라북도 금읍에서 일하던 일본인 이하라는 아내를 두고 군에 소집되었다. 부대는 집과 가까왔지만 이등병 신분으로 외출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부대의 고급 참모 야나기하라 소좌가 자신의 사택에 하숙한다는걸 알고 난 뒤, 이하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느 날, 모악산 기슭 금산사 경내에서 야나기하라 고급참모가 단도같은 흉기로 난도질당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조선이 무대라서 반가왔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조선 주둔군 소속 일본군인들이며, 살인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 백제 고찰 금산사거든요. 죽은 야나기하라가 오른손으로 풀 한 줌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제목도 "백제의 풀"이지요. 전쟁 말기 조선 정읍이라는 지방에 대한 여러가지 상세한 묘사도 돋보였는데 작가가 전쟁 말기, 조선 정읍에서 주둔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티가 물씬 납니다. 내지보다 조선이 안전하다, 미국도 조선은 독립시켜 장차 우방으로 확보해 두고 싶을테니 폭격하지 않을거라는 이하라의 식견이라던가, 불령선인이 범인일 수 있다는 등 디테일들도 좋았고요.

추리적으로도 군인으로 위장한다면 만사형통이었을거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위한 간단한 변장 트릭과 이 트릭이 결국 단서가 된다는 전개 모두 괜찮았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야나기하라 소좌는 사건 당일 누군가 다른 군인과 함께 걸어서 어딘가(금산사) 로 이동하는게 목격되었습니다. 그래서 범인은 정체 불명의 군인이라 여겨졌고요. 그러나 유이치와 친분이 있던 보급 담당자 다카스기의 추리는 달랐습니다. 유이치가 새 군복을 부탁해서 몰래 새 군복 한 벌을 주었지만, 유이치가 새 군복을 결국 입지 않았던걸 단서였어요. 유이치는 새 군복을 어디에 썼을까? 정답은 유이치는 새 군복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몰래 부대를 나가, 군복을 입고 군인으로 위장한 아내와 밀회를 즐겼는데, 그만 야나기하라에게 발각되어 버린거죠. 그래서 아내가 이를 가지고 협박하던 야나기하라를 살해했다는 겁니다. 이 추리가 정답이었는지, 결국 유이치는 사지 오키나와로 전속되어 버린다는게 이야기의 결말이고요. 이 범행을 알아챈 윗 선의 누군가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하라 부인이 군인으로 변장해서 금산사까지 이동해 밀회를 즐길 이유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집 근처 어딘가, 혹은 부대 근처 어딘가에서 밀회를 하는게 당연한 발상 아닐까요? 이하라의 장인은 결혼 선물로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줄 정도의 재력이 있는 인물인데, 이 정도 인물의 후광으로도 근처에 있는 아내를 보러가는게 과연 불가능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밀회를 알아낸 뒤, 야나기하라 역시 부인을 절로 꾀어내어 즐기려다가 살해당했을거라는 추리도 이상합니다. 야나기하라는 이하라 부인 집에 하숙하고 있었는데 구태여 밤에 외출할 필요는 없잖아요.

무엇보다도 전시에 그나마 편한 조선에 있으면서 아내와 밀회를 즐기려고 몰래 부대를 빠져나간 병사는 솔직히 죽어도 싸다고 생각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도망" 

전라북도 금읍에 위치한 남조선 연안 방비 사단에 새로 부임한 시노하라 겐사쿠 경리 대위는 사택 부인들과 안면을 텄다. 그리고 고고학 전공자라서 휴일에 금산사 경내를 산책하던 중, 사택 부인 중 한 명인 히사코를 만나 일종의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금산사를 더 자주 찾다가 하숙집 주인인 야마다 기사장, 금읍 최고의 부자 일본인인 속물 오이시 등만 차례로 만난 뒤, 이들이 왜 절에 왔는지 의문을 품게 되는데...

전편에 이어지는, 조선 주둔 일본군의 최후를 그린 작품입니다. 수수께끼는 야마다 기사장과 오이시가 왜 금산사를 찾는지? 인데, 이는 추리가 아닌 시노하라 대위의 미행을 통해 드러납니다. 야마다 기사장은 절에 초단파 수신기를 숨겨두고 몰래 전황을 들어왔던 겁니다. 기사장은 일본이 망하면 조선인이 봉기할테니 빼돌린 금을 가지고 바로 달아날 생각이었거든요. 오이시 역시 같은 목적이었고요.

여기까지는 꽤 흥미롭지만, 진상이 밝혀지는건 미행에 따른 결과라 추리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이후 전개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합니다. 착하고 순진해보였던 역사학도 출신 군인 시노하라 대위가 일본 패망을 알고 군비를 빼돌리고 오이시와 야마다를 꼬드겨 일본으로 탈출하다가 둘 다 살해한다는 막장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이하라 부인마저 살해하고 반지를 빼앗는다는 암시마저 등장하니 말 다했지요.

일장기에 색을 칠해 태극기를 만들고 봉기한다는 등 당시 조선에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디테일은 여전히 놀라운 수준이고, 일본인들이 자기 하나 살자고 조강지처까지 버리면서 발악하다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어요. 허나 앞서 설명드렸듯이 추리적으로나 전개 면으로나 그다지 점수를 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비와 2층" 

전쟁 때 군대에서 운전사로 일하던 하타노는 물자를 빼돌린 뒤 전후 암시장을 통해 한 몫 단단히 잡았다. 레이코와 바람이 난 하타노는 아내 아키에와 이혼하고 싶어지지만 위자료가 아까와 죽일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타노가 아키에를 살해하는데 사용된 기상천외한 트릭이 눈길을 끕니다. 아키에에게 큰 장화를 뒤집어 씌운 뒤, 곧바로 외출하면서 아랫층 관리인에게 부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니 윗층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지시했던 겁니다. 피해자는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든 장화를 벗으려 발버둥 쳤지만, 관리인은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생각해서 올라가지 않았고요. 이후 아키에는 질식해서 죽음에 이르지만 이 때까지는 살아있었으니 범인 하타노의 알리바이도 완벽하게 성립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일종의 시한장치 트릭인거지요. 

트릭도 트릭이지만 흉기인 고무 장화는 하타노가 취급하는 물자로 현장에 널려있었다는 점, 또 시체를 발견한 뒤 곧바로 장화를 벗기고 자신이 신어서 증거를 인멸한 마지막 행동이야말로 진짜 탁월한 아이디어였습니다. 하타노가 1년 뒤 암시장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는 허무함도 전후 일본의 상황과 잘 어울렸고요.

범인 하타노가 대단한 완력을 지녔다는 등의 디테일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건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석양에 물든 성" 

스미코는 아버지의 지인인, 국회의원이었다는 아와시마에게 속아 시골 명문가의 미치광이 외동아들에게 시집간다. 행복했던 나날은 잠깐 뿐, 남편의 광증을 알게 된 스미코는 이혼한 뒤 본가로 돌아온다. 그런데 뻔뻔한 아와시마는 되려 그녀를 농락하고, 살의를 품은 스미코는 아와시마를 사고로 위장하여 살해한다.

시골 명문가의 미치광이 외동아들, 후계자라는 뻔한 소재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 존재는 사건과는 무관하다는게 특이했던 작품입니다. 솔직히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그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부분도 없어요. 스미코가 아와시마에게 농락당한다는 전개도 지금 보면 영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스미코가 러브 호텔에 투숙한 아와시마에게 수면제를 탄 맥주를 먹이고, 욕실에서 익사시킨다는 범행의 설득력은 높지만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결국 사고사로 처리될 뿐 범행은 드러나지도 않고, 추리의 여지도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신세 망친 처녀의 복수를 그린 드라마인데 전형적이고 뻔해서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전등" 

아버지의 골동상에서 일하던 스미코에게 혼담이 들어오지만 계속 거절하던 어느 날, 그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혼담을 가져오던 가나이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추파를 던지던 무라타였다. 둘 중 누가 범인인가?

전편의 주인공 스미코가 이번에는 피해자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스미코가 살해된 시간과 그녀의 방에 침입한 수법 등 범행 관련 정보를 초반부에 상세히 알러줍니다. 이 과정에서 '왜 범인은 살해 후 도주하면서 전등을 켜 놓았는지?'라는 수수께끼도 드러나고요. 전등만 꺼 놓았다면 시체가 보다 늦게 발견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수수께끼가 앞서의 범행 시간, 범행 방법과 조합되어 뭔가 대단한 트릭이 나오겠구나! 싶은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그런데 진상은 생뚱맞습니다. 불을 끄지 않은 이유는 범인이 도주할 때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을 무서워한 범인이 경황없이 도주했기 때문이라는 건데, 앞서의 복선이나 단서를 통해 밝혀지는게 아니거든요. 이를 경찰이 밝혀낸건 가나이가 연행된 상태에서 지진이 일어난 덕분입니다. 운과 우연이 조합된 결과인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착상은 재미났지만, 정교함이 아쉽습니다.

"티켓"

고물상 다이치는 골동상의 첩 스가를 통해 철공소의 폐품 철사를 얻어 팔게 된다. 철사의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폐품 철사를 풀어서 파는데 큰 인건비가 들게 되어 고민 끝에, 고물업자 사카이의 요청 - 철사 푸는 기계를 만들테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 - 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가까지 끌어들여 큰 돈을 투자한 기계는 실패했고, 스가의 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다이치는 사카이와 함께 스가를 살해하고 그녀가 가진 돈을 가로챌 계획을 세우는데...

다이치와 사카이가 스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범행 현장까지 끌고가 죽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도서 추리물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범인의 완벽한 계획을 파헤치는 수사가 이어서 펼쳐지지는 않고, 사카이가 다이치까지 죽이려다가 자신이 죽고만다는 다소 허무한 결말이라서 도서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추리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워요. 사카이가 다이치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왕 한 명을 죽였다면, 한 명 더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이려면 인적없던 스가 살해 현장에서 바로 죽이는게 당연합니다. 스가가 가지고 있던 돈을 반으로 나누지 않아도 되니까요. 멀고 먼 시골 촌구석인 현장에서 기껏 도망쳐 나온 뒤, 시체에 유력한 증거인 '기차표'를 남겨두었다는 말로 다시 다이치를 현장으로 보낼 이유는 없어요.

전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돈에 매달리는 인간 군상에 대한 디테일은 좋습니다. 범죄에 빠져드는 과정, 범행이 일어나기까지의 긴장감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범행 동기가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필"

쓰치다 사부로의 집에 하숙하는 양공주 나쓰코는 대필을 업으로 하는 도쿠라와 사귀게 되었다. 그녀는 빅터라는 중사의 '키푸' (병사 한 명에게만 전속된 아가씨)였는데, 종종 빅터에게 폭행을 당해 멍이 들고 화상을 입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쓰코는 도쿠라와 밀회를 위해 준비했던 집에서 죽었다. 사인은 질식사였는데, 그녀의 몸 어디에도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가스 중독이나 약물에 의한 죽음도 아니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범인이 나쓰코를 어떻게 살해했는지?가 이야기의 핵심인 본격물입니다. 허나 후더닛물은 아니에요. 범인은 도쿠라일 가능성이 가장 높거든요. 가장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뿐더러, 유력한 용의자는 빅터와 도쿠라밖에 없는데 빅터는 나쓰코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범행 방법만 알아내면 되는, 구태여 표현하자면 하우더닛물인 셈이지요.

등장하는 흉기는 전기입니다. 변압기를 연결하여 가정용 100볼드를 승압하여 감전사 시킨 것으로, 도쿠라는 간다에 있는 전기 학교를 졸업했다는 부연 설명도 있고, 나쓰코 시체에 땀을 많이 흘렸다는 단서도 제공하는 등 나름 공정한 정보 제공에도 신경 쓴 티가 납니다.

그러나 전기 감전사의 경우 몸에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도쿠라가 나쓰코 화상 자리에 전선을 가져다 대었다 한들 그 흔적이 완벽하게 감추어졌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어요. 또 앞서 말했듯 유력한 용의자는 도쿠라밖에 없기에, 경찰이 조금만 더 파고들었다면 범행 방법은 몰라도 범인을 밝혀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생각되고요. 무엇보다도 도쿠라의 동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양공주와 관련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대표작인 "제로의 초점"이 떠오르네요.

"안전율"

도아 철강 회장 가구 류헤이에게 좌익 학생운동 단체인 총학련 재정부 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흥미를 느낀 가구는 후쿠시마 준이치와 만나 그들의 사상을 들은 뒤, 2만엔을 기부했다. 그 뒤, 가구는 자신과 내연 관계에 있는 스탠드바 '코스타리카'의 마담 사호코가 바텐더 기미지마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총학련 시위를 이용해 기미지마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적군파로 대표되는 60년대 급부상했던 좌익 학생 운동이 등장하는게 이채로왔던 작품. 사회적 이슈를 고발하는 작품을 써 왔던 사회파 작가답습니다. 좌익 운동의 지도부는 대학생 애송이들이지만 당시 사회 지배층들이 상당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묘사도 신기했고요. 또 프락치를 멤버들이 구분하여 린치하기 위해 특별한 표식을 한다는 설정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좌익 운동은 그냥 신기한 소재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이를 범행에 사용할 의도였다면 목적, 방법이 명확했어야 하는데 , 단지 등 뒤에 마크를 하는 정도로는 많이 부족해요. 기미지마가 연적이라 할 수 있는 가구의 초대로 선뜻 학생 운동 현장에 나타났다는 내용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시위가 격해지기 전에 귀가해 버렸을 수도 있는 등 헛점도 많습니다. 차라리 마크는 경찰을 속이기 위함이며, 가구 회장이 직접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의 전개가 나았을거에요. 여러모로 너무 대충 넘긴 느낌입니다. 이 한 편만으로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네요.

아울러 "시마 과장" 등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당시 일본 고위 인사가 내연의 처가 있는게 별로 문제가 되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문제가 되었더라도, 회장이 직접 살인에 나선다는건 현실적이지 않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림자"

전 편에서 기미지마가 좌익 학생 운동 단체에게 살해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호코가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 이야기입니다. 전 편이 완성된 작품이 아닌 느낌이 든 건 당연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기미지마 살해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니까요. 사호코 마담이 기미지마를 바에서 찔러 죽인 것이라고요. 그 뒤 그녀는 가구를 위해서 죄를 지었기에 그를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사랑 이야기죠? 그런데 와 닿지 않기는 전편과 마찬가지입니다. 전 편은 이야기의 구멍이 많은게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범행 방식이 문제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용해 유리를 잘라 흉기로 사용했다는게 특히 억지스러워요. 바에 흉기가 한두개가 아닐텐데 왜 흉기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범행을 저질렀을까요? 그것도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로 유리를 잘라가면서까지? 그냥 유리를 깨도 뾰족한 조각은 쉽게 얻을수 있었을텐데? 게다가 마지막에 다이아몬드에 난 상처가 큰 증거인 것 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걸로 유리를 잘랐다는건 증명하기도 불가능하고요.

경찰 수사망에 반지가 걸리는 것도 우연에 불과한 등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소멸" 

N시 호텔 공사 현장에서 일하게 된 17세 소년 지로는 휴일에 우연히 별장촌 주민 도요코를 만났다. 그녀는 지로가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걸 알고 여러가지 선의를 베풀었고, 지로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도요코는 결혼하여 별장촌을 떠난다고 지로에게 말했고, 지로는 도요코의 약혼자를 살해한 뒤 약혼 반지를 빼앗지만 이후 주박처럼 반지에 얽메이는데....

계급간 격차로 인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살의를 불러온다는 통속적인 내용의 작품. 그래도 밑바닥 노동자와 부잣집 딸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계급 격차를 빼면 '질투심'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도요코가 경찰에게 지로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별장에 초대해서 식사까지 대접해서 별장 고용인들도 아는 사실인데 왜 함구시켰을까요? 그녀 역시 나름대로 지로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걸까요? 하지만 그에 대한 묘사는 전무합니다. 

게다가 마무리는 최악입니다. 지로가 증거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두려움 때문에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낮지만, 급작스럽게 반지를 공사현장 철근에 용접한 뒤 철근이 떨어져 이상한 흔적이 들통난다는 결말은 우연치고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심지어 공사장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 떨어진 철근 자재에 맞아서 중상을 입고, 그래서 경찰이 함께 현장을 조사하던 중 철근에 백금이 달라붙은걸 알게 된다? 이 정도면 지로가 반지를 낀 채로 사건 담당 형사 앞에 떨어진다 수준의 우연일 겁니다.

고도 성장이 시작되는 상황에서의 빈부 격차, 사회 문제를 통속적이고 다룬 진부한 이야기로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반지를 이야기에 억지로 엮다가 마지막에 없애기 위해 만든 이야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04/14

테스터 - 이희영 : 별점 2점

테스터 - 4점
이희영 지음/허블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방새가 있는 동굴에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참혹하게 죽은 탓에 사람들은 동굴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전설 속 오방새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되살아났다. 빛나는 깃털을 지닌 '레인보드 버드'를 복원하여 관광 상품으로 활용하려는 계획 덕분이었다. 하지만 레인보드 버드는 끔찍한 전설의 원인이었던 치명적인 RB 바이러스와 함께 되살아났고, 복원 계획은 곧바로 폐기되었다. 그러나 계획을 진행했던 호텔 회장의 손자 강마오가 사고로 RB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태어나고 말았다.
회장은 전력을 다해 바이러스를 치료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오가 16살이 될 때까지 실패하던 와중에, 마오는 자기 말고 다른 바이러스 감염자 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외부로의 출입, 그리고 사람과의 만남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는 마오였지만 하라와 만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하라가 진짜 회장의 손자였고, 마오는 고아 출신으로 바이러스 치료를 위해 백신을 대신 투약받아왔던 '테스터' 일 뿐이었다.
다행히 백신은 성공하여 바이러스는 퇴치되었다. 하라는 마오를 꼭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오는 스스로의 의지로 죽음을 택한다.

한국 작가의 SF 소설. 딸이 다니는 학원 교재로 딸이 읽는걸 보고 읽어 보았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비인간적인,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동물들을 활용해서 표현한게 독특했습니다.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 멸종시켰다는 레인보드 버드를 관광상품으로 이용하려고 부활시켰지만 바이러스까지 함께 부활되어 위기에 봉착했다던가, 피부 이식을 위해서라며 만들어낸 인간 피부와 같은 성질의 피부를 가진 스킨 피기의 주 용도는 미용이라는 것처럼요. 동물을 이용한건 아니지만, 화성 이주자들을 모집하는 복권이 가난한 가족을 일종의 테스터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거라는 음모론도 비슷한 느낌이고요.
핵심 줄거리도 이런 황금만능주의 사상과 이어져 있습니다. 레인보드 버드에 의해 되살아난 RB 바이러스에 감염된 손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대기업 회장이 어린 고아들을 바이러스에 감염시킨 뒤 치료용 테스터로 삼았다는 내용이거든요.

여기서 서술 트릭을 활용한 반전이 하나 등장하는데, 회장의 손자인줄 알았던 마오가 테스터였고, 하라가 진짜 손자였다는 겁니다.
반전에 대한 복선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마오가 마시면 정신을 잃는 시계꽃 차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오는 차를 마시고 정신을 잃는데, 메이드 로봇 보보가 마오의 지시였다며 바이러스에 대한 검색 결과를 알려주지요. 이는 마오에게 바이러스의 정체와 하라의 존재를 알려주려는 외부의 움직임이 개입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마오의 기억이 뭔가 희미하다던가, 하라의 존재에 대해 주변 인물들이 은근슬쩍 정보를 알려주는 등도 마찬가지 복선입니다. 한마디로 꽤 괜찮은 반전이었어요. 
마오의 이름이 테스트용 고아 다섯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지막 다섯번째 아이"였다는 것도 제법 기발했고요.

허나 반전에 대한 설득력은 영 별로입니다. 회장이 마오를 자기 손자라고 속인 이유부터 도무지 모르겠어요. 마오가 그냥 바이러스에 걸려서 아픈 아이였다고 하면 뭐가 문제일까요? 하라를 위해 만든 설정을 마오에게 대입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삶에 대한 의지를 키워주기 위해서? 그럴 리가 없잖아요.
반전이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알고보니 무언가를 위해 길들여지고 만들어진 실험체였다!는 것도 SF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지극히 뻔한 설정이라는 것도 단점입니다. 영화 <<아일랜드>>, <<네버 렛 미 고>>나 시미즈 레이코의 <<월광천녀>>처럼 알고보니 장기 제공용 복제 인간이었다는 설정과 흡사한 탓입니다.
또 마오에게 하라의 존재를 알려준건, 하라의 투쟁 때문이었다고 설명됩니다. 하지만 하라가 마오의 존재를 알게 된 것 역시 어느정도 할아버지의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과정의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이왕 숨길거면 끝까지 숨기던가, 말해줄거면 대놓고 사실대로 말해주는게 당연했을텐데 말이죠.
마지막에 마오가 자살을 선택하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는 않았어요. 알비노는 하라가 책임지고 치료해준다고 했고, RB 바이러스도 다 나았는데 무엇 때문에 죽음을 택하는걸까요? 작중에서 마오는 잘못한게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살아남은 것도 단지 운이 좋았기 때문이고요.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가지거나 미안해할 이유는 전무합니다. 일종의 PTSD 같은걸 걸려서 괴로와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설명도 없어요. 일종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바이러스 백신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어야 했고요.
마오만 컨트롤 할 수 있는 메이드 로봇 보보가 마오도 모르게 업데이트되는게 굉장히 중요한 단서처럼 묘사되는데, 알고보니 일종의 맥거핀이었다는 것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진솔 아저씨가 사람이 아닌 휴머노이드라서 가능했다는건데, 이야기의 핵심과는 무관한 주변부적인 설정일 뿐이었어요. "알고보니 로봇이었다!"도 흔해빠진 클리셰의 재활용에 불과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이런 암울한 분위기와 설정의 작품이 청소년용으로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던건 수확이었고, 반전이 드러날 때의 맛은 괜찮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설정과 줄거리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성인에게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05/03/13

드래곤과 조지 - 고든 R 딕슨 / 강수백 : 별점 3.5점

드래곤과 조지 - 8점
고든 R. 딕슨 지음, 강수백 옮김/시공사

대학강사 짐 액커드는 박봉에 시달리지만 사랑하는 약혼자 앤지가 있어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는 가난한 청년, 그러나 어느날 앤지가 조수로 일하던 연구실에서 앤지가 애스트랄 투시 기계의 오작동으로 다른 세계로 전송되는 사건을 목격하고 장치를 이용하여 그녀 뒤를 쫓게 된다.

그러나 짐이 도착한 곳은 중세시대의 영국과도 같은 세계고 짐 자신은 드래곤의 육체에 전송되어 버린 것이었다! 앤지의 행방을 쫓던 드래곤 짐은 그녀가 "암흑의 권세"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마법사 캐롤리너스에서 듣고 그녀를 구해내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동반자"들을 모아 암흑의 권세를 쓰러트리는 모험에 착수한다.

용맹한 기사 브라이언과 원래 드래곤이었을때부터의 친구인 말하는 늑대 아아라, 그리고 활의 명수 다휘드, 황야의 무법자 가일즈와 그녀의 딸 다니엘,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 드래곤인 스므르골과 호수 드래곤 세코등과 힘을 합쳐 짐은 암흑의 권세에 도전하게 되는데....

아주 어렸을적에 TV에서 "용이여 불을 뿜어라!"라는 인상적인 영국풍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물리학을 가르치는 주인공이 보드게임같은 게임을 하다가 환타지 세계로 정신만 이동하여 용의 몸에 들어가 그 세계의 악과 싸운다라는 설정으로 기억됩니다. 특히 악의 두목 앞에서 현대 물리학 이론을 열거하며 환타지 세계를 붕괴시키는 마지막 결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죠.

이 작품은 이 애니메이션과 기본적인 설정이 동일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실 환타지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은 읽는 재미 하나만큼은 충분해요. 용과 기사, 아름다운 레이디 등 이런 류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기본 요소들에서 시작해서 중세사 전문가인 작가의 지식이 디테일하게 살아있는 궁수들에 대한 묘사나 말하는 늑대같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결합되어 흥미진진한 모험담을 보여주거든요.
그런데 짐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온 자신의 세계를 버리고 이 세계에 남기로 결심한 결말부는 애니메이션과는 반대더군요. 애니메이션에서는 주인공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고, 여주인공인 공주가 주인공의 세계로 온다는 결말이었는데 말이죠. 허나 소설도 워낙 매력적인 동반자들과 함께 했기에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결말이에요.

하지만 상당히 기발하고 유머스럽게 풀어나갔던 전반부에 비해 암흑의 권세와의 실제 한판 승부는 생각보다 시시한 편이라 약간 불만스럽긴 합니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아이디어가 도입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은데, 결국 순수하게 힘대 힘의 승부를 보여주기 때문에 좀 단순하게 끝나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도 조금 있고요. 물론 드래곤 대 드래곤, 오우거 대 드래곤 등 화려한 등장인물의 리얼한 전투 묘사를 즐기는 즐거움은 컸지만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전통적인 영국 환타지의 줄기를 어느정도 충실히 따르면서도 유머와 독특함이 잘 살아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재미 역시 빠지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SF중심의 그리폰북스에 이 작품이 왜 포함되었는지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는 뒷부분 해설도 볼거리였습니다. "반지의 제왕"같은 거대 장편에 압도되신 분들이라면 기분 전환을 위해 가볍게 읽어볼 만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그나저나, 다시한번 "용이여 불을 뿜어라!"를 보고 싶어 지는군요. 어디 구할데 없나....

2015/01/27

서랍 속 테라리움 - 구이 료코 / 박의령 : 별점 3점

서랍 속 테라리움 : 신장판 - 6점
쿠이 료코 지음, 김민재 옮김/㈜소미미디어

"던전밥"으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구이 료코(쿠이 료코)의 국내 첫 번역 출간작입니다. 200페이지를 갓 넘는 분량에 무려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페이지에서 10여 페이지 남짓한 작품들의 분량을 볼 때에는 쇼트쇼트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네요.

참고로 쇼트쇼트, 쇼트-쇼트는 사전적인 의미로 원고지 10매 안팎의 아주 짧은 소설을 지칭합니다. 꽁트보다 더 짧은, ‘마이크로픽션’ 혹은 장편(掌篇)에 해당하는 형식입니다. 호시 신이치가 이 장르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을 뿐더러 의표를 찌르는 반전, "기묘한 맛" 류의 독특함 가득한 작품이 많을 뿐더러 평범한 일상 드라마는 물론이고 SF, 추리, 범죄 스릴러, 판타지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성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호시 신이치나 아토다 다카시 같은 몇몇 쇼트쇼트 대가의 특징일 수도 있겠지만요.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도 이러한, 제가 알고 있는 쇼트쇼트의 특징이 가득한 작품들입니다. 정말 "기발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독특한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중 인상적이었던 것을 몇 가지 소개한다면,

  • 자신을 멀리하던 사장 딸이 사실은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변화무쌍한 아가씨였다는 것을 타임머신 원리를 이용한 데이터 전송이라는 설정과 함께 전개하는 "연인 카탈로그"
  • 일 년에 한 번 용을 먹는 마을에서 여러 가지 용고기 요리(회에서 숯불구이, 국물요리까지!)를 즐긴다는 "용의 역린"
  • 주인공의 인사를 무시한 직장 동료에 대해 마음속에서 법정을 열어 재판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는 내용을 아가씨의 귀여운 심리 묘사와 함께 선보이는 "대리 재판"
  • 애완동물 아기를 키우는 이야기로 짙은 여운을 남기는 "봄볕"
  • 왕따에 대한 인형극을 창작하다가 토끼 나라에 대한 거대한 서사극을 만들어내는 "머나먼 이상향"
  • 편의점 음식만 먹는 서민스러운 삶을 살던 친구가 프렌치 코스 요리를 먹고 난 뒤 요리에 대해 기이하게 평가하는 "특식"
  • 우연히 찾아간 산속 식당에서 주위 손님들이 파란만장한 행동을 펼친다는 "이런 산 속에"

등이 그러합니다.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고 밝은 분위기의 이야기들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를 창작할 때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지 너무 궁금해지네요.

쇼트쇼트의 또 다른 특징인 다양한 장르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도 큽니다. SF, 판타지, 구루메(?), 기이한 법정물, 일상계 드라마에 러브 코미디, 심리 썰렁물까지 오만가지 장르를 오가거든요. 장르에 따라 작풍을 바꾸는 그림 실력도 높이 평가할 만하고요. 정통 판타지스러운 고풍스러운 펜화, 전형적인 순정만화 스타일의 작화, 그리고 평범한 스타일의 일상계스러운 그림 등이 장르마다 적절히 어우려져 보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그러나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는 유명 거장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졸작이 의외로 많은 편인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작품이 빼어나지는 않아요. 아주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건 아니고, 거장의 졸작보다는 볼 만한 작품이긴 합니다. 그러나 뻔한 아이디어, 뻔한 전개의 식상한 이야기들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을 알게 된 인공 두뇌의 이야기라든가 상위 문명에 납치당해 사육당하는 미녀의 이야기가 대표적이겠죠. 흔한 이야기로 작가만의 별다른 상상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집이라 생각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 가지 장르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군청학사" 시리즈가 떠오르는데, "군청학사"보다는 훨씬 짧은 호흡의 이야기로 여운은 짙지 않지만 스피디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단편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6/01/05

용의 이 - 이영수 (듀나) : 별점 2.5점

용의 이 - 6점
이영수(듀나) 지음/북스피어

"면세구역" - 이영수 (듀나) : 별점 2.5점

연휴 기간 읽은 듀나의 중·단편집입니다. 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전 "면세구역"과 장·단점 모두 유사합니다. 책 기준 출간 시점이 7년이나 차이나는데도 불구하고요. 때문에 성장하는 작가라는 느낌은 받기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작품들의 성향이 많이 달라 전체를 요약하는 대신, 아래에 작품별 상세 리뷰를 올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너네 아빠 어딨니"

아빠에게 학대당하던 두 자매가 아빠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하는데 아빠가 좀비로 부활한다!

이전 "판타스틱"에 게재되었던 단편입니다. 뻔한 좀비물이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혹 행위를 일삼는 편부 슬하의 두 자매가 견디다 못해 저지른 살인이 좀비 아포칼립스의 시작이라는 점, 아빠가 좀비로 살아나는 이유가 묻은 창고의 황토 때문이며 두 자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도사의 부적 때문이라는 등 지극히 한국적인 설정이 재기발랄했던 덕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궁금했던 것, 즉 '동물이 좀비가 되면 어떻게 되나?'에 대한 나름의 해답도 반가웠습니다. 아빠 등이 잡아먹은 쥐가 좀비가 된 뒤 탈출하여 서울을 좀비 도시로 만든다고 하는데 그럴듯했어요. 매일매일 좀비를 죽이고 또 죽여나가는 자매의 비밀이 마지막까지 유지되다가 클라이맥스에서 한 방에 폭발한다는 스피드와 박력 넘치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허나 좀 쉽게 간 느낌도 듭니다. 도라지 도사의 부적이 대표적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어요. 위기에 처했는데 갑자기 UFO가 나타나서 외계인이 도와줬다는 설정과 다를 게 없어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 자체인데, 차라리 아빠를 매일매일 죽이고 또 죽이다 보니 좀비에 익숙해져서 살아남았다고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엣지 오브 투모로우"처럼, 결국 뭔가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리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낙관적인 결말 — 자매는 살아남아서 80억이나 되는 현금과 보석을 나누어 보관한다 — 도 크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지옥 같았던 두 자매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작품과 잘 어울렸다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천국의 왕"

죽은 후의 영혼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로 사고로 죽은 민서를 영체화시키는 이야기와 주인공이 아버지와 연구를 진행할 때의 이야기 두 개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민서 이야기는 순전히 사족일 뿐이며, 아버지와 연구 진행할 때의 이야기 역시 다소 늘어집니다. 영매 능력이 있었던 어머니의 영혼을 가둔 첫 번째 병에 대한 이야기, 특히 병 속에서 어머니의 영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장면 하나만큼은 굉장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알고 아버지에게 복수한다는 간단한 이야기로 끌고가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예요. 영혼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한 디테일과 아버지의 광기 역시 빼어나게 묘사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어머니 영체 이야기만큼은 별점 4점도 부족함이 없지만 다른 곁가지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

지성을 가진 나무들이 창조한 드라마 속 생명체가 자신의 능력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수페이지짜리 꽁트.

전형적인 듀나 스타일의 작품이에요. 재미있는 설정은 돋보이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2점입니다.

"용의 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고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자인 소녀가 우주선 불시착 후 홀로 살아남았다. 불시착한 별은 토착민들의 유령이 숭배하는 '여왕'의 존재를 놓고 유령들 간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였다.

기묘한 분위기의 판타지 SF로 260페이지가 넘는 중편입니다.

일단 강력한 능력을 가진 소녀가 나옵니다. 정신을 조합하여 새로운 인격을 만들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소유했고, 다른 사람의 기억에서 흡수한 전투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리도 있습니다. 여왕이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은 누구인지, 대체 이 별은 무엇인지 등 등장하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거든요.
액션도 화끈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적, 그리고 다양한 유령과 생명체, 기계와의 사투도 그려지니까요.

이렇게 보면 되게 재미있고 좋은 작품 같지요? 허나 아쉽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불친절한 전개와 묘사 탓입니다. 주인공 소녀 외에는 모두 유령이라 대화나 별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요. 대사와 의식의 흐름이 구분되지 않은 느낌이랄까요? 여러모로 깔끔하지 못해요. 그나마 중반까지는 제법 흡입력 있었는데,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습이 힘든 작가의 단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별에 존재하는 유령들은 모두 오래전 멸종한 달팽이들의 강력한 잔유 사념에 지배당한 결과라는 진상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합니다. 묘사 탓에 그냥 평이하게 흘러가고 끝나버리는 탓입니다. 어차피 주인공 소녀의 생각밖에는 근거가 없어서, 이게 미치광이 소녀가 정신병원에서 꾼 꿈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렵고요.
아울러 별의 문이 멋대로 열린다는 설정은 생각 흘러가는대로 써 내려간 느낌이라 더욱 별로였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재료는 엄청 많은데 정작 결과물은 그냥 그런 비빔밥에 불과한 결과물입니다. 그나마도 고추장, 참기름이 빠져서 엄청 심심한… 물론 이게 입맛에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게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 스페이스 오페라 스타일로 보다 명쾌하게, 속도감 있게 쓰는게 좋았을 겁니다.

2013/06/01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 미하엘 엔데 / 선우미정 : 별점 3점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 6점
미하엘 엔데 지음, 프란츠 요제프 트립 그림, 선우미정 옮김/길벗어린이

왕과 주민 3명으로 이루어진 작고 작은 섬나라 룸버란트에 흑인 아이가 착오로 배달되었다. 뭐요 아주머니 밑에서 아이는 "짐 크노프"라는 이름으로, 기관사 루카스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 기관사를 꿈꾸는 건강한 아이로 자랐다. 그러나 루카스가 섬나라의 작은 땅덩어리 탓에 짐을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서 섬을 떠날 결심을 하자, 짐은 루카스와 함께 떠나는데...

제가 어렸을 적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미카엘 엔데의 "짐 크노프" 시리즈 제1작. 아직은 어린 딸아이에게 언젠가 꼭 권해주고 싶어서 다시 구입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 설정과 묘사들. 천하장사에 침으로 재주를 넘게 만드는 루카스를 비롯한 등장인물 및 너무나도 좁지만 재미있고 따뜻한 인물들이 살고 있는 섬나라 룸버란트, 중국을 모티브로 한 대국 만달라와 그곳의 다양한 문화, 그리고 모험을 떠난 짐과 루카스 앞에 연이어 나타나는 거꾸로 거인이나 용의 나라 쿰버란트, 여러 용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내용들은 지금 읽어도 여전한 재미를 느끼게 해 줍니다. 호첸플로츠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프란츠 요제프 트립의 그림 역시 지금 보아도 너무나 멋졌고요. 참고로 국내 출간 판본 중에서 프란츠 요제프 트립의 그림이 아니라 다시 그린 그림으로 출간된 판본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 책의 기둥뿌리를 흔드는 행동이라 생각돼요. "짐 크노프"와 프란츠의 그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란 말이죠!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렸을 적 읽었을 때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전개, 설득력 없는 상황이 연이어 펼쳐지는 등 완성도 면에서 문제가 많아 보였거든요. 하지만 이건 제가 나이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이 크겠죠. 동화에서 설득력 있는 전개나 과학을 바랄 필요도 없을 테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꿈과 희망, 모험이 가득한 동화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딸아이가 이 책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초등학생은 되어야 할 텐데, 너무 일찍 구입한 것 같긴 합니다...

2018/09/08

깃털 - 소어 핸슨 / 하윤숙 : 별점 4점

깃털 - 8점
소어 핸슨 지음, 하윤숙 옮김/에이도스

깃털에 대해 모든 것을 고찰하여 알려주는 과학 서적입니다. 부제는 "가장 경이로운 자연의 걸작"이지요. 책은 어떻게 깃털이 진화하여 만들어졌는지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깃털의 주요 기능과 목적인 온도 조절과 비행, 그리고 장식 용도 세가지 항목을 각각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요. 마지막으로 인간이 깃털을 활용해왔던 여러가지 사례들을 설명해주며 마무리됩니다.

인터넷 서점 소갯글을 보고 읽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대박입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시조새 화석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첫번째 단락부터 푹 빠져버렸습니다. 저는 공룡에서 새가 진화했다는 이론을 접했던 세대가 아니라서 더욱 빠져든 것 같아요. 이 책을 통해서 공룡이 갖춘 초기 깃털은 아마도 보온과 장식 용도가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진화하여 일종의 '활공' 용 깃털이 생겨난 것이다라는 진화의 과정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던 덕분입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이미 날 수 있는 공룡 (익룡) 이 있었는데 왜 활공용 깃털로 진화가 이루어졌을까?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이른바 WAIR 가설(Wing assisted incline running)로 발과 조합하여 높은 경사를 오르기 위함이라는데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여기서 뛰어내리거나, 날아오르는 방향으로 점점 진화해 나가게 된 것이지요. 퍼덕거리며 높이 올라간 후 퍼덕거리며 뛰어내린다, 너무나도 그럴듯해요!

새의 온도 조절 메커니즘에 대한 이야기도 새로왔습니다. 새가 영하 수십 도의 높은 고도에서의 비행과 극지방, 물속에서 벼텨내고 뜨거운 열대 기후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이유가 전부 '깃털' 덕분이라니 놀랍기만 합니다. 덕다운 파카, 이른바 오리털 파카는 우리도 한겨울 보온용으로 친숙한데, 새의 솜털은 우리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대단한 보온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솜털을 포함한 깃털은 현대의 공업 기술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복잡한 구조물(?)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농담삼아 하는 "오리털 대신 닭털을 써서 싸구려다!"는 말은 책에 따르면 근거가 없네요. 깃털의 메커니즘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솜털을 쓰지않고 다른 깃털을 써서 싸구려다!"라고 해야 맞는 말인 것이지요.
새들이 체온이 올라갔을 때 체온을 내리는 다양한 방법도 재미있는데, 동물원 가면 가끔 보는 열대 조류인 큰부리새의 큰 부리도 체온을 내보내기 위해서 크게 발달했다는군요 단지 귀염귀염한 외모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거죠! 이렇게 체온을 유지하고 관리하는데 최적화되었기 때문에 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한 박쥐와는 다르게 전 세계 어디에서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의 신비는 정말 놀라워요.

극락조로 대표되는 새들의 기묘한 깃털 장식들과 인간 사회에서 유행했던 깃털 모자들, 이 때문에 이루어졌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바르바리 타조 밀수 작전, 그 외 깃털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심지어는 화폐로까지 이용되었던 공예품과 예술품들 이야기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양한 깃털 관련 물건들 이야기도 흥미가 넘칩니다. 깃털 책에서 플라이 낚시 미끼라던가 깃털 펜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읽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깃털 펜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한 책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런건 이전에 읽었던 문구 관련 서적에서 인용해서 다루어 주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외에도 재미있는 내용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중국의 이시안 지층, 시애틀의 깃털 회사, 라스베이거스 깃털 의상 제조자, 뉴욕의 깃털 모자 디자이너, 오리건 동부의 플라이 낚시 전문가 등 여러 지역을 방문하여 현지 취재 및 인터뷰를 감행한 저자의 노력과 이러한 연구 와중에 곁들여지는 좌충우돌 경험담도 재미를 더해주고요.

한마디로 지식의 충족과 읽는 재미 모두를 갖춘 최상급의 과학 교양 서적입니다. 도판이 전부 흑백에다가 주요한 도판이 제대로 수록되어 있지 않은 점 때문에 감점하지만 별점 4점은 충분해요. 깃털에 대해 관심이 전무하셨던 분들이라도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처럼 새와 깃털에 푹 빠지시게 될 것을 장담합니다.

2024/09/29

수학, 인문으로 수를 읽다 - 이광연 : 별점 2.5점

수학, 인문으로 수를 읽다 - 6점
이광연 지음/한국문학사

인문학이 문학이나 철학 등 문과 계열 뿐 아니라 수학이나 건축 등 이과 계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청소년용 교양서. 수학이 인간 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학문이라는걸 여러가지 알기 쉬운 예제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딸 아이 논술 교재라서 겸사겸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중 수학 공부와 건축의 원리가 같다는 주장은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건물을 설계하는게 책의 목차라는 주장이요. 수학책에서 목차를 보면 앞으로 공부할 내용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조감도를 그릴 수 있고, 목차를 알면 이미 50%를 알고 들어간다는데 수학책에서 목차가 중요하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앞으로 목차를 좀 더 꼼꼼히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어요.
또 기둥이 튼튼해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데, 수학에서의 기둥은 기하와 대수이며 기하와 대수는 3,000년 전 고대 수학부터 통합되어 있었다는 주장과 매듭이론에 대한 쉬운 설명도 좋았습니다. 이론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왜 필요한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딸은 음악에 대한 설명을 좋아하더군요. 그 중에서도 피타고라스가 음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요. 저는 피보나치수는 장음정 6도와 단음정 6도로 귀로 들어도 아름답다는게 기억에 남습니다. 유튜브로 한 번 찾아보니 과연 그러하네요.
또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다양하게 피보나치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악절을 황금비로 나누는 건데, 이건 과연 무슨 효과가 있었을지 궁금해 집니다.
주식 시장의 엘리엇 파동 원리가 피보나치 수열이고, 블랙 숄즈 방정식은 확률 미적분 이론을 이용해 파생상품 옵션의 가격을 계산한 모델이라는걸 설명해 주는 부분에서는, 가난한 수학자가 이세계에 환생한 뒤, 그곳의 시장 경제를 가지고 노는 환생물이 떠올라 재미있었어요. 용(드래곤)을 파는 시장을 지배해서 수학자가 용왕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영화를 가지고 수학에 대해 알려주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설국열차 등을 예로 드는데, 이 중에서 바이러스 감염률 한계 이론에는 놀랐습니다. 100만 명으로 모수가 늘어나면, 정밀도 99%의 검사라도 무려 9,999 명이 잘못 판단된다는데 여태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에요.
그 외에도 사이클로이드 곡선은 직선보다 훨씬 빠르게 특정 물체를 이동시킬 수 있어서 겅사면에는 사이클로이드를 적용한다, 동물들, 독수리나 매도 땅 위에 있는 사냥감을 잡을 때 사이클로이드에 가깝게 목표물을 향해 곡선 비행을 한다는 이야기,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전형적인 황금비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금강비(5:7)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서양인보다 상대적으로 동양인이 키가 작아서 황금비보다 작은 비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자 모양에서 중국에서 결승법 - 끈을 묶어 수를 표시하는 방법 - 을 썼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지만 뒷부분 이야기는 억지가 심해서 아쉬웠습니다. 대표적인건 삼국지 속 계륵이 암호이며, 이건 수학이는 주장입니다. 암호가 수학일 수는 있지만, 계륵은 수학과는 관련이 없는 심리적인 말장난에 가까우니까요. 또 그 뒤에 이어지는 암호에 대한 이야기는 수학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다른 책에서 지겹게 많이 접혔던 내용이 대부분이라 실망스러웠어요.
김삿갓, 이순신과 조선 수군 이야기도 수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수군에 훈도라는 수군직급이 있고 그들이 각종 계산을 담당했다고 해서 그들이 수학자라는 말도 안되지요. 지금 육군의 관측병들이 모두 수학자인가요? 마방진 이야기도 분량에 비하면 별다른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그림 그리는 얘기도 황금비라든가 외상 예술 같은 건 뻔하고 대단한 수학적인 이론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카르타고를 세웠다는 디도의 문제라던가, 달리의 4차원 그림 같이 그림의 주제가 된 수학 문제를 설명하는게 훨씬 좋았습니다.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있어야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건질 내용이 없는건 아닙니다. 몇몇 주장은 와 닿기도 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학에 대해 어려워하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2019/12/20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에드 멕베인 외 / 이리나 : 별점 2점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4점
에드 맥베인.로런스 블록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북스피어

미국 뉴욕에는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유명한 '미스터리 서점'이 있습니다. 유명 추리소설 편집자이자 비평가인 오토 펜즐러가 운영하는 서점으로 1979년에 문을 열었다니 올해로 40년이 되었네요. 이 책은 오토 펜즐러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서점 고객들에게 선물로 증정했던 소책자에 수록되었던 단편들을 모아 엮은 단편집입니다.

오토 펜즐러의 말에 따르면, 소책자용 이야기의 기준은 세가지였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이야기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할 것, 두번째는 당연하겠지만 미스터리를 포함할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적어도 몇몇 장면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어날 것이 그 기준입니다. 이 책이 국내 첫 출간될 당시, 책을 펴낸 북스피어가 이벤트삼아서 이와 유사한 조건의 꽁트를 모집했었습니다. 저의 짤막한 글도 다행히 선정되어 "작가의 수지"라는 멋진 책을 경품으로 증정받았었죠. 그러나 이벤트가 당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오토 펜즐러가 자신의 서점 고객용으로 준비한 글을 엮었던 "라인업" 같은 경우, 소설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생각하고 있다가 드디어 올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네요.

일단, 작가진은 굉장히 화려합니다. 오토 펜즐러의 유명세와 인맥 덕분이겠죠. 도널드 E 웨스크레이크, 로렌스 블록, 에드워드 C 호크, 에드 멕베인, 토머스 H 쿡, 메리 히긴스 클라크 등 제가 소개했었던 유명 작가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가득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오토 펜즐러가 고전 본격물 스타일의 탐정 역할을 소화하는 작품마저 있을 정도에요. 미스터리 서점이 사건의 무대가 되고, 서점 직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많고요. 오토 펜즐러가 내세운 기준 때문이겠죠. 마찬가지의 이유로 미스터리 서점에서 열리는 파티를 소재로 한 작품도 제법 되는 편입니다.

허나 이러한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 팬, 고객을 위한 서비스적인 묘사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볼만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완성도가 낮은 탓입니다. 오토 펜즐러가 내 건 조건들도 작위적으로 충족시킬 뿐이에요. 특히나 미스터리 서점에서의 흥청망청 크리스마스 파티는 영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희귀본을 수집하는 수집가가 자신의 서재에 술취한 손님들이 들어오는 파티를 연다는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솔직히 전체 평균내면 2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나마 반올림한 점수죠. 수많은 추리 작가, 추리 소설들이 인용되고 작품 속에서 활용되는 것을 보는 재미는 괜찮았지만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점수를 주기가 민망한 수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작가들의 명성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상황인데, 작가들 역시 단순한 팬 서비스 정도로 여긴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특정 작가의 팬이라도 마찬가지고요. 몇몇 괜찮은 작품이 있기는 하나 극소수거든요. 나중에 e-book으로 각 단편들이 분철되어 판매되면 고려해 보시길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에 소개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표지 디자인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크리스마스라기 보다는 할로윈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일러스트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서점 + 크리스마스 소품이라는 미국 원작 스타일 표지였다면 판매는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낌없이 주리라"

도둑 도트문더가 크리스마스날 맨해튼 호텔에서 고대 주화를 훔쳐 달아나다가 우연찮게 '미스터리 서점'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주인 오토와 다른 일행들의 착각으로 그들이 벌이는 포커판에 끼어든 도트문더는 정직하게 게임을 해서 240달러 정도를 땄다. 그러나 경찰이 출동하여 수상한 사람에 대해 탐문하는데....

걸작 "도끼"와 유쾌한 케이퍼 소설 "뉴욕을 털어라", 묵직한 복수극 "인간 사냥" 등으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단편. 좋은 단편도 여러 편 발표했기에 작품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마침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뉴욕을 털어라"의 주인공인 도둑 도트문더가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수수께끼는 딱 한가지, "왜 오토와 친구들은 도트문더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일까?" 인데 그 진상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거든요. 이유는 바로 도트문더가 240여달러의 돈을 땄기 때문이죠. 도트문더가 체포되면 포커판은 깨지고 돈도 다시 찾을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도트문더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오토와 친구들에게 돈을 잃어주기로 결심했다는 결말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포커판의 유지가 중요했다면, 240여 달러를 다시 잃는 것 보다 오토와 친구들의 돈을 모조리 따는게 게임을 끝내기에 더 현실적인 방법이니까요. 돈은 게임이 끝나고 공평하게 돌려주면 되잖아요? 돈을 다 따거나, 아니면 240여 달러를 다 잃거나 어느 쪽이건 게임이 끝날 때 오토와 친구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기도 하고요. 아울러 크리스마스날 일어난 사건일 뿐, 크리스마스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주제에 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쓴, 오토 펜즐러의 세 가지 기준에만 맞춘 졸작입니다.

"계획과 변주"

희귀 서적 중개인이 뉴욕에서 차례로 살해당했다. 파로아 러브 형사는 그들의 죽음이 대실 해밋의 잃어버린 원고인 "마른 여자"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고, 자신의 친구 오토 펜즐러를 찾아가 책 수집상 와일리 에머슨을 함께 찾아가 보자고 부탁했다. 와일리 에머슨이 "마른 여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와일리 에머스는 "마른 여자"라는 원고는 본 적도 없다며, 자신을 찾아왔던 수집가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오토는 와일리 에머슨이 썼다는 원고 뭉치를 들고 나오는데...

흑인 동성애자 형사 파로아 러브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저술한 조지 백스트의 파로아 러브 단편. 크리스마스가 배경이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주는 부분은 없습니다. 대실 해밋의 "마른 여자"라는 원고를 와일리 에머스가 숨긴채 가지고 있던 이유도 썩 납득이 되지 않고요. 원고를 쫓는 악랄한 무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차피 돈 받고 팔 생각이었다면 마찬가지 결과였을텐데 말이죠. 게다가 범인이 오토 펜즐러 서점의 매니저 알렉스였다는 진상도 뜬금없습니다. 나름의 복선이라고 등장하는건 찢어진 청바지와 원고를 노리는 도라를 배웅해 주었다는 것 뿐이라 억지스러웠어요.

한마디로 단편에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를 무리하게 펼쳐낸 느낌입니다. 조금 더 길게, 상세한 설명을 더하여 풀어냈어야 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녹슨 책갈피 도난 사건"

닉 벨벳은 크리스마스 주간에 고등학교 때 친구 찰스 오닐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의뢰는 오토 펜즐러에게 판매한 대량의 헌 책 속에 끼워진 금속 책갈피를 훔쳐와 달라는 것이었다. 닉은 택배기사로 변장하여 서점에 잠입한 뒤, 책갈피를 빼내오는데 성공하는데...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단편. 시리즈 캐릭터인 괴도 닉 벨벳이 주인공입니다. 확실히 제왕다운 작품이에요. 오토 펜즐러의 어떻게 보면 무리한 요구를 모두다 들어주면서 완성도까지 높은 수작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크리스마스라는 시즌을 유효적절하게 써먹고 있는게 눈에 뜨입니다. 크리스마스라 바빠서 닉의 변장이 잘 먹혔거든요. 오토 펜즐러가 대량의 추리 소설을 구입한 것과 그 탓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책갈피를 훔치게 되는 과정도 그럴듯합니다.

또 녹슨 책갈피를 거액의 수고비를 지불하면서까지 훔치게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도 인상적입니다. 사실 진상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요. 앞서 찰스의 여동생 마시의 남편이 목을 칼로 베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상세하게 설명되니까요. 그래도 '구리는 녹슬지 않는다. 이건 부식한게 아니다!'라는 닉 벨벳의 착안과 이를 통해 진상을 끌어내는 추리는 꽤 그럴듯합니다. 자수하라는 닉의 제안도 깔끔하고요.

무엇보다도 닉이 택배기사로 변장할 때, 위장을 위해 준비했던 여자친구의 추리소설들 중 한 권 - 놀랍게도 수 그래프턴의 "알리바이의 A" - 이 꽤나 값나가는 작품이었다는 결말이 아주 크리스마스답습니다. 오토 펜즐러씨가 횡재했다는 결말인데, 원고도 써 주고 덕담까지 해 준 셈이니 에드워드 D.호크는 상당한 대인배였던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 오토 펜즐러의 기획 의도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작품입니다. 완성도를 떠나 이 정도로 의도를 잘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역시 대가는 대가구나 싶네요.

"모작 살인 사건"

안 팔리는 아동 추리소설가 루페 페티코드는 자신의 교육 센터 창작 수업 수강생이 검토를 요청한 원고에 홀딱 반했다. 그 원고를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넘겨 선인세로 거액을 약속받은 루페는 원작자 도라 윔블러를 어쩔 수 없이 살해하는데...

잘 모르는 작가인 론 굴라트의 작품. 다른 누군가의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기 위해 원작자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는 많을겁니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럴듯한 동기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좋아보였던 도라 윔블러의 작품도 사실은 '도작' 이라는 진상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 덕분에 기존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옛 고전물을 떠올리게 만드는 걸작이라고 칭송받지만, 사실은 고전물의 모작에 불과했던 것이죠! 정말 유쾌하면서도 인상적인 반전이었습니다.

루페 페티코드의 나름 절박한 현실, 작가로서의 뒤틀린 긍지와 복수심이 만화적으로 과장되어 있는게 옥의 티이기는 합니다. 너무 스테레오 타입의 묘사였거든요. 반전 외의 모든 전개 역시 스테레오 타입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뻔했고요. 그래도 반전만으로 모든게 용서되는 작품. 별점은 3점입니다.

"이보다 더 어두울 순 없다"

네로 울프를 추종하는 탐정 레오 헤이그의 조수이자, 그가 해결한 사건들을 소설로 발표하는 칩 해리슨은 오토 펜즐러의 요청을 받아 '미스터리 서점'을 찾았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직후, 귀중한 코넬 울리치의 육필 원고가 도난당한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 때문이었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로 유명한 로렌스 블록의 단편. 매튜 스커더 시리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코믹한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특히 화자인 칩 해리슨의 거침없는 언변이 아주 돋보여요. 온갖 고전 추리소설을 비트는 독설, 그리고 오토 펜즐러가 흠모하던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지만 술 때문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상황을 풀어낸 전개도 유쾌하고요. 오토 펜즐러에게 장난치기 위해 쓴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에요.

문제는 로렌스 블록답지 않은 유쾌함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다는 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파티의 구실일 뿐 이야기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으며, 추리 역시 대단할게 없거든요. 용의자들을 불러 모아 순서대로 증언을 듣는걸로 사건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여섯명, 아니 일곱명의 용의자가 원고를 돌려보았으며, 마지막에 원고를 읽었던 연회업체 사장 진 보트레이가 오토 펜즐러의 침대 옆에 원고를 올려놓아 곧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진상은 허무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의 명성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졸작으로 로렌스 블록의 광팬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요정들의 선물"

보스턴에서 희귀 초판본 배달을 의뢰받고 오토 펜즐러의 '미스터리 서점'에 방문한 사설탐정 존 프랜시스 커디는 오토 펜즐러부터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그가 수집한 추리 소설가들의 소장품이 동일 가격의 돈이 들은 봉투와 바꿔치기 당한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세 명의 추리 소설가였다. 존은 세 작가를 차례로 탐문한 뒤, 진상을 알아낸다.

진상은 림프종으로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작가 모리가 꾸민 장난이었다는 소품으로 오토는 손해본게 실제로 없기 때문에 진지한 범죄가 아니라 장난이라는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토 펜즐러를 피해자로 삼은 생생한 추리 소설을 오토 펜즐러에게 선사한다는 건 추리 소설가가 세울법한 계획이구나 싶어 재미있었습니다. 모리의 시한부 삶이 다음 크리스마스를 맞지 못할 것 같다는게 도화선이 되었다는 설정은 필요없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지만요. 이 설정 때문에 밝고 유쾌할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가 좀 묵직해졌거든요.

그래도 미스터리 서점의 주인과 그의 친구인 추리소설가들이 벌일법한 크리스마스 장난과 선물이라 단편집 주제에 꼭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엄마가 산타클로스 아저씨를 죽였어요"

어느 바쁜 크리스마스 오후,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는 앨런의 앞에 맥스라는 꼬마가 나타나 산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기 시작했다. 

제목이 스포일러입니다! 제목이 다 망쳤어요. 맥스가 산타클로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할 때 부터 맥스의 엄마가 산타클로스를 죽였다는건 명백해집니다. 산타클로스의 정체가 대체로 아빠라는 점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동기도 대체로 짐작이 가고요.

물론 추리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 등장하는 전개는 볼만 합니다. 특히 서점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인 2급 형사 로지의 말이 기억에 남네요. '경찰 소설을 쓰는 작가 중에 정작 경찰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데, "87분서"> 시리즈로 일세를 풍미한 작가 스스로에 대한 자학개그로 느껴졌거든요. 역시 로지가 고양이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싫어한다면서 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고양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도 굉장히 와 닿았고요. "삼색털 고양이" 시리즈는 솔직히 첫 편을 제외하고는 엉망이었죠. "펠리데"는 괜찮았었지만요. 또 범죄물의 거장 에드 멕베인답게 맥스의 엄마가 서점에 나타나는 장면의 긴박감도 꽤 훌륭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제목만 조금 비틀어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더라면 훨씬 나았을텐데, 에드 멕베인답지 않은 안일한 구성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동방 박사의 간계"

오토의 손님 키티는 오토에게서 한 희귀본의 완벽한 표지를 가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 오토를 위해 희귀본을 완벽하게 만들어 선물하려던 키티는 그 남자 가토의 방에 잠입하여 표지를 빼내 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물용 희귀본 "바깥 화장실 가는 길"이 도난당한걸 알게 되는데... 

오토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두 도둑이 각자 서로의 희귀본과 표지를 훔친다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의좋은 형제"같은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완성도는 낮습니다. 전반적으로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왜 오토에게 귀중한 희귀본을 선물하려고 하는지, 키티와 가토는 직업이 도둑인지 등 기본 설정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거든요. 둘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려는걸 오토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고요. 또 오토가 둘이 그에게 선물하려던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흘린 정보로 둘이 각자 상대방이 가진 물건을 훔쳐내리라고 예상하는건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게 둘의 인연을 이어주려는 오토의 계획이었다니! 억지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했어요.

크리스마스, 선물, 해피엔딩 등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어울리는 소재들을 잔뜩 가져다 쓰기는 했지만 이래서야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내 목표는 신성하니"

윌슨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스터리 서점을 방문한다. 삼촌에게 고가의 책을 선물하려 한다는 핑계를 대고 오토 펜즐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목적은 선물 구입이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였다...

오토 펜즐러에게 원고를 퇴짜맞은 후, 복수심에 사로잡힌 작가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서스펜스 스릴러. 그러나 아쉽게도 긴장감이 잘 살아나지 않아서 서스펜스물로는 실격입니다. 정말로 윌슨이 오토 펜즐러를 죽이려고 했는지조차 모호하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그러나 마지막에 오토가 윌슨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써 내면 고료를 주겠다고 구슬리는 장면의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대단한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퇴짜를 놓은 평론가가 퇴짜를 맞은 작가에게 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느껴지거든요. 작가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잖아요?

그래도 별점은 1.5점입니다. 전개가 엉망이라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고양이 요정 스피릿"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찰서장 커디 맨검은 우연히 옛 인연이 있는 뉴욕 형사 로리를 만나 함께 오토의 미스터리 서점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가했다. 그리고 유명 작가 바트 웰스의 전처 클라우디아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미스터리 서점에 대한 떠들썩한 묘사는 볼거리입니다. 화자인 커디 맨검의 과장섞인, 허풍스러운 말투가 인상적인 탓으로 오토 펜즐러가 통이 커서 캐비어와 샴페인을 "전쟁과 평화"에서 보다도 많이 내 놓았다는 류의 말이 가득하기 때문이에요. 또 오토 펜즐러의 관심사, 미스터리 서점과 그곳에서 키우는 고양이에 대한 상세한 묘사 등은 작가가 오토 펜즐러를 속속들이 알고 있구나 싶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건은 너무나도 별볼일 없습니다. 장황한 파티,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 후 시체가 발견되고 사건이 해결되기까지는 달랑 2페이지 정도로 마무리되거든요. 고양이 스피릿이 바트 웰스의 바지에서 귀걸이를 발견하는게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러한 고양이의 도움이 없었어도 범인이 드러나는건 어렵지 않았을거에요. 흉기인 샴페인 병에 바트의 피가 묻어 있었고, 동기마저도 명확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주인공의 장황한 대사만 돋보일 뿐, 추리적인 부분에서 아무리 봐도 점수를 줄 부분이 없다면 추리 소설이 아니라 무슨 스탠딩 코미디와 다를 바 없지요.

"크리스마스가 남긴 교훈"

프리랜서 편집자 베로니카 크로스는 박봉 때문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며 부수입을 챙겨 왔다. 그녀는 토요일마다 서점에 나타나 싸구려 중의 싸구려 소설인 브루노 클렘의 페이퍼 백만 찾는 손님 해리에게 도대체 왜 브루노 클램 책을 읽는지를 묻는데... 

토머스 H 쿡의 단편. 심리 묘사의 대가다운 진중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또 누구나 가졌을 법한 질문, 이런 싸구려 책을 뭐하러 읽는가?에 대한 깊이있는 답도 인상적이고요. 베트남 전쟁에서의 무자비한 살인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는 해리에게는 싸구려 페이퍼백, 펄프 픽션이 일종의 스카치 위스키나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읽는다는게 그 진상인데, 이를 대단히 유려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고급 문학만 읽는 베로니카 역시 이런 류의 고통 - 강한 증오심으로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후려쳤던 것 - 을 잊기 위해 책으로 도피하는게 아닐까 싶은 결말도 돋보입니다. 결국, 수준을 떠나 문학은 마약이라는 결론이랄까요?

문제는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신간이 나오지 않는 브루노 클램의 책 대신, 시리즈가 많은 다른 싸구려 소설을 권해주고, 베로니카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원하는건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는 교훈을 얻는다는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딱히 흥겹거나 유쾌하지도 않고요. 또 미스터리라고 할 법한 내용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좋네요. 다른 졸작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후회하게 될 거에요"

미스터리 서점은 끔찍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토 펜즐러의 유일한 희망은 미스터리 소설을 수집하는 백작 부인이 찾는 "데인 가의 저주"를 찾아내어 판매를 성사시키는 것 뿐. 다행히 크리스마스에 책을 구하는데 성공하지만 백작 부인에게 건네기 전, 책을 분실해 버리고 마는데... 

오토 펜즐러의 아내라는 아동 도서 작가 리사 미쉘 앳킨슨의 이야기. 크리스마스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벌어진 미스터리라는 조건은 충족시키지만 완성도는 별로입니다. "데인 가의 저주"가 사라진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어요. 급료 없이 스티븐 킹의 신간 스릴러를 원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마지막 근무와 책을 숨기기 위해 스티븐 킹의 표지를 덮었다는 묘사가 합쳐지면 그 답은 너무나 뻔하잖아요. 게다가 백작 부인이 고가의 컬렉션을 오토 펜즐러에게 남기고 사고로 죽는다는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것도 순록이 끄는 썰매에 치어서 죽는다니,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도저히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긴 겨울의 한잠"

프리랜서 사진가였던 '나'는 오토 펜즐러의 도움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빠져나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맞은 첫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아래층 화장실을 방문했던 산타클로스의 시체를 발견한다. 산타클로스의 정체는 서점 직원 알란이었다. 

셜록 홈즈 원고가 동기인 고전 본격물 스타일의 정통 추리 단편. 오토 펜즐러가 직접 탐정역을 수행하는게 독특했습니다. 전개, 특히 셜록 홈즈와 비슷한 추리쇼를 펼쳐가면서 범인을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 등에서 고전 본격물을 잘 흉내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흉내에 그칠 뿐이라 아쉽습니다. 고전물 만큼의 정교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수께끼인 "왜 희귀본을 창고에 넣는다고 했던 알란이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채 살해되었는가?"부터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으니까요. 당연히 산타클로스가 알란을 죽이고, 옷을 갈아입힌게 뻔하잖아요? 그렇다면 산타클로스는 누구냐는 수수께끼가 남는데, 여기서 억지스럽게 이야기가 비약해 버리고 맙니다. 시체 발견이 계기가 된 튜바 연주자 더그가 범인으로, 그는 시체 근처에 떨어진 튜바의 밸브 오일을 감추기 위해 다시 현장을 방문했다는 설정인데 이건 말도 안되죠. 현장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면 다시 돌아가서 증거를 인멸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냥 도망가버리면 되지요. 현장의 튜바 밸브 오일이 그렇게 대단한 단서가 될 수도 없었을겁니다. 애초에 서점에 나타나지 않은걸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고전 본격물에 대한 팬심으로 조금은 후한 점수를 줍니다.

"콜드 리딩"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는 로저의 특기는 손님들을 파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책을 권해주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마스 이틀 전, 매들린 커크라는 아가씨가 나타났다. 유명 작가였던 할머니 매들린 커크 (동명이인)의 미발표 원고를 발견하고 그 값어치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로저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원고를 확인하기로 약속하는데, 원고를 빼앗기 위해 누군가 그녀를 습격한다. 로저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해낸다.

서점 손님을 보고 그들이 원하는 책을 추리해낸다는 로저의 특기는 재미있습니다. "시인장의 살인"에서 학생 식당 손님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추리 배틀을 펼치는 아케치 교스케와 하무라 유즈루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저는 별로였지만 존.D.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가 중요 소재로 등장하여 관련된 정보가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등 추리 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도 인상적이었고요.

문제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라는 일상계스러운 추리라면 모를까, 폭행 납치에 살인 미수까지 벌이는 범인을 추리하기에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범인인 맥도널드 팬을 특정하는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없지는 않고요. 그러나 단편 소설 분량에서 쉽게 풀어낼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크리스천 킬러"

지능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 죽이는 일에 충실한 킬러 사케시언은 독실한 크리스천. 어느날 자신의 타깃인 스티븐의 여동생을 진짜 천사로 착각한 뒤 살인을 그만두는데...

크리스천 킬러가 천사 분장을 한 타깃의 여동생을 만난 후 살인을 그만두지만, 또 다른 킬러의 살인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봐도 "레옹"이 떠오르지요? 우직한 킬러 사케시언, 살아있는 천사같은 헤일리 캐릭터도 딱 그러하고요. 마지막에 사케시언이 죽고 마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타깃인 인간 쓰레기 스티븐이 살아남는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딱 한가지, 사케시언이 죽기 전 진짜 천사를 보았다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 뻔하지만 극적인 전개에 이 결말을 더하면 평작 수준은 되다고 보여지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오토 펜즐러의 조건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작품이에요. 특별히 수수께끼가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칠십네번째 이야기"

미스터리 서점에서 칠십 세가지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을 구입한 주인공은 책에 수록된 "어셔가의 몰락"을 읽은 후,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아래층 한국인 편의점 주인을 트렁크에 넣어 땅에 파 묻는다... 

영미권 작품에 흔한, 1인칭 시점의 정신병자가 등장하는 사이코 스릴러. 하지만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이기는 한데, 지능지수가 너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어린 시절에 저질렀던, 동물들을 땅에 파묻던 행동을 범죄와 연결시키는데 발상이 지극히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동기도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라는 점도 그러하고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루스 렌들같은 심리 묘사를 선보였다면 나름 볼만한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묘사 역시 전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마지막 목격자로 오토 펜즐러와 서점 직원을 등장시킨 건 명백한 패착입니다. 지나치게 억지스러웠어요. 때문에 별점은 1점입니다.

"이름이 뭐길래"

전직 공중 곡예사 렉시 스미스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할머니의 유언으로 그녀가 퇴짜맞았던 원고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내 놓은 뒤, 친구 알비라의 사인회로 향했다. 사인회가 끝난 뒤, 사인회장이었던 미스터리 서점의 오토 펜즐러와 파티를 가지게 된 렉시는, 그곳에서 할머니의 작품 중 한 편이 유명 작가의 작품과 5년 전에 바꿔치기 되었다는걸 알고 경악한다. 

서스펜스 스릴러물로 유명한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단편. 작은 애완동물들을 사랑하고 추리 소설가를 지망했던 할머니 캐릭터 설정이 귀여웠던 작품입니다.

문제는 특별한 반전이 있는건 아니며, 할머니의 작품이 사실은 대단한 걸작들이었다는 결말이 지나치게 안일했다는 점이죠. 렉시가 전직 곡예사였다는 설정도 딱히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아니고요. 분쇄될 뻔 했던 봉투를 더 극적으로 회수했었어야 했어요.

그래도 크리스마스 특별 단편이니 이 정도는 눈감아줄 만합니다. 전개도 깔끔하고 시원시원해서 읽을 만 하고요. 완성도보다는 분위기가 적당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6/02/12

극비수사 (2015) - 곽경택 : 별점 1.5점

1978년 실제로 일어났던 '정효주양 유괴 사건'을 영상화한 작품입니다. 설 특선으로 TV에서 방영해주길래 감상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망이 컸습니다. 실화 바탕의 정통 수사극을 기대했는데, 수사물로는 기대 이하였던 탓입니다. 사건 해결부터가 수사보다 김중산 도사의 예지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에요. 아무리 실화 기반이라도 그렇지, 너무 비현실적이라 와 닿지 않더군요. 그나마도 재미있게 풀어내지도 못했고요. 전체 내용에서 수사가 차지하는 비중도 한없이 낮습니다. 유괴 수사에 초점을 맞추면 됐는데, 필요도 없는 조직 내 더러운 거래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수사물인지 풍자물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에요.
조직 내 암투에 비중을 둘 거였다면 실제 정효주 양이 두 번 유괴당했다는 드라마를 잘 활용하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공 형사의 공을 빼앗아 독식한 중부서 형사들이 두 번째 유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공 형사에게 석고대죄하다시피 사건 해결을 부탁한다는 식으로요. 두 번이나 유괴당하는 것도 굉장히 드라마틱한 일인데 왜 살리지 않았을까요?

또 주인공 공길용 형사(김윤석 분)의 캐릭터도 전형적이라 지루했습니다. 여러모로 그간의 김윤석 캐릭터, 그 외 형사물 주인공들과 상당 부분 겹쳐요. 현실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전혀 도사 같지 않았던 김중산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다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78년 당시를 충실히 구현한 화면은 상당한 볼거리였으며, 수사물로서도 몇몇 장면은 괜찮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극 초반 공길용 형사가 '극비 수사'를 주장하며 범인에게 경찰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최대한 감추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극장에서 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네요. 덧붙이자면, 담배 피는 장면에서 담배에 모자이크를 한 방송국의 행태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거 좀 가린다고 뭔지 모를 것도 아닐 텐데,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2025/12/12

전지적 독자 시점 (2025) - 김병우 : 별점 2점

"나 혼자만 레벨업"과 쌍벽의 인기를 누리는 판타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입니다. 세계가 갑자기 '성좌'들의 관전용 무대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 속 현실로 탈바꿈한 상황에서, 소설의 유일한 독자였던 김독자가 소설 속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는 설정의 작품이지요.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기존 회귀물, 전생물과는 약간 차별화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준 설정입니다. 지난 주에 넷플릭스에 업데이트 되었길래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만 놓고 보면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액션 판타지 장르로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무난한 편이에요. 안효섭(김독자 역), 이민호(유중혁 역) 두 주연 배우의 캐스팅도 잘 어울립니다. 두 사람의 호흡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잘 알겠더라고요. 단점이 뚜렷하게 느껴졌거든요. 우선 CG가 전반적으로 부족합니다. 게임 동영상이나 철지난 중국 무협 영화를 보는 듯해서 몰입을 방해하는데, 그 중에서도 절정부인 최종 화룡과의 결전 장면이 가장 실망스럽습니다. 몬스터들의 디자인 역시 현실감 없이 게임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라 위협감도,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액션도 특별히 합이 잘 맞는다던가, 서로의 특성을 살려 위기를 극복하는 식으로 그려져 있지 못합니다. 유중호의 이기어검술(?) 등 여러 스킬들은 모두 중국 무협 영화 그대로라서 새로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야기 구성도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단순한 게임 스타일로, 이를 극복하면서 나오는 반전이나 복선은 거의 없습니다. 김독자가 소설 내용을 알고 있다는게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고요. 오히려 금호역에서 천인호를 쫓다가 결계에 갇혀 죽기 직전, 갑자기 난입한 이지혜가 구해주는 식으로 우연과 운에 의지한 전개를 보이는 설정 구멍만 더 크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화룡과의 결전에서 유중호가 죽는 장면도 뜬금없습니다. 유중호가 죽은 것 외에는 김독자의 작전대로 흘러간 건데,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실망하고 감정선을 무겁게 끌고 가는 건 납득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추가 아이템을 얻어 칼을 완성해서 화룡을 물리치는데, 그럼 그 전의 작전은 어쩔 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부족한건 이야기 완성도 뿐만이 아닙니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현재 상황이 어떤 구조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명이 부족합니다. '성좌'의 무대라는 전제는 나오지만, 코인, 아이템, 스킬 같은 기본 설정조차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게임적인 설정이라서 그냥 넘어갔다면, 이 영화를 과연 대중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원작과 다른 설정도 문제입니다. 특히 김독자와 작가가 일종의 '게임'을 하는 듯한 설정은 최악입니다. 작가가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다면, 김독자의 전능한 예지 능력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부분이었어요. 여성 캐릭터들도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이 캐릭터성을 갖지 못한 뻔한 설정인데다가, 이지혜는 왜 등장했는지조차 불분명할 정도입니다. 연기도 어색한 부분이 많고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출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길영이가 코피를 쏟으며 사마귀를 조종하고, 그 장면을 본 이현성이 각성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유치합니다. 

결론적으로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 볼 만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원작의 팬이라면 실망할 수 있고, 원작을 모른다면 초반 설정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CG 퀄리티, 각색 방향, 연출 등 여러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8/04/08

술상 위의 중국 - 고광석 : 별점 2.5점

술상 위의 중국 - 6점
고광석 지음/섬앤섬

"중화요리에 담긴 중국" 이라는 책으로 음식과 관련된 중국 문화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알려주었던 고광석 작가가 "" 을 주제로 삼아 쓴 후속작입니다. 전작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현재 판매되는 중국 현대 술을 망라하여 소개하는 '제 1부 중국의 술', 그리고 술과 관련된 다양한 고사와 일화를 소개해주는 '제 2부 술이 빚어낸 역사', 마지막으로 다양한 안주와 주법, 조리법 등을 소개하는 '제 3부 안주와 주법' 이라는 세 부분으로 크게 구분됩니다. 1, 3 부는 각각 100 페이지, 60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총 340여 페이지의 절반 이상이 제 2부에 속해 있고요.

우선 풀 컬러로 도판과 함께 현대 중국 술을 잘 요약하여 소개하는 1부는 아주 근사합니다. 황주와 백주, 노주 등 종류별 구분 및 각각 상세한 유래 설명도 재미있고, 맛과 향기 등은 저자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기록하고 있어서 굉장히 생생한 덕분입니다. 수십 종의 술들이 소개되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건 '마오타이주'의 유래입니다. 저는 그냥 모택동을 위해 만든 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원래부터 귀주 지역에 있던 향토주로 대장정 직전, 홍군이 귀주에 머물며 향토주를 마시며 혁명 의지를 불태웠던 이후 국가 연회용 술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이름도 모택동에서 따온게 아니라 '모태진'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고요.
반대로 '수정방'은 유명세와는 다르게 비교적 최근인 1998년 수정가 양조 시설 발굴 후 개발된 현대 술이며, '공부가주' 역시 공자 집안과 관계가 없는 현대 술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아, 이래서 공부가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현대 술 말고 이 책에서 소개된 전통주를 더 찾아 마셔봐야겠네요.

그러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2부의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옛 고사에서 술이 등장한걸 무작위로 가져다 쓴 탓입니다. 술이 무엇인지, 안주로는 무엇을 먹었는지는 중요하게 소개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술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이야기까지 소개될 정도에요.
자객 예양이 주군의 복수를 위해 조양자를 죽이려하다 잡힌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술과 관련된 부분은 조양자가 예양의 주군 지백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썼다는 언급이 전부거든요. 이게 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그 외의 이야기들도 춘추, 전국 시대와 삼국 시대, 한나라까지는 대부분 잘 알려진 일화들이며, 역시 술이 중요한 이야기들은 거의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워낙 분량이 많은 탓에 아예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술 배는 따로 있다" 라는 말은 오대십국 시절 대주가였던 주유약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몸집의 그가 어떻게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지 왕이 묻자, "술을 위해서 몸 안에 장이 따로 있다" 고 답했던게 유래입니다.
근대로 넘어온 이후의 이야기들도 비교적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열국지", "삼국지", "초한지" 등 유명 고전을 벗어난 시점은 잘 모르는 저에게는 중국 근, 현대는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마오타이주를 국빈용 술로 정한 주은래를 소개하면서, 그는 굉장히 꼼꼼하고 확실한 성격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화들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아마도'라는 모호한 표현을 싫어했다는데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군 사령관 허세우를 술로 제압하고 주도에 대해 훈계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고요. 참고로 이 허세우는 소림사 출신으로 실제 무술 고수였다는데 좀 찾아봐야겠다 싶을 정도로 독특했습니다.
또 두보와 이백 등 술을 좋아했던 유명 인사들의 소개와 그들이 술을 마시고 술에 대해 쓴 시들도 좋습니다. 워낙 멋드러진 시들이니 당연하겠지요? 개인적인 베스트는 왕안석과 그의 친구 정협 사이에 오간 글입니다. "술이 임자를 만나면 천 잔도 적고, 뜻이 맞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많다"는데, 지금 읽어도 확실한 울림을 주는 멋진 글이에요.
아울러 제가 원했던, 술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역사 속 잡학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두보가 이백을 기려 지은 시 중 '이백은 한 말의 술이면 시 백수를 짓는다' 고 읆었는데 이 한 말이 바로 두주 (斗酒)입니다. 우리도 흔히 쓰는 '두주불사' 의 두주와 같은 말이지요. 한 말, 두주는 열 되와 같은데, 주나라 때는 2리터였지만 당나라 때는 6리터, 청나라 때는 10리터가 되는 등 시대에 따라 변화된 단위입니다. 이백의 주량은 당나라 기준으로 술 6리터, 돗수가 약한 소흥주를 마셨다 쳐도 어마어마합니다. 일찍 죽은게 이해가 됩니다.

마지막 3부는 그냥 유명한 안주거리, 음식 소개와 여러 요리에 쓰이는 한자어 소개로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부록같은 느낌입니다. 한자어 부분만 잘 기억해 두면 중국 여행갔을 때 유용하겠다 싶은 정도에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읽는 재미가 아주 없지는 않고 나름 건질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만 '술상 위의 중국' 운운하며 술과 관련된 중국 역사와 문화를 논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분명 기대 이하고요. 술이나 안주의 정체가 명확하고, 정말로 술이 큰 역할을 한 이야기에 집중해서 더 자세하게 풀어내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중국 술과 요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18,000원이라는 가격은 과한 감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4/07/06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세기의 재판 이야기 - 장보람 : 별점 2.5점


딸아이 논술용 교재인 청소년용 법 관련 미시사 서적. 제목 그대로 어떤 식으로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12개의 재판에 대해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재판 및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소크라테스의 재판 : 다수결이 과연 옳은 것인지?
  2. 토머스 모어의 재판 : 현행 법과 어긋나더라도, 옳은 양심을 처벌할 수 있는가?
  3. 세일럼 마녀 재판 : 제대로 된 근거 없이 타인을 비방하는 것에 대한 문제
  4. 드레퓌스 재판 : 억울한 상황에서는 여론의 힘도 중요하다
  5. 2차 대전 전범 재판 : 전쟁에서 일어났던 범죄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벌해야 하는가?
  6. 로자 파크스 재판 : 인종 차별 악법 없애기
  7. 미란다 재판 : 법에서는 결과 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하다.
  8. 제인 로 재판 : 낙태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9. 워터게이트 재판 : 대통령도 탄핵될 수 있다
  10. 카렌 앤 퀸란 재판 :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
  11.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 : 부도덕한 기업과 싸우는 방법
  12. 벌링턴 산업 재판 : 성희롱은 기업도 책임져야 한다.
주요 쟁점들 모두 한 번 생각해볼만한 것들이며, 과거 사례를 현대에 빗대어 현대 재판 설명도 곁들여 주고 있는게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형사 소송과 민사 소송의 차이라던가 3심 재판의 기능 및 조건, 중재 등 여러가지 현대 법률 용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미란다 재판 이야기에서처럼 국내 판례를 예시로 들어주는건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음주운전이 의심되는 피의자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강제 연행하여 음주 측정을 한 결과는 위법한 수사이므로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를 통해 '공권력에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걸 알려주는데, 범죄임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이런 한계를 두는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도 생기네요.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을 통해 중재 절차에 대해 알게된 것도 수확입니다. 법원의 판결 없이 당사자들끼리 합의하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걸 그동안은 잘 몰랐었거든요. 이런 방식은 크게 조정과 중재가 있는데 조정은 당사자 한쪽 또는 양쪽이 요청해 제3자를 조정자로 선임하여 해결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 중재는 반드시 '쌍방이 요청'한 후 중재인이 판정하면 양 당사자 동의 없이 바로 받아들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랍니다. 우리나라도 민사 조정 신청 절차가 별도로 있고, 소송 비용도 1/10이라고 하니 필요하다면 적극 고려해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재판보다는 재판 관련 상황에 더 촛점이 맞추어진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대표적인게 드레퓌스 재판입니다. 이는 누명을 쓰게된 상황, 판결을 받은 뒤 벌어진 일련의 과정 등이 재판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재판 이야기라고 보기 어려워요. '인종 차별', '낙태권', '존엄사' 등도 해당 이슈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재판'이라는 수단으로 설명할 뿐입니다. 
또한 절반 이상의 내용이 현대가 무대라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역사'를 바꾼 재판이라면 과거 이야기부터 소급해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현대 재판을 가지고 설명하더라도, 미국 사건만 가지고 온 것도 불만스럽고요. 재판들도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주었어야 했습니다. '벌링턴 산업 재판'이 여기 사건들과 어깨를 나란히할만한 사건인지는 솔직히 갸우뚱합니다.
소크라테스 재판 이야기에서 '다수결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답이 없이 다른 법적 이론 - 시민 불복종, 저항권 - 을 설명하는 것도 경우에 맞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저런 이슈를 한번 쯤 고민해봐야 하는 청소년이라면 모를까, 제 기대에는 별로 값하지 못했습니다.

2018/10/13

달팽이 더듬이 위에서 티격태격, 와우각상쟁 - 권오길 : 별점 3점

오랜 생물학 지도 경험이 있는 저자가 우리말 속담, 고사성어, 관용구에 서린 생물들에 대해 쉽게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입니다. 딸아이가 커가면서 속담에 관심을 많이 가지길래 저도 공부나 해 볼까 해서 구입하였는데, 의의로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속담, 옛말 자체는 잘 알려져 있지만, 잘 몰랐던 등장 생물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청출어람"이 "쪽빛"에 관련된 이야기라는건 누구나 알 겁니다. 하지만 쪽이 "상떡잎식물 마디풀과의 한해살이 풀로 동양에서는 남, 서양에서는 인디고라고 부르는 염료 식물이다. 천연 염료인 쪽은 석회와 잿물을 써서 산화, 환원 과정을 거쳐야 비로서 쪽빛을 얻을 수 있다. 자체에 방충, 방부 기능이 있다..." 는건 잘 몰랐는데 이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식입니다. "결초보은"도 뜻은 누구나 알지만 이 풀은 우리나라에서도 자라는 "그령"이다, "부평초"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개구리밥"이다, "용 빼는 재주"의 용은 녹용을 뜻한다 등도 처음 알았네요.

몰랐던 속담이나 옛 말을 접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가물치 콧구멍이다"라는 속담처럼요. "코빼기도 안보인다"는 뜻입니다. 가물치 콧구멍은 실제로 잘 보이지 않는다네요. 아울러 우리의 민물고기 가물치가 흘러들어간 일본, 미국 등에서 가물치는 여전히 먹이사슬 최상단으로 다른 생물들을 압살하고 있다니 나름 자부심도 느껴집니다. 제목에도 사용된 "와우각상쟁" 역시 처음 들은 말인데, 달팽이를 옛날에 그 느린 행동을 소에 빗대어 "와우"라고 불렀으며, 더듬이 넷이 서로 째려보고 다툰다고 생각하여 "와우각상쟁"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집안, 식구끼리 다투고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유래를 처음 알게 된 옛 말도 있습니다. "뚱딴지 같은 소리"에서 뚱딴지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처음 알았는데 '돼지감자'이며, 국화과 해바라기속에 드는 여러해살이 풀로 꽃, 줄기, 잎이 하나도 감자같지 않은데 감자꼴 덩이 뿌리가 달려있는 게 그 유래일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야말로 엉뚱함 그 자체인 셈이죠. "호박꽃" 이 왜 박색의 대명사인지에 대한 유래도 재미있습니다. 옛부터 곡식을 심기 힘든 곳곳에 호박을 심어서, 너무나 흔하게 꽃을 보게 된 탓이라네요. 호박꽃이 못나 보이지 않아 유래가 항상 궁금했었는데 속이 다 시원합니다. 그 외에도 "꿩 대신 닭" 은 평양 전통 요리 꿩만둣국을 만들 때 만두소를 꿩고기로 채워야 하지만 구하기 힘들어 닭고기로 채운 것이 유래, "밴댕이 소갈머리"는 밴댕이가 그물에 걸려 잡히면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파닥파닥 날뛰다가 금세 제 풀에 죽어버리는 습성이 유래입니다. 몸집에 비해 내장이 별로 없어서 해부학적으로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깨알같은 해석도 재미있었어요. 사마귀 이야기에서 사마귀의 다른 말인 '버마재비'의 유래는 '무서운 범 아저씨', 즉 '범 아재비'를 소리나는대로 적었다던가 "옹고집"은 아주 고집스러운 매에서 따온 "응應 고집"에서 생겨났다는 등의 어원 유래도 인상적이었고요.

먹을 수 있는 생물의 경우 요리법 등에 대해서도 짤막하게나마 소개해 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편에서 된장 담그기에 대해 아주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것처럼요. 앞서 설명드린 밴댕이 이야기에서 "오뉴월 밴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뉴월 제철에는 밴댕이 회가 정말 맛있다는데,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어집니다. 요리, 맛에 대해 나름의 이론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가재는 게 편" 에서 똑같은 종이라도 민물보다 바다의 것이 더 맛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그러합니다. 바다 생물은 고농도의 짠물에 살기 때문에 몸에 단백질, 지방과 같은 양분을 많이 저장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라네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한 내용이 가득한데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는 교양 서적이라기 보다는 저자의 추억이 담뿍 담긴 에세이 형식으로 쓰여졌다는 점입니다. 쉽게 읽힌다는 장점은 있지만 교양, 과학 서적으로의 형식이 갖추어졌더라면 저같은 고연령 독자에게는 더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금은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설명하는 식이라 제가 읽기는 조금 거북한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두번째는 도판이 부실하다는 점입니다. 위에 소개해드린 생물들의 도판이 멋스러운 일러스트, 최소한 디테일한 사진으로라도 곁들여 졌더라면 정말 좋았을텐데 몇몇 '삽화' 가 전부입니다. 공들여 그린 그림이지만 아동용 도서 삽화 수준이라 생물에 대해 디테일하게 알려주는 도판이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한 멋진 책입니다. 제. 딸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권해주고 싶을 정도이며, 후속권인 "소라는 까먹어도 한 바구니 안 까먹어도 한 바구니" 를 바로 구입할 정도로요. 그리고 저자의 글을 토대로 최불암 할아버지가 옛 말과 생물을 소개하는 탐방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지역에 가서 특정 옛말, 속담에 관련된 이것저것을 찾아보고 마지막에 해당 소재를 재료로 한 음식을 먹는 형식이라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요. 최소한 저는 보고 싶습니다.

2022/07/23

[2022년 버젼] 미스터리 소설 추천 35선. 신간부터 인기 고전 명작까지 랭킹으로 소개! from SAKIDORI

화제가 되는 여러가지들을 알기 쉽게 소개해준다는 일본의 웹 매거진 SAKIDORI에서 선정한 순위입니다.

개인적 평가로는, 초보자용과 반전계 랭킹은 나름 괜찮습니다. 초보자용은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제작되어 '친숙하고 읽기 쉬운' 측면을 많이 고려한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딱히 대단한 걸작이라고 보기 힘든히가시가와 도쿠야 작품 순위가 높은 점에서 추측해보자면 말이지요. 이 중 "푸른 불꽃"과 "거울 속 외딴성"은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2022.10.08에 읽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습니다.

반전계는 "까마귀의 엄지" 빼고는 다 읽어본 셈인데 ("가위남"은 영화로), 순위는 모르겠지만 선정 자체는 적절해 보입니다(*"까마귀의 엄지"도 2023.06.23에 읽었습니다). 일본판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표지의 치명적인 귀여움은 인상적이에요.

그러나 해외 미스터리 추천 랭킹은 좀 불만스럽습니다. 우선 비극 시리즈의 최고 걸작은 "Y의 비극"이라는건 정론입니다. "X의 비극"이 아니라요. "오페라의 괴인"이 미스터리에 속하는지도 의문이며, 잘 모르는 작품이 무려 세 편이나 있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수많은 걸작들을 제치고 애거서 크리스티, 코난 도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까요? 이는 찬찬히 읽어보고 평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보자용 미스터리 추천 랭킹 

반전계 미스터리 소설 추천 랭킹

해외 미스터리 소설 추천 랭킹 

2023/10/07

방황하는 칼날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방황하는 칼날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번 생긴 ‘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령 가해자가 갱생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악’은 피해자들 속에 남아, 영원히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나가미네가 아내와 사별 후 홀로 키워왔던 딸 에마가 강간 살해당했다. 좌절한 나가미네에게 범인이 도모자키와 스가노라는 메시지가 전달되었고, 메시지 속 주소로 도모자키의 집에 잠입한 나가미네는 에마가 강간당하는 동영상을 확인하고 분노에 휩싸여 도모자키를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스가노가 있다는 나가노 현으로 향했다. 도모자키 살해범이 나가미네라는걸 알아낸 경찰 역시 그의 뒤를 쫓는데....

우연찮게 제 구글 홈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한국 영화 소갯글이 떳길래 잠깐 찾아보았다가 급 호기심이 생겨 구독 중인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무섭다 알고리즘!

작품은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도 가벼운 형을 선고받는게 과연 옳은지를 비판하는 사회파 범죄 소설입니다. 미성년자 범인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극도로 흉악하게 설정한 덕분에 읽는 내내 나가미네에게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딸이 강간 살해당했다면 어떤 아버지가 가만 있을 수 있을까요? 심지어 그 상황의 동영상까지 보았다면 피가 꺼꾸로 솟는다 정도의 말로는 부족한 분노에 휩싸이는게 당연합니다. 때문에 범인들 - 특히 도주한 스가노 - 이 나가미네에게 합당한 응징을 받기 원하며 응원하면서 읽었습니다. 
미성년자 범죄에 대해 강력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되었네요. 요새처럼 아이들 성장이 빠른 시기에 오래전 잣대를 기준으로 판단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저는 중학생부터는 성인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관용 원칙으로요. 하긴 그래봤자 술을 먹어서 심신 미약이었다던가, 초범이라던가, 깊이 뉘우치고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빠져나올 놈들은 다 빠져나오는게 현실이라는게 더 씁쓸하기는 합니다만.
최근 언론에 언급되는 여러 학부모들의 민원(?)과 같이, 미성년자 범죄자들의 부모들의 눈 뜨고 못 볼 작태들도 잘 묘사됩니다. 이런걸 보면 미성년자 범죄는 그 부모도 함께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 역시 무관용 원칙으로요.

하지만 나가미네가 결국 응징에 실패하고 경찰에게 사살당한다는 결말은 씁쓸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 그리고 경찰 수사 과정과 경찰들의 생각을 통해 경찰의 자괴감 -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어떤 보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나?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 ‘악’을 벨 힘을 가지고 있나? - 을 잘 드러내기는 하나 독자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어요.
특히 경찰 히사쓰카 반장이 나가미네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는 반전은 최악이었습니다. 자수를 결심했던 나가미네가 사살당한건 히사쓰카 반장이 준 정보 탓입니다. 이렇게 애매한 정보만 전달하고 수사는 수사대로 진행하기 보다는 직접 수사를 뛰는 마노, 오리베와 같은 부하들을 설득해서 더 적극적으로 나가미네를 도와주는게 맞지 않았을까 싶어요. 과거 유사 범행의 수사를 맡았던 경험 때문이었다는 동기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정보를 나가미네의 핸드폰으로 보내는 것도 당황스러웠어요. 잠깐이라도 핸드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하면 현재 위치가 바로 추적되지 않나요? 경찰이 이 정도 수사도 하지 않는다는건 솔직히 억지스러웠습니다.

짜임새도 헐겁습니다. 중간에 매스컴이 단순히 화제와 시청률을 위해 보도를 벌이는 장면은 그냥 뻔한 이야기를 답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펜션 여주인 와카코가 나가미네에게 협력자가 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나가미네에게 협력자가 필요했던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은신처를 제공받으며 스가노 추적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그녀 없이도 이야기를 풀어갈 방법은 많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없으면서 하룻밤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찾다가 스가노가 폐업한 펜션에 숨어 있을 수 있다는걸 깨닫는게 훨씬 자연스러웠을거에요.
그리 기대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추리적인 요소도 거의 없습니다. 나가노에 있던 나가미네가 범인 스가노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아이치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정도만 약간 머리를 쓸만 했을 뿐입니다.

한국 영화 소개를 보니 제가 언급한 단점들을 인지했는지 보다 명확하게 이야기를 정리한 듯 하더군요. 펜션 여주인 와카코의 존재를 지우고, 직접 수사에 뛰어든 형사가 정보 제공도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결국 나가미네가 사살당하는건 변함이 없던데, 자수해서 집행유예를 받은 뒤, 스가노를 끝없이 추적한다는 결말은 어땠을까 싶네요. 다른 피해자 가족들과 연대해서요. 스가노 같은 녀석 때문에 인생을 망칠 이유는 없습니다. 군자의 복수는 몇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이고요. 살아서 스가노와 그 일당, 가족들에게 영원한 지옥을 선사하는게 복수로서 더 의미가 있었을겁니다. 지금의 죽음은 그냥 개죽음이니까요.

하여튼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몰입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완성도와 결말 부분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덧붙이자면, 범죄자 가족이라고 모두 고통받아야 하는지? 에 대해서 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이 <<편지>>를 통해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범죄의 종류와 범죄자 상황을 다 고려해서 선별적으로 비난하기는 불가능하니, 참 어려운 이야기지요....

2007/08/05

디 워 (D-War, 2007) - 심형래

스토리야 뭐 워낙 잘 알려져 있으니깐 생략하기로 하고... 전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뜬금없고 난데없는 장면들의 연속일지라도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는것은 아니며, 배우들이 연기를 발로 하더라도 어쨌건 CG로 구현된 이무기와 용이 너무 멋있고 대단했기에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거든요. 애국심을 떠나서라도 화려한 이무기의 액션은 최소한 저에게는 8000원의 값어치는 충분히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용은 정말! 캐감동이더군요!

조금 조사해보니 어떤 영화감독의 글로 파문이 좀 일었나 봅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에게는 그 감독의 "질투" 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B급 영화, 혹은 독립영화로 시작하여 메이저로 진출한 사람이 널리고 널린 국내 영화판에서 아직도 독립영화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는 불만이었을 수는 있겠지만.... 뭐 그것도 그 사람 실력이니까요. 

어쨌건, 로저 코만이 이야기했죠. 돈을 들인것이 화면에 보여야 한다고. 국내 대작 중에 들인 만큼의 돈이 화면에 보였던 작품이 어떤 것이 있었죠? 배달의 기수였던 <실미도>? 작품의 수준을 떠나, 디-워는 충분히 그 돈이 화면에 보였기에 저는 만족합니다. 1시간 30분 동안 저는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PS : 덧글을 보니 제가 뭔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이송희일 감독의 글 전문을 다시 읽고 수정하며, 아울러 몇 줄 더 적습니다.

1. 350개 어쩌구 했던 발언은 제가 잘못 본 것이었군요.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700억이란 돈을 끌어다 한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분명 열정이고 재능입니다. 독립영화가 어렵다고 넋두리는 그만 하시길. 말씀하신 열정의 쓰나미로 영화만 찍지 마시고 열정적으로 돈을 끌어 오세요.

2. 전 이야기가 개판이라도 즐거웠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700억짜리 (아니면 그게 얼마가 됐든) 이무기와 용의 향연을 보러가서 충분히 즐거웠기 때문이죠. 디-워의 경우는 허접함이 극의 재미를 더하는? B급 영화의 풍모가 느껴져 더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재미는 애국심과 상관없는 것으로서 저는 단지 한명의 관람객으로서 돈 8000원이 아깝지는 않았습니다. 

3. 그리고 마지막으로 왠 기타노 다케시? 전혀 쟝르가 다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