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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테미스의 검 - 나카야마 시치리 / 이연승 : 별점 3점

테미스의 검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동족 인간이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불손하고 오만하네. 구로사와 재판관 (시즈카 재판관의 스승) 

쇼와 59년 (1984), 부동산업자 구루마 부부가 살해당했다. 우라와 경찰서 검거율 1위인 나루미 경부보는 유력한 용의자 구스노키 아키히로를 불법으로 연행하여 심문한 뒤 자백을 이끌어냈다. 나루미의 파트너인 신참 형사 와타세는 나루미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말없이 따랐다.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아키히로는 결국 몇 년 뒤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헤이세이 1년 (1989) , 나루미의 은퇴 후 도지마와 파트너가 된 와타세는 가미키자키에서 발생한, 고급 주택에서 아이와 아이 엄마가 강도에게 살해된 사건 수사에 나섰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는 환경이라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도지마와 와타세 컴비는 이 사건이 단순 빈집털이 사건인 오하라 현장과 유사하다는걸 알아낸 뒤, 흉기와 도구에서 열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확인하고 관련자들을 수사해 나간 끝에 범인 사코미즈를 체포했다. 그리고 와타세는 이 사건이 쇼와 59년 부동산업자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는걸 깨닫고 심문을 통해 사코미즈가 진범임을 밝혀냈다. 

와타세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조직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지만, 시즈카 재판관 등의 조언을 받고 사코미즈의 조서를 공개했다. 이후 언론의 대대적인 공세와 함께 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좌천되거나, 해임되고 말았다. 그러나 핵심 수사관이었던 나루미는 이미 퇴임한지 3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리고 와타세는 내부 고발자로서 온다 검사로부터 보호받아 처분에서 빠져나갔다. 와타세 본인은 이에 대해 크게 자책하며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23년 뒤인 헤이세이 24년 (2012).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코미즈는 출소 직후 공중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수사 1과 1반을 맡는 경부가 된 와타세는 독자적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등으로 접했던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편입니다. 잘못된 수사와 판결에 의한 '원죄'를 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왜 가해자보다 피해자 가족이 더 비참해져야 하는지, 흉악한 살인범도 인권이라는게 있는지 등 여러가지 질문을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회파스러운 소재에 더해진 본격 추리라는 작풍이 작가의 특징인 듯 한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에요. 특히 '재판, 특히 사형 판결을 내린다는게 얼마나 무거운 행위인지' 알려주는 작품은 여러 편 보아 왔지만 묵직한 내용을 추리적으로 잘 포장한 작품은 "데이비드 게일"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그런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이야기는 시대순으로, 사건별로 구분되어 전개되지만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사건 용의자 아키히로의 자백을 받아내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강도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진범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사에 대한 묘사는 빼어납니다. 우선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 사건에서는 나루세 경부보가 용의자 아키히로를 옭아매는 조작 수사와 그 결과에 의한 재판이 아주 상세하고,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살인 사건에서는 와타세 형사의 추리에 이은 수사에 대한 설득력이 높습니다.
모자 살인 사건 범인은 '열쇠업자' 일거라는 착안이 특히 빼어납니다. 범인은 도주하면서 직접 만든 자물쇠 따는 도구인 '피크'를 버렸는데, 와타세는 다시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뒤 관련자 수사에 나서 범인을 체포하게 되거든요. 이후 범인 사코미즈가 전편에 등장했던 부동산업자 살인도 저질렀다는걸 알아차리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중반 이후, 진범 사코미즈가 모범수로 감형되어 23년 후 출소하자마자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 다룹니다. 앞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수사 중심이지만, 의외로 본격 추리물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알리바이 조작, 흉기 은닉과 같은 정통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와타세 경부가 범인인 아키히로의 부친을 찾아가 사건 시각에 경운기에 탔던건 치매에 걸린 아내이고, 흉기는 농기구인 경운기 부품이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추리쇼와 다를게 없고요. 여기에 사코미즈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반전 -그를 죽이려는 온다 검사의 음모였다는 - 까지 더해져 추리적으로는 아주 풍성한 편입니다.

주인공인 와타세 경부도 매력적이에요. "연쇄 살인범 개구리 남자"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수사 기계처럼 등장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납니다. 과거 원죄를 저지른 과오를 깊게 인식하고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수사 기계보다는 인간적인 모습, 고뇌하고 고민하는 입체적인 모습이 많이 보여져서 좋았습니다. 내부 고발자라 주위의 눈총을 받는 탓에 출세를 포기하고 범인 체포에 열중하는 모습도 설득력 높고요. 작품 속 진짜 수사 기계인 나루미 경부보는 알고보니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는, 자기 중심적인 악당이라서 대비가 강렬했던 탓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 같습니다. 본 작품이 와타세 경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라는데, 후속권도 계속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개구리 남자"의 주인공이었던 고테가와의 카메오 출연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진짜 흑막은 온다 검사!'라고 내세운 반전은 지나쳤습니다. 초반에 정의로운 모습을 보였던 온다 검사가 부동산 부부 살인 사건의 목격자로, 사건 당시 현장 근처 러브호텔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범인을 목격했지만 나서서 증언하지 않은 바람에 애꿎은 아키히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다는 설정까지는 그럴싸 합니다. 범인 사코미즈도 '커플에게 들켰지만 경찰은 찾아내지 못한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오는 밤에 커플이 사코미즈의 얼굴을 기억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거니와, 사코미즈가 당시 목격자인 온다 검사의 얼굴을 기억하여 협박하려 했다는건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려 28년 전 비오는 밤에 잠깐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또 와타세 경부의 수사처럼, 28년 전 사건의 첫 목격자가 당시 '유명 연예인을 닮은 사람'을 보았던걸 떠올린 덕분에 그 선을 수사하여 진상을 알아냈다는건 그나마 말은 됩니다. 허나 이 역시 그 연예인 닮은 사람이 진짜 그 연예인이었다는건 지나친 우연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불확실한 목격 증언에 기대는 것 보다는, 사코미즈가 출옥한다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보낸 누군가를 상세히 캐 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사코미즈가 아키히로 부친에게 살해당한다는건 더욱 억지스러웠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 가족인 부동산 업자 부부의 딸이나, 모자 살인 사건의 남편이 살해했다면 말은 됩니다. 하지만 아키히로의 부친이 진범 사코미즈를 살해한다? 부친이 원죄 사건에 대해 복수를 하고자 하면 최우선 목표는 나루미 경부보가 되어야 합니다. 사코미즈는 원죄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아키히로가 사형 판결을 받고 자살한건 경찰의 무리한 수사, 검찰의 무리한 기소, 그리고 이를 제대로 확인못한 재판관의 잘못이니까요. 그리고 와타세 경부도 이야기 하듯, 무려 28년을 (아키히로가 자살한 것부터로는 25년 쯤?)참고 살다가 급작스럽게 복수를 결심한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 세 명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온다 검사는 어쩔 셈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사코미즈를 없애기 위해서는 세 명의 피해자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정도로는 불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애초에 편지를 보내는 것 보다는 그냥 사코미즈의 주장을 무시하는게 정답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중반부에서 경찰 조직이 과거의 실수를 알아채고 증거 (조서)까지 확보한 와타세가 이를 밝히려하자 철저히 격리시키고, 심지어 폭행까지 저지르는 과정이 지나치게 뻔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조직의 잘못을 알게 된 언론도 대중과 영합하여 총 공격에 나서며, 관계자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보호되고 처벌받으며 이 와중에 지나친 관료 주의가 대두되는 등등 모두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묘사들이에요. 게다가 와타세가 관계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며 사죄하는 모습은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당연한 결과인데 말이지요. 본인이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것은 의아해할 수 있어도, 이는 조직에서는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내부 고발자는 보호하는데 마땅하니까요. 와타세는 나루미 경부보만 처벌받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까요? 말리는 선배까지 힘으로 눌러버리던 모습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묘사는 와타세 경부라는 캐릭터를 위해서는 불필요했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비록 단점은 있지만 묵직한 주제를 추리적으로 재미있게 포장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원죄에 대한 뻔한 묘사는 조금 줄이고, 온다 검사 수사에 조금만 더 설득력을 부여했더라면 별점 4점도 충분했을거에요.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니만큼,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2023/04/22

침저어 - 소네 게이스케 / 권일영 : 별점 2.5점

침저어 - 6점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예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사 2과 소속 후와 경부보는 일본의 국회의원인 중국 공작원 - '침저어' - 멕베스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수사에 가담했다. 곧 거물 정치인 아쿠타가와 의원이 유력한 멕베스 후보로 떠올랐다. 아쿠타가와의 비서 이토 마리가 중국 공작원으로 의심받는 우춘시엔과 만났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이토 마리가 실종되었고, 그녀의 노트북에서는 비밀 문서인 요코다 페이퍼까지 발견되어 혐의는 더 짙어졌다.
망명 요청을 한 중국 외교관 류잉캉의 증언으로 후와는 멕베스는 조작이라 여기게 되었지만, 수사본부를 장악한 고미 일당은 아쿠타가와가 멕베스이며, 후와는 중국 밀정인 두더쥐로 생각했다. 후와는 어쩔 수 없이 멕베스 사건 지휘자 도쓰이 관리관에게 직접 보고했고, 류잉캉의 증언으로 또다른 거물급 정보원 '시벨리우스'를 체포해서 멕베스 조작설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고미는 직접 류잉캉을 심문하러 나섰지만, 중국 공작원들에게 습격당해 류잉캉은 빼앗기고, 고미마저 치명상을 입었다. 후와의 직속 후배이자 부하 와카바야시는 이 사건이 자기 탓이라 자책했고, 그가 두더쥐였다는게 밝혀졌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포섭되었었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와카바야시의 행방을 찾는 무리에 후와마저 납치당했다.
풀려난 후와는 도쓰이 관리관에게 베이징의 책략을 폭로했다. 알고보니 멕베스는 아쿠타가와 겐타로가 맞았고, 류잉캉의 증언을 포함한 모든 건 이를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첩보 미스터리. 일본에서 국제적인 정보전이 펼쳐진다는 설정이 특이했는데, 흡입력은 상당합니다. 거물 공작원 멕베스가 누구인지, 멕베스의 존재 자체가 가짜가 아닌지, 경찰 내부의 두더쥐는 누구인지 등 다양한 수수께끼가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국회의원으로 대표되는 입법부와 경찰 조직간의 역학 관계, 고미 일당과 후와 경부보간의 알력 다툼 등 여러 갈등도 재미를 더해주고요.

하지만 기본적인 이야기 전개에서 헛점이 느껴지는건 아쉽습니다. 우선, '멕베스'의 존재가 드러난건 수사본부 발족 2개월 전 미국에 망명했던 중국 고위층 인물 후샤오밍의 증언 때문입니다. 중국은 이 증언 자체가 가짜라고 여기게끔 공작을 벌이고요. 그래서 류잉캉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죠. 목적은 당연히 멕베스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 번째는 왜 아쿠타카와의 비서 이토 마리가 우춘시엔과 만나는걸 방치했냐는 것입니다. 수사가 2개월 뒤에 시작되었으니, 이 만남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멕베스가 아쿠타카와가 아닌가 생각되었지만 그건 조작이었다!'보다는 '멕베스는 조작으로 누구인지 실체가 없다!' 쪽이 훨씬 안전한 선택입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왜 이토 마리를 납치해서 살해하고 노트북에 비밀 서류가 있다고 조작했냐는 것입니다. 마리는 중국이 죽인걸로 보이는데, 앞서 말했듯 중국은 멕베스라는 존재 자체가 가짜라고 여기게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쿠타카와가 의심을 살 단서를 조작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래서야 아쿠타카와에게 수사가 집중될 뿐입니다. 게다가 이토 마리의 만남은 후와의 수사로 문제가 없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자료는 '두더쥐' 와카바야시에게 넘겨주었으니 중국도 그 사실을 입수할 수 있었고요. 도대체 중국은 무슨 생각이었던걸까요?
일본측 목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아쿠타카와가 멕베스라는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쿠타가와는 이중 스파이였으니까요. 수사에 나서지 않으면 중국이 이상하게 여길테니 외사과를 투입하기는 했지만, 아쿠타가와의 정체가 드러날 수사를 진행할 필요는 없었어요. 드러난 증거로 소모적인 수사만 시키다가, 멕베스가 조작된 정보라는 것만 고미 일당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고 수사본부를 해산하면 됐습니다. 물론 이토 마리가 실종되고 노트북에서 기밀 정보가 발견된 이상, 누가 보아도 아쿠타카와를 수사해야 하는 상황이라 수사를 중지시키는건 어려워졌긴 했습니다만. 더더욱 중국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지는군요.
차라리 멕베스는 다른 누군가라고 후샤오밍이 명확하게 말했고, 중국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멕베스는 아쿠타카와다!"라고 속이기 위한 작전을 펼쳤으며, 일본은 "아니, 우리는 차라리 후샤오밍의 증언 자체가 조작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래"라고 받아치다가 후와에 의해 "알고보니 멕베스는 OOO이었다!"라고 드러나는 전개가 단순하지만 더 설득력있었을 겁니다.

이런 알 수 없는 양국 행태에 비하면 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와카바야시의 두더쥐 활동은 차라리 깔끔한 편이기는 합니다. 일본측 - 도쓰이 관리관 - 이 와카바야시도 이중 스파이로 이용했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았고요. 문제는 와카바야시를 커뮤니케이션이 지극히 떨어지는 기묘한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감정이입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른 인물들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후와 경부보는 일본 하드보일드물에 흔하디 흔한 한 마리 고독한 늑대, 고미 일당은 전형적인 깡패 형사들이고 그 외 인물들도 스테레오 타입에 가까운 탓입니다. 모든걸 알아챈 후와가 지인이자 어둠의 실력자 왕 영감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사라지면서, 뭔가 후속작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단점을 잔뜩 언급하기는 했지만, 재미는 있습니다. 첩보물로의 미덕은 잘 살아있고요. 란포상 수상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재미삼아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덧붙이자면, 뒤에 함께 수록된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소감이 놀랍습니다. 작가는 명문대 와세다 대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가 "빤한 인생을 살기 싫다" 였다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망해가는 사우나, 어두컴컴한 만화 카페 등에서 일했고 만화 카페에서조차 급여와 직책이 오르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껴 사표를 냈다니 놀랍습니다. 1967년 생이니 이런 결심을 했을 때에는 이미 일본에서도 버블 경제는 끝나서 그렇게 만만한 삶을 살기는 힘들었을텐데 말이지요. 또 정작 발표한 작품은 비교적 뻔하다는걸 보면 인생관, 가치관과 결과물이 비례하는건 아니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2021/03/06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6점
권일용.고나무 지음/알마

권일용은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입니다.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형사로 근무하다가 발탁되었지요. 감식 업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걸 눈여겨 보았던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윤외출의 덕이었습니다. 그 뒤 여러 수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프로파일러로서의 입지를 굳혔고요. 

이 책은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서 수사에 참여했던 6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국내 수사 기관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시작되어 성장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논픽션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2001년 조현길이 저질렀던 여아 살인 사건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피해 여아 사체를 냉동실에 보관해서 사체 등 부분에 생겨난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긴 눌린 흔적으로 냉장고 모델을 찾아낸 겁니다. 해당 냉장고는 업소용 중대형이었고, 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직접 확인한 단서를 토대로 권일용은 한국 범죄 사건 수사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서가 수사에 기여한 바가 있고, 보고서 속 범인상이 진범 조현길과 대체로 일치했던 덕분에 이후 국내 범죄 수사에서도 프로파일링이 활용되게 되었고요. 국내 프로파일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뒤이어 권일용이 투입되었던 2003년 유영철 사건에서는 연쇄 살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실패를 겪게 됩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유영철이 경찰 수사 방향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유영철은 범행 수법을 바꾸었고, 그 탓에 권일용은 이전 사건과 이후 사건을 연결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정통 수사기법의 한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수사팀은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고 피가 묻은 상태에서 도망을 갔는데도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량을 이용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수색에 집중했지요. 하지만 권일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걸 깨닫고,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들어맞았습니다.
최초 노인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 교회가 있었던게 나름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권일용의 생각대로였습니다. 유영철은 '교회가 옆에 있지만 바로 앞에 사는 이 사람도 무참히 죽는다’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체 매장 현장에 표식을 한건 완전히 헛다리를 짚기는 했습니다. 권일용은 범인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추하고 되돌아볼 것이라는 낭만적인 추정을 했는데, 유영철은 그냥 '사체를 묻은 데를 또 파면 귀찮아서' 표시를 한 것 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순한 실패보다는 나름 성과가 있었던 유영철 사건이 있었던 덕분에 권일용은 더욱 성장했고, 경찰 내에도 프로파일링 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뒤이은 정남규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순 강도 상해범으로 체포되었던 정남규가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임이 드러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자백을 권일용이 이끌어내게 되거든요.

2009년 강호순 사건에서도 권일용 팀의 분석이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범인은 '호의동승'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고, 이를 위해 고급차를 탔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일거라는 분석이었는데 실제로 강호순은 에쿠스를 탔으며, 범행 당시 깔끔한 양복을 입기도 했고, 차 대쉬보드 위에 개와 함께 있는 사진을 장식해 놓는 등 치밀하게 본인을 위장했다고 밝혀졌으니까요. 주변 사람들 평가도 굉장히 좋았다고 하지요

강호순 사건 중간에 맡았던 2007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아동 성범죄자 성유철 사건은, 프로파일링의 활용보다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2007년에 벌어졌던 고정민 (가명) 양 실종 사건에서는 사람의 자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거짓 자백에 이르는 과정과 거짓 자백 후 범행의 줄거리를 지어내는 모습 모두 교과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더라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확 물어버리고 소리를 지르는걸 왜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든 '공포심' 때문이라는데 굉장히 와 닿았어요.

또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1960~1970년대에는 살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죄였는데, 왜 그 양상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분석도 상세합니다. 자본주의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가 일부 구성원들을 스트레스로 압착할 때 일부 반사회적인 범죄자들이 복수심으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반사회성은 후천적 영향일 가능성이 높고요. 서구 사회에서는 반사회성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여기지만, 단일 민족인 한국에서 유전적 이유로 누구는 괴물이 된다는 건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복수심,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었던 유영철, 정남규와는 다르게 진짜 서구적인 쾌락 연쇄 살인을 저지른 강호순과의 차이도 잘 드러나고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도 잔혹 범죄는 존재했던 만큼 연쇄 살인이 양극화로 더 증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찰 수사력의 발달로 과거 사건화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밝혀지고, 이게 과거보다 발달한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탓에 증가한걸로 보이는게 아닌가 싶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 깊게 연구된 자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 외 단순히 당시 벌어졌던 범죄와 그 수사, 해결 과정 뿐 아니라 수사에 참여했던 프로파일러들의 생각과 행동도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로파일러가 무슨 마법사나 천재가 아니라, 수사를 돕는 역할이라는게 잘 드러나지요. 수사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적인 은어 등 디테일도 좋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 아픈 현실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듯 등장하기는 하지만, 권일용도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입장이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도소에서 교정, 교화가 가능하다고 쳐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중죄를 저지른 범인을 교정, 교화시켜 사회에 복귀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읽어 볼 만한 논픽션인건 분명한데, 건조한 르포르타쥬 문체가 아니라 권일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적인 구성과 문체로 쓰여진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 불호 쪽이에요. 분명 실화인데 뭔가 각색되어서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담기 위한 취지 탓이었겠지만, 익히 알려진 사건에서 누구나 다 아는 정보를 빼곡하게 채워 놓은 부분들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 범죄사, 프로파일링 역사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9/19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도 부부 자택에 화재가 일어난 후, 도의원인 남편 도도 야스유키의 사체는 거실 소파에서 전소된 채, 전 여배우인 아내 도도 에리코 사체는 욕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살한 걸로 보였지만, 수사를 통해 위장된 자살임이 금세 드러났다. 경찰은 원한 관계를 축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해 나갔고, 고다이, 야마오 컴비는 진술을 통해 도도 야스유키의 태블릿이 사라졌다는걸 알아냈다. 그 직후, 범인이라는 인물이 협박 편지를 보내어 태블릿 속 정보를 거래하자고 제안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장편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갈릴레오 유가와'나 '가가 형사'가 아닌, 새롭게 시작된 고다이 쓰토무 형사 시리즈이지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치밀한 수사 과정 묘사입니다. 주변 진술을 통해 태블릿의 존재를 확인하고, 태블릿 전원이 켜진 위치 데이터와 수상쩍은 언행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유력 용의자로 포착하고, 과거 조사를 통해 야마오 경부보가 도도 부부와 고등학교 때 부터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내고, 현금 인출책의 결정적 증언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체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철저하게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역시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입니다. 도도 에리코는 귀한 손님에게만 티파니 찻잔을 낸다는데, 사건 현장 식기 세척기에서 그 찻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티파니 찻잔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야마오는 사건 당일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최소한 야마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티파니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귀한 손님, 또는 손님(범인)이 떠난 뒤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찻잔을 현장에서 치웠던 것이지요. 

결국 수사를 통해 도도 야스유키가 살해당한 아내를 집에 있던 도구로 자살로 위장한 뒤,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미사키가 범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진상 외에도, 수사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 증언을 통한 의문들 - 예를 들어, 도도 야스유키는 체력이 좋았는데 어떻게 범인에게 간단히 살해당했는지 - 까지 모두 수사로 밝혀지는 등, 수사의 디테일은 최고 수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고다이의 예리한 관찰력도 빛납니다. 범인은 도도 저택에서 에리코를 목매달 끈을 조달했는데 왜 그런 준비를 사전에 하지 않았을까? 전기밥솥도 마찬가지, 왜 예약을 해제하지 않았을까? 즉 범인은 간단히 간파당할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우발적이면서도 어설픈 위장 공작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관찰을 통해 제시하거든요.

그리고 야스유키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신의 결의도 합쳐 미사키를 숨겨주기 위한 야마오 경부보의 범죄 계획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는 일부러 단서를 흘려 체포되었던 겁니다. 제목 그대로 '가공범'인 셈이지요. 하지만 야마오는 몇 달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며, 그 시점이면 증거도 많이 사라져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고다이의 끈질긴 수사로 진범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다이는 도도 에리코의 과거를 뒤져 고교 졸업 직후 숙모 집에 머물던 시기 임신했다는 정황을 잡고, 숨겨진 딸이 있으며 그녀가 도도 집을 드나들던 미사키였다는걸 밝혀냅니다. 도도 에리코의 임신을 밝혀내는건 수사 팀의 인해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수사물이라는걸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요.

야마오가 이런 계획을 진행한 동기인 40여년 전인 1985년 고등학생 시절의 야마오, 도도 부부가 엮인 연애와 욕망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팜므 파탈을 넘어서는 매력의 소유자 에리코의 존재감이 압권이었어요. 이런 설정에서는 일반적인, 학생과 관계를 가진 교사 도도 야스유키는 알고보니 굉장한 인격자에 선한 인물이라는 반전 설정도 신선했고요.
세 명의 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짝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 - "경솔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잃게 되는 거에요. 짝사랑이라면 상처 입는 일도, 상처 주는 일도 없잖아요." - 도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미사키의 범행 동기는 ‘버림받음’과 ‘비교에서 비롯된 분노’로 제시되는데, 이미 친모가 에리코라는걸 안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자기 딸이 비행을 저질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인으로 폭발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단순 폭행도 아니고 살인인데 말이지요.

가공범 설정도 지금 보기에는 다소 뻔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행을 떠안는 모습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별다를게 없으니까요. 너무 빠르게 야마오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고요.

핵심 동기인 도도 에리코의 출산과 아이 유기도 배경 설명이 빈약합니다. 아이는 야마오의 아이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낳을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묘사된 둘의 관계로 보면요. 힘들게 낳는 선택을 했다면, 왜 곧바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 부분은 낙태가 금기시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에리코의 개인사 같은게 추가적으로 보강되었어야 납득이 되었을 겁니다. 

진범이 밝혀진 뒤 사회적 파장이나 여론의 반응이 거의 다뤄지지 않아 결말의 현실감이 약하고, 나가마의 죽음은 결국 자살이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인 등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고다이 형사도 작가의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옅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성실함, 눈썰미 외에는 캐릭터적 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치밀한 수사와 ‘가공범’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경찰 수사물로는 우수한 수준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경찰 수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제일 불쌍한건 도도 야스유키네요. 자기 딸이라고 착각한 남의 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2021/05/07

통 - 프리먼 월스 크로프츠 / 오형태 : 별점 2.5점

 - 6점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 지음, 오형태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부두에서 포도주 통 하역 작업을 하던 해운회사 직원 보로턴은 통 한 개 안에 금화와 시체가 들어있다는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브로턴이 회사와 경찰에 신고하던 사이에 통을 누군가 가져가 버렸다. 번리 경감의 수사를 통해 통을 가져간 사람인 훼릭스 씨와 통, 그리고 통 속 금화와 시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번리 경감은 파리 경시청 경감 르빠르쥬와 함께 피해자 아네트, 피해자의 남편 보와라크 수사에 나서는데....

1920년에 발표된, 고전 본격 추리 소설 황금기 최고 걸작 중 한 편입니다. 작가 F.W.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의 데뷰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하고요. 유명세답게 이런저런 리스트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편입니다. '주간문춘에서 선정했던 동서미스터리 100'에서는 33위로, '에도가와 란포 본인 선정 미스터리'에서는 9위로 선정했었네요. '히치콕 매거진 선정 세계 10대 추리 소설' 중에서는 무려 2위이고요. 저도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모처럼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추리 소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용의자들 중 누가 진범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를 어떻게 저질렀는지 알아내는 하우더닛과 같은 당대에 유행했던 '두뇌 게임', '퍼즐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 아네트는 단순한 교살로 살해되어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범인은 훼릭스가 아니면 보와라크 씨일 수 밖에 없거든요.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말해서, 두뇌 게임이 아니라 '수사를 통한 현실감'이 주는 재미를 처음으로 독자에게 선사한 작품입니다. 그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겠지요.
1부에서 통을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수사도 볼 만 하지만 2부와 3부에 걸쳐 선보이는 본격적인 수사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2부는 번리 경감, 파리의 경시총감 쇼베 씨, 르빠르쥬 경감이 보와라크 씨의 알리바이가 완벽하고, 훼릭스가 범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여 그를 체포하는 내용이며 3부는 훼릭스의 변호사가 고용한 탐정 조르쥬 라튀슈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보와라크가 진범임을 밝히는 내용인데, 20세기 초반 시대상을 잘 반영하면서 당시 최신 문물과 단서들을 활용하여 멋지게 표현해 냅니다.

무언가를 수사, 조사하기 위해서는 추리를 통해 가설을 먼저 세우는 덕분에 아예 추리의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이 역시 수사의 영역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사건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이를 조사하여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탐문 수사가 대부분인 수사 과정은 추리할 부분이 많지 않고요. 2부에서 놓치거나, 간과했던 부분을 3부에서 검증, 보완하여 진상이 드러나게 될 뿐이거든요. 대표적인게 보와르크의 알리바이입니다. 보와르크는 파리에서 집사와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고 증언하고, 집사 등은 그 시간에 보와르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는걸 보장합니다. 그러나 라튀슈의 조사로 이 전화는 파리가 아니라 칼레에서 걸려왔다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확실히 추리가 아닌 수사를 통해 깰 수 있는건 범인의 알리바이 밖에 없지요. 이런 점에서 광고 문구 그대로 '리얼리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현실적인 수사 과정에 반해, 고전 본격물에서 흔히 봄직했던, 시체가 들어있던 불길하고 기묘한 '통'의 존재가 결합되어 흥미를 자아내는 설정도 좋습니다. 시체가 들어 있을 수도 있어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관계자들이 여럿 얽혀 왔다가다 하는 과정이 긴장감넘치고 심지어 웃음까지 자아내는 1부는 아주 흥미로왔으며, 마지막에 시체가 발견되는 클라이막스는 그야말로 압권이었어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고전 중심의 리스트말고,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과 같은 최신 작품을 포괄하는 리스트에는 선정되어 있지 않은데 이 역시 당연합니다. 시대를 앞서나가고, 경향을 주도한 당대의 최신작이었지만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고, 문제도 많은 탓이에요. 보와르크 씨가 저지른 범죄부터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는 살해 후에 충분히 사체를 숨길 수 있었습니다. 훼릭스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고 이미 집사와 하녀가 믿은 상태니까요. 구태여 조각상을 한 개 더 주문하면서, 정체가 드러날걸 각오해가면서까지 통을 파리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파리로 옮길 수고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시체를 통 속에 넣어둔 뒤, 집사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는걸 고민하는게 당연하지요. 훼릭스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그랬다는데, 그럴거라면 파리에서 훼릭스가 아내를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꾸미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훼릭스가 수상해 보이도록 만들어 누명을 씌울 생각이었다는데, 통이 깨져서 금화와 함께 시체가 살짝 드러나지 않았다면 사건이 커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훼릭스에게 누명을 제대로 씌우려면, 이 작품에서처럼 훼릭스가 찾기 전에 시체가 드러났어야 하지만 이는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그래도 통의 이동은 작품의 핵심이니 그렇다 치죠. 그러나 2부에서 보와라크의 알리바이가 확실하다고 의견을 모으는 장면은 여러모로 어설픕니다. 예를 들어 보와라크가 1시 쯤 내린 집중호우를 맞아서 옷이 젖었다는게 그 시간에 밖에 있었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경시총감 쇼베의 말대로 부인이 1시 전에 집을 나갔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고요. 지나치게 보와라크를 무죄로 만드려는 억지로 보였습니다.
세부 설정들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훼릭스의 복권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이를 사건에 써먹을 생각을 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훼릭스와 친구 르 고티에 씨는 복권 이야기를 할 때 보와르크 씨가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이건 공정하지 않지요. 마지막에 보와르크 씨가 라튀슈에게 모든 범행을 고백한 뒤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자살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울러 가독성이 떨어지는 동서 추리문고의 번역도 역시나 문제가 많네요. '워타르 로드'는 '워털루 로드'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점 때문에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금 시점에서 이 작품을 평가한다는게 온당한 처사는 아니겠지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부와 3부를 묶어서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드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20/11/01

비틀거리는 소 - 아이바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2점

비틀거리는 소 - 6점
아이바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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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와 신이치 형사는 미해결 사건인 나카노 역 앞 선술집 강도 사건 수사를 맡았다. 그는 외국인이 금품을 노린 강도 살인 사건이 아니라, 두 명의 피해자를 노린 계획 살인 사건이라는걸 알아냈다. 그리고 범인이 도주할 때 사용했던 차량 소유주를 알아내고, 소유주 아베 사나에의 정부인 가시와기 노부토모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시와기 노부토모는 유통 재벌 옥스 마트의 후계자로, 수사에 대한 여러가지 압력이 들어왔다. 그래도 다가와 형사는 상사 미야타 과장의 지지를 받아 노부토모를 체포하기 위한 증거를 모아 나가는데....

'현대 사회의 폐부를 날카롭게 찌르는 궁극의 사회파 미스터리!'라며 마쓰모토 세이초를 소환하는 소갯글에 흥미가 끌렸었습니다. 그런데 엘릭시르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네요. 좋은 책을 선사해주신 엘릭시르 담당자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미스터리 사전"에 따르면, '사회파 미스터리'는 사회 제도의 모순이나 심각한 사회 문제를 사건, 트릭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한 미스터리 작품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정의에 동의할 수는 없어요. '미스터리' 이기 때문에 사회 문제만 그리는건 적절하지 않지요. 제가 읽어왔던 다른 걸작 사회파 미스터리물 모두 사회 문제는 사건과 엮어 은근하게 드러납니다. "화차"에서의 사채와 개인 파산, "도끼"에서의 실업 문제, "제로의 촛점"에서의 전후 양공주 문제, "천사의 나이프"의 소년 범죄 문제, "붉은 손가락"의 치매 노인 문제 등이 그러합니다. 여러가지 사회 문제들이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걸맞게, 사건에 녹여져 있는 거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사회 문제 따로, 사건 따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사회 문제를 사건, 이야기에 잘 녹여냈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이래서야 '사회파'일 수는 있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부족합니다.

옥스 마트가 지역 상권, 공동체를 집어 삼키는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대표적입니다. 이는 다가와 형사가 지방으로 탐문 수사를 가서 유령 상가를 보고 느끼는 감정들, 쓰루타 기자가 쓴 기사 등을 통해 자세히 그려집니다. 띠지에서도 소개될 정도로요.
그러나 옥스 마트가 무슨 로비를 해서 지방 도시에 출점을 했건, 임대 매장이 매상 부진에 시달리건 말건, 모두 곁가지 이야기에요. 선술집 살인 사건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옥스 마트 관계자를 악역으로 설정하는 역할 말고는 하는게 없어요.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지역 상점가가 무너진걸 옥스 마트 탓으로 돌리는 시선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터넷 쇼핑몰이 활성화 된다면? 어차피 모두 사양 산업입니다. 옥스 마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이유는 없어요. 

차라리 식품 안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조금 더 와 닿기는 했습니다. '싸고 좋은 음식은 없다'는 주장으로, 남의 이야기같지 않아서 공감이 갔습니다. 이를 위해 '걸레'라고 부르는 햄버거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소개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하지만 사건과 별 상관이 없다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이유로 사회 문제를 작품안에서 드러내는 역할인 쓰루타 기자 역시 선술집 살인 사건만 놓고 본다면 불필요했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는 사회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등장시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그녀가 잘 나가던 언론사를 그만두고 인터넷 매체에서 옥스 마트를 공격하는 기사를 쓴 원인이 되었다는 가정사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으며, 캐릭터도 전형적이라 별다른 매력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사건 이야기는 재미있느냐? 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선술집 강도 사건이 미궁에 빠진건 초동 수사가 잘못된 탓이거든요. 대단한 수수께끼가 있는게 아니에요. 약간의 수사만으로 강도가 아니라 수의사와 산업 폐기물 처리 업자를 노린 계획 살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피해자인 수의사와 산업 폐기물 처리 업자를 '소'와 연결하면 '광우병'과 관련된 범죄라는건 쉽게 떠올릴 수 있고요(제목이 스포일러이기도 합니다). 이를 대단한 수수께끼가 있는 것 처럼 포장하는건 무리입니다. 

또 이 모든건 탐문 수사로 단서가 드러나기에 추리의 여지도 없고, 범인이 가시와키 노부토모라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거대 유통 기업 총수 아들이 직접 2명이나 죽이는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그것도 개인적인 약점이 아니라 회사에 닥칠 위기를 막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건 영 와 닿지 않았거든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마트 후계자 쯤 되는 인물인데 말이지요. 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최소한 돈으로 회유하려는 시도부터 먼저 해 보았어야죠. 회사의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는 다키자와라는 인물도 존재하기 때문에 직접 나설 이유도 없고요. 범행 수법도 어설픕니다. 심지어 도주할 때 자기 차를 썼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요. 초동 수사가 지나칠 정도로 미비해서 잘 빠져나갔을 뿐으로 피해자 중 한 명이라도 살아남았다던가, 경찰에서 처음부터 다가와 형사같이 접근했더라면 2년 전에 이미 구속되었을 겁니다. 별다른 증거가 없는데, '역수'로 칼을 잡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백을 이끌어내는 장면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딱히 볼만한 부분이 없었어요. 마지막에 미야타 과장이 옥스 마트와 결탁하여, 사건을 치정 살인 사건으로 축소, 은폐하는 모습도 개인적으로는 불필요했다 생각되네요.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다가와에게 수사를 맡기지 않았으면 되잖아요? 이를 묵인하면서 뒤로 진상을 폭로하려는 다가와 형사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수사 과정에 대한 묘사 만큼은 좋았거든요. 특히 끈기있는 탐문 수사가 장기라는 다가와 신이치 형사의 수사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프렌치 경감'을 연상케하는, 우직하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덕분입니다. 수사 대상과 인간적인 친분을 먼저 쌓고, 항상 메모를 한다는 디테일도 잘 살아 있고요. 광우병이 연결 고리라는걸 너무 늦게 파악하는 등 추리력은 딱히 없어 보이지만요.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도 재미가 없지는 않아요. 한번 정도는 곱씹어볼만한 좋은 이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사회파 미스터리'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좀 더 미스터리에 밀결합하여 전개했어야 했습니다. 술집 강도 사건 수사는 이 작품 분량의 절반이면 충분했을거에요. 피해자 아카마 유아, 니시노 마모루와 '소', 그리고 범인 가시와키 노부토모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를 찾는 과정은 실제로 그 정도 분량에 그치니까요.
또 광우병은 후반부에 급작스럽게 등장하는데, 딱히 문제로 제기되지도 않습니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부산물을 불법적으로 섞어서 식품을 제조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언급은 등장하지 않거든요. 

결론적으로, '사회파 + 미스터리'가 아니라 '사회파 | 미스터리'인 셈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다가와 신이치 형사는 마음에 들은 만큼, 다른 작품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2010/08/26

데드트릭 1,2 - 카린펜 (華倫変) : 별점 3점


나나모토서에 근무하는 순사장 이치모리 잇페이, 과학수사 연구소 수사관 도쿠가와 도쿠코, 그리고 변태 명탐정인 경시청 수사1과 경부 하다케야마 미치아키가 나나모토서 관할구역에서 발생한 기상천외한 범죄사건을 수사하여 해결하는 정통파 수사 추리만화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은 아니고 원서로 구해봤죠.

슥 한번 훝어봤을때는 작화나 전개가 왠지 어설픈 부분이 많이 보여서 크게 기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권을 읽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평범한 추리만화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추리강국 일본의 힘이겠죠?
범인이 앞부분에서 살짝 드러나는 도서 추리물 형태임에도 진상트릭은 끝까지 숨겨놓고 수사가 중심이 되는 본격 추리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제법이지만 독자가 추리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와 단서를 수사과정과 맞물려 제공하는 전개방식 역시 정통 본격 추리물에 걸맞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어요. 곳곳에서 느껴지는 추리라는 장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과학수사에 대한 세밀한 자료조사 역시 돋보이는 부분이었고요.

작화, 컷 구성 등 만화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며 캐릭터들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점 (주역인 도쿠코조차 전개에 사실 큰 필요가 없습니다), 1권에 비해 2권은 완성도가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은 아쉬우나 기대 이상의 신선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라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카린펜 (華倫変 かりんぺん)은 에로망가 출신 작가로 5권의 작품만 남기고 2003년 급성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하네요. 젊은 나이에 사망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국내 출간은 어려워 보이지만, 이 작품이라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권 : "연속자궁 강탈 살인사건"
나나모토 고교 여고생과 양호 교사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두 사체 모두 자궁이 적출된 상태였다. 경찰은 나나모토 고교에서 발견된 육망성 표식 등을 근거로 '악마 숭배' 의식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것은 왕따이자 저주와 주술 등에 취미를 가지고 있던 2학년생 츠지모토 가즈야였다.

제목 그대로 '자궁 적출'이라는 잭 더 리퍼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연쇄살인극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연쇄살인극이 단지 악마 숭배나 잔혹함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진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용의자에게 사건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공정하게 독자를 속인다는 점에서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 성향을 잘 따른다고 할 수 있고요.
그 외에도 추리 애호가를 사로잡을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잭 더 리퍼 사건의 가설 중 하나를 채용한 진상이라던가, 탐정역인 하다케야마가 진범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진상을 풀어낸다는 결말은 형사 콜롬보를 연상케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증거를 제시하라는 범인 앞에서 범인의 통화 녹음을 듣고 주변 소음으로 위치를 추적한 뒤, '공중전화'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공중전화에서 범인의 지문이 묻은 동전을 찾아내는 등의 과학에 기반한 철저한 수사도 볼거리였고요.

과연 자궁 적출이라는 행위를 단시간에 처리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 등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유머 등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 작화면에서 세련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2권 : "도쿠코의 범죄"
연휴에 도쿠코에게 친구 미에가 찾아온다. 그녀와 술을 마시다 잠들어버린 도쿠코는 자신의 옷이 피에 젖어 있다는 것, 그리고 피로 물든 칼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4일 후 다카이라는 청년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고, 도쿠코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도쿠코 옷과 칼의 피가 피해자의 것이었고 그녀의 모발이 피해자 방에서 발견된 것!
도쿠코를 구하기 위해 이치모리는 하다케야마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도쿠코가 범인일리가 없기 때문에, 독자는 미에가 범인임을 확실히 알고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시각에 교통사고로 체포되었는데, 체포장소에서 범행장소까지는 차로 2시간이 걸려서 그녀는 범인일리 없다'알리바이 트릭을 어떻게 깰 것인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촛점을 맞추게 되고요.

그러나 이 트릭은 특별한 조작이 있던건 아니었고, 경찰 수사의 헛점으로 철벽의 알리바이가 생겼다라는 설정이라 좀 별로였습니다.
오히려 도쿠코가 범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철저한 과학 수사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모발의 상태와 헤어 스프레이의 성분조사를 통한 오류 증명 - 현장에서 발견된 모발은 두종류의 스프레이가 뿌려져 있기에 같은날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 - , '곤약'은 위에서의 소화시간이 길기 때문에 사망시간 추정할 때 감안해야 한다는 것, 이문(耳紋)의 채집을 통해 범인 미에가 현장에 있었다는걸 증명하는 것 모두가 철저한 과학 수사에 기반합니다. 이런 류의 다른 컨텐츠들에 못지 않은 수준으로요.

설정과 내용에 비하면 지나치게 길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앞서 말했듯 경찰 수사의 헛점으로 우연히 발생하는 알리바이가 핵심이고, 범인의 동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요.

그래도 평작은 충분히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제대로 된 편집자가 붙어서 보강했더라면 아주아주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이치모리군의 도전장"
이치모리가 자신이 신참때 해결한 사건을 도쿠코에게 풀어보라고 소개하는 이야기. 
밀실에서 소녀가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열쇠를 가진 사람은 경비원 뿐이었고, 처음에 아이 어머니와 조사할 때 방은 비어있었다. 다시 조사할 때 시체를 발견하였으나 경비원은 항상 아이 어머니와 함께였다. 범인은 경비원인데 어떻게 살해했나? 라는 문제였다. 
단서는 처음 시체 발견 시에는 모포가 뒹굴고 있었으나, 구급차를 부르고 돌아왔을 때에는 모포가 사라졌다는 것 뿐.

미스터리 매니아 이치모리의 추리소설담이 펼쳐지는 소품으로 쩌리 이치모리가 낸 문제답게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습니다. 작중 토쿠코가 이야기하듯 흔해빠진 거울 트릭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미스터리 매니아 이치모리의 장황한 이야기가 나름 재미를 줍니다. 특히나 본격물은 프로레슬링, 사회파는 아마레슬링이라고 비유하는게 기억에 남네요. 아마레슬링이 각본없는 진정한 승부지만 작위적인 프로레슬링이 훨씬 재미있다는 논리죠. '바보같지만 재미있어!'랄까요.

또 사건의 동기와 이후 이야기를 작위적으로 짜맞추는 이치모리의 모습에서 최근 추리만화를 풍자하는 느낌이 풍기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3/11/19

한국의 CSI - 표창원, 유제설 : 별점 3점

한국의 CSI - 6점
표창원.유제설 지음/북라이프

미드 CSI로 잘 알려진, 과학수사 기법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책. 목차는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 1
Part1. 현장 감식, 모든 수사의 출발점
Part2. 지문, 감춰진 범죄자의 흔적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 2
Part3. DNA, 살인자의 또 다른 얼굴
Part4. 혈흔 형태 분석, 범죄 상황의 생생한 증언
Part5. 미세 증거, 범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증거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 3
Part6. 검시, 사체가 말하는 진실
◆CSI를 탄생시킨 과학수사 실패 사례 4
Part7. 화재 감식, 화염으로도 감출 수 없는 범죄

가장 큰 특징은 항목별로 실제 사례를 등장시켜 이해를 돕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혈흔에 대한 설명에 실제 "도망자"로 유명한 샘 셰퍼드 사건을 등장시키는 식입니다. 사건에 얽힌 후일담이 상세하게 실려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샘 의사가 킬러라는 닉네임으로 프로레슬러 생활을 했는지는 몰랐네요.

내용들 모두 흥미로우나 개인적으로는 과학수사 실패 사례를 소개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총 4개의 사건이 등장하는데 상세하게 소개하자면,

존배넷 램지 사건

"서프라이즈"에서도 방송되었던 미국의 아동 성폭행 살인사건으로 영구 미제 사건이기도 하지요. 초동 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범인 비스무레한 인물도 드러났고, 최소한 부모가 누명을 벗었다는건 다행입니다. 

오제이 심슨 사건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설명은 생략합니다만 변호인 측의 전략과 주장이 상당히 짜임새 있어서 놀랐습니다. 덧붙이자면 오제이 심슨이 범인인 줄 알았는데 그의 전처 아들이 유력한 용의자라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김성재 사건

유명한 사건이죠. 외국 도서와는 다르게 국내 유명 사건이 소개되는 점은 확실히 좋네요. 워낙에 널리 알려진 사건이지만 이 책에서는 변호인단의 논박과 증거들에 대한 변론이 디테일하게 소개된다는 점에서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저도 여태까지는 고 김성재의 애인이 유력한 용의자라고 생각했는데 변호인단 의견도 확실히 타당성이 있더군요. 그나저나 유력한 증거인 동물 마취제 성분의 독극물이 왜 크게 인정받지 못했는지는 조금 궁금합니다.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워낙에 유명한 영구 미제 사건이죠. 아직 여러모로 의견이 분분한 사건으로 제 개인적인 평을 담을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변호인 주장에 더 무게가 실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경찰 말대로 아내의 불륜이 사실이었다면 남편에게 가장 확실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도 부인하기는 어렵네요. 변호인이 밝힌 용의자인 치정남은 살인을 저지를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요? 돈 때문에 협박한 거라면 남편한테 밝혀버리는 게 맞지... 여튼 이 사건 이후 여러모로 발전한 경찰과 국과수의 노력으로 만삭 아내 살인사건 같은 사건이 제대로 수사되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겠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관련 서적은 여러 권 읽어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딱딱할 수 있는 과학수사 이론을 흥미로운 실제 사례와 결합하여 소개하는 이상적인 구성을 갖춘 책이라 생각됩니다. 한국화된 사례들도 마음에 좋았고요. 이론보다는 조금 재미에 치우친 편이긴 한데 도판과 자료를 조금만 더 보강한다면 이쪽 분야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와 겨루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관심 있으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25/03/22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엘리스 피터스 / 최인석 : 별점 2점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4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북하우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드펠 수사는 수도원의 영예를 위해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려는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웨일즈행 여정에 동참했다. 유골이 있다는 웨일즈 귀더린에 도착한 일행은 유골 이전을 반대하는 마을 지주 리샤르트와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논의를 다음날 이어가기로 했는데, 리샤르트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외지인 엥겔라드였다. 엥겔라드는 평소 리샤르트의 딸과 결혼 문제로 다툼을 벌였으며,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그의 화살이었다...

영국 작가 앨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의 캐드펠 수사(Brother Cadfael)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20여 년 전 번역 출간되었던 바 있는데, 이번에 북하우스에서 완역본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전 번역 출간본 제목은 "성녀의 유골"이었지요. 시리즈 중 대표작입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MWA)영국 추리 작가 협회(CWA)에서 각각 선정한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되었을 정도로요.

시리즈 특징인 12세기 영국의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한 묘사는 여전히 뛰어납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웨일즈 귀더린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국 본토와는 다른 웨일즈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마을 지주 리샤르트의 갈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세속적 욕망으로 변질된 종교가 아무리 권위를 갖추었다 해도, 순수한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거든요.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리고 수도사가 주인공인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잘 어우러졌고요.

추리적인 부분에서도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리샤르트의 사체 검시를 통해 사건 현장의 조작 여부를 밝혀내는 캐드펠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나름 과학 수사인데, 12세기라는걸 감안해도 별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멋진 추리였습니다. 또한, 쇼네드가 범인 콜룸바누스 수사를 추궁하다가 실수로 그를 죽게 만든 뒤, 그를 성녀의 유골과 함께 ‘빛의 세계’로 보낸 것처럼 꾸미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기발했습니다. 수사가 사라진걸 기적으로 포장하는, 시대에 걸맞는 완전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을 세속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 한 수도원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고요. 2년 뒤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에필로그도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될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용의자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리샤르트를 살해할 동기를 가진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다툼이 있었다는 외지인 엥겔라드가 범인일 경우, 그가 현장에 자기 화살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요. 현장을 조작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는 용의자는 성녀의 유골을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옮기려 했던 캐드펠 일행뿐입니다. 리샤르트만 없다면 유골을 쉽게 옮길 수 있으니, 이는 확실한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캐드펠과 함께 있었던 수도사들은 범인일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도하러 나갔던 제롬 수사나 콜룸바누스 수사 중 한 명이 범인입니다. 당연히 야망 넘치는 콜룸바누스 수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 정도로 용의자가 좁혀지면, 사실 둘 중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문제는 둘 중 누가 범인인지 밝히기 어렵다는 겁니다. 콜룸바누스 수사에게 처방했던 양귀비액이 줄어든 것(그가 제롬 수사에게 먹여 잠들게 만들었기 때문)은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결국 쇼네드가 성녀로 변장한 뒤, 콜룸바누스를 자극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이렇게 논리적 증거 없이 심리적 압박만으로 범인을 밝혀내는건, 이 작품을 정통 추리소설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세 영국의 역사적 분위기와 종교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역사 미스터리보다는 팩션 드라마에 더 가까운 작품이에요. 정통 추리물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18/04/15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기린의 날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혼바시 다리에서 건축 부품 제조 회사 간부인 아오야기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 용의자 야시마 후유키는 도주 중 교통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경찰은 아오야기가 근무하던 공장의 산재 은폐가 동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가가는 사건의 진짜 동기가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수사를 계속하는데...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가가

히가시노 게이고가가 형사 시리즈 장편입니다. 니혼바시 다리 중간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된 중년 남성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읽기 편하다는 겁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지요.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 끄는 전개가 흡입력의 비결이고요.

  • 피해자 아오야기가 왜 사건 현장을 방문했는지?
  • 아오야기가 칠복신 신사 순례를 한 이유는?
  • 아오야기가 신사 순례 때 종이학을 접어 바친 이유는?
  • 종이학은 왜 노란색부터 접어서 바쳤는지?
와 같이 수수께끼 하나를 풀면 뒤이어 다른 수수께끼가 등장하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개는 오래 전 일간지 연재물을 연상케도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잘 짜여진 이야기로 작가의 치밀한 구상과 계산이 돋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아오야기 관련 수수께끼에 더해 유력 용의자 야시마에 얽힌 수수께끼도 마찬가지입니다.

  • 야시마와 아오야기의 관계는? 
  • 야시마는 어떻게 아오야기를 만났는지? 
  • 흉기인 버터플라이 나이프의 입수 경로는? 

같이 단계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산재 은폐, 오래전 발생한 안전 사고의 은폐, 의도하지는 않은 아오야기 살인 사건 은폐라는 세 종류의 은폐가 핵심이 되는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비밀은 없고, 진실은 밝혀진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스러운 결말도 마음에 들고요. 역시나 흥행을 아는 작가다왔습니다.
사건과 함께 나름대로 성장해 나가는 가가의 모습도 볼 만 합니다. 아버지의 평소 이야기와는 다르게 죽을 때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게 살아있는 사람의 의무라는 말은 아주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와는 다른, 전통적인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이 엿보인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우선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도쿄를 무대로 한 작품임에도 "신참자" 의 무대와 같은 니혼바시 주변, 이른바 칠복신 신사 순례길을 바탕으로 한 탐문 수사가 길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도쿄 사는 사람들에게야 별 거 아니겠지만 다른 지방, 타국의 독자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이 충만한 묘사들이라 절로 눈이 가더군요. 가가의 추천 요리집과 요리도 몇 개 등장하는데 그 중 메밀 국수는 저도 꼭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회파 미스터리 느낌도 강합니다. 산재 은폐와 이를 피해자 아오야기에게 뒤집어 씌우는 회사의 행태, 그리고 이 때문에 살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억울한 비난이 쏟아지게 만드는 잘못된 매스컴의 행태 묘사 때문입니다. 산재 은폐건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겉핥기 식으로 짚고 넘어가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만, 이를 깊숙히 파고들면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읽는 재미도 있고,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볼거리도 풍성한 작품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보다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수사만으로 거의 모든게 해결되어서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입니다.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찰 소설, 수사 소설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릴 정도에요. 용의자 야시마가 도주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이유부터 경찰 포위망에 걸렸기 때문이고, 이후의 이야기도 추리보다는 수사 결과에 따라 진행될 뿐이거든요. 피해자와 하야마의 접점이 공장이라는걸 알아낸 경찰이 탐문 수사를 갔을 때 동료가 몰래 고발해서 산재 은폐건이 부각되고, 아오야기와 하야마의 범행 당일 행적을 뒤쫓다가 결국 그 날 아오야기가 만난건 하야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가가와 마츠야마가 칠복신 신사 순례라는 피해자 행적 파악에 성공하지만 이 역시 추리라기 보다는 우직하게 발로 걸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사 과정도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가가와 동행하는 마쓰미야의 "헛걸음을 얼마냐 하느냐에 따라 수사 결과가 달라진다"는 대사가 와 닿을 정도로 발로 뛰는 꼼꼼한 수사의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하아먀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으리라 추리하여, 결국 하야마가 피해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밝혀내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짜릿하고 멋졌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은 진상입니다. 일단 범행 당일 피해자와 함께 있던 범인이 들통나지 않은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합니다. 카페에서 무려 2시간 정도나 함께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노출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니까요. 여기에 지나가던 하야마가 '우연히' 피해자가 죽어가는걸 보고 가방과 지갑을 들고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가 나서 의식 불명이 되어 죽었다? 이건 우주의 운이 다 모이기 전에는 불가능할 거에요.
피해자의 유품인 디카에 종이학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단 것도 의문이며, 핸드폰 기록만 확인하고 접속했던 블로그 URL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이학 사진과 '기린의 날개' 블로그를 피해자의 행적과 함께 이으면 알 수 없던 피해자 행동의 의미가 드러나 사건 수사의 또다른 핵심 축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이를 짚어내지 못한 건 단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편의적 전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는 칠복신 순례의 핵심이 '순산 기원' 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의 임신과 연계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피해자가 니혼바시 다리 기린 상까지 구태여 찾아가 죽은 것도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이럴 힘이 남아 있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기린상" 을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억지가 너무 지나쳤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단계 성장하는 가가 형사의 모습은 마음에 들고 이런저런 볼거리는 많지만 추리 소설로서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만큼 시리즈 팬이시라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1/05/15

고독한 늑대의 피 - 유즈키 유코 / 이윤정 : 별점 2.5점

고독한 늑대의 피 - 6점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작가정신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8년, 구레하라 동부서 2과 폭력반계 오가미반에 신참 형사 히오카가 배속되었다. 그는 반장 오가미 슈고와 짝을 이루어 사금융 업체 구레하라 금융 경리 담당이었던 우에사와 지로 실종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시내에서 가코무라 구미와 적대적인 오다니구미 조직원들끼리 다투다가 오다니구미 조직원이 살해된 뒤, 대규모 항쟁으로 비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려는 가코무라 구미, 그리고 그들의 우방 조직 이라코카이의 음모였다.

오가미는 수사를 통해 우에사와는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들에게 납치되었다는걸 알아냈다.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들이 구레하라 금융에서 소액 대출 후 유흥비로 탕진한걸 들킬 위기에 처하자, 우에사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납치 살해했던 것이었다. 이게 사실로 증명된다면, 가코무라 구미의 두목과 주요 간부 모두를 체포하여 장기간 징역에 처할 수 있어서, 가코무라 구미는 와해되고 항쟁은 자연스럽게 끝나게 될 터였다. 

하지만 가코무라구미 상위 조직인 이라코구미가 오다니구미와의 항쟁에 불을 붙였고, 결국 감찰 때문에 자택 근신 중이던 오가미가 중재를 위해 나섰지만 살해되고 마는데....

1988년의 히로시마 근방 소도시 구레하라 시를 무대로 한 하드보일드 범죄 드라마로 야쿠자와 강력반 형사들이 뒤엉킨 거칠고 수컷 냄새나는 범죄와 인간 관계가 그려지는 작품입니다. 제목의 '늑대'가 가리키는건 형사반장 오가미 슈조입니다. 이름부터 오오가미(늑대)에서 따 왔으니까요. 

이렇게 한 마리 늑대와 같은 형사가 홀로 안팎의 적대 조직과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는 일본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주쿠 상어"가 좋은 예겠지요. 그러나 오가미 반장은 항상 아들과 같은 부하 히오카와 함께 하며, 자신이 이끄는 오가미 반 부하들의 신뢰도 두텁고, 강력한 야쿠자 조직인 오다니구미와 다키이구미 두목급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고독한 늑대는 아니에요.

이야기에서도 야쿠자와의 관계, 친분이 핵심 동기 및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우에사와 실종 사건 수사가 특히 그러합니다. 오가미가 사건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기는 구레하라 시에서 야쿠자들간 항쟁이 일어나는걸 막기 위해서, 또 자신이 밀고 있는 오다니구미 부두목 이치노세 모리타카가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도록 하기 위함이니까요. 사건 수사도 야쿠자와의 연줄과 그들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를 기반으로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진행됩니다.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 요시다 시게루를 몰래 불러내어 포박한 뒤, 식칼로 뺨을 긋는 등 협박을 가하다가 당근(오다니구미로부터 확보한 500만엔)을 제시해서 우에사와가 납치된 뒤 살해되었다는 진술을 확보하는 장면처럼요. 그밖의 증언들도 대부분 증인들을 협박해서 이끌어내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불법에 가깝지만, 수사는 합리적이며 범죄 묘사도 그럴듯해서 범죄 수사물로도 손색 없습니다. 우에사와의 목을 베어 죽인 뒤, 어선을 빌려 무인도에 유기하는 과정, 사체를 찾아내는 과정, 이를 위한 심문 등 범행과 수사에 대한 묘사들 모두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덕분입니다.

범죄 수사와 함께 펼쳐지는 야쿠자 조직 간 항쟁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뒷골목 사람들끼리 나누는 의리와 우정에 대한, 사뭇 마초스러우면서도 왠지모르게 낭만적인 이야기는 항상 기본은 해 주지요. 오래전, 80~90년대 유행했던 홍콩 느와르 분위기랄까요. 여기에 특정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 다툼과 전쟁, 음모는 군웅물스러운 재미도 느껴지고, 오가미가 자신의 연줄로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모습은 악을 더 큰 악, 안티 히어로가 응징하는 쾌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도 명확합니다. 야쿠자, 그리고 야쿠자와 결탁한 문제 형사를 미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담배가게 노파 가쓰, 술집 '시노' 주인 아키코의 입을 빌어 오가미가 불쌍한 사람을 돕는 히어로였다는걸 부각시키고는 있습니다만, 그가 야쿠자에게서 돈 상납을 받는, 야쿠자와 유착되어 있는 불량 형사라는건 명백한 사실인 탓입니다. 고독한 늑대가 아니라 하이에나 패거리 중 한마리에 불과한 거지요. 

그나마 상납받은 돈은 사건 수사에 썼다고 치더라도, 자기와 친한 조직이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도록 노력한다는건 도저히 용납이 안됩니다. 가코무라 구미는 우에하라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와해될 예정이었지만, 이후 벌어진 이라코카이와 오다니구미간 다툼에서 오다니구미에게 유리하게 중재한다는건 정도가 지나쳤어요. 오가미가 목숨까지 걸 이유도 없었고요. 

이를 포장하려고 다키이와 이치노세를 인의를 아는, 야쿠자지만 남자답고 괜찮은 인물이라고 묘사한 것도 볼썽사나왔습니다. 그렇다고 야쿠자가 서민들 등골을 빼먹고 사는 인간 쓰레기라는게 바뀌는건 아니잖아요? 협객이니, 사나이니 하는 미사여구를 아무리 가져다 붙여봤자, 쓰레기는 쓰레기입니다. 차라리 쓰레기답게 오다니구미가 오가미를 죽이고, 이를 이라코카이에게 뒤집어 씌웠다게 진상이었다면 더 볼만한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수사 일지를 보면, 오가미가 죽은 뒤 대형 항쟁은 결국 일어났고, 이치노세가 구레하라시를 장악했다는걸 알 수 있으니까요. 애초에 오가미가 중재에 나섰던 항쟁도 알고보면 오다니구미가 일으킨 것이기도 하고요. 

아울러 오가미가 살해당했다는 전개도 아쉬웠습니다.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면 그동안 온갖 수라장을 헤치고 나왔다는게 말이 안되잖아요? 오가미가 버틸 수 있었던건 주요 인물들의 비밀을 쥐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왜 진작에 오가미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설정, 묘사, 전개도 너무 뻔하며 작위적입니다. 오가미 반장에 대한 설정과 묘사부터 그러합니다. 조직과 잘 섞이지 못하는 형사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스테레오 타입 묘사에 그치며,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쇼트피스 담배와 파나마 모자, 늑대가 새겨진 지포 라이터는 만화적이며 유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걸 잘 알고 있고, 통제까지 가능하지만 신참에게 속내를 잘 비추지 않는 고참 형사와 그의 수사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시에 따르다가 어느새 감복하여 존경하게 되는 신참 형사 캐릭터 구도도 식상하고 뻔하기 그지 없습니다. 예컨데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와 똑같습니다. 다키이나 이치노세, 아키코 마담 등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도 어딘가에서 본듯한, 만화적인 캐릭터들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애초에 오가미가 반장인 이상 신참과 파트너가 되어 현장을 발로 뛸 이유도 없습니다. 전형적인 캐릭터 구도를 만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해요. 오가미가 히오카에게 히로시마 경찰 내부의 추문을 담은 노트와 거액의 돈을 남긴 것도 억지스러운건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일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히오카보다는 믿고 신뢰할만한, 오래도록 함께 일한 믿음직한 부하들에게 넘기는게 당연하잖아요? 히오카의 이름이 죽은 아들 이름과 같아서, 진짜 아들처럼 여겼다는 설명이 추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로 여겼다면 이런 무거운 짐을 남기면 안될 것 같은데 말이지요. 히오카가 감찰의 끄나풀이었다는 약간의 반전, 그리고 나름의 유산을 남긴게 그 때문이었다는 암시도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이렇게 단점도 많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재미만큼은 괜찮았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나 무협지스러운 재미는 충분하니까요. 킬링 타임펄프 픽션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더운 여름, 잠이 오지 않는 긴 밤을 보내기에 적당하리라 생각됩니다.

2020/05/24

폐허에 바라다 - 사사키 조 / 이기웅 : 별점 2.5점

폐허에 바라다 - 6점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북홀릭(bookholic)

"에토로후 발 긴급전"의 작가 사사키 조단편집입니다. 홋카이도 도경 경부보 센도 타카시가 이런저런 부탁으로 개인적인 수사를 벌인다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탐정사전"에서 멋지게 소개된 덕에 기억하고 있다가, 우연찮게 읽게 되었네요. 

센도는 이전 사건 때문에 PTSD 장애를 입어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장기 요양 중으로, 의사 말에 따르면 "경찰에 관련된 일은 모두 잊어라, 가능하면 신문도 읽지 마라, 책은 읽어도 상관없지만 범죄 소설은 금물이다"라는 상황이지만 주위의 요구에 응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수사를 돕습니다.

니세코 스키장, 홋카이도 동부 토카치 온천 여관, 유바리 시, 삿포로 시내, 히다카 등 북쪽 지방 이곳저곳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며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관련 묘사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폐허에 바라다" 속 소도시는 가공의 마을 같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유바리 시 인근 쿠라야마 초 등 현존하는 곳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덧붙여진 덕분입니다. 마을로 향하는 길에 대한 묘사는, 지금이라도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연어 정치망 어업과 가리비 양식이 주인 오오츠크해 연안 항구 마을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묘사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또 매 이야기마다 실제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등장하는데,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뽐내는 것도 재미요소에요. 사건 해결을 위해 센도를 이용하는 형사가 있는가하면 센도를 방해꾼 취급하면서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형사도 있고, 애주가도 있고 패션 감각이 빼어난 패셔니스타도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나오키 상을 수상했을 만큼 문학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사회파스럽게 현실에 대한 고발, 비판 의식을 이야기에 잘 담아낸 솜씨도 빼어나고요.

그러나 현실 고발없이 단순 범죄에 대한 이야기로만 끌고간 몇 몇 작품들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냥 멋드러지게 쓴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일 뿐, 추리 소설이나 범죄, 수사물로 보기에는 영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합한 별점은 2.5점. 문학적으로는 근사하고, 뭔가 품격이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추리적으로 빼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와 같이 추리물에는 어느 정도 수수께끼 풀이나 트릭같은 요소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추리 애호가 분들께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60여 페이지에 불과한 짤막한 단편입니다. 이야기도 대단한건 없어요. 센도 타카시가 휴직 중인 탓에 치밀한 수사를 벌일 수도 없고요. 하지만 고작 하룻밤 조사로 아서에게 쏠린 혐의를 돌릴만한 정황 증거를 담당 형사에게 들이민다는건 너무하다 싶었어요. 그것도 잠깐 관계자 옆자리에 동석했던 정도라면, 현재 담당 경찰들이 수사를 등한시 했다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지 경찰들이 '오지'에게 한 번 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죠. 용의자 아서의 아내는 일본인이고, 그의 자식 역시 일본인일테니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 이유도 없고요. 특별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으며, 인간 관계 및 경제적인 이득 등 동기까지 명확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사토미와 아서가 관계를 맺었다는 등의 설정도 불필요했습니다.

스키장 마을의 묘사라던가, 이야기를 쉽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전개는 나쁘지 않은데 특별히 점수를 줄 만 한 부분도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폐허에 바라다"

지독한 가난으로 어린 시절, 여동생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어머니를 목격한 뒤 범죄에 빠져버린 후루카와의 범행을 건조하게 그려냅니다. 후루카와를 한 때는 융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해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촌 마을에 빗대는게 인상적이에요. 후루카와가 바란건 죽음이었고, 결국 자살로 센도 앞에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은, 제목과 겹쳐지고요. 폐허에 바라는건 결국 흉물스러운 모습을 창피하게 드러내어 명줄을 유지하는게 아니라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히거든요. 이런 내용으로 본다면, 사회 고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사건이 워낙 명확한 탓이에요. 후루카와와 만나기로 한 센도의 의도를 야마기시가 어떻게 알고 추적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있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아닙니다.

이렇게 형사가 등장하고, 비참한 현실과 그 때문에 생겨난 비극을 범죄 드라마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는 김성종"어느 창녀의 죽음"과 비슷합니다. 드라마로서 볼 만하고, 묘사도 특출난 부분이 있지만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일본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일본의 버블 붕괴 및 지방 경기의 몰락을 그렸기 때문에, "어느 창녀의 죽음"만큼이나 우리에게 와 닿기는 힘들지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빠 마음"

'토'라는 어부들의 조합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흉기가 어부들이 쓰는 마키리라는 등 어업과 관련된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지저분한 마을 유력자의 음모, 그와 손을 잡은 폭력단의 만행이 동기라는 점에서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회 고발에만 그치지는 않습니다. 사건 속 수수께끼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용의자 이시마루가 피해자 다케우치를 폭행한건 인정했지만, 칼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단지 칼을 가져가지 않았을 뿐, 칼로 찌른건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끝에 그냥 손에 잡힌 칼로 범행을 저지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를 밝히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시마루의 가족들이 이시마루가 범인이라고 못 박은 이유가 드러나는 과정은 볼 만 했어요. 앞서 이야기한 사회파적인 고발이 함께 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순한 센도의 추측 - 추리라고 하기는 어려운 - 만으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쉽고 짧게 소비되어 버린 느낌도 들고요. "붉은 수확" 처럼 마을의 실력자,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분투하는, 장편 사회파 하드보일드물로 그려낼만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지요.

센도의 추리에 좀 더 설득력을 부여하고, 좀 더 드라마틱한 세력간 갈등을 그려낼 수 있는 장편이었다면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별점 2.5점입니다.

"사라진 딸"

범행은 강력하게 의심되지만, 시체가 없어서 본격적으로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작품. 경찰이 직접 일을 벌일 수 없어서 경찰 타나베가 미야우치에게 센도를 소개시켜 준 것입니다. 센도가 사건을 해결한 건 타카다 방에서 발견한 평범한 스냅 사진 속 인물에게 주목했던 덕분이고요. 그 인물의 정체를 알아낸 뒤, 전화 한 통으로 시체 은닉 장소를 알아내게 되거든요. 경찰이 수사 중 간과했던 단서에 주목한게 주효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경찰 수사의 디테일 부족으로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꽤 그럴듯했습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타카다의 과거를 상세하게 조사할 정도로 경찰이 수사를 확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설득력을 더합니다.

아주 빼어나지는 않지만, 실감나는 이야기라는건 분명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쿠로자와의 살인"

저자 후기를 보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는 젊은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이 좀 비슷하기는 합니다.
여기에 더해 유언장이 주요 동기 중 하나로 등장하며, 지방 영주의 성 같다는 오하타 목장의 저택 묘사, 말을 키우는 목장 묘사 등이 더해져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일본이 아니라 영국 어딘가를 무대로 한 작품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작가의 의도는 러시아였겠지만요.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외에, 추리적으로 건질건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17년 전 피해자였던 나가누마의 어린 아들이 장성해서 복수를 한게 뻔해 보이고, 새로 온 잡역부 청년 하라다가 마침 18살이라 수수께끼고 뭐고 이야기할게 별로 없네요. 오히려 하라다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지 않은 경찰의 무능함만 돋보일 뿐이에요.

추리 소설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순문학, 드라마를 그리고 싶었다면 좀 더 길고 풍성한 묘사가 필요해 보였던 작품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복귀 전날"

센도의 PTSD의 원인이 된 사건이 회자되며 센도의 완쾌를 알리는, 단편집의 대단원을 이루는 작품.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적으로 대단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유미코의 전화는 도움 요청인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하루카가 진범이라는걸 드러내기 위한 목적의 밀고 전화였다는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이 역시 그렇게 의외의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화 내용이 사실과 달랐다면, 전화를 건 사람이 거짓말을 한게 당연하니까요. 오히려 왜 이렇게 밀고를 하려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라던가, 범행에 무언가 트릭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내용도 없어서 이게 추리 소설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유미코의 동기는, 센도가 처음 만났을 때 손에 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라는 디테일과 하루카가 피해자인 나오와 남자 문제로 다투었다는 증언이 순차적으로 드러나니 그리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니거든요. 하루카의 범죄 역시,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나오를 죽이고 불에 태웠는지에 대한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그냥 그녀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정황 증거 정도만 추가될 뿐이라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도 않고요.

물론 이렇게 추리적으로 허술하다는게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이 단편집 수록작 모두가 마찬가지이기도 하고요. 또 아는 사람, 잘 해주는 듯한 사람이 더 무섭다라는 명제를 잘 전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를 위해 억지로 센도를 엮었다는 점입니다.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모두 센도가 사건에 개입되는게 나름 이유가 명확한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미코 본인이 와인바 사장인 유키에가 겪은 일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중요한 단서가 될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걸 그냥 경찰에 제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구태여 센도를 중간에 연락책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가족을 밀고한다는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람을 만들 필요도 없고요.

이렇게 시리즈를 위한 억지 투성이인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9/08/10

봉제인형 살인사건 - 다니엘 콜 / 유혜인 : 별점 2점

봉제인형 살인사건 - 4점
다니엘 콜 지음, 유혜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쇄 살인 방화범 칼리드 체포 과정에서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가 복직한 형사 울프는 무려 여섯 명의 사체를 꿰메어 만든 '봉제 인형 살인 사건' 수사를 맡게 되었다. 범인은 울프의 전처인 기자 안드레아를 통해 여섯 명의 살인을 더 예고했다. 경찰은 예고 살인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공개된 명단 속 인물들은 차례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울프와 수사팀은 이 모든 사건이 칼리드와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채나 범행을 막지는 못했고, 경찰 대학을 나온 브레인 에드먼즈가 혼자만의 조사를 통해 울프가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걸 밝혀내는데...

최근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지요. 여섯 명의 사체를 결합해 만든 '봉제 인형' 이 등장하는 서두도 강렬하지만, 경찰의 눈 앞에서 피해자들이 차례대로 살해되는 과정과 경찰의 수사가 숨돌릴 틈 없이 진행되는데 속도감과 흡입력은 상당합니다.

그러나 재미 외의 요소는 부족합니다. 싸구려 펄프 픽션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어요. 많은 부분에서 설득력이 결여되어 있는 탓입니다. 별다른 재산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홀로 행동하는 범인 매스가 어떻게 놀라운 범행을 계속 벌일 수 있었는지부터 전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보통 이렇게 전능한 악당의 경우, 경찰 관계자이거나 본인 스스로가 어떤 식으로든 - 머리가 좋다던가, 돈이 많다던가, 초능력이 있다던가... - 대단한 능력을 갖춘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작품 속 매스는 정신병을 앓고있는 퇴역 군인에 불과합니다. 턴블 시장을 살해하기 위해 그의 천식 흡입기를 어떻게 바꿔치기 했는지? 갈랜드 기자를 죽이기 위해 연극에 사용한 보호대를 어떻게 바꿔치기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요.
특히 천식 흡입기는 그나마 그렇다쳐도, 갈랜드 기자가 죽은 것 처럼 꾸미기 위한 작전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보호대를 쓰고 어떤 연극을 할 지 매스는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마지막에 울프가 희생자로 예고된 상황에서는 울프가 개인 행동만 벌이지 않았어도 범행을 성공할 방법이 없었을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꼭 이 연쇄 살인이 아니더라도 봉제 인형을 만들기 위해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인물들을 납치하여 토막낸게 시체 발견 시점까지 사건화 되지 않은 이유도 알기 어렵습니다. 피해자들이 부랑자나 노숙자도 아니고, 파트너급 변호사나 경찰 등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지요. 그 전부터 매스는 이른바 '악마의 거래'로 살인 행각을 계속해 왔지만, 아무도 정체를 몰랐다는 설정도 어이가 없습니다. 그만큼 영국의 치안이 허술하다는 이야기일까요? 이 정도면 정말 사람 살 곳이 아니네요.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범인을 후반부에 알아내기는 하는데 앞 부분의 수사는 별 관련이 없거든요. 에드먼즈의 프로파일링으로 도출된 인물상에 해당하는 인물을 DB를 통해 뒤지다가 사진 속 눈동자를 보고 범인임을 직감한다는데, 이럴거면 앞에서 벌였던 온갖 수사는 대체 뭔가 싶습니다. 왜 진작에 이렇게 수사를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사건 전개도 혼란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울프를 주인공으로 하여 피해자들의 정체를 알아내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밝히는 과정, 예고된 범행을 막는 과정이 한참 펼쳐지다가 갑자기 에드먼즈 쪽으로 시점이 이동하여 울프가 진범이 아닐까? 라는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럴거면 애초부터 시점을 울프가 아니라 에드먼즈 쪽으로 했어야 말이 됩니다. 에드먼즈 시점으로 전개되는 과정이 훨씬 흥미롭기도 하니까요. 정신병원에서 울프가 벽에 새겨놓은 피해자들의 이름을 드러내는 장면만큼은 아주 괜찮았는데 많이 아쉽네요. 울프의 수사는 현재로, 에드먼즈의 수사는 과거를 뒤지며 결국 두 시점이 하나로 합쳐지는 식으로 했더라면 설득력도 높고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내용에서 불필요한 부분도 너무 많습니다. 자극적인 뉴스로 시청률을 올리려고 혈안이 된 방송국장 엘리야와 그 밑에서 수족처럼 일하며 양심과 싸우는 울프의 전처 안드레아 이야기는 정말이지 쓰잘데 없어요. 이런 매스컴의 행각을 지적한 다른 컨텐츠에서 흔하디 흔하게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의 재탕일 뿐 아니라 실제 이야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안드레아의 개입은 사건을 혼란스럽게만 만들 뿐입니다.
에밀리 벡스터 형사와 울프의 친구 이상 연인 이하라는 설정에 할애한 분량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장해서 하는거라곤 울프와 울프 주변 여자들과의 감정 싸움 말고는 없는데 이러느니 없어도 될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어요. 싸구려 매스컴의 행태는 대폭 줄이고, 울프 주변의 여자 관계도 모두 쳐냈다면 이야기는 절반 정도 분량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거기에 에드먼즈 시점에서 썼다면? 1/3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때 유행처럼 쏟아졌던 '전능한 살인마의 예고 연쇄 살인'을 별 생각없이 재탕한 결과물입니다. 에드먼즈가 활약하는 부분만큼은 흥미를 자아내지만 그 외에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네요.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17/07/14

관찰자 - 샤를로테 링크 / 서유리 : 별점 2점

관찰자 - 4점
샤를로테 링크 지음, 서유리 옮김/뿔(웅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삼손 시걸은 직업도 없이 형, 형수와 함께 낡은 집에서 머물며 동네 여자들을 살펴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청년이다. 그런데 그의 흠모의 대상인 질리언 워드의 남편 토머스 워드가 살해당하자 삼손의 형수 밀리는 경찰에 삼손의 일기를 신고했다.

유력 용의자로 몰린 삼손은 도주했고, 질리언 워드 남편 살해범은 카를라 로버츠와 앤 웨스틀리라는 독거 노부인 두명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경찰의 수사가 집중되었지만 삼손은 질리언의 불륜 상대자인 존 버턴의 도움을 얻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존 버턴은 토머스 살인 사건은 원래 질리언을 노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독일 여류작가 샤를로트 링크의 작품입니다. 충격적인 프롤로그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왠만한 내용으로는 충격을 받기 힘든 요즈음이지만 아동 성애자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솔직히 기분은 아주 불편했습니다만...

그리고 이 프롤로그가 3건의 연쇄 살인이 펼쳐지는 본문 내용으로 연결되는데, 이 과정에서 10월, 11월, 12월 등 순차적으로 기입된 날짜들로 친절하게 구분된 목차가 단지 시간 흐름 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정교한 복선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첫 도입부인 10월 생일 파티 현장에서의 에피소드가 모든 사건의 발단이며, 타라가 이미 12월에 눈치챘던 존의 과거 성범죄 기소 이력을 1월까지 모른 척 한 것, 질리언이 타라에게 부동산 업자 루크 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 등이 모두 마지막 반전, 진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이책으로 69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어울릴만큼 잘 짜여져 있지는 않습니다. 쓸데없는 묘사와 내용이 많은 탓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수사 관련 내용입니다. 놀랍게도 완전히 불필요합니다. 결국 사건은 혼자 수사하는 전직 경찰 존 버턴의 활약에 의해 해결되며, 그것도 존 버턴이 혼자 잠복하여 리자 스탠퍼드를 만난 것이 결정적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존 버턴도 경찰 내부에서 결정적 정보를 얻지만 이는 경찰 수사 방향과는 무관하기에 경찰은 전혀 하는게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게다가 첫 등장, 수사 과정에서 비교적 유능한 것으로 생각된 피터 필더 경감은 경찰을 그만둔 뒤 잘나가는 존 버턴에게 질투나 느끼는 한심한 중년에 불과하다는게 밝혀지는 등 전반적인 경찰에 대한 묘사는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초반부 뭔가 있어 보임직했던 사회부적응자 삼손 시걸의 묘사도 분량에 비하면 별 볼일이 없어서 당황스럽습니다. 이러한 경찰 관련 묘사와 삼손 시걸 묘사만 들어내도 1/3 이상 깔끔하게 압축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여성 작가 특유의 장황한 심리 묘사까지 덜어낸다면 금상첨화일 테고요.

추리적으로 놓고 보아도 별 볼일 없습니다. 탐정역인 존 버턴의 수사는 우직한 탐문, 그리고 '운'이 좋았던 것 불과해서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리자 스탠퍼드의 거처를 알아낸 순간 이야기는 끝난거나 다름없습니다. 두 피해자와 질리얼 모두와 관계가 있는건 타라밖에 없으니까요.
범죄 측면에서도 무언가 의미가 있어보였던 엘리베이터 장난과 심야의 드라이브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어요. 단지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행동이라는 동기 자체는 설득력 있다 하더라도, 정체가 드러나기 쉬운 무모한 행동임에는 분명하니까요. 꽤 오랫동안 이런 행위를 반복했는데도 타라가 들키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그녀 어머니 사체를 진작에 치워버리지 않은 것과도 일맥상통하고요.
아울러 범행의 핵심 동기인 '구조 불이행죄' 역시 설득력이 낮습니다.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인물보다 그것을 방조한 인물의 죄가 더 크다는 논리는 다른 몇몇 작품에서도 접했었지만, 단 한번도 그게 합리적이라 느낀 적이 없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의 설명도 미쳤다는게 전부라면 아예 이런 동기도 필요 없지 않을까 싶고요. 마지막 숨겨진 별장에서의 범행 고백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위적이라 허무하기까지 했습니다. 질리언을 다른 피해자들처럼 질식사 시키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네요.

물론 장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다른 유사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 작품에서 타라의 분노는 어린 시절 지옥을 맛보게 한 의붓 아버지의 성폭행을 방조한 어머니로 향하며, 다른 방관자들에 대해서도 어머니와 같은 분노를 느꼈다는 식으로 설명되는건 그럴듯 했어요. 삼손 시걸의 캐릭터도 독특해서 이런 류의 작품에 등장하는 싸이코치고는 착한 인물이라는 의외성에 더해 마지막 장면에서의 활약은 나쁘지 않은 등 독특한 면은 분명 있고요. 불륜을 저지른 질리언이 잠깐의 실수로 앞으로 살아가며 정말 힘든 노력을 해야할 것이라는 전개도 마음에 듭니다. 불륜을 쉽게만 보는 다른 작품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측면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모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스무레한 타 범죄 스릴러 대비해서 딱히 차별화되는 점도 없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교보문고 전자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었는데 종이책은 이미 절판되었더군요. 딱히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독일 작가 작품인데 영국을 무대로 한 것은 좀 희한합니다. 미치광이 엘리트 살인자가 나돌아다니는 작품을 모국 무대로 쓰기는 싫다는 기묘한 애국심이 작용한 것은 아닐테고, 이유가 궁금합니다.

2014/03/18

노상강도 - 에드 멕베인 / 박진세 : 안타깝지만 별점 2점

노상강도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여성을 노린 연쇄 노상강도 범인이 범행 후 정중한 자기 소개 — "클리퍼드가 감사를 전합니다. 마담" — 로 유명해졌다. 87분서는 검거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한편 순찰경관 버트 클링은 오랫만에 찾아온 친구 벨의 부탁으로 그의 처제 지니 페이지를 도와주려 하나 실패했고, 그 뒤 지니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노상강도 사건과의 연관성이 의심되어 총력 수사가 진행되는데...

"경관혐오" 바로 다음에 발표된 87분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스티브 카렐라 형사는 작중에서는 내내 신혼여행 중으로 묘사됩니다. 때문에 주역으로는 순찰경관 버트 클링이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경관혐오"에서 총에 맞아 입원했었지요. 내용은 줄거리 요약에 있는 대로 노상강도 사건을 축으로, 지니 페이지 살인 사건이 함께 진행됩니다.

이 중 노상강도 사건은 윌리스 등 형사들의 수사과정이 꽤나 자세하게 묘사되어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끄나풀이 등장하고, 불법 도박장에 잠입하고, 심지어 여성 경관을 이용한 함정 수사까지 펼치는 등 수사 방법도 다양하게 선보입니다. 결국 범인을 잡게 된 단서가 함정수사를 통해 입수한 종이 성냥이었다는 식으로 체포까지의 과정도 아주 깔끔한 편이고요. 한 마디로, '발로 뛰는 수사로 확보한 단서를 토대로 한 범인 체포'라는 수사물의 왕도격 전개를 보여줍니다. 범인이 가명이 아니라 정말로 "클리퍼드"라는 이름이었다는 점에서 경찰 수사가 너무 미진한 게 아니었나 싶기는 하지만요.
유도 고수 윌리스나 폭력 형사 하빌랜드와 같은 형사들의 독특한 캐릭터도 돋보이고, 마이어 마이어가 끝까지 미는 농담 — 고양이 절도 사건과 그 진상인 Instant pussy — 까지 깨알같은 재미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또다른 이야기인 지니 페이지 살인 사건은 영...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내용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에드 멕베인의 또다른 필명인 에반 헌터 명의의 주정꾼 탐정 커트 캐넌 시리즈 중 한 편인 "프레디는 그곳에 (Now Die in It)"와 완벽하게 똑같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직업을 제외하면 친구가 처제의 비밀을 밝혀달라고 의뢰하고, 처제가 살해당하고, 처제의 남자를 찾아나서고, 결정적 단서는 받았던 메모였다는 전개와 내용 모두 동일합니다. 시기상으로도 이 "노상강도"가 3년 뒤 발표된 것이니 표절, 혹은 확대 재생산된 작품이 맞는 것이죠. 심지어는 왜 탐정–경찰에게 처제의 비밀을 밝혀달라고 의뢰하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단점까지 같아요.

물론 자신의 단편을 장편으로 만든 사례가 다른 거장들에게 없는 것은 아니긴 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님 등 유사한 전례는 제법 되니까요. 어차피 본인의 작품을 본인이 표절한 것이니만큼 비난하기도 뭐하고요. 허나 최소한 책 소개에서는 언급해주었어야 합니다. 읽다보니 완벽하게 똑같은데, 이래서야 돈을 주고 구입한 독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생각됩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뒷통수 맞은 기분이에요.

그래서 개인적인 별점은 2점입니다만, 버트 클링 순경의 재담과 클레어 타운센드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그리고 시적인 몇몇 묘사는 좋습니다. 초기작다운 순수한 하드보일드 스타일 전개도 인상적이고요. "주정꾼 탐정"을 먼저 읽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고득점이었을 겁니다.  "주정꾼 탐정"을 읽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립니다.

아울러, 버트 클링이 이 사건 이후 특진되어 87분서에 형사로 배속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후 작품에 등장하던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2008/08/02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 이수광 : 별점 2점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 4점
이수광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제목 그대로 16건의 사건을 통해 조선시대의 법의학, 수사기관 및 그 제도와 형벌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살인사건"에 따른 수사방법과 범인 색출이 등장하는 사건은 그다지 많지 않고, 권력형 비리 등이 더욱 많아서 좀 아쉽더군요. 사실 권력층이 노비를 살해한 것, 그리고 권력층 내부의 살인사건과 범죄는 당연하게도 별로 수사같은 것이 등장할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고 사건도 "상소" 를 통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서 크게 와 닿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또한 3부의 반군 소탕작전 챕터와 4부의 조선시대 강압수사 챕터는 제목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부분이라 왜 이 책에 포함됐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임꺽정 체포 작전이나 조선시대 검계 소탕작전은 살인사건으로 보기는 좀 무리잖아요? 강압수사 부분도 마찬가지고요.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목에 혹해서 산 저같은 독자는 완전히 낚였다라는 기분이 들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그나마 제대로 된 사건 수사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정조때 있었다는 "평산 박소사 살인사건" 이 거의 유일했습니다. 이 사건은 자살로 위장된 사체를 무원록에 기반을 둔 세번의 검시 (삼검)을 통해 살인사건임을 밝히고 심문 등을 통해 증거 수집 및 동기를 확인한 사건으로 디테일한 시체의 검시 방법의 등장은 물론이고 수사 및 형벌에 대한 내용 및 당시 사회상 등도 잘 드러나 있으며 사건의 전개 자체도 굉장히 드라마틱 한 등 여러모로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16개의 토막 중 딱 하나가 마음에 들었을 뿐, 제목에서 기대한 것에 비하면 실망이 더 큰 책이었습니다. 아울러 추리작가이기도한 이수광씨가 저술하였는데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지나치게 문어체적인 느낌이 강하고 너무 설명이 부족해서 읽기도 힘들었고요. 빈말이라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좀 어려네요.  별점은 2점만 주겠습니다.

2023/11/04

허상의 어릿광대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허상의 어릿광대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최신작. 모두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로서 원숙기를 넘어선 달인의 경지에 이른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라마 전개가 능수능란합니다. 사건에서의 불가능한 현상 조사를 구사나기가 의뢰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서, 유가와가 사건에 뛰어드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끼워넣는 솜씨가 기가 막힐 정도에요. 덕분에 유가와의 조사도 사건과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 - "2장 투시하다", "4장 휘다" - 와, 반대로 유가와가 경찰까지 속여가며 범인의 실수를 유도하는 이야기 - "5장 보내다" - 가 공존하는 등, 변주의 폭도 굉장히 넓습니다. 이렇게 내용을 풍성하게 가져간건 영상화를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었습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과학을 이용한 트릭들이 별로인 탓이 큽니다. 추리의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유가와의 도움 없이 경찰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는 이야기도 많은데다가, 동기 면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에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은 느껴지지만, 정교한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장 현혹하다"
종교단체 구아이회의 교조 렌자키는 "염"을 사람에게 보내는 능력이 있었다. 주간지 기자가 취재차 참석한 자리에서 경리담당 부장 나카가미가 염을 받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무도 나카가미에게 손을 대지 않아서 사건은 자살로 굳어져 갔고, 기자도 '염'을 받고 몸이 따뜻해짐을 느낀 뒤 기사를 발표해서 구아이회의 교세는 더 확장되어 갔는데....

상대방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경우에 따라 자살까지 유도한 방법이 무엇인지가 핵심 수수께끼입니다. 유가와가 밝혀낸 진상은 일종의 '전자레인지' 효과였습니다. 원격으로 상대방에게 투사하여, 피부 아래를 따뜻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추리의 여지는 없다시피 합니다. 애초에 교조가 '염'을 보내는건 특별한 방 안에서만 가능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방에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다는건 당연합니다. 경찰이 진작에 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건물을 조사하지 않은게 의아할 뿐입니다. 
또 장치 출력을 강하게 해서 나카가미가 지독한 뜨거움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자살하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상식적으로 나카가미가 조금만 자리를 이동해도 뜨거움으로부터 해방되었어야 하거든요.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염'을 받으면 안되니 장치는 명확한 조준이 필요했을테고, 그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을테니까요.
유가와가 대학 노트 사이에 감열지를 숨겨놓아서 트릭을 눈치챘다는 방법도 이상했습니다. 그냥 주머니같은데 넣어 두었어도 똑같았을텐데,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트릭 만큼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아쉬웠습니다.

"2장 투시하다"
투시 능력이 있는 호스티스 미카가 살해당했다. 수사 결과 손님이었던 니시하타가 범인이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공금 횡령의 증거를 미카가 투시했던게 동기였다. 그런데 미카는 어떻게 명함과 가방을 투시했을까?

구사나가기 해결하기 어려운 트릭을 밝혀내기 위해 유가와를 찾아가곤 했던 그간 시리즈의 전개 방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구사나기의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사체에 남겨졌던 희귀한 담뱃재가 클럽 손님 중 한 명과 관련이 있었고, 그와 같은 회사에 다녔던 니시하타가 미카와 마지막에 만났던 손님이었다는걸 알아내서 체포로 이어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유가와도 범인 체포와는 무관하게 미카의 투시가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했다는걸 밝혀내는 활약을 선보입니다. 최신 장비인데 나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밝혀낸 단서가 계모의 진심을 담은 메모를 찍은 사진이었다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작 중에서처럼 명함을 읽는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잘 찍힐까?라는 의문은 가시지않았고, 어두운 바나 영화관 같은 공간에서 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을 확인했다면 들통났을 것 - 밝은 액정 화면이 티가 날테니 - 같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경찰이 가택 수사를 했음에도 이 특수한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내지 못한 것도 이상하고요. 무엇보다도 미카와 계모와의 관계를 다룬 신파조의 이야기는 많이 유치했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3장 들리다"
구사나기는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던 환자 가야마를 제압하다가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가야마는 환청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수사해보니 가야마와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영업부장 하야미 다쓰로가 기묘한 단어를 검색한 뒤 자살했었다는게 밝혀졌다.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환청을 들리게 만들었다는건 추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초반에 이명 현상을 겪는 여직원 무쓰미가 등장했고, 가야마가 환청 현상을 겪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어떤 기술을 이용했는지만이 궁금할 뿐인데, 범인이 전자파를 피해자들 머리에 쏴서 소리를 들리게 했다는 진상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작중에서도 소형화가 어렵다는 설명이 될 정도의 장치인데, 이런걸 개인이 개발해서 소지하고 운용한다는건 비현실적이니까요.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남 탓만하는 범인 고나카 설정도 진부했고요.

수사를 구사나기의 경찰학교 동창이자 관할서 형사인 기타하라가 맡도록 해서 수사 1과와 관할서 사이 갈등을 그려낸건 좋았고, 유가와의 논리 정연함을 기타하라와의 대화를 통해 새삼 드러내는 솜씨는 좋았지만 이야기에 별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4장 휘다"
프로야구 선수 야나기사와의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수사를 맡았던 구사나기는 방출 후 트라이아웃을 준비하던 야나기사와가 전성기 때의 폼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데이터 측정을 도와줄 수 있는 유가와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나 상심에 빠진 야나기사와의 기량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데...

강도 살인사건 범인은 구사나기에 의해 쉽게 체포됩니다. 이후 야나기사와의 재활과 더불어 피해자 다에코가 가지고 있던 쇼핑백 속 선물이었던 자명종을 누구에게 주려고 했는지?를 밝혀내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일상계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에코가 '자명종'을 남편의 현역 생활 연장에 도움이 될 대만 프로야구 관계자에게 선물하려 했고, 중국에서는 시계를 선물하는 행위인 '송종'의 발음이 '임종'과 똑같아 자명종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진상도 일상계스러웠고요. 

다에코가 타고 있던 차에 소화기 분말이 묻었다는걸 알고, 호텔 주차장에서 소화기가 분출된 시간을 알아내서 다에코가 누구를 만났는지를 조사하는건 경찰 구사나기가 아니
었다면 조금 힘들었겠지만, 일상계물로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수작입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이번 단편집 수록작들 중에서도 에피소드들이 가장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5장 보내다"
하루나는 텔레파시로 쌍둥이 언니 와카나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고 느껴 형부 이소가이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귀가한 이소가이는 중상을 입은 와카나를 발견했다....

쌍둥이 사이에 텔레파시가 오갈 수 있다는걸 범인도 믿을 수 있게끔 그럴듯하게 설명한 뒤, 범인의 실수 - 친한 지인인 진범을 모른척하고, 진범이 외모를 크게 바꾸는 등 - 를 유도한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 데이토 대학 교수 유가와가 직접 나서서 텔레파시가 근거가 있는 것 처럼 조사했기 때문에 범인도 깜빡 속아넘어갔던 것이지요. 이 모든걸 안배한 유가와의 추리와 능력이 빛나는 이야기였습니다. 텔레파시는 실체가 없지만, 자매간의 정은 유효하다는 결말도 좋았고요. 

다만 이소가이의 동기가 명확하므로, 경찰 수사로 충분히 범행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장 위장하다"
구사나가와 유가와는 시골 읍장이 된 대학 동창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살인 사건 수사를 돕게 되었다. 유가와는 구사나기가 찍은 현장 사진을 보고 현장이 조작되었다는걸 알아내는데....

흔들의자에 앉은채 산탄총에 맞은 시체라는 현장 사진만 보고 조작을 눈치챈 유가와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운동에너지, 작용과 반작용을 언급하며, 흔들의자에 앉은 사람이 총에 맞으면 반동 때문에 앞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물리학자다운 추리였어요. 발견자 다에가 현장을 조작한 이유도 그럴듯했습니다. 원래는 의붓아버지 다케히사가 다에의 친모인 아내를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다에의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다에는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순서가 반대인 것처럼 현장을 조작했던 겁니다.

다만 사건의 동기인 아내의 불륜은 식상했으며 , 다에가 현장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는데 이를 유가와의 말대로 '우수한 일본 경찰'이 현장 조사로 밝혀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7장 연기하다"
극단 '파란 여우'의 연출가 고마이가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전 애인 아쓰코로, 그녀의 알리바이 트릭은 구사나기가 이미 밝혀냈지만,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유가와는 소도구인 칼이 흉기라는건 이상하다는데 주목하여 진상을 추리해낸다.

아쓰코가 고마이를 찌르고 휴대폰을 조작하여 알리바이를 만드는 과정이 맨 처음에 나오는 도서 추리물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대로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라 생각하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곧바로 구사나기가 모든걸 꿰뚫어보고 밝혀내서 좀 놀랐습니다. 구사나가도 그리 만만한 친구는 아니네요. 
고마이의 현 애인 구도 사토미가 진범이었다는 반전도 의외였으며, 경찰이 사건 진상을 파헤치기 힘들었던 불꽃놀이 사진은 단순히 유리창 반사에 의한 현상이었다는 디테일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살인범이 되어 경찰에게 쫓기는 심리를 느껴보고 싶었다'는 아쓰코의 동기, 그리고 재봉 가위를 흉기로 사용한 사토미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극단 소도구인 칼을 흉기로 위장한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범인을 극단 사람 내부인으로 한정해버리면 기껏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짜낸 트릭들의 가치도 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9/22

희망의 끈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1.5점

희망의 끈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진상,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케이크 카페 사장 하나즈카 야요이가 살해당했다. 도난당한 물품은 없었고, 인품이 좋은걸로 유명했던 탓에 원한 관계로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즈카 야요이가 사망 1개월 전, 개인 트레이닝과 피부 관리실에 등록했다는게 밝혀져 '이성 관계'가 동기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녀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남성은 사망 얼마 전 만났던 전 남편 와타누키와 가게 단골 시오미 뿐. 그러나 전 남편 와타누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기에 마쓰미야는 시오미에 주목했고, 가가의 동의를 얻어 본격적인 수사를 벌였다. 시오미는 아내와 사별한 뒤 중학생 딸 모나와 거리가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편 사건 수사와 동시에, 마쓰미야는 죽은 줄 알았던 친부가 아직 살아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배다른 누나 요시하라 아야코의 연락 덕분이었다. 암으로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친부를 만나러 갈 것인지? 마쓰미야의 결심을 도운 건 하나즈카 야요이 사건의 진상이었다. 십 수년 전, 불임 클리닉의 실수로 야요이의 수정란을 시오미 부부가 이식받아 낳은 딸이 모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야요이는 딸을 만나기 전 전 남편과 상의했는데 이를 오해했던 와타누키와 사실혼 관계인 동거녀 다유코가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마쓰미야는 가족이라는 끈은 어떻게든 이어져있다는걸 통감하고 친부를 만나러 간다....


"소중한 사람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끈이 아무리 길어져도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 죽을 때까지 끈을 놓지 않겠다."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가가 형사가 등장하더군요. 그러나 가가 형사 시리즈는 아닙니다. 가가 형사의 비중은 낮으며, 마쓰미야가 주인공인 스핀 오프입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 기대해 봄직한 추리적인 요소도 거의 없습니다. 트릭이라던가, 범행을 숨기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는 우발적인 범행인데다가, 유력한 용의자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경찰 수사가 오래 걸릴 일도 없었습니다. 와타누키와 야요이가 사건 직전에 만났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와타누키의 현재 동거녀 다유코인게 당연합니다. 혹시라도 둘이 재결합에 대해 쿵짝을 맞추는 중이었다면 버림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작중에서처럼 경찰이 와타누키에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며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고, 시오미에게 수사를 집중한다는건 있을리 없습니다.

이렇게 수사 과정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에 이야기도 사건과 수사보다는 야요이가 와타누키를 만났던 건 시오미의 딸 모나가 자기 딸이라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동기에 집중하여 드라마를 풀어나갑니다. 
하지만 수정란이 바뀌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전개도 그다지 흥미롭지 못했습니다. 다유코가 범행을 자백했음에도 모나의 정체를 캐는 마쓰미야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오히려 가정의 비밀과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는 잔인한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사건과 함께 펼쳐지는 마쓰미야의 친부 요시하라 마사쓰구 이야기는 최악이었어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간에, 그가 결혼한 상태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마쓰미야와 그의 어머니 가쓰코를 버리고 원래 가정으로 돌아간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야 '사정이 있었다, 가족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다가온다는건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 이 따위 끈이라면 잘라내는게 상책입니다. 아니면 돈으로 보상받던가요. 이런 인간을 가족이라며 대우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사쓰구 불륜의 원인이 아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는데 상대방이 여자였다는 것도 불필요한 사족에 불과합니다. 왜 덧붙여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런다고 불륜이 용서되는건 아니니까요.
이런 쓸모없는 마쓰미야 친부 이야기보다는 모나에 대한 이야기를 더 깊고 자세히 풀어내는게 좋았을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고로 죽은 언니, 오빠 대신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친딸이 아니라는건 다른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발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모나가 느낄 부담감과 딜레마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좋은 설정을 썩힌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수사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추리물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6/10/06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이번영 : 별점 3점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6점
이번영 지음/이른아침

정조가 남긴 "심리록"을 기반으로, 다산 정약용의 "흠흠신서" 내용을 덧붙여 정조 당시 대표적 옥사 18건을 추린 후 사건의 전말과 소송의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책입니다. 참고로 "심리록"은 정조가 자신이 관여한 모든 중범죄 소송에 대하여 그 과정과 결과, 판단의 근거 등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긴 뒤, 이를 묶어 편찬한 종합적인 형사소송 판례집이라고 하네요.

무려 1,850건이나 되는 "심리록" 사건 중 대표적인 사건을 꼽아서 수록한 덕분에 기본 재미는 보장됩니다. 소설 형식으로 쓰여져 읽기 편하다는 것 역시 큰 장점이고요. 정조 시절의 형사 사건에 대한 수사 및 심문, 최종 판결에 이르는 과정이 사건별로 상세하게 소개되어 자료적인 가치도 아주 높습니다.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후진적인 끔찍한 사건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과 비교되는 생각보다 놀라울 정도의 치밀한 과학 수사 및 판결 과정입니다.

문중 며느리가 간음의 소문이 났다는 이유로 친오빠까지 합세하여 물에 빠뜨려 죽인 사건, 소문으로 정절을 의심받은 여인이 소문을 낸 원수를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 동네 천것에게 희롱당해 팔을 잡힌 여인이 작두로 자신의 팔을 자른 사건, 아버지의 원수를 직접 죽이고 그 간을 꺼내어 씹고 창자를 몸에 둘렀다는 엽기적인 복수극 등, 소문 중심의 동기와 여성의 정절과 인륜을 법보다 중시 여기는 문화에서 이어지는 끔찍하고 잔혹한 범행은 굉장히 후진적입니다.

반대로, 범인을 잡은 후 실제 판결을 내리기까지 심지어 10년 이상 걸릴 정도로 집요하게 사건을 심리하는 과정은 나름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이라 대비됩니다. 일단, 수사는 "무원록"을 기반으로 한 검시가 기준이 됩니다. 예전에 "신주무원록에 대한 책"은 읽은 적이 있지만, 이 책이 실제 사건에서 어떻게 무원록이 활용되었는지 설명되는 덕분에 훨씬 쉽고 이해하기가 편했습니다. 무원록에 '만삭 여인의 태아가 다치거나 죽은 경우'까지 수록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그 상세함과 깊이에 새삼 놀랐습니다. 

이른바 "상명의 율", 즉 누군가의 목숨은 다른 목숨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지만, 사형만큼은 극도로 신중하게 판단한 후 임금이 직접 지시와 판결을 내리는 모습도 돋보입니다. 목숨을 중히 여기는 모습에서 후대에 명군으로 알려진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수사 과정에서 헛점이 발생한 경우 관찰사 등 관계자까지 처벌하는 꼼꼼함은 오히려 지금보다도 나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원수의 간을 씹고 창자를 꺼낸 복수극'의 원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현감과 부사가 제대로 형사사건으로 처리하지 않은 탓에 사적인 복수극이 일어났다는걸 명확히 밝힌 후, 현감과 부사를 사헌부에서 구속·처벌케 하는 판부를 내린 것이 대표적입니다. "격쟁"이라는 제도를 통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고하는 행위도 지금보다 낫더군요.

물론 이러한 판결 과정도 후진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심문과 취조는 형벌 중심이라는 것이 대표적이에요. 덕분에 취조 중 용의자, 범인이 장독으로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시대를 감안하면 당연했을 수 있습니다. 조카며느리 일가를 도둑으로 몰아 일곱 명이 자살하게 만든 사건의 범인 이경휘에게 '장일백으로 엄중히 처벌하라'라는 처벌로 '엄중히' 처벌받은 이경휘가 관문도 벗어나기 전 동헌 뜰에서 숨이 끊어지는 속 시원한 경우도 있어서 필요악이었다는 생각도 들긴 하고요.

판결을 내리는 데 기준이 되는 "대명률"에 있는 몇 가지 조항들도 후진적입니다. '부모를 죽인 현장에서 살인자를 죽이는 복수는 죄가 되지 않는다.' 처럼요.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일이긴 한데, 이를 법전에서 최상위 조항으로 정해놓았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악용될 소지도 있고요. 

그리고 정조가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실무자들이 철저히 조사하여 올린 보고에 대해 재검토를 지시하거나, 보고와 다른 본인 생각대로의 판결을 내리는 건 좋아 보이지 않더군요.

하여튼, 이러한 점을 종합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사건을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가장 복잡하고 최종 판결까지 오래 걸린 사건인 "04. 자신의 목을 세 번이나 찔러 죽은 의문의 자살 사건"입니다. 시어머니의 구박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박여인 사건입니다. 사건부터가 후진적이지요?

그런데 시체를 검시하는 과정부터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무원록"을 토대로 한 검시관들의 다양한 의견이 펼쳐지는 덕입니다. 바보 같은 의견도 있지만 - 치명상이 세 번임에도 자살로 판단한 것 등 -, 목 맨 자국이 초검에서는 나타났으나 재검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죽은 뒤 목을 매어 목의 혈맥이 돌지 않은 까닭이라 밝히는 것 처럼 현대 과학 수사 못지않은 의견도 등장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시어머니와 간통남이 둘의 행각을 며느리에게 들켜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간통남 조광진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밤에 상복을 입고 방문했다는 일종의 트릭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당시 예법상 상제로 상복을 입고 다니던 이차망이 장기간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만, 수사 중 관계자의 증언으로 결국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도 볼거리였습니다. 간통남으로 몰린 이차망이 석방 전 옥사하고, 진범인 간통남 조광진도 심문 중 사망한다는 것 역시 앞서 말씀드린 형벌 중심의 후진적 취조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고요.

한마디로 후진적 사건을 해결하는 과학 수사와 단서를 조합하는 추리, 후진적 판결 과정 모두가 결합된 이야기였습니다. 

그 외 다른 이야기들 모두 놀랍고 흥미진진하다는 점은 대동소이합니다. 소설 형식으로 구성되어 읽기도 편하고요. 조선 시대(후기)의 형사 사건 수사와 판결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셔야 할 책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1/11/25

사라진 세계 - 톰 스웨터리치 / 장호연 : 별점 3점

사라진 세계 - 6점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래의 지구, QTN입자가 날아와 환각에 빠져 죽게 만드는 터미너스 현상을 일으켜서 인류는 멸망해버렸다. 1980년대의 미국 해군 우주 사령부는 ‘인정되지 않는 미래 궤적(Inadmissible Future Trajectories)’, 즉 IFT라는 다중차원의 미래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 미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터미너스 현상을 막기 위해 사령부는 여러 요원들을 IFT 미래로 보내어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터미너스 현상이 일어날 시점만 2666년에서 2456년, 2121년... 등으로 계속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터미너스 현상을 일으키는 QTN 입자가 향하는 길을 열어준 탓이었다.

그리고 1997년 현재, IFT로의 탐험을 떠났다 돌아왔던 패트릭 머설트의 가족이 살해되고 큰 딸 매리언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수사에 IFT 귀환병 출신 섀넌 모스 특별 수사관이 투입되었다. 귀환병 관련 사건에는 해군 범죄 수사국이 참여되는게 규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 머설트가 탑승했던 '리브라 호'는 공식적으로 귀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건 해결을 위해 20여년 후의 IFT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섀넌의 수사 결과, 리브라 호가 QTN 입자가 있는 에스페란스 별에 착륙했던게 터미너스 현상을 지구로 불러온 원인이었으며 패트릭 머설트 사건은 역시 리브라 호 귀환병이었던 하이델크루거가 이끄는 테러 조직이 일으켰다는게 밝혀졌다. 하이델크루거는 추락한 리브라 호의 B-L 엔진이 가동될 때, 바르게도르 나무 주변에 생겨나는 시간의 틈을 이용하여 다른 IFT의 '메아리' 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넓히고, 터미너스 현상을 초래할 해군 사령부의 IFT 탐험과 관련된 모든 것에 거대한 테러를 가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누설하려던 머설트를 가족과 함께 살해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섀넌이 이를 알아낸 직후, 터미너스가 1997년의 지구를 덥쳤다. 섀넌이 패트릭 머설트의 증언을 확보하여 해군 사령부와 거래 하려던 변호사를 하이데크루거의 습격에서 구해준게 원인이었다. 해군 사령부는 이 증언을 통해 에스페란스의 위치를 알아내어 전함을 보냈고, 전함이 지구로 귀환하자 QTN 입자가 전함을 따라와 곧바로 지구를 덥쳤던 것이었다. 섀넌은 바르게도르 나무 근처 시간의 틈을 이용해, 과거 리브라 호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시점으로 이동하여 리브라 호의 자폭이 성공하도록 도울 결심을 하였다. 성공하면 단 하나 뿐인 시공간 '굳건한 대지'는 안전하게 될 터였다...

시간 여행 (타임 리프)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5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 SF 범죄 수사물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1986년 리브라호 사고, 1997년 현재, 그리고 약 20년 후의 IFT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너무 평범한 제목 탓에 손길이 가지 않았었는데, 읽다보니 굉장히 재미있어서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SF지만 범죄 수사물 측면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던 덕이 큽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사건을 수사한다는 설정이 잘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시공간('굳건한 대지')의 사람들이 IFT 미래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아내어 그들과 사건의 관계가 드러나는 과정을 꼼꼼한 복선 배치를 통해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대표적인게 FBI 수사관 네스터입니다. 섀넌은 미래의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과거로 돌아온 뒤 그가 미래에서 살던 집이 하이텔크루거 일당의 은거지였다는걸 알게 됩니다. 네스터가 자기 것이라고 말했던 무기들 역시 원래 테러범들 것이었고요. 즉 하이델크루거 일당과 네스터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엮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다른 미래라도, 시간의 흐름 상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거지요. 다른 인물들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또 비교적 초반부에 니콜과 절친한 친구가 된 덕분에, 과거의 그녀의 도움을 받아 임무를 완수하게 되는 식으로 연결된 '인간 관계'가 사건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식으로 관계를 잘 구축해 놓고 있고요. 무고한 사람을 살리려던 섀넌의 노력이 터미너스 현상을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불러오게 되었다는, 일종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SF적인 측면으로도 볼 만 합니다. 저같은 과학 둔재도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 기술과 이론들을 이야기와 잘 결합하여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 이동이 핵심이지만 그 원리나 기술을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아요. 그냥 소설에 잘 어울릴 설정들을 적절하게, 작품과 잘 어울리게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새년이 '굳건한 시간'에서 A라는 IFT 미래로 이동한 뒤, 임무를 마치고 원래의 '굳건한 시간'으로 돌아가게 되면 A라는 IFT 미래 시공간 자체가 소멸하여 무로 돌아간다는 설정처럼요. 하지만 독자가 충분히 설정에 대해 이해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은 잘 그려내고 있기에, 이 설정이 타임 패러독스를 없애는 완벽한 설정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이 비밀을 아는 해당 IFT 시공간 사람들이 시간 여행자를 감금한다던가 (그가 돌아가면 시공간이 소멸해버리니), '굳건한 시간' 외의 시공간에서 온 사람들을 '메아리'라고 부른다던가 하는 부가적인 설정들도 흥미롭게 묘사됩니다.
시간 점프 기술을 이용하여, 미래에서 터미넌스를 막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지 않았을까 싶어 미래로의 이동을 반복하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해서 모든 미래 시점에도 터미넌스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역시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는 거지요.

하지만 IFT 미래로의 탐험을 빼면, 수사물이나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이 '리브라 호' 선원이었던 하이델베르그라는건 비교적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머설트가 리브라호 귀환병이라는걸 알고 난 뒤에도 리브라 호 선원 명단을 전체 조사하지 않았던 해군 수사 본부의 무능함만 눈에 뜨일 뿐이지요. 이런 기본적인 수사도 하지 않고, 모든 수사를 IFT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미래에서 언제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 알아낸 후,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잠복 등으로 사건을 막는게 전부라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위기와 액션 묘사가 출중한 덕에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래서야 수사물이라고 하기도 어렵겠지요.

또 불필요했던 설정과 묘사도 너무 과했습니다. 하이델베르그가 해군 우주 본부 테러로 아득한 시간과 공간 탐험을 막고자 하는 동기부터 그러합니다. 납득할 수는 있지만 오버스러웠달까요. 몇몇 주요 인물만 암살하면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패트릭 머설트 가족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손톱을 뜯어낸 이유가 '손톱으로 만든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건 쓰잘데없는 설정의 최고봉이고요.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뿐더러, 말 그대로 '손톱으로 만든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진상은 허탈하기만 했거든요. 사건 현장마다 뭔가 흔적을 남긴다는 전형적이고 흔해빠진 싸이코 범죄물 설정에 집착한 듯 한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앨릭 플리스가 패트릭 머설트의 딸 매리언을 납치해서 바르게도르 나무에 묶은 이유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녀가 집에 없었을 때 하이델베르그 일당이 다른 남은 가족을 죽인건 말이 됩니다. 도망간 패트릭 머설트를 처형한 것도 말이 되고요. 그렇지만 일당이 메리언을 찾아내서 죽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앨릭이 하이델베르그 일당인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며, 설령 그가 일당이었다 쳐도, 구태여 바르게도르 나무까지 끌고가 묶어 놓는건 설명이 되지 않아요. 죽이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가족과 구분하여 처단할 이유는 없으니가요. 사건 수사에 집착하는 섀넌 모스의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일당과 접점을 만들고 마지막에 리브라 호 자폭으로 전개하기 위해 필요했던 소재인데, 조금 더 상식적으로 말이 되게끔 전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하이델베르그가 섀넌 모스를 생포한 뒤, 반란이 일어난 직후의 리브라 호로 데려간 이유도 이해할 수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리브라 호에 감금되었던 섀넌 모스가 추락 직후 니콜에 의해 구조되었던건 무려 11년이 지난 뒤였다는 이상한 시간의 뒤틀림도 설명은 전무한, 작위적이고 편의적인 전개였고요.
이런 내용은 몽땅 들어내 버리고, 생포된 섀넌 모스가 하이델베르그를 어떻해든 설득해서 함께 리브라 호를 파괴하러 간다는게 더 명쾌했을 겁니다. 하이델베르그는 분명 과거 리브라호로 이동한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의 행적을 보면 당연히 현재 시점의 '굳건한 대지'로의 탈출 방법도 알고 있었을테니까요. 반란만 제압하고 함장이 자폭하게 도와주고 탈출하면 그만이지요.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든다면 이렇게 각색할거라고 확신합니다! 

아울러 시간 여행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리브라호를 자폭시켜 블랙홀로 빨아들이면 터미너스가 없는 '굳건한 대지'가 유지될 수는 있습니다. 리브라호가 터미너스를 유발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미래는 다양한 우주로 점프하면서, 과거는 '굳건한 시간'의 과거로 갈 뿐이라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IFT 미래로 이동 후 복귀할 때 그 IFT 미래 시공간은 소멸하는데, 과거로 이동 후 죽거나 복귀하면 왜 그 과거에 관련된 시공간은 소멸하지 않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IFT 미래 시공간 이동 기술은 600년 후의 미래 기술을 1980년대 현재 기술로 양산 가능하도록 만든거라는 설정이 잠깐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과거로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나마 이런 설정들은 그래도 전개에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코트니 김이 살아있고, 섀넌 모스가 임신했다는걸 알아채는 1986년의 한 장면으로 끝나는 마무리는 영 이상했습니다. 코트니 김의 죽음은 리브라 호와는 무관했기에, 과거의 리브라호 자폭이 코트니 김이 살아있는 미래로 이어질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섀넌 모스가 코트니의 오빠와의 관계로 임신했다는걸 알아챈다는건 더 문제에요. 원래 코트니가 살해되기 전에 가졌던 관계이니, 현실의 섀넌도 임신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임신한 섀넌 모스는 원래 작중의 섀넌과 그녀 어머니 관계와 유사해서, 시공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납득할 수 없는 과한 사족에 불과했다 생각되네요. 앞서 이야기했듯 '현재'의 섀넌 모스가 '과거'로 돌아가 죽었다면, '과거'의 미래가 바뀐다는건 이 작품의 시공간에 대한 기본 전제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읽는 동안은 단점을 떠올리기 힘든 재미를 갖춘 작품입니다. 추락한 미래에서 온 우주선의 엔진 점화로 시공간이 뒤틀려 연결된다는 설정은 예전에 읽었던 다카미 요시히사의 "화석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멸망할 미래에서 과거로 탈주했다는 점, 탈주용 우주선 엔진이 현재에 폭주하여 타임 패러독스를 일으키는 등 유사한 점이 많이 느껴졌고요.
그러나 결말까지 이어지는 깔끔한 전개는 이 작품 쪽이 훨씬 낫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영상물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와 내용인데, 약간의 설정 구멍을 보완하여 만들어주면 참 좋겠다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