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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6

새댁의 위험한 취미 - 아로 히로시 : 별점 2점

"새댁의 위험한 취미 若奥さまのア・ブ・ナ・イ"

방대하고 깊이 있는 리뷰가 많아서 자주 찾는 만보님 블로그에서 알게 된 만화. 만보님 정보대로 J Comic에서 공짜로 볼 수 있어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로 히로시는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입니다. 하지만 저는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대표작 중 하나인 "유&미"를 일본에서의 단행본 발행과 거의 동시에 실시간으로 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읽으면 낡고 유치한 스타일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끝장이었죠. 그야말로 과격 슬랩스틱 싸이코 캐릭터 개그의 결정판이었으니까요. (이 역시 J Comic에서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유&미"와 같은 캐릭터 개그물로, 2편의 시리즈가 함께 실려 있는 옴니버스 단편집입니다. 첫 번째 시리즈가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내 아내라면?"이라는 발상의 표제작이고요.

요새는 용사, 마왕, 지구정복을 하러 온 괴인, 심지어는 신까지 평범한 곳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래서 설정 면에서 특이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발표 시기를 감안한다면 선구자적인 작품일 수 있겠지요. 또, 남편의 은밀한 취미 부분은 확실히 깼습니다. 

기묘한 발명품들의 재미도 쏠쏠한데, 특히 나름 과학적 근거까지 제시하는게 특히 좋았습니다. "피스 전기 만물상"이나 "도라에몽"의 성인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잘 짜여진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도차를 이용한 풍력 발전 이야기가 베스트였네요. 성인물답게 므흣한 장면들이 적절히 삽입된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서둘러 대충 끝내고 슈퍼 히어로물의 대사 ("언젠간 또다른 영웅이 나타날 것이다 어쩌구")로 마무리하는 결말은 영 별로였습니다. 좀 더 길게 끌고 나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고 생각되는데, 인기가 없었던 걸까요?

두 번째 시리즈인, 미녀 매드사이언티스트가 나오는 "오쿠 치치부 연구소"는 일반적인 매드 사이언티스트에 충실한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작에 미치지 못합니다. 조수 사이보그의 "극도로 인간에 가까운 사이보그"라는 설정 개그는 볼 만했고, 바이오 의류와 광물 수집 물고기 이야기는 그럴듯했지만 깨는 맛이 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저에게 잊혀진 이름과 다름없었던 작가를 다시 떠올리게 한 추억 점수는 값을 매기기 힘들겠지만...

그나저나 잠깐 작가의 근황을 조사해보니 "후타바군 체인지" 이후 별다른 작품 없이 잊혀져가다가 요사이는 성인만화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림도 그닥 특출난 것이 없고 개그도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캐릭터 개그에 불과할 수 있으나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인데 좀 아련합니다... (물론 본인은 그게 더 행복할지도?)

2021/09/25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 정진영 : 별점 2.5점

좀비 연대기 - 6점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근대 시기 유명 장르 소설가의 좀비 관련 중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작가들의 명성과 장르 문학치고는 고전급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낡은 느낌이 강했던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는 다르게, "지옥에서 온 비둘기"라던가 "좀비 감염 지대"같은 시대 초월 명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좀비'라는 말을 만들고, 아이티 부두교 좀비 설정을 확립했다는 "마법의 섬"과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하고요. 크리쳐 호러물 외에도 저주받은 저택, 호러 모험 액션, 판타지에 SF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장르 스펙트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열 두편의 수록작 중 수준 이하 졸작도 제법 됩니다. 발표된지 100여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리고 제목에서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좀비'라고 하면 떠올릴 몬스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없습니다. 아이티 등 열대 섬나라에서 부두교 주술 등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 노예처럼 부렸다는 초기 좀비 전설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물론 이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설정을 그대로 반복한 판박이같은 작품이 많다는거지요.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클래식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그런 앤솔러지였습니다. 좀비라는 크리쳐의 창작 초기 설정과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온 비둘기" 

그리스웰과 존 브래너는 비둘기 떼가 날아가버린 폐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중에 공포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잠을 깬 그리스웰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도끼에 맞아죽은 브래너가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다. 도망치던 그리스웰을 구해준 보안관 버크너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수수께끼와 브래너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자 늙은 부두교 주술사를 찾아갔지만, 주술사도 뱀에 물려 죽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버크너와 그리스웰은 흉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지만, 그날 밤 그리스웰은 악령에게 홀려 2층으로 향하는데...

좀비물이라기 보다는, 저주받은 저택 장르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죽은 브래너의 습격, 마찬가지로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실비아 블래슨빌 모두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복수를 위해 부두교 주술로 저주한게 원인이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저주물에 더 가깝고요.

저주받은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악령에게 습격받는 초반부 묘사는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하고 심심했지만, 버크너 보안관 등장 이후부터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버크너가 브래너의 시체를 발견한 뒤의 전개는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해서 독특했습니다. 상황은 그리스웰이 범인일 수 밖에 없어요. 둘만 있던 흉가에서 한 명이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버크너는 그리스웰의 옷에 피가 전혀 튀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리스웰이 범인이라면 죽은 버크너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이유로 추가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핏자욱을 따라 2층의 사건 발생 현장으로 이동한 뒤, 무언가 이상한 존재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지요. 단서를 통한 추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수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밀 방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3명의 가족이 목을 메고 죽어 있었다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진상도 오싹했습니다. 사람들을 습격해 죽였던 괴물 '주벰비'가 실비아 블래슨빌을 원망했던 혼혈 하녀 조안이 아니라, 실비아 블래슨빌이었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었고요. 조안은 주벰비가 되는 검은 술을 자기가 먹지 않고 주인에게 몰래 먹였던 겁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네요.

믿음직하고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겁 많은 애송이 그리스웰의 조합도 반 헬싱 교수와 조나단 하커 관계와 좀 비슷한데, 전형적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딱 맞는 조합이더군요. 무서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겁쟁이와 사건을 해결하고 악령을 응징하는 용감한 보안관이 조합되니, 두려움과 공포, 액션과 정의의 응징을 다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무 옛스럽게 쓰여졌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여러모로 부족한 묘사가 특히 거슬렸어요. 오래된 폐가, 몰락한 가문, 뱀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도망쳤던 생존자가 남긴 일기 등 모든 면에서 미쓰다 신조의 "흉가"가 떠오르는데, 공포를 자아내는 묘사와 전개는 전혀 미치지 못했거든요. 미쓰다 신조가 같은 작품을 썼다면 훨씬 무섭게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 방식으로 영상화하면 훨씬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검은 카난" 

커비 버크너는 고향 카난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귀향하다가 혼혈인 마녀의 유혹을 받았다. 최면에 걸렸던 버크너는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습격한 거구의 흑인 세 명을 물리쳤다. 마을에 도착한 버크너는 마을 흑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통해 늪지대에 사는 괴인 솔 스타크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조사 중 버크너는 마녀의 최면에 걸려 솔 스타크의 본거지로 본의 아니게 끌려가게 되었고, 친구 브랙스턴이 그를 돕기 위해 따라가는데....

부두교 주술사가 카난이라는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마을 지도자 버크너가 이를 물리친다는 호러 액션 활극입니다. 마녀의 최면, 주술로 만든 물고기 인간같은 공포스러운 요소가 등장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버크너 시점의 심리 묘사만 있는 탓이 큽니다. 버크너 캐릭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쾌남 영웅 스타일이라 공포를 크게 느끼지 않거든요. 공포에 사로잡힌 묘사도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마녀와 괴물들이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과, 최면술말고는 주인공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작품이 무섭지 않은 이유이고요.

그래도 모험 활극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버크너는 전작의 버크너 보안관의 선조, 혹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버크너 유니버스도 한 번 제대로 소개되면 좋겠네요.

"천 번의 죽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와 그 부하들이었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물에 빠져 죽었었지만 아버지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되살리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SF 호러 범죄물을 잭 런던이 썼다는건 특이했지만, 내용은 평이합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건 "프랑켄슈타인" 에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설정이니까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섬에 틀어박혀 생체 실험을 한다는건 "닥터 모로의 섬"과 똑같고요. 물론 생체 실험의 대상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로, 그가 반복적인 죽음과 소생을 거듭한다는 설정으로 확실히 차별화되기는 합니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 신체 장기에 아무런 훼손이 없는 죽음은 단지 생명의 보류 상태'라며 죽음과 소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점도 독특했어요.

하지만 차별화 요소를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독약, 질식 등으로 수차례 죽음을 맞는 고통이 잘 그려내지 못한 탓입입니다. 생체 실험의 고통을 극명하게 그려냈다면 호러물로 충분히 값했을텐데 말이지요. 과학적인 설명도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알맹이 없는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물질을 원소 상태로 되돌리는 장치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그 부하들을 없애고 탈출한다는 결말은 최악이네요. 아버지의 흑인 부하들이 자기 방으로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올 때 마다 없애고,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선 아버지를 없앴다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방에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칼로 찌르는게 빨랐을겁니다. 특별한 장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피해자들도 한 명씩 들어와 사라질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는데 왜 진작에 탈출하지 않은건지도 이유를 모르겠고요. SF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엄청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던 아버지의 최후라기에는 너무 허무했고요.

유사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호러물로는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했고,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아이티 호텔에서 머물다가, 호텔에서 일하는 노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과 호텔 직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과거 아이티 독립 전쟁 당시 '소금을 먹지 마라'는 금기를 어겼다가 시체가 된 연인 트레생에 대해 말해 주는데...

뒤에 수록된 "좀비와 함께 걷다"를 읽어야 설정이 이해가 되는 작품입니다. "좀비와 함께 걷다"에 따르면,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자신이 죽었다는걸 깨닫고,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트래생은 물론 마리도 진작에 죽었던 좀비였다는 뜻이고요. 트래생이 흑인 해방 등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똑똑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니, 다른 좀비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보면 되겠지요.

문제는 이 설정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마리도 좀비였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고요. 죽었다는걸 깨달은 좀비들이 무덤으로 폭주하는 장면 묘사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귀환자들의 마을" 

좀비 전설이 있는 열대 섬마을에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유혹당한 파파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괴담 소설로 유명한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인데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좀비와 다른, 열대 섬나라 좀비에 대한 설명과 파파가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별개로 진행되어 혼란스럽고, 별다른 내용도 없는 탓입니다. 섬마을의 여러 풍광에 대한 관능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를 걷어내고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한, 두페이지로도 충분했을 이야기입니다. 수록작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나트에서의 마법" 

조티크 대륙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 지라의 왕자 아다르는 노예 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된 약혼녀 달리리를 찾아 여러 왕국을 헤멨다. 그러다 그녀가 향했다는 요로스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탑승했지만 항해 중 폭풍에 휘말렸고, 상선은 사악한 섬 나트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달릴리의 구조로 홀로 살아남은 아다르는 나트의 마법사 우두머리 바카른을 만나, 그녀는 바카른이 되살려낸 익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데....

"코난 더 바바리안"을 연상케 하는 작품. 존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을 무대로 마법사와 영웅이 등장해서 대결을 펼치는 고대 판타지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결말이 예상 외라 놀랐습니다. 영웅 포지션인 아다르가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바카른의 두 아들 음모에 가담하여 바카른을 죽이려다고 되려 찔려 죽고 말거든요. 그리고 바카른의 아들에 의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는게 끝입니다. 달릴리와 뭔가 관계가 이루어진다던가, 정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던 족제비 괴물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런 이유로 방대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물의 일부만 수록된 느낌입니다. 최소한 아다르와 달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아이티 공화국 헌법에 좀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아이티에 진짜 좀비가 있다는 다양한 증언들이 이어지는 작품.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같은, 페이크 논픽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고, 좀비가 소금 맛을 보면 죽었다는걸 깨닫고 열일 제쳐놓고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무덤으로 향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경험담이 이어질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화이트 좀비" 

아프리카 엔스와지 지방의 행정관 제프리 에일럿은, 어느날부터 느껴지는 악취 탓에 겁에 질렸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결국 에일럿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돌봐준 신부는 과거 에일럿과 함께 했던 전우 싱클레어의 미망인이 수상하다고 말했고, 에일럿은 탐문과 잠복 끝에 그녀가 부두교 주술로 시체들을 조종하는 현장을 목격하는데...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부대로 부두교 주술이 등장하는 이색작입니다. 서술은 장황하지만, 정작 내용은 에일럿이 잠복해서 부두교 좀비 축제? 현장을 목격하고, 거기서 싱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부두교 주술솨를 쏴 죽인다는게 전부입니다. 악취라던가 불길한 안개 등의 설정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부의 존재도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좀비 사건의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싱클레어 부인이 부두교 주술에 빠져 시체를 되살렸는지는 아프리카의 심장 운운하며 농장 관리 목적이었다고 소개되지만 명확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되살릴 이유도 없었고요. 에일럿이 악취를 느낀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딱히 아프리카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묘사만으로 작 중 무대가 아프리카처럼 느껴지지도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할로 맨" 

한 남자가 아프리카로부터 15년만에 영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부두 거리를 헤메다 모모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자신이 15년 전에 죽여 매장했던 고팍이 자기 식당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경악했다. 고팍은 표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며, 자기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모모가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라면서. 식당에 고팍이 머문 뒤, 식당은 서서히 망해갔고, 딸 버블스마저 고팍에게 홀려 생기를 빼앗기자 모모는 고팍을 또 다시 한 번 죽일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은 자가 돌아왔다가, 다시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단 모모 시점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요. 과거에 저지른 죄로, 손을 씻고 가족과 열심히,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에게 지옥문이 열린 상황인데, 고팍의 존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묘사에서는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내용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 표범 인간이 고팍을 되살렸는지, 고팍이 영국에는 어떻게 왔는지 등이 모두 드러나지 않아요. 버블스의 생기를 빼았는다는 것도 대충대충 넘어가고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고팍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걸로 마무리되는데, 이럴 거였다면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여러모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나는 농부 폴리니스로부터 아이티 지역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들었다. 다른건 유럽과 흡사했지만, 이 지역에만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좀비였다. 나는 좀비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좀비"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작품으로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대리석 무덤에 묻히고 싶어하고, 자기 집 마당에 묘를 만들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길가나 도로변에 무덤이 많은 이유로 좀비를 설명하는 등, 좀비를 실존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티 형법을 증거로 내미는 장면도 그런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폴리니스가 해 준 늙은 추장 조제프가 데려온 좀비 이야기는 이 책에 앞서 수록되어 있는 다른 아이티 좀비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좀비가 소금기를 접한 뒤 다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최후까지요. 좀비가 되었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조제프에게 복수를 했다는 결말 정도만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발표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고, 무서운 이야기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 작품을 다른 유사 작품들보다 앞서 수록하지 않은 이 책의 문제가 너무 커 보입니다. 지금 책의 구성은, 후대의 아류작으로 원조의 가치가 퇴색되는 셈이거든요.

하여튼, 원조라는 역사적 가치를 더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투셀의 창백한 신부" 

흑인 부자 마티외 투셀은 스무살은 어린 혼혈 아가씨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기념일에 투셀은 카미유를 시체와 함께 하는 파티에 초대했고, 카미유는 미쳐버리는데....

화자가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 형태로, 화자의 말대로 '흐지부지되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결말이 없거든요. 투셀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셀이 파티가 연 의도가 무엇인지, 시체들은 누구였는지, 아내에게 1년간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시체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문제가 많았던 소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비" 

그랜빌리 씨는 1차 대전에서 폐를 다친 뒤, 서인도 제도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섬에서 친해진 제프리 다 실바와 럼주 칵테일을 함께 하던 어느날, 그랜빌리 씨는 '점비'에 대해 물었고 다 실바는 자기가 젊었을 때 목격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나온 집사 출신이라는 작가 이력이 특이했던 작품. 이런 이력이라면 좀비가 실제 있는 것 처럼 묘사되는 작품은 쓰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그러나 작품은 작가 이력만큼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다 실바가 친구 이베르센이 죽은 날, 이베르센의 유령을 만나고, 밤길에서 공중에 떠 있는 점비를 목격하고, 이베르센 집에서 개 인간을 만났다는 체험담이 이어질 뿐으로, "내가 했던 무서운 체험" 류의 기승전결없는 괴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점비'나 개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래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 감염 지대" 

고든 파넘 박사는 아발론 섬에서 불사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혈청을 개발했다. 마침 섬에 닥친 화산 폭발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박사는 혈청을 이용하여 그들을 되살릴 생각을 하는데...

부두교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좀비가 등장하는SF 호러물입니다. 앞서 잭 런던의 단편과 비슷한 소재이지만, 되살리는 과정을 나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게 큰 차이점이자 볼거리입니다. 특히 인체는 기계와 같다는 등의 고든 파넘 박사의 생명에 대한 이론이 아주 재미있고 풍성했어요. 이 이론과 박사가 여러 동물로 진행하는 실험으로 이야기 여러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불멸성을 부여받은 실험체들이 번식을 통해 불멸성 유전을 증명했지만, 태어난 실험체들이 태어난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는 이야기는 별도의 단편으로 꾸며도 재미있겠더라고요.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영혼과 두뇌가 없이 본능만 남은 상태라 야수로 돌변한다는 발상도 아주 좋았어요. 이들이 죽지 않는 상태로 군대, 경찰을 휩쓸어버리고, 잘려진 손발이 꿈틀대며 잘린 조각들이 엉망으로 붙어 괴물이 되어버리는 묘사도 일품이었고요. 절대 죽지 않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화산 폭발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린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합니다. 스케일이 정말 남달라요.

물론 화산 폭발을 사람이 제어한다는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기에,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 정도 허풍은 충분히 허용범위 안쪽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아니 시대를 초월한 끔찍한 아비규환을 그려낸 SF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영화로 나와도 아주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22/06/02

샴 쌍둥이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점

샴 쌍둥이 미스터리 - 2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휴가 중 퀸 부자는 산불에 습격했다. 탈주 끝에 산 정상에 있는, 저명한 외과의사 사비에르 박사의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박사의 저택에 머무르던 가족과 손님들은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음 날, 사비에르 박사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유일한 단서는 피해자 손에 남겨져 있던 찢겨진 카드 조각 뿐이었다. 퀸 경감은 사비에르 박사의 부인 새러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지만, 엘러리는 고심 끝에 카드는 조작된 증거이며, 조작한 건 사비에르 박사의 동생 마크였다는 걸 밝혀냈다. 그러나 도주하다가 퀸 경감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마크마저도 결국 살해당했고, 현장에는 또 다른 카드 조각이 남겨져 있었다....

"엘러리 퀸""국명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 2012년 시공사의 엘러리 퀸 컬렉션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던 작품입니다. 국명 시리즈는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었지만, 주말에 도무지 읽을 책이 없어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도 없던 기대 수준에도 전혀 미치지 못한 졸작이었습니다. 억지스러운 설정들, 도무지 설득력 없는 범행, 어처구니없는 진상이 결합된 환장의 작품이었으니까요.

이 중 억지스러운 설정이 가장 거슬렸습니다. 휴가 중 산불을 만나 산 정상 저택으로 도피했던 퀸 부자가 그곳에서 유명한 외과의사 사비에르 박사 가족과 손님을 만나게 되는 도입부부터 억지스러웠어요. 급작스러운 산불도 그렇지만, 유명한 외과의사가 은퇴 후에 첩첩산중 꼭대기에 기묘한 저택을 지어서 은신한다는 건 대관절 무슨 설정일까요... 물론 사비에르 박사가 샴 쌍둥이 동물들의 분리 실험을 했다는 설명과 작중 묘사를 통해 "닥터 모로의 섬"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느낌을 전해주려고는 합니다. 정통 본격물은 어느 정도, 아니 꽤 많이 허구와 상상이 결합되어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죠.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근거지를 찾은 퀸 부자가 악을 물리친다는 아동용 모험물이었다면 모를까, 정통 본격물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설정이었습니다. 이 정도 설정을 부여할거라면 사비에르 박사가 괴물이라도 하나 만들어 놓았어야 하는데, 나오자마자 죽어버린다는 것도 황당했습니다.

산을 덮친 산불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저택에 갇혀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과정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완벽한 클로즈드 서클 상황이기는 한데, 이 정도 첩첩산중 저택이라면 구태여 이런 억지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화재로 갇힌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재난물로서의 가치가 더 높습니다. 엘러리 퀸의 절대적인 팬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똑같이 샴 쌍둥이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에도가와 란포의 "외딴섬 악마"가 있는데, 이 작품과 비교하면 노벨 문학상 수상작 급입니다. 차라리 란포의 작품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살짝 등장하는 샴 쌍둥이 중 한 명이 범인일 때 어떻게 형벌을 내릴 수 있을까?에 대한 딜레마가 더 재미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로 끌고 나가는 게 더 나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2008/12/30

매드 사이언스 북 - 레토 슈나이더 / 이정모 : 별점 4점

매드 사이언스 북 - 8점
레토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뿌리와이파리

제목 그대로라면 미친 과학에 대한 책으로 보이겠지만 이 책은 여러 다양한, 그리고 기상천외했던 과학실험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제목처럼 미친 짓도 적잖이 등장하나 등장하는 사례들이 다 미친짓은 아니고 의미심장한 것도 있고 지금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친 실험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300년대부터 소급해서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도 방대하지만 재미있기도 하고 새로운 사실들이 많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네요. 저도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 알려진 것이라는 것도 많기도 했고요.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단 잘못 알려진 사례로는 "영혼의 무게는 21그램" 과 "영화 중간에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삽입하여 콜라와 팝콘을 엄청나게 많이 판 사건" 을 들 수 있겠네요. 저도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실험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는데 이 실험 결과가 엄청나게 오류에 가득차 있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과 마케팅적으로도 아주아주 유명한 콜라 판매 실험 역시 거의 사기..에 가깝다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재미있었고 특기할 만한 것이라면 영화 "익스페리먼트"의 모델이 된 모의 감옥 실험이라던가, 투자한 비용이 아까워 실패한 투자를 멈추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연구인 "1달러 경매" 등이 무척 흥미진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히치하이크를 하는데에는 예쁘고 가슴큰 여자가 유리하다는 상식이나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는 유혹에 대한 실험도 인상적이었고요. 몇가지 이야기는 소설 소재로 써먹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익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의 웹사이트 등의 참고 자료의 소개도 엄청나게 충실하고요.

전체적으로 약간은 심리학적인 부분에 책의 내용이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은 좀 강하지만 제가 워낙 심리학에 관심이 많기에 그다지 하자가 있는 부분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때문에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A급인 별 4개짜리 책입니다. 5개를 줘도 좋겠지만 아쉽게도 번역이 약간 지루하고 따분한 점이 있어서 약간 감점하였습니다. 그래도 읽는데는 전혀 지장없는 수준이니 이런 분야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참고로, 매드사이언티스트가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으니 그러한 것을 기대하신 분이라면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2012/04/23

정신자살 - 도진기 : 별점 1.5점

정신자살 - 4점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길영인은 아내 한다미의 가출 이후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가 인터넷에서 '정신자살연구소' 홈페이지를 발견했다. 정신을 파괴하여 자살 없는 인생을 살게 해 준다는 연구소 소장 이탁오 박사의 말에 혹한 길영인은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시술비를 지불하고 정신자살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시술 이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에 더욱 집착하며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작품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건너뛰게 되었네요. 전에 읽은 "어둠의 변호사"가 요코미조 세이시 느낌이라면,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먼저 좋았던 부분부터 이야기해보죠.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어둠의 변호사"와 비교할 때 소설적인 완성도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장편인 덕분이겠죠? 문체나 전개가 모두 세련되어졌습니다. 길영인이 "정신자살"이라는 독특한 말에 이끌려 이탁오 박사의 연구소에 찾아가는 과정과 정신자살 시술 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를 파헤치며 진상을 더듬어 가는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전작과 달리 고진과 이유현 형사 콤비의 캐릭터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진의 가벼운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이채로웠고요.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인 트릭도(중반까지는) 괜찮은 편입니다. 4년 전 이탁오 박사가 저지른 첫 사건인 박재성 - 우호선 사건에서의 트릭은 장편에서 캐릭터 소개에 사용되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후 신재인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트릭도 복선이 잘 설계되어 있으며, 신재인 집에서의 소실 트릭도 괜찮았어요.

또 전작에서의 아쉬웠던 점 - 판사가 쓴 작품이지만 실제 법률을 이용한 부분이 별로 없다 - 를 초반 염상우의 친족상도례 작전에서 잘 써먹습니다. 때문에 여기까지는 별점 3점, 아니 4점 가까이 줄 수 있을 정도에요.

그러나... 마지막 진상과 반전이 모든 것을 망쳐버립니다. 일단 다중인격이라는 길영인 사건의 진상은 현실적이지 않고 작위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요. 1인칭 시점에서의 수기와 전개를 통해 서술 트릭 같은 효과를 노린 것 같기도 한데, 뜬금없이 밝혀지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나마 두 가지 - 1년 전 프리버드의 전화와 펜션 사건에서의 길영인 전화 - 단서는 그럴듯하지만, 그것만으로 다른 것들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아무리 띄엄띄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한초록이 끝까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뭐 다중인격 부분은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다음, 펜션에서의 살인 사건에서의 과일을 이용한 트릭은 어떨까요? 그림 몇 장 본다고 과일을 가지고 사람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럴 능력이 있다면 수박을 깎아서 사람 모양을 만들거나, 아니면 화장실 휴지를 적셔서 종이찰흙을 만드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 인간거미 합체 장면은 정말이지 나오지 않는 것만 못했습니다. 작품에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설픈 에도가와 란포 흉내 내기에 불과했으니까요. 게다가 그 이유가 체포를 막기 위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의 극치. 다시 병원으로 보내 둘을 나눠 놓으면 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탁오 박사도 불법 시술로 구속되었을 테고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요?

덧붙이자면, 이탁오 박사 캐릭터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작품에 현실감을 심는 데는 오히려 장애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초, 중반부의 전개는 좋았고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도 있으며, 세 번째 장편다운 완성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후반부, 특히 마지막 장면 두 페이지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추리소설의 현재이자 미래를 나타내는 작품이고 시리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일본 추리소설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해 보이네요.

2009/01/22

저명작가가 뽑은 미스터리 / SF 베스트 5

쇼켄 추리문고 창간 40주년을 맞아 저명작가들이 쇼켄 추리 / SF 문고 출간본들 중 재미있는 작품들 5편을 꼽은 리스트로 출처는 "미스터리베스트" 입니다. 추리작가 위주로만 번역해서 올립니다.


'2013.06.24. 링크 추가'
'2025.01.05 링크 추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1. Y의 비극 : 엘러리 퀸
2. 브라운 신부의 동심 : G.K 체스터튼
3. 구부러진 경첩 : 딕슨 카
4. 그린 살인사건 : 반 다인
5. 독초콜릿 사건 : 안소니 버클리 콕스

기타무라 카오루
1. 일본탐정소설전집2 에도가와란포
2.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 아와사카 츠마오
3. 브라운 신부의 동심 : G.K 체스터튼
4. 불청객들의 뷔페 : 크리스티나 브랜드
5. 새하얀 거짓말 : 프레드릭 브라운

교코쿠 나츠히코
1. 흡혈귀 드랴큐라 : 브램 스토커
2. 기암성 : 모리스 르블랑
3. 현자의 돌 : 콜린 윌슨
4. 일본탐정소설전집10 사카구치안고
5. 키드 피스톨즈의 모험 : 야마구치 마사야

고이케 마리코
1. 신데렐라의 함정 : 세바스티앙 자프리조
2. 이천만달러와 물고기 한마리 : 카트리느 아를레
3. 실루엣 - 아이리쉬 단편집 4 : 윌리엄 아이리쉬
4. 악녀 이브 : 바틀리 체이스
5. 두명의 아내를 가진 남자 : 패트릭 퀜틴
 
미야베 미유키
1. 어둠의 스캐너 : 필립 K 딕
2. 브라운 신부의 동심 : G.K 체스터튼
3. 미스 마플과 13개의 수수께끼 : 애거서 크리스티
4. 매드 사이언티스트 : 스튜어트 D 시프 편저
5. 7명의 아줌마 : 패트리시아 맥거

에도가와 란포
1. 빨간머리 레드메인즈 : 이든 필포츠
2. 노란방의 비밀 : 가스통 르루
3. 승정(비숍)살인사건 : 반 다인
4. Y의 비극 : 엘러리 퀸
5. 트렌트 최후의 사건 : E.C 벤틀리
6.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7. 모자수집광 사건 : 딕슨 카
8. 붉은 집의 수수께끼 : A.A 밀른
9. 통 : F.W 크로포츠
10. 나인 테일러스 : 도로시 L 세이어스

란포 혼자 10편의 작품을 선정하는 것도 눈에 띄는데 역시 거장은 거장인가 봅니다. 여튼 간략하게 평하자면, 유명작가들은 대부분 고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전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고요. 저도 이 리스트를 보다가 다시 읽고 싶어진 책이 몇권 생겼는데, 이번 연휴때 들춰봐야겠습니다.

2007/03/14

마라코트 심해 - 코난 도일 : 별점 2.5점

마라코트 심해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이수현 옮김/행복한책읽기

옥스퍼드 대학 연구원 사이얼레스 해들리는 괴짜 박사 마라코트 박사의 연구를 위한 모험에 동참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종의 잠수장치를 이용하여 대서양 바다 밑 해구를 조사하는 것. 미국인 기계공 빌 스캔런까지 포함한 3인은 잠수에 성공하지만 곧바로 심해 생물의 공격을 받아 구명줄이 끊겨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만다. 그러나 바다 밑에서 그들은 만여년전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인들의 후예들에게 구조되고 그들의 신비로운 심해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코난 도일 경의 SF작품. 경의 마지막 장편이기도 합니다. 행복한 책 읽기 SF 총서로 새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지만 제가 읽은 것은 "하우미스테리"를 통해 입수하게 된 구 동서문화사 판본이라서 책 구성이 조금 다르군요. 도일 경의 SF는 "잃어버린 세계"를 통해 이미 접해 보았고, 그 엄청난 상상력과 기발함, 그리고 재미에 깜빡 뒤집어진 적이 있기에 이 작품 역시 무척이나 기대가 컸습니다. 최소한 "잃어버린 세계" 만큼은 8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재미를 가져다 주었거든요.

그러나 이 작품은 사실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일 큰 원인은 "잃어버린 세계"의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주인공 챌린져 교수가 등장하지 않는 것 때문이었죠.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원조이면서도 독특한 정신세계 때문에 독자를 매료시키던 교수 대신에 "마라코트 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챌린져 교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괴퍅한 인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만큼의 압도적인 캐릭터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어서 많이 실망스러웠어요.
또 총 4부로 구성된 이 작품의 구성 역시 재미를 떨어트리는데 한 몫 하고 있습니다. 1부는 해들리의 편지를 중심으로 탐험의 시작과 탐험 내용을 설명하는 도입부이며 2부는 해들리가 아틀란티스에서 띄워 보낸 수기, 3부는 3인조가 다시 지상 세계로 탈출하는 부분, 4부는 2부에서 부족했던 바닷속 생활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인데 각 부분마다의 연결고리가 매끄럽지 않아서 읽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4부는 왜 들어갔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사족이라는 느낌이 강했고요. 특히나 악마 "바알시이파"와의 대결은 읽기가 괴로울 정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80여년전의 에테르 과학관에 기반한 코난 도일 경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마라코트 심해에서의 생활 이야기는 독보적이기는 합니다. 지금 상식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부분이 많지만 순전히 머릿속으로만 창조한 공간치고는 나름 설득력이 넘치거든요. 잠수정의 설정은 지금 읽어도 납득이 갈 정도로 잘 만들어 놓았고요. 그 외에도 아틀란티스의 문명 묘사나 심해 풍경 같은 부분에서도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 멋드러진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수없이 인용되는 "침몰한 아틀란티스 제국의 생존자들" 이라는 테마를 전면에 부각시킨 첫번째 작품이라는 점이겠죠.
덧붙여 뒷부분에 실려있는 챌린져 교수 시리즈 단편인 "지구의 부르짖음"이 꽤 물건이더군요. 챌린져 교수의 매력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중심을 확실히 잡아주고 있으며 황당한 과학 세계관을 특유의 묘사와 설명으로 정말 있음직하지 않나 싶을정도로 재미나게 꾸며주고 있어서 저는 본편보다 이 작품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지금 읽으면 낡았다라는 느낌이 앞서 들 정도로 오래된 작품이지만 고전은 고전 특유의 매력이 있는 만큼 한번정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울러 귀중한 책을 선뜻 제공해 주신 이영진님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6/11/09

니콜라 테슬라 - 신과학 총서 4 - 마가렛 체니 / 이경복 : 별점 5점

니콜라 테슬라
마가렛 체니 지음, 이경복 옮김/양문

"프레스티지"를 보고 다시 필이 와서 잡게 된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입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간 뒤 교류 발전기를 개발하고 이후 여러가지 프로젝트의 실패로 좌절을 겪다가 쓸쓸한 만년을 보내는 그의 출생에서부터 사망때까지의 일대기를 3자의 시선으로 여러가지 자료를 모아서 디테일하게 서술한 책으로, 한 천재 과학자의 일생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이 책의 매력 포인트는 뭐니뭐니 해도 테슬라라는 천재이기도 하고 광인이기도 한 독특한 캐릭터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점과 그가 고안하고 발명했던 여러가지 발명품들에 대한 서술이겠죠. 그가 예견한, 혹은 거의 "개발이 완료" 되었다라고 한 것 중에서 시대를 거의 100여년 앞서간 것은 로봇, 휴대전화, 해수차 발전소, VTOL-비행체, 인터넷 등 한두개가 아니기에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가 새롭게 설계한, 기존 모든 동력기관의 단점을 해소한 "테슬라 터빈" 같은 경우에는 출력과 효율이 놀라운 기기였지만 당시의 야금술로 엔진의 열을 견디는 재질을 구현할 수 없어서 얼마 전에야 다시 개발이 진행되어 대단한 성과를 보여준다고 하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죠.

또 다른 포인트의 하나인 그의 광기에 대한 묘사 역시 자세합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동그란 물체"에 대한 공포심과 유명한 결벽증 같은 것은 제가 보기에는 분명 정신분열증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당대 사람들에게 보여진 이미지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신문등을 통해 실감나게, 때론 과장되게 그려진 그의 모습이 현대 여러 컨텐츠에서 접할 수 있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전형을 제시하고 많은 영감을 준 것은 분명하겠죠.

그 외에도 다른 천재인 에디슨, 그리고 테슬라 스스로 "멍청이"라고 이야기했던 마르코니와의 분쟁같은 소소한 이야기들도 흥미진진합니다.

여러가지 발명품은 당시 시대를 너무나 초월했기에 당대의 인정을 받기 힘들었다는 천재의 불우한 삶이야 워낙 많은 인물들에게서 보여지는 부분이지만 테슬라는 천재성의 결과물이 누가 보아도 확연한, 현재까지도 테슬라가 보여준 그 현상을 규명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업적이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고 잊혀졌다는 것이 놀랍더군요. 물론 테슬라 본인이 특허 관리를 좀 애매하게 했고 투자를 위해 사기(?)도 좀 치긴 했지만 납득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아마 말년에 점점 더 정신분열증(?)이 심해졌기 때문이겠지만요.

어쨌건 무척 재미있는 독서였습니다. 한 광기어린 천재의 일대기일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를 반영하는 디테일이 잘 살아있는, 전기문학이지만 읽는 재미 하나는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그나저나... 이 책 역시나 재미, 그 외 여러가지 부분에 있어서 정말로 탁월한 책인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왠지 테슬라 본인과 비슷하네요

2003/12/15

펠리데 - 고양이 추리소설 첫번째 이야기 - 아키프 피린치 / 이지영 : 별점 3점

펠리데 - 6점 아키프 피린치 지음, 이지영 옮김/해문출판사

음, 이상하게 고양이는 추리소설과 많이 연관된 친숙한 소재인 듯 합니다. 포우의 "검은 고양이"는 그렇다고 쳐도 아카가와 지로의 "삼색털고양이 홈즈"시리즈 도 있었죠. 이 책 "펠리데"도 고양이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이색적인 추리소설입니다. 다만 굉장히 의외였던 것이 다른 고양이 탐정 소설들이 거의 다 사람이 주인공이고 고양이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던가 하는 류의 역할을 해 왔던것에 반해 이 책은 완전히 고양이 1인칭 시점의 소설입니다. 고양이의 감각과 생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일단 설정면에서 독특한 재미를 주네요.

주인공 프란시스는 주인 구스타프와 새로운 동네에 이사온 굉장히 시니컬한 고양이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발정기 수컷들의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며 프란시스는 새로 사귄 친구 블라우바트와 함께 범인을 추적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미친듯한 연구에 따른 "클라우단두스"라는 존재라던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닌 거대한 진화론적 음모에 따른 범행이라는 줄거리, 그리고 꽤 개연성 있는 복선들로 특이한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추리 스릴러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편입니다. 여러 고양이와 인간들에 대한 시니컬하고도 디테일한 묘사 역시 재미있는 부분이죠. (역시 고양이는 은혜라는걸 쥐뿔도 모르는 짐승인듯 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장황하고 긴 묘사와 곁가지 설명들로 읽는 맥이 탁탁 끊어지는 느낌을 줍니다. 읽다가 졸음이 온 부분도 상당 부분 존재하고요. 잘 짜여진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완독하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지루했습니다. 고양이 탐정 프란시스의 다음 활약은 기대되지만 보다 짧고 압축된 이야기로 읽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저는 가격에 비한다면 약간 실망스러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5/04/14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 - 로버트 A. 하인라인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 이정 외 : 별점 2.5점

SF 명예의 전당 2 : 화성의 오디세이 - 6점
로버트 A. 하인라인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이정 외 옮김/오멜라스(웅진)

이전에 읽은 1권에 이어지는 2권. 마찬가지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수록작품은 모두 13편입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화성의 오디세이 A Martian Odyssey" - 스탠리 와인봄 Stanley G. Weinbaum
"헬렌 올로이 Helen O' Loy" - 레스터 델 레이 Lester del Rey
"길은 움직여야 한다 The Roads Must Roll" - 로버트 하인라인 Robert A. Heinlein
"소우주의 신 Microcosmic God" - 테오도어 스터전 Theodore Sturgeon
"보로고브들은 밈지했네 Mimsy Were the Borogoves" - 루이스 패짓 Lewis Padgett
"오로지 엄마만이 That Only a Mother" - 주디스 메릴 Judith Merril
"스캐너의 허무한 삶 Scanners Live in Vain" - 코드웨이너 스미스 Cordwainer Smith
"화성은 천국! Mars is Heaven!" - 레이 브래드버리 Ray Bradbury
"즐거운 인생 It's a Good Life" - 제롬 빅스비 Jerome Bixby
"즐거운 기온 Fondly Fahrenheit" - 앨프리드 베스터 Alfred Bester
"친절한 이들의 나라 The Country of the Kind" - 데이머너 나이트 Damon Knight
"앨저넌에게 꽃다발을 Flowers for Algernon" - 대니얼 키스 Daniel Keyes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A Rose for Ecclesiastes" - 로저 젤라즈니 Roger Zelazny

SF계의 어마무시한 거장, 큰형님들의 대표 걸작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1권과 같습니다. 국내 소개 기준으로는 1권보다 이름값은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은데, 로버트 하인라인, 레이 브래드버리, 로저 젤라즈니가 묵직하니 중심을 잡아줍니다.

그런데 SF 작가들의 투표로 선정된 리스트이기 때문일까요? "최고작"을 모았다기보다는 역사적 의미까지 고려하여 선정된 느낌이에요.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가 그러합니다. 좋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동명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프로스트와 베타"를 꼽고 싶거든요. 디테일한 과학적인 설정, 냉전시대의 세계관 등 현실이 잔뜩 투영된 그간의 공상과학 소설과는 다른 서정적이고도 종교적인 주제를 미려한 문체로 그려낸, 순문학에 가까운 새로운 SF의 "효시"라는 장르 역사적 의미가 커서 선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에서도 "화성은 천국!"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죠.

위에서 예를 든 작품들을 비롯하여 제 All time best이기도 한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처럼 다른 곳에서 소개된 작품이 많다는 점, 지금 읽기에는 낡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은 단점인데 이건 걸작선이라는 특징 및 작품 발표 시기를 볼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다만 이상할 정도로 읽기 힘들었는데, 원작 자체가 어렵게 쓰이기는 했겠지만 번역하면서 조금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쓰는 배려가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저런 감점요소가 제법 있는데 "앨저넌에게 꽃다발을"을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는 강력 추천드립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들만 아래에 짤막하게 리뷰 남깁니다.


"화성의 오딧세이"

열흘간 소식이 두절되었던 화성 탐사대원 자비스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마크 트웨인이 화성을 무대로 한 SF를 쓰면 이런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유머러스한 분위기, 허풍 가득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모험, 거기에 지구인의 탐욕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다는 결말에서의 풍자가 그야말로 마크 트웨인 스타일인 덕분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스타일만 모방한 파스티시가 아닙니다.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동안 친구가 된 타조 외계인 "트윌"에 대한 묘사 같은 설정의 디테일도 뛰어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길은 움직여야 한다"

모든 도로를 움직이게 만들어 나라 전체를 발전시켰지만, 기술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대형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한 총감독관 게인스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분위기는 하드보일드 범죄물 스타일인데 게인스의 활약이 별다른 게 없으며 전개도 뻔하고, 결말도 허무해서 전체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도로가 움직인다는 황당한 설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굉장합니다. 도로에 대한 세밀한 설정과 묘사에서 그야말로 거장의 힘이 한껏 느껴집니다. 이런 매력적인 설정을 잘 살리지 못한 이야기는 아쉽습니다만 이 설정 묘사 하나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소우주의 신"

천재 과학자를 이용해 먹는 은행가가 과학자에게 색다른 동력 전송기를 만들게 한 뒤, 그것을 이용해 국가를 협박하고 과학자를 죽이려 합니다. 다행히 과학자에게는 그가 만든 새로운 생명체 네오테릭스들이 있었고, 네오테릭스들이 더 뛰어난 발명을 해서 과학자를 구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이 가득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악덕 기업가는 물론 기이한 피조물까지 생생한 캐릭터 묘사 역시 아주 일품이고요. 흡입력도 대단해서 네오테릭스가 과학자가 요청한 "방어막"을 만든다는 결말까지 손을 떼기 힘들 정도 였습니다. 재미만 놓고 따지자면 1권의 "투기장"과 비교될 만큼 최고였어요. 제 별점은 5점입니다.

"오로지 엄마만이"

방사능으로 돌연변이들이 태어난다는 내용으로 냉전시대 핵공포가 만연했을 때 쓰여진 듯 합니다. 아이가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 돌연변이인데, 엄마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반전은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작가가 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스캐너의 허무한 삶"

우주(작중에서 "위와 밖") 여행 시 느끼는 거대한 고통을 잊고, 우주를 정복하기 위해 스캐너라는 전문 직업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몸의 감각을 없애고 "하버맨" 상태가 되어 우주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크랜치"라고 불리는 행위를 통해 잠깐이나마 감각을 회복할 수 있고요.
그리고 이들은 고통 없이 우주를 여행하는 방법을 알아낸 애덤 스톤을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들 직업의 위대함이 흔들리게 되니까요. 그러나 스캐너 중 한 명인 마텔이 인류를 위해 그를 구한다는 내용입니다.

내용은 굉장히 간단한데 스캐너, 크랜치 등 작중 나오는 관련 설정이 아주 상세하게, 설득력 있게 묘사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텔의 활약이 이러한 설정 묘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빈약하며, 결말이 허무할 정도로 시시하고 간단한 해피엔딩이라는건 단점이지만 압도적인 설득력에는 점수를 줄 수밖에 없네요. "길은 움직여야 한다"와 비슷하달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즐거운 인생"

조물주급의 초능력을 지닌 아이 앤서니를 중심으로 가족, 마을사람들이 마을 통째로 이세계를 방황한다는 내용의 작품.

SF로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이 "아이"로 태어난다면 그것은 재앙일 것이라는 주제를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앤서니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전전긍긍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신 앞에 비굴한 현대인을 풍자한 것으로 보이고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서운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즐거운 기온"

인간에 가까운 다기능 안드로이드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추리물 스타일로 풀어낸 작품. 일종의 서술 트릭이 도입된 점도 특징입니다.

하지만 그냥 추리극 형태로만 풀어내는 게 깔끔했을 것 같아요. 밴덜루어와 안드로이드에게 서로를 구분할 수 없는 일종의 "투영" 현상이 일어났다는건 이야기에 넣을 필요가 없었거든요.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가 혼란스러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좀 더 짧고 깔끔하게 전개했더라면 보기 드문 SF 추리물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9/10/25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구라치 준 / 김윤수 : 별점 2점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4점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작가정신

잘 모르는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흥미로와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기발함, 기묘함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큽니다. 개개의 이야기들 모두 아이디어에 비하면 긴 편이라는 것도 단점이고요. 호시 신이치였다면 10페이지 안 쪽으로 끝냈을, 그런 내용들에 불과하거든요. "사내 연애"와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특히 쇼트쇼트 스타일로 쓰여지는게 어울렸을겁니다. 기발한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는 점에서요.

물론 쓰고 싶은 글을 느긋하게 썼구나 싶은 작품도 있습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애묘인이구나! 싶은 묘사가 가득하여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어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기발함이 추리적으로 잘 포장된 괜찮은 이야기였고요.

하지만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고 아이디어도 괜찮았지만 약간은 어정쩡한 느낌이 컸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 쪽인지, 아토다 다카시 쪽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면 좋겠네요. 호시 신이치 쪽이라면 더 짧게, 아토다 다카시 쪽이라면 아이디어의 보강과 약간의 엽기성(?)이 추가되어야 할 겁니다.

각 단편별 상세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BC

불특정한 희생자를 살해하는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은 우연히 2 건의 살인 사건이 ABC의 규칙을 따른다는걸 알아내고 C에 해당하는 희생자를 찾아내어 살해하려 했다. 이유는 유산을 노리고 동생을 죽일 계획인데 동생이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그 연속 살인ABC 살인 사건의 결합은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에서도 써 먹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마 다른 작품에도 쓰여진 경우가 있을 거에요. 그만큼 유명한 트릭이자 설정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아이디어는 범인이 C 사건을 일으킨 뒤, 곧바로 다수의 D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반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연쇄 살인에 편승하여 저마다 모방 범죄를 일으킨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급작스럽게 자신도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걸 깨달으며 마무리됩니다.

반전과 결말 모두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흔해 빠진 서두를 조금 더 줄여서 쇼트쇼트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내 편애"

인사 관리를 컴퓨터가 전담하게 된 이후, AI 시스템 '마더컴'로부터 편애를 받게 된 주인공이 회사 내에서 이런 저런 황당한 일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공 지능이 인사 관리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지만 '모더레이트 플리커 메소드식 (MFM)' 이라고 불리우는 설정이 아주 기발합니다. 인사 관리를 지나치게 합리적이지 않도록 하는, 인간적인 모호함을 넣은 서브 프로그램으로 덕분에 좀 느슨하고 인간적으로 관리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인 '공정성'이 훼손되는거라 일부러 이런 오류를 집어넣을 이유는 없지만, 상황 자체는 꽤 그럴듯 했습니다.

이 모호함이 주인공 데라시마에게는 '편애'로 작동하여 일으키는 소동들도 재미있습니다. 전무가 직접 커피를 타다 주고, 상사가 허물을 덮어주는 정도에서 마음에 둔 여사원과 억지로 이어주는 민폐 수준의 도움까지 진화하게 되거든요. 심지어 마음을 고백한 것도 아닌데 주인공의 눈빛 등을 분석하여 이런 억지를 이끌어내니 어떻게 보면 무섭지요.

그러나 결국 지긋지긋해진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는데 그 회사 마더컴은 주인공을 그냥 싫어하더라는 결말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상황을 끌어낼 부분이 많았는데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끝낸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살해된 피해자 입에 파가 물려있고, 머리 맡에는 케이크가 놓여있는 기묘한 상황을 그린 단편입니다.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워요. 나카모토 경부의 합리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은 아주 쉽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범행 현장에 대한 아마치 형사의 추리가 전부인데, 진상이 밝혀지지 않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혼잣말과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라 공허합니다. 아마치 형사 본인 스스로도 마음껏 공상한, 상식 밖의 엉뚱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물론 실제 진상이 드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스토킹하면서 피해자가 파를 싫어하고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후,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싫어하는 파가 입을 막고 있어서 먹지 못해 원통해서 마음 편히 성불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불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는 추리는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피해자에게 집착해서 그녀가 죽어서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면 안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건데, 누가봐도 정신병자의 행동입니다. 정신병자의 정신나간 행동을 합리적으로 추리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때문에 추리 소설로의 가치는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

할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에 내려간 주인공 유리에는 할머니의 고양이 미코가 며칠동안 밤에 어딘가를 바라보는걸 알아챈다. 미코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양이 미코에 대한 묘사가 꽉 채워져 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시종일관 느껴져 좋았습니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만지고, 같이 노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고양이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냄새' 때문이며, 이는 이웃집 할머니를 아들이 암매장하기 위해 땅을 판 탓이라는 결말은 좀 억지스럽습니다. 고양이의 후각이 예민한건 맞지만, 이웃집에서 땅을 판다고 밤에 자지 않고 그쪽을 쳐다본다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땅을 판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한 냄새가 날지도 잘 모르겠고요. 실제로 공사 현장 옆에 산다고 해서 고양이가 그곳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양이 묘사는 좋지만 그 외에는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습니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패전 직전인 1944년 겨울, 나가노 현에 위치한 제국 육군 특수 과학 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묘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흉기는 하나도 없는 밀실인 실험실에서 피해자가 후두부를 날카로운 흉기로 얻어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언뜻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사망한 걸로 보이는데 과연 진상은 무엇일까?

밀실 살인물이자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마사키 박사가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력 '공간 전위', 즉 일종의 텔레포트 현상을 인력으로 발생시켜 미국에 폭탄을 투하한다는 연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무 첩보 기관에서 파견 나온 도네 소좌의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공간 전위의 첫번째는 공간 역전 현상으로 공간이 뒤집혀 피해자는 거꾸로 떨어졌고, 우연찮게 지금은 움푹 들어간 천장 모서리에 후두부가 찍히게 되었다는 추리입니다. 공간 역전이 일어나면 움푹 들어간 곳은 반대로 튀어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이런 괴기한 추리는 진상도 뭐도 아니며, 뒤이어 주인공인 이즈카 가쓰오 이등병의 합리적인 추리가 등장합니다. 범인은 도네 소좌이며, 이유는 피해자가 스파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흉기는 벽돌 같은 걸로 범행 후 멀리 던져버렸고, 아침에 문을 열 때 문 앞의 눈이 치워져 있었다는게 증거고요. 밀실은 특무대 소속이면 자물쇠 여는 것 쯤은 식은죽먹기였을거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일 뿐입니다. 근거도 없고, 진상도 결국 밝혀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이 진상이었다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고를 위장하여 연구에 종사하는 병사들을 죽이는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즈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는데, 도네 소좌가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해 가면서까지 가게우라 이등병을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가 스파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 죽여도 괜찮았을겁니다. 그만큼 미친 시대였지요.

그래도 일본의 전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무식한 특수 과학 실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걸 풍자하는 묘사와 내용은 인정할 만 합니다. 공간 전위라는 기묘한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를 추리에 응용한 발상도 좋았고요. 차라리 이 추리가 마지막에 진상처럼 드러나고,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지만 미친 시대에 누가 그런걸 신경이나 쓸까? 라는 형태로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하마오카는 회사 연구소에 극비 신소재 관련 자료를 가져오기 위해 방문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교 선배 네코마루를 만났고, 우연히 연구소 내 산책을 함께 하다가 연구 소장 살인 미수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일종의 불가능 범죄를 다룬 정통 본격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도가 지나친 삼엄한 연구소 경비, 기묘한 연구원과 도저히 알 수 없는 센스의 연구소 마스코트 네코멜론군,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네코마루 선배 등 설정이 만화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건 단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 정도만이었다면 괜찮았을텐데 말이죠. 이래서야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 - 극비 신소재에 대한 정보를 빼돌리는 것 - 와 거리감이 커서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시종일관 장난으로 일관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추리 자체는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추리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으니 이 범행은 소장의 자작극이다! 그리고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던질 수 없으니 빈 양동이를 던져 부딪혔고 물은 그 전에 쏟아 놓았다!는 추리로 아주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극비 신소재 자료를 빼돌리고 이를 하마오카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동기도 좋았고요. 농담같은 철저한 보안은 구급차를 타고 빠져나감으로써 뚫을 수 있다는 발상 역시 보안이 나름 강한 회사에 다니는 제 입장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과연 시리즈 작품에 탐정으로 등장할 만 합니다.

만화적이고 과장된 묘사를 줄이고 좀 더 일상계스러운 작품으로 쓰는게 여러모로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