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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2

탐정 혹은 살인자 - 지웨이란 / 김락준 : 별점 3점

탐정 혹은 살인자 - 6점
지웨이란 지음, 김락준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청은 한때 대만 연극계에서 잘 나가는 교수였지만 술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크게 상처 입혔던 사건을 계기로 교수직을 그만둔 뒤, 슬럼가같은 골목 워룽제로 옮겨갔다. 그리고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라는 일을 시작했다. 첫 의뢰인 린부인의 의뢰는 갑자기 남편을 미워하게 된 딸아이 행동의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미행과 탐문을 통해 린씨와 불륜 관계로 보였던 미스 추는 병원 대상으로 협박을 일삼던 범죄자였다는게 드러나고, 린부인은 이혼했다.

그 뒤 워룽제 주변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우청은 체포되었다. CCTV로 피해자들과 근처에 있었다는게 드러났으며, 결정적으로 범인이 우청으로 변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번째 사건에서 범인 스스로 변장을 드러내 우청은 풀려난다. 경찰과 수사에 함께 참여한 우청은 범행 장소가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정확히 4방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 범인의 변장 기술은 전문가에게 배웠을 거라는 것 등 여러가지 추리를 선보이고, 결국 범인이 자신을 추종하던 극작가 쑤훙즈라는걸 알아낸다. 그러나 경찰은 꼭꼭 숨은 쑤훙즈를 체포하지 못하고, 결국 다섯번째 범행이 벌어지는데....

"내 심경이 어땠냐 하면 좆나 엿같았습니다!"

중국 추리 소설은 몇 편 읽어보았지만 대만 추리 소설은 처음 읽어 보네요. 그런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에는 주인공 우청의 지분이 상당합니다. 독특하면서도 생생한 매력을 그야말로 '분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본인 실수로 스스로 루저의 길을 택했다는건 정신병을 앓는 탐정, 주정뱅이 탐정, 패배자 탐정 등 다른 루저 탐정들과 조금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살아있다!'는 걸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차이는 큽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는 다른 루저들과는 정 반대지요. 우청 역시 루저가 되는걸 선택한 뒤 워룽제 골방으로 숨어든건 혼자 우울하게, 어둡게 지내보겠다는 취지이기는 했습니다. 한데 뒤로 가면 갈 수록 경찰, 언론은 물론 범인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맞서 싸우면서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칩니다. 루저가 아니라 시민 영웅인 셈입니다.

또 우청은 사회에 대한 불만도 딱히 없고, 내면에 특별한 분노도 없습니다. 가족과도 그런대로 원만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루저의 길을 택한 평범한 우리 이웃이라서 현실감이 넘칩니다. 루저가 된 계기인 공황장애라는 병과 연극인들에게 상처를 준 '구이산다오' 사건 설명도 상세하고 현실적이고요. 어린 아이를 죽이거나, 믿었던 아내가 바람나서 도망갔다던가,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상황보다는 훨씬 와 닿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당연히 그냥 루저는 아닙니다. 명확한 주관이 있으며 추리력도 갖춘 실력자이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생각, 견해를 드러내는 언변과 재치도 대단하고요. 루저 탐정들이 보통 경찰 출신이라서 자연스럽게 먹고 살려고 탐정이 된 반면, 우청이 '사설 탐정'이 된건 지병 탓이라는 독특함도 눈에 뜨여요. 공황장애로 생긴 불면증으로 많은 책을 읽어서 사람 내면을 파악하는 기술을 습득했다는게 이유거든요. 스스로 추리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추리 소설을 셀 수 없이 많이 읽었고 타이완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는게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하지요. 한 마디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루저 탐정입니다. 이런 기묘한 캐릭터를 이렇게 잘 그려낸 작가에게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우청 탐정에 대한 여러가지 설정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린 부인, 천제루가 의뢰한 첫 번째 사건부터 흥미로운 부분이 있거든요. 미행과 탐문, 단도직입적 질문으로 답변을 끌어내어 해결되기 때문에 추리할 여지가 많지는 않지만, 린 선생이 받은 분재 동호회 회원 메일에 포함된 상품 번호가 날짜와 버스 번호, 내릴 정류장을 알리는 일종의 암호문이라는걸 찾아내는건 재미있었어요.

이어지는 본편 사건인 연쇄 살인 사건은 무려 다섯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라서 당연히 추리적으로 훨씬 풍성합니다. 우청이 체포되었을 때 당했던 부당한 처사를 이용하여 경찰 수사에 합류한다는 설정부터 괜찮습니다.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 연쇄 살인에 뛰어들어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경찰과 협조해야 하니까요.
이후 수사 과정에서 우청이 단서를 하나씩 짚어내는 과정도 볼만해요. 우청이 7월 7일 타이베이에 없었다는걸 증명한 뒤, 7월 7일 CCTV를 뒤져 자신으로 변장한 범인 행적을 추적하는 식으로요. 이를 통해 범인이 변장의 달인이라는걸 알아낸 우청은 이 정도 변장은 어딘가에서 배웠을 것이다!고 추리합니다. 그래서 관련 세미나와 강의를 뒤져 수강생 명단에서 범인 쑤훙즈를 찾아내게 되지요.

불교의 사상, 이론과 상징을 연쇄 살인 사건에 녹여낸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기독교 상징에 따라 일어난 작품은 있었습니다. 묵시록 예언을 따르는 식으로요. 동요그림, 수학 법칙, 음악, 바둑, 체스, 심지어 추리 소설에 따라 일어났거나, 주요 소재가 된 작품도 읽어 보았었고요. 그런데 불교라니! 그동안 제가 읽어왔던 거의 1000편에 가까운 추리 소설 중 이런 작품은 없었습니다.

불교적인 상징이 사용된건 피해자들이 선택된 이유가 만(卍)자에 해당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초 피해자들은 우청을 중심으로 위도, 경도가 정확한 정4방향 꼭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범인이 해당 위치에서 무작위로 희생자를 선택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좌우 대칭의 정사각형이 완성되었으니, 가운데 있는 우청만 남은 셈이지요.
그러나 5번째 사건이 일어난 위치를 확인하여 도형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불교의 만(卍)자를 그리고 있다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범인 쑤홍주가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우청을 깨우치게 만드는 종교적 목적이었고요. 물론 이는 불교 사상은 아닙니다. 불교를 믿었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세계에 사로잡힌, '우리에게는 현생만 있는데 현생은 지옥이라는' 정신병자 쑤홍주 자신만의 주장이지요. 하지만 이 주장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불교 사상에 닿아 있으며, 여러가지 소재를 통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핵심 키워드였던 금강경의 한 구절 - "마음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으면 머물러 있는게 아니니라" - 해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울림을 줍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기 위하면서 겉모습에 미혹된다는 거지요. 즉, 어떻게 사는게 편안한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일을 걱정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울고 웃는 거고요. 그래서 진짜 편안해지려면, 겉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불교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스쳐가듯 등장하는데, 모두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곁가지로 진행되는 황색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사회 지도층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풍자하는 장면들도 재미납니다. 우청이 범인으로 몰렸던 상황에서 언론의 부정확한 추측 보도와 취재 경쟁이 블랙 코미디처럼 묘사되거든요. 우청의 보복 고소에 대한 묘사도 속 시원합니다. "언론 건드려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에 언론이 사람 잘못 건드린 줄 알라고 하세요. 나는 공익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난 그저 법원에서 언론에 한 방 먹이고 싶을 뿐입니다." 라고 일갈하는데, 멋지더라고요. 이런저런 결탁으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지만, 고소라도 한 게 어딥니까. 우리 나라도 이런 고소, 그리고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 배상제가 일상화, 법죄화되면 좋겠네요.

잘 모르는 대만의 복잡한 도시 묘사, 이런저런 문화와 풍습들 묘사도 새로움이 많았습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뒤 족발 국수를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요. 서민적이고 사람사는 느낌 가득한 묘사도 정겨움을 더해 줍니다. 우청과 어머니의 관계는 물론, 우청과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 모두 서민적이고 정감가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거든요. 왁자지껄하면서 잔 정이 넘치는게 우리나라와도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수선스럽고 요란한 점은 옛날 보았던 홍콩 코미디 영화 정서와 비슷하다고 생각도 되네요.

그러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왜 쑤훙주가 우청을 함정에 빠트렸다가 바로 풀려날 수 있도록 범행을 저질렀는지부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요. 우청을 고난에 빠트리려면 그를 살인범으로 모는게 당연했을텐데, 너무 쉽게 혐의를 벗겨주는 느낌이거든요. 우청도 이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등장하지 않고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추리도 기발함은 있지만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아서 정교함을 느끼기 힘든건 마찬가지입니다. 범인 쑤훙주가 변장의 달인이라는게 전부니 어쩔 수 없지요.
경찰도 너무 하는게 없습니다. 우청과 동료들의 노력으로 범인이 쑤훙주라는게 드러난 이후에도 체포하지 못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무능해 보였고요. 쑤훙주의 집과 변장한 모습을 우청이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도 없어요. 대만의 치안이 심히 우려되더라고요.

마지막 결말은 지나치게 전형적입니다. 우청을 사로잡은 쑤훙주가 우청을 죽이기 전에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장황하게 설명한 뒤, 때맞춰 나타난 경찰에게 사살당하는데 여러모로 너무 시시했어요.

그래도 독특함, 신선함이 가득차 있는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우청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모로 영상물에 어울릴 듯 싶은데, 영화가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2012/01/31

살해하는 운명카드 - 윤현승 : 별점 3.5점

살해하는 운명카드 - 8점 윤현승 지음/새파란상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0대 초반에 이미 십억 가까운 빚을 지고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루저 종민의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모종의 게임을 제안하며, 게임의 승자가 되면 거액을 받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게임에 참가한 종민과 알 수 없는 다른 4명의 참가자들은 각각 잭 - 킹 - 조커 - 에이스 - 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한 장씩의 '운명카드'를 받아들었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운명카드에 적힌 운명을 거스르면 되는데, 잭 종민에게 주어진 운명은 "누군가를 살해할 운명!"

이 작품은 불특정한 사람들을 특정 장소에 모아놓고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을 다룬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의 작품입니다. 제가 접해본 이런 류의 작품만 해도 한 손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을 정도로 흔한 설정이기도 하죠. 이 장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큐브"에서부터 시작해 "극한추리 콜로세움", "인사이트 밀", "크림슨의 미궁", "페르마의 밀실", "24시간 7일", "쏘우 1", "다우트", "누가 울새를 죽였나", "라이어 게임" 등 수많은 작품이 존재합니다.

저는 이 장르물에서 핵심 요소는 얼마나 게임이 합리적이고 재미있게 구성되었는지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현실적인 설득력을 갖추기 어려운 설정이니, 게임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너무 어려우면 안 된다는 조건도 충족해야 합니다. 독자도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난해한 수학 공식같은게 난무하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재미를 느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합니다. 게임 자체는 간단하지만, 규칙이 공정하게 짜여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또한, 게임의 규칙을 설명할 때 중요해 보였던 것들 - 언제든 나갈 수 있음 / 상대방에 대해 묻지 말 것 / 운명 카드를 보여주거나 강제로 보지 말 것 -보다, 오히려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였던 - 식사 시간을 반드시 지킬 것 / 반드시 포커 게임에 참가할 것 / 돈을 어떻게 받아갈지 정할 것 -이 더 중요한 규칙이었다는 의외성도 돋보였고요.

게임의 규칙과 중간중간 탈락하거나 살해당하는 사람들이 정교하게 엮이는 전개도 훌륭하며, 서스펜스와 스릴도 굉장합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 읽는 데 2시간도 걸리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곳곳에 헛점도 많습니다. 에이스의 무리한, 합리성을 잃은 배팅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 킹은 본인이 조심만 했어도 "살해당한다"는 운명을 거스르기 가장 쉬운 존재였다는 점 등이 그렇죠.

무엇보다도 퀸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해서 돈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정말 말이 안 됩니다. 20억이면 충분했을 텐데 100억이라니? 거기에 에이스가 종민의 운명카드를 우연히 보게 된 뒤 퀸이 그 정보를 입수했다는 전제가 너무 크게 작용하고 있을 뿐더러(숟가락을 이용한 공작이 대표적입니다), 누군가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참가자들이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루 만에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었다는 점 등은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조커를 구태여 자살로 위장하려 했던 것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요. 마지막 종민의 상황 역시 충분히 정당방위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를 위해 억지로 몰아간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구성이 나름 신경 써서 짜였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와 이야기 전개에서는 그러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면, 주인공 종민은 다른 사람들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릴 적 저지른 작은 실수에 집착하는 전형적인 루저로 묘사되는데, 아무리 봐도 주인공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에서 갑자기 의외의 행동력을 발휘하는 전개가 전혀 와닿지 않았습니다. 또한, 게임 참가자들이 과거에 뭔가 인연이 있었다는 듯한 분위기도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접해왔던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물 중에서도 재미 하나만 놓고 본다면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미스터리, 추리 요소가 적다는 단점은 있지만, 에이스의 광기 어린 행동과 종민의 심리 묘사 등이 오싹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높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현실적이지 못한 설정과 앞서 언급한 단점들 때문에 최고점을 주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작가님의 건투를 빕니다.

덧: 좋은 추리소설 소개로 자주 방문하는 카구라님 블로그에서 리뷰를 보고 읽게 된 책인데, 카구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소개가 없었다면 읽어보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드립니다!

2012/01/01

심플 플랜 - 스콧 스미스 / 조동섭 : 별점 3점

심플 플랜 - 6점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비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기 일 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눈으로 가득한 촌 마을에서 출산을 앞둔 아내와 함께 사는 평범한 가장 행크는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형 제이콥, 형의 친구 루와 함께 묘지 참배를 떠났다. 이동 중 그들은 추락한 비행기 잔해와 4백여만 달러의 거금을 발견했다. 행크는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 6개월을 기다리자고 제의하는데...

먼저 사과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해 터무니없는 편견을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작가 스스로 썼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영화보다 확실히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후속작 "폐허"의 출구 없는 지옥, 절망의 도가니의 리얼 버전이라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까요. 읽는 내내 불편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지만 흡입력이 굉장했습니다. 눈으로 가득한 춥고 삭막하고 볼품없는 촌동네를 무대로, 전형적인 소시민이자 평범했던 주인공 행크가 우연히 발견한 거액의 돈 때문에 무려 여섯 명을 죽이는(이외에도 보안관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살인자로 변해가는 과정이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살육의 과정도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우발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기 때문에 읽는 내내 긴장감이 극대화됩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다소 찌질하고 애처롭게 그려졌던 형 제이콥의 최후와 어설펐던 마무리 등이 소설에서는 훨씬 더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살육의 과정이 평범한 행크의 1인칭 심리 묘사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후, 에필로그에서 묘사되는 행크의 모습 역시 강렬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할 뿐이라는 무간지옥 같은 삶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지만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띕니다. 형의 죽음 이후 등장하는 FBI 요원의 이야기는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한 장치로 필요하긴 했으나, 다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이후 행크의 딸 아만다에게 닥친 사고 역시 작위적이었고요.

또한, 돈을 처리하는 방식도 다소 비합리적으로 보였습니다. 1/10의 확률이라면 모험을 걸어보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일반적이지 않았을까요? 사라의 말처럼 도망 다니면서 사는 삶도 가능했을 텐데 말입니다. 어차피 돈의 일련번호가 일부 기록되어 있었다면, 세 명의 계획대로 잘 풀렸더라도 결국 결과는 뻔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결말이 공정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흑막처럼 보였던 아내 사라 캐릭터는 영화 쪽이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는 사라 역의 브리짓 폰다가 워낙 적역이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겠지만, 소설에서는 행크가 위안을 구하고 의지하는 존재일 뿐, 사건을 주도하는 역할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사라 캐릭터가 너무 약해졌고, 범죄를 공유한다는 느낌도 희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끼"라든가 "유니스의 비밀" 같은, 평범한 인물이 범죄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 걸작들과 견줄 만한 뛰어난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데뷔작이라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며, 성공은 당연해 보입니다. 확실히 이 장르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면 그 완성도도 보장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교훈은 "루저나 찌질이는 거액이 생겨도 루저이고 찌질이다"라는 것이겠죠?

2009/08/10

김씨표류기 (2009) - 이해준 : 별점 2.5점


김씨는 한강 다리에서의 자살 시도 후, 자신이 한강의 밤섬에 표류한 것을 알게되었다. 이래저래 막장인 인생, 섬에게 살아보기로 결심한 그에게 어느날 익명의 쪽지가 담긴 와인병이 도착하는데...

주말에 감상한 영화입니다. 평이 워낙 좋아서 기대했는데 마침내 보게 되었습니다. 기대했던 이유는 한강에 표류한다는 아이디어도 마음에 들었고 "루저"들의 인생사를 유쾌하게 다룬 듯한 분위기도 땡겼을 뿐 아니라 이른바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제가 무척 좋아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솔직히 영화가 흥행에 실패할만 하더군요. 정말 지루하고 재미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장면은 "출발 비디오 여행" 등에서 요약해서 보여준 장면이 거의 다일 정도였으니까요.
이유는 영화에 별다른 "드라마"가 없고 설득력도 떨어진다는 것에 기인합니다. 예를 들자면, 김씨가 한강 밤섬에 표류합니다. 그리고 몇개월 그곳에서 살게되죠. 하지만 "밤섬"이라는 이유로 인하여 별다른 위기나 생명을 건 모험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관객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김씨에게 닥쳐올 위험이라면 오염된 한강물로 인한 질병 문제 정도랄까요? 먹을 것 때문에 고생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뿐, 곧바로 밤섬과 그 생태계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으로 바로 등장해 버립니다.
그리고 정려원씨가 연기한 히키코모리 캐릭터는 밤섬 표류민 김씨보다도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이라서 설득력이 약합니다. 히키코모리로 외부와 소통하지 않고, 싸이에 빠져 산다는 설정은 뻔하기 그지 없고요. 방 구석에 처박힌 원인인 듯한 얼굴의 흉터도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더더욱 몰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젊고 예쁜 정려원씨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였어요 아울러 정재영의 김씨는 이미지는 그럴듯했지만 불쌍하고 무능한 바보 식탐 캐릭터라는 설정이 왠지 자꾸 정준하씨가 연상되기에 역시나 최적의 캐스팅이라 보기는 힘듭니다.차라리 정말 나이가 많은 뚱뚱하거나 못생긴 노처녀로 캐스팅해서 (그리고 와우에 빠져 산다면^^) 두 캐릭터 모두 확고한 루저 및 사회부적응자의 비쥬얼로 묘사시키는 것이 둘 사이의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싹트는 과정을 보다 설득력있게 보여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장면장면의 디테일과 구도, 재기발랄한 상상력은 초-중반까지는 빛나기는 합니다. 특히나 김씨가 "밤섬에서 농사를 짓는" 황당하지만 기발한 상황극으로 지루함을 헤쳐나가려고 하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가장 큰 이유인 "짜장면을 먹고싶다"는 이른바 김씨의 "희망"이 위기가 닥쳐오기도 전에 해결되어 버림으로서 영화의 맥이 탁 풀려버립니다. 사실 김씨가 짜장면을 먹는데 성공한 이후에는 영화가 왜 진행되는지 모를 정도로 사족에 가까운 내용이었습니다.
차라리 이후의 유치한, 그리고 너무 공식대로인 폭우 끝의 구조(?) 와 같은 상황보다는, 김씨가 짜장면을 먹은 뒤 "그릇 갖고가" 와 같은 문자를 쓰고 그릇을 회수하려고 여자가 찾아가는 결말 정도가 어땠을까 싶어요. 어차피 김씨는 희망을 이루고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 힘을 가지게 되었으며 여자 역시 김씨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기 자신을 외부와 소통하게끔 하는데 성공하고 있으니만큼 또다른 극적인 계기는 불필요할 것 같거든요. 앞서말한 뚱뚱한 여자라면 오리배를 타기 위해 살이 빠진다는 유머스러운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고요^^
 
어쨌건 결론적으로 평이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실험정신과 연출은 분명 좋았지만 어느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영화가 된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면 더더욱 동화답게 ("아멜리에" 나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처럼) 갔어야죠. 제발 막판에 감동이나 극적인 효과를 전해주려는 강박관념 좀 버리고 수수하고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 주기를 바랍니다. 

덧붙여, "짜파게티"는 정말 PPL의 궁극과 같은 형태로 등장하는데 영화가 흥행에 별로 성공하지 못해서 아쉽겠더군요. 영화야 어찌되었건간에 저도 "짜파게티"가 먹고 싶을 정도였어요. 왠지 거대한 CF로 영화를 만들었다가, CF가 끝난 이후 영화가 사족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드는군요.

2009/12/23

별난 전쟁, 특별한 작전 - 조셉 커민스 / 채인택 : 별점 4점

별난 전쟁, 특별한 작전 - 8점
조셉 커민스 지음, 채인택 옮김/플래닛미디어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전쟁들 중에서의 기발한 전략과 전술을 되짚는 책입니다. 병력 숫자만으로 밀어붙이는 어택땅이 아니라, 천재들의 전략을 중심으로 세밀한 설명과 자세한 지도 등의 도판과 함께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설명이나 묘사도 감칠맛나는지라 총 4부 254 400여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쑥쑥 읽히는 맛이 있더군요. 익히 알고있던 전투은 한니발의 포에니 전쟁 당시 칸나에 전투와 데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 해전에 불과할 정도로 새로운 정보가 가득하다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드는 점이었고요.
무엇보다도 "천재적인 전략과 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책이니만큼 아무래도 약자 쪽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기술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 아주 좋았는데 (전 루저들의 편이랍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일 먼저 꼽고싶은 이야기는 위대한 줄루족 지배자 샤카가 고안한 황소의 뿔 전략과 이 전략을 이용해 줄루족이 압도적인 장비의 영국군 분견대 천여명을 괴멸시킨 이산들와나 전투 이야기입니다. 빠른 이동과 부대지정이 전략의 핵심포인트였다는 점에서 아드레날린 업그레이드를 마친 저글링이 시즈탱크 부대를 가공할 속도와 완벽한 부대지정으로 휩쓸어버리는 모양새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야말로 상상만 해도 전율이 올 정도죠. 더불어 카리스마 넘치는 샤카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해서 재미를 더해 줍니다.

그리고 섬도시 티레를 정복하기 위해 아예 섬까지 다리를 놓아버린 알렉산드로스의 티레 점령기도 빼놓기 어렵겠죠. 이 이야기는 막강한 절대자가 반항하는 섬도시를 뭉갠 이야기라 루저들의 승리라는 전체적인 감상 포인트 측면에서는 좀 어긋나긴 하지만 워낙 스케일과 발상이 황당해서 인상적이었어요. 과연 과거의 절대자나 할 수 있었던 절대왕자다운 전략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꼽고싶은것은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오하에아와이 전투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최고의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용맹한 마오리족 전사들이 위대한 추장 헤케와 카위티의 지휘와 과학적이면서도 치밀한 구조물 파-벙커와 참호를 결합한 듯한 특이한 건물- 를 잘 활용하여 단 백명으로 이백오십명의 대포 등으로 중무장한 영국군을 격퇴했다는 내용으로 마오리족의 능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영국군의 멍청함은 부록삼아 즐길거리로 충분했고요.
저의 무지함탓에 야만인 정도로만 알고있었던 마오리족이었는데 정말 반성하고 사과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위의 전투들 외에도 당대 최정예 로마군이 숲속의 함정과 같은 완벽하고 치밀한 작전에 괴멸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어이가 없어서 차라리 웃기기까지한 남북전쟁 때의 구덩이 전투제 3차 가자전쟁때의 여러 속임수 작전 등 상세히 언급하지 않은 내용들도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이렇듯 재미만 따져도 최고수준이지만 다양한 자료와 도판 등 책의 완성도 역시 뛰어나기에 별점 4점은 충분하겠죠? 별 5점을 줄까도 했는데 사례로 든 전투들이 전부 서양쪽 시각에 가깝다는 단점이 약간 눈에 띄여서 감점했습니다. 어차피 학익진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면 하니발의 이야기 대신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끼워넣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뭐 그래도 4점도 굉장히 높은 점수죠!
전략과 전술에 관한 역사서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강추합니다.

2012/01/17

머니볼 - 베넷 밀러 : 별점 2점

원작을 굉장히 재미있게, 인상적으로 읽었고 영화의 평도 좋아서 보게 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원작과는 사뭇 다르더군요.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원작은 빌리 빈이 폴 데포스데타와 함께 2002 드래프트에서 제레미 브라운으로 대표되는, 다른 경쟁팀이 주목하지 않는 선수들을 상위 픽을 사용하여 영입하는 과정이 중심입니다. 이 드라마틱한 드래프트야말로 그동안 계속 정립해온 머니볼 이론을 완성하여 보여주는 새로운 시도, 변화의 장 그 자체인 것이죠.

그러나 영화에서는 드래프트는 언급도 되지 않고, 2001년 시즌이 끝난 뒤 데이먼, 지암비, 이스링하우젠이라는 스타 선수를 자유계약으로 놓친 후 몇 명의 선수 보강만으로 2002년 기적과도 같은 20연승을 이루어낸다는 줄거리로 흘러갑니다. 도저히 영화로 어떻게 찍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드래프트 현장보다 야구 시합이 중심이 된건 콘텐츠 속성상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처럼 선수 몇 명 바꿨다고 믿을 수 없는 연승을 한 것처럼 그리는 것은 솔직히 말도 안 됩니다. 프로야구 매니저 게임에서도 불가능할 거예요. 게다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2002년의 오클랜드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루저들의 팀도 아니었습니다. 배리 지토, 마크 멀더, 팀 허드슨이라는 투수 3인방이 건재했고, 미겔 테하다와 같은 타선의 구심점도 있었던, 충분히 지구 우승을 노려볼 만한 탄탄한 전력의 팀이었어요!

게다가 빌리 빈 캐릭터도 불만입니다. 야구계의 혁명가이자 독재자, 야구계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에서는 따뜻한 가장이자 야구를 사랑하는 야구인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러한 따뜻한 도시 남자 이미지가 브래드 피트의 상큼한 외모와 함께 전형적이고 뻔한 야구 영화 장면들로 반복되며 강조되는데, - 예를 들자면 팀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락커룸에서 벌이는 일장 연설이나 데이빗 저스티스에게 팀의 구심점이 되어주기를 요청하는 장면, 미안함이 어린 방출 통보, 그리고 경기를 보지 않는 신조를 깨고 츤데레 아가씨처럼 몰래 관객석에서 게임을 지켜보는 장면들 - 이건 아니죠...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장이 된 제리 맥과이어 필이거든요. 원작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그나마 머니볼 이론을 야구를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살짝 보여주는 부분은 괜찮았고 경기 장면도 좋긴 합니다. 중간중간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스타 선수들도 반갑고요. 한마디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면 썩 괜찮은 야구 영화이긴 해요. 하지만 원작과의 괴리가 너무 심하고 각색도 심해서 원작 팬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6/03/08

피너츠 완전판 1 : 1950~1952 - 찰스 M. 슐츠 / 신소희 : 별점 2.5점

피너츠 완전판 1 : 1950~1952 - 6점
찰스 M. 슐츠 지음, 신소희 옮김/북스토리

1950년부터 52년까지의 300페이지에 가까운 연재분, 작가 찰스 M. 슐츠의 생애에 대한 15페이지 분량의 짤막한 전기, 그리고 1987년 말 진행된 잡지 "네모 : 고전 만화 총서" 1992년 1월호에 수록된 찰스 M. 슐츠와의 인터뷰가 함께 실려 있는 완전판 1권입니다.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의 오랜 팬으로 별 고민없이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제가 1980년대 이후의 "피너츠"만을 접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찰리 브라운입니다. 익히 알고 있던, 염세적이면서도 현실에 순응하는 약간 루저의 표상 같은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주도적으로 장난도 치고, 제법 거친 면모를 보이는데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또 찰리 브라운의 친구 셔미라든가 패티, 바이올렛 같은 익숙지 않은 등장인물들 — 저에게는 라이너스, 슈뢰더, 루시, 페퍼민트 패티가 더 각인되어 있거든요 — 의 비중이 높다는 점, 스누피는 아직 그냥 "개"라는 점,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기억되는 아이들이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미취학 연령대라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깔끔하게 정돈된 펜선으로 동글동글하게 그려진 작화도 익숙치 않습니다.

이런 점들로 보면, 제가 아는 "피너츠"와는 다른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하긴, 제가 아는 80년대 작품과 30년의 갭이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죠.

그래도 팬으로서 즐길 거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슈뢰더가 음악 재능을 발견하고, 장난감 피아노에 탐닉하면서 베토벤 매니아가 되는 과정을 자세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는 점, 까칠하고 밉상으로는 1인자인 루시가 어렸을 때부터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라이너스가 아직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아기 모습으로, 그것도 담요 없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반가웠습니다. 빵 터지지는 않지만 잔잔한 개그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초기작이라 해도 거장의 저력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인터뷰가 재미있던 것도 수확입니다. 찰스 M. 슐츠의 만화관을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가 "피너츠"라는 제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생각과 다른 게 큰 단점은 아니고 기본적인 재미도 충분하며 책 자체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문제는 22,000원이라는 가격이지요. 가격만큼의 가치와 재미를 주냐 하면 그건 아닌 듯 합니다. 팬이 아니시라면 선뜻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구입 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나저나 과연 얼마나 팔릴지... "완전판"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지만 끝까지 출간될 수 있을까요? 나오다 만 "메그레 전집"의 악몽이 떠오릅니다.

2014/09/17

낮비 1~6 - 후루야 미노루 : 별점 2.5점

너무나 외롭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아무것도 없는 하루하루에 불만인 주인공 오카다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직장 동료 안도에게 말을 걸고, 여기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안도가 짝사랑하는 유카와의 만남, 그리고 유카를 죽이려는 연쇄살인마이자 고교 동창 모리타의 등장...

후루야 미노루의 우울 + 심각 계열 작품으로 전작인 "시가테라"와 굉장히 유사합니다. 루저에 가까운 주인공에게 미모의 여자친구가 먼저 대시한다는 판타지, 고교 동창인 사이코패스와 주변 인물들로 인해 본의 아니게 이상한 상황에 처한다는 이야기 구조가 거의 판박이거든요. 왕따 이야기 역시 빠지지 않고요.

그러나 "시가테라"와 가장 큰 차이점은 "시가테라"의 주인공 오기노는 왕따 피해자라서 핵심 사건에서 주변에만 있기 힘든 탓에 이런저런 일에 계속 휩쓸리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커플인 오카다와 유카의 연애담과 비일상적인 연쇄살인마 모리타의 살인 행각이 분리되어 교차 전개(물론 나중에 합쳐지지만)된다는 점입니다. 오기노 캐릭터의 평범한 부분과 피해자 부분을 둘로 나눈 셈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오카다와 유카 커플, 그리고 안도가 등장하여 양념을 쳐주는 일상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둘의 이야기가 재미있다기보다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고 고집하는 상남자 안도가 상당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에요. "이나중 탁구부", "그린힐"에서 보여주었던 작가의 개그 센스가 여전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도 하고요. 안도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이 나와도 참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에 반해 모리타의 폭주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환상을 확실히 깨준다는 측면에서는 성공하고 있으며, 막판까지 사이코 범죄물로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맛도 있지만 너무나 몰상식한 연쇄살인마로 묘사되기에 과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시가테라" 정도로—인터넷에서 우연히 만난 꼴통이 살인마더라, 중퇴당한 고교 동창은 야쿠자가 되었더라—마무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아니면 차라리 모리타가 오카다와 유카를 살해하는 데 성공하고 끝나는 게 그나마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무계획으로 막 나가는 모리타가 유일하게 목표하고 계획한 것이 바로 둘의 살해인데, 다른 우발적인 살인은 잘도 저지르면서 정작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다는 점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았던 탓입니다.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우리네 인생살이를 풍자한 걸까요?
마지막으로, 모리타가 학생 때 자신이 비정상임을 깨닫고 오열하는 장면, 그리고 그의 체포로 이어지는 마무리는 솔직히 좀 의아했습니다. 갑자기 '모리타도 인간이었던 적이 있었다'는 메시지가 이 작품에 무슨 역할을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뜬금없기도 했고요.

그래도 "시가테라"보다는 마무리가 깔끔할 뿐더러 나름 해피엔딩—어쨌든 오카다 커플은 목숨을 건지고, 안도는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 여성이 생기고, 모리타는 체포되니 만큼—이라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로 묶이게 되는 구성도 괜찮았고요. 두 작품의 장점만 하나로 합쳤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오카다와 유카의 미래에 행복만 있기를 바라며 리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