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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라멘이 과학이라면 - 가와구치 도모카즈 / 하진수 : 별점 3점

라멘이 과학이라면 - 6점
가와구치 도모카즈 지음, 하진수 옮김/부키

라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그 실체를 밝혀나가는 책입니다. 음식 관련 과학, 교양서라고 할 수 있죠. 이 책이 풀어낸 라멘에 관련된 내용은 크게 아래의 아홉 가지 항목입니다.

  • 1장_무엇이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가?
  • 2장_해장 라멘이 더 맛있는 이유
  • 3장_쫄깃쫄깃 면발의 과학
  • 4장_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라멘의 맛
  • 5장_화학조미료는 라멘의 친구인가, 적인가
  • 6장_기름과 건조 기술의 결정체, 인스턴트 라멘
  • 7장_라멘 명가의 맛을 과학으로 재현하다
  • 8장_라멘은 먹는 소리도 맛있다
  • 9장_사람들이 그 가게 앞에만 줄을 서는 이유

항목별로 간단히 살펴보자면 우선, 첫 번째 장에서는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감칠맛'을 꼽고 있으며, 이 감칠맛의 정체에 대해 상세히 분석해 줍니다. 일본의 맛국물은 보통 다시마와 가쓰오부시를 함께 사용하는데, 그래야 더욱 맛있어진다는군요. 이는 글루탐산의 단독 사용보다 이노신산과 조합할 경우 감칠맛이 7~8배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가쓰오부시나 다시마의 향 성분은 물에 녹아나서 라멘의 경우, 국물맛이 농후해진다고 하네요.

두 번째 장에서는 음주 후 숙취 해소를 위해 라멘이 땡기는 이유를 탐구합니다. 이 역시 과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술을 마시면 당을 만드는 원료가 부족해져서 혈당이 떨어지는 탓에 당이 필요해져서 단 것이나 탄수화물을 먹고 싶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알코올이 뇌 신경에 작용하여 공복감을 증가시키기 때문이고요. 과음 후 단 것을 먹으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행복한 기분이 되는데, 술 먹고 라면을 먹으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군요.
당연히 술을 먹고 라멘을 먹으면 몸에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전문가가 추천하는 술 마시고 좋은 음식은 스포츠 음료에요. 이유는 당과 소금, 염분 모두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과즙 100% 오렌지 쥬스도 좋다는군요. 수분 섭취에 칼륨도 많아서 과하게 섭취한 나트륨을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으며, 지방과 당 분해를 촉진하는 비타민 B1, B2도 풍부하니까요. 앞으로 저도 음주 후에는 과즙 쥬스를 먹어봐야겠습니다.

세 번째 장은 제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라멘은 자가 제면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소바의 경우 풍미가 바로 날아가므로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만들며, 공장에서 만들 경우 배송 중 향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가게에서 직접 면을 만들어야 하지만 라면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게 이유입니다. 면의 꼬불꼬불한 정도가 국물 맛이 배는걸 좌우한다는 것도 결국은 호불호에 불과해 보이고요. 게다가 물과 밀가루가 완전하게 섞이는 수화 작용에 시간이 걸려서 충분한 숙성이 필요하다는 것도 자가 제면의 약점이에요. 공장에서 제대로 만든 면을 사용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맛의 달인" 등에서 '간수'라는 말로 소개되었던 '간스이'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이 책에 따르면 간스이는 라멘의 맛에 큰 영향을 주지만 단지 취향일 뿐이니, 가게와 손님들이 알아서 고르면 된다고 하네요.
이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건 면발 특성에 따른 팁입니다. 라멘을 밥과 함께 먹으려면 면은 부드럽게 삶아달라고 해야 한다네요. 그래야 간스이가 국물에 섞여 들지 않고 면도 퍼지지 않거든요. 면의 삶은 정도가 꼬들꼬들하면 면이 국물을 빨아들이고 국물에는 간스이 맛이 섞이게 됩니다.

네 번째 장은 라멘의 맛에 온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5미(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 중 짠맛과 신맛은 온도에 따른 변화가 없지만 단맛, 쓴맛, 감칠맛은 온도에 따라 변화하므로 5미가 조합된 요리는 온도에 따라 맛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짠맛과 감칠맛의 밸런스가 온도에 따라 달라져서 제대로 맛을 느끼려면 적절한 온도로 먹어야 한답니다.

다섯 번째 장은 화학 조미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론은 화학 조미료를 적당히 써야 맛있는 라멘이 된다는 겁니다. 화학조미료 사용 여부보다 식재료를 듬뿍 사용한 국물인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는 팁도 좋았고요. 이유는 효모 추출물이나 단백가수분해물과 같은 첨가물은 '식품'으로 인정되어 화학조미료로 치지 않는데, 이런걸 많이 사용하는 가게들이 많기 때문이라네요.
또 라멘은 부족한 영양소가 있으니 제대로 만든 라멘에 무언가를 조금 더하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쇼유 라멘을 먹은 후에 채소주스를, 그리고 돈코츠 라멘의 영양가는 볶은 깨 간 것을 더하는 것만으로 훨씬 높아지고 쇼유 라멘에는 구운 김을 올리면 좋다, 미네랄을 보충하고 싶다면 미네랄이 풍부한 미소 된장으로 만든 미소 라멘이나 탄탄멘을 주문하라는 식입니다.

여섯 번째 장은 인스턴트 라멘이 정말 몸에 좋지 않은지?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지금의 인스턴트 라멘은 몸에 해롭지 않습니다. 염분이 많다고는 하나 국물을 남기면 되고, 기름 열화로 식중독을 일으켰던건 다 옛날 이야기이며 용기의 환경 호르몬 역시 위험성은 오해에 불과했다는 내용이거든요. 이 정도면 앞으로 컵라면을 먹을 때 건강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너무 자주 먹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초인 로크"로 유명한 만화가 히지리 유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구루구루박X"의 외계인들이 컵라면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로 "사람이 먹는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는 작가의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에요.

일곱 번째 장은 유명 가게, 노포의 라멘을 인스턴트로 만들어 제공하는 회사들의 비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탐방 취재 스타일의 리포트입니다. 사실 이런저런 엑기스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최대한 비슷한 맛을 찾아내는게 전부라 딱히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라면의 염분 측정 결과가 더 재미있었어요. 돈코츠 라멘의 염분은 1.48퍼센트, 미소 라멘의 염분은 1.35퍼센트인데 소유 라멘의 염분은 1.58퍼센트로 소유 라멘이 가장 높았거든요. 세가지 라멘 중 가장 감칠맛이 적은게 소유 라멘이라는 점에서 맛을 증폭시키는 감칠맛의 효과로 염도를 낮출 수 있다는건 사실이라는 뜻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도쿄의 새까만 소바 국물과 간사이의 투명한 소바 국물을 비교할 때, 간사이 소바 국물의 염분이 더 높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먹을 때 주로 표현되는 의성어 "즈루즈루"에 대해 탐구합니다. 뭘 이런것까지 조사하나 싶었는데, AI까지 동원해서 의성어의 느낌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데에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후루룩"과의 비교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에요. 이 AI를 가지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 아주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비슷한 툴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 장은 사람들이 라멘 가게에 줄을 서는 이유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약과 동일하게 뇌의 보상 회로가 작동하기 때문이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뇌에서 베타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모르핀이나 헤로인의 수용체이자 신경 전달 물질인 오피오이드에 작용하게 되거든요. 그러나 실제 마약과는 다르게 보상 회로 자극은 지극히 짧습니다. 그리고 실험 결과, 먹기 전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하네요. 즉 '기다리는 동안', '대기하는 동안' 음식을 곧 먹을거라는 생각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포방터 돈가스집에 줄을 서서 먹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이슈들이 있는데, 실제 줄을 서는 과정에서 이런 뇌내 보상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장기간 줄을 서는 것도 한 번쯤은 해봄직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라멘과 관련된 이런저런 내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재미나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라멘 그 자체보다는 주변 정보, 지식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많아서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난다는건 조금 아쉽습니다만, 재미와 교양 양쪽 측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책이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본 라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0/07/16

어른의 맛 - 히라마쓰 요코 / 조찬희 : 별점 3점

어른의 맛 - 6점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바다출판사

푸드 저널리스트 히라마쓰 요코의 에세이집으로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소다츠가 자신의 식도락 생활을 하이쿠가 아니라 일반 수필, 산문 형태로 써 내려간다면 이런 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글들이 가득합니다. 

은근하면서도 섬세한 묘사도 돋보입니다. 특히 "혼자의 맛"은 작가가 리얼 소다츠라는걸 증명하는 글이에요. 자신만의 음식 조합이라던가, 서서 마시는 선술집에서 어른스럽게 술을 마시는 방법, 혼자서 이자카야를 즐기는 법이 실려있는데 각 방법들 모두가 "술 한잔 인생 한 입"의 에피소드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술집에서의 일화나 음식과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글들도 소다츠가 바로 떠오르고요.

그러나 단순한 술꾼, 먹보 미식가의 글만도 아닙니다. 깊은 연륜과 경험이 묻어나는 글들도 인상적입니다. "눈물나는 맛"이라는 제목의 글 구성이 특히나 마음에 듭니다. 글은 와사비 초밥과 고추가 들어간 김치 등 매운 요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다츠가 먹음직한 아귀 간, 가라스미, 슈토 등 다양한 진미를 열거하며 어른이 되어 알고 먹게 된 맛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이어나가지요. 그 뒤는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된 여러가지 맛이 소개됩니다. 찜통에 찐 무화과에 참깨 소스를 얹은 일품 요리와 같은 대표적인 예가 등장하는건 물론이고요. 또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다시 맛볼 때 재회의 기쁨도 크다며 곶감, 톳 등의 맛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글의 마무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렸을 때 먹었던 엄마의 맛입니다. 어른이 조용히 흐느끼게 되는 맛은 바로 그 맛인거지요. 음식에 대한 맛있는 묘사에 살짝의 감동까지 곁들여진 좋은 글이라 생각됩니다.

"깊은 산의 맛"에서 료칸 우쓰오장의 음식을 소개하는 글도 대단합니다. 사진 한 장 없지만, 음식의 형태와 맛이 떠오를 정도로 잘 묘사한 글이기 때문이에요. 산촌의 맛을 표현하면서 '오독오독, 꾹, 섬벅, 바삭, 아삭아삭, 담백, 미끈미끈, 혹은 어떤 것은 쌉싸래하고 어떤 것은 은은히 달고 끈끈하고 아리다.'라고 설명하는 문장처럼요. 이 정도 글 솜씨면 오히려 사진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따라해보고 싶은 레시피도 실려 있습니다. 시금치를 데쳐서 서벅서벅 잘라 물기를 쫙 빼고 으깬 두부와 함께 무친 일종의 나물이 그러합니다. 간은 올리브오일과 소금, 간 후추가 전부라는데 쉽게 따라해 볼 만 하지요. 맛도 좋을 듯 싶고요.
해삼 손질법은 집에서 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억하면 좋겠더군요. 일본 전통 해삼 손질 방법인 '자부리'에 대한 소개인데, 뜨겁게 끓인 녹차에 채썬 해삼을 넣고 재빠르게 휘저어 살짝 데친 뒤 채반에 받치면 됩니다. 녹차 온도는 보통 80도 정도이고요. 이 뒤 유자 식초에 담가 손님에게 내면 됩니다. 이렇게 데치면 오독한 식감이 경쾌해지고 녹차가 해삼 특유의 알싸한 맛을 누그러뜨려 좋다는군요.

간간히 언급되는 음식 관련 정보도 볼만합니다. '로산진의 낫토 먹는 법'은 처음 알았네요. 일단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상태에서 305번, 그 다음 간장 넣고 119번, 이렇게 총 424번을 섞으면 낫토가 가장 맛있다는 설인데 솔직히 말도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저자가 여러 낫토로 실험해 본 결과로는 횟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답니다. 어떤 낫토냐가 더 중요한 거지요.
물의 경도에 따라 다른 맛이 나는 이유를 고찰한 "물의 맛"도 흥미롭습니다. 연수는 수용성 성분을 잘 유출하고, 경수는 미네랄 성분이 많아서 가교 결합이 이루어져 소재를 딱딱하게 만들기 때문에 연수는 일본 요리에, 경수는 유럽 요리에 어울린다고 하네요. 유럽에 스튜나 스톡이 많은 이유입니다. 경수라서 미네랄 성분이 소재와 더욱 잘 결합해서 진한 감칠맛을 내기 때문이지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재미도 있으며, 음미할만한 글이 많은 좋은 에세이였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크고요.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7/11

제리코의 죽음 - 콜린 덱스터 / 이정인 : 별점 3.5점

제리코의 죽음 - 8점 콜린 덱스터 지음, 장정선.이정인 옮김/해문출판사

모스경감은 한 파티장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에게 호감을 느낀 후 옥스퍼드 근처 제리코 거리에 있는 그녀의 집에 우연히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집은 텅 비어있는 상태였고 사실 그녀는 부엌에서 목을 매고 죽어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알게된 모스는 스스로 개인적인 수사에 나서서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기 시작하나 그녀의 이웃인 조지 잭슨이라는 동네의 허드렛일을 맡아 하는 수리공마저도 잔인하게 살해된채 발견되고 사건은 점차 미궁에 빠지게 되는데...


영국 추리 작가협회의 실버 대거상 수상작으로 해문의 모스경감 시리즈 4번째 작품입니다. 3, 4권이 동시 출간되었는데 형이 전부 구입해서 저는 4권부터 읽게 되었네요^^
전개는 다른 모스경감 시리즈와 비슷한 스타일입니다. "작은 사건"이 벌어지지만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혀서 이어진다는 점이 그러하죠. 이 작품에서도 사건은 한 여인의 자살사건과 늙은 수리공 살인사건, 딱 두개만 등장하지만 주변 인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증언에 거짓말과 진실이 교묘하게 섞여 있으며,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사건의 핵심인 것이라는 점도 다른 시리즈와 유사하네요.

그러나 다른 시리즈와 구별되는 특이한 점도 존재합니다. 특히 제가 읽었던 모스 경감 시리즈 중에서는 유일하게 "트릭"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 등장하는 것이 아주 이채로왔어요. 범인이 정말 머리를 써서 만든 알리바이 공작 트릭인데 기발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작품과 잘 어울릴 뿐더러 기대하지 않고 읽어서인지 더욱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첫번째 사건인 자살사건의 당사자와 모스 경감이 약간의 교분(?)이 있기 때문에 모스가 정식으로 수사를 지휘하기 전부터 스스로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는 것도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점이었고요.
그리고 단락이 끝나고 독자에게 힌트를 주듯이 "그러나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였다."라는 언급이 자주 등장하는 점도 특징인데 이게 제법 감칠맛 있더군요. 중요한 사실임에는 틀림없고, 머리를 싸매며 연구하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경험치를 쌓아가는 느낌이랄까요? 복잡한 설명들을 쌓아올려 막판에 가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요소들이라 후반부가 궁금해져서 열심히 읽게 만드는, 양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모스 경감의 캐릭터도 언제나의 즐거움을 주며 루이스 역시 감초같은 재미를 주기에 충분하도록 자기 역할을 다 하고 있는 등 시리즈 작품으로서의 매력도 확실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추천작. 전형적이지만 독특한 매력의 작품으로 캐릭터를 즐기더라도 재미있고, 정통 추리 독자에게도 만족감을 심어주는 시리즈 작품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단, 이전 "브라운 신부" 완전 번역판때에서도 느꼈었는데, 번역이 지나치게 딱딱합니다. 몰입하기 힘들 정도였어요. 영국식 문체 탓일까요?

2006/09/27

스카이잭 (A Tough One to Lose) - 토니 켄릭 / 변명식 (자유추리문고 46) : 별점 3.5점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출발했던 국내선 747 점보 여객기가 360여명의 손님과 함께 사라졌다. 뒤이어 범인들은 2천 5백만달러의 다이아몬드를 요구해왔다.
가난뱅이 변호사 윌리엄 베레커는 옛 전우였던 항공 조사원 필 링롭에게서 우연히 사건을 전해 듣고, 자신이 전날 골프를 쳤던 골프장에서의 비행기 이륙 흔적을 기억해냈다. 그는 전 부인인 비서 애니와 함께 사건에 걸려있을 보험금을 기대하며 조사에 뛰어드는데...

전설의 자유 추리문고 46, 토니 켄릭의 "스카이잭" 입니다. 원제와는 다르게 직접적인 제목을 가져다 붙였네요. 이왕이면 사전 용어인 하이잭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

하여튼, 잘 모르는 작가의 잘 모르는 작품이지만 눈에 띄는 대로 사고 있는 자유 추리문고인데다가, 워낙 싼 가격(1000원이었습니다)이라서 구입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장점부터 말씀드리자면, 먼저 우연히 사건에 가담하게 된 변호사 윌리엄 베레커와 전 아내이자 비서인 애니의 활약과 실제 범행을 저지른 인물들을 구분하여 전개되는 구성이 아주 좋습니다. 단순한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라 교묘하게 교차되도록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코믹하거나 별거 아닌 듯 했던 복선들이 결국 인과관계를 이루는 구성도 마음에 들었고요.

또 베레커와 애니의 이야기에서 둘의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재미납니다. 스쿠루볼 코미디의 장르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감칠맛 나는 대사들이 수도 없이 쏟아지는데, 읽으면서 저절로 웃음을 머금게 만들거든요. 단지 티격태격하는 것만 아니고 사건에 뛰어들면서 닥치는 여러가지 황당한 상황들 - 사이비 종교집단과의 조우, 스튜어디스로 위장했는데 진짜 스튜어디스로 착각되어 비행기에 타게 된다 등 - 역시 굉장히 기발하고 재미납니다(이러한 코믹스러운 상황 중에서 개인적인 베스트는 애니가 납치된 뒤 그 사실을 모르는 베레커와 범인들의 통화 장면이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승객을 가득 채운 747 여객기를 어떻게 완벽하게 납치, 은폐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를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군데군데 약점도 많이 보이지만, 꽤 그럴싸한 방법이었어요. 작중에서 표현되듯 범인들이 거액을 요구하지 말고 단지 짐을 빼돌리는 정도로 만족했으면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성립되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요.

하지만 실제로 베레커의 활약은 몸빵이었을 뿐, 결과적으로 사건의 진상은 범인의 고백을 통해 밝혀진다는건 이 작품을 추리소설로 보기는 어렵게 만듭니다.

전개에서의 문제도 있습니다. 폭탄마의 등장은 없어도 되었을 것 같고, 벽돌이 들어있는 가방은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의 공범 중 한명이 누구인지가 비교적 초반에 노출되는데, 이후 해당 인물에 대해 별다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뒷부분으로 갈수록 지나치게 헐리우드 영화처럼 통속적으로 흐르는 것도 단점으로 느껴지네요.

그래도 제가 읽은 작품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스케일의 범죄가 등장하고, 트릭과 수법도 괜찮습니다. 베로커 - 애니 커플의 톡톡 튀는 대사와 여러가지 상황 설정도 재미있고요. 한마디로 부담없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 작품이 두번째 장편이라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기대됩니다.

2005/08/18

웰컴 투 동막골 - 박광현 : 별점 4점


1950년 11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때, 외딴 산속 깊은곳에 추락한 P-47D 미 전투기 조종사인 연합군 병사 스미스(스티브 태슐러)를 근처의 마을 동막골의 주민들이 그를 구해준 후 정성으로 돌봐준다. 한편 동막골에 살고있는 여일(강혜정)은 우연히 인민군 리수화(정재영) 일행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동막골로 데리고 온는데 바로 그 때, 자군 병력에서 이탈해 길을 잃은 국군 표현철(신하균)과 문상상 일행이 동막골 촌장의 집까지 찾아 오게 되면서 양측 진영의 긴장감은 극도로 고조된다.

하지만 대치중 실수로 떨어트린 수류탄이 마을 곳간을 날려버리고, 인민군과 국군은 어쩔 수 없이 곳간을 다시 채워주기 위한 기간동안 동막골에 머물게 되면서 전쟁도 모르고 순수하게 살아가는 동막골의 순진한 사람들과 서서히 하나가 되어간다. 그러나 동막골에 추락한 미군기가 적군에 의해 폭격됐다고 오인한 연합군은 주요 요충지 선상에 있는 동막골을 집중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스미스 구출대를 먼저 파견하지만 구출대와 어쩔 수 없는 교전 끝에 생포한 포로에게서 폭격 계획을 들은 3국의 연합군(?)은 폭격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한다....

6.25 전쟁때의 한국군과 북한군, 거기에 연합군까지 모이게 되는 상황이 영화의 주 내용인데 전쟁영화에서 이렇게 적대하는 양 진영이 하나로 화합하는 내용은 사실 2차대전 영화에서도 많이 나왔던 소재죠. 독일군-미군이 하나가 되는 영화도 있었고 미군-일본군이 하나가 되는 영화도 본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영화는 "동막골"이라는 유토피아를 위해 양 진영이 마지막에 "하나"가 된다는 것이 차이점인 것 같네요. 그만큼 "동막골"이라는 공간이 누구나 이념을 버리고 하나가 되는 과정이 당연하다 여겨질 정도로 너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뭐 환타지이자 동화스러운 설정이긴 합니다만 잘 표현된 덕에 설득력도 강해요.

덧붙여 촬영과 배경, 전개에 관한 모든 것이 디테일이 굉장히 좋습니다. 동막골 사람들이 등불로 쓰는 탈바가지(?)에서 시작해서 아담한 동막골의 모든 요소요소들이 마음에 들더군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요. 신하균 이 친구 최근에 부진하더니만 꽤 괜찮은 역할로 부활하네요. 임하룡의 연기도 이젠 완전 정극배우로서 물이 오른 것 같고 광녀역의 강혜정은 최고(!)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 외에 조연들, 특히 동구역의 꼬마 등도 그 인물 자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으로 영화를 잘 살려주고 있습니다. 원래는 장진감독이 각본을 쓴 연극이라죠? 그래서인지 대사들도 감칠맛있고 상황설정도 유머러스해서 영화의 재미를 더해줍니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 역시 영화를 환타지-동화 스러운 분위기로 끌고 가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고요.

하지만 마지막에 동막골을 찾아온 연합군 구조대를 사살하고 연합군 폭격대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장면은 솔직히 아쉬웠습니다. 결국 유토피아와 하나가 될 수 있던 그들이 손에 피를 묻힐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왜 필요했을까요? 폭격에 대한 정보만 입수해서 어떻게든 폭격 지점을 바꾸기 위한 노력 정도만 살짝 보여주고, 아름다운 작전의 성공 후에 미소짓는 와중에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으로 전환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텐데 말이죠... 막판에 너무 피가 난무해 버려서 환타지, 동화로서의 이미지가 많이 깨져버린 듯 싶네요.

그래도 저는 무척 재미있게 봤습니다. 한편의 동화로서 말이죠. 전쟁 영화들 특유의 적나라한 묘사보다는 따뜻하고 유머스러운 묘사가 넘쳐 보는 내내 흐뭇했습니다. 별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올해 본 한국 영화 중에서는 최고였어요. 별점은 4점입니다.

PS :그런데 마지막 에필로그, 저는 왜 "죽이지 않았나?"에 대한 설명이 한번 나와줄 줄 알았는데 머리에 꽃을 꽂아주는 에피소드만 표현되더군요. 무슨 의도 였는지 약간 궁금하기도 한데, 사족 아니었을까요?

2004/09/22

안녕! UFO - 김진민 : 별점 1.5점

안녕 유에프오 (2disc) - 4점 김진민 감독, 봉태규 외 출연/덕슨미디어

선천적 시각장애인 경우는 애인과 헤어지고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기 위해 먼 구파발로 이사 온다. 상담소에서 일하는 경우는 밤마다 구파발행 막차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데 그 버스에는 항상 실연의 아픔을 호소하는 사연과 이를 느끼~하게 위로하는 라디오 방송 "박상현과 뛰뛰빵빵"이 흐른다. 사실 방송의 정체는 버스기사 상현이 밤마다 집에서 혼자 녹음한 짝퉁 교통방송. 어느 날 동네 골목길에서 우연히 자신을 도와 준 상현에게 경우는 친구하자며 당돌한 제안을 하고, 상현은 자신의 버스와 라디오방송에 대해 핀잔을 주는 경우를 보며 얼떨결에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속이게 된다. 
버스에선 버스기사 박상현으로, 경우 앞에선 전파사 직원 박평구로 애매모호한 이중생활을 하게 된 상현은 어느새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경우와 가까워질수록 그녀를 속이는 상현의 마음은 갈수록 복잡하고 괴롭기만 하다. 그리고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경우 역시 그의 마음을 애타게 하는데... 

"슈퍼스타 감사용"을 너무나 재밌게 봐서 이범수씨의 첫 주연작이라는 (그것도 멜로물!)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가벼운 웃음과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영화로 주인공 박상혁이 "은평구"라는 동네 이름을 보고 가명으로 "박평구"라는 이름을 생각해 낸다던가, 장님 아가씨 경우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조금씩 속이는 과정 같은것이 잔잔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음악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보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네요. 조연들의 연기도 감칠맛나고 전체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많은 것이 일단 이야기가 극적 긴장감이 별로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다가 갑자기 기복이 생기는 등 짜임새가 별로 매끄럽지 못합니다. 또한 UFO나 이범수의 가족관계, 동네 사람들 이야기등 주변 소재를 무리하게 끼워넣은 느낌이 강하며, 뒤로 갈 수록 주변 이야기의 비중이 강해지는 탓에 주요 스토리가 흐려져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버리네요.
거기에 마지막에 진짜 UFO까지 나오는 장면은.... 좀 너무합니다. 한발짝이 아니라 한 10발짝은 너무 앞서 나간것 같아요. 사실 UFO가 전혀 상관없는 영화로 만들었어도 하등 지장이 없는 소재인데 왜 이렇게 무리하게 집착했을까요?
그리고.. 다들 연기력이 좋지만 딱 한명! 이은주씨의 장님연기는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뭐 알 파치노급의 연기를 바란건 아니지만 그래도 장님이라는 인물의 눈동자나 시선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화가 날 정도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그냥 취미로 자신의 가상 방송을 녹음해서 버스에서 트는 버스 운전사와 장님 아가씨의 사랑이야기만 중심으로 다루면 영화가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 설정은 솔직히 괜찮았는데 너무 이거저거 보여주려는 욕심이 많았어요. 잔잔하고 흐뭇하긴 하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역시나.. 흥행에 실패하는 영화는 다 이유가 있다니깐...

2004/06/16

유쾌한 경제학 - 토드 부크홀츠 / 이성훈 : 별점 4점

유쾌한 경제학 - 8점
토드 부크홀츠 지음, 이성훈 옮김/김영사
경제라는 학문의 큰 부분을 쉽고 알기쉽게, 재미나게 설명한 책. 워낙 이쪽과 담쌓고 지낸지 오래되어 좀 어렵고 따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재미있고 감칠맛 나는 책이더군요.

크게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 국제경제학, 재산 증식의 4가지 항목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는데, 난해한 부분을 알기쉽게 설명하는 저자의 재치가 돋보입니다.
비록 미국 중심이긴 하지만 각종 사례와 근거 자료, 역사속의 상황들을 제시하며 저자 특유의 비유로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재미있더군요. 이런 재미난 설명 덕분에 이해가 쉽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생활 속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경제를 적극적으로 설명한 것도 마음에 드는 점이었어요.

마지막의 개인 투자와 주식 부분은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만 쓰여 있어서 조금 아쉽긴 합니다. 뭐 저자가 백만장자가 아닌 것으로 보아서는 별로 할 이야기도 없겠지만...^^

쉽고 재미난 만큼,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시작하기에는 딱 좋은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09/07/22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중)- 마쓰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 엮음 / 이규원 : 별점 3점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 중 - 6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미야베 미유키 엮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 마쓰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 엮음 / 이규원

간만에 읽어보는 신간입니다. 어차피 고전작품이니 신간이라 하기도 좀 어렵겠지만, 어쨌건 올 4월에 읽었던 마쓰모토 세이초 선생(이후 "선생" 생략)의 계승자이자 애호가로 유명한 추리소설가 미야베 미유키 여사(이후 "여사" 생략)가 직접 선정한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 컬렉션 중권입니다. 상권 출간 후 3개월만이네요.

상권은 4개의 큰 주제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권은 여자"와 "남자"라는 단순하면서도 쌍을 이루는 딱 2개의 주제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 주제 모두 앞에 미야베 미유키의 해설이 붙어있다는 것은 상권과 같지만 해설이 너무 멋드러지게, 감칠맛나게 쓰여진 덕분에 작품 본편 내용보다도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일단 짤막하게 작품별로 소개하자면 제 5장 "쓸쓸한 여인들의 초상" 에는 4편의 중단편이 실려있습니다.
첫 번째 작품인 "멀리서 부르는 소리"는 언니의 남편을 사랑하게 된 여성의 감정을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일종의 순애보와 같은 가슴 먹먹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사건이 없이 단지 숨겨진 감정의 단편만을 엿보는 구조라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솔직히 언니를 살해하는 전개로 진행될줄 알았거든요.

두 번째 작품 "권두시를 쓰는 여자"는 일상계 + 본격 미스터리가 결합된 좋은 단편입니다. 하이쿠 동인지에 열성적으로 시를 보내던 한 동호인의 시가 몇 달동안 오지 않자, 동인지 관계자들이 그 이유를 탐문하다가 뒤에 숨겨진 살인 사건을 밝혀낸다는 내용이거든요. 쉽게 지나칠법한 단순한 소재에서 극적인 드라마를 이끌어내는 거장의 노련함이 느껴졌습니다. 하이쿠 동인들이 오지랍이 너무 넓다 싶기는 한데, 이 정도야 허용범위 이내일 테지요. 시대를 떠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세 번째 작품 "서예강습"은 중편 이상 길이의, 이 책의 1/3 이상을 차지하는 긴 작품입니다. 일단 길이로 다른 작품들을 압도하는 만큼 세부 묘사도 굉장히 치밀합니다. 디테일이 잘 살아있어요.
그러나 치밀한 디테일 묘사를 제외하고는 중편으로서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 남자가 불륜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대방을 살해한다는 단순하면서도 뻔한 이야기인 탓입니다. 상세한 설정, 특히 "서예 강습" 이라는 이색적인 소재로 포장한건 좋지만 지나치게 장황한 감이 있어요.
나름 기발한 아이디어가 뒷받침 된 "사체 유기"도 썩 설득력이 있다고 보이기는 어렵고요.

그래서 전체적인 수준을 평가하자면 범작 정도에 그칩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남자이며 이야기도 여자에 대한 것 보다는 수렁에 빠지는 남자에 대한 내용이라서, 왜 "쓸쓸한 여인들의 초상"에 속해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네 번째 작품 "결혼식장의 미소"는 짤막한 소품입니다. 기모노 입히기 자격증 (별게 다 있네요)를 소재로 하여 인간사에 있음직한 에피소드를 이야기로 풀어냈지요. 유사한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사원 시마"의 한 에피소드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추리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그냥 드라마성 짙은 꽁트로 보는게 적합하겠네요.

그런데 이 작품 역시 주제와 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저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별로 쓸쓸하다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 6장 "불쾌한 남자들의 초상" 도 역시 5장과 대칭을 이루듯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첫 번째 작품 "공범"은 아주 기발합니다. 공범과 함께 은행을 턴 뒤 그 돈으로 사업에 성공한 사업가가 공범이 혹시나 생계가 어려워져 자신을 협박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설정이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마지막에 노숙자로 전락한 공범자가 서서히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는 묘사는 미야베 미유키 말대로 "호러" 그 자체였고 말이죠. 

그러나 후반부의 급반전이 너무나 깜짝쇼 수준이라 차라리 반전없이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 부분에서 끝내는 것이 더 좋았을것 같습니다. 아르바이트에 불과한 다카오카가 왜 사건에 집착하며 진상을 밝혀내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전혀 등장하고 있지 않는 것도 설득력을 너무 떨어트렸고요.

좋은 작품이라는건 확실하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뒷끝이 개운치는 못합니다.

두 번째 작품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는 대학교수 구무라의 치밀한 완전범죄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대학교수의 심리 묘사를 제외하고는 공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제목의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즉 형법상의 긴급피난과 같은 항목이 적용되는 사건도 아니고 말이죠. 결국 주인공의 복수조차 자신의 파멸을 담보로 한 것인데 이것이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 작품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역사학계를 무대로 한 학자들의 출세욕에 대한 이야기이지 결코 범죄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세 번째 작품 "공백의 디자인"은 추리 소설은 아니고 한 소규모 지방지의 광고부장의 눈물겨운 광고주 접대가 전편에 펼쳐지는 최루성 샐러리맨 드라마(?)입니다. 직장인으로 정말이지 공감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더라고요. 저도 슈퍼갑이라 불리우는 업체들의 횡포를 잘 알기에 눈물없이 볼 수 없었습니다.

단, 여기의 우에키 부장처럼 최후의 순간이 닥치면 한번 뒤집어 엎을 것 같은데, 그러한 마무리 없이 끝나버려 허무했습니다. 샐러리맨의 고충만 그려졌을 뿐 거기서 표출할 수 있는 분노, 그리고 카타르시스가 없어서 드라마가 맥이 빠져버렸어요.

네 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인 "산"은 굉장히 특이한 범죄 스릴러물입니다. 뭐가 특이하냐 하면 피해자, 즉 협박을 받는 당사자의 심리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는 것과 협박의 실질적인 과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때문에 독자는 현재의 상황을 미루어 판단할 뿐입니다.
이색적일 뿐더러 탐정역을 맡고있는 작가 오카모토의 시선과 독자를 동일하게 위치시키는, 효과적이면서도 공들인 설정이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이외의 내용은 평이한 협박물 수준이며 탐정역이 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고 우연 (피해자 동생의 편지)에 기대고 있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평작입니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기대했던 추리적인 요소가 그닥 녹아있지 않아 조금은 실망스러운 독서였습니다. 추리적인 요소로 만족스러웠던 작품은 개인적인 베스트이기도 한 "권두시를 쓰는 여자"가 거의 유일했거든요. 다른 작품들은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탐탁지 않은 요소들이 많아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대만큼" 이 아니었다는 것이지 결코 재미없거나 수준 미달의 작품들이 아닙니다! 재미있게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기에는 충분한, 거장의 노련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집임에는 분명하죠. 별점은 3점입니다.

아울러 부록 형식으로 미야베 미유키가 독자들에게 묻는 최고의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문 조사 결과가 실려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점과 선", "모래그릇", "제로의 촛점" 순이더군요. 제 마음 속 순위도 동일합니다.^^

2003/07/27

나를 기억하라 - 메리 히긴스 클라크 / 임지현 : 별점 3.5점

나를 기억하라 - 8점 메리 히긴스 클라크 지음, 임지현 옮김/문학사상사
미모의 동화작가 멘레이 니콜스는 실수로 아들을 잃은 후 극심한 불안 증세에 시달린다. 남편이 그녀와 같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온 해변의 별장 '리멤버 하우스'로 이사오자마자 멘레이는 환청과 환상에 시달리게 되고 저택의 옛주인인 선장과 그의 부인에 관련된 전설과 얽히면서 점차 멘레이와 가족은 또다른 위험속에 빠지게 되는데...

그동안 이상하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소설 중 처음 접하게 된 작품입니다. 그런데 왜 이제서야 읽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짜여진 괜찮은 서스펜스 스릴러더군요. 저택에 얽힌 과거의 사건과 겹쳐지는 현재시점의 서스펜스를 정말로 영상도 아닌 소설로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리적인 긴장감이 최고 수준이며 잘 짜여진 플롯과 의외의 결말 또한 미스테리물로서 감칠맛을 더해 주거든요.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소설을 읽은것은 처음이지만 유명세만큼의 만족감은 충분히 안겨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미국식 서스펜스 스릴러를 좋아하신다면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05/08/07

친절한 금자씨 - 박찬욱 : 별점 3점


전작 "올드보이"의 강렬한 기억때문에 오랫만에 극장을 찾아가 감상한 박찬욱 감독의 작품. 복수 3부작의 완결편이라고 하네요.

스토리는 잘 알고들 계실테니 요약은 생략합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없는 죄를 뒤집어쓴 금자씨의 복수극입니다. 굉장히 진부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재기발랄한 연출 덕분에 재미를 안겨다주는 작품으로 거듭났네요. 개인적으로는 전작 "복수는 나의 것"의 대 실패로 메이져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을 "올드보이"보다 더 실험적이고 과감한 영상이 눈에 많이 들어오더군요. 상당히 잘 만든 오프닝 화면부터 감각적인 느낌이 팍팍 납니다. 물론 너무 오바하는 장면 - 금자씨의 얼굴에서 정말 빛이 난다던가..- 은 약간 거슬렸긴 했지만요.

또 캐릭터가 굉장히 강렬합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이영애라는 청순가련, 지적인 미인의 대명사를 활용해 표현해 낸 금자씨가 대표적이죠. 교도소 생활과 출소해서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기간의 전혀 상반된 "친절함"의 표현 및 여러 대사들도 캐릭터의 볼륨을 감칠맛 있게 더해주고 있고요. 이 금자씨의 승리로 끝나는 결말도  마쵸적인 시각을 항상 보여주는 박찬욱 감독 영화치고는 상당히 이색적이더군요.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 (금자의 교도소 친구들)이 주로 사회적 약자로 묘사되기는 했으나 그간 박찬욱 감독 영화의 여성들이 대체로 피해자나 주변인 역할을 담당해 왔었던 것에 비한다면 많이 달라진, 개선된 모습으로 보아야겠죠.
절대악으로 그려지는 백선생과 결탁한 전도사 캐릭터 역시 대단합니다. 특히나 전도사는 광신과 아집으로 뭉쳐져 있고 선악을 떠나 어떤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이 땅의 종교단체를 많이 풍자한 듯한 느낌인데 오버하지 않고 딱 적당한, 유쾌한 수준으로 그리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울러 추리매니아로서 즐길 요소가 많았다는 것도 저에겐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복수의 과정같은 디테일이 잘 살아있는 것은 물론이고 마지막의 복수장면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연상되는 등 추리적 요소가 상당한 수준이었거든요. 우연에 의지하는 요소가 몇개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맥락이나 완성도를 거의 헤치지 않는 적당한 선이었다 생각됩니다.

하지만 최민식이 복수의 대상인 백선생 역을 맡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입니다. 최민식은 물론 한연기 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워낙 "오대수"의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자꾸 백선생에게 오대수가 오버랩되더군요. 묶여서 당하고 있더라도 한방 날려줄 것 같은... 그래서 시니컬하고 잔인한, 짐승같은 인물인 백선생의 특징이 잘 살아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사로잡힌 상태에서 금자와 딸 제니의 통역을 맡은 장면에서의 연기는 굉장히 와 닿았지만 목소리만 들릴 뿐이라 구태여 최민식씨를 쓸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이 더더욱 강했습니다. 비쥬얼 자체만으로 더 기름지며 사악한 다른 중견배우를 썼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그리고 마지막 복수가 끝나고 나서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후반이 많이 늘어지는 것 역시 옥의 티입니다. 물론 박찬욱이 "복수 3부작"을 완료하며 나름대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해주고자 노력한 티는 물씬 나지만 저에게는 너무 감상적이고 지루하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도 이름값은 분명히 해 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항상 그래왔지만 음악과 미술은 최고 수준이고 수없이 등장하는 카메오를 보는 재미 및 비장함과 살벌함 속에서 가끔 터져주는 유머 또한 무척 좋았고요. 취향에 따라 엄청 평가가 갈리리라는 생각도 들고, 전작의 엄청난 평가를 뛰어넘기에는 약간 부족해 보이기는 하지만 저는 무척 재미있게, 즐겁게 감상한 영화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8/02/04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 시모쓰키 아오이 / 김은모 : 별점 4.5점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 10점
시모쓰키 아오이 지음, 김은모 옮김/한겨레출판

오랜 경력의 평론가가 "왜 크리스티의 작품이 인기가 있고 재미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작품이 발표된 순서대로 전부 읽어본 후 평을 기록한 평론집이자 리뷰집입니다.

리뷰의 수준은 최상급입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면서 작품의 핵심을 콕 집어 지적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추리 소설 리뷰의 교과서라 해도 좋을 정도예요.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은 '불순물 하나 없는 본격 추리 소설의 원형'이고, "엔드하우스의 비극"은 '고명에 의존하지 않고 면발과 국물의 감칠맛으로만 승부하는 우동같은 작품'이라는 식입니다.
좋은 작품은 정말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잘 소개하고 있으며,  전문가답게 유사하거나 참고해야 할 다른 작품들도 함께 언급, 소개하는 부분들도 눈여겨볼 만 합니다. 트릭면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비뚤어진 집", "구름 속의 죽음" 정도는 저도 알고 있던 것이지만, "골프장 살인 사건" 이 10년 뒤 발표된 역사적 명작과 같은 장치를 사용했다, "블랙커피" 속 장치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 2" 속 장치와 일맥상통한다, "맥긴티 부인의 죽음" 은 하드보일드 성향이라 우수하다는 등의 정보들은 정말 그 깊이와 수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기억하고 쓰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리뷰가 작품이 발표된 연대별로 이어지는 덕분에 여사님의 발전, 작법의 진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연대기적 구성을 갖추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여사님 특유의 섬세한 인간관계 묘사가 정교하게 쌓아 올려지고, 트릭보다 인간관계와 동기 등 다양한 요소에 주목하는 작품들이 늘어나는 과정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여사님이 얼마나 많은 작품 스타일에 도전했는지도 알게 되었는데 정말 대단하더군요. 정통 추리에서 시작해서 모험물, 신본격 스타일 서술 트릭, 스릴러, 법정극, 하드보일드, 오컬트 심령 괴기물, 심지어 코즈믹 호러(!) 까지 장르 문학의 거의 전 범위를 아우르고 있으니까요. 왜 거장인지를 리뷰를 읽으면서 새삼 다시 느끼게 됩니다.
매우 낡아빠진 오래전 고전 작가 같지만 그렇지 않다며 "세번째 여인" 의 경우 1966년 발표된 작품으로 곧 '레드 제펠린' 이 결성될 시점이라고 지적하는 장면에서는 시대가 확 와 닿아서 놀랐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읽은 여사님 작품에서 '스푸트니크' 호가 언급되는 장면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지요. 참고로 이 작품은 당시 미국 최첨단 추리 소설에 도전한 작품이라고 저자는 소개하는데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무모한 도전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뽑아낸 증거라나요?

이렇게 리뷰 자체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이 리뷰를 통해 작가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낸다는 게 책의 핵심일 뿐 아니라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기가 있는 이유는 당연히 '걸작'이기 때문인데, 걸작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고 지적하지요. 여사님의 걸작들은 요약해서 설명하기가 불가능해서 제대로 소개되지 못 한게 원인이고요.
즉 작품 전체가 트릭이자, 복선이자, 단서이자, 미스디렉션으로 소설 전체가 속이기 위해 짜여진 플랫폼일 뿐 아니라, 여사님은 트릭에 능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명료하게 설명될 수 있는 본격물에 비하면 그 장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어렵다는 게 최종 결론인데, 여사님 작품에 대한 저자의 리뷰들을 읽어보면 이 의견에 동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리뷰를 통해 여사님의 특징적인 작법을 눈치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특유의 스타일은 그녀가 일종의 "연극"처럼 상황을 다룬 것이 비결로, 여사님 작품은 그림이나 동영상, 연극처럼 독자나 관객이 어디를 주목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 일어나는, "다의적" 이야기를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해 내는지가 중심이라는 건데 아주 타당해 보였습니다. 제가 읽었던 여사님 작품을 몇 편 떠올려 봐도 저자의 말대로 "여사님 머릿속에 상영되는 연극을 종이 위에 옮겼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 라는 것, 즉 보이는 것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겉보기를 만든 후, 겉보기와는 다른 진실에 그 이상의 설득력을 부여한다는 방법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가장 좋은 예는 여행지라는 무대와 신원을 위장한다는 설정인데 정말 그럴싸 하지요? 연극과 같은 상황을 접목하기 좋은건 당연히 일상과 분리된 장소일테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위장하는게 보다 손 쉬운 건 당연하니까요. 아울러 여사님은 독자가 어떤 때 어떤 인물을 의심하고 어떤 때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는지를 완벽하게 꿰고 있었던 덕분에 독자를 속이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이지 흉내내기 어려운 솜씨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저자 스스로 모든 작품의 별점을 매기고 평가한 결과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기는 합니다. 물론 평론, 리뷰 및 평가는 온전히 자기 혼자만의 결과물이기에 모든 사람이 만족하거나 동의할 수는 없죠. 그러나 전반적으로 별점이 높게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걸작이 아닌 자신만의 기준이 많이 부여되고 있어서 공감가지 않는 부분도 제법 많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주 별로였던 "헤라클레스의 모험" 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다섯 마리 아기 돼지" 나 "끝없는 밤" 을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은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역시 마찬가지고요. 한 권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로맨스 소설'로 알고 있는 매리 웨스트매콧 명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 것도 의아했던 점이에요. 제가 보았을 때에는 정교한 심리 묘사와 '이야기의 다의성' 이라는 항목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슬픈 사이프러스" 등 몇몇 작품은 국내 번역명과 동떨어진 일본식 제목으로 소개되거나, 포와로와 마플 및 기타 장편 외 몇몇 작품들에 대한 국내 출간 여부가 체크되지 않은 점은 옥의 티입니다. 출판사의 배려가 아쉽네요.

그래도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교과서이자 잘 쓰인 추리소설 리뷰 집으로 완벽에 가까운 책입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누구든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에요.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뛰어가서 사 오시길" 바랍니다. 저도 여사님같은 작품을 쓰지 못할 바에야, 이런 리뷰라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전체 베스트 10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이 많은데 서둘러, 시간 나는 대로 읽어봐야겠네요.

  1. 커튼
  2. 다섯 마리 아기 돼지
  3. 끝없는 밤,
  4. 주머니 속의 호밀
  5. 봄에 나는 없었다
  6. 백주의 악마
  7. 깨어진 거울
  8. 신비의 사나이 할리 퀸
  9. 죽음과의 약속
  10. N 또는 M

그 외 개인적으로 "장례식을 마치고", "할로 저택의 비극", "맥긴티 부인의 죽음", "카리브해의 미스터리", "서재의 시체" 도 읽어봐야겠어요. 다른 작품들도 많지만, 이것만 해도 올해 여름까지는 충분하겠지요?

2004/08/08

누구나 비밀은 있다 - 장현수 : 별점 1.5점


재즈바의 매력적인 보컬리스트 셋째 미영은 자유연애주의자이다. 자신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물망초 남자, 상일이 있지만 순진한 남자는 끌리지 않는다. 어느 날, 재즈바에 손님으로 온 수현을 보고 그 준수한 외모와 깔끔한 매너에 반하게 된다. 이 남자, 딱 내 타입이다! 제대로 걸렸다!

사랑? 섹스? 궁금한 건 뭐든지 책에서 배우는 학구파 대학원생 둘째 선영. 스물 일곱, 아직 처녀다. 사랑은 벼락처럼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 온다고 믿는 선영은 어느 날, 집으로 인사하러 온 동생의 애인 수현을 보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전율을 느낀다. 이 남자, 동생의 애인이지만 갖고 싶다!

결혼 전보다 오히려 섹스 횟수는 줄었고 남편은 가족하고는 동침하는 것이 아니라니 첫째 진영에게 사랑은 과거형일 뿐. 그런 진영에게 동생의 애인인 수현이 '귀여움' 그 이상으로 다가온다. 진영도 자신에게 전해지는 이 남자의 시선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이 남자, 속 마음이 궁금하다!

진영, 선영, 미영 세 자매가 동시에 사랑하게 된 수현. 도대체 수현의 어떤 매력이 세 자매를 사로잡은 것일까? 세 자매와 한 남자의 아찔한 애정행각. 그 은밀한 비밀이 조심스럽게 밝혀진다


간만에 극장가서 본 영화입니다. 익히 알려진 정보대로 이병헌을 중심으로 세 자매의 은밀한 이야기가 뒤섞이는 코미디 성격이 강한 로맨틱 드라마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계속 불쾌함이 느껴졌습니다. 화랑을 경영하며 오픈카를 타고다니며 패션감각이 뛰어난 바람둥이 이병헌과 재즈바 사장의 딸들로 넓은 2층집에서 살며 온갖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세 자매들의 설정은 상식적으로 보아도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뭐.. 제가 그렇게 살지 못해서 더 위화감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야기도 세 자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엮은 형식인데, 첫번째 이야기인 미영의 이야기와 두번째 이야기 선영의 이야기까지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지만 세번째 이야기인 진영의 이야기는 전체 내용과 별로 잘 어울리지도 않고, 사족으로만 느껴져서 아쉽더군요. 추상미는 못 보던 사이에 굉장히 나이 들어 보여서 안타깝기도 하고요...

전체적으로 이병헌의 플레이보이 전략과 감칠맛 나는 대사들, 세 자매의 이야기를 각자의 시선에서 절묘하게 편집한 이야기 구조 등은 상당히 재미있었고 촬영과 음악 등에서 완성도도 괜찮은 수준이지만 비현실적인 설정과 내용으로 공감할 수 없었던 영화입니다. 사실 주인공 이름들과 배우들만 빼면 대체 이 영화가 한국 영화인지도 의심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영국영화 리메이크라지만 이건 좀 심합니다. 리메이크할때는 각색을 안하나요? 그리고, 이병헌이 과연 이 영화에 적역이었을까요?

그래도 두번째 이야기 선영의 이야기만은 괜찮습니다. 최지우가 귀엽게 나오기도 하지만 이야기도 가장 재미있고 몰입할 수 있었거든요. 편집도 가장 맛깔나게 잘 되어 있어서 추천합니다. 그나마 세 여배우가 좀 더 벗어주기만 했어도 돈이 좀 덜 아까왔을텐데...... 별점은 1.5점입니다.

2005/09/07

박수칠때 떠나라 - 장진 : 별점 2.5점


강남의 최고급 호텔 1207호에서 A급 카피라이터 정유정이 칼에 9군데나 찔려 발견된다. 용의자는 휘발유 통을 들고 현장에서 바로 검거된 김영훈. '범죄없는 사회만들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살인사건의 수사가 공중파에서 생중계된다. 열혈 폭력 검사 최연기(차승원)와 자신의 혐의를 줄기차게 부인하는 용의자 김영훈(신하균)의 줄다리기 속에 1박 2일 간의 '버라이어티한 수사극'이 펼쳐지는데...

그런데 영화는 생각과는 많이 다르네요. 처음에는 일종의 수사극이라 생각했습니다. 초중반부 분위기는 그런대로 비슷하기는 하고요. 그러나 잘 짜여진 수사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헛점이 많습니다. 초반부에 "동기" 자체를 물어보는 장면이 전무하다는 것, 그리고 범인의 본명을 중반에서나 알게 된다는 것 등 기본적인 수사 과정의 오류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죠. 무엇보다도 검사가 중요 증거물을 빼돌리는 행위는 정말 공정치도 못하며 용서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러지 않기를 바랄뿐이죠)
또  "TV중계"라는 설정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영화에 좋게 작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특히 무당이 등장하고 PD가 빙의(?)하는 후반부 클라이막스 장면은 솔직히 오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설정을 집어 넣었을까요? 미디어를 풍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독특함을 심어주려는 단순한 의도였다면 불필요했는데 말이죠.
그리고 오컬트 심령물로 완전 급선회하는 마지막 장면... 무당이 나오면서 그런 분위기를 팍팍 풍기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뒤통수를 칠줄은 몰랐습니다. 뭐 진상을 이보다 완벽하게 보여주기는 어렵겠지만 제 생각에는 절반의 성공으로 보입니다. 의외성과 반전의 묘미는 좋았지만 뭐랄까, 납득이 안되는 면도 적지 않은 그런 결말이었어요.

물론 아주 나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어느정도 꽉 짜여진 수사물로서의 조건은 잘 갖추고는 있습니다. 여러 단서들의 제시도 공평한 편이라 추리적으로 제법 완성도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추리적 요소의 조합만 따진다면 "혈의 누"보다도 탄탄합니다. 대사들도 제법 감칠맛 있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요. 그리고 영화의 인트로 장면 만큼은 정말 잘 만들어서 기대를 팍팍! 하게 만듭니다. 여담이지만 요새 우리나라 영화 인트로는 정말 잘 만드는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부수적인 요소를 들어내고 더 드라마 위주로 탄탄하게 만드는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흥행작으로의 미덕과 장진감독의 과감한 실험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잘 잡은 그런 작품으로 보이네요. 중반부는 조금 지루했지만 최소한 재미라는 요소는 확실히 건질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PS : 근데 저 제목, 도대체 무슨 의미죠?

2024/06/19

범죄도시 3 (2023) - 이상용 : 별점 2점

작년에 천만 명을 넘는 흥행을 기록했던, 범죄 액션물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 얼마전 천만 명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의 막을 내리는 추세인데 감상이 늦었네요.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내용은 특별한 게 없습니다. 마석도 형사가 잔혹한 범행을 저지르는 악당들을 박살내는 게 전부이지요. 물론 이 영화에서 깊이 있는 내용이나 반전을 기대한건 아닙니다. 화끈한 액션과 감칠맛나는 유머로 2시간을 알차게 채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천만 명 이상의 관객분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이었을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이 그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메인 빌런 주성철 탓입니다. 별로 강하지도 않고(상대적인 개념입니다만), 정체가 마약 수사 팀장이었다는 반전도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설정 오류로 보이는게, 주성철이 한국 현직 경찰이었다면 권총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일본 야쿠자나 마석도 형사는 손쉽게 처리하는게 당연해요. 총기를 사용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중반까지는 최대한 사용을 자제했다고 치더라도, 도주를 결심했던 마지막 순간에 마석도 형사에게 야구 방망이로 맞설 이유는 없었습니다.
리키를 비롯한 일본 야쿠자들도 전형적인 클리셰 그대로라 진부했습니다. 주성철보다 쪽수와 무기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형사에게 박살난다는건 더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전작들처럼 마형사가 상대하는 적의 숫자를 줄여야 했습니다.
마형사 소속을 금천서 강력반에서 광역 수사대로 변경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금천서 강력반 동료들은 경찰 동료 느낌이 많이 났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려웠어요. 웃음 포인트로 내세우는 초롱이도 너무 노골적이라 저는 별로였습니다.

악당을 박살내는 장면은 여전해서 기본적인 재미는 보장되긴 하지만, 이런 점들 때문에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네요. 제 점수는 2점입니다.

2010/08/04

우주괴인 자이로박사 - 에드먼드 해밀턴 / 박홍근 : 별점 3점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암흑성, 그리고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에게 태양계의 지배권을 넘기라는 자이로박사의 음모에 대항하여 싸우는 캡틴 퓨처 커티스 뉴턴과 퓨처맨들의 이야기. 아이디어 회관 SF문고 중에서도 "비글호의 모험"과 더불어 개인 베스트 1~2위를 다투던 작품이었습니다. '직지프로젝트' 결과물로 갑자기 급 뽐뿌가 와서 읽게되었네요. 

원제(Calling Captain Future)와 간단한 내용소개를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캡틴 퓨처" 시리즈의 한 권이기도 합니다. "보물섬" 창간 당시 고유성 선생님께서 발표하셨던 "캡틴 퓨처"의 원작이기도 하고, 저와 유년기를 공유하신 분들이라면 친숙하실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전함 코메트"에도 포함된 에피소드이기도 하고요.

작품은 그야말로 우주 활극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에테르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복고적인 태양계를 종횡무진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캡틴 퓨처와 그의 동료 퓨처맨 - 사이먼, 클라크, 오토 - 의 모험이 그야말로 숨쉴틈없이 벌어지는 덕분입니다. 화성에서는 로프뱀에 사로잡히고, 에테르 사르갓소 바다에 표류하였다가 탈출하기도 하고, 명왕성에서 맹수와 사투를 벌이는 등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에요.

단순하게 모험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이로 박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과정이 추리물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서 재미를 더해줍니다. 자이로 박사와 함께 있는 외계인이 코발트가 함유되어 있는 행성에서 왔다던가, 자이로 박사가 나타났던 현장에 남아있던 발자국과 진흙을 가지고 펼치는 추리 등이 감칠맛나게 잘 쓰이고 있거든요. 이러한 추리를 바탕으로 한 반전도 깔끔한 편입니다. 아울러 에테르 우주관이기는 하지만 암흑성의 정체를 빛의 굴절 등을 통해 증명한다는 것도 괜찮았어요.

그 외에도 캡틴 퓨처와 퓨처맨 파티가 두뇌 - 힘 - 변장 으로 확실히 영역구분이 되어 있다는 점, 캡틴 퓨처의 벨트에 다양한 도구가 들어있고 캡틴 퓨처를 부를 때에는 북극에 마그네슘 등을 켠다는 등의 슈퍼 히어로 만화같은 느낌이 담뿍 들어있는 것도 독특한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제 어린시절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어도 역시 재미있네요. 너무 아동용으로 번역된 느낌이 드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6/17

아내의 여자친구 - 고이케 마리코 / 오근영 : 별점 3점

아내의 여자 친구 - 6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대교북스캔(대교베텔스만주식회사)

석원님 블로그에서 관련 정보와 리뷰를 읽고 구입하게 된 책입니다. 장정과 디자인, 제목만 보아서는 추리쪽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 석원님 글이 없었다면 영원히 모르고 지나갔을 것 같은데 먼저 감사 드립니다.

일본에서 꽤 잘 나간다는 여성 작가 고이케 마리코의 단편집으로 총 6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단편들의 소재가 주로 "가족"과 그 갈등관계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사건들도 이 갈등관계를 축으로 벌어지고 있어서 스케일이 작은 대신 현실감이 넘쳐서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예를 들자면 첫번째 작품 "보살 같은 여자"는 고모, 새엄마,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여성 중심 가족과 돈줄인 아버지와의 갈등관계. 두번째 작품 "추락"은 장인을 정점으로 하는 "가키누마 패밀리"에 속한 데릴사위 대학교수 가키누마의 은밀한 문제. 세번째 작품 "남자 잡아먹는 여자"와 네번째 작품 "아내의 여자 친구" 역시 한 가정 내에서 커지는 갈등관계를 다루고 있죠.
여성 작가다운 디테일하고 감칠맛나는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추리적 요소가 많지는 않았고 괜찮은 설정에 비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부분에서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제법 있기는 합니다. 여운을 남기는 깊은 맛은 로얄드 달이나 아토다 다카시 같은 작가들에 비해서는 부족한 편이에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 되는 맛이 제법 있어서 추리적인 요소에 치우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여성판 아토다 다카시 느낌, 혹은 요시모토 바나나가 쓴 추리소설같은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저의 베스트는 제일 정통 추리 소설에 가까운 "보살 같은 여자"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남자 잡아먹는 여자", 표제작 "아내의 여자친구"입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읽는 재미는 있는 만큼 주위에서 발견하신다면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작품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보살같은 여자" :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요시마루 가문. 집안의 돈줄인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의 거동이 어려워지며 점점 히스테리가 심해지고 집안의 다른 모든 가족은 그러한 아버지에게 살의를 서서히 품게 된다.
이 작품으로 89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 단편상을 수상했네요. 제일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트릭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동기와 수법이 확실한 제일 정통 추리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입니다.

"추락" :
여사원 사카모토 미야코는 소설가를 꿈꾸며 자신이 다니는 문화센터 창작반의 강사 가키누마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와중에 사고로 추락사하게 된다. 하지만 가키누마는 미야코와 드라이브할 때의 뺑소니 사건을 은폐했던 이유로 그 기록을 미야코가 남기지 않았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미야코가 추락사하기 전에 남기는 글 때문에 자살로 포장되는 사고사 과정이 기발합니다. 뭔가 다른 트릭으로 포장해서 쓴다면 근사한 정통 추리물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좋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좀 실망스럽네요.

"남자 잡아먹는 여자" : 
하나뿐인 남동생이 결혼만 하면 남편이 사고로 죽는 여인과 결혼하여 같이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들. 먼저 오랫동안 키워온 개가 죽고 다음에는 주인공의 아들이 사고로 죽게되며 이에 앙심을 품은 주인공은 시동생을 죽이려고 시도한다...
주인공의 심리의 흐름을 주로 묘사하는 심리드라마로 설정이 굉장히 좋습니다. 실제로도 있을법한 이른바 "남자 잡아먹는" 여인을 공포와 사건의 원흉으로 몰아가는 이야기구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설득력 있고 결말도 깔끔하면서도 나름의 반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에서 애완견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으로 보이네요.

"아내의 여자친구" :
약간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주인공이 아내가 학창시절 여고 동창과 친해지며 집밖에 나가는 시간이 잦아지자 그 여고 동창을 살해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단서를 현장에 두고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주인공의 심리를 처음에 집중적으로 묘사하여 주인공이 아내를 지극히,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과 그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며 마지막 반전으로 독자의 뒷통수를 칩니다. 이 단편집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군요.

"잘못된 사망장소" :
한 방송인의 불륜상대인 여성이 그 방송인을 살해한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방송인의 가족에게 사실을 고백하지만 가족은 오히려 온 가족이 나서 그의 시체만 서둘러 본가로 옮기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가족"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변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이 좀 특이하군요. 내용도 쉽게쉽게 진행되며 그다지 긴장감도 없고 설득력이 떨어져 이 책에서는 가장 처지는 작품으로 보입니다.

"종막" :
감독의 아내와의 불륜으로 주연자리를 차지한 주인공은 그 여자의 집착을 견디지 못해 살의를 품고 우연찮게 찾아온 기회를 통해 알리바이를 위장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준비하여 범행을 실행에 옮기는데...
범인, 그리고 범행의 과정이 먼저 나오는 도서형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트릭을 단서에 의해 밝혀내는 구조는 아니고 범인의 실수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 때문에 완벽한 추리물로 보기는 좀 어렵네요. 그래도 알리바이 트릭 자체는 단순하지만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2011/02/02

쩨쩨한 로맨스 (2010) - 김정훈 : 별점 3점

정배는 그림 실력에 비해 형편없는 스토리로 몇 년째 등단하지 못하는 성인 만화가로, 아버지의 유품을 지키기 위해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성인 만화 공모전에 도전하게 된다. 그래서 완성도를 높일 생각으로 스토리 작가를 선발하게 된다. 몇 번의 인터뷰를 거쳐 그가 선발한 것은 다림. 그녀는 별 볼일 없는 잡지 일을 전전하다 해고당한 여자로, 정배와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계속 충돌하게 되는데...

성인 만화가와 백조 작가의 알콩달콩 로맨스를 그린 섹시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티격태격하던 남녀가 공동의 작업을 하면서 사랑이 싹튼다는 설정은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을 비롯하여 많이 있었죠. 그러나 이 작품은 '성인 만화'라는 공동 작업물의 설정이 독특한 재미를 가져다줍니다. 여기서 오는 가장 독특한 재미는 무엇보다도 야한 대사가 감칠맛 나게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우쥬메리미?", "섹스계의 호날두~!!!!" 등을 꼽고 싶네요.

그 외에도 성적인 판타지를 코믹하게 풀어내는 여러 장면들도 인상적이었어요. 섹스의 전문가인 척하지만 전부 잡지 등에서 접했을 뿐, 실제로는 쑥맥인 다림의 섹스 이론이 펼쳐지는 장면처럼요.

그리고 설정에 어울리게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작중 만화 "킬러본색" 캐릭터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을 적재적소에 삽입한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도 괜찮았고, 정말 이야기 전개에 "딱 맞는" 효과를 보여주었으니까요.

단, "섹시 로맨틱 코미디" 치고는 화면 자체는 별로 야하지 않았다는 것과,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그대로 따라간 결말은 좀 안일했습니다. 너무 공식대로 흘러간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이건 뭐 불만까지는 아니고... 오히려 만화 시장을 너무 낙관적으로 그린 내용이 더 문제였다 생각됩니다. 내용과 캐릭터의 상당 부분이 거액의 성인 만화 공모전이라는 설정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현실과는 괴리감이 많이 느껴졌거든요. 4개국 동시 출판되는 신인 성인 만화 공모전 상금이 10만 불이고, 인세가 30%라니... 이건 판타지의 영역이죠.

그래도 섹시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굉장히 충실하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생각됩니다. 한국 영화에서 이 정도로 순수하게 직구 승부하는 영화는 보기 드물잖아요? 적역을 소화한 두 배우의 연기와 깔끔한 각본, 독특한 연출도 좋았고 말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2009/12/23

별난 전쟁, 특별한 작전 - 조셉 커민스 / 채인택 : 별점 4점

별난 전쟁, 특별한 작전 - 8점
조셉 커민스 지음, 채인택 옮김/플래닛미디어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전쟁들 중에서의 기발한 전략과 전술을 되짚는 책입니다. 병력 숫자만으로 밀어붙이는 어택땅이 아니라, 천재들의 전략을 중심으로 세밀한 설명과 자세한 지도 등의 도판과 함께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설명이나 묘사도 감칠맛나는지라 총 4부 254 400여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쑥쑥 읽히는 맛이 있더군요. 익히 알고있던 전투은 한니발의 포에니 전쟁 당시 칸나에 전투와 데미스토클레스의 살라미스 해전에 불과할 정도로 새로운 정보가 가득하다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드는 점이었고요.
무엇보다도 "천재적인 전략과 전술"을 중심으로 하는 책이니만큼 아무래도 약자 쪽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기술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 아주 좋았는데 (전 루저들의 편이랍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일 먼저 꼽고싶은 이야기는 위대한 줄루족 지배자 샤카가 고안한 황소의 뿔 전략과 이 전략을 이용해 줄루족이 압도적인 장비의 영국군 분견대 천여명을 괴멸시킨 이산들와나 전투 이야기입니다. 빠른 이동과 부대지정이 전략의 핵심포인트였다는 점에서 아드레날린 업그레이드를 마친 저글링이 시즈탱크 부대를 가공할 속도와 완벽한 부대지정으로 휩쓸어버리는 모양새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야말로 상상만 해도 전율이 올 정도죠. 더불어 카리스마 넘치는 샤카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해서 재미를 더해 줍니다.

그리고 섬도시 티레를 정복하기 위해 아예 섬까지 다리를 놓아버린 알렉산드로스의 티레 점령기도 빼놓기 어렵겠죠. 이 이야기는 막강한 절대자가 반항하는 섬도시를 뭉갠 이야기라 루저들의 승리라는 전체적인 감상 포인트 측면에서는 좀 어긋나긴 하지만 워낙 스케일과 발상이 황당해서 인상적이었어요. 과연 과거의 절대자나 할 수 있었던 절대왕자다운 전략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꼽고싶은것은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오하에아와이 전투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 최고의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용맹한 마오리족 전사들이 위대한 추장 헤케와 카위티의 지휘와 과학적이면서도 치밀한 구조물 파-벙커와 참호를 결합한 듯한 특이한 건물- 를 잘 활용하여 단 백명으로 이백오십명의 대포 등으로 중무장한 영국군을 격퇴했다는 내용으로 마오리족의 능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영국군의 멍청함은 부록삼아 즐길거리로 충분했고요.
저의 무지함탓에 야만인 정도로만 알고있었던 마오리족이었는데 정말 반성하고 사과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위의 전투들 외에도 당대 최정예 로마군이 숲속의 함정과 같은 완벽하고 치밀한 작전에 괴멸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어이가 없어서 차라리 웃기기까지한 남북전쟁 때의 구덩이 전투, 제 3차 가자전쟁때의 여러 속임수 작전 등 상세히 언급하지 않은 내용들도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이렇듯 재미만 따져도 최고수준이지만 다양한 자료와 도판 등 책의 완성도 역시 뛰어나기에 별점 4점은 충분하겠죠? 별 5점을 줄까도 했는데 사례로 든 전투들이 전부 서양쪽 시각에 가깝다는 단점이 약간 눈에 띄여서 감점했습니다. 어차피 학익진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면 하니발의 이야기 대신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끼워넣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뭐 그래도 4점도 굉장히 높은 점수죠!
전략과 전술에 관한 역사서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강추합니다.

2016/07/28

사기꾼 - 애드 멕베인 / 홍지로 : 별점 2점

사기꾼 - 4점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신원 미상의 표류 사체가 발견되었다. 검시 결과 그녀는 익사한게 아니라 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는게 밝혀졌다. 87분서 형사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 그리고 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 살인범을 쫓기 시작하는데...

"여자는 외모가 전부요." - 첫 번째 피해자 메리 루이즈의 아버지 프로셱이 딸을 떠올리며 하는 말.

87분서 시리즈입니다. 1957년 작으로 "마약 밀매인" 바로 다음 작품. 전작에서 총상을 입은 스티브 카렐라가 완쾌하여 등장합니다.

"마약 밀매인"처럼 초기작이라 나름 기대했는데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무려 두 명이나 살해당하고, 한 명은 죽기 직전에 몰릴 뿐 아니라 심지어 카렐라의 아내 테디까지 납치당함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너무 멍청해서 수사랄 게 없는 탓입니다.

범인 크리스 도널더슨에게 시대를 앞서간 매력은 있습니다. 혼인 빙자 살인 사기범이지만 회계사를 자처할 정도의 인텔리이며, 누가 봐도 훤칠한 금발 꽃미남이라는 점에서요. 이러한 능력을 잘 이용해 여자들을 끌어들인 후, 재산을 가로채고 살해하는 방식도 단순 무식한 깡패들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문제는 하는 짓이 무식한 깡패보다도 못하다는 겁니다. 자신이 죽일 여자 손에 이니셜을 문신으로 새기는 버릇이 있는데, 그냥 대놓고 문신 가게에서 문신을 해버립니다. 덕분에 두 명의 피해자가 문신을 한 곳이 밝혀진 후, 인상착의도 대충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놈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은 전혀 없어요. 이래서야 죽어도 쌉니다.

경찰도 멍청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문신 시술소에 이놈이 또 나타나면 연락하라는 최소한의 요청도 하지 않거든요. 도시에 문신 시술소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범행이 거듭되면 그중 한 곳에 또 들릴 게 뻔하니 당연히 요청했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요. 덕분에 선량한 모범 시민인 문신 시술소 사장 찰리 챈은 범인이 다시 나타났을 때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심지어 곧 죽을 것 같은 피해자가 함께 있는데도요!
마침 자리에 있던 테디 덕에 경찰에 전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카렐라가 퇴근한 후라 별 소용이 없습니다. 범인이 듣고 있는 와중에 찰리가 지혜를 짜내 남긴 "문신 도안"이 가게에 있다는 메시지도 전화를 대신 받은게 "일단 때리고 물어보는" 멍청한 하빌랜드라 무시해 버리고 맙니다. 즉, 카렐라에서 시작된 무능한 경찰력의 연쇄반응인 셈입ㄴ비다.

그나마 이 사건이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테디가 범인을 미행하면서 종이 쪽지를 남겨 사람들에게 87분서로 전화를 걸게 만든 것, 그리고 눈물겨운 찰리 챈의 활약 때문입니다. 경찰은 그야말로 받아먹기만 했어요. 버트 클링이 신참 형사로 실수를 연발하는 멍청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도 색다르기는 한데 다른 형사들 모두 바보이니 특별할 게 없어 보입니다. 온갖 중요한 단서 (그중에서 핵심은 문신의 의미!)를 떠올렸지만 그걸 놓쳤다라고 작가가 스스로 친절히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스럽고요.

그래도 TV 속 광고 등 일상생활 속 모두가 사기이며, 그것은 모두 당신을 노리고 있다!는 풍자에서 시작되는 혼인 빙자 사기 행각 및 브라운 형사가 쫓는 조무라기 커플의 시시한 사기극 등 사기 관련 이야기는 꽤 재미있기는 합니다. 5달러 지폐에 은총을 내린다면서 바꿔치기 한다던가, 우연을 가장하고 만난 후 일종의 야바위로 사기를 친다던가, 진짜 진주를 가짜로 바꿔치기 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정말로 이 범죄를 잘 알고 있구나 싶을 정도였어요. 크리스 도널더슨의 혼인빙자 사기도 여자의 돈을 끌어내는 과정이 정말 그럴듯해서 감탄했고요. 중간중간 소소하게 등장하는 감칠맛 넘치는 대사들도 볼거리입니다. 브라운 형사의 조크 센스가 특히나 돋보이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87분서 시리즈의 명성에 걸맞는 묵직한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조무라기 사기극은 여러모로 유머로 다루어지는 느낌이 더 강하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소소한 디테일들은 나쁘지 않고 속도감 넘치는 전개 덕분에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87분서답지 않아 감점할 수밖에 없네요. 묵직한 범죄물을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겁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에드 멕베인이 조금 쉬어가는 느낌으로 87분서 시리즈 설정을 가져다가 쓴 로맨스물 이라고 생각됩니다. 작중 카렐라와 테디의 뜨거운 (!) 사랑 이야기 비중을 봐도 그러해요. 메인 스토리부터가 판타지 동화잖아요. 여자들을 납치해가는 사악한 마법사가 있고, 이 마법사에게 공주까지 납치되어 가지만 공주의 기지로 위치를 알아낸 기사(혹은 왕자)가 마법사를 물리치고 공주와 잡혀간(아직 살아있는) 여자들을 구해낸다... 아울러 카렐라와 테디의 뜨거운 사랑과 대비되는 크리스의 프리실라에 대한 거짓된 사랑을 그림으로써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려는 거장의 작전도 포함되어 있고요. 사악한 마법사의 거짓된 사랑이 추가된 것이지요.

2005/02/17

호텔 캘리포니아 - 김진태 : 별점 3점

만화 호텔 캘리포니아 - 6점
김진태 글 그림/열린책들

2천년 전통의 살인무술 "북두관자 찌르기" 전승자 달라스 웨스트코스트는 아버지의 원수 신시내티 키드를 죽이려다가 실수로 미네소타 키드를 죽였다. 달라스는 콜린 교도소 - 통칭 "호텔 캘리포니아" - 에 수감되는데...

만화책을 엄청나게 구입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99년부터 2002년도까지죠. 이유는 직장생활을 새로 시작하여 월급도 생기고, 바쁜 탓에 다른 여가활동을 즐기기가 힘들어서였는데 어느 정도였나 하면 홍대앞 유명한 한양문고 사장님께 스카웃제의(?)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허나 그렇게 만화책을 사 모았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작가에는 눈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일본 코믹스를 모방한 캐릭터나 스토리도 싫었고 그나마 작가라 할 수 있는 몇몇 분들의 책은 워낙 귀할 뿐더러 신간이 자주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인데 그 중 단 한사람! 제가 거의 전 작품을 사 모으려 노력하고 아직까지도 총애하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김진태입니다.

데뷰 초에는 그림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억지성 짙은 스토리도 별로라 생각했지만 사회 풍자와 슬랩스틱을 교묘히 합성한 최초의 히트작 "대한민국 황대장"에서 부터 눈길이 가기 시작하여 후속작 "신한국 황대장"까지 저에게 구입하게 만들더니, 어마어마한 황당무계 SF "보글보글"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그 이후 "체리체리 GoGo"와 "시민 쾌걸" 등을 통해 이른바 "김진태월드"를 완성하여 팬을 더욱 즐겁게 해 주었죠. 하지만 매일매일 반복되는 신문연재라는 제약조건 때문인지 "시민 쾌걸"의 기발한 개그도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이 눈에 보이던 차에 결국 연재가 완결되어 여러모로 섭섭하고 아쉬웠는데 마침 신간 단행본이 출간되어 사보게 된 것이 이 책입니다.

사설이 길었는데, 이 만화는 이전 작품 "왕십리 종합병원"과 유사하게 특정 장소와 직종에서 유발되는 일종의 캐릭터 코미디입니다. 비교해보자면 "왕십리..."는 에피소드들이 다른 연재작에 비하면 긴 편이라 밀도가 떨어지고 "한호색"처럼 김진태 만화치고는 단순한 캐릭터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등 특출난 점이 없는 평범한 작품에 불과하죠.
그러나 이 작품은 '북두관자찌르기'의 전승자 달라스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는 있기는 하나 패러디 캐릭터로서의 약점때문인지 매 에피소드마다 달라스보다는 특색있고 개성있는 주변 인물들의 개그와 재치를 짤막한 길이로 압축하여 보여줍니다. 그래서 "왕십리.."보다는 주인공의 역할이 미미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독특하고 개성넘치는 달라스의 룸메이트 스티브 수세미나 컨트리 음악 애호가 교도소장, 흑인의 프라이드 힙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힙합듀오 어빙과 톰, 라틴 패거리의 보스 바티 스투타와 흑인 패거리 보스 말콤 S 등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이 한 꼭지 씩 등장하여 웃겨주는 식이라 오히려 캐릭터 코미디로서는 훨씬 좋은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 이런 완전 "교도소"배경의 만화는 처음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일반 흥행작에서 빠질 수 없는 "여성 캐릭터" 조차도 나름의 아이디어로 소화해 내어서 표현하는 김진태의 기발함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규화보전"이라니!).
개인적으로 최고의 에피소드는 모두가 싫어하는 죄수 "조지 워런"이 등장하는 "Jailhouse Rock"편입니다. 내용 진행이 힙합듀오의 랩으로 이루어지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감칠맛 나는 대사들, 생체실험을 통한 극적인 반전 등 김진태 월드의 재미가 전부 담겨있는 명편이에요.

하지만 커버와 이런 저런 사설들을 빼면 실제 내용은 약 120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가격이 7,500원이라는 것은 좀 부담입니다. 페이지당 가격이 60원을 넘어가는 셈이니까요. 거기에 김진태 만화의 최대 단점인 "마무리가 약하다"는 여전하고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설정과 아이디어, 패러디를 이해할 수 있는 독자층이 상당히 좁게 느껴지는 것도 아쉽네요.

그래도 간만에 등장한 새로운 설정의 김진태 작품으로 책 자체도 상당히 괜찮은 디자인으로 책들을 만드는 출판사 "열린책들"답게 깔끔한 편집에다가 올 칼라, 그리고 커버도 마음에 들어 간만에 무척 마음에 드는 책을 구입한 것 같습니다. 또 놀랍우면서도 반가운 것은 이 책이 책 날개에 있는 것 처럼 장 자끄 상뻬등 해외 유명 작가와 같은 반열의 시리즈 책으로 나왔다는 것이지요(진태님 만세!).  김진태 월드의 진가를 맛보기에는 좀 부족하지만 입문으로서는 손색없는, 저질 화장실 개그가 난무하는 개그만화계의 상큼한 한그루 상록수 같은 책으로 추천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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