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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역시 빵이 좋아! - 야마모토 아리 / 박정임 : 별점 1점

역시 빵이 좋아! - 2점
야마모토 아리 지음, 박정임 옮김/이봄

조리사 면허를 취득한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야마모토 아리의 빵에 대한 에세이 만화... 인 줄 알고 읽게 되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르네요. 130여 종의 일본 빵집의 빵을 한 개 당 1~2페이지 분량으로 빵 그림, 재료와 맛에 대한 설명, 잘 어울리는 술이나 음료를 소개하는게 전부거든요.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에요.

1. 빵 소개 : 눈이 번쩍하는 매운맛, 캐슈너트와 블랙 페퍼.
2. 특징 소개 : 블랙 페퍼의 매운 맛이 찌릿찌릿! 수제 효모 베이스의 산미도 서서히 올라와! 이 맛 엄청 자극적!
3. 부가 정보 : 이건 틀림없이 육류와 어울리는 맛이야. 비엔나 소시지와 정말 잘 맞아! 화이트와인이랑 드세요.

이외에 중간중간 아주 약간의 개그나 아이디어가 들어간 정도입니다. 만화라고 부르려면 최소한의 이야기는 필요한데 이래서야 빵 소개 책자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딱히 작화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요.

빵집 순례를 위해서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주로 도쿄에 있는 빵집들이 소개되지만 빵집 이름 뿐, 상세 주소나 지도가 소개되지 않는 탓입니다. 최소한 레시피라도 실렸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빵의 특성상 집에서 만드는 것은 거의 무리이니 이 역시 기대할 게 못됩니다. 약간의 어레인지 정도(오븐 토스트에서 구워 먹는 게 좋다던가)만 실려 있는 수준이에요.

편의점에서 파는 빵인(세븐 일레븐) '버터 스카치', '휩크림 듬뿍 데니시' 소개 정도는 괜찮았는데 차라리 이런 소재로 끌고 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빵이 아니라 '편의점이 좋아' 식으로 말이죠.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편의점 여왕 다인님이 한번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빵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기대가 컸는데 아쉽습니다. 차라리 우리나라에서도 구할 수 있는 빵 소개였다면 점수가 조금은 높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말이지 건질 게 없어요. 일본 맛집 소개 블로그를 보는 게 더 낫겠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26/06/0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6) 맥주가 맛있는 순간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 중 하나입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닿습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보리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고, 이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은 보리와 밀로 만든 빵을 주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물에 젖은 빵이 발효된 것을 먹어 본 것이 맥주의 시작이었다고 하지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록 문학으로 꼽히는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맥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맥주는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음식을 대표하는 상형문자가 ‘맥주’와 ‘빵’이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피라미드를 맥주와 마늘 덕분에 만들 수 있었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시원한 맥주와 강장제 역할을 하는 마늘이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고대 이집트에 냉장고가 있었을 리는 없지만, 더위 속에서 마시는 맥주가 각별하다는 사실만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듯합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린 뒤 마시는 맥주 한 잔은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드니까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닷쿠 & 다카치 시리즈 중 한 편인 "맥주 별장의 모험"에서 주인공 닷쿠 일행은 바로 그런 유혹에 빠집니다. 그들은 불의의 사고로 무더위 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별장에 몰래 들어갑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대량의 맥주를 발견하지요. 당연히 일행은 유혹을 참지 못합니다. 긴급 피난이라는 그럴듯한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며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은 몸에 해로울 수 있습니다. 더위로 땀을 많이 흘려 체내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알코올의 이뇨 작용까지 더해지면 탈수 증상이 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젊은 닷쿠 일행에게는 별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텅 빈 별장 1층에 싱글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기묘한 상황에 대해 저마다 추리를 꺼내 놓기까지 합니다.

같은 작가의 단편 "맥주집의 문제"도 비슷합니다. 닷쿠 일행이 빈집에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마시며 그 이유를 추리하는 이야기거든요. 만화 단행본 표지에서도 닷쿠 일행은 맥주를 들고 있는데, 이쯤 되면 참 맥주를 좋아하는 일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작품 속 닷쿠 일행이 마신 것은 냉장고 속 캔맥주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캔맥주보다 병맥주 쪽이 조금 더 시원한 인상을 줍니다. 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 병뚜껑이 열릴 때 나는 소리, 잔에 따를 때 올라오는 거품이 캔맥주보다 조금 더 선명한 장면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즐겼던 맥주도 Remmers 병맥주였습니다. "독사"에서 그 상표명이 직접 언급되지요.

병맥주 하면 역시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병을 꺼내, “퐁” 소리와 함께 뚜껑을 열고, 살짝 얼음이 낀 잔에 거품이 올라오도록 따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데 아마노 세츠코의 "얼음꽃"에는 바로 이 습관을 이용한 살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세노 쿄코는 냉장고 속 맥주를 냉동실에 얼려 둔 잔에 따라 마시는 남편의 습관을 이용해 남편을 원격으로 독살하고, 자살로 위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리 잔에 청산가리를 발라 두었던 겁니다.

다만 이 방법은 보기에는 시원해 보여도, 과학적으로는 맥주의 맛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맥주에는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적정 온도가 있는데, 얼린 잔은 그 온도를 지나치게 낮춰 버리는 탓입니다. 또 잔 표면에 맺히는 물방울 때문에 맥주를 따를 때 거품이 제대로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요. 가장 시원해 보이는 방식이 반드시 가장 맛있는 방식은 아닌 셈입니다.

그렇다고 더위 속에서 마시는 차가운 맥주만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테미스의 검"에 등장하는 사코미즈처럼, 25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한 뒤 맥주를 마신다면 어떨까요. 그 맥주가 맛없을 리 없습니다. 그는 탄산이 주는 청량감을 두고 “마치 목에도 미각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 느끼며, 맥주를 “액체 모양을 띤 황금”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잘 와닿습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영화 "쇼생크 탈출"의 지붕 공사 장면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앤디는 간수의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동료들에게 맥주를 요구합니다. 그 덕분에 죄수들은 햇볕이 내리쬐는 지붕 위에 앉아, 차갑게 식힌 Stroh’s Bohemian 맥주를 한 병씩 나누어 마시지요. 특별히 고급 맥주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교도소 안에서 잠시 자유를 맛봅니다. 죄수가 아니라 하루 일을 마친 평범한 노동자처럼요.

물론 차갑지 않아도 특별한 분위기가 함께한다면 맥주는 충분히 맛있을 수 있습니다. M. C. 비턴의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에 등장하는 해미시 순경은 일부러 맥주를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마시곤 합니다. 미국 영화 속 탐정들이 책상 서랍에서 술병을 꺼내 드는 장면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맥주를 마시면 자신도 옛 하드보일드 탐정과 닮아진 듯한 짜릿함을 느낀다고 하지요. 이쯤 되면 맛보다 분위기가 더 중요한 셈입니다.

스티븐 킹의 "여름 천둥"은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모든 것이 오염과 후유증으로 죽어 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로빈슨은 버려진 개 간달프와 함께 살아가고, 근처 고급 주택가에 홀로 남은 팀린과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결국 방사능 후유증이 심해져 죽음을 앞두게 된 팀린은 자살할 준비를 마친 뒤 로빈슨을 부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미지근한 Budweiser를 나누어 마십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맥주의 제왕”이라면서요. 차갑지도 않고, 세상이 끝나 가는 자리에서 마시는 맥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 장면의 Budweiser는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맛보다는 마지막으로 나누는 시간, 그리고 맥주라는 너무나 평범한 물건이 만들어 내는 쓸쓸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만약 간달프가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의 파트너 조처럼 Budweiser를 좋아하는 개였다면, 그 자리가 더 빛났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사실 이 자리는 Budweiser보다 벨기에 맥주 Duvel이 더 어울렸을겁니다. 시원해야 제맛인 라거 계열의 Budweiser와 달리, 에일 계열 맥주는 어느 정도 온도가 올라왔을 때 본연의 맛이 살아나는데 그 중에서도 Duvel이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향과 맛을 즐기기 좋은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Budweiser도 겨우 구했던 로빈슨과 팀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지만요.

이처럼 맥주의 맛은 온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위, 갈증, 자유, 고독, 동경, 마지막 순간의 체념 같은 것들이 맥주의 맛을 바꾸어 놓습니다. 어떤 맥주는 차가워서 맛있고, 어떤 맥주는 오래 기다린 끝에 마셔서 맛있습니다. 또 어떤 맥주는 맛 자체보다 그 순간의 분위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시는 순간입니다. 뜨거운 날의 갈증이든, 하루 끝의 여유든, 이야기 속 인물이 느낀 자유든, 맥주는 그런 장면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맥주를 맛있게 따르는 방법인 ‘세 번 따르기’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네로 울프도 좋아하는 Remmers 병맥주를 전용 금도금 병따개로 딴 뒤, 정확하게 거품을 맞춰 따라 마시곤 했다고 하니, 미식가에게 검증된 방법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맥주에 잘 어울리는 잔까지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세 번 따르기

1.
맥주병을 높이 들고 처음에는 천천히, 이어서 조금 세게 따라 거품을 만든다.

2.
거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맥주와 거품의 비율이 1:1 정도가 되면, 병을 잔 가장자리로 가져가 천천히 따른다. 이때 거품이 잔보다 1cm 정도 높게 올라올 때까지 따른다.

3.
거품이 잔보다 1.5~2cm 정도 높아질 때까지 맥주를 조심스럽게 붓는다.

# 시리즈 전체 보기

2016/12/31

2016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2015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13차, 열 세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6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53 (53)권, 기타 장르문학 8 (10)권, 역사서 18 (12)권, 디자인 및 스터디 도서 4 (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9 (7)권, 기타 도서 15 (21)권으로 모두 107 (107)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작년과 거의 비슷하군요.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6년 베스트 추리소설 :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단평 : 세상은 넓고, 모르는 작가도 많고, 재미있는 작품도 아직 이렇게나 많다! 

올해 추리, 호러 장르물 중 별점 4점 이상 작품은 단 한편도 없습니다. 그런데 별점 3점짜리는 "별도 없는 한밤에", "천사들의 탐정", "미스테리아 8호", "사냥개 탐정", "검은 수도사", "가면 무도회 1,2",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엠브리오 기담"의 여덟 편이나 됩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한편을 꼽기 위해서 우선 잡지인 "미스테리아 8호"를 뺐습니다. 호러 성향이 강한 "별도 없는 한밤에", "엠브리오 기담"과 역사 모험물 성격이 강한 "검은 수도사"도 빼면 네 편이 남네요.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이 중 추리적으로도 괜찮고 재미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선사한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를 올해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2016년 워스트 추리소설 :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단평 :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2016년에는 별점 2점 이하의 작품이 무려 16편이라고 한탄했는데 올해는 26편입니다! 읽은 작품 중 반 가까이가 수준 이하였다는 이야기지요. 참으로 너무합니다. 최악인 별점 1.5점 이하도 무려 열 편이나 되고요.

하지만 최악 중의 최악인 별점 1점을 획득한 작품은 이 작품 뿐입니다. 최악인 이유는 책의 완성도를 떠나 '미스터리'가 아닌 탓이에요. 그냥 청춘 연애물일 뿐이거든요. 작품의 수준을 떠나 구태여 추리물이라고 소개하여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괘씸한 마케팅 때문에 올해의 워스트로 꼽습니다.

2016년 베스트 기타 장르문학 : 

"제라르 준장의 회상" 

단평 : 시대를 뛰어넘다. 

올해의 기타 장르문학에서는 별점 3.5점의 이 작품이 베스트입니다. 모두 10권도 읽지 않아 한권의 베스트를 꼽기는 좀 애매하지만요. 여튼 코난 도일 경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고전 명작 모험물입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양심의 문제" 

단평 : 바탕에 깔린 사상 문제. 

도서출판 불새의 용기있는 행보에는 항상 박수를 보내는 바이지만... 이 작품만큼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역겨운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은연 중에 포장하여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신들의 연기, 담배" 

단평 : 교양과 재미의 절묘한 결합. 

이 책은 올해의 유이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교양과 재미,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놀라운 결과물이죠. 제가 꼭 흡연자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2016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조선의 武와 전쟁" 

단평 :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역사 도서는 좀 가려읽는 편이라 워스트가 대체로 없는 편인데 올해는 이 책이 뽑혔습니다. 단평대로 기대한 내용에 전혀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었어요.

2016년 베스트 디자인 / 스터디 도서 : 

올해 이 분야는 달랑 4권만 읽었기에 별도로 평하지는 않겠습니다. 내년에는 이 쪽 분야도 좀 더 열심히 읽겠습니다.

2016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백미진수" 

단평 : 실력자가 애정을 담아 쓴 미식 에세이의 진수.

이 책은 올해 유이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읽는 내내 즐거우면서도 유용한 좋은 에세이였어요.

2016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단평 : 발췌에 이은 레시피 소개에 그친, 날로 먹은 책 

제목 그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한 음식, 요리를 발췌한 후 해당 레시피 소개가 전부인 책. 저자의 아이디어는 눈꼽만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서프라이즈 : 인물편" 

단평 : 이 책이 존재할 이유를 모르겠다. 

올해 기타 도서는 전부 고만고만해서 베스트를 꼽기는 쉽지 않네요. 별점 3점짜리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장서의 괴로움") 독보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거든요. 하지만 워스트는 확실합니다. 총 4편의 별점 1.5점짜리 망작들 중에서도 이 책이 선명하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왜 책이 나왔는지 이유 자체를 모를 무의미한 결과물입니다.

2016년 베스트 기타 Comic :

"피너츠 완전판" 

단평 : 발간만으로도 감사한 완전판! 

올해 별점 3점을 넘는 만화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점수가 좋은 작품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총 4권을 읽었고, 대체로 별점이 우수했던 "피너츠 완전판"을 올해의 작품으로 꼽아봅니다. 단평 그대로 발간된 것 만으로도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Comic : 

"역시 빵이 좋아!" 

단평 : 만화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했다. 

올해 별점 1점짜리 망작은 본 작 외에 "스파이 vs 스파이", "산적 다이어리 2"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은 최소한 '만화' 이기는 한데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만화가 아닙니다. 빵 소개서를 만화처럼 만든 것에 불과하니까요. 최소한의 이야기와 재미도 없기에 올해의 워스트로 꼽습니다.

그외 영화, 만화 등은 대체로 부분별로 5편 이상 감상한 것이 없기에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결산평 : 

총 독서 권수가 작년과 똑같다는게 놀라운데 여튼 올해도 100권을 넘겼습니다. 이 정도면 취미인으로 할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제가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출간작들의 수준이 갈 수록 떨어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평균 이하의 작품들 수가 급증했다는 겁니다. "장서의 괴로움"에 나온 유명한 장서가 다니자와의 명서 감정술처럼 - "명저라는 홍보에 넘어가 샀던 책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류 이하 책을 이것저것 찾아 읽지 않았다면 초일류를 초일류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일 수는 있겠지만, 몇몇 망작들은 그야말로 읽는 시간조차 아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뭐 좋게 생각하면 이런 작품들을 소개하는게 제 미미한 블로그의 존재 의미겠죠. 찾아주시는 분들의 시간이라도 아껴야 할 테니까요.

하여튼,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여러분들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성취하시는 한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14/12/03

오무라이스 잼잼 4 - 조경규 : 별점 3점

오무라이스 잼잼 4 - 6점
조경규 글.그림/씨네21북스

1, 2, 3권을 모두 구입하기는 했습니다만, 2, 3권은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할인 가격에 구입했었습니다. 그래서 4권도 중고 서점 입고를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도서정가제 이후에는 할인폭이 크지 않을테고 중고도 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새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이전 권 리뷰에서 '어차피 인터넷에서 모두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을 이 돈 주고 사기에는 아깝다'고 적었었는데, 생각이 바뀌기도 했고요. 공짜로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2,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450페이지가 넘는 풀컬러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는 괜찮으며, 인터넷과는 다른 아날로그적인 정겹고 따뜻한 맛은 단순 비교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내 요리만화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콘텐츠 자체의 가치가 무척 높다는 장점도 큽니다. 지금은 국내에도 요리 만화가 웹툰 중심으로 제법 많아졌지만, 단순히 요리가 등장하고 레시피가 나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유로운 연상과 전개를 통해 요리와 에피소드가 어우러지는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은 여전히 발군입니다. 이번 권 역시 그러합니다. 미국 거주 시절 "인큐버스"라는 밴드의 라이브를 보기 위해 톨리도라는 무척 한적한 도시를 찾아간 에피소드가 대게 이야기로 연결된다든가, 자기와 닮은 Sasa 씨 이야기에서 소보로빵, 멜론빵, 파인애플빵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과정이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요리에 대한 그림과 소개 모두 당장 먹고 싶게 만드는 요리 만화로서의 미덕도 충분하고요.
이러한 독특한 매력은 작가 조경규의 이색적인 이력 덕도 클 것입니다.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하고 중국에서도 수년간 거주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겸 디자이너인데, 이시카와 쥰이 "만화의 시간"에서도 이야기했듯, 조금이라도 특이한 인생을 산 사람이 만화가로 유리하다고 하지요. 그 말대로라면 조경규 작가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인생을 산 셈입니다.

또 다양한 음식 관련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부가적인 가치도 큽니다. 츄파춥스의 로고를 살바도르 달리가 디자인했다는 사실이나, 달리와 디즈니의 공동작업 애니메이션이 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네요. 외에도 닭갈비의 유래나 다양한 연근 요리 등 읽을거리가 가득합니다.

총 24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가장 구미가 당기던 음식은 "차계란"이었습니다. 계란 장조림을 무척 좋아하기도 하지만, 소개 자체가 워낙 매력적이라 꼭 한번 따라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단점은 이전 권들과 동일하게 명확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무료로 볼 수 있는 웹툰과 비교한 가치가 얼마나 크냐는 여전히 애매합니다. 이번 권은 책에서만 볼 수 있는 부록이 특히나 별로입니다. 본편에 소개된 내용의 보강이나 외전 형식의 이야기, 만화로 제작된 레시피 등이 훨씬 가치 있었을 텐데, 정작 수록된 것은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맛집 소개나 재미없는 가족 만화가 대부분이니까요.

또 작가의 가족, 특히 아이들 소재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몇 안 되는 부록 페이지까지 아이들 사진과 그림으로 채워진 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소재 면에서 보다 자유롭고 유연한 발상의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고, 책을 구입한 독자를 위한 서비스에도 더 신경 써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작화는 물론 내용과 재미, 소개되는 요리의 가치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국내 요리, 음식 만화의 대표작임은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여러 번 다시 읽었기에 돈이 아깝지도 않고요. 1, 2, 3권 모두 열 번 이상 읽었으니까요. 요리, 음식 만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물론 이만한 금액을 지불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본인의 선택입니다.

2025/06/14

일본 현지 간식 대백과 - 일본 추억의 대백과 시리즈 편집부 / 수키 : 별점 2.5점

일본 각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간식들을 소개한 책입니다. 관련된 시리즈 중 한 권이지요. 

책장을 넘기다 보면 '먹고 싶다', '한 번 맛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절로 생켜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줍니다. 그중에서도 꼭 먹어보고 싶은 것들과, 어딘가에서 본 듯해서 반갑거나 기억이 나는 간식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맛이 궁금하거나 꼭 먹어보고 싶은 과자들을 보자면, 우선은 나가사키의 럭키체리마메가 있습니다. 좋은 지하수를 사용해 바삭하게 튀긴 콩을 설탕과 생강, 물엿으로 만든 시럽에 조려낸 간식이라는데, 정성과 기술과 함께 맛이 느껴지는 조합이라 먹어보고 싶어집니다. 나가사키에 가면 카스테라 말고 이 과자도 꼭 사 봐야겠어요. 같은 지역의 아지카레도 흥미롭습니다. 전문가 단 한 사람만이 제조법을 안다는 소개에서 왠지 전설의 비밀 레시피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거든요. 향신료를 직접 제조한다는 점도 전문 카레점 느낌이라 인상 깊었고요.
오키나와에서는 두 가지 간식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는 단나화쿠루라는 이름의 과자인데, 류큐 왕조 시대 궁정에서 먹던 군펜의 대용품으로 흑당, 밀가루, 달걀 등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진으로 보니 검고 진한 계란 과자 느낌인데, 제가 계란 과자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꼭 한번 맛보고 싶어졌습니다. 과거 궁정에서 먹었다니 호기심도 자극하고요. 또 하나는 시콰사아메라는 캔디입니다. 시큼하고 상큼하면서도 약간 쓴맛이 느껴진다는게 딱 제 취향이었습니다.
홋카이도 기타미의 핫카아메는 박하를 원재료로 만든 사탕입니다.기타미가 한때 세계 최대 박하 생산지였다른건 처음 알았네요. 시원하고 쌉싸름한 맛은 어른에게 어울릴것 같아 선물로 제격이라 생각됩니다.
시즈오카에서는 말차를 넣은 양갱인 오차요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배스킨라빈스에서도 그린티만 찾는 터라 이건 무조건 제 취향일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단맛보다 은은한 차향이 감도는 과자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분명 좋아할 같습니다.

후쿠이현 가메야제과의 유키가와는 처음엔 약간 괴식처럼 느껴졌습니다. 구운 다시마에 설탕을 묻힌 과자라니, 조합만 보면 어색한데 실제로는 꽤 인기 있다고 하네요. ‘기왓장 위에 눈이 내린 모습’이라는 말 그대로의 형태도 흥미롭고요.
미에현의 나마 아라레는 굽기 전 상태로 판매되는 생과자로, 집에서 전자레인지나 토스터로 간단히 조리해 갓 구운 상태로 먹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신선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밀키트보다도 간편해 보있는데 우리 제과업체에서도 시도해보면 좋겠네요.
고치현의 다마아라레는 점주가 수작업으로 만드는 과자로 직접 고치에 가지 않으면 맛볼 수 없다는게 인상적입니다.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나서 반가웠던 과자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스즈키 제과의 믹스 젤리의 경우는, 옛날에 먹어본 적 있는 것 같은 식감과 모양이더군요. 젤리와 양갱 사이쯤 되는 촉촉한 식감, 그리고 스즈키가 발명했다는 젤리를 싸는 전분으로 만든 오블라투까지도 예전에 분명 먹어본 기억이 있어요. 왜 이런 젤리 캔디는 우리나라에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지 살짝 궁금해지네요.
난부센베이도 어디선가 본 적이 확실히 있습니다. 후쿠이현 에가와의 미즈요칸도요. 사타안다기 역시 이름은 물론, 만화 속 묘사로 익히 들어왔습니다. "아즈망가 대왕"에서 제 기억으로는 튀긴 어묵이라고 소개되었었는데, 사실은 밀가루, 설탕 등으로 튀겨낸 도넛의 일종이라서 조금 놀랐네요. 다카기 나오코의 먹부림 만화에서 봤던 돈돈야키, 젤리프라이, 라디오야키도 책 속에서 다시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에도 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에히메의 타르트 역시 만화나 방송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 전통 과자인데 롤케잌 형태라는 점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사쿠라 다이콘은 막과자 만화 "다카시카시"에 등장했었지요. 절임 막과자라는 정체는 만화 속에서 보고도 믿기 어려웠는데, 실제 사진으로 보니 더 놀라웠습니다. 무절임이 과자가 된다는 개념 자체가 워낙 생소해서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한입쯤 먹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단촛물에 절인 무라니, 치킨무와 비슷한 맛이겠지요?

이렇게 맛있어보이는 다양한 일본 지역별 현지 간식 소개에 이어 책의 말미에는 지역별 간식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표로 정리해두었는데, 이게 참 마음에 듭니다. 일본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이 페이지만 펼쳐두면 그대로 현지에서 먹어볼만한 간식 리스트가 될 정도로 실용적인 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이나 빵 같은 항목은 이전의 대백과 시리즈와 중복되는 내용이라서 불필요했다고 여겨집니다. 목차와 분류도 종류보다는 지역별로 묶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부분도 있었고요.
간식들의 포장지를 소개하는 부분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진과 함께 추억과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재미있는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4/12/24

오무라이스 잼잼 5 - 조경규 : 별점 2.5점

4권 리뷰를 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출간되어 구입한 따끈따끈한 신간! 4권 구입 당시에는 혹시나 가격 할인이 있을까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구입했는데, 5권은 도서정가제 덕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져 나오자마자 구입했습니다. 4권에서의 좋았던 기분이 계속 유지된 탓도 크고요.

음식과 요리만큼은 국내 최고가 아닐까 싶은 빼어난 작화와 더불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재미와 매력도 여전합니다. "등교길의 소시지빵"처럼 별다른 내용없이 처음부터 그냥 소시지빵 이야기만 나오는 단순 돌직구 이야기도 있지만, 제가 사랑하는 의식의 흐름이 톡톡튀는 매력적인 이야기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제비 4개요~"가 대표적입니다. 아이들과 디즈니 만화를 보다가 모든 캐릭터들의 손가락이 4개라는 것을 알게 되는게 시작입니다. 살펴보니, 다른 캐릭터들(톰과 제리, 둘리 등등등)도 손가락이 4개였고요. 이유는 손가락 하나라도 줄이면 돈을 아낄 수 있다는 금전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나도 음식 그림을 좀 쉽게 그리고 싶다로 이어지고,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는 대충 빚어 그리면 되는 수제비다! 라는 결말로 이어집니다. 심지어 이 에피소드는 뒤에 이어지는 서비스 페이지도 물수제비에 대해 다루는 식으로, 전체적으로 뜬금없음이 가득해서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동춘 서커스를 찾아가 저글링 박의 공연을 본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요리사나 식당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장 완성도가 높은 요리 중 하나라는 북경오리를 소개하며 전개하는 "저글링 박 vs 오리구이", 그리고 "맥스와 나 그리고 캔스파게티"도 기억에 남습니다. "매드맥스 2"는 저도 인상적으로 감상했던 작품인데, 작가가 이야기한 개사료 통조림 먹는 장면은 기억에 별로 남아있지 않네요. 하지만 중학생 때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 작중에서처럼 남자의 로망으로 생각해 왔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로망이라면 비밀기지로 통하는 책꽂이가 있는 서재입니다. 언젠가 이사할 때는 아쉬우나마 비밀기지가 아니라 비밀 공간(?)이라도 확보해 놓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식빵은 오토 프레데릭 로웨더 씨가 만들었다" 역시 걸작 에피소드입니다. E.T를 딸아이와 감상하다가 E.T의 생김새에 대해 논하면서 김창완의 노래로 이어지고, 노래에서 식빵으로, 그리고 식빵을 썰어서 포장해서 판매하는 기계를 만든 오토 프레데릭 로웨더의 일생 이야기로 넘어가다니, 뜬금없기 그지없지만 무척이나 자연스러울 뿐더러, 오토 씨의 이야기와 E.T를 보던 저자의 딸 은영이의 감상이 겹쳐지는 엔딩은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명장면이었어요.

그 외에도 다양한 패러디들도 역시나 반가웠습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안 요리사 셰프 보얄디가 미국에 이민 올 때의 컷은 대부 2에서의 한 장면이죠. (아래 이미지!)

커피 우유 이야기에서의 엄지와 오혜성 역시 아주 적절한 투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점도 여전합니다. 만원이 넘는 돈을 들여 구입했지만, 무료로 볼 수 있는 웹툰과 비교할 만한 가치는 여전히 부족하거든요. 물론 책으로 만들면서 편집이 조금 바뀐 부분, 책만의 서비스로 실린 만화와 기사들, 몇몇 레시피들은 꽤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뚜기 스프를 만드는 사람들과의 인터뷰인 업체 탐방 스프 연구원의 하루, 앞서 말씀드린 물수제비의 모든 것을 다룬 이야기 등은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요. 그리고 가족 만화가 조금이나마 재미있어졌다는 것, 아이들 사진이 조금 덜 실린 것도 이전 권에 비하면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맛집 소개나 저자의 가족 관련 만화가 대부분이기에, 이런 점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겠죠. 덧붙이자면 저는 초판 특전으로 디저트 달력을 받기는 했으나, 딱히 필요하거나 관심이 가는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책 값을 깎아주는 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아울러 단점은 아닌데, 인터넷에서 최근에 감상했던 작품이 다수 실려 있었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목차로 따지면 중간 정도에 위치한 "맥스와 나 그리고 캔스파게티"부터 뒤의 이야기는 모두 기억에 생생해서,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었어요. 찾아보니 거의 올해 1월부터의 연재분이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4권처럼 나오고 한참 있다가 구입할 걸...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화는 물론 내용과 재미, 소개되는 요리의 가치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국내 요리, 음식 만화의 대표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웹툰으로 언제든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구입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조금 애매합니다. 특히나 아직 기억이 휘발되지 않은 경우 더더욱 그러하지요. 저는 구입에 큰 후회가 없고, 이런 구루메 만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권해드고는 있습니다만 이만한 금액을 지불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본인의 선택일걸로 생각됩니다.

2022/01/07

샘 호손 박사의 두번째 불가능 사건집 - 에드워드 D. 호크 / 김예진 : 별점 2점

샘 호손 박사의 두 번째 불가능 사건집 - 4점
에드워드 D. 호크 지음, 김예진 옮김/GCBooks(GC북스)

안녕하세요. 2022년 첫 리뷰네요. 먼저 새해 인사 드립니다. 202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노스몬트에서 일하는 시골 의사 샘 호손이 명탐정으로 등장해서, 온갖 불가능 사건을 해결하는 고전 스타일의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 시리즈입니다. 1권에 이어 2권도 읽게 되었네요. 

수록작은 무려 열 다섯 편이며, 샘 호손이 범인으로 몰린다던가, 대도시 보스턴에서 사건을 해결한다던가, 렌즈 보안관이 혼자서 사건을 해결한다던가 하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져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하지만 전편보다는 별로입니다. 모두 일종의 밀실 상황에서 일어난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알고보니 밀실이 아닌 상황이 많은 탓입니다. 대략 네 작품은 명백하게 밀실이 아니었어요. 트릭도 무려 여섯 작품에서 변장이 사용되고 있고요. 그리고 절반이 넘는 무려 여덟 작품에서 불가능 범죄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버리는 억지를 보여주는데 굉장히 실망스럽습니다. 범행 동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설득력이 없어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몇몇 작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술한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트릭과 범인을 모두 알려주는,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입니다.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무려 열 다섯 편의 리뷰를 상세하게 올리니 시간이 엄청 걸리네요. 다음부터는 인상적이었던 단편들만 추려서 올리는걸 고려해야 겠습니다.

"치유하는 천막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어린 아들을 치료사로 내세워 시골 환자들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다니는 사기꾼 조지 예스터의 공연을 찾아갔다가 그와 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자기 환자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샘이 그에게 주먹을 날린 뒤 나가려고 잠깐 뒤를 돈 순간, 조지 예스터가 가슴을 칼로 깊게 찔려 살해당했다. 천막 안에는 예스터와 샘 호손밖에 없었고, 잠깐 사이에 샘 호손의 눈을 피해 현장에서 빠져나가는건 불가능했다...

짧은 순간에 범인이 사라져 버리는 인간 소실 트릭이 사용된 작품인데, 범인인 매지가 동상으로 변장하고 있었다는게 트릭이라서 굉장히 허무했습니다. 동상과 사람이 몸에 페인트 칠을 한 건 명백히 달랐을 텐데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물론 어느 정도는 정말 동상처럼 보이게끔 하는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동상이 그녀를 모델로 만든거라는 일종의 복선도 제공되기는 하고요. 때문에 짧은 시간, 제한된 조건에서라면 먹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지 혼자 거대한 동상을 천막 밖으로 잠깐 치워 놓았다가 다시 원래 위치로 가져다 놓는다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등신대 금속 조각상이라면 무게가 아무리 적어도 백 킬로그램은 되었을테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동상으로 변장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샘 호손(아니면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트릭을 사용했다? 말도 안됩니다. 샘 호손,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그날 조지밖에 없는 천막으로 찾아와 다툴 거라는걸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하는데, 이걸 예상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설령 다툼을 예상했더라도, 천막 안이 아니라 천막 밖에서 다퉜을 수도 있고요. 

즉, 살해하려면 그냥 천막에 숨어있다가 죽이는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이 동상의 존재를 은근슬쩍 묻고 지나가는 전개가 별로 공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자와의 두뇌 싸움을 펼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속여넘기려는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또 트릭을 떠올릴 수도 있는 대학 시절 사진을 훔쳐내기 위해 매클로플린 교수를 습격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예스터의 공연에 찾아가기로 한 건 매지가 샘 호손과 함께 있었을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사진을 회수했으면 됩니다. 추가적인 범행을 저지를 필요 없이요. 매지가 토비 예스터의 엄마였었다는 동기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샘 호손이 범인으로 몰린다는 상황 말고는 건질게 없었던 졸작이었습니다.

"속삭이는 집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유령사냥꾼 태디어스 슬론과 함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오는 비밀의 방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 브라이어 가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둘은 한 밤중에 당장 나가라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들은 뒤, 누군가 저택에 들어와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걸 목격했다. 그리고 30여 분이 지나도 남자가 나오지 않아서 둘은 비밀문을 열어보는데, 남자는 죽어 있었고 방 안에는 다른 사람, 다른 출구도 없었다. 샘 호손은 피해자가 최소 15시간 전에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챘는데, 수사를 이어가던 샘 호손의 차가 누군가가 설치한 조잡한 폭탄에 의해 불타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비밀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는건, 그 방에 다른 비밀 출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숨겨진 출구만 찾으면 될 일이라, 이걸 불가능 범죄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도 너무 뻔합니다. 상황을 아는건 초반에 샘의 치료를 받는 빌리밖에는 없으니까요. 빌리는 어린 시절 유령 집에서 자주 놀았으며 치료를 받을 때 샘과 슬론이 그 집으로 간다는 이야기까지 들었고, 시체가 들고 있던 총은 발사된 흔적이 있었는데 빌리가 샘 호손의 치료를 받은 이유는 쇠스랑에 발을 관통당했다는 것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이상한 불가능 상황으로 만드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 방이었다면, 그 안에 시체를 숨겨놓고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이잖아요? 구태여 샘과 슬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사건을 키울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사건을 기획한 빌리의 모친이 사후경직을 통한 사망시각 추정이 가능하다는걸 몰라서 벌인 것이었다는 설명이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좋은 점수를 줄 만한 작품은 아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나마 샘 호손의 애차 피어스 랜스 어바웃이 7년만에 불에 타 버리고, 새로운 차를 구입한다는 이야기만 기억에 남네요.

"보스턴 공원의 수수께끼" 

샘 호손이 의학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보스턴애 도착한 날, 보스턴 공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쿠라레 독화살이 흉기로 사용되었으며, 이전에도 3명이나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했었다. 하지만 공원은 숨어서 총을 쏘거나, 대롱을 부는게 불가능했다. 심지어 세 번째 사건 때부터는 공원에 형사가 가득했고, 네 번째 피해자는 죽을 때 까지 경찰이 예의 주시하며 미행행하기까지 했었다. 범인은 어떻게 독이 묻은 화살을 피해자들에게 쏠 수 있었을까?

"사건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에 의해 사건이 벌어진다는 일종의 '투명 인간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범인이 기차 차장이나 레스토랑 웨이터 등이었다는 류의 트릭으로 이 작품에서는 호텔 도어맨이 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호텔 도어맨이라 눈에 뜨이지 않았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건 마음에 듭니다. 핵심은 샘 호손이 쿠라레에 대해 조사하여 밝혀낸대로, 공원 안이 아니라 공원 입구, 즉 호텔 근처에서 화살에 맞았다는 겁니다. 쿠라레는 즉효성이지만 맞고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어서 피해자들은 공원 안에 들어가서 이동하다가 죽었던 거지요. 도어맨은 호루라기를 부는게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라서 호루라기를 부는 척 하고 불특정 다수인 공원 이용자에게 독화살을 쏘았고요. 

노스몬트가 이닌 대도시 보스턴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것도 처음에는 그냥 재미 요소라 생각했는데, 트릭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큰 공원, 그리고 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큰 호텔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시골 소도시 노스몬트보다는 큰, 보스턴같은 대도시를 무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범인의 동기가 애매했으며, 20세기 초 미국을 무대로 한 작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독화살이 흉기로 사용된 건 작위적이기는 했습니다. 샘 호손이 스스로 미끼기 되는 장면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작품으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잡화점의 수수께끼" 

노스몬트에 미모의 중년 여성 매기 머피가 이사와서 맥스 하크너 잡화점 옆에 부동산을 열었다. 그녀는 자주 잡화점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 열변을 토했기에 마을 남자들이 싫어했지만, 워낙 미인이라 내색은 크게 하지 않았다. 존 클레이 노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날, 맥스의 잡화점에서 일했던 프랭크가 샘 호손을 찾아와 자신이 맥스의 아내 어밀리아와 불륜 관계였다는걸 털어 놓았고, 그 직후 맥스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잡화점 안에는 시체와 함께 기절했다는 매기 머피밖에 없었는데, 잡화점 문과 창문은 안쪽에서 모두 잠겨 있었다...

밀실물처럼 소개되지만 환풍기 날개 사이로 총을 집어넣어 쏘았다는게 진상이라서, 이게 밀실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현장에서 발견된 맥스의 총은 더블 배럴이라 환풍기 날개 사이로 넣을 수 없었지만, 밖에 있었던 존 클레인 노인의 총은 싱글 배럴이라 날개 사이로 넣을 수 있었다는데 이건 트릭도 뭐도 아니고요. 부실한 현장 조사에 더해 흉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생겨난 실수일 뿐입니다.존 클레이 노인의 범행 동기도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고, 범인이 살인 때문에 놀라서 죽었다는 등 내용도 전반적으로 억지스럽습니다. 

복잡하고 억지스러운 장치 트릭보다야 현실적인 발상입니다만,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법원 가고일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조스트로 살인 사건의 배심원을 맡게 되었다. 피고 애런 플레이버는 조스트로의 고용인으로, 그는 실수로 총이 발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조스트로 부인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재판 도중, 베일리 판사가 마시던 물 잔 속 청산가리에 의해 독살당했다. 판사가 죽기 전 '가고일'이라는 말을 남겨서 범원 가고일 상을 조사해보니, 베일리 판사가 메이틀랜드 판사와 함께 밀주 밀매점에 투자했다는 문서가 들어있었다. 샘 호손은 이런 저런 단서들을 확인한 뒤, 사건 현장을 재현해서 추리쇼를 펼쳐보이는데...

애런 플레이버가 자살하려고 조스트로 부인에게서 건네받은 청산가리를 잔에 부어 놓았는데, 판사가 착각해서 먹고 죽은 거라는 진상부터가 말도 안됩니다.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직접 입에 털어 넣었어야죠. 

독약을 애런이 손에 넣은 방법에 대한 설명도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재판 중에 조스트로 부인이 껌을 계속 씹고 있었다는 증언을 통해, 그녀가 껌으로 독약병을 증인석에 붙여 놓았다고 추리하는건 일견 그럴싸했지만 이 역시 조금만 생각해보면 납득할 수 없는 추리에요. 아무리 20세기 초반이라고 해도, 재판을 받는 피고가 흉기를 손쉽게 손에 넣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했을리가 없잖아요. 가능했다해도 총이나 칼을 손에 넣는게 나았을거에요. 

억지스러운 설정, 부실한 설명으로 이루어진 최악의 졸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수록장 중 최악입니다.

"청교도 풍차의 수수께끼" 

'청교도 풍차'라 불리우는 네덜란드 풍차가 보존되어 있던 부지에 청교도 기념 병원이 신설되었다. 노스몬트 최초의 흑인 의사 링컨의 근무로 이런저런 구설수가 나오고 있었던 중, 부지를 병원에 기증했던 랜디 콜린스가 풍차에서 몸에 불이 붙어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사건 당시 "루시퍼"라는 말을 겨우 남겼었고, 의식을 회복하여 풍차 안에 악마의 불덩이가 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샘 호손은 주유소를 운영하는 아이작 밴 도런이 풍차 안으로 걸어 들어간 뒤, 풍차와 함께 불에 타 죽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링컨 존스는 검시 결과 밴 도런의 다리가 심하게 골절되어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첫 사건은 백인 우월주의자 랜디 콜린스가 풍선을 이용하여 풍차 날개 4개에 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실수로 풍선이 터져 화상을 입었던 것이었습니다. "루시퍼"는 성냥을 부르는 명칭으로, 나중에 의식을 회복하고 악마 어쩌구로 말을 바꾼거지요. 

두 번째 사건은 랜디에게 휘발유를 팔았던 주유소 주인 밴 도런이 진상을 눈치채고 협박해서, 랜디가 그에게 풍차 윗쪽에 보물을 숨겨두었다고 알려주었던 겁니다. 성냥이나 촛불로 확인해보라면서요. 그리고 이 말을 따른 밴 도런은 풍차 윗 쪽으로 날려보냈던 휘발유에 불이 붙어버린 탓에 처참하게 죽었고요. 다리는 위에서 떨어질 때 부러졌던 것이었지요. 

랜디의 동기는 인종차별을 하기 위했던 것으로, 인종차별이 뒤의 범죄들과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매끄럽습니다. 사회파 느낌도 살짝 나서 괜찮았고요. 첫 번째 사건은 일종의 실수라 특별할 건 없지만, 두 번째 사건에 사용된 일종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나름대로 설득력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소소한 부분들은 문제가 많아요. 제일 먼저, 풍차를 십자가 형태로 불태우기 위해 풍선을 이용하려 했다는 발상이 억지스러웠어요. 이게 사건의 핵심인 탓에 이야기 전개도 다소 헐거운 편입니다. 성냥이나 촛불로 풍차 윗쪽을 확인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죠. 손전등도 있는 시대인데다가, 이렇게 한다고 불이 그렇게 쉽게 붙었을지도 의문이며, 설령 불이 붙었다 해도 밴 도런이 죽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랜디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걸 보다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건 공정해 보이지 않았어요. 단서가 없지는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티가 물씬 나서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은 나쁘지 않았는데 관련된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낮아서 감점합니다. 체스터튼 소설같은 사건이라며 한껏 분위기를 띄우는데, 그 정도 수준의 작품은 절대로 아닙니다.

"생강빵 하우스보트의 수수께끼" 

노스몬트 근처 체스터 호수는 마을 주민들의 여름 휴양지였다. 샘 호손은 여름 휴가를 왔던 미란다 그레이와 사랑에 빠졌다. 미란다의 삼촌인 제이슨, 기티 그레이 부부와 그 이웃 별장의 레이, 그레텔 하우저 부부와도 친해졌는데 어느날, 샘과 미란다 눈 앞에서 하우저 부부의 화려한 하우스 보트를 타고 놀던 두 부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메리 셀레스트호 괴담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끌어 올리지만, 특별한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보트에는 레이 하우저와 키티 그레이만 타고 있었고, 그레텔 하우저와 제이슨 그레이는 이미 살해당해서 별장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겁니다. 레이와 키티는 보트를 출발시킨 후, 별장에서 안 보이는 쪽으로 헤엄쳐 나왔고, 보트는 폭파시키려고 다이너마이트를 셋팅했는데 그게 불발했던거지요. 보트를 조사해서 다이너마이트를 찾아내면, 배 주인인 레이 하우저가 범인이라는게 뻔하니 후더닛 물로 볼 수도 없고요. 

설령 레이 하우저의 계획대로 폭파되었더라도 문제에요. 그는 배가 폭파된 후 그레텔과 제이슨의 시체를 떠내려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들이 익사하지 않았다는건 부검으로 밝혀졌을테니까요. 함께 배를 타고 있던 네 명 중 두 명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익사가 아니라면, 다른 두 명이 범인이라는건 당연하잖아요? 

아울러 이렇게 무거운 강력 범죄 이야기로 끌고가지 않고, 두 부부가 장난으로 이 일을 벌였다는 일상계 물이었다 한 들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샘 호손과 미란다 눈에 보이지 않게 배 반대쪽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간게 전부인 탓입니다. 즉, 이건 애초부터 불가능 범죄가 아니었어요. 차라리 장난에 가깝죠.

부실 수사와 부실한 계획이 합쳐진 망작입니다. 샘 호손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는게 독특했을 뿐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분홍색 우체국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간호사 에이프릴과 노스몬트 우체국을 방문했다. 개장 첫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우체국장 베라는 우체국을 분홍색으로 칠해놓았다. 분홍색 페인트가 값이 쌌던 덕분으로, 한 쪽 벽에 마저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흄 백스터를 불렀다. 흄이 페인트를 칠하기 시작했을 때, 은행장 앤슨 워터스가 주식 대공황을 알리며 1만 달러어치 무기명 채권의 특별 배송을 부탁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 봉투가 사라지고 마는데....

샘 호손이 미란다와 파국을 맞지만, 렌즈 보안관이 베라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애정 전선이 크게 움직이는 에피소드.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어요. 샘 호손이 봉투 행방에 대해 우체국 현장에서 펼쳐보이는 여러가지 추리들도 그럴싸했지만,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흄 백스터가 주워서, 벽에 붙인채 페인트 칠을 해 버렸다는 진상도 합리적이었거든요. 페인트가 마르면 바로 들통날테니 그날 밤 봉투를 회수하러 올 것이라는 마무리 추리까지 깔끔했고요.

물론 당장 봉투를 찾지 못했더라도, 수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렌즈 보안관의 무능이 드러나기는 합니다. 제일 수상한건 흄 백스터인게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은 단편이었습니다. 다른 작품들 수준이 워낙에 별로라 이 정도면 충분히 선녀급이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팔각형 방의 수수께끼" 

렌즈 보안관은 베라와 에덴 하우스의 팔각형 방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팔각형 방은 거대한 서재로, 네 귀퉁이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거울이 달린 수납장을 설치하여 만든 곳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방문이 열리지 않아서 잠긴 문을 부수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눈에 뜨이는 건 문 손잡이에 묶여 있던 끈 한 줄이었다. 끈으로 빗장을 잠글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끈은 너무 짧았고, 방문은 끈 한 올 통과할 틈이 없었다.

문 손잡이에 끈이 묶여 있었으니 이를 밀실물로 보기는 애매합니다. 이 끈으로 밀실을 만든게 당연하니까요. 진상도 예상 그대로입니다. 범인은 문 바로 맞은편 창문 걸쇠에 끈을 묶고, 이걸 빗장에도 묶은 뒤 창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문을 부술 때 끈이 당겨져 창문 걸쇠가 잠긴 것이지요. 

이렇게해서 창문이 잘 잠겼을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끈 조각이 남은 탓에 딱히 대단한 트릭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제대로 잠긴걸 확인하지 않아서 밀실로 착각했을 뿐, 실제로는 밀실이 아니었다는 문제도 크고요. 범인이 밀실을 만든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어요. 이렇게 복잡한 장치를 만드느니, 문을 열어두고 한 패에게 살해당했다는 식으로 꾸미는게 상식적입니다.

물론 범인인 조시의 아내 엘렌이 창문을 부수는걸 반대했던 장면같은 복선이라던가, 언제나 이야기를 듣는 화자가 아니라 범인이었던 엘렌이 찾아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거라는 나름의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지만, 결국 그 때문에 모든걸 잃었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부실했고, 상황의 설득력이 낮아서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집시 야영지의 수수께끼" 

청교도 기념 병원을 찾은 샘 호손이 병원 경영의 전권을 맡은 에이블 프레이터 의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때, 집시 에도 몬타나가 들어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한 뒤 곧바로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집시들은 무리의 지도자 루돌프의 저주 탓이라 여겼지만, 부검 결과 몬타나는 심장에 총을 맞았다는게 밝혀졌다. 그러나 몬타나의 가슴과 등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렌즈 보안관은 저주의 원인이 된 몬타나의 부인 테레즈를 구금하려 했지만 집시 스티브의 공격으로 실패했고, 철저한 수사를 위해 집시 무리를 하룻밤 동안 감시했는데 집시들은 스무 대의 마차, 말과 함께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불가능 범죄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 범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슴과 등에 상처가 없었다면 누군가 가슴을 연 뒤 심장에 총을 쏜 것이고, 부검 자리에는 샘 호손과 에이블 프레이터밖에 없었으니 범인은 에이블인게 당연하지요. 집시들이 머물던 해스킨스 농장의 상속 문제라는 동기도 이야기에서 거의 곧바로 드러나고요. 애초에 왜 가슴을 열기 전에 총을 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구태여 기묘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집시들이 하룻밤 새 사라져버린 두 번째 트릭은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말과 마차모양 판지를 세워놓아 눈을 속인 뒤, 판지를 태우고 사람들만 몰래 빠져나갔다는건데, 보안관이 멀리서 감시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속아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저 판지들을 모조리 태울 수 있었을지 의문인 등 세세한 점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밀주업자 자동차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밀주업자 래리 스피어스의 동료들에게 납치되었다. 총에 맞았다는 래리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래리는 중상이 아니었다. 동료 중 배신자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며 아픈 척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래리는 토니 배럴과의 거래 완료 때까지는 샘 호손을 풀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거래가 끝났을 때, 실수로 총격전이 벌어졌고, 차에 탔던 토니 배럴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진상은 래리 스피어스가 다친 척 위장해서 토니 배럴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뒤 살해했던 겁니다. 집 밖으로 나가 차에 탔던 건 래리가 매수한 토니의 부하 스쿠프였고요. 스쿠프는 래리가 뚱보로 변장할 때 썼던 완충재를 몸에 두르고, 수염을 붙인 뒤 웅얼거리며 토니인 척 나가서 차에 탔습니다. 그리고 변장을 풀고 바로 운전석으로 넘어가 차를 몰고 떠나려고 했던 거지요. 잘 됐더라면 완전 범죄가 됐을텐데, 하필이면 총격전이 벌어진 탓에 스쿠프가 운전석에서 내리자 불가해한 실종 사건이 생겨났던 겁니다. 이렇게 불가능 범죄가 일어난 이유를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합리적으로 설명되는게 좋았습니다. 래리가 술통 값을 낼 수 없는데 술통이 필요했다는 동기도 설득력 있었고, 토니 배럴의 차가 밖에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던가 (방탄을 위해서), 스쿠프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등의 복선도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갱들과 목숨을 걸고 담판을 지으며 사건을 해결하는 샘 호손의 모습도 독특했고요.

이렇게 이야기 완성도만큼은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트릭의 설득력이지요. 과연 저 정도의 변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다 속아넘어갔을까?는 잘 설명되지 못하거든요. 이번 권은 변장을 전가의 보도로 쓰고 있는 트릭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깡통 거위의 수수께끼" 

잠겨져 있던 비행기 조종석에 있던 조종사가 칼에 찔려 살해된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핵심은 조종석 안에 범인이 숨어 있었다는 겁니다! 샘 호손의 눈을 피해 숨어있다가 몰래 문 밖으로 나갔던 거지요. 밀실이라고 볼 수는 없는 셈입니다. 왜 이런 기묘한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잘 설명되지 못하고요. 

그래도 범인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비행기 곡예단 동료를 자기처럼 변장시켜 공연을 했다는 트릭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평작 수준은 될 듯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꾼 오두막의 수수께끼" 

샘의 아버지 해리 호손이 아내와 함께 노스몬트에 방문했다. 그는 편지 왕래로 친해진 대지주 라이더 색스턴으로부터 사냥 초대를 받고, 샘도 함께 사냥에 참가하게 되었다. 다음날, 사슴 사냥을 하던 중 혼자 사냥꾼 오두막에 있었던 라이더 색스턴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오두막으로 들어온 발자욱은 색스턴 것 뿐이었고, 흉기는 저택 안의 무기 컬렉션에 있던 곤봉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건 오래된 깃털 뿐이었다. 범인은 어떻게 발자욱없이 곤봉을 가지고 들어와 색스턴을 죽였을까?

범인은 사냥꾼 오두막 물탱크에 물을 채우기 위한 호스 자국 위로 이동하여 발자욱을 남기지 않았던 겁니다. 호스의 폭은 3cm에 불과했지만, 이 위를 '자전거'로 지나갔던 거지요. 상황을 잘 이용한 괜찮은 트릭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색스턴이 오두막으로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호스를 연결했다가 떼는 장면이 상당히 오래 묘사되고 있어서, 작가가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잘 전해주고요. 자전거를 닭장 안에 두었었기 때문에 현장에 닭털을 흘렸고, 이 탓에 트릭이 들통나는 과정도 괜찮았어요.

왜 불가능 상황을 연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건 아쉽지만, 트릭만큼은 정말 괜찮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건초 더미 속 시체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수의사 밥 위더스가 농부 펠릭스 베넷의 아내 세라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한 후, 펠릭스의 권유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가석방 중 펠릭스의 신세를 지다가 사고를 쳐서 펠릭스가 다시 교도소로 돌려 보냈던 로슨이 만기 출소했다며 나타나 펠릭스를 협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곰 사냥을 위해 렌즈 보안관을 비롯한 여러 명이 농장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펠릭스가 샘 호손에게 전화 한 통화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중에 그는 방수포로 덮은 건초 더미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보안관은 펠릭스가 건초 더미를 쌓고 방수포를 치는걸 자기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면서, 방수포 안에 시체를 넣는건 불가능했다고 말하는데...

렌즈 보안관이 혼자서 해결했다는 사건. 범인은 펠릭스 농장의 소작농 핼 패리였습니다. 그는 펠릭스의 상징과도 같은 큰 밀짚모자를 쓰고 건초 더미 뒤에 있던 펠릭스를 죽인 뒤, 자기가 펠릭스인 척 시체를 건초 더미에 넣고 그 위에 방수포를 쳤던 겁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변장 트릭이 사용되어서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만 독립적으로 놓고 보면 괜찮은 본격 추리물인건 분명합니다. 일단 다른 작품들보다는 변장의 설득력이 높거든요. 밀짚 모자에 대해서, 그리고 펠릭스와 핼 패리의 키가 비슷했고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는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이지요. 유력한 용의자 로슨의 콧수염에 대한 언급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몰래 시체를 숲에다 가져다 버릴 생각이었는데, 곰이 나타나는 바람에 기묘한 불가능 범죄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도 합리적이었어요.

곰이 시체를 뒤지는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노스몬트라는 시골 마을이라는 무대 특성 상 그렇게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타의 등대 수수께끼" 

여행을 떠난 샘 호손은 '산타의 등대'를 우연히 방문하여 해리와 리사 남매와 친해졌다. 그러나 그날 밤 등대 꼭대기 전망대에 있던 해리가 칼에 찔려 떨어져 죽고 말았다. 마침 리사와 함께 있던 샘 호손 바로 앞에 시체가 떨어졌는데, 둘을 지나치지 않고 범인은 빠져나갈 수 없었다. 샘은 사건 해결을 위해 수감 중인 남매의 아버지 로널드를 찾아갔다. 로널드는 등대에서 밀주 밀수를 했으며, 해산물 레스토랑 주인인 폴 레인과 거래를 해 왔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샘 호손은 처음에는 산타의 등대를 관광차 방문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었다고 추리했습니다. 난쟁이 킬러가 아이로 변장했다면서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헛점이 많은 추리였어요. 가족 요금이 더 싼데 아이들만 등대에 들여보낸게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유부터가 근거로는 터무니없이 빈약했으니까요. 아이들끼리 친하고 잘 노는데다가, 아이들을 돌봐줄 해리와 리사가 있는데 부모가 뭐하러 함께 들어간단 말입니까? 게다가 아이들이 떨어질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시설인데 아이들이 몇 명 들어가서 몇 명 나왔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안되죠. 수십명도 아니고, 고작 4~5명을 확인하지 못했을리가 없잖아요. 이 정도면 아이들 이름까지 외울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 리사가 범인으로, 그녀는 오빠를 죽인 뒤 등대 전망대에 낚싯줄로 묶어 고정했던 거라는 진상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난쟁이 킬러보다야 나을 뿐, 말이 안되는건 마찬가지에요. 딱히 좋아보이는 트릭도 아닐 뿐더러, 샘 호손이 있을 때 시체를 떨어트린건 납득하기 어려웠거든요. 자기의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 들, 살인범이 등대로 들어갈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은 딱히 유리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오빠를 일어서 떨어트리고 사고로 위장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게 오빠라서 죽였다는 동기도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대미를 장식하기는 하지만,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수준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2023/05/07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9. 역립(逆立)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카라쿠리의 과거 등은 제대로 번역하기 힘드네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9. 역립(逆立) 인형
카오리가 아틀리에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캔버스, 이젤은 한쪽으로 치워졌고, 책상은 수사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밝지만 장식이 적은 방이라 그림과 화구가 없으면 수사관들이 어슬렁거려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총소리를 들었을 때 어디에 있었지?"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있는 경찰관이다. 현경본부 수사 제1과의 노련한 호시자와 형사였다. 마이코가 아직 쇼조와 결혼하지 않았을 때 같은 서에서 근무했고, 마이코의 술친구였다. 너무 마음이 잘 맞은 탓에, 두 사람 모두 결혼 대상으로 서로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호시자와는 나라키 경감보다 한 살 위었다. 나라키 때문에 호시자와가 연기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고 마이코는 토시오에게 말했다.
"호시자와 군이 현경에 배치된 것은 분명 나라공 때문일 거야."
마이코는 아무래도 나라키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라키의 얼굴도 보였다. 변함없이 눈썹 사이에 깊은 세로 주름을 짓고 있었다.
토모히로와 토우이치의 연이은 사고사. 거기에 더해 카오리의 기이한 죽음. 당연히 경찰은 흥분 상태였다. 소우지의 신고로 즉시 여러 대의 경찰차가 도착했다. 나사 저택에는 수많은 수사관들이 긴급 배치되었다.
"미로 속에 있었어요."
토시오는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정자에서 쓰러졌을 때, 넘어지면서 뭔가에 부딪힌게 아닐까 생각했다.
"총소리는 어느 방향에서 났지?"
"모르겠습니다. 미로 속을 빙빙 돌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위치는 기억나지 않나요?"
"알 것 같아요. 저는 백묵으로 길을 표시하면서 가고 있었으니까요."
"그 위치에 서면 총소리가 들린 방향을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실제로 미로 안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미로를 빠져나온 후에는?"
호시자와가 질문을 이어갔다.
"연못 주변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니 화단으로 나왔습니다. 저택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무슨 일인지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연못 주변 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게 있다면 말해 주세요."
"아무것도요.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후로?"
"우다이 씨를 만났습니다."
호시자와는 마와리 저택의 약도를 보여주었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만났던 곳과 소우지가 서 있던 곳, 세 사람이 정자까지 달려온 경로를 표시했다. 그리고 카오리가 쓰러진 상태, 마사오가 서 있던 위치 등을 설명했다.
"당신은 카오리 씨가 쓰러진 정자에서 뭐든 떨어뜨린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 떨어뜨린 물건? 글쎄요........"
"시체를 본 게 처음인가요?"
호시자와의 말에는 가벼운 경멸이 섞여 있었다.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끔찍했다"고 말하려는 순간, 토시오는 말을 멈췄다. 여성인 마이코도 마사오도 기절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미로에서 나와서 ...... 의식을 잃을 때까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나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 그림자라든가, 풀의 움직임이라든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라도 괜찮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나중에 미로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소우지의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소우지의 방을 두드리자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우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유리 선반이 여러 개 눈에 들어왔다. 선반은 수많은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평범한 장난감이 아닌 것 같았다.
수많은 인형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상자 위에 앉아서 기타를 들고 있는 검은색 낡은 인형. 상자 아래에 나사가 보여서 전원을 켜면 바로 기타를 울릴 것 같았다. 아름답게 채색된 상자는 깜짝 상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다. 그 옆의 상자는 옛날 하코네 세공품일까? 회전목마에는 분명 오르골이 달려 있을 것이다. 시계를 내려놓은 인형이 그냥 그 자세를 계속하고 있을 리가 없다. 소우지의 손에 들어온 인형은 모두 생명을 얻어 보는 사람을 이차원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그 외 분라쿠(文楽)의 목, 동물, 자동차, 배, 서로 결합되어 있는 알 수 없는 톱니바퀴. 언젠가 마사오가 이야기했던 단쥬로의 숨은 병풍 ....... 새로운 것으로는 팬텀 램프, 밸런스 토이, 파이버 옵틱스 ....... 선반에서 넘쳐나는 장난감은 바닥과 책상 뿐 아니라 손 닿는 곳마다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장난감 상자를 뒤집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벽에도 여러가지 시계가 걸려 있는데, 모두 인형이나 오르골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 중 몇 개는 확실히 동작하는 물건이었다.
그 한가운데 소우지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역시 여동생의 죽음때문인지 평소의 가벼운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이코는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이코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에 토시오는 살짝 놀랐다.
토시오의 뒤를 이어 수사관이 찾아와 소우지를 데리고 갔다.
"총에 대해 물어봤지?"
둘만 남았을 때 마이코가 물었다.
"총? 네, 정자에 뭐든 떨어뜨린 물건이 없었는지 물어보더군요."
"흉기를 찾지 못했어."
"흉기?"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이 방도 구석구석 다 뒤졌지. 그리고 소우지가 가지고 있던 사냥총이 압수당했어."
"소우지가, 설마?"
"수사관이 총구 냄새를 맡았지만 최근에 사용한 흔적은 없는 것 같았어. 22구경 볼트액션으로 구 제국 육군이 사용하던 38식 보병총과 같은 형태야. 이 총은 원래부터 저택에 있었다고 하더군. 소우지가 손질해서 사용한 적은 있지만, 최근에는 총으로 사냥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사용한 적이 없었다고 해.”
"그렇다면 문제가 없겠네요."
"하지만 총을 손에 발견했을 때 수사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어. 그리고 카오리의 방도 '당연히' 수색을 당했어."
"카오리 씨는 피해자잖아요"
"자살 가능성도 고려한 모양이야. 하지만 자신의 눈을 쏘는 자살자는 드물고, 현장에는 총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살인이지. 카오리 씨의 뇌에서 총알이 검출됐어."
"총알이요…."
"그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은 것 같아."
"우다이 씨도 총을 보지 못했습니까?"
"보지 못했어. 좀 더 빨리 저택에서 나왔더라면 범인을 보았을지도 몰랐는데."
"마사오 씨가 가장 빨리 현장에 도착한 것 같네요."
"그래. 하지만 마사오 역시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어."
"그녀는 어디 있었는데요?"
토시오는 카오리의 방 창문을 통해 미로 근처에 있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사오는 연못 근처를 걷고 있었다고 하더군."
창밖으로 연못이 보인다. 연못 주변에는 여러 명의 경찰관들이 보였다.
"연못 속을 수색하는 걸테지."
"총을?"
"맞아. 경찰은 마와리 저택 안에 있는 사람의 범행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듯 해."
".....설마......."
"이러면 토모히로와 토우이치의 죽음도 다시 한번 문제 삼을 것 같군"
"마와리 저택 안 사람이라고 해도 마사오 씨, 소우지와 테츠바. 그리고 가정부밖에 없잖아요?"
"우리도 포함이지. 물론 이 저택은 담이 무너진 곳도 있고, 정원 안쪽은 그대로 숲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범인이 외부에서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정자 주변에는 마사오와 소우지, 나와 너, 그리고 카오리, 이 다섯 명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어."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요......."
"그래. 정자 부근의 길이 부드러워졌지? 범인이 카오리에게 접근하면 당연히 발자국이 남았을 거야."
"데츠바는 우다이 씨와 함께 있었죠?"
"그랬지. 만약 카오리가 권총으로 살해당한게 맞다면, 테츠바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될거야."
"데츠바와의 대화는 잘 됐습니까?"
마이코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데츠바는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어. 그리고 토모히로가 나에게 돈을 주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증언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 이런 상태니 나를 위한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증언해 주는 것이 좋지만, 어쩔 수 없지."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토시오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카오리는 이기적이지만 장난꾸러기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얼굴에 범인은 무자비하게 총알을 쏜 것이다. 그것은 악마의 소행과 다름없었다.
"마와리 가문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것같군."
마이코는 천천히 방 안의 장난감들을 둘러보았다.
소우지가 방으로 돌아와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스케치북 사이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뭐야, 그게 뭐야?"
마이코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미로의 설계도입니다. 예전에 그렸던 게 생각나서요. 경찰이 이걸 원하더라고요."
누렇게 변색된 켄트지 위에 오각형 무늬가 보였다. 마이코는 눈을 반짝였다.
"소우지 씨, 저거 베껴도 될까요?"
"좋아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한 적 없으니까."
마이코는 종이를 받아 재빨리 미로 그림을 베꼈다.
"한번 해볼래?"
소우지가 나간 후 마이코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토시오는 그림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너 군데, 손가락 끝이 막다른 골목에 빠졌지만, 그래도 중앙을 찾아갈 수 있었다.
".......52초"
마이코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손가락 끝이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실제로 안에 들어가서 본 느낌은 어땠어?"
"이 방법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골인 지점까지 도착하지 못했어요."
"그렇겠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이코는 서둘러 그림을 접었다.
경찰관이 얼굴을 내밀고 토시오를 향해 미로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이코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사하러 온 사람은 호시자와 형사와 젊은 수사관이었다.
토시오가 먼저 서고, 소우지, 두 명의 수사관, 마지막으로 마이코가 억지로 따라 왔다.
길에 새겨진 백묵의 흔적은 토시오가 직접 밟아서 사라질 뻔한 곳도 있었다. 그래도 표시를 따라가다 보니 토시오가 총소리를 들었던 곳에 도착했다. 선은 그 지점에서 끊어졌고, 떨어져 있던 백묵이 밟혀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이 밟은 것일까.
토시오는 일어서서 기억을 떠올렸다. 토시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호시자와는 그림과 나침반을 비교했다.
"틀림없는 것 같군. 정자의 방향과 일치한다."
그리고 소우지를 향해 말했다,
"미로의 중심부로 가고 싶은데, 안내해 주세요. 지도를 볼까요?"
소우지는 지도가 없어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소우지는 토시오를 대신해 소우지가 먼저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미로는 여전히 깊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 마지막 굽이굽이에서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보였을 때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대단한 미로네요."
호시자와는 돌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소우지를 바라보았다.
"이 미로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입니까?"
"이 저택이 지어질 때 동시에 만들어졌어요. 다이쇼 초기에 호도라는 분이 설계했어요. 제 증조부이십니다."
"무엇을 위해 정원에 미로를 만들었을까요?"
"무엇을 위해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곤란하죠."
같은 질문은 많은 카라쿠리 제작자들도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인형을 움직이는 것에 몰두하느냐고 묻는다면 말이다.
토시오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을 앞에 두고 주변 울타리를 둘러보았다. 그래, 혼자 있고 싶을 때 이곳이 가장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 일곱 겹 여덟 겹의 울타리 방벽은 한 겹의 철문보다 더 견고했을 것이다. 기행가 호도는 이 미로 속에서 무엇을 사색하고 있었을까?
호시자와는 불이 꺼진 성냥개비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 저택 안에 우물은 없나요?"
호시자와는 소우지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우물? ...... 조리실에 한 개가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우물은 말랐나요?"
"글쎄요. 우물이 왜요?"
"사실 총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정자로 달려간 사람은 마사오 씨인데, 그때 카오리 씨는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죽지 않았다고?"
소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카오리의 최후를 떠올린 것일까.
"카오리 씨는 자꾸만 입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중 한 마디만 귀에 쏙 들어왔다고 합니다. '마른 우물'이라는 말이었다고 하더군요."

미로를 빠져나오자 수사관 일행을 만났다.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마사오의 가냘픈 어깨가 보였다.
마사오는 짙은 감청색 정장을 입고 흰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검은색은 입지 않았지만 인상은 거의 상복에 가까웠다. 마사오는 토시오 일행을 발견하고는 바람에 날리듯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하네요."
도움을 청하듯 말했다.
"내 방으로 오세요. 우다이 씨도 함께 있어요."
소우지가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봐요, 이렇게 차가워졌어요."
"하지만 카오리 씨의 방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건 무신경하네. 그렇지 않습니까, 우다이 씨."
마이코는 나라키 경감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경감님, 마사오 씨가 소우지 씨 방에서 쉬어도 되겠지요?"
나라키의 눈썹 사이 세로 주름이 깊어졌다.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다만 소우지 씨는 남아서 우물 안내를 부탁합니다."
소우지는 작은 혀를 내밀며 껌을 입에 집어넣었다.
소우지의 방에 들어가자 마사오는 잠시 안도감을 느끼는 듯 했다.
"밝고, 영리한 사람이었어요."
마사오는 카오리를 회상했다.
"토모히로와 함께 신혼여행을 갔을 때가 기억나요. 숙소에 도착하니 방에 큰 꽃다발이 놓여 있었어요. 꽃다발 사이사이에 메시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카오리 씨로부터 온 것이었어요.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요.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창문을 크게 열어놓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어요. ......"
정말 카오리답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마이코는 가만히 마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오리 씨가 당신에게 이 저택에 살 것을 권유했다고 들었어요."
마사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곧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카오리 씨의 배려에 감사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카오리 씨는 저와 소우지와의 사이를 모르시거든요. 만약 이 저택에서 소우지와 함께 살게 된다면 그는 또다시 나를 농락할 거예요."
마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데츠바 씨는 어떻게 지내세요? 아까 만났을 때는 안색이 좋지 않으시던데요?"
"혈압이 조금 높은 것 같아요."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게 권유했어요. 하지만 진정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여전히 약을 복용하고 계십니까?"
"그것만은 제대로 복용하고 있어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서 소우지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이런, 저들은 이 집을 유령의 집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마른 우물 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정자까지 이어져 있는것 같다고 하면서, 방금 젊은 녀석 한 명이 뛰어들었어요."
"그래서, 구멍은 찾았나요?"
"아니요, 바닥에는 물이 있고, 옆에 구멍은 없는 것 같았어요. 덕분에 한 명의 진흙 인형이 만들어졌지요."
마사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소우지는 눈치를 보며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진흙 인형, 그것도 정교하게 움직이는 인형이지요."
마사오는 소우지의 과장된 말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나, 웃고 있었어."
"아니, 당신이 슬픈 표정을 짓게 해서는 안 돼죠. 카오리는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오늘 계획을 세웠으니까요. 마침 우다이 씨도 왔으니, 비스크 인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우지는 일어섰다. 발판에 올라가 유리 선반 안쪽에서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화려한 패션 인형이었다. 루이 왕조풍의 의상은 다소 색이 바랬지만, 손이 가득 찬 꽃 자수에서 당시의 사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인형의 특징은 도자기로 만든 머리였다. 피부는 지금 막 가마에서 꺼낸 것 같은 선명한 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원형의 굵은 눈썹 아래에는 커다란 눈이 있었다. 푸른 홍채가 방사형으로 빛나서 쳐다보고 있노라면 섬뜩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풍만한 뺨과 작은 입매. 전체적인 얼굴형은 확실히 마이코를 닮은 것 같았다.
"에밀 주모우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요. 게다가 이 인형은 자동 인형 - '오토마티즈크' - 입니다."
인형은 왼손에 접시를 들고 오른손에는 작은 나팔 모양의 관을 들고 있었다. 소우지는 서랍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안에 있는 액체를 접시에 부었다.
소우지는 병을 치우고 인형의 등 뒤로 손을 뻗어 태엽을 감았다. '딱딱',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잘 보세요."
소우지는 인형에서 손을 뗐다.
작은 톱니바퀴 소리와 함께 인형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 왼손으로 들고 있는 접시 안에 관 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에 옮기더니 손아래에 있는 튜브를 입에 넣었다.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인형의 가슴이 크게 숨을 쉬자 튜브 끝에서 비눗방울이 튀어나온 것이다.
비눗방울은 관을 벗어나 일곱 빛깔로 빛나며 공중에 떠올랐다.
"가슴의 움직임을 보세요. 솜씨가 아주 섬세하죠?"
인형은 여러 개의 비눗방울을 뿜어냈다. 귀여운 어설픔에 약간의 섬뜩함까지 더해진 인형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소우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기계를 멈춰 세웠다.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겠죠?"
마이코는 인형이 움직이지 않자 소우지에게 물었다.
"기원전 2천 년 전의 인형이 이집트에서 출토된 적이 있어요."
"기원전 2천 년 전이라니......."
"인간은 도구를 만들면서 동시에 인형도 만들기 시작했나 봐요. 게다가 자동 인형도요. 이집트 인형은 몸통과 팔다리를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한 것으로, 허리에 있는 끈을 당기면 손이 위아래로 움직여 빵을 반죽하는 동작을 하지요. 일본의 고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형이 출토되었어요."
"인간이 장난감에 쏟아 부은 에너지는 엄청났군요."
"쇼소인에 남아 있는 물건들도 투호, 탄환궁, 바둑, 스고쿠 등 사치와 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놀이기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요. 그 중의 하나가 카라쿠리 바둑판입니다. 양쪽에 바둑돌을 넣는 서랍이 만들어져 있는데, 한쪽을 당기면 다른 쪽도 나오도록 되어 있지요. 엑스레이를 통해 내부의 장치가 알려졌는데, 매우 정교한 장치가 돋보입니다. 문헌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건 고사기 속 기록입니다. 고야쿠 친왕이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요."
언젠가부터 소우지의 표정에서 어둠이 사라졌다. 좋아하는 카라쿠리의 세계에 빠져든 것 같았다.
"......카라쿠리가 성행한 것은 에도 시대였을 거에요. 그 당시에는 시계도 카라쿠리 중 하나였는데, 간분(寛文) 4년에 시조가와라(四条河原)에서 시계 놀이가 유행해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고 해요. 원래 시계와 카라쿠리의 관계는 깊습니다. 간분 2년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카라쿠리 연극의 기치를 올린 다케다 오오미는 원래 시계 장인이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에이세이 시계라는 백과사전만한 대형 시계를 나무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가에이(嘉永) 연간에 다나카 히사시게가 만년시계를 만들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건 알고 계신가요?"
"언젠가 국립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카라쿠리 하면 히다다카야마(飛騨高山)의 카라쿠리 수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답니다."
"그렇네요. 아이치, 기후의 축제를 위해서 정교한 카라쿠리가 만들어졌죠. 바닷가에서는 가메자키의 조수제, 산에서는 다카야마의 산왕제.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다카야마의 호테이다이(布袋台)일 것입니다. 우다이 씨, 알고 계시나요?"
마이코도 소우지의 말에 이끌려 장난감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 생각나요. 본 기억이 있어요. 무대에 내밀어진 팔 위에서 천으로 된 칠복신이 춤을 추고 있었어요. 그리고 두 명의 가라코 (唐子 *중국풍의 옷을 입은 아이)가 여러 개의 가라코를 넘나들며 곡예를 했어요. 마지막에는 두 사람 모두 칠복신의 어깨와 팔에 올라타게 되고요. 칠복신이 손을 흔들면 긴 깃발이 흘러나왔습니다. …….인형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동작들이었어요."
"가라코 인형은 그네를 타고 날아갈 수 있거든요. 이른바 자유분방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분세이 5년에 우에노산 아래, 화재 대피용 공터에서 행해진 축포세공 웃음 주머니는 더 대단합니다."
"웃음 주머니?"
"원래 제목은 '나니와가타하나노 스가타미(なにわがたはなのすがたみ)'. 오사카의 오오에 우베에(大江宇兵衛)라는 사람의 작품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카라쿠리는 눈알을 움직이면서 여유롭게 화살촉을 닦는 화살촉의 고로(矢の根の五郎), 옷깃에 꽂힌 바람개비에 손을 들며 기뻐하는 아이. 흙다리를 건너는 미인 등 십여 종이었습니다. 춤추는 모습과 말투, 문지기까지 모두 카라쿠리 인형이며, 마지막에 웃음 주머니를 팔았습니다. 칠복신과 가라코들의 놀이에서는 다카야마의 호테이다이와의 연관성도 느낄 수 있지요. 마지막에 이 축포세공 칠복신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크게 웃을 때는 얼굴 표정이나 몸놀림은 말할 것도 없고 배꼽까지 흔들렸다고 하니, 에도 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앞 다투어 산 아래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나라도 그렇겠네요."
마이코가 말했다. 마사오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소우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소우지는 그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덴포 4년, 에도 후카가와 하치만(深川八幡)에서 수호전이 상연되었습니다. 이는 하세가와 칸베에(長谷川勘兵衛)의 작품이며, 수호전의 호걸들이 대거 등장해서 활약하죠. 무대도 간도라케, 세리아케, 텐지라케 등이 많이 사용되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그 외에도 오오후네 사계절의 순풍, 요코덴, 기야만선의 카라쿠리 등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케일이 컸던 것은 아사히나(朝日奈)의 대작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금화로도 남아있는데, 머리의 크기가 한 뼘이 넘고, 담뱃갑이 두 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인형도 움직였나요?"
마이코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설마,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아사히나가 들고 있는 연통 위에 인형의 다이묘 행렬이 지나가고, 케누키 위에서 처녀가 춤을 추고, 연통에 달린 네츠케에서 입이 나오는 등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개막 직전에 이 인형은 사사(寺社)봉행관으로부터 흥행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너무 커서?"
"그래요. 당시에는 대형 인형극 금지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걸렸다고 하네요. 그런데 금지령이 내려진 분세이, 덴포 시대에는 큰 구경거리가 즐비했다고 하네요."
"그런 장난의 유행은 계속 이어져 왔던 건가요?"
마이코가 물었다.
"아니, 카라쿠리라는 것은 공예의 천재가 나타나면 번성하다가, 그 천재가 없어지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아요. 독창적인 천재성과 정교한 기술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거죠. 따라서 평범한 인형사는 인형을 어떻게 움직이느냐보다 어떻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느냐에 제작의 노력을 쏟게됩니다. 그들은 인형의 표정에 움직임을 더하고, 자세에 쓸데없는 고심을 거듭하지만, 정작 인형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죠."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인형에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예술 아닐까요? 소우지 씨의 말을 들어보면 예술적 표현보다 기발한 장치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사람에게는 다양한 입장이 있어요."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웃었다.
"예술가들이 보기에 카라쿠리 인형사들은 얼마나 엉성해 보일까요. 아무리 훌륭한 인형극이라도 그들은 절대 예술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반대로 과학자들이 보기에 카라쿠리 인형사는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 에디슨은 보캔슨에게 "어린아이 속임수 기계”라고 말했죠."
"카라쿠리 인형은 두 세계 모두에서 어린아이 장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거군요"
"하지만 사기꾼의 눈에는 예술도 과학도 모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미, 아시겠나요?"
"주모우의 인형을 보니까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 하여튼, 이런 카라쿠리 인기도 초대가 죽은 후 기껏해야 3대 정도까지만 이어질 뿐이었지만, 후대의 연극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분라쿠의 '카시라(かしら)'가 그렇죠."
소우지는 일어서서 다른 선반에서 한 개의 인형 목을 꺼냈다.
인형은 둥근 상투머리로 묶여 있다. 부분적으로 칠이 벗겨졌지만, 고운 눈썹과 통통한 뺨에서 기품 있는 유부녀의 색기가 느껴졌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목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속임수가 숨겨져 있어요."
소우지는 목 아래쪽에서 튀어나온 나무 돌기를 눌렀다. '쿵'하고 많은 단단한 나무가 한꺼번에 결합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인형의 이마에서 커다란 뿔이 두 개가 튀어나왔다. 눈이 위로 치솟고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평온한 유부녀가 순식간에 귀녀로 변해버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귀신의 인상이 마사오의 가방 속에 있던 ‘마도죠’의 얼굴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마이코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울한 표정으로 귀신을 보면서,
"소우지 씨, 나에게 토모히로 씨가 마도죠라는 인형을 보여 준 적이 있어요. 그 인형은 이 목에서 힌트를 얻은 거였나요?"
"토모 씨가 마도죠를?"
소우지는 목을 다시 돌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네. 그 인형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 뭐, 이 목이 힌트가 되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 목은 인형의 한 표정이 그대로 바뀌는데, 마도죠는 한 목에 두 개의 얼굴이 있어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취향은 아니라서 나는 제작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뭐, 바보짓이였죠. 토모 씨도 시제품을 한두개 만들다가 결국 내 의견에 동의한 것 같습니다. 판매할 생각도 없던 것 같고요."
소우지의 말 속에는 토모히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느껴졌다. 마이코는 마사오의 얼굴을 옆에서 바라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 분라쿠의 목도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장난이잖아요?"
"이런, 날카로운 질문이군요."
소우지는 다시 한 번 풍자극 세계의 얼굴이 되었다.
"이집트의 빵 반죽 인형은 당연히 손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이에요. 우다이 씨가 본 다카야마의 호테이타이에서 무대에 튀어나온 팔은 '카라쿠리도이(からくりどい)'라고 합니다. 인형을 조종하는 줄은 여러 개의 기관통을 통해 줄잡이의 손에 전달되는데, 복잡한 줄타기를 하려면 40조에 가까운 줄을 8명의 줄꾼이 협력하여 조종해야 합니다. 당연히 줄을 다루는 장인의 명인에 가까운 기술이 필요한거라 완벽한 카라쿠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웃음 주머니도 마찬가지에요. 천가방 옆에 희미하게 어두워진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에는 촛불이 놓여져 있어 살짝 비춰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거기에 장치가 있을 거라고 간파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블랙매직과 같은 원리죠. 당시의 속임수는 모두 똑같았어요.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인형을 조종했던 거죠. 즉, 멜첼의 자동 체스 기사와 같은 발상이었어요."
"즉, 속임수라고요?"
"네, 트릭입니다. 사람이 인형을 움직이는 거죠.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실을 사용하는 방법. 천으로 된 자루대를 사용하는 방법. 멜첼의 자동 체스기사와 같이 사람이 인형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 웃음보처럼 교묘하게 조명의 공조로 인형을 움직이는 인간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법 ......"
"정말 많네요."
"이런 트릭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책이 쿄오호오(享保)년도에 출간되었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죠? '기공훈몽감초(機工訓蒙鑑草)'라는 책인데, 방금 이야기한 트릭이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동 체스 기사의 트릭의 원리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케다의 속임수인데, 인형극에서 배우까지도 5촌 상자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죠. 사람이 5촌짜리 상자에 들어갈 수 있을리가 없으니 당연히 속임수고요. 의상만 남기고 배우는 무대 위 구멍을 통해 바닥으로 도망쳐 버리는 거였죠."
"그럼 주모우처럼 완벽한 카라쿠리는 없었나요?"
"그게 바로 ......."
소우지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있어요. 많이 있어요. ‘기공훈몽감초’가 출간된 지 66년 후에 출간된 ‘기공도휘《카라쿠리즈이》’는 완전한 카라쿠리만을 모아놓은 해설서입니다. 실이나 현기증을 유발하는 트릭은 일절 없어요. 기본은 태엽 장치이기 때문에, 첫머리에 시계의 도해가 제대로 붙어 있고요. 각 인형에는 치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고, 작은 부품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런 책이 한 권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소우지의 눈빛이 빛났다.
"가장 유명한 카라쿠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이에요. 주인이 인형의 양손에 들고 있는 쟁반 위에 찻잔을 올려놓으면 인형이 고개를 흔들며 걸어갑니다. 손님이 찻잔을 가져가면 인형은 걸음을 멈추고요. 손님이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다시 놓으면 인형은 다시 걷기 시작해 좌석을 돌아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하라 사이카쿠도 이 인형을 보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는 지금도 소중히 보존되어 있지요."
"그것도 고래의 수염으로 만든 태엽 장치를 사용한 것인가요?"
"초기 것은 그렇습니다. 막부 말기에는 금속제 기어와 태엽을 이용한 인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또 수은을 사용한 카라쿠리 인형도 만들어졌고요."
"수은이 인형에?"
"오단반지나 연리반지라는 인형에 수은으로 만든 카라쿠리 인형이 사용되었어요. 이 인형은 손에 들고 봐도 장치가 보이지 않아요. 인형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수은의 이동에 의한 것이지, 태엽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 인형을 맨 윗 단에 올려놓으면, 어느새 양손을 들어 올리고, 몸을 뒤틀고, 돌고 돌기를 반복하며 5단의 단을 이동해 나갑니다. 그 밖에도 잉어가 폭포를 타고 올라가 용으로 변하는 용문폭포, 아이가 북을 치면서 피리를 부는 고테키지도(鼓笛児童), 앞에 놓인 물건이 됫박을 내려놓을 때마다 네 가지로 변하는 물건 인형, 소년이 말의 목을 타고 노는 하루고마(春駒) 인형.... ..."
"정말 많네요."
에도 시대 중기에 이미 대규모 카라쿠리 연극이 상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토시오에게 있어서는 처음 알게 된 놀라움이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완전 자동화된 여러 가지 카라쿠리를 듣고 있자니, 그 기술을 이용하여 소정에서 카오리를 쏘아 죽이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인형을 만드는건 아주 쉬운 공작처럼 느껴졌다.
"너무 수다스러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네요. 이런 이야기만 들어서는 재미없을 것 같네요. 이제부터 실물을 보여드릴까요?"
소우지는 마사오를 바라보았다.
"마사오 씨, 역립(逆立)인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습니까?"
"역립 인형... 들어본 적 있어요."
마사오는 바로 대답했다.
"언젠가 토모히로가 흥분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소우지 씨가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창고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토모 씨와 둘이서 고쳐서 움직이게 만든 자동 인형이에요."
소우지는 일어서서 책상 위에서 네모난 포장지를 꺼내 세 사람 앞에 놓았다.
낡고 오래된 회색 면 봉투였다. 펼치자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오동나무 상자가 나타났다. 오동나무는 까맣게 그을려 있었지만, 위에 '역립인형(逆立人形)'이라고 적힌 필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상자를 열어보니 목화솜으로 감싼 물건이 들어 있었다. 소우지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에치고 사자 의상을 입은 어린아이 인형이었다. 인형은 사자 목을 달고 만자(万字)의 문양이 새겨진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 소우지는 인형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기공도휘'의 목록에도 없는 희귀한 카라쿠리입니다. 태엽 장치에 수은까지 내장되어 있지요. 처음에는 잘 움직이지 않았어요.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까 수은이 증발해서 수은의 양이 줄어들었더라고요. 수은을 보충해 주었더니 신기하게도 작동이 되더라고요. 작가도 분명합니다. 오노 벤키치(大野弁吉), 가에이 2년의 작품입니다."
소지는 상자 뚜껑을 뒤집었다. 표지와 같은 필체로 '嘉永二年三月 大野弁吉 |拵 之《これをこしらう》'라고 적혀 있었다.
"오노 벤키치…… 사기꾼인가요?"
마이코가 흥미롭게 물었다.
“'사기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학문을 익힌 과학 기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 카라쿠리 기에몬(からくり儀右衛門)의 다나카 히나시(田中久重) 등 카라쿠리를 만든 사람은 모두 걷는 사자를 만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학식과 기예가 여러 방면에 이르렀습니다. 오노 벤키치는 가나자와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가나자와의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라고도 불리며, 시조류(四条流)의 그림과 조각을 잘했고, 목조각, 죽세공, 금세공, 도자기, 유리공예, 마키에(蒔絵) 등의 작품이 남아있지요. 학식은 의학, 이화학을 비롯해 약학, 천문학, 역학, 항해술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그의 천재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우지는 테이블을 옆에 두고 카펫 위에 공간을 만들어 인형을 꺼내 들었다.
"태엽을 감아볼래요?"
그 말에 마사오는 인형을 바라보았다.
"태엽이 어디에 있죠?"
"허리 옆쪽. 하카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됩니다."
"안 돼요. 떨어뜨리면 안 돼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감아 드릴게요."
소우지는 세 사람의 곁을 떠나 바닥에 앉았다.
"이 시대가 되면 태엽도, 기어도 모두 금속으로 만들게 되죠. 그래서 보존도 잘 되어 있습니다."
소우지는 즐거워하는 듯이 태엽을 감았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한 번 감았을 때였다.
"아, 아퍼!"
소우지는 갑자기 오른손을 인형에서 떼어냈다.
소우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엄지손가락 밑부분에서 엷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엽이 끊어진건 아니야. 이상하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소우지는 조심스럽게 인형을 세 사람을 향해 세우게 했다.
인형은 가벼운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목에 달린 사자 관이 좌우로 흔들렸다. 양손이 움직여 허리춤에 달린 북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하는 북소리와 톱니바퀴 소리가 삐걱거리는 인공의 생명을 움직이고 있었다.
에치고 사자 소년은 세 사람 앞에 이르자 멈춰 서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잘 보세요 ......"
소우지의, 괴로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토시오는 그 목소리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인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형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형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뒤로 젖혀졌다. 두 발이 땅을 딛고 인형은 거꾸로 서게 되었다. 두 손 사이로 하얀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인형은 주인에게로 걸어갔다.
소우지 앞에서 인형은 멈춰 서서 천천히 두 발을 다시 땅으로 내려놓았다. 인형은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걸음걸이가 다소 어정쩡하게 소우지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멈추지 않아요 ...... 이상하네요 ......"
소우지가 신음하듯 말했다.
토시오는 처음으로 소우지의 얼굴을 보았다. 소우지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
“소우지 씨!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가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소우지는 걸어가는 인형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순간 무게 중심이 무너지면서 소우지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괜찮아!"
마이코가 달려와 소우지를 일으켜 세웠다. 소우지는 열심히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 하지만, 훌륭하군, 그렇지......."
격렬한 고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소우지는 마이코를 튕겨내고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마사오가 무언가 외쳤다.
"의사를 불러!"
마이코가 소우지를 내려다보았다. 토시오도 일어섰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기어 소리가 들렸다. 에치고 사자 인형이 구석에 쌓여 있는 장난감 상자에 부딪혀 옆으로 쓰러져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토시오는 무의식적으로 인형에 손을 뻗으려 했다.
"만지지 마!"
매서운 마이코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자 수사관들이 달려왔다. 한 수사관은 소우지의 상태를 보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의사가 도착해 맥박을 쟀을 때, 소우지의 숨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방 전체가 기어 소리로 가득 찼다. 여러 개의 시계가 시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르골이 울려 퍼지고, 시계 인형이 움직였다. 또 다른 시계의 창문이 열리고 기괴한 짐승이 얼굴을 내밀고 짖어댔다.

2016/10/29

서프라이즈 : 사건편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제작팀 : 별점 2점

서프라이즈 : 사건편 - 4점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지음/MBC C&I(MBC프로덕션)

MBC의 "서프라이즈"는 최근 잘 보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저도 자주 보았던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제 절친 철호군의 애청 프로그램이기도 하고요. 이 친구가 얼마나 좋아하냐 하면, 예전에 월드컵으로 "서프라이즈"가 결방하자 짜증을 낼 정도였죠. 아 철호야 보고싶다.... 하여튼, 그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던 이야기들이 두 권의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한 권은 "사건편", 다른 한 권은 "인물편"입니다. "사건편"에서는 제목 그대로 "서프라이즈"에 소개되었던 기묘한 사건들 중 약 90여편을 소개해 주고요.

하지만 내용이 의외성이 있다거나, 새로운 이야기는 많지 않습니다. 아틀란티스, 모아이, 마야, 일루미나티, 야마시타 골드, 사해 사본, 코덱스 기가스 등은 이런 저런 곳에서 하도 많이 언급해서, 이제 쉬어버렸다고 해도 무방할 소재들이니까요. 게다가 400페이지 정도 분량에 무려 11개 주제, 90여편의 이야기가 소개되는 탓에 깊게 파고들지도 못합니다. 한 이야기당 4페이지를 할당하기도 버거울 정도이니 당연합니다. 그나마도 소개되는 이야기들도 너무 각색해서 실제 역사가 왜곡되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한 이유가 병조림 때문이라는 (영국은 더욱 개선된 통조림을 장비)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TV에서 방영한 이야기를 가공한 것임에도 단 한장의 도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밀림 속 신비의 사원과 같은 고대 유적이나 그림, 주요 문화재와 같은 소재는 도판이 굉장히 큰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요.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아주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이슬람의 신비의 명검 다마스쿠스 검은 칼 표면의 소용돌이 또는 물결무늬가 특징인데, 이 무늬가 강도와 탄력성을 부여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700도까지 가열한 후 280도에서 담금질을 하였다는 제조법 또한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다마스쿠스 검의 최신 분석 결과로는 탄소나노튜브가 검출되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오래전에 감상했던 "13번째 전사"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분한 이븐 파들란이 전투를 앞두고 준비하던 칼이 떠올랐습니다.

중세 집집마다 상비했던 명약 무미야는 사실 이집트 미라를 갈아서 만든 것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미이라를 만들 때 쓴 "몰약" 성분 덕분이라는데 몰약은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성분이 무엇인지는 몰랐는데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동부아프리카 해안 자생 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살균, 정화 능력이 탁월하다네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에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림 위에 다섯 줄의 평행선을 그리고 제자들의 손과 빵의 위치에 점을 찍은 후 거울에 반전시켜 40초 분량의 찬송곡이 나왔다는군요. 이거야말로 TV로 보았으면 그림, 음악이 실제로 나왔을터라 더욱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그 외에도 나우루 공화국이 인광석을 바탕으로 엄청난 복지를 이루었지만 자원 고갈, 환경 오염 및 섬의 고도가 낮아져 가난과 공포에 휩싸인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라던가 하트셉수트의 사망 원인이 당뇨병, 온 몸에 퍼진 골암이었다는 이야기 등등도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TV로 보는게 더욱 의미있는 내용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책으로 읽을만큼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 생각되지도 않고요. 책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수십년 전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발간한 "세계진문기담"이나 "세계상식백과" 등과 비교해보아도 현격하게 처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궁금하신 주제가 있으시다면 인터넷으로 찾아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2007/11/16

돈가스의 탄생 - 튀김옷을 입은 일본 근대사 : 별점 3점

돈가스의 탄생 - 6점
오카다 데쓰 지음, 정순분 옮김/뿌리와이파리

오랫만의 포스팅이네요. 요새 하도 이런저런 일이 많아 심신이 피곤했던 차에, 저 자신에게 위로의 선물로 간만에 구입한 책 중 한권입니다. 관심은 있었지만 그다지 땡기지 않은 책이었는데 충동구매 해 버렸네요.

이 책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크게 두가지의 요리, "빵"과 "돈가스"를 가지고 일본 개화기의 근대사를 풀어나가는 일종의 역사책입니다. 단지 두가지 요리만이 아니라 그 외에도 "고로케"와 "카레라이스" 등도 비중있게 다루어지고는 있지만, 이 책의 핵심인 일본의 근대화과정과 연관시켜 고찰하는 요리라는 주제에는 아무래도 "빵"과 "돈가스(육류요리)"가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터라 비중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 개항 후 일본이 근대화 해 나가는 과정이 정말 음식 변천사와 유사해서 놀랐습니다. 육류 섭취를 불경한 것이라 여겨 피하던 중세적 사고관의 일본인들이 나가사키 등 개항한 항구를 중심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양식 요리를 받아들이는 모습과 양식 요리를 "일본화" 하여 자신들만의 새로운 요리로 재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 정말 근대화 과정과 딱 맞아 떨어져 보여서 재미있더군요.

물론 몇가지 음식을 기준으로 급변하던 시대를 통찰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많겠지만 나름 공감가는 점도 많고, 음식 하나하나에 대한 역사와 설명이 흡사 "맛의 달인" 같은 만화를 보는 것 같이 디테일하고 자세해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같이 요리에 관한 잡다한 지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딱 알맞게 당시 요리들의 해설과 레시피도 그런대로 충실하게 실려있는 편이고, 각종 자료들도 풍성하게 실려있다는 것도 일본 근대화 과정에 관련된 자료로도 요긴할 것 같아 마음에 드네요. 특히 여러가지 광고 전단 등은 정말 좋았습니다.

전체적인 문체가 좀 딱딱하고 지루한 면도 없잖아 있긴 하나,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책을 통해서 일본 여행갔을때 자주 스쳐지나갔던 신주쿠 "기무라야"가 단팥빵을 처음 만든 가게라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다음에 가면 꼭 단팥빵을 사 먹어야 겠습니다. 최초로 개발해 팔던 돈가스와 똑같은 돈가스를 팔고있다는 가게 등도 역시 꼭 체크해 놓았다가 다음에 일본에 여행가게 되면 가 봐야 겠네요.

2025/11/02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우아영 : 별점 3점

우리의 오감이 어떻게 일상에 영향을 주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과학, 인문학 서적입니다. 감각은 단순히 받아들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 행동, 관계, 심지어 생산성과 건강까지 좌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일상의 감각들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해킹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여러 가지 팁들이 가득한데, 특히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팁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귀마개를 '오른쪽 귀'에 꽂아야 한다는 연구처럼요. 이는 수면 중 좌뇌가 경계 태세를 유지한다는 뇌의 편측성에 근거한 것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꽤 놀라웠습니다. 잠들기 전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게 수면을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도 기억에 남고요. 자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발 밑에 뜨거운 물병을 두는 것만으로도 수면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하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만 해 보이네요.

또 하나 흥미로웠던건, 운동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탄수화물 음료 헹구기’ 실험이었습니다. 단 몇 초간 입 안에서 단 음료를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가 에너지 유입을 예측하며 운동 성과가 향상된다는데, 우리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감각에 영향을 받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향기 하나, 소리 하나, 피부에 닿는 감촉 하나까지도 우리의 뇌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는걸 이만큼 잘 드러내는 실험도 없지 않을까 싶고요.

이렇게 과학적 실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고, 실용적인 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례가 가득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목차가 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은 들고, 도판이 전무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기획, 마케팅 전문가들이 꼭 참고해야 할 도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주제별로 아래와 같이 간략히 정리하여 소개드립니다. 


공간과 감각

- 집의 냄새는 그 공간의 인상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이며, 바닐라나 커피 향은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반면, 반려동물이나 담배 냄새는 집값을 낮출 수 있다.
- 인간은 진화적으로 개방된 조망과 은신처가 있는 공간을 선호하며, 이는 실내 식물, 곡선 구조, 원형 테이블 등을 더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로 설명된다.
- 원형 테이블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 테이블보다 협동적 분위기를 만들고, 음악이 흐르면 사람들 간의 거리도 좁아진다.

자연 노출의 효과

- 잠깐의 자연 노출만으로도 기분과 건강, 집중력이 향상되며, 이는 용량 의존적이다.
- 숲 가까이 사는 사람은 실제로 뇌 구조에서 회백질 밀도가 높아지는 변화가 나타났고, 병원 창밖에 자연 경관이 보이는 경우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
- 자연의 시각 자극 외에도 자연 소리나 냄새 등 감각 자극 역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수면과 환경

- 최적의 수면 환경은 조용하고 어둡고 서늘해야 하며, 온도는 16~24도 사이가 이상적이다.
- 잠자기 전 따뜻한 목욕은 심부 체온을 낮추고 수면 유도를 돕는다. 이때 이상적인 수온은 40~42.5도이다.
- 귀마개는 오른쪽 귀에 착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이는 좌뇌가 경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수면 중에는 간단한 학습이 가능하다는 연구도 있으며, 좋은 수면은 창의성 향상에도 기여한다.
-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 밤 효과는 진화적 경계 반응으로, 익숙한 향기나 소리로 완화할 수 있다.

소리와 경계 반응

- 운전자의 뒤에서 들리는 경고음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는 뇌가 머리 뒤 공간을 감지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 문 소리, 대시보드 두드림, 방향 지시등 소리까지도 소비자의 감정과 신뢰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무실과 소음

- 개방형 사무실은 생산성과 만족도 모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많으며, 소음이 특히 문제가 된다.
- 갈색 소음은 자연 소리보다 실제로 집중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었으며, 자연 소리는 실내보다는 야외에서 더 효과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운동과 감각 피드백

- 빠른 템포의 음악은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며, 자신이 음악을 통제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 효과가 더 커진다.
-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입 안에서 헹구는 것만으로도 뇌는 에너지를 예측하고 운동 성과를 높인다.

매력과 진화심리

- 얼굴의 대칭성, 미소, 시선, 목소리, 피부색 변화 등은 모두 진화적 적합성 신호로 작용하며,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 남성은 여성의 엉덩이 움직임에, 여성은 남성의 상체 움직임(특히 오른쪽 무릎)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춤 관련 연구도 있다.
- 빨간색 옷이나 하이힐은 요추 곡률을 강조하며, 남성에게 성적으로 더 매력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

향기와 매력, 마케팅

- 링스 데오도란트처럼 쾌적한 향기는 사진 속 얼굴의 인상까지 바꿀 수 있으며, 뇌의 보상 중추가 활성화된다.
- 다카사고와의 협업 연구에서는 특정 향기가 여성의 나이를 더 젊게 보이게 만든다는 결과도 있다.
- 향기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약한 농도에서 더 효과적이며, 사람의 판단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소비 행동과 감각

- 레스토랑에서는 느린 음악이 손님의 체류 시간을 늘리고 소비 금액을 증가시키며, 매장 온도가 낮을수록 제품을 더 고급스럽게 느낀다.
- 소비자가 듣는 음악의 국가 분위기에 따라 와인 구매 선택이 달라지는 등의 사례도 있으며, 감각 자극은 소비 결정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간단한 센스 해킹 방법

- 좋은 냄새가 나는 수건이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 샤워를 좋아한다면 냉수샤워를 해보자. 병가 일수를 줄일 수 있다.
- 주름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페이스 크림의 주요 기능은 향이다.
- 자연의 소리는 평온한 느낌을 주며, 새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더 효과적이다.
- 옆집이 시끄럽다면 같은 소리를 들으면 더 잘 잘 수 있다.
- 가족용 자동차는 스포츠 모드에서 빨간 조명과 엔진음을 키워 성능 향상 느낌을 준다.
- 실내 식물은 사무실 공기 오염을 줄이고, 깨끗한 공기는 업무 생산성을 높인다.
- 여성은 사무실에서 더 추위를 많이 타므로 온도를 높이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 스트레스를 유발한 회의 뒤에는 다른 냄새를 맡아 정신 상태를 전환해보자.
- 개방형 사무실에서는 하루 평균 86분이 방해받는다. 배경음악을 들으면 생산성이 오른다.
- 패스트푸드점에서 빵 굽는 냄새는 고객의 구매 가능성을 높인다.
- 느린 음악이 흐를 때 쇼핑객은 돈을 더 많이 쓴다.
- 운동할 때 음악 속도를 10퍼센트 빠르게 하면 운동 효과와 즐거움이 향상된다.
- 테니스 경기에서 포효는 실제 경쟁 우위를 제공한다.
- 관중의 소음은 심판의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 운동 중 웃으면 달리기 효율이 향상된다.
- 운동 중 7~8분마다 탄수화물 맛만 봐도 운동 능력이 증가한다.
- 스포츠 팀의 장비 색상을 검은색으로 하면 승률이 높아질 수 있다.
- 데이트 중엔 스릴러 영화를 보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사람의 나이는 냄새로 알 수 있지만, 성별은 알 수 없다.

2016/06/08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1 - 제프리 스타인가튼 / 이용재 : 별점 3점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1 - 6점
제프리 스타인가튼 지음, 이용재 옮김/북캐슬

"보그"지의 음식 평론가 제프리 스타인가튼의 글을 모아놓은 일종의 컬럼, 에세이집입니다. 음식 및 요리에 관련된 책들을 좋아라 하기에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책이지요. 이전에 2권 리뷰에서 말씀드렸듯, 1권은 절판 상태였는데 '알라딘 중고서점'을 통해 좋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죠.

책의 구성 및 내용은 2권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2권과 가장 큰 차이점은 제프리 스타인가튼의 음식에 대한 무한 열정, 무한 도전이 더 크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컬럼부터 도전입니다. 음식 컬럼을 쓰기 위해 자신이 싫어하는 음식(심지어 김치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을 정복해 나간다는 것이거든요. 그 다음에는 직접 천연 효모를 쓴 자연 발효빵을 만들기 위한 노력, 프랑스의 새로운 다이어트 비법이라는 몽티냐크 다이어트를 직접 한 달 동안 체험한 기록, 채식주의를 체험한 결과 등이 이어집니다.

식도락 여행기도 "도전기"에 가깝습니다. 직접 어떤 음식의 오리지널을 체험하고 요리 강습을 받아 오거나, 최소한 레시피라도 구해 와서 직접 재현한다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슈크르트를 만들어 먹어보기 위해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여러 전통 농가 식당을 돌아다닌 뒤, 뉴욕에서 그 요리를 구현한다는 이야기처럼요. 심지어는 오리지널 레시피를 구현하기 위해서 소금에 절인 안심이 없어서 직접 절이는 등 미국에서는 팔지도 않는 고기 부위까지 구하려 노력할 정도니 뭐 말 다했죠.

완벽한 프렌치 프라이를 만들기 위한 고난의 과정 역시 발군입니다. 알랑 파사르의 비법(말기름에 튀겨라!)에서 시작하여, 어떤 감자를 어떤 기름에 어떤 방식으로 튀겨야 하는지에 대해 상세한 여정이 장황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참고로, 저자의 최적 프렌치 프라이 조리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 재료 : 땅콩기름 2~3리터, 아이다호 러셋-버벵크나 삶아먹는 감자 450~570g, 소금
  1. 땅콩기름을 전기 튀김기나 철제 튀김바구니가 들어가는 6리터짜리 우묵한 튀김팬에 붓는다. (전기 튀김기에는 사용설명서 추천량만큼, 화로에 올려놓는 튀김팬에는 3리터)
  2. 튀김용 온도계를 기름에 꽂아 온도를 130도까지 올린다.
  3. 감자를 씻고 껍질을 벗긴 뒤, 프렌치프라이 자르개나 부엌칼로 단면이 각각 1cm가 되도록 길게 썬다. 가장 작거나 불규칙한 조각은 버린다. 감자의 양은 340~450g이 되어야 한다.
  4. 감자를 헹구지는 말고, 종이 수건으로 신경 써서 말린다. 기름이 준비될 때까지 단단히 싸둔다.
  5. 감자를 튀김 바구니에 담아서 기름에 담근다. 기름 온도가 다시 125도로 오를 때까지 센 불에서 튀기다가, 불을 줄여 온도를 유지한 채 9~10분간 튀긴다.
  6. 바구니를 든 뒤 기름의 온도가 190도가 될 때까지 감자를 건져둔다. 불은 세게 올려 놓아야 하며 기름 온도는 195도를 넘지 말아야 한다.
  7. 감자를 다시 기름에 담가 3분 동안 튀긴다.
  8. 튀김 바구니를 들어 올려 기름을 몇 번 털어내고, 종이 수건을 깐 접시에 뒤집어 기름기를 종이 수건으로 빨아들인다. 먹기 직전에 소금을 넉넉히 뿌린다.

또 과학적인 이론에 바탕을 둔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책 뒤 소갯글처럼 여행기와 레시피, 논문이 결합된 독특한 책이라는 것이 허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이에요. 특히 술이 심장질환의 요인이 아니고, 적절히 술을 마시는 사람은 마시지 않는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오래 산다는 컬럼은 아주 좋았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로서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컬럼 내용에 폭음은 위험하고 담배는 아주 좋지 않다고 쓰여 있어서 제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말이죠. 마셨다 하면 폭음이니... 야채가 사실은 여러 가지 자연 독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컬럼은 추리 소설에도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겠구나 싶었고요.

그 외에도 식욕 억제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검증한다던가, 소금에 대한 현재의 우려는 지나치다던가 (소금과 혈압의 관계는 증명되지 않았음) 하는 이야기들도 재미와 가치 모두 뛰어나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재미있는 주제들에 저자의 음식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과 확고한 견해, 그리고 유머러스한 글 솜씨가 더해져 풍성함을 한껏 전해준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보그"지에서 음식 평론가로 활동하며, "줄리아 차일드 도서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은 허언이 아닌 셈입니다.

단, 글이 쓰여진 시기가 90년대로 보여지는데 2010년대에도 통용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약간 유행을 따르는 주제들 (다이어트 방법)이라던가 과학적 이론에 기반한 글들이 특히 그러합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개정판이 최소 10년이 지난 뒤에는 나와주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은 사소할 뿐 이런 류의 컬럼으로는 최상급이라 생각되네요. 저도 이런 컬럼을 써 보고 싶어집니다.

2014/08/12

식사는 하셨어요? Buonappetito! - 야마자키 마리 : 별점 3점

식사는 하셨어요? Buonappetito! - 6점
야마자키 마리 지음/애니북스

테르마에 로마에로 대박을 친 작가 야마자키 마리의 일상계 요리만화. 작가의 이탈리아 유학시절과 결혼 후 이탈리아, 포르투칼을 오가며 살고 있는 삶에서 벌어졌던 일화들과 함께 여러가지 요리들을 즐겁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대가 무대인지라 거의 전부 이탈리아 요리인데, 정작 만화는 "나폴리탄 스파게티"로 시작되는게 특이했습니다. 나폴리탄 스파게티는 사무라 히로아키의 "이사", 츠치야마 시게루의 "대결! 궁극의 맛"에서는 별볼일 없는 요리로 묘사되었었는데, 야마자키 마리는 추억 보정 덕분에 의외로 맛있는 요리였다고 소개합니다. 심지어 무대가 이탈리아임에도 불구하고! 요리에 케찹을 사용하는 것은 사도라고 비난하던 나폴리 출신 룸메이트 티나조차도 먹어보고 맛있다고 했다니 뭐 말 다 했죠. 맛이라는건 역시나 국경이 없나 봅니다.

그 외의 다양한 이탈리아 요리들을 적절한 이야기들로 재미나게 풀어나갑니다. 작가의 어린 시절 환상의 요리였던 "곰 세마리"의 곰의 수프, "하이디"의 흰빵을 이야기하다가 알프스에서 빵으로 만든 완자를 넣고 끓인 수프 카네데를리를 소개하는 식이지요. 또 포르투칼인이 아리가토의 어원이 포르투칼어 오브리가도라고 이야기하며 뻐긴다던가(땡큐라는 뜻이니 정말일지도?), 열정적인 이탈리아인이 더 큰 열정을 찾아 방문하는 나라 no.1이 브라질이라는 일종의 지역특화된 개그도 재미있었어요. 시어머니를 조금 과격하게 묘사한 감이 있는데, 어딜가나 며느리들 생각은 다 똑같은가 싶어서 괜시래 웃기기도 했고요.

아울러 에피소드 말미에 등장했던 요리들 레시피를 짤막하게나마 실어주는 것도 아주 좋았습니다. 물론 집에서 과연 해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게 많지만 그래도 고학생의 상징으로 묘사된 야채 미네스트로네는 시도해볼만 하겠더라고요. 샐러리, 토마토, 양파, 당근, 감자, 시금치에 까치콩은 모르겠지만 올리브오일과 물, 스톡이 재료의 전부이며 냄비에 오일 두르고 양파를 살짝 볶다가 나머지 채소와 물만 넣고 끓이면 끝이니까요.
앞서 소개드린 하이디의 빵과 곰 수프가 결합된 카네데를리 역시 굉장히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어서 욕심이 납니다. 생햄이 필요한데, 베이컨으로 대체해서 도전해볼까합니다. 나도 곰의 수프를 먹어보고 싶다고!

여튼. 다른 일상계 요리만화와는 다르게 이탈리아 요리가 소개된다는 점에서 차별화되고, "테르마에 로마에"만큼은 아니지만 작가 특유의 센스도 마음에 들어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림도 괜찮은 만큼, 이런 류의 만화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0/01/14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1)

식사는 하셨어요? Buonappetito! - 6점
야마자키 마리 지음/애니북스

"테르마에 로마에"로 히트를 친 작가 야마자키 마리의 이탈리안 식도락 일상계 만화입니다. 크게 이탈리아 유학 당시, 결혼 후 이탈리아에서의 생활, 일본에서의 이야기로 구분되는데 '식도락' 측면에서는 결혼 후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유학 시절은 너무 가난해서 변변한 음식을 먹은게 별로 없고, 일본에서의 이야기야 특별한 음식이 나오지 않는 반면 이탈리아인 남편과 시부모가 등장하는 정통 이탈리아의 생활 이야기에서는 새로운 재료라던가, 새로운 맛이 많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비싸고 귀한 특급 올리브 오일, 이탈리아의 연말연시 요리 등 여러가지 새로운 소재들에 작가 특유의 유머가 더해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 등장한 흰 빵과 수프와 같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좋았고요.

또 몇몇 요리는 간단한 레시피까지 소개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재미, 신선함에 실용적 가치까지 있다면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로 계속 나오면 좋겠네요.

하나씨의 간단요리 3 - 4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미즈사와 에츠코 그림/미우(대원씨아이)

출간된 지 2년이 훨씬 넘었는데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군요. 사실 TV 드라마까지 나온 인기작이기는 해도 1, 2권은 제게는 그닥이었습니다. 작화도 마음에 들지 않고, 주인공 하나 씨의 대책없는 성격도 취향이 아니었거든요. 간단 요리라는 제목에 어울릴만큼 둥장하는 레시피도 간단하지만, 특별히 따라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고요.

3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하나 씨의 대책없는 귀차니즘은 더욱 업그레이드 되기까지 했습니다! 요리들도 전골, 볶음 국수, 샤브 샤브 등은 손도 많이 가고 재료도 제법 많이 필요한 음식들인데, 이들이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에 컨셉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래서야 '간단 요리'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요. 

그나마 취지에 부합하는 건 고등어 통조림 밥과 생고추냉이 아보카도 덮밥 정도인데 문제는 역시나 전혀 따라서 해 먹어 보고 싶지 않다는 점입니다. 연어 차밥 김가루는 제법 땡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재료를 쓰는 탓에 따라하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제 편견을 깨기는 커녕 더 굳게 만들었습니다. 가볍게 읽을 만은 한데, 더 이상은 구입할 생각 없습니다.

우연한 산보 - 6점
다니구치 지로 만화, 쿠스미 마사유키 원작/미우(대원씨아이)

이 만화는 제목처럼 요리가 중심은 아니고 산보가 중심이기는 합니다. 1~3화 까지는 특별한 요리가 등장하지 않고요. 그러나 4화 이후부터는 산보 도중에 먹는 음식도 비중이 작지 않습니다. 4화 히피 축제에서는 오신코, 5화 한밤중의 고야에서는 고야 참플, 제 6화 개와 연식 야구공에서는 스콘, 제 7화 하모니카 요코쵸에서는 카레와 맥주, 제 8화 메지로의 카키모치에서는 쇼유 라멘이 등장하지요.

그러나 "고독한 미식가" 처럼 음식 구성과 맛을 상세히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요리들의 묘사는 마음에 들었지만 이 정도로는 역시나 요리 만화라고 부르기는 무리였을까요? 산보와 함께 음식의 비중을 좀 더 높여주었더라면 주인공이 술을 좋아한다는 측면에서 "고독한 미식가"와 다른 일상계 요리, 식도락 만화로 그려질 수 있었을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또 원작인 쿠스미 마사유키의 후기와 뒷 이야기가 너무 길게 수록된 것 역시 감점 요소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래저래 조금 애매한 결과물이네요.

2022/02/11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쿠스미 마사유키 / 박정임 : 별점 3점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6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박정임 옮김/살림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가로 잘 알려진 쿠스미 마사유키먹부림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총 3부 구성인데, 가장 비중이 높은 1부는 혼자서 혼술을 마실 때, 어떤 안주를 직접 만들어 어떤 술과 함께 먹는지에 대해 쓴 글들입니다. 2부는 혼자서 술집에 갈 때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고요. 3부는 술을 다 먹고 마무리로 어떤걸 먹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술과 안주를 사랑하는 작가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정말로 술과 안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저자의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술과 안주를 사랑하고, 먹거리에 대한 특별한 고집과 집착을 보이는 모습을 접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술잔이라던가, 차림상의 구성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다츠와 별다를게 없어 보였고요. 얼마 전에 읽었던 "혼밥 자작 감행"의 쇼지 사다오도 그러했는데, 혼술하는 아저씨의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먹는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전략, 전술'을 고려해서 안배한다는, "음식의 군사"가 떠오르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돈가스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돈가스를 소금, 간장, 소스 순서로 찍어 먹는다던가, 마지막 두 조각을 미리 소스를 뿌려 절여두었다가 밥이랑 함께 먹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에피소드와 거의 똑같았으니까요. 오뎅을 접시에 담을 때 색감을 고려해서 담는다는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쥬쿠 카페 베르크의 커피 역시 "음식의 군사"에서도 소개되었었지요,

그러나 돈가스 정식을 일종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는건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육류에 전채 (야채절임), 샐러드 (양배추), 수프 (미소시루), 푸짐한 채소 요리 (밥)이 곁들여 나오기 때문이라는데,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이왕 코스 요리니 주문할거면 값은 비싸도 히레가스 정식을 주문하자라던가, 맥주를 시킬 때 "이집 맥주는 어디 건가?"하고 브랜드를 물어보면 와인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에 이르르면, 이런걸 만화로 선보였다면 아주 좋았을텐데 좀 아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요리 에피소드보다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후지코 후지오의 "만화의 길" 속 추다와 멘치빵을 재현해 먹는 에피소드는 과연 만화가구나! 싶어서 기억에 남고요.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 더 기억에 남은 것 같네요. 참고로 원작 속 '츄다' 레시피는 소주 3, 사이드 7의 비율입니다. 멘치빵은 아래와 같고요.

기요켄의 슈마이 도시락에 대한 글은 저자의 데뷰작 "스키야키"가 떠올라서 반가왔습니다.

혼자 안주를 만드는 이야기 속 레시피도 짤막하지만 충분히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가다랑어 안주입니다. 조금 얇게 썬 가다랑어를 준비하고, 그 위에 대파를 잘게 다져서 듬뿍 올립니다. 다음은 양하도 잘게 다지고, 차조기나 깻잎 한 장도 채썰어 올립니다. 마지막이 비법이라 할 수 있는데 마늘 대신 편을 썬 마늘장아찌를 올리는겁니다. 생마늘은 맵고, 간 마늘은 느낌이 약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걸 레몬즙을 섞은 간장에 찍어먹는다는데, 반주로 니혼슈, 조금 비싼 사케가 제격이라네요. 가다랑어 회는 구하기 힘들겠지만 방어회로 다음에 도전해 볼까 합니다. 방어회는 먹다보면 물려서 남기기 십상이니까요. 

다른 먹부림 콘텐츠에서 탕두부라고 소개되는 물두부 레시피는 정말 쉬워 보여서 인상적입니다. 평범한 냄비에 다시마 한 장을 깔고 물을 담아 가스버너 등에 올리고, 한 입 크기로 자른 두부를 넣은 뒤 끓고 나면 간장과 가쓰오부시, 다진 파를 섞은 종지에 찍어 먹으면 된다니까요. 간단하기로는 '조야나베'도 만만치 않아요. 냄비에 물을 붓고 저민 생강 두 조각 정도를 넣은 뒤 끓이다가 큼직하게 썬 양배추, 기다란 삼겹살을 세 토막 낸 걸 넣고 갈은 무와 다진 파를 듬뿍 넣은 아지폰(감귤 과즙 폰즈 상품명)에 찍어 먹는게 끝입니다. 폰즈가 집에 없기는 한데, 그 외에는 재료나 조리법 모두 너무 쉬워서 당장 해 먹어도 됨직한 수준이네요. 심지어 우러난 국물은 제가 좋아하는 우동 사리를 넣어 먹으면 끝장이라니, 꼭 한 번 해 먹어 봐야 겠습니다. 

그 외에도 가열한 올리브 오일에 큼직하게 썬 양배추를 넣어 재빨리 볶은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먹는 양배추 볶음, 오니기리를 프라이팬에 올려 약한 불로 굽다가 간장과 미림, 미소 양념장을 발라 굽는 오니기리 구이, 간단한 여주 볶음밥, 통조림 참치에 잘게 다진 양파를 넣고 후추와 소금을 뿌린 후 마요네즈와 버무려 만든 속을 버터 발라 구운 식빵에 끼워 먹는 참치 토스트(굽지 않은 빵에 머스터드를 바른 뒤 슬라이스 치즈를 깔고, 그 위에 참치 마요네즈를 올려 구워도 맛있다네요) 등 대부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만 소개되고 있어서 아주 반가왔습니다.

뻔한 먹부림 에세이지만 재미도 있고, 레시피들도 괜찮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적당합니다.

2025/12/19

오무라이스 잼잼 15 - 조경규 : 별점 2점

이전 권 리뷰에서 더 구입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형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책 가격이 2만원을 돌파했네요.

특유의 정감 있는 그림체와 따뜻한 분위기는 여전하고, 다양한 음식에 얽힌 이야기와 정보들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따로 국밥은 6.25 때 밥이 미리 말아져 있는 국밥을 양반들이 체면 때문에 거부해서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투움바 파스타는 미국 아웃백에서 만들어진 메뉴다라는 등 음식 유래들에 대한 설명이 특히 좋습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정통 알프레도 파스타에는 크림이 들어가지 않고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와 버터만 들어간다는 등 처음 알게 된 정보들도 많고요. 

그리고 레시피도 꽤 볼 만 합니다. 무엇보다 초코파이 라테 레시피가 가장 눈길을 끌었습니다. 초코파이를 전자레인지에 6초간 데운 뒤, 에스프레소와 우유를 뿌리고 부숴서 먹는 디저트라는데, 이건 꼭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네요. "연유처럼 끈적이고 달콤한 삶" 편에서 연유의 유래와 함께 소개되는 홍콩의 '버터 돼지'(딱딱한 롤빵에 연유와 버터를 넣은 간식)를 한국 가정에서 만들려면 빵을 플레인 베이글로 대체하면 된다는 등의 꿀팁들도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전 권에서도 언급했듯 가족 이야기의 비중이 높아졌다는건 단점입니다. 더 이상 음식과 요리 만화가 아니라 가족 일상툰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에요. 가족끼리 어디 놀러가서 뭘 먹었다는 류의 에피소드 반복은 식상하다는 말도 사치라 느껴질 정도로 뻔하고요.

이미 웹툰으로 읽은 독자가 책을 구입할만한 요소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독자가 뽑은 오무라이스 잼잼 명대사라던가 팬아트 모음은 솔직히 페이지 낭비입니다. 맛집 탐방 및 소개 역시 인터넷 컨텐츠 대비한 장점을 찾기 어려웠어요. 이래서야 가격 인상에 걸맞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원래 이 시리즈의 장점이었던 음식 중심의 이야기와 정보성이 점점 희석되어 가는데, 다음 권을 구입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대로라면 구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