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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9

나쁜 토끼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점

나쁜 토끼 - 4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가출 소녀 미치루를 찾는 의뢰를 수행하던 중 칼에 찔렸지만, 이 사건을 해결한 덕분에 로열 할리우드 호텔 체인 회장 다키자와의 의뢰를 받게 되었다. 미치루의 친구이기도 한 딸 미와를 찾아달라는 의뢰였다. 고압적인 다키자와 때문에 조사는 난항을 겪었지만, 미치루의 도움으로 공통의 친구였던 아야코가 미와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아야코는 마약 중개인에게 살해당했고, 소녀들의 공통 친구인 가나도 실종되는 등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결국 하무라 아키라도 납치 후 감금당하고 마는데....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첫 장편입니다. 국내 소개된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초기작이 지금 소개되는게 조금 뜻밖이네요. 

하무라 아키라의 불행은 이 작품에서도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가출 소녀를 집으로 데려오는 간단한 의뢰에 미친 강간마 탐정이 끼어드는 바람에 격투 끝에 발이 부러지고, 친구가 교제하는 남자가 사악한 혼인 빙자 사기범이라는걸 알게 되고, 또 다른 실종 소녀를 찾는 의뢰는 자기 밖에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처음부터 고생하다가 납치 당해서 이틀 동안이나 갖히고, 마지막에는 사냥 게임의 사냥감으로 죽을 뻔 하니까요. 이 정도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도 불행과 고생으로는 1, 2위를 다툴만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오히려 억지스러운 설정 문제가 도드라집니다. 비교적 현실적이며, 일본의 현실에 잘 어울리는 하드보일드물이라고 여겨지는 후기작 - 특히 살인곰 서점 시리즈 - 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에요. 부유하지만 고압적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다키자와 가족과 다이라 가족 묘사부터가 그러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흉내내지만 캐릭터들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입니다. 딸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내다 버리면서 거액의 용돈을 주고 남자와 만나는건 아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다키자와, 어린 시절 유괴당한 뒤 죽은 아들을 못 잊어 딸을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다이라 미치루의 엄마 등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인물들이 한 가득입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불행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자기만 아는 괴물로 묘사되는 것 역시 읽기 불편했고 현실적이지도 못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들이 버젓이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고, 경찰서에서 유력한 용의자가 눈에 젖가락을 꽂는 방법으로 자살한다는 식의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현대물"이기 때문입니다. 개중 백미는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명사들의 모임 '28회'에서 사람을 사냥감으로 하는 게임을 했다는 진상입니다. 

사실 사냥꾼이 사람을 사냥한다는 소재를 가진 장르 문학은 많이 있습니다. 자기 소유의 섬으로 난파해 온 생존자들을 사냥하는 게임을 즐긴다는 내용의 "가장 위험한 게임"이 우선 떠오르지요. SF "불사 판매 주식회사"도 고용한 인간 사냥꾼들과 승부를 펼치는 이야기가 등장하며, 단편 "요트클럽"은 이 작품처럼 나름 상류층 사람들 모임에서 친목 행사로 사람 사냥이 벌어진다는 설정이고요. 하지만 이 작품처럼 막 나가지는 않아요. "불사 판매 주식회사"은 이야기가 허구라는게 이미 시대 배경 등으로 등장하고, "아주 위험한 게임"은 개인 소유의 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 벌이는 게임입니다. "요트클럽" 역시 망망대해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박 승객들을 사냥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나마 말은 됩니다. 그러나 현대 일본에서 노숙자도 아니고, 평범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사냥 게임을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아무리 봐도 억지스러우며 설득력도 낮습니다. 

노나카가 사냥 게임 사냥감으로 쓰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유혹에 빠지기 쉽고 시끄러운 주변 인물이 없는 젊은 여자를 찾고 있었다 하더라도, 친구 딸의 친구를 끌어들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최소한 다른 연줄을 활용하는게 맞았어요. 이 건을 계기로 사기가 파토날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작위적이며 불필요했던 요소들도 너무 많아요. 가면을 쓰고있던 딸 미와를 사살한게 아버지 다키자와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하무라 아키라를 납치해서 이틀 동안 가두어 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정황을 보면, 감금 장소에 시체를 묻었다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을 거에요. 범인들의 범죄 행각을 보면 하무라 아키라 한 명 더 죽인다고 해도 죄상이 달라질 것도 없고요. 사건이 커질걸 우려했다? 미와와 가나의 실종은 경찰도 알고 있었습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가나야 그렇다쳐도, 대기업 회장 다키자와의 딸 실종은 이야기가 다르지요. 이래저래 하무라 아키라를 죽여서 입을 막는게 당연했습니다.

이외에도 하무라의 친구 미노리가 혼인 빙자 사기범 우시지마 준타와 교제하면서 일어나는 트러블, 도토종합리서치 사원 세라가 일으킨 트러블들도 불필요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보통 정통 하드보일드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이는 트러블 들이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요란스럽기만 할 뿐,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냥 분량만 차지할 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었습니다. 노나카가 범인이라는걸 추리해 낸 것처럼 그려지지만, 당연히 노나카밖에 용의자가 없게끔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대단한 추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독자가 함께 고민해볼 만한 단서도 딱히 제공되지 않으며, 제목이자 게임의 유래가 되는 동요의 존재는 억지스럽기만 합니다. 대부분의 수사는 탐문, 그리고 관계자들 증언을 통해서 나아가고 있어서 탐정이 딱히 필요한 이야기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물론 볼만한 부분이 없는건 아닙니다. 하무라 아키라라는 독특한 탐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에요. 그녀에 대한 세세한 일상 묘사로 소심하면서도 정의로운 그녀의 매력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미와의 엄마 아스미가 자살한 탓에 노나카가 궁지에 몰리는 과정이라던가, 미치루가 발가락을 잘 쓰는게 특기라는 극 초반의 복선도 잘 활용되고 있고요. 악당들이 모두 몰락하고 만다는 결말은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후반부 작품들 수준에는 확연히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4/03/10

10호실 - 리 차일드 / 윤철희 : 별점 2.5점

10호실 - 6점
리 차일드 지음, 윤철희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아버지의 고향인 뉴햄프셔 래코니아를 충동적으로 방문하여 아버지가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한편, 캐나다 출신 연인 쇼티와 패티는 새출발을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중간에 차가 고장날 지경이라 어쩔 수 없이 래코니아 근처 모텔에 머물렀다. 그런데 손님은 그들 둘 뿐이었고, 자동차는 완전히 퍼졌다. 휴대폰 전파도 차단되어 외부와의 연락을 할 수도 없고, 마크 외의 모텔 관리자들과 충돌도 빚던 둘은 어느새 10호실 방에 감금되어 버렸다. 알고보니 마크들은 사람을 활로 사냥하고 싶어하는 멤버들을 모아 거액을 받고 사냥감을 제공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결국 쇼티와 패티를 사냥감으로 하는 활 사냥꾼들의 밤이 시작되고 말았다.


"웨스트포인트 2005"을 잇는 잭 리처 시리즈 23번째 작품. 원제는 "Past Tense"입니다.
최소한 이 작품만큼은 원제보다 우리나라 출간 제목이 훨씬 좋네요. 원제(과거시제(?))는 잭 리처가 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이야기를 핵심으로 그린 듯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10호실에 갖힌 쇼티와 패티의 생명을 건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광할한 미국 대륙 외딴 곳에서 자동차가 고장나고, 핸드폰마저 터지지 않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도입부부터 마크를 비롯한 모텔 관리인 일당이 10호실을 CCTV와 마이크로 감시, 도청하여 둘을 농락하며 위험에 빠트리는 과정이 정말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정비공인줄 알았던 카렐이 둘의 뒷통수를 치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화룡정점이었고요. 둘을 위기에서 구해줄 은인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냥꾼 중 한명이었을 줄이야!

마크 일당이 둘의 생명을 걸고 벌인게 인간 사냥 게임이었다는 진상도 꽤 신선했습니다. 장기 매매라던가 스너프 필름 등을 위한게 아닐까 싶었는데 인간 사냥은 생각도 못했네요. 진상을 드러내는 '이틀치 비상식량'에 끼워넣어진 '손전등'라는 중요한 단서를 수수께끼처럼 배치해서 흥미를 더하는 전개도 일품이었고요. 억지로 비상식량에 손전등을 끼워넣어 전해 준 건 밤에 벌어질 사냥 시간에서 도망갈 때 효과적으로 쓰라는 이유였거든요. 손전등에 GPS가 장치되어 본부(?)에서 추적할 수 있다는 이유도 크고요. 하지만 쇼티와 패티는 이를 무기로 활용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악당들의 판단 착오였던 셈이지요.

완력이 쎄고 즉흥적인 계획에 강점이 있는 쇼티, 어느정도 추리력을 갖춘데다가 행동력도 탁월한 두뇌파 패티 캐릭터의 설정도 좋으며, 사냥이 시작된 후 둘이 머리를 짜내 위기를 탈출해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쇼티가 자동차들 휘발유를 이용하여 모텔에 불을 지르고, 앞서 설명드렸던대로 손전등을 활용하여 야간투시경을 무력화한 뒤 사냥꾼들을 처단하는 장면들은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처가 아버지 과거를 조사하다가 마크의 모텔을 찾은 뒤, 모텔과 10호실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둘을 돕게되는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크가 완벽하게 짜낸 거짓말을 하나씩 분석하여 거짓말임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특유의 추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요. '제 3의 인물'로 마크 일당과 사냥꾼들이 방심한 사이에 그들을 급습해서 처치하는 장면도 잭 리처스러워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친해진 변호사 캐링턴이 위험에 빠졌을거라는 추리도 잘못 짚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반면 리처가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는 과정은 별 재미는 없었습니다. 와중에 아버지가 과거 저질렀던 살인 사건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별다른 이슈가 되는건 아닙니다. 리처가 우연찮게 동네 건달을 혼내주고, 사과 과수원 주인 아들을 혼내주다가 킬러와 덩치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설정은 지루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무장한 사냥꾼 중 둘이나 쇼티와 패티에게 당해버리고, 마크가 혼자 돈을 차지하기 위해 패거리들을 총으로 쏴죽인 뒤 달아날 생각을 하는 등 마지막 사냥 장면은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을 줍니다. 특히 마크는 리처가 있다는걸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너무 안일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데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이 상황에서는 카렐을 죽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리처 시리즈가 아니라 쇼티와 패티를 주인공으로 한 별개의 작품이었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06/12/29

원 포 더 머니 - 제닛 에바노비치 / 류이언 : 별점 2점

원 포 더 머니
자넷 에바노비치 지음, 류이연 옮김/시공사


30세의 이혼녀 스테파니 플럼은 6개월 전, 근무하던 2류 란제리 업체에서 해고되었다. 전화도 끊겼고, 차도 빼앗겼고, 냉장고 안도 텅 비었으며 더 이상 팔 가재도구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빈곤상태에 빠진 그녀는 보석금 보증회사를 운영하는 사촌 비니를 찾아갔다. 그리고 보석금을 지불한 뒤 잠적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현상군 사냥꾼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첫번째 사냥감은 살인죄로 기소된 경찰 조셉 모렐리였는데 사냥은 꼬여만 갔고, 조셉 모렐리가 저지른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던 그녀에게 위험이 닥치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여행갈때 가지고 감직한 책"입니다. 쑥쑥 읽히는 맛이 있고 심각한 사건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유머가 전체적으로 흘러 넘치며 주인공인 스테파니 플럼의 궁상과 좌충우돌을 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지루할 틈이 없거든요.그만큼 스테파니 플럼이 엄청나게 매력적입니다. 궁상과 찌질함, 자기 합리화 등이 솔직담백하고 유쾌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첫경험 상대이자 사냥감인 조셉 모렐리, 변태 성욕자 권투선수 라미네즈, 스테파니의 가족과 주변인물 등도 더 이상 리얼하게 그리기 힘들 만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캐릭터 구성 능력은 정말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화장실용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실망이 큰데, 이유는 무엇보다도 "추리소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넘치지만 트릭이나 복선은 전무하고, 스테파니 플럼이 사건을 해결하는건 정말 기적과 같은 우연의 연속이라서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우연히" 찾아간 의심스러운 가게에서 용의자를 발견한다던가 스테파니도 모르게 숨겨놓은 녹음기가 사건을 모두 해결해 준다는건 '별 생각없이 쉽게 썼구나'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네요. 

비스무레한 캐릭터인 터프하며 솔직한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워쇼스키 시리즈를 보더라도(한권밖에 읽어보진 못했지만), 사소한 단서에서 진상을 더듬어 나간다는 추리소설의 얼개를 나름 충실히 따르고 있었는데 너무 비교가 됩니다. 물론 워쇼스키는 이만큼 웃기지는 않으니 쌤쌤이겠지만.... 

정신병 수준의 스밀라는 제껴놓더라도 다른 지나칠 정도로 생각이 많은 여자 탐정들, 예를 들면 아나스타샤 같은 주인공 보다는 확실히 캐릭터는 마음에 들어요.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요. 유머와 재치를 좋아한다면 마음 편하게, 킬링 타임용으로 읽으면 적당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 이상을 기대하긴 힘듭니다. 장단점이 확실한 만큼 취향에 따라 갈릴 것 같은데 저는 후속작을 읽을 생각이 들지 않네요. 이 작품 역시 다시 읽게 되진 않을 것 같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나저나 1995년 CWA (영국 추리 작가 협회)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이 해에는 그다지 걸출한 신인이 없었나 보다.. 하는 생각만 드는군요.

2022/11/27

로그 메일 - 제프리 하우스홀드 / 이나경 : 별점 2.5점

로그 메일 - 6점 제프리 하우스홀드 지음, 이나경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고위층 명사가 유럽 어딘가의 독재자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 진짜로 죽이려고 했던건 아니고, 심심풀이로 벌인 게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은 모진 고문 뒤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이 여전히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불명예를 걱정한 그는 국가의 도움을 받지않고 홀로 도주하여, 과거 추억이 어려있던 도싯 지방에 은신처를 마련하는데...
.

2차 대전 직전인 1939년 출간된 전설적인 서스펜스 스릴러.
사실 저는 제목만 보고 최첨단 IT 소재물이라고 착각해 왔었습니다. Log mail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알고보니 Rogue Male 이더라고요! 외톨이 수컷, 일본식 표현으로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와 비슷하겠지요? 일종의 사냥감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끔은 흉폭함과 야성을 드러내는 주인공에게 딱 들어 맞는 제목입니다.

하여튼, 여러 미스터리 랭킹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작품으로, 국내에는 상당히 늦은 2019년에 출간되었는데 명성답게 서스펜스, 긴장감은 발군입니다.
외국에서 망신창이 상태로 이름모를 낚시꾼, 그리고 영국 배의 일등 항해사 베이너의 도움을 얻어 귀국한 뒤, 도싯 지방의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에 위치한 은신처로 이동하기 위해 여행하는 부부로부터 사이드카가 달린 자전거를 구입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고, 은신처 위치가 좁혀질 위기에 처하자 경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른 곳을 은신처처럼 만들어 위장하고, 결국 외국 비밀 요원 퀴브-스미스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좁은 공간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과정 모두 읽는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러가지 잘 안배된 설정들도 긴장감을 더해줍니다. 대표적인게 주인공이 고문을 받아 '눈에 상처'를 입었다는 설정입니다.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탓에 원래 계획이었던 시골 마을에 몰래 숨어드는게 불가능해져버리니까요. 선글라스로 가려도 누구나 눈에 이상이 있다는걸 눈치채버리고 말거든요.
비교적 초반에 비밀요원 중 한 명을 죽이는 바람에 영국 경찰들에게도 쫓기게 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주인공의 눈 이상이 전국에 알려졌을 뿐더러, 외국 정보요원들 뿐만 아니라 영국 경찰들도 주인공을 체포하려 해서 이중고를 겪게 됩니다.

주인공의 실력과 의지, 인내력만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조력자 - 특히 미녀 - 를 만나 도움을 얻는 헐리우드 스릴러스러운 전개는 전무합니다. 처음 탈출할 때 외국인 낚시꾼과 일등 항해사 베이너가 선선히 도와주는 장면같이 운에 의지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허용 범위 안쪽입니다. 낚시꾼은 독재 반대파일 수 있으며, 베이너의 경우는 주인공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라는 설정 덕에 도와주었을 거라는 암시를 주는 식으로 합리적인 설명도 덧붙여져 있고요.

쫓고 쫓기는 대결 구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치밀하고 끈기있는 추적으로 주인공의 은신처를 알아낸 퀴브-스미스 대령은 라이벌로 손색이 없습니다.
더 놀라왔던건 만만치 않았던 영국 경찰의 수사력 묘사였습니다. 도싯 시골 숲 속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있던 주인공에게 거의 한끝발 차이로 육박해 올 정도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맞부닥치는 바람에 정면에서 도주극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대방들의 추적을 통해 원래 사냥꾼이었던 주인공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상황을 잘 알려주는 묘사들도 몰입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몇가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독재자 암살 시도가 그러한데요, 주인공은 일관되게 단지 자기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퀴브 -스미스에 의해 은신처에 산채로 감금당한 뒤에 갑자기 약혼했던 연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는 동기가 튀어나옵니다. 이럴거라면 처음부터 당당히 죽일 의도가 있었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이 남의 나라 지도자를 쏘려고 했다가 잡혔는데, 이게 왜 외교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게임에 불과했다는 말을 외국 정보부에서 선선히 받아들여서 사고사로 죽이려 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주인공은 상당한 고위층으로 보이기에, 당연히 좋은 협박거리(?)로 사용될 수 있었으니까요.

전체적으로 흥미로운건 사실이지만, 경찰 추적이 근처에 이른 탓에 가짜 은신처를 만든 뒤 그 곳에 숨어있다가 도주한 것처럼 꾸미는 장면은 과했습니다. 도주 경로와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경찰 바로 옆에 숨는 묘기를 부릴 것 까지는 없었어요. 은신처를 감추려다가 본인이 위기에 처하는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잖아요. 또 그렇게 잘 숨을 수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은신처에서 숨어 있는게 더 나았을테고요.
게다가 이 시도는 퀴브 -스미스에 의해 숨겨두었던 사이드카가 드러나, 은신처 바로 근처까지 퀴브 -스미스가 찾아왔을 때의 행동과는 반대라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퀴브 -스미스가 근처 농장을 다 뒤져서 오솔길이 은신처라는걸 알아냈다고 추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앞서 경찰이 나타났을 때 처럼 다른 곳으로 도주했다고 위장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도주했어야 했습니다. 시간도 충분했었고요. 하지만 은신처에 틀어박혀 숨어있는 방법을 택했다가 산채로 감금당하고 말지요.

주인공을 은신처에 가둔 퀴브 - 스미스가 바로 그를 죽이지 않고 회유하는 척 연기를 하는 장면도 이상했습니다.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를 영 모르겠더라고요. 영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한 목적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별로 대단한 서류가 아니라는건 주인공과 퀴브 -스미스의 대화로 이미 드러날 정도이고, 주인공 서명 정도를 위조하는게 그리 어려울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영국 정부와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도 21세기의 한국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명예가 예상된다는데, 도대체 무슨 불명예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주인공이 "사실 내가 아는 영국인 중에 그가 가져온 망할 문서에 서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거부하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고집 때문에 거부할 것이다."며 서명을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도 퀴브-스미스와의 마지막 대결이 아쉬웠습니다. 총이 없어서 고대 로마의 노포와 비슷한 무기를 직접 만들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퀴브 스미스가 환기구를 막았던 자루를 빼다가 주인공이 쏜 화살에 맞고 죽는건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주인공에게 총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환기구로 고개를 내민다는건 영 석연치 않았습니다. 물론 직전에 주인공이 서명을 하겠다며 퀴브-스미스를 구워 삶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총이 없다는걸 퀴브-스미스가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내용을 보강하던가, 아니면 퀴브-스미스가 예상하지 못한 무기를 사용하는 식으로 끌고가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최소한 주인공과 자웅을 겨룬 라이벌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명성의 이유는 잘 알 수 있지만, 지금 시점의 한국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낡은 느낌도 없지 않아서 감점합니다.
이런 작품은 아무래도 영화로 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과거 2번이나 - 그 중 한 편은 흑백 고전 영화 시대의 거장 프리츠 랑 감독이고, 또 다른 한편은 명배우 피터 오툴 주연 - 영화화 되었더군요. 곧 베네딕트 컴버비치 주연으로 다시 영상화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 기대되네요.

2024/09/29

수학, 인문으로 수를 읽다 - 이광연 : 별점 2.5점

수학, 인문으로 수를 읽다 - 6점
이광연 지음/한국문학사

인문학이 문학이나 철학 등 문과 계열 뿐 아니라 수학이나 건축 등 이과 계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청소년용 교양서. 수학이 인간 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학문이라는걸 여러가지 알기 쉬운 예제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딸 아이 논술 교재라서 겸사겸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중 수학 공부와 건축의 원리가 같다는 주장은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건물을 설계하는게 책의 목차라는 주장이요. 수학책에서 목차를 보면 앞으로 공부할 내용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조감도를 그릴 수 있고, 목차를 알면 이미 50%를 알고 들어간다는데 수학책에서 목차가 중요하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앞으로 목차를 좀 더 꼼꼼히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어요.
또 기둥이 튼튼해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데, 수학에서의 기둥은 기하와 대수이며 기하와 대수는 3,000년 전 고대 수학부터 통합되어 있었다는 주장과 매듭이론에 대한 쉬운 설명도 좋았습니다. 이론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왜 필요한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딸은 음악에 대한 설명을 좋아하더군요. 그 중에서도 피타고라스가 음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요. 저는 피보나치수는 장음정 6도와 단음정 6도로 귀로 들어도 아름답다는게 기억에 남습니다. 유튜브로 한 번 찾아보니 과연 그러하네요.
또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다양하게 피보나치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악절을 황금비로 나누는 건데, 이건 과연 무슨 효과가 있었을지 궁금해 집니다.
주식 시장의 엘리엇 파동 원리가 피보나치 수열이고, 블랙 숄즈 방정식은 확률 미적분 이론을 이용해 파생상품 옵션의 가격을 계산한 모델이라는걸 설명해 주는 부분에서는, 가난한 수학자가 이세계에 환생한 뒤, 그곳의 시장 경제를 가지고 노는 환생물이 떠올라 재미있었어요. 용(드래곤)을 파는 시장을 지배해서 수학자가 용왕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영화를 가지고 수학에 대해 알려주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설국열차 등을 예로 드는데, 이 중에서 바이러스 감염률 한계 이론에는 놀랐습니다. 100만 명으로 모수가 늘어나면, 정밀도 99%의 검사라도 무려 9,999 명이 잘못 판단된다는데 여태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에요.
그 외에도 사이클로이드 곡선은 직선보다 훨씬 빠르게 특정 물체를 이동시킬 수 있어서 겅사면에는 사이클로이드를 적용한다, 동물들, 독수리나 매도 땅 위에 있는 사냥감을 잡을 때 사이클로이드에 가깝게 목표물을 향해 곡선 비행을 한다는 이야기,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전형적인 황금비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금강비(5:7)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서양인보다 상대적으로 동양인이 키가 작아서 황금비보다 작은 비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자 모양에서 중국에서 결승법 - 끈을 묶어 수를 표시하는 방법 - 을 썼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지만 뒷부분 이야기는 억지가 심해서 아쉬웠습니다. 대표적인건 삼국지 속 계륵이 암호이며, 이건 수학이는 주장입니다. 암호가 수학일 수는 있지만, 계륵은 수학과는 관련이 없는 심리적인 말장난에 가까우니까요. 또 그 뒤에 이어지는 암호에 대한 이야기는 수학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다른 책에서 지겹게 많이 접혔던 내용이 대부분이라 실망스러웠어요.
김삿갓, 이순신과 조선 수군 이야기도 수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수군에 훈도라는 수군직급이 있고 그들이 각종 계산을 담당했다고 해서 그들이 수학자라는 말도 안되지요. 지금 육군의 관측병들이 모두 수학자인가요? 마방진 이야기도 분량에 비하면 별다른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그림 그리는 얘기도 황금비라든가 외상 예술 같은 건 뻔하고 대단한 수학적인 이론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카르타고를 세웠다는 디도의 문제라던가, 달리의 4차원 그림 같이 그림의 주제가 된 수학 문제를 설명하는게 훨씬 좋았습니다.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있어야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건질 내용이 없는건 아닙니다. 몇몇 주장은 와 닿기도 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학에 대해 어려워하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2026/05/09

정점 APEX (2026) - 발타사르 코르마우퀴르 : 별점 2점

사샤는 파트너를 잃고 깊은 상심에 빠졌다. 그녀가 무리하게 암벽 등반을 진행했던 탓이었다. 사샤는 슬픔을 잊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오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인마 벤을 만나 쫓기게 되는데...

샤를리즈 테론과 태런 에저튼이 주연을 맡았고, 호주의 거친 오지를 배경으로 인간 사냥의 표적이 된 주인공과 사냥꾼의 추격전을 그린 최신 서바이벌 액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샤를리즈 테론과 태런 에저튼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두 배우 모두 뻔한 캐릭터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하거든요. 덕분에 사냥감과 사냥꾼이라는 단순한 관계가 그런대로 볼 만해집니다. 추격전도 나름대로 두뇌를 쓰는 부분은 괜찮습니다. 초반부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사샤를 낚는 장면처럼요.

호주 오지의 풍광을 활용한 장면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인간의 체력과 판단력이 한계까지 시험받는데, 워낙 대자연이 압도적으로 묘사되어 화면상으로 제법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중반부까지는 어느 정도 긴장감을 느끼며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오지에 사람을 사냥하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있고, 주인공이 그에게 쫓기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설정이 지나치게 뻔한 탓이 큽니다. 사샤가 등산과 서바이벌에 능한 전문가라는 설정도 훨씬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야 했는데, 영화는 그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단순한 도주와 추격으로 채울 뿐입니다. 사샤가 지형과 등반 기술을 이용해 벤과 치열하게 맞서는 장면이 더 많았어야 했습니다.

뒤로 갈수록 긴장감과 재미도 떨어집니다. 초반에는 압도적인 자연환경과 인간 사냥이라는 설정이 결합하면서 어느 정도 몰입하게 만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지며 액션도 별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결정적 도주 장면의 설득력이 너무 부족해요. 귀를 물어뜯어 위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기대에 비해 너무 시시했습니다.

게다가 이어지는 결말은 아쉬움의 '정점'을 찍습니다. 다리를 다친 벤이 자기 목숨을 순순히 사샤에게 거는 듯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지금까지 사람을 사냥해온 인물이라면 더 집요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마지막 승부를 걸었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찌질한 악당으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는 살인마 벤에게서 미친 사냥꾼의 압도적 카리스마를 느끼기 힘들다는 이유도 한몫 단단히 합니다. 벤 역을 맡은 태런 에저튼의 연기가 아무리 좋아도, 어린아이 같은 인상과 왜소해 보이는 체격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이 역으로 마동석이 할리우드 데뷔를 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고, 시작 부분의 등반 장면과 호주 오지의 풍광을 살린 서바이벌 장면들은 중반부까지 볼 만합니다. 하지만 설정이 뻔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며, 사샤의 전문가적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단점 때문에 감점합니다. 비슷한 장르를 많이 본 관객에게는 새롭거나 강렬한 인상을 주기 어려운 그냥저냥한 킬링타임용 액션 영화예요. 굳이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8/04/29

매스커레이드 이브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매스커레이드 이브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한국 한정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스커레이드 호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몇 년 전 전편을 읽고 호텔을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 단편이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평을 남겼는데, 작가도 같은 생각이었던 걸까요? 이번에는 전편 시점에서 수년 전을 무대로 하고 있는 중, 단편집입니다. 전부 네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상계와 강력 사건이 적당히 섞여 있는 구성으로 모든 이야기가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는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주제를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은 좋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별로라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지만 "루키 형사의 등장" 편을 제외하면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힘든,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시리즈보다는 못한 범작입니다. 작가의 대단한 팬이 아니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은데,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면도 제각각"

신참 호텔리어 야마가시 나오미는 업무 때문에 투숙한 옛 연인 미야하라의 급작스러운 부탁으로, 그의 불륜 상대인 니시무라 미에코를 찾아 나서는데...

전편의 주역 중 한 명인 나오미가 신참 호텔리어로 등장합니다. 그녀의 과거사, 신참으로서 호텔리어의 사명감을 이야기하는 부분 등 전반적으로 젊음이 한껏 느껴집니다. 주제 의식을 잘 드러내는 결말도 괜찮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미야하라의 보스인 전 프로야구 스타 "대장" *오야마가 실제로 불륜을 저지른 장본인이라는 걸 알아내는 장면은 그럴듯 했지만, 미에코가 현재 어디 있는지를 알아내는 부분은 나오미가 우연히 본 룸서비스 주문 내용을 통한 것으로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탓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루키 형사의 등장"

전편에 나오미가 등장하니 이번에는 당연히 닛타 형사가 등장할 차례죠? 닛타가 신참 형사일 때 맡았단 요식업자 거부 다도코로 살인 사건을 다룹니다.

실제 사건만 놓고 보면 범인이 운이 좋아서 당장 체포되지 않은 것 뿐, 경찰 수사가 조금만 더 이루어졌더라면 금방 체포되었으리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다도코로 미치요의 요리 학원 수강생들에 대해 수사만 진행했어도 요코모리 히토시를 유력 용의자로 끄집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범행 현장의 특수성에 따라 범인이 자전거를 탔다고 추리한다던가, 현장의 담배 꽁초는 위장이고 어딘가에서 입수한 것이라는 추리는 꽤 그럴듯 했으며, 무엇보다도 다도코로 미치요가 남편 살해를 사주한 진짜 악녀라는게 드러나는 마지막이 아주 괜찮았어요. "입술 틈새로 분홍빛 혀를 살짝 내밀었다. 그 표정은 사냥감을 노리는 뱀을 연상하게 했다"는 일본식 팜므파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묘사, 남자를 조종하여 완전 범죄를 성공시키는 모습은 한 편의 등장으로 그치는 게 아깝다 싶을 정도였어요. 다도코로 미치요 캐릭터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면과 복면"

코르테시아 도쿄 호텔에 유명 신인 복면 작가 다치바나 사쿠라가 작업 때문에 투숙하자,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오타쿠들이 몰려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데...

핵심 수수께끼인 다치바나 사쿠라의 정체가 중년 아저씨가 아니라 그녀의 딸이라는걸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다는 문제는 큽니다. 때문에 두 명이 투숙한 상황이라는 진상을 쉽게 눈치챌 수 있고, 중년 아저씨의 외근과 편집자와의 통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의 소소한 수수께끼 역시 특별할 게 없습니다.

한마디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소품으로 쉬어가는 이야기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호텔 퀸시" 의 또 다른 에피소드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매스커레이드 이브"

닛타는 공대 교수 오카지마 살인 사건 수사를 위해 교통과에서 지원나온 젊은 여경 호즈미 리사와 팀을 꾸렸다. 유력한 용의자는 특허 사용에 따른 거대 이권이 얽힌 준교수 난바라인데, 그는 혐의를 전면 부정했다. 그러나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핑계와 함께 정작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는 제시하지 못했다. 사건 당일 난바라가 투숙한 호텔에서 일하는 나오미는 수사를 나온 호즈미 리사에게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는데...

표제작이자 작품집의 핵심인 1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중편입니다. 하지만 대미를 담당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이야기에 비하면 분량도 너무 길고요. 

우선, 범인이 난바라라는게 너무 명확한데 왜 구속 수사를 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교환 살인" 은 지금 시점에서는 그리 특별한 아이디어도 아닐 뿐더러, 난바라와 함께 투숙한 여성이 하타케야마 레이코라는 게 밝혀지면 구태여 교환 살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쉽게 해결될 사건이라는 점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이전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경찰 내부 DB에 남아 있지 않을리가 없잖아요? 경찰 내부에서 레이코가 유력한 용의자였던 이무라 유리 사건만 짚어내면 이 사건을 난바라와 엮어 생각하는 건 추리도 뭐도 아닙니다.
레이코 일당이 왜 약속한 날이 아니라 그 전날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합니다. 알리바이가 너무 완벽하면 의심을 살 수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지요. 이럴거면 차를 옮겨 하루의 시간을 벌 필요도 없었어요. 그냥 두었더라면 호즈미 리사의 말대로 지갑을 가져간 강도의 소행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아울러 난바라가 투숙했던 오사카 호텔에서 근무하던 나오미가 난바라와 레이코를 엮어서 생각하게 되는 향수 이야기는 작위적이기 짝이 없어요. 짙은 향수 냄새로 두 명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는 설정이야 말이 안되는 건 아니지만, 타월을 무심코 가지고 나가다가 돌려준다는 건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닛타 형사와 함께 짝을 이룬 명랑하고 단순하면서도 의욕 넘치는 호즈미 리사 캐릭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 문제라면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 (오다 유지)와 별로 다를게 없는, 수사 본부에 지원 나온 교통 경찰 캐릭터라는 겁니다. 그동안 너무 많이 보아 온 탓에 읽다보니 식상해 지더라고요. 차라리 호즈미 리사의 단순한 추리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는 식으로 끌어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지요. 이래서야 '캐리어'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패배 의식만 심어줄 뿐입니다.

이렇게 단점이 더 도드라지는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오미 - 닛타 컴비 시리즈로 만들기 위한 억지만 없었더라도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2020/01/19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2)

유럽 맛 여행 - 4점
나가라 료코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제목 그대로, 독일에 남편과 함께 유학 생활 중인 젊은 일러스트레이터가 유럽을 여행하며 맛 본 음식들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냥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무엇을 먹었다가 내용의 전부에요. 일상계 수준을 벗어난, 거의 식단 일기에 가까운 그런 내용이에요. 때문에 그 어떤 드라마적인 재미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맛본 요리, 음식들에 대한 맛 이외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니고요.

손으로 꼼꼼하게 그린 따뜻한 그림은 마음에 들지만, '만화' 보다는 인스타그램 요리 일기에 가깝습니다. 이야기가 없기에 만화로는 낙제점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꾼의 식사"

'지비에'라고 불리우는 사냥한 동물들의 고기를 요리해 먹는 만화로 이전에 읽었던 "산적 다이어리"와 유사합니다. 다만 "산적 다이어리"는 '사냥'이 주였던 반면, 이 만화는 '요리'가 주라는 차이가 있지요. 주인공 아키노는 대부분의 경우 직접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사냥을 도와주는 등으로 야생 동물 고기를 얻거나, 함정을 만든거에 걸려든걸 나누거나 하는 식으로 재료를 얻거든요. 이렇게 얻은 재료로 요리를 만드는 과정이 내용의 핵심입니다.

사슴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먹기 힘든 오소리 등이 재료라 상당히 흥미롭게 보았는데, "산적 다이어리"와 마찬가지로 맛은 대부분 호평이라 좋은 참고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소리 고기가 맛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 의심스럽고요. 그래도 냄새가 심하고 엄청 고생해서 손질해야 하는 등 (사슴 내장의 경우는 여덟번도 넘게 데치는 등), 어려움도 비교적 공정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산적 다이어리"보다는 낫네요.

깔끔한 작화, 악역으로 설정되어 있는 사냥꾼이자 야생 동물 손질, 요리의 달인 이쿠지노 캐릭터도 상당히 인상적이며, 아키노가 덫 사냥, 사냥감 해체, 몰이꾼 등을 거쳐 사냥꾼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도 나쁘지 않고요.

사냥이라는 주제 자체가 우리의 실생활과는 분리되어 있어서 현실감은 없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과 식욕과 나 1 - 6점
시나노가와 히데오 지음, 김동수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27세 여사원 히비노 아유미가 주말마다 산행을 떠나 산에서 온갖 요리를 해 먹는다는 내용입니다. 최근 유행인 캠핑에 요리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만화인 셈이지요. 등산과 요리 중 한 가지만 좋아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니 머리를 잘 썼네요.

등산 쪽 정보도 충실히 제공하고 있지만 저는 아무래도 요리 쪽에 관심이 갔는데, 처음에는 주먹밥과 라면에서 시작해서 뒤로 가면 갈 수록 오버스러운 온갖 요리가 등장하는게 포인트입니다. 심지어 일종의 수비드 조리법을 활용한 "로스트 비프"까지 등장하니까요.
산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상황을 겪으면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도 잘 살아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뎃셍력이 부족해보이는 작화는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좀 더 꼼꼼한 그림체였다면 내용이 훨씬 잘 살아났을텐데 아쉽습니다. 등산 상황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집에서 따라 해 먹음직한 요리가 별로 없다는 것도 단점이고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충분히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8/04/20

레이디 킬러 - 도가와 마사꼬 / 김갑수 : 별점 3점

주말 부부인 컴퓨터 전문기사 혼다 이찌로오는 평일에 도쿄에서 가명으로 여자들을 헌팅하여 시간을 보내는 일상을 보내며, 자신의 헌팅 이야기를 "사냥꾼의 일기"라는 노트에 자세히 기록해 놓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냥한 여성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혼다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냥 여성을 찾아갔지만, 그 여성마저 살해된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주요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오른 혼다는 여러가지 단서를 통해 정체가 드러나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변호사 하다나까와 신지는 혼다의 변호를 맡아 그의 무죄를 증명해 주기 위해 여러가지 조사에 착수하는데...

원제는 "사냥꾼의 일기"입니다. 도가와 마사코는 국내에 많이 소개된 작가는 아닙니다. 번역된 장편은 아마 이 작품이 유일할거에요. 단편은 몇편 더 있지만, 단편들과 이 작품은 분위기 자체가 많이 다릅니다. 단편은 일종의 괴기 환상 소설같은 작품들이 많이 소개되었고 완성도도 아주 별로거든요. 

그런데 단편들에 비해 이 작품은 제대로 된 추리물의 구조를 잘 따라가고 있어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일단 위에 간략하게 적어놓은 줄거리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분위기가 이색적입니다. 법정물도 아니고 사회파 수사물도 아니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완전범죄물도 아닌 중간 정도에 걸치는 중립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각 쟝르의 재미있는 부분만 잘 따다가 만든 느낌이 들 정도에요. 

전개도 나름 독특합니다.  전반부인 "사냥과 사냥감" 편에서는 "사냥꾼의 일기"의 저자(?) 인 혼다 이찌로오의 엽색 행각, 그리고 그가 서서히 함정에 빠지는 이야기를 상세하게 그리며, 후반부인 "증거의 채집" 편에서는 변호사 신지를 중심으로 혼다 이찌로우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한 수사 및 추리의 과정이 묘사됩니다. 1963년 작품 치고는 굉장히 신선한 아이디어라 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보면 얼마전 읽었던 "이와 손톱"과 좀 유사한 전개인데, 아예 두가지 이야기를 확 나눠 버린 과감함(?) 은 이 작품이 조금 더 돋보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치밀한 완전범죄 공작을 깨트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불꽃튀는 두뇌대결과 사소한 단서에서 밝혀지는 진상 등이 정교하게 묘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변호사 하다나까와 신지가 벌이는 약간의 조사로 중요한 단서들이 연달아 밝혀지고 있어서 경찰 수사의 헛점만 드러날 뿐이에요. 물론 1부에서 혼다가 너무나 명백하게 죄를 뒤집어 쓰는 바람에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조사가 어설퍼 보이는 것은 추리물에서는 큰 약점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 반전 및 진상이 결과적으로는 범인의 "자백"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기에 대한 설득력이 약간 떨어져 보이는 것 역시 단점입니다. 아무리 작품이 "헌팅" 에 뒤이은 붕가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지만 지나칠 정도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는 점도 부담스러웠고요. 솔직히 저는 이런 묘사 굉장히, 아주아주 싫어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반전, 범인의 고백과 "사냥꾼의 일기"를 통해 밝혀지는 반전, 사건의 진상은 괜찮습니다. 어설프고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괜찮다고 기억하게 만들어 주지요. 그만큼 반전 하나는 아주 좋았습니다. 엄마 친구 아들같은 혼다가 수렁에 빠지는 내용도 디테일하면서도 참 감정이입하기 좋았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가의 대표작인 "거대한 환영"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뭐, 취향은 좀 탈 것 같긴 하지만...

PS : 헌팅의 대상자 중에 작가를 희회한 듯한 "도다 마사꼬" 라는 인물이 나오는 것은 특이했습니다. 샹송가수였던 이력을 티내고 싶었나봐요^^

2015/05/26

산적 다이어리 1 - 오카모토 켄타로 / 주원일 : 별점 2점

산적 다이어리 1 - 4점
오카모토 켄타로 지음, 주원일 옮김/애니북스

저자 오카모토 켄타로가 고향인 오카야마 현에서 사냥꾼 생활을 하는 동안의 에피소드를 그린 에세이 만화.

사냥꾼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부터, 사냥꾼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고, 그 뒤 총기 면허를 따고 총을 구입하고, 총기 소지 허가를 신청하는 등의 과정과 실제 사냥 체험이 뒤섞여 전개됩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자 저자 오카모토 켄타로의 사냥 목적입니다. 그는 취미가 아니라 정말 먹으려고 사냥을 하는 인물이거든요. 첫 사냥물인 멧비둘기라던가 토끼, 오리는 그렇다쳐도 뱀, 까마귀까지 무조건 직접 요리해 먹습니다. 때문에 그래서 평범한 요리는 물론 살모사 구이(소금, 후추 살짝)라던가 까마귀 꼬치구이 같은 독특한 요리까지 등장하는데 모두 설득력이 넘칩니다. 맛 역시도 직접 먹어본 사람의 증언이니 마찬가지고요.

이런 동물들을 사냥하기 위한 사냥 과정도 상세한데, 사냥의 시작에서부터 사냥한 동물을 조리해 먹는 것까지 패턴은 동일하지만 단순 반복은 아닙니다. 사냥감에 따라 사냥법, 조리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추운 날씨 속 물에 빠진 오리를 건져 오는 것 같은 예상치 못한 변수도 생기고요. 이런 소소한 변화가 재미를 가져다 줍니다.

아울러 비록 크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총기인 공기총이라던가 사냥 방법에 대한 정보도 충실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입니다. 특히 까마귀 사냥을 위해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짜내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사냥보다는 사냥을 한 동물을 요리해 먹는, 와일드하고 독특한 구루메 만화로서의 재미가 더 컸지만요. 법적으로 한국과 다른 일본에서의 수렵 활동 이야기는 아무래도 와 닿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제가 관심이 있거나 흥미있는 분야도 아니고요.

그러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그림이 너무 별로에요. 아무리 에세이 만화라고는 해도 사냥, 요리가 중심이라면 그러한 소재에 걸맞는 디테일한 묘사는 기본이 되어야 할텐데 턱도 없이 수준 미달입니다.
또 정보 제공에만 충실할 뿐 별다른 재미요소가 없다는 것도 감점요인입니다. 한마디로 케이블 TV의 낚시 채널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본인에게는 무척이나 재미있고 신기한 경험이겠지만 TV로 그걸 재미있게 보는 시청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독특하긴 하나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과연 멧돼지를 잡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지만 후속권을 구입하게 될 것 같지는 않네요.

덧 : 오카모토 켄타로가 한국 사람이라면 청설모를 사냥해도 요리해 먹었을 것 같은데 과연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2023/09/17

전래 미스터리 - 홍정기 : 별점 1점

전래 미스터리 - 2점
홍정기 지음/몽실북스

DC인사이드의 추리소설 갤러리에서 괜찮은 한국 추리 소설이라고 누군가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된 작품.

결론부터 말하면, 대실망이었습니다. 완성도가 지나치게 낮은 탓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수준 이하에요. 전래 동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에서 '변태 스토커', '알리바이', '스위치' 라는 말이 나온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고증은 둘째치고서라도 문체, 묘사라도 고전처럼 가져갔어야 했습니다. 잔인하고 자극적인 묘사가 쓸데없이 많은 것도 불쾌했으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어요. 
고전을 모티브로 잔혹함을 버무렸다는 점에서 한 때 유행했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시리즈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의 괴담물인 <<삼개주막 기담회>>와 비교해도 그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고요. <<삼개주막 기담회>>는 이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에 비하면 노벨문학상 감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아마츄어가 어딘가 커뮤니티에 올렸던 반 장난스러운 글이 출판된 걸로 보여지는데, 결과물 수준에 대해서는 출판 담당자의 책임도 커 보입니다. 최소한 어느정도 완성된 글로는 보이게끔 방향을 알려줬어야 했어요. 뭐 지금 말해봤자 별 의미는 없겠지만요. 앞으로 이 작가, 이 출판사 책을 두 번 다시 읽어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콩쥐 살인사건>>
콩쥐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팥쥐가 원님과 결혼하기 위해 발목을 스스로 자른다던가, 원님의 칼에 언년이 머리가 토막난다단가, 마지막에 팥쥐 목이 배달(?)되어 오는 등 쓸데없이 잔인한 묘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급작스럽게 언년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트릭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핵심 트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팥쥐가 도깨비 감투를 쓰고 방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트릭, 또 하나는 쥐가 언년이의 손톱을 먹은 뒤 언년이로 변신했다는 트릭이지요. 그러나 도깨비 감투 트릭은 창문이 작아서 어차피 성립할 수 없었고, 쥐가 언년이를 대신한 알리바이 트릭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쥐를 변신시킨게 아니라, 마침 쥐가 변신한걸 보고 즉흥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말이 안됩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니까요.
단서 제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콩쥐가 죽은 어머니로부터 기이한 보물을 물려받았고, 그 덕분에 계모가 시킨 말도 안되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정도만 앞에서 설명될 뿐입니다. 이런걸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는건 말도 안됩니다.

고전 설화 속 설정을 트릭으로 써먹는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과물은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나무꾼의 대위기>>
사슴과 사냥꾼이 짜고 선녀 날개옷을 훔치도록 유도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극적인 반전도 생기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이 관음증 환자일 수 있다는 설정은 워낙에 흔해서 새로울게 없었습니다. 금도끼 은도끼 신령이 갑자기 나오고, 탐정역으로 토끼가 나오는 등의 뜬금없는 전개는 황당했고요. 탐정역인 토끼는 이 모든게 나무꾼을 범인으로 몰기 위한 산신령까지 포함된 음모의 결과라는데, 그 때문에 산신령이 범인 선녀, 나무꾼, 사슴을 참살하는 결말도 영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옥황상제 앞에서의 공식 재판도 아니었으니, 그냥 나무꾼을 죽이고 거짓말로 고해 바치면 되는게 아니었을까요? 이런 연극을 꾸밀 이유가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굶주린 사냥꾼이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고팠다면 애초에 사슴을 죽여서 잡아먹었어야 하잖아요?

추리적으로도 엉망입니다. 범인 선녀가 물 속에서 죽은 선녀 다리를 끌고 움직이는 척 해서 옮긴 뒤, 온천의 뜨거운 열로 시체가 사후 강직이 풀리는걸 이용하여 스스로 주저 앉는것처럼 꾸몄다는 트릭인데, 만화에서도 써먹기 힘들겁니다. 뜨거운 물 속에 숨느라 갈대를 입에 물었다는 디테일도 유치하기 짝이 없고요. 애초에 사슴이 말하고, 선녀가 날아다니는 세계관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트릭을 쓴다는게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해와 달>>
떡장수 아주머니가 식인범에게 사로잡혀 산채로 먹히는 장면은 잘 그려냈습니다. 식인범의 설정도 꽤 탄탄하고 무서웠고요. 마츠모토 세이초의 <<전골을 먹는 여자>>를 떠오르게 만드는데, 그만큼 설득력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식인범이 어미의 머릿가죽을 뒤집어쓰고  찾아와 딸을 속이려 하는 장면, 그 뒤 정체가 탄로난 식인범이 딸과 사투를 벌이는 부분도 괜찮았습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크리처물인 <<사냥감>>이 떠오르는 박진감넘치는 묘사와 전개가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러나 해와 달이 쌍둥이고, 해는 타고난 살인마였다는 진상은 영 아니었습니다. 시간대별로 풀어가는 전개도 불필요했고요. 착한 남매가 기지를 발휘하여 식인범을 없애는 식으로 - 썩은 동아줄을 활용한다면 더 좋고 -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나마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연쇄 도살마>>
보름이 될 때마다 집의 가축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고, 큰 아들 일남은 막내 미호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먹었다고 하는데...

여우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 먹는다는 이야기를 추리적으로 풀어낸 이야기. 
알고보니 일남이 진범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문제 투성이입니다. 우선, 가축들을 차례로 죽이고, 나중에 부모 형제까지 죽였다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한 번에 다 죽이면 되잖아요? 뭐하러 땅을 파고 몸을 숨겨가면서까지 범행을 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미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이유도 없어요.
미호의 짓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미호의 신발을 신고 발자욱을 남긴건 괜찮았지만, 미호 시체를 소의 항문을 통해 쑤셔 넣어 은폐했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추리물 흉내를 조금 내기는 했지만 설득력 떨어지는 전개로 일관하는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스위치>>
나는 백정의 아들로 파란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눈을 누군가 나뭇조각을 댓가로 가져갔다. 나는 나뭇조각이 타인의 신체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 능력이 마을 주민들을 기괴한 모습으로 죽게 만든 연쇄 살인극의 진상이었다.

스위치라는 표현을 천연덕스럽게 쓴다는 것부터 황당했던 이야기. '혹부리 영감'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신체 전환(?) 설정은 그래도 볼 만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죽기 전에 뇌를 바꿨는데, 갓난 아이가 되어서 실패했다는 황당한 결말로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한 10살 정도 되는 아이하고 뇌를 바꿨으면 될 것을 왜 갓난아이랑 바꿨는지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연한걸 모를리 없을 정도로 능력을 계속 써 왔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초반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의 연쇄 살인극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나간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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