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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

2026/08/16

채권추심원(2026) - 수라퐁 플런상: 별점 2점

눔은 과거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의 채권 추심원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채권 추심 중 벌어진 살인 사건으로 10년 동안 복역했고, 출소 후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조용히 살아가던 눔이 알고 지내던 노점상인 할머니와 손녀가 사채업자 포에게 잔혹하게 당한 뒤 눔은 포를 죽일 결심을 하는데...

넷플릭스로 감상한 태국산 액션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뻔합니다. "아저씨"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잘 알지도 못했던 소녀를 위해 남자가 목숨을 걸고 복수한다는 이야기의 변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물론 익숙한 이야기를 사용했다는걸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뻔한 이야기라도 복수의 과정과 액션을 얼마나 멋지고 처절하게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니까요.

문제는 정작 그 액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좋게 보면 실제 싸움에 가까운 실전 액션이지만, 나쁘게 보면 동네 막싸움처럼 보여서 영 폼이 나지 않습니다. 눔이 전문 킬러나 특수부대 출신이 아니라 전직 채권 추심원인 만큼 엄청난 전투 능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복수극의 핵심 볼거리라고 할 만한 장면은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액션을 추구했다고 해도 영화적인 쾌감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었어요.

악당 포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눔과 마지막까지 맞서야 하는 인물인데 무력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고, 비주얼에서도 위압감이 부족합니다. 주인공의 복수가 강렬하게 느껴지려면 그만큼 상대하는 악당도 강력해야 하는데, 최종 보스라고 하기에는 기생 오래비 느낌이라서 여러모로 격이 떨어집니다. 눔의 액션과 포의 존재감이 모두 약하다 보니 절정부의 액션도 시시하고요.

불필요한 설정도 많습니다. 눔이 뇌종양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눔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경찰인 콩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콩은 그냥 정의로운 경찰로 설정하고, 상관의 비밀 지령을 받아 수사하다가 그 상관이 실제로는 악당 포의 끄나풀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정도로 이야기를 끌고 갔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여러 사정을 추가하다 보니 인물은 복잡해졌지만 그만큼 이야기가 풍성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처음 접해 본 태국 영화인데 생각보다 굉장히 만듦새가 좋다는 점에는 크게 놀랐습니다. 연출은 물론 촬영과 편집, 음악까지 어느 하나 크게 빠지는 부분이 없는 웰메이드 영화더라고요.

하지만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체적인 만듦새는 좋지만 액션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까지 뻔한데 액션의 쾌감도 부족하다 보니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26/06/06

리스타트 (Boss Level) (2021) - 조 캐너한 : 별점 2점

전직 특수부대원 로이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체불명의 암살자들에게 쫓기고, 죽은 뒤 다시 같은 날 아침으로 돌아오는 현상에 직면했다. 전처 젬마가 개발한 장치 때문이라는걸 알아낸 로이는, 젬마를 상관 벤터로부터 구하고 루프와 지구 파멸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하루가 반복된다는 루프물 영화는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소스 코드"를 보았었지요. 

뻔한 설정이지만 이 영화만의 큰 특징은 있습니다. 반복되는 하루를 끊임없는 액션의 무대로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비슷하지만, 이 영화는 현재 시점을 무대로 복선과 음모는 거의 없이 시종일관 액션으로만 밀어붙인다는게 차이점이에요. 맨손 격투와 총격전은 물론이고, 맨몸 스턴트, 자동차 추격, 검술 액션까지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액션은 다  등장합니다. 주인공 로이가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들과 악당들을 해치우기 위해 죽어가면서 공략법을 익히고 결국 그들을 극복해 나가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선보이는 프랭크 그릴로의 외모는 그야말로 완벽합니다. 촬영도 화끈하며 적절한 유머와 합도 좋고요.

일종의 게임같은 '공략' 세계관은 전체 전개에서도 일관되게 선보입니다. 루프가 계속되면 세계가 붕괴하기 때문에, 로이는 살아남거나 악당들을 없애는 대신 잠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아들과 마지막 하루를 보내기로요. 그런데 로이는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던 전처 젬마가 그날 아침까지는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로이는 다시 하루를 공략하는데, 이번에는 단순히 적들을 처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젬마를 최대한 빠르게 구해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거든요. 이렇게 단계별로 공략이 진행되며 단서와 조건이 추가된다는 점에서 원제 "Boss Level"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습니다.

또 아예 복선과 음모가 없지도 않습니다. 로이가 암살자들에게 쉽게 추격당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전날 치위생사를 만났는데, 그때 치료받은 이빨에 추적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대단히 놀라운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액션 중심 영화에서 제법 흥미로운 요소로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하기는 좀 부족합니다. 우선 앞서 액션으로 밀어붙인다고 했는데, 암살자들 개개인과의 대결이 대부분이라서 규모가 많이 작습니다. 루프물답게 반복되는 장면도 많고요. 

또 중반부에서 아들 조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부분은 조금 거슬립니다. 영화 전체가 쉴 새 없이 액션을 몰아치다가 갑자기 멈추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장면이 후반부 선택과 연결되기는 하지만, 화끈하게 달리던 액션 영화로서의 기세를 잡아먹는건 사실이에요.

배우들의 활용도 아쉽습니다. 프랭크 그릴로를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이름값에 비해 크게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멜 깁슨은 악역으로 등장하지만 별다른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왕년의 대배우가 이렇게 몰락했나 싶은 안타까운 마음만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신선함보다는 액션의 물량과 속도로 밀어붙이는 킬링타임용 루프물입니다. 저는 운동할 때 감상했는데 적당했어요.

2026/05/22

맨 온 파이어 (2026) - 카일 킬렌 : 별점 2점

전직 특수요원 존 크리시는 멕시코에서 벌어진 참혹한 작전 실패로 동료들을 모두 잃은 뒤 제대했고, 그 충격으로 심각한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삶의 의지를 잃고 자살까지 기도했던 그의 재기를 위해, 옛 동료 레이번은 브라질에서 운영 중인 자신의 보안 사업에 크리시를 합류시켰다.

하지만 크리시가 브라질에 도착한 직후, 대규모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레이번의 가족을 포함해 300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레이번의 딸 포만이 우연히 외출 중이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문제는 포가 테러범의 얼굴을 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범인들은 증인을 없애기 위해 포를 노렸고, 그녀를 향한 공격이 잇따라 일어났다.

크리시는 포를 지키고 레이번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거부했고, 홀로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며 포를 위협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데...

A. J. 퀸넬의 소설 '크리시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입니다. 원작 1편, 2편을 참조했다고 하네요. 넷플릭스로 감상하였습니다.

우선 주인공 크리시의 비주얼은 꽤 마음에 듭니다. 소설 속 크리시를 영상으로 옮기면 딱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칠고 무거우며, 어딘가 망가진 듯한 분위기가 잘 살아 있습니다. 단순히 멋있는 전직 요원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와 피로를 몸에 달고 사는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외형만 놓고 보면 영화 버젼의 덴젤 워싱턴보다는 더 설득력이 느껴집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크리시를 단순한 힘 캐릭터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 속 크리시는 상황을 읽고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지능적인 인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카세트테이프에 약간의 물질을 묻힌 뒤, 그것을 생화학 공격으로 오인하게 만들어 습격의 기회를 만드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설득력도 높으며, 이런 식의 해결 방식은 다른 콘텐츠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것이라 아주 신선했어요.

하지만 이 장점은 단점과 연결됩니다. 크리시가 지능적인 인물로 활약하는 것은 좋지만, 그 대신 기대했던 액션은 많이 아쉬운 탓입니다. "퍼니셔"같은 원맨아미식 활약을 기대했는데 영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의 액션도 크리시가 PTSD를 심하게 겪고 있다는 설정 때문에 중요한 순간마다 무너지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줘서 답답합니다.

크리시가 상처 입은 인물이라는 설정 자체가 나쁜건 아니에요. 문제는 이 설정이 액션 장르의 재미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겁니다. 복수극이라면 분노가 터져나오며 악당들을 쓸어버리는 통쾌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끝까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이야기도 많이 진부합니다. 브라질 대통령이 흑막이라는 전개는 초반부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전의 맛은 많이 약합니다. 그렇다고 중간 과정이 치밀하지도 못하고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궁지에 몰렸는데, '태픈이라면 자기가 죽었을 때 진상이 폭로되도록 안배했을거다. 그러니까 태픈만 죽이면 된다!'는 급전개는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에요. 이런 이야기라면 태픈이 바이크 운전자이자 적의 편이라는걸 알아챈 뒤 바로 결말로 달리는 식으로 짧게 압축했어야 합니다. 전체 분량 중 절반 이상은 덜어내도 이야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거에요.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장면들도 작위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포가 숨어 있던 빈민촌에서 악당의 하수인이 도주하다가 우연히 포를 마주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연에 기대어 위기를 만드는 장면이 반복되니 긴장감이 생기기보다는 짜증이 먼저 납니다. 더구나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포의 답답한 행동을 부각하는 쪽으로 이어집니다. 보호받아야 할 인물인데도 호감이 쌓이기보다 사건을 더 꼬이게 만드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크리시의 외형과 몇몇 아이디어는 괜찮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원작이나 기존 영화판에서 기대했던 처절한 복수극, 압도적인 응징, 크리시 특유의 무서운 존재감을 생각하면 실망이 더 큽니다. 크리시라는 이름을 가져왔지만, 정작 보고 나면 전혀 다른 작품을 본 느낌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이지만, 크리시 팬에게는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2026/01/23

수상탑의 살인 - 김영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년간의 연구 끝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지구환경과학부 전 교수 박종호는 거액의 돈을 들여 동해 바다에 스스로 떠 있일 수 있는 거대 건물인 수상탑을 만들었다. 

종호는 특별히 선정한 몇몇 사람들을 수상탑으로 초대했는데, 초대한 당일 수상탑에 폭우와 강풍이 덮쳤고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유일한 탈출 수단인 배마저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탑 정원 벤치에서 무언가에 찔려 죽은 종호의 딸 가온의 사체가, 종호의 잠긴 방 안에서 종호가 목이 베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건 해결을 위해 마침 지도 교수와 함께 수상탑에 방문한 이론입자물리학 전공 대학원생 한규현이 탐정으로 나서는데...

"법의 체면"에 이어 한국 추리 소설은 올해 벌써 두 번째네요.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선정하는 제41회 한국추리문학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국내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문, 정통 본격 미스터리를 정면으로 내세우는게 특징입니다. 특히 트릭은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밀실 트릭과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플랫폼과 밸러스트 등을 이용해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기묘한 구조의 수상탑 설정과 잘 결합되어 있거든요. 이 설정과 수상탑 방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단단한 문, 기묘한 발코니 여닫이 구조가 트릭의 핵심이고요. 

박종호 사건에서 범인 가온은 범행 당시 수상탑을 바다 밑으로 가라 앉힌 뒤, 자기 방에서 5층 종호 방 발코니로 떠 갔습니다. 종호가 놀라 발코니로 나왔을 때 종호의 목을 칼로 그어 살해했고요. 한규현 등이 현장 조사를 했을 때 발코니 문은 열려 있었지만, 5층에서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 없어서 밀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1층과 다름 없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종호의 애인 승희 살인 사건은 더 대담합니다. 가온은 약간의 조작(화약 폭발?)으로 승희 방문이 열리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승희는 욕실 비상구로 탈출하려고 했는데, 위층인 3층 내부는 탑이 가라앉은 탓에 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상구를 열자, 4m의 물기둥이 승희를 직격해 사망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약간의 특수 설정을 활용한 본격물적인 트릭은 꽤 괜찮습니다. 추리를 위해 필요한 정보와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수상탑도 본격물 무대로는 완벽합니다. 외부와 단절된 클로즈드 써클이며 그 자체가 트릭의 핵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요. 이런 설정은 그간 한국 작품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부분이라서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소설로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전개가 느리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약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한규현은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너무 평범합니다. 심약하고 수동적인 성격이고, 유머 감각도 전무하다시피해서 이야기를 이끌 만한 매력이 없어요. 독특한 공간과 어울리는 인물이 하나 쯤은 필요했지만, 그런 역할을 해주는 캐릭터는 끝내 등장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도 과도하게 많습니다. 석승준 교수, 대학원생 박규리, 음모론자 태용제는 이야기에서 실질적인 역할이 거의 없습니다. 사건 해결에도, 긴장감 조성에도 기여하는 바가 없고요. 분량만 늘리는 인물들로 빼는게 더 나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동기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자신이 후원하던 아이가 아버지의 실험으로 죽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살의를 품는다?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종호와 승희가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차별했다는 설정도 앞부분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요. 동기는 뒤늦게 억지로 덧붙여진 느낌입니다.

그리고 트릭은 나쁘지 않은데, 세세한 부분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우선 승희 사건은 가온이 사망한 뒤 일어났는데 누가, 어떻게 수상탑을 침수시켜 트릭에 사용될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물론 가온이 종호 사건을 일으킬 때 3층도 침수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 경우 다음날 범행이 발각될 우려가 있습니다. 생존자들이 범인을 찾기 위해 탑 전체를 수색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종호가 수상탑이 아예 가라앉을걸 예상하고 수상탑의 발코니와 문을 침수에 대비하는 형태로 만들었다는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수상탑이 가라앉은 건 가온이 완전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억지로 만든 상황입니다. 극한 상황을 고려하여 첫 방문한 한규현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설비를 갖출 이유는 없습니다. 
이런 거대 구조물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가 손쉽게 휴대폰 앱으로 가라앉히고, 폭탄으로 보트를 폭파시키고 단단한 문을 봉쇄했다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아무리 천재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비현실적이에요.

무엇보다도 범인 가온이 종호 방에서 탈출하다가 청새치의 습격으로 죽었다는 진상은 솔직히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니까요. 실제 사례를 좀 찾아보아도, 낚시 중이거나 배 위에서 잡은 청새치의 몸부림에 찔려 죽은 경우는 있어도 바다에서 공격받아 죽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불빛에 돌격한다는 습성도 없고요. 불가능 범죄를 위해 억지로 만든 설정에 불과합니다.
이후 가온의 시신이 부서진 수상탑의 정원 벤치 위에 놓여 있었다는 결과도 우연입니다. 시체가 떠내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트릭을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한건 큰 감점 요소입니다.

정보 제공이 지나치게 공정한 탓에 독자가 진상을 추리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탑'의 기묘한 설정이 트릭에 사용되었으리라는걸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본격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과 지적인 쾌감을 오래 느끼기는 힘듭니다. "유리탑의 살인"처럼 나름의 반전이라도 선보였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국 추리 소설로는 보기 드문 본격물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분량을 줄이고 밀도를 높였다면 훨씬 나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2026/01/03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5) - 드니 빌뇌브 : 별점 3.5점

FBI 요원 케이트는 CIA 작전 참여를 명령받고 책임자 맷과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를 만났다. 그녀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맷과 알레한드로의 수사에 위협을 느꼈지만, 사명감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선을 넘은 소노라 카르텔을 응징하는게 아니라, 그 세력을 메데인 카르텔에게 귀속시키는게 목적이었다는걸 알게 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2015년작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명성만 익히 듣고 그동안 보지 않았었는데, 와 정말 잘 만든 영화더군요. 특히 연출이 압도적입니다. 특수 효과나 과도한 액션 없이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솜씨가 대단한 덕분입니다. 절묘한 구도 및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미장센, 배우들의 의상, 절정부 터널 진입 씬에서의 야시경 등 모든 디테일이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며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고요. 그야말로 '삭막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건조한 멕시코 국경 지대 풍광 묘사도 좋습니다. 

맷과 알레한드로의 진짜 목적을 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알레한드로의 복수심을 설득력있게 전개한 각본도 좋습니다. 정의롭지만 힘이 없고 방관자에 머무는 케이트, 강한 힘으로 불법이면서 강요된 정의를 행하는 맷, 힘을 이용하여 복수를 달성하는 알레한드로라는 등장인물별 설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케이트 역의 에밀리 블런트는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의로운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강한 마초 미국'을 상징하는 맷 역의 조시 브롤린도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요. 무엇보다도 정의를 넘어선, 치외법권의 '시카리오(암살자)'인 알레한드로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는 복수심과 고독함, 그리고 전략가로서의 냉철함과 충분한 무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 일가족을 모두 죽인 뒤, 케이트에게 나타나 모든게 정당했다는 서류의 서명을 강요하는 장면에서 두 명배우의 불꽃튀는 연기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액션 쪽은 다소 심심합니다. 총격전이나 대규모 액션보다는 심리적으로 긴장하게 만드는 전개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액션도 '상상력'에 의존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고요. 주인공 케이트가 관찰자이자 이용당하는 인물로 머무는 탓도 큽니다. 그녀의 능동적인 활약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때문에 액션에서 느껴지는 쾌감이나 재미는 전무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맷과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작전 내용을 숨긴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작전이 불법이라서 숨겼다? 하지만 이 작전은 대통령급의 결정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현장 요원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 설정은 말이 안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반 협박으로 불법이 아니었다는 서류에 서명하게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더욱요. 말 잘 듣는 FBI 요원에게 작전에 협력하라고 설득하는게 훨씬 쉬운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임에도 예술성을 갖춘 보기드문 수작입니다.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이라는 뻔한 소재를 통해서 국가의 폭력성과 목적의 정당성을 묻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데 놀라게 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0/26

디스펠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구수영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벽 신문 담당이 된 초등학교 6학년 사쓰키, 미나, 유스케는 마을 오쿠사토정에 전해 내려오는 ‘7대 불가사의’의 수수께끼를 풀어 기사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쓰키에게는 1년 전 살해당한 사촌누나 마리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목적도 있었다. 마리코가 죽기 전 ‘6개의 불가사의’라는 괴담 글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쓰키는 벽 신문 취재를 핑계로 오컬트 애호가 유스케의 협조를 얻기 위해 벽 신문 담당으로 끌어들였다.

사쓰키는 논리적 관점, 유스케는 오컬트적 관점으로 괴담과 사건에 대해 추리하고, 추리 애호가 미나가 객관적으로 추리를 판단하기로 협의한 뒤 세 사람은 취재와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괴담이 오래 전 마을과 관련된 거대한 비밀, 그리고 '나즈테의 모임'이라는 조직에 대해 폭로한다는걸 알아내는데...

하무라-겐자키 컴비가 활약하는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유명한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최신작입니다. 괴담, 호러 및 오컬트와 추리를 엮고 있는 점에서 미쓰다 신조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리커시블"도 유사하다고 느껴졌고요. 몰락해가는 시골 마을, 마을에 전해지는 전설과 현재의 사건이 엮이는 전개,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요. 

하여튼, 무슨 작품을 떠올렸건 이 작품만의 확실한 장점, 차이점은 명확합니다. 마리코 언니가 남긴 '6개의 불가사의' 이야기마다 숨겨진 진상을 알아내면, 마지막에 '일곱 번 째 불가사의'인 마을에 얽힌 비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6개의 불가사의 각각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오쿠사토정 ‘6개의 불가사의’

첫 번째 불가사의 - S 터널의 동승자 :
내용 : 산 중턱 S터널에 놀러간 학생들 중 터널 끝까지 걸어간 세 명을 제외한 한 명이 차 안에서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S터널은 일찍부터 '소몬' 터널로 알려져 있었는데, 소몬 터널은 휘어져 있어서 터널 끝에서 차가 보이지 않는다. 즉, S터널은 소몬 터널이 아니라 쭉 뻗은 사쿠라즈카 터널이었다. 이야기는 마리코 언니가 죽기 전날 사쿠라즈카 터널 안 멈춰있는 차에서 급사한 진케이 대학 교수 사건을 의미한다.

두 번째 불가사의 - 영원한 생명 연구소 :
내용 : 폐허가 된 신흥 종교 시설을 방문했던 학생들이 차례대로 무언가에 씌워져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영원한 생명 연구소는 종교 단체 시설로 사용하기 전에는 반도 정신 병원 건물이었다.

세 번째 불가사의 - 미시사 고개의 목이 달린 지장보살 :
내용 : K가 저주받은 목이 잘린 지장보살을 본 뒤, 누군가 K의 집을 찾아왔고 그는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누군가'가 정사무소, 병원, 도서관, '나즈테'에서 왔다고 소개하는 말에서 '나즈테의 모임'과 그들이 근무하는 직장을 알려준다. 또한 이 이야기는 K의 시점과 '그림자 괴물'의 시점이 교차되는 서술 트릭물이기도 하다. 

네 번째 불가사의 - 자살 댐의 아이 :
F는 면허를 따자마자 자살의 명소인 댐 수문 전망대로 향했다. 그곳 전화부스 전화기에 적혀있던 번호에 장난삼아 전화를 걸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숨겨진 진상 : 916-7O62라는 전화 번호의 의미. 숫자 0이 아니라 영문 대문자 O라는게 핵심이다. 다섯 번째 불가사의와 연결하면, 이건 책의 분류번호와 페이지이다.

다섯 번째 불가사의 - 산할머니 마을 :
내용 : 시어머니를 산에 버려 죽게 만든 며느리 가족은 장례식에서 이상한 아이를 본 뒤, 한 명씩 차례대로 죽었다. 결국 의식을 주관하던 절의 주지스님까지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할머니가 쓴 관용구 - 날개 돋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등을 지다 - 를 통해 '책'을 주목하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과거 계획을 무시했던 채굴 때문에 수십 명이 죽은 광산 사고가 있었고, 광산 마을에서도 연이어 사람이 죽거나 정신 이상이 생기는 비극이 있었다는게 드러난다.

여섯 번째 불가사의 - 우물이 있는 집 :
내용 : 오래 전, 후카자와무라라는 마을은 집마다 있는 우물을 통해 이상한 돌림병이 돌았다. 우물에서 무언가를 본 정사무소 직원에 의해 마을은 댐이 생긴 뒤 수몰당했다.
숨겨진 진상 : 정사무소 직원은 '열 가지 약속 중 단 한 가지'를 지키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를 '녹스의 십계'에 빗대면, 화자인 정사무소 직원이 범인이거나 오컬트적 존재인 신이 실존한다는걸 알려준다. 


이렇게 괴담들 진상을 풀어내면서 점점 스케일이 커져가는 전개도 흥미롭고, 단순히 증언의 오류를 찾아내는 수준을 넘어 서술 트릭이나 리들 스토리 형태, 심지어 녹스의 십계까지 활용하는 추리적 장치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추리물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어서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괴담의 진상뿐 아니라 마리코가 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설득력 있었습니다. 괴이가 사람들의 찬미를 통해 힘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축제를 연기했다는건데, 앞부분에서 교수가 목공소에서 축제 용품을 부쉈던 장면, 시바타 할아버지가 북이 이상했다고 했던 말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단서로 공정하게 제시됩니다.

유스케의 시점으로 보여지는 오컬트적인 묘사 역시 인상적이며, ‘나즈테의 모임’이 은근히 아이들을 협박하고, 더 이상 진상 조사를 이어갈 수 없도록 만드는 장면은 꽤 섬뜩했습니다. 이야기 전반에 은근한 공포를 깔고가는게 꽤 매력적이었어요. 아이들 시점의 묘사들, 성장기로 보아도 흐뭇한 설정과 전개도 마음에 들고요. 아이들이라서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 - 늦은 시간까지 멀리 돌아다닐 수 없음, 자유롭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음 등 - 도 적절히 활용됩니다.

하지만 일찍이 '괴이'가 후카자와무라 사람들을 희생시켜 힘을 모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마을의 신관 가문 출신 무녀, 정사무소 직원 등이 힘을 합쳐 '나즈테의 모임'을 결성했다, 조력자인줄 알았던 사쿠마가 괴이였다는 진상과 사쿠마와의 대결이 펼쳐지는 결말은 아쉽습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이형 호러 괴담으로의 방향 전환이 급작스럽고,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괴이가 초등학생들을 포함한 인간들에게 패배한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왜 유튜버와 시바타 할아버지를 죽였는지 모르겠고, 인간의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는 제약 조건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제공되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에 비하면 무게감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미쓰다 신조 쪽이 훨씬 더 무섭고, 그 존재에 대한 설명 역시 더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미쓰다 신조 작품에서 괴이의 존재는 여운을 남기지만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등장하는 모든 기묘한 사건을 괴이와 무관하게 어떻게든 설명하지요. 이 작품처럼 명백하게 괴이가 등장해서 모든걸 정리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나즈테의 모임'이 초등학생들을 방관하는 설정도 이상했습니다. 어느 정도 알아냈다면 바로 진상을 알려주었어야 합니다. 그걸 못해서 모두가 다 죽을 뻔 했잖아요? 초등학생들을 방관해서 죽은 사람이 정장, 도서관 직원에 유튜버 두 명, 시바타 할아버지까지 모두 네 명인데(유튜버 댓글에 사쿠마를 만났다고 쓴 두 명도 포함하면 일곱 명), 불필요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괴담 풀이까지는 좋았지만 모든 진상과 반전이 드러나는 절정부와 결말이 아쉬움을 남깁니다. 직전에 읽었던 두 편의 추리 소설이 소설로의 기본적인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졸작이라서 읽는 내내 즐거웠지만, 단점도 없지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평균 이상의 재미는 전해주는 만큼, 추리와 호러 장르 애호가 분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5/09/12

사라진 탄환 (Balle perdue) (2022) - 기욤 피에레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노는 의동생 캉탱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이 개조한 클리오 차량을 이용해 상점을 털려다 붙잡혀 구속된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차량 개조 실력을 눈여겨본 경찰 샤라스가 그를 팀에 영입한다. 더 이상 마약 밀매 조직의 개조 차량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기대대로 샤라스의 팀은 계속해서 성과를 냈지만, 팀원 중 한 명인 야레스키가 마약 일부를 빼돌리는 것을 샤라스가 눈치채게 된다. 결국 야레스키는 샤라스를 살해하고, 그 죄를 리노에게 뒤집어씌운다. 도주 중인 리노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야레스키의 범행을 증명할 유일한 단서인 탄환이 박혀 있는 샤라스의 차, 르노21을 찾아 나선다.  

프랑스의 장편 액션 스릴러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누명을 쓴 주인공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유일한 증거물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걸 막으려는 진범과 충돌한다는 이야기로 정통 헐리우드 팝콘 무비 문법에 충실합니다. 별다른 복선이나 곁가지는 없고, 굉장히 단순하고 간결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이 영화만의 차이점이 있는데 그건 주인공 리노가 차량 정비사라는 설정입니다. 리노가 야레스키의 마지막 포위망을 뚫기 위해 1980년대 출시된 소형차 르노 21을 개조하고 결국 돌파하는 장면에서 이 설정은 잘 활용됩니다. 르노 21 앞에 거대한 구조물을 덧붙이는 식이었는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위 포스터의 저 구조물인데, 포스터를 미리 안 봐서 다행이입니다). 그리고 이 르노21의 존재감도 발군입니다. 제목이기도 한 핵심 증거인 '사라진 탄환'이 바로 이 차량 안에 존재할 뿐더러, 이 차량을 경찰에게 전해주기 위해 직접 개조하여 몰고간다는 점 때문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으로 느껴질 정도로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먼저 느낀건 부족한 액션의 규모입니다. 리노가 경찰서에서 탈출하거나, 야레스키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는 장면들은 리얼리티가 있고 처절하지만, 박진감과 시원시원함에서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리노가 차량 정비사니 별다른 액션을 펼치지 못하는건 당연한데, 최근 영화들은 전직 특수 부대원이나 전직 킬러가 워낙 많이 등장하다보니 심심하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습니다. 솔직히 차량 정비를 배우기 전에 알제리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이다!는 설정 정도는 나와줄 줄 알았습니다.
절정부에서 벌어지는 카 체이스도 실망스럽습니다. 도심부에서 야레스키와의 일대일 추격전이 살짝 펼쳐지는 정도라 차량 수나 공간 활용, 폭발 등에서 헐리우드 영화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스케일 면에서 부족하니, 최소한 더 길게, 그리고 스케일을 아이디어 - 르노 21을 정비한 식으로 - 로 극복했어야 했습니다.

주인공 리노의 매력이나 동기 설명도 다소 부족합니다. 샤라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도주하며 진범을 쫓는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레스키가 리노에게 회유를 시도할 때 왜 리노가 끝까지 버텼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대단한 은혜를 받은걸로 생각되지는 않는데 말이지요. 게다가 마지막에서 야레스키가 도주에 성공하는데, 이를 쥘리아가 방조한 이유 역시 전혀 설명되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간결하고 집중력 있는 서사와 자동차라는 소재는 효과는 좋지만 강렬한 타격감과 대규모 스펙터클 측면에서는 아쉽습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적절하지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속편이 있던데, 더 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6/29

복면 작가는 두 사람 있다 (覆面作家は二人いる) - 기타무라 카오루 : 별점 2점

"하늘을 나는 말" 등 만담가 '엔시 씨와 나'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일상계 추리물의 창시자 기타무라 가오루(카오루)의 또다른 시리즈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필명이 복면 작가인 이중인격 아가씨 니이즈마 치아키와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 컴비가 여러가지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지요. 국내에는 아직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았는데, 작가의 팬인 탓에 원서를 번역해서 읽어보았습니다.

특징이라면 기타무라 카오루 작품답지 않은 가볍고 만화적인 설정입니다. 엄청난 가문의 영애로 미모와 추리력, 거기에 집 밖을 나서면 성격이 야성적으로 변하는 이중 인격 탐정 니이즈마 치아키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설정은 아주 많이 별로였습니다. 다른건 다 그렇다쳐도,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성격이 변한다는건 납득하기 힘드네요. 설득력도 없고 현실적이지도 못하며, 작품에서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니까요. 그냥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귀한 집 아가씨라는 설정의 안락의자 탐정물로 만드는게 훨씬 더 나았을 겁니다.
추리적으로도 평범합니다. 사소한 정보와 단서에서 진상을 끌어내는 전개 솜씨는 여전하나, 동기면에서 설득력을 가져가고 있지 못한 탓이 큽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국내에 정식 소개되더라도 시리즈를 더 찾아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미노 미즈호의 만화가 조금 유명한 듯 한데(제 기억에 해적판으로 오래전에 소개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만화로 소개되는게 더 나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트릭, 진상 및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면작가의 크리스마스

잡지 '추리세계'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는 신인 작가 ‘니이즈마 치아키’를 만나러 갔다. 치아키는 엄청난 집의 아가씨로 귀족적인 외모에 섬세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문을 나서는 순간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변해버리는 특징이 있었다.
그 무렵, 근처 여고 기숙사에서 한 여학생이 살해당한다. 단서는 딱 하나, 피해자가 선물받았지만 사라져버린 ‘토끼 오르골’이었다. 치아키는 오르골 포장이 뜯어져 있었는지에 주목한 뒤, 범인을 밝혀낸다.

편집자 오카베 료스케, 쌍둥이 형이자 경찰인 오카베 유스케, 그리고 복면작가 치아키 등 주요 등장인물과 치아키의 기묘한 특징이 소개되는 시리즈 첫 작품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았어요. 료스케와 치아키가 처음 만났을 때 나누었던, 어떤 여성이 가지고 있던 검은 트렁크 안에서 채찍이 나온 이유에 대한 추리는 좋은 일상계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기숙사 살인 사건에서는 핵심 단서인 '오르골의 포장이 뜯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자 째 사라진 이유는?'를 통한 치아키의 추리 결과 - '포장된 선물이 방 안에 흩어져 있었다면, 산타클로스가 범인이라는걸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 -가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이 여고 기숙사는 산타가 돌아다니며 선물을 나눠주는 전통이 있었고, 산타가 범행을 저지를 때 선물이 흩어져 그걸 주워 담다가 피해자의 개인적인 선물까지 가져갔다는 것이지요. 사소한 단서에서 진상을 끌어내는 과정은 설득력 높고, 모든 정보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소개되어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범행 동기가 너무 사소했다는 문제는 있지만 일종의 사고같은 밤행이기도 하니, 이 정도면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잠자는 복면작가

오카베 료스케는 치아키에게 원고료를 주기 위해 수족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늦고 말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인근에서 유괴당한 아이 수사를 하고 있던 오카베의 쌍동이 형 유스케가 있었고, 서로의 오해가 겹쳐 치아키가 범인으로 의심받게 되었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히 돌아왔고, 이후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들은 치아키는 유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낸다.

초반, 치아키가 잠복 중이던 유스케를 료스케로 착각하고 '돈 내놔'라고 이야기해서 유괴범으로 오인된다는 전개는 제법 웃겼습니다. 치아키는 원고료를 달라는 말이었는데, 유스케는 몸값으로 오해했던 거지요.
유괴범이 유괴당한 유우코의 언니였다는 진상, 그리고 아빠의 재혼으로 새로 생긴 의붓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는 동기도 괜찮았어요. 이에 대한 정보 제공도 충실하고요. 

하지만 유괴 당일 언니가 쿠키를 따로 가져갔다는 등의 정보는 너무 과했습니다. 이를 통해 범인이 쉽게 드러나 버렸어요. '불에 태워버린다' 등의 이상한 협박과 특수 효과(?)를 이용한 불타는 소리같은 정보는 아예 쓸데가 없었고요.

무엇보다도 아이들 장난이라지만, 유괴라는 중대한 범죄를 가볍게 마무리하는 결말은 영 별로였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면 작가는 두 명 있다

료스케의 선배 사콘의 언니가 일하는 가게에서 연쇄 CD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유스케는 치아키가 집 밖에 나오면 성격이 변하는게 아니라, 자기들처럼 쌍둥이 두 명일 거라고 추리했다. CD 도난 사건과 치아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료스케는 치아키를 데리고 사콘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치아키가 사실은 두 명이 아닐까?'라는 추리는 료스케가 치아키와 함께 집 밖으로 나오면서 손쉽게 드러납니다. 수수께끼라고 할 수도 없어요. CD를 훔친 방법은 범인들이 사전에 걸리지 않는 '동선 확인'을 했다는게 진상이라서 영 실망스러웠고요. 이를 위해 스티커만 몰래 빼돌렸다는 등의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딱히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5/06/20

아이가 없는 집 - 알렉스 안도릴 / 유혜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요일, 산림재벌 페르 귄트(PG)는 사립탐정 율리아를 찾아가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시체 사진의 진상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전날 있었던 회사 주주총회 이후 만찬 자리에서 과음을 하고 필름이 끊겨, 사진이 찍힌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PG는 사진 속 피해자가 자신의 형 베르테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율리아는 전남편이자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PG의 시골 저택 ‘만하임’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밤, 저택 옆에 위치한 맥주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저택에는 자정부터 경보장치가 작동되기 때문에, 사진은 저택 부지 내, 특히 맥주 공장에서 찍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율리아와 시드니는 저택에 머무르며 수사를 이어갔고, PG의 사촌 형제인 비에른, 안드레, 시리를 만났다. 비에른과 안드레는 과거 베르테르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만하임을 팔자는 문제로 PG 부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막내 시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PG의 아내 모니카와는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날, 호수 위로 베르테르의 시체가 떠올랐고, 부검 결과 그는 일요일 오후 3시에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모니카는 시리와 함께 있었고, 안드레는 애인과 있었으며, PG와 비에른은 알리바이가 없었다. 

율리아는 장애가 있는 줄 알았던 비에른이 실제로는 홀로 걸을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비에른이 맥주 공장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혹을 거두었고, 우여곡절끝에 진상을 깨달은 뒤 베르테르의 장례식 날 관계자들을 모두 모은 자리에서 추리쇼를 펼쳐 범인을 지목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현대 스웨덴 장편 추리 소설. 사립 탐정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제 1작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은 먼저,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복고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들이 율리아의 추리를 통해 논리적으로 풀이됩니다.

1. 베르테르는 왜 전 재산을 시리에게 남겼는가?
→ 베르테르는 시리를 동생이자 애인, 그리고 자기 소유물이자 희생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과거 PG와 베르테르의 아버지 쉴베스테르는 아내 린네아가 동생 아우구스투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해서, 갓난 딸 시리를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내버렸습니다. 린네아는 자식을 빼앗긴 상실감에 자살했고, 시리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베르테르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시리를 농락하며 관계를 맺었던 것이지요.

2. 베르테르는 왜 살해당했는가?
→ 모니카가 베르테르와 맥주 공장에서 만날 때 시리와 동행했었습니다. 베르테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 장소에서 1의 사실을 알게 된 시리가 분노에 휩싸여 베르테르를 살해했습니다.

3. 범인은 누구였는가?
→ 주범은 시리였고, 모니카는 공범이었습니다. PG에게 전송된 베르테르의 이메일을 숨기고, 공장 열쇠를 빼돌릴 수 있었던 이는 모니카뿐이었습니다. 범행 후 두 사람은 범행 시간에 함께 보트를 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었고요.

4. 왜 PG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가?
→ 모니카의 계획이었습니다. 조울증을 앓고 있던 PG가 자신이 범인이라 오해하고 자살하게 되면, 그의 모든 재산이 모니카에게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5. 왜 시신을 댐에 유기했는가?
→ 숲에 묻었다면 절대 발견되지 않았을 테지만, PG가 탐정까지 불러 자기 범행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 하자 급해진 모니카가 사체가 드러나도록 유도했던 겁니다.

추리는 본격 추리물답게, 이야기 속에 배치된 단서와 복선에 의해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모니카가 일요일에 시리와 함께 보트를 탔다고 말하면서 ‘손에 녹이 묻었다’고 했던 대목은, 열쇠가 녹슬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며 모니카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유추하는 단서가 됩니다. 피해자 사진을 본 시리가 베르테르라는걸 알아챈 배의 흉터는, 그녀가 베르테르에게 범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또한, “내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이, 내 휴대폰에 살해된 사람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는 설정 자체도 매우 흥미로왔어요. 300여페이지 남짓한 분량도 합리적이고요.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주로 음식들)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음울하지만 귀족적인 만하임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성 탐정의 심리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설정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 율리아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에서 혼자 생존한 후 PTSD를 앓으며, 타인과 접촉하면 발작을 일으킨다는데, 이러한 배경은 이야기 전개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율리아가 전남편 시드니를 못 잊고 맴도는 묘사 또한 장황해서 지루하게 느껴졌고요. 솔직히 중간에 졸 정도였습니다.
율리아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시간이 멈춰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고 넘어가는 디테일과 표정을 포착한다는 특수 능력에 대한 묘사도 별로였습니다. 만화적일 뿐이며 그리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못하니까요.  

또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인 추리쇼는 극적이긴 하나 설득력은 다소 부족합니다. 시리가 PG와 베르테르의 친동생이었다는 사실만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을 뿐, 나머지 추리는 명확한 증거나 논리적 근거 없이 진행되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비에른이 열쇠가 없어 범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비에른의 형 안드레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네주거나 복제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용인 아멜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PG 또한 범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베르테르가 방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시리와 모니카가 범인이라는 사실도 시리의 자백이 없었다면 증명이 어려웠을 겁니다. 사건의 주요 현장인 맥주 공장이 불에 타버려서 결정적인 증거 확보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치밀하게 설계된, 잘 짜여진 추리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이가 없는 집"이라는 제목과 작중 대사로 상징되는(핏줄이 사악해서 대를 끊어야 한다!), 일본 고전 변격물에서나 봄직한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인 콩가루 집안 설정도 와 닿지 않았고, 카리스마와 사악함을 모두 갖춘 최고 악당인 베르테르가 피해자로만 등장하는 점도 아쉽습니다. 제대로 뭔가 보여줬을만한 설정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적인 추리물 구성은 돋보이지만, 심리 묘사의 과잉과 논리적 비약 등 아쉬움이 많아 감점합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4/26

엘리펀트 헤드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2점

엘리펀트 헤드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가조 의과대학 부속 병원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는 배우인 아내 기키, 대학생이자 가수인 큰 딸 마후유, 고등학생 둘째 딸 아야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가족의 행복이 쉽게 깨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술사였던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아픈 기억 탓이었다. 그래서 기사야마는 가족의 행복을 망치려는 원흉을 사전에 제거해 왔고, 최근에는 딸을 취재 목적으로 스토킹하던 방송인 이즈미를 살해했다. 그러나 마후유가 애인 하루를 가족에게 소개시켜 주는 날, 하루가 기사야마에게 돈을 받고 관계를 가졌다는걸 폭로해서 가족은 붕괴되고 말았다. 자포자기한 기사야마는 마약상 에덴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스마'를 주사했다. 그런데 시스마가 이상한 효과를 일으켜 시간을 역행한 기사야마는, 하루를 습격해서 입을 막고 가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 시간 역행이 아니라 시간 분기였다. 결국 두 개의 시스마를 사용해 사태를 해결한 행운아, 한 번 실패해서 시간 역행 효과만 확인한 복원자와 공격받아 입원한 산송장, 모두 실패한 도망자라는 다중 시간축이 생겨났다. 기사야마들은 어느 시간 축에서라도 사람이 죽으면(기사야마가 살해하면), 모든 시간 축 사람이 죽는다는걸 알아내고 나름대로 규칙을 세워 살인을 막으려 했지만, 마후유와 기키, 아야카가 차례대로 끔찍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신예 작가 중 '추리' 장르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최신작.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점에서 추리하는 구성이 특징인데, 이번에는 각기 다른 시간축(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동일 인물이 사건을 파헤친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다중 시간축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시간축이 달라도 죽음의 순간은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설정에서 일종의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탐정역을 소화하는 기사야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점도 큰 특징입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방해물로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소시오패스거든요. 아내의 스토커를 잡아다가 능욕하고, 딸 스토커는 살해하는 초반부 단계를 지나 후반부로 갈 수록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그 수준이 정말 어마무시합니다. 

그러나 참신함, 독특함은 설정에 국한될 뿐, 정작 추리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큽니다. 여러 명의 기사야마가 가족의 죽음을 놓고 펼치는 대부분의 추리는 결국 ‘추리를 위한 추리’에 불과해 억지스럽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아야카가 폭발한 이유가 알약에 숨겨진 소형 폭탄 때문이라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이 산산조각이 나고, 신체 조각이 날아갈 정도라면 알약 크기 폭탄으로는 어림도 없으니까요. 다중 시간축에 있던 복수의 가족들이 동시에 죽었는데, 죽은 상태가 서로 극과 극이라 사망한 원인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저절로 폭발했다는 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 자체는 그럴싸한데, 상황이 너무 말도 안돼요. 추운 차를 운전하다가 동사하고, 두꺼운 탈을 쓰고 공연하다가 열사병에 걸려 죽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여러 명이 추리를 펼쳐봤자 다 억지스럽고 말이 안된다면, 이건 그냥 분량 낭비일 뿐입니다. 이런 류의 대표 걸작 "독 초콜릿 사건"처럼, 모든 추리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진상 또한 억지스럽습니다. 기사야마들은 가족들이 죽는 순간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범인 기사야마는 피해자가 죽는 순간에는 손을 대지 않는 '시한 장치 트릭' 더하기 '원격 조종 트릭'을 사용했는데, 상황을 극단적으로 정교하게 맞춰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후유는 '행운아'가 죽였습니다. '행운아'는 마후유가 하루와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는걸 알게된 뒤, '산송장'의 손을 빌어 하루를 죽게 만듭니다. '산송장'의 시간축에서 하루가 죽자, '행운아'의 시간축 하루도 죽는데 마침 운전 중이라 교통사고가 일어나게 되고요. 사고로 차밖으로 튕겨나간 마후유는 공교롭게 지나가던 차량에 머리가 으깨져 죽습니다. 즉, 이 모든건 말 그대로 ‘기적의 타이밍’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던 마후유가 왜 튕겨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야카 폭사에 대한 진상은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도망자' 기사야마가 그녀를 성폭행해 임신시킨 뒤 태아를 불법으로 적출해 폭사시키고, 임신을 유지하던 '두더지' 시간대의 아야카의 뱃 속 아기가 폭발하자 다른 시간축의 아야카들 모두 폭사했다는건데, 이건 추리의 수준을 떠나 인간적으로 거부감이 듭니다. 이렇게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트릭으로 포장한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단점도 추리물로는 치명적입니다. 행운아는 마후유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행운아의 시간축에서는 마후유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소시오패스라서, 자신에게도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서 죽였다? 정신병자의 과대망상이 동기인 작품이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또 이게 동기라면, 행운아가 마후유를 살해했다는걸 숨길 이유는 없어요. 약속대로 다른 시간 축의 기사야마들이 가족을 죽이면, 손 안대고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설정도 편의적이고 작위적입니다. 죽음만 동일하게 적용될 뿐, 상처 등은 시간축에서 공유되지 않는다는게 대표적이에요. 상식적으로는 상처도 동기화되어야지요. 산송장이 중상을 입었을 때, 다른 시간축의 기사야마들도 모두 동일한 상처를 입고 쓰러졌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더지가 도망자를 죽이려고 배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에필로그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도망자를 죽이려면 그냥 자살하면 됩니다. 시간축에 있는 모든 기사야마가 동일한 운명을 맞을테니까요. 또 에필로그에서처럼 한 시간축에서 터진 폭탄이 다른 모든 시간축에 영향을 미친다면, 앞서의 현란하고 복잡했던 시한 장치 및 원격 조종 트릭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네요. 그냥 하루와 마후유가 탔던 차에 폭탄을 설치하면 되잖아요?

기사야마에 대한 묘사도 이상해요. 기사야마들은 시간축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시간축마다 별개의 인격을 가진듯 보이는건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야카 폭사 때 두더지는 도망자의 부탁을 받아 아야카의 아이를 살려주기까지 하는데, 이건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시스마를 잔뜩 맞은 탓에 시간축을 오가는 절대자가 된 우라시마도 사건 진상을 추리하기 위한 탐정역이 필요해서, 기사야마를 뛰어넘는 절대자가 필요해서 등장시킨 듯 한데, 인물 설정이나 등장 과정, 묘사 모두가 과장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시스마를 맞은 복원자가 첫 번째 시스마 이전 시점으로 돌아가 시간축을 한 번 더 분기시켜 ‘두더지’가 생겨났다는 설정은 참신했습니다. 이즈미 사키와 페페코 등 단순한 희생양으로 보였던 인물들을 활용하여 독자에게 시간 이동을 착각하게 만든 디테일도 눈에 띄었고요. 여러 시간축의 기사야마들이 추리를 펼칠 때, 사이렌 소리와 기키와의 과거사 등을 근거로 산송장이 사실은 아파서 누워있는 척 했다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그래도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참신한 설정과 캐릭터 구도는 흥미로웠지만,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비윤리적인 트릭과 없다시피한 동기, 개연성 부족의 삼박자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전에 보았던 한 추천 리스트에서 언급했듯, 재미는 있지만 최악이에요.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2024/10/27

종이학 살인사건 - 치넨 미키토 / 권하영 : 별점 2점

종이학 살인사건 - 4점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범인 및 진상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준세이 의대 부속 병원 조직 검사실 병리의 치하야의 아버지 미노루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병리해부를 유언으로 남겨서 치하야는 동기이자 지도의 시오리의 보조로 해부에 참석했다. 그런데, 아버지 위에는 암호가 새겨져 있었다. 암호는 28년 전 어린 아이들을 노렸던 미제 연쇄살인극 '종이학 살인사건'의 마지막 피해자 진나이 양의 시신이 숨겨진 곳을 의미했다.
둘은 이를 몰래 알리려 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28년 전 형사였던 아버지의 동료 사쿠라이 형사와 진범을 찾아내려 나섰다. 그와 함께 다시 연쇄 살인극이 일어났고, 현장에는 28년 전과 똑같이 '종이학 살인사건' 범인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유리탑의 살인"으로 이름을 날린 치넨 미키토의 장편 소설. "유리탑의 살인"처럼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 생각했는데, 전형적인 연쇄 살인마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그래도 아래와 같이 '위 속에 암호를 새겼다.'는 독특한 설정은 흥미로왔어요. 덕분에 이야기 중반까지 흥미를 잘 잡아줍니다. 
치하야, 시오리가 의사이며 특히 시오리가 병리해부를 맡은 병리의라는 설정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미노루가 생전 유전병인 '구루병'을 앓고 있었다는걸 알아내는 식으로요.

뼈가 약해지는 구루병은 X염색체 변이가 원인으로 100% 딸에게 유전됩니다. 즉, 키도 크며 격투기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튼튼해서 구루병을 앓지 않는 치하야는 미노루의 친 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노루의 친 딸은? 목이 부러진채 발견된, 28년 전의 피해자 진나이 양으로 알려진 시신의 진짜 주인공이었습니다. 구루병 탓에 급작스럽게 딸이 죽어 혼란에 빠졌던 미노루의 아내가 진나이 양을 유괴했고, 범인이었던 야기누마(타치바나) 와카코가 이 사건을 연쇄 살인극이 하나로 위장했던 겁니다. 알리바이를 통해 혐의를 벗기 위해서요. 마침 유괴 사건을 엮어 미노루를 협박하기도 해서 운 좋게 빠져나갈 수 있었지요. 범인을 놓아준 죄책감에 경찰을 그만 둔 미노루는 더 이상의 범행을 막기 위해 와카코를 계속 감시해왔고, 미노루가 죽자마자 와카코는 범행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죠.

하지만 여러모로 전작보다 못합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많이 부족해요. 범인을 추리할 만한 단서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미노루가 경찰을 그만둔 뒤,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무언가를 감시했다' 정도만 의미있는 단서입니다. 그 외의 단서들은 모두 쓸모가 없어요. 핵심 증거와 단서들은 모두 마지막에 범인이 치하야를 납치하며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후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시오리가 알아낸 아버지의 유전병이라는 단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특했던 '위에 암호를 새긴다는 설정'도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작품에서처럼 위궤양으로 암호가 지워질 수도 있는 등 변수도 많아요. 차라리 변호사에게 사쿠라이 형사에게 전해주라고 편지를 남겼으면 될 일입니다. 게다가 암호로 남길 이유도 없었고, 암호의 내용도 불합리합니다. 마지막 사건의 시신 위치를 알린다 한 들, 이는 진상과 연결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냥 범인 이름을 써 놓지 않았을까요? 범인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탓에 피해자도 두 명이나 생겼는데 말이지요. 암호 해독도 특별한게 없고요.

전개도 어이가 없습니다. 둘이 암호를 곧바로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 시신 발굴 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 사쿠라이와 비밀 수사를 하는 이유 모두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경찰 수사도 많이 어설픕니다. 특히 가장 어이가 없었던건, 이전 수사 담당자 이노하라가 타치바나 사장의 자식이 마지막 사건에서만 알리바이가 없었다고 알려주는 장면이었어요. 모든 연쇄 살인이 단독범의 소행일리 없는데, 마지막 알리바이가 없다고 유력한 용의자를 그냥 풀어주는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려 다섯 명의 아이가 살해된 사건인데, 경찰이 너무 안이한거 아닙니까? 범인이 유괴한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운다는 설정도 많이 접했던것이라 식상합니다. 이에 대한 정보도 많이 전해주고요.

이렇게 위에 새긴 암호, 병리의, 유전병 정도의 소재를 제외하면 연쇄 살인범과 형사의 대결을 그리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범죄 스릴러와 흡사합니다. 범인의 정체도 반전처럼 등장하지만 굉장히 뜬금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은 흥미롭지만 그 뒤의 이야기들은 모두 설득력낮고 억지스러우며, 뻔했다는 점에서 위에 암호를 새기는 상황을 떠올리고, 전체적인 얼개없이 재미있겠다 싶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게 아닌가 싶네요. 

2024/10/12

세상 끝의 살인 - 아라키 아카네 / 이규원 : 별점 1.5점

세상 끝의 살인 - 4점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4년 9월 7일,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충돌 날짜는 정확히 반년 뒤인 2025년 3월 7일이었다. 그 뒤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루의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도망갔고, 아버지는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남동생 세이고는 뉴스 전부터 중학교 때 학교 폭력을 저지른 탓에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었다. 매일을 운전 면허 교습을 받으며 소일하고 있던 하루는 고속도로 실습날인 12월 31일에 운전학원 실습차 트렁크에서 칼에 찔려 죽은 여성 사체를 발견했다. 
전직 형사였던 운전학원 강사 이사가와와 함께 얼떨결에 사건 수사에 나선 하루는,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있는 하카타와 이토시마에서 펼친 끈질긴 수사로 사건에 NARU라는 인물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런데 NARU는 하루의 동생 세이고였다. 모든건 세이고가 중학생 때 다른 친구들과 나카노 이쓰키라는 동급생을 심하게 이지메하고 괴롭혔던 과거와 관련되어 있었다.

제 68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얼마 뒤 지구는 멸망하는데 운전학원에 다니는 여자와 운전을 가르치는 여자 교관이 차 트렁크에서 시체를 발견한 뒤, 연쇄 살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는 기발한 설정이 돋보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상황도 그럴듯합니다. 세이고는 유이치, 준야와 함께 지구 멸망 전, 자기가 괴롭혔던 이쓰키에게 사과하려고 변호사 히츠미의 도움으로 그를 불러냈던 겁니다. 그런데 마침 불러낸 현장이 폭주 택시 연쇄 살인마인 경찰 이치무라가 시체를 버리던 초등학교였지요. 범행이 들통났다고 여긴 이치무라는 우선 세이고를 현장에서 살해했고, 도주한 유이치, 준야, 히쓰미를 차례대로 살해했던 겁니다. 이 때 세이고의 차를 유이치가 타고 달아나서 범인의 동선이 기묘해졌던 것이고요. 
피해자들이 방심한 상황 - 왜 차 안에서 창문을 열어서 범인이 손쉽게 찌를 수 있게 했는지 - 을 통해 범인이 경찰이라는걸 은근히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의감이 너무 넘치는 탓에 범죄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사가와 강사 캐릭터도 강렬합니다. 그외 멸망을 앞둔 상황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도 다채롭고요.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히쓰미의 신원을 알아내어 사건 파일을 입수하고, 피해자 준야를 처음 발견했다는 료도 형제와 우연찮게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듣고 동행하고, 세이고의 '마지막 사과'와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현장에 있었던 이쓰키가 하루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알려주고, 이치무라가 직접 나타나서 하루 등을 납치하지만 료도 형제와 중간에 만났던 소녀 나나코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가는 탓입니다. 이 과정에서 추리가 개입될 여지는 전무합니다. 이사가와 강사의 추리력이 번득이는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본 사건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그리고 범인이 경찰 이치무라라는건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경찰차 범퍼에 가해진 손상이 비중있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폭주 택시'가 경찰차라는걸 목격자들이 놓쳤다는게 더 말이 안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높은 가드레일 탓에 경찰차 특유의 도장을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되는데, 지극히 운과 우연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치무라의 동기가 작품의 핵심인 '지구가 곧 멸망하는데 사람들을 죽이는 까닭이 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무대 설정만 기발할 뿐, 결국 뻔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극과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면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작품처럼 그 설정이 추리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다른 후보작이 어땠기에 이 작품이 만장일치 수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란포상 수상작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의 망작이었습니다. 추리물도 아니고, 특수 설정도 이야기에 잘 녹여내지 못해서 좋은 점수를 도저히 줄 수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에 가까운 1.5점입니다.

2024/09/01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미스터리 소설 (オモコロ(Omocoro)bros)

유머러스한 기사들로 인기가 많은 일본 웹 사이트인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멤버들이 추천하는 미스터리 소설들입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은 세 편 뿐이라는게 아쉽네요.

브로스 편집부입니다.
8월의 일요일마다 다양한 장르의 "추천 소설"을 소개하는 기사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주는... "추천 미스터리 소설"! 다양한 미스터리를 즐겨보세요.

**다빈치 오시야마의 추천 호러 소설**
《우주 탐정 노그레이》 (타나카 히로부미)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한 미스터리 작품을 "특수 설정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마법이 있는 세계"나 "타임루프가 있는 세계"와 같이,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수 설정이라도 "아무거나 가능"한 것은 아니란 점이 중요합니다. 마법이 있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는 워프 마법을 범인만 사용할 수 있었다"라고 하면 흥이 깨지겠죠. 비현실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말에도 논리적인 납득이 필요합니다.
《우주 탐정 노그레이》는 다섯 편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우주를 무대로 하는 능력 있는 탐정 "노그레이"가 기묘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단, 이 행성들이 모두 매우 특이합니다.
  •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만 사는 "괴수 행성 킹고지"
  • 주민들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천국 행성 파라이스"
  • 주민 수가 항상 일정하며,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윤회 행성 텐쇼우"
  • 모두가 대본대로 연극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연극 행성 엔게키"
……등, 독특한 행성들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미스터리에서 "목 없는 시체"는 흔한 미스터리지만, 그 시체가 무적의 거대 괴수라면? 유쾌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더욱 불가사의한 사건들. 그 해결도 역시 행성의 특수한 성질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결말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치 모든 것이 가능한 듯 보이면서도 마지막에 피스가 맞아 떨어지며 규칙의 전체 그림이 보이는 그 기분은 미스터리의 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장난감 상자를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가 있는 한 권입니다.

**카마도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명탐정의 제물: 인민교회 살인사건》 (시라이 토모유키)

플롯부터 너무 멋진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최고입니다!!!!!!!
미스터리 작품 중에 "다중 해결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는 개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추리 결과, 여러 진실이 존재한다"라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입니다. 이 시라이 토모유키 선생님의 다중 해결물은 탁월합니다. 미스터리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물은 매우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추리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도중에 "이게 뭐야... 방금 추리는 뭐였지?" 또는 "피곤해... 결론만 말해줘..."라는 상황이 될 수 있지만, 이 《명탐정의 제물》에서는 제시된 여러 추리가 모두 강력한 임팩트를 줍니다. 압도적인 해설 파트를 읽으면서 "이 사람, 정말 대단하다!"라고 감탄하게 될 정도입니다. 장인의 기술에 감탄할 정도로 멋진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의 구조적 약점을 없애면서, 동시에 "다중 해결"이라는 장르 자체에 새로운 빛을 불어넣는 듯한 훌륭한 플롯을 꼭 경험해 보세요.
다른 작품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며, 이 《명탐정의 제물》을 시작으로 깊이 빠져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작품인 《엘리펀트 헤드》는 정말 최악입니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정말 재미있지만, 진짜 최악입니다. 사람이 이런 걸 써도 되나? 여러 의미에서 머릿속이 어떻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습니다.

**나시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이야기》 (스기이 미츠루)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이 떨리다니" 라는 경험을 한 건,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일종의 상쾌함까지 느낄 정도로, 기분 좋게 압도당했습니다.
훌륭한 독서 체험을 보장하므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꼭 서점에서 구입하시길 권합니다.
아니면 Amazon 카트에 담아주세요.
"전자책은 없나요?"라고 낙담할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키노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아사쿠라 아키나리)

취업을 위해 양산된 듯한 여섯 명의 우수한 대학생들이, 모두 내심 내정받고 싶은 대기업의 최종 면접에 남았으나, 전원이 내정받는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한 명만 내정된다고 변경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최종 토론 중에 우등생들의 "뒷모습"을 폭로하는 고발장이 나오면서, 한 사람씩 가면이 벗겨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책의 재미 순위를 석권하고, 만화화, 영화화, 라디오 드라마화까지 이루어졌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습니다! 취업을 위해 드러난 좋은 면과 고발을 위해 드러난 나쁜 면이 교차하며, 사람의 인상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스릴 넘치는 구성에 책을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게다가 엄청 읽기 쉽습니다!).
여러 번 뒤집히는 대학생들의 의혹에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교묘한 미스리드, 마지막에 남겨진 고발문의 놀라운 결말,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선명한 복선 회수... 말할 것이 없는 소설의 완전체였습니다. 11월에 영화도 개봉된다고 합니다. 꼭 보세요!

**가미죠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나오키상을 받은 화제작을 지금 와서 추천하는 것도 뭐하긴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배경은 전국시대로, 주인공은 실존 인물인 전국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입니다.
…잠깐만요, 이 시점에서 "역사물인가, 흥미 없네"라고 생각한 분들,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이 소설은 등장인물과 배경만 역사물일 뿐, 내용은 완벽한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 무라시게는 어느 계기로 상사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성에 틀어박힙니다. 그곳에 쿠로다 칸베이라는 엄청나게 뛰어난 지장이 찾아와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성 안에서 둘이 나눈 이야기가 지금으로 치면 실제로 있었던 "밀실 토크"처럼 느껴져,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예상해가며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 이야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설마, 이런 전개가 가능하다니!"라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 겁니다. 요네자와 호노부 선생님의 《흑뢰성》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다시 한번, 독서의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2024/08/02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4). - 아야츠지 유키토

「돈돈 다리, 떨어지다」의 「문제편」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속으로 살짝 일어난 화를 누르며 U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책장에서 꺼내온 우메즈 가즈오의 만화(『오로치』의 SUNDAY COMICS판, 네 번째 권이다)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아, 다 읽으셨어요?"
내 시선을 느낀 U군은 책을 덮으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우메즈 가즈오는 몇 번을 읽어도 대단하죠. 저는요, 그를 인생의 스승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환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우메즈 가즈오가 대단한 것은 나도 전적으로 인정하는 바지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생의 스승"이라고까지 치켜세우는 그의 천진난만함(이라고 할까 뭐라고 할까)이 이때의 나에게는 왠지 몹시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는 "스승"의 책을 정중히 옆에 놓으며 "자, 아야츠지 씨"라고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떻습니까? 설마 벌써, 풀어버리셨나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제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그렇네요."
U군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30분 정도 남았군요. 그 정도면 괜찮으세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세 번째 세븐스타 담배 포장을 뜯었다. 불을 붙이면서, 지금 느끼는 이 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피해자인 악동의 이름이 "유키토"라는 것 때문인가? 그것도 완전히 관계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안 된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학생이다. 악의가 있을 리는 없고, 어설픈 농담이라 웃으며 관대하게 넘겨야 한다.
불만을 제기하자면 오히려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그렇다 치고, 이 M** 마을 주민들의 이름은 대체 무엇인가. "포",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캠프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도 끔찍하다. "반 다이스케"는 반 다인의 패러디인가? "아사노 요우지"에 "사이토 사카에"——웃기지 않는다. 전혀 웃기지 않는다. 미스터리 매니아의 유치함이라면 듣기 좋겠지만, 읽는 내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이런 이름짓기는 정말 참아주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이 인물들, 읽다 보면 전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구별은 가능하지만, 아무리 '범인 맞추기' 단편이라 해도,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상 조금 더 제대로 된 묘사를 해주었으면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A, B, C……로 표기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나는 이렇게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맞아, 바로 이것이다.
목구멍까지 나왔던 그 말(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고)을 간신히 삼키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커피라도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아마추어 학생이다. 여기서는 선배답게 그 부분은 눈감아주고, 어쨌든 이 '문제'에 도전해야 한다.
"자, 그럼."
두 잔의 커피를 테이블에 내놓고, 나는 「문제편」의 원고를 다시 한번 대충 넘겼다. "잘 먹겠습니다"라며 컵에 손을 뻗으면서, U군은 내 표정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자신작이라고 할 만하군. 꽤 어려운 문제야."
라고 말했다. 사실 나의 진심이었다. 사건의 상황은 이른바 '준밀실'이다. 20미터의 공간으로 격리된 '열린 밀실'에서의 불가능 범죄. 설정과 이야기에서 뭔가 장치가 있을 것 같은 냄새가 풍기지만, 초점은 역시 이 불가능한 상황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20미터의 거리를 극복했는가. 그 트릭을 간파하면 자연스럽게 범인의 정체도 알 수 있는, 그런 타입의 '문제'다. 과연……?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한 후, 나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부분부터 파고들어갔다.
"'당했다', '밀쳐졌다', '사……사아……'라는 유키토의 말은, 글 중에 나와 있듯이 '다잉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지막 '사아'는 범인이 누구인지 말하려던 것이라는 거네."
"글쎄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실지……"
U군은 얼버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얄미운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사'가 머리에 오는 등장인물은, 이 중에서는 사키와 사카에군. 사카에는 성도 사이토지. 설마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겠지만.——흠. 달려온 사카에의 목소리를 듣고 '사이토 씨'라고 대답하려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군."
"그렇죠. 하지만, 다잉 메시지라는 건 대부분 보조적인 단서일 뿐이잖아요. 아야츠지 씨의 작품에서도, 항상 그렇지 않나요?"
"뭐, 그렇다고 하면 그렇지. 그럼, 이건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리고 나는 일단 정석적인 '소거법'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알리바이 등 데이터를 통해 범위를 좁혀나가는 거야. 먼저, M** 마을 사람들부터——"
범행 시각인 오후 2시 40분에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은,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네 사람이다. 이 중 카는 중상을 입고 위독한 상태니까, 당연히 제외된다.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체력적으로 생각해도 다리까지 왕복해야 하는 범행은 무리겠지.
엘러리는 어떤가. 가령 어떤 트릭을 써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죽였다고 해도, 그 후 25분 이내——즉 포가 그를 광장에서 본 3시 5분까지——마을로 돌아오려면, 어떻게든 [옆길 B]를 내려와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①의 루트를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파이프 바위에 있던 린타로는 그 시간에 통나무 다리를 건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엘러리도 범행은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남은 사람은 아가사뿐이지만, 그녀의 경우 엘러리와 달리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없으므로, ②의 루트를 통해 돌아왔다고 해도 시간적인 모순은 없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는 그녀가 범행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보면, 올츠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어떤 트릭을 썼다 해도, 상대는 20미터의 계곡이니까.
결국 여기서는 네 사람 모두 제외된다. 포가 말하는 X는, 그들 중에는 없는 것이다.
한숨을 쉬며, U군의 반응을 본다. 그는 또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고,
"10분 남짓 남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역시 얄미운 얼굴이라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음은 캠프의 네 사람."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나는 소거법을 계속했다.
요우지와 사키는, 오후 2시 40분 시점의 알리바이는 없지만, 다이스케가 돌아온 2시 50분에는 분명히 캠프에 있었다. 범행 후, 10분 안에 다리에서 돌아올 수는 없다. 다이스케가 다시 돌아온 루트도 20분 걸렸으니까. 예를 들어 [옆길 A]로 꺾어 [지류 B]를 따라 올라왔다면,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제외해야겠군.
당연히 다이스케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2시 40분에 범행을 저지른 후 되돌아갔다면, 아무리 서둘러도 2시 50분에 캠프에 도착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남는 사람은 사카에인가. 사카에가 빈사 상태의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 — 여기에는 시간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그는 시간적인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이스케가 산등성이 길을 되돌아간 것과 엇갈리면서 [옆길 A]에서 산등성이로 올라와 다리까지 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디. 그렇게 범행을 끝낸 후, 강으로 내려갔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겠지.
물론 사카에가 강가에서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 몇 개 있던것 같기는 하다. 때문에 정말로 사카에가 범인이라면, U군이 '페어 플레이의 룰은 엄격히 지켰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건 이상하다. 그 부분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걸까.
자, 어쨌건 문제는 그 다음이야—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알리바이로는 사카에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유키토를 절벽에서 떨어뜨렸을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황당한 트릭이 떠올랐다.
“흠. 굳이 계곡을 건너 유키토 곁까지 갈 필요는 없었겠군.”
“어떻게요?”
“사카에의 배낭에는 이때 낚싯대가 들어 있었어. 여기에 튼튼한 긴 낚싯줄을 달고, 그 끝에 예를 들면, 야구공 정도의 크기의 돌을 묶어서 말이야...”
“휘둘러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맞췄다고요?”
“그런 거야. 무리일까.”
U군은 복잡한 표정으로 “하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
“이런 건 어떨까.”
극약을 먹는다는 심정이 되어, 나는 거기서 새로 떠오른 트릭을 말했다.
“남아 있던 한 줄의 로프를 따라 뱀을 보내는 거야. 놀란 유키토는... 아니, 이건 안 되겠군. 유키토는 뱀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런 건 어떻지. 들쥐의 목에 긴 끈을 묶어 로프를 따라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구해줄 테니까 그 끈을 잡으라고 명령하는 거지. 멍청한 유키토가 그 말을 믿고 따랐을 때, 힘껏 끈을 당긴다. 균형을 잃은 유키토는...”
점점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애당초 이런 물리적인 트릭을 고안하는 게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시는군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고, U군은 조금 유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틀렸어요. 실행 가능 여부를 떠나서, 그것만으로는 ‘밀쳐져 떨어졌다’는 것이 되지 않으니까요. 유키토는 어디까지나, X의 손에 의해 ‘밀쳐 떨어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전한 유키토의 죽기 직전의 대사에 ‘거짓’은 없고, 본문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명기되어 있습니다.”
“흐음.”
“유키토는 X의 손에 의해 밀쳐져 떨어졌다. 이것은 즉, 범행이 일어난 2시 40분 시점에서, X는 확실히 돈돈다리 북쪽 돌출 부분에 있었고, 자신의 손으로 유키토를 거기서 밀쳐 떨어뜨린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슬슬 시간 초과네요.”
라는 무정한 선언을 듣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U군은 왼팔을 들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 뒤, “그럼, 이걸로”라고 말하며 ‘해답편’ 원고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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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답편
○반 다이스케, 아사노 요우지, 아사노 사키, 사이토 사카에 네 명은 시간적 혹은 물리적으로 생각해도 명백히 범행이 불가능하다. 또한, 본문에서 알리바이가 명기된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X가 아니다.
○따라서 X는 M** 마을의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 중에 있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카는 범행 불능. 한 팔이 없는 아가사는 범행 불능.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범행 불능.
○이상으로 X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엘러리 뿐이다.
○엘러리는 다이스케가 도망친 후 돈돈 다리를 건너가 유키토를 공격해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범행 후 다리를 건너 고개 길로 돌아가, [옆길 B]를 내려가 [지류 A]의 나무 다리를 건너는 루트로, 오후 3시 5분에 마을 광장에 돌아왔다.
○동기는 복수. 전날, 아들 카가 '금단의 계곡'에 갔다가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잔혹한 소년 유키토의 짓이었다. 사키의 바지에 묻은 빨간 손자국은 그때의 피에 의한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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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끝이야?"
순간적으로 아연한 후, 나는 물었다. U군은 씨익 웃으며 "네, 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잠깐만, 그건 아니지 않나."
나는 본의 아니게 큰 소리를 냈다. U군은 태연하게,
"왜죠?"
라고 되물었다.
"왜긴 왜야, 이건 전혀 해결이 안 됐잖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역시 조금 불친절했나."
"불친절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테이블에 몸을 기울여 따졌다.
"첫째로 말이지, 다리가 부서진 후 남은 로프는, 작은 초등학생인 유키토의 몸무게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구. 지문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어. 그런 로프를, 어떻게 어른인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던 거야? 거리는 20미터나 된다고.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강하고, 로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어. 가령 엘러리가 난쟁이고, 또 줄타기의 명인이었다 하더라도, 이 로프를 건너는 건 무리였다고 생각하는데."
"음, 확실히. 그런데요…"
"그리고, 범행 후는 ①의 루트를 통해 마을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린타로에게 들켰을 거라고.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쓰여 있었잖아. 그건 거짓말이었던 건가."
"그건 아야츠지 씨의 오해입니다."
U군은 단호히 말했다.
"사실,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로, 도중에 타케마루가 두 번이나 심하게 짖었다고 했죠. 타케마루는 자기들 앞을 지나가는 수상한 자를 알아차린 거예요. 그래서 짖은 겁니다."
"그럼, 역시 범인 이외의 등장인물의 말에 '거짓'이 있는 거잖아."
"아니에요. 왜냐면, 린타로는 이렇게 증언했잖아요. '그 다리를 건넌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엘러리를 보지 못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U군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와 나는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다른 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부서진 돈돈다리를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인데요."
U군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아니고 줄타기 명인도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남아 있던 로프 한 줄로 계곡을 건널 수 있었던 겁니다. 아주 쉽게요."
"그런…"
나는 산소를 찾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설마, M** 마을이 닌자의 숨은 마을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런건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설령 닌자라 하더라도, 미군의 특수 공작 부대라 하더라도, 이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도전'에 주석을 단 대로, 그런 도구는 여기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라고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해, 나는 불안하게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U군도 자신의 담배(같은 세븐스타)를 물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는 말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줄타기 명인도 닌자도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유키토의 다잉 메시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에…?"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을 멈추고, 나는 테이블 구석에 던져진 '문제편' 원고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유키토를 자신의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 같은 묘기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해요.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설마"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겨우 하나의 단어(설마)가 떠올랐다. 나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설마 그 '사…'라는 게, '사루(원숭이)'를 말하려고 한 건가?"
"정답입니다."
U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타케마루가 격하게 짖은 거예요. 옛날부터 개와 사이가 나쁜 동물이라고 하면 정해져 있잖아요. 타케마루와 엘러리는 문자 그대로 견원지간이었던 거죠."
잠시 멍해져서 중얼거리듯 "원숭이, 원숭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U군은 여전히 순진한 미소로 응시하며,
"처음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으로 돌아가 쓴 것'이라고.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이죠?"
"—사기다. 불공평해."
겨우 기운을 짜내어, 나는 항의했다. 그러나 U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M** 마을에 사는 일본 원숭이들을 '인간'이라고는,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나 '두 사람' 같은 표현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자'라는 한자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인간이 아닌 생물일 가능성을 암시하기 위해 '자'라고 굳이 히라가나로 표기했습니다.
애초에, 아야츠지 씨, 일본 본토의 산속에 포라든가 엘러리라든가 하는 이름의 인간들이 사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덧붙이자면, M** 마을의 M**는 'monkey'를, H** 대학의 H**는 'human'을 각각 암시한 이름입니다."
"원숭이를 '남자'나 '여자'라고 썼잖아."
"남자 = 인간 중, 수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수컷도 지칭.
여자 = 인간 중, 암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암컷도 지칭.
출처는 산세이도의 '신명해 국어사전'입니다. '코지엔'이나 '다이지린'이어도 상관없어요."
"젊은 여자들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원숭이가 그런 걸 할 리 없잖아."
"그건 물론 그루밍을 말하는 거예요. 원숭이의 털 손질. 아시죠."
"—더럽다. 비겁해."
"더럽다니요. 나이 많은 포우가 참나무 열매를 깨물고 있거나,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고 있는 등, 그들이 원숭이라는 복선을 몇 가지 깔아놓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조금 흥분한 나머지, 어조를 강하게 했다.
"하지만 말이야, 원래 원숭이가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규칙'이라든지 'X'라든지 '복수'라든지......"
그러자, U君은 "어머 어머"라는 듯 얇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전부 어디까지나 원숭이의 세계에서의 일이니까요. 인간과 대화를 나누진 않잖아요? 대사도 전부 캠프의 인간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중 괄호로 묶여 있죠. 게다가 고금을 통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부터 도룡뇽까지, 생각하는 동물도 있고 나름의 문화를 가진 동물도 있어요. 인간의 말을 이해하거나, 인간적인 감성으로 행동하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최근의 미스터리에서도 있었죠. 은퇴한 경찰견의 일인칭으로 쓰인 이야기. 미야베 미유키 씨의 '퍼펙트 블루'."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그런가요?"
나는 점점 더 흥분하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야."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U君은 간단히 "네, 맞아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라 '범원숭이 맞히기'죠. 그래서 그런 언어의 엄밀성을 중시해서, 작품 속에서도 아야츠지 씨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한 마디도 '범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어요. X 같은 진부한 미지수 기호를 끄집어낸 건 고육지책이었어요. '문제편'의 체크, 해 보실래요?"
"........"
"꽤나 고심했어요, 그 부분은. 아야츠지 씨라면 분명 그 고심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불쾌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래서 아마추어 학생은 곤란하다......라고 마음속으로 독을 품으며, 심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대로 침묵하고 있자,
"저기, 텔레비전 켜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U君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러게."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이상하게 밝고 씩씩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U君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쩐지 지금 막, 시계의 바늘이 오전 0시를 지난 모양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이다.
브라운관 속에서는, 익숙한 연예인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축하해, 축하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화면의 한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원숭이잖아."
어째서 U君이 굳이 오늘 밤을 선택해서 나를 찾아왔는지. 하필이면 섣달그믐의 이런 늦은 시간에, 추운 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도 연출("복선"이라고 그는 말할지도 모르겠지만)의 하나였던 것이다. 내가 이 '범원숭이 맞히기'를 다 읽을 즈음에 딱 새해가 밝는, 그런 타이밍을 그는 노렸다. 그래서 그렇게,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던 것인가.
1992년, 원숭이해의 시작――.
어깨에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 사라져가는 듯한 기분을 나는 맛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느끼던 화가 몹시 하찮게 느껴지고, 동시에 그런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져서......
나는 U君 쪽을 보았다. 하지만, 소파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검은 배낭도 가죽 장갑도, 크림색에 초록색 줄무늬가 들어간 헬멧도, 거기에는 없었다. "돈돈다리, 무너졌다"라고 표지에 크게 적힌 원고만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확실히 익숙한 얼굴. 잘 아는 이름. 무엇인지 무척 그립고, 그렇지만 조금 얄밉고, 그 천진난만함이 때로는 이상하게 짜증스럽고......
'아, 그렇구나'라고 나는 그제야 생각해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그건...... 아니, 이제 그만두자. 이 이상은 적지 않기로 하겠다.
남겨진 '돈돈다리, 무너졌다'의 원고에 살짝 손을 뻗으며, 다음에 그가 찾아오는 건 언제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2024/04/05

명탐정의 창자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2점

명탐정의 창자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상 그리고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우라노 큐와 조수 와타루(별명 하라와타(창자))는 기묘한 화재 사건 조사를 위해 기지타니 마을로 향했다. 진범을 체포했지만, 우라노 큐는 상처로 죽고 말았다. 기지타니 마을에서 행해졌던 소나 의식 때문에 과거 흉악범들이 '인귀'로 부활했는데, 그 중 한 명에게 치명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저승에서 인귀들을 잡기 위해 과거의 명탐정 고조 린도를 우라노 큐의 몸에 부활시켰다. 고조 린도는 와타루와 함께 인귀들을 없애기 위해 활약하게 되는데...


2023년 국내 추리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던 "명탐정의 제물"의 작가 시라이 도모유키의 신간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명탐정의 제물"보다는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에 가깝습니다. 추리적인 장치가 엄청나게 많지만, 기본적으로 '특수 설정'이 바탕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그래도 망작에 가까왔던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특수 설정이 이야기의 핵심 장치로 작용하고는 있지만, 추리와 트릭은 특수 설정과 거리를 두고 비교적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딱 한 가지, 인귀가 상대를 물고 뜯어 타액과 피를 접촉하는 방법으로 혼을 옮길 수 있다는 특수 설정만 핵심 트릭 중 하나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에요. 이 트릭도 정보 제공은 충분하고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나쁘지 않았고요.

인귀들이 벌인 사건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일종의 연작 단편 형식이라 많은 사건이 등장하는데, 범인이 과거의 기억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인귀이기 때문에, 동기가 없어서 주어진 단서만 가지고 추리해야하기 때문에 '추리 퀴즈' 느낌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래처럼요.

1. 기지타니 마을 사찰 간노지 화재 사건.
Q : 청년 6명이 죽고 한 명이 중태에 빠졌다. 피해자들은 묶여 있지도 않았고 별다른 상처도 없었는데, 왜 화재 당시에 잠겨 있지도 않았던 본당에 머무른 채 죽음을 맞이했을까?
A : (우라노 큐의 추리) 방화를 이용하여 알리바이를 만든 뒤, 화재 현장에서 절도를 했던 자료관장 로쿠구루마 다카시가 범인이었다. 청년들은 마을에 원한이 있는 무나카타 다다시의 후손 스즈무라에게 이끌려 '인귀'를 불러내는 소나 의식에 동참한 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쓰러졌었다. 이를 본 로쿠구루마는 청년들 지갑을 훔친 뒤 그들에게 등유를 붇고 불을 붙이고 도주했다. 증거는 로쿠구루마가 최근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던 것 등.
2. 아예 사다 사건
Q : 1936년, 애인 이시모토를 살해하고 국부를 잘라 달아났던 아예 사다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A : 80년 전, 이시모토를 살해했던건 명탐정 고조 린도였다. 원래 고조 린도를 끌어들여 살해하려던 이시모토와 아예 사다의 계획이었다. 아예 사다가 국부를 처음에 신문지로 감싸고 있었지만, 체포되었을 때 지저분한 잡지 종이로 감쌌던게 증거. 처음에 신문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중에 2층에 있던 이시모토로 부터 절단한 국부를 건네받다가 떨어트려 지저분해진걸 감추기 위해서였다.
3. 농약 콜라 사건
Q : 클럽 D-Mouse에서 독이 든 음료를 마신 손님들이 쓰러져 한 명이 죽고 세 명이 중태에 빠졌다. 범인은 현장을 촬영하던 '아리스'의 눈을 피해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A : 범인은 사건 당시 술 취했던 친구를 부축해 주었던 '어깨녀'였다. 인귀 '체셔'가 미리 여자 하나를 술에 취하게 만든 뒤, 그녀에게 혼을 옮긴 뒤 죽은 '체셔'를 부축해서 옮기는 척을 했던 것이었다.
4.쓰케야마 사건
Q : 마을 자료관에 보관하고 있던 칼(마도 아카고코로시)을 손에 넣기 위해 자료관을 습격해 직원 니시나를 살해하고, 고조 린도에게도 중상을 입힌 무카이 도키오는 누구인가?
A (와타루의 추리) : 78년 전 무카이 도키오는 칼을 두 자루 준비했었다. 칼은 기지타니에서 마카타로 향하는 도중에 숨겨두었었다. 비가 오는 오늘, 산에 올라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내려온건 사냥꾼 이구치 미쓰오 뿐으로 그가 범인이다.

퀴즈들에 대한 증거, 단서는 모두 공정하게 제공되어 정답에 대한 설득력은 높습니다.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답게 퀴즈별로 함께 제시되는 '오답' 추리들도 볼거리입니다. 오답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간노지 화재 사건에서 와타루의 오답 :
사건은 자연 재해였다. 사건 당일, 경내에 곰이 나타나 청년들은 창문이 없는 본당으로 이동했었다. 현장에 '오고령'이라는 종이 그걸 증명한다. 종으로 곰을 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패해서 냄새로 곰을 쫓기 위해 몸에 등유를 끼얹었는데 하필 본당 화염보주에 벼락이 내리쳐 화재가 나 모두 죽고 말았다.
2, 쓰케야마 사건 :
와타루의 오답 : 무카이 도키오는 깨진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정면 입구를 이용했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지팡이가 떨어져 있었다. 즉, 창문으로 들어올 수 없고 지팡이를 사용하던 환자 스즈무라가 범인이다(칼을 손에 넣은 뒤 칼을 지팡이로 이용했다).
고조 린도의 오답 : 무카이 도키오가 정면 입구를 이용했던건 와타루들과 똑같이 통나무 다리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료관 TV가 부서지지 않은걸 보면 범행 시각은 7시 이후이다. 이건 고조 린도가 습격당한 이후이므로, 범인은 자료관에서 칼을 손에 넣은게 아니었다. 칼은 와타루의 애인 미요코로부터 건네받았다. 미요코는 야쿠자 보스의 딸로 칼을 구하기 쉬웠다.

이런 사건들에 대한 추리 외에도 농약 콜라 사건 범인은 당시 증거를 보면 왼손잡이였는데 체셔는 그렇지 않았았기 때문에, 체셔는 보석점 세이긴도에 나타나 후생성 직원을 가장하여 직원들에게 독약을 먹인 사건의 범인이었다!라던가, 와타루가 어린 시절 히로세 순경에게 폭행당했다는걸 밝혀내는 우라노 큐의 추리, 아리스가 간호사로 대학 병원에서 일한다는걸 맞춘 방법에 대한 추리 등 전체적으로 소소한 추리들이 가득합니다. 모두 공정한 정보 제공 및 합리적 추리라는 본격물의 기본 전개를 잘 따르고 있고요.

과거 흉악범들이 소나 의식으로 '인귀'로 부활한다는 설정을 통해 예전 실제 범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치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모두 조금씩 각색되어 있는데, '아예 사다 사건'은 영화 "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아베 사다 사건'이 원조이고, '농약 콜라 사건'은 아마도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쓰케야마 사건은 "팔묘촌"에서도 인용했던 '츠야마 사건'이 원조일테고요. 하지만 이 설정이 유치하다는건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과거의 유명인이 부활해서 뭔가를 한다는건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설정에 바탕을 둔 이야기 전개도 대충 넘어가는게 너무 많아요. 대표적인게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우라노 큐로 보이지만, 사실은 되살아난 고조 린도다'라는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경찰 고위 간부까지 이를 쉽게 믿는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와타루의 여자 친구 미요코의 아버지가 야쿠자 보스라는 것도 비현실적인 설정이었고요. 고조 린도 역시 독특함을 찾기 힘듭니다. 건방지고 철없는 천재 탐정의 스테레오 타입에 불과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모두 좋은건 아닙니다. 추리를 정답에 끼워맞추고 있다는게 가장 큰 문제에요. 고조 린도를 살해하기 위해 국부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는 아예 사다 사건부터 황당하기 짝이 없어요. 이 논리면 '피를 많이 흘리고 죽은 척'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 상처 부위는 '국부'일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봐도 '국부를 자른다'가 '고조 린도를 죽인다'보다 앞 선에 있는 이유처럼 보이는데 이래서야 말이 안되지요. '괴상한 성적 취향'으로 대충 수습하고 넘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고조 린도의 추리도 억지가 많습니다. 아리스가 현장에 돌아왔다고 바로 그녀가 관계자라는걸 알아챈 것, 쓰케야마 사건에서 미요코가 공범이라고 추리한 것 등이 그러합니다. 고조 린도 대신 팬인 긴다이치 고스케를 부활시키기 위해 고조 린도를 죽이려 했다는 미요코의 동기부터가 설득력이 전무한 탓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추리'의 재미는 잘 살리고 있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명탐정의 제물"보다는 확실히 못했습니다. 만화로 각색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2024/03/24

라플라스의 마녀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1.5점

라플라스의 마녀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및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물 영화 제작자 미즈키 요시로가 아카쿠마 온천에서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나카오카 형사는 요시로의 아내 치사토의 범행을 의심했지만, 경찰 수사 협조를 요청받은 환경 분석 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는 고의로 중독 사건을 일으키는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도마테 온천에서 유사한 황화수소 중독사가 또 일어났고, 나카오카와 아오에는 피해자들이 영화 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아마카스도 수년 전 가족을 황화수소 중독으로 잃었던 과거가 있었다. 
뇌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아마카스의 아들 겐토를 쫓는 소녀 우하라 마도카와 만난 아오에 교수는 마도카와 그녀 주변인물들을 통해 결국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이 모든건 뇌수술로 물리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된 겐토의 복수극이었다....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 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주년 기념작인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겐토와 마도카가 가진, 물리법칙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현상에 대한 물리적인 데이터를 구비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등으로 꽤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겐토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인 과거 아마카스가 가족을 살해했던 사건의 동기도 놀라왔습니다. 아마카스가 작성했던 블로그 글과는 사뭇 다른 가족 관계가 밝혀지는 등의 설명으로 반전이 효과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아마카스가 주장하는 천재 이론 -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 과는 반대되는 주제의식 -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는 없다 - 도 와 닿았고요. 암요, 천재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있어야 천재도 빛을 보는 법이지요.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 뿐이고 대체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우선, 전개부터 예상 그대로라 굉장히 평이합니다. 황화수소에 의한 살인은 온천을 방문했던 청년이 일으켰다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그 정체도 읽다보면 아마카스 겐토라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전문가 아오에 교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황화수소를 이용한 살인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도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닙니다. 마도카의 특수 능력이 초반에 밝혀지는 탓에, 그런 능력을 이용한 범죄라는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초능력'을 활용한 범죄라는 점에서 추리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지 않게 전개도 깔끔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많아서 시점이 자주 전환되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도카 등 다른 인물들 시점으로의 전환은 필요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아오에 교수, 나카오카 형사를 중심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나카오카 형사의 수사가 '위'에서의 지시로 마무리되지 못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뇌 수술 덕분에 미래를 예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초능력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명은 잘 되어 있지만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결국은 '머리가 좋아진 것'에 불과하거든요. 즉, 아래와 같이 '아마데우스 조'가 미사일 궤도를 흐트러트리는 것과 똑같아요.
물이 흐른다던가,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다던가 하는 식의 물리법칙 이용은 듀나의 SF 단편 "나비전쟁"에도 유사한 설정이 등장했었고요.
게다가 이 능력에 대한 것 모두는 온갖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결국 과학이라기보다는 판타지입니다. 여기에 특수 능력자를 나라에서 관리한다 등의 설정에 '라플라스의 마녀'라는 코드네임(?)까지 더해지니 이거야 원, X-men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드네요.

등장인물들도 진부하고 평이합니다. 겐토는 특히 문제입니다. 그가 아버지 아마카스를 살해하려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치사토를 유혹하여 범죄에 끌어들이고 마지막에 함께 죽여버리려고 하면서 정의, 복수를 당당하게 주장하는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심지어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말이죠!
아오에 역시 불가능하다는 말만 해서 전혀 교수답지 않았을 뿐더러, 아오에가 가족 붕괴를 앞두고 있다던가 하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우하라 교수가 딸 마도카의 뇌수술을 하게 된 동기인 '토네이도' 사고도 굉장히 억지스러웠어요. 설령 이런 사고가 있었다한들, 딸에게 검증되지 않은 뇌수술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겐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추리적으로도, SF적으로도, 전개와 완성도 측면에서 별로이며 문제 투성이라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과학과 미스터리의 절묘한 융합이라는 광고 문구는 과대 포장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뻔하고 유치한 마블 히어로물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영화는 좀 궁금하네요. 예고편을보니 아오에 교수를 주인공으로 해서 복잡했던 시점 분산을 깔끔하게 정리한 듯 보여서 책보다 좋아보이거든요. 평이하고 쉬운 전개는 영화에는 분명 장점일테고,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장면들 - 특히 클라이막스의 '다운버스트' - 은 화면에서는 꽤 그럴싸하게 보일테니, 최소한 소설 후속권보다는 기대가 됩니다.

2024/02/24

하드웨이 - 리 차일드 / 전미영 : 별점 2점

하드웨이 - 6점
리 차일드 지음, 전미영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욕의 여름밤, 한가로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리처에게 존 그레고리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영국 공수특전단(SAS)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레고리는 전날 밤에도 리처가 그 카페에 있었던 걸 확인한 뒤, 전날 자정쯤 카페 앞에 주차되어 있던 벤츠를 타고 사라진 남자를 목격했는지 묻는다. 리처가 그렇다고 하자 그레고리는 자신의 상사이자 전직 특수부대원들을 모아 민간 용병 사업을 하는 에드워드 레인에게로 리처를 데려간다.
레인은 자신의 아내가 납치되었으며, 리처가 목격한 남자가 몸값 100만 달러가 실린 벤츠를 탈취한 납치범이라고 말한다. 레인은 아내를 되찾아 달라며 리처를 고용하고, 리처는 수사 과정에서 5년 전 레인의 첫 번째 아내였던 앤이 비슷한 방식으로 납치 후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건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리처는 전직 FBI 요원이자 사립탐정인 로런 폴링과 함께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나간다.


잭 리처 시리즈 10번째 작품. 이번에는 유괴극입니다. 유괴극의 핵심인 몸값 전달에 대한 새로운 방법이 제시되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범인은 특정 차를 지정하여 차 안에 현금을 두고, 차 키를 다른 곳에 두라고 시킵니다. 그리고 레인의 부하들과 리처가 차 키가 있는 곳을 감시하는 동안, 미리 빼돌렸던 스페어 키를 이용해 유유히 차를 몰고 달아나는 것이지요. 최소한 한, 두 번 정도는 먹힐 수 있는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레인의 의붓딸 제이드가 그린 그림, 그리고 아이 침실의 인형들을 통해 유괴가 아닌 자작극이라는걸 깨닫게 만드는 소소한 디테일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범인이 차를 열쇠로 열었다'는 것에 주목하는게 괜찮았어요. 무선 리모컨 키가 일반화된 시대에 잘 어울리는 착안점이었거든요. 군인처럼 시야 확보 등을 염두에 두고 범인의 은신처를 찾아내는 과정도 설득력 높았고요. 범인을 쫓으며 뉴욕의 지리를 상세하게 풀어내는 묘사도 좋았고, 레인이 아프리카에 버리고 왔던 부하 호바트 이야기도 그럴싸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대체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추리적으로 점수를 주기 힘든 탓이 큽니다. 리처와 용병들 모두 유괴 사건은 백화점에서 차가 잠깐 멈췄을 때 유괴범이 총을 들고 올라타 유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백화점 어디에서 차가 멈출지 범인은 알 수 없었다는게 문제였다는데, 이 점 하나만으로도 운전하던 테일러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테일러가 아니면 피해자 케이트가 공범이었을테고요. 심지어 범인은 레인이 보유한 현금이 얼마인지, 레인에게 무슨 차가 있는지를 꿰뚫고 있는 등 내부자가 아니면 모를 정보를 많이 알고 있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모두들 테일러가 죽었다고 확신하며 그에게 혐의를 두지 않는지 알 수 없어요. 자동차나 현금 가방에 GPS 추적장치 하나 몰래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일반인이라면 구하기 힘들었을 수 있지만, 레인 일당은 용병 부대이니 이런 장치를 구하는건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레인을 포함한 레인의 부하들이 허무하게 최후를 맞는 마지막 클리이막스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리처를 제외한 테일러 가족을 사로잡은 뒤, 성폭행과 낙태를 운운하며 잔인함을 부각시키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수수깡 인형과 별로 다를게 없어요. 반격다운 반격은 아예 하지 못하니까요. 전직 델타포스, SAS 등 엘리트 특수 부대원 출신들이라는 설정이지만, 하는 짓과 최후는 시리즈 다른 악당들보다도 못해서 허무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테일러가 일부러 단서를 조금씩 남겨 레인을 영국 시골 농장으로 유인했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어요. 유능한 대원이라는 설명은 있었지만, 장기간 포위와 대치가 가능한 용병들인 레인 일당과의 전면전은 무리입니다. 이보다는 유괴극을 꾸미기 전에 레인을 먼저 살해하는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거에요. 케이트가 위자료 대신 레인이 가진 현금 절반을 몸값을 가장하여 챙겼다는데, 레인이 죽었다면 전부를 챙길 수도 있었을테고요.
레인의 남은 용병 버크, 크룸, 코왈스키가 미국으로 돌아가 레인의 남은 돈을 빼앗아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죽은 보스의 돈에 손을 대지 않을 정도의 도덕군자들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이미 소액은 착복하려는 시도도 했었는데 말이죠.

인물들도 매력적이지 못하고 평면적입니다. 레인과 그 일당은 악덕 용병 부대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인물들로 묘사됩니다. '기뉴 특전대'와도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약하다는 점에서는 그보다도 못하고요.
잭 리처의 파트너인 전 FBI 수사관이자 현직 탐정 폴링 역시 시리즈 다른 작품 여주인공들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 뿐더러 등장하는 이유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그녀가 사건 수사와 해결에 도움을 주는 요소는 거의 없거든요. 탐정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영국 내에서 몇가지 정보를 얻는 등의 활약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리처 혼자서도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였습니다. FBI 출신이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마지막 레인 일당과의 결전에서는 사로잡힌 공주님 역할 뿐이고요. 결론적으로, 그냥 리처의 스쳐지나가는 애인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한없이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