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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1

잔혹한 여로 - 야마무라 미사 : 별점 2점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거주한 적이 있을 정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는데,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일본 여성 추리작가 야마무라 미사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설 연휴 때 원서로 읽었습니다. 

모두 일곱 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의외였던건, 수록작 중 세 편은 트릭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통파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특히 "공포의 연하장"이 아주 괜찮습니다. 트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겨진 유류품을 통해 피해자는 당첨된 연하장을 상품인 우표와 오전 9시 이후에 교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인 거래 증권회사 직원 가사하라는 오전 8시 40분에 출근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보냈지만, 사전에 당첨 유무를 아는건 불가능해서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 수도 없고요.
다카기 경부는 연하장에 소인이 없는 점(연하장은 12월 22일까지 접수분은 1월 1일 도착 보장이라 소인이 찍히지 않음)에 주목해서, 빌견된 당첨 연하장은 가사하라가 사건 당시에 가지고 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당첨 연하장을 가사하라가 미리 확보할 수 있었던 건 증권회사가 직원에게 연속 번호의 연하장 500장을 주는 전통 때문이었습니다. 연하장 추첨에서 최하등 우표는 100장당 반드시 3장 당첨되므로, 가사하라는 보내지 않고 남겨 둔 100장의 연속 번호 연하장만 있어도 반드시 당첨 엽서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즉 가사하라는 당첨 번호 발표 후 보관 중이던 연하장 중 당첨된 것을 고른 뒤, 사건 당일 피해자 집에 들고 가서 피해자를 살해하고 집에 있던 자기가 보낸 진짜 연하장과 바꿔치기했던 겁니다. 상품은 따로 교환해서 시체를 발견하러 갔을 때 몰래 피해자 주머니에 넣었고요.

이렇게 일본의 연하장 풍습과 증권 회사의 전통 등을 잘 결합하여 만들어 낸, 최근 본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멋진 트릭입니다. 완벽한 알리바이였지만, 가사하라가 원래 피해자에게 보냈던 연하장이 드러나면서 범행이 밝혀지는 결말까지 깔끔합니다.

피해자와 가사하라의 육체 관계와 같은 불필요한 설정과 진짜 연하장이 발견되는건 순전히 운이었다는 단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4점도 충분한 수준입니다.

"검은 테두리의 사진"은 오사카로 출장간 범인이 전날 사진으로 찍어 두었던 방송이 오사카에서는 그날 방송된다는걸 알고난 뒤, 전날 찍었던 사진을 알리바이에 이용한다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사실 트릭이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우연과 운이 지나치게 많이 좌우되는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같은 방송이라도 방송하는 채널이 다른데, 경찰이 이를 눈치채고 체포한다는 결말도 설득력이 약했고요. 앞서 범인 오사와는 '화면만 사진에 담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요. 채널 다이얼이 어떻게 보였다는건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결말에서 호텔 종업원이 오사와의 알리바이를 깨는 증언을 했다고 증언했다니, 사진 따위는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진은 다른 사람이 찍어줄 수도 있으니, 애초에 그리 탄탄한 증거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래도 TV를 찍은 사진을 알리바이에 사용한다는 설정만큼은 독특해서 눈길이 갑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 방식인 덕분입니다.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지만, 시대상을 잘 반영한건 분명합니다.

"죽은 자의 손바닥"에서는 셀로판지를 이용하여 이미 죽은 사람의 손바닥 도장을 찍는 트릭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위의 두 편 보다는 별로에요. 범죄물, 수사물, 추리물의 모든 측면에서 기대 이하거든요. 경찰의 추리는 근거없는 첫인상에 기반하고 있고, 범행 방법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런데 위의 세 작품을 제외하면 다른 작품은 모두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내용도 그냥저냥합니다.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간략하게 소개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잔혹한 여로"는 일종의 범죄 반전물입니다. 진범이 드러난 뒤 진범마저 개미지옥에 빠진다는 마지막 부분은 꽤 그럴 듯 합니다. "50퍼센트의 행복"은 오래 전 친자 감정 방식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볼만했던 치정 드라마이고요.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너무 뻔합니다. 결말도 안이하고요.

"고독한 증언"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를 떠오르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가사이 나오미의 증언을 회사측, 유족측이 제각각 제멋대로 유리하게 이용하려 한다는 내용이지요.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나오미의 고뇌를 심도깊게 다루지도 못했고, 밝혀진 진상 - 폭탄 테러 - 도 설득력이 약하며, 가사이 나오미가 결국 자고 있었다며 입을 다무는 결말도 영 아닌 탓에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살의의 축제"는 오래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공소 시효가 지난 뒤, 돈으로 진범을 날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기가 되는 살인범으로 몰린 사람은 가족마저도 영원히 떳떳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일본의 분위기 묘사, 그리고 당시 범인과 유족 측 인물들이 당시 상황을 복잡하게 밝히는 결말은 꽤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국내에 소개된 걸 읽은 바람에 다소 김이 빠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만, 잘 모르는 작가의 진면모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공포의 연하장"만큼은 국내에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2025/11/28

두산 베어스 스토브리그 : 기아 지명 선수 및 FA 단상

기아의 지명 선수는 작년 지명 신인 홍민규 선수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전에 올렸던 글에서 박치국 선수가 풀리지 않으면 박신지, 윤태호, 최준호, 양재훈, 홍민규, 김유성, 제환유 선수 등 중에서 지명되리라 예상했는데(그중에서도 김유성 선수), 역시 예상대로였습니다. 반드시 보호해야 했던 주력 선수들에 더하여 작년 지명 선수 중 박준순, 최민석 선수를 보호해야 했으니 이 정도 급 선수들을 지키는 건 무리였으니까요.
올 시즌 30여 이닝을 던지며 가능성을 보여준 선수라 무척 아쉽지만, 팀으로서는 제법 많은 우완 정통파 투수들이 있어 공백은 최지강, 윤태호, 양재훈 선수 등이 메꿀 수 있으리라 보여 선방했다고 생각합니다. 홍민규 선수도 기아에서 대성하기를 바랍니다.

박찬호 선수 FA 계약은 이렇게 마무리되었고, 우선 베어스의 FA 선수인 조수행, 이영하, 최원준 선수는 모두 잡았습니다. 오버페이 논란은 있지만, 조수행 선수 외에는 납득이 가는 수준이라 생각합니다. 이영하 선수는 젊은 나이에 고점이 높았고, 최원준 선수는 FA 직전인 올 시즌 계투 전환을 받아들이며 팀에 헌신한 측면도 감안해야 하고요. 특히 이영하 선수는 최 전성기 코치였던 김원형 감독 및 바뀐 코치진의 지도에 따라, 과거 활약을 재현해 준다면 오히려 좋은 계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김재환 선수가 아무런 대가 없는 방출 선수 신분으로 시장에 풀린 건 의외였어요. 그런데 그로 인해 여러모로 욕을 먹고는 있는 상황은 저는 이해하기 힘드네요. 이건 선수를 비난할게 없으니까요. 4년 전 계약 당시, 이 조항을 삽입하는 조건으로 구단이 돈을 아낀 건 사실이잖아요. 양측 합의하에 계약했던 걸 지금 와서 일방적으로 한쪽을 비난하는 건 말이 안 되지요(마찬가지로 저는 케이브 선수 보류권 문제는 구단 잘못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4년 전 계약 시 이런 옵션과 조건에 대해 공개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요.

하여튼 김재환 선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라 베어스와 다시 계약하는 건 무리로 보이며, 다음 시즌 구상에서는 없는 선수로 쳐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박찬호 선수 영입에 김재환, 홍건희 선수가 빠진 셈이 되고, 박찬호 선수가 좋은 선수이긴 하지만, 또 김재환 선수의 올해 활약이 기대 이하였다 하더라도 베어스 전력에는 흠집이 가는 상황입니다. 수비야 그렇다 쳐도, 타선에서 그 정도 역할을 대신할 선수? 당장은 없지요. 넘치는 내야에 비해 외야 선수층이 빈약하게 문제인데, 이는 기대를 모았던 김대한, 김민석 선수가 자리를 잡지 못하는 탓이 큽니다.
그래도 다른 커뮤니티의 의견처럼 김현수 선수나 강백호 선수에게 투자를 했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김현수 선수는 나이가, 강백호 선수는 최근의 부진과 포지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는 새로 계약한 외국인 선수 다즈 카메론이 어느 정도 활약해 주고, 제발 '나는 좌익수다 시즌 2'에서 누구든 기회를 잡아 주전으로 자리 잡아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넘치는 내야 자원 중 몇 선수가 외야 컨버젼을 하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스토브리그와 외국인 선수 계약이 모두 마무리되고, 전지훈련도 끝나면 다시 제대로 시즌 예상을 해 보겠습니다만, 이래서야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좀 어려워 보이기는 하네요. 

덧붙이자면, 김재환 선수가 어디로 갈지도 궁금합니다. 키움과 LG는 영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김현수 선수와 강백호 선수를 영입한 KT와 한화도 빼야 할 테고, 최형우 선수 계약이 더 급한 기아는 아닐겁니다. 그렇다면 SSG, 삼성, 롯데, NC가 후보인데 이 네 팀 모두 김재환 선수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는 않네요. 네 팀 중에서 그래도 필요하다면 NC인데, 시장 상황과 선수 상황 모두를 볼 때 거액을 배팅하지는 않을테고요.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4년 전 FA 계약은 김재환 선수에게도 그리 좋게 작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2025/09/27

돈돈 다리, 떨어졌다 - 문고판 후기

어제 읽은 "돈돈 다리, 떨어졌다" 문고판의 아야츠지 유키토가 직접 쓴 후기입니다. 재미있는 내용이 제법 있어서, 이 부분만 ChatGPT로 번역하여 소개해 드립니다.

문고판 후기

『どんどん橋、落ちた』라는 이 작품집에는 사실 남다른 애착이 있습니다. 일반 단행본 판본이나 고단샤 노벨스판으로 읽어 주신 분들의 반응은 각자 달랐습니다. 가벼운 ‘범인 맞히기’ 단편집으로 시원하게 즐긴 분도 있었고, “바보 같다”라며 불쾌해한 분도 있었지요. 현대 본격 미스터리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일종의 비판으로 무겁게 읽은 분도 있었고, 이번 문고판 해설을 써 주신 시노하라 미야코 씨처럼 “애잔한 미스터리”로 받아들이신 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읽든 독자의 자유이며, 한 번 손을 떠난 이상 작가가 “이렇게 읽어 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작품집에 실린 다섯 편 가운데 네 편(제1화부터 제5화)을 1998년 가을부터 1999년 여름에 걸쳐 잇달아 잡지에 발표하던 시절을 돌아보면, 제가 그 작품들을 꽤 절실한 마음으로 썼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절실한 마음”이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 ‘존재 방식’이 이대로 좋은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내 존재 방식은 이대로 괜찮은가? 결국 그 답은 제5화의 마지막에서 일단 제시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말끔히 매듭지을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번 문고판이 이 작품집의 최종판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각 수록작에 대한 짧은 해설을 덧붙입니다.

「どんどん橋、落ちた」"돈돈 다리, 떨어졌다."
(초출 = 아유카와 데쓰야·시마다 소지 편 『ミステリーの愉しみ 第五巻 奇想の復活』 릿푸샤, 1992년 9월 10일 초판)

1991~92년에 걸쳐 아유카와 데쓰야·시마다 소지 두 분이 책임 편집한 앤솔로지 『ミステリーの愉しみ』 전 5권이 릿푸샤에서 간행되었습니다. 그 최종권 『奇想の復活』은 띠지에 “헤이세이 본격의 기수”라 내세운 젊은 작가 19명의 신작을 모은 책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문장이나 인물 묘사보다 무엇보다 기상천외하고 전인미답의 발상을 담은 본격물을” 써 달라는 편자 시마다 씨의 요청에 응해 제가 쓴 작품이 이것입니다. 데뷔 이래 “인간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상투적인 말을 들으며 내심 질려 하던 차였지만, 그 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애초의 원형은 1984년 여름, 교토대 추리소설연구회 합숙에서 선보인 ‘범인 맞히기’ 단편이었습니다. 기노사키 온천의 어느 여관 큰방에서 십수 명의 회원을 상대로 ‘문제편’을 낭독했을 때의 두근거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젊은 날의 아비코 다케마루 군과 노리즈키 린타로 군도 있었지요. 두 사람을 포함해 거의 모두가 속아 넘어가 주어 무척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으로 천진난만했던 때였습니다.

「ぼうぼう森、燃えた」"보우보우 숲, 불타다."
(초출 = 『小説現代メフィスト』 1998년 12월 증간호)

1992년에 「どんどん橋、落ちた」를 썼던 즈음에 떠올려 “언젠가 속편을 써 볼까” 하고 농담처럼 몇 해 동안 품고 있던 아이디어입니다. 제목도 처음부터 이대로 정해 두었지요. 게임 『ナイトメア・プロジェクト YAKATA』 관련 일을 간신히 마무리하고 본업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마음만 앞서 집필에 집중이 되지 않던 1998년 가을, 반쯤은 재활의 뜻도 담아 『메피스토』에 발표했습니다. 그만한 고생은 있었지만 의외로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다만 「どんどん橋」 때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의 ‘고생’이자 ‘즐거움’이었지요. 참고로 이 작품 속에 삽입된 ‘작중작’에는 블랙 유머와 여러 겹의 숨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알아차릴 독자는 아마 손에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フェラーリは見ていた」"페라리는 보고 있었다."
(초출 = 『小説現代メフィスト』 1999년 5월 증간호)

본서에서 유일하게 정식 ‘독자에의 도전장’이 들어 있지 않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작가로서 저는 이것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의외이지요?). 등장하는 ‘U야마 씨’, ‘K코 씨’, ‘A모토 군’은 모두 실재 인물입니다. 사건은 물론 완전한 허구이지만, ‘카사이 씨 댁 신짱’을 둘러싸고 작중에 “암시적”이니 “예견적”이니 하는 말이 오가는 대목에는 작은 원 네타가 깔려 있습니다. 굳이 밝히지 않는 편이 멋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신경 쓰이시는 분은 가사이 기요시의 『ミネルヴァの梟は黄昏に飛びたつか? ——探偵小説の再定義』(하야카와쇼보, 2001)을 참조하시길.

「伊園家の崩壊」"이소노 가의 붕괴"
(초출 = 『小説現代メフィスト』 1999년 9월 증간호)

중심 아이디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지만, 설정이 설정인지라 선뜻 써서 발표할 결심이 서지 않았습니다. 전년에 우연히 고지마 미야코의 만화 『こども地獄』(분카샤, 1998)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등을 떠밀리듯 결심했습니다. 잡지 발표 당시에는 당사자인 고지마 씨께서 훌륭한 삽화를 그려 주셨고, 이번 문고화에서도 그 그림의 재수록을 생각했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자숙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문제작일지도 모릅니다. 본격 미스터리로서는 그렇지만, 다섯 편 중에서는 오히려 정통파에 가까운 편이 아닐까 합니다.

「意外な犯人」"의외의 범인"
(초출 = 『IN★POCKET』 1999년 9월호)

원본이나 노벨스판의 후기에 적었던 말을 반복합니다만, 작중에도 언급했듯 이 소설은 1994년 요미우리TV 심야 특집 『真冬の夜のミステリー』의 일부로 제작된, 제가 원안을 제공한 추리 드라마 「意外すぎる犯人」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극중극 부분에 배우 이토 세이코 씨가 등장하는 것은 드라마 그대로지만, 그 밖의 배우 이름은 가공으로 바꾸었습니다. 원안을 만들던 시점부터 언젠가 이 네타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생각해 왔습니다만, 설마 이런 형태, 이런 결말의 이야기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인생은 무엇이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법입니다.

이렇게 되돌아보니, 고작 3년 전에 묶은 작품집임에도 어쩐지 이상할 만큼 숙연한 기분이 듭니다. 다섯 편 중 세 편에 등장하는 얄미운 젊은이에 대해서는 일단 이것으로 봉인…할 작정입니다만, 글쎄요.

현안인 『暗黒館の殺人』도 연재를 시작한 지 벌써 2년 반. 헉헉대며 숨이 차오르면서도 슬슬 7합목이 보이는가 싶은 데까지 진행했습니다. 『鳴風荘事件』 이래 무려 7년 만의 장편 『最後の記憶』을 근래에 간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1987년 『十角館の殺人』으로 데뷔한 지 딱 15년. 올가을이 저에게 큰 분기점인 것은 분명하고, 그런 시기에 이 『どんどん橋、落ちた』가 문고화되는 것은, 이것 또한 뭔가 의미심장한 인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서두에서도 슬쩍 언급했듯 이 책의 해설을 써 주신 시노하라 미야코 씨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홉 해 전 『海になりたい青』와 『満たされた月』 두 장의 앨범을 잇달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빛바래지 않았습니다. 노랫말처럼 엮인 “애잔한 해설”, 정말 고맙습니다.

2002년 9월
綾辻行人

2025/05/18

시계 도둑과 악인들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점

시계 도둑과 악인들 - 4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방주", "십계"로 유명한 신예작가 유키 하루오의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집. 전직 도둑 하스노가 탐정역을 맡고, 그의 동료로 화가 이구치가 등장하는 다이쇼 시대 무대의 단편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 작품은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지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연결되어 있어서 느슨한 연작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단편집의 가장 큰 장점은 기발한 트릭과 추리 구조에 있습니다. 불가능 범죄로 보였던 사건이 논리적으로 해결되는데, 이를 위한 단서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말 그대로 '정통파 추리물'인 셈이지요. 유괴, 밀실 살인, 연쇄살인, 보석 도난, 일상계스러운 편지에 얽힌 과거의 비밀 등 사건의 종류도 다양해서 흥미를 더해주며, 다이쇼 시대의 분위기를 잘 살린 묘사, 인물 간의 대화들도 볼거리였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하스노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엘리트 출신의 전직 도둑으로, 굉장히 독특한 사고 방식을 갖춘 천재 탐정이라는 비현실적인 인물을 묘하게 현실적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편 전반에 걸쳐 범인의 동기가 전반적으로 약한 탓에, 와이더닛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해 억지로 만든 설정이 눈에 띄며, 일부 트릭 역시 과정은 흥미로우나 실행 가능성이나 현실성 면에서 허술함이 느껴지고요. 또한 장황한 묘사로 인해 리듬이 끊기거나, 인물의 심리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아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하스노가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데, 화자가 이구치가 아닌 단편들에서는 하스노의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도 아쉬웠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로 트릭과 분위기는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이야기 전체의 완성도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면 추천드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에몬 씨의 미술관"

화가 이구치는 친구 하스노에게 시계 바꿔치기를 부탁했다. 이구치의 아버지가 자산가 가에몬 씨에게 판 시계가 사실은 모조품이었고, 가에몬 씨가 그것을 미술관에 전시하려 하자 일이 커지기 전에 진품으로 되돌리려는 목적이었다. 말로 설득하는걸 포기한 두 사람은 미술관에 잠입해서 직접 바꿔치기를 시도하는데...

이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도입부로는 충분한 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전직 은행원이자 도둑 출신인 미남자 하스노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좋습니다. 다이쇼 시대를 충실히 그려낸 시대 묘사도 매력적이고요. 별 거 아닌 것처럼 흘러나온 이야기들을 모아 진상을 추리해내는 정통 추리물로서의 완성도도 괜찮은 편입니다. 가에몬 씨의 알 수 없는 언행 - 왜 미술관을 촌 동네에 만들었는지, 왜 미술관을 세우려는데 전시할 그림을 판매할 사람은 불신하는지, 본인은 그림을 보는 눈이 없다고 했으면서 왜 미술관에 소장품을 전시하려 하는지 - 와, 기묘한 미술관의 구조 - 긴 통로 위의 초가 지붕, 두꺼운 벽돌 담장, 화풍이나 시대순이 아닌 뒤죽박죽 전시 배치 - 등은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한 하스노의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미술관은 마음에 안 드는, 진위가 의심되는 소장품을 화재를 위장해 태워버리려고 만든 건물이었다는 것이지요. 하스노가 화재가 일어날 시점을 추리해내는 과정도 논리적이라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동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진위가 의심된다면 단순히 폐기하거나 감추면 되는데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들고 복잡한 과정을 택했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캐릭터, 추리는 나쁘지 않지만 동기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악인 일가의 밀실" 

미노다 가의 차남 아키마사가 밀실에서 살해당했다. 미노다 저택에는 장남 유키마사, 장녀 미치에, 막내 아쓰요시, 당숙 아키히코 등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를 증오하는 막장 가족이었다. 아키마사는 가족 중 유일하게 하녀 아쓰코와 함께 상식인처럼 보였으나, 실은 사기를 일삼던 악인이었다. 사기 피해 배상을 위해 저택을 찾은 하스노와 이구치는 하녀 아쓰코를 도와 밀실 살인의 진상을 밝혀낸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밀실 트릭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빗장으로 굳게 잠긴 문이지만, 사실 빗장은 애초에 바닥에 놓여 있었습니다. 문은 밀실에 굴러다니던 공구(끌)를 열쇠 구멍으로 실을 넣어 끌어 올린 뒤, 고정쇠에 걸어 잠갔습니다. 문을 부술 때 공구는 바닥으로 떨어져 증거가 인멸되었지요. '고정쇠에 꽉 끼어 외부에서 실 정도로는 움직일 수 없는 빗장'이라는 맹점을 깨고 현실적으로도 구현 가능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또 하나의 장점은 피해자가 유키마사였던 이유입니다. 이 막장 가족 내에서는 죽었을 때 곧바로 신고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유키마사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족이라면 죽든말든 아침까지 내버려 두었을거라는 거지요.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증오로 뭉친 가족을 묘사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 역시 동기의 설득력에 큰 결함이 있습니다. 범행 동기가 고작 '성질 고약한 아버지가 보낸 빗장을 망가뜨린 것을 숨기기 위함'이며, 이를 위해 문을 부술 때 망가진 걸로 위장하느라 밀실 살인을 저질렀다는데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문을 부수기 위해 밀폐했다'는게 목적이면, 그냥 불을 지르고 밀실을 만드는게 더 손쉬웠을거에요. 또한, 이따위 동기를 위해 이렇게 쉽게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윤리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워서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네요.

인물 묘사도 지나치게 1차원적이라, 악한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만화 속 등장인물처럼 느껴집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하녀 아쓰코도 엿듣기 능력자라는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해 존재 이유가 애매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트릭은 인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인 동기와 평면적인 인물 묘사는 끔찍한 수준입니다.

"유괴와 대설 - 유괴의 장 / 대설의 장" 

이구치의 처형 부부의 딸, 미네코가 유괴되었다. 이구치는 하스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유괴범들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둘은 여러가지 단서를 확보하여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 결국 둘은 미네코를 구해내고 범인 일당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품의 백미는 하스노의 추리 과정입니다. 하스노는 범인들이 남긴 몇 안 되는 단서, 예컨대 은행 영업시간 이후에 편지를 보낸 점, 자정에 몸값을 요구한 점, 현금으로만 요구한 점 등을 근거로 범행의 목적이 ‘집에 있는 특정한 현금’에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 결과 집안의 돈 중 위조지폐가 섞여 있음을 밝혀내지요.
범인들이 몸값을 받기 위해 장인을 커다란 굴뚝 위로 유도하고, 올라간 틈을 노려 짐을 훔쳐낸다는 설정은 몸값 회수의 현실적 대안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범인들이 숨겨놓은 돈을 위조지폐 사이에 넣기 위해 위조지폐를 직접 제작했다는 발상도 참신했고요. 

하스노와 이구치가 좁은 은신처 공간에서 강도 일당을 하나씩 제압해 나가는 장면도 긴장감과 함께 재미를 전해 줍니다. 제한된 환경 안에서 도구를 활용해 열세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은 영화 "나홀로 집에"를 연상케 하고요. 

하지만 동기에 대한 설득력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범인들이 유괴를 실행한 이유는 위조지폐의 출처가 드러나면서 은신처가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리에를 살해했고, 일본을 떠날 계획까지 세운 상황에서 굳이 유괴라는 위험한 수를 둘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강도 경험이 풍부한 일당이 원래 방식대로 범행을 저지르고 돈을 마련해 떠나게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니까요. 
아울러, 위조지폐를 만들어 돈을 숨겼다는 것도 참신하지만 설득력이 낮습니다. 

또한, 범인 일당이 두 패로 나뉘어 있었고, 아키야마가 만다를 살해한 뒤 미네코가 범인인 것처럼 위장하려 했다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이미 돈을 확보한 상황에서 만다 일당을 제거하려 했다면, 더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와 활극은 인상적인 부분이 있지만, 범행 동기와 일부 전개는 여전히 무리수가 많아 감점합니다.

"하루미 씨의 외국 편지" 

이구치와 하스노는 은인인 하루노 사장을 만났다. 하루노 사장은 하스노에게,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도착한 프랑스어 편지를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그는 자신과 자매 사이였던 세 명의 여자가 얽힌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하스노는 과거를 조사하여 편지에 담긴 진실을 밝혀낸다.

이 작품은 앞선 단편들과는 결이 다른, 잔잔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지닌 일상계 힐링물입니다. 사람 사이의 은혜와 보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이 인상적이네요. 하루노 사장이 겪은 삶의 굴곡 — 처음 교제했던 하루미의 사고사, 이어 그녀의 여동생 쓰키요와의 결혼, 그리고 다시 쓰키요의 여동생 야요이와의 결혼 — 은 자칫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설득력있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하루미를 구하려다 불구가 되어버린 프랑스인 샹플랭에게 하루미가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하루미의 동생들이 하루미의 삶을 대신 살아갔다는 이야기인데 아주 그럴싸했습니다. 다이쇼 시대라면 더욱 '보은'에 신경썼으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하루노 사장이 쓰키요 사후 겪었던 도난 사건은 야요이와 결혼하려는 의도를 뒷받침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추리도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해 줍니다.

다만, 아무리 보은이라도 일생을 바쳐 편지를 보냈다는건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죽기 직전까지 야요이가 하루미인 척하며 샹플랭에게 편지를 썼다는건 감동적이기보다는 억지로 보였고요. 야요이가 하루노 사장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이를 조금 더 뚜렷하게 드러냈더라면 감정선이 훨씬 명확해졌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따뜻한 이야기와 독특한 진상 설정은 좋았어요. 마무리만 여운을 남겨주었더라면 더 좋은 점수를 주었을텐데 약간 아쉽네요.

"미쓰카와마루호의 요사스러운 만찬"

전쟁통에 돈을 번 졸부 히로카와는 '흑조회'라는 괴상한 회합을 열어 왔는데, 이번에는 화물선 미쓰카와마루호에서 호랑이를 요리해 먹기로 했다. 만찬 직전에 고용인 데루에는 손님 미나미의 처참하게 훼손된 시체를 발견하고 히로카와에게 알렸지만, 사체는 사라졌고 히로카와는 이를 함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데루에는 하스노 일행에게 사실을 고백했고, 이들은 함께 배 안을 재조사해 나갔다. 

그들은 미나미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던 신문기자로, 손님 중 누군가를 체포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또 다른 손님 히라이가 살해된 후 하스노는 히라이의 시체 유기 방식을 단서로 삼아 범인을 밝혀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수수께끼 풀이의 정석을 따르는 정통 추리물로서의 재미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스노와 독자 모두에게 동일한 단서가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호랑이가 있는 창고를 여는 열쇠 주머니를 옮길 수 있었던 인물, 그리고 사체를 끌어올릴 수 있는 쇠밧줄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 진범이라는건 독자들도 모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의미해 보였던 요소들이 모두 퍼즐의 일부였다는 점도 인상적이에요. 예를 들어, 미나미의 시신에서 살덩이를 베어낸 행위는 단순히 연쇄살인의 특징으로 여겨졌지만, 실은 그것으로 호랑이를 유인해 창고 안 석탄 자루를 꺼내기 위한 장치였거든요. 배라는 폐쇄된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사건 전개와, 배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비들을 트릭과 연결시킨 설정은 이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 빛을 발하고요.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구리야마의 의도 — 승객 전원을 살해한 뒤 인육으로 식량을 조달하며 도주할 계획이었다는 설정 — 는 작품에 섬뜩한 여운을 남깁니다.

또한, 화가 이구치와 그의 친구 오쓰키가 나누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대화도 이 작품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입니다. 여성 시신을 훼손해 예술품처럼 연출한 범인을 예술가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입니다. 원래 이구치는 '예술은 완전히 무의미하면서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오쓰키는 여성 시신을 훼손한 결과물이야말로 '무의미하고 가치있는 물품'이라서 예술일 수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구치는 성적 욕구 때문에 이렇게 저지른거라면, 배가 고파서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만든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고 대꾸하지요. 목적이 있는건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면서요. 그리고 성욕과 외설과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로 이어지는데,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끝나기는 다소 아깝다 싶을 정도로 괜찮았습니다. 아예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리야마의 범행 계획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전원을 한꺼번에 죽이려 했다는 설정은 독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인육을 식량으로 삼으려는 계획과는 모순됩니다. 굳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었는지도 설명이 부족해요. 추리적으로는 공정함 측면에서는 완벽하지만, 이 탓에 범인을 특정하기 쉬워진다는 약점도 존재하고요. 

아울러 전반적으로 묘사가 장황하게 이어지는 구간이 많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이야기의 밀도에 비해 분량이 과도하다는 인상도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완벽한 구성과 재미있는 주제의 대화는 돋보이지만, 범인의 계획과 이야기 구성의 일부는 설득력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평균 수준은 됩니다.

"보석 도둑과 괘종시계"

이구치는 집에서 괘종 시계를 도난당하고 친구 하스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최근 주변에서 일어난 루비 도난 사건과 이 사건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전말을 들려주었다. 하스노는 이구치의 설명을 바탕으로 관계자들을 만난 뒤, 치밀한 추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

전작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사건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장점이라면 많은 수수께기가 등장한다는 겁니다. 첫째, 범인은 어떻게 이구치가 철저히 숨겨놓았던 괘종시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는가? 둘째, 범인은 어떻게 미쓰에의 드레스 세 벌 중 진짜 루비가 달린 드레스만을 알아냈는가? 셋째, 수많은 꾸러미 중 어떻게 루비 팔찌가 들어 있는 꾸러미만 골라서 훔쳐낼 수 있었는가?인데 마치 불가능 범죄처럼 보이지만, 모두 논리적인 설명과 함께 트릭이 밝혀지며 독자에게 추리의 쾌감을 선사합니다.

가장 인상 깊은 트릭은 루비 팔찌를 훔친 방식입니다. 범인은 팔찌가 들어 있는 상자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자 하나만 강제로 열린 것처럼 만들어 미쓰에의 눈에 띄게 했습니다. 이를 보고 미쓰에는 팔찌가 도난당했다고 착각했고요. 이후 고리짝 안에서 상자가 담긴 귤색 꾸러미가 사라졌다고 매니저 미즈타니가 보고했으니, 결국 그가 범인이라는 결론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또한 이전 단편에서 등장했던 괘종시계나 인물 미네코가 다시 등장해 연작의 흐름을 이어가는 느낌도 좋습니다. 단편집 안에서 세계관이 공유되는건 확실히 읽는 재미를 더해주니까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괘종 시계를 발견한 방법입니다. 옷본을 찾다 우연히 시계를 발견했다는게 진상이라 시시했어요.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하고 있기도 하고요. 거대한 시계를 훔치는 것 보다 루비만 떼어가는게 빨랐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드레스에 달린 진짜 루비를 판별한 트릭도 역시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해당 드레스만 기장을 늘렸다는 트릭이 핵심인데, 범인이 옷본을 바꿔치기한 방법이나 드레스 수선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무엇보다 범행 동기가 약하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범인 미즈타니는 대신 보관하던 귀중한 루비를 가문 장남이 팔아치워서 루비를 훔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비의 디자인과 크기까지 완전히 똑같지 않다면, 단순히 같은 보석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진짜 루비만 골라 훔친 이유도 불명확해요. 겉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면, 가짜 루비로 대신해도 되잖아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수수께끼와 트릭의 구성은 기발했지만, 동기와 설정 면에서는 설득력이 부족해 완성도를 떨어뜨립니다.

2025/05/17

Q.E.D Iff 증명종료 28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28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통의 시리즈 28권입니다. 이번에는 "행운", "논점 정리" 두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 편 모두 평균 수준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행운"

요식업 경영자 쿠마노 츠요시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돈과 애인을 쿠마노에게 빼앗긴 다테 슈지였다. 그러나 다테 슈지에게는 시간 안에 범행 현장까지 도착할 수 없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알리바이 깨기 트릭물입니다. 다테 슈지는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에서 범행 현장까지 30분 안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차를 이용하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거나, 똑같이 생긴 피자 배달 오토바이를 곳곳에 배치해두고 오토바이가 있는 장소까지 건물 내부를 뛰어서 이동하더라도 30분 안에 이동은 불가능했다는게 경찰 조사 결과였지요.

여기서 목격자의 '전파 시계' 시간을 조작하여 이동 시간을 확보했다는 토마의 추리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자동으로 시간을 조정하는 '전파 시계'의 특성을 이용하려면 전파가 멈추는 '정파 시간'에 범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쉬운 대낮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까지 깔끔하게 설명되지요. 그 날, 그 시간에 목격자의 전파 시계는 배달을 갔던 슈지만 조작할 수 있었고요.

Q.E.D.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수학적 이론 소개는 없지만, 주로 묘사되는 미즈하라 경부와 가나 사이의 애틋한 관계도 인상 깊었어요.

물론, 어차피 방범 카메라로 이동 경로를 특정하면 알리바이 자체가 의미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방범 카메라로 시간을 특정하면 되니까요. 목격자가 전파 시계의 시간이 갑자기 바뀌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남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본격, 정통파적인 알리바이 깨기 트릭물로는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됩니다. 정파 시간이라는건 처음 알게 된 정보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논점 정리"

가나의 동급생 어머니인 타니시 마키가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해고 위기에 처했다. 마키가 도움을 요청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나는 우연히 사건 해결을 돕게 되었고, 사건 배후에 회사의 경리부장 후지츠보 토시야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후지츠보가 모든 걸 꾸몄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궁지에 몰리는데...

도입부에서 토막 사체를 등장시키는 강렬한 연출이 나오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후지츠보가 공금 횡령 사실을 마키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목 그대로 ‘논점 정리’를 하며 사건을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처음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핵심 논점은 마키가 실제로 횡령했는지가 아니라, '회사가 횡령의 증거를 갖고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증거가 없다면 회사와 강하게 맞설 수 있었지요. 그러나 마키는 토막 사체를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정황 증거에, 횡령 증거를 스스로 찾으려다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이때 토마는 다시 논점을 정리합니다. 마키는 함정에 빠졌다고요. 이 지점에서부터 후지츠보가 횡령의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 나가는 전개는 깔끔합니다.

이렇게 ‘논점 정리’라는 개념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구성과 장난같지만 현실적이었던 토막 살인 연출 트릭이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래와 같이 토마와 가나의 관계가 명확히 진전된 듯한 느낌을 준게 오랜 팬으로서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이 정도면 다음 권 정도에서는 본격적으로 고백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기네요.

하지만 후지츠보가 조카의 취업 청탁을 굳이 연출할 필요는 없었다는 단점은 큽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더라면 마키가 스스로 자멸했을 텐데, 괜히 자신에게도 동기가 있는 듯한 연출을 하며 사람들에게 알릴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연출 방식도 유치해서 금방 들통났는데 왜 이런걸까요? 아울러 추리적인 면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서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12/29

2024 블로그 리뷰 결산

안녕하세요. 어제의 "사카나와 일본"을 끝으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스물 한 번째 블로그 리뷰 결산을 진행하겠습니다. 2024년 동안 읽은 총 책 권수는 110권입니다. 카테고리별 독서 권수 및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괄호는 작년):
  • 추리 / 호러: 76권 (61)
  • 기타: 14권 (15)
  • 역사서: 10권 (7)
  • 기타 장르문학: 5권 (4)
  • Food / 구루메: 5권 (3)

1. 추리 / 호러

베스트: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별점 4.0
- 현실이 픽션을 능가한다는 증거.

워스트: 유리병 속 지옥 - 유메노 큐사쿠 : 별점 1.0
- 완독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던 망작.

2. 기타

베스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정재승 : 별점 3.5
- 일상 속 과학을 알게 해주는 즐거운 입문서.

워스트: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 별점 1.5
- 비논리적이고 편협한 주장들.

3. 역사서

베스트: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0
- 19세기 살인 사건을 치밀하게 재구성한, 흥미진진한 논픽션.

워스트: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하마모토 다카시 외 / 노경아 : 별점 1.5
- 소재는 흥미롭지만 깊이 없는 서술로 일관.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눈의 황홀 - 마쓰다 유키마사 / 송태욱 : 별점 4.0
- 독특한 시각과 감각이 돋보임.

워스트: 별점 2.5이 최하점이라 특별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로봇 소년, 학교에 가다 - 톰 앵글버거, 폴 델린저 / 김영란 : 별점 3.0
- 유쾌한 스토리와 따뜻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청소년 소설.

워스트: 트레몬의 모험 - 로버트 바 / 남원우 : 별점 1.0
- 빈약한 플롯, 단조로운 전개에 최악의 현지화 각색이 더해진 환장의 콜라보. 

6. Food / 구루메

베스트: 딜리셔스 - 롭 던, 모니카 산체스 / 김수진 : 별점 4.0
- 과학적으로 분석한 음식들의 놀라운 이야기들.

워스트: 일본 현지 아이스크림 대백과 - 아이스맨 후쿠토메 / 김정원 : 별점 1.5
- 단순한 정보 나열에 불과.

2024/10/05

그림자 없는 남자 - 대실 해밋 / 구세희 : 별점 2점

그림자 없는 남자 - 4점
대실 해밋 지음, 구세희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유한 아내의 사업체를 관리하며 유유자적하던 전직 탐정 닉에게 그가 몇 년 전 다루었던 사건의 의뢰인 와이넌트의 딸 도로시가 찾아왔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부탁 때문이었다. 그런데 와이넌트의 비서 줄리아가 살해당한채 발견되었고, 와이넌트의 행방도 묘연한 상태였다. 닉은 옛 인연으로 도로시를 도우며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나서는데....

대실 해밋 전집 다섯 번째 작품으로, 전직 탐정 닉과 노라 부부가 우연찮게 만난 사건을 다룹니다. 

전직 탐정이자 지금은 처가 사업체를 관리하는 사업가인 주인공 닉이 꽤 독특합니다. 전통적인 하드보일드 탐정의 스타일을 보여주면서도, 결혼한 남자답게 어느 정도 매너와 배려를 선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성공했겠지요. 닉이 아내를 잘 만나 상류층이 된 덕분에 미국 상류층들의 시끌벅적, 흥청망청 분위기 한 가운데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도 이색적이었고요. 보통의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이런 분위기의 주변인물들이었는데, 정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진상을 드러내는 추리쇼도 괜찮습니다. 닉의 추리로는, 와이넌트 작업실에서 발견된 시체는 와이넌트였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와이넌트를 만났다고 한 건 그의 변호사 맥컬리밖에 없다는 점, 작업실에서 일하던 기계공들을 해고하고 작업실의 문을 닫은 다음 작업실 임대 기간을 연장하고 계속 비워 놓은 점이 근거입니다. 줄리아는 공범이었는데 그녀가 겁에 질려했거나, 혹은 입막음을 위해 살해했고요. 넌하임은 줄리아 살해 당시 맥컬리를 목격했었기 때문에 없앴습니다. 이후 와이넌트의 채권을 미미에게 준 것도 맥컬리입니다. 와이넌트를 만나 받은거라고 시켰지요.
이 추리를 위한 단서들도 모두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와이넌트 행방이 4개월 동안 묘연하다는 것, 그와의 연락은 전보나 전화 등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것, 미미가 돈에 환장했다는 것, 와이넌트 작업실의 존재 등 모든 것들요.

하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드보일드'라고 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이 작품과 정통파 하드보일드는 "도박묵시록 카이지"와 "일일외출록 반장"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드보일드 특유의 끔찍한 인간 관계, 잔혹한 현실 등은 전혀 그려지지 않으니까요. 범행 동기도 그냥 돈 문제였을 뿐이고요. 닉도 밑바닥 탐정이 아니라 상류층 인물이고, 호화롭고 흥청망청한 생활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사람이 세 명이나 - 와이넌트, 줄리아, 넌하임 - 살해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닉은 탐정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의뢰를 받지도 않았고, 닉 본인이 관련된 사건도 아니라서 닉에게 별 위험이 닥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대실 해밋이 쓴 크리스티의 "부부 탐정"에 불과합니다.

추리 역시 후더닛 측면에서 보면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줄리아를 살해할 등기가 있었던 건 와이넌트 밖에는 없습니다. 그녀에게 거액을 사기당했으니까요. 그런데 와이넌트의 동기도 줄리아가 사기친 금액이 고작 4천 달러라는 점에서 애매해집니다. 와이넌트는 1년에 수만 달러의 특허료를 받는 부자니까요.
또 다른 유력한 용의자는 와이넌트 부인 미미인데, 그녀가 줄리아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같이 살고 있으니 질투라는 동기는 말이 안되고, 돈이 목적이라면 줄리아가 아니라 와이넌트를 살해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4개월 전에 누군가가 와이넌트를 죽이고 살아 있는 걸로 위장한 뒤, 줄리아를 살해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비서였던 줄리아가 입을 맞추지 않으면 와이넌트가 살아 있다고 속일 수도, 그의 재산을 빼돌릴 수도 없었으니 그녀는 공범이었고요. 그렇다면 와이넌트와 줄리아를 죽인건 동일인물이고, 와이넌트와 그동안 연락을 했다라고 주장하는 건 변호사 맥컬리밖에 없으니 범인은 그밖에 없습니다. 경찰이 진작에 맥컬리를 체포하지 않은 이유를 모를 정도로 뻔합니다.

전개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여러 등장인물이 나와 서로 얽히며 여러 사건을 동시에 진행해 나가는게 하드보일드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증인의 입으로 풀어내는게 전부라서 잘 짜여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증인들이 이곳저곳에서 두서없이 등장하여 혼란스럽고, 도로시의 동생 길버트의 기묘한 행동 등 불필요한 이야기도 너무 많고요. 읽으면서 졸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하드보일드 답지 않다는게 신선하기는 한데, 그게 장점은 아닙니다. 별로 권해드리고 싶은 작품은 아닙니다.

2024/08/18

던전밥 1~14 - 구이 료코 / 김완 : 별점 4.5점

[세트] 던전밥 1~14 세트 - 전14권 (완결) - 10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라이오스 파티는 "황금성" 던전을 탐험하다가 레드 드래곤을 만났다. 라이오스의 동생 파린의 마법으로 일행은 던전 탈출에 성공했지만, 파린은 드래곤에게 먹혀버렸다. 라이오스, 마르실, 칠책은 파린을 구하기 위해 곧바로 던전으로 다시 향했다. 던전은 죽더라도 영혼이 사체와 연결되어 소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일푼이라 던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물을 식량으로 삼기로 했다. 덕분에 10년 이상 던전에서 마물식을 연구한 드워프 센시가 일행으로 합류했고, 우여곡절 끝에 레드 드래곤을 해치우고 파린을 소생시켰다.
하지만 던전의 주인 '광란의 마법사'에 의해 파린은 마물이 되어버렸다. 소생시킬 때 마물 레드 드래곤의 사체를 쓴 탓이었다. 파린을 완전히 되찾으려면 '광란의 마법사'를 쓰러트리고 던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걸 깨달은 라이오스 일행은 목숨을 건 사투를 통해 '광란의 마법사'를 쓰러트렸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을 먹기 위해 이 모든걸 조종하는 악마 '날개달린 사자'가 남아있었고, 마르실이 새로운 던전의 주인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현대인이 이세계로 날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지식이나 신에게 받은 치트로 무쌍을 찍는다는 이세계물이 넘쳐나는 요즈음, 정말로 보기 드문 정통파(?) 본격 판타지 만화입니다. 1권을 읽고 리뷰를 올린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드디어 완결되었네요. 동생을 구하기 위함이라는 명확한 목적도 있고, 단순히 등장하는 마물을 사냥해가며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익히는게 아니라 파티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머리를 써야 해결할 수 있는 퀘스트들이 이어지고, 퀘스트를 통해 동료와 능력을 얻어 결국 절대악을 쓰러트리고 세계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긴 호흡의 장대한 전개를 선보입니다. 결국 세상의 종말이 닥치지만, 라이오스와 날개달린 사자의 마지막 승부로 평화가 찾아오고 라이오스가 새로운 왕국의 왕이 된다는 결말도 나무랄데 없어요.

마물 요리라는 소재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현재의 식재료들과 거의 같거나 흡사한 마물 재료로 만드는 요리들이 잘 표현되어 있을 뿐더러, 맨드레이크를 캘 때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게 나쁜 독소(?)를 빼내어 맛이 더 좋아진다는 등의 세세한 설정도 볼거리입니다. 또 이 설정은 단순한 재미 요소로 끝나지 않습니다. 파티의 리더 라이오스가 그리 뛰어난 전사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건, 그가 마물 요리를 즐길만큼 마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냥 이세계에 현대 요리를 선보이는 정도에 그치는 다른 이세계 구루메 만화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개그 센스도 돋보입니다. 라이오스가 얼빠지거나 황당한 말을 하면 그걸 상식인(?) 마르실이나 칠첵이 받아치는 만담식 개그가 많은데,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게 그야말로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이를 드러내는 캐릭터들도 매력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톨맨(인간)과 드워프 전사, 하프 엘프 마법사, 하프풋 열쇠공 (도둑?) 이라는 인종과 직업 설정은 정통 판타지그대로이지만, 성격과 개성이 확실해서 넘치는 생동감을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이를 잘 그려낸 섬세한 작화도 발군이고요.

물론 앞서 '광란의 마법사' 시슬을 날개달린 사자가 어쩌지 못하는 묘사는 뒤의 상황을 봤을 때 납득하기 어렵고(광란의 사자야 말로 진짜 악마였으니), 라이오스가 책에 서둘러 휘갈겨 쓴 문구로 날개달린 사자를 해치운다는 결말은 다소 뻔하고 작위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라이오스 파티 외 인물들 배분이 들쭉날쭉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엘프 부대 '카나리아'의 부대장과 함께 행동하며 중재자 역할을 하는 카블루야 그렇다쳐도, 나마리는 오크족보다도 '광란의 마법사'나 '날개달린 사자'를 막기 위해 하는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과거 및 현재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한게 좋은 예입니다. 반면 슈로는 부하들을 이끌고 파린과의 싸움에서 활약하지만, 동방에서의 그의 지위라던가 부하들의 정체 등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냥 '동방에서 왔다'로 퉁치기에는 설명이 부족했어요. 물론 가이드북이나 후기 만화 등을 통해 약간의 정보를 더 얻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단점은 사소하다 못해 없는 수준입니다. 별점은 4.5점! 이세계 전생물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판타지 장르계에 정통 RPG 판타지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걸 보여준 걸작입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으셨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2024/04/15

04.09 ~ 04.14 두산 베어스 경기 감상평

한화, LG 홈 6연전
성적 : 4승 2패

좋았던 점
  • 국내 선발진(곽빈, 김동주 선수)의 쾌투
  • 살아난 중간 계투진
  • 성장한 이승엽 감독의 용병술
나빴던 점
  • 타선 침체와 엇박에 의한 18이닝 1득점
  • 불안정한 마무리
  • 연이은 주루 플레이 미스

총평과 이번주 예상 (혹은 기대)

강팀을 만나고, 바로 전주 팀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1승이나 거두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의 2연속 위닝으로 4승 2패를 거두었습니다.

승리를 거두었던 이유는 단연 계투진 덕분입니다. 막 조정을 마치고 올라온 홍건희 선수, 그리고 홈런을 맞은 박치국 선수, 그리고 신예 김호준, 김택연 선수가 각각 자책점 1점씩만을 기록했을 뿐입니다! 우리 불펜은 아껴쓰고, 적절하게 쓰면 약하지 않이요. 고속 사이드암 박치국, 흑마구 사이드암 박정수, 강속구 좌완 이병헌, 우완 정통파 최지강, 우완 제구왕 흑마구 김명신 선수로 이루어진 구성도 좋고요.
결국 이승엽 감독이 적절하게 운영만 하면 되는데, 대체선발 이영하 선수가 만루 위기를 겨우겨우 넘기면서 고작 3이닝만 버티고 강판당한 토요일 경기를 보면 그래도 깨달음을 조금 얻은듯 하더군요. 박치국 선수가 홈런으로 흔들리자마자 교체하는 식으로 9명의 투수를 잘 운용하여 경기를 잡아낸 용병술은 돋보였거든요. 지난주보다는 투수진을 무리시키지 않으면서도 적재적소에 교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앞으로도 적절히 휴식을 주는 운용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투수진은 퓨처스에서도 올릴만한 선수들이 있으니까요. 아주 좋지는 못했어도, 주 중 두 경기 10이닝을 2자책으로 버틴 투동주 선수도 1승 축하합니다. 
일요일 경기에서 허경민, 김재환 선수가 빠진 자리를 전민재, 조수행 선수로 메꾸고, 이들의 활약을 경기를 잡아낸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대체 선수들이 타점, 득점과 안타를 기록하며 고르게 활약한건 올 시즌 들어 처음 봤네요. 부진하지만 뚝심있게 박준영, 김대한 선수를 밀어주는 모습도 마음에 들고요. 애매한 현재보다는, 이런 과감한 기용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하지만 브랜든 선수와 곽빈 선수가 퀄리티 스타트 이상을 해 주었던 목, 금 경기를 놓친건 아쉬웠습니다. 류현진 선수와 켈리 선수에게 꽁꽁 묶인 타선 탓인데, 상대팀 에이스 급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연승을 이어가기는 힘듭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면 좋겠네요. 수비가 엉망인건 당장 대책이 없더라도, 타격만큼은 지금보다는 올라와주어야 합니다. 퐁당퐁당이 심한 강승호 선수를 비롯한 양석환, 김재환 선수 등 해 줘야 하는 선수들이 보다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요.
공격적인 주루도 좋지만 볼썽사나운 주루사는 지양하였으면 합니다. 빠른 선수들이 욕심을 내는 편인데, 지금 바뀐 규정에 따르면 도루는 분명 쉬워졌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도루를 노리는 경기가 더 나을거에요.
아울러 정철원 선수가 무실점 세이브를 연달아 거두기는 했지만, 보직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구속이 전년대비 줄었고 제구가 좋지 못해 출루 허용률이 너무 높습니다. 휴식을 줄 필요가 있어 보였어요.

그래도 1승 5패로 처참했던 한 주를 지나, 4승 2패로 반등하는 모습을 보인건 다행입니다. 그것도 강팀 상대로 말이죠. 이번 주는 삼성, 키움과의 원정, 홈 6연전입니다. 삼성과는 '싸대기 동맹'으로 불리고 있을만큼 붙을 때 마다 치열했고, 키움은 올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강팀이니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네요. 게다가 알칸타라 선수가 한 경기 쉬고, 키움전 한 경기는 연속으로 크게 무너졌던 최원준 선수가 나서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브랜든, 곽빈 선수가 연이어 등판하는 삼성전을 위닝으로 가져가야만 주말 키움전에서 다소 여유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경기들에 포커스를 맞춰야겠지요.

하여, 이번 주 예상(이라고 쓰고 본 뜻은 기대)은 3승 3패입니다. 언제나처럼 무리하지 말고, 부상 선수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허슬~ 두!!

2024/03/23

중간의 집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2점

중간의 집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러리의 지인인 변호사 빌의 매제 조가 살해당했다. 현장을 찾은 엘러리는 피해자가 뉴욕 상류층 사람인 조지프 켄트 김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볼은 조 윌슨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빌의 여동생 루시와 결혼했고, 본래 신분으로는 돈많은 과부 제시카 보든과 결혼했던 중혼자였다.
현장에서 조 윌슨의 아내 루시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수집되었고, 김볼로 가입했던 10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 수취인이 얼마전 루시로 변경된걸 근거로 경찰은 루시를 체포했다. 빌은 동생의 변호를 맡아 끝까지 분투했지만 루시는 유죄가 인정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엘러리는 현장을 목격했던 김볼의 의붓딸 안드레아의 결정적 증언을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여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데 성공한다.


검은숲의 엘러리 퀸 전집 중 한 권. "도중의 집"이라는 제목의 자유추리문고 버젼도 이미 읽었지만,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기에 겸사겸사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엘러리 퀸 1기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와 3기 라이츠빌 시리즈 사이에 위치한 2기 시기를 연 작품이라고 하는데, "스웨덴 성냥 미스터리"라는 제목을 붙여도 괜찮았을 거라는 언급이 작중에 등장할 정도로 '국명 시리즈'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후더닛'에 충실한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이며, '독자에의 도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명 시리즈'보다는 드라마의 변화 폭이 넓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반부는 아예 법정물로 간주해도 될 정도니까요. 법정물로의 수준도 높습니다. 특히 범인의 다분히 고의적이고 어설픈 행동들을 열거하며, 이는 루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라는 빌의 마지막 변론은 굉장히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범인이 충분한 휘발유가 있었는데도 구태여 주유소를 방문해 베일을 쓴 얼굴을 보여줄 이유가 없다는 등의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검사 역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만한 좋은 변론을 펼칩니다. '범죄자들은 아둔하며, 뛰어난 지능을 가진 범죄자들은 소설책에서나 볼 수 있다'는 건데 그럴듯했습니다.
거의 빌이 이길 뻔 했지만 흉기에 루시의 지문이 묻어 있있다는 증거를 뒤집는데 실패한다는 결말도 현실적이었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핀치의 만년필에 독특한 초록색 잉크가 들어있었다는 것, 범인이 립스틱을 이용하지 않고 구태여 코르크를 태워 필기구로 쓴 것 등 모든 단서가 '독자에의 도전' 단계 전까지 독자들에게 정말로 공정하게 제공된다는건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이를 통해
  1. 범인은 남자다.
  2. 범인은 흡연자고, 아마도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3. 범인은 자기 정체를 드러낼 내용이 새겨진 성냥갑을 가지고 있다.
  4. 범인은 김볼과 루시에게 적대적인 동기가 있다.
  5. 범인은 필기구를 소지하지 않았거나, 소유한 필기구를 사용하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어 사용하기를 꺼렸다.
  6. 범인은 아마도 김볼 쪽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7. 범인은 앤드레아에게는 우호적이다.
  8. 범인은 오른손잡이다.
  9. 범인은 김볼이 보험 수익자를 변경한 사실을 알고 있다.
라는 추리를 끌어내고, 관계자들 중 이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런 후더닛 추리 외에도 '중간의 집'으로 명명된 집에 대해서 간단한 조사만으로 그 용도를 꿰뚫어 보는 추리도 볼만한 등, 확실히 '엘러리 퀸'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점은 많았어요.

그러나 완성도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던, 앞서 안드레아가 목격했던 성냥부터가 그러합니다. 이를 토해 엘러리 퀸은 범인은 담배를 피운게 분명한데, 재와 꽁초와 같은 흔적이 없으니 파이프를 피웠다고 추리하지요. 하지만 애초에 엘러리 퀸 스스로가 범인은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파이프로 흡연이 가능했다는걸 초반에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성냥 모두가 코르크를 태우는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억지이자 반칙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의 아내 루시가 빌에게 선물하려고 산 문구 세트 칼을 만졌다는 완전한 우연이 재판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 것, 핀치의 간단한 변장이 주유소 사장이 루시로 잘못 알아볼 정도였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했고요.

전개 면에서는 수수께끼가 모두 엔드레아의 위증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점이 큽니다. 앤드레아가 중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했던걸 모두 털어놓았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었을 거에요. 앤드레아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었고요.
엘러리 퀸 특유의 장황한 대사들은 여전히 짜증스러웠으며, 빌이 엔드레아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었어요. 무고한 동생이 20년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동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덕 중혼자의 의붓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설명도 대체로 부족합니다. 빌이 처음에 '중간의 집'에서 발견했던 앤드레아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숨겼던 이유는?(둘이 원래 알던 사이였는지?) 김볼이 빌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고 마음먹은날 앤드레아까지 중간의 집에 부른 이유는? 대체 핀치는 그 날 그 시간에 김볼이 중간의 집에 혼자 있을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결국 끝까지 설명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부분의 '국명 시리즈'보다는 낫지만, 전체적으로 그냥저냥합니다.

2023/11/03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헌터 / 아웃핏 - 다윈 쿡 / 임태현 : 별점 5점!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헌터 - 10점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리처드 스타크 글/시공사(만화)
리처드 스타크의 파커 : 아웃핏 - 10점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리처드 스타크 글/시공사(만화)

"헌터"
범죄자 파커는 자신의 뒤통수를 친 동료 말에게 복수하기 위해 미 대륙을 가로질러 뉴욕에 왔다. 파커는 추적 끝에 말을 죽인 뒤, 말의 조직 두목 브론슨에게 4만 5천달러를 요구했다. 말이 조직에 상납했던 돈으로 원래 파커의 몫이었다. 파커는 브론슨 조직원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돈을 손에 넣은 뒤 동부로 항했다.

"아웃핏"
성형수술 후 마이애미에 머물던 파커는 브론슨이 아직도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걸 알고 복수를 결심했다. 동료들을 이용해 브론슨 조직의 사업장을 터는 것과 동시에, 파커 스스로 브론슨의 저택에 침입하여 그를 사살했다.

시공 그래픽 노블 레이블로 출간된 리처드 스타크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악당 파커 시리즈 만화. 제가 좋아하는 브루스 팀 그림체와 흡사한 작풍을 지닌 다윈 쿡이 작화를 맡았습니다.
이런 책이 출간된걸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통파 범죄 스릴러 느와르를 이렇게 멋지게 그려내다니! 감탄만 나왔습니다. 거의 아무런 대사 없이 자신을 배신한 아내 린을 찾는 "헌터"의 초반 약 20여페이지부터 시작해서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읽었네요. 그냥 그림만 봐도 '느와르'라는 느낌을 팍팍 전해줍니다.
재미의 핵심인 파커 캐릭터 묘사도 출중합니다. 잔혹한 범죄자로 완력도 강하며 사람 죽이는걸 예사로 알지만, 범죄는 공들여 설계하고 실행하는 두뇌파이기도 한 양면적인 모습을 잘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직하고 어두운 심리 묘사도 좋았으며, 파커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진 전개 부분도 독특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과거와 현재, 다른 시점과 상황을 화풍으로 구분하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고요.

범죄 계획들에 대한 묘사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특히 "아웃핏"에서 브론슨 사업장 털이 작전이 대박이었어요. 비밀 도박장, 사설 경마, 마약 밀매, 소액 도박 등 다양한 사업장을 여러가지 작전으로 터는 과정을 상세하면서도 상황별로 모두 다른 그림체와 편집을 통해 일종의 잡지 기사처럼 구성하여 보여주는데 재미도 있고, 작화와 디자인 모두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등장하는 파커의 범죄 계획은 모두 잘 짜여져 있다는 점에서 피카레스크 범죄극의 달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진면목을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다가 알았는데, 범죄극은 확실히 이미지가 있는게 더 낫더군요. 이해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에요.

한마디로 걸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5점입니다. 후속권도 읽고 싶은데 절판 상태네요. 어떻게든 구해봐야겠습니다.

2022/07/02

미스터리를 읽은 남자 - 윌리엄 브리튼 / 배지은 : 별점 3점

미스터리를 읽은 남자 - 6점
윌리엄 브리튼 지음, 배지은 옮김/현대문학

인기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를 답습하는 작품은 많습니다. 탐정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셜록 홈즈의 경우는 작가 사후에도 다른 작가들에 의한 시리즈가 계속되었고, 에놀라 홈즈와 같은 가족이 등장하는 스핀 오프에 각종 패러디와 파스티슈 물까지 합치면 그 수는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저 역시 "경성 탐정록"이라는 파스티슈 물로 숟가락을 얹었었지요. 

문제는 누구나 다 아는 탐정이 등장하기에 별다른 변주를 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셜록 홈즈가 21세기에 환생을 하든, 이세계로 전생을 하든간에 그는 셜록 홈즈니까요. 하지만 이 단편 시리즈는 이런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해결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그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 작품을 읽은 누군가가, 자기가 흠모하는 탐정을 따라해서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대와 탐정역에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합니다. 고전 정통 본격물 탐정들이 등장하기 때문인지, 모든 이야기들이 고전 정통 본격물 스타일인데 이 역시 마음에 듭니다. 작가 취향이 아무래도 저와 비슷한 듯 하네요.

물론 몇몇 작품들은 원래 탐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고전 정통 본격물 애호가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좋은 시리즈라는건 분명합니다. 뒤이은 수록된, 저자의 다른 시리즈인 스트랭 씨 시리즈 역시 고전 정통 본격물로서 나쁘지 않은 수준을 보여주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덕분에 오랫동안 겪고 있었던 고전 정통 본격물 금단 현상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11편이나 되는 "~를 읽은 남자" 리뷰를 쓰다보니 힘이 빠져서, 스트렝 씨 시리즈는 제일 괜찮았던 한 편만 소개드립니다.

"존 딕슨 카를 읽은 남자" 

에드거는 존 딕슨 카 소설에 나오는 것같은 밀실을 만들어 삼촌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핵심은 벽난로였다. 삼촌을 살해하고, 깨끗하게 청소한 벽난로 굴뚝으로 빠져나온 뒤 난로에 불을 붙여 밀실로 만들 셈이었다...

아주 오래 전 다른 앤솔러지를 통해 읽었던 작품입니다. 존 딕슨 카하면 떠오를 '밀실'을 소재로 만든 작가의 처녀작입니다. 범인이 범행 계획을 앞 부분에 상세하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도서 추리물'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본격 추리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블랙 코미디에 가깝지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나무랄데 없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엘러리 퀸을 읽은 남자" 

엘러리 퀸의 광팬 아서 민디가 머무는 양로원에서 위책 노인이 애지중지하던 10달러 금화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일한 용의자 데니슨이 그들 앞에서 옷을 벗기까지 했지만, 금화는 찾을 수 없었다...

엘러리 퀸 광팬이 "퀸 수사국" 속 "마약 부서 검은 장부"라는 작품을 인용해가며 추리를 펼친다는건 시리즈 설정에 딱 맞아 떨어지는데, 사실 아서 민디는 별로 엘러리 퀸같지는 않습니다. "검은 장부"에서의 트릭과도 아무 관련이 없고요. 

그러나 다행히도 원전보다 추리적인 부분은 훨씬 낫습니다. 아서 민디는 데니슨의 뺨 상처가 벌어진 이유, 계단을 끔찍히 싫어하면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유를 추리하여 진상을 밝혀내는데, 설득력 높은 완벽한 추리였기 때문입니다.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의 교과서같은 작품으로, 제 별점은 5점입니다. Hall of Fame!

"읽지 않은 남자" 

몬티는 친구 포드에게 벽돌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암실용 방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포드는 몬티의 아내 헬렌이 죽은 교통사고를 일으켰지만, 몬티는 그건 사고였다며 포드를 달랬다. 두 남자는 곧바로 벽을 쌓기 시작했고, 몬티는 포드에게 그가 좋아하는 위스키 코노서스 초이스 반 병을 건넸다...

포드는 헬렌이 갑자기 도로 한 복판으로 뛰어나와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몬티는 집 앞 우편함에 포드 차 페인트가 묻었다는 것, 그리고 현장 근처에서 버려진 위스키 병을 찾아낸 뒤, 포드가 차에서 술을 마시다가 헬렌을 덮쳤다고 추리합니다. 그래서 복수를 위해 포드를 불러 벽을 쌓는 척 하고 암실 안에 가둬 버리고 말지요.

그런데 차 안에서 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고 당시 포드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판단한 수사 결과는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분명 사고를 일으킨게 분명한 포드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몬티를 당당하게 찾아온 경위, 그리고 제 발로 갇힌 방을 만드는데 참여한 것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했고요. 몬티는 포드가 에드거 앨런 포의 "아몬티야도 술통"을 읽지 않아서 이 함정에 빠졌다고 말하지만, 이건 책을 읽고 안 읽고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애초에 위험한 상황에 제 발로 들어간게 문제거든요.

읽지 않은 남자라는 변주는 좋은 발상이었는데, 결과물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렉스 스타우트를 읽은 여자" 

카니발에서 "뚱뚱녀" 역할을 맡은 거트루드는 연기를 위해 렉스 스타우트 작품을 탐독하다가 빠져들게 되었다. 쇼 단원 중 거트루드가 딸같이 아끼던 뱀 조련사 릴리가 살해된채 발견되자, 거트루드는 직접 사건을 해결하려 나서는데...

렉스 스타우트네로 울프와 뚱뚱하다는 점, 그리고 아치와 같은 조수(?)가 있다는 연결 고리는 가지고 있지만, 내용 자체는 렉스 스타우트, 그리고 네로 울프와 별 관계는 없습니다. 평범한 추리물이에요.

그러나 정통파 본격물로 보기에는 애매했습니다. 핵심 단서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반쪽짜리 메달에 적힌 BY-BY라는 글귀에 대한 단서 제공이 전무한 탓입니다. '비실이'라는 별명을 들으면 불같이 화낸다는 설정도 너무 후반부에서나 드러나서, 전개 면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었고요. 그냥저냥한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은 소년" 

시골 마을 라킨스코너에 벨기에 교환학생인 열 살짜리 천재 자크 뒤몽드가 찾아왔다. 자크는 마을 경찰 맥스 코리와 친구가 되는데, 어느날 라킨스코너에 수 명의 대학생들이 찾아와 기묘한 장난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이 노린건 희귀 우표였는데, 이걸 사다가 혹시 발각될까봐 다른 기묘한 사건을 벌였다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진상이 납득되지 않아서 도무지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마을을 들 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여러 명이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차례대로 원하는 우표가 나올 때 까지 우표를 그냥 사면 아무 문제 없이 끝났을테니까요. 독자가 뭔가 희귀 우표 관련된 사건이라고 쉽게 짐작 할 수 있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아울러 탐정역인 자크가 벨기에인으로 대화하다가 프랑스어를 섞으며, 심지어 10살 짜리가 있지도 않은 콧수염을 만지는 시늉을 한다는 식으로 포와로를 따라한다는 묘사는 심하게 억지스러웠습니다. 학생들이 노리던 우표는 인쇄 오류로 '콧수염'이 생긴 것 처럼 인쇄되었다는건 이러한 억지 포와로 따라하기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추리도 별 볼일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시리즈 최악의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서 코난 도일을 읽은 남자" 

테리 왓슨에게 대학 후배 대니얼 블래싱검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던 사이인데다가, 뚱딴지같은 내용이어서 이유를 알기 위해 왓슨은 편지 속에서 언급된 다른 인물에게 전화를 건 뒤, 워싱턴으로 호출되었다. 알고보니 블래싱검은 타국 대사관에서 암약하는 스파이로, 중요한 목록이 담긴 상자의 비밀 번호를 편지 속에 숨겨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왜 테리 왓슨에게 편지를 보냈는지는 모른채 시간은 흘러만 가는데...

왓슨에게 보내진 엉뚱한 편지에 암호가 감추어져 있다는 설정은 흥미로왔습니다. 세개의 이어진 영어 알파벳이라는 암호도 단순해서 좋았고요. 무엇보다도 이 암호 때문에 테리 왓슨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결말이 아주 유쾌했어요. 암호는 "LMN"으로 이는 셜록 홈즈의 유명한 대사 - '엘레멘터리 왓슨 - 그건 기본이야 왓슨' - 를 떠올리면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LMN 테리 왓슨" 이 되니까요. 말장난이기는 해도, 아서 코난 도일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었어야만 풀 수 있는 암호라는 점에서 시리즈 취지에도 잘 부합하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체스터턴을 읽은 남자"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애독자 케니 신부는 추찹한 사진을 밀매하다가 자살했다는 교구민 팀 해링턴의 장례 미사 문제로 주임 시부 고거티 신부와 언쟁을 벌였다. 그 뒤 고거티 신부는 팀 해링턴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내 보라며 케니 신부에게 하룻 동안의 유예를 주었다. 그리고 케니 신부는 사건 담당인 깐깐한 언셀 형사와 함께 방문한 사건 현장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는데....

브라운 신부 스타일의 탐정물이라기 보다는, 브라운 신부가 가치 있는 작품이라는걸 증명하는 작품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특히 팀 해링턴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드러나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에요. 차에 반사되는 햇살을 보고, 추잡한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려면 '커튼'을 쳤어야 했는데 현장이 그렇지 않은걸 눈치채는게 아주 자연스러웠거든요. 깐깐한 언셀 형사가 설득당한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될 만큼 좋은 추리였습니다. 사진 배달부의 실수가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동기도 짧은 분량에 잘 드러나있고요. 여러가지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를 장황하게 펼치며 쉬운 말도 한번 더 꼬아서 말하는 브라운 신부와는 전혀 다른 신세대(?) 신부지만, 애정하는 브라운 신부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케니 신부 캐릭터도 마음에 드네요.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그 작품에 푹 빠졌다는 건 "~를 읽은 남자" 시리즈에 속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재미도 있고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좋은 단편 추리물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대실 해밋을 읽은 남자" 

정년 퇴직 후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잡무를 하게 된 프리처드는 어느날 도서관장 디컨 씨의 부름을 받았다. 추리소설 애호가 패러것이 도서관 이사회 회장 앤드루 킹과 건 내기 때문이었다. 패러것이 도서관 어딘가에 감추어 둔 책을 찾으면 그가 추리소설 초판본 컬렉션을 도서관에 기증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추리소설 매니아 프리처드가 앤드루 킹을 도와 패러것이 준 간단한 단서로 한 시간 안에 책을 찾기 위해 애쓰게 되는데....

아르바이트하는 추리소설 매니아가 자신의 취미를 이용해서 도서관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낸다는,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는 꿈 같은 설정의 이야기입니다. 추리 소설 매니아 프리처드 씨에게도 행운이 닥치는 결말까지도 아주 환상적이에요.

이야기의 핵심인 보물찾기 게임도 꽤 그럴듯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인 독자는 풀이 과정에 동참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3.14"가 적힌 봉투 안에 "더블 더즌", 그리고 "몰타의 매"라고 적힌 카드가 한 장씩 들어있는게 힌트였는데, "3.14" -> 파이는 "Pie"로 바꿀 수 있고, "더블 더즌"은 24, "몰타의 매"는 "매"가 소문자라서 말 그대로의 새를 의미하므로 "검은 새"가 되고, 이게 "파이 안에서 구워지는 스물 네 마리 검은 새"라는 동요로 이어지는데, 한국 독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추리인 탓입니다.

그래도 재미도 있고, 추리적으로도 깔끔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조르주 심농을 읽은 남자" 

친구 해럴드와 함께 고가의 화물을 나르는 바니는 조르주 심몽의 메그레 시리즈를 탐독해왔다. 그들은 대저택에서 '라이트풋' 래리 쇼필드라는 고용인 앞에서 싣고 온 화물을 내려놓았다. 그는 별명 그대로 알록달록 화려한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바니는 메그레 경감의 활약을 떠올리며, 래리 쇼필드가 가짜라고 확신하는데...

메그레 경감은 사실 대단한 추리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좀 우직하고, 인간 내면을 성찰하는 부분이 많은 편이죠. 그러나 성실하고 꼼꼼한데다가 관찰력이 뛰어난데, 이 작품 속 바니 역시 관찰을 통해 래리 쇼필드가 가짜라는걸 알아내게 됩니다. 그는 래리 쇼필드가 절대로 다리를 꼬지 않고, 발바닥을 계속 땅에 대고 있는걸 눈치채거든요. 부츠를 갈아신었는데, 새것이라는게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단지 부츠가 새 것이라는게 그가 가짜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래리 쇼필드가 자기 입으로 흙길을 걸어 왔다고 말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부츠는 얼마든지 갈아 신을 수 있잖아요? 바니가 오지랖을 떨어서 쇼필드의 정체를 폭로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설령 눈치를 챘더라도, 현장을 벗어나 경찰에 신고하는게 당연했습니다. 현장에서 총을 든 상대방을 위협해가며 추리쇼를 펼칠게 아니라요.

이렇게 단점이 더 눈에 많이 뜨이며, 메그레 경감의 특징을 잘 살린 것도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존 크리시를 읽은 소녀" 

에밀 프랫은 오랫만에 겨우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담당하고 있는 도킨스 사건 때문이었다. 영국인 도킨스는 미국으로 여행을 왔었는데,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도박으로 땄던 3천 달러 정도를 노린 범행이었다. 그는 죽기 전 경찰에게 "올드 피싱.."과 비슷한 말을 남겼다. 에밀 프랫의 딸 메릴리는 최근에 읽고 있는 존 크리시의 기디온 경정 시리즈에 나온 영국 코크니 말투가 해결의 실마리라는걸 아빠에게 알려준다....

기디온 경정의 활약보다는, 작품에 등장했던 영국 런던 토박이 코크니들의 은어가 단서가 된다는건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다이잉 메시지라는 억지스러운 설정에 더해 죽어가면서 은어를 써서 단서를 남길 이유가 설명되고 있지 않은 등,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다는건 아쉬웠어요. 당연히 한국인 독자로서는 추리하기도 힘든 내용이었고요. 그냥저냥한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를 읽은 남자들" 

역사 교사 폴 해스킬, 전화선 보수 기술자 재스퍼 지머먼, 대장장이 가브리엘 둔, 은행장 시드니 워윅과 메리 팅커 술집 주인 핀들레이의 다섯 명은 모두 아이작 아시모프 박사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메리 팅커 술집에 모여 "흑거미 클럽" 처럼 수수께끼 풀이 놀이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진짜 작은 마을 홀컴밀스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없어서 놀이 속 수수께끼는 공상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에게 기자 에드거 바시가 진짜 수수께끼를 가져왔다. 마을 최대의 백화점 '밸류 투데이'의 사장인 마케팅 귀재 데이비 로터스가 천 달러가 들어있는 금고를 전시장에 공개하고, 금고를 열면 누구나 돈을 가져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비밀번호가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였다. 아시모프 팬들은 각자 자신만의 추리를 들려주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흑거미 클럽'에 대한 일종의 파스티슈 작품입니다. 

참석자들이 각자 내 놓는 추리들이 눈길을 끕니다. 감히 '흑거미 클럽'을 운운할 수 없는, 여러모로 부족한 추리들이었지만 각자의 직업과 전문 분야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잘 와 닿기는 했거든요. 마지막에 집사 헨리의 포지션인 술집 주인 핀들레이가 정답을 맞추고 천 달러를 얻는 결말도 좋아요. 

무엇보다도 밸류 투데이는 데이비 로터스의 철자를 가지고 만든 애너그램으로, 이를 이용하면 금고 번호를 알아낼 수 있다는 진상에 대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한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게 바로 정통 본격 고전 추리물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인 독자에게는 쉽게 추리할 수 없는 내용이기는 했지만요.

여러모로 아시모프의 원전인 걸작을 잘 이해하고 쓴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 2부 스트랭 씨 이야기 - "스트랭 씨 여행가다" 

스트랭 씨는 단체 버스 투어로 캐나다 여행을 떠났다. 그의 옆 자리에 앉게 된 건 제리 수녀였다. 그리고 여행 도중 제리는 가판대에서 나무로 된 십자가를 구입했는데, 그 십자가가 사라져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스트랭 씨는 귀국 직전 십자가 사건과 퀘벡에서 일어났던 은행강도 사건의 연관성을 추리해 내고, 버스에서 추리쇼를 벌이게 되는데...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인 고교 과학 교사 스트랭 씨 시리즈의 수록작 중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십자가를 '길포일' 이라는 여행객으로 변장한 은행강도 르클레어가 훔쳤던 이유는, 십자가를 포장했던 신문지 때문이었다는 추리가 특히 좋습니다. 신문에 르클레어 사진이 실려 있었다는 이유는 십자가를 훔칠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요. 비록 프랑스어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고요. '알맹이보다 포장지가 중요하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은 왠지 "브라운 신부"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해서, "~를 읽은 남자" 시리즈로 썼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은행강도가 도주를 위해 미국인 단체 여행객으로 변장한다는 아이디어도 국경에서 어떻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설득력있게 들렸습니다.

이렇듯 추리물로서 상당한 수작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시리즈가 더 이어지지 못했고, 국내 소개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4편만으로 끝난게 못내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2022/06/11

기만의 살의 - 미키 아키코 / 이연승 : 별점 1.5점

기만의 살의 - 4점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레 가문의 당주 하루시게가 아내 사와코, 양자 요시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자켓에서 독이 들어있던 초콜릿 포장지 조각이, 그리고 사와코의 서재에서 그가 불륜을 저지르는 사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범행을 인정한 하루시게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40년 후, 가석방된 그는 사랑했던 니레 가문의 둘째 딸 도코에게 자신이 함정에 빠졌으며 사형 선고만을 피하려 거짓 자백을 했다며 40여년 간 고민해왔던 범인의 정체와 트릭을 알리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도코로부터 온 답장에는 그의 추리를 반박하는 도코의 추리가 담겨 있었다....

1947년 생이라는 노인 작가의 고전적인 정통파 본격 추리물입니다. 

콩가루 지역 유지 가문에서 발생한 의문의 독살 사건이라는 기본 설정부터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용 모두 본격물 황금기 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심지어 맨 앞 부분에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수록되어 있는 구성까지도요. 대부분의 전개가 하루시게와 도코 사이에 오간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건 독특한 요소지만, 손으로 써서 편지 봉투에 넣고 보냈다는 점에서도 고전적인 스타일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메신저 대화로 이루어지는 작품이 나오는 시대이니까요.

설정과 구성, 내용 외에 추리적인 부분도 고전 본격물 스타일을 충실히 따릅니다. '트릭' 이라는게 존재한다는 점에서요. 하루시게와 도코의 편지를 통해 같은 사건에 대해서 무려 4개의 추리가 펼쳐지는 풍성함도 좋고요. 특히 사와코의 자작극이었다는 추리와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가 공범이었다는 추리는 무릎을 칠 정도로 그럴듯했습니다. 사쿠라와 스미에의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를 근거로 써 먹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에 양복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트릭도 괜찮습니다. 처음에 요헤이와 하루시게 자켓을 바꾸어 걸어 놓은 뒤, 라이터를 꺼내는 척 양복 주머니에 조각을 집어 넣었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맨 처음에 효도가 범인임을 주장했을 때, 흰 커피잔에 다량의 아비산을 넣고 그 위에 물엿 코팅을 했다는 장치 트릭 이야기는 조금 별로였어요. 하루시게는 이 장치를 만든건 요시오였을 거라고 추리했습니다. 효도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아이에게 목숨을 맡기는 장치를 시킨다는건 그다지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독특한 장치 트릭인건 사실이고, 이외에도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하루시게가 죄를 인정했던 이유가 어쩔 수 없는 사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정도, 변호사 출신 작가답게 잘 풀어내고 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낡았을 뿐더러, 작위적이이라는 본격물 특유의 단점을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우선 전개의 핵심인 둘 사이에 오간 편지와 결말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첫 번째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양복 속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은 방법은 결국 알아낼 수 없었지만, 니레 가문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효도 유타카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도코는 하루시게의 아내 사와코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자신의 추리를 보내옵니다.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그리고 남편 상복을 준비했기에 포장지 조각을 쉽게 넣을 수 있었다는게 증거라면서요.
다음 편지에서 하루시게는 도코의 남편 요헤이와 사쿠라, 그리고 가정부 스미에가 공범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와코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와 함께요. 그리고 도코가 사실은 요헤이를 사랑했던거 아니냐고 비난합니다. 그러자 도코는 요헤이는 사고사한게 아니며, 자신이 살해한 것과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내옵니다.
하루시게의 마지막 편지는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하루시게가 감옥 생활을 하게 한 진범이라는걸 밝히는 내용이었고요.
둘의 자살 이후 이 편지들이 발견되었고, 하루시게의 변호사이지 친우 기시가미의 도움으로 경찰은 도코가 하루시게를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42년 간의 수감 생활 중 도코가 진범임을 확신했던 하루시게의 복수였다는게 드러나며 마무리 되는데, 이 편지의 왕래 자체가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보낸 뒤, 도코가 "맞아요, 효도가 범인일거에요" 라는 답장을 보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사와코가 범인이며, 사실 하루시게는 사와코를 사랑했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낼 이유는 없었습니다. 

설령 그런 답장을 보냈다 한들, 하루시게의 두 번째 편지 -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 - 에 응해 사실 자기가 요헤이를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편지를 보낸다는건 더 말이 안됩니다. 솔직히 도코가 이런 장문의 답장을 쓴 것 부터가 억지에요. 42년은 긴 세월입니다. 아무리 불같은 사랑을 했더라도 수십년간 연락도 뜸했던 남자가 저런 편지를 보내왔을 때, 도코가 기꺼이 반기며 열정적으로 답장을 보내면서 결국 다시 사랑에 불타오른다는건 별로, 아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도코가 범인이라는걸 증명할 수 없다는, 본격 추리물로 보기 어려운 결함도 큽니다. 도코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자백도 없기에 이는 하루시게의 확신에 불과합니다. 즉, 하루시게의 사쿠라, 요헤이, 스미에 공범설이 진짜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루시게가 니레 가문의 당주가 된 시점에서,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동기가 없는 탓이고요. 딸들도 아버지가 며느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걸 묵인했을 정도로 니레 가문 당주의 위치는 확고했습니다. 불륜 따위로는 흔들리지 않았을거에요. 

물론 불륜 상대방이 자기 동생이라걸 사와코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상황이 확인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하루시게가 당주가 된 직후에 도코가 사와코를 살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령 도코가 요헤이와 공모했다 하더라도, 하루시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듭니다. 누가 봐도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 곧바로 야심을 드러낸 사쿠라나 효도의 양복 속에 초콜릿 포장지 조각을 넣는게 당연했을 테니까요. 사건을 무마하고, 이후 니레 가문의 터전을 다지는데도 훨씬 쉬웠을테고요. 

하루시게가 경찰에서 '사와코가 진범이다' 라고 주장했을 거라는게 도코의 바람이었다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당신 아내를 죽이고 당신에게 누명을 씌웠지만, 당신은 똑똑하니까 당신 아내 자작극이라고 경찰에 말하면 될꺼야!" 라는 건데, 뭐라 말하기도 힘든 억지 주장일 뿐이지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 시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지막 반전(?)도 딱히 인상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 애호가로서 이런 스타일의 작품이 새롭게 출간된건 반가왔지만, 본격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입니다. 사실 도코의 두 번째 답장부터는 읽으면서도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었어요. 딱히 고전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01/07

샘 호손 박사의 두번째 불가능 사건집 - 에드워드 D. 호크 / 김예진 : 별점 2점

샘 호손 박사의 두 번째 불가능 사건집 - 4점
에드워드 D. 호크 지음, 김예진 옮김/GCBooks(GC북스)

안녕하세요. 2022년 첫 리뷰네요. 먼저 새해 인사 드립니다. 202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노스몬트에서 일하는 시골 의사 샘 호손이 명탐정으로 등장해서, 온갖 불가능 사건을 해결하는 고전 스타일의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 시리즈입니다. 1권에 이어 2권도 읽게 되었네요. 

수록작은 무려 열 다섯 편이며, 샘 호손이 범인으로 몰린다던가, 대도시 보스턴에서 사건을 해결한다던가, 렌즈 보안관이 혼자서 사건을 해결한다던가 하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져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하지만 전편보다는 별로입니다. 모두 일종의 밀실 상황에서 일어난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알고보니 밀실이 아닌 상황이 많은 탓입니다. 대략 네 작품은 명백하게 밀실이 아니었어요. 트릭도 무려 여섯 작품에서 변장이 사용되고 있고요. 그리고 절반이 넘는 무려 여덟 작품에서 불가능 범죄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버리는 억지를 보여주는데 굉장히 실망스럽습니다. 범행 동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설득력이 없어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몇몇 작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술한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트릭과 범인을 모두 알려주는,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입니다.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무려 열 다섯 편의 리뷰를 상세하게 올리니 시간이 엄청 걸리네요. 다음부터는 인상적이었던 단편들만 추려서 올리는걸 고려해야 겠습니다.

"치유하는 천막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어린 아들을 치료사로 내세워 시골 환자들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다니는 사기꾼 조지 예스터의 공연을 찾아갔다가 그와 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자기 환자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샘이 그에게 주먹을 날린 뒤 나가려고 잠깐 뒤를 돈 순간, 조지 예스터가 가슴을 칼로 깊게 찔려 살해당했다. 천막 안에는 예스터와 샘 호손밖에 없었고, 잠깐 사이에 샘 호손의 눈을 피해 현장에서 빠져나가는건 불가능했다...

짧은 순간에 범인이 사라져 버리는 인간 소실 트릭이 사용된 작품인데, 범인인 매지가 동상으로 변장하고 있었다는게 트릭이라서 굉장히 허무했습니다. 동상과 사람이 몸에 페인트 칠을 한 건 명백히 달랐을 텐데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물론 어느 정도는 정말 동상처럼 보이게끔 하는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동상이 그녀를 모델로 만든거라는 일종의 복선도 제공되기는 하고요. 때문에 짧은 시간, 제한된 조건에서라면 먹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지 혼자 거대한 동상을 천막 밖으로 잠깐 치워 놓았다가 다시 원래 위치로 가져다 놓는다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등신대 금속 조각상이라면 무게가 아무리 적어도 백 킬로그램은 되었을테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동상으로 변장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샘 호손(아니면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트릭을 사용했다? 말도 안됩니다. 샘 호손,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그날 조지밖에 없는 천막으로 찾아와 다툴 거라는걸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하는데, 이걸 예상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설령 다툼을 예상했더라도, 천막 안이 아니라 천막 밖에서 다퉜을 수도 있고요. 

즉, 살해하려면 그냥 천막에 숨어있다가 죽이는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이 동상의 존재를 은근슬쩍 묻고 지나가는 전개가 별로 공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자와의 두뇌 싸움을 펼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속여넘기려는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또 트릭을 떠올릴 수도 있는 대학 시절 사진을 훔쳐내기 위해 매클로플린 교수를 습격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예스터의 공연에 찾아가기로 한 건 매지가 샘 호손과 함께 있었을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사진을 회수했으면 됩니다. 추가적인 범행을 저지를 필요 없이요. 매지가 토비 예스터의 엄마였었다는 동기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샘 호손이 범인으로 몰린다는 상황 말고는 건질게 없었던 졸작이었습니다.

"속삭이는 집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유령사냥꾼 태디어스 슬론과 함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오는 비밀의 방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 브라이어 가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둘은 한 밤중에 당장 나가라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들은 뒤, 누군가 저택에 들어와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걸 목격했다. 그리고 30여 분이 지나도 남자가 나오지 않아서 둘은 비밀문을 열어보는데, 남자는 죽어 있었고 방 안에는 다른 사람, 다른 출구도 없었다. 샘 호손은 피해자가 최소 15시간 전에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챘는데, 수사를 이어가던 샘 호손의 차가 누군가가 설치한 조잡한 폭탄에 의해 불타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비밀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는건, 그 방에 다른 비밀 출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숨겨진 출구만 찾으면 될 일이라, 이걸 불가능 범죄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도 너무 뻔합니다. 상황을 아는건 초반에 샘의 치료를 받는 빌리밖에는 없으니까요. 빌리는 어린 시절 유령 집에서 자주 놀았으며 치료를 받을 때 샘과 슬론이 그 집으로 간다는 이야기까지 들었고, 시체가 들고 있던 총은 발사된 흔적이 있었는데 빌리가 샘 호손의 치료를 받은 이유는 쇠스랑에 발을 관통당했다는 것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이상한 불가능 상황으로 만드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 방이었다면, 그 안에 시체를 숨겨놓고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이잖아요? 구태여 샘과 슬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사건을 키울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사건을 기획한 빌리의 모친이 사후경직을 통한 사망시각 추정이 가능하다는걸 몰라서 벌인 것이었다는 설명이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좋은 점수를 줄 만한 작품은 아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나마 샘 호손의 애차 피어스 랜스 어바웃이 7년만에 불에 타 버리고, 새로운 차를 구입한다는 이야기만 기억에 남네요.

"보스턴 공원의 수수께끼" 

샘 호손이 의학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보스턴애 도착한 날, 보스턴 공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쿠라레 독화살이 흉기로 사용되었으며, 이전에도 3명이나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했었다. 하지만 공원은 숨어서 총을 쏘거나, 대롱을 부는게 불가능했다. 심지어 세 번째 사건 때부터는 공원에 형사가 가득했고, 네 번째 피해자는 죽을 때 까지 경찰이 예의 주시하며 미행행하기까지 했었다. 범인은 어떻게 독이 묻은 화살을 피해자들에게 쏠 수 있었을까?

"사건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에 의해 사건이 벌어진다는 일종의 '투명 인간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범인이 기차 차장이나 레스토랑 웨이터 등이었다는 류의 트릭으로 이 작품에서는 호텔 도어맨이 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호텔 도어맨이라 눈에 뜨이지 않았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건 마음에 듭니다. 핵심은 샘 호손이 쿠라레에 대해 조사하여 밝혀낸대로, 공원 안이 아니라 공원 입구, 즉 호텔 근처에서 화살에 맞았다는 겁니다. 쿠라레는 즉효성이지만 맞고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어서 피해자들은 공원 안에 들어가서 이동하다가 죽었던 거지요. 도어맨은 호루라기를 부는게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라서 호루라기를 부는 척 하고 불특정 다수인 공원 이용자에게 독화살을 쏘았고요. 

노스몬트가 이닌 대도시 보스턴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것도 처음에는 그냥 재미 요소라 생각했는데, 트릭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큰 공원, 그리고 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큰 호텔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시골 소도시 노스몬트보다는 큰, 보스턴같은 대도시를 무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범인의 동기가 애매했으며, 20세기 초 미국을 무대로 한 작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독화살이 흉기로 사용된 건 작위적이기는 했습니다. 샘 호손이 스스로 미끼기 되는 장면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작품으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잡화점의 수수께끼" 

노스몬트에 미모의 중년 여성 매기 머피가 이사와서 맥스 하크너 잡화점 옆에 부동산을 열었다. 그녀는 자주 잡화점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 열변을 토했기에 마을 남자들이 싫어했지만, 워낙 미인이라 내색은 크게 하지 않았다. 존 클레이 노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날, 맥스의 잡화점에서 일했던 프랭크가 샘 호손을 찾아와 자신이 맥스의 아내 어밀리아와 불륜 관계였다는걸 털어 놓았고, 그 직후 맥스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잡화점 안에는 시체와 함께 기절했다는 매기 머피밖에 없었는데, 잡화점 문과 창문은 안쪽에서 모두 잠겨 있었다...

밀실물처럼 소개되지만 환풍기 날개 사이로 총을 집어넣어 쏘았다는게 진상이라서, 이게 밀실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현장에서 발견된 맥스의 총은 더블 배럴이라 환풍기 날개 사이로 넣을 수 없었지만, 밖에 있었던 존 클레인 노인의 총은 싱글 배럴이라 날개 사이로 넣을 수 있었다는데 이건 트릭도 뭐도 아니고요. 부실한 현장 조사에 더해 흉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생겨난 실수일 뿐입니다.존 클레이 노인의 범행 동기도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고, 범인이 살인 때문에 놀라서 죽었다는 등 내용도 전반적으로 억지스럽습니다. 

복잡하고 억지스러운 장치 트릭보다야 현실적인 발상입니다만,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법원 가고일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조스트로 살인 사건의 배심원을 맡게 되었다. 피고 애런 플레이버는 조스트로의 고용인으로, 그는 실수로 총이 발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조스트로 부인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재판 도중, 베일리 판사가 마시던 물 잔 속 청산가리에 의해 독살당했다. 판사가 죽기 전 '가고일'이라는 말을 남겨서 범원 가고일 상을 조사해보니, 베일리 판사가 메이틀랜드 판사와 함께 밀주 밀매점에 투자했다는 문서가 들어있었다. 샘 호손은 이런 저런 단서들을 확인한 뒤, 사건 현장을 재현해서 추리쇼를 펼쳐보이는데...

애런 플레이버가 자살하려고 조스트로 부인에게서 건네받은 청산가리를 잔에 부어 놓았는데, 판사가 착각해서 먹고 죽은 거라는 진상부터가 말도 안됩니다.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직접 입에 털어 넣었어야죠. 

독약을 애런이 손에 넣은 방법에 대한 설명도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재판 중에 조스트로 부인이 껌을 계속 씹고 있었다는 증언을 통해, 그녀가 껌으로 독약병을 증인석에 붙여 놓았다고 추리하는건 일견 그럴싸했지만 이 역시 조금만 생각해보면 납득할 수 없는 추리에요. 아무리 20세기 초반이라고 해도, 재판을 받는 피고가 흉기를 손쉽게 손에 넣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했을리가 없잖아요. 가능했다해도 총이나 칼을 손에 넣는게 나았을거에요. 

억지스러운 설정, 부실한 설명으로 이루어진 최악의 졸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수록장 중 최악입니다.

"청교도 풍차의 수수께끼" 

'청교도 풍차'라 불리우는 네덜란드 풍차가 보존되어 있던 부지에 청교도 기념 병원이 신설되었다. 노스몬트 최초의 흑인 의사 링컨의 근무로 이런저런 구설수가 나오고 있었던 중, 부지를 병원에 기증했던 랜디 콜린스가 풍차에서 몸에 불이 붙어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사건 당시 "루시퍼"라는 말을 겨우 남겼었고, 의식을 회복하여 풍차 안에 악마의 불덩이가 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샘 호손은 주유소를 운영하는 아이작 밴 도런이 풍차 안으로 걸어 들어간 뒤, 풍차와 함께 불에 타 죽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링컨 존스는 검시 결과 밴 도런의 다리가 심하게 골절되어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첫 사건은 백인 우월주의자 랜디 콜린스가 풍선을 이용하여 풍차 날개 4개에 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실수로 풍선이 터져 화상을 입었던 것이었습니다. "루시퍼"는 성냥을 부르는 명칭으로, 나중에 의식을 회복하고 악마 어쩌구로 말을 바꾼거지요. 

두 번째 사건은 랜디에게 휘발유를 팔았던 주유소 주인 밴 도런이 진상을 눈치채고 협박해서, 랜디가 그에게 풍차 윗쪽에 보물을 숨겨두었다고 알려주었던 겁니다. 성냥이나 촛불로 확인해보라면서요. 그리고 이 말을 따른 밴 도런은 풍차 윗 쪽으로 날려보냈던 휘발유에 불이 붙어버린 탓에 처참하게 죽었고요. 다리는 위에서 떨어질 때 부러졌던 것이었지요. 

랜디의 동기는 인종차별을 하기 위했던 것으로, 인종차별이 뒤의 범죄들과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매끄럽습니다. 사회파 느낌도 살짝 나서 괜찮았고요. 첫 번째 사건은 일종의 실수라 특별할 건 없지만, 두 번째 사건에 사용된 일종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나름대로 설득력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소소한 부분들은 문제가 많아요. 제일 먼저, 풍차를 십자가 형태로 불태우기 위해 풍선을 이용하려 했다는 발상이 억지스러웠어요. 이게 사건의 핵심인 탓에 이야기 전개도 다소 헐거운 편입니다. 성냥이나 촛불로 풍차 윗쪽을 확인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죠. 손전등도 있는 시대인데다가, 이렇게 한다고 불이 그렇게 쉽게 붙었을지도 의문이며, 설령 불이 붙었다 해도 밴 도런이 죽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랜디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걸 보다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건 공정해 보이지 않았어요. 단서가 없지는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티가 물씬 나서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은 나쁘지 않았는데 관련된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낮아서 감점합니다. 체스터튼 소설같은 사건이라며 한껏 분위기를 띄우는데, 그 정도 수준의 작품은 절대로 아닙니다.

"생강빵 하우스보트의 수수께끼" 

노스몬트 근처 체스터 호수는 마을 주민들의 여름 휴양지였다. 샘 호손은 여름 휴가를 왔던 미란다 그레이와 사랑에 빠졌다. 미란다의 삼촌인 제이슨, 기티 그레이 부부와 그 이웃 별장의 레이, 그레텔 하우저 부부와도 친해졌는데 어느날, 샘과 미란다 눈 앞에서 하우저 부부의 화려한 하우스 보트를 타고 놀던 두 부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메리 셀레스트호 괴담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끌어 올리지만, 특별한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보트에는 레이 하우저와 키티 그레이만 타고 있었고, 그레텔 하우저와 제이슨 그레이는 이미 살해당해서 별장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겁니다. 레이와 키티는 보트를 출발시킨 후, 별장에서 안 보이는 쪽으로 헤엄쳐 나왔고, 보트는 폭파시키려고 다이너마이트를 셋팅했는데 그게 불발했던거지요. 보트를 조사해서 다이너마이트를 찾아내면, 배 주인인 레이 하우저가 범인이라는게 뻔하니 후더닛 물로 볼 수도 없고요. 

설령 레이 하우저의 계획대로 폭파되었더라도 문제에요. 그는 배가 폭파된 후 그레텔과 제이슨의 시체를 떠내려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들이 익사하지 않았다는건 부검으로 밝혀졌을테니까요. 함께 배를 타고 있던 네 명 중 두 명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익사가 아니라면, 다른 두 명이 범인이라는건 당연하잖아요? 

아울러 이렇게 무거운 강력 범죄 이야기로 끌고가지 않고, 두 부부가 장난으로 이 일을 벌였다는 일상계 물이었다 한 들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샘 호손과 미란다 눈에 보이지 않게 배 반대쪽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간게 전부인 탓입니다. 즉, 이건 애초부터 불가능 범죄가 아니었어요. 차라리 장난에 가깝죠.

부실 수사와 부실한 계획이 합쳐진 망작입니다. 샘 호손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는게 독특했을 뿐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분홍색 우체국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간호사 에이프릴과 노스몬트 우체국을 방문했다. 개장 첫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우체국장 베라는 우체국을 분홍색으로 칠해놓았다. 분홍색 페인트가 값이 쌌던 덕분으로, 한 쪽 벽에 마저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흄 백스터를 불렀다. 흄이 페인트를 칠하기 시작했을 때, 은행장 앤슨 워터스가 주식 대공황을 알리며 1만 달러어치 무기명 채권의 특별 배송을 부탁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 봉투가 사라지고 마는데....

샘 호손이 미란다와 파국을 맞지만, 렌즈 보안관이 베라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애정 전선이 크게 움직이는 에피소드.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어요. 샘 호손이 봉투 행방에 대해 우체국 현장에서 펼쳐보이는 여러가지 추리들도 그럴싸했지만,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흄 백스터가 주워서, 벽에 붙인채 페인트 칠을 해 버렸다는 진상도 합리적이었거든요. 페인트가 마르면 바로 들통날테니 그날 밤 봉투를 회수하러 올 것이라는 마무리 추리까지 깔끔했고요.

물론 당장 봉투를 찾지 못했더라도, 수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렌즈 보안관의 무능이 드러나기는 합니다. 제일 수상한건 흄 백스터인게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은 단편이었습니다. 다른 작품들 수준이 워낙에 별로라 이 정도면 충분히 선녀급이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팔각형 방의 수수께끼" 

렌즈 보안관은 베라와 에덴 하우스의 팔각형 방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팔각형 방은 거대한 서재로, 네 귀퉁이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거울이 달린 수납장을 설치하여 만든 곳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방문이 열리지 않아서 잠긴 문을 부수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눈에 뜨이는 건 문 손잡이에 묶여 있던 끈 한 줄이었다. 끈으로 빗장을 잠글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끈은 너무 짧았고, 방문은 끈 한 올 통과할 틈이 없었다.

문 손잡이에 끈이 묶여 있었으니 이를 밀실물로 보기는 애매합니다. 이 끈으로 밀실을 만든게 당연하니까요. 진상도 예상 그대로입니다. 범인은 문 바로 맞은편 창문 걸쇠에 끈을 묶고, 이걸 빗장에도 묶은 뒤 창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문을 부술 때 끈이 당겨져 창문 걸쇠가 잠긴 것이지요. 

이렇게해서 창문이 잘 잠겼을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끈 조각이 남은 탓에 딱히 대단한 트릭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제대로 잠긴걸 확인하지 않아서 밀실로 착각했을 뿐, 실제로는 밀실이 아니었다는 문제도 크고요. 범인이 밀실을 만든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어요. 이렇게 복잡한 장치를 만드느니, 문을 열어두고 한 패에게 살해당했다는 식으로 꾸미는게 상식적입니다.

물론 범인인 조시의 아내 엘렌이 창문을 부수는걸 반대했던 장면같은 복선이라던가, 언제나 이야기를 듣는 화자가 아니라 범인이었던 엘렌이 찾아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거라는 나름의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지만, 결국 그 때문에 모든걸 잃었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부실했고, 상황의 설득력이 낮아서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집시 야영지의 수수께끼" 

청교도 기념 병원을 찾은 샘 호손이 병원 경영의 전권을 맡은 에이블 프레이터 의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때, 집시 에도 몬타나가 들어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한 뒤 곧바로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집시들은 무리의 지도자 루돌프의 저주 탓이라 여겼지만, 부검 결과 몬타나는 심장에 총을 맞았다는게 밝혀졌다. 그러나 몬타나의 가슴과 등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렌즈 보안관은 저주의 원인이 된 몬타나의 부인 테레즈를 구금하려 했지만 집시 스티브의 공격으로 실패했고, 철저한 수사를 위해 집시 무리를 하룻밤 동안 감시했는데 집시들은 스무 대의 마차, 말과 함께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불가능 범죄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 범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슴과 등에 상처가 없었다면 누군가 가슴을 연 뒤 심장에 총을 쏜 것이고, 부검 자리에는 샘 호손과 에이블 프레이터밖에 없었으니 범인은 에이블인게 당연하지요. 집시들이 머물던 해스킨스 농장의 상속 문제라는 동기도 이야기에서 거의 곧바로 드러나고요. 애초에 왜 가슴을 열기 전에 총을 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구태여 기묘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집시들이 하룻밤 새 사라져버린 두 번째 트릭은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말과 마차모양 판지를 세워놓아 눈을 속인 뒤, 판지를 태우고 사람들만 몰래 빠져나갔다는건데, 보안관이 멀리서 감시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속아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저 판지들을 모조리 태울 수 있었을지 의문인 등 세세한 점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밀주업자 자동차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밀주업자 래리 스피어스의 동료들에게 납치되었다. 총에 맞았다는 래리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래리는 중상이 아니었다. 동료 중 배신자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며 아픈 척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래리는 토니 배럴과의 거래 완료 때까지는 샘 호손을 풀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거래가 끝났을 때, 실수로 총격전이 벌어졌고, 차에 탔던 토니 배럴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진상은 래리 스피어스가 다친 척 위장해서 토니 배럴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뒤 살해했던 겁니다. 집 밖으로 나가 차에 탔던 건 래리가 매수한 토니의 부하 스쿠프였고요. 스쿠프는 래리가 뚱보로 변장할 때 썼던 완충재를 몸에 두르고, 수염을 붙인 뒤 웅얼거리며 토니인 척 나가서 차에 탔습니다. 그리고 변장을 풀고 바로 운전석으로 넘어가 차를 몰고 떠나려고 했던 거지요. 잘 됐더라면 완전 범죄가 됐을텐데, 하필이면 총격전이 벌어진 탓에 스쿠프가 운전석에서 내리자 불가해한 실종 사건이 생겨났던 겁니다. 이렇게 불가능 범죄가 일어난 이유를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합리적으로 설명되는게 좋았습니다. 래리가 술통 값을 낼 수 없는데 술통이 필요했다는 동기도 설득력 있었고, 토니 배럴의 차가 밖에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던가 (방탄을 위해서), 스쿠프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등의 복선도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갱들과 목숨을 걸고 담판을 지으며 사건을 해결하는 샘 호손의 모습도 독특했고요.

이렇게 이야기 완성도만큼은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트릭의 설득력이지요. 과연 저 정도의 변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다 속아넘어갔을까?는 잘 설명되지 못하거든요. 이번 권은 변장을 전가의 보도로 쓰고 있는 트릭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깡통 거위의 수수께끼" 

잠겨져 있던 비행기 조종석에 있던 조종사가 칼에 찔려 살해된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핵심은 조종석 안에 범인이 숨어 있었다는 겁니다! 샘 호손의 눈을 피해 숨어있다가 몰래 문 밖으로 나갔던 거지요. 밀실이라고 볼 수는 없는 셈입니다. 왜 이런 기묘한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잘 설명되지 못하고요. 

그래도 범인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비행기 곡예단 동료를 자기처럼 변장시켜 공연을 했다는 트릭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평작 수준은 될 듯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꾼 오두막의 수수께끼" 

샘의 아버지 해리 호손이 아내와 함께 노스몬트에 방문했다. 그는 편지 왕래로 친해진 대지주 라이더 색스턴으로부터 사냥 초대를 받고, 샘도 함께 사냥에 참가하게 되었다. 다음날, 사슴 사냥을 하던 중 혼자 사냥꾼 오두막에 있었던 라이더 색스턴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오두막으로 들어온 발자욱은 색스턴 것 뿐이었고, 흉기는 저택 안의 무기 컬렉션에 있던 곤봉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건 오래된 깃털 뿐이었다. 범인은 어떻게 발자욱없이 곤봉을 가지고 들어와 색스턴을 죽였을까?

범인은 사냥꾼 오두막 물탱크에 물을 채우기 위한 호스 자국 위로 이동하여 발자욱을 남기지 않았던 겁니다. 호스의 폭은 3cm에 불과했지만, 이 위를 '자전거'로 지나갔던 거지요. 상황을 잘 이용한 괜찮은 트릭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색스턴이 오두막으로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호스를 연결했다가 떼는 장면이 상당히 오래 묘사되고 있어서, 작가가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잘 전해주고요. 자전거를 닭장 안에 두었었기 때문에 현장에 닭털을 흘렸고, 이 탓에 트릭이 들통나는 과정도 괜찮았어요.

왜 불가능 상황을 연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건 아쉽지만, 트릭만큼은 정말 괜찮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건초 더미 속 시체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수의사 밥 위더스가 농부 펠릭스 베넷의 아내 세라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한 후, 펠릭스의 권유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가석방 중 펠릭스의 신세를 지다가 사고를 쳐서 펠릭스가 다시 교도소로 돌려 보냈던 로슨이 만기 출소했다며 나타나 펠릭스를 협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곰 사냥을 위해 렌즈 보안관을 비롯한 여러 명이 농장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펠릭스가 샘 호손에게 전화 한 통화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중에 그는 방수포로 덮은 건초 더미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보안관은 펠릭스가 건초 더미를 쌓고 방수포를 치는걸 자기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면서, 방수포 안에 시체를 넣는건 불가능했다고 말하는데...

렌즈 보안관이 혼자서 해결했다는 사건. 범인은 펠릭스 농장의 소작농 핼 패리였습니다. 그는 펠릭스의 상징과도 같은 큰 밀짚모자를 쓰고 건초 더미 뒤에 있던 펠릭스를 죽인 뒤, 자기가 펠릭스인 척 시체를 건초 더미에 넣고 그 위에 방수포를 쳤던 겁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변장 트릭이 사용되어서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만 독립적으로 놓고 보면 괜찮은 본격 추리물인건 분명합니다. 일단 다른 작품들보다는 변장의 설득력이 높거든요. 밀짚 모자에 대해서, 그리고 펠릭스와 핼 패리의 키가 비슷했고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는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이지요. 유력한 용의자 로슨의 콧수염에 대한 언급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몰래 시체를 숲에다 가져다 버릴 생각이었는데, 곰이 나타나는 바람에 기묘한 불가능 범죄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도 합리적이었어요.

곰이 시체를 뒤지는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노스몬트라는 시골 마을이라는 무대 특성 상 그렇게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타의 등대 수수께끼" 

여행을 떠난 샘 호손은 '산타의 등대'를 우연히 방문하여 해리와 리사 남매와 친해졌다. 그러나 그날 밤 등대 꼭대기 전망대에 있던 해리가 칼에 찔려 떨어져 죽고 말았다. 마침 리사와 함께 있던 샘 호손 바로 앞에 시체가 떨어졌는데, 둘을 지나치지 않고 범인은 빠져나갈 수 없었다. 샘은 사건 해결을 위해 수감 중인 남매의 아버지 로널드를 찾아갔다. 로널드는 등대에서 밀주 밀수를 했으며, 해산물 레스토랑 주인인 폴 레인과 거래를 해 왔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샘 호손은 처음에는 산타의 등대를 관광차 방문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었다고 추리했습니다. 난쟁이 킬러가 아이로 변장했다면서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헛점이 많은 추리였어요. 가족 요금이 더 싼데 아이들만 등대에 들여보낸게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유부터가 근거로는 터무니없이 빈약했으니까요. 아이들끼리 친하고 잘 노는데다가, 아이들을 돌봐줄 해리와 리사가 있는데 부모가 뭐하러 함께 들어간단 말입니까? 게다가 아이들이 떨어질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시설인데 아이들이 몇 명 들어가서 몇 명 나왔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안되죠. 수십명도 아니고, 고작 4~5명을 확인하지 못했을리가 없잖아요. 이 정도면 아이들 이름까지 외울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 리사가 범인으로, 그녀는 오빠를 죽인 뒤 등대 전망대에 낚싯줄로 묶어 고정했던 거라는 진상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난쟁이 킬러보다야 나을 뿐, 말이 안되는건 마찬가지에요. 딱히 좋아보이는 트릭도 아닐 뿐더러, 샘 호손이 있을 때 시체를 떨어트린건 납득하기 어려웠거든요. 자기의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 들, 살인범이 등대로 들어갈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은 딱히 유리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오빠를 일어서 떨어트리고 사고로 위장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게 오빠라서 죽였다는 동기도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대미를 장식하기는 하지만,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수준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2021/12/26

대실 해밋 - 대실 해밋 / 변용란 : 별점 2.5점

대실 해밋 - 6점
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현대문학

하드보일드의 거장 대실 해밋이 쓴,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입니다. 작가 인생 초기작들로 유명한 컨티넨털 탐정사 탐정이 등장합니다. 

대체로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우며,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인 느낌을 전해줍니다. 몇몇 작품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배신의 거미줄" 

외과의사 에스텝 박사가 죽고 부인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사가 숨겨왔던 첫 번째 부인이 찾아온 직후 사건이 일어났던 탓이었다. 변호사 리치먼드의 의뢰로 탐정은 의사가 죽기 전 보냈다는 편지를 찾아 나섰다. 첫 번째 부인을 미행한 끝에 탐정은 사건 배후에 사기꾼 제이콥 레드위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제이콥을 미행하는 또 다른 인물의 존재를 알아챘는데...

"의심이 든다면 미행해라"라는 말 처럼 미행을 통한 단서 찾기와 그 외 탐정 사무소를 통한 조사 및 다른 탐정들과의 분담과 협력 등 탐정의 진짜 업무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탐정으로 일했던 대실 해밋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행 과정을 통해 당대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거리와 풍경들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좋았고요. 이 때부터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종의 "바꿔치기"트릭이 사용된 덕분입니다. 에스텝 박사는 가짜로, 진짜 에스텝 박사의 의사 면허를 제이콥에게서 구입하여 의사 행세를 해 왔던 겁니다. 첫 번째 부인이라며 나타났던건 진짜 에스텝 박사의 부인이었고요. 제이콥은 에스텝 박사를 수십년 동안 뜯어먹다가, 크게 한 탕 저지를 생각으로 사건을 꾸몄던겁니다. 

제이콥의 계획도 괜찮았어요. 그는 거액을 요구하면, 박사가 자살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그는 유산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의도는 아니었지만, 현 부인이 남편을 살해했다고 인정된다면 유산 전부를요!

그러나 계획을 밝혀내는데 있어서는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탐정이 제이콥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단서를 잡은 뒤, 협박해서 그의 입으로부터 진상을 듣는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행과 감시로 진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허나 제이콥이 탐정에게 진상을 술술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는게 문제에요. 증거품인 에스텝 박사의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순순히 내 준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탐정과 제이콥 모두 살인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제이콥이 이렇게까지 설설 길 이유는 없잖아요? 도주하던 제이콥이 오가르 경위에게 사살당한다는 마지막 장면도 허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탄 얼굴"

탐정은 밴브룩의 두 딸 가출 사건 조사 중 잠깐 만났던 코렐 부인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둘째딸 루스 밴브룩마저 시체로 발견되었고 탐정은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을거라 확신했다. 탐정과 팻 형사의 조사 결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유사했던 여성들이 자살했던 사건들이 여러 건 있었고, 모두 레이먼드 엘우드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실종되고, 자살했던 여성들 사건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관계된 사건을 모두 조사해 보겠다는 수사 방침에 대한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하드보일드라기 보다는,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운 탓입니다. 탐정과 팻 형사가 레이먼드 엘우드가 자주 방문했던 저택에 침입한 이후부터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저택에서 사이비 종교와 마약에 빠진 여자들이 난교 파티를 벌이던 사진을 찍어서 협박해 왔다는 진상도 허무하며, 탐정이 팻을 설득해서 주요 증거물인 사진을 모두 소각한다는 결말도 낭만적인 모험 활극과 다를게 없습니다. 팻의 백만장자 아내도 사진에 찍혀있었다는 약간의 반전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기 때문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중국 여인들의 죽음"

릴리언 샨은 하녀 한 명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취소하고 급작스럽게 귀가했던 날, 낯선 중국인 청년에게 습격당했다. 릴리언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하녀는 죽고 말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은 지하실에서 요리사 완란의 시체도 발견하였다. 탐정은 사건을 의뢰받은 뒤 정보를 캐내다가 사건 배후에 어빙턴 호텔 소유주 코니어스와 차아니타운의 실력자 창리칭이 관계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차이나타운을 무대로 하는데 단지 이국적인 배경에 그치는 건 아닙니다. 중국을 배신하고 한 몫 단단히 잡은 이민자의 딸이 주인공 중 한명이며,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중국인 독립운동가의 무기 밀수에 편승해서 악당들이 한 몫 잡으려고 했었다는 이야기의 핵심 설정과 전개 모두가 설득력있게 활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릴리언의 저택은 해변과 맞닿아 있었는데, 밀수를 위해서는 해변과 맞닿아 있는 저택이 필요했다는 진상도 그럴듯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탐정이 정말로 하는게 별로 없고 전개는 우연과 억지에 의한게 많은 탓입니다. 탐정이 조사원 중 한명이었던 마약중독자 얼이 수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걸 알아챈건 순전히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하니까요. 동공? 눈빛? 모두 설득력이 약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필요할 때마다 만나서, 필요한 증언을 얻는다는 전개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휘슬러가 일본군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조작했던 사진을 결정적 순간에 주머니에서 꺼내는 장면처럼요. 탐정이 이 사진을 가지고 다닐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의뢰인인 릴리언을 무사히 사건에서 빼내고 휘슬러를 포함한 악당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결말은 전혀 하드보일드스럽지 않더군요. 릴리언은 선량했고 선의에 가득찬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해주는 기사가 활약하는 영웅담이자 낭만적인 모험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아울러 당시 중국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판타지를 반영한 듯한 창리칭 저택의 복잡한 구조와 기묘한 보디가드들, 은밀하면서도 잔혹한 공격과 미모의 노예 소녀 슈슈에 대한 묘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지루했던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쿠피냘 섬의 약탈" 

탐정은 결혼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쿠피냘 섬에서 열린 헨드릭슨 가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날 밤, 폭풍우와 함께 강도단이 섬의 은행과 보석상을 습격했다. 결혼식 하객 중 한명이었던 러시아 공주로부터 이 사건 소식을 들은 탐정은,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헨드릭슨 저택 집사와 운전수에게 맡기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강도단의 도주를 막는데는 실패했고, 헨드릭슨 저택으 복귀 후에 집사와 운전사가 살해당했으며, 결혼 선물은 도난당했다는게 밝혀지는데....

오래 전에 읽었었던 작품인데 내용 자체를 잊어버려서 처음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초, 중반부까지는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완전 무장한 강도단과 맞서 싸우는 탐정의 활약을 그린 영웅담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정통파 추리물과 하드보일드가 잘 결합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말이지요. 

특히 합리적인 추리가 볼만합니다. 탐정은 강도들이 외부에서 왔다면 일당과 무기 운반을 위해 자동차나 배가 필요했을텐데, 섬 주민의 자동차와 배를 탈취했던 상황에 주목합니다. 그 외의 여러가지 단서를 조합하여 러시아 장군과 공주 일행이 강도라는걸 알아내고 맙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한 후,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공주 일당의 범행 동기도 시대를 감안해보면 충분히 그럴듯했고요. 이런 추리를 일종의 추리쇼를 통해 선보이는 장면은 정통파 고전 본격 추리물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리고 추리쇼에서 이어지는, 돈 보다 범죄를 해결하는게 더 재미있다며 뱀 같은 공주의 유혹은 무시하고, 심지어 여자를 쏘지 않을거라 믿으며 도망가려는 공주 다리를 쏘아 맞추는 탐정의 모습은 고전 본격 추리물을 넘어선, 하드보일드 장르의 도래를 알리는 명장면이었다 생각됩니다. "난 장애인한테서도 목발을 훔쳤던 사람 아닌가?"라는 말도 희대의 명대사였고요. 구 시대의 화려했던 부르주아들은 모두 현실에 몰락해 버렸고, 이들을 악전고투끝에 살아남은 플로레탈리아가 짓밟는 구성은 시대가 변했음을 잘 느끼게 해 주네요. 마지막에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던 잔챙이 범죄자 플리포를 탐정과 공주가 서로 자기 편으로 만들려 설득하는 클라이막스도 재미있었습니다. 작위적이라는건 부인하기 어렵지만요.

물론 공주가 탐정을 살려둔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큰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가장 위협이 될 인물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한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 여명기, 장르의 초석을 다졌을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크게 한탕"

탐정은 어느날 밤 술집에 패디 더 맥스, 블루포인트 밴스, 해피 짐 해커, 빅 버드 레드 오리어리 등 유명한 범죄자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맨스 은행이 습격당할거라는 정보를 전해 준 정보원 비노가 살해당한 다음날 아침, 시맨스 내셔널 은행과 골든게이트 신탁회사가 약탈당했다. 무려 150여명의 프로 범죄자들이 도로를 봉쇄하고 20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현금 수백만달러를 훔쳤고, 경찰 포함 3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던 대참사였다. 그런데 강도 일당 수십 명의 시신이 차례로 발견되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죽은 강도 중 한 명이 '빅 플로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생존자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쫓던 탐정은 밴스를 비롯한 다른 강도들의 습격에서 그를 데리고 겨우 탈출했다. 부상당했던 레드 오리어리가 탐정을 이끈 곳은 빅 플로라가 몸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였다....

백명이 넘는 강도단, 수백만 달러의 강탈, 수십명의 죽음 등 어처구니없는 스케일을 보여주는 범죄물. 은신처에 있던 연약해 보였던 노인이 사건의 흑막 파파도풀로스였으며,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기에 무사 탈출을 위해 탐정을 이용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탐정사무소 소장인 '영감'이 사건 배후에는 굉장히 머리 좋은 인물이 있을거라고 말했었고, 빅 플로라가 탐정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 등 이런저런 복선이 잘 배치되어 있던 덕분입니다.

하지만 설정에 비하면 내용은 비교적 수수한 편입니다. 탐정도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를 쫓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어요. 빅 플로라의 은신처에서 벌이는 목숨을 건 연극도 유치했고요. 빅 플로라가 노인을 하인 대하듯 하는 장면같은 억지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빅 플로라가 우두머리이며 노인은 거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유능한 탐정마저도 속아넘어간 것에 대해 변명거리를 만들 속셈이었을텐데,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였어요. 이런 점에서 하드보일드 추리물로 건질만했던건 별로 없었던 작품입니다. 단순 화끈한 마쵸 모험 액션물에 가까운 이야기였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거액을 강탈한 뒤, 공모자들을 죽이고 독차지하려고 했던 계획을 망쳐버린 사랑꾼 빅 레드 오리어리를 징벌하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파파도풀로스 입장에서는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피 묻은 포상금 106,000달러" 

탐정에게 패디 더 멕스의 동생 톰-톰 캐리가 찾아와 파파도풀로스에게 걸려있는 거액의 현상금에 대해 물어보았다. 몇 건의 살인과 습격이 이어진 끝에, 탐정들과 캐리는 백만장자 뉴홀 저택에 은신하고 있던 파파도풀로스를 잡는데 성공하는데...

시원치않았던 전편에서 이어지는 후편인데, 이 작품은 아주 좋았습니다. 탐정의 냉혈한스러운 면모가 빛나거든요. 탐정은 신참 탐정 잭이 파파도풀로스의 꼬임에 넘어가 한 패가 되었다는걸 진작에 눈치챘습니다. 아마도 그리스인 거주지 습격 사건 때 눈치챘겠지요. 그래서 마지막 습격 때 잭을 일부러 대동한 뒤, 모든 진상을 까발려서 잭은 캐리의 손에 의해, 캐리는 다른 탐정이 사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배신자를 징벌하고 탐정 사무소의 평판을 지켜내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 거지요. 이 와중에 탐정 사무소 다른 탐정들을 동원하고, 잭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안배를 하는 꼼꼼함도 볼만했고요. 

잭이 배신하게 된 계기가 빅 레드 오리어리의 연인 낸시가 사실 백만장자 뉴홀의 딸이었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반전도 상당한 놀라움을 가져다 준 좋은 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끝판왕격인 파파도풀로스의 허무했던 최후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탐정이 잭의 배신을 언제 눈치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도 설명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거에요. 낸시의 이상했던 시선, 잭의 이상했던 눈빛은 증거가 될 수 없었는데 말이지요. 잭이 별다른 증거도 없는데 스스로 자포자기해서 자백을 한 것도 다소 편의적인 전개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정교함과 냉혹함이 잘 살아있는 하드보일드 여명기를 대표할만한 수작이라 생각되네요.

"메인의 죽음" 

메인이 출장을 다녀온 날 새벽, 2인조 강도가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지갑 안의 2만 달러를 강탈해 사라졌다. 현장 근처에서는 흉기인 권총과, 여성 손수건이 들어있는 지갑이 발견되었다. 메인의 보스 군겐에게 고용된 탐정은 손수건이 군겐의 젊은 아내 것이며, 아내의 하녀가 범죄자와 어울린다는걸 알아낸 뒤, 아내로부터 사건 진상을 고백받았다. 그녀와 메인은 불륜 관계였으며, 2만 달러는 불륜을 저지르던 당일 오후에 강탈당했던 것이었다. 범인은 하녀의 애인이었다.

젊은 아내를 옭아맬 속셈으로 사건 수사를 의뢰한 군겐,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보스의 아내까지 건드리다 파멸한 메인,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한 젊은 아내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묘사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들이 얽히고 섥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든 건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마음에 들었고요. 불륜 남녀가 돈을 빼앗긴걸 쉽게 털어놓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범인들의 잔꾀도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하지만 범인 일당의 부주의한 행동이 미행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진상을 고백받은 형태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탐정 수사' 물인데, 미행으로 진범이 누구인지 바로 밝혀내는건 너무 쉬운 전개였습니다. 메인이 좌절한 나머지 자살했고, 보험금 때문에 메인의 아내가 이를 강도 사건으로 꾸몄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보스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는게 훨씬 낫다는 점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메인을 죽이고 강도 살해 당한 것 처럼 꾸몄다는게 더 타당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마무리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메인의 아내를 비롯, 군겐의 아내까지 사건에 관련 여성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던걸까요? 여튼,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수사물로는 괜찮았던 깔끔한 소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국왕 놀음" 

탐정은 미국인 청년 라이오넬 그랜덤을 찾아 유럽의 소국 모리비아로 향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어머니의 과보호로부터 탈출한 그는, 유럽에서 무려 3백만달러나 되는 돈을 현금화했다. 탐정은 라이오넬이 군대를 장악한 실력자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모리비아에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3백만 달러는 혁명을 위한 군자금이었다.

유럽 소국 모리비아를 무대로 한 일종의 군웅물이랄까, 여튼 왕이 되려는 사람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는 작품. 설정은 기발했고, 왕위를 놓고 여러 세력이 벌이는 암투가 짤막한 분량안에서 잘 그려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았어요. 일단 에이나르손 대령이 왜 미국인을 끌어들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요. 군대를 장악했고, 인기도 많았다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서 왕이 되면 그만이었을텐데 말이지요. 3백만 달러는 분명 거액이지만, 일국의 왕이 된다면 그 정도 돈이 문제가 될까요? 

대통령 비서 마흐무드가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현 대통령의 통치를 못마땅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한들, 절대 권력을 가진 대통령 비서가 이를 쉽게 포기하고 혁명에 바로 몸을 맡기고 급작스럽게 에이나르손을 암살하려고 한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에이나르손이 군대를 장악하여 기껏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탐정의 총에 굴복해서 순순히 라이오넬의 대관식을 치룬 것도 그의 야망과 노력을 생각하면 많이 허무합니다. 최후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낭만적인 중세 시대 모험 활극이라면 모를까, 20세기를 무대로 한 이야기에는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파리잡는 끈끈이" 

뉴욕의 명문가 햄블턴 가문의 막내딸 수는 범죄자와 도망친 후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1년 후, 돈 1,000달러를 요구하는 전보가 날라왔고 탐정은 돈을 가지고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이는 사기꾼 홀리 조의 계획으로 수는 가짜였었다. 

홀리 조로부터 캐낸 수와 베이브의 거처를 찾은 탐정은 그곳에서 수의 시체를 발견했다. 부검 결과 수는 만성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게 밝혀졌다. 비소는 파리잡는 끈끈이에서 추출한 것이었다. 다시 협잡꾼 홀리 조를 심문해서, 그가 수와 도주할 계획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갑자기 나타난 베이브가 홀리 조를 사살하고 달아나는데....

부잣집 철부지 딸의 비참한 죽음, 얽히고 섥혀 서로를 죽이고 마는 애증 관계가 그려진 정통 하드보일드 작품입니다. 

그런데 탐정이 베이브를 추격해서 사로잡는 부분은 액션 활극 느낌도 강하지만, "누가 수를 죽였나?"라는 후더닛 측면에서도 볼만한 추리물입니다. 일단 홀리 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마찬가지인 수를 죽일리 없었어요. 수와 도망칠 계획이었으니까요. 베이브도 오랫동안 비소를 수에게 먹여 죽일만한 인물은 아니었고요. 그렇다고 수가 자살했다고 하기에는, 만성 비소 중독은 여러모로 이치에 맞지 않지요. 그렇다면 진상은? 수는 비소를 오랫동안 조금씩 먹어 내성을 키운 뒤, 한번에 많은 양의 비소를 함께 먹어 베이브를 해치울 생각이었던겁니다. "맹독"에도 나오는 트릭이지요.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 소장 영감이 이건 체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비웃는 장면, 그리고 파리잡는 끈끈이가 숨겨져 있던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이 방법이 나와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전개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아요. 베이브가 마침 탐정이 심문하던 도중에 나타나 홀리 조를 사살했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웠고, 애초에 수와 조가 베이브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깔끔하게 사살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비소 내성을 키워 독살하려 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범행을 저지른다고 살인죄가 덮이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추리적인 부분에서 볼만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이전 리뷰에서도 그 부분을 좋게 언급했었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12/11

불온한 잠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점

불온한 잠 - 4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와카타케 나나미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최신작입니다, 2019년 12월 발표되었습니다. 2020년 초에 하무라 드라마가 방영되었기 때문에 일부러 간행 일자를 맞춘 듯 합니다. 통상 2년 정도 기간을 두고 발표되었던 시리즈 이전 작들에 비하면, 중간 기간이 확연히 짧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시리즈 이전 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별로였습니다. 사건들은 대부분 억지스러웠으며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거든요. 전작에 비하면 많아진 극적 소재들 - 폭발, 유령 빌딩과 그라피티, 총격 사건, 산사태 등 - 도 대체로 비현실적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라는 별명을 강조하기 위한 지나친 상황과 인물 설정들도 억지가 심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와카타케 나나미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미디어 믹스의 유혹, 편집부의 요청이 지나쳤던게 아니었나 싶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품 속의 나날" 

자신이 곧 죽을거라는 옛 기치조지의 마담 사쓰키는 하무라 아키라를 자택으로 불렀다. 그녀가 돌보던 친구 딸 하루카가 곧 출소하는데, 자기에게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루카는 마약에 취해 저지른 방화로 불륜남을 사망케해서 7년형을 받았었다. 하루카를 교도소에서 태우고 돌아오던 중, 수상한 2인조가 하루카를 납치하려다 실패했다. 경찰은 하루카가 죽게 만들었던 불륜남 다케이 소지로가 무언가 위험한걸 밀수했었고, 아직 그게 발견되지 않았다고 알려주는데...

하루카와 하무라 아키라, 악의 조직이 서로 쫓고 쫓기는 과정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세계관 그대로입니다. 재미도 있고요. 특히 하루카가 수상한 조직에 쫓기다가 도망가서 '무언가'가 있음직한 장소로 향하는 과정, 하무라가 그녀를 뒤쫓다가 조직과 마주치는 등의 장면은 "몰타의 매"를 연상케 합니다. 비싼 값어치가 있는 보물을 여러 명이 노리고, 여자와 탐정이 한 팀인줄 알았는데 여자가 뒷통수를 친다는 설정이 똑같으니까요. 

물론 하루카는 전혀 미인도 아니고, 머리도 나쁘며 하무라 아키라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소시민인데다가, 악의 조직도 사람을 죽이기 보다는 '손을 믹서기에 실수로 넣어 버리는' 정도의 조직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현대 일본에 하드보일드 세계관을 풀어놓으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요. '무언가'가 고작 거북이었다는 진상도 황당했지만, 현대 일본이 무대인 상황에서는 최선이었을 테고요. 악당들이 거액과 시간을 들여, 폭행을 가해가며 노려왔지만 정작 경찰은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을 그런 물건으로 딱 적당하다 싶었거든요. 멸종 위기종으로 약효가 좋다고는 해도, 수많은 관계자들 손을 갈아가면서 찾을 필요가 있나 싶기는 했습니다만.

하지만 이 작품이 진짜 하드보일드구나! 싶었던건, 악의 조직과의 문제가 일단락된 다음입니다. 사쓰키가 죽기 전, 하루카를 데려와 달라고 탐정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7년간 면회는 커녕, 영치금 한 번 넣어준 적이 없었고, 하루카는 사쓰키를 두려워했는데 말이죠. 정답은, 사쓰키는 하루카에게 복수를 하려고, 그녀가 도망가지 않고 자신에게 오도록 탐정에게 의뢰했던 겁니다. 이를 위해 앞서의 복선이 드러나는 장면은 서늘합니다. 사쓰키가 장갑을 끼고 있었던 이유가 대표적이에요. 사쓰키는 하루카 때문에 손가락을 믹서에 넣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밖에도 친구가 하루카를 임신했던 탓에 좋았던 관계가 깨졌었고, 하루카의 불륜으로 사업도 큰 손해를 보았던 등도 복수의 이유였고요. 이렇게 애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순수한 복수심이 대폭발하는 마지막 장면은 정통파 하드보일드 물임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어요.

그러나 멀쩡한 회사 대표였던 사쓰키 손을 갈아버렸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이 이렇게나 무식하고 무서운 무법천지란 말일까요? 하루카가 훨씬 젊고 힘도 좋을텐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죽음을 맞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 않았고요. 또 물론 집을 폭탄으로 날려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드라마를 과하게 의식한게 분명해 보여서 좀 별로였습니다. 앞서의 소시민스러운 하드보일드 느낌을 망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 범죄물 팬이라면 누구나 좋아함직한 수작이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새해의 미궁" 

하무라 아키라는 12월 31일, 하청 알선업자 사쿠라이를 통해서 철거 예정인 빌딩의 경비를 맡게 되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빌딩이었다. 고생 끝에 경비를 마친 히무라에게 경비 사무소 사무원 사나에가 실종된 경비원 구도 쓰요시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 구도 쓰요시는 회사 몰래 유령 빌딩 견학회를 열었던 사실이 질책받고 도망가 버린 상태였다. 하무라는 구도와 악연이 있다는 예술가 사촌 라이카의 집에서 구도를 발견하는데...

라이카가 빌딩 개발업자 관계자와 함께 경비 중이던 구도를 협박해서 유령 빌딩에 침입했던 이유는, 독자들도 비교적 쉽게 추리할 수 있습니다. 라이카가 이구치라는 그라피티 아티스트에게 푹 빠저 있었다는 정보가 초반에 제시되는 덕분입니다. 해체 직전의 빌딩에 경비원을 둔 건 빌딩 안에 값나가는 무언가가 있다는걸 개발업자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그 사실을 눈치했던 회사의 누군가가 이구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라이카를 현장에 불렀던 거라는 추리는 덕분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어요. 아마 그 누군가는 직품을 확인한 뒤 몰래 빼 낼 계획이었을테지요. 

그러나 진상은 조금 의외였습니다. 개발업자인 산도 개발의 오키타 부장이 이구치 그라피티가 있다고 사기쳐서 한 몫 챙기고 있었던 겁니다. 이구치 그림은 없었던 거에요! 이렇게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덕분에 사건의 복잡도도 높아져서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개는 여러모로 억지스러웠어요. 일단, 앞서 말했던 '누군가'에 해당하는 오키타 부장의 부하 후치가미가 아라카와, 라이카에게 이구치 그라피티에 대한 정보를 흘린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뭘 위해서 그랬을까요? 그림을 빼돌릴려고? 작 중에서 설명되지만, 건물 속 그라비티를 훔쳐내는건 현실성 없는 이야기에요. 벽을 해체하는게 그리 쉬울리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달리 돈을 만들 방법도 없고요. 후치가미가 속수무책으로 실종된걸 보면 딱히 협박이 목적이었던걸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리고 라이카는 이구치의 작품이 없다는 걸 알았을겁니다. 그런데도 시간을 들여 누드 사진을 찍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녀도 사실은 이구치 작품이 뭔지 잘 몰랐다는걸 의미하는 걸까요? 설령 그렇다쳐도, 작품 전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라이카가 사진가 아라카와에 의해 빌딩 안에서 살해당했다는게 가장 억지스러웠습니다. 경비원이었던 구도를 반 협박하다시피해서 들어오기는 했지만, 라이카와 아라카와가 빌딩에 잠입한건 그리 대단한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숨기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다? 아라카와는 이구치 그림이 없다는걸 알고, 오키타 부장 패거리에게 잡히면 죽을 거라고 추리했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오키타 부장 패거리가 자기들 얼굴을 목격했던 경비원 구도를 살려둔 이유가 설명이 안되지요.

사소해 보였던 의뢰가 대기업이 엮인 대형 사기극과 이어지지만, 하무라가 받은 의뢰는 사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습니다. 살인 사건은 우발적인 범행이었고요. 사건 해결도 추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우연에 가까왔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물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그래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도망친 철도 안내서" 

하무라 아키라는 병원에 입원한 도야마의 지시로 '철도 미스터리 페어' 준비를 도맡게 되었다. 페어의 메인은 수집가 미노와로부터 빌린 "ABC"였다. 유명 작가 가미오카의 장서로 '94식'이라는 총기 난동 현장에 있었다고 알려진 책이었다. 그러나 페어 와중에 누군가가 하무라를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킨 뒤 책을 훔쳐가 버렸다...

진상은 책이 가짜였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수집가 미노와는 손자를 시켜 책을 훔쳐냈던 거지요. 나중에 가짜와 바꿔치기 되었다고 할 속셈으로요.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실마리를 더듬어나가는 과정은 하드보일드물 스타일입니다. '철도 미스터리 투어'를 준비하면서 소개되는 열차 관련 미스터리 작품들의 목록들도 현란하고요.

그러나 그 밖에는 딱히 건질게 없던, 그닥인 작품이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아주 별로에요. 살인곰 서점에서 책을 훔처간 범인은 CCTV를 통해 누구인지 밝혀지고, 진상은 범인에게서 듣는게 전부니까요. 심지어 94식 사건의 관계자 구라나 마호코의 손자 구라노가 절도 미스터리 페어의 하이라이트인 경매회를 덥쳐서, 진상을 모든 이들에게 폭로하기까지 합니다!

무슨 회사 내부의 알력 어쩌구는 억지로 가져다 붙힌 설정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뿐, 하드보일드인지도 잘 모르겠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요약이 힘들 정도로 알맹이가 없었던 졸작입니다.

"불온한 잠" 

서점 단골 시나코씨가 11년 전, 자신 소유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던 하라다 히로카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누군가를 찾아, 유품을 전해 달라고 의뢰했다. 예전 히로키의 이웃 이와오 하쓰에 할머니가 탐문 수사 중이었던 하무라를 습격해 목을 졸랐고, 그녀가 히로카를 증오해서 위협했던게 사망 원인으로 밝혀졌다. 

히로카의 과거를 계속 추적하던 하무라는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얹혀 사는걸 반복해 왔다는 걸 알아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있던 생활 습관이었다. 그녀 어머니 이치카는 돈을 갚지 못한 채무자 집에 히로카를 보내어, 그녀가 그 집의 모든걸 독차지하여 살게 해 왔었다...

표제작, 하라다 히로카의 과거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정통 하드보일드스럽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단서를 수집하여 과거로 한 발 더 나아가고, 그러면서 숨겨져 있던 추악한 진실을 알게된다는 전개니까요. 간단해 보였던 의뢰가 범죄로 얽혀있고, 등장 인물들도 기묘하게 얽혀있는 내용도 마찬가지에요. 이거야말로 하드보일드다라는 느낌을 담뿍 전해줍니다. 

반면 수사 대상인 하라다 히로카에게 아무런 개인적 감정을 품지 않고, 의뢰 내용을 수행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죽을 뻔 하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은 상당히 독특했습니다. 복수와 같은 개인 감정 때문도 아니고, 수사 중 위험에 휘말려 살아남기 위해서도 아닌 정말로 열심히 일하는 탐정은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원래 의뢰는 '연고 없이 사망한 사람의 영혼을 달래주고 싶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고향까지 찾아갔지만, 사채 탓에 모든 사람들이 미워했다는 걸 알아냈다면 의뢰는 끝난 거에요. 히로카의 어머니 이치카가 '먼 모래'의 마담 아치요에게 돈 때문에 살해당했건, 히로카 옆집의 이와오가 사망한 히로카의 돈을 빼돌렸건, 그건 의뢰와는 무관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아치요와 이와오를 찾아갈 이유는 아니에요. 또 찾아가 봤자 이치카와 히로카의 돈이 둘에게로 흘러갔다는 증거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경찰 신고도 무용지물이었을테고요.

게다가 이렇게 하무라 아키라가 이야기를 끝낼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끝은 내기 위해 작가는 천재지변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토사 붕괴로 뉴타운이 휩쓸리고, 아치요와 이와오마저 실종되었다는 결말인데 작위적이고 허무하기로는 그야말로 끝판왕 격이에요. 차라리 하무라 아키라가 야치요에게 추리를 털어놓고, 원래 의뢰대로 유품을 전해주고 가는게 더 하드보일드스럽고 괜찮았을 겁니다.

하무라의 수사도 히로카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었다는게 밝혀지는 도입부는 괜찮았지만, 이후 기타노의 아내도 식칼로 하무라를 죽이려 했다던가, 히로카가 거쳐간 세 번의 거주지를 방문했고 기타노는 직접 만났음에도 마지막까지 '사채에 대해 증언을 얻지 못한다는 등 억지가 많더군요. 이치카, 히로카 모녀가 살던 오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사채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녀를 적대시 했었지요. 히로카의 정체 (사채업자)는 널리 알려져 있는게 당연했습니다. 최소한 불륜 상대로 오해받는 것 보다는 말이지요. 하루카가 시나코 씨 소유의 좁고 낡은, 거지같은 집에서 혼자 머무르다 죽음을 맞았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원칙대로였다면 채무자 이마이 집에 머물며 왕처럼 지냈어야죠. 돈도 많았을 텐데...

이렇게 독특함은 있지만, 단점들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