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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6

노인의 전쟁 - 존 스칼지 / 이수현 : 별점 2점

“맹세코 그놈을 때려눕히려고 했다니까. 월드시리즈 우승도 한번 못하고 200년이 지났으니 컵스는 마이너리그로 강등 시켜야 한다지 뭔가."

75세를 맞은 존 페리는 사랑했던 아내 캐시와 사별한 뒤, 미련을 버리고 '젊은 육체'를 준다는 우주개척연맹(CDF)에 입대했다. CDF는 외계 생명체로부터 우주 식민지를 보호하는 군대로, 외계에서 구한 최신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젊고 강화된 육체를 갖게 된 존 페리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 방위군에 복무하게 되었고,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데...

SF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있을 유명작입니다. 미국 작가 존 스칼지의 데뷔작으로, 읽은지 제법 되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75세 이상의 노인들이 입대하면 최신의 젊고 강하며 잘생긴 육체로 바꾸어준다는 설정의 참신함입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늙어가고 있는 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설득력 역시 무척 강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최전선에서 외계인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제대가 가능한 10년 뒤의 생존율이 25%에 불과하고, 두 번 다시 지구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조건이 붙지만, 어차피 더 잃을 게 없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한 도박이니까요. 아마 저도 가족에 대한 미련만 없다면 입대했을거에요.

젊은 군인으로 거듭난 존 페리가 같이 입대한 전우들과 훈련을 받는 장면도 생생합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악덕 상사 루이즈의 입담이 돋보였는데, 특히 젊었을 때 광고 문구를 썼던 존 페리와 루이즈 상사 간의 추억담 티키타카가 백미였습니다. 왜 상사들은 이렇게 입담이 좋은걸까요? 사뭇 궁금합니다.

훈련 후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외계 종족과의 전투도 흥미롭습니다. 지구인보다 앞선 과학 문명을 지녔지만 독특한 종교관으로 인해 전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콘수 종족의 설정은 이렇게 소비되기에는 아까울 정도였어요. 3부 마지막 코랄 행성 전투에서, 어떻게 코랄인들이 도약 추진한 전함의 위치를 파악해 타격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와 대응안도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고요. 콘수인이 관련 기술을 전해 주었지만 협상을 통해 기기 한 대만 전달된 것이 확인되어, 이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 전개가 기승전결이 완벽하여 몰입도를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 또한 분명합니다. 우선, 젊어져서 훈련을 받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SF 밀리터리물에 불과해져 버리고 맙니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이 과정에서 노인이었던 전생의 경험과 기억이 뭔가 역할을 해 준다면 독특함을 이어갈 수 있었을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이는 존 페리가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비현실성을 높이는 데에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한 번 죽을 뻔했지만, 그 외에는 영웅이 되기까지 탄탄대로인데,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려면 지구에서의 전생이 관련되어야 했습니다. 다른 군인들도 모두 노인이었던건 마찬가지니, 정말 독특한 경험과 기억이 있었다는 설정이었다면 좋았겠지요. 예를 들어 프로 바둑 기사라서 전략적으로 대국을 볼 줄 알았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전개도 후반부로 가면 처집니다. 여러 행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단편 에피소드처럼 나열되는 탓입니다. 게다가 사별했던 아내 캐시가 ‘제인’이라는 클론으로 되살아났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지구의 그 누구라도 클론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굳이 노인들을 징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시체를 수거해 육체를 복제하면 될 일입니다. 같은 이유로 초반부에 젊어지는 시술을 받기 직전 지병으로 사망한 존 페리의 룸메이트 디크는 왜 되살려 클론으로 만들지 않은걸까요? 그냥 존 페리의 러브라인과 해피엔딩을 위한 사족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은 흥미롭고 몰입도도 높았지만, 이후의 전개가 전형적이고 개연성에서도 아쉬움이 커서 감점합니다. 후속권이 있던데 더 읽어보지는 않을 듯 합니다.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24/01/24

외계+인 2부 (2024) - 최동훈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속에 가둬진 외계인 죄수의 탈옥을 막으려다 과거에 갇혀버린 ‘이안’(김태리)은 우여곡절 끝에 시간의 문을 열 수 있는 ‘신검’을 되찾고, ‘썬더’(김우빈)를 찾아 자신이 떠나온 미래로 돌아가려고 한다.
한편 이안을 위기의 순간마다 도와주는 ‘무륵’(류준열)은 자신의 몸속에 느껴지는 이상한 존재에 혼란을 느낀다. 그런 ‘무륵’ 속에 요괴가 있다고 의심하는 삼각산 두 신선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 소문 속 신검을 빼앗아 눈을 뜨려는 맹인 검객 ‘능파’(진선규), 신검을 차지하려는 ‘자장’(김의성)까지 ‘이안’과 ‘무륵’을 쫓기 시작한다.

현재,
탈옥한 외계인 죄수 ‘설계자’가 폭발 시킨 외계물질 ‘하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우연히 외계인을 목격한 ‘민개인’(이하늬)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모든 하바가 폭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48분,
마침내 시간의 문을 열고 무륵, 썬더, 두 신선과 함께 현재로 돌아온 이안.
외계인에 맞서 하바의 폭발을 막고 사람들을 구해야만 한다!


지난 주말 감상한 영화. 2024년 첫 극장 감상 영화네요. 1부는 넷플릭스로 감상했었는데, 당시 여러모로 바빠서 리뷰를 적지 않았었습니다.

오락 영화로서는 괜찮습니다. 긴장감을 전해주는 전개와 함께 스케일 큰 폭발과 액션이 연이어 펼쳐져서 숨 돌릴 새 없이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었거든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기차가 탈선하면서 벌어지는 파괴 장면은 정말 입이 딱 벌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덕분에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개그 요소들도 적절했고 - "이성계가 왕이 되었는가?" -, 무륵이 아니라 아인이 몸 속에 '설계자'가 들어갔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중요 내용은 요약하여 제공해주어서 1편을 기억하지 못해도 감상에 무리가 없다는 것도 좋았고요.

그러나 고려 시대 도사, 신선들이 펼치는 액션은 80~90년대 홍콩 영화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의상은 물론, 사용하는 무기와 기술들 모두 "천녀유혼" 등을 떠오르게 만들더군요. 과거로 가는게 중요했다면, 고려 시대보다는 70년대 쯤으로 넘어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작중 이하늬가 분한 민개인처럼 평범한 현대인(도사의 후손이기는 하나)이 외계인과 맞서 싸울 정도의 무예를 갖추었다면, 다른 현대인들도 가능한 사람들이 등장하게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라한 장풍 대작전"처럼).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하고 억지스러웠던 민개인 역할에 대한 설명도 되었을 테고요.
설명이 부족한건 그 외에도 많습니다. 우왕, 좌왕이 썬더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는걸 잊고 지낸 이유라던가, 무륵이 신검에 가슴이 찔리는 등의 큰 부상을 입고도 죽지 않은 이유, 진작에 외계인들이 우주선과 썬더를 확보하지 않았던 이유 (신검만 있다고 현재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오히려 이 둘 만 확보해 두었더라면 신검을 찾으려고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음) 등등등.... 5시간 가까운 시간을 할애해도 설명을 충분히 할 수 없었다면 불필요한 소재는 뺐어야 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1, 2편으로 나눌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에요. 합치면 5시간 가까이 되는 작품인데, 과연 이렇게까지 길게 끌고갈 이야기였을까요? 길게 끌고간 결말이 신검을 우주선 심장부에 던져넣는 것이었다는 마무리도 시시했습니다. 흥행을 위해서라도 1편으로 만들 수 있게끔 시나리오 단계에서 정리가 필요했었습니다.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기에, 그리고 국내에서 이런 SF 판타지 대작을 과감하게 제작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작비를 건지는건 불가능해보이지만, 모쪼록 무운을 빕니다.

2023/07/16

천국대마경 (Tengoku-Daimakyo / heavenly delusion) 시즌 1 : 별점 4점

디즈니 플러스로 감상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흔해빠진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DVD프라임 사이트에서 추천글을 읽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로도 설정과 묘사가 상당히 탄탄하며, 뼈대가 되는 타카하라 학원에 대한 설정도 참신한 부분이 많은, 잘 만들어진 SF더군요.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현재 시점의 마루와 키루코의 여행과 모험, 그리고 15년 전 타카하라 학원의 일상이 교차시키는 전개도 빼어납니다. 추리물처럼 복선과 단서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현재 시점의 떡밥들은 모두 과거 학원 이야기를 통해 밝혀지는데, 예를 들어 '히토구이'의 정체는 병으로 죽은 학원생이고, '마루'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학원생 토키오와 코나의 아들 클론 (누가 진짜인지는 불명)이며, '천국'은 아마도 타카하라 학원이라는 등이 그러합니다. 그 외의 소소한 것들 모두 학원과 현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다가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고 모든 진상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던져지는 복선과 떡밥은 모두 회수되고 있으니까요. 이런 복선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도 대단한 장점입니다. 다른 부가적인 공부, 연구가 필요하지 않다는건 요즘과 같이 복잡한 컨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분명한 미덕이라 생각합니다.

시즌 1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는 내용 중 중요한건 아이들의 정체 - 외계인으로 보이는 아스라의 모습을 보면 외계인을 통한 유전자 조작? -, 왜 마루가 클론에게 무언가를 주사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나자키 로빈이 폭주한 이유와 그 목적 정도인데 이 중에서는 이니자키 로빈에 관련된 내용들이 특히 궁금합니다. 학원생도 아니었고, 거리 고아들의 리더 정도에 불과했던 인물이 몇 년 만에 의학 기술을 깨우치고 히토구이와 사람의 접합을 시도한다는건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었거든요. 학원의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여러모로 다음 시즌이 너무 궁금해집니다. 

현재의 여행과 모험을 통해 선보이는 여러 단발성 에피소드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개그스러운 내용들은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의 작가다운 웃음을 전해주면서도, 얼마나 현재가 끔찍한지 - 이른바 '대마경' - 와 함께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성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건 제 8화입니다. 연인 호시오를 히토구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발병 부위를 잘라내가며 버텨왔지만, 결국 그녀를 마루의 힘으로 죽게 만든 우사미가 호시오의 마지막 말 - 정말 좋아해 - 을 보고 눈물을 터트리는 장면이지요. 아,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유튜브에 다양한 시청자들이 감동하는 리액션을 모아놓은 동영상도 있을 정도로요.
 

애니메이션 자체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음악도 좋고요. 다만 중간중간 몇 편에서 원화가 조금 튀고, 이상한 일본 신화를 설정에 집어넣은건 별로이기는 한데 큰 문제는 아닙니다. 최근 TV용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는데, 오랫만에 아주 재미있는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빨리 시즌 2가 나오면 좋겠네요.

2023/07/08

마션 - 앤디 위어 / 박아람 : 별점 3점

마션 - 8점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지구로부터 225,000,000km 떨어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조난을 당한 남성, 마크 와트니는 화성 탐사 계획에 참여한 식물학자로 1,000여 일 동안 아레스3 탐사선을 타고 무사히 화성에 도착한다. 예정된 탐사를 수행하던 엿새째, 예기치 못한 모래 폭풍에 휩쓸린 와트니와 일행들 사이에 교신이 끊겨버린다.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동료들은 두려움 속에 귀환하고, 모래 언덕에서 홀로 깨어난 그는 감자 몇 알과 함께 다음 탐사선이 올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이보다 더 최악의 생존기가 있을까? 하지만 이 똑똑한 과학자는 화성에 지구 작물을 심고, 물을 만들었으며 산소와 이산화탄소로 경작을 해낸다. 한편 나사 영상 담당 직원은 마크 와트니의 시체가 보일 줄 알았던 영상 기록을 통해 깨끗이 치워진 막사 근처에서 마침내 그의 생존을 확인한다. (알라딘 책소개에서 인용)

화성에 고립된 우주비행사의 눈물나는 과학적인 생존기. 출간되어 이미 시장을 휩쓴지 오래지만, 이번에 유럽으로 향하는 장거리 비행용으로 좀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찾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전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인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비교해 본다면, 정 반대, 대척점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화성에 고립된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전 지구가 힘을 합쳐 노력하는 반면,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단 한 명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러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이 훨씬 낫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페트로바선, 아스트로파지라던가 비교적 손쉽게 외계인과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는 등의 비현실적인 설징이 바탕이 된 반면, 이 작품은 상식 선에서 수용 가능한 수준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위기가 찾아오는 극적인 전개도 이 작품이 우위에 있고요. 무엇보다도 엄청 재미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라는 첫 문장부터 독자를 강하게 사로잡아요. 이어지는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 와트니의 생존을 위한 분투도 엄청 흥미롭고요. <<로빈슨 크루소>> 등과 다름없는 순수한 모험물인데, 고전적인 생존 모험물과는 다르게 치밀한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론의 전문성이 높아서 거의 하드 SF에 가까울 정도인데, 이를 이렇게 재미나게 그려내는건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됩니다.
또 마크 와트니 시점과 NASA에서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시점을 번갈아 가며 전개해 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어느 한 쪽은 모르지만 다른 한 쪽은 알고 있는 위기 상황 - 예를 들어 NASA에서 관측한 모래 폭풍 - 을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어 줄 뿐 아니라, 마크라는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마지막 마크 구조 순간의 감동이 극대화 되기 때문입니다.
유머 넘치는 마크 위트니 캐릭터도 아주 좋습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조차 유머로 대처하는 강한 멘탈에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어요. 암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죠. 갖추고 있는 여러가지 지식과 기술도 적절했습니다. 식물학자 겸 기계공학자로 '식물을 갖고 노는 전담 수리공'이라고 언급되는데, 덕분에 생존에 핵심이었던 화성 토양에서 감자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거든요. 각종 장비 수리 및 개조를 하는 모습, 심지어 '육분의'까지 자체 제작하여 화성에서 이동할 때 위치를 측정까지 하는걸 보면 단순한 공학자 수준은 아닌거 같아요. 하긴, NASA의 우주 비행사니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하지만 구조 이후의 후일담이 없다는건 다소 아쉬웠습니다. 간단하게나마 마크 와트니의 구조 이후의 모습을 그려주었더라면 아주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발표 당시의 인기가 수긍이 가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할게 없어서 동료 우주 비행사 짐을 뒤져 크리스티의 전자책을 읽어본다는 디테일이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무척 반가왔습니다. <<백주의 악마>> 속 범인을 아예, 터무니없이 잘못 짚기는 했습니다만.

2023/06/27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초창기 단편집. 1990년에 발표되었던 <<성>>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 발표되었기에, 초창기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BS 망가 야화에서 소개되었을 정도니까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방주가 오던 날
  2. 난파선
  3. 진수의 숲
  4.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5. 늪의 아이
  6. 유사(流砂)
  7. 쿠로이시지마(黑石島) 살인사건
  8. 성(城)
  9. 파란 무리
  10. 그림자의 거리
이 중 앞의 두 편은 아주 짤막한 가벼운 개그물로 언급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크리쳐 호러(?)물 <<진수의 숲>>, <<늪의 아이들>>은 <<자선단편집>>에 수록되었던 작품이고요 (궁금하신 분들은 이전 리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 작품들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자신이 외계인이며 UFO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고 말하는 동급생 후리오와 어울리다가, 약간의 차원 뒤틀림(?)을 경험한다는 내용.
작가의 말에 따르면, 폴 사이먼의 노래 (Me and Julio Down by the Schoolyard)에서 제목을 따 와 만들었다고 합니다. 내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가사를 잠깐 찾아보니 '훌리오와 내가 교정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는데 엄마가 뭔가 법에 위배되는걸 봤고, 그래서 나와 훌리오를 잡으면 구치소에 집어 넣는다'는 내용이더라고요. 정확한 의미는 영 알 수가 없는데 (폴 사이먼 본인도 엄마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변했답니다.), 이런 노래의 모호함이 만화의 결말과 일치한다는게 재미있습니다. 후리오가 UFO를 타고 갔는지, 그냥 버스를 타고 평범하게 떠났는지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여운을 남기니까요.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일상 속에서 약간의 뒤틀림을 보여주는 일상계 SF물, 아니면 평범하지만 조금은 독특한 성장기로 볼 수 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SF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폴 사이먼, 그리고 모로호시 다이지로 스타일에 가까우니까요. 흥겨운 노래하고도 잘 어울리고요. 기껏 상상력을 발휘했는데 그냥 버스타고 이사간거라면 너무 슬프잖아요.
대표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유사>>
주인공과 친구들은 사막과 엄청난 유사 폭포 탓에 감옥과 다름없는, 미래가 없는 별 볼일없는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해서 그들을 막아서는데....

SF의 탈을 쓰고 있기는 하나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하고 위기에는 전혀 대응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젊은 청춘의 뒷다리만 잡는 기성 세대를 풍자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1980년대는 모로호시 다이지로도 기성세대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나이라 그릴 수 있었겠지요? 사력을 다하는 청춘을 기성 세대가 뒤쫓는 결말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는 낡은 소재와 전개라는건 단점입니다. 불합리한 현실을 탈출하려고 애쓰는 청춘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예를 들어, 이런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불법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총몽 (알리타)>>이 되는거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쿠로이시지마 살인사건>>
외딴 섬에서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어 형사가 파견되었고, 섬 사람 누군가의 딸로 여겨져 장례식이 열렸다. 그런데 장례식 와중에, 그 딸이 살아있다는게 밝혀진다.
다른 사람이 피해자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녀 역시 살아있었고, 바닷물의 영향으로 사체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형사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며 반 쯤은 협박하듯이 부탁하는데....


우리나라 모 섬에서 일어났던 범죄가 떠오르는 작품.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흔합니다.
그런데 전형적인 모로호시 다이지로 그림체인데다가, 전개 방식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호러물스타일이라서 기묘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개그 콘서트 꽁트를 정극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하는 느낌이랄까요? <<유사>>처럼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성 세대에 대한 풍자로 볼 수도 있을테고요.
흔한 이야기인데 여러모로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기묘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성>>
대기업에 서류 하나를 전해주러 왔던 사원의 출장은 서류에 관계된 회사간의 복잡한 정리, 대기업의 인사 이동 등으로 장기화되고 말았다. 팩스로 지시를 기다리는 자택 대기 명령을 받은 뒤,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죽었을 때 지시가 전달되었다. 일반 사원들은 1층 이상 올라가보는게 꿈이라는 본사 건물 15층으로 오라는 지시였다....

대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드라마.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했습니다. 결말도 다소 뜬금없었고요. 왜 마지막에 15층으로 부른 걸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란 무리>>
장기 매매가 일반화된 미래. 하층민은 장기를 팔고 인공 장기로 교체하여 삶을 이어나간다. 판매된 장기는 하나로 모아져 부자 노인의 뇌를 이식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장기를 팔아 인공 장기로 교체하는건 단순한 빈민 대책으로 무의미한 시술이었고, 이 모든건 권력자들이 권력을 쥐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80년대 유행했던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SF물.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이야기였습니다. 기묘한 세포 덩어리로 피해자들을 변질시킨다는 결말에서 모로호시 다이지로 특유의 이형 생태 결합을 선보이기는 하는데, 장기 매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하더군요.  <<소일런트 그린>>정도의 충격적인 반전도 아니었고요. 지금 시점에서 다시 언급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자의 도시>>
한 초등학생이 모르는 아이에게 이끌려 낯선 골목길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과 건물을 잡아먹었다. 꿈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잡아먹혔던 아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잡아먹힌 학원도 불에 타 버렸다.
괴물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걸 깨달은 아이는 괴물에게 모델건을 쏘고 기절했다. 그리고 정신이 든 뒤, 싫은 일이 생길 때 마다 모르는 골목길로 항하게 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영향을 주었다는걸로 유명한 작품. 아래의 장면 덕분일겁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뻔했습니다. 이세계에서 경험한 일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많으니까요. <<앨리스 죽이기>>가 떠오르네요. 때문에 지금 읽기에는 진부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화로는 작품의 분위기를 잘 시각화하지 못하고 있고요.

하지만 초등학생이 주인공이고 진짜 악당 - 싫어하는걸 없애버리는데 주저함이 없으니 - 이라는 점은 특이했습니다. 이 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3/27

프로젝트 헤일메리 - 앤디 위어 / 강동혁 : 별점 3점

프로젝트 헤일메리 - 6점
앤디 위어 지음, 강동혁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양의 에너지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페트로바선이 에너지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태양 에너지를 흡수하는 외계 생명체 아스트로파지가 대량 증식하여 이산화탄소를 찾아 금성으로 향하며 에너지를 내뿜는게 페트로바선의 정체였다. 아스트로파지의 증식과 감염으로 모든 항성들이 10% 정도의 에너지를 잃었지만 타우세티만 건재하다는걸 알아낸 페트로바 대책위원회는, 그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우주선 헤일메리를 건조했다.

'나'는 기억을 잃고 나는 기억을 잃고 우주선 안에서 홀로 깨어났다. 동료 두 명은 수면 여행 중 사망한 상태였다. 서서히 기억을 되찾은 '나'는, 내가 지구의 운명을 걸고 타우세티로 향한 헤일메리호의 유일한 생존자 라일랜드 그레이스 박사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타우세티에서, 같은 목적으로 이 별을 찾아온 외계인 '로키'를 만나게 되는데...

"마션"의 원작자가 쓴 장편 SF 소설입니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용감한 전문직 종사자가 목숨을 건다는 내용의 작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일단 "아마게돈"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날아오는 운석을 파괴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태양 에너지를 빼앗고, 이산화탄소를 향해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증식하는 아스트로파지의 생태에 대한 상세한 설정이 특히 돋보입니다. 뒤 이은,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위해 전 지구의 의지를 모으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대단합니다.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아스트로파지에 대해 연구하여 그 생태의 비밀을 알아내는 과정,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일종의 반물질 에너지원같은 아스트로파지를 우주선 연료로 사용하려는 모습 모두 적절한 과학적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굉장한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전혀 개념은 다르지만, 엄청난 효율의 에너지원이기도 한 아스트로파지는 '시즈마 드라이브'가 연상되더군요.

타우세티에 도착한 후, '항성 40 에리다니'에서 온 외계인 로키와 만나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고, 목숨을 건 모험 끝에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는 '타우메바'를 채집하는 장면도 박진감 넘치고 흥미롭습니다. 탄탄한 과학적 배경을 바탕에 둔 건 마찬가지고요. 아스트로파지의 천적 타우메바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진화' 관련 담론이 인상적이었어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진화한 로키와 그레이스가 어떻게 같은 주파수 소리를 듣는지에서 시작해서, "왜 같은 속도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는데 답이 아주 그럴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스의 가설은 각자 행성을 확실히 지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능을 갖춘 뒤 진화를 멈췄다는 겁니다. 그 기준은 '중력'이고요. 중력이 높아지면 땅과 접촉하는 시간이 늘어나므로, 움직임이 더 빨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과학자 역할의 그레이스, 그리고 뭐든지 만들어내는 엔지니어 로키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는 팀 구성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서로의 언어를 습득하고 진짜 친구가 된 뒤, 그레이스가 죽을걸 알면서도 로키를 구해주러 가는 장면은 뭉클하기까지 했습니다. "가고 있어 친구. 기다려"는 정말 명대사였어요.

전편에 흐르고 있는 유머도 남다릅니다. 프로젝트의 어원부터가 미식축구 등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역전을 노리고 시도하는 성공률이 매우 낮은 작전을 일컫고, 그레이스도 자기 부정 등이 포함된 기묘한 유머 감각으로 상황을 그려낼 뿐더러, 상황 자체가 유머스럽게 그려진게 많거든요. 목숨을 건 임무를 거부했던 그레이스를 속여서 강제로 우주선에 태운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총책임자 에바의 행동이 대표적입니다. 충격적인 반전이기도 한데 솔직히 너무 웃겼습니다.

그러나 편의적인 전개가 너무 많기는 합니다. 그레이스와 로키가 만나고, 서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한다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아이큐가 80이 넘는다는 돌고래와는 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건지 설명이 안됩니다.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만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아스트로파지를 없애는 방법을 함께 찾을 정도로 서로의 언어에 숙달하게 되었다는건 억지입니다. 외계인이 언어 체계를 제외하면, 사고 방식 등이 모두 인류와 유사하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편의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타우메바의 진화가 쉽게 이루어지는 등 비교적 해결책이 쉽게 도출된다던가, 진화한 타우메바가 제노나이트를 뚫고나와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는 위기에서 타우메바의 유일한 천적(?)인 질소를 우주 비행사 중 한 명이었던 두보이스가 자살용으로 헤일메리에 실어놓았었다는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과학적인 설명도 가득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까지 있어서 무척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별점 3점은 충분하지요. 베스트셀러 작가는 확실히 다르네요.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8/06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마에카와 도모히로 / 이홍이 : 별점 2점

FoP 소설 : 산책하는 침략자 - 4점
마에카와 도모히로 지음, 이홍이 옮김, 최재훈 그래픽/알마

축제에서 금붕어를 손에 넣은 할머니가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본인 몸도 난자하여 자살했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손녀 아키라는 심한 충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사건 취재 차 마을을 찾은 르포 기자 사쿠라이는 자기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고교생 아마노를 만났고, 취재를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 한편, 나루미는 남편 신지가 축제에 갔다가 금붕어 하나를 가진 채 병원에 입원한 뒤, 신지가 이전 남편과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걸 알아챘다.

사람들로부터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인 아마노와 아키라가 만나서 지구 정복을 계획하고, 이를 막기 위해 사쿠라이는 나루미, 신지와 함께 도망친다. 신지는 나루미로부터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게 되는데...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SF 소설로 별다른 정보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입부는 정말 대박입니다. 정확하게는 할머니가 축제에서 낚은 금붕어를 집에서 '회'라고 하면서 산 채로 잡아 먹고, 그 다음날 아들 부부를 살해하고 자살하는 장면까지요. 굉장히 짧은 분량 속에서 공포심과 흥미를 모두 불러 일으킨 덕분입니다. 

중반부까지도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이른바 '외계인'들이 선보이는 독특한 능력 덕입니다. 외계인들은 대화하는 상대방이 특정한 단어의 이미지를 머릿 속에 떠올리면, 그걸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빼앗긴 사람은 그게 뭔지를 잊어 버리게 되고요. '개념'을 수집한다는 목적을 위해서인데, 이를 통해서 여러가지 해프닝이 벌어지게 됩니다. 나루미의 동생 아스미로부터 신지가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아 온 뒤, 아스미가 가족에 대해 모든걸 잊고 아빠를 변태로 생각해서 경찰에 신고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완전 별로였습니다. 외계인의 지구 침략 계획을 막기 위한 르포 기자 사쿠라이의 노력이 그려지는데, 하는건 외계인 아마노가 외계인 아카리를 만난 뒤 도망친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하는 일들 거의 모두가 즉흥적이라 치밀한 느낌은 전무합니다.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제대로 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신지를 다른 두 외계인과 못 만나도록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외계인들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 처럼요.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인 나루미와 신지 이야기는 잔잔한 사랑 이야기일 뿐이라 지루합니다. 사랑 이야기가 나쁜건 아닙니다. 저도 아주 좋아하고요. 하지만 나루미에게서 '사랑' 이라는 개념을 빼앗은 신지가 새롭게 태어나서, 나루미를 위해 살아갈 결심을 하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황당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잔혹한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결말이 "사랑이 지구를 구한다"라니, 독서에 들인 시간이 아까울 정도입니다.

핵심 설정인 "개념 빼앗기"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앞서 아스미는 "가족" 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뒤, 가족을 아예 기억하지 못했지요. 의사는 아예 폐인이 되어 버렸고요. 하지만 신지에 대한 "사랑"을 빼앗긴 나루미는 멀쩡한 채로 신지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건 전개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을 바꾼, 편의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볼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결론적으로는 수준 이하였습니다. 차라리 "기생수"처럼 개념을 빼앗는 외계인들의 냉혹한 행각을 자세하게 보여주는 전개가 더 나았을거에요. 선한 마음을 가진 신지와 개념 빼앗기에 골몰하는 아마노, 아키라의 행각을 대비시키면서요. "개념" 빼앗기는 "죠죠" 시리즈에 등장했던 스탠드 능력과 흡사한만큼, "죠죠", 혹은 "기억파단자"처럼 두뇌 배틀처럼 그렸어도 괜찮았을 것 같고요.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메시지 전달이 핵심인 현재의 작품에는 전혀 맞지 않는 방향이었겠지만, 최소한 지금보다야 재미는 있었을 겁니다.

2020/06/12

Q.E.D Iff 증명종료 6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6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만 읽던 와중에 확인해 보니, 본가인 Q.E.D도 2부격인 iff가 어느새 9권까지 나왔네요. 

이번 권은 한 편의 일상계와 한 편의 강력 범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Q.E.D 전통의 구성이지요. 보통 한 권에 4편 정도의 이야기를 수록하여 빠르게 진행하는 CMB와는 다르게, 한 개의 이야기를 보다 긴 호흡으로 디테일하게 전달해 주는게 QED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두 편 모두 이렇게 길게 늘일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디테일한 이야기 전개보다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더 강해요. 특히 첫 번째 이야기인 "지구에 떨어졌다 말하는 남자"가 심합니다. 미국에서 마약 조직간 항쟁에 휩싸인 와타루의 이야기와 자신이 '외계인' 이라고 주장하는 사이먼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었던 탓입니다. 사이먼이 토마와 30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웜홀을 통해 지구로 이동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었어요. 이보다 낫기는 했지만 "추락" 역시 여러모로 썩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에나리와 그 일당이 대학에 진학해서 여전히 탐정 동호회 놀이를 하고 있다는 등 오랜 팬으로서 반길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추리적으로는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음 권에서는 분발해 주면 좋겠네요.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지구에 떨어졌다 말하는 남자"

1986년, 모리타 리사는 미국에서 도미니코를 만나 결혼하지만, 이혼 후 양육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었다.
10년 후, 리사의 아들 와타루는 가난한 환경 때문에 마약 판매 조직의 일을 하게 되었지만, 4년 뒤인 14살 때 마약 조직간 항쟁에 휘말려 총상을 입고 버려졌다.
현재, 대학에서 미스터리 연구회를 만든 에나리와 홈즈, 멀더는 수수께끼를 찾다가 멀더의 할머니에게 찾아온 이상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금발의 남자 사이먼이 스스로 우주인이라고 말하며 할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가족은 사이먼이 의절한 고모인 리사의 아들 와타루라고 생각하고 모발을 습득하여 DNA 검사를 진행하는데...

서두에 나오는 미국에서의 잔혹한 갱단간 싸움이 멀더 모리타의 가족과 관련된 일상계로 이어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핵심 수수께끼는 사이먼의 정체입니다. 우선, 사이먼이 와타루라면 외계인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산이 탐난다면 더더욱 본인이 와타루라는걸 밝히는게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왜 외계인이라고 주장할까요? 별다른 사기를 치거나, 할머니 돈을 훔쳐 달아나는 것도 아니니 그 정체는 궁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DNA 검사 결과를 통해 할머니와 사이먼은 조손 祖孫 관계라는게 드러나서 사이먼은 와타루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리사와 와타루는 모두 사망했다는게 확인되었다고 통보되어 사이먼의 정체는 미궁에 빠지고 말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이먼은 와타루가 맞습니다. 토마의 추리에 따르면 리사와 와타루가 죽었다고 알려진건 갱단 조직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나치게 묵직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별로 와 닿지도 않네요. 비슷한 주제로 만화를 거의 90여권 가까이 (CMB 포함) 발표하다 보니, 일본 내에서의 이야기로는 이제 한계를 느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미국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일본 일상계 안에 가져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그리고 이 진상이 와타루가 '외계인'을 자칭할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는 여전합니다. 딸과 의절하고 원조를 거절하여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게 만든 할머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게 목적이었다면, '외계인' 이라는 수상쩍은 주장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체에 대한 의심만 불러오니까요. 수상쩍은 남자를 집에 들인 것도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부탁 때문이지, 외계인이라는 사이먼의 주장은 문제만 일으켰을 뿐이에요. 

또 에나리와 그 일당(?) 들, 토마와 가나의 활약도 거의 없고 주어진 정보에 따른 안락의자 탐정 역할만 마지막에 수행하기 때문에 이야기도 딱히 재미있지 않았어요. 현학적인 재미를 전해주는 부분도 '외계인' 사이먼과 웜홀 등에 대해 논하는게 전부로 이야기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없어서 영 별로였습니다.

이 보다는 차라리 백화점에서 사이먼이 미행을 따돌리고 사라진 방법이라던가, 열쇠가 없는데 집에 들어온 방법에 대한 일상계다운 추리가 더 볼 만 했습니다. 특히 가족 중 유일하게 집에 돌아오지 못한 '리사'를 위해, 그녀가 열쇠를 숨겨두던 곳에 열쇠를 여전히 두고 있었다는 건, 트릭으로서도 괜찮지만 가족 간의 정을 드러내는데 꽤 효과적이라 마음에 드네요.

그래도 긴 이야기에서 건질게 이 정도라면 많이 부족하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평균 이하의 지루한 이야기였습니다.

"추락"

TV 인기 드라마 프로듀서인 에코다 와타루가 빌딩에서 떨어져 죽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옥상에서 탈출하려다가 떨어져 죽은 사고사로 처리되었지만, 한 가지 의문을 남겼다. 왜 그는 직접 탈출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것일까?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문이 위에서부터 차례로 잠겨서 아무도 올라갈 수 없었던 상황을 풀어낸 트릭은 괜찮았습니다. 경비가 위에서부터 문을 잠그고 순찰하면서 내려온다는 시간차를 이용한 것이지요. 현실적이면서도 설득력 높아서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이 트릭 외에는 모든 부분, 진상과 동기, 진범의 정체 등 모든게 다 엉망이었습니다. 일단 사건부터 보면, 범인이 똑똑해보이지만 문제가 너무 많아요. 에코다의 죽음을 사고사로 위장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은 의문이 남게 되니까요. 특히 탈출하기 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건 바보같은 경찰도 바로 눈치챌 정도로 이상했으며, 토마의 현장 조사를 통해 에코다 와타루가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옥상 난간의 콘크리트 조각의 위치는 왼손 쪽이라는게 밝혀지는 것도 범인이 들인 공에 비하면 많이 어설펐습니다.

에코다를 아래쪽 창문으로 들어오라고 유도했다는 상황도 영 이해가 되지 않아요. 조금 기다린다고 얼어 죽을 날씨도 아닌데 건물 옥상에서 아래 층 창문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한다? 저는 죽어도 못합니다. 차라리 창문으로 들어오라는 범인에게 경비를 불러달라고 하는게 현실적이잖아요? 

수갑으로 묶여있던 여배우 츠루미 안나가 진범이라는 것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1층에 있던 각본가 온다가 아무도 올라가지 않았다는걸 증명했다는게 중요한 근거로 사용되는데, 온다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건 증명되지 않았으니까요.
Q.E.D에서 자주 써 먹는 인기 소재인 '모든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상황' 에서 증언만으로 진범을 찾아내는 이야기인데, 이 작품에서는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온다와 신인 여배우 츠무기, 미술 책임자 가즈야가 입을 맞추면 츠루미의 이상한 계획보다는 더 그럴싸한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때문에 온다보다는 1층에 아르바이트를 왔던 가나가 있었다고 설명하는게 더 바람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나의 범행 동기도 설득력이 낮아요. 에코다가 미성년 매춘을 했다는걸 알고, 그의 스캔들 때문에 중요한 배역을 놓칠까봐 살해했다는데 그가 죽었다고 스캔들이 표면화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프로듀서의 사망이 스캔들로 해고되는 것과 비교했을 때 문제가 덜하리라는 보장 역시 없고요. 에코다가 스캔들로 해고될 경우, 각본가가 미는 배우 츠무기에게 배역을 빼앗길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에코다가 사망한 경우도 마찬가지니 구태여 모험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지어 어느정도 성과가 있는 여배우라고 묘사되는 안나가 직접 범행을 저지른다?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무리봐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억지투성이 이야기였습니다. 이 실망감을 다음 권에서는 보란 듯이 만회해주면 좋겠네요.

2020/02/24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5)

쿠미카의 미각 1 - 6점
아키히로 오노나카 지음, 유유리 옮김/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식사가 필요없는 절약 근성 노력가 외계인 쿠미카가 지구에서 일하면서 서서히 음식에 길들여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쿠미카가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감각을 느끼고,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전개는 일견 독특해 보이지만 반대로 뒤집었을 뿐, 이세계에서 이종족에게 이쪽 요리를 대접한다는 판타지와 별로 다르지는 않습니다. 새롭고 맛있는 요리를 먹고 감탄하며 놀라는 묘사도 동일하고요. 이야기도 새로운 음식에 놀란다는 경험이 반복될 뿐입니다.

요리 관련 이야기보다는 한 푼이라도 아껴 모성에 돈을 보내야 하는 쿠미카의 설정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구입해서 요리를 하게 될 때의 감정 묘사나, 처음으로 여자 외계인들끼리 파자마 파티를 할 때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는 모습들은 아주 귀여웠거든요. 억지로 음식 이야기를 집어넣지 말고 이런 이야기로 그려나가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절박한 상황에서 열심히 일하며, 다행히 호흡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쿠미카에게 음식의 맛을 알게 해 그녀에게 불필요한 돈을 쓰게 만드는 치히로는 정말이지 사악한 악당이라 생각됩니다. 천벌 받을 놈 같으니라고.

[고화질] 마감의 미식가 - 6점
츠치야마 시게루/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작년에 유명을 달리한 만화가 츠치야마 시게루의 단권 완결 일상계 음식 만화입니다. 마감과 작가들과의 교섭, 접대에 시달리는 편집자 시노하라 카오루 (38)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그날 그날을 마감하기 위해 먹는 요리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과 구성을 보면 "고독한 미식가" 시리즈의 인기에 편승한 기획물로 보이네요.

그래도 이 작품만의 특징도 확실합니다. 주인공이 편집 업무를 하면서 만나는 작가들과의 에피소드가 많은데, 그러한 만남을 어떻게든 음식과 이어가며 드라마를 만드는 노력이 돋보이거든요. 약간이나마 기승전결이 있다는 점에서는 "고독한 미식가" 보다는 나은 측면이 있어요. 츠치야마 시게루의 연륜이 돋보이는 그림도 나쁘지 않고요.

등장하는 음식들은, 초반에는 주로 그날 자기 전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들입니다. 말 그대로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우리말로는 '야식'에 가까운 음식들로 모두 간편식에 가깝죠. 컵우동과 집에서 남은 카레를 섞어 만드는 카레 우동, 길거리 포장마차 라면, 편의점 오뎅 등이 그러하죠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기 전이 아니라 그날 업무를 마감한 뒤 먹는 음식으로 바뀝니다. 아마 간단한 야식만으로는 이야기를 끌고나가기 힘들었던 탓이겠지요. 그래서 제대로 된 식당에서 제대로 된 음식들을 먹게 됩니다. 선술집이나 규동집 등 좀 대충 먹는 음식도 있지만 중화요리집의 교자와 라멘이라던가 기리탄포 나베, 굴 나베 등 갖춰진 음식도 많아요.

여튼,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후속권이 이어지지는 않은게 아쉬울 뿐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주문 배달의 왕자님 1 - 6점
타카세 시호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배달 음식'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배달 음식과는 다릅니다. 주로 일본 각 지역 유명 맛집 대표 요리를 배달용으로 가공한 것들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소재도 독특하지만 주인공인 이이다 역시 범상치 않습니다. 오타쿠 엔지니어로 사교성이 부족하고 자기 중심적인 성격으로 묘사되거든요. 배달음식으로 혼밥, 혼술을 즐기고 먹은걸 SNS에 '왕자님'이라는 닉네임으로 올리는게 유일한 취미고요. 그야말로 배달 음식과 딱 맞는 인물입니다.
야근이 잦고, 이런저런 독특한 인물들이 넘쳐나는 IT 업계의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소소하게 이이다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들도 좋았고요. 덕분에 극적인 드라마가 없더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이런게 오히려 현실적이겠죠. 평범한 회사원 인생에 뭐 그리 특별한 일이 있겠습니까.

등장하는 배달 음식들은 일본에 실존하는 음식들로, 상당히 흥미로운 음식들이 많습니다. 완성된 음식 외에도 재료 배달에 가까운 음식도 많은데, 이이다의 요리 솜씨가 제법 괜찮아서 항상 그럴듯한 요리들이 태어납니다. 완성된 음식들도 나름의 어레인지로 이런저런 변화를 선사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적당한 재미에 그림도 좋고, 음식과 요리들도 만족스럽습니다. 배달 요리도 한계가 있는 만큼, 적당한 시점에 완결을 내 준 것도 마음에 든 점이에요. 비슷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우리나라 특유의 '편의점 레시피'를 만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4)

2020/01/31

라멘이 과학이라면 - 가와구치 도모카즈 / 하진수 : 별점 3점

라멘이 과학이라면 - 6점
가와구치 도모카즈 지음, 하진수 옮김/부키

라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그 실체를 밝혀나가는 책입니다. 음식 관련 과학, 교양서라고 할 수 있죠. 이 책이 풀어낸 라멘에 관련된 내용은 크게 아래의 아홉 가지 항목입니다.

  • 1장_무엇이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가?
  • 2장_해장 라멘이 더 맛있는 이유
  • 3장_쫄깃쫄깃 면발의 과학
  • 4장_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라멘의 맛
  • 5장_화학조미료는 라멘의 친구인가, 적인가
  • 6장_기름과 건조 기술의 결정체, 인스턴트 라멘
  • 7장_라멘 명가의 맛을 과학으로 재현하다
  • 8장_라멘은 먹는 소리도 맛있다
  • 9장_사람들이 그 가게 앞에만 줄을 서는 이유

항목별로 간단히 살펴보자면 우선, 첫 번째 장에서는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감칠맛'을 꼽고 있으며, 이 감칠맛의 정체에 대해 상세히 분석해 줍니다. 일본의 맛국물은 보통 다시마와 가쓰오부시를 함께 사용하는데, 그래야 더욱 맛있어진다는군요. 이는 글루탐산의 단독 사용보다 이노신산과 조합할 경우 감칠맛이 7~8배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가쓰오부시나 다시마의 향 성분은 물에 녹아나서 라멘의 경우, 국물맛이 농후해진다고 하네요.

두 번째 장에서는 음주 후 숙취 해소를 위해 라멘이 땡기는 이유를 탐구합니다. 이 역시 과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술을 마시면 당을 만드는 원료가 부족해져서 혈당이 떨어지는 탓에 당이 필요해져서 단 것이나 탄수화물을 먹고 싶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알코올이 뇌 신경에 작용하여 공복감을 증가시키기 때문이고요. 과음 후 단 것을 먹으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행복한 기분이 되는데, 술 먹고 라면을 먹으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군요.
당연히 술을 먹고 라멘을 먹으면 몸에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전문가가 추천하는 술 마시고 좋은 음식은 스포츠 음료에요. 이유는 당과 소금, 염분 모두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과즙 100% 오렌지 쥬스도 좋다는군요. 수분 섭취에 칼륨도 많아서 과하게 섭취한 나트륨을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으며, 지방과 당 분해를 촉진하는 비타민 B1, B2도 풍부하니까요. 앞으로 저도 음주 후에는 과즙 쥬스를 먹어봐야겠습니다.

세 번째 장은 제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라멘은 자가 제면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소바의 경우 풍미가 바로 날아가므로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만들며, 공장에서 만들 경우 배송 중 향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가게에서 직접 면을 만들어야 하지만 라면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게 이유입니다. 면의 꼬불꼬불한 정도가 국물 맛이 배는걸 좌우한다는 것도 결국은 호불호에 불과해 보이고요. 게다가 물과 밀가루가 완전하게 섞이는 수화 작용에 시간이 걸려서 충분한 숙성이 필요하다는 것도 자가 제면의 약점이에요. 공장에서 제대로 만든 면을 사용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맛의 달인" 등에서 '간수'라는 말로 소개되었던 '간스이'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이 책에 따르면 간스이는 라멘의 맛에 큰 영향을 주지만 단지 취향일 뿐이니, 가게와 손님들이 알아서 고르면 된다고 하네요.
이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건 면발 특성에 따른 팁입니다. 라멘을 밥과 함께 먹으려면 면은 부드럽게 삶아달라고 해야 한다네요. 그래야 간스이가 국물에 섞여 들지 않고 면도 퍼지지 않거든요. 면의 삶은 정도가 꼬들꼬들하면 면이 국물을 빨아들이고 국물에는 간스이 맛이 섞이게 됩니다.

네 번째 장은 라멘의 맛에 온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5미(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 중 짠맛과 신맛은 온도에 따른 변화가 없지만 단맛, 쓴맛, 감칠맛은 온도에 따라 변화하므로 5미가 조합된 요리는 온도에 따라 맛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짠맛과 감칠맛의 밸런스가 온도에 따라 달라져서 제대로 맛을 느끼려면 적절한 온도로 먹어야 한답니다.

다섯 번째 장은 화학 조미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론은 화학 조미료를 적당히 써야 맛있는 라멘이 된다는 겁니다. 화학조미료 사용 여부보다 식재료를 듬뿍 사용한 국물인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는 팁도 좋았고요. 이유는 효모 추출물이나 단백가수분해물과 같은 첨가물은 '식품'으로 인정되어 화학조미료로 치지 않는데, 이런걸 많이 사용하는 가게들이 많기 때문이라네요.
또 라멘은 부족한 영양소가 있으니 제대로 만든 라멘에 무언가를 조금 더하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쇼유 라멘을 먹은 후에 채소주스를, 그리고 돈코츠 라멘의 영양가는 볶은 깨 간 것을 더하는 것만으로 훨씬 높아지고 쇼유 라멘에는 구운 김을 올리면 좋다, 미네랄을 보충하고 싶다면 미네랄이 풍부한 미소 된장으로 만든 미소 라멘이나 탄탄멘을 주문하라는 식입니다.

여섯 번째 장은 인스턴트 라멘이 정말 몸에 좋지 않은지?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지금의 인스턴트 라멘은 몸에 해롭지 않습니다. 염분이 많다고는 하나 국물을 남기면 되고, 기름 열화로 식중독을 일으켰던건 다 옛날 이야기이며 용기의 환경 호르몬 역시 위험성은 오해에 불과했다는 내용이거든요. 이 정도면 앞으로 컵라면을 먹을 때 건강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너무 자주 먹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초인 로크"로 유명한 만화가 히지리 유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구루구루박X"의 외계인들이 컵라면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로 "사람이 먹는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는 작가의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에요.

일곱 번째 장은 유명 가게, 노포의 라멘을 인스턴트로 만들어 제공하는 회사들의 비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탐방 취재 스타일의 리포트입니다. 사실 이런저런 엑기스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최대한 비슷한 맛을 찾아내는게 전부라 딱히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라면의 염분 측정 결과가 더 재미있었어요. 돈코츠 라멘의 염분은 1.48퍼센트, 미소 라멘의 염분은 1.35퍼센트인데 소유 라멘의 염분은 1.58퍼센트로 소유 라멘이 가장 높았거든요. 세가지 라멘 중 가장 감칠맛이 적은게 소유 라멘이라는 점에서 맛을 증폭시키는 감칠맛의 효과로 염도를 낮출 수 있다는건 사실이라는 뜻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도쿄의 새까만 소바 국물과 간사이의 투명한 소바 국물을 비교할 때, 간사이 소바 국물의 염분이 더 높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먹을 때 주로 표현되는 의성어 "즈루즈루"에 대해 탐구합니다. 뭘 이런것까지 조사하나 싶었는데, AI까지 동원해서 의성어의 느낌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데에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후루룩"과의 비교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에요. 이 AI를 가지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 아주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비슷한 툴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 장은 사람들이 라멘 가게에 줄을 서는 이유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약과 동일하게 뇌의 보상 회로가 작동하기 때문이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뇌에서 베타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모르핀이나 헤로인의 수용체이자 신경 전달 물질인 오피오이드에 작용하게 되거든요. 그러나 실제 마약과는 다르게 보상 회로 자극은 지극히 짧습니다. 그리고 실험 결과, 먹기 전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하네요. 즉 '기다리는 동안', '대기하는 동안' 음식을 곧 먹을거라는 생각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포방터 돈가스집에 줄을 서서 먹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이슈들이 있는데, 실제 줄을 서는 과정에서 이런 뇌내 보상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장기간 줄을 서는 것도 한 번쯤은 해봄직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라멘과 관련된 이런저런 내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재미나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라멘 그 자체보다는 주변 정보, 지식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많아서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난다는건 조금 아쉽습니다만, 재미와 교양 양쪽 측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책이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본 라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19/12/16

2001+5 Space Fantasia Anthology - 호시노 유키노부 / 김완 : 별점 1.5점

2001+5 Space Fantasia Anthology - 4점
호시노 유키노부 글 그림, 김완 옮김/애니북스

좋아하는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집입니다. "요녀전설 1"은 비록 큰 실망을 안겨 주었지만, 이 책은 항상 평균 이상의 작품을 선보였던 SF 단편집이라 기대가 컸습니다. 대걸작 "2001"의 후속작같은 느낌의 제목도 큰 기대에 한 몫 단단히 했고요.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실망입니다. 특히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Starship Adventure" 탓이 가장 큽니다. 제대로 완결을 맺지 못하고 중도에 연재가 중단된 미완성 작품이거든요. 연재 잡지가 폐간되었다는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만, 작가 후기에서라도 결말에 대해 전해주지 못하는 완벽한 미완성 작품을 돈을 받고 판다는건 좀 비양심적인 행위였다 생각합니다. 죽은 작가도 아니고, 엄연히 살아있다면 결말은 정리해서 알려줬어야죠!
그렇다고 미완성인 이야기를 억지로 단행본화할 만큼 멋지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호시노 유키노부의 장기인 Hard SF가 아닌 스페이스 오페라같은 가벼운 액션 활극인데, 특징은 명확하지만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에서 기대할만한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내용도 평이하고요. 그나마 "아서월드"라는 소제목처럼, 아서왕 전설을 이야기에 깊숙이 연결시켜 전개하는 아이디어 정도만 눈에 뜨일 뿐입니다. '아발론'이라고 명명한 고대 외계인의 우주선 '엑스칼리버'를 손에 넣은 지구인들이 침략자들에 대항해 싸워나간다는 식이죠. 등장인물들도 팬드래건, 랜슬럿, 갤러해드, 퍼시벌, 거웨인 등 친숙한 이름들이 대거 등장하고요. 솔직히 너무 억지스럽게 가져다 붙인 티가 물씬 나서 딱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요. 결론적으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이 미완성 작품 외에는 총 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역시나 대체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을 내자면 1.5점 정도입니다.

"밤의 망망대해에서"

이전 "2001"의 단편과 이어지는 내용으로, 오래전 우주를 탐사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커크의 후일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월-E'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구형 로켓이 신형과 사랑에 빠져 신세대의 아담과 이브가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대단한 상상력이 발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고생만 한 커크에게 꽤 괜찮은 선물같은 결말이라는 점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진노의 그릇"

2001 러시아에서 핵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짤막한 소품으로 별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냉전시대에 누구나 상상했었을 그런 이야기를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긴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SPACE FANTASIA Part 1~3

제목처럼 3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2장 분량으로 짤막한 SF 꽁트입니다. 앞장은 기묘한 설정, 뒷장은 그 설정에 대한 반전과 같은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반전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소설로 따지면 '쇼트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소품이라 점수를 주기 애매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포보스 & 데이모스"

화성의 포보스 기지에서 급작스러운 바이러스에 의한 사고가 발생되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포보스 기지의 바이러스는 포보스 지하에서 채굴한 얼음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는 지구에서 튕겨나온 운석에서 비롯된 것이고요. 그리고 운석은 공룡 멸종을 가져온 대폭발 때문에 지구에서 튕겨나온 것으로, 멸종하던 공룡들의 공포를 그 사체와 함께 냉동건조하여 담았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과감한 SF 적인 발상에 여러가지 과학적 설정이 뒷받침되어 꽤 독특한 반전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호시노 유키노부 스타일의 작품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그래도 그나마 읽을만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안개행성"

행성 화이트 포레스트 2호를 탐사하기 위해 착륙했던 우주선 풀룩스의 통신 두절 후, 구출을 위해 출동한 우주선 카스토르도 행성의 고농도 산소층 때문에 화재를 당해 겨우 착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풀룩스의 생존자인 조종사 레크랑을 찾아나선 대원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이내 기묘한 생물의 습격을 받기 시작했다. 행성의 대기를 흡입한 대원 지나는 에어록을 열어 놓은 채 탈출하고, 모든 대원들이 행성의 대기를 흡입한 뒤 서서히 기억을 잃기 시작하는데...

지적인 동물이 나타나 불을 쓰기 시작하면 산소층이 반응해 신경 가스를 내뿜는 방위 시스템이 움직이고, 이 가스를 맡은 생명체는 기억을 잃고 사고력이 쇠퇴해 문명이 멸망한다는 설정이 아주 인상적인 SF입니다. 행성, 또는 숲이 사라지기 전에 자구책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문명은 발전을 위해 숲을 벌채하기 때문입니다.

설정도 멋지지만, 이야기도 진상을 서서히 드러나게끔 풀어나가고 있어서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지식과 경험이 없으면 노인은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던 선장의 자살 등 곳곳에 멋진 장면도 많고요. 한마디로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제법 눈에 뜨입니다. 우선 외계 문명이 돌로 건물을 만들 정도였다면 불도 진작에 썼을텐데 그 전에 쇠퇴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홀로 우주선에 복귀하여 탈출하는데 성공한 조종사 이언이 필요없는 기억과 정보부터 잃는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우주선 탈출 방법이라던가 조종법은 기억하지만 다른 동료들과 연인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 너무 편의적인 발상입니다. 특히 동료의 아들 사진을 보며 소중한 무언가를 잊었다는 식으로 끝내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수록작들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걸작 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작품 하나만큼은 찾아서 읽어볼 만 합니다.

2019/09/29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점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 4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뒤늦게 찾아 읽어본 요네자와 호노부일상계고전부 시리즈 근간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추리적으로 시리즈 타 작품에 비해 많이 처지는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이바라가 주인공인 "우리 전설의 책" 입니다. 학교 동아리 만연에서 일어난 분란에 휘말린 이바라의 이야기가 전부에요. 3학년 고치 선배의 충고로 이바라가 프로를 목표로 매진할걸 다짐하며 만연을 그만둔다는 내용은 "바쿠만"을 떠오르게 만들 뿐, 별다른 추리도 없으며 오레키 역시 거의 출연하지 않아서 별로였어요. 

그나마 이야기 서두에 소개되는, "달려라 메로스"에 대한 오레키의 색다른 시각이 엿보이는 독후감은 괜찮지만 전개면에서 무리였습니다. 독후감은 독후감으로 두는게 좋았을텐데 이바라의 상황을 독후감에 빗대는 전개가 억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메로스를 죽이는건 왕에게는 손해이다, 그러므로 메로스를 죽이려는건 왕의 적일테니 이바라의 만화 노트를 훔친건 만연의 '만화 읽는 파'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라는 추론은 그런대로 볼 만하지만 설득력은 낮습니다. 고치 선배가 이바라에게 연락하면 안될 이유는 없으니까요. 어차피 추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그냥 인간 관계와 갈등을 그린 드라마에 지나지 않기도 하고요.

추리물인 첫 에피소드 "상자 속의 결락"도 일상계 추리물이기는 한데 굉장히 시시합니다. 학교 투표함 갯수를 속여 회장 선거를 망치려고 했다는 음모부터가 별 볼일 없지요. 차라리 정말 일상에 맞닿은 이야기라면 괜찮았을텐데, 학생회장 선거와 학교 선거관리 위원회 등이 등장하는 탓에 일상 속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고요. 

중학교 시절 선생님에 대해 회상하는 "첩첩 산봉우리는 맑은가"도 지극히 간단한 조사로 진상이 드러나는 소품이라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부분은 거의 없으며, 이 단편집에서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거울에는 비치지 않아"는 이미 오래전 "미스테리아"를 통해 접했던 작품이라 신선함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도 감점 요소에요.

그래도 오랜 팬으로서 눈여겨 볼 만한 부분도 많습니다. 특히 오레키 호타로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작품이 많다는게 눈에 뜨이네요. "첩첩 산봉우리는 맑은가"에서부터 의외의 행동력이 드러나거든요. 사토시가 '너 오레키 호타로지? 외계인한테 조종당하고 있는 거 아니지?'라고 물어볼 정도로 당황스러운 변화입니다. 아마 불필요한 행동에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는, '안 해도 될 일은 하지 않는' 원칙주의자는 오레키도 지탄다 등을 만나며 조금은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걸 겁니다. 아마 본인은 모르는 지탄다에 대한 마음이 기폭제가 되었겠지만요.
오레키 호타로가 왜 이런 삶의 모토를 세웠는지 알려주는 "긴 휴일" 속 에피소드도 꽤 그럴듯합니다. 초등학생이던 오레키가 자신이 불평을 하지 않아 주위로부터 이용당했다는걸 깨닫고, 아무에게도 이용당하지 않는 '긴 휴일'을 맞이한다는 내용인데 차분히 쌓아올린 단서들이 치밀해서 설득력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후 사라진 지탄다를 찾아 여름방학에 직접 집을 나서기까지 하니 대단한 발전입니다. 과연 이바라가 사라졌다고 해도 찾아 나섰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참고로 이 "이제와서 날개라 해도" 이야기에서 지탄다도 굴레를 벗어 던지기에 둘 사이도 진전이 있으리라 짐작되네요. 

또 조금 의외였던건 오레키 호타로의 요리 솜씨입니다. 집에 있는 재료로 이런저런 요리를 뚝딱 만들어내는, 왠만한 가정주부 못지 않은 솜씨를 선보입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중화면이 있다고 집에서 중국식 냉면을 만든다는게 말이 될까요? 그 외에도 야키소바라던가 베이컨 채소 볶음, 계란말이 등 이런저런 요리들이 소개됩니다. 이 정도 솜씨라면 "쿠드랴프카의 차례" 속 축제의 요리 승부에 대표로 참석했어도 좋았을 뻔 했어요.

하지만 팬심 외에 추리적 요소는 여러모로 부족한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팬을 위한 선물에 그치미 말고, 추리적인 부분도 다음 권에서 좀 만회해 주면 좋겠습니다.

2018/02/16

패러독스의 세계 - 다무라 사부로 : 별점 2.5점

패러독스의 세계 - 6점
다무라 사부로/전파과학사

오래전 사랑했던 추억의 전파과학사 문고가 저렴한 가격의 ebook 대여 행사를 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행사가 끝났네요.

이 책에는 연인의 사고사 후 자살하려던 천애고아 미다 타로가 우연히 외계인 퀴리그인에게 납치된 후, 퀴리그 별에서 가정교사 및 기술자로 일하며 여러가지 수학 논리를 설명해 주었던 과거에 대한 일종의 수기와 "웃지 말 것 - 웃음과 패러독스", "읽지 말 것 - 수학과 패러독스" 라는 두 개의 챕터로 여러가지 패러독스 상황을 관련된 이야기들로 설명해 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미다 타로의 수기 부분은 솔직히 왜 이런 기묘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구태여 외계 행성 설정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설명 가능한 부분이었거든요. 그래도 초-중학생 수준의 외계인 아이들에게 수학과 논리를 가르친다는 설정 덕분에, 수학에 기반을 둔 내용이 많음에도 아주 어렵고 심오하지 않아서 이해가 쉽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들이 제목 그대로 "패러독스" 관련된 역설 이야기가 많아서 퍼즐을 푸는 듯한 재미도 넘치고요. 각종 공작이나 퍼즐, 심지어 미다 타로가 외계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요술' 관련된 도판까지 도판이 생각 외로 많은데 이 역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단순한 즐거움 외에도 현학적인,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기쁨 역시 컸습니다. "12 척의 배를 가진 부자가 장남에게는 1/2을, 차남에게는 1/4을, 막내에게는 1/6을 주기로 했는데 1척이 침몰해버렸다. 그런데 이웃에서 배를 빌려와서 장남에게 12척의 1/2인 6척, 차남에게는 1/4인 3척, 막내에게는 1/6인 2척을 주니 모두 11척이라 이웃에게 배를 돌려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라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지만 답을 몰랐던 수학 문제의 답을 알게 된 것 처럼요. 정답은 애초부터 잘못된 유언이라는 것입니다! 1/2 + 1/4 + 1/6 이 "1"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이 여관에 숙박비로 1인당 1만원 씩 지불했다. 그런데 여관 주인이 서비스로 5천원을 깎아 주었다. 그러나 이를 돌려주던 종업원이 2천원을 슬쩍하고 3천원만 돌려주었다. 각자 1만원 씩 냈는데 1천원씩 돌려 받았으니 1인당 낸 돈은 9천원이고, 3명이서 2만 7천원을 내었다. 여자 종업원이 2천원을 슬쩍한걸 더하면 2만 9천원. 1천원은 어디로 갔을까?" 라는 문제도 이 책 덕분에 속 시원하게 정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받은 돈은 2만 5천원이고, 종업원이 가로챈건 2천원이라 이는 손님 세 명이 지불한 돈과 일치합니다. 여기에 깎아준 3천원을 더하면 처음의 3만원이 됩니다. 이 돈에 또 슬쩍한 돈 2천원을 억지로 더해서 발생하는 오류지요.

이러한 퍼즐같은 이야기 외에도 정통 수학에 기반을 둔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앞의 두개의 수의 합이 다음 수가 되는 피보나치 수열의 이웃한 3개의 수는 항상 한가운데 수의 제곱과 양 끝 두 수의 곱은 언제나 1만큼 다르다' 라는 사실 등 새롭게 알게 된 이론도 많고요.
'큰 원의 원 둘레와 작은 원의 원 둘레가 1:1로 대응하더라도 길이는 똑같다고 할 수 없다' 는 이유 등 몰랐던 수학 이론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좋았습니다. "1/3 + 1/3 + 1/3 은 1인데 1/3은 0.333333333..... 이라 1/3을 더하면 완벽한 1이 되지 않는데?"라는 문제에 대한 답도 미력하나마 깨우칠 수 있었고요.

수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논리 퍼즐도 대미를 장식할 만 합니다. 아주 인상적이었기 상세하게 소개해 드릴께요. 일단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개의 문이 있는 방이 있다. 한 방은 정답, 다른 방은 오답이다. 방에는 언제나 사실을 말하는 정직 족, 언제나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 족으로 이루어진 별에서 온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어느 부족인지는 모른다. 이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한번만 질문할 수 있다. 그들의 답은 "팔" 또는 "다아" 중 하나이다. 이 "팔"과 "다아" 중 어느 쪽이 yes이고 어느 쪽이 No 인지는 알 수 없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하고, 답은 어떻게 되는가?" 입니다. 논리 퍼즐로 한참 고민해도 됨직한 멋진 이야기죠?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이를 수학 공식화하여 설명해 줍니다! 내용 중 "동치" 개념과 교환율, 간략화 공식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공식으로 "왼쪽의 문이 정답입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당신이라면 "팔" 이라고 대답합니까?" 라는 답이 도출되는 과정은 놀라왔습니다. 수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여러분들도 이 답이 맞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미타 타로의 수기와 비교한다면 이어지는 "웃지 말 것 - 웃음과 패러독스" 부분은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 패러독스를 다양한 글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라쿠고나 잡지의 유머 등을 인용하여 이해를 돕는건 좋지만 너무 장황한 탓입니다.
물론 유머, 우스개 들에서 패러독스 이론을 끄집어 내는건 대단했고, 유머만 소개되는게 아니라 체스터턴의 단편과 "라쇼몽"이 인용되는 등 볼거리가 많긴 합니다. 그래도 글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도판이나 다른 보조 장치가 필요했어요. 거짓말 관련된 패러독스가 내용의 대부분이라는 점도 아쉬웠고요. 마지막의 "읽지 말 것 - 수학과 패러독스"에 제목처럼 수학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 그 비중이 높지 않습니다. 도입부에서 칸토어의 정리를 쉬운 집합 형태로 바꾸어 설명하는 부분은 재미있었지만, 이외에는 패러독스를 수학으로 설명하기 위한 여러가지 이론 설명 비중이 더 크거든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읽을만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책의 가치를 번역이 반 이상 깎아먹고 있는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수학 이야기인데 어떤 항목은 번역된 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책 자체는 별점을 3점 이상 주고 싶어도 번역 때문에 도저히 2.5점 이상은 주기 힘드네요.
수학을 공부하는 중학생 정도라면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되어 수학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리고 싶은데, 번역 때문에 선뜻 권해드리기 어렵군요. 조금 현대적으로 각색해서 새롭게 번역되어 출간된다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