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감금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감금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2/06/16

룸 - 엠마 도노휴 / 유소영 : 별점 1.5점

 - 4점
엠마 도노휴 지음, 유소영 옮김/arte(아르테)

다섯 살 잭은 엄마와 함께 방 한 칸 짜리 별채 집에 감금된채 살아왔다. 엄마를 납치한 올드 닉은 매주 생필품을 가지고 모자를 찾아와 엄마를 농락한 뒤 돌아갔다. 그러던 중 올드 닉의 실직으로 위기 의식을 강하게 느낀 엄마는 잭이 죽은 것 처럼 올드 닉을 속여서 탈출시키고, 도움을 요청하게 만드는 '몽테크리스토 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잭은 탈출에 성공하는데....

실화를 각색한 범죄 휴먼 드라마로 2015년 발표되어 주목받았었던 동명의 영화 원작 소설입니다. 영화 쪽이 훨씬 유명한 것 같네요. 직접적 피해자인 여성이 아니라 그 아들 잭이 화자이자 주인공인게 특징입니다.

전반부는 방 한 칸 집에 감금당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는 엄마와 그 결과로 태어난 아이 잭의 생활을 그립니다. 모자가 가로세로 3.5미터에 불과한 공간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범인 올드 닉이 1주일마다 한 번씩 찾아와 엄마를 덮치고, 그 때마다 그가 가지고 오는 생필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비참한 생활 묘사는 정말로 굉장합니다. 엄마가 극심한 치통에도 병원에 가지 못해 결국 이빨이 빠지고, 잭은 바깥 세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TV와 현실의 차이도 모른다는 등의 이야기가 설득력있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잭에게 운동과 교육을 시키며 최소한의 상식과 교양을 갖추게 하려는 엄마의 노력도 잘 보여주고요. 또 이 와중에 모자 간의 애정, 어린 잭의 순진한 시선이 곳곳에 드러나는데, 비참한 현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같은 느낌을 전해주는게 독특했습니다. 자기가 피해자인줄 모르고, 자기가 감금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요정의 시선이랄까요?

이어지는 짤막한 중반부는 일종의 모험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직했다는 올드 닉의 말을 듣고, 집이 은행에 넘어가면 자기들이 죽을거라 확신했던 엄마의 탈출 계획이 중심이거든요. 이른바 '몽테크리스토 작전' 으로 올드 닉이 아이가 죽었다고 믿게 만든 후, 트럭에 싣고 매장하러갈 때 탈출하는 계획이었지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잭이 탈출하는데 성공함으로서 결국 모자는 구조되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잭의 시점에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어른이라면 쉽게 성공했겠지만, 잭은 세상물정이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고 바깥 세상을 처음 접해 보았기에 실패할 뻔 하거든요. 치밀한 계획 끝에 성공하는 탈주극은 아니지만, 덕분에 훨씬 긴장감 넘치면서도 설득력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실존했던 범죄를 다룬 픽션이라기에 범죄 스릴러물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요소를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범죄 자체보다는 범죄의 결과를 그린 이야기니 당연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후반부는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제대로 된 교육과 돌봄을 받지 못하고, 태어나서부터 집 안에 갇혀 자란 잭의 사회 적응기로 일종의 성장기인데, 이런 특수한 환경에 놓였을 아이의 심리를 유추하여 글을 쓴 상상력은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너무 깁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내용도 뻔해서 지루하기만 했고요. 

이 기나긴 잭의 성장기는 범죄와 천진한 아이를 대비시키고, 극적인 요소를 강화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차라리 아이러니 그 자체인 잭의 존재를 강조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잭은 엄마가 감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선물이지만, 아빠는 엄마를 감금한 잔인무도한 범죄자 올드 닉이니까요. 굉장히 고민해 볼 만한 주제인데 이 작품에서는 너무 짧게 언급되어서 아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큰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대했던 쟝르물도 아니라서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군요. 별로 권해드릴 책은 아니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에버노트의 문제로 두 번 날려먹었던 리뷰입니다. 세 번째도 날려먹을 뻔 했네요. 더 길게 적기도 힘들기에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2003/12/14

올드보이 - 박찬욱 : 별점 5점


내 이름이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산다해서 오.대.수라구요"
술 좋아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오대수. 본인의 이름풀이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라고 이죽거리는 이 남자는 아내와 어린 딸아이를 가진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어느 날, 술이 거나하게 취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존재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납치, 사설 감금방에 갇히게 되는데...

"그 때 그들이 '십오년'이라고 말해 줬다면
조금이라도 견디기 쉬었을까?"

언뜻 보면 싸구려 호텔방을 연상케 하는 감금방. 중국집 군만두만을 먹으며 8평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텔레비전 보는 게 전부.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뉴스를 통해 나오는 아내의 살해소식. 게다가 아내의 살인범으로 자신이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된 오대수는 자살을 감행하지만 죽는 것조차 그에겐 용납 되지 않는다. 오대수는 복수를 위해 체력단련을 비롯, 자신을 가둘만한 사람들, 사건들을 모조리 기억 속에서 꺼내 '악행의 자서전'을 기록한다. 한편, 탈출을 위해 감금방 한쪽 구석을 쇠젓가락으로 파기도 하는데.. 감금 15년을 맞이하는 해, 마침내 사람 몸 하나 빠져나갈 만큼의 탈출구가 생겼을 때, 어이없게도 15년 전 납치됐던 바로 그 장소로 풀려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누군지, 왜 가뒀는지 밝혀내면... 내가 죽어줄께요"

우연히 들른 일식집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어버린 오대수는 보조 요리사 미도 집으로 가게 되고, 미도는 오대수에게 연민에서 시작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게 된다. 한편 감금방에서 먹던 군만두에서 나온 청룡이란 전표 하나로 찾아낸 7.5층 감금방의 정체를 찾아내고... 마침내, 첫 대면을 하는 날 복수심으로 들끓는 대수에게 우진은 너무나 냉정하게 게임을 제안한다. 자신이 가둔 이유를 5일 안에 밝혀내면 스스로 죽어주겠다는 것.

대수는 이 지독한 비밀을 풀기 위해, 사랑하는 연인, 미도를 잃지 않기 위해 5일간의 긴박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한다. 도대체 이우진은 누구이며? 이우진이 오대수를 15년 동안이나 감금한 이유는 뭘까? 밝혀진 비밀 앞에 두 남자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15년 동안 영문도 모르고 갖혀있던 오대수(최민식)이 그 이유와 복수를 위해 과거를 복습하는 5일간의 체험기. 이 정도는 다들 접하셨으리라 믿고요, 나중 반전은 영화 특성상 생략하겠습니다. 전 먼저 일본 원작 만화를 읽어 보았는데 기본 설정 (영문을 알 수 없는 감금과 그 이유와 복수를 위한 과정) 빼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놓았네요.

개인적으로, 올해 본 스릴러들, -아이덴티티, 사이퍼, 팜프파탈, 에니그마, 프레일티...- 등등등 중에서도, 그 어떤 것보다도 빼어난 영화였습니다.
일단 무엇보다 최민식의 광기어린 연기는 정말 최고였습니다. 역시 최민식!이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더라고요. 냉정한 귀족 악당 이우진역의 유지태도 생각보다 연기가 꽤 괜찮았고요. 차갑고 냉정하면서도 치밀한 캐릭터를 잘 소화해낸것 같습니다. 워낙 압권인 최민식 때문에 빛이 바래 보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둘이 동년배로 나오는 설정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연기력이나 캐리어로 볼때 이우진 역에 한석규를 쓰는게 어땠을까 싶기는 합니다.
스타일리스트 박찬욱 감독의 영상도 최고입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후 완전히 물이 오른것 같네요. 뭔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화면들이 가득합니다. 피와 폭력이 난무하지만 오버하거나 잔인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건, 연기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도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겠지요. 아! 음악도 굉장히 좋습니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갑자기 튀어나오던데 정말 놀랐습니다. 이렇게 스토리가 치밀하게 짜여지다가, 나중에 터트리는 각본의 완성도도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화가 "한국영화"라는것이 고맙기까지 하네요. 제 생각에는 일본같은 곳에는 그냥 수출을 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것 같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화이팅! 한국영화!

2018/10/27

비하인드 도어 - B.A. 패리스 / 이수영 : 별점 1.5점

비하인드 도어 - 4점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arte(아르테)

모두가 부러워하는 화려한 부부 잭과 그레이스. 남편 잭은 승률 100%를 자랑하는 유명 가정 폭력 전문 변호사로, 영화배우와 같은 외모까지 갖춘 근사한 남자다. 그레이스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여동생까지 사랑해주는 잭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꿈꾸지만... 그녀는 괴물 같은 그의 손길이 사랑하는 동생 밀리에게 닿기 전에 이 악몽을 끝내려 한다. 닫힌 문 뒤에서,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처절한 심리 싸움이 시작된다...(출판사 제공 줄거리 인용)

책 뒤에 소개된 짤막한 본문 -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공포를 주입할 수 있는 사람. 계속 숨겨 둘 수 있는 사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 보는 한 편 내 갈망을 충족시킬 방법도 마련했어. 뭔지 알겠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잭은 몸을 기울여 내 귓가에 입을 가져왔다. "너랑 결혼했어. 그레이스" - 가 마음에 들어 집어들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지인이 싸이코패스였다'는 책을 읽었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핸섬하고 친절한 신사로, 결혼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잭이 결혼하자마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돌변한다는 이야기니까요.

이런 류의 이야기라면 범인이 치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상대방을 협박하고 죽이려 하는지가 잘 묘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재미 핵심 요소고요. 하지만 이 책은 완벽한 실패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를 주기 위한 무리한 설정 탓입니다. 잭이 치밀해서 그레이스가 탈출도 못 하고 도움도 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설정인데,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만나고 외출도 하는데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다는건 솔직히 말이 안되지요.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놓기는 했지만 다 핑계로 밖에는 보이지 않있습니다. 여자 화장실 안에는 같이 못 간다는 묘사가 등장하니 화장실에서 거울에 몇 자 쓴다던가 하는 식으로 방법을 생각해 볼 만 한데 절박함이 부족해요. 이래서야 감금과 협박을 즐기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위기 극복, 탈출 과정이 재미있느냐? 아닙니다! 겨우 구한 약을 잭에게 먹이고 탈출한 그레이스가 태국으로 여행간 후 완전 범죄를 꾸민다는 내용인데 과정이 전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우 탈출했을 뿐 잭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하실에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벌일 일은 아니잖아요. 이럴 계획이었다면 최소한 책을 확실히 죽였어야 했습니다. 단지 지하실에 가두었다고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잭이 깨어나 탈출하면 모든게 끝나버리니까요. 실제로 잭이 바로 태국으로 쫓아 왔다면 그레이스가 옭아매인 신혼 여행 상황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뉴질랜드 행을 가장한 죽음을 맞게 되었겠지요.
결말 부분에서 에스더가 그레이스를 도와줘 완전 범죄를 성공시킨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그 전까지 에스더와의 친분은 전혀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뜬금없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밝힌 이유인 "빨간 방" 의 정체는 말이 되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세부 묘사가 너무 부족했어요.

다른 부분들도 건질게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와 과거가 복합되어 진행되는 진부한 방식의 전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밀리의 수면제가 현재에 등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가 깔끔했던 것 정도만 볼거리였습니다만, 이 정도도 수습이 안 됐다면 이야기가 성립하지도 않았을테니 딱히 장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처음에 완벽함을 강요받는 그레이스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완벽에 집착한 나머지 아내의 허술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상계스러운 특이한 싸이코구나! 싶게 만드는 부분은 독특했기에 차라리 이런 설정을 밀어 붙였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잭이 누군가를 감금해서 공포에 질리게 하는 모습을 즐기는 싸이코패스라는 이야기는 그닥 신선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니, 너무 뻔하죠. 이런 뻔한 내용이니 잭이 남편에게 폭행당한 여자들을 전문으로 변호하는 변호사라는 작위적인 설정은 단점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한 가지 괜찮았던 아이디어라면 잭이 그레이스와 결혼한 이유입니다. 그레이스의 동생 밀리가 다운증후군이라서, 이를 이용해 밀리를 감금하려고 계획했다는 건데 불쌍한 장애우를 학대하는 악당이라는 느낌이 더해져 사악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밀리에 대해 그레이스가 가진 모정에 가까운 애정을 협박의 재료로 쓴다는 것도 그럴듯 했고요. 아울러 사건의 핵심인 공포의 "빨간방" 묘사는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장점은 빈약해서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라는 결론을 뒤집기는 무리에요. 영화도 많이 제작되는 인기있고 유행하는 소재를 억지스러운 설정을 덧붙여 변주한 현실성없는 이야기라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06/06/03

탈명검 - 용대운 : 별점 2점

요사이 용대운 작가 소설만 읽는 것 같군요. 이번에 읽은 작품은 "탈명검"입니다.

임무정은 무림의 이대세가 중 하나인 화씨세가의 외동딸과 사랑에 빠진 탓에 한 신비조직에 의해 운영되는 감옥에 종신 수감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천지회라는 조직의 고수에 의해 우연찮게 탈옥하게 된 뒤, 옆방에 수감되어 있던 노인에게 얻은 정보로 "북해의 검"을 손에 넣어 천하 제일의 고수가 된 후 자신을 감금한 사람들과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을 위해 복수에 나서게 된다...

간단한 내용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설정을 많이 따 왔습니다. 특히 영문도 모른채 10년의 세월을 감금당한다는 설정과 탈출을 기도하던 옆방 노인과의 친분으로 기연을 얻어 고수가 된다는 설정은 거의 그대로더군요. 개인적으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소설을 굉장히 좋아하기에 무협지 버젼도 나쁘지 않구나.. 하는 생각으로 읽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설정은 높이 평가할만한데 중요한 전개 부분에서 어설픈 부분이 많이 눈에 띄여서 아쉽네요. 일단 주인공 임무정이 고수가 되는 과정은 너무나 간략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쉽게 몰입하기 어려웠으며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얼개가 대충 짜여진 느낌이 강합니다. 이왕 설정을 가져다 쓸 거면 그대로 들어다 쓰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을 나름대로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이런 저런 단체와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바람에 스토리의 힘이 약해지고 진정한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흐려지는 결과를 낳아 버렸습니다. 단적인 예는 무적도 사마백혼이라는 라이벌격인 존재입니다. 사랑하던 여인의 현재 남편이자 딸의 아버지 행세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원수 중 한명인 페르낭 몬데고 같은 캐릭터인데 공명정대하고 착한 인물로 그려져서 라이벌도 아니고 적도 아닌 애매한 캐릭터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 외에도 봉황신녀 같은 캐릭터 역시 너무 사족스러웠고 다른 천지회의 인물들도 부록의 느낌이 강한 편이었고요.

그리고 이야기 전개를 약간이나마 복잡하게 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의 설득력이 너무나 떨어지는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었죠. 그냥 우직하게 적을 격파해 나가는 이야기로 하는 것이 더욱 쉽고 재미나지 않았을까요? 복선 같지도 않은 복선 (예를 들자면 잠깐 나왔던 천지회 부회주의 정체라던가) 은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용대운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무공의 묘사가 너무 천편일률적이라 세번째 읽게되니 똑같은 묘사가 반복되기만 하기 때문에 사뭇 지루했습니다. 비무를 나누는 장면에서의 묘사가 너무 단순하거든요. 아무리 고수들의 싸움이라지만 주인공 임무정은 칼 한번 휘두를 뿐이니.... 초기작으로 알고 있는데 최근작에서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궁금하네요.

어쨌건 한마디로 평한다면 그런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소설적인 완성도는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생각됩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달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조금 더 완성도를 높이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아서 아깝습니다. 걸작은 아니더라도 수작의 반열에는 오를 수 있었을텐데....

2024/10/06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 미쓰다 신조 / 권영주 : 별점 3점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상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조 겐야는 대학교 선배 아부쿠마가와 가라스로부터 하미 지역의 특별한 제의와 기묘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미에는 네 개의 마을에 각각 신사가 있고, 홍수나 가뭄 때마다 신사마다 돌아가며 지역 농사의 젖줄인 미쓰 천의 원류 진신 호에서 미즈치 신을 모시는 제의를 행해왔는데, 13년 전 제의에서 사요촌 미즈시 신사 신관 류지의 큰아들 류이치가 죽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터무니없이 무서운 어떤 것을 본듯한 형상이었다. 그 뒤 제의에서도 신관들은 기묘한걸 목격했다고 했다. 
이 소재를 탐방하기 위해 도조 겐야는 편집자 소후에와 함께 가뭄 탓에 행해지는 하미의 기우제에 참석했다. 그리고 제의 중 신남 역할을 맡은 류지의 둘째 아들 류조가 가슴에 미즈치 님의 신기 중 하나인 뿔에 찔려 죽은걸 목격했다. 그러나 현장인 집배는 완전한 밀실이었다. 겐야는 현장을 확인한 뒤, 자살이라고 추리했고 류지가 동의하여 사건은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미즈시 신사 외눈 광에 제물로 류지의 의붓손녀 사요코가 감금돠었다는걸 다른 신관들과 관계자들이 알게 되었다. 사요코를 풀어달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류지는 주술을 푸는데 시간이 걸린다며, 다음 날 풀어 줄 것을 약속했다. 

그날 밤부터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미즈치 신사의 다쓰키치로, 미쿠마리 신사의 다쓰조 신관이 차례로 살해당했고, 스이바 신사 류코 신관은 중상을 입었다. 류지는 소후에를 감금한 뒤 겐야를 협박하여 범인을 밝혀낼 것을 종용했고, 겐야는 관계자들 앞에서 범인은 류지의 의붓 손자 쇼이치라고 추리했다. 겐야가 내 놓은 범인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건 쇼이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추리쇼 직후 류지마저 총격으로 살해당했고, 도조 겐야는 소후에를 구해내 스이바 신사 후계자 류마와 함께 마을 밖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에서 류마에게 진짜 진범이 누구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 때 네 개의 마을은 폭우로 범람한 미쓰 천에 모두 휩쓸리고 말았고, 도조 겐야는 경찰에 살해된 사람들과 범인들 모두 실종된 것으로 신고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자신감 있는 오만한 명탐정보다 도조 겐야 쪽이 마음에 드는 걸. 연쇄살인이 발생해 몇 명 죽고 난 다음에 겨우 사건을 해결해 놓고 실은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고 지껄이는 명탐정보다,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댁이 훨씬 더 믿음이 가." - 류마.

도조 겐야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제 10회 일본 본격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인데, 굉장히 흡입력있고 재미있는 내용이라서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즈치 신을 모시는 제의와 사건, 트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게 아주 돋보였습니다. 제의는 공물을 담은 큰 통을 호수에 빠트리면서 진행되는데, 이 통 안에 '산제물'인 사람을 넣어 두었던게 밀실 트릭의 진상입니다. 13년 전 제의에서 처음 산제물을 바쳤는데, 이 때 통에 갇혔던 산제물 이치로가 물 속에서 튀어나와서 류이치는 깜짝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켰던겁니다. 이치로는 지하 수로로 빨려들어갔고요.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는 산제물은 사요코였는데, 그녀 역시 통을 호수에 빠트릴 때 빠져나와 류조를 찔러 죽였습니다. 통 안에 공기가 남아있어서 관계자들이 현장을 보고 떠날 때 까지 숨어있을 수 있었고요. 이 과정에서 집배가 한 번 더 흔들린 이유 - 떠오른 통에 부딪혀서 - 까지 설명되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사건에 대해 겐야가 내 놓는 여러가지 추리도 볼 만 합니다. 우선 겐야는 범인에게 해당되는 일곱 개의 조건을 꺼내어 놓습니다.
  1. 미즈치님 제의에 산재물이 부활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2. 쓰루코 대신 사요코가 제물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3. 산재물이 통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인물
  4. 사요코가 제물로 바쳐졌음을 알고 범행을 결심한 인물
  5. 류마의 잠수 장비가 어느 광 어느 궤짝에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인물
  6. 잠수 장비를 착용하고 활동할 수 있는 인물
  7. 호수에 드나드는 방법을 알 수 있는 인물.
이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추려낸 후, 하나씩 소거해가는 과정이 아주 그럴듯했어요. 이를 통해 범인이 쇼이치라는걸 드러내는 추리도 합리적이고요. 물론 이는 나중에 아닌걸로 밝혀지지만요.
미즈시 신사가 '산제물'을 바쳤다는걸 밝혀내는 추리도 돋보입니다. 신에게 바치는 '신찬'은 누가 보아도 산제물인 여성을 형상화한 것인데, 류지가 이를 대충 고르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등의 단서는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알려줍니다. 여러모로 '본격추리대상'을 탈만큼 추리적으로는 풍성합니다.
다만 도조 겐야의 추리는 일본어를 이용한게 많아서 한국 독자는 풀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약간 아쉬웠습니다. '산제물'을 추리해내는 추리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이런걸 원어로 보고 이해하며 추리에 동참할 수 있는 일본 독자들이 부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전쟁 당시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눈에 뜨였습니다. 류마가 해군 자살 특공대 후쿠류 출신이라는 설정인데, 류마의 입을 빌어 전쟁 당시 자살 특공대에 대해 개죽음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라던가, 자식이 죽어도 체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낙후된 촌락의 사고방식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사고방식과 빗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아버지나 자식이 죽어도, 형이나 동생이 목숨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기뻐했던건 비정상적이라는 것이지요.
쇼이치가 어떻게 되는지 밝혀지지 않은 후일담은 다소 마음에 걸리지만, 자매가 행복을 찾았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몇 가지 있습니다. 사요코가 산제물로 통 안에 갖혔을 때 미즈치의 뿔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처럼요. '불안함을 느껴 호신의 의미로 가지고 있었다'는 정도로 대충 넘어가는데,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닙니다. 그렇게 아무나 가져갈 수 있게 두었다는 것부터가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그것도 제의 전에 말이지요. 또 호수에서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는데, 사요코가 범행을 저지른 뒤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물론 공기가 들어있는 통을 사용했다는 트릭이 활용되기는 했는데, 과연 얼마나 숨을 쉴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온 뒤 사건에 대해 증언하지 않고, 숨어서 신관 연쇄 살인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불분명합니다. 자신을 산 제물로 삼으려고 했다는게 신관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라고 믿었다 한 들, 최우선 복수의 대상은 류지여야 합니다. 다른 신사의 신관들이 아니라요. 그리고 복수심에 불탔다 한들 신관들을 미즈치 님의 신기로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상식적이었다면 자신들의 편일 세이지, 류마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마을 밖 경찰서에 신고했어야 했어요.
류지가 산제물을 바치기로 결심한 뒤에도 외눈광을 유지한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의 때마다 산제물을 바친다면, 필요 없는 곳입니다. 미즈치 신을 모시는 곳이라서 쉽게 허물 수가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다쳐도 첫 산제물을 바친게 13년 전이니,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습니다.
이미 13년 전에 통 뚜껑을 잘 닫지 않아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또 통 뚜껑이 열렸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던 점이고요.

아울러,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어느 정도 읽은 지금 시점에서 보면, 작품의 거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쇼이치 시점의 이야기는 너무 길고 지루했습니다. 쇼이치를 통해 하미 지방에 미즈치 신 외에도 기묘한 어떤 것 - '팽것', 귀녀 등 - 이 있다는 설정을 장황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이러한 이형 존재에 대한 서술은 다른 미쓰다 신조 작품과 거의 똑같았던 탓입니다. 추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거의 없고요. 그나마 진신 호에서 미쓰 천으로 이어지는 지하 수로는 여러 통로로 접근할 수 있다 정도만 추리에 도움을 주지만, 이 역시 류마가 조성한 무덤 - 이치로의 시체가 떠내려 온 - 과 이치로의 사체가 발견된 곳 등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게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습니다. 다 읽고나서 쇼이치 부분을 빼고 도조 겐야 부분만 추려서 읽어도 충분히 말이 될 정도였으니까요.
쇼이치 가족의 어머니가 '가가구시촌의 사기리'였다는건 시리즈 제 1작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과 연결되는데, 이 역시 천편일률적인 묘사로만 이어질 뿐 특별한 소재로 사용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있는건 분명하니까요. 도조 겐야 시리즈, 혹은 호러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9/07/07

31번지 뉴 여인숙의 수수께끼 -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 민웅기 : 별점 2점

31번지 뉴 여인숙의 수수께끼 - 4점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지음, 민웅기 옮김/바른번역(왓북)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용 의사로 일하던 저비스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로 왕진을 나가서 모르핀 중독으로 보이던 환자 그레이브스를 치료했다. 이후 저비스는 감금되다시피 이동했던 상황, 심상치 않았던 환자의 상태 때문에 사건을 친구 손다이크와 상의했다. 손다이크는 그 집이 어딘지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두 번째 왕진에서 저비스는 그레이브스가 거의 사망 직전이라는걸 알고나서 왕진 후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당장은 사건성이 없다며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후 저비스는 고용 의사를 그만두고 손다이크 박사와 일하기 시작했는데, 첫 번째 수임한 사건은 기묘한 유언장 사건이었다. 의뢰인은 사망한 제프리 할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게 된 스티븐이었다. 그는 별 것 아닌 삼촌의 유언장 수정으로 거액을 상속받지 못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사건을 조사한 손다이크 박사는 이 사건이 저비스가 접했던 기묘한 환자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 장편입니다. 저자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풀려서 번역된 것 같네요. 저작권 만료된 작품이 주로 발매되는 전자책 전문 출판사 '왓북'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당연히 종이책은 없습니다.

읽기 전 기대가 컸습니다. 제가 사랑해 마지 않는 고전 본격물이기 때문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명이었던 손다이크 박사의 장편으로, 이전에 읽었던 손다이크 박사 장편은 모두 괜찮았기도 했고요. 그러나 기대에는 살짝 미치지 못했습니다.

물론 장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손다이크 박사 시리즈다운 부분은 전부 장점입니다. 첫 번째는 현장을 방문하여 온갖 쓰레기를 샅샅이 뒤져 단서를 모으는 등 당시의 과학 수사가 치밀하게 펼쳐진다는 점입니다. 특히 초반에 저비스가 철저하게 마차에 가두어진 채로 미지의 장소로 왕진나갈 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는 경로 추적도를 만드는 장면이 일품입니다. 단순한 나무판에 나침반을 부착하고 수첩을 곁들인 정도지만, 그래도 방향이 바뀔 때의 시간 및 상세한 정보를 수첩에 자세하게 기록하는 방법은 꽤나 유용해 보였습니다. 서명을 분석하기 위해 사진 확대를 이용하는 장면은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고요. 

두 번째는 본격 추리물로서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화자 저비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쫓아갑니다. 그래서 탐정과 독자에게 모든 정보와 단서는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디테일도 상당히 좋아요. 바이스 씨는 분명히 독일인이라고 했는데 집에 커피가 없고 차만 있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독일인은 보통 커피를 마시지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하네요.
물론 몇 가지 단서들(기묘하게 생긴 갈대, 깨진 유리 조각 등) 은 직접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정체를 알기 힘들다는 문제는 있지만, 이 정도 단서는 없어도 진상에 이르는데 큰 문제는 없습니다. 

세 번째는 당연히 손다이크 박사의 팬으로 즐길거리가 많다는 점이죠. 저비스가 의사를 떼려 치우고 손다이크 박사의 조수로 일하게 된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손다이크 박사가 법의학자가 아니라 변호사로 소개되는게 특이했습니다.

그러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고 많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진상이 너무 알아차리기 쉬운데, 저비스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점입니다. 당대 독자 수준이 저비스 수준이라 이렇게 썼겠지만 지금 읽기는 너무너무 답답했습니다.
이미 독자는 초반부, 저비스가 왕진나가 진찰했던 환자 그레이브스가 시체로 발견된 제프리라는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편에 취해 결국 약물 과용으로 사망했다는 사인, 그리고 한 쪽 눈에 두드러진 실명에 가까운 증상 등의 단서 때문이지요. 과연 누가 그를 감금하여 살해했을까?라는 질문의 답은 당연히 유일하게 이득을 보는 피해자의 형 존이 유력하고요. 그리고 존이 제프리와 꽤 닮았으며 배우로 활동했다는 이력을 듣고나면 그가 제프리로 변장해서 뉴 여인숙에 거주했다는걸 모르면 바보입니다. 설형문자 액자가 뒤집혀 있었다는 증거까지 있는데 말이죠. 그러나 저비스는 이런 점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저비스라는 인물의 설정에도 문제가 있어요. 초반부 저비스는 분명히 능력이 있는 걸로 묘사됩니다. 홀로 그레이브스에게 왕진갈 때가 좋은 예입니다. 그레이브스 코의 안경 자국을 보고 이건 얼마 전 까지 안경을 쓰고 있다는걸 나타내므로 오랜 기간 혼수상태였다는 바이스 씨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걸 추리해 내거든요. 그러나 두 번째 왕진부터 바보가 되어버립니다. 의식을 찾은 피해자는 저비스가 계속 "그레이브스 씨"라고 말을 걸 때마다 당황해합니다. 누가 봐도 자기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런걸 계속 놓칩니다. 손다이크 박사의 표현을 빌겠습니다. "저비스, 자네는 정말 구제불능이군". 단지 바보일 뿐 아니라 제프리 죽음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누가 봐도 위험한 상황이고 범죄의 가능성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그를 죽게 내버려둔 셈이거든요. 손다이크가 악당들의 위치를 알아낼 방법까지 알려줬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핑계는 단지 바쁘다는 것 뿐이고요.
이래서야 아무리봐도 추리 소설의 사이드 킥으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비스를 자신의 파트너로 불러온 손다이크도 언젠가는 크게 후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에요.

추리에 있어서도 헛점이 눈에 뜨입니다. 바이스 박사가 은신처를 떠나면서 편지가 올까 두려워 열쇠를 가지고 자주 왕래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곧바로 다음 세입자가 입주해버리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던걸까요?
변장용 안경에 반드시 돗수가 있어야 한다는 추리는 현 시점에서 보면 그닥 일리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안경용도 아니고, 회중 시계용도 아닌 유리의 정체가 범인을 밝혀내는데 핵심 역할을 한다는 점도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위적인 우연, 불필요한 장치도 지나치게 많습니다. 저비스의 왕진이 사건과 겹치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저비스가 그레이브스 씨라고 불리운 제프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건이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부분을 덜어내고 추리를 펼치는게 더 완성도는 높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바이스 씨의 부인이 사시였다던가, 바이스 씨와 마부는 동일인물이었다는 등의 장치는 불필요했고요.

마지막으로 사건이 밝혀지는 계기가 된 다시 쓴 유언장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확인이 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원래 존은 250 파운드만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바뀐 유언장에 의해 '잔여 재산 수여자' 가 되어서 죽은 고모의 유산 3만파운드를 받는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모든 유산의 수령인은 조카 스티븐인데, 왜 고모의 유산이 잔여 재산이 되어 존에게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던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너무 쉬운 내용이라 이렇게까지 길 필요가 없었고, 특히 저비스의 왕진 부분은 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손다이크 박사의 팬이시라면 모를까, 구태여 구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3/05/27

당신의 과녁 - 고태호 : 별점 2점

당신의 과녁 5 - 4점
고태호 지음/3rdpost(써드포스트)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스무살 청년 최엽은 연쇄 살인범 석규남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쓴 뒤,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석규남이 노환으로 죽고, 남은 가족들이 발견한 증거를 제출한 덕분에 17년 후 풀려났다. 
그러나 17년 만에 돌아온 세상은 지옥과 같았다. 연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가족은 생업을 잃고 갖은 욕을 먹었으며, 어머니는 무죄를 탄원하는 거리 시위를 하다가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였다. 이에 최엽은 연쇄 살인마의 손녀를 납치해 자기와 똑같이 17년간 감금하기로 결심했다.
죄책감으로 최엽의 협력자가 된 경찰과 당시 기자, 그리고 여동생과 절친 3인방은 최엽의 계획을 알고나서, 17년 감금할 시설 공사를 한다는 핑계로 최엽과 주말마다 어울렸다. 사회의 따뜻함, 가족의 온정 등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엽은 석규남의 손자 - 납치 대상의 남동생 - 으로부터 자기가 무죄라는걸 알고도 그 가족들이 증거 제출을 10년이나 미루었다는걸 알고난 뒤, 납치를 결행했다. 그러나 납치 대상이 여성 연쇄 납치범 일당에 납치당하는걸 목격한 최엽과 일행들은 납치범들을 뒤쫓아 결국 그들을 체포하고 납치 대상을 구해냈다....


간략한 줄거리 소개만 보고 혹해서 보게 된 웹툰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최엽의 심리 묘사입니다. 뎃셍력이 별로라 인물 형태가 계속 깨지며, 모든 묘사에서의 디테일이 부족해서 작화는 등 좋은 편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미묘한 심리 묘사는 놀라울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최엽이 분노하는 장면은 묘사의 달인 윤태호의 <<야후>>를 보는 듯한 섬찟함마저 느껴졌으니까요.
만화의 컷 구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 것도 돋보입니다. 엣 연인을 다시 만나 각자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는게 마지막 컷에서 드러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기대했던 복수극으로는 뜨뜻미지근한 탓입니다. 최엽의 복수 외길 전개가 아니라, 최엽이 친구들을 만나 다시 흉금을 터 놓게 되는 과정처럼 주변 인물들과 관계 복원을 이루는 출소자의 사회 적응기, 주변 인물들과 여러가지 즐거운 추억을 쌓는 일종의 일상 시트콤, 거기에 연쇄 부녀자 납치범들과 대결하는 액션 추적극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런 곁가지 이야기들이 비중만 놓고 보면 복수 자체보다 더 커요.
게다가 복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납치하려던 여자를 도리어 구해주게 된 뒤, 최엽이 복수를 포기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더 큰 악을 만나서 그들을 물리치고나니 모든게 허탈해졌다는 건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더 이상 위험에 빠트릴 수 없었던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 과정에서 석규남 가족의 진심어린 사죄도 없고요.
여기까지는 그렇다쳐도,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뒤 식물인간이 되었던 어머니가 깨어난다는 말도 안되는 해피엔딩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너무 뜬금없었어요. 최엽이 겪은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이 정도는 줘야지!라는 작가의 의도일까요? 이런 애매한 해피엔딩보다는 차라리 화끈한 복수가 더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최엽 캐릭터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90cn가 넘는 거구의 근육질로 묘사되는데, 딱히 대단한 전투력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두뇌가 비상한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라서 강력 범죄를 계획하는 인물로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맨몸 운동을 조금 한 정도로 세상과 맞서 싸우기는 어렵지요. 경찰과 기자라는 조력자, 그리고 죄책감을 느낀 검사의 유산 - 납치범을 가둘 일종의 별장 - 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흥미진진한 전개를 위해서는 최엽이라는 인물에게도 보다 설득력을 부여했어야 했습니다.
납치 계획도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납치에 성공했었더라도 체포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납치가 핵심인 범죄물이 아무리 아니더라도,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기대했던 복수극이나 범죄 스릴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더 글로리>> 류의 화끈한 복수극을 기대하고 보신다면 실망하실겁니다.

2005/03/03

모든 것이 F가 된다. (2005.06.23. 약간 내용 수정버젼) : 별점 3점

모든 것이 F가 된다 모리 히로시 지음/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마가타 박사는 완전무결한 컴퓨터가 제어하는, 단 하나의 문으로 막힌 방에서 15년 간 살아왔다. 14살때 양친을 살해했지만, 다중인격을 인정받아 사형을 면한 뒤 감금된 것이었다.
그녀가 천재적인 능력으로 15년간 양친이 설계한 연구소에 감금된 채 여러 시스템을 개발하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도 단 세 명뿐이었다. 유일한 출구는 카메라가 24시간 감시했고, 카메라가 기록한 영상도 절대 침입이 불가능한 컴퓨터에 저장되었으며, 나오는 짐이나 들어가는 짐 모두가 철저하게 점검당했다. 즉, 손톱만큼의 빈틈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밀실이었다.

국립대학 공학부 교수 사이카와는 그녀에게 흥미를 느껴 연구소가 위치한 섬으로 학부 MT를 떠났다. 그런데 그날 밤, 사이카와와 모에가 우연찮게 방문한 연구소에서 급작스러운 시스템 다운이 일어났다. 그리고 둘은 마가타 여사의 방 앞에서 여사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양손과 양발을 절단당한 시체를 목격했다. 살해당한 그녀는 '모든 것이 F가 된다'는 문장을 남긴 채였다.

이후 연구소의 소장도 옥상 헬기 착륙장에서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연구소는 지속적인 시스템 다운으로 경찰과 연락이 불가능했지만, 개발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겨우 전화망이 복구되었을 때 부소장 야마네마저 살해당했다. 모든 것이 컴퓨터로 관리되는 이 완벽한 밀실 살인 사건에 사이카와는 수학의 천재 모에와 함께 도전한다. 

모리 히로시의 데뷰작. 이 작가의 작품은 이전 서울문화사에 나온 "웃지않는 수학자"를 먼저 읽었었는데 조사해 보니(작가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있군요)사이카와-모에 커플 시리즈 중서 웃지않는 수학자는 세 번째 작품이고, 이 작품이 첫 번째 작품입니다. 제 1회 메피스토 상을 수상했고요. 원래는 시리즈 5연작으로 쓰던 작품중 4번째 작품이 될 예정이었다는데, 출판사의 의향에 따라 첫번째로 간행되었다는군요.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는 않았고 저는 한국의 번역자이신 로랑님의 홈페이지를 통해 읽었습니다. 혹 제 사이트 통해 찾아가신다면 감사의 말씀은 꼭 남겨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무척 잘 읽었거든요.

굉장히 독특하고 보기 힘든 밀실 트릭이 등장한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카메라 등으로 완벽하게 관리되는 시스템이라는 기발한 발상으로 거의 완벽한 밀실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현대 과학, 기술 시대의 완벽한 밀실 살인 사건"의 모범 설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첫머리에서부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등, 단서의 제공 역시 상당히 공정한 편이라 마음에 듭니다.

아울러 탐정역의 사이카와는 제가 싫어하는 "천재형 명탐정"에 가깝지만 엘러리보다는 "트릭"의 우에다에 가까울 정도로 소탈하고 거부감 없는 성격으로 역시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재벌가의 외동딸이자 수학의 천재인 모에는 만화스럽긴 해도 감초로서의 재미는 충분히 가져다 주고요.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천재 마가타 시키 박사의 캐릭터가 아주 멋집니다. "천재 사이코 살인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한니발 렉터 박사에 뒤지지 않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지적하듯이 트릭이 '실제로 쓰이기에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라는 점이 정통 본격 추리 팬들에게는 가장 아쉬운 점입니다.  비현실적이거나 완전 허구는 아니라서 본격물로서 가치를 잃지 않고는 있습니다만...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트릭이거든요. 일부 독자들은 이 트릭 때문에 이 작품을 "SF"로까지 분류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저같은 일반인이 해독하기에는 불가능한 트릭인건 맞습니다. 단서와 복선이 아무리 많아도 말이지요. 

그리고 가장 큰 반전이자 내용의 핵심인 이른바 "트로이의 목마" 트릭은 너무 작위적입니다. 15년이라는 세월동안 은폐가 가능했다는 점, 어느 시점에서의 "교체"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은 여러가지 장치로 설득력있게 설명하고는 있으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뭐, 그래도 흥미진진하고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과학적이론들은 현학적인 재미를 충족시켜 주며, 건조하기는 하지만 건전한(?)묘사는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다른 일본 작품들과는 뚜렷한 차별점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건전하고 밝으면서도 완벽한 연쇄 살인을 다룬 현대 본격물이라는게 이 작품이 가진 최대의 장점입니다. 개인적으로 불만스러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공짜로 읽은 주제에 주절거릴 수는 없겠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내용 추가 : "웃지 않는 수학자" 한편만 번역, 출간되어 아쉬움이 남던 차에 이번에 다시 국내에 출간된다니 더욱 반갑네요. 모쪼록 시리즈 전편이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불량한 표지 디자인과 가격은 다시한번 국내 추리 도서 시장에 대해 재고하게 만드는군요.

PS : 이 작품은 "The Perfect Insider"라는 제목으로 게임으로까지 나와 있다니 게임도 한번 즐겨보고 싶네요. 사이트를 방문하시면 게임 오프닝과 일러스트를 보실 수 있으니 한번 들려보시기를 권합니다.

2015/11/24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유키는 사고로 죽은 약혼녀 도모미의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녀 가족의 산장으로 향했다. 도모미의 부모, 오빠와 친지 등 모두 여덟 명이 산장에 모인 당일, 두 명의 은행 강도가 침입해서 그들 모두를 감금했다. 은행 강도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던 중, 도모미의 사촌 동생 유키에가 칼에 찔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꽤 인기 있는 작품인데 읽는게 늦었네요. 부유한 가족, 그리고 그들과 엮인 인물들이 모인 폐쇄된 산장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설정의 흥미진진한 본격 추리물입니다. 

두 개의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사건, 즉 도모미의 죽음은 마지막에서야 진상이 설명될 뿐더러 범인은 관계자 증언밖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 사건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설정일 뿐이지요. 허나 두 번째 사건인 유키에 살인 사건은 고전 본격물의 원칙에 충실합니다. 일종의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진 기묘한 범죄, 용의자는 공간 내 모두라는 상황 덕분입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유키에를 살해하는건 인질인 아쓰코 외의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전의 상황, 즉 레이코가 몰래 적은 SOS를 지우고 타이머를 망가뜨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 뒤 그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연결되는 추리의 흐름이 설득력 높기 때문입니다. 타이머 관련 트릭 - 범인이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시간만 바꿔 놓은 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망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부순 것 - 도 간단하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허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탓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노부히코의 마지막 증언 - 레이코가 일기 페이지를 입에 넣었으며 그 페이지에 진상이 적혀 있을 것이다 - 부터가 그러합니다. 칼에 찔렸는데 죽어가면서도 일기장의 특정 페이지를 찢어서 입에 넣는다? 인간의 정신력이 아무리 놀랍다 하더라도 이건 무리지요. 그리고 일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필케이스 약통의 약이 정상적인 것으로 밝혀진 이상 큰 증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부히코가 감금된 상태에서 유키에를 죽여야 하는 타당성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누군가를 살해한다? 탈출 후 유키에를 따로 손보는 게 상식적입니다. 최소한 풀려난 뒤 죽이고, 범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게 훨씬 나았겠지요. 진범을 밝히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는 후지의 협박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격한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범인을 밝혀냈다고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노부히코가 자살한 시점에서는 협박할 건덕지가 사라져 버렸으니 다 죽이는 게 당연합니다.

하긴, 이 모든 게 거대한 연극이니 작위적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그보다는 다카유키를 옭아매기 위해 이런 추리쇼를 펼친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단지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도모미의 행동을 유키에가 보고 들었다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했을까요? 다른 추리 소설에서는 복수를 하고도 남을 증거인데 말이지요. 기껏 그걸 보강하려고 거대한 연극을 꾸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범행 증명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성공 가능성도 떨어지는 연극을 벌이는 것 보다는, 산장에서 다카유키를 제압하고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는 게 비용과 시간, 그리고 기분 등 모든 측면에서 나았을 겁니다.
마지막에 노부히코를 다카유키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즉 연극이 실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카유키 역시 그 순간에 노부히코를 죽인다 해도 빠져나가는건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발악을 하는게 납득이 되지도 않았고요. 약혼녀를 죽일 때에도 남이 슬쩍 보고 다른 약임을 눈치챌 수 있는 약으로 바꿔칠 정도로 무신경한 놈이니 이런 대책 없는 행동도 당연하다고 본 걸까요?

아울러 상황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트린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일 뿐더러 설정이 완전 말도 안 됩니다. 은행 강도 같은 케케묵은 설정이 통할 리 없어요. 핸드폰 세대에게는 도저히 먹힐 수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읽으면서 후지가 죽은 줄 알았던 레이코고, 그녀가 사람들을 동원해 도모미 사건의 진범을 밝히려고 하는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였다면 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네요.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화자라 할 수 있는 다카유키가 도모미 살해를 꾸몄다는 것 역시 반칙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과 스토리를 보면 영상물, 혹은 만화가 더 어울립니다. 유일한 가치라면 모든 잠재적 범죄자들은 최후의 그 순간, 즉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속영장이 청구될 때까지는 무조건 무죄를 주장하며 헛짓거리하지 말고 버티라는 교훈 하나만큼은 제대로 전달해 준다는 것? 그 외의 무언가는 딱히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덧붙이자면, 범인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 도주 중인 흉악범을 가장하고 범행을 저지른다는 유사 설정의 작품인 소년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사건"과 비교해 본다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 죽이겠다!("비련호 살인사건") 와 누군지는 알지만 확실치 않으니 확인해 보자!("가면산장 살인사건")의 차이인데 저는 "비련호 살인사건" 쪽에 점수를 더 주고 싶네요. 

그나저나, 최근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리뷰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유를 모르겠군요. 리뷰는 별거 없지만 거의 2주에 걸쳐 썼습니다. 리뷰 완성도도 낮고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지만 이게 한계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026/02/01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2025)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호주 국빈 만찬이 열리던 밤, 백악관 관리 총책임자 A.B. 윈터가 시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측근 해리 홀린저 등은 자살로 무마하려 했지만, 워싱턴 경찰 국장이 수사를 위해 부른 명탐정 코델리아 컵은 살인 사건이라며 백악관을 폐쇄하고 모든 관계자와 초대 손님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여러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되었으나, 국회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세 번째 남자)이 밝혀져 다시 코델리아 컵이 소환되는데...

넷플릭스에서 감상한 추리 드라마입니다. 총 8회 에피소드, 시간으로는 약 8시간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장편 영상 추리물을 본 건 처음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안락의자형 추리물을 영상화한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컵 탐정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전개의 대부분인데, 이를 단순히 나열했더라면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언 장면과 컵 탐정이 추리한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왜곡된 증언과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범인 릴리 슈마커가 대통령의 배우자 엘리엇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건 발생 당시 2층을 비우고, 이후 사건 현장은 옐로우 룸을 드나드는 문을 폐쇄하는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핵심 단서인데, 릴리가 인터뷰 중 실제로 엘리엇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이런 장면은 소설로는 구현하기 힘든, 영상물이기에 가능했던 연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단서들, 예를 들어 백악관 내부 그림의 이동으로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 등도 모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정 코델리아 컵도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마을과 인간 관계의 전문가인 미스 마플처럼, 자신이 지닌 "탐조"라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던 덕입니다. 
스스로를 천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무능을 드러내며 면박을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 또한 인상 깊습니다. 고전 본격물의 "잘난 척하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백악관 관계자들의 무능과 거짓이 워낙에 강하게 드러나는 덕분에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추리의 절정에서 선보이는 추리쇼도 명탐정답게 화려합니다. 릴리가 범인임을 밝혀내고, 핵심 증거인 시계를 찾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카일리 미노그의 깜짝 카메오 등장도 재미요소였어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악관 내부 묘사입니다. 지나치게 희화화되어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조직이 이렇게 무능하게 묘사된다는 건 과장이 지나치지요. 백악관의 전통과 규범은 무시한 채, 개인의 아집으로 만찬을 망친 요리사 실라와 파티셰 디디에, 알코올중독 집사, 그리고 불청객과 정체 불명의 게스트까지 들여보낸 경호원들 모두 다음 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게이라는 설정 역시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풀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인 릴리가 퍼스트 레이디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테고요. 여러모로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였습니다.

추리적인 면에서도 억지가 있습니다. 릴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대통령 동생 트립, 엔지니어 브루스, 파티셰 디디에 등이 우연히 개입한 탓입니다. 거의 동시에 사건 현장에 모였던 여러 인물이 벌인 우발적 행동으로 인해 사건이 꼬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건이 호주 국빈 만찬 중에 벌어졌고, 국빈들을 감금했다는 설정도 무리입니다. 백악관 직원을, 백악관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점은 이미 코델리아 컵에 의해 밝혀졌던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국빈들은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의 감금을 유지하더라도요.

후더닛물답게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는 있지만, 정작 범인 릴리의 동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점도 아쉽습니다. 릴리는 재벌가 출신으로 애초에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희박합니다. 실라나 엘시처럼 직접적인 "해고"라는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횡령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의 딸인 릴리가 이 정도 이유로 해고되거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합니다. 설정의 과도함과 동기의 빈약함 같은 단점은 분명하지만,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볼 만합니다.

2022/05/29

나쁜 토끼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2점

나쁜 토끼 - 4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가출 소녀 미치루를 찾는 의뢰를 수행하던 중 칼에 찔렸지만, 이 사건을 해결한 덕분에 로열 할리우드 호텔 체인 회장 다키자와의 의뢰를 받게 되었다. 미치루의 친구이기도 한 딸 미와를 찾아달라는 의뢰였다. 고압적인 다키자와 때문에 조사는 난항을 겪었지만, 미치루의 도움으로 공통의 친구였던 아야코가 미와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아야코는 마약 중개인에게 살해당했고, 소녀들의 공통 친구인 가나도 실종되는 등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결국 하무라 아키라도 납치 후 감금당하고 마는데....

와카타케 나나미의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첫 장편입니다. 국내 소개된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초기작이 지금 소개되는게 조금 뜻밖이네요. 

하무라 아키라의 불행은 이 작품에서도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가출 소녀를 집으로 데려오는 간단한 의뢰에 미친 강간마 탐정이 끼어드는 바람에 격투 끝에 발이 부러지고, 친구가 교제하는 남자가 사악한 혼인 빙자 사기범이라는걸 알게 되고, 또 다른 실종 소녀를 찾는 의뢰는 자기 밖에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처음부터 고생하다가 납치 당해서 이틀 동안이나 갖히고, 마지막에는 사냥 게임의 사냥감으로 죽을 뻔 하니까요. 이 정도면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도 불행과 고생으로는 1, 2위를 다툴만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오히려 억지스러운 설정 문제가 도드라집니다. 비교적 현실적이며, 일본의 현실에 잘 어울리는 하드보일드물이라고 여겨지는 후기작 - 특히 살인곰 서점 시리즈 - 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에요. 부유하지만 고압적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다키자와 가족과 다이라 가족 묘사부터가 그러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흉내내지만 캐릭터들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입니다. 딸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내다 버리면서 거액의 용돈을 주고 남자와 만나는건 아무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다키자와, 어린 시절 유괴당한 뒤 죽은 아들을 못 잊어 딸을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다이라 미치루의 엄마 등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인물들이 한 가득입니다. 하무라 아키라의 불행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자기만 아는 괴물로 묘사되는 것 역시 읽기 불편했고 현실적이지도 못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들이 버젓이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고, 경찰서에서 유력한 용의자가 눈에 젖가락을 꽂는 방법으로 자살한다는 식의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현대물"이기 때문입니다. 개중 백미는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명사들의 모임 '28회'에서 사람을 사냥감으로 하는 게임을 했다는 진상입니다. 

사실 사냥꾼이 사람을 사냥한다는 소재를 가진 장르 문학은 많이 있습니다. 자기 소유의 섬으로 난파해 온 생존자들을 사냥하는 게임을 즐긴다는 내용의 "가장 위험한 게임"이 우선 떠오르지요. SF "불사 판매 주식회사"도 고용한 인간 사냥꾼들과 승부를 펼치는 이야기가 등장하며, 단편 "요트클럽"은 이 작품처럼 나름 상류층 사람들 모임에서 친목 행사로 사람 사냥이 벌어진다는 설정이고요. 하지만 이 작품처럼 막 나가지는 않아요. "불사 판매 주식회사"은 이야기가 허구라는게 이미 시대 배경 등으로 등장하고, "아주 위험한 게임"은 개인 소유의 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 벌이는 게임입니다. "요트클럽" 역시 망망대해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박 승객들을 사냥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나마 말은 됩니다. 그러나 현대 일본에서 노숙자도 아니고, 평범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사냥 게임을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아무리 봐도 억지스러우며 설득력도 낮습니다. 

노나카가 사냥 게임 사냥감으로 쓰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유혹에 빠지기 쉽고 시끄러운 주변 인물이 없는 젊은 여자를 찾고 있었다 하더라도, 친구 딸의 친구를 끌어들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최소한 다른 연줄을 활용하는게 맞았어요. 이 건을 계기로 사기가 파토날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작위적이며 불필요했던 요소들도 너무 많아요. 가면을 쓰고있던 딸 미와를 사살한게 아버지 다키자와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하무라 아키라를 납치해서 이틀 동안 가두어 놓는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정황을 보면, 감금 장소에 시체를 묻었다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을 거에요. 범인들의 범죄 행각을 보면 하무라 아키라 한 명 더 죽인다고 해도 죄상이 달라질 것도 없고요. 사건이 커질걸 우려했다? 미와와 가나의 실종은 경찰도 알고 있었습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가나야 그렇다쳐도, 대기업 회장 다키자와의 딸 실종은 이야기가 다르지요. 이래저래 하무라 아키라를 죽여서 입을 막는게 당연했습니다.

이외에도 하무라의 친구 미노리가 혼인 빙자 사기범 우시지마 준타와 교제하면서 일어나는 트러블, 도토종합리서치 사원 세라가 일으킨 트러블들도 불필요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보통 정통 하드보일드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보이는 트러블 들이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요란스럽기만 할 뿐, 전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냥 분량만 차지할 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었습니다. 노나카가 범인이라는걸 추리해 낸 것처럼 그려지지만, 당연히 노나카밖에 용의자가 없게끔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대단한 추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독자가 함께 고민해볼 만한 단서도 딱히 제공되지 않으며, 제목이자 게임의 유래가 되는 동요의 존재는 억지스럽기만 합니다. 대부분의 수사는 탐문, 그리고 관계자들 증언을 통해서 나아가고 있어서 탐정이 딱히 필요한 이야기로 보이지도 않았고요.

물론 볼만한 부분이 없는건 아닙니다. 하무라 아키라라는 독특한 탐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에요. 그녀에 대한 세세한 일상 묘사로 소심하면서도 정의로운 그녀의 매력이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미와의 엄마 아스미가 자살한 탓에 노나카가 궁지에 몰리는 과정이라던가, 미치루가 발가락을 잘 쓰는게 특기라는 극 초반의 복선도 잘 활용되고 있고요. 악당들이 모두 몰락하고 만다는 결말은 특히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후반부 작품들 수준에는 확연히 미치지 못합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11/27

로그 메일 - 제프리 하우스홀드 / 이나경 : 별점 2.5점

로그 메일 - 6점 제프리 하우스홀드 지음, 이나경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고위층 명사가 유럽 어딘가의 독재자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 진짜로 죽이려고 했던건 아니고, 심심풀이로 벌인 게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은 모진 고문 뒤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이 여전히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불명예를 걱정한 그는 국가의 도움을 받지않고 홀로 도주하여, 과거 추억이 어려있던 도싯 지방에 은신처를 마련하는데...
.

2차 대전 직전인 1939년 출간된 전설적인 서스펜스 스릴러.
사실 저는 제목만 보고 최첨단 IT 소재물이라고 착각해 왔었습니다. Log mail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알고보니 Rogue Male 이더라고요! 외톨이 수컷, 일본식 표현으로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와 비슷하겠지요? 일종의 사냥감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끔은 흉폭함과 야성을 드러내는 주인공에게 딱 들어 맞는 제목입니다.

하여튼, 여러 미스터리 랭킹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작품으로, 국내에는 상당히 늦은 2019년에 출간되었는데 명성답게 서스펜스, 긴장감은 발군입니다.
외국에서 망신창이 상태로 이름모를 낚시꾼, 그리고 영국 배의 일등 항해사 베이너의 도움을 얻어 귀국한 뒤, 도싯 지방의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에 위치한 은신처로 이동하기 위해 여행하는 부부로부터 사이드카가 달린 자전거를 구입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고, 은신처 위치가 좁혀질 위기에 처하자 경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른 곳을 은신처처럼 만들어 위장하고, 결국 외국 비밀 요원 퀴브-스미스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좁은 공간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과정 모두 읽는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러가지 잘 안배된 설정들도 긴장감을 더해줍니다. 대표적인게 주인공이 고문을 받아 '눈에 상처'를 입었다는 설정입니다.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탓에 원래 계획이었던 시골 마을에 몰래 숨어드는게 불가능해져버리니까요. 선글라스로 가려도 누구나 눈에 이상이 있다는걸 눈치채버리고 말거든요.
비교적 초반에 비밀요원 중 한 명을 죽이는 바람에 영국 경찰들에게도 쫓기게 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주인공의 눈 이상이 전국에 알려졌을 뿐더러, 외국 정보요원들 뿐만 아니라 영국 경찰들도 주인공을 체포하려 해서 이중고를 겪게 됩니다.

주인공의 실력과 의지, 인내력만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조력자 - 특히 미녀 - 를 만나 도움을 얻는 헐리우드 스릴러스러운 전개는 전무합니다. 처음 탈출할 때 외국인 낚시꾼과 일등 항해사 베이너가 선선히 도와주는 장면같이 운에 의지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허용 범위 안쪽입니다. 낚시꾼은 독재 반대파일 수 있으며, 베이너의 경우는 주인공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라는 설정 덕에 도와주었을 거라는 암시를 주는 식으로 합리적인 설명도 덧붙여져 있고요.

쫓고 쫓기는 대결 구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치밀하고 끈기있는 추적으로 주인공의 은신처를 알아낸 퀴브-스미스 대령은 라이벌로 손색이 없습니다.
더 놀라왔던건 만만치 않았던 영국 경찰의 수사력 묘사였습니다. 도싯 시골 숲 속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있던 주인공에게 거의 한끝발 차이로 육박해 올 정도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맞부닥치는 바람에 정면에서 도주극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대방들의 추적을 통해 원래 사냥꾼이었던 주인공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상황을 잘 알려주는 묘사들도 몰입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몇가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독재자 암살 시도가 그러한데요, 주인공은 일관되게 단지 자기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퀴브 -스미스에 의해 은신처에 산채로 감금당한 뒤에 갑자기 약혼했던 연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는 동기가 튀어나옵니다. 이럴거라면 처음부터 당당히 죽일 의도가 있었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이 남의 나라 지도자를 쏘려고 했다가 잡혔는데, 이게 왜 외교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게임에 불과했다는 말을 외국 정보부에서 선선히 받아들여서 사고사로 죽이려 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주인공은 상당한 고위층으로 보이기에, 당연히 좋은 협박거리(?)로 사용될 수 있었으니까요.

전체적으로 흥미로운건 사실이지만, 경찰 추적이 근처에 이른 탓에 가짜 은신처를 만든 뒤 그 곳에 숨어있다가 도주한 것처럼 꾸미는 장면은 과했습니다. 도주 경로와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경찰 바로 옆에 숨는 묘기를 부릴 것 까지는 없었어요. 은신처를 감추려다가 본인이 위기에 처하는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잖아요. 또 그렇게 잘 숨을 수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은신처에서 숨어 있는게 더 나았을테고요.
게다가 이 시도는 퀴브 -스미스에 의해 숨겨두었던 사이드카가 드러나, 은신처 바로 근처까지 퀴브 -스미스가 찾아왔을 때의 행동과는 반대라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퀴브 -스미스가 근처 농장을 다 뒤져서 오솔길이 은신처라는걸 알아냈다고 추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앞서 경찰이 나타났을 때 처럼 다른 곳으로 도주했다고 위장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도주했어야 했습니다. 시간도 충분했었고요. 하지만 은신처에 틀어박혀 숨어있는 방법을 택했다가 산채로 감금당하고 말지요.

주인공을 은신처에 가둔 퀴브 - 스미스가 바로 그를 죽이지 않고 회유하는 척 연기를 하는 장면도 이상했습니다.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를 영 모르겠더라고요. 영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한 목적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별로 대단한 서류가 아니라는건 주인공과 퀴브 -스미스의 대화로 이미 드러날 정도이고, 주인공 서명 정도를 위조하는게 그리 어려울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영국 정부와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도 21세기의 한국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명예가 예상된다는데, 도대체 무슨 불명예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주인공이 "사실 내가 아는 영국인 중에 그가 가져온 망할 문서에 서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거부하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고집 때문에 거부할 것이다."며 서명을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도 퀴브-스미스와의 마지막 대결이 아쉬웠습니다. 총이 없어서 고대 로마의 노포와 비슷한 무기를 직접 만들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퀴브 스미스가 환기구를 막았던 자루를 빼다가 주인공이 쏜 화살에 맞고 죽는건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주인공에게 총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환기구로 고개를 내민다는건 영 석연치 않았습니다. 물론 직전에 주인공이 서명을 하겠다며 퀴브-스미스를 구워 삶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총이 없다는걸 퀴브-스미스가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내용을 보강하던가, 아니면 퀴브-스미스가 예상하지 못한 무기를 사용하는 식으로 끌고가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최소한 주인공과 자웅을 겨룬 라이벌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명성의 이유는 잘 알 수 있지만, 지금 시점의 한국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낡은 느낌도 없지 않아서 감점합니다.
이런 작품은 아무래도 영화로 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과거 2번이나 - 그 중 한 편은 흑백 고전 영화 시대의 거장 프리츠 랑 감독이고, 또 다른 한편은 명배우 피터 오툴 주연 - 영화화 되었더군요. 곧 베네딕트 컴버비치 주연으로 다시 영상화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 기대되네요.

2019/08/04

조용한 무더위 - 와카타케 나나미 / 문승준 : 별점 3점

조용한 무더위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와카타케 나나미의 '유능하지만 불운한' 여성 사립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입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백곰 탐정사 탐정이자 미스테리 전문 서점 '살인곰 서점'의 거의 유일한 아르바이트 생으로 2014년 7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벌어진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 여섯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마흔을 넘긴 나이를 제외하고는 독신에다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산다는건 여전하네요. 나이 탓에 어깨 근육통 등 건강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는 탐정으로서 꽤 유능합니다.

읽기 전에는 아무래도 일상계에 가까울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현재 모습을 보면 딱히 대단한 사건에 휘말릴걸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처럼 내용과 사건들이 상당히 묵직해서 의외였습니다. "파란 그늘"만 들치기라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이며 그 외의 작품들에서는 강력 범죄들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작품별로 분류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조용한 무더위" : 살인 미수
  • "아타미 브라이튼 록" : 불법 약물 제조에 살인과 사체 은닉
  • "소에지마씨 가라사대" : 살인과 감금
  • "붉은 흉작" : 호적 도용과 살인 강도
  • "성야 플러스 1" : 살인 사건

이런 강력 범죄들이 왁자지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일어나고, 시니컬한 하무라 시점의 묘사가 더해져 독특한 재미를 안겨다 주는 이 시리즈의 매력 포인트도 잘 살아 있습니다. 진지한 주인공이 자신도 휩쓸린 대소동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는, 우디 알렌이 연상되는 블랙 코미디 스타일이지요. 역시나 시리즈의 매력인 평범한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악의'도 곳곳에서 드러나고요. 추리적으로도 잘 정리되어서 깔끔합니다.

무엇보다도 '미스테리 전문 서점'이라는 '살인곰 서점'이 주요 무대이며, '살인곰 서점'에서 매월 벌이는 '미스터리 투어'가 이야기의 핵심 소재 중 하나라는게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여러 추리 소설과 작가들이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파란 그늘"에서 사건의 진상은 작 중 언급되는 "레베카"의 티 타임 비밀 레시피에 얽힌 진실이 드러난 덕분입니다. "아타미 브라이튼 록"에서 피해자가 영국 추리 소설을 읽었다는 수상한 증언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고요. "성야 플러스 1"은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1"이 핵심 소재 중 하나로 사용됩니다. 마지막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살인곰 서점 점장 도야마의 입을 빌어 작 중 등장하는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에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와 추리 모두 충분한 수준이며, 추리 애호가의 덕심(?)을 잘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추리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은 작품이에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란 그늘" 7월

단편집을 개시하는 첫 단편입니다. 더위에 대한 하무라의 푸념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그리고 '뱀녀'의 행방을 쫓다가 그녀가 택배 배달원과 손을 잡은 들치기범이라는게 밝혀진다는 전개가 빠르면서도 설득력 높게 진행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무라가 범인의 대략적인 인상 착의와 차림새, 범인이 이동한 방향이라는 몇 안되는 단서로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도 꽤 설득력 높고요. 평범한 인간의 '악의'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 발 벗고 나서는 교통 사고 현장에서 죽어가는 피해자의 가방을 훔치는 범죄가 그러하지요. 모친의 애끓는 호소에도 가방을 버렸다고 하지만 정작 돌려달라고 한 레시피 노트를 연인에게 선물한 사실을 밝히지 않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 추리 모두 일정 수준 이상입니다. 이어지는 작품들에 기대를 갖게 만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런 책을 쓴 입장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사건의 핵심인 쓰구미의 노트에 수록되었던 소설 "레베카"와 관련된 레시피가 진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상세하게 알려주지 않는 레시피 속 비밀 재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어떤 맛일지 아주 궁금하네요. 서점 점장인 도야마가 기획한 7월 미스터리 페어의 주제가 "달콤한 미스터리 페어" 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추리 소설에 관련된 레시피 책들도 소개되는데 그 중 "Len Deighton's Action Cookbook"은 꼭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작가 렌 테이턴의 레시피인데 레몽 머랭 파이 레시피가 실려 있는 등 디저트 부분이 충실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스터리 티 파티 계획도 발군이에요. 미스터리에 등장하는 과자들을 죽 늘어놓고 티 파티를 열다니! 아, 이런 서점이 집 근처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한 무더위" 8월

전편에 이어 무더위가 이어집니다. 무더위가 일종의 흉기로 사용되기도 하고요. 자치회장은 어머니를 열사병에 걸리게 할 속셈이었거든요. 이 아이디어는 실제 뉴스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설득력도 강합니다. 계절 묘사도 발군입니다.

하지만 범행을 위해 자치회장이 무리하게 거리를 비운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남의 집 에어컨 소리를 귀담아 들을 이유는 없죠. 또 거리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있을 수도 있는 등 어차피 통제는 불가능하니까요. 하무라의 탐정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것도 좀 과했습니다. 진상을 깨닫게 되는, 자치회장의 볼펜은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점도 감점 요소죠. 이런 부분은 조금 더 정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타미 브라이튼 록" 9월

하무라 아키라가 이동하는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만 이 작품은 특히나 이동이 잦아서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악의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이 있는 범죄 모의라는 점, 그리고 과거의 수수께끼를 다양한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현재 시점에 밝혀낸다는 고전적, 왕도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를 깔끔하게 전개하는 솜씨는 대단합니다. "브라이튼 록"이라는 소설을 시타라 소가 읽은 시점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본인이 발로 뛰어 얻어낸 정보와 엮어 진상을 도출하는 하무라의 활약도 눈부실 정도에요. UFO에 미친 부동산업자, 바퀴벌레를 키우는 전 상사맨같은 독특한 등장인물들도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묘사와 맞물려 재미를 더해줍니다.

하지만 결말이 '그래서 어쨌는데?' 수준으로 마무리 되어서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수십년 전 사건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무라가 자신이 애써 진상을 밝힐 필요도 없었다는 점에서는 이게 최선이었겠지만요. 그 외 추리적으로도 '자백'에 의존할 뿐이라 - 다른건 몰라도 시타로 소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백이 아니라면 알아낼 도리가 없었으니 - 조금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소에지마씨 가라사대" 10월

하무라가 서점에서 전화와 인터넷만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니 현대적인 '안락의자 탐정물' 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 중 미스터리 페어의 주제가 '학자 탐정' 으로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주는 것도 재미있어요. 이런저런 지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은 동일하니까요. 추리 애호가를 위한 정보도 한 가득입니다. '학자 미스터리 페어'라는 페어의 주제는 심심하지만 그만큼 소개되는 작품들이 친숙해서 마음에 들더군요. '싱킹 머신' 반 두젠 교수를 비롯한 다양한 학자, 박사들이 등장하거든요. 또 피해자가 리모델링 업자라는 걸 듣고 '딕 프랜시스의 주인공이 이런 일을 했었는데' 라고 생각하는건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너무 뻔해서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은퇴한 변호사가 리모델링 업자에게 판 저택이 동기일거라는게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하무라의 추리대로 저택에 사체가 묻혀 있었다는 결말도 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변호사 조카가 호시노 구루미를 살해한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어설퍼요. 운 좋게 용의자가 소에지마씨로 특정되었을 뿐, 용의자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궁지에 몰린 소에지마씨가 무라키를 감금하여 인질극을 벌인다는 설정도 지나쳤습니다. 이런 류의 소동극이 작가의 장기이기는 한데, 자극이 자니치다 보면 무덤덤해지는 법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붉은 흉작" 11월

하드보일드 팬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드보일드 작가가 의뢰인인데다가 주요 소재가 "붉은 수확"과 비슷한 사건을 일으킨 다카노바바의 저주받은 땅이니까요. 심지어 고가 간타가 오기 노보루를 살해한 흉기도 '얼음 송곳'입니다!
삼천만엔이라는 거금을 가지고 있지만 드러내 쓰지도 못하고 홀로 약간의 사치만 부리면서, 죄책감에 몸부림치다가 죽어간 불쌍한 남자가 주인공이며, 그의 평생의 은인은 광인이 되어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간다는 설정도 하드보일드스러웠어요. 냉정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 선생의 한 마디는 화룡 정점이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애매합니다. 가짜 츠노다 지로가 자주 다니던 지압원에서 의료 보험증 사본을 입수하여 '고가 간타'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 장소를 찾아가고, 그 곳에서 고가 간타가 저지른 살인 사건과 참고인이었던 츠다 지로를 확인하는 과정이 일사천리이기 때문입니다. 오기 노보루가 지녔지만 사라진 삼천만엔을 츠다 지로가 손에 넣었을 거라는 추리는 딱히 중요한 요소는 아니고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드보일드라는 의미 외의 가치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성야 플러스 1"

개빈 라이얼의 "심야 플러스 1"에서 따온 제목이죠. "심야 플러스 1"은 서스펜스 가득한 모험물인데 이 이야기 속 하무라에게 닥친 시련도 "심야 플러스 1" 못지 않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부탁을 들어주고 임무를 완수하는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은 성녀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에요.
그런데 조금 의아했던건 일본인들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걸 굉장히 두려워 한다는데,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하무라에게 폐를 끼치는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무라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작 중 하무라가 부탁받은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한 여정의 정도는 지나친 편입니다. 중간의 여정들은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요. 솔직히 중간 과정들은 불필요했습니다.
소노다 씨가 "심야 플러스 1"의 가짜 사인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책 도둑들이 사인본을 노린다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하무라의 말대로 옥션에서 2백불 정도면 살 수 있는데 노상강도짓을 할 이유는 없지요.

추리적으로도 별 내용은 없습니다. 백골 사체는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어차피 본 편 정보로 추리가 가능한 사건은 아닙니다. 고이시바라 미야코 할머니와 사위의 칼부림 역시 억지스러운 요구에 불과할 뿐이고요. 오히려 사위가 딸을 살해한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더라면 말이 되었을텐데 말이죠. 책을 날치기한 2인조의 경우는 앞서 말씀드렸듯 사건 자체의 현실성이 약해서 추리의 여지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하무라의 불운을 잘 드러내고 있고, 중간중간 벌어지는 사건들이 많아서 왁자지껄한 블랙 코미디로 본다면 괜찮습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고이시바라 미야코와 사위 사이에서 벌어진 칼부림입니다. 정말 급작스럽게 말려들었는데 미야코 할머니가 하무라의 가방을 잡고 놔주지 않는 등의 황당한 상황이 이어지거든요. 이를 슈톨렌이 해결한다는 결말도 재미있었고요. 그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다 극복하고 모두가 원하는 상황으로 매조지하는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해지는게 크리스마스의 핵심요소이긴 하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지만 재미 만큼은 확실합니다.

2021/11/25

사라진 세계 - 톰 스웨터리치 / 장호연 : 별점 3점

사라진 세계 - 6점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래의 지구, QTN입자가 날아와 환각에 빠져 죽게 만드는 터미너스 현상을 일으켜서 인류는 멸망해버렸다. 1980년대의 미국 해군 우주 사령부는 ‘인정되지 않는 미래 궤적(Inadmissible Future Trajectories)’, 즉 IFT라는 다중차원의 미래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 미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터미너스 현상을 막기 위해 사령부는 여러 요원들을 IFT 미래로 보내어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터미너스 현상이 일어날 시점만 2666년에서 2456년, 2121년... 등으로 계속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터미너스 현상을 일으키는 QTN 입자가 향하는 길을 열어준 탓이었다.

그리고 1997년 현재, IFT로의 탐험을 떠났다 돌아왔던 패트릭 머설트의 가족이 살해되고 큰 딸 매리언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수사에 IFT 귀환병 출신 섀넌 모스 특별 수사관이 투입되었다. 귀환병 관련 사건에는 해군 범죄 수사국이 참여되는게 규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 머설트가 탑승했던 '리브라 호'는 공식적으로 귀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건 해결을 위해 20여년 후의 IFT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섀넌의 수사 결과, 리브라 호가 QTN 입자가 있는 에스페란스 별에 착륙했던게 터미너스 현상을 지구로 불러온 원인이었으며 패트릭 머설트 사건은 역시 리브라 호 귀환병이었던 하이델크루거가 이끄는 테러 조직이 일으켰다는게 밝혀졌다. 하이델크루거는 추락한 리브라 호의 B-L 엔진이 가동될 때, 바르게도르 나무 주변에 생겨나는 시간의 틈을 이용하여 다른 IFT의 '메아리' 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넓히고, 터미너스 현상을 초래할 해군 사령부의 IFT 탐험과 관련된 모든 것에 거대한 테러를 가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누설하려던 머설트를 가족과 함께 살해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섀넌이 이를 알아낸 직후, 터미너스가 1997년의 지구를 덥쳤다. 섀넌이 패트릭 머설트의 증언을 확보하여 해군 사령부와 거래 하려던 변호사를 하이데크루거의 습격에서 구해준게 원인이었다. 해군 사령부는 이 증언을 통해 에스페란스의 위치를 알아내어 전함을 보냈고, 전함이 지구로 귀환하자 QTN 입자가 전함을 따라와 곧바로 지구를 덥쳤던 것이었다. 섀넌은 바르게도르 나무 근처 시간의 틈을 이용해, 과거 리브라 호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시점으로 이동하여 리브라 호의 자폭이 성공하도록 도울 결심을 하였다. 성공하면 단 하나 뿐인 시공간 '굳건한 대지'는 안전하게 될 터였다...

시간 여행 (타임 리프)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5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 SF 범죄 수사물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1986년 리브라호 사고, 1997년 현재, 그리고 약 20년 후의 IFT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너무 평범한 제목 탓에 손길이 가지 않았었는데, 읽다보니 굉장히 재미있어서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SF지만 범죄 수사물 측면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던 덕이 큽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사건을 수사한다는 설정이 잘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시공간('굳건한 대지')의 사람들이 IFT 미래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아내어 그들과 사건의 관계가 드러나는 과정을 꼼꼼한 복선 배치를 통해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대표적인게 FBI 수사관 네스터입니다. 섀넌은 미래의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과거로 돌아온 뒤 그가 미래에서 살던 집이 하이텔크루거 일당의 은거지였다는걸 알게 됩니다. 네스터가 자기 것이라고 말했던 무기들 역시 원래 테러범들 것이었고요. 즉 하이델크루거 일당과 네스터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엮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다른 미래라도, 시간의 흐름 상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거지요. 다른 인물들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또 비교적 초반부에 니콜과 절친한 친구가 된 덕분에, 과거의 그녀의 도움을 받아 임무를 완수하게 되는 식으로 연결된 '인간 관계'가 사건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식으로 관계를 잘 구축해 놓고 있고요. 무고한 사람을 살리려던 섀넌의 노력이 터미너스 현상을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불러오게 되었다는, 일종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SF적인 측면으로도 볼 만 합니다. 저같은 과학 둔재도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 기술과 이론들을 이야기와 잘 결합하여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 이동이 핵심이지만 그 원리나 기술을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아요. 그냥 소설에 잘 어울릴 설정들을 적절하게, 작품과 잘 어울리게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새년이 '굳건한 시간'에서 A라는 IFT 미래로 이동한 뒤, 임무를 마치고 원래의 '굳건한 시간'으로 돌아가게 되면 A라는 IFT 미래 시공간 자체가 소멸하여 무로 돌아간다는 설정처럼요. 하지만 독자가 충분히 설정에 대해 이해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은 잘 그려내고 있기에, 이 설정이 타임 패러독스를 없애는 완벽한 설정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이 비밀을 아는 해당 IFT 시공간 사람들이 시간 여행자를 감금한다던가 (그가 돌아가면 시공간이 소멸해버리니), '굳건한 시간' 외의 시공간에서 온 사람들을 '메아리'라고 부른다던가 하는 부가적인 설정들도 흥미롭게 묘사됩니다.
시간 점프 기술을 이용하여, 미래에서 터미넌스를 막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지 않았을까 싶어 미래로의 이동을 반복하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해서 모든 미래 시점에도 터미넌스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역시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는 거지요.

하지만 IFT 미래로의 탐험을 빼면, 수사물이나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이 '리브라 호' 선원이었던 하이델베르그라는건 비교적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머설트가 리브라호 귀환병이라는걸 알고 난 뒤에도 리브라 호 선원 명단을 전체 조사하지 않았던 해군 수사 본부의 무능함만 눈에 뜨일 뿐이지요. 이런 기본적인 수사도 하지 않고, 모든 수사를 IFT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미래에서 언제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 알아낸 후,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잠복 등으로 사건을 막는게 전부라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위기와 액션 묘사가 출중한 덕에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래서야 수사물이라고 하기도 어렵겠지요.

또 불필요했던 설정과 묘사도 너무 과했습니다. 하이델베르그가 해군 우주 본부 테러로 아득한 시간과 공간 탐험을 막고자 하는 동기부터 그러합니다. 납득할 수는 있지만 오버스러웠달까요. 몇몇 주요 인물만 암살하면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패트릭 머설트 가족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손톱을 뜯어낸 이유가 '손톱으로 만든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건 쓰잘데없는 설정의 최고봉이고요.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뿐더러, 말 그대로 '손톱으로 만든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진상은 허탈하기만 했거든요. 사건 현장마다 뭔가 흔적을 남긴다는 전형적이고 흔해빠진 싸이코 범죄물 설정에 집착한 듯 한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앨릭 플리스가 패트릭 머설트의 딸 매리언을 납치해서 바르게도르 나무에 묶은 이유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녀가 집에 없었을 때 하이델베르그 일당이 다른 남은 가족을 죽인건 말이 됩니다. 도망간 패트릭 머설트를 처형한 것도 말이 되고요. 그렇지만 일당이 메리언을 찾아내서 죽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앨릭이 하이델베르그 일당인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며, 설령 그가 일당이었다 쳐도, 구태여 바르게도르 나무까지 끌고가 묶어 놓는건 설명이 되지 않아요. 죽이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가족과 구분하여 처단할 이유는 없으니가요. 사건 수사에 집착하는 섀넌 모스의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일당과 접점을 만들고 마지막에 리브라 호 자폭으로 전개하기 위해 필요했던 소재인데, 조금 더 상식적으로 말이 되게끔 전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하이델베르그가 섀넌 모스를 생포한 뒤, 반란이 일어난 직후의 리브라 호로 데려간 이유도 이해할 수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리브라 호에 감금되었던 섀넌 모스가 추락 직후 니콜에 의해 구조되었던건 무려 11년이 지난 뒤였다는 이상한 시간의 뒤틀림도 설명은 전무한, 작위적이고 편의적인 전개였고요.
이런 내용은 몽땅 들어내 버리고, 생포된 섀넌 모스가 하이델베르그를 어떻해든 설득해서 함께 리브라 호를 파괴하러 간다는게 더 명쾌했을 겁니다. 하이델베르그는 분명 과거 리브라호로 이동한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의 행적을 보면 당연히 현재 시점의 '굳건한 대지'로의 탈출 방법도 알고 있었을테니까요. 반란만 제압하고 함장이 자폭하게 도와주고 탈출하면 그만이지요.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든다면 이렇게 각색할거라고 확신합니다! 

아울러 시간 여행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리브라호를 자폭시켜 블랙홀로 빨아들이면 터미너스가 없는 '굳건한 대지'가 유지될 수는 있습니다. 리브라호가 터미너스를 유발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미래는 다양한 우주로 점프하면서, 과거는 '굳건한 시간'의 과거로 갈 뿐이라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IFT 미래로 이동 후 복귀할 때 그 IFT 미래 시공간은 소멸하는데, 과거로 이동 후 죽거나 복귀하면 왜 그 과거에 관련된 시공간은 소멸하지 않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IFT 미래 시공간 이동 기술은 600년 후의 미래 기술을 1980년대 현재 기술로 양산 가능하도록 만든거라는 설정이 잠깐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과거로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나마 이런 설정들은 그래도 전개에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코트니 김이 살아있고, 섀넌 모스가 임신했다는걸 알아채는 1986년의 한 장면으로 끝나는 마무리는 영 이상했습니다. 코트니 김의 죽음은 리브라 호와는 무관했기에, 과거의 리브라호 자폭이 코트니 김이 살아있는 미래로 이어질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섀넌 모스가 코트니의 오빠와의 관계로 임신했다는걸 알아챈다는건 더 문제에요. 원래 코트니가 살해되기 전에 가졌던 관계이니, 현실의 섀넌도 임신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임신한 섀넌 모스는 원래 작중의 섀넌과 그녀 어머니 관계와 유사해서, 시공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납득할 수 없는 과한 사족에 불과했다 생각되네요. 앞서 이야기했듯 '현재'의 섀넌 모스가 '과거'로 돌아가 죽었다면, '과거'의 미래가 바뀐다는건 이 작품의 시공간에 대한 기본 전제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읽는 동안은 단점을 떠올리기 힘든 재미를 갖춘 작품입니다. 추락한 미래에서 온 우주선의 엔진 점화로 시공간이 뒤틀려 연결된다는 설정은 예전에 읽었던 다카미 요시히사의 "화석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멸망할 미래에서 과거로 탈주했다는 점, 탈주용 우주선 엔진이 현재에 폭주하여 타임 패러독스를 일으키는 등 유사한 점이 많이 느껴졌고요.
그러나 결말까지 이어지는 깔끔한 전개는 이 작품 쪽이 훨씬 낫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영상물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와 내용인데, 약간의 설정 구멍을 보완하여 만들어주면 참 좋겠다 싶네요.

2024/03/10

10호실 - 리 차일드 / 윤철희 : 별점 2.5점

10호실 - 6점
리 차일드 지음, 윤철희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아버지의 고향인 뉴햄프셔 래코니아를 충동적으로 방문하여 아버지가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한편, 캐나다 출신 연인 쇼티와 패티는 새출발을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중간에 차가 고장날 지경이라 어쩔 수 없이 래코니아 근처 모텔에 머물렀다. 그런데 손님은 그들 둘 뿐이었고, 자동차는 완전히 퍼졌다. 휴대폰 전파도 차단되어 외부와의 연락을 할 수도 없고, 마크 외의 모텔 관리자들과 충돌도 빚던 둘은 어느새 10호실 방에 감금되어 버렸다. 알고보니 마크들은 사람을 활로 사냥하고 싶어하는 멤버들을 모아 거액을 받고 사냥감을 제공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결국 쇼티와 패티를 사냥감으로 하는 활 사냥꾼들의 밤이 시작되고 말았다.


"웨스트포인트 2005"을 잇는 잭 리처 시리즈 23번째 작품. 원제는 "Past Tense"입니다.
최소한 이 작품만큼은 원제보다 우리나라 출간 제목이 훨씬 좋네요. 원제(과거시제(?))는 잭 리처가 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이야기를 핵심으로 그린 듯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10호실에 갖힌 쇼티와 패티의 생명을 건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광할한 미국 대륙 외딴 곳에서 자동차가 고장나고, 핸드폰마저 터지지 않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도입부부터 마크를 비롯한 모텔 관리인 일당이 10호실을 CCTV와 마이크로 감시, 도청하여 둘을 농락하며 위험에 빠트리는 과정이 정말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정비공인줄 알았던 카렐이 둘의 뒷통수를 치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화룡정점이었고요. 둘을 위기에서 구해줄 은인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냥꾼 중 한명이었을 줄이야!

마크 일당이 둘의 생명을 걸고 벌인게 인간 사냥 게임이었다는 진상도 꽤 신선했습니다. 장기 매매라던가 스너프 필름 등을 위한게 아닐까 싶었는데 인간 사냥은 생각도 못했네요. 진상을 드러내는 '이틀치 비상식량'에 끼워넣어진 '손전등'라는 중요한 단서를 수수께끼처럼 배치해서 흥미를 더하는 전개도 일품이었고요. 억지로 비상식량에 손전등을 끼워넣어 전해 준 건 밤에 벌어질 사냥 시간에서 도망갈 때 효과적으로 쓰라는 이유였거든요. 손전등에 GPS가 장치되어 본부(?)에서 추적할 수 있다는 이유도 크고요. 하지만 쇼티와 패티는 이를 무기로 활용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악당들의 판단 착오였던 셈이지요.

완력이 쎄고 즉흥적인 계획에 강점이 있는 쇼티, 어느정도 추리력을 갖춘데다가 행동력도 탁월한 두뇌파 패티 캐릭터의 설정도 좋으며, 사냥이 시작된 후 둘이 머리를 짜내 위기를 탈출해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쇼티가 자동차들 휘발유를 이용하여 모텔에 불을 지르고, 앞서 설명드렸던대로 손전등을 활용하여 야간투시경을 무력화한 뒤 사냥꾼들을 처단하는 장면들은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처가 아버지 과거를 조사하다가 마크의 모텔을 찾은 뒤, 모텔과 10호실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둘을 돕게되는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크가 완벽하게 짜낸 거짓말을 하나씩 분석하여 거짓말임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특유의 추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요. '제 3의 인물'로 마크 일당과 사냥꾼들이 방심한 사이에 그들을 급습해서 처치하는 장면도 잭 리처스러워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친해진 변호사 캐링턴이 위험에 빠졌을거라는 추리도 잘못 짚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반면 리처가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는 과정은 별 재미는 없었습니다. 와중에 아버지가 과거 저질렀던 살인 사건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별다른 이슈가 되는건 아닙니다. 리처가 우연찮게 동네 건달을 혼내주고, 사과 과수원 주인 아들을 혼내주다가 킬러와 덩치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설정은 지루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무장한 사냥꾼 중 둘이나 쇼티와 패티에게 당해버리고, 마크가 혼자 돈을 차지하기 위해 패거리들을 총으로 쏴죽인 뒤 달아날 생각을 하는 등 마지막 사냥 장면은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을 줍니다. 특히 마크는 리처가 있다는걸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너무 안일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데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이 상황에서는 카렐을 죽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리처 시리즈가 아니라 쇼티와 패티를 주인공으로 한 별개의 작품이었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7/04/22

미스터리 사전 - 미스터리 사전 편집위원회 / 곽지현 : 별점 2점

미스터리 사전 - 4점
미스터리 사전 편집위원회 지음, 곽지현 옮김, 모리세 료 감수/비즈앤비즈

제목 그대로 미스터리, 추리라는 장르 문학에 관한 110개 항목을 설명해 주는 '사전' 입니다. 110개 항목은 6개의 대분류로 구성되고요. '게임 시나리오를 위해 꼭 알아두어야 할 110가지 추리 규칙·트릭·이론'이라는 부제를 보면, 이쪽에 관심있는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를 위해 쓰여진 책 같습니다.

일단 구성은 괜찮습니다. 항목별로 통일된 형태로 심지어 페이지 수 까지 똑같이 맞춰져 있어서 읽기 편하고 깔끔한 덕분입니다. 이런 건 정말 일본 사람들이 잘 하는 것 같아요. 이런 면에서 문제가 많았던 "탐정 사전"과 좋은 비교가 되네요.  

또 미스터리, 추리 애호가로서 즐길 부분도 제법 됩니다. 특히 소분류 항목별 대표작의 예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유명 소설 뿐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건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TV 드라마까지 방대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괴도'를 설명하며 '루팡 3세'를 예로 들고, '극장형 범죄'를 설명하며 "공각기동대" TV 애니메이션의 한 에피소드("웃는 남자")를 예로 드는 식으로요. '밀실 살인'의 예로는 RPG게임 "호라이 학원의 모험!"이 설명될 정도이지요. '살인범'의 예로 "죠죠 4부"의 키라 요시카게를 드는 등 지나치게 서브 컬쳐 중심으로만 소개되는 감도 없지는 않지만요.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제법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묘한 맛"이라는 분야가 어떻게 명명되었으며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된 책은 처음 봤네요. 에도가와 란포가 명명했다고 하며, 란포가 예시한 작법의 예는 아래와 같습니다. 

  • 명탐정에게 범행을 간파당하고도 사기범은 뻔뻔스럽게 결백을 주장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범행을 계속한다.
  • 노부인에게서 집이나 재산을 빼앗고 감금까지 한 악당 청년이 알뜰살뜰 여자친구의 신변을 돌봐준다.
  • 신문기자에게 붙잡힌 연속살인마가 어째서 이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며 기자를 새로운 피해자로 만든다. 

솔직히 작법 예시는 영 와닿지 않습니다만, 사고와 발상, 그리고 상식의 틀어짐이 낳는 의외성이 중요하다는건 분명해 보이네요. 

몇몇 사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1981년 가부키쵸 러브호텔 연속 살인사건에서 두 번째 피해자 겨드랑이 밑에 액취 치료 수술 흔적이 있었기에 술집 여성이라고 판단했다는 내용은 신선했어요. 당시는 술집 여성이나 받을만한 수술이었나 봅니다.

'마지막 반전' 이라는 항목에서 '현대는 트릭만으로는 부족하여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트릭으로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한 트릭을 살리기 위해 플롯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은 추리 소설가를 지망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와 닿은 내용이었고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2페이지라는 제약 탓에 지나치게 요약된 부분이 많다는 점입니다. 하드보일드 등 장르에 대한 설명을 두 페이지 안에 담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이런 항목들은 모두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추리 소설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아는 정보에 불과하며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항목으로 꼽기에는 미약한 것들도 눈에 띕니다. 트릭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합니다. '발자국 트릭'이 하나의 항목으로 꼽힐만한 이야기였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순간이동, 소실 트릭과 같은 보다 큰 범주로 묶었어야죠. '눈의 착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량을 할애한 '착시 현상'은 미스터리 장르와는 무관해요.
이렇게 소분류 선정 및 분류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탓에 심지어는 왜 이런게 설명되나? 싶은 항목도 있습니다. '미스터리 연구회' 같은게 대표적이죠. 일본에 한정된 특정한 형태의 소모임일 뿐이고 그렇게 이쪽 바닥에서 유명한 소재는 아니니까요.

번역도 큰 문제입니다. 읽기가 힘들 정도에요. 조금 더 읽기 편하게 번역할 수 있었을텐데 너무 딱딱하고 어려운 문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번역가가 이쪽 컨텐츠를 잘 모르는 티가 물씬 납니다. 이 바닥에서 자주 쓰지 않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다거나 -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를 '나라 이름' 시리즈라고 소개하는 등 -, 잘 알려진 발음과 다르게 번역하거나 일본어 번역에서의 실수 - '면죄를 호소하다' -> '무죄를 호소하다' (99p), '사이타마현 아이켄가 연쇄 살인사건' -> '사이타마현 애견가 연쇄 살인사건' (101p) -, 당연한 고유 명사의 오류 - 히가시노 게이고 -> 토우노 게이고 (207p) -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오류, 오타가 너무 많아요. 조금이라도 이쪽 세계를 아는 사람이 한번이라도 교정, 검수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잘못 되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처음으로 입문하는 초보자 대상의 학습 사전으로는 나름 괜찮지만 제가 읽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으며, 거기에 더해 번역 문제와 19,000원이라는 가격도 과합니다.
솔직히 이 책의 존재 의미도 잘 모르겠어요. 시나리오 라이터를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도 모르는 사람이 뭔가 만들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추리 소설에 첫 입문한다고 해서 이런 류의 '참고서'를 사 볼 필요는 더더욱 없죠. 고전 명작부터 찬찬히 읽어 나가면 그만이니까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애매했습니다. 저도 두번 읽게 될 것 같지는 않군요.

2020/02/07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그럭저럭 좋아합니다. 작품들의 편차가 큰 탓에 선뜻 읽게 되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이 단편집은 스스로가 선정한 단편들을 모아 놓았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오랜 만화가 경력 기간 중 발표했던 작품들에서 뽑았다면 전부 기본 이상은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목차는 크게 3장, "제 1장 신이 된 인간, 혹은 귀신이 된 인간" 과 "제 2장 기괴한 사건이 일어나다", "제 3장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이 되다"로 나뉘며, 목차별로 각각 1장에 세 편, 2장에 두 편, 3장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 대표 시리즈들이 적절히 선정되어 있으며, 작가의 평상시 작풍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작품까지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대에 값합니다.

국내에 이미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만 이는 '자선 단편집' 특성 상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이 정도면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팬에게는 충분히 어필할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도원기"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출세작인 중국 호러 판타지 중 한 편입니다. 도연명이 원량, 잠과 함께 복숭아 나무에 숨겨진 마을에서 불로장생을 꿈꾸지만,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정신을 차린다는 이야기로 속세의 모든 것을 내려두고 불로 장생을 꿈꾸는, 즉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신이 되고 싶었지만 신이 되지 못한' 인간들의 종말을 그리고 있습니다. 도연명은 그들과 함께 하려다 헛된 꿈을 꾸고 말고요.

내용 자체는 굉장히 평이합니다. 불로장생 마을은 요상한 요물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요물이 사라지자 모두 백골로 화했다는 전개는 뻔하디 뻔하니까요. 그러나 마을의 비밀을 더듬어 나가는 과정은 꽤 긴박감이 넘치며, 도연명의 본명이 도잠, 자는 연명 또는 원량으로 일행이었던 원량과 잠도 그 자신이었다는 반전은 독특합니다. 

1980년 발표 작품인데, 작가 자신의 스타일이 충실히 구현된 좋은 작품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진수의 숲"

오랫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산책 중 신사 근처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술래잡기를 하다가 기묘한 시대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누군가에게 잡혀 왼쪽 눈이 뽑혀 나간 뒤 신사에 감금되었는데, 이는 1년에 한 번, 인신 공양에 이용되는 '두옥'이라는 신령의 권속인 산 제물로 선정된 까닭이었다. '나'는 신사를 탈출하여 숲에 숨어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버티다가, 스스로 '귀신'이 되었다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현대'로 이동하는데...

'귀신이 된 인간'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일본 전통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인신공양의 대상으로 신령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귀신, 도깨비가 된다는 이야기를 현실감있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요괴 헌터" 느낌이랄까요? '한쪽 눈이 빠진' 상태와 도깨비를 연결시킨 아이디어도 좋아요.

그러나 아쉬운건 결말이 다소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된 뒤 다시 타임 슬립하여 현대로 돌아온다는건 안이한 발상이 아닌가 싶거든요. 딱히 반전도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복수 클럽"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통해 맞이하는 갖가지 불행들이 사실은 '복수 클럽' 때문이라는 내용의 작품. 불특정 다수가 회원이라서 상관없는 사람의 복수를 대행시킨다는 설정은 꽤 그럴듯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귀신이나 이세계 이야기, 설화나 SF적인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순수하게 현대 사회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사회 풍자극이자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이런 작품은 정말이지 처음 보네요.

그러나 반대로, 왜 이런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았는지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작화라던가 전개 방식이 영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후지코 후지오의 "웃는 세일즈맨" 같은 형식에 더 적합한 아이디어라 생각이 되더라고요. 더 웃기거나, 더 극적인 반전이 있는 쪽으로 가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3.5점.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약간 아쉽습니다.

"모가지괴"

"이계록"에 수록되었던 중국 설화 이야기로 안정적인 작화와 전개 모두 괜찮은 수작입니다. 별다른 반전이야 없지만 원전이 되는 이야기가 그러한 탓이겠죠.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왜 "이계록"에서 이 작품을 선정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살아있는 목 사건"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죠. 기괴하면서도 일상에 맞닿아 있고, 또 은근히 웃기기까지 한 좋은 작품입니다.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대충 손가는대로 그린 듯한 작화도 이야기의 멋을 잘 살려줍니다. 누가 뭐래도 작가의 최고 대표작 중 한 편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연못의 아이"

남아메리카 오지의 차크타 호수에서 동물처럼 지내는 두 남녀가 발견된 후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인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 아이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애매하며, 여자 쪽은 헐리우드의 총아가 되지만 남자는 목동으로 살다가 자살한다는 결말도 뜬금없는 탓입니다. 딱히 무섭지도 않고, 의외성도 없으며 흥미롭지도 않은 졸작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린이의 놀이"

어린이들이 몰래 키우던 무언가가 그 아이를 대체한다는 내용인데 단순한 일상계 호러는 아닙니다. 사춘기나 '철 든다'는 특정 시기의 변화를 이러한 존재의 대체로 설명하려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주인공이 이런 변화를 너무 쉽게 수긍하는건 좀 석연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걸 더 극적으로 그려내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또다른 "바디 스내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역립 원인"

직립 원인의 미싱 링크로 역립 원인이 있었을 거라는 황당한 아이디어의 꽁트. 별점을 주기 애매한 쉬어가는 소품입니다.

"꿈꾸는 기계"

사람들은 모두 꿈만 꾸고, 일상 생활은 기계로 대체된 사회를 그린 SF인데, 1974년 발표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와 너무나 똑같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서 블랙 코미디 요소를 빼고, 액션만 넣는다면 "매트릭스"인 것이지요. 한마디로 시대를 20년이상 앞서간 작품이에요.

그러나 작화가 이야기와 영 어울리지 않다는 문제와 함께, 전개가 약간 아쉽습니다. 도시가 정지해버리는 결말도 너무 안이하고요. 한 발자욱을 더 못 나간 느낌이랄까요? 오토모 가즈히로가 그려내었더라면 영원히 이름이 남을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거에요. 별점은 3.5점입니다.

2005/04/12

헬로 네즈미 - 히로카네 켄시 : 별점 2.5점

헬로 네즈미 28 - 6점 켄시 히로카네/대원씨아이(만화)

아카츠카 탐정 사무소라는 탐정사에서 근무하는 일명 "고슴도치"인 고로와 그의 동료인 전 도박사 출신 큐사쿠, 통칭 "구레"를 중심으로 한 사무소의 멤버들이 펼치는 옴니버스 드라마입니다.

작가의 대표작인 "시마과장"은 이래저래 욕도 많이 먹고 문제도 많은 작품이긴 하지만 작품 자체를 끝까지 읽게 하는 통속적인 재미 하나는 대단하지요.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재미만큼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스타일이라고는 해도, 감수성에 치우친 드라마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눈물이 너무 많고 사랑도 너무 많은 순정파적인 전개라, 2000년대에 보기에는 짜증날 정도였거든요. 거기에 그림체 역시 전통 극화체에 가까운 탓에 뎃생력과 구성력은 나무랄데 없다 하더라도, 역시나 요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내용 자체는 재미있습니다. 눈물 쏙 빼놓는 에피소드들 뿐만 아니라 웃기는 이야기에서 대하 액션, 거기에 괴담과 사극, SF까지 통통 튀는 전개는 옴니버스 캐릭터 극의 장점을 잘 살린 이야기로 보여지며, 어느정도 성공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추리물도 포함해서요. 물론 "인간 교차점" 스타일의 드라마들은 좀 지루한 맛도 없지 않습니다만....

추리적으로 본다면 탐정 사무소의 탐정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의뢰들어오는 사건은 단순한 조사나 사람 찾기 같은 일(이게 물론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이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탓에 관련 에피소드가 많지는 않습니다. 전 29권 분량 중에서 진정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어요. 하지만 소수 정예인지 나름대로는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개 있습니다. 특히 감금장소나 스토커 잠복 장소를 알아내는 실질적인 조사 방식은 개인적으로는 높이 평가합니다. 꽤 현실적이면서도 나름 추리적 요소가 괜찮거든요.

그러나 중반이후에는 소재고갈인지 너무 이야기가 비약해 버려 실망스러운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심령퇴마물", "흡혈귀", "UFO" 에피소드들은 사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에요. 또 일상적인 이야기와 단순 범죄 사건에서 상당한 스케일의 범국가적 스파이 액션까지 다루므로 이야기의 고저가 심해서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평균정도의 재미는 가져다 주는 만화입니다. 별점은 2.5점.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고 일본에서도 대표적인 보수 우익 취향의 만화가로 알려진 히로카네 켄시의 작품이라 앞으로도 구해 볼 생각도 없지만 그냥저냥 지나다가다 눈길한번 줄 만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추리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듯 하군요.

PS : "아"로 시작하는 탐정 사무소 이름때문에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보고 제일 위에 있어서 의뢰한다는 고객들 에피소드가 꽤 많더군요. 가가 탐정 사무소도 실패한 전략은 아닌 듯....

에피소드 중 추리물을 뽑아본다면

5~6권 - 고로의 애인인 란코의 아버지가 관련되어 있던 비리에 대한 에피소드 :
이 에피소드는 일종의 정경유착에 따른 거대한 음모를 다루고 있는데 킬러까지 등장하며 과격한 액션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정경유착에 관한 디테일이 굉장히 좋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다이잉 메시지 해독이 등장하는데 꽤 괜찮습니다. 좀 더 소규모의 음모였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오버하는 경향이 있어서 약간 아쉽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였습니다.

7권 - 기억상실중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공백의 격류" :
십수년전에 살인을 저지르고 사고로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의뢰인의 과거를 조사하는 에피소드로 만화에 딱 어울리는 단서들과 내용전개가 독특하며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8~9권 - "유괴" 에피소드 :
한 대기업의 데릴사위 사장이 내연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유괴당해 탐정 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하는 에피소드입니다. 돈을 주고 풀려나기는 하지만 사회적 응징을 위해 유괴범을 조사하여 소재를 파악하는 과정이 현실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합니다.

14권 - 연쇄 살인마 이야기인 "빨간색의 혼란" :
싸이코 연쇄 살인범 이야기인데 내용 전개는 뻔하지만 꽤 재미있더군요.

14권 - 정체모를 인물이 가입한 보험금을 타게되는 한 주부의 에피소드인 "정체불명의 사례" :
어느날 아무 생각 없이 베푼 선행으로 보험금을 받게되는 한 주부, 그리고 그 보험금에 얽힌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로 정통 추리적 요소가 많으면서도 내용 전개도 깔끔하며 반전도 상당히 괜찮은 에피소드입니다.

16~17권 - 의학교수와 브로커가 관련된 스캔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진상을 다룬 에피소드 :
범행 장소와 공개된 장소 양쪽에서 동일 시간대에 존재하는 알리바이 트릭을 파헤치는 에피소드로 트릭은 생각외로 시시하지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꽤 재미있습니다.

19~20권 - 한 여인의 완벽한 복수극을 다룬 "의문의 편지" :
자신이 살해될 것을 예상한 한 정치인의 정부가 펼치는 완벽한 복수극인데 시한 장치를 이용한 편지 발송 트릭이 등장합니다.

20권 - 모닝콜을 통한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모닝콜" :
아침에 모닝콜을 받았다는 용의자가 그 시간에 절도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인데 사실 굉장히 간단하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쓰이는 소재를 트릭에 이용하는 발상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24권 - 일본 전통 이야기에 대한 숨은 진상을 파헤치는 "사랑밖에 난 몰라" :
일종의 번외편으로 에도시대에 있었던 방화사건에 관련된 진상을 풀어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원전격 이야기를 잘 몰라서 몰입은 쉽지 않았지만 역사 추리물 적인 요소가 강하고 트릭과 전개도 재미납니다.

26권 - 한 여인의 밀실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긴머리의 여인" :
시체 이동을 통해 자살로 위장된 한 여인의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로 전편을 통해 가장 독특한 트릭이 등장합니다. 현실감은 왠지 많이 떨어지는 트릭이지만 발상이 무척 기발하며, 사건의 발단이 되는 단 하나의 단서를 쫓아 현장 조사 등을 통해 범인을 밝히는 과정이 좋습니다.

29권 - 도쿠가와의 매장금을 찾는 "보물 찾기" :
암호 트릭이 등장합니다. 암호 자체의 수준은 평이하고 일본어를 좀 알아야 해독할 수 있어서 아쉽지만 너무 어렵지도 않고 나름의 바탕이 있어야 풀 수 있어서 꽤 재미있는 암호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