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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7

코핀 댄서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3점

코핀 댄서 - 6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컬렉터' 사건 이후 뉴욕 시경과 FBI의 수사 자문으로 일하는 전신마비 범죄학자 링컨 라임은 시카고 외곽 상공에서 폭발한 민간 제트기 사건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사망자는 거물급 무기상 필립 핸슨의 재판에 증언을 하기로 했던 조종사 에드워드 카니였다. 그러나 라임의 관심을 더더욱 끈 것은 이 사건에 청부살인업자 '코핀 댄서'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코핀 댄서에게 5년 전 부하들을 잃은 적이 있기에 댄서를 잡으려는 라임의 의욕은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이제 남은 핸슨 재판의 증인은 카니의 부인인 퍼시와 동료 헤일. 재판까지 정확히 45시간이 남은 상황, 링컨 라임은 최강의 암살자 코핀 댄서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는 한편, 자신의 손으로 댄서를 잡아들일 함정을 준비해야 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제프리 디버의 빅 히트한 전신마비 범죄학자 링컨 라임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링컨 라임과 살인청부업자 코핀 댄서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데,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흥미를 자아냅니다.

특히 링컨 라임과 동료들 시점과 살인을 실행하는 청부업자 스티븐 콜 시점을 오가는 구성에서 전해지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스티븐 콜의 현재 행동을 통해 그가 앞으로 범행을 어떻게 저지를지?를 궁금하게 만든 뒤, 이를 알아챈 링컨 라임이 간발의 차이로 이를 저지하려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는데, 뻔하기는 하지만 몰입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스스로는 전화도 걸 수 없는 링컨 라임이 범행 수법을 알았지만 전화를 거는데 실패해서 타겟 중 한 명이 희생되는 장면은 그 중 백미입니다. 2000년대 이후 작품이었다면 Siri로 쉽게 전화를 걸 수 있었을 텐데("스마트 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처럼요), 당시 음성 인식 기술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기도 했고요.
스티븐 콜이 링컨 라임이 장애인임을 알아챈 뒤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장면도 아주 멋졌습니다. 왜 링컨 라임이 강한지를 잘 알려주는 장면이었어요.

범죄학자, 법의학자이자 감식 전문가인 링컨 라임이 주인공다운 디테일도 압권입니다. 애밀리아 색스 등을 활용하여 수집한 미량 증거물들을 통해 스티븐 콜을 추적해 나아가는 묘사가 아주 빼어나요. 대체로 범행 과정을 검증하는 정도에 그치기는 하지만, 지문 인식이 불가능한 지문 조각을 긁어모아 하나의 지문을 만드는 등, 실제 수사에 활용하는 장면들도 제법 많은 편입니다. 스티븐 콜 범행에서도 폭탄의 디테일 등 볼거리가 아주 많고요.

허드슨 에어와 퍼시 플레이 시점으로 보여지는 여러가지 비행 관련 전문 정보들도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공항의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폭탄을 비행기 외부에 부착한다는, 공항 구조를 잘 활용한 아이디어처럼요. 공항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장면에서도 숨어있는 파일럿을 끌어내기 위해 비행기를 쏜다는 발상 등에서 많은 연구와 조사가 뒷받침된 티가 납니다. 무엇보다도 퍼시 플레이가 고도가 낮아지면 폭발하는 폭탄 때문에 마지막 비행에서 겪는 고군분투는 정말이지 인상적이었어요. 범인이 설정한 고도보다 높은 공항 (덴버)으로 향한다던가, 부족한 연료를 근처 사막이 태양빛을 받고 만들어낸 상승기류로 해결한다는 등의 아이디어들도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이야기를 빛내 줍니다. 이 이야기만 가지고도 한 편의 이야기가 충분히 될 수 있을 정도에요. 그만큼 드라마와 긴장감이 잘 살아있었습니다.

약간은 서술 트릭을 갖추고 있으며, 두 개의 반전이 존재해서 추리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야기 구조에서 링컨 라임과 시종일관 대등한 대결을 펼치던 또 다른 주인공 스티븐 콜은 '댄서'가 아니라는게 나중에 밝혀지거든요. 이건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이외에도 악덕 사업가 핸슨이 아니라 허드슨 에어 멤버 론 탤봇이 청부를 의뢰했다는 반전도 놀라왔고요.

그러나 반전에 지나치게 집착한 느낌을 전해주는건 조금 아쉬웠어요. 스티븐 콜이 그냥 댄서였어도 이야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텐데 말이지요. 론 탤봇이 사장 퍼시를 비롯한 3명의 소유주를 없애고 회사를 가로채려고 했다는 청부 의뢰 동기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론 탤봇의 횡령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단순 횡령과 살인 청부는 급이 다른 범죄인데 말이지요. 잘나가는 항공사의 경영진 중 한명으로 이익을 나누는 것 대비해서 얼마나 큰 이익을 보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동기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3명을 죽이려다가 경찰, 보안관을 포함하여 거의 20여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요. 미량 증거물로 그가 이 모든걸 꾸몄다는게 증명된다는 것도 무리였다 생각되고요. 끝까지 부인해서 법정까지 갔다면, 아마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겁니다.

또 이야기 전개에 억지가 많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댄서'가 색스에게 총상을 입고 체포되는 마지막 장면을 한 번 볼까요? '댄서'는 원거리 저격을 가장한 뒤, 뒤로 돌아가 기습하려는 작전이 들켜 체포되고 맙니다. 하지만 자리만 조금 높은 곳으로 이동해도 쉽게 색스와 퍼시, 롤랜드를 저격해서 쉽게 죽일 수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이길 수 있는 카드를 버리고, 질 수도 있는 별로 좋지 않은 카드를 선택할 이유는 없어요. '댄서'가 체포되게 만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합니다. 

댄서의 전지전능함을 과시하기 위한 설정들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댄서가 스티븐 콜에게 살인 청부를 재하청 준 뒤, 그를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댄서는 '조디'라는 약물중독 노숙자로 변장하고 스티븐 콜과 접촉하지요. 그런데 이 때 스티븐 콜이 만나자마자 그를 죽이지 않은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었습니다. 이후, 조디가 배신한걸 알아챈 스티븐 콜의 저격이 실패한 것도 우연이고요. '댄서'가 체포된 뒤 "모험 없는 인생은 없다. 그래도 난 대응책을 강구했다. 스티븐 콜의 잠재적 동성애 성향을 이용했다." 고 링컨 라임에게 떠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디'가 스티븐 콜의 동성애 성향을 알아챈 방법에 대한 설명도 없고, 그가 스티븐 콜의 취향이었다는 정보도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되짚어 생각해보면, 에드가 죽은건 어쩔 수 없었지만, 누군가 자신들 생명을 노린다는걸 알고 난 뒤에도 비행에 집착했던 퍼시 플레이 탓에 사건이 커진 탓이 너무 큽니다. 경찰과 FBI가 시키는대로 안전 가옥에 얌전히 있었다면, 사건이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거에요. 퍼시는 회사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죽고 나서는 그런건 아무 필요가 없잖아요? 악당 론 탤봇이 회사를 차지했을 수는 있지만, 다른 친구와 경찰, 보안관 들의 희생은 없었겠지요. 그녀는 살아도 산게 아닐거에요.
링컨 라임의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아멜리아 색스의 무모함, 그녀가 느끼는 질투심과 링컨 라임과의 러브 라인 등도 이야기에는 별로 도움이 된 것 같지 않네요. 지나치게 헐리우드 식이었달까요?

하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충분히 읽을만 하고, 링컨 라임이라는 캐릭터의 독특한 설정도 잘 써먹고 있으니까요. 영화화되기 좋은 내용인데, 영화 소식이 없는게 좀 신기하군요.

2016/11/18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3점

천사들의 탐정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2005/08/22

상당히 정통 추리적인 사건입니다.

질문 몇 가지.

물론 불행한 일을 당하신 당사자 및 가족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저 역시 사건에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decca님의 글에서 트랙백하여 답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1. 흠 몇몇 대학교=명문대 공식은 쓸데없이 선정적이다. 참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_- : 동감입니다.

2. 혈중 알코올 0.15% 정도면 몸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을 정도일텐데, 독주를 홀로 마시는 습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미분양 아파트를 찾아서 저리 마시는 일은 참 드문 일일 듯. 그렇다면 강제로 마시게 한 걸까? : 마신뒤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인사불성 상태에서 빈 아파트로 범인이 데리고 이동한 경우가 아닐까 싶은데요.

3. 타액은 어디서 검출됐나? 지문은 없었나? : 2번 답일 경우, 범인의 계획적 범행으로 본다면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죠. 타액은 글쎄요... 담배꽁초라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말이죠.

4. 피해자는 집을 얻으러 다녔던 걸까? 신혼 초인데 다른 데 집을 얻어야 했을까? : 단순히 알던 교수의 이동에 동참한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가족들에게서 나온 증언은 아닌것으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5. 범인은 면식범인가? 만약 면식범이라면 ‘집을 보러 가자’라는 핑계로 피해자를 유인한걸까? 그렇다면 범인은 집을 알아보던 사람인가? 그렇다면 범인은 학교 근처에서 사는 사람 즉, 학교에 관련이 있는 사람일까? :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생각됩니다.

6. 피해자 주변인 중에 미분양 아파트의 비밀번호가 평이한 번호로 세팅돼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 이 사건의 핵심 열쇠가 아닐까 싶은데, 조사해 봐야겠죠.

7. 목격자는 없었던가? 근처 부동산 주인은 혹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 역시 6번과 마찬가지. 조사해 봐야겠죠.

8. 현금과 소지품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치정, 원한, 청부에 의한 살인인가? : 원한 혹은 청부일 가능성이 높다 생각됩니다.

물적 증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꼭 범인이 잡히기를 희망합니다.

2017/06/11

후쿠오카 살인 - 김성종 : 별점 1점

후쿠오카 살인 - 2점
김성종 지음/뿔(웅진)

국내 추리문학의 거목인 김성종 선생님의 근간입니다만, 단언컨데 그 동안 읽은 책 중에서도 최악을 다툴만합니다. 감히 '작품' 이라는 표현을 붙이기도 어려운 지경의 종이 무더기에요. 얼마전 "하카다 돈코츠 라멘즈"가 '나무야 미안해' 수준이라면 이건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수준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최악입니다.

지나와 봉수 부부, 세호와 서라 부부가 등장하고 그들이 각자 상대방 배우자들과 불륜을 저지른다는 시대착오적인 도입부 설정부터 가관입니다만, 유지나가 이세호를 시켜 서봉수를 죽이기 위한 일본 여행을 떠나는 본편이 시작되면서 더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먹고살기 힘든 인쇄소 사장에 불과해 보였던 이세호의 정체가 사실은 국내 위조 조직에서도 거물인 범죄자로, 과거 살인을 포함한 수 없이 많은 범죄를 저지른 변장의 달인이자 범죄의 황제라는 진상은 어이를 상실케 만듭니다. 알고 보니 옆집 남자가 팡토마고르고 13이었다는 건데, 이렇게 설정을 변경하려면 최소한의 설득력은 보장해 줬어야 합니다. 뜬금없기가 과거 김삼 화백 만화를 수준이에요.

더 웃기는 것은 이세호가 개중 나은 편이라는 겁니다. 여성들 캐릭터는 모두 삼류 성인 만화에나 나옴직한 색정광들로 이해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그 중에서도 형사 구밀라 캐릭터는 최악 오브 더 최악이에요. 섹스 중독증이라는 설정부터가 유치하지만,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과 관계를 가지는 상황은 뭐라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더블맨을 만나기 위해 먼저 위조업자 황사장과 관계를 갖고, 한국과 일본 양국 경찰에게 쫓기는 흉악범이 된 더블맨 이세호와 마지막에 관계를 갖는 식이니까요. 섹스 중독증에 걸린 이유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어렸을 때의 성폭행 때문이라는데 요새 삼류 성인만화도 이렇게 막 나가지는 않을것 같군요. 게다가 이 조교로 육노예를 만든다는 싸구려 성인물 설정을 구밀라 한명 뿐 아니라 미치코라는 다른 여성에게도 써먹는 건 정말이지 어안이 벙벙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최악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이세호가 일본에서 위조지폐를 구태여 쓴 행위부터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깟 잔돈푼이 뭐가 중요해서 청부살인을 앞두고 사건을 일으켰을까요? 자신의 위조 기술을 괴신했다기에는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서봉수가 유지나를 청부 살해하는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유지나와 이세호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알게 된 시점에서 유지나를 죽일 하등의 이유는 없어집니다. 이혼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니까요. 게다가 유지나가 살해된 이후는 더 문제입니다. 적극적으로 피해자 남편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두 여성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섹스나 하려고 하는데 이건 말도 안되잖아요. 경찰이 자신을 찾아온 것도 잊어버렸단 말인가요?
서봉수가 문서라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대응도 최악입니다. 당연히 이세호의 불륜을 눈치채고 쳐들어온 것이라고 둘러댔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주역을 보는 것도 참 오랫만이에요.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도다이, 미치코가 유지나를 죽이기 위해 아무런 연고 없는 부랑자를 동원하여 일종의 자살 테러를 하는 정도인데, 이 역시 미치코와 범인간의 관계를 작위적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목처럼 일본 홋카이도에서 후쿠오카에 이르는 장대한 여정을 녹여낸 것 만큼은 나쁘지 않습니다. 등장하는 여행 코스도 꽤 그럴듯하고요. 허나 일본 여행 역시 결정적 문제가 있습니다. 작품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일본에서 살해하는게 여러모로 더 쉽다? 무슨 근거인지 알 수가 없어요. 일본도 나름대로 유능한 경찰력을 보유한 선진국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이 책을 읽으면 일본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무모한 행동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 여행 설정은 아무래도 일본에 대해서 잘 알고, 많이 가 봤다는 아는 척에 분량을 늘리기 위한 꼼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미우라 아야코 문학관'에 대해 장황하게 풀어내는 등 작품과 상관없는 작가 개인 생각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김성종 선생님이 척박한 한국 추리 문학을 어떻게든 일으켰던 이 바닥의 거목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항상 존경하고 있고요. 그러나 이 쓰레기만큼은 도저히 용서가 안되네요. 과거의 좋은 기억만 안고 가는게 훨씬 좋을 뻔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쓰레기만큼은 주의하시고 피하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립니다.

2009/10/18

봇코짱 - 호시 신이치 / 윤성규 : 별점 3점

봇코짱 - 6점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지식여행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


일본 플레이보이지가 선정한 올타임 일본 미스테리 베스트100에 당당히 선정된 작품으로, 리스트를 접한 뒤 곧바로 구입한 책입니다. 호시 신이치 작품은 20여년전에 읽었던 "신선함을 드립니다" 이후에도 많은 단편 앤솔로지를 통해 접할 기회가 많긴 했지만 장단점이 너무 명확해서 선뜻 구입하기는 망설여졌었는데 제가 귀가 얇은 탓인지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이런 류의 리스트에 약해서 선뜻 지갑을 열게 되었네요.

하지만 작품은 역시나, 장단점이 너무나 명확한 호시 신이치의 전형적 작품들로 이루어진 책이었습니다.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뭐니뭐니해도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제일 크겠죠. 이른바 "쇼트쇼트"라는 콩트 형식으로만 수록 작품들이 이루어져 있기에 부담없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작가 특유의 의표를 찌르는 반전과 이른바 "기묘한 맛" 류의 독특함이 잘 살아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SF, 추리, 범죄 스릴러, 판타지 등 다양한 쟝르를 선보이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너무 많은 작품을 써내려가다보니 생긴 일이겠지만 유사한 분위기와 설정의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입니다. 작품의 주제도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진상" 이나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을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말이죠.... 또한 뒷끝이 좀 허무하고 씁쓸한 작품도 적지 않다는 것도 다작의 탓이 아닐까 싶네요. 덕분에 작품들의 편차도 제법 큰 편입니다.

그래도 간만에 접한 쇼트쇼트 작품집으로 충분히 쉽고 재미있게 읽었기에 나름 만족합니다. 책도 아주 이쁘고 나와서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왜 "일본 미스테리 올타임 베스트 100"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모든 작품이 쟝르문학이긴 해도 추리 성향을 띈 작품은 정말 몇개 안되거든요. 저처럼 추리쪽을 많이 기대하고 읽으신다면 실망하시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개를 소개합니다.

"봇코짱" - 표제작으로 바텐더가 만들어 가게 홍보에 사용한 미녀 로보트와 그녀에게 반한 남자, 그리고 예상을 깨는 결말을 다룬 이색 SF입니다. 굉장히 짤막한 쇼트쇼트임에도 너무나 단순한 남자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봐, 나와!" - 한 마을에 생긴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구멍, 그리고 그 구멍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너무나 끝없이 사용하는 인류 앞에 섬뜩한 반전이 펼쳐지는 SF로 "일본 SF단편 올타임 베스트" 에 선정되기도 한 좋은 작품입니다.

"살인청부업자입니다" - 추리성향의 쇼트쇼트로 이색 살인청부 비즈니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범죄" 자체를 확인할 수 없고 때문에 "범죄"로서도 성립하지 않는 너무나 완벽한 살인청부 비즈니스! 주인공의 직업이 드러나며 밝혀지는 진상과 반전이 깔끔한 작품입니다.

"포위" - 누군가 나를 죽이려한다는 것, 그래서 그 배후를 쫓는 주인공을 그린 쇼트쇼트입니다. 스릴러물에 흔하게 등장하는, "위기에 처한 주인공"에서 시작해서 주인공이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까지는 뻔하게 흘러가는데 진상과 반전이 굉장히 이색적이더군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통념을 깨는 결말이었거든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죽이고 싶어한다" 는 것. 충분히 설득력있고 무서운 내용이었어요.

"더위" - "더위"를 참지 못하고 여름마다 곤충 등을 죽이며 겨우겨우 버텨온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죽음의 대상도 업그레이드 되어 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기묘한 맛" 류의 섬뜩한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이러한 쟝르 전체를 놓고 따져보더라도 굉장히 높은 점수를 줄만한 명작이죠. 호시 신이치 작품 안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년축하손님" - 친구의 어려움을 무시한 한 부자에게 친구가 마지막으로 "환생"을 언급한다는 이야기. 짤막하지만 무난한 수준의 반전이 깔끔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친선키스" - SF와 SEX가 결합한, 농담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구인과 흡사한 외모의 외계인들을 만난 우주선 승무원들이 지구의 인사라 속이며 키스를 난무하는데 결국 마지막이 되어서 알게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웃기면서도 황당한 결말이 아주 놀라운 작품이었어요.

"추월" - 과거 자신에게 버림받고 자살한 여인의 모습을 보는 한 남자. 추리물 성향을 띄고 있는 쇼트쇼트로 이른바 트릭이라 할 수 있는 자살한 여인의 정체가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된 작품입니다. 짤막하지만 복선도 확실해서 설득력도 풍부한 등 이쪽 쟝르물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PS : 위 작품들 말고도 "이키가미"의 원조와도 같은 "생활유지청"이나 인간 욕망의 끝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거울" 같은 작품도 다른 매체에서는 걸작이라고 많이 소개하고 있더군요. 그 외에도 좋은 작품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2017/02/10

바텐더 - 윌리엄 래시너 / 김연우 : 별점 2.5점

바텐더 - 6점
윌리엄 래시너 지음, 김연우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떠돌이 바텐더 저스틴 앞에 정체불명의 노인 버디 그래클이 나타났다. 버디는 수 년 전 저스틴 어머니 살인 사건의 범인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자신이 청부를 받아 진행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가 의뢰했는지 알고 싶으면 1만불을 달라고 요구하는데....

바텐더가 오래전 살인 사건 진상을 찾아나선다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예전 어딘가에서 책 소갯글을 보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책이지요. 제목과 간단한 줄거리 소개가 상당히 흥미로왔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법 두꺼운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몰아쳐서 하룻만에 읽어버릴 정도로요. 이야기의 도입부부터 인상적입니다. 어머니의 살인범이 아버지라는걸 고발했던 기억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벗어났는데,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나타나 사실은 자기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밝힌다!는 이야기를 짧은 도입부 안에서 긴장감 넘치게, 완벽하게 서술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정말로 어머니를 죽인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도저히 다음 장을 안 읽을 수 없었습니다. 최근 읽었던 작품들 중 가장 괜찮았던 도입부였다 생각되네요. 

사건을 개인적으로 파고드는 바텐더 저스틴 나름의 수사 활동도 그럴싸합니다. 과거 로스쿨 출신이라는 배경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우직한 인터뷰, 탐문 중심의 조사만 벌이는게 무척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조사를 시작한 후 의미있는 단서를 손에 쥐게 되는 것도 이모와 형과의 인터뷰부터 였다는 점 역시 설득력 높은 전개였고요.

또 이 작품만의 특징인데, 제목에 걸맞게 칵테일 활용이 아주 탁월해서 눈길을 끕니다. 그 중에서도 모든 단락의 소제목을 칵테일과 다양한 술, 음료수 이름으로 구성한 것이 아주 괜찮았어요. 마구잡이로 붙인 것이 아니라 단락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내용에도 술이 적절하게 인용됩니다. 알콜 중독자 버디(던)을 낚기 위해 조니 워커 블루 라벨로 유혹한다던가, 아버지의 옛 불륜 상대 애니를 찾아간 저스틴이 그녀의 냉장고 속 다이어트 진저에일, 썩어가는 딸기, 말라 비틀어진 라임, 싸구려 보드카로 스트로베리 뮬을 만들어 준다는 식으로요. 해고된 저스틴이 친구 코디에게 총을 구입해달라며 최고급 데킬라 테존 아녜호를 주는 장면도 빼 놓을 수 없겠군요.
제가 칵테일, 술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라 더 즐길거리가 많았던 것 같은데, 여튼 이러한 요소들은 던이 코디에게 보험 사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복선 등에서 활용되는 디테일과 함께 작품의 짜임새를 높여줍니다.

그러나 추리, 범죄 소설로 볼 때 너무 별 볼일 없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첫 번째로, 아버지의 작전은 너무 별볼일 없습니다. 플린이 증언 철회를 하기 위해 그냥 두어도 되는데 왜 죽였을까요? 그를 죽이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비밀이 있는 진범이 있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게 과연 합리적인 시나리오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단순 사고로 처리될 위험도 있고, 결국 사람을 더 죽여야 하는 위험부담을 짊어져야 하니까요. 이보다는 플린 증언 철회를 통한 재심을 일단 시도해보는게 더 낫지요. 

또 아내의 불륜과 그에 따른 범행 조작 역시 증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재닛 모스가 몇년이 지난 후 죄책감으로 자살했다? 죽일만큼 미워한 여자가 죽었으면 두다리 쭉 뻗고 자면 잤지 자살했을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랬더라도 살인을 청부했다는 증거는 절대로 찾을 수 없었을테고요. 한마디로, 유죄 판결을 뒤엎을만한 증거는 전무합니다.

두 번째로, 버디 그래클(던)의 모든 행동이 말이 안됩니다. 제이크를 찾아와 자신이 범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도입부부터요. 왜 데릭이라는 유능한 하수인을 두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악당이 1만불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까요? 푼돈 벌이라도 하려는 의도였다고 칩시다. 그래도 저스틴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던이 협박, 회유 중에 데릭을 이용하여 제이크를 위협하는 것도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저스틴이 사건에 뭔가 있다는 생각을 굳히고 더 열심히 조사에 나서게 만드는 결과만 초래했으니까요. 성과는 없고 뭘 기대했는지도 알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럴 바에야 데릭을 시켜 빈집을 터는게 훨씬 나았을테지요. 그나마 여기까지야 괜찮다쳐도, 던이 최후의 순간에 애니의 집에 침입해서 칼부림을 한건 최악 중의 최악입니다.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역시나 없지만, 끔찍할 정도로 작위적인 탓입니다. 사랑하는 여인의 집에 살인범이 침입하지만 백마탄 왕자가 구해준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클리셰의 반복에 불과해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되는 죽은 어머니의 장신구들도 도대체 어디서 났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사건이 현재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중요한 증거품인데 이게 어디서 났을까요?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요소들이 많은 작품이 좋은 작품이기는 힘들겠지요.

저스틴 캐릭터 역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드보일드 황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냉소적인 성격과 입담은 나쁘지 않습니다. 허나 술이나 다른 자극적인 것 모두 입에 대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으며 오로지 명상과 요가로 자신을 다스리는 구도자적인 인물이라는 것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장황합니다. 사실 작품과 별 상관도 없는 설정인데, 그냥 너무 멋을 부린 느낌이에요. 구도자처럼 사는데 불구하고 여자는 왜 이렇게 밝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고요. 그냥 아픈 과거가 있는 바텐더 정도가 적당하지 않았을까요? "바텐더"의 사사쿠라 류 처럼 손님의 심리와 느낌을 잘 파악하는, 한마디로 '눈치'가 빠르다는 바텐더의 특기를 잘 살려 사건 수사와 연결했더라면 훨씬 더 제목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었을텐데, 책 속 묘사로는 바텐더의 기술과는 무관한 저스틴의 수도승같은 생활이 더 중요하게 묘사되어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던과 다른 청부업자들의 힘 센 도구 역할을 하는 데릭은 도무지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야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않아요. 너무 눈에 띌 뿐더러 범행도 지나치게 많이 저지르는데 그냥 공기와 같은 인물이라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건에서 손쉽게 빠져나가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비현실적인 인물을 이야기에 개입시키는 것보다는, 던과 데릭을 합쳐 실제로 몸을 써서 사람을 죽이는 보다 사악한 악당을 그려내는게 대결 구도에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지만 여러모로, 특히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킬링타임용으로는 적절한데, 개인적으로는 눈치빠른 바텐더와 미녀 단골 손님이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하는 단편 이야기가 더 좋지않았을까 싶네요. "구석의 노인"의 변주처럼요.

2006/04/25

루시퍼의 초대 (알라트리스테 시리즈 1) -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 김수진 : 별점 3점

루시퍼의 초대 - 6점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시공사

마드리드에서 청부 검술사로 연명하는 백전노장 알라트리스테(Alatriste)는 친한 순찰대장 살다냐에게서 은밀한 의뢰를 받고 의뢰인을 찾아간다. 가면을 쓴 의뢰인은 영국에서 오는 2명의 여행객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들의 서류와 짐을 빼앗을 것을 요청하나 직후에 나타난 종교재판소의 최고 책임자 에밀리오 보카네그라 수사는 그 2명을 모두 죽일 것을 명령한다.

이탈리아인 칼잡이 괄테리오 말라테스타와 같이 그들을 습격하여 부상을 입히는데에 성공하는 알라트리스테, 하지만 영국인들의 용기에 감동한 그는 이탈리아인 칼잡이를 제지하여 그들을 살려주고 과거의 전우인 과달메디나 백작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며 그곳에서 두명의 영국인이 영국의 왕세자 찰스와 버킹엄 후작임을 알게 된다.


중대한 음모의 비밀을 알게된 알라트리스테는 곧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데....

몇권 읽긴 했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던 작가 레베르테의 시리즈 역사 활극 장편. 관심이 1피코그램도 없었지만 간만에 간 헌책방에서 새책이 눈에 띄길래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읽어보니 왠걸! 생각보다는 무척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선 주인공 알라트리스테 대위가 아주 돋보여요. 화자역의 이니고 발보아도 상당한 매력을 뽐내지만 알라트리스테에게 댈건 아니죠. 백전노장이자 현재는 마드리드에서 청부 검술사로 살아가는 퇴락한 군인이라는 설정은 진부할 수 있지만 (크리쉬?)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그러면서도 낭만적인 구시대의 유물스러운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쉽게 보기힘든 존재감을 보여주거든요. 레베르테의 글빨이 제대로 먹혔다고 할 수 있죠.
이러한 멋진 주인공 알라트리스테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거대한 음모에 찰스왕세자, 버킹엄 후작, 펠리페 4세와 같은 역사속 실존인물들이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대하 서사극으로도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실존인물과 가공의 인물이 배치되어 펼쳐지는 활극이라면 "삼총사" 시리즈를 빼 놓을 수 없을테고, 이 작품 역시 여러가지 면에서 상당히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은, 상당한 수준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대단해요. 작가 자신이 즐기면서 썼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전개가 빠르면서도 주인공들이 잘 살아있어서 독자를 매료시키는 것 같습니다.
또 이전 작품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레베르테의 현학적인 장황한 묘사도 치밀한 자료조사가 덧붙여져 17세기 스페인 마드리드라는 배경에 잘 녹아들고 있기 때문에 현실감을 더해주는 요소로 사용된 것도 마음에 들고요.

아쉬운 점이라면 거대한 국가적인 음모로 보여지던 계획이 별볼일 없는 결말을 맞고 흐지부지 끝나다는 점입니다. 좀 더 여러가지 장치를 덧붙였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음모가 그닥 복잡하거나 교묘하지 않아서 약간 실망스러웠거든요.
약간 독자에게 공부(?)를 요하게 하는 전개 역시 답답하긴 했어요. 이럴거라면 당시의 역사와 배경을 부록으로 실어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아쉽다기 보다는 문화적 차이랄까... 등장인물들 이름이 너무 길고 장황해서 기억하기가 무척 힘들었다는것도 단점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재미도 있고 캐릭터도 잘 살아있는, 충분히 다음편이 기대되는 작품임에는 분명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협지와 유사하구나 하는 느낌도 오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상당히 중독성이 있더라고요. 전부 5부작이라고는 하는데 한편 한편으로 따지면 분량도 그다지 많지 않으니 차분히 구해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PS : 반지의 제왕의 비고 모르텐슨 주연으로 곧 영화도 개봉하는 모양인데 예고편만 봐도 캐릭터가 상당히 근사하게 구현되어 보이는 만큼 영화도 무척 관심이 갑니다.(위의 사진이 포스터입니다)

2006/06/07

유성검 - 용대운 : 별점 1.5점

천하제일살수인 조무상은 병약하며 불치병을 앓고 있는 동생을 완치시키기 위해 위험성이 높은 고액의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아 왔다. 그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림 제일인인 만승무적극 소대진의 암살을 청부받아 성공하게 되는데 그 일로 구중천과 소대진의 일가에게 그와 동료들은 거의 모두 생명을 잃고 조무상만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다. 특히 병약한 동생 조유향까지 잔인하게 살해된 것에 분개한 조무상은 유일한 친구 임표의 처가가 있는 해남도라는 오지에서 몸을 치료하고 절세의 무공을 얻어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

드디어 읽게 된 "유성검" 입니다. 일찌기 "크리시" 시리즈에서 모티브를 따 와서 쓰여진 무협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고 그때부터 쭉 읽고 싶었는데 최근 저만의 무협지 읽기 바람에 편승해 독파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크리시 시리즈 (1편) 하고 비교한다면 어린 소녀가 잔인하게 살해된 것에 대한 전문 살수(?)의 복수극이라는 기본 모티브는 똑같고 내용면에서는 주인공이 몸을 치료하기 위해 외딴 오지에 숨어서 그곳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의 묘사가 거의 동일하더군요. 원작이 기본적으로 "재미"는 주는 만큼 여기까지의 과정은 무협지로 번안되었다 하더라도 상당히 흥미진진했습니다. 크리시 시리즈 처럼 "작전 (여기서는 암살)"에 대한 치밀함이 굉장히 돋보였고요.
하지만 주인공이 강호에 다시 출두한 다음부터의 이야기가 좀 애매합니다. 실제 복수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극까지는 괜찮은데 이후에 별 상관없는 구중천이라는 곳으로 잠입하여 활동하는 이야기는 실제 복수와는 거의 무관할 뿐더러 마지막에 갑자기 원군이 몰려오는 등 현실성 없는 설정이 난무해서 많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크리시가 마피아를 제거하기 위해 마피아에 잠입하여 중간보스 자리에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말이나 됩니까?  무엇보다도 크리시는 복수에 대한 명분이 있고 소녀의 죽음에 대한 복선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의 조무상은 누군가에게 일가족이 난도질당해도 뭐라 할 말 없는 전문 살수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에 이후의 복수극도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고요. 차라리 치밀한 암살극을 더 디테일하게 꾸며 밀고 나가는 것이 재미나 작품성 측면에서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게다가 용대운 특유의 수많은 고수의 등장과 무의미한 비무에 대한 묘사가 너무 많아서 읽기가 짜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후반부에 억지로 등장하는 일종의 비무대회는 정말 좌절 수준이었었어요... 마지막의 어설픈 해피엔딩 역시 도대체 이해 불가였고요.

한마디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편입니다. 그냥 원전 그대로 스토리를 이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전에 읽은 "탈명검"과도 같습니다. 제가 간략하게 구상했던 이야기가 더 충실하게 원작을 구현할 수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솔직히 이 작품에서 건질만한 부분은 소대진의 암살을 계획해서 실행하는 과정까지일 뿐 뒷부분, 꼭 집어 이야기한다면 구중천 잠입 이후의 이야기는 완전히 사족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9/08/11

브루투스의 심장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1.5점

브루투스의 심장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한정 일본 추리 소설의 제왕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추리 소설로, 1989년에 처음으로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입니다. 범행이 먼저 등장하는 일종의 도서 추리 소설입니다.

작가 생활 초창기에 이런저런 시도를 하던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라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풍과는 사뭇 다른게 특징입니다. 흡사 70년대를 풍미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같았어요. 기차 시간표는 아니지만 상당히 정교한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과 재벌 가문의 문란한 생활, 출세를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 야심가, 등장인물마다 엮여 있는 콩가루같고 불우한 가정사 등 모든 설정이 흡사한 탓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서 거의 보기 힘든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인기를 얻기 전 무명 작가 시절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 시대의 인기작을 분석하고 따라해서 어떻게든 인기를 얻어보려 했던 결과물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답다 싶은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악녀 야스코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꽤나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 돋보입니다. 최초에 등장한, 3명이 실행하는 사체 이동 계획부터 꽤 흥미롭습니다. 오사카, 나고야, 도쿄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잘 계산한 괜찮은 트릭이었어요. 나오키의 말대로 2명이라면 모를까, 3명이 실행하는 계획은 경찰도 쉽게 예상하기 힘들었을테고요.
두 번째 범행인 만년필을 이용한 살인도 그럴듯합니다. 만년필 잉크를 넣는 곳에 청산가리 결정을 넣어 놓고 잉크를 넣으면 청산가스가 발생하여 사망한다는 트릭인데, 청색 잉크만 산성을 띄고 있어서 청산가스가 발생한다는 등의 과학적인 설명이 뒷받침되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든요. 이공계 출신 작가다운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마지막에 다쿠야가 야스코를 살해한 방법도 기발하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미리 야스코의 방에 잠입해서 찻주전자 주둥이 안쪽에 청산가리를 발라 놓은 후, 저녁에 당당하게 방문해서 차를 직접 끓여마시게끔 유도하여 살해하는 계획으로 완벽하게 성공하니까요. 야스코도 이미 2명이나 살해된 상황이라 다쿠야를 조심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탄 차에 독이 들어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지요.

그러나 초기작인 탓인지 모두 헛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의 사체 이동 계획은 나오키가 나고야에서 오사카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신칸센을 탔어야 했고, 다쿠야 역시 이용한 차량을 처리할 때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다쿠야는 이 때문에 덜미를 잡히죠.
두 번째 청산가스 살인도 경찰이 현장 조사할 때 가스가 남아 있어서 들통난다는 점에서는 완벽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마지막 트릭 역시 다쿠야가 직접 야스코의 집을 방문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운 좋게 들키지 않았을 뿐이니까요. 

물론 사람이 만든 계획에 헛점이 있는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를 작중에서 형사들이 치밀한 수사를 통해 밝혀내는 것도 볼거리로 이런게 도서 추리 소설의 묘미이기도 하고요. 정작 문제는 이야기 자체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3명의 사체 이동 계획부터 애매합니다. 애초에 나오키가 고로의 약점을 잡아 청부 살인까지 시킬 수 있었다면, 그냥 고로를 시키면 됩니다. 알리바이고 뭐고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한 명이라도 적은게 낫잖아요? 이야기를 보면 고로와 나오키의 연결 고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 고로에게 청혼을 받은 나오키의 비서 유미에마저 모르니 완벽한 청부 살인이 되었을겁니다.

또 하시모토와 다쿠야를 끌어들이는 이유도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나오키가 트럼프 카드 마술이 특기라는 설정도 고로의 존재 때문에 말이 안됩니다. 그냥 뽑으면 되죠. 최악인 살인이 걸린다면 고로를 시키면 되니까요. 다른 살인을 뽑은 관련자에게 빚을 지게 만들 수도 있고요. 이런걸 대단한 단서인 것 처럼 흘릴 이유는 없습니다.

진범 고로가 야스코 대신 나오키를 살해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살의를 품을 만큼 원한이 깊었다는 설명도 없을 뿐더러, 그랬다면 진작에 살인을 저질렀다면 모를까 왜 이 때 저질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사체 이동 계획에 대한 종이가 차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시체가 야스코가 아니라 나오키였다'는 충격적인 설정을 제대로 설명할만한 합리적인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나오키를 죽인건 살인까지 시켜서 살의가 폭발했다고 치죠. 그러면 시체 이동 계획에 참여한 하시모토와 다쿠야까지 죽이려 한 이유는 뭘까요?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었는지 먼저 간을 보는게 순서였을텐데 말이죠. 시체가 발견되어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된 마당에, 연이어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아무리 봐도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수사 와중에 직접 나서서 야스코를 죽이고 마지막에 고로까지 살해하려한 다쿠야의 정신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대로 모리무라 세이이치 류의 설정이 너무 과한 것도 문제입니다. 주인공인 다쿠야가 온갖 어려움을 혼자 힘으로 이겨낸 자수성가형 엘리트이자 야심가라는건 흔해빠지긴 했어도 봐줄만은 합니다.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의 근거로는 타당하고요. 그러나 니시나 나오키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후계자가 되었으며, 아버지 도시키를 증오한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3인 살인 계획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로봇이 사고를 일으킨 것으로 위장한다는 설정도 말이 안됩니다. 실제로 사고를 일으켰다는 로봇 '나오미'는 바로 폐기되고, MM 중공은 그 뒤로도 잘 나가고 있으니 무의미한 복수였어요. 차라리 로봇을 이용해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걸 널리 알리는게 더 효과적이었을겁니다.
니시나 가문의 딸 호시코의 방자한 행동이라던가, 니시나 도시키의 문란한 사생활 역시 콩가루 재벌집 설정을 드러내는 역할 뿐입니다. 특히 니시나 도시키와 야스코의 관계는 충분히 재미있게 가져갈 수 있는 소재였는데 이래저래 이상하게 소모된 느낌이에요. 

마지막의 열린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다쿠야가 고로의 존재를 눈치챈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쿠야는 고로를 살해할 이유는 없었어요. 경찰에 고로가 나오키를 죽였다고 알리면 그만이죠. 다쿠야가 시체 운반을 맡았던 이유는 예비 처남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고 하면 문제 없었을겁니다. 설령 3인 살인 계획의 증거인 연판장이 남아있었더라도, 이미 2 명은 확실하게 살해한 고로보다는 다쿠야 쪽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죠. 오히려 야스코 살인까지 고로가 뒤집어 썼을 거에요. 어차피 누가 죽였는지 증명할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쿠야가 만든 브루투스가 오작동하여 다쿠야를 죽인다는 결말은 솔직히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로봇 자체가 이야기의 핵심 소재도 아닌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등장해서 이야기를 끝맺는건 이상하다 싶었어요. 인간보다 로봇이 우수하다고 주장했던 다쿠야의 죽음으로는 어울린다 싶기도 한데, 그동안 뛰어난 엘리트의 모습을 보여왔으니 마지막 로봇을 이용한 범행도 멋지게 성공하는게 더 설득력은 높지 않았을까요?
그 외에도 세세한 문제점들이 많아서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재벌 가문과 야심가, 알리바이 트릭이라는 3위 일체는 이미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질릴 정도로 써 먹기도 했고요. 거장이 되기 위해 겪었던 시행착오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5/04/18

악연 1~6 (2025) - 이일형 : 별점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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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영은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직장 동료였던 폭력 조직 출신 조선족 장길룡에게 살인을 청부했다. 한 달 뒤까지 사채를 갚지 않으면 장기가 적출될 위기에 처해서 보험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인 사건 수사가 시작되었고, 장길룡은 경찰마저 살해한 뒤 박재영에게 돈을 요구했다. 궁지에 몰린 박재영은 장길룡을 살해하려했지만, 되려 습격당한 뒤 납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길룡과 함께 김범준에게 살해당했다. 호구 한의사 한상훈을 살해한 혐의로 수배 중이었던 김범준이 박재영으로 신분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최신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최근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인데, 회사 동료 조문 차 장거리 버스 여행을 떠난 김에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생생한 등장 인물들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는 배우들의 연기가 한 몫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빼어난 연기력을 보여주거든요. 그냥 욕설만 하는게 아니라 농담섞인 대사를 나누는 식으로 각본도 잘 받쳐주고요. 각본에서 시니컬한 블랙 코미디 정서가 묻어나는데, 제법 괜찮았습니다.

피해자인 의사 김주연을 제외하고는 주요 등장 인물들 모두가 이른바 '악연'으로 촘촘히 연결되었다는 설정도 눈에 띄네요. 박재영은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장길룡에게 청부를 의뢰하고, 장길룡은 교도소 동기였던 김범준을 범행에 끌어들입니다. 김범준은 박재영의 고등학교 선배이고, 사고로 입원한 박재영(으로 신분 세탁한 김범준)의 주치의 이주연은 고등학교 시절 박재영 일당에게 성폭행을 당했었는데 이는 김범준의 애인 이유정의 사주 때문이었고요. 마지막 장기 밀매 조직 소속 의사로 김범준의 장기를 적출하는건 김주연의 애인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총 6화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며 깔끔하게 마무리하였으며, 모든 악당들이 죽고 만다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최종 빌런인 김범준은 산채로 장기를 적출당한다는 끔찍한 죽음을 맞는데, 작 중에서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정도로 통쾌했습니다.

김범준과 이주연이 공모해서 한상훈을 털어먹기 위해 짠 설계, 박재영이 장길룡을 살해하기 위해 준비한 휴대폰 알람(방심하게 만들려고), 한상훈이 자동차 정비소 이야기를 듣고 블랙박스 메모리를 뒤져 진상을 알아채는 장면, 김범준의 약병 바꿔치기 등 추리 및 범죄물로도 볼만했고요.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채, 장기 밀매, 보험 사기 등 자극적인 소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라 극의 개연성이 떨어지고, 유치하다는 인상을 주는 탓이 큽니다. 사채빚을 못 갚아서 장기가 털린다는건 도대체 언제적 발상인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김범준이 박재영과 고등학교 선후배였고, 이주연의 애인이 장기 밀매 조직의 일원이라는 요소는 과도하게 작위적으로 느껴지고요. 아무리 '악연'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이야기는 익숙하고 결말도 뻔합니다. 박재영이 이주연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중요한 단서가 초반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박재영이 사실은 박재영이 아니라는 뜻이 되며, 그렇다면 그 정체는 이야기 흐름 상 김범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 김범준이 마지막에 장기가 적출되며 죽음을 맞는다는건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요. 그래서 특별한 반전이나 여운이 남지는 못합니다. 제가 이런 장르물을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전개, 배우들의 연기는 좋은데 개연성 부족과 다소 뻔한 전개는 아쉽습니다. 그래도 분량이 짧다는 장점은 확실하고, 흥미로운 부분도 많습니다. 범죄 스릴러를 좋아하신다면 보셔도 괜찮을겁니다. 인기작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2009/03/27

천사의 나이프 - 야쿠마루 가쿠 / 김수현 : 별점 3점

천사의 나이프 - 6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황금가지

커피숍 점장 히야마 다카시는 4년 전 13세 미만 소년 강도들에게 아내가 살해당해 어린 딸과 살아가는 싱글대디이다. 당시 소년들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경미한 처벌에 그쳤고, 히야마는 TV 를 통해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속마음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소년 강도들이 차례로 살해당하자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히야마는 누명을 벗고 당시 사건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그리고 소년범들에 대해 알기 위해 스스로 사건의 조사에 뛰어드는데...


이 책은 51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번 이글루스 렛츠 리뷰에 당첨되어 읽게 된 책입니다. 사실 그동안의 란포상 수상작은 반정도는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았었을 뿐 아니라 이 작품은 제목과 작가가 생소해서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절대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네요. 정말이지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과거의 범죄가 현재의 연쇄살인극과 연관되어 펼쳐지는 과정도 괜찮았을 뿐 아니라, "소년범죄"를 소재로 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솜씨가 제법이라 감탄했습니다. 소년들이 저지른 과거의 범죄가 현재의 연쇄살인과 연결되는 이야기 구조는 시미즈 레이코의 "비밀"이나 소설 "소년탐정 김전일" 등에서 읽었던 것과 좀 유사하긴 한데 나름 합리적으로 잘 포장해서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앞부분의 만화경이나 저금통장의 출금액 같은 사소한 단서를 복선으로 잘 포장해서 결말로 이끌어내는 부분과 마지막 반전 부분에서는 정교함도 엿보였고요. 얼마전 TV에서 실제 일본에서의 한 소년범죄의 실존 인물이 이후 변호사로 성공했다는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이 같은 해당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부분도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소년범죄"라는 것에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좋은 점이겠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촉법소년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형사책임무능력자 - 은 조사해 보니 국내에서도 소년법에 따른 보호 처분을 받는다고 하네요. 국내에서도 이 소설에서처럼 피해자를 무시한채 소년들의 인권을 고려한 처벌을 내리는 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소설에서의 소년들에 대한 처벌과 그 결과는 정말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충격적이긴 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게, "계획범죄" 라도 아이들은 보호를 받나요? 어쨌건 이 이야기대로라면 아이들에게 거금을 주고 살인을 청부하는 이야기도 생각해 볼만 하겠더라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쉬움도 있긴 합니다. 솔직히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의 구조가 일직선이기도 해서 추리적으로 특기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으며, 범죄의 동기 자체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과정과 결과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죠. 특히 야기라는 범인이 히야마에게 단서를 제공하는 부분은 정말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해 너무 억지를 부린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더군요. "사회파 추리소설" 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기는 한데 그냥 "사회파" 소설이랄까요...

아울러 소년범죄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덕분에 메시지 전달은 더 강하게 이루어지지만, 이 범죄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는 설정은 너무 지나쳤어요... 작가의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좀 덜어내는 것이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울러 결말도 너무 급작스럽게 끝나버려서 좀 맥이 빠지는 감이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서둘러 대충 마무리 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추리 매니아로 평가하기에는 추리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누가 읽어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1급 쟝르 문학이라는 것은 확실하니까요. 개인적인 별점은 3점이지만 재미만 놓고 따진다면 4점을 줘도 아깝지 않은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재미난 작품이 사회적 메시지까지 확실하게 담고 있으니 란포상을 탄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싶더군요. 추리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반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에 국내 쟝르문학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PS : 좋은 독서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이글루스와 황금가지 관계자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24/04/24

데드미트 패러독스 - 강착원반, 사토 : 별점 1.5점

데드미트 패러독스 - 4점
강착원반 지음, 사토 그림/놀

친 좀비파 귀족 아르테미아 가문의 외동딸 릴리는 부모님 사망에 따른 생명보험금을 지급받기 직전에 살해당했다. 보험회사 빅베일의 청부였다.
다행히 릴리는 좀비로 되살아났고, 변호사 골드는 그녀를 위해 빅베일에게 보험금 지급 소송을 걸었다. 사망한 그녀에게 그녀 본인의 생명보험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이었다.
이를 위해 전 왕실의사장 더미로부터 사망증명서까지 받아냈지만, 빅베일이 재판장과 배심원, 의사협회를 매수한 탓에 릴리는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골드의 계획이었다....


좀비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차별받는 좀비들을 위해 노력하는 변호사 골드의 활약을 그린 단편. 소갯글이 재미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그랬어요. 핵심인 재판 과정이 시시한 탓이 큽니다. 릴리가 죽음을 인정받지 못해서 본인의 사망보험금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을 살아있는 상태이니 수령하는건 당연하니까요. 별로 치밀한 계획이나 드라마가 있지 않아서 시시합니다.
좀비와 인간이 공존한다는 세계관도 어디선가 많이 보아왔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좀비가 익히 알고 있듯 사람을 잡아먹는다던가, 사람을 물어 전염시킨다는 설정없이 약간의 공격적 행동만 있는걸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좀비가 좀비답지 않으니, 인간 사회에 이종이 섞여 살아가면서('인간 세계에 섞여 사는 마족'같이) 차별도 받지만 서로 도움도 주며 공존한다는 흔해빠진 판타지 세계관과 변별력을 느끼기 어려워요. 좀비 존재에 따른 긴장감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골드의 동생인 좀비 실버에 대한 드라마도 뻔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작화는 괜찮았지만, 이렇게 단점이 훨씬 많아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4/01/24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 - 표창원 : 별점 3점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사건 추적 - 6점
표창원 지음/지식의숲(넥서스)

유명했던 국내 사건들에 대해 소개해 주는 논픽션입니다. 시사저널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인데, 연재물을 꾸준히 읽고 갈무리까지 한 저에게는 별로 새로운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냥 한 권으로 모아서 다시 읽었다는 정도의 의미 뿐이지요.

그래도 한 권의 단행본인 덕분에 가지게 된 장점도 많습니다. 먼저 표창원 씨의 일관된 시각 - 범인은 엄정한 죄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 - 을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미제사건인 제주도 여교사 사건 등을 재조명하여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천명하는 부분 등이 그러합니다.
또 부산의 한 교수가 아내 살해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변호사를 동원해서 20년 형을 선고받았던 사건, 유명한 시체 없는 사건의 피의자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이 대비되는 효과도 단행본이기에 지니는 장점이었고요.
연재물에서는 보지 못했던 짤막한 해외 사례 및 중간, 중간에 토막 상식처럼 들어간 표창원 씨의 생각도 눈여겨볼 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었다고 가치가 반감되는건 아닙니다. 사건 중에서는 애 키우는 아빠라 그런지 유괴사건들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모든 사건에서 유괴 초반에 이미 아이가 살해당하는 이유는, 범인도 처음에는 죽일 생각까지 없었는데 아이의 칭얼거림, 보챔 등의 행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치닫게 된다는 분석 등이 인상적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유괴범은 괴물이 아니라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아이에게 교육을 정말 잘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지강헌 사건의 이유가 이른바 사회보호법 때문에 556만원이라는 단순절도에도 무려 17년형을 선고받은 탓이 가장 컸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입니다. 저라도 미쳐버릴 형량이긴 하죠. 살인범도 한 20년형 선고받는 게 고작인 세상인데.... 어떻게 보면 현대의 장발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그러나 약간 아쉬운 부분도 없잖아 있습니다. 사건의 주요 인물과 관계된 단체, 회사를 어떤 사건에서는 애매하게 등장시킨 부분인데 법률적인 문제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의아했거든요. 예를 들어 장영자 사건에서 사위와 며느리인 탤런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인데, 인터넷 좀 뒤져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이라 구태여 숨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아울러 사건의 범인들의 현재까지 취재하여 엄정한 심판이 이루어졌는지, 관계자들의 근황은 어떠한지까지 알려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이미 출소하였을 윤금이 사건의 범인인 케네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있는 수지킴 사건의 윤태식의 근황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윤태식의 경우는 얼마 전 여대생 청부살해 사모님과 같이 편안한 징역생활을 하고나 있지는 않은지 걱정도 되니까요.

여튼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범죄를 다룬 논픽션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책으로 범죄, 사건을 다룬 논픽션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 중에서도 이 글들을 아직 다른 매체로 접하지 않으신 분들께는 추천드립니다.

2022/12/04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국내에서 과학 수사를 통해 해결했던 여러 사건들을 정리한 논픽션. 2부 구성으로 모두 22건의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부는 특정 과학 수사 기법이 해결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어서, 해당 수사 기법에 대해 이해를 돕는 구성입니다. 현장 검증과 검시는 물론이고, 비산 혈흔 등 혈흔 형태 분석, DNA 분석, 프로파일링, 법 최면, 지문 감식, 지리 프로파일링 등이 등장하며, 수사 기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이고 전문가들에 대한 인터뷰 등 부가 자료들도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습니다. 사건도 밝혀진 모든 내용이 소개되고 있으며, 사건 현장 사진과 도해로 구성된 사건 상황 등 도판도 완벽합니다.
2부는 완전 범죄를 노렸지만, 수사관들이 끈질긴 수사로 밝혀낸 사건들이 담겨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소개는 1부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수준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4점. 우리나라 범죄를 다룬 논픽션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여,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해 드립니다.

첫 번째는 <<마포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입니다. 의사 남편이 만삭 부인을 살해했던 엽기적인 범행으로, 피고인 남편 측에서 캐나다 법의학 전문가까지 증인으로 불러 법정 다툼이 있었던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니, 남편 범행이 확실하더군요. 피해자의 목졸림 흔적과 얼굴과 몸의 멍자국, 저항하다 생긴 것으로 보인 손톱 밑의 남편 DNA 등 현장 증거가 뚜렸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남편 쪽에서 주장했던, "욕조에서 넘어져 죽은 것 같다"는걸 설명할 수 없는, 피해자 몸의 혈흔과 상처가 결정적인것 같아요. 욕조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양양 일가족 방화 사건>>은 무식한 범인이 교과서처럼 단서를 남긴 범행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현장 검증과 검시로 피해자 일가족 시신에서 수면제가 검출되어 누군가 방화를 저지른게 명백하다는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경찰 진술에서 필요도 없는 말을 해 가며 자살이 맞다고 주장했고, 결국 현장에서 발견된 차용증 등으로 동기마저 드러나버리고 말았지요. 범행 직후 소방차를 따라 다시 현장에 나타난 것까지, 하는 행동 모두가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단순 무식한 범인을 연상케합니다. 아울러 고작 2,0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어린 소녀가 포함된 네 명의 일가족을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에게 무기징역은 너무 관대한 선고였습니다. 능지처참하고 저잣거리에 효수를 했어야....
<<서울 광진구 주부 성폭행 사건>>은 그야말로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DNA 감식을 통해 드러난 범인은 범행 당시 수감 중이었지만, 과학수사관 권경사의 추리 덕분에 진범이 체포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수감 중인 용의자의 일란성 쌍동이라는 추리였지요.
<<60대 남녀 변사 사건>>은 단순 자연사로 보였지만, 현장 검증을 통해 몇 가지 이상한 정황이 포착되어 살인 사건이라는게 드러난 경우입니다. 현장에서의 구토 흔적과 기묘한 자살 시도 흔적, 그리고 자연사는 이불 한 장만 반듯이 덮고있는게 일반적인데 이불 두 장이 포개져 쌓여 있었던 것, 피해자 옷과 맞지 않았던 방에 떨어져 있던 단추 등이 단서가 되었습니다. 검시 결과도 살인 사건임을 증명해 주었고요. 현장 상황과 시신의 모습 등을 분석하는 과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안성 부부 살인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사건 해결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데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잔혹한 현장 모습으로 청부 살인이나 원한 살인이 의심되었지만 프로파일러들은 "돈을 목적으로 한 범죄이며, 근처에서 일어났던 침입 사건의 범인과 동일인물일 것이다. 침입이 발각되어 과도한 공격으로 피해자들을 살해했고,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몰린 사람이며, 피해자들은 물론 마을을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일 것이다"는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이는 실제 범인 모습과 일치했지요. 어떻게보면 좀 뻔한데, 현실은 픽션과는 엄연히 다르다는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양주 전원 주택 살인 방화 사건>>을 통해서 지문은 고온에서는 수분이 증발하면서 흔적 자체가 사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화재 현장에서는 '열 사각 지대'에서 집중적으로 지문을 채취한다는 등 실제 현장에서의 지문 감식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었고, <<의정부 연쇄 절도 사건>>은 이름도 생소한 '지리 프로파일링'을 접하게 해 주어 좋았습니다. 범죄가 발생한 장소와 시간을 토대로 범인이 머무는 곳과 다음 범행 장소를 예상하는 과학수사 기법이라는데, <<넘버스>>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던 적이 있지요. 실제 사건을 해결할 정도로 정립된 기법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2부의 <<고급 전원주택 연쇄 강도 사건>>은 완전 범죄를 노린 3인조 일당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고 전원 주택을 털었던 사건으로, 집에 설치된 폐쇄 회로 TV는 본체까지 뜯어서 들고갔고, 현장에 남긴 담배 꽁초도 어디선가 주워와 일부러 흘리는 등 굉장히 치밀하게 범행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범행 장소를 오간 차량이 없었다는게 특히 주목할만 합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전원 주택이 산과 가깝다는걸 이용하여, 목표지 인근까지 대포차로 이동한 뒤 야산에서 하루 노숙을 하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군요. 현장에 일부러 뿌린 꽁초 중 동일한 DNA가 검출된 탓에 덜미가 잡히고 말았지만, 정말로 대단한 지능범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산 교수 부인 살인 사건>>은 한 때 뉴스를 도배했던 사건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는 범죄 전문가 교수가 경찰과 두뇌 싸움을 벌인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사건 개요를 읽어보니 별다르게 머리를 쓴 부분은 없어서 놀랐습니다. 내세운 알리바이도 엉망이었고, 내연녀를 동원한 시체 유기도 곧바로 경찰에 발각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언변만 빼어날 뿐 일개 잡범 수준에 불과했어요. 차라리 앞서의 고급 전원주택 연쇄 강도 사건 범인들 수준이 더 높았습니다. 범인의 직업이 선입견을 만든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것도 일종의 미스디렉션이겠지요.

2022/08/20

시체 찾는 아이들 - 시모무라 아쓰시 / 최재호 : 별점 1.5점

시체 찾는 아이들 - 4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및 주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체포된 24살의 미청년 연쇄 살인범 아사누마 쇼고는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 8명의 피해자 중 미즈모토 유카는 자신이 살해하지 않았고, 진범은 자기가 죽여 '추억의 장소'에 묻었다는 폭탄 발언을 해 버렸다. 세간에서는 시체 찾기 소동이 일어났고, 휴직 중인 형사 노조미도 독단적으로 재수사에 나섰다. 그녀는 유카 사건에서 아사누마 쇼고가 아닌 다른 3인조를 범인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벌였었는데, 3인조 중 한 명인 히카루가 실종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인기 유튜버를 꿈꾸는 중학생 소타는 유튜버 니시얀, 세이와 함께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시체 찾기'에 나서는데.... 

미즈모토 유카 사건에 대해 추적하는 노조미와 소타 일행의 시체 찾기가 병행 전개되는데, 중반부까지는 두 이야기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병행 전개되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데, 나중에 소타 일행의 이야기는 노조미 이야기의 수년 전이며, 소타 일행 중 한 명인 세이가 아사누마 쇼고였다는 반전이 드러납니다. 아사누마 쇼고의 '추억의 장소'는 3인조가 시체를 찾아 나섰던 바로 그곳이었고요. 일종의 서술 트릭이기도 한데 꽤 괜찮아요. 잘 숨기고 있어서 반전에 대한 놀라움과 재미는 충분히 가져다 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서술 트릭 외에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캐릭터는 - 특히 연쇄 살인마 아사누마 쇼고 - 클리셰로만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뻔했고, 소타 일행의 시체 찾기와 노조미의 수사 모두 전개가 비현실적인 탓입니다. 이 중 시체 찾기는 "스탠 바이 미" 설정과 너무 유사한데다가 소타 일행 중 한 명인 고등학생 세이의 경우, 시종일관 비정상적인 사고 방식이 두드러지게 묘사됩니다. 일행의 목적지였던 치바의 '우는 아이 숲' 근처에서 만난 미모의 소녀 카호의 등장은 뻔하면서도 억지스러웠고요. 

굳이 변명한다면, 세이의 비정상적인 사고 방식은 그가 '살인마' 아사누마 쇼고라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서술 트릭 장면과 엮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호도 앞 부분 미즈모토 유카 사건에서 "남편이 살인을 청부했다"고 말했던걸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고요. 카호를 세이가 강간하려 했던 과정을 통해서, 그가 "믿어왔던 타인에 대한 절망"을 안겨주는걸 꿈꿔왔다는걸 드러내거든요. 이런 설명이 구태여 필요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러나 노조미 이야기는 이렇게 독자가 이해해 줄 구석이 전무합니다. 특히 그녀의 사건 추적 때문에 실종된 카네다의 부친인 변호사가 현직 형사의 납치 살해를 교사한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카네다의 부친이 이러한 대형 강력 범죄를 사주할 동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카네다가 미즈모토 유카 사건의 진범이라는건 이 시점에서는 밝혀지지 않았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를 납치해봤자 세간의 화제가 된 시체 찾기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시체 찾기가 성공하여 카네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한들, 카네다가 아사누마 쇼고가 살해한 유카 사건의 진범이라는 증거도 없고요. 변호사가 이런 기본적인 상황도 모른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노조미의 수사는 그 외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증거없이 직관에 의존하는 탓입니다. 애초에 3인조가 범인이라고 주장했던 근거부터가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사진 한 장 뿐이었지요. 아사나무 쇼코의 '추억의 장소'도 인터넷 시체찾기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읽고 떠올린 직감에 불과하고요. 이 직감은 정말 황당한데, '아사누마 쇼코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여서' 신빙성을 느꼈다네요. 사건 수사 중인 형사가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DC 인사이드의 사건 갤러리'를 읽다가 범인과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글에서 찾아냈다는 것과 똑같지요. 이렇게까지 막 나가면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어집니다.

소타 일행의 이야기도 세이가 주도했던 시체 찾기의 진상이 드러난 뒤 - 부정을 저지른 모친을 세이가 살해했는데 시체를 부친이 몰래 유기했다. 그 뒤 세이는 모친의 환청이 들려 시체의 목을 베려고 시체를 찾아나섰다 - 부터는 막 나갑니다. 세이가 니시얀과 소타를 시체 찾기에 끌어들인 이유부터 설명이 안되거든요. 작중에서는 미쳐버려서 어머니 시체를 찾아 목을 베려 했는데 , 혼자서는 힘들어서 동료가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니시얀과 소타가 시체를 찾는데 특별히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장비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이 둘을 왜 데리고 갔을까요?

또 아무리 미쳤다 한들, 사람을 죽이면 벌을 받는다는 기본적인 사회적인 상식을 망각했을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니시얀과 소타도 같이 죽이려고 했던 걸까요? 만약 그랬다면, 범행이 발각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텐데요? 게다가 니시얀의 희생으로 소타와 카호가 도주한 다음 이야기는 그야말로 가관이에요. 소타는 세이 모친의 시체를 발견했고, 모친을 세이가 죽였다는 것도 알고, 심지어 니시얀까지 죽었는데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무섭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자기를 구하려다가 친구가 죽었고, 살인자는 자기 얼굴을 알고 있는데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게 말이나 될까요? 니시얀도 단순 실종으로 처리된 이유를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소타가 니시얀이 죽는 상황을 방치했던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둘 사이에 절벽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소타가 당시 경찰에 신고만 했어도 이후 8명의 여성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소타가 "어릴 때 겁쟁이였다는 것을 처벌할 법은 없다" 고 노조미의 말을 듣고, 니시얀의 할머니를 찾아가 위안을 얻는 에필로그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니시얀이 아니라 8명의 여성과 그 가족에게 사죄하고, 평생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서술 트릭만큼은 괜찮았지만 그 외 다른 부분들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독자를 속이려다가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렸네요. 추천하지 않습니다.

2010/08/22

마인드 헌터 - 존 더글러스, 마크 올셰이커 / 이종인 : 별점 3점

마인드 헌터 - 6점
존 더글러스.마크 올셰이커 지음, 이종인 옮김/비채

프로파일러 존 더글러스의 회고록입니다. 저자는 FBI 수사지원부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며 수백 명의 연쇄 살인범을 검거한 경력자로, 책에서도 살짝 언급되지만 <양들의 침묵> 수사관의 모델이라는 전설적인 수사관입니다.

저자가 직접 수사과정에 참여했던 잔혹한 범행들에 대한 수사과정을 비롯하여 범인들과의 인터뷰와 분석 등 '프로파일링'이라는 기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리소설에 그대로 사용해도 괜찮을 듯한 소재들도 굉장히 많고요.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내의 청부살인으로 죽을뻔한 경찰 수사관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너무 잘 짜여져서 수사가 미궁에 빠질 수 있었지만, 결국 수사의 단서가 된 것이 '고액의 전화요금' 이라는 사소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잔혹한 사건 대부분에서 '프로파일링'을 통해 도출된 범인의 이미지와 범인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건 조금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현실적으로 100% 적중률은 아닐테니, 프로파일러의 실수담도 등장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죠... '회고록'이라는 책의 속성상 무리였을까요?

소설은 아니고 사건들이 토막토막으로 이어지는 논픽션 에세이기에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긴 하지만, 재미와 더불어 자료적 가치도 높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지만 회고록이기 때문인지 저자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아서 감점합니다. '프로파일링'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9/07/08

파리의 밤은 깊어 - 노엘 칼레프 / 김두남 : 별점 2점

파리의 밤은 깊어 - 4점
노엘 칼레프 지음, 김두남 옮김/해문출판사

간만에 본업(?)인 추리소설의 포스팅인 것 같네요. 이번에 읽은 작품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로 이미 접한 프랑스 작가 노엘 칼레프의 데뷰작인 "파리의 밤은 깊어" 입니다. 제 고전 선호 취향 탓에 집어든 작품이죠.

마약 운반책으로 일하며 사랑하는 약혼녀와의 행복을 위해 조직 탈출을 꿈꾸는 바스티앙은 자신이 속한 "아르메니아인" 조직의 라이벌 조직을 찾아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대신, 자신의 탈출을 보장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라이벌 조직은 바스티앙의 축구공 대신 안에 "폭탄"이 들은 축구공을 주고 폭탄을 아르메니아인에게 가져다 주라고 시키지요. 하지만 바스티앙의 실수로 동네 꼬마들 축구공과 공이 바뀌어 버린 뒤, 파리 경찰, 범죄조직, 꼬마들, 병원 등 다양한 사람들과 얽히고 섥힌 하룻밤의 대 소동이 시작됩니다!

일단 읽으면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줄거리 요약만 봐도 비슷하지요? 마약을 운반하는 운반책과 범죄조직, 그리고 시한 폭탄을 동네 꼬마들과 바람난 남편, 이탈리아인 떠벌이 트럭 운전사, 꼬장꼬장한 병원장과 간호사들을 한데 묶고,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소해 보이는 일부터 시작해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리는 사건들, 복잡한 이야기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묘사 등 기본 뼈대가 그야말로 형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똑같습니다. 또한 마약을 숨겨 운반하는 축구공에 대한 아이디어 말고는 추리소설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범죄-서스펜스-스릴러 물이기 때문에 추리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추리적 요소가 없는 대신 폭탄을 찾고자 하는 경찰과 방송의 노력을 한발자국씩 빗겨나가는 폭탄 주인의 모습 같은 서스펜스 요소가 굉장히 강력하다는 것도 역시 동일하고 말이죠. 

그러나 이러한 서스펜스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지하고 있으며,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비한다면 아무래도 범죄조직이 등장하고 살인 청부나 총격전 같은 묘사가 많기때문에 블랙코미디적인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유쾌함이 떨어지며, 마지막에는 결국 무고한 형사가 사망하는 등 뒷맛까지 찝찝해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더군요. 무엇보다도 반전같지 않은 반전이 포함된 결말이 가장 큰 감점요소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뻔하고 낡은 결말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50년대 프랑스 추리소설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다면 챙겨보실 필요는 딱히 없을 것 같네요. 차라리 영화에 더욱 더 잘 어울렸을 것으로 보이기에 영화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혹 온다면 그때 챙겨보시는 것이 더 나을테고 말이죠. (그런데 영화가 나오려나...)

2017/05/27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 - 키사키 치아키 / 박춘상 : 별점 1점

하카타 돈코츠 라멘즈 - 2점
키사키 치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살인 청부회사의 신입사원 사이토는 인구의 3%가 킬러인 마굴 후쿠오카로 파견되어 첫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하카타 시장과 시장이 고용한, 무나가타를 리더로 하는 킬러 4인조, 다국적 마피아 화구회, 사립탐정 반바와 화구회에게 배신당한 킬러 린 시안밍간 싸움에 휘말리고 말았다.
킬러 린 시안밍은 어렸을 때 팔려와 화구회에 의해 킬러로 키워졌으나, 화구회의 리더 장에게 불만을 품던 와중에, 여동생 등 일가족은 모두 그에게 살해당했고 자신은 이용당한 것에 불과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겨우 사지에서 벗어난 린은 복수를 위해 화구회가 지목한 타겟인 사립탐정 반바와 손을 잡는데... 

라멘에 대해 좀 정리할게 있어 뒤적이다가 충동적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그런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뭐라 말하기도 어렵네요. 일단 후쿠오카 인구의 3%가 킬러고, 누구나 킬러나 복수 대행업자를 고용한다는 설정이야 그렇다 쳐도, 내용 전개가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보통은 킬러가 등장하는 작품이라면 타겟을 어떻게 살해할지에 대한 고민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자칼의 날"이나 "피닉스"처럼요. "고르고 13"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이 작품 속 킬러들은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그냥 찾아가서 죽이고 끝! 입니다. 죽이는 것도 칼이나 손, 폭탄 등 주특기를 이용한다는 만화같은 설정이 전부고요. 이바노프가 린을 죽이려고 할 때 맨손만으로 죽이려고 하면서 강철같은 육체 어쩌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영화 "언터처블"도 안 봤을까요? '총싸움에 칼을 가지고 오는 멍청이가 어딨나'. 이바노프는 린에게 죽어도 쌉니다.
그나마 작전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복수 대행업자 지로가 초등학생 꼬마 미사키와 함께 다니면서 타겟의 경계심을 풀어놓는다는 것, 린이 이바노프에게 죽기 직전 사용하는 피스톨 나이프, 반바가 거미 모양 도청기를 활용하는 것 정도에 불과합니다.

또 킬러가 다수 등장하지만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는 전개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화구회 장이 구태여 킬러 시안밍을 자극한 후 사무실로 끌어들여 부하들을 그냥 버리는 패로 쓴다는 식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렇게나 모르다니. 작가는 그냥 액션 장면을 쓰고 싶었던 모양인데 최소한의 설득력은 있었어야 합니다.  
킬러들이 대놓고 활개치는 이유를 시장이 경찰 등 하카타 시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역시 말도 안됩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킬러를 고용하면서까지 반대파를 숙청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경찰을 시켜 누명을 씌우고 쳐 넣으면 될텐데요.

마지막 반전이랍시고 들어간 니와카사무라이의 정체도 너무 뻔합니다. 반바의 조작질이 직전에 묘사될 뿐더러, 반바와 같은 주인공급 인물이 맥락없이 죽었다고 목만 달랑 등장할리 없으니까요. 게다가 완전히 설정 오류인게 이 정도의 실력자가 화구회의 의뢰를 받은 후 움직일 이유는 없습니다. 시게마츠의 의뢰를 받은 시점에 시장을 포함해서 나쁜 놈들을 그냥 다 죽여버리는게 낫잖아요?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더군요. 이렇게 화구회와 시장 부하를 쓸어버리면 니와카사무라이가 배신했다는 것이 이 바닥에 쫙 퍼지는건 기정 사실일터라 '킬러를 죽이는 킬러'라는 설정에 반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는 것도 문제고요.

킬러들이 서로 엮이는 과정도 작위적이라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입니다. 시장의 변태 살인마 아들 유스케를 축으로 그가 벌인 범죄 때문에 이런저런 킬러들이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는데, 모든 이야기가 우연이에요. 사이토가 사건에 엮이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원래 사이토의 타겟인 무라세 준은 지로의 타겟이라는 것이 첫번째 이유인데 이것부터 말이 안되지요.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도대체 킬러 몇명이 달라 붙는건지... 사이토가 무라세 준으로 오해받아 지로에게 납치되어 죽을 뻔 하다가 안면을 트게 된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무라세 준이 유스케의 친구인데, 유스케와 함께 사람을 때려 죽여서 시장 부하 무나가타 4인조가 먼저 죽인다는 것도 황당합니다. 뒤이어 무나가타 4인조가 유스케의 다른 범죄를 만취한 사이토에게 뒤집어 씌우는 과정도 너무 작위적이고요. 이것 때문에 사이토가 지로에게 복수를 의뢰해서 지로가 무나가타 4인조를 노리게 된다는 이야기에 이르면 뭐라 더 할 말이 없어집니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야기 최고의 쓰레기 유스케가 맞는 비참한 최후 뿐인, 당위성을 생각하기 보다는 화끈한 액션을 즐기 위한 액션물입니다. 과거 스탤론이나 아놀드, 이후의 시걸, 최근의 제이슨 스탠덤 영화처럼요. 하지만 이런 액션물이 소설로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게다가 영화나 만화였어도 화면, 작화가 별로라면 혹평을 받아 마땅할 내용으로 소설로 읽기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종이 무더기에 불과했습니다. 요새 말로 하자면 '나무야 미안해' 급이에요. 감히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2024/10/25

끝없는 바닥 - 이케이도 준 / 심정명 : 별점 2점

끝없는 바닥 - 4점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토 은행의 융자 담당 대리 이기 하루카는 어느날 동료이자 친구 사카모토가 알레르기로 쇼크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카모토는 죽기 전, 이기를 만났을 때 “너, 나한테 빚진 거다?”라는 묘한 말을 남겼었다. 
사카모토의 업무를 인계받은 이기는 남겨진 자료에서 과거 도쿄 실리콘의 야나기바 사장이 관련된 수상한 입금 내역을 발견했다. 기타가와 부지점장의 방해에도 조사를 진행하던 이기의 앞에 누군가 나타나 흉기를 휘둘렀고, 융자과장 후루카와가 대신 칼에 맞아 쓰러졌다. 그 뒤 기타가와도 술에 취한 채 물에 빠져 죽어버렸다.
이기는 모든 사건이 도쿄 실리콘과 신에쓰 머터리얼간의 자금 흐름, 그리고 텐나인이라는 벤처 업체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흑막은 니토 상사에서 신에쓰 머터리얼로 파견되었던 재무담당 이사 야마자키였다.


이케이도 준의 데뷰작.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입니다. "한자와 나오키" 등 작가의 이름은 전부터 들어 왔는데, 작품을 읽어보는건 처음이네요.

재미는 있습니다. 사카모토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거대한 음모가 드러나는 과정이 치밀한 덕분입니다. 특히 자금의 흐름을 이용한 야마자키의 계획이 아주 볼만 했습니다. 신에쓰 머터리얼은 반도체 시장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지만, 무리한 투자로 자금난에 몰렸습니다. 그 탓에 니토 상사에서 신에쓰 머터리얼 투자를 주도했던 야마자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고요. 그래서 야마자키는 신에쓰 머터리얼의 하청업체이자 운명 공동체 도쿄 실리콘에게 신에쓰 머터리얼을 살리기 위함이라며 거액의 뒷돈을 받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반도체 업체로의 진출을 위한 로비 자금이라는 핑계였는데, 야마자키는 이 돈을 착복하고 신에쓰 머터리얼을 부도낸 뒤 새로운 회사 텐 나인 설립과 함께 신에쓰 핵심 기술자들을 모두 빼돌렸습니다. 텐 나인과 함께 니토 상사로 금의환향할 생각이었지요. 사카모토는 이 뒷돈의 흐름을 알아낸 탓에 살해당했고요.
이러한 복잡한 자금의 흐름을 밝혀내는 과정은 물론, 은행 내부의 파벌 다툼, 여러가지 시스템에 대한 설명과 같은 실무자만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상세하여 설득력을 높여줍니다. 이케이도 준이 은행원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자금 흐름에 관련된 음모를 제외하고, 이야기는 엉성합니다. 첫 번째로, 사카모토에게 뒤집어 씌운 횡령은 사카모토가 아직 살아있던 한달 전 수차례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범인들이 사카모토를 어느 시점에 제거할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카모토가 언제 눈치챌지도 모르기 때문에 한달이나 되는 시간을 둔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두 번째로, 사카모토 살인은 알레르기를 이용한거라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기타가와 사건도 일단은 술에 취한 탓으로 처리되었고요. 하지만 융자과장 후루카와를 찌르고, 차를 빌려 고속도로에서 이기를 죽이려다가 일반인을 죽게 만든 범죄는 차원이 다릅니다. 엄연한 강력 사건이라서 경찰이 수사에 나설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건을 키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도쿄 실리콘의 수상한 자금 입금은 불법이 아니라고 작중에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설령 문제가 되었더라도 기타가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면 끝났을테고요. 
그러나 이런 강력범죄를 저지른 탓에 결국 청부업자 리 료헤이가 범행을 저질렀다는게 경찰에게 밝혀져서 야마자키도 빠져나가는게 불가능해져 버렸습니다. 자금의 흐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인 청부건으로 엮어 결국 체포되었겠죠.
이 억지스러운 강력 범죄 흐름 마지막에 야마자키가 니시나 사와코의 집에서 이기를 죽이려한건 비현실의 끝판왕 격입니다. 니시나 사와코는 공범도 아니었고, 사건 후에 입을 다물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데뷰작답게 다소 정리가 되지않은 부분들도 눈에 뜨입니다. 나오, 요코와 같은 여성 캐릭터들이 대표적입니다. 없어도 되고, 매력도 느끼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사소한 사건이 점점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상황에 휩쓸린 전문 직업인이라는 점에서 "스쳐 지나간 거리"와 비슷한데, 완성도는 그만 못합니다. "스쳐 지나간 거리"를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04/26

다이얼 M을 돌려라! - 알프레드 히치콕 : 별점 4점


전직 테니스 스타 토니(Tony Wendice: 레이 밀런드 분)는 부자인 아내 마고(Margot Wendice: 그레이스 켈리 분)와 결혼한 뒤, 테니스를 그만두고 사업가로 그럭저럭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아내가 옛 동창이자 추리 소설가인 마크(Mark Halliday: 로버트 커밍스 분)와 사랑에 빠지자 아내의 유산을 노리고 청부살인을 계획한다.
옛 동창생 스완(C.A. Swan/Captain Lesgate: 안소니 도슨 분)을 끌어들여 마고를 죽이도록 치밀한 계획을 꾸민 뒤, 자신은 알리바이를 위해 연적 마크와 함께 사교모임에 참석하나 마고는 자신을 목 졸라 죽이려는 스완과 격투를 벌이다 엉겁결에 바느질 가위로 그의 등을 찌르고, 스완은 뒤로 넘어지면서 가위에 깊이 찔려 숨지고 만다.
토니는 이 우연한 기회를 오히려 역전시켜 아내를 계획적인 살인범으로 몰아가며 사형 선고를 받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마고의 애인인 마크와 형사반장(Inspector Hubbard: 존 윌리암스 분)의 끈질긴 추격으로 결국 진상이 밝혀지게 된다.

굉장히 보고싶었던 영화인데 EBS에서 방영해 주길래 놓치지 않고 보리라 마음먹고 기다려서 본 작품. 초반부의 토니의 치밀한 살인 계획과 약간씩 어긋나는 실제상황, 그리고 중반 이후의 토니의 아내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두뇌게임이라는 크게 두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초반부는 추리소설가 마크가 이야기한대로 “실제로는 제대로 될 리가 없겠죠”라는 완전범죄의 실현 불가능한 현실적 요소들만 잘 보여주고 있어서 재미있더군요. 계획과 달리 외출하려고 하는 아내라던가, 갑작스럽게 멈춘 시계로 타이밍을 놓친다던가, 급한 전화를 하려 하는데 공중전화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던가 하는 디테일이 긴장감 있게 진행됩니다.
중반 이후는 오히려 초반의 완전범죄 계획보다 토니의 애드립이 치밀함에서 더 빛을 발한다는 것도 굉장히 신선했고요. (역시 애드립인가!) 무엇보다도  정통 추리물의 구조에 비교적 충실하게 몇가지 단서, 그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었던 (!) 단 하나의 단서를 가지고 토니의 범죄를 밝히는 마지막 장면은 역시나 멋지더군요. 별볼일 없어 보이던 하버드 형사 반장의 추리가 정말이지 반짝반짝합니다. “마크, 역시 자네 말대로 잘 되지 않는군” 라는 마지막 토니의 명대사도 기억에 많이 남고 말이죠.
추리소설가 마크의 활약은 기대 이하라는 점, 그리고 바람을 피운 마고도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되기에 마크와 마고의 해피엔딩을 암시하는 결말부는 좀 아쉽긴 했습니다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명불허전!"의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히치콕의 걸작 중에서도 베스트에 꼽히는 작품답게 등장인물도 몇 없고 세트 하나에서 영화가 거의 다 이루어지지만 그 서스펜스와 치밀한 두뇌게임은 과연!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토니역의 레이 밀렌드의 뻔뻔스러운 악당 연기와 마고역의 그레이스 켈리의 현재도 빛을 발하는 미모를 감상하는 것은 보너스고요.
때문에 별점은 4점. 아직 보시지 못하신 분들께서는 꼭 챙겨보시길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그동안 항상 궁금했었던 다이얼 M은 토니의 집 전화번호의 가장 앞에 있는 번호의 알파벳 이니셜이더군요. 여기서는 "Murder"의 의미도 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