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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9

쌍두의 악마 1,2 - 아리스가와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쌍두의 악마 2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시공사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외딴섬 퍼즐' 사건 이후 정신적 충격으로 예술가들의 촌락 기사라 마을에 은둔해 버렸다.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에이토 대학 추리연구회 일동이 출동했다. 하지만 기사라 마을은 여러가지 이유로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탓에, 추리연구회는 심야에 침투작전을 벌여 에가미 선배 홀로 겨우 침투에 성공했다. 아리스를 비롯한 나머지 연구회원들은 예술가 마을 바로 옆의 나쓰모리 촌락으로 후퇴한 뒤 선배와 마리아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사라 마을의 화가 오노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사건 해결을 위해 잠시 남기로 한 에가미 선배의 전화를 마지막으로 기사라 - 나쓰모리를 잇는 유일한 다리가 폭우로 유실되고 전기와 전화마저 끊겼다. 뒤이어 나쓰모리 마을에서도 카메라맨 아이하라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 작가 중 하나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 작가의 두개의 시리즈 중 - 하나는 에이토 대학 추리 연구회 회원인 대학생 아리스가 화자로 등장하고 에이토 대학 추리 연구회의 대선배인 에가미 지로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학생 아리스"시리즈. 그리고 또 하나는 추리소설가 아리스가 화자이며 그의 친구이자 임상병리학자로 유명한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시리즈 - 학생 아리스 시리즈로 그간 읽어왔던 작가의 작품들 중 가장 긴, 8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시리즈 작품답게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전작 설정과 유사하면서도, 신본격 작가다운 고전적인 설정과 전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골 마을의 폐쇄적 공동체와 이 공동체가 천재지변으로 고립된다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거든요. 그리고 연쇄 살인극이라는 것도 전작들과 유사하고요.

그동안 예닐곱편의 작품을 읽어온 것에 따르면,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공정한 단서 제공과 합리적인 추리라는 장점과 작위적인 설정이라는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작가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장점이라 생각했던 추리적인 부분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대표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첫번째 사건부터 문제에요. 향수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이 야기사와 뿐이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어차피 우산 안이라면 접혀져 있을때 향기가 나지 않아서 은폐가 가능했을테니까요.
향수를 뿌리는 것이 가능했다 하더라도, 동굴 안에서 살해할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작중에서 설명되듯 그냥 동굴 입구에서 살해해도 되잖아요. 입구가 2개라서 어디서 나올지를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향기에 의지해서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누군가를 미행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설령 가능하더라도 피해자에게 발각될 위험성이 너무 높아요. 그러느니 차라리 50% 확률로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계약에 따라 혐의를 벗겨주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 설정도 무리수였습니다. 여자 힘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것은 가정일 뿐, 현실적인 단서가 되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이럴 바에야 확고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증거로 귀를 잘라낸다는 발상도 썩 와 닿지 않았고요. 차라리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으면 모든 것이 깔끔했을텐데, 이래서야 범행을 위한 범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계약서"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귀"는 무가치하며 외려 범인에게는 불리한 증거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두번째 사건인 사진작가 아이하라 살인사건은 그래도 깔끔한 편이지만, 이 사건은 저도 범인을 짐작할 수 있었을 만큼 너무 간단하고 명쾌하다는게 문제입니다. 솔직히 추리적으로는 재미가 너무 부족했어요. 핵심 단서에 대한 정보 제공이 너무나 공정한 탓에, 용의자의 직업만 가지고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로키의 팔레 이데알 이야기도 너무 많이 나와서 뭔가 사건에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트릭이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낯선 승객"과 동일한 트릭이라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것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그나마도 중간 과정을 너무 대충대충 넘기고 있기도 하고요.

동기면에서도 오노야 당연히 누구나 죽이고 싶어하는 인물이라 열외이지만 (종유동에 벽화따위나 그리는 놈은 죽어도 싸지) 야기사와의 살의는 살인 말고라도 여러가지 방법 - 돈이나 필름을 회수하거나 하는 방법 - 이 있었을테고 세번째 살인 역시 무로키가 체포된다면 불필요한 살인이기에 무의미해 보여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고립된 기사라 마을에서 한정된 인물들 대상으로 범인이 결국 밝혀졌을테고 말이죠.

아울러 작가의 전통적인 단점 역시나 그대로입니다. 고립된 상황을 만들기 위한 작중 설정부터가 억지스러워요. 특히나 몇몇 한정된 선택받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외딴 마을의 예술가 공동체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죠. 예술가들이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서 버틴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지나칠 정도로 "고립"에 집착하는 모습은 과히 좋아보이지는 않네요.

물론 기사라 마을 - 나쓰모리 마을 두개로 나뉘어져 전개되는 방식은 상당히 재미있고, 이렇게 두개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사건이 결국 하나로 엮인다는 결말도 굉장히 잘 만들어져 있기는 합니다. 사건도 모두 3건이나 등장해서 대장편다운 풍성함을 전해주고요.
또한 세번째 사건인 음악가 야기사와 살인사건은 주요 단서가 명쾌하고 설득력 넘치게 짜여진 잘 만들어진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트릭이라기 보다는 왜 X가 범인인가? 에 대한 설명이 핵심이지만 굉장히 합리적이고 깔끔하게 전개되고 있을 뿐더러, 고전적이며 본격 추리소설같은 느낌이 잘 전해지기 때문에 마음에 들었어요 . 구태여 변명하려면 변명할 수 있는 단서이기는 하지만...

결론내리자면 공정한 단서제공과 본격 추리소설다운 지적인 재미는 존재하나 하나의 장편으로서의 완성도는 그에 미치지는 못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벌려놓은 것에 비하면 알맹이는 빈약한 편이니까요. 엄청나게 긴 분량 역시 감점 요소였어요. 분량에 걸맞게 디테일하지도 못한데 차라리 조금 더 짧았더라면 훨씬 좋았을것 같습니다.개인적으로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조금은 더 나아 보이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현대 사회에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물을 만들고자 노력한 작 가의 노고에는 경의를 표합니다만 왜 이 작품이 대표작으로 인정받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작가가 트릭과 추리적인 발상에 비하면, 소설가로서의 글 쓰는 능력은 부족해 보입니다.

2019/10/26

위작 X 미술시장 - 켄 페레니 / 이동천 : 별점 3점

위작 X 미술시장 - 6점 켄 페레니 지음, 이동천 옮김/라의눈

위작 전문가 켄 페레니의 자서전입니다. 1949년에 태어난 켄 페레니가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전성기 때 범죄자 토니 마사치오와 어울리며 예술가 톰 달리를 만나 예술에 눈을 뜨고, 판 메이헤른의 책을 읽고 위조를 시작한 뒤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위조 작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을 본인 스스로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책은 기막히게 재미있습니다. 본인의 생생한 경험담들이 압권이기 때문입니다. '허구는 실화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은 정말이지 맞는 말이에요. 톰 달리와 앤디 워홀, 유명 변호사 로이 콘, 유명 컬렉터 지미 리코, 피카소의 딸 팔로마 피카소 등 실존 인물들이 등장해서 팩션같은 재미도 전해주고요.게다가 켄 페레니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들은 하나, 하나가 한 편의 이야기로 충분할 정도로 기승전결이 완벽한데, 이런 범죄들이 40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있다는 볼륨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존하는 위조범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년간 위조를 하면서 발전시키는 기술과 위조 분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어떤 젯소와 어떤 캔버스를 써서 어떻게 오래된 듯한 흔적을 남기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아낌없이 공개해주고 있으니까요. 공개해 봤자 어차피 따라하기는 힘든 영역이긴 하지만요.
대표적인 노하우는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 때 이런저런 공통 요소들을 조합한 패턴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당연히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아요. 그림에 흔히 보이는 작은 까만색 덩어리는 바니시의 당분에 끌린 집파리 싼 파리똥 축적물이라는게 좋은 예입니다.

초창기 켄이 영향을 받은 예술가인 톰 달리를 비롯하여 오드리 비어즐리, 제임스 엔서, 히로니뮈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 브라이스 마든, 벤자민 웨스트를 비롯하여 지미의 영향으로 현대 미국 회화를 방대하게 위조할 때 연구했던 현대 미국 화가인 캐틀린, 찰스 버드 킹, 인먼, 존 F 피토, 라파엘 필, 존 F 프랜시스, 레비 웰스 프랜시스, 제임스 E 버터스워스, 안토니오 제이콥슨, 제임스 바드, 마틴 존슨 히드, 윌리엄 아이콘 워커, 안토니오 제이콥슨, 세베린 로센, 레비 웰스 프렌티스, 그리고 FBI의 추적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영국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위조를 시작했을 때 손 대었던 영국 수렵파 화파 화가들인 조지 스터브스, 존 우턴, 존 프레드릭 헤링 주니어. 제임스 세이무어, 존 노스트 사토리우스, 토머스 스펜서, 존 프레드릭 헤링 시니어, 존 E 퍼넬리와 영국 해양화가인 토마스 휘트콤, 찰스 브루킹, 토마스 버터스워스, 니콜라스 캔디 등 실존 유명 화가들에 대한 언급도 상세합니다.

이런 오랜 연구와 위조 과정을 거치며 가면 갈 수록 실력이 늘어서 1993년 마틴 존슨 히드의 "브라질의 보배" 위작은 경매에서 판매되었다는 기사가 '런던 타임즈'에도 실리고, 1994년 그린 최고의 위작인 히드의 "팻 보이"는 모든 전문가의 감정까지 통과하여 무려 71만 달러에 경매에서 판매되기까지 합니다. 마침내는 그가 가공의 화가를 내세워 그린 작품들, 심지어 위작가 켄 페레니의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이 정도면 위작계의 미켈란젤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네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켄 페레니가 저지른 범죄 들은 위조 관련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절도, 사기 행각이며 별로 치밀하지도 않은 즉흥적인 범죄가 많습니다. 사회 통념과 정의를 깨트리는 파격이라는 재미로 보기에는 단순히 '돈'을 노리고 저지른 단순 범죄에 불과하고요.
켄 페레니가 '천재 예술가'와는 거리가 먼 거리의 잡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 역시 당연하지만 썩 개운하지 않았어요. 이런 인간이 잘난척 떠벌이는 무용담을 수백 페이지나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그리고 인생이 너무 잘 풀립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 의해 인생이 바뀌고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탓입니다. 실화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소설이라면 이렇게 쓰면 욕을 먹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에요.
마지막으로 이렇게 위조, 위작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면 도판이 보다 충실한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번역도 오타가 많아서 불만스러워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자서전이자 논픽션임에는 분명합니다. 켄 페레니가 동네 잡범이라도 최소한 위작 계에서의 위치는 인정해 줄 수 밖에 없기도 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위조와 위작 사기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10/24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점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지만 명칭이나 유래를 잘 알지 못했던 물건들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주는 책입니다. 원래는 매일경제 연재물입니다. 접할 때마다 흥미롭게 읽었는데, 책 한 권으로 묶여 나와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습니다. 

단순한 사물 설명을 넘어, 그것들이 가진 인문학적 의미까지 함께 풀어냈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집 반찬으로 자주 나오는 자차이를 소개하면서, 중국에서는 자차이의 지역별 판매량이 도시화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소비되는 반찬으로 도시 거주 인구수와 비례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지표 역할을 하는 음식이 놀랍게도 커피라고 하네요. 이처럼 단순한 사물에서 출발해, 관련된 사회적 맥락까지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구성이 돋보입니다.
배달 음식 포장을 벗길 때 사용하는 랩칼을 다루면서는, 우리나라 배달 음식 문화의 역사가 함께 소개되고요. 과거 젓가락으로 그릇과 랩이 닿은 부분을 문질러 벗겨내던 '젓가락 신공' 소개는 저에게도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 주었습니다.

초밥 사이에 넣는 인조 대잎에 대한 설명이 조지 오웰의 소설 "엽란을 날려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저자의 넓은 식견을 느낄 수 있었으며, 상표나 가격이 적힌 꼬리표를 고정하는 택핀 항목에서는 과거 서태지가 유행시키기도 했던, 흑인 문화에서 상표 태그를 떼지 않았던 이유에 대한 문화적 배경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여러가지 설 중에서도 '난 이렇게 대단한 물건을 새걸로 가지고 있다'는걸 자랑하고 과시하는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건 확실히 그럴 듯 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자부심의 표현이었다는 것이지요.

도어 스토퍼를 다루며 엘러리 퀸의 "용 조각 문 버팀쇠의 비밀"을 언급한 대목은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반가왔습니다. 참고로, 원래 문 버팀쇠는 여닫이창을 열린 상태로 고정하기 위해 받쳐 세우는 막대를 뜻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오역이라고 하네요. 문이 천천히 닫히도록 하는 현관문 위에 달린 장치는 도어 체크, 혹은 도어 클로저라는 것도 도어 스토퍼 설명에서 소개되고요.

뚫어뻥의 어원은 흥미로운데, 1980년대 백광산업이 출시한 '백광 트래펑'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하수구 트랩에 펑크를 내는 도구라는 의미의 '트래펑'에, ‘뚫어’와 ‘뻥’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이 더해진 멋진 네이밍인데 아직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는게 오히려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어원이라면 사이펀 펌프로 알고 있던 기름 펌프의 정식 명칭이 '간장 츄르츄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정보입니다. 이 이름을 붙인 사람은 일본의 기발한 발명가 닥터 나카마츠로, 그의 엉뚱하면서도 놀라운 발명 인생에 대한 짧은 소개도 인상 깊었어요.

여러 익숙한 물건들의 명칭을 처음 알게 된 것도 수확입니다. 예를 들자면 중식당 회전 테이블의 '레이지 수잔', 신발끈 끝의 '애글릿', 끈이 통과하는 구멍인 '아일릿', 창문 잠금장치인 '크리센트', 마트 계산대에서 사용하는 막대는 '체크아웃 디바이더', 겨울 가로수에 묶는 볏짚은 '잠복소', 사원증 목걸이 끈은 '랜야드'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신장개업 가게 앞에서 바람에 춤을 추는 풍선 인형에도 이름이 있었는데, '스카이댄서'입니다. 원래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처음 선보인 예술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디어를 낸 예술가는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의 민셜, 하지만 특허는 협업했던 풍선 예술가 가짓이 등록했다고 합니다. 가짓은 유대인이었다니 그럴만도 하겠다 싶습니다.

그 외에도 과일을 감싸는 포장재인 팬캡이나 과일망이 재활용이 안 된다는 사실, 회 밑에 깔린 천사채의 한자가 '천사(天使)'가 아닌 '하늘이 내린 채소(天賜)'였다는 등 짧지만 밀도 있는 정보가 가득하고, 단순한 설명을 넘어 인문학적인 부분도 전해준다는 점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핵심이 되는 '그거' 말고는 도판이 부실하다는건 단점입니다. 연재물로 접했던 독자에게 별다르게 새롭게 전해주는 정보도 별로 없고요. '그거' 종류에 따라 분량도 조금씩 다르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되는 좋은 인문학, 잡학 서적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볍게, 하지만 의미도 있는 독서를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0/11/02

라블레의 아이들 - 요모타 이누히코 / 양경미 : 별점 4점

라블레의 아이들 - 8점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양경미 옮김/빨간머리

저명인사와 예술가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을 재현해 먹어본 뒤, 그 음식과 해당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총 25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 책입니다. 요리를 단순히 레시피와 결과물로만 보지 않고, 그 요리를 즐겼던 인물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제목은 음식 이야기를 즐겨 등장시킨 16세기 프랑스 작가 라블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식탐을 '그들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던 세상에 대한 탐욕스러운 호기심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여, 그들 모두가 라블레의 아이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요.

등장인물과 레시피, 요리들 모두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학과 예술에서 가져와 현학적인 재미가 넘쳐납니다. 복잡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유명인사의 레시피를 재현한 사진과 그 맛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음식과 유명인사에 대한 에피소드들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워 아주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네 종류의 요리와 디저트로 구성된 '미래파의 이탈리아 통합 디너 세트'였습니다. 조명과 벽지 등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미래파적 시각과 함께, 단순히 시각적인 요소를 넘어 미각까지 결합시켜 요리를 예술로 승화하려는 시도가 독특하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이 요리에는 단순한 미학적 의미를 넘어, 결국 파시즘적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는 정치적 의미까지 담겨 있다니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그로테스크했던 권터 그라스의 장어요리,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어떤 것을 먹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과자 이야기 등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우스터 소스 요리는 가정에서 당장 만들어볼 수 있는 레시피라 직접 도전해 보고 싶어졌고요.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우스터 소스 설명 부분에서 사진이 잘못 편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전체적으로 번역과 사진의 완성도가 높다 보니 더욱 눈에 거슬리더군요.

그래도 별점은 4점. 뻔한 레시피 중심이거나 맛집 순례에 불과한 요리·미식 관련 에세이와는 달리, 개념 자체가 색다른 책이라 요리와 미식을 좋아하는 모든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덧붙이자면, 제가 썼던 '장르문학과 함께하는 음식 이야기'라는 짧은 칼럼이 부끄러워지더군요. 아무리 취미의 일환이라지만, 좀 더 보강하고 제대로 의미를 담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 칼럼은 재현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2016/06/05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 홍성욱 : 별점 2.5점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 6점
홍성욱 지음/책세상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그림을 토대로 과학의 역사와 다양한 과학 이론을 알려주는 독특한 책입니다. 목차는 크게 세 부분 - "제 1부 근대 과학의 탄생, 제 2부 이성과 근대성, 제 3부 오래된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이미지"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까지의 시대순리녀, 목차별로 다양한 소주제가 포함되어 있고요.

그림을 활용하여 설명해 주는 덕분에, 딱딱한 내용임에도 이해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르키메데스의 준정다면체와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여 플라톤의 다면체 다섯 개를 이용한 기하학적 원리를 여섯 개의 행성에 대입하는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부분이 아주 좋았습니다(참고로, 케플러의 이론은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 이러한 수학적 조화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곤 하는군요).그림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나무"를 이용하여 진화론을 설명해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시대순으로 조목조목 짚어주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본인의 그림 실력을 활용하여 자세한 달 그림을 남겼던 갈릴레오도 이후 서적에서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도형만 사용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메디치 궁정의 철학자가 된 뒤 예술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석하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학이 예술보다 더 신분이 높다"는건 갓 암흑시대를 벗어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이지요.
이 이야기를 갈릴레오가 관측한 달 그림이 로도비코 카르디 다 치콜리의 "성모 마리아" 그림에 활용되었다는 것과 엮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울퉁불퉁한 갈릴레오의 달 해석을 카톨릭 교회는 반대했지만, 달은 "타락의 결점"을 상징하므로 성모가 짓밟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해석되어 무사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정밀한 과학이 기존의 예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예술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술가들의 반격 역시 몇 가지 예로 설명됩니다. 백과전서의 권두화에 대한 항목, 예술가 블레이크가 "예술은 생명의 나무이고, 과학은 죽음의 나무이다"라고 과학을 비판했다는 항목 등으로요.
그런데 백과전서 권두화 이야기는 좀 과잉해석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 저자의 의도와 그림이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의도인지 아니면 그냥 그림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일환이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죠. 권두화를 창작한 화가가 이렇게까지 고민해서 만들었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그 외, 볼테르의 연인이었던 샤틀레 부인이 뛰어난 과학자였다, 라부아지에의 아내 역시 만만찮은 능력으로 라부아지에를 충실히 내조했다 등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책의 특성상 도판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역시 대체로 우수한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에서 필요한 부분을 "확대" 해서 삽입하여 설명해주는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큰 그림을 접이식으로 수록하는 것보다 훨씬 읽기 편했으니까요. "아테네 학당" 등 유명한 그림들이 사용된 것도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하지만 목차의 세 번째 부분인 "오래된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이미지"는 내용과 분위기 모두 다른 부분과는 분리되어 있는 듯 해서 아쉬웠습니다. 유명한 그림도 등장하지 않고, 과학사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좀 더 복잡한 이론에 치우친 느낌이 강했던 탓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프리온 이야기는 완전히 생뚱맞은 내용이라 굉장히 실망스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상술한 단점들로 조금 감점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재미있는 과학 도서는 분명하기에, 읽기 편한 과학사 중심의 과학 도서를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예술 두 분야가 영원히 양립할 수 없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현대의 미디어 아트 같은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2015/12/13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 - 에릭 메이젤 / 안종설 : 별점 2점

나는 예술가로 살기로 했다 - 4점
에릭 메이젤 지음, 안종설 옮김/심플라이프

'창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 해결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가진 책입니다. 창작하는 데 문제가 생긴 여러 사람들 - 전업 작가나 화가도 있고 전업을 꿈꾸는 직장인도 있는데 - 이 저자에게 요청했던 고민 상담 내용과 저자가 해 준 코칭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창작하며 산다는 것에 대해 알려준다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칭 내용이 정말 별거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창작 비법이나 발상력에 대한 비결도 없고요. 아침에 아주 잠깐이라도 창작하는 데 할애해라, 실현 가능하고 최대한 단순하게 목표를 정해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표를 작성해라, 현재 생긴 문제에서 네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만 적어보아라, 정확하게 문제점이 무엇인지 적어보아라 등, 그냥 집에서 부모님이 해 줄 법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창작하다가 벽에 부딪히게 된다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읽어볼 만 하기는 합니다. 짤막하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그러나 창작에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은 아닙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 창작하려면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기에 별점을 조금 더 얹습니다.

2020/11/20

움직이는 집의 살인 - 우타노 쇼고 / 박재현 : 별점 2점

움직이는 집의 살인 - 4점
우타노 쇼고 지음, 박재현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자마 아키라가 이끄는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는 연극 "신은 예술가를 좋아해" 공연 연습에 한창이었다. 이 공연은 6년 전 무대에서 사고로 죽은 이자와 기요미 추모 공연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유명 건축가 이지와 야스노리가 직접 만든 극장인 시어터 KI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다. 시어터 KI는 계란 형태로 생겨서, 가운데 노른자 부분인 무대가 회전하는 독특한 극장이었다. 

시나노 조지는 이 공연 제작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단원인 모리 쿄코와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 연극 공연 당일 배우 스미요시 가즈오가 부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소품인 칼이 진짜 칼로 바꿔치기 된 탓이었다. 그럼에도 단원들은 공연을 강행하는데, 마지막 공연에서 각본가 겸 배우 다키가와 요스케가 무대에서 똑같은 소품용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다. 경찰은 칼을 바꿔치기 할 수 있던 단원들을 의심하고, 단원들은 내분에 휩싸이지만 시나노 조지는 극장 구조를 검토한 뒤 외부 인물이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 태동하여 대 유행한 본격 미스터리를 '신본격'이라고 부릅니다. 본격 미스터리의 논리성과 게임성을 중시하는 작품들이지요. 문제는 비현실적인 설정과 트릭이 많다는 점이고요.

이 작품은 전형적인 신본격물입니다. 설정과 캐릭터, 트릭 등 모든게 비현실적, 만화적이며 과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에서 사람이 다치고 죽는다는 설정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핵심 등장 인물들인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 인물들도 마찬가지에요. 연극에 미쳐 다른 건 돌아보지도 않는 성격에, 대체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비인간적이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대마초를 재배해서 피우고, 민폐 끼치기가 일쑤인 탐정 시나노 조지야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연극 "신은 예술가를 좋아해"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도 비현실적입니다. 애초에 소품을 잘못 써서 사고가 일어났다면, 장난감이나 가짜로 바꾸는게 당연한거 아닐까요? 또 연극용 소품으로 만들어진, 몸에 닿으면 쑥 들어가는 장치가 된 칼을 진짜 등산용 칼로 바꿔치기 하여 사건이 벌어진다던가, 한 명이 부상을 입은 뒤, 또 다른 한 명이 같은 흉기로 살해된다는 전개는 너무 뻔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무엇보다도 시나노 조지가 진상이라고 설명하는, 객석이 무대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는 거대한 장치 트릭이야말로 과장된 이야기의 정점입니다. 무대가 회전하는 줄 알았지만 반대였다는건데 "웃지 않는 수학자"같은 트릭이지요. 이를 통해 건축가 이자와가 나갔을 때 문은, 원래 방향과 정 반대로 분장실과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당연히 현실성이 낮습니다. "웃지 않는 수학자"는 개인 건물에서 단 몇 명만 속이면 됐지만, 그리고 천문대가 회전하는건 말이 되는데 거대한 극장 객석이 회전한다는건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300명의 관객이 좌석이 회전한다는걸 모두 몰랐다던가, 중간에 아무도 화장실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건 아무리 신본격이라 하더라도 면죄부를 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생각이에요. 문을 빠져나가 칼을 바꿔치기 하고 다시 돌아오려면, 객석이 회전하고 있으므로 문 위치가 틀어졌을텐데 그 해결 방법도 설명되지 않고요.
또 이자와 혼자만이 아니라 극장을 만든 모든 사람들, 그리고 범행 당시 무대 조작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경찰이 조금만 조사해도 금방 알 수 있다는 문제도 큽니다. 읽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그나마 다행인건 이 트릭은 사실이 아니었다는겁니다. 경찰 조사 결과 객석은 회전하지 않았고, 이자와는 무죄로 풀려나게 되지요.

이후 시나노 조지는 피해자 다키가와가 자살했다고 추리하는데, 좀 시시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앞서 추리보다는 낫더군요. 연극에 미친 사나이가 자신이 직접 쓴 연극 무대를 자살 장소로 삼았다는건 과장된 캐릭터성에 기초하고 있기는 하나, 미래에 대해 절망한 차에 옛 연인 기요미 추모 공연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등, 여러가지 동기에 대한 설명이 꽤 설득력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살이라서 별다른 트릭이 없다는 문제는 존재합니다. 앞서 가즈가 다친건 우연한 사고에 불과했다는 설명이지요. '신본격'의 전형적인 틀을 깨고는 있는데, 이래서야 '신본격'이라고 부르기는 또 애매한, 그런 기묘한 장르물이 되어 버렸네요.

작가도 뭔가 트릭에 대한 사명감을 느꼈는지, 연극 무대 살인 사건과는 별개로 핵심 트릭이 따로 등장하기는 합니다.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 제작 담당으로 일했던, 주인공인 시나노 조지가 사실은 시나노 조지가 아니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그것입니다. 그는 소극장을 상대로 일 년에 한 두번 씩 5년 동안 수익금을 빼돌려 왔던 사기꾼 오니쓰카 도시였지요. 시나노 조지가 등장하는 전작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전작을 읽었던 사람들은 놀랄만한 트릭일거에요. 변장을 위해 착용했던 선글라스와 마스크, 수염을 기르는 행위 등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고보니 제목도 트릭이네요. '움직이는 집' 에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가짜 시나노 조지가 사기꾼이라는걸 눈치챈 배우 사이키와 다투다가 머리를 부딪혀 죽은 뒤, 트릭이 밝혀지면서 나름 추리력을 보여준 가짜 시나노 조지 캐릭터가 엉망이 된건 아쉽습니다. 그의 말대로 5년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씩 극단 상대로 사기를 쳤다면 최소 5번에서 10번 정도 반복했다는건데 진작에 들키지 않았을 이유가 없습니다. 연극계가 발이 좁다는 묘사는 작품에 넘쳐나니까요. 진짜로부터 신분을 훔친 방법도 '우연히' 보험증을 손에 넣은게 전부고요. 이래서야 나름대로 추리력을 보여 주었던 치밀한 범죄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시한 죽음을 맞은건 당연해 보입니다. 서술 트릭도 곱씹어보면 이야기와는 무관한 곁가지 이야기에 불과하고요.

그나마 가짜가 죽은 뒤 진짜 시나노 조지는 대마 불법 소지 및 재배 혐의로 체포되고, 모리 쿄코가 투신하는 장면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건 좀 괜찮았습니다 . 과장된 세계에 종지부를 찍는 작가 나름의 의식으로 보였기 때문이에요. 모든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죽음, 아니면 감옥으로 현실의 굴레에 갖혀버리고 만 셈이니까요. 작가가 쓴 서문을 보면 본격 추리물을 쓰기 위해 등장시켰던 시나노 조지를 퇴장시키기로 결심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 결심에 어울리는 결말이라 생각됩니다. 더 제대로 쓰려면, 시나노 조지를 진짜로 죽여버리는게 나았겠지만요.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본격 추리, 신본격 소설이면서도 트릭은 별볼일 없는데다가, 신본격 소설들이 갖춘 단점들도 두드러지는 탓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3/12/09

똑같은 빨강은 없다 - 김경서 : 별점 3.5점

똑같은 빨강은 없다 - 8점
김경서 지음/창비

딸아이의 논술학원 교재입니다. 우연찮게 읽어보게 되었네요. 그런데 생각보다 깊이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인류는 오래전 부터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습니다. 빗살 무늬 토기의 빗살이 그 좋은 예이지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름다움의 기준은 변화했고, 사람들의 미적 가치도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름다움의 정의는 명확합니다. '쾌락'을 주는지 여부입니다. 즉, 그게 어떤 것이 되었건 사람들이 '쾌'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든 예술 작품이 아름다운 것 만은 아닙니다. 피카소의 '황소 머리'나 뒤샹의 '샘'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아름답다고 하기 힘든 기성품들이지요. 이들이 '작품'이 된 이유는 작가의 표현 의식 때문입니다. 현대 미술에서는 이렇게 '의미'를 찾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행위와 과정도 예술이 됩니다. 그걸 아름다움이라고 해석하는 것이고요.

이렇게 현대의 아름다움은 새로움과 창의성을 추구합니다. 당연히 이런 작품들은 관객들에게도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기에, 예술을 비평하고 즐기는 안목을 기르려면 관객들도 자유로와야 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요. 기존의 고정 관념을 깨야하고, 이를 깨는 것이 신세대 예술가와 관람객 들의 몫이라고 하네요. 저도 그동안 고정 관념에 많이 매몰되어 있었는데 앞으로는 아름다움을 즐기고, 뭐가 아름다운지를 찾아내는, 순수하게 '즐기는' 행동으로 작품들을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하는 자세도 좋지만, 그 이전에 '감상'이라는 취지를 잊지 말고요.

예술은 어렵지 않다는걸 상세한 예, 그리고 쉬운 글로 이해하기 쉽도록 잘 쓰여졌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내용이 다소 두서가 없다는 점입니다. 시대순으로 아름다움의 변천 과정을 설명하게끔 쓰여졌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어른들이 읽어도 나무랄데 없는 좋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3/01/07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이소영 : 별점 3점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6점
이소영 지음/모요사

미술사를 바꾼 여러 가지 그림 도구 및 각종 계기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책. 모두 1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제목에서처럼 도구들이 설명되고 있지만 화가의 직업병을 다룬 '백내장' 같은 챕터와 같이 다른 분야도 폭넓게 소개해줍니다.
특히 이런 도구와 각종 계기들이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캔버스의 도입처럼요. 이동이 용이한 캔버스 덕분에 그림이 더 이상 교회와 건물에 붙박이 장식으로 활용되지 않고, 보다 폭넓게 유행하게 되었다니 대단한 혁신을 이룬 셈입니다. 나무 패널에서 캔버스로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가 바다에 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습하고 소금기가 많은 대기는 프레스코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뿐더러, 베네치아에서는 나무는 배를 만들기 위한 중요 자재였기 때문이었다니까요. 그래서 해양강국답게, 돛을 만들던 기술을 활용한 캔버스가 대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캔버스의 질감을 그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 소개도 좋았어요.
이런 캔버스만큼, 아니 더 큰 미술사의 혁명을 불러온 재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아크릴 물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미술은 현실 세계에 없는 입체감 없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라는 사조가 등장했는데 이는 경쾌하고 선명한 색감, 빠른 건조에 어디에나 그릴 수 있는 등의 장점을 갖춘 아크릴 물감의 등장으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크릴 물감 챕터에서는 이렇게 아크릴 물감이 현대 미술을 그야말로 '접수'한 신소재라는걸 여러가지 작가들의 작품들을 예를 들어가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술과 결합된 현대미술의 큰 이바지를 한 빌리 클뤼버, 그리고 그가 주축이 된 창작집단 E.A.T 소개도 좋았습니다. 당연히 미술가들이 기계적인 작품을 혼자서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기술자들과 만나서 작업을 진행했는지는 몰랐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협의 기간이 오래 걸렸고, 심지어는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지 못할 때 다른 기술을 제시하여 전혀 다른 결과물을 창조해내는데 일조했던 작품도 있었다니 - 앤디 워홀의 <<은색 구름>> - 이 정도면 함께 창작을 진행한 동료라고 보아도 무방할것 같아요. 더 이상 기술의 도움없는 예술은 없는 시대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템페라화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템페라화는 유화가 유행한 뒤에는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에 나름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군요. 약간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질감과 색감이 현대 미술의 어떤 분야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라나요. 게다가 21세기에는 공장에서 제조된 물감의 유해성이 알려지며 템페라 물감이 또다시 유행한다고 합니다. 자연친화적인 재료니까요. 또 달걀 노른자를 사용한 템페라처럼 부엌 재료들이 일찍이 물감 재료로 활용되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어요. 렘브란트의 그림에 밀가루가 사용되었던 식인데, 확실히 화가들도 계속 연구와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라는걸 잘 알려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네요.
'종이'에서는 터너의 수채화의 독특한 질감과 효과는 모두 그가 사용했던 종이 덕분이었다는 내용을 알려줍니다. 종이에 상처를 낸 뒤 물을 붓고 거기에 물감을 떨어뜨려 무늬와 명암을 얻는 터너의 기법은 현재의 종이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종이 원료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지 회사에서 전문가용으로 '터너풍 수채화 종이'를 개발해서 판매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팔레트'는 미술 도구로서의 팔레트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 팔레트는 필요없는 그림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화가들이 팔레트에 뿌린 물감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팔레트에는 대체로 열 개 정도의 물감만 쓰였고, 전통적인 팔레트는 혼색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혼색 대신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비비고 흩뿌려 작업했다고 합니다. 즉 인상주의의 탄생은 튜브형 물감의 도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는 팔레트도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튜브형 물감과 같은 합성 물감도 한 항목을 할애하여 설명해주는데, 일전에 다른 다른 책에서 읽었던 고흐의 독특한 노란색이 시간이 흐르며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백내장'은 독특하게도 화가들의 직업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 질환을 앓은 화가들이 많았다는데, 드가가 거의 완전 실명에 이르른 탓에 유화를 그리지 못해 파스텔화와 조각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갔다는건 몰랐었습니다. 유별나게 인상파 화가들에게 백내장 등의 질병이 많았던건 여러가지 물감들에 포함된 납 성분, 야외에서의 작품 활동을 즐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 방식 등이 이유였겠지요. 이를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상파 화가 메리 커셋의 작품이 초기의 세밀하고 부드러웠던 그림에서 거친 파스텔 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내장에 걸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컴퓨터에서 재현하면 드가와 모네의 화풍과 비슷하다는 도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림과 미술사, 각종 재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내용이 가득한 책입니다. 확실히 미술사 전문 출판사 모요사의 책 답게 재미와 가치를 동시에 잡고 있어요. 도판이 너무 작다는 점, 그리고 소개되는 모든 작품의 도판을 수록하고 있지 못한 점은 좀 아쉬우며, 전문가적인 이야기에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이 다소 많이 섞여 있는 것도 옥의 티라 할 수 있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19/07/14

미술관에 간 화학자 1 - 전창림 : 별점 2점

미술관에 간 화학자 1 - 4점
전창림 지음/어바웃어북

화학 박사인 저자가 다양한 미술 작품에 사용된 화학에 대해 설명해주는 내용... 으로 알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초반부는 생각대로더군요. 특히 첫번째 장인 '마리아의 파란색 치마를 그린 물감'은 근거를 토대로 추리하는 맛까지 살아있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의 매장"은 미완성인데, 오른쪽 하단은 뭘 그리려고 했는지? 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내용이거든요.
저자는 성모 마리아를 그리려다 만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최후의 심판"에서처럼 성모 마리아의 치마는 울트라 마린으로 칠하려 했지만, 울트라 마린은 당시에 비싸고 귀한 재료라 칠하지 못했던 거라면서요. 그래서 더 싼 파란색 염료인 아주라이트로 막달라 마리아를 칠했는데, 아주라이트는 안정성이 떨어지는 탓에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어 칙칙해져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매장"의 사진을 통해 막달라 마리아 옷 색은 칙칙한 갈색이라는걸 보여주며 마무리합니다.

유화의 성분 (불포화지방산)을 알려주며 유화가 어떻게 단단한 도막을 형성하는지를 알려주는 '유화를 탄생시킨 불포화지방산'도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항상 수백년 된 유화가 어떻게 이렇게 잘 보존되는지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풀렸거든요. 유화의 아마인유 (불포화지방산) 작용을 달걀노른자로 대신한 템페라, 석고 위에 수성 물감을 스미게 한 프레스코 모두 색감과 묘사에 있어 유화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유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설명도 좋았고요.

'화학에는 문외한이었던 천재 예술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주인공입니다. 세계적인 천재로 알려진 그가 화학에는 문외한이었던 탓에, 납이나 구리를 함유한 흰색이나 녹색과 황을 함유한 버밀리온이나 울트라마린을 함께 사용해서 두 물질이 반응을 일으켜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답니다. 그 외에도 화학을 몰라 저지른 실수가 많던데 미켈란젤로가 일찍 유화를 시작하지 않은게 전 인류의 손실인 듯 해서 많이 안타깝습니다.
이런 물감의 변화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게 '화학 반응으로 바뀐 그림의 제목' 입니다. 렘브란트의 "야경"은 원래 밤을 그린 어두운 그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후 그림 보존을 위해 바니시를 발랐을 때의 실수, 그리고 납을 포함한 안료를 사용한 탓으로 그림이 검게 변한 겁니다. 이 안료는 황과 만나면 흑변하는데, 19세기 산업 혁명으로 도시 공해가 심해졌을 때 대기 중의 황산화물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렇게 납이 들어간 색 중 연백 (lead white)를 즐겨 사용한 화가 휘슬러는 납 중독으로 죽었다니 무섭기도 합니다.
연금술에 관련된 그림을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연금술의 죽음'은 과연 화학자가 썼구나 싶었습니다. "인을 발견한 연금술사"라는 잘 알지도 못했던 그림까지 찾아내어 소개하는 등 열정도 대단하고요.

화학 외에 미술에 대해 전문적으로 풀어낸 내용도 재미있는게 많았습니다.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 그림을 구석구석 상세하게 분석하여 어떤 사물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식의 설명이 특히 좋았어요. 이런 류의 설명은 '연금술의 죽음'에서 "프로크리스의 죽음", '밀랍과 수은'에서 "이카루스의 추락", 홀바인의 "대사들" 등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그림 설명도 설명인데 프랑스 혁명 당시 상황까지도 상세하게 알려주는 소개가 무척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인상파 작가들이 물감을 직접 섞으면 탁해지기 때문에 한정된 밝은 색 물감만 짧은 붓터치를 사용해서 사람의 눈에 섞여서 보이게끔 했다는게 아주아주 기억에 남습니다. 전혀 몰랐네요. 쇠라의 그림도 그렇다면 확실히 의미가 있겠지요. 실물을 꼭 한 번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뒤로 갈 수록 화학, 과학보다는 점점 평범한 미술사 관련 책이 되어 버리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미술에 대한 설명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기대했던 내용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게다가 과학을 그림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억지스러운 것도 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과 색의 주기율 R.G.B를 연결시키는건 나쁘지는 않지만 딱 들어맞는다고 하기는 어려웠고, 마찬가지로 마티스의 그림이 색으로 입체를 표현했다는 설명도 그렇게 와 닿지 않습니다.
그 외에 인상파 관련된 글이 많은 점과 해부에 대한 그림, 과학 기기가 등장하는 그림에 챕터 하나를 할애하는 설명들도 앞 부분에 비하면 그닥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미술사 관련 서적으로 부족함은 없지만 기대한 내용은 아니라 감점합니다.화학 관련된 이야기가 더 많았어야 하니까요. 후속권이 있는 듯 한데 이대로라면 찾아서 읽어 볼 생각은 없습니다.

2015/03/06

비독 소사이어티 - 마이클 카프초 / 박산호 : 별점 3점

비독 소사이어티 - 6점
마이클 카프초 지음, 박산호 옮김/시공사

비독 소사이어티는 82세로 생을 마감한 비독을 기리기 위해 인종, 성, 연령, 국적을 가리지 않고 총 82명의 세계 최고의 형사들과 범죄 수사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범죄 해결을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재능기부 단체, 자원봉사 탐정들이라고 합니다. 단, 발생한 지 2년 이상이 지나 경찰의 공식 협조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해당 사건의 조사에 응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공권력을 넘보지 않기 위해서겠죠. 사건 해결을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은 빠지는, 철저하게 조력자 역할에 충실한 전문가들입니다. 쿨하고 멋있죠?

이 책은 비독 소사이어티 소속 수사관들이 가 요청받은 미해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5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통해 수많은 사건과 수사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세계 5대 프로파일러 중 한 명으로 셜록 홈즈의 재림이라 불리는 골초 프로파일러 리처드 월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의 프로파일링은 신급으로 묘사되는데, 사건을 맡으면 범인 체포를 자신하며 "내가 범인이라면 익지 않은 바나나는 사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캐릭터성도 확실해서 독신주의에 엄청난 골초, 전자제품은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고 양복은 단 한 벌 뿐, 그런데 피아노 연주 능력은 뛰어난 음악가이며 모든 일에 시니컬한 천재로 묘사됩니다. 작중 표현 그대로 "셜록 홈즈와 싱크로율 9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20년 전 가족을 몰살시키고 도주한 존 리스트 사건 해결입니다. 리스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어떤 차를 탈지까지 정확하게 예측해 내거든요. 폭주족 살인자 나우스에 대한 프로파일링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정확했고요.
이러한 프로파일링 실력 뿐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수갑소리야"라는 말로 대표되는 실질적 범인 검거 능력도 인상적입니다. 스콧 살인 사건에서는 자료만 보고 범인이 레이샤일 것이라 확신하며, "시체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지방 검사에게 "현장의 혈흔은 누군가 죽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피도 시체의 일부다"라고 설득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개인적인 천재성으로 설명되기에, 그 비결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살인자를 4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헬릭스 이론"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 분류를 통해 한밤중 마트에서 세 번 살해당한 브룩스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도 인상 깊고요.

그러나 다른 수사관들은 리처드에 비해 활약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협회를 만든 윌리엄 플라이셔는 사건 해결보다는 리더십을 갖춘 마당발, 얼굴마담 역할이며, 또 다른 중심 인물 프랭크 벤터는 과거 사진만으로 존 리스트의 현재 모습을 예측한 흉상 제작으로 유명세를 얻은 천재이지만 범죄 전문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탓입니다.

해골을 통한 얼굴 복원, 실종 용의자의 현재 모습을 조각하는 일 등을 담당하므로 이야기 중심에서는 조금 비켜나 있지요. 비교하자면 천재 아이언맨이 리처드 월터, 리더십 중심의 캡틴 아메리카가 윌리엄 플라이셔, 과학보다는 신화 기반의 토르가 프랭크 벤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건, 수사관, 수사 이야기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기존 경찰 수사로는 해결이 어려웠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제 사건을 천재들이 해결해 나간다는건 추리 소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예를 들자면 이런 작품)인데, 그게 실제 사건이라면 왠만한 소설 이상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지요.

아울러 공소시효 없이 미제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미국 사법당국의 노력도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흉악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폐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몇몇 사건처럼, 사건 발생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DNA 감식 등의 수사기법 덕분에 진범이 밝혀진 사례도 있으니까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미제 사건을 부각시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는데, "화성 연쇄살인" 같은 경우는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랭크 벤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화성 연쇄살인범의 몽타주는 철저히 가상이기에 현재 모습을 조각할 수는 없겠지만, 리처드 월터의 능력을 빌린다면 훨씬 정밀한 프로파일링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처럼 재미와 가치를 지닌 책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논픽션과 소설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어 불필요한 묘사와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은 읽는 데 부담을 줍니다. 다른 유사한 논픽션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인데,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리처드와 프랭크의 천재성에 대한 묘사는 지나쳐서 오히려 거부감을 줄 뿐이고요. 차라리 이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아울러 너무 극적인 성공 사례만 실려 있는 점도 좀 아쉬웠습니다. 프로파일링은 본질적으로 데이터와 직감에 기대는 작업인데, 100% 적중이라는 건 비현실적이니까요. 한두 건의 실패 사례가 들어갔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자 속 소년" 사건의 진범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도 불만이며 부실한 번역과 교정은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공통적으로 지적된 문제인데, 18,000원짜리 책이라면 그에 맞는 완성도를 갖췄어야 했습니다. 초판 독자가 베타테스터도 아니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었지만, 책의 완성도 부족으로 1점 감점합니다. 다만 범죄 분석과 프로파일링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는 매우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덧붙이자면, 대니 드비토가 운영하는 제작사가 비독 소사이어티 관련 영화 판권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리처드와 프랭크가 중심이라면 아마도 존 리스트 사건이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8/02/03

중국 초청 SF 단편들

중국 SF로부터의 초대장

자주 찾는 블로그 이웃 잠보니님 글을 통해 소식을 듣고 읽어보았습니다.중국 SF는 이전에 "삼체" 를 꽤 재미있게 읽어서 기대도 되었고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여섯 편의 단편 중 딱 한 편, "기아의 탑" 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가 수준 이하인 탓입니다. 설정은 그럴듯하지만 최소한의 설명도 없고, 이야기도 편의대로 흘러가기 때문이지요. 뭔가 있어보이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는 딱히 괜찮다고 보기 어렵네요. 과거 모뎀 시절 유행했던 함량미달의 한국 SF 단편들이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독특하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지만 구태여 찾아 읽으실 내용은 아닙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아의 탑" 

추락한 우주선의 생존자들이 먹을 것 하나 없는 수도원에 고립된 상황을 그립니다. 생존자들이 식인으로 치닫는다는 전개는 뻔하지만,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라는 약간의 수수께끼와 "진동으로 가득 찬" 행성이라는 SF적인 설정이 잘 결합되어 있는 덕분에 충분한 재미를 전해 줍니다.
수도원에서 생각을 증폭시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나름 철학적이면서도 신선한 설정과 이를 흉폭한 야성이 무위로 되돌린다는 결말도 괜찮았고요. 그게 뭐가 되었건 '최후의 말 한마디'는 들어 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줍니다.

그런데 이전에 거주하던 수도사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설명해주지 않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생각을 증폭시켜 열반에 이르렀다는 설정일까요? 또 생존자들을 습격하는 괴물의 정체도 뭔가 복선처럼 풀어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테고요.

그래도 중국 SF의 저력을 확인하는데는 문제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고래자리를 본 사람" 

행위 예술가인 아버지는 딸의 숙제를 위해 '만들어 낸' 행성이 '진짜' 라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을 증명하지 못해서(혹은 증명하기 위해서) 모두의 지탄을 받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딸 릴리안은 아버지와 떨어져 성장하여 우주 비행사가 된 후, 웜홀을 통과하여 고래자리 델타를 직접 보고 나서야 아버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과학이 기반이 된 행위 예술이 등장하고, 주인공 릴리안이 웜홀을 통과하는 우주 비행사라는 등 SF적인 설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진의를 나중에서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저 역시 딸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조금 뭉클하게 다가오긴 했지만, 별로 SF 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아버지가 어떻게 고래자리 델타성을 보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겁니다. 이래서야 본격 SF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지하철의 충격" 

사람으로 가득찬 출근길 지하철이 시공을 초월하여 달리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기묘한 현상을 그리는 작품으로 초반 설정은 참신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을 타 본 적이 있는 사람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공포가 리얼하게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암벽등반가 샤오지가 열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이동하면서 목격하는 다른 차량의 상태, 현상에 대한 묘사부터 이야기는 그야말로 폭주합니다. 이 모든게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의한 진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내용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봐도 하나의 이야기로 성립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사에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무슨 호접몽도 아니고...

기묘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며 이야기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중국 고전 기담을 연상케 하는데, 고전 기담 쪽이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더 높습니다.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인류의 여신 G" 

선천적 결함을 지닌채 태어나 정상적 성생활, 출산이 불가능했던 G는 기도를 통해 전신 성감대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그녀는 상류층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나,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대중의 정점에 서는데...

일본 에로 만화에서 접했음직한 설정이 등장하여 인간의 해탈, 전도와 좌절, 한 단계 위로의 진화라는 일종의 종교 프로세스를 섹스에 빗대어 풀어내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딱히 신선하거나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SF로서는 함량 미달입니다. G의 변신은 기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정부터 G가 대중을 사로잡는 과정과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서 설득력이 전무한 탓입니다. 결국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한 뒤 과격 종교집단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녀에게 일어난 결말 역시 잘 이해가 되지 않고요. 고자와 석녀가 함께 절정에 이르렀다?

애매하게 종교적인 내용을 넣지 말고, 불감증에 시달리던 인류에게 전신 성감대 미녀가 등장하여 인류를 자위만으로도 충분한, 한단계 더 높은 쾌락의 세계로 이끈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화끈하고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탈피" 

탈피를 거듭하는 혈인이지만 약물의 힘으로 탈피 충동을 억누르며 배우로 성공한 공은 투라는 다른 혈인에게 연기를 가르쳤다. 투도 배우로 성공했는데, 투는 배우로서의 삶이 아니라 탈피를 택하고 말았다. 공도 탈피에 대한 욕망은 크지만 탈피 후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해 주저하는데...

이종족 판타지로 9번의 탈피를 끝내고, 혈인으로서 죽어가느냐 아니면 자신의 본능을 숨기고 인간 세계에서 살아갈 것인지 선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딱히 재미는 없습니다. 늑대 인간이나 뱀파이어로서의 삶을 선택하느냐!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유사 딜레마들과 구분될만한 내용도 없고요.

'배우'라는, 일종의 가장된 삶의 대표격인 직업을 선택한 정도가 조금 신선했지만 그냥저냥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우주표 담배" 

우주정거장만한 담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 스케일 하나 만큼은 높이 사 주고 싶습니다. 흡연 인구가 엄청난 중국에서 생각했음직한 내용이네요. 이 모든게 환상이고, 담배는 값싼 대용품 센티멘털 니코틴에 밀려났다는 결말도 뻔하지만 괜찮았고요. 전통적인 산업의 종말을 블랙 코미디 식으로 그린 느낌인데, 바로 얼마전의 미국 토이저러스 오프라인 매장 폐쇄 사태가 떠오르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2/09/18

달리의 고치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 별점 1.5점

달리의 고치 - 4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를 신봉하던 연매출 100억 엔대의 주얼리 브랜드 사장 도죠 슈이치가 살해당했다. 주말을 보내러 내려간 별장에서 발견된 사장의 시체는 현대판 고치, 프로트 캡슐이라는 명상 기계 안에 알몸인 채로 방치돼 있었다. 게다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달리 수염은 잘려 나간 상태. 그 밖에도 살해 현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메시지로 가득한 가운데, 여러 인물들이 차례차례 용의선상에 오르는데…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작가의 별명에 걸맞게 기이한 현장의 모습과 그것을 설명하는 논리적인 진상은 엘러리 퀸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에서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우선, 살바도르 달리나 고치와 같은 불필요한 설정과 장황한 묘사가 짜증나는 탓입니다. 달리는 "수염"을 이용한 트릭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끌어들인 것 같은데,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과장된 설정 탓에 현실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요. 고치 역시 그냥 별장에 사우나 시설이 있었다 정도로 해도 충분했을 텐데 지나치게 멋을 부린 느낌이고요. 완전 방음이 된다면야 좀 더 그럴싸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

또 진상으로 밝혀진 도죠 슈이치의 구멍투성이 계획도 황당합니다. 공을 많이 들이기는 했으나 번거롭기만 한 흉기 입수 작전에서부터 시작해서, 과연 나가이케가 방문하기로 약속된 시간에 요시미즈가 정확하게 고치를 이용하려 했을지, 나가이케는 정각에 제대로 방문했을지, 요시미즈가 고치를 이용하는 도중에 범행을 조용하고 완벽하게 저지른 뒤 40~50분 동안 시체를 숨기고 옮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은 뻔한데 알리바이가 좀 약하지 않았을지, 그리고 나가이케가 별장 방문을 과연 함구하고 있었을지 등등 세세한 부분에서 허점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좋게 봐 줄 수 없었어요. 이래서야 수염을 깎고 변장한 뒤 나가이케 집에 쳐들어가서 범행을 저지르는 게 더 쉬웠을 겁니다.

그리고 중요 용의자의 혐의가 차례대로 너무 쉽게 벗겨지고, 마지막에는 도죠 슈지 외에 그럴듯한 용의자가 남지 않는다는건 본격 추리 장편으로는 심각할 정도의 문제라 생각됩니다.

고치에 의미를 부여하여 작가 아리스의 첫사랑과 추리소설을 쓰게 된 계기 등 자전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기는 하나 너무 감상적이라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옥의 티였고요.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기이한 사건 현장과 그것을 설명하는 트릭의 합리성만큼은 괜찮습니다. 히무라 히데오가 휘파람으로 롤링스톤즈의 "김미 쉘터"를 분다던가 하는 디테일, 작가 아리스의 과거 등 시리즈 팬이라면 나름 즐길 거리가 있기는 해요. 이세와 미키모토 코키치의 섬이 기념품 가게와 맞물려 등장하는 부분에서 여정 (여행) 미스터리의 풍취가 느껴지는 등의 독특한 부분도 좋았고요. 차라리 더 함축하여 중단편화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덧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작가의 별명은 과장된 것이 분명합니다...

덧2 : 어느덧 추리소설 리뷰가 550편째~!

2026/04/25

가구, 집을 갖추다 - 김지수 : 별점 2.5점

가구와 인테리어를 단순히 취향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생활사와 주거문화의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장점은 가구와 인테리어 전문가인 저자의 식견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화장대 설명에서 청동기시대의 거울 대체품 이야기에서 출발해, 르네상스 이후 화장 문화의 변화, 17세기의 로보이 화장대, 18세기의 토일렛 테이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더치스 화장대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정리하며 화장대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미의식, 계급 문화, 생활양식의 변화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점을 알려주는 식입니다.

이런 설명은 서양 가구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선 말기의 경대, 유리 거울의 보급, 좌식 문화에 맞추어 발달한 소반의 구조와 쓰임, 사랑채와 안방의 변화를 통해 한국의 주거문화와 가구를 연결해 설명해 주기도 하거든요.
덕분에 읽다보면 왜 과거의 가구들이 작고 이동하기 편한 구조였는지, 왜 안방이 오랫동안 생활의 중심이 되었는지, 또 근대 이후에는 거실과 식탁 중심의 공간으로 어떻게 옮겨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온돌의 일반화와 좌식 문화의 정착, 그리고 그에 따라 소반이나 경대 같은 생활 가구가 발달해 나갔단 것이지요. 

현재의 생활 방식과 이어지는 제안들도 흥미롭습니다. 소파보다 식탁에 투자하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조언이 아니라, 거실과 부엌을 통합하고 한 공간에서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따라 하고 싶은지와는 별개로, 집을 꾸민다는 일이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와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이사를 계획 중인데 여러모로 참고가 됩니다.

엠파이어 스타일, 리젠시 양식, 아르데코 같은 서양 디자인사의 흐름을 대중문화와 사회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대목도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예술가와 장인, 파리지엔느와 프렌치 시크 등의 설명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다만 책의 성격에 비해 도판이 부실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시각 자료가 꼭 필요한 책인데 말이지요. 저자의 일러스트가 수록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울러 인문학 서적으로 보기에는 전문성이 조금 부족합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넓은 범위의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근거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적지 않거든요. 

그래도 가구와 집을 둘러싼 역사, 문화, 생활양식에 대해 쉽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크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4/03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정운현 : 별점 5점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10점
정운현 지음/개마고원

친일파를 조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론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친일 행각과 후일담까지 소개해주는 인물사 서적입니다. 크게 관리, 경제인 (갑부), 지식인, 언론인, 작가 및 예술가, 종교인, 직업적 친일분자라는 7개 분류로 소개됩니다.

서론에서 소개되는, 타국 친일파 처벌 사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국립묘지에 안장되거나 3.1 문화상을 수상한 친일파가 있을 뿐더러 심지어 친일파의 이름을 딴 상까지 있다는 우리나라의 실태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뒤이은 친일파들의 매국 행각도 화려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 친일파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선대의 재산에 힘입어 해방 이후 한 자리씩 차지했던 후손들의 이름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부분 반성은 커녕 친일 재산을 되찾으려는 등 뻔뻔함으로 일관했으니까요. 최소한 '친일을 해서 잘 살고, 독립 운동을 해서 못 사는' 나라가 아님을 지금이라도 증명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반대로, 친일 행각을 반성했던 소수는 이 점을 감안해서 대접해야 햘 테고요. 윤서인같은 인간들이 망발을 내뱉는 사회가 된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는 바로잡고 바로 세워야 할 겁니다.

그럼 몇 명의 인상적이었던 친일파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김대우입니다. 3.1 의거에 참여할 정도로 애국 청년이었지만 감옥살이 이후 변절하여 일제하 도지사를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던 친일파이지요. 반민특위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는데, 1960년 총선에 출마했다는 뻔뻔함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이끌며 수백명의 독립군을 체포, 사살하는데 기여했던 김창영이 반민특위에서 고작 '공민권 정지 3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당연히 능지처참을 해도 마땅한 악질 친일파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김창영이 다른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해방 이후 권력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죗값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김희선은 원래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알고보니 변절자로 상하이 임시정부 밀정 노릇을 했다니 기가 찹니다. 

유명했던 친일경찰 노덕술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독립 운동 사건만 취급했던 악질 고등 경찰 출신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될 당시, 무려 34만 1천원이라는 도피 자금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선인의 고혈을 빨아먹은 악질이었지요. 게다가 친일파에 의한 반민특위 테러 음모에도 가담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바로 사형을 시켰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등으로 수감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네요. 그 뒤 제 1사단 헌병대장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6.25 때 김창룡 특무대장에 의해 구속된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제대로 된 응징을 받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조선 제일 갑부의 한 명이었던 공주 갑부 김갑순 이야기도 볼 만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관직에 있으며 개발 정보를 빼돌려 땅 투기하여 치부한 인물이거든요. 단순 치부였다면 모를까, 재산 증식 및 인맥 확보를 위해 친일파들과 적극적으로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일본 밀정 노릇을 하기까지 했다네요. 그나마 그 많던 재산은 해방 이후 다 날리고, 제실도 흉가가 되었다니 조금 위안이 됩니다. 이런 정보로 치부한 공직자들도 모두 패가망신하면 좋겠네요. 

영덕 갑부 문명기도 친일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에 골몰했던 친일파인데, 1935년에 일제에 10만원을 헌납해 비행기를 기증했다는 일화가 재미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복엽기!더라고요. 일제에서 누군가 문명기 돈을 빼돌린 모양인데, 전쟁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을거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문제는 문명기의 손자 문태준이죠.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런저런 공직에 종사하며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니까요. 연좌제처럼 공직을 박탈할 필요야 없지만, 할아버지 재산이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냈던 할아버지 못지않은 파렴치한이라는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족운동가로 알려졌던 이선근은 열렬한 친일파였던건 물론이고 박정희 시절 유신 독재 찬양에 전두환까지 찬양했던, 그야말로 아부의 달인이더군요. 국립묘지 안장에 아들과 손녀들이 모두 떵떵거리며 산다니, 지금이라도 국립묘지 파묘는 물론 그의 정체와 후손들 모두 널리 알리는게 당연합니다.

조선에 있었던 신사에서 신직, 즉 신관으로 일했던 조선인 이산연 이야기는 신기했습니다. 아무리 할 게 없어도 그렇지.... 덕분에 이산연은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처럼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행방불명된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는 것 하나만 위안거리네요. 

조선 불교 총 본산 조계종이 일제 강점기 때 생겼으며, 이를 주도했던 첫 종무총장 (총무원장) 이었던 불교계 거두 이종욱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후 국회의원 등을 지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 뿐더러 그 아들은 동국대 대학원장까지 지냈기 때문입니다. 친일해서 후손이 잘 사는 세상을 더 이상 만들지는 말아야 하잖아요. 

1급 친일파 조병상 이야기는 좀 놀라왔어요. 직업이 아예 친일이었는데, 학병 출정을 독려하며 자기 아들도 5명 중 3명이나 출병시켰다니 그 충정이 대단합니다. 아들들이 다 생환해서 모두 출세했다는게 좀 쓰린데, 조병상 본인은 6.25때 실종된 걸로 추정된다는게 위안입니다.

친일파 정보는 물론, 일제하 공직자 관등과 같은 볼만한 자료도 많습니다. 최상급은 일왕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으로 조선 내에는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두 명 뿐이고 그 다음이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순서입니다. 주임관 이상이 고등관이고요. 지금의 5급 공무원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며,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현재의 행정고시) 합격자가 임용되었다고 합니다. 즉, 군수는 5급 공무원 수준이니 이 정도면 친일파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권한과 재량이 더 많았고,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면 당연합니다.

좌옹 윤치호의 친일 논리도 곱씹어볼만했습니다. 윤치호가 친일파가 된 건, 미국 유학시절 겪었던 인종차별, 그리고 개화기부터 잠재되어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 통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 그리고 105인 사건 때 겪었던 가혹한 고문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군요. 이후 윤치호는 '황인족 담합론'과 강자에게 약자가 순종해야 평화의 기틀이 마련된다,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는게 조선이 살 길이라는 등의 등의 사상적 기반과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이렇게까지 변명거리를 만들어 낸게 더 웃깁니다.

민족대표였던 최린은 변절하여 친일을 한 이유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서 망명도, 자살도 못하고 일본에 항복했다'고 고백했는데, 차라리 이게 더 합리적이지요. 최린은 반민특위 법정에서 진솔하게 반성과 후회를 보였다니, 같은 친일파라도 인간적으로는 더 나은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을 도운 친일파 1호 김인승, 여자 밀정 배정자 같은 경우는 친일의 이유가 나름 합당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좀 애매했습니다. 김인승은 조선 말기, 지역 수령과 의견충돌 끝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탈주했던 인물이거든요. 공권력과 싸워서 패배하여 도망친 뒤, 자신을 버린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판 오자서인 셈이지요.
배정자의 일생은 더 기구합니다. 아버지가 대원군 실각 때 한 패로 몰려 처형된 뒤 유랑생활을 하다가 관기로 팔렸고, 그 뒤 중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김옥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거든요. 조선에 대해 증오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고, 일본에 충성을 바친 이유도 타당해서 친일파라고 매도해야 할 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결과야 친일인데, 그 이유는 수긍할 만 하니....

이렇게 친일에 대해 여러가지를 깨닫게 된 좋은 독서였습니다. 박흥식, 김활란 등 익히 잘 알려진 친일파가 함께 소개된다거나, 그 외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친일파들이 많은건 조금 아쉽지만, 책의 취지 상 쉽게 빼지는 못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빠진 친일파가 세간에서 잊혀질까 두렵네요. 역사 바로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제가 읽은 구판은 절판되었지만, 아래의 책으로 재간되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정운현 지음/인문서원

2020/04/26

우연한 걸작 - 마이클 키멜만 / 박상미 : 별점 2.5점

우연한 걸작 - 6점
마이클 키멜만 지음, 박상미 옮김/세미콜론

여러 예술가들의 걸작들을 전부 10개의 주제로 나누어 왜 그 작품이 걸작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책으로 예술에 대해 깊이있는 식견을 바탕으로 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지만 전혀 쉽지는 않아요.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설명하는 느낌이거든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요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가지 기록해 볼 만 한 내용들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보나르의 작품들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현대 인상파'라 부를 수 있는 좋은 그림이기 때문에 걸작이라는군요. 도판만 보았을 때에는 인상파라기 보다는 좀 더 괴기 쪽에 가깝지 않나 싶지만요.
아마츄어리즘은 적은 노력으로 큰 만족을 얻는 쪽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밥 로스와 일맥상통하기에 밥 로스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츄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은 프로와 별 다를게 없다는 이유이기도 한데,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지요. 게다가 별다른 목적없이 그리거나 찍은 작품이 '우연과 실수'라는 측면에서 초현실주의와 연결되어 걸작으로 인정받게 된다는군요. 이유는, 이 책에 쓰여진대로라면 그 작품에서 무언가 놀랍거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걸작이라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 현대 미술은 기존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과정도 포함되었다고 하니 더더욱 그러해 보여요.
문제는 그런 평을 전문 비평가가 해야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아마추어리즘과는 좀 분리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드네요. 철학자이자 미술 평론가 아서 딘토는 아름다움은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했는데, 이 노력에 대한 설명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수준이 판가름날 테니까요. 제가 '이게 걸작이야!'라고 제 딸 아이 그림을 평가해도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결국 다 평론가들 놀음이라는 점에서는 입맛이 좀 씁니다.

또 시대에 따라 경험이 변해서, 아름다움의 정의가 변한다는 것도 와 닿았습니다. 명확한 사실이니까요. 현대에 사는 우리가. 여러가지 매체에서 수없이 보았을 '모나리자'를 보고 놀라움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지요. '놀라움' 을 느낄 여지가 적어졌다는 점에서, 현대는 정말 예술을 하기 힘든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존 케이지의 음악처럼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도 못할 기괴한 발상이 난무하고 있죠.
그래도 재미있는 작품과 발상들이 몇 가지 눈에 뜨이기는 합니다. 저자의 친구 알렉스의 서재가 대표적입니다. 알렉스는 원룸 집 벽에 나무 책장을 들여 놓았는데, 책으로 가득차 책 한 권을 더 꽂으려면, 그 두께만큼 다른 책을 빼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재는 자츰 진화하고, 가꾸는 물건이 되었으며 결국 알렉스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죠. 여기에 더해 가차없으면서도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기에 이는 예술이며 작품이 되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합니다!
존 레넌의 아내였던 오노 요코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존 레넌을 유혹하는데 성공한 외국 여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상당한 수준의 교육과 깊이를 가진 여성이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수동성'을 표현했다는 그녀의 여러가지 작품들도 인상적이었고요.
 수집 자체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수집은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 감식안과 더불어 일종의 상징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인데, 이유보다도 앨버트 C. 반스의 수집품이라는 실례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진열 방식으로 수집품이 진열되었는데, 덕분에 그림을 새롭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오노 요코 외에도 새로 알게된 사실은 많아요. 화가들도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던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루이스 캐럴은 변태가 아니었다는 것,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 말이지요. 특히 보나르가 생의 마지막 시기에 옛 연인 르네를 그린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보나르 작품에 언제나 등장하는 마르트가 잘 보이지도 않게 등장해서, 화면 중앙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르네와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보나르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궁금하지만, 르네야말로 그의 마음 속 천사였고, 마르트는 그를 뒤에서 지배하는 움울한 지박령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르네가 마르트와 눈이 마주친건, 결국 지박령의 승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암울한 그림이라 할 수 있고요. 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니 이런게 예술인거겠죠?

몇가지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굉장히 흥미로와서 인터넷에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은 유대인 아가씨 샬로트가 죽기 직전까지 몰두하여 만들었다는, 1300쪽에 이르는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인생? 혹은 연극?"이 대표적입니다. 그게 뭐든, 양이 많으면 일단 독보적인 무언가가 되는 듯 합니다.
자수로 프로야구 선수들 초상화를 만든 죄수 출신 작가 레이 매터슨의 작품들, 초창기 남극 탐험에서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으로 불멸의 이름을 남긴 프랭크 헐리의 기록 사진들도 찾아볼 만 하더군요. 저자가 작품 창작 과정을 직접 관찰한 화가 펄스타인의 작품들 역시 괜찮았습니다. 한 점 구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도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거대 작품, 해당 작품이 놓인 장소로 여행을 떠나야지만 볼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일 이상했습니다. 감상 순간의 주변 환경이 중요한 장소 특정적 예술이라는게 있다는 논리에서 시작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현대의 이런 작품들은 그냥 크기로 승부하는, 크기로 놀라움을 주는 단순한 아이디어가 전부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었어요. 거대 기념비와 별 다를게 없는데 이게 과연 예술인가요? 화가나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큰 돌덩어리가 예술이 되는건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에 비하면 일상 속 아름다움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샤르댕이나 티보의 작품들이 훨씬 예술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도판이 부실한건 굉장히 아쉽네요. 컬러로 수록된 도판도 부족할 뿐더러, 그나마 수록된 도판들도 저자가 설명하는 작품들을 전부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궁금한건 인터넷으로 직접 찾아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수록된 도판도 흑백이 많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고, 예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으니 좋은 독서임에는 분명합니다. 단지 제 취향과 맞지 않았을 뿐이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2/05/25

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장우진 : 별점 2.5점

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6점
장우진 지음/미술문화

"아르누보" 그 자체였던 미술가 무하의 일생을 상세한 도판과 함께 설명하는 책. 일종의 전기이자 미술사, 미시사 책입니다. 무하에 대해서는 아르누보 예술가로 몇몇 포스터와 보석 디자인밖에는 몰랐었는데, 책이 예쁘게 생겨서 반쯤은 충동구매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건질 게 많더군요. 우선, 무하라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습니다. 장식미술가로서의 디테일한 작품과 일생에서부터 굉장한 애국자로 고국 체코에 대작 "슬라브 서사시"를 남기는 것이 평생의 목적이었다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도 수록된 도판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보아도 낡아 보이지 않는 섬세하고 세련된, 처음 보았을 때만큼의 시각적인 충격과 재미를 항상 가져다주는 무하의 작품은 물론이고, 당시 벨에포크 시대의 파리와 유럽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그림, 일러스트, 사진과 각종 자료들이 압도적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많이 실려 있거든요.

도판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인쇄와 편집도 훌륭하고요. 가격이 좀 비싼 감이 있기는 하나 아르누보, 아르누보 스타일 일러스트와 장식미술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3/01/06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오혜진 : 별점 3점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 - 6점
오혜진 지음/어문학사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추리소설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문학적 위상을 지녔는지를 알려주는 논문집.

1930년대 추리소설이 유행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총독부의 언론 장악이 강하게 이루어졌고, 언론이 경쟁 과열 등으로 급격하게 상업화가 진행되어 독자의 흥미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글들이 많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 하에서 추리소설이 어떻게 등장하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김동인, 최독견, 방인근, 염상섭, 박태원, 김유정, 김내성 등 당대 유명 작가와 그들의 작품, 그리고 기타 다양한 자료와 인용문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 접하는 작품들이 다양하게 소개되는 것이 큰 장점인데, 이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김동인의 "수평선 너머로"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얻기 위해 급파된 서인준과 뉴욕에 본부를 둔 범죄집단 LC당이 윤백작 공채를 둘러싸고 대결을 벌이고, 이를 형사 이필호가 쫓는다는 이야기로 스파이 모험소설의 서사를 갖춘 작품인데, 줄거리만 봐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더군요.

또한 1940년대로 넘어가면서 김내성이 친일문학에 손을 대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유불란이 적국 스파이와 대결한다는 "태풍", 그리고 결국에는 유불란이 이름부터 친일스러운 "애국방첩협회" 회장으로 등장하여 미·영의 스파이와 대결한다는 "매국노"라는 작품 발표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건 뭐 면죄부를 줄래야 줄 수 없네요.

그 외에도 당시 추리서사의 작품들이 유행하였고 유명 작가들도 많이 창작하기는 하였으나, 대중문학이라서 순수문학에 비해 평가절하당하고 냉대받았다는 것, 동아일보에서 (1934.3.6~7) 세계 10대 탐정 작가로 소개한 작가들의 이름들(오픈하임, 르블랑, 췌스터턴, 반 다인, 필립 포츠, 엘러리 퀸, 프리먼, 레오나드 메릭, 프레챠, 비-스톤), 조선뿐 아니라 일본 추리문학을 짤막하게 소개하는 글들(그중에서도 1918.7.7 중앙공론 정기증간호를 통해 "비밀과 개방"의 '예술적 탐정 소설' 특집이 발표되었으며, 여기에 타니자키 준이치로의 "두 예술가의 대화"(금과 은으로 개제), 사토 하루오의 "지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개화의 살인", 사토미 톤의 "형사의 집"이라는 유명 작가 작품이 실렸다는 사실!) 등 유념해서 볼 만한 내용이 많았습니다.

논문집이기에 단지 재미만 따지기는 어렵고, 2만 원에 가까운 가격이 부담스럽기는 하나, 식민지 조선에서의 추리소설이 어떤 시대적·사회적 배경 아래에서 어떠한 작가들에 의해 어떻게 창작되었는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네요.

2024/04/02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 나들이

지난 목요일 (3월 28일), 오랫만에 전시회 관람을 갔습니다. 화창하면 더 좋았겠지만, 봄비가 살짝 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덥지 않고 선선해서 걷기에 딱 좋았습니다.

언제나 방문하면 찍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도 한 컷 찍고,
첫 번째 목표인 'MMCA 과천 프로젝트 2023 : 연결' 전시로 입장하였습니다. 3층과 4층의 실내외와 옥상 정원을 잇는 무료 전시로, 과천의 꽃과 생태계를 중심으로 둘러보면서 '힐링'하는 경험 제공이 목적으로 보였습니다. 무언가를 자세히 관찰하고, 깊게 사유한다기 보다는, 음악과 함께 둘러보며 쉬어가는 장소라는 느낌이었거든요.
공간의 구성과 연출은 좋았는데, 한 가지 아쉬웠던건 '정원'이라는 전시의 컨셉에 맞는 계절에 방문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봄이 되어 꽃이 만발했을 때 왔어야 했어요. 꽃과 나무와 함께하는 전시였으니까요.
그래도 일상 속에서 힐링하며 휴식과 여유를 즐기기에는 충분히 좋은 전시였다 생각합니다. 다음 번, 꽃이 피는 주말에 한 번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전시도 함께 관람하였습니다.
이 전시는 기하학적 형태, 원색의 색채,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추상 미술의 경향이 한국 미술에서 언제 시작되어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연대순으로 상세하게 알려주는 전시입니다. 1920년대 일제 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를 아우르기에 굉장히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눈이 즐거웠습니다. 유명한 김환기, 박서보 화백의 작품은 물론이고 당대를 풍미했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가득한 덕분입니다.
또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구상적인, 의미가 있는 형태에서 시작하여 완전한 평면 추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던가,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옵아트 등의 사조에 한국적 색깔을 더한 작품들도 있는 등 볼거리가 정말 많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하는건, 항상 궁금했었던 추상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가 모호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론은 '별 차이가 없다'입니다.. 훌륭한 평면 디자인은 그 자체가 훌륭한 추상 미술이기도 하다는걸 많은 작가분들께서 증명해 주셨거든요. 작가분들 중에는 회화와 디자인 양쪽에서 활약한 분도 계시기도 하고요. 저도 UX 디자인을 하며 평면 디자인에 살짝 발을 걸치고 있는데, 나름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도 될 것 같아서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이렇게 많은걸 알려주며 내용과 구성 모두 훌륭했던, 굉장히 좋은 전시였습니다. 한국의 추상 미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관람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