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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8

좀비 - 조이스 캐롤 오츠 / 공경희 : 별점 2.5점

좀비 - 6점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포레

Q_는 얼마전 저지른 흑인 소년 성추행 건으로 정기적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유명 교수의 아들로, 변태적인 싸이코로 진화한 뒤 '전두엽 절제 수술'로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일종의 성노예 좀비를 만들 꿈을 꾸는데...

명성이 자자했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입니다. 스티븐 킹이었나요?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현대를 대표하는 공포, 호러 소설 중 한편으로 극찬했었기에 평소 관심을 두던 차에, 드디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본 결과는 제 생각과는 굉장히 달라서 의외네요. 실제로 좀비가 등장하는 크리처 호러를 생각했는데 작품은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같은, 변태 싸이코 살인마범죄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재미가 없던건 아닙니다. 이런 류의 작품들에서 봄직한, 무의미한 범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차이점도 있고요. 예를 들어, "내 안의 살인마"의 주인공 루 포드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즉 그냥 '죽이고 싶으면' 죽입니다. 즉, 무계획적이고 돌직구같은 범행이지요. 그러나 Q_의 범죄는 명확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수행한다는 점이 독특했어요. 

들은 바 대로 묘사력도 대단합니다. 특히 범죄 행위에 대한 묘사들은 그야말로 발군입니다. 가장 상세하게 묘사되는, '다람쥐'를 잡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디테일이 지나쳐서 쉽게 모방 범죄가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세세한 디테일 - Q_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먹는 음식이나 입고 있는 옷, 기타 여러가지 설정들 - 을 적재적소에 그려내어 자연스럽게 캐릭터가 드러나고 부각되게 만드는 솜씨도 훌륭해요. 

아울러 전두엽 절제 수술로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는 '좀비'로 만든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쉽사리 사람을 사귀지 못하고, 본인에게 별다른 매력도 없는 싸이코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설득력이 높습니다. 물론 대학을 수차례 다닐 정도로 기본적인 지성은 갖춘(것으로 보이는) Q_가 전두엽 절제 수술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갖는다는건 다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만, 미친 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가야겠지요. 최소한 '최면술' 따위나 실제 좀비 전설의 원전인 '부두교 주술'보다는 과학적이긴 하고요.
260여 페이지에 여백도 많아서 읽기 쉬웠다는 것 역시 장점입니다. 별다를 것이 없는 범죄극에 딱 맞는 적절한 분량이었어요.

그러나 솔직히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내 안의 살인마"도 별로 제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에요. 주인공 Q_ (쿠엔틴인데 1인칭 시점에서는 항상 Q_로 묘사됩니다)가 상상 이상의 변태이며, 범죄도 혐오스럽기 그지 없는 탓입니다. 하드고어적인 내용만 보면 "살육에 이르는 병"과 별로 다를게 없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Q_의 동성애 취향, 그리고 기껏 전두엽 절제술로 만든 좀비를 만들어 성노예로 부릴 것이라는 목표도 너무 싸구려 성인물같아서 역겨웠고요. 

엽기적인 변태 싸이코가 등장하더라도 "내 눈에 비친 악마"에서처럼 별다르게 범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전개라면 모를까, 이렇게 살아있을 가치가 전무한 주인공이 벌이는 엽기 행각이 지속적으로 성공하고, 또 앞으로도 성공할 것 같다는 마무리는 정말 별로였습니다. Q_가 자신이 관리하는 하숙집 외국인 유학생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다면 충분히 오랫동안 들통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소름이 끼치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야기하는 거장의 매력은 충분히 살아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또 읽어 볼 일은 없겠습니다.

2016/09/03

크리피 - 마에카와 유타카 / 이선희 : 별점 2점

크리피 - 4점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외딴 주택가에 거주하며 가끔 TV에 출연하던 범죄심리학 교수 다카쿠라는 제자 린코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인 고교 동창생 노가미가 연락해서 8년 전 일어났던 미제 사건인 혼다 일가 실종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노가미는 다카쿠라의 집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열의를 보였지만, 실종된 후 다카쿠라 옆집 노모녀 화재 현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 다카쿠라의 옆집 니시노 일가의 수상쩍은 가족 관계가 점차 불거졌고, 결국 니시노의 폭주가 일어나는데...

격조했습니다. 인륜지대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중대사인 "이사"를 하느라 지난 한 주간 정말 정신없이 보냈네요.

어딘가의 멋드러진 소개글을 보고 읽게 된 작품입니다. 작가 마에카와 유타카의 출세작이지요. "검은 집"처럼 평범함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싸이코패스의 가공할 범죄를 그리고 있습니다.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초~중반부는 인상적입니다. 다카쿠라가 거주하는 주택 단지 구성이 8년 전 히노 시에서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 현장과 유사하다는게 드러나고, 옆집 남자 니시노와 가족이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갑자기 그 집 딸이 "그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그 뒤 급작스럽게 옆집 남자가 돌변하여 폭주하는 과정까지는 정말 대단합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니시노가 식칼을 집어들고 광기를 보이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입니다.

알고 봤더니 옆집 남자 니시노가 모든 연쇄 살인의 범인인 "위장 살인마"이며, 그의 정체는 사건을 추적하다가 실종된 후 결국 사체로 발견된 형사 노가미의 형 야지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좋았던 중반부를 지나 노가미가 유서처럼 남긴 편지를 통해 야지마의 범행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진 후부터는 힘이 빠져버립니다. 370페이지라는 분량에서 240~50페이지 정도가 되면 진상이 밝혀지는데, 이후는 완전히 사족입니다. 너무 일찍 답을 정해놓고 이야기가 흘러가버리니 재미가 있을 리 없지요. 이렇게 쉽게 밝혀질 것을 뭐 이리 질질 끌었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수사도 어설펐고요.

게다가 마지막 반전 — 야지마가 죽인 줄 알았던 노가미는 사실 전처 소노코가 죽였다, 야지마는 뒷처리를 도와준 것일 뿐이다, 편지 역시 소노코가 쓴 것이다 — 는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정의감을 불태운 줄 알았던 노가미가 형 야지마 못지않은 쓰레기일 뿐이었다는건 독자를 우롱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상을 밝히는 다카쿠라의 추리도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소노코의 양녀 유가 사실은 실종된 여고생 미오였고, 야지마는 이미 소노코에 의해 살해된 뒤였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을 그리기 위한 억지 전개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야지마가 구태여 오와다 옆집에 살면서 정보를 캐내 스토커 짓을 한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뭔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 다카쿠라와 여대생 린코의 플라토닉한 사랑 이야기는 야지마와의 최종 대결에서 오와다가 죽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온 것 이외의 가치가 없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린코는 비중에 비하면 하는 것이 너무 없거든요. 비중을 볼 때 다카쿠라의 불륜 상대가 아니라면 최소한 범죄 심리학 전문가로서 뭔가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위장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한 가족에 침입하여 가장 행세를 하며 가족들을 한 명씩 차례로 죽이는 악의 천재 야지마의 능력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 점입니다. 작품의 설득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야지마가 어떻게 가족들을 지배했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서술했어야 합니다. 작중 묘사된 정도로는 설득력이 너무 약해요. 다카쿠라가 잠깐 설명한 대로 공포와 협박, 좁은 공간의 3가지가 갖춰져 마인드 콘트롤이 용이했다 하더라도, 외부 활동을 했음이 분명한 아들과 딸이 잠자코 오랜 기간 그의 말을 따랐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지가 않는 탓입니다. 비슷하게 싸이코패스의 치밀한 범죄가 그려지는 작품들 — 앞서 말씀드린 "검은 집"을 비롯해서 — 은 동기는 물론 범행 과정에 있어서도 범행의 현실성을 높게 그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확연히 비교되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역대급 초반부를 지녔지만 중반부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해서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좋은 리뷰로 존경해 마지않는 정윤성님의 리뷰에 100%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금 조사해보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으로 영화가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요소 (린코, 반전 등)를 다 쳐내고 범죄 심리학자 다카쿠라와 형사 노가미 (그리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다니모토)가 악의 천재 야지마와 대결하는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그려낸다면, 즉 선–악 구도를 명확하게 각색한다면 소설보다는 훨씬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2/12/25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1권과 동일하게 각종 사건들의 상세한 소개에 더해 수사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던 법의학법과학 방식이 소개되는 논픽션.
이번에는 거짓말 탐지기, DNA 분석, 루미놀 시약, 삭흔, 뼈, 법보행 등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범죄의 종류 - 실종, 도굴 - 이라던가 수사 방식 - 잠복, 공개 수배 -, 범인의 특징 - 싸이코패스, 피해망상 -, 단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 자백, 간접증거 - 등 많은 범죄 관련 소재가 언급됩니다. 이건 법의학과 법과학 관련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걸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건 쪽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점 첫 번째는 여러 지능범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체 인멸, 현장 조작에 알리바이 트릭까지 사용하는 놀라운 범인들의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기할 점은 범인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범인들의 행태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사형 제도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네요.

특정 주제에 맞는 대표적인 사건을 선정하기 쉬웠을 1권보다는 주제부터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는건 아쉽지만, 상세한 사건 정리가 여러 자료와 도판 등으로 뒷받침되는 좋은 범죄 논픽션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두 타석 연속 장타!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던 범죄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몇몇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아산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1).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현장에 다시 침입했습니다. 양초를 이용한 장치로 시간 조작 방화를 일으키려고요. 범인은 집을 비웠던 시간에 영화 다운로드를 걸어 두어서 집에 있는척 했다는 알리바이 트릭까지 써먹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만화와 다른 법입니다. 범인은 한 달도 더 지난 사건 당일 행적을 너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했던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서 덜미가 잡히고 말거든요. 체포되어서 다행입니다.

<<환경 미화원 살인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2)
추리 소설에서나 봄직했던 정교한 시신 유기가 놀라왔던 사건입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철물점에서 사온 5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100리터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2장을 덧씌웠습니다.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보이도록요. 그리고 환경 미화원이었던 범인은 자기 담당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은 뒤, 다음날 시신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에 던져 넣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전주 시내의 한 소각장으로 이동 후 소각 처리되고 말았다는군요. 무섭습니다.

<<거여동 여고 동창 살해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3)
단순 질투로 친구와 친구 아이 두 명을 살해했던, 비상식적인 잔혹함으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사건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에 목장갑만 꼈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정도의 지능범으로 방 열쇠를 넣은 핸드백을 방범창 안으로 던져 넣는 식으로 일종의 밀실 트릭까지 사용된, 거의 성공했던 완전범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손에 현장에는 없었던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현장 수사관들의 식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종잇조각은 범행 도구로 준비해왔던 페트병으로 만든 빨랫줄 고정판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네요.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을거라고 경찰을 도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집에 범행 기록을 꼼꼼히 적어둔 일기장을 남겨두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시욕' 이라는게 있었던걸까요?
아울러 이런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무기 징역에 그쳤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발 이런 범인은 좀 죽입시다.

<<신혼부부 니코틴 살인 사건>>
범인은 신혼 여행을 떠났던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 화장을 서둘러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의 부검 감정서로 덜미가 잡힌 경우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혈관 내 다량 투여된 니코틴에 따른 급성 중독사인데, 시신의 왼쪽 팔에서 두 곳, 오른쪽 팔에서 한 곳, 총 세 곳에서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인이 입증되었거든요. 처음 주사했을 때 바로 독성이 나타났을터라, 그 다음 나머지 두 곳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타인이 주사를 놨다는 것이고, 사망 장소에는 남편밖에 다른 이는 없었으니 범인은 뻔한 셈입니다.
단지 돈 목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살해한 인면수심의 뻔뻔한 살인범이라는 특징도 잘 살아있는 사건으로, 남편이라는 놈은 이 증거가 드러나자 자살 방조라고 우겼다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네요. 이런 놈도 좀 죽입시다....

뻔뻔함이라면 <<포천 암매장 살인 사건>>범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인 범인이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가공할만한 뻔뻔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 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포천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TV 화면을 제시하자, “함께 갔지만 피해자는 포천이동갈비를 먹으러 갔다"고 바로 말을 바꾼다던가, "함께 어머니 산소에 들렀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상식적 변명을 늘어놓는 식이었다네요. 이런 변명이 통할거라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고,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미아동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남아시아계라는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잠복 중이던 형사가 혼혈로 보이는 어린 형제를 보고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 중 큰 아이가 "아빠다!"라고 외쳐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행동이었어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잡아야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혼혈 아이들의 집만 알아내어도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 아빠 신원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울주 노인 연쇄살인 사건>>
사건 현장에 범인의 DNA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폐쇄회로 TV 영상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백 진술과 이 진술에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가 더해지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됐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자백'이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피고인의 자백이 곧바로 유죄 증거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최근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도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또는 기망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되거나, 혹은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땐 자백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고요.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네요. 과거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강도 살인'처럼 허위 자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경우가 많은 탓이겠지요.

<<이천 무덤 연쇄 도굴 사건>>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행으로 범행 자체는 특기할게 없는데, 피해자가 너무 안타까왔던 경우입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최씨는 부모 무덤이 도굴당한건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믿어서 11년간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친지와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거든요.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버렸는데, 이런건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제주 보육교사 피살 사건>>
미제 사건인줄 알았었는데, 과학 수사를 통해 이전에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던 택시 운전사가 검거되었더군요. 사건 당시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과학 수사를 통해 피해자 사망 시각이 재조정되어 결국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 사체를 이용한 실험 결과로,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는 그늘인 데다 바람이 심했고, 사후 일주일이 넘은 뒤에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어서 경찰은 다시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갔는데, 9년 사이 미세 증거물을 증폭해 보는 기술이 발달한 덕에 다행히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해자 옷에서 범인 옷과 동일한 섬유 조각이, 범인의 차에서 피해자 섬유 조각이 수집되었던 것이지요. 섬유 조각이 범인이나 피해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교차 발견되는게 많아지면 둘이 만났다는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단계까지만 언급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용의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나, 섬유 증거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네요. 그 외의 증거들도 용의자가 범인이다! 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쉽습니다. 언젠가 진범이 잡혀 피해자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2021/11/25

사라진 세계 - 톰 스웨터리치 / 장호연 : 별점 3점

사라진 세계 - 6점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래의 지구, QTN입자가 날아와 환각에 빠져 죽게 만드는 터미너스 현상을 일으켜서 인류는 멸망해버렸다. 1980년대의 미국 해군 우주 사령부는 ‘인정되지 않는 미래 궤적(Inadmissible Future Trajectories)’, 즉 IFT라는 다중차원의 미래로 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 미래에 대해 알게 되었다. 터미너스 현상을 막기 위해 사령부는 여러 요원들을 IFT 미래로 보내어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터미너스 현상이 일어날 시점만 2666년에서 2456년, 2121년... 등으로 계속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터미너스 현상을 일으키는 QTN 입자가 향하는 길을 열어준 탓이었다.

그리고 1997년 현재, IFT로의 탐험을 떠났다 돌아왔던 패트릭 머설트의 가족이 살해되고 큰 딸 매리언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수사에 IFT 귀환병 출신 섀넌 모스 특별 수사관이 투입되었다. 귀환병 관련 사건에는 해군 범죄 수사국이 참여되는게 규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패트릭 머설트가 탑승했던 '리브라 호'는 공식적으로 귀환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건 해결을 위해 20여년 후의 IFT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섀넌의 수사 결과, 리브라 호가 QTN 입자가 있는 에스페란스 별에 착륙했던게 터미너스 현상을 지구로 불러온 원인이었으며 패트릭 머설트 사건은 역시 리브라 호 귀환병이었던 하이델크루거가 이끄는 테러 조직이 일으켰다는게 밝혀졌다. 하이델크루거는 추락한 리브라 호의 B-L 엔진이 가동될 때, 바르게도르 나무 주변에 생겨나는 시간의 틈을 이용하여 다른 IFT의 '메아리' 들을 끌어들여 세력을 넓히고, 터미너스 현상을 초래할 해군 사령부의 IFT 탐험과 관련된 모든 것에 거대한 테러를 가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누설하려던 머설트를 가족과 함께 살해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섀넌이 이를 알아낸 직후, 터미너스가 1997년의 지구를 덥쳤다. 섀넌이 패트릭 머설트의 증언을 확보하여 해군 사령부와 거래 하려던 변호사를 하이데크루거의 습격에서 구해준게 원인이었다. 해군 사령부는 이 증언을 통해 에스페란스의 위치를 알아내어 전함을 보냈고, 전함이 지구로 귀환하자 QTN 입자가 전함을 따라와 곧바로 지구를 덥쳤던 것이었다. 섀넌은 바르게도르 나무 근처 시간의 틈을 이용해, 과거 리브라 호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시점으로 이동하여 리브라 호의 자폭이 성공하도록 도울 결심을 하였다. 성공하면 단 하나 뿐인 시공간 '굳건한 대지'는 안전하게 될 터였다...

시간 여행 (타임 리프)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5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 SF 범죄 수사물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1986년 리브라호 사고, 1997년 현재, 그리고 약 20년 후의 IFT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너무 평범한 제목 탓에 손길이 가지 않았었는데, 읽다보니 굉장히 재미있어서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SF지만 범죄 수사물 측면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던 덕이 큽니다. 시간을 뛰어넘어 사건을 수사한다는 설정이 잘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시공간('굳건한 대지')의 사람들이 IFT 미래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아내어 그들과 사건의 관계가 드러나는 과정을 꼼꼼한 복선 배치를 통해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대표적인게 FBI 수사관 네스터입니다. 섀넌은 미래의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과거로 돌아온 뒤 그가 미래에서 살던 집이 하이텔크루거 일당의 은거지였다는걸 알게 됩니다. 네스터가 자기 것이라고 말했던 무기들 역시 원래 테러범들 것이었고요. 즉 하이델크루거 일당과 네스터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엮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다른 미래라도, 시간의 흐름 상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거지요. 다른 인물들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또 비교적 초반부에 니콜과 절친한 친구가 된 덕분에, 과거의 그녀의 도움을 받아 임무를 완수하게 되는 식으로 연결된 '인간 관계'가 사건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식으로 관계를 잘 구축해 놓고 있고요. 무고한 사람을 살리려던 섀넌의 노력이 터미너스 현상을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불러오게 되었다는, 일종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SF적인 측면으로도 볼 만 합니다. 저같은 과학 둔재도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 기술과 이론들을 이야기와 잘 결합하여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 이동이 핵심이지만 그 원리나 기술을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아요. 그냥 소설에 잘 어울릴 설정들을 적절하게, 작품과 잘 어울리게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새년이 '굳건한 시간'에서 A라는 IFT 미래로 이동한 뒤, 임무를 마치고 원래의 '굳건한 시간'으로 돌아가게 되면 A라는 IFT 미래 시공간 자체가 소멸하여 무로 돌아간다는 설정처럼요. 하지만 독자가 충분히 설정에 대해 이해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은 잘 그려내고 있기에, 이 설정이 타임 패러독스를 없애는 완벽한 설정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이 비밀을 아는 해당 IFT 시공간 사람들이 시간 여행자를 감금한다던가 (그가 돌아가면 시공간이 소멸해버리니), '굳건한 시간' 외의 시공간에서 온 사람들을 '메아리'라고 부른다던가 하는 부가적인 설정들도 흥미롭게 묘사됩니다.
시간 점프 기술을 이용하여, 미래에서 터미넌스를 막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지 않았을까 싶어 미래로의 이동을 반복하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해서 모든 미래 시점에도 터미넌스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역시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는 거지요.

하지만 IFT 미래로의 탐험을 빼면, 수사물이나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범인이 '리브라 호' 선원이었던 하이델베르그라는건 비교적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머설트가 리브라호 귀환병이라는걸 알고 난 뒤에도 리브라 호 선원 명단을 전체 조사하지 않았던 해군 수사 본부의 무능함만 눈에 뜨일 뿐이지요. 이런 기본적인 수사도 하지 않고, 모든 수사를 IFT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미래에서 언제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 알아낸 후,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잠복 등으로 사건을 막는게 전부라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위기와 액션 묘사가 출중한 덕에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이래서야 수사물이라고 하기도 어렵겠지요.

또 불필요했던 설정과 묘사도 너무 과했습니다. 하이델베르그가 해군 우주 본부 테러로 아득한 시간과 공간 탐험을 막고자 하는 동기부터 그러합니다. 납득할 수는 있지만 오버스러웠달까요. 몇몇 주요 인물만 암살하면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패트릭 머설트 가족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손톱을 뜯어낸 이유가 '손톱으로 만든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건 쓰잘데없는 설정의 최고봉이고요.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뿐더러, 말 그대로 '손톱으로 만든 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진상은 허탈하기만 했거든요. 사건 현장마다 뭔가 흔적을 남긴다는 전형적이고 흔해빠진 싸이코 범죄물 설정에 집착한 듯 한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앨릭 플리스가 패트릭 머설트의 딸 매리언을 납치해서 바르게도르 나무에 묶은 이유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녀가 집에 없었을 때 하이델베르그 일당이 다른 남은 가족을 죽인건 말이 됩니다. 도망간 패트릭 머설트를 처형한 것도 말이 되고요. 그렇지만 일당이 메리언을 찾아내서 죽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앨릭이 하이델베르그 일당인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며, 설령 그가 일당이었다 쳐도, 구태여 바르게도르 나무까지 끌고가 묶어 놓는건 설명이 되지 않아요. 죽이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가족과 구분하여 처단할 이유는 없으니가요. 사건 수사에 집착하는 섀넌 모스의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는,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일당과 접점을 만들고 마지막에 리브라 호 자폭으로 전개하기 위해 필요했던 소재인데, 조금 더 상식적으로 말이 되게끔 전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하이델베르그가 섀넌 모스를 생포한 뒤, 반란이 일어난 직후의 리브라 호로 데려간 이유도 이해할 수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리브라 호에 감금되었던 섀넌 모스가 추락 직후 니콜에 의해 구조되었던건 무려 11년이 지난 뒤였다는 이상한 시간의 뒤틀림도 설명은 전무한, 작위적이고 편의적인 전개였고요.
이런 내용은 몽땅 들어내 버리고, 생포된 섀넌 모스가 하이델베르그를 어떻해든 설득해서 함께 리브라 호를 파괴하러 간다는게 더 명쾌했을 겁니다. 하이델베르그는 분명 과거 리브라호로 이동한다는걸 알고 있었고, 그의 행적을 보면 당연히 현재 시점의 '굳건한 대지'로의 탈출 방법도 알고 있었을테니까요. 반란만 제압하고 함장이 자폭하게 도와주고 탈출하면 그만이지요.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든다면 이렇게 각색할거라고 확신합니다! 

아울러 시간 여행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리브라호를 자폭시켜 블랙홀로 빨아들이면 터미너스가 없는 '굳건한 대지'가 유지될 수는 있습니다. 리브라호가 터미너스를 유발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미래는 다양한 우주로 점프하면서, 과거는 '굳건한 시간'의 과거로 갈 뿐이라는 것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IFT 미래로 이동 후 복귀할 때 그 IFT 미래 시공간은 소멸하는데, 과거로 이동 후 죽거나 복귀하면 왜 그 과거에 관련된 시공간은 소멸하지 않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IFT 미래 시공간 이동 기술은 600년 후의 미래 기술을 1980년대 현재 기술로 양산 가능하도록 만든거라는 설정이 잠깐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과거로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나마 이런 설정들은 그래도 전개에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코트니 김이 살아있고, 섀넌 모스가 임신했다는걸 알아채는 1986년의 한 장면으로 끝나는 마무리는 영 이상했습니다. 코트니 김의 죽음은 리브라 호와는 무관했기에, 과거의 리브라호 자폭이 코트니 김이 살아있는 미래로 이어질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섀넌 모스가 코트니의 오빠와의 관계로 임신했다는걸 알아챈다는건 더 문제에요. 원래 코트니가 살해되기 전에 가졌던 관계이니, 현실의 섀넌도 임신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임신한 섀넌 모스는 원래 작중의 섀넌과 그녀 어머니 관계와 유사해서, 시공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납득할 수 없는 과한 사족에 불과했다 생각되네요. 앞서 이야기했듯 '현재'의 섀넌 모스가 '과거'로 돌아가 죽었다면, '과거'의 미래가 바뀐다는건 이 작품의 시공간에 대한 기본 전제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읽는 동안은 단점을 떠올리기 힘든 재미를 갖춘 작품입니다. 추락한 미래에서 온 우주선의 엔진 점화로 시공간이 뒤틀려 연결된다는 설정은 예전에 읽었던 다카미 요시히사의 "화석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필연적으로 멸망할 미래에서 과거로 탈주했다는 점, 탈주용 우주선 엔진이 현재에 폭주하여 타임 패러독스를 일으키는 등 유사한 점이 많이 느껴졌고요.
그러나 결말까지 이어지는 깔끔한 전개는 이 작품 쪽이 훨씬 낫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영상물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와 내용인데, 약간의 설정 구멍을 보완하여 만들어주면 참 좋겠다 싶네요.

2015/01/23

연쇄살인범 지도 매핑 - 브렌다 랠프 루이스 / 이경식 : 별점 2점

연쇄살인범 지도 매핑 - 4점
브렌다 랠프 루이스 지음, 이경식 옮김/휴먼앤북스(Human&Books)

이런 류 연쇄살인범 관련 논픽션은 그동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꾸준히, 많이 읽어왔습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애호가로서의 흥미, 그리고 창작을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자료 및 아이디어 확보 측면에서 말이죠. 허나 세계적인 연쇄살인마가 흔한 것도 아닌만큼 몇권 읽으면 충분하기는 합니다. 특히나 미국에서 발표된 책이라면 미국 중심이기에 미국의 유명 살인마들 - 에드 게인테드 번디, 샘의 아들, 나이트 스토커 등등 - 은 이제 지겨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제목 때문입니다. 연쇄 살인범의 범죄 행각을 지도에 매핑했다는 제목에서 뭔가 색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거든요. 미드 <넘버스>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수학자 동생이 무작위로 보이는 범죄 행위가 실제로는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수학이론을 통해 밝혀내고 (범인이 범행 장소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숨기기 위해 무작위적으로 범행 장소가 바뀌지만 이러한 무작위는 외려 작위적인 수열을 형성하므로 그 시작점을 수학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 범인이 어디 있을지 추론하던 에피소드였죠.

그러나... 지도 매핑은 그냥 범죄 행위를 지도에 그려놓은 것일 뿐이라 실망스러웠습니다. 지도가 실려있을 뿐 연쇄살인범들과 그들의 범죄행각을 요약해서 소개해주는 방식은 다른 책들과 대동소이해요.
물론 이 책만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가 별 정보를 전해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없는 것 보다는 당연히 있는 것이 낫고 그 외의 도판들, 예컨데 피해자 사진들이 조금 더 많이 수록되어 있는 점도 괜찮았어요.
무엇보다도 다른 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비키니 살인마 찰스 소브라즈, 트럭 운전사 연쇄 교살범 폴커 에케르트 등의 연쇄살인마들이 수록되어 있는 점에서는 나름 가치가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씌여졌기에 최근의 범죄, 배낭여행객 살인자 이반 밀라트나 유명한 사건이었던 워싱턴의 저격수 존 앨런 무하메드와 리 보이드 말보, 베르사체 저격범 이야기가 실려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얼마전 보았던 영화 <툼스톤>의 원작 <무덤으로 향하다>의 범인들 모델로 생각되는 싸이코패스 컴비인 태평양 연안 고속도로 살인마 비태커와 노리스 이야기도 충격적이고 놀라왔습니다.


다른 책들에 비해 소설처럼 조금 더 생생하게 쓰여진 것과 체포와 수사 과정 및 범인들이 체포된 이후 사법거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던가, 사형을 기다리고 있다던가, 사형을 당했다던가, 아니면 놀랍게도 해당 국가의 형법이 정해져 있어서 석방되었다던가! (안데스의 괴물 페드로 로페즈) 등의 후일담까지 꼼꼼한 것도 특징입니다. 이반 밀라트 차에 탔던 영국인 여행자가 가방과 여권을 모두 버려두고 달아난 사례처럼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경우 의외로 살아난 경우가 많거나, 최소한 범인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허나 장점보다는 제목에 낚인 듯한 기분도 크며 내용도 아주 새롭거나 하지는 않아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제 이런 책은 좀 많이 지겹습니다...

그나저나 외국 살인자들은 자칭이건 타칭이건 별명이 있는데 참 기묘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식으로 별명을 붙이면 장난스럽다고 엄청 공격받을 것 같은데 말이죠. 국가마다 문화가 달라서 그런 걸까요?

2018/10/27

비하인드 도어 - B.A. 패리스 / 이수영 : 별점 1.5점

비하인드 도어 - 4점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arte(아르테)

모두가 부러워하는 화려한 부부 잭과 그레이스. 남편 잭은 승률 100%를 자랑하는 유명 가정 폭력 전문 변호사로, 영화배우와 같은 외모까지 갖춘 근사한 남자다. 그레이스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여동생까지 사랑해주는 잭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꿈꾸지만... 그녀는 괴물 같은 그의 손길이 사랑하는 동생 밀리에게 닿기 전에 이 악몽을 끝내려 한다. 닫힌 문 뒤에서,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처절한 심리 싸움이 시작된다...(출판사 제공 줄거리 인용)

책 뒤에 소개된 짤막한 본문 -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공포를 주입할 수 있는 사람. 계속 숨겨 둘 수 있는 사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 보는 한 편 내 갈망을 충족시킬 방법도 마련했어. 뭔지 알겠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잭은 몸을 기울여 내 귓가에 입을 가져왔다. "너랑 결혼했어. 그레이스" - 가 마음에 들어 집어들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지인이 싸이코패스였다'는 책을 읽었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핸섬하고 친절한 신사로, 결혼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잭이 결혼하자마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돌변한다는 이야기니까요.

이런 류의 이야기라면 범인이 치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상대방을 협박하고 죽이려 하는지가 잘 묘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재미 핵심 요소고요. 하지만 이 책은 완벽한 실패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를 주기 위한 무리한 설정 탓입니다. 잭이 치밀해서 그레이스가 탈출도 못 하고 도움도 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설정인데,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만나고 외출도 하는데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다는건 솔직히 말이 안되지요.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놓기는 했지만 다 핑계로 밖에는 보이지 않있습니다. 여자 화장실 안에는 같이 못 간다는 묘사가 등장하니 화장실에서 거울에 몇 자 쓴다던가 하는 식으로 방법을 생각해 볼 만 한데 절박함이 부족해요. 이래서야 감금과 협박을 즐기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위기 극복, 탈출 과정이 재미있느냐? 아닙니다! 겨우 구한 약을 잭에게 먹이고 탈출한 그레이스가 태국으로 여행간 후 완전 범죄를 꾸민다는 내용인데 과정이 전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우 탈출했을 뿐 잭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하실에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벌일 일은 아니잖아요. 이럴 계획이었다면 최소한 책을 확실히 죽였어야 했습니다. 단지 지하실에 가두었다고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잭이 깨어나 탈출하면 모든게 끝나버리니까요. 실제로 잭이 바로 태국으로 쫓아 왔다면 그레이스가 옭아매인 신혼 여행 상황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뉴질랜드 행을 가장한 죽음을 맞게 되었겠지요.
결말 부분에서 에스더가 그레이스를 도와줘 완전 범죄를 성공시킨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그 전까지 에스더와의 친분은 전혀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뜬금없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밝힌 이유인 "빨간 방" 의 정체는 말이 되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세부 묘사가 너무 부족했어요.

다른 부분들도 건질게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와 과거가 복합되어 진행되는 진부한 방식의 전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밀리의 수면제가 현재에 등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가 깔끔했던 것 정도만 볼거리였습니다만, 이 정도도 수습이 안 됐다면 이야기가 성립하지도 않았을테니 딱히 장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처음에 완벽함을 강요받는 그레이스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완벽에 집착한 나머지 아내의 허술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상계스러운 특이한 싸이코구나! 싶게 만드는 부분은 독특했기에 차라리 이런 설정을 밀어 붙였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잭이 누군가를 감금해서 공포에 질리게 하는 모습을 즐기는 싸이코패스라는 이야기는 그닥 신선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니, 너무 뻔하죠. 이런 뻔한 내용이니 잭이 남편에게 폭행당한 여자들을 전문으로 변호하는 변호사라는 작위적인 설정은 단점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한 가지 괜찮았던 아이디어라면 잭이 그레이스와 결혼한 이유입니다. 그레이스의 동생 밀리가 다운증후군이라서, 이를 이용해 밀리를 감금하려고 계획했다는 건데 불쌍한 장애우를 학대하는 악당이라는 느낌이 더해져 사악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밀리에 대해 그레이스가 가진 모정에 가까운 애정을 협박의 재료로 쓴다는 것도 그럴듯 했고요. 아울러 사건의 핵심인 공포의 "빨간방" 묘사는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장점은 빈약해서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라는 결론을 뒤집기는 무리에요. 영화도 많이 제작되는 인기있고 유행하는 소재를 억지스러운 설정을 덧붙여 변주한 현실성없는 이야기라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8/10/21

불티 - 시즈쿠이 슈스케 / 김미림 : 별점 2.5점

불티 - 6점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쿄 지방법원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는 일가족 살해 혐의를 받던 다케우치 신고 재판을 마지막으로 퇴관했다. 그의 마지막 판결은 무죄판결이었다. 그리고 2년 뒤, 다케우치기 가지마 이사오 바로 옆 집으로 이사왔다. 가지마 가(家)의 모든 대소사에 성의를 다하는 그에게 집안 사람들 모두는 호감을 느꼈지만, 며느리 유키미만은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는데...

법률 미스터리로 유명하다는 작가 시즈쿠이 슈스케의 장편입니다. 한번 손에 잡으면 내려 놓을 수 없다는 뜻의 '철야책' 이라는 별명이 있다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작가의 이력, 그리고 초반부의 판사 가지마 이사오의 재판과 그에 관련된 딜레마 때문에 당연히 법률 미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싸이코 살인마 다케우치와 가지마 가(家)의 대결을 그린 전형적인 서스펜스 스릴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대결에서 전해지는 서스펜스가 읽는 내내 넘쳐서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해 주기 때문에 '철야책' 이라는 별명에는 충분히 값합니다.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유일하게 비협조적인 인물인 며느리 유키미를 배제해 가는 첫번째 과정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의심들이 쌓여 진상을 알게 된 어머니 가지마 히로에가 위험에 처하는 전개, 뒤이어 집안일에 무심했다가 뒤늦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가지마 이사오와 그를 돕는 유키미의 활약이 교차되는 후반부까지 정말로 흥미진진한 덕분입니다. 다케우치가 수상하다는건 상당히 초반부터 암시되어서, 어떻게 남은 500여 페이지를 끌고 갈까 궁금했는데 여러가지 장치를 통해 흥미를 더하는 솜씨가 일품이에요. 특히 유키미 배제에 그녀의 딸 마도카를 이용하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쿠르트로 밤 잠을 못 자게 하고, 창문으로 보이는 자기 집에서 약간의 조작으로 마도카가 인형 놀이를 과격하게 하게끔 유도하면서 유키미의 폭행을 끌어내는 식인데 치밀하면서도 설득력이 높아 감탄했습니다.

아울러 싸이코 다케우치의 설정도 독특해서 나름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사실 착하고 평범해 보였던 지인이 알고 보니 싸이코 살인자더라.. 라는 설정의 작품은 쎄고 쎘죠. 스플래터 고어 호러가 아닌 싸이코 살인자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아마 비슷한 설정일 거에요. 주인공이 살인자의 정체를 알아내지만 주위 사람들은 주인공 말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공이 살인자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 역시 대부분 비슷할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살인자 다케우치가 자신의 재력을 활용하여 상대방에게 무한에 가까운 호의를 베풀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방으로부터의 애정과 호감을 강요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이 큰 차이점입니다. 한마디로 애정과 호감을 자신의 돈과 성의로 사려고 하고, 이를 거절당했을 때 격렬한 살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호감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착각하는 스토커, 혹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싸이코패스소시오패스들처럼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는 인물이 아니라는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다케우치는 가지마 이사오가 재판관 시절 무죄 판결을 내린 피고 출신이라는 설정도 새롭습니다. 이는 다케우치가 가지마가(家)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정말 무죄로 보이는 다케우치의 묘사를 통해 독자들도 정말 진범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중반부의 가장 큰 승부인 피해자 유족 이케모토와 대면한 다케우치가 이케모토가 진범이 아니냐고 되묻는 장면이 특히 그러합니다. 주인공인 유키미마저 속아넘어갈 정도이니 독자야 오죽 하겠습니까.

하지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원죄 운운한다던가, 재판관으로서 사형 선고를 내리는 심경을 그려내는 등의 법률 미스터리스러운 설정은 내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불필요한 묘사였습니다 제목의 '불티' 부터가 사건의 원인이 된 다케우치의 무죄 판결을 뜻하는데(아마도), 내용만 보면 이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다케우치를 스스로 단죄하고 죗값을 받는 가지마에 대한 에필로그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 앞에서 아들을 죽이려 하는 살인자를 누가 가만 놔 두겠어요? 이러한 전개를 통해 사형 선고 등 현재 사법 시스템의 문제와 딜레마를 짚고 넘어가려면 앞부분에서 가지마 이사오가 사형 선고에 극도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더 드러냈어야 합니다. 현재 수준으로는 죄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걸 간접 살인이라고 생각하던 인물이 스스로 사람을 죽인 상황에 대한 딜레마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억지로 법관 설정과 모호한 주제 의식을 끼워 넣은 탓이 큽니다. 그냥 평범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동네 할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분량과 내용도 훨씬 깔끔했을테고요.

그 외에도 다케우치의 무모한 범죄가 이어지는 와중에 그가 수상하다는 걸 가지마 이사오가 몇일에 불과한 조사로 알아내는 전개는 경찰과 검찰이 대체 무엇을 했는지 의심을 품게 만들며, 사건의 핵심인 다케우치 등에 나 있던, 도저히 혼자서 낼 수 없는 상처를 낸 트릭도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방망이에 줄을 묶어 기둥을 축으로 회전시켜 등을 때렸다는 건데... 이 정도로 세 명이나 살해당한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무죄 판결이 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히로에의 시어머니 간호와 고부 갈등, 유키미의 집안 문제도 사족입니다. 시어머니의 죽음이 사건의 도화선이며 장례 일정과 이야기가 발 맞춰 돌아가기는 하지만 시어머니, 시동생 이야기는 뺐어도 됐을 것 같아요. 읽으면서 가장 짜증이 났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단점도 있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드라마화도 두 번이나 되었을 만큼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조금 고급진(?) 킬링 타임용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참고로, 두번째로 제작된 드라마는 다케우치 역을 춤추는 대수사선의 마시타 유스케 산타마리아가 연기했다니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조금 조사해보니 결말 부분이 다르긴 하지만요. 가지가 이사오가 마지막에 다케우치에게 진짜 유죄 판결을 내리고 다케우치는 자살을 택하는 결말인데 앞서 말씀드렸던 제가 느꼈던 문제점 - 가지마가 살인을 저지르고 죗값을 받는다는 와닿지 않는다 - 을 제작진도 공감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2019/01/19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윤수 : 별점 2.5점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엽기적인 살인 범죄가 잇달아 일어났다. 사건 담당 형사 고테가와는 과거 성범죄 등을 일으켰던 우범자 수사 중 알게 된 우범자 도마 가쓰오와 그의 보호 관찰관 우도 사유리와 친분이 생겼지만 우도 사유리의 아들 마사토가 세번째 피해자로 발견되었다. 피해자들의 성이 아-에-이.. 순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급기야는 우범자 명단을 내 놓으라며 경찰서까지 습격했다. 시민의 습격을 막던 고테가와는 시민들이 도마 가쓰오를 노린다는 우도 사유리의 전화를 받고, 그를 구하려 반장 와타세의 도움을 받아 경찰서를 나서는데...

저자인 나카야마 시치리는 2010년 "고노미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대상을 받으면서 데뷰한 작가입니다. 이력을 봤더니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쏟아내었더군요. 하지만 잘 모르는 작가이고 제목도 전혀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던 차에, 어디선가 괜찮은 작품이라는 리뷰를 얼핏 보고 출장 중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괜찮은 부분이 많네요. 우선 엽기적인 범죄극에 형법 39조에 대한 비판이 곁들여져 사회파스러운 느낌을 주는게 좋습니다. 저 역시도 최근 일어나는 흉폭한 범죄에 대해 더 강하게 단죄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심신 미약이었다던가, 단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형을 경감해준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짐승은 짐승답게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이 회복해서 사회에 복귀하는걸 막자는건 아니지만, 그들의 회복을 지원하고 기다려주는건 죗값을 치룬 다음이어야 합니다.
이 작품은 절대로 회복되지 않고 다시 살인마로 돌변하는 정신 이상자와 그들의 끔찍한 범행 묘사를 통해 이에 대한 메시지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줍니다. 참고로 제목의 "개구리 남자"는 범인이 개구리를 잔혹하게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인데, 그만큼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범행이 이어집니다.

전개도 탄탄하고 세련된 편입니다. 대표적인게 도마 가쓰오와 이름이 비슷한 나쓰오라는 소년의 과거 일화를 조금씩 소개해주면서 도마 가쓰오가 범인이 아닐까? 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주는 과정입니다.
물론 나쓰오가 저지른 미카 살인 사건은 이미 앞부분에서 도마 가쓰오의 범행으로 소개된 '교살'이 아니라서 나쓰오는 도마 가쓰오가 아니라는게 밝혀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미카 사건 직후, 시민의 한노 경찰서 습격이 몰아치기 때문에 고테가와가 도마 가쓰오의 집에서 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증거를 포착한 뒤 도마 가쓰오와 생명을 건 사투로 이어지는 과정은 위화감없이 진행됩니다. 경찰서 습격 장면 묘사는 그만큼 임팩트가 넘쳐서 독자가 딴 생각을 하기는 힘든 덕분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비록 본격물 수준의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건 아니지만 범죄 스릴러물로서의 완성도는 충분합니다. 특히 도마 가쓰오가 범인이었다고 마무리되는게 아니라 이 뒤에도 무려 두 번이나 반전!이 더 있다는게 돋보입니다. 단지 깜짝 반전이 아니라 나름대로 설득력도 높습니다.
첫 번째 반전은 우도 사유리가 진범이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근거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네 번째 피해자 에토 가즈요시가 남긴 물어 뜯은 듯한 상처, 그녀가 과거 범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는 묘사, 보험금 등 받을 수 있는 돈과 그녀의 주택 대출금이 일치한다는 등 여러가지 복선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나쓰오였다는 진상은 살짝 서술 트릭 느낌도 들고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부상을 입은 채 우도 사유리와 맞서 싸우는 고테가와에 대한 묘사는 "검은 집"의 절정부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마지막 반전인 오마에자키 교수가 흑막이었다는 결말도 좋습니다. 이 쪽은 증거보다는 형법 39조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가 와 닿은 덕입니다. 우도 사유리와 같은 단순히 "돈" 이라는 측면 보다는 훨씬 그럴듯했고, 사회파 소설다운 느낌을 전해주어서 괜찮더라고요. 결국 풀려나게 된 도마 가쓰오가 자신이 "개구리 남자" 임을 자각하고 아-이-우-에-오 순으로 오마에자키 교수를 죽이러 가겠다고 결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의 에필로그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경찰서 습격 이후의 묘사가 장황하고 강약조절에 실패하고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경찰서 습격에서 이미 한바탕 클라이막스를 거치고, 다시 도마 가쓰오와 고테가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이어진 후, 또 다시 우도 사유리와 어둠 속에서 결전을 벌이는 식으로 강-강-강으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덕분에 가장 중요한 우도 사유리와의 결전은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합니다. 목숨도 한 번 걸어야지 세 번이나 연속으로 걸면 값이 싸 보이게 마련이니까요.
오마에자키 교수의 동기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득력은 높지만 그가 우도 사유리를 다시 범죄로 인도했다는 이야기는 영 와 닿지 않아요. 사람의 정신과 기억을 마음대로 복사하고, 집어넣을 수 있다는건 너무 허황된 이야기였어요. 설령 그녀의 악마성을 깨워 아들 살해까지 유도했다 하더라도, 에토 가즈요시를 살해한 이유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결국 도마 가쓰오가 범인으로 드러날 판인데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잖아요? 사유리가 오마에자키 교수가 지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지 않은 이유 역시 불분명하고 말이죠. 싸이코 연쇄 살인마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도 석연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서스펜스 넘치는 전개에 더해 몇 번의 반전까지 제공한다는 점과 형법에 대한 비판 정신만큼은 괜찮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서스펜스가 지나쳐 표류해 버리는 후반부는 아쉽지만 추리, 스릴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킬링 타임용으로는 충분한 수준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05/11/25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 4 - 정태원 / 신재원 편역 : 별점 2점

에드가상 수상작품집 4 정태원 옮김/명지사

1,2,3권은 이런저런 경로로 예전에 구입했었지만 4권만 이빨이 빠져있던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을 드디어 완비하게 되었습니다. 우연찮게 반디앤루니스에 들렸는데 이 시리즈가 재간되어 있더군요! 덕분에 구입하게 되었네요.

가격이 무려 15,000원이나 했지만 목차만 봤을 때에는 괜찮다 싶었습니다. 1985년도부터 1993년 까지의 수상작품을 싣고 있는데 작가들이 "빌 크렌쇼"나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로렌스 블럭" 등 유명작가라 화려하고 다양해 보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3권에서부터 느꼈지만, 정통 추리물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작품들이 많이 실려있어서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제 취향과 기대와는 많이 달랐어요. 단편만의 맛을 잘 살리면서도 추리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을 기대했는데 이상하게 꼬아놓았다던가, 내용이 애매모호한 것이 많았거든요.

읽고 나니 15,000원이라는 가격에 조금 화가 날 정도였는데 에드가상 수상 목록이 쫙 실려있는 부록이 좋고 어차피 수집하던 것이니 만큼 자기 만족 차원에서 납득해 버리기로 했습니다...만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래도 현대적인 소재와 내용의 단편들은 정통 추리물과는 안 맞는 것 같네요.

그래도 개인적인 베스트를 꼽아보자면, 너무나 좋아하는 작가인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도둑들"과 단편의 맛이 살아있는 웬디 혼스비의 "아홉명의 아들", 나름대로 논리 정연하며 전개가 명쾌한 벤 슐츠의 "메리, 메리, 문을 닫아라" 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존 러츠 "번개를 타라"
살인강도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애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여인의 의뢰라는 내용.
뻔한 설정에다가 주인공 탐정의 캐릭터도 너무나 뻔하고 진부했던 작품.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깔끔하며 반전도 나름 괜찮더군요.

로버트 샘프슨 "핀톤군의 비"
그야말로 고전적인 범죄소설을 현대화 시켰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하나의 사건에서 계속 죽음이 파생되는 전개와 정의로운 인물이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 설정은 정말 고전 하드보일드의 풍모가 엿보이거든요. 하지만 하나의 단편에 담기에는 좀 무리한 내용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할란 엘리슨 "소프트 몽키"
흑인 여자 거지가 목격한 갱들의 살인사건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을 여자 시점에서, 그리고 "소프트 몽키"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서술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묘사는 독창적이고 전개도 꽤 박진감 있기는 하지만 왜 "소프트 몽키"라는 소재를 이용했는지는 모르겠고, 정말이지 결말이 너무 싱거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빌 크렌쇼 "공포영화"
심야 공포 영화관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쫓는 형사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서를 쫓는 것이 아니고 잠복만 할 뿐이며, 범행 역시 단순한 싸이코 연쇄 살인이라 동기조차 없기에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더군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도둑들"
땅굴을 파고 잠입한 은행강도가 은행이 이미 무장강도들에게 점령된 사실을 알게 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코믹 범죄물. 추리적 요소는 크지 않지만 전개가 시원시원, 유쾌하고 범행에 대한 타당성이 설득력있게 제시되고 있어서 베스트로 꼽을만 합니다. 결말도 멋져요!

린 배러트 "엘비스는 살아있다"
엘비스 재현 쇼단의 일원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드라마성이 무척 강합니다. 단 한번 벌어지는 범죄 역시 우발적이고 순간적인 행동일 뿐이고요. 한마디로 글은 꽤 잘 쓴 편이에요. 제 취향은 아니지만요. 문제는 왜  에드가상을 탔는지는 잘 모르겠다는거....

웬디 혼스비 "아홉명의 아들"
북부지방 초원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추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단편.
앞부분은 장황한 서술과 묘사로 이루어져 있지만 마지막에 반전의 맛이 잘 살아있는 딱 한 문장으로 짤막하게 정리되기 때문에 추천할 만 합니다. 그야말로 단편의 교과서같달까요? 왠지 우리네 과거와 그닥 다르지 않은 설정이 더 와 닿았던 것 같기도 하네요.

벤자민 M 슈츠 "메리, 메리, 문을 닫아라"
거액의 상속녀와 결혼하려는 남자를 조사하는 사립탐정의 이야기입니다. 설정은 수없이 반복된 바로 그것이지만 전개가 무척 독특하고 결국 뒤에 이루어지는 범죄를 막지 못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이 작품 역시 탐정이 등장하고 거액의 상속녀가 등장하는 정통파적인 설정에 비해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는 편이라 아쉬웠습니다.

로렌스 블럭 "켈러의 요법"
한 킬러가 정신과 의사와 치료를 거듭하는 와중에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되는 내용인데, 괜찮은 수준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정신과 치료를 하며 나누는 대화가 재미있긴한데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장황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길이에 비한다면 알맹이가 너무 없었어요.

2015/02/12

능숙한 솜씨 - 피에르 르메트르 / 서준환 : 별점 2.5점

능숙한 솜씨 - 6점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다산책방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명의 매춘부가 엽기적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베르호벤 반장은 두 사건이 2년 전에 있었던 다른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공통점은 현장과 시신에 가짜 손가락 지문이 남겨져 있었던 것, 그리고 어떠한 이유도 찾아낼 수 없는 범행 과정상의 디테일들이었다. 우연히 이 디테일들이 모두 유명한 추리소설을 모방했다는걸 알아낸 베르호벤은 탐정문학 전문지 광고로 범인과의 접촉을 시도하는데....

간만에 읽은 최신 프랑스 추리 소설입니다. 그동안 프랑스 추리소설들은 모리스 르블랑의 뤼뺑심농의 매그레 시리즈 외에는 딱히 취향이 아니어서 별로 손대지 않았었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과 표지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블로그 이웃과 커뮤니티의 호평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읽을 일이 없었을겁니다.

여러 면에서 프랑스 소설이라는걸 여실히 드러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 그리고 그 안에서도 많은 부분을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에 할애한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이건 제가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그리고 싫어했던 프랑스 소설들의 단점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꽤 재미있었습니다. 등장하는 범행들이 워낙에 자극적인데다가, 유명 작품들의 범행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설정이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뭔가를 따라 한 연쇄 살인은 흔한 설정이지만, 추리소설을 따라 했다는 작품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 명작, 고전 취급을 받는 작품들을 모방했다는데 제가 읽은 작품은 달랑 한 작품밖에는 없네요. 이런 명작, 고전 선정은 작 중에 나오듯이 자의적인 판단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조금은 아쉬웠어요. 아무래도 제 취향이 수사물, 하드보일드보다는 고전 본격물 쪽인 탓도 크겠지만요. 참고로, 작중 명작, 고전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브랫 이스턴 앨리스 "아메리칸 싸이코" : 작품 도입부에 소개된 두 명의 여성을 엽기적으로 살해한 범죄의 원전.
  • 제임스 옐로이 "블랙 다알리아" : 이전 여성 토막 살인사건의 원전
  • 마이 셰발 / 페르 발뢰 "로제안나" : 역시나 기이했던, 이전에 벌어졌던 살인사건의 원전
  • 윌리엄 매킬바니 "레들로" : 범인이 현장에 서명을 남긴 첫 번째 사건의 원전
  • 에밀 가보리오 "오르시발의 범죄" : 범인이 소설을 따라 벌인 첫 번째 살인

참고로, 제가 읽은 "블랙 다알리아" 말고 번역된 작품은 "아메리칸 싸이코"밖에 없군요. 못 읽은 게 당연하네요...

하여튼, 애호가를 자극하는 설정 외에도 놀라운 반전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1부 분량)이 사실은 범인이 쓴 소설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자 액자 소설 같은 구성이 드러나는 반전인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현대물에서도 이런 아이디어를 가진 작품이 계속 나온다는게 놀라울 뿐입니다. 베르호벤이 말발을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 소설 속 인물들과 실존 인물과의 차이를 설명하는 디테일도 아주 절묘했어요.

그러나 설정과 이러한 놀라운 반전 서술 트릭을 제외하고는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추리"라는 것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결국 범인이 기자 필리프 뷔송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니까요. 발랑제르 교수와 통화하다가 우연히 얻은 정보가 없었다면 영원히 알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최소한 아내가 죽을 때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까지 예상해서 범인이 모든 것을 안배한 것처럼 전개되고 있다는 건 전혀 합리적이지가 않죠. 범인이 무슨 신도 아니고....

이러한 우연, 그리고 범인의 안배를 제외하고는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한 베르호벤과 동료들의 수사는 모두 헛수고일 뿐이라 정말 명수사관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범인이 유명한 추리소설들을 모방하여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정도 재미는 있고 시선을 사로잡는 데는 충분하지만, 이러한 범행을 통해서 범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전혀 설명되지 않고요. 아니 설명되기는 하는데 작중 정신과 의사인 크레스트 박사의 말 - 사실은 미친 게 아니다 -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독자가 범인의 편지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 - 제대로 미친 놈이다 -가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더군요.

작중 등장했던 괜찮았던 착안점, 즉 왜 "레들로" 사건은 실제로 스코틀랜드까지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는데 다른 사건들은 프랑스에서 재현했는지? 에 대해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등 떡밥 회수가 부실한 것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소설다운 장황한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갓 태어난 아기까지 참살한 필요 이상의 잔인한 묘사, 유명 화가인 어머니의 임신 중 흡연으로 키가 145cm에 불과하다는 베르호벤의 설정과 그에 따른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베르호벤 설정은 과합니다. 키가 작다고 해서 대단한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니며 작품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는 부분도 없거든요. 그나마 덜 기형적인 툴르즈 로트렉의 창백한 복사판 운운하는 묘사처럼 독특한 캐릭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그냥 얄팍한 캐릭터 만들기에 불과한거지요. 장님이지만 작품에서는 특징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던 맥스 캐러도스가 연상되었습니다. 부하인 루이가 부유하다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에요.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캐릭터들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 주는 것은 좋지만, 이러한 만화 같은 설정이 과연 작품에 필요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를 위한 설정에 더해 읽는 재미도 괜찮고, 독특한 반전의 가치는 높습니다. 하지만 추리 소설로의 완성도는 그냥저냥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베르호벤 시리즈는 이어지고 이 작품과도 연계성이 있다고 하니 후속작도 읽어는 봐야겠네요.

2019/08/02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 / 노진선 : 별점 2점

죽여 마땅한 사람들 - 6점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테드 스버슨은 아내 미란다가 건축업자 브래드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 실의에 빠졌다. 그 때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둘은 죽어 마땅하다며 테드가 직접 행동에 나설걸 촉구했다. 릴리에게 빠져든 테드는 살인 계획을 세웠지만, 브래드가 선수를 쳐서 테드를 살해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뉴스로 접한 릴리는 그 둘을 직접 응징하려 하는데... 

이런 저런 곳에서 평이 상당히 좋았던 미국 스릴러입니다. 오쟁이를 진 남편이 살의를 품게 된 계기가 우연히 만난 여성 릴리의 설득 때문이라는 시작은 독특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낯선 승객"이 살짝 떠오르더군요. 책 뒤 해설을 보니 영향을 받은 듯, 안 받은 듯 모호하게 쓰여져 있기는 한데 최소한 작가도 존재를 알고 있었던건 분명하네요. 첫 만남 당시 릴리가 읽고 있던 작품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 이니까요.

평이 좋은 이유는 일단 잘 알 수 있습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거든요. 흡입력있는 신선한 전개도 아주 좋고요. 중반부까지 테드와 릴리의 시점을 각각 오가는데 테드의 시점은 릴리를 만난 다음부터의 현재이며, 릴리의 시점은 그녀가 첫 살인을 저지른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옵니다. 그리고 두 시점이 합쳐지는 순간, 테드는 살해당하고 이는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줍니다. 그 뒤에도 릴리와 미란다 시점, 미란다가 살해된 뒤에는 경찰 킴볼 시점과의 교차 전개가 계속되는 것도 괜찮았어요. 독자에게 다양한 시각, 알지 못했던 정보를 제공하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테드에게 살의를 불러 일으키는 릴리에 대한 설정과 묘사도 인상적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죽이는데 주저함이 없는 싸이코패스"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스타일인데, 개인의 욕심이나 이기심보다는 제목 그대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만 죽인다는 차이점이 명확합니다. 범행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의 추진력, 결단력 역시 매력적이고요. 그녀를 실존하듯 그려낸 묘사도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부터 추리 소설을 - '낸시 드류' 시리즈를 포함해서 - 좋아했던 소녀로 그려져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녀와 대척점에 있는 '죽여 마땅한' 사람들인 미란다와 브래드 설정도 괜찮습니다. 단순히 불륜 관계가 아니라 테드를 살해한다는 전개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 킴볼 역시 잘 그려져 있습니다. 시를 쓰는게 취미일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고, 상당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우연히 쓴 음란한 시가 발목을 잡게 된다는 복선도 치밀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릴리가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에릭을 살해한 범행만큼은 돋보입니다. 에릭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견과류가 들어간 인도 요리를 먹인 뒤, 치료제를 숨겨 질식해 사망하게 만드는데 사고사로 보이게끔 다양한 조작을 하기 때문입니다. 견과류는 미리 갈아서 요리에 섞어두었고, 범행 전 에릭의 승부욕을 자극하여 펍에서 열리는 술 먹기 대회에 참여하게 만드는 등의 작전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에릭이 실수로 요리를 먹고, 치료제도 찾지 못해 죽었다고 경찰은 생각하게 되지요.
경찰 킴볼이 의외로 유능해서 릴리와 테드의 관계, 릴리의 거짓말과 여러가지 이상한 행동을 파헤치는 과정도 볼거리입니다. 정말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릴리를 추적해나가는 과정은 경찰력에 상당한 신뢰를 갖게 만들 정도에요.

그러나 다른 범행은 그닥입니다. 릴리가 미란다와 브래드를 살해하는 핵심 범행부터가 그러합니다. 특히 브래드를 설득해서 미란다를 죽이게 만든다는 계획이 최악이죠. 브래드가 미란다에게 역으로 설득당해 릴리를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요.
미란다, 브래드를 살해한 뒤 먼 거리를 이동하여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의 묘사도 나쁘지는 않지만 도로의 CCTV에 촬영되거나 도로 요금소에서 목격당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완벽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미국 도로 CCTV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과연 추적이 불가능했을지?에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릴리가 저질렀던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 만났던 유아 성애자 챗을 숨겨진 우물에 떨어트려 죽인 뒤 챗의 모든 짐도 같은 장소에 버린 첫 범행부터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자체의 설득력부터 부족한 탓입니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기는 했지만 챗이 우물에서 떨어져 즉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지나치게 잘 풀린 느낌이에요. 차라리 뚜껑을 덮고 굶어죽도록 놔 두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또 당장은 살해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누군가 찾아 나섰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문제에요.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라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설정으로 대충 넘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릴리가 충동적으로 킴볼을 칼로 찔러 체포되는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백주대낮에 현역 경찰에게 직접 흉기를 휘두르는건 빠져나가기 힘든 범죄니까요. 킴볼을 없애려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범행을 저질러야 했습니다. 치밀해 보였던 릴리 캐릭터가 막판에 급작스럽게 붕괴되어 버리는데 그래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범죄 천재로 보였지만 그냥 어설픈 정신병자에 불과했다는 결말에 불과합니다.

그 외의 범행들도 어설픕니다.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가로채려던 미란다의 계획? 당연히 실패했을겁니다. 범행 당시 브래드의 인상착의가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릴리에 의해 살해되지 않았다면 킴볼 등 경찰의 수사에 의해 진상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거에요. 작 중에 등장하는 것 처럼 가짜 증언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그렇게 쉽게 넘어갔을지는 의문입니다.
테드가 충동적으로 릴리가 근무하는 대학 도시 윈슬로를 방문한 것, 릴리가 테드 사망 후 케네윅을 방문해서 숙박한 것 등의 자잘한 실수도 눈에 뜨입니다. 테드의 실수는 릴리를 곧바로 수사 선상에 올리게 만드니까요. 테드가 미란다보다 선수쳐서 범행을 저질렀다 해도 이래서야 완전 범죄가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테드와 릴리가 서로 끌렸다는 설정은 바람난 아내와 정부를 응징하겠다는 테드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아니 등장하니만 못했고요.

작위적인 설정도 많습니다. 테드의 아내 미란다가 에릭과 바람이 났던 대학 시절 친구 페이스이며, 우연히 만난 줄 알았던 릴리와 테드의 만남도 어느정도 계획된 것이라는게 밝혀지는 것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냥 우연히 만나서 정말로 범행에 대해 조언을 해 주게 되었다는 식으로 풀어나가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마지막에, 릴리가 시체를 유기했던 초원 지대가 재개발된다는 마무리도 작위적입니다. 이런 류의 개발 계획을 근처에 사는 사람이 몰랐다는게 말이 될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인물 설정 및 묘사, 그리고 전개는 뛰어나지만 범죄물로는 함량 미달이라 감점합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천재 여성 범죄자가 별볼일 없는 정신병자라는 결말도 실망스럽고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6/01/26

미스터 메르세데스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점

미스터 메르세데스 - 4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은퇴 형사 빌 호지스는 홀로 외로이 TV에 빠져 살다가 자살까지 꿈꾼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그가 형사 시절에 해결하지 못했던, 시티 센터에서 8명을 살해하고 도주했던 싸이코 살인마 "메르세데스 살인마"가 보낸 편지였다. 그의 목적은 호지스의 자살 유도였다. 그러나 이를 도발로 받아들인 호지스는 새롭게 삶의 의미를 다지고, 그를 자기 손으로 체포하기 위해 다시 수사에 나서는데....

호러의 거장 스티븐 킹이 발표한, 은퇴한 형사 호지스와 '미스터 메르세데스'라고 불리는 싸이코 살인마 브래디 하츠필드의 대결을 그린 600페이지의 대장편 하드보일드입니다. 2015년 에드거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관심 가던 차에 늦게나마 읽게 되었습니다.

작품은 장단점 모두 기존 스티븐 킹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우선 첫 번째 장점으로는 읽는 재미가 최고 수준이라는 겁니다. 브래디가 빌 호지스를 자살로 몰아넣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 도입부에서 시작해서, 오히려 삶의 의욕을 되찾은 빌 호지스가 범인이 지정한 채팅 사이트 '데비스 블루 엄브렐라'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며 범인에게 접근해 나가는 전개가 아주 흥미진진한 덕분입니다. 차를 도난당한 올리비아 트릴로니의 증언을 믿지 않았던게 큰 실수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범죄물로도 괜찮은 편이에요. 브래디가 자동차를 훔친 방법,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호지스 등을 염탐한 방법, 본인의 범행을 위해 이런저런 발명을 하는 부분 등이 아주 설득력 있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장점은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입니다. 주인공 빌 호지스부터가 그러해요. 은퇴 형사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피터 러브시의 "다이아몬드 형사" 시리즈 등 상당히 많습니다. 최근 쏟아지는, 은퇴한 전직 특수 요원이 사건을 해결한다는 영화들도 비슷한 류일 테고요. 허나 본작의 주인공 빌 호지스는 제가 읽었던 유사 작품 주인공들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현실적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묘사도 아주 좋고요. 초반의 자살을 기도하는 모습, 브래디를 잡기 위해 의욕을 불태우는 과정 모두 자연스러우며 체중 등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을 신경 쓰는 묘사 역시 한몫 단단히 하기 때문이지요. 무엇보다도 제이니가 폭사한 직후 모습은 정말 압권이에요. 연인이 산산조각이 되어 팔 하나만 나뒹구는 상태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데, 속된 말로 '간지 폭풍'이었습니다. "우주해적 코브라"의 한 에피소드에서 도미니크가 죽은 것을 알게 된 코브라의 대사가 떠오르더군요('안녕 도미니크 다음에 만날 때에는 지옥이겠지').
악당인 '미스터 메르세데스' 브래디 역시 나름의 존재감을 뽐냅니다. 어머니와 근친상간 관계에 동생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등의 가족사는 진부했지만, 일반인보다 약간 똑똑한 미친놈이라는 설정을 인상적으로 잘 그려낸 덕입니다. 항상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는 성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주 설득력 높았어요. 사람 마음(빌 호지스)을 갖고 놀려다가 실패하는 과정의 디테일도 잘 살아 있고요.
다른 인물들도 독특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사이드킥 제롬은 엘리트 흑인 집안의 아들인 우등생이라는 그간 볼 수 없었던 설정인데, 작중 언급되는 버락 오바마와 더불어 달라진 미국 흑인의 지위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다만 또 다른 조력자 홀리는 컴퓨터 천재지만 심한 우울증을 앓는 기묘한 노처녀라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이기는 했지만요.

허나 역시나 스티븐 킹 작품의 단점도 그대로입니다. 첫 번째는 '탐정 하드보일드' 소설이라는 홍보 문구를 달고 나온 것 치고는 '추리물'로 볼만한 부분이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주인공 빌 호지스부터가 은퇴한 형사라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단서를 전해주는건 범인 브래디의 역할이거든요. 호지스는 던져주는 단서를 받아 먹을 뿐입니다. 그나마 범인과의 두뇌싸움이라든가, 범인이 보낸 편지와 채팅에서 입수한 것을 통해 프로파일링을 한 결과는 상당히 정확하지만 호지스 스스로의 입으로 이야기하듯 '감'에 의지한 것이라 그닥 정교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급작스러운 억지 전개가 많다는게 두 번째 단점입니다. 올리비아의 동생 제이니 패터슨과 사귀게 되어 잠자리를 같이하는 관계까지 발전하고, 마지막에 아이돌 가수 콘서트에서 폭탄을 터뜨리려는 브래디의 계획을 홀리와 제롬이 저지한다는 결말이 대표적입니다. 솔직히 좀 가관이었달까요. 하긴, 이건 스티븐 킹 소설이니까...

마지막으로 호지스의 실수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예요. 대표적인 것이 제이니의 죽음이죠. 작중에서 계속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어떻게 차를 훔쳤는지까지 알아내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호지스의 실수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녀의 죽음은 독자가 브래디가 처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게 만들지만, 주인공의 무능력함을 돋보이게 하니 과연 적절한 장치였나 의구심이 생깁니다.
호지스가 월권에 가까운 단독 수사를 고집하는 것도 석연치 않아요. 애초에 올리비아 컴퓨터에 심어진 수상한 파일에 대해 알게 된 시점에서 경찰에 모든 자료를 넘겼다면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을 텐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정통 하드보일드는 절대로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소설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공통적으로 탐정 스토리의 모습을 취하며, 범죄나 폭력, 섹스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 없이 무미건조한 묘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는데, 이 작품은 추리물이지만 무미건조한 묘사는 아니니까요. 과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정 묘사는 풍성합니다. 그렇다고 폭력이 난무하는 마초물도 아닙니다. 호지스 캐릭터만 놓고 보면 정 많고 정의감 넘치는 동네 아저씨거든요.
물론 호지스와 브래디 둘의 시점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전개에서 브래디 시점 묘사는 고전 하드보일드 느낌이 살짝 나기는 합니다. 스티븐 킹이 서두에 '제임스 M 케인을 그리며'라고 했는데 제임스 M 케인의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누른다"가 떠오를 정도로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모로 하드보일드보다는 전통적인 서부극에 가깝습니다. 캐릭터와 서사 구조 모두요. 은퇴한 총잡이에게 신세대 총잡이가 도전하고, 도전을 피하는 늙은이를 도발하기 위해 그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서 결국 대결이 벌어지며, 이 와중에 은퇴한 총잡이가 새로운 삶의 보람을 깨우친다는 내용이니 당연하지요.

하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장점이 없지는 않으나 단점이 더 컸고, 제 취향도 아니라서 감점합니다. 재미만 놓고 보면 그럭저럭이기는 한데 딱히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특히나 저처럼 '하드보일드'라는 말에 낚이신다면 크게 실망하실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앞서 말씀드렸듯 에드거상은 물론,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선정한 2015 최고의 장르소설 베스트 10에도 당당히 선정되어 있는데 이유를 모르겠네요. 제 취향의 문제일까요?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20/08/13

우먼 인 윈도 - A.J 핀 / 부선희 : 별점 3점

우먼 인 윈도 - 6점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황 장애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한지 10개월이 넘은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는 이웃에 새로 이사온 제인 러셀과 친해졌다. 며칠 뒤 밤, 애나는 이웃집 창을 바라보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인 러셀을 목격했다. 911에 신고한 뒤 애나는 공황 장애를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집 밖을 뛰쳐나가다가 기절해버렸다.

다음날 정신이 든 애나 앞에 자신이 아는 제인 러셀과 다른 여자가 '제인 러셀' 이라며 나타나서 살인 사건은 없던걸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건 애나의 알콜 중독과 치료를 위해 먹는 약이 결합되어 생긴 망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6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는 탓이지요.

작품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한 -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인어 다크, 다크 우드", "걸 온 더 트레인" - 과 유사한,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몇 편은 영화화되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이 중에서도 특히 "걸 온 더 트레인"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몰래 엿보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나'가 알콜 중독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이런 류 내용의 원조인 1954년 작품 "이창"의 설정에 더욱 가까운 편입니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심심하던 차에 이웃집을 카메라로 도촬한다는 설정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 애나는 공황 장애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해 창문으로 이웃집을 바라보고 가끔 사진도 찍는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단순히 설정만 따온 표절작은 아닙니다. 다리 부상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이 보다 정교한 공황 장애로 발전한 것은 물론,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여러가지 복선, 단서를 선보이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인 러셀'과 친분을 쌓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애나가 넘겨짚은 것 뿐이지요.
또 이 과정에서 제인 러셀이 그려준 애나의 초상, 애나가 찍은 석양 사진 속 창문에 반사된 그녀가 찍힌 것 등이 나중에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게 드러나게 되고요. 애나의 아랫층 하숙인인 데이비드의 방 안에서 제인 러셀의 진주 귀걸이가 발견되지만, 그게 '캐서린' 것이라고 한 데이비드의 말도 '제인 러셀'이 사실은 캐서린, 케이티라는게 밝혀지면서 사실로 밝혀지는 등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단서는 한 개도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제인 러셀'의 정체도 인상적이에요. 이 부분을 요약해서 설명드리자면, 처음에 애나가 '제인 러셀'로 알았던건 사실은 이웃집 아들 이선의 친모 케이티였습니다. 케이티는 방탕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이선을 낳았는데, 약물 중독 등으로 보살필 수 없어 입양을 보냈었습니다. 그 후 갱생한 뒤 이선의 양부 알리스타가 이사간다는걸 뉴스에서 보고 찾아온겁니다. 도중에 만난 애나가 그녀를 이웃집 엄마로 오해하자, 구태여 그걸 수정하지는 않은거지요. 때문에 케이티가 알리스타의 집에서 살해된걸 목격한 애나는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진짜 제인 러셀이 살해된건 아닙니다. 곧바로 진짜 제인 러셀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출동한 경찰에게 증명하고요. 결국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애나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총 출동하여 애나를 압박하자, 애나 본인 스스로 모든게 환각이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도 그럴듯합니다. 과음에 독한 약을 수시로 다량 복용하며, 이 과정에서 본인의 무의식적인 행동들 - 제인 러셀의 사인을 써 보는 등 - 이 착각의 근거로 뒷받침 되는 덕분입니다.

애나의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에 대한 묘사도 좋고 그 원인도 합리적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자기 때문에 남편과 어린 아이가 죽었다면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이런 부분은 확실히 불임, 이혼 정도로 자책하고 망가진다는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한 수 위였습니다.

아울러 이야기 전개가 애나가 좋아하는 고전 흑백 영화들, 특히 스릴러와 느와르 영화의 소개와 함께 전개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해서 마음에 드네요. 책 뒤에 부록 "애나 폭스의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총 49편에 이를 정도로 양도 방대할 뿐더러, 그 수준들도 높은 명작들이 많아서 따로 이 작품들만 챙겨보고 싶어질 정도에요. 이 작품 자체가 이런 고전 스릴러의 충실한 후계자이기도 하니, 영화화가 된다는데 영화 버젼도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웃집 아들 이선이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너무 뜬금없었어요. 하숙인 데이비드도 범인이 아니고, 이웃집 남편 알리스타도 범인이 아니면 남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어진 단서가 너무 없어요. 이선이 고양이 펀치의 발이 다친걸 알고있다는걸 말함으로서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나름 단서지만,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 하니 결정적 단서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또 입양한 아이의 부모가 친모를 살해하는 건 그렇다쳐도, 아이가 친모를 살해하는건 억지스럽습니다. 특별한 동기도 없이 단지 짜증난다는 이유인데 이를 싸이코패스라는 말 하나로 정리해버리는건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싸이코패스라는 말이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같은 만병통치약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고 찾아와 진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전개 역시 편의적이면서 헐리우드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반전에 욕심을 부렸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그 외에도, 알리스타가 밤에 술을 먹고 애나의 집에 침입해서 그녀를 폭행한건 옥의 티입니다. 알리스타가 진범임을 끌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는데 무리수였습니다. 이런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 꼬투리를 잡히게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범행 전 케이티가 지른 비명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있는 불필요한 묘사들도 제법 됩니다. 데이비드와 애나가 관계를 가지는 묘사가 대표적이지요. 데이비드의 캐릭터만 애매해질 뿐이에요.

지루한 심리 묘사도 많습니다. 애나의 남편 에드와 딸 올리비아와 별거하면서 스카이프로 통신한다는 1인칭 시점의 묘사도 마찬가지에요.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둘이 이미 죽었다는건 초반에 짐작할 수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은 탓입니다.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이미 숱하게 존재하니까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며 모든걸 애나의 착각으로 몰아가는 경찰 노렐리가 얼마나 배려심없는 쓰레기인지를 드러내는 장치 역할 외에는 쓰임새가 없는, 분량 낭비에 가까운 묘사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애나가 혼자 사건을 밝히지 못해 전전긍긍하는건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400만불 가까이 되는, 옥상에 정원까지 있는 큰 집에 혼자 사는 전직 정신과 의사라면 직접 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하여 진상을 알아보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제인 러셀' 이라고 주장한 케이티의 그림과 함께 둔 체스 말에서 지문을 채취하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술과 약에 취해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명불허전이며,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도 정교함이 돋보이는 웰-메이드 스릴러라는건 분명합니다.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 스릴러 중에서도 빼어난 편이고요. 무리한 반전, 그리고 마지막 대결이 작위적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충분히 추천드릴만합니다.

알고보니 모중석 스릴러 클럽 레이블의 47번째 소개작인데, 이 레이블이 아직도 나오는지는 몰랐네요. 장르 문학 애호가로서 앞으로도 모중석 씨의 건투를 빕니다.

2020/05/09

이웃집 소녀 - 잭 케첨 / 전행성 : 별점 2점

이웃집 소녀 - 4점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크롭써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에서 구라타 히데유키가 이 책을 산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다 읽지 않으면 오늘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극찬했던 말 때문에 구입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그런데 제 취향과는 백만광년정도 거리가 떨어진 작품이더군요. 너무나 예쁜 소녀 메그에게 닥치는 처절한 학대가 이야기의 골자로, 미국 시골에서 벌어지는 무식한 광기를 극한으로 그려내는데 묘사가 너무 끔찍한 탓입니다. 제대로 읽기가 어려울 정도였어요.

시골 촌 사람들의 비뚤어지고 무식한 광기를 극한으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는 스티븐 킹의 "1922"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끔찍한 묘사도 그에 못지 않고요. 그러나 순수한 픽션으로 나름 '공포'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 킹의 작품과는 다르게,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혐오스럽다는 감정밖에는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무식한 아이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학대의 주체인 루스의 언행 하나하나 모두가 혐오스럽기 짝이 없으며, 이들이 벌이는 고문과 폭행도 마찬가지거든요. 왜냐하면 이들의 행동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싸이코패스들이 모여서 벌이는 광기의 축제인데, 이를 생생한 작가의 묘사력으로 그려낸 탓에, 더욱 혐오스럽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고요. 

주인공 데이비드가 이들에 휩쓸리는 과정과, 나름대로 이들에 맞서 펼치는 발버둥도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뭔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해 보여서 기분도 별로였고요. 그나마 루스를 살해하는 데이비드의 행동도,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보다는 자위행위와 같은 감정의 배설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요. 차라리 그녀가 대중의 질타를 받으며 죗값을 받는게 더 큰 형벌이었을텐데 말이지요. 이 정도면 너무 쉽게, 편하게 죽은 셈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후의 에필로그, 데이비드의 어정쩡한 인생과 루스의 아들 중 한명인 우퍼가 살인마가 되었다는 뉴스 등도 사족일 뿐입니다. 다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그리고 있지 않아서 애매하기도 하며, 솔직히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 라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아요. 잔혹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정상적으로 살 수 없었다는 결말을 그리려고 한 모양인데 이건 너무 뻔하죠.
이렇게 작가의 의도가 뻔하게 드러나는 설정과 묘사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루스가 엄청나게 예뻤고, 그림에 대해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그렇게 죽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소녀였다는걸 독자에게 각인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뻔하다는걸 부인하기 힘듭니다. 

전개가 흡입력 있고, 묘사가 걸출하다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읽는내내 끔찍했고 혐오스러웠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드코어 포르노 혹은 하드고어 호러물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잔혹함이 극대화되었던 범죄들, 예를 들자면 일본 시멘트 살인 사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소설처럼 재구성하기 보다는, 실제 사건에 대한 논픽션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좀 객관화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는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촉법 소년' 들이 일으키는 범죄에 대해서 용서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생이라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죗값을 치루는게 맞지요. 부디 빠른 시일 내에 어리다는 이유로 무죄 방면되는 어처구니 없는 법이 시정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2017/07/14

관찰자 - 샤를로테 링크 / 서유리 : 별점 2점

관찰자 - 4점
샤를로테 링크 지음, 서유리 옮김/뿔(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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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시걸은 직업도 없이 형, 형수와 함께 낡은 집에서 머물며 동네 여자들을 살펴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청년이다. 그런데 그의 흠모의 대상인 질리언 워드의 남편 토머스 워드가 살해당하자 삼손의 형수 밀리는 경찰에 삼손의 일기를 신고했다.

유력 용의자로 몰린 삼손은 도주했고, 질리언 워드 남편 살해범은 카를라 로버츠와 앤 웨스틀리라는 독거 노부인 두명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경찰의 수사가 집중되었지만 삼손은 질리언의 불륜 상대자인 존 버턴의 도움을 얻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존 버턴은 토머스 살인 사건은 원래 질리언을 노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사건 수사에 뛰어드는데...

 독일 여류작가 샤를로트 링크의 작품입니다. 충격적인 프롤로그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왠만한 내용으로는 충격을 받기 힘든 요즈음이지만 아동 성애자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솔직히 기분은 아주 불편했습니다만...

그리고 이 프롤로그가 3건의 연쇄 살인이 펼쳐지는 본문 내용으로 연결되는데, 이 과정에서 10월, 11월, 12월 등 순차적으로 기입된 날짜들로 친절하게 구분된 목차가 단지 시간 흐름 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정교한 복선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띕니다. 첫 도입부인 10월 생일 파티 현장에서의 에피소드가 모든 사건의 발단이며, 타라가 이미 12월에 눈치챘던 존의 과거 성범죄 기소 이력을 1월까지 모른 척 한 것, 질리언이 타라에게 부동산 업자 루크 팜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 등이 모두 마지막 반전, 진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이책으로 69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어울릴만큼 잘 짜여져 있지는 않습니다. 쓸데없는 묘사와 내용이 많은 탓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수사 관련 내용입니다. 놀랍게도 완전히 불필요합니다. 결국 사건은 혼자 수사하는 전직 경찰 존 버턴의 활약에 의해 해결되며, 그것도 존 버턴이 혼자 잠복하여 리자 스탠퍼드를 만난 것이 결정적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존 버턴도 경찰 내부에서 결정적 정보를 얻지만 이는 경찰 수사 방향과는 무관하기에 경찰은 전혀 하는게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게다가 첫 등장, 수사 과정에서 비교적 유능한 것으로 생각된 피터 필더 경감은 경찰을 그만둔 뒤 잘나가는 존 버턴에게 질투나 느끼는 한심한 중년에 불과하다는게 밝혀지는 등 전반적인 경찰에 대한 묘사는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초반부 뭔가 있어 보임직했던 사회부적응자 삼손 시걸의 묘사도 분량에 비하면 별 볼일이 없어서 당황스럽습니다. 이러한 경찰 관련 묘사와 삼손 시걸 묘사만 들어내도 1/3 이상 깔끔하게 압축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여성 작가 특유의 장황한 심리 묘사까지 덜어낸다면 금상첨화일 테고요.

추리적으로 놓고 보아도 별 볼일 없습니다. 탐정역인 존 버턴의 수사는 우직한 탐문, 그리고 '운'이 좋았던 것 불과해서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리자 스탠퍼드의 거처를 알아낸 순간 이야기는 끝난거나 다름없습니다. 두 피해자와 질리얼 모두와 관계가 있는건 타라밖에 없으니까요.
범죄 측면에서도 무언가 의미가 있어보였던 엘리베이터 장난과 심야의 드라이브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어요. 단지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행동이라는 동기 자체는 설득력 있다 하더라도, 정체가 드러나기 쉬운 무모한 행동임에는 분명하니까요. 꽤 오랫동안 이런 행위를 반복했는데도 타라가 들키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그녀 어머니 사체를 진작에 치워버리지 않은 것과도 일맥상통하고요.
아울러 범행의 핵심 동기인 '구조 불이행죄' 역시 설득력이 낮습니다.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인물보다 그것을 방조한 인물의 죄가 더 크다는 논리는 다른 몇몇 작품에서도 접했었지만, 단 한번도 그게 합리적이라 느낀 적이 없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의 설명도 미쳤다는게 전부라면 아예 이런 동기도 필요 없지 않을까 싶고요. 마지막 숨겨진 별장에서의 범행 고백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위적이라 허무하기까지 했습니다. 질리언을 다른 피해자들처럼 질식사 시키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네요.

물론 장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다른 유사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 작품에서 타라의 분노는 어린 시절 지옥을 맛보게 한 의붓 아버지의 성폭행을 방조한 어머니로 향하며, 다른 방관자들에 대해서도 어머니와 같은 분노를 느꼈다는 식으로 설명되는건 그럴듯 했어요. 삼손 시걸의 캐릭터도 독특해서 이런 류의 작품에 등장하는 싸이코치고는 착한 인물이라는 의외성에 더해 마지막 장면에서의 활약은 나쁘지 않은 등 독특한 면은 분명 있고요. 불륜을 저지른 질리언이 잠깐의 실수로 앞으로 살아가며 정말 힘든 노력을 해야할 것이라는 전개도 마음에 듭니다. 불륜을 쉽게만 보는 다른 작품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측면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모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스무레한 타 범죄 스릴러 대비해서 딱히 차별화되는 점도 없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교보문고 전자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었는데 종이책은 이미 절판되었더군요. 딱히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독일 작가 작품인데 영국을 무대로 한 것은 좀 희한합니다. 미치광이 엘리트 살인자가 나돌아다니는 작품을 모국 무대로 쓰기는 싫다는 기묘한 애국심이 작용한 것은 아닐테고, 이유가 궁금합니다.

2015/01/07

나를 찾아줘 (Gone girl. 2014) - 데이비드 핀처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완벽한 커플 닉&에이미.
결혼 5주년 기념일 아침, 에이미가 흔적도 없이 실종된다.
유년 시절 어린이 동화 시리즈 ‘어메이징 에이미’의 실제 여주인공이었던 유명인사 아내가 사라지자, 세상은 그녀의 실종 사건으로 떠들썩해진다.

한편 경찰은, 에이미가 결혼기념일 선물로 숨겨뒀던 편지와 함께 곳곳에서 드러나는 단서들로 남편 닉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미디어들이 살인 용의자 닉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기 시작하고, 시간이 갈수록 세상의 관심이 그에게 더욱 집중된다.

과연 닉은 아내를 죽였을까? 진실은 무엇일까? <영화 소개에서 인용>

"셔터 아일랜드" 이후 추리소설 원작 영화로는 가장 큰 흥행 및 비평적인 성공을 거둔 영화이지요. 진작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이제서야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뉩니다. 에이미가 장기간에 걸친 완벽한 계획으로 남편 닉을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과정이 1부, 그리고 그 사실을 에이미 시점으로 드러내면서 에이미가 도주 중 자금을 강도에게 털린 뒤 옛 애인 데시를 만났다가, 데시를 죽이고 다시 닉에게 돌아오는게 2부입니다.

이 중 1부의 악녀 에이미의 완벽한 계획이 굉장한 볼거리입니다. 이 정도로 치밀하면 정말 벗어나기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꽉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동기를 장기간에 걸쳐 만드는 과정과 사건 현장의 조작이 대표적이에요. 그 외에도 동네 임산부와 의도적으로 친해진 후 임신했다는 거짓말을 조작하는 생전 처음 보는 트릭이 등장하기도 하고, 별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보물찾기 암호 트릭이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 꽤 풍성합니다. 에이미가 데시를 죽이는 과정도 즉흥적이지만 탄탄하게 짜여져서 만족스러웠습니다.

1부의 내용 전개가 현재 시점은 모두 닉,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들의 회상은 에이미 시점으로 그려지는데 1부 종료 시점에 과거 회상은 모두 에이미가 창작한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특이했습니다. 일종의 서술트릭인데 상당히 잘 만들어져 있어요.

그리고 에이미의 남편인 닉이 "악마같은 여자"의 찐따처럼 허술하지 않고, 나름 똑똑한 친구로 대결 구도를 형성하여 극적 긴장감을 더해주는게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가장 위험한 순간, 즉 자신이 범인으로 전미에 알려지는 상황에서 불륜 사실이 폭로된 직후, 전국 방송 인터뷰를 자처하여 에이미가 원하는 완벽한 모습을 연기해서 에이미가 자기에게 돌아오게 만드는 과정이 백미입니다. 턱에 손을 가져다 대는 제스처도 효과적으로 활용됩니다.

에이미가 돌아온 뒤의 에필로그, 종반부도 상당히 괜찮아요. 위선과 조작으로 점철된 부부생활 연기를 계속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하게 만드는 설득력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사는 게 지옥이라는 현실이 절절하게 와 닿기도 하고요. 이런 상황을 뒷받침하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심리 묘사도 명불허전입니다. 이 감독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전해 주는데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로 보는 내내 조마조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감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아주 뛰어난 드라마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아요. 애초에 동기 자체가 싸이코 에이미의 집착에 기인하고 있어서 설득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지는 않은 탓입니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게 와이프가 예쁘고 똑똑한 데다가 돈까지 많다면, 나를 완벽하게 컨트롤하려 한 게 그리 큰 문제일까요? 저 같으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을 거예요. 게다가 와이프와 멀어졌다고 제자와 불륜이나 저지르다니, 솔직히 죽어도 싼 놈이라고 생각됩니다.
에이미의 처음 계획 역시 그녀가 과연 자살하려 했는지도 의문이고,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데시를 죽이는 상황처럼 닉을 죽이고 자살하던가 경찰에 신고하는 게 훨씬 쉽고 깔끔했을 겁니다. 이렇게 일을 벌일 필요는 없었어요. 또 우연에 가까운 강도 사건만 없었더라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점에서 완벽한 계획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데시에게 납치되었다는 상황을 자작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이건 문제라고 하기는 좀 뭐한데 1부에서 과거 이야기는 모두 에이미가 창작한 가짜입니다.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닉이 주장하는 에이미의 문제와 부부 간의 불화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끝나버립니다. 부부 관계가 도대체 어땠길래 남편을 사형시키고 자살할 생각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어서 조금 답답했습니다.

아울러 배우진도 좀 아쉽습니다. 아카데미 위너 벤 애플렉은 꽤 괜찮았지만 에이미 역의 로자먼드 파이크는 "잭 리처"에서의 볼륨감이 화면에서 도드라지지 않는 탓에 작중 표현된 대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집착하는 닐 패트릭 해리스 역시 게이라는 것을 거의 전 세계가 다 아는 상황에서 한 여자에게 집착한다는게 별로 어울리지 않았고요.

그래도 간만에 본 웰 메이드 범죄 드라마임에는 분명합니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답게 러닝타임이 두 시간을 훌쩍 넘지만 꽉 짜여진 탄탄한 연출과 전개 덕에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고 보았네요. 최근 보기 드문 완전범죄물이라는 측면에서도 좋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 1 : "Gone Girl"이 왜 "나를 찾아줘"로 번역된 것일까요? "Girl"이라는 미묘한 단어가 꽤 중요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덧 2 : 원작소설도 평이 좋은데 읽어봐야 할지는 잘 모르겠군요. 원작자인 길리언 플린이 영화의 각본까지 맡은 것으로 보아 원작에 굉장히 충실한 작품이라 판단되거든요.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2006/08/26

팔묘촌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3점

팔묘촌
요코미조 세이시

팔묘촌은 에이로쿠 9년, 멸망한 가문의 젊은 무사 8명이 삼천냥의 황금을 가지고 숨어 지내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참살된 전설이 있는 마을. 그러나 황금은 결국 발견되지 않고 여러명에게 저주가 내린 듯 죽음이 닥치자 마을 사람들은 8명의 무사를 공양하고 그들을 마을의 신으로 삼는다.

그로부터 300여년 뒤, 나 데라다 타츠야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양부에게 얹혀 지내다 전쟁 후 양부의 집마저 불타 혼자 살아가고 있는 중 라디오에서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회사 과장에 의해 내가 팔묘촌이라는 마을 최고 갑부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팔묘촌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 다지미 요조는 일찌기 내가 태어난 직후 어머니와의 부적절한 관계때문에 발광하여 마을사람 20여명을 살해하고 행방불명된 과거가 있는 인물이었다.

팔묘촌으로 출발하기 직전 처음 만난 외할아버지가 독살당한 것을 시작으로 처음 만난 의붓 형, 그리고 의붓형의 장례식에서 마을 스님마저 독설당하고 이 모든것이 아버지의 업보를 뒤집어 쓴 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돌며 흉흉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나의 편인줄 알았던 마을 두번째가는 유지의 며느리인 미야코도 서서히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마을 사람들의 폭동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비밀 통로를 통해 도망친 후 유일한 힘이 되어 주었던 의붓 누나인 하루요마저 살해당한것을 발견하고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노리코와 함께 정체모를 인물인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모든것을 의지한채 지하 동굴에 숨어 있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집요한 추적이 이어지고 노리코와 나는 동굴 깊숙한 곳으로 계속 쫓겨 결국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되는데...


간만에 읽은 추리소설인 것 같네요. 블로그의 정체성에 좀 더 충실해져야 하나.... 하여간 지인이자 은인이신 decca님의 도움으로 전에 TV 드라마로 먼저 보았던 긴다이치 코스케 등장 추리물의 대표작 "팔묘촌"을 드디어 책으로 완독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일 큰 특징이라면 에도가와 란뽀의 "고도의 마인 (외딴섬 악마)" 처럼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의 수기 형태로 기술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유행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건 주인공 타츠야의 시점으로 모든 전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이나 추리는 마지막 추리극 형태의 설명 부분을 제외하고는 크게 보여지지가 않으며 외려 타츠야에게 닥치는 공포스러운 사건들과 상황들을 변격물 형태로 잘 포장하여 보여주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고도의 마인" 처럼 트릭도 많고 추리적인 장치도 잘 짜여진 편이지만 아무래도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변격물의 성격을 띈 모험소설로 보입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 본다면 이야기의 큰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쇄살인과 보물찾기 중에서 연쇄살인 쪽은 꽤 잘 짜여진 트릭을 보여주고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8명의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미신에서 비롯된 무차별 살인을 보여주는 설정이 꽤 그럴싸하거든요. 가장된 동기 아래에서 벌어지는 무차별 살인 와중에 꼭 죽여야 하는 인물을 죽여야 하는 전개는 크리스티 여사님의 "ABC 살인사건"과도 굉장히 흡사하고요. 그러나 범행 자체가 완전범죄에 가까웠다는 점은 좋았지만 범인이 최초에 대신 죄를 뒤집어 쓸 희생양을 잘못 골랐다는 것 때문에 사건의 결정적 해결이 범인의 자백에 의존한다는 점은 많이 아쉬웠습니다. 희생양이 버젓이 살아있던 중반까지는 참 좋았는데 말이죠... 뭐 이러한 점은 완전범죄 트릭물의 가장 큰 맹점이기도 하고 다른 고전 정통 트릭물에서도 많이 눈에 뜨이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탐정역인 긴다이치의 활약이 굉장히 적어서 최소한의 추리쇼는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나 싶거든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마지막의 해결 장면, 그리고 긴다이치 코스케의 캐릭터가 많이 약해져버리더군요. 막판에 긴다이치가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범인도 결정적 단서가 남겨져 있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마무리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허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물찾기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뭔가 근사한 트릭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결국은 치밀한 탐색과 우연에 의한 발견이라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앞부분에 미완성된 지도와 수수께끼같은 싯구, 지명 등 괜찮은 암호트릭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니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숨겨진 보물은 이야기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은 사족에 가까운 내용인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무려 60여년전에 발표되었다는 시대를 뛰어넘는, 최소한 드라마 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소설이여서 무척이나 재미있고 만족스러웠던 독서였습니다. 위의 아쉬운 점은 분명히 존재하더라도 이야기의 진행과 소설적 구성이 참으로 완벽해서 흡입력도 굉장했기 때문이죠. 덕분에 저는 손에 잡고 거의 2~3시간만에 다 읽어버렸을 정도였습니다. 소설을 읽고나니 무려 세번의 영화, 여섯번의 드라마 (띠지에서 인용)로 영상화 되긴 했지만 이 소설을 영상화하는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아무래도 긴다이치의 비중이 너무나 작기 때문인것 같네요.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이 너무나 미미해서 탐정 캐릭터물의 팬이라면 2% 부족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김전일의 팬이라면 굉장히 즐겁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원전격의 내용으로 김전일 시리즈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좋은 의미이건 나쁜 의미건 말이죠) 그 외에도 많은 곳에서 패러디된 회중전등을 머리띠와 가슴에 둘러맨 싸이코 연쇄살인마의 원전이라는 의미도 있고요. 국내에 이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옥문도"와 "팔묘촌", 그리고 동서에서 나온 "혼징 살인사건"까지 세권이 정식 출간되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출간되길 희망합니다.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