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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7

이브의 대관람차 - 유우야 토시오 / 김진환 : 별점 1.5점

이브의 대관람차 - 4점
유우야 토시오 지음, 김진환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직 경찰관 나카야마 히데오는 이혼 후 전처가 키우던 딸 린과 오랫만에 만났다. 화제가 되고 있는 대관람차인 '드림아이' 탑승권이 당첨되어 함께 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드림아이는 '난장이'라는 괴한에게 통제권을 탈취당했고, 탑승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난장이는 나카야마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경찰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나카야마는 드림아이 테러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시청 수사 1과 형사 카이자키와 연락을 시작했다. 사실 나카야마와 카이자키는 경찰학교 동기이자 5년 전 후카 살인 사건으로 멀어진 사이였다.
곤돌라가 연이어 떨어지고, 범인의 8엔억 요구 등으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지면 결국 드림아이 통제권을 회수하여 남은 승객들을 구출하고 범인을 체포했다. 범인은 5년 전 후카 살인 사건 때문에 이 테러 사건을 계획했었다....


일본 신인 작가의 데뷰작품. 버티고 레이블에서 일본 작품으로 소개되는 첫 번째 작품이라 호기심을 자아내어 읽게 되었습니다. 

천재적(?)인 범인이 장교하게 설계한 범죄에 맞서, 탐정역의 주인공이 여러 사람의 생명을 걸고 게임을 벌인다는 점에서, 두뇌 배틀 장르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르물이 성공하려면, 범인의 도전적인 계획과 이를 막기 위한 주인공의 두뇌 싸움이 탄탄하게 연결돼야 합니다. 또한 범인의 동기가 명확하게 설명되어야 하며,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과정도 타당성 있어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범인이 그런 행동을 취한 이유도 제대로 밝혀져야 합니다. 영화 "스피드"를 보자면 범인은 버스 속도계와 연동된 폭탄으로 거액을 요구합니다. 구출 시도는 CCTV로 감시하며 대응하고요. 범인의 정체는 FBI 수사로 나름 그럴듯하게 밝혀집니다. 동기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런 요소들은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드림아이의 장악과 곤돌라를 떨어트린 범행부터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드림아이의 제어권을 아르바이트생이 훔친 카드키 입력만으로 빼앗을 수 있는 점부터 이상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복수의 관리자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곤돌라를 어떻게 떨어트렸는지, 통신망에 어떻게 장애를 일으켰는지 등에 대한 설명도 전무합니다. 범인 중 한 명인 타키구치가 공대생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범인들의 몸값 요구도 매우 이상합니다. 후카가 죽은건 제국부동산 비자금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범인 카나모리가 체포되지 않은건, 제국부동산으로부터 돈을 받은 카이자키가 증거 인멸을 하며 그를 보호한 결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범인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진범이 카나모리라는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이 없고요. 만약  이들 모두를 알고 있다면, 대관람차로 다른 피해자들을 불러모을 까닭도 없습니다. 핵심 원흉과 범인에게는 손도 대지 않고 단순 방관자들에게만 지옥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또 범인들이 제국부동산의 비자금을 폭로할 이유, 비자금 관리자 미야우치를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미야우치는 후카 사건과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고한 인물이었으니까요. 범인들은 그냥 무작정 살인을 저질렀다는건데,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비자금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조부모와 언니가 동생의 죽음으로 이런 거대한 테러를 벌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 조부모가 언니를 끌어들인 이유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죽은 손녀를 위한 복수로 산 손녀를 살인범으로 만든다는게 말이 될리가 없잖아요?

카이자키가 후카 사건에서 정액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남겼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증거를 인멸하려면 시신을 불태워버렸어야죠. 어설픈 처리로 시간만 낭비한데다가, 제국 부동산 비자금을 맡았던 카츠라기가 누명을 쓰고 죽게 만들었고, 카츠라기가 나카야마에게 했던 증언으로 꼬리마저 밟히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허술함은 작 중 냉정하고 뱀같이 묘사되는 카이자키 분위기와도 맞지 않습니다.
후카 살인 사건의 진범이 카나모리라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해주지 않는 탓입니다. 너무 뜬금없어서 황당할 지경이었어요.

다른 설정과 전개도 이해가 되지 않는게 많습니다. 나카야마가 카츠라기의 증언을 숨기고 경찰을 떠나고 이혼까지 했다는 과거가 대표적입니다. 나카야마가 의심을 받아서 그만 두었나?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약간 수상하다는 것만 묘사될 뿐입니다. 별도의 조사나 수사도 받지 않았고요. 내사를 받은건 후카 사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카이지키를 범인이라고 고발해서 경찰 내 공공의 적이 되었나? 아닙니다. 카이자키는 용의선상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나카야마가 당시 카이자키를 봤을 때 몸이 젖어 있었다(긴 시간 동안 증거를 인멸하느라)는 정도로는 고발도 불가능했을테고요. 
관할 내 친했던 소녀가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에 가책을 느껴 경찰을 그만 두었다는 정도가 말이 되는 설명인데, 이 정도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이혼까지 하는건 말이 안되지요. 카이자키가 지속적으로 나카야마를 범인으로 몰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요.
나카야마가 사건을 미리 예지한다던가, 편집증같이 계획을 짜는데 몰입한다는 등의 설정도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이야기와는 별 관계가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름이 '나카야마 히데오'라는게 좀 재미있었던 정도입니다. 요코야마 히데오에서 따왔겠지요?

괜찮은 부분이 없는건 아닙니다. 대관람차를 탈취한다는 설정은 꽤 기발했고, 놀이공원을 찾은 손님들이 관객이 되어 피해자들을 바라보게 한 이유가 동기와 연결되는 - 후카를 방조한 피해자들 - 건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범인 난쟁이가 드림아이 곤돌라 중 하나에 탑승했다는걸 밝혀내는건 좋았어요. 곤돌라 승객들은 핸드폰을 버리게 한 탓에 현재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시계탑 시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쟁이가 정해진 시간보다 전화를 늦게 걸어서 위치가 탄로나게 됩니다. 경찰이 시계탑 시계를 늦춰 놓있기 때문입니다. 범인 시계가 망가진 이유도 복선으로 제시해 주고 있고요.

그러나 좋은 점수를 주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인기있을만한 소재만 잔뜩 끌어와서 어설프게 조립한 치기어린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06/25

658, 우연히 - 존 버든 / 이진 : 별점 2.5점

658, 우연히 - 6점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퇴한 전설적인 뉴욕 경찰 거니에게 대학동창 멜러리가 찾아왔다. 멜러리는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 무작위로 자신이 떠올린 숫자를 알아맞춘 누군가가 자기를 협박하고 있다는 걱정을 털어 놓았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거니의 지시를 사업 - 조금 수상쩍은 일종의 종교단체 - 핑계를 대며 회피하던 멜러리는 결국 살해당했다. 사건 현장도 기묘한 점 - 허공으로 사라진 듯한 발자국, 총을 쏜 뒤 깨진 병으로 목을 찌른 점 등 - 투성이었다.
거니는 지방검사 클라인의 요청으로 수사본부에 자문역으로 참여했고, 브롱크스와 소더턴에서 잇달아 일어난 살인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걸 알아냈다. 알고보니 범인은 경찰과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유리탑의 살인>>에 꽤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작품. 소개가 멋드러지고 재미있어 보여서 바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범인은 1에서 1000까지의 수 중 피해자가 아무렇게나 떠올린 숫자를 어떻게 맞출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도입부는 기대에 부응합니다. 아주 흥미로왔거든요. 살인이 벌어진 뒤, 현장의 범인 발자국을 따라가보니 허공으로 떠오른 듯 갑자기 사라졌다는 엽기적인 현장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요. 범인이 살인 현장에 이전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대한 단서를 남기며 - 작약 (피어니), 넙치 (플라운더) - 경찰과 게임을 벌이는 전개도 재미있었습니다.
기상천외한 트릭, 불가능 범죄에 연쇄 살인극, 거기에 범인과의 두뇌싸움까지 결합되어 있으니 본격물로의 판은 제대로 깔린 셈입니다. 이런 작품을 21세기에 볼 수 있다는게 놀랍네요.

특히 도입부를 장식했던 '숫자 맞추기' 트릭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원리는 유명한 '주식 투자 사기'와 같아요. 여러명에게 '숫자를 생각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그 뒤 '너가 생각한건 이 숫자야'라는 편지에 모두 똑같은 숫자를 써서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숫자를 생각했던 사람은 깜짝 놀라며 범인에게 조종되고 마는 것이고요. 범인이 편지를 보낼 대상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런 사람은 늘어나게 됩니다. 문제는 주식이 오르냐, 내리냐와 같은 단순한 이지선다가 아니라 1부터 1000까지의 광범위한 숫자라는게 핵심인데, 챗 GPT에게 물어보니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10000명이 각자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1000의 10000승으로 같은 숫자를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약 1/1000이 됩니다. 즉, 10000명이 각자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약 10명 정도가 같은 숫자를 선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라고 하네요. 범인처럼 약 수만명에 이르는 광범위한 DB를 확보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인거지요. 누구나 알고 있음직한 아이디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는건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지가 않습니다.
트릭과 결합된 범인의 행동도 설득력이 넘칩니다. 범인은 당첨된 - 숫자를 맞춘 - 사람들에게 약간의 돈 (200여 달러)을 수표로 보내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이 이런 숫자를 알 정도로 전지전능하고, 너의 비밀도 알고 있다면서요. 그러면 뭔가 비밀이 있는 사람들은 수표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범인은 아는게 하나도 없지만 이렇게 받은 수표를 이용하여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게 됩니다.
형사답지않고 프로파일러에 가까운 거니 형사의 활약도 독특했습니다. 범인 입장에서 왜 그랬는지?를 생각하고 추리한다던가, 범인의 심리를 예상해서 위기를 타개하는 장면들이 그러합니다. 과장이 심한 측면은 있지만 나름 볼 만 했어요. 아내와의 대화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묘사도 기존 컨텐츠들의 거친 상남자 뉴욕 형사들과는 달랐고요.

그러나 도입부의 숫자 트릭 외의 추리적 요소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화로 생각한 숫자를 말하게 한 뒤, 우편함의 편지를 보라고 했던 두 번째의 숫자 맞추는 트릭이 대표적입니다. 숫자를 듣고 편지를 우편함에 넣은게 당연하지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신발 밑창을 거꾸로 붙인 장화를 신고 범행을 저질러서 허공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는 트릭은 유치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트릭은 피해자를 골라내고,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분명합니다만, 뒤이은 트릭들은 이렇게 범행을 저지를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힌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 숫자 맞추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멜러리를 죽였을테고, 이미 죽였다면 현장을 기묘하게 위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를 위해 덧붙인 경찰과 게임을 하기 위해서? 라는 설정은 억지스러웠고요.
주정뱅이 경찰이었던 아버지 탓에 어머니가 장애를 얻어서 복수를 시작했다는 범인의 동기도 납득하기 힘들었어요. 그렇다면 범행 대상도 주정뱅이 경찰이었어야 했는데, 금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범인의 총구 앞에 놓인 나르도 반장을 구하기 위해 거니가 범인을 도발하면서 시간을 끌고, 이 틈에 나르도 반장이 술병을 던져 범인을 죽인다는 결말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좋다는 첫 번째 트릭도 후보자가 많아지면 들통날 우려가 많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SNS 등 소통 수단이 많은 지금보다는 인터넷 등이 덜 발달한 시대에 적절했을 트릭이에요.

경찰의 수사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범인이 수표를 보내도록 유도한 사서함 주인 더모트를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은게 대표적입니다. 범인이 그 사서함에 접근해서, 수표를 빼돌려 주소를 알아낸건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수표를 보는게 쉬웠을 더모트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범인이 어떻게 범행 현장에서 개인 흔적을 철저히 지웠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전혀 다른 도시에서 무려 3건이나 범행을 저질렀는데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운다? 현대의 과학 수사를 일반 범죄자가 벗어나기는 거의 무리가 아닐까 싶네요. 이런 부분은 대충 넘어가고 있는데, 설득력을 갖추려면 보다 상세한 디테일이 필요했습니다.

너무 길다는 문제도 큽니다. 사건과 관계된 이야기로 분량이 늘어났다면야 괜찮았겠지만, 거니 형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 작업들과 여러가지 생각, 꿈, 아들과의 인연과 사건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건 지루함만 더해줄 뿐이었습니다. 부인과의 긴장감 느껴지는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집에서 쉬면서 편하게 사건 이야기를 하다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으면 안되나요? 프렌치 경감처럼요. 현대물이라고 다 이혼남에 가정 내 위기를 겪는건 아닌데 말이지요. 필요한 설명보다 쓸데없는 부분의 디테일만 넘치는 셈입니다.

그래도 숫자 맞추기 트릭에 대한 발상만큼은 좋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분량을 줄이고 범행 과정의 설득력을 보강했더라면 아주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겁니다. 그래도 본격적인 추리물 애호가라면 즐길만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덧 : 유리탑의 살인에서는 이 작품의 '658'이 추리 소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세자리 숫자라는 식으로 언급하는데, 추리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숫자는 '813'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명도, 발표년도, 누적 판매량 모두 이 책을 압도할테니까요.

2022/09/25

살인자의 사랑법 - 마이크 오머 / 김지선 : 별점 2점

살인자의 사랑법 - 4점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이는 20년 전, 자기 동네에서 벌어졌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이웃 글로버라는걸 알았지만 그가 도망가는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만보았던 과거 탓에 프로파일러가 되었다. 그러나 글로버는 그녀 주위를 끊임없이 맴돌며 회색 타이를 보내는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계속 어필해 왔다.
그리고 현재, 시카고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돕기 위해 조이는 FBI요원 테이텀과 함께 수사팀에 합류했다. 언론에서 '목조르는 장의사'라 부르는 살인범은 살해한 여자들을 방부처리하여 시내에 유기하고 있었다. 조이는 프로파일링과 수사를 진행하면서, 사건의 범인이 20년 전 사건의 범인 글로버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시체를 가지고 장난치는 연쇄 살인마와 프로파일러, FBI 요원 컴비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작품. <<살인자의 기억법>>과 비슷한 제목 때문에 영 손이 가지 않았던 작품인데, 읽어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 꽤 괜찮았던 부분이 많았던 덕분이지요.
우선 연쇄 살인마인 '목조르는 장의사'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초반에 방부처리된 사체를 보고 가짜 프로파일러가 범인은 전문 장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체의 발목 부분이 부패했다는걸 조이가 간파하고 범인은 이러한 사체 처리에 익숙하지 않은 초짜라는걸 밝혀내는 첫 장면부터 그럴듯했어요.
연쇄 살인의 패턴을 파악하여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과정도 여타 연쇄 살인물과 비슷하지만 추리의 여지는 많은 편입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들의 키가 전부 달랐는데, 딱 맞는 옷을 입고 있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범인은 살해 전에 피해자들에게 옷을 사 입혔던 겁니다! 첫 희생자 집 배관이 자주 역류했다던가, 납치되었던 피해자가 범인에 대해 재갈이 물린채 했던 말 등을 통해 범인이 배관공이라는걸 드러내는 식으로 단서 제공도 비교적 공정한 편이고요.

범인이 여성들을 방부처리한 이유와 유기한 시체들이 전부 우는 듯한 표정이었던 이유를 범인이 오랫동안 함께 한 '연인'을 꿈꿨고, 그녀와 헤어지게 되자 사체들이 슬퍼하는 것 처럼 연출했다는 황당무계한 추리도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그냥 범인의 광기 묘사에 집증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광기어리고 비참했던 유년 시절의 끔찍했던 학대가 원인이었다는건 다소 뻔했습니다만, 도화선이 된 사건은 동기로서는 충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잘 그려져 있거든요.
아직 살아있는 피해자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하던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조이가 범인의 판타지를 활용하여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범인 앞에서 옷을 벗으며, 팬티에 감춘 권총을 테이텀이 잡게 만드는 마지막 클라이막스도 영화화하면 괜찮았겠다 싶더라고요.
현재의 사건과 병행 진행되는 20년 전 과거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글로버가 진범이란걸 확신한 뒤, 그의 집에 몰래 잠입해서 증거를 뒤지다가 글로버와 마주치는 장면, 글로버가 조이의 집에 쳐들어와서 자매를 협박하는 장면은 굉장한 서스펜스를 안겨줍니다. 21세기 작품다운 속도감있는 전개 역시 좋았어요

그러나 워낙 뻔한 설정이라 비슷한 작품과의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고, 캐릭터가 진부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프로파일러 조이 캐릭터가 대표적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공포스러운 기억, 그에 따른 불면증, 감정적이면서 도전적인 말투와 행동 등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여성 수사관 캐릭터와 별다를게 없거든요.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가 바로 떠오를 정도었어요. 그나마 조이에게는 여동생 안드레아, 그레이에게는 여든 살 넘은 할아버지 마빈이라는 가족이 굳건한 유대를 보여준다는건 좋았지만 , 이야기와 크게 관련이 있는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편의에 따라 작위적으로 쓰여진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20년 전 사건 관련 내용에 특히 그러합니다. 우선 12살 중학생의 고발이라 하더라도 이를 무시해버린 처사는 쉬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고발 직후 소녀들 집에 침입해서 협박하다가 도주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범인으로 몰려 자살했던 용의자 매니 앤더슨의 부모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또 1996년이라는 시기는 그리 옛날도 아닙니다. 어느정도 법의학이 정립되어 있었을터라 분명 단서도 남아있었을텐데, 경찰이 매니 앤더슨에게만 촛점을 맞춘건 말이 안됩니다. 글로버의 철벽같았던 알리바이가 알고보니 매니 앤더슨을 옭아매기 위해 검시 보고서가 조작된 탓에 불과했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글로버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이야기니까요. 이를 테이텀이 짧은 시간 동안 밝혀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어요.
또 현재의 시카고 사건에 갑작스럽게 글로버가 끼어드는건 전혀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글로버가 등장하는 속편을 강하게 암시하는 결말은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설득력도 없어요. 조이가 동생 안드레아의 심층 트라우마를 일깨울까봐 글로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안드레아가 글로버를 알아보지 못하고 납치될 수도 있다는건데, 조이가 스토킹을 당했다면 안드레아도 글로버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건 당연합니다. 진작에 최대한 상세히 정보를 제공해 주었어야 했어요.
덜 떨어진 것 처럼 보였던 글로버가 20여년 동안 FBI의 자문역도 맡고 있는 전문가를 거리낌없이 스토킹하며, 나중에는 덮치는데 성공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과거의 알리바이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인 충동적 범죄자에 불과하니까요. 게다가 조이가 습격당한건 대낮이었습니다. 미국의 치안이 이 정도로 엉망일까요?
납치되었던 피해자 전화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려는 시도 외에는 범인을 잡아낼 방법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범인이 범행을 저질렀던 거리까지 알아냈는데도 불구하고 범행 장소도 결국 특정하지 못하는 등, 시카고 경찰의 무능만 작품 전체에 걸쳐 도드라지고, 범인을 잡은건 오로지 조이의 프로파일링 덕분인데 이는 현실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장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주 매력적이라고 보기는 힘드네요. 킬링타임용으로 적합한 작품입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2/12/25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1권과 동일하게 각종 사건들의 상세한 소개에 더해 수사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던 법의학법과학 방식이 소개되는 논픽션.
이번에는 거짓말 탐지기, DNA 분석, 루미놀 시약, 삭흔, 뼈, 법보행 등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범죄의 종류 - 실종, 도굴 - 이라던가 수사 방식 - 잠복, 공개 수배 -, 범인의 특징 - 싸이코패스, 피해망상 -, 단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 자백, 간접증거 - 등 많은 범죄 관련 소재가 언급됩니다. 이건 법의학과 법과학 관련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걸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건 쪽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점 첫 번째는 여러 지능범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체 인멸, 현장 조작에 알리바이 트릭까지 사용하는 놀라운 범인들의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기할 점은 범인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범인들의 행태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사형 제도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네요.

특정 주제에 맞는 대표적인 사건을 선정하기 쉬웠을 1권보다는 주제부터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는건 아쉽지만, 상세한 사건 정리가 여러 자료와 도판 등으로 뒷받침되는 좋은 범죄 논픽션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두 타석 연속 장타!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던 범죄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몇몇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아산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1).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현장에 다시 침입했습니다. 양초를 이용한 장치로 시간 조작 방화를 일으키려고요. 범인은 집을 비웠던 시간에 영화 다운로드를 걸어 두어서 집에 있는척 했다는 알리바이 트릭까지 써먹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만화와 다른 법입니다. 범인은 한 달도 더 지난 사건 당일 행적을 너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했던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서 덜미가 잡히고 말거든요. 체포되어서 다행입니다.

<<환경 미화원 살인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2)
추리 소설에서나 봄직했던 정교한 시신 유기가 놀라왔던 사건입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철물점에서 사온 5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100리터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2장을 덧씌웠습니다.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보이도록요. 그리고 환경 미화원이었던 범인은 자기 담당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은 뒤, 다음날 시신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에 던져 넣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전주 시내의 한 소각장으로 이동 후 소각 처리되고 말았다는군요. 무섭습니다.

<<거여동 여고 동창 살해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3)
단순 질투로 친구와 친구 아이 두 명을 살해했던, 비상식적인 잔혹함으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사건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에 목장갑만 꼈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정도의 지능범으로 방 열쇠를 넣은 핸드백을 방범창 안으로 던져 넣는 식으로 일종의 밀실 트릭까지 사용된, 거의 성공했던 완전범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손에 현장에는 없었던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현장 수사관들의 식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종잇조각은 범행 도구로 준비해왔던 페트병으로 만든 빨랫줄 고정판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네요.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을거라고 경찰을 도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집에 범행 기록을 꼼꼼히 적어둔 일기장을 남겨두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시욕' 이라는게 있었던걸까요?
아울러 이런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무기 징역에 그쳤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발 이런 범인은 좀 죽입시다.

<<신혼부부 니코틴 살인 사건>>
범인은 신혼 여행을 떠났던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 화장을 서둘러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의 부검 감정서로 덜미가 잡힌 경우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혈관 내 다량 투여된 니코틴에 따른 급성 중독사인데, 시신의 왼쪽 팔에서 두 곳, 오른쪽 팔에서 한 곳, 총 세 곳에서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인이 입증되었거든요. 처음 주사했을 때 바로 독성이 나타났을터라, 그 다음 나머지 두 곳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타인이 주사를 놨다는 것이고, 사망 장소에는 남편밖에 다른 이는 없었으니 범인은 뻔한 셈입니다.
단지 돈 목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살해한 인면수심의 뻔뻔한 살인범이라는 특징도 잘 살아있는 사건으로, 남편이라는 놈은 이 증거가 드러나자 자살 방조라고 우겼다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네요. 이런 놈도 좀 죽입시다....

뻔뻔함이라면 <<포천 암매장 살인 사건>>범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인 범인이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가공할만한 뻔뻔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 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포천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TV 화면을 제시하자, “함께 갔지만 피해자는 포천이동갈비를 먹으러 갔다"고 바로 말을 바꾼다던가, "함께 어머니 산소에 들렀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상식적 변명을 늘어놓는 식이었다네요. 이런 변명이 통할거라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고,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미아동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남아시아계라는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잠복 중이던 형사가 혼혈로 보이는 어린 형제를 보고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 중 큰 아이가 "아빠다!"라고 외쳐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행동이었어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잡아야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혼혈 아이들의 집만 알아내어도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 아빠 신원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울주 노인 연쇄살인 사건>>
사건 현장에 범인의 DNA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폐쇄회로 TV 영상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백 진술과 이 진술에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가 더해지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됐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자백'이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피고인의 자백이 곧바로 유죄 증거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최근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도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또는 기망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되거나, 혹은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땐 자백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고요.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네요. 과거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강도 살인'처럼 허위 자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경우가 많은 탓이겠지요.

<<이천 무덤 연쇄 도굴 사건>>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행으로 범행 자체는 특기할게 없는데, 피해자가 너무 안타까왔던 경우입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최씨는 부모 무덤이 도굴당한건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믿어서 11년간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친지와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거든요.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버렸는데, 이런건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제주 보육교사 피살 사건>>
미제 사건인줄 알았었는데, 과학 수사를 통해 이전에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던 택시 운전사가 검거되었더군요. 사건 당시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과학 수사를 통해 피해자 사망 시각이 재조정되어 결국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 사체를 이용한 실험 결과로,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는 그늘인 데다 바람이 심했고, 사후 일주일이 넘은 뒤에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어서 경찰은 다시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갔는데, 9년 사이 미세 증거물을 증폭해 보는 기술이 발달한 덕에 다행히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해자 옷에서 범인 옷과 동일한 섬유 조각이, 범인의 차에서 피해자 섬유 조각이 수집되었던 것이지요. 섬유 조각이 범인이나 피해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교차 발견되는게 많아지면 둘이 만났다는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단계까지만 언급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용의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나, 섬유 증거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네요. 그 외의 증거들도 용의자가 범인이다! 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쉽습니다. 언젠가 진범이 잡혀 피해자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2016/05/10

퀸 수사국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2점

퀸 수사국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엘러리 퀸 단편집. 1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30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이라서, 이야기의 깊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1. 사건이 발생한다. 2. 유일한 단서로 OOO이 있다. 3. 용의자들 중 범인은 누구인가?' 로 구성되어 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엘러리 퀸이 쓴 "추리 퀴즈" 모음집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트릭이나 수수께끼의 수준이 굉장히 중요하겠지요? 그러나 역시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영어권"에서만 적절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일종의 말장난같은 트릭이 많은 탓입니다. "협박 부서 돈이 말한다", "희귀 서적 부서 괴상한 학장", "자살 부서 명예의 문제", "보물찾기 부서 구두쇠의 황금", "다잉메시지 부서 GI 이야기"의 다섯 편 트릭 모두 말장난입니다. "담합 부서 대리인들의 문제"는 특정 지식 전문성에 기반한 트릭이라 평범한 독자가 해독하기 어렵고요. "허위 주장 부서 타임 스퀘어의 마녀"는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형편없는 쓰레기라서 작가 명성에 누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뒷받침되지 않아서, 동기와 용의자가 명백하여 범행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트릭만 믿고 범행을 저지르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 역시 비현실적입니다. 훨씬 설득력있는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이 작품들이 '추리 퀴즈'가 아닌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면요.

물론 전부 폄하하기 어렵긴 합니다. 아래 작품별 리뷰에서 상세하게 설명드리겠지만, 엘러리 퀸의 명성에 걸맞는, 정통 본격물 황금기의 고급진 트릭을 사용한 작품도 있기는 하거든요. 저같은 정통파 고전 본격물의 팬에게는 번역되어 출간된 것 만으로도 아주 반가운 일이고요.

그러나 괜찮은 작품은 절반 정도에 그치며, 괜찮은 작품도 트릭을 활용한 '추리 퀴즈' 수준이라서 한 편의 "작품"으로 높은 수준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더해 별점은 2점입니다만,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각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꼭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협박 부서 돈이 말한다

촉망받는 오페라 가수 루치아를 협박하는 협박범의 정체는?
답은 중고 서점 직원 아널드였다. 루치아 출생의 비밀에 대한 협박인데, 비밀은 미국에서는 일언반구 꺼낸 적도 없으므로 영국에서 알려졌을 터였다. 즉 범인은 영국인일 가능성이 높다. 아널드는 고향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영국식 단어를 말해서 들통나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따지면 고향을 속여왔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사투리가 튀어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경성탐정록"의 "운수 좋은 날"처럼 해당 언어권 독자가 아니면 풀 수 없는 트릭이라는 점입니다. 한국 독자로서 딱히 점수를 줄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담합 부서 대리인들의 문제

엄청난 돈이 걸린 권투 시합의 도전자가 유괴된다. 범인들의 요구사항은 10만 달러. 그리고 돈을 전달하는 대리인으로 엘러리 퀸이 임명된다. 범인들의 대리인은 유명한 스포츠 기자 잭맨이었다.
돈을 건네주는 자리에서 엘러리는 범인이 기자를 가장했다는걸 눈치채고 그를 제압했다. 스포츠 기자라면 모를리 없는 권투 시합에 대한 잘못된 설명을 떠벌였기 때문이었다(오서독스 스타일의 권투 선수는 라이트 훅으로 치명타를 날릴 수 없다).

일종의 말실수로 꼬투리를 잡는다는 내용인데 비약이 너무 심합니다. 엘러리가 권투에 이렇게까지 빠삭한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유괴범 중 한명이 배신했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독특한 소재 (권투 시합과 유괴) 외에는 점수를 줄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불가능 범죄 부서 세 과부

새어머니의 유산을 노리는 두 자매는 그녀를 독살할 계획을 세웠다. 새어머니는 첫 번째 독살 기도 실패 이후 철저하게 조심하던 중이었는데, 결국 독살당하고 말았다. 어떻게 그녀를 독살할 수 있었을까?
답은 자매 중 한명이 새어머니의 주치의를 유혹한 뒤, 진찰 시 입에 넣는 체온계에 독을 바른 것!

오래전 "세계의 명탐정 50인 (이후 44인)"에서 접했던 트릭입니다. 트릭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빛을 발할만한 멋집니다. 문제는 동기가 명확하고 용의자가 뻔해서 트릭만 믿고 범행을 저지른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추리 퀴즈를 위한 이야기랄까요.

그래도 평균 이상의 트릭이 사용된 것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희귀 서적 부서 괴상한 학장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뉴욕 대학교 인문학부 학장 매슈 아널드 호프 교수는 엘러리의 하버드 시절 은사로 두음 전환을 하는 말버릇이 있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의 관계를 증명하는 중요한 서적을 1만달러에 구입할 약속을 한 후, 안전을 위해 엘러리와 아버지 퀸 경감이 거래에 입회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도착한 현장에서 엘러리는 쓰러진 교수를 발견했다. 교수는 "고먼"이라는 말만 남기고 기절했다. 범인은 누구인가?
처음에는 영문학교 교수 오즈월드 고먼으로 의심되었으나 교수의 두음 전환 버릇을 반영하여 엘러리는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냈다. 진범은 바로 영문학 강사 "모건"이었다.

영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한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워낙에 명확한 트릭이라 풀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추리 퀴즈라면 초심자용이랄까요? 솔직히 트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에요. 범행도 굉장히 허술합니다. 교수의 두음 전환은 차치하고라도 범인을 잡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아 보였습니다. 솔직히 추리적인 면보다는 셰익스피어 관련한 도서 거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살인 부서 운전석

세명의 브라더스 형제는 형수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다. 형수가 자신들을 알거지로 만들 권한을 소유했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동기가 있는 탓이었다. 그런데 범행 당일 세명 모두 자신들의 차(캐딜락, 롤스로이스, 쉐보레)를 타고 형수를 방문했기 때문에, 세 명 중 누가 범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제비뽑기로 범인을 정한 뒤, 제비를 뽑은 사람을 다른 두 형제가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유일한 단서는 오른쪽 소매 끝자락이 푹 젖은 레인코트 뿐이었다. 범인은 누구일까?
오른쪽 소매만 젖은 이유는 비오는 날 팔로 수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며, 수신호를 오른쪽으로 보낸 이유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던 것. 즉, 영국 차 롤스로이스의 주인이 범인이다.

트릭과 단서가 뭐건 차종을 통해 범인이 드러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세 대 중 한 대만 영국차니까요. 이 경우 쓸만한 소재는 운전대 위치일게 뻔하고요.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수신호'를 선택했는데 시대를 느끼게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동기가 되는 주식 지분에 대한 이야기 등 세세한 재미도 있고요. 

허나 레인코트의 물기가 왜 마르지 않았는지, 레인코트가 범인의 것이 확실한지 등 세세한 부분에서의 설명이 부족한 건 문제입니다.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공원 순찰 부서 각설탕

기마 순찰 경관 윌킨스는 세익스 쿠니의 시체를 발견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그에게서 협박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상원의원 크레그, 금융업자 밀라드, 정치가 스티븐스 3명이었다. 유일한 단서는 셰익스 쿠니가 죽기 전 움켜쥔 것으로 보이는 각설탕 한 개라는 다이잉 메시지 뿐이었다. "설탕"을 "돈"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세 명 모두 부자이며 승마에는 문외한이라는 공톰점이 있었다. 그 외에는 사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설탕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최초 엘러리의 추리는 "당뇨"에 걸린 사람이 아닐까 였지만 세명 모두 당뇨와는 무관했다. 범인은 누구인가?
범인은 기마 순찰 경관 윌킨스였다. 각설탕을 손에 들고 다닌다면, 말에게 먹이기 위해서 말고는 다른 답이 없기 때문이다. 세 명 모두 승마와 무관하다면 범인은 제 4의 용의자이기도 하고.

범인이 제 4의 인물이었다는 발상의 전환이 돋보였던 작품입니다. 수수께끼고 뭐고, 마지막에 메시지를 남기려면 범인을 곧바로 지칭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엘러리의 이론도 공감할 만 하고요. 허나 다이잉 메시지로는 너무 빈약해 보이긴 합니다. 기마경찰과 각설탕이 그렇게나 짝이 잘 맞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거든요. 발표 당시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떠 올릴 수 있는 보편 타당한 상식이라면 그건 또 그것대로 너무 쉬워지니 문제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공개 파일 부서 차가운 돈

챈슬러 호텔에서 필리 멀레인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는 맨해튼 급여 강도 협의로 10년 복역 후 출소한 상태로, 돈을 찾으러 온 것으로 의심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체는 깨끗이 면도가 되어 있었는데, 호텔 방 안에는 수건이 없었다. 범인은 누구?
범인은 바로 메이드였다. 쓰던 수건이 없는 이유는 메이드가 가져가고 수건을 교체한 것이었다.

사소한 단서를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전형적인 고전 황금기 본격물입니다. 돈을 호텔방에숨겨 놓았다는 설정도 재미있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횡령 부서 구관조

늙은 앤드러스 부인은 의사, 변호사, 말벗이 자신의 돈을 횡령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챘다. 세명의 횡령범은 그녀를 죽여 입을 막는데 성공했지만, 마침 경찰이 들이닥쳐 그들을 체포하고 말았다. 앤드러스 부인이 미리 퀸 경감에게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 세명 중 범인은 누구?

용의자들은 브릿지 게임 중 카드를 뽑아 범인을 뽑았다. 3, 9, 킹의 카드를 각각 뽑았는데, 킹을 뽑은 사람은 킹 옆 재떨이에 시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사 쿡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심장의 위치를 놓쳐 4번이나 칼질을 할 이유는 없으므로, 범인은 3을 뽑은 말벗 배곳양이다.

카드 추첨으로 실행범을 결정했다는 잔혹한 아이디어에 더해 누가 무슨 카드를 뽑았는지,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까지의 추리는 논리적이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심장의 위치를 잘 안다고 해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 아닐까요? 손이 떨릴 수도 있는 등 변수가 많은데 말이죠. 범행 직후 경찰이 들이닥쳤기에 딱히 추리가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고요. 

이런 점에서 추리 퀴즈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 듯 싶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자살 부서 명예의 문제

중요한 결혼의 당사자를 협박하는 협박범과 교섭하기로 한 런던 경시청의 버크 경감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협박범이 버크 경감의 뒤통수를 쳐 돈을 빼돌린 탓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보였다. 유력한 용의자 애클리, 체이스, 벤슨 중 범인은 누구인가?
유서로 보이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영국식으로 표기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범인은 문서위조범 벤슨이다.

앞서 말씀드렸던 미국식 - 영국식 표현을 이해해야 풀 수 있는 트릭물이라 딱히 와 닿지 않았습니다. 단서가 뭐든, 유서를 위조했다면 범인은 벤슨일 수 밖에 없기도 하고요. 세 명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짤막한 추리는 나쁘지 않았지만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노상강도 부서 라이츠빌의 강도

마을의 성공한 사업가 앤슨 휠러는 공장의 급여를 도둑맞았다. 범인은 의붓아들 델버트로 추정되었는데, 엘러리는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서 도둑맞은 돈뭉치를 찾아냈다. 그러나 5개월 여 방치되어 거의 썩어 못 쓰게 되어 버렸다. 범인은 누구인가?
당연히 돈을 방치할 이유가 없으므로 바로 찾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5개월이나 찾아가지 못한 이유는? 모종의 이유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던 탓이었다. 즉, 범인은 델버트를 쫓다가 부상당해 누워있는 경관 조킹이었다.

라이츠빌이 무대라 오랜 팬으로 무척 반가왔습니다. 내용도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나름 하나의 작품으로서 충분한 수준을 보여주고요. 주어진 단서도 공정하며 추리도 합리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사기 부서 돈을 두배로 돌려드립니다.

전형적인 폰지 사기로 투자자를 모으고 있는 시어도어 F. 그루스를 체포하기 위해 퀸 경감과 엘러리가 출동했다. 그러나 그루스는 개인 사무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서 앨버트 크로커가 사무실 문을 열지만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 그는 어디로 사라졌나?
방에는 출구가 단 두 개 - 문과 창문 - 뿐인데, 문은 경찰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탈출구는 창문일 수 밖에 없다. 그루스는 창문을 통해 옆방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대머리, 몸 속 패드 등을 뗀 후 변장하여 다시 사무실을 "크로커"라는 이름으로 방문했던 것이다. 그리고 창문을 잠가 완전 범죄를 완성하려 했다.

독특한 인간 소실 트릭물. 트릭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문이 잠긴 상황 말고는 명확한 탈출 방법이 있다는 점에서 의외성이 높지는 않습니다. 현실적이라는 장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루스가 도주 후 변장하여 다시 돌아온 이유가 이해불가라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단지 불가능 범죄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설득력이 너무 약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보물찾기 부서 구두쇠의 황금

의사 벤과 서점 주인 이브 커플이 엘러리를 찾아왔다. 전당포 주인 엉클 맬러키가 남긴 유산 4백만달러를 찾기 위해서였다. 유일한 단서는 멜러키가 "도둑맞은 편지"를 읽다가 "방 안에 명백한 단서가 있다"라는 말을 남긴 것 뿐이었다. 책으로 가득찬 그 방에서 엘러리가 찾은 단서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오 헨리의 "4백만 달러"라는 책이 단서이다. 책 속 목차를 통해 의미가 있는 유일한 제목인 "between rounds"라는 말을 찾아내어 돈을 찾아낸다.

요약된 줄거리 그대로 영어권 독자를 위한 트릭물입니다. 별로 코멘트할게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술 부서 7월의 스노볼

보석강도 다이아몬드 짐 그레이디를 교수대로 보낼 수 있는 증인 리즈벳의 열차 호송 작전에 퀸 경감과 엘러리가 동행했다. 그러나 전 역을 출발한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하지 않았고, 경찰들은 두 역을 수차례 오갔지만 열차를 찾지 못했다. 열차는 어디로 갔는가?
전 역 역장이 매수되어 거짓말을 했던게 진상이다. 즉 열차는 전 역과 지금 역 사이가 아니라 전 역과 전전역 사이에 있었다.

딱 한명 (전 역 역장)만 매수하여 기차가 사라진다는 놀라운 불가능 범죄를 구현한 아이디어가 기발했던 작품입니다. 변장 호송 작전, 화끈한 총격전 등 잔재미도 괜찮으며, 리즈벳의 대사 등에서 엿보이는 유머도 돋보였어요. 현실적으로 과연 잘 되었을지 궁금하기는 하고 엘러리 퀸이 명탐정답지 않게 너무 헤메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평작급은 되지 싶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허위 주장 부서 타임 스퀘어의 마녀

위칭검 양 사후, 그녀의 재산은 조카에게 가기로 되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두 명의 조카가 나타났다. 둘 중 한명은 가짜. 누가 가짜인가?

엘러리가 말도 안되는 이론을 들먹여 범인을 자백처럼 밝혀내는데... 솔직히 추리물로 볼 수 없을 만큼 조잡했던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

투기부서 증권 투기자 클럽

증권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는 16명으로 구성된 클럽 멤버 3인이 엘러리를 찾아왔다. 자신들에게 지난 세 번에 걸쳐 좋은 정보를 제공한 정보원이 2만 5천달러를 주면 진짜 핵심 정보를 가져다 주겠다고 유혹했기 때문이었다.
진상은 퀸 경감의 말대로 16명의 그룹원을 반으로 나누어 반대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었다(반은 오른다, 반은 떨어진다). 이렇게 3주가 지나면 호구(?)는 두명만 남는다. 때문에 찾아온 3명 중 한명이 범인이다.

퀸 경감의 이론이 재미있었던 작품. 시대를 감안하면 아주 선구자적인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이 작품이 원조인지가 좀 궁금하네요.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추리쇼를 할만한 범죄가 아니라는 겁니다. 세 명의 재정 상태만 조사하면 될 일이잖아요? 게다가 두명의 돈을 가져가려면 당연히 가장 늦은 시간대에 찾아갈 사람이 범인일 확률이 제일 높을테고요. 안 그러면 두번 가야할테니 금방 들통날 거잖아요. 이러한 전개면에서의 작위적인 부분이 많아 조금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잉메시지 부서 GI 이야기
라이츠빌의 가정용 조명 기구 상점 주인 클린트 포스딕이 살해된다. 용의자는 포스딕의 의붓아들들 중 하나인데, 유력한 상황 증거에도 불구하고 클린트가 죽기전 남긴 "GI"라는 글과 부합하지 않아 골머리를 썩는 중. GI의 의미, 그리고 범인은 누구인가?
GI는 조지 워싱턴 스미스의 이름을 쓰려 한 것이고, E의 세로획까지만 쓴 것이다.

다잉메시지가 아니라 다이잉 메시지 아닌가요? 여튼, 누가 자기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안다면 이름을 적었을 것이다라는 당연한 논리가 핵심입니다. 이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에 트릭은 별거 없어요. 아들들의 풀 네임만 알면 누구나 풀 수 있는, 추리 퀴즈 초심자용 작품이라 할 수 있죠. 

당연한 이야기에 뻔한 트릭, 나름 가치는 있지만 많이 부족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마약 부서 검은 장부
미국 내 주요 지역 마역 공급책의 이름이 적혀있는 52페이지짜리 장부를 뉴욕으로 옮기는 임무를 맡은 엘러리 퀸. 그러나 출발과 거의 동시에 마약왕에게 납치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약왕의 꼼꼼한 수색에도 장부는 발견되지 못했다. 장부를 어떻게 옮겼을까?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은 뒤 파이프 속에 숨긴 것.

일종의 장치 트릭이 등장하는데, 시대를 생각한다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허나 본격물 특유의 공정한 맛(담배맛에 대한 묘사로 넘어가기에는 너무 부족하죠)은 없다시피하며, 트릭 역시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냥 몸만 뒤지고 고이 풀어주는 마약왕의 행태가 설득력없어요. 당연히 고문이라도 했어야죠. 트릭과 내용 모두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유괴 부서 아이가 사라졌다!

뉴욕에 사는 빌리 하퍼가 유괴된 후, 유괴범의 몸값 편지가 도착했다. 그러나 몸값 전달 장소가 로스앤젤리스로 지정된 탓에, 편지 도착 후 2시간 뒤 몸값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괴상한 편지는 무엇이고 유괴범은 누구인가?
엘러리는 옛 신문을 뒤져 협박 편지가 1년 전 기사화된 유괴 사건에서의 편지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범인은 사건을 벌였지만 뉴욕과 로스앤젤리스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즉, 어린 아이 빌리 하퍼로 사건은 부모의 이혼을 앞두고 벌인 자작극이었다.

유괴범의 편지로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가 인상적이었던 작품. 단서들도 공정하게 배치된 편이며 이야기의 설득력도 높습니다. 가족간의 행복을 다룬 주제와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 엔딩도 마음에 들고요. 추리소설 입문자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은 괜찮은 소품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3/23

중간의 집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2점

중간의 집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러리의 지인인 변호사 빌의 매제 조가 살해당했다. 현장을 찾은 엘러리는 피해자가 뉴욕 상류층 사람인 조지프 켄트 김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볼은 조 윌슨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빌의 여동생 루시와 결혼했고, 본래 신분으로는 돈많은 과부 제시카 보든과 결혼했던 중혼자였다.
현장에서 조 윌슨의 아내 루시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수집되었고, 김볼로 가입했던 10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 수취인이 얼마전 루시로 변경된걸 근거로 경찰은 루시를 체포했다. 빌은 동생의 변호를 맡아 끝까지 분투했지만 루시는 유죄가 인정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엘러리는 현장을 목격했던 김볼의 의붓딸 안드레아의 결정적 증언을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여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데 성공한다.


검은숲의 엘러리 퀸 전집 중 한 권. "도중의 집"이라는 제목의 자유추리문고 버젼도 이미 읽었지만,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기에 겸사겸사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엘러리 퀸 1기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와 3기 라이츠빌 시리즈 사이에 위치한 2기 시기를 연 작품이라고 하는데, "스웨덴 성냥 미스터리"라는 제목을 붙여도 괜찮았을 거라는 언급이 작중에 등장할 정도로 '국명 시리즈'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후더닛'에 충실한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이며, '독자에의 도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명 시리즈'보다는 드라마의 변화 폭이 넓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반부는 아예 법정물로 간주해도 될 정도니까요. 법정물로의 수준도 높습니다. 특히 범인의 다분히 고의적이고 어설픈 행동들을 열거하며, 이는 루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라는 빌의 마지막 변론은 굉장히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범인이 충분한 휘발유가 있었는데도 구태여 주유소를 방문해 베일을 쓴 얼굴을 보여줄 이유가 없다는 등의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검사 역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만한 좋은 변론을 펼칩니다. '범죄자들은 아둔하며, 뛰어난 지능을 가진 범죄자들은 소설책에서나 볼 수 있다'는 건데 그럴듯했습니다.
거의 빌이 이길 뻔 했지만 흉기에 루시의 지문이 묻어 있있다는 증거를 뒤집는데 실패한다는 결말도 현실적이었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핀치의 만년필에 독특한 초록색 잉크가 들어있었다는 것, 범인이 립스틱을 이용하지 않고 구태여 코르크를 태워 필기구로 쓴 것 등 모든 단서가 '독자에의 도전' 단계 전까지 독자들에게 정말로 공정하게 제공된다는건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이를 통해
  1. 범인은 남자다.
  2. 범인은 흡연자고, 아마도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3. 범인은 자기 정체를 드러낼 내용이 새겨진 성냥갑을 가지고 있다.
  4. 범인은 김볼과 루시에게 적대적인 동기가 있다.
  5. 범인은 필기구를 소지하지 않았거나, 소유한 필기구를 사용하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어 사용하기를 꺼렸다.
  6. 범인은 아마도 김볼 쪽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7. 범인은 앤드레아에게는 우호적이다.
  8. 범인은 오른손잡이다.
  9. 범인은 김볼이 보험 수익자를 변경한 사실을 알고 있다.
라는 추리를 끌어내고, 관계자들 중 이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런 후더닛 추리 외에도 '중간의 집'으로 명명된 집에 대해서 간단한 조사만으로 그 용도를 꿰뚫어 보는 추리도 볼만한 등, 확실히 '엘러리 퀸'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점은 많았어요.

그러나 완성도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던, 앞서 안드레아가 목격했던 성냥부터가 그러합니다. 이를 토해 엘러리 퀸은 범인은 담배를 피운게 분명한데, 재와 꽁초와 같은 흔적이 없으니 파이프를 피웠다고 추리하지요. 하지만 애초에 엘러리 퀸 스스로가 범인은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파이프로 흡연이 가능했다는걸 초반에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성냥 모두가 코르크를 태우는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억지이자 반칙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의 아내 루시가 빌에게 선물하려고 산 문구 세트 칼을 만졌다는 완전한 우연이 재판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 것, 핀치의 간단한 변장이 주유소 사장이 루시로 잘못 알아볼 정도였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했고요.

전개 면에서는 수수께끼가 모두 엔드레아의 위증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점이 큽니다. 앤드레아가 중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했던걸 모두 털어놓았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었을 거에요. 앤드레아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었고요.
엘러리 퀸 특유의 장황한 대사들은 여전히 짜증스러웠으며, 빌이 엔드레아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었어요. 무고한 동생이 20년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동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덕 중혼자의 의붓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설명도 대체로 부족합니다. 빌이 처음에 '중간의 집'에서 발견했던 앤드레아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숨겼던 이유는?(둘이 원래 알던 사이였는지?) 김볼이 빌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고 마음먹은날 앤드레아까지 중간의 집에 부른 이유는? 대체 핀치는 그 날 그 시간에 김볼이 중간의 집에 혼자 있을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결국 끝까지 설명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부분의 '국명 시리즈'보다는 낫지만, 전체적으로 그냥저냥합니다.

2025/07/05

미치도록 잡고 싶다 - 정락인 : 별점 3점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범죄 전문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진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미제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사건의 흐름은 물론 왜 지금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들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1년에 발생한 "'그놈 목소리'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 저자는 이 사건이 장기 미제가 된 가장 큰 원인을 초동 수사 실패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사건 초기 세 번이나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거든요. 첫 번째는 범인이 돈을 전달하려 할 때 접근했던 수상한 남성을 놓친 것이고, 두 번째는 경찰이 다른 장소에 잠복하느라 범인이 돈을 챙겨 유유히 사라지게 만든 점, 세 번째는 범인이 은행에 돈을 찾으러 왔지만 현장에서 놓친 경우입니다. 오늘날 CCTV 등의 수사 인프라를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논리적인 추리입니다. 앞서의 "그놈 목소리" 사건의 경우, 저자는 범인이 최소 세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합니다. 범인의 언행, 범행 방식, 통화 기록 등을 종합한 분석이 그 근거입니다. 또한 사건의 최신 수사 현황도 책에 충실히 담겨 있습니다. 이형호 군의 외가 친척인 이 모 씨의 성문이 범인과 완벽하게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명확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언급됩니다. 그런데 만약 범인이 여럿이라면, 알리바이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희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지금이라도 체포해서 수사할 수는 없는지 독자로서 궁금해지네요. 
"남양주 아파트 밀실 살인사건"에서도 실제로 추리 소설의 소재로 활용될만한 추리가 선보입니다. 14층 피해자의 집까지 찾아가려면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CCTV에 범인은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면 마찬가지로 비디오폰에 촬영되고요. 그러나 두 카메라 모두에 범인이 찍히지 않았고, 아파트 문을 억지로 열지 않았으며, 범인이 화장실까지 이용했다는 점에서 범인은 피해자와 친분이 있는 아파트 내부자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게 저자의 추리입니다. 현관 비디오폰 촬영은 노크를 해서 피했고요. 이 정도면 어느정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대부분 워낙 유명한 사건들이라, 이미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여러 차례 다뤄진 내용이 많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엽기토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정동 연쇄 납치 살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평소 저자의 '사건 속으로'라는 이름의 칼럼을 꾸준히 읽어온 저에게는 책에 담긴 정보 중 상당 부분이 이미 접했던 것이었고요. 이런 점 때문에 새로운 정보나 미공개 기록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몇몇 사건은 설명이 부족합니다. "홍해 토막 살인 사건"은 남편의 혐의가 짙은 정도가 아니라 명백해 보이는데도 왜 체포하지 못하는지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김해, 부산 부녀자 연쇄 실종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가 있지만 사체를 찾지 못해 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는데, 최근에는 '시체없는 살인 사건'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최신 판례와 수사 기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면 좋았을 겁니다.
미제 사건과 무관한, 저자의 기자로서의 활약과 소회를 담은 컬럼인 "정락인의 사건 추적"은 책의 성격과 많이 다른 탓에 차라리 추가되지 않는게 좋겠다 싶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제 사건 자체의 흥미와 저자의 분석력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이미 알려진 사건 중심의 구성과 정보의 신선도 부족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래도 "완전범죄"보다는 깊이있는 정보가 많고, "표창원의 사건 추적"보다는 추리와 분석 측면으로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2024/11/09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 아사쿠라 아키나리 / 남소현 : 별점 3.5점

여섯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 8점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남소현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서는 트릭과 진범이 누구인지가 모두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타노, 시마, 쿠가, 하카마다, 야시로, 모리쿠보의 명문대 졸업을 앞둔 취준생 6명은 가장 잘 나가는 신생기업 스피라링크스 최종 전형까지 살아남았다. 한 달 동안 6명은 마지막 관문인 그룹 토론을 준비하여 모두 함께 합격하자며 친해졌는데, 그룹 토론은 그들 중 딱 한 명만 투표로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토론장에서 여섯 명은 각각이 수신인인 수상한 봉투를 발견했고, 그 안에 각자의 과거 치부가 증거와 함께 들어있다는게 밝혀졌다. 이를 통해 투표는 순식간에 요동쳐서 원래 앞서가던 쿠가 등이 봉투 속 내용물로 뒤쳐지고, 하타노가 1위로 부상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봉투를 가져다 놓은게 하타노라는게 드러나 결국 시마가 1위로 스피라링크스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후, 하타노는 지병으로 사망했고 시마는 유품을 건네받았다. 유품은 시마가 진범이라는 일종의 고발이었다. 범인이 아니었던 시마는 충격을 받고, 과거 그룹 토론 멤버들과 다시 연락하여 사건에 대해 재조사에 나섰다. 이는 하타노가 끝까지 숨겼던 자신의 치부가 담겨있던 봉투 속 내용물이 무엇인지 두려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취업 준비생들의 극심한 경쟁을 사회파 범죄 스릴러로 풀어낸 작품. 신입사원 공채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으니 사회파 소설로 보아도 무리가 없겠지요. 얼마전 올렸던 추리 소설 추천 리스트에 있었는데 번역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일단 독자를 흡입시키는 전개가 아주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1부는 화자 하타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그가 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인으로 몰려 추락하는 상황이 긴장감있게 그려집니다. 또 그룹 토론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매우 흥미로우며, 특히 입사가 어려워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긴장감은 눈부십니다. 단순한 그룹 토론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솜씨가 정말 놀랍습니다. 이와 함께, 치열한 입사 경쟁이라는 현실도 강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2부에서의 입사에 성공한 시마의 시점으로 그녀의 조사를 통해 하타노의 결백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도 무척 흥미롭고요.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캐릭터의 진실을 탐구하는 재미를 더합니다. 

작품 속 여섯 명의 취준생 캐릭터들도 처음에는 능력있고 선한 사람들로만 보였지만 이후 그룹 토론과 시마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약점(?)이 하나, 둘 씩 독자에게 제공되면서 마지막에 복합적인 인물들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좋았어요. 그동안 보아왔던 평면적인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생함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작 중 언급된대로 '달은 지구에서는 표면밖에 보이지 않지만, '뒷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걸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누가 비밀을 폭로하는 봉투를 준비했나?'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본격 추리물처럼 단서를 제공하고 범인을 빵 터트리는건 아니지만, 결정적인 단서로 '하타노가 음주를 하던 사진에서 '스미노프 보드카'가 술이라는걸 알아채지 못한 사람이 범인이다'는걸 독자에게도 알려주고, 이를 통해 술을 못하는 쿠가가 범인이라는걸 드러내는건 본격 추리물 못지 않았습니다. 하타노가 유언처럼 남긴 파일의 '범인, 시마 이오리에게'라는 수신인이 '범인 시마 이오리에게'가 아니라 '범인과 시마 이오리에게'라는 뜻이었다는 착안도 괜찮았고요. 하타노가 파일에 걸어놓은 암호도 범인이 쿠가이므로 '페어'였었죠.

또 괜찮은 서술 트릭물이기도 합니다. 시마의 인터뷰와 하타노, 시마 1인칭 시점으로만 다른 인물들을 묘사하여 야시로가 선뜻 장애인 석에 앉았고, 쿠가가 장애인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하카마다가 야구를 하던 어린 아이들에게 폭언을 하며 혼을 냈다는걸 드러내며 그들을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하고 얄팍한 인물로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야시로와 쿠가는 장애가 있는 시마를 배려했던거고 하카마다도 할머니가 공에 맞을 뻔 해서 아이들을 혼냈고 나중에는 잘 타일렀다는게 드러납니다. 이렇게 독자를 착각하게 만들었다가 마지막에 반전으로 진상을 드러내는건 전형적인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도 깜빡 속았네요.

취준생들이 겪는 압박과 고통, 힘든 취업 과정에 대한 묘사도 빼어납니다. 읽다가 얼마전 제가 근무하는 부서에 입사한 신입사원이 합격 소식을 듣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기뻐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취준생 들의 심정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신입 공채에 대해서도 사회파 추리 소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 밝히고 있습니다. 단지 사측 입장이 아니라 취준생들도 거짓말쟁이라는걸 밝히고 있어서 균형을 맞추는 것도 좋고요. 물론 사측 문제가 더 커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타노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유품으로 시마의 진상 추적이 시작되는 2부는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쿠가가 신입 공채 시험의 정당성에 의심을 품고 일부러 사건을 일으켰다는 동기가 불공정한 탓이 큽니다. 쿠가의 뛰어난 친구가 스피라링크스 2차에서 떨어졌는데 쿠가 본인은 최종 전형까지 합격한게 불만이라는 동기는 처음에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뛰어난 친구 이야기가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동기를 뒷받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동기 자체의 설득력도 없어요. 쿠가의 말 그대로 치기어린 행동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철없는 아이의 장난과 다를바 없는 사건이라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네요.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쿠가가 하타노를 범인으로 몰아붙인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겁니다. 쿠가가 신입 공채를 망치고 싶었다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최후의 1인이 되든 상관없이 그룹 토론이 엉망이었다는것만 스피라링크스 인사팀이 확인하면 되었으니까요. 각자의 치부를 담은 봉투 안에 작은 협박문을 넣어서 알리바이를 조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모리쿠보가 범인으로 몰리게 된 상황에서, 사진이 이상하다는걸 들먹이면서 각자의 알리바이를 확인하여 하타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식으로 끌고간 까닭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전 술자리에서 술을 못하는 시마에게 술을 강권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쿠가가 시마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지 않는 한, 그렇게까지 큰 잘못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 자리에 하타노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또 시마가 확인한 그룹 토론 당시 동영상을 통해 모리쿠보와 야시로가 협박당했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이 당시에는 모두 취직이 급했으니 비밀을 공개하겠다는 협박은 통했을겁니다. 그러나 8년이 지나 모두 사회인이 된 현재 시점에서 이 시절 협박당했다는걸 드러내지 않은건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하타노의 알리바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협박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하타노가 범인으로 몰리는걸 방조한 잘못이 있기도 하고요. 모리쿠보는 시마를 의심했고, 쿠가는 진범이었으니 그렇다쳐도 최소한 야시로는 시마를 만났을 때 그 사실을 충분히 밝혔어야 했습니다. 이 점은 이들 모두 알고보면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반전을 약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아울러 '공개되지 않은 시마의 비밀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는 좀 작위적이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시마의 장애가 1부에서 아예 설명되지 않은 것도 탐탁치 않고요. 약간은 노리고 속인 느낌이 드니까요.

신입 공채에 대한 비판도 다소 과장되어 있습니다. 스피라링크스의 인사부장이 말한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서류 전형과 면접, 여러가지 시험 등을 통해 나름 공정하게 사원을 선발하는게 당연합니다. 6명의 최종 입사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그룹 토론해서 1명을 뽑아라? 이건 말도 안되요. 갑자기 성장한 회사라 제대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다는 변명이 실제로 통할리 만무합니다. 작가가 직장 생활은 해 보지 않은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건 분명합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신입 사원 공채를 소재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데 감탄할 수 밖에 없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쿠가가 하타노를 범인으로 몰지만 않았어도 별점 4점 이상은 충분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보통 추리소설 추천 리스트는 믿지 않는 편인데,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추천은 믿음이 생기네요. 다른 작품도 번역이 되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당연하게도 영화화가 되었더군요. 곧 개봉이라는데, 서술 트릭 쪽을 어떻게 영상화했을지 궁금합니다. 



2021/04/09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정영목 : 별점 2점

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 4점
엘러리 퀸 지음, 정영목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 병원에서 수술을 앞두고 있던 백만장자 노부인 애비게일 도른이 수술 중 살해당했다. 범인은 병원 내에 있는게 확실했지만 수사는 난항에 빠졌고, 주요 사건 관계자였던 외과 과장 닥터 프랜시스 재니까지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실마리를 잡지 못해 괴로워하던 엘러리는 친구인 네덜란드 병원 의료과장 존 민첸이 한 말 덕분에 범인을 추리해 내는데 성공한다.

엘러리 퀸국명 시리즈입니다. 국명 시리즈다운 본격 추리물로, 독자와의 공정한 두뇌 게임이 펼쳐집니다. '독자에의 도전'도 적절한 위치에 삽입되어 있고요.

공정하다는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모든 단서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에 더해, 중요 단서는 엘러리 퀸이 중요하다고 콕 짚어 주기까지 하니까요. 때문에 추리 자체는 비교적 쉽게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31년에 발표되었던, 비교적 초기작인 탓이겠지요.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언급하는 '구두'가 대표적입니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이미 엘러리는 안쪽으로 말려들어간 '구두 혀가죽'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며, 닥터 제니의 구두 사이즈를 물어봅니다. 키가 165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닥터 제니의 발 사이즈도 245밀리미터인데, 발견된 구두는 240밀리미터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이를 통해 독자는 범인은 발이 240밀리미터보다 작은, 아마도 여성일거라는 추리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구두 끈을 수선했던 반창고도 마찬가지에요. 닥터 민첸이 "외부인들은 아무도 뭐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반면, 병원에서 이런 물건들이 어디 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라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범인은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일 거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동기도 쉽게 드러납니다. 애비게일 도른이 죽으면 이득을 얻는 사람은 많지만, 닥터 재니가 죽음으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은? 닥터 재니의 아들로 밝혀진 토머스 스완슨밖에 없습니다. 책을 함께 쓰고 있다고 밝힌 닥터 존 민첸이 책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엘러리 퀸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 살인이라는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습닌다. 즉 범인은 토머스 스완슨과 관계가 있는, 네덜란드 기념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인 거지요.

물론 그냥 이렇게 사건이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트릭도 적절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범인인 루실 프라이스가 어떻게 닥터 재니로 변장한 범인과 함께 범행 시각에 함께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트릭으로, 그녀가 닥터 재니로 변장하고, 목소리는 자기 목소리만 내었다는 간단한 1인 2역 트릭이지만 꽤 효과적으로 보였습니다. 트릭은 언제나 간단하면 간단할 수록 설득력이 높은 법이지요. 

범인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추리쇼도 멋졌습니다. 속기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루실 프라이스를 모든 수사 관계자가 모여있는 범행 현장에 불러 경찰청장에게 보내는 메모를 쓰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범인을 눈치 챈 퀸 경감이 "‘도른 부인과 닥터 재니의 살인자는…….’ 토머스, 이 여자를 잡게! ‘루실 프라이스입니다!’”라고 외치는데, 셜록 홈즈"주홍색 연구"에서, 짐을 가져온 마부를 붙잡고 범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오르더라고요.
나중에 추리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그렇게 쉽고 단순하지만은 않고, 나름 여러가지 변수를 생각해서 추리를 했다는걸 잘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만큼 멋지지고,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요한 부분에서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티가 물씬 나는 탓입니다. 가장 작위적이었던건 '사라진 캐비닛' 입니다. 원래 닥터 재니가 살해된 현장에는 캐비닛이 있었습니다. 등 뒤 캐비닛으로 향하는 사람을 닥터 재니가 의심하지 않아서 살해당했고, 이로써 닥터 민첸이 초반에 말했던 "그 기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재니와 나 그리고 재니의 조수인 프라이스 양뿐일세. 프라이스 양은 훈련받은 간호사인데, 일반적인 사무를 본다네.”를 통해 범인이 드러나는 중요한 단서죠. 그러나 캐비닛의 존재는 마지막에서야 밝혀집니다. 함께 책을 쓰던 닥터 민첸이 모든 관련 서류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라면서요. 서류를 없앨 때 '캐비닛' 째로 가져가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살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서류가 아니라 휴지 한 장을 가져가도 문제가 될 상황인데 캐비닛 째로 무언가를 가져가서 없앴다? 현장을 지키던 경찰이 허수아비도 아니고, 이건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설정이었습니다. 게다가 캐비닛으로 들어가려면 좁은 책상 틈을 통과하여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는데, 시체를 놔 둔 채로 캐비닛을 어떻게 치웠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또 앞서 구두와 반창고 때문에 범인이 병원에서 일하는 여자라는건 이미 추리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병원에 있던 모든 관계자,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인적 사항을 낱낱이 파헤치는게 경찰의 할 일인데, 도대체 경찰은 뭐 하는지, 엘러리는 왜 이야기를 안 해 주었는지 모르겠어요. 

두 번째 사건이 벌어진 마침 그 시간에 모든 주요 관계자들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못하는 것도 작위적이며, 제목 역시 마찬가지에요. '네덜란드' 는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사건 무대가 된 병원 이름이 네덜란드 기념 병원일 뿐이니까요. 국명 시리즈는 작위적이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은데, 이 작품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요.

아울러 전개도 불만스럽니다. 수상한 용의자들을 잔뜩 만들기 위해, 모든 등장인물들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는건 억지스럽고 짜증만 났어요. 살인 사건 수사에 나선 경찰 앞에서 모든 주요 관계자들이 뻔뻔하게 자신이 했던 일, 만났던 사람은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들이 사실만 이야기했어도 절반 분량의 이야기는 필요가 없었을겁니다. 이런 억지는 고전 본격 추리의 황금기 시절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기는 합니다. "비숍 살인사건"에서 처럼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묘사였습니다. 

등장인물들도 억지스러워요. 정신나간 인물들이 태반이거든요. 정신병자이자 광신자인 사라 풀러, 누이 돈을 축내며 살아가는 기생충 헨드릭 도른은 고전 본격물에 등장하는 짜증나는 용의자의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였고, 기묘한 합금을 발명한다는 헛똑똑이 모리츠 크나이젤은 엘러리 퀸이 호적수를 만났다 운운하면서 띄워줬는데, 바로 다음에 자신이 살인자의 목표라는 허황된 추리를 떠벌여서 왜 등장해야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더군요. 아이가 죽고, 산모도 곧 죽을거라는 잔인한 대사를 서슴없이 내뱉는 산부인과 의사 닥터 펜니니도 사악함만 기억에 남을 뿐 등장할 이유가 없던건 마찬가지고요. 사라 풀러를 강간하다시피해서 훌다 도른을 낳게 한 내과 의사 루시우스 더닝은 그야말로 최악의 쓰레기였는데, 적절한 응징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엘러리 퀸이 인물 묘사에 약하기는 한데,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공정함' 측면에서는 백만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본격 추리물로서의 묘미를 잘 갖추고 있지만, 추리 자체는 추리 퀴즈 수준인데다가 작위적인 전개와 함량 미달의 인물들로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국명 시리즈는 저와 맞지 않는 듯 합니다. 세상에 읽어야 할 추리물은 많으니, 국명 시리즈는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05/01/14

노래하는 백골 - 오스틴 프리맨 / 김종휘 : 별점 2.5점

노래하는 백골 - 6점 오스틴 프리맨 지음, 김종휘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과학수사"의 원조, CSI 수사대의 할아버지뻘 되는 존 손다이크 박사의 단편집으로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추리소설 초창기인 1900년대 발표된 작품으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이고 색다른 시도를 보인 작품들 (첫 두편만이지만)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추리소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작품집이라 생각되네요. 프리맨 평소의 지론이었던 "독자는 범인이 누구냐보다는 수사 과정에 더 흥미를 느낀다"를 너무나 잘 구현했달까요?

그러나 손다이크 박사의 과학적인 증거 수집에 의한 범인 색출에 중점을 두고 있고 (ex : 1. 사건의 진행 과정 서술 (범인의 범행 및 간단한 증거인멸 작업 등) >> 2. 발견된 증거를 토대로 한 손다이크 박사의 조사 >> 3. 현장검증을 통한 범인 확정 / 검거)범인의 트릭이나 소설적 재미는 적어서 처음 2편의 단편은 추리적인 맛이 많이 부족하더군요. 아무런 트릭도 없고 복선이나 반전도 없이 단지 수사과정 자체만 보여주는 이야기 구성 역시 지루했고요.

처음 2편의 반응이 별로였었는지 이후 작품들은 위의 프리맨의 명제대로 서술된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단편 추리물의 원칙에 충실한 작품들입니다. 때문에 약간 논지가 흐려지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보다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었어요. 물론 추리적인 측면에서도 우연과 특정 상황에 기댄 것 같은 작품들이 많은 것은 분명 약점이지만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과학적 추리라는 뼈대는 계속 잘 살려 나가고 있으며, 동시대 라이벌들은 주로 "안락의자"형이지만 손다이크 박사는 어디까지나 증거 위주로 공정하게 게임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다른 유명 단편집들과 차별화 되는 요소가 분명 있긴 합니다. 확실히 추리계에 한 획을 그을만한 작품들이에요. 개인적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랜 탓이지 작품의 흠결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아쉬운 점은 동시대 라이벌 탐정들과 비교해 보면 손다이크 박사의 개인적 매력이 너무 드러나지 않는, 개성적이지 못한 평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점입니다. 손다이크 박사보다 오히려 범인들에게 촛점을 맞춘 전개 방식이나 전체적으로 건조한 묘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적이고 뭔가 평범한, 진솔한 묘사보다는 수사 방식과 해결에 너무 작가가 집중한 것 같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마땅한 방법이겠지만 독자를 위해서, 그리고 극 중 탐정을 위해서라면 좀 더 따뜻한 묘사를 해 주어도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를 떠나서 추리소설 역사에 남을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하기에 추리 애호가분들께서는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작품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오스카 브러트스키 사건 :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로 다이아몬드 상인 오스카 브러트스키의 살인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발적이고도 우연한 상황에서 자살이나 사고로 보이게끔 위장한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 핵심으로 범인과 범행과정을 먼저 보여주는 도서 추리적인 성격에 손다이크 박사의 과학 수사를 결합한 독특한 작풍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손다이크 시리즈의 핵심 특징을 모두 갖춘 기념비적인 작품이죠.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단점들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즉, 재미는 없다는 뜻이죠.

2. 노래하는 백골 :
역시 대표작중 하나.
사고로도 보일 수 있는 한 등대지기의 죽음을 시체 (백골)의 상처에 집중하고 현장 검증을 통해 진상을 알아내는 손다이크의 활약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재미면에서는 많이 떨어지는, 너무 설정과 과정에 집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입니다.

3. 계획된 살인사건 :
탈옥수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협박하는 전 간수를 죽이기 위한 치밀한 노력이 빛나는 괜찮은 단편.
손다이크의 활약보다는 범인 펜베리의 살인을 위한 계획과 그 과정이 더 길고 재미나게 그려진 이색적인 작품으로 추리적으로나, 과학 수사 측면에서나 상당히 읽을만한 작품입니다.

4. 전과자 :
절도 현장에서 자신의 지문이 발견된 것 때문에 범인으로 몰린 한 전과자가 손다이크에게 결백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단편. 특징이라면 당시 지문에 대한 인식을 잘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5. 파란 스팽글 :
굉장히 독특한 작품. 우연에 기댄 것 같은 사건 자체는 조금 불만이지만 이른바 "사고"를 밝혀내는 손다이크의 활약이 드라마틱하게 보여지는 수작입니다. 재미있었어요.

6. 어느 퇴락한 신사의 로맨스 :
손다이크 박사보다 범인의 행동과 생각에 촛점을 맞춘 소품.
유일한 추리적 장치인 "범인의 유실물인 코트에 묻은 먼지"를 가지고 범인의 거주지를 알아낸다는 내용은 좀 억지스럽더군요. 당시 도시가 좁아서 거주지를 특정할 수 있었을 지는 모르겠지만요...

7. 모아브어 암호 :
뭔가 있을것 같다가 좀 허무하게 풀리는 단편.
제목 그대로 암호트릭은 아닙니다. "복잡하게 보이는 암호보다 그 종이 자체"에 집중한 트릭이죠.
트릭 자체는 꽤 매력적이지만 지나치게 산만한 느낌을 주어서 약간 아쉬웠어요.

8. 버너비 사건 :
상당한 수작으로 독살을 위한 색다른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정된 피해자의 특이한 체질이 전제조건이라는 약점이 있기는 하나 잘 짜여진 드라마와 반전으로 충분히 상쇄하고 있는 멋진 작품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 3편을 뽑는다면 "계획된 살인사건", "파란 스팽글" 그리고 "버너비 사건" 입니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는 "버너비 사건".

2023/09/30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도진기 : 별점 2점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4점
도진기 지음/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룸살롱에서 일하던 정유미, 그리고 그녀를 스토킹하던 아래층 남자 이필호가 함께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정유미의 집에 침입한 이필호가 정유미를 찌른 뒤, 정유미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이필호를 살해한 것 처럼 보였지만 이유현 반장은 아파트 경비 조판걸을 기소했다. 조판걸이 고진의 도움으로 풀려난 후 고진은 진범이 따로 있을거라며 자기 추리를 들려주었다. 이유현 반장은 고진의 추리대로 정유미의 애인 김형빈에 대한 수사에 나섰지만 김형빈의 탄탄한 알리바이는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전작에 이어 읽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 두 번째 작품.
범인이 아랫층 이필호 집 베란다를 통해 이필호 집으로 들어간 뒤, 내부 계단으로 정유미 집에 들어가 정유미를 살해했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이필호가 죽기 전 했다는 말 - 정유미를 자기 것으로 하겠다 - 과 통장에서 빠져나간 돈 등으로 설득력있게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고요. 윗층 남자가 들었던 '쨍그랑' 소리는 이필호의 열쇠를 베란다를 통해 던져 넣을 때 났던 소리라는 추리도 합리적이었습니다. 열쇠의 존재가 이필호 범인설을 무력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잘 짜여진 트릭이라 생각되네요.
무엇보다도 김형빈은 '노인 성애자'로 그 대상이 정유미의 가정부인 할머니 황금순이었으며, 질투에 눈이 먼 황금순이 정유미를 살해했다는 진상과 반전이 굉장히 강렬했습니다. 비현실적이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김형빈의 이상한 성적 취향은 정유미의 룸살롱 동료들 증언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도록 전개됩니다. 김형빈 모친 집에 강도가 침입했던 사건도 황금순의 질투 - 모친을 또 다른 애인으로 오해 - 를 설명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요.

그러나 이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깁니다. 우선 이유현 반장이 아무리 보아도 타당한 이필호 범인설을 놔두고 왜 제 3자 범인설을 포기하지 않는지부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형사들의 대화로 어떻게든 수사의 당위성을 펼쳐보려 하지만, 이필호가 범인이라는 심증만 굳게 만듭니다. 근거라는게 예를 들면 피해자가 죽기전 "강도!"라고 외쳤기 때문이라는데, 복면을 하고 침입했다면 누군지 모르는게 당연한거 아닙니까? 그 외의 주장들 역시 일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이보다는 이필호가 범인이겠지만 뭔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졌던 이유현이 고진에게 의견을 물었고, 고진이 사건 이야기를 들은 뒤 이필호 집 열쇠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다른 누군가가 상황을 조작했을 거라고 알려주는게 훨씬 바람직했습니다.
외부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필호가 범인일텐데, 경비원 조판걸을 범인으로 기소한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증거가 없다고 이유현 스스로도 인정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건 공권력을 가장한 폭력입니다. 고진의 몇 가지 주장에 반론도 하지 못하는 이유현의 모습은 한심과 무능 그 자체였고요.

이후 고진이 개입하여 김형빈이 범인일 수도 있다는 추리를 들려주면서부터는 더 기가 찹니다. 누가 봐도 김형빈이 가장 수상합니다. 정유미가 번 적지 않은 돈은 김형빈에게 흘러들어갔고, 김형빈은 현관 비밀 번호를 알고 있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유현의 수사를 통해 김형빈이 범인이 아니라는게 너무 빨리 밝혀져서 전개가 이상해집니다.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는 이유현의 무리한 수사와 김형빈의 반론으로 이유현이 망신당하는 과정이 반복될 뿐이니까요. 이런 점에서는 신인 작가라는 티가 물씬 나더군요.

"조판걸", "황금순" 같은 일상적이지 않은 이름들도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아래 <<아오이 호노오>>에서처럼 이름만 가지고도 캐릭터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해야 했습니다.

"굉장해! 이름만 읽어도 이미지가 떠오른다! 네이밍 능력이 장난아니야! 
이것이 일류 원작자의 힘이다!!"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이 많은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다소 변태적이면서 엽기적인 동기가 엮여 있다는 점에서는 에도가와 란포나 요코미조 세이시와 같은 일본 변격물 느낌도 전해주는데, 이런 작품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테고요. 그러나 전개면에서는 미숙한 티가 많이 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015/02/12

능숙한 솜씨 - 피에르 르메트르 / 서준환 : 별점 2.5점

능숙한 솜씨 - 6점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서준환 옮김/다산책방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명의 매춘부가 엽기적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베르호벤 반장은 두 사건이 2년 전에 있었던 다른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공통점은 현장과 시신에 가짜 손가락 지문이 남겨져 있었던 것, 그리고 어떠한 이유도 찾아낼 수 없는 범행 과정상의 디테일들이었다. 우연히 이 디테일들이 모두 유명한 추리소설을 모방했다는걸 알아낸 베르호벤은 탐정문학 전문지 광고로 범인과의 접촉을 시도하는데....

간만에 읽은 최신 프랑스 추리 소설입니다. 그동안 프랑스 추리소설들은 모리스 르블랑의 뤼뺑심농의 매그레 시리즈 외에는 딱히 취향이 아니어서 별로 손대지 않았었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과 표지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블로그 이웃과 커뮤니티의 호평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읽을 일이 없었을겁니다.

여러 면에서 프랑스 소설이라는걸 여실히 드러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 그리고 그 안에서도 많은 부분을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에 할애한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이건 제가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그리고 싫어했던 프랑스 소설들의 단점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꽤 재미있었습니다. 등장하는 범행들이 워낙에 자극적인데다가, 유명 작품들의 범행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설정이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뭔가를 따라 한 연쇄 살인은 흔한 설정이지만, 추리소설을 따라 했다는 작품은 처음 봅니다. 그런데 명작, 고전 취급을 받는 작품들을 모방했다는데 제가 읽은 작품은 달랑 한 작품밖에는 없네요. 이런 명작, 고전 선정은 작 중에 나오듯이 자의적인 판단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조금은 아쉬웠어요. 아무래도 제 취향이 수사물, 하드보일드보다는 고전 본격물 쪽인 탓도 크겠지만요. 참고로, 작중 명작, 고전으로 소개되는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브랫 이스턴 앨리스 "아메리칸 싸이코" : 작품 도입부에 소개된 두 명의 여성을 엽기적으로 살해한 범죄의 원전.
  • 제임스 옐로이 "블랙 다알리아" : 이전 여성 토막 살인사건의 원전
  • 마이 셰발 / 페르 발뢰 "로제안나" : 역시나 기이했던, 이전에 벌어졌던 살인사건의 원전
  • 윌리엄 매킬바니 "레들로" : 범인이 현장에 서명을 남긴 첫 번째 사건의 원전
  • 에밀 가보리오 "오르시발의 범죄" : 범인이 소설을 따라 벌인 첫 번째 살인

참고로, 제가 읽은 "블랙 다알리아" 말고 번역된 작품은 "아메리칸 싸이코"밖에 없군요. 못 읽은 게 당연하네요...

하여튼, 애호가를 자극하는 설정 외에도 놀라운 반전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1부 분량)이 사실은 범인이 쓴 소설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자 액자 소설 같은 구성이 드러나는 반전인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현대물에서도 이런 아이디어를 가진 작품이 계속 나온다는게 놀라울 뿐입니다. 베르호벤이 말발을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 소설 속 인물들과 실존 인물과의 차이를 설명하는 디테일도 아주 절묘했어요.

그러나 설정과 이러한 놀라운 반전 서술 트릭을 제외하고는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추리"라는 것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결국 범인이 기자 필리프 뷔송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니까요. 발랑제르 교수와 통화하다가 우연히 얻은 정보가 없었다면 영원히 알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최소한 아내가 죽을 때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까지 예상해서 범인이 모든 것을 안배한 것처럼 전개되고 있다는 건 전혀 합리적이지가 않죠. 범인이 무슨 신도 아니고....

이러한 우연, 그리고 범인의 안배를 제외하고는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한 베르호벤과 동료들의 수사는 모두 헛수고일 뿐이라 정말 명수사관이 맞는지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범인이 유명한 추리소설들을 모방하여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정도 재미는 있고 시선을 사로잡는 데는 충분하지만, 이러한 범행을 통해서 범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전혀 설명되지 않고요. 아니 설명되기는 하는데 작중 정신과 의사인 크레스트 박사의 말 - 사실은 미친 게 아니다 -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독자가 범인의 편지 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 - 제대로 미친 놈이다 -가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더군요.

작중 등장했던 괜찮았던 착안점, 즉 왜 "레들로" 사건은 실제로 스코틀랜드까지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는데 다른 사건들은 프랑스에서 재현했는지? 에 대해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등 떡밥 회수가 부실한 것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소설다운 장황한 묘사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갓 태어난 아기까지 참살한 필요 이상의 잔인한 묘사, 유명 화가인 어머니의 임신 중 흡연으로 키가 145cm에 불과하다는 베르호벤의 설정과 그에 따른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특히 베르호벤 설정은 과합니다. 키가 작다고 해서 대단한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니며 작품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는 부분도 없거든요. 그나마 덜 기형적인 툴르즈 로트렉의 창백한 복사판 운운하는 묘사처럼 독특한 캐릭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그냥 얄팍한 캐릭터 만들기에 불과한거지요. 장님이지만 작품에서는 특징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던 맥스 캐러도스가 연상되었습니다. 부하인 루이가 부유하다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에요.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캐릭터들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 주는 것은 좋지만, 이러한 만화 같은 설정이 과연 작품에 필요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를 위한 설정에 더해 읽는 재미도 괜찮고, 독특한 반전의 가치는 높습니다. 하지만 추리 소설로의 완성도는 그냥저냥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베르호벤 시리즈는 이어지고 이 작품과도 연계성이 있다고 하니 후속작도 읽어는 봐야겠네요.

2021/12/24

끝없는 살인 - 니시자와 야스히코 / 주자덕 : 별점 2점

끝없는 살인 - 4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투고 매니아 이치로이 고즈에는 귀가하다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습격을 받고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반격 끝에 겨우 살아난 그녀가 범인의 수첩을 끄집어 낸 덕분에, 범인의 정체가 구츠와 기미히코라는건 비교적 일찍 드러났다. 또한 수첩 속 기록으로 그가 일련의 연쇄 살인을 일으킨 범인이라는 것도 밝혀졌지만, 구츠와가 실종된 탓에 범행 동기는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범죄 전반의 권위자가 모이는 모임 '연미회'에서 비밀리에 이 사건을 논의하기로 하여, 고즈에도 모임에 참석했다. 연미회 멤버인 추리작가, 탐정 회사 경영자, 범죄 심리학자 등 참석자 5인은 각자 추리를 펼쳐 보이는데....

"맥주 별장의 모험"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 추리작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정통 본격 추리물입니다. 여러 명의 탐정이 하나의 사건을 놓고 각자의 추리를 펼친다는건 "독 초콜릿 사건"의 구성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본격물 팬은 즐길거리가 많아요. 다양한 추리가 폭넓게 펼쳐지고, 동기트릭에 대한 추리도 여러가지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치로이 고즈에가 살해당했을 뻔한 상황부터가 그러해요. 처음에는 범인 구츠와 기미히코가 살인 미수로 도주했다고 생각되었지만, 연미회에서의 추리 배틀(?)을 통해서 현장은 일종의 밀실이었다는게 드러나거든요. 뒤이어 사전 조사로 맨션 106호에 살던 고즈에의 이웃집이 비어있다는걸 안 범인이 도주할 때 그곳에 숨었다던가, 사건 직후 비명을 듣고 복도로 나와있던 102호 거주자 모미야마 케이이치가 범인의 조력자이자 진범이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관련된 추리가 이어집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추리는 경찰 나루토모가 당시 수사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게 밝혀졌다고 말해서 부정됩니다. 경찰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작중 고즈에의 말대로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는건 칭찬받아 마땅해요. 현장은 밀실이 아니라 피해자가 피해자인 척 조작했던 일종의 시간차 밀실 트릭도 꽤 그럴듯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추리 소설가나 전문가들이 탐정으로 나오기 때문에, 범인 구츠와 기미히코의 동기를 설명할 때 '미싱 링크'라면서 여러가지 추리물 고전을 들먹이는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또 단순히 추리 배틀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야기 도입부에 벌어진, 고즈에 살인 미수 장면이 사실은 더 이전 시점에 있었던 (구츠와 기미히코가 사라진 2월 15일) 사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있는 덕분입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이 쓰인 셈인데, 깜빡 속았네요. 뻔했던 고전적 설정에 이런 아이디어를 더해 현대적인 감성이 느껴지게 한 건 마음에 듭니다. 반전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이야기 중에 고즈에가 잠깐 집을 떠나 살았던 곳에 대한 언급 등 관련 정보가 제공됨은 물론, 고즈에가 이전에 4층에 살았는데 살해당할 뻔 한 뒤 이사간 곳이 1층이라는건 이상하다는 나루토모의 착안이 핵심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사건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초반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고즈에가 예전에 받았던 협박장과 협박 전화, 시가타의 이상했던 사고사는 초반에 이야기되었어야 했어요. 고즈에가 '연미회'에 이 사건을 의뢰한건, 구츠와 기미히코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지요. 하지만 범인이 가출했을 때를 즈음하여 고즈에에게 협박 전화와 협박장이 보내졌고, 그녀와 친했던 남자가 사고로 죽었다면 당연히 이를 범인과 연결하는건 당연합니다. 고즈에의 의문도 여기서부터 출발했어야 하는게 당연하고요. 이걸 아예 깨닫지도 못하다가 연미회 자리에서 알아채는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4년간 범인의 동기에 대해 고민했다는 그녀의 절실함도 설득력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추리들도 어떤건 재미있지만, 어떤건 비약과 억측이 심했어요. 고즈에의 말대로 '억지로 가져다 붙이려면 뭐든지 가능하다'는걸 증명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고즈에가 연쇄 살인범이며, 자기가 습격당했던건 조작이었다는 진상이 드러난 이후 설명은 최악이에요. 고즈에가 구츠와 기미히코를 죽인 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도움을 청했던 시가타가 경찰에 신고하려고 해서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구츠와를 살해한건 당연히 정당방위인데 왜 경찰에 바로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 깊게 사귀지도 않았던 남자가 부모보다도 더 믿고 의지할 만 했을지는 잘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그 뒤, 구츠와 기미히코 수첩에 적혀있던 하시타니 코지로를 찾아가 구츠와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물어본 것부터는 완전 억지에요. 하사타니는 그녀가 구츠와 기미히코를 죽였다는걸 눈치챘고, 사체 처리를 도운 뒤 그걸로 고즈에를 협박해 성 노리개로 삼았다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구츠와를 죽였다는 진상을 곧바로 눈치챘다는건 비약이 심할 뿐더러, 하시타니가 사체 처리에 협조한 이상 그 역시 빠져나갈 수 없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고즈에를 협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요. 차라리 고즈에가 하시타니를 공범으로 신고하겠다며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게 더 말이 되었을 겁니다.

사건 동기를 알아내기 위해 고즈에가 구츠와 기미히코 수첩에 적혔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다 죽일 필요도 없이 자기와 관련이 깊었던 하시타니만 죽이고, 현장에 수첩을 떨어트려 놓는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수첩에 적혔던 이름이 있으니 나머지는 경찰이 수사하면 되니까요. 오히려 초등학생의 경우는, 구츠와와 엮일 이유가 많지 않은 만큼 살아 있는 상태로 증언을 하게 하는게 훨씬 진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했다면 구태여 토네리 히로미 페이지를 뜯어낼 필요도 없었어요. 시점적으로 토네리 히로미가 먼저 죽은게 분명하니까요. 하시타니가 토네리 히로미라는 여성(가명을 쓴 고즈에)과 방을 빌렸다는게 드러났어도, 이는 구츠와와 피해자들이 어떻게든 엮여 있다는걸 강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범인이 초반에 누구인지 드러난 탓에, 후더닛이 아니라 와이더닛 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쪽 부분으로도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독자 투고는 처음부터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모두 독자 투고에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건 연미회 멤버들은 몰라도 독자들은 쉽게 집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토네리 히로미를 살해하려고 했던 구츠와가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해 다른 피해자들도 죽일 생각을 했고, 그 연결고리가 독자 투고였다는건 연미회의 슈타라가 초반에 언급했 듯 다소 뻔한 설정입니다. 무엇보다도 범인 구츠와와 살인 목록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된 피해자는 토네리밖에 없으니, 범인과 목록만 있다면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추리쇼따위는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주인공인 고즈에가 '무작위로 선정된 가짜 목표' 였었다는걸 알게된 후, 구츠와가 토네리에게 살의를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구츠와의 동급생 여학우들을 모조리 죽일 결심을 한다는 결말은 제가 뭘 읽었나 싶게 만들더군요. 이기던 게임 종료 직전 자살골을 넣은 선수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그나마 좋던 결과물을 다 망쳤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인 부분은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 트릭을 잘 사용한 전개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본격 추리물에서 가장 중요할 '공정성' 측면에서 큰 단점이 있고, 살인을 가볍게 여기고 희화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점합니다. 차라리 만화였다면, 아무래도 허구성이 강조되는 만큼 이런 단점이 좀 가려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2021/01/03

비숍 살인 사건 - S.S. 밴 다인 / 최인자 : 별점 1.5점

비숍 살인 사건 - 4점
S. S. 밴 다인 지음, 최인자 옮김/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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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드 교수 자택에서 조셉 코크레인 로빈이 화살에 찔려 죽었다. 범인이 비숍이라고 서명하여 보낸 마더 구스 동요 편지가 발견된 뒤, 동요대로 조니 스프리그, 드러커마저 살해당했다. 체스 연구가 파디가 자살하여 사건은 종결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어린 소녀 매들린 모팻마저 유괴되자 파일로 밴스는 행동에 나서는데....

'마더 구스' 동요에 따른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내용으로 반 다인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추리작가 협회가 선정한 '동서 미스터리 100'에서는 9위,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100'에서는 18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요.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밴 다인 (반 다인)의 파일로 밴스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기대치가 높지는 않았습니다 .몇 권 읽어 보기는 했는데, 명성과는 다르게 추리적으로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탓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 역시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무려 다섯 번이나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만, 마더 구스 동요에 맞춰서 일어났다는 특징 외에는 별다른 트릭은 없습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범인이 지나치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범인 딜러드 교수가 코크 로빈을 살해했을 때 드러커 부인에게 들키지 않은 것, 드러커를 살해할 때 미행하던 경찰에게 들키지 않은 것 모두 운에 불과하니까요.
드러커 부인 앞에서 드러커 살해를 이야기하여 심장마비로 사망케 한 것도 결과를 예상할 수 없었던 도박입니다. 부인이 큰 소리를 질러 교수가 범인이라고 외쳤다면, 아래 층에 있던 요리사까지 살해할 생각이었던걸까요?

범행 전개 과정도 정교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딜러드 교수는 드러커가 연구하던 노트를 훔치고, 아르네손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전기 의자로 보내버릴 생각이었습니다. 젊은 아르네손의 재능에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코크 로빈과 조니 스프리그는 죽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드러커만 험프티 덤프티라고 해서 죽이고 '비숍' 이라는 서명을 남기면 되니까요. 왜냐하면 비숍이 헨리크 입센이 쓴 "왕위를 노리는 자들" 속 악당 니콜라스 아르네손에서 유래되었다는걸 경찰이 눈치챌 수 있고, 그렇다면 이후 드러커가 쓴 연구 노트를 훔치기 전에 아르네손이 체포되고 사건이 끝나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장은 증거가 없어서 풀려나더라도, 경찰이 엄중 감시했을테니 나중에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같은 이유로 코크 로빈, 조니 스프리그, 드러커, 드러커 부인을 살해한 뒤 파디가 자살한걸로 꾸며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범인은 아르네손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파디가 진범이라고 경찰이 착각했던 탓에 교수는 매들린 모팻을 유괴해서 죽이려는 번잡스러운 추가 범행을 벌일 수 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아르네손에게는 드러커 부인을 비숍이 습격한 날,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동행했던 벨 양이 시계를 보지 않았어도, 연극을 봤다면 끝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알리바이를 깨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으니 소거법으로 모든 피해자들 스케쥴과 집 안팎을 꿰고 있는건 범인 딜러드 교수밖에 남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본격 추리물이라고 하기도 민망합니다.

전개도 짜증납니다. 특히 수사, 심문 과정이 그러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제대로 경찰에게 협조하는 인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탓입니다. 딜러드 교수, 드러커, 드러커 부인이 모두요. 요리사 비들은 심문도 아니고 단순한 사정 청취에 지독한 반감을 드러낼 정도입니다.
게다가 드러커나 드러커 부인이 한 말은 거짓말 투성이인데, 이를 추궁하지 않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컴 검사와 경찰은 드러커 부인이 불쌍한 여자라며 그냥 수수방관합니다. 그녀가 범인을 목격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또 드러커 부인을 살해하려고 온 범인이 비숍 말을 남겨두면 부인이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할거라고 여겼다는 추리도 어처구니가 없어요. 매컴 검사가 이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건 말이 안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컴 검사는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모르는 느낌입니다.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탐정 역을 자처했던 아르네손은 입센의 광팬이라 비숍의 뜻을 처음부터 눈치챘을텐데,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은 이유처럼요. 파디가 루빈슈타인과 대국을 하던 중에도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추리도 마찬가지에요. 45분 정도 시간이 빈 틈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을 수 있었겠지만, 루빈슈타인이 45분동안 숙고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루빈슈타인이 45분 숙고 시간을 요청했다는 설명 정도는 필요했습니다.

그나마 밴스가 인간 정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범죄는 수학자의 범죄라고 추리하는 정도가 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거는 빈약하고 설득력도 낮습니다. '장기간 심하고 지속적인 정신 노동을 하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기괴하기 짝이 없는 폭발을 낳으며, 아르네손은 균형 유지를 위해 항상 남을 비하하고 비웃는 식으로 감정 표출을 해서 범인이 아니니, 범인은 딜러드 교수일 수 밖에 없다'는게 전부거든요. 당연하게도, 스트레스가 심하면 가학적 본능에 따른 기괴한 범죄를 행한다는건 근거가 없습니다. 수학자들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주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그리고 이 논리라면, 항상 아이들과 놀고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드러커도 범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밴스는 드러커를 용의선상에 올려 놓았었죠. 자기 추리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 행동이었어요. 

이외에도 파일로 밴스가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장황하게 떠드는 묘사도 너무 많고 지루합니다.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묘사로만 줄여도 길이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에요. 이런 현학적 과시가 작품 특징이기는 한데, 저에게는 불필요하고 짜증나는 요소였습니다.

그나마 마지막에 아르네손을 몰래 살해하려던 교수를 술잔 바꿔치기로 대신 살해한 밴스의 행동만큼은 괜찮았어요. 매컴 검사는 "하지만 그건 살인이야!"라고 화를 내지만, 범인이 아르네손인지, 교수인지 증명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괜찮은 선택이었어요. 그리고 어차피 술은 둘 중 누군가가 먹게 될 테니, 이왕이면 범인이 먹는게 낫겠죠.
그러나 이 정도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절망적인 수준이며 마더 구스 동요를 잘 녹여내었다는 선구적인 아이디어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추리 소설 속 트릭의 비밀"에서 이 작품에 대해 '동요와 살인의 소름돋는 일치가 최대의 스릴이며, 그 절묘한 스릴을 제외하면 이 작품이 가진 대부분의 매력을 잃는다'고 말했는데, 그 말 그대로에요. 그러한 특이점 외에는 매력이 없습니다.

2023/09/29

방주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5점

방주 - 6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슈이치는 대학 동창들, 그리고 사촌형 쇼타로와 함께 유야의 별장에 놀라왔다가 유야가 발견했다는, '방주'라 불리우는 거대한 지하 시설을 찾았다. 일행은 버섯을 따러 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야자키 가족과 하룻밤을 '방주'에서 보냈는데, 지진 탓에 그만 갇히고 말았다. 
지하에서부터 물이 차올라 일주일 안에 탈출해야 했지만, 방법은 입구를 막은 돌을 떨어트리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돌을 떨어트린 사람 혼자 방주에 남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마침 유야가 살해되었고, 일행은 유야를 죽인 범인을 방주에 남도록 하자는 암묵적인 동의를 이뤘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 시간이 흘러가던 차에, 사야카와 야자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쇼타로가 추리쇼를 벌여 범인을 밝혀냈다.

2022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23년 '본격미스터리 10' 2위에 선정되는 등 최근 가장 뜨거운 작품. 추석 연휴를 맞아 읽어보았습니다. 찬사를 받은 이유는 바로 알겠더군요. 일반적인 클로즈드 써클 (클로즈드서클) 장르의 틀을 완전히 깨버린 덕분입니다. 이렇게 닫힌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한, 두편이 아닙니다. 산장이나 섬같은 고전적인 장소에서 현대적인 빌딩이나 기묘한 이공간 등으로 장소도 확장되어 왔고, 고립되는 이유도 폭설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서 정전 등의 현대적인 이유, 특수한 집단이 납치하여 게임을 벌이거나 좀비가 등장하는 식의 특수 설정까지 다양한 상황을 선보여 왔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고립된 장소도 독특하지만, '범행을 벌이는 동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범인 마이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원한따위가 아닙니다. 오로지 "고립된 장소에서 탈출해서 살아남기" 위해서에요. 게다가 이를 위해서 범행이 결국 밝혀지도록 유도하기까지 하고요. 전에 보지 못한 신선한 발상이었습니다.
고립된 장소인 '방주' 설정도 좋습니다. 출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물론, 반전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출입구와 비상구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오래전 과격 분자나 사이비 종교 단체가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방주 내에 이런저런 시설과 장비, 음식 등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로 말이 됩니다. 지하 3층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방주'의 존재감이 너무 확실해서 초, 중반부까지는 방주가 주인공인 느낌마저 전해줍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첫 번째는 '범인'에게 닻감개로 바위를 치우고 홀로 고립될 역할을 맡긴다는 암묵적인 동의입니다. 범인이 누구든간에 자기 범행이 드러났다고 그런걸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범인이 피트니스 센터 강사 류헤이였다면? 완력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기도 어려웠을테지요. 그리고 침수 중이라 시간 제한이 있다면 범인을 찾아서 희생하라고 설득하느니, 누구든 빨리 돌을 치워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구조를 기다리는게 빨랐을겁니다.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났어도 한나절 만에 올라온 산을 내려가는데 1주일이나 걸릴리가 없잖아요? 기본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설정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아무도 공기통을 활용하여 지하 3층을 지나 비상구로의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범인을 밝히는 것 외에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마이가 범행을 저지르는 일련의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물론 마이가 곧바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희생자(?)를 고르기 전에 상황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라는건 어느정도 말은 됩니다. 전에 '방주'에 왔던 경험이 있는 유야는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눈치챘을지도 몰랐기에 제일 먼저 죽였다는 것, 유야 사건에 증거가 남지 않고 모두가 범행이 가능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납득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야카의 핸드폰 속 사진이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나타낼 수 있어서 죽였고, 사야카가 핸드폰을 분실해서 어쩔 수 없이 목을 잘랐다 - 핸드폰이 안면인식으로 잠금 해제가 되는 모델이라 - 는 것까지는 그렇다쳐도, 애써 종이 타월을 가져오면서까지 증거 인멸을 위해 노력했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어차피 범인임을 드러내어 희생양이 될 목적이었다면 시체의 목을 자르다가 들통나는게 더 확실했을거에요. 제한 시간까지 기다리면서 범행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말이지요. 사체의 목을 자르는 행동이 의심을 불러 일으킬까봐 그랬다?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겁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고립된 사람들 앞에서는요. 마지막 쇼타로의 추리쇼에서 어떤 사진 때문에 사야카를 죽였는지에 대해 마이가 설명한걸 아무도 부정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또 마지막 추리쇼에서 마이가 범인이라는건 증명하지만, 앞서 쇼타로가 말했듯 "동기가 없다"는 이유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했다던가, 유야가 방주로 일행을 억지로 데리고 왔다는 등의 설정을 덧붙였더라면 좋았을겁니다.
마이가 탈출에 성공했다 한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실종과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려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테이프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유야의 손톱깎기와 지퍼백을 범인이 가지고 왔던 이유는 핸드폰이 방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억지스러웠습니다. 테이프 정도야 잊어버릴 수도 있지요. 지퍼백의 용도도 지나치게 국한되어 있고, 발표 시점에 생활 방수가 되지 않는 핸드폰을 사용하는 MZ 세대가 있을걸로 보이지도 않고요. 

이렇게 장점도 확실하고 단점 또한 확실한 그런 작품입니다. 돌직구 하나로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변화구도 적절하게 섞어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듭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그래도 한 가지 장점으로 정면 승부를 벌일만큼의 매력도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슷한 설정들에 지친 추리 소설 애호가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덧붙이자면, 10명에 불과한 등장인물 - 심지어 3명은 중간에 살해당함 - 과 폐쇄된 공간, 일주일의 시간 제한 등의 설정은 '무대'에 잘 어울릴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각색해도 괜찮은 연극이 될 수 있을것 같네요.

2015/01/21

유괴 - 다카기 아키미쓰 / 이규원 : 엘릭시르 : 별점 2.5점

유괴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이규원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트 치과 의사가 유괴 살인을 저질러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기무라 사건의 재판이 열리는 법정. 그곳에 완전 범죄를 꿈꾸는 한 남자가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본다.
이윽고 고리대금으로 거금을 모은 이노우에 라이조의 아들이 유괴되고, 기무라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치밀함에 경찰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뒤, 라이조는 거금을 들여 범인에게 현상금을 거는데...

다카키 아키미쓰의 장편. 파계재판의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 시리즈로 실제 있었던 유괴 사건을 소재로 쓴 작품입니다. 범인이 유괴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재판을 방청하며 얻은 정보로 완전 범죄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는 내용이지요.

약간은 도서 추리소설 스타일로 전개되는데, 실제 사건과 거의 동일한 기무라 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이노우에 가문에서 일어난 유괴 사건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흥미진진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범행의 "동기"와 범행의 과정만큼은 이쪽 장르 경쟁작들과 충분히 자웅을 겨룰 만 합니다. 특히 고령인 라이조의 나이를 감안하여 유산 상속을 노렸다는 진짜 동기는 정말이지 무릎을 칠 만큼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아들이 있고 특정한 유언이 없다면, 라이조 사후 아들에게 전 재산이 상속되지만 아들이 없다면 아내와 동생과 같은 친권자 기준으로 분배됩니다. 그런데 아내와도 이혼을 한다면? 이라는건 작중 내내 강조되는 라이조의 재산을 감안할 때 충분히 설득력이 느껴졌으니까요. 또 이 동기와 "실종 후 7년 동안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법적 조항이 맞물리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범행 과정 묘사도 실제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답게 생생합니다. 상세한 부분에서의 고민도 많이 느껴졌고요. 유괴 사건을 다룬 많은 작품들에서 제기되는 질문 - 결국 범인이 몸값을 어떻게 손에 넣을 것인가? - 에 대한 나름의 해석도 괜찮았습니다. 거짓말 탐지기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전해주는 등 당대 수사 기법에 대해 여러가지 정보를 전해주는 부분들도 마음에 들었어요. 거짓말 탐지기의 %에 대한 이야기나 부신 피질의 문제가 있으면 제대로 검사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고요.

또 당시 화제가 되었던 유괴 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점, 정신 감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견지하는 설정 등에서는 사회파적인 성격을 느끼게 해 주는데, 권말에 상당한 분량으로 수록된 '마사키 유괴 살인 사건'의 재판을 다룬 논픽션이 그 방점을 제대로 찍어줍니다. 논픽션으로서도 뛰어나지만 실제 작품과 여러모로 연결되어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 주기 대문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를 놓고 본다면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치밀하고 흥미진진했던 범행 과정의 묘사에 비교하면 후반부는 너무 쉽고 어설픈 탓입니다. 범인을 지목한 이유가 "범인이 기무라 재판을 방청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재판이 보도된 신문을 연구하는게 훨씬 안전하고 손쉬웠을텐데 구태여 방청을 한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을 뿐더러, 범행이 성공한 이후 무가치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기무라의 운명을 알기 위해 방청을 계속했다는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범인이 관련된 장소에 당당히 얼굴을 내민다는 것도 비상식적인 행동이라 생각되고요.

이렇게 근거 없는 추리와 설명할 수 없는 범인의 무의미한 행동이 결합된, 그야말로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우연으로 보이는 전개는 또 있습니다. 다에코에게 불륜남이 때맞춰 전화하여 라이조에게 이혼 결심을 하게 만드는 장면, 오카 다미코의 죽음과 오카야마 도시오의 도주로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부분 등이 모두 그러합니다.

또 햐쿠타니 센이치로와 그의 아내가 라이조가 내건 현상금에 눈이 멀어 사건에 뛰어든다는 동기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너무 억지로 시리즈로 끌고가려는 느낌이었달까요. 차라리 시리즈가 아니라 사건을 수사하던 에노모토 경위 그룹에서 햐쿠타니 센이치로와 같은 발상의 전환으로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는다는 식으로 풀어내는 게 어땠을까 싶어요. 아니면 최소한 햐쿠타니 센이치로가 기무라 재판에 방청객, 혹은 참고인으로 참여했다가 범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내용이라도 나와 주던가요.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어머니 다에코의 공작에 의해 범인으로 확정된다는 결말도 깜찍하기는 하지만 현실성은 약합니다. 누군가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한 가장 유치한 수준의 공작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그 어떤 증거도 없는 인물의 집에서 유력한 단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바로 범인 취급을 해 버리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낭패를 볼 겁니다. 제가 봤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근거도 제법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본격 추리의 향취도 나면서도 사회파적인 느낌도 전해주는, 과도기의 교량 역할을 잘 해주고는 있지만 이러한 단점들로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 중에서는 아래에서 순위를 다툴만한 작품입니다.

2023/02/12

황제의 코담뱃갑 - 존 딕슨 카 / 전형기 : 별점 5점

황제의 코담뱃갑 - 10점
존 딕슨 카 지음, 전형기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브는 이혼 후 거주하던 프랑스 휴양지 바로 옆 집에 사는 로스 경의 아들 토비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한 전남편 네드 애트우드가 한 밤중에 몰래 침실로 숨어든 날, 둘은 로스 경이 살해당한 직후를 목격했다. 토비를 비롯한 이웃 가족의 오해를 살까 두려웠던 이브는 이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그러나 애트우드가 빠져나가다가 계단에서 굴렀을 때 흘렸던 코피와 로스 경이 살해될 때 만지고 있었던 코담배 케이스 파편이 잠옷에 묻어 있었던 등의 증거와 이브를 미워하는 하녀 이베트의 증언 탓에 유력한 용의자로 몰렸다. 결국 이브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모든 사실을 고백했지만, 정작 애트우드는 뇌진탕 탓에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선건 영국인 정신분석 전문의 킨로스 박사였다.

존 딕슨 카의 대표작 중 하나. 구입해서 읽은지는 오래되었지만, 얼마전 <<마녀의 은신처>>도 읽은 참에 국내 출간작 전권 리뷰를 올리고자 재차 읽게 되었습니다. - 참고로, 엘릭시르의 새 출간본은 아니고 동서문화사 판본입니다. - 역시나, 다시 읽어도 걸작이더군요. 이웃집에서 일어난 수상한 사건을 목격했다가 위기에 빠진다는건 <<이창>> 등 여러 작품에서 사용된 소재이기는 한데, 이 작품은 1942년이라는 발표 시점을 보아도 원조격인데다가 목격자가 오히려 범인으로 몰린다는 독특한 전개부터 굉장한 긴박감을 자아냅니다. 전남편과 벌인 다소 우발적인 사고, 주인을 미워하는 하녀의 돌발 행동 등이 겹쳐져 이브가 범인으로 몰리는 과정도 꽤 설득력 넘치고요. 사건 직후 피묻은 잠옷을 입고 집으로 들어왔다는건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니까요.

킨로스 박사의 말 하나하나 모두가 논리적이며, 그의 지극히 논리적인 추론이 바탕이 된 이야기 전개가 많다는 점도 추리 애호가로서 반가왔습니다. 토비가 그날 밤 일을 고백한 이브를 추궁할 때 킨로스 박사가 그를 몰아붙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토비는 그녀가 애트우드와 침실에 있었으니 자신을 배신했다면서, 또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게 아니냐고 추궁하는데 킨로스 박사는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며 토비의 입을 닥치게 만들지요.
이브를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고롱 서장을 설득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브에게는 동기가 없거든요. 고롱 서장은 로스 경이 이브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살해당했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로스 경은 그날 이미 토비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토비는 그 때문에 이브에게 전화까지 걸었습니다. 즉, 그게 무슨 비밀이건 약혼자가 이미 알고난 다음이기에 로스 경을 죽일 이유는 사라져 버리고 만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범인을 밝혀내는 마지막 추리쇼입니다. 박사는 사람들에게 범인인줄 알았던 갈색 장갑의 정체를 먼저 알려줍니다. 그건 토비였어요. 그는 정부인 프뤼 양이 이브와의 결혼을 훼방놓는걸 막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버지 소장품 중 하나인 드 랑발 부인 목걸이를 훔쳐서 프뤼 양에게 주려고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킨로스 박사는 이브가 이야기했던 사건 당일 서재에서 일어난 일 중 이브가 목격하기 전 상황은 모두 애트우드가 해 준 말에 지나지 않았으며, 암시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었던 이브는 이를 자기가 목격했던걸로 착각했던 거라고 설명해줍니다. 애트우드는 이미 로스 경을 살해하고 이브의 침실에 침입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로스 경이 살아있는 척 꾸민 뒤, 그 상황을 드러내는걸 가장 싫어할 이브를 통해 증언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던거에요. 재니스 로스 양의 말 그대로 "여자에게 나쁜 소문이 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다물게 하고, 스스로는 조금도 꺼릴 것이 없는 목격자가 실은 범인이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킨로스 박사는 먼 곳에서 본 물건을 '코담배 케이스'라고 말했다는 실수를 통해 애트우드가 범인이라는걸 알아냅니다. 코담배 케이스는 그냥 보면 회중시계와 똑같이 생겨서 첫 눈에 알아보는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마지막에 말한 뒤, 예심판사 사무실 문을 열어 범인 애트우드를 선보이는 장면 - 애트우드는 뇌진탕에서 회복한 뒤 토비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기 위해 억지로 찾아왔던 것 - 은 역대 추리쇼 등장 작품 중에서도 첫 손을 꼽을만한 마무리였습니다.

정확한 내용을 몰랐던, 사건 당일 로스 경이 산책을 갔다 온 이후 왜 기분이 나빴는지, 동물원에서 누군가를 왜 만났었는지가 애트우드의 동기와 이어지는 전개도 깔끔했습니다. 이를 로스 경이 형무소 관련 업무를 진행하며 만났던 재소자 얼굴을 기억했다는 과거 이야기와 절묘하게 연결시키는 덕분입니다. 로스 경은 애트우드가 전과자이자 탈주범이라는걸 알고 있어서, 자기 아들과 이브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애트우드를 쫓아내려고 경고했다가 살해당했던 것이지요.
그 외의 여러가지 추리적인 장치들과 복선들 - 사건 현장에 떨어져있던 드 랑발 부인 목걸이에 혈흔이 묻어있었던 이유, 오르골 태엽이 풀려있었던 이유, 하녀 이베트가 이브를 옭아매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 등 - 에 대한 설명도 확실합니다. 목걸이에 혈흔이 묻어있던던 건 목걸이를 훔쳐내려다 아버지가 죽은걸 알고 허둥대던 토비가 묻혔던거지요. 오르골 태엽은 그 와중에 동작해서 풀렸고요. 이베트가 이브를 잡아넣으려고 노력했던건 그녀가 프뤼 양의 친언니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수수께끼가 완벽하게 정리되기에 마지막까지 읽으면 굉장히 후련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어요.
아울러 추리적으로는 일종의 독자에의 도전이 삽입되어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 합니다. 킨로스 박사가 이브에게 그날 밤 일어났던 일을 듣고 범인을 알아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도 그 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보았고, 그 장면만 알면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다는걸 선언한 셈입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다만 지금 읽기 다소 낡은 설정은 있습니다. 이브가 초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사건을 방관해 버렸던건, 약혼자 가족이 이웃집에 살고 있어서, 침실에 숨어든 전 남편을 어쩌지 못한 탓 - 들켜서 오해를 살까봐 - 이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애트우드와 토비가 버젓이 바람을 피우면서 이브에게 정숙을 강요하는 행태도 그러하고요. 너무 뻔뻔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참고로, 에드보다 오히려 토비가 더 극혐이었습니다. 순진한 척을 다 하다니 알고보면 뒤에서는 다른 여자에게 돈을 요구받을 정도로 놀아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만 하면서 이브를 차버리는 장면은 정말 기도 안 차더군요.
이브가 남자 복이 너무 없고, 남자들 유혹(?)에 너무 쉽게 빠지다는 것도 낡은 설정이고요.
또 시계처럼 생긴게 알고보니 "코담배갑"이었다는게 핵심인데, 이걸 비교적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것도 낡아보였습니다. 최근 작품이라면 이렇게까지 드러내지는 않았을거에요. 하긴, 이 작품은 아래와같이 책 표지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알려주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걸작이라는걸 부인하기 힘든 멋진 작품입니다. 이브와 킨로스 박사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해피엔딩까지 완벽합니다. 제 별점은 5점입니다. 오컬트 분위기 전무한, 일종의 영웅담에 가까운 정통 추리물이니만큼 딕슨 카 입문자라면 이 작품부터 시작하는게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that woman opposite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는데 유튜브에 Full Movie가 올라와 있네요. 애트우드의 암시로 이브가 착각하는 장면을 어떻게 찍었을지 궁금해서 잠깐 봤더니만, 걍 말로 퉁치고 끝나서 실망했습니다. 오래전 작품이기는 하지만 연극과 다를게 없는 평면적인 구성에 그쳤더라고요. 게다가 마지막에 애트우드가 이브를 없애려고 찾아오는 장면을 삽입해서 더 영웅담처럼 각색했던데,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