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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6

경성의 건축가들 - 김소연 : 별점 2.5점

경성의 건축가들 - 6점
김소연 지음/루아크

일제 강점기 당시 유명 건축가들에 대해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예전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던 기사에 몇 가지 항목을 추가하여 한 권으로 만든 책이지요 .

장점은 일제 강점기 당시 '건축가'들의 이력과 삶, 활동 내역과 그 결과물을 통해 당시 조선에서의 젊은 엘리트들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조선에서 건축가로 활동하기 위한 유일했던,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이력이 조선 총독부 근무였다는 겁니다.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던 건축가 박길룡을 비롯, 박동진, 김세연, 김윤기 등이 그러했을 뿐더러, 심지어 3.1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로 애국 청년이었던 박동진마저도 조선이 일본 차지가 된 현실을 인정하고, 늦은 학부 졸업 후 조선 총독부에 들어갈 정도였다니 말 다했지요. 

게다가 박동진은 총독부 근무 후, 온돌마저 폐지하자고 주장할 정도로 급진적인 근대화를 추구했다는데, 이런게 당시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초상이었을 겁니다. 애국 청년이라도 일본의 돈을 받아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결국 이들이 건축계의 주류가 된 것 처럼, 당대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는 유학파 청년들 대부분이 이러했을테지요. 

물론 건축가는 근대적인 대형 건축물 건설을 경험하려면 총독부에서 일할 수 없었을테니 다른 직업군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초상이자 표본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들의 조선 총독부 근무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이들은 일종의 파벌을 이루어 몰려다니고, 근무가 끝난 뒤 일종의 아르바이트도 함께 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러한 전통적인 코스 외에 다른 길을 걸어간 건축가들에 대한 소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조선 최초 유학파 건축가인 박인준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항일 독립 운동을 하다가 상하이로 도주, 그 뒤 미국으로 망명 유학하여 시카고와 미네소타에서 건축을 전공했다는 그의 이력부터가 특출난 탓입니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니까요. 일본 땅이 된 조선에 귀국해서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지만, 항일 사건으로 학교를 떠난 뒤 개업했지만 일본어도 잘 못하고, 총독부 인맥도 없어서 수주에 곤란을 겪었고 해방 후 행적은 불명이라는 후일담은 씁쓸했고요. 이런 분이 좀 잘 되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가난하게 산다는게 허언은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 드네요.

독립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미국인 선교사 보리스의 건축사무소에서 건축을 배운 뒤 귀국해서 주로 종교 관련 건축 작업에 종사했던 강윤 역시 행복한 말년을 보내지 못했다니, 더욱 아쉽습니다. 그 외에도 조선에서 일했던 일본인 건축가들과 유명한 선교사이자 건축가였던 윌리엄 보리스까지 소개하고 있으며, 전통 건축 장인들이 당시 널리 보급되었던 문화 주택 건설에 참여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 등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내용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처럼, 건축가로 보기는 힘들 뿐더러 그 일대기가 잘 알려진 인물을 이 책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소개된 건축가들의 대표작 등 관련된 도판 소개가 부실하다는 약점도 크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건축, 건축가보다는 일제 강점기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08/08

빛의 현관 - 요코야마 히데오 / 최고은 : 별점 2.5점

빛의 현관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품이 꺼진 뒤 몰락해버린 건축업계에서 친구 오카지마의 도움으로 겨우 설계일을 이어나가던 아오세는, 의뢰인 요시노로부터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고 평생의 걸작인 Y주택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요시노 가족이 Y주택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아오세는 그들의 행적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옛 유명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존재가 깊숙히 개입되어 있다는걸 알아채는데....

원제는 "노스라이트"로 2020년에 발표되었던 요코야마 히데오의 최신작입니다. 2020년 당시, 온갖 순위를 휩쓴 작품이지요. '202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국내편 2위, '2020 주간문춘 베스트 미스터리' 1위, '2020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2위 등을 차지했었습니다.

건축가가 주인공인 추리 소설은 보기 드뭅니다.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건물들이 사건의 무대가 되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는 건축가가 주인공이라고 볼 수는 없고, "낯선 승객"은 주인공 거이가 건축가지만 내용은 건축과는 무관했지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 아오세가 직접 설계한 건축물인 Y주택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심혈을 기울인 Y주택에 의뢰인 가족이 이사오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 하며 직접 찾아 나선 설정과 동기는 지극히 건축가스러우니까요.
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알게 된 외국인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설명들은 나중에 아오세가 건축가로 더욱 성장하여 미술관 공모전이라는 큰 도전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아오세의 가족 복원에도 도움을 주고요. 이 정도면 건축가가 주인공이며, 건축물이 주요 소재인 추리물이라고 하기 충분하겠죠.

물론 주인공 아오세가 평범한 건축가인 탓에 대단한 추리력이나 수사력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일반인으로서는 최선을 다한 수사와 나름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꽤 괜찮습니다. 요시노 가족을 찾을 때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 가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진품이 희귀한 덕분입니다. 그래서 요시노 도타라는 의뢰인의 뿌리를 알아내는 과정도 타당했고, 아오세가 브루노 타우트를 알아가는 과정은 독자도 함께하는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Y주택을 짓게 된 의뢰는 요시노 가족이 아니라, 이혼한 전처 유카리의 바램에서 비롯되었다는 진상을 알아내는데까지의 전개도 자연스럽습니다. 아오세와 유카리가 함께 살 때 이야기했던 내용을 복선처럼 앞에서 드러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따뜻한 가족 관계의 복원을 암시하는 마무리는 완전 제 취향이었고요. 저는 해피 엔딩을 좋아하니까요. 이야기를 시작하는 소재이며 가족 관계 복원의 핵심인, 이른바 '노스라이트'를 끌어들여 빛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는 Y주택에 대한 묘사도 엄청납니다.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매력적이었어요. 드라마화 된 영상물에서의 모습은 생각보다 작고 볼품없는 모양새라 실망스러웠지만요.

2020년 발표작인데, 아오세와 주변 인물들이 버블로 몰락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특이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극초반을 무대로 하고 있는 탓으로, 이 시기가 무대인건 1930년대 일본에 잠깐 머물렀던 브루노 타우트와 등장인물들이 연결점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됩니다. 1930년대 당시 브루노 타우트를 어린 나이에 만난 뒤, 요시노 이사쿠는 타협없는 깐깐한 장인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상황을 목격했던 90대의 야마시타 구사오가 살아서 아오세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시노 도타는 요시노 이사쿠의 손자라고 설정해도 되고, 야마시타 구사오의 증언도 일기나 편지 등의 형태로 남아있었어도 무리는 없었을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아오세가 버블 경제의 쓴 맛을 톡톡히 보았다는 설정을 위해 이 시기로 무대를 설정했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하여튼, 이렇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아주 좋은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광의의 미스터리'로 볼 수는 있지만, 정통 추리 소설은 아닌 탓이 가장 커요. 요시노 가족의 실종을 추적하는 과정만큼은 추리 소설인데, 진상이 드러나는건 뒤에 다시 설명드리겠지만 결국 주요 등장인물들의 증언이 전부니까요. 

요시노 가족의 실종이 아오세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요시노 도타의 아버지 이사쿠와 아오세의 아버지가 구관조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다가 아오세의 아버지가 절벽으로 추락사했던 과거의 속죄를 위해서라는 설정부터가 그닥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요시노가 아버지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3천만엔의 거금을 쓴다는건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딱히 대단한 애정을 품지 않았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살아 생전 듣지 않았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거금을 쓴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지요.

등장인물들이 서로 인연을 더듬게 되는 이유도 '아오세', '요시노'라는 성이 특이하다는 탓이 큰데,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일본인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오세라면 모를까 요시노가 그렇게 특이한 성은 아니지 않나요? 유명한 규동 체인점 이름도 '요시노야'인데....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온갖 순위를 휩쓸었는데에도 불구하고, '2020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걸로 짐작됩니다.

브루노 타우트 비중이 너무 크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작 중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묘사, 타우트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부분 등은 읽으면서도 한편으로 타우트의 작품을 계속 찾아보게 만들게끔 잘 쓰여져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타우트와 그의 작품들이 이야기에 꼭 필요했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요시노 이사쿠가 브루노 타우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장인이라는게 이 작품에서 유일했던 브루노 타우트의 존재 이유인데, 자존심으로 버티는 장인이 딱히 그런 공예가일 필요는 없잖아요? 이런 장인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가 Y주택에 남아 있던 덕분에 요시노 이사쿠의 과거가 일부 드러나게 되지만, 이 역시 사건을 밝히는데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스쳐지나가는 오카지마의 말이 진상을 밝히는 결정적 단서가 되지요. 탐정이 아오세에 대해 조사했다는 말이었는데, 아오세는 이를 통해 탐정을 이용하던 요시노가 전처 유카리를 직접 만났다는걸 알아냅니다. 그리고 유카리가 직접 요시노의 의뢰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요. 그 뒤 목적이 아버지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였다는건 아오세가 요시노로부터 직접 듣게 됩니다. 

이렇게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증언으로 밝혀져서, 추리도 무의미할 뿐더러 브루노 타우트 엮일 이유는 마찬가지로 없습니다. 브루노 타우트와 연인 에리카의 관계도 확대 해석한 느낌이고요. 이런 점을 보면, 작가가 큰 감동을 받은 브루노 타우트를 어떻게든 끌어들여 작품을 쓰려고 했던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네요.

아울러 전체 분량의 2/3가 지난 시점부터 클라이막스까지 이어지는, 아오세가 근무하는 오카지마 건축 설계 사무소 이야기는 앞서의 요시노 가족 실종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뿐더러, 너무 뻔했습니다. 대단치 않은 부정 - 택시비 대납 - 탓에 궁지에 몰린 오카지마가 사고로 죽은 뒤, 그가 남긴 설계안을 바탕으로 사무소 직원들 모두가 힘을 합쳐 공모안을 완성한다!는 내용은 철지난 열혈 청춘 드라마와 다를게 없으니까요.

게다가 아오세를 중심으로 한 직원들이 공모안을 완성시킨 뒤, 이를 공모전에 참여하는 대형 건축 사무소의 소장 노세에게 가져간다는 결말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설계안은 무상으로 넘기고, 이름 올려달라는 말도 안 할테니 나중에 오카지마의 아들에게 네 아버지가 지은 건물이라고 말하게 해 달라? 대체 뭘 위한 노력이었을까요? 뻔한 열혈 청춘 드라마도 요새 이렇게 쓰면 욕을 먹을 겁니다. 이미 인생에서 쓴 맛을 여러번 겪었을 아오세가 한 말이라는게 믿어지지 않네요. 이보다는 오카지마는 죽었지만 공모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남은 직원들이 힘을 합친 결과물이 선정된다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후지미야 하루코의 유족이 오카지마를 지지했다는 설정은 남아있는 만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요. 

오카지마의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었다던가, 마유미와 오카지마의 은밀한 관계 등은 구태여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가족간의 애정은 꼭 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조금 더 세련되게 풀어냈어야 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입부는 흥미로왔고, 건축 관련된 묘사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가족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가 만드는 메시지도 뭉클했고요. 그러나 브루노 타우트에 관련된 내용 비중이 지나치고, 클라이막스와 결말은 뻔하고 납득하기도 어려워 감점합니다.

2020/11/29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의자들 - 아가타 토로마노프 / 최다연 : 별점 3점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의자들 - 6점
아가타 토로마노프 지음, 최다연 옮김/시공문화사

의자는 제품 디자인의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도가 명확하고, 역사도 오래되어 새로운 게 많이 나올 것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소재와 구조를 연구하여 계속 진화하고, 발전해 나간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디자이너들의 도전 정신을 일깨우는 주제인 셈이죠. 요리로 따지면 라면같달까요. 그래서 의자 디자인을 좋아하고, 관심도 많아서 이런 저런 책 - "명작 의자 유래 사전", "의자의 재발견", "세상을 바꾼 50가지 의자" 등 - 을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조금 특이합니다. 의자 디자인만을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목 그대로 유명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건축물과 그들이 디자인한 의자를 각각 한 페이지씩 서로 비교하며 소개하는 구성이거든요. 의자와 건축의 연관성을 깊게 느끼게 만들 목적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 보면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사상이 의자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게 명확하게 드러나서 재미있었습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프랭크 게리, 마리오 보타 등 건축계 거장들이 디자인한 의자들은 딱 보면 그들의 건축물과 곧바로 연결될 정도로 이미지가 강하고 확실합니다. 심지어 아예 건축물을 위해서 디자인된 의자들은 두말하면 잔소리겠지요.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토르셀 스피릿 하우스와 스피릿 하우스 체어, 쿠마 켄고의 GC 프로스토 박물관 리서치 디자인 센터와 GC 체어, 위엘 아레츠의 라이트쉐 라인 칼리지와 LRC 체어는 의자 자체가 건축물의 일부라 생각될 정도였어요.

물론 앞서 말씀드린대로, 의자 자체를 혁신적으로 디자인한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유명 건축가들은 유명 디자이너이기도 하니 당연하겠죠. 특히 미스 반 더 로에가 1929년에 디자인한 바르셀로나 체어와 1968년에 디자인한 베를린 신 국립 미술관 모두 지금 보아도 촌스럽지 않은, 아름다운 디자인이라는게 놀랍습니다. 단순함과 균형감이 핵심이라고 하는데, 이런 디자인을 해 보고 싶어지네요. 바르셀로나 체어는 꼭 구입해서 앉아보고 싶은데, 천만원이 넘는다니 과연 생전에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리처드 마이어의 1978년 작품인 암체어 810과 2006년 디자인 된 아라 파키스 박물관도 같은 맥락입니다. 완벽한 비율, 기하학적 구조의 완벽한 균형감이라는 점에서요. 과한 장식이나 패턴보다는 이런 작품들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 의자는 유명하지만 반대로 건축가로서의 작품은 잘 알지 못했던 디자이너들의 건축물 소개도 반가왔습니다. 게리트 리트벨트가 대표적입니다. 그가 디자인했던 레드 블루 체어는 몬드리안의 작품과 유사해서 유명한데, 건축물은 처음 보았네요. 건축물 역시 기하학적으로 사각형 평면을 강조했으며, 포인트 컬러가 선명하다는 점에서 레드 블루 체어와 연관성이 느껴지는데 실제로 보고 싶어집니다.  

그 외 이소자키 아라타가 1973년에 디자인 한 마릴린 체어는 유명한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디자인을 유머스럽게 재해석했다는게 눈에 띄더군요. 론 아라드의 3 스킨 체어도 역동적인 형태가 과장되어 유머스럽게 느껴졌고요. 건축가들의 의자는 딱딱하고 기능적일거라는 인상이 짙은데 이를 깨 주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책의 구성과 디자인, 도판 역시 취지에 걸맞게 높은 수준이라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의자에 비해 대표작 건축물 소개는 여러모로 조금 부족했습니다. 유명 건축가의 경우, 대표작이 많을텐데 한 개만 선정된 것도 그렇고, 실내, 외가 모두 중요할텐데 사진이 딱 한장만 실려있어서 전체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종의 화보처럼 설명은 최소화하고 있는데, 의자의 캔틸레버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 정도는 별도로 해 주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단점은 크지 않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조금 부족하지만, 책의 취지를 살리는데에는 충분했습니다.

2023/07/25

'젊은 모색 2023' 관람

지난 달의 '게임사회' 전시에 이어, 이번달에 관람한 전시입니다. 회사에서 매달 실시하는 문화 행사를 이용하였습니다.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집에서 가까워서 딸 아이가 어릴 때 자주 데리고 갔었던, 여러가지 추억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평일에 혼자서 방문한건 처음이네요. 이렇게 또 추억이 하나 쌓여 갑니다.

언제나 방문하면 찾아보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과 큰 화분을 둘러보고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저 큰 화분 위에 뭐가 있나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살짝 봤더니, 평면에 올록볼록하게 뭔가 나와 있는 형태더군요. 싹이 나기 직전의 무언가를 입체화한 것일까요? 살짝 궁금해집니다.
이번에 찾은 전시는 '젊은 모색 2023' 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신인 작가 발굴을 위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정례전이라고 하네요.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번 전시는 주제가 전시의 무대가 되는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으로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순수 미술 뿐 아니라 건축가, 가구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등 다양한 직군의 작가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고요. 같은 이유로 제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도 굉장히 직관적으로 쉽게 느껴지는 작품들도 있었고, 제 이해 수용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는 작품도 있었고요.

아무래도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작품들에 더 눈길이 많이 갔는데요, 대표적인건 과천 현대 미술관이 주제라면 누구나 생각해봄직한, 미술관 자체를 미니어쳐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공간 및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인 씨오엠 COM의 작품입니다. 누가 보아도 미술관임을 알 수 있는, 원뿔모양의 형태가 돋보이는 미니어쳐가 특히 귀여웠는데, 더 작게 만들어서 뮤지엄 샵에서 팔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미술관이라는 공간 내에서 가장 존재감이 있는 사물인 기둥에 초점을 맞춘 작가가 여러명 있는건 신기했습니다. 작가들도 깊은 연구와 고민보다는,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사물에서부터 아이디어를 발산하는게 더 용이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오브젝트 자체로도 괜찮았으니 선택했겠지만요. 당연히 작품들 수준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시에서 시작하여 사진, 조각, 설치 미술 등 작품들이 보여주는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도 보는 재미를 더해 주었고요. 이 중에서는 개인적으로는 건축가인 김현종 작가의 <<범위의 확장>>이 가장 좋았습니다. 기둥을 손대지 않고 감싸서 새로운 무언가로 어색하지 않게 만들었다는게 좋았어요. 건축가답게 건축의 핵심 구조이지만, 전시장에서는 애물단지인 기둥에 대한 애정이 담뿍 느껴졌습니다.
미술관의 공간과 환경에 집중한 작품도 인상적이었는데, 아래 황동욱 작가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빛과 바람의 흐름, 움직임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키네틱 아트인데, 정말로 자연이 느껴지는 듯한 부드러운 움직임과 효과가 좋았어요.
 

그런데 이런 결과물이라면, 구조물 없이 원통 공간 안 360도를 커버할 수 있도록 빔 프로젝터 여러대를 설치하여 보여줄 수도 있어 보였어요. 원통형 공간에 적합한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제품이 나와도 괜찮겠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제 베스트는 추미림 작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평면 작업이지만 빔 프로젝터를 활용하여 시간의 이미지를 씌운 <<횃불과 경사로>>도 인상적이었고, 과천 미술관을 단순하게 시각화한 평면 작업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습니다. 미려한 그래픽으로 과전 현대 미술관을 잘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한 점 정도 집에 걸어두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 외에도 아래와 같이 여러 작품들을 감상하며 오랫만에 여유를 즐기며, 힐링하고 감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관람을 마치며 제가 '국립 현대 미술관 과천'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라면 뭘 만들었을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라면 과천관의 가장 유명한 소장품인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가지고 새로운 미디어 아트를 만드는 시도를 해 보았을 것 같아요. VR로 다다익선을 뒤집어서, 감상하는 사람이 TV가 안쪽으로 쌓여진 탑 안에 들어가 있는 형태로 감상할 수 있도록요. 과연 어떤 광경을 보게 될까요? 거울로 된 구 안에 사람이 들어가 발광한다는 에도가와 란포 작품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2016/08/28

비밀기지 만들기 - 오가타 다카히로 / 임윤정, 한누리 : 별점 2점

비밀기지 만들기 - 4점 오가타 다카히로 지음, 임윤정.한누리 옮김, 노리타케 그림/프로파간다

일본의 기지학회 회장이라는 건축가 오가타 다카히로의 저서로, 이런저런 독특한 책들을 내놓고 있는 출판사 프로파간다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동안 프로파간다에서 출간했던 책들을 몇 권 읽어보았었는데, 컨셉은 괜찮지만 정작 결과물은 여러모로 애매했었고 이 책 역시 딱 그렇습니다.

우선 주 독자층이 누구인지 불분명합니다. 어린 시절 비밀 기지를 만들어 본 적이 있거나 그러한 것을 동경하는 키덜트들인지, 아니면 여러 '비밀 기지'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어요.
첫 번째 독자층인 '키덜트'들을 위해서는 설문 조사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밀 기지를 나름대로 분류하여 소개하는데, 내용만큼은 나쁘지 않습니다. 일러스트도 괜찮고요. 하지만 설명이 너무 빈약합니다. 아동용 그림책 수준의 내용에 불과합니다. 이 내용이 페이지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요.
저는 앞서 이야기한 독자층 중 후자에 가까운 독자이기에 실망이 더 컸습니다. 토관이라는 소재가 등장할 때마다 언급되는 "도라에몽"이라던가, 비밀 기지가 큰 역할을 차지하는 "20세기 소년" 등의 작품을 소개해 준다던가, 역시나 작중에서 언급된 대로 "스탠 바이 미"에서의 비밀 기지 장면을 보여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동서고금의 역사와 다양한 콘텐츠에 등장했던 비밀 기지를 선보여 주기를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함께 수록된 전문가들을 위한 듯한 콘텐츠도 내용이 애매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파크라는 공원 소개에 대한 칼럼은 비밀 기지가 아니라 새로운 놀이 공간?에 가까운 개념이라 책의 주제에는 적합치 않았으며, "건축가가 비밀기지 설계도를 그린다면"이라는 칼럼은 몇몇 실존하는 비밀 기지를 단순히 설계도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별다른 해석이 개입되어 있지도 않고요.
게다가 이런 식의 전문가적인 정보 제공 영역은 앞서 수록되어 있는, 설문조사를 통해 재현한 이이들의 비밀 기지와 비밀 기지에서의 활동이라는 판타지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책을 합친 느낌마저 들 정도에요.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앞부분의 비밀 기지들도 전부 이런 도면, 실제 제작된 예시 사진과 함께 더욱 디테일하게, 정말 건축물 관련 글처럼 쓰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프로파간다의 전위적인 편집도 다른 책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포스트잇 노란색 같은 용지는 그림과 글자는 괜찮더라도 사진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소였으며, 뒤에 메모지 영역이 있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12,000원이라는 가격도 담긴 콘텐츠 내용에 비하면 과한 편이고요.

그나마 뒷부분의 "어른이 만드는 비밀 기지"와 편집부가 썼다는 "이야기 속의 비밀 기지"가 정보 제공이라는 제 의도에 조금이나마 부합합니다만, 문제는 이 부분을 다 합쳐도 10페이지가 될까 말까 하다는 점입니다. 일러스트와 몇몇 디테일도 좋았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여러모로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키덜트를 위한 그림책으로 재편집하여 판매하는 것이 보다 낫지 않을까 싶네요.

2013/08/14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2 - 구마 겐고 외 / 권은희 : 별점 2.5점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2 - 6점
구마 겐고 외 지음, 권은희 옮김/까치

건물 하나당 한 장 분량의 짤막한 글과 사진으로 구성된 전편에 이어지는 건축물 관련 서적. 몰랐는데 아사히 신문 연재 컬럼이라고 하네요.

이 책의 장점은 아주 확실합니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진이 굉장히 멋지다는 점이죠. 글들은 4명의 작가가 나누어 썼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름다움이나 기묘함만을 설명하는 다른 작가들과는 다르게 그 건축물의 의미를 다각적으로 보는 후지모리 데루노부의 글이 가장 좋았습니다. 일본에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들의 건물이 제법 있다는 정보는 솔깃했고요. 여행 갔을 때 좀 알고 돌아볼걸...

그러나 건축물에 대한 정보 전달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점, 전편보다 참신함과 재미가 부족하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정보 부족의 경우, 이 책을 사진과 함께 하는 일종의 건축물에 대한 감상 중심의 에세이로 규정한다면 단점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두 번째 단점은 심각합니다. 에펠탑이나 런던의 유리 달걀 같은 관광지화된 유명 유적에다가 가우디, 르 코르뷔지에, 반 데어 로에,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의 대표작들은 이런저런 다른 매체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것들로, 이 책의 제목인 "불가사의한"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아트북 같은 책의 성격은 마음에 들지만 전편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에 든 건축물들을 몇 개 꼽아본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카이딘 황릉

베트남 최후의 황제 바오다이 바로 직전의 황제인 카이딘 황제의 능. 철근 콘크리트와 가우디 취향의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지만 슬프고 품위가 없는 분위기라는 기묘한 건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긴타이쿄

그야말로 우키요에의 풍경 그림 같은 독특한 다리.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야마구치현, 이와쿠니번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르세 미술관

1970년대 초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1968년 5월 혁명 후 이의가 제기되어 보존이 결정되고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건물. 워낙에 유명한 곳이라 내용은 잘 알고 있었지만, 20세기에 대한 이의제기가 관광 명소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씁쓸한 결말이 인상적입니다.

이탈리아의 몬테마르티니 박물관

히틀러의 전체주의와는 다르게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미래파를 후원하는 등 디자인 선진국다운 미의식의 소산이 보였다죠. 그래서인지 다른 국가의 오래된 건물을 박물관화하는 프로젝트는 모두 오르세 미술관처럼 역사적 건물 안에 근현대 미술품을 전시한 의외성이 특징이나, 이 미술관은 고대 조각을 수용했다는 독특함이 돋보입니다. 책에서는 이러한 것이 영원한 디자인 대국다운 면모라고 하네요.

스트로베리힐 빌라

고딕 호러 오트란트 성의 작가 호레이스 월폴이 자신의 고딕 취미를 반영하여 건축한 자택. 당시 기준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잔뜩 집어넣으려 노력한 것 같은데 사진만 보면 괴기스럽다기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 느껴집니다. 시대가 많이 변한 탓이겠죠.

긴자 라이온

1934년에 개업한 맥주 마니아의 성지. 건축적인 의미보다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보고 싶더군요. 사진만 보면 뭐... 그냥 강남 지하에 있는 맥주집 같긴 하지만요. 참고로 이 "긴자 라이온"은 대일본맥주의 직영 맥주홀로 1934년 개장하였으며, 연중무휴로 생맥주 한 잔은 25전이었다고 합니다.

2010/08/03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 허영섭 : 별점 2.5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 6점
허영섭 지음/채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과정을 '조선총독부' 건축의 역사와 연결시켜 풀어나간 미시사 서적. "경성탐정록" 자료로 쓸까 하고 읽어보았습니다. 

단순하고 지루하게 역사를 나열하지 않고, 주제별로 재미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총독부 건축 설계라는 주제에서는 설계를 최초로 진행했던 건축가 라란데는 프로이센의 식민지 폴란드 출신의 일본 건축가로 그의 아내 에디타는 라란데의 사후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와 재혼했는데, 도고 시게노리는 '박무덕'이라는 이름의 조선 도공의 후예였다... 라는 3국을 넘나드는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입니다.
경복궁 철거 부분에서는 고종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아놓았다는 비자금인 85만냥의 금항아리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비화를 풀어놓기도 하고요. '~카더라' 수준에 그치지 않고, 고종의 비자금 출처는 북진 금광의 사용료와 사례비를 모아 놓은 것이었다는걸 밝혀주는 것도 돋보였어요.

무엇보다도 조선총독부라는 건축물의 규모와 시설 등에 대한 자료로는 기대 이상입니다. 건축 기간, 주요 인물, 비용 및 설계와 내 / 외장에 대한 설명은 물론, 마지막에는 전구와 설치된 시계의 갯수까지 망라하는 등 무시무시할 정도로 자세한 덕분입니다. '조선총독부'를 소재로 한 컨텐츠를 창작하려면 필독서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총독부 외에도 다른 조선의 근대 건축에 대한 이야기도 상세합니다. 때문에 자료적 가치는 높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에피소드와 총독부, 근대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말고는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가는 이야기의 재반복일 뿐이라 아쉽습니다. 차라리 건축물에 대한 에피소드에만 포커스를 맞추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미시사 서적이라고 보기에는 저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된 듯한 느낌을 주는 문체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12/22

영국 장식미술 기행 - 최지혜 : 별점 2.5점

영국 장식미술 기행 - 6점
최지혜 지음/호미

제목과 짤막한 소갯글만 보고"부르주아의 유쾌한 사생활" 비슷한, 제목 그대로 영국의 장식 미술에 대해 시기별로 대표적인 양식과 작품을 소개해주는 책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저자가 영국의 다양한 저택들을 구경다니며 그 저택과 소장품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일종의 기행문이기 때문입니다. 목차도 특정 시기나 문화, 유행에 집중해서 진행되는게 아니라 런던 시내와 런던 외곽을 구분하여 각각 7곳의 저택을 관광다닌 순서대로 나열된 것에 불과하고요. 게다가 방문한 저택들이 모두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도 아주 돋보이는 그런 공간이라고 하기도 조금은 어렵습니다. 대체로 18~19세기 큰 영화를 누렸던 귀족이나 거부의 저택인데 소장된 가구라던가, 도자기 수집품 등의 면면이 아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국'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저택과 집들의 인테리어와 가구 등이 주로 소개되고 있거든요. 이럴 바에야 한 곳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보다 상세하게 풀어내는게 어땠을까 싶을 정도에요.

물론 개개의 저택과 집들과 방들, 소장품 하나하나 모두가 특색있으면서도 아름다운건 사실입니다. 저자가 클래식 악기와 같은 골동품 전문가인 덕분에, 깊이있는 전문가적인 식견도 곧 잘 눈에 뜨이고요. 예를 들어 자기 컬렉션에 대해 설명하면서 중국 자기 수입품이 마이센 자기로 대체되는 과정과 마이센 자기 최고의 대가인 캔들러라는 조각가에 대한 설명같은 부분이 그러합니다.
여행 동료가 직접 촬영한 사진과 함께 소개해 주고 있는데 이 역시 좋더군요. 눈도 즐거우며 이해를 도우니까요. 특히 가구들이 상세합니다. 디테일한 관찰이 과연 전문가다왔습니다. 클래식 악기 전문가다운 골동품 악기 설명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다른 대 저택들에 비하면 소박한 펜튼 하우스에 소장된 하프시코드, 버지널, 스피너 등에 대해 소개해주는데, 이 악기들 때문에 이 저택을 방문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건축, 소장품 외에도 다양한 정보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집 주인과 건축가, 디자이너에 대한 정보가 많은데 1939년에 완공된 비교적 최신 건물로 현대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윌로우 로드 2번지의 경우, 건축가 에르노 골드핑거가 건축했는데 이 집이 너무 현대적이라 이를 못마땅했던 작가 이언 플레밍이 자신의 작품에서 골드핑거를 악당으로 지었다는 일화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녀였지만 몇 번의 결혼을 통해 손녀를 차기 왕위 계승자에 가까운 지위까지 끌어올렸던 출세의 천재인 '베스 오프 하드윅'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싶었어요. 속칭 '혼테크'의 1인자인 셈이죠. 또 도판도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더라도 내용을 확인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풀 컬러라는 점도 좋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기대와는 다르지만 이 책만 놓고보면 볼만한 구석이 없지는 않은, 그런 책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전문가적인 관점에서 장식 미술만을 둘러본 여행기라는 측면에서는, 이런 류의 기행문의 교과서적인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냥 유명 명승지를 둘러보는 기행문보다는 전문적이고 깊이가 느껴져서 괜찮았거든요. 저자의 장식 미술 소개서가 간행되면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26/02/06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양억관 : 별점 4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츠노시마의 '십각관'에 K 대학교 미스터리 연구회 회원 일곱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머물게 되었다. 회지 작업 등을 위해서였다. 십각관은 괴짜 천재 건축가로 유명했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로 그는 반 년 전에 아내, 고용인과 함께 십각관 옆 청옥부에서 불타죽었다. 곧이어 연구회 회원들도 오르치부터 한 명 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육지에 남았던 전 연구회원 가와미나미는 시마다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나카무라 세이지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냈다는 괴문서를 받은게 계기였다. 여기에는 같은 연구회원 모리스도 힘을 보태는데...

아주 오래 전, 20년도 더 전에 학산 문화사 출간본으로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스 미디어에서 재간된 버젼으로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되었길래 옛 추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엄청난 성공으로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클로즈드 서클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고전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젊은 작가가 젊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괴짜 천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려낸 덕분에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십각관'은 정말 후속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츠노시마에서 일가가 불타 죽었던 괴짜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관련되었던 반 년 전 사건부터 볼거리가 많습니다. 실종된 정원사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 나카무라 세이지의 아내 가즈에의 왼손은 왜 잘려 나갔는지 등 수수께끼가 가득하니까요.

섬에서 일어난 살인의 트릭은 겉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마스터 키를 이용해 방을 열고, 음료나 담배에 독을 넣는 방식이 중심인 탓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에서 트릭보다 더 중요한 건 범인의 정체입니다. 연구회에서 닉네임 ‘밴’을 쓰던 범인은, 육지에서 가와미나미, 시마다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모리스 교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스가 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한 충격을 안겨다 줍니다. 그는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와 섬을 오가며 연쇄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을 엘러리가 저지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공했던 겁니다. 
'십각관'이라는 장소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컵이 십각형인데 딱 한 개의 컵만 십일각형이었다는걸 독살에 활용한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트릭이나 단서의 제시도 공정한 편입니다. 섬과 육지를 보트로 쉽게 오갈 수 있다는건 진작부터 제시되는 정보이며, 루르가 살해당한 현장의 발자욱을 토대로 엘러리가 펼치는 추리는 결정적이니까요. 여기서 루르는 선착장에서부터 쫓아온 범인에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선착장으로 사라졌다는게 명백히 드러나거든요.
이런 여러 정보와 단서가 있음에도, 초반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심어주어서 범인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카무라 세이지나 나카무라 고지로일거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아울러 미스터리 연구회 출신 작가다운, 현대 무대 탐정 소설은 클로즈드 서클 물을 쓸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추리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의 등장도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워드프로세서로 쓴 것에 대한 분석, 십각관 사건에 대한 연구회원들의 추리 등 소소한 추리들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탐정역인 시마다 기요시는 이 작품에서는 하는게 별로 없습니다. 모리스 교이치의 완전 범죄극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시리즈 탐정이 될 정도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리스의 완전 범죄 계획도 큰 구멍이 있습니다. 가와미나미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받고 모리스를 만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게 핵심인 탓입니다. 가와미나미가 모리스의 전화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 활동에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답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알리바이를 만들기야 했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첫 날 알리바이는 날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낸 듯한 편지 역시 범행 후 엘러리가 보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이고요.
동기도 빈약해요. 치오리가 술을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품는다? 별로 와 닿지 못합니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게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요.

또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너무 쉽게 살해당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의심 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료를 마시는 장면,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 장면 등은 미스터리 독자답지 않은 행동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치오리와 모리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오리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딸이라는 걸 오르치조차 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섬에 오지도 않았을테고, 처음에 연쇄 살인에 대한 의심이 싹틀 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지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모리스가 자신의 범행 계획을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고, 훗날 그 병을 주워 자백하는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적입니다. 완전 범죄를 달성하기 위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범인의 감성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젊은 작가의 감정 과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불만은 번역입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모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모리스'라고만 소개되었습니다. '모리스 교이치'라는 전체 이름이 아니라요. 그래서 '모리스'도 다른 연구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닉네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가 밴 다인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 버젼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리스 르블랑과 밴 다인은 같은 사람일 수 없지만, 모리스 교이치는 밴 다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클로즈드 서클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독자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완벽한 완전 범죄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계속 회자되고, 미디어 믹스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0/11/20

움직이는 집의 살인 - 우타노 쇼고 / 박재현 : 별점 2점

움직이는 집의 살인 - 4점
우타노 쇼고 지음, 박재현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자마 아키라가 이끄는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는 연극 "신은 예술가를 좋아해" 공연 연습에 한창이었다. 이 공연은 6년 전 무대에서 사고로 죽은 이자와 기요미 추모 공연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유명 건축가 이지와 야스노리가 직접 만든 극장인 시어터 KI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다. 시어터 KI는 계란 형태로 생겨서, 가운데 노른자 부분인 무대가 회전하는 독특한 극장이었다. 

시나노 조지는 이 공연 제작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단원인 모리 쿄코와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 연극 공연 당일 배우 스미요시 가즈오가 부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소품인 칼이 진짜 칼로 바꿔치기 된 탓이었다. 그럼에도 단원들은 공연을 강행하는데, 마지막 공연에서 각본가 겸 배우 다키가와 요스케가 무대에서 똑같은 소품용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다. 경찰은 칼을 바꿔치기 할 수 있던 단원들을 의심하고, 단원들은 내분에 휩싸이지만 시나노 조지는 극장 구조를 검토한 뒤 외부 인물이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 태동하여 대 유행한 본격 미스터리를 '신본격'이라고 부릅니다. 본격 미스터리의 논리성과 게임성을 중시하는 작품들이지요. 문제는 비현실적인 설정과 트릭이 많다는 점이고요.

이 작품은 전형적인 신본격물입니다. 설정과 캐릭터, 트릭 등 모든게 비현실적, 만화적이며 과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에서 사람이 다치고 죽는다는 설정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핵심 등장 인물들인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 인물들도 마찬가지에요. 연극에 미쳐 다른 건 돌아보지도 않는 성격에, 대체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비인간적이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대마초를 재배해서 피우고, 민폐 끼치기가 일쑤인 탐정 시나노 조지야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연극 "신은 예술가를 좋아해"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도 비현실적입니다. 애초에 소품을 잘못 써서 사고가 일어났다면, 장난감이나 가짜로 바꾸는게 당연한거 아닐까요? 또 연극용 소품으로 만들어진, 몸에 닿으면 쑥 들어가는 장치가 된 칼을 진짜 등산용 칼로 바꿔치기 하여 사건이 벌어진다던가, 한 명이 부상을 입은 뒤, 또 다른 한 명이 같은 흉기로 살해된다는 전개는 너무 뻔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무엇보다도 시나노 조지가 진상이라고 설명하는, 객석이 무대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는 거대한 장치 트릭이야말로 과장된 이야기의 정점입니다. 무대가 회전하는 줄 알았지만 반대였다는건데 "웃지 않는 수학자"같은 트릭이지요. 이를 통해 건축가 이자와가 나갔을 때 문은, 원래 방향과 정 반대로 분장실과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당연히 현실성이 낮습니다. "웃지 않는 수학자"는 개인 건물에서 단 몇 명만 속이면 됐지만, 그리고 천문대가 회전하는건 말이 되는데 거대한 극장 객석이 회전한다는건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300명의 관객이 좌석이 회전한다는걸 모두 몰랐다던가, 중간에 아무도 화장실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건 아무리 신본격이라 하더라도 면죄부를 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생각이에요. 문을 빠져나가 칼을 바꿔치기 하고 다시 돌아오려면, 객석이 회전하고 있으므로 문 위치가 틀어졌을텐데 그 해결 방법도 설명되지 않고요.
또 이자와 혼자만이 아니라 극장을 만든 모든 사람들, 그리고 범행 당시 무대 조작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경찰이 조금만 조사해도 금방 알 수 있다는 문제도 큽니다. 읽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그나마 다행인건 이 트릭은 사실이 아니었다는겁니다. 경찰 조사 결과 객석은 회전하지 않았고, 이자와는 무죄로 풀려나게 되지요.

이후 시나노 조지는 피해자 다키가와가 자살했다고 추리하는데, 좀 시시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앞서 추리보다는 낫더군요. 연극에 미친 사나이가 자신이 직접 쓴 연극 무대를 자살 장소로 삼았다는건 과장된 캐릭터성에 기초하고 있기는 하나, 미래에 대해 절망한 차에 옛 연인 기요미 추모 공연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등, 여러가지 동기에 대한 설명이 꽤 설득력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살이라서 별다른 트릭이 없다는 문제는 존재합니다. 앞서 가즈가 다친건 우연한 사고에 불과했다는 설명이지요. '신본격'의 전형적인 틀을 깨고는 있는데, 이래서야 '신본격'이라고 부르기는 또 애매한, 그런 기묘한 장르물이 되어 버렸네요.

작가도 뭔가 트릭에 대한 사명감을 느꼈는지, 연극 무대 살인 사건과는 별개로 핵심 트릭이 따로 등장하기는 합니다.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 제작 담당으로 일했던, 주인공인 시나노 조지가 사실은 시나노 조지가 아니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그것입니다. 그는 소극장을 상대로 일 년에 한 두번 씩 5년 동안 수익금을 빼돌려 왔던 사기꾼 오니쓰카 도시였지요. 시나노 조지가 등장하는 전작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전작을 읽었던 사람들은 놀랄만한 트릭일거에요. 변장을 위해 착용했던 선글라스와 마스크, 수염을 기르는 행위 등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고보니 제목도 트릭이네요. '움직이는 집' 에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가짜 시나노 조지가 사기꾼이라는걸 눈치챈 배우 사이키와 다투다가 머리를 부딪혀 죽은 뒤, 트릭이 밝혀지면서 나름 추리력을 보여준 가짜 시나노 조지 캐릭터가 엉망이 된건 아쉽습니다. 그의 말대로 5년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씩 극단 상대로 사기를 쳤다면 최소 5번에서 10번 정도 반복했다는건데 진작에 들키지 않았을 이유가 없습니다. 연극계가 발이 좁다는 묘사는 작품에 넘쳐나니까요. 진짜로부터 신분을 훔친 방법도 '우연히' 보험증을 손에 넣은게 전부고요. 이래서야 나름대로 추리력을 보여 주었던 치밀한 범죄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시한 죽음을 맞은건 당연해 보입니다. 서술 트릭도 곱씹어보면 이야기와는 무관한 곁가지 이야기에 불과하고요.

그나마 가짜가 죽은 뒤 진짜 시나노 조지는 대마 불법 소지 및 재배 혐의로 체포되고, 모리 쿄코가 투신하는 장면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건 좀 괜찮았습니다 . 과장된 세계에 종지부를 찍는 작가 나름의 의식으로 보였기 때문이에요. 모든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죽음, 아니면 감옥으로 현실의 굴레에 갖혀버리고 만 셈이니까요. 작가가 쓴 서문을 보면 본격 추리물을 쓰기 위해 등장시켰던 시나노 조지를 퇴장시키기로 결심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 결심에 어울리는 결말이라 생각됩니다. 더 제대로 쓰려면, 시나노 조지를 진짜로 죽여버리는게 나았겠지만요.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본격 추리, 신본격 소설이면서도 트릭은 별볼일 없는데다가, 신본격 소설들이 갖춘 단점들도 두드러지는 탓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2/09/18

한 문장의 충격!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180도 뒤집히는 경악의 미스터리 소설! - 혼토 북트리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 소개드렸던 honto의 북트리 서비스에서 추천하는 '반전'이 있는 작품들입니다. 그냥 반전이 아니라 '한 문장'으로 이야기가 뒤집히는 작품들로 본격물보다는 서술 트릭에 가까운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전부 '반전'이라는 취지에는 충실한 좋은 작품들이에요. 일본 작품만 있는게 옥의 티이기는 하지만요. 그나저나 이 서비스, 보면 볼 수록 괜찮네요. 다른 추천도 찾는대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뛰어난 구성에 잘 짜여진 작가의 안배로 때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 한 문장. 미스터리 소설 중에는, 마지막 단 한 문장으로 세상이 바뀌는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걸작들이 있습니다. 기분 좋게 속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 이누이 구루미 

'나'는 마유코와 만나, 곧 사랑에 빠졌다. 대학생에서부터 사회인에 이르기까지를 그리는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같지만, 마지막 한 문장 덕분에 걸작 미스터리로 변신하는 작품. 다시 읽어보면, 저자의 철저한 계획에 감탄의 한 숨을 내 쉴 수 밖에 없다.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대학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 젊은이들은 외딴 섬에 위치한 십각형 모양 저택을 방문했다. 그들은 반년 전에 타 죽은 건축가 수수께끼에 접근하려 했지만, 차례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왜 살해당하며, 범인은 누구인가? 마지막 충격적인 문장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작.

"미로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시가 지은 기괴한 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리는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미로같은 관에 모인 젊은 작가들에게 닥치는 살인 사건. 이 작품은 '마지막 한 문장'이 여러 개 존재하기 때문에, 종반부에서 이야기는 여러 번 뒤집힌다.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여러 번 맛볼 수 있는 작품.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 로커" : 이사카 고타로 

대학생 '나'가 이사하자마자 이웃과 함께 서점을 덮친 이유는 코지엔 사전을 훔치기 위해서였다. 세련된 대화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청춘 소설에 가깝지만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야기는 뒤집힌다. 조금은 잔혹하고 센티멘탈한 결말의 작품으로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살육에 이르는 병" : 아비코 다케마루 

연속 엽기 살인 사건을 범인, 전직 형사, 범인의 가족이라는 세 명의 시점으로 그려나가는 작품. "범인"의 시점으로 그려져서 범인은 초반부터 확실하지만, 평범한 사이코 서스펜스로 끝나지는 않는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이야기가 뒤집히는데, 충격이 장난이 아니라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작품.

2009/07/19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이야기 - 스즈키 히로유키 외 / 유인경 : 별점 3점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 - 6점
구마 겐고 외 지음, 유인경 옮김/까치글방

일본인 건축가와 건축사가들이 세계 각지에 있는 여러가지 독특하거나 희한한, 또는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77개의 건축물에 대해 짤막하게 사진을 곁들여 설명해 준 책입니다. 제가 이런 짤막한 사진 중심의 아트북스러운 책을 좋아라 하고, 재미도 있어서 아주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미국-일본-프랑스에 많이 치우쳐져 있다는 것과 각 건축물에 대한 설명이 너무 짧고 사진도 몇장 없어서 이 책만으로 그 건축물에 대한 내용을 알기 힘들다는 것은 단점이지만, 해당 건축물에 대한 자세한 웹사이트를 소개하는 등으로 보충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각 웹사이트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네요. 너무 자세하게 써서 학술논문처럼 지루하게 읽히는 것보다 책의 취지에 잘 어울렸고 말이죠.

제목에 어울리는 아주 독특하고 희한한, 불가사의한 건축물은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건축물 몇개만 뽑아서 소개하자면

  • 바위 위에 우뚝 솟은, 드루이드교의 전통 샤머니즘과 기독교 사상이 결합한 르 퓌-앙-벌레이의 교회 : www.ot-lepuyenvelay.fr
  • 오키나와 섬 북부의 독특하고 자연스러운 건축물인 나고 시청사 : www.zoz.co.jp (건축사무소) / http://www.arch-hiroshima.net/a-map/okinawa/nago.html
  • 중국 농촌에 1920년대부터 건축된 농민들의 마천루 도시 다올로 : http://www.kaipingdiaolou.com/ (요기는 특히 재미있는게, 마천루 형태로 지어진 이유가 산적들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산적 습격시 1층을 걸어 잠그고 위로 올라가 총격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 아프리카 말리의 진흙 대 모스크 : http://www.ovpm.org/en/rep_of_mali/djenne (사진만 보면 촉수괴물들이 사는곳 같습니다)
  • 시민케인의 모델인 미국 신문재벌 허스트의 대저택 허스트 성 : http://www.hearstcastle.com/ (그래! 이 정도는 되야 부자죠!)
  • Q.E.D의 한 에피소드에도 등장했던 나선형 경사를 오르내리는 아이즈 사자에 불당 : http://www.geocities.jp/aizu_sazaedo/
등이 있습니다. 이외의 건축물들 이야기 모두 재미있었고요. 가격이 좀 쎄긴 한데 풀컬러이고 하니 어쩔 수 없었겠죠? 별점은 3점입니다.

2004/10/19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 장용민, 김성범 : 별점 0.5점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2 - 2점 장용민 지음/시공사

천재 시인이자 천재 건축가 김해경이 갑작스러운 잠적 끝에 발표한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 그러나 이 한편의 시는 시가 아니라 일본이 계획한 엄청난 음모를 밝혀내는 암호문이었다. 이 수수께끼를 자신들의 즐거움으로 즐기던 이상 동호회 회원 건희와 덕희는 현재까지 활동하는 미지의 조직에게 쫓겨가며 점차 진실의 실체에 접근해 나가는데...

예전에 영화화도 되었던 히트작이지요. 영화는 워낙 평이 엄청나서 보지는 않았지만, '책은 괜찮더라...'는 말을 들어왔던 차에, 가끔 들르는 헌책방에서 권당 천원에 팔길래(합이 2천원!) 냉큼 집어왔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이상이라는 천재 시인의 수수께끼 같은 시를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한건 좋아요. 일제시대때의 쇠말뚝 등의 현재진행형 이슈를 도입한 설정도 괜찮은 편이고요.
그러나 문제는 전체적으로 너무 싸구려티가 난다는 겁니다. 소설 쓰기의 기본이 부족한 인터넷 소설 습작 수준이에요. 긴박감없는 전개탓에 좋은 설정이 다 묻혀버렸습니다. 캐릭터, 장면 장면도 모두 전부 어디에서 본 듯 하고요.

무엇보다도 이상의 시를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암호 트릭이 너무나 지루하고 따분합니다. 과학적인 설명이나 이론적인 해설은 전혀 없이, 두 주인공의 상상에만 의존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무런 근거없이 갑자기 등장하는 "1행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 - 조선총독부를 의미한다"는 한 줄로 모든 걸 해결해 버리는 건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비밀 장소가 "국립 중앙 박물관"이라는걸 밝히는 제 1행의 해석부터가 이렇게 설득력이 없으니 더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이 두 젊은 작가의 상상력은 아이디어와 설정까지였을 뿐, 그것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무덤에 누운 이상이 벌떡 일어나 분노에 찬 저주를 퍼부을 만한 망작이에요. 구태여 평점을 매기자면 아이디어 및 설정 4점, 나머지 모든 부분 0점으로 총점 0.5점입니다. 2000원이라는 돈조차 아깝네요. 보시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거저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페이지를 좀 빼곡히 쓰고 글줄을 조금만 더 붙여도 충분히 한권으로 만들 수 있는 책을 2권으로 만든 출판사의 가증스러움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그나저나, 각본을 좀 더 괜찮게 수정했다면 그나마 영화적으로는 괜찮았을 소재인데 어떻게 이 책이 영화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걸까요? 아니, 영화는 대체 얼마나 쓰레기인겁니까?

2024/11/29

십계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점

십계 - 4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대 입시생 리에와 그녀의 아버지 오무로는 오랫만에 큰아버지 슈조의 소유였던 에다우치지마섬을 찾았다. 슈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리조트 개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개발회사, 부동산 업자, 건축가 등을 포함해 모두 9명이었다.
그런데 섬에서 대량의 폭탄 재료들이 발견되었고, 그날 밤 부동산 업자 오사나이가 살해당했다. 범인은 열가지 규칙('십계')를 남긴 뒤, 앞으로 사흘 동안 생존자들에게 섬을 떠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일행은 십계를 지키며 사흘을 버티려고 했지만, 슈조의 친구였던 야노구치, 부동산 업자 후지와라가 차례로 살해당하고 마는데...

유키 하루오의 장편 소설 "십계"는 그의 전작 "방주"와 같은 클로즈드 서클물로, 특유의 반전 매력을 내세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 중 하나는 짧은 분량입니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길이로, 빠르게 읽고 즐기기 좋은 점이 매력적입니다. 또한, 전작 "방주"보다는 설득력 있는 무대 설정이 돋보입니다. 부유한 개인의 취미 생활이었던 무인도라는 설정은 현실성은 물론이고,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충실히 전해줍니다.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단서가(그런대로) 독자에게 공정히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범인은 왜 자신의 발자국이 아니라 야노구치의 발자국만 지웠을까?'라는 핵심 단서를 통해 결말로 이어지는 추리가 좋았습니다. 야노구치가 범인의 신발을 착각해서 신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착각할만한 신발은 후지와라의 신발밖에 없어서 범인은 후지와라이다!라는 건데, 아주 합리적이었어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방주"와 달리 사건의 템포가 느리며,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방주"에서는 제한 시간 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반면, "십계"는 제한 시간 내에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 조건만 지키면 모두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범인이 약속을 어기고 모두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는 하는데, 이는 독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작가가 애써 제시한 '십계'라는 공정한 룰이 깨지면, 본격물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을 해칠테니까요.

또 아야카와가 진범임을 반전처럼 밝히는 마지막 장면은 추리물로서는 불공정합니다. 애초에 아야카와는 리에와 오사나이가 살해당한 밤에 같은 방을 썼기에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었고, 심지어 리에는 주요 화자로 등장하여 아야카와의 알리바이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리에도 그녀가 범인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설명하는건 반칙입니다. 차라리 아예 몰랐다고 했더라면 모를까요. 아울러 리에가 아야카와의 범행을 숨긴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점도 독자에게 혼란을 줍니다. 최소한 아야카와가 범행 이유- 폭탄을 만든 일당이 그들을 죽이려 해서 먼저 죽였다! -를 설명하고 같은 편이 되기를 설득했다는 설정은 필요했습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눈에 띕니다. 오사나이의 살해 이후 야노구치와 후지와라가 차례로 아야카와의 꾀임에 빠져 홀로 행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설정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본인이 유력한 다음 희생자라는 점이 명확한 상황에서,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야카와를 쉽게 믿고 행동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섬에 폭탄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역시 작 중에서는 실수로 설명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전작보다는 낫다고 해도 비현실적인 요소 역시 여전합니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엄청난 양의 폭탄이 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왜 폭탄을 만들었는지 설명도 없고요. 중요한 연결고리가 끊겨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캐릭터 역시 평면적으로,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른 작품에서 자주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매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탐정이자 천재 범죄자인 아야카와는 흥미롭기보다는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결말에서 리에에게 반 협박식으로 건네는 마지막 인사도 영 별로였고요. 다른 인물들도 건축사 노무라 씨 정도를 제외하면 특별한 묘사가 없어서 그들이 처한 위급한 상황이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작만큼의 화제를 불러오지 못했는데, 읽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전작을 정 반대로 비틀기는 했는데, 단점은 거의 그대로이고 좋았던 장점마저 희석되고 말았네요.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7/06/18

미스테리아 5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5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엮음/엘릭시르

구하게 되면 읽곤 하는 장르문학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 5호입니다. 작년 초에 출간된 한참 전 과월호지요. 언제나처럼 특집 기사와 신간 소개, 이런 저런 연재 기사, 인터뷰, 수록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관심 있던건 특집입니다. "음식 미스터리"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장르 문학 속 요리'에 대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좋은 비교, 혹은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주 별로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재가 진부하다는 겁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흔해 빠진 내용이에요. 도입부의 식인 천재 범죄자 한니발 렉터,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가 대표적입니다. 그나마도 인터넷을 뒤지면 알 수 있는 내용일 뿐이고요. 정작 기대했던 내용은 실려있지도 않습니다. 저라면 한니발 렉터의 '전두엽 소테'나 네로 울프의 '소시스 미뉴이'를 소개할 때 최소한 해당 음식의 레시피와 조리 사진을 수록했을 겁니다.
이어지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속 독약에 대한 소개는 '음식 미스터리'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입니다. 차라리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같은 작품 소개가 더 적절했을 것입니다.

작품 속 요리를 재현하는 코너 역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주제와 연결되는 요리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미스테리아 측에서 별다르게 창작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참고 도서 속 - 주로 "미국 미스터리 작가들의 요리책" -  요리를 재현한 것에 불과해요. 그나마 셜록 홈즈가 '해군 조약문'을 극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던 "해군 조약문" 속 치킨 커리 정도만 어느정도 주제에 값할 뿐, 재현한 요리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았고요. 

마지막의 '10권의 맛있는 미스터리' 소개는 실망의 정점을 찍습니다. 기준, 근거를 알기 어려운 탓입니다. 일단 소개작 중 "스위트 홈 살인사건",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기나긴 이별"은 절대로 음식 미스터리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억지에요. "어느 백만장자의 죽음"은 아슬아슬하게 음식 미스터리 범주 안에는 들기는 한데,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을 추천 도서로 떡 하니 내미는 행위는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조앤 플루크의 한나 스웬슨 시리즈는 빈말로도 좋은 작품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 외 작품들도 음식 미스터리로는 볼 만 하지만, 추천할만한 수준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특별 요리"와 "맛" 외에는 모두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수를 주자면 1.5점 정도? 제 개인 프로젝트에 필적할만한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는 조금 안심했지만,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힘든 기획입니다. 

다행히 특집 외에는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빼어난 리뷰가 많아서 "미스테리아"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신간 소개 코너는 역시나, 사람을 혹하게 만드는 좋은 리뷰들이 많더군요. 솔직히 읽어본 결과에 따르면 좀 과한 홍보의 결과물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번에 소개된 작품 중 마쓰모토 세이초의 "범죄자의 탄생"은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원작, 영화를 함께 소개하는 코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신부"가 "상복의 랑데뷰"보다 낭만적인 애상으로 넘쳐흐른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완성도 면에서 천지차이니까요. 영상화된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개되기는 했지만,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연재물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건축가 야스이 도시오의 밀실에 대한 대담은 재미있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써먹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았어요. 특히 다다미를 걷어내면 아마추어는 다시 깔 수 없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코너를 통해 소개되는 정보를 토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내 놓는 아이디어 - 다양한 기술자들이 등장하는 탐정물 - 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미로관을 예로 들며 전기비가 많이 들었을 것이라는 언급을 하는 등 건축 전문가의 식견이 느껴지는 여러 코멘트들도 기억에 남고요.

한국의 50~60년대 추리 소설을 발굴한 추리소설 평론가 박광규 씨와의 인터뷰 역시 좋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재 사고와 관련된 논픽션, 폴란드에서 실제로 있었던 젊은 지식인 발라가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웠는데, 특히 범인 크리스티안 발라와 그의 작품 "아목", 형사 브로블레브스키라는 키워드는 꼭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봐야겠습니다.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계보를 추적하며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다는 기획물인 '동아시아 미스터리, 정치적 죄와 서스펜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대중 서사의 최고봉이라는 이병주의 "관부 연락선", "별이 차가운 밤이면"과 김내성의 "청춘 열차"는 틈 나는 대로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두 편의 단편도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척박한 한국 장르 문학의 구심점 역할을 해 주는 좋은 잡지이지만, 이번호는 특집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2편의 단편의 짤막한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나비 부인의 커튼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두 남자가 운영하는 카페 '이기적인 갈 사장' 건너편에 '나비 부인'이라는 카페가 개업했다. '나비 부인'은 가면을 쓰고 서빙하는 독특한 컨셉과 인테리어, 커피 맛이 입소문을 타 맛집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던 중, 기묘한 노인이 '나비 부인'에서 진상을 부린 다음 날 '나비 부인' 사장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최혁곤의 단편입니다. 시리즈 캐릭터로 전직 사회부 기자 박희윤과 퇴출 형사 갈호태 콤비가 등장하는 단편집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전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쾌한 분위기의 버디물인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별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초반에 나왔던 수상쩍은 노인이 범인으로 체포되는 등 수수께끼의 여지도 없고요. 

특히 후더닛 물로는 영 아니올시다에요. 오히려 인터넷 상에서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만드는 일종의 '사이버 테러'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사회파적 측면이 강하며, 이것이 동기로 밝혀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와이더닛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좀 가볍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사회파적 설정이 잘 어울리지는 않네요. 인터넷의 비방글로 자살을 한다는 것도 와 닿지 않고요. 또 고3 수험생 투신 사건도 불필요할 정도로 질질 끄는 느낌입니다. 동기 부분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도 와이더닛물로는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진범 검은 뿔테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도 불분명하니까요. 남자 친구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낮아요.
진소담의 가족 관계 증명서 정도만 나름 증거일 뿐, 추리가 모두 정황 증거에 기반한다는 약점도 크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기대 이하였던 범작이었습니다. 그래도 버디물로서는 충분히 즐길만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단편집은 한번 읽어 볼 생각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기흥 보리산 자락에 있는 무당의 당집에서 처참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완벽한 밀실 안에서 홀로 생존한 채 발견된 유홍석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판사에게 유홍석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한국에서 보기 드문 본격 추리물들을 발표하고 계신 도진기 판사님 - 현 시점에서 변호사가 되셨지만 - 의 스탠드얼론 단편입니다.

다른건 몰라도 작가가 뼛속까지 고전 본격물 애호가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1인칭의 수기 형태로 전개되며, 끔찍한 사건이 초자연적인 현상과 얽혀 일어난다는 점이 완전 고전 스타일이었거든요. 비교하자면 코난 도일경의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이라던가, 앰브로스 비어스의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에 수록된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제가 워낙 고전물을 좋아하기에, 완전 제 취향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게다가 단지 스타일을 따온 것에 그치지 않고, 무당 '인문희'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덕분에 독특한 한국적 오컬트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특히 그녀가 서상표의 집에 몰래 부적을 붙인게 드러나는 장면은 굉장히 섬찟합니다. 만약 영상화한다면 클라이막스로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문희에 비하면 서상표는 전형적인 한국 쓰레기 남자와 다를 바 없어 지루합니다. 무엇보다도 진상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어요. 괜찮은 고전 오컬트물이 갑자기 크리쳐 호러로 변질되는데 영 어울리지 않았던 탓입니다.
게다가 잘린 목이 경동맥을 물어 뜯었다면 부검으로 밝혀지는게 당연한데 간과되고 있고, 유홍석이 현장 문을 잠가 밀실로 만든 이유도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등 디테일에서도 문제가 많아요.

하지만 한국에서 보기 드문, 고전 스타일 오컬트 호러 스릴러임에는 분명합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를 굉장히 탈 텐데 저한테는 호 쪽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드린 부적이 드러나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