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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31

가라오케 가자! - 와야마 야마 : 별점 4점

야쿠자 쿄지는 조직의 두목이 주관하는 가라오케 대회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절대음감을 가진 두목은 부하들의 노래를 평가해 꼴찌에게 직접 문신을 새겨주는 끔찍한 벌칙을 내리는데, 쿄지는 노래에 영 소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벌칙을 피하기 위해 쿄지는 중학교 합창부 부장 사토미에게 개인 교습을 부탁하는데...

와야마 야마의 단권 완결 만화입니다. 조금 황당한 일상계 개그 드라마인데, 야쿠자가 노래 대회에서 꼴찌를 하지 않으려고 중학생에게 노래를 배운다는 기본 설정부터가 미쳤습니다. 심지어 대회를 주관하는 두목은 절대음감의 소유자이고, 벌칙은 두목이 직접 새겨주는 형편없는 문신이라니,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모르겠어요.

중학교 합창부 부장인 사토미 캐릭터도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느닷없이 나타난 야쿠자의 부탁에 벌벌 떨지만, 정작 쿄지 앞에서 태연하게 볶음밥을 시켜 먹고, 노래를 가르칠 때는 할 말도 다 합니다. 다른 야쿠자들에게도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고요. 야쿠자라고는 하지만 어딘지 허술하고 능글맞은 쿄지와, 겁은 많으면서도 은근히 당돌한 사토미 사이의 티키타카가 정말로 재미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가라오케를 통해 교감을 나누는 과정도 자연스럽고요.

그러나 이 작품의 백미는 마지막 가라오케 대회 장면입니다. 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죽었다고 착각한 사토미는 자신의 합창 공연까지 포기하고 야쿠자들의 가라오케 대회장에 난입합니다. 그리고 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18번인 X JAPAN의 "쿠레나이"를 열창하는데 이 장면은 정말 대박입니다. 처음에는 쿄지의 형편없는 노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한 우스꽝스러운 소재에 불과했던 "쿠레나이"가 마지막에는 사토미의 감정이 폭발하는 결정적인 장치가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변성기 때문에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던 사토미가 쿄지를 위해 전력을 다해 노래한다는 점에서요. 처음 등장했던 노래가 마지막 절정부를 장식하는 수미쌍관식 구성으로도 아주 훌륭합니다. 제가 "쿠레나이"를 듣고 즐겼던 세대라서 더 재미있게 느꼈을 수도 있어요. 저 노래는 정말 어려우니까요. 

게다가 쿄지는 죽기는커녕 멀쩡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저 사고를 당했을 뿐인데 사토미가 혼자 오해한 것이지요. 이 어처구니없는 반전까지 작품의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이후 3년이 지나 다시 만난 두 사람과, 쿄지의 팔에 새겨진 사토미의 이름도 재미있는 마무리입니다. 짧은 이야기지만 필요한 내용은 모두 담겨 있어 한 권으로 깔끔하게 끝나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기본 설정부터가 황당한 만큼 전개에도 현실성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야쿠자라고 해도 중학생에게 노래 교습을 부탁하고, 그 중학생이 야쿠자들 사이를 이토록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상황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어요.

쿄지와 사토미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이나 교감을 넘어 동성애적인 분위기로 묘사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독특한 관계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데, 굳이 그런 뉘앙스까지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기발한 기본 설정부터 개성적인 캐릭터, 기막힌 유머와 마지막 "쿠레나이" 장면까지, 짧은 분량 안에 재미있는 요소가 가득합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애니메이션도 찾아봐야겠습니다. 쿄지가 얼마나 노래를 못하는지 벌써부터 궁금하거든요.

2026/10/18

약사의 혼잣말 Season 2 (2025) 후반부 - 나가무라 노리히로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사의 혼잣말" 시즌 2에 대해 이전에 리뷰를 남겼었지요. 이번에 시즌 3가 새로 시작되어 보기 시작했는데, 모르던 이야기가 나오길래 조사해보니 시즌 2를 다 못 본 거였더라고요. 그래서 이전에 보았던 36화 뒤의 12편을 주말에 몰아 보았습니다.

후반부는 기존의 소소한 사건들 중심이 아니라 시 일족의 반란이라는 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래도 리슈비가 유령을 목격한 사연이나 러우란비를 위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에피소드처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는 여전히 좋습니다. 진시가 왕제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마오마오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등 주요 인물들의 상황이 급변하는 과정도 흥미로웠고요.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러우란비의 정체가 시스이였다는 반전입니다. 이는 화려한 복장과 두꺼운 화장, 부채로 가린 무표정한 얼굴이 정체를 감추는 장치 등 다양한 복선 덕분에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시스이가 보여 준 교육 수준과 유복한 집안 출신 같은 분위기라던가, 그녀가 낙태약을 구하거나 낙태를 유도하는 꽈리를 먹는 장면 역시 중요한 단서였습니다.

러우란이라는 캐릭터도 상당히 매력적이에요. 일족의 몰락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마지막을 전용 음악, 그리고 화려한 무대와 함께 장식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녀가 원하는걸 이루라고 보내주는 마오마오의 쿨함도 빛납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장점보다 단점이 많습니다. 시 일족의 반란이 대하 서사극처럼 펼쳐지면서, 이 시리즈의 장점이었던 소소한 일상과 추리의 재미가 크게 줄어드는 탓입니다. 사건의 규모가 커진 만큼 재미도 커졌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러우란의 계획도 허술합니다. 마오마오가 의관이 시 일족과 한패라는 사실을 알아내 납치되고, 진시가 그녀를 추적하다 반역 음모를 밝혀 금군을 이끌고 일족을 처단한다는게 주요 전개입니다. 여기서 마오마오를 살려 둔 것은 친구인 시스이(러우란)의 배려였다 하더라도, 이후의 추적과 정벌까지 러우란이 안배했다고 보기에는 우연에 기대는 부분이 너무 큽니다. 썩어 버린 일족과 가족을 도려내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 이야기 속에 마오마오를 억지로 끌어들였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러우란이 살아남아 외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지나치게 전형적입니다. 차라리 시장에 나온 비녀만 보여 주며 생사를 여운으로 남겼다면 더 좋았을거에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반전과 인물의 매력은 괜찮았지만, 후반부의 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시리즈의 큰 서사를 이해하려면 건너뛰기 어려운 만큼, 시리즈 팬에게만 추천합니다.

2026/09/11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 아오사키 유고 외 : 별점 2.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8/22

스파이더 맨 브랜드 뉴 데이(2026) - 데스틴 대니얼 크레턴: 별점 4점

지금 최고 흥행작이죠. 마블 영화에 대한 관심은 최근 많이 식었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OTT를 통해 빼놓지 않고 챙겨봤는데(왜 리뷰가 없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번 작품은 오랫만에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가장 돋보인 건 액션입니다. 화끈하고 속도감 넘칩니다. 특히 초반의 1인칭 시점 질주, 활강 장면은 이전 "스파이더맨"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연출이라 신선했습니다. 드라마와 액션의 조화도 적절해서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진 그레이가 점프하듯 다른 사람의 육체를 강탈하는 시퀀스가 대표적입니다. CG가 필요없는 아날로그적인 촬영으로 슈퍼 히어로의 능력을 구현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탄탄한 이야기도 마음에 듭니다. 진 그레이가 벌이는 일종의 테러에는 V-Max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지요. 이는 나중에 진이 갇혀 있던 연구소 천장에 설치된 에어컨 브랜드에서 유래되었다는게 밝혀지면서, 진의 언니 세라가 연구소에 감금되어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과거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단서가 진상을 밝히는 열쇠가 되고, 동시에 진 그레이의 행동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구성인데 아주 훌륭해요. 복선을 제시하고 회수하는 과정도 깔끔하고요.

중반에 진이 MJ의 육체를 강탈했지만, MJ인 척 피터 파커를 속이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지극히 뻔하고 유치한 설정인줄 알았는데, 이 역시 진의 농간이었다는게 드러나면서 그녀의 가공할 능력을 관객에게 제대로 각인시켜 주거든요. 

블랙 위도우와 헐크 등 다른 마블 히어로들의 등장도 반갑습니다.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도 이야기가 산만해지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퍼니셔와 스파이더맨의 조합이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액션 스타일만 놓고 보면 잘 어울리는 콤비는 아니지만, 상극인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의외로 잘 맞습니다. 피터 파커가 필요한 장비를 이야기할 때마다 퍼니셔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 등 개그 장면들이 아주 발군이에요.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피터 파커가 MJ를 잊지 못한 채 4년이나 홀로 지내며 괴로워한다는 설정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21세기 MZ 세대의 젊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MJ 역의 젠데이야가 그 정도로 설득력 있는 외모를 갖췄는지도 개인적으로는 의문이고요.

마지막 절정부도 조금 아쉽습니다. 영화의 중심이 강력한 슈퍼 빌런과의 대결보다는 피터 파커 내면의 사투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마지막을 장식할 만한 화려한 액션 대결이 없습니다. 핸즈와의 대결이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질 것 같지 않은 상대라 긴장감은 떨어집니다.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마블 영화와 세계관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100% 즐기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화끈한 액션과 신선한 아이디어, 적절한 유머에 잘 짜인 이야기를 갖춘 좋은 작품입니다. 

2026/08/02

광장(2025) - 최성은: 별점 2.5점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김부장"을 챙겨봐서인지, 넷플릭스 추천으로 뜨길래 보게 되었네요. 

가장 큰 장점은 액션입니다. 남기준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인지를 과장 없이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초반 PC방에서 벌어지는 난투극과 구준모가 숨어 있던 별장에서의 액션은 현실감 있는 타격감과 묵직한 연출이 인상적입니다. 화려한 기술보다 그야말로 상대를 압도하는 힘과 타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서 남기준이라는 캐릭터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단순한 복수극에서 끝나지 않고, 거대한 음모를 결합한 전개와 흑막은 이금손이었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경찰이면서도 돈을 위해 폭력 조직과 결탁한 뒤, 조직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움직이는 핵심인물 차영도 설정도 설득력있게 그려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구준모가 죽은 이후 이야기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남기준의 목표는 동생 남기석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는 것이었는데, 구준모가 제거된 시점에서 그 목적은 사실상 달성되니까요.
이후 이금손과 차영도가 진짜 배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새로운 복수의 대상이 생기지만, 구준모와 이금손, 차영도의 관계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 다소 억지스럽습니다. 구준모가 남기석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이금손과 차영도가 그 선택을 어떻게 유도하고 설계했는지는 작품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 탓입니다. 구준모가 두 사람의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후반부 액션의 완성도 역시 초반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PC방과 별장에서 보여준 묵직한 실전 액션과 달리, 끝판왕 격인 재일교포 킬러 카네야마와의 대결은 칼부림 중심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홍콩 액션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에요. 이어지는 차영도와 이금손과의 대결 역시 두 사람이 애초에 남기준과 대등하게 맞설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긴장감을 끌어내기는 힘들고요. 쓸데없이 잔인한 것도 영 별로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액션과 분위기만으로도 볼거리는 충분합니다. 후반부 이야기와 액션이 초반의 완성도를 끝까지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킬링 타임용으로는 괜찮습니다.

2026/07/31

명탐정의 유해성 - 사쿠라바 카즈키 / 권영주 : 별점 2점

20년 전 명탐정 가제의 조수였던 나루는 결혼 후 가업인 카페를 운영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튜버 코롱이가 명탐정들의 폐해를 고발하는 영상을 공개한 탓에 가제가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제는 나루와 함께 과거 사건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당시의 진실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잊고 있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고, 명탐정의 추리가 언제나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도 마주했다. 

결국 여행은 끝났고, 나루는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오키 상 수상 작가 사쿠라바 카즈키의 장편입니다. 제목만 보면 본격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탐정이라는 캐릭터와 추리 소설의 관행을 풍자하는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같은 완전 풍자 유머 소설은 아닙니다. '명탐정'이라는 존재를 통해 헤이세이와 레이와라는 두 시대를 대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중년 성장기에 가까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헤이세이는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화려한 명탐정들의 시대입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든 나타나 극적인 추리를 펼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던 명탐정들은 현실적인 인물이라기보다 만화 속 히어로처럼 그려집니다. 반면 레이와는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시대입니다. 한때 명탐정의 조수로 이름을 알렸던 나루는 오십 대가 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알아보지 않는 평범한 동네 중년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화려했던 헤이세이와 소박한 레이와를 '명탐정'이라는 의외의 소재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나루가 가제와 함께 화려했던 헤이세이의 영광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다시 돌아보면서 잊고 지냈던 즐거운 기억뿐 아니라 외면했던 상처까지 마주합니다. 그러면서 지나간 시절을 되찾는게 아니라 현재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요. 그래서 중년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성장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추리적인 재미도 아예 없는건 아닙니다. 초반 나루와 가제가 처음 만났을 때 나루가 사는 곳을 추리해 내는 가제의 추리나 AI 탐정이 사실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 연기하고 있었다는 진상을 나루가 사소한 단서만으로 밝혀내는 장면 등은 꽤 그럴듯 합니다.

명탐정 풍자도 재미있습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에나 나타나고 화려한 언행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작품 속의 헤이세이 명탐정들은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과장된, 초법적인 히어로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졌던 겁니다. 그야말로 만화와 다를게 없었던 것이지요. 

명탐정의 추리를 비판적으로 비판하는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당시 주어진 단서만 놓고 보면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리였더라도, 나중에 새로운 정보가 밝혀진다면 그 결론 역시 왜곡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즉, 명탐정이라는 존재는 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DNA 검사 등으로 나중에 증거는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부족한 정보로 산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데 불과하다는 코롱이의 비난도 꽤 합리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추리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작품 속 추리들은 대부분 이미 해결된 사건을 되돌아보는 형식이고, 그나마 등장하는 사건과 트릭들도 만화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은 탓입니다. '크리스마스 연쇄 살인'에서 피해자들이 받았던 장식물의 순서대로 살해당했단게 대표적입니다. 순록 - 굴뚝 - 벽난로 순으로, 이건 산타의 이동 경로라는 추리거든요. 

코롱이를 중심으로 한 현재 시점의 전개도 다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유튜브 폭로 영상 하나가 과거 사건을 다시 확인하는 긴 여정의 계기가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후반부에 코롱이가 가제와 나루의 일행이 되는 전개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솔직히 등장하지 않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케이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루가 처한 현재 상황 - 모두가 무시하는 투명 인간 - 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라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성격과 행동이 지나치게 거슬려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명탐정을 주제로 그려낸 성장기라는 아이디어는 독특하고, 명탐정에 대한 재해석은 흥미습니다 그러나 추리 소설로는 별볼일 없어서 감점합니다.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5/31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5) 사람먹는 장르 문학

추리 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에는 식인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소재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한 번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독자에게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작품 속 식인은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흔한 형태입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먹이’나 ‘식량’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사람이 평범한 먹잇감으로 취급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좀비물처럼 사람을 잡아먹는 크리처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식육 열차", 그러니까 "미드나이트 미트 트레인"은 조금 다릅니다. 작품 속 빌런인 푸주한 마호가니가 깊은 밤 지하철 승객들을 도살해 인육으로 만드는 이유는 직접 먹기 위해서가 아니거든요. 미지의 절대자에게 대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먹이’가 아니라 ‘미식’의 영역으로 발전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전에 소개드렸던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계보를 잇는 타쿠미 츠카사의 "금단의 팬더"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인육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작품입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끔찍하지만, 장르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람을 먹이로 삼는 경우 중에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육을 먹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다시 재료의 정체를 숨기고 먹느냐, 대놓고 먹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는 대표작은 고전 SF "소일렌트 그린"입니다. 작품 속 “소일렌트 그린”은 인구 폭발과 환경 오염으로 식량이 사라져가는 미래 세계에 등장한 먹거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플랑크톤으로 만들었다고 소개되지만 그 정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대사 “Soylent Green is people!”로 밝혀집니다.

반대로 살기 위해 대놓고 사람을 먹는 작품 중에서는 스티븐 킹의 "서바이버 타입"을 끝판왕으로 꼽고 싶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조금씩 먹어버린다는 엽기적인 이야기인데, 스티븐 킹답게 이 말도 안 되는 설정을 묘하게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두 번째는 범죄 목적으로 식인을 행하는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증거 인멸을 위한 식인일 것입니다. 로드 던세이니의 "두 개의 양념병"은 한 남자가 거처를 떠나지 않은 채, 함께 살던 동거녀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든 사건을 다룹니다. 남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장작 패기라는 적절한 운동, 그리고 입맛을 돋우기 위한 ‘두 개의 양념병’뿐이었다는 내용이지요.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호러 "오메가의 성찬"은 여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아예 전문적으로 시체를 ‘먹어서’ 폐기하는 괴인이 등장하니까요. 증거 인멸이라는 범죄 목적과 식인이라는 혐오 소재가 결합했을 때 얼마나 기괴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또 다른 범죄 목적은 복수입니다. “원수의 간을 씹어 먹는다”는 옛말처럼, 식인은 복수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카니발리즘 소론"에 등장하는 식인이 바로 이런 목적에 가깝습니다. 다만 시각은 조금 독특합니다. 범인이 동거녀를 죽이고 먹은 이유가, 그녀를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니까요. 혐오스럽지만,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발상입니다.

세 번째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속설이 구전되어 왔고, 실제 사건도 존재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경성 죽첨정 단두여아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간질병의 특효약이 아이의 뇌수라는 속설을 믿은 범인이,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어린아이의 사체에서 뇌수를 긁어낸 사건이었지요.

비슷한 맥락에서 이우혁의 단편 "손가락"은 ‘문둥이가 아이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여자친구"도 넓게 보면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낙태한 태아의 사체를 섭취함으로써 극한에 이른 스트레스를 달래려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치료라기보다는 병적인 해소에 가깝지만, 몸과 질병, 치유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식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의학적 목적의 식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식인을 특별한 의미 없이, 캐릭터 형성을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식인만큼 ‘광기’를 즉각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소재도 드물기 때문이겠지요. 토머스 해리스가 창조해낸 한니발 렉터 박사가 가장 유명한 예입니다. 사실 한니발의 식인 행위는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크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한니발이 평범한 인간의 윤리와 감각을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각인시킵니다. 저는 아직도 “내 오랜 친구를 먹으러 가야 하거든”이라는 한니발의 대사만큼 유머러스하면서도 잔혹하게, 동시에 절대자 같은 면모를 드러내는 문장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식인이 캐릭터의 기괴함과 매력을 동시에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장르 문학 속 식인은 여러 목적과 형태로 변주되어 왔습니다. 먹이, 미식, 생존, 증거 인멸, 복수, 의학적 속설, 캐릭터의 광기까지. 충격과 혐오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소재도 드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사용되어 이제는 더 새로운 설정이나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처럼, 제 분류로는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도입된 작품이 발표되는 걸 보면 여전히 놀랍습니다. 저도 언젠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도전해 보고 싶은 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인육을 먹었다는 살인마 부부 사건’ 같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지네요. 과연 실화를 뛰어넘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 시리즈 전체 보기

2026/05/29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레스토랑 - 유키 신이치로 / 김은모 : 별점 2.5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의 작가 유키 신이치로의 공유 주방을 배경으로 한 연작 단편집입니다. 다양한 음식점 수십 개를 등록해 우버 이츠로부터 배달 주문을 받는 공유 주방의 점장이, 외부 활동을 하는 배달원들이 모아온 정보를 바탕으로 추리를 펼치는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설정은 꽤 좋습니다. 점장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미남이지만, 정의감 넘치는 명탐정이라기보다는 적절한 가격에 추리 결과를 제공하는 냉정한 장사꾼에 가깝습니다. 의뢰인만 알고 지불할 수 있는 거액의 요리를 시스템에 등록해 거래하는 방식도 합리적이고요. 배달 앱과 공유 주방이라는 현대적인 시스템을 추리소설의 장치로 활용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깊은 연구도 돋보이고요.

사건 역시 일상계에 가까운 이야기부터 묵직한 살인까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앞부분 수록작들은 설정도 좋고, 추리적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은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을 잘 보여줍니다. 배달원이 사건 현장에서 직접 뛰어다니고, 점장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구조도 안정적입니다.

다만 뒤로 갈수록 설정이 애매해지고, 추리적으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특히 후반부에서 점장의 정체를 실체적으로 밝혀내려는 시도가 등장하는 점은 영 별로였습니다. 이런 인물은 판타지로 남아 있을 때 더 매력적입니다. 굳이 현실적인 설명을 붙이려는 순간, 앞에서 쌓아둔 쿨하고 냉정한 분위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앞의 수록작 두 편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작가의 전작이 영 아니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자기만의 무언가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로서 성장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체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공유 주방과 배달 앱을 결합한 안락의자 탐정물이라는 설정, 그리고 앞부분 수록작들의 추리적 재미만으로도 읽어볼 가치는 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넘어져도 빈손으로는 일어서지 않는 완두콩 싹 달걀 수프 사건

맨션에서 화재 사건이 벌어졌다. 화재가 일어난 방의 입주민이었던 대학생 가지와라 료마는 팬티 바람으로 입주민들을 깨워 도망치게 하여 대참사를 막았다. 그러나 전소한 료마의 방에서 료마의 전 여자친구 유즈키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경찰은 자살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유즈키가 헐렁한 옷을 입고 화재 현장에 나타나 ‘당해봐라’라는 복수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뒤, 불길이 치솟는 건물 안에 자기 발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연에 따른 극단적 선택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점장의 추리는 다릅니다. 료마는 유즈키를 미리 죽여 자기 방에 놓아둔 뒤, 불을 지르고 유즈키의 옷을 입고 나와 유즈키인 척했습니다. 그리고 밖에 있다가 다시 화재 현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유즈키가 스스로 불길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꾸몄던 겁니다.

근거는 배달원의 조사입니다. 료마가 여성스러운 외모와 체구의 소유자이며, 심한 근시라 잘 때는 렌즈를 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료마는 팬티 바람으로 밖에 나와 있을 때 현장에 있던 현재 여자친구를 알아봤습니다. 이 증언을 통해 점장은 료마가 렌즈를 끼고 있었고, 따라서 자다가 급히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합니다.

시리즈의 설정과 분위기를 알려주는 첫 작품으로는 꽤 좋습니다. 사건 자체도 나쁘지 않고, 여장 트릭과 시력 단서를 결합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결말입니다. 사건을 의뢰해던 료마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진상을 알고 싶어 한게 아닙니다. 그 진상을 가지고 아내를 협박하려 했지요. 점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추리를 들려줍니다. 점장은 음식점의 셰프로서 고객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면 충분하다는 식이거든요. 정의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 추리가 진짜라고 보장하지도 않고요. 이 부분에서 의뢰와 돈에만 충실한 추리를 펼친다는, 이 시리즈만의 독특함이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첫 작품으로서 세계관 소개도 잘하고, 추리적으로도 준수합니다. 무엇보다 점장의 냉정한 캐릭터가 확실하게 각인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잉꼬부부의 갈릭 버터 치킨 수프 사건

남편 다이시로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 아내는 처음으로 남편의 왼손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이시로는 왜 손가락이 절단된 것을 숨겼을까? 그리고 아내는 왜 몇 개월 동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설정부터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손가락이 절단된 남편, 그 사실을 몇 개월 동안이나 모른 아내라는 출발점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배달을 맡은 배달원의 가정사와 연결되며 부부 사이의 애정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는데, 이 드라마가 특히 좋습니다. 배달원은 자기 손가락이 잘렸을 경우, 아내가 그걸 알아챌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 불안과 의심이 마지막 식사 장면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이고요. 사건의 수수께끼와 배달원의 개인사가 따로 놀지 않고, 부부라는 공통된 주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소통 부족이라는 사회파스러운 문제 제기까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깔끔합니다. 남편의 아내가 엄청난 악처로, 결혼반지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는 증언이 핵심 단서입니다. 점장은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남편이 그것을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절단했다고 추리합니다. 극단적인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이는 앞서 쌓아온 부부 관계의 드라마와 맞물리면서 충분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추리에 대한 근거 - 구급차 대신 택시를 탔고, 절단된 손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도 합리적이고요.

반지를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추리도 좋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호스티스 리리카를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아내의 이름을 말했을 리 없지요. 그런데 리리카는 아내 요리코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반지 안쪽에 부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반지를 가져간 사람은 리리카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단순하지만 논리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추리였습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악처의 잔소리가 싫었다 하더라도 손가락을 절단한다는건 너무 극단적이지요. 베란다에 대한 조사 역시 조금 과하게 작위적입니다. 그러나 단점들은 사소합니다. 설정과 전개, 드라마, 추리가 모두 잘 맞물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입니다.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의 양파 토마토 수프 사건

나는 전직 패션모델 출신 싱글맘으로 아들 하루토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유일한 위안은 수시로 X에 올리는 글에 대한 반응이었다.

배달원의 일상이 사건과 연결된다는 전개 방식은 직전 작품과 같습니다. 이번에는 배달원이 SNS, 정확히는 X에 중독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폐해를 직접 알거나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건 역시 같은 상황에서 비롯되고요.

수수께끼는 빈집털이범의 기묘한 행동입니다. 범인은 빈집을 털러 들어왔는데, 그 안에서 무언가에 놀란 듯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붙잡혔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빈집 안에서 갑자기 핸드폰을 확인했을까요?

정답은 빈집털이범이 집을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빈집털이범은 배달원으로 일하며 배달품 안에 집집마다 다른 감사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감사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X에 글을 올리면, 범인은 어느 집인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X에 집을 비운다는 글을 남기면 그때 빈집을 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범인은 그 집을 유명 인플루언서 마루미 짱의 집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는 모두 마루미 짱의 계획이었습니다. 마루미 짱은 자기 고교 동창이자 친구인 고토미의 집을 털게 하려고 일부러 고토미의 집에 놀러 가서 배달을 시킨 뒤, X에 감사 메시지를 올렸지요. 이유는 자신에게 악플을 달던 악플러의 정체가 고토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요. 복수하려 한 것이지요.

동기는 좋고, 추리도 깔끔합니다. SNS를 활용하는 범죄 수법도 재미있습니다. X에 중독된 배달원이 X 때문에 개인 사생활이 드러나고, 대중의 관심을 얻으려 할수록 오히려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과정을 사건과 결합한 부분도 괜찮아요. 소재와 주제가 잘 맞물린 편입니다.

하지만 약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감사 메시지를 보낸 배달원이 반드시 빈집털이범이라는 전제가 없다는 점입니다. 마루미 짱은 빈집털이범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고토미 집에 놀러 가서 배달을 시킬 생각이었을까요? 이 부분은 뭔가 설득력 있는 설정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마루미 짱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점장의 추리는 재미있지만, 지금의 내용만으로는 범행 계획이 지나치게 우연에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 하나 불만이었던 건 점장의 태도입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점장은 사건의 진상이 몰고 올 파장과 무관하게 순수히 돈과 주문에만 추구했습니다. 그게 특징이자 멋있는 점이었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배달원에게 훈계하는 듯한 말을 남겨서 점장만의 카리스마가 깨져버립니다. 때문에 캐릭터의 일관성이 이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SNS와 배달 시스템을 이용한 범죄라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사건의 설득력과 점장 캐릭터 운용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수치가 이상한 수준의 건더기 가득한 육개장 수프 사건

작가인 배달원이 점장에게 수수께끼를 가져왔다. 한 여성에게 열 번이나 똑같은 배달원이 음식을 배달했고, 마지막 배달 때에는 밀봉된 배달 음식 봉투 안에 머플러가 들어 있었다는 사건이었다. 마침 그녀가 머플러를 잃어버린 직후였기 때문에,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상황인데...

점장은 음식을 가져다준 사람이 배달원이 아니라, 잘못 배달된 음식을 받은 다른 건물 입주민이었다고 추리합니다. 오래된 맨션의 1호와 2호가 나란히 서 있어서 배달원이 착각했고, 그 잘못 배달된 음식을 받은 남자가 다시 여성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것이지요. 마침 그는 여성에게 호감이 있었고, 여성을 관찰하다가 머플러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된 뒤 선물로 머플러를 넣었습니다. 이는 가게 포장지가 기성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배달 온 포장을 뜯은 뒤, 기성 포장지로 머플러와 함께 다시 포장해서 배달품을 가져다준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더 좋았던 건 이 표면상의 추리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작가가 점장의 정체를 캐내려고 이런 사건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추리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점장은 작가에게 실제 배달 경로로 배달을 시킨 뒤, 그 동선을 확인해서 오배송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밝혀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장의 정체를 캐내려는 작가 설정은 영 별로였습니다. 물론 이런 수수께끼의 가게와 점장에 대해 궁금해하고, 어떻게든 그 실체를 밝혀내려고 애쓰는 인물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너무 어설프다는 겁니다. 미행도 그렇고, 사건을 의뢰하는 방식도 와 닿지 않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한다고 해서 점장의 정체에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애매하고요.

게다가 작가가 점장의 손에 의해 죽고 만다는 결말은 완전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점장은 만화적이고 판타지 같은 인물이지만, 배달원이 현실을 붙잡고 있는 덕분에 그럭저럭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판타지 속 인물처럼 보였던 점장이 현실에 있는 배달원에게 직접 손을 대는 순간, 그 실감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맙니다.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아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사건과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점장의 정체를 파고드는 방향과 결말시리즈의 매력을 깎아먹었기에 감점합니다.

악령 퇴치 닭봉 삼계탕풍 수프 사건

분명히 비어 있는 이웃집에 계속해서 물건 배달이 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달라는 의뢰가 접수되었다. 

진상은 빈집의 옆집 여자, 정확히는 의뢰인 집 기준으로 옆옆집에 사는 여자가 벌인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허술한 맨션 방범 체계를 개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어 있는 집 앞으로 계속 물건이 배달되는 상황을 만들면, 관리인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CCTV를 설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건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비어 있는 집으로 계속 배달이 온다는 수수께끼는 일상계 미스터리지만 나름대로 기묘함을 전해줍니다. 다른 수록작들보다 범죄의 무게가 덜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하지만 진상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맨션의 방범을 강화하고 싶었다면 이런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직접 CCTV를 사서 맨션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만두 배달만 한가득 시켰는데, 최소한 몇십만 원은 들었을 테니까요. 그 돈과 수고를 생각하면 범행 동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맨션 관리인이 진상 주민을 내쫓기 위해 다른 층에서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는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다른 층에서는 장기 출장 간 집 앞으로 배달이 계속되어 그 이웃집 진상이 이사를 갔다고 하는데, 정작 기분 나쁜 건 배달이 온 집 주민이지 이웃집 주민은 아닐 겁니다. 유명한 진상 세입자가 이 정도 일로 꿈쩍이나 할까 싶기도 하고요.

시리즈의 매력인 배달원의 일상과 사건의 연계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번 배달원은 인기 없는 개그맨입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를 자기 개그 소재로 쓰는 것이 전부이고, 본인의 드라마와 사건이 깊게 엮이지는 않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배달원의 개인사가 사건의 주제와 맞물렸던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약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수께끼의 출발점은 괜찮았지만, 진상과 동기, 배달원 캐릭터 활용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인 완탕 고추장 수프 사건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나(가지와라)’는 죽기 전에 범인의 정체를 확신했다...

첫 번째 사건의 배달원이 점장에게 인간 소실 사건 해결을 의뢰했다. 첫 번째 사건의 의뢰인이었던 가지와라 씨가 실종되고, 그의 자택에서는 강한 루미놀 반응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마지막 수록작인데 연작 단편집의 마무리로는 괜찮은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앞선 단편들의 배달원들이 모두 등장하고, 첫 번째 사건 의뢰인과 관련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작품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마지막 작품으로 돌아오는 방식은 일종의 수미쌍관으로, 확실히 연작 단편집이구나!라는 재미를 전해줍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가지와라가 배달을 시켰을 때, 범인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배달원보다 먼저 찾아가 살해했는지가 핵심입니다. 진상은 특정 상품을 주문하면 안건 상담 비용을 할인해준다는 쿠폰에 있었습니다. 범인은 가지와라에게 그 쿠폰을 전달해두었고, 가지와라가 특정 상품을 주문하자 상담 의뢰가 들어온 것을 알고 배달원보다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살해한 뒤, 큰 우버 이츠 가방에 시체를 넣어 옮겼던 겁니다. 이는 특정 상품이 상담과 관련되어 있다는 앞선 설정과도 잘 연결되고, 쿠폰 전달 같은 소소한 정보도 비교적 공정하게 제공되어 마음에 듭니다. 

배달 앱과 공유 주방 시스템을 이용한 시리즈 특유의 장치도 마지막까지 살아 있고, 모든 추리는 결국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점장의 철학도 잘 드러나서 시리즈 작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이 범인이었다는 결말은 뜬금없었습니다. 가지와라의 전처, 그러니까 가지와라 료마의 어머니로부터 암살 의뢰를 받았다고 해서 실제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전개는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쌓아온 세계관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로 직접적인 살인 실행까지 가는 것은 과했습니다.

배달원들이 합심해서 진상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는 설정도 생각만큼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연작의 마무리로 여러 인물을 다시 모으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인물들의 감정이나 관계가 충분히 쌓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마지막에 점장의 추리 철학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긴 것도 단점입니다.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자체는 이 시리즈와 잘 맞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철학을 길게 풀어 설명하다 보니, 사건의 긴장감보다 작가의 설명 의식이 더 강하게 느껴진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5/24

Chat GPT가 그린 토마와 가나 ("Q.E.D")

Chat GPT로 명탐정을 그려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Q.E.D"의 토마와 가나를 그려보았습니다. 만화라서 원래도 캐릭터는 구체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연재가 장기화되면서 작화가 충격적일 정도로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에피소드의, 무려 27년간 이어진 연재의 절정부라 할 수 있는 장면은 특히 실망스러웠어요. 그래서 새롭게 그려보았습니다.

현재 시점인 고 3 졸업반 시기보다는 조금 더 어린, 고등학교 1학년 겨울 쯤의 모습입니다. 15세에 MIT를 졸업하였지만 다시 일본 고등학교에 입학한, 또래보다는 성숙한 느낌의 토마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발랄하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가나 역시 생각했던 그대로의 모습이고요.

이런 작화로 만화가 발표되었다면 애니메이션은 물론, 드라마, 영화 등으로 확장되는 인기 시리즈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실망했다고 말씀드렸던 장면도 다시 그려 소개해 드립니다. 토마가 가나를 소중한 사람이라고 모두에게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2026/05/22

맨 온 파이어 (2026) - 카일 킬렌 : 별점 2점

전직 특수요원 존 크리시는 멕시코에서 벌어진 참혹한 작전 실패로 동료들을 모두 잃은 뒤 제대했고, 그 충격으로 심각한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삶의 의지를 잃고 자살까지 기도했던 그의 재기를 위해, 옛 동료 레이번은 브라질에서 운영 중인 자신의 보안 사업에 크리시를 합류시켰다.

하지만 크리시가 브라질에 도착한 직후, 대규모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레이번의 가족을 포함해 300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레이번의 딸 포만이 우연히 외출 중이었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문제는 포가 테러범의 얼굴을 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범인들은 증인을 없애기 위해 포를 노렸고, 그녀를 향한 공격이 잇따라 일어났다.

크리시는 포를 지키고 레이번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거부했고, 홀로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며 포를 위협하는 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데...

A. J. 퀸넬의 소설 '크리시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입니다. 원작 1편, 2편을 참조했다고 하네요. 넷플릭스로 감상하였습니다.

우선 주인공 크리시의 비주얼은 꽤 마음에 듭니다. 소설 속 크리시를 영상으로 옮기면 딱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칠고 무거우며, 어딘가 망가진 듯한 분위기가 잘 살아 있습니다. 단순히 멋있는 전직 요원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와 피로를 몸에 달고 사는 인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외형만 놓고 보면 영화 버젼의 덴젤 워싱턴보다는 더 설득력이 느껴집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크리시를 단순한 힘 캐릭터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 속 크리시는 상황을 읽고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지능적인 인물에 가깝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카세트테이프에 약간의 물질을 묻힌 뒤, 그것을 생화학 공격으로 오인하게 만들어 습격의 기회를 만드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설득력도 높으며, 이런 식의 해결 방식은 다른 콘텐츠에서 흔히 보지 못했던 것이라 아주 신선했어요.

하지만 이 장점은 단점과 연결됩니다. 크리시가 지능적인 인물로 활약하는 것은 좋지만, 그 대신 기대했던 액션은 많이 아쉬운 탓입니다. "퍼니셔"같은 원맨아미식 활약을 기대했는데 영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의 액션도 크리시가 PTSD를 심하게 겪고 있다는 설정 때문에 중요한 순간마다 무너지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줘서 답답합니다.

크리시가 상처 입은 인물이라는 설정 자체가 나쁜건 아니에요. 문제는 이 설정이 액션 장르의 재미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겁니다. 복수극이라면 분노가 터져나오며 악당들을 쓸어버리는 통쾌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끝까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이야기도 많이 진부합니다. 브라질 대통령이 흑막이라는 전개는 초반부터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전의 맛은 많이 약합니다. 그렇다고 중간 과정이 치밀하지도 못하고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궁지에 몰렸는데, '태픈이라면 자기가 죽었을 때 진상이 폭로되도록 안배했을거다. 그러니까 태픈만 죽이면 된다!'는 급전개는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에요. 이런 이야기라면 태픈이 바이크 운전자이자 적의 편이라는걸 알아챈 뒤 바로 결말로 달리는 식으로 짧게 압축했어야 합니다. 전체 분량 중 절반 이상은 덜어내도 이야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거에요.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장면들도 작위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포가 숨어 있던 빈민촌에서 악당의 하수인이 도주하다가 우연히 포를 마주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연에 기대어 위기를 만드는 장면이 반복되니 긴장감이 생기기보다는 짜증이 먼저 납니다. 더구나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포의 답답한 행동을 부각하는 쪽으로 이어집니다. 보호받아야 할 인물인데도 호감이 쌓이기보다 사건을 더 꼬이게 만드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크리시의 외형과 몇몇 아이디어는 괜찮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원작이나 기존 영화판에서 기대했던 처절한 복수극, 압도적인 응징, 크리시 특유의 무서운 존재감을 생각하면 실망이 더 큽니다. 크리시라는 이름을 가져왔지만, 정작 보고 나면 전혀 다른 작품을 본 느낌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이지만, 크리시 팬에게는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2026/05/09

정점 APEX (2026) - 발타사르 코르마우퀴르 : 별점 2점

사샤는 파트너를 잃고 깊은 상심에 빠졌다. 그녀가 무리하게 암벽 등반을 진행했던 탓이었다. 사샤는 슬픔을 잊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오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인마 벤을 만나 쫓기게 되는데...

샤를리즈 테론과 태런 에저튼이 주연을 맡았고, 호주의 거친 오지를 배경으로 인간 사냥의 표적이 된 주인공과 사냥꾼의 추격전을 그린 최신 서바이벌 액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샤를리즈 테론과 태런 에저튼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두 배우 모두 뻔한 캐릭터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하거든요. 덕분에 사냥감과 사냥꾼이라는 단순한 관계가 그런대로 볼 만해집니다. 추격전도 나름대로 두뇌를 쓰는 부분은 괜찮습니다. 초반부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사샤를 낚는 장면처럼요.

호주 오지의 풍광을 활용한 장면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인간의 체력과 판단력이 한계까지 시험받는데, 워낙 대자연이 압도적으로 묘사되어 화면상으로 제법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중반부까지는 어느 정도 긴장감을 느끼며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오지에 사람을 사냥하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있고, 주인공이 그에게 쫓기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설정이 지나치게 뻔한 탓이 큽니다. 사샤가 등산과 서바이벌에 능한 전문가라는 설정도 훨씬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야 했는데, 영화는 그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단순한 도주와 추격으로 채울 뿐입니다. 사샤가 지형과 등반 기술을 이용해 벤과 치열하게 맞서는 장면이 더 많았어야 했습니다.

뒤로 갈수록 긴장감과 재미도 떨어집니다. 초반에는 압도적인 자연환경과 인간 사냥이라는 설정이 결합하면서 어느 정도 몰입하게 만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해지며 액션도 별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결정적 도주 장면의 설득력이 너무 부족해요. 귀를 물어뜯어 위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기대에 비해 너무 시시했습니다.

게다가 이어지는 결말은 아쉬움의 '정점'을 찍습니다. 다리를 다친 벤이 자기 목숨을 순순히 사샤에게 거는 듯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지금까지 사람을 사냥해온 인물이라면 더 집요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마지막 승부를 걸었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찌질한 악당으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여기에는 살인마 벤에게서 미친 사냥꾼의 압도적 카리스마를 느끼기 힘들다는 이유도 한몫 단단히 합니다. 벤 역을 맡은 태런 에저튼의 연기가 아무리 좋아도, 어린아이 같은 인상과 왜소해 보이는 체격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이 역으로 마동석이 할리우드 데뷔를 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고, 시작 부분의 등반 장면과 호주 오지의 풍광을 살린 서바이벌 장면들은 중반부까지 볼 만합니다. 하지만 설정이 뻔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며, 사샤의 전문가적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단점 때문에 감점합니다. 비슷한 장르를 많이 본 관객에게는 새롭거나 강렬한 인상을 주기 어려운 그냥저냥한 킬링타임용 액션 영화예요. 굳이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2026/05/02

귀공자 (2023) - 박훈정 : 별점 2.5점

코피노 마르코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한국으로 향했다. 그런 마르코를 뒤쫓는 의문의 남자, 자칭 "친구"에 의해 아버지의 부하들은 모두 죽었다. 마르코는 우여곡절 끝에 의붓형을 만났지만, 의붓형 한이사는 마르코가 아버지에게 심장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곧바로 수술이 시작되었지만 수술실에 '친구'가 나타나 마르코를 구해주는데...

박훈정 감독의 액션 영화입니다. 최근에는 미중년 액션물을 많이 보았는데, 생생한 젊은 남자가 펼치는 무쌍 액션물은 오랫만이네요. 그런데 이 젊은 남자, '친구'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마르코에게 자기는 "친구!"라며 살갑게 굴다가도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실력을 가진 프로 해결사라는 모순적인 인물을 잘 그려낸 덕분입니다. 명품 정장을 걸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살육을 벌인다는 모순도 그럴듯하게 표현됩니다. 여기에는 '친구'역을 맡은 김선호의 연기와 매력이 한 몫 단단히 하고요. 그야말로 혼자서 영화를 끌고 갑니다.

김강우가 연기한 한이사도 빌런으로는 나쁘지 않습니다. 돈과 상속이 전부인 잔혹한 속물 재벌 2세라는 인물상을 설득력 있게 연기하고 있거든요. 그리 깊이 있는 악역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뻔하지만, 장르 영화 속 빌런으로는 충분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액션도 괜찮습니다. 합도 잘 맞고, 장면의 동선도 지루하지 않게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박훈정 감독 특유의 잔혹한 분위기도 잘 살아 있어서 총격전, 맨손 격투, 자동차 추격 등 종류도 다양한데 뭐 하나 처지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친구'가 마르코를 쫓는 추격전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순히 죽이려는 사람과 도망치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장난이 많이 포함된 애매함이 독특했어요. 이 과정에서 '친구'의 엄청난 신체 능력도 튀지 않게 선보여서 마음에 듭니다.

각본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지만 여러 설정을 적절히 잘 써먹는 것도 눈에 띕니다. '친구' 역시 코피노 출신이라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필리핀어로 정보를 주는 장면으로 잘 이어지는 식으로요. 덕분에 마르코를 이용해 돈 벌 생각만 있어 보였던 '친구'가 사실은 마르코의 편이었다는 결말도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핵심 설정이 너무 말이 안 된다는 문제는 큽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상속에서 지기 때문에 심장 이식 수술을 시켜야 한다는 상황은 그럴듯합니다. 문제는 그 심장 제공자가 반드시 사생아인 마르코여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에요. 이 일을 위해 쓴 돈만 당장 천만 달러 규모이고,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도 수십 명입니다. 그 정도 비용과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면, 마르코 한 명에게 매달리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심장을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최소한 유전적인 조건이나 특수한 의학적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 필요했어요.

액션은 앞서 말했듯 좋지만, 김선호가 연기한 '친구'의 무력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조금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악당들은 수수깡과 다름이 없으니까요. 그에게 맞설 수 있는 빌런이 한 명 정도는 나와주었어야 했습니다. '친구'가 나타나면 만사형통이라, 강한 캐릭터를 보는 재미는 있지만 위기감은 약합니다.
여기서 마르코의 활용도 아쉽습니다. 초반에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복서로 등장해서 당연히 그의 복싱 실력이 후반부 어떤 식으로든 쓰일 것이라 기대하게 만드는데, 이야기 내내 마르코는 쫓기고, 얻어맞고, 도망치는 역할에 머뭅니다. 이럴 거라면 왜 굳이 복서라는 설정을 길게 보여주었는지 모르겠네요.

마지막 장면에서 한이사가 '친구'를 그냥 보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도 남습니다. '친구'가 거래를 깨고 그들을 죽인 뒤 마르코를 구해주었을까요?

그래도 흥행에 실패할 정도의 망작은 아닙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야기의 짜임새를 중요하게 보는 관객이라면 아쉬움이 크겠지만, 최소한 김선호의 연기만으로도 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액션도 좋고요. 속편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2026/04/18

장송의 프리렌 : season 2 (2026) - 키타가와 토모야 : 별점 4점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모두 10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Season2는 거대한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달려가는 구성이라기보다는, 각 화가 비교적 독립적으로 완결되는 형식에 가까운 흐름을 보여주는게 특징입니다. 긴 호흡의 대서사 대신 에피소드별로 잔잔하게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이어지거든요. 특히 프리렌이라는 작품의 핵심인 '과거의 모험을 현재의 시간 위에서 천천히 되짚는다'는 테마를 이야기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이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마을, 예전에 접했던 풍경들, 예전에 함께 보냈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만남과 사건을 통해 다시 의미를 얻게 되는데, 화려한 사건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그야말로 힐링물로서의 매력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잔잔한 것만은 아닙니다. 웃음을 섞는 타이밍이 좋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소소한 재미도 살아 있으며, 필요할 때는 액션의 밀도도 충분히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액션 쪽에서의 만족도도 높습니다. 이번 시즌의 핵심인 마족 "신기의 레볼테"와 맞서는 에피소드는 비교적 긴 호흡으로 전개되는데, 묵직하고 진지한 전투 연출에 더해 캐릭터들의 협력 구도가 돋보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슈타르크와 게나우가 연계하여 레볼테와 싸우는 장면은 이번 시즌의 백미라고 부를 만합니다.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움직임과 타이밍이 잘 맞물린 연출로 마지막 순간까지 긴박감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그 외, 주제가도 좋고 작화도 안정적인 등 단점을 찾기 어려운 좋은 작품인데,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여행, 모험에 대한 목적 의식이 다소 흐릿하게 느껴진다는 점 정도입니다. 게다가 잔잔하기까지 해서 긴 이야기 중간의 쉬어가는 부분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드네요. 다만 이건 단점이라기보다는, 본래 이 작품 특징에서 비롯된 셈이라서 불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분위기를 이어서 다음 시즌이 더 빨리 나와 주기 바랍니다.

2026/04/17

이과장 생존기 - 불량집사 : 별점 2점

사출 업계를 전면에 내세운 장편 웹소설입니다. 자주 찾는 커뮤니티에 작가분이 계신 덕분에 우연찮게 알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가장 돋보이는건 배경이 되는 사출 업계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설명입니다. 생산과 영업 정도만 훑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 동포와 탈북민 고용 문제, 현장 생산 환경, 원료 수급, 노동자들의 처우와 수당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또한 단순히 용어나 업계 분위기를 가져다 붙이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 배경 자체를 이야기의 동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도 좋습니다. 노동 환경 개선 문제나 공장장과의 갈등, 현장 내부의 자체적인 규율, 고부가가치 상품 개발과 공장 확장, 원료 수급 등의 실제 공장 내 환경이 이야기의 소재로 사용되어 업계물로서의 현장감은 압도적이라 할 수 있어요.

웹소설답게 호흡도 빠르고 전개도 시원시원합니다. 문장이 어렵지 않고 사건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때문에 가독성도 좋은 편이에요. 실제 기업을 연상하게 만드는 설정 역시 이 소설의 재미를 높여 주는 요소입니다. 남양, 매일유업, 오뚜기(아마도?) 같은 현실 기업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기업 구조와 이해관계를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줍니다. 

주인공의 성공 방식도 나름 인상적입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나 "상남자"처럼 이미 알고 있는 미래를 발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작품의 이과장은 자기 힘으로 성과를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정도 경영과 사원 복지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 유튜브를 성공의 도구로 활용하는 설정은 판타지스럽기는 하지만 아주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한 철저한 업계 조사가 뒷받침된 덕분이지요. 한성에서 태성으로 자리를 옮긴 뒤, 된장 계량 스푼에서 시작해서 친해진 '본부장'의 절대미각을 살린 '본부장 부대찌게'와 '본부장 커피' 런칭에 힘을 보태 성공을 거두는 부분까지는 읽으면서도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사와 소재가 잘 짜여져 있었거든요.  

그러나 본부장 커피 이후는 솔직히 망작입니다. 그냥 판타지로 전락해 버리는 탓입니다. 게다가 중국 진출 시점부터는 그야말로 가관이에요. 여러 활동을 통해 이과장(이 시점부터는 이사장이지만) 중국에서 일종의 계몽 활동을 펼치다가, 심지어 시진핑 주석까지 만나는 식으로 흘러가는데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현실적인 산업 현장 서사와 기업 성장담이 이 작품의 강점이었는데, 그와는 동떨어지는 황당무계한 전개였습니다. 

등장인물들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인물들이 상당히 전형적이거든요. 이과장은 착하고 정의로운 인물이며, 그의 아내 오세정도 비슷한 결을 공유합니다. 잘생긴 처남 캐릭터는 설정만 놓고 보면 조금 튀는 편이지만, 결국 엄청나게 착한 훈남이라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서사가 길어질수록 캐릭터의 힘이 떨어집니다. 러브라인도 특별한 긴장감이나 설렘을 주지 못해 보는 맛이 약합니다. 이야기 전체가 산업과 경영 쪽으로 무게를 두고 있다 해도, 인물 관계에서 오는 흡인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훨씬 풍성한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생생함이 탁월한 외국인 노동자나 탈북자를 좀 더 중요하게 썼더라면 독특한 맛이라도 살렸을 텐데 말이지요.
등장인물들의 설정 활용도 아쉽습니다. 대표적인게 이과장의 탁월한 시력에 대한 설정입니다. 처음에는 뭔가 중요한 장치처럼 보이는데, 막상 이야기 전체를 놓고 보면 특별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결말도 영 별로에요. 태성을 대기업으로 키워 내는 쪽으로 끝까지 밀어붙이거나, 반대로 판타지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확실한 방향성을 가졌어야 하는데 일종의 번아웃 상태에서 대충 살기로 마음먹는다는 결말이라서 성공기라는 측면에서도 애매하고 판타지 서사라는 측면에서도 애매해져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허무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업계물로서의 사실감과 가독성, 그리고 국내에서의 성공담이 주는 재미는 분명합니다. 특히 사출 업계에 대한 묘사만큼은 대단한 강점이고요. 그러나 여러 단점들로 인하여 전체적인 만족도는 많이 떨어집니다. 재미가 아주 없는 작품은 아니지만, 선뜻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3/27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 찰리 돈리 / 안은주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는 변호사인 아버지 프랭크 무어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장기 복역수의 가석방 절차를 인계받아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도적'이라는 별명으로 40년 전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 토머스 미첼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미첼이 죽였다는 피해자의 시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찰리 돈리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작품은 현재 시점의 로리와 과거 시점의 앤절라 미첼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데, 앤절라 미첼 시점에서 ‘도적(The Thief)’이라 불린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과정이 더 볼만 합니다. 앤절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흐름이, 앤절라의 자폐로 인한 강박적인 심리묘사와 함께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덕분입니다. 앤절라가 헛다리 - 남편 회사의 새 고용인이 범인이다, 친구 남편이 범인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 를 짚어 나가다가 범인이 남편 토머스라는걸 깨닫는 장면까지의 빌드업도 좋습니다.

로리의 아버지 프랭크와 토머스 미첼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토머스 미첼이 60년 형을 선고받은 결정적 이유는 아내 앤절라 미첼의 실종 때문이었습니다. 도적이 저지른 연쇄 살인은 시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하는데 실패했거든요. 선고 후 토머스는 아내를 찾아 달라며 프랭크를 개인적으로 고용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않은 앤절라의 생존이 확인되면 자신은 풀려날 수 있으니까요.
프랭크도 처음에는 의뢰인인 토머스를 믿고 앤절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랭크는 토머스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 그리고 앤절라는 토머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앤절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함과 동시에 토머스를 속여 가며 가석방을 늦춰 왔던겁니다.
이는 현재 시점의 화자인 로리가 바로 토머스와 앤절라의 딸이었다는 그럴싸한 반전으로 이어지며,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만들고요.

하지만 절대로!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연쇄 살인마와 맞서 싸우는, 다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흔해빠진 양산형 범죄 스릴러에 불과한 탓입니다.
특히 주요 화자인 로리와 앤절라의 자폐 성향이나 강박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 묘사는 과할 뿐더러, 최근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캐릭터 유형을 그대로 반복하여 식상합니다. 친절하고 다정해 보였던 남편이 사실은 연쇄 살인마였다는 설정 역시 뻔하고요.

수사 과정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토머스가 증거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거의 십 년 동안 여성들을 수십 명이나 살해했는데 경찰과 검찰이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설정, 그리고 토머스를 체포하는 근거가 되었던 실종 여성의 신분증과 목걸이는 분명한 물증인데 이걸 단순한 정황 증거처럼 취급했던 재판 과정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토머스의 후반부 행동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는 40년 동안 복역한 뒤 가석방되자마자 곧바로 앤절라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캐서린과 그레타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무리한 행동을 해야 할 이유가 작품 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토머스가 시한부라든가 하는 설정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어요.
범행 과정 역시 허술합니다. 그레타를 살해하면서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는 등 명확한 증거를 남기는데, 이런 방식은 40년 전 이야기라면 모를까 2020년대에서는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CCTV도 있을테고요.
마지막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진상을 눈치챈 로리가 토머스의 집을 혼자 찾아가는 행동부터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토머스가 언제나처럼 희생자를 매단 교수대를 만들어 변태적인 놀이를 즐기다가, 숨어 있던 로리의 기습을 받고 죽는 결말은 허무함의 극치였고요.

불필요한 묘사도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 주인공들의 심리적 문제를 강조하는 묘사는 과할 정도로 반복되고, 캐스트너 인형 복원이나 플로이즈 다크로드 맥주 같은 이상한 취미와 집착도 이야기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카밀 버드 관련 설정은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고, 로리의 연인인 레인의 존재 역시 작품 전개에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앤절라가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범죄 전문가라는 로리가 이를 지나치게 늦게 눈치챈다는 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범죄 스릴러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지탱할 만큼의 독특함은 없어요.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6/03/22

관상 (2012) - 한재림 : 별점 2점

계유정난에 관상이라는 소재를 결합한 2012년 영화입니다. 당시에는 미처 보지 못했었는데,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유명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답게 배우들의 연기가 가장 눈에 띕니다. 특히 김종서 역의 백윤식과 수양대군 역의 이정재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두 배우 모두 캐릭터에 완벽하게 어울리며, 등장하는 장면마다 집중도를 끌어올리는 호연을 보여줍니다. 그 외 배우들도 전반적으로 연기와 외모 모두 역할에 잘 맞는 캐스팅이라 어색함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전개도 중반까지는 꽤 괜찮습니다. 관상가의 활약을 그린 전반부는 적절한 유머가 더해져 유쾌하고, 김종서 측과 수양대군 측의 지략 대결로 넘어가는 중반부 이후는 잘 만들어진 정치 드라마로 몰입해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수양대군의 얼굴을 숨기고 관상을 보게 만든 장면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또 10년도 더 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적인 완성도도 흠잡을 데 없습니다. 촬영이나 미술, 의상, 음악, 소품 등 전반적인 퀄리티가 높아 화면 자체가 안정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관상가 김내경의 아들 진형이 수양대군 측의 계략에 당하고, 이를 계기로 팽헌이 김종서의 계획을 넘겨버리는 시점 이후부터 전개가 급격히 지루해진다는 점입니다. 슬로우모션이 과하게 사용되고, 여러 인물들의 최후를 계속 이어서 보여주는 탓에 극적인 효과가 점점 떨어집니다.
게다가 계유정난의 성공과 김종서의 최후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를 새롭게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애초에 쉽지 않았을 텐데, 결과적으로는 길게 늘어지면서 지루함만 남는 느낌입니다. 차라리 이 부분을 짧고 강하게 정리하고, 김내경 중심으로 마무리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후반부는 길고 힘이 빠집니다.
영화 설정도 다소 아쉽습니다. 김내경은 자신의 상을 보지 않았던 걸까요? 높은 관직과 부귀영화를 노리다가 아들까지 잃는 운명을 조선 최고의 관상가가 알지 못했다는 점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김내경의 아들 진형 역의 이종석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미스캐스팅이라고 느껴집니다. 설정상으로는 연민을 자아내는 어린 소년 같은 이미지가 필요했는데, 배우의 외형이나 분위기가 잘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믹한 장면에서만 소비된 연홍의 캐릭터도 다소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영화적인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후반부 전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2026/02/08

십각관의 살인 1~2 - 키요하라 히로 (아야츠지 유키토 원작) : 별점 2.5점

이번 주는 "십각관의 살인"으로 꽉 찬 한 주네요. 결국 만화 버전까지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마침 리디 북스에서 제공하고 있더라고요.
원작과 거의 똑같은 전개인데, 만화만의 각색 요소가 몇 가지 있습니다.

  • 가와미나미(카와미나미)가 여자로 바뀐 점
  • 치오리가 술을 먹다가 죽은게 아니라 연구회원들과 크루즈 여행 중 사고사 했다는 점
  • 마지막 장면에서 엘러리가 밴(반)에게 속는게 아니라 진범을 밝히고 죽는다는 점

입니다.

이 중 치오리를 사고사로 만든건 괜찮은 각색이었어요. 치오리만 구명 조끼가 없는걸 알게된 반이 치오리는 사고로 죽은게 아니라 연구회원들에게 구명 조끼를 빼앗겨 죽었다!고 여기고 복수를 펼친다는건 원작보다는 조금 더 설득력있는 동기였으니까요. "소년 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 사건"과 똑같은 동기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큰 틀에서는 다른 건 없습니다. 핵심 트릭인 반의 정체는 모리스였다!는 똑같은 탓입니다. 사실 궁금했던건 모리스가 반이라는걸 어떻게 숨기면서 전개할까 하는 점이었는데, 그냥 헤어스타일만 다르게 - 모리스는 단정하게 묶고, 반은 대충 풀어헤치는 스타일 - 묘사할 뿐입니다. 보다 정교한 만화적인 장치가 들어갈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어요.
작화도 나쁘지는 않지만 순정 만화체라는건 작풍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작품의 주인공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십각관에 대한 묘사가 그닥이라는 단점은 큽니다.

그래도 긴 장편을 무리없이 만화화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캐릭터들도 대체로 원작과 부합하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소소하게 읽을 만 합니다.

2026/02/01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2025)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호주 국빈 만찬이 열리던 밤, 백악관 관리 총책임자 A.B. 윈터가 시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측근 해리 홀린저 등은 자살로 무마하려 했지만, 워싱턴 경찰 국장이 수사를 위해 부른 명탐정 코델리아 컵은 살인 사건이라며 백악관을 폐쇄하고 모든 관계자와 초대 손님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여러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되었으나, 국회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세 번째 남자)이 밝혀져 다시 코델리아 컵이 소환되는데...

넷플릭스에서 감상한 추리 드라마입니다. 총 8회 에피소드, 시간으로는 약 8시간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장편 영상 추리물을 본 건 처음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안락의자형 추리물을 영상화한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컵 탐정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전개의 대부분인데, 이를 단순히 나열했더라면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언 장면과 컵 탐정이 추리한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왜곡된 증언과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범인 릴리 슈마커가 대통령의 배우자 엘리엇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건 발생 당시 2층을 비우고, 이후 사건 현장은 옐로우 룸을 드나드는 문을 폐쇄하는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핵심 단서인데, 릴리가 인터뷰 중 실제로 엘리엇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이런 장면은 소설로는 구현하기 힘든, 영상물이기에 가능했던 연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단서들, 예를 들어 백악관 내부 그림의 이동으로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 등도 모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정 코델리아 컵도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마을과 인간 관계의 전문가인 미스 마플처럼, 자신이 지닌 "탐조"라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던 덕입니다. 
스스로를 천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무능을 드러내며 면박을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 또한 인상 깊습니다. 고전 본격물의 "잘난 척하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백악관 관계자들의 무능과 거짓이 워낙에 강하게 드러나는 덕분에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추리의 절정에서 선보이는 추리쇼도 명탐정답게 화려합니다. 릴리가 범인임을 밝혀내고, 핵심 증거인 시계를 찾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카일리 미노그의 깜짝 카메오 등장도 재미요소였어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악관 내부 묘사입니다. 지나치게 희화화되어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조직이 이렇게 무능하게 묘사된다는 건 과장이 지나치지요. 백악관의 전통과 규범은 무시한 채, 개인의 아집으로 만찬을 망친 요리사 실라와 파티셰 디디에, 알코올중독 집사, 그리고 불청객과 정체 불명의 게스트까지 들여보낸 경호원들 모두 다음 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게이라는 설정 역시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풀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인 릴리가 퍼스트 레이디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테고요. 여러모로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였습니다.

추리적인 면에서도 억지가 있습니다. 릴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대통령 동생 트립, 엔지니어 브루스, 파티셰 디디에 등이 우연히 개입한 탓입니다. 거의 동시에 사건 현장에 모였던 여러 인물이 벌인 우발적 행동으로 인해 사건이 꼬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건이 호주 국빈 만찬 중에 벌어졌고, 국빈들을 감금했다는 설정도 무리입니다. 백악관 직원을, 백악관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점은 이미 코델리아 컵에 의해 밝혀졌던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국빈들은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의 감금을 유지하더라도요.

후더닛물답게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는 있지만, 정작 범인 릴리의 동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점도 아쉽습니다. 릴리는 재벌가 출신으로 애초에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희박합니다. 실라나 엘시처럼 직접적인 "해고"라는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횡령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의 딸인 릴리가 이 정도 이유로 해고되거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합니다. 설정의 과도함과 동기의 빈약함 같은 단점은 분명하지만,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볼 만합니다.

2026/01/24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 (2025~2026) : 별점 3점

"흑백요리사 시즌 2"는 지금은 흔해빠진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다른 요리 서바이벌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던, 이미 성공한 셰프들과 신인들을 대결시킨다는 대결 구도를 잘 살려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워낙 쟁쟁한 셰프들이 백수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참가자는 단연 후덕죽 셰프입니다. 50년이 넘는 요리 경력을 지닌 요리계의 거물이 자신의 긴 이력에 기대지 않고, 거의 자식뻘에 가까운 후배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연에 나선다는 사실 자체가 큰 감동이었습니다. 결승 직전까지 가는 엄청난 실력이 함께 한 덕분이지요. 특히 당근 요리 지옥에서 요리괴물과 맞붙은 대결은 무협지의 비무대회에서 원로 고수와 신예 후기지수가 맞붙는 장면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긴장감과 재미가 넘쳤습니다. 그날의 당근 짜장면은 단연 최고의 한 수였고요. 만약 그게 결승 요리였다면, 요리괴물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애청하는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친숙해진 셰프들의 출장도 반가왔습니다. 손정원 셰프야 백수저로 등장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이력의 소유자이지만, 정호영 셰프와 샘 킴 셰프는 솔직히 초반에는 애매하거나 웃음 후보가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 경연에서 예상과 달리 끝까지 잘 버텨주어서 좋았어요. 특히 정호영 셰프는 탑 4에 오르는 성적으로 실력을 분명히 입증했지요. 대진운이 따른 측면도 있겠지만, 이런 경연에서 운 역시 실력의 일부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인정할 만한 결과라 생각됩니다.

또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나치게 캐릭터를 과시하거나 센 척에 집중하는 흑수저 요리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자신감으로 가득찬 요리괴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매너 있게 경연에 임하고 있어, 시청자로서 불편함 없이 대결에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시즌 1에서 중간에 하차했던게 이상한 캐릭터 만들기에 의한 불편함 때문이었는데, 그런걸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대결도 꽤 잘 짜여 있습니다. 개인전과 팀전의 배치, 그리고 후반부에 등장하는 요리 천국과 요리 지옥이라는 대비되는 무대는 흐름을 단조롭지 않게 만듭니다. 특히 요리 지옥에서 진행된 당근을 활용한 30분 요리 대결은 이번 시즌을 대표하는 명장면이라 할 만합니다. 제한된 재료인 당근 하나로 이렇게 다양한 발상과 요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고, 결과물의 완성도 역시 납득이 갔습니다.

결승으로 이어지는 서사도 인상 깊었습니다. ‘나를 위한 요리’라는 결승전 주제는 경쟁의 끝에서 요리사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들었고, 최강록 셰프의 우승은 단순한 실력 경쟁을 넘어 감정적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결말이었습니다. 감동과 재미를 모두 잡은,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좋은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시즌 1에서도 느꼈던 부분이지만, 백수저 참가자들 사이의 급 차이는 여전히 큽니다. 각종 대회 우승자, 미슐렝 스타 셰프와 단순히 방송 출연 경험이 많은 스타 셰프를 같은 선상에서 경쟁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참가자 선별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선재 스님은 사찰 요리의 대가이지만 육류나 오신채를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제약을 안고 있고, 고기굽기 연구소장의 경우는 BBQ에 특화된 영역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전문 셰프라고 보기 애매한 참가자, 혹은 특정 장르에만 지나치게 특화된 참가자들은 애초에 어느 정도 걸러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리괴물의 캐릭터 만들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굳이 그렇게까지 센 척하는 연출이 필요했는지 의문입니다.

대결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흑백 팀전이 가장 큰 문제에요. 여기서 패한 팀은 전원이 탈락한다는 규칙인데, 흑수저들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으니까요. 패자 부활전으로 두 명을 살려주기는 했지만, 그 중 한 명이 누가 봐도 결승까지 올라갈 요리괴물이라서 긴장감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팀을 섞거나, 최소한 두 팀 씩 나눠 경쟁하게 했다면 긴장감과 공정성을 모두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심사위원 평가 역시 쉽게 공감되지는 않았습니다. 백종원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느껴진 탓이 가장 크지만, 안성재 셰프의 심사 또한 일관되게 공정하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특정 분야에 대해 가혹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심사위원 수를 늘려 다양한 관점이 반영되었더라면 더 좋았을거에요.

그래도 잘 짜인 미션과 인상적인 참가자, 그리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결말을 보여준 재미있는 시리즈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요리 서바이벌 예능을 좋아하는 시청자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