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빅토리아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빅토리아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06/2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8) 카레가 건너 온 추리 소설

카레는 친숙한 요리입니다. 한국군 전투식량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요. 우리와 교류가 적었던 인도의 전통 요리가 이렇게 친숙해진 건, 영국의 인도 식민지 지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식민지에 진출했던 영국인들이 현지에서 고용했던 요리사들과 함께 귀국하면서 여러 인도 요리가 영국에 들어왔지요. 이후 이 음식들은 영국인의 입맛에 맞게 밀가루를 넣은 스튜 형태로 변형되었고, 때마침 영국 회사 C&B에서 인도 향신료를 배합한 가정용 분말을 출시하면서 널리 퍼졌습니다. 

고기와 채소를 썰어 넣은 걸쭉한 스튜처럼 조리하되, 시판 향신료 분말로 이국적인 맛과 향을 더한 음식. 영국인들은 이를 인도 타밀어로 ‘소스’라는 뜻의 ‘카리(Kari)’에서 따와 ‘커리’라고 불렀습니다. 정작 인도에는 없는, 영국에서 탄생한 인도 요리인 셈입니다. 참고로 커리라는 명칭은 카릴, 혹은 카리라고 불리던 매콤한 남부 인도 요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국인들의 삶 속에 커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는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경주마 은점박이" 사건에서 마방 조교사 집의 저녁 식사로 양고기 카레가 등장하니까요. 범인은 마굿간 청년들에게 맛이 강한 아편 분말을 섞어 먹이기 위해 이 요리를 택했습니다. 커리의 강렬한 맛이라면 웬만한 약을 숨기기에 적절했을 테니, 범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지요.

"해군 조약"에서는 의뢰인 펠프스와 함께하는 식사 메뉴 중 하나로 닭고기 커리가 나옵니다. 허드슨 부인의 특기처럼 소개되는데, 이렇게 평범한 저녁 메뉴로 등장할 정도라면 당시 영국에서 커리는 우리나라의 김치찌개 정도 위치의 음식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영국에서 커리의 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1년, 영국 외무부 장관 로빈 쿡은 인도 카레라이스의 일종인 치킨 티카 마살라를 ‘진정한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니까요. 2015년에 발표된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도 정통 인도 커리인 치킨 코르마가 자주 먹는 요리로 소개됩니다. 코르마는 주 향신료인 마살라에 버터와 크림, 요거트 등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내는 커리인데 여주인공 릴리는 단골집에서 테이크아웃해 온 치킨 코르마에 견과류를 갈아 넣습니다. 심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연인 에릭을 살해하기 위해서요. 에릭은 예상대로 치킨 코르마를 먹은 뒤 발작을 일으키고, 릴리가 치료제를 숨긴 탓에 결국 질식사합니다. 약을 섞지도 않은, 그야말로 완전범죄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이렇게 영국인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은 커리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카레는 단순한 서양식 요리를 넘어, 밥과 함께 먹는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일본에는 1870년대 국비유학생 야마가와 겐지로가 최초로 영국식 커리를 전래했습니다. 이때 일본식 발음으로 ‘카레’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당시 일본에 여러 서양 요리가 전파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카레는 독보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때마침 일본 해군이 영국군을 따라 카레를 장병들에게 보급했던 덕이 컸습니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 주요했지요. 고기도 작게 썰어 넣어, 육고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당대 일본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시대에 돼지고기와 감자, 당근이 들어가는 현대적인 레시피가 정착합니다. 영국 C&B 카레 가루를 국산화한 카레 가루 제조사도 등장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카레라이스’가 가정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3분 카레’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즉석 카레 역시 1968년 일본 오츠카식품이 레토르트 파우치에 카레를 넣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입니다. 일본은 카레에 정말 진심이었던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카레의 인기는 밥과 함께 먹는다는 개념을 넘어, 여러 음식으로 확장된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카레빵이 대표적입니다. 이름 그대로 속에 카레를 넣은 빵이지요. 도쿄 명화당이 1927년 특허 등록한 양식 빵이 원조라고 합니다. 라쿠고가 엔시 씨가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소설 "가을꽃"에서 맛있게 빵을 먹는 삼원칙 이야기가 나올 때도 언급되었지요.

카레 우동은 1909년 와세다대학 옆의 오래된 소바집 ‘산초안’에서 개발한, 메밀국수 위에 카레와 파를 얹은 카레 남만이 발전한 음식입니다. "시인장의 살인" 도입부에서 낯선 여학우가 무슨 메뉴를 주문할지를 두고 아케치와 하무라가 추리 대결을 펼칠 때, 아케치가 선택한 메뉴이기도 합니다. 일본 전통 요리와 카레가 결합된 음식이라는 점에서, 좀비물과 본격 추리물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작품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런 나라니 당연히 카레 전문점도 많습니다. ‘아비꼬’나 ‘코코이찌방야’ 같은 일본 카레 전문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영업 중이지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에는 ‘파라다이 로스트’라는 카레 가게가 등장합니다. 이 가게는 미나코가 중학생 때 교회 부설 고아원인 ‘성모의 정원’에서 임신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뒤 시작한 곳입니다. 그녀의 아들 분지는 정신지체아로, 성장한 뒤 가게에서 함께 일하게 됩니다.
미나코는 성모의 정원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지만, 수녀들은 더럽다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녀가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근처에서 실종된 어린아이를 찾기 위해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카레를 제공했을 때뿐이었지요.
그 뒤 죽어서도 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거절당한 미나코를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분지는 먼저 어린아이를 유괴합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미나코의 사체로 만든 카레를 제공합니다. 고기의 특성을 지울 수 있는 카레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영국에서 태어나 일본의 생활 음식으로 자리 잡은 카레는, 카레는 우리나라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곧바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컸을 것입니다.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도 경성지방법원에 호송된 뒤 법원 구내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김치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는 후쿠신즈케가 곁들여지지 않은 것은 카레라이스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에게 김치도 한 번 권해 주고 싶네요.

하지만 카레가 세계적으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슴 따뜻한 드라마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알려주듯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영양 균형이 좋은 음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도에서 출발한 향신료 요리는 영국에서 스튜가 되었고, 일본에서 밥과 만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치와 함께 먹는 일상식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한 끼를 든든하게 채우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점만은 같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카레가 어떠신가요? 기왕 먹을 것이라면, ‘컨트리 캡틴 치킨’을 한 번 시도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요리는 1849년 출간된 책에 실린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레시피로 널리 알려졌는데, 시기적으로 볼 때 허드슨 부인이 홈즈를 위해 만들었던 닭고기 커리도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로버트 플라워 리델, "인도 가정과 요리책", 1849

  1. 닭고기를 잘게 썬다. 
  2. 양파는 채 썰어 버터에 갈색이 되도록 볶는다. 
  3. 닭고기에 소금과 커리 가루를 뿌리고 노릇해질 때까지 볶는다. 
  4. 스튜 냄비에 수프 1파인트와 재료를 함께 넣는다. 
  5. 국물이 반으로 줄 때까지 뭉근히 끓인 다음 밥과 함께 낸다.

# 시리즈 전체 보기

2026/04/25

가구, 집을 갖추다 - 김지수 : 별점 2.5점

가구와 인테리어를 단순히 취향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생활사와 주거문화의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장점은 가구와 인테리어 전문가인 저자의 식견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화장대 설명에서 청동기시대의 거울 대체품 이야기에서 출발해, 르네상스 이후 화장 문화의 변화, 17세기의 로보이 화장대, 18세기의 토일렛 테이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더치스 화장대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정리하며 화장대가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미의식, 계급 문화, 생활양식의 변화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점을 알려주는 식입니다.

이런 설명은 서양 가구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조선 말기의 경대, 유리 거울의 보급, 좌식 문화에 맞추어 발달한 소반의 구조와 쓰임, 사랑채와 안방의 변화를 통해 한국의 주거문화와 가구를 연결해 설명해 주기도 하거든요.
덕분에 읽다보면 왜 과거의 가구들이 작고 이동하기 편한 구조였는지, 왜 안방이 오랫동안 생활의 중심이 되었는지, 또 근대 이후에는 거실과 식탁 중심의 공간으로 어떻게 옮겨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온돌의 일반화와 좌식 문화의 정착, 그리고 그에 따라 소반이나 경대 같은 생활 가구가 발달해 나갔단 것이지요. 

현재의 생활 방식과 이어지는 제안들도 흥미롭습니다. 소파보다 식탁에 투자하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조언이 아니라, 거실과 부엌을 통합하고 한 공간에서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따라 하고 싶은지와는 별개로, 집을 꾸민다는 일이 결국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와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이사를 계획 중인데 여러모로 참고가 됩니다.

엠파이어 스타일, 리젠시 양식, 아르데코 같은 서양 디자인사의 흐름을 대중문화와 사회 변화 속에서 풀어내는 대목도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예술가와 장인, 파리지엔느와 프렌치 시크 등의 설명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다만 책의 성격에 비해 도판이 부실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설명을 뒷받침해주는 시각 자료가 꼭 필요한 책인데 말이지요. 저자의 일러스트가 수록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아울러 인문학 서적으로 보기에는 전문성이 조금 부족합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넓은 범위의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근거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적지 않거든요. 

그래도 가구와 집을 둘러싼 역사, 문화, 생활양식에 대해 쉽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크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1/09

러브데이 브룩, 탐정 -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 명인 러브데이 브룩 단편집입니다. 이전에 단편은 다른 앤솔로지(이거, 이거)를 통해 읽어본 적이 있지요. 그녀가 등장하는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곱 편이 그녀 시리즈의 전부인데, 저자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만료된 덕분에 국내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공인 러브데이 브룩은 2025년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아도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뛰어난 관찰력과 ‘여성’이라는 점을 활용한 활약이 지금보다 여성 인권이 확연히 낮았을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추리라기보다는 관찰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도 당시 시대에 잘 어울립니다. 실종된 아가씨 방을 둘러본 뒤, 이건 하녀가 정리한 솜씨라는 걸 눈치채는 장면처럼요.

그러나 좋은 작품들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고전 본격물이라고 보기에는 추리적으로 보잘것없는 탓이 큽니다. 러브데이 브룩이 관찰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아요. 그래서 독자가 추리할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자기만 아는 정보로 자기의 추리 결과를 진상이라고 마지막에 털어놓는 게 전부일 뿐입니다.

그나마 추리의 핵심인 러브데이 브룩의 관찰도 비약이 심합니다. “공주의 복수”가 대표적입니다. 러브데이 브룩이 집사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눈빛’ 때문이었고, 결정적 단서인 모자 가게의 이름을 알아낸 것도 러브데이 브룩이 탐정이라는 걸 밝히자 그윈 부인이 모자를 쳐다보았기 때문입니다. 눈빛으로 수상한 사람을 알아챌 수 있다면, 추리가 왜 필요할까요?

트릭도 실망스럽습니다. 수록작 중 무려 네 편, “현관 앞 검은 가방”, “레드힐 수녀회”, “그려진 단검 사건”, “실종”에서 변장과 착각이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실종”에서는 죽은 어머니의 사체를 본 아버지가 딸로 착각하는 상황이 펼쳐지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둘이 닮았다는 설정이라도 쳐도, 이건 너무 말도 안되지요.

범행들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레드힐 수녀회”에서 존 머레이는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수녀들이 강도단일지 모른다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이 그녀들에게 집중하는 사이 스스로 강도짓을 벌일 생각으로요. 하지만 그냥 강도짓을 벌였으면 사전에 주목도 받지 않았을 겁니다. 이게 무슨 헛짓거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외에도 빅토리아 시대의 짜증 나고 이상한 사고방식도 가득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망작입니다. 역시 잊혀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2025/12/20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박산호 : 별점 1.5점

근대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초창기 거장 중 한 명인 윌키 콜린스의 단편집입니다. 저자의 단편은 이전에 몇 편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럽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감성 그대로의, 낡고 지루한 내용이 가득한 탓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예상대로이며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거장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쌍둥이 자매"는 첫 눈에 반한 여성 제인과 결혼하게 된 스트릿필드가 결혼식 날, 자신이 반했던 여자는 제인이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클라라는걸 깨닫는다는 상황 설정이 기가 막힙니다.

"페루지노 포츠 씨의 인생길"은 영국 신사임을 자처하는 속물 포츠 씨가 거구의 이탈리아 여성에게 속박당하는 수난의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합니다. 이른바 영국식 유머 소설 느낌인데, 포츠 씨 일기라는 형태의 1인칭 시점으로 화끈하고 깨는 맛을 더해주는게 좋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아주 기묘한 침대"는 10여년 전에 읽었던 단편인데 여전히 재미있었어요. 침대가 서서히 내려오는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제미나이로 그려본 아주 기묘한 침대가 놓여진 방

하지만 예전보다는 장황함이 지나치게 느껴졌는데, 빅토리아 시대 원전에 충실한 번역 탓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덕분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언급하며 방을 꼼꼼히 살핀게 '나'가 생명을 구한 이유가 되었다는걸 알게 되었지만, 예전만큼 '걸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의, 경마 시즌이라 빈 방이 없던 탓에 여관 주인의 '말없고 조용한 동숙인'이라는 말에 속아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아서 홀리데이의 상황만큼은 기발합니다. 시체를 바라보다가 시체가 움직인걸 알아챈 순간의 묘사 - 이제 거길 보자 침대 옆으로 축 늘어진 길고 흰 손이 보였다. 그 손은 시체의 머리 쪽과 발치를 가린 두 장의 커튼이 만나는 곳에 꼼짝도 않고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모든 것을 감춘 채 길고 흰 손만 보여 주었다. - 도 일품이고요.

하지만 이외 작품들은 모두 지루하며,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은 볼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입니다. "얼어붙은 땅"에서 연적과 표류하게 된 리처드처럼요. 그는 목숨걸고 연적 프랭크를 옛 연인에게 데려다 주고 죽고 맙니다. 순애보도 아니고, 그에게는 일종의 '임무'였기 때문이라는데, 참 낡아빠진 발상이지요.

좋았다고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일부 상황 설정이 재미있을 뿐, 낡고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손"이 대표적이에요. 시체와 함께 있는 두려운 상황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었는 사람이었고 그는 아서 홀리데이의 의붓형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결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대부분의 작품에 가득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기대했던 범죄, 추리 계열 작품도 없다시피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5/07/12

올드 가드 2 (2025) - 빅토리아 마호니 : 별점 1.5점

앤디 일행은 무기를 밀매하는 조작을 소탕했지만, 흑막이 여전하다는 사실에 고민했다. 하지만 이전에 추방했던 부커를 통해, 500년 전 앤디의 동료였던 '꾸인'이 돌아왔고 이 모든건 최초의 불사자 '디스코드'의 음모라는걸 알게 되었다.

원자력 발전소를 점거한 디스코드와 꾸인을 막기위해 일행은 출동했고, 불사의 해제 조건을 알게 된 부커에 의해 앤디는 불사의 능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디스코드의 목표는 테러가 아니라 일행의 납치였고 앤디를 제외한 모든 일행은 납치되고 말았다. 

전편에 이어서 곧바로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이번 편은 1편에서 제시된 ‘불사의 끝’이라는 설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1편에서 나일이 앤디와 격투 중 칼로 찌른 장면이 있었는데, 나일이 상처를 입힌 불사자는 그 힘을 잃는다는 설정이지요. 뒤이어 이를 알게된 부커가 의도적으로 나일에게 상처를 입고, 자신의 불사의 시간을 끝내며 앤디에게 불사의 힘을 돌려주는 전개로 무리 없이 이어지고요. 최초의 불사자인 디스코드가 힘을 되찾기 위해 나일을 이용하려 한다는 음모 역시 이 설정을 바탕으로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아무래도 불사자인 디스코드와 꾸인, 그리고 앤디 일행의 대결이라 전편보다는 "아인"스럽게 불사자들을 사로잡을 계획이 펼쳐지는 점도 볼거리입니다. 디스코드는 액체질소를 이용한 냉각 후 진공 포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더군요. 

하지만 이외에 건질건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영화가 독립된 이야기로 완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후반부는 다음 편을 예고하는 형태로 마무리되는 탓입니다.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설정의 일관성도 떨어집니다. 1편에서는 나일에게 찔린 앤디의 상처는 회복되었고, 불사의 힘을 잃은 시점은 그보다 훨씬 나중이었습니다. 반면 2편에서는 부커와 꾸인이 나일에게 찔리자마자 곧바로 힘을 잃습니다. 같은 조건임에도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디스코드가 나일을 이용해 힘을 되찾으려는 계획도 논리적 연결이 부족합니다. 불사의 힘을 잃게되는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수락해야 이전된다는 설정인데, 앤디 일행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으니까요.

인물 간 감정선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꾸인의 분노와 앤디와의 관계 회복은 배우들의 연기에 의존할 뿐, 이야기 내에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부커가 죽음을 택하는 장면도 개연성이 약하고, 극적인 효과 외에는 큰 의미를 남기지 못합니다. 솔직히 개죽음이었습니다.

액션의 완성도도 낮은 편입니다. 여성들간 격투가 주로 벌어지는데, 아무래도 속도감과 임팩트가 부족합니다. 특히 꾸인과 앤디의 격투는 많이 실망스러웠어요. 여러모로 장르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설정을 이어가는 몇몇 장치는 흥미로웠지만, 전체적으로 완결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고, 후속편을 위한 연결에 그친 영화였습니다. 온전히 이 영화만으로 평가하는건 무리입니다. 3편은 어쩔 수 없이 보기야 보겠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네요. 샤를리즈 테론의 경력이 아깝습니다.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네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01/06

필요의 탄생 - 헬린 피빗 / 서종기 : 별점 3점

필요의 탄생 - 6점
헬렌 피빗 지음, 서종기 옮김/푸른숲

냉장고 도입에 따른 가정의 변화를 알려주는 과학사, 미시사, 인문학 서적.

냉장고 도입의 역사는 얼음과 아이스박스에서 시작됩니다. 가정 내에서 얼음을 사용한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되었더군요.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는 귀족들 계층에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일반 가정에도 보급되었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유명한 19세기 영국의 만국 박람회에 여러가지 제빙기의 등장 후 모든게 바뀌었습니다. 얼음을 언제든지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대가 열리자 저온 유통 체계가 자리잡아서 식료품 공급망에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한 마디로 신선한 식품들이 계절과 지역에 상관없이 전 세계 곳곳에서 값싸게 거래되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정용 냉장고가 도입된건 필연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유럽보다도 보급은 훨씬 빠르고 광범위 했습니다. 이유는 20세기 초 근교 주택이 성장하여, 미국의 주택 크기가 계속 커진 덕이 큽니다. 그래서 실내에 냉장고를 충분히 설치할 수 있었거든요. 반면 유럽의 주택 크기는 그대로라 냉장고 크기는 작을 수 밖에 없었을 뿐더러, 영국의 경우는 식품 저장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가정 내에 냉장고를 들이기가 여의치 않았다고 하네요. 1953년에도 영국 전체 가구의 5% 정도만 냉장고를 보유했다고 할 정도로요. 그러나 이후 신규 주택 단지에 냉장고가 기본 설치되고, 중앙 난방의 보급으로 식품 저장고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등의 이유로 냉장고 보급은 가속화되었습니다. 음식의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한 각종 첨가물이 금지된 것도 한 몫 단단히 했습니다. 건강을 강조한 광고도 이런 분위기를 이끌었고요. 심지어 1950년대 뉴질랜드에서는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은 우유를 파는게 범법행위에 해당하기도 했다니, 보급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인겁니다.

그 외에도 냉장고 문 안쪽에 선반을 단 발명 특허는 사장될 뻔 했다던가, 선반 특허를 반격했던 회전식 선반은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사장되었다, 냉장고 소리를 감추기 위해 라디오를 다는 발명도 있었다는 등 소개되는 냉장고 관련 잡학들도 재미있었어요. 그 중 냉장고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발명은 최근에서야 여러가지 센서와 칩으로 가능했을 기술같은데, 이미 1970년대에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이용해서 구현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냉장고'하나만으로 미국과 유럽의 주거 환경, 가정 내 상황, 그리고 미국의 교외화 현상 등을 설명할 수 있다는게 인상적이었던 독서였습니다. 냉장고와 냉동 기술이 핵심 이유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영향을 미쳤다는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에 대해 깊이 파고 들면,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해 이해하기 쉬워진다는게 미시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3/06/17

설원의 독수리 - 마이클 모퍼고 / 보탬 : 별점 2점

설원의 독수리 - 4점
마이클 모퍼고 지음, 마이클 포맨 그림, 보탬 옮김/내인생의책

바니는 독일군 폭격으로 집을 잃고 어머니와 함께 이모가 살고 있는 콘월로 향하던 중, 기차 안에서 공습 감시원으로 활약했던 1차대전 참전 용사 아저씨를 만났다. 
기차가 독일군 공격을 피해 터널 안으로 숨어든 사이, 아저씨는 겁에 질린 바니를 달래기 위해 1차대전 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저씨의 친구 빌리는 전쟁 영웅으로 빅토리아 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빌리가 마지막 전투에서 살려주었던 독일 병사가 아돌프 히틀러였다! 빌리는 자신이 구해주었던 고아 소녀 크리스틴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보냈으나, 나중에 자기가 히틀러를 살려주었다는걸 알고 죄책감때문에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고 실패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저씨가 이야기를 마친 뒤, 어두운 터널 안에서 모자는 잠이 들었다. 그런데 기차가 다시 출발하고 난 뒤, 아저씨는 사라졌다. 기차 차장에게 물어보았으나 아저씨는 처음부터 없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니는 나중에 이모로부터 아저씨가 빌리였고, 그는 멀베리 공습 때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 영웅 헨리 텐디의, '아돌프 히틀러를 살려준 병사'라는 유명한 실화를 각색해서 만든 작품. "나와 마빈 가든"처럼 아이의 토론 수업 교재입니다. 
전쟁에 대한 참상, 그리고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릴 수 있는지와 한 사람이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알려줍니다. 

나쁘지는 않지만, 아동용 소설이라 어른이 읽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했습니다. 인간 드라마로 보기에는 빌리의 고뇌 등이 제대로 그려지지 못했고. 드라마 부분도 약한 탓입니다. 빌리가 히틀러를 살려주었다는 과거는 주변과의 갈등을 일으키지 못해서 극적 긴장감도 부족하고요. 전쟁물로는 디테일이 떨어지며, 암살물로는 정교함과 치밀함이 턱도 없습니다. 아무리 전 전쟁 영웅이라도, 히틀러라는 인물 암살을 이렇게 쉽게 시도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빌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결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편의적인 발상이었어요. 이미 죽었다면, 아마 암살 시도가 실패했을 때 죽었겠죠. 폭격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3/26

죽음의 전주곡 - 나이오 마시 / 원은주 : 별점 2점

죽음의 전주곡 - 4점
나이오 마시 지음, 원은주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적한 시골 마을 펜쿠쿠에서 자선 행사로 교구 교민들이 진행하는 소박한 연극이 진행되던 중,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마을의 부유한 노처녀 이드리스 캠패뉼러로, 그녀는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피아노 안에 장치된 총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런던 경시청 범죄 수사반 로더릭 앨린 경감이 수사를 맡게 되는데.... 

전성기에는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즈, 마저리 앨링엄과 더불어 4대 범죄 소설의 여왕이라고 불렸다는 - 누가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 나이오 마시의 장편. 국내에는 첫 소개된 작품입니다.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다가 이번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지극히 전형적인 황금기 시절 영국 시골 마을 추리물이더군요. 미스 마플 시리즈를 연상케 할 정도로 심도깊은 마을 주민들 묘사가 인상적이에요. 소수의 등장인물들을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꼼꼼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거기에 더해 앨린 경감의 발로 뛰는 수사 역시 치밀하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 하면 그렇다고는 이야기 못 하겠네요. 단순 소거법으로만 보아도 범인이 누군지는 상당히 뻔한 탓입니다. 
주요 등장인물 일곱명 중 월터 목사와 그의 딸 다이나, 저닝햄 부자는 일단 제외됩니다. 노처녀들의 목사에 대한 짝사랑은 엄청나지만, 목사가 그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는건 상상하기 힘들고 다이나와 헨리 저닝햄의 사랑을 방해하는건 엘리너 프랜티스이지 이드리스 캠패뉼러는 아닙니다. 조슬린 저닝햄은 아예 동기 자체가 없고요. 의사인 템플렛 박사와 셀리아 로스도 마찬가지, 둘의 불륜을 눈치챈건 엘리너 프랜티스이지 이드리스 캠패뉼러가 아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드리스가 죽으면 그녀로부터 유산도 받고, 연적까지 없앨 수 있던 엘리너 프랜티스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물론 피아노 연주자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설정 때문에 엘러너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까?라는 추리도 가능합니다. 작품도 당연히 그 쪽으로 몰아가고 있고요. 하지만 연주를 포기한건 엘리너 본인이라는 점에서 이건 수수께끼가 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수사를 통해 엘리너가 이미 피아노에 장치되었던 물총에 맞았었고, 공연 직전 피아노 연주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게 밝혀진 시점에서 범인은 확정입니다. 물총이 장치된걸 알았던 사람이 총을 바꿔치기 했을테니 그건 엘리너입니다! 

자, 이렇게 범인이 드러났으니 사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장치 트릭만 남았습니다. "피아노에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총을 장치했는지?" 라는 트릭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추리쇼를 통해 밝혀진 진상은, 피아노 뒤에 쳐진 무대막 사이로 손을 넣어서 안전장치를 풀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독자는 어리둥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밝혀진 상황만 놓고 보면 무대를 한 번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왜 아무도 "무대막 뒤에서 손을 뻗으면 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이 정도 트릭이면, 아니 트릭이라고 부를 수 없는 단순한 상황을 앨린 경감 등이 기묘한 불가능 범죄처럼 언급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수사가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도 없습니다. 또 무대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가 추리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공정함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고요. 앞부분에 펜처치 지역 지도를 실어놓지 말고, 무대에 대한 그림을 실어주었어야 했습니다.
양파나 상자와 같은 요소에 집착하는 것도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디테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허나 이들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빅토리아 시기 명탐정 흉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에 더해 이야기가 너무 길다는 문제도 큽니다. 특히 초반부, 사건이 벌어지기 전 100여 페이지는 짜증나는 노처녀들의 심리를 장황하게 그려서 도저히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어요. 노처녀들에 대한 '살의'를 촉발시킨다는 점에서는 잘 된 묘사일 수는 있겠지만... 독자가 살의를 품어서 뭘 하겠습니까? 

그래서 별점은 2점. 몰랐던 작가의 몰랐던 탐정을 접했다는 역사적 가치 말고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왜 지금은 잊혀진 작가가 되었는지 잘 알 수 있었네요. 당시에는 먹혔을지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읽기에는 한없이 지루했습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0/09/25

에놀라 홈즈 3 기묘한 꽃다발 - 낸시 스프링어 / 김진희 : 별점 1.5점

기묘한 꽃다발 - 4점
낸시 스프링어 지음, 김진희 옮김/북레시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신 병원에 갖힌 환자 키퍼솔트는 자신은 의사 왓슨이라고 주장하지만, 수간호사는 다른 병동에 셜록 홈즈도 있다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그러나 그는 진짜 왓슨 박사였다. 한편 밖에서는 왓슨 박사 실종에 대해 셜록 홈즈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에놀라 홈즈가 사건에 뛰어드는데....

셜록 홈즈와 마이크로포트 홈즈, 왓슨 박사 등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홈즈의 여동생인 에놀라 홈즈가 활약하는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최근 영상화도 되었다고 해서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북 대여가 세 번째 작품만 가능하더라고요.

이런 류의 작품들 중 기대를 충족시킨건 별로 없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마찬가지로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특히 추리적으로는 영 아닙니다. 애초에 추리라는걸 보여줄 여지가 거의 없어요. 에놀라가 마음먹은대로 신통방통하게 전개되는 탓입니다.
우선 왓슨을 구해주기로 마음 먹은 뒤, 에놀라는 왓슨의 집을 방문하는데 그 곳에서 협박을 의미한다는 (순전히 에놀라 생각이지만) 꽃다발을 발견합니다. 꽃다발이 또 올거라고 확신한 에놀라는 왓슨 자택 맞은 편 집에 방을 구해 감시하는데, 바로 다음날! 꽃다발이 정말로 보내져 오지요. 에놀라는 꽃다발을 가져온 덜 떨어진 심부름꾼 소년으로부터 의뢰인 신사가 코가 없어서 가짜코를 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짜 코를 취급할 법한 변장 도구를 파는 상점에 찾아가 가짜 코에 대해서 물어보는데, 상점 주인인 페르텔로트 부인은 엄청난 적의를 보이며 그녀를 쫓아내지요. 당연히 그녀는 범인과 관련이 있었고, 에놀라는 곧바로 그녀 집에 잠입했다가 페르텔로트와 그녀의 동생 플로라의 대화를 엿듣고,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됩니다.
이렇게 에놀라 의식의 흐름대로 사건이 흘러가고, 해결되는걸 보면 탐정이 아니라 무당이라고 하는게 옳아요. 이야기도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모험물에 가깝고요.

그러나 모험물이라면 극적인 서스펜스, 스릴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에놀라의 쓸데없는 심리 묘사와, 그리고 그녀와 어머니간 애증과 같은 불필요한 설정들에 대한 설명이 많은 탓에 그런건 느끼기 힘듭니다. 이런 불필요한 설명은 에놀라가 왓슨 박사의 집에 찾아갈 때 까지의 전체 분량 중 1/5 가량을 소모할 정도입니다. 전개도 답답하고요. 

에놀라 홈즈 캐릭터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여성의 능력을 억합하던 당대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여, 스스로 행동하는 독립적인 여성을 그려내는게 의도였던 듯 한데, 작중에서는 그냥 전형적인 말괄량이 왈가닥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남자들은 단순한 얼간이들이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보면 멍청이가 된다' 는 등의 언급은 왜 등장하는지 의문이며, 코르셋에 이런저런 장비를 넣고 다닌다는 '소년 탐정단' 스러운 설정, 변장으로 미녀와 못난이 아가씨를 오간다는 설정 지나치게 만화적입니다.

그래도 이런 단점들은 참아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를 독선적이고 무능하며 관찰력 떨어지는 인물로 그려낸건 정말이지 유감입니다. 에놀라의 들러리, 병풍 역할에만 그려낸건 에놀라 홈즈 시리즈이니 당연하다 쳐도, '남자에게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여성에 대해 논리적 사고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는 식으로 이상하게 몰고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여성 대상으로는 탐정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는데 이 무슨 망발인지 모르겠어요. 저자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어보기나 한 걸까요?
셜록 홈즈가 에놀라는 한 번 보고 눈치 챈 수상한 꽃다발에 대해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꽃말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설정 역시 홈즈 팬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에놀라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모리스 르블랑뤼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헐록 숌즈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멋대로 망가트렸던게 떠오르네요. 이는 코난 도일의 분노를 샀고, 모리스 르블랑은 욕을 먹었던 행위였습니다. 원전에 기댄 주제에 원전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이런 제멋대로 각색은 정당한 창작자의 행위는 아니에요.

물론 유명세답게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 대한 충실한 묘사는 좋았어요. 몇 개 등장하는 암호 트릭 중 에놀라의 어머니가 에놀라에게 보낸 메시지 암호도 괜찮았고요. 그냥 읽으면 Alone part part alone이라는, 외로움에 사무친 문구로 보이지만 거꾸로 읽으면 에놀라! 함정을 조심해! 라는 의미가 되니까요. 이름을 잘 활용한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또 결정적 단서가 되는, 왓슨 부인에게 전해져 온 꽃다발은 꽃말로 볼 때 복수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추리는 바로 직전에 읽었던 "남은 날은 전부 휴가"와 겹쳐서 조금 신기했습니다. 확실히 여성스러움이 넘쳐나는 단서라 시리즈 취지와 잘 어울리기도 했고요. 꽃다발에는 어울리지 않는 아스파라거스에서 A spear of Gus라는 문장을 뽑아내어 아우구수투스 (거스) 키퍼솔트라는 이름으로 연결하는 과정도 깔끔합니다. 그러나 명확한 꽃말도 아니고, 이런저런 민속적인 의미나 꽃이 피는 장소 등을 결합해서 저주의 의미라고 풀이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범인은 플로라라서 아우구수투스의 창이라는건 딱 맞는 표현은 아니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처음에 '키퍼솔트는 코가 없어서 가짜 코를 연구하다가 변장 도구를 다루는 상점을 열게 되었고, 왓슨 박사에게 원한을 품은건 코 절단의 집도의였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것과 '키퍼솔트의 아내 페르텔로트에게 플로라라는 정신병자 여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어린 시절 쥐에게 코를 뜯어먹힌 뒤 정신병을 갖게 되었으며, 키퍼솔트에 의해 정신병원에 보내졌지만 언니의 도움으로 돌아온 뒤 키퍼솔트를 죽이고 그로 변장해서 살아온 것' 이라는 진상도 꽤 재미있는 편이었어요. 참고로 플로라가 왓슨 박사를 정신 병원에 가둔건, 플로라를 정신병원에 보내는 문서에 서명했기 때문이라네요.

그러나 장점 보다는 단점이 훨씬 크게 느껴져서 전체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홈즈의 이름을 달고 나왔다면, 좀 더 정교한 트릭으로 승부하는 본격물이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홈즈를 존중이라도 하던가요. 두 번 다시 이 시리즈를 읽어 볼 일은 없겠습니다. 책 보다는 차라리 영상화한 쪽 결과물이 훨씬 좋으리라 확신이 드는데,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 쪽을 챙겨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0/05/23

레베카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2.5점

레베카 (초판 출간 80주년 기념판) - 6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나'는 남편 맥심과 함께 작은 호텔에 머물며, 과거 함께 시간을 보냈던 대저택 맨덜리에서의 생활을 회상한다.

'나'는 결혼 후 드 윈터 부인으로 맨덜리에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맥심 드 윈터의 전처 레베카가 비참하게 사고로 죽었지만, 아직도 맨덜리에 그녀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다는걸 느꼈다. 그런데 우연히 레베카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녀 죽음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었다. 맥심 드 윈터는 '나'에게 자신이 그녀를 살해한 뒤 시체를 숨긴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대프니 듀 모리에의 전설적인 장편 소설입니다. 18~20세기 초반 큰 인기를 끌었던, 상류 사회와 로맨스, 범죄호러를 결합한 '고딕'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미스터리 소설 중 한 편이지요. 'MWA 추천 미스터리 100'이나 '동서 미스터리 100' 같은 이런저런 리스트에 포함될 정도로 명성만큼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거의 600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이렇게 두꺼운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숙제를 끝내기 위한 사명감 비슷한걸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숙제를 끝내기는 정말로 어렵더군요. 이야기의 2/3 대부분이 드 윈터 부인의 1인칭 심리묘사인데, 그녀의 마음에 전혀 공감할 수 없던 탓이 가장 큽니다. 어린 철부지 소녀가 급작스럽게 대저택의 안주인이 된 당황스러운 마음은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에요. 그러나 맨덜리 저택과 그 주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라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져 시종일관 소심함을 드러내고, 주변 사람들 눈치를 신경쓰고 그들의 반응을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에는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당황스럽고, 철부지였다 하더라도 대저택 안주인으로 몇 개월 보냈으면 당연히 적응을 했어야죠. 몇 개월이 지나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극복 하지 못하고 손톱이나 물어 뜯는 모습에는 공감을 할래야 할 수가 없네요. 

이렇게 그녀의 어리버리함이 지나치게 부각되기 때문에, 저택 주변에 항상 맴도는 '레베카'의 그림자가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레베카를 숭배했다는 저택 관리인의 우두머리 댄버스 부인의 악의만큼은 실감나게 느껴집니다만, 이 역시 그녀가 어설퍼서 댄버스 부인의 증오를 초래한 것에 불과합니다. 드 윈터 부인이 댄버스 부인에게 자신이 이제부터 드 윈터 부인이며, 그녀의 윗 사람이라는걸 처음에 확실하게 인지시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거든요. 댄버스 부인이 굴복하던가,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알아서 떠나버렸을테니까요.
심지어 지나치게 상황 인식이 부족한 탓에 스스로 사건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합니다. 독자들은 이미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레베카가 정숙하지 못했다는걸 눈치채고 있습니다. 저택을 몰래 방문했던 사촌 파벨이 레베카의 문란한 생활 속 상대 중 하나라는 것도 쉽게 예측 가능하고요. 왜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맨덜리에서 오랫만에 수많은 손님이 방문하는 무도회가 열리는데, 댄버스 부인이 사근사근하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모습에서 무언가 사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뻔합니다. 그러나 딱 한 명, 주인공 드 윈터 부인만 모를 뿐이지요. 이래서야 드 윈터 부인이야말로 문제의 원흉이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남편 맥심이 그녀의 적응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건 이해합니다만, 그녀가 속 시원하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게 더 큰 문제에요. 맥심지어 유일한 그녀의 편인 영지 관리인 프랭크에게는 어려운 상황과 댄버스 부인의 적의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이야기했었어야 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느낀다, 와 같은 말로는 부족했어요. 특히나 댄버스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레베카의 사촌 파벨을 맨덜리에 들였던게 탄로난 건은 하인으로서 하면 안될 일입니다. 이걸 꾸짖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댄버스 부인에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루함을 참고, 2/3 정도를 지나면 다행히 명성을 회복합니다. 무도회에서 드 윈터 부인이 댄버스 부인의 복수로 레베카의 옷을 입어 주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진 직후, 레베카의 사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맥심 드 윈터는 아내에게 자신이 레베카를 죽이고 배를 침몰시켰다고 고백하고요. 레베카가 저질렀던 온갖 부정들이 여기서 맥심의 입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후 명백한 침몰 흔적때문에 벌어지는 재심리, 자살로 대충 결론내려지지만 이의를 제기한 사촌 파벨의 협잡 등 여러번의 위기가 몰아치기 때문에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렇게 맥심 드 윈터에게 위기가 연이어 닥치고, 하나씩 위기를 넘는 듯 하지만 위기가 계속되는 전개는 그야말로 '서스펜스'가 뭔지 그 답을 제시해 주는 느낌입니다.
특히나 파벨이 찾아와 협작질을 벌이는 날, 여러 명의 관계자들을 소환해 진상이 무엇인지를 추궁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맥심! 그렇게 하면 안돼!'라는 심정으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들더라고요. 아울러 이를 함께 극복해 나가며 소녀에서 진짜 귀족 여성이 되는 드 윈터 부인의 성장기로서도 볼 만합니다. 그녀의 맥심을 향한 장황한 심리 묘사에 더해, 맥심은 레베카를 진짜로 사랑하지 않았고, 진짜 사랑한건 자신이라는걸 깨닫는 장면 등은 이 작품이 로맨스가 중요한 요소인 고딕이라는 장르라는걸 새삼 깨닫게 해 주고요.

그러나 치안판사 줄리언 대령이 직접 수사에 나설 정도의 단서를 파벨이 제시한게 맞는지는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그가 레베카가 만나자고 보낸 쪽지를 들고 있던건 사실이지만, 그 쪽지가 레베카가 사망한 날 쓰여졌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쪽지로 지역 명사를 협박한 파벨을 체포하여 재판하는게 당연한 수순이에요.

레베카가 몰래 의사를 찾아간 뒤,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걸 알게 되었다는 결말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자살 겸 해서 일부러 맥심 드 윈터를 도발한게 진상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쪽지를 남긴 이유는 설명되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댄버스 부인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무엇보다도, 맥심 드 윈터가 어찌되었건 아내를 살해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정숙하지 못한 아내에 대한 응징으로 포장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범죄에요. 빅토리아 시기 직후, 20세기 초반에야 레베카의 부정이 죽을 죄였을지는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건 무리지요. 어떤 식으로건 단죄는 필요하다 생각되어서 별로 개운치 못합니다. 단지 저택을 잃은 정도로 끝나기는 부족했어요. 이 때문에 작은 호텔 등에 숨어산다는 현재 역시도 그게 얼마나 큰 벌인지 잘 와 닿지도 않습니다. 히치콕의 영화에서는, 레베카의 사인은 사고사이며 결말은 해피엔딩이라는데 저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을 위한 각색이라 생각됩니다. 헐리우드식이기는 하지만, 이 쪽이 더 명확해서 좋다는 생각도 드네요. 아울러 진상을 눈치 챈 댄버스 부인의 복수도 허망합니다. 저라면 드 윈터 부부가 돌아온 직후, 불을 질렀을 거에요. 그깟 저택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후반부 1/3은 고딕 미스터리의 대명사다운 놀라운 서스펜스와 몰입감을 자랑하지만, 2/3 분량의 지루함에 대한 압박이 커서 감점합니다. 지금 읽기에는 낡은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걸작은 아니라 생각되네요. 현대 독자라면, 영화 쪽을 감상하는게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조용한 무더위" 수록작인 "파란 그늘"에서 중요한 요소로 쓰였던, 다과회에 나왔다는 비밀 샌드위치는 어디에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샌드위치는 맥심의 할머니가 티 타임에 먹은 물냉이 샌드위치, 맨덜리에서 먹는다고 언급된 오이 샌드위치가 기억에 남을 뿐인데 말이죠.
여기서 무언가 요리를 발췌한다면, 드 윈터 부인이 처음 보고 놀란 호화스러운 아침 식사나, 매형 자일즈가 감탄하는 영국에서 제대로 된 음식의 대표격인 수플레, 차를 마실 때 빠지지 않는 스콘과 카스텔라가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018/05/20

늑대를 요리하는 법 - M.F.K 피셔 / 김정민 : 별점 3.5점

늑대를 요리하는 법 - 8점
M.F.K 피셔 지음, 김정민 옮김/다른목소리

미국에서 태어난 M.F.K 피셔, 메리 프랜시스 케네디 피셔가 쓴 음식과 삶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1942년 발표된 고전으로 제목의 "늑대"는 위기 상황'을 의미하는 "문가에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문구에서 따 왔습니다. "늑대를 요리하는 법"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을 의미하지요.

제목 그대로 미국 대공황기 등 여러 힘든 시기를 보낸 저자가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소개됩니다. 그 중에서도 물자, 재료가 부족할 경우 무엇을 어떻게 해 먹는지에 대한 방법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생선, 고기, 빵, 수프 등 생각할 수 있는 주요 재료별로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다양한 내용 중에서 우선은 눈물 겨울 정도의 절약 비법이 눈에 뜨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불 없이 요리하는 방법입니다. 건초 통을 감싸고 그 안에 음식을 넣은 뒤 통의 뚜껑을 덮는 방법인데, 발효(?) 열을 이용하는 것일까요? 또 당시 통화 기준이기는 해도 50 센트로 차리는 극빈 요리에 도둑질, 야생에서 얻은 식재료를 이용한 "나는 자연인이다" 스타일 요리, 심지어 음식 뿐만이 아니라 대체 커피라던가 술값 아끼는 비법으로 가짜 보드카 제조법까지 등장합니다. 가짜 보드카는 물 1쿼트, 글리세린이나 설탕 1 작은술, 레몬 1개의 껍질, 오렌지 1/2개의 껍질을 20분 동안 아주 약한 불에서 끓인 뒤 알코올 1쿼트를 더한 후 바로 뚜껑을 덮고 식힌 뒤 걸러서 만든다고 하는데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진짜 위기 상황, 즉 "등화관제" 상황에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가스가 전기보다 빨리 끊긴다는 등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반려 동물들을 위한 절약 방법도 관심 가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그냥 안 먹고, 아끼는 방법이 아니라 아무리 어려워도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저자의 철학이 가득 담겨 있는, 궁상맞지만 매력적으로 보이는 요리 레시피도 많습니다. 단순한 미국 가정 레시피가 아니라 유럽, 심지어 간장과 누룽지 등 중국에서 비롯된 재료를 사용하는 요리를 가르쳐 주는 식이라 수준도 상당히 높은 편이에요. 그 중에서도 파리식 양파 수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큰 만족을 주며 언제나 위로가 되고 마음에 남는 소박한 수프라는 미네스트로네 레시피는 꼭 따라해 보고 싶더군요. 집이나 시장에서 가장 흔하고 싼 재료로 만드는 게 최고라니 더할 나위 없죠. 가끔 집에서 궁상을 떨며 혼술을 즐기는 이와마 소다츠가 떠오르는 메뉴들도 좋습니다. 이런 저런 선반에 채운 통조림들을 결합해서 먹는 레시피들 처럼요.

이러한 레시피, 조리법 외에도 커피 찌꺼기를 바늘 겨레 안에 넣으면 바늘이 녹슬지 않는다, 핸드로션 대신 버터 포장지를 손에 문지르고 나서 버리라는 등의 생활 꿀팁도 많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시대 착오적인 내용들, 그리고 말을 타다가 생긴 타박상은 말 바로 옆 축축한 잔디를 상처 부위에 고정한다는 말도 안되는 민간 요법이 대부분이긴 합니다만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어서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글의 흐름 속에서 저자의 여러가지 철학을 강하게 피력하는 장면들도 기억에 많이 남네요. 개인적으로는 어린이도 사람이기 때문에 맛, 질감, 자극 면에서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운" 것을 얻기 위해 "생각하며" 먹게 해야 한다는 교육 이론이 와 닿았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잘 먹는다" 는 중국 속담에서 시작하여 "우리 나라는 현명하지 못하다!" 고 일갈하는 장면은 "맛의 달인" 의 지로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이렇게 재미있고 한 번 읽어보면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이 많아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흰 빵을 증오하는 저자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집에서 직접 빵을 구워 먹기 까지 해야 하는지 등 내용 모두를 동의하기는 어려우며,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많이 낡았고 번역 문제겠지만 문체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는 문제들, 무엇보다도 요리와 레시피를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도판이 하나도 없다는 큰 문제는 있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3.5점인데, 도판과 번역만 충실했더라도 별점 4점이 아깝지 않았을 거에요. 요리, 음식 들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현대를 무대로 "좀비를 요리하는 법"과 같은 개정판이 나와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조금 찾아보았는데 이 책 발표 시점에서 저자 나이가 34살이라는 것에 크게 놀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의 잔소리 섞인, "옛날에는 이랬지" 스타일의 글들로 크리스티 여사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빅토리아 시대 할머니가 썼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요. 대체 젊었을 때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상상도 안 되는군요. 또 아래와 같은 평균 이상의 미모도 놀랍고요. 여러모로 관심을 가져볼 저자라 생각됩니다.

2018/04/22

배트맨 : 가스등 아래의 고담 - 브라이언 어거스틴 외 / 이한 : 별점 3점

배트맨 : 가스등 아래의 고담 - 6점
브라이언 어거스틴 외 지음, 이한 옮김/세미콜론

스팀 펑크 세계관에 배트맨을 등장시켰다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다양하게 미디어 믹스된 바 있고, 얼마전에는 애니메이션도 출시된 표제작 "가스등 아래의 고담", 그리고 동일 세계관 시리즈인 "미래의 주인" 두 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읽으면서 스팀 펑크 세계관이 아니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왜 스팀 펑크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특히나 "가스등 아래의 고담" 은 그냥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하여 배트맨을 등장시킨, '팩션'이라고 해도 무방할 설정의 작품이었습니다. 실존 인물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브루스 웨인의 스승으로 등장하고, 잭 더 리퍼 사건이 이야기의 핵심으로 전개되는 등 현실과 허구의 혼합이 절묘한 덕분입니다. 고담도 미국이기는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배트맨 역시 과학 기술과는 무관한, 순전히 단련된 육체에 의지하는 인물로 그려져서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자경단원" 이자 "탐정"으로서의 배트맨이 그려지는 것 역시 현실적이면서 마음에 든 점이고요.

아이디어는 굉장히 탁월하고 작화도 독특하고 좋은데, 아쉽게도 작품의 완성도는 기대 이하입니다. 브루스 웨인이 잭 더 리퍼로 오인받아 체포되고, 감옥에서 정보를 끌어모아 진범을 알아내는 과정의 긴장감과 이야기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브루스 웨인에게는 삼촌같았던 변호사 제이콥 패커가 진범임이 드러나는 과정이 특히 그러해요. 단순히 같은 연대 소속이었다는게 범인이라는 증거가 될까요? 또 제이콥 패커는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와 같은 연배인 노인으로 애초에 배트맨과 일기토를 벌인다는 건 불가능해서 최후의 대결에서의 긴장감도 제로에 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걸작이라는 명성에 비하면 실망이 더 큽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차라리 이 작품보다는 함께 실려있는 "미래의 주인" 이 재미면에서는 한결 낫습니다. 우선 빌런 알렉상드르 르루아의 존재감이 출중합니다. 배트맨의 맞수로 부족함이 없어요. 적당히 미치기도 했고, 적당한 능력도 갖추고 있으니까요. 또 르루아가 비행선에 달린 장치를 이용하여 '태양의 불길'을 내리쳐 고담시에서 열리는 박람회를 비롯하여 고담시 일부를 불에 태워 백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음모의 스케일도 크고, 이를 막기 위한 배트맨과의 일기토도 적절하여 재미를 더합니다. 르루아의 파괴는 그와 손잡은 악덕 기업인이 있었다는 진상을 밝혀내는 '탐정' 배트맨의 활약과 그의 정체를 간파한 약혼녀 줄리 캐릭터도 볼거리였고요. 그리고 르루아의 비밀 무기도 "스팀 펑크 세계관의 배트맨" 이라는 말에 더 어울리는 소재였어요. 아주 초월적인 무언가는 아니고, 상식선의 무기로 보이긴 하나 적당히 SF적이고 적당히 레트로한게 꽤나 잘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딱 한 가지, 전형적인 미국 극화체 작화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작화만 "가스등 아래의 고담" 스타일이었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그래서 두 작품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유명세에 비하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예상치 못한 다른 작품 덕분에 평균 이상의 재미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세계관의 다른 시리즈도 보고 싶어집니다.

덧 1 : 배트맨이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물이지만 분위기는 잭 더 리퍼 사건을 해결하는 범죄 액션 스릴러에 가까우므로 분류는 "추리 - 호러" 로 하겠습니다. 덧 2 : 아무리 풀 컬러지만 120페이지도 안되지만 14,000원은 좀 비싸네요. 한 페이지에 100원이 넘는 셈이잖아요? 이렇게 비싼 이유가 있는걸까요?

2018/03/02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애거서 크리스티 / 송경아 : 별점 2.5점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송경아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라피엘 소령과 어울렸다. 라피엘 소령은 여러 과거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살인자의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사진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소령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사인은 지병인 고혈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미스 마플은 소령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데...

카리브 해의 한적한 호텔을 무대로 한 여사님미스 마플 시리즈 장편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이하 "공략")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영상물로는 굉장히 실망했었지만 연출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지금은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기도 해서요.

읽으면서 가장 놀라왔던 것은 이야기의 속도감입니다. 무려 3명이 살해당하고, 1명은 미수에 그치는 연쇄 살인극이 펼쳐지지만 중편 분량에 가깝거든요. 이전 "다섯 마리 아기 돼지"와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덕분입니다. 최근 읽었던 몇몇 대장편들에서 보았던 짜증나고 지루한 심리 묘사, 장황하기만 할 뿐 쓰잘데 없는 배경 묘사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미스 마플의 심리는 비교작 자주 묘사되는 편이지만 모두 전개에 필요한 요소들이라 납득할만한 수준이었고요. 이런 점은 현대 작가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네요.
물론 이런 묘사의 부족으로 '카리브 해' 라는 배경이 잘 드러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 원주민 종업원 이야기만 없다면 우리나라 온양 온천이라고 해도 딱히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배경 묘사는 별 게 없습니다 - 장점에 비교하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입니다.

또 미스 마플의 은밀한 탐정 활동도 상당한 볼거리입니다. 평범한 할머니가 손님들과 나누는 수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추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정식 수사가 아닌 탓에 여러가지 제약이 생겨버리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입니다. 심지어 3인칭 시점으로 오간 대사마저도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 를 고민하게 만든건 정말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잘 가공하면 꽤 괜찮은 서술 트릭으로 써 먹어도 무방할 정도에요.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수사와 추리는 현실감 넘치는 분위기를 선사해주기도 하고요.

아울러 "공략"에서 언급한대로 "킥 애스" 의 힛걸과 같은 현대적 여성 영웅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독특한 히어로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결핍', 즉 뭔가 부족한 영웅이 활약하는 현실적인 모험담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요. 힛걸은 뛰어난 격투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모도 없는 어린아이이고, 미스 마플은 천재 탐정이지만 늙은 독신 할머니라 '결핍' 측면에서 보면 거의 동일하니까요. 아, 정말이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감탄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아요. 트릭은 별볼일 없지만 "공략"에서 말한대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드라마' 를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끌어나가고 있는 덕분입니다. 몇 안되는 등장 인물들이 각자 비밀이 있고, 나름의 동기가 있으며, 한 명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식이거든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정교한 구성도 볼만하고, 누가 범인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라피엘 소령은 살인범이 누군지 알아챈게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걸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는 빅토리아가 고혈압 약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를 안다면 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동거남이 있는 이상 그녀를 살해한다고 입막음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간과된 부분입니다.
또 몰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살해한다고 하더라도, 빅토리아와 럭키는 그렇다쳐도 라피엘 소령 살인죄까지 묻기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비록 대사들을 통해 사진 속 독살범이 '여자일 수도 있다' 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독자는 3인칭 시점으로 된 대사를 통해 이미 그 독살범이 남자라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품이 발표된 1960년대 시점으로 보아도 단지 가계에 정신병자가 있었다는 정도로 연쇄 살인을 일으킨다는 발상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무려 세 명이나 살해당한 상황에서 몰리를 마지막으로 독살하려고 시도하는 행동은 설득력있다고 보기 어렵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공략" 에서 별점 5점을 주면서 걸작이라고 극찬한 탓에, 기대는 컸지만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략" 에서 말한대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멋지다는' 미스 마플의 도움 요청 장면도 독특하기는 한데 그렇게 멋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리뷰가 원작을 초월한 모양새입니다.

2017/08/25

험담꾼의 죽음 - M.C.비턴 / 지여울 : 별점 2.5점

험담꾼의 죽음 - 6점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어와 송어 낚시 전문 로흐두 낚시 교실'에 낚시를 배우기 위해 8명의 수강생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 중 '레이디 제인'은 엄청난 재앙 덩어리로, 그녀의 특기는 낚시 교실 참가자들을 뒷조사해서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것이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물론 낚시 교실 운영자 존과 헤더 부부마저 그녀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중, 4일 째 되는날 레이디 제인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로흐두의 순경 해미시 맥베시 시리즈 제 1작입니다. 눈에 띄는건 정통 영국 미스터리, 그 중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스타일을 쏙 빼닮았다는 겁니다. 시골 촌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 부르조아들과 계급 문화 등 바탕이 되는 설정이 굉장히 영국적이라는 점, 시골 촌 마을의 인간 관계가 여러 사건 관계자들의 경우와 맞아 떨어져 추리의 바탕이 된다는 점,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이고 싶어한 험담꾼 레이디 제인의 설정과 그녀의 협박 재료들 모두 그야말로 여사님의 재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문제는, 지금 읽기에는 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입니다. 묘사부터가 빅토리아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에요. 1985년 작품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부유한 상류층과 일반인들이 어우러져 각각의 속셈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 소집단이라는 설정부터가 별로 현대적이지 않잖아요?
게다가 로맨스 관련 이야기들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진부합니다. 이야기의 주역 중 하나인 앨리스는 20세기 아가씨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순진해 빠졌고, 해미시 순경과 지역 유지의 딸 프리실라의 로맨스 역시 고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부자집 망나니 제레미도 켸켸묵은 설정인 것은 마찬가지고요.

물론 현대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캐릭터들이 나름 적극적이고 입체적이기는 합니다. 레이디 제인이 좋은 예입니다. 은근하게 사람들을 상처주던 여사님 작품 속 할머니나 부르조아 귀부인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짜증 유발자로 잘 묘사되고 있거든요. 작중 등장인물 뿐 아니라 독자마저도 분노케 만들 정도로요. 최근 작품들 중에서 이렇게 누구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등장인물은 오랫만에 봅니다.
앨리스가 제레미에게 넘어가 밤을 같이 보내는 묘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여사님 작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나름 현대적인 부분입니다.

해미시 순경 역시 멍청한 바보가 아니라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할 말 다 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신선합니다. 레이디 제인이나 찰리 백스터의 어머니에게 일갈하는 장면은 개중 백미입니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조리있게,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만큼 할 말 다 하는 정말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를 굉장히 잘 그려냈습니다.
탐정 역할로도 괜찮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스 마플 스타일의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한 추리력에 더해 "누가 범인인지 알고 싶다면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고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지론도 인상적입니다. 

로흐두라는 마을과 주변 묘사의 디테일도 상당한 수준이며, 이야기의 큰 축인 낚시 교실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져서 여정 미스터리의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해미시 순경 등 멋드러진 캐릭터만으로는 역부족이네요. 여러모로 원조 여사님 작품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적으로는 실망스러운 탓이 큽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소소한 시골 마을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사건에 접목하는 추리 방식이라던가 마지막에 해미시 순경이 사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추리쇼를 벌이는 등의 추리 과정만큼은 고전 스타일인데, 실제 '추리'는 전혀 고전 본격물스럽지 않아요.
일단 공정하지가 않습니다. 핵심 단서인 "BUY BRIT...", 그리고 스트리퍼 에이미에 대해 순경이 알아낸 정보를 독자에게 공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도 에이미 로스가 "레드훅"이라고 말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순경이 인맥을 통해 전화를 걸어 알아낸 정보를 독자가 끌어낸다는건 불가능하니까요.
게다가 이 핵심 단서도 헛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스트리퍼가 성공해서도 과거 예명을 계속 사용한 이유, 술잔이 비었을 때 호텔이라면 마땅히 종업원이 있어야 하지만 에이미가 모두에게 술을 따라준 이유 등이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나마의 사진도 '증거'라고 밀어붙이기는 영 부족하고요.
무엇보다도 밀렵꾼에게 목격되었다는 말로 자백을 유도한 것은 최악이었습니다. 정통 본격물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탐정의 야바위 짓이잖아요. 살해 동기도 영 시원치 않고요. 이럴거라면 차라리 소거법으로 근거를 보강했어야 합니다.

  • 어린아이인 찰리 백스터는 거구의 레이디 제인을 살해해 옮기기 어려우니 제외.
  • 앨리스는 과거의 치부를 이미 제러미에게 밝혔기에 드러난다고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니 제외.
  • 제러미와 프레임 소령의 비밀은 아는 사람은 다 알 뿐더러 알려면 누구나 알 수 있고, 게다가 알려진다고 해도 본인이 창피할 뿐 해가 될 일은 당장 없기에 제외.
  • 대프니의 과거 정신병 이력이야말로 드러난다고 해도 무엇 하나 해로울 게 없기에 제외.
  • 존과 헤더 부부가 살해했다면 최소한 존의 낚시에 시체가 걸려 끌려 나오도록 처리하지는 않았을터이니 제외.

그러면 결국 정계 진출을 노리고 있지만 과거가 드러나면 위태로울 수 있는 마빈 로스와 에이미 로스 부부만이 남게 되지요.
여기서부터 해미시의 조사 결과와 추리를 이어가면 그런대로 괜찮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적당한 내용, 묘사, 분량이라 쉽게 읽힌다는 장점만큼은 확실하며 현대적인 캐릭터들도 볼거리이기는 합니다. 비록 추리적으로는 꽝이더라도 현대물에 여사님의 작풍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텍스트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해미시 순경이 마음에 들었기에, 후속권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코지 미스터리'라고 분류하고 연애질이나 해 대는 여타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인 부분도 적절하고, 책도 예쁘게 잘 나온 편이니까요.

2017/03/19

벙어리 목격자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3점

벙어리 목격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어리석은 낙천주의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쉽게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게 보통이었다. - 에밀리 아룬델이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묘사

살인의 특징은 살인자의 기질을 암시해 주기 때문에 범죄의 실마리를 잡는 데 있어 필수야. - 포와로.

마켓 베이싱의 리틀 그린 하우스에 거주하는 부유한 노부인 에밀리 아룬델은 조카들과 함께 한 부활절 연휴 때 계단에서 떨어져 다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애견 밥이 가지고 놀던 공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챈 에밀리 아룬델은 포와로에게 편지를 보냈고, 무려 두 달 이 지나서야 이를 받은 포와로는 마켓 베이싱으로 향했지만 에밀리 아룬델은 이미 한 달 전에 사망했다...

몸 속 필수 영양소 중 하나인 고전 본격물 성분이 많이 부족해져서 집어든 여사님 장편입니다. 제게는 탄수화물급 영양소거든요. 바로 전 읽었던 "도서관의 살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제대로 된 고전 본격물을 선택했습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물이더군요. "도서관의 살인"과 마찬가지로요.

포와로가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이유인 노부인의 의뢰 편지가 그녀가 사후 발송되었다는 도입부부터 무척 흥미롭습니다. 뒤이어 다양한 등장인물의 증언들로 진상에 접근해 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다운 공정함을 자랑하고요. 무엇보다도 고전 본격물의 핵심인 동기 부여와 이에 따라 용의자들이 속출하는 전개가 대단합니다. 주요 관계인인 찰스와 테레사 남매, 벨라와 타니오스 부부 모두 유산 상속에 혈안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누구 한 명 용의선상에서 빠지지 않는 덕분입니다. 심지어 찰스와 테레사의 어머니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이라는 설정까지 갖췄으며, 그 외 등장인물 모두 수상한건 마찬가지에요. 이미 유산을 상속받은 로슨 양이 심령술에 빠진 이상한 노처녀로 그려지는 식으로요. "도서관의 살인"에서 가장 부족했던게 바로 이겁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하지만 이러한 점은 본격물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탁월한건 증언과 인물 묘사가 결합되어 독자를 교묘하게 함정에 빠트리는 전개입니다. 놀랍게도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증언은 모두 진실이에요. 하지만 말을 한 사람이 워낙 수상한 탓에 독자들 모두 "이 사람 말은 못 믿겠는데?"라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뒤이은 증언들도 부정하게 되어 결국 진상에 이르지 못하게 되지요.
찰스 아룬델이 한 말이 대표적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에밀리 아룬델을 만났을 때, 그녀가 수정한 유언장을 보여주었다는 증언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모두 찰스가 돈 때문에 심한 짓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에밀리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유언장을 미리 보았다는 증언은 자신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에밀리를 죽일 동기가 없다고 위장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게다가 여동생 테레사와의 다툼은 증언의 신빙성을 더욱 떨어트리고요.
이야기 전체가 이런 구성이라서 저는 함정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세세한 디테일로 범인을 드러내는 점도 본격물스럽습니다. 타니오스 부인이 테레사를 따라, 하지만 보다 저렴하게 옷을 구해 입었다는 묘사와 에밀리 아룬델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 주치의 그레이너 박사가 후각을 상실했다는건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설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뭐 하나 허투르게 활용되지 않아요. 로슨양이 거울로 본 브로치는 이니셜이 반전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은 아나벨라 타니오스의 약자다, 브로치는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싸져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테레사 패션을 따라하는 벨라가 서슴없이 구입했다. 벨라는 화학 교수의 딸로 인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너 박사는 인 중독의 뚜렷한 징후인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모두 추리에 이용되니까요. 심지어 아무 의미 없어보였던 로슨 양의 강령회 관련 증언까지도요. 그녀는 에밀리 양이 강령회 때 빛나는 심령체에 의한 "후광을 둘렀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모두가 정신나간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포와로는 그것이 '인관성 호흡'이라는 것을 간파하거든요. 이런게 본격물이죠!

트릭도 괜찮습니다. 간이 나빴던 피해자에게 인을 투여하여 간견병과 별 차이 없는 예후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어요. 로널드슨 의사의 자연사 확진 판정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기는 하나 에밀리가 평소 유사 증상을 오래 앓고 있던 환자라 충분히 걸어볼만 한 도박이었으니까요. 피해자가 자주 먹던 캡슐 중 하나에 투입하여 일종의 시한 장치를 만든 것도 그럴듯했고요.

또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완역판이라 주장하는 판본으로 읽었는데, 확실히 번역도 한층 높은 완성도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포와로의 프랑스 어를 섞는 말버릇도 맛깔나게 잘 살려 놓았으며, 헤이스팅스와의 재담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거든요. 헤이스팅스가 이렇게나 유머러스하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등장인물들을 모두 수상쩍게 그리는 묘사가 과해서 읽는 내내 짜증이 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실제 범인은 아니지만 제발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포와로의 추리가 진상에 도달하여 진범을 밝혀내기는 하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심약한 타니오스 부인이 시체를 재검시하자는 포와로의 주장에 겁을 먹고 자살을 하지만, 실제 재검시를 했어도 사인을 밝히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설령 실제 사인이 밝혀졌다고 해도 타니오스 부인이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요. 로슨양이 거울을 통해서 목격한, 타니오스 부인이 계단에 장치를 설치했다는 증언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을거에요. 마침 범인이 딱 좋게 자살했을 뿐, 제대로 범인을 옭아매었다고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뭐 이런 점도 본격물이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장, 단점 모두 고전 본격물스러운 작품입니다. 저와 같이 고전 본격물 성분(?)이 부족해 지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책 뒤 소개글처럼 "훌륭한 평균작품보다도 잘못 쓴 크리스티 작품이 더 낫다" 이니까요. 이 작품은 잘 못 쓰지도 않았고요.

2017/01/28

칼리의 노래 - 댄 시먼스 / 김미정 : 별점 3점

칼리의 노래 - 6점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오픈하우스

죽었다고 알려졌던 시인 M.다스가 아직 살아있고, 캘커타에 나타났다는걸 알게 된 잡지사의 의뢰로 시인 보비는 아내 암리타, 젖먹이 딸 빅토리아와 함께 캘커타로 향했다. M.다스의 신작 확보와 그에 대한 기사 작성이 목적이었다. 보비는 그를 찾아온 조력자 "크리슈나"로부터 M.다스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신작에 얽힌 "칼리" 신을 모시는 신앙과 폭력에 대해 들었다.
여차저차 M.다스의 신작을 입수해 독파한 보비는 반은 협박에 가까운 어거지로 M.다스를 직접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다스의 죽음과 카팔리카 교단의 납치와 폭력에 휩쓸리고 말았고, 크리슈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호텔에 돌아왔지만 빅토리아가 유괴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장르 소설가 댄 시먼스의 데뷰작입니다. '세계환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스티븐 킹, 딘 쿤츠 등이 격찬한 공포 소설이라기에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캘커타를 무대로 범죄 집단의 광기에 휩쓸린 시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과연 명성이 허언은 아니더군요. 확실히 재미있었어요. 

사실 보비의 임무(?)는 별게 없습니다. 죽은 것으로 알려진 시인의 복귀작을 구해오고, 관련된 기사를 쓰는게 전부니까요. 그러나 이를 독자에게 흥미롭게 전달하는 솜씨가 정말 빼어나며, 그 바탕에는 발군의 묘사력이 자리합니다. 캘커타라는 곳에 절대로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글 솜씨가 가장 돋보여요. 이 작품의 첫 문장부터가 그러합니다. "어떤 장소는 너무나 사악하여 그 존재를 허락할 수 없다. 어떤 도시는 지독히 악랄해서 용납할 수 없다. 캘커타는 그런 곳이다." 작품 내내 이 첫 문장을 그대로 증명하듯 캘커타의 치부와 오점만을 상세하게 그려냅니다. 이러한 캘커타 묘사 덕에 "폐쇄공포증"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포감이 모락모락 생겨나고요. 특정 장소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데 그 장소나 너무나 혐오스럽게 묘사되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이렇듯 특정 장소에 대한 혐오감과 폐쇄 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은 스티븐 킹의 "아주 비좁은 것"과 좋은 비교가 될 정도에요. 이런 곳에서 하나 뿐인 아이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 공포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러한 공포에 감정이입이 가능하도록 묘사한 덕분에 그 위력은 더욱 배가되고요. 

다른 묘사들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크타난다지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카팔리카의 예배 의식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좋은 예입니다. 엄청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되어 있어 보이는 디테일, 신상이 밟고 있는 시체와 들고 있는 참수된 목을 이용한 아이디어도 아주 공포스러워서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익사한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이었고요.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무섭기에 시각화하더라도 아주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영상화되지는 않은 듯 해서 좀 의외였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한 "칼리의 노래"에 대한 아이디어도 아주 좋아요. 일종의 서사시와 현대 문명을 결합하여 설명하는데, 번역된 결과물로는 천재 시인의 작품인지 잘 모르겠더라도 아이디어만으로 놀라운 결과물로 느껴졌습니다. 현대 문명이 진정한 폭력의 시대라는 것을 광고나 뉴스 기사와의 결합을 통해(의도한 것이던 아니던) 잘 드러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시 속 표현 그대로 "칼리의 시대가 열렸도다"! 인 것이죠. 

적절하게 등장하는 소소한 액션, 빅토리아를 잃었지만 보비와 암리타 부부는 결국 어둠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는다는 나름대로의 해피 엔딩도 괜찮았습니다. 제가 해피 엔딩을 좋아하기도 할 뿐더러, 이 정도 고초를 겪었으면 좀 행복해져도 될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주요 인물인 보비, 크리슈나의 급격한 심리 변화와 행동들의 이유, 목적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보비가 다스를 꼭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 - 보비가 원고를 손에 든 시점에서는 M.다스를 만날 이유는 없음 -, 만남 이후 크리슈나가 건네준 권총을 M.다스가 부탁한 시집 속에 숨겨 넣은 이유, 마지막에 보비가 발작적으로 캘커타로 돌아가 닥치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등 이야기의 핵심 변곡점 모두가 그러합니다.
크리슈나 즉 산자이의 목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카팔리카가 되고 싶었지만, 되고 난 이후에는 왜 보비를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를 전혀 모르겠거든요. 칼리 신의 뜻도 아니고, 그 스스로 칼리 신을 거역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을 정도의 실력자로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지요. 만약 크리슈나의 행동이 카팔리카의 목적이라면 M.다스를 죽인 이유도 이해 불가입니다. 그냥 놔 두었어도 어차피 오래 갈 목숨은 아니고, 시의 출간을 막기 위해서라면 보비와의 만남과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칼리 신의 안배라고 한다면 최소한 그 안배, 계획이 무엇인지 정도는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에 폭력의 시대가 돌아왔음을 선언한다... 정도로는 많이 부족했어요.
빅토리아를 납치한 것도 밀수품 운반을 위한 악당들의 음모였는지, 칼리 교도인 카팔리카들의 복수인지도 결국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악당들의 음모라면 사전의 안배 - 다스의 조카라는 카마키야 브하라티의 존재 - 라던가, 차터지가 M.다스와의 면담을 주선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카팔리카가 연류되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좀 애매해요. 이렇듯 좀 모호한 이야기가 '환상문학' 스타일이기는 합니다만 제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보비가 과거 성폭행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등의 짤막한 묘사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고요.

아울러 공포 소설이라고 알고 있는데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다는 단점도 있지만 사소합니다. 재미도 있고 묵직한, 좋은 장르 문학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만큼 장황하면서도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러고보니 아주 무섭지는 않지만 환상 문학 쪽으로는 최고 수준이라는 점은 앰브로스 비어스 작품과도 비슷하군요. 여튼, 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지 못하신 장르문학 팬 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리는 바 입니다.

덧붙이자면, 그 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번 독서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인도는 절대 가면 안된다는 것을. 댄 시먼스가 캘커타에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앙심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이 책을 읽은 독자의 대부분은 캘커타라는 곳을 방문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2016/09/19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 존 피셔 / 이승민 : 별점 1.5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 4점 존 피셔 지음, 이승민 옮김, 존 테니얼 그림/정은문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음식, 요리 관련 항목을 발췌한 후, 해당 요리 레시피를 함께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한 컬럼을 준비하고 있어서 혹 참고가 될까 싶어 읽어보았습니다.

허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구성부터 별로예요. 요리가 등장하는 항목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요리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발췌된 내용은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정말 소설 속 해당 단락을 그대로 실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레시피가 더해졌을 뿐이에요.

레시피나 요리 관련 항목도 별 재미가 없습니다. 제법 그럴싸한 것도 있지만, 소설 속 내용을 멋대로 해석하여 레시피를 억지로 연결시킨게 많은 탓입니다. 먹으면 몸이 작아지는 '나를 마셔요 수프'의 경우, 소설 속 내용에는 조리법을 짐작케 하는 단서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렌지와 레몬 등 각종 과일을 끓인 과일 수프 레시피를 곁들이는 식으로요. 심지어는 요리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에 레시피를 결합시키기까지 합니다. 앨리스가 체셔 고양이를 처음 만난 장면 뒤에 '체셔 고양이 수염'이라는 요리 레시피를 덧붙인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요리가 대중적이고 유명하다면 아예 관련이 없지 않겠지만, 검색해보니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네요.

물론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인 크리스마스 놀이라는 '스냅드래곤'의 실체 - 그릇에 브랜디를 채우고 건포도를 넣은 다음 술에 불을 붙이고 불꽃 속에서 건포도를 낚아채 불이 꺼지기 전 입안에 넣는 것 - 등 처음 알게 된 내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부록으로 수록된 "정신의 식생활"이라는 컬럼도 아주 인상적이고요.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해롭듯,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책을 읽거나 너무 책을 많이 읽으면 마음에 좋지 않다는 시각이 독특했던 덕분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발표 당시 그려진 존 테니얼의 삽화도 고풍스러운 매력이 넘쳐 마음에 들며, 책의 디자인도 예쁜 편이에요.

허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으며, 170페이지 정도 분량에 13,000원이라는 가격도 과하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팬이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15/01/06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워싱턴 어빙 외 / 한동훈 : 별점 3점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 6점 워싱턴 어빙 지음, 한동훈 옮김/태동출판사

이 블로그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서는 아마도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고전 본격 황금기, 클래식 미스터리는 사족을 못 쓰는 애호가입니다. 이런저런 고전들은 많이 읽은 편인데 평균적으로 괜찮게 평가하고 있는 이유는 다 저의 취향 때문이죠.
 그러나 아주 오래전 읽었었던 예전에 읽었던 "골든에이지 미스터리 중편선"이 심하게 기대 이하라서 나름의 기준점을 최소한 19세기 말 이후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그 이전 작품들은 지금 읽기에는 심하게 낡았다고 여겼거든요. 이 책 역시 대부분 작품이 19세기 후반 발표된, 기준점 통과가 간당간당해서 그동안 읽지 않았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 완전 대박입니다. 예상치 못한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했어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과 견줄만한,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은 명탐정들 -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의뢰인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는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과학 탐정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 시리즈 단편들은 완성도를 떠나 존재만으로도 반가웠을 뿐더러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결산", "위험천만한 게임"이라는 "걸작"이라 칭해도 부족함없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된 볼륨도 마음에 들고요. 발표된 시기를 감안할 때 지금 읽기에는 낡아버리거나 시대착오적인 작품도 있고, 고전적 작법으로 쓰여져 지금 기준의 완성도를 충족시키기는 어려운 작품도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고전을 읽을 때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세금과도 같은 것이죠. 가이 포크스나 보르시치와 같은 고유명사를 잘못 번역한 옥의 티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번역도 무난한 편입니다.

그래서 수록 작품 평균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본격물 미스터리 애호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책인데 고전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기는 하네요. 그래도 최소한 걸작이라 말씀드린 저 세작품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서는 절판되었으나 e-book은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기도 하니까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울버트 웨버, 혹은 황금의 꿈" 

"슬리피 할로우" 등으로 유명한,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명이라는 워싱턴 어빙의 작품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평범한 네덜란드 출신 배추농부 울버트 웨버가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한다는 내용인데, 떠벌이가 지껄이는 듯한 구전문학같은 묘사가 볼거리입니다. 울버트의 보물을 찾기 위한 헛된 노력이 해적들의 은밀한 행동과 결합되어 전개되는 독특한 전개, 블랙코미디 느낌도 많이 전해주는 유쾌함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울버트가 부동산 재벌이 된다는 난데없는 결말과 같은 두서없는 전개, 구전문학스러운 묘사 등은 너무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약간 호러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장르 문학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하기도 하고요. 최소한 "미스터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부동산이 최고라는 교훈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차라리 시사풍자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길쭉한 궤짝"

에드거 엘런 포우의 단편. 친구가 애지중지 돌보는 궤짝 안에 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낡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나 흥미로왔어요. 

다만 선장의 말을 빌어서 마무리하지 말고, 마지막 침몰 직전 상황에서 진상이 드러나는게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예를 들자면 관 뚜껑이 열리고 아내의 시체가 등장하는 "어셔가의 몰락"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시무시하고 이상한 침대"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걸작 단편입입니다. 무허가 3류 도박장에서 주인공이 도박으로 거금을 딴 뒤 술에 취하고 몽롱한 채로 도박장 방 하나를 빌려 잠을 자다가 침대 천장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주인공이 술에 취하는 과정의 생생한 묘사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침대 지붕이 내려오는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읽다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에요. 잠이 오지 않아 세밀하게 관찰했던 벽에 걸린 그림 속 인물의 깃털 유무에서 모골송연한 범죄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과정도 매끄럽고요. 짧은 글이지만 정교하게 복선이 짜여져 있는 덕분이지요. 

한마디로, 이 작품을 읽은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작품집을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근대 추리소설의 시조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거장의 작품다왔달까요. 별점은 5점입니다.

"꿈속의 여인"

조금 흔해빠진 괴담이랄까... 자신의 생일날 자신을 죽이기 위해 나타나는 여인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품고 살아가는 마부 아이작의 이야기입니다. 

별다른 극적 반전도 없고 여인의 정체도 알려주지 않는 등 불친절한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앞선 작품은 걸작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거장이라고 항상 걸작만 쓰는건 아니겠지요. 

그래도 아이작의 과거 이야기는 분명 흥미로우며 꿈과 현실을 잇는 과정의 묘사만큼은 볼만했던 만큼 별점은 2.5점입니다.

"공주의 복수"

캐서린 루이자 퍼키스의 여성 탐정 러브데이 브룩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에 "문간의 검은 가방"이라는 단편이 소개되었던 시리즈이지요.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루시에 쿠니에르라는 아가씨의 실종 사건을 그리는데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어요. 러브데이의 추리가 불완전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사가 드루스 소령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지나친 억측입니다.
뭐 이 부분은 눈빛에서 살기를 느끼는 무림 고수와 같은 재주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 쳐도, 사건 관계자들이 모인 상황에 난입하여 "모자 가게"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의 비약입니다. 그녀를 빼돌린 드루스 부인과 그윈 부인이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며 모자를 쳐다보았다? 이게 모자 가게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냥 눈둘데가 없는 것인지도 불명확하고 그 모자 가게에서 산 모자인지도 확실치 않으니까요.

주로 관찰을 통해 추리하는 러브데이 브룩과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주위 남자들을 매료시키는 루시에 캐릭터, 셜록 홈즈의 라이벌치고는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쓰여진 점 등은 특이하지만 추리적으로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천국의 물가에서"

아주아주 약간 고딕 호러 분위기가 나기는 하는데 실상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입니다. 주인공 케언공이 라마스 양에게 청혼할 때의 대사는 재미난데 그 외에는 별다른게 없는 고전 할리퀸 로맨스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목사 서재의 피웅덩이" 

오스트리아 최고의 형사이자 탐정인 요제프 뮬러 시리즈 단편입니다. 목사관 서재에 피웅덩이를 남긴채 목사가 사라진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로, 충격적이면서도 기발한 인간 소실 트릭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상은 트릭이고 뭐고 없이 서재에서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 지하실에 숨겼다는게 결론이라서 맥이 빠집니다. 이래서야 명탐정이 딱히 등장할 필요도 없죠. 자세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더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에요. 아무리 피가 응고하였더라도 아무런 흔적없이 시체를 옮기는 작업을 성공했을리는 없으니까요.

그 외에도 사건 해결의 핵심 단서가 순전한 우연 - 범인이 시체를 옮길 때 우연히 팽이가 떨어져 그것을 돌리게 된 것 - 이라 추리적인 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지닌 양치기 캐릭터는 전혀 등장할 필요가 없었고요. 

셜록 홈즈처럼 현장을 아주 철저하게 조사한 뒤 단서를 찾아내어 사건을 해결하는 뮬러의 활약은 그럴듯했습니다만, 이러한 이유로 별점은 2점입니다. 홈즈 시대 추리소설의 단점만이 극대화된 작품이었어요.

"범죄구성 사실" 

엉클 애브너 시리즈로도 유명한 멜빈 데이비스 포스트의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사교계의 총아인 사무엘 월콧이 사실은 리차드 워렌이라는 인물로, 월콧의 아내와 공모하여 그를 죽인 뒤 신분을 가로챈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월콧 (워렌)이 아내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계획을 돕는다'는 나름 충격적인 설정으로 고객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랜돌프 메이슨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에요. 페리 메이슨의 선구자적인 캐릭터죠.

또 완벽하게 시체를 없앨 경우 범죄 사실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사망 사실과 그 사망을 가능케 한 폭력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어서 무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 당시에 소설로 발표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이른바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이 법의 헛점이 많이 알려진 덕인지 이런저런 정황 증거를 통해 범죄 사실이 입증된다면 유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체를 없애는 과정의 디테일도 좋아요. 황산을 이용하여 시체를 녹여 없애는 방법인데 소설처럼 깔끔하게 모든 흔적을 단시간내에 없애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묘사가 잔혹하면서도 생생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부족함이 없지는 않으나,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쌍벽의 탐정"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작가인 마크 트웨인의 작품으로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서사, 그리고 제법 그럴듯한 범죄 및 트릭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완성도는 좀 처집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치 스틸맨이 어머니를 버리고 모욕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와중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재능(냄새 맡기)을 어필하는 전반부와 호프 캐넌의 은광 부락에서 벌어진 폭사사고를 다룬 후반부로 나뉘는데, 두 이야기가 잘 결합되지도 않을 뿐더러 지루한 탓입니다. 

특히 전반부 이야기는 설득력도 낮고 이렇게 길게 설명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장황해요. 후반부도 문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플린트 버크너에게 살의를 품은 노예와 같은 영국 소년 페트락 존스가 범행을 결심하는 과정, 거기에 아치 스틸맨이 그 마을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의 특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실종된 아기를 찾아내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플린트 폭사사건 이후 페트락의 친척 아저씨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러가지 단서를 이용하여 범인을 지목하고 아치 스틸맨과 추리 대결을 펼치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난잡하게 전개됩니다. 

마크 트웨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정교한 과학적 트릭 - 초가 타는 시간을 이용하여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알리바이를 만듬 - 이 등장하는 것은 인상적이지만 아치 스틸맨이 현장 조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한 만큼 완전 범죄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아요.

물론 셜록 홈즈의 패러디물을 쓰기도 했던 작가의 작품답게 셜록 홈즈가 등장하여 여지없이 망가지는 장면은 재미있었고 그 외에도 셜록 홈즈 스타일에 대한 통렬한 패러디, 예를 들어 "탐정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탐정 곁에서 일을 꾸미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등은 인상적이고 재미있긴 했습니다. 미국적인 정취와 무식함 (집단 린치를 포함하여)을 한껏 느낄 수 있다는 부가적인 장점도 존재하고요.

그러나 단점이 더 부각되는 작품이라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더 짧게 줄였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작가의 욕심이 과했던게 아닌가 싶네요.

"블랙 핸드"

제목을 한글로 풀이하면 "흑수단". 제목 그대로의 범죄단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크레이그 케네디 교수 시리즈 중 한편입니다. "과학 탐정"의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직접 개발한 도청 장치를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영향을 짙게 느껴지는데 1인칭 화자가 파트너로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기묘한 사건의 의뢰, 독자가 그 사용법을 알 수 없는 장치의 등장,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홈즈 시리즈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별게 없습니다. 유괴 사건에서 아이를 은닉한 장소를 도청 장치를 통해 듣고 경찰에게 알려준다는 방법이 전부니 말이죠.

그런대로 잘 쓰여지기는 했지만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탁상시계"

"독화살의 집"이라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을 쓴 작가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는데 환상특급을 보는 듯한 내용이라 기대와 영 달랐습니다. 장르 구분을 하자면 판타지에 가까왔달까요. 시간을 불특정하게 14분간 멈추는 능력이 있는 탁상시계로 벌인 완전범죄 이야기로 시간이여 멈춰라! 류의 내용이라 추리적으로는 건질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시계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반전도 없어서 여러모로 실망스러웠습니다. 

만년 2인자의 질투심이라는 동기는 충분히 설득력있기는 하고, 이런 류 아이디어의 원조인지도 궁금하긴 한데, 상술한 이유로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결산"

퍼시벌 와일드의 단막극. 극작가로도 알려져 있지만 국내에 출간된 작품은 단편집 두 권밖에 없지요. 때문에 자료로서도 귀중한데 작품의 수준도 아주 높습니다. 딱 두명의 등장인물이 이발소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빚어지는 극도의 서스펜스가 놀라울 정도에요. 이발사 킬번이 과연 그의 딸을 농락하고 버린 손님 존의 멱을 딸 것인가?와 존이 시간제한이 있는, 전 재산이 걸린 경매에 참석할 수 있는가?라는 두가지 드라마를 긴장감넘치게 선보이면서도 킬번이 존을 12년 동안 뒤쫓고 지금의 찬스를 만들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는 솜씨도 탁월한 덕분입니다.

아울러 마지막 반전 - 존이 이야기한 경매시간과 이발소 시계가 얼마나 빨리 가는지에 대한 대사 - 까지 확실하고요. 이런 작품이 10여 페이지에 불과하다니 고개가 숙여질 뿐이네요. 별점은 5점입니다!

"위험천만한 게임"

프로 사냥꾼 레인스포드는 우연히 조난당하여 러시아 출신 부호 자로프 장군의 섬에 표류하였다. 자로프 장군은 사냥에 미친 인물로 극도의 긴장감을 위해 인간을 사냥하고 있었고 레인스포드도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생명을 건 게임에 참여하는데..... 

어딘가의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던 걸작입니다. 인간 사냥이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실제 사냥 게임에 대한 설정 - 3일이라는 시간 제한 및 자로프 장군이 사거리 짧은 피스톨을 장비했다는 핸디캡 등 - 이 탁월할 뿐 아니라 두 명의 대결에 대한 묘사가 긴장감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반전도 기가 막혀요. 바다로 뛰어든 레인스포드의 목적은 탈출이 아니라 성까지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인데 예상을 깨는 맛이 있었거든요. 별점은 5점입니다. 

한 남자가 협박 때문에 생명을 건 모험에 뛰어들어 성공한 뒤 협박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은 스티븐 킹의 단편 "벼랑 끝에 선 사나이"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새 출발"

잘 모르는 작가의 종말 이후를 그린 SF로 문명이 모두 사라진 뒤, 이전 문명의 기억을 지닌 자가 미개집단의 종교인과 충돌한다는 설정의 작품입니다. 

설정부터 많이 접해보았던 것으로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네요. 종교인이 믿는 신의 존재가 식기세척기였다는 반전은 있지만, 충분히 예상 가능하여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고요. 한마디로 전체적으로 진부했어요. 시대가 너무 흐른 탓이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2014/08/04

타블로이드 전쟁 - 폴 콜린스 / 홍한별 : 별점 4점

타블로이드 전쟁 - 8점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양철북

19세기 말, 토막난 채 발견된 시체가 신원이 마사지사 굴든수프로 밝혀진 후,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마틴 손에 대한 재판과 사건을 보도하며 선정적 보도의 끝을 보여준 퓰리처의 월드, 허스트의 저널지의 경쟁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우선 빅토리아시대 말, 그야말로 셜록 홈즈 전성기를 무대로 상세하게 소개되는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은 굉장한 볼거리였습니다. 과학 수사의 초창기로, 아직 지문 대신 베르티용 측정법이 사용되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혈흔 분석, 포장지의 출처 추적, 여러 목격자 증언을 통한 용의자 특정 등의 수사 과정은 현대 수사물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합니다. 고문에 의존하지 않는 냉정한 수사라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백여년의 시차가 남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추억"보다 더 현대적 수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논란이 되는 시체 없는(또는 시체의 정체가 불명확한) 사건에 대해 혐의를 물을 수 있느냐는 쟁점도 흥미로왔던 점이며, 마틴 손의 변호를 맡았던 당시 최고의 변호사 하우의 실력도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피고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고 묘사되는데, 예를 들자면 다른 사건에서는 핵심 증인을 돈을 주고 홍콩으로 이민 보냈다고도 하네요. 페리 메이슨이 떠오릅니다. 하여튼, 하우가마틴 손이 범인이라고 말했던 오거스터 낵을 법정에서 박살내는 장면, 검찰 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와 증거(예: 사건 현장의 욕조가 시신을 썰기엔 너무 작았다)는 뛰어난 변론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마틴 손이 사형선고를 받은 뒤에도 배심원단의 음주 사실을 조사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물론 개인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지만요.

아울러 사건의 진상이 재판이나 수사로는 완전히 밝혀지지 않지만, 저자가 제시한 추론도 나름 설득력 있더군요. 굴든수프의 시신에는 반항 흔적은 있으나 섬유 증거는 없었고, 오거스터 낵 체포 시 멍자국이 있었으며, 빈 와인병이 현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굴든수프가 게이가 아닌 이상, 함께 와인을 마시고 알몸 상태에서 칼을 들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오거스터 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추리였습니다.

오거스터 낵은 사건과 재판, 그리고 이후의 행보까지 볼 때 정말 대단한 팜므파탈이라 생각됩니다. 자기 확신과 합리화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소시오패스와 다를게 없더군요. 예전에 읽었던 "밀랍 인형"의 팜므파탈 미리엄의 리얼 버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책의 또다른 축인 황색지의 보도 경쟁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현재의 언론 행태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는 씁쓸함도 전해 줍니다. 하지만 그 치열한 노력이 만들어낸 효과도 무시할 수는 없더군요. 무엇보다도 허스트의 말처럼, 사건을 실제로 만들어서라도 특종을 얻는다는 전략은 지금 보아도 놀랍습니다. 예전에, 평화로운 시골 마을 신문사 기자가 사건을 만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단편 소설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이게 그냥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 외에도 재판 중 굴든수프의 사체 일부에 대한 묘사, 마틴 손의 외모를 언급하는 증언들, 일종의 ‘아이돌’이 된 피고의 인기, 그리고 사건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 등도 흥미로운 요소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범죄 논픽션으로도, 황색 언론의 보도 행태를 다룬 기록물로도 손색 없는 책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추리물, 범죄물, 논픽션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