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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9

조선의 명탐정들 - 정명섭 / 최혁곤 : 별점 2점

조선의 명탐정들 - 4점
정명섭.최혁곤 지음/황금가지

조선시대 사료를 바탕으로 실재했던 사건 해결 사례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논픽션 역사추리물이라고나 할 수 있습니다. 추리작가 정명섭, 최혁곤씨 공저로 모두 13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앉아서 수수께끼를 풀다 - 세종대왕
2. 권력의 중심에 칼을 겨누다 - 이휘
3. 법 위의 권력을 처단하다 - 박처륜
4. 악녀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 - 이의형
5. 천재적 두뇌를 가진 타락한 탐정 - 연산군
6. 부인과 아들, 살인자는 누구인가? - 황헌
7.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다 - 이순
8. 부당한 수사에 맞선 용감한 선비들 - 이유달, 이민구, 목서흠
9. 방방곡곡을 떠돌며 캐낸 숨은 진실 - 심염조
10. 조선 최고의 명탐정 - 정약용
11. 한 치의 의심도 없게 하라 - 정조
12. 심리수사 기법으로 범인을 찾다 - 이름 모를 서흥 부사
13. 조선 투캅스 - 좌포청 군관 이종원, 우포청 군관 육중창

13편이나 되는 이야기가 실려있기 때문에 분량만 놓고 본다면 꽤나 풍성합니다. 그러나 해결이 어려웠던 이유는 단지 조선시대였기 때문이었던 사건 등 지금 보기에는 추리라고 보기에 민망한 수준의 사건도 많습니다. 검시 과정은 상세하지만 매번 유사하게 반복되어 지루하고요. 수사과정은 "국문"이라고 불리우는 고문에 의존하고 있어서 이게 정말 진상을 밝힌 것인지, 고문으로 또다른 피해자를 만든 것에 불과한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나마 추리적으로 기대에 값했던 내용은 아래 세 편 정도입니다.

첫 번째는 "권력의 중심에 칼을 겨누다 - 이휘" 입니다. 사건 현장에 종이가 발라진 벽에서 혈흔을 체취하고, 벽과 기둥에 묻은 혈흔을 보고 바닥에도 흘렀을 것이라 추리하여 증거를 보강하고, 시신에 난 상처 (창대에 눌린 것 처럼 원형)를 통해 철창이 흉기임을 떠올리는 일련의 과정이 굉장히 상세합니다. 동기를 밝혀내는 과정도 그럴듯했고요. 무엇보다 결말에서 세조의 최측근이자 공신인 민발이 범인이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자, 이휘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사육신에 가담하게 된다는 후일담까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악녀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 - 이의형" 입니다. 피해자가 조선 역사에 길이 남을 악녀 중의 하나이자 어우동의 어머니인 "귀덕"이라는것 부터 흥미로운데, 범인이 어머니의 패악을 못견뎌했던 아들이라는 것이 충격적이었어요. 형벌은 능지처참이었다니... 죽을 죄이기는 하나 귀덕의 행실을 보자면 참작의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텐데 유교 국가인지라 최고형이 선고된 듯 합니다.

마지막은 "천재적 두뇌를 가진 타락한 탐정 - 연산군"으로 유인홍의 첩이 남자 종과 간통을 하다가 딸에게 발각되어 딸을 찔러 죽였던 사건입니다. 유인홍은 딸은 자살이고 첩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새 옷에 피가 묻는 것을 피하려고 헌 옷을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목을 찔렀다는 내용에 주목하여 자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연산군이 알아냅니다. 결국 유인홍이 첩 무적과 언문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수사과정에서 밝혀져 편지가 압수된 뒤 유인홍이 모든 증언을 조작, 조종하였다는 것, 그리고 첩이 간통이 드러나 딸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는게 밝혀지게 되지요.

내용은 평이하지만, 첩과 본처 소생 딸과의 갈등이라는 고전적 주제에 더해 피해자가 살해당했다는걸 간파하는 장면만큼은 추리소설같은 재미를 전해주기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참고로 정조편의 소박맞은 여동생을 살해한 오빠 사건 역시 동일한 발상으로 전개됩니다. 여동생이 자살할 결심을 했다면 돈과 베가 든 보자기를 가져갔을리 없다는 논리로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나 나머지 이야기들은 딱히 큰 재미가 있거나 자료적 가치가 있어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료적 가치라면 "원통함을 없게하라" 와 같은 "신주무원록" 번역서가 더 낫겠죠. 얼마전 EBS에서 관련 다큐가 방영되기도 했고 말이죠.

아울러 책의 구성이 영 별로더군요. 본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짤막하게 소설 형식으로 시작한 뒤 상세한 내용을 기사처럼 쓰는 방식인데, 이러한 방식은 다큐멘터리의 "재연화면"을 연상케하여 논픽션을 흥미롭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왜 똑같은 이야기를 두번 반복해서 분량을 늘리고 읽는 노력을 낭비하게 만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설적인 형식으로 쓰여졌다고 더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본편의 논픽션 부분에서 모두 소개되는데 말이죠.

게다가 최악은 각 이야기 후에 이 사건의 탐정역인 인물과 유사하다는 해외 명탐정을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조선의 명탐정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해외 명탐정에 대해 관심이 있으리라 생각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유명한 파스타집에 갔더니 반찬으로 김치가 나오는 것과 다를바 없지요. 아무리 쉐프의 의도라도, 일반 손님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그나마 해외 명탐정들도 본편 내용과 억지로 연결시켰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범인을 잡아낸 탐정이 벤자민 위버라는 식인데 세상에 그렇지 않은 탐정이 있나요? 소개도 프로필 소개 정도에 불과해서 그닥 자료적인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책이 무언가의 시작점이 될 수는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재미, 자료적 가치 모두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좋은 디자인과 일러스트가 낭비된 느낌인데 차라리 신주무원록을 재미있게 소개해주는 식으로 논픽션 부분만 강화해서 책을 냈다면 더 나았을 것 같네요.

2014/04/28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 고마츠 사쿄 / 이동진 : 별점 1.5점

끝없는 시간의 흐름 끝에서 - 4점
고마츠 사쿄 지음, 이동진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노노무라는 은사의 친구 반쇼야 교수가 발굴했다는 기묘한 모래시계 때문에 탐사여행을 떠났다. 모래시계는 어느 방향으로 뒤집든 끊임없이 모래가 떨어지는 4차원적인 구조를 가진 물체였다. 그러나 발굴 현장인 고분을 탐사하던 모든 일행과 관계자가 잇달아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노누무라 역시 시속 70킬로미터로 달리던 택시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저자인 고마츠 사쿄는 호시 신이치, 츠츠이 야쓰타카와 함께 이른바 일본 3대 SF 작가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다른 두명에 비하면 국내에서의 인지도나 대접이 시원치 않아서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일본침몰" 이외에는 소개된 적이 없었죠. 그래서 소개만으로도 무척 반갑고 기쁜 일인데다가, 이 작품은 일본 SF 최대 걸작 중 하나로 이런저런 매체에서 항상 소개되고 있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끝없이 떨어지는 모래시계, 모래시계가 발굴된 고분의 기이한 구조, 모래시계와 고분 탐사에 관련된 인물들에게 벌어진 기묘한 사건이라는 초반부만큼은 이해하기도 쉽고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노노무라 - 사요코 커플의 장대한 러브스토리 역시 인상적이었고요.

그런데 결국 도대체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더군요. 짧게 이해한 바로는, 노노무라는 신에게 선택받았지만 우매한 인류에게 지혜를 전해주려다가 신에게 쫓기게 되었으며. 이는 최후의 순간에 신에게 가까이 다가서긴 하는데 결국 추락하여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타천사 루시퍼 이야기의 변주로 보였습니다. 여기에 진화와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복잡하게 꼬여있고요.

그런데 이를 설명하는 초반 이후의 이야기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초과학 연구소에서 일어난 폭발사건, 태양의 이상현상으로 멸망이 닥친 지구에 찾아온 외계인들, 외계인들에 의해 분류되는 인류, 이어지는 습격과 추격 등은 모두 토막나 있어서 제대로 연결되지도 않고 앞뒤의 인과관계도 불명확한 탓입니다. 게다가 반쇼야 교수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외계인들이 찾아온 뒤에 지구가 멸망한 것인건지 아닌건지, 엘마와 한스 마리아 후민은 어떻게 되었다는건지, 애초에 대립하는 두 단체의 성격과 대립의 과정은 무엇인지 등 뿌려놓은 복선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모래시계의 정체를 일종의 발신기라고 설명하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이래서야 모래시계는 작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그냥 흥밋거리 소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그야말로 전형적인 맥거핀, 흥미거리 떡밥이랄까요. 여튼, 작가의 욕심만 지나칠 뿐 이야기를 제대로 정리하고 마무리짓는 힘이 부족하다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쓸데없이 복잡합니다. 시공간을 4차원 축으로 놓고 어쩌구 한다는 이론은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작가가 나 이만큼 똑똑해! 라고 현학적 능력을 과시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어요. 이러한 현학적 과시의 대표적인 예는 네안네르탈인 집단에 던져진 호모 사피엔스 생존자를 묘사하던 부분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피해자가 한다는 말이 "1930년에 발굴된 이스라엘 카르멜 산 동굴 기억하나?" 어쩌구라니 오버도 정도가 있어야죠.

차라리 초반부 이야기만 더 깔끔하게 정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시간 이동에 대한 SF 멜로는 "민들레 소녀"가 이미 한 정점을 찍기는 했지만 이 작품은 물리적인 시간 이동과는 조금 다르게 설명되기 때문에 평행 우주 이론을 살린다던가 하는 식으로 다른 방식도 가능했을 것 같거든요. 모래시계가 발신기라는 작중 아이디어를 더하여 다른 시공에 있지만 모래시계의 한쪽 끝이 연결된 사요코에게 모르스부호와 같은 신호를 보낸다던가 하는 식으로 모래시계도 적절하게 이용해가면서 말이죠.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서 좋은 별점을 준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로저 젤라즈니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작가의 생각을 잘 전달하는 작품은 쎄고 쎘죠. 예를 들어 불멸의 삶과 그에 따른 진화, 생명에 대한 고찰은 "불새 우주편"이 훨씬 쉽고 재미있었어요. 그 어렵다는 "쿼런틴" 조차도 이 작품에 비하면 차라리 재미있었던 것 같네요.

제가 나이가 든 탓에 쉽게 쉽게 읽히는 간단한 독서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으나, 뭔가 있어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 좋은 대접을 받았던 시대의 유산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고마츠 사쿄라는 작가의 작품을 접한 기쁨은 크지만 널리 권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14/04/22

자백의 대가 - 티에리 크루벨리에 / 전혜영 : 별점 2.5점

자백의 대가 - 6점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 전혜영 옮김/글항아리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폴 포트 정권에서 S-21 교도소의 소장으로 일하며, 이른바 킬링 필드에서 1만 2천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 데 관여했던 남자 ‘두크'의 국제 재판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이 책이 알리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두크가 저지른 범죄가 과연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크를 비롯한 전범들은 혁명을 위해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열심히 일했을 뿐이며 이는 불가항력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데, 이는 일제 강점기 친일이나 독재 정권 시기 순응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이지요. 때문에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큽니다.

책은 두크의 주장뿐만 아니라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생존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과 인터뷰를 500쪽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제공하며,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재판에 참여하고 함께 판단하게 만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크가 자신의 범죄를 불가항력으로 주장하고, 고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게 초반부입니다. 중반부는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도움을 준 프랑스인 프랑수아 비조의 이야기 및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의 말로, 그리고 프놈펜 함락 이후 두크의 삶에 대한 내용이고요. 후반부는 재판 과정 중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장면, 즉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여야 했던 풍 떤 교수 가족의 인상적인 등장과 함께 재판의 결말로 이어집니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두크의 천재적인 기억력, 수십 년 전 심문 대상자의 자백을 기억하는 능력, 재판장에서 보여준 능수능란한 대응 등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 그는 "밀그램의 복종 실험"처럼 단순히 권위에 복종한 인물이 아니라는걸 잘 알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스스로의 이상을 위해, 나중에는 기계적으로 범행에 가담한 독특한 사례로 이해됩니다. 더불어 교도소장이던 시기를 제외하면 그는 선생, 목회자 등으로 성실하고 신뢰받는 인물이었다는 이중적인 모습도 특이했고요.

그러나 제 기대와는 조금 다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자백의 대가’라는 개인에 집중하기보다는, 크메르 루즈라는 거대한 조직 내에서 그가 왜 범죄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를 구조적으로 조망하는 데 주력하는 탓이 큽니다. ‘자백의 대가’로서의 조종 능력, 심리적 설계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고요. 제가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었어요.

재판 논픽션으로서도 법정극적인 재미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두크의 범죄가 워낙 명확해서 빠져나갈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고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만, 그가 직접 작성한 방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지막에 프랑수아 루 변호사가 펼치는 변론 역시 공허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재미’의 측면에서는 부족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책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의 격동의 근현대사와 맞닿아 있는 주제를 담고 있고, 두크라는 인물이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점도 똑같고요.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회심은 과연 가능하며 진실한가?” 하는 점인데, 등장하는 목사는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책이 내리는 결론은, 두크는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물이며, 과거에는 공산당이 그 믿음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종교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은 이기적인 믿음일 뿐이라는 분석이죠.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크메르 루즈의 집단학살 현장이 현재는 관광산업의 일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혹한 현실이 상업화되는 모습은 씁쓸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남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는 부족하지만, 크메르 루즈와 캄보디아의 현대사, 집단학살과 전범 재판, 인간 심리라는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께는 의미 있는 독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 "어차피 죽일 거면 대체 왜 고문을 한 겁니까?"

2014/04/21

파계 재판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3점

파계 재판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 신극배우였던 무라타는 내연녀와 그의 남편을 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는 남편을 살해한 내연녀 야스코를 위해 시체 유기를 도왔다는 혐의는 인정했지만, 나머지 혐의는 모두 부인했다. 검사는 무라타의 유죄를 확신했으나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활약으로 서서히 흐름이 바뀌고, 결국 무라타의 비밀까지 밝혀지는데...

누명을 뒤집어 쓴 피고인 무라타 가즈히코의 결백을 밝히고 진범을 밝혀내는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의 활약이 그려지는 법정 미스터리입니다. 일본 추리작가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 중 한 편이지요. 작가가 후기에서 언급하기로는, 이전 가미즈 교스케 단편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도서출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두 번째로 출간되었는데,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에 이어 국내 정식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네요.

장점이라면, 재미 하나는 확실하다는 겁니다. 두 건의 살인사건 자체가 흥미롭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한순간에 드러나는 진범과 그 진상이 매우 인상적인 덕분입니다. 작가가 사법고시 준비 수준으로 조사했다는 법정 묘사는 허언이 아닐 정도로 상세하고요. 증인이 한 명씩 등장해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는 치열한 공방도 매우 긴박감 넘치게 그려집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법정극을 넘어서는 사회파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부락민 출신이라 평생 차별에 시달렸다는 설정을 통해, 일본 사회에 내재한 차별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인 "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차별을 그린 동명 작품에서 따왔으며, 부제 역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입니다. 검사가 제시하는 무라타의 과거 범죄들이 실은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정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극단에서의 횡령은 출신을 이용한 협박 때문이었고, 동거녀와의 결별 역시 출신 성분을 알게 된 그녀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식으거든요. 특히 그 동거녀가 법정에서 결혼하겠다고 증언하는 장면과, 무라타가 이를 일축하며 "내 돈 때문이지!"라고 외치는 순간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전개 방식도 독특합니다. 전부 법정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화자인 요네다가 법정출입기자로서 재판 과정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별도 취재나 외부 조사가 동반되는데, 그런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 덕분에 엽기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에서 보이던 과장된 묘사 없이 매우 절제되고 날카로운 문체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추리적인 요소의 한계입니다. 요네다의 시점만으로 모든 정보가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탓이에요. 법정 미스터리 특성상 상대가 어떤 증언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이는 이야기 구조를 제한적으로 만듭니다. 또한 정보의 일부가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혈액형에 대한 증언이 위증으로 밝혀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증인이 정직하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사건이 더 애매해졌을거에요. 또한 사라진 천만 엔의 행방에 대해 검사나 경찰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60년대 초반 기준으로도 막대한 액수이며, 자금의 출처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진범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쓰가와 히로모토와 야스코의 관계 역시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특히 쓰가와가 야스코의 시신을 어떻게 유기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유기에는 무라타의 자가용이 개입되었기에 개연성이 있었지만, 두 번째 범행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이 작품은 무라타의 재판에서만 끝을 맺습니다. 화자인 요네다를 내세운 만큼 쓰가와 재판 결과까지 다루는 에필로그가 있었더라면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텐데 아쉽습니다. 

배우 이토 교지나 여배우 호시 아키코 같은 인물들도 단순한 미스디렉션으로 사용하기엔 등장 비중이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고요. 무라타의 무죄를 확신하고 자비까지 들여 조사에 나선 햐쿠타니 변호사의 동기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상황상 무라타가 범인처럼 보이니까요. 이후 시리즈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캐릭터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카기 아키미쓰의 법정 미스터리는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작가 역시 변호사보다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극적 긴장감과 사회파적 메시지를 고루 갖춘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사법고시 수준의 공부를 했다는 열정이 느껴졌고,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재미를 함께 갖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덧 : 책의 디자인은 나쁘지 않지만, 표지 일러스트 때문에 책 하단에 오물이 묻은 것처럼 보입니다. 구입 당시에는 띠지로 가려져 있었지만, 이런 디테일은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14/04/19

알라딘 중고서적을 잘 찾아보면... 온라인 비블리아 고서당

여러모로 뒤숭숭하고 힘들고 어려운 시기네요. 책도 손에 잘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세월호 생존자 구조가 모쪼록 잘 이루어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번에는 읽은 책도 없고 하니,   오무라이스 잼잼 리뷰에서 언급했던 알라딘 중고서적에 대해 조금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알라딘 중고도서 헌터인데 왠만한 책은 알라딘 직배송으로만 구입합니다. 회원 판매가격은 이해불가 가격도 많고 배송비가 얄짤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절판되었고 희귀본이라면? 당연히 회원 판매를 알아봐야죠. 알라딘 판매 회원 중에도 몇몇 절판 희귀본 전문 셀러가 있습니다. "비블리아 고서당"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지요. 그 중 한 셀러의 판매 목록에 들어가서 훑어보니 참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절판되었다는데 놀랐습니다. 이런 책까지 나왔었나? 싶은 책도 있고요. 가장 놀라운 가격의 책은 요거입니다. 출간된 지 10년도 안 된 책인데 가격이 상당해요. 보통 절판 희귀본의 시세는 정가의 1.5~2배인데, 이 책은 3배에 달할 뿐더러 원래 정가도 고가의 책이라 높은 가격이 형성된 듯 싶습니다.

이런저런 정보를 접하니 제가 가진 고서들의 가격이 궁금해져서 저만의 다카키 아키미쓰 컬렉션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다른 책은 아예 검색도 안 되고, 그나마 검색된 "제로의 밀월"은 2,000원... 그 외의 추리소설들 모두 가격이 형편없더군요. 재간되기 전의 "점성술 살인사건"과 "관 시리즈", "불야성" 등을 소장했을 때에는 중고가격이 상당했었는데... 다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네요. 아쉽...

제가 가진 책이야 망했지만, 그래도 잘 관심을 가지면 갖고 싶은 책을 건질 수 있는 만큼 앞으로도 중고도서 헌터짓은 계속할 예정입니다. 바로 오늘도 이 책을 5,000원 대에 건졌거든요! 이러니 헌터짓을 그만둘 수 없지요.

2014/04/18

오무라이스 잼잼 2 - 조경규 : 별점 2.5점

오무라이스 잼잼 2 - 6점
조경규 글.그림/씨네21북스

국내 최고의 일상계 요리만화로 이전에 읽었던 1권에 이어지는 이야기. 1권 리뷰에서 가성비를 언급하고 다음 권을 살 생각은 없다고 단언했었지요. 그러나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반값에 팔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가성비에 의한 착시 효과일 수도 있겠지만, 1권보다는 마음에 드네요. 웹툰 연재 시 읽었던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XO 소스 발명에 대한 일화, 작가의 미국 유학 생활 중 단골 중국집에서 Happy family~ 전가복!을 먹은 이야기, 작가의 산타페 여행기, 너무너무 맛있는 베이컨 이야기 등이 실려있고, 각종 부록도 1권보다는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XO소스를 이용한 볶음밥, 완벽한 계란후라이와 스크램블 에그와 같은 조리법 소개가 괜찮았던 덕분이지요. 무엇보다도 산타페 여행기 편에서 잠깐 그림으로 소개되기만 했던, 작가가 산타페에서 1회용 카메라로 찍었다는 당시 사진이 실려있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사진도 나름 감각적이더군요. 이왕 이 사진을 실을 생각이었다면 전가복 편에 등장한 메뉴판 등도 실어주었으면 했는데 조금 아쉽네요. 다만 작가의 아들 준영이를 주인공으로 한 짤막한 만화나 맛집 소개, 오래된 광고 소개 같은 잡스러운 정보들은 여전히 재미없고 쓸데없었습니다.

하여튼 별점은 2.5점. 정가로 구입했다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것 같은데 반값에 구입했기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웹툰으로 이미 다 보신 분들이라면 구태여 구입하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현재 판매가의 50% 금액의 중고서적을 구입했는데,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회원 판매 중고가는 배송비 포함하면 새책 가격보다도 비싸지네요. 절판된 책도 아닌데 이 미친 중고가격 책정은 대체 뭘까요?

2014/04/16

라이징 임팩트 1~17 - 스즈키 나카바 : 별점 1.5점

라이징 임팩트 17 - 4점
스즈키 나카바 지음, 정선희 옮김/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완결된지 10년도 더 넘게 지났지만, 최근에 골프에 관심을 둔 친구가 많아져서 이런 저런 작품을 읽다가 만나게 된 작품입니다.

그런데 골프 만화는 아닙니다. 전형적인 왕도형 배틀 판타지 만화입니다. 초등학생이 400야드가 넘는 드라이버샷을 날리고, 수십미터짜리 버디 퍼팅과 칩인 어프로치를 당연하게 성공시키고, "기프트"라고도 불리우는 각자의 필살기("라이징 임팩트", "샤이닝 로드"…)를 가지고 있고, 주인공이 아무리봐도 초등학생 같지 않은 라이벌들과 싸워 나가고, 그 라이벌들과 한팀이 된 이후 다른 라이벌 팀과 싸워 나가고, 그 라이벌 팀과의 싸움이 끝난 뒤 진정한 라이벌 팀이 나타나고… 하는 식의 전형적인 배틀 판타지 액션 소년 만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만화에서 골프는 단지 소재일 뿐입니다. 골프 시합은 성투사들과의 전투, 라이징 임팩트는 페가수스 유성권으로 바꿔도 이야기는 가능하겠지요.

그래도 배틀 판타지로는 왕도형이라 기본적인 재미는 갖추고 있습니다. "점프"에서 단행본 17권 분량까지 연재되었다는게 증거이고요. 다양한 홀의 구성과 환경에 맞춰 서로의 필살기를 펼쳐나가는 것이 꽤 그럴듯한 덕분입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두뇌 싸움을 보는 맛도 약간 느껴지고요. 또 천연계 주인공 가웨인 캐릭터는 이런 류의 만화에서는 보기 드문 캐릭터라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별다른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했지만요.

그러나 갈수록 너무 뻔해지는게 심상치 않았는데, 카멜롯과 그렐 킹덤과의 최종 결전에서 "자 이제 승부를 시작해볼까!"라는 말과 함께 바로 10년 후로 넘어가 후일담이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결말은 좀 황당했습니다. 편집부의 압력 ("당장 집어쳐!")이 느껴지더군요. 그나마 후일담으로 거의 모든 등장 인물들에 대해서 정리해준게 다행이에요.

여튼 기대와는 전혀 달랐던 전형적인 소년 만화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중년에 접어든 제가 읽기에는 너무 유치했어요. 킬링타임용으로 오래 기억될 작품은 아니네요.

덧붙이자면 주인공은 가웨인에 라이벌은 란슬롯, 끝판왕은 트리스탄, 다니는 학교는 카멜롯인 등 아더왕 전설에서 모티브를 따 오기는 했으나 그냥 그뿐입니다.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끝판왕은 모드레드에 모르가나 정도는 나와줬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요. 일본이 무대인 만화에 왜 억지로 이런 이름을 가져다 붙였는지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2014/04/15

차이니즈 봉봉 클럽 1 - 조경규 : 별점 2점

차이니즈 봉봉 클럽 01 - 4점
조경규 지음/씨네21북스

국내 요리 만화 중에서는 첫 손가락에 꼽는 "오무라이스 잼잼"의 작가 조경구의 요리 만화입니다. "오무라이스 잼잼"에도 등장했던 작가의 딸 은영이를 모티브로 만든, 돈 많고 예쁘고 공부까지 잘하는 여고생 조은영이 중화요리 식도락 동아리 '차이니즈 봉봉 클럽'에 가입하여 여러 가지 요리를 클럽 친구들과 맛보고 다닌다는 내용입니다. 2008년도 만화이니 5년도 더 지났지만, 이제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용은 별 게 없습니다. 청송고 차이니즈 봉봉 클럽 멤버들이 실존하는 중화요리집을 찾아다니며 먹은 맛있는 음식에 대해 소개해준다는게 전부거든요. 만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서울 중화요리집 가이드북에 가깝습니다. 가이드북으로서의 기능은 충실하며, 무엇보다도 고급 요리보다는 만두나 면류 등 간단하고 크게 부담 없는 가격의 식사 위주로 소개되고 있는게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실제 저도 방문했었던 구로동(구 가리봉동)의 "삼팔교자관"의 꿔바로우가 등장하는 것도 무척 반가웠고요.

반면 만화로서의 재미는 기대 이하입니다. 작가도 단순 가이드 이상의 재미를 주기 위해 차이니즈 봉봉 클럽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상세한 설정 및 다양한 개그를 선보이지만 무리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고프면 얼굴이 변하는 쇼타, 맛있는 것을 먹으면 이마의 상처가 아프다는 해리, 대표 비슷한 아롱군이라는 클럽 3인방 모두 별다른 매력 없는, 개그 만화의 병풍 수준에 가깝더라고요.

작화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딱딱 떨어지는 일러스트 같은 펜선이 독특한 전통적인 만화 작풍인데,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표정을 보여준다는 시도는 좋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고 연출이 안정되지 않은 느낌이며, 컬러로 정성껏 그렸던 "오무라이스 잼잼"에 비해 요리들이 그닥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자금 사정에 안절부절 못하는 해리가 은영의 친구에게 일갈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끝나서 다음 권이 조금 궁금해지기는 하지만, 형식 자체가 동일하다면 굳이 찾아 읽어볼 것 같지는 않네요. 차라리 담백하게 중화요리를 좋아하는 소녀가 유명 가게를 여러 가지 채널을 통해 정보를 얻어 구루메 투어를 다닌다는 식, 아니면 그냥 작가와 기자들이 실재 취재를 한 취재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식으로 일상계스럽게 전개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가이드북 이상의 가치를 찾기 어렵습니다. 

2014/04/14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 도현신 : 별점 2점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 4점
도현신 지음/시대의창

전쟁과 관련된 음식들 및 해당 음식과 요리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소개해 주는 식문화사 서적이자 일종의 미시사 서적입니다.

전쟁 때문에 비롯된 음식들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리라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전쟁으로 전파되거나 전쟁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음식과 요리들 소개가 없는건 아닌데, 억지로 끼워 맞춘 음식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예를 들면 바이킹이 뷔페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음식을 조리해 놓고 알아서 덜어 먹는 문화가 과연 바이킹만의 것이었을까요? 예전에는 다 그렇게 먹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심지어 전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요리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청어잡이는 청어가 돈이 되어서 잡았던 겁니다. 전쟁과는 관련이 없어요. 실제로 전쟁과 직접 관련되어 만들어진 음식은 오스만 제국을 물리친 기념으로 제빵사 피터 벤더가 초승달 모양을 본떠 만든 크루아상 정도 뿐입니다.

또한 다른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예를 들면 스팸 이야기는 너무 많이 접해 지겨울 정도지요. "오무라이스 잼잼"에서도 이미 충분히 다루어졌을 정도로요.

그래도 워낙 많은 음식들이 소개되기 때문에 건질 게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소설과 애니메이션 "보물섬"에서 묘사된, 당시 선원들이 럼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 - 물 보관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 - 라던가, 나치 독일에서 콜라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환타"를 만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흥미로왔어요.

처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알라모 전투 이후 몰락해 미국에 망명한 산타 안나가 사진작가 토마스 애덤스에게 치클을 알려준게 껌의 기원이었다, 프렌치 프라이는 프랑스가 아니라 벨기에에서 시작되었다'가 그러합니다. 벨기에 뫼스 계곡 사람들은 원래 작은 물고기를 튀겨 먹었는데, 강물이 얼어버려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자 감자를 길게 썰어 튀겨 먹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이는 세계 최초의 감자튀김이기도 하고요.

또한 탕수육이 청나라 말기에 외국인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은 진위 여부를 떠나 그럴듯했고, 채만식의 "태평천하"에도 언급될 정도로 탕수육이 일제 강점기 때 이미 널리 알려진 음식이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어도, 전체의 가치를 끌어올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정말로 "전쟁"에 얽힌 음식들만 심도 있게 파고들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2014/04/09

백일홍 나무아래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백일홍 나무 아래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총 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후기작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초기작들이라 그런지 생각보다는 트릭 위주의 정통파 추리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이라 괜찮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 직후 일본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낸 점, 긴다이치의 첫 탐정 사무소의 위치 등 세밀한 설정과 묘사도 돋보였고요. 또한 "살인귀"와 "백일홍 나무 아래"는 에도가와 란포의 향취가 느껴지는 변격물적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시대적 분위기와 함께 란포의 여전한 영향력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낡은 점이 분명하고,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헛점도 많습니다. 전체 별점은 2점 입니다. 다른 단편집인 "혼진 살인사건"처럼 작가의 최고작과 비교하면 조금 뒤처집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면 읽어볼 만하지만,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수록작별 상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살인귀"

우리 이웃 중 한 명은 살인귀일지도 모른다는 설정에서 시작합니다. 추리소설가 야시로 류스케가 우연히 만난 미녀와 의족, 의안의 사나이와 얽혀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지요.

장점은 꽤 그럴듯한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피해자인 가가와가 사실은 가해자였다는 반전도 괜찮고요. 복선과 우메코의 자살이라는 의외의 상황도 설득력 있게 제시됩니다. 시대적 배경을 활용한 동기도 마음에 드네요.

그러나 사건 자체가 운과 우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 긴다이치 코스케가 모든 것을 알아낸 뒤 가나코를 방치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점, 야시로와 가나코의 동반자살이라는 불필요한 사족은 아쉬웠기에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야시로 류스케라는 이름에서 사카구치 안고의 "불연속 살인사건'"이 떠올랐습니다.

"흑난초 아가씨"

도벽이 있는 부유한 집 아가씨가 훔친 물건과 전쟁 당시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자살용 청산가리를 지급했던 시사적 소재를 결합한 작품입니다.

두 가지 소재를 결합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과격한 연쇄살인 전개가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핵심 설정에서도 헛점이 많이 보입니다. 특히 범인이 매장 주임 교체를 간과한 점이나, 급작스럽게 살인을 저지른 점은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긴다이치 탐정 사무소가 처음 등장하는 묘사는 좋았으나 전체적으로 간결함이 아쉬웠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향수 동반 자살"

화장품 회사 총수의 의뢰로 카루이자와에서 총수 손자의 동반 자살 사건을 수사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와 도도로키 경부의 이야기입니다.

카루이자와의 풍광을 살짝 보여주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과 도도로키 경부의 등장 등은 팬으로서 반가운 점이었지만, 사건 전개는 순전히 운과 우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죽은 줄 알았던 유리코가 살아났다는 설정은 코미디에 가까웠어요.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백일홍 나무 아래"

옛 전우의 부탁으로 과거의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해결하는 작품입니다.

전우의 증언만으로 진상에 도달하는 점은 안락의자 탐정물 같지만, 범인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핵심 트릭은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습니다. 이 탓에 평작 수준에 머무릅니다. "겐지 모노가타리"를 연상시키는 변격물적 설정과 전쟁 직후 도쿄의 묘사는 볼거리였지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4/04/08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 아서 코난 도일 / 송기철 : 별점 2점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 4점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송기철 옮김/북스피어

코난 도일의 출세작인 표제작을 포함한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입니다. 홈즈 시리즈 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경험에 따르면 지금 읽기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만, 표제작부터 그동안 궁금했던 작품일 뿐더러 마이클 더다의 '코난 도일을 읽는 밤'"에서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소개한 "북극성 호의 선장", "249호 경매 품목"이 함께 실려 있어서 구매하게 되었네요.

그러나 역시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예상대로였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모두 낡아버린 소재와 전개의 이야기들입니다. 재미와 현재의 가치만 따지면 별점은 2점 이상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코난 도일 경을 경애하고 있으며 고전 추리문학 애호가이기도 한 저 같은 사람에게는 소장할 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하며, 출간된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입니다. 앞으로도 북스피어와 임프린트 에스프레소 노벨라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선박 관련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인 "메리 셀레스트호 사건"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작품에서는 "마리설레스트호"라고 등장합니다. 'J. 하버쿡 젭슨'이라는 꽤나 그럴듯한 이력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가 마리설레스트호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죽기 전 진상을 고백한다는 내용이지요.

워낙 유명한 사건을 다룬 작품이긴 하나, 이야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배에 남겨진 모든 것들이 너무나 평온했다는 실제 사건과 달리, 작품 속 진상은 거의 선상 반란에 가까워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코난 도일이라는 작가의 시작점을 엿볼 수 있는 상세한 설정은 인상적이에요. 하버쿡 젠슨이 흑인 노예에게 받은, 사람 귀 모양의 기묘한 돌에 대한 묘사라던가 이 돌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는 설정은 흥미로웠거든요. 사건의 흑막인 혼혈아 고링도 돋보였어요. 첫 등장부터 손가락이 없는 손이라는 묘사로 오싹함을 전하고, 고링이 설파하는 복수와 흑인들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이상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덕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실제로 관계된 사람이 많은 사건을 픽션으로 다룬 것이 가능했던 것은 빅토리아 시대라서였을까요? 지금 시점에 "천안함 제대병이 이야기하는 천안함의 진상!" 같은 제목으로 UFO가 배를 파괴했다는 소설을 쓴다면 아마 잡혀가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가죽 깔대기"

거대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깔대기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기묘한 맛"류의 작품입니다. 브랑빌리에 후작부인을 등장시켜 역사 추리물스러운 분위기를 전해주는 점도 좋았고요.

그러나 역시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습니다. 깔대기 주둥이에 있는 이상한 자국의 정체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고, 강력한 염원이 있으면 그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는 설정도 시대를 고려하면 대단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허황되고 장황했어요. 이렇게 길게 끌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깔대기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전개가 늘어진 점은 아쉬웠습니다.

결론적으로는 평작.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임은 분명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경매품 249호"

동양 사상에 정통한 음침한 친구가 경매품 249호 미이라를 구입한 뒤, 그 친구의 원수에게 기묘한 습격이 일어나고, 같은 건물에 살던 스미스 등이 그의 방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분량은 가장 길지만, 그러한 분량을 갖출 필요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누가 봐도 미이라를 조종하는 음모라는 게 명확한데, 이를 대단한 서스펜스처럼 길게 끌고 가는 순진함이 다소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그나마 긴 분량에 걸맞는, 영국스러운 상세 묘사는 그런대로 볼만했습니다. 보트 대회라든가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 특히 흑막 벨링엄을 찾아가 정중하게 협박하여 미이라를 비롯한 관련 물품을 불태우는 결말은 굉장히 영국적인 결말이었다고 생각되니까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인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북극성호의 선장"

포경선 북극성호가 빙원에 고립된 후 유령과 조우하여 벌어진 기묘한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다른 선원들의 목격담이나 동요도 있지만, 주로 선장에게 일어난 변화를 중심으로 서술됩니다. 지금 읽기에는 일종의 순애보 같은 느낌도 들었고, 고유성 화백의 대표작인 "복제인간"도 연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장의 심리묘사 외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어, 재미나 가치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솔직히 마이클 더다가 왜 그렇게 극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4/04/04

마법사의 딸 1~8 - 나스 유키에 : 별점 2.5점

마법사의 딸 8 - 6점 나스 유키에 지음/대원씨아이(만화)

평범한 여고생 스노츠키 하츠네는 아버지 스노즈키 무잔이 일본 최고의 음양사인 탓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기숙사 무대 러브코미디의 금자탑 "여기는 그린우드"의 작가 나스 유키에의 근작입니다. 분위기 자체는 "백귀야행"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실력 있는 음양사라는 점에서 이이지마 료와 스노즈키 무잔이 겹치고, 영감은 있지만 딱히 대단한 능력은 없으며 음양사가 되는걸 싫어하는 주인공 리쓰와 하츠네의 설정도 비슷합니다. 강력한 식신 아오아라시와 고야타는 완전 판박이고요.

그러나 단순한 아류작으로 평가절하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작가 특유의 코미디 터치에 더해, 중반까지는 무잔과 고야타, 그 이후는 무잔과 하츠네의 친아버지 무죠가 얽힌 과거사를 중심으로 한 긴 호흡의 진지한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잔과 사제 무이, 제자 효우고 등의 등장인물들이 상당히 화려한 영력을 선보이는 점도 차별화되는 점이고요. 완전 천연이지만 음양사 일에 있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잔, 그리고 무잔 사부의 제자인 자동 영 청소기(?) Jr 캐릭터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긴 호흡의 이야기보다는 일상계스러운 단편 에피소드들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4권의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삼신할매 에피소드와 5권의 사라진 며느리와 화분에 얽힌 에피소드를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삼신할매 에피소드에서는 삼신할매에게 쫓기던 애엄마가 공포에 사로잡히지만, 삼신할매가 사실은 자기가 아니라 앞에 있던 딸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걸 자각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 후에도 별로 바뀐 건 없더라...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화분 에피소드는 도난당한 화분에서 서스펜스 호러물로 이어지는 전개와 결말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수년 전 사라져버렸다는 며느리가 사실은 집 앞에 내어놓은 화분들에 나누어져 담겨 있었다는 진상은 정말 최고였어요. 이 정도면 가장 좋은 "백귀야행" 에피소드에 근접하는 수준입니다. 상류와 끊어진 하천의 지박령과 얽힌 에피소드가 왜 끼어들었는지는 조금 의문이었지만요.

단편 옴니버스물로 가져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장편으로 전개하면서 무리수를 둔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하츠네와 효우코의 커플링이라는 결말도 너무 급작스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후속작도 있는 듯한데 부디 일상계스러운 단편 옴니버스물로 전개되기를 바랍니다. 뭐, 효우고와 엮인 시점에서 그렇게 되는 건 불가능하겠습니다만...

2014/04/02

교보문고, 궁극의 리스트전

"교보문고에서 진행하는 50% 할인 이벤트"입니다. 지난주에 마감한 줄 알았는데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한 주 더 연장한다고 하네요. 알라딘 애용자이기는 하지만 이런 기회는 놓치기 힘들기에 저도 몇 권 구입했습니다. 제가 구입한 책은 존 키건의 "1차세계대전사", "2차세계대전사"와 이에인 딕키의 "해전의 모든 것"... 그런데 "세계대전사"는 지금은 판매 완료되었군요.

충동구매이기도 하고, 도착한 책을 보니 기대와 약간 다르기는 했지만 워낙 저렴하게 구입했기에 후회되지는 않습니다. 독서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쯤 들러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책 관련 이야기니 도서 밸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