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1인칭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1인칭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0/07/19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8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고화질]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8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전통의 시리즈 Q.E.D의 두 번째 시즌도 벌써 여덟 권째네요.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독특한 작품들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발표되면 좋겠네요.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해변의 목격자"

Q.E.D 시리즈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토우의 1인칭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무토우가 바라보는 시점으로 그려지고 전개됩니다. 무토우는 거울을 보는 장면 정도에서만 등장할 정도지요.

이러한 1인칭 시점 덕분에 무토우의 목격 정보가 여러가지 조사를 거치면서 '누군가'로 덧칠되어 가는 전개가 빛을 발합니다. 기억이 조작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당사자 기억에 덧칠하는 식으로 묘사했는데,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섬 소년들의 마돈나인 교우코가 비참한 희생자에서 옛 연인에게 살인 누명을 씌워가며 현실을 탈출하려는 악녀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1인칭 전개보다 더 잘 그려낼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트릭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앞서 여러가지 단서와 복선을 잘 활용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빚더미 때문에 궁지에 몰려 범행까지 저지른다는 동기도 설득력 높아서 만족스럽습니다. 이런 류의 범행에서 간과하기 쉬운, '범인역'으로 교우코의 옛 연인 구리바야시를 써먹는다는 점도 돋보였어요.

물론 교우코의 배가 수리 중이라 본토로 갈 수 없었다는 건, 수리하는 상황만 목격되었을 뿐이라 정말로 움직일 수 없었는지 증명되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사체를 숨긴 곳이 집 안에서 자리보전하고 있던 그녀 아버지의 병상 속이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짐작 가능하고요.
즉, 무토우의 조사 이후 구리바야시 범인설이 불거지기는 하지만 결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 (무토우)의 왜곡되어 가는 목격 증언 말고는 누가 봐도 교우코가 범인인 상황인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또 1인칭 전개라는 독특한 방식을 트릭 등에 활용하지 못한 것도 조금은 아쉽네요. 잘만 이용한다면 서술 트릭의 또 다른 형태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었을걸로 보이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추리와 재미 양 쪽에서 성과를 거둔, 좋은 에피소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흰 까마귀"

특별한 범죄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1, 2부 구성인데 1부는 전형적인 일본의 콩가루 집안 이야기 비슷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와누마의 애인도 유산 상속을 받는 4명 중 한명이며, 10억엔에 가까왔던 유산도 투자 실패 탓에 700만엔 밖에 남지 않았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이지요. 변호사와 애인이 만나는 걸 본 나머지 일족은 둘이 한 패로 유산을 빼돌린다고 생각하고요. 1부 마지막까지 변호사와 애인은 악당처럼 보입니다. 나머지 일족은 자신들의 돈을 찾기 위한 절박한 노력에 나서고요.

하지만 2부에서 일족들은 모두 무능한 기생충들이었고, 변호사와 애인이라는 여자가 우리 편(?)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납니다. 이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큰 딸, 그리고 가즈타 모두 자신들의 실수와 무능으로 재산을 탕진했다는게 설명되거든요. 이 과정에서 1부에 등장했던 여러가지 복선들도 잘 사용되고 있어서 만족도가 높아요.

그러나 결국 일족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통장 확인만으로 남은 재산이 700만엔 밖에 안된다고 납득한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0억엔이나 되는 돈을 누가 은행 통장 하나에 그냥 넣어 둘까요? 일본 노인들에게는 보편적인 재산 관리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와누마 할아버지는 페루의 광산에까지 투자할 정도로 많은 투자를 한 인물인데 통장 하나로 이 모든걸 관리한다는건 말도 안되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놀라운 반전으로 끌고나가는 전개 과정의 설득력은 높은데, 통장 만큼은 납득하기 어렵기에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흰 까마귀'는 딱히 이야기하고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이와누마 할아버지가 죽기 직전에 토마와 나눈 말에서 따 온 것입니다. 일족이 재산이 700만엔 밖에 없다는걸 납득하게끔 증명해 달라는 할아버지의 부탁이 굉장히 어렵다는걸 빗댄 표현이지요. "흰 까마귀가 없다는걸 증명하는건, 다른 모든 까마귀가 희지 않다는걸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거든요. 가나가 흰 까마귀를 보고, 토마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나와 같은 세계에 있다! 고 생각하는 결말에서 써먹기는 하는데, 딱히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가나와 토마와의 관계가 한 걸음 더 나아간걸까? 싶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권을 지켜봐야겠네요.

2013/12/25

내 안의 살인마 - 짐 톰슨 / 박산호 : 별점 3점

내 안의 살인마 - 6점
짐 톰슨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텍사스 작은 마을의 신뢰받는 부 보안관 루 포드는 창녀 조이스와 얽힌 뒤,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정신적인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조이스를 그녀를 짝사랑하는 엘머 콘웨이와 엮어 살해했지만 조이스가 큰 상처를 입고도 살아있는 채 발견되자 루는 걷잡을 수 없게 폭주하게 되는데....

심각한 정신적인 문제를 앓고 있지만, 운 좋게 그것을 숨겨온 주인공 루 포드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폭주를 벌이는 이야기를 1인칭으로 그린 범죄 - 심리 서스펜스물입니다.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1952년도에 발표된 고전이기도 합니다. 이 리스트가 없었더라면 아마 읽게 되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여튼 찾아 읽어보게 되었네요.

작품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돌직구'입니다. 죽이고 싶고, 죽여야 하면 바로 죽입니다. 이렇게 시종일관 돌직구 스트라이크가 팍팍 꽂힙니다. 때문에 루 포드 캐릭터 묘사가 가장 중요한데 캐릭터 묘사, 즉 직구의 구위 역시 일품입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굿 가이로 통하지만 실상은 잔인무도한 살인마 주인공이 이렇게 설득력 있게 표현된 작품도 드물지요. 1인칭 시점으로 여러 가지 살인 계획을 세우고 수행하는게 냉정하면서도 하나의 게임처럼 그려지고 있는데, 정말로 오싹할 정도였어요. 그야말로 소시오패스 그 자체인 인물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귀공자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가 살짝 연상되는데, 작품 발표 시기가 테드 번디 사건 20여 년 전이라는걸 보면 그야말로 이 분야의 선구자라 불러도 무방할 겁니다.

이러한 캐릭터를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그리는 묘사도 대단합니다. 하드보일드 작가가 맘먹고 그려낸 "나쁜 놈"이라는 이미지인데, 1인칭 하드보일드 스타일 범죄물은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 등의 작품이 있기는 하나 이 작품의 범인은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달라요. 타당한 동기는 뒷전인 살인마니까요.

아울러 최초 범행에서 받은 뒤 우연찮게 사용한 20불의 존재가 동네의 껄렁한 불량아인 조니에게 이어지고, 교도소 안에서 살해한 조니가 사실 알리바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다른 희생양을 찾아 약혼녀를 살해하고, 협박범을 강도로 위장하여 살해하는 등의 모든 범행이 1인칭으로 그려져서 도서 추리물 같은 느낌을 전해주는 것도 독특했어요. 마지막의 조이스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사실상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말이죠.

그러나 불필요한 잔설정이 많은 것은 좀 아쉽더군요. 초반에 루 포드가 다국어를 하고 심심풀이로 미적분을 푸는 지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이후 그러한 설정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루 포드가 정신적 문제를 가지게 된 계기인 가정부와의 에피소드, 그의 죄를 뒤집어썼던 의붓형 마이크에 대한 이야기도 솔직히 사족이었습니다. 이왕지사 돌직구를 날리려면 그냥 나쁜 놈이다는 식으로 가는 게 더 좋았을 겁니다.

전개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콘웨이는 처음부터 진범을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초반에 보안관 밥에게 무언가 이야기했다는 것이나, 조니 파파스의 아버지 가게를 리모델링하는걸 돕는 식으로요. 그런데 왜 루 포드를 그냥 방치해서 사건을 키우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변호사 빌리 보이 워커가 루 포드를 정신병원에서 꺼낸 것 때문에 불필요한 마지막 사건이 또 일어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이렇게 설정면의 오류나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는 어딘가의 연재물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만듭니다(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문제는 있지만 강력한 소설로, 컨트롤은 별로지만 돌직구 하나로 타자를 제압하는 투수가 연상되는 작품입니다. 지나치게 잔인하고 묵직한, 불쾌감 남는 묘사 탓에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어려우나 명성에 어울리는 가치는 충분하죠. 시대를 뛰어넘어 여러 차례 영화화 된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에 읽고 리뷰를 올리기에는 좀 너무하네요....

2017/10/22

걸 온 더 트레인 - 폴라 호킨스 / 이영아 : 별점 2점

걸 온 더 트레인 - 4점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북폴리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임으로 인한 알콜 중독 탓에 이혼과 퇴사로 인생이 엉망이 된 레이첼에게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듯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정차하는 중간 지점에서 보이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레이첼은 부부 중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가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는데... 

"인어 다크, 다크 우드"와 동일한, 요새 유행하는 1인칭 시점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입니다. 영화화되었다는데, 영화화될 만큼의 재미는 충분히 전해줍니다. 사라진 메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죽였는지?에 대해 계속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전개 덕분입니다. 이 중 메건이 실종된 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의 기억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은 특히나 일품이에요. 레이첼이 메건을 죽인걸까? 아니면 뭔가 중요한 것을 본 걸까? 등 오만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이러한 전개가 모두 3명의 여성 - 레이첼, 메건, 애나 -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도 독특합니다. 사실 다양한 인물들의 1인칭 시점이 교차되는 전개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읽은 이런 류의 전개 방식은 보통 서술 트릭을 위한 장치인 경우가 많았던 반면, 이 작품은 애나가 톰이 거짓말을 정말 잘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 애나가 톰이 숨겨둔 전화기를 찾아내는 장면 등 레이첼 시점에서는 알 수 없는 디테일을 보강해주는 장치로서, 또 톰이 원래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이유에 대해 레이첼에게 한 말과 애나 시점의 심리 묘사가 반대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레이첼은 모르지만 독자에게만 해당 정보를 살짝 알려주는 식으로 사용되는 등 정직하게 전개를 위해서만 사용해서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레이첼이 메건을 엿보며 "제스"라고 혼자 부르다가 갑자기 "메건" 시점으로 넘어올 때의 기묘한 느낌도 나쁘지 않았고요.

아울러 "일상계" 느낌이 가득하다는 독특함 역시 큰 장점입니다. 정말 보통 사람(알콜 중독에 빠져 있고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현 상태만 보면 오히려 그 이하)인 레이첼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좌석의 기차를 타면서 똑같이 정차 하는 곳의 집을 쳐다보다가 사건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게 된다는 설정부터 아주 매력적이지요. 게다가 그녀가 목격한 것은 정말 사소한 사항에 불과했고, 사건의 진실과도 동떨어져 있었다는 진상도 마음에 들고요. 우연히 찍은 사진에 거대 조직의 음모가 담겼다! 이런 것보다 여러모로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러나 괜찮은 범죄 스릴러냐하면, 솔직히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는데도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추리적인 부분부터 보자면, 작 중 레이첼이 벌이는 일종의 탐정 활동은 모두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진상은 등장인물들의 입으로 밝혀질 뿐이에요. 단지 메건 사건 뿐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 마음 속에 있는 한가지 씩의 비밀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비밀들은 모두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메건의 비밀은 비교적 초반, 즉 심리치료사 카말과 면담 때 부터 중요하게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철없을 때 낳았던 딸을 부주의로 잃었다는건데, 이걸 아는 사람은 헤어진 아이 아빠 맥 밖에 없으므로 본 사건과 관계가 있을리 없으며, 심리치료사 카말이 이 것을 안다고 해도 딱히 뭘 할 리가 없지요.
레이첼이 술을 마시는 이유? 불임 때문에 알콜 중독이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톰이 바람을 피워 이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 역시 본 사건과는 무관합니다. 그냥 분량 늘리기에 불과해요. 

톰이 진범임이 드러나는 장면도 황당합니다. 메건 시점으로도 작품이 교차 진행되기 때문에, 결국 메건 시점의 마지막 날 범인은 밝혀지게 됩니다. 때문에 최대한 레이첼, 애나 시점에서 범인을 제대로 드러냈어야 했는데 이 부분에서 정교한 맛이 없어서 설득력이 거의 없습니다. 결정적 단서는 애나가 우연찮게 발견한 톰의 또다른 휴대전화가 전부인데, 사건이 일어난지 오래 되었는데 왜 휴대전화를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래서야 톰이 뜬금없이 둘 앞에서 "내가 범인이야. 놀랐지?"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도 않지요. 이는 "톰은 거짓말을 잘한다"를 드러내는 것 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를 범인으로 연결하는데 실패한 탓이 큽니다. 레이첼이 필름이 끊겼을 때 톰이 이야기 한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고요.
이럴 바에야 레이첼 1인칭 시점으로만 작품을 전개하는게 더 깔끔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메건과 애나 시점의 전개는 실상 본 사건 해결에는 별 도움도 안되는데 장황한 묘사로 페이지를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울러 서스펜스나 스릴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데, 레이첼 시점의 묘사가 너무 많은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고, 이혼에 대해 자책하고 항상 알콜 중독을 의식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도피처를 찾는 묘사들로 솔직히 짜증 났어요. 무능력한데다가 입만 열면 거짓말에, 오지랖은 넓어서 쓰잘데 없는 사건에 뛰어들어 일만 복잡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 그 자체니까요. 경찰 라일리가 그녀를 못견뎌하는게 충분히 이해될 정도였습니다. 제대로 된 증인 역할도 불가능한 인물이 탐정역을 한다? 어불성설도 유분수여야지요.
레이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 모두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에요. 메건? 남편 덕에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당당하게 바람을 피면서 사람 가지고 노는게 취미인 유부녀로, 솔직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더해요. 카말은 자신의 환자와 바람을 피는 부도덕한 심리치료사, 스콧은 의처증 가득한 정신병자, 톰은 거짓말을 일삼는 살인자라는 점에서요. 등장인물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 애나, 그리고 "좋은 사람"은 레이첼의 친구 캐리가 유일할 정도로 작품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습니다(아, 캐리는 거의 마더 테레사 수준입니다).

또 최근 접했던 이런 류의 여성 1인칭 시점의 스릴러물의 대부분이 "아이"와 "임신"이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도가 지나칩니다. 레이첼이 알콜 중독이 된 이유는 그녀의 불임이고, 톰과 애나의 불륜과 재혼은 애나의 임신 때문이고, 메건의 불면증의 원인은 그녀가 출산한 아이가 죽은 탓이고, 메건이 살해당한 이유는 톰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고.... 모든 사건이 임신과 출산에 관련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는 그럭저럭인데, 최근 유행(?)에 편승한 작품으로 딱히 완성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특히 추리나 서스펜스 측면에서 말이죠.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걸"은 등장하지도 않는데 왜 제목이 "걸 온 더 트레인" 일까요? 이 역시 미스테리입니다...

2013/12/24

1의 비극 - 노리즈키 린타로 / 이기웅 : 별점 2.5점

1의 비극 - 6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포레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마쿠라 시로는 아들 다카시가 유괴당했다는 전화에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유괴된건 다카시가 아니라 다카시의 친구 시게루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시게루는 아내 가즈미가 유산으로 힘든 시기에, 야마쿠라가 간호사 미치코와 불륜을 저질러 낳은 그의 친아들이었다. 야마쿠라는 범인이 지시하는대로 몸값을 전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나 실패했고, 결국 시게루는 시체로 발견되는데...

신본격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의 장편. 이른바 "비극 3부작" 중 두번째 작품이라는데 모르고 두 번째부터 읽게 되었네요. 읽는데 별 상관은 없었습니다.

뒤바뀐 아이의 유괴, 그리고 이어진 죽음에 얽힌 진상을 파헤친다는 내용으로, 작 중에서도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로 언급되는 "킹의 몸값"(영화는 "천국과 지옥")의 아이디어를 따 왔습니다. 요새 이 아이디어를 사용한 작품들을 많이 읽있네요. 쓰여진 시기는 전부 다르지만요. 당연히 표절은 아니고 "저물어 가는 여름"처럼 나름대로 변형하였습니다. 원전은 "실수로 유괴된 아이의 몸값을 내가 내야 하는지?"라는 딜레마가, 여기서는 "실수로 유괴된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 아이가 처음부터 목적이었다"가 핵심입니다.

실수나 아무 관련없는 인물인 줄 알았던 피해자가 진짜 타겟이었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야마쿠라 시로의 1인칭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독자가 감정이입하여 쉽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글솜씨가 탁월합니다. 야마쿠라가 과거의 불륜과 현실이라는 양쪽 덫에 모두 걸리고, 그걸 빠져나가려 발버둥치는 묘사도 디테일해서 더욱 몰입하게 만들고요.

시체를 움직이는 일종의 순간 이동 트릭처럼 신본격 기수의 작품다운 점도 눈에 띕니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며, 적절하게 사용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그러나 작품의 수준은 미묘합니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꼬아놓으려는 의도가 지나친 탓이 큽니다. 시게루의 친부가 야마쿠라, 다카시의 친부는 미우라라는 복잡한 관계부터 비현실적이며, 이 관계에서 촉발된 살의가 동기라는 것도 와닿지 않습니다.

게다가 미우라가 밀실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그 이유가 다이잉 메시지 때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설정은 당황스럽습니다. 누가 봐도 본인이 치명상을 입은 뒤 문을 잠궈서 발생한 밀실인데, 문을 잠근 것이 빗장이라는 말을 이용해서 다이잉 메시지를 남겼다는 건 억지스러워요. 범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문을 잠그는 건 당연하잖아요? 또 담배 한대 입에 물 시간은 있었으면서, 피로 범인 이름을 쓸 생각도 안했다는 것도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건 솔직히 제목과 연관시키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에 불과합니다. 미우라도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명탐정과 고위급 경찰을 이용한다는 터무니 없는 발상을 한 놈이니 죽어도 쌉니다만...

우연에 의한 전개가 지나칠 정도로 많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본격물을 표방한 작품에서 이런걸 문제로 삼기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정도가 너무 과했습니다. 야마쿠라가 조금만 참았어도 미우라의 알리바이는 노리즈키에 의해 무산되어 경찰 수사가 바로 시작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사건이 미궁에 빠지고 말고 할 것도 없었을테니까요. 사실 가즈미가 미우라를 살해한 것 역시 예고된 종말을 약간 늦추는 것에 불과한 무의미한 행동이고요. 어차피 미우라 단독 범행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용의자가 제거되는 전개도 아쉬웠습니다. 원래부터 가능성있는 인물군이 적은데, 미우라 → 미치코 → 도미사와 순으로 용의선상에서 사라져버리니 결국 장인 아니면 가즈미밖에는 용의자가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무리라면 사실 탐정도 필요없어요.

개인적으로는 미치코의 다카시 유괴 소동에서 밝혀지는 도미사와 진범설에서 끝내는 게 훨씬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꽤 충격적인 결말이기도 했고 적절하게 마무리하기에도 괜찮은 결말이었으니까요. 위에 이야기한 어설픈 동기와 결합된 출구없는 새드&배드 엔딩은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야마쿠라 1인칭으로만 전개되는 탓에 노리즈키라는 인물의 역할이 작다는 것도 팬으로서 불만스러웠습니다. 야마쿠라 1인칭이 이야기의 박진감을 높이는데에는 큰 도움을 주었겠지만 이래서야 노리즈키 시리즈인지, 그냥 별개의 스탠드얼론 작품인지도 잘 모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최근 읽은 유사한 설정의 유괴물 중에서도 가장 처집니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이게 본격물이야!"라는 집착이 너무 강한 탓이지요. 좋은 재료를 쓸데없는 양념으로 망쳐버린 요리 느낌도 듭니다. 재료도 좋고 요리 솜씨도 나쁘지 않아 분명 먹을만은 한데, 영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2007/01/13

핑거스미스 (Finger Smith) - 세라 워터스 / 최용준 : 별점 2점

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장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입스씨와 석스비 부인에 의해 양육된 사영수의 딸 수전 트린더는 입스씨와 친분이 있는 건달 "젠틀먼" 리버스의 계획, 즉 부유하지만 삼촌에게 얽매여 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처녀를 꼬셔 결혼한 뒤 유산을 가로챈다는 계획에 협조하기 위해 모드라는 처녀의 하녀로 임시 고용되어 "브라이어"라는 저택으로 향한다.
음란서생 삼촌에게 기계처럼 양육되며 고독한 생활을 보내던 모드와 친분을 쌓으며 연민의 정을 키워나가던 수전은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까지 들 정도로 깊이 빠지지만 3천파운드라는 거금 때문에 모드와 결혼한 뒤 그녀를 정신병원에 집어 넣는다는 리버스의 계획에 협력하여 그녀가 리버스와 결혼하는 것을 돕게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레즈비언 소설"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2005년판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의 해외판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추리계에서 유명한 작품이죠.

읽고나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정말로 두꺼운 책이라는 것. 즉 대 장편이라는 것이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판형은 작지만 페이지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거든요. 이렇게 긴 이유는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과 브라이어, 정신병원 등의 배경은 물론 등장인물들의 옷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묘사한 것에 더하여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엄청나게 장황한 탓이 큽니다. 여성 작가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심리묘사가 책의 반을 차지한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하더군요. 디테일이 지나쳐서 나오는 인물들이 다 미친것 처럼 보일 정도니까요. 뭐 실제로 미친 애들도 있고.
읽기가 쉽지는 않은 분량이라 3개로 나누어진 - 수전 트리더, 즉 수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지는 1부, 그리고 모드의 시점으로 쓰여지는 2부, 다시 수의 1인칭으로 돌아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3부 - 이야기를 각각 3권의 책으로 분책하여 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무겁고 길기에 들고 다니면서 읽은 제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네요.

그러나 길이에 비한다면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재미는 물론이고 빅토리아 시대의 하층 계급들과 음란서생(?)등 성적인 요소를 등장시키면서도 싸구려스럽지 않고 나름의 품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시기에 대해 방대한 묘사를 통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에 못 미칠 정도로 추리물의 궤도에서는 꽤 많이 빗나가 있다는 것이 좀 아쉽더군요. 물론 뻔한 사기극으로 전개되다가 충격적으로 터지는 1부 마지막의 반전은 정말 효과적이었고, 2부에서 밝혀지는 1부와의 연관성도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이기는 해요. 그러나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핑거포스트와는 달리 별다른 단서도, 복선도 없고 "고백"에 의존하는 전개이기 때문이며 진상 그 자체도 그리 복잡하거나 뒤틀린 구조는 아니었거든요. 또한 진상 자체가 워낙 고전적 설정이기에 1부 이후에는 크게 충격적이지도 않았고요.
그나마 1부와 2부는 나름 추리물의 구조를 지니지만 3부는 소설의 마무리를 위해서만 존재하기에 전혀 추리물스럽지 않습니다. 아울러 나름 해피엔딩을 좋아하긴 하나 이 작품의 대단원은 별로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됩니다.

결론내리자면 꽤 재미있고 가치도 있지만 제 취향은 절대 아닌 작품이었어요. 레즈비언 코드는 제껴놓더라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은 추리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나름의 가치는 충분하나 자료 조사 목적이 아니라면 두번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토대로 제작했다는 TV 시리즈는 꽤 관심이 가는군요. 영상으로라면 무척 화려하리라 생각됩니다. 

2009/11/01

고백 - 미나토 가나에 / 김선영 : 별점 3점

고백 - 6점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비채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에서 사고로 딸을 잃은 교사가 봄방학을 맞아 마지막 조회에서 학생들 앞에서 충격적 사실을 밝히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반에 있습니다"....

*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읽으실 분들은 미리 염두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출간소식을 알았을때에는 그닥 구입생각이 없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많은 호평을 접해서 구입하게 된 책입니다. 워낙 많은 상을 탔기 때문에 혹한것도 있죠.

그런데 제게는 그냥 평균작 수준이었어요. 대단한 작품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기에는 좀 부족했거든요.
물론 1인칭 시점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성직자"라는 단편은 대단했고, 이 첫번째 단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등장인물을 바꾸어가며 극단적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형식도 독특해서 - 두번째 단편 "순교자"는 서간문 형태, 세번째 단편 "자애자"는 일기, 네번째 단편 "구도자"는 1인칭 추억담, 다섯번째 단편 "신봉자"는 유서, 마지막 단편 "전도자"는 전화통화라는 형태 - 이러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작가의 고민과 노력이 눈에 선할 정도에요. 또 그만큼 충분한 재미는 가져다 주고 말이죠.

그러나 기본 설정과 캐릭터가 너무 현실적이지 못해서 끝까지 몰입하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특히나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비현실적인것은 큰 문제로 생각됩니다. 주인공의 한명인 슈야가 대표적이죠. 유년기의 애정결핍으로 삐뚤어진 양심을 지니게 된 천재라는 설정도 뻔하지만 묘사된 캐릭터가 너무 극단적이라 감정이입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작품 후기 등에서 소개되기를 등장인물 이력서가 있고 그 이력서에 기반하여 작품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 것처럼 홍보되고 있는데 사실 슈야 캐릭터는 그동안 만화에서 흔히 보아왔던 인물 설정이기도 하죠. 읽자마자 저는 "암즈"의 건방진 천재 쌍둥이 알과 제프가 연상되었거든요. 그나마 요새는 만화에서도 쓰이지 않는 케케묵은 설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요. 슈야에 비하면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작중에 등장하는 AIDS에 걸린 세상을 바꾸는 철부지 선생이나 다양한 약품을 손에 넣는 중학교 여반장같은 캐릭터는 그나마 약과겠죠...

게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건물을 날려버릴만한 폭탄을 현실세계의 중학생이 제조한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모리구치 유코가 그 폭탄을 옮겨 놓는다는 것은 황당의 극치더군요. 결국 모리구치 유코 역시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 수준으로 자기합리화에만 골몰하는 뻔뻔한 인물이라는 것을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모리구치 유코의 경우 하나뿐인 혈육이 죽었으므로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긴 하지만 이렇듯 이후의 전개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당위성이 서서히 희박해져 가는것이 뒤로 갈 수록 너무 막가는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거야 캐릭터들의 설정이 설득력이 없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단죄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천사의 나이프"처럼 법적인 저촉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첫 단편 이외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복수극으로 보기도 힘들며 추리물로 보기에도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분명히 재미있고 독특한 작품이긴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현실성이 떨어지는 등 단점이 확연하기에 그냥 첫번째 단편으로 끝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9/12

괴담의 테이프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3점

괴담의 테이프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미쓰다 신조)는 편집자 도키토 미나미로부터 녹음된 괴이담을 기초로 한 단편을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녹음한 카세트나 MD는 많아도 대부분 써먹기 힘든 탓에 거절했지만, 도키토 미나미는 자기가 듣고 소재를 찾아보겠다며 카세트와 MD를 빌려갔다. 이렇게 해서 완성한 작품이 "빈 집을 지키던 밤"이었다. 

도키토는 후속 작품도 정기적으로 써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연작 단편 구성을 취하기 위해 실제 괴담을 겪은 사람들의 체험담을 듣고 쓴 글이라는 머릿말을 추가했다. 그런데 도키토는 녹취를 시작한 이후, 기묘한 걸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침마다 마시던 홍차 속 기묘한 반원형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나날이 바뀌어 결국 작은 사람의 모습이 되었고, 도키토는 이후 홍차 마시기를 그만두었다. 이외에도 샤워할 때 빗소리가 들리는 등의 괴이 현상이 그녀 옆에서 계속 일어나자 나는 그녀에게 녹취를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다.

작품 연재를 마무리한 나는, 도토키 미나미로 부터 회수한 MD와 카세트 중에서 예전에 듣다가 무서워진 나머지 꽁꽁 봉해놓고 처분했던 기류 마사히코의 카세트를 다시 발견했다. 충동적으로 카세트를 듣다가 그 목소리가 물 속에서 들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모든 괴기 현상이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닫는데...

실제 사연들을 소설화 했다는 설정의 생활 괴담 단편들이 미쓰다 신조가 괴담 단편을 창작하는 과정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모두가 '물'과 관련되어 있다는게 특징입니다. 또 저자의 '작가 시리즈'와 유사하게, 실제 있었던 이야기처럼 쓰여진 덕분에 실제감, 현실감이 아주 높습니다. 어떤 작품은 논픽션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니 말 다했지요. 이야기 한 편, 한 편의 완성도도 빼어나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쓰다 신조 장편이 두께 때문에 손대기 어려우셨던 분들이라면, 이 책으로 발을 들여놓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 

나 (미쓰다 신조)는 자살 명소에 대한 글을 의뢰하기 위해 프리랜서 작가 기류 요시히코를 만났다. "호러 재피니스크 총서" 기획 때문이었다. 기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테이프를 여러개 가지고 있다며, 그 테이프 녹취를 출간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3개월 뒤, 기류는 3개의 테이프를 듣고 기록한 샘플 원고를 보내 오는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생생함입니다. 특히 진짜 자살자가 죽기 직전 남긴 듯한, 생생한 테이프 녹취가 아주 일품이에요. 그 처절한 죽음의 순간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섬찟합니다. 생생함은 미쓰다 신조 1인칭으로 쓰여지고, 미쓰다 신조의 과거 펀집자 경험을 작품 속에 녹여낸 덕분이기도 합니다. "붉은 눈"에 수록되었던 1인칭 괴담과 같은 계열이지요.

또 3개의 괴담 테이프 녹취 중 앞의 2개는 호텔에서 목을 매거나, 자동차로 절벽을 향하는 등 일반적인 자살에 대한 단순한 녹취이지만, 마지막 녹취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드러냅니다. 그리고 기류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녹음한 테이프를 미쓰다 신조에게 보내고, 미쓰다 신조가 기류의 테이프를 잠시 틀어보고는 바로 봉인해 버리는 결말이지요.
무엇 하나 드러나지 않은 듯 하지만 기류는 죽었고, 기류가 녹음한 테이프는 누군가 회수해서 미쓰다 신조에게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테이프를 받은 사람이 듣기를 원했을테고요. 즉, "링"과 같은 일종의 저주, 죽음의 연쇄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소설로서의 얼개는 갖춰진 셈이지요. (*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지막 이야기에서 어느정도는 비슷하게 마무리 됩니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입니다. 르포르타쥬 형식의 작가 1인칭으로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는 생생함도 대단했고요. 무서워야 한다는 괴담의 조건도 아주 잘 충족하고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빈집을 지키던 밤"

마이코는 대학 문예부 선배 오다기리로부터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다. 젊은 부부가 백모와 함께 살고 있는 시골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었다. 부부가 집을 비운 동안 백모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아르바이트 내용이 소개되는 시작부터 흥미를 잡아 끕니다. 여대생이 선뜻 수락하기에는 너무 수상한 아르바이트잖아요? 역에서 저택까지 거리도 멀고, 인기척도 없는 곳에 홀로 찾아가 하룻밤을 보낸다니, 이래서야 바로 납치되어 이상한 비디오 주인공이 되는 전개도 어색하지 않죠. 당연히 이야기도 그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마이코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지만, 겨우 탈출한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러나 뻔한 설정과 전개임에도 여러가지 복선과 디테일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택에 대한 묘사부터 그러합니다.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아치 장식 등을 통해 위화감과 뒤틀림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거든요. 하여튼, 미쓰다 신조의 무서운 집 묘사는 정말이지 최고에요.
또 저택에서 느낀 위화감과 뒤틀림을 젊은 부부에게서도 느끼게 된다는 연계도 좋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부가 서로 다른 말을 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백모님을 숭배하고 있으며, 백모님은 낯선 사람을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집을 지킬 때 백모님이 계신 3층에는 올라가지 말아달라고 당부합니다. 하지만 부인은 백모님은 이미 죽었으며 남편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요. 아, 정말 섬찟합니다.

단순한 체험 괴담이 아니라 한 편의 완성된 소설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3층에 있던건 백모님이 아니라 젊은 남편 미쓰노부였으며, 그가 이전 아르바이트 생들을 살해했다는 명확한 결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결말에 앞서 마이코는 팔 다리가 길었고, 저택 근처에서 양팔만 잘라 가슴께에 평행하게 올려놓은 기묘한 토막 살인 사체가 발견되었었고, 부부가 저택 안을 오갈 때에 복도 한 가운데로는 지나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등의 복선과 단서를 통해 이유를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앞서 위화감을 느꼈던 아치는 '도리이'이며, 도리이 아래 길은 신이 지나가는 길이다, 이 길은 백모의 방과 통해 있다, 사체의 토막은 도리이를 나타내고, 그래서 긴 다리를 지닌 피해자가 필요했다... 는 내용으로 마무리 되니까요.

젊은 부부의 광기, 백모님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 설명이 부족하고 마지막 미쓰노부가 살인마라는 반전은 뻔하지만 정교하면서도 하나의 완성된 호러, 공포 소설로 나무랄데 없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우연히 모인 네 사람"

오쿠아먀 가쓰야는 가쿠 마사노부의 하이킹 계획에 동참했는데 정작 가쿠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쿠야마가 리더가 되어 하이킹을 이끌어 달라는 휴대전화의 부재 중 메시지 탓에 가쓰야는 모르는 세 사람과 하이킹을 떠나는데...

네가히산이 실존하는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를 보는 듯한 상세한 묘사도 좋고, 가쿠씨가 오지 못한 이유로 불안이 쌓여가는 전개도 멋집니다. 가쿠씨가 보낸 메시지 등 불안을 가중시키는 요소들이 서서히 하나씩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하이킹을 일렬로 가야 하는 상황도 불안하고요. 그러다가 숨겨진 길로 발을 들이는건 그야말로 화룡정점입니다. 알 수 없이 무서운 공간에 대한 묘사도 좋지만, 길에 남아있는 발자국 오른쪽보다 왼 쪽이 더 먼저 찍힌것으로 보인다는 묘사가 아주 기가 막혔어요. 방 구석에 있는 사람을 차례로 터치하는 게임처럼, 가쿠가 오지 못한다고 했지만 특급 열차에 네 명이 탈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한 의심을 품는 장면도 오싹합니다. 가쿠가 오지 못한다는건 미리 알지 못했다면, 표가 모자랐을테니까요!

하지만 괴이한 존재였던 이마이 쇼조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쿠는 어떻게 되었는지, 산에서 주은 계란돌은 무엇인지 등 수수께끼만 남긴채 이야기는 마무리되기에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들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완결된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생생한 묘사만큼은 발군이었습니다.

"시체와 잠들지 마라"

'나'에게 중학교 동창 K가 자기 어머니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는 기묘한 노인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원해있던 요양병동에서는 밤마다 희미한 비명 소리나 남자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 이어 입원한 노인 로쿠바 히로는 K의 뒤에서 중얼중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거의 정신을 잃은 노인이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이야기를 모아 놓았더니 무서운 이야기였더라....는 아이디어가 정말 좋습니다. 로쿠바 히로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전개는 그야말로 엄청나고요.

로쿠바 히로 노인의 이야기를 설명드리자면,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이 상을 당했는데, 다른 가족들이 다치거나 상황이 어려워 부의금을 가지고 상가에 혼자 방문하게 된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소년은 출발 전 할머니와 함께 한 곳쿠리님에서 '시체와 함께 자지 마라'는 계시를 받죠. 그러나 기차에서 소년은 이상한 노인을 만나서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집에서 잠을 깨고, 누군지도 모르는 친척의 부고를 받는다... 는 루프물입니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운 요소는 없어요. '나'를 통해서 노인의 괴이한 행동은 노인이 젊은 아이의 몸을 빼앗는 과정이라 설명되는데 이 역시도 뻔한 설정입니다. 또 이야기만 놓고 보면 K에게 시카바네 히로(로쿠바 히로)가 뒤집어 씌여야 하는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쿠바 히로가 한 말 중 '휴대'와 '뉴루우스'라는 말 뜻을 몰라 궁금해 하는 장면이 있어서 충격적인 진상과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용도 전혀 없어서 실망스러웠고요.

흥미로운 설정이었고, 전개도 대단했지만 결과물은 그냥저냥한 평작이라 아쉽습니다.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내었더라면 분명 걸작이 될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별점은 2점입니다.

"기우메 노란 우비의 여자"

잡지의 편집자인 '나'는 점성술사 취재를 하다가, 그들은 '자신의 죽을 날'이 언제냐는 질문에 절대로 답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답을 알려준 적이 있다는 점성술사에게 '나'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단 사토루와 '기우메' 이야기로 답해 주었다.

기우메는 사토루 자취방에서 학교 통학로에서 목격된, 비가 오지 않는데 우산과 레인코트, 장화, 우천용 모자를 노란색으로 전부 갖춰입은 여자였다. 사토루는 어느 날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선배의 조언으로 기우메를 무시했다. 그리고 여름 방학, 점성술사는 사토루와 헤어져 아르바이트로 나날을 보내며 편지로 근황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사토루의 마지막 편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날, 기우메가 수로에 휩쓸려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사토루의 자취방을 찾아간 점성술사는 빈 방에서 쓰다만 편지를 읽었다. 사토루가 기우메의 시체를 발견하기까지 했지만, 계속 기우메를 통학로에서 목격했는데 그녀가 볼 때마다 점점 자취방으로 다가왔으며 마지막에는 폭우와 함께 문을 두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사토루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초반에 비중있게 설명되는 '나'가 과거 고교 시절 겪었던 기묘한 유령 체험은 본 편인 기우메 이야기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점성술사의 기우메 이야기도 그녀가 왜 죽을 날을 손님에게 이야기해 주었는지와 크게 관련이 없고요. 괜히 이야기만 두서없이 전개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기우메 이야기는 충분히 무섭기는 했습니다. 괴이한 무언가를 눈치챈 후 '그것'이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온다는걸 알게되는 이야기는 몇 편 읽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말이지요.

실화 괴담이라는 주제에 충실한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

도쿄에서 직장에 다니며 혼자 사는 유나는 어느날 집을 나서다가 문 앞에 꽃이 꽂혀 있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져 있는걸 발견했다. 그 뒤 유나는 출근길에서 검은 이상한 형체를 보기 시작했다. 검은 형체는 출근길을 거슬러 점점 유나의 집으로 다가왔고, 유나는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검은 형체를 불러오는 매개체가 되었던게 아닌가 싶어 공포에 떨었다.

드디어 어느 월요일 아침, 유나의 집 앞에 검은 형체가 도착해 인터폰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나가 도움을 요청한 친구 히나타가 도착하자 이상한 형체는 사라졌지만, 이후 히나타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 기우메와 비슷하게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대한 괴담입니다. 마지막 유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 히나타에게 무언가 씌워진다는 결말은 상당히 오싹합니다. 이전 작품과 유사하기는 한데, 정확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애매한 공포라서 실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차별화 요소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왜 유나의 집 앞에 그것이 다가오는지, 대체 그건 무엇인지 등이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기는 합니다. 유나의 집 앞에 놓였던 꽃이 건널목 근처 사고 현장에 놓여진 공양물이었고, 어린 아이가 장난으로 이를 가져다 유나의 집 앞에 놓았기 때문에 원령이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식의 추리가 살짝 등장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작은 유리병과 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유나의 집 앞에 놓여 있는지도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기승전결은 있고, 오싹한 맛도 괜찮았습니다.

2023/05/04

프리즌 트릭 - 엔도 다케후미 / 김소영 : 별점 1.5점

프리즌 트릭 - 4점
엔도 다케후미 지음, 김소영 옮김/살림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치하라 교도소에서 수형자 미야자키가 사라지고, 창고에서 약품으로 얼굴과 손가락이 훼손된 시체가 발견되었다. 사건 초기에는 미야자키가 수형자 이시즈카를 살해하고 도주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벽에 붙은 메모 등의 단서 탓이었다. 그러나 다케다 관리관을 비롯한 여러 경찰의 끈질긴 수사를 통해 피해자가 미야자키였고, 도주한 이시즈카는 다른 누군가가 신원을 도용한 가짜였다는게 밝혀졌다.
그 뒤 교도관 노다, 아즈미노 시장이 차례로 살해되고 나서야 가짜 이시즈카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는 미야자키가 음주운전으로 죽게 했던 료코의 남편 무라카미 고스케였다. 무라카미는 독자적인 수사를 이어가던 보험회사 직원 시게노가 경찰의 실수로 총상을 입은 사건 뒤, 수기를 보내 사건의 진상을 공개했다. 그는 복수를 위해 미야자키를 죽였고, 여기에는 친구 도다 가즈요시의 도움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2009년 제55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으로, 가장 큰 특징은 현대의 교도소라는 폐쇄 공간에서 일어난 불가능 범죄를 그려냈다는 겁니다. '수형자 (죄수) 중 한 명이 살해당한채 발견되고, 한 명이 사라졌다. 사라진 수형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사라진 수형자가 빠져나간 통로는 있는데, 살해된 수형자가 범행 현장까지 오는 통로는 막혀있었다'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상황에 비한다면, 트릭은 그닥입니다.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트릭의 핵심은 '바꿔치기'입니다. 도다 가즈요시가 교도소에 잠입한 후 무라카미와 미야자키에게 창고에서 잡무를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고위 교도관으로 변장해서요. 그리고 둘은 창고에서 미야자키를 살해했습니다. 일단 시체를 숨긴 뒤, 도다는 미야자키로 변장해서 점검에 임했습니다. 미야자키가 방을 옮기는 '전방일' 이라서 다른 수형자들은 미야자키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걸 몰랐기에 저녁 점검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요. 그 뒤 도다와 무라카미는 각자 자력으로 탈옥했습니다. 이 때 무라카미가 미야자키가 탈옥할 때 빠져나왔을만한 통로를 뚫어 놓았어야 했는데, 그걸 깜빡해서 앞서의 불가능 범죄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외부에서의 침입과 탈옥이 쉬운 공간이라는게 핵심입니다. 곧 있으면 풀려날 경범죄자들이 많아서 그렇다는 설정이죠. 하지만 이는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누가 교도소를 이런 장소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교도소'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깨는, 독특한 장소가 무대였기에 가능했던 트릭이라 좋은 점수는 못 주겠습니다.
범행이 범인 무라카미 1인칭으로 묘사된 것도 공정하지 못합니다. 무라카미는 미야자키를 교도관으로 변장한 도다와 함께 살해했습니다. 도다가 미야자키와 변장했고요. 그런데 그런 설명없이 무라카미 1인칭으로 미야자키와 함께 작업을 끝내고 나온 것으로 묘사한건 반칙입니다.
추리를 위한 단서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피해자가 방을 이동하는 전방일을 범행의 D-Day로 잡았다는건 꽤 비중있게 설명되고, 1인칭으로 미야자키와 작업 후 토할것 같았다는 묘사 -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 - 는 있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아울러 검시에 따른 사망 추정 시간 폭이 넓었던 것도 불가능 범죄로 보이는데 일조했는데 (명확하게 저녁 점검 전 살해당한게 드러났더라면 트릭은 더 빨리 간파되었을테니), 바로 발견된 사체의 검시 결과가 이렇게 편차가 심할 수 있을까요? 별다른 외부 요인 (예를 들어 불에 태운다던가)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과학 수사를 너무 얕본게 아닌가 싶습니다.

범행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합니다. 교도소에서 범행을 저지른 이유부터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요. 작 중에서도 '미야자키가 몇 년 씩이나 교도소에서 썩는 것도 아닌데 굳이 교도소에서 죽일 이유는 없다'고 언급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상황인데, 이유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무라카미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을 완전범죄롤 노릴 수도 없었습니다. 피해자 미야자키는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죽이고 수감된 수형자였으니, 상식적으로 피해자의 친인척, 지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잖아요? 도주한 수형자 - 가짜 이시즈카 - 가 범인일텐데, 그 수형자는 누군가가 신분을 도용한 가짜였으니 수형자 얼굴을 미야자키가 일으켰던 사고 피해자 주변인물과 대조해보면 됩니다. 수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던 무라카미가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트릭을 사용할 이유도 많이 부족해집니다. 저녁 점검을 넘긴 뒤 밤에 몰래 탈옥하기 위한 목적 정도? 그런데 묘사된걸 보면 탈옥은 너무나 쉽습니다. 이럴바에야 밤에 몰래 미야자키를 죽이고 달아나는 것과 다를게 없어요. 구태여 도다가 참여할 이유도 없고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목적? 도망친 수형자가 범인인게 뻔한데 알리바이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마찬가지 이유로 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면서 범행을 기다린 필요도 없었습니다. 백주대낮에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별로 다르지도 않으니까요.

아내의 복수를 위해 범행을 결심한 무라카미의 조력자 도다가 아내를 죽인 범인이었다는 마지막 반전도 뜬금없습니다. 완벽한걸 부수는데 쾌감을 느끼는 정신병자라서, 완벽한 결혼 생활을 하는 친구 무라카미의 아내를 죽였다는 설정은 뭐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도다는 왜 무라카미의 범행 - 복수 - 을 도왔을까요? 범인이 자기라는걸 모르는건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무라카미를 그대로 놔 두면 이 사실이 어떻게든 폭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라카미를 죽이는게 가장 깔끔한 해결책입니다. 이런 복잡한 범행을 저질러가며 본인 스스로도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이유는 없어요. 범행에 사용했던 독물 브론 화합물로 무라카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하는건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도 쉬웠을겁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트릭이 사용되었으니 나름 점수를 줄 수는 있어요. 더 큰 문제는 전개입니다. 일단, 시점 변화와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은데 이를 잘 정리하지 못하고 이야기에 녹여내지도 못합니다. 대부분 쓸데없는 에피소드로 느껴집니다. 전직 기자였던 도이 화재 직원 시게노 다카유키가 신문기자 아사이 유리를 만난 뒤 미야자키 사건을 개인적으로 조사한다던가, 시게노가 과거 기자시절 다카하시 의원의 비리를 폭로해서 다카하시 의원의 큰 딸이 자살했다던가, 다케다 관리관의 아이가 PTSD를 앓고 있다던가 등등은 모두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화룡점정은 음주운전으로 아이들을 죽게 만들었던 수형자 나카지마 이야기입니다. 정말 아무런! 쓸모도! 관계도! 없었던 이야기거든요. 음주운전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잔뜩 집어넣어 사회파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게 만들 의도였던 것 같은데 너무 과했습니다. 없으니만 못했어요.
시게노가 다카하시 의원 비리를 폭로하게 되었던 계기였던 아즈미 토마토 팜 취재는 무라카미 료코 사건과 관계가 없지는 않지만, 이게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는건 전혀 없습니다. 시게노가 사건과 얽힌것도 우연이고요. 게다가 시게노가 시장 살인 사건의 누명을 뒤집어 쓴 뒤, 홀로 조사하다가 경찰의 총에 맞는다는건 너무 억지라서 황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작가도 수습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란포상 수상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졸작입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12/08/16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하)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 하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어쩌다 보니 두 번째 권부터 읽게 된 스티븐 킹의 단편집. 이전의 "스켈레톤 크루"가 80년대 작품 중심이라면, 이 책은 90년대 이후의 비교적 최신작이 실려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L.T.의 애완동물 이론
  • 로드 바이러스, 북쪽으로 가다
  • 고담 카페에서의 점심식사
  • 데자뷰
  • 1408
  • 총알 차 타기
  • 행운의 동전

"1408" 이외의 모든 작품들이 1인칭의 강한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독특합니다. 또한 "스켈레톤 크루"와 같은 예전 작품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이 그려진 뒤, 그 상황이 어떻게든 종료되었던 반면, 여기서는 알 수 없는 상황 그 자체만이 중요한 것으로 묘사된다는 차이가 큽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 상황에 대한 혼란스럽고 복잡한, 강한 1인칭 심리묘사를 통해서 말이죠.

마지막으로, 호러 소설인 줄 알고 읽었는데 교훈적인 주제를 갖고 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었습니다. - 결혼 생활의 중요성 ("L.T의 애완동물 이론", "데자뷰"), 어른들이 하는 말은 잘 들어야 한다 ("1408"), 어머니 계실 때 잘해라 ("총알 차 타기"), 담배를 끊어라 ("고담 카페에서의 점심식사", "총알 차 타기") 등인데, 우화 같은 느낌을 전해주기도 하더군요.

결론적으로 묘사가 강화되고 주제의식은 깊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호러"라는 측면에서는 예전 80년대 작품들에 미치지 못했어요. 물론 작품성이야 더 좋아졌을 수도 있고, 완성도도 나쁘지는 않으나 막 달려주던 젊은 시절 그의 작품이 제게는 더 취향이네요. 스티븐 킹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달까요? 별점은 2.5점. 개인적인 베스트는 "고담 카페에서의 점심식사"입니다.

덧붙이자면, 각 단편 서두에 스티븐 킹이 친절하게 작품에 대한 해설을 붙여 놓았는데 꽤 재미있더군요. 작품 본편보다 해설이 탁월하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L.T의 애완동물 이론"

화자의 동료 L.T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에 대해 떠벌이는 수다가 내용의 거의 대부분인 작품. 결말 부분에 그녀가 연쇄살인범의 피해자가 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끝나기는 하나, 진상이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답답한 느낌이 더 큽니다. 그래서 룰루는 어떻게 되었는지? LT가 죽이고 고양이 먹이로 줬다는 이야기? 좀 더 깔끔하게 끝맺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별점은 2점입니다.

"고담 카페에서의 점심식사"

갑작스럽게 의외의 장소에서 정신병자 살인마와 격투를 벌인다는 액션 슬래셔 호러. 주인공의 심리묘사와 이혼을 앞둔 아내와의 디테일한 싸움이 깨알 같은 재미를 전해줍니다. 블랙코미디 느낌도 나더군요. 조금 과장하자면 스크루볼 코미디?

게다가 예상했던 해피엔딩(역경을 헤쳐나간 두 명이 다시 재결합한다는)이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개인적인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별점은 3점입니다.

"데자뷰"

두 번째 신혼여행 중인 중년 부부 아내의 1인칭 심리묘사를 통해 그려지는 무간지옥 이야기. 특유의 시각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묘사는 탁월하나,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과 설정이라 딱히 새롭지는 않더군요. 반복의 원인에 대해 뭔가 설정이 한 개 정도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별점은 2점입니다.

"1408"

"유혹하는 글쓰기"에도 소개되었었고, 존 쿠삭 주연의 영화로도 알려진 작품이죠.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읽고 싶었던 작품이었습니다.

도입부에서 지배인이 귀신 들린 방 1408호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부터 흥미진진하며,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방에 대한 묘사는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등 역시나 만만치 않은 재미를 선사해줍니다.

그러나 기대에는 살짝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그래서 어쩌라고" 거든요. 그 방에 귀신이 있다는 게 전부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총알 차 타기"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뇌졸중 발병을 알게 된 대학생 앨런이 히치하이킹으로 고향에 돌아가다가 사신을 만난다는 내용의 중단편.

히치하이킹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와 더불어 새롭게 창조한 사신 캐릭터는 그럴싸한데,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딱 우리나라 전래동화의 호랑이(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수준입니다. 호러보다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주제 의식이 더 강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행운의 동전"

팁으로 받은 25센트 동전에 대한 일종의 망상(?)을 그린 소품.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06/10/18

고독의 노랫소리 - 텐도 아라타 / 양억관 : 별점 2점

고독의 노랫소리
텐도 아라타 지음/문학동네

젊은 여성을 노린 잔혹한 여성 연쇄 살인 사건과 편의점을 노린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편의점 강도 사건 담당자 아사야마 후키는 강도 피해자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자 인디 가수 준페이를 알게 된 후, 둘은 서로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후키의 옆집에 살고 있던 교코가 실종되자 후키는 준페이가 강도를 당할때 편의점에 있었던 손님과 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을 의심하여 스스로를 미끼로 한 수사에 나서는데...

이 바닥에서는 희귀본인 전설적 작품 "영원의 아이"의 저자 텐도 아라타의 초기작으로 1993년 작품입니다. 평이 좋아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양들의 침묵"을 벤치마킹'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있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여형사와 싸이코 연쇄살인범, 그리고 여형사의 조력자와도 같은 스스로의 세계에 갖혀있는 고독한 인물이라는 캐릭터 설정부터가 판박이에요. 거기에 연쇄 살인의 엽기성과 잔혹성만 더해졌을 뿐이에요. 그 외에도 고학력 살인범이 미모의 여성만 사냥하는 이야기 전개는 "천재 정신과 의사의 살인광고"와 비슷하며, 살인의 이유가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 더하기 모친의 비정상적인 가정 형성에 따른 정신붕괴... 라는 것도 너무 뻔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모로 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류작에 불과합니다.

물론 싸이코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작품이야 널렸을 뿐더러, 93년도 발표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양들의 침묵"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은 됩니다. 그래서 '범인을 어떻게 잡느냐'의 과정만이라도 잘 풀어냈다면 괜찮았을 거에요.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서스펜스보다는 3명의 주요 등장인물, 즉 형사인 후키와 조력자인 준페이, 범인 마쓰다 3인을 1인칭으로 한 심리묘사에 주력하고 있어서 서스펜스가 극히 제한적입니다. 솔직히 너무 겉멋을 부린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듭니다. 

추리적으로도 따져보더라도,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는데 취하는 행동은 거의 없고 외려 준페이라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활약으로 두개의 사건이 해결된다는 것이라 허무하기 그지 없고, 등장인물을 모두 1인칭으로 표현하는 등의 세밀한 묘사 방식도 불필요할정도로 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 모두 심리적인 상처나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설정은 당쵀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고요. 이러한 과거의 심리적인 상처가 너무나 작위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것도 문제이지요.

물론 유명 작가의 유명한 작품답게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은 있습니다. 각 등장인물들의 1인칭 시점으로 시각을 계속 바꾸어나가며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솜씨 하나만큼은 일품이며 마지막 3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까지의 서스펜스는 발군이거든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단점이 너무 크네요. 제 취향이라고 하기에도 힘들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양들의 침묵"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2008/04/06

네 탓이야 - 와카타케 나나미 / 권영주 : 별점 3점

 

네 탓이야 - 6점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캬캬. 결혼하고 간만에 몇만원 이상되는 추리소설을 질렀습니다. 첫번째로 읽은 것은 바로 이 책 "네 탓이야" 입니다. 이전에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을 재미있게 읽었었고 제가 좋아하는 단편집이기도 하니 안 살 이유가 없었죠. 책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읽어 보았습니다.

일상계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작풍과는 다르게 정통 추리 단편의 모양새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탐정역으로 두명의 인물, 프리터인 하무라 아키라와 시경 형사과 경위인 고바야시 순타로 2명이 번갈아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독특한 전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하무라 편은 하무라 1인칭으로 사건 발생 후 단서를 추적하여 밝혀내는 정통 트릭물, 고바야시 경위 편은 범인 1인칭으로 도서 추리물에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아주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또 작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인칭과 시점, 시공간의 변경이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도 특징입니다. 물론 너무 남용되는 느낌이 있기에 좀 거슬리는 부분도 있고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에서도 어느정도 써먹은 것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물론 정통 트릭물로 보기에는 트릭들이 좀 약하긴 했습니다. 전개도 무척 쉬운 편이고요. 읽어나가면서 "범인이 누굴까" 라는 고민을 별로 하지 않게 만드는 작품이랄까요? 일상물과 정통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조금은 섬뜩한"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추리물로의 완성도는 약합니다. 
신경날카로운 노처녀와 약간 독특하고 순박해 보이는 형사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라서 징글징글한 묘사 외에 신선한 맛은 부족했고요.

그래도 대부분의 작품이 의표를 찌르는 맛과 약간의 섬뜩한 느낌, 그리고 반전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작품마다 편차가 제법 있고 추리물로 보기에는 완전히 에러인 작품도 있기에 정통 추리 팬이라면 약간 애매한 작품이긴 할 것 같네요. 뭐 시대가 변한만큼 추리 단편의 속성도 변한 것이겠죠. 빠른 전개와 흡입력 있는 묘사는 추리팬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꽤 먹힐거 같기도 하고요. 단, 일반 독자에게는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을 더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정통 추리적인 요소를 따진다면 "바다 속"과 "살인공작", 작가 특유의 시점과 공간의 변경을 느낄 수 있는 이색작으로는 "재생"을 추천합니다.

첫번째 이야기 "바다 속"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바다가 내다보이는 고급 호텔로 하무라 아키라는 대학 선배 엔도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다. 불려간 이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인 작가 아카쓰키 부이치의 실종과 관련된 핏자국을 지우는 일. 다양한 프리타 생활로 청소쪽도 능통한 하무라는 불만을 가지면서도 핏자국을 지운 뒤,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작품집의 시작과 캐릭터의 소개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작품으로 무대공간의 독특함, 그리고 시작과 끝이 인상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안에 있다는, 어떻게 보면 좀 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설정과 설득력있는 전개 덕분에 읽는 재미가 충분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겨울 이야기"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나는 소꼽친구이지만 나를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긴 요시모토를 살해하고 시체를 은닉한다. 며칠 뒤, 시경 형사과의 고바야시 경위가 찾아오는데...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로 겨울 분위기를 잘 살린 작품입니다. 범인 시점의 전개와 디테일한 완전 범죄 시나리오의 구성은 미국 미스테리 단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전해 주더군요. 이 작품도 "소금"이라는 단서를 통한 결말부는 사실 예상 범위 안에 있긴 한데 고바야시 경위와 범인과의 문답을 통한 반전이 효과적이라 그러한 단점이 묻히면서 재미를 극대화 시켜 주는 점이 참 탁월했습니다.

세번째 이야기 "당나귀 구덩이"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전화 고민 상담소에서 일을 시작한 하무라.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상담원 중 한명이 자살하고, 최근 그 회사 직원 중 여러명이 자살한 사건 때문에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다.
이 작품은 "일상계"와 어느정도 맞닿아 있는 작품입니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범행이 아닌 정신적 공격을 통한 범행이라는 것이 그러한데요. 자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의 전화라는게 어떤 것인지 영 감이 안와서 설득력이 좀 떨어지긴 했고 결말이 너무 뜬금없었습니다. 걍 그냥저냥한 수준이랄까요.

네번째 이야기 "살인공작"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나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하루미의 사체를 은인 가타쿠라 조교수의 사체와 같이 놓아 두어 동반 자살로 위장한다...
세번째 이야기와 같이 이 작품도 직접적 살인을 담고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일종의 누명 공작 이야기인데 작품 전체에서 보이는 공작이 너무 허술하고 단서가 굉장히 쉽게쉽게 드러나는 등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더군요. 약간의 반전이 있긴 하지만 작품 자체는 평이한 수준이었습니다.

다섯번째 이야기 "네 탓이야"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하무라는 대학 동창이긴 하지만 과거의 악연으로 얽힌 가요코의 일방적 약속 통보를 받은 뒤 약속을 어기고 술을 먹으러 나가지만 그 뒤 해당 시간에 있었던 가요코의 연적 피살 사건에 연루된다. 결국 가요코에게서 탐정사무소에서 일을 하는 인연으로 사건을 반 강제로 의뢰받게 되는데...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단편으로 작품 자체의 완성도 보다는 사건이 일어나는 전반적인 동기, 즉 "네 탓이야" 마인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어떤 일도 자기 때문이 아닌 남 탓으로 여기는 이 마인드에서 벌어지는 범행이라는 것이 무척 독특했거든요. 추리적으로는 단 한번의 돌발 사건에 의해 범인이 밝혀지기에 썩 완성도 있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동기와 심리묘사가 좋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섯번째 이야기 "프레젠트"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 사에키 리리의 피살 사건 이후 1년이 지난 날, 피살 사건 당일 그녀의 생일 파티에 초대되었던 지인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진범이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한 진실게임을 시작한다.
이 작품은 다양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 중에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전개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솔직히 증언들의 배후에 감추어진 진상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증언 자체들도 별로 꼬이거나 숨겨진 부분이 없어서 추리적으로는 낙제점에 가깝더군요. 범인이 내뱉는 말들이 정말 뜬금없이 등장하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하기가 땅짚고 헤엄치기였으니까요. 이런류의 작품은 정교한 플롯이 제일 중요할텐데 시작부터 설득력이 없어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작품이 표제작이라 의외였습니다. 작품의 수준도 별로고 1인칭 주인공 하무라가 아닌 고바야시 경위 이야기가 표제작이라니 좀 난데없었거든요. 저와는 달리 작가는 의외로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군요.

일곱번째 이야기 "재생"
하무라 아키라 이야기. 하무라가 일하는 탐정 사무소에 사무소장의 친구인 작가가 찾아와 사건을 의뢰한다. 사건은 자신이 작품때문에 방에 갖혀 있던 어느날, 알리바이를 위해 몰래 비디오 카메라를 셋팅하고 잠깐 방을 비운 뒤 카메라에 찍힌 영상 때문. 그날 벌어진 살인사건의 단서가 될 수 있는 증거인데...
첫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하무라의 선배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인칭의 혼용을 통해 소설적 트릭을 구사하는 작품입니다. 단서가 명확하게 마지막에 등장하기에 그다지 놀라운 반전은 없지만 발상 하나만큼은 기발하네요. 추리적 요소보다는 심리묘사와 아이디어가 돋보인 작품이었습니다. 단, 이 작품처럼 두명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트릭을 동일한 장치로 구현한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지는 의문입니다만....

여덟번째 이야기 "트러블메이커"
하무라 아키라와 고바야시 경위 만나다. 빈사상태의 여성이 발견되고 그 여성의 소지품을 통해 여성의 신원을 하무라 아키라로 파악한 고바야시 경위는 사건 조사를 위해 도쿄로 향한다.
이 단편집의 마무리 작품입니다. 하무라 아키라 시점에서 전개되는 사건과 고바야시 경위가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뒤쫓는 사건이 절묘하게 결합되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의 특기이기도 한 시점과 시공간의 변경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물론 단서가 애매하고 범인들의 조작이 좀 치졸해 보인다는 약점도 있지만 마지막 부분까지 긴장감을 가지고 읽어나갈 수 있도록 잘 짜여진 작품이었습니다. 한국 판형에서만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섬뜩한 마지막 대사 한줄이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있는 책의 구성도 인상적입니다.

2005/10/14

칼의 노래 1,2 - 김훈 : 별점 3점

칼의 노래 - 6점
김훈 지음/문학동네

불멸의 이순신 원작이라죠? 드라마는 제대로 챙겨보진 못했지만 소설의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던 차에 집에 있다는 사실을 얼마전에 알아채고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줄거리는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기에 생략합니다만, 방대한 "성웅"으로서의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에서 백의 종군 중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 한 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이후부터의 이야기만 그리고 있는 것이 특이하더군요. 태어날때 부터 범상치 않았다....어쩌구 하는 전형적인 영웅담 구조가 아니라 신선했습니다. 이야기의 묘사도 1인칭으로 묘사되는데 성웅, 영웅으로서 마쵸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영웅전의 인물이 아니라 굉장히 감상적이고 예민한 인물로 심리를 묘사함으로써 색다름과 함께 파격이 느껴지더군요.

무엇보다도 작가의 치밀한 자료조사로 표현한 여러 세부 묘사들이 좋습니다.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한 조선 수군의 기지를 옮겨가면서 재건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당시 있었던 여러 소소한 사건들과 더불어 실제 당시 해전에서의 여러 전법 및 전술, 무기 및 작전 체계 등이 이순신 장군의 1인칭 시점으로 묘사되는 것이 새로우면서도 참으로 재미납니다.

요사이 젊은 작가들의 책들에서 느껴지는 가벼움과 현란한 묘사가 절제되어 표현되면서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이순신장군이라는 인물의 새로운 해석을 곁들인, 동인 문학상을 탈만한 새로운 느낌의 소설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고 어찌 보면 진부한 이야기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독자에게도 신선하게 다가가는 이러한 방법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이네요. 저도 많이 참고해 봐야 겠습니다.

그나저나 전체적으로 굉장히 짧은 분량인데 왜 1,2권으로 나뉘어져 출판되었는지는 모르겠고 인물과 당시 해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부록 형식으로 실어 놓은 것은 좋았지만 도판도 좀 충실하게 같이 실어 주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아 약간 아쉽긴 하네요.

2018/04/20

지금은 더 이상 없다 - 모리 히로시 / 이연승 : 별점 1점

지금은 더 이상 없다 - 2점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하시즈메의 별장에 약혼녀 마리코와 함께 방문하여 휴가를 보내던 공무원 사사키는 우연히 만난 니시노소노 양에게 푹 빠졌다. 마침 니시노소노 양은 가출 상태로 사에키에게 가까운 역까지 이동을 부탁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폭풍우 탓에 니시노소노 양도 별장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는데, 마침 그날 밤 밀실인 오락실-영사실에서 아사미 자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모리 히로시의 대표작인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8편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사키라는 인물의 1인칭 수기 형태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완벽한 졸작입니다! 이유는 추리적으로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는 탓입니다. 거의 500여 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쌓아 올린 이야기와 설정을 모두 뭉개고 설득력이 전혀 없는 이야기를 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생을 살해한 언니가 자살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칩시다. 그렇지만 구태여 좁은 창을 빠져나가면서 현장을 밀실로 만든 이유, 그리고 아사미 유키코가 동생 아스코에게 가발을 씌우고 옷도 바꿔 입힌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른 가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들이 정작 진상에서는 유키코가 흥분 상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흘러가니 황당할 뿐입니다. 이에 비교하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등장하는, 방을 밀실인 척 할 수 있는 사사키가 범인이다! 라는 추리 퀴즈 수준의 가설들이 진상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또 사사키의 수기 속에 등장하는 니시노소노가 모에가 아니라 모에의 고모 무쓰코였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반전도 사기에 가깝습니다. 보통의 서술 트릭물은 앞부분에서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를 던져주는데, 이 작품 속에는 휴대폰이 없고 HAM을 취미로 한다는 정도의 설정 밖에는 없고, 오히려 이름이 "모에" 라는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리는 등 독자를 속이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강해서 괘씸하기 짝이 없네요.

사실 중간까지는 제법 읽을 만 했기에 더욱 아쉬움이 큽니다. 사에키 1인칭 시점의 모에 홀릭 서술 트릭은 도대체 사이카와는 어떻게 된거지? 라는 독자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폭풍우가 밀어닥쳐 고립된 산 속 별장의 밀실 살인이라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설정도 나쁘지는 않거든요. 또 "둥글둥글해졌다" 는 말은 약한 부분이 없어지고 강한 부분만 남은 강한 형태다, 트럼프나 타로는 자신의 미래를 트집잡으며 기뻐하는 자학적 게임이다는 식의 모리 히로시다운 조금 삐뚤어진 사고 방식이 엿보이는 묘사들도 나쁘지는 않고요. 그러나 이런 요소는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거나 재미를 주지는 못하며, 약혼녀와 여행 온 주제에 18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어떻게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사사키라는 인간 쓰레기 시점에서 이런 묘사가 많은 탓에 사사키의 비호감도만 상승할 뿐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본격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에다가 서술 트릭물로 보기에는 트릭이라는 게 없는 사기극이라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작가 스스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건 추리 소설이 아니라 연애 소설이다, 사사키는 글재주가 없어서 이야기가 완전 별로다, 운운하는 마지막 대단원의 작가 변명은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읽은 독자를 더욱 허탈하게 만듭니다. 연애 소설이지만 추리 소설로도 완벽한 작품들을 쏟아낸 여사님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몇몇 설정은 시리즈 독자라면 그런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이 작품만 놓고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기에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단연코 제가 읽은 이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2020/08/13

우먼 인 윈도 - A.J 핀 / 부선희 : 별점 3점

우먼 인 윈도 - 6점
A. J. 핀 지음, 부선희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황 장애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한지 10개월이 넘은 정신과 의사 애나 폭스는 이웃에 새로 이사온 제인 러셀과 친해졌다. 며칠 뒤 밤, 애나는 이웃집 창을 바라보다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인 러셀을 목격했다. 911에 신고한 뒤 애나는 공황 장애를 무릅쓰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집 밖을 뛰쳐나가다가 기절해버렸다.

다음날 정신이 든 애나 앞에 자신이 아는 제인 러셀과 다른 여자가 '제인 러셀' 이라며 나타나서 살인 사건은 없던걸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건 애나의 알콜 중독과 치료를 위해 먹는 약이 결합되어 생긴 망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데...

600여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딱히 갈 곳도 없는 탓이지요.

작품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한 - "나를 찾아줘 (gone girl)", "인어 다크, 다크 우드", "걸 온 더 트레인" - 과 유사한,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몇 편은 영화화되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네요. 이 중에서도 특히 "걸 온 더 트레인"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몰래 엿보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진상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설정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나'가 알콜 중독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이런 류 내용의 원조인 1954년 작품 "이창"의 설정에 더욱 가까운 편입니다. "이창"에서 주인공 제임스 스튜어트는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심심하던 차에 이웃집을 카메라로 도촬한다는 설정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 애나는 공황 장애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해 창문으로 이웃집을 바라보고 가끔 사진도 찍는다는 설정이니까요.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는 것도 같고요.

하지만 단순히 설정만 따온 표절작은 아닙니다. 다리 부상이라는 물리적인 제약이 보다 정교한 공황 장애로 발전한 것은 물론,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여러가지 복선, 단서를 선보이면서 독자를 몰입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인 러셀'과 친분을 쌓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애나가 넘겨짚은 것 뿐이지요.
또 이 과정에서 제인 러셀이 그려준 애나의 초상, 애나가 찍은 석양 사진 속 창문에 반사된 그녀가 찍힌 것 등이 나중에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게 드러나게 되고요. 애나의 아랫층 하숙인인 데이비드의 방 안에서 제인 러셀의 진주 귀걸이가 발견되지만, 그게 '캐서린' 것이라고 한 데이비드의 말도 '제인 러셀'이 사실은 캐서린, 케이티라는게 밝혀지면서 사실로 밝혀지는 등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단서는 한 개도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존재가 증명되지 않은 '제인 러셀'의 정체도 인상적이에요. 이 부분을 요약해서 설명드리자면, 처음에 애나가 '제인 러셀'로 알았던건 사실은 이웃집 아들 이선의 친모 케이티였습니다. 케이티는 방탕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이선을 낳았는데, 약물 중독 등으로 보살필 수 없어 입양을 보냈었습니다. 그 후 갱생한 뒤 이선의 양부 알리스타가 이사간다는걸 뉴스에서 보고 찾아온겁니다. 도중에 만난 애나가 그녀를 이웃집 엄마로 오해하자, 구태여 그걸 수정하지는 않은거지요. 때문에 케이티가 알리스타의 집에서 살해된걸 목격한 애나는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생각하고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진짜 제인 러셀이 살해된건 아닙니다. 곧바로 진짜 제인 러셀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출동한 경찰에게 증명하고요. 결국 제인 러셀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 애나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총 출동하여 애나를 압박하자, 애나 본인 스스로 모든게 환각이었다고 자기 합리화하는 장면도 그럴듯합니다. 과음에 독한 약을 수시로 다량 복용하며, 이 과정에서 본인의 무의식적인 행동들 - 제인 러셀의 사인을 써 보는 등 - 이 착각의 근거로 뒷받침 되는 덕분입니다.

애나의 광장 공포증, 공황 장애에 대한 묘사도 좋고 그 원인도 합리적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자기 때문에 남편과 어린 아이가 죽었다면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이런 부분은 확실히 불임, 이혼 정도로 자책하고 망가진다는 "걸 온 더 트레인"보다는 한 수 위였습니다.

아울러 이야기 전개가 애나가 좋아하는 고전 흑백 영화들, 특히 스릴러와 느와르 영화의 소개와 함께 전개되는 방식도 아주 독특해서 마음에 드네요. 책 뒤에 부록 "애나 폭스의 영화들"이 소개되는데 총 49편에 이를 정도로 양도 방대할 뿐더러, 그 수준들도 높은 명작들이 많아서 따로 이 작품들만 챙겨보고 싶어질 정도에요. 이 작품 자체가 이런 고전 스릴러의 충실한 후계자이기도 하니, 영화화가 된다는데 영화 버젼도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웃집 아들 이선이 범인이었다는 반전은 너무 뜬금없었어요. 하숙인 데이비드도 범인이 아니고, 이웃집 남편 알리스타도 범인이 아니면 남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한데, 그래도 반칙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어진 단서가 너무 없어요. 이선이 고양이 펀치의 발이 다친걸 알고있다는걸 말함으로서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나름 단서지만,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 하니 결정적 단서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또 입양한 아이의 부모가 친모를 살해하는 건 그렇다쳐도, 아이가 친모를 살해하는건 억지스럽습니다. 특별한 동기도 없이 단지 짜증난다는 이유인데 이를 싸이코패스라는 말 하나로 정리해버리는건 너무 쉽게 간 느낌입니다. 싸이코패스라는 말이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같은 만병통치약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이선이 애나를 죽이려고 찾아와 진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전개 역시 편의적이면서 헐리우드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반전에 욕심을 부렸는데, 여러모로 아쉬웠어요.

그 외에도, 알리스타가 밤에 술을 먹고 애나의 집에 침입해서 그녀를 폭행한건 옥의 티입니다. 알리스타가 진범임을 끌고 나가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는데 무리수였습니다. 이런 명백한 범죄를 저질러 꼬투리를 잡히게 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범행 전 케이티가 지른 비명을 동네 사람들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하고요. 이런 류의 작품에서 흔히 있는 불필요한 묘사들도 제법 됩니다. 데이비드와 애나가 관계를 가지는 묘사가 대표적이지요. 데이비드의 캐릭터만 애매해질 뿐이에요.

지루한 심리 묘사도 많습니다. 애나의 남편 에드와 딸 올리비아와 별거하면서 스카이프로 통신한다는 1인칭 시점의 묘사도 마찬가지에요.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둘이 이미 죽었다는건 초반에 짐작할 수 있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은 탓입니다. 이런 류의 서술 트릭은 이미 숱하게 존재하니까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며 모든걸 애나의 착각으로 몰아가는 경찰 노렐리가 얼마나 배려심없는 쓰레기인지를 드러내는 장치 역할 외에는 쓰임새가 없는, 분량 낭비에 가까운 묘사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애나가 혼자 사건을 밝히지 못해 전전긍긍하는건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400만불 가까이 되는, 옥상에 정원까지 있는 큰 집에 혼자 사는 전직 정신과 의사라면 직접 돈을 써서 사람을 고용하여 진상을 알아보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요? '제인 러셀' 이라고 주장한 케이티의 그림과 함께 둔 체스 말에서 지문을 채취하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말이지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술과 약에 취해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납득이 되지 않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명불허전이며,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도 정교함이 돋보이는 웰-메이드 스릴러라는건 분명합니다. 여성 주인공 1인칭 시점 스릴러 중에서도 빼어난 편이고요. 무리한 반전, 그리고 마지막 대결이 작위적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충분히 추천드릴만합니다.

알고보니 모중석 스릴러 클럽 레이블의 47번째 소개작인데, 이 레이블이 아직도 나오는지는 몰랐네요. 장르 문학 애호가로서 앞으로도 모중석 씨의 건투를 빕니다.

2009/06/17

악마같은 여자 - 토마 나르스작 외 / 양원달 : 별점 3점

악마 같은 여자 - 6점
토마 나르스작 외 지음, 양원달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디아볼릭"이라는 영화로 더 유명한 소설이죠. 이쪽 바닥에서는 유명한 작품인데 프랑스 쪽 소설은 뤼뺑 시리즈말고는 그닥 취향이 아니라서 스킵하고 지나갔지만 동서 추리문고의 꾸준한 할인행사 덕분에 결국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구입하고 보니 본편이라 할 수 있는 "악마같은 여자" 보다 같이 실려있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쪽이 더 길고 비중있는 작품이라 황당했습니다. 제목이 바뀌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

어쨌건, 일단 "악마같은 여자" 이야기부터 하자면, 이 작품은 낚시 전문 샐러리맨 라비넬이 정부 뤼세느와 공모하여 아내를 살해하고 거액의 보험금을 받으려고 하는데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라비넬은 결국 시체 유기까지 성공하는데 문제는 그 다음, 죽은 아내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면서 라비넬은 폭주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유명한 작품이긴 한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감이 큽니다.

제일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영화 때문에 사건의 진상을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이겠죠. 중반 이후부터는 결과가 빤히 보여서 도저히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어차피 "제목" 이 가장 강력한 스포일러이기도 한 탓에 영화에 대한 내용을 몰랐다 하더라도 결국 눈치챘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또한 결국 범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될까라는 것에 대한 설득력이 좀 약하더군요. 라비넬이 소설과 같은 의도된 결말로 폭주할 것일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물론 라비넬의 1인칭 심리묘사를 통해 정상궤도를 벗어나는 심리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기는 합니다.그러나 독자는 알지만 범인은 모를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라서 썩 와닿지 않았으며 (중간에 뤼세느가 잠깐 라비넬을 만나긴 하는데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심리묘사 역시 너무 지나쳐서 읽는데 좀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참고로, 이러한 프랑스 소설 특유의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한 묘사는 제가 프랑스 추리 소설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납니다. 너무 장황해요. 도대체 라비넬의 "파리낚시" 이야기는 왜 나오는건지도 모르겠다니까요... 그리고 라비넬 심리묘사와 반대로 팜므 파탈에 대한 묘사가 애매하고 부족한 것 역시 감점 요소였고요.

한마디로 소심남이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대형 사고를 쳤다가 파멸하는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였습니다. 보다 유머스럽게 블랙코미디로 갔더라면 더 제 취향이었을 것 같은데, 뭐 시대가 너무 흐른 탓도 크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두번째 작품인 노엘 칼레프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역시 영화로 더욱 유명한 작품이죠. 사실 아주 오래전에 "하서 출판사" 판본으로 이미 읽은 작품이긴 합니다만 다시 읽어도 재미있더군요.

줄거리는 반쯤은 사기꾼인 주인공 줄리앙 크르트와가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완전범죄를 꾸며 고리대금업자 볼그리를 살해하는데 성공하지만, 깜빡한 마지막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사무실로 되돌아가다가 엘리베이터에 갖히게 된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사건은 여기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지죠. 일단 줄리앙의 아내와 가족의 분란에서 시작해서 줄리앙의 차를 훔쳐탄 한 연인의 범죄행각 등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거든요.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가 소란스럽고 유쾌하다는 점, 그리고 전혀 다른 인물들이 얽히고 섥히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결말로 흘러간다는 점이 굉장히 현대적이고 영화적이라서 인상적입니다. 정말 "영화" 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또한 사람들의 심리묘사 등이 프랑스 소설이지만 어느정도 수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품에 딱 어울리는 수준이었어요. 단, 중간에 등장하는 두 연인 -프레드와 테레즈- 의 묘사가 "셸부르의 우산"류의 신파 멜로물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좀 별로였습니다. 두 연인의 존재가 작품의 결말에 필요 불가결했던 부분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겠지만요...

"악마같은 여자"와 비교하자면, 수렁에 빠진 남자의 원맨쇼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훨씬 제 취향이었달까요. 뭔가 타란티노 영화가 연상되는 것이 시대가 흘렀지만 현대적인 느낌도 전해주며, 지옥행 급행(정말이지 초특급!) 열차를 타는 줄리앙의 모습이 통쾌하기도 해서 여러모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결론내리자면, 두 작품 평균한 이 책 전체의 별점은 3점으로, 점수가 높은 편은 아니며 두 작품 모두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범죄, 스릴러 물에 가깝긴 하지만 이 책 한권이면 1950년대 프랑스 추리소설의 진수이자 장, 단점을 맛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생각되네요.

2009/03/14

앨저넌에게 꽃을 - 다니엘 키스 / 김인영 : 별점 5점

앨저넌에게 꽃을 - 10점
다니엘 키스 지음, 김인영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빵가게 점원 '찰리 고든'은 32살이지만 IQ가 70도 되지 않는 저능아. 그런 그에게 지능 향상을 위한 실험이 제안되며 똑똑해 지고 싶었던 찰리는 그 제안을 수락한다. 지능향상 실험은 이미 "앨저넌"이라는 이름의 생쥐에게 적용되어 성공하였기에 인체 실험이 필요했던 것. 찰리는 실험 시작과 동시에 "경과보고"라는 이름의 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기 시작한다....

반세기전인 1959년에 출간된, 휴고상과 네뷸라 상을 수상한 SF의 고전입니다. 유명한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SF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읽지 않았었는데 중고서점에서 별 생각없이 충동구매한 뒤 순식간에 다 읽어버린 작품입니다.
찰리의 경과보고라는 형태의 극단적 1인칭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고, 저능아의 서툰 글에서 시작하는 변화의 과정이 고작 8개월여에 머무르는 짧은 기간의 이야기이기에 심리 묘사의 극을 보여주면서도 감동의 깊이를 더하는 이 작품은 한마디로 굉장히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그러면서도 끔찍하고도 잔인한 이야기였습니다. 다 읽고나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요.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 리뷰를 쓰기도 쉽지 않군요.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얻어가면서 더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기도 하고, 슬픈 결말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시한부 최루성 멜로물이기도 하고, 행복이라는 것이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짤막한 상식으로 리뷰를 쓴다는 것이 무례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성취"를 이룬, 진정한 걸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우리 시대의 고전이네요.

한마디로 이제서야 읽은 것이 후회가 될 정도로 대단한, 놀라운 작품으로 이런 책이 잘 팔리지 않아서 절판을 거듭한 국내의 척박한 장르문학 환경은 화가 나기까지 하네요. 차라리 SF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진정한 고전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을까요? SF적인 요소도 많지 않은데... 어쨌건 별점은 당연히 5점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책 리뷰를 올리면서 5점짜리 작품은 처음이네요. 이 작품을 좀 더 일찍 읽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덧붙이자면. 소설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워렌학교로 돌아간 찰리에게 곧 다가올 필연적 죽음, 그의 시체를 놓고 벌어질 실험을 생각하니 더 가슴이 아픕니다. 부디 찰리가 마지막 얼마간이라도 워렌학교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PS : 그나저나 영화화도 몇번 된 것 같은데 이 1인칭 심리묘사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을 어떻게 영상화할 수 있다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네요. 뭐 찰리 역이야 연기 좀 한다는 배우는 당연히 욕심낼만한 배역이긴 하지만 도저히 책이라는 매체의 효과를 뛰어넘는 영화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되지 않거든요.

2014/07/29

풍장의 교실 - 야마다 에이미 / 박유하 : 별점 2.5점

풍장의 교실 - 6점
야마다 에이미 지음, 박유하 옮김/민음사

표제작을 포함하여 3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작품집. 이유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일본 여류 작가의 작품이구나!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는 작품들로 고이케 마리코가쿠타 미쓰요의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일상 생활 속 악의와 살의를 상세한 심리묘사로 그린 소품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작품들이 일종의 "성장기"라는 차이점은 있지만요.
그래서 두 작가 작품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범죄물적인 재미는 고이케 마리코보다 못하고, 일상 속 서늘한 심리묘사는 가쿠타 미쓰요보다 못한 느낌이 듭니다. 딱 세 편만 실렸다는 점에서 풍성함도 부족하고요.

그래도 "풍장의 교실"만큼은 확실한 수작일 뿐더러, "제시의 등뼈"를 제외한 두 편의 이야기는 나름 극적 반전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는 있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 일본 여류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풍장의 교실"

잦은 이사를 통해 어떻게 주변에 녹아드는지를 깨우친 어린 소녀가 왕따를 당하는 상황에 놓이지만, 극복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 소녀 모토미야 안의 1인칭 심리묘사가 엄청나게 상세하고 집요해서 읽으면서 내내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솜씨가 발군입니다. 특히 왕따를 당하는 과정의 몰입감은 장난이 아닙니다. "악의"라는 것을 이렇게나 구체화시켜 묘사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할 뿐이에요. 안이 왕따를 설명하며 그냥 가려운 느낌, 누군가가 긁으면 정말로 가려워져서 또 긁고, 더는 참을 수 없어져 일제히 손톱을 세운 뒤 긁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겨 이유도 모른 채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또 단순한 왕따 이야기가 아니라 극적 반전을 갖추었다는 매력도 겸비하고 있습니다.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가족들의 대화를 듣고 모든 것을 이겨낸 뒤 오히려 "경멸"을 무기로 반격한다는 결말이거든요. 더욱이 왕따의 원인이 된 특정 선생님의 애정을 오히려 이용하여, 자신의 매력을 더욱 어필한다는 점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안의 편인 듯 보이지만 딱히 행동을 보여주지는 않는 "악코"라는 학생의 존재는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고, 이런저런 곁가지 이야기로 길어진 감은 없잖아 있으나 충분한 수작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나비의 전족"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함께 했지만 그녀의 배경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소녀가 친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남자를 만나고, 육체 관계를 가진 뒤 벌어지는 파국과 그 이후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풍장의 교실"과 마찬가지로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지는 작품으로, 심리묘사는 역시나 대단합니다. 하지만 너무 완벽한 친구 에리코를 차버리기 위해(?) 남자와의 관계를 선택한다는 전개는 크게 와닿지는 않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히토미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가치 없게 내버렸는지를...

마지막에 "친구"가 아니라 정말로 "이성"으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괜찮았지만, 설명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이래저래 조금 애매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제시의 등뼈"

좋아하는 남자의 아이 제시를 돌봐주게 된 코코의 이야기.

애정 없는 부모 아래에서 어리광을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제시, 그리고 아이 없이 남자와의 애정만으로 살아가는 코코의 대립과 성장, 관계 회복이 그려지는데,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제시라는 아이의 등뼈가 증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마지막 부분이 살짝 감동을 주긴 했지만, 워낙에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말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6/12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 화바이룽/ 김소희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에 사랑은 추억이나 순간,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아."

어느 날 남편 밍런이 갑작스럽게 이혼을 통보했다. 밍런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의심한 나는 친한 팡 언니에게 부탁해 밍런을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이혼은 성립되었다. 

그 뒤 밍런이 사람을 죽여 체포된 뒤 구속되었고, 밍런의 동기를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나에게 독방에서 자살한 밍런의 이메일이 전달되며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

대만 작가 화바이룽의 장편소설입니다. 범죄물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남편 밍런을 교도소에서 면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 뒤, 이야기는 사건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밍런의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 아내의 불륜 의심, 사설 조사, 살인, 구속, 자살, 마지막 진상까지 빠르게 이어지는데 이러한 전개가 만들어 내는 흡입력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밍런이 왜 이혼을 요구했는지, 왜 개명했는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왜 끝내 자살했는지 계속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롯이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이어지는 묘사도 좋습니다. 갑자기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혼란과 분노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덕분이에요. 사건은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주인공의 감정은 설득력이 넘칩니다. 그만큼 생생하고 생활감 있는 묘사가 빼어납니다. 웃기기도 하고요.

범행의 세부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밍런의 작업실은 보안이 엄격한 곳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뤄지가 그곳에 쉽게 들어갔다는 설명은 의심스럽고, 밍런이 자백한 그대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작업실에 있던 두 개의 옷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밍런은 옷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작업실에는 옷장이 두 개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잠겨 있었는데 역시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는 밍런이 작업실에서 재스민이라고 부르는 러브돌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진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옷장은 밍런이 재스민과 관련 물품을 숨긴 공간이었고요. 이를 알아챈 뤄지는 밍런을 협박하다가 고압 전기에 감전되어 살해당합니다. 이 죽음 역시 앞에서 밍런이 형과 함께 감전 장치를 만들었다는 복선을 통해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꽤 잘 짜여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뤄지가 밍런의 비밀을 알게 된 이유도 재미있는데, 아내가 의뢰한 불륜 조사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인데, 그 조사 때문에 밍런의 은밀한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비밀은 협박으로 이어지고, 결국 살인까지 부르고요. 처음의 의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마지막 비극과 진상에 맞물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윤회식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밀리의 서재에서 홍보하는 대로 '추리소설'로 보면 아쉽습니다. 복선은 있지만 독자가 단서를 모아 진상을 맞히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갈 뿐이며, 중요한 진실은 밍런의 자백(이메일)로 밝혀지니까요. 

밍런의 동기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는 결혼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러브돌에 깊이 빠졌을까요? 주인공 '나'의 1인칭으로만 전개되기 때문에 밍런 시점의 고민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둠 속에 머물고 싶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더구나 이미 이혼도 했고, 러브돌과의 관계가 불법도 아닌데 왜 살인까지 해야 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허술한 부분도 보입니다. 작업실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점은 좋은 복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뤄지가 경비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작업실에 들어갔다고 밝혀집니다. 이렇게 되면 보안이 엄격하다는 설정의 힘이 약해집니다. 치밀한 장치로 보기도 어렵고요. 또 이 경비원 친구의 존재도 문제입니다. 밍런은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뤄지를 죽이고 자살합니다. 하지만 뤄지가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을 도운 경비원 친구가 입을 열면 밍런의 비밀은 다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밍런의 자살 이유도 애매해집니다. 비밀을 완전히 묻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흥미진진한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남편의 이혼 통보에서 시작해 불륜 조사, 살인, 자살, 진상 공개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빠릅니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도 좋고, 생활감 있는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추리물로는 아쉽지만 범죄 드라마로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07/06

리얼 라이즈 - T.M. 로건 / 이수영 : 별점 1.5점

리얼 라이즈 - 6점
T. M. 로건 지음, 이수영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4살 아들과 살아가는 평범한 30대 가장인 영어교사 죠셉은 어느 날, 우연히 아내가 지인인 벤과 호텔에서 만남을 갖는 걸 목격했다. 아내가 떠난 뒤, 죠셉은 벤과 잠깐 마찰을 빚다가 벤을 밀쳤는데 뒤로 넘어진 벤은 피를 흘린채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아들 윌이 천식 발작을 일으킨 탓에 죠셉은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윌에게 약을 준 뒤 다시 호텔 주차장을 찾았지만, 벤과 벤의 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뒤 죠셉은 벤으로 보이는 누군가로부터 온라인상에서 테러를 당했고, 상황 조사 결과 아내와 벤이 불륜 관계였다는걸 알게 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라진 벤을 살해한 범인으로 몰리고 말았다. 누명을 벗기 위해서는 벤을 직접 잡아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모함을 받아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이를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범죄 스릴러입니다. 이런 장르는 얼마나 주인공이 철저하게 위기에 처하는지가 핵심인데, 그 부분은 괜찮은 편입니다. 이를 그려내는 1인칭 시점의 묘사도 탁월합니다. 덕분에 긴장감이 잘 살아나서 끝까지 흡입력을 유지해 줍니다.
"벤과는 대부분 축구 얘기만 했다. 서로 잘 모르는 남자들이 그래도 뭔가에 대해 대화할 수 있도록 발명된 세계 공통어 말이다."와 같은 축구와 펍 대사처럼 남성 취향을 저격하는 부분들도 마음에 듭니다. 남성 작가의 1인칭 서술이라는 장점을 톡톡히 살려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들 윌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정말 그 시기 아이의 모습을 아주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범죄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위험에 빠졌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와 같은 두뇌 게임이 전무한 탓입니다. 죠셉이 위기에 처한 뒤 벌이는 각종 행동은 모두 무의미한 삽질이에요. 이 과정에서 뭐라도 하나 알아냈다면 좋았을텐데 그런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마지막에 위험을 무릅쓰고 선덜랜드로 이동하여 벌인 조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중요한건 모두 선덜랜드로 이동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며, 설령 몇몇 단서들에 대해 죠셉이 깨달았어도 이는 무의미했습니다. 죠셉은 베스와 앨리스를 구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 없이 벤의 저택으로 향해 스스로 위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죠셉이 알아낸건 멀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 뿐, 결국 베스의 말에 의해 진상을 깨닫게 되지요.
독자는 이미 멀, 그리고 베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상하다는걸 눈치챌 수 밖에 없어서 이러한 전개는 크게 답답했습니다. 베스의 딸인 앨리스의 도움이 없었으면 베스의 계획대로 강간범으로 몰린 파렴치범으로 살해당했을게 뻔합니다.

또 일견 치밀해 보였던 베스의 계획도 결국 돌이켜보면 헛점 투성이입니다. 베스와 멀이 처음에 벤을 살해한 뒤 왜 시체를 숲에다 유기하지 않았을까요? 시체만 발견되었다면 죠셉은 그 날로 구속되어 최소 20년은 교도소에 있어야 했을 겁니다. 구태여 저택으로 시체를 가지고 와서 은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반대로 시체가 발견되지 않으면 죠셉이 무죄로 풀려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택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그렇지, 엄연히 딸이 집에 있는데 총질을 해서 사람을 죽일 생각을 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멀과 벤이 호텔에서 만난건 사실이고, 이를 조셉이 목격한 것도 사실인데 왜 멀의 누드 사진을 찍어서 공유하는 불필요한 추가 작업을 했는지도 의문이고요. 그냥 불륜을 저질렀다는 멀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죠셉이 동기가 있다는걸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고 해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경찰만 알면 되는데 주변 사람들이 아는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벤이 살아있는 척 문자와 SNS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폰과 PC를 해킹하여 정보를 빼돌렸다는 설정도 불필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페이스 북이나 SNS를 이야기에 끌어들여 화려함을 더하는 수단일 뿐,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정보를 남기면 경찰에게 꼬리를 잡힐 수도 있을 뿐입니다. 경찰이 이를 죠셉의 자작극이라 여긴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 심도깊게 수사를 진행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지요.

그 외에도 치밀하지 못한 작위적인 설정과 전개가 너무 많습니다. 첫 만남에서 벤이 죠셉을 밀치다가 우연찮게 쓰러져 기절하고, 갑자기 윌이 천식 발작을 일으키며 주차장에 CCTV가 제대로 없었다는 3중 우연 상황부터가 작위적입니다. CCTV의 경우, 최소한 페이스북이 대세가 된 현대 호텔에서 있음직한 상황은 아닙니다. 
벤이 살아있는 것처럼 죠셉과 독자를 속이지만 벤이 죠셉을 수렁으로 몰고가는 전개도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말이 안된다는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거대 기업체의 수장이자 백만장자가 자신이 죽은 것 처럼 위장하여 불륜 상대의 남편을 파멸로 몰고 간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영원히 몸을 숨길 상황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잖아요. 돈을 써서 해결사를 고용한 뒤 죠셉을 없애버리는게 상식적이지요. 실제로 벤은 해결사를 통해 경쟁자를 박살낸 경험이 있는걸로 묘사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럴거라면 죠셉에게 메시지 따위를 남길리도 없고 은밀하게, 조용하게 해결하는게 당연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허술함을 감싸는 동기, 베스와 멀이 서로 동성간 사랑 때문에 벌인 범행이었다는 건 작위적이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설정의 극치입니다. 베스가 빈털터리로 쫓겨날게 두려웠다 한들 죠셉을 끌어들여 살인극을 벌일 이유가 뭘까요? "악마같은 여자"처럼 한 번 정도 관계를 더 꼬아 놓는다면 모를까, 급작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흡입력은 있지만 읽고나면 단점만 더 생각나는 그런 책입니다. 권해드리기 어렵네요.

2024/05/05

우리 역사 속 수학 이야기 - 이장주 : 별점 2점

우리 역사 속 수학 이야기 - 4점
이장주 지음/사람의무늬

제목 그대로 우리 역사 속 수학에 대해 소개해주는 수학사 서적. 조선 이후 역사 속 유명 수학자를 소개하는 1부와 삼국시대부터 수학을 통해 이루어진 여러가지 성취를 알려주는 2부 구성입니다. 이를 통해 서양 중심의 수학사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도 옛부터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는걸 알려줍니다.

1부는 세종대왕이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실제로 수학 서적을 펴내거나 수학 관련 활동으로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역관 등 중인 계층이 수학을 공부했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세종이 공자의 말을 빌어 수학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수학적인 사고가 위대한 사상과 발명의 큰 축이자 기초이니, 위대한 발명가가 수학자이기도 했다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헤이그 밀사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수학자이기도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구한말에서 개화기에 이르는 시기에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수학 교육과 보급에 노력했다는건, 그가 얼마나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라 할 수 있겠지요. 확실히 당대 조선 제일의 천재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나 봅니다.
2부는 우리나라의 문화 유산과 여러가지 문헌을 통해 우리 수학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알려주며, 문헌에 소개된 문제들을 현대적으로 풀어 소개해줍니다. 덕분에 함께 따라 푸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죠.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신라 포석정의 주사위 주령구에요. 6개의 사각형 면과 8개의 육각형 면으로 이루어진 주사위로, 굴려서 나온 벌칙을 따라 해야 한다는건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학적으로 '두 종류 이상의 정다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꼭짓점에 모인 면의 배치가 서로 같은 준정다면체'로 각 면의 넓이가 모두 동일하다고 합니다! 주사위는 모든 면의 확률이 공평해야 하지만, 애써 14개의 면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텐데 이를 적용한 주사위를 놀이기구로 썼다는건 신라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일 겁니다. 지금도 이를 손으로 만드는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도 궁금하네요. 그리고 조선 시대 수학 서적을 통해, 당시에 어떻게 방정식과 제곱근을 푸는지를 알려주는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이치에 맞게 풀도록 되어 있더라고요. 이런 내용을 뒷받침해주는 도판도 충실합니다. 청소년용 도서답게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2부에서 문체가 들쭉날쭉한건 아쉬웠습니다. 3인칭으로 '소개'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1인칭으로 강의하듯 문체가 바뀌는 부분이 있는데 거슬렸어요. 계속 출간되려면 교정이 필요해보입니다.
역사 속 수학을 바라보기에는 내용 구성이 부실하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신라 이야기 약간 외에는 전부 조선의 이야기라면 '우리 역사 속'이라고 말하기는 다소 애매하잖아요? 그나마도 뒤로 가면 갈 수록 역사 속 수학 소개보다는 수학 문제 풀이의 비중이 높아지고요.

그래도 청소년들이 가볍게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책이라고는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