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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5

죽이는 요리책 - 케이트 화이트 엮음 / 김연우 : 별점 2점

죽이는 요리책 - 4점
케이트 화이트 엮음, 김연우 옮김/라의눈

MWA (미국 추리 작가 협회) 에서 소속 작가들을 대상으로 레시피를 추천받아 모아 놓은 요리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추리 소설 속 요리"라는 주제로 글을 조금 쓰고 있기 때문에 흥미가 생겨 구입했습니다.
구입 전부터 "요리"와 "추리 소설" 에 관련된 글들은 아니고 단순한 레시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별로 큰 기대도 없었고요. 

역시나, 책은 유명 작가들이 짤막한 레시피 소갯글과 함께 레시피를 실어 놓은게 전부라 딱히 언급할 내용이 많지는 않네요.
오히려 책의 성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이런 의뢰를 받았다면 최소한 제 작품, 자기 작품에 등장했던 인상적인 레시피를 소개했을 겁니다. 루이즈 페니의 "마담 브누아의 투르티에" 처럼 말이지요. 루이즈 페니는 자신의 작품 속 묘사와 함께 투르티에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소재에 불과하긴 하지만, 최소한 자신의 작품 속에는 등장하는 소재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의 특기 요리" 라던가, "내 시리즈 탐정이 즐겨 먹음직한 요리"라면서 작품과 별 상관도 없는 레시피들이 실려 있는 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울러 "MWA" 소속이지만 지명도가 떨어지는 작가들이 많다는 점도 책의 매력을 반감시킵니다. 전부 110명의 작가가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는데, 제가 이름을 들어보았거나 한 권이라도 책을 읽어본 작가는 15명이 채 안 됩니다. 제가 그래도 추리 소설을 꽤 읽은 편인데 이 정도라면, 아마 일반 독자분들은 한두 명(리 차일드나 제임스 패터슨, 길리언 플린 정도?) 알 정도겠지요. 유명 작가의 레시피라면 팬심으로라도 구해 볼지 모르겠는데 이름을 알 만한 작가조차 적으니, 우리나라에서는 여러모로 흥행하기 힘든 책이겠구나 싶습니다. 

또 레시피들의 거의 대부분이 "오븐"을 필요로 해서 집에서 해 먹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도 많고요. 토머스 H. 쿡의 "채식주의자 칠리 프롤로그" 는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데 "초리조" 를 어떻게 구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예 절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존 매커보이의 "파산자의 굴라시" 처럼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이루어진 레시피도 제법 되니까요. 파산자의 굴라시는 제일 먼저 간 쇠고기를 양파, 피망과 함께 냄비에 볶은 후 마늘 소금으로 간합니다. 국수를 알 덴테 직전까지 삶아 쇠고기, 채소를 볶은 냄비에 넣고 토마토 소스도 넣은 후 뚜껑을 연 채 약한 불에 15분 정도 끓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케첩을 넣어 잘 섞으면 완성입니다. 맛있어 보이죠?
또 "베이커 가의 음식 사냥개"라는 제목으로 홈즈의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소개한다던가, "당신의 정원에 있는 예쁜 독"이라는 제목으로 일상 속 독초를 소개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실린 몇 가지 팁들은 무척 반가웠습니다. 책도 만듦새는 아주 좋고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딱히 마음에 드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유명 작가가 되면 몇 줄의 레시피 소개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어서 참 좋겠다는 생각만 들 뿐입니다. 수록 작가 중 누군가의 굉장한 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25,000원이라는 가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죠.

2018/10/19

흑백의 여로 - 나쓰키 시즈코 / 추지나 : 별점 2점

흑백의 여로 - 4점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에서 일하는 여대생 리카코는 삶의 의미나 재미를 찾지 못한 탓에, 유부남 애인 도모나가의 부탁으로 함께 자살 여행을 떠났다. 아타미의 아가미 깊은 산 속에서 수면제를 다량 복용했지만, 리카코는 구토 증상으로 수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옆에 누웠던 도모나가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걸 알고 놀란 그녀는 도쿄로 돌아와 도모나가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밝혀내려 하는데...

오랫만에 추리 소설을 집어 들었네요. "일본의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다소 과한 별명의 소유자인 일본의 여성 추리작가 나쓰키 시즈코가 1975년에 발표한 장편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저자의 장편은 두 편인데 나름 복잡한 트릭이 등장하는 "W의 비극"이 평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짝퉁인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는 완벽한 졸작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두 작품 중간 정도 수준이네요.

특징이라면 사회적인 문제, 이슈가 전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누구나 쉽게 위조할 수 있는 호적, 호모섹슈얼과 바이섹슈얼, 트렌스젠더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일본 사회파 스릴러, 추리물의 얼개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청춘 남녀가 등장해서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일본 전역의 여행을 통해 전개되며, 이 와중에 제법 기발한 트릭과 진상이 선보이는 내용은 사회파 작가 중에서도 당시 일본을 평정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초기작 영향이 아주 짙게 느껴졌고요. 하여튼, 예상 외의 장르라 놀랐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점, 단점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들과 비슷합니다. 장점부터 설명드리면, 첫 번째는 쉽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도모나가 죽음의 진상을 쫓는 리카코와 실종된 매형 이와타의 행방을 쫓는 다키이가 우연히 만나 함께 사건을 파헤쳐나가는 과정 속에서 잇달아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등 독자의 흥미를 끄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에요. 펄프 픽션이기는 하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나름의 트릭과 더불어 이어지는 반전과 진상이 괜찮다는 점입니다. 도모나가는 자살할 생각이 없었고, 성전환을 한 아내 유키코의 비밀을 알고 협박하던 이와타를 아내가 살해하자 그 시체를 은닉하기 위해 동반 자살을 가장했다는게 진상인데, "성전환 수술"이라는 1975년이라는 시대를 놓고 보면 꽤나 앞서간 소재를 활용한 반전이 돋보여요. 이를 앞 부분에서부터 계속해서 복선을 던져주며 중간중간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흘려서 설득력도 높습니다. 리카코가 남장을 한다던가, 남장을 하면서 기묘한 매력을 느낀다는 묘사는 지나쳤고 복선이 과한 탓에 어느 정도 되면 진상은 눈치챌 수 있기는 하지만요. 참고로 덧붙이자면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 중 1974년 발표된 "흑마술의 여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하는 반전으로, 성전환까지는 아니지만 질 형성술에 대한 내용이 유사한데 아무래도 조금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 번째 장점은 정사를 하러 떠난 아타미로의 여정, 아오야마에서 오모테산도 등 도쿄 시내와 가사이, 이와타의 뒤를 쫓아 헤메는 후쿠오카, 리카코와 도모나가의 고향인 시즈오카 방문 등 다양한 지방을 방문한 묘사들입니다. 디테일도 좋고 생동감이 넘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직접 방문한 느낌이 팍팍 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행이 막 시작되었을 여정 미스터리 느낌인데 이런저런 흥행 요소를 모두 가져다가 인기작을 만드려는 작가의 의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장점으로는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독특한 시각이 빛나는 묘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죽은 도모나가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는 은빛 예거 르쿨루트, 집으로 돌아온 리카코가 찾은 담배는 오래된 하이라이트, 다키이의 차는 회색 코로나, 다키이가 주문한 술은 미즈와리라는 식의 디테일들이 발군입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묘사는 숨어 살게 된 리카코의 이사 선물이자 집들이 기념으로 다키이가 사온 선물입니다. 인스턴트 커피, 각설탕, 하얀 머그잔 두 개인데 정말 센스가 대단해요. 또 월경곤란증 치료약으로 경구피임약으로도 알려져 있는 필이 주요 단서로 쓰인 점은 확실히 여성 작가라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었고요. 중간에 지하철에 우연히 본 여성을 보고 스스로 남장을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그런 묘사였다 생각되네요. 남과 여, 누명을 쓴 리카코와 진범 등 정 반대 상황을 은유하여 붙인 제목도 멋집니다. 아마도 모리무라 세이이치였다면 굉장히 직접적인 제목이었을테지요.

그러나 흥행을 노리고 이런저런 요소를 모두 모아놓기는 했지만, 모든게 구태의연하다는 단점도 명확합니다. 질퍽한 정사 장면에서 시작되는 첫번째 문단부터 흥행을 노린 티가 물씬 나고요. 또 아무리 이인증이라는 병을 조금 앓고 있더라도 꽃다운 스물한살 여대생이 불장난 같은 불륜 상대, 그것도 열 일곱섯 살이나 많은 연상의 남자와 동반 자살을 쉽게 결심한다는 설정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럴거면 보다 깊은 관계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불거지는 '정사'라는 소재는 구태의연의 극치라 할 수 있지요.

정사 이후의 과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뻔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리카코와 다키이가 서로 만나게 되는 상황부터가 그러합니다. 리카코가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가는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다키이가 도모나가의 집을 찾아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니까요. 게다가 매형 이와타가 실종되고 사흘만에 범인의 집을 찾아내고, 나흘간 잠복하다가 리카코를 만나게 되는 식인데 이 정도면 경찰이 도대체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훨씬 유능하잖아요?
이어지는 전개도 작위적이고 우연에 기반한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가사이가 죽기 전 마키노 의사의 이름을 남긴게 가장 억지에요. 그냥 "유키노는 남자였다" 라고 이야기하는게 당연합니다. 의사의 입을 통해 성전환의 과정을 설득력있게 표현하려 한 작가의 의도는 알겠지만, 도가 지나쳐 이야기가 산으로 간 느낌입니다.
그 외에도 호적 위조를 통한 신분 세탁이 반복되고, 유키노의 무모한 범행이 성공리에 거듭되는 전개도 별다른 고민이 느껴지지 않아 별로였어요.

이렇게 장점, 단점이 명확한 작품으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인 해피 엔딩이라는 결말은 나쁘지 않으며 쉽게 읽히기는 하는 만큼, 이 작품으로 사회파에 입문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다키이가 요 몇 주 동안 쓴 돈이 도대체 얼마나 될지 궁금해서 대충 큰 비용만 따져 보았습니다.

  • 후쿠오카 비행기 2명 왕복
  • 리카코가 묵는 싱글룸 2박에 다키이가 묵는 스테이션 1박 호텔비
  • 꽤나 장거리 (합쳐서 시외 편도 한시간?) 왕복 택시비
  • 기차로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시즈오카행 신칸센 왕복 비용
  • 시즈오카에서 편도 삼십분 정도 택시 비용
  • 마지막 추격에서 삿포로행 비행기 편도 두 장
  • 치토세 공항에서 오카다마 공항까지 택시비
  • 메반베쓰행 비행기 편도 두 장

이를 한국 기준으로 후쿠오카는 부산, 시즈오카는 광주, 삿포로는 제주로 대체해보면 전부 백오십만원 정도 쓴 듯 합니다. 여기에 리카코의 임시 거처까지 마련해 주었고요. 1급 건축사 면허 소유자로 설계부서 내 1팀 주임이라고 하는데, 돈벌이가 꽤 괜찮은가 봅니다.

2017/03/01

학생가의 살인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학생가의 살인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헤이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지 않은채 몰락해가는 학원가 카페 '푸른 나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사에서 소모품은 되기 싫으며, 자신의 길을 찾고 싶다는 바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거리를 탈출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던 아르바이트 동료 마쓰키가 살해당했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고헤이의 연인 히로미마저 피살되고 말았다. 고헤이는 히로미의 동생 에쓰코와 손잡고, 형사 고즈키와 경쟁하듯 사건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들을 비웃듯 학생가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에 시체가 매달렸다. 피해자는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 '수국학원'의 원장 호리에였다. 수국학원은 생전 히로미가 봉사활동을 하던 곳이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추리소설로 1988년 발표된 초기작입니다.

초기작임에도 흥행 작가의 역량은 충분히 보여줍니다. 방대한 분량임에도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덕분입니다. 세세한 인물과 배경 설정도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특히 인공 지능 관련 신기술을 핵심 소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돋보입니다. 공대 출신이라는 배경을 잘 활용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알파고' 덕분에 화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는 소재인데, 무려 30년 전에 도입해서 이만큼 낡아보이지 않게 풀어낸 솜씨도 정말 대단하고요. 버블 시기, 대학만 졸업하면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상황도 아련하게 시대를 느끼게 해 줍니다. 이러한 시대와 겹쳐진 문란하면서도 대책없는 청춘들의 행동은 80년대 하루키스러웠고요.

추리적으로도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만큼은 괜찮습니다.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며 이 단서들을 바탕으로 의외의 진상 - 모든 범행은 5년전 히로미가 피아노 콩쿨에서 연주를 하지 못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진상을 드러내는 점과 결말만큼은 유명 고전 본격물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각 사건 별로는 큰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건인 마쓰키 사건은 트릭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라 시시합니다. 사건 해결도 피해자가 4년 전 센트럴 전자 주식회사에 근무했던 당시 접촉했던 인물을 찾아낸 경찰의 활약 덕분이라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재미는 없습니다.

두 번째 히로미 사건은 밀실 트릭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언급되지만 허술합니다. 죽은 히로미가 6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발견되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출발한 이후 3층에 잠깐 멈췄다가 6층으로 가서 내려오지 않았고, 계단으로는 고스케가 이동하고 있어서 범인이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상황입니다만... 여러모로 완벽한 밀실로 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작중 에쓰코의 언급대로 3층, 또는 6층에 거주하는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고, 옥상으로 도망친 후 후일을 도모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계단을 올라가면서 층별 복도를 과연 그렇게까지 유심히 볼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칼에 찔린 히로미가 엘리베이터로 도망쳐 6층을 누른 뒤 사망했다는 트릭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루미놀 검사 등의 현장 검증으로 경찰이 범행 장소를 알아내지 못한건 이해하기 어려우며, 구태여 꽃다발을 끝까지 들고 있던 이유도 애매하거든요.

또 첫 번째 , 두 번째 사건을 연결하는 잡지인 "사이언스 논픽션"도 거슬립니다. 잡지 안에 각서가 들어있다는 것을 이하라가 알아챈 이유도 석연치 않고(죽기전에 마쓰키가 실토했을까요?), 각서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하거든요. 우선 이하라가 히로미에게서 회수하는데 성공했다면, 마지막에 고스케를 죽이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장 유력한 증거가 없어진 것이니까요. 반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면 잡지 속에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그것도 이상하고요.

그리고 마지막 사건이자 세 번째 사건인 호리에 원장 사건은 이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트릭없이 우연이 개입되어 미궁에 빠졌을 뿐인 탓입니다. 만약 서점 주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준코의 범행은 여기서 드러났을 거에요. 이 사건은 사건의 동기를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작위적인 전개도 도가 지나칩니다. 만약 이하라가 히로미를 살해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로미 살해는 아무리 준코가 안배했다 하더라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이 겹쳐있습니다. 히로미가 도주에 성공했을 수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준코는 대체 어쩔 셈이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흥행작가다운 면모는 충분히 과시하는 작품입니다. 킬링타임용으로 권해드립니다.

2020/06/21

Q.E.D Iff 증명종료 7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7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6권에서의 실망을 뒤로 하고 새롭게 읽은 7권. 간만에 로키, 에바와 뭉쳐 인도에서 수학 천재 소년을 찾고 학교 선생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무지개 너머의 라마누잔", 그리고 전후 오사카 흥행계에서 벌어졌던 수수께끼와 같은 사건의 진상을 풀어내는 "어떤 흥행사"라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강력 범죄와 일상계 구성이 아니라서 조금 특이했는데, 전권보다는 대체로 괜찮더군요. 다행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dlqslek. 아주 빼어나지는 않더라도, 기대했던 만큼의 재미를 선사하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무지개 너머의 라마누잔" 

인도에서 아이들을 가르키는 라비는 아르쟌이라는 천재 소년을 발견하고 대학 이사장에게 장학금을 요청했지만,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아르쟌에게 장학금을 주어서 제 2의 라마누잔 (인도의 천재 수학자)으로 만들겠다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려는 에바의 부탁으로 로키, 토마, 가나는 인도로 향하는데...

초반부 전개와는 다르게 아르쟌을 찾는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핵심은 라비 선생이 살해당한 이유, 그리고 대학 이사장이 장학금 주는걸 주저한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일단, 라비 선생이 살해당한건 이사장의 대학 진학 뒷거래 증거를 가지고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사장이 뇌물과 뒷 돈 운운하는 장면 등의 복선으로 설명됩니다만 공정함, 정교함 측면에서는 좀 약해요. 고의는 아니었다는 이사장의 설명도 구차하고요. 

그러나 장학금 주는걸 주저한 이유는 놀랍습니다. 라비 선생이 찾은 수학 천재 소년은 아르쟌이 무려 6번째인데, 그 전의 아이들은 천재가 아니라 단지 조숙했을 뿐이라는거죠. 결국 중압감으로 인해 2명은 자퇴하고, 1명은 자살해버려서 이사장은 아이들이 짊어질 부담에 대해 고민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와 닿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재능으로 승부하는 세계에서는 재능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탓에 조금 뒤떨어지면 금방 좌절할 수 밖에 없다'는건 저 역시 미술 대학교를 별볼일 없는 능력으로 겨우 졸업한 탓에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아울러 인도 수학자 라마누잔과 그의 발견을 테마로 하고 있고, 라비 선생이 이사장 비리의 증거가 어디있는지를 남긴 '4번째 쌍동이'라는 소수 관련 정보도 Q.E.D 스러워서 좋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르쟌에게 너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라는 토마의 모습도 토마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냉정해 보일 수는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죠. 누군가의 말, 혹은 유품(라비 선생의 반지)은 아무 도움이나 보증도 되지 않는건 당연하니까요.

그러나 아르쟌이 갱단에게 살해당한 라비 선생의 복수를 위해 갱단 사이의 항쟁을 일부러 일으킨 사건은 영 별로였어요. 위에서 좋다고 이야기한 내용 정도로 끝냈으면 좋았을텐데, 아이들 장난같은 행위로 7명이 죽고, 수십명이 중상을 입는 갱단 항쟁이 벌어진다는건 너무 막 나간게 아닌가 싶거든요. 항쟁을 일으킨 결정적 방법인 라비 선생의 유령 모습 조작도 너무 유치해서, 이게 과연 가능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수학적인 정보 전달과 천재 소년의 장학금 관련 이야기는 여러모로 볼 만 했지만, 이에 얽힌 갱단 이야기는 나오지 않느니만 못했습니다. 갱단 이야기를 빼고 일상계처럼 정리했다면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했을겁니다.

"어떤 흥행사"

1964년, 오사카 흥행계의 큰손 유메다가 분신 자살했지만 불에 탄 차만 발견되고 사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유메다 사건을 추적하는 역사 학자이자 소설가 후지와라는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을 유메다와 친했던 야쿠자 야마가와의 일기가 경매에 나온걸 알고 경매에 참가했다. 그 곳에서 우연히 유메다와 관련된 기녀 츠루코에 대해 조사하는 프리라이터 가네모리와 토마, 가나와 만났고, 토마는 작가들의 이야기와 일기 내용을 들은 뒤 유메다 사건의 진상을 말해준다.

사건의 핵심 수수께끼는 세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흥행사 유메다 메지로에 대한 이미지가 왜 말하는 사람마다 달랐는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야망과 배포가 큰 쾌남아인데, 어떤 사람 (특히 야마가와)에게는 무능력하고 소심한 인물로 비추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지요.
두 번째는 유메다와 만담가 츠바메, 그리고 기녀 츠루코 3명의 관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떼 놓을 수 없는 사이였고, 어떤 사람들은 서로 얼굴도 안 보는 사이라고 했는데 진상은 무엇인지? 입니다.
세 번째는 차에서 사체가 사라진 수수께끼에 대한 것이고요. 

이에 대한 토마의 추리는 대담합니다. 유메다와 츠바메, 그리고 기녀 츠루코가 동일인물이었다는 겁니다. 유메다와 츠바메가 떼 놓을 수 없었지만 서로 얼굴도 보지 않았다는 수수께끼는 그렇게 해결됩니다. 츠루코가 모두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유메다와 츠루코가 후대 작가가 추적할만큼의 무용담을 남긴 것도, 가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반대로, 이들을 깊게 알게 된 야마가와에게는 그들의 진실된 능력이 보인것이고요.

하지만 이 트릭을 밝혀낸 핵심 단서인 야마가와의 일기 속 묘사 - '어두웠던 극장에서 야마가와 옆에 유메다가 나타날 수 있었던 건 밝은 무대 위에서 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메다는 무대 위에 있었던 츠바메와 동일인물이다' - 는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반론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또 유메다와 츠바메가 동일 인물이라는건 그렇다 쳐도, 후대 작가가 추적할만큼 그 매력과 인기가 남달랐던 츠루코마저 남자가 변장했다는 건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이 정도의 변장 능력이 있었다면, 흥행사로는 실패했더라도 먹고사는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텐데 빚에 허덕이다가 야마가와의 일기마저 훔쳐 팔아넘길 정도로 몰락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네요. 때문에 대담한 추리에 걸맞는 완성도를 지녔다고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래도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전후 고도 성장기 오사카 흥행계를 그린 묘사는 괜찮거든요. 특히 유메다, 아니 츠바메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흥행업에 대한 미련으로 친절을 배푼 배포 큰 야쿠자 야마가와는 꽤나 멋지게 그려집니다. "타이거 & 드래곤"의 야쿠자 야마자키와 좀 비슷한데, 그보다는 훨씬 큰 남자인 셈이지요.

결론적으로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하고 트릭반전도 남다른 점은 있습니다. 설득력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평작 수준은 됩니다.

2005/05/04

초고층 호텔 살인사건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3점

초고층 호텔 살인사건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김정우 옮김/해문출판사

크리스마스 이브, 동양 최대의 호텔인 이하라 호텔의 개장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리던 중, 이하라 호텔의 거대한 빛의 십자가 모양의 조명 앞으로 사람이 떨어져 죽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하게 된다.
피해자는 미국 넬슨사에서 파견된 이하라 호텔의 지배인 토마스 소렌센. 그의 죽음은 살인사건으로 보이지만 그가 투숙해 있던 16층의 방은 사실상 밀실 상태여서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그 뒤, 이하라 그룹 사장 비서 오자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오자와의 부하 직원의 증언으로 경찰은 소렌센 사건에서의 트릭 및 소렌센-오자와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철벽의 알리바이를 깨지 못해 고민하던 중, 이하라 그룹의 라이벌인 부용은행의 차남 고레나리 도시히코마저 밀실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며, 경찰은 이 세 사건의 연관성을 연구하여 철벽의 알리바이와 밀실트릭을 깨트리고 진범을 검거하게 된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 꽤 유명한 작품이지만 예전 번역본은 구하기가 어려워 손을 놓고 있던 차에 해문의 미스테리 베스트로 출간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1971년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고, 이 작가의 초기작은 꽤 괜찮은 작품이 많아 읽기 전 부터 상당히 기대를 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작가의 후기작은 작품이라 부르기 미안한 수준의 작품마저 양산한 작가라서.....

여튼, 이전에 읽었던 "고층의 사각"과 유사하다는 것이 눈에 먼저 뜨이네요. 호텔에서 실제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설정이 꽤나 요긴하게 쓰이는 점, 그리고 고층의 호텔 밀실이라는 점은 판박이로 보여져요.
그러나 데뷰작 이후 어느정도 내공이 쌓인 덕인지, 인물과 드라마는 훨씬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무엇보다도 호텔에서 발생한 밀실 살인 트릭과 시간차를 이용한 장소이동 알리바이 트릭, 그리고 체인으로 밀실을 만드는 3종의 트릭이 등장해서 추리적인 재미를 마음껏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최대의 장점이겠죠.
허나 "고층의 사각"에 비해 너무 흥행을 의식한 티가 나는 것은 감점 요소입니다. 난잡한 상류계층의 생활과 범죄를 그리는 것이야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의 특징이라 치더라도 이 작품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만화같은 느낌마저 들거든요. 인물 및 배경 설정에서 현실감이 너무 떨어지기도 하고요. 모리무라 작품에서 항상 느껴왔던 것이지만 이러한 설정들이 좋은 트릭과 전개를 너무 흐리고 있어서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냥 트릭만 놓고 본다면 모리무라 세이이치 작품에서도 꽤 높은 수준이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면 첫번째 사건 -초고층 호텔 살인사건- 은 제목으로까지 쓰인 임팩트 있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트릭은 수긍하기 어려운, 그냥저냥한 수준이었지만 다른 2개의 트릭은 상당히 재미있고 깔끔하니까요. 특히나 2번째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아주 좋은 편인데, 기발하기도 하거니와 범인들이 보다 치밀한 함정을 파기 위한 공작을 벌이다가 오히려 꼬리를 잡히게 되는 전개가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작가의 최고 대표작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지만 추리작가로서의 모리무라 세이이치를 잘 느낄 수 있고, 길이도 그다지 길지 않아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심심풀이 독서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생각됩니다.
아울러 접하기 힘든 작품을 과감하게 선정해서 소개해 주는 점, 거기에 계보도까지 그려놓고 시간차 트릭을 깨기위한 시간대를 표로 구성하여 삽입한 출판사의 센스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역시 추리전문 출판사는 다르군요.

2007/04/17

무죄추정 - 스코트 터로우 / 최승자 : 별점 4점

무죄추정 1 스콧 터로 지음, 한정아 옮김/황금가지

킨들군의 검사장 레이몬드의 수석 부관이자 심복인 러스티는 검사장 선거의 혼란한 와중에서 살해당한 동료 검사이자 불륜 상대였던 캐롤린 살해사건의 지휘를 맡는다. 그러나 선거에서 레이몬드가 패한 뒤, 러스티의 옛 동료 니코는 자신의 심복 토미 몰토의 조사에 의해 캐롤린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기소되고 레이몬드는 유능한 변호사 스턴에게 의뢰하여 법정에서의 싸움을 벌여나간다. 재판이 진행될 수록 사건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B서류의 정체와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져나가는데...

이번에 개인 사정으로 부산에 잠깐 갔다가 들른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이 미스테리가 굉장해"의 과거 18년간의 베스트 10에도 뽑힌 작품이라 궁금했었는데 찾아내고 반가운 마음에 서슴없이 구입하게 되었네요. 재출간되긴 하지만 제가 구입한 것은 예전의 절판본입니다.

검찰이 주인공 러스티를 기소하여 법정에서 승부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원래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과 사건 내내 강조되는 "B서류"의 정체라는 두가지의 수수께끼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서술되는 복잡한 구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으로 법정 싸움 장면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해결 과정 역시 타당할 뿐 아니라 살인사건의 범인과 B서류의 의미 역시 사건이나 중요 복선과 연관되어 명쾌하게 처리되고 있어서 추리적으로 무척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냐에 대한 것은 마지막까지 독자를 속이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어서 더욱 마음에 들더군요.
처음 봤을때는 여러모로 제가 싫어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 보이는 책이었지만 읽어보니 역시나 명불허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짜여진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평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사건이 엽기 강간사건으로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어라? 이거 흥행을 너무 의식한 의도적 설정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기도 했는데 결국 충분히 이해 가능한 범행 방식으로 밝혀지는 결말에서 어느새 작가의 의도적인 속임수에 걸려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 참 놀라왔습니다. 

또 작가 프로필을 보니 역시나 존 그리샴이나 얼 스탠리 가드너 같이 법조인, 특히 이 책의 주인공인 러스티와 같이 검사 출신이던데 그래서인지 책의 중요한 설정 중 하나인 검사장 선거와 검사들간의 세력 다툼, 판사와의 관계 등 재미난 요소들이 참으로 실감나게 묘사되는 것도 큰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검사 출신답게 다른 법조인 작가인 존 그리샴, 얼 스탠리 가드너의 소설들은 대부분 변호사가 주인공이었었는데 검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 특이했고요.

지나칠 정도로 길다라는 것은 좀 부담되는 요소였고 재판이 시작되기 전 부분인 초반부는 좀 지루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감수할만한 수준이었어요. 이 책이 작가의 "킨들카운티(군)" 시리즈의 한권이라고 하는데 다른 책도 궁금해지는군요.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번역은 좀 불만스럽네요. 워낙 길고 복잡한 내용이라 번역이 쉽진 않았겠지만 도저히 몰입하기가 힘들정도로 문맥이 엉망이었습니다. 이번에 재 출간된 책은 어떨지 궁금해지는데, 번역이 괜찮다면 새 판본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2017/10/01

미저리 - 스티븐 킹 / 조재형 : 별점 3점

미저리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황금가지

격조했습니다. 바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통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거든요. 연휴도 되었으니 다시 달려 봐야겠네요.

이 책은 최근 개봉한 "IT(그것)"의 대흥행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스티븐 킹의 대장편입니다. 한창 원숙한 필력을 뽐내던 1980년대 중반(1987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스티븐 킹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1990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영화화되었는데, 주인공 캐시 베이츠의 명연기로 일세를 풍미하기도 했지요. 영화를 오래전에 감상한 덕에 그간 읽어볼 생각을 하지는 못했는데, 연휴를 맞아 밀린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집어들었습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스티븐 킹의 스타일입니다. 작가의 특기 중 특기인 궁지에 몰리고 위기에 빠진 주인공의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전편에 걸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가공할만한 악의 덩어리 애니도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찾아봄직한 크리쳐들, 그리고 싸이코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고요. 아울러 폴과 경찰 등에게 벌어지는 잔혹한 폭력을 상세하게 그려낸 고어 묘사로 말초적인 공포심을 자극하는 것도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긴장감을 자아내는 솜씨가 일품이라 몰입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집 한 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전부라 스케일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상황과 심리 묘사를 통해 긴장감을 자아내는 전개가 아주 빼어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애니의 집에 젊은 경찰이 찾아왔을 때 폴의 심리 묘사 ("아프리카!!!!")는 정말 최고로 치고 싶어요. 말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행동해야 하는 딜레마의 순간을 이렇게 잘 표현한 작품은 달리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과연 거장은 거장이에요.

또 전형적이라고 하였지만, 확실한 차별화 요소들도 재미를 더합니다. 미친 광팬 애니에게 사로잡혀 그녀만을 위한 새로운 소설을 써야 하는 신세가 된 소설가 폴에 대한 설정부터가 아주 독특해요. 광팬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는 지금에는 딱히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분명 아주 참신한 이야기였음이 분명합니다. 비슷한 설정의 영화 "더 팬"이 발표된 것이 1997년이니까요.
게다가 애니가 단순히 세헤라자드에게 이야기를 듣는 왕이 아니라, "미저리"의 광팬으로 상세한 내용을 꿰뚫고 있다는 것도 효과적으로 활용됩니다. 폴이 대충 쓴 도입부만 가지고 '이야기가 불공정하다'고 지적하여 폴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일종의 편집자 역할을 한다는건데 이 역시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어요. 애니가 이야기하는 '로켓맨이 비행기 좌석 밑 낙하산을 발견하는 것'을 폴이 철지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생각하여 비웃다가, 결국 '공정하다'는 말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전개로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도 아주 그럴듯했고요. 애니와 폴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끄집어낸 명장면이라 생각됩니다.
탄탄한 캐릭터 설정으로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작가적인 자존심을 지키려 애쓰지만 결국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폴의 심리묘사는 그 중에서도 아주 돋보였어요. 애니가 그냥 미친게 아니라 나름의 루틴, 철학과 삶이 있다는 것으로 보다 공포심을 이끌어내는 묘사도 훌륭했고요.

또 몇가지 장치를 통해, 폴이 애니에게 휘둘리는 것에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도 좋습니다. 첫 번째는 자동차 사고로 폴의 두 다리가 박살나다시피 한것, 두 번째는 이 상처 때문에 애니가 공급해주는 진통제 노브릴에 폴이 중독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여기에 애니가 지닌 흉폭한 과거와 때때로 엿보이는 잔인한 행동 묘사가 더해져, 폴은 완벽한 애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킹의 최고작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작위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에요. 폴이 애니를 죽이기 위해 식칼을 하나 숨겨놓은 것이 들통나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하필이면 바로 그날 들통난다는게 쉽게 와 닿지는 않았어요. 애니가 저지른 과거의 범죄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가는 상황이 아니었고요.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애니를 제압하는 장면 묘사는 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돌아온 미저리" 원고를 태우는 것으로 충격을 준 뒤 습격하는데, 우연이 결합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쉽게(?) 결판이 날 것이라면 앞서 있었던 생고생은 대체 뭔가 싶거든요. 타자기로 근력을 조금 붙인 뒤 습격해도 마찬가지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뭘 해도 죽을거, 고생이라도 좀 덜 하는게 낫지 싶은데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애니의 환영에 시달리며, 소설가로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결말은 완전 사족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대표작 중 한편이라고 칭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임에도 읽는게 전혀 힘들지 않는 몰입감을 선사해 주니까요. 재미 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킹의 쫄깃한 심리 묘사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1/03

황새 - 장 크로스토프 그랑제 / 이재형 : 별점 2.5점

황새 1 - 4점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랜덤하우스중앙)

루이 앙티오슈는 공부에 지친 육신을 환기시키고자 양부모가 소개시켜준 막스 뵘이라는 조류학자의 "황새 추적" 아르바이트에 응한다. 막스 뵘이 고리를 끼운 황새들이 둥지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황새떼를 추적하여 밝혀내는 것이 목적, 이후 막스 뵘의 급작스럽게 사망 이후 죽음에 대한 의혹이 깊어지나 루이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중간에 만난 집시 조류학자와 이스라엘 청년의 의문의 죽음 (심장이 사라지고 난도질 당한 시체)을 접하고 막스 뵘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재산,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거대 의료 봉사 조직에 대한 의문이 생긴 뒤 루이는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황새들의 기착지인 중앙아프리카에 도착한 루이는 막스 뵘이 황새 다리에 끼운 고리를 통해 중앙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다이아몬드를 밀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새로운 심장이 없어진 변사체를 발견한 뒤 진정한 조직의 실체와 흑막을 알게 된다...

프랑스작가의 스릴러물. 방대한 조사와 기발한 아이디어가 잘 결합된 깔끔한 전개의 작품입니다. 특히 황새떼의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분석하여 "1. 황새가 운반할 수 있다 2.돈이 된다 3. 그 나라의 특산품이다"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물건으로 "다이아몬드"를 설정한 아이디어가 신선합니다. 이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작품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죠.
묘사도 괜찮아서 불가리아의 집시들과 이스라엘, 중앙 아프리카는 아주 실감나서 작가의 엄청난 사전 조사를 가늠케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묘사는 정말 대단했고요. 뭐라 표현하기도 어렵네요.

하지만 심장이 사라진 시체들과 진정한 조직의 흑막을 연결시키는 부분이 너무 작위적인 것은 단점입니다. 대상자들이 우연찮게 황새떼를 쫓는 루이와 접촉하게 되는 설정은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거든요. 또 진정한 흑막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그야말로 "악의 화신"같은 인물로 그려지는데 묘사가 허황되고 만화적이라 앞부분의 치밀하고 교묘한 설정을 다 말아먹습니다. 요새 일본 만화도 이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악의 정체가 얼마전에 읽은 "철의 장미"와 똑같다는 것도 저에게는 조금 아쉬웠고요.
거기에 더해 보스와의 최종 결전에서의 황당함은 그야말로 어이 상실이었어요. 앞부분에 잠깐 등장했던 인물의 혜성과도 같은 등장으로 해결되는데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질구레한 묘사와 설명 없이 그냥 루이가 끝내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텐데, 이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당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이외에도 흥행을 의식한 듯한 불필요한 요소들 -이스라엘 여성 사라와의 로맨스나 아프리카에서 동행한 티나라는 여성과의 정사 장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잔인한 묘사들 등- 이 많은 것도 불만스러웠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작가의 "미숙함"이 티가 나서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전체적인 설정과 짜임새가 제법 잘 살아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기는 합니다. 우직하게 한길로 밀어 붙이는 원숙함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데뷰작이라니 뭐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만 하겠죠. 워낙 설정이 좋았고 묘사력도 수준급인만큼 후속작을 기대해 봅니다.

2012/04/11

마리오네트의 덫 - 아카가와 지로 / 이용택 : 별점 1점

마리오네트의 덫 - 2점
아카가와 지로 지음, 이용택 옮김/리버스맵

프랑스어 전공 대학원생 우에다 슈이치는 지도교수의 소개로 외딴 곳에 위치한 미네기시 집안의 대저택에서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일하던 중 슈이치는 우연히 미네기시 집안의 막내딸 마사코가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연쇄살인범이었다... 

마사코의 연쇄살인극이 펼쳐지는 동안 슈이치의 약혼녀 미나코는 슈이치를 구해내기 위해 미네기시 집안 마약 밀매의 본거지인 요양소로 잠입하는데...

아카가와 지로의 초기 대표작 중 한 편인 범죄 스릴러. 요새 아카가와 지로 출판 러시에 힘입어 정발되었네요. 사실 명성에 비하면 그리 높은 퀄리티의 작품을 쓰는 작가는 아닌, 일본의 "시드니 셀던" 정도의 작가로 알고 있어서 별로 챙겨 읽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읽고 난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마약왕의 외딴 대저택을 무대로 미모의 세 자매(흑묘관인가?)가 등장하고, 자매 중 큰 딸은 색녀이고 막내는 광기 어린 연쇄살인마라는, 현실성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는 설정을 바탕으로 치밀하지도 않은 즉흥적인 연쇄살인을 모래성처럼 쌓아 올린데다가, 중간중간에는 정사 신 같은 자극적인 묘사를 끼워 넣은 싸구려 3류 소설입니다. 십여 페이지에 한 번씩은 자극적인 장면이 등장하니 3류 소설의 교과서라 해도 되겠어요. 물론 자극적인 장면을 등장시킨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나름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했던 '로망 포르노'라는 장르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은 그냥 자극과 흥행이 될 만한 요소만 집중적으로 파고든 펄프 픽션에 불과합니다.

추리적으로 본다면 애초부터 추리소설이라고 하기는 힘들고, 미치광이 연쇄 살인범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서스펜스 스릴러로 부를 수 있으나 이야기 자체가 허점투성이라 점수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전무합니다. 슈이치가 마사코를 조종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것이 가장 큰 예이겠죠. 그 외의 설정과 여러 사건들은 솔직히 성인 만화라고 해도 유치할 수준이고요. 마지막에 반전이 있기는 하나, 반전 역시도 설득력이 전무한 만화 같은 이야기라는 문제점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 기대 수준을 거의 맞추긴 했습니다. 그만큼 애초에 기대치가 낮기는 했지만요. 그러나 제 기대치보다도 형편없었다는 건 좀 문제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혹 궁금하신 분들께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남으셔도 세상에는 훨씬 유익한 것이 많으니 이 책만큼은 관심 두지 않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왜 이 작가가 일본에서(나마) 인기가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더 깊어지네요.

2004/02/22

태극기 휘날리며 - 강제규 : 별점 3점


드디어 봤습니다. 정말 대단한 흥행을 하고 있어서 3주동안 계속 예매까지 매진이라 보지도 못했는데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종인이형 덕분에 보게 되었습니다. (종인이형 고마워!)

다들 알고계실 스토리는 생략하고요, 일단 이 영화는 고생해서, 돈들여서 찍은 티가 팍팍나는 영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때깔에 어울리게 6.25 라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좌-우 어느쪽에도 걸치지 않고, 단순히 이념 때문에 죽어나가며 광기어린 살인마로 돌변하는 주인공들과 그 희생양들을 그린 각본도 굉장히 좋습니다, 한마디로 “Well-Made”영화입니다. 국내 블록버스터 영화중에서 이만한 각본의 완성도를 갖춘 작품은 처음인 것 같네요. 역시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강제규 감독 답습니다.
캐스팅도 완벽합니다. 요새 “연기파” 배우로 변해가는 장동건의 연기야 기본은 먹어준다고 해도 원빈의 연기가 의외로 뛰어나더군요. 더군다나 둘다 “꽃미남” 계보라서 그런지 형제라는 설정도 별로 어설프지 않고요. 조연들 (기억나는 건 공형진 뿐이지만…)의 연기도 평균이상은 다들 해 주고 있습니다. 우정출연이라는 최민식, 김수로도 기억에 남고요.
특히 감동과 눈물의 폭풍! 마지막의 감동의 도가니탕(^^)에서는 저도 눈물을 찔끔 흘렸을 만큼 감동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늙은 진석의 모습과 진석이 형의 유골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은 좀 사족이라 생각되었고 몇몇 CG가 튀는 것은 조금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별로 흠 잡을데 없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이런 블록버스터가 나와주는군요. 한마디로 흥행할 만한 영화가 흥행한다는 생각입니다.

딴지일보의 모 기자는 이 영화에 중간점수를 주며 기존의 전쟁영화의 룰을 답습하며 기존 헐리우드 영화와 비스무레 하다고 했는데 저는 6.25의 특수성, 즉 같은 동포들끼리 별다른 이유없이 살육하는 비참함과 이념의 허무함을 잘 그렸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꽤 많은 스크린으로 개봉한다는 뉴스를 어디선가 보았는데 히트쳤으면 좋겠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요사이 “빨갱이”운운 하는 보수 우익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더군요. 저도 중학교때까지 “때려잡자 공산당” 포스터를 그리고 표어를 만들었던 세대인데(평화의 댐 성금까지 냈답니다. 젠장…) 결국 우리는 다 형제 아니겠습니까….

2018/04/15

기린의 날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기린의 날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혼바시 다리에서 건축 부품 제조 회사 간부인 아오야기가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 용의자 야시마 후유키는 도주 중 교통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고, 경찰은 아오야기가 근무하던 공장의 산재 은폐가 동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가가는 사건의 진짜 동기가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수사를 계속하는데...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가가

히가시노 게이고가가 형사 시리즈 장편입니다. 니혼바시 다리 중간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된 중년 남성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읽기 편하다는 겁니다. 500여 페이지에 가까운 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스토리텔러,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지요. 독자의 흥미를 계속 잡아 끄는 전개가 흡입력의 비결이고요.

  • 피해자 아오야기가 왜 사건 현장을 방문했는지?
  • 아오야기가 칠복신 신사 순례를 한 이유는?
  • 아오야기가 신사 순례 때 종이학을 접어 바친 이유는?
  • 종이학은 왜 노란색부터 접어서 바쳤는지?
와 같이 수수께끼 하나를 풀면 뒤이어 다른 수수께끼가 등장하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전개는 오래 전 일간지 연재물을 연상케도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잘 짜여진 이야기로 작가의 치밀한 구상과 계산이 돋보입니다. 

아울러 이런 아오야기 관련 수수께끼에 더해 유력 용의자 야시마에 얽힌 수수께끼도 마찬가지입니다.

  • 야시마와 아오야기의 관계는? 
  • 야시마는 어떻게 아오야기를 만났는지? 
  • 흉기인 버터플라이 나이프의 입수 경로는? 

같이 단계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산재 은폐, 오래전 발생한 안전 사고의 은폐, 의도하지는 않은 아오야기 살인 사건 은폐라는 세 종류의 은폐가 핵심이 되는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비밀은 없고, 진실은 밝혀진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히가시노 게이고스러운 결말도 마음에 들고요. 역시나 흥행을 아는 작가다왔습니다.
사건과 함께 나름대로 성장해 나가는 가가의 모습도 볼 만 합니다. 아버지의 평소 이야기와는 다르게 죽을 때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게 살아있는 사람의 의무라는 말은 아주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와는 다른, 전통적인 일본 미스터리 스타일이 엿보인다는 점도 독특합니다. 우선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물씬 난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도쿄를 무대로 한 작품임에도 "신참자" 의 무대와 같은 니혼바시 주변, 이른바 칠복신 신사 순례길을 바탕으로 한 탐문 수사가 길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도쿄 사는 사람들에게야 별 거 아니겠지만 다른 지방, 타국의 독자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이 충만한 묘사들이라 절로 눈이 가더군요. 가가의 추천 요리집과 요리도 몇 개 등장하는데 그 중 메밀 국수는 저도 꼭 한 번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70년대를 주름잡았던 사회파 미스터리 느낌도 강합니다. 산재 은폐와 이를 피해자 아오야기에게 뒤집어 씌우는 회사의 행태, 그리고 이 때문에 살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억울한 비난이 쏟아지게 만드는 잘못된 매스컴의 행태 묘사 때문입니다. 산재 은폐건은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 겉핥기 식으로 짚고 넘어가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만, 이를 깊숙히 파고들면 가볍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었을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읽는 재미도 있고,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볼거리도 풍성한 작품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보다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수사만으로 거의 모든게 해결되어서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입니다.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찰 소설, 수사 소설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릴 정도에요. 용의자 야시마가 도주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이유부터 경찰 포위망에 걸렸기 때문이고, 이후의 이야기도 추리보다는 수사 결과에 따라 진행될 뿐이거든요. 피해자와 하야마의 접점이 공장이라는걸 알아낸 경찰이 탐문 수사를 갔을 때 동료가 몰래 고발해서 산재 은폐건이 부각되고, 아오야기와 하야마의 범행 당일 행적을 뒤쫓다가 결국 그 날 아오야기가 만난건 하야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가가와 마츠야마가 칠복신 신사 순례라는 피해자 행적 파악에 성공하지만 이 역시 추리라기 보다는 우직하게 발로 걸어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사 과정도 재미가 없는건 아닙니다. 가가와 동행하는 마쓰미야의 "헛걸음을 얼마냐 하느냐에 따라 수사 결과가 달라진다"는 대사가 와 닿을 정도로 발로 뛰는 꼼꼼한 수사의 디테일도 대단하고요.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하아먀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으리라 추리하여, 결국 하야마가 피해자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걸 밝혀내는 과정은 독자에게도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짜릿하고 멋졌습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은 진상입니다. 일단 범행 당일 피해자와 함께 있던 범인이 들통나지 않은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합니다. 카페에서 무려 2시간 정도나 함께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등 노출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이니까요. 여기에 지나가던 하야마가 '우연히' 피해자가 죽어가는걸 보고 가방과 지갑을 들고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가 나서 의식 불명이 되어 죽었다? 이건 우주의 운이 다 모이기 전에는 불가능할 거에요.
피해자의 유품인 디카에 종이학 사진이 남아있지 않았단 것도 의문이며, 핸드폰 기록만 확인하고 접속했던 블로그 URL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종이학 사진과 '기린의 날개' 블로그를 피해자의 행적과 함께 이으면 알 수 없던 피해자 행동의 의미가 드러나 사건 수사의 또다른 핵심 축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이를 짚어내지 못한 건 단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작가의 편의적 전개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이는 칠복신 순례의 핵심이 '순산 기원' 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하야마의 동거인 가오리의 임신과 연계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도 한 몫 단단히 하고 있고요.
피해자가 니혼바시 다리 기린 상까지 구태여 찾아가 죽은 것도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이럴 힘이 남아 있었다면 도움을 요청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기린상" 을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억지가 너무 지나쳤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 단계 성장하는 가가 형사의 모습은 마음에 들고 이런저런 볼거리는 많지만 추리 소설로서는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만큼 시리즈 팬이시라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5/12/12

전지적 독자 시점 (2025) - 김병우 : 별점 2점

"나 혼자만 레벨업"과 쌍벽의 인기를 누리는 판타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입니다. 세계가 갑자기 '성좌'들의 관전용 무대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 속 현실로 탈바꿈한 상황에서, 소설의 유일한 독자였던 김독자가 소설 속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는 설정의 작품이지요.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기존 회귀물, 전생물과는 약간 차별화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준 설정입니다. 지난 주에 넷플릭스에 업데이트 되었길래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만 놓고 보면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액션 판타지 장르로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무난한 편이에요. 안효섭(김독자 역), 이민호(유중혁 역) 두 주연 배우의 캐스팅도 잘 어울립니다. 두 사람의 호흡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잘 알겠더라고요. 단점이 뚜렷하게 느껴졌거든요. 우선 CG가 전반적으로 부족합니다. 게임 동영상이나 철지난 중국 무협 영화를 보는 듯해서 몰입을 방해하는데, 그 중에서도 절정부인 최종 화룡과의 결전 장면이 가장 실망스럽습니다. 몬스터들의 디자인 역시 현실감 없이 게임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라 위협감도,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액션도 특별히 합이 잘 맞는다던가, 서로의 특성을 살려 위기를 극복하는 식으로 그려져 있지 못합니다. 유중호의 이기어검술(?) 등 여러 스킬들은 모두 중국 무협 영화 그대로라서 새로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야기 구성도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단순한 게임 스타일로, 이를 극복하면서 나오는 반전이나 복선은 거의 없습니다. 김독자가 소설 내용을 알고 있다는게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고요. 오히려 금호역에서 천인호를 쫓다가 결계에 갇혀 죽기 직전, 갑자기 난입한 이지혜가 구해주는 식으로 우연과 운에 의지한 전개를 보이는 설정 구멍만 더 크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화룡과의 결전에서 유중호가 죽는 장면도 뜬금없습니다. 유중호가 죽은 것 외에는 김독자의 작전대로 흘러간 건데,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실망하고 감정선을 무겁게 끌고 가는 건 납득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추가 아이템을 얻어 칼을 완성해서 화룡을 물리치는데, 그럼 그 전의 작전은 어쩔 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부족한건 이야기 완성도 뿐만이 아닙니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현재 상황이 어떤 구조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명이 부족합니다. '성좌'의 무대라는 전제는 나오지만, 코인, 아이템, 스킬 같은 기본 설정조차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게임적인 설정이라서 그냥 넘어갔다면, 이 영화를 과연 대중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원작과 다른 설정도 문제입니다. 특히 김독자와 작가가 일종의 '게임'을 하는 듯한 설정은 최악입니다. 작가가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다면, 김독자의 전능한 예지 능력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부분이었어요. 여성 캐릭터들도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이 캐릭터성을 갖지 못한 뻔한 설정인데다가, 이지혜는 왜 등장했는지조차 불분명할 정도입니다. 연기도 어색한 부분이 많고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출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길영이가 코피를 쏟으며 사마귀를 조종하고, 그 장면을 본 이현성이 각성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유치합니다. 

결론적으로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 볼 만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원작의 팬이라면 실망할 수 있고, 원작을 모른다면 초반 설정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CG 퀄리티, 각색 방향, 연출 등 여러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04/12/23

철의 장미 - 브리지트 오베르 : 별점 2.5점

철의 장미 - 6점 브리지트 오베르/고려원(고려원미디어)

제네바 교외에서 평화롭게 사는, 겉으로는 SELECOM이라는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려진 조르주 리옹은 사실은 전문 은행강도인 "4총사"의 멤버이다. 하지만 자기 몫으로 5백만 벨기에 프랑이 걸린 큰 건을 성공한 직후 집에 있어야 할 자신의 아내인 마르타가 브뤼셀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아내의 배신을 직감한다. 아내의 이중생활을 추적하면서 4총사도 분열되어 한명씩 살해되는 와중에 조르주는 또다른 세력이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조직을 추적하던 조르주는 모든 사건에 자신의 쌍동이 동생인 그레고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동독 정보부에서 일하던 그레고리가 나치의 재산과 세력을 계승한 "철의 장미"라는 조직의 조직원 명단을 빼낸 후 사라진 사실과 동생을 쫓던 조직이 자신을 동생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마지막에 조직의 행동대장 격인 실베르만과 자신의 정신과 주치의였던 란즈만과 대면한 자리에서 마르타의 도움으로 빠져나오게 되며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간만에 읽은 프랑스 작가의 작품으로 이젠 너무 많이 나와서 고색창연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나치잔당"을 다룬 스릴러물입니다.

좋은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숨돌릴 틈 없이 읽게되는 재미 만큼은 확실했습니다. 특히 초반부의 은행강도 사건에서의 치밀함이나 조르주가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을 그때 그때의 기지로 넘기는 부분, "철의 장미"라는 조직이 자신의 동생과 자신을 착각하는 상황에서의 대처 등은 아주 흥미진진해요. 자신의 아내인 마르타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출몰한다는 설정이나 주인공이 쌍동이라는 설정은 뻔하지만 유치하지 않게 이끌어나가는 작가의 필력 역시 감탄스럽고요.

하지만 "철의 장미"가 세계적인 조직이라면서 달랑 조직원 3명 정도만 등장하고 사소한 액션을 보여주는 정도로 별다른 스케일이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 막판에 정신과 의사였던 란즈만이 진정한 흑막이랍시고 한방 터트리는 부분은 조금 아쉽더군요. 약간 우연에 의지한 전개인것 같고 현실성이 너무 많이 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반전이 시시합니다. 상당히 공들인 전개와 설정이긴 한데 90년대 작품 치고는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쓰인 너무 낡은 반전이 아닌가 싶거든요. 차라리 반전 없이 그냥 가는게 괜찮았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간 읽어왔던 프랑스 추리소설과는 좀 다른, 미국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은 작품으로 반담의 "맥시멈 리스크"를 보는 듯한 상황 전개와 설정은 상당히 설득력있고 재미있습니다. 이젠 이런게 흥행이 되는 시대겠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03/05/16

시간의 침묵 - 제임스 패터슨 : 별점 1점

시간의 침묵 - 2점
제임스 패터슨/우리시대사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패터슨의 '알렉스 크로스'형사 시리즈 1작. 

심리학 학위를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도 근사한 흑인경찰 알렉스와 영화배우의 딸을 유괴하고 몸값을 가로챈 천재 유괴범과의 한판 승부를 그리고 있는데, 소설보다는 전형적인 한편의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흑인이라는 것을 빼면 주인공 알렉스 크로스 형사는 우리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캐릭터와 똑같고, 완전범죄를 꿈꾸는 정신이상범죄자 역시 영화에서 친숙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꽤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부담없이 쉽게 읽을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흥행요소들을 차용했지만 작가가 그다지 뛰어난 스토리텔러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범인은 억지스럽고 평면적이라 진부하기 짝이없고, 꽤 공들인듯한 극적 반전도 너무 터무니 없는 탓입니다. 도저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추리소설로는 많이 부족한, 싸구려 펄프 픽션 형사물입니다. 영화로 만들면 더 효과적일것 같기는 하고, 그래서인지 영화화가 되긴 했는데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습니다. 대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된건지 이해하기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딱 한가지, 알렉스 크로스 형사가 책에서는 건장한 중년 흑인으로 나름대로 섹시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영화에서는 모건 프리먼이 주연이라서 여주인공과의 로맨스를 어떻게 표현했을지가 약간 궁금하긴 합니다. 덴젤 워싱턴이 적역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어차피 안볼거지만...

2022/03/25

신성한 관계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1.5점

신성한 관계 - 4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트릭 켄지와 안젤라 제나로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거부 프레드 스톤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둘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며, 실종된 딸 데지레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다. 켄지의 사수이기도 했던 최고 탐정 제이 베커마저도 데지레를 찾다가 실종된 상태였다.
알고보니 데지레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200만 달러를 횡령한 관계자 제프 프라이스와 도망쳤고, 베커는 그녀를 찾아낸 뒤 사랑에 빠져 사라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프라이스가 데지레를 살해한 뒤 베커는 프라이스를 죽였다. 베터는 둘에게 데지레를 죽이라고 의뢰했던건 트레버 스톤이라며, 복수를 위해 출발했지만 스톤 부하의 공격으로 죽고 말았다.
겨우 경찰에게서 풀려난 켄지와 제나로의 앞에 데지레가 나타나 도움을 요청하는데....


직전작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데니스 루헤인의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후속작. 이전 작에서의 충격으로 켄지와 제나로는 탐정 사무소 문을 닫고, 상실감을 달래고 있던 중이라는 설정이지요.

수사 과정 초기에 불거지는, 슬픔 치유사와 연계된 사이비 종교 집단의 사기 행각은 꽤나 볼만했습니다. '고해 성사'를 협박과 사기를 위해 써먹는게 효과가 큰건 당연할테니까요. 단순 협박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은행 비밀번호와 같은 개인 정보까지 수집한 뒤 이를 교단 내 국세청 직원 등의 전문가를 통해 모든 재산을 장악한다는건 90년대 초반 발표된 작품 치고는 꽤나 앞서가는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설정을 잘 써먹지는 못했습니다. 슬픔 치유사들에게서 정보를 빼낸 방법도 강도짓과 부바 등 친구들을 동원해 완력을 써서 캐내는게 전부였고요. 이 뒤는 트레버 스톤이 사실 데지레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알고보니 데지레가 먼저 트레버 스톤을 불구로 만든 사고를 사주했다는 것 등이 밝혀지며 트레버 스톤과 데지레 스톤, 두 악마가 서로 죽이려는 대결로 바뀌고 맙니다.
데지레가 비련의 천사가 아니라 주위 남자들을 모두 홀린 뒤 써먹다가 죽게 만드는 악녀라는 반전은 나쁘지 않았지만, 억지스러웠어요. 주변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자신의 이익을 단지 몸 하나를 팔아서 얻어내는데, 남자들이 아무리 섹스에 미친 바보들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유치한 발상이었습니다.

전개도 억지스럽고 납득하기 어려운 점 투성입니다. 모든 것의 발단인 데지레 실종부터 그러합니다. 그녀는 왜 사라졌을까요? 트레버 스톤이 사고를 사주한게 그녀라는걸 알아냈기 때문에? 그런 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이 베커의 입을 통해 그녀를 죽이는게 트레버 스톤의 의뢰라는걸 밝히기는 하지만, 이 때만해도 그녀가 악당 흑막이라는건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 애초에 제이 베커에게 이렇게 의뢰했다면, 켄지와 제나로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이유가 불분명하고요.
제이 베커의 죽음도 이상합니다. 그는 데지레의 복수를 한다며 트레버 스톤을 찾아가려다 트레버 스톤 부하의 공격을 받고 죽게 되지요. 그러나 데지레가 죽었다면 트레버 스톤의 부하들은 제이 베커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까요. 제이 베커의 의도 (복수)를 알아챘다면 공격했을 수도 있지만, 그걸 알 수 있었던 방법도 없었습니다. 또 베커가 어떤 길로 가는지 알고 있었는데 도로에서 단순하게 자동차로 밀어버려 죽이려 했다는 것도 너무 어설펐어요. 프로답지도 않았고요.
반대로 데지레가 죽지 않았다는걸 알아챘다면, 제이 베커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어야 했습니다. 데지레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니 사로잡아 행적을 캐내는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짜고짜 차로 들이받아 죽이려 한다는건 영 납득하기 어렵더군요. 이는 작가가 화끈한 액션 장면을 넣고 싶어서 삽입한 장면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켄지가 데지레의 정체를 알게된 건, 데지레가 제이 베커에게서 들었다며 '페일세이프'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페일세이프'는 오래전부터 켄지와 제이 사이에 있었던 암호였습니다. 누군가 '페일세이프'라는 말을 하면서 나타나면 무조건 적이니 박살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즉, 제이 베커는 데지레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켄지와 제나로에게는 말하지 않고, 사랑했던 그녀를 잃은 복수를 해야 한다고 트레버 스톤을 찾아가다가 죽는다는건 영 앞 뒤가 맞지 않아요. 트레버 스톤이 그녀를 죽이려고는 했지만, 정작 죽인건 그 시점에서는 아무 관계없던 프라이스였으니 복수의 대상도 잘못된게 아닌가 싶네요.
'페일세이프'를 통해 데지레의 정체를 알아낸 뒤, 켄지와 제나로는 그녀의 뒷통수를 칠 계획을 짜지만 정작 잘 써먹지도 못하고 데지레에게 사로잡혀 위기에 빠진다는 전개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땅에 파묻었던 제나로가 자력으로 탈출해 스톤 부녀를 응징한다는 결말도 너무 대충 수습한 느낌이었고요.

이런 앞뒤 안맞는 급작스럽고 자극적인 전개는 오래전 신문 연재 소설이나 싸구려 펄프 픽션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 무리수를 막 던진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도를 넘는 폭력과 비도덕적인 가족 관계 정도만이 하드보일드스러운 느낌을 전해줄 뿐이며, 추리적으로도 건질건 거의 없었으니까요. 가짜 신분으로 수감된 제이 베커를 찾아가 그가 말한 기묘한 말을 듣고 진상을 풀어내는 정도만 그런대로 탐정스러웠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작가가 자극적인 소재를 끝까지 건드리고 전개 역시 흥미본위로 채워놓은, 노골적으로 흥행을 노린 펄프 픽션에 불과합니다. 전형적인 성인용 헐리우드 액션 범죄물로, 차라리 영화였더라면 더 볼만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시리즈 팬에게는 켄지와 제나로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점, 그리고 <<라쇼몽>>을 언급한다던가, 막스형제의 고전 영화 <<선상 대소동>>을 즐겨 본다던가, <<페일세이프>>를 결정적 단서로 쓰는 등 영화광 켄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부바의 활약이 미미하지만 여전하다는 아주 약간의 즐길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외의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도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22/04/22

숲 - 할런 코벤 / 최필원 : 별점 2.5점

- 6점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사 폴 코플랜드는 얼마전 살해된 채 발견된 마놀로 산티아고가 20년 전, 캠프장 살인 사건에서 살해되었다고 알려진 길 페레즈라는걸 알게 되었다. 당시 피해자 중 마고 그린과 더그 빌링엄의 시체는 발견되었었지만, 길 페레즈와 폴의 여동생 카밀 코플랜드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었다. 폴은 20년 전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그리고 동생 카밀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사에 나서는데....

할런 코벤 작품은 처음 읽어봅니다. 전미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는 하지만, 제가 현대물보다는 고전 취향인 탓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격리 중 읽을 거리를 찾다가 드디어 읽어보았습니다.

이야기는 폴이 주도하는, 젊은 대학생 젠레트와 마란츠가 스트리퍼 샤미키를 강간한 사건 재판과 20년 전 있었던 숲에서의 여름 캠프 참가자 살해 사건이 겹쳐져 진행됩니다. 가해자 젠레트의 아버지가 사건을 무마하려고, 협박할 거리를 찾아서 폴의 과거를 뒤지기 위해 풀어놓은 탐정에게 길 페레즈가 접촉해서 정보를 전해준게 20년 전 사건의 재조사로 연결되거든요.
이러한 전개는 과연 베스트셀러 작가답습니다. 여러가지 수수께끼들을 하나씩 드러내가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면서, 결국 이 모든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0년 전 사건에 얽혀있는 주요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폴의 여동생 카밀이 살아있는지?
  2. 어떻게 폴이 루시와 밀회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그 날 웨인 스튜벤스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3. 왜 폴의 아버지는 카밀을 찾기 위해 2년간 숲을 뒤지다가 포기했는지?
  4. 왜 폴의 어머니는 폴을 남겨 두고 홀로 집을 나갔는지?
  5. 페레즈 가족이 카밀이 살아있다고 했는데, 숲에서 발견된 유골은 누구의 것인지?
  6. 길 페레즈의 부모는 왜 마놀로 산티아고가 자기 아들이라는걸 계속 숨기는지?
  7. 마놀로 산티아고는 누가 살해했는지?
이 수수께끼들은 폴의 수사와 일련의 증언들로 하나씩 풀리는데, 우선 카밀은 살아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숲에서 발견된 유골은 카밀일리 없습니다. 검시를 통해 유골은 출산했던 여성이고, 40~50대의 나이로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지며, 이 조건에 부합되는건 폴의 어머니입니다. 폴의 아버지는 떠나려는 어머니를 죽여 매장한 뒤, 숲을 수색하는걸 포기했던 겁니다.
길 페레즈의 부모가 아들이 마놀로 산티아고라는 가명으로 살아왔다는걸 알면서도 부정했던건, 과거 캠프장 사건의 유족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진상이 모두 이치에 맞고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것도 놀라왔던 점입니다.

거기에 더해 젠레트와 마란츠 강간 사건에서 변호사 플레어와 대결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과정은 한 편의 좋은 법정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젠레트와 마란츠가 '짐과 칼' 이라는 기묘한 가명을 댄 이유를 클럽하우스에서 빌렸던 DVD 목록을 뒤져서 찾아내고, 그 DVD를 법정에서 상영하는 장면은 아주 멋졌어요. 단순히 20년 전 사건을 다시 끄집어 내기 위한 동기로 사용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말이지요.
카밀이 돌아오고, 젠레트와 마란츠 사건은 젠레트 아버지의 힘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20년 전 사건 당일 루시가 폴을 유혹했던 건 의도되었던 일이었다...는 비교적 현실적인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폴이 이런 류 (법조인이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의 스테레오 타입이라는건 다소 아쉬웠고, 몇몇 부분에서 눈에 뜨이는 헛점도 있습니다. 우선 마놀로 산티아고를 루시의 아버지이자 당시 캠프장 주인이었던 아이라가 살해했다는건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이런저런 설명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라가 나이를 많이 먹고 정신이 온전치 못해 살해했다는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뒤이은 아이라가 폴을 살해하려는 과정은 더 억지스러웠고요.
루시에게 젠레트의 아버지가 고용한 탐정사가 20년 전 사건에 대한 편지를 보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폴의 치부라고 생각했으면 공론화해서 폴을 검사 자리에서 끌어내리는게 맞습니다. 왜 아무 관계도 없는 루시에게 편지를 보낼까요?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행동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또 길 페레즈의 부모가 마놀로 산티아고가 아들이 아님을 주장하는건, DNA 조사 앞에서는 무력한 발버둥일 뿐입니다. DNA 샘플을 얻는건 어렵지 않았을텐데 왜 조사를 하지 않는지도 설명이 부족했습니다요. 심지어 폴은 검사인데 말이지요.
폴의 작은 아버지같은 존재인 소시가 카밀이 살아있음을 폴에게 끝까지 숨긴 이유도 불분명해요. 길 페레즈의 부모는 살아있지만, 폴의 부모는 모두 죽은 마당에 보상금을 받았던 죄를 물을 수도 없잖아요. 폴의 아버지가 죽은 순간, 진실을 이야기해도 아무 문제 없었을 겁니다.

지나치게 곁가지 이야기가 많은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폴의 아내가 일찍 죽고, 폴은 아내의 이름으로 처제 가족과 신탁 기금을 운용하지만 이를 처제 남편이 횡령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폴의 아버지는 KGB 출신이었고 자신의 장인, 장모를 고발해서 아내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는건 어머니 살해의 동기로 써먹기는해서 좀 낫긴 하지만 과하게 거창했던 느낌이고요. 등장하는 여성들이 거의 대부분 엄청난 미녀라는 점도 마찬가지입니다.구태여 이런 설정들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흥행할만한 요소는 충분히 갖춘 범죄 스릴러였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08/14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마이클 코넬리 / 조영학 : 별점 2점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 4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조영학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물 변호사 미키 할러는 운 좋게 거물 부동산 업자 루이스가 한 여성을 잔인하게 폭행했다는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었다. 미키 할러는 루이스가 무죄라는걸 확신하여 변호에 임했지만, 어느 순간 루이스가 유죄일 뿐 아니라 과거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진범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루이스에 의해 조사원 라울이 살해당했고 유력한 증거마저 빼앗겼을 뿐 아니라, 라울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는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루이스는 이런 미키 할러를 협박하여 자신의 변호에 힘을 쏟게 만드는데....


마이클 코넬리의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엄청난 성공을 거둔 베스트셀러입니다. 매튜 매커너히 주연의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었고요. 작가가 생각했던 멋진 트릭과 설정을 아낌없이 쏟아붓기 때문에 시리즈의 경우는 첫 작품이 가장 뛰어난 경우가 많기도 하고, 이전에 읽었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에 대한 기억도 좋아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완독했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별로였습니다. 일단 미키 할러 캐릭터부터가 별로에요. 정의로운 변호사와 악덕 변호사 사이의 애매한 무언가로 그려져 있거든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드리자면, 미키 할러는 의뢰인들이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무죄로 풀려나게 만드는데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는걸로 묘사됩니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고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으로, 나 역시 무죄냐 유죄냐를 다루지 않는다" 면서요. 이 과정에서 "돈이 없으면 죄를 짓지 말라"며 엄청난 돈 욕심도 부립니다. 그렇다면, 루이스의 의뢰를 받아들일 때 그가 무죄임을 확신하고 변론에 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던대로 법의 헛점을 찾아내어 의뢰인을 빼내면 그만이지요.
같은 이유로 루이스가 연쇄 살인범이고, 미키 할러가 과거 사법 거래를 유도해 징역을 선고받게 만든 지저스 사건의 진범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저스는 돈이 없었고, 루이스는 돈이 많으니까요. 피고만 풀려나게 해 주고 돈만 벌면 되지요.
게다가 앞서 여러 명의 마약 사범들을 무죄로 풀려나게 하는데에는 일말의 주저도, 양심의 가책도 보이지 않으면서 루이스에 대해서만 정의감을 불태우는 것도 앞 뒤가 맞지 않았어요. 이를 미키의 부친 말을 인용하면서 '무고한 사람'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식으로 포장하고는 있는데 이 정도로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물론 루이스가 라울을 살해했기 때문에 복수심을 갖는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는 미키 할러가 불필요한 정의감을 불태워 루이스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즉, 주객이 전도된 상황인 것이지요.
그 외 다른 캐릭터들도 별로인건 마찬가지입니다. 변태 연쇄 살인마 루이스에 대한 설정이라던가 미키 할러와 전처이자 검사 매기와의 관계 등도 진부했습니다. 특히나 루이스의 경우는, 다른 작품들 속에서 숱하게 등장해왔던 두뇌파 연쇄 살인마들과 흡사했을 뿐더러, 다소 뜬금없이 살인마라는게 밝혀져서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설득력있게 그려냈어야 했습니다.

이야기도 작위적인 전개가 많아서 잘 짜여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루이스가 진범이라는걸 알아차리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미키 할러는 옛 의뢰인 지저스 사건의 피해자 마사 렌테리아와 루이스 사건의 피해자가 "쌍둥이처럼 꼭 닮았다"는걸 알아채고 루이스가 진범이라는걸 확신합니다. 허나 두 피해자가 그렇게 닮았다는 것 부터가 비상식적이고 작위적이에요. 루이스가 미키 할러의 총을 훔쳐 라울을 살해할 때 사용했다는건 작위적인 설정의 끝판왕 격입니다. 총은 루이스가 미키를 옭아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만약 미키 할러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루이스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미키 할러를 협박할 생각이었을까요?
미키 할러의 작전도 치밀하지 못합니다. 고작해야 법정에서 밀고자의 입을 빌어 루이스가 과거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정도인데, 그 밀고자의 증언이 허술하다는건 이미 법정에서 미키 할러 자신이 증명해 버립니다. 경찰이 이 증언으로 보강 수사를 벌일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요. 유력한 용의자였던 지저스가 사법 거래를 통해 이미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는걸 자백해버렸는데, 경찰이 다시 수사에 나설만큼 한가할리도 없고, 심지어 담당 형사는 미키 할러를 미워하기까지 하는데 왜 다시 수사를 벌일까요?
루이스의 범죄 행각도 왜 진작에 체포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대충이었습니다. 루이스는 CCTV에 얼굴을 드러내고 당당히 피해자를 찾아가거든요.

그나마 전자 발찌로 모든 행적이 추적당하는 루이스가 어떻게 라울을 살해했는지? 에 대한 트릭은 하나만큼은 괜찮았습니다. 루이스의 어머니가 대신 범행을 저질렀다는 거지요. 상당히 설득력이 높을 뿐더러, 라울이 죽기 전 손가락으로 남긴 다이잉 메시지 - W, 즉 여자가 범인이다! 라는 것 - 와 연결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단점들이 더 많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미 영상화가 되었으니, 소설보다는 영상화된 버젼을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2004/11/23

그들의 조국 (Father land) - 로버트 해리스 : 별점 3점


그들의 조국 - 6점 로버트 해리스/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1964년 독일이 유럽에 천년제국을 건설한 시대, 총통 히틀러의 75회째 생일을 1주일 앞두고 베를린 외곽 하벨 호수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시체에 대해 사법경찰 살인 담당 수사관 사비에르 마르크가 조사를 착수한다. 
시체의 정체는 폴란드 총독부의 고위 관료이자 SS 여단장 출신인 요제프 뷜러 박사로 밝혀지고 그의 수첩에 적혀있던 인물 중 빌헬름 스튜칼트 (내무성 장관 출신) 역시 살해되며 또다른 인물인 마틴 루터 (외무성 차관 출신)는 실종된다. 

 잇달은 과거 고위 관료들의 죽음과 실종 뒤에 모종의 흑막이 있음을 눈치챈 마르크는 살로트 맥과이어라는 미국 여기자와 함께 그들의 과거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스튜칼트의 아파트 비밀금고에서 발견된 스위스 비밀은행 금고의 열쇠로 그 비밀을 알아내려 애쓴다. 
결국 어떤 비밀에 관련된 서류를 가지고 루터가 미국으로 망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나 루터는 마르크의 눈 앞에서 저격당하고 마르크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버리는데... 

2차대전 관련 저술로 유명한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Fatherland" 입니다. 2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전하고 난 뒤 20여년이 지난 1960년대를 다룬 일종의 대체 역사물이죠.  
영국은 일종의 독일 속국이 되고, 처칠과 여왕은 캐나다로 망명가고, 러시아는 남부지방을 잃었지만 계속 동부전선을 유지하여 국지전을 벌이며 미국의 대통령 조셉 케네디는 독일과 일종의 "동맹"(데탕트)을 맺은 1964년이 무대입니다. 
실제 역사물을 보는 듯한 1960년대 승전국 나찌 독일에 대한 리얼한 묘사가 정말 대단하네요. 여객기는 보잉과 융커스 제트기가 함께 쓰이며 경찰도 군인편제로 제편된 군국주의 전체주의 국가. 비밀경찰 게쉬타포가 은밀히 지배하며 절친한 친구가 배신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는 비인간적인 독재국가.

하지만 일반적인 대체 역사물이 아니라 작품 안에서 실존인물들과 2차대전 당시의 유태인 학살, 그리고 당시 주독대사였던 조셉 케네디 (존의 아버지죠)의 언행 등에서 유추하여 상상한, 거대한 국제적 음모가 등장하는 전형적 추리 스릴러의 포맷으로 진행됩니다. 특히나 수사 방법에 있어서 경찰 조직 자체가 재편되어 재구성된 사회에서 어떻게 수사를 진행하는 지 꽤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부정축재에 대한 묘사의 상상력도 눈여겨 볼 만 했고요. 
읽고나니 일전에 소개해드렸던 러시아 형사 아르카디 렌코 시리즈의 러시아와 흡사함도 느껴지네요. 전체주의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 하는 여러 인물들 및 설정, 특히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겉도는 주인공 (형사라는 직업까지 같은)에 대한 점은 정말 비슷하니까요. (아울러 번역이 좀 엉망인 점도 비슷...) 하지만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이나 후속작에 대한 여운을 계속 남기는 렌코 시리즈와는 달리 한편으로 완결된 구조라는 점은 큰 차이점이겠죠. 

불만이 있다면 흥행을 염두에 둔 듯한 미국인 여기자와의 로맨스는 사족인 듯 싶다는 점, 그리고 거대한 음모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서인 서류를 너무 쉽게 찾아내는 등 디테일한 수사 과정에서 쉽게 지나간 듯한 부분이 눈에 띄는 점입니다. 아울러 번역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 역시 크고요. 

그래도 사소한 불만을 감안하더라도 상상력으로보나 완성도로 보나 대체역사 추리물이라는 흔치 않은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이 작품에 비한다면 아카가와 지로의 "프로메테우스의 딸"이나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그야말로 쓰레기죠. 아 이들은 SF던가?) 별점은 3점입니다. 

 조사해 보니 TV용 영화로 제작되어 국내에 "어둠속의 미스테리"라는 제목으로 비디오로 출시되었네요. 하하하! (다른건 몰라도 룻거 하우어는 정말 적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0/09/01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 - 마이크 뉴웰 : 별점 2점


페르시아의 왕자 다스탄은 알라무트 왕국을 점령하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왕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쫓기게 되었다. 알라무트의 공주 타미나와 함께 도주하던 다스탄은 타미나를 통해 '시간의 모래'에 대해 듣고, 알라무트 정복에서 시작된 모든 사건의 진실을 깨닫는데...

게임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의 실사 영화입니다. 무려 1억불이 넘는 제작비를 들였다고 하죠. 그러나 한마디로 별로더군요. 흥행도 실패해서 제작비도 못 건졌다고 하니 저만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보네요.

일단 허술한 이야기가 너무 거슬립니다. 연기파 배우 벤 킹슬리가 맡은 악역 니잠은 다스탄과 대적할만한 무예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대단한 지략을 보이거나 부하가 많은 것도 아닌, 우리나라 사극의 간사한 노인 악역 정도밖에는 안되는 인물이라 별로 긴장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의 모래'를 이용한 니잠의 왕위 찬탈 작전은 니잠 스스로가 왕과 왕자를 모두 죽여버리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래서야 이야기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의 너무나 뜬금없는 해피엔딩은 최근 본 영화 중에서도 최악이었어요. 작가가 시나리오를 발로 쓴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말이죠. 차라리 세계가 멸망하는 걸로 끝내던가.

그리고 초반부의 전쟁 장면 잠깐을 제외하면 막대한 제작비를 어디다 썼는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일부 세트를 제외하면 대단한 CG나 방대한 규모의 인원이 동원된 것도 아닌데 돈을 어디다 쓴걸까요? "실미도" 이후 제작비 지출ㅍ내역이 궁금한 영화는 정말이지 오랫만이네요. 감독부터가 블록버스터에 별 소질이 없어보이는 마이크 뉴웰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요...
게임의 팬으로서 기대가 컸던 아크로바틱 액션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마이크 뉴웰 감독의 장기라 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러브라인의 표현 말고는 건질게 없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적절한 수준의 오락거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별로였습니다.

2005/03/18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2,3,4,5- 더글러스 애덤스 : 별점 2.5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세트 - 전6권 - 6점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책세상

영국인 아서 덴트는 자기의 집이 우회로 건설을 위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욕가운 차림으로 불도저 앞에 누워 있던 중 자신이 사실은 외계인이며 지구가 지금 파괴 직전이라고 주장하는 친구 포드 프리펙트에 의해 정말로 지구가 파괴되기 직전 함께 우주로 탈줄하게 된다.

그들은 자포드 비블브락스라는 외계인과 트릴리언 (트리시어 맥밀란)이라는 지구인 여성과 함께 은하계를 여행하며 모험을 하게 되며 그 와중에 지구가 사실은 은하계 제일의 컴퓨터가 우주와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해 "42"라는 답을 내 놓고, 그 질문의 본질을 대답하기 위해서 설계한 거대한 유기컴퓨터였었다는 사실,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인 아서의 뇌 속에 그 해답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 질문의 근본적인 답이 "6 곱하기 9" 라는 것을 깨닫고 황당해 하게 된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해 포기한채 과거의 지구에서 살아가게 된 아서 덴트는 우주의 종말을 가져오려는 크리킷 행성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들의 모험에 휩쓸리게 되며 삶과 우주에 대한 진실한 해답을 알게 된다.

다시 살아난 지구로 돌아와 펜처지라는 묘한 여자와 사귀게 된 아서 덴트는 우주 창조 신의 메시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며 우주를 여행하다가 차원이동의 실수로 펜처지를 잃고 좌절한 채 조난당하여 이름모를 별에서 "샌드위치의 대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어느날 자신이 기증한 정자은행의 정자로 수정된 자신의 딸을 데리고 트릴리안이 찾아오게 되고 지겨움과 외로움을 참지 못해 자신에게 배달된 궁극의 "안내서"와 함께 지구로 도망간 딸을 찾기 위해 포드 프리펙트와 함께 다시 지구로 되돌아가게 된다...

음, 일단 이쪽 바닥 팬들에게는 전설과 같이 전해지던 바로 그 책입니다. 이전 판본으로 어렵게 1,2권만 헌책방에서 구했었는데 읽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아마도 영화화 소식때문이겠지만) 전권이 새롭게 번역, 출간되어 한번에 읽게 되었습니다.

먼저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코미디를 전개시키는 작가의 상상력과 그 기발함입니다. 우주적인 설정과 무대를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잘 접목시킴은 물론, 십수년에 걸쳐 아무 개연성없이 쓰여진 작품군임에도 불구하고 책들이 하나의 거대한 줄기를 이루는 것 같이 쓴 점은 정말 대단하네요. 여러가지 말장난으로 읽는이의 실소를 자아내는 솜씨도 좋고요.

하지만 어떠한 목적의식 없이 단지 "흥행"과 "재미"를 추구하는 라디오극이 원형이라 그런지 내용에서 깊이는 전무합니다. 삶과 우주를 논하며 지구, 그리고 우주의 지배자와 창조신의 메시지조차 유머로 다루는 착상은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그 착상에서 파생된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 가볍고 시니컬해서 아이디어가 상당히 아깝다고 느껴지네요.
이야기 전개가 대부분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용 전개가 복잡한데 등장인물도 로봇 "마빈"만이 독특한(?) 개성을 보여줄 뿐, 다른 인물들은 독특한 척 위장하고 말만 많다 뿐이지 잘 구분되지 않아서 굉장히 혼란스럽거든요. 그나마 1권부터 3권까지는 괜찮지만 4,5권은 억지와 이야기의 비약이 심해지고 멤버도 아서와 포드로만 거의 제한됨으로 인해 단순히 "속편"으로서의 가치만 남아서 더욱 지루하게 느껴지더군요.
"영국식" 코미디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생각만큼 웃긴 장면도 많지 않다는 것도 단점이죠. 번역으로 인해 원문의 많은 유머를 놓쳤을지도 모르지만 역시 국내 정서에는 그다지 유머로 접근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리고 도대체 포드 프리펙트가 아서 덴트와 같이 탈출한 이유부터 저는 이해가 안되더군요. 오로지 생각나는 이유라면 라디오에서 현재 상황을 포드의 독백으로 처리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상대역이라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아서의 비중이 너무나 커져서 결국 시리즈 후반부에는 포드보다도 중요한 인물이 되니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긴 유머소설에서 개연성을 논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되긴 하지만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만으로 따진다면, 술술 읽히고 웃음을 주기는 합니다. 허나 단지 그것뿐이랄까요? 읽고나서 남는 것은 하나도 없기에 전부 1500페이지 정도의 방대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얄팍하다는 느낌 뿐이에요. 번역되어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는 무척 감사하지만 끝까지 다 읽었음에도 이 작품의 평가가 높은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큰 재미는 없지만 대체로 쉽게쉽게 읽히면서도 책의 판형도 작으므로 민방위 훈련용이나 지겨운 강의시간 용으로 추천할 만 합니다.

PS : 그나마 영화화 하기에는 범 우주적인 위기와 "우주전쟁"을 다룬 3권의 내용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두고 봐야 겠네요.

PS2 : 시리즈 권수가 5권이나 되고 페이지도 꽤 많은 편이라 1주일 정도는 후딱 보내는 묘미도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