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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2

위대한 승부 (Searching for Bobby Fischer / 1993) - 스티브 잘리안 : 별점 3점

7살 아들 조쉬가 체스에 대해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프레드는 조쉬를 브루스 판돌피니라는 거물급 플레이어에게 맡겼다. 그러나 토너먼트에 출전하면서 조쉬는 점차 체스와 승부에 지쳐가는데...

원제는 "Searching for Bobby Fischer". 체스 천재 조쉬 웨이츠킨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 영화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네요.

일단 성장 영화다운 교훈적인 내용이 가득합니다. 예를 들자면 "체스(또는 다른 것이라도)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인생에서 승부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스스로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등 입니다.

이러한 교훈과 더불어 조쉬의 천재성을 소유하려 하고 통제하려 하던 아버지 프레드의 모습에는 공감이 많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때문인데, 우리나라의 무리한 교육열과 비슷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천재마저도 현실에 좌절하고 피로감을 느끼는데, 아이의 능력조차 제대로 모른 상태에서 아이들을 통제하려 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 아닐까요? 영화 속 조쉬가 체스를 잊고 아이다운 삶을 즐기며 부활하듯, 아이는 정말로 아이처럼 키우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키우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힘든 일이겠지만...

단지 교훈만 있는 것은 아니고, 체스를 잘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시합 장면의 박진감을 잘 살린 좋은 체스 영화이기도 합니다. 전설적 체스 천재 바비 피셔의 소개가 곁들여진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또 "퀸을 먼저 사용하면 안 된다"라는 지시를 영화 내내 복선처럼 써먹는 것도 괜찮았어요. 마지막 결승전은 아주 약간의 체스 지식—끝까지 간 졸은 자신이 잃은 말과 바꿀 수 있다, 퀸은 전후좌우대각선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이 있어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나, 이 정도는 허용 범위 내라고 봐야겠죠.

그 외에도 주인공 아역, 특히 조쉬 역의 꼬마도 귀엽고, 체스 선생 역의 벤 킹슬리, 조쉬 아버지 역의 조 만테냐, 조쉬의 동네 친구이자 선배(?) 비니 역의 로렌스 피쉬번 등 화려한 조연진도 볼거리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조쉬의 현명한 어머니의 비중이 너무 작고 아버지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동네 친구 비니의 역할이 애매하다는 점(사실 비니는 빼고 브루스에게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집중시키는 게 나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승부에서 졸을 움직여 퀸으로 승부를 내는 장면은 너무 뻔했습니다. 최종 보스인 라이벌 조나단과의 마지막 결전치고는 좀 김이 새는 결말이었어요.

그래도 성장 영화로서도 우수하고, 체스 영화로서도 괜찮은 만큼 결론은 추천작입니다. 별점은 3점. 성장기 아이가 있다면 더 와 닿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아울러 영화에서 최종 보스 끝판왕으로 나오는 조나단과의 마지막 챔피언십 매치가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고 하는 후일담도 재미있었습니다. 정말로 조쉬가 무승부를 제의했지만, 실제 마지막 경기 상대였던 제프 역시 거절했고, 경기 끝에 공동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자세한 정보는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세요.

2005/10/25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 정창 : 별점 2.5점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 4점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열린책들

미술품 복원 전문가 훌리아는 곧 경매에 걸릴 플랑드르 시절 거장 반 호이스의 작품 "체스 게임" 복원 중,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 그림 밑에 숨겨진 수수께끼의 메시지 "누가 기사를 죽였는가?"를 발견했다. 메시지가 그림의 모델인 오스텐부르크 대공과 로제 드 아라, 그리고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체의 관계와 관련된 내용임을 짐작한 훌리아는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훌리아는 후원자이자 아버지와 같은 골동품상 세사르의 도움을 받아, 체스 플레이어 무뇨스에게 그림 안에서 기사 (나이트)를 잡은 말이 무엇인지 알아내 줄 것을 부탁했다. 체스 게임과 메시지의 연관성을 풀어내기 위해서였다.
기사를 잡은 말은 흑의 여왕이라는걸 알아는 뒤, 의문의 인물이 그림 속에서 중단된 체스게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연쇄 살인과 그림의 도난 사건이 일어났고, 훌리아와 무뇨스는 범인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데....

레베르테의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입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추리 소설을 한 권 읽었네요.

이 작가 작품은 이전에 "뒤마클럽"을 읽어 보았지만, "뒤마클럽"은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실망이 더 컸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훨씬 낫더군요. 제법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현학적인 지식을 과시하는 특유의 문체는 여전하지만, 이야기의 맥락도 그런대로 명확한 편이고요. 체스를 통한 연쇄살인이란 아이디어도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이야기에 나오는 체스의 행마를 따라가는 재미가 굉장합니다! 
참고로 체스를 소재로 삼은 작품은 캐더린 네빌의 "에이트 (8)"라는 작품도 있었지만, 이 작품은 체스의 말을 움직이는 "행마"를 주요 소재로 삼아서 차별화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 추리"라는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중반 정도에 흑녀가 기사를 잡은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역사속의 인물들과 사건은 별로 중요하게 되지 않거든요. 이후 발생하는 현실의 사건들과 과거의 사건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점도 역사 추리물로 평가하기 어렵게 만들고요. 전체적으로 본다면 전반부는 역사 추리, 후반부는 평범한 추리 스릴러물로 양분되는데, 두 사건을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이 강합니다.
아울러 추리적으로도 단점이 큽니다. 살인의 동기가 비약이 심하다는 점, 그리고 전개가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동기가 불분명해서 범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건 작가 입장에서는 범인의 의외성을 강조할 수 있는 방법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독자에 대한 반칙이라 생각되네요.
즉, 추리소설이라고만 본다면 부족한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도 작가 특유의 방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내용 전개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힘이 느껴집니다. 정말 이 사람은 "프로"작가다! 라는 것이 팍팍 와 닿는달까요?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 덕분에,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흥미를 놓치지 않으며, 마지막 범인의 자백에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이끌어내는 부분도 괜찮았습니다. "강추"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 읽어볼만 한 책이에요. "체스"라는 소재를 잘 알고 있다면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PS : 좀 조사해 봤는데 피터 반 호이스라는 작가는 역시 가공의 인물인 것 같군요.

2004/04/21

디 에이트 - 캐더린 네빌 / 조윤숙 : 별점 2.5점

디 에이트 2 - 6점 캐서린 네빌 지음, 조윤숙 옮김/자음과모음

컴퓨터 전문가인 캐더린 벨리스는 알제리에서 OPEC 회담을 위한 컴퓨터 시스템 설치를 강요받는 자리로 좌천된 후, 지인 해리의 딸 릴리를 통해 체스 천재 솔라린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계속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 과거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는 공식이 숨겨져 있는 “몽글랑 서비스”라는 신비의 체스판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손에 있는 “8”의 손금으로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인 체스 게임에 뛰어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캐더린은 비밀을 이용하려 하는 “백”의 세력에 맞서 자신의 편인 “흑”의 세력과 더불어 체스판과 말,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뛰어드는데...

캐더린 네빌 여사의 장편 데뷰작.
위의 줄거리로 요약 가능한 현재 시점의 캐더린 벨리스 이야기, 그리고 몽글랑 서비스가 처음으로 드러나는 격동의 프랑스 혁명기를 무대로 한 수녀 미레유 이야기라는 두가지 축으로 전개됩니다. 마지막에는 이 3세기의 시공을 초월한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이죠.
전자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몽글랑 서비스와 “8”의 비밀에 휩쓸려 가면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자각해 가는 일종의 성장기라면, 후자는 처음에는 소꿉친구인 발렌티느의 복수를 위해, 그 이후에는 비밀스러운 힘의 정체와 자신과 맞서 싸우는 “백”의 여왕과의 전투를 위해 모험에 스스로 뛰어드는 주체적인 이야기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캐더린 벨리스의 이야기보다는 미레유의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프랑스, 영국, 미국, 알제리까지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 비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의 묘사까지 훨씬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모리스 탈레랑, 다비드,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장 자크 루소, 벤자민 프랭클린, 거기에 나폴레옹까지 등장하여 역사 추리물 느낌을 가득 전해주기 때문이에요. 초반의 크로스워드와 글자를 이용한 암호풀이 트릭도 괜찮은 편이라 추리소설 애호가로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한가지 특이했던 점이라면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의 다 미남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키가 굉장히 작은, 결코 잘생겼다고 알려지지는 않은 나폴레옹 조차 엄청난 미남으로 묘사하더군요. 여성 작가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캐더린 벨리스의 모험 부분은 미레유에 비하면 조력자도 훨씬 많고 문명의 이기와 돈을 충분히 사용하기 때문에 긴박감면에서 많이 부족하고, 갑작스럽게 솔라린과 사랑에 빠진다는 등의 설정 등이 너무 순정만화, 로맨스 소설 분위기가 느껴져 영 별로였어요
게다가 시공을 초월하는 힘인 몽글랑 서비스의 비밀이 밝혀지면서부터는 급작스럽게 판타지 소설이 되어버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입니다. 연금술 등 과거의 모든 신비적인 지식과 자료를 총 동원해서 설명해 놓기는 했지만 워낙 황당무계한 이야기라 당최 실감이 나지 않았거든요. 몽글랑 서비스를 보다 실질적인 힘으로 묘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무엇보다도 제일 당황스러웠던건 체스세트를 완전히 갖추지 않아도 비밀을 풀 수 있다는 마지막 부분이었습니다. 다 모이면 빛이라도 한번 번쩍여 주면서 고대의 비밀을 알려줄 줄 알았는데 기대와는 사뭇 달라 완전 실망스러웠어요. 영화와 만화 등에 너무 길들여진 탓도 있겠지만...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별로도 아닌 그런 작품입니다. 데뷰작치고는 적절했달까요. 작가의 후속작이 더욱 기대되네요.

덧붙이자면, 어떤 분은 체스를 잘 모르면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다고 표현하셨는데 뭐 그 정도로 체스가 중요한 역할로 쓰인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나이트나 폰 등의 행마에 관한 약간의 지식만 알면 무리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2005/05/14

르윈터의 망명 - 로버트 리텔 / 강호걸 : 별점 4점

르윈터의 망명 - 8점 로버트 리텔 지음, 강호걸 옮김/해문출판사
미국 MIT 대학의 부교수이자 MIRV (다탄두 각개목표 재돌입 미사일) 계획의 관계자인 르윈터는 일본에서 소련 대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한다. 그의 전문분야는 미사일의 탄두부분인 노즈콘이라는 그다지 가치없는 일이지만 그는 극비문서의 비밀 열람을 통해 자신의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암기한 MIRV의 미사일 탄도 공식을 가지고 소련과 협상하여 망명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된 CIA출신의 부차관보 대리 리오 다이아몬드는 자료 조사 및 심리 분석을 통해 르윈터가 실제로 가치있는 진짜 탄도 공식을 가지고 갔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전 동료이자 CIA 담당자 듀크스는 르윈터의 탄도 공식은 가짜일 것이라는 견해를 내어 서로 대립하게 된다.
다이아몬드와 듀크스, 그리고 소련의 르윈터 담당자이자 유능한 정보국원 포고딘은 체스를 두듯 서로의 계획과 의도를 숨긴채 작전과 계획을 차차 실행해 나가게 되는데....

저는 스파이소설이라는 쟝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슈퍼맨같은 주인공, 미녀-액션이 짬뽕된 007시리즈에 대한 편견 탓에 그동안 선택에 있어서도 항상 뒷전으로 미루어 놓았었죠. 하지만 이 작품은 그간의 저의 선입견을 깨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제목대로 미국 MIT 교수 르윈터의 망명 사건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데 르윈터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KGB와 CIA가 중심이 된 양 진형의 "체스게임"이 더욱 중요하거든요.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속에서 르윈터는 단순한 소모품, 이용물로 전락될 뿐입니다. 이러한 게임이 각 진영에서 캐릭터들과 주변인물의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특히 정보전의 근본이 되는 여러 조직들과 회의들에 대한 묘사는 대단합니다) 세밀하고 현실적으로 벌어지며, 그야말로 "정보전"의 실체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과 재미가 엄청나서 히어로의 큰 액션이나 반전 없이도 커다란 만족감을 전해줍니다. 그야말로 "리얼한 재미"를 전해주는 소설이랄까요?
예를 들자면 소설에서 양 진영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르윈터는 과연 탄도함수를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오가지만 답은 결국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양 진영에서 이 정보를 가지고 서로가 게임하듯 진행되는 과정만이 소설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이죠. 그 외에도 많은 정보들에 대한 답은 소설속에서 답해주지 않고 오직 서로의 작전의 "과정"과 "결과"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친절하다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러한 부분에서 리얼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예외적으로 후반부의 리오 다이아몬드의 작전에 의한 첩보 작전 자체는 꽤 긴박감이 넘치는 부분으로 스파이 소설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는 하지만 작전 자체가 워낙 소규모일 뿐더러 사람과 사람을 서로 도구로 여기고 이용하며 필요여부에 따라 가차없이 배신하기 때문에 역시나 다른 소설들과 차별화되고 있고요.
아울러 여타 소설들에 비해 적수인 소련 정보국원들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묘사로 표현하는 것 역시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소련의 체스 마스터 자이체프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마음에 들더군요.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소설 자체가 리얼하기는 하지만 많이 싱겁다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 책은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재미와 흥분을 선사해 줍니다. 너무 딱딱하고 약간 덜 다듬어진 듯한 번역 때문에 읽기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6/01/25

명탐정 코난 : 17년 전의 진상 (2025) - 야마모토 야스이치로, 카마나카 노부하루 : 별점 1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티빙에 업로드되었길래, 작년 말에 기말고사가 끝난 딸과 오랜만에 감상한 코난 극장판입니다. 리뷰가 많이 늦었네요. 정확히 말하면 해당 내용의 TV 시리즈 총집편입니다.
이야기는 두 가지입니다. 현재 벌어진 체스 대회 살인 사건과 17년 전에 있었던 아만다 휴즈와 하네다 코지 살인 사건이 이어지며 전개됩니다. 현재 체스 대회에 참가했던 쿠로다 관리관이 17년 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설정이지요.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추리적으로 완성도가 치명적으로 낮습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에요. 우선 체스 대회 살인 사건은 ‘다이잉 메시지’가 핵심 단서로 등장하는데, 피해자가 죽기 전에 굳이 이런 암호 같은 메시지를 만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범인의 이름을 쓰면 되니까요. 트릭을 위한 억지 설정입니다.
범인이 잔을 깨는 척 자작극을 벌인 트릭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네덜란드의 눈물’이라는 일종의 유리 덩어리를 활용해 잔을 깨뜨렸다는 트릭인데, 번거롭고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한 손으로 컵을 잡고 다른 손으로 네덜란드의 눈물 끝부분을 부러뜨릴 만년필을 사용하는 모습도 어색할 테고요. 이럴 바엔 잔 깨지는 소리를 녹음해 틀어놓은 뒤 컵을 떨어뜨려 깨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17년 전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원작 이야기를 읽지 않아서 왜 검은 조직과 럼이 아만다를 살해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독약이 완벽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조직원이 호텔에 침투해 보디가드들을 제압했다면 굳이 독을 사용할 이유가 있나 싶습니다. 괜히 다이잉 메시지를 남길 시간만 준 셈이니까요. 언제나처럼 등장하는 독약 설정도 유치했고, 다이잉 메시지의 구체적인 내용도 유치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리고 17년 전 당시 현장에서 도주했던 생존자, 아만다의 보디가드 아사카가 현재 소년 탐정단의 부(副)담임인 루미 선생님이라는 설정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초반부터 ‘수상하다’는 분위기를 깔고 가서 대단한 반전도 없었고, 코바야시 선생님을 죽을 지경으로 만들면서까지 검은 조직을 노렸지만 결국 헛수고로 끝난 결말도 황당했습니다. 이게 대체 뭔가 싶더군요. 키안티 등의 저격을 코바야시 선생 일행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점도 마찬가지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긴 시리즈를 끌고 가는 중간 징검다리 역할에 불과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졸작입니다. 등장인물의 매력도 별 볼 일 없고, 추리와 트릭은 엉망이며, 액션은 부족하고 작화 역시 수준 이하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이전에 보았던 총집편 "흑철의 미스터리 트레인"은 이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는데 아쉽네요. 앞으로 총집편은 웬만하면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2022/09/18

조커게임 - 야나기 코지 / 한성례 : 별점 2점

조커게임 - 4점
야나기 코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어딘가의 랭킹에서 트릭이 뛰어난 작품이라며 추천하고 있어서 구해 읽었습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과 전혀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랭킹 탓에 특별한 게임과 관련된 본격 미스터리 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구 일본 제국 시대를 무대로 한 스파이물인데다가 심지어 단편 시리즈였기 때문입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몇가지 트릭은 분명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 상황을 잘 살리고 있는 덕분입니다. <<조커 게임>>에서 헌병대가 외국 스파이의 집을 철저하게 뒤졌지만 마이크로 필름을 찾지 못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스파이는 마이크로 필름을 천황의 사진 뒤에 숨겨 놓았던 것이지요. 일본 헌병대는 불경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사진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겁니다.
<<로빈슨>>에서 완벽하게 암호를 전달했지만 본국이 가짜라는걸 알아채게 만든 트릭은 일정 간격으로 오타를 입력해야 되는 것이었고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저 정도의 트릭으로 '빼어나다' 고 말하기는 힘들고요. 무엇보다도 작품 속 특수 정보 기관인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유치하고 진부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마왕' 유키 중령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모든 D기관원들 모두가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슈퍼 스파이 - 스파이 패밀리 같은 - 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만화 속 등장인물에 가까와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애니메이션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데, 여러모로 애니메이션으로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그만큼 만화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후속작을 따로 책으로 읽어볼 계획은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커 게임>>
육군에 유키 대령 지휘 하에 스파이 양성 학교가 세워졌다. 훈련생들이 군인이 아닌 일반 대학 졸업생이었고, 전통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무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이 학교와 조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육군은 사쿠마 중위를 파견했다. 사쿠마 중위의 임무는 유키 대령 조직의 실수와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쿠마는 학교 훈련생들의 기상천외한 입학 시험과 훈련 과정, 그리고 천황제를 부정하는 듯한 사고 방식에 경악하던 차에, 미국인 기술자 고든의 스파이 행위 증거를 찾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데...

표제작이자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사쿠마 중위의 시점으로 첩보 기관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마왕' 유키 대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게 제목이기도 한 '조커 게임' 입니다. D 기관 훈련생들이 식당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포커 게임으로 보이지만, 사실 식당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스파이 게임이지요. 누구나 누군가의 카드를 보고 정보를 줄 수 있는데, 그 정보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규칙입니다.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고,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는 D 기관의 룰을 잘 드러내는 게임이에요.

이러한 D 기관 설명이 중심이고, 고든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물을 찾는 과정은 곁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과정에 약간의 트릭이 사용되고 있으며, D 기관원들이 천황제 부정 발언을 했던게 트릭과 연결되고 있어서 전개 구조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쿠마가 주도한 수색 자체가 육군의 음모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초 수색을 지시했던 무토 중령은 필름을 발견하지 못했고, 고든의 부당한 수사에 대한 항의로 궁지에 몰렸던 상태였지요. 그래서 D 기관을 시켜 두 번째 수사에 나선 것입니다. D 기관도 수색에 실패하면 모든걸 뒤집어씌워 조.직을 와해시키고, 자기 실수를 덮으려는 목적으로요. 사쿠마는 무토 중령의 음모를 위한 버림돌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반전이 드러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헛점도 많습니다. 무토 중령이 술집 게이샤에게 용의자 집 수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고든 본인이 사쿠마 중위에게 지금이 두 번째 수사라고 말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지 모르겠거든요. 유키 중령이 변장하고 무토 중령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등 작위적인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작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령>>
영국 총영사 그레이엄은 일본인 양복점 점원 가모와 체스로 친해졌다. 그러나 가모는 D 기관 조직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폭탄 테러 계획의 유력한 용의자 그레이엄 총영사에 대한 혐의를 확정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가모는 체스를 통해 총영사는 심증으로는 죄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총영사 관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종이가 테러범 접선 장소에서 발견되었기에, 결정적 증거를 잡고자 철저히 미행했지만 별다른걸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새벽에 영사관에 잡입하게 되는데....


영사는 지령문을 옮기는 수단에 불과했다는게 진상입니다. 테러 조직은 영사의 우산 속 빈 공간을 활용해서 접선 장소에서 몰래 지령문을 전달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영사가 테러 조직의 접선 장소와 동선이 겹쳤고요.

발상의 전환이기는 한데, 구태여 영사를 이용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D 기관원 가모가 영어에 능통하고, 체스는 물론 미행과 잠입, 그리고 금고 털기에도 숙달된 슈퍼 스파이라는 묘사도 과장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가모가 영사가 소싯적 저질렀던 악행을 고백한 일기를 읽은 뒤, 이걸로 영사를 협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악이었습니다. 촬영도 않고 다른 증거도 없는데, 단지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는걸로 영사를 협박하는게 가능했을까요? 심지어 상대는 적국의 스파이인데 말이지요. 이게 통하려면 뭔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가모가 신분을 세탁하여 영사와 친분을 맺는 과정, 그리고 가모가 미행할 때 영사가 팁을 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정보 교환 방법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 정도는 볼 만 했는데, 그 외에는 건질게 별로 없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로빈슨>>
D 기관원 이자와는 영국 런던에 잠입했지만 영국 첩보기관에 체포되었고, 자백 유도제를 맞아 비밀 암호 등을 털어놓고 말았다. 영국은 유키 대령에게 배반당했다는 이자와를 이용하여, 일본에 가짜 정보를 전달하여 혼란을 주려 했지만 이자와는 의식의심층 구조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비밀은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래서 D 기관은 이자와의 정보가 가짜라는걸 알아채는데...

앞서 소개해드렸던 , 암호가 가짜라는걸 알게된 이유는 꽤 괜찮았습니다. 스파이는 일본 남아의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 무조건 살아남아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유키 대령의 사고 방식도 스파이다워서 좋았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과장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특히 자백제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방법이 말이 안됩니다. 의식의 표층과 심층을 구분하여 표층 정보만 입에 올리도록 훈련했다는데, 전혀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지 못했습니다. 훈련 과정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긴, 자백제라는 비과학적인 약도 마찬가지긴 하네요.
이자와 탈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라이데이'의 존재도 이전에 설명 한 번 없어서 뜬금없었습니다. 이자와가 임무를 떠날 때 유키 대령이 <<로빈슨 크루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위기에 처했던 이자와가 동그라미에 십자가 기호가 그려진 암호를 보고 프라이데이의 존재를 깨닫는다는건 솔직히 가관이었습니다. 이 암호는 연금술에서 '미의 여신'을 뜻하고, 미의 여신 비너스는 천문학에서는 금성이며, 이는 일주일 중 제 6일, 즉 '프라이데이'를 가리킨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국가 정보 기관들의 두뇌 싸움은 볼 만 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마의 도시>>
상하이에 파견된 헌병 중사 혼마 에이지는 상사 오이카와 대위로부터 헌병대 내부 내통자 색출을 지시 받는다. 헌병대의 미야타 중사가 살해당했기 때문이어다.
그 직후, 오이카와 대위의 자택이 폭탄 테러를 당했고 혼마는 본국 '특고' 시절 안면을 텄던 신문기자 시오즈카로부터 제보를 전달받았다. 옛 동급생이자 D 기관원인 대학 동창 구사나기를 상하이에서 목격했다는 제보였다....


D 기관원이나 기관의 작전이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이색작. 헌병대 중사 혼마의 수사와 추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탓입니다.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가 돋보였습니다. 오이카와 대위는 아편을 빼돌리다가 미야타 중사에게 들켰고, 그래서 중사를 살해한 뒤 증거 은폐 목적으로 자택을 테러로 위장해 폭발시켰던 겁니다. D 기관은 시오즈카로 변장시킨 조직원을 시켜 혼마가 이 수사를 하게끔 유도했고요.

하지만 혼마의 추리는 증거가 없다는 문제가 큽니다. 오이카와가 도박장을 드나들었고, 빚이 있었다는 정도로 미야타 중사 살인사건 및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몰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이카와가 혼마의 질책 정도로 패배를 쉽게 수긍하는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뒤 요시노 상병에게 총을 맞고 죽는 장면도 뜬금없었습니다. 요시노 상병은 오이카와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이다가 폭발 때 죽고 만 게이 소년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인데, 설명이 부족했어요.

혼란스러웠던 상하이 분위기와 이런저런 묘사는 그럴싸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결말이 별로였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더블 크로스>>
독일인 카를 슈나이더가 소련과 독일 양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D 기관은 졸업 시험을 겸해 도비사키에게 임무를 맡겼다. 도비사키는 슈나이더가 어떻게 암호를 발송했는지 등을 밝혀냈고, 신병을 확보하기 직전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애인의 집에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은 사건 현장을 발견했던 슈나이더의 애인 노가미 유리코였습니다.
사건 당일 그녀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습니다. 수 km 떨어진 극단 연습장에서 한창 연극 리허설 중이었고 그녀는 주역이라 연습장을 5분 이상 비우는건 불가능했는데, 차로 집을 왕복하는데는 최소 10분은 걸리는데다가, 슈나이더에게 유서를 쓰게하고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하는데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알리바이 트릭물 처럼 보였던 설정과 전개에 비해 진상은 보잘것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미리 독을 넣어둔 와인을 마시고 죽었던 겁니다. 바로 직전에 읽고 소개해드렸던 <<흑마술의 여자>> 트릭과 똑같네요. 유서는 전화를 통해 연극 대사로 위장해 쓰게 했다는, 추리 퀴즈 수준의 트릭이었고요. 노가미 유리코가 자택에 설치해두었던 전화 대신, 사람을 시켜 경찰을 부른 이유 - 유서를 옮겨 놓으려고 - 정도에 대해서만 약간의 추리가 등장할 뿐입니다.
유서(?)에 작게 쓰여져 있던 '더블 크로스'도 슈나이더의 즉흥적인 낙서에 불과하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했습니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의미였다는데, 그냥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오히려 본편 사건보다는 도비사키의 과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등을 버리며 홀로 살아가는 스파이가 될 수 없다는 도비사키의 결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급작스럽게 등장합니다. 이 작품이 장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노가미 유리코를 심문하면서 애정이 싹텄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다면 괜찮았을텐데 중간 과정 없이 결심만 등장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수록작 중 워스트로 추리물, 스파이물 양쪽 모두 별 가치가 없는 작품입니다.

2020/05/16

밤의 매미 - 기타무라 가오루 / 정경진 : 별점 2.5점

밤의 매미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일상계 추리의 시조인 '엔시 씨와 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하늘을 나는 말"은 이미 3년 전에 읽었는데, 후속 시리즈를 읽는게 많이 늦어졌네요. 

이번 권에는 세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상계 추리물임에는 분명한데, 최근의 일상계와는 다른 점들이 눈에 많이 뜨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분량입니다. 중편 분량의 이야기들은 다른 일상계 시리즈에서는 보기 힘드니까요.
전작과의 차이도 보이는데, '나'의 친구들, 가족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전편만 보면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문학 소녀 느낌인데, 이번 편을 보면 단짝 친구도 있는 등 나름 정상적인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듯 하여 반갑더라고요. 또 꼼꼼하지 못하고 덤벙대는 성격이라는게 의외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엔시 씨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친구와 가족 비중이 높으니 당연하겠지요. 전작에서는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 해결하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결정적 순간에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해 주는 조력자 역할에 머물 뿐입니다. 전작에서는 홈스였다면, 이번에는 '구석의 노인' 인 셈이죠.

그래도 장점인 순문학적인 흥취를 돋우는 문체와 분위기는 여전합니다. '으스름달밤', '밤의 매미'라는 각 이야기 제목이 대표적입니다.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귀족의 신분이지만, 현실은 헤이안 시대의 그것이 아니라 에도 시대의 벼슬아치쯤 된다. 생활수준이 높지 않다는 뜻이다."와 같은, '나'는 확실히 일본 문화 전공자구나! 싶은 표현도 즐거웠고요. 이런 묘사들이 이야기마다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근하고 멋진, 순문학적인 분위기가 본 편 사건과는 분리되어 있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분위기에 치중하지 않았다면 훨씬 짧게 요약될 수도 있었을 거에요. 그만큼 추리적인 이야기와는 명백히 분리되어 있는 묘사들이었어요.

또 추리적으로 내세울만한 부분 역시 많지 않습니다. '일상계의 시조' 시리즈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에요. 이유는 사건들 대부분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세 편의 수록작에서 동기가 명확해 보이는건 첫 번째 "으스름달밤" 에서의 사건 뿐이며,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은 동기도 모르겠고 상황도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일상 속 수수께끼를 다룬다는 명제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비일상적인 상황들이라는 점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묘사와 분위기도 좋고, 읽는 것 자체는 즐겁지만 추리적으로는 그리 높은 수준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다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으스름달밤" 

나'는 친구 쇼코가 아르바이트하는 서점에서 국문학 코너의 책 일부가 뒤집혀져 꽂혀 있는걸 발견했다. 엔시 씨와 도예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나'는,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엔시 씨에게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앞서 요약했던 장,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장점인 묘사는 유려하고, 분위기도 좋습니다. 작품에서 핵심적인 분위기를 잡아가는 건, 친구 쇼코의 '창작 시음회' 발표된 동명의 시구인데, 시 자체도 멋있지만 를 '밑바닥을 건넌다'고 표현하여 그 위 에 펼쳐진 무한한 밤을 의식하게끔 했다는 해석은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시구, 분위기는 쇼코가 아르바이트하는 서점에서 책이 뒤집혀져 꽂혀있는 기묘한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분위기만 멋드러지게 만들 뿐이에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쇼코가 별자리를 말하기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생일을 알아내는 전형적인 일상계스러운 추리는 좋아요. 하지만 책이 뒤집혀 꽂혀 있었다는 이야기 속 핵심 수수께끼에 대한 엔시씨의 추리는 억지입니다. 범인의 목적이 '환불'이었다는건데, 환불 목적이라면 앞서의 사건, 즉 책을 뒤집어 꽂는 사건을 범인이 일으킬 이유는 없습니다. 딱 한 번만 행할 수 있는 범죄를 위해, 그 전에 무려 3번이나 서점을 방문해서 책을 뒤집어 놓을리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사전 작업이 책 환불의 근거가 되는 책의 슬립이 잘못 꽂혀진걸 뒷받침 한다는데, 보통은 그 책을 구입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을까요?
또 책을 뒤집다가 발각될 경우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부족하며, '나'가 아니었다면 이 범행 자체가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헛수고가 될 수도 있었던 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아울러 라쿠고에서 본 편에 등장하는 주요한 단어에 대해 미리 설명해주는 '서설' 이라는 용어를 통해 이 범죄를 설명하는 묘사 역시, 그리 와 닿지 않더군요. 라쿠고 및 라쿠고가 엔시 씨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한 사족에 불과했습니다.

덧붙이자면, '나'가 호감을 가진 '안도 선배'의 본명이 사카이리였다는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나'가 쇼코에서 진심으로 분노한다는 심리 묘사는 인상적이었습니다만, 이 역시 추리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안코 + 도넛의 약자로 '안도'라는 별명이 붙었다는건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6월의 신부"

가루이자와로 향하여 시간을 보내는 부분에 대한 공들인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풋풋한 대학생들의 여행을 그리고 있는데 아련하고 좋더군요. 약간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또 곁다리 사건이나 이야기없이 체스의 퀸이 없어진 사건만을 다루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결국 카루이자와 별장 여행을 함께 했던 다섯 명 중 한 명이 장난을 친 건 분명하니까요. '나'가 범인이 아니면 후보는 네 명으로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네 명 중 거의 그 날 처음 만난 듯한 귀공녀 미네, 가사이 선배와 요시무라 선배는 범인이라 하더라도 쉽게 알아챌 수가 없을테니, 에미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요.
또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건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에미가 요시무라 선배가 체스를 두지 않고 시간을 보낸 걸 숨기기 위함이었다는 동기는 그럴듯해요. 하지만 이런 장난까지 칠 필요가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 떨어졌다던가 하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는게 상식적이죠. 실제로 트럼프 카드나 체스 말이 없어지는건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설령 이를 얼버무리기 힘들었다 하더라도, 냉장고 속 달걀과 바꿔치기하고, 달걀은 휴대용 거울과 바꿔치는 등의 수고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에미와 요시무라 선배가 서로의 교제를 숨겨야 하는 상황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저녁에 술을 먹으면서 미네와 가사이 선배는 어느정도 선(?)을 넘었다는 묘사가 등장하는 걸로 봐서는, 딱히 남녀 교제가 터부시되는 상황도 아닌데 말이지요. 여행을 떠날 때 귀공녀 미네와 가사이 선배, 에미와 요시무라 선배로 커플이 맞추어진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나'가 범인이 누군지 알았다!는 일종의 추리쇼 역시, 설득력이 약합니다. 에미의 자백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밝혀내는 단서 역시 일본어 '리스 (다람쥐)'와 버금간다는 한자 '아'를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이라 일본인이 아니면 어차피 알아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러한 본 편 추리보다는 차라리 '나'의 중학교 시절, 교무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더 인상적입니다. 칠석은 7월 7일이니 여름같지만, 7,8,9월이 가을이라 칠석은 가을의 계어 라는 말입니다. 이유는 음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름은 4,5,6월이고요. 음력은 확실히 과학적인 단위임이 분명합니다.

"밤의 매미"

언니는 교제하던 남자 미키에게 충동적으로 가부키 표를 보냅니다. 그러나 공연에는 미키가 마음에 두던 신입사원 아가씨가 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언니는 미키와 확실하게 연을 끊지요. 문제는 사와이라는 신입사원은 이 표를 미키가 보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언니는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비열한 악녀가 되어 버린 상황인데, '나'가 엔시 씨의 도움으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이야기지요.

진상은, 언니 동료 오누키 씨가 저지른 일이었다는 겁니다. 언니는 회사 우편물을 다량으로 보내면서 미키에게 이 편지를 함께 보냈는데, 오누키씨가 미키와는 헤어지는게 좋겠다 생각하여 집배원에게 통사정하여 우편물을 모두 돌려받습니다. 그리고 미키 씨 이름으로 사와이 씨에게 표를 보낸거죠.

그러나 이유, 동기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오누키 씨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다른걸 다 떠나서, 우편물을 거짓말을 해 가며 집배원에게서 받아내는건 범죄입니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누군가의 연애를 훼방놓고 싶다 하더라도 말이죠.
게다가 빼돌렸다 하더라도 그걸 가짜 이름으로 다시 보내는건 더 지나친, 정말이지 악행인데 오누키 씨가 미키 씨 이름으로 사와이 씨에게 표를 보낸 이유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거 봐라, 둘이 사귀고 있지 않냐!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비싼 표를 누가 보내 준다면,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공연에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약간의 호감이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고요. 단지 공연에 왔다는게 무슨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도야 어쨌건, 결과적으로 언니가 최악의 여자가 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건 정말 바보입니다.

아울러 이 이야기를 라쿠고 "미끌미끌"와 연결하려는 시도도 그리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미끌미끌"에서 광대 가즈야가 사랑에 실패하는건 본인의 실수 때문이니까요. 그 누구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애매하기에, 이야기를 엮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오누키 씨가 이 상황을 모두 사와이 씨에게 말해서, 사와이 씨는 모든걸 알고 있었지만 가련한 피해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만, 문제는 사와이 씨에게 고백했는데 언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 역시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언니와의 관계가 아직은 깔끔하게 끝나지 않은 느낌인데, 후속권에서 무슨 이야기가 진행될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

2015/10/21

특별요리 - 스텐리 엘린 / 김민수 : 별점 4점

특별 요리 - 8점
스탠리 엘린 지음, 김민수 옮김/엘릭시르

2003년에 동서 추리문고 출간본으로 읽고 폭풍 감동했던 스텐리 엘린의 걸작 단편선집입니다. 당시 별점은 5점이었지요. 이번에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엘릭시르에서 정식 번역본으로 재출간되었기에 다시 구입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작품들은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번역에서도 차이가 나더군요. 제목부터요. 원제를 보니 엘릭시르 번역본이 확실히 제대로 된 번역이네요. "the best of everything"은 "최상의 것"이지 "너와 똑같다"일리 없으니까요. "배반자들 (The Betrayers)"의 경우는 동서판의 "벽 너머의 목격자"라는 제목이 더 와닿기는 했습니다만, 이는 최초 일어판의 초월번역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이겠지요. 번역은 일단 원제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엘릭시르 버전 쪽에 점수를 더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유명한 스빌로스의 아밀스턴 양 요리도 스비로스의 아미르스탄 양 요리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역시 엘릭시르 쪽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작품들 자체는 10년도 더 전에, 그것도 이미 한 번 읽었기에 신선함이 떨어지는건 어쩔 수 없네요. 아무래도 별점 5점을 줄 때만큼의 감동을 느끼기는 힘듭니다.

그래도 오 헨리를 연상케 하는 반전의 맛은 여전히 살아 있고, 일상적이지 않은 독특한 세계와 인물을 그려내는 설정 역시 빼어납니다. 개인적으로는 각 단편에 등장하는 악당들 대부분이 지옥으로 간다는 결말들도 마음에 들었고요. 한마디로 언제 읽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전해주는 걸작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4점. 이런 말은 좀 식상하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부럽습니다.

각 작품별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특별 요리

스비로스의 아미르스탄 양 요리! 뭐 더할 나위 없는 걸작이지요.

손발의 몫

"미생"이 "완생"이 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랄까요. 비정한 고용인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본인은 그에 대한 자각 없이 하나의 기계로 동작한다는 작품. 지금의 한국 사회와 딱 어울리는 느낌이라 시대를 앞서간 듯 합니다. 취업을 위해 경쟁자를 살해한다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걸작 "도끼"도 떠올랐습니다.

성탄 전야의 죽음

이십여 년에 걸친 무간지옥 이야기. 누가 제시를 죽였는지에 대해 수수께끼를 불러일으키다가 마지막 대사 하나로 놀라운 반전을 터트리는 작품. 이런 류의 서늘한 느낌을 전해주는 반전 단편으로는 교과서라 해도 무방할 수작입니다.

애플비 씨의 질서정연한 세계

아내를 여섯 명이나 죽여가며 자신의 골동품 가게를 지키려던 애플비 씨는 일곱 번째 여자와 결혼하는데, 정작 그녀는 그에 대한 모든 범죄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 조금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블랙 코미디 느낌의 반전 결말이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체스의 고수

체스에 몰두하다가 자신의 상대가 될 또 다른 인격을 분열시킨다는 내용.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아 아쉬웠지만 평범한 사람의 정신이 붕괴하는 과정 묘사는 탁월해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했습니다.

최상의 것

"리플리"의 또 다른 버전이랄까요. 자신과 닮은 부잣집 아들을 죽이고 그에게 오는 돈을 가로챈 젊은이에게 파국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이어지는 설정, 그리고 반전 역시 좋았습니다.

배반자들

과거 읽었을 때에도 아주 좋았던 작품. 벽 너머에서 누군가 살해당하는 소리를 들은 이웃집 남자의 활약(?)이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야기인데 역시 반전 매력이 돋보였습니다.

하우스 파티

무간지옥 2탄. "사랑의 블랙홀"의 막장물 버전이지요. 반전은 없고 다소 뻔한 내용이지만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연극과 무한 반복되는 세계라는 감옥을 연결시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브로커 특급

아내의 불륜을 눈치채고 불륜남 살인을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 다 좋은데 결말이 석연치는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한 게 뻔한데 진정한 사랑 운운하며 같이 죽는다는 건 납득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너무 보수적인 걸까요?

결단의 순간

태어나서 고민이라는 걸 한 번도 안 해본 남자가 일생일대의 고민을 앞둔다는 내용으로 열린 결말이 인상적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입장이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목숨을 건 딜레마라는 점에서,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피아니스트를 불타는 집에 수갑을 채워놓고 도끼인지 칼인지를 꽂아놓고 쿨하게 떠나는 남자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디서 읽었던 걸까요?

2026/01/04

루드비히, 퍼즐로 푸는 진실 (2024) : 별점 4.5점

유명 퍼즐작가로 필명이 '루드비히'인 존 테일러에게 형수이자 소꼽친구 루시로부터 경찰인 쌍둥이 형 제임스가 실종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러 정황은 제임스가 모종의 이유로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는걸 알려주었다. 루시는 존에게 제임스인척 경찰서로 출근해서 존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출근한 존 앞에 여러 불가능 범죄가 잇달아 펼쳐지는데....

영국 BBC에서 제작한 총 6화 구성의 추리 드라마 첫 번째 시즌입니다. 

가장 큰 매력은 독특한 설정입니다. 퍼즐 천재인 '루드비히' 존을 주인공 탐정역으로, 범죄 속 트릭들을 퍼즐의 일종처럼 선보이거든요. 존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하나의 ‘퍼즐’로 인식하며 본격적으로 해결에 나서고요. 마술사 탐정까지는 봤었는데, 퍼즐 전문가 탐정은 처음 보네요.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입니다. 퍼즐 제작에만 몰두하며 사회성과 현실 감각이 부족한 존이 갑작스럽게 경찰 역할을 맡아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코믹하면서도 묘하게 현실감 있게 그려집니다. 형수 루시와 조카 헨리도 제임스 실종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요. 그러고보니 존과 제임스 형제에 아들 이름은 헨리라니, 가족 자체가 영국적이군요. 
카터를 비롯한 경찰 동료들, 다른 등장인물들도 진지한 상황 속에서 영국식 유머를 자연스럽게 섞어내어 극을 재미있게 만들어 줍니다. 가족과 동료애가 끝까지 이어지는 것도 요사이 보기드문 미덕이라 할 수 있고요.

추리적으로도 빼어납니다. 1화에서는 여러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교차 분석해 논리적으로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인물을 드러냅니다. 시청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서 추리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렵지만, 퍼즐 전문가의 해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2화에서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퍼즐 트릭이 사용됩니다. 존은 사진을 통해 벽지가 미세하게 이동한 점을 알아채고, 벽지 뒤 벽을 뚫어 숨겨진 시체를 찾아낸 뒤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요. 피해자 사기꾼에게 사기당한 일행들이 단체로 범행을 저지르고 은폐했던건데, 앞서 등장한 여러가지 단서들로 설득력있게 설명됩니다.

3화는 두 개의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는 ‘병렬 퍼즐’이 등장합니다. 관광 가이드 살인은 갑작스럽게 행해진 것으로 추리하고, 그 이유를 관광 코스를 직접 도는 방법으로 발품을 팔아 증명해내는데 수사와 진상 모두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4화는 체스말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범은 장치 트릭을 활용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다섯 명의 동료들 작업 위치가 순차적으로 바뀌도록 유도해서, 피해자가 원했던 위치에 가도록 만든 뒤 장치를 통해 추락사하게 만든거지요. 존은 이를 '역행 제스' 퍼즐로 풀어냅니다. 이 퍼즐 자체가 루드비히' 존이 처음 만들었다고 소개되는데, 현재의 체스판 상태를 보고 이전 수를 맞추는 퍼즐이에요. 즉, 이전 수를 맞춰가면서 최초에 수를 둔 사람을 알아내 범인을 밝혀냅니다. 
퍼즐을 활용한 추리도 깔끔하지만, 피해자를 발전기가 있는 위치로 이동시킨 뒤 쇼트가 나가도록 배선을 망치고, 발전기를 가동하면 피해자가 감전되어 추락사하게 만든 장치 트릭도 합리적입니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범인이 원하는 흐름대로 움직였던 것도 이전부터 자주 그래왔다는 설정이라 설득력있고요.
마지막에 발전기에 물을 뿌려 놓은 탓에 범인의 DNA가 묻은 물통을 확보했지만, 범인이 “자기는 1층에서 버렸다”고 주장하자 5층 현장에서만 쓰레기 수거장 안으로 투입 가능하다는 점을 추리쇼처럼 밝혀내는 장면도 볼만합니다.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에피소드입니다.

5화는 '밀실 살인' 트릭이 등장하는데, 꽤 그럴듯합니다. 주말 내내 잠겨있던 교장실에서 교장이 살해된채 발견되는 사건인데, 존은 범인이 밀실 안에 계속 있었다!는 대담한 추리를 내 놓습니다. 이를 발견하는 단서가 교장실 쓰레기통에 있던 '변색되지 않은 사과 조각'이라는 디테일도 인상적입니다. 누군가 교장실에 최근까지 있었다는 증거인데, 영상물에 잘 어울리는 디테일이었습니다. 존의 학창 시절 과거, 그리고 노인이라도 쓸모없는게 아니라는 메시지도 좋았고요.

6화는 루시의 살인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잡는 이야기인데, '루시가 집에서 가져간 칼로 사망한 피해자'라는 결정적 증거를 뒤집는 추리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범인이 막 피해자 폴라를 칼로 찔렀을 때 루시가 자기 칼을 들고 그 집에 들어섰습니다. 범인은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식탁 뒤로 숨었고, 루시가 쓰러진 폴라를 보고 자기 칼을 내려 놓은 뒤 그녀에게 다가가자 범인은 루시에게 보이지 않는 사각으로 빠져나가면서 칼을 바꿔치기 했던 겁니다.
정통 본격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싶을 멋진 트릭이며, 증거도 확실하게 제시됩니다. 범인은 바꿔치기한 루시의 칼을 폴라 부엌 칼꽂이에 꽂아두었는데, 이 칼에서 루시나 존의 지문이 나오면 바꿔치기했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이러한 각각의 사건들과 함께 제임스 실종 사건에 대한 조사와 추리도 계속 이어집니다. 결국 존은 제임스가 남긴, 누구나 들으면 스스로 떠났다고 생각할 메시지에서 암호 해독 키를 찾아내어 암호를 풀어내어 단서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체가 드러났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경찰의 고문역으로 일하며 형을 계속 추적할 존의 모습으로 총 6화의 시즌 1은 마무리 됩니다. 

1화와 2화, 3화 사건은 경찰 수사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듯 싶고, 경찰이 너무 무능하게 그려진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제임스와 폴라, 싱클레어 등이 관련된 진짜 음모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고요. 제임스가 암호로 창고 위치를 남긴 이유와 사라진 이유를 창고에 남기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재미와 추리 모두 빼어난 좋은 드라마였습니다. '루드비히'라는 주인공 필명에 어울리는, 베토벤 음악의 적절한 활용과 촬영도 좋고요. 시즌 2가 빨리 나오면 좋겠습니다.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2006/06/13

검의 대가 (Maestro de esgrima, El) -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 김수진 : 별점 3점

검의 대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열린책들

마드리드에서 혼자 살고 있는 쉰 여섯의 돈 하이메 아스타를로아는 한때는 화려한 시기를 보냈지만, 점차 그 유행과 가치가 퇴색되고 있는 검술을 가르치며 연명하는 검술 교사이다. 

1868년 여름, 이사벨 2세 여왕 정부에 대한 반발 세력들이 정권을 전복시킬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며 어수선하던 어느 날 돈 하이메에게 아델라 데 오테로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돈을 두 배로 주겠다며 돈 하이메가 직접 창안한 '2백 에스쿠도' 검법이라 불리는 공격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하지만 끈질긴 간청으로 약간의 시험을 거친 뒤 그녀가 뛰어난 검객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검법을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점차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레베르테의 대표작이라는 "검의 대가"를 드디어 읽었습니다! 이 작가 작품은 네 번째로 읽어보는데 작가의 두 번째 장편이며 제가 읽은 것 중에서는 가장 먼저 발표한 작품이네요.

특징이라면 초기작이지만 다른 작품들 처럼 역시 작가의 뛰어난 자료 조사 능력이 돋보이는 현학적 재미가 엄청나다는 겁니다. "뒤마 클럽"이 고서,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이 체스라면 이 작품은 "알라트리스테"와 비슷하게 스페인의 근대사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제목 그대로 "검술 (펜싱)" 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설명해 줍니다. 19세기 후반의 스페인을 무대로 당시의 격동적인 사회상을 소설 내용에 그대로 반영한 전개는 역시나 레베르테 답다는 탄성이 나오게 할 만큼 잘 짜여져 있고요. 

또한 "뒤마 클럽"이 재미와는 상관없이 고서사냥꾼 코르소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잘 묘사한 것 처럼 이 작품에서도 돈 하이메라는 정말 "검의 대가"같은 그럴싸한 캐릭터 덕분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어떻게 보면 나이든 알라트리스테와 느낌인데 진중한 멋이 느껴지는 멋진 캐릭터라 무척 호감이 갔습니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에서는 체스의 고수 캐릭터가 약했던 측면이 있었는데 두 작품의 장점만 섞어 놓았달까요? 기본 설정과 캐릭터, 묘사에서 일단 먹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펜싱에 대한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하고 당시 사회상에 대한 묘사, 돈 하이메의 과거사 등에 대한 설명이 과해서 지루한 측면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현학적인 과시욕 때문이었을까요? 움베르토 에코의 여러 작품들에 비하면 그 정도가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2/3 정도로 분량을 줄이는 것이 효과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메인 스토리 자체는 다른 웅장한 설정이나 묘사에 비하면 많이 약하기 때문에 분량 면에서 더욱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또한 마지막의 대결 장면은 아무리 진검과 연습용 검의 차이는 있지만 "검의 대가"인 돈 하이메의 캐릭터 때문에 그다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아 긴장감이 덜한 것 역시 아쉬웠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우연찮게 케이블 TV에서 방영했던 영화를 먼저 감상했었기 때문에 결과를 미리 알고 있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책에 등장한 다양한 펜싱의 자세를 약간의 도해로나마 표현해 주었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작가 스스로는 "200 에스쿠도"를 눈이 휭휭 돌아갈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는데 머리로는 그 검법이 전혀 그려지지 않거든요. 책 자체는 이쁘게 잘 나왔는데 약간의 배려가 아쉽네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영화로 먼저 보기는 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소설을 보니 확실히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드네요. 돈 하이메 캐릭터를 잘 살렸던 영화나 다시 구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PS : 근데... 이게 "추리물" 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2004/09/07

빅포 - 애거서 크리스티 / 유명우 : 별점 1.5점

빅포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해문출판사

이름 그대로 4명의 인물 - 조직의 보스이자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중국인 리창옌, 자금을 대는 거부 미국인 에이브 라일랜드, 천재 여류 과학자이면서도 사악한 무기를 개발하려고 하는 프랑스인 올리비에 부인, 조직의 킬러인 전직 연극배우 - 을 중심으로 구성된 빅 포 (Big Four)라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포와로의 활약을 그린 단편집.
이들은 자신들의 세계정복(?) 계획에 포와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되리라 예상하여 포와로를 제거하려 하고 포와로는 헤이스팅스와 함께 힘을 모아 대결한다는 조금은 단순한 설정인데 각 단편들이 하나의 큰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연작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건은 행방불명 되었었던 영국 정보부원 메이얼링의 살해사건입니다. 메이얼링이 포와로에게 빅포의 위험을 알리다가 포와로 방 침대에서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되며 살해당한 증거는 시계의 문자판으로 만든 "4"라는 숫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정작 트릭은 범인이 "변장의 명수"였다.. 라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무한 것이라 뭐라 이야기할게 없네요.

두번째 사건은 훼일리라는 빅포의 존재를 알고있는 노인이 살해당한 사건으로 교묘하게 잘 짜여진 트릭이 등장합니다. 범인이 진작부터 살해를 목적으로 하인을 포섭하는 부분은 좀 억지스럽지만 영국의 여름 날씨와 푸줏간 주인을 연결하는 부분이 아주 괜찮았어요.

세번째 사건은 젊은 유망한 과학자 할리데이의 실종사건입니다. 빅포의 구성원 중 한명인 과학자 올리비에 부인의 정체가 폭로되는 부분으로 빅포의 하수인으로 포와로의 옛사랑 로사코프 백작부인이 등장하는 등 연작의 전체 구성에 있어서는 중요한 작품이나 추리적으로는 빵점에 가까웠습니다. 스파이 소설이나 모험 소설로 보는게 더 타당한 작품이었어요.

네번째 사건에서는 빅포의 나머지 멤버가 미국인 거부 에이브 라일랜드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헤이스팅스가 좌충우돌하는 내용이 거의 전부로 세번째 사건처럼 전체에 있어서는 중요한 내용이긴 하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한마디로 별로라는 이야기죠...

다섯번째 사건은 부유한 여행가 페인터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빅포가 페인터의 회고록 출판을 막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페인터가 죽기 전 남긴 "노란 자스민"이라는 글귀를 토대로 범인을 알아낸다는, 어떻게보면 전형적인 포와로식 단편입니다. 이 책의 다른 사건들에 비해 추리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내용이라 그나마 마음에 든 편입니다.

여섯번째 사건은 러시아 체스 고수와 미국인 체스 고수의 시합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입니다. 이 책의 가장 뛰어난 단편으로 크리스티 여사의 단편에서 거의 보기 드문 과학적, 기계적 트릭이 등장하고 있으며 살인의 원인과 동기도 매끄럽게 처리하고 있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일곱번째 사건은 헤이스팅스의 부인을 납치, 헤이스팅스로 하여금 포와로를 배신하게 하려 하는 빅포의 음모가 그려집니다. 그냥 뻔한 모험소설로 포와로의 "액션"이 등장하긴 하지만 건질건 거의 없는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크리스티 여사 작품 중에서도 최악으로는 1, 2위를 다투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어요.

여덟번째 사건에서는 빅포의 킬러인 연극배우의 정체를 밝히려는 포와로의 치밀한 노력이 빛나는 편입니다. 외모와 행동에서 유출한 데이터만 가지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모험소설적인 내용과 추리적인 부분과의 모범적인 공존 형태를 보여주고는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역시 마지막 부분이 많이 허무한 등 아쉬운 점이 더 많았습니다.

마지막 사건은 포와로의 죽음과 포와로의 쌍동이 형 아킬의 등장, 빅포의 회의장소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사투를 담고 있습니다. 쌍동이 형에 관한 반전은 괜찮았지만 빅포의 너무나 허무한 최후나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탈출이 "운이 좋아서" (물론 포와로의 준비는 있었지만) 가능했다는 등, 내용상의 헛점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결론내리자면 홈즈 시리즈의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는 모험물 스타일의 작품이었습니다.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포와로의 활약을 그리고 싶었던 크리스티 여사의 의도는 확실히 전해지고요. 그러나.... 포와로라는 캐릭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라 생각되며 빅포라는 악의 조직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그려져서 설득력도 떨어지고 왠지 아동물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거의 "검은별" 수준입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나 트릭이 간간히 등장하고 여섯번째 사건 같은 경우는 상당한 수준으로 충분한 재미를 전해주긴 합니다만 괜찮은 아이디어들을 빅포라는 조직과 무리하게 연관 시키면서 무너져 버리는 부분이 많아 안타깝네요.
"부부탐정" 처럼 악당 조직은 중간 중간 별개의 이야기로 등장하고 아예 다른 내용으로 꾸며져 한권의 단편집으로 처리하였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여간.... 제가 읽은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 중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3/11/18

명작 추리 소설 5선 : 이 서술 트릭이 굉장해!

소설에 대해 안내하고 소개해주는 일본 사이트 '소설마루'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가볍게 소개해 드립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이 노출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0/02/16

구제의 게임 - 가와이 간지 / 이규원 : 별점 1.5점

구제의 게임 - 4점
가와이 간지 지음, 이규원 옮김/작가정신

미국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 자리한 ‘성스러운 나무 언덕’이라는 뜻의 ‘홀리파인힐’ 골프코스에서 열린 PGA챔피언십에서 ‘골프 신의 총애를 받는 남자’ 닉 로빈슨이 우승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18번 홀에서 위기를 맞이했다. 첫 타를 숲에 박은 것이었다. 그곳에는 기병대에 의한 원주민 학살이 이뤄졌다는 불길한 전설이 내려오는, 4,500년 수령의 거목 ‘신의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신령한 나무는 오르면 벼락을 맞고 떨어지다가 옆의 나무 기둥에 몸통이 관통되어 죽는다는 재앙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로빈슨과 캐디 토니 라이언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마침내 승리를 따 냈지만, 이튿날 로빈슨은 골프 역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을 세우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 열린 US오픈에서 예선을 1위로 통과한 일본계 미국인 잭 아키라 그린필드와 캐디 팀 브루스는 첫 승 도전에 나섰다. 하버드에서 진화심리학을 전공한 잭은 자신만의 골프 이론과 탁월한 기술을 겸비한 천재 골퍼였다. 그러나 대회 당일 아침, 18번 홀에서 깃대에 복부가 관통된 끔찍한 모습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데드맨"의 작가 가와이 간지가 쓴 본격 추리 장편 소설입니다.

솔직히 작가의 전작에 대한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부분은 괜찮았지만, 전개가 영 그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도서관이나 서점을 가기 힘들어져서, 온라인 도서관으로 읽을거리를 찾다가 소갯글을 보고 호기심이 당겨서 읽게 되었네요.
호기심이 당긴 이유는 딱 한가지, 작품이 "골프"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트라이크 살인"이나 "마구"처럼 야구라던가, 엘러리 퀸의 단편의 소재로 등장했던 권투, 딕 프란시스의 모든 작품에 소재로 사용된 경마, "검은개""사라진 테니스 스타"의 테니스, 스키 등 여러가지 스포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많이 봤지만, 골프를 소재로 한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거든요. 골프라는 스포츠를 즐기지는 않지만, 규칙은 잘 알고 있고 평소 관심도 있었고요.

이런 스포츠 소재 작품들 중 어떤 작품은 단순히 해당 경기의 선수가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이 작품은 다행히 그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사건의 핵심 동기가 '벌타'규정에 따라 우승을 놓치게 된 슈퍼스타 닉 로빈슨의 캐디 토니 라이언이 어쩔 수 없이 벌인 부정행위이며, 또 이 부정행위 탓에

  1. 캐디의 판단보다 세 단계나 짧은 클럽을 선택했다. 
  2. 루틴을 무시하고 손수 클럽을 뽑아 들었다.
  3. 서드 샷 전에 에이프런에서 한참 멈칫거렸다.
  4. 지극히 단순한 라이에서 생크를 냈다.
  5. 우승 공을 처음으로 직접 챙겼다.
  6. 우승 직후 뜻밖의 은퇴 발표를 했다.
  7. 은퇴 이튿날 18번 홀에서 드라이버 연습을 했다. 

는 닉의 이상한 행동들이 결정적 단서가 되니까요. 게다가 이 부정행위 탓에 협박받게 된 캐디가 살인을 저지르고 자살한 장소가 US 오픈이 열리는, 요세미티에 위치한 더 홀리파인힐 리조트이며, 탐정 역할을 맡은건 US 오픈 출전권을 갓 획득한 일본계 미국인 잭 아키라 그린필드이고 왓슨 역할은 그의 캐디 팀이 수행한다는 점, 그리고 “골프는 훌륭한 스포츠야. 바람, 풀, 나무, 물, 모래, 흙, 늘 자연과 함께하는 스포츠잖아.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려서 실수해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아.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지." 라는 잭의 후원자 맥거번 회장의 말이나, "골프는 스포츠 중에 유일하게 심판이 없는 경기다, 골퍼는 양심과 자존심을 걸고 규칠을 지키며 정직하게 플레이해야 한다"는 잭의 말 등 이야기 전반에 걸쳐 골프라는 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골프 추리 소설' 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그런 작품입니다. 제목도 아주 근사하지요.

"데드맨"도 그랬지만, 추리적으로도 꽤 그럴싸합니다. 특히 앞서 설명드린 닉 로빈슨의 기묘한 행동을 파고들어 해당 경기에서의 부정을 밝혀내는 부분, 그리고 사건을 담당하는 휴즈 형사의 접근법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는 토니 라이언이 살해된 현장을 보고 세 가지 의문을 느낍니다. 첫 번째는 왜 전설과 일치하도록 범행했는지, 두 번째는 깃대로 어떻게 몸을 관통시켰는지, 세 번째는 왜 많은 사람이 모이는 US 오픈 현장에서 범행했는지입니다. 그러나 휴즈 형사는 앞의 두 가지는 버리고, 마지막 의문에만 집중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의문이며, 이 의문을 풀어 범인을 체포하면 앞의 두 가지는 범인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굉장히 와 닿습니다. 온갖 불가능 범죄가 난무하는 고전 본격물에 도입하면 꽤 괜찮겠다 싶은 현실적인 추리법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잭과 팀의 티격태격하는 대화는 만담같은 재미가 잘 살아있으며, 가끔 등장하는 골프 장면도 박진감있게 묘사되어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그러나 역시나,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토니 라이언 살인 사건의 동기가 닉 로빈슨의 마지막 경기이며, 그 중에서도 다른 공을 발견한 척 했다는 건 읽다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를 밝혀내려고 하는 휴즈 형사와 잭의 추리에 대한 흥미는 상대적으로 떨어져요. 그런데 다른 피해자 앤서니 스미스가 발견되고, 그가 닉 로빈슨 마지막 경기에서 공을 발견한 당사자였다? 이렇게 되면 진범은 닉 로빈슨이거나, 최소한 닉이 강하게 연루되었으리라는건 뻔한 추리입니다. 앞서 휴즈 형사의 추리 방법론에 따르면 그로부터 자백을 이끌어내면 되는거죠.

토니 라이언이 닉을 보호하기 위해 앤서니 스미스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진상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토니의 동기는 설득력이 높지만 인디언 전설에 따라 현장을 조작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토니는 자신도 살해된 것처럼 꾸며서 닉을 지키기 위한 의도였다고는 하는데, 동기가 명확하기 때문에 닉이 빠져나갈 방법은 애초에 없습니다. 차라리 앤서니 스미스의 시체를 싣고 US 오픈 현장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차와 함께 불태워 버리는게 더 나은 해결 방법이었을거에요. 이 작가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실력이 아무리 봐도 너무 부족해 보입니다.
아울러 끝이 뭉툭한 깃대를 몸에 관통시킨 방법은 드라이버 샤프트로 미리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라는 진상 역시 그다지 새롭지 않을 뿐더러 무의미했어요. 차라리 앤서니 스미스의 몸을 관통한 나뭇가지 끝은, 사고 후 부러졌다는 추리가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더해, 인물들이 지나치게 만화적이라는 것도 설득력을 떨어트리는 요소입니다. 주인공 탐정인 잭에 대한 설정이 대표적이에요. 하버드에서 진화심리학을 전공하였으며, 골프는 시작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1년 만에 골프 스윙의 진리를 발견한 뒤 US 오픈 출전권을 획득했고 일종의 시범 게임에서 세계 1위를 압도적으로 이긴다는 묘사는 해도 너무하지요. '사고기계' 반 두젠 교수도 규칙만 이해하면 충분하다며 체스를 익힌지 단 하루만에 체스 세계 챔피언을 이기긴 했다지만 이건 1900년대 초반의 이야기입니다. 21세기에 먹힐 수 있는 설정은 도저히 아니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골프를 소재로 한 거의 유일무이한 추리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골프를 정말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분께 어필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평범한 추리 애호가에는 그닥 인상적이거나 흥미로운 부분이 없는 평범 이하의 작품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0/01/28

클로버의 악당들 - 퍼시벌 와일드 / 정태원 : 별점 4점

클로버의 악당들 - 8점
퍼시벌 와일드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1900년대 초반의 미국을 무대로, 어렸을 때 집을 뛰쳐나와 6년간 프로도박사로 활동하다가 코네디컷에 농부로 눌러 앉은 25살의 빌 파믈리가 친구이자 주로 "사건"을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를 전담하는 토니 클랙혼과 함께 사기 도박을 밝혀낸다는 류의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유쾌한 단편집입니다.

이전에 소개했던 "퀸의 정원"의 "제 1기 근대"에 포와로, 뤼팽, 피터경 등과 함께 분류되어 있으며, 수록작 중 몇 안되는 국내 출간작이기도 합니다. "퀸의 정원" 분류표에서도 H.Q.S, 즉 역사적 중요성, 문학적 가치, 입수 곤란하다는 3관왕을 달성하고 있네요. 국내 출간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는데 저도 이번에야 알고 냉큼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일단 "퀸의 정원"에 선정된 작품답게 추리적인 내용이 상당히 비범한 편입니다. 사기 도박을 밝혀낸다는 것이 범죄자가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범죄를 몇 안되는 단서를 통해 탐정이 밝혀내는 추리의 과정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일 텐데요. (뭐 사기 도박이 아니라 사기라는 범죄를 밝혀내는 여러 작품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이러한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교한 사기"가 무려 100여년 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한 점이겠죠. 주로 다양한 장치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장치를 뒤집어 써먹는다던가 하는 두뇌싸움도 효과적으로 써먹고 있다는 것도 재미를 더해주고요.

또한 1900년대 초반 발표된 작품이지만 뭔가 개척시대의 유쾌한 도박사 일당 이야기 - 매버릭 - 와 같은 시끌벅쩍 유쾌한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와 더불어 젊지만 느물느물한 속을 알 수 없는 고수이자 장난꾸러기인 주인공 빌 파믈리, 사고뭉치에 주제를 파악할 줄도 모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멍청이인 토니 클랙혼 등 등장인물들도 톡톡 튀며 재치있는 대사와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넘치는 것이 왠지 예전에 읽었던 "O.헨리의 미스터리 걸작선" 느낌을 가져다 주더군요.

추리 애호가 뿐만 아니라 오 헨리의 팬이시라면 한번 읽어보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것 같네요. 별점은 4점. (솔직히 희귀하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긴 했습니다^^)

아울러 국내 추리문학을 위해 노력하시는 정태원 선생님이 손수 구한 책을 가지고 번역하신 것이라 더욱 뜻깊은 작품이기도 한데, 앞으로도 이런 고전 명작들이 번역 출간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작품 해설을 통해 알려주신 이 작가의 다른 대표작인 검시재판이나 탐정 피트 모란 시리즈라면 더할나위 없겠죠.

심벌 (The Symbol)
집을 뛰쳐나와 도박사로 먹고살던 빌 파믈리가 고향 코네티컷에 돌아가 아버지와 포커 승부를 벌인 뒤 개심하여 농부가 되는 과정을 그린 시리즈의 서두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빌이라는 주인공의 성장 배경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핵심 이야기로 두건의 사기 도박이 등장합니다.
첫번째는 빌이 벌이는 사기도박으로 카드 바꿔치기에 대한 내용으로 별다른 건 없습니다. 두번째 아버지와의 승부는 빌이 카드를 조작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정직한 승부"에 패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갑작스러운 빌의 난조가 명쾌하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승부 자체도 재미있고 부자의 관계 회복도 설득력 있는 작품이죠.

사기꾼의 카드 (The Run of the Cards)
빌 파믈리가 토니 클랙혼과 만나는 시리즈 두번째 이야기. 사기 도박으로 거액을 잃은 토니의 아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빌이 토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도와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사기 방법에 대한 단서 제공도 공정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포커 승부 자체가 굉장히 박진감있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죠. 마지막의 상대방의 사기를 역으로 공격하여 승리하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마지막 공정한 승부에 대한 짤막한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별점 5점짜리 단편입니다.

포커 도그 (The Poker Dog)
토니가 또다시 처남 테드와 함께 사기에 걸려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빌은 슈워츠라는 그 사기꾼과 대결하기로 한다. 그러나 그가 정작 토니에게 부탁한 것은 개를 한마리 사달라고 한 것 뿐.
전보로 시작하는 유쾌한 서두 - 완벽한 사기꾼 슈워츠에 대한 묘사로 분위기 고조 -갑작스러운 빌의 강아지 찾기를 통한 의외성 도출 - 마지막 승부에서의 화끈한 결말 이라는 기-승-전-결 에 충실한 교과서같은 단편입니다. 운에 의지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 이런게 완벽한 기승전결의 힘이겠죠.

레드 앤 블랙 (Red and Black)
부자이지만 천하의 싸가지 덩어리인 휘트니가 룰렛에서 큰 돈을 잃고 토니와 그의 친구 빌에게 사건 해결을 의뢰하는 이야기.
이번편 부터 의뢰를 통한 본격적인 "사기꾼 박살내기" 시리즈로 돌입하게 됩니다. 전편들과는 달리 "룰렛"이 등장하고 이를 파헤치기 위한 도구 역시 카메라와 쌍안경을 조합한 장치라는 점이 특이하더군요. 사실 사기행각보다는 휘트니라는 싸가지의 행동거지와 말로를 보는게 더 재밌는 작품이었습니다.

양심의 문제 (A Case of Conscience)
유서깊은, 그래서 회원이라는 것이 명예인 "윈저클럽" 회원인 토니는 항상 있는 필 터너와 램지 폴웰의 카드게임에서 램지 폴웰이 언제나 일방적으로 진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잘 모르는 "카지노"라는 카드 게임을 소재로 했기에 몰입하기가 약간은 힘들었지만 미덕이 넘치는 반전 탓에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오 헨리 스럽긴 했지만) 훈훈한 느낌이 전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발상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고 말이죠. 사고뭉치 토니의 캐릭터가 극단적일 정도로 부상하기에 짜증까지 나기는 했습니다만, 뭐 원래 이런 캐릭터니까요.^^

초보의 행운 (Beginner's Luck)
피트 커니라는 도박사의 사기를 밝혀달라는 앨런 그레이엄의 편지를 받은 빌과 토니. 빌은 자기 대신 토니를 보내며 여러가지 조언을 해 준다.
캐릭터 바꿔치기의 묘미와 더불어 반전을 거듭하는 줄거리가 인상적인 좋은 작품입니다. 혼자 착각한 토니의 좌충우돌이 굉장히 웃기기도 하고요. 무적의 갬블러 피트의 비결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약간 아쉽지만 별점 4점은 너끈할 것 같네요.

불기둥 (The Pillar of Fire)
해변가에서 포커를 하는 특이한 섬 리그스에 빌과 토니가 참가한다. 하지만 빌 파믈리는 연이어 대패하고, 수영복만 입은 해변가에서 그 어떤 사기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는 난감함에 처하는데...
빌 파믈리가 한번 궁지에 몰리는 전개가 이색적인 단편입니다. 그런데 독자에게 너무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해 준 탓에 사기의 방법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결말이 화끈해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덧붙이자면, 작품 내 등장하는 "최고의 독심술 마법"은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작품내에서 제대로 써먹었더군요.

붉은 느릅나무 (Slippery Elm)
J 햄프톤 후지스트라튼이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메트로폴리턴 체스 클럽에 입회한다. 그리고 그는 강자들을 차례로 꺽으며 강자로 부상하지만 모든 회원들은 그를 미워한다.
빌이 29달러 55센트의 사례금을 받고 뛰어든 이색 사건. 즉 후지스트라튼을 클럽에서 쫓아내기 위한 체스 사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창한 천국 입장을 다루며 시작하는 분위기부터 오 헨리 스타일의 작품인데 이후의 전개도 치밀하고 마지막 승부에 대한 조작 및 결말까지 완벽해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역시나 별점 4점은 충분하겠죠.^^

타락 천사의 모험
브리지에서 항상 이기는 테리스를 조사해 달라는 친구들의 요청을 수락한 토니는 사기수법을 지적하지만 외려 역공을 당한다...
일단 이 작품은 원본 단편집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국내 출판본만의 특전과 같은 작품입니다. 일단 정태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작품은 브리지 사기 수사에서 의외로 포커 클럽인 히말라야 클럽의 과거 사기사건으로 이동하여 전개되는 내용으로 사기꾼의 집념이 잘 그려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데 정말 사기의 세계란 대단한 거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테리스가 사기를 쳤는지 안 쳤는지도 불분명한 등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듯 싶어서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약간 처지긴 하더군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2023/04/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8. 만화경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8. 만화경

저녁이 가까워지자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임차인들이 사무실에 들러 연락 사항을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전화 사용도 많아져 통화 소리와 담배 연기가 좁은 방에 가득 찼다. 비가 내린 탓에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토모히로의 고별식 다음 날,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데츠바가 마이코를 만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토모히로의 초칠일 전인 토요일로 정했고, 시간은 추후에 알려주겠다고했다. 카오리는 전화를 끊으면서 내 생일을 잊지 않았겠지요, 라고 상기시켰었다.

그래서 시간 확인차 카오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마와리 집안의 가정부였는데, 꼼꼼한 성격 탓인지 카오리가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무실 전화번호를 꼼꼼히 물어보았다.

토우이치는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장례식 이후 마사오를 만나지 못했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벽녘에는 마사오의 꿈을 꾸었다. 마사오는 죽은 줄 알았던 토모히로와 팔짱을 끼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 마사오는 샹보르관을 나왔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토시오는 가슴이 먹먹해져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꿈의 맛은 이상하게 달콤했고, 아침에도 좀처럼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9만 파운드짜리 자동 음악 기계인가 ......"

아까부터 신문을 읽고 있던 후쿠나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동 음악 기계?"

마이코가 되물었다. 요즘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술품 경매입니다. 영국 버크셔 백작의 성, 멘트모어 타워스가 경매에 나왔다고 하네요."

"백작님도 돈에 쪼들리는건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문제지요. 7대째가 막대한 상속세를 물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이 사람은 달마니라는 성을 하나 더 가지고 있긴 하지만요. 눈에 띄는 미술품은 전부 그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건 극히 일부라고 합니다."

"일부라도 대단한 재산인가 보군요."

"그렇죠. 세계 각국에서 3만 명의 바이어가 사전 답사를 마치고 경매는 열흘 동안 계속된다고 합니다. 멘트모어 타워스는 18세기부터 백 년 동안 수집한 프랑스 그림과 가구, 도자기, 시계 등이 가득한 보물창고라니까요요. 예를 들어 루이 14세의 책상이 5만1천 파운드, 방금 말한 두 마리의 새가 조각된 루이 15세의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 루이 16세 시대의 자카드 로스가 만든 필사 인형 같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필사 인형이라고 하면 글씨를 쓰는 인형인가요?"

"그렇겠지요."

"설마 인형 안에 아이 같은 걸 넣는 장치는 아니겠죠?" 

"하하하, 우다이 씨가 말씀하신건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인데요, 그런 트릭도 물론 있었지만  18세기에는 이미 카라쿠리 인형의 기술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트릭이 아니라 실제로 기계만의 힘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글씨를 쓰는 인형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지루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렇군요. 그 사람은 그만큼 트릭을 좋아하나 봅니다. 물론, 장난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트릭으로 보충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마술은 기계공에서 마술사의 손으로 넘어갔고, 기계공은 기계의 가능성만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프랑스 궁정에서는 유명한 자크 드 보캉송이 활약했습니다. 보캉송은 클레오파트라의 뱀, 파우누스 신의 옆구리 피리 부는 사람 등 많은 카라쿠리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오리였습니다. 이 오리는 살아 있는 오리처럼 헤엄을 치고, 소리를 내고, 물을 마시는데다가 먹이를 던져주면 목을 쭉 뻗어 쪼아먹고, 음식물을 소화하고 배설까지 했다고 하네요. 이 오리는 훗날 마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베르 우당(Robert Wodan)의 손에 의해 수리되었고, 동시에 모든 메커니즘이 밝혀졌다고 하고요."

"마술사가 인형을 고쳤다고요?"

"그 당시 우당은 아직 시계 장인이었습니다. 그 후 우당은 오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스스로 다양한 카라쿠리를 만들었지요. 줄타기하는 인형, 기계 없이 움직이는 시계, 컵과 구슬의 기예를 하는 인형까지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마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으로, 나중에는 마술사로 변신해 마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지요. 오리가 생각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진 수영하는 오리를 팔던 장사치가 있었어요."

"저는 몰라요."

"뭐 오래 전 이야기니, 그렇겠죠. 이 오리는 더러운 통 안에 떠서 신기하게도 스스로 헤엄쳐 다녔어요. 그리고 가끔은 먹이를 잡기 위해 부리를 물속으로 집어넣기도 하고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요."

"기계 장치인가요?" 

"아니요. 보캉송의 오리도 저렇게 생물처럼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에요. 생물의 움직임에는 기계에는 없는 불규칙한 부분이 있는 법인데, 노점상 오리는 그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어요."

"어떻게요?"

"그 오리를 사면 어디서든 팔고 있는 평범한 셀룰로이드 오리를 줍니다. 다만,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어요. 그리고 그 종이에는 오리를 움직이는 비결이 적혀있었죠."

"네?"

"<오리의 목에 실을 달고 그 끝에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매달아 두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거, 사기 아닌가요?"

마이코는 입을 열었다.

"사기는 아닙니다. 속임수죠. 에도 시대부터 있던 장난감이에요. 원래 이름은 '부동새'였어요. 가마우지를 본뜬 장난감이었지요. 분세이 말기, 우에노야마시타 부근에서 처음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셀룰로이드 오리는 장사치들 사이에서는 '즌부리코'라고 불렸습니다. ......반대되는 트릭도 있었어요. 이것은 만든 시체 인형을 살아있는 까마귀가 쪼아댄다는 것이었죠."

"시체 인형?"

"네, 막부 말기에는 기괴한 구경거리가 활발하게 등장합니다. 이른바 시체 세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익사체를 모방한 인형으로, 물벼락에 맞은 얼굴 등이 사실적으로 만들어진데다가 시체를 진짜 까마귀가 쪼아댔다고 하더군요."

"알겠어요! 그 시체에는 미꾸라지가 숨겨져 있었군요."

토시오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역시 우다이 씨네요. 맞아요. 재미있는 것은 미꾸라지를 너무 많이 먹은 까마귀가 쓰러졌다는 흔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에요. 즌부리코도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이 근처에서 팔면 돈벌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사람이라면 화를 낼 것 같네요"

"그게 문제에요. 옛날 사람들도 화를 냈어요. 하지만 아이디어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싼 거지요. 저런 걸작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니까. 백화점 같은 데서 파는게 나을거에요.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교육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될 테고요. 아이디어라고 하면, 187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의 메카니컬 뱅크도 아이디어만으로 팔렸죠."

"메카니컬 뱅크? 들어본 적 없는데요?"

"기발한 구조의 저금통이었는데요. 주물로 만든 견고한 구조로 동전을 넣는 상자 위에 사람이나 동물의 장난감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이 중에 ‘조련사’라는 저금통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동전을 조련사의 손에 들고 상자에 달린 레버를 누르면 옆에 있던 개가 뛰어올라 조련사의 동전을 물고 저금통 안으로 떨어트립니다. ‘광대’는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레버를 누르면 입이 열리고 손이 움직여 동전을 입에 집어넣고요. 가장 걸작은 '정치가'라는 저금통입니다. 큰 의자에 꼿꼿이 앉은 정치가의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무게에 의해 팔이 움직여 주머니에 만들어진 동전 넣는 구멍에 동전을 쏙쏙 집어넣습니다. 정치가의 무표정한 얼굴이 참 웃기죠. 그 외에도 마술사, 펀치 앤 주디, 엉클톰, 링컨 등 200여 종의 제품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금통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모터가 움직이면서 상자 안에서 해골 손이 나와서 동전을 잡고 상자 속으로 사라지는 장난감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그런 게 메카니컬 뱅크, 즉 기계식 저금통입니다. 처음 개발되었던 당시에는 모터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지만요. 오히려 그런 소박한 점이 좋았어요.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라쿠고(落語) 속에만 남아 있지만, 히다리 진고로(ひだりじんごろう)가 만들었다는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 마네키네코(招き猫)가 그것이에요. 손바닥 위에 정해진 수의 동전을 올려놓으면 사라져 버리는 장치인데, 이것도 메카니컬 뱅크, 기계식 은행의 일종이었을 것 같네요."

"히다리 진고로는 장난에 관련된 전설이 많네요."

"맞아요. 카라쿠리에는 전설이 많이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카라쿠리를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현존하는 물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나무와 종이로 만든 집에 살았고, 도시의 역사는 큰 화재의 반복이었으니까요."

"외국에는 오래된 장난감이 많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야 많죠. 물론 중요한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은 필라델피아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어요. 하지만 런던 박물관에 가면 17세기 마스켈라인의 카라쿠리을 볼 수 있습니다. 조라든가 사이코라든가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메카니컬 뱅크도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취재한 적이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요. 뉴욕의 사미엘 F 프라이어 씨가 수집한 것으로 주모우의 카라쿠리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어요."

"주모우라고 하면 비스크 인형이네요."

"우다이 씨, 잘 알고 계시네요."

"저를 비스크 인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 닮았네요. 주모우의 작품은 카라쿠리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나 한다니까요…."

소우지 씨는 주모우의 인형을 몇 점 갖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골동품 가치가 있는 자동 기계 인형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한 재산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 도중에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카츠 씨 회사, 정말 바쁘신가 봐요. 몇 번을 전화해도 통화 중이었어요."

"미안해요." 

카오리는 시간을 지정했다. 내일 1시에 나사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우다이 씨와 함께 오라고 했다.

"카오리 씨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네, 카네이션이 좋아요. 연홍색으로, 아셨죠?"

카오리는 그렇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이 뭔지 알아?"

다음 날, 나사 저택으로 향하는 에그 안에서 마이코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렇겠지. 꽃말은 열애야."

"...... 그러나 그녀가 지정한 겁니다."

"놀리는 걸까, 아니면 의외로 진심인걸까?"

"카오리 씨에게는 슌키치라는 약혼자가 있어요."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이지?"

"맞습니다."

"그럼 오늘은 못 올거야.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앞둔, 장난감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니깐. 토요일이라고 해도 정시에 퇴근하는 건 불가능해. 특히 젊은 평사원은 말이야."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어. 괜찮아. 정 어려우면 카오리의 억지에 당한 척 하라고."

어제 내린 비는 완전히 그쳤고, 오랜만에 하늘이 맑게 개었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오르니 씻겨 내려간 단풍의 색이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나사 저택의 중앙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서 바라본 인상보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저택 건물의 비틀림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벽은 원래는 선명한 주홍색으로 빛났을 터였지만 지금은 기괴한 검붉은 색이었고, 벽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담쟁이 덩굴이 겹겹이 쌓인 모양은 마치 거대한 뱀의 비늘을 연상케 했다. 당나라 풍의 기와에서 튀어 나와있는 푸른 오각뿔 모양의 탑은 기괴한 조합으로 보였다.

흙담은 곳곳이 무너져 무질서하게 관목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당초 문양의 철책문은 열린 채였다. 토시오는 문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에 고풍스러운 클래식 자동차가 놓여 있다. 소우지의 애마(愛車)일까? 토시오는 그 옆에 차를 세웠다.

황량한 정원이었다. 저택 맞은편은 낮게 경사져 있고,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왼쪽의 기하학적인 녹색 면이 이야기로 들었던 미로인 것 같다. 연못과 미로 건너편에는 녹나무, 소나무 등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카오리는 빨간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카오리만 알고 있던 토시오에게 카오리의 모습은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카오리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표정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가슴이 풍만하게 솟아오른 모습은 지금까지의 카오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토시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카오리의 뺨에 금방이라도 수줍은 홍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방으로 안내할게요."

카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탑 아래가 홀이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바로 카오리의 방이었다. 계단, 난간, 문짝의 나무는 모두 세월의 흔적이 묻어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은 지금까지의 건물 인상과는 달리 밝은 색채로 가득했다. 창문이 두 개 있는데, 한 쪽 창문을 통해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이 아래가 오빠 방, 그 앞이 아버지 방이에요."

카오리 씨가 설명했다. 그 안쪽이 조리실이고, 가사 도우미의 작은 방이 있다고 한다. 2층은 카오리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아틀리에라고 했다.

"그런데 아틀리에로 마사오 씨가 이사를 올지도 몰라요."

"마사오 씨가?"

토시오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두 사람이나 되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너무 쓸쓸해 보여서요. 제가 권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결정하지는 못햇어요. 방금 전에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마사오 씨는 이 집에 계신가요?"

"그래요."

카오리는 하얀 화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연신 모양을 다듬었다.

"뜻밖의 선물 ......"

카오리는 꽃병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꽃병 옆에는 길쭉한 화장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카오리는 마사오와 소우지와의 관계를 모르는 것 같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사오를 불러들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오리는 잠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거, 전부 카오리 씨의 작품인가요?"

마이코는 아까부터 벽에 걸려 있는 여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카오리의 방에 화사한 색감이 넘쳐나는 것은 밝은 색감의 그림들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그림은 추상적인 면과 선의 교집합이 선명한 색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조금 과장된, 시제품 같은 느낌이에요."

카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듯 했다.

마이코는 그 중 한 장의 그림에 마음이 꽂힌 듯 했다. 중앙에 패턴이 있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림이었다.

"만화경을 보는 것 같네요......"

마이코는 이렇게 평했다.

"훌륭해요."

카오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만화경이라는 제목이에요. 언젠가 만화경을 보다가 그 그림의 주제가 떠올랐어요. 만화경의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애를 썼어요."

토시오는 만화경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만화경이라고 하면, 장난감?"

"그래요, 만화경. 카츠 씨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지금은 어른들이 보기에도 좋은 멋진 만화경들이 많이 팔리고 있어요."

카오리는 일어서서 유리장 문을 열고 예쁘게 채색된 원통 몇 개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원통은 미세한 체크 무늬가 있고 한쪽에 작은 렌즈가 달려 있었다.

"만화경의 원형은 영국의 데이비드 브루스터라는 물리학자가 만들었다고 해요. 원형은 통 안에 들어 있는 색종이를 사방의 거울에 비춰서 다른 쪽의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인데, 이 만화경에는 그 종이가 없죠. 파타노스코프라고 해요."

토시오는 원통에 눈을 돌렸다. 원통 안쪽에서 마이코의 얼굴이 여러 개로 분해되어 겹쳐 보였다. 그 기형적인 이미지에 숨을 죽였다.

"색종이 조각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거죠. 망원경과 만화경을 합친 거죠."

파타노스코프는 마이코에게 넘어갔다. 마이코도 신기하다는 듯이 방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파생품 중 하나인데, 작은 조각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지만 통을 움직이면 안쪽의 거울이 움직여요."

그 작은 조각은 불규칙한 색종이 등이 아니라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통을 움직이면 인물이 요염하게 얽히고 설키며 갈라졌다.

"통이 아닌 만화경도 있어요. 스피아로스코프라는 것은 두 장의 맞닿은 거울 아래에서 무늬가 있는 원반을 돌려서 그림을 변화시키는 거죠.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거예요. 안티스코프예요."

카오리는 또 다른 검은색 통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내 얼굴 좀 보세요."

그것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카오리의 얼굴이 삐뚤빼뚤하게 휘어져 있었다. 시점을 바꾸면 크고 작은 눈알이 흔들거렸다. 코만 거품처럼 날아와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만화경의 어떤 파생품에서도 기본은 변하지 않아요. 그것은 어떤 불규칙한 형태도 순식간에 규칙적인 대칭으로 바꿔버리는 거울의 마술이죠. 그런데 안티스코프는 어떤 질서정연한 대칭도 비틀어 버리고 말아요. 원통 안의 거울을 구부러뜨린 것이겠지요. 이걸로 보면 인간의 형상은 모두 벨마이어의 인형처럼 변해버리게 되지요. 이 ‘반’ 만화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의 매력은 정돈된 형태가 순식간에 그로테스크하게 변하는 기괴함이에요."

토시오는 안티스코프로 카오리가 그린 만화경을 보았다. 색채가 뒤틀리고 흐르고 기묘하게 뒤섞여 마치 썩어가는 고기 덩어리처럼 보였다.

"만화경에 열광하는 나를 보고 오빠가 만화경을 준 적이 있었어요. 작은 평범한 만화경이었어요. 한참을 들여다 본 나에게 오빠가 이상하다며 거울을 건네줬어요. 거울로 보니, 내 눈 주위에 동그랗게 먹물이 칠해져 있었어. 만화경 눈과 맞닿는 부분에 먹물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정말 장난이 심하지 않아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정부가 들어왔다.

"......어르신께서 손님을 모셔다 달라고 하십니다."

마이코와 카오리가 방을 나갔다.

토시오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택 바로 앞은 화단이었을 것이다. 잡초 사이로 기하학적인 흔적이 보인다. 왼쪽에 연못 쪽으로 튀어나온 석가산이 있고, 그 위에 기울어진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에 서면 정원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자 앞은 가파른 경사면으로, 경사면 끝자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물줄기는 연못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연못 왼쪽 안쪽에 있는 미로에 눈이 갔을 때였다.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볼품없죠?"

정신을 차려보니 카오리가 옆에 서 있었다.

"이런 정원도 운치가 있지요."

토시오의 말에 카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츠 씨, 아첨을 잘 못하시네요."

카오리는 토시오와 함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 하늘 저 멀리."

카오리가 중얼거렸다. 쳐다보니 카오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히로 씨가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마사오 씨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을 텐데...."

젊은 여성과 단둘이 있는 방에서, 그것도 여성이 감상에 젖어 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카오리는 토시오를 잠시 쳐다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우다이 씨 이야기란, 무슨 이야기인가요?"

모처럼의 배려이긴 하지만 마이코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어려워 보이던데요."

"맞습니다 ......."

토시오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첨을 잘 못한다는 말을 듣고 위축되어 버린 것 같았다. 대답은 당연히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다.

"연분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을 아시나요?"

카오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요. 열애일 거에요."

"알고서 주셨군요."

"카오리 씨의 희망이었으니까요. 슌키치씨가 오늘은 오지 않을 줄 알기도 했고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으니 회사가 바쁘겠죠."

카오리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당신, 대단해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좀 더 센스 있는 대사를 쓰지 않으면 안 돼요. 이런 건 어때요?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토시오는 카오리의 말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광대 같다고 생각했다.

"시도해 보지 않겠어요? 사실은, 진짜 미로가 있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제 미로에 관한 책도 조금 읽었죠."

"그럼 잘 알고 있겠군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카오리는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복도로 나와 현관을 등지고 정원에 면한 문을 열었다. 문은 무거운 기척을 내며 열렸다. 화단으로 나가는 돌계단을 내려가서 화단을 지나면,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로 굽이굽이 연못을 향하고 있었다. 연못은 예상외로 물이 맑고 깨끗했다. 카오리의 모습을 발견한 새하얀 오리 서너 마리가 헤엄쳐 왔다.

"샘이 의외로 풍부해요."

카오리는 한 마리씩 오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못을 따라 왼편으로 가니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 나왔다. 광장 중앙에 높은 담장 같은 울타리가 보였다.

카오리는 울타리 앞에 섰다. 그곳은 울타리가 끊어지고 안쪽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입구인데, 자신 있어요?"

"있습니다."

토시오가 대답했다.

"그럼 안내해주세요."

"카오리 씨는 미로 길을 모르시나요?" 

"몰라요. 어렸을 때는 오빠랑 자주 놀았는데, 그 때는 작은 나뭇가지의 조합이나 길의 느낌으로 절대 길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아이는 그런 직감이 예민하잖아요. 카드 뒷면의 작은 얼룩을 기억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미로에 계속 들어가지도 않았고, 감도 둔해졌을 거예요."

"그럼, 제 손을 잡고 가시죠."

토시오는 울타리 사이로 들어갔다. 카오리는 토시오의 오른손을 잡았다. 토시오는 미로에 들어가자마자 왼손을 뻗어 울타리 왼쪽에 댔다.

"뭐하는 거에요?"

"미로 책에 나온 방법이에요. 이 왼손은 절대로 울타리에서 떼지 말고 걸어야 해요.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왼손을 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있어요. 다만, 조금 돌아갈 수는 있지만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길은 쾌적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울타리 덤불이 길을 좁게 만들고, 나뭇잎에는 어제 내린 비가 아직 묻어 있었다. 서너 번 모퉁이를 돌자,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왼손만이 의지할 수 있는 길잡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가에 타원형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의자요. 길을 잃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돌의 중앙에는 빗물을 통과시키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토시오는 의자 앞을 지나쳤다.

꽤나 긴 길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도착했나요?"

하지만 그것은 둘이 들어왔던 원래의 입구였다.

"실패했네요."

"아닙니다. 자, 아직 손이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죠. 책에 보면 미로를 한 번 빠져나와서 바깥쪽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고 나와 있었어요."

"융통성 없는 방법이네요, 뭐, 괜찮아요."

두 사람은 미로의 바깥쪽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서 이 미로가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뒤에서 카오리가 말했다.

"내기할까요?"

"무엇에요?"

"만약 카츠 씨가 골인하지 못하면 모두가 모였을 때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는 잘못하는데요."

"하지만 미로에는 자신이 있지요?" 

"네, 있어요."

"있어요. 그럼 내가 골인 지점에 도착하면?"

"카츠 씨에게 키스를 할게요."

카오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왠지 모르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자 다시 입구로 나왔다.

"내가 이겼네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토시오는 카오리의 손을 놓았다. 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 미로와 복연결 미로 두 가지가 있어요. 단연결 미로라면 지금의 방법으로도 골인할 수 있어요. 따라서 이 미로는 복연결 미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연결이 뭐예요?"

"이 미로의 울타리를 모두 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지금 끈의 한쪽 끝을 잡고 공중에 매달아 놓았다고 생각하면, 단연결 미로라면 모든 끈이 다 들어올려질 수 있어요. 하지만 복연결 미로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땅 위에 남겨진 밧줄이 생기게 됩니다. 햄튼 코트의 미로 역시 복연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복연결 미로에서도 골인 지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뭐라고요?"

"예를 들어 백묵 등으로 길의 왼쪽에 선을 긋고 가는 거죠. 모퉁이를 돌면 원하는 방향으로 꺾어가는 거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양쪽에 두 줄로 체크된 길을 만날 때가 있어요. 양쪽에 두 개의 선이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갔다가 다시 돌아온 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피해서 지나가야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최단거리의 길을 찾을 수 있고요. 즉, 표시된 길 하나만 따라가면 되니까요."

"좋은 방법이네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잠입한 테세우스는 미녀 아리아드네스로부터 받은 비단실 구슬을 풀면서 나아갔다고 하죠. 테세우스도 분명 같은 생각이었겠지요. 비단실을 가져올까요?"

"백묵을 준비해 왔어요."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백묵의 작은 상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왼손으로 벽을 쓰다듬으면서 갈 수는 없겠지요."

"그럼 나는 잠시 볼일을 보고 다시 올게요."

카오리는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기는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알아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약속이 있어요."

카오리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 최단 거리를 찾아줘요."

라고 말하고는 빙글 돌아서서 달려갔다.


미로를 백묵으로 체크하며 진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땅은 어둡고, 백묵은 쉽게 끊어졌다. 땅에 웅크리고 선을 긋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탓에 토시오는 몇 번이고 일어나서 허리를 크게 펴야 했다. 카오리는 현명하게도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작업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 나중에 경찰 수사관에게 끈질기게 추궁을 당하게 되지만, 십오 분, 삼십 분 정도인 것 같았다.

갑자기 날카로운 폭발음이 들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폭발음은 한 번 뿐이었다. 토시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돌아온 고요함은 이전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작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쿵'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에 이어 물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폭발음으로 인해 청력이 예민해져 있지 않았다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금세 작아졌고, 곧 사라졌다.

토시오는 무언가 모를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느다란 백묵의 선을 따라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렸다. 폭발음의 방향은 물론이고 방향도 알 수 없다.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미로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길을 잘 살펴본 덕에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것만은 면했다.

미로를 벗어나자마자 연못 쪽으로 돌아갔다. 길은 그 길밖에 몰랐기 때문이었다. 언덕길을 화단 쪽으로 올라가려다 마주오던 마이코와 부딪혔다.

"무슨 소리야?"

마이코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르겠어요. 미로 속에 있었으니까요."

"연못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

"연못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로 안에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그럼 전망대 정자 쪽으로 가보자."

마이코는 방금 왔던 화단 길을 되돌아갔다. 저택 앞에 소우지가 서 있었다.

"오, 비스크, 아니, 우다이 씨였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소우지 씨는?"

"제 방에 있었어요. 왠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와 보았습니다."

"정자 쪽으로 가 보시죠."

세 사람은 일단 저택 앞을 나와 주차장이 되어 있는 공터 앞을 지나 정자로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갔다.

정자에 도착하기 전,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붉은 옷이 보였다. 그 옆에는 마사오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부인,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오리는 연못을 바라보며 마사오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토시오는 카오리를 일으켜 세웠다. 토시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카오리의 얼굴 밑에 고인 피였다.

카오리의 얼굴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왼쪽 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알이 부서지고 찢어진 붉은 살덩어리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매캐한 피 냄새 속에서 토시오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카오리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이 사라지고 주위가 하얗게 변했다. 그는 자신이 기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