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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4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 박지영 : 별점 2점

시크릿 스파이 - 4점
헤더 베센트 외 지음, 박지영 옮김/시그마북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첩보 활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으로, 시대 순으로 유명 스파이와 첩보 활동, 주요 활약상 및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장치, 암호 등을 소개해 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250여 페이지의 분량을 풀 컬러로 가득 채운, 화려한 도판입니다. 모든 주제를 한 장 안에 도판과 함께 담고 있어서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짤막하게 요약하여, 다양한 도판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카드 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 속 유명 스파이, 첩보 활동 중 몰랐던 내용도 많았습니다. 남북전쟁 때, 노예해방론자들과 흑인 노예들은 남부 연합 안에서 정보원 활동을 했었고, 반대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사교계 인사 로즈 오닐 그린하우는 북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는 이야기처럼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네요. 영국이 인도 지형을 조사할 때 고용했던 현지인들 중 가장 유명했던 '1번' 나인 싱 라와트도 보다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졌고요. 

1차 대전 시기부터는 친숙한, 고전적인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는, 약간 낭만적이기까지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외다리였던 몸을 이용하여 측량 기계를 의족을 숨긴 채 독일의 알프스 지역 요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다녔던 미국인 하워드 버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강 악화로 죽을 때 유언마저도 '독일군은 알프스 산맥에 전선을 구축할 계획이 없다' 였다니, 죽음마저도 고전전이네요. 프랑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루이즈드 베티니가 첩보망을 조직, 운영하였고, 벨기에에서는 '하얀 여인' 첩보방을 전화 기술자 발테르 드베가 운영했다는 등의 일반인 영웅들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회 지도층 아마츄어들 - 백만장자 빈센트 에스터, 루스벨트 주니어 - 이 뭉쳐서 '더 룸' 이라는 명칭으로 첩보 활동을 했다니 확실히 미국적이다 싶군요. 당시 미국인이 머나먼 유럽 등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 러시아에서 활약했다는 영국의 에이스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는 사실 별 활약 없이 1925년, 볼셰비키 타도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는 등의 팩트 체크도 볼거리였고, 치머만 전보의 암호 해독처럼 실제로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놀라운 성과들도 눈에 뜨였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는 막강해진 국가별 정보 기관들과 고위층 스파이 '두더지' 들, 상대편 스파이들을 속여서 체포하고, 내부 스파이들을 솎아낸 뒤 처형하거나 변절자로 만드는 (더블 크로스 시스템) 등 현대적인 스파이 작전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이 중에서는 독일 해외방첩청 아프베어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나리스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반나치 정책을 나름대로 펼친 끝에, 종전 직전 사형당했다는데 과연 살아있는채로 종전을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아무리 반나치 주의자였다 한들, 방첩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는 모두 정보가 미리 유출되었기 때문이며,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한게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독일 침공을 사전에 첩보원들이 파악하여 제보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스탈린의 사례를 볼 때, 첩보 활동 자체가 중요하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이 이렇게 그를 위해 일했던 첩보원들을 전쟁 후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후일담이 더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독일 최고의 스파이로 중립국 터키의 영국 대사 휴 내치불휴게슨의 부하였던 바즈나의 활약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네임이 오버로드라는 등의 고급 정보를 넘기는 활약을 했지만, 독일은 그 정보의 진가를 몰라봤다지요. 심지어 그에게 준 30만 파운드의 거액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찍어내었던 위조지폐였다고 하고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영화같은 일화였습니다.

냉전부터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존 스마일리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 등 익히 잘 알려진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M16의 수장으로 KGB 스파이였던 킴 필비와 그의 동료들이었던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와 이스라엘이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켰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흥망성쇠가 흥미로왔습니다. IBM과 히타치의 분쟁 등 산업 스파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F1 레이스에도 산업 스파이가 개입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니까요. 페라리의 정비사 나이절 스테프니가 멕라렌에게 정보를 넘겼던 사건인데, 스테프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버려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교가 자기들의 면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백설 공주 작전'이라는걸 벌였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국세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방 검사 사무실까지 뒤졌다니 종교의 힘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힘 있는 사이비 종교들이 최근 많아진 듯 한데,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 외. 첩보 기술에 대한 설명들도 볼만했습니다. 동독의 '로미오 스파이' 작전처럼요. 25~35살 사이의 교육을 잘 받은,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이용하여 서독 여성들을 포섭했다지요. 러시아의 여성 해외 정보 요원 '스패로'는 이와 반대로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다는데, "레드 스패로"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건 분명해 보입니다. 두 작전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카메라, 통신 장비, 암살 장비 등의 소개는 비밀 무기류에 사족을 못 쓰는 제 동심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독침 우산과 청산가리 가스총이 언급되는데, 이 둘을 합친 장비가 "마스터 키튼"에도 등장했었지요. 고양이 몸 속에 배터리, 안테나, 마이크를 장착하여 도청하려는 '어쿠스틱 키티' 계획도 황당하지만 멋졌고요. "쉬리"가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드네요. 1984년 미국 모스크바 대사관, 레닌그라드 영사관의 타자기에 설치되었다는 키 자동 기록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기묘한 레트로함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타자기 내부에 설치되어 활자 뭉치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자기장 교란을 측정하여 입력되었을 법한 글자를 추측한 뒤, 전파를 터트려 도청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내는 장치였다는데, 당시 기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이테크 기기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왔던 이야기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주제를 한 장으로 요약한 탓에 깊이가 없으며, 스파이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대 시대 이야기는 너무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가 스파이 덕분인 것 처럼 써 놓았을 정도로요. 실제 내용을 보면 스파이가 아니라, 단순히 사전 염탐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패배 역시 정찰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스파이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패권이 무함마드가 스파이 활동에 통달한 덕분이었다는 언급도 어처구니 없었고요. 

이런 류의 과장은 뒤에도 계속됩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게 스파이 카를 슐마이스터가 거짓 정보를 뿌려 오스트리아 군이 속았기 때문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남부 목화 판매 댓가로 전쟁 물자를 구입했던 제임스 불럭을 스파이라고 부르는 것도 억지였고요. 이건 단순한 통상 업무에 지나지 않잖아요? 암살과 테러범들 이야기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급 창부였던 '크리스틴 킬러' 마저도 한 챕터를 차지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암호에 대한 소개가 적지 않은데, 9세기 학자 야쿱 이븐 이스하크 알 킨디가 암호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떤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많이 사용된다는 원리인 빈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등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도판도 충실했고요.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암호의 과학" 등에서 많이 보아와서 별로 새롭지 않았고, 책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가격에 비하면 별로 깊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이 책 보다는 특정 스파이 활동과 작전, 혹은 암호 등에 촛점을 맞춘 다른 전문 서적을 읽어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

2010/06/06

에토로후 발 긴급전 - 사사키 조 / 김선영 : 별점은 2.5점

에토로후 발 긴급전 - 6점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시작

이런저런 작품으로 알려진 사사키 조의 대표작 중 하나로 진주만 공습 직전, 미국인 스파이가 관련된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비밀 작전을 그린 첩보 모험 소설입니다. 무려 500페이지를 꽉 채운 대장편이기도 하죠. 하지만 길이에 비하면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수상경력이 무색할 정도로요.

일단 이렇게 길 이유가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되는 과거사는 주요 내용하고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해설에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학대받는 자들, 아웃사이더들 어쩌구 하면서 포장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어차피 남의 나라에 스파이 활동하러 들어오는 일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일인데 왜 그런 것들을 합리화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악도 모호하고 센치한 정서만 난무하는 등, 첩보 모험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할 뿐입니다.

또 준비 과정과 잠입 과정의 디테일에 비해 에토로후 섬에서의 첩보 활동은 설명이 많이 부족합니다. 국가의 명운을 건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섬을 봉쇄한 해군이 유일한 발전기가 있는 공장을 내버려둔다? 당연히 말이 안 되죠. 상식적으로라도 해군 부대가 일부라도 상륙해서 마을과 주요 고지를 점령한 뒤, 감시 및 경계 근무를 벌였어야 했습니다. 물론 섬 최고의 미녀가 정체도 모르는 스파이한테 반해서 이것저것 도와준다는 설정에 비하면 이 정도 몰상식은 양반이지만요. 그 외에도 작전 자체의 긴장감이 부족하고, 첩보를 입수한 미국 쪽에서의 움직임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점 등 첩보 소설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뒷 부분 해설에서도 언급하듯이 켄 폴레트의 "바늘구멍"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적성국의 스파이가 외딴 섬에 스파이로 잠입하고, 섬에 살던 여자가 그 스파이에게 홀딱 빠진다는 설정은 똑같습니다. 하필이면 비슷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비슷하냐... 단지 "바늘구멍"의 스파이와 여자는 국가에 충실한 애국자였고, 이 작품에서의 스파이와 여자는 감정에 충실한 인간이라는 차이만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전 "바늘구멍" 쪽이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유명세만큼 읽는 재미는 있긴 합니다. 에토로후 섬에 대한 세밀한 묘사 등 방대한 자료조사가 뒷받침된 내용, 그리고 일본인의 전쟁 범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좋았어요. 건질 게 아예 없지는 않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유키-센조 이야기, 케니 사이토의 스페인 내전과 미국에서의 범죄활동 묘사, 슬렌슨 신부의 난징에서의 체험 묘사 등은 모두 잘라내고 케니 사이토의 첩보활동을 중심으로 일본 헌병대와 경찰의 추적활동을 보다 치밀하고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2004/02/03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20세기를 배후 조종한 세기의 첩보전들 : 별점 4점

스파이의 역사 1 : 작전편 - 8점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이창신 옮김/이마고
이 책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파이들과 그 정보전을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워낙 소재가 독특하고 제 취향에 맞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목차와 내용을 잠깐 소개해드리자면,
“제1부 기만작전: 사상 최대의 속임수”는 가공의 저항 자유 조직을 만들어 서방세계를 속인 소련과, 쿠바인을 스파이로 고용했던 CIA를 역이용하고 농락하는 쿠바와 같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속여 먹는 이야기입니다. 무적으로 느껴지는 CIA의 멍청하고 한심한 일면을 다루고 있어 상당히 통쾌하게(?) 읽었습니다.
“제2부 암호와 감청 전쟁: 보이지 않는 스파이들”은 주로 2차대전을 다루고 있는 편으로 에니그마와 일본 암호 해독 등 서로의 암호를 해독하여 전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명한 에니그마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상당히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다루고 있네요. (물론 “암호의 세계”라는 이 분야의 바이블 같은 책이 있습니다만…)
“제3부 반역작전: 내부의 적을 색출하라”는 제목 그대로 조직 내부의 스파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원자폭탄 관련 정보를 입수하게 되는 소련과 소련의 최 고위층 비밀 요원 “톱해트”의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흡사 영화 같습니다.
“제4부 두더지작전: 미로 속의 첩보 게임”은 역사속에 묻혀진, 그리고 역사의 희생양이 된 몇몇 스파이들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스웨덴의 “발렌베리” 사건이 인상적입니다. 스웨덴의 명문 출신이자 인도주의자였던 외교관 발렌베리가 어떻게 누명을 쓰고 죽어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인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가슴 아프기도 하고요.
“제5부 실패한 작전: 첩보역사상의 대실수들”은 실패로 끝난 작전들이 나옵니다. 일본과 미국의 진주만을 둘러싼 암투라던가, 동유럽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가 실패하는 CIA이야기도 있고 태평양의 한 섬을 둘러싼 미-일 간의 첩보 공방전 이야기 등이 실려 있습니다.
“제6부 성공한 작전: 대규모 작전의 눈부신 성과들”은 성공한 유명한 스파이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던 미국의 “배신자” 워커일가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잡혔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같은 곳에서 특집으로 낼 만큼 유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네요. 그 외에도 영국의 엘리트 5인방 스파이 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7부 무의미한 작전: 첩보역사상 최대의 코미디”는 제목 그대로 무의미 했던 정보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 뿌리기 위해 만든 반체제 우편물과 우표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지금은 그 우표 (반은 해골, 반은 히틀러)가 수집가들 사이에서 굉장히 고가에 거래된다는 이야기까지,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재밌네요.
이렇게 역사적 정보전과 유명 스파이들을 다루고 있는데 무척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은 역사책, 그 중에서도 2차대전 물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부분은 미스터리물 같다는 점도 흥미로왔고요. 읽고나니 스파이와 정보전의 중요성이 굉장히 크게 느껴지네요. 역사를 움직이는 “흑막”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고 말이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역사서적으로의 가치와 재미를 모두 갖춘 보기드문 책입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이나 유명한 (영화로도 나왔죠) “뻐꾸기 알” 이야기가 없는게 조금 의아하지만, 2편을 계속 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2023/07/07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 존 르 카레 / 최용준 : 별점 2점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 4점
존 르 카레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마일리는 페넌의 자살이 수상하다는걸 눈치챘다. 자살하기 전날에 다음날 모닝콜을 부탁했다는걸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모닝콜을 부탁한 8시와 자살한 10시 30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페넌의 부인 엘자는 모닝콜을 자기가 신청했다고 했지만, 그녀는 불면증이었고 모닝콜 신청 시간에 언제나처럼 공연 관람중이었다. 스마일리는 그녀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사 매스틴은 스마일리의 의견을 묵살했고, 스마일리는 결정적 단서 - 페넌이 스마일리에게 만나자고 보내왔던 편지 - 를 덧붙인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누군가 집에 침입한 뒤, 이대로 발을 빼기 힘들어졌다는걸 깨달았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건 은퇴가 코 앞인 경찰 멘델 뿐이었다. 둘은 스마일리를 찾아왔던 차의 소유주 스카를 만나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들었지만, 스마일리가 습격을 당해 쓰러졌고 스카는 살해당했다.
그래도 멘델의 도움으로 스마일리는 사건에 동독 사절단이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를 잡았다. 동독 사절단은 페넌과 연결고리가 있었고, 그걸 페넌이 밝힐까 두려워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사절단 대표는 전쟁 당시 스마일리와 일했던 정보원 디터였다.....


"알겠네. 페넌은 자살할 결심을 해. 그런 뒤 교환국에 전화를 해서 8시 30분 모닝콜을 부탁하지. 코코아를 타서 거실에 놓고. 이층으로 가 유서를 쓰지. 다시 내려와 코코아는 마시지 않은 채 그냥 두고 자기 머리에 총을 쏜다. 모든 게 멋지게 맞아떨어지는군그래."

존 르 카레의 데뷰작. 스마일리의 등장 역시 당연히 처음입니다.
첩보 조직과 첩보원들이 등장하고 관련된 사건이 등장하지만, 전형적인 첩보, 스파이 소설은 아닙니다. 첩보 기관은 사건의 동기를 설명하는데 이용될 뿐, 전반적인 전개는 전형적인 범죄 소설에 가깝습니다. 전개는 평범한 범죄, 수사 소설과 유사하며 스마일리도 첩보원이 아니라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으로서의 활약만 선보이거든요. 심지어 파트너격인 멘델은 경찰이고요. 

그러나 범죄, 수사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수사가 단순히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에 불과한 탓입니다. 예컨데 1. 불법 렌트카 업자 스카의 증언으로 익명의 대여인의 존재를 알아낸다, --> 2. 패넌 부인 엘자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면서 그녀가 매주 극장에서 수상한 남자에게 악보 가방을 전해주었다는걸 알아낸다. --> 3. 익명의 대여인 전화번호의 주인인 동독 사절단에 고용된 문트가 엘자와 만난 남자라는걸 알아낸다. 는 식입니다. 이렇게 수사할 때마다 한 발자욱씩 다음 단계로 나아가 진상에 도달하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딱 한 번 뿐이었던 엘자와의 만남, 그리고 스카의 증언을 들은 것만으로 동독 사절단이 관련되어 있다는 진상을 어느정도 눈치챌 정도에요.
첩보, 스파이 소설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점수를 줄 부분은 없습니다. 비중이 작을 뿐만 아니라, 스카를 통해 동독 정보원이기도 한 사절단 전화번호가 노출되는 등 스파이 소설에서 기대해봄직한 정교함과는 거리가 너무 멀거든요.
메인 빌런이라 할 수 있는 디터에 대한 묘사도 많은 공을 들였지만, 좋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소아마비로 장애가 있는 디터가 엘자를 죽이고 멘델까지 쓰러트린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디터를 평범한 중년 남성에 불과한 스마일리가 죽인다는 결말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도 딱 한 가지, 페넌이 아니라 엘자가 동독 정보원이었다는 진상만큼은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범인 문트가 가장 위험한 엘자를 죽이지 않고 급하게 귀국했던 기묘한 행동, 그리고 페넌이 기밀 정보 대신 쓸데없는 정보만 수집했던 이유가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모닝콜도 페넌이 아내를 고발하기 위한 핑계거리로 신청했다고 추리하는데 꽤 그럴싸했어요.
엘자가 정보를 전달하는 아날로그적인 방식 - 서로 같은 가방을 극장 휴대품 보관소에 맡긴 뒤, 휴대품 보관증을 바꿔 가져감 - 도 깔끔해서 좋았습니다. 
그 밖에도 은퇴를 앞 둔 퇴물 스마일리에 대한 묘사, 스마일라가 회원으로 있는 클럽에 대한 설명, 스마일리와 전처 앤과의 관계 등 시리즈 팬이라면 볼거리는 제법 많은 편입니다.

그러나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대했던, 국제적인 음모가 등장하는 정통 스파이 소설은 아니었고, 그렇게 재미있다고 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거장의 작품이지만 확실히 데뷰작의 한계가 느껴지네요.

2023/02/11

닌자의 세계 - 야마키타 아쓰시 / 송명규 : 별점 2.5점

닌자의 세계 - 6점
야마키타 아쓰시 지음, 송명규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제목 그대로 닌자에 대한 모든걸 정리하여 알려주는 책. 구성은 몇 권 읽어보았던 다른 AK 트리비아 북 시리즈와 동일합니다. 한 개의 주제에 한페이지 설명과 한 페이지 도표, 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책은 닌자의 역사에 대해 통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닌자가 정말로 존재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되거든요. 전국시대 당시 첩보를 하는 인간들은 분명 존재했다고 설명해 줍니다. 이들을 모두 '시노비'라고 부르게 되었던건 도쿠가와 막부가 고용했던 이가 사람들이 시노비였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닌자라는 말은 2차대전 이후 야마다 후타로가 쓴 인법장 시리즈 등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답니다. 당연히 만화 등에 나오는 화려한 인법보다는 첩보, 정찰 업무가 주였고, 인술비전서 최고의 인술로도 '모략'이 소개되고 있다는군요. 원래도 대단치않은 기술을 보유했었고, 전국 통일 후에는 대부분 평범한 하급 무사가 되었버려서 그나마의 인술도 잊혀졌지만, 이가에서만 이가를 맡았던 다카토라에 의해 기술을 발전시킬 '무족인' 제도가 도입되어 기술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막부 말기 이른바 최후의 닌자로 이가의 무족인이었던 '사와무라 진자부로' 가 페리 함대에 잠입해서 조사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고요. 뭐, 이것도 인술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첩보 활동이었다고는 하지만요. 이가만큼이나 유명했던 코가 닌자는 무족인과 같은 특권을 받지 못해 결국 멸망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에도시대에 예능이 성행하면서 시노비의 기술이 기예로 인기를 끌어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즉, 현재의 닌자 캐릭터는 일종의 광대극 캐릭터인 셈입니다.
이 뒤에는 닌자의 기원에 대한 이론, 유명한 이가와 코가 닌자의 유래와 그 관계, 핫토리 한조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막부 시대 밀정은 닌자는 아닙니다만, 후계자라면 후계자라면 할 수 있겠지요. 에도 시대 호조 가문의 시노비였던 후마 코타로가 도적이 되었고, 그를 잡는데 도움을 주었던 카이의 시노비 코사카 진나이도 결국 잡혀 죽었다는건 역사적 사실로 보여 흥미로왔습니다.

닌자의 도구, 기술 설명 부분도 흥미로왔습니다. 닌자의 옷이 검은색으로 알려진건 에도 시대 무대 공연 때문일 뿐, 실제로는 저렴하게 물들일 수 있는 감즙색 옷이 많았다는 사실에 기반한 정보들도 좋았고, 시노비 두건 쓰는 법, 닌자의 속옷, 수리검이라고 불린 차검의 다양한 형태와 봉수리검과의 차이, 항아리 뗏목, 소형톱 시코로 등위 도구와 자사구리, 츠리가타나, 사게오칠술 등의 인술처럼 도판이 효과를 발휘하는 항목도 많아서 마음에 들았습니다.
닌자는 가난하다는 기본 상식을 가지고 도구 이야기를 풀어내니 얼마나 창작물이 허구인지도 잘 알 수 있었어요. 한번 쓰고 버릴 수리검에 돈을 투자할 이유가 없지요. 줄에 가로대를 달고 끝에 갈고리를 붙여 올라가는 사다리 카기시바고는 잘 알려져 있기는 한데, 걸 때 소리가 나서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았을 거라는 설명도 좋았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이겠지요. 이렇게 실제로는 무의미했을 창작품은 그 외에도 물 위를 걷는 신발 미즈구모(실제로는 두께가30cm이상 되었어야 함) 등이 있다네요.
인술비전서도 당연히 후대의 창작품이지만 그 중 <<만천집해>>는 그래도 상당한 연구가 겻들여진 수작이라는걸 알려줍니다. 도판도 곁들여져 있다하니까요.

인술이 나름 효과있는 술법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급박한 전투에서는 간단하고 실용적이며 빠르게 쓸 수 있는 술법이 사용된게 당연하지요. 한 번 성공하면 상대를 죽일 수 있으니 비밀도 지켜지고요. 이런건 후대 닌자 만화 설정과 비슷하네요. 당연한 일을 좀처럼 할 수 없는게 인간이라 일부러 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해석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격으로 보이지만요. 물론 설명되는 인술은 무슨무슨술....처럼 이름은 거창하지만 뻔하고 어이없는 것들도 많기는 했습니다. 그나마 고양이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다는 찰천술은 기억에 남네요. 죽은 시체의 동공으로 시간을 확인했다는 클락성 살인사건의 추리가 떠올랐거든요. 정원 한복판에서 등을 둥글게하고 머리를 숨기며 가만히 있는 메추라기 은신술도 나름대로 그럴듯했고요.
참고로 여우 은신술은 물 속에 숨는 술법인데 만화에서처럼 대나무로 호흡하지는 않았다네요. 굵은 나무가 튀어나와 있으면 이상하니까요. 원래는 얼굴에 나뭇잎 등을 붙이고 얼굴째 내밀어 호흡했다고 합니다. 삼베 뛰어넘기 훈련법은 삼베가 아니라 모시풀이었을거라는 추정도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은 창작물 속 닌자들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타츠카와 문고의 사루토비 사스케, 야마다 후타로의 인법첩 시리즈 특징과 주요 대결구도, 시라토 산페이의 닌자 만화 시리즈 소개, 지라이야 소개 등. 시라토 산페이의 만화에서 인술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는건 신선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닌자의 체술이 바탕이 되었다고는 해도, 아예 마법같은 것 보아야 현실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었겠지요. 그러나 이 부분은 설명 도판이 아쉬웠습니다. 인술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는 부분을 실제 만화 이미지로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을거에요.
지라이야의 유래가 중국 소설에 등장하는 도적으로, 도둑질 한 곳에 아래야라는 메모를 담겨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건 처음 알았고요.
마지막 100번째 항목은 실존하는 무술 Ninjutsu입니다. 해외에서는 유명하지요. UFC 초창기(시즌 2)에 닌쥬츠 고수가 나왔던 시합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닌자 역사에 대한 설명 중 야규 일족, 마미야 린조 등 암살, 밀정 활동을 한 실존 인물을 닌자처럼 설명하는건 와 닿지 않았고, 사이고 다카모리까지 언급하는건 도가 지나쳤습니다. 이시카와 고에몬도 닌자였을 수 있다는건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비슷한 기술을 지니고 있있으니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둑이 된 닌자가 많았을거라는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니까요. 마츠오 바쇼 닌자설도 마찬가지, 많이 걸었다는 것과 여비를 누구도 주었는지로 닌자일 수 있다는건 억지입니다.
다른 트리비아북 시리즈에는 파워포인트스러운 도표가 대부분인 책도 있었는데, 이 책은 그래도 일러스트를 통한 설명이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성에 차는 수준은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그리 깊이있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할 수 없고 가성비도 좋나고 보기 어려우나 실제 역사와 근거에 기반한 설명과 시리즈 취지에 걸맞는 잡다한 정보가 많은건 분명한 장점입니다. 닌자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2007/08/15

사라진 남자 (Charlie Muffin)- B 프리맨틀 / 박종원 (일신추리문고31) : 별점 3.5점

찰리 머핀은 영국 정보부의 베테랑 요원이지만 정보부장의 교체 등 인물들이 물갈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소외되기 시작했다. 한편 그의 활약으로 붙잡은 소련 KGB의 1급 스파이 베렌코프의 석방을 놓고 궁지에 몰린 KGB 장군 카레닌은 망명의사를 은밀히 피력했고, 그러한 신호를 감지한 CIA와 영국 정보부는 공동 작전을 개시하여 그를 서방세계로 망명시키려 했다. 그러나 담당 정보부원들이 모두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영국 정보부는 찰리 머핀을 작전의 중심 인물로 기용하며, 찰리 머핀은 일생일대의 대 작전에 나서는데...

B 프리맨틀은 일본에서 선정한 "동서 미스터리 100"에 "이별을 알리러 온 남자"라는 작품이 선정되어 있기도 한 유명작가인데 작품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적은 탓도 크지만요.

줄거리 소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스파이 첩보물입니다. 그러나 이 바닥의 고전인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라던가 "르윈터의 망명"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조국에 대한 충섬심은 배재한체 두뇌게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이죠. 또한 일반적인 스파이들과는 다른 찰리 머핀이라는 캐릭터도 무척 인상적이에요. 잔머리에 강하면서도 프로로서의 자부심도 높고 약간 비열한 면모도 보이는, 그간 다른 첩보물에서 보기 힘들었던 복잡하면서도 독특한 캐릭터였거든요. 이러한 그의 모습이 작품의 재미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고요.

내용은 베테랑 요원 찰리 머핀의 1인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활약과 두뇌싸움이 중심인데 007같은 단순한 히어로물은 아니며 정보부의 비정함, 서로가 속고 속이는 잔인한 게임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현실적이면서도 긴박한 전개가 무척 일품이었어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스파이 첩보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 지금 구하기에는 조금 어렵지만 구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그나저나... 조사해 보니 이 작품을 시작으로 한 시리즈물이던데 이후 작품들도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특히 "이별을 알리러 온 남자"가 땡기네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리즈물이 계속될 만한 결말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좀 궁금하거든요. 덧붙이자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부하한테 잘 해줘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2024/02/04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김승욱 : 별점 4점

스파이와 배신자 - 8점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열린책들

1970~80년대 영국 정보부서 M16와 내통하던 KGB 최고위급 간부(KGB 런던 지부장)였던 올레크 고르디엡스키에 대한 논픽션.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입니다. 냉전시대 여러 첩보 작전들이 굉장히 상세하며, 드라마틱하게 소개되어 큰 재미를 안겨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고르디엡스키의 정체가 들통나서 모스크바로 소환된 뒤부터는 논픽션이지만 왠만한 스파이 소설보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고르디엡스키가 궁지에 몰리며 수렁에 빠지는 과정,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설계되었던 '핌리코 작전'의 가동, 그리고 고르디엡스키의 목숨을 건 소련으로부터의 탈출이 이어지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실제로 진행되었던 작전이라 픽션에서는 주기 어려운 생생한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핌리코 작전 때 차 트렁크에 있는 고르디엡스키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아기 기저귀를 차 트렁크 위에 올려놓고 갈았다는 것처럼요. 소련 당국의 안일한 태도 - 그래서 탈출을 눈치채지 못했음 - 도 오히려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픽션이라면 허술하다고 비판받았을테지만요.
이런 디테일들은 올레크가 M16과 안가에서 만나 내통하는 상세한 과정, 당시 기술로는 최고 수준의 정교한 라이터 내장 카메라, 스파이가 메시지를 잘 받았다는 답이 맥주병 뚜껑을 올려놓는 것인데 '진저비어' 병뚜껑을 올려둔건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던는 등으로 책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실제 스파이들을 둘러 싼 첩보 과정도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대표적인게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고심하는 부분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첩자의 정보를 그냥 활용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리 간닪난 일이 아니더라고요. 적의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첩자가 우리 진영 내 첩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어 그들을 모두 체포했다면, 적 역시 자기들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걸 알아챌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M16는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길게 보고 이용하는걸 택했지만, 결국 정보를 이용한 탓에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CIA가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를 알아낸 과정도 왠만한 추리 소설은 비벼보기도 힘듭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CIA는 M16에서 제공한 라이언 작전 관련 정보로 정보원이 KGB 요원이라는걸 알았습니다. 보고서가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것으로는 그 사람이 M16과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그는 소련 밖에 있고 영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추리했습니다. 전달된 정보는 기술 정보나 군사 정보보다 정치 정보가 많다는 것으로 그가 제1주요부 PR라인에 근무한다는 걸 알려주었고요. 마지막으로 KGB 내부 첩자라면 서방의 소련 첩자를 알려주었을텐데, 최근 소련이 잃은 첩자들은 노르웨이의 호비크와 트레홀트, 스웨덴의 베릴링, 영국의 마이클 베터니였습니다. 호비크와 베릴링이 체포되었을 때 스칸디나비아에 있었고, 트레홀트와 베터니가 잡혔을 때 영국에 있었던 사람은? 올레크 고르디엡스키 뿐이었습니다! 이어진 올레크의 과거 조사는 그가 M16의 내부 첩자라는건 분명히 드러나게 만들었지요. 이렇게 CIA가 알아낸 내부 첩자의 정체를 CIA의 배신자 올드리치 에임스가 밀고하여 올레크가 위기에 빠졌던 것입니다.

고르디엡스키의 활약(?)과 함께 당시 국제 정세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설명되는데 냉전 때 KGB 수장이었던, 그리고 소련 서기장까지 올랐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실제 서방의 핵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KGB는 서방의 선제 핵 공격 징후를 다각도로 포착하기 위한 '라이언 작전'을 진행했었으며, '에이블 아처' 훈련 당시가 가장 큰 위기 상황이었다는 등의 비화도 놀라왔습니다. 
라이언 작전 당시 크렘린은 '혈액 은행'이 진짜 은행처럼 혈액을 사고 파는 곳인줄 알았다는건 좀 웃겼고요.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도 무척이나 독특한 매력을 전해줍니다. 우선 그가 조국을 배신한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 탓이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이 책에 나온 다른 스파이들은 모두 돈 때문에 변절했는데 말이지요. 본인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정보를 넘긴걸 다른 반체제 활동과 동일시했다는 올레크의 생각도 신선했어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으로, 작가 솔제니친은 글로 싸웠듯이 KGB 요원인 올레크는 첩보 세계에서 정보를 활용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요.
 
하지만 문제는 그의 이상이 무엇이었던간에 고르디엡스키가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버리고 홀로 도주한 비겁자이기도 하고요. 이런 인물에 대해 칭송하다시피하는 내용을 쓴건 적합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공적이라고 책에서 설명되는 것들의 실체도 모호하고요. 책에서는 소련이 선제 핵 공격을 고려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걸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으로 전달된 정보로 서방은 알고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서방은 당시 스타워즈 계획을 중지하거나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즉, 고르디엡스키가 제공한 정보와 핵 전쟁을 막은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책에서는 그의 활약과 희생이 대단한 것처럼 설명하고, 대처도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을 그를 높이 평가했다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인정받을만한 인물일까요? 가족도 잃은 채 조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 M16의 보호를 받는 일종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는 현재가 고르디엡스키가 어떤 인물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제외한다면, 달리 나무랄데 없는 최고의 책입니다. 스파이 소설을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8/03/31

고양이 발 살인사건 - 코니 윌리스 / 신해경 : 별점 3점

고양이 발 살인사건 - 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SF 쪽에서는 명성이 높은 코니 윌리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입니다.
코니 윌리스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수록작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데다가, 밝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통 SF라기 보다는 약간의 SF 설정이 가미된 작품들로 일상 - 홈 드라마이자 사회 비판물인 "말하라, 유령", 본격 추리물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로맨틱 코미디 첩보물 "절찬 상영중",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SF "소식지", 로드무비 "동방박사들의 여정", 일상 드라마인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로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친숙한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클리셰, 설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장르문학, 컨텐츠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점이에요. 그만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아래 상세 리뷰에서 처럼 별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저도 크리스마스 관련된 이야기를 몇 번 써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수준 차이가 엄청나네요. 반성하게 됩니다.

"말하라, 유령" 

이혼남으로 책이 유일한 취미인 서점 직원 그레이의 유일한 낙은 크리스마스에 딸 젬마와 보낼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점의 사인회와 전처 때문에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그레이는 서점 직원으로 임시 채용된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는데...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꾸만 엇나가는 그레이와 사람을 개과천선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판타지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며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 바쁜 백화점 서점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압권이에요. 이래서야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딸 젬마가 좋아하는 소공녀, 그 외에도 디킨스와 월터 스콧의 작품이 많이 인용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완벽한 크리스마스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건 의외였습니다. 마지막에 유령들이 뭔가의 슈퍼 파워로 딸 젬마를 그레이에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끝나버리거든요. 돈이 최고고(작 중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것), 유령들은 힘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결말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사회 비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게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씁쓸하네요. 디즈니 작품과 비슷한 가족 판타지로 위장된 탓에 이런 갭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딸아이 아빠로서 젬마는 최소한 행복해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양이 발 살인사건" 

세계 최고의 탐정 투페는 크리스마스에 친구 브리들링스 대령과 함께 마웨이트 장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건을 의뢰한 샬롯 발라디 부인이 영장류를 연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소로 사람의 말이 가능한 고릴라 달타냥, 추리소설도 좋아하는 똑똑한 침팬치 하이디가 하인으로 일하는 등 연구 실적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동생 제임스는 영장류를 증오하여 자신이 유산 상속을 받으면 모두 쫓아낸다고 공언한 상태. 다행히 그들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알리스테어 경은 치매로 난폭한 바보가 되었지만, 앞으로 수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투페 컴비는 다른 손님들, 기자인 루트거스와 폭스양, 지역 경찰 유스티스 경사, 알리스테어 경의 간호사 파치트리 양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의뢰하는 수수께끼가 단지 영장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 투페는 당장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 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든 정황이 고릴라 달타냥의 범행임을 암시했는데....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컴비를 빼닮은 탐정 컴비가 등장하고, 전형적인 영국 장원을 무대로 하는 클로즈드 써클 미스테리입니다.

일단, 고전 본격물에 대한 높은 이해가 돋보여요. 탐정 컴비의 묘사는 물론 장원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모두가 동기가 있고 수상쩍은 등 여사님 작품에서 보았었던 그런 느낌으로 묘사되거든요.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 캐릭터를 쏙 빼 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전형적입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 그대로에요. 무엇보다도 추리에 있어서 영장류의 지능이 높다는 설정으로 독특함과 재미를 안겨다 주는 부분이 탁월했습니다. 이 설정이 단지 재미 요소가 아니라 진짜 반전의 핵심 요소인 덕분입니다. 영장류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알리스테어 경을 살해하고 제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SF가 가미된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물로 추리와 재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시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실 거에요. 별점은 5점!입니다.

"절찬 상영중"

"크리스마스 소동" 이라는 고전 영화를 보기 위해 애쓰는 사라와 그녀가 그 영화룰 왜 못 보는지를 설명해주는 전 애인 잭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사라가 방문한 영화관 시네드롬은 온갖 영화 관련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는 일종의 테마 파크인데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손님들이 밀어닥친 탓에 난리도 아닌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상황 묘사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영화를 보지 못한 이유도 아주 그럴듯해요. 영화를 만든다고 사기를 친 뒤 시네드롬에 돈을 좀 쥐어줘서 아무도 못보는 환상의 상영관을 확보한 후 제작비를 쓴 것처럼 꾸미는 제작사의 음모이고, 이는 백 개도 넘는 상영관을 모두 채우는 건 무리였던 시네드롬에게도 필요했던 사기라는 진상인데 생각도 못했네요.

이러한 내용을 소비자 사기국에서 근무하는 잭의 화려한, 영화를 방불케하는 첩보 작전처럼 풀어나가는 것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라에게 사 준 티셔츠가 카메라 부착형이라는 아이디어 등 디테일도 볼거리이며, "백만 달러의 사랑", "아이 러브 트러블", "위기의 암호명" 등 비슷한 영화들의 장면 장면과 엮이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거든요.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 첩보극이라는 장르 공식에 굉장히 충실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지요. 그 외 다수 영화들의 인용, 묘사도 흥미로운데, "디워"가 원작에도 언급되는건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망한 영화도 매니아가 따라붙고, 온갖 매체에서 흥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설정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잭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소식지"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착해졌다. 이를 처음 눈치챈 건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가 흠모하는 이혼남 게리였다. 둘은 곧 착해진 사람들이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다른 악영향없이 착해지기만 한 탓에 이를 밝히고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착해진 사람들의 몸 관절이 이상해지는 부작용을 알아낸 주인공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수를 박멸하고자 직장과 집의 온도를 올렸다(모자를 벗게). 다행히 기온이 올라 이 소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변주된 "신체 강탈자의 습격 (바디 스내쳐)" 입니다. 기생수의 부작용이 착해지는 거라니 정말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이변을 눈치채지만 착해지는 게 과연 무슨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도 웃음을 자아내고요.

하지만 디테일이 좀 지나쳤습니다. 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과유불급이랄까요? 제목이기도 한 가족들 간의 '소식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의 이변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품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지역별 편차가 있고 이유는 기온이다!를 드러내려면 TV나 신문 등의 뉴스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등장인물들도 너무 많은데, 이 역시 주인공과 게리가 잘 되게 만드는 식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마무리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 

눈보라가 휘몰아쳐 도로가 통제되는 와중에서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예수를 찾아나선 목사 멜과 친구 BT,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여성 캐시 3인의 여정이 그려진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동방박사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온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백인 목사, 흑인 과학자, 전직 영어 교사인 여성 3인이라는 파티 구성도 나름 완벽해서 눈길을 끌고요.

그러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실제로 동방박사가 겪었음직한 고뇌(이게 계시가 맞는지? 내가 미친건 아닌지? 와 같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드라마적 재미는 별로 없어요. 독백과 종교적 고뇌로 가득찬 작품이 애초에 재미있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 계시와 유사한 카니발 조명과 예수일지도 모르는 카니발 운전사 등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계시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일종의 추리 과정이라도 동반되었더라면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세 명이 카니발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는지, 그들을 방해하는 헤롯왕의 수하들은 누구인지 등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마무리 되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모험이 시작되자마자 이야기가 끝나는, "반지의 제왕" 1부와 같은 수준의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냐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책 뒤에 작가가 꼽은 크리스마스를 다룬 최고의 영화, 책, TV 시리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 중 최고는 "러브 액츄얼리"를 꼽고 있더군요. 이 작품은 작가가 나름대로 변주한 "러브 액츄얼리" 입니다. 족 모임을 위해 오리를 구우려는 루크,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구엘의 양육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파일러, 남편과 사별하고 멕시코로 여행온 베브, 아내 마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워런,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식을 주장하는 친구 스테이시의 들러리로 여행 온 폴라,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대폭설을 연구하는 네이선 박사와 조수 진성 등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다양한 등장인물이 한 꼭지 씩 이야기를 선보이다가 마지막에 연결되는 결말인데 전개 방식이 똑같거든요. 대부분 해피엔딩이며 감동적인 이야기와 적절한 코미디가 섞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차이점이라면 이야기들 속 대 소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 폭설" 이라는 SF적인 설정이라는 것 뿐입니다.

모두 재미있고 따뜻하며,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도저히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다가 파멸한 불륜남 워런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아주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도 대폭설의 원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다운 발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반짝반짝한 작은 소품들이 모인 선물 상자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로 꼭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2014/12/11

게물랭의 댄서 - 조르주 심농 / 성귀수 : 별점 2.5점

게물랭의 댄서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열린책들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 샤보와 르네 델포스는 단골 캬바레 게물랭을 털 계획을 세우고 심야에 몰래 잠입했다. 그러나 그들은 캬바레 안에서 시체를 발견했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시체가 동물원 앞에서 유기된 채 발견된 후, 수수께끼의 사내에게 미행당해 불안감에 사로잡힌 두 젊은이는 달리 마련한 돈을 처분하기 위해 다시 게물랭에 방문했다. 그러나 장 샤보가 경찰에 체포되고 마는데...

조르주 심농메그레 경감 시리즈 중 한 권으로, 1931년도 작품입니다. 연표를 보니 상당히 초기작이네요.

제가 읽었던 메그레 경감 시리즈 중 단언컨데 가장 이색적입니다. 다른 시리즈 작품과 차별화되는 점을 하나씩 열거해 보자면,

  1. 거의 책의 절반 분량까지 메그레 경감은 등장하지 않고 방탕한 청년 장 샤보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점.
  2. 사건 발생 및 해결 모두가 벨기에의 리에주라는 도시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3. 일상 속 범죄, 현실 속에 감추어진 어두운 드라마가 중심이었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국제적인 첩보조직이 등장하는 등 약간은 모험 소설 같은 파격적인 설정을 갖추고 있다는 점.
  4. 메그레가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본격물 탐정들과 같은 대담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

입니다.

이 중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네번째 항목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피해자가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그 뒤 경찰을 어떻게든 따돌리려 시도한 이유에 대한 추리가 핵심인데 셜록 홈즈의 추리법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추리의 결과가 황당하지만, 그게 사실에 거의 부합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또 독자에게 비교적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역시나 고전 본격물스럽습니다. 앞서 언급한 피해자의 기이한 행동, 담배갑을 델포스가 가지고 있다고 입을 맞춘 게물랭 직원과 댄서의 증언으로 장 샤보가 늪에 빠지지만 이후 진상이 밝혀진다는 디테일, 르네 델포스가 훔쳤다고 증언한 2천 프랑의 출처 등이 대표적입니다. 피해자가 최초에 죽은 척 한 것이라는 일종의 트릭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심농이 다른 경쟁자들을 의식해서 “나도 이런 거 쓸 수 있다구!” 라는 마음가짐으로 써내려간 느낌이 듭니다.

심농 작품다운 심리묘사와 배경 묘사도 여전합니다. 특히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로 생각되는)에게 쫓긴다고 생각하는 철부지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볼거리였어요. 적절한 분량이라는 미덕 역시 동일하고요.

하지만 약간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메그레 스스로 시체를 은닉했다는 중요한 정보를 나중에 알려주는 것은 공정치 못합니다. 마지막에 아델의 집으로 빅토르와 델포스가 잠입하여 물건을 회수하려 한 까닭도 잘 모르겠고요. 마지막 장면은 주요 등장인물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놓고 메그레가 진상을 설명하는 추리쇼 형태라서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것까지 다른 고전 본격물을 따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사실은 비밀첩보원이었고, 암호로 된 편지까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명작 중 잠수함 설계도를 다룬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만, 게물랭이 국제적인 첩보 조직에 속한 곳!이라는 설정도 많이 엉뚱합니다. 차별화되는 요소였을지는 모르나 설득력 측면에서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메그레 시리즈의 일반적인 스타일을 사랑하는 독자에게는 호오가 갈릴 수 있고, 제 기대와도 약간 달라서 감점하지만, 추리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고 심농만의 장점도 여전히 유효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2004/10/23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사나이 - 켄 폴레트 : 별점 2.5점

1914년, 영국 귀족원 의원 월든 백작에게 윈스턴 처칠이 갑자기 찾아왔다. 처칠은 군비를 확충 중인 독일의 위협에 대비해 러시아와의 동맹을 수립해야 한다는 밀명을 내렸고, 이에 백작은 처조카이자 러시아 짜르의 조카이자 해군 제독인 알렉스와의 회담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회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펠릭스는 알렉스를 암살하기 위해 영국으로 출발했다. 무고한 러시아 민중의 전쟁 참여를 막기 위함이었다...

영화로도 유명한 첩보물 "바늘구멍"의 원작자 켄 폴레트의 역사 첩보 스릴러입니다. 1차대전 직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여 무정부주의자의 암살 계획을 그리고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답게 바늘구멍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적대국의 스파이이자 악당인 주인공이 주변 여성(?)의 도움으로 수차례의 도주 끝에 임무에 성공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세에 지장을 주지는 못한다는 - 바늘구멍은 최후의 순간에 실패하고 죽어버리긴 했지만 - 설정이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무방하거든요. 

그래도 실존인물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는 전개(특히나 처칠의 악역스러운 묘사!)로 팩션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이는 영국 귀족에 대한 상세한 세부 묘사(파티나 체면을 위한 여러 의식 등)로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암살, 모험물로도 빼어납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활동, 직접 제작하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암살 계획 및 발각된 펠릭스의 수차례에 걸친 탈주극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무엇보다도 타락하고 아무 생각 없는, 자신밖에 모르는 영국과 러시아 귀족들보다는 무정부주의자의 편을 들고 싶어지는 전개가 인상적이에요. 펠릭스는 악역처럼 묘사되고는 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일종의 안티 히어로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니까요. 때문에 집념의 암살 계획은 성공하지만 아무 소득없이 끝나버린다는 결말은 굉장히 슬펐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대중적인 인기에 집착한 듯한 불필요한 성적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월든 백작의 딸 샬롯의 지나친 정치 참여 의식도 전혀 설득력이 느껴지지 못했고요. 마지막으로 펠릭스와 리디아, 그리고 샬롯과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한 극적 장치이긴 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재미있기는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비슷한 소재였던 쥘 베르느의 "황제의 밀사" 쪽이 저는 훨씬 마음에 드네요. "황제의 밀사"나 다시 구해서 읽어 봐야 겠습니다.

2017/04/08

콘돌의 6일 - 제임스 그레이디 / 윤철희 : 별점 2점

콘돌의 6일 - 4점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오픈하우스

코드네임 '콘돌'인 정보원 말콤은 CIA 조직에서도 한직인 미국문학사협회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한가하고 무료하게 보내던 중,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다른 동료들이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말콤은 '패닉 넘버'로 사건을 보고했지만, 오히려 조직 내 끄나풀에 의해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다. 운 좋게 살아남아 도주에 성공한 말콤은 스스로 사건의 진상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하는데...

"콘돌"은 오래전 극장에서 감상했던 영화였습니다. 찾아보니 국내 개봉이 1989년이었더군요. 1975년 영화이니 국내 개봉은 무척 늦은 편이지요. 14년이나 뒤에 개봉할 정도로 큰 화제를 몰고 온 작품은 아닌데 좀 희한하군요. 여튼, 한창 전성기였던 로버트 레드포드페이 더너웨이가 주연을, 거장은 아니더라도 몇몇 작품("투씨", "아웃 오브 아프리카")으로 영화사에 큰 자취를 남긴 시드니 폴락 감독을 맡은 작품으로 당시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정말 너무나도 재미있게 감상했었습니다. 그때까지 보아왔던 영화 중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요. 어린 마음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흥미로왔던 첩보 스릴러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쪽 장르 영상물로는 역시 비슷한 시기 TV에서 감상했던 리처드 체임벌린 주연의 "잃어버린 얼굴 (본아이덴티티)"와 제 추억 속에서는 쌍벽을 이룹니다. "아이거빙벽"까지 해서 저만의 3대장인 셈이지요.

서론이 길었군요. 이 책은 바로 그 영화의 원작 소설입니다. 오픈하우스에서 선보인 장르문학 시리즈인 '버티고'시리즈 중 한 권으로, 원작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번역, 출간되니 너무 반갑네요. 

그런데 제 기억 속 영화에 비하면 소설의 완성도와 재미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물론 영화는 경험치도 높지 않고, 접해본 컨텐츠도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감상했던 탓에 과하게 좋은 평가를 내렸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영화화된 인기작답게 아예 형편없지만은 않아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이런 것 까지? 라는 생각이 드는, CIA 같지도 않은 독립적이고 한가한 정보 분석 부서 '미국문학사협회'에 대한 설정은 분명 독특하니까요. 여기서 일하는, 현장 요원이 아닌 말콤(콘돌) 설정도 타 첩보물과 차별화되는 부분이고요. 군인이나 경찰 출신도 아니고, 석사 학위 필기 시험 때 "돈키호테"를 '네로 울프'에 비교하여 쓴 답안지 덕분에 취직에 성공한 문학 전공자라니 정말 독특하잖아요.

미국문학사협회 직원들이 급작스러운 습격으로 몰살당한 후, 숨겨진 뒷문으로 점심을 사러 갔던 말콤만 운 좋게 살아남아 목숨을 걸고 도망다니면서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한다는 중반부까지의 전개도 흥미롭습니다. 별다른 훈련도 받지 않은, 무늬만 정보 요원인 말콤이 여러가지로 머리를 짜내어 도주하는 과정이 아주 그럴듯해서 설득력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CIA의 핵심 인물인 '노인'과 케빈 파웰이 말콤을 찾아내기 위해 벌이는 수사의 디테일도 빼어나고요.
참고로, 여기서 주는 교훈이라면 도주할 때에는 절대 이발소를 찾아가지 말라는 것. 결국 이발소를 통해 모든 행적이 드러나게 되거든요. "아저씨"의 원빈처럼 직접 자르는게 답인 듯 싶네요.
아울러 이만한 이야기를 200페이지를 갓 넘는 분량으로 소화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콤이 웬디를 만나 은신하기 시작한 후 부터는 별로입니다. 우연에 의한, 작위적 설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탓입니다. 애초에 웬디가 말콤의 말만 믿고 몸과 마음을 바쳐가며 도주를 돕는다는 설정부터 작위적입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헐리우드 스타일 도주극이 그러하니 여기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워싱턴에 변장하고 다시 잠입한 말콤과 웬디가 '우연히' 마로닉을 만나게 되어 총격전이 벌어지고, 이 와중에 말콤이 마로닉과 함께 있던 동행의 차 번호판을 기억하여 주소를 알아내는 과정은 개연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CIA 내부의 흑막이 벌이는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허술하다는 것도 문제고요.
이후 저택에 숨어든 말콤이 사로잡혀 죽을 위기에 빠지지만 마로닉에 의해 살아남는 과정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로닉이 구태여 말콤을 살려줄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건 사건이 왜 일어났으며, 진상이 무엇인지를 악당 시점에서 상세하게 설명해주려는 목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악당 마로닉이 자기 입으로 진상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그 다음에 말콤이 공항까지 찾아가 마로닉을 사살한다는 결말도 뜬금없습니다. 진상이라도 대단하면 모를까, 마약 밀수 때문이라니 좀 허무했어요. 웬디가 죽지 않아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마지막 장면은 사족에 불과하고요. 

영화의 디테일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지막 장면만은 확실히 기억납니다. 신문사를 찾아가 모든걸 폭로한 '콘돌'과 정부 요원이 대화를 끝낸 후 인쇄된 신문이 쌓이는 장면이었습니다. 신문에 말콤이 이야기한 사건이 실렸을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 여운도 남기고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드는 멋진 결말이었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결말만큼은 영화가 백만배는 더 뛰어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독특한 캐릭터만큼은 높이 평가하나, 그 외에는 딱히 특기할 점이 없는 스파이 소설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영화를 구할 수 있다면 영화로 감상하는게 훨씬 낫습니다.

2010/11/23

007 제임스 본드의 과학 - 로이스 그레시 외 / 유나영 : 별점 2점

007 제임스 본드의 과학 - 4점
로이스 그레시, 로버트 와인버그 지음, 유나영 옮김/한승

이전에 읽었던 "셜록 홈스의 과학"이 아주 좋았기에 읽게 된 시리즈 책입니다. 

"셜록 홈스의 과학"이 셜록 홈스를 등장시켜 과학 수사를 설명했듯이, 이 책도 '007 - 제임스 본드'와 그 작품을 통해 첩보·스파이의 역사와 발전사를 다룰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시리즈로 묶였을 뿐, 책의 성격이 너무나 달라서 아차 싶었습니다. 본드카, 총기와 폭발물, 핵전쟁, 첩보 장비 등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다양한 도구들과 악당들, 그리고 악당들의 음모를 약간의 과학적 상식을 섞어 분석하는 내용이더라고요. 그러나 밀도 높은 분석을 제공한다기 보다는, "007 - 제임스 본드" 영화에 충실한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물론 덕분에 "007"이라는 시리즈, 특히 영화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본드 소설과 영화에 등장했던 화려한 장비나 다양한 본드카에 대한 설명은 읽는 재미가 넘쳤고요. 과학적 분석도 몇몇 이야기는 꽤 흥미로왔어요. 세균전과 화학전에 대한 짤막한 설명, 실제로 제작되었던 007용 도구(특히 '자이로콥터'!)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마지막 부록으로 포함된 '마티니의 과학 - 제임스 본드의 마티니' 부분도 인상적이었고요.(관련 기사: 여기)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007 - 제임스 본드"라는 하나의 장르물에 대한 팬 사이트 해설 모음집 같은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007" 시리즈의 팬이 아니라면 큰 흥미를 느끼기 어려울거에요. 다양한 도구들에 대한 도판 하나 제대로 실려 있지 않은 것도 불만스럽고요. 이런저런 이유로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작품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007/12/15

009-1 : 별점 3점

전 세계가 이스트블록과 웨스트블록으로 나뉘어져 대립하는 시대. 중립 지역은 달. 각 블록의 핵과 군비 경쟁의 뒷면에서 서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평화를 유지시키려는 에이전트들의 활약이 존재한다. 웨스트블록의 핵심 에이젼트는 009-1!

이 작품의 제목을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헛갈립니다만(제로제로 원인지, 더블오 원인지, 제로제로 쿠노이치인지...), 간만에 전 편을 몰아본 TV 애니메이션이네요. 정말 간만입니다. 보게 된 동기는 인터넷 서핑 중 발견한 이 작품의 히로인 밀레느 호프만의 피규어 사진 때문입니다. 정말 땡기게 만들었거든요.

작품은 009로 유명한 이시노모리 쇼타로 선생의 원작으로 30여년전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작한, "자이언트 로보"나 "009" 애니메이션과 같은 컨셉입니다. "쾌걸 증기탐정단"을 보는 느낌도 좀 들고요. 작품에 레트로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복고적인 의상과 메카닉을 좋아하는 탓에, 모두가 제 취향에 딱 맞아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주 내용은 "에이전트"라 불리우는 사이보그 여성의 활약상을 담고 있는데 SF적인 느낌보다는 첩보물 성향이 강합니다. 첩보물적인 설정의 에피소드들은 그 수준도 모두 상당한 편이었고요. 정보를 얻기 위한 여러가지 스파이 활동의 디테일은 물론이고, 에이젼트들의 인간적인 고뇌까지 충실하게 그려져 있는 덕분입니다. SF적인 설정의 근간인, 온 몸이 기계화된 미녀들의 액션도 괜찮습니다. 각 에이젼트들의 캐릭터나 특징이 사이보그 009의 멤버들과 무척 유사하다는건 저같은 고전 매니아에게는 반가운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히로인인 009-1 밀레느 호프만입니다. 강하고 냉정한 것은 물론, 임무를 위해서라면 몸을 팔거나 살인까지 서슴치 않는 팜므파탈적인 매력이 아주 독특하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는 복잡한 성격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비쥬얼도 돋보였고요. 피규어를 사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특하고 재미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매니아적인 취향의 작품이었기 때문인지 12화로 짧게 끝납니다. 단지 짤막한 시즌이면 괜찮은데 9화부터 심각하게 작화 붕괴 현상이 일어나 안타깝네요. 조금 더 길게, 완성도 있게 제작되었더라면 더욱 좋았텐데 말이지요. 

워낙 짧은 분량이라 딱히 특정 에피소드를 추천하기는 좀 어렵지만, 다양한 미녀들의 멋진 액션과 작품의 특징이 잘 살아있는 1화 "잠입자들", 강력한 라이벌과의 사투가 벌어지는 3화 "하드보일드"는 내용과 전개 모두 일급인 걸작 에피소드라 생각되며, 미래세계의 굉장히 기발한 황금 운송 작전이 등장하는 5화 "황금의 여자"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6화 "팝"은 여운을 남기는 전개가 인상적이었고 작화가 붕괴되던 초입인 7화 "항구"는 순진한 소년과 추악한 음모가 대비되는 전개가 좋았고요. 

다만 앞서 설명드린대로, 결말부인 10,11,12화는 솔직히 너무 급하게 마무리한 느낌이 강해서 아쉽습니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법인데 말이죠.

그래도 정말 간만에 애니메이션 한 시즌을 전부 몰아 보았는데 나름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습니다. 고전 매니아라면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04/12/05

즈베즈다(Zvezda / The Star, 2002) - 니콜라이 레베데프 : 별점 3점


트라브킨 중위가 이끄는 정찰부대에게 독일군 후방에 침투하여 첩보를 입수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트라브킨 중위와 고참병사 마르첸코 병장 외에 새로 보충된 4명과 부상에서 돌아온 1명, 총 7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분대는 독일군 후방에서 각각의 특기를 발휘하여 (사격전문, 독일어 통역, 작전 지역 태생의 지리 전문가 등) 독일군의 대 공세의 일자 및 부대의 규모 등 비밀 작전의 전말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여 본부에 연락함으로써 소련군의 승리에 결정적 공을 세우지만 결국 전멸하게 된다.

2차대전을 무대로 한 정찰부대의 활약을 그린 전쟁영화입니다.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영화로 그간 미군이나 영국군 중심의 영화에 비하면 상당히 색다른 소재라 재미있게 봤습니다. 소련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Enemy at the Gate"이후 두번째이지만 러시아에서 만든 러시아어 영화는 처음인 것 같군요.

내용은 "전문가 집단인 소수 특공대의 활약"이라는 전쟁영화의 한 전형을 따라가고 있지만 재미와 액션 위주라기 보다 리얼한 묘사를 주로 하고 있어서 특이합니다. 리얼한 묘사에 더불어 첩보 부대라는 부대 특성 때문에 교전보다는 "회피"하는 전술을 주로 구사하므로 스케일이 최근 영화들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초반 늪에서의 은신 장면이나 독일군 트럭을 몰래 타고 수송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정찰 장면 등에서 효과적인 연출로 표현한 긴박감은 대단합니다. 또한 폭격이나 총격씬 등도 적당한 수준으로 멋지게 표현해 주고 있으며 수준 역시 높아서 최근의 대작 영화들에게도 별로 꿀리지가 않네요.

지나친 충성심과 애국심, 헌신하는 조국의 병사들이라는 선전영화스러운 분위기와 과장된 활약상을 보여주긴 하지만 전쟁영화라면 꼭 등장하는 내용이니 이 부분은 패스. 하지만 여성 통신병 "시마코바" 일병의 존재는 좀 불필요 했다고 보입니다.

그래도 각본 및 촬영, 편집이 상당히 좋고 재미도 있으면서도 적당히 감동도 있는 좋은 영화입니다. 러시아 영화의 저력을 잘 보여주고 있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3/03

나이트 스쿨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나이트 스쿨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6년 어느날, 잭 리처는 미 육군 수훈장을 받은 날 '학교'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학교'에서 리처는 FBI의 케이시 워터맨, CIA의 존 화이트와 만났고, 그들 모두 조직 최고의 요원으로 특별한 작전을 위해 소집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불법무장단체가 '1억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어떤 미국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사려고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세 명은 그 미국인이 누구이며, 팔려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작전에 돌입했다.
거래가 있던 독일 함부르크로 향한 리처는 목격자 설명에 따른 몽타쥬를 통해 미군 탈영병 윌레이가 범인이라는걸 밝혀냈다. 윌레이의 은신처는 그가 사용했던 가명을 통해서, 그리고 윌레이의 주변 사람들 증언을 통해 그가 팔아넘긴게 '소형 핵폭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지만 윌레이는 시체로 발견되고 마는데.....

잭 리처 시리즈 21번째 작품. 원제는 동일합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정체와 그가 팔려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전개는 일종의 첩보물을 연상케합니다. 첩보물에서 "숨어있는 적 정보원, 그리고 그가 확보한 중요 단서"를 찾으려는 설정, 과정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수사물의 기본 얼개와도 비슷하기에 잭 리처의 추리도 많이 선보이고요.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이미 드러난 윌레이의 가명들을 통해 그가 현재 쓰고 있는 가명을 추리해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윌레이가 먼저 사용했던 가명은 '에른스트'와 '겝하르트'였습니다. 리처는 마지막 남은 이름은 '아이작 H. 켐프너'라고 추리합니다. 윌레이는 텍사스 슈거 랜드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텍사스 최초의 독일 정착촌을 설립한 에른스트, 텍사스 출신의 유명한 핫소스 창업자 겝하르트의 뒤를 이을 이름은 슈거 랜드를 이룩한 슈거 랜드의 아버지 아이작 H. 켐프너 뿐인 것이지요. 실제로 윌레이가 쓴 가명도 아이작 헤르베르트 켐프너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번안하자면 LG 트윈스 팬인 범인이 첫 가명을 "김용수", 두 번째 가명을 "이병규"라고 했다면 마지막 가명은 "박용택"이다!라고 하는 느낌이겠지요? 텍사스와 독일계 미국인에 대해 엄청나게 자세하게 알아야 풀 수 있는 추리이기는 하지만, 재미있었어요.
현장을 분석하여, 윌레이는 물건을 배로 실어 나를 생각이었다, 그래서 트럭을 항구 근처 창고에 숨겼을 것이다, 그 창고는 트럭 2대가 들어갈 양문형에 추가 잠금 장치가 되어 있을 것이다는 추리도 좋았고요.

윌레이가 팔려고 했던 물건이 그가 입대 동기로 이야기했던 "데비 크로켓 때문에 군인이 되고 싶었다."는 말이라던가, 유년 시절 함께 살았던 엄마의 정부 "삼촌"의 경력 등이 토대가 되어 천천히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도 합리적이며,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었어요. 미군이 냉전시절 개발했던 소형 핵폭탄이 착오로 버려진걸 윌레이가 확보했다는 정체도 괜찮았고요. 유럽과 미국이 '1'을 쓰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에 착안하여 현재 위치를 찾아내었다는 아이디어도 그럴싸 했습니다.

"1030"의 니글리, 오로스코의 등장도 반가왔습니다. 만나는 모든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리처가 가장 신뢰하며 오래되었을 부하 니글리와는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가 밝혀지기도 하고요. (접촉 기피증)

하지만 이야기를 지나치게 길게 늘린 느낌이 듭니다. 앞서 대단한 듯 했던 '학교'에서의 멤버들 중 FBI와 CIA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실제 독일에서의 활약은 니글리와 오로스크라는 리쳐의 인맥과 독일 경찰 그리즈만이 활용되었으니까요.
윌레이가 거래가 마무리 되기 전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매춘부와 즐기다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범행은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윌레이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별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독일 경찰 그리즈만은 리처를 돕지만, 뮬러는 배신해서 극우 조직의 리더인 드레믈러에게 정보를 팔아넘긴다는 설정도 똑같아요. 극우 조직이 이 사건에 개입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범죄 조직과 극우 조직이 비록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는 있어도, 비교적 성공한 사업가인 드레믈러가 돈 때문에 물건을 빼았앗을리는 없어서 개연성도 부족합니다.
이런 불필요한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윌레이를 보다 신중한 인물로 그린 뒤 그와의 대결에 집중했어야 했습니다. 지금의 여러가지 설정들은 이야기만 길게 만들었을 뿐으로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윌레이와 드레믈러의 최후는 시시하기까지 하고요.

타국에서 일종의 비밀 작전을 벌이는 것이라 액션이 별볼일 없다는 단점도 큽니다. 리처가 드레믈러를 제외한 악당을 아무도 죽이지 않아서, 다른 작품들만큼의 파괴에 대한 쾌감은 부족하거든요. 당연히 펼치는 액션과 무기에 대한 설명도 부실한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리처의 군 시절 활약이 펼쳐진다는 특이함은 팬으로서 기뻤지만, 전체적으로는 평작에 가깝습니다.

2015/09/28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2014) - 매튜 본 : 별점 3점

올 초를 뜨겁게 달구었던 화제작. 영화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뒤늦게 감상하게 되었네요. 줄거리는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만화 원작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확실히 B급 향취가 가득합니다. 특히 한국인이라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을 정도로 익숙한 무협지의 전형적인 얼개를 충실히 따른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했습니다. 생명의 은인의 아들을 제자로 삼은 무림 고수가 죽은 뒤, 제자가 복수에 나선다는 이야기는 정말 전형적인 구성이지요.
나름 심각한 내용임에도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고 B급 정서를 유지한 것도 인상 깊었습니다. 마지막 머리가 "폭죽처럼" 터지는 장면, 핀란드 공주의 "뒤로 해줄게" 발언 같은게 대표적입니다.

동네 찌질이였던 에그시가 첩보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대부분 생략하고 철저히 액션에 집중한 감독의 선택도 나쁘지 않습니다. 훈련을 받았다면 뛰어난 실력을 갖췄을 것이라는 가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이야기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오히려 히어로의 성장 서사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기존 영화들과는 다른 신선한 발상이라 볼 수 있겠네요.

무엇보다 이 영화 최고의 매력 포인트는 콜린 퍼스가 연기한 갤러해드 해리 하트 캐릭터입니다. 젠틀맨이 무엇인지 눈빛만으로도 보여주는 인물이었고,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액션도 놀라운 수준으로 선보였습니다. 딘 일당을 쓰러뜨리는 펍 액션도 훌륭했지만, 광기에 가득 찬 교회에서의 살육 시퀀스는 그야말로 황홀한 시각적 경험이었습니다. 비록 최후는 다소 허무했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인상이었어요. 구태여 비교하자면 "스타워즈"의 오비완급 캐릭터였달까요. "스타워즈" 프리퀄처럼 젊은 시절의 해리가 주인공인 프리퀄이 나온다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배우가 워낙 마음에 들기에 아주 오래전 이야기가 아닌, 과거의 작전 중 하나만 다뤄도 괜찮을 것 같고요(* 방법은 알 수 없지만 후속편에 콜린 퍼스의 해리를 계속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이클 케인이 킹스맨의 수장 아서로 등장한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뼛속까지 영국인 같은 배우들이 젠틀맨을 연기하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네요. 죽기 직전 쌍욕을 내뱉는 장면도 반전 매력을 더했습니다. 이렇게 친숙한 영국 배우들이 등장하니 휴 그랜트도 카메오, 아니면 란슬롯 역으로 출연해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또한 첩보영화의 왕도와도 같은 다양한 특수 무기들이 등장한 것도 좋았고, 중간중간 "007" 같은 고전 첩보영화를 언급하는 유머도 고전 팬으로서 반가운 포인트였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진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멀린의 해킹으로 대부분의 위기가 너무 쉽게 해결된다는 점입니다. 이 정도 해킹에도 대비하지 못한 발렌타인이 무너지는 전개는 너무 허술하게 느껴졌고, 덕분에 해리가 왜 죽어야 했는지도 의문스러웠습니다.

록시의 비중이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꽤 크다 싶었는데, 결말부에 거의 존재감이 사라졌다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핀란드 공주보다도 비중이 낮아 보였으니, 이 정도면 분량과 캐릭터 모두 낭비된 셈이죠.

허나 장점이 워낙 확실한, 즐거움이 가득한 영화이기에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이야기는 헛점 투성이에 유머나 잔혹한 표현도 다소 과하지만, 이상하게 즐겁고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제 취향에는 딱 맞았지요. 인생 뭐 있습니까. 보면서 즐기면 그게 최고입니다. 후속작이 나온다니 아주 기대됩니다.

2023/04/22

침저어 - 소네 게이스케 / 권일영 : 별점 2.5점

침저어 - 6점
소네 게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예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사 2과 소속 후와 경부보는 일본의 국회의원인 중국 공작원 - '침저어' - 멕베스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수사에 가담했다. 곧 거물 정치인 아쿠타가와 의원이 유력한 멕베스 후보로 떠올랐다. 아쿠타가와의 비서 이토 마리가 중국 공작원으로 의심받는 우춘시엔과 만났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이토 마리가 실종되었고, 그녀의 노트북에서는 비밀 문서인 요코다 페이퍼까지 발견되어 혐의는 더 짙어졌다.
망명 요청을 한 중국 외교관 류잉캉의 증언으로 후와는 멕베스는 조작이라 여기게 되었지만, 수사본부를 장악한 고미 일당은 아쿠타가와가 멕베스이며, 후와는 중국 밀정인 두더쥐로 생각했다. 후와는 어쩔 수 없이 멕베스 사건 지휘자 도쓰이 관리관에게 직접 보고했고, 류잉캉의 증언으로 또다른 거물급 정보원 '시벨리우스'를 체포해서 멕베스 조작설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고미는 직접 류잉캉을 심문하러 나섰지만, 중국 공작원들에게 습격당해 류잉캉은 빼앗기고, 고미마저 치명상을 입었다. 후와의 직속 후배이자 부하 와카바야시는 이 사건이 자기 탓이라 자책했고, 그가 두더쥐였다는게 밝혀졌다.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포섭되었었다. 그리고 사라져버린 와카바야시의 행방을 찾는 무리에 후와마저 납치당했다.
풀려난 후와는 도쓰이 관리관에게 베이징의 책략을 폭로했다. 알고보니 멕베스는 아쿠타가와 겐타로가 맞았고, 류잉캉의 증언을 포함한 모든 건 이를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첩보 미스터리. 일본에서 국제적인 정보전이 펼쳐진다는 설정이 특이했는데, 흡입력은 상당합니다. 거물 공작원 멕베스가 누구인지, 멕베스의 존재 자체가 가짜가 아닌지, 경찰 내부의 두더쥐는 누구인지 등 다양한 수수께끼가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국회의원으로 대표되는 입법부와 경찰 조직간의 역학 관계, 고미 일당과 후와 경부보간의 알력 다툼 등 여러 갈등도 재미를 더해주고요.

하지만 기본적인 이야기 전개에서 헛점이 느껴지는건 아쉽습니다. 우선, '멕베스'의 존재가 드러난건 수사본부 발족 2개월 전 미국에 망명했던 중국 고위층 인물 후샤오밍의 증언 때문입니다. 중국은 이 증언 자체가 가짜라고 여기게끔 공작을 벌이고요. 그래서 류잉캉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죠. 목적은 당연히 멕베스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 번째는 왜 아쿠타카와의 비서 이토 마리가 우춘시엔과 만나는걸 방치했냐는 것입니다. 수사가 2개월 뒤에 시작되었으니, 이 만남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습니다. '멕베스가 아쿠타카와가 아닌가 생각되었지만 그건 조작이었다!'보다는 '멕베스는 조작으로 누구인지 실체가 없다!' 쪽이 훨씬 안전한 선택입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왜 이토 마리를 납치해서 살해하고 노트북에 비밀 서류가 있다고 조작했냐는 것입니다. 마리는 중국이 죽인걸로 보이는데, 앞서 말했듯 중국은 멕베스라는 존재 자체가 가짜라고 여기게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쿠타카와가 의심을 살 단서를 조작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래서야 아쿠타카와에게 수사가 집중될 뿐입니다. 게다가 이토 마리의 만남은 후와의 수사로 문제가 없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자료는 '두더쥐' 와카바야시에게 넘겨주었으니 중국도 그 사실을 입수할 수 있었고요. 도대체 중국은 무슨 생각이었던걸까요?
일본측 목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아쿠타카와가 멕베스라는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아쿠타가와는 이중 스파이였으니까요. 수사에 나서지 않으면 중국이 이상하게 여길테니 외사과를 투입하기는 했지만, 아쿠타가와의 정체가 드러날 수사를 진행할 필요는 없었어요. 드러난 증거로 소모적인 수사만 시키다가, 멕베스가 조작된 정보라는 것만 고미 일당에게 충분히 설명해 주고 수사본부를 해산하면 됐습니다. 물론 이토 마리가 실종되고 노트북에서 기밀 정보가 발견된 이상, 누가 보아도 아쿠타카와를 수사해야 하는 상황이라 수사를 중지시키는건 어려워졌긴 했습니다만. 더더욱 중국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지는군요.
차라리 멕베스는 다른 누군가라고 후샤오밍이 명확하게 말했고, 중국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멕베스는 아쿠타카와다!"라고 속이기 위한 작전을 펼쳤으며, 일본은 "아니, 우리는 차라리 후샤오밍의 증언 자체가 조작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래"라고 받아치다가 후와에 의해 "알고보니 멕베스는 OOO이었다!"라고 드러나는 전개가 단순하지만 더 설득력있었을 겁니다.

이런 알 수 없는 양국 행태에 비하면 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와카바야시의 두더쥐 활동은 차라리 깔끔한 편이기는 합니다. 일본측 - 도쓰이 관리관 - 이 와카바야시도 이중 스파이로 이용했다는 설정도 나쁘지 않았고요. 문제는 와카바야시를 커뮤니케이션이 지극히 떨어지는 기묘한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도무지 감정이입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른 인물들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후와 경부보는 일본 하드보일드물에 흔하디 흔한 한 마리 고독한 늑대, 고미 일당은 전형적인 깡패 형사들이고 그 외 인물들도 스테레오 타입에 가까운 탓입니다. 모든걸 알아챈 후와가 지인이자 어둠의 실력자 왕 영감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사라지면서, 뭔가 후속작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단점을 잔뜩 언급하기는 했지만, 재미는 있습니다. 첩보물로의 미덕은 잘 살아있고요. 란포상 수상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재미삼아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덧붙이자면, 뒤에 함께 수록된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소감이 놀랍습니다. 작가는 명문대 와세다 대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그 이유가 "빤한 인생을 살기 싫다" 였다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망해가는 사우나, 어두컴컴한 만화 카페 등에서 일했고 만화 카페에서조차 급여와 직책이 오르기 시작하자 위기감을 느껴 사표를 냈다니 놀랍습니다. 1967년 생이니 이런 결심을 했을 때에는 이미 일본에서도 버블 경제는 끝나서 그렇게 만만한 삶을 살기는 힘들었을텐데 말이지요. 또 정작 발표한 작품은 비교적 뻔하다는걸 보면 인생관, 가치관과 결과물이 비례하는건 아니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2022/09/18

조커게임 - 야나기 코지 / 한성례 : 별점 2점

조커게임 - 4점
야나기 코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어딘가의 랭킹에서 트릭이 뛰어난 작품이라며 추천하고 있어서 구해 읽었습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과 전혀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랭킹 탓에 특별한 게임과 관련된 본격 미스터리 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구 일본 제국 시대를 무대로 한 스파이물인데다가 심지어 단편 시리즈였기 때문입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몇가지 트릭은 분명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 상황을 잘 살리고 있는 덕분입니다. <<조커 게임>>에서 헌병대가 외국 스파이의 집을 철저하게 뒤졌지만 마이크로 필름을 찾지 못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스파이는 마이크로 필름을 천황의 사진 뒤에 숨겨 놓았던 것이지요. 일본 헌병대는 불경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사진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겁니다.
<<로빈슨>>에서 완벽하게 암호를 전달했지만 본국이 가짜라는걸 알아채게 만든 트릭은 일정 간격으로 오타를 입력해야 되는 것이었고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저 정도의 트릭으로 '빼어나다' 고 말하기는 힘들고요. 무엇보다도 작품 속 특수 정보 기관인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유치하고 진부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마왕' 유키 중령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모든 D기관원들 모두가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슈퍼 스파이 - 스파이 패밀리 같은 - 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만화 속 등장인물에 가까와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애니메이션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데, 여러모로 애니메이션으로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그만큼 만화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후속작을 따로 책으로 읽어볼 계획은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커 게임>>
육군에 유키 대령 지휘 하에 스파이 양성 학교가 세워졌다. 훈련생들이 군인이 아닌 일반 대학 졸업생이었고, 전통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무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이 학교와 조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육군은 사쿠마 중위를 파견했다. 사쿠마 중위의 임무는 유키 대령 조직의 실수와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쿠마는 학교 훈련생들의 기상천외한 입학 시험과 훈련 과정, 그리고 천황제를 부정하는 듯한 사고 방식에 경악하던 차에, 미국인 기술자 고든의 스파이 행위 증거를 찾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데...

표제작이자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사쿠마 중위의 시점으로 첩보 기관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마왕' 유키 대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게 제목이기도 한 '조커 게임' 입니다. D 기관 훈련생들이 식당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포커 게임으로 보이지만, 사실 식당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스파이 게임이지요. 누구나 누군가의 카드를 보고 정보를 줄 수 있는데, 그 정보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규칙입니다.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고,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는 D 기관의 룰을 잘 드러내는 게임이에요.

이러한 D 기관 설명이 중심이고, 고든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물을 찾는 과정은 곁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과정에 약간의 트릭이 사용되고 있으며, D 기관원들이 천황제 부정 발언을 했던게 트릭과 연결되고 있어서 전개 구조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쿠마가 주도한 수색 자체가 육군의 음모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초 수색을 지시했던 무토 중령은 필름을 발견하지 못했고, 고든의 부당한 수사에 대한 항의로 궁지에 몰렸던 상태였지요. 그래서 D 기관을 시켜 두 번째 수사에 나선 것입니다. D 기관도 수색에 실패하면 모든걸 뒤집어씌워 조.직을 와해시키고, 자기 실수를 덮으려는 목적으로요. 사쿠마는 무토 중령의 음모를 위한 버림돌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반전이 드러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헛점도 많습니다. 무토 중령이 술집 게이샤에게 용의자 집 수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고든 본인이 사쿠마 중위에게 지금이 두 번째 수사라고 말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지 모르겠거든요. 유키 중령이 변장하고 무토 중령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등 작위적인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작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령>>
영국 총영사 그레이엄은 일본인 양복점 점원 가모와 체스로 친해졌다. 그러나 가모는 D 기관 조직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폭탄 테러 계획의 유력한 용의자 그레이엄 총영사에 대한 혐의를 확정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가모는 체스를 통해 총영사는 심증으로는 죄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총영사 관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종이가 테러범 접선 장소에서 발견되었기에, 결정적 증거를 잡고자 철저히 미행했지만 별다른걸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새벽에 영사관에 잡입하게 되는데....


영사는 지령문을 옮기는 수단에 불과했다는게 진상입니다. 테러 조직은 영사의 우산 속 빈 공간을 활용해서 접선 장소에서 몰래 지령문을 전달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영사가 테러 조직의 접선 장소와 동선이 겹쳤고요.

발상의 전환이기는 한데, 구태여 영사를 이용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D 기관원 가모가 영어에 능통하고, 체스는 물론 미행과 잠입, 그리고 금고 털기에도 숙달된 슈퍼 스파이라는 묘사도 과장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가모가 영사가 소싯적 저질렀던 악행을 고백한 일기를 읽은 뒤, 이걸로 영사를 협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악이었습니다. 촬영도 않고 다른 증거도 없는데, 단지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는걸로 영사를 협박하는게 가능했을까요? 심지어 상대는 적국의 스파이인데 말이지요. 이게 통하려면 뭔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가모가 신분을 세탁하여 영사와 친분을 맺는 과정, 그리고 가모가 미행할 때 영사가 팁을 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정보 교환 방법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 정도는 볼 만 했는데, 그 외에는 건질게 별로 없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로빈슨>>
D 기관원 이자와는 영국 런던에 잠입했지만 영국 첩보기관에 체포되었고, 자백 유도제를 맞아 비밀 암호 등을 털어놓고 말았다. 영국은 유키 대령에게 배반당했다는 이자와를 이용하여, 일본에 가짜 정보를 전달하여 혼란을 주려 했지만 이자와는 의식의심층 구조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비밀은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래서 D 기관은 이자와의 정보가 가짜라는걸 알아채는데...

앞서 소개해드렸던 , 암호가 가짜라는걸 알게된 이유는 꽤 괜찮았습니다. 스파이는 일본 남아의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 무조건 살아남아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유키 대령의 사고 방식도 스파이다워서 좋았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과장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특히 자백제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방법이 말이 안됩니다. 의식의 표층과 심층을 구분하여 표층 정보만 입에 올리도록 훈련했다는데, 전혀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지 못했습니다. 훈련 과정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긴, 자백제라는 비과학적인 약도 마찬가지긴 하네요.
이자와 탈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라이데이'의 존재도 이전에 설명 한 번 없어서 뜬금없었습니다. 이자와가 임무를 떠날 때 유키 대령이 <<로빈슨 크루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위기에 처했던 이자와가 동그라미에 십자가 기호가 그려진 암호를 보고 프라이데이의 존재를 깨닫는다는건 솔직히 가관이었습니다. 이 암호는 연금술에서 '미의 여신'을 뜻하고, 미의 여신 비너스는 천문학에서는 금성이며, 이는 일주일 중 제 6일, 즉 '프라이데이'를 가리킨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국가 정보 기관들의 두뇌 싸움은 볼 만 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마의 도시>>
상하이에 파견된 헌병 중사 혼마 에이지는 상사 오이카와 대위로부터 헌병대 내부 내통자 색출을 지시 받는다. 헌병대의 미야타 중사가 살해당했기 때문이어다.
그 직후, 오이카와 대위의 자택이 폭탄 테러를 당했고 혼마는 본국 '특고' 시절 안면을 텄던 신문기자 시오즈카로부터 제보를 전달받았다. 옛 동급생이자 D 기관원인 대학 동창 구사나기를 상하이에서 목격했다는 제보였다....


D 기관원이나 기관의 작전이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이색작. 헌병대 중사 혼마의 수사와 추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탓입니다.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가 돋보였습니다. 오이카와 대위는 아편을 빼돌리다가 미야타 중사에게 들켰고, 그래서 중사를 살해한 뒤 증거 은폐 목적으로 자택을 테러로 위장해 폭발시켰던 겁니다. D 기관은 시오즈카로 변장시킨 조직원을 시켜 혼마가 이 수사를 하게끔 유도했고요.

하지만 혼마의 추리는 증거가 없다는 문제가 큽니다. 오이카와가 도박장을 드나들었고, 빚이 있었다는 정도로 미야타 중사 살인사건 및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몰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이카와가 혼마의 질책 정도로 패배를 쉽게 수긍하는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뒤 요시노 상병에게 총을 맞고 죽는 장면도 뜬금없었습니다. 요시노 상병은 오이카와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이다가 폭발 때 죽고 만 게이 소년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인데, 설명이 부족했어요.

혼란스러웠던 상하이 분위기와 이런저런 묘사는 그럴싸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결말이 별로였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더블 크로스>>
독일인 카를 슈나이더가 소련과 독일 양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D 기관은 졸업 시험을 겸해 도비사키에게 임무를 맡겼다. 도비사키는 슈나이더가 어떻게 암호를 발송했는지 등을 밝혀냈고, 신병을 확보하기 직전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애인의 집에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은 사건 현장을 발견했던 슈나이더의 애인 노가미 유리코였습니다.
사건 당일 그녀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습니다. 수 km 떨어진 극단 연습장에서 한창 연극 리허설 중이었고 그녀는 주역이라 연습장을 5분 이상 비우는건 불가능했는데, 차로 집을 왕복하는데는 최소 10분은 걸리는데다가, 슈나이더에게 유서를 쓰게하고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하는데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알리바이 트릭물 처럼 보였던 설정과 전개에 비해 진상은 보잘것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미리 독을 넣어둔 와인을 마시고 죽었던 겁니다. 바로 직전에 읽고 소개해드렸던 <<흑마술의 여자>> 트릭과 똑같네요. 유서는 전화를 통해 연극 대사로 위장해 쓰게 했다는, 추리 퀴즈 수준의 트릭이었고요. 노가미 유리코가 자택에 설치해두었던 전화 대신, 사람을 시켜 경찰을 부른 이유 - 유서를 옮겨 놓으려고 - 정도에 대해서만 약간의 추리가 등장할 뿐입니다.
유서(?)에 작게 쓰여져 있던 '더블 크로스'도 슈나이더의 즉흥적인 낙서에 불과하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했습니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의미였다는데, 그냥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오히려 본편 사건보다는 도비사키의 과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등을 버리며 홀로 살아가는 스파이가 될 수 없다는 도비사키의 결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급작스럽게 등장합니다. 이 작품이 장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노가미 유리코를 심문하면서 애정이 싹텄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다면 괜찮았을텐데 중간 과정 없이 결심만 등장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수록작 중 워스트로 추리물, 스파이물 양쪽 모두 별 가치가 없는 작품입니다.

2005/05/14

르윈터의 망명 - 로버트 리텔 / 강호걸 : 별점 4점

르윈터의 망명 - 8점 로버트 리텔 지음, 강호걸 옮김/해문출판사
미국 MIT 대학의 부교수이자 MIRV (다탄두 각개목표 재돌입 미사일) 계획의 관계자인 르윈터는 일본에서 소련 대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한다. 그의 전문분야는 미사일의 탄두부분인 노즈콘이라는 그다지 가치없는 일이지만 그는 극비문서의 비밀 열람을 통해 자신의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암기한 MIRV의 미사일 탄도 공식을 가지고 소련과 협상하여 망명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된 CIA출신의 부차관보 대리 리오 다이아몬드는 자료 조사 및 심리 분석을 통해 르윈터가 실제로 가치있는 진짜 탄도 공식을 가지고 갔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전 동료이자 CIA 담당자 듀크스는 르윈터의 탄도 공식은 가짜일 것이라는 견해를 내어 서로 대립하게 된다.
다이아몬드와 듀크스, 그리고 소련의 르윈터 담당자이자 유능한 정보국원 포고딘은 체스를 두듯 서로의 계획과 의도를 숨긴채 작전과 계획을 차차 실행해 나가게 되는데....

저는 스파이소설이라는 쟝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슈퍼맨같은 주인공, 미녀-액션이 짬뽕된 007시리즈에 대한 편견 탓에 그동안 선택에 있어서도 항상 뒷전으로 미루어 놓았었죠. 하지만 이 작품은 그간의 저의 선입견을 깨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제목대로 미국 MIT 교수 르윈터의 망명 사건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데 르윈터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KGB와 CIA가 중심이 된 양 진형의 "체스게임"이 더욱 중요하거든요.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속에서 르윈터는 단순한 소모품, 이용물로 전락될 뿐입니다. 이러한 게임이 각 진영에서 캐릭터들과 주변인물의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특히 정보전의 근본이 되는 여러 조직들과 회의들에 대한 묘사는 대단합니다) 세밀하고 현실적으로 벌어지며, 그야말로 "정보전"의 실체를 보는 것 같은 긴장감과 재미가 엄청나서 히어로의 큰 액션이나 반전 없이도 커다란 만족감을 전해줍니다. 그야말로 "리얼한 재미"를 전해주는 소설이랄까요?
예를 들자면 소설에서 양 진영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르윈터는 과연 탄도함수를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오가지만 답은 결국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양 진영에서 이 정보를 가지고 서로가 게임하듯 진행되는 과정만이 소설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이죠. 그 외에도 많은 정보들에 대한 답은 소설속에서 답해주지 않고 오직 서로의 작전의 "과정"과 "결과"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친절하다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러한 부분에서 리얼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예외적으로 후반부의 리오 다이아몬드의 작전에 의한 첩보 작전 자체는 꽤 긴박감이 넘치는 부분으로 스파이 소설의 전형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는 하지만 작전 자체가 워낙 소규모일 뿐더러 사람과 사람을 서로 도구로 여기고 이용하며 필요여부에 따라 가차없이 배신하기 때문에 역시나 다른 소설들과 차별화되고 있고요.
아울러 여타 소설들에 비해 적수인 소련 정보국원들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묘사로 표현하는 것 역시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소련의 체스 마스터 자이체프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마음에 들더군요.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소설 자체가 리얼하기는 하지만 많이 싱겁다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 책은 한단계 높은 수준의 재미와 흥분을 선사해 줍니다. 너무 딱딱하고 약간 덜 다듬어진 듯한 번역 때문에 읽기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04/08/23

어쩌다 찾은 필독 추리소설 리스트...

추리소설 초심자를 위한 필독 작품 리스트 by 화요추리클럽 in 싸이월드

개인적으로는 이런 리스트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습니다. 워낙 사람들마다 취향들이 다르니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 리스트는 초심자를 위해서 리스트를 선정하셨다고 하는 원 저자분의 노고가 엿보이는 리스트라 돋보입니다.
추리사적으로 인상적인 작품들과 정통파-하드보일드-첩보물 등 쟝르를 골고루 섞은 노력과 꽤 최근까지 올라오는 연대 등 여러모로 알찬 리스트인것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일본 작품이 좀 적다는 것이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서 저만의 리스트를 몇개 적어 보았습니다.

  • 크리스티 - 포와로 수사집 / 화요일 클럽의 살인 (걸작 단편집 2권 추려보았습니다. 단편이고 유명 탐정이 등장하니 초심자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케멜먼 - 9마일은 너무 멀다 (역시 단편집을....^^)
  • 엘러리 퀸 - 엘러리 퀸의 모험 / 새로운 모험 / Y의 비극 (역시 엘러리 퀸의 걸작 중단편집과 그 유명한 Y의 비극, 빼놓을 수 없겠죠)
  • 도일 - 홈즈 시리즈 전집 (단편집을 더욱 추천합니다)
  • 르블랑 - 뤼뺑 시리즈 (역시 단편집을 더욱 추천합니다)
  • 엘린 - 특별요리
  • 해미트 - 말타의 매
  • 챈들러 - 기나긴 이별
  • 에도가와 란포 - 고도의 마인 (외딴섬 악마)
  • 마츠모토 세이쵸 - 점과 선
  • 피터 러브시 - 가짜 경감 듀
  • 마지막으로... 딕슨 카의 황제의 코담배케이스!
써 놓고 보니 단편집 투성이네요. 그래도 크게 살인사건이나 엽기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골랐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에도가와 란포는 가부가 좀 갈릴 것 같긴 하네요.

이것도 투표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