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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5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1권과 동일하게 각종 사건들의 상세한 소개에 더해 수사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던 법의학법과학 방식이 소개되는 논픽션.
이번에는 거짓말 탐지기, DNA 분석, 루미놀 시약, 삭흔, 뼈, 법보행 등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범죄의 종류 - 실종, 도굴 - 이라던가 수사 방식 - 잠복, 공개 수배 -, 범인의 특징 - 싸이코패스, 피해망상 -, 단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 자백, 간접증거 - 등 많은 범죄 관련 소재가 언급됩니다. 이건 법의학과 법과학 관련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걸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건 쪽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점 첫 번째는 여러 지능범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체 인멸, 현장 조작에 알리바이 트릭까지 사용하는 놀라운 범인들의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기할 점은 범인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범인들의 행태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사형 제도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네요.

특정 주제에 맞는 대표적인 사건을 선정하기 쉬웠을 1권보다는 주제부터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는건 아쉽지만, 상세한 사건 정리가 여러 자료와 도판 등으로 뒷받침되는 좋은 범죄 논픽션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두 타석 연속 장타!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던 범죄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몇몇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아산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1).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현장에 다시 침입했습니다. 양초를 이용한 장치로 시간 조작 방화를 일으키려고요. 범인은 집을 비웠던 시간에 영화 다운로드를 걸어 두어서 집에 있는척 했다는 알리바이 트릭까지 써먹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만화와 다른 법입니다. 범인은 한 달도 더 지난 사건 당일 행적을 너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했던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서 덜미가 잡히고 말거든요. 체포되어서 다행입니다.

<<환경 미화원 살인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2)
추리 소설에서나 봄직했던 정교한 시신 유기가 놀라왔던 사건입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철물점에서 사온 5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100리터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2장을 덧씌웠습니다.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보이도록요. 그리고 환경 미화원이었던 범인은 자기 담당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은 뒤, 다음날 시신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에 던져 넣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전주 시내의 한 소각장으로 이동 후 소각 처리되고 말았다는군요. 무섭습니다.

<<거여동 여고 동창 살해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3)
단순 질투로 친구와 친구 아이 두 명을 살해했던, 비상식적인 잔혹함으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사건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에 목장갑만 꼈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정도의 지능범으로 방 열쇠를 넣은 핸드백을 방범창 안으로 던져 넣는 식으로 일종의 밀실 트릭까지 사용된, 거의 성공했던 완전범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손에 현장에는 없었던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현장 수사관들의 식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종잇조각은 범행 도구로 준비해왔던 페트병으로 만든 빨랫줄 고정판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네요.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을거라고 경찰을 도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집에 범행 기록을 꼼꼼히 적어둔 일기장을 남겨두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시욕' 이라는게 있었던걸까요?
아울러 이런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무기 징역에 그쳤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발 이런 범인은 좀 죽입시다.

<<신혼부부 니코틴 살인 사건>>
범인은 신혼 여행을 떠났던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 화장을 서둘러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의 부검 감정서로 덜미가 잡힌 경우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혈관 내 다량 투여된 니코틴에 따른 급성 중독사인데, 시신의 왼쪽 팔에서 두 곳, 오른쪽 팔에서 한 곳, 총 세 곳에서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인이 입증되었거든요. 처음 주사했을 때 바로 독성이 나타났을터라, 그 다음 나머지 두 곳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타인이 주사를 놨다는 것이고, 사망 장소에는 남편밖에 다른 이는 없었으니 범인은 뻔한 셈입니다.
단지 돈 목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살해한 인면수심의 뻔뻔한 살인범이라는 특징도 잘 살아있는 사건으로, 남편이라는 놈은 이 증거가 드러나자 자살 방조라고 우겼다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네요. 이런 놈도 좀 죽입시다....

뻔뻔함이라면 <<포천 암매장 살인 사건>>범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인 범인이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가공할만한 뻔뻔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 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포천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TV 화면을 제시하자, “함께 갔지만 피해자는 포천이동갈비를 먹으러 갔다"고 바로 말을 바꾼다던가, "함께 어머니 산소에 들렀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상식적 변명을 늘어놓는 식이었다네요. 이런 변명이 통할거라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고,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미아동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남아시아계라는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잠복 중이던 형사가 혼혈로 보이는 어린 형제를 보고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 중 큰 아이가 "아빠다!"라고 외쳐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행동이었어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잡아야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혼혈 아이들의 집만 알아내어도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 아빠 신원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울주 노인 연쇄살인 사건>>
사건 현장에 범인의 DNA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폐쇄회로 TV 영상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백 진술과 이 진술에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가 더해지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됐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자백'이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피고인의 자백이 곧바로 유죄 증거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최근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도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또는 기망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되거나, 혹은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땐 자백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고요.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네요. 과거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강도 살인'처럼 허위 자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경우가 많은 탓이겠지요.

<<이천 무덤 연쇄 도굴 사건>>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행으로 범행 자체는 특기할게 없는데, 피해자가 너무 안타까왔던 경우입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최씨는 부모 무덤이 도굴당한건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믿어서 11년간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친지와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거든요.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버렸는데, 이런건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제주 보육교사 피살 사건>>
미제 사건인줄 알았었는데, 과학 수사를 통해 이전에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던 택시 운전사가 검거되었더군요. 사건 당시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과학 수사를 통해 피해자 사망 시각이 재조정되어 결국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 사체를 이용한 실험 결과로,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는 그늘인 데다 바람이 심했고, 사후 일주일이 넘은 뒤에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어서 경찰은 다시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갔는데, 9년 사이 미세 증거물을 증폭해 보는 기술이 발달한 덕에 다행히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해자 옷에서 범인 옷과 동일한 섬유 조각이, 범인의 차에서 피해자 섬유 조각이 수집되었던 것이지요. 섬유 조각이 범인이나 피해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교차 발견되는게 많아지면 둘이 만났다는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단계까지만 언급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용의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나, 섬유 증거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네요. 그 외의 증거들도 용의자가 범인이다! 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쉽습니다. 언젠가 진범이 잡혀 피해자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2024/04/14

목요일 살인 클럽 - 리처드 오스먼 / 공보경 : 별점 1.5점

목요일 살인 클럽 - 4점
리처드 오스먼 지음, 공보경 옮김/살림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쿠퍼스 체이스 실버타운에는 노인들 몇 명이 미해결 사건에 대해 토론하는 '목요일 살인 클럽'이 있었다. 클럽 멤버들은 실버 타운을 만든 건축업자 토니 커런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였던 토니의 동업자 이안마저도 클럽 멤버들 눈 앞에서 독살당했다. 그가 새 사업을 위해 수녀원 묘지를 파내는걸 클럽 멤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저지하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토니 사건 현장 옆에 클럽 멤버 중 한 명인 론의 아들 제이슨이 토니와 함께 찍혀있었던 사진이 놓여 있었고, 제이슨은 토니가 죽은 날 그의 집을 방문했다는게 드러나 궁지에 몰렸다. 그렇지만 제이슨은 다른 옛 친구와 함께 토니에게 원한이 있는 터키시 지아니가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이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는 묘지 발굴을 반대하다가 이안과 몸싸움을 벌였던 매튜 매키 신부였다. 경찰 조사 결과 신부가 아니라는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 작품. 영국 어딘가의 고급 실버 타운에 거주하는 노인들이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클럽의 핵심 인물이자 리더인 엘리자베스는 여성이다는 등의 모든 설정이 전형적입니다. 실버 타운을 무대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노인들 및 여러 등장인물들의 숨겨졌던 과거가 서서히 밝혀지는 전개도 비교적 밝은 분위기를 전해주고요. 노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코지 미스터리라는 점에서는 "살인 플롯 짜는 노파"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그러나 아무리 가벼운 코지 미스터리라도 분명 추리 소설입니다. 때문에 어느정도의 추리 요소는 갖췄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추리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선 토니, 이안 두 명의 죽음은 작품 내 주어진 정보로는 범인을 알아내는게 불가능합니다. 토니를 죽인 범인은 이안에게 토니대신 고용되었던 보그단인데,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어요. 토니 커런이 과거 죽였던 택시 운전사의 친구였기 때문에 복수를 위해 죽였다는 동기도 작 중에서 전혀 설명되지 않고요. 경찰이 토니를 죽였다고 생각했던 지아니 역시 이미 오래전에 보그단이 깜쪽같이 죽였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속에서 보그단이 직접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알아내는건 불가능합니다.
이안을 살해한 진범이 존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존이 수의사였기에 주사기와 약 사용법을 잘 알고 있다는 정도의 단서로는 부족해요. 수녀 무덤에 묻었던 시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했다는 동기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이안이 벌인 공사로 시체가 발굴되어도 피해자가 누군지 알아낼 수도 없었을겁니다. 설령 알아냈다 치더라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드러나지 않았을테고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했으니까요. 설령 시체가 발굴될까 두려워 이안을 살해했다쳐도, 이안의 뒤를 이은 누군가가 공사를 재개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이안을 살해한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게다가 다른 여러 사람들이 있는 와중에 늙은 존이 이안에게 몰래 독극물을 주사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정체모를 주사를 놓는걸 방관할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요?
또 존이 거의 뇌사상태인 아내 페니가 오래전 살인범 피터 머서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아내를 죽인 뒤 자살을 택한다는 결말도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내 페니가 오래전 살인범 피터 머서를 살해했다는건 지금 시점에 밝혀져도 문제될게 없습니다. 어차피 더 오래 살기도 힘든데 밝혀진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재판정에 세울 수도 없는 몸상태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존의 동기라던가 페니의 과거를 독자가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전무합니다. 이래서야 미스터리 측면에서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버나드가 몰래 빼돌려 숨겼던 아내의 유골 탓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도 그리 좋은 결말은 아니었고요.

경찰이 제이슨의 혐의를 빠르게 포기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제이슨의 주장만으로 그를 풀어주기는 힘들 정도의 정황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니가 죽은 날, 제이슨은 수차례 토니에게 전화를 했고 범행 시간에 토니의 집에 가기까지 했습니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니라면 다른 명확한 증거를 제시했어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했고, 지아니가 범인이라는 그의 주장 역시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옛 친구 바비 태너가 토니 커런 사건 후 지아니가 도주했다고 했지만, 이 역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경찰은 제이슨을 체포하지 않았을까요? 경찰 입장에서는 존재조차 모호한 지아니보다는 제이슨에게 수사력을 집중하는게 당연합니다. 제이슨이 인기있는 유명인이라서 봐주기 수사를 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캐릭터들도 별다른 매력이 없습니다. 오지랖넓은 노인들이 사건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미스 마플' 이래 변한게 없는것 같네요. 무대포에 가까운 기묘한 행동력은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을 떠오르게 만들고요. 한마디로 다 어디서 봤던 설정들입니다. 노인을 중심으로 살인 사건에 일반인들이 뛰어든다는 설정과 전개도 뻔합니다. 앞서 언급드렸던 "살인 플롯 짜는 노파"도 비슷하지요. 
나름의 차이점을 만들기 위해 노인들의 배경 설명에 공을 들였는데 이 역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 스파이 출신으로 보이는 엘리자베스가 대표적입니다. 클럽의 리더로서 멤버들을 잘 이끌기는 하지만, 스파이 경력을 보여줄만한 특별한 활약은 선보이지 못합니다. 뭔가 가지고 있는 연줄로 정보를 긁어모으는 정도에 그치거든요. 다른 멤버들인 간호사 출신 조이스, 유명한 좌익 노동 운동가였던 론, 정신과 의사였던 이브라힘의 경력도 사건 해결과는 무관하고요. 그냥 우리 주변에 계실법한 노인분들같은 느낌만 전해 줄 뿐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현재를 서서히 잃어가는 노인들의 삶을 살짝 보여주는 묘사는 괜찮았지만, 전체적으로 지루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코지 미스터리하고는 안 맞나 봅니다. 후속권이 있던데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0/04/05

무증거 범죄 - 쯔진천 / 최정숙 : 별점 2점

무증거 범죄 - 4점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현장에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가 인쇄된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다른 어떤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네 번째 특별조사팀마저 성과 없이 해산되자, 경찰은 수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한순간의 실수로 불량배를 죽이게 된 청년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증거를 없애줄 테니 범죄를 부인하라며 경찰 대처법을 가르쳐주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수정 인용)

중국 추리 소설찬호께이의 작품 3편 - "13 .67",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 과 원샨의 "역향유괴" 만 읽어보았습니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대체로 평작 이상이었지만 원샨의 작품은 기대 이하였었는데, 이 작품은 어떨까 싶어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트릭이 존재하는 본격 추리물은 아니며, 범죄자와 탐정두뇌 싸움이 핵심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러나 제목의 '무증거 범죄'가 의미하는 완전범죄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前 수사전문 요원이었던 뤄원이 깡패 소태보가 살해된 현장을 조작하는 과정의 디테일, 그리고 이 사건이 범죄논리학자 옌량에 의해 하나씩 단서가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이 볼 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만 위안이 넘는 큰 돈을 하트 모양으로 작게 접어서 사건 현장에 숨겨 놓는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했어요. 이 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몰려들어 현장이 훼손되게 만드려는 의도였는데, 아주 설득력 넘쳤습니다.
이 사건과 항저우 시에서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모를 남기고 벌어진 연쇄 살인극이 맞물리는 전개도 좋습니다. 뤄원이 자신의 아내와 딸이 실종된 현장에 남겨진 지문의 소유자를 찾기 위해, 그 지문의 소유자가 범인인 살인극을 조작하여 일으켰다는 동기였는데 대담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설득력 덕분에,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됩니다. 

옌량이 추리한, 뤄원이 주후이루와 궈위가 저지른 살인 은폐를 도와준 이유도 그럴듯합니다. 뤄윈이 소태보를 애초부터 살해할 목적이었지만, 선수를 빼앗긴 뒤 은폐를 도와주었다는 이유인데,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그게 사실이라는걸 암시하니까요. 좀 작위적이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외에 익숙치 않은 중국식 묘사들도 흥미로왔습니다. 제목의 '무증거 범죄(완전범죄)'를 비롯하여 상식적이다, 이론적이다라는 말을 '유물론자'라고 표현한다던가, 범인이 경찰 수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걸 '역수사 능력' 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두뇌 싸움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옌랑과 경찰이 뤄원을 잡아 넣을 증거를 찾아내는데 결국 실패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옌량의 활약이 없는건 아니지만, 두뇌 싸움의 결과는 일방적입니다. 게다가 고차방정식 운운하며, 증거가 없으니 범인부터 대입해서 시나리오를 짠다는 옌랑의 방법론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특정 인물을 범인으로 만드는 조작극과 별로 차이가 없어서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이는 뤄원이 "모든 이야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내가 범인이라곤 할 순 없어. 자네의 시나리오는 아무한테나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범행 동기를 설명할 수 있지."라고 통렬하게 부정하지요. 옌랑은 마지막에는 감정에 호소해서 어떻게든 자백을 이끌어내는게 전부로, 한 마디로 뤄원한테 완패한 셈입니다. 이래서야 공정한 두뇌 싸움으로 보기는 어렵죠.
또 뤄원이 연쇄 살인극을 벌이는 와중에, 과연 단 한 번도 경찰 수사 물망에 오르지 않을 정도의 완전범죄가 가능했을지?에 대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뤄원이 대단한 전문가라는걸로 퉁치기는 힘들어요. 실제로 공원에서의 범행은 목격자도 있었는데 말이죠. 하긴, 이는 뤄원의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죄가 완전범죄가 된 것에 비하면 약과이기는 합니다. 우발적으로 급작스럽게 벌인 범행인데도 불구하고, 경찰 최고의 전문가가 사력을 다해 찾았지만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할 완전 범죄가 성립된걸 단지 운이라고 치부하는게 가능할까요? 작 중에서 뤄원의 능력이 시종일관 대단한걸로 묘사되는 것과는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해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옌랑이 뤄원을 수상하다고 여긴 계기가 된 뤄원의 차에 대한 감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뤄원답지 않은 좋은 차는, 범행을 저지르고 용의선상에서 쉽게 빠져나가기 위함이라고 추리하지만, 뤄원이 과거 출원했던 특허로 성공한 부자라고 설명되는 만큼, 좋은 집과 좋은 차는 그 재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요. 또 그게 수상했다면 좋은 집에 사는 건 왜 트집을 잡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사소할 뿐, 가장 큰 문제는 책 뒤 해설에서도 실려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과 너무나 비슷한 구조라는 점입니다. 수학, 과학과 관련된 천재들의 두뇌 대결, 순전히 선의에 의해 사건 은폐에 가담한다는건 완전 판박이입니다.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두 청춘 남녀가 결국 파멸한다는 결말까지도 똑같고요. 작가 스스로도 영향을 받았다는걸 인정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무언가 새로운게 있었어야 했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요소는 중국이라는 무대의 특성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리지널 만큼의 수작은 아닙니다. 그나마 캐릭터를 가져오려면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옌량과 뤄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갈릴레오 유가와 역인 옌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범죄자와의 승부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으며, 뤄원은 아무리 아내와 딸 실종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잔챙이 범죄자들을 다섯 명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질 여지가 없으니까요. "용의자 X의 헌신" 속 이시가미처럼 뤄원이 아내와 딸의 실종 이후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독자에게 잘 공감시키지 못하기도 했고요. 이건 작가가 놓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죠. 어설프게 캐릭터를 베끼지 말고, 초반부에 옌량이 똥이 있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벌어지는 사고는 재미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좀 어설픈 인물로 그려가는게 차별화되고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나쁘지 않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 비교하자면 한없이 부족하네요. 중국 추리 소설이 궁금하신게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중국 추리 소설은 찬호께이만 믿고 가야겠습니다.

2025/05/17

Q.E.D Iff 증명종료 28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28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통의 시리즈 28권입니다. 이번에는 "행운", "논점 정리" 두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 편 모두 평균 수준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행운"

요식업 경영자 쿠마노 츠요시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돈과 애인을 쿠마노에게 빼앗긴 다테 슈지였다. 그러나 다테 슈지에게는 시간 안에 범행 현장까지 도착할 수 없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알리바이 깨기 트릭물입니다. 다테 슈지는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에서 범행 현장까지 30분 안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차를 이용하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거나, 똑같이 생긴 피자 배달 오토바이를 곳곳에 배치해두고 오토바이가 있는 장소까지 건물 내부를 뛰어서 이동하더라도 30분 안에 이동은 불가능했다는게 경찰 조사 결과였지요.

여기서 목격자의 '전파 시계' 시간을 조작하여 이동 시간을 확보했다는 토마의 추리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자동으로 시간을 조정하는 '전파 시계'의 특성을 이용하려면 전파가 멈추는 '정파 시간'에 범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쉬운 대낮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까지 깔끔하게 설명되지요. 그 날, 그 시간에 목격자의 전파 시계는 배달을 갔던 슈지만 조작할 수 있었고요.

Q.E.D.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수학적 이론 소개는 없지만, 주로 묘사되는 미즈하라 경부와 가나 사이의 애틋한 관계도 인상 깊었어요.

물론, 어차피 방범 카메라로 이동 경로를 특정하면 알리바이 자체가 의미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방범 카메라로 시간을 특정하면 되니까요. 목격자가 전파 시계의 시간이 갑자기 바뀌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남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본격, 정통파적인 알리바이 깨기 트릭물로는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됩니다. 정파 시간이라는건 처음 알게 된 정보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논점 정리"

가나의 동급생 어머니인 타니시 마키가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해고 위기에 처했다. 마키가 도움을 요청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나는 우연히 사건 해결을 돕게 되었고, 사건 배후에 회사의 경리부장 후지츠보 토시야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후지츠보가 모든 걸 꾸몄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궁지에 몰리는데...

도입부에서 토막 사체를 등장시키는 강렬한 연출이 나오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후지츠보가 공금 횡령 사실을 마키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목 그대로 ‘논점 정리’를 하며 사건을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처음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핵심 논점은 마키가 실제로 횡령했는지가 아니라, '회사가 횡령의 증거를 갖고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증거가 없다면 회사와 강하게 맞설 수 있었지요. 그러나 마키는 토막 사체를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정황 증거에, 횡령 증거를 스스로 찾으려다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이때 토마는 다시 논점을 정리합니다. 마키는 함정에 빠졌다고요. 이 지점에서부터 후지츠보가 횡령의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 나가는 전개는 깔끔합니다.

이렇게 ‘논점 정리’라는 개념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구성과 장난같지만 현실적이었던 토막 살인 연출 트릭이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래와 같이 토마와 가나의 관계가 명확히 진전된 듯한 느낌을 준게 오랜 팬으로서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이 정도면 다음 권 정도에서는 본격적으로 고백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기네요.

하지만 후지츠보가 조카의 취업 청탁을 굳이 연출할 필요는 없었다는 단점은 큽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더라면 마키가 스스로 자멸했을 텐데, 괜히 자신에게도 동기가 있는 듯한 연출을 하며 사람들에게 알릴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연출 방식도 유치해서 금방 들통났는데 왜 이런걸까요? 아울러 추리적인 면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서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02/24

지문 - 콜린 비번 / 유혜경 : 별점 3점

지문 - 6점
콜린 비번 지음, 유혜경 옮김/황금가지

지문이 신원 확인에 사용된다는건 지금은 일반 상식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지문이 신원 확인의 수단이 되었을까요?
이 책은 지문이 현재의 자리를 차지하기 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지문의 역사에 대한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자 과학사 서적입니다. 거기에 더해, 지문이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결정적 사건인 뎁퍼드가에 위치한 채프먼 화방의 강도 살인 사건의 전말 및 재판 과정과 최종 판결까지의 전말이 지문의 역사와 함께 소상하게 펼쳐지는 논픽션 성격도 띄고 있습니다. 즉, 지문의 역사가 뎁퍼드가 사건을 비롯한 다양한 실제 지문 응용 사례와 함께 전개되는 구성이지요.

'지문학'의 역사는 학술적인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지문이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한 이후, 지문의 여러가지 특성에 대한 연구 과정과 실제 지문을 분류하는 방법 등의 디테일과 지문 연구의 발명자(?)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한 이전투구가 아주 흥미로왔던 덕분입니다. 흡사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했어요. 사고방식부터 썩어빠진 거물 쓰레기 골턴이 또다른 쓰레기 허셜과 손잡고, 실제 지문 연구의 권위자로 이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폴즈의 연구를 빼앗은 후 폴즈를 부정하는 양심도 없는 행각이 그것으로 다행히(?) 골턴도 다른 인물들에 의해 영광의 월계관을 빼앗기고 잊혀진다는 결말인데, 씁쓸하면서도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또 폴즈가 지문을 알리기 위해 절박한 노력을 하던 와중에 발표되었던 기사가 마크 트웨인의 "미시시피에서의 삶" 이라는 작품 속 "엄지손가락 지문 채취와 그 결과" 라는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복수를 위해 '수상가' 로 위장하여 살인범을 찾아나선 인물의 이야기라는데 내용이 궁금해지네요.

하지만 아무래도 지문학의 역사보다는 관련된 사건들 쪽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유아 살인 사건 등 초창기 지문을 활용하여 해결한 범죄들 모두 흥미진진하며, 지문이 사용되지 않아 문제가 되었던 범죄들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었어요. 여러 명의 피해자 증언으로 수년간 구속되었었지만 진범이 다른 사람으로 드러났던 아돌프 벡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면식 식별이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데, 책에 실려있는 사진을 보니 범인과 벡은 정말 닮긴 닮았더라고요. 이러니 명확한 개인별 확인 수단이 필요할 수 밖에요.

그 외에도 많은 사건들이 소개되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나 서두와 마지막을 장식할 정도로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서술되는 뎁퍼드가 살인 사건입니다. 몇가지 정황 증거는 있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범인의 지문 밖에 없는 상황, 지문이 아직 널리 인정받지 못한 때에 지문만 가지고 과연 용의자들에게 유죄 선고, 더 나아가 '사형 선고' 를 내릴 수 있는지? 라는 딜레마를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문학의 아버지 폴즈 역시 '지문으로 사형 선고를 할 수 있는지?' 에 대한 개인적 의구심으로 변호인 측에 협력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요.
또 이 과정에서 범인측 변호사와 증인들, 검찰측이 벌이는 치열한 법정 싸움도 아주 볼만합니다. 지문 도입으로 자리를 잃게 된, 전 원래 영국 경시청 신원 확인 전문가로 일했던 복수심 불타는 가슨 박사와 검사측이 벌이는 논쟁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잘 짜여진 법정물로도 손색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체포된 두 형제 모두 교수대로 향했는데, 아마 제가 배심원이었다 하더라도 지문 외 증거들로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지문은 밥 숟가락 한 개 얹은 정도의 재판이긴 했으니까요. 그래도 이후 지문이 증거로 채택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니 제 몫은 충분히 다 한 셈이겠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서로 다른 손가락에서 채취한 두 개의 지문이 동일할 수 없다' 는 것은 아직도 증명되지 않았다'는 말도 인상적이었어요니다. 이를 증명하는 한 방법은 현재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지문끼리 서로 비교하는 것 밖에는 없는데 이는 불가능하니까요.

지문 관련 이야기 외에도, 당대 지문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베르티용'과 베르티용의 측정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해줍니다. 실험을 통해 두 사람이 어느 특정 치수가 똑같은 경우는 4:1의 비율로, 모두 11가지 측정치를 보유하는 베르티용 측정법을 통해 두 사람에게 모두 동일한 치수가 나올 확률은 4의 11제곱 대 1이었다는 기본 이론과 베르티용 측정법이 지니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측정 자체가 번거롭고 어려우며 측정 기준도 상황, 장소, 사람에 따라 일정치 못함)를 비롯, 베르티용도 지문을 등록하는건 찬성했지만 이를 상세 분류하는 것을 반대하여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모나리자 도난 사건' 의 범인 확인이 늦어지게 되어 치명타를 입었다는 이야기 등은 이전에 미쳐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었어요.

이렇게 재미와 지적 호기심을 모두 만족시키는 괜찮은 책입니다. 법의학이나 법과학 등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책만 읽으면 지문이 어떻게 신원 확인에 이용되어, 중요한 증거의 하나로 자리잡았는지를 잘 알 수 있으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9/05

가족의 탄생 - 도진기 : 별점 2.5점

가족의 탄생 - 6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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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해결사로 활동하며 먹고 사는 김진구에게 여자친구 혜미를 통해 의뢰가 들어왔다. 얼마 전 사고로 아내를 잃은 일식 요리사 이교준의 의뢰였다. 그는 아내의 사고에 두 처형이 관련되어 있다며, 갓난 자신의 딸 아름이 100억대인 장인의 유산을 독식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진구는 젊은 새어머니의 유산까지 아름의 것으로 해 줄것을 약조하며, 이교준 명의의 3억짜리 집을 담보로 잡았다.

그러나 두 처형도 동생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며 이교준을 의심한 나머지, 이런 류의 범죄에 해박하다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을 고용하고, 김진구와 고진의 두뇌 게임이 시작되는데...

눈에 뜨일 때 마다 집어들고 읽게 되는 도진기 작가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해결사 김진구와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함께 등장한다는게 특징이고요. 그러나 공동 주연 작품은 아닙니다. 각자의 의뢰인이 적대하는 관계라서,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맞붙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명탐정 코난괴도 키드' 라기 보다는 '소년 탐정 김전일지옥의 광대 타카토 요이치'에 좀 더 가까운 셈이지요.
이 중 주인공은 김진구입니다. 고진은 남고운, 남문영 자매로 부터 받은 '제부의 유산 상속을 막아달라' 라는 의뢰만 해결하고 빠지는 반면, 나머지 사건과 유산 상속 정리는 김진구가 해결해버리고, 작 중 비중도 두 배 가량 될 정도로 높으니까요.

그래도 남유정 사망 사건 해결은 나름 둘이 함께 힘을 합치기는 합니다. 이 사건에서 유산 상속 문제가 비롯된건 물론, 추리적으로 작품의 핵심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처음에는 단순 교통 사고로 생각되었습니다. 이교준이 동승하여 남유정이 운전하던 미니가 김순옥의 모하비와 추돌했고, 조수석에 탔던 이교준은 생명을 건졌지만 남유정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던 탓에 사망했으니까요. 그러나 이 사건은 이교준이 일으킨 살인 사건으로, 진구의 말에 따르면 '3중 방어막'이 쳐진 교묘한 계획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어막은 원래 알려진 바와 같이 살인 혐의를 찾아보기 힘든, 단순 교통사고로 보이도록 꾸민 겁니다. 그러나 이교준이 김순옥과 불륜 관계라는게 밝혀져 첫 번째 방어막은 뚫리게 됩니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우니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두 번째 방어막은 '고의적인 충돌 사고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불륜을 목격한 남유정이 과속하여 추격하다가 모하비에 추돌하여 일어난 불행한 사고라는 주장이에요. 불륜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남유정이 고의적으로 추돌하게 만들었다는건 증명할 수 없어서 단순 사고로 처리될 수 밖에 없게 되지요.
그러나 남유정의 목에 교살 흔적이 남아 있어서 살인이라는게 밝혀진 뒤 마지막 방어막인 '정황의 방어막'이 등장합니다. 이교준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김순옥의 모하비에 타고 있어서 범행을 저지르는게 불가능했다는게 정황입니다. 하지만 진구는 남유정 목의 교살 흔적은 왼손잡이의 흔적인데, 가족 중 왼손잡이는 이교준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CCTV에 찍힌 모하비는 추돌 부위가 이미 부숴져 있었다는 사실을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모하비와의 추돌은 조작된 것이고,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을 목 졸라 죽인 뒤, 자기 무릎에 시체를 앉히고 전봇대에 추돌하여 사고를 위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3중 방어막이라는 말만 그럴듯하지, 그다지 완성도 높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애초에 실제 자동차 추돌 여부를 조사하지 않은 점, 사인을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은 점, 꽤 장기간 불륜 관계였던 김순옥과 이교준의 관계를 밝혀내지 못한 점 등 사고 발생 시 수사에 나섰던 경찰의 무능이 확실한 탓입니다. 진구의 말 대로 조금만 파고들면 지나치게 많은 우연이 결합된 수상한 사건이라는걸 금방 알 수 있었을 테니까요. 최소한 명확한 사인은 검증했어야 합니다.

추리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고진과 진구가 사고 전 CCTV를 입수하여 이를 단서로 이교준의 공작을 증명하는게 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미니가 한 쪽으로 쏠린걸 과학 수사까지 이용하여 검증한 디테일은 좋지만, 이게 이교준의 범행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문제는 큽니다. 진구가 이교준이 범인이라며 쏘아붙이는 것들 - 범인은 남유정을 목졸라 죽이고는 미니에 싣고 달리다가 사고를 냈다, 이 살인자는 왼손잡이인데 가족 중 이교준만 왼손잡이다. 미니는 남유정 남편인 이교준의 불륜녀가 운전하는 모하비와 부딪혀 사고가 난다, 그 모하비는 CCTV를 통해 보니 사고 전에 이미 충돌 부위가 부서져 있었다 등등등 - 은 모두 정황 증거 뿐이에요. 왼손잡이라는게 그렇게 대단한 증거도 아니고요. 제 생각에 이교준이 유죄 판결을 받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추리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유산 상속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법조인 출신 작가라 그런지, 현행법에 기초하여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잘 풀어낸 덕입니다. 고진과 진구의 활약도 대단하고요.

우선 고진이 의뢰에 따라 이교준의 친권을 박탈하여 아름이 몫의 상속분을 빼앗습니다. 이교준의 딸 아름이가 사실은 남유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아니라, 불륜녀 김순옥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라는걸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아름이의 친부임을 주장한 남유정의 불륜남 원경호 소동에서 유전자 감식이 진행되었는데, 이 때 증거를 확보한 거지요.
또 진구와의 조사 결과 공유를 통해, 이교준이 아내 남유정 사망 후 남유정 - 원경호의 딸인 진짜 아름이를 자신과 김순옥 사이의 딸로 바꿔치고, 아름이를 입양 기관에 보냈다는 걸 알아냅니다. 아내가 죽은 뒤, 가사 도우미를 해고해서 아름이가 바뀐걸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할아버지는 장님이고, 다른 친척들은 아름이에게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이는 진구가 이교준의 집을 방문하는 제일 첫 장면에서, 부부의 사진은 있지만 아이 사진이 없는 복선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고진의 말에 따르면 친부가 아니더라도, 아름이는 부부 사이의 딸이므로 이교준이 친권자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자기 친딸과 바꿔치기하고 입양 기관에 보낸 사람에게는 친권 자격이 있을리가 없으니 친권 상실 청구를 하면 이교준은 아름이 몫을 못 받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유정 몫의 대습 상속은 유지되는데, 이 역시도 진구가 남유정을 살해한건 이교준이라는걸 밝혀내어 상속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앞선 순위나 동순위 상속인을 살해하면 상속권을 잃는 법 때문입니다. 결국 이교준은 빈털터리 신세가 됩니다!

여기까지는 생각대로의 전개인데, 그 뒤 다른 상속인들 모두의 상속권이 날아가버리는 전개는 예상치 못했네요. 새어머니 유재연이 낙태를 한게 발단입니다. 그녀는 불륜을 저질러 아이를 갖지만 이런저런 부담감으로 낙태를 선택합니다. 이 낙태에 그녀를 미워하던 두 의붓딸 남고운, 남문영 자매가 진구의 권유로 모처럼 동행했고요. 그러나 유재연이 가진 아이가 남현호 할아버지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법률상으로는 엄연히 부부간의 아이이고 적법한 상속인입니다. 즉, 상속인을 살해한건 마찬가지라 그녀도 상속권을 잃고, 낙태에 동행했던 두 딸도 낙태를 도운 공범으로 상속 자격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즉, 남유정의 딸 아름이가 유일한 상속인이 되는 거지요.
이렇게 낙태가 상속을 막는다는건 정말이지 처음 접해보았는데, 완전 대박이네요. 법률에 대해 잘 아는 작가라 쓸 수 있던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의뢰대로 상속을 막은 진구가 의뢰인 이교준에게 당신이 살인범이라는걸 밝혀낸건 의뢰와 관계 없었으니 보수를 챙기겠다며 쿨하게 마무리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어요. 가족이 모두 파멸하는 결말인데, 워낙 많은 분량에 걸쳐 비호감을 끌어온터라 속 시원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또 자신만의 가족을 꿈꾸었던 이교준, 그리고 가족이지만 각자 자기 생각만 했던 남씨 일가족이 무너진다는건 "가족의 탄생"이라는 제목과 묘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러나 이 유산 상속 과정가 전부 잘 짜여져 있는건 아닙니다. 콩가루 집안이 모두 몰락한다는건 지나치게 전형적인데다가, 남고운, 남문영 자매는 악인도 아니기에 결말이 썩 개운하지 않거든요. 막내 동생을 제부가 죽였다고 의심하여 제부에게 유산이 가는걸 막으려고 노력하는데, 의심이 사실로 밝혀졌으니 그녀들은 잘못한게 없습니다. 오히려 새어머니 유재연의 낙태를 도와준건 순전한 선의였기에, 유산 상속을 막으려는 악당 김진구에게 농락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울러 김진구가 작중에서 벌인 활약과 행동은 모두 이교준의 범행을 밝혀내기 위함입니다. 이교준의 의뢰를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의뢰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건 예상치 못했던 급작스러운 유재연의 임신과 낙태, 그리고 진구의 권유를 받은 남씨 자매가 낙태 수술에 동행했기 때문으로, 진구의 활약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우연에 불과합니다. 이런걸 보면 그다지 정교하게 잘 짜인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들어요. 부부가 모두 불륜을 저질러 같은 시기에 혼외자를 낳는다는 설정 역시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고, 우연과 작위적인 설정이 많이 결합된 전개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낙태를 통해 기존 알고 있던 유산 상속의 상식을 깨 버린 아이디어 만큼은 높게 평가할 만 한데, 이 설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라면 진짜 걸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덧붙이자면, 서두와 에필로그에 "정신자살"의 '이탁오 박사'를 등장시켜 다음 작품과 연결시키는 구성을 갖추고 있는데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2026/03/27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 찰리 돈리 / 안은주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는 변호사인 아버지 프랭크 무어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장기 복역수의 가석방 절차를 인계받아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도적'이라는 별명으로 40년 전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 토머스 미첼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미첼이 죽였다는 피해자의 시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찰리 돈리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작품은 현재 시점의 로리와 과거 시점의 앤절라 미첼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데, 앤절라 미첼 시점에서 ‘도적(The Thief)’이라 불린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과정이 더 볼만 합니다. 앤절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흐름이, 앤절라의 자폐로 인한 강박적인 심리묘사와 함께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덕분입니다. 앤절라가 헛다리 - 남편 회사의 새 고용인이 범인이다, 친구 남편이 범인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 를 짚어 나가다가 범인이 남편 토머스라는걸 깨닫는 장면까지의 빌드업도 좋습니다.

로리의 아버지 프랭크와 토머스 미첼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토머스 미첼이 60년 형을 선고받은 결정적 이유는 아내 앤절라 미첼의 실종 때문이었습니다. 도적이 저지른 연쇄 살인은 시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하는데 실패했거든요. 선고 후 토머스는 아내를 찾아 달라며 프랭크를 개인적으로 고용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않은 앤절라의 생존이 확인되면 자신은 풀려날 수 있으니까요.
프랭크도 처음에는 의뢰인인 토머스를 믿고 앤절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랭크는 토머스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 그리고 앤절라는 토머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앤절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함과 동시에 토머스를 속여 가며 가석방을 늦춰 왔던겁니다.
이는 현재 시점의 화자인 로리가 바로 토머스와 앤절라의 딸이었다는 그럴싸한 반전으로 이어지며,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만들고요.

하지만 절대로!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연쇄 살인마와 맞서 싸우는, 다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흔해빠진 양산형 범죄 스릴러에 불과한 탓입니다.
특히 주요 화자인 로리와 앤절라의 자폐 성향이나 강박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 묘사는 과할 뿐더러, 최근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캐릭터 유형을 그대로 반복하여 식상합니다. 친절하고 다정해 보였던 남편이 사실은 연쇄 살인마였다는 설정 역시 뻔하고요.

수사 과정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토머스가 증거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거의 십 년 동안 여성들을 수십 명이나 살해했는데 경찰과 검찰이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설정, 그리고 토머스를 체포하는 근거가 되었던 실종 여성의 신분증과 목걸이는 분명한 물증인데 이걸 단순한 정황 증거처럼 취급했던 재판 과정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토머스의 후반부 행동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는 40년 동안 복역한 뒤 가석방되자마자 곧바로 앤절라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캐서린과 그레타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무리한 행동을 해야 할 이유가 작품 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토머스가 시한부라든가 하는 설정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어요.
범행 과정 역시 허술합니다. 그레타를 살해하면서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는 등 명확한 증거를 남기는데, 이런 방식은 40년 전 이야기라면 모를까 2020년대에서는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CCTV도 있을테고요.
마지막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진상을 눈치챈 로리가 토머스의 집을 혼자 찾아가는 행동부터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토머스가 언제나처럼 희생자를 매단 교수대를 만들어 변태적인 놀이를 즐기다가, 숨어 있던 로리의 기습을 받고 죽는 결말은 허무함의 극치였고요.

불필요한 묘사도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 주인공들의 심리적 문제를 강조하는 묘사는 과할 정도로 반복되고, 캐스트너 인형 복원이나 플로이즈 다크로드 맥주 같은 이상한 취미와 집착도 이야기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카밀 버드 관련 설정은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고, 로리의 연인인 레인의 존재 역시 작품 전개에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앤절라가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범죄 전문가라는 로리가 이를 지나치게 늦게 눈치챈다는 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범죄 스릴러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지탱할 만큼의 독특함은 없어요.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6/04/24

4의 재판 - 도진기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판사가 문제다. 인간의 한계다.

살인에 걸래?가 형사 재판의 물음이라면, 살인에 걸래, 교통사고에 걸래?가 민사 재판의 물음입니다.

선재는 약혼자 지훈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범인 양길의 유죄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황 증거 외에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길은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을 이유로 19억원에 이르는 보험금 수령에까지 성공했고, 선재는 절망에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로 유명한, 검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신작 장편입니다. 그러나 시리즈 작품은 아니고, 정통 추리 소설도 아닙니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과 판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파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유명 사건 -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여수 금오도 차량 추락 사망 사건 - 의 판례를 바탕으로 한, 독자의 분노를 자극하는 양길의 완전범죄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양길은 누가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험금까지 타내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비슷한 사건들을 접해는 왔었지만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검사 출신 작가답게 판사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하는 시선도 분명합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 주는 점도 좋았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소재 활용도 돋보입니다. 선재가 양길 측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복사 현장에서 적발되었지만 복사지가 스스로 구입한 자신의 물건이고, 변호사 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침입이 성립하기 어려워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신선했어요.
양길이 지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재판정에서 살인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명예 훼손이 성립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이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양길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양길이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된 뒤, 유죄판결을 받는 반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소설 자체가 아주 잘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개가 심심한 탓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선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고요. 형사재판 과정에서 선재는 철저하게 방관자에 머뭅니다. 피해자 측 유족인 이상 법정 공방에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실제 재판은 검사와 양길 측 변호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 후에는 문병일의 변호사 사무소에 위장 취업해 사건 자료를 복사해 빼돌리는 활약을 보여 주지만, 그것 역시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길의 재판 과정도 분량에 비해 밋밋합니다. 법정극에서 기대해 봄직한 강한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공방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양길의 무죄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전환점이 없고, 판사의 판단이 전부인 흐름이 이어져 답답합니다. 

등장인물 묘사도 아쉽습니다. 선재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은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맥거핀에 불과해요. 심리 묘사 역시 진부하고요. 게다가 장인규나 서찬휴는 작가 대신 법률 이론과 재판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기 위한 스피커에 불과합니다.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둘의 이야기는 비슷한게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고요.

결말도 신선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선재가 불법적으로 총을 손에 넣어 직접 복수를 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건 불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양길의 체포도 묘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결국 양길이 필리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결말도 한 줄 설명에 그치며 양길 시점의 묘사가 전무해서 아이디어에 비하면 잘 쓴 결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그리고 검사 출신으로 판사의 신성불가침(?)성에 태클을 걸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된 사건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판결도 있지만, 시체가 없거나 직접 증거가 없어도 유죄 선고가 내려진 사건도 있으니까요. 부산 시신없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법과 재판의 허점을 드러내는 사회파적인 성격, 형사와 민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는 점, 그리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세부 설정은 분명 장점이지만 소설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대폭 줄이고, 등장하는 사건은 작중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고 뒤에 별도로  소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의 "4의 재판"은 3심제를 벗어나더라도 네 번째 재판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닌가 싶네요.


2024/01/27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 권도희 : 별점 2점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위한 뷔페 - 4점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지음, 권도희 옮김/엘릭시르

"녹색은 위험", "제제벨의 죽음"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아나 브랜드의 단편집. 5부 구성으로 모두 1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통 본격물, 범죄물,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등으로 수록작 장르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기대했던 정통 본격물의 비중은 무척 적은 탓입니다. 트릭도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추리도 억지스러워서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주기 어려운 작품들이 많아요. '기묘한 맛' 장르 느낌으로 마지막 한 줄, 한 문단으로 반전의 매력을 전해주려고 노력한 티는 역력하지만 이 역시 모두 성공한건 아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5부 구성도 1부 코크릴 칵테일을 코크릴 경감 시리즈로만 모아 놓았다는 것 외에는 어떤 의도로 분류하여 구성되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인 게임"은 앙트레로 묶기 어려운, 이 단편집 최고의 메인 요리라 생각되거든요. 오히려 앙트레 선택에 5부 블랙 커피에 수록된 심리물들을 포함시키고, 범죄물을 메인 요리로 묶어 구성하는게 더 일목요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범죄물도 심리 묘사가 중심이거나 조금 가벼운 이야기와 묵직한 본격물을 구분하여 배치하고요. 제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아페리티프(식전주) : 코크릴 칵테일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피를 나눈 형제"
* 기존 구성에서 코크릴 경감의 등장을 알리는 작품 한 편, 그리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선정.

2부 앙트레 선택
"이 집에 축복을"
"수군거림"
"발코니에서"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
* 심리 묘사 중심의 작품들로 구성.

3부 르 푸아송 (생선 요리)
"말벌집"
"너무나 괜찮은 사람"
"신의 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 말벌집은 '굴'이 사용되어서 생선 요리로 분류했고 다른 작품들은 심리 중심의 범죄물들.

4부 리플렛 프로스펠 (메인 요리)
"살인 게임"
"희생양"
"여기 잠들다"
"회전 목마"
정통 본격 추리 범죄물들.

5부 데세르 (디저트)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

6부 블랙 커피
"잔 속에 든 독"
도서 추리물로 '커피'가 핵심 소재라는 점에서 블랙 커피로 분류.


마지막으로 수록작들의 간략한 리뷰는 아래에 요약하였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1부 코크릴 칵테일.
코크릴 경감이 활약하는, 늙은 형사의 회고담인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 뺑소니 살인과 정부 살인 사건을 저지른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인 "피를 나눈 형제", 성질 고약한 부자 노인이 후처를 맞은 결혼식 날 독살당한다는 "말벌집", 남편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독살한 아내 시점의 도서 추리 소설 "잔 속에 든 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범인의 조작을 코크릴 경감이 간파한다는 작품들로 "사건이 막을 내린 뒤에"에서는 유명 극단의 톱 스타 주연 배우 제임스 드래건의 아내가 살해당했는데, 극단 배우들이 모두 나서 경찰 앞에서 연극을 펼칩니다. 이를 통해 제임스 드래건이 경찰에 연행되지만, 알고보니 범인이 제임스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서 드래건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피를 나눈 형제"에서는 쌍둥이 형제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이고, 한 명은 알리바이가 확실히 있었다면 누구를 체포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둘 다 자기가 알리바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밝혀내는건 쉽지 않아 보였거든요. 쌍둥이 형제가 서로 상대방의 옷에 증거를 남겼다는 반전도 기발했고, 결국 진흙탕 속으로 서로를 밀어넣어 파멸하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말벌집"은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1966년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이 후원한 영국추리작가 협회 회원 대상 단편소설 경연대회 1등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말이죠. 이유는 범인 엘레자베스를 체포할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훈제 연어를 준비하는게 어려웠다'는 말이 그렇게 큰 증거가 된다는건 믿기 힘듭니다. 엘리자베스가 사건을 연출했다는 것도 정황 증거에 불과하며 굴 안에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 먹였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고요.
"잔 속에 든 독"은 범인 스텔라가 범인으로 몰리자, 임기 응변으로 남편 등을 범인으로 지목한다는 내용으로 도서 추리 소설과 심리 스릴러를 잘 결합한 좋은 작품입니다. 완벽하게 처리한 줄 알았던 독이 든 커피잔이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마지막 한 마디도 좋았고요. 1부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괜찮았어요.

2부 앙트레 선택.
유명한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살인 게임", 일종의 시간차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희생양", 거짓 증언으로 선량한 히피가 파멸에 이른다는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의 세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살인 게임"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도 소개되었던 단편이지요. 이전에 다른 단편집을 통해 읽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범인이 경찰로 변장한 뒤 밀실이었던 현장에 숨어있다가, 밀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 중 한 명으로 위장했다는 트릭이 기발합니다. 마지막에 이야기를 듣던 노인의 한 마디로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도 서늘했고요. 다만 범죄자의 혈통은 유전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는건 현재 시점에서 보기에는 낡은 사고방식이라 아쉽네요. 그래도 2부에서는 최고작입니다.
"희생양"은 13년 전, 유명 마술사 미스테리오소가 저격당해 충직한 하인 톰이 대신 죽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저격용 총의 방아쇠에 묶인 끈에 사과 봉투를 위에서 떨어트린 장치 트릭인 것 처럼 풀어나가지만, 일종의 시간차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트릭이 너무 별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범인이었던 경찰이 사과 봉투를 터트려 총소리를 위장한 뒤 진짜 저격은 나중에 벌였다는데, 사과 봉투를 터트려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총 소리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두 번째 총소리는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마지막에 소년이 미스테리오소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이게 뭔가 싶더군요. 마지막에 반전 요소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강박같은게 있었던걸까요? 2부, 아니 수록작 전체를 통틀어서 최악의 작품이었습니다.
"더이상 5월 축제는 없다......"는 웨일스를 무대로,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탈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 했던 거짓말에서 시작된 거짓말의 연쇄가 진범의 알리바이를 굳건하게 만들며 선량한 히피 무리의 리더 크리스토가 누명을 쓰고 마는 과정이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묘사됩니다. 셜리 잭슨이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방불케할 정도에요. 정통 추리물은 아니지만 볼만한 범죄 심리 스릴러였습니다.

3부 입가심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한 편이 소개됩니다. 블란쳇 부인의 진주 목걸이를 훔치려는 컴퍼트 양과 스네이스 씨의 작전, 그리고 이들을 농락하는 진짜 '스코틀랜드에서 온 조카딸' 호지 양이 얽힌 재미난 범죄극이 펼쳐집니다. 진짜 도둑은 하녀 글래디스였다는 마지막 반전도 일품이고요. 그야말로 '입가심'에 적절한 유쾌하면서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쾌작입니다.

4부 프티 푸르
'프티 푸르'는 한 입 디저트라고 하는데, 수록작들 대부분이 완전범죄 계획 살인물입니다. 한 입에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들이네요.
하여튼, "여기 잠들다"는 아내를 사고사처럼 위장하여 죽이려는 제럴드의 치밀한 계획을 그립니다. 아내가 수영을 좋아해서 익사시킨다는 계획은 나쁘지 않았어요. 실제로도 거의 성공했고요. 하지만 알리바이를 위해 고용했던 타이피스트 부처 부인이 제럴드를 죽인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부처 부인의 외모라던가 성격 묘사를 덧붙여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회전 목마"는 자신을 협박하던 빈들 씨를 살해한 하틀리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범죄물로도 좋은 수준이지만, 빈들 씨와 하틀리 부인의 꼬마 아이들이 범죄에 대해 모든걸 알고 서로의 속내를 감춘채 진상을 이야기하는 묘사도 서늘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는 악당 호러호러 족장을 살해한 이야기인데, 계획에 따른 완전범죄는 아니었습니다. 범인이 풀려났던건 목격자였던 존스 부인이 유리창 반사로 일으켰던 착각 탓이었지요.
"발코니에서"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웃 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으킨 제닝스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의 심리 스릴러 범죄물입니다. 히치콕의 "이창"을 뒤집어 놓은 설정과 제닝스 부인을 바라보는 이웃 시점의 묘사를 곳곳에 삽입하다가, 이웃들이 실존하지 않았다는게 마지막 반전으로 드러나는 결말이 독특했습니다.

5부 블랙 커피
수록작 네 편 중 세 편은 여자의 심리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에 축복을"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를 예수라고 믿는 여자의 심리를, "너무나 괜찮은 사람"은 그야말로 딱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너무나 괜찮았던 남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심리를, "수군거림"은 자신의 실수로 거짓말을 지어내서 사촌과 아빠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여자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 "신의 힘"은 완전 범죄물입니다. 범인 에반스 경관의 범행 계획은 그냥저냥이지만, 딸과 손녀를 죽게만든 범인 젤링크스를 옭아맨 설정은 일품이었습니다. 에반스 경관의 거짓 증언으로 젤링크스는 반박하지 못하고 무죄를 받아들인 뒤 협박받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는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였습니다.

2023/12/16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1.5점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및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물 모두가 감염될 수 있는, 치사율이 50%가 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여 인류의 상당수가 사망했다. 치료제를 만들었지만 인간에게만 유효해서 사람들은 채식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영양 섭취 문제가 불거졌다. 일본 유전자 공학의 1인자 후지야마 히로미는 식용 클론 인간을 대량 생산하여 고기를 보급한다는 계획을 내 놓고 '플라나리아 센터'라는 식육 가공 시설을 만들었다. 클론의 개인 제작은 엄격하게 금지하며, 클론 고기는 먹는 본인의 클론이어야 하고, 클론은 성장 촉진제로 빠르게 성장시키기에 개와 비슷한 지성밖에 갖추지 못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세워 비난을 최소화했다. 사업은 성공했고, 일본 경제도 성장했지만 후생 노동부 장관에 취임했던 후지야마는 매춘 스캔들이 터져 사임했다. 이는 클론 인간 제작을 반대했던 정적 노다 조타로 살인 사건 조사 때 드러났다.
그리고 몇 년 후, 후지야마에게 배달하기 위해 가공했던 클론 배달물에 '머리'가 함께 배달되는 사고가 터졌다. 유력한 용의자는 배달물을 포장했던 시바타 가즈시였다. 동료 유시마 미키오가 범인은 후지야마 본인이라는 그럴듯한 추리를 내 놓았지만 증거를 잡지는 못해서 둘 다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날 밤, 잃어버린 시계를 찾으려고 다시 플라나리아 센터로 항했던 시바타는 괴한에게 습격당했고, 다음날 센터가 테러 때문에 전소되는 대형 사고가 벌어지는데....

"명탐정의 제물"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시바타 도모유키의 데뷰작. 제 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이었습니다.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미치오 슈스케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추천으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하네요.

식인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던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작품에서는 식인은 단순히 미식이나 생존 목적은 아닙니다. 일종의 수단으로 식용 '클론'을 만들 수 밖에 없게 되었던 이유, 식용 클론을 만드는 플라나리아 센터에 대한 상세한 설정 등은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추리적으로도 풍성합니다. 후지야마가 잘린 머리를 배달받은 사건에서 시작해서 시바타가 밤에 센터에서 만났던 괴한 사건, 플라나리아 센터 폭파 테러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며, "명탐정의 제물"처럼 여러 등장인물들이 서로 자신의 추리를 선보이다가 의외의 진상으로 이어지는 덕분입니다. 이 과정에서 식인, 그리고 클론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식인물과 충분히 차별화됩니다.
전개도 괜찮아요. 단서와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해줄 뿐 아니라 시바타 가즈시와 가와우치 미노리로 화자를 바꾸어가며 전개하는데, 결국 시바타 가즈시와 가와우치 이노리가 사실은 두 명이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을 활용한 반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추리와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설정이 허황되고 비현실적인데다가, 사건들 대부분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우연과 운이 많이 작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완성도가 낮습니다.
핵심 트릭인 '클론으로 사람 바꿔치기'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후지야마는 노다 조타로를 살해할 때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자기 클론을 활용했습니다. 클론은 성장 촉진제를 사용하여 두뇌 개발이 더디다고 했는데, 어떻게 후지야마인 척 할 수 있었을까요?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게다가 알리바이를 만들거라면 대중들 앞의 노출된 장소에서 뭔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매춘부를 만나는 것 보다는 말이죠.
같은 이유로 시바타에 의해 가축으로 키워진, 실제 나이로는 몇 살 되지 않을 차보의 남다른 지성, 그리고 차보가 감금 장소를 마음대로 빠져나가며 이런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 그리고 클론이 후지야마를 살해한 뒤 그 자리를 꿰찼고, 차보가 후지야마의 클론과 손을 잡고 클론 해방과 시바타에 대한 복수로 일련의 사건을 일으켰다는 진상도 허황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보다는 성형 수술이나 쌍둥이 쪽이 더 말이 되는 트릭이었을거에요.
또 공들여 만든 클론 관련 설정이 이렇게 작가 편의에 따라 변경되는 탓에, 이는 트릭을 위해 만들어진 억지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상식적으로도 사람을 위한 치료제를 만들었다면, 동물 대상으로 못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고액을 들여 인간 클론을 고기로 만드는 공장을 만드는 것 보다도 동물용 치료제를 만드는게 싸게 먹힐테고요. 설령 동물용 치료제가 만들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동물성 단백질을 대체할 식물성 단백질은 많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무슨 큰 일이 나는건 아닙니다. 콩 등에서 뽑아낸 성분으로 고기를 만드는 공장도 최근 많이 늘어나고 있고요.

추리적으로도 뭔가 수수께끼가 많고 복잡해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별건 없습니다. 노다 조타로 사건은 클론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 후지야마 클론 머리 오배송 사고와 플라나리아 센터에 잡입한 괴한 사건, 테러 사건은 모두 시바타를 함정에 빠트리고 센터를 폭파시키려고 후지야마 클론이 실행범으로 일으켰다는게 전부거든요. 즉, 어떻게보면 시바타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증거만 없을 뿐이었지요. 
이 와중에 시바타가 '후지야마는 약시다! '라는게 증거라고 믿었던건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약시인 것과, 범행과 무슨 관계가 있지요? 무엇보다도 약시가 범인이라는걸 드러내는 괴한의 센터 침입 사건의 목격자는 시바타 본인입니다. 이걸 경찰이 어떻게 믿고 수사를 하겠습니까..... 설령 그 범행을 약시인 사람만 저지를 수 있었다 한 들, 그건 단순히 정황 증거에 불과하고요.
또 마지막 테러 사건까지의 모든 사건이 차보가 계획한 음모의 한 셋트인데, 여러모로 헛점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플라나리아 센터에 잠입한 괴한을 시바타가 제압했다면? 시바타가 센터 테러 사건 와중에 공장 내부에 남지 않았다면? 유시마 미키오가 죽지 않았다면? 뭐 하나라도 변수가 생겼다면 성립할 수 없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권해드릴 수준의 작품은 전혀 아닙니다.

2020/10/02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살인 현장은 구름 위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단편집입니다. 신일본 항공 승무원인 하야세 에이코를 탐정으로 내세운 시리즈이지요. 에이코는 통칭 A코로 불리우는, 도쿄 대학을 중퇴하고 입사하여 훈련생 수석까지 차지한 재원으로, 마른 몸매의 고전적 외모의 미녀이기까지 하지요. 그녀가 겨우 합격하고 훈련생에서도 꼴찌인 동기 후지 마미코(통칭 B코)와 콤비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구태여 승무원이 주인공일 필요는 딱히 없어요. 승무원 설정을 살린 이야기가 한 편 정도? 때문에 버블 시대에 승무원 관련 컨텐츠 유행에 편승한 설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B코 역시 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추리에 도움을 주지도 않고, 민폐만 끼칠 뿐이니까요. 사실 등장할 때 마다 짜증만 날 정도였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이야기는 많이 없어요. 무리한 설정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이런 단점들 때문에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K호텔 살인의 밤" 

가고시마로의 비행 후 언제나처럼 바 '와이키키'에 모여 한 잔 하던 승무원들 모임에 그날 승객이었던 혼마가 동석했는데, 마침 그 때 혼마 아내의 전화가 걸려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그녀의 호텔 방으로 샌드위치를 배달하는건 호텔에 있던 B코가 목격했다. 4시간 정도 술을 마시고 새벽 1시 경 호텔로 돌아간 그들은, 혼마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 때 A코의 눈에 들어온건, 혼마 씨 부인 시체가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도가 구태여 트윈룸에 침입할리 없으며(두 명이 있을 수 있으니), 오토록으로 잠긴 문을 돌파할 방법도 없습니다. 여기에 누구나 알리바이 공작임을 알아챌 수 있는 술자리 설정을 더하면 범인이 혼마 씨라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이렇게 범인이 뻔하기에, 트릭이 중요합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트릭은 단순한 변장 트릭이라 시시합니다. 배달된 샌드위치를 받았던 건 변장한 조카였거든요. 둘은 자신들의 유산을 혼마 씨 부인이 멋대로 주식에 투자해서 큰 손해를 보자, 의기투합하여 살인을 공모했던 겁니다. 간단하고 현실적이기는 한데, 재미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나마 사체 부검 결과 위장 속에 있었던, 먹은지 30분 정도 지난 샌드위치는 배달 전에 따로 구입한걸 혼마 씨가 부인에게 먼저 먹였다는 조금 고심한 트릭이 곁들여져 있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새롭거나 기발한 발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추리를 경찰이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조카가 피해자로 변장했다는걸 밝혀내기는 불가능하니까요. 혼마 씨가 따로 샌드위치를 샀다는걸 결정적 증거처럼 취급하고 있는데, 이건 단순한 정황증거일 뿐입니다. 혼마 씨 조카의 지문이 피해자 방에서 나왔다면 모를까, 증거가 샌드위치가 전부라면 무죄 판결을 받는게 그리 어려워보이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분실물에 유의하세요" 

베이비 투어에 참가했던 25쌍의 가족이 탑승했던 비행이 끝난 뒤, B코는 실내를 정리하다가 남겨진 아기를 발견했다. 서둘러 베이비 투어 일행을 찾았지만 아이는 25명이 모두 있었다. 아이는 누구이며, 왜 혼자 남겨져 있었을까? 결국 사건은 방송을 타게 되는데, 다행히 교토에 사는 아기 엄마가 나타난다. 아기는 엄마와 함께 산책 중 실종되었었다...

A코는 베이비 투어 일행이 교토에서 그 공원에 들렸던 걸 알아낸 뒤, 참석했던 부부 중 누군가가 자기들 아기와 똑같은 옷을 입은 남의 아기를 착각해서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에요.

그래도 비행기에서 내린 베이비 투어 참석자의 아기가 25명이었던 이유에 대한 추리는 꽤 괜찮습니다. 남편이 먼저 자기 아기를 데리고 도쿄로 먼저 출발한 겁니다. 부인은 남의 아기를 데리고 원래의 투어용 비행기에 탑승했고요. 착륙 후 남의 아기는 자리에 남겨두고, 공기 인형 따위에 아이 옷을 입혀 위장한 뒤 비행기에서 내렸고, 곧바로 남편을 만나 자신들의 진짜 아기를 안고 있던 겁니다.

그러나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실수로 데려온 남의 아이와 함께 비행기까지 탄 뒤 비행기에서 유기한다는건 너무 억지스럽지요. 투어였다면 가이드와 상의해서 처리하는게 상식적이잖아요? 비행기에서 유기하는 순간 애가 울기라도 했으면 빠져나갈 방법도 없고요. 마찬가지로 남의 아기를 태연히 버린 부모를 용서할 수 없던 A코와 B코가 그 부부의 아기를 인형과 바꿔치기 한 뒤 옥상에서 떨어트리는 쇼를 펼쳐 응징한다는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중범죄인 탓입니다. 경찰에 신고하는게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상황은 흥미롭지만, 억지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티가 너무 많이 났습니다.

"중매석의 신데렐라"

B코는 비행 중 친해진 나카야마라는 승객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운전사 딸린 벤츠로 B코를 에스코트한 뒤, B코에게 청혼했다. B코는 재산을 노리는 나카야마 친척들의 욕심을 좌절시켜야 한다며 A코에게 완벽한 신부 연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길, 나카야마의 벤츠로 이동하던 A코는 운전사 다무라를 어디선가 보았다고 느끼는데...

간단한 일상계 소품. 나카야마와 B코의 결혼은 나카야마의 부탁으로 진행했던 연극이었습니다. 나카야마가 진짜 연인과 함께 하기 위해 연극을 꾸민거지요. 나카야마의 연인이 남자인 운전수 다무라였기에 친척들이 반대할게 뻔했기 때문이라는게 그 이유인데, 2020년 관점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특이한 설정이나 반전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마지막에, 다무라를 성전환 시키겠다는 이야기는 이게 뭔가 싶더군요. 그럴거라면 성전환 후에 당당하게 결혼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억지 연극을 벌일 이유는 없죠.

전체적으로 억지스럽고 작위적일 뿐 아니라, 결말이 황당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나카야마가 연극 상대로 B코를 점찍은 이유가 다무라와 B코가 닮았다는 것 정도만 재미있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길동무 미스터리" 

후쿠오카 전통 과자 가게 도미야의 주인 도미타 게이조가 호리이 사키코라는 여성과 함께 도쿄의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남자는 욕조에서 손을 그어 출혈사하였고, 여자는 칼에 가슴이 찔린 채였다. 처음에는 치정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지만, 그들이 마셨던 커피 잔 두 잔 중 한 잔은 지문이 지워져 있던 상태였고, A코와 B코를 통해 둘은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며 같은 호텔에 투숙한 것 역시 우연이라는게 드러났다.
도미야가 경영 위기였고, 도미타가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서 아내의 범행도 의심했지만 알리바이는 철벽이었다. 또 자살 시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데 자살로 보이는 애매한 상황을 만들리도 없어서 그녀는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는데...

진상은 도미타가 보험금을 목적으로 자살하려 했다는 겁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걸로 위장하려고 열쇠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손을 그었지요. 그러나 투숙객 사키코가 열쇠를 주운 뒤, 친절하게도 방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도미타는 자살 시도가 밝혀지면 보험금을 받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죽이고 자살했고요. 찻잔을 위장할 수는 있었지만, 열쇠를 다시 버리러 갈 여유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나친 우연이 겹친 작위적인 사건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도미타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경찰이 진상을 밝혀내는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살인사건으로 처리될지는 확실치 않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문제고요. 자살로도 처리될 수 있는 애매한 상황이니까요.

무엇보다도 도미타의 아내가 진상을 알고 나서도 보험금을 꼭 받겠다고 단언하는 마무리는, 개죽음당한 사키코에 대한 배려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주 중요한 분실물" 

A코는 비행 중 화장실 앞에서 유서를 주웠다. 27명의 승객 중 화장실을 간 승객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 일흔살 쯤 되어 보이는 은발의 노부인, 여자 중학생, 머리가 벗어진 중년 남자, 인텔리 남자 회사원, 염치없는 중년 여성, 그 중 누구의 유서인가?

유서에 서명이 없는게 결정적 단서가 되는게 독특했던 작품. 소녀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성이 바뀌게 되어서, 어떤 성을 써야 할 지 몰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허깨비 승객" 

신일본 항공 객실과 승무원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남자는 A코에게 자신이 어제 신일본 항공 승객을 죽인 뒤 도쿄만에 유기했다고 털어놓으며, 돈을 내 놓지 않으면 비행기 승객을 계속 죽일거라고 협박했다. 경찰은 수사에 나서지만, 찾은 건 피가 묻은 핸드백 뿐으로 시체는 발견되지 았다. 핸드백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핸드백 속 탑승권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이 나타났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런 여자 승객은 없었다는게 드러나는데...

앞서 협박 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핸드백 주인이 왜 나타나지 않는지가 핵심 수수께끼인 일종의 일상계 작품입니다.

이 모든건 그녀를 목격했다는 승객 나리타의 계획이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만난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꾸민 범행이지요. 피 묻은 핸드백을 버려두고 협박 전화를 건 뒤, 핸드백 주인을 보았다고 하면 얼굴을 확인시키기 위해 다른 승객들을 만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이를 핸드백 속 립스틱으로 알아챈 A코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립스틱은 신상으로 출시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많이 닳아있던걸 보고 조작을 간파했던 것이지요. 일부러 쓰던 것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의미니까요. 장난이 아니라 협박이 사실이라면, 피해자의 신원이 드러나야 범인에게 유리한데 그렇지 않다는건 아주 공들인 장난일 거라는 추리 역시 합리적이고요.

무엇보다도 여성 승객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승무원 중 한명인 A코들의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그날따라 승객으로 탑승했던겁니다! 그녀가 핸드백 주인이 아니라는건 전 승무원들이 아는 만큼 수사 초기에 밝혀졌으니, 범인 나리타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줄 이유가 없었지요.

그러나 일반인이 선뜻 실행하기에는 너무 큰 범죄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장난이라도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있어 보이지 않아요. 또 B코가 번호를 잘못 눌러 발신번호 추적이 실패했다는 설정은 황당했습니다. 이건 경고 정도로 넘어가기는 불가능한 실수잖아요?

그래도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예상치 못했던 동기가 잘 결합되어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누가 A코를 노리는가" 

결혼과 함께 승무원을 그만 둔 전 선배 기타지마 가오리가 승객으로 탑승한 비행을 마친 A코는 가오리로부터 그녀 옆에 앉았던 이상한 승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뒤 휴일에 쇼핑을 나선 A코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걸 깨닫고 불안해서 귀가하던 중, 차량의 습격을 받았다. 다음날, 출근한 A코에게 형사가 찾아왔다. 어떤 남자가 그녀가 기타지마 가오리와 함께 했던 비행편에 탑승했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A코는 경찰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그가 대학 동창이자 전 연인 쓰카하라라는걸 알고 놀랐다. 그는 모리오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주요 참고인이었다. A코는 쓰카하라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게 되는데...

진상은, 쓰카하라는 범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장 동료 다구치가 범인이었지요. 다구치가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비행기로 이동 중, 우연히 기타지마 가오리 옆 자리에 앉았던게 발단입니다. A코가 기타지마 가오리에게 "오랫만이에요"라며 아는 척 했는데, 승무원끼리는 개인적인 대화를 삼가하는 관습 때문에 대 놓고 아는척 하지 못한 기타지마 가오리가 눈인사만 전한게 화근이었어요. 다구치가 인사말을 자기에게 한 걸로 오해했거든요. 그래서 A코가 자신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녀를 죽이려고 한게 자동차 습격 사건의 진상입니다. 3개월 전, A코의 옛 연인이기도 했던 쓰카하라가 A코와 우연히 재회했을 때, 다구치는 쓰카하라와 함께 있었던 탓도 큽니다. 그래서 더 쉽게 오해했던 것이지요.

우연에 의지하고 있고, 조금은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승무원의 업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쓰여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2.5점 입니다.

2023/09/03

0시를 향하여 - 애거서 크리스티 / 이선주 : 별점 2.5점

0시를 향하여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생기고 부유한 테니스 스타 네빌 스트레인지는 오드리와 이혼 후 화려한 미인 케이와 재혼했다. 그리고 네빌은 부부의 여름 휴가를 오드리와 함께 보낼 계획을 세우고, 휴양지 솔트크리크에 위치한 트레실리안 부인의 저택 걸즈 포인트에 향했다. 그 곳에 네빌 부부와 오드리 외에도 케이의 전 남자 친구 테드 라티머, 오드리를 흠모하는 어린 시절 친구 하워드 등 관련된 다른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휴가를 보내며 네빌이 오드리와 다시 가까와졌고, 케이와 이혼할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던 와중에 트레실리안 부인이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네빌이었다. 이혼 이야기로 트레실리안 부인과 언쟁을 벌였고, 흉기로 보이는 골프채에 네빌의 지문이 있었던데다가 그의 양복에서 혈흔이 발견된데다가 부인에게서 거액의 유산까지 받게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빌의 알리바이는 곧바로 증명되었고,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건 오드리였다. 노부인에게 유산을 받을 네빌 부부의 아내는 현처 케이가 아니라 전처 오드리로 명시되어 있다는 동기 외에도 흉기 등의 증거들이 차례로 발견된 탓이었다.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 또는 살인 사건에 바탕을 둔 소설을 읽을 때, 이야기가 살인 그 자체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모두 틀린 겁니다. 살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합니다. 살인은 수많은 다른 정황들이, 주어진 시각에 주어진 지점에서 한데 합쳐지면서 그 정점에 달해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살인은 그 자체로는 이야기의 종결입니다. 그것은 '0시' 이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중기 작품. '밀리의 서재'에 업로드되어있는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완전 공략>>에 따르면 중기 걸작으로 별점은 4점이네요. 아~주 오래 전, 무려 12년 전에 동서에서 출간되었던 버젼으로 읽어보기는 했었는데 내용을 완전히 잊은 덕분에 처음 읽는 것 처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몇 가지 특징들로 다른 여사님의 작품들과 구별됩니다. 첫 번째는 푸아로나 미스 마플 시리즈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끔 경찰 쪽 주요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 배틀 총경이 홀로 활약하는 작품이지요.

두 번째로는 트릭을 파헤치는 본격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동기 분석이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특별한 트릭이 사용되지도 않고요. 그 탓에 추리적으로는 다소 재미가 떨어지기는 합니다. 배틀 총경도 직감이 뛰어나고, 심리를 분석하는데 능한 유능한 수사관이기는 하지만, 푸아로와 같이 범인의 의표를 간파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거든요. 
예를 들어, 배틀 총경은 네빌이 범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증거 모두가 억지로 만들어져 있다는걸 비교적 초반에 알아챕니다. 네빌이 범행을 사전에 계획해서 하녀에게 수면제를 먹였다면 - 노부인이 종을 울려도 알아채지 못하게 - 그가 노부인과 언쟁을 벌였을 이유가 없고, 골프채라는 증거도 남겨놓지 않은 채 강도 사건으로 위장했을거라는 분석을 통해서요. 사건에 대해 범인의 심리를 냉철하게 분석한 결과인 것이지요. 하지만 '진범이 그래서 누구인지?'에 대한 추리는 없습니다. 단지 우직한 수사를 펼칠 뿐이에요.

그래도 덕분에 배틀 총경이 발로 뛰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제대로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해 주는 것 역시 고전 본격 추리물로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범인 네빌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 - 오드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들려고 했던 것 - 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노부인 살해는 그게 목적이 아니라, 이 동기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0시를 향해"라는 제목과 극중 대사를 잘 드러내는 동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고보니 케이를 만나 오드리와 이혼했던게 아니라, 오드리가 자신을 버리고 먼저 도망을 쳤기 때문이었는데, 여러 복선을 잘 쌓아올려서 설득력도 있고,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도 잘 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만큼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우연, 억지가 심한 탓입니다. 완전한 제 3자인 맥휘터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오드리를 구해주고 배틀 총경과 협력하여 네빌을 옭아매는 추리쇼를 펼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연치고는 너무 심하잖아요?
맥휘터가 사건에 뛰어드는 도화선이 된, 냄새나는 양복을 손에 넣은 경위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네빌이 수영해서 걸즈 포인트로 건너가기 전 벗어놓은 양복을 썩은 고기 위에 올려 놓아서 지독한 냄새가 배었고, 그걸 숨기려고 세탁소에 마침 호텔에서 봤던 사람 이름으로 맡겼는데, 그게 맥휘터였다는 겁니다. 왜 네빌은 그냥 양복을 버리지 않았던 걸까요?
이후 맥휘터가 걸즈 포인트를 방문해서 중요 단서 - 젖은 로프 - 를 찾아낸다는 것도 와 닿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한데, 자기와 관계없는 사건에 발벗고 나설 충분한 이유로 보이지는 않은 탓입니다. 다른 증거를 조작하고 없앨 시간이 충분했다는 네빌이 로프를 없애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맥휘터와 배틀 총경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선보이는 추리쇼의 핵심은 맥휘터가 '누군가 로프를 타고 저택을 올라가는 걸 봤다' 뿐입니다. 그게 네빌이라는 증거, 아니 저택 내부 인물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하인 누군가가 로프를 몰래 내려 보내서 외부 인물이 침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네빌이 고작 이 정도 거짓 증언에 흔들려서 죄를 고백해버리니 맥이 풀리는 느낌이에요. 시시할 뿐더러 사악한 천재 악당으로의 면모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셈입니다. 

불필요한 등장인물과 사건도 너무 많습니다. 네빌 스트레인지와 오드리, 케이 외의 인물은 나올 필요가 없었어요. 애초에 노부인을 살해할 동기가 없어서, 독자의 흥미를 잡아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케이의 남자친구 테드 라티머를 수상쩍게 그리기는 하지만, 그 역시 동기가 너무 희박했습니다. 케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빌을 함정에 빠트린다? 글쎄요.... 테드 라티머는 네빌을 직접 죽이면 모를까, 그런 계획을 세울 인물로는 그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트레브스 씨 살해도 내용과 별 관련이 없어요. 비교적 비중있어 보이지만, 진범이 밝혀지는건 이 사건과는 무관했으니까요. "누구나 알 수 있는 신체적 특징이 있다"는 말로 범인이 누구인지 끄집어내는건 불가능했습니다. 다들 특징들이 있기도 한 데다가, 진범 네빌의 새끼 손가락 길이가 다르다는건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특징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나쁜 정보에 가까왔어요. 
마지막에 맥휘터 앞에 오드리가 나타나 결혼하지고 하는건 황당했습니다. 딱 두 번 본 남자에게, 자기를 구해줬다는 이유로 바로 결혼을 한다는건 이상하잖아요. 그냥 멀리 떠난 맥휘터 앞에 나타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 정도가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여사님은 다 좋은데, 왜 이렇게 커플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들로 보면, 단편으로 충분했을 이야기를 길게 늘려쓴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7/14

Q.E.D iff 증명종료 2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Q.E.D Iff 증명종료 24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일상계, 다른 한 편에는 강력 범죄가 등장한다는 것도 언제나와 같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추리적으로 비약이 심했고, 설명과 설득력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Q.E.D의 또다른 특징인 정보 전달 측면으로는, '내시 균형'은 잘 설명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점수를 주는 부분 등 설명이 완벽하지는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권이 워낙 좋아 기대가 컸는데 아쉽습니다. 요새 몇몇 추리 만화 신예들이 눈에 뜨이는데, 이대로 괜찮을까요? 모쪼록 다음 권에서는 폼을 좀 회복해 주기를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시 균형과 구기대회"
사키사카 고교에서 반 대항 구기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운동부 연습과 겹쳐 혼란이 일어났다. 그 뒤 운동부 비품을 누군가 망가트리고, 구기대회 실행위원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수수께끼의 가면을 쓴 괴인은 마지막 순간에 가나 등의 앞에서 허공으로 사라져버리고 마는데....

제목에서처럼 '내시 균형'을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운동부와 학교(구기 대회)측 대립을 내시 균형으로 풀어내는건 재미있었습니다. 요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 학교는 구기 대회를 실행하고, 운동부는 연습장을 넘겨주는 상황에서 내시 균형이 출현한다.
  • 학교는 수고와 트러블이 늘고 운동부는 연습장을 쓰지 못해 양쪽 모두에게 손해이다.
이와는 별개로, 토마의 농구 시합 출전에 대한 내시 균형의 이득 행렬 설명을 통해, 사람의 감정은 계산할 수 없다는걸 드러내는 묘사도 좋았습니다.
가면을 쓴 괴인이 사라지게 한 간단한 트릭도 괜찮았어요. 만화적이기는 한데, 한 번 정도는 잘 써먹을 수 있었다 싶거든요. 현장의 자전거 바퀴 자국같은 증거도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의 추리는 비약이 심합니다. 양쪽 모두 손해인데 왜 구기 대회를 실행했는지에 대해서 갑자기 야구부 감독이 술에 취해 이야기했을거라는건 근거가 부족합니다. 연습장 사용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진 장면에서 토마는 함께 있지도 않았고요. 감독이 이때다 싶어 안 쓰는 비품을 부수고 예산을 타낸건 분명한 범죄인데, 가볍게 넘어간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번역 문제인지 운동부와 학교 측 이득 행렬 부분이 조금 어렵게 설명되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점수 배정이 토마 마음대로라 공정하지 못한데, 이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7개의 사실"
A건설은 지체되고 있는 프로젝트 성사를 위해 컨설턴트 마루모리 유나를 고용했다. 그녀는 거물 의원에게 5천만엔을 몰래 준다는 계획을 내 놓았다. 그러나 비자금이 신문지로 바꿔치기된 후, A건설 사원 미야지는 살해당했다. 또 다른 사원 쥬몬지도 공격받아 결박된 상태였다.
계획의 핵심 인물 미노 부장과 장서 거래로 엮인 토마와 가나는 사장의 부탁으로 진상 조사에 나섰다.

토마가 사건의 핵심인 7개의 사실을 나열한 뒤, 이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범인이라며 선보이는 추리쇼는 깔끔했습니다.

하지만 전개 과정의 설득력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처음에 유나가 쥬몬지를 만나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인 이유부터 석연치 않습니다. 계획이 탄로나면 누군가 감옥에 가야 하는데, 좋은 대학을 나온 쥬몬지가 적합했다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유나의 신분을 알고 쥬몬지가 먼저 접근했다는 것도 방법이나 과정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고요. 어리숙해보였던 쥬몬지 캐릭터가 갑자기 돈을 훔치고 동료를 죽이는 흉악범으로 돌변한 이유도 석연치 않습니다.
쥬몬지가 미야지를 살해한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쥬몬지가 돈을 훔친걸 알아서 협박했기 때문에 죽였다? 어차피 비자금이니 돈을 주고 공범으로 만드는게 이상한 살인극을 벌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사건 당시, 미노 부장의 차가 딱 맞게 도착해서, 그 앞에 뛰어들었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유나는 창고로 오라는 문자를 받았지만 수상하게 여겨 오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장이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만약 부장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토마의 추리가 맞다고 한들, 증거가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미야지가 죽은걸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미리 알고 소리쳤다는건 정황 증거에 불과합니다. 불려나간 창고에서 미야지가 먼저 공격받은걸 보았다고 주장했다면, 범행을 입증하는건 불가능했을 거에요.

마지막으로 수학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대신 특이하게도 존 스타인벡의 작품인 "생쥐와 인간"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건과도 별 관계가 없고요. 쥬몬지 캐릭터를 본다면 "생쥐와 인간"이 아니라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 쪽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09/09/11

절벽 - 현재훈 : 별점 3.5점

거의 백만년만의 추리소설 포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새 너무 독서가 뜸했네요. 개인적으로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보니 책을 지긋이 읽는 것 자체가 좀 무리더군요.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이번에는 단편집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이 책은 저도 잘 몰랐던 한국 작가 현재훈님의 단편집입니다. 우연찮게 검색을 통해 알게된 작가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분들을 알게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척박한 국내 추리 문단에서 작품을 발표해 왔다는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쨌건 책 소개를 하자면, 이 책에는 "절벽", "곰팡이", "낙화", "검은 반점", "기만자", "부녀", "모래성", "흑무", "복제인간", "잠꼬대", "목소리", "족적" 이라는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몇몇 작품은 20여페이지 내외의 꽁트 분량이지만 양적으로는 풍성합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일본 사회파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독재시대인 80년대 당시의 분위기를 작품과 캐릭터, 설정에 드러내면서 이야기와 연관시키는 본격적인 사회파 작품은 아닙니다("검은 반점"에서 노동운동이 약간 표현되는 정도입니다). 분위기만 따라갈 뿐이지요. 그래도 황금만능주의를 주요 테마로 하여, 범행의 동기와 수사의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정통 사회파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낙화"나 "검은 반점"의 트릭은 작품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며, "부녀"나 "모래성"에서의 경찰 수사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한국 추리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을 심리묘사 중심으로 끌고나가는 문장력도 빼어납니다. 순수문학가 출신다운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네요. 한국적인 특색을 살린 몇몇 묘사들도 굉장히 반가웠고요. 그야말로 숨겨졌던 한국 추리문학의 재발견에 가까운 작품이랄까요.

그러나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큽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A"가 저지른 사건에는 "B"과 관련되어 있고 "A"와 "B"가 티격태격하다가 전혀 엉뚱한 "C"에 의해 사건이 밝혀진다.'는, 반전도 아닌 깜짝쇼에 의존한다던가, 결국 범인이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상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요.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들과 설정 등에서 지나칠 정도로 유사성을 보이는 점도 거슬렸던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표제작인 "절벽"의 예를 들 수 있겠죠. 이 작품은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권에 수록된 "수사권외의 조건"의 설정을 많이 따라했거든요. 사실 백영호라는 인물이 복수를 위해 "8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자신을 감추는 과정과 범행에 대한 디테일(상상이지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잠꼬대"라는 작품에서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과 주요 트릭을 언급하고 있으며, "곰팡이"는 "제로의 촛점"과 캐릭터 면에서 유사한 등 많은 부분이 겹칩니다.

그리고 작품마다 여러 고전과 명대사, 명언등이 언급되고 철학적 주제를 논하기까지 하는데 영 별로였습니다.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묘사를 들어내면 작품이 더 깔끔해졌을텐데 아쉽네요. "추리소설"이 그다지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70~80년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주 색다른 작품들이었고 좋은 독서였습니다. 비록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추리문학을 논할때 빼놓으면 안되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작품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의미도 크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85년도에 출간된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구하실 수 있다면 한번 찾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절벽

이승준은 과거 가난했지만 사장의 딸 홍정아와 결혼하여 출세했다. 그러나 과거의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하여 불륜을 저지르고, 과거 부하 백영호의 아내와도 불륜관계였다가 그 아내를 사망케하고 도주한 과거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백영호는 때를 기다린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출세하고 싶었던 가난뱅이 청년과 황금만능주의는 "아메리카의 비극" 등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테마죠.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출세를 위해 과거 교제했거나 임신한 여인을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출세하고 난 뒤에 불륜이 시작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지나치게 통속적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공범자가 있다는 트릭과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사회파 추리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백영호"라는 인물의 설정을 앞서 말했듯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따왔다는 점입니다.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곰팡이"

부유한 저명인사 허진영은 그녀의 과거가 양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학수라는 인물에게 협박을 당하는데.... 

6.25 동란때의 숨겨야 하는 과거와 현재가 밀결합되고 있는 점, 그리고 과거에서 파생된 범죄가 범죄를 낳는 점 등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과 사건 전개, 그리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촛점"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협박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어 같이 살해당한 여인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탐정역의 박상호라는 인물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단점이 아쉽습니다.

"낙화"

화가인 내가 작품 활동을 위해 머무는 산장에 친구 박희주 부부가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박군은 아내 문영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 처제 난영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문영이 산장 베란다 밑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다. 방은 밀실상태였고 문영의 손에는 박희주의 양복단추가 쥐어져 있던 상태였다. 

밀실 + 심리 트릭이 돋보이는 잘 짜여진 정통 추리물입니다. 지나칠정도로 치정극으로 치우쳐져서 통속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인물 설정과 상황 묘사들로 추리적인 매력이 많이 희석된게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동기와 트릭, 범행방법 모두 납득할만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결말부분에서 너무 "끝"을 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튀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작품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닙니다.

"검은 반점" 

신혼여행 중 신부 한미숙이 바닷가에서 실종된 후, 위도라는 섬에서 청산가리를 음독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가 입고있던 실내의가 바닷물에 오염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바닷물로 흘러간 상태는 아니었지만, 구역내의 어떠한 배도 위도로 여자를 실어다 준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시체가 어떻게 그 섬에 있을 수 있었을까? 라는 순간 이동 트릭을 테마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꿔치기 트릭도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바탕이 된 듯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범인이 시체를 은닉하거나 자연스럽게 유기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만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과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범인의 자백으로 작품을 마무리 지은 것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드네요.

"기만자"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과연 아내 희숙을 죽인것은 또는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경선을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C군은 어떻게 된 것인지가 뒤엉켜서 흘러가는 복잡한 작품이기는 한데 썩 재미는 없더군요. 참신한 시도는 눈여겨 볼 만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부녀" 

진아물산 사장 김인호의 큰딸이 밀실에서 청산가리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형사 김익수는 치밀한 수사 끝에 여러 정황증거를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되는데... 

과거의 사건에 의한 범죄라는 테마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이죠. 이 작품은 과거의 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다는 줄거리와 더불어 현재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치밀한 수사가 디테일하게 그려진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입니다.

작중에 경찰 스스로의 입으로 밝히듯 결정적 증거가 없다!라는 추리소설로서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결말도 범인의 자백으로 끝나는 등 "추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개는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수작입니다. 디테일한 수사와 여러 단서를 통해 유추해내는 추리가 무척이나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모래성"

H부동산의 회장 신병호가 자신의 저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수사관 한정수는 제한된 단서와 증언을 토대로 서서히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데... 

여러 용의자, 복잡하게 꼬인 단서들과 서로 다른 증언들이 교차되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사 추리물입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범행을 하기 전 똥을 누면 운이 좋다"와 같은 속설까지 작품에 끌어들일 정도로 세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속 불가능 범죄가 아닌 현실의 실제 있는 강도사건을 보는 듯한 자세한 상황 및 배경 묘사가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이나 침투경로, 새벽에 들은 소리, 왜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는지 등의 다양한 단서들을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던져주는 등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신병호의 과거와 현재, 강남 복부인들과의 관계라던가 실제 사건에서의 몇몇 미심쩍은 단서 등 벌려놓은 소재를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맺은 마무리 부분이 너무나 아쉽네요. 보다 긴 중편 이상 길이의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로 전개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추리문학의 고전으로 길이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말이 매끄럽지 못해서 평작에 머무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봄직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흑무"

문학교수 김용석은 학문에서 좌절하고 부인 이지영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여 술로 고독을 삼키던 중,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한 여인에게 끌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복수극이긴 한데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소품입니다. 주인공의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여인, 그에게 원한이 있는 범인 등 한번 수사를 한다고 치면 걸려들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범죄로 가장하기에는 너무 미흡하지 않나 싶더군요. 작가의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정도로 토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문학적인 이론과 평가가 난무하는 것은 내용에 혼란만 더하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복제인간 

2015년 서울 교외의 아파트촌에서 주미리여사가 살해당했다. 사건과 더불어 복제인간 유아 성추행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근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흉기가 총이라는 것과 복제인간 아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SF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게 특이합니다. 사실상 복제인간 아이라는 것도 "쌍둥이"라는 설정을 위해 가져온 것이니 만큼 별다른 것이 없어서 왜 근미래를 무대로 묘사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이야기 자체는 평이하고 예상대로 전개되기에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소품 수준의 평작입니다.

"잠꼬대" 

최건호는 아내 은영의 불륜을 의심하여 여러가지로 그녀를 시험해본다. 그러던 중 은영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숨지고, 사건은 자살로 판명되는 듯 하지만.... 

한마디로 "의처증"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집요하고 수법이 잔인한 편이라 좀 놀랍더군요. 시대를 앞서간 듯한 강박증에 대한 심리묘사도 대단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의처증 이외의 사건 전개는 너무 막 나가기에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건이 주요 전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끝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의처증 증세의 진상이 폭로되는, 즉 최건호는 의처증으로 의심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앞부분에서는 결백한 듯 했던 은영이 실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식의 전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목소리" 

박찬식은 사업과 연애의 라이벌이었던 정진호를 제거하고 그의 아내 미경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미경이 살해되고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자 박찬식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도청과 가명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피력되는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도청" 방법 이외의 추리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엔 무리가 있네요. 경찰의 수사로 인해 끝나는 결말 역시 많이 허무한 편입니다.

"족적" 

조숙경이 살해된다. 제1용의자는 불륜관계였던 화가 김기오. 그러나 김기오는 스스로 누명에 빠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 연상되는 이색단편입니다.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스스로의 진술을 사기친다는 설정이 동일하거든요. 하지만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으며 별로 공평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아서 굉장히 무리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음에도 기소하지 않는 황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평균 이하인 졸작입니다.

2020/12/26

Q.E.D Iff 증명종료 12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12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이번 권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괴 교섭을 다룬 "좋은 사람"과 복잡한 트릭이 사용된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재생의 시간" 입니다. "좋은 사람"은 평균 이하였지만, "재생의 시간"은 Q.E.D가 다른 추리 만화와 다른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편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사람"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아르젠트 (알) 로셀리니가 시리아 무장 단체에게 유괴되었다. 교섭인 시나 샌드는 토마의 옛 동창이어서 토마와 가나는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그녀와 이탈리아 정부, 그리고 알의 백부 마이클까지 모두 3개의 창구가 존재하는 상황으로 교섭은 난항을 겪는데....

유괴 교섭에 대한 이야기. 그런데 단순 교섭보다는 복잡합니다. 세 개의 창구가 교섭에 나선 탓입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와 마이클에게 범인 X의 요구액이 너무 높으니 일부분을 부담해달라는 부탁을 해 보라는 토마의 계획은 기발합니다. 만약 다른 두 창구가 범인과 교섭하고 있는게 아니었다면 동의할테고(인질 석방이 우선이니), 그들도 교섭 중이었다면 거절할거라는 이유입니다.
이탈리아 정부와 마이클의 거절로 범인이 세 개 창구 모두와 교섭하여 몸값을 받아낼 속셈이라는걸 알아낸 뒤, 모두의 몸값 전달 날짜가 다르다는걸 통해 각각 다른 사람들과 교섭하고 있다고 추리하게 됩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개 창구가 교섭하는건 가짜인거지요. 

이러한 교섭 단체간 의견 조율과 교섭 이야기는 꽤 그럴싸 합니다. 또 중동 유괴범들이 어떻게 사업(?)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투자자도 있고, 이자도 지급하는 등 여러모로 명백한 사업이더군요. 그래서 빠른 교섭이 필요하고요. 투자금 회수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손해가 커지기 때문에 몸값이 점점 올라갈 수 밖에 없거든요.
콘테이너를 이용하여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삶에 대한 묘사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난민 소년이 유괴범 일원이 되는 과정도 설득력이 있고요. 즉 유괴 교섭, 유괴 사업, 유괴범에 대한 드라마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그런데 알을 돌려받는 클라이막스는 영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까지 토마와 가나가 나서서 위험에 휘말릴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요. 또 알과 가나가 절벽 아래에서 탈출하기 위해 숨겨둔 장치를 이용한 일종의 패러글라이딩을 이용한다는건 과정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이 역시 현실성이 없습니다.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어서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중요한 조사를 가나 한 명으로 돌려막기 하는 내용도 비현실적입니다. 가나 혼자 이탈리아에서 마이클을 만나 협상하고, 마이클 비서를 자칭하여 은행으로부터 몸값 전달 날짜를 알아낸다는 식인데, 일본이었다면 모를까 외국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진행한건 지나쳤습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가나도 토마 못지 않은, 어학과 연기의 천재인거지요. 이 정도면 "엘프 사냥꾼"의 코미야마 아이리급이 아닐런지?

이야기도 짜임새가 부족합니다. 유괴 교섭인에 대한 이야기, 유괴된 인질의 탈출극 (?),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삶, 좋은 사람 알에 대한 이야기가 마구 뒤섞여 있거든요. 예전 "마스터 키튼" 속 에피소드처럼 '교섭' 하나에 집중하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재생의 시간" 

잡지 기자 크리스는 시의회의원 모카이에게 찾아가 17년전 스미야 코우사쿠 사망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며 협박하여 300만엔을 뜯어 내었다. 스미야 코우사쿠 사망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사방이 벽으로 둘러쌓여 출입금지된 장소에서 목을 메고 죽은걸로 보이는 백골 사체가 발견된 사건이었다. 유류품으로 사체는 스미야 코우사쿠로 판명되었는데, 그는 이미 14년 전 실종된 상태였었다(현 시점에서는 17년 전).
경찰은 14년 전 스미야가 이 장소에서 목을 메고 자살했다고 결론내렸었다. 하지만 스미야는 함께 일하던 쇼우스케와 자주 다퉜으며, 쇼우스케가 큰 상처를 입고 기숙사로 돌아온 17년 전 어느날 돌아오지 않았었고, 쇼우스케도 곧바로 입원했던 병원에서 사라졌다.

이후 쇼우스케가 있는 마을로 찾아온 크리스는 시체로 발견되었고, 유력한 용의자는 쇼우스케의 아들 세이지였다. 아르바이트 중 피해자와 다퉜고, 아르바이트하던 술집 근처에서 피해자가 살해되었으며, 시체를 옮긴 보트는 그의 아버지 가게에서 분실된 것이라는 등의 불리한 정황 증거 때문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범인이 술집에서 술을 먹는다는걸 알 수는 없었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피해자가 술집에 오는걸 알지 못했다면, 보트를 미리 준비해서 유기 장소로 옮기는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살해 현장 근처에는 보트를 숨길 곳도 없었다...

17년 전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사건이 하나로 만나는 작품으로 두 개의 사건은 모두 수수께끼를 품고 있습니다. 17년 전 사건에서 쇼우스케는 범인일 수 없었습니다. 쇼우스케와 스미야가 다투는게 목격된 장소에서 사체 발견 현장까지는 왕복 1시간 이상 걸리는데, 쇼우스케가 다친채로 기숙사로 돌아온건 고작 30분 뒤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누가 봐도 쇼우스케가 범인이니, 무언가 트릭이 사용된게 분명합니다. 현재의 사건에서는 술을 어디서 먹을지 모르는데 보트를 어떻게 미리 준비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요.

토마는 두 사건은 모두 밤에 술 마시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습격당했다는 공통점에 착안하여, 술 마시러 가는 장소 모두에 미리 시체를 숨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추리합니다. 스미야는 역 앞 라면집, 산기슭 정식집, 이자카야의 세 개 가게만 다녔기 때문에 준비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거지요.
산 기슭 정식집 근처에서 도난당했던 포크레인이 발견된게 증거입니다. 범인은 포크레인을 휘둘러 사체를 멀리 던져 버리고 알리바이를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이는 17년전 사건에 사용된 트릭과 같아요. 사체가 밀실에서 발견된건, 담벼락 넘어 공중에서 던져졌기 때문이었죠. 꽤 기발하고, 나름 현실적인 멋진 트릭이었어요.

범인이 사건을 저지른 동기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사체로 발견된 스미야가 원래 쇼우스케였던 겁니다. 스미야가 쇼우스케를 죽이고 신분을 바꾼거지요. 모카이가 이를 도왔고요. 쇼우스케와 모카이는 고교시절 야구부 배터리로 절친이었고, 모카이는 쇼우스케가 야구부 매니저였던 교우카와 맺어지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야구를 그만두고 방탕한 삶을 보내던 쇼유스케가 음주운전으로 교우카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도망간 탓에 원한을 품었다가, 스미야가 저지른 사건을 알고 그를 도와준 겁니다.

이후 바꿔치기한 스미야가 교우카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사랑 이야기도 나무랄데 없어요. 처음 봤을 때 부터 사랑했다는 부부의 말은 참 슬프네요. "마틴 기어의 귀향"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바꿔치기와 트릭을 눈치채고 크리스는 모카이를 협박했고, 스미야(현 쇼우스케)가 그를 죽인겁니다.
크리스가 17년전 사건은 살인 사건이 분명하다며 남긴, '기름게와 무당게의 다른 점'이 핵심이라는 말도 바꿔치기를 의미합니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건 이름 뿐이라는 뜻이지요. 이를 여러가지 단서복선으로 드러내는 전개도 일품입니다.

그런데 추리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현재의 크리스 살인 사건의 경우, 피해자와 이자카야에 동행했던 아오야마가 공범에 전화를 걸어 보트를 준비하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요? 단독 범행이라고만 생각하는 이유를 통 모르겠어요.
17년 전 사건도 마찬가지에요. 30분 안에 사체를 어딘가 숨기고 돌아온 뒤, 퇴원 후 숨기러 가도 되니까요. 17년, 아니 14년 만에 백골로 발견되었다면 그 정도 차이를 눈치채는건 불가능했을텐데 말이지요. 아니면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된 후, 현장을 뒤져 시체를 암매장하는 것도 방법이었고요. 살인사체 유기가 동시에 벌어졌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쇼우스케가 스미야라는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별다른 증거가 없는 말 뿐만인 추리라는 약점도 큽니다. 같은 이유로 크리스를 살해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고요. 설령 쇼우스케가 스미야라는게 밝혀진다 한 들,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숨겼다는 증거는 없으니까요. 한 명 더 살해해서 위험을 늘리기보다는, 정면으로 반박하는게 더욱 타당했습니다. 

아울러 토마와 가나가 무리하게 사건에 뛰어들어 추리를 도와주는 이유도 석연치 않습니다. 용의자 세이지와 교제하는 마리나와 가나가 친구라는게 이유인데, 그렇다면 세이지가 혐의를 벗은 시점에서 더 도와줄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토마가 입만 다물었어도 미제 사건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데, 토마가 웃는 얼굴로 추리쇼를 펼치며 사건을 해결해서 세이지 가족을 파괴해버리고 맙니다. 이래서야 정의의 집행자가 아니라 사랑을 방해하는 무자비한 악마, 냉정한 추리하는 기계일 뿐이지요. 한 마디로 토마의 비인간성이 부각된 에피소드입니다. 하긴, 이게 Q.E.D와 토마의 매력이긴 하지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입니다. 추리에서의 설득력이 조금만 갖추어졌더라면 걸작이 될 수 있던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좀 긴 호흡의 소설로 발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2015/11/23

야경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야경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6편의 단편이 수록된 요네자와 호노부스탠드얼론 단편집.

요네자와 호노부는 널리 알려진 "빙과"같은 일상계 단편의 강자인데,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일상계라고 보기 어려운 묵직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대체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고요.

그래도 일상계스러운 분위기가 살짝 묻어나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추리적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석류"라는 용서하기 어려운 쓰레기 망작이 하나 섞여 있기는 하지만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무난하기에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이네요. "만원"이 워낙 잘 빠진 작품이라 멱살잡고 평점을 올려놓은 감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요네자와 호노부 팬 분들께 추천드릴 만합니다. 이런저런 상을 탄 이유는 확실히 있는 듯싶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야경"

신입 경찰 가와토 히로시의 순직 사고의 진상은? 모든 것은 가와토의 의도로, 목적은 그가 실수로 발포한 총알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가와토는 불륜을 가장하여 다바라를 자극한 뒤 발포하여 살해하고, 자기가 이전에 쐈던 총알을 현장에 버리는데 성공했지만 다바라의 믿을 수 없는 생명력 탓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다...

가와토 죽음의 진상을 파출소장 야나오카 경사의 시점으로 풀어나갑니다. 무려 두 명이나 사망한 무거운 내용이지만 분위기는 묘하게 일상계에 가깝습니다. 캐릭터가 선명하고 '실제 있을 법하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문제아 가와토보다는 경찰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자행한 야나오카 경사가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놈, 정말 나쁜 놈이더라고요.

딱 한 가지, 가와토는 정말로 경찰에 맞지 않는 소심한 민폐덩어리였다는 결말이 약간 찜찜하나 그 외 전개는 깔끔한 수작입니다. 역시나 일상계 전문가 요네자와 호노부답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가와토가 실수로 발포했다는 것에 지나친 우연이 겹쳐 있었다는 점에서 감점하지만, 읽을 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사인숙"

사라진 연인 사와코를 찾아 머나먼 시골 온천여관으로 향한 "나". 그곳은 자살의 명소로 알려진 곳으로, 누군가 흘린 유서를 발견한 사와코가 어떤 손님이 죽으려 하는지 찾아달라고 부탁하는데...

유서에 쓰인 글귀 중 "오늘로 이 년", "오늘 죽었다고 증언해 주시면 여한이 없겠습니다"를 통해 자살의 목적은 보험이지만 보험을 위해서는 이름과 날짜라는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는걸 알아낸 뒤, 나머지 부분은 물에 흘려보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좋습니다. 사와코의 힘겨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 때문에 사건에 몰두하는 "나"의 심리 묘사 역시 설득력이 넘치고요. 마지막에 자살을 목적으로 한 사람이 사실은 두 명이었다는 반전도 의외성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유카타 색깔이라는 단서는 많이 부족했으며, 사와코가 그렇게까지 자살을 막고 싶었다면 입구 쪽에 CCTV를 설치하면 되는 문제인데 이게 왜 사건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걸 보면 사와코도 결국 죽음을 홍보에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러한 사와코의 기만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석류"

딸 유코가 아버지 나루미를 남자로 느낀다는 야설 수준의 이야기. 둘이서 석류를 먹었느니 어쨌느니 하는, 두 번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찝찝하고 기분 더러운 내용입니다. 유코가 쓰끼꼬를 매질한 반전 정도는 기억에 남으나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는 쓰레기입니다. 별점은 없습니다.

"만등"

이케다 상사의 이타미와 OGO의 모리시타는 개발도상국 방글라데시의 가스전 개발을 위해 이를 거부하던 마을 장로 알람을 살해했다. 그러나 모리시타는 죄책감에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향했고, 불안해진 이타미는 그를 쫓아 입을 막으려 하는데...

모리시타가 콜레라에 걸렸으며 전 일본이 그를 쫓는다는 아이디어가 아주 좋았어요. 이타미와 모리시타가 연결되어 있다는건 아무도 모르지만 공항 검역에서 이미 이상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이타미가 콜레라에 걸렸다면, 원인은 모리시타와의 만남이라는 인과관계가 형성되니까요. 그리고 모리시타의 과거 행적을 쫓으면 잡점이 드러날 테니 이타미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 외에도 무자비한 자원 개발을 반대하는 알람의 사고방식 등의 디테일도 볼 만했습니다.

딱 한 가지, 급작스러운 모리시타의 심경 변화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단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큰 흠은 아닙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의 현대판 개미지옥 이야기로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문지기"

오다와라에서 세 시간, 이즈 반도의 아마기 산맥을 넘어가는 즈난정을 향하는 가쓰라다니 고갯길에서 벌어진 네 건의 연쇄 교통사고 - 파칭코 프로 다카다, 사학과 학생 오쓰카, 기둥서방 다자와와 동거녀, 공무원 마에노가 죽은 사고 - 의 진상은 무엇인지?

전개도 흥미롭고, 할머니의 수다가 결국 진상에 이르게 만드는 여러 가지 복선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범행, 즉 살인일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고, 흑막은 모든 것을 보았다는 휴게소 할머니일 것이라는 점 역시 너무 뻔해서 긴장감은 다소 떨어집니다. 또 진상 -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다카다의 죽음은 할머니 딸이 죽인 것이며, 흉기는 길가의 석불 행신으로 목이 당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것에 주목한 사람들을 차례로 죽였다는 것 - 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석불 사에노카미 목이 떨어진 정도가 무슨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몇 년 전 사건인데 말이죠. 물론 할머니의 노파심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납득하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만원"

학창 시절 흠모했던 하숙집 여주인 다에코가 살인사건 피의자가 되자 변호사인 주인공 후지이가 그녀를 위해 재판에 나서는데...

가보인 족자에 피가 튄 것을 사건에 고의성이 없다는 유력한 정황 증거로 사용하지만(그렇게 귀중한 물건을 피해자를 만나는 자리에 내놓을 리가 없다) 사실 족자에 피가 튀도록 한 것 자체가 의도였다는 진상이 놀라웠던 작품입니다. 해당 물건이 중요 증거로 검찰에 압수되도록 하여, 다른 재산은 모두 차압당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겁니다. 남편 우카와 시게하루가 병사한 뒤 상고를 포기한 것은 보험금으로 빚을 갚을 수 있어서 족자를 빼앗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고요.

이렇게 법 자체를 변호사도 모르게 범인이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점이 정말 돋보였습니다. 다에코가 주인공과 법률 관련 이야기를 들으며 법에 대해 지식을 빨아들였다 정도의 묘사만 있었어도 아주 완벽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상고를 포기한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죽어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보다 빨리 출소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됩니다. 뭔가 타이밍 문제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래도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법의 맹점을 다룬 단편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살의" 급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13/12/02

스틸 라이프 - 루이즈 페니 / 박웅희 : 별점 2점

스틸 라이프 - 4점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추리작가협회상, 캐나다추리작가협회상, 영미서점협회 딜리스상, 앤서니상, 배리상 5관왕에 빛나는 루이즈 페니의 데뷔작. 선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 스리 파인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이 곪아있다. 추수감사절 이른 아침 안개가 걷히고 스리 파인스의 집집마다 새로운 하루가 찾아든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천국이나 다름없는 캐나다 퀘벡주 시골 마을의 단풍나무 숲에서 노부인의 시체가 발견되자 마을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분명 사슴 사냥철 사냥꾼의 오발에 의한 사고였음이 틀림없다. 누가 온화하고 선량한 아마추어 화가의 죽음을 원하겠는가? 하지만 눈부신 경력의 퀘벡 경찰청 아르망 가마슈 경감은 하얀 말뚝 울타리 너머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채는데…

자신의 그림 전시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숲 속에서 죽음을 맞은 제인 닐은 과연 사고사인가? 고의적인 살인인가? 제인의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도대체 무얼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 영어권과 불어권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국적인 문화 배경을 토대로 목가적인 풍경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작품이다. <인터넷 서점 책 소개 인용>

퀘벡 경찰청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첫 번째 작품. 분량이 무려 450페이지나 됩니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후덜덜한 볼륨을 자랑하지요. 

스리 파인스 마을을 무대로 한 살인 사건을 그리는데, 최근의 현대적인 작품들에서는 보기 드문 크리스티 여사류의 전형적 후더닛 계열 미스터리물입니다. 폐쇄된 작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 딱 한 건의 사건, 그리고 범인은 누구이냐가 핵심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후더닛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닙니다. 책 해설에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작품과 비교했는데 엄청난 무리수에요. 비교가 안되니까요.

가장 큰 이유는 추리적인 가치가 거의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가마슈 경감은 명문장과 시를 외우고 다니는, 약간은 P.D 제임스의 달그리쉬 경부를 연상케 하는 지적이고 섬세한 인물인데 작품 내내 폼만 잡을 뿐 실상 추리를 하거나 탐정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사건이 해결되는 결정적 계기도 클라라가 제인이 그린 그림의 이상을 발견한 덕분이고요. 이래서야 "명탐정 코난"의 멍청한 지방 현경(이름이 뭐더라?)과 별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범행 동기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추리물로는 있을 수 없는 단점입니다. 이미 중반에 벤의 어머니 살해 사실을 증명하는건 불가능하다고 언급됩니다. 그런데 단지 그림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여 일을 키운다? 말도 안됩니다. 사실이 폭로되었다 해도 벤이 잃을 건 아무것도 없었을테니까요. 제인과 벤 사이의 인간관계가 약간 금이 갈 뿐이었겠지요. 증거가 없으니 무고죄로 물고 늘어지는 것도 가능했을 테고요. 이렇게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 정통 후더닛 계열 작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동기로서는 반칙에 불과해요.

그림을 덧칠해서 수정한다는 것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쉬운 작업도 아니었을 텐데, 차라리 그냥 지우는게 당연했습니다. 또 그림을 이미 다섯 명이나 보았는데, 본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라 여긴 이유도 모르겠고요. 최소한 피터와 클라라 부부가 지인들을 찾아봤다고 여기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결국 진상을 눈치챈 클라라를 지하실에서 살해한 뒤, 피터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마지막 결말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마을에 상주한 경찰을 허수아비로 봐도 유분수지, 이미 경찰이 피터를 찾아가 클라라의 행방을 물은 시점에서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저 같으면, 찾아온 클라라에게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마을 잔치에 참석한 것으로 그려진 자신이 너무 싫어서 그림을 지웠다 정도로 우기고 끝냈을 겁니다. 제인을 살해한 것은 정황 증거밖에 없으니 빠져나가기도 어렵지 않았을 거예요.

또 왜 화살을 사용했는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총을 사용했더라면 사냥꾼의 오발로 충분히 몰고 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피터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목적이었더라 하더라도 적절치 못한 선택이었어요.

이외에도 어설픈 부분이 많습니다. 일단 볼륨에 비하면 등장인물이 너무 적어요. 피터와 클라라 부부, 벤, 욜랑드 가족, 크로프트 가족, 루스, 머나에 올리비에 - 가브리 커플이 다거든요. 물론 폐쇄된 공동체에 등장인물이 적다는건 전형적일 수 있습니다. 허나 등장인물들을 적절히 배분하여 누가 범인인지를 모르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텐데, 작가는 클라라 중심의 심리묘사에 더해 크로프트 가족을 중반에 용의자에서 리타이어시켜 버림으로써 용의자를 스스로 대폭 줄여버리고 맙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심리도 이해 불가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말도 안 되는 장식으로 벽을 뒤덮은 욜랑드의 행동이죠. 그 시점에서 어차피 자기 집인데 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이베트 니콜이라는 제가 여태까지 본 추리소설 등장인물 중 최고 수준의 짜증을 유발하는 캐릭터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것은 용서가 안되네요. 무능하고 사회성도 없는 캐릭터 자체가 짜증날 뿐 아니라 존재 의미 역시 전무합니다. 그녀의 등장을 전부 잘라내어도 전개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어요. 거진 100여 페이지를 재미도 없고 쓸데도 없는 멘토링에 낭비한 거나 다름없죠. 솔직히 이베트 니콜이 없는 버전으로 책이 한 권 더 나오는 게 판매에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베트의 존재는 작가가 "넬레 노이하우스" 작품을 인상적으로 읽은 탓이 아닌가 의심스럽네요. 생각만 많은 고위 경찰에 사고뭉치 애송이 여자부하가 딸렸다는 설정은 판박이니까요.

물론 한 할머니가 혼자서만 간직하다가 발표하게 된 그림이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발상만큼은 괜찮습니다. 무려 60년 동안 사람을 들이지 않은 거실은 할머니가 손수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림은 60년간을 기록한 하나의 역사였다는 설정도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크로프트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여운을 남기면서 설명하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그리고 현대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고전적 후더닛 소설의 기본적 얼개를 갖추었다는 것도 분명 장점이기는 합니다. 초중반에 뿌려지는 떡밥도 공정하게 회수하고 있으며, 퀘벡의 불어권 - 영어권 주민들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이고요.

그러나 장점보다 단점이 명확하고 방대하여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데뷔작임을 감안하더라도 부족함이 더 많았습니다. 위에 이야기한 대로 이베트 니콜 등장 부분을 싹 날려버리고, 가마슈 경감은 그냥 수사하러 나온 담당자로 역할을 최소화한 뒤 클라라를 탐정역으로 전개하여 250페이지 정도로 완결하였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거예요.

후속작이 어떨지 약간 궁금하긴 한데 이베트 니콜이 계속 등장한다면 읽게 될 것 같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