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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내 방 여행하는 법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 장석훈 : 별점 1.5점

내 방 여행하는 법 - 4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지음, 장석훈 옮김/유유

1794년에 프랑스 군인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결투를 치렀다는 이유로 42일간 가택연금을 당한 후, 자택에서 보낸 일과를 개인의 단상과 곁들여 써내려간 에세이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멋드러진 소갯글을 읽고 혹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42일간 작은 방 안에서 무슨 여행 관련 이야기를 풀어낼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소갯글과 비슷하게 방과 여러 가구들, 의자, 침대, 벽에 걸린 그림들, 애견과 하인 등을 바라보며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를 여행처럼 묘사하는 글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딱히 재미있거나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다는 겁니다. 발상만 독특할 뿐 작가의 능력이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 탓입니다. 장황한 장광설 스타일의 문체, 쓸데없는 미사여구, 난무하는 자화자찬이 가득해서 중학생이 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건질 만한 것은 당대 프랑스 부르주아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음악보다 그림을 높이 평가하는 등의 독특한 시각 정도? 허나 화가는 뒤에 무언가를 남긴다는 이유이며, 작곡가도 음악을 남기지만 음악은 유행에 따라 변화를 겪는데 회화는 그렇지 않다는 무식한 이야기라 딱히 이야기할 것도 없네요.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짤막한 분량이라 읽기가 힘들지는 않았으며, 나름 충실한 도판에 유유 출판사 책다운 깔끔한 장정만큼은 돋보였습니다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약간의 장점도 12,000원이라는 가격이 납득이 되는 수준은 아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전 손택 등이 극찬했다는 소개가 전혀 와 닿지 않는군요.

그래도 아이디어는 괜찮은 만큼 저도 언젠가 비슷한 글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최소한 제 방이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방보다는 재미있을 듯 합니다.

2025/12/20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박산호 : 별점 1.5점

근대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초창기 거장 중 한 명인 윌키 콜린스의 단편집입니다. 저자의 단편은 이전에 몇 편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럽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감성 그대로의, 낡고 지루한 내용이 가득한 탓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예상대로이며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거장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쌍둥이 자매"는 첫 눈에 반한 여성 제인과 결혼하게 된 스트릿필드가 결혼식 날, 자신이 반했던 여자는 제인이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클라라는걸 깨닫는다는 상황 설정이 기가 막힙니다.

"페루지노 포츠 씨의 인생길"은 영국 신사임을 자처하는 속물 포츠 씨가 거구의 이탈리아 여성에게 속박당하는 수난의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합니다. 이른바 영국식 유머 소설 느낌인데, 포츠 씨 일기라는 형태의 1인칭 시점으로 화끈하고 깨는 맛을 더해주는게 좋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아주 기묘한 침대"는 10여년 전에 읽었던 단편인데 여전히 재미있었어요. 침대가 서서히 내려오는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제미나이로 그려본 아주 기묘한 침대가 놓여진 방

하지만 예전보다는 장황함이 지나치게 느껴졌는데, 빅토리아 시대 원전에 충실한 번역 탓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덕분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언급하며 방을 꼼꼼히 살핀게 '나'가 생명을 구한 이유가 되었다는걸 알게 되었지만, 예전만큼 '걸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의, 경마 시즌이라 빈 방이 없던 탓에 여관 주인의 '말없고 조용한 동숙인'이라는 말에 속아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아서 홀리데이의 상황만큼은 기발합니다. 시체를 바라보다가 시체가 움직인걸 알아챈 순간의 묘사 - 이제 거길 보자 침대 옆으로 축 늘어진 길고 흰 손이 보였다. 그 손은 시체의 머리 쪽과 발치를 가린 두 장의 커튼이 만나는 곳에 꼼짝도 않고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모든 것을 감춘 채 길고 흰 손만 보여 주었다. - 도 일품이고요.

하지만 이외 작품들은 모두 지루하며,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은 볼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입니다. "얼어붙은 땅"에서 연적과 표류하게 된 리처드처럼요. 그는 목숨걸고 연적 프랭크를 옛 연인에게 데려다 주고 죽고 맙니다. 순애보도 아니고, 그에게는 일종의 '임무'였기 때문이라는데, 참 낡아빠진 발상이지요.

좋았다고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일부 상황 설정이 재미있을 뿐, 낡고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손"이 대표적이에요. 시체와 함께 있는 두려운 상황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었는 사람이었고 그는 아서 홀리데이의 의붓형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결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대부분의 작품에 가득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기대했던 범죄, 추리 계열 작품도 없다시피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16/08/05

제라르 준장의 회상 - 아서 코난 도일 / 김상훈 : 별점 3.5점

제라르 준장의 회상 - 6점
아서 코난 도일 지음, 김상훈 옮김/북스피어

나폴레옹 휘하에서 싸웠던 제라르 준장의 소싯적 모험담이 수록된 연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셜록 홈즈의 아버지 코난 도일 경의 작품으로 "코난 도일을 읽는 밤"에서 마이클 더다가 극찬했던 탓에 관심을 갖던 작품인데, 얼마 전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 출간되어서 여름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읽어보았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극찬받을 만하더군요!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정말 발군이었던 덕분입니다. 준장의 생명을 건 모험들의 긴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손에 땀을 쥐고 읽었습니다.
여섯 명의 펜싱 사범과 결투를 벌였다는 식의 허세 끼 있으면서도, 황제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과 여성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매너를 보여주는 제라르 준장도 아주 매력적이고요. 시기적으로 본다면 얼마 전 읽은 "내 방 여행하는 법"의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떠오르는데, 허세는 동급이더라도 유머 감각은 월등합니다. 그래서 모험담도 전반적으로 유쾌해요. 잘난 척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유쾌한 친구인 셈이지요.

아울러 역사 모험물답게 나폴레옹, 네 원수, 탈레랑, 워털루 장군, 뮈라 원수 등 다양한 실존 인물들과 실제 전쟁이 벌어졌던 곳들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도 좋습니다. 군복을 비롯한 여러 세세한 디테일들과 전투 장면의 묘사 역시 큰 볼거리에요.

결론적으로 추천작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약간 시대는 다르지만 "스카라무슈"나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비교할 만한 좋은 작품입니다. 후속작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잃어버린 세계"로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도일 경은 추리물뿐 아니라 모험물에도 확실히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는 작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프랑스 군인의 이야기를 영국 작가가 이렇게나 실감나게 쓴 것도 정말이지 놀라와요. 영국 군인을 지나치게 영웅시하지 않은 것도 신기했습니다.

각 단편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라르 준장, 음울한 성으로 가다"

1807년 2월, 제라르 중위는 연대 본부에 출두하던 중 우연히 경기병 연대 순찰대를 만났다. 순찰대의 지휘관 뒤로크 소위는 아버지의 원수 슈트라우벤탈 남작에 대한 복수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둘은 남작의 계략으로 성에 갇혀버리는데...

제라르 준장의 회고에서 시작되는 모험담의 첫 이야기입니다. 나이 지긋한 인물의 1인칭 방백에서, 본 이야기는 3인칭의 소설로 전환되는 구조인데 예전 "샘 호손의 사건부"와 같은 방식입니다. 이야기의 현실성을 높이는데에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네요.

시리즈의 시작으로 나무랄 데 없습니다. 지하에 갇힌 후 탈출하는 과정, 그 와중에 남작을 중오하는 의붓딸의 도움, 그리고 남작과의 최후의 결투와 완벽한 해피엔딩 등 모험물로서의 재미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라르 준장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각인될 뿐 아니라, 사악한 남작의 캐릭터도 잘 살아 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아작시오의 자객들을 처단하다"

1807년, 제라르 중위는 퐁텐블로 궁에서 나폴레옹 황제의 밀명을 받았다. 밤 10시에 황제와 함께 어떤 사내들을 상대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코르시카에서 '아작시오 형제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했었는데, 그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팩션적 요소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황제가 암살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핵심인데, 이미 결과(암살 실패)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별다른 재미를 주기 어려운 탓입니다. 검술로는 상대도 안 되는 두 명의 자객과 대결하는게 모험의 전부이기도 하고요.

물론 나폴레옹을 위장한 일종의 가게무샤가 대신 죽었다는 약간의 반전, 그리고 제라르가 궁을 나갈 때 처음 들어올 때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서, 즉 모든 걸 잊고  나가겠다고 하자 나폴레옹이 한 답변 — "그럴 수는 없을걸, 그때 자넨 중위였으니까 말이야. 이제 가서 푹 쉬게, 제라르 대위" — 등 재치 있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단점이 더 크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왕을 잡다"

1810년, 부상으로 후방에 머무르던 제라르 대령은 연대 복귀를 위해 산을 넘다가 게릴라들에게 사로잡혔다. 잔혹한 게릴라 엘 쿠치요에게 사지가 찢길 뻔했던 제라르를 구해준 건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영국군 용기병대였다.
용기병대의 지휘관 바트와 친해진 제라르는 그와 카드 게임 '에카르테'를 벌여 당당하게 탈출할걸 계획하는데...

산적에게 습격받았다가 영국군에 사로잡히고, 마지막에는 웰링턴 장군까지 나오는 드라마틱한 구성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제라르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기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스페인 산적들의 묘사도 생동감 넘치며, 프랑스인이 영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 카드 게임의 박진감 등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요. 에카르테를 프랑스 전체를 뒤져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이 세 사람이나 될까라는 식의 귀여운 허세도 여전합니다.

마지막 웰링턴의 한마디도 인상적입니다. 급작스럽게 나타난 웰링턴에게 제라르가 하는 말 — "내가 카드 게임에서 이겼다, 약속대로 자유를 달라, 자신은 킹을 잡고 있다" — 에 대한 답변으로 웰링턴이 "자넨 우리 킹에게 잡혔거든" 이라고 하는 장면은 영국적이면서도 재치 있더라고요.

모험물로도 재미있고, 팩션으로도 괜찮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왕, 제라르 준장을 잡다"

1810년, 다트무어 감옥에 수감된 제라르는 탈출을 감행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치밀한 탈출 — 창의 철봉을 뽑고, 벽돌을 빼낸 후 이중 벽을 철봉에 침대보로 만든 밧줄을 묶어 넘음 — 도 재미있지만, 탈출 후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우선 찰스 메러디스의 마차를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외투를 훔칩니다. 그러나 그 사이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을 몰라서 왔던 길을 되돌아와 다시 형무소 근처에 오고 말지요.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말한 방향과 반대로 향했지만, 영국 복싱 챔피언 브리스톨 버슬러를 만나 격투를 벌인 끝에 사로잡힌다는 좌충우돌 행각이 정말 흥미진진한 덕분이에요.
메레디스의 편지로 풀려난다는 반전도 아주 기막히며, 이 와중에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는 기사도 정신도 반짝반짝 빛납니다. 메레디스 부인과 나누는 농짓거리도 인상적이었고요.

한마디로 탈출기로서도, 모험담으로서도 빼어난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밀플뢰르 원수와 맞서다"

1810년, 마세나 원수는 제라르 대령에게 탈주병 출신으로 엄청난 세력의 산적 집단을 만든 밀플뢰르 원수 타도 및 그가 사로잡은 부유한 백작 부인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하들과 산적의 근거지로 향하던 제라르는 도중에 영국군을 만났다. 다행히 지휘관이 친분이 있던 바트이며, 그도 같은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산적의 근거지인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마침 그 수도원에서 쫓겨났다는 수도원장의 말을 듣고, 패잔병을 가장하여 잠입할 것을 모의하는데...

일단 바트의 재등장은 반가웠고 수도원장의 정체가 밀플뢰르 원수였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원수에게 푹 빠져버렸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허나 중간에 제라르의 목숨을 노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등 전개 면에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영국군을 사로잡은 방법과 똑같이 아침에 제라르를 유인하여 프랑스 군도 일망타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방심을 노렸다 치더라도 밀플뢰르 원수가 직접 나설 이유는 당연히 없습니다. 또 반가운 캐릭터였던 바트가 전사한다는 내용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제라르보다는 밀플뢰르가 더욱 주인공에 가까운 일종의 안티 히어로물로 보는 게 타당할 듯싶네요. 결국 밀플뢰르가 승리하는 결말 역시 그러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왕국을 걸고 도박을 하다"

1812년, 프랑스는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한 후 괴멸적 상황에 빠졌다. 때문에 제라르 대령은 프랑스로 복귀하여 부대를 재건할 것을 명받았다.

독일을 가로질러 귀국하는 와중에 제라르는 항상 프랑스와 친밀했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눈치챘고, 협력자를 통해 곳곳에 표시된 기묘한 "T"자 마크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것은 프로이센 상류층의 비밀 결사 투겐트분트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제라르는 죽어가는 군위대 장교 아르노 후작을 만나 황제의 밀서를 건네받았다. 그의 마지막 부탁은 호프성의 작스-펠슈타인 대공에게 밀서를 전해 독일이 황제에게 거역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그리고 전 유럽이 나폴레옹에게 거역하는 상황의 한가운데 놓인 제라르의 모험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팩션 느낌이 강합니다. 하지만 실상 모험이랄 것은 대단치 않습니다. 대공을 찾아가 이야기하는 게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제라르가 팔로타 백작부인을 자칭한 대공비에게 서류를 뺏기는 과정, 궁지에 몰려도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역사를 거스르지 못하는 제라르의 실패만큼은 인상적이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라르 준장, 훈장을 타다"

준장이 된 제라르는 전우 샤르팡티에 소령과 함께 나폴레옹의 부름을 받았다. 황제는 당면한 작전 내용과 밀서를 스페인 국왕인 자기 형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후, 친히 경로까지 정해 주었다. 하지만 그 경로는 프로이센 군 등에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다. 제라르는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여 명령을 완수하는데...

태사자가 홀로 북해성 밖의 원군을 청하는 것과 같은, 혈혈단신으로 적진 한복판을 가로지른다는 화끈한 모험이 펼쳐집니다. 태사자처럼 제라르의 기지도 돋보입니다. 시장 저택에서 벌어지는 프랑스군 - 프로이센군 전투, 그리고 이후 프로이센 군에게 다시 점령된 상황에서 코사크 장교 부트킨 백작을 속여 탈출하는 과정은 정말 기가 막히거든요.

게다가 황제의 의도는 그들이 사로잡히게 만들어 거짓 정보를 적에게 노출시키려 했다는 것, 그래서 황제는 사로잡힌 샤르팡티에게 레지옹도뇌르를 수여하고 제라르에게는 특별 명예 훈장을 수여한다는 결말까지도 완벽합니다. "저 친구는 우리 군에서 최악의 돌대가리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용감한 군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말이야."라는 말과 함께요. 그 말 정말이지 정확합니다! 아무래도 제라르는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머리는 타고났지만 좀 더 큰 그림은 볼 줄 모르는 인물인 것 같아요.

여튼 별점은 4점. 모험도 화끈하고 결말까지 완벽하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제라르 준장, 악마의 유혹을 받다"

나폴레옹 군대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제라르 준장은 프랑스 군 내에서 최고의 용사로 알려진 다른 전우 2명과 함께 베르티에 원수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나폴레옹을 적군에 넘기자고 제안했다. 3명 모두 분노와 함께 제안을 거절했지만, 직후 황제가 나타나 그들을 시험했다며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그의 후계자를 증명하는 서류와 4천만 프랑에 해당하는 증권을 숨겨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탈레랑의 지시를 받은 악당들에게 서류를 빼앗겼고,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추격과 격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단편집의 아쉽지만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마지막답게 황제 나폴레옹의 최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이 단 한통의 편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는 도입부로부터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지 밝히는 전개는 괜찮습니다. 허나 무려 전우 2명이 죽었음에도 대단한 모험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이 임무를 성공하더라도 나폴레옹에게 내일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좀 맥이 빠고요. 나폴레옹 2세는 결국 한 게 아무것도 없을 뿐더러 이 서류들이 그의 존재를 어떻게 한 건 아니니까요.

결론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4/23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7. 곰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7. 곰 인형
토시오가 사고를 알게 된 것은 다음 날 점심, 중국집의 감도가 떨어진 TV를 통해서였다.
토시오는 오전에 조사 보고서 작성에 몰두했다. 마이코가 지시했던 업무였다. 그녀는 업무 지시 후 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토시오는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가,  무심코 보고 있던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았다.
".... 오늘 오전 9시, 실수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아이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망한 아이는 시나가와구 니시하라 마와리 마사오(馬割真棹)씨의 장남인 마와리 토우이치(馬割透一)라는 두 살배기 남자아이입니다. 어젯밤 9시 경, 토우이치 군은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방에 들어간 뒤, 가족들이 놓아 두었던 수면제 병을 열어 약 50알을 거의 다 마셔버렸습니다. 가족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야 토우이치 군의 사망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토우이치 군은 엊그제 운석 낙하로 사망한 마와리 토모히로(馬割朋浩)의 아들로, 어젯밤 토모히로의 상을 지낸 탓에 온 집안이 잠을 자고 있어 토우이치 군이 수면제를 가져간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가족은 연이은 불운에 휩싸여 있습니다. 다음 뉴스는......"
토시오는 무심코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사오의 얼굴이 TV 해설자의 얼굴과 겹쳤다. 그대로 마사오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마이코가 알면 바로 사무실에 전화를 걸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시오는 식사를 대충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구로사와가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 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밀었다. 역시나, 마이코에게서 온 전화였다.
"토우이치가 죽었어."
마이코가 거칠게 소리쳤다.
"저도 방금 뉴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토모히로의 고별식은 열한 시부터야. 토모히로의 집에 가면 별 수 없겠지만, 화장터에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곧 가겠습니다."
"위치를 알려주지."
화장터는 교외에 있었다. 토시오는 위치를 적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연이어 벨이 울렸다. 구로사와가 다시 토시오를 불렀다.
"마이코, 있나?"
교통과 교도 형사의 전화였다.
"부재중입니다. 지금 만나기로 했는데요."
"여전히 바쁠 것 같군. 마와리 토우이치가 죽었어."
"뉴스를 통해 방금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말이 빠르겠군. 나도 방금 서에 돌아와서 알았어. 담당이 니시하라 경찰서의 나라키 경감으로 정해졌어. 마이코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네. 마이코를 만나면 나라키 경감에게 연락하라고 전해줘."

화장장은 넓은 묘지 한 켠에 있었다.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콘크리트 대기실에는 조문객들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마사오의 모습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나무 벤치에 데츠바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토시오는 무심코 움츠러들고 말았다. 하룻밤 사이에 다섯 살, 여섯 살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생기고 뺨의 살도 빠졌다. 어깨선도 한 뼘 더 작아 보이는 것은 기우일까. 두 사람 모두 침묵하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토시오는 두 사람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
마이코가 토시오의 모습을 보고는 인파를 헤치고 다가왔다.
"정말 혼잡하네. 어제는 흉한 날이었다고 하던데."
"교도 형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그래?"
"이번 사건은 니시하라 경찰서의 나라키 경감이 담당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나라공인가.......1과가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알는 분입니까?"
"응. 고등학교 때 동기였어. 벌써 경감이 되었나? 아, 니시하라서에는 키츠네자와 씨도 있었지?"
"우다이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연락해 달라고 했어요."
"뭐, 이따가 연락하면 돼. 그런데 마사오는 뭐라고 해?"
"저도 지금 막 도착해서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이코는 조문객들 사이에서 마사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다가갔다. 마사오는 표정을 잊은듯 했다. 토시오를 보아도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거나, 기억 자체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데츠바도 마찬가지였다. 일자로 다문 입은 전혀 열리지 않았다. 마이코도 짧은 인사만 하고 두 사람의 곁을 지나쳐 왔다.
"해바라기 공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
토시오는 회사 사람의 얼굴을 몰랐다.
"숨이 막히네. 이런 건 잘 못하겠어. 밖으로 나가자."
대기실 밖은 자갈이 깔린 마당이었다. 바람은 차갑지만 햇볕이 잘 드는 곳이었다. 마이코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조문객들이 어슬렁어슬렁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일단 나라공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좋겠지."
마이코는 수첩을 펴고 생각했다. 공중전화는 대합실 안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가끔씩 스피커에서 납골 차례가 된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토시오는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는 새로 조성된 묘지였다. 묘비는 모두 새것이고 묘목도 작았다. 군데군데 꽂혀 있는 생화의 색이 선명했다.
"어머, 안 계신 줄 알았어요."
토시오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상복을 입은 카오리가 굳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밝은 햇볕 아래 건강한 피부색은 검은색 옷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카오리는 거의 껴안을 듯이 토시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 뉴스에서 봤어요.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쩔 수 없어요. 저, 우연이라는 것이 정말 무섭네요."
카오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어제 아버지와 오빠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저는 마사오씨 집에 머물렀어요.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의 절반은 내 책임이지요."
"도대체 그 수면제는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돌아가신 토모 씨의 것이었어요"
"토모히로 씨는 평소에도 수면제를 먹는 습관이 있었나요?"
"아니요. 마사오 씨 부부가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던걸 알고 계시죠? 그 약은 환경이 바뀌어서 잠을 못 잘 때를 대비해서 토모 씨가 마사오 씨에게 사다 준 거라고 하더군요."
토시오는 문득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사오와 같은 약국에서 구입한 작은 약 상자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마사오 씨는 집을 떠나기 전에 약을 토모 씨에게 건넸다고 했어요. 그리고 여행을 떠나느라 바빠서 어디다 둔 채 깜빡한 것 같아요."
".......아이의 손이 닿는 곳에요?"
"그 부분이 좀 명확하지 않아요. 아침부터 경찰이 계속 물어봤어요. 그런데 마사오 씨도, 할머니도, 저까지 어젯밤 마사오 씨 집에 묵었던 세 사람 모두 토우이치 군이 어디서 약병을 자기 방으로 가져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해요."
"누가 토우이치 군을 재운 거죠?"
"마사오 씨예요. 어젯밤 토우이치 군은 흥분해서 좀처럼 잠들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재우려고 해도 금방 일어났지요. 그럴 만도 한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본 적도 없는 일을 시작했으니까요. 아버지와 오빠가 돌아갈 때 쯤이 되어서야 마사오 씨가 토우이치 군을 이불 속에 넣었죠."
"잠드는 모습은 보지 못했군요."
"그래요. 항상 그렇게 재우고 있어요. 토모 씨는 훈육이 엄격했거든요."
"그 방에 수면제 병이 있었던 거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마사오 씨는 이불을 깔고 토우이치 군을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재울 때까지 그 병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나도 그 방에 드나들었지만 당연히 보지 못했고요."
"토우이치 군이 손에 들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군요"
"그렇죠. 할머니가 토우이치 군에게 옷을 갈아입혔으니까요."
"그럼, 아무도 모르게 한 번 누워있던 토우이치 군이 일어나서 다른 방으로 갔다는 건가요?"
"내가 잠든 건 열두 시가 넘었을 때였어요. 마사오 씨도 같은 시간에 잠을 잤지만 거의 잠들지 못했다고 해요. 뭐 그렇다쳐도 토우이치 군이 잠에서 깬 뒤 몰래 다른 방으로 갈 수는 있었겠지만, 두 살짜리 아이가 그런 짓을 할까요?"
"안 하겠지요."
"그렇죠. 그래서인지 경찰은 더 무서운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서운 일?" 
"만약 누군가가 토우이치 군의 침대 옆에 수면제를 몰래 놓았다고 가정하면, 누가 누구와 함께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라는 거지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 때 마사오 씨 집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가능했을거라고 대답해 주었어요.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요. 누구라도 토우치군의 베개에 약을 살짝 놓고 올 수 있었어요."
"그럼 토우이치 군의 침대 옆에서 그 병을 발견한 건가요?"
"그래요. 평소에는 7시 반이면 일어나지만, 어젯밤은 늦게까지 깨어 있었으니 그저 푹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죠. 설마 토우이치 군이 죽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누가 발견했습니까?"
"마사오 씨예요. …… 잔인했어."
카오리는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무덤 사이로 걸어갔다. 토시오도 카오리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카오리는 걸음을 멈추고 빙글빙글 돌면서 토시오를 향해 말했다,
"카츠 씨는 마사오 씨를 좋아하는군요."
갑자기 말했다.
"...... 내가? 그런….."
토시오는 속으로 당황하며 말문이 막혔다. 처음 마이코가 마사오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부터 마사오에 대해 다른 여자를 볼 때와는 다른 감정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막연한 호의라고 생각했다. 호의 이상의 것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이 카오리에게 보였을까.
"괜찮아요."
카오리는 다시 뒷걸음질 쳤다. 변명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마사오를 좋아해도 괜찮다는 뜻일까?
"..... 이것은 이것은 동그라미에 횡목과……동그라미에 가지 잎…… 오동나무……......"
카오리는 무덤의 문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문장의 이름을 잘 알고 있군요."
카오리는 토시오를 보고 살짝 웃었다.
"처음 들었어요, 당신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건."
그 말이 맞았다. 아까의 말은 가벼운 질투심이었을까. 토시오는 젊은 여자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저는 미술을 전공하고 있어요."
"화가가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수다쟁이에게 들었군요. 그리고 나에 대해서 또 어떤걸 카츠 씨에게 알려주었죠?"
"여러 가지입니다."
일부러 신경을 쓰게 하려고 돌려 말했다.
"알려주지 않을거에요? 못됐네."
알려주고 싶어도 그 이상은 알고 있는게 없었다.
"카오리 씨 집의 가문 문장은 무엇입니까?"
"......포옹하는 명자 나무요. 하지만 원래는 나사 매화였다고 하네요. 나사 매화는 매화꽃을 담은 매병의 문양이지요. 카츠 씨의 집은?"
"그게….., 모르겠어요."
카오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 수다쟁이가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건 거짓말이겠지요."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 것 같았다. 토시오는 입을 다물었다. 카오리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모레 우리 집에 오시지 않을래요?"
"저요?"
"그래요. 모레가 내 생일이거든요. 애도 중이니 화려한 행사는 열 수 없어서 은밀하게 몇 명만 부르기로 했어요. 괜찮지요? 마사오 씨도 올지도 몰라요."
"슌키치 씨도요?"
"그 사람은 안 돼요. 분명 일이 있을 테니까요. 오늘도 바로 돌아갔어요."
카오리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카오리 씨의 아버지에게 우다이 씨가 할 말이 있다고 하네요."
"아, 그 위풍당당한 사람 말이죠. 그 사람, 당신의 상사에요?"
"네, 뭐, 그런 편입니다."
"직접 만나시면 좋을텐데. 아버지는 이제는 딱히 거물이 아니에요."
"이럴 때일수록 말을 꺼내기 힘들죠. 게다가 즐거운 얘기가 아닐 것 같아서요."
"좋아, 내가 밑밥을 깔아줄게요. 하지만 남자는 왜 일, 일만 하는 걸까요?"
"기분 나빴어요?"
"그래요."
스피커에서 마와리 가문의 이름이 들려왔다. 카오리는 화장터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토시오로 시선을 돌렸다,
"생일에 못 온다고 미리 선물을 준 사람도 있었어요. 즉 '부재중 선물'이지요. 카츠 씨도 초대받으셨으니 꽃다발 정도는 가져오세요."

"꽤나 마음이 맞는 것 같잖아."
차 안에서 마이코가 말했다.
"생일에 초대받았어요. 우다이 씨가 만나고 싶다는 말을 데츠바에게 전해 줄 것 같네요."
"그거 고맙네. 카오리는 너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반대로 ......"
마사오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어젯밤에 대해 카오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이코는 가만히 토시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수면제는 마사오가 사준 거라고 했지?"
"맞습니다."
"카츠군이 사준 감기약은 어떻게 됐어?"
"아직 주머니에 들어 있어요. 상의 왼쪽에 있어요."
마이코의 손이 주머니를 뒤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토시오는 왼손을 손잡이에서 떼어내어 감기약 상자를 꺼냈다. 마이코는 상자를 열고 작은 병을 꺼냈다. 병에는 상자와 같은 선명한 녹색 디자인의 라벨이 감겨져 있었다. 마이코는 나사 뚜껑을 열었다. 처음 열 때 약간의 힘이 필요했다.
"흠, 뭔가 이상하네."
마이코가 중얼거렸다.
"토우이치의 죽음 말인가요?"
"그래. 마사오가 약을 산 것은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어. 토모히로도 낮에 수면제 따위를 먹을 리가 없으니 포장은 버렸을지언정 병뚜껑은 열지 않았을거야. 그렇다면 처음 여는 견고한 나사 뚜껑을 두 살짜리 아이의 힘으로 열 수 있었을까? 아이 혼자서 나사 뚜껑을 여는건 어려워. 게다가 새 병의 입구에는 알약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무로 꽉 채워져 있는 법이고. 충전재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병 뚜껑을 열고 충전재를 제거한 후 일부러 병 뚜껑을 느슨하게 다시 조여 놓은 것일까요?"
"그런 무서운 일을 가볍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 토우이치가 열어놓았던 병은 다른 병이었을지도 모르니깐."

니시하라 경찰서의 나라키 경감은 하얀 피부와 콧대가 높은 남자였다. 턱이 깎인 듯 뾰족하고, 눈썹 사이에는 깊은 세로 주름이 있었다.
"유카와 씨......아니, 실례지만, 결혼 후 이름이 뭐였습니까?"
나라키의 목소리는 높았다.
"마이코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옛날 그대로? 그럼 마이코."
"뭐라고? 나라공!"
나라키의 세로 주름이 깊어졌다. 머리카락을 칠대삼으로 나누고, 한 올 한 올 흐트러짐이 없었다.
"......역시, 이전처럼 부르도록 하죠. 그 편이 낫겠군."
"그래요. 경감님답게 말이죠. 저는 우다이라고 합니다. 나라키 경감님,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요. 그리고 당신은?"
토시오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우다이 경제연구회 직원이라고 덧붙였다.
"우다이 씨, 당신은 어젯밤 마와리 가족의 철야에 참석하셨죠?"
"네, 다녀왔습니다."
마이코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몇 시쯤까지 그 집에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경이 끝나고 여러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스님과 함께 오노와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9시 조금 전 쯤이었을 겁니다."
"토우이치 군은 아직 깨어있었군요?"
"깨어 있었습니다."
"어떤 모습이었나요?"
"어떤 모습이었냐면, 보통 아이들 모습 그대로였어요. 어른들 주변을 돌아다니고, 과자를 집어먹고, 곰 인형을 안아주기도 하고 ......"
"특별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특이한 점은 없었어요."
마이코는 담배 연기를 나라키에게 내뱉었다.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뭔가 의심이 가는 게 있나요?"
나라키는 마이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변사니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만일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거죠."
"만일의 경우라고 하면 살인도 고려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시체는 해부했겠지요. 결과는?"
"공식적인 보고는 아직 안 나왔지만……"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한 것은 틀림없겠군요."
"글쎄요."
"그 약은 마사오 씨가 구입한 약이 틀림없습니까?"
"우다이 씨, 잠깐만요. 내가 물어보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나라키 형사님. 하지만 이게 마지막 질문이니 알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라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제조번호를 약국에 대조해 봤습니다. 약은 마사오 씨가 구입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다이 씨, 오늘 마바시 토모히로 씨의 고별식에 갔었지요?"
"정확히 고별식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화장터에서 유골을 안치하는 데 참여했을 뿐입니다."
"그 동안 마와리 가문 사람들과 함께 있었겠지요?"
"그렇습니다."
"마와리 가문 사람들….. 장례식 참석자까지 포함해서요,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어요. 데츠바 씨와 마사오 씨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카오리 씨도 딱히 말씀드릴만한게 없었던건 마찬가지입니다. 나머지 분들과는 안면이 없고요. 그러고 보니 소우지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네요."
"소우지 씨는 토모히로 씨 집에 남아 있었어요."
"그랬군요. 하긴, 죽은 아이를 혼자 두면 안 되겠지요. 경감님의 질문도 있을테고."
나라키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우다이 씨. 협조해줘서 고마워요. 오늘은 이만 물러가셔도 됩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도움이 되건 없는데요. 그런데 나라키 씨, 이제부터 토모히로의 집에 가시는 거죠?"
"......"
"데츠바 씨와 마사오 씨와 카오리 씨에게 물어보실 게 남아있을 텐데요. 그녀들은 이제 집에 돌아갔을 거예요. 우리도 향을 피우러 갈 건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실래요?"
"아뇨, 됐어요.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았어요."
나라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호시자와 씨도 한동안 만나지 못했어요. 잘 지내고 있겠지요?"
"호시자와 군은 현 경찰로 전근을 갔어요."
"현 경찰로......."
마이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 점수는 좋았을지 몰라도 그 정도로는 안 되는 거였군요."

마이코는 에그 속에서 나라키를 비판했다.
"첫째, 우리도 알 수 없는 것만 물어보고 있어. 히라 형사님들이 훨씬 더 잘 물어보는 것 같아. 호시자와 씨도 변함없이 쫓겨다니고만 있고 ......"
마이코는 가방에서 감기약 병을 꺼내어 토시오의 왼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조금 더 신경써서 정보를 전해줄까 했는데, 너무 태도가 별로라 오늘은 그만두기로 했어......"

토모히로 집의 장의용품은 거의 다 치워져 있었다. 주택가는 다시 원래의 고요함으로 돌아갔고, 한 사람의 죽음 따위는 잊어버린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향 냄새가 진동했다. 안방에는 토모히로의 유골과 사진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토우이치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토우이치의 관은 없었다. 대신 익숙한 곰 인형이 놓여 있었다.
마와리 가문의 유족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가벼워 보였던 소우지마저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토시오 일행의 뒤를 이어 나라키 경감을 포함한 두 명의 수사관들이 도착했다. 수사관들의 태도는 정중했다. 조문(弔問)이 끝나자 두 사람은 별실의 응접실을 배정받았다. 마사오를 시작으로 한 명씩 응접실로 불려갔다. 심문은 길지 않았다. 사고의 자세한 내용은 이미 마사오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들었을테니, 나라키 일행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전날의 행동을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일행의 심문이 끝나자, 데츠바가 몸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어지럽다고 했다.
"약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요?"
마사오가 물었다. 데츠바는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빨간 라벨이 벗겨져 있었다. 병 안에는 빨간 캡슐이 반쯤 들어 있었다.
"아니, 잊지 않았어. 항상 이렇게 가지고 다닌다고. 아침 식사 후에 꼭 먹으니까. 오늘도 제대로 먹었어. 나는 다른 약은 먹을 생각이 없어. 너만 믿는다."
"어제부터 너무 피곤하신 것 같아요. 집에 가서 푹 주무세요. 따뜻하게 하고 계시고요. 소우지 씨, 그렇게 해 주세요."
소우지는 데츠바와 마사오를 보며 서성이다가 마사오가 강권하는 바람에 코트를 집어 들었다.
"우다이 씨, 미안하지만 마사오 씨를 위해 조금만 더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소우지는 현관을 나가면서 마이코에게 속삭였다.
그 말을 전후로 나라키들도 자리를 떴다.
"아, 뭔가 곤란한가 보군."
마이코가 나지막이 말했다.
"카츠 군만 남아줘. 나는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현관으로 나갔다.
엔진 소리가 멀어지자 집 안은 조용해졌다. 마사오의 권유로 마사오의 어머니도 2층으로 올라갔다. 마사오의 어머니의 이름이 아키코(秋子)라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다. 아키코는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집을 비울 예정이었던 일주일 전부터 이 집에 와 있었다고 했다.
카오리와 토시오만 남았다.
마사오는 무의식적으로 토우이치의 곰인형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손이 쉴 새 없이 곰인형의 주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몇 번이고 곰인형의 등을 열었다 닫았다. 소우지의 말대로 배터리를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동작이 마사오의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배터리를 넣고 곰인형이 걷는 모습을 토우이치에게 보여주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 하지만 마치 노의 가면같이 굳은 마사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카오리는 자꾸 토시오에게 말을 걸었다. 토시오는 어쩔 수 없이 복서였다는 과거를 말해 주었다. 항상 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말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더 심하게 상처받은 사람이 듣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토시오는 과감하게 패배한 경기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그 정도밖에 할 말이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마침 그 때 카오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누구한테서 온 전화인가요?"
마사오가 물었다.
"슌키치 씨예요.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거절했어."
"용무가 있는 거 아니에요?"
"볼일 따위는 없어요. 너무 일 얘기만 하길래 화를 냈는데 그게 생각났나 봐요. 내가 오늘 밤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왜 전화했을까요? 정말 미친 것 같아."
"그건 안 돼요. 나 때문이라면 나는 괜찮아요. 나에게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거절하면 내가 곤란해져요."
카오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건 토시오도 알 수 있었다.
"전화는 회사에서 걸려온 거죠?"
"네."
"그럼 빨리 다시 전화하세요. 빨리 전화하지 않으면 놓쳐 버릴지도 몰라."
"마사오 씨, 미안해요."
카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카오리가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나면 꼭 혼내 줄게요. 카츠 씨, 부탁할게요."
전화를 마친 카오리는 서둘러 현관으로 나갔다.

"좋은 때야."
카오리를 배웅한 마사오가 툭 던진 말이었다.
"술 한 잔 하고 싶어요. 카츠 씨, 같이 가세요."
마사오는 응접실 문을 열었다. 아담한 방이었다.
"어느 걸로 할까요?"
마사오는 양주 선반 앞에 섰다. 토시오는 적당한 병을 골라 탁자 위에 놓았다. 마사오는 방을 나갔다.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서른 전후의 남자였다. 초점이 흐릿한 데다 갈색으로 변색되어 특징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단단히 묶은 입술이 데츠바를 닮은 부분이 있었다.
마사오가 얼음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토시오가 바라보던 사진을 보고는 "저기, 토모히로의 아버지입니다. 류키치라는 이름이었어요."라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데츠바씨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네요."
"비슷하긴 하지만 데츠바씨와 류키치 형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토모히로가 늘 이야기하곤 했어요."
토모히로와 소우지의 관계와 비슷했을까? 마사오는 류키치의 사진을 보면서 말을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두 사람의 아버지 때 해바라기 공예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어요. 형제끼리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종종 그런 일이 생기죠. 게다가 두 사람의 아버지는 병약해서 해바라기 공예 일은 두 사람의 손에 맡겨져 있었어요. 개성이 강하고 재능이 있는 두 형제는 서로에게 양보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사오는 토시오에게 의자를 권했다. 자신은 소파에 걸터앉아 두 잔에 술과 얼음을 넣고 한 잔을 토시오에게 권했다.
"류키치는 창의적인 사람이었어요. 기츠키라든가 수영하는 금붕어. 그런 오래된 장난감을 개량해서 더 재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재능이 뛰어났어요. 한편, 데츠바도 이에 뒤지지 않았어요. 판로를 개척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상술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죠."
마사오는 약을 마시듯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술을 음미하는 모습이 아니다.
"류키치에게는 자신이 고안한 장난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자기 것인 양 상품화하여 자랑스럽게 판매하는 데츠바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류키치는 그것을 도둑질이라 부르며 어린 토모히로에게 저 녀석은 도둑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두 분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그래도 해바라기 공예 일로 힘을 합쳤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재산 분배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어요. 문제는 전쟁을 눈앞에 둔, 장난감 산업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던 시대였던데다가 상속권도 장남이 한 손에 쥐고 있던 시대였기에, 류키치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거지요."
마사오는 말수가 적어졌다. 무언가에 열중하지 않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결국 장남 데츠바가 오노와의 땅과 거래처를 독점해버렸어요. 류키치는 적은 자금으로 다른 회사를 차릴 수 밖에 없었지요. 주로 해바라기 공예의 하청을 맡았다고 해요. 전쟁이 끝난 후 류키치는 몇 가지 새로운 장난감을 만들었지만, 장사에 소질이 없던 탓에 상품으로서는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고요. 데츠바는 전처럼 내가 아니면 안 된다며 류키치에게서 아이디어를 싸게 사들였어요. 류키치는 아쉬운 마음에 애써 만든 작품을 포기했지만, 죽을 때까지 데츠바를 도둑놈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마사오의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와 술에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류키치가 죽고 나서, 토모히로는 데츠바에게 맡겨졌어요. 나도 마찬가지지만, 마와리 가에는 친척이 별로 없었어요. 토모히로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데츠바뿐이었죠. 그러나 토모히로에게는 적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과 같았던 셈이에요. 토모히로의 음울한 성격은 그런 데서 비롯되었겠지요. 아무 불편함 없이 자란 소우지 씨와 카오리 씨 사이에서 토모히로는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런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어요...... 나만 말하는 것 같네요. 카츠 씨, 지루하지 않아요?"
"지루하지 않아요. 하지만 부인은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요. ...... 나, 토모히로와 결혼하기 전에 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데츠바 씨를 진료할 수 있는 거군요."
"데츠바는 의사를 싫어해요. 나는 예전에 한의학을 공부한 적이 있어요. 데츠바는 나를 믿어주고 있고요. 그게 환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죠."
"한약도 캡슐을 쓰나요?" 
"아, 그 약이요. 겉은 캡슐이지만 속은 한약이 들어있지요. 편리해졌죠?"
마사오는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지 3년째였어요. 토모히로와 처음 만났을 때였어요. 토모히로는 위궤양 수술을 받고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했었어요. 우리는 거기서 알게 되었어요. ...... 이런 이야기 듣기 싫지 않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술잔에 술을 더했다.
"처음엔 토모히로는 온순하고 얌전하고 음침한 청년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고집스럽고 생각도 비뚤어진 면도 있었고요. 수술이 끝나고 결과가 좋게 나오자 밝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와 친해지자 이기적인 환자로 변해버렸어요. 자기 얘기를 많이 하고, 내가 없으면 어린아이처럼 심술궂게 굴었지요. 하지만 면회 온 사람들 앞에서는 다시 원래의 음침한 청년으로 돌아갔어요. 그의 주변에는 마음을 달래줄 사람이 없었나 봐요. 그는 끊임없이 열등감을 가지고 사람들의 선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요."
마사오는 술을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퇴원하던 날, 토모히로는 나에게 청혼을 했어요. 나는 망설였지만,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외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 해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결혼해서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네라고 해야 되겠죠. 하지만 그것이 내 덕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렇다면 소우지와의 관계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토시오는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토시오는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때요? 마음을 열게 되었나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토모히로가 카츠 씨의 회사에 새로 거래할 회사의 신용 조사를 의뢰한 것을 알고 나서야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토모히로는 데츠바 일가와 헤어지려고 했던 것이었군요."
"그리고 우리는 그날 미행을 했습니다"
"그랬군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리는 의뢰인인 토모히로 씨는 미행할 필요가 없었는데요."
마사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모님을 미행하고 있었던 거죠. 아침부터 ......"
마사오의 표정이 심하게 동요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도 토모히로가 부탁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비겁한 짓이군요."
마사오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샹보르관 옆방에는 저와 우다이 씨가 있었어요."
마사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토시오는 말을 더 강하게 했다.
"마사오 씨의 얼굴은 그 전에 사진을 보여줘서 알고 있었어요. 어딘가에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에서 부인은 붉은색에 가까운 감색 옷을 입고 웃고 있었어요."
"올 여름에 나는 토모히로와 함께 가나자와를 여행했었지요...."
"하지만 저는 믿지 않습니다. 설령 마사오 씨와 소우지 씨가 샹보르관의 같은 방에 있었다고 해도, 거기서……."
"그만해! 그냥 평범하게 생각해 주시면 돼요. 나와 소우지는 어린 아이들이 아니에요. 평범한 어른이라고요."
마사오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술잔을 마셨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당신 남편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운석이 차에 부딪혔을 때, 자신이 도망치기 전에 당신부터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병원에서 남편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누가 봐도 남편을........"
"말하지 마세요!"
"......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잠깐만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나, 토모히로가 살아있을 때 그 일을 말해야만 했어요.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어요.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어요. 토모히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카츠 씨, 들어보세요. ......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나, 앞뒤가 맞지 않는 말만 하는 것 같은데?"
"이 세상에 앞뒤가 맞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요"
"토모히로는 죽었어요. 이제는 그 일을 누구에게 말해도 상관없어요. 소우지도 그렇게 만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알았어. 당신은 소우지 씨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었군요. 당신과의 관계를 남편에게 들킬까봐요."
"토우이치의 죽음은 제가 받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마사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은 토시오에게 깊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토시오는 일어서서 마사오의 뒤를 돌아보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죠."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마사오는 자신의 소파 옆에 토시오를 앉혔다..
"토모히로가 퇴원했을 때, 그는 해바라기 공예에 입사한 지 5년쯤 되었을 때로 독신으로 살고 있었어요. 휴일이 되면 나는 토모히로의 아파트에 가서 빨래를 하고, 밥을 해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었어요. ......"
지금의 카오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을 하든 만족스러운 삶…….
"어느 날, 삼촌 데츠바가 중매 이야기를 들고 왔다고 하면서 토모히로는 고민에 빠졌어요. 우리 둘의 상견례는 곧 결정되었습니다. 며칠 후, 토모히로는 나를 데리고 나사 저택으로 가서 데츠바를 만나게 했지요. 데츠바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데츠바는 토모히로가 없는 곳에서 나에게 말했주었어요. ‘토모히로는 죽은 아버지 류키치를 닮아 성격이 외골수다, 나는 토모히로의 행복을 가장 바라는 사람이다, 제발 토모히로를 부탁한다’고요. 나는 토모히로를 밝게 해줄 자신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나사 저택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어요."
그것은 평범한 사랑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것 같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토시오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 소우지를 소개받은 것도 그 때였어요. 그는 마치 희귀한 물건이라도 보는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소우지는 자신의 방에 세계 각국의 장난감을 모아놓고 있었죠. 오래된 오르골이 달린 서양의 카라쿠리 인형,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 고베의 흑인 소년의 카라쿠리 인형, 작은 것들로는 스케로쿠(助六)의 날고 뛰는 인형, 단쥬로(団十郎)의 숨은 병풍까지, 거의 모든 유명한 장난감은 빼 놓지 않고 수집하고 있었어요. 그 하나하나를 나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아요. 그런 희귀한 장난감은 나사 저택에는 잘 어울렸는데,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요."
나사 저택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자란 소우지가 장난감 애호가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 듯했다.
"나사 저택에는 울타리로 만든 미로가 있습니다. 나는 그냥 울타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만들어진 미로라는걸 알려준 것도 소우지였어요. 소우지는 자꾸만 안을 안내해 주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왠지 으스스해 보여서 나는 거절했지요. 소우지는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어요. ……어느 날 나는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토모히로의 뒷모습을 봤어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문득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미로 속에서 토모히로를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길을 잃으면 토모히로를 부르면 되겠지, 라며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미로에 발을 들여놓았어요. 어렸을 때 종이에 인쇄된 미로를 손끝으로 따라가면서 놀아본 적이 있을 거에요. 대부분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죠. 내 미로에 대한 지식은 그 정도였습니다. 나사 저택에 만들어진 미로는 실제로 만들어졌으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어요."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거군요."
"네. 미로는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듯 울타리가 무성하고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어요. 어떤 곳은 하늘도 보이지 않는, 마치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고요. 미로라는 게 이렇게까지 방향을 알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어요.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서쪽도 동쪽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원래 왔던 길로 나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 깊숙이, 더 깊숙이 빠져드는 느낌이었어요. 나는 그 미로를 만든 인간의 악의를 알게 되었습니다. 악마 같은 지혜로 정상적인 지각을 망가뜨리는 곳이구나, 라는걸요. 나는 그저 헤매기만 했어요. 그러다 무서워져서 반쯤 울면서 토모히로의 이름을 불렀어요.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긴 시간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미로는 시간 감각마저도 미치게 만들더라고요. 그러던 중 어느 모퉁이에서, 누군가 갑자기 내 눈을 가렸어요. 따스한 손길의 감촉에 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죠. ’왜 좀 더 빨리 오지 않았어요? 내가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기다린거에요?’라고 말했는데, 그 누군가는 내 눈에서 손을 떼지 않고 나를 돌려 입술을 맞닿았어요. ……그리고 나는 깨달았어요. 그건 토모히로가 아니라 소우지였지요."
마사오는 술에 취해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는 특유의 말투가 강조되고, 목소리의 톤이 느슨해졌다. 확실히 술에 취한 것이 느껴졌다.
"...... 미로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토모히로로 착각했던 것 같아요. 나는 소우지를 밀어냈습니다. 소우지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내 손을 잡고 미로를 걸어 나갔어요. 나는 그렇게 당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소우지가 갑자기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 다시 껴안는 것보다는,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더 안전했으니까요. 소우지는 어느 모퉁이를 돌면서 '자, 도착했어요, 아가씨'라고 말하며 손을 놓았습니다. 그곳은 미로의 출구가 아니라 미로의 중심이었어요. 열 평 남짓한 넓이로 중앙에 오각형의 돌로 된 테이블이 놓여 있더군요. 소우지는 돌 의자에 앉자마자 차분히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지요. 나를 훝듯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마사오는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 마사오는 아름다웠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주세요’라고 부탁했지만, 소우지는 '좀 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아니면 혼자 나갈 수 있으면 나가봐요'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과감히 혼자서 미로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중심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버리려고 했지요.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면 다시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이러다가는 언제까지나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겠될까? …… 바보 같지만, 평생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기분은 미로에서 한참을 헤매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거에요. 결국 나는 다시 미로 한가운데로 돌아가야만 했어요. 소우지는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라고 말하면서 저를 안으며 풀밭 위로 밀어붙였어요."
유리잔 안의 얼음이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마사오는 잔에 새 얼음을 넣었다. 그 손길이 답답해 보였다.
"그 후로 소우지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 마다 내 몸을 요구했어요. 그래요. 카츠 씨가 말한 대로 나는 계속 협박을 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거부하면 소우지는 우리의 관계를 토모히로에게 말한다면서 겁을 줬어요. 그게 가장 무서웠어요. 소우지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어요.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카라쿠리 인형을 만지작거리듯 나와의 접촉을 즐긴 것 뿐. 하지만 소우지는 선천적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특히 토우이치가 태어난 후, 토모히로에게는 남자로서의 힘이 없어졌어요. 변명 같지만, 그런 것도 있어서 나는 소우지가 말하는 '둘만의 금지된 맛'을 배우게 되었어요........ ......"
격정이 마사오를 덮친 것 같았다. 입술이 떨리고 목소리 톤이 변했다.
"하지만 더 이상 싫었어요. 그런 거짓으로 가득 찬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토모히로에게 고백할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해외여행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행 중에 당신에게 모든걸 털어놓기로 결심했지요."
마사오는 토시오를 당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피로와 상처와 취기가 토시오에게 토모히로의 성격을 부여한 것일까.
"당신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어요. 당신이 해바라기 공예를 떠날 마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도 소우지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
마사오는 최면에 걸린 듯이 말했다.
"화내지 말고, 한 가지 더 얘기할 게 있어......., 당신 듣고 있어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토시오는 토모히로로서 대답을 주저했지만, 마사오의 감정에 이끌려 대답했다.
"...... 듣고 있어요."
토시오는 작게 말했다.
"기쁘다……"
마사오는 토시오를 붙잡고 입술을 밀착시켰다. 마사오의 입술은 부드럽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사오는 대담하게 혀를 내밀었다. 토시오는 반쯤은 포기하고 마사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조금씩 마사오는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마사오는 조용히 얼굴을 떼어냈다.
"...... 또 다른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입니까?"
토시오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팔에서 몸을 떼어내어 탁자 위에 엎드렸다.
"그것만은....... 더는 안 되겠어요….."
잔이 굴러서 양탄자 위에 떨어져 깨져버리고 말았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2020/04/03

[번역] 2DK 개미지옥 - 아토다 다카시

일전에 졸역한 'A 사이즈 살인사건'을 올리며, 반응이 괜찮으면 다음 편도 번역하겠다고 약조한 바 있습니다. 너무나도 엉망인 번역 탓에 송구스럽지만, 즐겨주신 분이 계신 듯 하여 다음 편인 '2DK 개미지옥'도 소개해 드립니다. 의역으로 가득찬 졸역이지만, 추리적으로는 전작보다 훨씬 나은 작품이라 생각되니, 사회적 거리두기로 한창 심심하신 분들께 위안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관리 측면에서 좀 길지만 한 편으로 올리는 점, 참고 부탁드려요.

도요코 선의 N 역에서 하차하여 서쪽의 개찰구로 나오면, 길고 완만한 오르막 언덕이 나타난다.
"아저씨, 비켜비켜! 비켜요!"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아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위험하잖아!"
사무라 에이스케는 다급하게 보도 옆으로 몸을 피했다.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 옆을 지나갔다.
언덕의 길이는 50여 미터, 경사는 78도. 확실히 스케이트보드를 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학교에서는 분명히 도로에서 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시키고 있겠지만, 개구쟁이 아이들이 귀담아들을 리가 없다.
"뭐, 다른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사무라는 석양빛으로 길게 드러워진 아이들의 그림자를 뒤로 한 채, 다시 서둘러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을 오르면 바로 묘법사다. 절에는 산호(山呼)와 사호(寺呼)가 있는 법이니, 묘법사도 정식으로는 어딘가산 묘법사라고 불러야겠지만, 사무라도 산호까지는 모른다. 똑같이 시체를 취급하는 장사라도, 수사 1과의 형사가 산호까지 알 정도로 절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 리는 없다.
산호가 있는 건 절이 분명 산 위에 있기 때문이다. 묘법사 정문까지 긴 고갯길이 이어진 것에서도 그러한 산호의 유래를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 주변도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한적한 산길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회색 빌딩과 콘크리트 포장길이 무표정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 묘법사만 홀로 고집을 부리듯 화려하게 자연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채로 가는 쪽문을 빠져나와 마당 쪽으로 고개를 내밀자, 형형색색의 튤립이 피어 있는데, 툇마루를 따라 화려한 와인잔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
사무라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툇마루 쪽을 향해 말했다.
"여어. 기다렸다고."
감색 티셔츠를 입은 주지 스님이 사무라를 알아채고 고개를 까닥였다. 스님 앞에는 몇 년 전 은거한 노사가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주지 스님은 노사의 머리를 면도하는 중이었다. 노사는 치매가 시작된 후에는 좀처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은 탓이겠지. 사무라와 친한, 현재의 주지 스님은 데릴사위로 노사는 그의 장인이다. 주지 스님이 수행승이던 시절부터 장인의 머리를 깎는 일은 그의 몫이었을 거다. 그 습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으로, 평소엔 멍한 얼굴을 하는 노사도 오늘만큼은 위엄을 떨치듯 고개를 바짝 세우고 있었으며, 그 뒤에서 티셔츠를 입은 스님이 얌전히 면도하는 모습은 시간이 십수 년 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곧 끝나니까. 2층에서 기다리게."
지켜보던 사무라에게 주지 스님이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푹 쉬고 있으라고."
사무라는 현관으로 돌아 나온 뒤, 젊은 수행승의 안내로 언제나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는 아니나 다를까 벌써 바둑판과 방석이 갖추어져 있었다. 오월의 바람이 어디선가 꽃향기를 날라와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살인사건 얘기를 꺼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이렇게 상쾌한 봄날 저녁 스님을 상대로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지내고 싶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스님이 큼직한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사무라 에이스케는 살인 담당 형사로는 아직 신출내기로 쉰을 넘은 주지 스님과는 부모 자식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났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잘 맞았다. 바둑 솜씨는 서로가 상대보다 조금 강하다고 생각하는 정도. 세상에 이렇게 멋진 적수는 없다.
"자, 시작할까?"
스님은 바둑판 덮개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잡을게요'
사무라가 선을 잡았다.
"정선."
"네."
잡은 돌을 세어보니 열한 개였다. 흑을 잡은 사무라는 가벼운 묵례 후, 우상귀에 돌을 두었다. 돌은 고급품으로, 1.5cm 정도의 두께였다. 내려놓은 돌이 바둑판 위에서 살짝 떨렸다.
"오늘은 그쪽부터 두는건가?"
"우선 이쪽 집을 벌어 놓으려고요."
"그렇군."
번갈아 열 수 정도 둔 뒤, 사무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혼잣말하듯 사건을 입에 올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시체가 마중을 나왔답니다."
돌을 집어 든 스님의 손이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이런, 벌써 교란 전술 시작인가?"
"천만에요. 이건 진짜 사건이에요. 지난주 시모키타자와에서 일어난 정말 기묘한 사건이지요."
스님은 사무라의 공격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부처님은 남자였나? 아니면 여자였나?"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수행승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아직 식사하기에는 좀 이르지? 술이나 한잔하자고."
'항상 죄송합니다.'
안주는 죽순조림과 참치 초무침이었다. 닳고 닳은 스님 같으니라고. 술은 흠뻑 취할 정도로 마시고, 남의 살도 매우 좋아한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정말로 밝다. 살아가는 도중에 우연히 묘법사의 사위가 되어 스님이 된 것 같은데, 스님이 되기 전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사무라도 아직 물어본 적이 없다.
수행승이 나가자 사무라가 말했다.
"부처님은 남자입니다."
"그렇군. 그럼, 부처님은 새 신부의 옛날 애인쯤이려나."
"아니,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합니다."
"그럼 신랑의 친구였나?"
"그렇지도 않고요."
"호오. 그럼 신랑, 신부, 그 누구와도 관계가 없다고?"
"본인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 남자가 부부의 2DK 아파트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죽었는데 말이죠."
* 2DK : 방 2개 + Dining Room (식당) + Kitchen (부엌) 으로 이루어진 집
"아이고 부처님, 알몸으로? 그런데 이 돌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나저나 알몸으로 죽으면 안 되지."
스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구석진 돌을 공격해 들어갔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화요일, 5월 9일의 일입니다. 시모키타자와의 그린 아파트에 사는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이죠. 스즈미 코지와 스즈미 료코 부부로...."
"잠깐만. 아파트에 살던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아닐까?"
".….…?"
"그렇지만 맞잖아.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직 부부가 아니었으니까."
"아하하하. 스님의 억지는 당할 수 없네요.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결혼한 건 5월 3일입니다. 아파트를 빌린 것은 4월 중순이고요. 남자가 결혼식까지 혼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뒤 일주일간 규슈를 돌아보았고......."
"그리고 돌아와 보니 세상에나! 벌거벗은 남자가 죽어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 이건 안 돼. 방심하면 안 되지. 엄청난 실수를 할 뻔했군."
스님은 입을 삐죽이며 사무라를 노려보았다. 오른쪽 구석에서 사무라의 흑과 대치 중인 백의 생사가 불안했다. 스님은 얼굴을 바둑판에 묻고 그 돌 무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무라는 어려운 사건을 맡을 때마다, 고양이가 다래나무에 이끌리듯 묘법사를 찾는다. 그래서 스님은 웃으면서 '자네는 뭔가 풀 수 없는 사건을 만나면 절에 발길을 옮기는군'이라고 말하곤 했다.
오늘의 방문도 마찬가지 목적이다. 이번 사건은 정말로 기묘했다. 스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사건이 신고된 날은 5월 9일 화요일이었다. 그날, 시모키타자와의 번화가로부터 조금 뒷골목에 들어간 3층짜리 아파트에 스즈미 코우지, 료코 두 사람이 돌아왔다. 코우지는 굵은 체크 재킷에 밤색 바지, 료코는 꽃무늬 투피스에 연지색 모자를 차려입었다. 낡은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모습이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막 신혼여행을 끝낸 뒤, 걸음걸이도 가볍게 둘만의 스위트 홈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신랑이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도 기다릴 리 없는 방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인기척이 없는 실내에 공기가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신부가 이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결혼식 전에 짐을 나르고 청소를 하거나, 혹은 내친김에 미래의 배우자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이러쿵저러쿵 몇 번이나 이 아파트를 찾았었다. 그러나 정식 거주자로서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시각은 오후 4시가 넘었다. 실내는 밝았다.
"나올 때 커튼 치는 걸 깜빡 한거야?"
며칠 전 신랑은 이 방에서 결혼식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음, 그랬었나?"
코우지는 자신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료코는 시원시원하게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그런 다음 오늘부터 자신이 지배하게 될 땅을 점검하듯 부엌을 살펴본 뒤, 욕실 문을 열었다. 순간 숨을 삼키는 듯한 기색이 흐르고, "꺄악!"이라는 비명과 함께 료코가 도망치듯 튀어나왔다.
"왜 그래?"
"사, 사, 사람이......"
료코는 남편에게 매달려 욕실 쪽을 가리켰다. 코우지는 옆에 매달아 놓은 프라이팬을 손에 들고 조심조심 욕실로 향했다. 프라이팬을 든 것은 무의식중에서도 무기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기는 필요 없었다.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욕실 좁은 욕조 속에서 한 남자가 목을 늘어뜨린 채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죽었어."
"정말?"
"틀림없어……. 가스가 새고 있어."
확실히 욕실에 발을 들여놓자, 날카로운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즈미 코우지는 서둘러 욕실 창문을 열고 가스 욕조의 밸브를 잠갔다.
"누구야? 이 사람은?"
료코가 코를 막으며 물었다.
"모르겠어. 난 몰라, 이런 남자."
코우지는 숨을 멈춘 뒤, 다시 한번 욕실로 돌아가 시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34, 5살쯤 되어 보이네."
시체는 섬뜩했지만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야. 도대체 누굴까..... 너는 어때?"
새신랑은 "너"라는 호칭을 약간은 어색하게 사용하며 아내에게 말했다. 료코는 두려움을 억누르려는 듯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며 욕실을 들여다보았다.
"몰라, 이런 사람."
"그래도 모르니까, 잘 봐."
"잘 보라니......몰라."
"좋아. 어쨌든 경찰에 전화하자."
"으....."
축복받아야 할 새로운 삶의 첫걸음은, 낯선 노출광에 의해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죽은 남자의 신원은 알아냈나?"
묘법사의 주지 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위, 아래로 움직여 바둑의 형세를 가늠하며 물었다. 바둑은 중반의 접전을 끝내고 종반전에 진입한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전황은 사무라가 우세했다. 스님은 형세를 단번에 만회할 수단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이제 둘 곳도 없는 곳들을 상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둘 데가 없을걸요? 그 근처는."
"응. 없는 것 같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심야 방송을 들으면서 공부하는 게 효과적이라는데, 스님의 두뇌도 그런 구조인 것 같다. 바둑을 두면서 동시에 사건을 추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둑이 별로일 때에는 아직 추리 쪽도 정리되지 못한, 암중모색의 단계이다. 아까부터 변변한 수가 없는 걸 보면 스님의 추리는 아직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한 듯 싶었다. 사무라는 이 상태에서는 적당히 스님의 비위를 맞추며 질문에 대답하는 게 제일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했느냐 하면……."
사무라는 흑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걸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되지...."
팟! 하고 스님의 흰 돌이 응전해왔다.
"우리 경찰은 우수합니다. 당연히 밝혀냈죠."
"그렇군."
"미나토구의, 가전 제조업체 경리부에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이름은 코이즈미 노부히코, 나이는 37세. 가족으로는 아내와 자식은 두 명…….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와 유치원 다니는 남자아이입니다. 세타가야의 공단 주택에 살고 있고, 월급은 20 수만엔 정도. 잔업 수당은 부인에게 주지 않고 모두 용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듯한 평범한 직장인이고, 취미는......"
"골프와 마작."
"그것도 추리인가요? 하지만 틀렸습니다. 골프도 못 치고, 마작도 못 한다네요. 취미는 산책과 사교댄스, 그리고 패션이었답니다. 멋 내기를 좋아했다는군요."
"술은?"
"조금."
"유흥 업소는 다녔던가?
"스님이 그걸 물어볼 거로 생각해서 회사 동료에게 물어봤죠."
"잘했네. "
"직장인이라 가보긴 했지만, 부지런히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는군요. 구태여 말하자면 적당하였달까요?"
"흥, 흥......"
스님은 갑자기 화제를 바둑으로 돌렸다.
"어, 거기 그런 수가 있었나?"
"이쪽 돌은 덕을 좀 본 것 같죠?"
"이미 대세에 영향은 없나."
"그런 셈이죠."
"확실히, 여기서 끝났구먼."
"그런 것 같네요."
"유감이군. 이번에는 내가 졌네. 잠시 모습을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늘었는걸? 수사는 대충 하고 바둑책을 읽으면서 공부한 거 아냐? 덕분에 범인은 전부 다 놓치고 말이야."
"와, 엄청난 말씀이시네요. 스님 쪽이야말로 틈나는 대로 비밀로 전해진 전설의 두루마리를 숙독하면서 공부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아니, 환절기에는 부처님이 되는 사람이 많아서 절도 꽤 바쁘다고."
"그래요?"
계가해 본 결과, 흑집은 마흔 둘, 백집은 스물셋으로 덤을 빼도 무려 열네 집 반의 승리였다.
"아이고 망신스러워. 이건 대패야 대패."
스님은 갑자기 생각난 듯 손을 두드려 술을 추가 주문했다.
"그러면 다시 한 판 더?"
"네, 네."
첫판에서 사무라가 이기면 스님은 분해서 꼭 다음에는 이기려고 한다. 착수도 날카로워졌고, 그 영향으로 추리 쪽도 좋아진다. 사무라에게는 더 바랄 나위 없는 결과였다. 사무라는 따끈하게 데운 술을 목구멍에 흘려 넣고, 맛있게 버무린 초무침을 한 입 깨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흑으로 시작하지."
"네."
바둑돌을 치운 뒤,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스님은 흑 1, 3, 5로 시작하는, 슈사쿠 명인의 포석으로 두기 시작했다.
사무라가 손을 잠깐 멈춘 사이,
"그 살해당한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하고 스님 쪽에서 교란 전술을 써왔다.
"고이즈미 노부히코입니다."
"그래그래. 그 고이즈미와 신혼부부의 관계는?"
"그게 아무래도 확실치 않아요."
"호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남편은, 이런 남자는 전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아내 역시 이런 사람 알 리가 없다고 경찰에서 줄곧 증언하고 있거든요."
"그럼 왜 그 남자가 아파트에 있었지?"
바둑은 포석이 끝나고,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심사숙고가 필요한 중반의 공방전에 돌입하였다. 사건의 추리도 조금씩 조금씩, 까다롭고 어려운 부분을 향하였다.
"그게 문제라고요. 아파트 관리인이나 이웃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그런 남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 고이즈미 누군가가 전에 그 아파트에 살았던 건 아니겠지?"
"맞아요. 그 부분은 정말로 아주 상세하게 수사를 진행했는데, 고이즈미 노부히코와 그린 아파트를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아, 깜빡했네!
스님은 정석대로 흑돌을 놓으며 외쳤다.
"뭘요?"
"살인사건이 맞나?, 애초에, 욕실에는 가스 냄새가 났었잖아? 사고사 가능성은 없나?"
이번 한 수로 흑이 형성한 빗살 모양 세력이 백의 중요한 지점을 단절시켰다. 스님의 수는 두면 둘수록 점점 날카로워졌다.
"사고사 가능성도 있습니다. 목욕탕의 가스 욕조는 뚜껑을 닫으면 불이 꺼지도록 만들어진 물건인데, 고무관을 연결한 부분이 느슨하더군요. 그 부분에 가스 누출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하죠."
"하지만 자네 말로는 신혼부부는 아파트로 돌아가서 한동안 가스 냄새를 눈치채지 못했잖아? 작은 아파트 목욕탕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가스가 샜는데, 거실 다다미방에서 알아채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나?"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부부에게 물어보니 남편은 현관을 열자마자 약간 가스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했다 하고, 부인은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너무 놀라서 냄새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욕실에 얼마나 가스가 차 있었는지도 정확히는 알 수 없고요.".
"나중에 테스트 해봤을 거잖아. 같은 욕조로."
"물론이죠. "
"어땠나?"
"어느 쪽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전문가는 꽤 오랜 시간, 대략 한 시간 정도 가스가 누출된다면 모르고 목욕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응, 응. 그렇지. 가스 중독은 먼저 운동 중추를 마비시키니까. 뭐지? 몸이 이상한데?라고 깨달았을 때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스님은 부처님 만드는 법도 잘 아시네요."
"그런 거북한 소리 말라고. 그것보다도 구석의 이 대마 말이야, 이 녀석도 부처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아무리 스님이라도 좀 힘들어 보이는데요?"
"그래, 그래."
스님은 다시 바둑판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무라는 화제를 되돌렸다.
"그래서 욕실 정황만으로는 뭐라 말할 수 없어요. 목욕탕에서 가스가 누출되어 일어난 사고사는 도내에도 매년 몇 건씩 신고되니까요."
"그럼 고이즈미 누군가 씨도 사고사라고 하는 게 어때? 경찰도 바쁠 거잖아."
"가능하다면 그렇게 처리해버리고 싶기는 합니다. 위에서도 그럴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사인도 마침 일산화탄소 중독이니까요. 하지만 피해자가 어째서 생면부지의 집에서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문제에요. 그것 때문에 최소한 저는 그렇게 간단하게 사고사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국민의 경찰, 민중의 지팡이로서 말이죠."
"고맙군그려."
탁! 소리가 났다. 바둑판 위의 돌이 흔들렸다. 두 번째 판은 스님의 우세로 흘러가고 있다.

시신이 발견된 그린 아파트는 콘크리트 3층 건물로 문제의 방은 306호실, 계단을 올라 안쪽에서 두 번째 방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다다미 넉 장 반쯤 되는 식당 부엌이 있고, 오른쪽 안쪽으로 가스대와 싱크대가, 왼쪽에 좁은 널빤지를 세워놓은 듯한 욕실 미닫이문이 있다. 식당 겸 부엌의 안쪽은 다다미 6장짜리 방, 그 안쪽으로 다다미 8장짜리 방이 있는데 신혼부부는 이곳을 침실로 삼으려 했는지 큰 더블베드, 그리고 막상막하로 큰 옷장이 놓여 있다. 사체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각은 발견된 시간으로부터 40시간에서 45시간 전, 즉 전전날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의 사이이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질식사. 사체에 외상은 전혀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약물의 흔적도 없었다.
"자물쇠는 구석구석까지 채워져 있었겠군."
바둑은 세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판은 스님의 압승. 사무라는 도중에 돌을 던졌다.
"맞아요. 그리고 혹시 창문이 잠겨있지 않았었더라도 방은 3층이고 창문 밑은 절벽입니다. 현관 말고는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어요."
"현관문은 확실히 잠겨 있었나?"
"남편인 스즈미 코우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누군가의 옷과 신발은?
"있었어요. 욕실 미닫이문 위에 선반이 있는데, 거기에 놓인 의상 바구니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군."
세 번째 판은 중반까지 느긋하게 진행되었다.
"팬티, 셔츠, 양말, 이름이 새겨진 와이셔츠, 영국제 양복 상, 하의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습니다. 주머니에는 명함, 던힐 라이터, 테크노 시계 등. 신발은 구찌 제품으로 신발장 안에......"
"고급품뿐이네. 누군가의 지문은?"
"선명한 것은 침실에서 두 개, 다다미 6장짜리 방 하나, 부엌에서 목욕탕까지 일곱 개 정도."
"기묘하군."
스님이 과장되게 팔짱을 꼈다. 뭔가 복잡한 생각이 뇌리에 오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팟! 사무라의 흑집 안에 백돌을 놓았다. 세력을 새롭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신발에 붙어있는 흙은 아파트 부근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군."
"뭔가 아시겠어요?"
"아니, 아직 아무것도……. 신혼부부 사이는?
"좋은 것 같아요. 뭐, 신혼부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만....... 신랑 선배의 권유로 맞선을 보고 6개월의 교제 끝에 결혼. 당사자들은 물론 양가 부모님들 모두 좋은 인연이라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둘이 죽은 남자를 모른다는 게 정말이겠지?"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정성 들여 수사했지만, 고이즈미와 부부, 구리고 그린 아파트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저도 부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확실하겠지."
"이거 참, 송구스럽네요."
"죽은 고이즈미는 어떤 사람인가?"
"평범한 직장인인데, 여자관계는 깔끔하지 못한 편입니다. 4년에 한 번꼴로 부인을 울렸거든요."
"올림픽 같은 남자잖아."
스님은 자신의 농담을 즐기듯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바둑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말 별난 사건이구먼."
"예, 뭐......"
"죽은 남자의 회사는 그래, 경기는 괜찮았다던가?
"최근 몇 년 동안의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요."
"그래?"
스님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사건을 생각하고 있는지 바둑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사무라 쪽도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좋다.
"좋아."
생각을 마친 스님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사무라의 흑 세력을 비집고 장렬하게 돌을 내려놓았다. 묘수였다. 백에게도 위험한 수였지만, 흑으로서는 도무지 뾰족하게 응대할 방법이 없는 멋진 수였다. 무리해서 장렬한 싸움을 시작하더라도, 결과는 흑의 패배임이 눈에 보이듯 뻔했다.
"아! 굉장한 묘수네요. 완전히 당했습니다."
"아니야, 이쪽도 약점이 있어."
그러나 스님이 승리를 확신했다는건 말투로도 잘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스님의 추리도 막바지에 이른 게 틀림없다.
"사무라"
"네."
"자네, 피아노 칠 줄 아나?"
"아뇨, 음악은 전혀 재능이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자네 아파트에서는 피아노를 쳐도 되나?"
"예, 일단은요. 피아노를 치든, 방망이를 두드리든 뭘 해도 상관없습니다. 해 본 적은 없지만요."
"그럼 그린 아파트는 어떨까?"
"글쎄요......"
"그린 아파트에서 피아노를 쳐도 되는지,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되는지, 이 점을 조사해 주게."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기묘한 질문이 사건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무라는 검은 수첩을 꺼내 스님의 질문을 적었다.
"아무래도 바둑은 이것으로 끝이군요."
스님의 한수로 반상 위의 모든 싸움은 끝났다. 계가해보니 백의 일곱 집 반 승. 종반전에서 스님의 수가 절묘했던 덕분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사무라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니, 아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건 쪽 말인데...."
"네, 네."
스님은 뒤섞여 있는 돌들을 색깔별로 골라낸 뒤, 손끝으로 좌우로 나누며 말했다.
"신혼부부 아파트 침실......"
"예......?"
"거기 옷장 서랍......"
"네?"
"거기에 자석에 달라붙는 게 몇 개나 들어 있을까?"
"그걸 조사해야 하는 거군요."
"맞아. 내친김에 죽은 고이즈미 누군가 씨. 이 사람은 텔레비전 영화 따위를 보면서 자주 졸지 않았는지, 부처님 부인에게 물어봐 달라고. 그리고 사건이 있었던 306호실, 베란다에 러닝머신이 놓여 있었는지, 커다란 화분은 없었는지......"
"글쎄요. 그건 분명히......"
"일단 알아봐 달라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그린 아파트 306호실에 살았던 여자 중에서는 누가 수학을 제일 잘했을 것 같은지......"
"네? 그런 거 물어본다고 알아낼 수 있을까요?"
"뭐, 괜찮아. 아무튼 물어보라고."
"관리인이나 이웃을 만나서 어떻게든 대답을 모아보겠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해서 수학을 제일 잘할 것 같은 여자를 알아내면, 그녀를 만나서 수학을 제일 잘하는 여자를 만나서 개미를 좋아하는지 물어봐 줘."
"개미라니……. 그……. 저…. 설탕에 꼬이는 그거요?"
"그렇고말고."
"점점 모르겠네요"
"그렇게 불평하지 말고 한번 해 보라고."
"물론 물어보고말고요. 다른 건 없나요?"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오늘은 그 정도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알아낼 수 있겠나?"
"글쎄요."
사무라는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적은 수첩을 쳐다보았다.
"모레, 이틀 후 점심때까진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그거 딱 좋군그래. 나는 그날 2시 즈음까지는 잠깐 본업 쪽 일이 있어서 외출하지만, 3시 이후에는 완전히 비어 있거든. 또 바둑을 두러 오라고. 오늘은 내가 이겼지만, 모레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저는 항상 살인사건을 떠안고 다니기 때문에 바둑에 집중하는 건 어렵단 말입니다."
"천만에. 나야말로 자네가 힘든 숙제를 가져오기 때문에 여러모로 힘들다고."
"그럼, 이번의 숙제는 모레 무사히 해결될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지금 여기서 스님의 추리를 물어봤자 말해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모레의 즐거움. 사무라는 그때까지 스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탐문과 조사를 해 올 수밖에 없다.
"정말 귀찮게 해드렸습니다."
"조금만 더 붙잡고 싶긴 하지만, 자네도 바쁘잖은가."
"그럼 실례했습니다."
현관을 나서자 부드러운 바람이 또 어디선가 농밀한 꽃향기를 실어 온다. 사무라는 향긋한 냄새를 가슴 가득히 담으며 긴 고갯길을 내려갔다.

이틀이 지나고, 스님에게 부탁받은 조사를 모두 마친 사무라는 약속한 3시에 맞춰 묘법사로 이어지는 언덕을 올라갔다.
"아저씨, 위험해요!"
그저께와 같은 개구쟁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언덕을 내려왔다. 사무라는 아이와 지나쳐 절의 입구를 통과했다.
"실례합니다."
"시간을 딱 맞췄군."
스님이 감색 줄무늬 옷을 입은 채 현관으로 나왔다. 지금 외출에서 막 돌아온 것 같았다.
"모처럼이니까 한 판"
"네."
사무라는 한시라도 빨리 스님의 입에서 범인으로 점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듣고 싶었지만, 묘법사 주지 스님의 두뇌는 언제나 바둑돌의 움직임과 함께 활동을 개시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바둑을 두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자, 오늘은 기껏해야 한 판이겠네."
스님이 선을 잡은 결과, 사무라가 흑이었다.
"글쎄요. 과연 어떨지....."
"어때, 부탁한 조사 쪽은?"
"네, 다 조사를 마쳤습니다. 만족하실지 어떨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아니, 아니, 천만에."
"우선 피아노는 말이죠."
"그래."
"치는 건 금지입니다. 뻐드렁니에 쭈글쭈글한 아줌마로 엄청나게 짜증나는 스타일인 아파트 관리인이 신경질적으로 답하더군요. 벽이 얇아서 이웃에 폐를 끼치니까 악기류는 절대 사절! 이라고요."
"개,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금지지?"
"아, 그렇습니다. 잘 아시네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드네."
"그리고 다음에는......"
사무라는 주머니의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맞아, 맞아. 양복장 서랍에 자석에 달라붙는 게 몇 개 들어 있는지......"
"맞네 "
"스님의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조사해 왔습니다. 손톱깎이, 가위, 양복장 열쇠, 부서진 시계, 클립, 회사 배지, 금속 빗, 안전핀, 샤프펜슬의 이상 아홉 개가 자석에 붙었습니다. 샤프펜슬은 플라스틱이지만 연결 부분이 쇠로 되어 있어서 붙더라고요. 대충 이 정도입니다."
"수고 많았어."
"그다음에 죽은 고이즈미 노부히코가 TV를 보면서 자주 졸았는지 여부였죠? 이건 부인에게 물어봤어요."
"아, 4년마다 눈물을 쏟았다는 올림픽 부인?"
"맞아요. TV를 보면서 선잠 자는 건 항상 자기였으며, 남편은 졸지 않는 쪽이었다고 대답하더군요. 하지만 곧바로 이런 질문이 수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가운 눈총과 함께 쏘아붙여서 혼났습니다."
"그건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조사한 건……."
"이봐, 자네 차례야."
"아, 고맙습니다."
사무라는 스님만큼 편리한 이중구조식 두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바둑 쪽에는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
"다음은 베란다에 러닝머신과 화분이 있는지였죠?"
"그래. 맞아."
"스님에게 그걸 들었을 때, 나도, 어라?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조사해 봤습니다. 그런데....."
"베란다가 없었어?"
"맞아요. 아예 베란다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베란다에 러닝머신이든 화분이든 놓을 방법도 없죠. 창밖에 있을 수 있는 건 공기와 유령뿐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정말이에요? 바둑처럼 억지 부리시기 없습니다."
"바둑 쪽도 억지 따위는 부리지 않는다고. 어차피 요즘은 이기기만 하니까 억지 부릴 기회조차 없잖은가?"
"어, 그랬나요?"
"이론보다 증거. 이 수는 어떤가?"
스님이 둔 수에, 사무라 오른쪽 세력이 갑자기 약해졌다. 묘수였다.
"이건......"
"괜찮았지?"
"음....."
절묘한 수를 보니, 스님의 뇌세포는 최고조로 향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조사 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예상대로 지금까지 306호실에 살았던 여자 중에 누가 가장 산수를 잘하는지였습니다."
"산수가 아니야. 수학이라고."
"아, 맞네요. 하여튼 이웃 등을 조사한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3년 정도 전에 이사 간 미야오 씨라는 젊은 부인이 가장 잘하는 거로 결론났습니다. 이분은 약사 면허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이과 전공이라면, 당연히 제일 수학을 잘했을 거라는 이유죠."
"그러면 그 젊은 부인에게, 개미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는가?"
"네, 찾아가 물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권투 선수 말인가요? 라고 되묻더군요."
"무하마드 알리와 착각했군."
* 일본어로 개미는 '아리'
"네, 그래서 권투 선수가 아니라, 곤충인 개미 이야기라고 했더니,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라고요."
"그 여자는 매력적인 외모에, 두 살쯤 된 아기가 하나......"
"세상에, 맞아요! 스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팟! 스님이 돌을 한층 더 강하게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그 여자가 범인이니까"
"정말요?"
사무라는 아연실색하며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동기는? 어떻게 살해한 거죠?"
"본좌는 억지를 잘 부려잖나.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는 없지."
"억지는 농담이었습니다만... 빨리 알려주세요."
"자네 말을 하나씩 하나씩 듣다 보면, 이쯤에 범인이 숨어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
"자 보라고. 죽은 남자에게는 아무런 외상이 없고, 구두에는 아파트 부근의 흙이 묻어 있다고 했지?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고, 죽은 누군가 씨는 덩치가 상당히 큰 데다가 306호실은 후미진 곳에 있고 창문은 높아. 이런 걸 종합해보면, 누군가 씨는 자신의 두 발로 걸어서 306호실에 왔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해."
"그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사교댄스를 좋아하고, 패션을 좋아하는 멋쟁이고, 여자 문제로 4년에 한 번꼴로 아내를 울리는 남자가 한밤중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아파트를 방문했다는 것은……. 소모산 (作生)!"
스님이 웃으며 선문답의 표어를 외쳤다.
"즉, 여자겠죠."
사무라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306호실의 실제 거주자들은 한창 신혼여행 중. 그렇다면, 이 방에 들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유력한 건 관리인이겠지. 하지만 관리인은 고이즈미 누군가 씨가 도저히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짜증나는 쭈글쭈글 아줌마였어. 맞지?"
"네."
"그렇다면 그다음 후보는 306호실의 이전 거주자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이사할 때 방 열쇠는 관리인에게 돌려주지만, 그 이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여벌 열쇠를 만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그건 그렇죠."
"그린 아파트는 피아노를 쳐도 안 되고,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아파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사를 할 수밖에 없어."
"그렇군요."
"그렇다면, 306호실에는 지금까지 몇 명의 젊은 부인이 살았으며, 그 부인들이 아이를 낳은 뒤 어디론가 이사를 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해. 또 요즘 젊은 부인들이 남편 몰래 남자 친구를 만들고 있을 확률은 약 8%라고 하지."
"정말입니까?"
"아하하하. 주간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 매력적인 부인이라면 좀 더 비율이 높을지도 몰라."
"음, 확실히 그 젊은 부인, 미야오 유키에 씨라고 합니다만,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경찰이 이상한 관심 가지지 말라고."
"아이고, 이거 참, 잘 알고 있다고요."
"그 젊은 부인은 예전에 어딘가에서 고이즈미 누군가 씨를 알게 되어 불장난을 시작했던게 아닐까? 사교댄스를 추는 댄스홀에서 만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고이즈미 누군가는 별로 좋은 남자는 아니었어. 대단한 악당은 아니지만, 남의 약점을 잡은 뒤 협박하여 용돈을 갈취하는 정도의 범죄는 저질렀을 거야. 목욕탕 선반에 놓인 영국제 양복, 신발장의 신발은 경기가 별로인 회사에 다니는 월급이 20수만 엔인 월급쟁이에게는 사치스러우니까. 미야오 유키에 씨도 이 남자에게 협박을 당했겠지."
"그게 살인의 동기였을까요?"
"아마도. 마지막까지 몰린 나머지 살의를 품은 거야. 3년 전에 살고 있던 아파트의 열쇠를 이용할 생각을 한 뒤, 간단한 조사를 통해 지금 사는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떠나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운다는 걸 알아내고는 범행에 이용한걸세. 결혼과 신혼여행은 널리 알리는 경사이니만큼, 이웃에게 물으면 곧바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그 틈을 타서 남자를 유인해서 죽인 거야."
"그랬군요."
"남의 아파트를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속이고는, 남편이 출장을 갔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만나고 싶다는 정도만 말해도 플레이보이 고이즈미 누군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 조심을 거듭하여 몰래 숨어들어왔을 테지."
"그리고 그곳에서 목욕을 시키다가......"
"그건 아니야. 가스 목욕 중에 사고로 죽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계획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어려워. 일단 가스가 새는 상태에서 욕조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죽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나 자네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에게는 조는 버릇이 없었어. 욕조에서 자는 사람은 상당히 선잠을 좋아하는 사람일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하잖은가. 설령 졸았다 해도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약물 흔적도 없고."
"과연, 일리 있네요."
"게다가 범인으로서는, 혹시라도 이웃들이 가스 냄새를 눈치채면 큰일이란 말이지. 그런 위험한 짓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럼 어떻게...?"
사무라는 남은 돌을 바둑판 위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어라? 돌을 던지는 건가?"
"네, 도저히 승부가 안 되네요."
"음, 그렇겠지, 그렇겠지. 그러면 사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고이즈미 누군가가 살해된 건 목욕탕이 아니었어.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는 더 좁고 밀폐된 곳이 필요했어. 바로 침실 옷장이지. 옷장 열쇠는 서랍 속에 있었지? 자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말이야."
"자석에 달라붙는 게 뭔지는 그래서 조사를 시키신 거군요. 그런데 남자는 옷장 안에 왜 들어간 거죠?"
"여자가 시켜서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려는 찰나! 여자가 남편이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겠지. 방은 3층이고, 창문 밑은 절벽이야. 도저히 도망칠 방법이 없어. 숨을만한 베란다도 없는 데다가 알몸이고. 그 상황에서 고이즈미 누군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여자가 빨리 옷장으로 들어가요! 라고 말하면 들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지. 그 뒤 옷장 문을 밖에서 잠가야만 열 수 없다는 설명을 들으면,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 버려도 수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테고."
"스님, 보고 오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하하, 그럴 리가. 하지만 이 추리는 대충 맞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건 미야오 유키에 씨에게 자네가 개미 좋아하느냐고 물어봤기 때문이지. 그때 그녀가 새파랗게 질렸다고 했잖은가.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추리가 맞다는걸 롹신했다네."
사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개미를 좋아하면 어떻다는 것일까. 스님은 즐거운 듯이 웃고 있다.
"도시가스 냄새는 강하니까. 수면제라도 먹이지 않는 한 그렇게 쉽게 큰 남자를 죽일 수는 없어. 옷장 안에 숨어 있어도 가스 냄새가 나면 남자는 난리가 날 테고. 그래서 범인은 냄새가 없는, 순수한 일산화탄소를 맡게 할 생각을 한 거야. 그 뒤 사고사로 수습되기를 꿈꾸며 시체를 욕조에 집어넣은걸세. 잘만 됐더라면, 뭔가 이상한 사고사로 대충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
"그런 걸 생각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실행까지 하려면 확실히 화학에 대해 지식이 필요해. 그래서 수학을 잘하는 여자라는 힌트로 찾아보라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약사님이 등장하시더구먼."
"예"
"실험실에서 일산화탄소를 만들려면, 황산과 개미산을 혼합하면 된다네. 옷장 뒤에 구멍을 뚫어 튜브라도 꽂아두면, 쉽게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형사에게 갑자기 개미를 좋아하느냐는 말을 듣고 그 부인이 새파래진 것은 그 탓이야. 그녀는 개미라는 말을 들으면, 개미산이라는 특별한 약품을 떠올릴 수밖에 없거든. 범행이 인상 깊게 남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여자가 범인이라는 걸 확신한거야. 뭐, 일부 세세한 점은 내 추리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욕실에서 가스 중독을 시키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뒤, 내 추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네...."
스님은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건 신식 개미지옥이네요."
"그거 딱 어울리는 말이구먼. 이제부터 그린 아파트로 가서 옷장 뒤에 구멍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그다음에는 그 여자, 미야오 유키에 씨를 다시 한 번 방문한 뒤, 옷장 뒤에 개미구멍이 있었다고 말해 주라고. 매력적인 여성분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몹시 기대되는구먼."
놀랍게도, 스님의 추리는 이번에도 적중했다.

2022/12/25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1권과 동일하게 각종 사건들의 상세한 소개에 더해 수사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던 법의학, 법과학 방식이 소개되는 논픽션입니다. 이번에는 거짓말 탐지기, DNA 분석, 루미놀 시약, 삭흔, 뼈, 법보행 등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범죄의 종류 - 실종, 도굴 - 이라던가 수사 방식 - 잠복, 공개 수배 -, 범인의 특징 - 싸이코패스, 피해망상 -, 단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 자백, 간접증거 - 등 많은 범죄 관련 소재가 언급되고요. 이건 법의학과 법과학 관련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걸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건 쪽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점 첫 번째는 여러 지능범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체 인멸, 현장 조작에 알리바이 트릭까지 사용하는 놀라운 범인들의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기할 점은 범인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범인들의 행태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사형 제도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네요.

특정 주제에 맞는 대표적인 사건을 선정하기 쉬웠을 1권보다는 주제부터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는건 아쉽지만, 상세한 사건 정리가 여러 자료와 도판 등으로 뒷받침되는 좋은 범죄 논픽션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두 타석 연속 장타!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던 범죄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몇몇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아산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1).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현장에 다시 침입했습니다. 양초를 이용한 장치로 시간 조작 방화를 일으키려고요. 범인은 집을 비웠던 시간에 영화 다운로드를 걸어 두어서 집에 있는척 했다는 알리바이 트릭까지 써먹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만화와 다른 법입니다. 범인은 한 달도 더 지난 사건 당일 행적을 너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했던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서 덜미가 잡히고 말거든요. 체포되어서 다행입니다.

"환경 미화원 살인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2). 추리 소설에서나 봄직했던 정교한 시신 유기가 놀라왔던 사건입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철물점에서 사온 5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100리터짜리 종량제 쓰레기 봉투 2장을 덧씌웠습니다.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보이도록요. 그리고 환경 미화원이었던 범인은 자기 담당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은 뒤, 다음날 시신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에 던져 넣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전주 시내의 한 소각장으로 이동 후 소각 처리되고 말았다는군요. 무섭습니다.

"거여동 여고 동창 살해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3). 단순 질투로 친구와 친구 아이 두 명을 살해했던, 비상식적인 잔혹함으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사건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에 목장갑만 꼈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정도의 지능범으로 방 열쇠를 넣은 핸드백을 방범창 안으로 던져 넣는 식으로 일종의 밀실 트릭까지 사용된, 거의 성공했던 완전범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손에 현장에는 없었던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현장 수사관들의 식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종잇조각은 범행 도구로 준비해왔던 페트병으로 만든 빨랫줄 고정판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네요.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을거라고 경찰을 도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집에 범행 기록을 꼼꼼히 적어둔 일기장을 남겨두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시욕' 이라는게 있었던걸까요? 아울러 이런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무기 징역에 그쳤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발 이런 범인은 좀 죽입시다.

"신혼부부 니코틴 살인 사건"

범인은 신혼 여행을 떠났던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 화장을 서둘러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의 부검 감정서로 덜미가 잡힌 경우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혈관 내 다량 투여된 니코틴에 따른 급성 중독사인데, 시신의 왼쪽 팔에서 두 곳, 오른쪽 팔에서 한 곳, 총 세 곳에서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인이 입증되었거든요. 처음 주사했을 때 바로 독성이 나타났을터라, 그 다음 나머지 두 곳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타인이 주사를 놨다는 것이고, 사망 장소에는 남편밖에 다른 이는 없었으니 범인은 뻔한 셈입니다. 단지 돈 목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살해한 인면수심의 뻔뻔한 살인범이라는 특징도 잘 살아있는 사건으로, 남편이라는 놈은 이 증거가 드러나자 자살 방조라고 우겼다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네요. 이런 놈도 좀 죽입시다....

뻔뻔함이라면 "포천 암매장 살인 사건"범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인 범인이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가공할만한 뻔뻔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 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포천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TV 화면을 제시하자, “함께 갔지만 피해자는 포천이동갈비를 먹으러 갔다"고 바로 말을 바꾼다던가, "함께 어머니 산소에 들렀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상식적 변명을 늘어놓는 식이었다네요. 이런 변명이 통할거라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고,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미아동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남아시아계라는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잠복 중이던 형사가 혼혈로 보이는 어린 형제를 보고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 중 큰 아이가 "아빠다!"라고 외쳐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행동이었어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잡아야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혼혈 아이들의 집만 알아내어도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 아빠 신원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울주 노인 연쇄살인 사건" 

사건 현장에 범인의 DNA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폐쇄회로 TV 영상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백 진술과 이 진술에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가 더해지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됐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자백'이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피고인의 자백이 곧바로 유죄 증거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최근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도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또는 기망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되거나, 혹은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땐 자백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고요.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네요. 과거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강도 살인'처럼 허위 자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경우가 많은 탓이겠지요.

"이천 무덤 연쇄 도굴 사건"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행으로 범행 자체는 특기할게 없는데, 피해자가 너무 안타까왔던 경우입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최씨는 부모 무덤이 도굴당한건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믿어서 11년간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친지와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거든요.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버렸는데, 이런건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제주 보육교사 피살 사건" 

미제 사건인줄 알았었는데, 과학 수사를 통해 이전에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던 택시 운전사가 검거되었더군요. 사건 당시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과학 수사를 통해 피해자 사망 시각이 재조정되어 결국 체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동물 사체를 이용한 실험 결과로,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는 그늘인 데다 바람이 심했고, 사후 일주일이 넘은 뒤에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방법이었다네요. 하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어서 경찰은 다시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갔는데, 9년 사이 미세 증거물을 증폭해 보는 기술이 발달한 덕에 다행히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고요. 피해자 옷에서 범인 옷과 동일한 섬유 조각이, 범인의 차에서 피해자 섬유 조각이 수집되었던 것이지요. 섬유 조각이 범인이나 피해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교차 발견되는게 많아지면 둘이 만났다는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요. 

책에서는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단계까지만 언급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용의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나, 섬유 증거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네요. 그 외의 증거들도 용의자가 범인이다! 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쉽습니다. 언젠가 진범이 잡혀 피해자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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