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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0

기억 파단자 - 고바야시 야스미 / 주자덕 : 별점 1.5점

기억 파단자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낯선 방에서 깨어난 니키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노트를 통해 자신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타인의 기억을 개조하는 초능력을 가진 살인마와 대면하게 되는데……. 의지할 수 있는 건 노트와 잃어버린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발달한 뛰어난 추리력과 판단력을 가진 두뇌뿐이다. 니키치는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출판사 책 소개 인용)

"앨리스 죽이기" 등으로 접했었던 공학 박사 학위를 지닌 공대생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편 스릴러입니다. '기억 파탄'이 아니라 '기억 파단 (記憶破断)' 이라는 제목과 책 소갯글 그대로, '기억의 단절'을 핵심 소재로 다룹니다. 기억을 이어 나갈 수 없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 니키치와 타인과 접촉하여 연속된 기억 속에 기억을 추가하여 기억 그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 키라와 한 판 승부에서 단기 기억 상실증은 기억파단 그 자체이고, 기억 속에 다른 기억을 집어 넣어 왜곡하는 것 역시 연속된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니까요.

니키치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로만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대응하며, 이 노트를 통해 키라와 맞서 싸우는데 이를 위해 등장하는 설정들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노트의 사용법과 생활 방법 등에 대한 디테일이 꽤 그럴싸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기억을 온전하게 노트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반전 요소로 써먹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반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후 키라의 범죄 행위가 담긴 USB 메모리를 '서랍에 넣어 놓았다'는 노트 메모를 통해 알게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데 애초에 이 메모 자체가 거짓이었습니다. 키라에게 헛수고를 하게 만들고 실제로 교코를 통해 USB를 안전하게 빼돌리려는 계획이었거든요. 이렇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기억' 그 자체가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병 때문에 쉽게 왜곡할 수 있다는게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 기억을 조작하는 키라의 초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본인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사고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새로운 기억이 생겨난건 분명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논리인데 설득력있지요. 이걸 이렇게 써먹나 싶어 감탄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 이 반전 외에 딱히 건질게 많은,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니키치 관련 주요 설정은 명백히 영화 "메멘토"에서 설정을 따 온 것이니까요. 노트의 메모가 중요하며, 또 자신의 '글씨체'로 기록한 메모만이 중요하는 점과 사진을 주요 기적 보조재로 사용하는 점이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억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박이에요. 나쁜 기억 대신 자신이나 타인이 왜곡한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단기 기억 상실증은 "메멘토" 등을 통해 구축된 설정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나름 설득력이 높은데 반해 키라의 초능력은 너무 허황됩니다. 접촉을 통해 기억을 조작한다는 설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멍이 많아요. 누군가 모르는 사람의 접촉을 쉽게 허용한다는건 상식적이지 않으니까요. 왜곡된 기억이 많아지면 당연히 일어날 여러가지 모순을 정신 붕괴를 일으킨다며 대충 퉁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요. 잘못된 기억이 주입된다면 그 이유를 따져 볼 사람이 없을리 없잖아요? 특정 기억에 대한 반대 기억이 명확한 경우, 예를 들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다' 가 '그 때 다른 누구와 무언가를 했다' 라는 분명한 기억과 겹칠 경우 더욱 그러할테고요. 기억 조작이라는건 전후관계와 디테일을 모두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을텐데 그런 부분은 이런 식으로 모두 대충입니다. 최소한 독자가 흥미를 가질만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어요.
범행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자가 편의점이나 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폭행하고,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수준 이하의 범죄만 저지른다는게 말이 될까요? 심지어 기억 조작도 어설퍼요. 지하철에서의 성추행같은 경우는 피해자와 정의감에 불타 나섰던 사람 2명의 증인의 기억만 조작해서 빠져나가는데, 실제로 니키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 기묘한 상황을 눈치챕니다. 이렇게 백주대낮에 대중 앞에서 벌이는 범죄 행각들이 많다면, 아무리 CCTV의 사각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결국 꼬리를 잡혔을 겁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립니다. 살인마를 쫓고 있는 상황에서, 또 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니키치가 기억을 잃더라도 굉장히 필요한 정보만 잘 떠올리고 기억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딱 좋은 위치와 장소에서 노트 속 필요한 페이지를 읽게 되는 식이거든요. 기억을 잃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보이지 않고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 친구가 기억 상실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에요. 억지로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이런저런 설정들도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니키치를 비롯한 캐릭터들의 묘사가 밋밋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살인마 키라는 그냥 나쁜 놈, 니키치는 성격 묘사없이 그냥 키라와 싸우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분법적인 구분만 있을 뿐 별다른 묘사는 없어서 평면적이고 만화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한데, 매력적인 세계관과 설정 창조는 잘 하지만 캐릭터를 묘사하는 능력은 없는 듯 합니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조력자 도쿠 할아버지나 화법 교실 강사 교코도 다 어디서 본 듯한,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다를게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일부 매력적인 설정과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없지는 않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단기 기억 상실증 관련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이 그러합니다. 작가의 팬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관심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2008/07/17

가타부츠 - 사와무라 린 / 김소영 : 별점 3점

가타부츠 - 6점
사와무라 린 지음, 김소영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이 작품은 총 6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단편집입니다. 제목의 사전적 의미로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네요. 작가의 의도는 소박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어서 쓴 것이라고 하는데, 제목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소박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지만 뭔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의 소유자들이 등장합니다. 주인공들의 고지식함에 관련된 내용은 비록 소설이지만 일반 소시민이 가질 법한 집착이나 생각들이라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고요. 소박한 이야기답게 이야기의 스케일도 작아서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 단편집인줄 알고 구입했는데 추리하고는 거리가 좀 있지만, 구입을 후회되지 않을 만큼 재미있고 신선한 이야기들이었다 생각되네요. 별 3개는 충분한 책입니다.

총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작품별로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첫번째 단편인 “맥이 꾼 꿈”은 유부남 유부녀가 우연찮게 만나 사랑에 빠져 불륜관계가 되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는 이야기입니다.
불륜 관계의 남녀가 남겨지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자살을 결심한다는 전개와 그들의 심리묘사가 소박하면서도 드라마틱 합니다. 각자 자살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도 흥미진진했고요. 그러나 진부한 멜로드라마적인 설정과 마지막의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제일 첫 작품이 제일 처지는 작품이라는 것이 좀 의아했네요.

두번째 단편 “주머니 속의 캥거루”는 쌍둥이 여동생 아코의 뒷치닥거리 때문에 일상이 꼬이는 주인공 다카모리의 이야기입니다. 최후의 순간에 여자친구와 아코 둘 중 한명을 선택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제목이 의미하는 난폭한 캥거루를 제압하기 위해 캥거루에 주머니를 씌우듯, 아코를 돌봐주려 하지만 외려 그녀가 족쇄가 되어 자유의지를 잃는 과정이 담담하고 디테일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희한한 집착. 이 단편집의 명제를 잘 드러내 줍니다.

세번째 작품 “역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역 개찰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취미인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이상적인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 한 여자, 그리고 그녀가 기다린 남자였지만 그녀를 외면해 버린 남자에게 급작스런 살의를 품게 된다는 전개인데요. 독특한 취미가 인상적이고 이 취미를 통해 한 평범한 남자가 살의를 품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표현된 작품입니다. 평범함 속에 비일상적인 설정을 끌어들이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인 작품이기도 하고요. 가장 비일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가장 끔찍한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마저도 소박하게 전개하는 솜씨가 참 대단하다 생각됩니다.

네번째 작품 “유사시”는 아들에게 갑자기 닥쳐올 사고에 대한 강박증에 빠진 한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강박신경증에 대한 묘사도 세밀하지만 그러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반전이 인상적인 소품입니다. 정말로 소박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인데 디테일한 심리묘사로 반전까지 이르는 과정이 마음에 들더군요.

다섯번째 작품인 “매리지 블루 마린 그레이”는 사고로 인해 3년전 이틀의 기억이 없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여자친구의 고향을 찾는데 그 고향 바닷가의 풍경이 기억 나지만 왜 기억이 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 수 없고, 3년 전 그 기억이 없는 날 그 장소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뒤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30년도 아니고 3년도 아니고 딱 3일의 기억상실. 정말 소박하다 못해 눈물날 정도인 설정입니다. 3일의 기억 상실로도 사람이 극단적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라는 것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반전도 마음에 들었고요.

여섯번째 작품인 “무언의 전화 저편”은 한 연립주택 앞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당시 피해자 옆집에 살던 다루미 간토라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비명소리와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을 무시하고 나와보지도 않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현대 사회의 매정한 세태를 그리는 듯 하지만 우리 옆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와닿는 점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중간중간의 복선을 통해 마무리되는 결말도 깔끔하고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2020/03/21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히가시노 게이고 / 최고은 : 별점 2.5점

옛날에 내가 죽은 집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반전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년전 헤어졌던 옛 연인 사야카가 그녀의 아버지 유품 속 약도와 열쇠의 수수께끼를 함께 풀자고 부탁해왔다. 사야카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에 거절하려 했지만, 그녀가 초등학교 입학 이전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이 집에서는 무언가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야카에게 자해의 흔적까지 봤기에 더더욱. 

그녀와 함께 출발하여 찾아낸 약도 위치의 기묘한 건물은 아버지의 열쇠로 지하실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집은 '미쿠리아 유스케'라는 소년이 가족과 함께 살다가, 23년 전의 2월 11일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사야카는 왜 초등학생 이전의 기억을 잃었는지? 23년 전,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 일이 사야카가 기억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 집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하는지? 나는 사야카와 함께 집 안에서 찾아낸 유스케의 일기장 등을 단서로 이 의문을 풀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1994년 발표 장편으로, 존재를 몰랐던 작품인데 몰입감이 대단합니다. 초등학생 이전의 과거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야카, 그녀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수수께끼의 열쇠와 약도, 그 곳에 위치한 기묘한 집, 지하실 입구로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집은 모든게 이십여년 전 어느 날의 11시 10분에 멈춰진 상태였다는 등 도입부부터 아주 흥미로운 덕분입니다. 집 안의 시계가 모두, 심지어 서랍 속에 숨어있던 회중시계조차 11시 10분이라는 시간에 멈춰있는게 드러나는 묘사는 오싹할 정도였어요.
이어서 둘의 조사를 통해 발견한 집의 거주자였던 유스케의 일기, 미쿠리야 씨의 편지 등 여러가지 단서가 수집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수수께끼가 연달아 등장합니다. 이게 만약 연재물이었다면 다음 회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을거에요. 덕분에 한 번도 쉬지않고 읽어갈 수 있었습니다.

추리물로서도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굉장히 공정합니다. 이 집과 미쿠리야가(家), 그리고 사야카의 과거에 대한 단서는 주인공과 사야카의 조사를 통해 독자에게도 동일하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스케의 일기와 아버지 미쿠리야의 편지 등은 주인공들이 입수하여 접하는 시점부터가 독자들과 똑같아요. 주인공들만 더 알고 있는 정보도 거의 없습니다. 사야카는 어린 시절 기억이 없고, 둘 모두 이 집에 처음 온 셈이니까요.
 트릭도 괜찮습니다. 일기와 편지를 통해 구성된 일종의 서술 트릭인데 깔끔하며, 설득력도 높거든요. 진상은 유스케의 아버지인 줄 알았던 미쿠리야 씨는 알고보니 할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조부모가 손자를 거두어 키우면서, 손자로부터 아버지처럼 여겨졌다는건 아주 드문일도 아니지요. 사야카의 정체가 유스케의 동생 히사미였다는 극적인 반전 역시 이 진상을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일기 속에서 히사미를 '차미'라는 애칭으로 부를 때, 이를 주인공들이 고양이로 착각했다는 전개도 자연스러웠고요.

거의 이야기 전체에 걸쳐 집 한채와 남녀 주인공 2명만이 등장하는데, 이 만큼의 몰입감을 전해주는 전개도 대단합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무대 장치가 간단하고 등장 인물이 적더라도 장면 장면의 임팩트가 있는 작품이라 연극에는 별로 적합하지는 않아 보였고, 저예산 영상물로 찍으면 아주 좋겠더군요. 왜 아직 영상물이 나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 판권을 사서 조금 각색해도 괜찮을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러나 책 뒤 해설에서 '어정쩡하다'고 하는 - 2012년 독자 일만명이 뽑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인기 랭킹에서 36위를 차지하는 등 - 이유도 대충은 이해가 됩니다. 서술 트릭 전성기에 야심차게 도전한 결과물로 보이는데, 억지가 지나친 탓입니다. 집의 정체가 가장 억지입니다. 크노소스 궁전과 같은, 죽은 당시를 재현해 놓은 일종의 무덤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현실적이지 않지요. 크노소스 시대도 아니고, 현대 시점에서 구현하기에는 지나친 낭비니까요. 별로 큰 돈은 들지 않았다고 설명은 되지만, 지하실에다가 방 여러 개를 갖춘 단독 건물을 세우고, 그 안의 인테리어도 모두 갖춘다고 하면 억 단위의 돈은 들었을겁니다. 만든 뒤의 관리 문제도 크고요. 또 이야기를 살펴보면, 할머니는 이 비극적인 범죄를 비밀로 하고 싶어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렇게 비싸고 거창한 무덤을 만든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사야카의 기억 상실과 자녀 학대가 과거의 끔찍한 성추행과 오빠의 죽음으로 빚어졌다는 진상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물론 유스케가 밤에 우연히 들었다는 그 '소리'가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맞고, 굉장히 충격적인 진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 - 성추행, 그리고 오빠의 죽음 - 이 기억 상실을 불러왔다는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야카의 자녀 학대를 이 설정에 당위성을 부여하려고 써 먹은 건 큰 잘못이에요. 어찌되었건 자녀 학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으니까요.
이런 성추행과 자녀 학대 설정은 빼고 "몽환화"처럼 풋풋한 두 남녀의 모험물로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결말도 해피엔딩으로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사야카의 아버지가 비록 할머니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한 들, 자신들의 소중한 딸이 그 집 아들이 일으킨 사고로 죽은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자기 딸 대신 원수의 집 딸을 대신 딸처럼 키웠다? 제대로 키울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서라도, 친 딸이 죽어서 제대로 슬퍼하거나 공양조차 하지 못한다는걸 받아들인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할머니까지 죽었다면 모를까, 엄연히 육친이 살아있잖아요. 비밀을 지키고 싶었다면 조손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서 새롭게 삶을 이어가도 되고요.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면에서는 나무랄데 없는 좋은 작품인건 분명하지만, 대체로 억지스럽다는 서술 트릭물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읽어 볼 만은 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외출이 어려운 요즈음, 집에서 가볍게 읽어보실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길이도 적당한 편이니까요.

2010/07/05

이방의 기사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이방의 기사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시공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의 기수 중 한 명인 시마다 소지의 장편으로,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의 시작을 그린 작품입니다. 책 뒤 해설을 보니 첫 작품인데 여러가지 이유로 발표가 늦어졌을 뿐, 실질적인 데뷰작이라고 하네요.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00페이지가 넘는 가장 긴 첫 번째 부분은 화자인 "나" 가 기억상실 상태로 발견된 뒤, 료코라는 여성과 우연찮게 동거하게 되면서 살아가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나"가 운전면허증을 토대로 과거를 알아가는 내용이고요.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는 친구가 된 점성술사 미타라이 기요시가 "나"에 관련된 사건을 추리하여 진상을 알려줍니다. 기억을 잃기 전, 아내와 아이가 죽은 사건의 복수를 위해 살아왔던 것으로 보였는데 알고보니 이 과거조차 조작된 것이라는게 핵심 트릭이고요. 일종의 원격 살인을 위한 거창한 장치였던 것이지요.
문제는 핵심 트릭의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전혀 기대에 값하지 못했어요. 우선, 찾는 가족도 없고, 기억도 완벽하게 없으며, 당분간 기억이 돌아올 일도 없어야 한다는 조건에 딱 들어맞는 기억상실 환자를 찾는다는 것부터 문제이니까요. 이런 환자를 운 좋게 찾았다 치더라도, 그를 마음먹은대로 조종한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설령 정말로, 정말로 운이 좋아서 사건이 원하는대로 흘러갔다고 칩시다. 그래도 경찰에 체포되면 바로 끝입니다. 사건을 은폐하는건 불가능한 탓입니다. 
이외에도 곳곳에 헛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범인 슈지가 과연 작중 묘사되는 것 만큼의 천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세부적인 디테일도 억지가 많습니다. 자기 얼굴을 보기를 아무리 싫어해도 그렇지, 자신의 얼굴을 착각한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필적을 쉽게 위조할 수 있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정도 부족합니다. 산탄총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예 나오지도 않더라고요.

물론 신본격 작가의 데뷰작답게 추리의 과정 자체는 상당히 괜찮기는 합니다. 정말로 사소한 대화를 통해 실마리를 잡는다는 구성도 좋고요. 
미타라이의 캐릭터 역시 가장 좋았던 시절, 즉 "점성술 살인사건" 시절의 가난뱅이 점성술사이기는 한데, 음악에 몰두하여 대단한 기타 솜씨와 오토바이 운전 솜씨를 뽐내는 등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어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위적이기는 하나 중반의 일기부터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재미는 확실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미타라이 시리즈의 첫 작품이고, "점성술 살인사건"의 컴비 이시오카의 첫 등장 작품이라는 점에서 점수를 줍니다. 시마다 소지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기에, 일본 본격 - 신본격 추리소설 팬이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덧붙이자면, 미타라이의 추리는 마지막 순간이 닥치기 훨씬 전에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웠습니다. 절박한 친구 사정을 모른척하다가 누가 죽어나갈 정도가 되니까 억지로 몸을 움직인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거든요. 이시오카도 이런 비정한 친구보다는 보다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네요.

2025/10/12

망각배터리(2024) - 나카조노 마사토 : 별점 3점

나카조노 마사토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TV 애니메이션 시즌 1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흔히 스포츠물이라 하면 진지하거나 극적인 시합 연출에 치중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청춘과 개그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나름대로 야구라는 소재의 매력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캐릭터들의 개성 또한 매력적입니다. 투타 이도류 천재 키요미네는 외모와 분위기만 보면 완벽한 알파메일이지만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큰 웃음을 줍니다. "야구는 내가 던지고, 케이가 받고, 내가 쳐서 이기는 게임이다."라는 명대사는 그의 캐릭터를 단번에 설명해주지요.
기억을 잃은 포수 카나메 케이는 엉뚱한 대사로 분위기를 이끌며, 야마, 아오이, 슌페이, 츠치야 같은 조연들도 스테레오타입에 가깝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잘 뒷받침합니다. 이들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좌절을 이겨내는 전형적인 청춘물스러운 서사도 작품과 잘 어울리도록 풀어내고 있고요.

이들이 어우러진 팀 구성도 괜찮습니다. 키요미네의 공을 왠만한 고등학생 선수가 외야로 보내기는 힘들테니 내야 수비가 중요한데, 그 중에서도 핵심인 유격수, 2루수에 재능을 몰아넣고 이들의 공을 어떻게든 잡을 수 있는 야마를 1루수로 기용하는건 좋은 선택입니다. 

여자 캐릭터나 연애 요소를 넣지 않고 야구와 개그에만 집중하는 방향성도 좋으며, 작화도 꽤 안정적입니다. 야구 장면도 몰입할 수 있도록, 어색하지 않게 깔끔하게 그려낸게 돋보였어요. 케이의 기억 상실과 관련된 상황을 미스터리물 식으로 - 밤에 보던 애니메이션과 바보가 된 후 언행과의 연결 - 표현한 것도 흥미로왔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기억상실로 인해 케이가 바보가 된 상황 설정은 아무리 개그를 위해서라지만 억지가 심합니다. 솔직히 케이의 바보짓(가슴털~)은 별로 웃기지도 않았어요. 아오이와 슌페이의 과거사는 평면적이고 전형적이어서 다소 심심했고요.

그래도 청춘과 야구, 개그를 잘 버무려낸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가볍게 웃으면서도 스포츠물로의 재미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추천할 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2/11/13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 - 니시자와 야스히코 / 김은모 : 별점 2점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 - 4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인 소년 마모루 미키가미는 어느 순간 부모님과 떨어져 머나먼 어딘가에 있는 기숙학교에 재학하게 되었다. 그곳에 머무는 학생들은 그 외에 스텔라와 중립, 시인, 여왕님, 신하 (마모루가 붙인 별명)의 모두 6명이었다. 어느날 '교장 선생님'이 새로운 학생의 입학을 알리자 마모루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마모루는 '시인'에게 이유를 물었고, '시인'은 신입생이 오면 학교에 살고있는 무엇인가가 깨어나며, 과거 마모루가 전학왔을 때도 그랬다는 말을 해 주었다. 몇일 뒤, 신입생 루 베넷을 처음 만났을 때, 마모루를 포함한 학생들 모두는 세계가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루 베넷은 입학한 첫날 사라져 버렸고, 그를 찾기 위해 '교장 선생님'과 '사감'이 학교를 비운 사이, 신하, 시인 등 다른 학생들과 선생들이 차례로 살해당하고 마는데....

"일곱 번 죽은 남자"와 '탓쿠 & 타카치' 시리즈로 유명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예전에 소개해드렸던 "헌책방 스탭의 추천"에서 반전이 놀라운 작품으로 소개되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숙학교에 모인 소년, 소녀들'이라는 주제는 일본 만화에서는 많이 보아왔는데, 이 상황에 대해 학생들이 하나씩 펼쳐놓는 추리가 초반부의 볼거리입니다. 맨 처음에 '중립'은 그들을 특수한 비밀 탐정으로 만들려는 목적이라고 추리합니다. '여왕님'은 그들이 전생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특별한 아이들이라 한 곳에 모이게 되었다고 추리하고요. 다른 기억을 떠올릴 때는 현재를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에 오기 전 기억이 없다는게 이유였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학교는 가상 현실 속 세계라는 '시인'의 추리였습니다. 기억 상실은 물론 '뒤틀림' 까지 설명가능했던 덕분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앨리스 살인게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시인이 자기 자신, 즉 케네스 더피도 가공의 인물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진상과 맞닿아 있기도 하고요.

반전도 놀랍습니다. 사실 학생들은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던 겁니다! 그들 모두 치매 탓에 12살 이후의 기억을 잃고, 12살에 갇혀 있던 상태였어요. 이는 '교장 선생님' 시워드 박사의 연구를 위해서였는데, 이 연구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다수가 같은 착각을 하면, 그 착각이 객관적 사실로 변한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인들이 10~12살 아이들이라고 착각하는 환경을 만들었다는데 상당히 그럴싸했어요. 노인 모두가 자기들이 아이들이라고 믿고 생활하게 되었지만, 잘 모르는 신입생이 나타나면 노인을 억지로 어린 아이로 착각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뒤틀림'이 일어났다는 등의 디테일도 좋았고요. 역자의 말대로 "벛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가 떠오르기도 하만, 주인공들도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이런 변주도 아주 좋네요.

반전까지 이르는 과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싫어하는 코튼 부인의 저염 건강식 요리, 게이트 볼 정도 밖에 없는 야외 활동, 열 살에서 열두 살 먹은 아이들치고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사고방식과 말투가 어른스럽고 실제 그 또래들보다 지력이 뛰어나다는 점 등 엄청나게 다양하고 방대한 단서를 통해 반전에 대한 단서를 사전에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단서들은 온갖 세세한 데에 이르고 있어서 공정함 측면에서는 최고 점수를 줄만 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인 마모루가 영어를 금방 습득했던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작 중에서는 '머리가 좋다' 고 설명되지만, 사실은 12살 이후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익혔기 때문입니다. '전화 부스' 방에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최첨단 전자 장치들과 사건이 일어난 뒤 아이들이 '전화 부스'에 설치되어 있던 전화를 걸 수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려 60년 뒤 제품들이라 최첨단으로 보였을 뿐이며, 전화도 미래의 물건이니 걸기 힘들었던게 당연하지요.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 전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잠시 머물렸던 중계점이 있었다는 공통의 기억과 신문과 잡지는 물론 텔레비젼도 없는 시설, 사감 파킨스 씨 이름과 그가 내는 추리 퀴즈에 항상 등장하는 치매 노인 등 단서들은 그 외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 많은 단서들 중 가장 결정적인건 이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데니스 루드로가 '이 세계, 건물과 사람 모두 거짓이며 우리는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고 한 말일 테고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스텔라라는건 다소 뜬금없었지만, 학교 세계에 푹 빠져 소녀로 있고 싶었던 스텔라가 판타지를 깨트리려고 했던 다른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동기만큼은 중반에 소개되는 마모루의 종교관 - '자신의 판타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부정하고 말살하려 한다. 자신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이 피를 흘려도 태연하다.' - 으로 거의 돌직구처럼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그야말로 전개 과정에서 독자와 정정당당히 승부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데니스가 사라진 상황에 대한 시인의 추리 등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은 그 밖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힘듭니다. 곳곳에 헛점이 많이 보이는 탓입니다. 학교는 가상 현실이라는 '시인'의 추리처럼요.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최신의 첨단 기술로 60년 전 과거에 사로잡혀서 최신 폰으로는 전화도 걸지 못하는 노인의 추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역자는 '등장인물들도 속고 있으므로, 이 작품은 서술 트릭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반쯤은 의도적인 설정 오류 때문에 서술 트릭이 아니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반전을 숨기기 위한 색다른 추리를 위해 집어넣은 장치로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이런 설정 오류는 가상 현실 외에도 텔레비젼과 비디오 테이프, 비디오 게임 등에 대한 설명 등 곳곳에서 눈에 뜨입니다. 오래전 TV, 자동차를 구하기 위해 고생했다는데 정작 이런 미래 기술(?)은 거리낌없이 도입했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죠.

그래도 이 정도 오류는 반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을텐데, 살인 사건은 도무지 용납이 안됩니다. '신하' 살인 사건부터 보자면, 수업 도중에 스텔라가 급작스럽게 저지른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동안 스텔라의 판타지에 잘 맞춰주던 '신하'가 왜 갑자기 살해당할 정도로 스텔라 심기를 거슬렸을까요? 게다가 이 자리에는 '시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즉, '시인'은 범인이 스텔라라는걸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시인'이 스텔라와 함께 있으라는 마모루의 말을 선선히 들었을리 없습니다. 당연히 마모루와 함께 있으려 했겠지요. 케네스 (신하) 만의 사정이 있었을거라는 '사감'의 말로 퉁치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코튼 부인 살해도 억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치매 노인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 앞에서 욕설을 퍼붓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돼요. 전개를 보면 '학교'에서 일어났던 기존 사건들은 모두 '사감'이 숨기고 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렇다면 코튼 부인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려다가 충돌을 일으켜 총에 맞아 죽을 이유는 없어요. '신하'는 사고사로 착각했다쳐도, '시인'은 엄연히 칼에 찔려 죽었으니 당연히 경찰에 신고했었어야 합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사감'과 코튼 부인이 한패였어야 했는데, 그런 설명은 전무합니다. 오히려 '교장 선생님'마저도 '사감'이 살인 사건을 은폐한걸 몰랐다고 묘사될 정도지요. 경찰이 나타나면 곧바로 진상이 드러날테니, 이야기를 끌고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또 스텔라가 판타지를 지키기 위해서 뭔가 거슬렸던 신하를 죽이고, 범행을 목격한 시인을 죽인건 그렇다쳐도 그 뒤의 범행은 아예 설명이 불가합니다. 여왕님과 마모루를 설득해서 교장 선생님과 사감만 조용히 기다렸으면 만사 해결이었을텐데 말이지요. 자동차로 이동해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던 여왕님 살해야 그렇다쳐도, 중립을 실해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적인 반전과 반전을 위한 빌드업은 대단했지만, 살인 사건 쪽으로는 영 별로였고요 감점합니다. 작가의 장점 - 아이디어 - 과 단점 - 무리수 - 을 한 눈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2004/09/28

열흘간의 불가사의 - 엘러리 퀸 : 별점 3점

열흘간의 불가사의 - 6점 엘러리퀸/시공사

2차 대전 이전, 프랑스 파리에서 잠시 교분을 가졌던 하워드 밴 혼의 갑작스러운 부탁으로 엘러리는 라이츠 빌의 밴혼 저택에 머물며 하워드의 기억 상실 발작을 도와준다. 하지만 하워드는 자신의 새어머니 샐리와의 부정한 관계로 고통받던 상태로 마침내 협박까지 받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엘러리는 사건에 뛰어들지만 하워드의 발작이 결국 의외의 사건을 부르며 엘러리는 이 모든 사건은 성서의 "10계"가 바탕이라는걸 깨닫는다.


엘러리의 "라이츠빌" 시리즈의 3번째 작품입니다. 엘러리의 유머와 잘난척이 줄어든 대신 잔인한 인간성에 보다 촛점을 맞춘 작품이죠. 역시 "옥수수밭" 님 덕분에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제목처럼 열흘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성서의 "10계"와 연결시켜 진행해 나간다는 점입니다. 독특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일 뿐만 아니라, 10계의 범죄를 하나씩 행하면서 결국 살인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은 역시 정통파의 거장답더군요. 거기에 더해 굉장히 효과적이고 충격적인 반전을 던져주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너무 아이디어에 치중한 탓인지 중간 과정에 몇몇 핵심적인 오류가 보인다는 것은 아쉽네요. 하워드의 기억 상실은 예측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범인이 효과적으로 써먹은 여러 자료들이 전부 허구였다는 사실 역시 그간의 치밀함에 비추어 볼때 너무 무신경한 부분이었다 생각됩니다. 범인이 의도한대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던가, 엘러리가 1년전에 받은 쪽지 뒷면을 한번도 보지 않다가 마지막에 뒷면을 보고 진상을 깨닫는다던가 하는 등의 설정 역시 현실성이 떨어지고요.
기발한 아이디어에 치중한 나머지 치밀한 전개가 부족하다는건 다른 엘러리 작품과 유사합니다. "악의 기원" 처럼요.

그래도 엘러리의 패배(정확하게 보면 1승 1패지만 제가 보기에는 패배가 맞습니다)가 선보이는 이야기 전개는 독특하며,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시 한번 책을 영구대여(?)해 주신 옥수수밭 님께 감사드리며....^^

2024/04/21

용서받지 못한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5점

용서받지 못한 밤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놀
<<아래 리뷰에는 핵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키히토의 아내 에츠코는 어린 딸 유미가 베란다에 올려두었던 엉겅퀴 화분을 떨어트린 탓에 일어난 사고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15년 뒤, 아버지의 가게를 이어받은 유키히토에게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협박범은 '사고를 친 딸, 엉겅퀴에 대해 알고 있다'며 돈을 요구했다. 하지만 협박범을 만나자마자 유키히토는 기절했고, 장성한 딸 유미는 휴양 겸 해서 아빠 고향으로의 여행을 권했다.
유키히토 가족이 고향 하타가미를 등진 이유는 30년 전, 유키히토의 아버지 미나토가 마을 유지들을 살해했다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었고, 유키히토는 말이 나온 김에 누나 아사미와 함께 당시 사건의 진상도 밝힐겸 하타가미로 향했다.


미치오 슈스케의 장편. 30년 전 하타가미에서의 사건과 15년 전 에츠코의 사고사, 그리고 현재 하타가미에서의 살인 사건이 연결고리를 가지고 펼쳐집니다. 
핵심은 30년 전 사건 - 신울림제에서 마을 유지 4명에게 독버섯을 먹여 2명을 죽게 만든 - 의 진범은 누나 아사미였으며, 현재의 협박범 시노바야시 유이치로가 유키히토를 협박한건 이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딸아이 유미가 실수로 엄마를 죽였다는게 아니라요. 시노바야시는 유키히토가 아버지의 가게를 이어받은걸 모르고, 전화를 받은게 아버지 미나토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30년 전 사건에서 아버지가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었던 원인인 마을 신사 신관 다라베 요코의 편지는 아버지가 일부러 조작 - 눈을 벼락으로 바꾸어서 - 했었습니다. 딸이 진범인걸 알고 딸을 지켜주기 위해서요. 마침 벼락을 맞아 당시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던 아사미는 자신이 범인인걸 모른 채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살아왔고요.

이런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복선도 탄탄합니다. 유키히토가 애초에 집에서 엉겅퀴를 키웠던 계기는 어린 시절 하타가미에서의 추억에서 비롯되었던 겁니다. 어머니가 꽃에 해박해서 집에서 키워 약으로도 썼었거든요. 마침 아사미가 독버섯 해독제로 엉겅퀴를 쓴게 두 사건을 연결하여 유키히토의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요. 아버지가 한자에 해박해서 한자를 가지고 여러가지 장난을 치는 설정은 다라베 요코의 편지 내용 조작을 알려주며, 누나 아사미가 사건 당시 기억 - 특히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까지 - 을 극히 최근까지 잃었다는 증거도 여러가지 일화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런게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개에 녹여낸 솜씨는 일품이라 할 수 있어요.
그 외에도, 유미가 아기일때 저지른 실수로 에츠코가 죽은걸 협박범이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30년 전 사건은 정말로 미나토가 저지른 것인지? 협박범 시노바야시를 죽인건 누구인지? 등의 수수께끼가 계속 펼쳐져서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신은 없다'는 마지막 문장도 대박입니다. 아무리 선의에 의한 행동이라도 그 결과는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씁쓸함을 이렇게 잘 그려낸 작품은 쉽게 찾기 어려울 듯 합니다.

하지만 '딸아이의 사고'와 '엉겅퀴'라는 키워드는 어떻게든 연결시켰지만, 전개와 설정에 억지가 많다는건 단점입니다. 아사미가 무려 30년간 기억상실이었는데, 마침 30년만에 방문했던 고향에서 벼락이 치는걸 보고 기억을 되찾는다는 설정이 대표적이에요. 마침 그 순간에 옆에 있었던 협박범 시노바야시를 본의아니게 살해하게 되었고, 이 순간이 마침 그 순간에 벼락 사진을 찍던 아야네의 카메라에 잡힌다는 일련의 연쇄는 우연이 너무 지나칩니다.
아사미가 기억을 되찾은 뒤, 남은 마을 유지 2명을 마저 살해하다가 결국 죽고 만다는 결말도 뜬금없었습니다. 복수를 생각했다면 꼭 이 시점에 했어야 했나? 싶고, 누가 보아도 수상한 외지인 유키히토를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없어요.
가족의 엄마가 환각 버섯에 중독되어 성폭행당하다가 살해당했다는 등의 설정도 이렇게 길게 끌고갈 필요가 있었을지는 좀 의문이에요. 이런 설정 없이도 4명의 '갑뿌'가 허튼 짓을 하다가 엄마가 죽게된건 누구나 떠올릴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독자가 추리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큽니다. 30년 전 사건 당일 아사미가 독버섯을 넣으러 신사로 향하던 순간에 찍힌 사진이 그 예입니다. 화면에 '고스트 현상'이 보인다고 이야기되는데, 알고보니 이건 '눈'이 찍힌 것이고 이를 통해 독버섯을 넣은건 벼락이 치기 전날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작중 묘사만 가지고 이를 추리해내는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눈'을 '벼락'으로 바꾼 트릭 역시 번역된 글로는 떠올리기 불가능한건 마찬가지고요.

오래된 사건을 조사한다는 아야네는 사건의 핵심 당사자이기도 한 유키히토 가족과는 다르게 반쯤은 장난처럼 사건을 바라보는 행태가 영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고전 본격물 속 떠돌이 탐정같은 설정도 도무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요. 무언가 시리즈 캐릭터로 보이는데, 억지로 등장시켜서 시리즈로 만드는 것 보다는 빼는게 더 나았습니다. 실제 사건 해결에 별로 기여하지도 못하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졸저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후속으로 '요리 외의 추리 소설 속 여러가지 중요 소재들'을 쓰게 된다면 이 작품 속 '엉겅퀴'는 꼭 언급하고 싶습니다. 사건을 일으키는 핵심 소재이기도 하고, 중요 단서가 되기도 하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런 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2026/07/05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2025) - 시게하라 카츠야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마토 칸스케는 용의자를 추격하던 중 저격을 당해 왼쪽 눈의 시력과 당시 사건에 대한 기억 일부를 잃었다. 10개월 뒤, 모리 코고로의 옛 동료 사메타니가 저격당해 죽자, 모리 탐정은 경찰과 함께 사메타니가 찾았다는 나가노현으로 향했다. 

결국 여러가지 단서들로 범인은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려 했던 나가노현 경찰 하야시였다는걸 밝혀냈다. 마지막 설산 추격전 끝에 하야시는 체포되고, 야마토 칸스케도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으며 사건은 해결된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의 28번째 극장판입니다. 전작은 하코다테가 무대였는데 이번에는 나가노현이 무대입니다. 설산과 노베야마 전파망원경 시설이 주 배경으로 등장하지요.

가장 좋았던 점은 원작 만화나 TV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모리 코고로가 오랜만에 사건 해결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나름대로의 추리는 물론이고 뛰어난 사격 실력까지 선보이며 제 몫을 톡톡히 합니다.

등장인물이 많지만, 비중 배분도 훌륭합니다. 나가노현 경찰 3인방은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만큼 당연하게 활약하고, 란은 범인과 맞서 가라데 액션을 보여 줍니다. 소년 탐정단은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고, 하이바라는 마지막 추격전에서 과학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고요. 비중이 적은 사토와 타카기도 마지막 추격전에서는 나름 역할을 합니다. 아가사 박사의 퀴즈, 아무로 토오루의 냉정한 모습도 팬으로서 반가왔어요.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범인이 사용한 총기를 주요 단서로 쓰는게 좋았어요. 겉으로는 권총이지만 실제로는 소총탄을 사용하는 개조 총기였는데 이는 앞서 여러 단서들로 밝혀지고, 결국 범인이 경찰 내부 인물이라는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거든요. 피해자의 별명인 '와니' 역시 진범을 특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나가노현 경찰 하야시가 연인의 죽음 탓에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동기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설산과 전파망원경 시설을 활용한 액션들도 대체로 그럴듯하게 그려집니다. 최근 극장판에서 자주 보였던 어처구니없는 액션이 줄어든 점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 무대인 나가노의 풍광도 수려하게 그려지고요.

반면 코난의 활약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추리에서는 큰 존재감을 보여 주지 못했고, 마지막 평지에서 무한 동력으로 날아다니는 스노보드 추격 장면은 황당했습니다.

범인 하야시의 행동도 쉽게 납득되지는 않습니다. 사법 거래에 불만을 품고 정부를 협박하려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사메타니를 살해한 것은 스스로 범행의 명분을 무너뜨린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법안이 바뀔 이유도 없고요.

야마토 칸스케의 기억 상실 역시 아쉬웠습니다. 특정 기억만 사라졌다가 사건 해결에 필요한 순간 되살아나는 전개는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메'와 '와니'의 연결도 많이 사용된 소재인데, 작중 등장인물들이 모두 모르고 있다는 것도 좀 와 닿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이야기 완성도가 떨어졌던 전작보다는 여러모로 낫습니다. 모리 코고로의 활약도 만족스러웠고요. 일부 설정은 아쉬웠지만 코난 팬이라면 충분히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1/10

인페르노 (2016) - 론 하워드 : 별점 1.5점

"암호를 풀지 못하면 지옥의 문이 열린다!"
전세계 인구를 절반으로 줄일 것을 주장한 천재 생물학자 ‘조브리스트’의 갑작스러운 자살 이후 하버드대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은 기억을 잃은 채 피렌체의 한 병원에서 눈을 뜬다. 담당 의사 ‘시에나 브룩스’의 도움으로 병원을 탈출한 랭던은 사고 전 자신의 옷에서 의문의 실린더를 발견하고,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묘사한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원본과 달리 지옥의 지도에는 조작된 암호들이 새겨져 있고, 랭던은 이 모든 것이 전 인류를 위협할 거대한 계획과 얽혀져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는데…

거대한 음모를 밝혀낼 유일한 단서
단테의 지옥은 소설이 아니라 예언이다!


연초에 볼거 없나 싶어 넷플릭스에 들어갔다가 충동적으로 보게 된 작품.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에 이은 로버트 랭던 시리즈 제 3탄으로 "천사와 악마"는 원작만 읽고 영화는 보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게 되었네요.

로버트 랭던 교수가 기억을 잃은 채 여러 조직에게 쫓기면서 암호를 풀어나가는 중반부까지는 흥미로왔는데, 시에나가 조브리스트의 연인임을 밝힌 이후부터는 아쉬움 투성이입니다. 이야기의 개연성도 많이 부족했고요.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건 왜 랭던 박사를 기억 상실처럼 속여서 암호를 해독하게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바이러스를 없애려고 하는 WHO는 바이러스에 대해 아무런 단서가 없었어요. 조브리스트는 자살했으니 시에나가 랭던 박사를 속여서 암호를 풀게 하지 않았다면, 바이러스의 위치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았을겁니다. 바이러스 확산을 앞당기기 위해서 위치를 알아내야 했다고 설명되는데, 앞당겨야하는 합당한 이유는 정작 설명되지도 않고요.
조브리스트가 바이러스의 위치를 구태여 암호로 남긴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위치도 영원히 숨겨놓는게 당연하잖아요? 단테의 신곡 속 지옥을 활용한 암호로 남긴 이유도 알 수 없으며, 해석도 억지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바이러스를 둘러싼 짤막한 액션도 별로였습니다. 톰 행크스가 소화하기에는 어색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보인 탓이지요. 흐름상 바이러스가 유출되지 않을거라는 확신도 들어서 긴장감도 전혀 느낄 수 없었고요.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유명 건물들과 작품들을 활용한 배경은 멋있었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네요. 단점만 가득한 작품으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2/08/13

CMB 박물관 사건목록 18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CMB 박물관 사건목록 18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도 이제 20권을 향해 달리네요. 18권에는 모두 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용봉"이라는 큰 스케일의 국제 문제(?)를 다룬 에피소드와 소소한 일상계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죠.

그러나 추리적으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 별로 없고, 여주인공 타츠키의 활약이 없다는 것, "C.M.B"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박물학적 지식"을 제공하는 맛이 부족했다는 점 등 단점이 더 눈에 많이 뜨이네요. 전체 별점은 2점입니다. 다음 권에서는 신라가 토마와 진검 승부를 펼치는 모양인데 만회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점점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 갈수록 "박물관"이라는 소재가 들러리로 전락하는 느낌인데, 박물학적 지식에 더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 "Q.E.D"와 다를 게 없는 자가 복제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해주었으면 합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용봉"

홍콩 흑사회 암흑가 두목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신라가 사건의 핵심인 다잉 메시지를 풀어낸다는 내용.

"용봉"이라는 쌍둥이의 존재와 중국의 한 자녀 갖기 운동을 트릭에 엮어나간 과정은 좋으나, 애초부터 범인이 쌍둥이라는 것을 숨긴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등 허점투성이입니다. 다이잉 메시지도 이름을 말하면 될 것을 굳이 "쌍둥이" 어쩌고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이래서야 트릭을 위한 트릭일 뿐이죠.

스케일만 클 뿐 알맹이는 없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A열차로 가자"

새로 전학 온 학생이 자기를 둘러싼 이상한 분위기, 일종의 이지메를 눈치챈 뒤 신라에게 해결을 부탁한다는 일상계. 전학생의 뒤죽박죽 기억이 "사고를 위장한 살인"으로 보이는 사건과 뒤섞여 있어서, 뭔가 심각한 문제가 뒤에 감추어진 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전개되다가 모든 것은 친구들의 "배려"일 뿐이었다는 결말의 작품입니다.

"기억상실 치료"라는 진상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비약이 너무 심해요.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치료에는 더 낫지 않았을까요? 이래서야 머리를 다시 한 대 세게 때리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아이디어는 참신했고, 나름 분위기를 끌고 가는 전개도 괜찮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리박물관"

유리제품 수집가의 개인 박물관에서 벌어진 제품 파손 사고를 다룬 일상계 작품 (걸려 있는 돈이 커 보이니 일상계로 보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등장하는 장치 트릭은 현실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일반인이 접시를 쓰러질 때까지 돌릴 수 있는 한계는 과연 몇 분일까요? 저는 2~3분을 넘기기 어렵다고 봅니다. 내용에서처럼 알리바이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에요. 또 나중에 원래의 그릇을 몰래 가지고 빠져나가려고 한다는 안이한 설정도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안에서 깨는 것은 가능해도 , 가지고 나가는게 훨씬 힘든건 당연하잖아요?

특유의 일상계 분위기는 잘 살아있지만, 추리적인 허점이 많아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4/10/26

렌지맨 1~6 - 모리 타이시 : 별점 2.5점

렌지맨 6 - 6점
모리 타이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오츠카 렌지는 끊임없이 연애에 실패하는 고등학생으로, 우연히 수수께끼의 노인 Dr. 오기쿠보를 만나 사랑의 힘으로 변신할 수 있는 히어로 ‘렌지맨’이 된다. 하지만 그 대가로 변신 시마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는 슬픈 운명을 맞는데....

마사토끼가 추천했던 작품. 이전에 읽었었는데 리뷰를 올리지 않았더군요. 다시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은 전대물과 개그 러브 코미디의 조합이라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잘 살려냈다는 점입니다. 사랑을 하면 파워가 생기지만 그 대가로 사랑을 잊는다는 설정도 좋아요. 이를 통해 개별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이야기의 몰입감을 높여주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열혈 캐릭터인 렌지도 '코이즈미 마이 러브~'를 외치던 "이케테루 후타리"의 사지가 떠오르는 올드 타입이지만 작품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지나치게 개그 위주로 전개되는건 아쉬웠습니다. 좌충우돌 렌지와 그에게 빠져드는 후카의 이야기를 좀 더 집중해서 풀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겁니다. 마지막 편에서 전대 액션을 전혀 넣지 않고 후카 시점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나간건 굉장히 인상적이었거든요.
렌지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한 리키와 후카와의 삼각관계 에피소드도 지나치게 길었습니다. 나름 전대물인데 한 권 이상 분량을 밀땅으로 때우는건 말이 안되지요. 리키에게 정말로 푹 빠진 묘사를 강조해서 마지막 실연, 그리고 후카와의 사랑과 기억 상실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게 좋았을겁니다.
마찬가지로 오쿠다가 후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전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억지스러웠고, 등장 인물들 비중 분배도 실패한 느낌만 줍니다. 인기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계속 등장시키기는 하는데,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상황도 반복되고요 .후카의 라이벌이라고 자칭하는 레미가 대표적입니다.
레미가 유혹하려고 했을 때 렌지가 넘어가지 않은것도 이상합니다. 원래 그런 캐릭터도 아니고, 이 때는 후카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편도 인상적이었지만, 결말만큼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후카를 잊은 렌지를 한 대 때리자마자 기억이 돌아온다는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발상이었으니까요. 기껏 쌓아올린 애틋함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마무리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독특한 설정과 참신한 개그 요소는 좋지만, 개그와 스토리의 균형 면에서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2019/12/08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4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5점

[고화질] C.M.B. 박물관 사건목록(씨엠비) 34 - 6점
MOTOHIRO KATOU/학산문화사

이전 권은 기대 이하였다고 리뷰를 남겼었는데, 이번 권인 34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미도 없고, 추리적으로도 눈길을 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맨 마지막 수록작인 "낡은 집"이 아주 괜찮은 덕분에 별점도 2.5점 줍니다.

이야기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소멸 비행"

신라 박물관에 작가 카가미 요이치가 찾아왔다. 그는 1932년, 일본 운카이 운수의 화물 수송 비행기가 추락 후 사라진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비행기를 절에서 숨겼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신라가 가진 CMB 반지의 권한을 써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일행의 조사를 지켜본 주지는, 당시 사고는 운카이 운수 라이벌 회사의 조작으로 일어난 것으로 비행기는 이미 회사에 반환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신라는 동굴 속, 숯으로 흑채를 만들어 숨겨놓은 비행기를 찾아내고 진상을 밝혀낸다. 

비행기 기술자들의 집념을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트릭은 대단치 않으나 합리적이며, 1930년대 시대 상황하고도 잘 맞물린 사건의 전개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의 보잉사처럼 영국 최신 기종의 결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운카이 운수의 사정도 충분히 설득력 넘치니까요.

그러나 무려 70년 이상 지난 시점에서 진상을 비밀로 유지하고 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관계자들도 모두 사망하고, 운카이 운수마저 사라진 상태라면 비밀로 놔 둘 필요가 없잖아요? 주지 스님이 그렇게까지 충실하게 사명을 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마리아나의 환상"

1946년 아마존에서 마리아나는 일본계 연인 모리오와 결혼할 계획을 세우지만 그가 사기를 당한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마리아나는 에콰도르에서 '마녀'라는 별명으로 주술적 치료를 행하며 먹고 살고 있는데 일본으로 돌아왔던 칸베 모리오가 그녀를 찾아 에콰도르로 향하고, 모리오의 손자 부탁으로 역시 에콰도르로 향한 신라 일행은 1945년 종전 직후, 일본의 승패를 알 수 없던 상황에서 승리파와 패배파가 다툼을 벌여 혼란에 빠졌고, 승리파였던 모리오가 마리아나와 만난 직후 패배파로 돌아섰다는걸 알아냈다. 신라 일행은 마리아나의 행방을 추적하여 모리오가 그곳을 방문했으며, 마리아나의 보물을 찾으면 모리오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보물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나가 당시 모리오에게 마술을 걸었는데, 그건 모리오의 의식을 넓혀 기억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으로 문제는 마리아나에 대한 기억까지 잊어버리게 했다...

두 편으로 이어진 제법 긴 호흡의 이야기로 마리아나의 마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마리아나의 보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결국 마술은 일종의 기억 상실이고, 보물은 그녀가 모리오를 위해 만든 마을이라는 순애보였다는 내용은 의외성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2차 대전 직후, 브라질 일본계 이주민들 사이에서 있었던 분쟁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것도 수확입니다. 오지인 탓에 공신력있는 뉴스가 원할히 공급되지 못해서, 심지어 '일본이 승리했다'는 승리파가 다수 존재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나 에피소드 2편 분량을 할애하여 길게 진행할 정도의 깊이있는 이야기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야기가 너무 작위적인 탓이에요. 집 뿐 아니라 마을까지도 마리아나가 모리오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는 설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억지가 지나쳤어요 또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다는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낡은 집"

세토는 회사를 그만두고 연인과 함께 빵집을 차리기 위해 시골로 내려왔다. 운 좋게 집세가 0엔인 집을 구해 수리를 하고 살려고 하지만 마을에서 기묘하고 불쾌한 인상을 받고, 목수들도 모두 집 수리를 거절하는데...

의외로 깔끔한 일상계입니다. 줄거리만 보면 아시겠지만, 시골 마을이나 외국에서 외지인을 배척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는 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괴물 가면을 쓴 범인이 나타나서 입주를 방해하고, 공포감을 조성하는 방식이 딱 그러했으니까요.
그러나 원인이 착해 보이는 집 주인 때문이었다는 진상은 놀랍습니다. 집세를 받지 않는 대신, 임대차 계약서를 쓰지 않은 점을 악용하여 세입자가 집을 수리하게 만든 뒤 쫒아낸 것이지요. 이를 집 주인의 아들이 집의 장미 덤불을 베어 넘기는 등의 기묘한 행동으로 추리해 내는 신라의 활약도 아주 볼 만 합니다.

사람의 선의는 무조건 의심해 봐야 한다는 씁쓸한 결말이지만, 일상계로는 최고 수준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신라가 진상을 눈치채는 단서가 조금 작위적이기는 하나 큰 문제는 아니에요. 별점은 3.5점 입니다.

2022/10/30

외침과 기도 - 시자키 유 / 김은모 : 별점 2.5점

외침과 기도 - 6점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북홀릭(bookholic)

7개 국어에 능통한 사이키가 해외 동향을 분석하는 잡지사에서 일하며 겪는 여러가지 사건들로 구성된 연작 단편집. 시자키 유의 데뷰작으로 근래 찾아보았던 추리소설 랭킹에서 추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몰랐었는데, 작품이 발표되었던 2010년에 이런저런 상 - '주간 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2010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2위 등 - 을 휩쓸었군요.

읽어보니 과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독특함도 잘 살아있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특히 이국에 대한 서정적인 묘사들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굉장히 고급진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추리적으로는 편차가 있는 편이라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몇몇 작품 (개인적으로는 <<얼어붙은 루시>>)의 수준은 높으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각 단편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라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막을 달리는 뱃길>>
사이키는 사하라 사막 한 복판에서 소금을 채굴하는 대상 일행에 합류했다가 일행이 하나씩 살해당하는 사건에 휘말렸다. 사막에서 소금길을 나아갈 뿐인, 몇 안되는 일행을 살해할 이유는 무엇일까?

사이키의 모험과 여행, 그리고 삶에 대해서모험 소설과 추리 소설을 결합한 형태로 풀어주는 작품.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특히 동기 측면에서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대장이 급작스럽게 사고로 죽은 뒤, 달랑 세 명 - 사이키까지는 네 명 - 밖에 없는 일행을 죽일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금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면 차례로 죽인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첫 범행인 켄부를 죽일 때 다 죽이면 됐으니까요. 만약 대장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니라서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범인을 지목하고 일행의 동의를 얻어 처단하는게 깔끔했습니다. 모두가 공범이었을 수는 있지만, 그랬다면 마찬가지로 한 번에 다 죽이는게 합당했고요. 그렇다고 완전 범죄를 노리기에는 마지막 남은 사람이 범인인게 뻔하니 그것도 아니고.....
그런데 여기서 '사막의 대상' 이라는 환경에 꼭 들어맞는 타당한 이유가 등장합니다. 죽은 대장만이 사막에 난 길의 경로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범인 바르보예는 자기가 모르는 소금 채굴 마을로 향하는 길의 이정표를 만들기 위해서 일행들을 죽였고요. 시차를 두고 차례대로 죽였던건, 시체를 죽은 자리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바르보예는 전체 길의 일부만 모른다는게 앞서 소개되는 등, 추리를 위한 단서 제공도 공정합니다.
대장이 아꼈던 어린 낙타 메챠보가 모든 길을 알고 있었다는 반전도 깔끔했어요.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막과 대상 일행에 대한 묘사도 빼어나고요.

사이키가 왜 대상 일행에 합류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애매했고, 사이키가 메챠보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는 장면은 조금 작위적이었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2008년,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5회 미스터리즈! 신인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이해가 되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덧붙이자면, GPS를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낡은 소재일 수는 있겠습니다.

<<하얀 거인>>
사쿠라는 대학 친구 사이키, 요스케와 함께 1년 전 연인과 이별했던 마드리드 근처 레엔쿠엔트로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게되었다. 1년 전, 연인 아야코는 마을의 하얀 풍차 안에 들어간 뒤 사라져 버렸었다....

사쿠라는 풍차 주인이 아야코를 살해하고, 풍차의 돌절구를 이용하여 그녀를 분해(!)했다고 추리하지만 진상은 그냥 아야코가 사쿠라 눈 앞에서 떠났던게 전부입니다. 온통 하얀 옷, 그리고 모자까지 하얀 색이었던 탓에 사쿠라는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요. 풍차가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솔직히 트릭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다.
'사쿠라'는 별명으로, 화자의 정체는 스페인인 세레소였다는 서술 트릭 역시 그렇게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습니다. 일단 정보가 부족하며, 사쿠라의 정체가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탓입니다. 딱히 반전이라고 볼 수도 없었고요.

이야기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아야코의 귀국은 레엔쿠엔트로 마을에서 급작스럽게 결정된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그녀가 세레소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당연히 사유와 연락처를 진작에 알려줬을거에요. 눈 앞에서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면,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의도였다는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 작품에서처럼 세월이 지난 뒤 다른 유학생들을 통해 찾는다는건, 다른 목적이 있다고 밖에는 생각이 안 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추리적으로도 그닥일 뿐더러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고 공감하기 어려워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얼어붙은 루시>>
사이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우라디미르 사제와 함께 우크라이나에 인접한 수도원에 방문했다. 죽은지 250년이 지났지만, 썩지 않고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리자베타 수녀의 성인 인정 절차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확인한 유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우라디미르 사제가 사흘 동안 유해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한 부탁을 수도원장에게 허락받은 뒤, 사이키는 '성인'이라는게 무엇인지 수도원장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일반적인 3인칭 시점과 리자베타 수녀를 신성시하는 스코냐 수녀 시점을 오가는 전개는 복잡하기만 할 뿐이라 생각했는데, 이는 스코냐가 수도원장을 살해했다는걸 추리할 수 있도록 잘 짜여진 구성이더군요. 읽으면서 실로 감탄했습니다. 스코냐가 수도원장, 우라디미르 사제와 사이키간 대화를 어딘가에 숨어서 듣는 묘사는, 이후 스코냐가 사이키에게 실수로 그 사실을 드러낸 뒤 스코냐가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인 척 했다는 사이키의 추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는 숨을데가 없었거든요.
수도원장이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살해당했고, 스코냐가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인 척 수도원장의 유해를 관에 넣어 두었다는 추리도 기가 막혔습니다.

이 사건이 스코냐 수녀의 그릇된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 만 합니다. 스코냐 수녀가 수도원장을 살해한건, 시성 (성인인증)을 받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수도원장은 앞서 시성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지 성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고 싶다는 취지에서 시성을 요청했을 뿐인데 말이지요. 수도원장은 '살아있는 성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어서,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거라 여겼다는 추리는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마지막에 사이키가 스코냐에게 물었던, '그렇다면 리자베타 수녀의 유해는 그럼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답도 인상적이었어요. 리자베타 수녀는 부활했기 때문에 유해가 사라졌다는데.... 와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이해가 안되었던건, 수도원장은 시성을 위해 스코냐가 리자베타의 유해 대역을 소화하는걸 묵인했던게 분명합니다. 이는 시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수도원장의 말과는 배치됩니다. 스코냐가 우리디미르 사제와 사이키가 조사를 나왔을 때 급작스럽게 대역을 소화했다는 묘사도 없고요. 다른 수녀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입을 다문건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이야기였다는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했고요.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네요.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외침>>
사이키는 의료 봉사를 하는 영국인 의사 애슐리 카슨과 함께 아마존 오지의 데뮤니 촌락으로 향했다. 잡지 취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을은 에볼라 바이러스와 비슷한 전염병으로 거의 절멸의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살아있는 사람 중 감염되지 않은건 장로, 전사 아리밀리, 통역 역할을 하는 다니 정도였다. 그러나 외부로 도움을 청하려다 실패하고 돌아온 사이키는 그나마의 생존자들도 누군가 살해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누가 곧 죽을 사람들을 일부러 살해했을까?

아마존 오지에서의 에볼라 바이러스 유행에 대한 묘사는 빼어나며, 사이키와 애슐리가 서로가 범인이라며 펼치는 추리 대결이 특히 볼만했던 작품입니다. 에볼라는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니 편하게 죽게 도와주었을거다, 그들은 보균자가 될 수 있으니 화를 없애기 위해 먼저 제거했을거라는 동기에 대한 각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사이키가 챙겼던 비옷 등 앞서 소개되었던 정보를 토대로 펼치는 추리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정작 진상은 황당했습니다. 범인은 전사 아리밀리였어요. 동기는 데무니 마을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다는건 굉장히 중요했고, 데무니 마을만이 유일한 세계였기에 마지막 생존자는 세계의 마지막 역사에 남는, 최고의 영예라는 원주민의 세계관 때문이었고요. 이는 다니 등 다른 원주민들의 언행을 통해 살짝 드러나기는 하나, 추리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렇게 일반 상식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다른 세계관으로 동기를 해석해야 한다면, 반칙인 셈이라 추리 소설로는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기도>>
찾아가기도 힘든 밀림 속, 높이 10m되는 바위산에 천연 동굴을 파 낸 '고아.도아', 우리말로 '기도의 동굴' 이라는 곳이 있다. 동굴 안 쪽 벽에는 모두 이런저런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뒷 쪽 출구는 바다로 인접한 낭떠러지에 위치했다. 이런 동굴이 '기도의 동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나'는 친구 모리노가 낸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이런 저런 조사에 나서는데...

동굴은 감옥이었다는게 '나'의 답이었습니다. 고위층을 유배했고, 그들을 출구를 통해 자살하게끔 유도했다, 동굴 안 조각들은 그들이 새긴 절망과 저주였다는겁니다.
그러나 '나'가 동티모르에서 폭동에 휩싸인 뒤, 측두엽성 기억상실에 빠진 사이키라는게 밝혀지고, 이 답은 사이키 자신의 처지를 빗댄거라는게 드러납니다. 사이키가 멀쩡했을 때, 그는 동굴은 말 그대로 기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었거든요.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배의 무사 귀환을 바라기 위한 장소로 바다가 보이는 출구를 만들었고, 동굴 안에 이런저런 기도 목적의 그림을 새겼다고 추리했었으니까요.
정답은 없지만 이러한 '기도의 동굴' 명칭에 대한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현재 사이키 상태와 연결되어 다른 답이 나온다는 구성도 좋았고요.

그런데 기억상실 설정은 다소 뜬금없는 편입니다. 전체 단편집 맥락과 잘 맞지도 않았고요. 다른 단편들은 여행, 그리고 그곳에서의 사건으로 삶과 생존, 인생과 사랑 등에 대해 생각할거리를 던져주지만, 이 이야기는 여행과는 무관하며, 내용도 자아성찰에 가까운 탓입니다. 차라리 여행지에서 물리적인 감금 상태에 놓였다고 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 설정에서 빚어지는 다소 모호한 1인칭 시점 묘사도 그닥이었고요.
책 소개를 보니 '세계 속에 넘치는 이야기들, 그 신비하면서도 미스터리한 경험들을 전달하고자 하는 '여행자'의 바람은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전체 에피소드를 하나로 아우르는 강력한 구심점 역할을 한다.'는데 무슨 말인지 당쵀 모르겠네요.

하여튼, 별점은 2.5점입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치고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2005/04/12

헬로 네즈미 - 히로카네 켄시 : 별점 2.5점

헬로 네즈미 28 - 6점 켄시 히로카네/대원씨아이(만화)

아카츠카 탐정 사무소라는 탐정사에서 근무하는 일명 "고슴도치"인 고로와 그의 동료인 전 도박사 출신 큐사쿠, 통칭 "구레"를 중심으로 한 사무소의 멤버들이 펼치는 옴니버스 드라마입니다.

작가의 대표작인 "시마과장"은 이래저래 욕도 많이 먹고 문제도 많은 작품이긴 하지만 작품 자체를 끝까지 읽게 하는 통속적인 재미 하나는 대단하지요.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재미만큼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스타일이라고는 해도, 감수성에 치우친 드라마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눈물이 너무 많고 사랑도 너무 많은 순정파적인 전개라, 2000년대에 보기에는 짜증날 정도였거든요. 거기에 그림체 역시 전통 극화체에 가까운 탓에 뎃생력과 구성력은 나무랄데 없다 하더라도, 역시나 요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내용 자체는 재미있습니다. 눈물 쏙 빼놓는 에피소드들 뿐만 아니라 웃기는 이야기에서 대하 액션, 거기에 괴담과 사극, SF까지 통통 튀는 전개는 옴니버스 캐릭터 극의 장점을 잘 살린 이야기로 보여지며, 어느정도 성공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추리물도 포함해서요. 물론 "인간 교차점" 스타일의 드라마들은 좀 지루한 맛도 없지 않습니다만....

추리적으로 본다면 탐정 사무소의 탐정이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의뢰들어오는 사건은 단순한 조사나 사람 찾기 같은 일(이게 물론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이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탓에 관련 에피소드가 많지는 않습니다. 전 29권 분량 중에서 진정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은 별로 없어요. 하지만 소수 정예인지 나름대로는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개 있습니다. 특히 감금장소나 스토커 잠복 장소를 알아내는 실질적인 조사 방식은 개인적으로는 높이 평가합니다. 꽤 현실적이면서도 나름 추리적 요소가 괜찮거든요.

그러나 중반이후에는 소재고갈인지 너무 이야기가 비약해 버려 실망스러운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심령퇴마물", "흡혈귀", "UFO" 에피소드들은 사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에요. 또 일상적인 이야기와 단순 범죄 사건에서 상당한 스케일의 범국가적 스파이 액션까지 다루므로 이야기의 고저가 심해서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평균정도의 재미는 가져다 주는 만화입니다. 별점은 2.5점. 지금은 구하기가 쉽지 않고 일본에서도 대표적인 보수 우익 취향의 만화가로 알려진 히로카네 켄시의 작품이라 앞으로도 구해 볼 생각도 없지만 그냥저냥 지나다가다 눈길한번 줄 만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추리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듯 하군요.

PS : "아"로 시작하는 탐정 사무소 이름때문에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보고 제일 위에 있어서 의뢰한다는 고객들 에피소드가 꽤 많더군요. 가가 탐정 사무소도 실패한 전략은 아닌 듯....

에피소드 중 추리물을 뽑아본다면

5~6권 - 고로의 애인인 란코의 아버지가 관련되어 있던 비리에 대한 에피소드 :
이 에피소드는 일종의 정경유착에 따른 거대한 음모를 다루고 있는데 킬러까지 등장하며 과격한 액션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정경유착에 관한 디테일이 굉장히 좋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다이잉 메시지 해독이 등장하는데 꽤 괜찮습니다. 좀 더 소규모의 음모였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오버하는 경향이 있어서 약간 아쉽지만 재미있는 에피소드였습니다.

7권 - 기억상실중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공백의 격류" :
십수년전에 살인을 저지르고 사고로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의뢰인의 과거를 조사하는 에피소드로 만화에 딱 어울리는 단서들과 내용전개가 독특하며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8~9권 - "유괴" 에피소드 :
한 대기업의 데릴사위 사장이 내연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유괴당해 탐정 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하는 에피소드입니다. 돈을 주고 풀려나기는 하지만 사회적 응징을 위해 유괴범을 조사하여 소재를 파악하는 과정이 현실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합니다.

14권 - 연쇄 살인마 이야기인 "빨간색의 혼란" :
싸이코 연쇄 살인범 이야기인데 내용 전개는 뻔하지만 꽤 재미있더군요.

14권 - 정체모를 인물이 가입한 보험금을 타게되는 한 주부의 에피소드인 "정체불명의 사례" :
어느날 아무 생각 없이 베푼 선행으로 보험금을 받게되는 한 주부, 그리고 그 보험금에 얽힌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로 정통 추리적 요소가 많으면서도 내용 전개도 깔끔하며 반전도 상당히 괜찮은 에피소드입니다.

16~17권 - 의학교수와 브로커가 관련된 스캔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진상을 다룬 에피소드 :
범행 장소와 공개된 장소 양쪽에서 동일 시간대에 존재하는 알리바이 트릭을 파헤치는 에피소드로 트릭은 생각외로 시시하지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과정이 꽤 재미있습니다.

19~20권 - 한 여인의 완벽한 복수극을 다룬 "의문의 편지" :
자신이 살해될 것을 예상한 한 정치인의 정부가 펼치는 완벽한 복수극인데 시한 장치를 이용한 편지 발송 트릭이 등장합니다.

20권 - 모닝콜을 통한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모닝콜" :
아침에 모닝콜을 받았다는 용의자가 그 시간에 절도를 행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인데 사실 굉장히 간단하긴 하지만 일상적으로 쓰이는 소재를 트릭에 이용하는 발상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24권 - 일본 전통 이야기에 대한 숨은 진상을 파헤치는 "사랑밖에 난 몰라" :
일종의 번외편으로 에도시대에 있었던 방화사건에 관련된 진상을 풀어내는 이야기입니다. 이 원전격 이야기를 잘 몰라서 몰입은 쉽지 않았지만 역사 추리물 적인 요소가 강하고 트릭과 전개도 재미납니다.

26권 - 한 여인의 밀실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긴머리의 여인" :
시체 이동을 통해 자살로 위장된 한 여인의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로 전편을 통해 가장 독특한 트릭이 등장합니다. 현실감은 왠지 많이 떨어지는 트릭이지만 발상이 무척 기발하며, 사건의 발단이 되는 단 하나의 단서를 쫓아 현장 조사 등을 통해 범인을 밝히는 과정이 좋습니다.

29권 - 도쿠가와의 매장금을 찾는 "보물 찾기" :
암호 트릭이 등장합니다. 암호 자체의 수준은 평이하고 일본어를 좀 알아야 해독할 수 있어서 아쉽지만 너무 어렵지도 않고 나름의 바탕이 있어야 풀 수 있어서 꽤 재미있는 암호로 보입니다.

2021/06/26

안개의 항구 - 조르주 심농 / 최애리 : 별점 2.5점

안개의 항구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 시내 한 복판에서 머리에 수술을 받은 채로 기억을 잃은 남자가 발견되었다. 신문 광고를 통해 그는 위스트르앙의 항만 관리소장인 조리스 선장이라는게 밝혀졌다. 하녀 쥘르 르그랑이 나타난 덕분이었다. 조리스 선장은 쥘르, 메그레 반장과 함께 위스트르앙 자택으로 귀가했다. 하지만 귀가한 바로 그 날, 조리스 선장은 독살당했고, 메그레 반장은 끈질긴 수사를 통해 이 사건에 마을 시장 그라메종과 쥘르의 오빠 그랑 루이, 그리고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1932년에 발표되었던,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 초기작입니다. "피해자가 총상을 입은 뒤 정성껏 치료를 받고 살아났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다시 독살당한다"는, 다른 메그레 반장 시리즈에서는 보기 드문 기묘한 사건이 등장한다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선장을 누가 공격했으며, 결국 누가 죽였는지? 다친 선장을 깔끔하게 치료해준건 누구인지? 선장에게 30만 프랑의 거액을 입금해 준 건 누구인지? 등 여러가지 본격물스러운 수수께끼도 가득하고요. 

이를 밝혀내는 메그레 반장의 추리도 빼어납니다. 메그레가 그랑 루이와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레몽)를 체포하고, 그랑메종 시장을 자살하게 만든 것은 모두 수사 과정에서 알아낸 정보를 통한 추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추리력보다는 경험과 통찰력이 돋보이며 범죄 드라마에 가까운 다른 메그레 시리즈보다는 본격 추리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밝혀진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르웨이인 장 마르티노는 그랑메종 시장의 조카 레몽이었습니다. 과거 부정을 저지르고 외국으로 쫓겨났었지요. 그 뒤, 그랑메종은 장의 연인 엘렌과 결혼했고요. 그런데 엘렌은 레몽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거부가 된 레몽은 아들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랑메종으로부터 아들을 빼앗아 오기 위해 작전을 벌였는데 이 때 레몽을 도와주던 조리스 선장이 그랑메종의 총에 맞았고, 레몽은 그를 정성껏 치료하고 여생을 편하게 보내기 위해 30만 프랑까지 입금해 주었지만, 조리스 선장이 입을 열 걸 두려워했던 그랑메종이 그를 독살했던 겁니다.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 느낌이 들만큼 대중적으로 먹힐만한 소재 - 기억 상실, 거액의 유산, 숨겨진 아들, 복수 등등등 - 들이 가득하여 아주 흥미로왔어요.

이렇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묘사되는, 전형적인 '사나이'인 메그레 반장과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그랑메종 시장의 대비, 그리고 둘의 알력 다툼도 눈에 띄는 부분이었습니다. 짜증나긴 하지만 당대 부르주아를 잘 묘사했을 그랑메종 시장 캐릭터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짜증나는 부르주아 독신녀들 묘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니까요.

추리적으로도 괜찮고, 읽는 재미도 좋은데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관계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는 설정은 답답할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레몽은 선장을 독살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른다쳐도, 그에게 총상을 입힌게 그랑메종 시장이라는걸 경찰에게 알리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시장이 자살한 뒤에도 입을 다물 이유는 더더욱 없고요. 단순 조력자였던 생미셀호 선원들이 입을 다문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선원들간의 의리'로 입을 다물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조리스 선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선원들간의 의리에 해당하지 않는걸까요? 

그랑메종의 행동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엄연히 남의 아들을 내어주지 않으려고 한 까닭부터 잘 모르겠습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는 건지... 또 선장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걸 알았을텐데, 돌아온 날 바로 살인을 저지를만한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파리에서 온 형사가 함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거부인데도 범행을 직접 저지를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하긴, 레몽과 일당들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형사가 있는데도 다시 아들을 빼돌릴 생각을 했으니, 다들 메그레 반장을 너무 우습게 본 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는 사뭇 다른 추리적인 요소들은 좋았지만, 이런저런 비현실적이고 지루했던 전개는 조금 아쉬웠어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충분하니, 메그레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여, 쥘리의 오빠 그랑 루이가 쥘리를 찾아왔을 때 쪽지를 남겼으리라는건 당대 프랑스인의 상식이었을까요? 쪽지가 있다는걸 당연하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지, 사소한 점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궁금합니다.

2004/06/29

잃어버린 지평선 : The Lost Horizon - 제임스 힐튼 / 이가형 : 별점 2점

잃어버린 지평선 - 4점
제임스 힐튼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소설가 러더퍼드는 중국에서 우연히 옛 동창 콘웨이를 만났다. 기억 상실 상태였던 콘웨이와 함께 여행했는데, 어느날 콘웨이가 기억을 되찾은 뒤 자취를 감췄다....

러더퍼드가 콘웨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는, 일종의 액자소설입니다. 러더퍼드가 콘웨이의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시작하는데, 이후 식민지의 반란으로 급히 피난하게 된 바스쿨의 영국 영사 콘웨이가 일행들과 납치되어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라마교 사원인 “상그리라”에 도착한 후 벌어지는 이야기가 펼쳐지게 됩니다.

해문 추리문고 시리즈로 나오기는 했지만, 추리소설은 아닙니다. 일종의 모험물에 멜로 드라마, 그리고 판타지 속성을 섞은 작품이죠. 
인상적인 것은 샹그리라의 설정과 묘사입니다. 20세기 초반 서구 사회에서 동양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신비로움을 극한까지 묘사하고 있거든요. 그야말로 진정한 이상향으로서, 불사의 도시로서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토피아 "상그리라"의 환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잘 알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반전(?)도 예상대로지만 상당한 울림을 주고요.

그러나 소설 발표 당시 유럽에서는 굉장히 신선하고 이색적인 소재였겠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동양인인 저에게는 당연히도 그닥 신비롭게 다가올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샹그리라의 여러 이상적인 체제를 조직한 사람이 결국 서양인이라는 설정은 어처구니가 없었고, 라마교 사원에 신부가 등장한다는 설정까지 나오니 할 말이 없습니다... 실제였다면 맞아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을 거에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는 단점을 뛰어넘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그래도 유명한 고전 명작답게 제법 흡입력 있고 이런 저런 볼거리도 제법 되는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거리를 찾는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덧 : 자취를 감춘 콘웨이는 다시 샹그리라에 도착했을까요? 제가 아주 예전에 본 흑백 영화 “샹그리라” 마지막 장면에서는 콘웨이의 앞에 샹그리라 사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충분히 도착했으리라 믿고 싶네요.

2020/08/23

백사당 - 미쓰다 신조 / 김은모 : 별점 3점

백사당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겸 편집자 미쓰다 신조는 다쓰미 미노부라는 남자의 괴이한 체험을 들은 뒤, 그가 쓴 원고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그 원고를 읽은 미쓰다 신조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 둘 씩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젊은 여성 편집자 다마가와는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미쓰다 신조는 이 현상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는 다쓰미 미노부를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교토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집에서도 괴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실종된 다마가와는 돌아온 뒤 눈 앞에서 자살하는 등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는데....

직전 "사관장"에 이어 읽은 미쓰다 신조작가 시리즈 3부작 마지막 작품입니다. 읽고 나니 "사관장"을 읽고 든, 미완성같다는 느낌이 맞았더라고요. "사관장"은 이야기의 도입부이자 전편이고, 이 "백사당"으로 이야기가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하나의 긴 장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백사당"을 통해 "사관장" 속 중요한 수수께끼들의 진상이 밝혀지거든요. 일본에서는 '작가 시리즈 3부작 전편 (사관장)'과 '작가 시리즈 3부작 후편 (백사당)'으로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그렇게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중 하나만 읽게 되는 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저만해도 깜빡 그럴 뻔 했습니다.

하여튼, 작품은 미쓰다 신조가 겪은 괴기 체험에 기반을 둔 '작가 시리즈'답게 공포의 마물 '마모우돈'이 실제한다는걸 전제로 하고 있긴 한데, 놀라운건 이야기 속 일어났던 괴이한 현상이 모두 합리적인 추리로 설명된다는 점입니다. 작 중 친구 소후에 고스케의 말에 따라서 - "초자연 현상은 해석할 방법이 없으니,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는건 확실하게 일어났다고 인정되는 현상만 상대하는" - 요. 덕분에 그야말로 '호러 미스터리'라는 장르 정의에 딱 들어맞습니다. 

이 지론에 의하면, 결국 "사관장"에서의 수수께끼는 백사당에서의 아버지 실종과 새어머니 실종, 두 개의 사건만 확실히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두 사건에 대해서만 합리적인 해석이 될 수 있도록 파고듭니다.

첫 번째 수수께끼인 할머니 탕관 의식 도중 실종된 아버지 사건에 대한 탐정역인 아스카 신이치로의 추리는, 아버지는 새어머니 도미 씨에게 살해당했고 그 시체는 관 속에 숨겨져 있었다는 겁니다. 도미 씨가 백사당에 들어올 수 있었던건, 자물쇠가 잠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우선 도미 씨는 탕관을 도와주겠다며 백사당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뒤, 탕관 후 이물질을 배출하기 위한 탕관구를 통해 죽은 할머니의 시신을 분해해 버리고 관 속에 대신 아버지의 시신을 넣었습니다. 그 뒤 백사당 입구 옆 공간에 숨어있다가, 다미 할멈이 백사당 안으로 들어올 때 몰래 탈출했다는 추리입니다.
백사당이 밀실이기는 하지만, 탕관을 하기 위해 설치된 탕관구라는 특이한 구멍의 존재와 요철 모양으로 입구 옆에 공간이 있는 구조라는 점을 잘 활용한 멋진 트릭이었어요.

마물에 의한 기억상실 정도로 치부되었던 도도야마 산에서의 체험도 알고보니 추리적으로도 잘 짜여져있으며, 정교한 극적 반전이 등장해서 무척 인상적입니다.
단서는 이전에 등장했던, 도도야마 산을 올랐던 사람들 이야기들입니다. 혼자서 산을 찾았던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는데, 두 명이 방문하면 둘 다 무사하거나, 한 명만 무사하거나, 둘 다 죽었으며 세 명 이상이 올라가면 대부분 죽었다는게 그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이를 통해 두 명 이상이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게 아닐까라는 추리가 이어집니다.
"사관장"에서는 아이들끼리 도도야마 산을 올라가기로 결심했었는데, 할머니 장례로 흐지부지되는 듯한 묘사가 나왔었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아이들 모두 도도야마 산에 올라갔던 겁니다! 그 중 한 명이 경찰 서장의 아들인 전학생 미쓰다 신조였고, 미쓰다 신조는 도도야마 산 정상 신당에서 다쓰미 미노부를 만났는데 둘이 정신적으로 뒤바뀌어 버리고 만 것이에요. 무언가 습격한게 아니라 둘이 급작스럽게 만난걸 계기로 정신이 바뀐 채 기억을 잃은 겁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미쓰다 신조와 다쓰미 미노부가 엮이게 되었으며, 미쓰다 신조가 무언가에 쫓기는 현상이 일어났고, 결국 미쓰다 신조가 다우군 다우초를 제 발로 찾아 햐쿠미가 은거방 격자 안에 갇히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 진상의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관장"에서 친구가 된 전학생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숨기는 등 이를 서술 트릭처럼 활용한 전개도 돋보입니다.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늙어 보이는 다쓰미 미노부가 사실은 미쓰다 신조들과 동년배라는 것 역시 서술 트릭의 일종으로 마지막 진상이자 반전의 순간 충격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합니다. 다쓰미는 마모우돈에게 정기를 빼앗긴 탓에 폭삭 늙어버렸다는 설정인데, 이 설정은 작품 속 또 다른 중요한 단서로 등장하는 6년전 아이들 실종 사건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모우돈이 정기를 빼앗으며 나라에서부터 다쓰미가 사는 교토까지 이동하면서 벌어진 일이거든요. 마모우돈은 아이들의 정기 덕분에 아름다운 여자로 탈바꿈 하게 되었고요.

전편에서 설명이 부족했거나 설명되지 않은 부분을 보완해 주는 내용도 많습니다. 다쓰미 미노부가 겪었던 할머니의 학대는, 말 그대로 '첩의 아이'에게 명문가 대가 이어진다는 것에 대한 분노라고 이전 리뷰에서 설명드렸었는데, 이 작품에서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햐쿠미가 당주들은 모두 여성 편력이 심하고, 여성들에게 원한을 많이 샀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대로 햐쿠미가 당주들에게는 여성들의 저주가 씌워졌다는군요. '나'인 다쓰미 미노부(햐쿠미가에서 다쓰미가의 양자로 보내져 성이 바뀜)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던거지요.
아울러 스나가와가 살았던 집 폐허에서 만난 무언가는 스나가와의 할아버지의 원령인건 당연한데, '왜 원령이 나타나서 햐쿠미가를 원망하는지'는 전편에서는 설명되지 않았죠. 이 작품에서 원령의 존재는 앞서 설명드린 도도야마 산 체험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아이들끼리 도도야마 산을 올라갔다가 이상해졌는데, 마침 스나가와는 함께 올라가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스나가와가 아이들이 산에 올라가도록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결국 마을 사람들이 스나가와를 죽였지요. 그 뒤 스나가와의 부모는 자살하고 할아버지도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어 원한이 남게 된 것이고요. 스나가와가 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원한이 사무칠만한 비참한 죽음인건 분명합니다.

이외에 이 작품 속에서만 등장하는 괴이 현상에 대한 묘사들도 좋습니다. 다쓰미의 "사관장" 원고를 읽은 미쓰다 신조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인데, 특히 여성 편집자 다마가와가 자살하는 순간 입에서 쏟아낸 방언, 기묘하게 남긴 메시지는 섬찟할 뿐 아니라 미쓰다 신조와 다쓰미 미노부가 동일 인물이라는걸 드러난다는 복선으로도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미쓰다 신조가 마모우돈을 만난 순간 두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스륵 스륵 스륵...' 의 표현도 섬찟하며, "사관장" 초반 할머니가 강제로 곰팡이 슨 만주를 먹이는 장면과 겹치는 스나가와 할아버지 원령의 전병 대접과 원한의 토로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눅눅한가...')

그런데 정작 추리와 진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다쓰미 미노부와 미쓰다 신조가 할머니 묘를 파서 관을 확인해 본 결과, 관 속의 뼈는 그냥 할머니 뼈였습니다. 즉, 도미 씨의 살의를 눈치챈 아버지 나오호 씨가 입구 옆 공간에 숨어있다가 다미 할멈이 들어오는 틈을 타 도망갔다는게 진상이라 좀 허무했어요. 다미 할멈이 다쓰미 미노부를 위해 꾸민 일로 당주 나오호씨가 도망치는 큰 소동이 일어나면, 체면을 중시하는 도미 씨가 아들을 본가에서 내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소 다쓰미 미노부를 아꼈던 다미 할멈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일이라 합리적이기는 한데, 추리적으로 재미는 없습니다.
또 이 진상이 사실이라면, 도미 씨와 하룻밤 밤 백사당에 갇혀 있었을 때 무사했던게 설명 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요. 

그리고 두 번째 수수께끼에 대한 추리는 명백히 문제가 있습니다. 아스카 신이치로는 도미 씨 장례식에서 탕관을 하던 다쓰미를 습격한건 단순한 환청과 환각이었으며, 다음날 아침 백사당을 찾은 다미 할멈은 쓰러진 다쓰미를 보고 충격을 받아 죽었다고 추리합니다. 이를 발견한 두 명 숙부와 고모는 도미 씨 시체를 탕관구를 통해 없애고 다미 할멈의 시체를 도미 씨 관에다 넣었다는 거지요. 그러나 '나'가 멀쩡한만큼, 다미 할멈은 고령으로 인해 백사당에서 자연사한걸로 이야기하면 되는데, 이렇게까지 무리한 트릭을 감수해가며 고모와 숙부들이 다미 할멈의 죽음을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앞서 첫 번째 수수께끼의 진상이 단순 도망이라면, 이러한 트릭을 고모와 숙부들이 급조해서 떠올릴 이유도 없고요.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우선은 미쓰다 신조 및 친구들의 말로가 조금 불분명하다는겁니다. 단순 실종으로 퉁치고 끝내는건, 이야기가 제대로 끝나지 않은 느낌입니다.
햐쿠미가가 백마리 뱀에서 가려 뽑은 뱀신을 모신다던가, 그 외 이런저런 스쳐지나가는 괴담들같이 뭔가 있어보였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던 묘사도 많습니다. 아버지 나오호 씨가 마지막 순간, 미쓰다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갑자기 등장해서 살짝 폼을 잡다가 바로 정기를 빨려 리타이어 해 버리는 장면도 단지 나오호 씨의 말로에 대해 알려주는 것 외의 역할은 없는 불필요한 이야기였고요.
마모우돈이 다쓰미 미노부의 몸을 한 미쓰다 신조와는 잘 지내면서, 미쓰다 신조의 몸을 한 다쓰미 미노부는 햐쿠미가에 감금한 이유도 모르겠네요. 전의 사건들을 보면 미쓰다 신조를 납치하는건 일도 아닌데, 왜 이리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지도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추리를 펼쳐보이는 탐정 역인 미쓰다 신조의 친구 아스카 신이치로의 캐릭터는 특별한 매력이 없어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모든 탐정들이 괴상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평범해서 작품에 많이 묻혀요. 탐정은 아니지만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친구 소후에 고스케도 등장하기 때문에 비중과 존재감도 흐릿한 편이고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도조 겐야 시리즈로 만드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전작과 합쳐 1000페이지를 훌쩍 넘는 어마무시한 분량도 부담스러웠고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백사당에 관련된 거의 모든 수수께끼는 완벽하게 풀린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웠습니다. 더운 여름 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3/11

너무 예쁜 소녀 1~3 - 얀 제거스 / 송경은 : 별점 1점

[세트] 너무 예쁜 소녀 (전3권) - 2점
얀 제거스 지음, 송경은 옮김/한경비피

인적이 드문 프랑스의 한 마을에 어느 날 숨이 막힐 정도로 예쁜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마농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녀를 돌봐주던 미망인이 심장마비로 죽자 마농은 마을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마을을 떠났다. 때마침, 총각 파티를 떠나던 세 명의 남자들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해 차에 태워 주었다.

장면이 바뀌어 한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프랑크푸르트. 미국대통령의 방문으로 도시 전체가 삼엄한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 도시 숲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강력계 팀장 로버트 마탈러가 이 사건을 맡게 된다. 사건 발생 이틀 뒤, 사건 현장 근처 호수에서 물에 빠진 자동차가 발견된다. 트렁크에서 또 다른 남자의 시체가 나오면서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진다. 트렁크 안에서 발견한 피해자의 옷에서 주유소 영수증을 찾아내고, 그 일행이 주유소 주인의 조카는 자동차에 남자 세 명과 유난히 눈에 띄게 예쁜 여자가 타고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작가의 추리 소설 데뷰작이자 로버트 마탈러 형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네요. 코로나 사태로 방콕하는 와중에 도서관 e-book 대여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유럽 추리 소설은 딱히 취향이 아니지만, 이전에 분명 어디선가 소갯글을 읽고 장바구니에 담아놓았었기 때문이죠. 제목에서 왠지모를 호기심도 느꼈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선택은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끔찍한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범인을 뒤쫓는 형사들의 활약이 펼쳐지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모든 면에서 함량 미달인 탓입니다. 주인공인 로버트 마탈러 형사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오랫동안 형사로 일하고, 지금은 팀장이라는데 전혀 전문가스럽지 않기 때문이에요. 피해자 가족에게 피해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기를 지극히 꺼려할 정도로요. 독일 형사라면 기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수사를 진행할 것 같지만, 연락하라고 한 사람이 누군지도 잊어버린다거나,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등 잔 실수도 많습니다. 추격전과 같이 대단한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고, 사람 몇 명 만났다고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을 보면 영 신뢰하기 어렵고요. 여기에 먹는걸 좋아하고, 15년 전 사망한 아내를 잊지 못하면서도 단골 카페의 새로운 아르바이트생 테레사를 유혹하는 모습을 더하면, 이게 무슨 독일인이가 싶습니다. 이탈리아 인에 더 가까운거 아닐까요? 수사 외에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미술 쪽에 대한 취미도 피력하는데 이는 완전한 사족이었습니다. 운전을 싫어하고, 담배와 커피를 즐기는 모습 정도의 독특함만 가져가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다른 경찰들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탈러의 부하들은 도주 중인 플뢰거에게 습격당해 총을 빼앗기고, 플뢰거에게 사로잡혀 끌려다니는데다가, 마리 루이제가 있는 쇼핑몰 봉쇄에 실패하고, 심지어 유력 용의자인 마리 루이제를 호송 중에 놓치기까지 합니다. 다른건 몰라도 유력한 용의자를 놓친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너무 예쁜 소녀' 마농, 마리 루이즈의 존재도 별거 아닙니다. 누구나 반할만큼 대단한 외모를 소유했다고 묘사는 되지만, 그 미모 탓에 사건이 벌어진다고는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모 때문에 가족이 파멸하고, 그녀가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요
또 소악당 3명의 차에 얻어탄 뒤 성폭행 당한건 미모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외모가 평균 수준만 되었어도 충분히 닥칠 수 있는 범죄였으니까요. 로만을 유혹한 뒤 살해하는 범행에는 명백히 미모가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야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마농의 모든 행동은 뒤떨어져 보이는 지능 등으로 모두 즉흥적, 수동적으로 묘사됩니다. 미모를 사용하려는 의지가 아예 없어요. 미모를 활용한 어린 팜므파탈을 기대했었지만, 실망스럽기만 하네요.

내용에서도 스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추리의 여지도 당연히 없고요. 시체가 발견된 뒤, 목격자들의 증언과 이런저런 증거를 모아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요. 마농이 베른트 풍케와 요헨 힐셔, 플뢰거가 탄 차에 동승한 뒤 숲 속에서 플뢰거를 제외한 사람들끼리 성관계가 있었고, 일행 중 베른트 풍케와 요헨 힐셔가 난도질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범인이 제 3의 인물이 아니라면 플뢰거나 마농, 둘 중의 한 명이 범인인건 뻔합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여자인 마농보다는 플뢰거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봐야겠죠. 마농 혼자 남자 2명을 살해하고, 그 중 한 명을 차 트렁크에 실어 호수에 버릴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우니까요. 마농이 범행을 저지르는 와중에 플뢰거 혼자 도주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하지만 이 가설은 사건 뒤 마농이 우연히 만나 유혹한 로만을 난도질해서 살해한 것 때문에 부정됩니다. 그녀는 정말 살인마였던거죠, 그렇다면 플뢰거는 왜 마농과 따로 도주한 뒤 경찰에 쫓기다가 투신자살했을까요? 범행의 공범이었다 하더라도 직접 실행범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릴 이유가 없었을텐데 말이죠. 그리고 공범이었다면, 애초에 자기 친구 두 명 살해와 시체 유기에 가담한 이유와 요헨 힐셔의 시체를 은닉한 뒤 마농이 플뢰거를 살해하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남자만 죽인다는게 이유였을까요? 그렇다면 왜? 정말로 아버지에게 성폭행 당했던 트라우마가 있었던걸까요? 그리고 로만과는 몇일간 함께 지내며 관계를 맺었는데 왜 바로 살해하지 않은걸까요?
이렇게 떡밥을 던진건 많은데 제대로 회수되는건 별로 없어요. 범행 동기도 도무지 알 수 없고요. 게다가 모든 수수께끼는 결말에서 마농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어서 그랬다, 즉 심신 미약 상태에서 일으킨 불가항력적인 범행이었다는 식으로 대충 마무리됩니다. 이 정도면 막장 드라마기억 상실급에 비교할 만한 최악의 결말이라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설명되지 못한 부분은 많습니다. 애초에 왜 마농의 아버지 페터가 가족 동반 자살을 기도했는지, 가족 동반 자살 사건에서 마농 혼자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인지, 살아남은 뒤 왜 정상적인 사고를 갖추지 못하게 되었는지, 마농이 체포되고 난 후 장 루크 지로가 죄를 뒤집어 쓰기 위해 나선 이유는 무엇인지 등 많은 부분이 모호합니다. 장 루크 지로는 마농에게 홀딱 반한 멍청이라서 그렇다지만, 딱히 납득이 되는 설명은 아니었어요.
그나마 추리가 등장하는건, 페터 가이슬러가 좌절하여 일가족 동반 자살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 익명의 투서를 누가 썼느냐를 밝혀내는 정도에 그치며, 이 역시 사건 후 페터의 주변 동료 중 한 명이 자주 쓰지 않는 단어를 진술서에 썼는데 이 단어가 투서에도 쓰였다는게 이유라서 대단한 추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캐릭터, 내용 모두 뭐 하나 건질게 없었던 완벽한 시간 낭비였습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걸 알게된게 유일한 수확이에요. 로버트 마탈러가 팀장으로 근무하는 독일의 치안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