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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6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6점
권일용.고나무 지음/알마

권일용은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입니다.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형사로 근무하다가 발탁되었지요. 감식 업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걸 눈여겨 보았던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윤외출의 덕이었습니다. 그 뒤 여러 수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프로파일러로서의 입지를 굳혔고요. 

이 책은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서 수사에 참여했던 6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국내 수사 기관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시작되어 성장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논픽션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2001년 조현길이 저질렀던 여아 살인 사건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피해 여아 사체를 냉동실에 보관해서 사체 등 부분에 생겨난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긴 눌린 흔적으로 냉장고 모델을 찾아낸 겁니다. 해당 냉장고는 업소용 중대형이었고, 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직접 확인한 단서를 토대로 권일용은 한국 범죄 사건 수사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서가 수사에 기여한 바가 있고, 보고서 속 범인상이 진범 조현길과 대체로 일치했던 덕분에 이후 국내 범죄 수사에서도 프로파일링이 활용되게 되었고요. 국내 프로파일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뒤이어 권일용이 투입되었던 2003년 유영철 사건에서는 연쇄 살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실패를 겪게 됩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유영철이 경찰 수사 방향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유영철은 범행 수법을 바꾸었고, 그 탓에 권일용은 이전 사건과 이후 사건을 연결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정통 수사기법의 한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수사팀은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고 피가 묻은 상태에서 도망을 갔는데도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량을 이용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수색에 집중했지요. 하지만 권일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걸 깨닫고,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들어맞았습니다.
최초 노인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 교회가 있었던게 나름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권일용의 생각대로였습니다. 유영철은 '교회가 옆에 있지만 바로 앞에 사는 이 사람도 무참히 죽는다’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체 매장 현장에 표식을 한건 완전히 헛다리를 짚기는 했습니다. 권일용은 범인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추하고 되돌아볼 것이라는 낭만적인 추정을 했는데, 유영철은 그냥 '사체를 묻은 데를 또 파면 귀찮아서' 표시를 한 것 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순한 실패보다는 나름 성과가 있었던 유영철 사건이 있었던 덕분에 권일용은 더욱 성장했고, 경찰 내에도 프로파일링 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뒤이은 정남규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순 강도 상해범으로 체포되었던 정남규가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임이 드러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자백을 권일용이 이끌어내게 되거든요.

2009년 강호순 사건에서도 권일용 팀의 분석이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범인은 '호의동승'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고, 이를 위해 고급차를 탔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일거라는 분석이었는데 실제로 강호순은 에쿠스를 탔으며, 범행 당시 깔끔한 양복을 입기도 했고, 차 대쉬보드 위에 개와 함께 있는 사진을 장식해 놓는 등 치밀하게 본인을 위장했다고 밝혀졌으니까요. 주변 사람들 평가도 굉장히 좋았다고 하지요

강호순 사건 중간에 맡았던 2007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아동 성범죄자 성유철 사건은, 프로파일링의 활용보다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2007년에 벌어졌던 고정민 (가명) 양 실종 사건에서는 사람의 자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거짓 자백에 이르는 과정과 거짓 자백 후 범행의 줄거리를 지어내는 모습 모두 교과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더라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확 물어버리고 소리를 지르는걸 왜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든 '공포심' 때문이라는데 굉장히 와 닿았어요.

또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1960~1970년대에는 살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죄였는데, 왜 그 양상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분석도 상세합니다. 자본주의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가 일부 구성원들을 스트레스로 압착할 때 일부 반사회적인 범죄자들이 복수심으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반사회성은 후천적 영향일 가능성이 높고요. 서구 사회에서는 반사회성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여기지만, 단일 민족인 한국에서 유전적 이유로 누구는 괴물이 된다는 건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복수심,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었던 유영철, 정남규와는 다르게 진짜 서구적인 쾌락 연쇄 살인을 저지른 강호순과의 차이도 잘 드러나고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도 잔혹 범죄는 존재했던 만큼 연쇄 살인이 양극화로 더 증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찰 수사력의 발달로 과거 사건화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밝혀지고, 이게 과거보다 발달한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탓에 증가한걸로 보이는게 아닌가 싶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 깊게 연구된 자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 외 단순히 당시 벌어졌던 범죄와 그 수사, 해결 과정 뿐 아니라 수사에 참여했던 프로파일러들의 생각과 행동도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로파일러가 무슨 마법사나 천재가 아니라, 수사를 돕는 역할이라는게 잘 드러나지요. 수사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적인 은어 등 디테일도 좋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 아픈 현실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듯 등장하기는 하지만, 권일용도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입장이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도소에서 교정, 교화가 가능하다고 쳐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중죄를 저지른 범인을 교정, 교화시켜 사회에 복귀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읽어 볼 만한 논픽션인건 분명한데, 건조한 르포르타쥬 문체가 아니라 권일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적인 구성과 문체로 쓰여진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 불호 쪽이에요. 분명 실화인데 뭔가 각색되어서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담기 위한 취지 탓이었겠지만, 익히 알려진 사건에서 누구나 다 아는 정보를 빼곡하게 채워 놓은 부분들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 범죄사, 프로파일링 역사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5/03/06

비독 소사이어티 - 마이클 카프초 / 박산호 : 별점 3점

비독 소사이어티 - 6점
마이클 카프초 지음, 박산호 옮김/시공사

비독 소사이어티는 82세로 생을 마감한 비독을 기리기 위해 인종, 성, 연령, 국적을 가리지 않고 총 82명의 세계 최고의 형사들과 범죄 수사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범죄 해결을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재능기부 단체, 자원봉사 탐정들이라고 합니다. 단, 발생한 지 2년 이상이 지나 경찰의 공식 협조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해당 사건의 조사에 응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공권력을 넘보지 않기 위해서겠죠. 사건 해결을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은 빠지는, 철저하게 조력자 역할에 충실한 전문가들입니다. 쿨하고 멋있죠?

이 책은 비독 소사이어티 소속 수사관들이 가 요청받은 미해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5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통해 수많은 사건과 수사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세계 5대 프로파일러 중 한 명으로 셜록 홈즈의 재림이라 불리는 골초 프로파일러 리처드 월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의 프로파일링은 신급으로 묘사되는데, 사건을 맡으면 범인 체포를 자신하며 "내가 범인이라면 익지 않은 바나나는 사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캐릭터성도 확실해서 독신주의에 엄청난 골초, 전자제품은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고 양복은 단 한 벌 뿐, 그런데 피아노 연주 능력은 뛰어난 음악가이며 모든 일에 시니컬한 천재로 묘사됩니다. 작중 표현 그대로 "셜록 홈즈와 싱크로율 9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20년 전 가족을 몰살시키고 도주한 존 리스트 사건 해결입니다. 리스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어떤 차를 탈지까지 정확하게 예측해 내거든요. 폭주족 살인자 나우스에 대한 프로파일링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정확했고요.
이러한 프로파일링 실력 뿐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수갑소리야"라는 말로 대표되는 실질적 범인 검거 능력도 인상적입니다. 스콧 살인 사건에서는 자료만 보고 범인이 레이샤일 것이라 확신하며, "시체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지방 검사에게 "현장의 혈흔은 누군가 죽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피도 시체의 일부다"라고 설득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개인적인 천재성으로 설명되기에, 그 비결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살인자를 4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헬릭스 이론"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 분류를 통해 한밤중 마트에서 세 번 살해당한 브룩스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도 인상 깊고요.

그러나 다른 수사관들은 리처드에 비해 활약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협회를 만든 윌리엄 플라이셔는 사건 해결보다는 리더십을 갖춘 마당발, 얼굴마담 역할이며, 또 다른 중심 인물 프랭크 벤터는 과거 사진만으로 존 리스트의 현재 모습을 예측한 흉상 제작으로 유명세를 얻은 천재이지만 범죄 전문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탓입니다.

해골을 통한 얼굴 복원, 실종 용의자의 현재 모습을 조각하는 일 등을 담당하므로 이야기 중심에서는 조금 비켜나 있지요. 비교하자면 천재 아이언맨이 리처드 월터, 리더십 중심의 캡틴 아메리카가 윌리엄 플라이셔, 과학보다는 신화 기반의 토르가 프랭크 벤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건, 수사관, 수사 이야기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기존 경찰 수사로는 해결이 어려웠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제 사건을 천재들이 해결해 나간다는건 추리 소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예를 들자면 이런 작품)인데, 그게 실제 사건이라면 왠만한 소설 이상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지요.

아울러 공소시효 없이 미제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미국 사법당국의 노력도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흉악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폐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몇몇 사건처럼, 사건 발생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DNA 감식 등의 수사기법 덕분에 진범이 밝혀진 사례도 있으니까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미제 사건을 부각시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는데, "화성 연쇄살인" 같은 경우는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랭크 벤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화성 연쇄살인범의 몽타주는 철저히 가상이기에 현재 모습을 조각할 수는 없겠지만, 리처드 월터의 능력을 빌린다면 훨씬 정밀한 프로파일링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처럼 재미와 가치를 지닌 책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논픽션과 소설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어 불필요한 묘사와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은 읽는 데 부담을 줍니다. 다른 유사한 논픽션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인데,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리처드와 프랭크의 천재성에 대한 묘사는 지나쳐서 오히려 거부감을 줄 뿐이고요. 차라리 이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아울러 너무 극적인 성공 사례만 실려 있는 점도 좀 아쉬웠습니다. 프로파일링은 본질적으로 데이터와 직감에 기대는 작업인데, 100% 적중이라는 건 비현실적이니까요. 한두 건의 실패 사례가 들어갔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자 속 소년" 사건의 진범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도 불만이며 부실한 번역과 교정은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공통적으로 지적된 문제인데, 18,000원짜리 책이라면 그에 맞는 완성도를 갖췄어야 했습니다. 초판 독자가 베타테스터도 아니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었지만, 책의 완성도 부족으로 1점 감점합니다. 다만 범죄 분석과 프로파일링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는 매우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덧붙이자면, 대니 드비토가 운영하는 제작사가 비독 소사이어티 관련 영화 판권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리처드와 프랭크가 중심이라면 아마도 존 리스트 사건이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5/11/09

어둠속의 목소리 (The Voice From the Dark) - 이든 필포츠 : 별점 2점

어둠의 소리 - 6점 이든 필포츠 지음, 박기반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유명한 탐정 존 링그로오즈는 은퇴 후 회상록 저술 작업을 위해 제이콥 브렌트의 호텔에 머물던 중, 한밤중에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링그로오즈는 아이 유령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호텔에 거주하던 노부인 베라아스와 그녀의 하녀 수잔을 만난 뒤, 목소리의 정체가 브루우크 남작의 후계자였던 르도비크 소년이며, 소년의 죽음에 현재 남작인 숙부 바아고인과 바아고인의 심복인 집사 아서 비튼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범인들을 검거하기 위해 링그로오즈는 변장하여 비튼에게 접근하여 그가 소년을 죽일때 사용한 악마의 머리 모형을 이용하여 겁을 주었지만, 비튼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조사를 계속한 링그로오즈는 바아고인의 형인 전 남작 부르우크의 죽음도 의심스럽다는걸 알아낸 뒤, 바아고인과 최후의 대결을 준비한다....

"빨간 머리 레드메인즈"의 작가 이든 필포츠의 또다른 대표작입니다. 집에 있던지는 꽤 되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차에 이번에 결국 완독에 성공했습니다.

"빨간 머리 레드메인즈"와 같이 사악한 인물과의 한판 대결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야기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이 작품이 더 낫습니다. "빨간 머리..." 에서는 탐정역이 2명이 등장해서 혼란스러인데, 여기서는 시종일관 우직하게 은퇴한 노 탐정 혼자 악당과 대결하는 구도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악한 범인역의 캐릭터라던가 각종 심리 묘사, 러브 스토리를 이야기에 잘 끼워 넣은 점 등은 "빨간 머리..."와 거의 판박이로 보인다는 점에서 같은 작가 작품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당대에 높이 평가되었다는데, 그럴 법 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내용은 "빨간 머리..."보다 더욱 지루합니다! 일단 이 작품에서는 최소한의 트릭 조차 찾아보기 어려우며 탐정의 역할이나 캐릭터도 그다지 강하게 다가오지 않는 탓입니다. 그렇다면 악역이라도 뭔가 해 줘야 할텐데 악역인 바아고인의 캐릭터 역시 뭔가 심심합니다. 지금 읽기에는 악역이기는 커녕 오히려 순진해 보일 정도에요. 계획도 많이 어설프고요. 그래서인지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래된 작품이어서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늘어지는 느낌도 강합니다. 등장 인물도 많지 않은데, 왜 이렇게 긴 걸까요? 지금보다는 더 짧게 압축해서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 명작임에는 분명하고 이후의 추리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 역시 분명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예전의 "하서판"으로 읽었기에 번역의 문제로 더욱 지루함을 느꼈으리라 생각은 되지만, 이 작가 작품은 아무래도 취향에 맞지 않나 봅니다.

2023/09/12

블랙잭 링 노트

인터넷 서핑 중 발견한 아이템 한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일본 다이소에서 2023년 8월부터 데츠카 오사무 캐릭터 상품을 판매한다고 하는데, 그 중 <<블랙잭>>의 링 노트 디자인이 아주 인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펼치기 전은 아래와 같이 평범한 노트로 보이는데요,
펼치면 노트의 링이 얼굴 흉터를 재현하도록 디자인되어 있거든요. 대단합니다!
다른 제품들도 괜찮아 보이지만, 링 노트는 정말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2/12/04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국내에서 과학 수사를 통해 해결했던 여러 사건들을 정리한 논픽션. 2부 구성으로 모두 22건의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부는 특정 과학 수사 기법이 해결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어서, 해당 수사 기법에 대해 이해를 돕는 구성입니다. 현장 검증과 검시는 물론이고, 비산 혈흔 등 혈흔 형태 분석, DNA 분석, 프로파일링, 법 최면, 지문 감식, 지리 프로파일링 등이 등장하며, 수사 기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이고 전문가들에 대한 인터뷰 등 부가 자료들도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습니다. 사건도 밝혀진 모든 내용이 소개되고 있으며, 사건 현장 사진과 도해로 구성된 사건 상황 등 도판도 완벽합니다.
2부는 완전 범죄를 노렸지만, 수사관들이 끈질긴 수사로 밝혀낸 사건들이 담겨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소개는 1부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수준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4점. 우리나라 범죄를 다룬 논픽션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여,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해 드립니다.

첫 번째는 <<마포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입니다. 의사 남편이 만삭 부인을 살해했던 엽기적인 범행으로, 피고인 남편 측에서 캐나다 법의학 전문가까지 증인으로 불러 법정 다툼이 있었던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니, 남편 범행이 확실하더군요. 피해자의 목졸림 흔적과 얼굴과 몸의 멍자국, 저항하다 생긴 것으로 보인 손톱 밑의 남편 DNA 등 현장 증거가 뚜렸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남편 쪽에서 주장했던, "욕조에서 넘어져 죽은 것 같다"는걸 설명할 수 없는, 피해자 몸의 혈흔과 상처가 결정적인것 같아요. 욕조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양양 일가족 방화 사건>>은 무식한 범인이 교과서처럼 단서를 남긴 범행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현장 검증과 검시로 피해자 일가족 시신에서 수면제가 검출되어 누군가 방화를 저지른게 명백하다는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경찰 진술에서 필요도 없는 말을 해 가며 자살이 맞다고 주장했고, 결국 현장에서 발견된 차용증 등으로 동기마저 드러나버리고 말았지요. 범행 직후 소방차를 따라 다시 현장에 나타난 것까지, 하는 행동 모두가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단순 무식한 범인을 연상케합니다. 아울러 고작 2,0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어린 소녀가 포함된 네 명의 일가족을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에게 무기징역은 너무 관대한 선고였습니다. 능지처참하고 저잣거리에 효수를 했어야....
<<서울 광진구 주부 성폭행 사건>>은 그야말로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DNA 감식을 통해 드러난 범인은 범행 당시 수감 중이었지만, 과학수사관 권경사의 추리 덕분에 진범이 체포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수감 중인 용의자의 일란성 쌍동이라는 추리였지요.
<<60대 남녀 변사 사건>>은 단순 자연사로 보였지만, 현장 검증을 통해 몇 가지 이상한 정황이 포착되어 살인 사건이라는게 드러난 경우입니다. 현장에서의 구토 흔적과 기묘한 자살 시도 흔적, 그리고 자연사는 이불 한 장만 반듯이 덮고있는게 일반적인데 이불 두 장이 포개져 쌓여 있었던 것, 피해자 옷과 맞지 않았던 방에 떨어져 있던 단추 등이 단서가 되었습니다. 검시 결과도 살인 사건임을 증명해 주었고요. 현장 상황과 시신의 모습 등을 분석하는 과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안성 부부 살인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사건 해결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데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잔혹한 현장 모습으로 청부 살인이나 원한 살인이 의심되었지만 프로파일러들은 "돈을 목적으로 한 범죄이며, 근처에서 일어났던 침입 사건의 범인과 동일인물일 것이다. 침입이 발각되어 과도한 공격으로 피해자들을 살해했고,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몰린 사람이며, 피해자들은 물론 마을을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일 것이다"는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이는 실제 범인 모습과 일치했지요. 어떻게보면 좀 뻔한데, 현실은 픽션과는 엄연히 다르다는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양주 전원 주택 살인 방화 사건>>을 통해서 지문은 고온에서는 수분이 증발하면서 흔적 자체가 사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화재 현장에서는 '열 사각 지대'에서 집중적으로 지문을 채취한다는 등 실제 현장에서의 지문 감식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었고, <<의정부 연쇄 절도 사건>>은 이름도 생소한 '지리 프로파일링'을 접하게 해 주어 좋았습니다. 범죄가 발생한 장소와 시간을 토대로 범인이 머무는 곳과 다음 범행 장소를 예상하는 과학수사 기법이라는데, <<넘버스>>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던 적이 있지요. 실제 사건을 해결할 정도로 정립된 기법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2부의 <<고급 전원주택 연쇄 강도 사건>>은 완전 범죄를 노린 3인조 일당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고 전원 주택을 털었던 사건으로, 집에 설치된 폐쇄 회로 TV는 본체까지 뜯어서 들고갔고, 현장에 남긴 담배 꽁초도 어디선가 주워와 일부러 흘리는 등 굉장히 치밀하게 범행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범행 장소를 오간 차량이 없었다는게 특히 주목할만 합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전원 주택이 산과 가깝다는걸 이용하여, 목표지 인근까지 대포차로 이동한 뒤 야산에서 하루 노숙을 하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군요. 현장에 일부러 뿌린 꽁초 중 동일한 DNA가 검출된 탓에 덜미가 잡히고 말았지만, 정말로 대단한 지능범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산 교수 부인 살인 사건>>은 한 때 뉴스를 도배했던 사건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는 범죄 전문가 교수가 경찰과 두뇌 싸움을 벌인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사건 개요를 읽어보니 별다르게 머리를 쓴 부분은 없어서 놀랐습니다. 내세운 알리바이도 엉망이었고, 내연녀를 동원한 시체 유기도 곧바로 경찰에 발각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언변만 빼어날 뿐 일개 잡범 수준에 불과했어요. 차라리 앞서의 고급 전원주택 연쇄 강도 사건 범인들 수준이 더 높았습니다. 범인의 직업이 선입견을 만든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것도 일종의 미스디렉션이겠지요.

2015/09/18

나를 아는 남자 - 도진기 : 별점 1.5점

나를 아는 남자 - 4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구는 혜미의 부탁으로 박민서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별거 중인 그의 아내 문성희가 남편의 불륜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물증을 잡지 못한채 조사 기간이 길어지자, 문성희는 남편 집에 침입하여 조사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마침 박민서가 인천으로 향한 것을 알게 된 진구는 몰래 집에 침입했다가 박민서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추리소설가이자 판사이신 도진기 작가의 진구 시리즈 2작. 일단, 판사라는 업에 종사하면서 작품을 계속 발표하시는 노력과 정열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작품은 기대 이하였습니다. 진구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쓰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핵심인데, 전개와 묘사 양쪽 모두에서 극적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구 본인이야 엄청 스트레스 받고 힘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독자는 그걸 알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수사를 빙자해서 좋은 것만 먹으러 다니던가 하는 식이라 작중에서의 긴장감이 전무하니까요.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언제까지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면 잡혀간다! 와 같은 한계점이 명확히 존재했어야 합니다. 국내 사법제도 특성상 그러한 설정이 힘들었다면, 진구는 구치소에 갇혀 재판이 시작되면 유죄는 확실한 상황이라는 전제를 깔고 면회오는 혜미를 통해 진범을 밝혀나간다는 전개로 가져가던가요. 물론 이런 설정과 전개는 "환상의 여인"이나 "처형 6일전"과 같다는 약점은 있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흥미진진했을겁니다.

그리고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도 부족합니다. 진범이 누구일까?에 촛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우왕좌왕하는 과정이 너무 긴 탓입니다. 또 중반 이후부터는 박민서가 남긴 증거물을 찾기 위한 노력이 전부인데, 이 증거물(노트)이 임재엽이라는 제 3의 인물과 엮이게 만드는 등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핵심 증거로는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아울러 이런 노트를 프로 플레이보이(?)가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놓아두었다는 것 도 말이 안됩니다. "사냥꾼의 일기"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 시점에 노트라고요? 인터넷 노트, 뭐 예를 들면 구글 드라이브같은 것을 활용하는게 당연하잖아요. DB화 하기도 쉽고,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으니까요. 폰도 아이폰을 쓴다면서 노트라니... (참고로 이 리뷰도 삼성 갤럭시S4 + 에버노트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박민서의 핸드폰을 바꿔 가져간 방수연이 우연히 박민서의 핸드폰에 깔린 앱을 보게 되고, 거기서 문제의 글을 보게 되어 극렬한 살의를 품게되었다는게 트릭과도 연계성이 생길 뿐더러 훨씬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왠만한 핸드폰은 자동 로그인이 될테니. 그리고 문제의 노트를 삭제하면 모든게 완벽하게 끝났겠죠. 그리고 진구는 오프라인으로 작성된 이 노트를 발견하다는 결말! 아... 제가 다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노트가 방수연이 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입니다. 핸드폰이 바뀌었다는 것은 진구의 추리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경찰은 진구, 아니면 노트 때문에 또다른 살인을 저지른 문기동을 범인으로 기소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진구의 천재적인 추리력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커플링을 발견한 상황에서 박민서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눈치챘다는 설정이 훨씬 나았을텐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어요. 박민서가 정신병원을 다녔다는 것, 커플링을 맞췄다는 것, 한서원과 모종의 썸씽이 있었다는 것 정도로 박민서가 플레이보이였다고 짐작하는 것도 무리고요. 좀 더 장치가 필요한 부분이죠. 이 부분의 정보가 부족한 것은 박민서 캐릭터를 거의 마지막까지 순진무구한, 마음에 상처입은 어린왕자로 몰고간 탓인데 여러모로 실패 같네요.
그 외에도 문기동이 퍽치기를 살인에 사용한다는 트릭, 최초 구속 기소된 진구가 빠져나갈 수 있었던 닦인 지문 트릭 등 작위적이고 별로인 트릭도 감점 요소입니다.

물론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일단 그동안 국내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진구 캐릭터는 여전히 재미있기는 합니다. 또 진구 수준의 일반인이 조사할 수 있는 극한까지 정보를 조사하는 과정도 굉장히 설득력이 높습니다. 특히나 작가의 전문분야 지식을 활용한 일종의 편법들이 아주 재미있는데 예를 들자면 경찰 신분증 위조와 같은 것이죠. 일부만 위조하면 신분증 위조죄에 해당하지 않고, 벌금 몇만원 수준의 사칭죄에만 해당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도 꽤 유용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또 국내 작가 중 가장 본격 추리물 스타일 작품을 발표해오신 도진기 판사님 작품답게 괜찮은 트릭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인천으로 향하며 곧 집에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박민서의 전화 관련된 트릭이나 M.S.H라는 이니셜이 사용된 커플링 관련 트릭이 그러합니다. 전화 트릭은 핵심 중의 핵심 트릭이고 커플링은 박민서의 여성 편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등 작품에 잘 녹아든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단점이 너무 명확해서 장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괜히 노트 가지고 왔다갔다하는 등의 잔가지는 다 쳐내고 핸드폰 트릭에 다른 증거 한가지만 더 덧붙여 깔끔하게 중단편 분량으로 마무리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2012/07/01

프로파일러 노트 - 로이 해이즐우드 / 허진 : 별점 3점

프로파일러 노트 - 6점
로이 해이즐우드 지음, 허진 옮김/마티

FBI의 프로파일러 출신인 지은이 로이 해이즐우드가 실제 프로파일링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사건과 범인들에 대해 분석한 책입니다. 각 사건마다 상세한 설명 및 범인을 뒤쫓는 방법과 과정, 법정에서의 증언 및 판결까지 완결되도록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개요만 놓고 보면 "FBI 심리 분석관"과 유사하지만, 이 책에서는 프로파일러라는 직업과 여러 가지 범죄 이론 및 분석과 더불어 그것을 뒷받침하는 실제 강력범죄들이 많이 소개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또한, 그 수사 과정이 디테일하게, 스토리가 있게 펼쳐지기에 흥미로운 범죄 - 사건 관련 논픽션을 읽는 느낌도 전해주고요. "범죄자는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행동에 옮긴 환상을 매춘부들과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을 소개하며, 실제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한 사건에서 근처 매춘부들을 탐문하여 범인을 검거한 예를 드는 식입니다.
역시 비슷한 류인 "마인드 헌터"보다는 더 전문적이고,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요.

몇 가지 재미있는 내용을 소개해 드리자면, 어떤 의식적 범죄자들은 순응적 피해자, 주로 아내나 여자친구를 대상으로 자신의 환상을 실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응적 피해자의 다섯 단계 (가학적 변태성욕자가 단번에 알아보는)가 있다고 하네요.

1. 감정적 트라우마로 인해 쉽게 영향을 받는다. (경험이 없고 순진하고 우유부단하거나, 최근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거나...) 의존성 인격장애가 있다. 즉,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과도한 욕구가 있는,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유형이다.

2. 유혹. 가학적 변태성욕자들은 표적으로 삼은 여성이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 후, 무자비한 행동을 가한다.

3. 두 번째 단계 이후 아내나 여자친구가 윤리적 범위를 넘도록 조종한다.

4. 여성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

5. 처벌. 여성을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다.

이 단계를 통해 한 여성을 만나 그녀를 사로잡은 뒤 일탈을 한 번 경험하게 만들고, 이후 그녀의 체중을 늘리는 등 사회적으로 고립시킨 후 완전히 마음대로 조종했던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추리소설을 쓴다면 꽤 도움이 될 만한 내용 중 하나는 "프로파일러는 범죄자의 시각으로 범죄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범죄자가 피해자를 숲 한가운데 2미터 정도 깊이에 묻었다면, 왜 그랬을까요? 범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첫째, 시체가 발견되지 않기를 원하고, 둘째, 필요한 육체적 노동을 신경 쓰지 않으며 (심지어는 즐길 수도 있고), 셋째, 분명히 야외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한 방송국에서 기획했던 살인마 잭의 프로파일링에 대한 내용은 추리 애호가로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국, 코스민스키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 하네요! 주요 용의자로 부각된 여러 인물들을 전문가들이 배제하는 이유가 합리적이어서 흥미롭게 읽혔고, 방송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도 많고, 유사한 서적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부분이 있기에 프로파일링과 범죄 수사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 같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0/08/22

마인드 헌터 - 존 더글러스, 마크 올셰이커 / 이종인 : 별점 3점

마인드 헌터 - 6점
존 더글러스.마크 올셰이커 지음, 이종인 옮김/비채

프로파일러 존 더글러스의 회고록입니다. 저자는 FBI 수사지원부에서 25년 동안 근무하며 수백 명의 연쇄 살인범을 검거한 경력자로, 책에서도 살짝 언급되지만 <양들의 침묵> 수사관의 모델이라는 전설적인 수사관입니다.

저자가 직접 수사과정에 참여했던 잔혹한 범행들에 대한 수사과정을 비롯하여 범인들과의 인터뷰와 분석 등 '프로파일링'이라는 기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추리소설에 그대로 사용해도 괜찮을 듯한 소재들도 굉장히 많고요.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내의 청부살인으로 죽을뻔한 경찰 수사관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너무 잘 짜여져서 수사가 미궁에 빠질 수 있었지만, 결국 수사의 단서가 된 것이 '고액의 전화요금' 이라는 사소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잔혹한 사건 대부분에서 '프로파일링'을 통해 도출된 범인의 이미지와 범인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건 조금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현실적으로 100% 적중률은 아닐테니, 프로파일러의 실수담도 등장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죠... '회고록'이라는 책의 속성상 무리였을까요?

소설은 아니고 사건들이 토막토막으로 이어지는 논픽션 에세이기에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긴 하지만, 재미와 더불어 자료적 가치도 높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지만 회고록이기 때문인지 저자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아서 감점합니다. '프로파일링'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23/09/21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1~3 - 토마토수프 : 별점 2.5점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1 - 6점
토마토수프 지음, 문기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2 - 6점
토마토수프 지음, 문기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3 - 6점
토마토수프 지음, 문기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대항해 시대, 세계일주를 3번이나 하고, 다양한 연구 자료를 가지고 돌아와 출판했다는 실존인물이었던 사략선 선원 댐피어의 탐험과 모험을 그린 만화. 댐피어가 사략선을 타고 스페인 상선을 노리는 항해를 떠나 태평양, 카리브 해를 떠돌며 겪는 모험 이야기 중간중간에 댐피어의 과거가 곁들여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댐피어가 남해의 여러가지 새로운 문물 소개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제목처럼 식재료에 대한 비중이 높은 편입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것에 대해 탐구심을 불태우는 댐피어의 성격을, 처음 접하는 식재료로 만든 요리도 거침없이 도전하는 모습으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탐구심은 갖추지 않은 옥스퍼드 출신 항해사 카울리와 비교됩니다. 카울리는 자주 새로운 식재료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역해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거든요. 불법 사략선을 조사하는 왕의 밀명을 받은 요원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카울리가 댐피어에 감화되어 새로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후에는 카울리도 새로운 식재료를 먹고 맛있어 하는 모습을 선보이고요. 카울리의 연구는 갈라파고스 제도 해도라는 실질적인 결과물로도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대항해시대 버젼의 <<던전밥>>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든 구한, 어떻게 보면 괴물과도 같은 새로운 식재료를 요리해 먹는데 탐구심을 불태운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거든요.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이야기이고, 갈라파고스 섬의 이구아나가 특별히 맛있다는 등 실존하는 식재료와 요리에 대한 소개가 많다는건 장점입니다. 야자나무 심 요리라던가, 바나나와 비슷한 플랜틴, 맘미 애플 등의 식재료 묘사는 보기만 해도 재미있었습니다. 쉽게 구해 먹을 수는 없어도 실존한다는 점에서 판타지 식재로보다는 훨씬 큰 동경심을 품게 만드네요.
아래와 같이 지금 가정에서도 재현 가능한 조개 요리같은건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집니다.
대항해 시대 당시의 사회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묘사라던가, 사략선 면허 등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정보들은 충실하게 알려줍니다. 이런 정보들을 아래와 같이 학습만화처럼 소개해 주는 것도 좋았고요.
하지만 선뜻 추천드리기는 애매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작화입니다 동글동글, 귀염귀염한 작화 자체는 매력적인데 작품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항해 시대 해적 행위, 전쟁, 살인 등의 묘사가 팬시 인형같은 캐릭터로 보여지니 영 와닿지 않더라고요. 배경도 디테일과 깊이감이 부족하고, 고증도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던전밥>> 수준의 작화였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게다가 이런 작화 탓에, 댐피어의 라이벌(?)인 링로즈와의 관계는 보이즈러브 물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링로즈 덕분에 댐피어는 탐구심을 불태우고, 링로즈도 댐피어의 적극성에 감화되어 성장해 나가는 관계인데 말이지요. 작가의 의도일 수는 있겠지만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또 엄연한 범죄자인 사략선의 해적질을 미화하고 있다는 문제도 큽니다. 작중에서도 사략선 면허를 조작하여 해적질을 하고 있다고 설명되니, 엄연한 범죄자들입니다. 이들의 행동에 뭔가 정당성이 부여되고 있는 듯한 전개는 영 아니다 싶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 계속 구입해 볼 예정이지만, 담고 있는 사상은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다소 학습만화 성격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딸에게 권해주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2019/08/24

아자젤 - 보리스 아쿠닌 / 이항재 : 별점 2.5점

아자젤 - 6점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항재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유한 대학생 코코린이 백주대낮에 기묘하게 자살했다. 막 스무살이 된 14등급 서기관 에라스트 판도린은 목격자 중 한 명의 '대학생' 이라는 증언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코코린의 복장은 대학생임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사를 통해 판도린은 대학교 제복을 입은 니콜라이가 코코린과 함께 행동했다는걸 알아냈다. 니콜라이는 심지어 코코린의 유언장에 집행인으로 언급된 인물이었다.
알고보니 코코린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둘이 수수께끼의 미녀 아말리야를 두고 벌인 일종의 결투였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곧바로 암살자에게 칼에 찔려 죽고 판도린도 죽을 뻔 하는데....

19세기 후반의 제정 러시아를 무대로 14등급(중간에 진급해서 9등급) 서기관 에라스트 판도린이 활약하는 추리 모험 소설입니다. 일종의 역사 추리물로 볼 수도 있으며, 특별한 정보를 입수하고 해석하여 국제적인 음모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파이 소설로 볼 수도 있는 복합적인 장르의 작품입니다.

러시아에서는 현재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시리즈라는데 수긍할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줄거리 요약이 된, 니콜라이가 살해되는 초반부까지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유쾌한 분위기도 좋고, 러시안 룰렛을 흉내낸 기묘한 자살이 사실은 '결투' 였다는 아이디어도 기발한 덕분입니다. 사건에 니콜라이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달은 판도린의 직감도 높이 평가하고 싶고요. 이런저런 복선도 꽤 충실합니다. 고래뼈 코르셋은 아주 일품이에요.

그러나 이어지는 중반부는 많이 어설픕니다. 아말리야와 애증의 관계라는 주로프가 그녀의 행방을 알려주는 부분부터가 억지스럽습니다. 판도린이 정상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객기를 부려 주로프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완벽하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목숨을 내거는 모습에 감명한 주로프가 오히려 그를 살려주고 아말리야의 주소까지 전해준다는건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결투를 촉발한 둘 사이의 도박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주가 카드 한 장을 오픈하고, 두 장을 차례로 오픈한다, 첫 카드가 오픈된 카드와 같으면 물주가 이기고 두번째 카드가 같으면 상대방의 승리. 만약 두 카드 모두 오픈된 카드와 다르면 판돈을 2배로 올려 이를 최대 5번까지 반복한다는 룰인데 누가 봐도 물주가 너무 유리해요! 여기서 물주가 이길 확률은 97%!!!!에 달합니다. 이런 도박을 졌다고 주로프가 열이 받는건 말이 안됩니다. 어차피 다음 물주는 주로프였으니까요.

게다가 아말리야의 영국 주소를 받고 영국에서 벌어진 모험은 더 가관입니다. 판도린이 중요한 서류를 손에 넣은 건 단순한 미행 덕분이고, 그의 행방을 밝혀낸 아말리야 일당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익사 직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범인들이 칼을 미쳐 빼앗지 않은 덕분입니다. 순전한 행운이죠. 배신자 프이조프에게 죽을 뻔 할 때 갑자기 나타난 주로프가 그를 구해주는 건 우연과 행운의 행진에 정점이고요. 워낙에 말도 안되는 행운인지라 작가도 무안했는지 주로프의 입을 빌어 '판도린은 '후광'을 갖춘 특별한 행운의 소유자다'라고 양념을 조금 치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럴리가 없잖아요?
이런 행운은 걷어내고 보다 설득력있게 전개할 필요가 있었어요. 아말리야를 사살하고 탈출한 판도린은 프이조프의 배신 덕분에 위기에 처하지만, 특유의 호흡법으로 살아나서 그들을 되려 해치운다는 식으로요. 이렇게 된다면 주로프는 등장할 필요도 없죠.

그래도 다행히 겨우 살아난 판도린이 팀장 브릴링에게 진상을 말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후반부는 또 괜찮습니다. 특히 '아자젤'이라고 불리우는 집단의 정체가 백미입니다. 각국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유력자로 급부상했다는게 확보한 서류로 알아낸 전부인데, 판도린은 이들이 모두 에스터 남작 부인이 운영하는 보육원 에스테르나트 출신이라고 추리하죠.
이 놀라운 추리는 앞 부분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었던 여러가지 복선들로 뒷받침 됩니다. 부유했던 두 대학생이 유산을 남기기로 유언한 곳은 에스터 남작 부인의 보육원이었다는 당연한 증거는 물론, 남작 부인의 교육 철학 역시 중요한 복선입니다. 각자의 재능을 딱 맞춰 개회시킨다는 것으로 이를 통해 고아들이 각자의 분야(경제, 군사,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낸게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물론 후반부에서도 판도린은 두 번의 위험을 순전히 행운으로 벗어난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특히 남작 부인에게 사로잡히지만 오래 수련한 호흡법으로 숨을 참아 클르르포름 마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판도린의 모습을 본 브릴링이 엄청난 충격을 받는 묘사에서 브릴링이 흑막 중 하나라는건 눈치챌 수 있어서 반전의 묘미도 약했고요. 개인적으로는 남작 부인까지 처지하고 성공과 미인 신부까지 손에 얻은 판도린의 행복이 아자젤 잔당에 의해 박살나는 비극적인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행운이 이어지는 전개 문제는 핵심 추리와 진상이 놀라운 덕분에 상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세밀하게 그려낸 묘사도 좋습니다. 러시아 작가가 쓴 오리지널 러시아 추리 소설은 알렉산드라 마리리나의 작품 이후 십수년만에 처음인데 저력이 대단하네요. 재미와 흡입력이 아주 상당합니다.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번역 출간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어설픈 전개를 조금 보완해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2018/03/18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브리짓 허스 / 조윤경 : 별점 4.5점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8점
브리짓 허스 지음, 조윤경 옮김/동아엠앤비

법의학의 역사를 쉽게 설명해주는 일종의 미시사, 과학사 서적입니다. 통사처럼 '법의학'의 흐름을 일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별다른 과학적인 수사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로, 비소가 특별한 검사법이 없어서 널리 쓰이던 1751년에 영국 여성이 아버지 독살 혐의로 기소되면서 과학 수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사건 소개입니다. 비소는 가열하면 마늘 향을 내뿜는데 용의자 메리의 약갑 속 물질을 가열하니 마늘 냄새가 났다는, 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그야말로 과학 수사의 한 걸음을 내딛은 방법이 등장합니다. 이 증거로 메리는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1806년 로제 교수가 '로제 검사법' 이라는 비소 검출법을 고안해 냅니다.

그리고 의사가 검시관이 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라까사뉴가 1881년 리옹에 '법의학 연구소'에 합류하여 부검에 참여하고 여러 제자를 양성하여 많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집니다. 특히 유명한 '크리펜 사건' 은 대중에게 라까사뉴와 같은 법의 병리학자의 존재 및 그 유용함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병리학자 스필스베리가 크리펜 자택 지하실에서 발견한 사체가 크리펜의 실종된 아내라고 판단한게 사형 선고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참고로, 최근 조사 결과로는 이 사체는 '남자의 사체' 였다고 합니다. 스필스베리의 추리대로 독살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총으로 쏘고 사체를 절단하여 유기하는 건 일반적인 독살범 행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이었고요. 하지만 코라 크리펜은 결국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크리펜의 범행은 성공했지만 우연에 의해 정의의 철퇴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요.
여튼 이러한 최근 조사로 스필스베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또 다른 유명 연쇄 살인 사건인 '욕조 속의 신부들' 사건 당시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 조사하여 증언한 내용도 인상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만삭 의사 부인 사망사건' 이라는 유사 사건이 있어서인지 더 기억에 남네요. 의사인 주제에 100년전 사기꾼보다도 유치하게 현장을 조작하다니,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1925년 노먼 쏜 재판에서의 논란으로 스필스베리의 완벽함에 균열이 가고, 대중도 병리학자의 결점과 오류 가능성에 대해 알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유럽보다 늦은 1918년 법의관 제도가 시작되는데 법의관들의 활약으로 여러 건의 사건이 해결됩니다. 부검이 아니라 정말 탐정 뺨치는 추리로 범인을 밝혀낸 사건도 있습니다. 하숙집에서 노부인이 시체로 발견되어 자연사인줄 알았는데, 현장에 도착한 법의관이 '가정부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문은 안에서 잠겨있었다는 뜻인데, 그럼 열쇠는 어디 있는걸까?'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수사를 이어간 끝에 열쇠를 소지한 범인을 잡는다는 결말인데, 당장 추리 소설에 응용해도 좋은 멋진 추리였어요.

이러한 법의관 제도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과학적인 수사 방법도 상세합니다. 지금은 일반 상식이 된 범죄 현장의 증거를 토대로 한 수사는 1세대 법과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셜록 홈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홈즈의 영향이 컸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에드몽 로카르를 비롯, 오스트리아의 한스 그로스, 프랑스의 빅토르 발타자르, 미국의 벤자민 모건 밴스 등 여러 선구자들의 활약으로 해결된 사건이 연대별로 흥미롭게 소개됩니다. 여기에 더해서 과거에는 분석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정보로 현대에는 어떻게 사건이 해결되었는지를 병렬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를 돕고요.

뒤이어 각종 분석 방법들을 한 챕터씩 할애하여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챕터별 구성은 대동소이합니다. 해당 분석법의 역사와 주요 인물, 그리고 해당 분석법이 활용된 주요 사건이 소개되는 식이죠. '지문'의 경우, 뎁퍼드가 살인 사건을 비롯한 거의 모든 내용은 이전에 읽었던 "지문"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어서 딱히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도 샤를리즈 테론의 "몬스터"로 잘 알려진 에일린 워노스 사건 소개는 기억에 남네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문'을 숨겨야 했던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시체를 자신이 죽은걸로 위장하려고 기도한 사건인데 황당한건 시신의 신원만 위장했지 정작 범인 자신의 신원은 위장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후 다른 사건 사례를 통해 지문의 결함이 있다는 점도 알려주며 마무리됩니다.
이와 함께 베르틸롱(베르티용) 측정법도 함께 실려 있는데, "지문"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베르틸롱 측정법의 심각한 문제인 "쌍둥이는 구분할 수 없다"의 실제 사례는 흥미로왔습니다.

총기 분석에서는 유명한 '사코와 반체티 사건' 에서 최근 분석 결과 사코는 진범이었을 수 있다는 결론. 그리고 알 카포네의 '발렌타인 데이의 학살' 관련 수사가 재미있었어요.

혈흔 분석 챕터에서는 "도망자"의 모델 샘 셰퍼드 의사 부인 살인 사건이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혈흔 분석을 통해 재판 결과가 뒤바뀌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의 조사 결과와 결론을 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 그리고 결론이 아주 새롭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피해자학(희생자가 살해될 요소가 무엇인지? 를 분석하여 동기, 용의자를 알아내는 기법)'을 토대로 메릴린이 희생자가 될 확률은 오로지 불안정한 결혼 생활 뿐이었다고 단언합니다. 현장이 조작된 증거도 상세하게 실려 있고요.

시신 분석 사건에서는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의 살인 청부업자가 피해자의 시신을 수 년간 냉동한 후 유기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실제 범행은 수년 전이지만 3~4 주 전에 살해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여러가지 증거를 토대로 진상을 밝혀내고 범인을 체포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은 흡사 미드 "CSI"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유골 분석은 다른 챕터에 비하면 사례의 재미가 조금 덜한 편입니다. '아나스타샤 사건'으로 법의인류학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정도만 괜찮았어요.

마지막은 프로파일링과 DNA 분석이라는 최신 수사 기법으로 마무리됩니다. 프로파일링은 익히 수많은 책을 통해 접했던 내용의 요약이지만, FBI 행동 과학부의 수사관들이 활약한 사건들은 흥미진진합니다. 사건에서 프로파일링 기법의 활용도 잘 설명되고 있고요.
DNA 분석은 이를 통해 해결한 사건보다도 증거가 왜곡된 사건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DNA가 악수 등으로 쉽게 옮겨질 수 있기 때문으로 이를 통해 잘못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는 물론, '바이트 마크' 와 같이 오류가 있는 증거가 채택되어 발생한 문제 등이 함께 소개되는데 참 무섭더군요. 요새도 증거 조작이나 오인식, 각종 오류로 피해를 보는 사례가 가끔 보도되는데, 항상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법의학, 법과학에 대한 통사적인 이해는 물론, 실제 사건과 연계하여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듯한 재미도 전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으며, 도판들도 적절한 수준으로 삽입되어 있는 등 전체적인 책의 완성도도 빼어납니다. 한마디로 재미와 가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보기드문 좋은 책이에요.
분량 상 개략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많으며, 이미 각 분야별로 상세하게 설명한 다른 책들을 통해 제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 제법 된다는 점은 아쉽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3/10/28

J호러, 할리우드를 쏘다 - 이치세 다카시게 / 이은경 : 별점 2점

J호러, 할리우드를 쏘다 - 6점
이치세 다카시게 지음, 이은경 외 옮김/서해문집

일본의 영화 프로듀서 이치세 다카시게의 자서전. "울트라Q"에 크게 자극받은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서, 미국에서 "그루지"를 히트시킨 성공한 제작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립니다.

성공담은 밋밋합니다. 크게 좌절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일이 별로 없는 탓입니다. 오히려 너무 운이 좋았다는 게 눈에 뜨입니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이 베니스 영화제에 소개되고 26세에 무려 10억 엔짜리 대작인 "제도이야기" 프로듀서를 맡았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때문에 흔해 빠진 성공담류의 재미는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대신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링", "주온"에 이르기까지 이치세 본인이 작업한 작품들은 물론, 관련 인물과 당대에 유명했던 히트작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뒷이야기들을 전해주는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본 영화도 상당히 많아서 더 재미있었게 읽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홍콩 영화의 성장에 깜짝 놀랐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녀유혼"을 봤을 때의 이야기, "공작왕"의 일본 쪽 프로듀서로 일하며 영감을 얻어 "제도이야기" 후속작인 "제도대전" 기획 시 홍콩 영화처럼 SF가 가미된 액션물로 만들면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여 감독도 남내재 ("공작왕" 감독)를 섭외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본인이 감독까지 맡게 된 후 결국 대차게 말아먹은 이야기 등입니다. 발상은 괜찮은 것 같은데, 감독이 문제였나?

또 미국에서 V시네마 제작자로 활동하던 때 지금은 대배우로 성장한 비고 모텐슨, 버지니아 매드슨, 러셀 크로우 등을 출연시켰었던 일화, 그리고 "크라잉 프리맨"을 1,000만 불의 예산으로 제작할 때의 일화도 재미있었습니다. "크라잉 프리맨"의 제작 - 감독 콤비가 "늑대의 후예들"로 대박 떴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에요. 개인적으로 "크라잉 프리맨"은 그런대로 재미있게 감상했었는데, 잘 나간다니 왠지 모르게 기쁘군요.

그리고 제작자로서, 특히 일본 호러 영화의 전문가로서의 명확한 의견 제시도 괜찮았습니다. 일본식 공간에서 공포감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그루지"는 무대를 일본으로 하여 촬영했다는 내용이 대표적입니다. "링"의 미국판에서 사다코가 TV에서 기어나오는 장면이 너무 넓은 집이라 별로 무섭지 않았다는 것을 타산지석 삼았다고 하는데 그럴듯했어요. 확실히 도망칠 구석이 별로 없는 좁아터진 일본식 원룸에서 귀신이 TV에서 나타난다면, 도망갈 데가 별로 없긴 하겠죠.

아울러 이 친구 (저하고 거의 동년배니...) 마인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하고 관객이 돈을 낸 값어치를 주어야 한다는 건데, 이 부분은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제작자 로저 코먼과 비슷하더군요. 로저 코먼과 비교 자체가 불가할 만큼 필모그래피는 보잘것 없고 성공 자체도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앞으로의 성공 여부도 불투명 ("그루지" 이후는 뭐 별거 없죠)한 것은 분명합니다만...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솔직히 싸이의 빌보드 점령보다도 못한 수준인 "그루지" 성공에만 기댄 철저한 기획 도서입니다. 성공담으로는 별볼일 없고요. 그러나 8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까지의 일본을 중심으로 한 영화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괜찮았습니다. 거의 안 계시겠지만 이 당시 일본 영화나 J호러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2005/09/30

FBI 심리 분석관 (Whoever Fights Mosters)- 로버트 K 레슬러, 톰 샤흐트만 / 황보석 : 별점 3점

FBI 심리분석관 - 6점
로버트 K. 레슬러 & 톰 샤흐트만 지음, 황보석 옮김/미래사
실제로 FBI에서 범죄 심리학 전문의 심리 분석관으로 20여년을 일한 로버트 K 레슬러의 기록물. 20여년간 여러 연쇄 살인범들의 수사에 참가하고 프로파일링 및 그들의 심리분석을 토대로 사건 해결에 기여하는 과정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물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연쇄 살인범인 테드 번디나 보스턴 교살자 드 살보, 세크라멘토 흡혈귀 트렌튼 체이스, 맨슨 일당 등 저명한 살인범들과의 인터뷰 내용이라던가 실제 연쇄 살인 기록, 사건개요, 당시 작성된 프로파일링 내용과 범인에 대한 비교 및 묘사, 상세한 수사 활동 및 반성과 앞으로의 과제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사하게 연쇄 살인범의 심리와 사회상을 분석한 표창원 교수의 "한국의 연쇄살인"이라는 책과 비교해 본다면 아무래도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저같은 한국 독자에게는 "한국의 연쇄살인"이 더 낫긴 하겠지만 범죄에 대한 과학적이고 상세한 접근은 이 책이 보다 뛰어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실제 사건을 직접 수사했던 전문 분석관이 직접 저술했기 때문이고 범인과의 인터뷰까지 상세하게 분석해 놓았기 때문이죠.
저자가 "양들의 침묵"과 "천재 정신과 의사의 살인광고" 라는 두권의 책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전문가라는 내용도 들어 있는데 책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만 보아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 하다고 생각되네요. 실제로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을 인터뷰하는 과정의 묘사나 신문광고를 통한 희생자 낚기 등은 충분히 저자의 실제 수사 경험에서 우러나온 아이디어로 보이거든요.

다만 FBI 조직 발전사 같은 부수적인 설명과 저자 개인의 사건에 대한 평가가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 약간 지루한 부분이 있고 책의 목차도 시기별이나 수사상의 발전에 따른 구분이 아닌 약간 모호한 상태로 구분되어 있어서 조금 혼란스럽더군요. 조금 더 재미있고 풍성하게 구성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약간 아쉽습니다. 

어쨌건 저는 꽤 관심가는 분야의 내용인지라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지루한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범죄 심리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볼 책인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2/04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김승욱 : 별점 4점

스파이와 배신자 - 8점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열린책들

1970~80년대 영국 정보부서 M16와 내통하던 KGB 최고위급 간부(KGB 런던 지부장)였던 올레크 고르디엡스키에 대한 논픽션.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입니다. 냉전시대 여러 첩보 작전들이 굉장히 상세하며, 드라마틱하게 소개되어 큰 재미를 안겨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고르디엡스키의 정체가 들통나서 모스크바로 소환된 뒤부터는 논픽션이지만 왠만한 스파이 소설보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고르디엡스키가 궁지에 몰리며 수렁에 빠지는 과정,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설계되었던 '핌리코 작전'의 가동, 그리고 고르디엡스키의 목숨을 건 소련으로부터의 탈출이 이어지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실제로 진행되었던 작전이라 픽션에서는 주기 어려운 생생한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핌리코 작전 때 차 트렁크에 있는 고르디엡스키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아기 기저귀를 차 트렁크 위에 올려놓고 갈았다는 것처럼요. 소련 당국의 안일한 태도 - 그래서 탈출을 눈치채지 못했음 - 도 오히려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픽션이라면 허술하다고 비판받았을테지만요.
이런 디테일들은 올레크가 M16과 안가에서 만나 내통하는 상세한 과정, 당시 기술로는 최고 수준의 정교한 라이터 내장 카메라, 스파이가 메시지를 잘 받았다는 답이 맥주병 뚜껑을 올려놓는 것인데 '진저비어' 병뚜껑을 올려둔건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던는 등으로 책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실제 스파이들을 둘러 싼 첩보 과정도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대표적인게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고심하는 부분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첩자의 정보를 그냥 활용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리 간닪난 일이 아니더라고요. 적의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첩자가 우리 진영 내 첩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어 그들을 모두 체포했다면, 적 역시 자기들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걸 알아챌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M16는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길게 보고 이용하는걸 택했지만, 결국 정보를 이용한 탓에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CIA가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를 알아낸 과정도 왠만한 추리 소설은 비벼보기도 힘듭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CIA는 M16에서 제공한 라이언 작전 관련 정보로 정보원이 KGB 요원이라는걸 알았습니다. 보고서가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것으로는 그 사람이 M16과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그는 소련 밖에 있고 영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추리했습니다. 전달된 정보는 기술 정보나 군사 정보보다 정치 정보가 많다는 것으로 그가 제1주요부 PR라인에 근무한다는 걸 알려주었고요. 마지막으로 KGB 내부 첩자라면 서방의 소련 첩자를 알려주었을텐데, 최근 소련이 잃은 첩자들은 노르웨이의 호비크와 트레홀트, 스웨덴의 베릴링, 영국의 마이클 베터니였습니다. 호비크와 베릴링이 체포되었을 때 스칸디나비아에 있었고, 트레홀트와 베터니가 잡혔을 때 영국에 있었던 사람은? 올레크 고르디엡스키 뿐이었습니다! 이어진 올레크의 과거 조사는 그가 M16의 내부 첩자라는건 분명히 드러나게 만들었지요. 이렇게 CIA가 알아낸 내부 첩자의 정체를 CIA의 배신자 올드리치 에임스가 밀고하여 올레크가 위기에 빠졌던 것입니다.

고르디엡스키의 활약(?)과 함께 당시 국제 정세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설명되는데 냉전 때 KGB 수장이었던, 그리고 소련 서기장까지 올랐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실제 서방의 핵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KGB는 서방의 선제 핵 공격 징후를 다각도로 포착하기 위한 '라이언 작전'을 진행했었으며, '에이블 아처' 훈련 당시가 가장 큰 위기 상황이었다는 등의 비화도 놀라왔습니다. 
라이언 작전 당시 크렘린은 '혈액 은행'이 진짜 은행처럼 혈액을 사고 파는 곳인줄 알았다는건 좀 웃겼고요.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도 무척이나 독특한 매력을 전해줍니다. 우선 그가 조국을 배신한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 탓이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이 책에 나온 다른 스파이들은 모두 돈 때문에 변절했는데 말이지요. 본인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정보를 넘긴걸 다른 반체제 활동과 동일시했다는 올레크의 생각도 신선했어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으로, 작가 솔제니친은 글로 싸웠듯이 KGB 요원인 올레크는 첩보 세계에서 정보를 활용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요.
 
하지만 문제는 그의 이상이 무엇이었던간에 고르디엡스키가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버리고 홀로 도주한 비겁자이기도 하고요. 이런 인물에 대해 칭송하다시피하는 내용을 쓴건 적합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공적이라고 책에서 설명되는 것들의 실체도 모호하고요. 책에서는 소련이 선제 핵 공격을 고려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걸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으로 전달된 정보로 서방은 알고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서방은 당시 스타워즈 계획을 중지하거나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즉, 고르디엡스키가 제공한 정보와 핵 전쟁을 막은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책에서는 그의 활약과 희생이 대단한 것처럼 설명하고, 대처도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을 그를 높이 평가했다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인정받을만한 인물일까요? 가족도 잃은 채 조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 M16의 보호를 받는 일종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는 현재가 고르디엡스키가 어떤 인물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제외한다면, 달리 나무랄데 없는 최고의 책입니다. 스파이 소설을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6/08/06

메두사 - 이노우에 유메히토 / 송영인 : 별점 3점

메두사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송영인 옮김/시공사

공포소설가 후지 요조가 스스로를 시멘트에 파묻은 채 자살했다. 그런데 시멘트 더미 안에서 발견된, 빈 약병에 남겨져 있던 "메두사를 보았다"라는 글귀는 유서라기에는 의아스러웠다. 후지 요조의 외동딸 나나코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 '나'는 후지 요소가 마지막으로 작업하던 소설을 찾아 나섰고, 연이어 발생하는 이상 현상에도 불구하고 후지 요조가 이시우미라는 촌에서 일어났던 기묘한 사건 취재를 했었다는걸 알아냈다. '나'는 이시우미에서 23년전에 발생했던, 수수께끼 같은 사건과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연쇄적인 죽음에 주목하는데... 

하아.. 정말로 덥네요. 뫼르소처럼 순간적이고도 돌발적인 살의가 일어날 것도 같은 더윕니다. 이런 더위에는 호러 소설이 딱이죠. 예전에 읽었었지만 리뷰를 올린적은 없었던 작품인 "메두사"를 다시 꺼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대박을 쳤던 "링"의 영향을 받은 티가 물씬 납니다. 한 소녀의 원한과 저주로 시작된 죽음이라는 소재, 그리고 극적 반전이 있는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가 비슷하거든요. 과거의 원한이 현재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기본 내용도 뻔하고요.

그러나 단순한 아류작은 아닙니다. 작가가 원래 '오카지마 후타리'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을 써 냈던 도쿠야마 준이치 - 이노우에 유메히토 컴비 중 한명인 이노우에 유메히토인 덕분에, 후지 요조의 미발표 원고를 추적하는 과정은 여러가지 단서가 잘 조합되어 추리물처럼 짜임새있게 전개되는 덕분입니다. 단순히 죽음의 원인을 찾는다는 뻔한 전개가 아니라, 잊혀진 원고를 찾는다는 설정도 새롭게 느껴졌고요.

호러 소설로도 기본 이상입니다. "메두사를 보았다"라는 글귀를 남기고 돌(?)이 되어 죽는 후지 요조의 자살방법, 24년전 초등학교 5학년 같은반이었던 학생들이 모두 죽었다는 등 여러가지 설정들은 독자를 충분히 오싹하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또한 소설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리는 이야기들(소설 속의 후지 요조의 미발표 소설과 실제 소설이 겹쳐져서 보여지는 독특한 구조), 그리고 시공간이 흔들리는 반전이 색다르면서도 아주 충격적입니다.서평을 쓰신 김지운 감독께서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느낌이 든다고까지 평하실 정도로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후지 요조의 숨겨진 원고를 찾는 결정적 계기가 "우연"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너무 진보(?) 적인 소설 구조는 독자에 따라 반칙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발표된지 10년이 지난 탓에 지금 읽으면 아무래도 조금 낡았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도 호러 소설이라는 쟝르에 충실한, 공포라는 감정은 잘 전해주는 괜찮은 소설입니다. 그닥 잔인하지도 않고 사람도 많이 죽지도 않는데도요. 소설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살렸기에 영상화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서 링보다 저평가될 수 밖에 없지만 공포에 치중하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어떻게보면 여성적이고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색적인 호러물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5/01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4 - 토마토수프 / 문기업 : 별점 2점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4 - 4점
토마토수프 지음, 문기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댐피어는 데이비스 선장을 떠나 스완 선장의 배 시그넛 호로 옮겨 탔다. 멕시코 일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별 수확없이 몇개월을 보내다 말라리아에 걸렸고, 링로즈는 식량을 구하려다가 스페인 군에게 죽었다.
멕시코를 떠나 동인도 제도로 향한 일행은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도착했다. 독립 왕조를 유지하던 민다나오 술탄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맞서기 위해 댐피어 일행의 배와 대포를 원했다. 풍부한 식량, 섬의 환대에 일행은 남기로 했지만 댐피어는 영어로 쓰여진 수상한 문구 - 그들은 모두 도둑이다 - 에 미심쩍어했다.
반년의 체류 기간 동안 스완 선장은 섬에 푹 빠져버렸고, 결국 사략선 활동을 계속하려는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선장과 몇몇 선원들을 두고 섬을 떠났다.
댐피어는 해적질을 하기 위한 은둔처를 요구받았고 캄보디아 풀로콘도르 섬을 제안했다.


4권은 이전 권들과는 다르게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동인도 제도를 주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대항해 시대를 무대론 한 던전밥' 느낌이었던 1~3권보다는 확연히 재미가 떨어집니다. 가장 큰 장점이었던 새로운 장소와 문화, 먹거리에 대한 소개가 줄어든 탓입니다. 특히 새로운 먹거리 소개가 부실합니다. 앞부분의 쥬피시를 이용한 민스파이는 그냥 물고기 파이이며, 옥수수가루로 만든 푸딩도 그리 특별하지 않지요. 새로운건 이야기 절반 정도가 경과한 시점에서야 처음으로 '빵나무 열매'가 소개될 정도입니다. 마지막 민다나오 섬 탈출 직전의 멧돼지 요리는 그냥 bbq일 뿐이며, 구아바나 망고도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과일이라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민다나오' 섬에서 빈랑, 사고 등이 소개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제목부터가 '맛있는 모험'인데, 맛이 없어어야 되겠습니까.....
또 댐피어가 병에 걸리고 링로즈가 죽으며, 민다나오 섬에서 기묘한 탈출과 그 이후 면허도 없는 사략선 생활은 이전과 다르게 무겁고 심각해서 이전 권들에서의 느슨하며 여유로왔던 분위기를 찾기 어려운 단점도 큽니다.

물론 아예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대항해시대 당시의 동인도 제도, 특히 민다나오 섬에 대한 묘사와 설명은 볼 만 했습니다. 이전에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힘든 내용이었으니까요. 관련된 설명도 충실한 편입니다.

새로운 먹거리와 요리도 양이 문제지 소개 자체는 재미있어요.
이 중에서는 사고 요리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번 먹어보고 싶을 정도로요.
구아바 크리스마스 푸딩은 Panpanya의 "구야아바노 홀리데이"가 떠올랐고요.

하지만 앞서의 단점에 더해, 특유의 둥글둥글한 작화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다음 목적지인 풀로콘도르 섬은 궁금한 만큼, 다음 권은 구입해 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