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호러, 할리우드를 쏘다 - 이치세 다카시게 지음, 이은경 외 옮김/서해문집 |
일본의 영화 프로듀서 이치세 다카시게의 자서전. "울트라Q"에 크게 자극받은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서, 미국에서 "그루지"를 히트시킨 성공한 제작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립니다.
성공담은 밋밋합니다. 크게 좌절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일이 별로 없는 탓입니다. 오히려 너무 운이 좋았다는 게 눈에 뜨입니다. 두 번째 제작 작품이 베니스 영화제에 소개되고 26세에 무려 10억 엔짜리 대작인 "제도이야기" 프로듀서를 맡았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때문에 흔해 빠진 성공담류의 재미는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대신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링", "주온"에 이르기까지 이치세 본인이 작업한 작품들은 물론, 관련 인물과 당대에 유명했던 히트작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뒷이야기들을 전해주는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본 영화도 상당히 많아서 더 재미있었게 읽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홍콩 영화의 성장에 깜짝 놀랐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천녀유혼"을 봤을 때의 이야기, "공작왕"의 일본 쪽 프로듀서로 일하며 영감을 얻어 "제도이야기" 후속작인 "제도대전" 기획 시 홍콩 영화처럼 SF가 가미된 액션물로 만들면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여 감독도 남내재 ("공작왕" 감독)를 섭외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본인이 감독까지 맡게 된 후 결국 대차게 말아먹은 이야기 등입니다. 발상은 괜찮은 것 같은데, 감독이 문제였나?
또 미국에서 V시네마 제작자로 활동하던 때 지금은 대배우로 성장한 비고 모텐슨, 버지니아 매드슨, 러셀 크로우 등을 출연시켰었던 일화, 그리고 "크라잉 프리맨"을 1,000만 불의 예산으로 제작할 때의 일화도 재미있었습니다. "크라잉 프리맨"의 제작 - 감독 콤비가 "늑대의 후예들"로 대박 떴다는 것은 처음 안 사실이에요. 개인적으로 "크라잉 프리맨"은 그런대로 재미있게 감상했었는데, 잘 나간다니 왠지 모르게 기쁘군요.
그리고 제작자로서, 특히 일본 호러 영화의 전문가로서의 명확한 의견 제시도 괜찮았습니다. 일본식 공간에서 공포감이 극대화되기 때문에 "그루지"는 무대를 일본으로 하여 촬영했다는 내용이 대표적입니다. "링"의 미국판에서 사다코가 TV에서 기어나오는 장면이 너무 넓은 집이라 별로 무섭지 않았다는 것을 타산지석 삼았다고 하는데 그럴듯했어요. 확실히 도망칠 구석이 별로 없는 좁아터진 일본식 원룸에서 귀신이 TV에서 나타난다면, 도망갈 데가 별로 없긴 하겠죠.
아울러 이 친구 (저하고 거의 동년배니...) 마인드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하고 관객이 돈을 낸 값어치를 주어야 한다는 건데, 이 부분은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제작자 로저 코먼과 비슷하더군요. 로저 코먼과 비교 자체가 불가할 만큼 필모그래피는 보잘것 없고 성공 자체도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앞으로의 성공 여부도 불투명 ("그루지" 이후는 뭐 별거 없죠)한 것은 분명합니다만...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 솔직히 싸이의 빌보드 점령보다도 못한 수준인 "그루지" 성공에만 기댄 철저한 기획 도서입니다. 성공담으로는 별볼일 없고요. 그러나 8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까지의 일본을 중심으로 한 영화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괜찮았습니다. 거의 안 계시겠지만 이 당시 일본 영화나 J호러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