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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2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 화바이룽/ 김소희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생각에 사랑은 추억이나 순간,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아."

어느 날 남편 밍런이 갑작스럽게 이혼을 통보했다. 밍런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의심한 나는 친한 팡 언니에게 부탁해 밍런을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이혼은 성립되었다. 

그 뒤 밍런이 사람을 죽여 체포된 뒤 구속되었고, 밍런의 동기를 알지 못해 답답해하던 나에게 독방에서 자살한 밍런의 이메일이 전달되며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

대만 작가 화바이룽의 장편소설입니다. 범죄물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남편 밍런을 교도소에서 면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 뒤, 이야기는 사건의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밍런의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 아내의 불륜 의심, 사설 조사, 살인, 구속, 자살, 마지막 진상까지 빠르게 이어지는데 이러한 전개가 만들어 내는 흡입력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밍런이 왜 이혼을 요구했는지, 왜 개명했는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왜 끝내 자살했는지 계속 궁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오롯이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이어지는 묘사도 좋습니다. 갑자기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의 혼란과 분노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덕분이에요. 사건은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주인공의 감정은 설득력이 넘칩니다. 그만큼 생생하고 생활감 있는 묘사가 빼어납니다. 웃기기도 하고요.

범행의 세부 묘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밍런의 작업실은 보안이 엄격한 곳입니다. 그래서 피해자 뤄지가 그곳에 쉽게 들어갔다는 설명은 의심스럽고, 밍런이 자백한 그대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만듭니다. 작업실에 있던 두 개의 옷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밍런은 옷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작업실에는 옷장이 두 개나 있었고, 그중 하나는 잠겨 있었는데 역시 뭔가 수상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는 밍런이 작업실에서 재스민이라고 부르는 러브돌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진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옷장은 밍런이 재스민과 관련 물품을 숨긴 공간이었고요. 이를 알아챈 뤄지는 밍런을 협박하다가 고압 전기에 감전되어 살해당합니다. 이 죽음 역시 앞에서 밍런이 형과 함께 감전 장치를 만들었다는 복선을 통해 연결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꽤 잘 짜여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뤄지가 밍런의 비밀을 알게 된 이유도 재미있는데, 아내가 의뢰한 불륜 조사 때문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인데, 그 조사 때문에 밍런의 은밀한 비밀이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비밀은 협박으로 이어지고, 결국 살인까지 부르고요. 처음의 의심에서 비롯된 행동이 마지막 비극과 진상에 맞물린다는 점에서 일종의 윤회식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하지만 밀리의 서재에서 홍보하는 대로 '추리소설'로 보면 아쉽습니다. 복선은 있지만 독자가 단서를 모아 진상을 맞히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흘러갈 뿐이며, 중요한 진실은 밍런의 자백(이메일)로 밝혀지니까요. 

밍런의 동기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는 결혼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러브돌에 깊이 빠졌을까요? 주인공 '나'의 1인칭으로만 전개되기 때문에 밍런 시점의 고민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둠 속에 머물고 싶었다는 식인데,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더구나 이미 이혼도 했고, 러브돌과의 관계가 불법도 아닌데 왜 살인까지 해야 했는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허술한 부분도 보입니다. 작업실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점은 좋은 복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뤄지가 경비원 친구의 도움을 받아 작업실에 들어갔다고 밝혀집니다. 이렇게 되면 보안이 엄격하다는 설정의 힘이 약해집니다. 치밀한 장치로 보기도 어렵고요. 또 이 경비원 친구의 존재도 문제입니다. 밍런은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뤄지를 죽이고 자살합니다. 하지만 뤄지가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을 도운 경비원 친구가 입을 열면 밍런의 비밀은 다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밍런의 자살 이유도 애매해집니다. 비밀을 완전히 묻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흥미진진한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남편의 이혼 통보에서 시작해 불륜 조사, 살인, 자살, 진상 공개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빠릅니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도 좋고, 생활감 있는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추리물로는 아쉽지만 범죄 드라마로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6/03/28

미명의 집 : 건축탐정 사쿠라이 교스케의 사건부 - 시노다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축 대학원생 사쿠라이 교스케와 아오, 미하루 일행은 할아버지 아스마 와타루가 지은 이즈의 별장 “여명장”에 대한 아스마 리오의 조사 의뢰로 여명장을 찾았다. 여명장은 스페인풍 별장이지만 집 중심의 파티오가 주변 방과 바로 이어지지 않고, 심지어 창문조차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건물이었다.
알고보니 와타루는 1년 전 그 집에서 머리를 다쳐 죽었는데 경찰은 사고사로 처리했으며, 얼마 뒤 아들(리오의 부친) 아스마 나다오도 같은 집에서 칼에 찔렸지만 자살 미수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교스케 일행은 와타루가 여명장 어딘가에 거대한 블루 사파이어를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던 중 부동산업자 사메가이 하루오가 여명장 파티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고, 사건 해결을 위해 아스마 가 사람들을 여명장에 불러모았지만 교스케마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다치고 말았다.

아오는 자신의 절대 기억을 통해 여명장에서 고야의 판화에 남겨진 흔적을 보고, 와타루가 죽기 직전 와인으로 “NADA”에 원 하나를 더해 “NADA-O”, 즉 “나다오”라는 이름을 남겼음을 알아냈다. 즉, 와타루를 죽인 범인은 나다오였다. 레키가 나다오에게 스페인어 “NADA”, 곧 “허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을 준 게 동기였다. 나다오는 평생 아버지에게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해 왔었다.
나다오는 자신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자살하려 했지만, 사메가이는 리오의 여동생 산고가 죽였다는게 진상이었고 
교스케는 뒤이은 추리쇼를 통해 아스마 와타루의 인생을 재구성하고, 사파이어의 위치를 밝혔다. 특이한 파티오의 구조와 레키가 남긴 글이 열쇠였다. 마지막으로 레키가 남긴 “NADA-O”는 단순히 아들을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허무, 혹은 그 반대”라는 뜻으로, 자신의 삶이 완전히 허무만은 아니었음을 전하려 한 흔적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시노다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건축 탐정 사쿠라이 교스케' 시리즈 1작으로 원서로 감상하였습니다. 분량도 길고, 전문 용어도 많아서 완독까지 오래 걸렸네요. 

철거 위기에 놓인 이즈의 별장 "여명장"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처음에는 오래된 별장의 보존 문제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스마 와타루의 죽음, 아스마 나다오의 자살 미수, 사메가이 하루오의 죽음,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블루 사파이어까지 여러 갈래의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얽혀 있습니다. 분량은 적지 않지만 이렇게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덕분에 읽는 내내 호기심을 유지시켜 줍니다.

무대가 되는 "여명장"이 사건의 핵심이라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건축 탐정' 시리즈답게요. 스페인풍으로 만들어진 이 별장은 중앙의 파티오가 방과의 연결이 단절되어 있고, 동선도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묘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교스케는 여명장의 배치와 채광, 파티오의 위치, 벽의 막힌 구조 같은 기묘한 요소들을 건축 전문가의 시선으로 분석하여 아스마 와타루의 일생을 재구성하는 추리에 활용합니다.
영국에 유학을 갔던 와타루가 굳이 스페인으로 건너가 마술馬術을 배웠다는 점, 스페인풍 별장에 유난할 정도의 애착을 보였다는 점, 새벽과 바다를 피하면서도 그 공간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집 안에 남겨진 미술적·건축적 흔적들을 합치고 미학 및 역사적인 지식까지 동원한 교스케의 추리는, 와타루는 안달루시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귀족 여성 루나와의 기억을 평생 함께 했으며 여명장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그 기억을 일본 땅에 재현한 장소였다는 겁니다.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건축학에 미학, 역사까지 결합되어 있어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당연히 여명장에 대한 묘사도 치밀하고요.

고야의 판화 "전쟁의 참화" 69번(아래 그림)이 사건의 핵심 단서로 사용되는 미술적인 장치도 좋습니다.

그림 속 'NADA'라는 말이 단순한 문구나 다이잉 메시지가 아니라, 동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다오는 자신의 이름이 스페인어로 "허무"를 뜻하는 "NADA"에서 왔다고 여기며, 아버지가 평생 자신을 부정했다고 생각해서 와타루에 대해 증오와 살의를 품게 되었다는데 현학적이면서도 작품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마지막에 'NADA'에 'O'가 더해져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결말도 마찬가지로입니다. 여러모로 작가가 건축 뿐 아니라 미술, 그리고 언어의 상징성을 세심하게 설계했다는 인상을 전해주거든요. 마무리로도 최고였다 생각되고요.

다만 추리소설로서 보면 아쉬움도 큽니다.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은 인물 설정입니다. 주인공 사쿠라이 교스케는 물론이고, 동반자 아오와 친구 미하루까지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만화적인 분위기를 띱니다. 교스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외모를 지녔으면서 유난히 아침잠이 많고, 아오는 순간 기억력에 가까운 특수한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려지는 식인데, 깊이있는 전문가적 분석이 중요한 작품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상학 탐정 야부키 가케루 정도 수준이 적당했어요. 

추리도 그렇게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고야 화집의 다이잉 메시지로 나다오의 동기가 드러나면, 아스마 와타루 사건의 범인은 사실상 나다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그를 누가 도왔느냐로 좁혀지는데, 리오가 아니라면 당시 슈젠지에 나다오와 함께 있던 산고 뿐입니다. 나다오 자살 미수 사건에 이르면 이 점은 더 분명해집니다. 나다오의 공범(?)으로 비밀을 함께 했던 사람이 범인일 테니까요. 운전을 할 수 있고, 리오로 오인될 만한 외모를 가진 인물 역시 산고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수수께끼에 비해 추리는 다소 빈약합니다.
또한 나다오가 범인이라는건 추리라기 보다는 남겨진 다이잉 메시지와 나다오의 자백(?)으로 밝혀지기 때문에 추리적인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애초에 다이잉 메시지가 쓰여진 화집을 폐기하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산고가 블루 사파이어에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동기도 가족 안에서의 소외감 등으로 잘 설명하고 있기는 한데, 사메가이가 죽게 되는 과정은 우연과 억지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문제는 큽니다. 와타루가 리오에게 남긴 말 조각상 가운데 유서 같은 쪽지가 들어 있던 걸 산고가 훔쳤던 것, 그것을 깨트려 내용물을 발견했던 것, 쪽지를 가지고 여명장에 갔다가 사메가이를 만난 것 모두 우연이라는건 너무 작위적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해요.

블루 사파이어가 숨겨진 곳이 파티오 안의 샹들리에였다는 마지막 장면도 극적이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한줄기 빛이 들어와 사파이어를 비추는 장면은 만화같은 아이디어였고요. 그리고 여기 숨겼다면 산고의 상세한 조사 때 발견되지 않았을 까닭이 없고, 발견하지 못했어도 원래 계획대로 여명장을 철거했다면 발견할 수 있었을테니 대단한 추리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건축과 미술을 사건 해결의 핵심에 놓은 발상, "NADA"와 "O"를 둘러싼 상징, 그리고 아스마 와타루의 삶을 복원하는 마지막 추리는 볼 만했지만, 기대보다는 못했어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읽었다는 보람 외에는 특별히 건질게 없습니다. 문고본 기준 47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구태여 번역까지 해 가면서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2/06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양억관 : 별점 4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츠노시마의 '십각관'에 K 대학교 미스터리 연구회 회원 일곱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머물게 되었다. 회지 작업 등을 위해서였다. 십각관은 괴짜 천재 건축가로 유명했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로 그는 반 년 전에 아내, 고용인과 함께 십각관 옆 청옥부에서 불타죽었다. 곧이어 연구회 회원들도 오르치부터 한 명 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육지에 남았던 전 연구회원 가와미나미는 시마다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나카무라 세이지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냈다는 괴문서를 받은게 계기였다. 여기에는 같은 연구회원 모리스도 힘을 보태는데...

아주 오래 전, 20년도 더 전에 학산 문화사 출간본으로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스 미디어에서 재간된 버젼으로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되었길래 옛 추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엄청난 성공으로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클로즈드 서클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고전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젊은 작가가 젊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괴짜 천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려낸 덕분에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십각관'은 정말 후속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츠노시마에서 일가가 불타 죽었던 괴짜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관련되었던 반 년 전 사건부터 볼거리가 많습니다. 실종된 정원사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 나카무라 세이지의 아내 가즈에의 왼손은 왜 잘려 나갔는지 등 수수께끼가 가득하니까요.

섬에서 일어난 살인의 트릭은 겉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마스터 키를 이용해 방을 열고, 음료나 담배에 독을 넣는 방식이 중심인 탓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에서 트릭보다 더 중요한 건 범인의 정체입니다. 연구회에서 닉네임 ‘밴’을 쓰던 범인은, 육지에서 가와미나미, 시마다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모리스 교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스가 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한 충격을 안겨다 줍니다. 그는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와 섬을 오가며 연쇄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을 엘러리가 저지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공했던 겁니다. 
'십각관'이라는 장소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컵이 십각형인데 딱 한 개의 컵만 십일각형이었다는걸 독살에 활용한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트릭이나 단서의 제시도 공정한 편입니다. 섬과 육지를 보트로 쉽게 오갈 수 있다는건 진작부터 제시되는 정보이며, 루르가 살해당한 현장의 발자욱을 토대로 엘러리가 펼치는 추리는 결정적이니까요. 여기서 루르는 선착장에서부터 쫓아온 범인에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선착장으로 사라졌다는게 명백히 드러나거든요.
이런 여러 정보와 단서가 있음에도, 초반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심어주어서 범인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카무라 세이지나 나카무라 고지로일거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아울러 미스터리 연구회 출신 작가다운, 현대 무대 탐정 소설은 클로즈드 서클 물을 쓸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추리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의 등장도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워드프로세서로 쓴 것에 대한 분석, 십각관 사건에 대한 연구회원들의 추리 등 소소한 추리들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탐정역인 시마다 기요시는 이 작품에서는 하는게 별로 없습니다. 모리스 교이치의 완전 범죄극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시리즈 탐정이 될 정도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리스의 완전 범죄 계획도 큰 구멍이 있습니다. 가와미나미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받고 모리스를 만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게 핵심인 탓입니다. 가와미나미가 모리스의 전화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 활동에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답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알리바이를 만들기야 했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첫 날 알리바이는 날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낸 듯한 편지 역시 범행 후 엘러리가 보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이고요.
동기도 빈약해요. 치오리가 술을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품는다? 별로 와 닿지 못합니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게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요.

또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너무 쉽게 살해당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의심 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료를 마시는 장면,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 장면 등은 미스터리 독자답지 않은 행동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치오리와 모리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오리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딸이라는 걸 오르치조차 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섬에 오지도 않았을테고, 처음에 연쇄 살인에 대한 의심이 싹틀 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지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모리스가 자신의 범행 계획을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고, 훗날 그 병을 주워 자백하는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적입니다. 완전 범죄를 달성하기 위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범인의 감성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젊은 작가의 감정 과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불만은 번역입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모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모리스'라고만 소개되었습니다. '모리스 교이치'라는 전체 이름이 아니라요. 그래서 '모리스'도 다른 연구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닉네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가 밴 다인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 버젼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리스 르블랑과 밴 다인은 같은 사람일 수 없지만, 모리스 교이치는 밴 다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클로즈드 서클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독자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완벽한 완전 범죄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계속 회자되고, 미디어 믹스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6/01/10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2025) - 라이언 존슨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드 신부는 몬시뇰 윅스 신부가 지배하는 일단의 추종자들 중심의 성당 보좌로 부임했다. 그는 윅스 신부의 비정상적인 운영과 범죄에 가까운 행동에 분노를 쌓아가다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뒤  윅스 신부가 미사 중 밀실에서 살해당하자 범인으로 몰렸고, 유명한 탐정 브누아 블랑이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지만 윅스 신부의 부활 후 정원사 샘슨의 죽음, 의사 냇 박사의 죽음이 잇달아 일어나는데...

미국 넷플릭스 전용 장편 영화인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 최신작입니다. 그런데 분위기와 접근 방식은 전작들과 꽤 다릅니다. 전작들은 브누아 블랑이 직접 휩쓸린 사건을 추리해 나간다면, 이번에는 주드 신부를 도와 사건을 풀어나가는 조력자일 뿐이라는 점에서요. 작품의 주인공은 주드 신부거든요. 비교적 가볍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였던 전작들에 비해 종교와 신앙, 개인의 분노와 죄책감 등 묵직한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도 차이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주 괜찮습니다. 고전 본격물 팬이라면 만족할 수 밖에 없는 밀실 트릭이 펼져지는 덕분입니다.

게다가 정보 제공이 공정하다 못해 노골적입니다. 영화에서 존 딕슨 카의 “할로우 맨(국내 출간명 "세 개의 관")”에 등장하는 밀실 트릭 강좌가 직접 인용되기 때문입니다. 브누아 블랑은 장치 트릭 설명에서 멈추지만, 이 뒤에는 '시간차 트릭(살인이 발생한 시점과 발견된 시점이 다르다)'가 이어지는데 실제 범인은 이 트릭으로 범행을 저질렀거든요. 마사는 흉기인 칼 머리의 악마 장식과 동일한 장식을 윅스 신부 미사복 등에 미리 꿰메 두었습니다. 그리고 밀실로 향한 윅스 신부가 항상 마시는 술에 약을 탔고, 술을 마신 신부가 쓰러진 후 피 주머니를 터트려 죽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의사 냇 박사가 상태를 확인하는 척 하다가 악마 장식을 떼고 진짜 칼로 찔러 죽였던게 진상이지요.
이를 진범이 아니라 주드 신부로 혐의를 돌리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윅스 신부의 부활을 그린 불가능 범죄도 고전 본격물스럽습니다. 당연히 시체를 바뀌치기한 것이고(대역은 당연히 윅스 신부와 닮았고, 관을 만들고 나중에 죽은 샘슨이지요) 트릭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주드 신부가 신앙심과 개인적인 분노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서, 그가 보고 듣는 정보가 어느정도 왜곡되었다는걸 활용하여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그가 ‘부활한 몬시뇰을 자신이 죽였다'고 믿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정말 극적으로 잘 연출했어요.

한편으로는 8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보물 찾기도 병행되는데 이 역시 관객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유일한 단서인 ‘이브의 사과’를 분해한 뒤, 나중에 그게 일종의 '보석함'이었다는걸 드러내는 식으로요.

동기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마사는 성당을 지키기 위해 윅스를 죽였지만, 동시에 그가 부활한 것처럼 꾸며 성당을 되살리고자 했던 겁니다. 윅스 신부가 입을 열면 경력이 끝장날 위기에 빠진 냇 박사가 실행범으로 동참했고요. 그러나 냇은 8천만 달러짜리 보석 앞에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샘슨을 죽인 뒤, 마사까지 죽이려 했지만 되려 그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를 그리는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워낙 유명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 시리즈답게 이번에도 배우들 캐스팅이 엄청 화려한데, 마사 역의 글렌 클로즈는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평생 헌신했으나 내면에 분노를 품은 인물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표현해 냅니다. 주드 신부 역의 조쉬 오코너는 흔들리는 신앙과 불안한 정신 상태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조쉬 브롤린이 연기한 몬시뇰 윅스 역시 광기와 카리스마를 동시에 보여주며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다른 배우들 연기도 다 좋아요.

그런데 너무 길다는 단점은 큽니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조쉬 신부가 윅스 신부와 그의 추종자들을 만나 여러가지 관계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장황하게 보여주는 탓입니다. 물론 인물들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윅스 신부가 추종자들을 마지막에 협박했더라도 경력을 잃을 위기에 빠진 냇 박사와 작가 리오 말고는 동기가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장애가 있는 시몬이 실행범일리는 없고(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걸 보여주어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하지만), 베라 변호사는 아버지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아서 동기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즉, 이런 인간관계는 관객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사족입니다.
신앙심과 개인적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드 신부의 딜레마 역시 흥미롭지만 이렇게 길게 풀어낼 정도로 재미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드 신부의 정신력이 너무 약하지 않나 싶은 생각만 들어요.

브누아 블랑의 매력도 잘 드러나지 못합니다. 그는 진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사의 자백을 유도하는데, 이는 정의 구현에 충실했던 그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거든요. 피도 눈물도 없는 추리 기계가 갑자기 따뜻한 남자로 돌변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마사가 용서와 구원의 이미지를 남긴 채 생을 마감하는 결말 역시 식상할 뿐 아니라, 끝까지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는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지막에 보석이 주드 신부가 만든 십자가 그리스도 상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부분 역시 뻔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볼거리가 풍부하다는건 분명합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아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작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25/09/05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 - 시모무라 아쓰시 / 남소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카가와에서 만든 전기 자전거의 결함으로 사람이 죽은 뒤, 회사에는 비난이 폭주했다. 그 때문인지 시카가와 사장이 목을 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사장과 관계가 있는 일곱 명의 남녀가 한 폐쇄 공간에 갇혔다. 그들을 가둔 '게임 마스터'는 그들 중 시카가와 사장을 죽인 범인만 살려주겠다며 48시간을 주었다. 사고를 기사화하며 시카가와를 비난했던 기자 카미사와, 피해자 대표 유메코, 사장의 아내 카나에, 시카가와의 부장 린도와 과장 이시와다, 사장의 운전사 쿠라모치와 청소부 하야시의 일곱 명은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며 지은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가 시모무라 아쓰시의 장편입니다. 

닫힌 공간, 클로즈드 써클에서 범인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는건  "방주"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이라는 제목의 상황을 잘 구현했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거리의 상황에 놓인 탓에, 일곱 명의 시카가와 사장 관계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백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보도, 증거 날조, 거짓 증언 등으로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서 사장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자연스럽게 사장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이 살해했다는 자백으로 이어지지요. 즉 모두가 '범인'입니다. 그러나 자백한 사람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 자백에 허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자백을 격파하여, 자연스럽게 탐정 역할을 분담하게 됩니다. 즉, 모두가 '탐정'인 거지요. 마지막에는 한 명만 살아남고 전부 죽음으로써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추리적인 부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시카가와 사장의 사망은 그의 사무실에서 발생했고, 이 사무실은 항상 CCTV로 감시되고 있었기에 자살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범인이 되기 위해서는 밀실 살인을 일으켰어야 했기 때문에, 이 밀실 살인의 트릭을 파헤쳐나가게 됩니다. 처음에 CCTV를 피해 사무실에 들어간 트릭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사장을 살해했고, 어떻게 나왔는지를 다른 사람의 자백을 들은 뒤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은 더 정교한 트릭을 구성해서 '내가 진짜 범인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요. 여러 명의 추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독 초콜릿 사건"도 떠오르네요.
진범이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트릭도 단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아 만족스럽습니다. 사장실 문을 열면 CCTV가 가려져 사각지대가 생기고, 탈출할 때는 녹화를 약 30초간 멈춘 뒤 재개되도록 설정(여러 시간 동안 동일한 장면만 촬영한터라, 조사하는 사람도 배속 재생해서 보기 때문에 30초는 눈치채기 어렵다)해서 그 사이에 탈출했다는 트릭입니다. 두 개 모두 기술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외의 자백에서도 유메코가 주장한 '냉장고에 숨어 있었다'는 트릭은 기발했습니다.

아울러 유일하게 실질적인 죄를 짓지 않은 카미사와(과장되게 비난했고, 정보 제공자 쿠라모치에게 금품을 건넨 실수는 했지만 보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므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어서 죽었다는 결말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러웠다는 점에서 고전 추리 소설에 대한 오마쥬 느낌도 전해줍니다. 작가의 전작도 다른 작품의 영향이 짙게 느껴졌는데, 이런 스타일의 작법을 즐겨 하나 보네요.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탓입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성인들이 선뜻 폐쇄 공간에 모여 무려 이틀 동안이나 목숨을 건 추리 게임을 펼친다는게 과연 현대 사회에서 가능할지 의문이에요. 핸드폰 전파 신호가 닿지 않는다는 것 부터가 억지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중간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의 난입, 현재 진행 중인 게임이 알고보니 경찰이 탐정들을 고용해 만든 '연극 무대'라는 설정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고 불필요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가상가족놀이"와 흡사한 설정인데 그만큼의 동기나 반전이 있지도 않습니다. 연극이라는 장치는 빼고 진짜 게임으로 밀고 가는게 훨씬 더 긴장감 넘쳤을 겁니다.
게다가 연극 속에서 등장한 카미시마가 사실 진짜 사장이었고, 사망한 인물은 사장의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결말은 억지의 화룡점정입니다. 경찰 수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닌가요? 카미시마가 다른 피해자들을 단검으로 살해해서 살아남았는데, 이를 린도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진상도 불필요한건 마찬가지고요.  

설명도 부족합니다. 일곱 명이 시카가와 사장이 무고하게 비난받게 된 원흉이라는걸 시카가와 사장이 알아낸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내의 불륜, 회사 과장 이시와다의 거짓 증언, 운전사 쿠라모치의 증거 조작은 알 수 있었다고 해도, 하야시의 경우는 실제로 크게 드러난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대표 유메코의 아버지가 실제로는 자전거 결함으로 죽은게 아니었다는 것, 카나에의 불륜 상대가 린도였다는 것 역시 알아내기 어렵고요.
작 중에서는 그들을 가둔 건물을 사장실 구조로 만든게 아니라, 그 건물 구조로 사장실을 리모델링했다고 설명되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을 들여 몰래 이런 계획을 구체화했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한참 회사가 비난받고 있는 와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의 구조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전체적인 전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결말은 억지스러운 반전이 도드라집니다. 흥미는 있지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작가 작품은 다시 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2025/08/01

동트기 힘든 긴 밤 - 쓰진천 / 최정숙 : 별점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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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역에서 살해당한 남자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옮기던 남자가 체포되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 장차오로, 피해자 장양과 금전 관계로 다투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경찰의 권위에 눌려 허위 증언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함과 더불어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에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경찰은 장차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 천재인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0여년 전 있었던 허우구이핑 변사 사건 및 초등학생 아이 성상납이라는 추악한 범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서서히 드러난다...

중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폭력, 권력형 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초등학생을 성상납하는 추악한 범죄가 이루어졌음에도, 대기업 회장과 고위 정치인이 결탁하여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며, 주요 수사 관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이 20여 년 전인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이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쑨훙원의 비서 후이랑과 공안 리젠궈가 결탁하여 허우구이핑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유력한 증인이었던 딩춘메이도 살해하며, 딩춘메이를 살해한 왕하이쥔마저 죽이면서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는 과정은 범죄, 수사물로 충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전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입니다. 이처럼 극심한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수사를 이어가는 장양과 주웨이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요.

결국 사건이 영원히 은폐되나 싶었지만, 장양, 주웨이, 천민장, 장차오가 힘을 합쳐 거짓 살인 사건을 만들어 이를 공론화하는 전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양이 자살한 뒤, 그 시간에 알리바이를 만든 장차오가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목을 끈 다음, 시체를 드러내는 도입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동 성매매를 했던 고위 정치인 샤리핑의 친자 검사를 비밀리에 진행해, 그가 피해자에게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 절정 부분의 쾌감도 강렬하고요.
샤리핑이 최종 악역이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흑막이 존재해서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고, 장양의 조력자들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축인 허우구이핑 사건을 다시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양과 주웨이, 천민장의 우정과 의리, 정의감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사파가 지배하는 무림을 정의롭게 되돌리기 위해 나서는 영웅호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느껴졌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이 곳곳에 보입니다. 시한부 인생인 주인공이 자살했지만, 이를 살인 사건으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아요. 심지어 자살 방법과 동영상으로 자살했다는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유사하다는건 아쉽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집행이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에 맞는 설정이라서 와 닿는데, 장양이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할 이유는 솔직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지는 못합니다. 왜 샤리핑 사진과 사건 진상을 그냥 인터넷에 뿌리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과거 허우구이핑 사건 조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는 너무 뻔해서 뒤로 갈수록 식상합니다. 장양과 주웨이 등이 그들의 덫에 쉽게 걸리는 등의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리젠궈가 어떤 식으로든 훼방놓을게 뻔한데, 계속 리젠궈의 방해에 걸려 좌절하는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허술합니다. 장차오가 갑자기 등장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이유부터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허우구이핑의 연인이었던 리징과 결혼한 게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낄 일인지 의문이에요. 장차오 때문에 허우구이핑이 죽은게 아니니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허우구이핑의 사인이 잘못되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들, 그 당시에 장차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장양을 돕기 위해 갑자기 나타나는 전개가 더 어색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장양에게 사건에 뛰어들기를 강요했던 연인 우아이커와의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우아이커의 비중을 초반에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수학 천재 옌량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큽니다. 옌량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 강렬함만큼은 놀랍고, 한번 잡으면 손 떼기 힘든 재미를 갖추고 있는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5/06/20

아이가 없는 집 - 알렉스 안도릴 / 유혜인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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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산림재벌 페르 귄트(PG)는 사립탐정 율리아를 찾아가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시체 사진의 진상을 조사해달라고 의뢰했다. 그는 전날 있었던 회사 주주총회 이후 만찬 자리에서 과음을 하고 필름이 끊겨, 사진이 찍힌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PG는 사진 속 피해자가 자신의 형 베르테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율리아는 전남편이자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PG의 시골 저택 ‘만하임’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밤, 저택 옆에 위치한 맥주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다. 저택에는 자정부터 경보장치가 작동되기 때문에, 사진은 저택 부지 내, 특히 맥주 공장에서 찍혔을 가능성이 높았다.

율리아와 시드니는 저택에 머무르며 수사를 이어갔고, PG의 사촌 형제인 비에른, 안드레, 시리를 만났다. 비에른과 안드레는 과거 베르테르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만하임을 팔자는 문제로 PG 부부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막내 시리는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PG의 아내 모니카와는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였다.

다음 날, 호수 위로 베르테르의 시체가 떠올랐고, 부검 결과 그는 일요일 오후 3시에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모니카는 시리와 함께 있었고, 안드레는 애인과 있었으며, PG와 비에른은 알리바이가 없었다. 

율리아는 장애가 있는 줄 알았던 비에른이 실제로는 홀로 걸을 수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비에른이 맥주 공장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의혹을 거두었고, 우여곡절끝에 진상을 깨달은 뒤 베르테르의 장례식 날 관계자들을 모두 모은 자리에서 추리쇼를 펼쳐 범인을 지목하는데...

오랫만에 읽은 현대 스웨덴 장편 추리 소설. 사립 탐정 율리아 스타르크 시리즈 제 1작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은 먼저,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복고적이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들이 율리아의 추리를 통해 논리적으로 풀이됩니다.

1. 베르테르는 왜 전 재산을 시리에게 남겼는가?
→ 베르테르는 시리를 동생이자 애인, 그리고 자기 소유물이자 희생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과거 PG와 베르테르의 아버지 쉴베스테르는 아내 린네아가 동생 아우구스투스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해서, 갓난 딸 시리를 아우구스투스에게 보내버렸습니다. 린네아는 자식을 빼앗긴 상실감에 자살했고, 시리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베르테르는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시리를 농락하며 관계를 맺었던 것이지요.

2. 베르테르는 왜 살해당했는가?
→ 모니카가 베르테르와 맥주 공장에서 만날 때 시리와 동행했었습니다. 베르테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 장소에서 1의 사실을 알게 된 시리가 분노에 휩싸여 베르테르를 살해했습니다.

3. 범인은 누구였는가?
→ 주범은 시리였고, 모니카는 공범이었습니다. PG에게 전송된 베르테르의 이메일을 숨기고, 공장 열쇠를 빼돌릴 수 있었던 이는 모니카뿐이었습니다. 범행 후 두 사람은 범행 시간에 함께 보트를 탔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었고요.

4. 왜 PG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가?
→ 모니카의 계획이었습니다. 조울증을 앓고 있던 PG가 자신이 범인이라 오해하고 자살하게 되면, 그의 모든 재산이 모니카에게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5. 왜 시신을 댐에 유기했는가?
→ 숲에 묻었다면 절대 발견되지 않았을 테지만, PG가 탐정까지 불러 자기 범행이 아니라는걸 증명하려 하자 급해진 모니카가 사체가 드러나도록 유도했던 겁니다.

추리는 본격 추리물답게, 이야기 속에 배치된 단서와 복선에 의해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모니카가 일요일에 시리와 함께 보트를 탔다고 말하면서 ‘손에 녹이 묻었다’고 했던 대목은, 열쇠가 녹슬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연결되며 모니카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유추하는 단서가 됩니다. 피해자 사진을 본 시리가 베르테르라는걸 알아챈 배의 흉터는, 그녀가 베르테르에게 범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요.

또한, “내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사이, 내 휴대폰에 살해된 사람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는 설정 자체도 매우 흥미로왔어요. 300여페이지 남짓한 분량도 합리적이고요.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주로 음식들)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음울하지만 귀족적인 만하임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성 탐정의 심리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설정을 선호하지 않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 율리아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에서 혼자 생존한 후 PTSD를 앓으며, 타인과 접촉하면 발작을 일으킨다는데, 이러한 배경은 이야기 전개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율리아가 전남편 시드니를 못 잊고 맴도는 묘사 또한 장황해서 지루하게 느껴졌고요. 솔직히 중간에 졸 정도였습니다.
율리아가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시간이 멈춰 대부분의 사람은 못 보고 넘어가는 디테일과 표정을 포착한다는 특수 능력에 대한 묘사도 별로였습니다. 만화적일 뿐이며 그리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못하니까요.  

또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인 추리쇼는 극적이긴 하나 설득력은 다소 부족합니다. 시리가 PG와 베르테르의 친동생이었다는 사실만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을 뿐, 나머지 추리는 명확한 증거나 논리적 근거 없이 진행되는 탓입니다. 예를 들어, 비에른이 열쇠가 없어 범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비에른의 형 안드레가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네주거나 복제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고용인 아멜리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PG 또한 범인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베르테르가 방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유로 시리와 모니카가 범인이라는 사실도 시리의 자백이 없었다면 증명이 어려웠을 겁니다. 사건의 주요 현장인 맥주 공장이 불에 타버려서 결정적인 증거 확보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을 치밀하게 설계된, 잘 짜여진 추리물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이가 없는 집"이라는 제목과 작중 대사로 상징되는(핏줄이 사악해서 대를 끊어야 한다!), 일본 고전 변격물에서나 봄직한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인 콩가루 집안 설정도 와 닿지 않았고, 카리스마와 사악함을 모두 갖춘 최고 악당인 베르테르가 피해자로만 등장하는 점도 아쉽습니다. 제대로 뭔가 보여줬을만한 설정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전적인 추리물 구성은 돋보이지만, 심리 묘사의 과잉과 논리적 비약 등 아쉬움이 많아 감점합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3/22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엘리스 피터스 / 최인석 : 별점 2점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 4점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북하우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드펠 수사는 수도원의 영예를 위해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져오려는 로버트 부수도원장의 웨일즈행 여정에 동참했다. 유골이 있다는 웨일즈 귀더린에 도착한 일행은 유골 이전을 반대하는 마을 지주 리샤르트와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논의를 다음날 이어가기로 했는데, 리샤르트는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외지인 엥겔라드였다. 엥겔라드는 평소 리샤르트의 딸과 결혼 문제로 다툼을 벌였으며,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그의 화살이었다...

영국 작가 앨리스 피터스(Ellis Peters)의 캐드펠 수사(Brother Cadfael)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20여 년 전 번역 출간되었던 바 있는데, 이번에 북하우스에서 완역본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이전 번역 출간본 제목은 "성녀의 유골"이었지요. 시리즈 중 대표작입니다. 미국 추리 작가 협회(MWA)영국 추리 작가 협회(CWA)에서 각각 선정한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되었을 정도로요.

시리즈 특징인 12세기 영국의 풍경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한 묘사는 여전히 뛰어납니다.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웨일즈 귀더린 지방을 배경으로 하는데, 영국 본토와는 다른 웨일즈 특유의 분위기가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손에 잡힐 듯 그려집니다.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버트 부수도원장과 마을 지주 리샤르트의 갈등도 흥미로웠습니다. 세속적 욕망으로 변질된 종교가 아무리 권위를 갖추었다 해도, 순수한 신앙과 믿음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보여주거든요.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리고 수도사가 주인공인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잘 어우러졌고요.

추리적인 부분에서도 몇몇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리샤르트의 사체 검시를 통해 사건 현장의 조작 여부를 밝혀내는 캐드펠의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나름 과학 수사인데, 12세기라는걸 감안해도 별로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멋진 추리였습니다. 또한, 쇼네드가 범인 콜룸바누스 수사를 추궁하다가 실수로 그를 죽게 만든 뒤, 그를 성녀의 유골과 함께 ‘빛의 세계’로 보낸 것처럼 꾸미는 마지막 장면이 아주 기발했습니다. 수사가 사라진걸 기적으로 포장하는, 시대에 걸맞는 완전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신념을 세속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려 한 수도원에 대한 통렬한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고요. 2년 뒤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에필로그도 만족스러웠어요.

그러나 all time best 100에 포함될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뛰어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용의자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리샤르트를 살해할 동기를 가진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다툼이 있었다는 외지인 엥겔라드가 범인일 경우, 그가 현장에 자기 화살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요. 현장을 조작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는 용의자는 성녀의 유골을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옮기려 했던 캐드펠 일행뿐입니다. 리샤르트만 없다면 유골을 쉽게 옮길 수 있으니, 이는 확실한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캐드펠과 함께 있었던 수도사들은 범인일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도하러 나갔던 제롬 수사나 콜룸바누스 수사 중 한 명이 범인입니다. 당연히 야망 넘치는 콜룸바누스 수사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고요. 

이 정도로 용의자가 좁혀지면, 사실 둘 중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문제는 둘 중 누가 범인인지 밝히기 어렵다는 겁니다. 콜룸바누스 수사에게 처방했던 양귀비액이 줄어든 것(그가 제롬 수사에게 먹여 잠들게 만들었기 때문)은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결국 쇼네드가 성녀로 변장한 뒤, 콜룸바누스를 자극하여 자백을 유도하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이렇게 논리적 증거 없이 심리적 압박만으로 범인을 밝혀내는건, 이 작품을 정통 추리소설로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중세 영국의 역사적 분위기와 종교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담아낸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다소 아쉬워 감점합니다. 역사 미스터리보다는 팩션 드라마에 더 가까운 작품이에요. 정통 추리물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 시리즈를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025/02/22

모즈가 울부짖는 밤 - 오사카 고 / 김은모 : 별점 2.5점

모즈가 울부짖는 밤 - 6점
오사카 고 지음, 김은모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킬러 '모즈'는 타겟 가케히를 죽이려다 가케히가 들고 있던 폭탄이 폭발하는 사고에 휘말렸다. 사고에 휘말려 죽은 피해 여성은 경시청 공안부 형사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였다. 담당자였지만 가족이라 사건에서 배제된 구라키는 얻어낸 열흘간의 휴가를 이용해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신가이 가즈히코는 호메이 흥업 조직원들에게 살해당했지만, 기억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호메이 흥업이 계속 그의 목숨을 노리는 와중에, 신가이는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분투하여 결국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가즈히코가 아니라 동생 히로미이자 킬러 '모즈'였다. 

구라키, 모즈, 그리고 형사 오스기 등의 수사와 추적으로 폭탄 테러는 공안부장 무로이 때문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무로이와 구라키의 아내 다마에는 불륜 관계였고, 방일하는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테러하기 위해 가케히는 무로이를 협박해서 정보와 폭탄을 손에 넣으려 했었다. 무로이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이 협박에 흥했지만,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해 가케히를 죽이려다 폭발에 말려든게 진상이었다...

오사카 고의 '모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입니다. 1986년에 출간된 작품이지요.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가가와 데루유키 주연으로 드라마도 제작된 인기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10여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 선정되어 있어서 이전부터 관심이 가던 차에, 늦었지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킬러 신가이 가즈히코와 아내를 잃은 공안 형사 구라키 나오타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절벽에서 추락해 기억을 상실한 채 발견된 신가이는 아주 사소한 단서들을 토대로 과거를 찾아 나섭니다. 폭탄 테러로 아내를 잃은 구라키 형사는 독단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며 사건의 실체를 쫓고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굉장히 빠른 전개로 강한 흡입력을 보여줍니다. 지루함 없이 여러 사건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와중에 폭력과 액션도 넘쳐나서 오락적인 요소도 풍부하거든요. 사람도 여럿 죽어나가고요.

복잡한 이야기들이 얽히지만, 모두 '복수'가 중심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구라키 형사는 폭탄 테러로 죽은 아내 다마에의 복수를 위해, 신가이(히로미)는 형 가즈히코의 복수를 위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흑막이자 원흉인 공안부장 무로이조차 사르도니아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이유는 딸과 사위의 복수를 위해서였고요. 이렇게 작품 속 주요 인물들이 각자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며 이야기가 전개되는건 신선했습니다. 

반전들도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 반전은 기억을 잃은 신가이 가즈히코가 사실은 쌍둥이 동생 히로미였다는 것입니다. 히로미는 남성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트라우마로 인해 여장을 하고 킬러로 살아왔다는데,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은 꽤 설득력 있습니다. 그가 신가이로 오인되는 과정도 합리적인 편이고요.

두 번째 반전은 구라키 형사의 아내 다마에가 사실 폭탄 테러의 범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마에는 공안부장 무로이와 오랜 기간 불륜 관계였고, 이를 가케히에게 들켜 협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로이가 폭탄을 가케히에게 주기로 했었습니다. 무로이는 사르도니아 대통령 에체베리아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러나 다마에가 폭탄을 이용하여 협박자였던 가케히를 죽이려다 결국 자신까지 말려들게 되었던 겁니다.

그 외에도 구로키와 다마에 사이에 태어났던 딸이 사실은 무로이의 자식이었고,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가 호메이 흥업과 손을 잡은 악당이었다는게 밝혀지는 장면도 꽤 놀라운, 반전이라면 반전입니다. 이렇게 많은 반전들 모두가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 점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이야기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합니다. 구라키 형사의 수사와 신가이(히로미)의 추적, 그리고 흑막인 무로이 부장의 존재까지는 납득할 만하지만, 여기에 더해 무로이의 부하 와카마쓰 경시가 독단적으로 극우 폭력단 호메이 흥업을 조종했다던가, 감찰부의 쓰키 경시정이 부하 미키를 이용해 내부 감찰을 벌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과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의 비중있는 등장은 오히려 서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였습니다. 특히 미키는 정말 불필요해서, 왜 등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구로키에게 갖게되는 연심도 불필요한 요소였던건 마찬가지고요. 

또한, 이야기 전개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호메이 흥업이 애초에 신가이를 살해하려 한 이유부터 명확하지 않습니다. 무로이 부장 측이 불륜과 테러의 증거 사진이 신가이에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도 불합리하고요. 피해자인 가케히가 설령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신가이에게 넘겼을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가이(히로미)를 두 번이나 생포하여 사진의 위치를 추궁한다?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불륜 사진 확보 없이 가케히에게 사진과 폭탄을 전해준 것도 말이 안되지요. 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라는 거대한 범죄가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증거가 되는 사진을 회수하지 못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건 당연하니까요. 

구로키와 신가이 이야기가 교차될 때, 신가이 시점은 신가이가 살아난 다음부터 시작되지만 구로키 시점은 폭탄 테러 직후라서 시계열이 일치하지 않는데, 왜 이런 방식을 취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결말도 아쉬운 점 중 하나입니다. 대단한 증거없이 무로이 부장의 자백으로 마무리되는건 허무하며, 길고 늘어지는 감도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주요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대단원에 이르는건 비현실적이었어요. 하긴, 형이 살해당한 그 장소에서 쌍둥이 동생이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고 발견된다는 기본 설정부터 비현실적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도 많지만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강렬한 반전, 그리고 복수를 주제로 한 독창적인 이야기는 나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인기를 끌만한 요소는 많아요. 무엇보다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킬링 타임용 작품을 찾는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본격 미스터리 100에 선정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만...

2025/01/25

Q.E.D iff 증명종료 27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27 - 8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강력 사건 1편, 일상계 1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2024년 6월의 23권 이후 네권째 만에 평균 이상의 작품을 선보여 주었네요. 앞으로도 이 정도 수준을 계속 유지해주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수록작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형의 집 살인 사건

가나의 입학 절차 때문에 하버드를 방문한 토마와 가나는 회계사 레기 베이커 살인 사건 수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25년 전 발생했던 윌리엄 힐 살인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피해자는 윌리엄 힐 사건 당시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해되었고, 사건 현장에는 윌리엄 힐 사건을 재현한 인형의 집이 놓여 있었다.

인형의 집을 만든 이는 윌리엄의 모친인 카밀라였으며, 토마는 카밀라를 찾아가 그녀가 범행을 지시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암으로 죽어가던 카밀라는 자백하기에 앞서, 25년 전 사건의 진상을 먼저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윌리엄 힐 사건은 범인이 피해자를 폭행한 둔기는 가져갔지만, 나이프는 남겨두었고 혈흔은 사방에 튀었으나 발자국은 없는 등 기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력한 용의자인 윌리엄의 애인이 실종되어 사건은 미궁에 빠진 상태였다...

범인은 회계사 레기 베이커였습니다. 윌리엄 힐은 충동적으로 애인을 살해한 뒤, 레기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레기는 이 틈을 이용해 알리바이 - 차를 가져간 윌리엄 힐에게 차가 없다고 말하게 한 뒤, 윌리엄의 차를 몰고 가겠다고 말하고 바로 현장으로 출발하여 시간을 번 것 - 를 만들고 윌리엄을 살해했습니다. 윌리엄이 가지고 있던 300만 달러를 가져가기 위해서였지요.
레기는 윌리엄이 애인을 죽인 둔기로 윌리엄을 때렸기에 둔기를 가져갔으며, 애인의 피를 숨기기 위해 윌리엄을 난자하면서 현장이 혼란스러워졌던 겁니다.

Q.E.D에서는 정말이지 오랫만에 만나보는 정통 본격 추리물로 설득력 높은 알리바이 트릭이 사용되었고, 기묘한 상황을 풀어내는 추리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Q.E.D의 특징인 '학습 만화'스러운 부분도 과학 수사의 어머니라는 프랜시스 글래스너 리의 생애와 그녀가 만든 '인형의 집' 방식을 소개해 주면서 독자를 만족시킵니다. 그 외에도 가나의 하버드 입학 등이 펼쳐지는 등, 여러모로 오랜 팬으로서 즐길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본격 추리물이라면 모를까, 현대적 관점에서는 과학 수사를 다소 무시한 점은 아쉬웠습니다. 25년 전이라고 하면 오래전으로 느껴지지만, 작품 발표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1990년대 극후반입니다. "C.S.I" 시즌 1이 2000년에 시작된 점을 고려하면, 당시 현장 조사에서 다른 혈흔을 밝혀내지 못하거나, 자동차 타이어 흔적 등을 통해 단서를 찾지 못했다는건 솔직히 납득하기 어려워요. 이미 핸드폰 시대인데 윌리엄 힐이 집 전화로 전화를 건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윌리엄 힐이 자택에 전화를 두 번 - 레기에게 먼저, 그 다음에 가족에게 - 걸었던건 왜 밝혀지지 않았을까요? 피해자의 모친이 엄청난 재력가로 진상 규명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허점들은 더욱 아쉽습니다. 범인 발자국이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건 치명적인 단점이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평작 수준은 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임시 특별 침대 열차 사건

"습관에 주의하세요. 그것은 언젠가 성격이 될 테니. 성격에 주의하세요. 그것은 언젠가 운명이 될 테니." - 테레사 수녀.

봉사활동을 위해 아오모리에 간 토마와 가나는 도쿄로 돌아가는 길에 고급 침대 열차에 탑승했다가 부유한 할머니가 급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 사건에 휘말렸다.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모두 사건 현장인 식당칸에 있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할머니의 사망은 단순한 사고였지만, 승객들이 식당칸에 있었던 사실을 숨기려 했던 이유가 충격적입니다. 승객들은 모두 식당칸에서 할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목격했지만 이를 방관했고, 사망 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을 숨겼던 것입니다.

이후 전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라면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서 강도와 살인범에게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야기로 끌고 갔을겁니다. 그리고 방관자 효과 설명으로 마무리했겠지요. 사회파적인 고발, 그리고 Q.E.D 특유의 학습 만화스러운 정체성을 선보이기 이해서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을테지요.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봉사'라는 개념을 끄집어내며 마무리합니다. 작가는 이 사건을 통해 "남을 돕는 행동도 스포츠나 공부나 그림처럼 무의식이면서 습관적으로 하면 할 수 있지만, 무의식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급작스럽게 대응할 수가 없다. 반대로 의식은 할 수 없었던 정당성을 생각해낸다. 남을 돕는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할 수 있도록 습관화하는 것은 인격 형성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봉사 활동 경력이 대학 입시 등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앞서 소개드렸던 테레사 수녀의 말로 마무리되고요. 이런 깔끔한 일련의 전개와 마무리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봉사에 대한 개념 역시 그동안 생각도 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많은 반성도 하게 만드네요. 봉사가 몸에 배어 있는 분들은 존경할 수 밖에 없겠어요.

중반에 승객들이 가상의 범인을 만들어내는 전개는 다소 억지스러웠지만, 그 외의 전반적인 내용은 평균 이상의 수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5/01/10

메이지 단두대(明治斷頭台) - 야마다 후타로 : 별점 3점

明治斷頭台 山田風太郞ベストコレクション (角川文庫) (文庫) - 6점
山田 風太郞/角川書店(角川グル-プパブリッシング)

아래 리뷰에는 트릭,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단두대"는 일본 소설가 야마다 후타로가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쓴 단편집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메이지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탐구합니다.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에서 당당히 1위로 선정되었기에 계속 궁금했던 작품인데, 이번 기회에 원서를 ChatGPT의 도움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호평에 걸맞는 장점들이 눈에 띕니다. 첫 번째 장점은 실존 인물과 메이지 시대 풍광을 활용한 팩션적 재미입니다. 츠키지 호텔관, 에이타이바시 다리, 코덴마초 감옥 등 메이지 시대의 상징적인 장소들이 사건 속 배경으로 등장하고, 사회적 변화와 증기선같은 기술 발전이 트릭의 핵심 요소로 작용합니다. 주역 중 한 명으로 근대 경찰의 아버지 카와지 토시요시가 등장하고, 그 외에도 사이고 다카모리라던가 '마지막 사무라이' 키리노 토시아키, 일본 육군 창설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실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현실감과 역사적 몰입감을 전해줍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가공의 이야기와 결합해 당시 시대적 풍광을 생생히 재현하며, 작품의 팩션적 매력을 극대화합니다.

두 번째 장점은 추리적 재미와 정교한 트릭의 사용입니다. "괴담 츠키지 호텔관"에서는 일본도 양 끝에 게다를 고정시키고, 게다 굽을 나선형 계단 난간에 걸쳐 위에서 미끄러트린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나카사카 큐우치는 이를 이용해 자신은 옥상 전망대에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피해자를 공격해 살해했지요.
"미국에서 보내는 사랑"에서 범인은 인력거를 혼자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진상은 인력거 두 대를 묶어서 일종의 4륜 차량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이를 언덕 위에서 밀어서 굴러내려가게 한건데, 굉장히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트릭이었다 생각됩니다. 다만 라소츠(나졸)들의 위증(?)과 마지막 현장에서 인력거가 묶여 있지 않았던 점(얇은 끈으로 묶여 풀렸다?) 등이 애매했던 점인데, 이는 라소츠들이 진범의 도우미였다는 마지막 단편을 통해 잘 설명되고요.
"에이타이바시의 교수형"에서는 밧줄과 배의 움직임을 이용해 자살로 위장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범인 테라니시 진주로는 피해자를 강 위 증기선으로 유괴한 뒤, 미리 에이타이바시에 설치해 두었던 밧줄 고리에 목을 밀어넣고, 반대쪽 끝을 자신이 잡아당겨 자살처럼 보이게 위장했습니다. 증기선을 타고 있어서 당시 상식으로는 이동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도 만들 수 있었고요. 앞서 설명드렸던 사회적 변화와 기술적 발전이 사용된 멋진 트릭입니다.
"자신의 목을 안고 있는 시체"에서는 범인이 아리사카 이헤이를 살해한 뒤, 그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피해자의 몸과 처형된 죄수의 목을 붙여 위장한 사건입니다. 핵심은 '어떻게 죄수의 목을 빼돌렸는지?'인데, 이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라소츠의 속임수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앞서 모든 작품에서 라소츠가 한 몫했다는 걸 결정적으로 증명하게 됩니다.

세 번째 장점은 충격적인 결말입니다. 마지막 단편 "정의로운 정부는 존재할 수 있는가"에서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가 모든 사건의 흑막이었다'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나는 덕분입니다. 그는 정의를 위해 악인들을 처단하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라소츠들의 협력을 얻었던 겁니다. 사실 사건 대부분에서 라소츠들의 부정부패와 속임수가 바탕이 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유발했는데, 알고 보니 과거 무사였던 라소츠들은 탄정대 대순찰 케이시로의 이상에 공감하며 범죄에 협력했고, 케이시로는 이들의 범죄를 묵인하며 자신의 계획을 이어갔던 것이었지요. 모든 걸 밝힌 케이시로가 스스로 단두대를 사용해 자살하는 장면도 충격적이며, 정의와 권력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전해줍니다. 이후 체포하는 척했던 라소츠들이 에스메랄다를 탈옥시키며 막을 내리는데, 이 역시 괜찮은 결말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작품의 배경인 일본 메이지 시대는 국내 독자들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츠마와 조슈번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주요 요소로 등장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추리 소설로 기대했는데, 실제로 트릭이 활용된 본격 추리 단편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야기 "탄정대 대순찰"은 케이시로와 라소츠들, 탄정대와 단두대의 배경 설명에 치중되어 있고, 이어지는 "무녀 에스메랄다"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거든요. 마지막 "정당한 정부는 가능한가"는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이는 자백을 통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 추리보다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있고요. 따라서 본격적인 추리 요소는 부족한 편입니다.

케이시로가 정의를 추구하며 폭주하는 이유, 라소츠들이 케이시로에게 충성을 바치며 목숨까지 거는 이유에 대한 설명 역시 부족합니다. 이는 작품 전체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입니다. 소소한 악행을 저지르는 평균 이하 범죄자들인 라소츠들의 심경 변화가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했어요. 반대로 에스메랄다가 프랑스의 사형 집행인 상송 가문의 후예로, 일본에서는 '무녀'로 활약한다는 설정은 너무 과했고요. 만화적이라서 영 별로였습니다.

그래도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추리 팩션으로서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바실리스크"같은 닌자 액션물(?) 원작으로만 알고 있었던 작가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24/09/21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의사 데지마 하쿠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암으로 잃었었다. 어머니 데이코는 병원 재벌 야가미가 후계자 야스하루와 결혼해서 이복동생 아키토를 낳았다. 이후 하쿠로는 야가미가와 연을 끊고 데지마 성을 쓰게 되었고, 어머니마저 16년 전 고향 집에서 사고로 죽고나서는 가족과 아예 멀어졌다.
그런데 동생 아키토의 아내라는 미녀 가에데가 나타나 아키토가 실종되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쿠로는 가에데를 도와 오랫만에 야가미 가문 사람들과 이모 준코 등 친척들을 만나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수수께끼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2016년에 발표했던 장편. 적당한 분량에 꽤 많은 수수께끼를 담아내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대충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성공한 사업가인 아키토의 실종
  2. 가즈키요의 기묘한 추상화와 야스하루의 연구
  3. 데이코 살해 사건의 진상
  4. 데이코가 물려받았다는 귀한 유산의 정체
여기에 야가미 가문의 유산 상속 문제, 그리고 데이코가 고향집의 존재가 더해져 이야기는 아주 풍성합니다.

핵심 수수께끼 중 하나인 가즈키요의 그림과 야스하루의 연구에는 뇌과학, 그 중에서도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사용되어 재미를 더해줍니다. 과학과 관련된 최신 소재를 작품에 녹여내는데 능숙한 히가시노 게이고답더군요. 뇌를 자극하여 의도적으로 서번트와 같은 천재를 만들어내는게 가능하다는 이론으로 하쿠로의 친부 가즈키요는 뇌종양에 걸린 뒤, 야스하루의 생체 실험에 가까운 치료를 받고나서 '서번트 증후군'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분포에 법칙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그림 '관서의 망'을 그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진상은 세 번째 수수께끼인 데이코 살해 사건의 진상, 그리고 네 번째 수수께끼인 데이코가 받은 유산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수학자였던 데이코의 동서(하쿠로의 이모부) 겐조가 그림을 알아보고 탐냈고, 이를 알아챈 데이코의 입을 막으려 그녀를 살해했던겁니다. 마지막 데이코가 받은 유산은 '관서의 망' 이고요.

또 겐조가 범인으로 드러날 때, 최소한 야스하루의 보고서를 고향집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던건 겐조밖에 없다는 추리는 아주 괜찮습니다. 유마가 보고서를 발견하기 전, 하쿠로가 왔을 때 보고서는 없었습니다. 보고서를 가져다 놓은 범인은 왜 진작에 가져다 두지 않있을까요? 그 이유는 고향집이 있다는걸 그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겐조밖에 없습니다. 하쿠로가 방문하여 진작에 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거짓말과 함께, 준코 이모에게 어머니의 유품인 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겐조는 16년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기에 앨범이 고향 집에 있었다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이코가 하쿠로에게 앨범을 줄 수는 없으니, 하쿠로는 고향 집에서 앨범을 가져왔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겐조는 고향집이 그대로 있다는걸 그날 알아챘고, 보고서를 건네주어 하쿠로 일행이 고향집에서 손을 떼게 만든 뒤 '관서의 망'을 독차지할 속셈이었던 겁니다. 꽤 잘 짜여진 추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수수께끼와 이와 관련된 설정들은 모두 별로입니다. 아키토가 실종된 이유부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겐조가 아키토를 납치하려 했는데 그걸 사전에 알아챈 경찰이 아키토가 실종된 척 하고 아키토의 아내를 가장한 수사관 가에데를 사건에 투입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공개 수사로 전환해서 주모자를 체포했어야죠. 그랬다면 데이코의 고향집과 '관서의 망'도 불타지 않고 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수수께끼는 거의 모두 겐조의 자백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 추리 소설로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안드는건 주인공 하쿠로입니다. 첫 눈에 가에데에게 반했다치더라도, 엄연히 동생의 아내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은 최악이에요. 심지어 동생은 실종 상태인데 말이지요. 야가미 가문의 유마가 가에데에게 추근거리는걸 불쾌해하고 방해하지만, 하쿠로도 그에 뒤지지 않게 추근거리는 상황이라는걸 본인만 모르더라고요. 동물 병원에서 일하는 가게야마와의 관계도 뭔가 싶고요. 한마디로 '발암' 캐릭터였습니다.
가에데도 만만치 않아요. 비현실적이며 애매한 탓입니다. 팜므 파탈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활약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목의 '위험한 비너스'는 가에데를 의미하는 듯 한데, 그 정도 비중과 현실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하쿠로라면, 그녀의 주장을 절대 믿지 않았을겁니다.
이런 별로인데다가 비현실적인 커플을 주인공으로 삼느니 아키토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키토가 재력과 힘을 손에 넣기 전인 중학생 쯤 시기에 어머니 살해 사건과 아버지 그림의 행방을 쫓는 이야기를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키도 크고 미남인데다가 천재이니까요. 하쿠로는 조력자가 어울리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기본적인 재미는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주인공과 기본 설정이 문제일 뿐이지요. 당연히 영상화되었던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네요. 영상물에 더 어울리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주연이 츠마부키 사토시!

2024/08/09

폭포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5점

폭포의 밤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단편집. "절벽의 밤"에 이은, '안 된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수록작들은 독립적인 단편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제 1장 "묘진 폭포에서 소원을 빌어서는 안 된다"에서 벌어진 여고생 히리카 실종 사건은 마지막 제 4장 "소원 비는 목소리를 연결해서는 안 된다"와 곧바로 이어집니다. 4장에서 히리카의 사체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 3장 "그 영상을 조사해서는 안 된다"의 진상이 밝혀집니다. 3장에서 지기는 자신을 학대하던 아들 다카시를 살해한 뒤, 사체를 요메가 숲에 묻은 것처럼 경찰을 속인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사실은 자기 집 바닥에 사체를 숨겼지만요. 하지만 집 바닥에 사체를 묻으려다가 오히려 히리카의 사체를 발견했던겁니다. 다카시가 히리카를 살해하고 은닉했던 것이지요. 지기는 히리카의 사체를 요메가 숲에 암매장하였습니다. 다카시 사체를 요메가 숲에 묻은 척 했던 건 경찰을 속이려는게 아니라, 히리카의 사체를 찾게 만들어서 히리카 부모에게 진상을 알려주려던 마음이었고요. 

다만 2장 "머리 없는 남자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독립적인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1장에서 살아난 것처럼 보였던 모모카가 살해당했다는게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 목적보다는 2장의 주인공인 초등학생 신을 4장에서 활약시켜 경찰에게 히리카 사건 진상을 알게 하도록 만든 목적이 더 큽니다. 전개에 필수적인 징검다리 역할인 셈이지요.
 
이렇게 사건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미고오리 시와 묘진 폭포, 가쿠레이 산과 등산로, 무쿠로 다리, 고코 강, 요메가 숲 등 시의 주요 장소들을 무대로 사건이 일어나고, 묘진 폭포에 소원을 비는 행위가 진상으로 이어지며, 서로 다른 사건들이지만 수사를 맡은건 모두 구마지마 형사라는 식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절벽의 밤"과 같은 시리즈답게 '사진'을 이용하여 진상을 드러내는 장치도 삽입되어 있으며,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1장에서는 시점과 상황을 속이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3장은 일부러 시간 제한이 있는 블랙박스 메모리를 남기는 아이디어가 괜찮았어요. 4장은 다카시의 폭주와 히리카 실종 시점의 일치, 히리카 핸드폰이 잠깐 켜졌던 이유 등에 대한 진상이 설득력있게 밝혀지고요.

각 단편별로 조금 더 내용과 의견을 덧붙이자면,
1장은 제일 처집니다. 모모카가 언니 히리카의 행방을 우연히 발견한 부계정 SNS를 통해 추리해내는건 볼만 합니다만 그 외 전개는 다소 식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산장 관리인 오쓰키가 냉동고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오쓰키 어머니는 실종된게 아니라 아버지가 살해했다는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흥미를 반감시킵니다. 그렇다면 이를 눈치챈 모모카에게 위험이 닥치는 서스펜스라도 잘 표현했어야 하는데 이 역시 좋지 못합니다. 오쓰키 캐릭터를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아버지가 죽여 은닉한 모친의 사체를 모모카가 발견했다고 그녀를 바로 살해할만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 외 단서들 - 오쓰키가 만든 눈인형, 모모카가 입고있던 옷 사진 - 도 평면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이 없으면 진상을 완전히 알아내기 어렵다는 단점이 큽니다. "절벽의 밤"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던, 장난같이 여겨지는 장치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오쓰키를 뻔하더라도 전형적인 단순한 '산장 살인마'로 그리고, 사진의 역할은 배제하는게 서스펜스 스릴러로는 더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장은 신의 삼촌이 은둔형 외톨이가 된게 어린 시절 물놀이 사고에서 아버지를 죽게 만든 트라우마라는게 드러나는 일상계에 가까운 소품입니다. 다소 무서운 진상 - 삼촌이 자살하고 말았다는 - 을 사진으로 보여주어서 단점이라 할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 주요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사진을 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더라면 더 완성도 높은 단편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3장은 지기 씨가 아들을 살해했다며 자수했지만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 풀려나고, 이는 지기 씨 부부가 의도했던(?) 완전 범죄였다는 범죄물입니다. 경찰과 범죄자의 두뇌 배틀물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지기 씨가 '딱 한 가지 했다는 거짓말'을 형사 구마지마가 알아채고, 이를 통해 다카시의 사체를 찾아내려 하지만 이도 지기 씨의 계획이었다는 전개이니까요. 이야기는 흥미롭고 결말도 깔끔합니다. 다른 작품과의 연결없이 단독으로 읽어도 기승전결이 완벽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다만 딱 한 가지, 정황 증거와 자백까지 있는데 시체가 없다고 용의자를 풀어주는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4장은 1장의 히리카 사건, 3장의 다카시 사건이 한데 이어져 대단원에 이르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앞에서 설명드린 그대로입니다. 특별한 추리없이 지기 씨의 아내 지에코의 회상으로만 진상이 밝혀져서, 흥미롭지만 추리적인 맛과 정교함이 부족한게 아쉬웠습니다. 신이 지에코를 구한 뒤, 히리카 사건의 핵심 열쇠가 되는 핸드폰을 가져다 주는 결말은 앞서의 복선 - 빌린 물건은 제대로 된 상태로 돌려줘야 한다 - 로 설명되는 등 정교한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한건 좋아요. 하지만 신과 지에코가 엮이는 과정은 작위적이고, 목소리를 잃은 신이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다시 말문이 트였다는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별로 고민한 느낌을 주지 못해요. 이런 무리수를 두는 것 보다는 구마지마 형사의 추리와 활약으로 해결하는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장인물들이 폭포에 빈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지만 그 대신 모모카, 히리카 자매가 모두 죽었다는 결말도 안타까왔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체적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평이하지만 "절벽의 밤"보다는 좋았어요. "절벽의 밤"은 '사진'을 사용한 실험이 지나쳤는데, 여기서는 이야기 자체에 중심을 두고 있는 덕분입니다. 시리즈 1작은 평균 이하, 2작은 평균 수준은 돼니 3작은 기대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2024/04/27

7인 1역 - 렌조 미키히코 / 양윤옥 : 별점 2점

7인 1역 - 4점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모모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 모델 미오리 레이코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이었다. 경찰은 그녀에게 농락당해 모든걸 잃은 의사 사사하라가 범인이라 생각했다. 사건 현장, 그리고 청산가리 봉투에 그의 지문이 있었고 그가 사망 추정일에 레이코를 방문한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드 섬유회사의 사장 사와모리 에이지로가 레이코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서 사사하라는 풀려났다.
그런데 사와모리 말고도 레이코가 평상시 원수라면서 이를 갈고 협박해오던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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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 "회귀천 정사"로 유명한 렌조 미키히코의 장편. 1984년 첫 출간된 작품이라고 합니다.
렌조 미키히코는 정통 본격물보다는 "회귀천 정사"같은 서정적인 문체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렌조 미키히코하면 떠오르는 작품과는 사뭇 다른 스타일과 전개를 보여줍니다. 미오리 레이코 시점에서 상대방이 자신을 살해하도록 유도하는 범죄물이자 도서 추리물로 시작해서, 7명 모두가 똑같은 방법으로 레이코를 살해했다는게 드러나는 시점부터는 하우더닛 본격 추리물이 되는 작품이거든요.
 
가장 인상적인건 트릭입니다. 트릭을 잘 사용하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꽤 현실적인 트릭을 멋드러지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트릭을 조금 설명해 드리자면, 레이코의 과거 직장 동료 이시가미 요시코는 레이코가 성형 수술을 했다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뜯어내고 있었습니다. 레이코는 요시코를 꼬드겨 자기처럼 성형 수술을 시켜준 뒤, 그녀를 독살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자택 침대 위에 놓아 두고, 7명의 원수들을 한 명씩 불러 거실에서 한바탕 연기 - 나에게 농락당한 의사 사사하라가 나를 죽이려고 독약을 가져왔지만 실패했다. 독약은 저 술잔에 들어있다라며 술잔을 바꿔치도록 유도 - 를 펼친 뒤, 술을 마신척 하고 침실로 뛰어들어가 곧바로 몸을 숨겼습니다. 뒤쫓아 침실로 온 손님들은 레이코와 똑같은 시체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술잔을 바꿔치기해서 레이코가 죽었다고 여기고 도망쳤고요. 이렇게 해서 7명이 한 명을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하는 범죄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 트릭을 성공시키려면 마지막에 레이코가 진짜로 독을 먹고 죽은 뒤, 그 시체를 숨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게 사사하라였다는 진상도 괜찮았습니다. 청산가리를 준비할 수도 있었고, 세간에는 레이코 때문에 신세를 제대로 망친걸로 알려져있으니 독을 레이코 집에 가져온 동기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어서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더할나위 없었던 덕분이지요.

단서도 적절히 제공됩니다. 사사하라가 경찰에 체포된 후, 레이코의 집을 방문할 날짜를 대충 얼버무리는게 대표적입니다. 무려 7명을 대상으로 벌인 계획이라 이틀에 걸쳐 진행했던 탓에, 날짜를 특정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날짜를 대충 둘러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5일의 알리바이만큼은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확실하게 제공하고 있는걸 통해, 7명 모두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는걸 드러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레이코의 입으로 완벽한 알리바이 계획이 설명되었기에, 이를 이용하여 15일 이후 범행이 일어났다고 착각하게 만들고 본인들은 15일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금붕어 1마리가 죽은 수조를 보고 수사를 펼쳐서 원래는 7마리를 샀다는걸 알아내는 등의 경찰 수사 과정도 합리적으로 그려집니다. 결국 경찰은 이러한 꼼꼼한 수사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사건 진상에 도달하고요. 이렇게 경찰이 나름 활약을 펼친다는건 여러모로 눈여겨볼만 했습니다. 특히 레이코, 하마노, 사사하라의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되고 있는데 경찰까지 신경써서 분량을 안배해 준 정성(?)이 신기하더라고요. 사실 경찰은 헛다리를 짚는 수준으로 그쳐도 내용 전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든요. 오히려 사와모리의 완벽한 자백 유서를 확인한 뒤에 개인적으로 수사를 진행한다는게 더 설득력이 없지요. 이건 작가가 '일본 경찰은 우수하다!'라는걸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캐릭터와 상황, 심리를 묘사하는 방법과 문체가 굉장히 옛스러워서 확실히 40여년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납니다. 게다가 핵심 인물인 미오리 레이코에 대한 캐릭터 설정이 영 별로입니다. 그녀가 7명에게 원한을 품은 이유도 도무지 알 수가 없고요. 7명 모두 그녀에게 아픔을 주었을 수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 정당한 거래 관계였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얻은게 훨씬 더 많아 보여요. 모두가 선망하는 대 스타가 되어 큰 돈을 만지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멋대로 그들이 자기 인생을 망쳤다며 건수를 잡아 협박한다? 솔직히 죽어도 싼 여자라 생각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혼자만의 피해의식에 가까운 복수에 동참해서 스스로 그들을 모두 죽일 결심을 하는 사사하라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에게 아무리 푹 빠져다 한들, 이건 상식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현대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같은 작가가 썼더라면 아마 걸작으로 널리 알려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결과물은 조금 부족합니다. 최소한 '동기'만큼이라도 설득력있게 만들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2023/12/29

블루버드, 블루버드 - 애티카 로크 / 박영인 : 별점 3점

블루버드, 블루버드 - 6점
애티카 로크 지음, 박영인 옮김/네버모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흑인 텍사스 레인저 대런 매슈스는 지인 맥을 돕다가 ABT (Aryan Brotherhood of Texas) 갱단원 로니 말보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정직 처분을 받았다. 마침 그 때 FBI 요원인 친구 그렉이 엿새 사이 두 명이 시체로 발견된 사건 조사를 부탁했다. 먼저 사망한 피해자는 흑인 남자였고, 두 번째 피해자는 백인 여자라 전형적인 인종 혐오와 치정에 관련된 사건으로 보였다. 대런은 정의감에 불타 사건에 뛰어들었고, 복잡한 가족 관계가 얽힌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에 이름을 올렸기에 읽어보게 된 작품. 이런 류의 리스트 선정작에 실망한 적이 많아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뛰어난 작품이라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선 텍사스의 작은 촌마을 라크를 무대로, 여러 등장인물들과 장소 및 각종 디테일에 대한 묘사가 빼어납니다. 장면 장면이 모두 머릿 속에 그대로 떠오를 정도였어요. 전형적인 미국식 스릴러, 수사물로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지만, 하드보일드 전성기 스타일 느낌의, 인종차별이 남아있는 남부 특유의 성향과 복잡한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한 동기와 진상도 그럴싸 했습니다. 전개도 명쾌하고요. 간략하게 사건의 구조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첫 번째 피해자 마이클은 라크에서 음식점을 하는 제네바를 찾아와 제네바의 남편 조의 기타를 전해주었습니다. 마이클의 삼촌 부커가 조와 같이 밴드를 할 때 돌려주지 않았던 기타였지요. 조는 6년전 강도들에게 살해당했었습니다.
  2. 조 사건 이야기를 들은 마이클은 의문을 품고 재조사를 제안했습니다.
  3. 마이클은 그날 밤 두 번째 피해자 미시와 우연히 술집에서 어울리게 되었는데, 미시는 제네바의 아들과 불륜을 저지르다가 아이까지 낳았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남편 키스는 이를 꾹 참고 묵인해왔었습니다.
  4. 키스는 마이클과 미시가 어울리는걸 보고 분노가 폭발해서 마이클을 폭행하고 미시를 살해했습니다.
  5. 수사 과정에서 키스가 마이클을 폭행한게 드러나서, 라크 보안관은 키스를 두 건 모두의 범인으로 체포합니다.
  6. 그러나 알고보니 키스의 폭행으로 마이클은 다쳤을 뿐이지만, 6년전 조 사건의 진범인 마을 유력자 월리의 공범 아이작에 의해 죽고 말았습니다. 조 사건이 재조사가 될까봐 두려워했던 탓입니다.
여기서 5에서 6으로 이어지는, 대런이 의문을 품고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키스가 범인이라면 마이클의 차는 어디로 사라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6년전 사건에서 아이작이 "범인은 세 명의 백인이었다"고 증언한건 모순이라는 (범인을 볼 수 없었으므로) 상황에 대한 지적도 여러 번 등장하고 있고요. 이 정도면 독자에 대한 정보 전달도 공정한 셈입니다.
마지막에 대런이 연류된 로니 말보 사건의 진범이 맥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어요. 작가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잘 알고, 정교하게 전개했다는 인상을 전해줍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전형적이라는 단점은 있습니다. 외딴 마을의 지배자가 범죄의 흑막이라던가, 복잡한 인간 관계 - 미시의 아들은 제네바의 손녀이며, 제네바의 아들은 알고보니 월리의 이복 형제였다 (월리의 아버지가 제네바와 불륜을 저질러 낳은) - 가 핵심 고리 역할을 한다는 등의 설정은 수십년 전 부터 계속 반복되어 왔던 것입니다. "흑인"이 주인공으로 인종 차별에 대항한다는 설정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차별화를 주고 있기는 하지만, 하드보일드 속 탐정들은 모두 소수자, 약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니 딱히 변별력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독자가 이런 남부 흑인들 정서에 대해 온전히 공감하며 작품을 이해하기는 무리일 수 밖에 없고요.
전개가 대체로 우연에 기대고 있으며 마지막에 월리가 진범임을 폭로하는 장면은 거의 모두 자백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아이작이 도주하다가 체포되었다한들, 그가 원래대로의 증언을 고수했다면 오히려 대런이 궁지에 몰렸을텐데 (총으로 월리를 협박했으므로) 그걸 대항할 수단은 마땅한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의 BMW를 아이작이 타고 있었던건 월리 정도의 힘이면 충분히 무마할 수 있었을거에요. 키스의 부탁으로 창고를 내 주었을 뿐이었다고 하는 식으로요. 아이작의 증언도 누명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고요. 월리를 반드시 체포되게 만들기 위해 ABT와 연계되어 마약을 밀매하는 사업을 했다는 설정을 집어넣기는 했는데 억지스러웠습니다.

이런 류의 미국식 하드보일드 범죄 수사, 스릴러에 한결같이 적용되는 장황한 배경 설정 설명도 지루했습니다. 특히 앞의 1/5이 넘는 분량은 대런에 대한, 그리고 사건에 핵심 요소인 백인 갱단 ABT -등에 대한 설정을 상세하게 소개할 뿐, 실제 사건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대런이 아내와의 관계라던가 본인의 출생, 가족 관계 등에 고뇌하며 술독에 빠지는 묘사도 너무 많고요. 솔직히 음주 운전을 일상적으로 하는 이런 인간이 정의를 운운한다는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대런의 어머니 커밀라가 맥이 진범이라는 증거를 대런이 숨겼다는걸 가지고 협박을 시작한다는 마지막 반전도 한국인 정서에는 잘 맞지는 않더군요. 아무리 거리가 멀고 사는 환경이 달라도, 친모가 아들을 협박해서 울궈먹는다는건 납득하기 쉬운 설정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오랫만에 묵직한 본격 하드보일드 작품의 진수를 맛본 느낌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2023/09/22

희망의 끈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1.5점

희망의 끈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진상,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케이크 카페 사장 하나즈카 야요이가 살해당했다. 도난당한 물품은 없었고, 인품이 좋은걸로 유명했던 탓에 원한 관계로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즈카 야요이가 사망 1개월 전, 개인 트레이닝과 피부 관리실에 등록했다는게 밝혀져 '이성 관계'가 동기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녀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남성은 사망 얼마 전 만났던 전 남편 와타누키와 가게 단골 시오미 뿐. 그러나 전 남편 와타누키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기에 마쓰미야는 시오미에 주목했고, 가가의 동의를 얻어 본격적인 수사를 벌였다. 시오미는 아내와 사별한 뒤 중학생 딸 모나와 거리가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편 사건 수사와 동시에, 마쓰미야는 죽은 줄 알았던 친부가 아직 살아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배다른 누나 요시하라 아야코의 연락 덕분이었다. 암으로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친부를 만나러 갈 것인지? 마쓰미야의 결심을 도운 건 하나즈카 야요이 사건의 진상이었다. 십 수년 전, 불임 클리닉의 실수로 야요이의 수정란을 시오미 부부가 이식받아 낳은 딸이 모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야요이는 딸을 만나기 전 전 남편과 상의했는데 이를 오해했던 와타누키와 사실혼 관계인 동거녀 다유코가 살인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마쓰미야는 가족이라는 끈은 어떻게든 이어져있다는걸 통감하고 친부를 만나러 간다....


"소중한 사람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끈이 아무리 길어져도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 죽을 때까지 끈을 놓지 않겠다."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가가 형사가 등장하더군요. 그러나 가가 형사 시리즈는 아닙니다. 가가 형사의 비중은 낮으며, 마쓰미야가 주인공인 스핀 오프입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 기대해 봄직한 추리적인 요소도 거의 없습니다. 트릭이라던가, 범행을 숨기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는 우발적인 범행인데다가, 유력한 용의자가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경찰 수사가 오래 걸릴 일도 없었습니다. 와타누키와 야요이가 사건 직전에 만났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와타누키의 현재 동거녀 다유코인게 당연합니다. 혹시라도 둘이 재결합에 대해 쿵짝을 맞추는 중이었다면 버림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작중에서처럼 경찰이 와타누키에게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며 용의 선상에서 제외하고, 시오미에게 수사를 집중한다는건 있을리 없습니다.

이렇게 수사 과정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에 이야기도 사건과 수사보다는 야요이가 와타누키를 만났던 건 시오미의 딸 모나가 자기 딸이라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동기에 집중하여 드라마를 풀어나갑니다. 
하지만 수정란이 바뀌는 일이 과연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전개도 그다지 흥미롭지 못했습니다. 다유코가 범행을 자백했음에도 모나의 정체를 캐는 마쓰미야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오히려 가정의 비밀과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는 잔인한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사건과 함께 펼쳐지는 마쓰미야의 친부 요시하라 마사쓰구 이야기는 최악이었어요. 어떤 사연이 있었던 간에, 그가 결혼한 상태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마쓰미야와 그의 어머니 가쓰코를 버리고 원래 가정으로 돌아간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죽기 전에야 '사정이 있었다, 가족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다가온다는건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 이 따위 끈이라면 잘라내는게 상책입니다. 아니면 돈으로 보상받던가요. 이런 인간을 가족이라며 대우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사쓰구 불륜의 원인이 아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는데 상대방이 여자였다는 것도 불필요한 사족에 불과합니다. 왜 덧붙여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런다고 불륜이 용서되는건 아니니까요.
이런 쓸모없는 마쓰미야 친부 이야기보다는 모나에 대한 이야기를 더 깊고 자세히 풀어내는게 좋았을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고로 죽은 언니, 오빠 대신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지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친딸이 아니라는건 다른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발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모나가 느낄 부담감과 딜레마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좋은 설정을 썩힌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수사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추리물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3/03/12

생피아크르 사건 - 조르주 심농 / 성귀수 : 별점 1.5점

생피아크르 사건 - 4점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그레는 생피아크르 성의 관리인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찾았다. 살인을 예고하는 편지를 받고 마음이 쓰인 탓이었다.
그리고 예고 편지에서처럼 생피아크르 성당 미사에서 백작 부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메그레는 백작 부인의 미사 경본에 끼워져 있었던 가짜 신문 기사가 일종의 흉기였다는걸 밝혀낸다. 그리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고향 마들을 무대로 비공식적인 수사를 벌이기 시작하는데....


메그레가 비공식적으로 고향을 방문해서, 지역 유지였던 백작 부인 죽음에 얽힌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 국내 출간된 메그레 시리즈의 13번째 작품입니다.
미사에 참석해서 자리에만 있었던 백작 부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장면은 메그레 시리즈답지 않은 본격물적인 냄새를 풍겨서 두근두근했습니다. 작품 내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인이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총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다! 누구도 백작 부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매그레는 그녀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라고 하는 사건이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실망스럽습니다. 알고보니 미사 경본 사이에 끼워 두었던 도발적인 신문기사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던 겁니다. 백작 부인 아들이 자살했고, 그 이유는 모친 탓이었다는 가짜 기사였지요. 심장이 약했다니 위험했을 수는 있겠지만, 살인 흉기로 쓰기에는 부정확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냥 운에 맡겼을 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게다가 백작 부인과 아들 사이는 소원했고, 백작 부인은 정부에게 남은 재산을 가져다 바치고 있었으니 이런 기사로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도 의문이고요.
수사도 그다지 치밀하지 못합니다. 메그레가 정처없이 거리를 쏘다니다가 무언가를 본 뒤, 그걸 계기로 조사를 한다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치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즉흥적인 수사라는건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도 비슷하기는 한데, 비공식적인 고향 마을에서의 수사라 그런지 더 두서없이 느껴졌습니다. 자기가 예전에 살던 집, 어린 시절 알고 지낸 사람들 이야기가 마구 뒤섞이거든요.

마지막 사건 해결은 더 어이가 없었습니다. 살해 동기가 있었던 사람들을 불러모은 모리스 백작이 일종의 추리쇼를 벌인 뒤, 범인을 도발하여 자백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드라마틱하기는 합니다. 범인 에밀이 자제력을 잃을만한 분위기를 잔뜩 자아내는 연극적인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여지가 전무합니다. 범인 에밀이 자폭할 이유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에밀은 모리스 백작을 쏘고 자기가 범인을 죽였다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증거도 없었는데, 긁어서 부스럼만 잔뜩 만든 셈이에요. 범인은 백작 부인의 정부 장 매테예아니면 모리스 백작인 것 처럼 분위기를 몰고가고 있었는데, 왜 법적인 효력도 없을 추리쇼에 압도되어 자제력을 잃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백작에게는 동기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유산으로 남은 푼돈 얼마라도 지키려고 했다? 너무 때늦은 행동이었을 뿐더러 실제로 남은 유산이 거의 없었다는게 이미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백작 부인의 정부 장 메테예가 범인인 것 처럼 몰고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장이 돈줄을 억지로 끊을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범인이 백작 부인이 살해당할거라는 예언을 경찰에 보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그 예언 탓에 메그레가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는데, 에밀 입장에서는 경찰이 없는게 더 나았을거에요. 구태여 장 매테예를 범인으로 몰아서 치워버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냥 백작 부인이 자연사한 것 처럼 보이게 만들고, 몰래 빼돌린 백작 부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하면 되니까요. 백작이 추리쇼를 벌여 범인을 색출하려고 했을 수는 있지만, 공식적인 효력이 없는 거덜난 귀족의 마지막 발버둥에 동참해 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약간 고딕 호러물스러운, 고풍스러운 성에서 벌이는 추리쇼 분위기는 그럴싸했지만 추리물로 보기 힘든 기묘한 드라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차라리 좀 더 호러스럽게 끌고가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백작 부인의 사체가 벌떡 일어나는 식으로요!

2022/12/25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1권과 동일하게 각종 사건들의 상세한 소개에 더해 수사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던 법의학법과학 방식이 소개되는 논픽션.
이번에는 거짓말 탐지기, DNA 분석, 루미놀 시약, 삭흔, 뼈, 법보행 등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범죄의 종류 - 실종, 도굴 - 이라던가 수사 방식 - 잠복, 공개 수배 -, 범인의 특징 - 싸이코패스, 피해망상 -, 단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 자백, 간접증거 - 등 많은 범죄 관련 소재가 언급됩니다. 이건 법의학과 법과학 관련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걸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건 쪽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점 첫 번째는 여러 지능범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체 인멸, 현장 조작에 알리바이 트릭까지 사용하는 놀라운 범인들의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기할 점은 범인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범인들의 행태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사형 제도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네요.

특정 주제에 맞는 대표적인 사건을 선정하기 쉬웠을 1권보다는 주제부터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는건 아쉽지만, 상세한 사건 정리가 여러 자료와 도판 등으로 뒷받침되는 좋은 범죄 논픽션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두 타석 연속 장타!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던 범죄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몇몇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아산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1).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현장에 다시 침입했습니다. 양초를 이용한 장치로 시간 조작 방화를 일으키려고요. 범인은 집을 비웠던 시간에 영화 다운로드를 걸어 두어서 집에 있는척 했다는 알리바이 트릭까지 써먹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만화와 다른 법입니다. 범인은 한 달도 더 지난 사건 당일 행적을 너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했던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서 덜미가 잡히고 말거든요. 체포되어서 다행입니다.

<<환경 미화원 살인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2)
추리 소설에서나 봄직했던 정교한 시신 유기가 놀라왔던 사건입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철물점에서 사온 5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100리터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2장을 덧씌웠습니다.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보이도록요. 그리고 환경 미화원이었던 범인은 자기 담당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은 뒤, 다음날 시신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에 던져 넣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전주 시내의 한 소각장으로 이동 후 소각 처리되고 말았다는군요. 무섭습니다.

<<거여동 여고 동창 살해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3)
단순 질투로 친구와 친구 아이 두 명을 살해했던, 비상식적인 잔혹함으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사건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에 목장갑만 꼈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정도의 지능범으로 방 열쇠를 넣은 핸드백을 방범창 안으로 던져 넣는 식으로 일종의 밀실 트릭까지 사용된, 거의 성공했던 완전범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손에 현장에는 없었던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현장 수사관들의 식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종잇조각은 범행 도구로 준비해왔던 페트병으로 만든 빨랫줄 고정판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네요.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을거라고 경찰을 도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집에 범행 기록을 꼼꼼히 적어둔 일기장을 남겨두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시욕' 이라는게 있었던걸까요?
아울러 이런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무기 징역에 그쳤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발 이런 범인은 좀 죽입시다.

<<신혼부부 니코틴 살인 사건>>
범인은 신혼 여행을 떠났던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 화장을 서둘러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의 부검 감정서로 덜미가 잡힌 경우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혈관 내 다량 투여된 니코틴에 따른 급성 중독사인데, 시신의 왼쪽 팔에서 두 곳, 오른쪽 팔에서 한 곳, 총 세 곳에서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인이 입증되었거든요. 처음 주사했을 때 바로 독성이 나타났을터라, 그 다음 나머지 두 곳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타인이 주사를 놨다는 것이고, 사망 장소에는 남편밖에 다른 이는 없었으니 범인은 뻔한 셈입니다.
단지 돈 목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살해한 인면수심의 뻔뻔한 살인범이라는 특징도 잘 살아있는 사건으로, 남편이라는 놈은 이 증거가 드러나자 자살 방조라고 우겼다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네요. 이런 놈도 좀 죽입시다....

뻔뻔함이라면 <<포천 암매장 살인 사건>>범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인 범인이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가공할만한 뻔뻔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 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포천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TV 화면을 제시하자, “함께 갔지만 피해자는 포천이동갈비를 먹으러 갔다"고 바로 말을 바꾼다던가, "함께 어머니 산소에 들렀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상식적 변명을 늘어놓는 식이었다네요. 이런 변명이 통할거라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고,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미아동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남아시아계라는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잠복 중이던 형사가 혼혈로 보이는 어린 형제를 보고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 중 큰 아이가 "아빠다!"라고 외쳐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행동이었어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잡아야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혼혈 아이들의 집만 알아내어도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 아빠 신원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울주 노인 연쇄살인 사건>>
사건 현장에 범인의 DNA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폐쇄회로 TV 영상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백 진술과 이 진술에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가 더해지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됐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자백'이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피고인의 자백이 곧바로 유죄 증거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최근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도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또는 기망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되거나, 혹은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땐 자백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고요.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네요. 과거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강도 살인'처럼 허위 자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경우가 많은 탓이겠지요.

<<이천 무덤 연쇄 도굴 사건>>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행으로 범행 자체는 특기할게 없는데, 피해자가 너무 안타까왔던 경우입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최씨는 부모 무덤이 도굴당한건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믿어서 11년간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친지와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거든요.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버렸는데, 이런건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제주 보육교사 피살 사건>>
미제 사건인줄 알았었는데, 과학 수사를 통해 이전에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던 택시 운전사가 검거되었더군요. 사건 당시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과학 수사를 통해 피해자 사망 시각이 재조정되어 결국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 사체를 이용한 실험 결과로,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는 그늘인 데다 바람이 심했고, 사후 일주일이 넘은 뒤에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어서 경찰은 다시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갔는데, 9년 사이 미세 증거물을 증폭해 보는 기술이 발달한 덕에 다행히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해자 옷에서 범인 옷과 동일한 섬유 조각이, 범인의 차에서 피해자 섬유 조각이 수집되었던 것이지요. 섬유 조각이 범인이나 피해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교차 발견되는게 많아지면 둘이 만났다는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단계까지만 언급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용의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나, 섬유 증거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네요. 그 외의 증거들도 용의자가 범인이다! 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쉽습니다. 언젠가 진범이 잡혀 피해자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