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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30

전쟁과 군복의 역사 - 쓰지모토 요시후미 / 김효진 : 별점 3점

전쟁과 군복의 역사 - 6점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AK 트리비아 북 시리즈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군사사 전문가인 쓰지모토 요시후미가 집필한 책으로, 전쟁과 군복이 어떻게 함께 진화해왔는지를 방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조명합니다. 인류 최초로 군복 개념이 등장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를 시작으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군복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시대별, 지역별 군복의 변화를 다루면서도, 단순한 복식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초로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와 독일의 효웅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격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제국의 결전에서 대활약했던 폴란드 왕 얀 3세의 유익 기병대 '후사리아(윙드 후사르)' 이야기, 군인왕 프리드리히의 생애 등 군복과 불가분한 주요 전사 및 영웅들의 활약상을 병행해 설명해 주는 덕분입니다. 

당연히 복식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폴란드 중장기병 후사리아의 복장 묘사처럼요. 등에 장착한 거대한 스크시드워(천사의 날개 모양 장식)부터, 장창 코피아, 휘어진 군도 사블라, 2미터 장검 콘체슈, 권총 반돌레트, 동양풍 투구 시샤크, 어깨에 걸친 표범 가죽까지 장비 일체를 착용 이유와 이후 발전 상황 등까지 모두 알려줍니다. 아래와 같이 도판도 함께 제시되고요.

복식으로서의 군복에 대한 정보도 흥미롭습니다. 군복이 화려한 원색으로 구성되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화약은 짙은 연기를 발생시켰기 때문에 전장의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총기의 명중률도 낮아 병사들이 적의 사격을 피하는 것보다 아군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원색과 금·은 자수, 매듭 장식이 선호되었다고 하네요. 또, 화려한 군복은 군대의 상징이자 국가 권위의 표상으로 기능해서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이 이를 의도적으로 장려했다는 설명은 군복이 단순한 실용품이 아닌 국가 전략의 일부였음을 보여주고요. 또한 병사들에게 눈에 띄는 군복을 입히면 탈영을 어렵게 만든다는 설명도 그럴듯한 해석이었습니다.

프랑스 총사대의 복장, 이른바 '타바드'에 대한 고증 또한 세밀합니다. 대부분 대중매체에서 보아온 파란색 상의는 실은 루이 14세 시대의 것이며, 루이 13세나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에는 다른 복장이었다고 하네요. '늑골복'이라 불린 헝가리계 경기병의 복장이 오스만 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1848년 무렵, 재인도 영국군의 선도 군단(Corps of Guides)을 이끈 해리 버넷 럼스덴 중위(후에 중장. 1821~1896 년)가 고안한 진흙으로 염색한 군복을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우르두어에 카키 (Khaki, 진흙 색)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카키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전장에서의 위장 효과를 의식한 군복이라던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세계 최강의 패권국은 대영제국으로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영국 육군이 전 세계에 유행시킨 세 가지 아이템은 승마 바지와 승마 부츠의 조합, 어깨에 두르는 샘 브라운 벨트, 오늘날 일반 신사복으로 널리 정착한 '트렌치코트' 이고, 세계 최초의 위장복은 2차대전 독일 친위대가 도입했다는 등의 재미난 정보가 가득합니다.

다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다소 산만하고 두서없이 전개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는 있지만, 주로 근대 유럽에 치우쳤다는 비중 문제도 있고요. 또한 소개된 내용들의 출처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학술적 깊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이라는 독특한 주제를 '전사(戰史)'와 함께 입체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전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책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3/07

비잔티움의 역사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 최하늘 : 별점 3점

비잔티움의 역사 - 6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급격히 비잔티움 제국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역사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로 정의합니다.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방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리스와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제국만 남게 된 4세기 이후를 비잔티움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고요.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9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각각 탄생, 영토 확장, 이슬람의 공세, 부활, 최대 전성기, 십자군 원정과 지방 분권화, 분열, 몰락, 멸망 등의 흐름을 따라가며, 각 시기별 황제들이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년 왕국’이라는 위상을 지녔던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건 황제들이 동시에도 여러 명이 존재했고, 배신과 찬탈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천 년이나 존속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고,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보다는 용병과 외교에 의존했던 덕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족 가문과 대립을 벌이면서도 정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권한이 강력했던 점(특히 전성기)도 주요 요인이었고요.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는 수십 년 전 기근 이후 판매된 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며, 거대 귀족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강력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서방 제국에서 흔히 있었던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투쟁도 비잔티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테고요. 

게다가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가끔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천재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끌어들여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체적인 강력한 군사력없이, 주변보다 앞선 우수한 문화와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용병 고용과 동맹, 외교로 버티는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처럼요. 그러고보면 중국 송나라와 비슷하게 많네요. 비단이 유명했다던가, 강력한 무기가 - 송나라는 화포,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 - 있었다던가 등등등.

하여튼,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는 ‘분열’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후계국 세 개(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트 제국)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다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강력했던 황권도 약화되었고, 귀족층에게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도시국가로 전락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문제에서 교훈을 얻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쇠퇴도 초래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얻은 무역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격히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제노바는 15세기 이후 사실상 무역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의 중심이 프랑스와 영국 등 보다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흥미로운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외에도, 불가르 제국처럼 낯설고 새로운 역사적 명칭과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이 실제로 대활약해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서로 보니까 굉장히 새로왔습니다. 슬라브권에서 널리 쓰이는 키릴 문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 콘스탄디노스(성직명 키릴로스)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슬라브어 선교를 위해 제작된 이 알파벳이 훗날 키릴 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생겼던건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총리대신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운명 이야기였습니다.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남자들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두 딸과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생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은행에 상당한 재산을 맡겨 두었었고, 딸 엘레니가 고생 끝에 결국 동생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냈다는군요. 이 정도면 대하 소설로 만들 법한 극적인 이야기아닐까요? '몰락 미녀 귀족 영애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갖은 노력 끝에 집안 재산을 되찾아 가족을 구해낸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주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때문이더군요. 기번은 이 책에서 비잔티움 문화를 ‘이민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는데,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훨씬 빠르게 그리스와 발칸 반도, 혹은 그 이상까지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폄하는 부당하지요. 서구 유럽이 중심이 된 근대사의 또다른 폐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황당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각 시기별 제국의 판도를 쉽게 이해하고, 주요 전장 및 도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도가 필수적인데, 기본적인 지도조차 부실하여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역사”에서도 지도가 부족했는데, 앞으로 이러한 역사서에서 지도 부실 문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전투나 영웅적인 활약, 스캔들 같은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건조하고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전달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누가 즉위했고, 어떤 일을 했다라는 서술이 이어질 뿐이거든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과 전투는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9/19

커피인문학 - 박영순 : 별점 2점

커피인문학 - 4점
박영순 지음, 유사랑 그림/인물과사상사

커피의, 그리고 커피가 관련된 역사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는 식문화 관련 인문학 서적입니다.

커피의 간략한 역사부터 시작하는데, 이 책에 따르면 커피는 에디오피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예멘을 거쳐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졌고, 오스만 제국 시기에 베네치아를 통해 유럽에 상륙하여 대중화 되었습니다. 164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이후 각국에 사람들이 모여 커피를 마시는 곳에 관련된 시설들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당시에는 간판도 없어서 사람들이 '커피'라는 말로 그 장소를 특정한게 '커피'를 뜻하는 '카페'가 마시는 공간까지 아우르게 된 이유입니다.

커피 추출법은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 이스탄불 시대부터 기록이 전해진다는군요. 지금까지 전해지는 '터키시 커피' 방식으로 '체즈베'라는 도구에 볶아 빻은 커피콩을 끓여내는 방식이지요. 이후 유럽에서 가루를 걸러내기 위한 필터를 도입했고,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생크림을 얹거나 우유를 가미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1711년에 천주머니에 원두가루를 채워 '우려내기' 방식으로 마시기 시작했고요. 1908년에는 독일의 멜리타 벤츠가 드립법을 창시했고, 1906년 이탈리아에서는 최초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발표했습니다. 1933년에는 비알레티의 모카포트가 발명되었고요. 1938년, 아킬레 가치아가 드디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현대적인 에스프레소 머신을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와 함께 커피에 관련된 일화도 소개해줍니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라던가, 볼테르는 하루에 40~50잔의 커피를 마셨고, "커피가 독이라면, 그것은 느리게 퍼지는 독일 것이다"는 말을 남겼는데, 실제로 84세까지 장수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루소, 탈레랑, 나폴레옹,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등 여러 유명인들이 등장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커피가 대중화 된 이유는, 일본인들이 우유 먹기를 힘들어하자 메이지 정부에서 커피에 섞어 마시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소소한 역사도 재미있었고요.

그리고 미국의 독립, 조선의 커피 음용이나 우리나라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커피 역사도 알려준 뒤, 각 주요 커피 산지에서 커피가 재배된 역사와 현재를 다루는 이야기가 책 마지막까지 이어지는데, 크게는 브라질과 자메이카, 파나마, 르완다와 우간다, 하와이, 콜롬비아 순입니다. 이를 통해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된 건, 대공황 등 여러가지 이유로 추락한 자메이카 커피 산업에 1960년대 일본 자본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부터였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일본은 명확한 품질 관리와 최고 등급 커피의 세계 시장 유통을 인위적으로 조절했고, 커피 생두를 오크통에 담아 파는 고급화 전략으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을 세계 최고급 커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맛도 맛이지만,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 외 파나마 게이샤 커피의 역사와 르완다 커피의 감자맛 결함, 하와이와 콜롬비아 커피의 역사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다보니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가 바로 떠올랐습니다. 특정 음료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적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유명 산지와 주요 결과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똑같으니까요. 그러나 책의 완성도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커피에 대한 과대평가가 너무 심하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은 "커피견문록"에서 이미 접했었지만 그 정도가 더욱 심해요. 커피가 프랑스에서 계몽 사상을 일깨운 각성제로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냈고, 미국에서 커피가 독립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한건 커피 때문이다라는 식이거든요. 뒤로 가면 갈 수록 더 가관입니다. 조선에서 모던 보이들 중심으로 커피하우스 개업이 이어졌지만, 주권 회복을 위한 시대적 각성과 독립을 위한 저항심을 기르는 커피와 카페의 역할이 작동한 사례가 발굴되지 않았다면서 아쉬워하는데, 대관절 커피가 독립 운동과 무슨 상관이랍니까?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는. 뭐라 언급하기도 어려운 억지스러운 발상이었습니다. 커피에 계몽의 힘 따위는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커피가 아니라 카페인의 힘이에요. 이런 각성이 중요하다면, 다른 각성제도 다 마찬가지겠지요.

목차가 명확히 정의되지 못하고 두서없이 섞여있는 구성도 아쉽습니다. 각 주요 산지의 커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커피가 선악과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식이에요. 재미있는 주제이고, 한 번 볼 만 했지만 이는 커피 역사 부분에 포함시켰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심지어 같은 주제 안에서도 두서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우간다 커피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우간다 로부스타는 로부스타 중에서도 품질이 좋기로 소문나 인스턴트 커피용보다 에스프레서 블렌딩용으로 인기가 높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우간다 로부스타종은 인스턴트 커피의 주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는 글로 마무리되지요. 뭐가 맞는걸까요?

도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커피로 그렸다는 일러스트도 구태여 필요했을지 의문입니다. 잘 알려진 사진이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들이 많고, 내용에 꼭 필요했는지도 의문이며, 그리 잘 그린 것 같지도 않거든요. 실제 그림에서는 커피 향이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만, 인쇄된 책으로 보는데 커피로 그렸어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커피에 대한 역사를 알 수 있고, 여러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인 건 맞지만, 단점도 명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많은 커피 관련 책을 읽어봤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두드러진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1/17

향신료의 지구사 - 프레드 차라, 강경이 : 별점 2.5점

향신료의 지구사 - 6점
프레드 차라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기대가 컸던 "스파이스"에 큰 실망을 한 뒤 집어들게 된, 향신료를 주제로 한 식문화사, 미시사 서적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스파이스" 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주요 향신료 5개 - 시나몬cinnamon(석란육계), 클로브clove(정향), 블랙페퍼 blackpepper(흑후추), 넛메그 nutmeg(육두구), 칠리페퍼chilli pepper(고추)- 에 대한 상세한 설명부터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마음에 듭니다. 어떤 물건에 대해 설명하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려주는게 먼저인게 당연하니까요.
또 큰 세계사 흐름과의 연결도 잘 정리되어 있는 편입니다. 동서간의 만남, 신대륙의 발견에는 향신료가 주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라는걸 잘 알 수 있었거든요. 이러한 노력에 의해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로 진행되는 과정과 향신료 교역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해 주고요.

뒤이어 고대와 로마, 중세, 대항해시대, 산업혁명기, 현재에 걸쳐 각 시대별로 향신료가 어떤 향신료가 어떤 경로로, 무엇을 위해 누구에 의해서 유통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역시 핵심만 잘 짚고 있어서 깔끔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특히 "스파이스"에서는 설명되지 않았던 여러가지 사항에 대한 소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단순한 '선물' 정도만 전해주고 페퍼를 싣고 올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다 가마 일행부터가 캘리컷 힌두 지배자 사마린에게 보잘것없는 선물을 바쳤다고 하니까요. 선물이 통하지 않는다는걸 알고 난 뒤, 대포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요. 덕분에 포르투갈은 16세기 초반, 유럽에서 소비되는 페퍼 대부분의 공급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의 이슬람 항구를 함락할 수는 없어서, 주도권을 결국 네덜란드에게 내어 주고 맙니다.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홍해 길목의 항구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관할하에 있었을테니, 엄청나게 먼 항로를 거쳐 와야 하는 포르투갈 함대가 공략해서 정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을겁니다. 아울러 이 책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성공은 아시아 세력이 해상 무역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하고요. 당연히 홍해를 거친 육로를 통한 향신료 거래가 유통의 중심이었고, 포르투갈이 차지한건 전체 향신료 거래의 약 5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속이 다 시원하네요.

포르투갈 이후 네덜란드가 포르투칼의 동방 교역로를 차지할 수 있었던건 향신료 거래 시 현지 세력과 은화로 거래했기 때문이라는건 새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물론 네덜란드도 동인도 제도의 세 가지 주요 향신료는 반다 제도는 정복 후 노예화 과정을 통해 장악했지만요. 2006년 세계적인 사학자 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가 유럽인의 열대지방 진출에 대해 요약한 말 그대로, “그들은 포옹으로 시작해서 학대로 태도를 바꾸더니 유혈 사태로 마무리했다." 인 셈이지요.
또 포르투갈처럼 네덜란드도 향신료 교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중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이 해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향신료 생산지역의 내륙으로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토착 세력이 공백 상태에 있었던 덕분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중국인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이지만 설명되어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유럽이 아시아에 진출하기 몇 세기 전부터 중국인은 향신료 교역망에 뛰어들어 페퍼, 클로브, 넛메그, 시나몬을 구해갔고, 아시아 내 교역은 서로간에 쉽고, 상호 존중하는 관계로 이루어져서 중국인은 원하는 향신료를 얻기 위해 그다지 많은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페퍼는 베트남, 인도네시아에서 재배되었으니 중국은 굉장히 가까왔고, 시나몬과 넛메그는 중국에서 재배되었기 때문이지요. 만약 중국이 항로를 장악할 생각이었다면, 유럽과의 동서 대전이 훨씬 이른 시기에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어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사뭇 궁금합니다.

이후 향신료가 쇠퇴하는 과정은 "스파이스" 설명과 거의 같지만, 훨씬 깔끔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향신료 산업의 현재도 알려주면서 마침표를 찍는 구성도 마음에 들고요. 도판도 최고 수준인 등 책 자체의 완성도도 높습니다.

번역이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고, 주요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시대 향신료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문헌 번역 인용에 그칠 뿐이라 조금 아쉽습니다만, 이 정도면 기본은 된다고 생각되네요. '지구사' 시리즈는 항상 기본은 해 주는 것 같아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11/22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타고 파리로 - 슈테판 마르틴 마이어 지음, 토어발트 슈팡겐베르크 그림 / 류동수 : 별점 2점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타고 파리로 - 4점
슈테판 마르틴 마이어 지음, 토어발트 슈팡겐베르크 그림, 류동수 옮김/찰리북

오스만 제국의 소년 시난은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타고 파리로 떠났다. 아버지와 함께 파리 만국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열차에서 시난은 정식 승무원을 꿈구는 주방 보조 피에르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남작 부인이 회중 시계를 잃어버리고 피에르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시난은 피에르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3일 동안 시계를 찾기 위한 조사에 나서는데...

오리엔트 특급 열차로 오스만 제국에서 파리까지에 이르는 여정을 화려한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 동화책입니다. 단순한 지도, 풍경 묘사 뿐 아니라 열차 구조라던가 증기 기관차의 원리 등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보가 가득합니다. 또 실존했던 무기 거래상 바실 자하로프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고, 당시 불가리아 왕 페르디난트 1세가 열차를 모는걸 좋아했다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후가 여행을 좋아해서 전용 객차가 있었다는 등 실제 역사를 이야기에 녹여내어 재미를 더합니다. 당시 유럽의 패권 구도라던가 신분 제도 등을 어린 아이들이 약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전개도 좋았고요.

그러나 회중 시계는 단지 분실했던 것이고, 남작 부인은 오스만 제국 비밀 정보를 몰래 옮기던 첩자였다는 반전은 너무 급작스러웠습니다. 사악한 갑질로 일관하던 남작 부인이 사실은 사랑 때문에 위험한 첩자 역할을 수행한 사랑꾼이었다는 설정도 당황스러웠고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지금보다는 단서가 더 많이 제공되었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그림도 아주 빼어나다고 하기는 어려웠어요. 공들여 열심히 그리기는 했는데, 디테일이라던가 컬러 사용, 기본적인 뎃생력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동용 책을 어른 시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제 딸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더군요. '스칼라 월드 북스' 수준의 그림을 더해서 지금보다는 상세하게 이야기를 풀어냈어야 했습니다.

2019/11/30

드라큘라 그의 이야기 - 레이몬드 맥널리, 라두 플로레스쿠 / 하연희 : 별점 3점

드라큘라 그의 이야기 - 6점
레이몬드 맥널리.라두 플로레스쿠 지음, 하연희 옮김/루비박스

드라큘라라는 컨텐츠의 실체에 대해 다루는 책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흡혈귀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인 루마니아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드라큘라의 자취를 추적해 나가는 전반부, 그리고 브람스토커를 중심으로 흡혈귀와 드라큘라 컨텐츠에 대해 다루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는 실제 왈라키아 공국을 방문하여 현지 답사도 진행하고, 거의 남아있지는 않지만 유적의 자취도 탐색하는 노력에 더해 방대한 당시 사료들을 조사하여 드라큘라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깊이와 디테일은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지요. 잔인무도했다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일대기 자체가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그의 일대기를 소개하자면, 드라큘라는 어린 시절 발칸 반도를 집어심킨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볼모로 잡혀가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그 와중에 형은 산채로 생매장 당하는 등의 아픔도 겪고요. 몇 년 뒤 탈출하여 트란실바니아의 후냐디의 도움으로 왈라키아 군주 자리에 오른 뒤, 동맹인 트란실바니아의 색슨족들을 가혹하게 제압합니다. 왈라키아 인들을 위해서였지만 이 때 벌인 잔혹한 학살 때문에 생긴 악명이 그를 지금과 같은 불멸의 존재로 만들게 되었죠. 이후에는 투르크와 큰 전쟁을 벌입니다. 다뉴브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병력 규모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던 탓에 험준한 산림을 이용한 유격전, 전염병을 이용한 세균전과 보급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청야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이웃나라 헝가리로 동맹을 요청하러 탈출하지만 무려 12년간 헝가리 왕국의 포로로 세월을 보냅니다. 헝가리 왕국은 꼭두각시 군주를 통해 왈라키아를 지배하에 두고, 투르크와 휴전을 통해 평화를 강구하려는 속셈이었을거에요.헝가리에서 러시아 정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드라큘라는 투르크의 지원을 받는 왈라키아 군주 바사라브 3세를 쓰러트리기 위해 출진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며 삶을 마칩니다.

보시다시피 일생 자체가 포로, 배신, 전쟁으로 이루어진 인물입니다. 후대에 드라큘라로 알려지게 된 이유인 잔혹한 통치 방법도 이런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공포로 충성심을 잡아두지 않으면 자리가 위태롭다고 여긴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왈라키아 주민들에게는 비교적 괜찮은 군주였다는군요 그 유명한 말뚝형의 대상은 주로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는 지역 유지인 보야르와 그 일당들, 왈라키아에서 새력을 펼치는 게르만계, 그리고 당연히 오스만 제국과 이웃 나라의 병사들과 포로들 등이었다고 하니까요. 자신에게 충성하는 주민들만 평양에 모아놓은 북한 정권을 보는 듯 합니다. 덕분에 악명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군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겠지요.

말뚝형으로 대표되는 잔혹함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가득합니다. 터번을 벗지 않으려는 오스만 제국 사신의 머리에 터번째 못을 박았다던가, 말뚝형에 꽂힌 시체 냄새가 지독하다고 불평한 귀족을 가장 높은 말뚝에 꽂아 세워 놓았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전설인줄로만 알았던 황당한 이야기가 많은데 출처도 명확히 소개해주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무리 전설이라도 당대 문헌에 이 정도로 많이 소개되었다면 꽤나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들일테니까요. 과연 후대에 잔혹한 흡혈귀의 모델이 될 법한 인물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의외였던건 영화와는 다르게 드라큘라는 엄청나게 독실한 신자였다는 겁니다. 수도원을 세워 헌금을 하고, 죽는 순간에 진실로 참회하면 모든 죄가 사하여진다고 믿었다는데 솔직히 가당치도 않지요. 그렇다면 수도사까지 말뚝형에 처한건 또 왜였는지 궁금하네요.

이러한 드라큘라의 일대기와 발자취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흡혈귀에 대한 유럽의 전설과 민담, 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의 무서운 이야기 등을 거쳐 본격적인 흡혈귀 문학에 대해 소개해주는 후반부가 이어집니다. 내용의 핵심은 브람스토커와 그의 대표작 "드라큘라"이기는 한데, 그 외에도 조세프 셰리단 르 파누의 "카르밀라"라는 흡혈귀 이야기의 고전 걸작,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의 탄생과 폴리도리, 뒤마, 플랑쉬 등이 발표한 다양한 흡혈귀 이야기도 연대별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카르밀라"는 얼마전 읽었던 "요녀전설"과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흥미로왔으며, 브람스토커의 작품도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건 아니고 다양한 작품들에 영향을 받았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드라큘라'라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재창작해 낸 아이디어 덕분에 불멸의 명성을 얻은 듯 한데, 남들과 다른 아이디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브람스토커 이후의 다양한 흡혈귀 관련 컨텐츠 소개는 현대 컨텐츠까지 쭈욱 계속되고요. 재미는 물론 어떻게 '흡혈귀'가 호러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여 널리 퍼졌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보기드문 자료라 아주 좋았습니다. 특히 잘 알려져있지 않은 관련 컨텐츠 소개가 소설 뿐 아니라 영화에 이르기까지 폭 넓고 풍성해서 마음에 쏙 들었어요.

책의 마지막은 부록입니다. 지도를 비롯한 드라큘라의 일대기 및 관련된 당대 자료들의 번역본, 그리고 흡혈귀 관련 영화 소개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고 문헌 목록까지 합치면 부록의 분량이 100페이지 정도나 될 정도로 풍성하며, 그 수준도 깊고 방대하여 빼 놓기 힘들 정도의 귀한 자료임에는 분명합니다. 왜 부록으로 뺐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흡혈귀 컨텐츠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꼭 읽어봐야 할, 자료적 가치가 높은 서적입니다. 도판도 아주 충실하니까요. 장르 문학 매니아로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장르 문학, 그 중에서도 호러, 또 그 중에서도 흡혈귀 관련 장르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7/12/09

페퍼로드 - 야마모토 노리오 / 최용우 : 별점 3점

고추의 발상지에서 시작하여, 고추가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을 그린 음식사, 문화사, 미시사 서적입니다.

농학 박사이자 민족, 민속학자로 화려한 이력을 지닌 저자가 직접 발로 뛰고 조사한 정보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내용이 굉장히 충실하고 신뢰가 갑니다. 고추가 자생종에서 처음 재배종으로 바뀌게 된 남미에서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저자의 젊은 시절 박사 논문을 읽기 쉽도록 재구성했다고 하는데, 수록된 사진과 분포도 등의 도판만으로도 박사 학위는 충분히 딸만 하다 생각될 정도에요.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습니다. 고추가 매운맛을 지니게 된 이유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새는 고추를 좋아한다고 하네요. 씨앗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선택적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랍니다.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고추는 중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재배 식물로 기원전 8,000~9,000년 경부터 이용되기 시작하여 수천 년에 걸쳐 재배화되었습니다. 이후 콜럼버스가 처음 발견하여 후추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16세기 중반 무렵에는 스페인 곳곳에서도 재배가 시작되죠. 매운맛은 이런저런 편견을 불러일으켜 유럽 전역으로 퍼지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 등에서는 널리 퍼지게 됩니다. 흔히 들어본 "페페론치노"가 바로 고추라는 뜻이죠.
또 고추의 하나인 파프리카는 헝가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헝가리에는 맛이 아니라 관상용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는데, 이후 오스만 제국을 거쳐 식용 고추가 유입됩니다. 헝가리에서 고추를 "터키 후추"라고 부르는 게 가장 큰 증거죠. 그 후 덜 매운 고추를 선별해가는 과정을 거쳐 파프리카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프리카는 1937년 얼베르트 센트죄르지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센트죄르지는 비타민 C를 연구하기 위해 이를 분리해내야 했지만, 감귤류에서 분리하는 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답보상태였는데, 우연히 저녁 식사로 올라온 파프리카를 실험한 결과로 다량의 비타민 C를 분리하는데 분리하여 성공하게 되었다고 하거든요. 수많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 멋진 이야기입니다.

이후 노예제 때문에 아프리카로 전해지는 과정, 대항해 시대를 거쳐 인도로 전해지는 등 세계화되는 과정 모두가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당연히 한, 중, 일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로의 전래도 상세하고요. 여기서 몇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매운 요리로 유명한 사천 지방에서도 고추를 이용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라는 점, 한국에서도 18세기나 되어서야 김치에 고추를 사용한다는 기술이 등장한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추는 중국에서 전래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전래하였을지 모른다는 것도 흥미로웠으며, 또 일본에서 왜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고추를 많이 먹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기 요리를 중국이나 우리나라처럼 많이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거든요. 빨간색과 매운맛을 통한 일종의 '벽사 신앙'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이렇게 고추의 역사와 그 전파 과정, 그리고 나라별 특징 등을 모두 아우르는 고추의 집대성 같은 책입니다. 재배화 과정에 대한 내용은 조금 지루하고, 나라별 전파 과정과 레시피를 보다 상세하게 실어주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재미와 가치 모두 높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고추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당장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7/03/08

대포와 스탬프 1,2 - 하야미 라센진 : 별점 2점

대포와 스탬프 2 - 4점
하야미 라센진 지음/미우(대원씨아이)

하야미 라센진의 밀리터리 판타지 신작으로, "육해공 대작전" 비슷한,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선보입니다. 대공국, 제국 연합군과 공화국 간 전쟁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2차대전 비슷한 문명 수준과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 중 주역인 대공국군은 이름 - 마야코프스카야 (마르티나) 소위, 키릴 대위, 보이코 상사, 아네티카 병장 등등 - 이라던가, 무식해보이는 장비들, 보드카가 중요하게 (?) 등장하는 등 여러 면에서 러시아 느낌이 물씬 나고요. "군화와 전선"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작가가 2차대전 당시 소련군 팬이 확실한가 봅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느낌의 공화국도 상당히 이색적이고요.
이런 2차대전스러운 분위기는 작가의 전작들과 유사한데, 전투요원이나 전쟁을 중심으로 가져가는게 아니라 '병참부대원'을 주인공으로 하여 보급과 행정 업무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차이점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재미는 부족합니다. 보급물자를 빼돌리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지루하고, 그림과 어울리지 않게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가는 심각한 분위기 탓도 큽니다. 기자단이 싸그리 죽어 나가는 것도 모자라서, 2권 뒷부분에 등장하는 이이다코 고지 사령관 파파에프 대위는 폭격으로 팔만 발견될 정도에요.
주인공인 마르티나가 꽉 막힌 원리원칙주의자로 매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재미를 떨어트리는 요소입니다. 주인공을 괴롭히거나 힘들게하는 조연 상사 역할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네요. 마르티나보다는 명문가 아들이지만 후방에서 대충대충 일하면서 SF 소설을 쓰는 키릴 대위나, 헤프고 글도 못 읽지만 용감무쌍한 아네티카 병장 쪽이 더 주인공에 가깝습니다. 2권에서 키릴 대위의 동생인 코스챠, 이중스파이 시난 중위와 같은 새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는걸 보면,작가도 마르티나 중심으로 드라마를 만드는게 힘들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덧붙이자면 족제비 '스탬프'도 귀엽고 아주 약간 활약이 있긴 하나 왜 나오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최소한 제목에 등장할 비중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제목의 스탬프에는 '서류 작업'을 뜻하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긴 합니다만...

아울러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인 그럴듯한 장비들, 병기들 묘사는 여전히 빼어나지만, 작품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부수적 소재에 그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중장갑전함 '평화호' 외에는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육해공 대작전" 만큼 참신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팬으로서는 제법 만족스럽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많이 처집니다. 다음 권도 사 보겠지만 오래 이어질 것 같지는 않네요.

덧붙이자면, 출판사가 이미지 프레임에서 미우 (대원)으로 바뀐 것도 긍정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판형이 달라진 것도 짜증나지만, 등장하는 장비, 병기를 에피소드가 끝나면 그대로 확대해서 양면 페이지로 수록한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네요. 잉크와 종이 낭비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2016/10/30

서프라이즈 : 인물편 -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지음 : 별점 1.5점

서프라이즈 : 인물편 - 4점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지음/MBC C&I(MBC프로덕션)

MBC의 방송 프로그램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던 인물들이 소개되는 책입니다. 그런데 직전에 읽은 "사건편"보다도 더 재미없고 자료적 가치도 없습니다. 두 권이 세트 느낌이라 한꺼번에 읽기는 했지만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리지가 않네요.

그나마 기대에 최소한이나마 값했던 이야기는 피타고라스 이야기 뿐입니다. 피타고라스가 무리수라는 개념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무리수를 발견한 제자 히파수스를 죽였고, 무리수를 아르곤이라고 명명한 뒤 외부로 누설되는 것을 강력히 금지했다. 그러나 무리수의 개념은 얼마후 피타고라스의 발견으로 공식 발표되었고, 오히려 거기서 확장된 개념 - 예를 들어 정오각형의 한 변과 대각선의 비는 1:1.618이라는 황금분할의 비율이다! - 이었다는건데 꽤나 그럴듯했습니다. 뭔가 수학 관련 추리소설 소재로도 쓸만해 보였고요.

그러나 그 외에는 대체로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식상한 이야기, 별로 미스터리하지 않은 가쉽과 스캔들, 기묘하고 흥미롭더라도 진위 여부는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별 관련 없는 것들을 정말로 중요했던 단서나 진상처럼 포장해서 이야기하는 전개 방식은 정말 짜증납니다. 대표적인게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진 이유는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 휴전하고 모든 대군을 프랑스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며, 이는 나폴레옹을 증오한 오스만 황제의 어머니 에메 뒤비크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억지도 정도껏 해야지요... 하긴, "사건편"에서의, 워털루 전쟁 패전 원인은 통조림 대신 병조림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보다는 조금 나아 보이기는 합니다만.

아인슈타인을 유혹한 화가의 아내 마르가리타는 사실 소련의 스파이였으며, 그녀에게 아인슈타인이 연구 기밀을 제공한 덕분에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틱하기는 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은 이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진게 아니라는건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스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개중 나은 편이기는 합니다. 예로는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했던 21살 연하의 테오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에디트가 결혼하고 1년만에 사망하자 테오는 임종 사진 보도에 대한 독점권을 팔았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 결혼은 돈이 목적이었다고 비난했고요. 허나 테오가 7년 뒤 사망한 후,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에디트 피아프가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 빚을 테오가 대신 갚아 주었다는 것이지요.
장국영 자살 사건을 소개하며 그는 타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제기하는 부분도 추리소설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등장하는 의혹들은 제법 그럴듯한데, 과연 진상이 무엇일지 궁금해지네요.

그런데 이런 스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가쉽에 가깝다는 문제는 큽니다. "서프라이즈"가 아니라 "연예가 중계"에 가까운 내용들이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사건편"보다도 가치가 낮아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인터넷의 유사 사이트 검색보다 나은 점 역시 전무하고요. 가격까지 비싸니 구태여 찾아 읽지 마시기 바립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방영 당시 아주 흥미롭게 보았던 일본의 여왕벌 히가 가즈코 이야기가 빠진게 의외였습니다. 검증된 사실일 뿐더러 충격적인 내용으로 이 책에 딱 맞는 소재인데 왜 빠졌을까요?

2014/07/19

무기 - 영국왕립무기박물관, DK <무기> 편집위원회 / 정병선, 이민아 : 별점 3점

무기 - 6점
영국왕립무기박물관, DK <무기> 편집위원회 지음, 정병선, 이민아 옮김, 리처드 홈 감수/사이언스북스

제목 그대로 돌도끼에서 최신의 총기까지 망라하는 무기 사전입니다. 아주 예전에 위시 리스트에 담아놓았었는데, 이제야 구입했네요.

장점은 여러 무기를 상세한 도판과 함께 소개하는데,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변방의 무기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인도와 스리랑카, 오스만 투르크의 무기 같은 것들이죠. 다른 책이나 자료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무기들을 실제 사진과 함께 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특히 인도의 무기들은 신기한 것들이 많더군요. 악어가죽으로 만든 투구와 갑옷이라든가, 주먹으로 쥐는 손단검 같은 것들은 실물을 한 번 보고 싶어졌습니다. 일본에서 자체 발달한 “텟포”의 사진도 처음 보는 것이라 무척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서양, 특히 유럽의 도검류나 총기들은 일정 시점 이후로는 생김새나 특징에 큰 차이가 없이 나라나 제작사만 바뀐채 반복적으로 나열되는데 다소 아쉬웠습니다. 이런 비슷한 총검류 대신 다른 무기들, 이를테면 대형 화기 쪽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게 더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책의 주제가 개인용 무기라서 어울리지 않았다면, 수류탄 같은 화기를 다루는 것도 방법이었을테고요.
그리고 일본의 칼들은 한 페이지 이상씩 할애되어 소개되는 반면 조선과 중국의 무기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조선 무구는 투구 하나 실려 있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무기 사전으로서 이만한 볼륨과 도판을 자랑하는 책은 드물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비교적 고가이지만 지금은 할인된 금액에 판매되고 있으며, 도판만으로도 지금 가격에 걸맞는 가치는 충분합니다. 저처럼 “대백과”류 책에 향수를 가진 분들이나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적극 추천드립니다.

2014/04/14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 도현신 : 별점 2점

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 4점
도현신 지음/시대의창

전쟁과 관련된 음식들 및 해당 음식과 요리의 역사적 배경을 함께 소개해 주는 식문화사 서적이자 일종의 미시사 서적입니다.

전쟁 때문에 비롯된 음식들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리라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전쟁으로 전파되거나 전쟁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음식과 요리들 소개가 없는건 아닌데, 억지로 끼워 맞춘 음식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예를 들면 바이킹이 뷔페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음식을 조리해 놓고 알아서 덜어 먹는 문화가 과연 바이킹만의 것이었을까요? 예전에는 다 그렇게 먹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심지어 전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요리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의 청어잡이는 청어가 돈이 되어서 잡았던 겁니다. 전쟁과는 관련이 없어요. 실제로 전쟁과 직접 관련되어 만들어진 음식은 오스만 제국을 물리친 기념으로 제빵사 피터 벤더가 초승달 모양을 본떠 만든 크루아상 정도 뿐입니다.

또한 다른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예를 들면 스팸 이야기는 너무 많이 접해 지겨울 정도지요. "오무라이스 잼잼"에서도 이미 충분히 다루어졌을 정도로요.

그래도 워낙 많은 음식들이 소개되기 때문에 건질 게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소설과 애니메이션 "보물섬"에서 묘사된, 당시 선원들이 럼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 - 물 보관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 - 라던가, 나치 독일에서 콜라를 구할 수 없게 되자 "환타"를 만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흥미로왔어요.

처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알라모 전투 이후 몰락해 미국에 망명한 산타 안나가 사진작가 토마스 애덤스에게 치클을 알려준게 껌의 기원이었다, 프렌치 프라이는 프랑스가 아니라 벨기에에서 시작되었다'가 그러합니다. 벨기에 뫼스 계곡 사람들은 원래 작은 물고기를 튀겨 먹었는데, 강물이 얼어버려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자 감자를 길게 썰어 튀겨 먹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이는 세계 최초의 감자튀김이기도 하고요.

또한 탕수육이 청나라 말기에 외국인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은 진위 여부를 떠나 그럴듯했고, 채만식의 "태평천하"에도 언급될 정도로 탕수육이 일제 강점기 때 이미 널리 알려진 음식이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몇몇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어도, 전체의 가치를 끌어올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정말로 "전쟁"에 얽힌 음식들만 심도 있게 파고들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2014/01/14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 - 모리 아키마로 / 이기웅 : 별점 2점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 - 4점
모리 아키마로 지음, 이기웅 옮김/포레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려는 건 미적 추리이고, 그에 따라 나타난 진상이 미적이지 않으면 내 관심은 그 시점에서 소멸될 거야."

'미학'이 주요 테마인 일상계 추리 연작 단편집. 제1회 애거서 크리스티 상을 수상하였다고 하네요. 전혀 몰랐던 작품인데, 국내 최고의 추리애호가 사이트인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 중인 "2013년 올해의 추리소설" 이벤트에서 몇몇 분들이 언급하였길래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미학 전공자인 탐정이 등장하여 "미학 강의"를 이야기의 뼈대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를 다른 무언가와 절묘하게 겹쳐서 진행하는 작품은 일상계 연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미학"이라는 소재는 정말이지 처음 봤습니다.

단지 독특한 수준에 그치지지도 않습니다. 미학 이론을 일상계 추리물 속에 결합하여 잘 녹여내고 있거든요. 화자인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에드거 앨런 포라는 설정이라서 포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미학적 분석과 이론이 등장하는데, 실제 사건이 이러한 이론들과 엮여 나가는 과정이 제법 괜찮습니다. 실제 통하는 이론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 검정고양이의 미학 이론과 논리도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그럴싸하고요. 덕분에 미학 이론에 대한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히 전해 줍니다.

아울러 특이한 탐정, 천재 탐정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지만 "미학"을 전문으로 하는 교수 탐정 역시 이 작품이 처음이었어요. 미학 전공이라는 점 외의 탐정에 대한 설정과 묘사는 천재 학자이자 잘난 척 덩어리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시니컬한 대사로 똘똘 뭉쳐 있는 점에서는 임상 범죄 학자 히무라 히데오나 갈릴레오 유가와가 바로 연상되는 탓에 그렇게 차별화되지는 않지만요. 오히려 설정과 묘사보다는 "검정고양이"라는 별명 외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화자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게 더 특이했습니다. 추후 서술트릭에 써먹으려는 의도였을까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첫 두 편 이외의 나머지 네 편은 추리적으로나 이야기 전개나 모두 미흡하여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미학 이론과 추리가 제대로 조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후의 시리즈가 기대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어요. 독특한 설정을 지속적으로 끌어나가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인 느낌입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평균해서 2점입니다. 앞의 두 편은 미학 이론과 추리의 결합이 잘 이루어진 좋은 작품들로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하지만, 뒤의 네 편이 점수를 모두 깎아먹었습니다. 그래도 앞의 두 편만큼은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독특한 일상계 추리물을 찾으신다면 정답일 수도 있으니까요. e-book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만큼은 각 단편별로 별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수록작 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달과 나의 거리"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나"가 어머니의 정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이한 지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내용입니다. 

"다케토리 이야기"의 원제는 "다케토리옹 이야기" 였는데, 달과 인간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제목이 바뀌었다던가, 나폴레옹 3세가 고용한 오스만 남작이 파리에 가스등을 전면으로 도입하며 '예술의 학살자'임을 자처한 이유는 달을 대체하여 달의 주민을 파리에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던가하는 등의 눈이 휭휭 돌아갈 정도로 현학적인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거의 강의에 가깝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미학 강의가 무척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더해 지도의 수수께끼도 대단한건 아니지만 지도에 관계된 두 학자의 전공분야가 앞서 자세하게 설명한 이론과 딱 들어맞고, 진상 역시도 합리적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암호로서의 가치가 없는 기이한 지도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징표가 된다는건 별로 와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짜임새와 완성도는 좋았고 무엇보다도 미학이론과 일상계 추리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새로운 시리즈의 도입부로는 차고 넘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벽과 모방"

3년전 "나"와 검은고양이가 처음 만나게 되었던 세미나 팀에서 여름 휴가를 계획했다. 장소는 팀원 중 한명인 세키마타의 가루이자와 별장이었다. 그러나 세키마타는 팀원들이 방문한 날 기이한 행동을 보인 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세키마타의 자살 원인을 분석하는 추리와 작품을 관통하는 바그너와 니체의 "벽" 이론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이지만 서양에서는 말하는 벽은 공포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 기본 개념의 붕괴- 는 것, "검은 고양이"에서의 벽을 해석하는 이론, "모방"과 "카피"의 차이 - 모방은 정신과 행위에 관한 개념이지만 카피는 완성된 결과만을 지향하는 것 - 를 설명해 주면서 이 개념이 이 사건에 깊게 얽혀있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 등 현학적인 이론 소개는 아주 좋았습니다.

다만 세키마타의 모방 행위는 비정상적이라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미학과 추리를 절묘하게 엮어나간 전개는 기존에 알고있던 추리 소설의 상식을 깨는, 멋진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강의가 지나치게 장황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쉬우며 적절한 길이로 마무리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물의 레토릭"

연인이 동반자살로 의심되는데 여자가 사용한 향수의 향기가 이후에도 떠돈다는 괴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내용의 작품. 

그런데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와 사건을 엮는건 무리수였습니다. 물 - 여성의 시체라는 모티브 외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학강의와 일상계 추리를 엮는다는 설정에 지나치게 얽매인 느낌입니다. 사건도 오해와 잘못된 증언이 결합된 것일 뿐이라서 사건으로 보기도 어렵고요. 우연과 작위에 의한 전개가 많다는 것도 감점요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숨기면 꽃"

검은 고양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여류학자 이구스가 실종되어 그녀의 행방을 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도둑맞은 편지"와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를 주로 강의하는데, 내용에 비하면 너무 거창하네요. 알맹이는 별거 없는데 포장만 요란한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었달까요. 진상도 딱히 설득력이 없어서 전혀 와닿지 않았고요. 머리를 깎았다고 해서 딸을 못 알아볼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눈이 안 좋다고 해도 저같으면 목소리로 알아볼 수 있을거라 자신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두개골 속에서"

5년전 혜성처럼 데뷰했으나 데뷰작 이후 사라져 버린 천재시인 시조 도미아키의 데뷰 5주년 기념 파티에서 그의 신작이 낭독되었다. 그 후 시조와 동일인물이라고 의심받던 영화감독 에즈미가 자살하는데...

"황금충"에서 리그랜드와 황금충이 서로에게 침입했다고 설명하는 미학 강의만큼은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이야기들과 같습니다. 이 미학 강의가 시조 도미아키와 에즈미 감독의 죽음을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억지스럽기만 했다는 점입니다. 사디즘 - 마조히즘의 관계처럼 에즈미는 관능 속에서 생을 긍정하는 반면, 시조는 그로테스크한 모티브 속에서 유머러스하게 죽음을 긍정한다는 정 반대의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부연 설명만으로도 이야기 전개는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검은 고양이의 누나 레이카가 제대로 설명만 해 주면 애시당초 사건이 될 수도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설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보다는 미학강의가 더 좋아서 완벽하게 주객전도된 느낌입니다.

"달과 왕"

한 노교수의 죽음, 그리고 그와 젊은 여류학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단편.

포의 "까마귀"가 그리스 음악적인 시라는 것, 여기서 까마귀의 "Nevermore"는 악기를 의미할 수 있다는 등의 현란한 미학 강의만큼은 여전히 볼거리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그리스 연극 "쫓는 왕"과 작중 사건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전개도 꽤 괜찮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전혀 건질게 없습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바로 앞의 사람이 소리를 내는데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골전도"를 응용한 발성법이라는 설정은 불필요한 사족이었습니다. 어치피 말도 안되는 내용에, 선하나 더 긋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선글라스를 끼면 신호등이 푸른달로 보인다는 마지막 이야기도 지나치게 만화적이라 별로였어요.

그래도 직전의 막장 작품들보다는 낫네요. 내용면에서 설득력도 있고, 결말 부분에서 나와 검정고양이 관계의 진전을 암시하는 달달한 전개도 선보인 덕분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13/09/19

전쟁의 재발견 - 김도균 : 별점 2점

전쟁의 재발견 - 4점
김도균 지음/추수밭(청림출판)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전쟁을 몇 개의 테마로 묶어서 엮은 전쟁-미시사 서적.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장. 세계사를 뒤흔든 천재적 조직술_ 군대의 재발견
전장에서 꽃피운 사랑―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군대, ‘신성대’
수천 년 이어온 베트남 저항정신의 상징―고대 베트남의 여성 전사, 쯩 자매
오스만튀르크의 전성기를 구가한 ‘병정개미’―술탄의 친위대 예니체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향한 열망―미국 최초의 흑인 부대, 54연대
독일군의 밤잠을 설치게 한 ‘밤의 마녀들’―소련 여성 폭격기 연대
붉은 꼬리의 검은 조종사들―아주 특별한 흑인 비행대대, 터스키기 비행대
소련의 보이지 않는 사단―히틀러도 감쪽같이 속은 소련군의 동원 제도
일본의 피를 이어받아 미군을 위해 싸우다―일본계 2세로 편성된 미군의 442연대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소련의 죄수 부대, 형벌 대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귀신도 울고 가다―미국의 땅굴전 특수부대, ‘터널 래츠’
전사는 죽어서도 전사다―전사자의 여로
힘들고 지친 병사들의 로망, 핀업걸―전장의 엔터테인먼트

2장. 인류의 문명을 비약시킨 천재적 기술_ 무기의 재발견
세계 대변혁을 일으킨 작은 금속 조각―중세 봉건시대를 연 등자
스멀스멀 피어오른 노란 안개의 정체―영혼 없는 한 과학자의 비극과 독가스
대량 살상을 부른 속도에 대한 열정―보병을 참호 속으로 밀어 넣은 기관총
독일군의 오금을 저리게 한 철갑 괴물―지상전의 왕자, 전차의 탄생
‘크기’가 승패를 가른다―대함거포주의의 산물, 드레드노트
소리 없이 다가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다―해전의 필살 병기, 어뢰
전쟁을 가장 비인도적으로 만든 주인공―숨은 살인자, 지뢰
무인 폭격기, 미사일의 공포―나치 독일의 보복 병기, V-1과 V-2
빗나간 열정이 만든 인류 최대 재앙―현대판 ‘다모클레스의 칼’, 원자폭탄
군견 칩스가 훈장을 빼앗긴 사연―주인을 사랑한 군견의 죄
금강산도 식후경?―군 사기와 직결된 전투 식량의 역사
전장에서는 죽음에도 순서가 있다―야전 의료 시스템의 역사
‘뽕’ 맞은 전사들―전쟁의 우울한 이면, 약물

3장. 극한의 상황에서 꽃피운 천재적 리더십_ 전투의 재발견
한니발, 세계 최강 로마군을 전멸시키다―포위 섬멸전의 교과서, 칸나에전투
포위한 군대가 포위당하다―카이사르의 알레시아 공방전
‘신의 도리깨’, 유럽을 내리치다―유럽인의 황색 공포, 레그니차전투
십자가와 코란, 역사적인 첫 대결을 펼치다―레판토 해전
영국군 역사상 가장 졸렬한 전쟁―무능하기 그지없는 지휘관과 발라클라바전투
아메리카 원주민 최후의 저항―완벽한 승리와 치졸한 복수, 리틀빅혼전투
역사상 가장 값비싼 따귀 한 대―일파만파의 교훈, 타넨베르크전투
외로운 섬을 지켜낸 영국인 ‘최고의 시간’―‘나치 팽창’의 마지막 방어선, 영국전투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승리하다―명절의 허를 찌른 베트남전 구정 공세

4장. 인간을 극한으로 몰고 간 천재적 심리술_ 군가의 재발견
켈트인의 아련한 독립의 꿈―〈스코틀랜드 더 브레이브〉
레드 코트, 줄루 전사들의 창을 꺾다―〈할렉의 사나이들〉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국가―〈라 마르세예즈〉
한 급진주의자의 죽음이 부른 거대한 전쟁―〈존 브라운의 시신〉
파리를 핏빛으로 물들인 코뮌의 슬픈 봄―〈체리가 익을 무렵〉
피어보지도 못한 칠레 민중의 혁명가요―〈벤세레모스〉
영광과 피투성이는 한 끗 차이―〈라이저 위에 피〉
그림자 전사들의 연가―〈발라드 오브 그린베레〉

이렇게 총 4장으로 구분되는데 1장, 2장, 4장이 괜찮았어요.

1장에서는 술탄의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의 흥망성쇠를 그린 이야기는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이,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흑인 부대였던 54연대를 다룬 이야기는 영화 "글로리 - 영광의 깃발"이 떠올라서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소련의 형벌부대나 월남전의 미군 땅굴전 특수부대 터널 래츠 등이 인상적이었고요.

2장을 통해 고대 바이킹 전사 베르세르크의 종교 의식에 광대 버섯을 먹인 순록의 오줌이 사용되었다는걸 처음 알았네요. 광대 버섯의 암페타민이 축적되어 환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데, 중독자들이 들으면 꽤나 솔깃할 정보로 보입니다.

4장은 "군가"라는 주제부터 굉장히 이색적인데, 해당 군가가 발표된 시기와 이유를 상세하게 그리는 시도가 아주 좋았습니다. 노예해방론자인 광신자 브라운의 이야기를 다룬 "존 브라운의 시신",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의 최후를 그린 "벤세레모스" 등이 그중 마음에 들었고요. "군가"로 보기 힘든 노래가 함께 실려 있다는 점, 그리고 웨일즈의 군가를 다루면서 줄루 전쟁 이야기로 이어지는 "할렉의 사나이들"과 같이 군가와 실제 내용의 연관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약간의 단점은 있지만, 독특한 주제를 다루었기에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른 책에서 많이 접했던 유명 전쟁사 내용을 다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3장과 부실한 도판은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도판은 그렇잖아도 부실한데 한 장짜리 이미지를 4장으로 약간의 톤을 조절하여 복사하여 실어놓은 기이한 편집으로 실려 있어서 더 짜증났어요. 딱히 보기 좋은 것도 아니고 디자인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닌, 그야말로 삽질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4장 하나만큼은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주제이지만, 전반적으로 자료적인 가치는 낮습니다. 내용이 지나치게 간략하고 요약되어 있으며, 도판이 부실한 탓입니다. 진지한 전쟁사를 원하시는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짤막하게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로 적당한 책입니다.

2009/03/18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 제임스 굿윈 / 한은경 : 별점 3점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6점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비채

술탄 마흐무트 2세 치하의 19세기 중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광이 서서히 저물던 시기의 이스탄불에서 제국의 근대적 군대 신위병 장교 4명이 실종되었다. 군대 총사령관 세라스케르는 환관 야심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야심은 이외에도 궁정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수사도 맡는 등, 쉴틈없는 나날을 보냈다. 
신위병 장교 4명은 한명씩 살해된채 발견되었고, 수사를 진행하던 야심은 이 사건의 배후에 10년전 신위병이 끝장낸 구제국의 유물이었던 전투기계집단 "예니체리"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서서히 사건의 흑막, 본질에 접근하는데....

'19세기 초-중반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무대로 환관 탐정이 활약하는 팩션'이라는 책 소개를 믿고 구입한 책입니다. 제가 추리 소설은 물론 역사물도 좋아하기도 하고, 역사 추리물은 항상 기본은 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이 책의 장점으로는, 제일 먼저 19세기 초-중반의 이스탄불의 세밀한 묘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책 한권만 읽어도 당시 이스탄불 거리의 정경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수준이거든요. 당시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정치적 상황같은 국제 정세, 술탄과 귀족들, 거리나 지명과 같은 단순한 정보 이외에도 요리나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지는 등 그 깊이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 모든건 작가가 원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 연구를 계속해 온 학자출신인 덕분입니다. 작가의 애정이 곳곳에서 느껴질만큼 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추리 소설 역사에 없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환관탐정" 야심의 캐릭터 역시 독특한 맛이 넘칩니다. 성실하고 똑똑하며 요리 역시 뛰어나지만, 환관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는 환관탐정... 멋지지 않나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의 화끈한 친구인 망한 나라 폴란드의 전권대사 팔레브스키 역시 멋졌습니다. 이 친구가 주인공인 스핀오프격 외전이 나와도 재미있겠더라고요.

마지막으로는,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잘 몰랐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황제의 모후 발리데 술탄이라는 인물 같은 경우겠지요. 프랑스 출신의 미녀로 노예시장을 거쳐 술탄을 낳아, 결국 황태후의 자리에 이르르게 된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의 친구이기도 한 여인이라니.. 이 여자 이야기만으로도 소설이 한권이겠어요! 
번역도 깔끔한 편이라 쉽게 쉽게 읽을 수 있고, 책 뒤의 "예니체리" 부대에 대한 자세한 해설 등 책 만듬새도 좋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소설이라는 측면 이외의 "추리"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술탄의 근대적 개혁 칙령 발표 직전에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중심으로 술탄의 모후인 발리데의 보석 도난 사건, 그리고 하렘에서 일어난 궁녀 교살 사건이라는 사건이 계속 벌어져서 사건 자체는 풍성하지만, 이 모든 사건이 연관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야심의 추리에 의해 해결되는 것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야심은 충실한 수사관이긴 하지만 그가 수집하여 독자와 공유하는 정보는 대부분 쓰잘데 없는 것들이고, 중요한 정보들은 너무나 작위적인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흑막인 마지막 반전 부분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범인이자 흑막은 사건 자체를 일으키면 안되는 상황이거든요. 은밀하고 조용하게 거사를 진행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어처구니 사건을 벌인다니.... 설득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요. 그리고 거사가 실패하는 결말 역시 별로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흑막자체가 너무나 어설펐다!" 라고나 할까요.... 
아울러 당대 오스만투르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실제 역사와 실제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세계의 판타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약점입니다. 실제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픽션인 "팩션"으로 읽히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웠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에 읽었던 "알렉산드로스의 음모" 과 유사합니다. 역사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역사물, 아니 "역사 모험물"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요. 야심부터가 이 작품에서 3번이나 죽을 뻔하고, 스스로도 격투로 사람을 잡고, 죽이고,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등 많은 모험이 담겨 있는데, 이럴 거라면 차라리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저 자신도 추리적인 부분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아서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도 지루한 역사물로 끝나지 않고 많은 모험과 더불어 나름 추리적 요소가 담겨있는건 사실입니다. 당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매력을 아주아주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 준다는 점도 분명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저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이국적인 매력에 푹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추리 매니아로서는 실망한 점이 분명 있기 때문에 시리즈 작품이 더 있더라도 계속 읽어볼지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2004/02/25

해적의 역사 - 앵거스 컨스텀 / 이종인 : 별점 3점

해적의 역사 - 6점
앵거스 컨스텀 지음, 이종인 옮김/가람기획

역사서적을 많이 내놓는 “가람기획”에서 발간된 역사명저 시리즈의 열한번째 책.

제목 그대로 인류사의 해적들의 역사를 주로 서양 중심으로 - 저자가 영국인이기에 당연한 것이겠지만 - 서술한 역사서적입니다. 로마시대에서 부터 중세의 바이킹과 바르바리 해적, 오스만 제국의 울루지 알리라는 해적출신 황제와 몰타 기사단의 해적질, 이후의 스페인과 영국의 재해권을 놓은 싸움의 주역인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과 존 호킨스 경, 스페인의 페드로 데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 같은 인물들과 이른바 “해적의 황금시대” 시대의 해적들, 그리고 이후의 인도양과 미국의 마지막 해적들, 중국의 해적들까지 고금의 해적들의 역사를 망라하고 있죠.
관심이 갔던 것은 유명한 키드 선장과 블랙 비어드 같은 해적의 황금시대 인물들에 대한 정보인데 재미있고 놀라운 사실들이 많더군요. 키드 선장은 사실은 단 한번의 해적질 항해 후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라던가, 신사이고 부유한 농장주였지만 모험을 동경해서 해적이 된 스티드 보넷이라는 사나이의 이야기라던가, 노획물로 남은 여생을 편하게 보냈던 헨리 에버리 같은 성공한 해적들의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하고 다채로운 내용이 가득합니다. 인도의 해적왕조 앙그리아 가문이나 중국 해적 정성공과 정을, 삽응차이의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이러한 이야기 외에도 해적들의 기지였던 여러 섬이나 당시 기준으로는 평등함의 최고봉이었던 해적 규약,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 등으로 미화된 해적 행위의 낭만적 추억들과 더불어 해적선들의 모습이라던가 당시의 관련 삽화 등 도판까지 충실하기에 그야말로 해적이라는 집단에 대해서는 교과서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역사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쭉쭉 읽어나갈 수 있는 재미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가람 기획의 다른 역사명저 시리즈도 기대하게 만드네요. 다만 “이종인”씨라는 상당한 수준의 번역가가 번역했는데도 불구하고 번역이 조금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 그리고 책의 완성도에 비하면 터무니없어 보이는 15,000원이라는 가격 때문에 감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