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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1

희극비기극(喜劇悲奇劇)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대 화물선을 개조한 공연용 배 '우콘호'에 시치로는 마술사로 고용되어 조수 마코토와 탑승했다. 그러나 연예인 혹부리 곤타와 세가와 박사가 연달아 살해당하고 말았다. 시치로 일행은 피해자들 모두가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졌다는걸 알아냈다. 시치로는 전처 우타코, 조수 마코토(모리 마리모라는 예명)가 다음 피해자가 될까 걱정하면서 점차 사건에 깊숙히 휘말리게 된다...

일본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본격 추리와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소동극이 결합된게 특징입니다.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회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한다는 설정도 독특하고요. 목차의 모든 소제목도 회문으로 구성되어 있을만큼 회문을 전편에 걸쳐 적절히 써먹고 있기도 합니다.

첫 피해자였던 논 레논(None lenon)이 진범이었고, 그 정체는 그랜트였다는 전개도 좋습니다. 그랜트와 레논은 동일 인물이었으며,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역할을 번갈아 연기하고 있었다는건데, 이를 마술이라는 소재로 드러내는게 아주 기막힙니다. 

우선 레논의 특기 마술은 얼굴을 가린 채 선보이는 독심술인데, 이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드러내지 않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세 장의 거대한 트럼프를 이용한 마술 리허설도 진상과 연결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바꿔치기 마술이었지만, 곤타만은 그 공연을 유난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곤타는 무대를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트럼프 안에 사람이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범해 보였던 바꿔치기가 실제로는 불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다는걸 알아챈 것이지요.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결정적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사건 당시 배 안의 전화는 계속 불통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킨 단장은 전화로 곤타의 방에 불려갔다가 살해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화는 배 밖에서 걸려 왔어야 합니다. 당시 상황을 모두 파악하면서 외부에서 바킨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던 사람은 그랜트뿐이었고요.

연쇄살인의 배경이 된, 과거 사이비 종교 집단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근처를 지나던 무일푼으로 궁지에 몰렸던 바킨 단장과 산엔자이 극단원들이 환자들을 돕는 대신 마약으로 독살하고 금품을 빼앗은 사건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이를 통해 범인 그랜트는 사이비 종교 집단 교주로 현재의 살인들은 산엔자이 극단원들을 대상으로 했던 복수극이었던게 밝혀지는데, 동기에 대한 설득력도 높습니다. 아울러 앞서 결정적 조건으로 보였던 회문 이름은 단순히 회문을 좋아했던 바킨 단장이 단원들 예명을 지어서 생긴 우연의 일치였다는 상황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아와사카 쓰마오 특유의 좌충우돌하는 희극적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곤타의 시체가 들어 있는 호랑이 탈 인형이 엉뚱한 곳으로 배송되면서 벌어지는 대소동이 대표적입니다. 끔찍한 살인 사건과 황당한 상황이 한데 어우러져 제목처럼 희극과 비극이 뒤얽힌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주인공 시치로가 아주 별로입니다. 아내가 떠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별 볼 일 없는 마술사라는 설정, 조수 마코토와 전처 우타코를 둘러싼 관계 모두 진부합니다.

범인을 밝혀내는 논리적인 추리 과정과 다르게 개별 살인에 사용된 트릭들도 모두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레논이 칼에 찔려 죽은 것처럼 꾸민 방법이 대표적입니다. 배의 근육과 지방을 등 쪽으로 이동시켜 칼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는데, 아무리 레논이 인도에서 특별한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세가와 박사를 사고사로 위장한 라이터 트릭 역시 가스 라이터에서 나온 불꽃이 사람을 태울 정도로 강하게 번진다는 전제에 의존하고 있어서 비현실적이에요. 인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망할 정도의 사고가 될리는 없었을 겁니다.

곤타와 타마하의 시체가 뒤바뀐 과정도 별볼일 없어요. 당시 시체에 손을 댈 수 있었던 인물이 사실상 그랜트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랜트가 진범이라는 사실도 비교적 일찍 짐작할 수 있어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과거 미국의 사이비 종교 집단과 관련된 외국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커지는데, 주요 인물 가운데 그 조건에 맞는 외국인은 사실상 그랜트뿐이니까요. 

그래도 '회문'과 마술이라는 소재의 사용과 추리적인 전개, 흥미로운 과거의 범죄 등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개별 트릭의 완성도에는 아쉬움이 있지만, 회문과 마술을 결합한 색다른 본격 추리소설을 찾는 독자라면 추천드립니다.

2025/11/30

속임수의 심리학 - 김영헌 : 별점 2.5점

검찰 수사관으로 오랜 기간 일해온 저자가 다양한 사기 범죄를 심리학적으로 고찰한 범죄 인문·심리 교양서입니다. 각종 사기의 수법과 사람들의 심리적 허점을 교차 분석하며 ‘왜 사람은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가’에 대해 알려줍니다. "심리 조작의 비밀"과 약간 비슷한데, 더 우리나라 중심의 사례와 사기 범죄 위주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선급금 사기’ 등 대표적인 수법을 비롯해 다양한 사기의 유형이 등장하는데, ‘경품 당첨’을 가장한 사기의 뿌리가 1800년대 후반 ‘스페인 죄수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는 등 그 소개가 무척 상세합니다. 사기 수법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형태만 바뀌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걸 잘 알려줍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사기에 잘 걸리는 이유를 인간의 유전적 본성 때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본래 집단 내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존재이고, 집단의 의견에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무리에서 떨어지는 것이 곧 생존의 위협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본능적인 성향이라고 하고요. 또한, 누구나 손실을 피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사기꾼들이 파고드는 겁니다. 대표적인게 댓글과 별점 조작입니다. 최근 유행하는 주식, 코인 투자 열풍과 연결되는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칠까 봐 두려운 심리)’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는 리딩방에서 쉽게 사기 행각이 일어나는건 당연합니다.

사기꾼들이 흔히 사용하는 심리 기법인 '콜드 리딩’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뢰를 얻는 화법, 예를 들어 “당신은 외향적이면서도 내성적인 면이 있군요”처럼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모호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이런 애매한 화법은 점술가나 역술인이 자주 쓰는데, 이런 화법으로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점점 더 정보를 얻고 맞춰가는 구조라고 합니다. 특히 건강, 돈, 인간관계에 대해 넘겨짚어 질문을 던지고,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은 사기성 상담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신흥 종교의 포교 방식도 다루고 있습니다. ‘미끼 – 끌어올리기 – 격리 – 사랑 – 헌신’이라는 5단계 전략을 통해 상대를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심리를 조작하고 세뇌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의 겐조의 수법도 이런 방식이었겠지요.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 이슈가 되는 사이비 종교들, 그리고 해외의 세뇌 범죄가 다 이런 방식이고요. 핵심은 '격리'라고 하니, 어딘가에서 합숙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단체 모임은 정말 조심해야 할 것 입니다. 

결혼 사기의 심리적 기제도 설명되는데, 여성은 대체로 사랑에 신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깊이 빠지는데, 그 시점이 되면 상대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남성의 경우는 성욕과 관련된 유전적 특성으로 인해 여성의 신호를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사기에서 빈번히 이용되는 심리적 허점이니 역시 조심해야 할 부분이고요.

‘사기를 피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도 풍부합니다. 공짜에는 반드시 숨은 목적이 있다는 사실, 욕망이 클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는 조언, 후회라는 감정이 오히려 사기의 브레이크를 무디게 만든다는 설명 등은 관련된 사기 범죄와 함께 소개되어 굉장히 와 닿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반드시 조사하고, 정과 감정에 휘둘리지 말며, 거절은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말도 당연하지만 실제로 행하기 어려운 것인데 명심해야 할 테고요.

이런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는데, 전반적으로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며, 목차 간 구성의 차이도 뚜렷하지 않아 중후반부로 갈수록 흥미가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사기라는 주제가 기본적으로 ‘속인다’는 공통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례 중심, 수법 중심, 예방 중심으로 명확히 분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사례도 실제 유명 사건보다는 소설처럼 각색된 예시가 많은데 이 역시 아쉬운 부분이고요.
사기를 피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전반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 상식적인 말들을 정리해 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같은 사기 과잉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자주 잊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8/23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이진아 : 별점 1.5점

미치오, 교코 부부는 아들 가나타를 무차별 살인범에게 잃고 삶이 무너졌다. 껍데기처럼 살아가던 교코는 ‘영원의 소리’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한 뒤 활기를 되찾고, 딸 가온도 엄마를 따라 단체를 드나들게 되었다. 이를 사이비로 확신한 미치오는 막으려 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미치오 역시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단체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이후 4년여 동안 종교 활동에 매달린 가온은 사회와 멀어졌고, 단체를 믿지 않는 이리에 슌타로와 교제를 시작한 뒤 믿음도 흔들렸다. 그런 가온이 교단 내부 인물 모가미의 범죄를 신고하여 교코는 배신감에 절규했다. 그러나 교코도 모가미가 집에 난입해 난동을 피우자 가온을 구해냈고, 이를 통해 다시 가족은 하나가 될 기회를 잡는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이후 사이비 종교에 깊이 빠져드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소설입니다. 

가나타가 초등학생 연쇄 살인범에게 습격당하는 도입부, 미치오 시점으로 아내 교코의 극심한 변화가 그려지는 서두, 그리고 교코 시점에서 세뇌된 상태를 그린 중반부까지는 꽤 인상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이비 종교의 무서움을 한껏 느낄 수 있거든요.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 찾아온 공허와 슬픔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위안으로 변질되는지와, 이를 통해 그들의 얄팍하고 보잘것없는 주장과 세뇌가 얼마나 피해자들에게 파고드는지, 가족을 어떻게 망쳐버리는지를 잘 그려낸 덕분입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삶이 무너진 뒤 사이비 종교로 위안을 찾는 엄마, 그 엄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종교 단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딸, 그리고 가족을 지키려다 결국 종교 활동에 동참하게 되는 아빠라는 조합도 절묘해요. 이 조합과 설정은 사이비 종교의 전파력과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실망이 더 큽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대했던 추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탓입니다. 가나타 사건에 의외의 진상이 있지도 않고, ‘영원의 소리’가 행하는 세뇌, 사기와 같은 범죄 방식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특히 사이비 종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변화시키는 배경 장치일 뿐입니다. 모가미의 범죄도 단편적인 사건으로 그치고요. 종교 단체가 악의 실체라는걸 드러내지도 못하고, 극적 반전도 없으니 독자가 단서를 따라가는 추리적 재미도 찾을 수 없는건 당연합니다.

미치오 시점, 교코 시점에서 가온 시점으로 이어지는 전개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서로의 시점이 교차되며 시너지를 내는게 아니라, 아예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분명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미치오가 시점 변화를 통해 가족에게 냉담하고, 대화도 거의 없는 이기적인 꼰대남으로 돌변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범죄 피해자 가족을 돕는 이노우에 변호사와 자원봉사자 마코토와의 에피소드도 불필요했고요. 이럴 바에야 미치오, 교코 시점을 대폭 줄이고 그냥 가온 시점의 성장기로만 다루는게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상실과 불안이 어떻게 왜곡된 믿음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심리 드라마, 가족 심리극이자 가온의 성장기로는 볼 만한 구석이 있지만 범죄·스릴러 장르로서의 매력은 전무하여 대폭 감점합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솔직히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에요.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2024/08/04

저지먼트 - 고바야시 유카 / 이영미 : 별점 1.5점

저지먼트 - 4점
고바야시 유카 지음, 이영미 옮김/예문아카이브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XX년, 급증해가던 범죄를 막기 위해 일본에서 범죄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폭력이나 가학 행위를 똑같이 형벌로 집행할 권리를 피해자 측에 주는 '복수법'이 제정되었다. 단, 복수법을 선택한 경우 피해자 측이 직접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 도리타니 아야노는 복수법 집행자를 보호하고, 집행 현장을 감찰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복수 감찰관'으로, 복수 현장을 지켜보면서 복수법의 존재 의미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되는데...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단편집으로 일본 신인 작가 고바야시 유카의 데뷔작입니다. 책 소개를 보고 관심이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 별로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법률, 그리고 화자가 이 법률을 수행하는 공무원이라는 점에서 만화 '이키가미'와 비슷한데,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이키가미'에서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주는데 반해, 이 작품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탓입니다. 과연 이런 복수가 정당한지, 그리고 복수 때문에 선량한 집행자들이 살인자가 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묻는데, 등장하는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라서 별로 고민할 게 없거든요. 신림동 묻지마 칼부림 사건의 조선, 평택 아동 암매장 사건의 원영이 부모같은 인간 말종들을 단죄하는게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이렌'에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장면도 같은 이유로 전혀 공감되지 않았습니다.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를 아끼는 어머니가 있어서 자식의 복수를 한다는 건 말이 되지만, 워낙에 지은 죄가 커서 적반하장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범죄자 가족이 판사에게 복수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어서 불합리하기도 하고요.

억지 설정도 많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저지먼트'에서 복수자 하야토가 죽는 게 대표적입니다. 여동생을 아사시킨 부모에게 복수법을 집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여동생을 학대의 희생양으로 내세웠던 자신에게 벌을 가해 굶어 죽는다는 건데, 공공기관에서 소년이 죽어가는 걸 방치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소년의 죽음이 복수법 반대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복수법 반대에 활용하려면, 집행 대상인 범죄자가 사실은 무고한 인물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어야 했습니다. 

장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야기마다 약간의 반전이 있는 건 좋습니다. '사이렌'에서 피해자의 아버지도 피해자에 대해 잘 몰랐었다라든가, '앵커'에서 엔도는 피해자 리오와 결혼할 생각을 접었던 상태였다든가, '페이크'에서 피해자의 엄마가 피해자를 학대하고 있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이런 반전이 일종의 조사와 추리로 밝혀진다는 전개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특히 어머니를 살해한 딸 엘레나를 어머니가 복수법으로 죽이려 했지만, 알고 보니 딸 엘레나는 가스라이팅당하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이 사실이 밝혀지자 어머니가 유아 퇴행 현상을 일으켰다는 '보더'는 추리적으로, 그리고 결말의 의외성 측면에서 제일 괜찮았습니다. 물론 엘레나의 행동이 친구 나쓰키의 편지 하나로 밝혀진다는 점에서 추리의 여지가 많지 않으며, 할머니의 가스라이팅도 복선은 잘 짜여져 있지만 억지스럽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대한 과대평가가 지나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화자 아야노를 내세워 어설픈 휴머니즘 드라마로 만들기보다는, 복수의 쾌감이 느껴지는 하드고어 복수 포르노로 만드는 게 더 재미있었을 겁니다. 아야노 대신 처절한 복수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인물을 등장시켜서요.

2024/06/02

절벽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점

절벽의 밤 - 4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각 단편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편의 사건과 등장인물이 연결고리를 가지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구조이지요. 마지막 단편은 총 정리하는 결론에 가깝습니다.
단편별로 여러가지 트릭이 사용되며 추리도 많이 펼쳐집니다. 의외의 반전도 있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아이디어가 너무 많습니다. 전개가 억지스러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전개에 포함되었어야 할 내용을 마지막 사진으로 퉁친건 '실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편의에 따른 '반칙'에 가까왔습니다. 그나마 사진이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마지막 단편 뿐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미나게 절벽을 보아서는 안 된다"
구니오는 자살 명소 유미나게 절벽 옆 터널에서 사고를 당했다. 불법 유턴을 하던 차 탓이었다. 사고를 유발한 차 운전자 나오는 구니오를 구해주기는 커녕 현금을 빼앗은 뒤 살해했다.
구니오의 아내 유미코의 옛 연인인 형사 구마지마는 전력으로 사건 수사에 나섰지만, 나오가 살해당했고 동승자였던 히로도 실종되고 말았다. 구마지마는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냈지만, 유미코를 또다른 동승자 마사가 노린다는걸 알고 황급히 유미코의 맨션으로 항했다....


구니오가 사고 당시 죽지 않고 실명했으며, 죽은건 조수석에 있던 네 살배기 아들 나오야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일당이 사건 당시 현금을 훔치려고 지갑을 확인했기 때문에 구니오의 집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추리, 그리고 구니오가 집에 찾아온 히로를 손쉽게 살해한 방법 - 궁도부였던 아내 유미코의 화살을 이용 - 과 범행을 은폐하는 과정도 깔끔하게 진행됩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사이비 종교 '십왕환명회'도 작품 내에서 단순히 들러리가 아닌 제 역할 - 히로 사건 은폐를 위한 즉흥적인 거짓말, 마지막의 사고 등 - 을 충실히 해 주고 있고요.

하지만 구니오가 살아있다는걸 숨기는 방식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리 잘 만들어진 서술 트릭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구니오가 복수를 위해 나오의 차 깜빡이 커버와 동일한 걸 구해 사건 현장 근처에 놓아두고 잠복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어두운 터널에서, 최소 몇십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밖의 깜빡이 커버를 알아챈다? 대단히 큰 덩어리도 아니고 부서진 조각인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설령 나오가 알아채고 차를 세운 뒤 커버를 회수했다 한들, 때마침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는 등 범행에 딱 맞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이 정도 억지가 필요하다면 실명한 구니오가 나오를 명확하게 인지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것 정도는 별 문제도 아니겠지요. 하늘이 나오보고 살해당하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런 설득력없는 내용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중국에서 건너온 초등학생 커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부모님의 방치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환영을 볼 정도였다. 환영 퇴치를 위해 문방구를 찾은 커는 기묘한걸 목격했다. 젊은 남자의 묘한 모습, 안쪽 방 고타쓰 앞에 쓰러지듯 놓여진 발, 뒤섞인 문구류, 얼핏 보인 바닥 얼룩.... 커는 남자가 주인 할머니를 살해했다고 추리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간 문방구의 주인 할머니는 멀쩡했고, 추리를 털어놓은 친구 야마우치도 실망한 듯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서 문방구 할머니의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이 손이 닿는 곳에 어른 문구가,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어린이 문구가 놓여진 상황에서 출발하는 커의 추리는 깔끔합니다. 뉴스를 통해 진짜 피해자가 밝혀지고 범인인 조카와 할머니가 커를 납치하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하지만 야마우치가 자동차 안에 숨어 있다가 커를 구해준다는 결말에 대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야마우치가 왜 이렇게까지 해서 -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 커를 구해주는지도 설명이 없는건 마찬가지고요. 차 안에 숨었다는 것도 마지막에 삽입된 사진으로 살짝 알려주기는 하는데, 본 편에 녹여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반칙으로 보일 뿐이에요. 커가 보아왔던 환영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도 설명되지 않는데, 커가 환영을 본다는 설정보다는 커와 야마우치와의 관계를 더 상세하게 그려내는게 나았을 겁니다. 커 주변을 야마우치가 항상 멤돌았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서는 안 된다"
십왕환명회의 간부 미야시타 시호가 자택에서 목을 멘 사체로 발견되었다. 신참 형사 미즈모토는 또다른 간부 모리야 다쿠미가 그녀를 살해했고, 이를 알아챈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마저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시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는지를 알아내지 못해 고민했다. 그러나 미즈모토는 파트너이자 선배 다케나시와 술을 먹다가 트릭을 간파해내는데...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작품. 미야시타 시호의 방은 제대로 잠겨진 밀실이 아니라 자석으로 '스마트록'을 붙여 임시로 만들어진 밀실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부동산 회사 사장 앞에서 잠겼다는걸 보여준 뒤, 열쇠로 문을 열 때 록을 해제하고, 들어가면서 회수했던 것이지요. 방법 자체는 현실적이에요. 문제는 눈에 뜨이지 않고 록을 회수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실제로 현장에 함께 있던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에게 곧바로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야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또 모리야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않아서 좋은 후더닛, 와이더닛 물이라기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나카가와 도루의 수첩을 조작해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렸고, 진상을 알아챈 미즈모토마저 살해했다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였다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는 합니다만.... 너무 막 나가는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수첩 조작도 마지막에 사진으로 설명해줄 뿐, 앞선 본문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고 자살하려던 구니오는 옛 제자를 만난 뒤 다시 삶의 의지를 찾는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작품. 짤막한 에필로그에 가까우며, 이 작품만 단독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앞서 단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에필로그. 결말답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경찰 내 협조자가 누구인지? 사고를 당한건 누구인지? 히로의 사체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진상은?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사건을 조작한건 누구인지? 미즈모토를 누가 살해했는지? 등 모든 떡밥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라서 첫 사건에서 구마지마의 사고사를 거짓 증언했고, 세 번째 작품 사건에서의 은폐와 미즈모토 살해를 저질렀다는 고백을 선보이는게 핵심이지요.
에필로그라 추리적으로는 별게 없지만, 시력을 상실해서 아내 유미코에게 사건 진상 고백문을 쓰게 했지만, 알고보니 백지였다는걸 마지막 사진 한 장으로 밝히는 반전은 강렬했어요.
 
그러나 다케나시,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의 진범 모리야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마무리되는건 문제에요. 깔끔하게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이 한 편 만으로는 온전한 작품이 아니라서 별점을 주기도 어렵네요. 구태여 준다면 2.5점? 반전만 좋았습니다.

2023/09/29

방주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5점

방주 - 6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슈이치는 대학 동창들, 그리고 사촌형 쇼타로와 함께 유야의 별장에 놀라왔다가 유야가 발견했다는, '방주'라 불리우는 거대한 지하 시설을 찾았다. 일행은 버섯을 따러 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야자키 가족과 하룻밤을 '방주'에서 보냈는데, 지진 탓에 그만 갇히고 말았다. 
지하에서부터 물이 차올라 일주일 안에 탈출해야 했지만, 방법은 입구를 막은 돌을 떨어트리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돌을 떨어트린 사람 혼자 방주에 남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마침 유야가 살해되었고, 일행은 유야를 죽인 범인을 방주에 남도록 하자는 암묵적인 동의를 이뤘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 시간이 흘러가던 차에, 사야카와 야자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쇼타로가 추리쇼를 벌여 범인을 밝혀냈다.

2022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23년 '본격미스터리 10' 2위에 선정되는 등 최근 가장 뜨거운 작품. 추석 연휴를 맞아 읽어보았습니다. 찬사를 받은 이유는 바로 알겠더군요. 일반적인 클로즈드 써클 (클로즈드서클) 장르의 틀을 완전히 깨버린 덕분입니다. 이렇게 닫힌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한, 두편이 아닙니다. 산장이나 섬같은 고전적인 장소에서 현대적인 빌딩이나 기묘한 이공간 등으로 장소도 확장되어 왔고, 고립되는 이유도 폭설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서 정전 등의 현대적인 이유, 특수한 집단이 납치하여 게임을 벌이거나 좀비가 등장하는 식의 특수 설정까지 다양한 상황을 선보여 왔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고립된 장소도 독특하지만, '범행을 벌이는 동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범인 마이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원한따위가 아닙니다. 오로지 "고립된 장소에서 탈출해서 살아남기" 위해서에요. 게다가 이를 위해서 범행이 결국 밝혀지도록 유도하기까지 하고요. 전에 보지 못한 신선한 발상이었습니다.
고립된 장소인 '방주' 설정도 좋습니다. 출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물론, 반전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출입구와 비상구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오래전 과격 분자나 사이비 종교 단체가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방주 내에 이런저런 시설과 장비, 음식 등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로 말이 됩니다. 지하 3층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방주'의 존재감이 너무 확실해서 초, 중반부까지는 방주가 주인공인 느낌마저 전해줍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첫 번째는 '범인'에게 닻감개로 바위를 치우고 홀로 고립될 역할을 맡긴다는 암묵적인 동의입니다. 범인이 누구든간에 자기 범행이 드러났다고 그런걸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범인이 피트니스 센터 강사 류헤이였다면? 완력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기도 어려웠을테지요. 그리고 침수 중이라 시간 제한이 있다면 범인을 찾아서 희생하라고 설득하느니, 누구든 빨리 돌을 치워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구조를 기다리는게 빨랐을겁니다.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났어도 한나절 만에 올라온 산을 내려가는데 1주일이나 걸릴리가 없잖아요? 기본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설정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아무도 공기통을 활용하여 지하 3층을 지나 비상구로의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범인을 밝히는 것 외에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마이가 범행을 저지르는 일련의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물론 마이가 곧바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희생자(?)를 고르기 전에 상황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라는건 어느정도 말은 됩니다. 전에 '방주'에 왔던 경험이 있는 유야는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눈치챘을지도 몰랐기에 제일 먼저 죽였다는 것, 유야 사건에 증거가 남지 않고 모두가 범행이 가능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납득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야카의 핸드폰 속 사진이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나타낼 수 있어서 죽였고, 사야카가 핸드폰을 분실해서 어쩔 수 없이 목을 잘랐다 - 핸드폰이 안면인식으로 잠금 해제가 되는 모델이라 - 는 것까지는 그렇다쳐도, 애써 종이 타월을 가져오면서까지 증거 인멸을 위해 노력했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어차피 범인임을 드러내어 희생양이 될 목적이었다면 시체의 목을 자르다가 들통나는게 더 확실했을거에요. 제한 시간까지 기다리면서 범행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말이지요. 사체의 목을 자르는 행동이 의심을 불러 일으킬까봐 그랬다?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겁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고립된 사람들 앞에서는요. 마지막 쇼타로의 추리쇼에서 어떤 사진 때문에 사야카를 죽였는지에 대해 마이가 설명한걸 아무도 부정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또 마지막 추리쇼에서 마이가 범인이라는건 증명하지만, 앞서 쇼타로가 말했듯 "동기가 없다"는 이유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했다던가, 유야가 방주로 일행을 억지로 데리고 왔다는 등의 설정을 덧붙였더라면 좋았을겁니다.
마이가 탈출에 성공했다 한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실종과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려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테이프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유야의 손톱깎기와 지퍼백을 범인이 가지고 왔던 이유는 핸드폰이 방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억지스러웠습니다. 테이프 정도야 잊어버릴 수도 있지요. 지퍼백의 용도도 지나치게 국한되어 있고, 발표 시점에 생활 방수가 되지 않는 핸드폰을 사용하는 MZ 세대가 있을걸로 보이지도 않고요. 

이렇게 장점도 확실하고 단점 또한 확실한 그런 작품입니다. 돌직구 하나로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변화구도 적절하게 섞어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듭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그래도 한 가지 장점으로 정면 승부를 벌일만큼의 매력도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슷한 설정들에 지친 추리 소설 애호가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덧붙이자면, 10명에 불과한 등장인물 - 심지어 3명은 중간에 살해당함 - 과 폐쇄된 공간, 일주일의 시간 제한 등의 설정은 '무대'에 잘 어울릴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각색해도 괜찮은 연극이 될 수 있을것 같네요.

2023/08/26

명탐정의 제물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2.5점

명탐정의 제물 - 6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상 그리고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오토야 다카시의 조수 리리코는 민박집에서 일어났던 밀실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뒤, 학회에 참석해야 한다며 사무실을 떠났다. 귀국 예정일이 지나도 리리코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오토야는 가이아나의 조든 타운으로 향했다. 알고보니 리리코는 짐 조든이 이끄는 종교의 광신도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 조든 타운을 조사하기 위해 찰스 클라크가 조직한 조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착 직후 오토야와 동행했던 저널리스트 노기가 타운의 보안군에게 총살당했고, 뒤이어 클라크 조사단원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불가능 상황에서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리리코는 오토야와 함께 조사를 펼친 끝에 미국 하원의원 라일랜드가 조든 타운을 방문한 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건들은 모두 사고였고 불가능 상황이 된 건 신도들의 의지였다는 추리를 밝혔다.
그러나 라일랜드 일행을 타운 보안군이 사살하고 리리코마저 살해당한 날, 오토야는 대규모 자살쇼를 앞둔 조든과 신도들 앞에서 숨겨져 있었던 진상을 폭로하기 시작하는데....

최근 추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있는 일본 본격 추리물. 2023년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을 비롯하여 '고노미스',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등 유명 미스터리 어워드 상위권을 휩쓴 작품이지요.

유치해보이는 표지와 부제 탓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화려한 수상 이력이 증명하듯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가 높다는게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조든 타운에서 벌어진 무려 4건의 불가능 범죄를 비롯하여, 도입부의 요코야부 요스케 밀실 살인 사건 등 사건도 풍성하고,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단서가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며, 오토야와 리리코를 통해 각 사건마다 여러가지 추리가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리리코가 왜 오토야에게 가짜 서명이 되어 있는 <<탐정 교과서>>를 가져왔었는지 등 사소하지만 디테일한 추리들도 잘 짜여져 있고요.
특히 핵심이 되는 조든 타운에서 벌어진 불가능 범죄에 대한 트릭과 추리가 기발해서 만족도가 높습니다. 사건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은데요.
  1. 전 FBI 조사관으로 인민교회 간부로 위장한 알프레드 덴트가 밀실인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죽음.
  2. 조든 타운 요리반 멤버들과 티 타임을 갖던 사이비 과학 탐정 조디 랜디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었는데, 차는 함께 했던 요리반 멤버들 모두가 같이 마셨음.
  3. 한국인 이하준이 상, 하반신이 토막난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이하준은 가방에 갇혀서 오토야와 리리코의 눈을 피해 빠져나갈 수 없었음.
  4. 묘지에서 리리코를 살해한건 아이였는데, 묘지 관리인 크리스티나는 아이는 누구도 묘지에 절대 들어오지 않았다고 단언함.
여기서 진상은 '조든 타운의 광신도들은 스스로 아무도 질병이나 몸의 이상이 없으며, 사람들을 이상이 없는 완전한 모습으로 바라보지만 외부인들은 그들의 모습을 현재 그대로 바라본다'는, 오토야의 표현을 빌자면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를 통해 밝혀지게 됩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덴트는 이미 칼에 수차례 찔린 채로 방에 들어간 뒤 문을 닫고 밀실을 만든 뒤 죽었습니다. 그러나 방에 가던 덴트를 목격했던 Q는 덴트의 치명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조든 타운의 신도가 몸에 상처가 있을리 없기에, 기억에 왜곡을 일으켰던 겁니다.
두 번째 사건에서 조디 랜디는 오른 손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의 입이 닿는 부분에 묻혀진 독을 먹고 죽었습니다. 함께 했던 요리반 멤버 중 크리스티나는 오른 손이 없었고, 블랑카는 왼손잡이였으며 레이첼은 오른 손가락이 골절되어 오른 손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오른 손으로 차를 마셨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범인은 사전에 레이첼의 오른 손가락을 부러뜨렸지만, 레이첼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도 레이첼이 다쳤다는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사건에서 범인은 감방에서 이하준을 살해한 뒤, 상하체를 토막내어 각각을 간수 프랭클린을 이용해 밖으로 옮겼습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다리가 있다고 믿었기에, 휠체어 하반신 쪽에 설치(?)된 사체 토막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시체를 옮길 때 마다 범인에 의해 기절했던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요. 
네 번째의 리리코 사건은 범인 레이 모튼이 어른이지만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던 탓에 아이같은 외모를 가졌던게 이유였습니다. 오토야는 실제 그대로 어린아이를 목격했지만, 묘지 관리인 크리스티나의 눈에 레이 모튼은 정상적인 성인이었기에 상반된 증언에 의한 불가능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광신자 집단의 잘못된 믿음같은 일종의 대규모 집단 최면은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기는 했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작품 중에서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이 대표적이지요. 특정 집단 전체에 걸려있는 일종의 최면으로 정보 자체가 왜곡된다는건 동일합니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 소개된 <<다카마가하라의 범죄>>는 '현인신은 신이라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녀가 조서를 들고 2층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보초 눈에 보이지 않았다'라는, 종교 단체의 신앙으로 비롯된 현실 왜곡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아예 똑같은 발상일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과 트릭을 꽤 현실적으로, 설득력있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정신병자 교주가 주도하여 신도들이 집단 자살했던 가이아나 존스 타운 사건 (인민 사원 사건)을 사건의 바탕으로 삼고있는 덕분입니다. 실제 사건을 본격물로 풀어내어 다채로운 트릭을 선보인 것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다소 팩션같은 느낌을 전해주는게 좋더라고요.

하지만 이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 외의 추리들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문제는 큽니다. 리리코의 추리부터 살펴보자면, 그녀는 사건들은 모두 사고였다고 - 덴트는 밀실에서 실수로 칼에 찔려 죽었고, 조디 랜디는 지병인 협심증으로 사망했으며, 이하준은 간수 프랭클린으로 변장하여 휠체어를 타고 급경사에서 고속으로 도주하다가 와이어에 걸려 토막이 났다 - 생각했습니다. 이를 발견한 조든 타운의 신도들이 '질병도 없고, 사고도 없는 조든 타운'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현장을 조작했다고 추리했고요. 
그런데 협심증이야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칼이 튀어 등에 찔려 죽었다? 고속 휠체어 이동으로 몸이 토막났다? 솔직히 어이없는 발상입니다. 이런 추리에 수긍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물론 이는 사건을 대충 수습해서 무마하기 위해 억지로 풀어낸 추리였다는 전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오토야의 '신앙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는 더 한심했습니다.
오토야는 덴트의 방을 밀실로 착각하게 만든 열쇠와 조디 랜디에게 다과회 시점에 녹아내리도록 독이 든 캡슐을 낮은 온도에서 녹는 저융점 합금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융점 합금은 별다른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조든 타운에서도 어떻게든 가공할 수 있는 소재였을 수는 있어요. 문제는 이 합금이 그렇게 흔하지도 않았을테고, 원하는 모양으로 딱 맞춰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때 맞춰 녹아내리도록 한다는건 더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이건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사용될 수준의 트릭이었어요. 그나마 3일 전 사망했던 오토야의 지인 노기의 사체를 토막내어 이하준 사체로 위장한 뒤 발견되도록 만든 다음에 이하준을 살해했다는 추리 정도만 괜찮았습니다. 이후 이하준 사체를 토막내서 공동묘지 관리 오두막의 노기 사체와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죠.
'신앙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의 끝이 짐 조든이 범인이라는건 설득력이 더욱 약했습니다. 저융점 합금을 사용할 수 있고, 이하준의 사체를 빼돌리기 위해 1감옥에 갇혀 있던 오토야와 리리코를 석방시킬 수 있었던건 짐 조든 밖에 없었다는게 근거인데, 애초에 저융점 합금을 사용했다는게 말도 안될 뿐더러, 짐 조든은 앞서 맹인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낮다는게 이미 언급되기에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조든이 카리스마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의 천벌같은 불가능 범죄를 저질렀을거라는 동기도 미흡하기 짝이 없고요. 설령 조든이 그런 생각을 했다 한들, 직접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수족같은 간부나 광신자를 이용하겠지요. 맨슨 패밀리의 찰스 맨슨이나, 오움 진리교의 이시하라 쇼코가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애초에 '명탐정' 들이 다수 등장하는 설정부터가 별로에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괴사건 해결 전문 명탐정을 실체 있었던 사건과 결합하여 풀어나가니 괴리감만 크게 느껴집니다. 오토야와 리리코를 사이비 종교 전문가로 설정해서 조든 타운으로 향하게 만드는게 훨씬 좋았을거에요.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기는 하나, 너무 과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느낌도 들게 만듭니다. 대표적인게 덴트 방 옷장의 혈흔입니다. 등에 칼을 찔렸다고 혈흔이 저렇게나 튄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문이 어떻게 열리든 그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도입부의 밀실 살인 사건도 그닥입니다. 밀실 안에서 죽은 사람은 유명탐정 요코야부 유스케였고 사체에 남겨진 탄환 감식 결과, 그를 쏜 건 10여년 전 권총을 훔친 뒤 11명을 사살했던 108호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건이지요. 오토야는 추운 날씨인데도 요코야부가 얆은 옷에 난방도 켜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는 범인이 요코야부의 겉옷을 벗겨갔으며, 그 이유는 겉옷에 총을 쏜 흔적을 숨기기 위해서였고, 따라서 요코야부는 자살했다, 이유는 요코야부가 108호였기 때문으로, 실수로 권총이 오발된 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창 밖 바다에 총과 겉옷을 버렸고, 그 때 그걸 목격한 거리의 떠돌이 소년을 쏴 죽였으며, 문만 열어두면 침입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여겨졌겠지만 힘이 다해 문을 열기 전에 죽고 말았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리리코는 요코야부의 겉옷을 벗겨간 건 자기보다 큰 재킷을 입고 있었던 거리의 떠돌이 소년이며, 그가 바로 108호였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요코야부에게 원한을 품은 108호는 요코야부에게 총을 쏜 뒤 오토야의 추리처럼 그를 108호로 몰기 위해 총을 객실에 두고 나왔는데, 기력이 남아있던 요코야부가 창 밖의 108호를 쏴 죽인 뒤 108호로 오인받지 않으려고 권총을 던져버렸다면서요. 108호는 10년 전에도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는데 지금도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 이유는, 성인이 되지 못하는 선천성 질환인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하는데, 이는 경찰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지게 됩니다.
오토야와 리리코의 추리는 괜찮습니다. 추운 날씨인데도 켜지 않는 나방과 입지 않은 외투, 안에서 보기에 열릴 것 처럼 보이지 않는 바다로 향한 창, 다른 객실 투숙객이 들은 물 튀기는 소리 등 단서도 잘 제공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총을 훔쳐 11명이나 죽였던 범인이 알고보니 성장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는게 너무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며,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오토야가 조든 타운 신도들을 모두 독살한 진범이었다는 마지막 진상으로 이어진다는건 해도 너무했습니다. 명탐정 리리코가 고작 세 명을 살해한 잡범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인정할 수 없어서 - 요코야부는 11명을 죽인 108호에게 죽었는데! - 수백명을 참살하도록 만들었다는데, 정말 가관이었어요. 일본식 명탐정 허세의 극을 달리는, 정신줄 놓게 만드는 황당한 동기였습니다. "탐정은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며 탐정의 역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도 옥의 티이고요. <<유리탑의 살인>>도 그렇고, 왜 이렇게 명탐정이라는 존재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동기야 어쨌건 오토야가 독을 탔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루이스의 유서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요. 신도 중 생존자였던 Q가 루이스가 이상했지만, 당시 조든 타운 신도였기에 이를 몰랐다는 주장을 펴는 것 역시 입증할 증거는 전무하고요. 오토야가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고 체포되어 수감될 이유가 도저히 보이지 않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 실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추리와 결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솜씨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만화같은 불필요한 설정, 그리고 추리에 사족이 많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건 분명하니, 추리 애호가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3/01/06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3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2.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3 - 6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안녕하세요. 2023년 들어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1권, 2권에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지능범죄편이라는 부제 그대로 다양한 사기 범죄가 주제로 피해자들이 왜 속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하고 뻔한 사기도 있지만,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담한 발상의 사기극도 등장합니다. 유명하고 잘 알려진 사건도 있지만, 잘 몰랐던 사건도 많아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범행에 대한 치밀한 수사로 범인을 잡아나가는, 수사물로서의 드라마가 느껴지던 1, 2권에 비하면 아무래도 그런 요소는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속아넘어갈만한 정교한 사기극은 거의 없고, 왜 속아넘어가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뻔하고 단순한 사기극이 많다는 점도 실망스러웠어요. 이게 현실이겠지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억에 남는 사건 몇 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행복팀 사건>>
심리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는 농아들을 속여 가스라이팅한 뒤,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군림하며 등쳐먹은 일종의 사이비 종교 사기극. 사이비 종교가 범죄로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울러 범인들 때문에 자살 등 안타까운 죽음이 이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량이 낮다는건 큰 문제로 보입니다. 이런 놈들은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모쪼록 자살과 가장 붕괴의 원인이 된 사기 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은 살인죄 이상으로 판결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대구 금호강 보험금 살인 사건>>
이 사건은 제가 봤던 <<그것이 알고싶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였습니다. 범인의 억울하다는 투서에서부터 시작해서, 범인 가족이 억울하다며 울면서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알고보니 그놈이 진범이 맞아서 황당했었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살던 15년 친구를 보험금때문에 살해하는 인간 말종이니 애초에 양심은 없겠지만, 아직도 무죄를 주장한다는데 입맛이 쓰더군요.
그나저나 생소했던 '법보행'이 결정적 증거였다는 것도 기억에 남은 요인으로 대체 얼마나 걸음이 특이하길래 주위 친구들이 모조리 알아볼까 싶은데, 걷는 모습을 자세하게 보고 싶네요.

<<로맨스스캠>>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범죄이지요. 책에서 범죄 흐름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주고 있는데, 앞으로 이런 범죄 방지를 하자는 차원에서 짤막하게 소개해드립니다.
1. 채팅 앱에서 자신을 여군 간호장교라고 소개한 아만다 앰버는 그 후 메일을 통해 연애를 하자고 접근해온다.
2. 앰버는 자신의 신분증이나 군부대에서 찍은 사진을 종종 보내옴으로써 자신을 믿게 만든다.
3. 메일에서 '자기' '남편' 등 애칭으로 A씨를 부르며 전역한 뒤 한국에서 결혼하자고 구애한다. 어느 날 시리아 내전 지역에 파병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작전 중 사망할 때를 대비해 상속자 이름을 적었는데 '미래의 남편인 당신의 이름을 적어냈다”고 한다.
4. 앰버는 “작전 지역으로 급히 이동해야 하는데 돈을 찾을 적당한 곳이 없다"며 경비와 생활비 명목으로 10만~100만 원을 요구한다.
5. 앰버는 시리아에서 수색 작전을 하다 동굴에서 숨겨둔 무기와 함께 달러 뭉치를 발견했다며, 자기 몫인 500만 달러를 일단 런던 보안업체의 개인 금고로 빼돌리고 그것을 다시 주한미군 기지로 옮기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거액의 비용을 요구한다. A씨는 통관비와 항공수송비를 모아 앰버에게 보낸다.
6. A씨는 달러가 든 가방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1만 달러를 건넨 뒤에야 가방을 넘겨받는다. 가방에 든 금고에서 검은색 종이만 가득 나온다.


<<인천 공인중개사 전세 사기 사건>>
이중 전세 계약 사기입니다. 집주인에게서 월세 계약을 위임받은 공인중개사가 세입자에게 자신이 집주인이라고 속여 전세 계약을 하고, 그 돈으로 주인에게 월세를 지급한 사건입니다. 등기부등본에서 근저당권 설정 항목을 삭제한 뒤, 근저당권 없는 매물이라고 속여 계약하기도 했고요. 그 외에도 보증금 뻥튀기 등 다양한 사기 행각이 이어졌습니다.
아울러 '전세 사기'를 피하는 방법으로
① 집주인을 만나 신분증, 주소지, 생년월일 확인
② 전세 대금은 주인 명의의 계좌에 직접 입금
③ 등기부등본은 앱 등으로 직접 뽑아 확인

하라고 알려주는데, 아쉽게도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저도 전세 계약을 몇 번 해 보았지만 본인 확인부터가 쉽지 않거든요. 실제 있었던 범행들처럼 대역을 내세우면 알아낼 방법이 사실상 없으니까요. 부동산 계약은 거액이 오가는 만큼 보다 명확한 본인 인증 거래가 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개선되는게 바람직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기 행각보다 더 큰 문제는 47명 전세자금을 떼먹었는데 고작 선고받은게 7년 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사기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죠.

<<온라인 암표>>
요새 꽤나 많이 회자되는, 온라인에서 암표를 팔기 위해 매크로를 이용해 표를 구입하는 방식이 소개됩니다. 특정 프로그램을 돌리는건데 캡챠까지 자동 해제하는 기능이 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각 예매처가 사용하는 캡차 문자와 이미지 꾸러미를 미리 매크로 프로그램에 입력해놨다가, 특정 문자나 이미지가 뜨면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꾸러미에서 가장 유사한 것을 찾아 보안 절차를 해제하도록 하는 단순한 DB처리 방식인데, 캡챠가 이렇게 쉽게 뚫리는건지 몰랐네요.

<<검사 사칭 대출 사기>>
유부남 사기범이 검사를 사칭해서 거액을 빌리고 결혼 약속까지 하는 식의 뻔한 사기라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자기가 거액을 빌려주고, 결혼할 사람 신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건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되요. 전화 한 통화면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공무원 사칭 사기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기다. 이런 사기가 여전히 통한다는 건 그만큼 한국 사화가 투명하지 않다고 보는 국민이 많다는 증거다."라는 마지막 마무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PC방 패보기 도박 사기>
대담한 발상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들은 당시 우리나라 PC방 컴퓨터의 66퍼센트 정도에 악성코드를 설치해서 사기 도박을 벌였는데요, 그 방법은 범인들이 5억원에 PC방 관리 프로그램 업체를 인수했던 것입니다! 범인 중 한 명이 개발자 출신으로 게임 회사를 운영할 정도로 IT계통에 정통했던 덕분이겠지만, 밝혀진 것만 40억원 정도를 패보기 도박으로 벌어들였다니 꽤나 남는 장사였던 셈이네요.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2022/09/12

흑마술의 여자 - 모리무라 세이이치 : 별점 2점

흑마술의 여자 - 4점 모리무라 세이이치 지음/동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흑마술과 관련된 기묘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카미치 도키코는 다카네자와 다쿠야와 결혼하여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던 중, 남편 친구 우나하라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되어 버렸다. 밀실인 그녀의 별장에서 우나하라의 시체가 발견된 탓이었다. 그녀는 또 다른 남편 친구 아리자와가 수상하다고 주장했지만, 아리자와마저 살해되어 버렸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당했던 미스기 게이코 사건과 이 사건이 관련이 있다는걸 알아냈고, 도키코를 추궁하여 결국 진상을 밝혀내게 되는데....

추석 연휴를 맞아 책을 정리하다가 집어들게 된, 거의 30여년 전 구입했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장편입니다.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잔혹한 범죄에서 시작되는 범죄 스릴러물, 그리고 몇 가지 트릭이 등장해서 비교적 정통 추리물 느낌을 전해줍니다. 특히 '유니트 하우스'라는 건물의 특징을 이용한 밀실 트릭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우나하라는 도키코의 별장이 아니라 바로 옆 아리자와 별장에서 살해당했고, 아리자와가 별장 이층 방을 통째로 떼어내 교체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수사 과정에서 도키코와 아리자와 별장의 이층 유니트가 바뀌어져 있다는게 드러나고요.

'이층 유니트를 통째로 바꾸는건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층을 통째로 교체하느니 지붕이나 벽면 일부만 떼어내어 사체를 옮기는게 더 편했을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등 이어지는 수수께끼도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당연히 아리자와가 범행 후 유니트를 교체한건 아니었습니다. 진범은 도키코로 그녀는 우나하라를 별장에 먼저 초대한 뒤, 독이 든 위스키를 먹도록 유도하여 살해했던 겁니다. 유니트는 설치 당시 도키코가 자기 별장에 더 새 것처럼 보이는 유니트가 설치되도록 했던 것이고요. 설치 공사는 명찰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명찰만 바꾸는 걸로 교체가 가능했었죠. 유니트 하우스이니 설치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요. 나중에 범행을 아리자와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사실을 이용했던 겁니다. 

별장 해체 후 유니트 패널 조사를 통해, 우나하라 살해 사건 당시 별장 근처 아자마 산이 분화하여 화산재가 내렸는데, 패널에는 화산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진상을 증명하는 경찰의 수사도 설득력 높습니다. 즉, 사건 당시 유니트는 분해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당시로서는 꽤 첨단이었을 유니트 하우스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비현실적인 교체가 아니라 누군가를 모함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다는 등 꽤 괜찮은 발상이 많이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작 밀실 살인에는 굉장히 간단한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유니트가 바뀌었던 이유가 '자기 것을 더 좋은 걸로 만들고 싶은' 보편적인 인간 심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그리고 3인조 성폭행범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던 미스기 게이코 사건이 우나하라, 그리고 아리자와 살인 사건과 이어지는 복잡한 과정이 경찰 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그리고 흥미롭게 드러나는 전개도 볼 만 합니다. 우나하라가 3인조 성폭행범 일당 중 한 명으로 그들은 게이코를 살해하지 않았으며, 미스기 게이코와 동행했다가 함께 성폭행범에게 납치되었던 '환상의 여자'가 도키코라는건 초반에 독자에게 공유되는 덕분입니다. 독자도 게이코 살해의 진상과 우나하라를 죽인 범인이 도키코인지 아니면 게이코의 약혼자였던 아리자와인지를 궁금해 할 수 밖에 없지요.

경찰이 우나하라가 3인조 중 한 명이라고 추리하여 나머지 일당을 체포하고 아리자와 사건의 진상을 밝혀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우나하라가 살해된 뒤, 남은 2인조가 아리자와가 복수했다 여기고 그를 살해했던 겁니다. 여기서 아리자와 사건은 게이코 사건과 연결되지 않으니, 우나하라 사건과 게이코 사건이 연결되며 두 사건의 범인은 도키코라는 결론에 이르는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도키코가 우나하라를 살해한 이유는 협박받았기 때문일텐데, 그 이유는 우나하라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걸 폭로하겠다는 협박일리는 없습니다. 그 사실이 드러나면 잃을게 더 많은건 우나하라니까요. 결국 우나하라는 게이코를 죽인 진범이 도키코라는걸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환상의 여자'가 도키코임을 밝혀내고 결국 도키코를 체포하는 경찰의 집요하면서 끈질긴 수사 과정도 사회파 추리 소설 작가다운 디테일이 돋보였습니다. 고소우 경찰 부장 등 등장하는 경찰 캐릭터들도 생동감있게 잘 그려내고 있고요.

가장 마지막에 드러나는, 도키코가 게이코를 살해했던 이유는 정말 놀라왔습니다. 그녀는 선천적 기형으로 질결손 상태였는데, 성폭행범들 때문에 이 사실이 게이코에게 알려지자 그걸 숨기기 위해 살해했던 겁니다. 그 뒤 인공 질 성형술을 시술받아 결혼했고요. 좀 급작스러게 드러나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앞서 여러가지 복선으로 - 특히 다쿠야가 미국 출장을 간 사이, 도키코가 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이유처럼 - 설명되고 있어서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이 발표된 1974년이라는 시점에서는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신선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비슷한 아이디어가 1975년 작품인 나쓰키 시즈코의 "흑백의 여로"에서도 사용된 바 있는데, 아마 당시 일본에서 뭔가 뉴스가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이렇게 3인조 성폭행범의 범죄에서 촉발된 연쇄 살인극만 놓고 보면 꽤 괜찮은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도 잘 사용되어 있고, 수사 과정과 진상 모두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작가 인생 최전성기에 발표된 작품답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목에도 있는 '흑마술' 입니다. 이는 도키코의 남편 다쿠야가 흑마술과 집단 난교 등을 행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인 '신비학회'의 본부가 있는 미국 라스베가스까지 날아가 비밀 모임에 몰래 참석하는 등 뭔가 대단한 배경이 있는 것 처럼 장황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본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한 자극적인 소재에 불과해요. 추리적으로도 도키코가 아리자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아리자와에게 알리바이가 있을 경우 대책이 없었다는 헛점이 크게 느껴집니다. 아리자와의 알리바이가 증명된 이후, 도키코는 빠져나갈 여지가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아리자와가 운 좋게 (?) 살해당해서 시간을 벌었을 뿐입니다. 작가 특유의 성적 묘사도 지나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점도 분명하지만 단점이 너무 커서 완성도 측면에서는 점수를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나마 흑마술과 성적 묘사 부분만 뺐더라도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어차피 절판되어서 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만...

2022/03/25

신성한 관계 - 데니스 루헤인 / 조영학 : 별점 1.5점

신성한 관계 - 4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트릭 켄지와 안젤라 제나로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거부 프레드 스톤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둘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며, 실종된 딸 데지레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다. 켄지의 사수이기도 했던 최고 탐정 제이 베커마저도 데지레를 찾다가 실종된 상태였다. 알고보니 데지레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200만 달러를 횡령한 관계자 제프 프라이스와 도망쳤고, 베커는 그녀를 찾아낸 뒤 사랑에 빠져 사라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프라이스가 데지레를 살해한 뒤 베커는 프라이스를 죽였다. 베커는 둘에게 데지레를 죽이라고 의뢰했던건 트레버 스톤이라며, 복수를 위해 출발했지만 스톤 부하의 공격으로 죽고 말았다. 겨우 경찰에게서 풀려난 켄지와 제나로의 앞에 데지레가 나타나 도움을 요청하는데....

데니스 루헤인의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로 직전작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곧바로 이어집니다. 전작에서의 충격으로 켄지와 제나로는 탐정 사무소 문을 닫고, 상실감을 달래고 있던 중이라는 설정이지요.

수사 과정 초기에 불거지는, 슬픔 치유사와 연계된 사이비 종교 집단의 사기 행각은 꽤나 볼만했습니다. '고해 성사'를 협박과 사기를 위해 써먹는게 효과가 큰건 당연할테니까요. 단순 협박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은행 비밀번호와 같은 개인 정보까지 수집한 뒤 이를 교단 내 국세청 직원 등의 전문가를 통해 모든 재산을 장악한다는건 90년대 초반 발표된 작품 치고는 꽤나 앞서가는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설정을 잘 써먹지는 못합니다. 슬픔 치유사들에게서 정보를 빼낸 방법도 강도짓과 부바 등 친구들을 동원해 완력을 써서 캐내는게 전부고요. 이 뒤는 트레버 스톤이 사실 데지레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알고보니 데지레가 먼저 트레버 스톤을 불구로 만든 사고를 사주했다는 것 등이 밝혀지며 트레버 스톤과 데지레 스톤, 두 악마가 서로 죽이려는 대결로 바뀌고 맙니다. 데지레가 비련의 천사가 아니라 주위 남자들을 모두 홀린 뒤 써먹다가 죽게 만드는 악녀라는 반전은 나쁘지 않았지만, 억지스러웠어요. 주변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자신의 이익을 단지 몸 하나를 팔아서 얻어내는데, 남자들이 아무리 섹스에 미친 바보들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유치한 발상입니다.

전개도 억지스럽고 납득하기 어려운 점 투성입니다. 모든 것의 발단인 데지레 실종부터 그러합니다. 그녀는 왜 사라졌을까요? 트레버 스톤이 사고를 사주한게 그녀라는걸 알아냈기 때문에? 그런 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이 베커의 입을 통해 그녀를 죽이는게 트레버 스톤의 의뢰라는걸 밝히기는 하지만, 이 때만해도 그녀가 악당 흑막이라는건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 애초에 제이 베커에게 이렇게 의뢰했다면, 켄지와 제나로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이유가 불분명하고요. 

제이 베커의 죽음도 이상합니다. 그는 데지레의 복수를 한다며 트레버 스톤을 찾아가려다 트레버 스톤 부하의 공격을 받고 죽습니다. 그러나 데지레가 죽었다면 트레버 스톤의 부하들은 제이 베커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까요. 제이 베커의 의도(복수)를 알아챘다면 공격했을 수도 있지만, 그걸 알 수 있었던 방법도 없었습니다. 또 베커가 어떤 길로 가는지 알고 있었는데 도로에서 단순하게 자동차로 밀어버려 죽이려 했다는 것도 너무 어설펐어요. 프로답지도 않았고요. 반대로 데지레가 죽지 않았다는걸 알아챘다면, 제이 베커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어야 했습니다. 데지레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니 사로잡아 행적을 캐내는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짜고짜 차로 들이받아 죽이려 한다는건 영 납득하기 어렵더군요. 이는 작가가 화끈한 액션 장면을 넣고 싶어서 삽입한 장면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켄지가 데지레의 정체를 알게된 건, 데지레가 제이 베커에게서 들었다며 '페일세이프'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페일세이프'는 오래전부터 켄지와 제이 사이에 있었던 암호였습니다. 누군가 '페일세이프'라는 말을 하면서 나타나면 무조건 적이니 박살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즉, 제이 베커는 데지레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켄지와 제나로에게는 말하지 않고, 사랑했던 그녀를 잃은 복수를 해야 한다고 트레버 스톤을 찾아가다가 죽는다는건 영 앞 뒤가 맞지 않아요. 트레버 스톤이 그녀를 죽이려고는 했지만, 정작 죽인건 그 시점에서는 아무 관계없던 프라이스였으니 복수의 대상도 잘못된게 아닌가 싶네요. '페일세이프'를 통해 데지레의 정체를 알아낸 뒤, 켄지와 제나로는 그녀의 뒷통수를 칠 계획을 짜지만 정작 잘 써먹지도 못하고 데지레에게 사로잡혀 위기에 빠진다는 전개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땅에 파묻었던 제나로가 자력으로 탈출해 스톤 부녀를 응징한다는 결말도 너무 대충 수습한 느낌이었고요.

이런 앞뒤 안맞는 급작스럽고 자극적인 전개는 오래전 신문 연재 소설이나 싸구려 펄프 픽션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 무리수를 막 던진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도를 넘는 폭력과 비도덕적인 가족 관계 정도만이 하드보일드스러운 느낌을 전해줄 뿐이며, 추리적으로도 건질건 거의 없었으니까요. 가짜 신분으로 수감된 제이 베커를 찾아가 그가 말한 기묘한 말을 듣고 진상을 풀어내는 정도만 그런대로 탐정스러웠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작가가 자극적인 소재를 끝까지 건드리고 전개 역시 흥미본위로 채워놓은, 노골적으로 흥행을 노린 펄프 픽션에 불과합니다. 전형적인 성인용 헐리우드 액션 범죄물로, 차라리 영화였더라면 더 볼만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시리즈 팬에게는 켄지와 제나로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점, 그리고 "라쇼몽"을 언급한다던가, 막스형제의 고전 영화 "선상 대소동"을 즐겨 본다던가, "페일세이프"를 결정적 단서로 쓰는 등 영화광 켄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부바의 활약이 미미하지만 여전하다는 아주 약간의 즐길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외의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도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22/03/04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 박지영 : 별점 2점

시크릿 스파이 - 4점
헤더 베센트 외 지음, 박지영 옮김/시그마북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첩보 활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으로, 시대 순으로 유명 스파이와 첩보 활동, 주요 활약상 및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장치, 암호 등을 소개해 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250여 페이지의 분량을 풀 컬러로 가득 채운, 화려한 도판입니다. 모든 주제를 한 장 안에 도판과 함께 담고 있어서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짤막하게 요약하여, 다양한 도판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카드 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 속 유명 스파이, 첩보 활동 중 몰랐던 내용도 많았습니다. 남북전쟁 때, 노예해방론자들과 흑인 노예들은 남부 연합 안에서 정보원 활동을 했었고, 반대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사교계 인사 로즈 오닐 그린하우는 북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는 이야기처럼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네요. 영국이 인도 지형을 조사할 때 고용했던 현지인들 중 가장 유명했던 '1번' 나인 싱 라와트도 보다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졌고요. 

1차 대전 시기부터는 친숙한, 고전적인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는, 약간 낭만적이기까지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외다리였던 몸을 이용하여 측량 기계를 의족을 숨긴 채 독일의 알프스 지역 요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다녔던 미국인 하워드 버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강 악화로 죽을 때 유언마저도 '독일군은 알프스 산맥에 전선을 구축할 계획이 없다' 였다니, 죽음마저도 고전전이네요. 프랑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루이즈드 베티니가 첩보망을 조직, 운영하였고, 벨기에에서는 '하얀 여인' 첩보방을 전화 기술자 발테르 드베가 운영했다는 등의 일반인 영웅들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회 지도층 아마츄어들 - 백만장자 빈센트 에스터, 루스벨트 주니어 - 이 뭉쳐서 '더 룸' 이라는 명칭으로 첩보 활동을 했다니 확실히 미국적이다 싶군요. 당시 미국인이 머나먼 유럽 등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 러시아에서 활약했다는 영국의 에이스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는 사실 별 활약 없이 1925년, 볼셰비키 타도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는 등의 팩트 체크도 볼거리였고, 치머만 전보의 암호 해독처럼 실제로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놀라운 성과들도 눈에 뜨였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는 막강해진 국가별 정보 기관들과 고위층 스파이 '두더지' 들, 상대편 스파이들을 속여서 체포하고, 내부 스파이들을 솎아낸 뒤 처형하거나 변절자로 만드는 (더블 크로스 시스템) 등 현대적인 스파이 작전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이 중에서는 독일 해외방첩청 아프베어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나리스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반나치 정책을 나름대로 펼친 끝에, 종전 직전 사형당했다는데 과연 살아있는채로 종전을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아무리 반나치 주의자였다 한들, 방첩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는 모두 정보가 미리 유출되었기 때문이며,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한게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독일 침공을 사전에 첩보원들이 파악하여 제보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스탈린의 사례를 볼 때, 첩보 활동 자체가 중요하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이 이렇게 그를 위해 일했던 첩보원들을 전쟁 후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후일담이 더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독일 최고의 스파이로 중립국 터키의 영국 대사 휴 내치불휴게슨의 부하였던 바즈나의 활약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네임이 오버로드라는 등의 고급 정보를 넘기는 활약을 했지만, 독일은 그 정보의 진가를 몰라봤다지요. 심지어 그에게 준 30만 파운드의 거액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찍어내었던 위조지폐였다고 하고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영화같은 일화였습니다.

냉전부터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존 스마일리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 등 익히 잘 알려진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M16의 수장으로 KGB 스파이였던 킴 필비와 그의 동료들이었던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와 이스라엘이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켰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흥망성쇠가 흥미로왔습니다. IBM과 히타치의 분쟁 등 산업 스파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F1 레이스에도 산업 스파이가 개입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니까요. 페라리의 정비사 나이절 스테프니가 멕라렌에게 정보를 넘겼던 사건인데, 스테프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버려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교가 자기들의 면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백설 공주 작전'이라는걸 벌였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국세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방 검사 사무실까지 뒤졌다니 종교의 힘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힘 있는 사이비 종교들이 최근 많아진 듯 한데,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 외. 첩보 기술에 대한 설명들도 볼만했습니다. 동독의 '로미오 스파이' 작전처럼요. 25~35살 사이의 교육을 잘 받은,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이용하여 서독 여성들을 포섭했다지요. 러시아의 여성 해외 정보 요원 '스패로'는 이와 반대로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다는데, "레드 스패로"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건 분명해 보입니다. 두 작전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카메라, 통신 장비, 암살 장비 등의 소개는 비밀 무기류에 사족을 못 쓰는 제 동심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독침 우산과 청산가리 가스총이 언급되는데, 이 둘을 합친 장비가 "마스터 키튼"에도 등장했었지요. 고양이 몸 속에 배터리, 안테나, 마이크를 장착하여 도청하려는 '어쿠스틱 키티' 계획도 황당하지만 멋졌고요. "쉬리"가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드네요. 1984년 미국 모스크바 대사관, 레닌그라드 영사관의 타자기에 설치되었다는 키 자동 기록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기묘한 레트로함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타자기 내부에 설치되어 활자 뭉치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자기장 교란을 측정하여 입력되었을 법한 글자를 추측한 뒤, 전파를 터트려 도청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내는 장치였다는데, 당시 기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이테크 기기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왔던 이야기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주제를 한 장으로 요약한 탓에 깊이가 없으며, 스파이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대 시대 이야기는 너무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가 스파이 덕분인 것 처럼 써 놓았을 정도로요. 실제 내용을 보면 스파이가 아니라, 단순히 사전 염탐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패배 역시 정찰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스파이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패권이 무함마드가 스파이 활동에 통달한 덕분이었다는 언급도 어처구니 없었고요. 

이런 류의 과장은 뒤에도 계속됩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게 스파이 카를 슐마이스터가 거짓 정보를 뿌려 오스트리아 군이 속았기 때문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남부 목화 판매 댓가로 전쟁 물자를 구입했던 제임스 불럭을 스파이라고 부르는 것도 억지였고요. 이건 단순한 통상 업무에 지나지 않잖아요? 암살과 테러범들 이야기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급 창부였던 '크리스틴 킬러' 마저도 한 챕터를 차지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암호에 대한 소개가 적지 않은데, 9세기 학자 야쿱 이븐 이스하크 알 킨디가 암호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떤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많이 사용된다는 원리인 빈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등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도판도 충실했고요.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암호의 과학" 등에서 많이 보아와서 별로 새롭지 않았고, 책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가격에 비하면 별로 깊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이 책 보다는 특정 스파이 활동과 작전, 혹은 암호 등에 촛점을 맞춘 다른 전문 서적을 읽어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

2021/12/26

대실 해밋 - 대실 해밋 / 변용란 : 별점 2.5점

대실 해밋 - 6점
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현대문학

하드보일드의 거장 대실 해밋이 쓴,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입니다. 작가 인생 초기작들로 유명한 컨티넨털 탐정사 탐정이 등장합니다. 

대체로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우며,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인 느낌을 전해줍니다. 몇몇 작품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배신의 거미줄" 

외과의사 에스텝 박사가 죽고 부인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사가 숨겨왔던 첫 번째 부인이 찾아온 직후 사건이 일어났던 탓이었다. 변호사 리치먼드의 의뢰로 탐정은 의사가 죽기 전 보냈다는 편지를 찾아 나섰다. 첫 번째 부인을 미행한 끝에 탐정은 사건 배후에 사기꾼 제이콥 레드위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제이콥을 미행하는 또 다른 인물의 존재를 알아챘는데...

"의심이 든다면 미행해라"라는 말 처럼 미행을 통한 단서 찾기와 그 외 탐정 사무소를 통한 조사 및 다른 탐정들과의 분담과 협력 등 탐정의 진짜 업무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탐정으로 일했던 대실 해밋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행 과정을 통해 당대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거리와 풍경들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좋았고요. 이 때부터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종의 "바꿔치기"트릭이 사용된 덕분입니다. 에스텝 박사는 가짜로, 진짜 에스텝 박사의 의사 면허를 제이콥에게서 구입하여 의사 행세를 해 왔던 겁니다. 첫 번째 부인이라며 나타났던건 진짜 에스텝 박사의 부인이었고요. 제이콥은 에스텝 박사를 수십년 동안 뜯어먹다가, 크게 한 탕 저지를 생각으로 사건을 꾸몄던겁니다. 

제이콥의 계획도 괜찮았어요. 그는 거액을 요구하면, 박사가 자살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그는 유산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의도는 아니었지만, 현 부인이 남편을 살해했다고 인정된다면 유산 전부를요!

그러나 계획을 밝혀내는데 있어서는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탐정이 제이콥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단서를 잡은 뒤, 협박해서 그의 입으로부터 진상을 듣는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행과 감시로 진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허나 제이콥이 탐정에게 진상을 술술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는게 문제에요. 증거품인 에스텝 박사의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순순히 내 준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탐정과 제이콥 모두 살인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제이콥이 이렇게까지 설설 길 이유는 없잖아요? 도주하던 제이콥이 오가르 경위에게 사살당한다는 마지막 장면도 허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탄 얼굴"

탐정은 밴브룩의 두 딸 가출 사건 조사 중 잠깐 만났던 코렐 부인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둘째딸 루스 밴브룩마저 시체로 발견되었고 탐정은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을거라 확신했다. 탐정과 팻 형사의 조사 결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유사했던 여성들이 자살했던 사건들이 여러 건 있었고, 모두 레이먼드 엘우드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실종되고, 자살했던 여성들 사건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관계된 사건을 모두 조사해 보겠다는 수사 방침에 대한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하드보일드라기 보다는,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운 탓입니다. 탐정과 팻 형사가 레이먼드 엘우드가 자주 방문했던 저택에 침입한 이후부터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저택에서 사이비 종교와 마약에 빠진 여자들이 난교 파티를 벌이던 사진을 찍어서 협박해 왔다는 진상도 허무하며, 탐정이 팻을 설득해서 주요 증거물인 사진을 모두 소각한다는 결말도 낭만적인 모험 활극과 다를게 없습니다. 팻의 백만장자 아내도 사진에 찍혀있었다는 약간의 반전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기 때문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중국 여인들의 죽음"

릴리언 샨은 하녀 한 명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취소하고 급작스럽게 귀가했던 날, 낯선 중국인 청년에게 습격당했다. 릴리언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하녀는 죽고 말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은 지하실에서 요리사 완란의 시체도 발견하였다. 탐정은 사건을 의뢰받은 뒤 정보를 캐내다가 사건 배후에 어빙턴 호텔 소유주 코니어스와 차아니타운의 실력자 창리칭이 관계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차이나타운을 무대로 하는데 단지 이국적인 배경에 그치는 건 아닙니다. 중국을 배신하고 한 몫 단단히 잡은 이민자의 딸이 주인공 중 한명이며,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중국인 독립운동가의 무기 밀수에 편승해서 악당들이 한 몫 잡으려고 했었다는 이야기의 핵심 설정과 전개 모두가 설득력있게 활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릴리언의 저택은 해변과 맞닿아 있었는데, 밀수를 위해서는 해변과 맞닿아 있는 저택이 필요했다는 진상도 그럴듯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탐정이 정말로 하는게 별로 없고 전개는 우연과 억지에 의한게 많은 탓입니다. 탐정이 조사원 중 한명이었던 마약중독자 얼이 수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걸 알아챈건 순전히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하니까요. 동공? 눈빛? 모두 설득력이 약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필요할 때마다 만나서, 필요한 증언을 얻는다는 전개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휘슬러가 일본군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조작했던 사진을 결정적 순간에 주머니에서 꺼내는 장면처럼요. 탐정이 이 사진을 가지고 다닐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의뢰인인 릴리언을 무사히 사건에서 빼내고 휘슬러를 포함한 악당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결말은 전혀 하드보일드스럽지 않더군요. 릴리언은 선량했고 선의에 가득찬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해주는 기사가 활약하는 영웅담이자 낭만적인 모험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아울러 당시 중국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판타지를 반영한 듯한 창리칭 저택의 복잡한 구조와 기묘한 보디가드들, 은밀하면서도 잔혹한 공격과 미모의 노예 소녀 슈슈에 대한 묘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지루했던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쿠피냘 섬의 약탈" 

탐정은 결혼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쿠피냘 섬에서 열린 헨드릭슨 가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날 밤, 폭풍우와 함께 강도단이 섬의 은행과 보석상을 습격했다. 결혼식 하객 중 한명이었던 러시아 공주로부터 이 사건 소식을 들은 탐정은,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헨드릭슨 저택 집사와 운전수에게 맡기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강도단의 도주를 막는데는 실패했고, 헨드릭슨 저택으 복귀 후에 집사와 운전사가 살해당했으며, 결혼 선물은 도난당했다는게 밝혀지는데....

오래 전에 읽었었던 작품인데 내용 자체를 잊어버려서 처음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초, 중반부까지는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완전 무장한 강도단과 맞서 싸우는 탐정의 활약을 그린 영웅담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정통파 추리물과 하드보일드가 잘 결합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말이지요. 

특히 합리적인 추리가 볼만합니다. 탐정은 강도들이 외부에서 왔다면 일당과 무기 운반을 위해 자동차나 배가 필요했을텐데, 섬 주민의 자동차와 배를 탈취했던 상황에 주목합니다. 그 외의 여러가지 단서를 조합하여 러시아 장군과 공주 일행이 강도라는걸 알아내고 맙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한 후,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공주 일당의 범행 동기도 시대를 감안해보면 충분히 그럴듯했고요. 이런 추리를 일종의 추리쇼를 통해 선보이는 장면은 정통파 고전 본격 추리물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리고 추리쇼에서 이어지는, 돈 보다 범죄를 해결하는게 더 재미있다며 뱀 같은 공주의 유혹은 무시하고, 심지어 여자를 쏘지 않을거라 믿으며 도망가려는 공주 다리를 쏘아 맞추는 탐정의 모습은 고전 본격 추리물을 넘어선, 하드보일드 장르의 도래를 알리는 명장면이었다 생각됩니다. "난 장애인한테서도 목발을 훔쳤던 사람 아닌가?"라는 말도 희대의 명대사였고요. 구 시대의 화려했던 부르주아들은 모두 현실에 몰락해 버렸고, 이들을 악전고투끝에 살아남은 플로레탈리아가 짓밟는 구성은 시대가 변했음을 잘 느끼게 해 주네요. 마지막에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던 잔챙이 범죄자 플리포를 탐정과 공주가 서로 자기 편으로 만들려 설득하는 클라이막스도 재미있었습니다. 작위적이라는건 부인하기 어렵지만요.

물론 공주가 탐정을 살려둔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큰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가장 위협이 될 인물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한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 여명기, 장르의 초석을 다졌을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크게 한탕"

탐정은 어느날 밤 술집에 패디 더 맥스, 블루포인트 밴스, 해피 짐 해커, 빅 버드 레드 오리어리 등 유명한 범죄자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맨스 은행이 습격당할거라는 정보를 전해 준 정보원 비노가 살해당한 다음날 아침, 시맨스 내셔널 은행과 골든게이트 신탁회사가 약탈당했다. 무려 150여명의 프로 범죄자들이 도로를 봉쇄하고 20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현금 수백만달러를 훔쳤고, 경찰 포함 3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던 대참사였다. 그런데 강도 일당 수십 명의 시신이 차례로 발견되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죽은 강도 중 한 명이 '빅 플로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생존자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쫓던 탐정은 밴스를 비롯한 다른 강도들의 습격에서 그를 데리고 겨우 탈출했다. 부상당했던 레드 오리어리가 탐정을 이끈 곳은 빅 플로라가 몸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였다....

백명이 넘는 강도단, 수백만 달러의 강탈, 수십명의 죽음 등 어처구니없는 스케일을 보여주는 범죄물. 은신처에 있던 연약해 보였던 노인이 사건의 흑막 파파도풀로스였으며,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기에 무사 탈출을 위해 탐정을 이용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탐정사무소 소장인 '영감'이 사건 배후에는 굉장히 머리 좋은 인물이 있을거라고 말했었고, 빅 플로라가 탐정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 등 이런저런 복선이 잘 배치되어 있던 덕분입니다.

하지만 설정에 비하면 내용은 비교적 수수한 편입니다. 탐정도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를 쫓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어요. 빅 플로라의 은신처에서 벌이는 목숨을 건 연극도 유치했고요. 빅 플로라가 노인을 하인 대하듯 하는 장면같은 억지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빅 플로라가 우두머리이며 노인은 거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유능한 탐정마저도 속아넘어간 것에 대해 변명거리를 만들 속셈이었을텐데,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였어요. 이런 점에서 하드보일드 추리물로 건질만했던건 별로 없었던 작품입니다. 단순 화끈한 마쵸 모험 액션물에 가까운 이야기였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거액을 강탈한 뒤, 공모자들을 죽이고 독차지하려고 했던 계획을 망쳐버린 사랑꾼 빅 레드 오리어리를 징벌하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파파도풀로스 입장에서는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피 묻은 포상금 106,000달러" 

탐정에게 패디 더 멕스의 동생 톰-톰 캐리가 찾아와 파파도풀로스에게 걸려있는 거액의 현상금에 대해 물어보았다. 몇 건의 살인과 습격이 이어진 끝에, 탐정들과 캐리는 백만장자 뉴홀 저택에 은신하고 있던 파파도풀로스를 잡는데 성공하는데...

시원치않았던 전편에서 이어지는 후편인데, 이 작품은 아주 좋았습니다. 탐정의 냉혈한스러운 면모가 빛나거든요. 탐정은 신참 탐정 잭이 파파도풀로스의 꼬임에 넘어가 한 패가 되었다는걸 진작에 눈치챘습니다. 아마도 그리스인 거주지 습격 사건 때 눈치챘겠지요. 그래서 마지막 습격 때 잭을 일부러 대동한 뒤, 모든 진상을 까발려서 잭은 캐리의 손에 의해, 캐리는 다른 탐정이 사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배신자를 징벌하고 탐정 사무소의 평판을 지켜내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 거지요. 이 와중에 탐정 사무소 다른 탐정들을 동원하고, 잭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안배를 하는 꼼꼼함도 볼만했고요. 

잭이 배신하게 된 계기가 빅 레드 오리어리의 연인 낸시가 사실 백만장자 뉴홀의 딸이었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반전도 상당한 놀라움을 가져다 준 좋은 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끝판왕격인 파파도풀로스의 허무했던 최후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탐정이 잭의 배신을 언제 눈치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도 설명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거에요. 낸시의 이상했던 시선, 잭의 이상했던 눈빛은 증거가 될 수 없었는데 말이지요. 잭이 별다른 증거도 없는데 스스로 자포자기해서 자백을 한 것도 다소 편의적인 전개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정교함과 냉혹함이 잘 살아있는 하드보일드 여명기를 대표할만한 수작이라 생각되네요.

"메인의 죽음" 

메인이 출장을 다녀온 날 새벽, 2인조 강도가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지갑 안의 2만 달러를 강탈해 사라졌다. 현장 근처에서는 흉기인 권총과, 여성 손수건이 들어있는 지갑이 발견되었다. 메인의 보스 군겐에게 고용된 탐정은 손수건이 군겐의 젊은 아내 것이며, 아내의 하녀가 범죄자와 어울린다는걸 알아낸 뒤, 아내로부터 사건 진상을 고백받았다. 그녀와 메인은 불륜 관계였으며, 2만 달러는 불륜을 저지르던 당일 오후에 강탈당했던 것이었다. 범인은 하녀의 애인이었다.

젊은 아내를 옭아맬 속셈으로 사건 수사를 의뢰한 군겐,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보스의 아내까지 건드리다 파멸한 메인,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한 젊은 아내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묘사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들이 얽히고 섥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든 건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마음에 들었고요. 불륜 남녀가 돈을 빼앗긴걸 쉽게 털어놓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범인들의 잔꾀도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하지만 범인 일당의 부주의한 행동이 미행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진상을 고백받은 형태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탐정 수사' 물인데, 미행으로 진범이 누구인지 바로 밝혀내는건 너무 쉬운 전개였습니다. 메인이 좌절한 나머지 자살했고, 보험금 때문에 메인의 아내가 이를 강도 사건으로 꾸몄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보스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는게 훨씬 낫다는 점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메인을 죽이고 강도 살해 당한 것 처럼 꾸몄다는게 더 타당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마무리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메인의 아내를 비롯, 군겐의 아내까지 사건에 관련 여성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던걸까요? 여튼,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수사물로는 괜찮았던 깔끔한 소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국왕 놀음" 

탐정은 미국인 청년 라이오넬 그랜덤을 찾아 유럽의 소국 모리비아로 향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어머니의 과보호로부터 탈출한 그는, 유럽에서 무려 3백만달러나 되는 돈을 현금화했다. 탐정은 라이오넬이 군대를 장악한 실력자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모리비아에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3백만 달러는 혁명을 위한 군자금이었다.

유럽 소국 모리비아를 무대로 한 일종의 군웅물이랄까, 여튼 왕이 되려는 사람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는 작품. 설정은 기발했고, 왕위를 놓고 여러 세력이 벌이는 암투가 짤막한 분량안에서 잘 그려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았어요. 일단 에이나르손 대령이 왜 미국인을 끌어들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요. 군대를 장악했고, 인기도 많았다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서 왕이 되면 그만이었을텐데 말이지요. 3백만 달러는 분명 거액이지만, 일국의 왕이 된다면 그 정도 돈이 문제가 될까요? 

대통령 비서 마흐무드가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현 대통령의 통치를 못마땅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한들, 절대 권력을 가진 대통령 비서가 이를 쉽게 포기하고 혁명에 바로 몸을 맡기고 급작스럽게 에이나르손을 암살하려고 한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에이나르손이 군대를 장악하여 기껏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탐정의 총에 굴복해서 순순히 라이오넬의 대관식을 치룬 것도 그의 야망과 노력을 생각하면 많이 허무합니다. 최후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낭만적인 중세 시대 모험 활극이라면 모를까, 20세기를 무대로 한 이야기에는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파리잡는 끈끈이" 

뉴욕의 명문가 햄블턴 가문의 막내딸 수는 범죄자와 도망친 후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1년 후, 돈 1,000달러를 요구하는 전보가 날라왔고 탐정은 돈을 가지고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이는 사기꾼 홀리 조의 계획으로 수는 가짜였었다. 

홀리 조로부터 캐낸 수와 베이브의 거처를 찾은 탐정은 그곳에서 수의 시체를 발견했다. 부검 결과 수는 만성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게 밝혀졌다. 비소는 파리잡는 끈끈이에서 추출한 것이었다. 다시 협잡꾼 홀리 조를 심문해서, 그가 수와 도주할 계획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갑자기 나타난 베이브가 홀리 조를 사살하고 달아나는데....

부잣집 철부지 딸의 비참한 죽음, 얽히고 섥혀 서로를 죽이고 마는 애증 관계가 그려진 정통 하드보일드 작품입니다. 

그런데 탐정이 베이브를 추격해서 사로잡는 부분은 액션 활극 느낌도 강하지만, "누가 수를 죽였나?"라는 후더닛 측면에서도 볼만한 추리물입니다. 일단 홀리 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마찬가지인 수를 죽일리 없었어요. 수와 도망칠 계획이었으니까요. 베이브도 오랫동안 비소를 수에게 먹여 죽일만한 인물은 아니었고요. 그렇다고 수가 자살했다고 하기에는, 만성 비소 중독은 여러모로 이치에 맞지 않지요. 그렇다면 진상은? 수는 비소를 오랫동안 조금씩 먹어 내성을 키운 뒤, 한번에 많은 양의 비소를 함께 먹어 베이브를 해치울 생각이었던겁니다. "맹독"에도 나오는 트릭이지요.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 소장 영감이 이건 체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비웃는 장면, 그리고 파리잡는 끈끈이가 숨겨져 있던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이 방법이 나와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전개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아요. 베이브가 마침 탐정이 심문하던 도중에 나타나 홀리 조를 사살했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웠고, 애초에 수와 조가 베이브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깔끔하게 사살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비소 내성을 키워 독살하려 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범행을 저지른다고 살인죄가 덮이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추리적인 부분에서 볼만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이전 리뷰에서도 그 부분을 좋게 언급했었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5/05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1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1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C.M.B도 40권을 넘어섰네요. 이번 권에는 4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수록된 이야기 모두가 설득력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C.M.B의 또다른 매력인 현학적인 정보 제공 측면에서도 건질게 많지 않고요. 그래서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드네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운영위원" 

신라와 타츠키가 학교 운영위원을 맡은 날, 원예부원들은 이사장이 지시했던 화단과 백엽상 철거에 반대하며 철거업자와 대치했고, 화장실 변기가 막혔고, 학교 입구가 진흙 발자욱으로 지저분해졌고, 요코아리가 식사용 빵을 도둑맞는 등 학교 안에서 여러가지 사고와 문제가 잇달아 일어났다. 원예부가 화단 철거를 막은 이유였던, 원예부 아이돌 소녀가 맡긴 씨앗의 정체는 신라가 밝혀낸다. 그러나 검역 문제로 결국 철거가 수포로 돌아가자, 철거업자는 항의하는데...

신라는 철거업자 중 한 명이 학교에 있는 고가의 그림을 훔치기 위해 잠입해 있었다고 추리합니다. 진흙발로 학교로 들어와 변기를 일부러 막았던 거지요. 사용금지 팻말이 붙은 화장실 안에 숨어 있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요코아리의 빵은 먹으려고 훔쳤고요. 이렇게 별 거 아닌 걸로 보였던 디테일이 모여서,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는 꽤 볼만합니다.

그러나 원예부 소동은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이를 도둑과 엮는건 무리입니다. 애초에 무언가를 훔치려면, 소동이 일어난 날이 아니라 다른 날을 선택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오스트리아에서 허가받지 않고 들여왔다는 씨앗의 검역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라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어요. 

이렇게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봉인의 기담" 

메이지 시대 화족 부나가와 가문의 별장은 과거 2명이 죽고, 1명이 실종된 탓에 봉인되어 유령이 나온다는 전설 때문에 '봉인장'이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 철거를 앞둔 봉인장은 기록을 위한 건설회사 조사가 시작되었고, 신라도 부나가와 당주의 부탁으로 조사에 참여했다. 

지하에서 죄인을 가두어두는 시설을 발견한 조사팀은 비싼 장비를 이 안에 넣고 휴식을 취했지만, 잠든 과장을 제외한 조사팀원은 차례로 습격받은 뒤 장비마저 도난당하는데...

봉인장 지하의 '치도리 격자'라는 독특한 감옥 구조를 이용해서 탈출구를 만드는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 CMB 특유의 현학적인 재미를 잘 살리고 있어요.

그러나 다른 내용은 별로였습니다. 동기에 큰 문제가 있는 탓입니다. 특히 이렇게 용의자가 제한적인 상황에서까지 도둑질을 할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과장은 잠들어 있었고, 장비를 잃어버리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편의점에 심부름을 갔던 직원은 영수증이라는 증거가 명확하고요. 이 둘을 제외하면 용의자는 세 명에 불과해요. 이 정도라면 당장은 빠져나갈 수 있더라도 장치를 회수하거나,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범인이 누구인지는 쉽게 드러났을겁니다. 

신라의 추리도 빈약합니다. 범인만이 얻어맞고 기절한 쿠로마츠라는 직원이 어디있는지 알 수 있었다는 증거가 대표적이에요.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었잖아요? 때문에 격자에서 지문을 채취한다던가 하는 보강은 필요했습니다. 

전개도 문제가 많습니다. 초반에는 과거 봉인장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들지만, 이 역시 치도리 격자 구조를 이용해서 일으켰던 거라고 짤막하게 언급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봉인장' 어쩌구 하면서 거창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하마구리 가 사람들" 

경찰서에서 나오던 신라와 타츠키에게 하마구리 가 사람들이 자신들 아버지에 관련된 사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도내에 맨션 여러 채를 가지고 있는 부자 아버지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이웃집에 사는 수수께끼의 여자 마야에게 홀려 요가 강습료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현금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경찰은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방관했지만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사라졌고, 타츠키와 하마구리 가 사람들은 미행을 통해 마야가 다치가와류라는 기묘한 불교 분파 수행자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 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는 유서를 남긴 채 하마구리 기치사부로가 시체로 발견되자, 유족은 경찰에게 책임을 물었고 경찰은 어쩔 수 없이 기치사부로의 죽음을 사고사로 처리하는데....

신라가 추리한 사건의 진상은, 이 사건은 하마구리 가 사람들의 조작이라는 겁니다. 기치사부로가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죽게 된게 이유였어요. 상속 확정까지는 기치사부로의 계좌가 동결처리되어 돈을 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치사부로의 돈으로만 먹고 살던 기생충들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사망 확인을 최대한 늦추면서, 서둘러 계좌 속 돈을 현금화한겁니다. 거액을 인출한걸 설명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여자에게 속아 돈을 건넸다는 이야기를 만든거지요.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핏빗(?)을 스마트폰에 동기화시키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치사부로가 매일 1만보 걷기 등을 실천하던 사람이라, 어느 시점에서 움직이지 않았는지가 동기화를 통해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떼어 놓을 수야 있겠지만, 이전 이력과 비교하면 이상 여부를 쉽게 알 수 있을테니, 확실한 증거는 아니더라도 참고 이상으로는 충분히 쓰일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웨어러블 장치가 일상회된 현재라면 말이지요.

하지만 하마구리 가 사람들의 조작은 거창하기만 할 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수상한 옆집 여자 마야에게 현금을 주더라, 정도로 끝내는게 합리적이었어요. 돈을 건네 주다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건 별로 이상하지 않잖아요? 사이비 종교를 엮어서 구원 어쩌구 하는 이유를 들먹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외려 다치가와 류는 살아있는 채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신라에게 의심을 사고 말았을 뿐입니다. 경찰도 아니고, 경찰 관계자도 아닌 평범한 고등학생 신라와 타츠키에게까지 사건을 이야기할 이유도 딱히 없었고요. 

설명도 부족합니다. 기차사부로의 사체를 어디에 보관했는지부터가 애매해요. 부검에서 사망 추정시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경찰에 신고하며 소동을 일으키려면 적어도 1주일 이상은 걸렸을 거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설득력만 높여 주었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돌과 사진" 

마추피추 유적에서 스페인 여성 관광객 알마가 낙석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뒤 잉카의 저주라는 소문이 퍼졌다. 피해자가 잉카를 정복했던 스페인인이었고, 낙석은 다른 돌로 가로막혀 떨어질 수 없었던 위치에 놓여 있었던 탓이었다.

살인의 동기가 인스타그램일 수 있다는 전개는 꽤 시의적절했습니다. 피해자가 친구들 사진 아이디어를 도용해 사진을 올리고, 그걸로 인기를 얻었다는 내용이거든요. 물론 결정적인 동기는 따로 있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인스타그램 관련 내용 외의 모든 것입니다. 돌이 떨어진 진상부터가 허무하고 유치했어요. 가로막고 있던 돌을 피해서 굴린 뒤 피해자에게 떨어트린게 전부거든요. 밑에 굴리기 쉽게 태피스트리를 깔았다는데, 이건 트릭도 뭐도 아닙니다. 증거인 유리 구슬 파편도 너무 쉽게 드러나고요. 상식적으로도 자연스럽게 낙석이 일어난 것으로 위장하는게 당연합니다. 이렇게 억지로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다른 친구 두 명이 범인 엘자가 위로 올라가 돌을 떨어트린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09/20

심리 조작의 비밀 - 오카다 다카시 / 황선종 : 별점 3점

심리 조작의 비밀 - 6점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어크로스

사이비(책 속에서는 컬트 교단이라고 칭함) 종교나 각종 강매 행위가 어떠한 방식으로 심리 조작을 일으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지를 상세하게 파헤쳐서 알려주는 책입니다.
심리 조작, 세뇌, 최면 등이 소개되는데, '심리학'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심리 조작과 세뇌, 최면을 거는 방법 및 실제 사례들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어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항상 궁금해왔던 질문에 대한 답도 많고요. 예를 들면 '사이비 종교를 믿는 이유는 폭력적인 남편에게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를 의심하면, 자기 자신마저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더 강한 믿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네요.
소규모 집단, 배타적인 작은 팀에서 외부 정보가 차단되면 공동 생활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는 테러리스트 훈련 과정은 왜 시골 마을이 배타적이고 자신들만의 룰을 강요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에 딱 들어맞고요.
또 애착불안이 강한 의존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을 지탱해갈 수 없기에 가까이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게 되기 쉽다고 합니다. 즉, 눈앞에 그 사람이 있을 때는 헤어지는 일은 생각도 못할 정도로 끈끈하게 연결된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눈앞에서 사라지면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아주 간단하게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리는 거지요. 남자 친구가 군대 간 사이, 여자 친구가 복학생 오빠와 사귀는건 애착불안이 강한 의존성 인격장애일 수 있다는 겁니다!

더블 바인드라는 기법도 눈길을 끕니다. 상대가 무언가 해주기를 바랄 때, 그 일을 할 생각이냐 아니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선택지를 준비해 질문하는 방법으로, 복수의 선택지가 제시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국 같은 결과로 유도됩니다. 자동차를 살까말까 갈등하는 고객에게 "이 장치를 달아놓을까요?” 아니면 "자동차 색깔은 흰색을 좋아하세요? 아니면 검은색을 좋아하세요.?"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식으로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다음 선택 사항으로 고객의 관심이 향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는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을 때 “국어와 수학 중 어느 쪽부터 할까?”, “숙제를 엄마와 함께 할래? 아니면 혼자서 할래?" 라고 공부를 하는걸 전제로 묻는 등 다양한 응용이 가능합니다. 강하게 저항하리라고 예상되는 경우에는 “숙제를 간식 먹기 전에 할래? 아니면 먹고 나서 할래?”와 같은 식으로 한 발 물러난 제안을 하여 하나를 선택하게 하거나, 반대로 “숙제를 할래? 목욕탕 청소를 할래?”와 같은 식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께 넣어서 선택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고 하네요. 직접적으로 뭔가를 하라는 말을 들으면, 명령받았다고 받아들여 반항심이 생기지만 간접적으로 넌지시 말하거나, 하는 것을 전제로 놓고 말하면 저항감이 생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고 놀고 있을 때 공부하라는 독촉은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내년 이맘때에는 이렇게 가족이 모두 모여 한가롭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없겠네. 대학교는 1학년 때가 가장 바쁘다고 하니 말이야.”와 같이 말하는게 훨씬 효과가 좋다는 뜻이지요. 아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비난도 명령도 아니기에 마음에 저항이 생기기 어려우니까요. 그럴싸 합니다. 꼭 한 번 써 먹어 봐야겠습니다.

조언은 항상 긍정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실제 사례로 설명해 주어서 와 닿았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에릭슨 박사의 이야기로, 어느 날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 10대 소년에게 에릭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너의 행동이 얼마나 변할지 상상조차 못하겠는데." 이 말은 소년이 변하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단정 짓지도 않지요. 또 이 말을 들은 소년은 안도감과 함께 자신의 행동이 전문가가 예측조차 못할 정도라고 바뀐다는 것에 자극받아서 실제로 소년의 행동은 변했다고 합니다.
상대가 예스라고 대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방법으로 신뢰성을 높여 최종적인 질문에도 예스라고 대답하도록 이끄는 예스 세트도 같은 원리입니다. "노!" 대신 상대가 “예스!"라고 대답하도록 유도하면, 상대의 저항을 없애고 본심에 다가서거나 결단을 좌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군요. 예를 들면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죠?”라고 묻는 식입니다. 또는 “그와 헤어지고 싶나요? 아니 그럴 리가 없죠.”와 같이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하거나요. 이렇게 하면 “아뇨.”라고 부정하고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건 심리 상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명확하게 표현된 말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문제와 마주 서서 의식화된 경우에 한하거든요. 문제와 마주 서기를 피하고 핑계만 생각할 때는 직접적으로 지적당하면 더욱 강하게 저항하고 부정하게 되는거죠.

생활과 행동을 유형별로 분류해놓고, 다음 행동이나 생각으로 전환시킬 때 신호가 되는 자극을 주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에요. 정해놓은 음악을 틀거나 벨을 울리는 행위가 널리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뇌에 대한 굉장히 상세한 이론과 실제 예가 소개되는 부분도 눈길을 끌고요. 이 부분은 내용이 워낙 많아서 제가 요약해서 설명드리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정말 그럴듯해서 와 닿았습니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주제의 반복이 많고, 목차가 조금 정리가 되지 않은 느낌이 들거든요. '오옴 진리교' 사건 직후 발표된 책인지 오옴 진리교 이야기도 지나치게 많고요. 읽다보면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아요.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심리 조작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된 덕분입니다. 제가 소개해드린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니만큼, 이런 류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20/03/22

희망장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3.5점

희망장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시리즈 탐정 중 하나인 스기무라 사부로가 등장하는 단편집입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유명세에 비하면 제가 많이 읽은 작가는 아닙니다. "화차"는 제 올타임 베스트 10에 언제나 꼽을 수 있는 걸작이고,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평균 이상이지만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는 않더라고요. 가장 큰 이유는 500페이지는 훌쩍 넘기는 대장편이 많은 탓입니다. 두께만 봐도 먼저 질리는 느낌이거든요. 에도 시대물은 재미있긴 했지만 별로 취향이 아니었고요.
이 책 역시 거의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께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부 활동이 극히 적어진 요즈음, 이런 책이 집에서 진득하게 읽기에는 오히려 좋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고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미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탐정과 일반인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있으며, 추리력과 더불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관찰력을 선보이는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는 "탐정 사전"을 통해 존재를 알게된 뒤,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해 왔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하네요. 평상시 흠모하던 스타와 우연히 동석하여 식사를 했는데, 스타가 밥값까지 내 준 격이랄까요. 두 번째는 평균 이상되는 추리물로서의 완성도고요.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평균 이상의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전부 평균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전작을 꼭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성역"

이혼한 독신남으로 사립 탐정업과 조사로 먹고 사는 38살의 스기무라 사부로에게 기념할 만한 첫 손님이 찾아왔다. 이웃 맨션 파스텔 다케나카에 사는 독신 여성 모리타였다. 그녀의 의뢰 내용은 유령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것으로, 그녀의 아래층에 살다가 사망한 할머니 미쿠모 가쓰에를 꼭 닮은 사람을 보았는데 가난에 허덕이던 미쿠모 할머니와는 다르게 그녀는 유복해 보였다고 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조사의 의뢰비는 착수금 5천엔과, 2년 동안의 쓰레기장 청소 당번 대행이었다.

조사 시작과 거의 동시에, 스기무라는 곧 죽을거라는 전화만을 남기고 사라진 미쿠모 할머니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남겨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 죽지 않은 그녀가 지금 유복해보이는건 뭔가 인생 역전의 계기가 있었다고 추리하고, 옛 주소지에서 연을 끊다시피한 딸 역시 행방불명이라는걸 알아내 둘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는걸 알아내지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복권 당첨에 당첨된 할머니가, 딸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둘이 새로운 삶을 찾아 과거를 모두 버리고 떠났다는 결말까지 차분히 이어집니다.
이를 위한 중간중간의 디테일들도 꼼꼼합니다. 38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그런데 작중 배경인 2010년에 38살이면, 저와 동갑이네요. 호감도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배려를 소중히 여기는 스기무라 사부로도 무척이나 호감가게 그려지고요.

조금 특이했던건, 불쌍한 할머니를 염려하는 동네 주민의 의뢰와 조사 중 자상한 동네 주민들의 도움을 받는 따뜻한 분위기와 딸인 지독한 이기주의자 미쿠모 사나에의 표독스러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보였던 스타차일드 멤버들마저도 알고보니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는게 밝혀집니다. 이들에 비하면 사나에는 그야말로 자기만 아는 압도적인 악역이에요. 문제는 사나에같은 인물이 우리 주위에서 더욱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겠죠. 할머니의 무사는 축하할 일이지만 이런 딸과 함께 산다면, 결말은 안 봐도 뻔할 거라는게 무섭게 다가옵니다.

스타차일드 멤버인 벨과 사나에의 악연, 그로부터 비롯된 가노쿠라 풍아당과의 관계는 사족이었다 생각되지만, 이 정도면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희망장"

세상을 떠난 무토 간지는 죽기 전, 양로원 관계자와 아들에게 과거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고백했고 아들 아이자와는 스기무라에게 이 사실의 진위여부를 밝혀줄 것을 부탁했다. 주변인들을 통해 밝혀진건, 간지 씨가 쇼와 50년 8월, 젊은 여성이 습격당해 살해된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자와의 말에 따르면, 무토 간지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아이자와 가문으로부터 절연당한 뒤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도 탓으로, 그가 특정 여성에게 발끈하여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건 충분히 가능했을거라고 설명되지요. 하지만 스기무라의 조사로,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직접 표현한 적은 없다는게 곧바로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진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밝혀내기 위해 성실하게 발품을 팔아 단서를 찾는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 활동은 정겹습니다. 오래전, 35년 전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 거리를 헤메는데, 나름의 노하우가 눈에 띕니다. 음식점, 이발소, 미용실, 세탁소나 술가게 등 배달도 하는 업종의 가게 등을 돌아다니지만, 바나 스낵에는 기대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둑 모임이나 장기 살롱은 있으면 좋은 정보원이지만 마작이나 파친코는 그 반대이고, 편의점은 별로 도움이 안되지만 학원은 도움이 된다던가, 파출소에는 들르지 말아야 한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류의 조사를 한다면 참고할 만한 정보네요.

하여튼, 이러한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로 35년 전 강간 살해 사건의 범인과 무토 간지가 같은 아파트 '희망장'에 살았다는게 밝혀집니다. 처음 방문했던 술가게에서 정보를 얻었더라면 이후의 조사는 별로 필요가 없었지만, 이런 시행착오가 오히려 현실감을 더해줍니다. 또 이 과정에서 탐정은 아무리 일상계라도 비정할 수 밖에 없다는걸 전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차가운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인데, 굉장히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스기무라의 추리에 따른 가설도 그럴듯합니다. 35년 전 사건의 진범이 무토 간지였거나, 진범 가야노 지로의 아주 친한 지인이었을거다라는 가설이지요. 당연히 35년전이라고 해도, 경찰을 우습게 보면 안되니 두 번째 가설이 정답이고요.
그렇다면 왜 무토 간지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이상한 말을 했느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스기무라가 양로원 청소 스태프가 청소할 때 스포츠 타월을 접어 바닥에 까는 걸 보고 알아채게 됩니다. 무토 간지는 살인범을 본 적이 있어서, 그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양로원 청소 스태프 하자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알고 그걸 은밀히 드러내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최근에 일어났던 성폭행 미수 살인사건과, 35년전인 쇼와 50년 8월 사건 두가지가 마지막에 맞물리는 전개가 정말 멋집니다. 일평생 고독하지만, 정직하고 한결같이 살아온 무토 간지의 매력도 빛을 발하고요.

하지만 욕심이 조금은 지나친 느낌입니다. 35년전 피해자 다나카 유미코의 동생을 이야기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그녀는 원래부터 재였다. 사람의 모습을 한 재다."와 같은 멋드러진 묘사에 비하면 등장해서 하는게 없고, 묘사도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담아내기에는 지나친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5점입니다! 지금도 좋은 작품이지만 불필요한 요소를 들어내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아니면 다나카 유미코 사건도 더 깊숙히 파고들어 더 긴 호흡의 이야기로 전개하던가요. 그랬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텐데, 약간 아쉽습니다.

"모래 남자"

스기무라의 이혼 후 야마나시에서의 삶, 가키가라 스바루를 만나 조사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 등이 차분히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호토 가게 '이오리'의 주인 마키타 히로키가 이노우에 다카미와 불륜 끝에 사랑의 도피를 한 사건의 조사와 추리와 함께 진행되지요.

남편 마키타 히로키는 과거 문제아로 아버지에게 절연당했다, 지금 그의 사진은 남아있는게 없다, 사진을 확인조차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당연히 과거 문제아 가가와 히로키는 지금의 마키타 히로키와는 다른 인물이라는건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카미가 문제아 시절 과거를 노리코와의 친분 덕분에 알게 되었고, 돈이 궁해진 지금에 와서 그 정보를 협박의 도구로 썼으리라는 추리도 역시나 상상력 범주 안에 있고요.
하지만 이를 마키타 집에서 풍겨온 염소 냄새, 집 근처에 묘지가 있다는 상황 등과 연결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는 오싹합니다. 협박을 '공포'의 문제로 풀어나가는 감각,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공포, 후회를 드러내는 솜씨도 실로 발군입니다.

하지만 이노우에 다카미가 살아있었으며, 이 모든건 히로키의 부탁으로 벌인 연극이었다는 진상 이후부터는 시시해집니다. 히로키가 지나치게 착한 탓에 벌어진 일이라서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요. 한 번 희생양은 영원히 그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느껴졌거든요.
같은 이유로 진짜 히로키로부터 위협받던 가짜가 진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건 의외이기는 했지만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모든걸 알게 된 다카미가 어머니와 함께 사과했다는 후일담은, 결국 히로키의 연극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카미의 철없는 악의가 결국 모든 걸 망쳐버렸다는 뜻이니까요. 게다가 본인은 잘못을 느끼지 못하며, 잘못을 깨닫고도 결국 민폐만 끼치고 말았다는 점에서 아예 사악함을 뿜어냈던 "성역"의 사나에보다도 더 질이 나빠요.

결론내리자면, 사건보다는 스기무라의 과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던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도플갱어"

후쿠시마 사태를 일으킨 도호쿠 대지진을 소재로 한 작품.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태가 일본인에게 얼마나 공포였는지가 작품에서 은근하게 표현되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스기무라 사부로의 입을 통해 '일본은 키를 잃고 폭주할 것이다, 우리는 망망대해를 절망 속에서 떠돌 것이다'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대표적이지요. 소시민과 상대적인 약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미야베 미유키의 특성이 잘 드러난 말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핵심 사건인 유타카 실종 사건의 추리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지진으로 실종된 줄 알았지만 사실은 살해되었다는건 좀 뻔한 이야기죠. "브라운 신부"에서도 시체를 숨기려면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도 동기가 그의 결혼 결심이었다는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결혼을 결심하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고, 프로포즈를 위해 고가의 반지를 구입했으며 이를 범인이 유타카를 살해하고 빼돌렸다는 진상은 충분히 합리적이니까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작위적인 전개가 눈에 거슬립니다. 애초에 아스나가 스기무라에게 실종 조사를 의뢰한 것 부터가 작위적이에요. 스기무라가 그 의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조사를 한 것도 석연치는 않고요. 작 중 묘사되듯 '자원 봉사'로 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런 실종은 전문 단체에 의뢰하는게 맞는 상황이니까요.
마쓰나가가 유타카를 살해한 직후, 대형 재해가 때마침 벌어진 것 역시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재해가 일어난 후, 유타카가 프로포즈를 결심하고 , 그 탓에 마쓰나가와 트러블이 일어났다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사부로가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된 계기인 아스나를 괴롭히는 나쁜 친구들이 사건에 엮인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단서를 끄집어 내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억지스러운 느낌이 강했어요. 이 친구들이 등장하느니, 마쓰나가가 아스나에게 직접 연락하여 사귀자고 한 뒤, 그 징표로 비싼 반지를 선물한다는 식으로 풀어나갔더라면 더 어땠을까 싶네요.

명백한 살인 사건을 스기무라 사부로가 해결하는 정통 추리물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본격물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그만큼 본격물이 현대 사회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경찰도 아니고, 정식 탐정도 아닌 스기무라 사부로 수준에서는 더욱 한계가 느껴질 수 밖에 없지요.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집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11/29

회색 인간 - 김동식 : 별점 2점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가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꾸준히 업로드한 글이 인기를 얻은 덕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결과물입니다. 과거 하이텔 시기에나 존재했을 법한 이야기의 재림이네요. 올린 글의 분량만 따지만 거의 "태백산맥"에 육박한다니 그 열정과 노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이텔 시기 인기를 끌었던 "퇴마록" 등과는 명확히 다른 점은, 굉장히 짧은 꽁트, 아니 쇼트쇼트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야기들이 표제작을 포함하여 무려 스물 네 편이나 수록된 단편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 편의 이야기로의 완성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이야기들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기묘한 설정, 그리고 그 기묘한 설정 때문에 인간들의 집단 이기주의나 탐욕이 생겨나 결국 파국을 초래한다는 결말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기묘한 설정이라도 재미있다면 괜찮지만, 그냥 기묘하다는 상황에만 매몰되어버린 이야기들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건물이 급작스럽게 식인 괴물로 변하여 밖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식인 빌딩", 인간이 녹았다가 다시 돌아오면 완벽한 컨디션이 된다는 기적의 물 정화수가 대유행한다는 "흐르는 물이 되어"가 대표적이에요.
또 기묘한 설정에 기댈 뿐,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반전도 뻔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아우팅"에서 인류 모두가 인조인간이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차라리 연구소 경비병들만 진짜 인간이었다는 반전이라도 넣어 주었어야 했어요. 그나마 조금 신선한 반전들도 대체로 기존 상식이나 그때까지의 현실을 반대로 뒤집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괜찮아 보여도 읽으면 읽을 수록 식상해 질 수 밖에 없어요.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들"에서 나이를 먹지 않게 만드는 영원의 구가 사실은 저주였다던가, "공 박사의 좀비 바이러스"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무적의 재생력을 안겨다주는 선물로 사람들은 다시 인간이 되려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피노키오의 꿈"에서 피노키오의 소원이 인간이 되는게 아니라 건강한 소나무가 되는 것이었다는 결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반전이라도 있는 이야기는 조금 나은 편입니다. 특별한 반전 없이 인간미, 감동 쪽에 방점을 찍으려 노력한 이야기들은 더 엉망이에요. 표제작인 "회색 인간"이 대표적입니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납치되어 땅을 파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립니다. 먹을게 부족해서 문화는 사치였지만, 어느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 문화가 생겨난다는 결말입니다. 문화가 사라지면 인간도 아니라는 주제인데, 솔직히 억지스럽죠. 이런 상황이라면 집단이 생기고, 자체적인 법률이 생기는게 타당한데 그런 내용은 전혀 없이 그냥 살기 힘든 상황만 길게 묘사되는 것도 지루하고요.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도 추구하는 문화에 대한 욕구와 인간미는 "도박묵시록 카이지 외전 반장의 일일 외출록" 에서 훨씬 더 재미있게 잘 그려졌다 생각됩니다.
손가락 여섯개인 신인류를 낳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계획이 비선 실세의 농간으로 밝혀진 후, 손가락 여섯개인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생각이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꿈같은 이야기도 황당하기 그지 없고요. 괴물이지만 또 인간이기도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처럼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접했었던 설정도 많습니다. 어설픈 풍자, 별 것 아닌 내용을 길게 늘려쓴 이야기도 눈에 거슬렸어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이야기답게 반짝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들이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노인에게 나누어주기를 거부하자 노인이 자신이 부자라면서 통조림을 500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무인도의 부자 노인", 신에게 소원을 빌 당사자로 선택되는 개인에게 닥치는 집단 광기를 설득력있게 보여준 "신의 소원", 노인을 가상 세계에 모신다는 발상이 그럴싸 했던 "디지털 고려장" 등이 그러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후의 전개가 뻔하고 결말의 반전이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이거나 아예 없다는 단점은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

다행히 설정도 좋고, 전개도 괜찮으며 결말과 반전도 완성도 높은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재활용" 입니다. 돈만을 위해 살아온 두석구가 딸이 교통사고로 죽자, 13일 내 시체 세 구를 섞어 넣으면 한 명이 부활한다는 주술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생존은 랜덤이라 딸이 살아나지 못하자 두석구는 전 재산을 투자해서 13일 동안 이 주술을 계속 시도하고요.
그런데 영혼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영혼들은 두석구의 딸 부터 영혼을 찢어발긴다는 마지막 반전이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두석구는 딸이 살아날 때 까지 주술을 시도할테니 영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딸부터 처치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이를 고통스러워 하는 딸의 마지막 대사도 좋았고요.
쇼트쇼트로는 그야말로 완벽했던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베스트입니다.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의 대표작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합니다.

"보물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도 평균 이상입니다. 정대리가 가진 보물인 쇠구슬은 손을 대면 비가 오게 만듭니다. 김대리는 이를 훔쳐내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을 대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흐려지기만 할 뿐이고요. 그런데 아기가 손을 대자 지진이 발생하여 결국 집이 무너지고 맙니다. 원리는 비가 오는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날이 실현된다는 이야기지요. 기묘한 설정도 좋지만 제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았던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세 모녀, 한 사내와 협곡에 갇힌 김남우가 극심한 굶주림 끝에 식량으로 희생될 사람을 뽑는 제비뽑기에 참여하는 "협곡에서의 식인"도 기묘한 맛 측면에서는 꽤 괜찮습니다. 김남우의 편인줄 알았던 사내가 놀랍게도 급작스럽게 김남우를 살해하는데, 알고보니 그들 4명은 모두 가족이었던 반전 덕분입니다. 김남우가 가족을 경계하고 오히려 위협할까 두려워 남인척 김남우 편에 섰다가 배신을 했던 거지요. 살아난 가족이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는다는 마지막 한 방도 묵직하고요.
아쉬운건 에이즈가 지금은 그렇게 위험한 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좀 더 '천벌'에 가까운 병에 걸리는게 나았을 거에요. 그런 면에서는 "살인단백질 이야기"에 나왔던 프리온을 활용한 병이 어땠을까 싶네요. 식인으로 전염되고, 치사율 100%이니까요.

"지옥으로 간 사이비 교주"도 반전이 좋습니다. 사이비 종교 교주 두석구가 지옥에서 악마들의 부탁으로 죄인들에게 환생을 약속하는 환생교를 만들어 포교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 통제를 잘 하려는 악마들의 계획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나 1년 뒤, 절대자가 강림하여 두석구를 찢어 발기고 죄인들의 희망을 끝냅니다. 죄인들에게 어설프게 희망을 주었다가 큰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결말인데 아주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하여튼, 전체 평균해서 별점을 주자면 2점입니다. 모든 수록작 중 세네 편 정도가 중간 수준, 세 편 정도가 중간 이상, 한 편이 수작이고 나머지가 모두 기대 이하이니 이 정도가 적당해 보입니다. 반 타작도 하지 못한 셈이니 전반적으로 좋은 단편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일하면서,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 창작하여 발표한 작가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등단도 한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다음에는 보다 완성도있게 다듬어 발표해 주기를 바랍니다.

2018/07/08

모크샤, 혹은 아이를 배신한 어미 이야기 1,2 - 차무진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차무진 작가의 800여 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입니다. 2015년, 한국콘텐츠 진흥원에서 주관한 원작 소설 창작 과정에서 선정된 열두 편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군요. 국내 최대의 추리 소설 애호가 커뮤니티인 "하우미스터리" 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 전 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도서출판 들녘에서 출간된 책을 읽어보는 것도 오랫만입니다.
참고로, 정성을 다해 리뷰를 썼지만 사용하던 에버노트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다 날아가 버려 다시 쓴 터라 내용이 두서가 없고 요약된 내용이 많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는 작품인데, 이야기의 핵심인 "해인(미륵의 눈)"과 "메시아(정도령)", 그리고 정만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설정부터가 띄엄띄엄인 탓에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설정만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정도령" 이라고 불리우는 메시아가 태어났고, 태어날 예정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도령들은 비참하게 죽거나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하늘에서 점지한 "성모"가 정도령을 제대로 낳으려면, 관계할 때 "해인"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정도령을 성공적으로 출현시키기 위해 정도령을 보필하는 초인 "박마"가 해인을 찾아 바쳐 왔지만, 이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불사의 삶을 사는 "정만인" 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오랜 세월을 통해 자신이 해인을 가지고 성모를 범하면, 성모 속 정도령으로 잉태되어 불사의 삶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걸 알고 이를 계속 시도합니다. 불사의 삶이 끔찍해서요.

6.25가 끝난 직후 어느 날, 정만인은 불사의 삶을 사는 박마를 발견하여 그와 밀약을 나눕니다. 여태껏 수 차례 다시 태어나려 했지만 실패했는데, 성모 속에 잉태되어 있을 때 그도 가사 상태에 빠지는 탓이었습니다. 그 사이 성모를 보호하거나 아이를 지키지 못해서 낙태나 성모의 죽음 등이 일어났었지요.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성모를 지켜달라는 밀약입니다. 그가 정도령으로 태어나고 박마는 정도령을 모시게 되며, 정도령이 죽을 때 함께 죽으니 불사의 삶이 끝날 거라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박마는 정만인을 배신합니다. 배신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때 실패했던 정만인은 다음 성모가 해인을 가지고 도주한 후, 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아이가 죽어야 새로운 정도령이 잉태될 수 있기에 정만인은 아이를 납치하여 죽입니다.

여기까지가 1979년 김목사의 아들 소국이가 유괴되어 살해된다는, 이야기의 서두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현대로 넘어와 새로운 성모 준희가 유괴된 아들 늘해랑을 찾기 위해 마음 속 괴물 "탄하"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충동대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태연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고학력의 혼혈 스님 원정과 손을 잡고 사이비 종교 단체 교주인 "수벌"로 거듭난 정만인과 얽히게 된다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방대한 시대에 걸친 이야기가 시대별, 등장인물별로 두서없이 뒤섞어가며 전개하는 탓에 복잡하지만 쉽게 읽히며 그만큼 재미는 있습니다. 각 시대, 등장인물 별로 한 편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한 수준인데, 그 중에서도 해인에 대한 설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6.25 직후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왔습니다. 캐릭터부터 독특한 외팔의 괴녀 고무기부터 시작하여 다른 2명의 성모가 등장하고, 사악한 박마가 관 속에서 깨어났다가 익사를 반복했다는 내용은 이 부분만 따로 떼어 놓아 한 편의 근대 호러(?)로 만들어도 재미있겠다 싶을 정도로 여러모로 압도적이었거든요. 

자료 조사가 뒷받침 된 설정도 탄탄합니다. 제목부터가 정만인이 불사를 끝내기 위해 성모의 몸에 대신 잉태되면 성모, 어머니가 불길함을 느끼고 아이를 낙태하는 식으로 그 계획을 무위로 돌리곤 했다는 데에서 따 온 것으로 아주 인상적이고요.

하지만 아쉽게도 아주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단편 "비형도"와 마찬가지로, 좋은 설정에 비해 이야기 전개나 구성이 부족한 탓입니다. 이야기에 구멍이 너무 많아요.
우선 김목사가 박마라는게 밝혀지는 반전은 놀랍다고는 해도 이는 서두의 김목사 관련 이야기를 잘못 묘사한 것이라 사기에 가깝습니다. 김목사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 소국이의 정체, 해인이 무엇인지는 물론 소국이가 성모를 범하기 전에 하늘을 속이려고 8살 이하의 어린 아이를 죽여 그 피를 생명석에 바르는 "가인" 이라는 행위를 위해 죽었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 시점의 초반부 묘사에서는 이러한 정보를 하나도 전달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벌이 원흉이라는 것을 알 테니, 수벌을 만난 상황에서 바로 복수를 하는게 정상입니다. 수벌이 시키는대로 목숨걸고 김갈현을 찾을 이유는 없어요. 박마는 정도령을 보필하지 수벌 정만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요. 김갈현이 "해인"을 가지고 도망쳤기 때문에? 이는 정만인에 대한 복수와는 무관합니다. 나중에 찾아도 되지요. 병원에서 구태여 김갈현을 협박해 가며 목걸이를 빼앗을 이유도 전혀 없으며 자신이 박마라고 밝히기만 했어도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아울러 김목사 설정도 문제에요. 박마 김목사가 성모와 결혼하여 메시아 정도령을 낳았다면, 정도령이 죽을 때 박마도 죽어야 하는데 김목사는 여전히 불사라는게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처음에 정만인이 박마를 설득할 때 한 말이 잘못된 것일까요?

또 준희가 원정의 살인 현장을 목격한 후, 협박 때문에 입을 다물었더라도 남편에게까지 그것을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당장은 이야기하지 못했더라도 해인을 내 놓으라는 지시를 들은 시점에서는 비밀을 공유하는게 당연합니다. 살인범보다 남편을 믿지 못한다는건 말이 안되니까요.
반대로, 모순희가 죽기 직전까지 해인을 가지고 있었다면 범인이 그것을 가져간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선샤인 피플 잔당과 수벌은 왜 준희가 그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요? 모순희 살인 사건에 준희가 연루되었다는 건 이 시점까지는 정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준희가 자신의 목격담만 정우에게 이야기하고 해인에 대해서 숨겼다? 이것도 말이 안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경찰서에서 사건을 일으키느니 정우가 집을 뒤지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늘해랑의 유괴는 해인과는 무관한, 청선녀와 송팀장이 과거 선샤인 피플의 것이었던 눈먼 돈을 목적으로 벌인 범죄에 불과해서 괜히 이야기만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이후 "가인"을 위해 늘해랑이 살해될 지도 모른다는, 늘해랑의 여덟 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극적 긴장감도 가면 갈 수록 힘이 떨어지고요. 가인을 위해 죽는 아이가 메시아일 필요는 없다는게 후반부에 밝혀지기 때문이지요. 그 외에도 김목사가 봉인한 수벌이 어떻게 김정우로 부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 설정도 그닥입니다. 주인공 중 한명인 정원은 문제 투성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살인을 저지른 사이코 패스로 지금도 살인을 저지르곤 한다는 설정부터가 황당무계하며, 그와 관련된 일들 대부분이 억지스럽고 작위적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에 모순희 살인 사건을 목격당한 것, 해인을 손에 넣은 것 부터가 우연이니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그의 성욕에 관련된 묘사는 말초적인 자극을 위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읽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고요. 다른 캐릭터들 모두가 문제지만 정원 때문에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인다는게 놀랍기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온갖 고전들을 들먹이며 탄탄하게 구성한 설정도 결국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메시아 정도령에 얽힌 이야기로 한참을 풀어가다가, 결국 목적은 불사의 존재가 유한한 삶을 얻기 위함이었다는게 전부라는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전해주니까요. 수벌이 그동안 정도령이 실패한 이유를 분석하여 "바람길"을 열었다는 묘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와 흡입력은 갖추고 있는건 맞지만 여러모로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기에 감점합니다. 한국 장르 문학의 현재이자 최전선이라는 점에서 한번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긴 하지만, 분량과 가격은 좀 부담될 수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6/12/05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 미카미 엔 / 최고은 : 별점 2점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 4점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arte(아르테)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사진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로 홈런을 날린 작가 미카미 엔의 또다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유명 휴양지 에노시마에 위치한, 돌아가신 할머니의 "니시우라 사진관"을 정리하기 위해 찾아온 손녀 마유가 이런저런 일상 속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가는 내용입니다. 모두 네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제목에서처럼 '사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이야기에 녹여내었다는 점입니다.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가 책에 대한 정보를 활용하는 것 처럼요. 별다르지는 않지만 호기심을 자아내는 수수께끼들이 등장한다는 일상계 느낌의 전개와 소소하면서도 훈훈한 분위기도 "비블리아 고서당"스럽고요.

그러나 설정과 분위기만 비슷할 뿐 "비블리아 고서당" 수준에는 여러모로 미치지는 못합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내세울게 없는 탓입니다. 2장과 3장은 범인(?)이 너무 뻔하며, 4장은 설정이 극히 작위적이라 전혀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입부인 1장이 그나마 괜찮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 이하입니다.

탐정역이자 주인공이기도 한 가쓰라기 마유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시오리코씨의 안 좋은 부분인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을 극대화한 것에 더해, 대학 시절의 민폐 행각을 부각시킨 탓에 영 호감이 가지 않더라고요. 사진에 있어서도 대학 시절 전공했던 정도라 딱히 대단한 전문가라고 하기 어렵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추리 소설에 입문하시는 분들께는 적합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면 딱히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루이가 아직 사진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마유가 깨닫고, 이후 루이와 다시 만나는 마무리는 후속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다음 권을 읽을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마지막으로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1장

가쓰라기 마유는 에노시마에 위치한 니시우라 사진관을 찾았다. 폐암으로 사망한, 100년 동안 영업했던 사진관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외할머니 니시우라 후지코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정리를 시작한 마유는 '미수령 사진' 이라고 적힌 양철 상자를 발견했고, 그 속에서 '마도리 마사카즈 님'이라고 적힌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100여년전 사진과 70여년 전, 20여년 전, 그리고 지금 현재의 에노시마를 무대로 거의 25년 단위로 찍은 한 남자의 사진 4장과 필름 3개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 인물은 모두 동일 인물로 보이는데 합성은 아니었다.

마침 사진을 맡긴 마도리 마사카즈가 방문했고, 그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소중한 사진에 얽힌 수수께끼를 밝혀달라고 마유에게 부탁하는데...

'동일한 장소에서 찍은, 거의 25년 단위로 찍은 한 남자의 사진 4장'에 얽힌 수수께끼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첫 작품. 수수께끼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100여년전 사진과 70여년 전, 20여년 전, 그리고 지금 현재의 에노시마를 무대로 한 사진 속 인물이 모두 동일 인물로 보이는데 합성은 아니다! 라는 것으로 괴담 등에서 많이 변주되었었죠.

그러나 이 작품은 괴담이 아닌지라 나름 합리적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첫번째 사진은 에어브러시를 이용한 가필, 두번째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의 할아버지, 세번째는 아버지가 약간 분장한 것이고 네번째 사진 속 모델 마도리 마사카즈는 할아버지와 꼭 닮은 사람이었다'라는 겁니다. 특히 '에어브러시'라는 아이디어가 좋습니다. 합성보다는 한 발자욱 더 나아간, 사진이라는 설정을 활용한 아이디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로 모든 것이 바뀐 현재의 상황에서는 잘 모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 높기도 하고요.

물론 에어브러시로 그렇게까지 똑같게 사람을 그릴 수 있었을까?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이야기의 시작으로 아주 괜찮았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장

마유가 4년전 사진을 그만둔 계기는 소꼽친구로 인기 아이돌이었던 "루이"의 개인적 비밀(특정 사이비 종교를 믿는다는)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었다가, 그 사진이 유출되어 루이의 인생을 망쳐버린 과거 탓이었다.

그런데 마도리 마사카즈와 사진관을 정리하던 마유는 당시 사건에 연류된 선배 고사카가 비교적 최근에 찍은 루이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을 전해주기 위해 고사카를 다시 만난 마유는 고사카와의 대화를 통해 마유는 사진 유출의 진상과 이후 루이의 삶에 대해 알게 되는데...

루이의 사진을 누가 유출시켰는지? 에 대한 것이 핵심 수수께끼인데 사실 별 내용은 없습니다. 아날로그로 사진을 찍은 것을 전문 카메라맨이 된 아키호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즉 사진을 잘 모르는 다른 서클 사람들이 한통속이 되어 유출했다는 진상을 몇 년 간이나 알지 못하고 끙끙대었다는 것 부터가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합숙을 하느라 통신이 불가했다는건 알리바이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내용을 읽어보면 당시 마유가 서클 사람들에게 잘못한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해서 딱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정 이입도 하기 어려웠어요. 아무리 비공개 SNS라도 사진을 올린건 마유의 실수라는게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또 루이에 대한 설정도 딱히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소꼽친구, 엄청난 미남, 성공한 아이돌이라는 설정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루이가 추락하게 된, 사이비 종교의 신자로 교주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울러 해당 종교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더라도 루이는 분명 피해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더라도, 세간의 비난을 받고 은퇴할만한 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작중에서 본인이 계속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마침 사진은 좋은 계기가 된 것에 불과해 보이는데 만약 그렇다면 마유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필요가 없지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뭔가 있어보이는 마유의 과거사를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할 뿐더러, 과거사가 만화와 같은 설정으로 가득차 있어 전혀 와 닿지 않은 작품입니다. 점수를 줄 부분이 별로 없네요.

3장

기념품 가게 주인 겐지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있다. 그는 지금의 아내 요코에게 청혼할 때 필요한 자금이 없어서 삼촌 오사무와 함께 니시우라 사진관에서 은덩이를 훔쳤었다. 잠깐 빌려간다는 의미로 차용증을 써서 남겼었는데, 겐지는 마유에게 들키기 전 차용증을 빼돌릴 결심을 한다...

은은 과거 니시우라 사진관에서 일했던 오사무 삼촌이 현상 과정에서 나오는 폐약에서 추출한 것, 캐비닛이 일종의 미니 암실?이어서 그것이 열렸다면 증거가 남는다는 설정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사진관이라는 무대에 잘 맞는 소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후 이야기 전개는 영 별로입니다. 캐비닛과 함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겐지인데 뭐 이렇게 복잡한 설명이 필요했을지 잘 모르겠어요. 상세한 설명 없이 그냥 경찰을 부르는 게 빠른 방법이잖아요? 겐지가 은덩이를 훔친 것으로도 모자라 차용증까지 훔치려 한 것은 엄연한 범죄라 정상참작의 여지도 전혀 없고요.

그리고 캐비닛 속의 필름이 감광되었다 하더라도 열은 것이 겐지라는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단지 캐비닛이 열렸다는 증거 정도밖에는 안되죠. 시간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로 괜찮았던 소재를 억지스러운 전개로 망친 느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4장

마유는 정리 중 발견한 마도리 부자의 사진을 전해주기 위해 마도리 가문의 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마유는 아키타카의 아버지 료헤이가 아들을 대하는 매몰찬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발견한 여러 가지 이상한 점 — 겐지가 전해준 아키타카는 이전의 모습이 아니다, 별장과 본가를 아키타카의 사진이 온통 장식하고 있다, 부자의 사진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있다 등 — 을 토대로 아키타카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깨닫는데...

역시나 핵심 트릭은 사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료헤이와 아키타카가 찍은 사진은 아주 오래전 료헤이가 찍은 사진에 현재의 아키타카의 모습을 합성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합성'은 사진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뻔한 조작이라 트릭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어려우며, 이렇게 복잡한 공작을 할 필요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구태여 조작까지 해서 사진을 전시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현재의 아키타카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시해 놓는 것으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게다가 아버지가 얼굴을 바꾼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단점입니다. 너무나 미워했던 전처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탓이 컸다던가... 하는 식의 배경 설명이 반드시 필요했어요. 물론 그랬다면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 블랙잭이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의 후처 얼굴을 어머니 얼굴로 바꾸어 놓는 에피소드와 똑같은 내용이기는 했겠지만요.

아키타카가 아버지에게 강하게, 논리적으로 반항하는 결말 정도만 깔끔할 뿐, 여러모로 부족함과 억지가 많이 느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