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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12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9) 축배와 흉기 사이

추리소설에서 와인은 익숙한 소재입니다. 독살에 사용되기도 하고, 중요한 대화가 오가는 식탁에 오르기도 하지요. 하지만 와인 병 자체가 흉기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술병을 휘두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오히려 드문 소재입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와인병은 사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와인의 역사는 기원전 수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당시에는 암포라 같은 토기나 참나무통이 와인을 담는 용기였습니다. 두꺼운 유리병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 이후이고,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자리 잡은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이르러서였습니다.와인병의 모양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보르도 와인은 어깨가 각진 병을, 부르고뉴 와인은 둥근 어깨를 가진 병을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병의 실루엣만 보고도 어느 지역 와인인지 짐작할 정도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병은 와인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두껍고 단단한 유리로 제작됩니다. 자연스럽게 무게도 제법 나가고, 목 부분을 잡으면 손에 쥐기도 편합니다. 축하와 만찬을 위한 물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둔기로 사용하기에도 적합한 형태인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추리소설에서도 와인병은 종종 인상적인 흉기로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앤서니 호로위츠의 "숨겨진 건 죽음"입니다. 

유명 이혼 전문 변호사 리처드 프라이스가 자신의 집에서 와인병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현장에는 초록색 페인트로 적힌 ‘182’라는 숫자가 남아 있고, 탐정 호손과 작가 호로위츠는 그 숫자의 의미를 쫓으며 수사를 시작합니다. 여러 용의자가 저마다 충분한 살해 동기를 가지고 있어 마지막까지 범인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정통 본격 추리소설입니다.

작품 속에서 흉기로 사용된건 1982년산 샤토 라피트 로트실드 병입니다. 보르도 1등급 와인의 대표격으로, 흔히 프랑스 보르도 '5대 샤토' 가운데 하나로 불리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브랜드 중 하나이지요. 그 중에서도 1982년은 최고의 빈티지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아무리 와인병이 흉기로 적합했다 하더라도, 흉기로 쓰기는 구하기도 힘들고 너무 비싼 와인이지요. 이 보다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와인이 흉기로 등장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피쳐"입니다. 

이 작품은 사진가를 꿈꿨지만 월가의 변호사가 된 벤 브래드포드의 이야기입니다.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그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연인 게리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지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고, 프랑스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인기작입니다. 유난히 와인이 자주 등장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벤의 인생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와인이 함께하거든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클라우디 베이 소비뇽블랑입니다. 

클라우디 베이는 뉴질랜드 말버러 지역을 대표하는 화이트와인으로, 지금도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벤은 아내의 불륜을 이 와인 때문에 눈치챕니다. 와인을 잘 모르던 베스가 어느 날 갑자기 클라우디 베이를 사 왔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가게에서는 이 와인을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웃인 게리가 즐겨 마시던 와인이었고, 베스 역시 그에게서 선물받은 것이었습니다. 벤은 게리를 찾아가 같은 와인을 함께 마시다 말다툼 끝에 결국 클라우디 베이 병을 휘둘러 그를 살해합니다. 와인 한 병이 불륜의 단서가 되고, 결국 살인의 흉기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클라우디 베이 와이너리의 설립자는 더글라스 케네디와 친구였다고 합니다. 작가는 친구의 와인을 작품 속에서 최고의 소비뇽블랑이라고 극찬했지만, 그 와인을 살인의 흉기로 사용해 버렸기 때문에 설립자는 처음에는 못마땅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클라우디 베이 역시 함께 유명해졌고, 와이너리도 고액에 매각할 수 있었으니 지금은 무척 고마와하지 않을까 싶네요.

와인병은 원래 축배를 위한 물건입니다. 하지만 추리소설에서는 때로 사건의 단서가 되고, 때로는 살인의 흉기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와인병이라도 작품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평범한 식탁 위의 와인 한 병도 작가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클라우디 베이를 보게 된다면, 저는 아마 먼저 이 소설부터 떠올릴 것 같습니다.

# 시리즈 전체 보기

2026/07/04

Q.E.D Iff 증명종료 30 - 카토 모토히로

"Q.E.D."의 시즌 2라고 할 수 있는 "iff"의 마지막 권입니다. 

이전 권에서 토마가 가나에게 고백하길래 이번 권을 마지막으로 시리즈가 끝날 줄 알았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Q.E.D. UNIV"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합니다. 최근의 폼은 작가의 최전성기가 지났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시리즈가 계속된다는 것은 반갑네요.

이번 권에도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비교적 가벼운 입시 부정 사건이고, 한 편은 살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두 편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레스티지"

하버드에 합격한 가나는 브라이언 교수와 학장으로부터 입시 부정 관련 사건 조사를 의뢰받았다. 자동차 부품 회사 사장 넬리 게레로가 기부 입학을 위해 천만 달러 수표를 보냈는데, 아들 야엘이 불합격하고 자살했다며 학교를 고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수표를 받지 못했다.

넬리가 마약 카르텔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자, 입시 컨설턴트 시퍼가 천만 달러 수표를 학교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챙기려고 했던 것이 수표 분실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녀는 야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학교에 수표를 돌려주었지만 들통나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나 진짜 진상은 넬리가 야엘을 마약 카르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죽은 것으로 위장시켰던 것입니다.

진상은 나쁘지 않지만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야엘의 위장 자살과 시퍼가 학교에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 수표를 반납한 일은 경찰과 학교 측 조사가 미흡한 탓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습격한 마약 카르텔을 가나가 공격해서 물리친다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리즈 특유의 정보 제공도 기부 입학에 대해 약간 알려주고 끝날 뿐입니다. 제목의 "프레스티지"도 명예와 환상을 의미하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문이 닫힐 때"

암호화폐 투자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은 간호사 허버트는 투자 회사 사장 체스터 피멜 살해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체스터의 혈액만 낭자할 뿐, 시신은 없었다. 시신 없는 상태로 기소된 허버트의 재판이 시작되는데...

허버트가 체스터의 혈액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풀어내는 추리는 좋습니다. 안티에이징 클리닉에서 허버트와 체스터가 만났다는 것이 단서가 되거든요. 젊은 시절에 채혈했던 피를 주입하는 요법을 위해 확보했다는 것인데, 실제 미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꽤 높습니다. 체스터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한 체스터의 작전이었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교살한 체스터의 사체를 숨긴 방법도 앞서 나온 복선과 이어집니다.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키트에 대한 복선으로, 체스터의 사체를 마약 중독 사망자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개에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체스터의 변호사가 노력해서 허버트를 재판정에 세웠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허버트가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체스터의 부재로 인한 암호화폐 폭락이 멈추지도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길거리 마약 중독자의 시신이라도, 살해당한 시신을 마약 키트로만 검사하여 매장한다는 것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최소한 근처에 유명 투자자의 시신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근처 시신들은 철저하게 조사하는게 당연합니다.

허버트가 변호사를 살해하려 한 척 해서 체스터 사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아요. 두 사건은 관계가 없으니까요. 변호사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해서, 체스터를 죽이지 않았다는건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는 발상은 있지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멍이 많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키스 씬은 마음에 듭니다. 무려 80권의 연재 끝에 결국 성사된 데다가, 토마가 얼마나 괜찮은 녀석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려진 덕분입니다.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4/24

4의 재판 - 도진기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판사가 문제다. 인간의 한계다.

살인에 걸래?가 형사 재판의 물음이라면, 살인에 걸래, 교통사고에 걸래?가 민사 재판의 물음입니다.

선재는 약혼자 지훈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범인 양길의 유죄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황 증거 외에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길은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을 이유로 19억원에 이르는 보험금 수령에까지 성공했고, 선재는 절망에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로 유명한, 검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신작 장편입니다. 그러나 시리즈 작품은 아니고, 정통 추리 소설도 아닙니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과 판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파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유명 사건 -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여수 금오도 차량 추락 사망 사건 - 의 판례를 바탕으로 한, 독자의 분노를 자극하는 양길의 완전범죄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양길은 누가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험금까지 타내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비슷한 사건들을 접해는 왔었지만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검사 출신 작가답게 판사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하는 시선도 분명합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 주는 점도 좋았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소재 활용도 돋보입니다. 선재가 양길 측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복사 현장에서 적발되었지만 복사지가 스스로 구입한 자신의 물건이고, 변호사 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침입이 성립하기 어려워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신선했어요.
양길이 지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재판정에서 살인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명예 훼손이 성립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이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양길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양길이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된 뒤, 유죄판결을 받는 반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소설 자체가 아주 잘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개가 심심한 탓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선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고요. 형사재판 과정에서 선재는 철저하게 방관자에 머뭅니다. 피해자 측 유족인 이상 법정 공방에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실제 재판은 검사와 양길 측 변호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 후에는 문병일의 변호사 사무소에 위장 취업해 사건 자료를 복사해 빼돌리는 활약을 보여 주지만, 그것 역시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길의 재판 과정도 분량에 비해 밋밋합니다. 법정극에서 기대해 봄직한 강한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공방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양길의 무죄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전환점이 없고, 판사의 판단이 전부인 흐름이 이어져 답답합니다. 

등장인물 묘사도 아쉽습니다. 선재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은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맥거핀에 불과해요. 심리 묘사 역시 진부하고요. 게다가 장인규나 서찬휴는 작가 대신 법률 이론과 재판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기 위한 스피커에 불과합니다.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둘의 이야기는 비슷한게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고요.

결말도 신선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선재가 불법적으로 총을 손에 넣어 직접 복수를 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건 불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양길의 체포도 묘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결국 양길이 필리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결말도 한 줄 설명에 그치며 양길 시점의 묘사가 전무해서 아이디어에 비하면 잘 쓴 결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그리고 검사 출신으로 판사의 신성불가침(?)성에 태클을 걸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된 사건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판결도 있지만, 시체가 없거나 직접 증거가 없어도 유죄 선고가 내려진 사건도 있으니까요. 부산 시신없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법과 재판의 허점을 드러내는 사회파적인 성격, 형사와 민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는 점, 그리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세부 설정은 분명 장점이지만 소설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대폭 줄이고, 등장하는 사건은 작중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고 뒤에 별도로  소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의 "4의 재판"은 3심제를 벗어나더라도 네 번째 재판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닌가 싶네요.


2026/03/27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 찰리 돈리 / 안은주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는 변호사인 아버지 프랭크 무어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장기 복역수의 가석방 절차를 인계받아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도적'이라는 별명으로 40년 전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 토머스 미첼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미첼이 죽였다는 피해자의 시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찰리 돈리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작품은 현재 시점의 로리와 과거 시점의 앤절라 미첼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데, 앤절라 미첼 시점에서 ‘도적(The Thief)’이라 불린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과정이 더 볼만 합니다. 앤절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흐름이, 앤절라의 자폐로 인한 강박적인 심리묘사와 함께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덕분입니다. 앤절라가 헛다리 - 남편 회사의 새 고용인이 범인이다, 친구 남편이 범인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 를 짚어 나가다가 범인이 남편 토머스라는걸 깨닫는 장면까지의 빌드업도 좋습니다.

로리의 아버지 프랭크와 토머스 미첼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토머스 미첼이 60년 형을 선고받은 결정적 이유는 아내 앤절라 미첼의 실종 때문이었습니다. 도적이 저지른 연쇄 살인은 시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하는데 실패했거든요. 선고 후 토머스는 아내를 찾아 달라며 프랭크를 개인적으로 고용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않은 앤절라의 생존이 확인되면 자신은 풀려날 수 있으니까요.
프랭크도 처음에는 의뢰인인 토머스를 믿고 앤절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랭크는 토머스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 그리고 앤절라는 토머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앤절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함과 동시에 토머스를 속여 가며 가석방을 늦춰 왔던겁니다.
이는 현재 시점의 화자인 로리가 바로 토머스와 앤절라의 딸이었다는 그럴싸한 반전으로 이어지며,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만들고요.

하지만 절대로!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연쇄 살인마와 맞서 싸우는, 다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흔해빠진 양산형 범죄 스릴러에 불과한 탓입니다.
특히 주요 화자인 로리와 앤절라의 자폐 성향이나 강박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 묘사는 과할 뿐더러, 최근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캐릭터 유형을 그대로 반복하여 식상합니다. 친절하고 다정해 보였던 남편이 사실은 연쇄 살인마였다는 설정 역시 뻔하고요.

수사 과정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토머스가 증거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거의 십 년 동안 여성들을 수십 명이나 살해했는데 경찰과 검찰이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설정, 그리고 토머스를 체포하는 근거가 되었던 실종 여성의 신분증과 목걸이는 분명한 물증인데 이걸 단순한 정황 증거처럼 취급했던 재판 과정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토머스의 후반부 행동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는 40년 동안 복역한 뒤 가석방되자마자 곧바로 앤절라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캐서린과 그레타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무리한 행동을 해야 할 이유가 작품 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토머스가 시한부라든가 하는 설정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어요.
범행 과정 역시 허술합니다. 그레타를 살해하면서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는 등 명확한 증거를 남기는데, 이런 방식은 40년 전 이야기라면 모를까 2020년대에서는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CCTV도 있을테고요.
마지막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진상을 눈치챈 로리가 토머스의 집을 혼자 찾아가는 행동부터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토머스가 언제나처럼 희생자를 매단 교수대를 만들어 변태적인 놀이를 즐기다가, 숨어 있던 로리의 기습을 받고 죽는 결말은 허무함의 극치였고요.

불필요한 묘사도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 주인공들의 심리적 문제를 강조하는 묘사는 과할 정도로 반복되고, 캐스트너 인형 복원이나 플로이즈 다크로드 맥주 같은 이상한 취미와 집착도 이야기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카밀 버드 관련 설정은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고, 로리의 연인인 레인의 존재 역시 작품 전개에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앤절라가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범죄 전문가라는 로리가 이를 지나치게 늦게 눈치챈다는 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범죄 스릴러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지탱할 만큼의 독특함은 없어요.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6/03/14

추리 소설 속 자동차 : 알파 로메오 스파이더

그동안 추리소설 속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해 몇 차례 글을 써 왔습니다. 음식은 인물의 취향과 성격, 그리고 시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모아서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지요.

이번에는 조금 방향을 바꿔,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자동차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자동차는 추리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기도 하고, 완벽해 보이던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니까요. 때로는 밀실을 대신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고요. 차종과 색상, 구입 시기 같은 정보만으로도 인물의 성향과 처지를 드러노기도 합니다. 굴러가기만 한다는 이유로 오래된 고물 블루버드를 타고 다니는 탐정 사와자키처럼요. 낡고 오래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BMW’라는 별명답게 튼튼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물과 차가 절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최근의 예로는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의 미키 할러를 떠올릴 수 있겠네요.

이처럼 현대 추리소설에서 자동차는 사건과 등장인물과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입니다. 수많은 작품 속에 다양한 차가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야기의 핵심 장치로 기능하는 자동차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소개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자동차는 알파로메오 스파이더 3세대입니다.

알파로메오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발한 브랜드로, 레이싱을 통해 다져진 기술력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아 왔습니다. ‘운전의 즐거움’을 상징하는 브랜드로 자주 언급되며, 스포츠성을 중시하는 제조사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파이더는 1966년 처음 등장한 2인승 오픈 스포츠카입니다. 디자인은 피닌파리나가 맡았고, 유려한 곡선의 차체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영화 "졸업"에 등장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1993년까지 약 27년간 생산되며 12만 대 이상 판매된 장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중 3세대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생산된 후기형으로, 기존의 클래식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범퍼와 외관을 현대적으로 다듬어 1980년대 감각에 맞춘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전통을 이어 가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 세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모델이지요.

이 차가 등장하는 작품은 일본의 콤비 추리소설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1987년 작품 "그리고 문이 닫혔다"입니다.
오카지마 후타리는 두 명(이노우에 유메히토, 도쿠야마 준이치)의 합동 필명으로, 이름의 유래는 ‘재미있는 두 사람’(오카시나 후타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소재를 도입한 본격 추리물로 유명하며, 대표작으로는 "클라인의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는 피해자의 모친이 사건 용의자 네 명을 핵 셸터에 가둔 뒤 진상을 밝혀내려 한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 속 피해자 사키코의 애차가 바로 알파로메오스파이더고요. 세대가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발표 시점이 1987년이고 사키코가 부유한 집안의 딸로 최신 유행과 명품을 선호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 판매 중이던 3세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려한 빨간색 오픈 스포츠카는 제멋대로이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사키코의 성격과 잘 어울립니다. 유이치와 드라이브를 하다가 일부러 차를 세우고, 루프를 연 채 키스를 나눈다는 묘사를 통해 관심받기를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그녀의 모습을 한층 선명하게 드러내지요. 이는 2인승 오픈카라서 가능했을 행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자동차는 단순히 이러한 사키코의 성격을 상징하는 소품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녀가 절벽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을 당시 타고 있던 차가 바로 이 알파로메오였고, 사건의 실마리 역시 차량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실린 흑백 사진 속 인양된 알파로메오와, 사키코가 생전에 찍힌 컬러 사진 속 차량을 번갈아 보던 유이치 일행은 운전석 시트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두 사진 모두 차량의 왼쪽에서 촬영되었고, 좌핸들 차량이므로 운전석은 카메라 쪽에 자리합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끌어올린 차량의 시트는 컬러 사진보다 훨씬 뒤로 밀려 있습니다. 사키코가 직접 운전했다면 시트 위치가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사건 당시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은 인물이 사키코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동차는 단순한 배경, 소품이 아니라 소설의 추리적 핵심 장치로 사용됩니다. 시트 위치라는 사소한 차이가 사고사라는 견해를 뒤집고, 등장인물들의 알리바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드니까요.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시각 현장에 있던 네 명 중 타다시는 사키코를 살해한 뒤 차량에 태워 절벽까지 이동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다시와 치즈루, 아유미는 이후 함께 절벽에서 차량을 발견했지만, 차 안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세 사람은 계속 함께 있었기 때문에 타다시가 차량을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반면 그 시간대에 유일하게 자리를 비운 인물은 유이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이치가 범인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사건 초반에 별장을 떠났기 때문에 살해를 실행하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으니까요.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요. 누가 언제 운전대를 잡았고, 사키코의 죽음은 어떻게 연출된 것일까요. 그 진상과 트릭은 "그리고 문이 닫혔다"를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추리소설을 읽으실 때 인물들의 대사뿐 아니라 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도 한 번쯤 눈길을 주시면,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2026/02/20

꽃다발은 독 - 오리가미 교야 / 이현주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세는 어린 시절 과외 선생이었던 마카베의 협박범을 잡기 위해 기타미 탐정 사무소를 찾았다. 소장 대리인 기타미는 기세의 중학교 선배였다. 마카베가 의뢰를 망설여서 기세는 직접 사건을 의뢰했고, 조사를 통해 협박은 마카베가 저질렀다는 4년 전 강간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났다. 마카베는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마카베는 모든 걸 잃고 학교마저 그만둔 채 지금에 이르렀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일본의 범죄 스릴러입니다. 분량이 비교적 간결한 편이라 집어들게 되었네요.

이야기는 결혼을 앞둔 마카베에게 익명의 협박장이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협박은 4년 전 그가 저질렀다는 강간 사건과 관련되었고, 협박범은 당시 피해자로 추정되지요. 그러나 마카베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세도 그가 누명을 썼을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기타미의 조사 과정을 통해 독자들도 ‘마카베는 억울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요. 이렇게 '원죄(엔자이)'를 다루는 부분은 살짝 사회파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뒤이은 전개는 마카베가 정말 결백한 인물인지?에 대한 의심을 싹트게 하여 흥미롭습니다. 마카베의 모친도 그의 무죄를 믿지 않고, 마카베 가족이 왜 합의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 - DNA 검출 -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기세를 통해 소개된 마카베라는 인물과는 너무 다른 이야기라서, 독자로서는 놀라움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더 놀랍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사건을 뒤집어 버리는 덕분입니다. 우선, 4년 전 사건은 피해자였던 나가노 가나미의 자작극이었습니다. 마카베에게 푹 빠진 나머지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목적이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결국 성공해서 마카베와 결혼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협박장은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나미의 아버지 나가노가 마카베를 돕기 위해서 보냈던 겁니다. 이렇게 독자가 자연스럽게 믿어온 전제가 뒤집히는 순간의 파괴력은 상당합니다. 이 반전이 결혼식 직전의 마카베에게 진상을 알릴지 말지에 대한 딜레마로 이어지는 결말도 충분히 흥미롭고요. 

그리고 반전은 협박장이 두 종류 - 강경한 경고와 정중한 문체 - 였다는 단서로 뒷받침되는데 이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기타미와 기세는 강경한 경고는 마카베에게 보냈고, 가나미가 받아볼 수 있는 협박장은 정중한 문체로 보냈다고 추리했습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나가노는 처음에 가나미에게 강경한 경고가 전달되도록 협박장을 보냈습니다. 부부의 이름으로 동거 중이라면 자연스럽게 아내가 우편함을 확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는 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 경고가 효과를 보지 못해서, 마카베에게 정중한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겁니다. 이렇게 등장인물은 물론 독자까지 공정하게 제공한 단서로 속여 넘기는데 성공했다는게 아주 좋았어요.
가나미가 마카베를 옭아매기 위해 벌였던 몇 가지 장치 - 당시 마카베가 연인과 시간을 보냈던 러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DNA를 손에 넣었다는 등 - 도 설득력있게 설명되고요.

진상을 드러내기 위해 기타미가 벌이는 조사의 상세함도 최고 수준입니다. 주로 탐문과 관계자 면담이 중심이지만, 기타미는 피해자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마카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보를 캐 내기까지 하는데 이는 법대생 기세의 입을 빌어 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선이라고 설명되거든요. 그야말로 일반 '탐정'이 조사할 수 있는 한계를 그려낸 느낌이에요.
개인이 받은 '협박장'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소재를 다룬 점도 현실적이라서 마음에 들었고요. 이 역시 일개 탐정이 해결할 수 있는 최대치의 범죄일테니까요.

그러나 마카베가 받는 협박의 원인이 4년 전 사건일 수밖에 없는 탓에 협박범이 그 사건의 피해자나 관계자일 거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인 가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길어서 중반부는 다소 지루합니다.  
아울러 중학생 시절부터 탐정으로 활약해 왔다는 기타미의 설정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저해합니다. 굳이 필요했던 설정은 아니었어요. 기세와 기타미의 1인칭 시점을 오가는 전개도 불필요해 보였고요. 

그래도 반전을 중심에 둔 일상계 범죄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합니다.

2026/01/10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2025) - 라이언 존슨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드 신부는 몬시뇰 윅스 신부가 지배하는 일단의 추종자들 중심의 성당 보좌로 부임했다. 그는 윅스 신부의 비정상적인 운영과 범죄에 가까운 행동에 분노를 쌓아가다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뒤  윅스 신부가 미사 중 밀실에서 살해당하자 범인으로 몰렸고, 유명한 탐정 브누아 블랑이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지만 윅스 신부의 부활 후 정원사 샘슨의 죽음, 의사 냇 박사의 죽음이 잇달아 일어나는데...

미국 넷플릭스 전용 장편 영화인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 최신작입니다. 그런데 분위기와 접근 방식은 전작들과 꽤 다릅니다. 전작들은 브누아 블랑이 직접 휩쓸린 사건을 추리해 나간다면, 이번에는 주드 신부를 도와 사건을 풀어나가는 조력자일 뿐이라는 점에서요. 작품의 주인공은 주드 신부거든요. 비교적 가볍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였던 전작들에 비해 종교와 신앙, 개인의 분노와 죄책감 등 묵직한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도 차이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주 괜찮습니다. 고전 본격물 팬이라면 만족할 수 밖에 없는 밀실 트릭이 펼져지는 덕분입니다.

게다가 정보 제공이 공정하다 못해 노골적입니다. 영화에서 존 딕슨 카의 “할로우 맨(국내 출간명 "세 개의 관")”에 등장하는 밀실 트릭 강좌가 직접 인용되기 때문입니다. 브누아 블랑은 장치 트릭 설명에서 멈추지만, 이 뒤에는 '시간차 트릭(살인이 발생한 시점과 발견된 시점이 다르다)'가 이어지는데 실제 범인은 이 트릭으로 범행을 저질렀거든요. 마사는 흉기인 칼 머리의 악마 장식과 동일한 장식을 윅스 신부 미사복 등에 미리 꿰메 두었습니다. 그리고 밀실로 향한 윅스 신부가 항상 마시는 술에 약을 탔고, 술을 마신 신부가 쓰러진 후 피 주머니를 터트려 죽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의사 냇 박사가 상태를 확인하는 척 하다가 악마 장식을 떼고 진짜 칼로 찔러 죽였던게 진상이지요.
이를 진범이 아니라 주드 신부로 혐의를 돌리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윅스 신부의 부활을 그린 불가능 범죄도 고전 본격물스럽습니다. 당연히 시체를 바뀌치기한 것이고(대역은 당연히 윅스 신부와 닮았고, 관을 만들고 나중에 죽은 샘슨이지요) 트릭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주드 신부가 신앙심과 개인적인 분노 사이에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라서, 그가 보고 듣는 정보가 어느정도 왜곡되었다는걸 활용하여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그가 ‘부활한 몬시뇰을 자신이 죽였다'고 믿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정말 극적으로 잘 연출했어요.

한편으로는 8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유산을 둘러싼 보물 찾기도 병행되는데 이 역시 관객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유일한 단서인 ‘이브의 사과’를 분해한 뒤, 나중에 그게 일종의 '보석함'이었다는걸 드러내는 식으로요.

동기도 설득력이 높습니다. 마사는 성당을 지키기 위해 윅스를 죽였지만, 동시에 그가 부활한 것처럼 꾸며 성당을 되살리고자 했던 겁니다. 윅스 신부가 입을 열면 경력이 끝장날 위기에 빠진 냇 박사가 실행범으로 동참했고요. 그러나 냇은 8천만 달러짜리 보석 앞에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샘슨을 죽인 뒤, 마사까지 죽이려 했지만 되려 그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를 그리는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워낙 유명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 시리즈답게 이번에도 배우들 캐스팅이 엄청 화려한데, 마사 역의 글렌 클로즈는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평생 헌신했으나 내면에 분노를 품은 인물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표현해 냅니다. 주드 신부 역의 조쉬 오코너는 흔들리는 신앙과 불안한 정신 상태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조쉬 브롤린이 연기한 몬시뇰 윅스 역시 광기와 카리스마를 동시에 보여주며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다른 배우들 연기도 다 좋아요.

그런데 너무 길다는 단점은 큽니다.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조쉬 신부가 윅스 신부와 그의 추종자들을 만나 여러가지 관계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장황하게 보여주는 탓입니다. 물론 인물들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윅스 신부가 추종자들을 마지막에 협박했더라도 경력을 잃을 위기에 빠진 냇 박사와 작가 리오 말고는 동기가 있는 인물이 없습니다. 장애가 있는 시몬이 실행범일리는 없고(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걸 보여주어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하지만), 베라 변호사는 아버지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설명해주지 않아서 동기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즉, 이런 인간관계는 관객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사족입니다.
신앙심과 개인적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드 신부의 딜레마 역시 흥미롭지만 이렇게 길게 풀어낼 정도로 재미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드 신부의 정신력이 너무 약하지 않나 싶은 생각만 들어요.

브누아 블랑의 매력도 잘 드러나지 못합니다. 그는 진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사의 자백을 유도하는데, 이는 정의 구현에 충실했던 그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거든요. 피도 눈물도 없는 추리 기계가 갑자기 따뜻한 남자로 돌변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마사가 용서와 구원의 이미지를 남긴 채 생을 마감하는 결말 역시 식상할 뿐 아니라, 끝까지 종교적 의미를 강조하는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지막에 보석이 주드 신부가 만든 십자가 그리스도 상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부분 역시 뻔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볼거리가 풍부하다는건 분명합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즐길거리가 많아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작보다는 훨씬 좋습니다.

2026/01/02

법의 체면 - 도진기 : 별점 2점

안녕하세요, 2026년 새해가 밝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 처음으로 리뷰를 올리는 작품은, 척박한 한국 본격 추리물 시장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과 "완전범죄" 두 편은 좋습니다. 법을 잘 아는 작가가 법에 대한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진기 작가만 쓸 수 있을 법한 작품이에요. "완전범죄"는 본격물을 방불케 하는 추리가 펼쳐지기도 하고요.
"애니"는 다소 독특한 설정의 SF인데, 이 역시 설정만큼은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당신의 천국"과 "행복한 남자" 두 편은 한마디로 망작이었고, 앞서의 세 편 역시 전개와 묘사 등 소설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빼어난 설정과 아이디어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작가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점수를 줄 만한 흥미로운 지점은 분명 있는데, 아쉽게도 단점이 더 많습니다.

수록작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

호연정 변호사에게 변상일이 찾아와 자신의 장물 취득 사건 3심 변호를 의뢰했다. 변상일의 유죄가 확실했지만, 시한부 인생이라는 변상일의 청에 못 이겨 호연정은 사건을 맡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상고는 기각되었다.

그러나 상고 기각 확정 후, 변상일이 강원도 홍천에서 일어났던 ‘청테이프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증거는 현장에서 발견된 변상일의 쪽지문이었다.

호연정 변호사 시리즈 단편입니다. 변상일의 조작으로 유죄가 확정된 장물 취득 사건이 일어난 날짜가 청테이프 살인사건 발생 일자와 같아서, 변상일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지만 풀어줄 수 없는 딜레마를 다룹니다. ‘법의 체면’이라는 제목 그대로이지요. 법관들은 체면 때문에 이전 판결을 뒤집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는 굉장히 흥미롭고, 변상일이 과거 음주운전 사고로 딸과 아내를 잃었는데, 음주운전 가해자 장봉호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탓에 장봉호와 법에 복수하려고 결심했다는 서사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변상일의 범행 과정을 1인칭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처럼 묘사한건 반칙입니다. 독자는 변상일이 진범이 아니라고 오해하게 되니까요. 전개에 필요했던 부분도 아니니 빼야 합니다. 마지막 변상일의 자살도 좋은 마무리는 아니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을 잘 풀어냈지만,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아쉽습니다.

당신의 천국

국회의원 최명환에게 상담 차 장애가 있는 박성혜라는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명환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의 거의 대부분은 막장 드라마를 쓰다가 시민단체로 고발당하고 취조당한 끝에 자살 시도로 몸을 망쳤다는 박성혜의 1인칭 고백입니다.

그러나 장황한 고백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낮고 시시합니다. 박성혜가 최명환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무슨 논리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최명환을 살해하는 방법도 생수통에 독을 풀었다는 것인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자가 생수통에 어떻게 약을 풀었는지, 청산가리는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묘사도 문제입니다. 28살 여성의 한 서린 독백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건질 만한 점이라면 박성혜가 ‘신시아’라는 필명으로 썼다는 막장 드라마의 내용뿐인 막장 범죄물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완전범죄

석지연은 동거하던 직원 방미래 과실치사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사인은 의심할 바 없는 뇌출혈이었고, 방미래가 술에 취한 줄 알아 방치했다는 변명은 설득력 있어 보였다.

의사 출신 김 검사는 피해자가 거액의 질병 사망 보험에 가입했다는 점을 근거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기소하는데...

과실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 완전범죄가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이자, 법정에서의 공방이 벌어지는 법정물 단편입니다.
작 중, 김 검사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동기. 단지 직원 방미래에게 숙식을 제공할 뿐인 사장 석지연이 그녀를 살해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2. 범행 방법. 마침 그 시간에 뇌출혈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김 검사는 첫 번째는 거액의 보험으로, 두 번째는 평소 피해자에게 뇌출혈 전조 증상이 있다는 점을 눈치챈 범인이 보험 가입을 유도했고, 뇌출혈이 일어났을 때 방치했다는 답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방미래의 연인 류소이의 증언 등을 통해 법정에서 전조 증상은 2개월 전 부터 있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이러한 본격 추리적인 재미에 더해 법적인 딜레마 부분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의사 출신인 김 검사는 방미래의 의료 기록을 보고 그녀가 뇌출혈을 일으켰을 때 거의 즉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는 석지연이 방미래를 방치했던건 방미래의 죽음과 인과관계가 없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녀를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본격물적인 요소와 법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딜레마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나 황 판사가 의사인 아내를 통해 방미래의 사인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에 대한 극심한 혐오로 이를 숨긴 채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결말은 작품을 완전히 망쳐버립니다. 아쉽기만 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애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던 동한은 금사원 박사의 연구에 피험자로 응모했다. 하룻밤에 한 사람의 한 평생에 대한 꿈을 꾸게 해 주는 ‘영생’ 실험이었다.

설정은 정말 멋집니다. 한 평생의 꿈을 꾸게 하면 결국 그것이 영생에 가깝다는 발상은 정말 혹할 만 하니까요. 친구 수민에게 사 주었던 전기 충격기로 뇌에 삽입된 칩을 제거한다는 결말도 작가의 작품치고는 보기 드물게 깔끔합니다.

하지만 연구로 만들어진 ‘꿈’에 자아가 생겨 본체를 지배하려 한다는 전개는 뻔합니다. 설명도 충분하지 않아 와 닿지 않고요. 애니와의 사투 역시 박진감은 넘치지만,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탓에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설정과 마무리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다른 작품들도 이 정도로만 정리되었다면 훨씬 좋을텐데 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행복한 남자

꽃뱀에게 당한 한 남자의 약 반년에 걸친 일기 형식을 빌린 독백으로 내용도 뻔하지만, 그나마의 설득력조차 낮습니다. 문체가 30대 남자의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구식이고, 과장되고 낡은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맞는 결말 역시 식상하며 전혀 현대적이지 못합니다.

낡은 설정을 낡게 풀어낸, 새로운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탓에 2025년에 읽을 이유가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25/09/13

속임수의 섬 - 히가시가와 도쿠야 / 김은모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사야카는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유언 집행을 위해 가문의 별장이 있는 비탈섬으로 향했다. 유언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사촌 쓰루오카, 그리고 쓰루오카를 찾아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와 함께였다. 그런데 가문 일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공개한 다음날, 쓰루오카는 전신이 골절되어 살해당했다. 태풍으로 경찰이 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카오와 사야카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고전 본격 추리물의 전형적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풍으로 고립된 외딴섬 ‘비탈섬’, 기묘한 외형과 구조를 가진 별장 ‘화강장’, 그곳에 모인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일가, 그리고 명탐정의 등장까지 모두 고전 추리물 애호가에게 익숙한 클로즈드 써클 설정 그 자체입니다. 

설정뿐 아니라 제시된 수수께끼도 본격적입니다. 23년 전 낚시 중 물속에서 사람이 뱃전 위로 튀어 올랐던 괴이한 사건과 그때 목격된 ‘용’의 정체, 최근 벌어진 쓰루오카 전신 골절 살인 사건, 중정에 나타난 오두막과 빨간 도깨비, 전망대에서 사람이 사라진 수수께끼, 그리고 기묘한 화강장의 구조 등 여러 의문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수수께끼는 결국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고요.

그 중에서도 화강장의 구조가 ‘책을 읽는 사람’을 본떠 설계되었고, 그 구조가 핵심 트릭이라는 진상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위치가 중정이며, 그곳에 숨겨진 거대한 팝업북이 흉기였다는 사실을 다카오 등이 구조를 파악하며 밝혀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덕분입니다. 현재 전망대 창은 ‘두뇌’ 역할을 하는 서재 앞에 있어 얼굴의 ‘이마’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눈’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추리도 설득력있었고요. 사야카의 눈을 피해 전망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바로 이 공간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AI로 그려본 아래 이미지 참고하세요).

23년 전 사건에 대해 가문 사람들이 침묵했던 이유도 잘 설명됩니다. 사이도우지 도시로가 살해된 뒤 범인이 절벽 끝에서 사라지고, 게이스케의 익사체가 밀려왔으니, 일족은 ‘게이스케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투신 자살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드러난 진상과 트릭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23년 전 사건의 실제 경위는 이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도시로를 살해한 뒤 절벽에서 로프를 매고 뛰어내렸고, 이를 막으려던 게이스케가 함께 추락했습니다. 쓰루오카는 캐러비너로 로프를 고정해 무사히 착지했지만, 게이스케는 로프 반동으로 낚시배 위로 튀어 오른 것입니다. 당시 목격된 ‘용’은 잘려진 로프였고요.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설정은 한 마디로 무리입니다. 안전하게 로프를 타고 내려가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도박에 가까운 방법을 택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쓰루오카가 별장을 통해 되돌아오기 위해 이용한 동굴 통로를 일족이 전혀 몰랐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쓰루오카가 그 통로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 배에 함께 있던 학생 히로시가 기억을 잃자 그를 게이스케의 대역으로 삼아 23년간 속여왔다는 설정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최근 사건의 흉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중정에 설치된 거대한 팝업북 장치입니다. 사이도우지 출판사의 첫 동화책을 재현한 이 구조물은 전망대의 책과 연동되어 작동했고, 게이스케는 이 장치를 이용해 쓰루오카를 중정으로 유인해 압사시켰습니다. 피투성이 쓰루오카의 시신이 오두막 모양 팝업에 걸려 올라오자, 이를 미사키가 ‘빨간 도깨비’로 착각했던게 진상이고요. 그러나 이 팝업북 트릭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입니다. 이 정도 크기와 무게의 장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이 없고,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무도 소음을 듣지 못했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다른 일족들이 이처럼 거대하고 값비싼 구조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장황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전 본격물처럼 ‘일족’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사건에 관여하는 인물은 피해자 쓰루오카와 범인 게이스케 뿐입니다. 다른 등장 인물들, 특히 도라쿠 스님은 등장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작가 특유의 유머를 곳곳에 섞은 문체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웃음도 유발하지 못합니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역시 시덥잖은 유머만 남발하는 가벼운 남자로 그려져 도무지 명탐정으로는 보이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추리물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트릭과 이야기의 완성도가 턱없이 부족한 졸작입니다. 심지어 길기까지 하니 추천하기 어렵네요. 이 작가 작품도 더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25/08/23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이진아 : 별점 1.5점

미치오, 교코 부부는 아들 가나타를 무차별 살인범에게 잃고 삶이 무너졌다. 껍데기처럼 살아가던 교코는 ‘영원의 소리’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한 뒤 활기를 되찾고, 딸 가온도 엄마를 따라 단체를 드나들게 되었다. 이를 사이비로 확신한 미치오는 막으려 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미치오 역시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단체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이후 4년여 동안 종교 활동에 매달린 가온은 사회와 멀어졌고, 단체를 믿지 않는 이리에 슌타로와 교제를 시작한 뒤 믿음도 흔들렸다. 그런 가온이 교단 내부 인물 모가미의 범죄를 신고하여 교코는 배신감에 절규했다. 그러나 교코도 모가미가 집에 난입해 난동을 피우자 가온을 구해냈고, 이를 통해 다시 가족은 하나가 될 기회를 잡는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이후 사이비 종교에 깊이 빠져드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소설입니다. 

가나타가 초등학생 연쇄 살인범에게 습격당하는 도입부, 미치오 시점으로 아내 교코의 극심한 변화가 그려지는 서두, 그리고 교코 시점에서 세뇌된 상태를 그린 중반부까지는 꽤 인상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이비 종교의 무서움을 한껏 느낄 수 있거든요.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 찾아온 공허와 슬픔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위안으로 변질되는지와, 이를 통해 그들의 얄팍하고 보잘것없는 주장과 세뇌가 얼마나 피해자들에게 파고드는지, 가족을 어떻게 망쳐버리는지를 잘 그려낸 덕분입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삶이 무너진 뒤 사이비 종교로 위안을 찾는 엄마, 그 엄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종교 단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딸, 그리고 가족을 지키려다 결국 종교 활동에 동참하게 되는 아빠라는 조합도 절묘해요. 이 조합과 설정은 사이비 종교의 전파력과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실망이 더 큽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대했던 추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탓입니다. 가나타 사건에 의외의 진상이 있지도 않고, ‘영원의 소리’가 행하는 세뇌, 사기와 같은 범죄 방식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특히 사이비 종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변화시키는 배경 장치일 뿐입니다. 모가미의 범죄도 단편적인 사건으로 그치고요. 종교 단체가 악의 실체라는걸 드러내지도 못하고, 극적 반전도 없으니 독자가 단서를 따라가는 추리적 재미도 찾을 수 없는건 당연합니다.

미치오 시점, 교코 시점에서 가온 시점으로 이어지는 전개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서로의 시점이 교차되며 시너지를 내는게 아니라, 아예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분명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미치오가 시점 변화를 통해 가족에게 냉담하고, 대화도 거의 없는 이기적인 꼰대남으로 돌변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범죄 피해자 가족을 돕는 이노우에 변호사와 자원봉사자 마코토와의 에피소드도 불필요했고요. 이럴 바에야 미치오, 교코 시점을 대폭 줄이고 그냥 가온 시점의 성장기로만 다루는게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상실과 불안이 어떻게 왜곡된 믿음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심리 드라마, 가족 심리극이자 가온의 성장기로는 볼 만한 구석이 있지만 범죄·스릴러 장르로서의 매력은 전무하여 대폭 감점합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솔직히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에요.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2025/08/01

동트기 힘든 긴 밤 - 쓰진천 / 최정숙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살해당한 남자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옮기던 남자가 체포되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 장차오로, 피해자 장양과 금전 관계로 다투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경찰의 권위에 눌려 허위 증언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함과 더불어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에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경찰은 장차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 천재인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0여년 전 있었던 허우구이핑 변사 사건 및 초등학생 아이 성상납이라는 추악한 범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서서히 드러난다...

중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폭력, 권력형 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초등학생을 성상납하는 추악한 범죄가 이루어졌음에도, 대기업 회장과 고위 정치인이 결탁하여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며, 주요 수사 관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이 20여 년 전인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이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쑨훙원의 비서 후이랑과 공안 리젠궈가 결탁하여 허우구이핑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유력한 증인이었던 딩춘메이도 살해하며, 딩춘메이를 살해한 왕하이쥔마저 죽이면서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는 과정은 범죄, 수사물로 충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전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입니다. 이처럼 극심한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수사를 이어가는 장양과 주웨이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요.

결국 사건이 영원히 은폐되나 싶었지만, 장양, 주웨이, 천민장, 장차오가 힘을 합쳐 거짓 살인 사건을 만들어 이를 공론화하는 전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양이 자살한 뒤, 그 시간에 알리바이를 만든 장차오가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목을 끈 다음, 시체를 드러내는 도입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동 성매매를 했던 고위 정치인 샤리핑의 친자 검사를 비밀리에 진행해, 그가 피해자에게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 절정 부분의 쾌감도 강렬하고요.
샤리핑이 최종 악역이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흑막이 존재해서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고, 장양의 조력자들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축인 허우구이핑 사건을 다시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양과 주웨이, 천민장의 우정과 의리, 정의감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사파가 지배하는 무림을 정의롭게 되돌리기 위해 나서는 영웅호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느껴졌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이 곳곳에 보입니다. 시한부 인생인 주인공이 자살했지만, 이를 살인 사건으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아요. 심지어 자살 방법과 동영상으로 자살했다는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유사하다는건 아쉽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집행이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에 맞는 설정이라서 와 닿는데, 장양이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할 이유는 솔직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지는 못합니다. 왜 샤리핑 사진과 사건 진상을 그냥 인터넷에 뿌리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과거 허우구이핑 사건 조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는 너무 뻔해서 뒤로 갈수록 식상합니다. 장양과 주웨이 등이 그들의 덫에 쉽게 걸리는 등의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리젠궈가 어떤 식으로든 훼방놓을게 뻔한데, 계속 리젠궈의 방해에 걸려 좌절하는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허술합니다. 장차오가 갑자기 등장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이유부터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허우구이핑의 연인이었던 리징과 결혼한 게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낄 일인지 의문이에요. 장차오 때문에 허우구이핑이 죽은게 아니니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허우구이핑의 사인이 잘못되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들, 그 당시에 장차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장양을 돕기 위해 갑자기 나타나는 전개가 더 어색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장양에게 사건에 뛰어들기를 강요했던 연인 우아이커와의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우아이커의 비중을 초반에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수학 천재 옌량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큽니다. 옌량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 강렬함만큼은 놀랍고, 한번 잡으면 손 떼기 힘든 재미를 갖추고 있는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5/07/25

괴물 나무꾼 (2023) - 미이케 다카시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을 저질러왔던 변호사 아키라는 어느날 '괴물 나무꾼'의 가면을 뒤집어 쓴 괴한에게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입원한 병원에서 자신의 머리 속에 '칩'이 삽입되어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칩은 뇌를 건드려 평범한 인간을 사이코패스로 만들었고, 이는 아키라를 과거에 납치했던 토마 부부의 실험에 의한 것이었다.
괴한의 공격으로 칩이 망가진 아키라는 서서히 인간성을 되찾았고, 칩 이식 수술을 받아 사이코패스가 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괴물 나무꾼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데...

기괴하고 변태적인 상상력의 영화로 잘 알려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넷플릭스 전용 영화입니다. 어딘가의 추천을 읽고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흔해빠진 사이코패스물에 변주를 가한 설정은 괜찮습니다. 주인공 아키라 등 어릴 적 토마 부부에게 유괴당했던 아이들은 부부에 의해 모두 뇌에 ‘칩’을 삽입당했고, 칩이 뇌간을 건드려 감정과 공감 능력을 차단했기 때문에 모두 사이코 패스가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토마 부부의 아들이 선천적인 사이코패스였고, 그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이코패스를 만들었다는 동기도 설득력있습니다. 만들줄 알아야, 부술 수도 있다는 논리인데 그런대로 와 닿았어요.
아키라가 저지른 살인들에 대한 묘사, 사이코패스 아키라에 대한 표현도 좋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영화는 ‘괴물 나무꾼’의 정체를 쫓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정작 추리적인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범인은 앞서 등장한 인물 중 하나일 수밖에 없고, 결국 켄모치가 범인으로 밝혀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 있는 복선이나 서사적인 개연성은 부족합니다. 사실상 유일한 단서는 켄모치가 이누이 형사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머리를 부딪힌 장면뿐인데, 이로 인해 뇌에 삽입된 칩이 고장나고, 그로 인해 인간성을 되찾았다는건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인간성을 되찾은 그가 자신과 같은 실험체들을 죽인 이유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범행 동기가 모호해서 관객이 범인을 추론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탓에, 후더닛(whodunit) 형식으로서도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켄모치는 죽었지만, 켄모치와 아키라의 사투 중에 아키라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이코패스라는걸 알게 된 아키라의 약혼녀가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도 시시하고 허무합니다.

설정상의 허점도 눈에 띕니다. 아키라는 자신이 뇌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아무리 어렸어도 그런 수술을 받았다는건 충분히 기억하거나 인지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설득력이 부족해요. 또 켄모치가 왜 하필 ‘괴물 나무꾼’이라는 복장과 설정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도 없고요.
사이코패스인 아키라의 친구 스키타니나 프로파일러인 토시로 란코는 서사에 거의 기여하지 않아서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시나리오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사이코패스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설정 자체는 흥미롭고, 살인 장면들이 풍기는 감정의 결핍이나 공허한 분위기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 특유의 연출력이 느껴지긴 합니다. 하지만 스릴러로서도, 미스터리로서도 설득력이 약하고, 연출과 구성도 허술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적인 재미를 기대하신다면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2025/05/30

판사 이한영 - 이해날, 문성호 / 전돌돌 : 별점 2점


드라마도 제작될 정도로 인기있는 웹 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기본 설정은 뻔한 회귀물+복수극이지만, 주인공 직업이 '판사'라는 특이한 차별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법정 배경 작품 중에서 검사나 변호사가 아니라 판사가 주인공인건 처음 접해 보네요. 그 덕분에 법정물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한영이 회귀 후, 과거 판결 결과와 사건 진상을 기억하고 있어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면서 승승장구한다는 전개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데, 이게 꽤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선희는 전 연인 박혁준에게 스토킹당하다가 사망했는데 마침 박혁준이 보험금 수령자이기도 해서 유력한 용의자로 부상하지요. 하지만 이한영은 박혁준과 불륜 관계였던 피해자의 사촌 김가영이 진범이라는걸 여러가지 주변 증거를 통해 밝혀냅니다. 살인 미수 누명을 쓴 서민훈 사건은, 서민훈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유성그룹의 음모라는걸 택시의 블랙박스 영상 등으로 증명하고요. 이처럼 추리물에 가까운 구성과 연출이 돋보이는 사건들이 제법 많아서 단순한 법정극 이상의 재미를 줍니다. 이한영의 판결은 대기업 회장이나 강신진 판사같은 빌런에게 무려 '사형선고'를 내릴 정도로  '사이다' 판결이라서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 있고요.

아울러 판사가 재판을 통해 얼마나 판결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부분은, 최근 국내에서도 논란이 되는 ‘접대 판사’ 문제와 맞물려 있어서 더 흥미로왔습니다.

이한영의 복수 서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강신진과 장태진을 무너뜨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박철우 검사, 로펌 에스로펌 소속의 유세희, 기자 송나연 등 각각의 역할이 분명한 조력자들의 도움이 잘 그려진 덕분입니다.

하지만 복수가 구체화되어 갈 수록 긴장감과 개연성은 퇴색되어 버립니다. 대부분 사건들이 녹화나 녹취 파일 한두 개나 주요 인물의 배신으로 쉽게, 뻔하게 증명되는 탓이 큽니다.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이런 증거와 증언 한, 두개에 무너진다는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또한 강신진과 장태진 같은 인물들이 직접 범죄에 가담하고, 치명적인 증거를 남긴다는 전개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검사, 경찰도 아닌 판사가 드러난 증거 외의 것에 간섭한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이한영이 에스로펌의 후계 구도에 간섭하고, 장유린 판사와 손을 잡는 등의 불필요한 서사도 거슬렸습니다. 에스로펌을 몰락시키겠다는 의도와 후계 구도에 간섭해서 유세희를 밀어주는 행동은 아무리 봐도 앞 뒤가 안 맞더라고요.
만화적인 과장도 지나칩니다. 법정 장면은 과장되고 고증이 부족하며, 석정호나 박철우 검사의 전투력 묘사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들도 두서없습니다. 강력한 빌런이자 라이벌로 보였던 김윤혁은 일관되게 찌질함만 보여주다가 별다른 활약없이 퇴장해 버리고, 에스로펌의 유선철은 조력자로 나설 듯 하다가 갑자기 흑화하는데 결말도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러브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한영과 유세희, 송나영, 윤슬혜 간 관계는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김진아 검사는 뜬금없이 박철우와 엮이는 식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깊이 생각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한 티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의 구성력과 법정 내외의 갈등 구조,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성과 논리 전개가 약화되면서 아쉬움을 남깁니다. 앞부분에 여러 가지 사건을 배치해서 흥미를 자아내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흥미를 잃게 만드는 흔한  법정 드라마와 비슷했어요.

2025/05/17

Q.E.D Iff 증명종료 28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28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통의 시리즈 28권입니다. 이번에는 "행운", "논점 정리" 두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 편 모두 평균 수준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행운"

요식업 경영자 쿠마노 츠요시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돈과 애인을 쿠마노에게 빼앗긴 다테 슈지였다. 그러나 다테 슈지에게는 시간 안에 범행 현장까지 도착할 수 없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는데...

전통적인 알리바이 깨기 트릭물입니다. 다테 슈지는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에서 범행 현장까지 30분 안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차를 이용하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거나, 똑같이 생긴 피자 배달 오토바이를 곳곳에 배치해두고 오토바이가 있는 장소까지 건물 내부를 뛰어서 이동하더라도 30분 안에 이동은 불가능했다는게 경찰 조사 결과였지요.

여기서 목격자의 '전파 시계' 시간을 조작하여 이동 시간을 확보했다는 토마의 추리가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자동으로 시간을 조정하는 '전파 시계'의 특성을 이용하려면 전파가 멈추는 '정파 시간'에 범행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방범 카메라에 찍히기 쉬운 대낮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까지 깔끔하게 설명되지요. 그 날, 그 시간에 목격자의 전파 시계는 배달을 갔던 슈지만 조작할 수 있었고요.

Q.E.D.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수학적 이론 소개는 없지만, 주로 묘사되는 미즈하라 경부와 가나 사이의 애틋한 관계도 인상 깊었어요.

물론, 어차피 방범 카메라로 이동 경로를 특정하면 알리바이 자체가 의미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방범 카메라로 시간을 특정하면 되니까요. 목격자가 전파 시계의 시간이 갑자기 바뀌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남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본격, 정통파적인 알리바이 깨기 트릭물로는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됩니다. 정파 시간이라는건 처음 알게 된 정보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논점 정리"

가나의 동급생 어머니인 타니시 마키가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해고 위기에 처했다. 마키가 도움을 요청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나는 우연히 사건 해결을 돕게 되었고, 사건 배후에 회사의 경리부장 후지츠보 토시야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후지츠보가 모든 걸 꾸몄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궁지에 몰리는데...

도입부에서 토막 사체를 등장시키는 강렬한 연출이 나오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후지츠보가 공금 횡령 사실을 마키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목 그대로 ‘논점 정리’를 하며 사건을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처음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핵심 논점은 마키가 실제로 횡령했는지가 아니라, '회사가 횡령의 증거를 갖고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증거가 없다면 회사와 강하게 맞설 수 있었지요. 그러나 마키는 토막 사체를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정황 증거에, 횡령 증거를 스스로 찾으려다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맙니다.
이때 토마는 다시 논점을 정리합니다. 마키는 함정에 빠졌다고요. 이 지점에서부터 후지츠보가 횡령의 진범이라는 사실을 밝혀 나가는 전개는 깔끔합니다.

이렇게 ‘논점 정리’라는 개념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구성과 장난같지만 현실적이었던 토막 살인 연출 트릭이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래와 같이 토마와 가나의 관계가 명확히 진전된 듯한 느낌을 준게 오랜 팬으로서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이 정도면 다음 권 정도에서는 본격적으로 고백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기네요.

하지만 후지츠보가 조카의 취업 청탁을 굳이 연출할 필요는 없었다는 단점은 큽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더라면 마키가 스스로 자멸했을 텐데, 괜히 자신에게도 동기가 있는 듯한 연출을 하며 사람들에게 알릴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 연출 방식도 유치해서 금방 들통났는데 왜 이런걸까요? 아울러 추리적인 면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어서 감점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3/01

명탐정 코난 :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2024) - 나가오카 치카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에서, 괴도 키드가 히지카타 토시조에 썼다는 일본도를 훔치려 했다. 이 칼들을 모으면, 오노에 재벌 선대가 남긴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핫토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키드는 칼을 훔쳐갔지만, 암호를 풀 수 없어서 코난 일행에게 돌려주었다.

이 때 오노에 가문 변호사가 살해되었고, 경찰은 모리 탐정, 핫토리와 함께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 보물 찾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보물을 노리는 무기 상인 카도쿠라가 오노에 선대로부터 칼을 맡았던 전직 사범 후쿠시로를 납치했고, 괴도 키드를 쫓던 나카모리 경부도 카도쿠라에게 저격받아 중상을 입고 마는데...

"흑철의 어영"에 이은 명탐정 코난 극장판 시리즈의 27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의 유명 관광지 하코다테를 배경으로 전설적인 보물과 연쇄 사건이 얽힌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추리적으로는 꽤 흥미롭습니다.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한 암호가 등장하는데, 전통 일본도의 구조와 히지카타 토시조가 남긴 시집, 하코다테의 오릉곽 등 실존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몰입감을 높이며, 사라진 성릉도 대신에 히지카타 토시조가 칼싸움 중 남겼다는 자국의 본을 떠서 코등이를 만드는 이야기는 팩션같은 재미도 줍니다. 덕분에 2차 대전 당시 숨겨진 무기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설정도 그럴듯하게 포장됩니다.

주 무대인 오릉곽은 물론, 여러 하코다테의 실제 명소들이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코다테 뿐 아니라 모미지가 좌충우돌하면서 다른 홋카이도의 명소를 보여주기까지 하고요. 덕분에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여정 미스터리'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엔딩에서는 실제 사진이 보여지는데, 꼭 한 번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장판 코난 특유의 비현실적인 액션도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납득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케이블카 선로를 따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달리거나, 비행기 날개 위에서 검술 대결을 펼치는건 고속 열차가 탈선하거나,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고 침몰하는 것에 비교하면 소소한 편이지요. 실제 명소들이 무대인 덕분이기도 할 텐데, 앞으로도 이러한 방향성이 유지된다면 좋겠습니다.

시리즈 팬으로는 핫토리 헤이지가 핵심 멤버로 활약한다는게 좋았습니다. 제 최애 캐릭터 중 한 명이거든요. 핫토리가 카즈하에게 고백하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 모미지의 훼방으로 고백에 실패하는 장면 등은 충분히 즐길만 했고요. 신이치와 괴도 키드가 닮은 이유(알고보니 사촌간!)가 밝혀지는 쿠키 영상도 호불호가 갈린다는데,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괴도 키드 세계관과 엮을 필요는 없어 보이긴 했지만요.

그러나 단점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이야기가 너무 허술합니다. 초반에는 칼을 훔치려는 키드와 핫토리, 코난과의 대결이 펼쳐지고, 그 뒤에는 보물을 찾으려는 암호 해독이 진행됩니다. 이 이야기만 중심으로 전개해도 차고 넘쳤을 텐데, 경찰이 개입하게 하기 위해 변호사 살인 사건을 삽입한건 무리수였습니다. 애초에 범인이 저지를 이유가 없었던 사건이기도 했고요. 키드 역시 칼을 훔치려다가 돌려준 이후에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이유가 없어서, 계속 등장하는건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동기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전황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했던 무기라 하더라도, 21세기에 경제적 가치를 가질리 없습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무시하고, 악당들이 경찰에게 총질을 하고 일본 대도시에서 폭탄 테러를 하면서까지 이를 찾아다니는 전개는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다른 이야기도 이 때문에 여러모로 이상하고요. 차라리 금괴가 보물이라는 설정을 밀어붙이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암호 풀이의 과정은 좋지만,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밝혀내는 마지막 장면은 많이 허술했습니다. 트릭은 성릉도의 코등이(?)의 모양이 오릉곽과 동일하다는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먼저 기구를 띄운 뒤 칼을 바라보면서 오릉곽과 코등이의 형태가 일치하는 고도를 찾아냅니다. 기구 고도에 위치하는 장소는 하코다테 산 밖에 없으니, 하코다테 산의 이 고도 위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건데, 실존하는 장소에 기반한 트릭이라는건 장점이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기구를 띄우는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면 고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칼을 세우는 위치에 따라서도 오차가 생길 가능성이 크고요. 기구에서 산을 가리키는 정확한 방향을 모르면, 이 역시 오차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래서야 '하코다테 산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라는 말과 별다를게 없어서,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암호를 풀 필요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데, 이 정도면 그래도 평작은 된다 싶네요.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2025/02/15

A하라 죽이기 - 도미나가 미도 / 김진환 : 별점 2점

A하라 죽이기 - 4점
도미나가 미도 지음, 김진환 옮김/라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능한 웨딩플래너 미노 탓에 결혼식이 엉망이 되어 버린 슈헤이, 시에리 부부는 하르모니아 호텔 예식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예식부는 창업주 아들인 미노의 잘못을 다른 플래너 아이하라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나 이는 인플루언서 시에리와 그녀의 친구 키미에의 SNS를 통한 비난을 불러왔고, 아이하라에 대한 악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제대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아이하라를 회사는 전혀 지켜주지 않았고, 아이하라는 친구와 지인, 그리고 변호사 쿠인의 도움으로 맞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일본 최대 라이트노벨상 ‘인터넷소설대상(제9회)’수상작이라고 해서 읽게 된 작품. 온라인 범죄 관련 장르 문학이라고 생각했는데, 법정물 성격이 약간 있지만 평범한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SNS, 온라인에서 '#A하라를용서할수없다'는 해시태그가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아이하라가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고립되는 과정 묘사는 볼 만 합니다. 회사는 결혼식을 망친 원흉인 미노를 창업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보호하면서, 오히려 아이하라를 공범으로 몰아가며 비난의 화살을 그에게 돌리거든요. SNS에서 아이하라를 향한 비난이 거세지지만, 회사는 아이하라를 방패막이로 삼아 책임을 떠넘기고 전혀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경찰의 지시와 아이하라의 도움 요청도 무시하고요. 결국 아이하라는 개인적으로 변호사를 고용하여 싸우게 되는데, 여기까지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며 아이하라는 아무 죄도 없다는게 잘 설명되어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억울해서 미칠 지경인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이하라가 쿠인 변호사의 도움으로 진행하는 법적 조치도 볼 만 했습니다. 회사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면서 필요한 자료, 고용 문제 및 진단서 등에 대한 설정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고, 300만엔이라는 청구 금액도 이치에 합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디지털 마녀사냥의 폐해를 다룬 다른 기존 작품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차별화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두드러지는 독창적인 시각이나 새로운 접근이 없는 탓입니다. 아이하라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에게 사과를 받는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무난했고요.

무엇보다도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법정 다툼이 시작되기 직전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인 미노와 회사로부터는 어떠한 반성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더욱 철저한 권선징악의 방식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최소한 발암 물질 미노는 철저하게 응징받았어야 했습니다. 슈헤이 부부와 키미에 역시 단순 사과로 끝낼 일은 아니었다 생각되네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SNS 마녀사냥과 회사의 부조리한 대응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은 인상적이지만,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 작품과 차별성이 크지 않고, 결말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점이 아쉬워 감점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추리'와 관련된 장르 문학이 아니라는 점에 실망하기도 했고요. 특별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1/24

가을비 이야기 - 기시 유스케 / 이선희 : 별점 1.5점

가을비 이야기 - 4점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비채

'현대 호러의 일인자 기시 유스케, 작품 하나하나에 들이는 공이 커서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가 오랜만에 신작 《가을비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 이 작품은 인간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공포를 극대화한 기담집이다.
호러에 미스터리 기법을 절묘하게 접목시킨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1990년대 이후 일본 호러소설계를 이끌고 있는 일인자 자리에 오른 기시 유스케가, 이번에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찾아온 것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네 가지 공포담은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며 읽는 이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면서 진정한 공포를 선사한다.'
는 책 소갯글을 보고 집어든 작품.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 소갯글에서는 공포, 호러 소설로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낄 만한 요소나 의외성이 전무한 탓입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작가 명성만 놓고 보면 "엠브리오 기담" 정도의 결과물일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의 소재, 내용들도 "백조의 노래" 외에는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완성도도 그닥이라 좋은 점수는 못 주겠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시 유스케의 단편들 - "도깨비불의 집", "미스터리 클락" - 은 대체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도 역시나군요. 앞으로 기시 유스케 단편은 읽지 말아야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귀의 논"

아오타는 자기가 전생에 저지른 죄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지만, 얻지는 못하는 아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미하루는 그 말을 들은 뒤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미하루와 아오타가 나누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미하루가 고백을 끝낸 아오타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걸 좀 더 극적으로 표현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무섭지도 않고 의외의 반전도 없는 짤막한 소품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가"

작가 아오야마는 자다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이동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병원 의사는 마쓰나가에게 '푸가(해리성 전주)'라는 말을 꺼냈다. 자살 명소 수해로 이동하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오야마는 영능력자에게 부탁해 침실에 강력한 결계를 쳤다. 그러나 결계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는 침실에서 대량의 물을 남기고 사라졌다. 편집자 마쓰나미는 얼마 후, 아오야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다. 침실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안으로 이동했던 것이었다...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가 떠오르는 작품. 에메의 작품에서는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약의 부작용으로 벽에 갇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자면서 순간 이동을 하던 주인공이 결계 탓에 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물침대 속에 갇혀 죽게 됩니다. 특별한 이유로 이동을 못해서 중간에 갇힌다는 점에서 비슷하지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짧았던 에메의 작품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아오야마 시점의 순간 이동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너무 길거든요. 읽다보면 비슷한 내용이라 지루해집니다.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의 공포심을 잘 표현하지 못한 탓입니다. 거미를 테마로 한 결계 등의 이야기도 지나치게 장황하며, 거미 꿈은 정말이지 나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오더라도 이렇게 길게 쓸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반면 순간 이동에 대한 설명은 제목의 '푸가' 뿐인데 극히 부족하고요. 분량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에요.

게다가 반전 소재로 사용된 물침대는 너무 생뚱맞았어요. 물침대가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침구는 아니니까요. 순간 이동이라는 설정을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억지 발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보다는 함께 자던 동거인 아키 몸 속으로 들어가버렸다는게 더 호러블하지 않았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백조의 노래"

인기없는 소설가 오니시 레이분은 대부호 사가로부터 미쓰코 존스라는 무명 가수의 전기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녀는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창법으로 부른 레코드를 남겼다.

탐정 로스의 보고를 통해, 미쓰코 존스의 창법은 사막에서 노래하다가 콕시디오이데스 이미티스라는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게 밝혀졌다. 이 병이 성대를 찢어 얇게 만들고, 분할 진동하게 만든 것이었다.

환상이 깨진 사가에게 로스는 자신도 이 병에 걸렸다고 보고했고, 레이분은 의뢰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오디오와 음악에 대한 전문가적인 설명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콘덴서 스피커는 놀라운 기술이지만 저음이 나지 않는 단점이 있다거나, 스테레오 녹음은 3D 영화 같아서 진기함을 자랑하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등 여러가지 내용은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소개된 노래들 - 메리 캠프가 무른 마농 레스코의 '홀로 외로이 버려져', 미쓰코 존스가 부른 라크메 중 '종의 노래' -도 실제로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고요. (아래와 같습니다)

전설적인 가수의 창법의 비결이 불치의 풍토병이라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구'를 던지는 투수의 비법이 제어할 수 없는 손가락 떨림이었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구"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궁극의 비법을 손에 넣었지만, 짧은 영광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앞서의 오디오, 음악에 대한 상세 설명에 비하면, 풍토병에 대한 설명과 설정은 그리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반전을 위한 억지 설정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고쿠리 상"

2003년 11월 28일, 대형 사고를 쳐서 자살을 결심한 열두 살 다쿠야에게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 하루토가 함께 죽자며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 주술은 소원을 빈 네 명 중 세 명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지만, 한 명의 생명을 앗아간다고 했다. 다쿠야와 하루토는 친구 가에데와 신이치를 끌어들여 고쿠리상을 불러내는 데 성공했고, 숨을 거둔 하루토 외 세 명은 고쿠리상의 조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11월 22일, 성공한 변호사가 된 다쿠야 앞에 주간지 기자 노구치가 나타나 18년 전 하루토의 돌연사, 가에데의 집 전소와 가족의 죽음 및 다쿠야가 저질렀던 사건을 언급하고 돈을 요구했다. 충동적으로 노구치를 살해하고 다급해진 다쿠야는 다시 한 번 고쿠리상을 부르기로 결심하고 가에데와 신이치 등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 아오모리현 도와다시의 쓰타나나누마로 가라는 답을 받은 다쿠야는 그곳으로 향하는데...

결말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 주술이 소원을 빈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선사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쿠야는 쓰타나나누마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한 뒤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작품은 명확한 주술의 조건과 이를 불러낸 존재에 의한 저주와 공포가 필수입니다. 고전 걸작인 스즈키 코지의 "링"처럼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어둠 버전의 고쿠리상은 조건, 목적은 물론 주술을 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설명과 주술 결과 모두 애매하게 묘사되어 혼란스럽고, 전혀 무섭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안락사를 선사하는 주술이었다면, 18년 전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은걸까요? 

마지막 순간에 이미 사망한 하루토와의 대화도 무슨 맥락으로 등장하는지 모르겠고, 쓰타나나누마의 경치를 지나치게 강조한 점도 뭐지 싶어요. 아오모리 현에서 돈이라도 받았나... 별점은 1.5점입니다. 무섭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니 점수를 줄래야 줄 수가 없네요.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네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