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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6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 아라키 히로히코 : 별점 1.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으로 유명한 아라키 히로히코의 만화 단편집입니다.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돌치 ~ 다이하드 더 캣",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 고해소", "데드맨즈 Q"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묘한 상상력과 불길한 상황 설정을 짧은 이야기 안에 압축한 이야기들로, 인물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던져진 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거나 무너지는지를 주로 보여줍니다. 

감옥인지 호텔인지 알 수 없는 공간, 바다 위 요트에서 사람과 고양이간 벌어지는 기묘한 생존극, 죽은 뒤에도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듯한 인물이라는 소재는 확실히 아라키 히로히코답습니다.
아라키 히로히코 특유의 기괴한 상상력도 돋보입니다. 평범한 공간을 순식간에 불안하고 위협적인 장소로 바꾸는 감각, 인물의 육체를 과격하게 몰아붙이는 작화와 연출, 현실적인 논리보다 불길한 이미지로 독자를 압박하는 방식은 분명 개성적입니다. 또한 "돌치 ~ 다이하드 더 캣"처럼 제한된 상황에서 작은 두뇌 게임을 활용하는 대목도 눈에 띕니다. 작가의 재치를 잘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단점이 더 큽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는 아무리 기묘한 사건이 벌어져도 스탠드라는 설정과 대결의 규칙이 있기 때문에 독자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책 수록작들은 그런 뒷받침 없이 기괴한 상황만 먼저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기묘하다는 인상은 강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은 부족합니다. 결말도 대체로 시시한 편이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로 추천할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사형집행중 탈옥진행중"

표제작. 한 남자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듯한 방에 갇히면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공간은 단순한 감옥이 아닙니다. 음식과 생활 시설은 지나치게 잘 갖춰져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호화로운 호텔 방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의 모든 사물은 죄수를 죽이기 위한 장치처럼 움직이지요. 침대, 욕실, 식사, 창문까지 일종의 함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 방 안의 구조를 파악하며 조금씩 탈출 가능성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사형 집행과 탈옥이 동시에 진행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핵심으로 주인공은 계속 죽음의 위협을 피하면서, 결국 탈옥 직전의 상황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랜 세월 탈옥을 포기한 채 그 안에 머무는 쪽을 택하는게 결말입니다. 

기괴한 발상은 인상적이고 중반부의 위기와 탈출 묘사는 흥미롭지만, 갖은 노력을 통해 탈출 직전의 상황을 만든 주인공이 수십 년 동안 그대로 남는다는 결말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몇 년 안에는 결정을 내렸어야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충 의도는 알겠지만 마무리의 설득력이 약해서 감점합니다.

"돌치 ~ 다이하드 더 캣"

난파한 요트 위에서 남자와 고양이 돌치가 생존을 두고 얽히는 이야기인데, 이 단편집에서 그나마 두뇌게임과 반전의 재미가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단순히 기괴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상대를 속이거나 유인하는 장면이 들어가는 덕분이지요. 특히 손가락을 이용해 돌치를 낚는 장면에서 아라키 히로히코 특유의 과장된 연출과 잔혹한 아이디어, 일종의 두뇌 게임이 잘 드러납니다. 대단히 정교한 추리나 전략은 아니지만, 짧은 단편 안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장치로는 꽤 효과적입니다.

다만 이 작품 역시 결말까지 놓고 보면 강렬한 설정에 비해 뒷맛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돌치가 생각보다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는 정도인데 반전도 아니고, 별로 통쾌한 결말도 아닌 탓입니다. 애초에 돌치의 능력에 대한 설명도 전무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 고해소"

나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내용과 작품 완성도만 놓고 보면 이 책 최고의 수록작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를 통해 이미 접했다는 점입니다. 책 값도 제법 나가는 편인데 중요한 수록작 하나를 이미 접했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데드맨즈 Q"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4부와 이어지는 성격이 강한 단편입니다. 키라 요시카게가 죽은 뒤의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죽은 상태에서, 어떤 의뢰나 임무를 수행한다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독립적인 단편으로 읽기에는 설명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키라 요시카게가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탓입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4부를 읽은 독자라면 키라 요시카게라는 인물 자체에서 오는 흥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을 모른다면, 알 수 없는 인물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알 수 없는 일을 하는 영문모를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어요.

즉, 단독 작품이라기보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이미 읽은 독자를 위한 후일담이나 외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6/03/20

지뢰 글리코 - 아오사키 유고 / 김은모 : 별점 3점

오타쿠 탐정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작가인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의 단편 연작집입니다. 2024~25년에 걸쳐 일본의 4대 미스터리 랭킹 1위를 휩쓸었던 작품이지요. 저 역시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재미는 있었습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유쾌함과 만화적인 설정, 그리고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본격 미스터리를 보다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게임’의 영역으로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도 단점을 최소화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 속에는 모두 다섯 가지 게임이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게임이지만, 여기에 약간의 변주를 더했다는 점에서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게임은 ‘정확하게 정해진 조건’ 아래에서 진행되며, 그 조건의 허점을 파악하고 상대를 교묘하게 속이는 플레이어가 승리하게 되고요. 이러한 점 덕분에 단순한 놀이를 넘어 두뇌 게임으로서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계단 오르기나 가위바위보에 더해진 약간의 변주만으로 순수한 두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니!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여러 랭킹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축제 때 좋은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든가, 마음에 들지 않는 카페 주인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등 비교적 일상적인 이유인 게임의 목적들도 마음에 듭니다.

주인공인 이모리야 마토도 꽤 매력적으로 그려집니다. 놀라울 정도의 분석력을 지닌 천재이기는 하지만, 게임 이외의 부분에서는 그렇게 기이한 면모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사연이나 기묘한 습관도 없는, 다소 가벼워 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여학생입니다. 구누기 선배에게 거는 장난스러운 모습이 본래 모습처럼 느껴질 정도에요. 아래 만화판 이미지처럼요.
친구이자 주요 화자인 고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며, 다른 등장인물들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충분히 현실에서 있을 법 합니다.

그러나 사립 세이에쓰 고교와 화폐처럼 유통되는 S칩을 걸고 게임을 벌이는 후반부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특히 마지막에는 거의 1억 엔에 가까운 돈이 걸린 게임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도박 실력이 학교 내 서열을 결정한다는 "카케구루이" 수준의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처럼 느껴집니다.
세이에쓰 고교와 얽히면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예를 들어 학생회장 사부리나 이모리야와 비슷한 수준의 게임 천재인 우키타 에소라 등도 앞서 등장했던 평범한 학생들과는 상당히 다른, 다소 비현실적인 면모를 보여 마음에 들지 않네요. 마토가 세이에쓰의 용벙(?)처럼 활약한다는 여지를 남기는 에필로그도 영 별로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게임을 고도의 두뇌 게임 영역으로 끌어들인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등장하는 이야기별 간략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뢰 글리코 :

학원제 때 옥상의 사용권을 놓고 마토와 학생회의 구누기 선배가 ‘지뢰 글리코’라는 게임으로 대결합니다. 가위바위보로 이긴 플레이어가 3의 배수만큼 계단을 올라가는 게임인데, 서로 계단에 ‘지뢰’를 장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마토가 장치한 지뢰에 걸린 구누기 선배가 3연타로 30계단을 미끄러져 패배하고 맙니다.

3의 배수로 올라가는 상황을 이용하는 초반부 전개, 그리고 설치한 지뢰 위치에 선배가 서도록 유도한 마지막 승부는 볼 만합니다. 그러나 구누기 선배가 마토의 지뢰를 모두 밟아 열다섯 계단 차이가 벌어진 뒤 바로 패배 선언이 이어지는 결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위나 보로 이기면 여섯 계단씩, 바위로 이기면 세 계단을 올라갈 수 있으니 3연승만 하면 따라잡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두뇌 게임이라면 모를까, 순수한 가위바위보 승부라면 3연승 정도는 그리 낮은 확률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스님 쇠약 :

카루타 카페에 출입 금지당한 카루타부를 위해, 카페 사장과 마토가 백인일수 카루타와 ‘신경 쇠약’을 결합한 ‘스님 쇠약’ 게임으로 승부를 벌입니다.

그런데 ‘두뇌 게임’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아쉬운 이야기였습니다. 카페 사장은 카루타 카드에 몰래 표시를 하여 사기 게임을 하고 있었고, 이를 간파한 마토가 카드를 바꿔치기해 승리합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카드 마킹을 새로 한 뒤 바꿔치기한다는 방법 자체도 비현실적이고, 마지막 카드 조합 역시 운의 비중이 너무 큽니다.

차라리 사기를 고발해 망신을 주는 편이 학생들 입장에서는 더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 :

마토를 마음에 들어 한 학생회장 사부리 선배가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가리자고 제안합니다. 선배가 이기면 마토는 학생회에 들어가고, 마토가 이기면 선배가 마토의 중학교 동급생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만들어 준다는 조건입니다.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는 일반적인 가위바위보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각각 ‘독자손’을 추가해 7전 4선승제로 겨루는 게임입니다. 독자손은 형태와 이름을 정하고 그 효과를 설정할 수 있는데, 최소한 한 종류의 손에는 반드시 져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부적인 설정들이 꽤 복잡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토는 ‘형태가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교묘하게 활용해 마지막 대역전승을 이끌어냅니다. 핵심은 중반 이후 고다에게 부탁한 핫초콜릿을 마시기 위해 자연스럽게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던 장면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전혀 다른 손이므로 사실상 무효가 되어 그 판에서는 패배한 셈이었는데, 사부리 선배는 이를 독자손 설정의 효과로 오해해 마지막에 패배하고 맙니다.

이처럼 평범한 게임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두뇌 게임으로 만든 점이 인상적인 이야기이며, 주어진 조건을 정확히 파악해야 이길 수 있다는 전제도 가장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물론 사부리 선배가 이 게임의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제안했던 ‘스네일’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편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 :

에소라와의 진검 승부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사립 세이에쓰 고교 학생회와 게임을 벌입니다. 그들의 ‘S칩’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승부 게임은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로, 방법은 한국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거의 같습니다. 다만 표적(술래)은 몇 개의 단어로 외칠지를 먼저 정하고, 암살자(공격자) 역시 몇 걸음을 움직일지를 미리 선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사실 게임을 만든 스도는 그동안 잔꾀를 부려 ‘0’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숨겨 왔고, 그 덕분에 항상 승리해 왔습니다. 암살자는 최소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게 마련이니,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모리야는 이 트릭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표적에게 여러 가지 제한 조건을 걸어 둡니다. 예를 들어 떡갈나무 정면만 보고 움직여야 한다거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표적이 보지 못하는 공원 밖으로 돌아 나간 뒤, 떡갈나무 뒤편으로 걸어 들어가 표적을 붙잡는 데 성공합니다.

주어진 조건을 활용해 승리한다는 두뇌 게임 측면에서는 흠잡을 데 없습니다만, 세이에쓰의 오케가와가 엄청난 청력으로 숫자를 추측한다는 설정은 다소 과합니다. 또한 비현실적인 거액이 게임에 걸리는 전개 역시 마음에 들지 않고요. 게다가 스도의 필승법도 소문이 나면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다지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4 Rooms Poker :

마토가 호적수 에소라와 S칩 전액을 걸고 세 장의 카드로만 패를 만들어 겨루는 포커 게임으로 승부를 벌이게 됩니다.
처음 받은 카드는 버리고 한 번 다시 받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포커와 다른 점은 플레이어가 제한된 시간 안에 카드를 가지러 네 개의 무늬 방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방에 놓여 있는 카드 중 원하는 카드를 직접 가져오는 방식이지요.

등장하는 게임 중 조건이 가장 많고 복잡하며 여러 장치들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게임 자체만 놓고 보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조건들 가운데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방에 불까지 지른다는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생각되네요.

마지막 승부 역시 아쉽습니다. 아무리 카드의 뒷면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에소라가 최후의 승부 순간까지 뒷면의 색깔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입니다. 만약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뒷면을 보고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가 원래의 카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여기에 모든걸 걸기에는 너무 확률이 낮지 않나 싶어요.

무려 1억이라는 판돈을 쿨하게 포기하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마토의 성격이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본인은 몸을 팔 생각까지 했는데 그걸 이대로 퉁친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8/03

베이비 드라이버 (2017) - 에드가 라이트 : 별점 2.5점

베이비는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 박사가 계획한 범죄 계획에 전용 드라이버로 고용되어 왔다. 오래전 박사의 차를 훔쳤던 탓에 빚을 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빚을 다 갚고, 사랑하게 된 데보라와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는데 박사의 협박으로 새로운 범죄 계획에 합류하면서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베이비는 작전을 망쳐버리고 마는데...

음악과 액션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몇 년 전 흥행작이지요. 에드가 라이트 감독 작품입니다.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음악과 화면의 완벽한 싱크에 있습니다. 베이비가 일종의 장애(귀울음)이 있어서 항상 음악을 들으며 생활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거의 모든 장면이 특정 곡의 리듬에 맞춰 편집되어 있습니다. 총격전, 도주 장면, 걷는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음악에 맞춰 조율되어 있으며, 립싱크 장면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액션 영화임에도 마치 뮤지컬처럼 느껴질 만큼, 연출과 편집의 밀도가 높습니다.

제목에 걸맞게 수차례 등장하는 카 체이스 장면들도 일품입니다. 특히 시작과 동시에 펼쳐지는 카 체이스가 압권이에요. 도심을 질주하며 헬기까지 동원한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과정을 생생함과 유쾌함, 그리고 약간의 치밀함이 곁들여진 리듬감있는 연출로 잘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청춘 영화적인 감성도 좋습니다. 베이비와 웨이트리스 데보라 사이의 관계를 풋풋하면서도 선명하게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둘이 현실을 박차고 함께 떠나는 미래를 꿈꾸는 구조는 전형적인 청춘 로드무비 구성이고요. 마지막 장면에서 수감 중인 베이비가 데보라의 편지를 받은 뒤 석방되어 데보라와 키스를 나누고 떠난다는 씬은 이런 장르 판타지의 결정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25년형을 선고받은 뒤 최소 10년에서 15년 정도를 복역해야 가석방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장면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가까우며, 그래서 더 아련합니다.

다만 전체적인 서사는 아쉬움이 큽니다. 베이비가 범죄에서 손을 떼려다 계획이 틀어지고, 결국 조직원들과 충돌한 뒤 모두 죽고 베이비만 체포되는게 줄거리의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그래도 범죄가 성공하고 베이비와 데보라의 관계도 잘 이루어지는 중반부까지는 유쾌해서 좋았는데,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급작스럽게 진지하고 무거운 범죄극으로 돌변할 뿐더러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베이비와 버디의 대결도 단순한 육체적 충돌에 불과한 탓입니다. 별다른 전략이나 반전은 등장하지 않아요. 청춘 로맨스와 액션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트루 로맨스"가 떠올랐고, 최소한 그 정도의 드라마나 두뇌 게임을 기대했는데 실망했습니다. 최소한 베이비가 모든 말을 녹음한다는 설정이라도 잘 써먹어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인물 구성도 단조롭습니다. 베이비와 데보라는 그냥 '아이들'이고, 배츠는 단순무식한 폭력적인 악역이거든요. 버디 정도만 베이비를 따뜻하게 대하는 등 약간 입체적으로 보였는데, 그마저도 애인 모니카의 죽음 이후에는 복수심만으로 움직이는 전형적인 악역으로 퇴화해 버리고 맙니다. 유일하게 제대로 된 어른(?)이자 흑막으로 묘사되는 박사만 개성있게 등장하지만, 마지막에 베이비를 돕고 죽는건 급작스러우며 일관성을 해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청춘 감성과 감각적인 연출은 뛰어나지만, 이야기와 인물 구성은 아쉽습니다. 그래도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합니다.

2024/07/07

이브의 대관람차 - 유우야 토시오 / 김진환 : 별점 1.5점

이브의 대관람차 - 4점
유우야 토시오 지음, 김진환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전직 경찰관 나카야마 히데오는 이혼 후 전처가 키우던 딸 린과 오랫만에 만났다. 화제가 되고 있는 대관람차인 '드림아이' 탑승권이 당첨되어 함께 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드림아이는 '난장이'라는 괴한에게 통제권을 탈취당했고, 탑승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난장이는 나카야마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경찰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나카야마는 드림아이 테러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시청 수사 1과 형사 카이자키와 연락을 시작했다. 사실 나카야마와 카이자키는 경찰학교 동기이자 5년 전 후카 살인 사건으로 멀어진 사이였다.
곤돌라가 연이어 떨어지고, 범인의 8엔억 요구 등으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지면 결국 드림아이 통제권을 회수하여 남은 승객들을 구출하고 범인을 체포했다. 범인은 5년 전 후카 살인 사건 때문에 이 테러 사건을 계획했었다....


일본 신인 작가의 데뷰작품. 버티고 레이블에서 일본 작품으로 소개되는 첫 번째 작품이라 호기심을 자아내어 읽게 되었습니다. 

천재적(?)인 범인이 장교하게 설계한 범죄에 맞서, 탐정역의 주인공이 여러 사람의 생명을 걸고 게임을 벌인다는 점에서, 두뇌 배틀 장르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르물이 성공하려면, 범인의 도전적인 계획과 이를 막기 위한 주인공의 두뇌 싸움이 탄탄하게 연결돼야 합니다. 또한 범인의 동기가 명확하게 설명되어야 하며,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과정도 타당성 있어야 하고요. 마지막으로 범인이 그런 행동을 취한 이유도 제대로 밝혀져야 합니다. 영화 "스피드"를 보자면 범인은 버스 속도계와 연동된 폭탄으로 거액을 요구합니다. 구출 시도는 CCTV로 감시하며 대응하고요. 범인의 정체는 FBI 수사로 나름 그럴듯하게 밝혀집니다. 동기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런 요소들은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드림아이의 장악과 곤돌라를 떨어트린 범행부터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드림아이의 제어권을 아르바이트생이 훔친 카드키 입력만으로 빼앗을 수 있는 점부터 이상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일반적으로 복수의 관리자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곤돌라를 어떻게 떨어트렸는지, 통신망에 어떻게 장애를 일으켰는지 등에 대한 설명도 전무합니다. 범인 중 한 명인 타키구치가 공대생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범인들의 몸값 요구도 매우 이상합니다. 후카가 죽은건 제국부동산 비자금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범인 카나모리가 체포되지 않은건, 제국부동산으로부터 돈을 받은 카이자키가 증거 인멸을 하며 그를 보호한 결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범인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진범이 카나모리라는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이 없고요. 만약  이들 모두를 알고 있다면, 대관람차로 다른 피해자들을 불러모을 까닭도 없습니다. 핵심 원흉과 범인에게는 손도 대지 않고 단순 방관자들에게만 지옥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요.
또 범인들이 제국부동산의 비자금을 폭로할 이유, 비자금 관리자 미야우치를 살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미야우치는 후카 사건과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고한 인물이었으니까요. 범인들은 그냥 무작정 살인을 저질렀다는건데,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비자금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고요.
조부모와 언니가 동생의 죽음으로 이런 거대한 테러를 벌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 조부모가 언니를 끌어들인 이유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죽은 손녀를 위한 복수로 산 손녀를 살인범으로 만든다는게 말이 될리가 없잖아요?

카이자키가 후카 사건에서 정액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남겼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증거를 인멸하려면 시신을 불태워버렸어야죠. 어설픈 처리로 시간만 낭비한데다가, 제국 부동산 비자금을 맡았던 카츠라기가 누명을 쓰고 죽게 만들었고, 카츠라기가 나카야마에게 했던 증언으로 꼬리마저 밟히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허술함은 작 중 냉정하고 뱀같이 묘사되는 카이자키 분위기와도 맞지 않습니다.
후카 살인 사건의 진범이 카나모리라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해주지 않는 탓입니다. 너무 뜬금없어서 황당할 지경이었어요.

다른 설정과 전개도 이해가 되지 않는게 많습니다. 나카야마가 카츠라기의 증언을 숨기고 경찰을 떠나고 이혼까지 했다는 과거가 대표적입니다. 나카야마가 의심을 받아서 그만 두었나? 그런 설명은 없습니다. 약간 수상하다는 것만 묘사될 뿐입니다. 별도의 조사나 수사도 받지 않았고요. 내사를 받은건 후카 사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카이지키를 범인이라고 고발해서 경찰 내 공공의 적이 되었나? 아닙니다. 카이자키는 용의선상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나카야마가 당시 카이자키를 봤을 때 몸이 젖어 있었다(긴 시간 동안 증거를 인멸하느라)는 정도로는 고발도 불가능했을테고요. 
관할 내 친했던 소녀가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에 가책을 느껴 경찰을 그만 두었다는 정도가 말이 되는 설명인데, 이 정도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이혼까지 하는건 말이 안되지요. 카이자키가 지속적으로 나카야마를 범인으로 몰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요.
나카야마가 사건을 미리 예지한다던가, 편집증같이 계획을 짜는데 몰입한다는 등의 설정도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이야기와는 별 관계가 없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름이 '나카야마 히데오'라는게 좀 재미있었던 정도입니다. 요코야마 히데오에서 따왔겠지요?

괜찮은 부분이 없는건 아닙니다. 대관람차를 탈취한다는 설정은 꽤 기발했고, 놀이공원을 찾은 손님들이 관객이 되어 피해자들을 바라보게 한 이유가 동기와 연결되는 - 후카를 방조한 피해자들 - 건 괜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범인 난쟁이가 드림아이 곤돌라 중 하나에 탑승했다는걸 밝혀내는건 좋았어요. 곤돌라 승객들은 핸드폰을 버리게 한 탓에 현재 시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시계탑 시계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쟁이가 정해진 시간보다 전화를 늦게 걸어서 위치가 탄로나게 됩니다. 경찰이 시계탑 시계를 늦춰 놓있기 때문입니다. 범인 시계가 망가진 이유도 복선으로 제시해 주고 있고요.

그러나 좋은 점수를 주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인기있을만한 소재만 잔뜩 끌어와서 어설프게 조립한 치기어린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4/03/10

10호실 - 리 차일드 / 윤철희 : 별점 2.5점

10호실 - 6점
리 차일드 지음, 윤철희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아버지의 고향인 뉴햄프셔 래코니아를 충동적으로 방문하여 아버지가 살던 집을 찾아 나섰다.
한편, 캐나다 출신 연인 쇼티와 패티는 새출발을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중간에 차가 고장날 지경이라 어쩔 수 없이 래코니아 근처 모텔에 머물렀다. 그런데 손님은 그들 둘 뿐이었고, 자동차는 완전히 퍼졌다. 휴대폰 전파도 차단되어 외부와의 연락을 할 수도 없고, 마크 외의 모텔 관리자들과 충돌도 빚던 둘은 어느새 10호실 방에 감금되어 버렸다. 알고보니 마크들은 사람을 활로 사냥하고 싶어하는 멤버들을 모아 거액을 받고 사냥감을 제공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결국 쇼티와 패티를 사냥감으로 하는 활 사냥꾼들의 밤이 시작되고 말았다.


"웨스트포인트 2005"을 잇는 잭 리처 시리즈 23번째 작품. 원제는 "Past Tense"입니다.
최소한 이 작품만큼은 원제보다 우리나라 출간 제목이 훨씬 좋네요. 원제(과거시제(?))는 잭 리처가 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이야기를 핵심으로 그린 듯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10호실에 갖힌 쇼티와 패티의 생명을 건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광할한 미국 대륙 외딴 곳에서 자동차가 고장나고, 핸드폰마저 터지지 않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도입부부터 마크를 비롯한 모텔 관리인 일당이 10호실을 CCTV와 마이크로 감시, 도청하여 둘을 농락하며 위험에 빠트리는 과정이 정말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정비공인줄 알았던 카렐이 둘의 뒷통수를 치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화룡정점이었고요. 둘을 위기에서 구해줄 은인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냥꾼 중 한명이었을 줄이야!

마크 일당이 둘의 생명을 걸고 벌인게 인간 사냥 게임이었다는 진상도 꽤 신선했습니다. 장기 매매라던가 스너프 필름 등을 위한게 아닐까 싶었는데 인간 사냥은 생각도 못했네요. 진상을 드러내는 '이틀치 비상식량'에 끼워넣어진 '손전등'라는 중요한 단서를 수수께끼처럼 배치해서 흥미를 더하는 전개도 일품이었고요. 억지로 비상식량에 손전등을 끼워넣어 전해 준 건 밤에 벌어질 사냥 시간에서 도망갈 때 효과적으로 쓰라는 이유였거든요. 손전등에 GPS가 장치되어 본부(?)에서 추적할 수 있다는 이유도 크고요. 하지만 쇼티와 패티는 이를 무기로 활용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악당들의 판단 착오였던 셈이지요.

완력이 쎄고 즉흥적인 계획에 강점이 있는 쇼티, 어느정도 추리력을 갖춘데다가 행동력도 탁월한 두뇌파 패티 캐릭터의 설정도 좋으며, 사냥이 시작된 후 둘이 머리를 짜내 위기를 탈출해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쇼티가 자동차들 휘발유를 이용하여 모텔에 불을 지르고, 앞서 설명드렸던대로 손전등을 활용하여 야간투시경을 무력화한 뒤 사냥꾼들을 처단하는 장면들은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처가 아버지 과거를 조사하다가 마크의 모텔을 찾은 뒤, 모텔과 10호실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둘을 돕게되는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크가 완벽하게 짜낸 거짓말을 하나씩 분석하여 거짓말임을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특유의 추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요. '제 3의 인물'로 마크 일당과 사냥꾼들이 방심한 사이에 그들을 급습해서 처치하는 장면도 잭 리처스러워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친해진 변호사 캐링턴이 위험에 빠졌을거라는 추리도 잘못 짚기는 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반면 리처가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는 과정은 별 재미는 없었습니다. 와중에 아버지가 과거 저질렀던 살인 사건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별다른 이슈가 되는건 아닙니다. 리처가 우연찮게 동네 건달을 혼내주고, 사과 과수원 주인 아들을 혼내주다가 킬러와 덩치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설정은 지루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무장한 사냥꾼 중 둘이나 쇼티와 패티에게 당해버리고, 마크가 혼자 돈을 차지하기 위해 패거리들을 총으로 쏴죽인 뒤 달아날 생각을 하는 등 마지막 사냥 장면은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을 줍니다. 특히 마크는 리처가 있다는걸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너무 안일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데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이 상황에서는 카렐을 죽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리처 시리즈가 아니라 쇼티와 패티를 주인공으로 한 별개의 작품이었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2024/02/14

키시베 로한은 움직이지 않는다 (2017~2020) : 별점 2.5점

"죠죠의 기묘한 모험" 시리즈 4부의 조연 키시베 로한이 주인공인 단편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 원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죠죠 시리즈는 좋아하기에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에피소드도 4편 뿐이라 부담없어서 좋았습니다. 한 번에 몰아서 보았네요.

특징이라면 호러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기괴한 등장인물들과 더불어 대결 장면에서의 섬찟한 긴장감을 주는 묘사가 탁월한 덕분이지요. 최고는 "무츠카베자카"입니다. 오오사토 나오코가 실수로 남자친구를 죽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집에는 약혼자가 찾아와서 시체를 치워야 하는데 시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터져나옵니다! 상처를 붕대로 감고, 꿰메기까지 했는데도 피를 막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결국 문을 열고 들어온 약혼자는 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나오코는 어떻게 피를 숨겼을까요?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고해소"는 악령, "부호촌"은 산신, "더 런"은 헤르메스 화신이라는 기괴한 적과의 대결이 선보여집니다.

죠죠 시리즈다운 두뇌 게임 요소도 있습니다. "부호촌"이 대표적입니다.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산신을 상대로 함정을 간파하여 예의를 차림은 물론, 집사를 헤븐즈 도어로 조작하여 대결을 승리로 이끄는 식이거든요.
앞서 소개해드린 "무츠카베자카"에서 피를 숨긴 방법, "고해소"에서 비둘기 떼가 노리는 팝콘을 무사히 던져서 먹는 방법도 두뇌 게임이라 볼 수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없지 않아요. 일단 작화 문제가 큽니다. 컬러와 디자인이 과해서 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원작의 괴이한 패션 감각은 만화는 흑백이라서 그렇게 거슬리지 않지만, 풀 컬러 애니메이션에서는 거의 시각적 공해라고 해도 무방하겠더라고요. 핵심 장면 외에는 흑백으로 제작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동화도 그닥이에요. 잘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효과가 조금 화려한 슬라이드 쇼와 별로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대결도 헤븐스 도어의 능력을 활용하여 마무리하는건 별로였습니다. "무츠카베자카"에서, 소녀가 사고로 죽었는데 헤븐스 도어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살려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다는건 무리일 뿐더러, 살려내는 방법도 단지 '키시베 로한을 알기 이전'으로 되돌리는게 전부라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호촌"도 단순 대결물로 끌고가다가 헤븐스 도어의 능력으로 마무리한건 아쉬었습니다. 마을의 존재가 굉장히 흥미로왔는데도 말이지요.

그래도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없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른 원작 에피소드들도 영상화되면 좋겠습니다.

2023/11/25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스튜어트 터튼 / 최필원 : 별점 2점

에블린 하드캐슬의 일곱 번의 죽음 - 4점
스튜어트 터튼 지음, 최필원 옮김/책세상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년 전, 장남 토마스가 관리인 카버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하드캐슬가의 저택 블랙히스 하우스에서 그날의 손님들을 고스란히 다시 불러모은 파티가 열렸다.
손님 중 한 명인 의사 서배스천 밸은 팔에 큰 부상을 입고 숲에서 깨어나 애나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는걸 목격했다. 기억을 잃은 그의 앞에 흑사병 의사 옷차림을 한 남자가 나타나 여러가지 경고를 날렸다. 이런 저런 경고와 조언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서배스천은 누군가 자기에게 죽은 토끼를 선물한걸 발견하고 실신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고난 뒤, '나'는 집사 콜린스로 깨어났다는걸 알게 되었다. 흑사병 의사는 '나' 에이든 비숍에게 그는 모두 여덟 명의 다른 사람으로 하루를 반복하게 되며, 무도회에서 살해당하는 하드캐슬의 장녀 에블린을 누가 죽였는지 알아내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이 루프 속에 다른 두 명의 경쟁자가 있다는 말과 함께.
에이든 비숍은 하룻동안 8명 - 마약 판매상이기도 한 의사 서배스천 벨, 집사 스탠윈, 늙고 뚱뚱한 레이븐코트, 강간범 더비, 에드워드 댄스, 순경 짐 래시턴, 도널드 데이비스, 화가 그레고리 골드 - 의 몸을 오가며, 에블린 하드캐슬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본인과 애나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미래는 경고가 아니야, 미래는 약속이라고. 그리고 그 약속은 우리가 결코 깨버릴 수 없어. 바로 그게 우리가 갇힌 이 덫의 본성이라고."

어딘가에서 추천하는 글을 읽고 알게 된 영국 대장편 판타지 미스터리. 무슨 리스트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 하루를 반복하는 루프물이라는 아이디어는 특별한건 아닙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일곱 번 죽은 남자"는 제목처럼 계속 반복해 살해당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막으려고 노력한다는 내용마저도 비슷하지요. 루프보다는 시간 여행에 가깝지만, 과거를 반복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사라진 세계", "리피트", "나만이 없는 거리", "타임 리프"등 수도 없이 많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설정에 딱 한 가지 차이를 두어 차별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로 "한 명이 하루를 반복하는게 아니라,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입니다. 

루프에 갖힌걸 모른 채 에블린 사건의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설정이 드러나는 도입부는 신선하고 흥미로왔습니다. 사건 자체는 심플합니다. 에블린 하드캐슬이 자살한건 부모가 돈 때문에 레이븐코트 경과 억지로 결혼시키려는걸 막으려고 동생 마이클 등의 도움을 받아 벌인 연극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에블린으로 알고있던건 사기꾼 펄리시티 매덕스였습니다. 오랫만에 유럽에서 돌아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던 겁니다. 에블린은 하녀 마들렌으로 변장하고 있었고요. 그리고 마이클은 연극이라 믿고 있었던 펄리시티 매덕스를 살해해서 자살로 보이는 살인을 완성했습니다.
동기는 19년 전 토마스 살인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토마스를 죽였던건 에블린이었습니다. 토마스가 에블린과 마굿간지기 파커 사이의 부도덕한 관계를 눈치챘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디 하드캐슬과 불륜 관계로 에블린의 진짜 부친이었던 카버는 딸 에블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누명을 쓰고 교수대로 향했죠. 그러나 레이디 하드캐슬이 에블린이 진범이라는걸 알아채서 입막음 댓가로 가문을 위해 에블린에게 레이븐코트와 억지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에블린은 부모도 죽이고, 자기 자신도 자살한걸로 위장하려 했던 겁니다.

에블린의 자살이 연극으로 위장한 살인이었다는걸 증명하는 단서도 제대로 제공됩니다. 대표적인게 "왜 권총 두 정을 모두 가져갔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마이클이 나머지 한 정으로 죽은 척하던 에블린 - 으로 변장한 펄리시티 매덕스 - 를 살해하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그 외 발견된 신호용 피스톨 (총 소리만 내기 위함), 피를 담아둔 병도 자살 연극에 사용되었다는 추리로 잘 이어집니다.
루프를 오가는 중간중간마다 '체스말'같은 연결고리도 충실히 제공되고 있어서 잘 짜여졌다는 느낌을 전해주고요.

하지만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8명을 통해 하루를 반복한다는 설정은 참신하기는 한데, 이야기를 괜히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이 더 강해요.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각 인물별로 시간대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에이든 비숍이 얻는 정보도 전부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인 굉장히 복잡한 구성과 전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한 정보와 단서는 전개 후반인 순경 짐 래시턴 시점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앞서 다른 사람들 - "호스트"라고 불리우는 - 의 정보들은 추리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8명의 '호스트' 들의 설정들도 불필요하게 장황합니다. 서배스천이 마약을 몰래 공급해왔다던가, 레이븐코트가 식탐이 엄청난 고도비만이었다던가, 더비가 성범죄자라던가하는건 에블린 살인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협박범 스탠윈, 하드캐슬 가문의 사생아 커닝햄, 또다른 루프 참여인물 대니얼 콜리지 등의 주변 인물들 설정과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장황하더라도 설명이 명확하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정작 중요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대니얼 콜리지가 에이든을 방해하는건 당연하지만 - 루프에서는 한 명만 탈출할 수 있어서 -, 애나가 에이든에게 협조하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이 루프의 정체 - 일종의 감옥 - 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재소자들을 살인 사건 안에 가두고 그들에게 타인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속죄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저만 이해를 못하는걸까요? 그리고 에이든 비숍은 애나를 찾아 제발로 루프에 들어왔기 때문에 배석 판사 흑사병가면이 호스트 통제권 및 여러가지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반 감옥이라고 치면, 감옥 재소자를 제 발로 찾아온 선량한 시민에게 감옥에서 지낼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는 말과 같은데 이건 말도 안되죠. 그냥 일종의 "두뇌 게임"을 펼치기 위한 장을 억지로 만든 것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사악했던 괴물 애나벨 코커는 비숍의 여동생을 고문해 죽였지만, 그녀는 죽고 지금의 애나는 갱생했다! 비숍을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 증명했다! 며 두 명 모두 풀어주는 마지막의 해피 엔딩도 허무했습니다.

복잡하고 일견 치밀해 보이는 구성이지만 핵심 전개와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한 전개는 부족하고, 기본 설정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복잡하지만 알고보니 알멩이 없는 미국 드라마같은 작품입니다. 정통 추리물을 기대하신다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2023/09/10

소문 - 오기와라 히로시 / 권일영 : 별점 2.5점

소문 - 6점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권일영 옮김/모모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짓 소문을 퍼트려 - WOM (Word of Mouth), 입소문 - 경쟁사의 매출을 떨어트리고, 특정 제품의 판매를 신장시켜온 '컴사이트'의 대표 쓰에무라는 '뮈리엘'이라는 향수 브랜드를 위해 죽인 여자의 발을 가져가는 살인마 레인맨은 뮈리엘 로즈 향수를 뿌린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런데 실제로 고등학생 등 젊은 여성들이 살해당하고 발목이 사라진채 유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내를 잃은 뒤 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형사 고구레는 사건 수사에 투입되어 나이어린 신참 여성 경부보 나지마와 한 조가 되어 피해자들이 컴사이트에서 주도해서 레인맨 소문을 퍼트렸던 뮈리엘 향수 아르바이트를 했다는걸 알아냈다. 그리고 쓰에무라의 오른팔인 아소를 체포했지만, 그는 범인이 아니었다. 결정적 단서는 컴사이트 압수 수색에서 발견된 '카드 브레인스토밍' 자료였다. 사건이 시작되기 전에 레인맨 설정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는 광고회사 직원 니시자키라는게 밝혀지는데....

오기와라 히로시의 장편. 2000년대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었던 작품입니다. 수년전 재간되었네요. '일본 미스터리 역사상 최고의 반전' 운운하는 띠지에 혹해 읽게 되었습니다. 오기와라 히로시 작품 타율도 대체로 괜찮은 편이었고요.

경찰과 일종의 게임을 벌이는 엽기 변태 연쇄 살인마와 형사의 대결이라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 범죄 스릴러와는 다른 점은 경찰 수사가 정말 '발로 뛴다'는 겁니다. 어딘가의 천재가 활약하는게 아니라요. 고구레가 딸 뻘인 여자 아이들과 어울려 단서를 모으고, 나지마가 지인들을 동원하여 '레인맨' 소문이 퍼진 경로와 위치, 날짜를 수집하여 도식화하는 등의 과정은 굉장히 실감났습니다. 고구레의 말 그대로, '과수원에 벌레 먹은 사과가 있다면, 해야 할 일은 나무에 매달린 사과 가운데 벌레 먹은 사과를 찾는 일이 아니라 땅바닥에 엎드려 사과를 골라내는 일'인 것이지요. 덕분에 소문을 낸 원흉이 컴사이트의 쓰에무라라는게 밝혀지는 과정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고구레와 나지마가 마지막에 발견된 피해자 발에 칠해진 패디큐어를 보고 펼치는 추리도 좋았습니다. 고구레는 범인이 왼손잡이라고, 나지마는 발톱에 범인 지문이 남아있을거라고 추리하는데 설명이 아주 그럴듯했거든요. 패디큐어 색깔이 다른건 범인이 색맹이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수사 관계자가 모인 수사본부에서 마지막 스커츠 차림으로 발을 들어 올려 설명하는 장면도 극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짜임새도 발군입니다. 범인 니시자키가 왼손잡이라는걸 앞서부터 설명한다던가, 세 번째 발견된 피해자 미사키 야스요가 니시자키와 함께 살던 '사키'였고, 그녀가 이미 죽었음을 치밀하게 복선으로 깔아둔 전개 - 예를 들어 '냉장고에서 악취가 났다. 사키가 또 음식물을 썩힌 것이다' 등 - 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본청 캐리어와 출세는 포기한 관할서 형사라는 캐릭터, 두뇌와 실무로 나누어진 캐릭터 구도도 흔해 빠졌지만, 본청의 경부보인 나지마가 더 나이가 어린 여성이라는 점과 둘 다 남편, 아내를 잃은 편모, 편부 가정이라는 등의 세세한 설정을 덧붙여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 줍니다. 상당히 디테일하게 짜여져 있어서 정말로 이런 사람이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사건 이면에 존재하는 WOM 이론도 흥미로왔습니다. 한 명이 WOM으로 정보를 전파하는 평균치는 일주일에 대략 2.5명, 대략 한 달 만에 10만명 가까운 사람에게 퍼진다는 데이터는 놀라왔고요. 실제로 쓰에무라처럼 괴소문을 퍼트려 매출을 떨어트리는 행위는 암암리에 있어 왔기에, 남의 이야기같지 않았습니다. 좀 극단적인 예이지만, 바로 옆 경쟁 점포를 음해하려고 했던 '밤식빵 쥐 혼입 조작 사건' 같은 것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죠.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떤 정보가 진실인지를 알아내는게 더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전 보았던 만화 <<로켓맨>>의 대사가 떠오르네요.


하지만 카드 브레인스토밍 자료와 사체에서 발견된 지문으로 범인이 니시자키라는게 밝혀지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는 재미가 떨어집니다. 전개를 보면 니시자키는 딱히 의도적으로 범행을 숨기려거나 과시하려고 했던걸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체포되지 않은건 운이 좋아서 - 그리고 경찰이 멍청해서 - 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구레 앞에 나타나 직접 정보를 제공하기까지 했는데 말이지요. 즉, 이런 류의 작품에서 핵심인 '천재 범인과 경찰과의 두뇌 게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경찰의 수사만 있는 셈이에요.
물론 경찰과 게임을 펼치는 천재 범인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이 좋은건 아닙니다. 그러나 니시자키가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단지 정신이 이상한 변태라고 설명한건 아쉬웠습니다. 도화선이 된 '사키'의 존재도 억지스러웠고요. 변태 정신병자의 클리셰만 모아 놓아서 진부했는데, 그나마 클리셰의 재미 요소는 빼 먹은 셈입니다.

띠지에서 광고했던 반전도 그닥입니다. "마지막 4글자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의 4글자는 '기나오싹'입니다. 고구레의 딸 나츠미가 만든 말이지요. 즉, 쓰에무라를 살해한건 나쓰미였다는 것이지요. 사회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약간의 사회파적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생각됩니다. 작 중 고구레가 피해자들 부모를 만나며 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데, 그 역시 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는건 말 그대로 기나오싹 - 기분 나쁘고 오싹하다 - 했거든요. 굉장히 자상한 아빠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건데, 세대 차이를 충격적으로 드러내는데는 적당했습니다. 나츠미가 잦은 외박을 한다던가, 머리 색깔이 바뀌었다는 등의 복선도 충실히 설명되고요.
그러나 이 반전은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궁금증만 더 키운다는 점에서 별로였어요. 평범한 여고생들이 어떻게 쓰에무라 집에 침입해서 살인을 저질렀고, 시체를 토막까지 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4글자라는걸 띠지에서 강조하는건 일종의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기나오싹이 작중에서 좀 비중있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띠지가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는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의 호토리가 미스터리를 읽는 방법을 따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오기와라 히로시 작품답게 흡입력은 높습니다. 잘 짜여져 있기도 하고요. 반전 운운하는 마케팅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것 같습니다.

2023/08/25

폭탄 - 오승호 / 이연승 : 별점 2.5점

폭탄 - 6점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상,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0시 정각. 아키하바라 쪽에서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겁니다." 술에 취해 자판기를 훼손해 인근 경찰서로 붙잡혀온 남자가 왠지 촉이 온다며 내뱉은 이 말에 귀 기울인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술이 덜 깼나?" 하는 비아냥은 10시 정각에 폭발 사고 신고가 들어오며 서늘한 공포로 변한다.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을 잇는다. "제 촉대로라면 지금부터 총 3회, 이다음에는 한 시간 후에 폭발이 일어날 겁니다."

가벼운 상해 사건이었던 이 건은 금세 최우선 순위로 격상되고, 본청 형사들이 취조실로 들이닥친다. 베테랑 형사들을 앞에 두고 남자는 선문답을 연상케하는 말을 늘어놓으며 '아홉 개의 꼬리'라는 퀴즈 게임을 제안한다. 어쩔 수 없이 제한 시간을 두고 그와 마주 앉아 절박한 게임에 참여하게 된 경찰. 허술한 주취자로 생각했던 남자가 "하지만 폭발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것 없지 않나요?" 하며 싱글벙글거리고, 사건의 전모가 예상을 가히 뛰어넘는다는 것이 밝혀지며 취조실에는 오싹함이 감돈다. 이들은 폭발을 막을 수 있을까. (출판사 제공 줄거리 인용)

<<도덕의 시간>>, <<스완>>의 작가 오승호의 따끈따끈한 신작. 작년 거의 모든 일본내 추리, 미스터리 랭킹을 휩쓸었던 화제작이었지요. 천재 범인과 경찰의 대결을 독특하게 변주한 점에 더해 추리적으로도 (제가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빼어난 덕분일 겁니다. 
별볼일 없는 사고뭉치 노숙자로 보였던 스즈키가 폭탄 테러의 핵심 인물로 드러나는 도입부부터 굉장히 흥미로우며, 스즈키가 경찰에게 심문을 받으며 내 놓는 퀴즈(?)는 대부분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설명도 그럴듯합니다. 전설의 동물 구단 이야기로 지역은 '구단시타', '신의 말씀과 회문, 그리고 탁점'이라는 힌트로 '신문지'를 떠올리게 해서 구단시타의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곳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정답을 이끌어내는 식으로요.
스즈키와 진범 다쓰미 일당과의 연결 고리를 더듬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에요. 스즈키가 일부러 남긴 핸드폰이라는 단서와 도도로키 형사의 심문 중 나온 하세베 유코의 이름을 통해 가족들을 찾게되는 수사 모두 다쓰미의 마지막 거주지로 연결되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습니다. 다쓰미 시체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한 것도 단순히 경찰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쓰미의 사인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목적이었다는 것도 합리적으로 설명되고요.
스즈키의 퀴즈로 역을 알아낼 수 없었던건, 그도 어떤 역에 폭탄이 설치되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스즈키는 다쓰미 일당이 아니었고 진범임을 자처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는 반전도요. 다쓰미의 모친 아스카가 아들의 테러를 알고 살해한 뒤 스즈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도 셰어 하우스에 다쓰미가 데려왔던 네 번째 인물, 그리고 스즈키가 노숙자 시절 알고 지냈던 신참 노숙자, 스즈키의 드래곤즈 모자 등으로 차분히 단서와 복선을 설계하여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진범 다쓰미 일당이 계획했던 폭탄 테러 방법도 기발했습니다. 일당 중 한 명인 야마와키의 주류 배달업이라는 직업을 활용하여 음료수 형태로 가공한 폭탄을 자판기 안에 넣었다는데, 이래서야 경찰의 수색으로 찾아내지 못한건 당연하겠지요. 결국 정해진 시간이 되어 순환선 야마노테선의 주요 역들이 차례대로 폭발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고요. 이건 영상화되면 꼭 한 번 보고 싶을 정도에요.

아울러 오승호 작품답게 사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구성도 좋았습니다. 단순한 사회파 범죄물처럼 특정 이슈에 대한 범죄를 등장시키는건 아니고, 주로 스즈키의 입을 통해 누군가 폭발로 죽을 때 내가 슬퍼해야 하는가? 인간의 생명은 과연 평등한가? 동료가 아닌 적의 목숨은 없애도 괜찮지 않나? 이 세상은 정말 살 가치가 있는가? 이런 세상은 모두 망해버려야 하지 않는가? 등 작가가 생각하는 사회적인 여러가지 문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합니다. 덕분에 스즈키의 캐릭터성도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천재 범죄자이자,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있을 '조커'가 배 나오고 머리에 땜통까지 있는, 자기비하에 능숙한 노숙자 출신 아저씨라니! 다시 보기 힘든 빌런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작가의 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듯한 메시지가 과잉인 탓입니다. 다쓰미가 가족이 무너진 것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테러를 저지른다는 동기는 명확하고 설정도 참신했지만, 그 뒤 스즈키가 테러를 떠안는 동기도 잘 설명되지 못해서, 메시지 전달도 공허합니다. 다쓰미가 직접 별거 아닌 일로 가족을 붕괴시킨 일본 사회에 복수하겠다는 메시지를 외쳤다면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애초에 남편과 아버지가 변태였다는게 사회적으로 가족이 모두 매장당할 일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범행 현장에서 자위 행위를 한 건 피해자들 입장에서 분통이 터질 행위인건 맞지만, 법률적으로는 죄라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거주지만 옮겨도 가족들의 생활이 무너질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렇게 억울했을 다쓰미에 비하면, 스즈키의 메시지는 사회 부적응자의 개인 주장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또 노숙자에 불과한 스즈키가 어떻게 고도의 심리 - 정보전을 엘리트 경찰들과 대등하게 벌이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유너바머' 정도의 배경은 있어야 할 인물 같은데, 노숙자라는 '현재'만 보여주다보니 그런 부분에서 설득력이 많이 부족해져 버렸네요.

그래도 스즈키는 독특한 매력을 뿜뿜해서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역으로서의 자리매김은 확실히 하고 있는 반면, 상대역인 경찰쪽 인물들의 매력은 부족하다 못해 없다시피 합니다. 도도로키 형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스타일이라서, 루이케는 정의와 사명감보다는 스즈키와의 게임에 심취해서, 기요미야는 심약하고 정서가 불안해서 스즈키에게 농락만 당하는 탓에 모두 맞상대로서의 격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때문에 스즈키와 1:1로 대결을 펼치는 재미를 전혀 주지 못합니다. 이런 류의 작품에서 중요한 팽팽한 대결의 긴장감도 없다시피하고요. 마지막에 야마노테 선 폭탄 테러를 막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였어요. 
그 외에도 친구의 부상으로 폭주하는 순경 사라, 자리를 지키는데에만 급급한 쓰루쿠 등도 그야말로 뻔하디 뻔한 스테레오 타입이라 지루했습니다.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범죄로 다쓰미 가족 모두가 무너져 버린다는 것 같이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도 많습니다. 천재 범죄자와 경찰과의 두뇌 게임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가치관에 맞는 행동을 고집하여 조직 내에서 고립된다던가 (도도로키 형사) 하는 이야기는 질릴 정도로 많이 봤습니다. 잇달아 일어나는 범죄 탓에 일반 시민들이 경찰서로 몰려드는 묘사도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등에서 이미 써먹었던 것이고요.
 
변태 남편 탓에 이미 지옥을 맛 보았던 아스카가 또 고통을 겪고야 마는 결말, 에필로그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쓰미가 폭탄 탓에 산산조각이 나기 전 살해당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스즈키를 죽일 의도로 경찰서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폭탄도 없었고, 살의를 증명할 방법도 사라의 증언 말고는 딱히 없어 보이고요. 그녀를 어떻게 재판에 회부할 수 있을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알겠지만 제게는 좀 애매했습니다.

2023/06/25

658, 우연히 - 존 버든 / 이진 : 별점 2.5점

658, 우연히 - 6점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퇴한 전설적인 뉴욕 경찰 거니에게 대학동창 멜러리가 찾아왔다. 멜러리는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 무작위로 자신이 떠올린 숫자를 알아맞춘 누군가가 자기를 협박하고 있다는 걱정을 털어 놓았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거니의 지시를 사업 - 조금 수상쩍은 일종의 종교단체 - 핑계를 대며 회피하던 멜러리는 결국 살해당했다. 사건 현장도 기묘한 점 - 허공으로 사라진 듯한 발자국, 총을 쏜 뒤 깨진 병으로 목을 찌른 점 등 - 투성이었다.
거니는 지방검사 클라인의 요청으로 수사본부에 자문역으로 참여했고, 브롱크스와 소더턴에서 잇달아 일어난 살인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걸 알아냈다. 알고보니 범인은 경찰과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유리탑의 살인>>에 꽤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작품. 소개가 멋드러지고 재미있어 보여서 바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범인은 1에서 1000까지의 수 중 피해자가 아무렇게나 떠올린 숫자를 어떻게 맞출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도입부는 기대에 부응합니다. 아주 흥미로왔거든요. 살인이 벌어진 뒤, 현장의 범인 발자국을 따라가보니 허공으로 떠오른 듯 갑자기 사라졌다는 엽기적인 현장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요. 범인이 살인 현장에 이전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대한 단서를 남기며 - 작약 (피어니), 넙치 (플라운더) - 경찰과 게임을 벌이는 전개도 재미있었습니다.
기상천외한 트릭, 불가능 범죄에 연쇄 살인극, 거기에 범인과의 두뇌싸움까지 결합되어 있으니 본격물로의 판은 제대로 깔린 셈입니다. 이런 작품을 21세기에 볼 수 있다는게 놀랍네요.

특히 도입부를 장식했던 '숫자 맞추기' 트릭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원리는 유명한 '주식 투자 사기'와 같아요. 여러명에게 '숫자를 생각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그 뒤 '너가 생각한건 이 숫자야'라는 편지에 모두 똑같은 숫자를 써서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숫자를 생각했던 사람은 깜짝 놀라며 범인에게 조종되고 마는 것이고요. 범인이 편지를 보낼 대상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런 사람은 늘어나게 됩니다. 문제는 주식이 오르냐, 내리냐와 같은 단순한 이지선다가 아니라 1부터 1000까지의 광범위한 숫자라는게 핵심인데, 챗 GPT에게 물어보니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10000명이 각자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1000의 10000승으로 같은 숫자를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약 1/1000이 됩니다. 즉, 10000명이 각자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약 10명 정도가 같은 숫자를 선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라고 하네요. 범인처럼 약 수만명에 이르는 광범위한 DB를 확보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인거지요. 누구나 알고 있음직한 아이디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는건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지가 않습니다.
트릭과 결합된 범인의 행동도 설득력이 넘칩니다. 범인은 당첨된 - 숫자를 맞춘 - 사람들에게 약간의 돈 (200여 달러)을 수표로 보내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이 이런 숫자를 알 정도로 전지전능하고, 너의 비밀도 알고 있다면서요. 그러면 뭔가 비밀이 있는 사람들은 수표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범인은 아는게 하나도 없지만 이렇게 받은 수표를 이용하여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게 됩니다.
형사답지않고 프로파일러에 가까운 거니 형사의 활약도 독특했습니다. 범인 입장에서 왜 그랬는지?를 생각하고 추리한다던가, 범인의 심리를 예상해서 위기를 타개하는 장면들이 그러합니다. 과장이 심한 측면은 있지만 나름 볼 만 했어요. 아내와의 대화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묘사도 기존 컨텐츠들의 거친 상남자 뉴욕 형사들과는 달랐고요.

그러나 도입부의 숫자 트릭 외의 추리적 요소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화로 생각한 숫자를 말하게 한 뒤, 우편함의 편지를 보라고 했던 두 번째의 숫자 맞추는 트릭이 대표적입니다. 숫자를 듣고 편지를 우편함에 넣은게 당연하지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신발 밑창을 거꾸로 붙인 장화를 신고 범행을 저질러서 허공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는 트릭은 유치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트릭은 피해자를 골라내고,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분명합니다만, 뒤이은 트릭들은 이렇게 범행을 저지를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힌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 숫자 맞추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멜러리를 죽였을테고, 이미 죽였다면 현장을 기묘하게 위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를 위해 덧붙인 경찰과 게임을 하기 위해서? 라는 설정은 억지스러웠고요.
주정뱅이 경찰이었던 아버지 탓에 어머니가 장애를 얻어서 복수를 시작했다는 범인의 동기도 납득하기 힘들었어요. 그렇다면 범행 대상도 주정뱅이 경찰이었어야 했는데, 금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요. 
범인의 총구 앞에 놓인 나르도 반장을 구하기 위해 거니가 범인을 도발하면서 시간을 끌고, 이 틈에 나르도 반장이 술병을 던져 범인을 죽인다는 결말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좋다는 첫 번째 트릭도 후보자가 많아지면 들통날 우려가 많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SNS 등 소통 수단이 많은 지금보다는 인터넷 등이 덜 발달한 시대에 적절했을 트릭이에요.

경찰의 수사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범인이 수표를 보내도록 유도한 사서함 주인 더모트를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은게 대표적입니다. 범인이 그 사서함에 접근해서, 수표를 빼돌려 주소를 알아낸건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수표를 보는게 쉬웠을 더모트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범인이 어떻게 범행 현장에서 개인 흔적을 철저히 지웠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전혀 다른 도시에서 무려 3건이나 범행을 저질렀는데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운다? 현대의 과학 수사를 일반 범죄자가 벗어나기는 거의 무리가 아닐까 싶네요. 이런 부분은 대충 넘어가고 있는데, 설득력을 갖추려면 보다 상세한 디테일이 필요했습니다.

너무 길다는 문제도 큽니다. 사건과 관계된 이야기로 분량이 늘어났다면야 괜찮았겠지만, 거니 형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 작업들과 여러가지 생각, 꿈, 아들과의 인연과 사건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건 지루함만 더해줄 뿐이었습니다. 부인과의 긴장감 느껴지는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집에서 쉬면서 편하게 사건 이야기를 하다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으면 안되나요? 프렌치 경감처럼요. 현대물이라고 다 이혼남에 가정 내 위기를 겪는건 아닌데 말이지요. 필요한 설명보다 쓸데없는 부분의 디테일만 넘치는 셈입니다.

그래도 숫자 맞추기 트릭에 대한 발상만큼은 좋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분량을 줄이고 범행 과정의 설득력을 보강했더라면 아주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겁니다. 그래도 본격적인 추리물 애호가라면 즐길만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덧 : 유리탑의 살인에서는 이 작품의 '658'이 추리 소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세자리 숫자라는 식으로 언급하는데, 추리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숫자는 '813'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명도, 발표년도, 누적 판매량 모두 이 책을 압도할테니까요.

2023/03/11

흑뢰성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흑뢰성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내용 및 트릭 등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오카 성의 성주이자 셋슈 지방의 영주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이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리오카 성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고, 아라키 군과 오다 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라시게 믿었던 모리 군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초반에는 잘 버텼던 무라시게 군의 기강도 나날이 해이해져 갔다. 그 와중에 아리오카 성 내에서는 여러가지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아라키는 사건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로다 간베에의 도움을 청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에게 나오키 상을 안긴 대작 연작 장편 소설. 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 아리오카 성 전투를 배경으로 전투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그리고 있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대망>>같은 전국시대 군웅물로 보아도 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대하 역사극 서사를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아리오카 성을 기반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은 아라키 무라시게와 그의 군대가 오다 군에게 포위당하고 1년여간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이 치밀하게 그려져있는데 기가 막힙니다. 원래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물을 주로 쓰던 작가가 대하 서사물을 이런 수준으로 발표했다는데는 탄복할 수 밖에 없네요.
군웅물 대하 역사극답게 등장인물들 모두 관련된 배경 설명도 충실하며 캐릭터들이 확실하게 잡혀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 주인공 아라키 무라시게를 비롯하여 직속 수하들인 호위대 오본창, 철없는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 호전적인 노무라 단고, 냉정한 규자에몬, 이케다 이즈미 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특히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가 처음에는 아라키 무라시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1년여가 흐르면 적장과 주군 몰래 교류를 하는 묘사 등으로 인물 설정과 배경 묘사를 통해 아라키 군의 해이와 패망의 전조를 알리는 잘 짜여진 구성은 매력적이었어요.
구로다 간베에가 아리오카 성 전투 당시 지하 감옥에 갇혔었다, 아라키 무라시게는 리큐의 진전을 받은 다도인으로 천하가 흠모하는 명품 다기 "도라사루'를 가지고 있었다,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는 과거 나가시마에서 겪었던, 일향종 신도들의 떼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체험을 겪었다는 실제 사실을 이야기에 녹여내는건 팩션 느낌을 전해주며, 호위대 오본창과 사이카 병사 등이 각자 지니고 있는 힘, 창, 검, 총포 등의 특기, 그리고 남만종을 믿는 다카야마 다료의 입장 등이 이야기와 맞물린다는건 설정 하나하나를 깊게 고민한 티도 물씬 났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 중에서 두 편은 본격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본격물이기도 하거든요. 첫 번째는 <<설야등롱>>에서 인질 아베 지넨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베 지넨은 복도 양쪽을 충실한 호위대가 지키고, 장지문 앞 마당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화살마저 사라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요. 핵심 단서는 마당 가운데에 서 있던 석등이었습니다. 석등 안쪽에서 핏자욱이 발견되었거든요. 즉, 벽을 따라 순찰하던 호위대원 모리 가헤에가 창 두개를 이어붙인 긴 봉 끝에 화살촉을 매단 뒤, 석등을 통과시켜 아베 지넨을 죽인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었던거지요. 봉이 너무 길어서 가운데 받침대가 필요했던겁니다. 모리 가헤에가 호위대 오본창에서도 특히나 창의 명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범행이지요.
세 번째 작품 <<원뢰염불>>에서는 무라시게가 밀정으로 쓰던 행각승 무헨과 그를 호위하던 오본창 아키오카 시로노스케가 살해됩니다. 무헨이 머물던 암자는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범인은 어떻게 둘을 살해하고 깜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범인은 승려 행색을 하고 다니던 장수 노토 뉴도였습니다. 그는 호위대가 도착하기 전 무헨을 찾아갔다가 살해한 뒤, 무헨의 삿갓과 지팡이, 고리짝을 훔쳐 무헨으로 위장한 뒤 호위대 아키오카를 살해하고 도주했습니다. 변장을 통해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및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인 셈입니다. 이를 무헨 (으로 위장했던 노토 뉴도) 스님이 기묘한 진언을 읆었고 평소와 다르게 일꾼을 험하게 대했다던가, 고리짝을 훔쳐간 이유 등으로 독자에게도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본격 후더닛물로 손색없는 수준이었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냐? 라고 물으면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야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본격 추리물을 결합한 독특함과 그 완성도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을거라 생각되는데, 국내독자가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할 여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호적수이자 일종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구로다 간베에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적이지만 그 두뇌를 인정하여 죽이지는 않고, 필요할 때 가서 조언을 구한다는 핵심 설정은 유사한 캐릭터, 설정을 많이 모방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지요. 구로다 간베에도 한니발 렉터 못지 않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요. 이 설정 때문에 괜찮은 팩션이 그냥 가공의 픽션으로 바뀌어버린 느낌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에 비하면 구로다 간베에는 그야말로 전국구 인기 무장이라 이렇게라도 끼워 넣은 작가 의도는 대충 알겠습니다만, 구로다 간베에의 등장 없이 아라키 무라시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어도 이야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겁니다.
무라시게가 일세의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두드러집니다. 모리가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걸 진작에 알아챘는데도 불구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오다 노부나가와의 화의를 신청하는 밀사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게 없거든요. 이것도 밀사 무헨의 죽음 뒤로는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도라사루에 대한 애착만 드러내며 끝난다는 점에서는 도대체 뭘하는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질 시간만 질질 끌 뿐입니다. 심지어 유력 가문 무장 노토 뉴도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드러난 상황에서도요. 그러니 무라시게에게 전국에 대해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건 자신밖에 없다고 일갈하는 간베에의 모습도 아첨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닥친 위기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는데 무슨 전국에 대해 논한단 말입니까? 대학 입시도 치루지 않은 학생에게 대기업 입사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과 다를게 없어요. 오히려 자기 혼자 살겠다가 홀로 도망치는걸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승리하리라! 는 결심으로 포장하는건 헛웃음마저 났습니다. 그럴거면 원군을 진작 보냈겠죠. 다 진 싸움에 누가 원군을 보낸답니까.

추리적으로도 다른 두 편은 그리 대단한 트릭이나 내용이 있는게 아니라서 전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베 지넨을 죽게 만들고, 적장의 수급을 흉상으로 만들고, 노토 뉴도를 쏘아 죽이려고 했던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단순한 소거법이라서 추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트릭도 디테일은 다소 부족합니다. <<설야등롱>>에서 범인 모리 가헤에가 아베 지넨을 살해한 동기, 그리고 트릭을 떠올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리 가헤에는 지적인 면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기에 이런 복잡한 트릭을 떠올린다는건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게다가 호위대 오본창으로 아라키 무라시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추고 있기에, 주군 명에 반하는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석연치 않고요.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가 부처의 벌을 가장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지요호가 트릭을 가헤에에게 알려주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트릭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도 썩 납득이 가지는 않을 뿐더러, 전국시대 호위대 무사가 주군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종교, 그리고 주군 아내의 뜻을 따른다는게 말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다카야마 다료의 말처럼 종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용할? 도구 정도에 그치는게 당시 현실이었을텐데 말이죠. <<원뢰염불>>에서 노토 뉴도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 그래도 명성에 걸맞는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소 단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소합니다. 전국시대 군웅물 팬이시라면, 혹은 <<노부나가의 야망>>과 같은 게임을 즐겨 하신다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겁니다.

2022/11/27

몸값과 생명을 둘러싼 속고 속이는 공방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유괴 미스터리 걸작

* 자주 소개드리는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으로, 이번에는 유괴가 주제인 작품들입니다. 일본 작품만 선정하지 말고, <<킹의 몸값>>과 같은 유명 해외 고전도 포함시키는게 좋았을 것 같네요.

유괴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뤄지는 범죄를 말합니다. 범인과 피해자, 경찰간의 몸값과 생명을 둘러싼 긴박한 공방,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로를 어떻게 속일 것인지?는 소설의 주제로 매력적입니다. 이런 유괴 주제 미스터리 소설 중에서, 끝까지 결말을 읽지 않을 수 없는 걸작을 골라보았습니다.

<<99%의 유괴>> 오카지마 후타리 : 국내 미출간
오카지마 후타리는 '납치의 오카지마', '유괴의 오카지마' 라고 불릴 정도로 유괴 소설의 명수이다. 이 작품은 30여년 전에 발표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었던 컴퓨터 등의 첨단 기기를 동원하여 치밀한 유괴 범죄를 그리고 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알리바이도 완벽하고, 증거도 남기지 않은 완전 범죄의 행방에 주목해 보시길.

<<게임의 이름은 유괴>> 히가시노 게이고
광고 크리에이터 사쿠마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망친 원수 카츠시로의 딸과 공모하여 가짜 유괴 사건을 저지른다. 몸값은 3억엔. 유괴와 몸값을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속셈이 서로 엇갈리며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굴러간다. 유괴를 순수 두뇌 게임으로 그린 걸작.

<<대유괴>> 덴도 신
감옥에서 알게 된 3명의 남자들이 인생 한방!을 목표로 대부호 할머니를 유괴한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오히려 유괴범들을 손아귀에 넣고, 그들의 범행을 자기 시나리오로 바꾸어 버린다. 이를 통해 5천만엔이었던 몸값이 100억엔으로 늘어나면서 엄청난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대유괴'로 바뀌어 가는 모습이 압권인 작품.

<<유괴의 과실>> 신포 유이치 : 국내 미출간
종합 병원 병원장의 손녀가 유괴된다. 범인의 요구 사항은 몸값이 아니라 입원 환자를 죽이라는 것. 그 입원 환자는 정계의 거물이자 재판 중인 피고였다. 그리고 이 사건과 동시에 '몸값 대신 특정 주식을 사라'고 요구하는 또 다른 유괴 사건이 일어나는데... 두 개의 유괴 사건이 얽히며,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

<<1의 비극>> 노리즈키 린타로
야마쿠라 가문에 아들을 유괴했다는 전화가 오는데, 실제로 유괴된건 지인의 아들 시게루였다. 잘못 유괴했다는걸 범인에게 숨긴채 야마쿠라는 몸값을 전해 주려 노력하지만, 사소한 실수로 시게루는 살해당하고 만다. 유력한 용의자였던 남자마저 살해당한 뒤 명탐정 노리즈키 린타로가 나서고, 사건은 의외의 전개를 맞이하게 된다.

2022/09/24

앨리스 살인게임 - 가코야 게이이치 / 김현화 : 별점 2점

앨리스 살인게임 - 4점
가코야 게이이치 지음, 김현화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파국을 맞은 2061년의 지구, 하루는 돈을 벌기 위해 VR로 가상 현실 세계 '앨리스'에 접속했다가 정체불명의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로그 아웃도, 다른 곳으로 이동도 불가능하며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시스템 컨트롤 불가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피노키오'라고 불리우는 이 새로운 공간에서 가이드를 따라 목숨을 걸고 '빨간 새우의 집'에 도착한 하루는, 자기와 같이 끌려온 다른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죽을 때마다 집의 잠겨진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들은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가상 공간을 무대로 한 액션 스릴러입니다. '피노키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는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있어서 약간의 추리물적인 성향도 갖추고 있고요. 

액션 스릴러적인 성향은 "빨간 새우의 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강을 건널 때 그 편린을 살짝 보여준 뒤, 빨간 새우의 집 안에서 생존자들이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을 벌일 때 절정에 달합니다. 하루가 LK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그 중에서도 절정부이고요. 

여기서 가상 현실을 잘 이용한 두뇌 게임은 상당한 볼거리입니다. 하루가 시스템 내에서 아바타 외모를 다른 사람처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낸 뒤 시체를 자기로 위장시키고, 공간에 자기처럼 보이는 영상을 투영한 뒤 급습한다는 등으로 꽤 그럴듯했어요. 

가상 공간 피노키오에 대한 진상도 신선했습니다. 앨리스 시스템 내의 다른 공간이 아니라, 앨리스에서 접속할 수 있는 또다른 가상 공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했을 뿐인 하루 등은 어떻게 피노키오에 접속할 수 있었나? 라는 수수께끼가 새로 불거지는데, 이는 하루가 앨리스 내에서 활동하는 인공지능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하루는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한게 아니라, 앨리스에서 피노키오에 접속했었던 겁니다. '푸른 머리의 소녀'는 하루를 만들어낸, 진짜 현실의 인공지능 연구자였고요. 앨리스 안에서 인공지능을 만들어냈던건 현실 세계에서 대파국 이후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대신해 앨리스 안에서 생활할 인공지능이 필요했다는 거지요. 이렇게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려 했던 이유는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터무니없다는 점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지 않으면 본성을 알 수 없어서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특정 공간에 가두었다는 발상부터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런다고 인간의 본성이 드러날리가 없지요. 설령 그렇다쳐도, 구태여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불필요한 설정들을 따 오면서, 이상한 공간에서 생존 게임을 벌이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생존 게임으로 알 수 있는건 가장 싸움을 잘하고 강한 인공지능이 누구인지일 뿐이니까요. 극한 상황이 필요했다면 앨리스 시스템 내의 문제로 시스템 컨트롤을 할 수 없는 특정 클러스터 - 현실의 무인도같은 - 에 갇히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충분했을 겁니다.
생존자들에게 '푸른 머리의 소녀'라는 수수께끼를 던져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추리력은 인간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피노키오'를 가져다 붙인 것도 억지스럽고요. 

생존 게임도 앞서 소개했던 배틀 자체는 그럴싸하지만, 설정은 진부합니다.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는 탓입니다. 과묵한 전사, 쎈 언니, 이해심 높은 조력자, 양아치 (?) 등 등장 인물들도 진부한데다가, 설정상 오류가 크게 느껴집니다. 이 등장 인물들은 모두 앨리스 내부에서 활동할 인공지능이라는 설정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평범한 인물들이었어야 했습니다. 문신충 앗슈라던가, 사교성없고 폭력적인 LK는 인공지능 프로토타입으로는 지극히 비상식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테스트를 반복해서 하루에게 부담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스템 설계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화 후 업데이트된 버젼으로 테스트했다면 이전 히스토리를 알 수 없는게 당연할텐데요. 찬호께이의 "S.T.E.P"에서의 시뮬레이션처럼, 각 테스트는 모두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결과라는 설정이 더 이치에 맞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좋았던 아이디어와 설정에 기묘한 생존 게임을 더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린 작품입니다.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습니다.

2022/09/18

조커게임 - 야나기 코지 / 한성례 : 별점 2점

조커게임 - 4점
야나기 코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어딘가의 랭킹에서 트릭이 뛰어난 작품이라며 추천하고 있어서 구해 읽었습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과 전혀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랭킹 탓에 특별한 게임과 관련된 본격 미스터리 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구 일본 제국 시대를 무대로 한 스파이물인데다가 심지어 단편 시리즈였기 때문입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몇가지 트릭은 분명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 상황을 잘 살리고 있는 덕분입니다. <<조커 게임>>에서 헌병대가 외국 스파이의 집을 철저하게 뒤졌지만 마이크로 필름을 찾지 못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스파이는 마이크로 필름을 천황의 사진 뒤에 숨겨 놓았던 것이지요. 일본 헌병대는 불경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사진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겁니다.
<<로빈슨>>에서 완벽하게 암호를 전달했지만 본국이 가짜라는걸 알아채게 만든 트릭은 일정 간격으로 오타를 입력해야 되는 것이었고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저 정도의 트릭으로 '빼어나다' 고 말하기는 힘들고요. 무엇보다도 작품 속 특수 정보 기관인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유치하고 진부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마왕' 유키 중령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모든 D기관원들 모두가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슈퍼 스파이 - 스파이 패밀리 같은 - 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만화 속 등장인물에 가까와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애니메이션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데, 여러모로 애니메이션으로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그만큼 만화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후속작을 따로 책으로 읽어볼 계획은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커 게임>>
육군에 유키 대령 지휘 하에 스파이 양성 학교가 세워졌다. 훈련생들이 군인이 아닌 일반 대학 졸업생이었고, 전통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무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이 학교와 조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육군은 사쿠마 중위를 파견했다. 사쿠마 중위의 임무는 유키 대령 조직의 실수와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쿠마는 학교 훈련생들의 기상천외한 입학 시험과 훈련 과정, 그리고 천황제를 부정하는 듯한 사고 방식에 경악하던 차에, 미국인 기술자 고든의 스파이 행위 증거를 찾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데...

표제작이자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사쿠마 중위의 시점으로 첩보 기관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마왕' 유키 대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게 제목이기도 한 '조커 게임' 입니다. D 기관 훈련생들이 식당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포커 게임으로 보이지만, 사실 식당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스파이 게임이지요. 누구나 누군가의 카드를 보고 정보를 줄 수 있는데, 그 정보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규칙입니다.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고,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는 D 기관의 룰을 잘 드러내는 게임이에요.

이러한 D 기관 설명이 중심이고, 고든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물을 찾는 과정은 곁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과정에 약간의 트릭이 사용되고 있으며, D 기관원들이 천황제 부정 발언을 했던게 트릭과 연결되고 있어서 전개 구조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쿠마가 주도한 수색 자체가 육군의 음모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초 수색을 지시했던 무토 중령은 필름을 발견하지 못했고, 고든의 부당한 수사에 대한 항의로 궁지에 몰렸던 상태였지요. 그래서 D 기관을 시켜 두 번째 수사에 나선 것입니다. D 기관도 수색에 실패하면 모든걸 뒤집어씌워 조.직을 와해시키고, 자기 실수를 덮으려는 목적으로요. 사쿠마는 무토 중령의 음모를 위한 버림돌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반전이 드러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헛점도 많습니다. 무토 중령이 술집 게이샤에게 용의자 집 수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고든 본인이 사쿠마 중위에게 지금이 두 번째 수사라고 말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지 모르겠거든요. 유키 중령이 변장하고 무토 중령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등 작위적인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작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령>>
영국 총영사 그레이엄은 일본인 양복점 점원 가모와 체스로 친해졌다. 그러나 가모는 D 기관 조직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폭탄 테러 계획의 유력한 용의자 그레이엄 총영사에 대한 혐의를 확정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가모는 체스를 통해 총영사는 심증으로는 죄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총영사 관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종이가 테러범 접선 장소에서 발견되었기에, 결정적 증거를 잡고자 철저히 미행했지만 별다른걸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새벽에 영사관에 잡입하게 되는데....


영사는 지령문을 옮기는 수단에 불과했다는게 진상입니다. 테러 조직은 영사의 우산 속 빈 공간을 활용해서 접선 장소에서 몰래 지령문을 전달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영사가 테러 조직의 접선 장소와 동선이 겹쳤고요.

발상의 전환이기는 한데, 구태여 영사를 이용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D 기관원 가모가 영어에 능통하고, 체스는 물론 미행과 잠입, 그리고 금고 털기에도 숙달된 슈퍼 스파이라는 묘사도 과장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가모가 영사가 소싯적 저질렀던 악행을 고백한 일기를 읽은 뒤, 이걸로 영사를 협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악이었습니다. 촬영도 않고 다른 증거도 없는데, 단지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는걸로 영사를 협박하는게 가능했을까요? 심지어 상대는 적국의 스파이인데 말이지요. 이게 통하려면 뭔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가모가 신분을 세탁하여 영사와 친분을 맺는 과정, 그리고 가모가 미행할 때 영사가 팁을 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정보 교환 방법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 정도는 볼 만 했는데, 그 외에는 건질게 별로 없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로빈슨>>
D 기관원 이자와는 영국 런던에 잠입했지만 영국 첩보기관에 체포되었고, 자백 유도제를 맞아 비밀 암호 등을 털어놓고 말았다. 영국은 유키 대령에게 배반당했다는 이자와를 이용하여, 일본에 가짜 정보를 전달하여 혼란을 주려 했지만 이자와는 의식의심층 구조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비밀은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래서 D 기관은 이자와의 정보가 가짜라는걸 알아채는데...

앞서 소개해드렸던 , 암호가 가짜라는걸 알게된 이유는 꽤 괜찮았습니다. 스파이는 일본 남아의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 무조건 살아남아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유키 대령의 사고 방식도 스파이다워서 좋았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과장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특히 자백제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방법이 말이 안됩니다. 의식의 표층과 심층을 구분하여 표층 정보만 입에 올리도록 훈련했다는데, 전혀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지 못했습니다. 훈련 과정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긴, 자백제라는 비과학적인 약도 마찬가지긴 하네요.
이자와 탈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라이데이'의 존재도 이전에 설명 한 번 없어서 뜬금없었습니다. 이자와가 임무를 떠날 때 유키 대령이 <<로빈슨 크루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위기에 처했던 이자와가 동그라미에 십자가 기호가 그려진 암호를 보고 프라이데이의 존재를 깨닫는다는건 솔직히 가관이었습니다. 이 암호는 연금술에서 '미의 여신'을 뜻하고, 미의 여신 비너스는 천문학에서는 금성이며, 이는 일주일 중 제 6일, 즉 '프라이데이'를 가리킨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국가 정보 기관들의 두뇌 싸움은 볼 만 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마의 도시>>
상하이에 파견된 헌병 중사 혼마 에이지는 상사 오이카와 대위로부터 헌병대 내부 내통자 색출을 지시 받는다. 헌병대의 미야타 중사가 살해당했기 때문이어다.
그 직후, 오이카와 대위의 자택이 폭탄 테러를 당했고 혼마는 본국 '특고' 시절 안면을 텄던 신문기자 시오즈카로부터 제보를 전달받았다. 옛 동급생이자 D 기관원인 대학 동창 구사나기를 상하이에서 목격했다는 제보였다....


D 기관원이나 기관의 작전이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이색작. 헌병대 중사 혼마의 수사와 추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탓입니다.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가 돋보였습니다. 오이카와 대위는 아편을 빼돌리다가 미야타 중사에게 들켰고, 그래서 중사를 살해한 뒤 증거 은폐 목적으로 자택을 테러로 위장해 폭발시켰던 겁니다. D 기관은 시오즈카로 변장시킨 조직원을 시켜 혼마가 이 수사를 하게끔 유도했고요.

하지만 혼마의 추리는 증거가 없다는 문제가 큽니다. 오이카와가 도박장을 드나들었고, 빚이 있었다는 정도로 미야타 중사 살인사건 및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몰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이카와가 혼마의 질책 정도로 패배를 쉽게 수긍하는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뒤 요시노 상병에게 총을 맞고 죽는 장면도 뜬금없었습니다. 요시노 상병은 오이카와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이다가 폭발 때 죽고 만 게이 소년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인데, 설명이 부족했어요.

혼란스러웠던 상하이 분위기와 이런저런 묘사는 그럴싸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결말이 별로였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더블 크로스>>
독일인 카를 슈나이더가 소련과 독일 양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D 기관은 졸업 시험을 겸해 도비사키에게 임무를 맡겼다. 도비사키는 슈나이더가 어떻게 암호를 발송했는지 등을 밝혀냈고, 신병을 확보하기 직전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애인의 집에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은 사건 현장을 발견했던 슈나이더의 애인 노가미 유리코였습니다.
사건 당일 그녀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습니다. 수 km 떨어진 극단 연습장에서 한창 연극 리허설 중이었고 그녀는 주역이라 연습장을 5분 이상 비우는건 불가능했는데, 차로 집을 왕복하는데는 최소 10분은 걸리는데다가, 슈나이더에게 유서를 쓰게하고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하는데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알리바이 트릭물 처럼 보였던 설정과 전개에 비해 진상은 보잘것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미리 독을 넣어둔 와인을 마시고 죽었던 겁니다. 바로 직전에 읽고 소개해드렸던 <<흑마술의 여자>> 트릭과 똑같네요. 유서는 전화를 통해 연극 대사로 위장해 쓰게 했다는, 추리 퀴즈 수준의 트릭이었고요. 노가미 유리코가 자택에 설치해두었던 전화 대신, 사람을 시켜 경찰을 부른 이유 - 유서를 옮겨 놓으려고 - 정도에 대해서만 약간의 추리가 등장할 뿐입니다.
유서(?)에 작게 쓰여져 있던 '더블 크로스'도 슈나이더의 즉흥적인 낙서에 불과하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했습니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의미였다는데, 그냥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오히려 본편 사건보다는 도비사키의 과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등을 버리며 홀로 살아가는 스파이가 될 수 없다는 도비사키의 결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급작스럽게 등장합니다. 이 작품이 장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노가미 유리코를 심문하면서 애정이 싹텄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다면 괜찮았을텐데 중간 과정 없이 결심만 등장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수록작 중 워스트로 추리물, 스파이물 양쪽 모두 별 가치가 없는 작품입니다.

2022/09/09

BOX ~상자 속에 무언가 있다 1~3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이야기의 진상 및 반전, 여러가지 트릭과 장치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형의 죽음으로 가정이 엉망이 된 고등학교 1학년 가쿠다 코우지에게 어느날 발신인 불명으로 세공상자가 배달되었다. 상자 퍼즐을 풀자 큰 소리와 함께 알수없는 무언가가 어디론가 향했고, 집과 어머니 머리 일부는 사라져 버렸다. 기묘한 사건을 풀기 위해 무언가가 향한 곳을 찾아간 코우지는 루빅스 큐브를 풀고 있던 마스다 메구미를 만났다. 그 뒤 둘은 공원의 기묘한 정방형 건물 앞에서 똑같이 발신자를 알 수 없는 퍼즐을 받았다는 다른 다섯 명을 만났고(두 명은 부부라서 네 팀), 호기심 넘치는 기묘한 여자 쿄우코와 함께 정방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출구는 곧바로 사라져버렸고, 건물 속 네비게이터라는 괴소녀가 건물을 빠져나가려면 '상자'가 제공한 퍼즐을 모두 풀어야 한다고 일행에게 말했지만, 일행 중 야마우치는 퍼즐을 풀지 않으려 했다. 건물과 관련된 민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어간 사람 중 돌아오지 않거나 존재조차 사라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퍼즐을 풀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야마우치는 괴물로 변했고, 퍼즐을 풀지않고 편법으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고우다도 자기 퍼즐을 쿄우코에게 넘기다가 괴물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쿄우코, 코우지와 메구미, 치에코 네 명은 괴물 고우다의 공격, 상자 퍼즐 네비게이터 괴소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퍼즐까지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괴소녀는 최후의 순간에 네 명을 모두 없앨 계획이었지만 이 역시 쿄우코가 기지를 발휘하여 무사히 빠져나오게 되는데...

좋아하는 작가인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장편(?)입니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아닙니다. 일본어 독해 실력은 형편없지만 읽고 싶은 마음에 도전해 보았는데, 전 3권으로 각 권당 200페이지 정도 분량 정도라 다행히 어떻게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체 불명의 누군가가 보낸 초대장으로 모인 사람들이 폐쇄된 장소에서 생존 게임을 벌인다는 설정은 흔합니다. 하지만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없애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는건 독특했습니다. 초대장이기도 한 '퍼즐'을 모두가 푸는게 살아남는 조건이라서, 모두 살아남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또 이런 류의 생존 게임은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많았었는데, '상자'에 갖혀있는 '인과'를 잡아먹는 괴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게임을 벌인다는 나름의 이유도 괜찮았습니다. 황당무계하게 스케일을 키워버리니까 오히려 번잡하고 비현실적인 게임이 더 말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사람들을 불러들였지만, 사람들이 패닉을 일으키며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자 - 당연합니다. 정체 불명의 공간에 갇혔을테니... -, 사람들이 단계를 밟아 나가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퍼즐'을 풀게 했다는 설정, 그리고 '먹이'가 사람들이 버리고 싶은 것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물의 먹이가 '인과'인 탓에, 사람들이 상자에 두고 가서 '무언가'가 원래부터 없던게 되어버리면 - 예를 들어 아내를 상자에 준다면, 상자에서 나온 세상에는 아내가 처음부터 없다. -, 인과관계 변화가 크게 생겨서 그에 따른 에너지를 상자 속 괴물이 먹어치운다고 설명되는데, 상황에 대한 설득력은 충분했어요. 괴물의 실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작가가 자주 써먹는 특유의 크툴루 신화스러운 분위기를 적당히 살린 은근하게 묘사도 한 몫 하고요. 

다른 소소한 설정들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초대된 사람들이 6명인 이유는 '상자', 즉 육면체가 플레이어들을 선택하여 퍼즐을 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퍼즐을 풀었다는 증거인 카드가 죽은 사람 것이라도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육면체에 카드를 붙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퍼즐'을 풀지 않는게 가장 중요한 규칙 위반이라서 그런 짓을 한 플레이어는 상자가 처단한다는 설정, 그리고 입장권과 퍼즐을 넘기면 플레이어로서의 권리를 넘길 수 있다는 설정도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뿐더러 이야기 절정부에서 아주 잘 사용되고요.

작중에 등장하는, 작가가 직접 고안했다는 퍼즐들도 좋습니다. 종이를 접어야 풀 수 있는 미로, 일행의 이름을 사용하는 힌트없는 크로스워드 퍼즐에서 시작해서, 각 에피소드 표지 그림 등 곳곳에 삽입된 그림 퍼즐들 모두 볼거리에요.

퍼즐 풀이에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들도 적절합니다. 코우지는 세공 상자를, 메구미는 루빅스 큐브를 이미 풀었는데 상자에 들어갈 때 퍼즐을 풀었다는 증거인 카드를 받지 못했었지요. 오히려 '안'에서 다시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고요. 이는 세공 상자와 루빅스 큐브를 풀었던 방법을 상자 안에서 그대로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데,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세공 상자의 해법 순서대로 '문'을 열고 닫을 때 열린 문으로 괴물이 들어올 수 있는 상황에 처해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메구미가 풀어야 하는 퍼즐이 전체 면이 백색인 루빅스 큐브라는 것도 기발했습니다. 원래 밖에서 풀었던 큐브 순서 그대로 다시 풀어야 했던 거지요. 네비게이터가 이를 방해하기 위해 큐브를 건드리려 했었던 상황은 정말로 큰 위기였고요. 한 칸이라도 돌렸으면 푸는게 불가능했으니까요.

캐릭터 구성도 나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소년 만화 주인공 쾌남 코우지를 비롯한 대부분 등장인물들의 활약이 잘 배분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메구미가 상자에 갇힌 타니 부부를 데려오려 했던게 알고보니 중요했다는 - 타니 부부의 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어서 - 게 대표적입니다. 딜러, 힐러 등으로 역할 구분이 되는게 아니라 모두 퍼즐을 푸는데 성공하는 두뇌파 모습을 공평하게 보여준다는 점과 코우지와 메구미, 치에코의 기묘한 삼각관계도 독특합니다. 패닉을 일으키는 어른 두 명과 네비게이터 괴소녀와의 대결을 통해 서바이벌 게임이 아닌 탓에 다소 부족했던 갈등과 대결 구도를 보완하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고요.

그러나 '네비게이터'같은 설정 구멍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목숨을 걸고 게임을 시키고, 그 결과 자기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걸 먹이로 준다는게 상자 퍼즐 게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왜 이를 플레이어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걸까요? 애초에 제대로 먹이를 주지 않으면 상자 속 괴물이 상자를 찢고 나올 수 있어서 이 게임을 벌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게임은 퍼즐을 잘 풀도록 도와줘서 필요없는걸 - 그리고 그에 따른 인과 에너지를 - 쉽게 받아내는게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구태여 플레이어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다고 인과 에너지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네비게이터는 마지막에 카드에 표시되는, 자기가 바쳐야 할 무언가를 상자에게 주는걸 거부하면 그 플레이어 혼자서만 빠져나올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는건데 그걸 거부하고 상자를 빠져나오는 선택을 하는 플레이어가 있을까요? 실제로 작중에서 코우지는 집안의 우환이 되어버린 죽은 형의 존재, 메구미는 성정체성장애를 겪는 자신의 '남성', 치에코는 자기를 고립되게 만든 '영감'을 주는데, 이것들은 그들이 너무나 쉽게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하는 것으로 작 중에서 설명됩니다. 코우지 일행 중 이것들 때문에 배신을 할 사람이 있을리 없습니다. 이미 친구 이상이 되기도 했고요. 게다가 네비게이터는 쿄우코의 작전으로 진짜 '플레이어'가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직접 무언가를 주는걸 거부하면 됐습니다. 일행을 유혹해서 배신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모두가 필요없는걸 바친 정도가 목숨을 건 게임 보상이라는건 좀 시시했고요.

그래도 이런 설정 구멍은 빠른 전개와 여러가지 퍼즐의 배치로 읽으면서 눈치채기는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발암 캐릭터 쿄우코입니다. 이야기 맥락을 많이 끊을 뿐더러, 그녀가 네비게이터 소녀에게 싸움을 걸어서 코우지 일행이 위기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만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단순히 '흥미가 넘쳐서' 상자에 일부러 뛰어든다는 등의 캐릭터 설정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녀가 대활약하는 '착시 퍼즐' 부분은 퍼즐이라고 하기는 억지스러운, 다소 개그스러운 내용이라서 역시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저자가 그녀는 '트릭스터'이며 "요괴헌터"의 히에다 교수의 제멋대로 무책임 버젼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히에다 교수 본인이 등장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정신나간 여자가 어설픈 개그, 색기 따위를 보여주는것 보다는 말이죠.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테이스트가 잘 살아있으면서도 거북하지 않은 괜찮은 모험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 월드 입문작으로 제격인 작품으로 생각되는 만큼, 국내에도 꼭 소개되기를 바랍니다.

2022/07/09

사명과 영혼의 경계 - 히가시노 게이고 / 송태욱 : 별점 3점

사명과 영혼의 경계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송태욱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키는 아빠 겐스케가 대동맥류 수술을 받다가 죽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의사가 될 결심을 했다. 데이도 대학 의대를 졸업한 그녀는 아빠를 수술했던 니시조노 교수 팀에 소속되었고, 이후 엄마 유리에와 니시조노 교수가 재혼한다는 사실과 아빠가 경찰이었을 당시 추격하다가 교통 사고로 사망한 소년이 니시조노 교수의 아들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빠 죽음에 더 큰 의심을 품게 되었다.
한편 데이도 대학 병원의 간호사 노조미와 교제하고 있는 전자 기술자 나오이 조지는 노조미로부터 병원에서 아리마 자동차의 사장 시마바라 소이치로가 곧 수술을 받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모종의 계획을 시작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의학 드라마이자 범죄 스릴러물. 의학 드라마는 유키와 니시조노 교수 사이의 이야기에서 주로 등장합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종합병원'같은 의학 빙자 연애물같은건 아니에요. 유키가 겐스케가 죽은게 정말 의료 사고였는지, 아니면 니시조노 교수가 유키의 엄마 유리에와 불륜 관계라서 아빠를 실수로 위장해 죽인건지, 아니면 아들의 복수였는지에 대해 추적하면서 독자를 고민에 빠트리기 때문이지요. 동기가 많은 탓에 진상도 굉장히 궁금하더라고요. 이렇게 여러가지 동기를 쌓아나가는 솜씨는 확실히 잘 나가는 작가다왔습니다.

의학 드라마로서의 가치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야기 핵심이 의사로서의 '사명'인 탓입니다. '사명'은 유키의 아빠 겐스케의 입을 빌어 "인간은 그 사람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전개를 통해 니시조노 교수는 그의 사명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항상 최선을 다했다는게 밝혀지게 됩니다. 어차피 겐스케 죽음의 진상은 유키가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을 터라, 이런 식으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전개와 결말 모두 독자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끔 잘 그려지고 있어요.
이를 의학 드라마라면 반드시 클라이막스에서 보여줄 '위험한 수술의 성공' 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이용하고 있는데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조지의 테러로 수술의 성공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온갖 노력을 짜내어 시마바라의 수술을 이어가는 과정은 왠만한 모험 소설 못지 않은 긴장감과 스릴을 가져다 주는 덕분입니다. 이만큼의 노력을 기울이는 의사가 사람을 일부러 죽일리 없다는 설득력도 갖추면서요.

그리고 시마바라가 수술받을 때를 노려 병원을 정전시키는 조지의 계획이 펼쳐지는 부분이 범죄 스릴러물 부분인데, 여기서는 탁월한 장르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실력이 눈부시게 빛납니다. 조지의 계획이 아주 그럴듯 했던 덕이지요. 처음에는 단순히 심폐 소생기 전원만 건드리는 수준으로 보였지만, 나중에 조지가 일으켰던, 혹은 행했던 소소한 사건들 모두 - 대표적인 예는 처음에 기묘한 협박장을 보냈던 이유입니다. 자신의 계획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가 목적이었지요. - 타당한 이유가 있었으며, 계획 역시 굉장히 스케일 크고 잘 짜여진 것이었다는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나나오 형사가 협박범의 진짜 목적은 시마바라 소이치로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벌여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전개되는 추리적인 부분들도 볼만했습니다. 나나오 형사는 범인의 동기를 밝혀내기 위해 아리마 자동차의 과거 과실을 조사했고, 단순히 과실 피해자가 아니라 과실로 인해 수술 골든타임을 놓쳤던 다른 피해자의 애인이었던 조지가 드러나게 되거든요. 과실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서 처음에는 용의 선상에 오르지도 않았었는데,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아이디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유키가 조지의 얼굴을 살짝 보고 기억하고 있었다가 이를 나나오 형사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우연찮게 보고 떠올린다는 작위적인 요소는 조금 거슬리기는 했습니다만, 이 정도는 봐 줄만 하지요.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조지가 본인 이름으로 숙박했던 호텔을 경찰이 덮쳤음에도 현장에 없었다는 식의 두뇌 게임도 볼만 했습니다. 경찰에게 정체가 발각날 것을 대비해서 미리 본명으로 추가 예약을 해 놓았을 뿐, 조지의 은신처는 따로 있었다는 공격을, 범인이 호텔 예약 시 특별한 '층'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통해 그 호텔은 저층에서는 데이도 대학 병원이 보이지 않으니 이건 위장이다! 라고 나나오 형사가 받아치는 식인데 재미있었어요.
조지가 전자 기술 전문가로서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장치들도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고요.

그러나 조지의 계획도 생각해보면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조지가 노조미를 유혹해서 사귀게 된 것은 언젠가 데이도 대학 병원에서 시마바라 소이치로가 수술을 받을거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는 것 처럼요. 그리고 노조미가 수술실에 들여보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할 속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간호사를 유혹하려면 시간이 없잖아요. 또 수술 중 정전을 일으키는 테러를 일으킬 수 있었다면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쓰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폭탄 등을 설치할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했을텐데 말이죠. 시간이 필요한 계획을 세우다 보니, 결국 노조미가 감정에 호소하자 복수를 포기하고 말았으니까요. 여러모로 구멍이 많은 계획이었어요.
의학 드라마 부분에서 니시조노 교수가 유키의 엄마 유리에와 재혼을 앞두고 있다던가, 니시조노 교수 아들 사건과 같은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유키와 니시조노 교수간 갈등이 약해질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이런 설정에 대한 분량도 필요 이상으로 길다고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조지와 노조미의 감동적인 엔딩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범죄 스릴러 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명성에 값하며, 의학 드라마로서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가져다 준다 생각됩니다.
 

이시하라 사토미 주연의 드라마도 한 번 보고 싶네요.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데 어떻게 구현했으려나....

2022/01/07

샘 호손 박사의 두번째 불가능 사건집 - 에드워드 D. 호크 / 김예진 : 별점 2점

샘 호손 박사의 두 번째 불가능 사건집 - 4점
에드워드 D. 호크 지음, 김예진 옮김/GCBooks(GC북스)

안녕하세요. 2022년 첫 리뷰네요. 먼저 새해 인사 드립니다. 2022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노스몬트에서 일하는 시골 의사 샘 호손이 명탐정으로 등장해서, 온갖 불가능 사건을 해결하는 고전 스타일의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 시리즈입니다. 1권에 이어 2권도 읽게 되었네요. 

수록작은 무려 열 다섯 편이며, 샘 호손이 범인으로 몰린다던가, 대도시 보스턴에서 사건을 해결한다던가, 렌즈 보안관이 혼자서 사건을 해결한다던가 하는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져서 팬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하지만 전편보다는 별로입니다. 모두 일종의 밀실 상황에서 일어난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알고보니 밀실이 아닌 상황이 많은 탓입니다. 대략 네 작품은 명백하게 밀실이 아니었어요. 트릭도 무려 여섯 작품에서 변장이 사용되고 있고요. 그리고 절반이 넘는 무려 여덟 작품에서 불가능 범죄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버리는 억지를 보여주는데 굉장히 실망스럽습니다. 범행 동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설득력이 없어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몇몇 작품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술한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트릭과 범인을 모두 알려주는,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입니다.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나저나, 무려 열 다섯 편의 리뷰를 상세하게 올리니 시간이 엄청 걸리네요. 다음부터는 인상적이었던 단편들만 추려서 올리는걸 고려해야 겠습니다.

"치유하는 천막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어린 아들을 치료사로 내세워 시골 환자들 대상으로 사기를 치고 다니는 사기꾼 조지 예스터의 공연을 찾아갔다가 그와 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자기 환자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샘이 그에게 주먹을 날린 뒤 나가려고 잠깐 뒤를 돈 순간, 조지 예스터가 가슴을 칼로 깊게 찔려 살해당했다. 천막 안에는 예스터와 샘 호손밖에 없었고, 잠깐 사이에 샘 호손의 눈을 피해 현장에서 빠져나가는건 불가능했다...

짧은 순간에 범인이 사라져 버리는 인간 소실 트릭이 사용된 작품인데, 범인인 매지가 동상으로 변장하고 있었다는게 트릭이라서 굉장히 허무했습니다. 동상과 사람이 몸에 페인트 칠을 한 건 명백히 달랐을 텐데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물론 어느 정도는 정말 동상처럼 보이게끔 하는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동상이 그녀를 모델로 만든거라는 일종의 복선도 제공되기는 하고요. 때문에 짧은 시간, 제한된 조건에서라면 먹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지 혼자 거대한 동상을 천막 밖으로 잠깐 치워 놓았다가 다시 원래 위치로 가져다 놓는다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등신대 금속 조각상이라면 무게가 아무리 적어도 백 킬로그램은 되었을테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동상으로 변장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샘 호손(아니면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트릭을 사용했다? 말도 안됩니다. 샘 호손,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그날 조지밖에 없는 천막으로 찾아와 다툴 거라는걸 미리 알고 있었어야 하는데, 이걸 예상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설령 다툼을 예상했더라도, 천막 안이 아니라 천막 밖에서 다퉜을 수도 있고요. 

즉, 살해하려면 그냥 천막에 숨어있다가 죽이는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이 동상의 존재를 은근슬쩍 묻고 지나가는 전개가 별로 공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독자와의 두뇌 싸움을 펼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속여넘기려는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또 트릭을 떠올릴 수도 있는 대학 시절 사진을 훔쳐내기 위해 매클로플린 교수를 습격했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예스터의 공연에 찾아가기로 한 건 매지가 샘 호손과 함께 있었을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사진을 회수했으면 됩니다. 추가적인 범행을 저지를 필요 없이요. 매지가 토비 예스터의 엄마였었다는 동기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샘 호손이 범인으로 몰린다는 상황 말고는 건질게 없었던 졸작이었습니다.

"속삭이는 집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유령사냥꾼 태디어스 슬론과 함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오는 비밀의 방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 브라이어 가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둘은 한 밤중에 당장 나가라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들은 뒤, 누군가 저택에 들어와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걸 목격했다. 그리고 30여 분이 지나도 남자가 나오지 않아서 둘은 비밀문을 열어보는데, 남자는 죽어 있었고 방 안에는 다른 사람, 다른 출구도 없었다. 샘 호손은 피해자가 최소 15시간 전에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챘는데, 수사를 이어가던 샘 호손의 차가 누군가가 설치한 조잡한 폭탄에 의해 불타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비밀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는건, 그 방에 다른 비밀 출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숨겨진 출구만 찾으면 될 일이라, 이걸 불가능 범죄물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유력한 용의자도 너무 뻔합니다. 상황을 아는건 초반에 샘의 치료를 받는 빌리밖에는 없으니까요. 빌리는 어린 시절 유령 집에서 자주 놀았으며 치료를 받을 때 샘과 슬론이 그 집으로 간다는 이야기까지 들었고, 시체가 들고 있던 총은 발사된 흔적이 있었는데 빌리가 샘 호손의 치료를 받은 이유는 쇠스랑에 발을 관통당했다는 것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이상한 불가능 상황으로 만드는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비밀 방이었다면, 그 안에 시체를 숨겨놓고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이잖아요? 구태여 샘과 슬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사건을 키울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사건을 기획한 빌리의 모친이 사후경직을 통한 사망시각 추정이 가능하다는걸 몰라서 벌인 것이었다는 설명이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좋은 점수를 줄 만한 작품은 아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나마 샘 호손의 애차 피어스 랜스 어바웃이 7년만에 불에 타 버리고, 새로운 차를 구입한다는 이야기만 기억에 남네요.

"보스턴 공원의 수수께끼" 

샘 호손이 의학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보스턴애 도착한 날, 보스턴 공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쿠라레 독화살이 흉기로 사용되었으며, 이전에도 3명이나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했었다. 하지만 공원은 숨어서 총을 쏘거나, 대롱을 부는게 불가능했다. 심지어 세 번째 사건 때부터는 공원에 형사가 가득했고, 네 번째 피해자는 죽을 때 까지 경찰이 예의 주시하며 미행행하기까지 했었다. 범인은 어떻게 독이 묻은 화살을 피해자들에게 쏠 수 있었을까?

"사건 현장에 있었지만, 아무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에 의해 사건이 벌어진다는 일종의 '투명 인간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범인이 기차 차장이나 레스토랑 웨이터 등이었다는 류의 트릭으로 이 작품에서는 호텔 도어맨이 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호텔 도어맨이라 눈에 뜨이지 않았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건 마음에 듭니다. 핵심은 샘 호손이 쿠라레에 대해 조사하여 밝혀낸대로, 공원 안이 아니라 공원 입구, 즉 호텔 근처에서 화살에 맞았다는 겁니다. 쿠라레는 즉효성이지만 맞고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어서 피해자들은 공원 안에 들어가서 이동하다가 죽었던 거지요. 도어맨은 호루라기를 부는게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라서 호루라기를 부는 척 하고 불특정 다수인 공원 이용자에게 독화살을 쏘았고요. 

노스몬트가 이닌 대도시 보스턴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것도 처음에는 그냥 재미 요소라 생각했는데, 트릭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큰 공원, 그리고 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큰 호텔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시골 소도시 노스몬트보다는 큰, 보스턴같은 대도시를 무대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범인의 동기가 애매했으며, 20세기 초 미국을 무대로 한 작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독화살이 흉기로 사용된 건 작위적이기는 했습니다. 샘 호손이 스스로 미끼기 되는 장면도 억지스러웠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 작품으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잡화점의 수수께끼" 

노스몬트에 미모의 중년 여성 매기 머피가 이사와서 맥스 하크너 잡화점 옆에 부동산을 열었다. 그녀는 자주 잡화점에서 여성 인권에 대해 열변을 토했기에 마을 남자들이 싫어했지만, 워낙 미인이라 내색은 크게 하지 않았다. 존 클레이 노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날, 맥스의 잡화점에서 일했던 프랭크가 샘 호손을 찾아와 자신이 맥스의 아내 어밀리아와 불륜 관계였다는걸 털어 놓았고, 그 직후 맥스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잡화점 안에는 시체와 함께 기절했다는 매기 머피밖에 없었는데, 잡화점 문과 창문은 안쪽에서 모두 잠겨 있었다...

밀실물처럼 소개되지만 환풍기 날개 사이로 총을 집어넣어 쏘았다는게 진상이라서, 이게 밀실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현장에서 발견된 맥스의 총은 더블 배럴이라 환풍기 날개 사이로 넣을 수 없었지만, 밖에 있었던 존 클레인 노인의 총은 싱글 배럴이라 날개 사이로 넣을 수 있었다는데 이건 트릭도 뭐도 아니고요. 부실한 현장 조사에 더해 흉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생겨난 실수일 뿐입니다.존 클레이 노인의 범행 동기도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고, 범인이 살인 때문에 놀라서 죽었다는 등 내용도 전반적으로 억지스럽습니다. 

복잡하고 억지스러운 장치 트릭보다야 현실적인 발상입니다만,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법원 가고일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조스트로 살인 사건의 배심원을 맡게 되었다. 피고 애런 플레이버는 조스트로의 고용인으로, 그는 실수로 총이 발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조스트로 부인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있어서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재판 도중, 베일리 판사가 마시던 물 잔 속 청산가리에 의해 독살당했다. 판사가 죽기 전 '가고일'이라는 말을 남겨서 범원 가고일 상을 조사해보니, 베일리 판사가 메이틀랜드 판사와 함께 밀주 밀매점에 투자했다는 문서가 들어있었다. 샘 호손은 이런 저런 단서들을 확인한 뒤, 사건 현장을 재현해서 추리쇼를 펼쳐보이는데...

애런 플레이버가 자살하려고 조스트로 부인에게서 건네받은 청산가리를 잔에 부어 놓았는데, 판사가 착각해서 먹고 죽은 거라는 진상부터가 말도 안됩니다.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직접 입에 털어 넣었어야죠. 

독약을 애런이 손에 넣은 방법에 대한 설명도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재판 중에 조스트로 부인이 껌을 계속 씹고 있었다는 증언을 통해, 그녀가 껌으로 독약병을 증인석에 붙여 놓았다고 추리하는건 일견 그럴싸했지만 이 역시 조금만 생각해보면 납득할 수 없는 추리에요. 아무리 20세기 초반이라고 해도, 재판을 받는 피고가 흉기를 손쉽게 손에 넣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했을리가 없잖아요. 가능했다해도 총이나 칼을 손에 넣는게 나았을거에요. 

억지스러운 설정, 부실한 설명으로 이루어진 최악의 졸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수록장 중 최악입니다.

"청교도 풍차의 수수께끼" 

'청교도 풍차'라 불리우는 네덜란드 풍차가 보존되어 있던 부지에 청교도 기념 병원이 신설되었다. 노스몬트 최초의 흑인 의사 링컨의 근무로 이런저런 구설수가 나오고 있었던 중, 부지를 병원에 기증했던 랜디 콜린스가 풍차에서 몸에 불이 붙어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사건 당시 "루시퍼"라는 말을 겨우 남겼었고, 의식을 회복하여 풍차 안에 악마의 불덩이가 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샘 호손은 주유소를 운영하는 아이작 밴 도런이 풍차 안으로 걸어 들어간 뒤, 풍차와 함께 불에 타 죽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링컨 존스는 검시 결과 밴 도런의 다리가 심하게 골절되어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첫 사건은 백인 우월주의자 랜디 콜린스가 풍선을 이용하여 풍차 날개 4개에 불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실수로 풍선이 터져 화상을 입었던 것이었습니다. "루시퍼"는 성냥을 부르는 명칭으로, 나중에 의식을 회복하고 악마 어쩌구로 말을 바꾼거지요. 

두 번째 사건은 랜디에게 휘발유를 팔았던 주유소 주인 밴 도런이 진상을 눈치채고 협박해서, 랜디가 그에게 풍차 윗쪽에 보물을 숨겨두었다고 알려주었던 겁니다. 성냥이나 촛불로 확인해보라면서요. 그리고 이 말을 따른 밴 도런은 풍차 윗 쪽으로 날려보냈던 휘발유에 불이 붙어버린 탓에 처참하게 죽었고요. 다리는 위에서 떨어질 때 부러졌던 것이었지요. 

랜디의 동기는 인종차별을 하기 위했던 것으로, 인종차별이 뒤의 범죄들과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매끄럽습니다. 사회파 느낌도 살짝 나서 괜찮았고요. 첫 번째 사건은 일종의 실수라 특별할 건 없지만, 두 번째 사건에 사용된 일종의 원격 조종 트릭은 나름대로 설득력도 높았습니다.

하지만 소소한 부분들은 문제가 많아요. 제일 먼저, 풍차를 십자가 형태로 불태우기 위해 풍선을 이용하려 했다는 발상이 억지스러웠어요. 이게 사건의 핵심인 탓에 이야기 전개도 다소 헐거운 편입니다. 성냥이나 촛불로 풍차 윗쪽을 확인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죠. 손전등도 있는 시대인데다가, 이렇게 한다고 불이 그렇게 쉽게 붙었을지도 의문이며, 설령 불이 붙었다 해도 밴 도런이 죽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랜디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걸 보다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건 공정해 보이지 않았어요. 단서가 없지는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티가 물씬 나서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은 나쁘지 않았는데 관련된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낮아서 감점합니다. 체스터튼 소설같은 사건이라며 한껏 분위기를 띄우는데, 그 정도 수준의 작품은 절대로 아닙니다.

"생강빵 하우스보트의 수수께끼" 

노스몬트 근처 체스터 호수는 마을 주민들의 여름 휴양지였다. 샘 호손은 여름 휴가를 왔던 미란다 그레이와 사랑에 빠졌다. 미란다의 삼촌인 제이슨, 기티 그레이 부부와 그 이웃 별장의 레이, 그레텔 하우저 부부와도 친해졌는데 어느날, 샘과 미란다 눈 앞에서 하우저 부부의 화려한 하우스 보트를 타고 놀던 두 부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메리 셀레스트호 괴담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끌어 올리지만, 특별한 수수께끼는 없습니다. 보트에는 레이 하우저와 키티 그레이만 타고 있었고, 그레텔 하우저와 제이슨 그레이는 이미 살해당해서 별장 안에 숨겨져 있었던 겁니다. 레이와 키티는 보트를 출발시킨 후, 별장에서 안 보이는 쪽으로 헤엄쳐 나왔고, 보트는 폭파시키려고 다이너마이트를 셋팅했는데 그게 불발했던거지요. 보트를 조사해서 다이너마이트를 찾아내면, 배 주인인 레이 하우저가 범인이라는게 뻔하니 후더닛 물로 볼 수도 없고요. 

설령 레이 하우저의 계획대로 폭파되었더라도 문제에요. 그는 배가 폭파된 후 그레텔과 제이슨의 시체를 떠내려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들이 익사하지 않았다는건 부검으로 밝혀졌을테니까요. 함께 배를 타고 있던 네 명 중 두 명이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익사가 아니라면, 다른 두 명이 범인이라는건 당연하잖아요? 

아울러 이렇게 무거운 강력 범죄 이야기로 끌고가지 않고, 두 부부가 장난으로 이 일을 벌였다는 일상계 물이었다 한 들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샘 호손과 미란다 눈에 보이지 않게 배 반대쪽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간게 전부인 탓입니다. 즉, 이건 애초부터 불가능 범죄가 아니었어요. 차라리 장난에 가깝죠.

부실 수사와 부실한 계획이 합쳐진 망작입니다. 샘 호손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는게 독특했을 뿐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분홍색 우체국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간호사 에이프릴과 노스몬트 우체국을 방문했다. 개장 첫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우체국장 베라는 우체국을 분홍색으로 칠해놓았다. 분홍색 페인트가 값이 쌌던 덕분으로, 한 쪽 벽에 마저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 흄 백스터를 불렀다. 흄이 페인트를 칠하기 시작했을 때, 은행장 앤슨 워터스가 주식 대공황을 알리며 1만 달러어치 무기명 채권의 특별 배송을 부탁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 봉투가 사라지고 마는데....

샘 호손이 미란다와 파국을 맞지만, 렌즈 보안관이 베라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애정 전선이 크게 움직이는 에피소드.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어요. 샘 호손이 봉투 행방에 대해 우체국 현장에서 펼쳐보이는 여러가지 추리들도 그럴싸했지만,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흄 백스터가 주워서, 벽에 붙인채 페인트 칠을 해 버렸다는 진상도 합리적이었거든요. 페인트가 마르면 바로 들통날테니 그날 밤 봉투를 회수하러 올 것이라는 마무리 추리까지 깔끔했고요.

물론 당장 봉투를 찾지 못했더라도, 수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렌즈 보안관의 무능이 드러나기는 합니다. 제일 수상한건 흄 백스터인게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런대로 괜찮은 단편이었습니다. 다른 작품들 수준이 워낙에 별로라 이 정도면 충분히 선녀급이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팔각형 방의 수수께끼" 

렌즈 보안관은 베라와 에덴 하우스의 팔각형 방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팔각형 방은 거대한 서재로, 네 귀퉁이에 바닥에서 천장까지 닿는 거울이 달린 수납장을 설치하여 만든 곳이었다. 그런데 결혼식 당일, 방문이 열리지 않아서 잠긴 문을 부수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눈에 뜨이는 건 문 손잡이에 묶여 있던 끈 한 줄이었다. 끈으로 빗장을 잠글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았지만 끈은 너무 짧았고, 방문은 끈 한 올 통과할 틈이 없었다.

문 손잡이에 끈이 묶여 있었으니 이를 밀실물로 보기는 애매합니다. 이 끈으로 밀실을 만든게 당연하니까요. 진상도 예상 그대로입니다. 범인은 문 바로 맞은편 창문 걸쇠에 끈을 묶고, 이걸 빗장에도 묶은 뒤 창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문을 부술 때 끈이 당겨져 창문 걸쇠가 잠긴 것이지요. 

이렇게해서 창문이 잘 잠겼을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끈 조각이 남은 탓에 딱히 대단한 트릭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제대로 잠긴걸 확인하지 않아서 밀실로 착각했을 뿐, 실제로는 밀실이 아니었다는 문제도 크고요. 범인이 밀실을 만든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어요. 이렇게 복잡한 장치를 만드느니, 문을 열어두고 한 패에게 살해당했다는 식으로 꾸미는게 상식적입니다.

물론 범인인 조시의 아내 엘렌이 창문을 부수는걸 반대했던 장면같은 복선이라던가, 언제나 이야기를 듣는 화자가 아니라 범인이었던 엘렌이 찾아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거라는 나름의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그녀가 남편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지만, 결국 그 때문에 모든걸 잃었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부실했고, 상황의 설득력이 낮아서 좋은 점수는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집시 야영지의 수수께끼" 

청교도 기념 병원을 찾은 샘 호손이 병원 경영의 전권을 맡은 에이블 프레이터 의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눌 때, 집시 에도 몬타나가 들어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한 뒤 곧바로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집시들은 무리의 지도자 루돌프의 저주 탓이라 여겼지만, 부검 결과 몬타나는 심장에 총을 맞았다는게 밝혀졌다. 그러나 몬타나의 가슴과 등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렌즈 보안관은 저주의 원인이 된 몬타나의 부인 테레즈를 구금하려 했지만 집시 스티브의 공격으로 실패했고, 철저한 수사를 위해 집시 무리를 하룻밤 동안 감시했는데 집시들은 스무 대의 마차, 말과 함께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두 개의 불가능 범죄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 범죄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가슴과 등에 상처가 없었다면 누군가 가슴을 연 뒤 심장에 총을 쏜 것이고, 부검 자리에는 샘 호손과 에이블 프레이터밖에 없었으니 범인은 에이블인게 당연하지요. 집시들이 머물던 해스킨스 농장의 상속 문제라는 동기도 이야기에서 거의 곧바로 드러나고요. 애초에 왜 가슴을 열기 전에 총을 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구태여 기묘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집시들이 하룻밤 새 사라져버린 두 번째 트릭은 그래도 조금 낫습니다. 말과 마차모양 판지를 세워놓아 눈을 속인 뒤, 판지를 태우고 사람들만 몰래 빠져나갔다는건데, 보안관이 멀리서 감시하고 있었다면 충분히 속아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저 판지들을 모조리 태울 수 있었을지 의문인 등 세세한 점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밀주업자 자동차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밀주업자 래리 스피어스의 동료들에게 납치되었다. 총에 맞았다는 래리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래리는 중상이 아니었다. 동료 중 배신자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며 아픈 척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래리는 토니 배럴과의 거래 완료 때까지는 샘 호손을 풀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거래가 끝났을 때, 실수로 총격전이 벌어졌고, 차에 탔던 토니 배럴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진상은 래리 스피어스가 다친 척 위장해서 토니 배럴을 집 안으로 끌어들인 뒤 살해했던 겁니다. 집 밖으로 나가 차에 탔던 건 래리가 매수한 토니의 부하 스쿠프였고요. 스쿠프는 래리가 뚱보로 변장할 때 썼던 완충재를 몸에 두르고, 수염을 붙인 뒤 웅얼거리며 토니인 척 나가서 차에 탔습니다. 그리고 변장을 풀고 바로 운전석으로 넘어가 차를 몰고 떠나려고 했던 거지요. 잘 됐더라면 완전 범죄가 됐을텐데, 하필이면 총격전이 벌어진 탓에 스쿠프가 운전석에서 내리자 불가해한 실종 사건이 생겨났던 겁니다. 이렇게 불가능 범죄가 일어난 이유를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합리적으로 설명되는게 좋았습니다. 래리가 술통 값을 낼 수 없는데 술통이 필요했다는 동기도 설득력 있었고, 토니 배럴의 차가 밖에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던가 (방탄을 위해서), 스쿠프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등의 복선도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갱들과 목숨을 걸고 담판을 지으며 사건을 해결하는 샘 호손의 모습도 독특했고요.

이렇게 이야기 완성도만큼은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트릭의 설득력이지요. 과연 저 정도의 변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다 속아넘어갔을까?는 잘 설명되지 못하거든요. 이번 권은 변장을 전가의 보도로 쓰고 있는 트릭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깡통 거위의 수수께끼" 

잠겨져 있던 비행기 조종석에 있던 조종사가 칼에 찔려 살해된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핵심은 조종석 안에 범인이 숨어 있었다는 겁니다! 샘 호손의 눈을 피해 숨어있다가 몰래 문 밖으로 나갔던 거지요. 밀실이라고 볼 수는 없는 셈입니다. 왜 이런 기묘한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잘 설명되지 못하고요. 

그래도 범인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비행기 곡예단 동료를 자기처럼 변장시켜 공연을 했다는 트릭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평작 수준은 될 듯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꾼 오두막의 수수께끼" 

샘의 아버지 해리 호손이 아내와 함께 노스몬트에 방문했다. 그는 편지 왕래로 친해진 대지주 라이더 색스턴으로부터 사냥 초대를 받고, 샘도 함께 사냥에 참가하게 되었다. 다음날, 사슴 사냥을 하던 중 혼자 사냥꾼 오두막에 있었던 라이더 색스턴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오두막으로 들어온 발자욱은 색스턴 것 뿐이었고, 흉기는 저택 안의 무기 컬렉션에 있던 곤봉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건 오래된 깃털 뿐이었다. 범인은 어떻게 발자욱없이 곤봉을 가지고 들어와 색스턴을 죽였을까?

범인은 사냥꾼 오두막 물탱크에 물을 채우기 위한 호스 자국 위로 이동하여 발자욱을 남기지 않았던 겁니다. 호스의 폭은 3cm에 불과했지만, 이 위를 '자전거'로 지나갔던 거지요. 상황을 잘 이용한 괜찮은 트릭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색스턴이 오두막으로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호스를 연결했다가 떼는 장면이 상당히 오래 묘사되고 있어서, 작가가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잘 전해주고요. 자전거를 닭장 안에 두었었기 때문에 현장에 닭털을 흘렸고, 이 탓에 트릭이 들통나는 과정도 괜찮았어요.

왜 불가능 상황을 연출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건 아쉽지만, 트릭만큼은 정말 괜찮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건초 더미 속 시체의 수수께끼" 

샘 호손은 수의사 밥 위더스가 농부 펠릭스 베넷의 아내 세라와 불륜을 저지르는걸 목격한 후, 펠릭스의 권유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가석방 중 펠릭스의 신세를 지다가 사고를 쳐서 펠릭스가 다시 교도소로 돌려 보냈던 로슨이 만기 출소했다며 나타나 펠릭스를 협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곰 사냥을 위해 렌즈 보안관을 비롯한 여러 명이 농장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펠릭스가 샘 호손에게 전화 한 통화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중에 그는 방수포로 덮은 건초 더미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보안관은 펠릭스가 건초 더미를 쌓고 방수포를 치는걸 자기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면서, 방수포 안에 시체를 넣는건 불가능했다고 말하는데...

렌즈 보안관이 혼자서 해결했다는 사건. 범인은 펠릭스 농장의 소작농 핼 패리였습니다. 그는 펠릭스의 상징과도 같은 큰 밀짚모자를 쓰고 건초 더미 뒤에 있던 펠릭스를 죽인 뒤, 자기가 펠릭스인 척 시체를 건초 더미에 넣고 그 위에 방수포를 쳤던 겁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변장 트릭이 사용되어서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만 독립적으로 놓고 보면 괜찮은 본격 추리물인건 분명합니다. 일단 다른 작품들보다는 변장의 설득력이 높거든요. 밀짚 모자에 대해서, 그리고 펠릭스와 핼 패리의 키가 비슷했고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는 정보가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이지요. 유력한 용의자 로슨의 콧수염에 대한 언급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몰래 시체를 숲에다 가져다 버릴 생각이었는데, 곰이 나타나는 바람에 기묘한 불가능 범죄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도 합리적이었어요.

곰이 시체를 뒤지는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노스몬트라는 시골 마을이라는 무대 특성 상 그렇게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산타의 등대 수수께끼" 

여행을 떠난 샘 호손은 '산타의 등대'를 우연히 방문하여 해리와 리사 남매와 친해졌다. 그러나 그날 밤 등대 꼭대기 전망대에 있던 해리가 칼에 찔려 떨어져 죽고 말았다. 마침 리사와 함께 있던 샘 호손 바로 앞에 시체가 떨어졌는데, 둘을 지나치지 않고 범인은 빠져나갈 수 없었다. 샘은 사건 해결을 위해 수감 중인 남매의 아버지 로널드를 찾아갔다. 로널드는 등대에서 밀주 밀수를 했으며, 해산물 레스토랑 주인인 폴 레인과 거래를 해 왔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샘 호손은 처음에는 산타의 등대를 관광차 방문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었다고 추리했습니다. 난쟁이 킬러가 아이로 변장했다면서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헛점이 많은 추리였어요. 가족 요금이 더 싼데 아이들만 등대에 들여보낸게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유부터가 근거로는 터무니없이 빈약했으니까요. 아이들끼리 친하고 잘 노는데다가, 아이들을 돌봐줄 해리와 리사가 있는데 부모가 뭐하러 함께 들어간단 말입니까? 게다가 아이들이 떨어질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시설인데 아이들이 몇 명 들어가서 몇 명 나왔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안되죠. 수십명도 아니고, 고작 4~5명을 확인하지 못했을리가 없잖아요. 이 정도면 아이들 이름까지 외울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 리사가 범인으로, 그녀는 오빠를 죽인 뒤 등대 전망대에 낚싯줄로 묶어 고정했던 거라는 진상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이 역시 난쟁이 킬러보다야 나을 뿐, 말이 안되는건 마찬가지에요. 딱히 좋아보이는 트릭도 아닐 뿐더러, 샘 호손이 있을 때 시체를 떨어트린건 납득하기 어려웠거든요. 자기의 알리바이가 있었다 한 들, 살인범이 등대로 들어갈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은 딱히 유리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오빠를 일어서 떨어트리고 사고로 위장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아버지를 감옥에 보낸게 오빠라서 죽였다는 동기도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대미를 장식하기는 하지만,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드는 수준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