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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9

수학, 인문으로 수를 읽다 - 이광연 : 별점 2.5점

수학, 인문으로 수를 읽다 - 6점
이광연 지음/한국문학사

인문학이 문학이나 철학 등 문과 계열 뿐 아니라 수학이나 건축 등 이과 계열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걸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청소년용 교양서. 수학이 인간 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학문이라는걸 여러가지 알기 쉬운 예제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딸 아이 논술 교재라서 겸사겸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중 수학 공부와 건축의 원리가 같다는 주장은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건물을 설계하는게 책의 목차라는 주장이요. 수학책에서 목차를 보면 앞으로 공부할 내용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조감도를 그릴 수 있고, 목차를 알면 이미 50%를 알고 들어간다는데 수학책에서 목차가 중요하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앞으로 목차를 좀 더 꼼꼼히 보는 습관을 들여야겠어요.
또 기둥이 튼튼해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데, 수학에서의 기둥은 기하와 대수이며 기하와 대수는 3,000년 전 고대 수학부터 통합되어 있었다는 주장과 매듭이론에 대한 쉬운 설명도 좋았습니다. 이론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왜 필요한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딸은 음악에 대한 설명을 좋아하더군요. 그 중에서도 피타고라스가 음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요. 저는 피보나치수는 장음정 6도와 단음정 6도로 귀로 들어도 아름답다는게 기억에 남습니다. 유튜브로 한 번 찾아보니 과연 그러하네요.
또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다양하게 피보나치수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악절을 황금비로 나누는 건데, 이건 과연 무슨 효과가 있었을지 궁금해 집니다.
주식 시장의 엘리엇 파동 원리가 피보나치 수열이고, 블랙 숄즈 방정식은 확률 미적분 이론을 이용해 파생상품 옵션의 가격을 계산한 모델이라는걸 설명해 주는 부분에서는, 가난한 수학자가 이세계에 환생한 뒤, 그곳의 시장 경제를 가지고 노는 환생물이 떠올라 재미있었어요. 용(드래곤)을 파는 시장을 지배해서 수학자가 용왕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영화를 가지고 수학에 대해 알려주는 부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설국열차 등을 예로 드는데, 이 중에서 바이러스 감염률 한계 이론에는 놀랐습니다. 100만 명으로 모수가 늘어나면, 정밀도 99%의 검사라도 무려 9,999 명이 잘못 판단된다는데 여태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에요.
그 외에도 사이클로이드 곡선은 직선보다 훨씬 빠르게 특정 물체를 이동시킬 수 있어서 겅사면에는 사이클로이드를 적용한다, 동물들, 독수리나 매도 땅 위에 있는 사냥감을 잡을 때 사이클로이드에 가깝게 목표물을 향해 곡선 비행을 한다는 이야기,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전형적인 황금비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금강비(5:7)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서양인보다 상대적으로 동양인이 키가 작아서 황금비보다 작은 비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자 모양에서 중국에서 결승법 - 끈을 묶어 수를 표시하는 방법 - 을 썼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렇지만 뒷부분 이야기는 억지가 심해서 아쉬웠습니다. 대표적인건 삼국지 속 계륵이 암호이며, 이건 수학이는 주장입니다. 암호가 수학일 수는 있지만, 계륵은 수학과는 관련이 없는 심리적인 말장난에 가까우니까요. 또 그 뒤에 이어지는 암호에 대한 이야기는 수학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다른 책에서 지겹게 많이 접혔던 내용이 대부분이라 실망스러웠어요.
김삿갓, 이순신과 조선 수군 이야기도 수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수군에 훈도라는 수군직급이 있고 그들이 각종 계산을 담당했다고 해서 그들이 수학자라는 말도 안되지요. 지금 육군의 관측병들이 모두 수학자인가요? 마방진 이야기도 분량에 비하면 별다른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그림 그리는 얘기도 황금비라든가 외상 예술 같은 건 뻔하고 대단한 수학적인 이론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카르타고를 세웠다는 디도의 문제라던가, 달리의 4차원 그림 같이 그림의 주제가 된 수학 문제를 설명하는게 훨씬 좋았습니다.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있어야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건질 내용이 없는건 아닙니다. 몇몇 주장은 와 닿기도 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학에 대해 어려워하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2024/09/28

무도 실무관 (2024) - 김주환 : 별점 2점


무술에 능한 치킨배달원 이정도는 보호관찰관 김선민을 도와준걸 계기로 전자 발찌를 찬 범죄자들을 감시하는 '무도실무관'을 하게 되었다. 최악의 아동 연쇄 성범죄자 강기중이 20년만에 출소한 뒤, 강기중에게 돈을 대어 아동 성착취물 영상을 만드는 조직이 보호관찰관 조직을 습격했다. 다행히 이정도와 김선민은 중상에 그쳤지만, 무도실무관 조주임은 사망하고 말았다. 정도는 퇴원 후 동네 친구들과 힘을 합쳐 강기중을 잡으러 나서는데...

넷플릭스를 통해 본 액션 범죄 스릴러물. 지난 추석 연휴에 감상하였습니다. 리뷰가 늦었네요.

고단자 무도 실무관으로 나오는 김우빈을 중심으로 한 액션은 볼만했습니다. 유도, 태권도, 검도 각 3단의 엄청난 유단자로 등장하는데, 외모부터 설정에 걸맞고 액션도 나쁘지 않았어요. 최종 빌런이라 할 수 있는 강기중도 외모, 덩치로 강함을 충분히 어필하고요. 
다소 가벼운 분위기의 전개, 그리고 전자 발찌에 대한 이해를 도우며'무도 실무관'과 '보호 관찰관'이라는 다소 생소한 직업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각본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정도가 차량 번호판에 대한 조회를 김선민 팀장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스스로 강기중을 잡으러 나서는 클라이막스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별볼일 없는 친구들과 협력해서 다크웹 조직과 강기중을 일망타진하는 모습은 경찰의 무능력함만 돋보이게 만들 뿐이고요.
설정도 문제 투성이입니다. 다크웹 조직이 무도 실무관과 보호 관찰관을 습격할 이유는? 왜 다크웹 조직이 돈과 시간, 중범죄 죗값까지 나중에 치뤄야 하는 무리수를 두었을까요? 아동 성착취물에 강기중이 등장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설령 강기중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강기중만 전자 발찌를 떼어내고 다른 곳에 옮긴 뒤 영상물을 만들면 될 일이었고요. 무도 실무관과 보호 관찰관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 강기중이 본인 거주지에서 당당히 살아가는건 불가능했을테니까요.
강기중의 강함도 설정에서 뒷받침해주는게 좋았습니다. 20년 형을 살고 나왔으니 최소한 40대 중반일테고, 출소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쌩쌩한 몸 상태를 유지하며 무술 고단자와 대등하게 일기토를 겨룬다는건 영 와 닿지 않았거든요. 세 명의 친구들이 이정도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경찰도 부르지 않고 먼 곳에서 동영상 중계만 보고있던 설정도 어처구니가 없었고요.

초반부의 가벼운 전개가 조주임의 죽음으로 무겁게 전환되는 것도 별로였습니다. 이정도라는 캐릭터와 잘 어울리지 않은 탓입니다. 이왕 무겁게 전개할 거였다면 '신입 무도 실무관 이정도'라는 설정으로 정상적인 경찰 조직내 활동으로 그려내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 OTT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볼 만한, 양산형 킬링타임용 액션물 이상은 아닙니다.

2024/09/27

어페어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점

어페어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시시피에서 젊은 여성이 살해된 사건으로 육군 헌병 수사관 잭 리처가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범인이 그 마을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부대원일 가능성이 높았고, 부대 중대장이 상원의원 칼튼 릴리의 아들 리드 릴리였기 때문이었다.
마을에는 이전에도 두 명의 미인 흑인 여성이 살해당했었고, 공수부대 근처에서는 비밀리에 통제와 위협이 일어나고 있었다. 잭 리처는 마을 보안관 데버로와 깊은 관계가 되었고, 리드 릴리가 세 명의 피해자와 교제했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데버로가 리드의 첫 번째 여자였고, 군내부 조사 결과를 통해 과거 해병대원이었던 데버로가 질투로 심각한 폭행 및 음해 사건을 일으켰다라는 보고가 전달되었다.
데버로가 질투심에 리드와 교제했던 여자들을 살해한걸까?


"희망은 최선을 기대할 때 품는 거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해서 세우는 거야." 프레이저 대령 (이 말을 처음한게 빌런 프레이저 대령이라는게 놀랍습니다!)

잭 리처 시리즈. 리처가 군을 그만두게 된 이유가 실려 있습니다. 군 치부를 알아내어 주모자 - 릴리 부자, 프레이저 대령 - 를 살해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옷을 벗게 된 것이더라고요.

군부대와 수십 명의 민병대가 엮여 있고, 희생자만 5명이 넘으며 최종 보스는 상원 군사 위원회 위원장인 등 큰 스케일은 돋보입니다. 이를 오롯이 잭 리처의 활약으로 파헤쳐 나가는 과정도 잘 그려져 있고요. 공수부대와 싸우는게 아니라,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데 주력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피해자 채프먼 자택에서의 지문 채취로 그녀가 오드리라는 여성이었다는걸 알아내는 식으로 잭 리처의 탐문, 현장 검증 등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고요.
데버로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계속 뿌리면서 독자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솜씨도 본격물 작가 못지 않습니다. 그녀가 사슴 사냥꾼으로 사슴의 피를 빼는 가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숨겼다던가, 그녀 차에 있던 흙자국(시체를 옮겼을지 모를), 해병대 시절 질투심으로 일으킨 사건에 대한 보고서 등으로 빌드업 하는 전개가 좋습니다. 작중 잭 리처마저도 잠깐이지만 속아넘어갈 정도이니까요.
사건 보고서가 가짜라는걸 반전처럼 등장시킨 장면도 괜찮았습니다. '사진'이 옛날 것이라는걸 포착한건, 그래서 가짜라는걸 알아챘다 - 그녀는 능력이 있으므로 5년이나 진급을 못 했을리 없다 - 는건데 그야말로 헌병 수사관 잭 리처에게 딱 맞는 단서였지요.
팬이라면 반가울 니글리의 활약, 그리고 잭 리처 못지 않은 능력의 헌병대 수사관 문로의 활약도 눈에 띕니다. 문로는 다른 작품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을 법 한데, 제가 읽은 다른 작품에서 접했던 기억이 없네요. 언젠간 한 번 다시 나와줄걸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과 스케일에 비하면 알멩이는 부족합니다. 추리물, 수사물로서의 값어치는 거의 없기도 하고요. 물론 이런 부분에서 큰 기대를 한건 아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데버로가 범인이 아니라면 범인은 리드 릴리일 수 밖에 없는 탓이 큽니다.
데버로 보안관이 능력이 없다시피한 것도 문제입니다. 채프먼 사건의 현장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채프먼의 지문을 채취한 신원 검증도 하지 않았고, 피해자들 모두가 리드 릴리와 교제했다는걸 마을 전부가 알고 있는데 리드 릴리를 아예 수사선상에 올리지 않은 등 사건 해결을 위해 하는게 없어요. 이런 무능력은 외려 본인이 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요.

설명도 불충분합니다. 군이 릴리 사건을 덮으려 했고 범인이 체포되었다며 부대 통제를 풀었다면, 이 시점에 데버로를 체포했어야 했습니다. 부대 통제를 푼 시점에서 진범이 누구인지는 정해지지도 않은건 이상하잖아요? 프레이저 대령이 칼튼 릴리에게 충성심을 보이며 리처를 죽이려 한 이유도 마찬가지에요. 대령이 도청을 했다는게 리처에게 들키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리처에게 대단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자기 사무실에서 죽일게 아니라 밖에서 살해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도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잭 리처를 그 자리에서 죽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프레지어 대령이 완력에 자신이 있다 한들 잭 리처의 경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또 프레이저는 잭 리처가 배후 인물을 알고 있다고 했으니, 그걸 릴리에게 보고했을 겁니다. 그러나 잭 리처가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건 프레이저도 죽을 때 알았으니, 그걸 보고할 틈은 없었습니다. 즉, 잭 리처는 살아있는 위험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를 그냥 놓아두고 릴리 부자가 사건 해결 파티를 열 정도로 경계심을 풀었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리드 릴리가 연쇄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단순히 사이코패스였다는게 전부라 식상하며, 다른 설정도 문제가 많아요. 피해자들 모두가 엄청난 미인이었다는건 그나마 리드 릴리의 허영심이 컸기 때문이라는 일종의 동기 측면으로 기능하기는 하지만, 마지막 피해자 채프먼(오드리)은 테드 릴리의 정부이기도 했다는 설정은 억지스러운데다가 불필요하기까지 했습니다.
데버로와의 성관계 묘사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장황합니다. 이게 이렇게까지 묘사될 일인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때문에 이 작품이 펄프 픽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전형적인 헐리우드 사이코 연쇄 살인마와의 대결을 잭 리처 시리즈 설정에는 잘 녹여내었지만, 전반적으로 액션이 부족하여 잭 리처스럽지도 않고 수사물로도 가치가 없어 감점합니다. 

2024/09/23

두산 베어스, 제발 한 해는 리빌딩 합시다.


지난 몇주간은 두산 베어스의 현실이 꼴보기가 싫어서 야구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시즌이 저물어가니, 현재는 한 번 되짚어보게 되네요.

두산 베어스의 가장 큰 문제는 야수진입니다. 우완 영건 중심의 투수진은 탄탄한데 반해, 야수들 중 자기 포지션에서 OPS건, WAR이건 뭐건 1위를 하고 있는 선수는 없습니다. 자기 수비 포지션을 시즌 내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 선수도 거의 없고요. 노쇠화, 부상 탓입니다. 비싼 FA 선수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연봉값 정도 활약을 하는 FA 선수는 정수빈 선수가 유일합니다. 이마저도 연봉이 비교적 낮은 덕분이고요.
때문에 이번 드래프트에서 No.1 야수인 박준순 선수를 1라운드에 지명한건 당연합니다. 양석환(1), 강승호(2), 김재호(유), 허경민(3) 선수로 구성된 내야 라인업 중 김재호, 허경민 선수는 당장 내년부터 못 볼 수 있으니까요. 유격수와 3루수가 필요합니다. 오재원 사건 때문에 선수 여럿이 날아갔고 몇년 뒤 강승호 선수도 못 잡는다고 한다면, 장기적으로는 안재석(유) - 박준순(2) 키스톤 컴비에 박준영(3) 선수로 구성된 내야진을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오재원 탓만 할건 아닙니다. 이 팀의 육성 능력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올해를 빼고라도, 24년에는 당해년도 No.2 야수 여동건 선수를, 22년에는 2차 1라운더로 김동준 선수를, 21년에는 무려 1차 지명으로 안재석 선수를, 20년에는 2차 1라운더로 장규빈 선수를, 2019년에는 1차 지명으로 김대한 선수를 뽑았었습니다. 모두 제대로 된 지명인지는 둘째치고서라도, 스카우터들은 23년을 빼고는 상위 라운더로 재능을 모아 주었습니다. 내, 외야에 포수까지 골고루요. 이들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건 코치진의 잘못입니다. 특히나 서울권 1차 지명이자 전국으로 확대해도 1차 지명이 유력했던 김대한, 안재석 선수를 성장시키지 못한건 당연히 책임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당연히 이승엽 감독입니다. 
솔직히 이승엽 감독 선임은 불안했지만, '국민 타자'라는 별명답게 타격 코칭 쪽으로 능력을 발휘하여 이러한 신예들을 잘 키워낼걸로 생각했는데 2년간 본 모습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승엽 감독 부임 후 키워낸 야수는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유찬 선수? 이승엽 감독 부임 전에 이미 2군에서 수위 타자를 차지했었고, 그보다 지금 실력이 늘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이기기 위한 기용을 잘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계가 이미 명확한 조수행 선수를 선발 좌, 우익수로 쓰는게 대표적입니다. 조수행 선수 최적 역할은 대주자와 중견수 대수비라는건 증명된지 오래입니다. 선발은 당연히 장타력이 있는 선수, 그게 안되면 OPS만 봐도 1푼 이상 높은 이유찬 선수를 써야합니다. 지난주 중요했던 LG전 9회 마지막 공격에서 양의지 선수 대신 대타로 조수행 선수를 기용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외야 컨버젼으로 꾸준한 출장 기회를 받은 이유찬 선수는 나은 편입니다. 신인급 중에서 1군에서 기회를 받는 야수는 전무합니다. 기회를 줘도 발빠른 쌕쌕이들 중심이고요. 1군에서는 빠른 발 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김태근 선수가 외야에서도 실수를 범하는 모습을 본 홍성호 선수 등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이승엽 감독의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투수진 혹사도 책임져야 합니다. 시즌 중 필승조 중에서 두 명이나 부상 이탈한 것, 지는 경기에도 필승조를 소모해서 부담을 가중시킨 것 등 책임질게 한두개가 아니에요. 외국인 선발 투수들이 모두 망해서 그랬다는건 핑계입니다. 지는 경기만 확실하게 버렸어도 이렇게는 안됐겠지요. 또 중요한 경기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어제 경기만 해도 그래요. 총력전을 펼칠거였다면 발라조빅 선수를 1회에 내렸어야지요. 이제 와서 투수 관리를 하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매년 호구 잡히는 팀이 있다는 것도 큰 문제고요 (작년 LG, 올해 삼성).

그러니 한 해는 리빌딩합시다. 현재 이 팀은 우승권 전력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외국인 선수들 활약으로 플레이오프 정도는 나갈 수 있을지라도 그 이상은 힘듭니다. 무리하지말고 안재석 선수가 복귀할 26 시즌을 목표로 신인 선수들을 고루 기용하면서 옥석을 가려야 할 때입니다. 당장 내년의 센터라인 주전, 백업 - 정수빈, 조수행, 강승호, 이유찬, 양의지, 김기연 선수 등 - 은 나름 견고한 만큼 유격수와 코너 내, 외야에 박준순, 박준영, 여동건, 김대한, 홍성호, 전다민, 양찬열 선수 등을 기용해서 한 ,두 명이라도 건져야 합니다. 그리고 26년에 승부를 걸어 봐야지요.
또한 앞서 문제점들의 책임지는 모습을 위해서라도 타격 부문 코치진의 전면 교체가 동반되어야 하는건 물론입니다. 감독도 바꾸면 좋을텐데, 제발 구단주의 빠른 결단이 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올해 니퍼트 선수의 은퇴식은 잘했습니다. 다만 영상으로 이미 은퇴했거나 타 팀으로 이적한 왕조 시절 동료들이 더 나와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건 좀 아쉽더군요. 김태형 감독, 장원준 선수, 오재일 선수, 최주환 선수 등이 그리워지는 하루였습니다.

2024/09/22

레블 리지(rebel ridge)(2024) - 제레미 솔니에르 : 별점 2.5점


전직 해병대원 테리는 사촌 동생 마이크를 풀어주기 위해 보석금을 가지고 가다가 경찰의 황당한 검문을 받고 돈을 압수당했다. 그 마을은 경찰이 수상한 사람의 돈을 압수하는게 당연시되는 곳이었다. 테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경찰서장을 압박하여 돈을 회수했지만, 감옥으로 이감된 마이크는 살해당하고 말았다.
경찰서장은 테리를 회유하여 돈을 돌려주면서 마을로 돌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테리는 유일하게 도와주었던 서머가 위기에 처해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둘은 죽을 뻔한 위기를 빠져나와 수상한 법정 기록을 토대로 경찰서장의 악행을 모두 알아챘다. 테리와 서머는 경찰서장을 끝장낼 증거까지 확보하나 서머가 잡혀버리고 마는데...

전직 해병대원이 사회적 부조리에 대항하여 떨쳐 일어난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 액션물. 연휴 기간에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뻔한 설정이지만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새 영화치고는 비교적 긴,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테리의 행동이 잘 설명됩니다. 어떻게든 참고 넘기려 했지만, 경찰서장을 응징하고야 마는 빌드업을 위한 분량은 충분하거든요. 주변인물인 서머에 대한 서사도 마찬가지로 잘 풀어내고 있고요.
두 번째는 요새 영화치고 별로 잔인하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테리가 사람을 죽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누군가의 아빠, 엄마라는게 강조되고 있기도 하고요. 악에 가담한 무리라면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두 죽이는 "잭 리처"같은 작품만 보다가 보니 아주 신선했습니다.

각본도 괜찮습니다. 우선 경찰서장의 음모가 좋았어요. 파산에 몰리자 무차별적으로 돈과 귀중품을 압수해 시의 재원으로 삼았고, 혹시 모를 소송을 방지하기 위해 무조건 90일 구류기간을 두었다는 - 하드디스크의 체포관련 기록이 삭제되는 기간 - 건데, 참신하면서도 놀라왔어요. 미국은 정말 이렇게 아무나 수상하다고 검문하고 체포해도 되는걸까요? 어떻게보면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마약범은 언제, 어디서든 심문 및 체포가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었는데, 범죄를 불문하고 왜 합법적인 체포 절차가 필요한지 새삼 느꼈습니다.
경찰서 내에 있는 서머의 협력자 '서피코'의 정체가 여성 경관 제시카가 아니라 남자 경찰 에브였다는 반전도 돋보였어요.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캐스팅도 좋습니다. 추억의 배우 돈 존슨이 악역 경찰서장을 맡았는데, 색다르지만 잘 어울렸습니다. 백인 우월 사상에 빠져있는 남부 꼰대 개저씨를 대표하는 연기였어요.

하지만 액션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전체적으로 액션 장면 분량은 턱없이 부족하고, 스케일도 작은 탓입니다. 해병대 무술 교관 출신의 인간 흉기인 테리의 강함도 잘 그려지지 않고요.
결말에서 제시카가 마지막에 서장을 체포하는건 뭔가 싶었습니다. 에브가 서피코가 아니라 제시카가 서피코였던걸까요? 그렇다면 애초에 테리를 왜 체포하려 시도했는지, 중요한 증거물인 메모리 카드 파손은 왜 방조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결말도 뭔가 시원한 사이다 느낌은 주지 못합니다. 다른 경찰들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겠고, 경찰서장만 주경찰에 체포되는 정도로는 많이 부족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킬링 타임용으로 가볍게 보기 좋은 영화입니다.

2024/09/21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의사 데지마 하쿠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암으로 잃었었다. 어머니 데이코는 병원 재벌 야가미가 후계자 야스하루와 결혼해서 이복동생 아키토를 낳았다. 이후 하쿠로는 야가미가와 연을 끊고 데지마 성을 쓰게 되었고, 어머니마저 16년 전 고향 집에서 사고로 죽고나서는 가족과 아예 멀어졌다.
그런데 동생 아키토의 아내라는 미녀 가에데가 나타나 아키토가 실종되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쿠로는 가에데를 도와 오랫만에 야가미 가문 사람들과 이모 준코 등 친척들을 만나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수수께끼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2016년에 발표했던 장편. 적당한 분량에 꽤 많은 수수께끼를 담아내고 있는게 특징입니다. 대충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성공한 사업가인 아키토의 실종
  2. 가즈키요의 기묘한 추상화와 야스하루의 연구
  3. 데이코 살해 사건의 진상
  4. 데이코가 물려받았다는 귀한 유산의 정체
여기에 야가미 가문의 유산 상속 문제, 그리고 데이코가 고향집의 존재가 더해져 이야기는 아주 풍성합니다.

핵심 수수께끼 중 하나인 가즈키요의 그림과 야스하루의 연구에는 뇌과학, 그 중에서도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사용되어 재미를 더해줍니다. 과학과 관련된 최신 소재를 작품에 녹여내는데 능숙한 히가시노 게이고답더군요. 뇌를 자극하여 의도적으로 서번트와 같은 천재를 만들어내는게 가능하다는 이론으로 하쿠로의 친부 가즈키요는 뇌종양에 걸린 뒤, 야스하루의 생체 실험에 가까운 치료를 받고나서 '서번트 증후군'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분포에 법칙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그림 '관서의 망'을 그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진상은 세 번째 수수께끼인 데이코 살해 사건의 진상, 그리고 네 번째 수수께끼인 데이코가 받은 유산과 곧바로 연결됩니다. 수학자였던 데이코의 동서(하쿠로의 이모부) 겐조가 그림을 알아보고 탐냈고, 이를 알아챈 데이코의 입을 막으려 그녀를 살해했던겁니다. 마지막 데이코가 받은 유산은 '관서의 망' 이고요.

또 겐조가 범인으로 드러날 때, 최소한 야스하루의 보고서를 고향집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던건 겐조밖에 없다는 추리는 아주 괜찮습니다. 유마가 보고서를 발견하기 전, 하쿠로가 왔을 때 보고서는 없었습니다. 보고서를 가져다 놓은 범인은 왜 진작에 가져다 두지 않있을까요? 그 이유는 고향집이 있다는걸 그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겐조밖에 없습니다. 하쿠로가 방문하여 진작에 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거짓말과 함께, 준코 이모에게 어머니의 유품인 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겐조는 16년전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기에 앨범이 고향 집에 있었다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이코가 하쿠로에게 앨범을 줄 수는 없으니, 하쿠로는 고향 집에서 앨범을 가져왔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겐조는 고향집이 그대로 있다는걸 그날 알아챘고, 보고서를 건네주어 하쿠로 일행이 고향집에서 손을 떼게 만든 뒤 '관서의 망'을 독차지할 속셈이었던 겁니다. 꽤 잘 짜여진 추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수수께끼와 이와 관련된 설정들은 모두 별로입니다. 아키토가 실종된 이유부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겐조가 아키토를 납치하려 했는데 그걸 사전에 알아챈 경찰이 아키토가 실종된 척 하고 아키토의 아내를 가장한 수사관 가에데를 사건에 투입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공개 수사로 전환해서 주모자를 체포했어야죠. 그랬다면 데이코의 고향집과 '관서의 망'도 불타지 않고 남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수수께끼는 거의 모두 겐조의 자백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도 추리 소설로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안드는건 주인공 하쿠로입니다. 첫 눈에 가에데에게 반했다치더라도, 엄연히 동생의 아내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은 최악이에요. 심지어 동생은 실종 상태인데 말이지요. 야가미 가문의 유마가 가에데에게 추근거리는걸 불쾌해하고 방해하지만, 하쿠로도 그에 뒤지지 않게 추근거리는 상황이라는걸 본인만 모르더라고요. 동물 병원에서 일하는 가게야마와의 관계도 뭔가 싶고요. 한마디로 '발암' 캐릭터였습니다.
가에데도 만만치 않아요. 비현실적이며 애매한 탓입니다. 팜므 파탈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대단한 활약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목의 '위험한 비너스'는 가에데를 의미하는 듯 한데, 그 정도 비중과 현실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하쿠로라면, 그녀의 주장을 절대 믿지 않았을겁니다.
이런 별로인데다가 비현실적인 커플을 주인공으로 삼느니 아키토를 주인공으로 해서, 아키토가 재력과 힘을 손에 넣기 전인 중학생 쯤 시기에 어머니 살해 사건과 아버지 그림의 행방을 쫓는 이야기를 그려내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키도 크고 미남인데다가 천재이니까요. 하쿠로는 조력자가 어울리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기본적인 재미는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주인공과 기본 설정이 문제일 뿐이지요. 당연히 영상화되었던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네요. 영상물에 더 어울리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주연이 츠마부키 사토시!

2024/09/20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 마사키 도시카 / 이정민 : 별점 2.5점

그날, 너는 무엇을 했는가 - 6점
마사키 도시카 지음, 이정민 옮김/모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5년 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다이키는 새벽에 경찰을 피해 도주하다가 차에 치어 사망했다. 탈주한 연쇄 살인범 하야시 류이치로 오인되었기 때문인데, 착실한 우등생이었던 다이키가 왜 부모 몰래 새벽에 집을 나갔었는지, 왜 경찰을 피해 도주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이키의 가족이 사건 후 붕괴해버린 15년 뒤, 고미네 아카리가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인 불륜남 모모이 다쓰히코는 사건 발생 직후 실종되었다. 모모이의 어머니는 며느리 이누코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손자를 유괴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고미네 아카리 살인사건 수사본부에 소속된 신입 형사 가쿠토는 괴짜로 유명한 고참 형사 미쓰야 슈헤이와 한 팀이 되어 사건 수사에 나섰다. 미쓰야 슈헤이는 고미네 사건이 15년 전 다이키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걸 직감했고, 끈질긴 수사를 통해 고미네 사건의 진범이 다이키의 모친 이즈미라는걸 밝혀내어 체포하였다. 이즈미는 이누코를 다이키의 며느리로, 이누코의 아이 린타를 다이키의 환생이라 여겨 다쓰히코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리고 모모이 이누코는 15년 전 다이키와 만남을 가졌고, 어머니의 재혼 상대이자 자신을 겁탈하려 했던 료를 죽여달라고 다이키에게 부탁했었다고 고백했다.

잘 모르는 일본 작가의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의 책장"에서 "결말이 충격적인 미스터리 작품"으로 소개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재미는 있더군요. 일단 사건이 흥미로우니까요. "다이키가 왜 도망갔는지?"를 비중있게 드러내지 않다가, 모모이 사건을 통해 이를 서서히 드러내는게 좋았습니다. 다이키가 도망갔던 이유도 그럴싸합니다. 다이키는 그날 료(로 착각한 이누코가 모친의 지인)를 살해하고 사체를 숨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큰 범행을 저질렀으니, 경찰의 검문에 도망갈 수 밖에 없었겠지요. 이는 다이키가 버렸던 아버지 영업용 차량의 복제 열쇠, 2년 뒤 발견된 백골 사체 등으로 약간이나마 단서가 제공되기도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한 다이키 가족의 붕괴도 서늘함을 전해줍니다. 여성 작가답게 두 명의 어머니 - 다이키의 모친 이즈미, 다쓰히코의 모친 지에 - 의 심리 묘사가 발군이라 더욱 와 닿았습니다. 아들을 잃고 미쳐가는 과정이 섬뜩할 정도로 상세하게 그려지거든요. 사건을 이용하려 하고,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비난하는 여러 주변 인물들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하지만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고미네 아카리 사건 진상은 추리가 개입될 여지가 전무한 탓입니다. 진범인 이즈미가 이누코의 아들 린타를 데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밝혀졌을 뿐이니까요. 경찰 수사만으로는 진범을 이렇게 빨리 찾아내는건 불가능했을겁니다. 이즈미가 린타를 데리고 사라질 이유도 딱히 없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급하게 마무리 짓기 위한 목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이키가 이누코를 노리던 료(로 잘못 안 사람)를 살해한건 동기의 설득력이 낮습니다.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모범생이 살인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여서 범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솔직히 말도 안됩니다. 차라리 이누코와 깊은 사이였기 때문에 복수의 심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게 나았을겁니다. 물론 그랬다면 이누코가 과거를 그렇게 쉽게 잊어버린채 다쓰히코같은 쓰레기와 결혼해서 맹하고 얼빠진 채로 생활한다는 현재와 잘 이어지지 않았겠지만, 최소한 더 말은 됐겠지요.
이즈미가 다이키의 환생을 믿고, 이누코를 며느리로 여기며 반 쯤은 환상과 착각 속에서 살아가다가 다쓰히코와 불륜녀를 살해했다는 동기도 설득력이 낮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추리할만한 그 어떤 단서도 제공되지 않고요.

불필요한 묘사와 설정도 너무 많습니다. 구사나기의 약혼자이자 결혼 사기범 사토 고타가 다이키가 료로 착각해 살해한 피해자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다이키가 사망 후에도 료가 살아있어서, 료는 이누코의 어머니가 죽였다고 이누코와 독자를 착각하게 만드는 장치에 불과합니다. 이야기를 복잡하게 꼬아놓으려는 의도만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미쓰야 슈헤이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살해당했던 과거가 있어서 마음의 병이 생겼다, 순간 기억의 소유자다 등의 설정도 과했습니다. 캐릭터 만들기의 일환인데,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했습니다.
묘사에서 화자를 너무 많이 바꾸는 것도 별로였어요. 이야기와 아무 상관없는 다이키의 누나 사라의 심리 묘사처럼 아예 불필요한 내용도 많았고요.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만큼 결말이 충격적이었냐?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긴, 거기 소개된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기는 하네요. 낚인 제가 잘못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도 많지만 재미는 있었던 만큼, 후속작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2024/09/18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5 - 토마토수프 / 문기업 : 별점 2점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5 - 4점
토마토수프 지음, 문기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전권에서 민다나오 섬을 떠난 시그넛 호는 새로운 동료인 에라스모를 만나 프리타스 섬으로 보물을 찾는 항해를 떠난다. 그러나 폭풍우로 보물 탐사를 포기했고, 해적질과 여행에 질린 댐피어와 일부 동료들은 동인도에 남게 되는데...

이번 권에서는 풀로 콘도르 섬에서 광둥성 남해안을 거쳐, 대만과 루손 사이의 바탄 제도 , 보루네오 섬 남단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다시 수마트라까지의 장대한 항해가 펼쳐집니다. 조금만 더 올라왔다면 '조선'도 볼 수 있었을텐데 약간 아쉽네요.

그런데 요리에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이래서야 '맛있는 모험'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중국 차, 황주 등이 등장하기지만 '차'나 '술'을 요리라고 부르기는 힘들지요. 이미 완성된 제품이기도 하고요. 대왕 조개살 요리는 전권에서 등장했었던 해산물 요리들과 다르지 않아 식상했고, 바탄 제도 원주민들이 만든 염소가 씹어 삼킨 위장 안의 풀을 삶은 것과 다진 물고기 살을 섞은건 요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두 가지 정도만 인상적이었는데, 첫 번째는 매너티 고기입니다. 맛있다는게 신기했거든요. 하지만 그냥 삶은 고기 말고 좀 더 요리같은 요리를 보여주는게 좋았을 듯 합니다.
두 번째는 '메로리'입니다. 판다누스 나무열매를 익힌 뒤, 과육을 깎아내 반죽하여 굳힌 것입니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건망고'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외에도 '다마르'라는 나무 수액을 이용한 역청 만들기같이 재미있는 정보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 원주민들 - 바탄 제도 원주민의 생활과 식습관, 오스트레일리아 어보리진의 무소유(?) 삶 등 - 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댐피어가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버린 뒤, 함께 낙오한(?) 동료들과 일종의 요트로 먼 수마트라로 향하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는건 분명한데, 과연 어떻게 될지? 다음 권을 읽을 수 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맛있는 모험' 부분이 부실하니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무리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9/14

가연물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가연물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 가쓰라 경부를 주인공으로 한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고의 추리 소설 동호회인 하우 미스터리 이벤트에 당첨되어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작가 최초의 경찰 수사 본격 추리물인데, 그냥저냥한 수준입니다. 경부 캐릭터도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이고요. 손대는 거의 대부분의 장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뽑아냈던 이미지와 호노부의 작품치고는 평이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숨빚"만큼은 빼어납니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낭떠러지 밑"
눈밭에서 조난당한 두 사람 중 한 명이 목을 무언가에 찔려 살해당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심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끝이 날카로운 말뚝 같은 걸로 목을 찔러 살해했다는 감식 결과를 보았을 때에는 흉기가 고드름일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고의가 아니었다면, 낭떠러지에서 고드름이 떨어져 운 나쁜 피해자 목에 꽂힌 사고일거라 여겼지요. 하지만 다행히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피해자 목에 혈액이 응고되는 반응이 있었다는 감식 결과를 토대로, 이는 다른 사람의 혈액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반응이니 범인 미즈노의 혈액이 포함된(?) 흉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즉, 흉기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에 부상당해 튀어나온 미즈노의 팔 뼈였다는 추리, 진상으로 이어집니다.

흉기는 신선한 편이고, 이에 이르는 추리와 단서 제공 모두 공정하고 합리적이지만 '경찰 수사물'에 잘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흉기가 뭐든 범인은 미즈노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기소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기 - '고드름'이 흉기였다고 주장해도 될테지요 - 때문입니다. 수사가 아니라 '추리'에 방점을 둔 느낌입니다.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라도 처음 시도하는 경찰 시도물이라서 다소 혼선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흉기 트릭도 신선하지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정신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했을 방법이니까요. 아울러 수사 기계같은 냉정한 가쓰라 경부의 묘사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다른 작품들 속 냉정한 수사 반장들 - 대표적으로는 "제 3의 시효" - 과 차별화되는 점이 없는 탓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걸까요?

여러모로 평범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졸음"
유력한 강도 치상 사건 용의자 다구마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경찰은 다구마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교차로에서 발생한 사고 원인이 다구마의 신호위반일 경우, 체포 영장을 청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새벽 3시 일어난 다구마의 교통사고를 무려 네 명이나 목격했고, 그들은 모두 다구마가 신호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쓰라 경부는 다구마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즉 신호 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데...

처음에는 다구마가 교통사고를 빙자하여, 상대방 미즈우라와 신분을 바꿔 도망쳤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황당하면서도 뻔한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거짓 증언 부수기' 설정의 작품으로, 피해자나 가해자와 전혀 관계없는 목격자들이 우연히 똑같은 거짓 증언을 하게 된 과정의 설득력이 높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불성실한 근무 태도로 언제 해고될지 모를 교통 정리원과 편의점 직원이 하필 사고 시점에 졸고 있었기 때문에, 의기투합해서 졸았다는걸 숨기려고 거짓 증언했다는건 말이 되니까요.

그런데 전개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가쓰라 경부의 확신 - 네 명 모두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 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누가 봐도 다구마는 바로 체포해도 되는 상황입니다. 아니, 경찰 수사를 위해서는 증언이 없었더라도 체포 영장을 청구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난 사건의 목격 증인이 네 명이나 되고, 이들의 증언이 일치해서 불신을 품었다? 말도 안됩니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또 응급실 의사와 게임 클랜의 리더인 대학생도 졸아서 위증에 동참했다는건 과했습니다. 이 둘은 빼고 교통 정리원 가마타와 편의점 직원 고가가 입을 맞추었다는 정도로 끝내는게 깔끔했을 거예요. 의사와 대학생은 사고를 보지 못했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뿐더러, 거짓 증언에 똑같이 동참할만한 접점도 마땅치 않으니까요.

이런 단점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목숨 빚"
유명 관광지에서 절단된 사람의 팔이 발견되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나머지 사체 부위들도 발견했다. 피해자의 신원은 노스에 하루요시로 밝혀졌다. 곧 피해자가 오래 전에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미아타무라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미야타무라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아타무라의 흉기에 대한 증언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가쓰라 경부는 납득하지 못하는데...

앞서와 마찬가지로 범인이 명확한 상황에서 가쓰라 경부가 의문을 품는 과정의 설득력은 약합니다. 특히 '사체를 절단하는 커다란 수고에 비하면 사소한, 치아를 뽑거나 부숴서 신원을 알아내지 못하게 하지 않은 것이 수상하다'고 하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사체 전달은 옮기기 편해서라는 이유가 더 클 테니까요. 유명 관광지에 사체를 흩뿌린게 이상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급했다거나, 길을 잘 몰라 실수하는 등 이유는 여러가지 있습니다. 범인이 확실하다면 수상하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어요.

하지만 더 이상 빚과 노모의 간병을 감당할 수 없었던 하루요시가 자살한 뒤, 이를 살인으로 위장하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긴 미야타무라가 현장을 조작했다는게 충격적인 진상이 모든 문제를 덮어줍니다. 우리도 직면한 문제인 '부양하기 힘든 고령 인구의 증가, 중년의 노후 보장 없는 은퇴, 취직도 못하는 삼포세대 젊은이'라는 3대에 걸친 사회 현상을 정면으로, 그것도 제대로 된 추리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회파 본격 추리 수사물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리고 앞서 억지스럽다고는 했지만, 가쓰라 경부가 수상하다고 여긴 상황들이 진상에 딱 들어맞는건 추리물다와서 좋았어요. 우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관광지의 사체를 버린 이유는 빨리 발견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확인되어야 보험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사체의 정체를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흉기에 대한 거짓말도 같은 이유입니다. 미야타무라는 '노스에 하루요시를 살해했다'는게 진실로 여겨지기를 바랬으니 이렇게 주장할 수 밖에요.
사체를 토막낸 이유가 하루요시의 사체에서 '목을 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게 숨기기 위해서였다는 트릭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다만, 독자에게 하루요시 사체 중 목의 중간부 일부가 사라졌다라는걸 정확하게 알려 주지 않은건 조금 아쉬웠지만요.

그래도 여러모로 볼만했던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연물"
월요일 심야부터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가 잇달아 발생하여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잠복수사 결과 몇 명의 용의자가 떠올랐지만, 잠복근무 시작 후 방화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자 잠복 중인 형사가 범인에게 들킨 거 아니냐고 상관이 가쓰라 경부를 질책했다. 그러나 가쓰라 경부는 범인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를 내놓았고, 어떤 목적으로 방화를 저질렀는지 동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인 오노하라가 버린 쓰레기에서 착화에 쓰인 잡지가 발견되는데...


후더닛보다는 와이더닛 물인데, 범인의 동기가 하찮을 뿐더러, 납득하기도 어려웠던 탓입니다. 화재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에 돌발적인 화제를 막으려고 안전한 방화를 저질렀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범인은 그냥 수사를 통해 체포하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고요.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지는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진짜인가"
이제사키 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권총을 가진 범인이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게 안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 조사를 통해 가게 점장 아오토와 아르바이트 생 유노가 아직 안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가쓰라 경부는 아오토와의 통화로 유노가 범인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알게되었다.
범인 시다는 아들에게 생일 선물로 파르페를 사주려고 가게를 찾았는데,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아들에게 견과류가 들어 있는 파르페가 서비스되어 화가 난 뒤 다툼이 시작된걸로 보였다. 유노는 파르페에 대해 시다에게 설명하지 않은 직원이었다.

비교적 독특한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인질을 븥잡고 농성을 벌이는 사건은 웬만한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지요. "스완"이 설정은 약간 비슷하지만, 결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작품에서 중요한 '인질범과의 협상'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독특했습니다. 오로지 가쓰라 경부의 추리에 의한 의외의 진상이 밝혀지는 구조가 돋보였고,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 진상을 추리해내는 전개, 가게 안 장난감 가게에서 타는 물총이 시다가 들고 있는 권총과 비슷하다는 단서 등 여러 가지 정보와 단서들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상도 재미있었습니다. 사건은 아오토 점장의 자작극이었습니다. 치정 문제로 유노를 살해한 직후, 시다가 사무실로 들이닥쳐 범행이 들키자 시다의 아들을 인질로 삼아 시다가 범인이고 자신은 피해자인 척 농성하는 연극을 시켰던 것이지요. 나중에 구출 직전 시다와 거의 아들은 살해할 생각으로요.

그런데 조리 담당으로부터 사건 당시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조리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추리해냈다는건 와 닿지 않았어요. 오징어 먹물 파스타 조리 시간을 감안하여, 시다가 항의차 점장을 찾은 뒤, 한참(약 10분?) 지나서 도망치라는 큰 소리가 나왔다는건 그리 큰 단서나 증거로 볼 수 없습니다. 짜증이 쌓여 한참 있다가 폭발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살해 현장을 무마하기 위해 농성이라는 연극을 벌인 것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아 감점합니다. 
 

2024/09/13

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피가 흐르는 곳에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브 킹의 중편집. 세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빌 호지스 3부작' 시리즈 후속편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제외한 두 편은 순문학에 가깝습니다. 순문학 성향이 두드러지는 스티븐 킹의 말년 작품답네요. 말년 작품이라도 왕년의 화끈함, 끔찍한,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보여준 작품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런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다만 '호러의 제왕'이라는 이름값에 걸맞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
초등학생 크레이그는 똑똑했던 덕분에 마을 굴지의 대부호 헤리건 씨에게 책을 읽어 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 때마다 헤리건 씨에게 복권을 선물받았다. 마침 선물받은 복권이 당첨된 어느 해,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에게 아이폰을 사 주었다. 해리건 씨는 평소 이런 제품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금새 아이폰에 푹 빠졌다. 그리고 헤리건 씨가 노환으로 사망한 뒤,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 관에 아이폰을 몰래 넣어 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케니 얀코에 대해 헤리건 씨의 전화기에 넋두리를 늘어놓은 날, 케니 얀코가 자살했다는걸 알게 되는데...

스마트폰이 처음 도입되었던, 아이폰이 첫 출시되었던 시대에서 시작되는 작품. 
핵심은 해리건 씨입니다. 나이는 많지만 똑똑하고,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지만 자기 사람에게는 굉장히 따뜻한 괴팍한 노인을 생생하게 잘 그리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대한 헤리건 씨의 탁월한 식견 등은 그를 단순한 노인 이상으로 구체화합니다. 여러모로 "재벌집 막내아들"이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은 크레이그(진도준)이지만, 해리건 씨(진양철 회장)에게 눈길이 더 간다는 점과, 현재 시각으로 과거 - 여기서는 스마트폰 도입 - 의 경제 효과를 예측하고 있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이런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큰 돈을 벌었겠지지요. 스티븐 킹이 과연 애플과 아마존 주식을 샀을지 궁금하네요.
조숙하고 똑똑한 크레이그, 그리고 크레이그의 아버지라던가 케니 얀코, 하긴슨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크레이그가 초등학생에서 시작하여 대학 졸업 후 직장인이 될 때까지 겪는 성장기로도 볼 만 했고요.

그러나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크레이그와 해리건 씨의 우정(?)과 크레이그의 성장기를 제외하고는 무덤 속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거는게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설명되지 않아요. 이래서야 단순한 저주나 주술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매개체가 밀짚인형이나 생닭같은게 아니라 아이폰이라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작가 후기를 보면 '관에 휴대폰이 들어갔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데, 그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크레이그가 옛 은사를 위한 복수를 마치고 전화기를 버리는 결말도 시시했습니다. 옛날 스티븐 킹이라면 좀 더 화끈하게 달려주었을텐데 말이지요. 스티븐 킹도 나이가 들면서 문학적이면서도 은근하고, 다소 애매한 결말을 즐기는데 이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글솜씨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일가를 이루었다 싶은 생각은 듭니다. 다만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척의 일생"
3막 : 고마왔어요, 척!
자연재해로 미국은 서서히 멸망해가고 있었다. 마틴을 비롯한 주민들 눈 앞에는 찰스 크란츠의 은퇴를 알리는 광고만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후가 다가왔다....

2막 : 길거리 공연
길거리 드럼 연주가 제러드 프랑크의 연주에 맞춰 시작된 척의 춤은 구경꾼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제니스도 합류하여 대단한 공연을 마쳤고, 척은 호텔로 가면서 왜 춤을 추기 시작했는지를 떠올렸다.

1막 :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척의 할아버지는 다락방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본 그대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다음에, 척은 잠겨진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는 환영을 보았다. 하지만 척은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3막이자 맨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마틴과 주민들이 사는 곳은 척의 인생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척이 죽어 가자, 그가 은퇴한다는(죽는다는) 광고가 계속 표시되었고 숨을 거두자 세계가 멸망하게 된 겁니다. 척의 안에 담겨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은 바로 이 세계였다고 해도 되겠지요. 사실 뻔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워낙 글을 잘 써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3막에서 서서히 세계가 멸망해가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지만, 일상 속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한 때를 묘사한 2막이 가장 좋았어요. 후기를 보면 크리스토퍼 워켄의 팻 보이 슬림 뮤직비디오를 보고 영감을 얻은 듯 한데, 저는 "패리스 뷸러의 해방"의 거리 퍼레이드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척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해 주는 2막, 그리고 척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1막은 문학적인 성취와는 별도로 사족에 가깝습니다. 3막만으로도 이야기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1막은 킹 스스로가 후기에서 1년 뒤에 덧붙였다고 하니 사족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이럴 바에야 3막의 이야기에 가필하여 짧지만 반전이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독특한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마틴의 눈 앞에 척의 광고만 떠오르는 묘사는 나름 공포스러웠는데, 이를 잘 살리지 못한 느낌이거든요. 설명도 많이 부족했고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잘 살리고, 척 내면 세계라는걸 짧지만 강렬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쓰는게 좋았을 것 같네요.
현재의 결과물은 장르 문학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와서 평가하기 어려운데,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피가 흐르는 곳에"
파인더스 키퍼스의 탐정 홀리 기브니는 뉴스를 보다가 캐스터 채트 온도스키가 테러를 저지른 범인이라는걸 알아챘다. 홀리는 전직 경찰 벨 씨와 벨 씨 손자의 협조로 온도스키가 모습을 바꿔가며 저질렀던 오래전부터의 사건들 증거를 확보했다. 온도스키를 만나 살해할 계획을 세운 홀리는 파인더스 키퍼스 사무실에서 대결을 준비했지만, 제롬과 바버라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미스터 메르세데스" 시리즈 후속작 중편. 빌 호지스 사후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게 된 홀리 기브니가 주인공입니다. 제롬과 바버라 등 전작의 주요 등장인물도 건재합니다.
수록작 중 유일한 범죄 호러 스릴러물로 체트 온도스키의 정체를 파헤치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수사물로 손색이 없으며, 그가 마음대로 모습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살아온 '괴물'이라는 설정은 일종의 크리쳐 호러물을 연상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언급되는, 사람의 얼굴은 몇 가지 타입밖에 없다는 이론도 재미있었습니다. 홀리의 조력자 벨 씨가 탁월한 그림 실력을 갖춘 전직 경찰 몽타주 작성 전문가였고, 그의 손자는 음악 전문가로 성문 분석이 가능하다는 설정도 좋았고요. 온도스키가 과거부터 모습을 바꿔가며 암약했다라는 걸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장치였어요. 호러와 과학 수사가 절묘하게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습도 바꿀 수 있고, 빠른 속도를 지닌 온도스키가 고작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진 정도로 죽어 버렸다는 결말은 맥빠집니다. 홀리가 이를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고는해도, 이러한 괴물 상대로는 약해보였기 때문입니다.제롬과 바버라가 사건에 휩쓸리는 전개도 좀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읽는 재미는 좋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영문학과 교수 드류는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자 아버지의 오두막 집에 틀어박혔다. 집필 중 심한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폭풍이 몰아쳐 오두막집에 고립된 드류는, 자신이 구해준 쥐가 소설 완성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쥐는 소설 완성과 동시에 드류의 멘토 앨이 죽을거라고 말했고, 드류는 거래에 응했다...

소설을 완성하는데 작가들이 문장과 단어 하나 가지고 얼마나 머리를 싸매는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실감나게 풀어낸 작품. 드류가 태풍으로 오두막집에 고립되었는데, 아프기까지 해서 위기에 처하는 상황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환상인지 모를 쥐(악마)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는 건 다소 뻔했습니다. 특히 그 거래가 일종의 사기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런 류 작품들은 보통 비슷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탓입니다. 제 졸작 "계약은 충실하게"도 같은 이야기였지요.
앨이 죽은 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그래도 소설 완성의 기쁨이 더 큰 것인지 잘 모를 다소 애매한 결말도 아쉬웠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최근 킹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악마와의 거래가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좀 더 화끈한 맛이나 반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9/08

언어의 역사 - 데이비드 크리스털 / 서순승 : 별점 3점

언어의 역사 - 6점
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서순승 옮김/소소의책

영국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이 쓴 인문학 서적. 언어가 무엇인지, 언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언어가 왜 필요한지, 언어를 어떻게 학습하게 되는지, 언어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왜 세계에 많은 언어가 존재하는지, 언어는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변하는지, 표준어와 방언은 무엇인지, 문법은 무엇인지, 언어의 스타일이 왜 필요한지 등에 대해 항목별로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한마디로, '언어에 대해 궁금한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인걸 소개해드리자면, 우선은 아이들이 언어를 쉽게 배우는 까닭은 우선 리듬과 억양부터 배우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한 20여년 전 유행했던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책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책에서도 무조건 들으면 귀가 뚫린다고 했는데, 같은 이치인것 같아요. 단어의 뜻이나 문법을 모르더라도 그냥 들으면서 그 나라 말의 리듬과 억양부터 깨우치면 된다는 의미일테니까요. 물론 저는 영어의 리듬과 억양을 깨우치지는 못했습니다만....
표준 영어 문법이 생겨난 이유는, 상류층이 하층민이나 평민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개발한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내용도 기억에 남습니다. 새로운 악센트도 마찬가지고요. 또 악센트나 방언을 진화의 '적자생존'과 연결하는 발상은 신선했습니다. 낯선 악센트는 우리 소속이 아닌 '적'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라나요. 이를 이튼, 해로 등의 학교에 갓 입학한 지역 악센트 아이가 놀림당하는걸 예로  든 것도 영국 학자답더군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경상도에 전학간 전라도 사투리 소년 상황과 비슷하겠지요? 아, 상상만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마지막 부분의 응용 언어학자 같은 연관 학문에 대한 소개도 좋았습니다. 언어학이 언어를 연구만 하는게 아니라 언어를 어떻게 더 쉽게, 잘 배울 수 있도록 하는지, 언어 학습을 어떻게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지 등은 충분히 실용적으로 써 먹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제가 관심있는 범죄 분야에서도 응용 언어학이 한 분야인 '법 언어학' 전문가들이 활약하여 증거인 문서 자료를 누가 말했고 누가 썼는지를 밝혀낸다니, 언어학의 쓰임은 정말 방대한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예를 통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는 글 솜씨도 좋습니다. 문법은 지겹게 외워야 하는게 아니고, 단어들의 의미를 통하게 하는 방법이라며 'BAND'라는 단어의 사용 예를 알려주는 식으로요. 이 중 속어를 설명하면서 런던 이스트엔드의 코크니들 말을 예로 든 부분은 "미스터리를 읽은 남자"의 "존 크리시를 읽은 소녀"와 내용과 거의 똑같기도 했고요. 이 작품을 예로 들어주었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그런데 '한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고, 대부분 영어로 된 예제만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영국 학자의 책이니 영어 예제만 포함된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안내할 수 있는 설명이 포함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소의 지루한 부분과, 각 부문별로 지엽적 접근이 이루어지는 구성을 통사적으로 보완하면 좋겠다 싶고요.
그래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재미까지 놓치지 않은 좋은 책인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9/07

오렌지와 빵칼 - 청예 : 별점 2점

오렌지와 빵칼 - 4점
청예 지음/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게 순종하며,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따라하며 모든걸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유치원 교사 오영아는 심리 상담을 통해 전두엽 기능을 일부 조절하는 시술을 받았다. 그 뒤 영아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고, 억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모든 금기를 범하며 엄청난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시술 효과는 4주만 지속될 뿐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금기를 범하는, 도덕에 반하는 행동(배덕의 맛)은 쾌락을 주지만 이는 마약과 같다는 설정의 일상 심리물. 

뇌를 건드려 사람이 변모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전두엽 절제로 멀쩡한 사람을 로봇처럼 만든다던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혹성탈출 1" -, 아니면 바보를 천재로 만드는 - "앨저넌에게 꽃을", "론머맨" - 식으로요. 이 작품처럼 자기 통제를 없애는 설정은 뇌 조작으로 사악한 범죄자를 사회 규범에 충실하게 만드는 "시계 태엽 오렌지"의 반대 버젼이고요. 사회 비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들 자기가 옳다고 믿지만, 그걸 타인에게 강요하는건 잘못되었고 이런걸 추종하지말고 자기 자신의 뜻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자기 통제, 죄의식을 없애는 설정이라면 SF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에서 완벽한 군인이나 범죄자, 혹은 킬러를 만들 때 써먹음직 한데, 이를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풀어나간건 분명한 차별화 요소입니다. 사회 비판적 요소도 공정무역, 환경보호와 친환경, 기부 등과 같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소소한 것들이라 신선했어요. 이런 작품이 체제와 제도의 비판을 하지 않는건 거의 처음 본 것 같네요.
덕분에 신선한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온갖 통제에 얽매여 살아가는 오영아의 답답한 모습에서,시술 후 통제를 다 부숴버리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주변인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묘사는 통쾌했고요.

그러나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서 극도의 쾌락을 느낀다는 핵심 설정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 쾌락을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탓입니다. 자기 통제가 강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오영아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상황인지도 모르겠고요. 영아의 연인 수원도 피실험자로 영아를 희생양삼아 공짜 시술을 받은 듯 한데, 평상시에 철저한 자기 관리와 영아에 대한 지극정성을 보여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원이 은우의 친부였다는 일종의 반전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의 결말도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어딘가의 추천에서 접해서 읽어보았는데, 저는 그닥이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 문학'은 아니었던 탓이 가장 큽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9/06

트레몬의 모험 - 로버트 바 / 남원우 : 별점 1점

트레몬의 모험 - 2점
로버트 바 지음, 남원우 옮김/단한권의책

전 재산을 미국인에게 사기당해 잃은 뒤, 나가사키에 머물며 자신을 구해줄 인연을 기다리고 있던 트레몬 눈 앞에 미국의 대부호 헴스터 씨의 요트가 나타났다. 트레몬은 헴스터 씨와의 면회로 그의 비서로 고용되었다. 트레몬이 외교 쪽 연줄이 있고,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던 덕분이었다. 햄스터 씨의 딸 거트루드의 허영심 충족을 위한, 각 나라의 왕들을 만나려는 여행 목적을 이루기 위해 트레몬은 연줄이 있던 코레아의 황제를 만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항해 도중, 그리고 황제 알현 중에 거트루드의 오만방자함과 철없음으로 분란이 일어났지만, 트레몬은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헤쳐나가며 헴스터 씨가 보호해 왔던 헴스터 씨 친구의 딸 힐다 스트레톤과 연인이 되었다.

외젠 발몽 시리즈로 유명한 로버트 바의 역사 모험 연애 소설. 
여자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알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영국식 화법의 귀재 트레몬의 입담은 볼만했습니다. 말 안 듣는 여자는 때려야 한다는 사고방식도 신기했고요. 지금 시점에서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발상이지만, 솔직히 작품 속 거트루드 헴스터는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원본에서 각색이 이루어진 듯 한데, '코레아'가 무대라는 점도 독특했어요.

그러나 재미는 입담 뿐입니다. 내용은 유치했고, 정교하지도 못합니다. 기껏 거트루드를 납치한 코레아의 황제가 그녀를 선뜻 순순히 다시 보내준다는 결말이 특히 어처구니 없었어요. 거트루드가 평소의 패악질을 궁 내에서도 부려서 못이겨 쫓아낸다는 설명 정도는 덧붙여줬어야 했습니다. 
 트레몬을 사기쳐 먹었던 미국인 사업기 캐머포드가 거트루드와 결혼하는 결말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물에서 가장 중요할 둘 사이의 빌드업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초반에 거트루드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던 트레몬의 마음이 힐다에게로 쏠리는, 심지어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청혼부터 하는 급작스러운 전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에서 헤이스팅스의 뜬금없는 청혼과 굉장히 비슷했는데, 당시 영국 남자들의 사고방식이었나 봅니다. 빌드업 따위는 건너뛰고 돌직구를 한복판에 던지는 상남자들!

더 큰 문제는 코레아와 고종 황제의 등장입니다. 후진적이며 남성 중심의 강압적 문화라는걸 강조하는 요소일 뿐더러, 명성 황후 시해 사건가지 집어넣었는데 이건 정말이지 최악 오브 최악이에요. 황후가 무도한 외국 세력에게 살해당했는데, 황제는 여자에 미친 나머지 납치까지 해서 새로 후궁을 들일 생각만 하는 상황으로 그려지니까요. 이 정도면 각색자가 고종에 대한 원한에 사무친게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각색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그냥도 수준 이하인데, 불필요했던 각색으로 읽을 가치가 전무한 쓰레기가 되어 버렸네요.

2024/09/04

Q.E.D. iff 증명종료 26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점

[고화질]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26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전권에 이어 바로 집어든 전통의 시리즈 신간. "사자에상 시공"으로 영원히 시간이 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나가 대학 진학 이후를 고민하는 묘사가 나오네요. 게다가 가나가 확실히 성장했다는걸 보여주는, 우수한 활약을 펼치는게 아주 이채로왔습니다.

다만 아쉬운건 Q.E.D라는 작품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수학과 추리의 결합은 제대로 선보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주 부실했던 탓입니다. 
오랜 팬으로 가나의 색다른 모습은 반가왔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만, 다음 권에서는 기존의 매력을 다시 선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세 권 연속으로 기대 이하였으니까요. 야구에서도 세 번 아웃이면 공수가 교대된단 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검은 성모상"
마피아 조직원이기도 했던 작가 엔조 콜시니의 정신과 주치의 키케가 죽었다. 베니토 경감은 엔조가 살인을 저지르고 사고로 위장했다 확신했다. 마침 장학금을 위해 엔조와의 인터뷰가 있던 가나는 사건 조사에 휩쓸리게 되었다...

15년 전 사건에 대한 추리는 깔끔합니다. 피해자는 사건 당시 보험금을 노리고 강도 총에 맞은 척 연기했는데, 진범이 나중에 살해했던겁니다. 진범은 CCTV 촬영 당시 알리바이가 있던 엔조였고요.
키케를 죽게 만드는 등 엔조를 서서히 궁지로 몰아 폭력의 세계로 끌어들이려했던게 엔조의 아내 마리아였다는 진상도 꽤 놀라왔고요. 

'검은 성모'와 '마리아'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신을 믿는 신자들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 실제 신의 생각은 빠져있다는 것을 통해 "신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나?"를 냉정하게 분석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용서받았다는건 신자들의 착각일 뿐이라는건데, 나름 획기적인 발상이라 생각됩니다. 영화 "밀양"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요.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15년 전 범죄의 동영상 속의 이상한 점 - 피해자는 총을 맞을 때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시신은 도난 보험 증서를 쥐고 있었다 - 을 가나가 알아챌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이상합니다. 이 사건이 범인이 엔조라고 확신하고 쫓고 있던 베니토 경감은 15년간 대체 뭘 한걸까요?
정신과 의사가 사망한건 너무 간단한 조작에 의한 것으로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서 사건이라 보기도 어렵습니다. 오래전 시체를 다시 꺼내어 차 안에 가져다 놓은건 억지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가나가 능력을 발휘하며, 토마의 큰 도움 없이 스스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준게 팬으로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몬티 홀 문제"
젊은 패션 CEO 릴리 랑베르는 어린 시절 소꼽친구 소년을 찾아 나섰다. 세 명의 남자가 자신이 그 소년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누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릴리의 스토커가 나타나 폭탄 테러를 저질렀고, 점차 릴리의 목숨을 위협하게 되는데....

'몬티 홀 문제'가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학습 만화로도 가치가 높은 Q.E.D답게 '수형도'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본편 사건은 몬티 홀 문제와는 다릅니다. 세 명 중 한 명이 진짜인데, 그 중 한 명은 가짜라는게 밝혀진 - 경찰이 스토커 사건 조사를 위해 잠입시킨 형사 - 상황은 좀 비슷하지만, 주어진 정보가 랜덤이 아니라 일부러 틀린 답을 선택하게 만드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자가 있지도 않고, '꽝' 시점에서 이런 조작이 일어납니다. 
게다가 어차피 정답도 랜덤이 아닙니다. 답은 정해져 있어요. 애초에 릴리가 추억의 소년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더라면 문제될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학적 정보와 이야기가 잘 연결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토마도 '다르다'는걸 지적하지요.

사건도 별로입니다.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는 탓입니다. 범인 카프리 형사가 사건을 일으킨 동기부터 설명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릴리가 진짜인 고트를 단박에 알아봤다면 어쩔 셈이었던건지도 모르겠고요. 경호 대상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스토커였다면, 이런 가짜 연극에 어울릴 필요도 없었지요.

이렇게 전개와 사건 측면에서는 점수를 줄 부분은 없는데, 놀랍게도 가나의 우수성이 증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팬이라면 볼 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9/01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미스터리 소설 (オモコロ(Omocoro)bros)

유머러스한 기사들로 인기가 많은 일본 웹 사이트인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멤버들이 추천하는 미스터리 소설들입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은 세 편 뿐이라는게 아쉽네요.

브로스 편집부입니다.
8월의 일요일마다 다양한 장르의 "추천 소설"을 소개하는 기사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주는... "추천 미스터리 소설"! 다양한 미스터리를 즐겨보세요.

**다빈치 오시야마의 추천 호러 소설**
《우주 탐정 노그레이》 (타나카 히로부미)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한 미스터리 작품을 "특수 설정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마법이 있는 세계"나 "타임루프가 있는 세계"와 같이,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수 설정이라도 "아무거나 가능"한 것은 아니란 점이 중요합니다. 마법이 있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는 워프 마법을 범인만 사용할 수 있었다"라고 하면 흥이 깨지겠죠. 비현실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말에도 논리적인 납득이 필요합니다.
《우주 탐정 노그레이》는 다섯 편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우주를 무대로 하는 능력 있는 탐정 "노그레이"가 기묘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단, 이 행성들이 모두 매우 특이합니다.
  •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만 사는 "괴수 행성 킹고지"
  • 주민들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천국 행성 파라이스"
  • 주민 수가 항상 일정하며,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윤회 행성 텐쇼우"
  • 모두가 대본대로 연극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연극 행성 엔게키"
……등, 독특한 행성들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미스터리에서 "목 없는 시체"는 흔한 미스터리지만, 그 시체가 무적의 거대 괴수라면? 유쾌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더욱 불가사의한 사건들. 그 해결도 역시 행성의 특수한 성질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결말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치 모든 것이 가능한 듯 보이면서도 마지막에 피스가 맞아 떨어지며 규칙의 전체 그림이 보이는 그 기분은 미스터리의 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장난감 상자를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가 있는 한 권입니다.

**카마도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명탐정의 제물: 인민교회 살인사건》 (시라이 토모유키)

플롯부터 너무 멋진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최고입니다!!!!!!!
미스터리 작품 중에 "다중 해결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는 개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추리 결과, 여러 진실이 존재한다"라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입니다. 이 시라이 토모유키 선생님의 다중 해결물은 탁월합니다. 미스터리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물은 매우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추리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도중에 "이게 뭐야... 방금 추리는 뭐였지?" 또는 "피곤해... 결론만 말해줘..."라는 상황이 될 수 있지만, 이 《명탐정의 제물》에서는 제시된 여러 추리가 모두 강력한 임팩트를 줍니다. 압도적인 해설 파트를 읽으면서 "이 사람, 정말 대단하다!"라고 감탄하게 될 정도입니다. 장인의 기술에 감탄할 정도로 멋진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의 구조적 약점을 없애면서, 동시에 "다중 해결"이라는 장르 자체에 새로운 빛을 불어넣는 듯한 훌륭한 플롯을 꼭 경험해 보세요.
다른 작품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며, 이 《명탐정의 제물》을 시작으로 깊이 빠져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작품인 《엘리펀트 헤드》는 정말 최악입니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정말 재미있지만, 진짜 최악입니다. 사람이 이런 걸 써도 되나? 여러 의미에서 머릿속이 어떻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습니다.

**나시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이야기》 (스기이 미츠루)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이 떨리다니" 라는 경험을 한 건,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일종의 상쾌함까지 느낄 정도로, 기분 좋게 압도당했습니다.
훌륭한 독서 체험을 보장하므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꼭 서점에서 구입하시길 권합니다.
아니면 Amazon 카트에 담아주세요.
"전자책은 없나요?"라고 낙담할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키노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아사쿠라 아키나리)

취업을 위해 양산된 듯한 여섯 명의 우수한 대학생들이, 모두 내심 내정받고 싶은 대기업의 최종 면접에 남았으나, 전원이 내정받는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한 명만 내정된다고 변경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최종 토론 중에 우등생들의 "뒷모습"을 폭로하는 고발장이 나오면서, 한 사람씩 가면이 벗겨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책의 재미 순위를 석권하고, 만화화, 영화화, 라디오 드라마화까지 이루어졌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습니다! 취업을 위해 드러난 좋은 면과 고발을 위해 드러난 나쁜 면이 교차하며, 사람의 인상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스릴 넘치는 구성에 책을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게다가 엄청 읽기 쉽습니다!).
여러 번 뒤집히는 대학생들의 의혹에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교묘한 미스리드, 마지막에 남겨진 고발문의 놀라운 결말,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선명한 복선 회수... 말할 것이 없는 소설의 완전체였습니다. 11월에 영화도 개봉된다고 합니다. 꼭 보세요!

**가미죠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나오키상을 받은 화제작을 지금 와서 추천하는 것도 뭐하긴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배경은 전국시대로, 주인공은 실존 인물인 전국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입니다.
…잠깐만요, 이 시점에서 "역사물인가, 흥미 없네"라고 생각한 분들,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이 소설은 등장인물과 배경만 역사물일 뿐, 내용은 완벽한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 무라시게는 어느 계기로 상사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성에 틀어박힙니다. 그곳에 쿠로다 칸베이라는 엄청나게 뛰어난 지장이 찾아와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성 안에서 둘이 나눈 이야기가 지금으로 치면 실제로 있었던 "밀실 토크"처럼 느껴져,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예상해가며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 이야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설마, 이런 전개가 가능하다니!"라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 겁니다. 요네자와 호노부 선생님의 《흑뢰성》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다시 한번, 독서의 즐거움을 느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