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를 훔쳐라 - 하라 켄야 지음, 이규원 옮김/안그라픽스 |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1991년부터 4년 동안 「소설신초」에 연재한 50편의 수필에 더해, 15년 후인 2009년에 3편의 수필을 덧붙여 출간한 수필집입니다.
저자의 대표작인 "디자인의 디자인"을 읽었기에 글솜씨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놀랐습니다. 본인 스스로 디자인을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또 하나의 디자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본인이 1류 디자이너이니 그만큼 표현력이 탁월한건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생각해 보면 유명 디자이너들의 에세이가 대체로 뛰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네요.
단순히 문체가 유려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읽히는 재미도 뛰어난데요. 예를 들어 「딱한 사람」이라는 책의 디자인을 하며 가장 '딱한' 느낌이 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이야기, 다빈치가 그린 그림 속 잘 보이지도 않는 천사마저도 지능지수가 높아 보인다는 묘사, 그리고 후지이 타모쓰의 위스키 광고 사진을 보고 감탄한 일화 등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참고로 그 광고 사진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잔 두 개를 찍은게 아니라 그 잔을 통해 누군가가 술을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고 촬영한 결과였다고 합니다. 사물을 인격적으로 바라보고 찍었다는 설명인데, 정말이지 사진 원본이 보고 싶어 미치겠습니다(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긴 했지만 원본인지는 잘 모르겠고, 사진도 너무 작더군요). 참고로 후지이 타모쓰는 "디자인의 디자인"에서 자세히 소개한 무인양품 프로젝트를 촬영한 사진가이기도 합니다.
책 디자인을 야구의 투구에 비유하는 글도 재미있었습니다. 히메노 카오루코라는 작가의 책 디자인 작업을 이야기하면서, 동일한 작가의 책을 계속 맡다 보면 점차 그 작가에 대한 '스트라이크 존'이 형성되고, 여기서 직구를 던질지 변화구를 던질지 판단하게 된다는건데 야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무릎을 칠 만한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하라 켄야의 작품과 작업 과정에 대한 내용이 많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디자인 전공자로서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고, 자극제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유명 건축가들이 파스타 디자인을 했다는 것에 착안해 하라 켄야가 가락국수 디자인을 시도했다는 내용은 기억에 남습니다. 양념 국물이 더 많이 묻도록 디자인했다는 아이디어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실제 양산은 되지 않았지만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람들이 훔쳐가고 싶어하는 포스터’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극사실주의 작가 리처드 에스테스의 전시회 포스터를 만들면서, 아무리 봐도 그림으로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네요. 극사실주의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고급스러운 커피 라벨 작업에서는 엠보스 가공을 시도했지만, 막상 병에 붙이자 요철이 거의 사라져버린다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는데 이러한 작업상의 난관들이 오히려 좋은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들이 많지만 꼭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어떤 생각으로 작업을 하는지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디자인은 단순히 껍데기가 아니라 제품의 배경과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저자의 철학은 특히 인상적이었고, 저도 그런 디자인을 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다만, 책 가격에 비하면 지나치게 부실한 도판은 아쉽습니다. 저자 스스로 언급한 디자인의 절반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특히 위스키 광고나 커피 라벨 등, 결과물이 궁금한 사례가 많은데 이를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책 디자인 역시 하라 켄야 본인이 참여했을 텐데, 상상력을 자극하려는 의도였다면 이해는 되지만, 해외 독자들에게는 조금 더 친절한 배려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도판만 좋았더라면 별점 5점도 충분했겠지만, 이런 아쉬움으로 인해 별점은 4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전공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재미와 사고의 확장을 동시에 선사하는 최상급 수필집입니다. 제가 디자인을 가르치는 입장이라면, 필독서로 지정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