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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포스터를 훔쳐라 - 하라 켄야 / 이규원 : 별점 4점

포스터를 훔쳐라 - 8점
하라 켄야 지음, 이규원 옮김/안그라픽스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1991년부터 4년 동안 「소설신초」에 연재한 50편의 수필에 더해, 15년 후인 2009년에 3편의 수필을 덧붙여 출간한 수필집입니다.

저자의 대표작인 "디자인의 디자인"을 읽었기에 글솜씨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놀랐습니다. 본인 스스로 디자인을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또 하나의 디자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본인이 1류 디자이너이니 그만큼 표현력이 탁월한건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생각해 보면 유명 디자이너들의 에세이가 대체로 뛰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네요.

단순히 문체가 유려하다는 수준이 아니라 읽히는 재미도 뛰어난데요. 예를 들어 「딱한 사람」이라는 책의 디자인을 하며 가장 '딱한' 느낌이 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이야기, 다빈치가 그린 그림 속 잘 보이지도 않는 천사마저도 지능지수가 높아 보인다는 묘사, 그리고 후지이 타모쓰의 위스키 광고 사진을 보고 감탄한 일화 등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참고로 그 광고 사진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잔 두 개를 찍은게 아니라 그 잔을 통해 누군가가 술을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고 촬영한 결과였다고 합니다. 사물을 인격적으로 바라보고 찍었다는 설명인데, 정말이지 사진 원본이 보고 싶어 미치겠습니다(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긴 했지만 원본인지는 잘 모르겠고, 사진도 너무 작더군요). 참고로 후지이 타모쓰는 "디자인의 디자인"에서 자세히 소개한 무인양품 프로젝트를 촬영한 사진가이기도 합니다.
책 디자인을 야구의 투구에 비유하는 글도 재미있었습니다. 히메노 카오루코라는 작가의 책 디자인 작업을 이야기하면서, 동일한 작가의 책을 계속 맡다 보면 점차 그 작가에 대한 '스트라이크 존'이 형성되고, 여기서 직구를 던질지 변화구를 던질지 판단하게 된다는건데 야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무릎을 칠 만한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하라 켄야의 작품과 작업 과정에 대한 내용이 많다는 것도 좋았습니다. 디자인 전공자로서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고, 자극제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유명 건축가들이 파스타 디자인을 했다는 것에 착안해 하라 켄야가 가락국수 디자인을 시도했다는 내용은 기억에 남습니다. 양념 국물이 더 많이 묻도록 디자인했다는 아이디어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실제 양산은 되지 않았지만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람들이 훔쳐가고 싶어하는 포스터’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극사실주의 작가 리처드 에스테스의 전시회 포스터를 만들면서, 아무리 봐도 그림으로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네요. 극사실주의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고급스러운 커피 라벨 작업에서는 엠보스 가공을 시도했지만, 막상 병에 붙이자 요철이 거의 사라져버린다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는데 이러한 작업상의 난관들이 오히려 좋은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들이 많지만 꼭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어떤 생각으로 작업을 하는지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디자인은 단순히 껍데기가 아니라 제품의 배경과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저자의 철학은 특히 인상적이었고, 저도 그런 디자인을 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다만, 책 가격에 비하면 지나치게 부실한 도판은 아쉽습니다. 저자 스스로 언급한 디자인의 절반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특히 위스키 광고나 커피 라벨 등, 결과물이 궁금한 사례가 많은데 이를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책 디자인 역시 하라 켄야 본인이 참여했을 텐데, 상상력을 자극하려는 의도였다면 이해는 되지만, 해외 독자들에게는 조금 더 친절한 배려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도판만 좋았더라면 별점 5점도 충분했겠지만, 이런 아쉬움으로 인해 별점은 4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전공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재미와 사고의 확장을 동시에 선사하는 최상급 수필집입니다. 제가 디자인을 가르치는 입장이라면, 필독서로 지정하고 싶습니다.

2015/03/27

명당은 마음속에 있다 - 최창조 / 김진태 : 별점 3점

명당은 마음속에 있다 - 6점
최창조 지음, 김진태 만화/고릴라박스(비룡소)

제가 경애하는 작가인 김진태의 신작으로, 한국 풍수 지리학의 대가라는 최창조 선생의 저서를 바탕으로 풍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학습 만화입니다. 총 4편의 핵심 스토리 만화에 더해 각 이야기별로 부록처럼 풍수 상식과 풍수에 대한 Q&A를 알려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화
사라진 무덤
상식 이야기 풍수① 임금도 막을 수 없었던 묏자리 다툼
풍수 Q&A① 역대 대통령의 선친 묘는 명당일까?
풍수 Q&A② 묏자리를 잘못 써서 부관참시당한 지관이 있다는데?

2화
묏자리 명당을 찾아라!
상식 이야기 풍수② 뿌리 깊은 명당 발복설
풍수 Q&A③ 지관들의 묏자리는 최고 명당?
풍수 Q&A④ 요즘 화장이 대세라는데?

3화
대박집의 조건
상식 이야기 풍수③ 한양 천도를 둘러싼 풍수 싸움
풍수 Q&A⑤ 풍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지?
풍수 Q&A⑥ 청계천의 역사는?
풍수 Q&A⑦ 터는 3대를 거슬러 보고 고르라는데?

4화
돈이 모이는 곳, 환포를 찾아라!
상식 이야기 풍수④ 좋은 땅, 좋은 집
풍수 Q&A⑧ 요즘 아파트들은 풍수지리가 필수라는데?
풍수 Q&A⑨ 나쁜 땅에 맞는 건물은?

목차만 봐도 무척 흥미롭죠? 대체로 인터넷이나 이런저런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기는 하지만, 김진태 특유의 개그 센스가 정보들과 잘 어우러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풍수에 대해 여러 가지로 궁금했던 점들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었고요.

하지만 상식 이야기와 Q&A는 학습만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나름의 재미도 전해주는데 반해, 핵심 스토리 만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주인공 득수가 풍수에 미쳐 가정을 소홀히 한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대기업에 입사하지만, 결국 풍수의 세계에 빠져든다는 설정인데요. 풍수가 무슨 선천적인 재능도 아니고, 아버지를 싫어했다면 굳이 풍수를 배워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신의 물방울"의 시즈쿠도 아버지 칸자키 유타카에게 배운 건 없고, 디켄딩 능력 역시 어릴 적부터 자주 해봐서 익숙해진 것이니 결국 타고난 혀로 승부하는 건데요. 이 책에서는 풍수를 어느 정도 알려면 결국 공부해야 한다고 설명되는데, 그렇다면 설정부터 오류라 생각됩니다.

엄마의 식당이 대박집이 된 이유가 아버지가 명당에 가게 터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설정처럼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풍수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니 무리수처럼 보이는 장면들도 많았습니다. 차라리 상식 이야기처럼 현대적인 내용을 따로 떼고 역사 개그 만화 스타일로 풀어냈다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오랜만에 접한 김진태 작가의 작품으로, 재미와 정보 제공이라는 두 측면에서 기본 이상은 해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 팬심이 반영된 평점이긴 하지만, 저처럼 김진태 매니아이시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은 작품입니다.

2015/03/26

혁명의 맛 - 가쓰미 요이치 / 임정은 : 별점 2.5점

혁명의 맛 - 6점
가쓰미 요이치 지음, 임정은 옮김/교양인

중국 근현대사를 베이징이라는 장소와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음식과 함께 설명해주는 독특한 책입니다. 왕조 시절(주로 청나라)에서부터 유래한 유명 음식들과 음식점들의 흥망성쇠를 급변하는 정치 환경과 연결하여 흥미롭게 풀어내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청나라 시기 다양한 지방의 요리들을 바탕으로 베이징에서 식문화가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혁명 초기, 1950년대 마오쩌둥의 "농민 선호, 도시 혐오" 기조  때문에 식당들은 이른바 "혁명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후 경영의 어려움으로 정부가 경영권을 소유하는 공사합영 체제로 전환되었고요. 문화혁명 시기에는 식당 이름조차 바뀌었다가, 개방 정책 이후 다시 부활하는 과정까지 설명해줍니다.

역사와 정치 상황, 음식과 식당 이야기가 묘하게 어우러지는 구성이 인상적이며, 무엇보다도 문화혁명 시기부터 중국을 드나들었던 저자의 직접 경험이 바탕이 된 덕분에 높은 현장감을 자랑합니다. "루쉰이 본 베이징 풍경"을 정말 그 시절에 있던 사람처럼 묘사한 부분은 자료적 가치도 높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 기대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저는 음식 문화사나 미시사 같은 책을 기대했는데, 수필에 가까운 글들로 전체적으로는 정리되지 않은 잡문을 읽는 느낌마저 전해주는 탓입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중국 음식의 역사나 문화가 어떤 사료를 바탕으로 했는지 설명이 부족한 것도 문제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인지 의심이 드니까요.
아울러 저자가 직접 찍은 몇몇 사진 외에는 도판 구성이 부실하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유명 요리들 정도는 사진으로 소개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읽히는 재미는 괜찮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중국 음식 문화사를 다룬 책은 많지만, 재미 면에서는 상급에 속한다고 생각됩니다. 가볍게 역사와 음식을 버무린 글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15/03/23

신데렐라 (2015) - 케네스 브래너 : 별점 2점

광고를 본 딸아이가 강하게 부탁해서 보게 된 작품입니다.

일단 생각도 못했던 "겨울왕국" 단편 "Frozen Fever"로 시작되는데,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안나의 생일파티를 철저하게 준비하지만 정작 엘사는 감기에 걸려버린다는 내용으로 짤막하지만 노래도 좋고 분위기도 흥겨워서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기침을 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눈사람들도 무척 귀엽고요.

그러나 정작 본편 "신데렐라"는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편 이야기를 애니메이션보다 더 탄탄하게 구성하려는 시도 자체가 가장 큰 이유였다 생각됩니다. 신데렐라의 성장 과정,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계기, 왕국이 작아 정략결혼이 필요하다는 사정, 계모의 음모 등 디테일한 설정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런 설명이 늘어난다고 해도 모두가 알고 있는 판타지 동화일 뿐이거든요. 불필요한 설정과 설명은 다 집어치우고 예전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생쥐 친구들의 활약이나 음악을 적절히 활용해 본편 외의 잔재미를 더해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아니면 신데렐라를 지나치게 착한 캐릭터로 만들지 않고, 마지막에는 통쾌한 응징을 보여주는 식의 새로운 해석도 나쁘지 않았을테고요.
한마디로, 지금의 이야기는 진부하고 재미없었습니다.

비주얼적인 면에서도 기대 이하였습니다. 신데렐라가 그다지 미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하이라이트가 되어야 할 대모 요정의 마법 장면이나 무도회 신도 연출에서 그다지 임팩트가 없었던 탓입니다. 촬영이나 세트도 연극적인 느낌이 강해서 전체적으로 스케일이 작게 느껴졌고요. 말 그대로 눈요깃거리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셰익스피어 극 전문가인 케네스 브래너 감독답게 스토리 전개와 연극적인 구성은 꼼꼼하게 잘 짜여져 있긴 합니다. 특히 계모 캐릭터만큼은 확실히 입체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음모까지 작품에서 잘 설명되고 있을 뿐 아니라, 케이트 블란쳇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빛을 발하거든요. 두 새언니의 재수 없음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부분은, 영화라서 더 설득력이 넘쳤던 장면이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작품 전체를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고, 별점은 2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1점 수준이지만 "Frozen Fever" 덕분에 1점을 더 얹습니다.

딸아이가 정말 즐거워했더라면 조금 더 좋은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딸아이 역시 딱히 재미있어 하지 않았기에 점수를 더 줄 이유가 없네요.

2015/03/19

모래혹성 듄과 이케가미 료이치

데이빗 린치의 <듄> (1984) 일본 개봉 시 (1985) 개봉기념 특전. 핀터레스트 순례 중 찾았습니다. 아 멋지다!

2015/03/17

던전 밥 1- 쿠이 료코 : 별점 4점

던전밥 1 - 8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던전 심층부에서 드래곤과 승부를 벌이다가 간신히 탈출한 주인공 라이오스 일행은 곧바로 던전에 복귀했다. 그들을 구하고 드래곤에게 잡혀버린 여동생 파린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짐을 잃어버려 곤경에 처했다. 그래서 식비를 줄이기 위해 라이오스는 던전 내의 마물들을 사냥해 먹자고 제안하는데!

쿠이 료코의 만화. 일전에 "서랍 속 테라리움"을 재미있게 읽어서 바로 구입해 본 작품입니다.

전사, 드워프, 엘프, 도둑(열쇠사)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던전을 공략한다는 점과 기본 세계관은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버린 전형적인 RPG 판타지의 룰과 설정을 따릅니다. 하지만 이들이 마물을 사냥해 먹는 이야기를 요리 만화 스타일로 풀어낸다는 아이디어가 탁월했습니다. 재료가 되는 마물들과 요리에 대한 디테일한 설정도 돋보였고요.

어떻게 보면 뻔한 판타지와 뻔한 요리 만화의 결합인데, 서로의 장점과 재미를 극대화시켰기에 단순히 구루메 만화 붐에 편승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장르라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는 식재료와 요리를 정말로 있음직하게 그려낸 작가의 솜씨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다 재미있지만 그중 인상 깊었던 두 가지 에피소드를 꼽자면,

첫 번째는 만드레이크와 바실리스크의 알로 만든 오믈렛 이야기입니다. 만드레이크를 채취할 때 비명을 들으면 죽을 수도 있지만, 드워프 전사 센시는 소리를 지르기 전에 목을 베어버리는 방식으로 채취해서 멀쩡하죠. 그러나 엘프 마법사 마르실은 책에서 배운 대로 개와 연결된 밧줄로 만드레이크를 묶고 개를 달리게 해 채취하는 방법(그리고 개는 죽게 되는)을 쓰고자 합니다. 던전에는 개가 없으므로 박쥐 마물을 대신 사용해서요. 자신이 파티의 짐 같은 존재로 여겨져, 파티에 기여하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던 탓입니다.

하지만 박쥐가 폭주하면서 되려 죽을 뻔하게 되고, 더 큰 실의에 빠지게 되는데요. 그때 드워프 전사 센시가 바실리스크의 알에 만드레이크를 섞어 만든 오믈렛을 맛보고, "비명을 지른 쪽"이 더 맛있다고 인정하면서 훈훈한 결말을 맺습니다. 센시가 마르실에게 몸에도 좋고 맛도 좋다는 만드레이크의 머리 부분을 특별히 챙겨주며 마무리되고요(이건 정말 만화를 봐야 느낄 수 있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움직이는 갑옷 에피소드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리보다는 판타지 설정 자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움직이는 갑옷이 실제로는 갑옷처럼 생긴 일종의 조개라는 설정은 정말 기발하더군요.

게다가 주역 캐릭터들도 전사 - 엘프 - 드워프 - 도둑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기는 하지만, 약간의 개성을 더해 각자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에피소드마다 번갈아가며 주역을 맡는 방식으로 비중 배분도 확실해서 좋았습니다. 쿠이 료코의 뛰어난 작화와 독특한 개그 센스 역시 더할 나위 없습니다.

동어 반복적인 요소가 조금 있으며,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설정(죽어도 마법으로 소생 가능하다는 설정)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이세계 구루메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신경지를 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4점. 판타지와 구루메, 요리 만화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2015/03/16

SF 명예의 전당 1 - 아이작 아시모프 외 / 박병곤 : 별점 3점

SF 명예의 전당 1 - 6점
아이작 아시모프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박병곤 외 옮김/오멜라스(웅진)

SFWA (미국과학소설작가협회)가 생긴 후인 1964년 12월 31일 이전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회원들이 투표를 진행하여 가려 뽑은 작품들을 모은 앤솔러지입니다. 1965년 이전 작품 15편과 30위까지의 작품 일부를 더한 구성이며, 1권과 2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4권 세트 e-book을 종이책 대비 엄청 저렴한 29,700원에 팔고 있어서 구입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SF라는 장르에는 e-book이 가장 적합한 콘텐츠 형태가 아닐까 싶네요.

1권을 먼저 읽었는데, 수록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 어스름 Twilight - 존 캠벨
  • 전설의 밤 Nightfall - 아이작 아시모프
  • 무기 상점 The Weapon Shop - A.E. 밴 보그트
  • 투기장 Arena - 프레드릭 브라운
  • 허들링 플레이스 Huddling Place - 클리포드 D. 시맥
  • 최초의 접촉 Firt Contact - 머레이 라인스터
  • 남자와 여자의 소산 Born of Man and Woman - 리처드 매디슨
  • 커밍 어트랙션 Coming Attraction - 프리츠 라이버
  • 작고 검은 가방 The Little Black Bag - 시릴 콘블루스
  • 성 아퀸을 찾아서 The Quest for Saint Aquin - 앤소니 바우처
  • 표면장력 Surface Tension - 제임스 블리시
  • 90억 가지 신의 이름 The Nine Billion Names of God - 아서 클라크
  • 차가운 방정식 The Cold Equations - 톰 고드윈

대충 봐도 SF계의 대가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작품의 수준도 당연히 높습니다. SF 작가들이 직접 선정한 고전 명작이니만큼, 작품의 수준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SF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 작품집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는건 아쉬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불필요하게 어렵게 쓴, 혹은 번역된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을 두고 굳이 어려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역장", "정신인자", "윤충류" 등이 대표적입니다. 교황을 '로마 주교이자 사도 전승 카톨릭 성교회의 수장,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는 — 그러니까 교황은 —'이라고 장황하게 소개하는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배경이 되는 기본 설정 소개도 인색한 편입니다. "Coming Attraction" 같은 경우, 핵전쟁 이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가상 역사 SF인데, 단편적인 정보만 설명되는 탓에 전체적인 그림은 미루어 짐작만 가능할 뿐입니다.
SF가 장르적 특수성이 강해서 작가가 '독자가 이 정도는 알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작가의 잘난 척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대중성은 떨어지고 읽기만 어려워지는 듯 한데 말이지요.

아울러 냉전 시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나 기계 문명과 신성을 빗대어 설명하는, 지금 읽기에는 낡은 소재가 많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먼 미래의 지구는 어떤 이유로든 멸망했고, 영원히 동작하는 기계가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는 "Twilight", 앞서 말씀드린 "Coming Attraction", 가상 역사 SF이자 기계 문명과 신성을 이야기하는 "The Quest for Saint Aquin" 등이 그러합니다. "Nightfall", "The Cold Equations"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익히 접했던 작품들이 제법 된다는 것도 아쉽고요. 물론 이 책의 취지가 시대를 초월한 걸작들을 모아놓은 것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그러나 당연히, 그리고 다행히도 시대를 뛰어넘는 멋진 작품도 많습니다. 그중 제 개인적인 베스트 작품을 소개해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The Weapon Shop"

"우주선 비글호" 시리즈로도 유명한 밴 보그트의 작품입니다. 독재 정권에 이용해왔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충성만 하던 서민이 우연한 계기로 자유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 빗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가진 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낸다는게 정말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SF 뿐 아니라 정치 풍자극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일종의 먼치킨 같은 역할을 하는 "무기상점"이라는 아이디어도 참신하게 느껴졌고요. 시대를 초월한 걸작입니다.

"Arena"

외계의 두 종족 간 전면전이 벌어질 찰나, 지구인 주인공이 기묘한 장소로 소환됩니다. 그 이유는 전면전이 벌어지면 두 종족 모두 멸망하게 되므로, 신이 한 종족만이라도 남기기 위해 두 종족의 대표 전사를 소환해 생명을 건 전투를 벌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롤러 형태의 외계인과 1:1로 생명과 인류의 존망을 걸고 벌이는 전투라는 설정 자체가 매력적인데, 거장 프레더릭 브라운의 명성에 어울리는 전개도 압권입니다. 소환된 장소의 다양한 환경을 이용하는 과정과 마지막 승부에 활용되는 복선까지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SF가 꼭 심오하게 인류의 미래, 신의 존재와 같은 주제를 다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재미를 위해 쓰더라도 이만큼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존재 이유는 충분하지요. 별점을 준다면 5점입니다.

"First Contact"

게 성운에서 우연히 조우한 지구인과 외계인 비행선. 서로 마음을 열어가면서도 결국 생명을 걸고 양쪽이 전투를 벌여야 할 것이라는 묘한 상황에 빠집니다. 그러나 다행히 놀라운 아이디어로 싸우지 않고, 서로의 정보를 공평하게 가지고 귀환하게 되지요.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딜레마가 잘 표현된 작품으로 완벽한 해피엔딩에 이르는 반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밝고 유쾌하게 쓰여졌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약간은 냉전 시대의 소산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시대를 뛰어넘는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The Little Black Bag"

미래에서 온 마법의 의사 가방을 놓고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설정과 이야기가 한데 뒤섞여 있는데, 한 작품에 쓰이는 게 아깝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게 많습니다. 다만 미래의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가 된다는 설정은 불필요해 보였어요. 그냥 미래에서 의사 가방이 보내지고, 그것이 사용되다가 살인 사건이 벌어져 동작이 취소된다는 정도만 등장해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작가의 욕심, 의욕이 지나쳤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는 뛰어나고 마지막 마무리까지 완벽합니다.

"Surface Tension"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밤 이야기"가 연상되는 식민화 우주선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호시노 유키노부 작품보다는 압도적으로 뛰어난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식민화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기는 한데, 그 별에 가장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작품의 무대가 된 행성에서는 미생물 — 윤충류! — 로 인류가 탄생하게 되거든요. 이후 이러한 미생물 인류가 이른바 "외계"로 나가기 위해 나름의 "우주선"을 만들고,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는 내용은 인류의 우주 진출과 비교되며,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모로 잘 짜여진 SF 모험물입니다.


다른 작품에는 불만과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은 충분합니다. SF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도 최소한 "Arena"만큼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책 서두에 소개되어 있는, SFWA에서 가장 표를 많이 받은 15위까지의 작품은 알려드리며 리뷰를 마칩니다. 그런데 영문으로만 소개되어 있는건 이해가 안 되네요. 책에는 한글 제목으로 실어놓았는데 말이죠. 또 3위인 "Flowers for Algernon"은 영문 제목이 잘못되어 있기까지 합니다. 거기에 더해 이 작품들을 어떻게 1, 2권으로 나누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았는데, 여러모로 세심한 배려가 아쉽습니다.

  • 1. "Nightfall" - 아이작 아시모프
  • 2. "A Martian Odyssey" - 스탠리 와인봄
  • 3. "Flowers for Algernon" - 대니얼 키스
  • 4. "Microcosmic God" - 테오도어 스터전
  • (동률) "First Contact" - 머레이 라인스터
  • 6. "A Rose for Ecclesiastes" - 로저 젤라즈니
  • 7. "The Roads Must Roll" - 로버트 하인라인
  • (동률) "Mimsy Were the Borogoves" - 루이스 패짓
  • (동률) "Coming Attraction" - 프리츠 라이버
  • (동률) "The Cold Equations" - 롬 고드윈
  • 11. "The Nine Billion Names of God" - 아서 클라크
  • 12. "Surface Tension" - 제임스 블리시
  • 13. "The Weapon Shop" - A.E. 밴 보그트
  • (동률) "Twilight" - 존 캠벨 
  • 15. "Arena" - 프레드릭 브라운

2015/03/12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별점 3.5점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8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를 처음 읽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왠걸, 전작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수록 작품 하나하나의 재미와 소설적인 완성도 모두 빼어난 수준이었어요. 또한 추리적 속성의 작품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실과 정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왜 미스터리가 벌어지는가?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인 듯싶네요.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메이즈리크가 명탐정이라는 것도 잘 드러나 있고요.

아울러 책 뒤 소갯글을 보니, 차페크는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완벽한 형식이 단편소설이라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단편도 그냥 단편이 아니라 호시 신이치와 같은 "쇼트쇼트" 스타일의 초단편들이 많은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장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수록 작품의 편차가 있는 편이고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이야기들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해봅니다. 쇼트쇼트 스타일이라 수록 작품이 워낙 많아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네요. 아울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발자국"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의 발자국이 딱 한 지점에서 사라졌다는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이 수수께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수수께끼와 현실 사이의 문제를 냉정하게 지적하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독백 - "우리가 범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미스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당을 쫓는 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 이 핵심입니다.

때문에 좋은 미스터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발상은 괜찮았습니다. 하기사, 경찰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떤 사건"

메이즈리크 형사가 선배에게, 최근 금고털이를 체포했던건 사실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 이야기입니다. 우연이 겹쳐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이 코믹하게 전개되는데, 메이즈리크는 본인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요. 범인 신발에 묻은 "가루"를 인지한 것은(그것도 비 오는 상황이라는 걸 특정해서!) 분명 뛰어난 수사 능력이죠.

"푸른 국화"

희귀한 푸른 국화를 찾는 정원사의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마을 바보가 가져온 푸른 국화 뿌리에 묻은 흙의 종류와 잎에 묻은 이물질을 통해 "어딘가의 정원에 있을 것"이라 추리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을을 전부 뒤졌지만 찾지 못했던 이유는 보행 금지 표지가 있었던 철로 건너편 경비원 관사에 피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말까지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바보는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통행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넜다"는 핵심 트릭도 좋았고요. 그 외에도 경비원과의 언쟁, 정원사의 일탈 등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점쟁이"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이어스 부인을 의심한 서장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수사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마이어스 부인을 사기로 옭아매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녀의 점이 실제로 들어맞는다는 기묘한 블랙코미디 같은 반전이 돋보였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다소 예상 가능한 전개지만, 시대를 앞선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통력의 소유자"

필적만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초능력자를 시험하기 위해 검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의 냉혹한 살인범이 쓴 편지를 보여주는데, 능력자의 평가 결과가 너무나 정확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편지가 자신이 쓴 메모로 바뀌어 있었음을 깨닫고, 그 초능력자의 분석은 그냥 일반화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여기까지는 흔한 초능력 격파물인데, 이후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검사는 그 초능력자가 묘사한 말들을 활용하여 실제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거든요.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 급의 쇼트쇼트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필적 미스터리"

아내의 편지를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받은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칭 전문가의 현란한 말에 휘둘려 이십여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아내를 의심하고 매도하게 되는데, 백여 년 전 이야기임에도 인터넷상 자칭 전문가나 SNS 루머 등으로 판단을 내리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 인상 깊었던 소품입니다.

"도둑맞은 서류"

마카로니 통 안에 숨겨 놓은 비밀 서류 도난 사건을 다룹니다. 지역 경찰관이 일종의 DB 기반 추론으로 범인을 검거하는 독특한 수사 방식이 돋보이며, 동시에 속물적이고 유쾌한 블랙코미디 요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보티츠키 가문의 몰락"

메이즈리크가 역사학자의 의뢰로 15세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두 남자의 죽음, 사라진 딸, 국왕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단서로 펼치는 추리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실화가 아니라 허구의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리는 시간의 딸"보다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한 단편이 연상되더군요.

"영수증"

메이즈리크 반장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단서는 전철 티켓과 영수증 뿐. 하지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영수증을 통해 피해자가 중국 도자기 가게에서 산 물건을 추리해내고, 그 이유까지 밝혀냅니다. 도자기를 산 이유는 그것을 깨뜨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추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명작입니다.

다만 전개 면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있습니다. 청자인 두 연인 민카와 페파, 그리고 화자인 소우체크의 이야기는 서사의 흐름에 꼭 필요해 보이진 않았거든요.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감정적으로 깊게 와닿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배우의 실종"

천재 배우 얀 벤다가 실종된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벤다의 친구인 의사 골드베르크가 탐정 역할을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데, 벤다가 '메소드 배우', 즉 배역에 몰입해 자신을 바꿔가는 배우였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벤다가 부랑자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을 완전히 부랑자처럼 바꾸어 버린 탓에, 결국 시체가 부랑자의 변사체로 오인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 봐도 설득력 있는 설정과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단돈 200코루나가 사라진 사건으로 감사관에게 적발당하고 자살한 불쌍한 우체국 직원 헬렌카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경감 '나'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1. 헬렌카의 시선을 잠시만 돌리면 200코루나 정도는 쉽게 훔칠 수 있었다는 점
2. 시선을 돌리려면 전보나 소포를 보내야 했다는 점
3. 사건 당시 익명의 편지가 파르두비체에서 대거 발송되었다는 점
4. 파르두비체에 사는 우체국 아가씨와 교제 중인 감독관이 소포를 보냈고, 주소 오류로 반송되었다는 점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감독관이 애인을 자신의 근무지 근처로 전근시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애인이 익명으로 그 사실을 고발해 감사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일상계 추리물로도 수준이 높고,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벌인 일탈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씁쓸한 결말도 매우 인상 깊습니다.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은 걸작으로, 별 5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2015/03/09

3월 7일~8일 두산 시범경기 중계를 보고

순전히 재미와 감으로 써보는 2015 프로야구 예상!

얼마 전 2015 순위 예상 글을 위와 같이 썼었는데, 시범경기 중계를 보고 추가로 몇 자 더 적습니다.

먼저 타선은 민병헌, 정수빈, 홍성흔, 오재원 선수 등 주전 대부분이 삽을 들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단 두 경기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뿐더러 시즌은 시작도 하지 않았고, 주전 선수들은 개막에 맞춰서 컨디션을 끌어올릴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정수빈 선수의 타격을 보고 일부 팬은 벌써부터 정진호 선수의 주전 기용을 언급하는데, 당장은 고려할 필요도 없죠. 누적 기록과 경험 모두 정수빈 선수가 압도적이니까요. 조급해하지 말고 찬찬히 몸을 만들었으면 하네요.

또 주전 선수들이 단체로 삽을 들기는 했지만 몇몇 선수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바로 FA로이드가 기대되는 김현수 선수와 외국인 타자 루츠 선수, 그리고 김재환 선수죠. 김현수 선수는 투수와 공을 가리지 않고 때려내는 모습이 과거 '기계'라는 명성이 부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했고, 루츠 선수는 선구안과 공을 많이 던지게 만드는 커트 능력에 더해 중장거리포 역할도 기대해볼 만한 펀치력을 보여줬습니다. 김재환 선수도 주전으로 꾸준히 기용해볼 만한 가능성을 보였고요.

그런데 투수진은 물음표네요. 역시나 폼을 끌어올리는 단계라 큰 의미는 없겠지만 삼성이 1군 주전 라인업을 기용한 것도 아닌데도 맞아나가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장원준 선수는 정말로 기대 이하였고, 캠프에서 좋았다는 김강률 선수의 제구도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진야곱 선수 역시 예상대로 제구가 들쭉날쭉, 이혜천 ver.2 느낌의 막제구를 보여줘 과연 중간에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이재우 선수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제는 정말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요.

그나마 괜찮게 본 투수는 변진수, 김수완 선수였습니다. 특히 김수완 선수는 투수진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우완 투수일 뿐 아니라, 롯데 시절 보여준 좋은 모습이 살짝 보이기도 해서 나름 중용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했습니다. 함덕주 선수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나저나 몇 명 되지도 않는 투수진인데 최병욱 선수가 갑작스럽게 부상까지 당해버리니... 과거 좌완 수맥이 흐르던 팀이 이제는 우완 수맥으로 바뀌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이번 시범경기를 통해 드러난 점은 이렇습니다. 장점은 선발투수진, 타선, 수비 등인데 그냥 그런 수준이고, 단점은 중간계투와 마무리로 이 부분은 정말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아직 등판하지 않은 마야, 이현승, 이현호, 조승수, 이원재 선수 등의 호투를 기대해봅니다. 그런데 조승수 선수와 이원재 선수는 재활군인가요? 투수 엔트리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2015/03/06

비독 소사이어티 - 마이클 카프초 / 박산호 : 별점 3점

비독 소사이어티 - 6점
마이클 카프초 지음, 박산호 옮김/시공사

비독 소사이어티는 82세로 생을 마감한 비독을 기리기 위해 인종, 성, 연령, 국적을 가리지 않고 총 82명의 세계 최고의 형사들과 범죄 수사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범죄 해결을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재능기부 단체, 자원봉사 탐정들이라고 합니다. 단, 발생한 지 2년 이상이 지나 경찰의 공식 협조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해당 사건의 조사에 응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공권력을 넘보지 않기 위해서겠죠. 사건 해결을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은 빠지는, 철저하게 조력자 역할에 충실한 전문가들입니다. 쿨하고 멋있죠?

이 책은 비독 소사이어티 소속 수사관들이 가 요청받은 미해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5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통해 수많은 사건과 수사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세계 5대 프로파일러 중 한 명으로 셜록 홈즈의 재림이라 불리는 골초 프로파일러 리처드 월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의 프로파일링은 신급으로 묘사되는데, 사건을 맡으면 범인 체포를 자신하며 "내가 범인이라면 익지 않은 바나나는 사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캐릭터성도 확실해서 독신주의에 엄청난 골초, 전자제품은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고 양복은 단 한 벌 뿐, 그런데 피아노 연주 능력은 뛰어난 음악가이며 모든 일에 시니컬한 천재로 묘사됩니다. 작중 표현 그대로 "셜록 홈즈와 싱크로율 9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20년 전 가족을 몰살시키고 도주한 존 리스트 사건 해결입니다. 리스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어떤 차를 탈지까지 정확하게 예측해 내거든요. 폭주족 살인자 나우스에 대한 프로파일링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정확했고요.
이러한 프로파일링 실력 뿐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수갑소리야"라는 말로 대표되는 실질적 범인 검거 능력도 인상적입니다. 스콧 살인 사건에서는 자료만 보고 범인이 레이샤일 것이라 확신하며, "시체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지방 검사에게 "현장의 혈흔은 누군가 죽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피도 시체의 일부다"라고 설득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개인적인 천재성으로 설명되기에, 그 비결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살인자를 4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헬릭스 이론"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 분류를 통해 한밤중 마트에서 세 번 살해당한 브룩스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도 인상 깊고요.

그러나 다른 수사관들은 리처드에 비해 활약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협회를 만든 윌리엄 플라이셔는 사건 해결보다는 리더십을 갖춘 마당발, 얼굴마담 역할이며, 또 다른 중심 인물 프랭크 벤터는 과거 사진만으로 존 리스트의 현재 모습을 예측한 흉상 제작으로 유명세를 얻은 천재이지만 범죄 전문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탓입니다.

해골을 통한 얼굴 복원, 실종 용의자의 현재 모습을 조각하는 일 등을 담당하므로 이야기 중심에서는 조금 비켜나 있지요. 비교하자면 천재 아이언맨이 리처드 월터, 리더십 중심의 캡틴 아메리카가 윌리엄 플라이셔, 과학보다는 신화 기반의 토르가 프랭크 벤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건, 수사관, 수사 이야기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기존 경찰 수사로는 해결이 어려웠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제 사건을 천재들이 해결해 나간다는건 추리 소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예를 들자면 이런 작품)인데, 그게 실제 사건이라면 왠만한 소설 이상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지요.

아울러 공소시효 없이 미제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미국 사법당국의 노력도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흉악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폐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몇몇 사건처럼, 사건 발생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DNA 감식 등의 수사기법 덕분에 진범이 밝혀진 사례도 있으니까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미제 사건을 부각시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는데, "화성 연쇄살인" 같은 경우는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랭크 벤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화성 연쇄살인범의 몽타주는 철저히 가상이기에 현재 모습을 조각할 수는 없겠지만, 리처드 월터의 능력을 빌린다면 훨씬 정밀한 프로파일링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처럼 재미와 가치를 지닌 책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논픽션과 소설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어 불필요한 묘사와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은 읽는 데 부담을 줍니다. 다른 유사한 논픽션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인데,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리처드와 프랭크의 천재성에 대한 묘사는 지나쳐서 오히려 거부감을 줄 뿐이고요. 차라리 이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아울러 너무 극적인 성공 사례만 실려 있는 점도 좀 아쉬웠습니다. 프로파일링은 본질적으로 데이터와 직감에 기대는 작업인데, 100% 적중이라는 건 비현실적이니까요. 한두 건의 실패 사례가 들어갔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자 속 소년" 사건의 진범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도 불만이며 부실한 번역과 교정은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공통적으로 지적된 문제인데, 18,000원짜리 책이라면 그에 맞는 완성도를 갖췄어야 했습니다. 초판 독자가 베타테스터도 아니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었지만, 책의 완성도 부족으로 1점 감점합니다. 다만 범죄 분석과 프로파일링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는 매우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덧붙이자면, 대니 드비토가 운영하는 제작사가 비독 소사이어티 관련 영화 판권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리처드와 프랭크가 중심이라면 아마도 존 리스트 사건이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5/03/05

일곱난쟁이 (2014) - 보리스 알지노빅, 헤랄드 지페르만 : 별점 1점

딸아이 때문에 보게 된 독일산 애니메이션. 독일산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은 아니고, 전부 어디서 따온 듯한 설정과 내용의 전형적인 디즈니풍 애니메이션입니다.

동화를 약간 비틀고 패러디한 부분은 "슈렉"이 떠오르나 그렇게 과감하거나 새롭지는 않습니다. 백설공주가 섹시한 자아도취 캐릭터가 되었다거나, 브레멘의 음악대가 4인조 밴드가 되어 축하 연주를 펼친다던가 하는 약간의 변주에 그칠 뿐이에요.

하지만 이러한 변주는 그래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야기 자체예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따오기는 했지만,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앙심을 품었다는 원작과는 다르게 이 작품에서는 마녀가 왜 저주를 걸었는지부터가 불명확합니다. 저주도 그냥 잠을 자게 만드는 것이라니 별게 없고 말이죠.

이후의 전개 역시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합니다. 로즈 공주의 연인 잭을 구하기 위한 여정은 단지 거리만 멀 뿐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며, 유일한 걸림돌인 용은 만나자마자 친구가 되고, 마지막 마녀와의 단판 승부 역시 우연한 거울 반사라는 어처구니없는 장치로 끝나버리는 등 내용에서 어떤 극적 요소를 느끼기는 어려웠어요. 중간중간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삽입된 노래들도 그다지 좋지 못했고요.

또한 일곱 난장이 역시 별다른 활약이 없습니다. 사이즈가 별로 난장이로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백설공주"에 비하면 각 캐릭터도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주인공급인 막내 보보가 신발끈도 혼자서 못 맨다는 설정도 계속 반복되었지만 딱히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공주가 나와서 딸아이가 좋아하기는 했지만, 좋은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전무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어른이 볼 작품은 절대 아니에요.

2015/03/04

순전히 재미와 감으로 써보는 2015 프로야구 예상!

2015 프로야구 개막을 앞둔 나만의 순위 예상입니다.

외국인 선수의 성적은 예상 자체가 어렵기에 10개 구단 모두 동일한 클래스의 선수들로 가정하였습니다. 즉, 국내 선수들의 전력에 따라 예상한 순위라는 것이죠.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가 무슨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감으로 잡은 순위이니 재미로 봐 주세요.

제 예상으로는 삼성과 SK가 상위권을 형성하고, 중위권은 LG, 넥센, 두산이 경쟁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화와 NC는 다크호스로 언제든지 중위권 다툼에 끼어들 수 있는 팀이고요. 그리고 롯데, 기아, KT가 하위권에 위치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상세 예상 순위와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두산 순위는 팬심이 반영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퐈이팅 허슬 두!

1위 삼성

에이스였던 벤덴헐크, 하위 선발인 배영수, 계투 권혁 선수가 이적했지만 큰 타격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몇 년간 외국인 선수의 도움 없이도 우승했던 팀이고, 국내파 선발이 탄탄하며 계투진, 타선, 수비, 경험 등 모든 면에서 탑 클래스의 완성된 팀입니다.

2위 SK

정우람과 박희수 선수가 돌아오고, 김광현도 지켜냈으며, 모든 FA를 잔류시킨 스토브리그의 승자입니다. 외국인 선수들도 교체하여 큰 폭의 전력 상승이 기대됩니다.

3위 넥센

작년 외국인 타자의 도움을 못 받은 부분은 스나이더가 메워줄 수 있지만, 강정호가 빠진 공백은 크다고 봅니다. 에이스 벤 헤켄도 후반기에는 흔들렸고, 국내파 선발은 마땅한 선수가 없어 한현희를 선발로 돌렸습니다. 전형적인 아랫돌 빼서 윗돌 막기죠.

그래도 박병호가 이끄는 타선은 여전히 강력하며, 이기는 경기를 잡는 힘은 유지될 것입니다. 중위권 수성은 충분해 보입니다.

4위 LG

가장 큰 장점은 투수진, 특히 불펜입니다. 확실한 셋업과 마무리가 버티고 있죠. 국내파 선발진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후보군이 많아 큰 걱정은 없고, 다만 평균 연령이 높은 주전 야수층은 보강이 필요해 보입니다. 한 시즌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네요.

5위 두산

장원준은 분명한 전력 상승 요인이지만, 불펜진은 눈에 띄게 약해졌습니다. 작년 필승조 중 남아 있는 선수가 거의 없고, 윤명준의 부상 소식도 뼈아픕니다.

그래도 감독 교체로 인한 기대감과 탄탄한 선발진은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선발 4명이 50승 이상만 해 준다면 5할 승부는 가능하겠죠. 이용찬은 "누가 나와도 그 정도는 해 줄" 수준의 마무리였고, 정재훈은 노쇠화가 우려되었기에 어떻게든 대체 가능하며, 다행히 올 시즌은 긁어볼 로또 자원도 많습니다. (함덕주, 김강률, 장민익, 이원재, 변진수, 조승수, 진야곱 등)

6위 한화

엄청난 선수 보강과 감독 교체만으로도 전력 상승이 기대됩니다. 특 A급 보강은 없었지만, 1군급 선수를 다수 충원해 경쟁력 있는 팀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바로 상위권 진입은 어려워도 중위권 싸움은 충분히 가능하겠죠.

7위 NC

신생팀 프리미엄이었던 외국인 선발 3명 보유가 끝났습니다. 웨버는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120이닝 9승을 기록한 준수한 선발이었고, 대체 자원이 마땅치 않습니다.

국내파 에이스 이재학도 시즌이 길어질수록 한계를 보였고, 중간에서 큰 역할을 했던 원종현의 이탈은 뼈아픕니다. 보강도 제대로 못 했고요. 요즘 기사에 나오는 박명환은 로또고... 김경문 감독의 매직이 발휘될 수는 있어도 작년만큼의 순위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8위 롯데

모든 FA를 놓치고, 10승 이상을 거뒀던 외국인 투수들도 모두 교체한 절망적인 스토브리그였습니다. 작년 대비 전력 보강은 전무하며, 정재훈이 김사율과 비슷한 성적을 낼 수 있다 해도 큰 의미는 없습니다. 힘겨운 시즌이 예상됩니다.

9위 기아

외국인 투수 교체는 긍정적이지만, 그 외 전력 보강은 전무합니다. 눈에 띄는 군 제대 선수나 신인도 없고, 오히려 주전 선수가 군입대로 빠져나간 타격이 큽니다. 반강제적인 리빌딩 시즌이 될 듯합니다.

10위 KT

신생팀입니다. FA 영입으로 구색은 갖췄지만, 이기는 경기를 잡을 수 있는 힘은 없어 보입니다. 올 시즌은 경기 감각을 익히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입니다. 승부는 다음 시즌부터~!

2015/03/02

살인을 부르는 수학 공식 - 테프크로스 미카엘리데스 / 전행성 : 별점 3점

살인을 부르는 수학 공식 - 6점
테프크로스 미카엘리데스 지음, 전행선 옮김/살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9년, 수학교사 스테파노스가 살해당했다. 유일한 친구였던 미카엘 이게리노스는 경찰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던 1900년 파리 수학자 대회를 떠올렸다.

1900년 파리 수학자 대회에서 힐베르트가 제시한 23개의 문제 중 2번 문제, "산술의 공리들이 무모순임을 증명하라"에 대한 해법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20세기 초반 수학계의 주요 흐름을 짚는 수학 소설인 탓에, 당대 수학계의 핵심 이론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 주력하지만 단순히 수학 이론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는건 아닙니다.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리물로서의 수준도 높습니다. 힐베르트의 강의가 있었던 날부터 독자에게 동기를 지속적으로 부각시키는 복선에 더해, 범행의 진상도 깔끔했고, 무엇보다 마지막 반전 - 스테파노스의 증명은 범행 직후 발표된 쿠르트 괴델의 논문을 통해 오류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이게리노스의 범행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이 돋보인 덕분입니다.

여러모로 "장미의 이름"과 유사하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장미의 이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책을 숨기고 살인을 저질렀는데, 이 책에서는 이게리노스가 수학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스테파노스의 논문 발표를 막고자 살인을 저지른다는 동기가 매우 비슷하거든요. 다양한 수학 이론을 설명해 독자에게 현학적인 느낌을 제공하는 점, 주인공 외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고 실제 역사와 맞물려 전개되는 팩션이라는 점도 이러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고요.

그런데 핵심 내용 몇 가지를 제외하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는 단점인 큽니다. 파리에서 파블로 피카소를 만난다거나, 이게리노스의 결혼과 이혼, 스테파노스가 우연히 그의 전처 및 정부와 엮이는 등의 설정은 핵심 이야기 전개와 별 관계가 없으니까요. 피카소가 기하학에 관심이 많다는 설정이 입체파의 시작을 알린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어진다는 발상은 흥미롭지만, 수학자들이 피카소에게 기하학 강의를 해 준다는 내용은 수학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 작품은 추리, 미스터리물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수학 소설"이기에 수학 이론 설명이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지식 전달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시도한 결과물인데 재미와 정보 전달 양쪽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장미의 이름"과 직접적으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레베르테의 작품들처럼 지식을 과시하는 데 치중하는 책들보다는 훨씬 낫네요. 수학에 관심이 있고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