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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4

앨리스 살인게임 - 가코야 게이이치 / 김현화 : 별점 2점

앨리스 살인게임 - 4점
가코야 게이이치 지음, 김현화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61년, 식량 부족으로 파국을 맞은 지구, 하루는 돈을 벌기 위해 VR로 가상 현실 세계 '앨리스'에 접속했다가 정체불명의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 때문에 로그 아웃도, 다른 곳으로 이동도 불가능하며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시스템 컨트롤 불가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피노키오'라고 불리우는 이 새로운 공간에서, 가이드를 따라 목숨을 걸고 '빨간 새우의 집'에 도착한 하루는, 자기와 같이 끌려온 다른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생존자들이 죽을 때마다 집의 잠겨진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들은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가상 공간을 무대로 한 액션 스릴러입니다. '피노키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녀'는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있어서 약간의 추리물적인 성향도 갖추고 있고요.
액션 스릴러적인 성향은 "빨간 새우의 집"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강을 건널 때 그 편린을 살짝 보여준 뒤, 빨간 새우의 집 안에서 생존자들이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을 벌이면서 절정에 달합니다. 하루가 LK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클라이막스고요. 여기서 가상 현실을 잘 이용한 두뇌 게임은 상당한 볼거리였습니다. 하루가 시스템 내에서 아바타 외모를 다른 사람처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내고 시체를 자기로 위장시킨다던가, 공간에 자기처럼 보이는 영상을 투영한 뒤 급습한다는 식인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가상 공간 피노키오에 대한 진상도 신선했습니다. 앨리스 시스템 내의 다른 공간이 아니라, 앨리스에서 접속할 수 있는 또다른 가상 공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했을 뿐인 하루 등은 어떻게 피노키오에 접속할 수 있었나? 라는 수수께끼가 새로 불거지는데, 이는 하루가 앨리스 내에서 활동하는 인공지능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즉, 하루는 현실에서 앨리스에 접속한게 아니라, 앨리스에서 피노키오에 접속했었던 겁니다. '푸른 머리의 소녀'는 하루를 만들어낸, 진짜 현실의 인공지능 연구자였고요. 앨리스 안에서 인공지능을 만들어냈던건 현실 세계에서 대파국 이후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대신해 앨리스 안에서 생활할 인공지능이 필요했다는 거지요.
이렇게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려 했던 이유는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터무니없다는 점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밀어 넣지 않으면 본성을 알 수 없어서 다양한 프로토타입을 특정 공간에 가두었다는 발상부터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이런다고 인간의 본성이 드러날까요? 설령 그렇다쳐도, 구태여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불필요한 설정들을 따 오면서, 이상한 공간에서 생존 게임을 벌이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생존 게임으로 알 수 있는건 가장 싸움을 잘하고 강한 인공지능이 누구인지일 뿐이니까요. 극한 상황이 필요했다면 앨리스 시스템 내의 문제로 시스템 컨트롤을 할 수 없는 특정 클러스터 - 현실의 무인도같은 - 에 갇히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충분했을 겁니다. 생존자들에게 '푸른 머리의 소녀'라는 수수께끼를 던져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추리력은 인간 본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피노키오'를 가져다 붙인 것도 억지스럽고요.
생존 게임도 앞서 소개했던 배틀 자체는 그럴싸하지만, 설정은 진부합니다.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묵한 전사, 쎈 언니, 이해심 높은 조력자, 양아치 (?) 등 등장 인물들도 진부한데다가, 설정상 오류가 크게 느껴집니다. 이 등장 인물들은 모두 앨리스 내부에서 활동할 인공지능이라는 설정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평범한 인물들이었어야 했습니다. 문신충 앗슈라던가, 사교성없고 폭력적인 LK는 인공지능 프로토타입으로는 지극히 비상식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테스트를 반복해서 하루에게 부담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스템 설계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기화 후 업데이트된 버젼으로 테스트했다면 이전 히스토리를 알 수 없는게 당연할텐데요. 찬호께이의 <<S.T.E.P>>에서의 시뮬레이션처럼, 각 테스트는 모두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결과라는 설정이 더 이치에 맞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좋았던 아이디어와 설정에 기묘한 생존 게임을 더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린 작품입니다.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습니다.

2024/01/13

로봇 소년, 학교에 가다 - 톰 앵글버거, 폴 델린저 / 김영란 : 별점 3점

로봇 소년, 학교에 가다 - 6점
톰 앵글버거.폴 델린저 지음, 김영란 옮김/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맥스가 다니는 뱅가드 중학교에 로봇 퍼지가 등교하게 되었다. 퍼지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로봇 통합 프로그램(RIP)의 핵심으로, 기술적 기반인 퍼지 논리를 발전, 완성시키기 위해 학교에 보내진 것이었다. 하지만 퍼지는 등교 첫날부터 시끌벅적한 복도를 걷다가 먹통이 되고 말았다. 연구팀은 퍼지를 완성시키기 위해 맥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맥스의 도움과 퍼지 스스로의 프로그래밍으로 퍼지는 진짜 '인간'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편 뱅가드 중학교를 철저히 관리하는 인공지능 바바라 교감은 맥스를 퇴학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맥스가 장래 학업을 방해하는 위험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게 된 퍼지는 맥스를 돕기 위해 자신의 전력을 다한다....


딸 아이의 논술학교 교재입니다. 별 기대없이 읽어보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인공 지능의 발전과 '인간성'이 어떻게 비롯되는지, 그리고 인공지능에 '인간성'이 타당한지 등의 심각한 주제들을 인공지능 두 개를 통해 이야기로 잘 풀어나간 덕분입니다.
인공지능의 하나는 바바라, 또 하나는 퍼지인데 바바라는 일체의 오류를 허락하지 않는 수학적인 연산 기계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결론에 맞게 상황을 조작까지 하지요. 이로써 인간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기계는 전형적인 흑백논리에 의해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반면 퍼지는 오류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성장해나가면서 점차 인간적인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즉, 사람은 실수를 하지만 이를 통해 성장하며 어른이 된다는걸 퍼지를 빌어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고요. 반면 인간성은 인공지능, 로봇으로서는 필요한건 아니었기에, 인간의 명령을 듣지 않는 문제도 일으킵니다. 
이렇게 어느 쪽이 옳다는걸 확실히 알려주지는 않는 것과 이러한 퍼지의 반항(?)이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이어지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잘 짜여진 느낌이에요. 인간성을 갖춘 퍼지보다는, 말 그대로 주어진 명령에 충실한 바바라야말로 훨씬 군대에 적합한 인공지능임에는 분명하기도 하고요.

바바라가 학업 성과를 올리기 위해 중학교 아이들을 통제 대상으로 삼는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그럴듯하게 설명해주는 덕분입니다. 
퍼지가 함정에 빠진 맥스를 돕기위해 벌이는 여러가지 활약, 맥스와 친구들의 활약이 그럴듯해서 모험 소설로도 괜찮습니다.

물론 '퍼지 이론'은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이론이기는 합니다. 냉정한 전자 계산기같은 기계와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의 대결도 친숙한 소재이며, 로봇이 학교를 통제하는 것 역시 "폭력 교실 1999"가 바로 떠오를 정도라 신선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중국 회사임이 분명한 로봇 회사 순쭈사의 산업 스파이는 등장하지 않는게 좋다 싶을 정도로 불필요한 설정이었고요.
무엇보다도 끔찍한 표지 일러스트와 유치한 제목은 최악입니다. 원제 (Fuzzy)를 살리고 보다 고급스럽게 디자인을 바꾸는게 높을거에요. 요새는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좋은 디자인이 뭔지 잘 아는 시대이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5/01

스텝 - 찬호께이, 미스터 펫 / 강초아 : 별점 2.5점

스텝 - 6점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알마

'사보타주'라고 불리우는, 범죄자 형량을 인공지능 분석을 통해 결정하는 시스템을 주제로 한 4편의 중편이 모여 하나의 큰 이야기를 이루는 연작 소설집입니다. "13.76"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중국 추리작가 찬호께이가 타이완의 추리 작가인 미스터 펫과 함께 쓴 작품이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저' 방식은 아닙니다. 기둥 줄거리와 기본 설정은 함께 생각했을테지만, 미국을 무대로 한 첫 번째, 세 번째 이야기를 찬호께이가, 일본을 무대로 한 두 번째, 네 번째 이야기를 미스터 펫이 써서 합쳤거든요. 

그래서 각각의 이야기는 분위기와 전개가 사뭇 다른데, 찬호께이가 쓴 작품들은 정교한 구성, 반전 모두 어느 정도 기대에 값합니다. 하지만 미스터 펫의 작품은 별로였습니다. 작위적인 부분이 많은 탓입니다. 왜 일본을 무대로 했는지도 모르겠고요. 특히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는 그 수준이 가히 처참한 수준입니다. 미스터 펫이 맡았던 이야기들은 작 중에서 인공 지능의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라고 설명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처지는 완성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어요. 찬호께이가 맡았던 첫 번째 이야기 속 매슈 프레드 범죄극도 마찬가지로 시뮬레이션이지만 범죄물로는 차고 넘치는 좋은 작품이었으니까요. 추리물, 범죄물이 아닌 SF 측면으로도 사보타주 시스템 등 상세 설정도 찬호께이 이야기에서 더 잘 설명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찬호께이 부분은 별점 3.5점, 미스터펫 부분은 별점 1.5점인데 찬호께이가 이야기 전부를 썼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P.1 SA.BO.TA.GE. /찬호께이 : 

미국을 무대로 매슈 프레드라는 범죄자가 저지르는 여러가지 범죄를 그려낸 작품. 이 중 마지막 범죄는 꽤 완성도가 높아요. 술집에서 만난 E와 의기투합해 그의 전처를 응징한다는건데, 아내나 불륜남이 아니라 E를 죽이고 아내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다는 반전이 괜찮았거든요. 매슈 프레드가 저지른 모든 범죄는 사보타주가 시뮬레이션한 내용이라는 큰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E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정비공에게 시세보다 훨씬 큰 돈을 주고 자동차 정비를 맡기는 등 약간의 헛점은 있지만, 이 모든게 시뮬레이션이라면 어느정도 납득할 만 합니다.

EP.2 T&E /미스터 펫 : 

탐정 메이구가 정부 의뢰로 사보타주 시스템을 일본에 이식한 '선인장' 시스템을 해킹한 범인을 찾아낸다는, 일본을 무대로 한 독특한 SF 추리물입니다. 

수사는 미행, 도청, 해킹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이구가 가진 특수 능력이 무엇인지가 수수께끼의 핵심입니다. 사건 수사를 여러가지로 시도하면서, 실패할 때 마다 사건을 의뢰받은 시점으로 기억과 함께 돌아오는 능력이지요. 실패하지 않아도, 5일이 지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요. 이 능력 덕분에 메이구는 의뢰받은 사건을 5일 안에 밝혀낼 수 있었던 겁니다. 

이야기는 중간에 의뢰인이 사망하는 등의 깜짝 전개를 거쳐, 특수 능력이 밝혀지고 범인이 타케우치라는게 드러나며 타케우치와 메이구의 격투로 끝맺습니다. 지금 전개되는 현실은 메이구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로, 이 가상 현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일종의 열린 결말입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타임 리프물, 타임 슬립물과는 다른 설정에 더해, 메이구가 리셋할 때마다 료코의 1인칭, 3인칭으로 시점이 변하는 묘사도 독특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에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생각과는 사뭇 달라서 신선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하려면 료코 뿐만이 아니라 메이구로의 시점 전환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료코만의 시점 변화는 진짜가 아닌 가상 현실이라는걸 보여주기위한 장치로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거든요.

EP.3 E PLURIBUS UNUM /찬호께이 : 

석방된 범죄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최악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본 법무부의 사보타주 시스템 총 책임자인 앤드루 키팅이 범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줄 알지만, 시스템 비밀을 밝히기 어려워 전전긍긍하는 담당자의 고뇌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지막 범죄 현장에서 마주치는 클라이막스 까지의 전개도 긴장감이 넘치고요, 마지막에 키팅이 읽은건 단순한 시뮬레이션 결과일 뿐, 실제 예측이 아니었다는 반전도 설득력있게 묘사됩니다. 

문제는 전개와 결과가 예상가능했고, 운과 우연에 지나치게 의지한다는 점입니다. 시뮬레이션과 비슷하게 애덤스가 현장에 나타나서 희생된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보타주 시스템의 문제를 드러내는데 너무 치중한 결과물이었어요. 키팅이 범인 애덤스를 죽이고 그냥 잡혀갈 생각을 했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고요.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밝혀지는 두 번째 이야기 속 기묘한 설정만큼은 아주 흥미로왔습니다. 키팅은 범죄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인공지능이 시뮬레이션 도중 일정 조건이 만족되면 자동으로 특정 시점으로 되돌아가 변수를 변화시켜 시뮬레이션을 계속하는 '가젯'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시점을 되돌리는 방식을 인공지능이 학습해 버려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가젯이 유출되어 해커가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등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되지요. 이렇게 가상 세계 속에서 시간 회귀, 변수 수정, 데이터 기록의 능력을 갖게 되는 '머니퓰레이터' 를 잡기 위해 프로그래머 프랭크는 '에스코트'라는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에스코트는 머니퓰레이터를 확인하면, 소멸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지요. 즉, 두 번째 이야기에서 머니퓰레이터가 메이구, 에스코트는 다케우치였던 겁니다. 이런 점에서 다케우치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설정이 신선하게 다가오네요. 시스템만 놓고 보면 다케우치는 백혈구와 같은, 정의로운 존재인데 말이지요. 

그리고 머니퓰레이터로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 방법은 인공지능 딥 러닝 학습법의 하나인 GAN 모델이 연상되어 더욱 그럴듯하게 여겨졌습니다. GAN 모델은 학습이 필요한 인공 지능을 Discriminator라고 부르며, 여기에 가짜 데이터를 만드는 Generator가 생성한 결과물을 입력하는 방식입니다. Generator의 위조가 정교해 질 수록, 이를 판별하는 Discriminator의 능력도 올라가는 방식이지요. 이 이야기로 따지면 메이구가 이런저런 가상 시나리오를 시도하는 Generator이고, 사보타주 시스템 속 인공 지능이 Discriminator인 셈입니다.

EP.4 PROCESS SYNCHRONIZATION /미스터 펫 : 

두 번째 이야기가 비롯된 원인인, 선인장 시스템에 침입하여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면서, 실제 현실의 메이구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 완성도가 절망스러운 수준입니다. 완벽한 보안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중앙 처리실에 두 시간 이상 머물려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한 방법에 대한 트릭부터 억지입니다. 뭔가 엄청난 시스템인 것 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그냥 데이터 조작과 별로 다르지 않거든요. 

과거 일본에서 실행되었던, 기억을 조작하는 수술인 HIMIKO 프로젝트도 뜬금없었습니다. 수술을 받았던 메이구가 수술에 대한 비밀 서류를 손에 넣고, 관계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전개는 유치하고 작위적이고요. 아무리 이야기가 모두 시뮬레이션 결과에 불과했다고는 해도, 앞서의 다른 시뮬레이션들보다 현격히 낮은 완성도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에필로그 : 

사보타주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인권을 무시하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 형법 제도가 옛날 방식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인데 솔직히 사족에 불과합니다. 개인적으로 범죄자가 수형 시설에서 교정, 교화가 될 수 있다는걸 믿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대로 반성하지 않으면, 절대로 풀어주지 않겠다!는 정서가 깔린 사보타주 시스템의 형량 결정 시스템이 지금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됩니다.

2024/08/28

인공지능이 그린 "경성탐정록"

MS의 코파일럿을 이용하면, 인공지능 'DALL·E'가 생성하는 이미지를 무료로 하루에 몇 장씩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만들어보다가, 오래전 원안으로 참여했던 추리소설 "경성탐정록"의 표지 일러스트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제목은 아직 제대로 생성하지 못하지만, 분위기는 아주 그럴싸하네요. 앞으로 후속권이 나오면 인공지능에게 아예 표지를 맡겨봐야겠습니다.

2021/10/29

Q.E.D Iff 증명종료 1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일상계 추리물은 없습니다. 조금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었어요. 한 편은 평균 이하, 한 편은 평균 이상으로 두 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들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 

라이메이가 유산 상속 입회에 끼어들었던 토마와 가나는 라이메이가 장남 만사쿠, 장녀 교우코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리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가문의 막내 토우카였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모두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은 이미 받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학문의 길을 택해서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체들에서 발견된 기묘한 메시지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게 밝혀지는데....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는 유클리드의 공리였습니다. 그냥 단서로만 남겨진건 아니에요. 트릭과 공리가 나름 연결된 것 처럼 보이니까요. 우선 만사쿠 살인 사건은 개천에 조명을 띄워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바늘 구멍 카메라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움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토마는 이를 유클리드 공리 중 점과 점의 연결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쿄우코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로프를 이용한 장치 트릭은, 공리의 직선과 원 표시를 로프와 호수와 대칭시킨 것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공리와 트릭을 연결한건 토마의 해석일 뿐.... 범인인 모모히코가 공리를 현장에 남긴 이유는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속셈이었을 뿐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트릭과 연결시킨건 토우카가 범인, 최소한 주요 관계자일 거라는 의심을 끝까지 끌고가려는 작가의 억지에 불과했어요. 토마가 없었다면 트릭과 연결되지도 못했을테니까요. 

공리를 현장에 남길 이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토우카가 범인임을 드러내려면, 차라리 이름을 남기는게 낫잖아요? 공리 따위를 남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트릭과 그렇게 설득력있게 연결되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애초에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유산 상속 입회에 불렀어야 했습니다. 토우카가 관련되었던 흔적을 남긴 정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우카의 딸 치도리가 변호사로 현장에 와 있었긴 했습니다만, 이는 경찰이 겨우 알아낸 사실입니다. 모모히코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명은 없어요. 설령 알고 있었다 쳐도, 치도리가 토마, 가나와 함께하던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에 관련된 대책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완성도 높은 살인 계획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범인이 모모히코라는걸 밝혀낸 단서는 그가 무심코 했던, "자기 옷이 아니라 아버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 뿐인데, 이 정도로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옷을 입으면 안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기가 당주가 되었으니, 기념삼아, 혹은 추모의 의미로 아버지 옷을 입는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런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유클리드 공리를 트릭과 엮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작품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습니다.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은 아직 볼 수 없다" 

204X년, 가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소에 AI가 폭주했다는 상담이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접수된 사건 조사에 나선 가나는 시스템 엔지니어 토마와 재회했다. 마찬가지로 폭주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토마는 산보용 로봇을 조사해서, 누군가 통신으로 조작에 개입했다는걸 알아냈다. 

이 회로를 가지고 제조사로 찾아간 토마와 가나에게, 제조사는 회사에 앙심을 품은 개발자 알슈가 멋대로 회로를 탑재시킨게 원인이라고 말했지만, 알슈의 동료 루이스는 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204X년을 무대로 한, 11권에 처음 등장했던 평행 우주 세계관SF 추리물. 토마는 산보 로봇에 회로를 재탑재하여, 알슈 박사와 대화를 시도하여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공지능 갈라테아가 폭주하자 제조사는 이를 없애려 했고, 알슈 박사가 갈라테아를 서버 째 들고, 로봇 안에 숨어 도망을 친게 진상이었지요. 토마는 로봇과 관련된 사건 - 이탈리아 요리점 로봇이 중화요리를 만든 사건, 사서 로봇이 부탁받지 않은 책을 꽂아 놓은 사건, 산보 로봇이 바다를 보러간 사건 등 - 모두가 아이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키우는 경험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갈라테아가 자아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라고 추리합니다. 폭주 사건들은 갈라테아가 좋아하는걸 우선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던 겁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던건 인공지능에 대한 색다른 이용 방법? 이었습니다 .인격이 생겨난 기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는 SF계에서 꽤 많이 보아왔던 화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제조사가 갈라테아를 원했던건, PC를 끄면 갈라테아는 "죽는다"는 상황이라,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처음 본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판단한 재판 결과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제조사와의 소유권 분쟁은 말이 안됩니다. 알슈 개인의 기술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던, 갈라테아는 제조사에서 월급을 받고 근무할 때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회사의 것이에요. 알슈는 회사 재산을 빼돌러 도망간 것에 불과하고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지, 알수 본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이를 판가름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색다르고 기발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워낙에 돋보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재판도 성립될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원을 꺼서 갈라테아가 죽는다면, 다시 전원을 넣었을 때 살아나는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2023/07/29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 우타노 쇼고 / 이연승 : 별점 2점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 4점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우타노 쇼고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물. 이런 류의 기획물은 그리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원작을 이야기와 별 관계없이 무리하게 집어넣는 등 억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에도가와 란포와 상관없는 독립된 작품으로 발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의자? 인간!>>
인기작가 스즈카는 창작 동반자였던 아키히로를 차버리고 부유한 간부급 공무원 하라구치와 결혼했다. 아키히로에게서 사람을 써서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5년 뒤, 아키히로가 문자를 보내왔다. 지난 5년간 그가 어떻게 복수를 계획하여 실행해 왔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즈카의 소파 속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고, 스즈카가 문자를 보내자 정말로 소파 안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인간 의자>>에서 따 온 이야기. 의자 안에 남자가 들어간다는 설정을 따왔고, 비현실적인 인간 의자 제작과 안에 들어가는 과정, 방법에 대한 디테일은 유사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원작에서 인간 의자가 변태의 집요함을 그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여기서는 복수를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즈카가 궁지에 몰리는 심리 묘사도 범인의 서간문으로만 이루어진 원작과의 차이점인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결말로 이르는 빌드업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다만 진상, 그리고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아키히로는 의자에 여벌 휴대폰을 넣어놓고 전화를 걸면 진동이 오게 했을 뿐으로 실제로 안에 들어가 있던건 스즈카의 남편 하라구치였다, 그래서 아키히로가 의자 안에 있다고 굳게 믿은 가즈키가 의자를 난도질해서 하라구치는 죽고 말았다는건데 억지스럽고 뻔했기 때문입니다. 아키히로가 "나를 죽이세요"라는 메시지를 이렇게나 장황하게 보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스마트 폰 속 여자와 여행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괴담물 (?). 현대 문명의 이기로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일종의 다른 세계(사후 세계?)와의 연결고리로 활용하고 있는건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자신이 너무 사랑해서 죽여버린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인공지능을 만들고, 인공지능을 학습시킨다는 설정도 꽤 참신했습니다.

하지만 설정을 빼면 <<어느날 갑자기>> 등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는 단순한 괴담에 불과합니다. 기승전결도 애매하고, 이야기에서 합리적인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는 탓입니다. 남자마저도 사후 세계에 속한 인물이라는 결말도 어정쩡했고요. 보다 독특한 반전 정도는 나와주는게 좋았을거에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원작에 현대적인 설정을 덧붙였을 뿐, 새로움을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D의 살인 사건>>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이지만 주로 흥신소 의뢰로 먹고 사는)인 '나'는 도쿄 뒷골목 거리에서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리에서 친해진 초등학생 세이야와 함께였다. 피해자 노조미는 SM 플레이를 즐기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는데, 밀실에 가까왔고 접근 가능했던 인물들도 제한적이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세이야가 범인일 것이라 추리했다. 목격자 두명의 증언 - 범인이 입은 옷을 각각 주황색과 검은색이라고 다르게 말한 - 이 근거였다. 사건 당시 세이야가 입고있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티셔츠는 주황색과 검은색 양쪽 모두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다소 변태적인 성행위 도중 살해당한 피해자, 밀실에 가까운 현장, 범인의 옷을 서로 다르게 말하는 목격자라는 소재를 따 와서 현대적으로 재 구성한 작품.
'나'의 추리는 좋았습니다. 옆 건물과 좁게 붙어있던 창문으로 초등학생은 충분히 침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었고, 목격자의 증언이 달랐던 이유라며 제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티셔츠도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 세이야를 범인이라고 지목하는건 솔직히 무리였습니다. 동기가 설명되지 못하니까요. '나'가 제시한, 성범죄를 저지르려다가 살인까지 저질렀다는건 너무 억지스러웠습니다.
진상은 더 억지에요. HR 기기 등 가상 현실을 활용하여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다가 사망했다는건데, 가상으로 채찍질 같은 자극을 주는 기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있다손 쳐도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격을 줄 수는 없습니다. 안전 기준이라는게 있을테니까요. '비가시 광선' 때문에 옷이 두 가지 색깔로 보였다는 것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티셔츠만큼이나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고요.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장비를 해체하고 숨겼다는 마사코의 행동도 말이 안됩니다. 그래봤자 SM플레이를 즐긴 흔적을 숨길 수는 없었거든요.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다 '실수로' 죽었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살해당했다'는게 낫다고 여겼을 수는 있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 단순 변사가 살인 사건으로 확대되어 버린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혹시라도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게되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게다가 세이야가 '나'에게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나'에게 아동 성 추행범이라는 누명을 씌운다는 마지막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배신감을 느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뒤의 설득력없는 추리와 결말을 덧붙이지 말고, '나'의 추리로 이야기를 끝내는게 바람직했습니다. 동기만 좀 합리적으로 만들어서요. 이 인물 구도에서 합리적인 동기를 만드는건 불가능해보입니다만.

<<오세이 등장을 읽은 남자>>
스무살 가까이 차이나는 어린 여성과 결혼 후 실직해 기둥서방처럼 얹혀사는 타로는 그 탓에 치매에 걸린 장인어른 고스케를 떠맡아 돌보게 되었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던 타로는 란포의 소설 오세이 등장을 읽은 뒤, 고스케를 사고로 가장하여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소설처럼 고스케를 의류함에 넣고 질식사시킬 속셈이었다. 치매 탓에 유아 퇴행 현상을 일으키던 고스케가 했음직한 행동으로 의심을 살 이유는 없었다.
아내의 파리 출장에 맞춰 범행을 결의한 타로는 사전 조사차 직접 의류함 안에 들어갔다가 갇히고 말았다. 고스케가 별 생각없이 다른 물건들을 함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타로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아내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아내는 직접 구조를 요청하겠으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타로가 나이가 많은 탓에 평소에 스마트폰에 대해 무지했고,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 아내 유코가 원래 자기 것이었던 타로의 폰을 원격잠금하고, 회선도 정지시켜 통화를 못 하게 막아서 죽게 만든다는 트릭이 사용되었거든요.
이렇게 원작에 굉장히 충실한데다가, 나름의 트릭까지 사용된 점 만큼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유코가 타로에게 품었던 살의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코가 진작부터 불륜을 저질러 왔다는 설명은 있는데, 이를 살의로 이어지게 만드는 설명은 좀 부족했어요.
치매 노인 탓에 의류함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늙은 치매 노인이 의류함 뚜껑 위에 무언가 덮어놓았다고 뚜껑을 열지 못한다? 저는 잘 와 닿지 않더라고요. 뭔가 다른 이유 - 자물쇠를 잠갔다던가 - 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치매 노인이 평소에 무언가를 잠그는 (?) 행동을 많이 했다는 식의 설명이 덧붙여졌다면 더욱 좋았을테고요.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해서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원작과도 유사하고, 현대적인 설정과 트릭을 효과적으로 사용한건 분명합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치매 노인 관련된 복수극은 오가와라 히로시의 <<냉혹한 간병인>>이 아직까지는 최고네요.

<<붉은 방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붉은 방에 모여 일탈을 즐기는 일곱 명의 남자들.
에도가와 란포의 붉은 방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다. '죄를 물을 수 없는 살인'을 저질러온 T역의 배우가 공포탄이 아닌 실탄에 맞은 사건이었다. 관객 중에 경찰이 있어서 곧바로 수사가 시작되었고, 관객들은 모두 중요 참고인이 되었는데....


사건도 연극의 일부로 마지막 공연에서 선보인 특별 부록이었다는 이야기.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관 투입과 수사가 지나칠 정도로 빨랐고, 이후의 과정이 모두 작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포일러를 막을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스포일러를 이용하여 관객들에게 더 충격을 주려고 했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흥분했던 관객이 무대로 난입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결말은 영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연극으로 여긴 관객의 반응 등 볼만한 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없는게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깔끔했을거에요. 이 결말 탓에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음울한 짐승의 환희>>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의 육체만 생각하는 변태였지만, 스스로를 철저하게 통제하여 교육자로 잘 살아오고 있었다. 어느날 산책 중 이상형인 여자 유키를 알게되어, 그녀가 운영하는 북유럽풍 잡화점 락카우스의 단골이 되었다.
그리고 두달 쯤 뒤, 내가 란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걸 알게 된 유키가 도움을 청해왔다. 오에 슌데이라는 발신자가 트위터 DM으로 그녀에게 버림받았었는데, 그녀를 다시 발견하여 복수한다는 글과 에도가와 란포의 귀한 초판본, 그리고 그녀를 스토킹하는 글을 연달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짐작가는 사람이 없냐는 질문에 유키는 20년 전 사귀었던 여자 후배 가야코 이야기를 꺼냈다....


'그'라는 3인칭에서 '나'로, 다시 '그' 전환되는 시점이 급작스럽고 미묘한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 의도인지, 번역 오류인지 헛갈리네요.
여튼 변태인 '그'가 카메라를 설치해 유키를 협박하는 한편, 착한 단골로 위장하여 조력자 위치에 올라가지만 유키에게 정체가 드러나버리는 일련의 과정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키의 펜던트가 카메라였고, 그 때문에 '그'의 범행이 발각되는 결말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카메라를 몸에 달고다닐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키가 알고보니 트랜스젠더라서 살해했다는 일종의 반전도 신선하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영화 <<크라잉 게임>>이 발표되었을 때 정도의 시기였다면 모르지만요. 지금은 그렇게 대단한 트릭이라고 보기는 힘들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비인간적인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마니와 가즈키를 유혹하다가 가즈키는 '시짱'이라는 피규어를 사랑한다는걸 알게 되었다. 분노가 폭발한 나는 가즈키를 속여 집에 침입한 뒤 시짱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가즈키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신의 옷 주머니에 부서진 인형 머리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라는 증강현실 게임 엔딩을 접한 나는 다시 가즈키를 골라 게임을 시도했다. 그런 나를 방해한건 남편 가즈키였다. 게임에 빠진 나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가즈키와 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출소 후 70세 노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조용히 살게 된 나는우연찮게 노인 스나무라 다케오에게 교도소 주문에 대해 털어놓았다. 노인은 혼자서 주문에 대해 조사한 뒤,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주문에 등장하는 단어는 모두 1990년에 방영된 TV 프로그램이었고, 주문은 방송 채널 번호를 이용하는 암호문이었다. 암호문은 특정 지역을 의미했고, 노인은 그 곳에 무언가를 숨겼으며 그건 1990년에 일어났던 흉악한 강도사건의 절도품이라고 추리했다.
하지만 방문한 장소는 이미 신축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기괴한 사이버 애정극에서 시작해서 암호 해독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은 짤막한 쇼트쇼트 블랙 코미디로 이어지는 독특한 작품. 수록작 중 유일하게 원작을 접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호 해독은 재미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구전되는 '행운을 불러오는 주문'이 90년대 당시 TV 프로그램의 명칭이었다는 아이디어도 좋고, 이걸 어떻게 글자로 치환하는지?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잘 그려지고 있거든요. 노인은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에 끈기있게 도전하여 풀어낼 수 있었다는 설정도 좋고요. 암호문을 풀어낸 뒤, 암호문이 가리키는 장소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추리역시 합리적이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조사해서 밝혀내는데 아주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가 따로 논다는 겁니다. 특히 화자인 유리나가 겪은 게임 속 사건이 그러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암호 해독 이야기와 별로 관계는 없어요. 유리나가 감옥에 간 이유인 남편 살해 동기에 불과하거든요. 이렇게까지 펼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란포의 원작을 너무 의식한 것 같아요. '비인간적인 사랑'을 이렇게 무리하게 삽입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차라리 두 개로 분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만큼 두 이야기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물이라 생각했던 증권이 버블 지나면서 파산한 회사라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는 결말도 뜬금없었을 뿐더러,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결말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다른 설정은 다 없애고, 나이 많은 노인과 함께 사는 손녀딸이 교도소 자원 봉사를 갔다가 주문을 들었다는 정도로 풀어나가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상한 설정과 앞과 뒤의 곁가지 이야기는 불필요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살해해서 복역 후 출소한 유리나가 오갈데 없어서 나이 많은 노인과 결혼했다는 설정은 의아했습니다. 아무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라도, 남편 살인범과 함께 살고 싶을까요? 젊은 여자가 필요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상황인지 궁금해집니다.

2022/10/22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애덤 쿠하르스키 / 정훈직 : 별점 3.5점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8점 애덤 쿠하르스키 지음, 정훈직 옮김/북라이프

여러가지 도박에 대해 수학적으로 연구된, 여러가지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
리처드 파인만의 책 도입부 일화부터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파인만은 도박은 잃을 수 밖에 없다는걸 계산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프로 갬블러를 만나고 혼란에 빠집니다. 수학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로 갬블러 닉은 파인만에게 “베팅 판에 돈을 거는 게 아니라, 베팅 판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돈을 거는 것." 이라는 비결을 말해 주었답니다. 암요, 호구는 타짜의 먹잇감에 불과하지요.

뒤이어 각종 도박 및 베팅에 대해 수학자들이 연구한 방대한 사례들이 소개되는데, 뭐 하나 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신기했습니다. 맨 먼저 소개되는 무작위여야 할 룰렛에서 거금을 땄던 일화부터 말이죠. 룰렛이 마모 등의 사소한 결함으로 특정 숫자가 다른 숫자들보다 자주 나온다면, 상황이 갬블러에게 유리하게 바뀔 수 있다는게 비결입니다. 하지만 바퀴가 문제가 있어도 어느 숫자에 돈을 걸어야 하는지 알아내는게 문제인데, 물리학에다가 컴퓨터까지 동원해서 최대 20% 정도의 적중률을 확보했던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임의의 배팅일 경우의 확률은 2% 미만이라니 그 차이가 실로 엄청나네요. 휴대폰 등을 이용해서 2004년에도 130만 파운드를 따 간 일당이 있었다고 하고요. 이런 계산을 할 수 있을 사람이라면 저 돈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여튼 대단합니다.

운이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복권에서도 수학자들의 성취는 눈부십니다. 제일 간단한건 로또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구입하는 비용이 상금보다 적을 경우 모든 숫자를 다 사버리는 '브룻 포스 공격'법입니다. 문제는 모든 조합을 구매하는 수고, 그리고 공동 당첨자가 있을 때 상금을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는건 정말 큰일일거에요.
경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학적인 예측으로 거액을 벌어들이는 조직이 있으며, 그 적중률이 높다는 것에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포인트는 잘하는 말은 배당이 낮고 못하는 말은 배당이 높아서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에요. 사람들이 못하는 말의 확률을 후하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말의 예상 성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고요. 이건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고배당으로 한 방을 노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잘하는 말에 돈을 거는 것 만으로 돈을 무조건 딸 수는 없겠죠. 수수료 문제도 있고요. (이 책에 의하면19%) 그래서 여러가지 수학 기법이 적용된 경마 우승 확률 분석 프로그램이 많이 나타났는데, 대체로 프로그램 결과와 현재의 배당률을 조합하여 베팅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축구 경기도 수학 기법이 도입되는건 마찬가지입니다. 1970년대에 몇몇 학자들은 축구 한 경기는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예측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적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수학의 발달로 이런 제약도 무너져버리고 말았는데, 예를 들어 팀이 골을 넣는 실력, 골을 얼마나 못 막는지를 뽑으면 골을 넣을 확률을 다음과 같은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군요.
홈팀의 공격 능력 × 원정팀의 수비 취약점 × 홈그라운드 이점
이를 기반으로 만든 모델을 통한 예측 결과가 베팅 업체 배당률보다 10퍼센트 이상 가능성이 높았다니 놀랍습니다.
이렇게 모든 스포츠 도박은 이제 과학적인 분석 대상이 되었기에, 심지어 투자 회사까지 생겨 투자 개념으로 접근한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주식과 다를바 없다는건데, 이 정도로 고도화된 분석에 따른 결과라면 수긍할 만 합니다. 물론 저는 제 돈을 이런데 투자하지는 않겠지만요.

책은 이런 수학 이론들을 통해 인공 지능 단계까지 나아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포커에서 블러핑까지 구사한다는건 놀랍습니다. 이는 냉정한 논리에 따른, 최적의 포커 전략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경기나 룰렛에 돈을 거는 행동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포커 선수들은 베팅으로 게임의 결과를 바꿀 수 있어서 선수인 셈이니까요.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은 절대로 지지않는 포커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다고 하네요. 온라인으로 포커 게임을 하면 절대로 안되겠습니다.

블랙잭과 카드 카운팅은 많은 책에서 소개되어서 새로운건 없었지만, 카지노가 유리한 이유는 기억에 남습니다. 참가자의 차례가 항상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참가자가 카드 한 장을 쓸데없이 더 요청했다가 목표치를 넘어가면, 딜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이기니까요. 그래도 딜러의 카드 숫자가 작으면 딜러가 카드 몇 장을 더 뽑아야 할 가능성이 높아져서 합계가 21이 넘어갈 위험이 커진다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딜러의 카드가 6이면 딜러 쪽이 21을 넘어버릴 확률이 40퍼센트라는군요! 10의 경우에는 그 확률이 반으로 줄어들고요. 따라서 딜러가 6을 갖고 있으면 자신의 카드 합계가 작더라도 가만히 있어야 결과가 좋을 수 있다는군요. 잘 기억해 두어야겠어요.

곁들여 소개되는 이런저런 정보들도 흥미롭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징크스’처럼요. 이 잡지의 표지에 나온 선수들은 종종 그 후 성적 하락을 겪게 된다는데, 통계학자들은 실제로는 징크스가 아니라고 합니다. 선수들이 잡지 표지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대체로 그 선수들이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시즌을 보냈기 때문인데, 이는 진정한 실력보다 비정상적인 변동에 의한 것으로 이듬해 성적 하락은 단순히 원래 실력으로 돌아간 것 뿐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현곤 선수의 타격왕 획득같은 경우겠죠.
갬블, 베팅에 관련된 정보도 많습니다. 카지노와의 대결에서 정해진 액수만큼 더 벌 수 있다고 기대될 때 걸어야 할 최적의 액수는 얼마일까요? ‘켈리 기준’이라고 알려진 수학 공식을 따르면 됩니다. 기대 수익을 이기면 받게 될 액수로 나눠서 나온 비율을 전체 자금에도 적용해서 그만큼의 액수를 걸어야 한다는군요. 예를 들어 동전 던지기에서 뒷면이 나오면 2달러를 주는 내기가 있다고 한다면, 켈리 기준은 기대되는 당첨금 50센트를 이겼을 때의 액수인 2달러로 나눈 것이다. 계산 결과는 0. 25로, 이는 이용 가능한 자금의 4분의 1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론상으로는 이만큼을 걸면 적절한 수익이 보장되는 동시에 자금 손실의 위험성이 제한된다는 겁니다.

이런 류의 책답게 번역이 그렇게 좋지는 못하고, 아무래도 내용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도판은 아예 없다시피하고요.
그래도 재미와 정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도박을 좋아하고, 이기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읽는다고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2016/12/11

인류사를 가로지른 스마트한 발명들 50 - 알프리트 슈미츠 / 송소민 : 별점 2점

인류사를 가로지른 스마트한 발명들 50 - 4점
알프리트 슈미츠 지음, 송소민 옮김/서해문집

제목 그대로 저자가 선별한, 인류사에서 중요한 50개의 발명이 소개되고 있는 과학사 - 미시사 책입니다. 

이런 류의 특정 발명이나 아이템들을 소개하는 책은 그동안 몇 번 읽어보았는데, 비교해 볼 때 그렇게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몇몇 부분은 나쁘지 않았어요. 

첫 번째는 현재의 시점으로 앞으로의 방향을 언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백열등이 LED로 바뀌고 있고, 자동차가 전기 자동차로 바뀌는 식입니다. 대체 에너지를 중요 발명으로 언급하는 등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내용과 항목도 눈에 뜨이고요.
또 새롭거나 독특한 시각, 내용의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그 중 첫번째는 기계 베틀 항목에서 기계베틀, 즉 직조기가 발명된 후 기계 보조원으로 전락한 직조공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름 전문직이었으나 하루 아침에 쓸모없는 단순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자 1844년 폭동을 일으켰고, 결국 11명이 총살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는데 현재의 AI의 발전 방향을 보면 이런 일이 조만간 여러 산업분야에서 벌어질 것으로 보여서 남일 같지가 않더군요. 제가 봐도 앞으로 10년 내 필요없어질 기술이 한두개가 아니니까요. 대표적인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우선은 운전일테고, 이후 여러 분야로 확산될텐데 저부터도 걱정이네요.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두 번째는 섭씨와 화씨의 어원입니다. 섭씨는 온도 측정 눈금을 고안한 '셀시우스'의 이름을 딴 것이고 화씨는 '파렌하이트'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데 저는 처음 알았네요. '셀시우시'가 중국 발음으로 '섭이사'가 되었고 그래서 '섭씨'가 되었다는데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지만 '불란서', '화란'과 비슷한 방식이죠? 외래어의 유입과 적용은 참으로 재미난게 많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컨베이어 벨트 기술 항목에서 소개된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라는 인물 소개입니다. 이력을 보니 인간 공학의 시조와 같은 사람으로 이른바 '테일러리즘'을 만든 장본인인데 아직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죄송스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제가 UX를 업으로 한지 10년이 훨씬 넘어가는데 공부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반성이 되네요. '예전에는 인간이 첫 번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는 시스템이 첫 번째 위치에 있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을 보면 정말로 이 바닥의 선구자적인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전공 분야 공부도 빼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좋았던 부분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전체적인 단점을 상쇄하기에는 아쉬움이 더욱 많아요. 가장 큰 단점은 앞서 말씀드렸듯 뻔하다는 것에 더해 깊이 역시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류의 책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몇 페이지 안에서 해당 발명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량에 비해 잘 요약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해당 주제에 대한 시작점 정도에 불과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소개되는 주제별로 레벨이 너무 다르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입니다. 어떤 것은 특정 발명품 한 가지만을 다루는데 - '안경', '나침반', '지퍼', '백열등', '자동차' 등등 - 어떤 것은 그 분야 전체를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 '도구', '무기', '약', '악기' 등 - 이는 앞서 말씀드린 깊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발명품으로 주제를 좁히는게 그나마 적은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도구'는 그 자체가 발명이기에 언급되는게 이상할 뿐더러 무기, 약, 악기 등과 마찬가지로 몇 페이지로 요약될 이야기는 아닌 탓입니다. 무기 관련 책은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만 시대별, 분야별로 10권 가까이 될 정도니까요. 마찬가지로 '컴퓨터' 항목 안에 반도체와 인터넷 이야기까지 우겨 넣은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인터넷은 분리했어야죠.

마지막으로 단점으로 꼽기는 좀 어렵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인류사를 가로질렀다 하기 어려운 발명도 몇 개 속해있다는건 불만스럽습니다. 진공청소기가 우리 인류사에 그렇게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을까요? 또 지퍼가 없었다면 세상이 굉장히 살기 불편해졌을까요? 이 발명으로 우리들 삶이 조금은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인류사'라는 표제 하에 소개되기에는 너무 미미한 발명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사한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때 이 책만 특별히 좋아보이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모로 추천드리기는 좀 어렵네요.

마지막으로 이 책에 소개된 50개의 항목을 레벨을 맞추어 상세하게 분류하고 재정의하여 저만의 인류사 대표 발명을 꼽아봅니다.

불, 바퀴, 말과 글, 수학과 수체계, 배와 보트, 유리, 돈, 렌즈, 나침반, 인쇄술, 천문학, 달력, 전기, 증기기관, 항공, 철도, 화약, 전신과 전화, 백열등, 자동차, 사진, 냉장기술, 합성수지, 컨베이어벨트 기술, 라디오와 텔레비전, 페니실린, 핵에너지, 컴퓨터와 반도체, 인터넷, 피임, 인공지능, 로켓.

빠진 것은 도구, 화장실, 도자기, 기계 베틀, 온도계, 통조림, 자전거, 진공청소기, 음반과 CD, 취사 조리기, 영화와 영화관, X-레이, 지퍼, 악기, 세탁기, 레이저, 대체에너지, 위성 네비게이션입니다. 무기는 화약으로, 약은 페니실린으로, 컴퓨터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분리하였으며 로봇은 인공지능으로 바꾸었고요. 화장실과 도자기, 온도계, 취사조리기는 추가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2021/07/10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애덤 쿠하르스키 / 정훈직 : 별점 2.5점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 - 6점 애덤 쿠하르스키 지음, 정훈직 옮김/북라이프

수학자는 과연 논리적인 게임을 잘 할까?는 제 오랜 궁금증 중 하나였었습니다. 이 책은 여기에 대한 어느 정도 합리적인 답을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수학을 이용해서 룰렛, 복권, 경마, 블랙잭, 포커, 드래프트, 체스 등에서 이겼던, 혹은 이기려고 노력했던 여러가지 노력과 사례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자들이 이런 게임들에 도전해서 돈을 벌었던 실제 사례들이 특히 재미있더군요. 대표적인 예가 복권입니다. 복권 당첨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수학자들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더라고요. "스크래치 복권"의 공정한 지역 분배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복권 당첨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여섯 개가 아니라 그보다 적은 숫자가 당첨된 사람에게 당첨금을 분배하는 '롤 다운' 제도의 헛점을 이용한 전략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수학자가 계산해보니, 롤 다운 상황이 일어났을 때는 판매되는 2달러 복권 당 최소 2달러 30센트의 상금을 기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비가 이끄는 MIT 그룹은 롤 다운 상황을 이용해서 무려 70만 달러에 당첨되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아일랜드 회계사 스테판 클린세비치의 전략은 더 단순합니다. 모든 당첨 가능한 숫자를 조합해서 복권을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이 100만 파운드 미만이라는 점을 알아낸 뒤, 당첨금이 100만 파운드를 훨씬 넘겼을 때 베팅을 시도한다는 전략입니다. 복권 구입에 품이 많이 든다는 점과 다른 사람이 당첨되면 당첨금을 나눠 가져야 하므로 이익이 떨어진다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어서 확실하다고만은 할 수 없겠습니다만....

블랙잭 전략은 "MIT 수학천재들의 카지노 무너뜨리기" 등에 나왔던 카드 카운팅 외에도, 다양한 전략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카드 카운팅이 핵심이기는 하지만, 카드 섞는 과정에서 패턴을 추출하는 방식은 꽤 그럴듯해 보이네요.

경마에서 성공하기 위한 전략은 출발 위치 등 여러가지 측정치를 통해 특정 말의 우승할 확률을 먼저 계산하는. 이른바 예측 모델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갬블러들은 모델을 통해 얻어낸 데이터와 실제 배당률을 비교하여 베팅을 하고요. 축구 경기도 이러한 예측 모델이 존재합니다. 홈팀이 넣을 골의 기대치는 "홈팀의 공격 능력 * '원정팀의 수비 취약점 * 홈 그라운드 이점' 이다" 처럼요. 이 모델은 기초적인 상태에서도 베팅 업체를 능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니, 스포츠 토토를 한다면 관심을 한 번 가져볼만 하겠습니다. 선수 영입 시에는 득점할 골의 수 보다는, 만들어 낼 슈팅의 수를 예측해 봐야 한다는 말도 기억에 남고요.

스포츠 베팅은 제가 야구를 좋아하기에 관심있게 읽었는데, 잘 알려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징크스'에 대한 설명처럼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 표지 모델이 되었던 선수들은 종종 그 뒤 성적 하락을 겪게 된다는 징크스인데, 통계학자들에 따르면 징크스가 아니라고 합니다. 선수들이 잡지 표지에 나올 수 있었던 건,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시즌을 보냈기 때문이며, 이는 그들의 진짜 능력이라기 보다는 불규칙한 변동으로 보는게 타당하기에, 이후의 성적 하락은 단순히 평균 회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몬스터 시즌'을 보낸 뒤 성적이 급격하게 하락한 몇몇 선수들이 떠오르네요.

실제 베팅을 위해 유용한 정보도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켈리 기준'입니다. 장기적으로 기대 수익을 이기면 받을 액수로 나눠서 나온 비율을 전체 자금에도 적용하여 그 만큼의 액수를 거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동전 던지기에서 1달러를 건 뒤, 뒷면이 나오면 2달러를 주는 도박이 있다면 절반의 경우 1달러를 잃고, 절반의 경우 2달러를 따니 기대 수입은 50센트 입니다. 얼마를 거는게 적절할까요? 켈리 기준 적용 시,기대 수입 50센트를 이겼을 때의 액수 2달러로 나눈 0.25, 즉 이용 가능한 자금의 1/4을 걸면 된다는군요. 참고로 켈리 기준은 블랙잭 등에는 적절하지만, 경마 등에서는 부적절합니다. 일어난 확률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계산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마 예측 모델의 확률은 추정치에 불과하니, 이대로 계산할 경우 위험도가 증가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경마에 대한 이야기 뒤로는 주로 예측 모델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예측 모델이 잘 만들어져 있을 경우, 나름대로 안정적인 투자처로 이용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베팅 회사가 존재한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이 쪽 세계의 발전이 놀라운 것 같습니다. 불확실성이라는게 존재하는 세계인건 맞지만, 사람들은 놀라운 사건의 빈도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 책의 말 처럼 너무 마음에 둘 필요는 없어요. 연 15~25%의 수익률을 올린다면 충분히 투자를 고려해 봄 직 하지요. 예측 모델도 유명한 IBM의 딥 블루나 왓슨처럼 점차 '인공 지능'에 가까운 연구들이 소개되는 식으로 최근(책이 쓰여진 기준으로) 연구 결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상적이었던건 포커를 이기는 모델이 굉장히 만들기 어렵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확률이 중요한 게임이니 수학자들에게 유리할 것 같은데 의외였거든요. 그런데 읽다보니 과연 그럴만 하더군요. "블러핑"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폰 노이만에 의해, 블러핑은 반드시 필요하다는게 수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플레이어가 최악의 카드를 가졌다면, 상대가 게임을 접지 않는 한 승리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블러핑 전략을 펼쳐야 하니까요. 그 외에도 '어떻게 하면 돈을 가장 많이 딸 수 있을까?"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잃을 수 있을까?"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던가, 후회의 감정이 없어지면 위험 요인이 관련된 게임 숙달이 힘들다는 등 다양한 이론과 전략이 가득해서, 포커 자동 프로그램 제작은 쉽지 않았다네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프로 포커 플레이어도 원숭이에게 질 수 있는게 포커라는 뜻입니다!

또 각종 도박에 승리하기 위한 수학적 노력이 단지 돈벌이가 아니라 새로운 이론과 기술의 시작점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예를 들어 룰렛은 일반적인 패턴에서 무작위로 전환되는데, 이를 카오스적 전환의 실제 사례로 보고 여기서 카오스 이론이 파생되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예측 모델이 결국 인공 지능으로 발전한 것도 마찬가지일테고요.

하지만 기대했던건 수학자의 이론이 바탕이 된 '필승 전략'은 많이 없어서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이기기 위한 여러가지 수학적 방법은 결국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카드 카운팅부터가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지요. 그나마도 카지노에서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있다고 하니, 결국 카지노에 가는 것 보다는 탄탄한 예측 모델을 가지고 있는 베팅 그룹에 투자하는게 훨씬 나은 선택으로 보이네요. 또 수록된 내용들도 쉽게 쓰여져 있지는 않습니다. 노력은 한 것 같지만, 애초에 수학 초보자가 쉽게 이해하기는 워낙에 어려운 이론들이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기대와는 사뭇 달랐고,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장벽이 높기에 감점합니다. 수학적으로 저보다는 기초가 탄탄하신 분들이 읽으신다면 더 좋은 성과를 거두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는 살짝 스쳐지나갔는데, "인기"에 대한 연구 결과가 기억에 남습니다. 음악을 다운로드 받는 사람들을 그룹으로 나눈 실험을 통해, "대중적 인기와 유명세는 퍼트리는 사람에 더 관련이 많다"는 결과가 나왔거든요. 여기서는 운과 실력, 갬블링과 투자는 명확하게 분리하기 어렵다는 근거로 이 결과를 활용하는데, 이 주제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를 읽고 싶어지네요.

2021/04/10

대량살상수학무기 - 캐시 오닐 / 김정혜 : 별점 3점

대량살상수학무기 - 6점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흐름출판

수학박사이자 펀드회사 퀀트, 데이터 과학자 등으로 일하던 저자가 빅데이터 경제가 불평등을 확산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내용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쓴 수학, 과학, 인문학 교양서입니다. 빅데이터를 기반한 수학 모형 프로그램이 왜 대량살상수학무기 (이하 WMD)로 불릴만큼 위험한지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해 줍니다.

위험한 이유는, 인간의 편견과 오해, 편향성을 코드화했으며 유해한 결론이 나오더라도 개인이 반박하거나 수정하기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대체로 직접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직접적 관계가 없는 대체 혹은 대리 데이터로 억지로 연관성을 도출하고요. 한 마디로, 가난한 동네에 살고, 신용이 낮고,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했다고 모두 범죄자가 되는건 아닌데 이런 식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건 뭔가 있어보이지만 실상 '인종차별'과 다르지 않은 논리라는 겁니다. 특정 피부색은 행실이 나쁘고, 그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거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굉장히 공감이 많이 됩니다.

또 이러한 WMD가 널리 사용됨으로 인해서,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차별받고,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신용을 측정하는 '신용평가점수'입니다. 신용평가점수는 대부분의 경우 업무 능력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용평가점수가 낮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죠. 말 그대로 하향식 악순환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아요. 얼마전 대통령께서 신용도 낮은 사람들에게 대출을 더 많이 해줘야 하지 않느냐? 라는 말을 해서 엄청나게 욕을 먹었었습니다. 물론 원칙에 따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렇게 신용도로 대출을 하게 되면, 당연히 부자나 안정적인 직장인에게 더 유리할 수 밖에 없어요. 정작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은 고금리 사금융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어렵겠지만, 뭔가 대책은 필요한건 분명해요.

인간의 편견이 양형에 미치는 영향력을 줄여 범죄자들을 더욱 공정하게 대하자는 재범위험성모형 recidivism models 의 문제점도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양형의 일관성을 높이고, 판사의 기분이나 편견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력을 줄이며, 평균 수감 기간도 줄여서 예산을 절약해 주는 획기적인 모델이라는데, 아쉽게도 이 역시 전형적인 WMD에 불과합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대리 데이터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사람은 일정한 직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족과 친구가 많은 환경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죠. 그러면 이들은 재범 위험성 평가에서 받은 높은 점수가 더해져, 더욱 무거운 형을 선고받고 범죄자들에게 둘러싸인 감옥에서 사회와 격리된 채 수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수감 생활은 그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즉 재범 위험성을 확실히 증가시키고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더라도 예전에 살던 가난한 동네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전과자라는 별까지 단 상태라 일자리를 구하기가 훨씬 어려워집니다. 결국 그는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걸 재범위험성모형이 정확한 예측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냥 하향식 악순환의 또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단지 '현재의 범죄'만 놓고 판단을 해야지, 사건과 관계없는 주변 데이터들을 판단에 집어넣는건 잘못된 알고리즘이죠.

그 외, 취업 시장, 대학 입시 시장 등 다양한 곳에서 WMD가 사용되는 사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일정 관리 소프트웨어의 가혹한 일정 관리는 끔찍할 정도에요. 게다가 거의 신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셈인데, 사실상 일반 개인이 반항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게 무섭네요. 거대하고 불투명하며, 무책임하다는 측면에서 최근 화두가 되는 마이크로 타기팅 광고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WMD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한 무리수도 몇 가지 있습니다. 경찰이 사용하는 범죄 예측 모형 프레드폴이 대표적입니다. 경범죄를 중시하도록 설계되어, 빈민가 중심의 순찰을 통해 검거율이 대폭 상승했지만 저자는 진짜 중범죄는 잡지 못한다고 역설하지요. 하지만 순찰 경관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경제사범을 체포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순찰이라는 행위가 거리에서의 범죄 단속이니까요. 저는 순찰 경관이 필요한 범죄 카테고리 중심으로 설계된 지금 모델은 충분히 신뢰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력서 서류 심사에서, 깔끔한 것과 지저분한 것의 차이로 평가하는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이력서를 내는데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을 선발하는게 마땅하니까요.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배려심,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은 회사에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높고요. 아, 이런 것도 대리 데이터에 따른 개인적 편견일까요?
비만인에게 건강 보험료를 많이 걷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비만이 병의 원인임이 분명하면, 그다지 잘못된 정책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 비슷한 사례가 계속 이어지니 좀 식상한 측면도 있고, 목차 구성에서 'WMD가 무엇인지'를 좀 더 명확하 한 뒤, 뒤의 사례들을 소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각 사례 소개 때 마다 '이건 이러해서 WMD이다' 에 대한 설명이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계속 등장하는데, 목차 구성을 통해 이런 부분은 최소화할 수 있었을걸로 보이거든요.

아울러 이런 프로그램을 통한 개인 평가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근본 고민이 부족하다는 것도 좀 아쉬웠습니다. 지난 수백년간 모든 모델, 즉 대출이나 재판, 고용, 입시 등 거의 모든 경우에서 '평가'라는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 평가는 그동안은 해당 상황을 통제하는 '사람'에 의해 진행되었고요. 과연 사람이 이런 프로그램보다 더 나을까? 라는 측면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책에서는 대체, 대리 데이터가 문제가 있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사실 경험적으로 어느정도 성립하는 대체, 대리 데이터가 존재하는 것도 현실이고요. 예를 들면 예전 "신입사원"이라는 만화에서 보았던, '학력필터' 이론이 그러합니다. 부모님 노력이 아니라 순수하게 학생들끼리 '학력' 으로만 평가해서 순위가 높은 대학에 들어간거라면, 저라도 명문대생을 우선 뽑을 것 같네요.

그래도 오랫만에 굉장히 유익하고 좋은 독서를 한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인공지능의 문제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가질 수 있는 문제에 대해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18/03/31

고양이 발 살인사건 - 코니 윌리스 / 신해경 : 별점 3점

고양이 발 살인사건 - 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SF 쪽에서는 명성이 높은 코니 윌리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입니다.
코니 윌리스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수록작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데다가, 밝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통 SF라기 보다는 약간의 SF 설정이 가미된 작품들로 일상 - 홈 드라마이자 사회 비판물인 "말하라, 유령", 본격 추리물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로맨틱 코미디 첩보물 "절찬 상영중",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SF "소식지", 로드무비 "동방박사들의 여정", 일상 드라마인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로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친숙한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클리셰, 설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장르문학, 컨텐츠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점이에요. 그만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아래 상세 리뷰에서 처럼 별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저도 크리스마스 관련된 이야기를 몇 번 써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수준 차이가 엄청나네요. 반성하게 됩니다.

"말하라, 유령" 

이혼남으로 책이 유일한 취미인 서점 직원 그레이의 유일한 낙은 크리스마스에 딸 젬마와 보낼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점의 사인회와 전처 때문에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그레이는 서점 직원으로 임시 채용된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는데...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꾸만 엇나가는 그레이와 사람을 개과천선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판타지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며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 바쁜 백화점 서점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압권이에요. 이래서야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딸 젬마가 좋아하는 소공녀, 그 외에도 디킨스와 월터 스콧의 작품이 많이 인용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완벽한 크리스마스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건 의외였습니다. 마지막에 유령들이 뭔가의 슈퍼 파워로 딸 젬마를 그레이에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끝나버리거든요. 돈이 최고고(작 중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것), 유령들은 힘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결말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사회 비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게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씁쓸하네요. 디즈니 작품과 비슷한 가족 판타지로 위장된 탓에 이런 갭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딸아이 아빠로서 젬마는 최소한 행복해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양이 발 살인사건" 

세계 최고의 탐정 투페는 크리스마스에 친구 브리들링스 대령과 함께 마웨이트 장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건을 의뢰한 샬롯 발라디 부인이 영장류를 연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소로 사람의 말이 가능한 고릴라 달타냥, 추리소설도 좋아하는 똑똑한 침팬치 하이디가 하인으로 일하는 등 연구 실적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동생 제임스는 영장류를 증오하여 자신이 유산 상속을 받으면 모두 쫓아낸다고 공언한 상태. 다행히 그들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알리스테어 경은 치매로 난폭한 바보가 되었지만, 앞으로 수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투페 컴비는 다른 손님들, 기자인 루트거스와 폭스양, 지역 경찰 유스티스 경사, 알리스테어 경의 간호사 파치트리 양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의뢰하는 수수께끼가 단지 영장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 투페는 당장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 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든 정황이 고릴라 달타냥의 범행임을 암시했는데....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컴비를 빼닮은 탐정 컴비가 등장하고, 전형적인 영국 장원을 무대로 하는 클로즈드 써클 미스테리입니다.

일단, 고전 본격물에 대한 높은 이해가 돋보여요. 탐정 컴비의 묘사는 물론 장원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모두가 동기가 있고 수상쩍은 등 여사님 작품에서 보았었던 그런 느낌으로 묘사되거든요.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 캐릭터를 쏙 빼 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전형적입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 그대로에요. 무엇보다도 추리에 있어서 영장류의 지능이 높다는 설정으로 독특함과 재미를 안겨다 주는 부분이 탁월했습니다. 이 설정이 단지 재미 요소가 아니라 진짜 반전의 핵심 요소인 덕분입니다. 영장류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알리스테어 경을 살해하고 제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SF가 가미된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물로 추리와 재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시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실 거에요. 별점은 5점!입니다.

"절찬 상영중"

"크리스마스 소동" 이라는 고전 영화를 보기 위해 애쓰는 사라와 그녀가 그 영화룰 왜 못 보는지를 설명해주는 전 애인 잭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사라가 방문한 영화관 시네드롬은 온갖 영화 관련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는 일종의 테마 파크인데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손님들이 밀어닥친 탓에 난리도 아닌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상황 묘사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영화를 보지 못한 이유도 아주 그럴듯해요. 영화를 만든다고 사기를 친 뒤 시네드롬에 돈을 좀 쥐어줘서 아무도 못보는 환상의 상영관을 확보한 후 제작비를 쓴 것처럼 꾸미는 제작사의 음모이고, 이는 백 개도 넘는 상영관을 모두 채우는 건 무리였던 시네드롬에게도 필요했던 사기라는 진상인데 생각도 못했네요.

이러한 내용을 소비자 사기국에서 근무하는 잭의 화려한, 영화를 방불케하는 첩보 작전처럼 풀어나가는 것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라에게 사 준 티셔츠가 카메라 부착형이라는 아이디어 등 디테일도 볼거리이며, "백만 달러의 사랑", "아이 러브 트러블", "위기의 암호명" 등 비슷한 영화들의 장면 장면과 엮이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거든요.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 첩보극이라는 장르 공식에 굉장히 충실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지요. 그 외 다수 영화들의 인용, 묘사도 흥미로운데, "디워"가 원작에도 언급되는건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망한 영화도 매니아가 따라붙고, 온갖 매체에서 흥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설정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잭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소식지"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착해졌다. 이를 처음 눈치챈 건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가 흠모하는 이혼남 게리였다. 둘은 곧 착해진 사람들이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다른 악영향없이 착해지기만 한 탓에 이를 밝히고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착해진 사람들의 몸 관절이 이상해지는 부작용을 알아낸 주인공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수를 박멸하고자 직장과 집의 온도를 올렸다(모자를 벗게). 다행히 기온이 올라 이 소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변주된 "신체 강탈자의 습격 (바디 스내쳐)" 입니다. 기생수의 부작용이 착해지는 거라니 정말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이변을 눈치채지만 착해지는 게 과연 무슨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도 웃음을 자아내고요.

하지만 디테일이 좀 지나쳤습니다. 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과유불급이랄까요? 제목이기도 한 가족들 간의 '소식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의 이변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품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지역별 편차가 있고 이유는 기온이다!를 드러내려면 TV나 신문 등의 뉴스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등장인물들도 너무 많은데, 이 역시 주인공과 게리가 잘 되게 만드는 식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마무리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 

눈보라가 휘몰아쳐 도로가 통제되는 와중에서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예수를 찾아나선 목사 멜과 친구 BT,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여성 캐시 3인의 여정이 그려진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동방박사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온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백인 목사, 흑인 과학자, 전직 영어 교사인 여성 3인이라는 파티 구성도 나름 완벽해서 눈길을 끌고요.

그러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실제로 동방박사가 겪었음직한 고뇌(이게 계시가 맞는지? 내가 미친건 아닌지? 와 같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드라마적 재미는 별로 없어요. 독백과 종교적 고뇌로 가득찬 작품이 애초에 재미있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 계시와 유사한 카니발 조명과 예수일지도 모르는 카니발 운전사 등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계시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일종의 추리 과정이라도 동반되었더라면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세 명이 카니발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는지, 그들을 방해하는 헤롯왕의 수하들은 누구인지 등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마무리 되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모험이 시작되자마자 이야기가 끝나는, "반지의 제왕" 1부와 같은 수준의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냐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책 뒤에 작가가 꼽은 크리스마스를 다룬 최고의 영화, 책, TV 시리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 중 최고는 "러브 액츄얼리"를 꼽고 있더군요. 이 작품은 작가가 나름대로 변주한 "러브 액츄얼리" 입니다. 족 모임을 위해 오리를 구우려는 루크,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구엘의 양육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파일러, 남편과 사별하고 멕시코로 여행온 베브, 아내 마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워런,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식을 주장하는 친구 스테이시의 들러리로 여행 온 폴라,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대폭설을 연구하는 네이선 박사와 조수 진성 등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다양한 등장인물이 한 꼭지 씩 이야기를 선보이다가 마지막에 연결되는 결말인데 전개 방식이 똑같거든요. 대부분 해피엔딩이며 감동적인 이야기와 적절한 코미디가 섞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차이점이라면 이야기들 속 대 소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 폭설" 이라는 SF적인 설정이라는 것 뿐입니다.

모두 재미있고 따뜻하며,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도저히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다가 파멸한 불륜남 워런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아주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도 대폭설의 원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다운 발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반짝반짝한 작은 소품들이 모인 선물 상자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로 꼭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2020/03/06

식스웨이크 - 무르 래퍼티 / 신해경 : 별점 2.5점

식스웨이크 - 6점
무르 래퍼티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기 2493년, 4백 년 항해 예정의 항성 간 이민 우주선 승무원인 마리아 아레나는 마른 피로 얼룩진 클론 재생 탱크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런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 마리아는 새로 깨어난 클론이 자기뿐만 아니라 여섯 명 승무원 전원임을 깨닫게 되고, 클론 재생실에는 칼에 찔려 죽은 승무원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외로운 밀실 우주선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게다가 모든 승무원이 죽었다면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책 소갯글에 혹해서 읽게 된 SF 미스터리 장편입니다. 우주선에 탑승한 여섯 명의 승무원이 서로 죽고 죽여서 전멸한 뒤, 사건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클론으로 재생된다는 설정이 아주 매력적이라 읽게 되었습니다. 누가 살인자인지, 동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이 이보다 더 잘 맞아 떨어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기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사건에 대한 추리적인 내용보다는, SF 소설로서의 비중이 훨씬 높거든요. 물론 나쁜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SF 적인 부분은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클론에 대한 세세한 설정이 아주 돋보입니다. 이 세계의 클론은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쳐 철저한 법률에 근거하여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 탄탄한 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클론의 존재에 대해 거대한 다툼과 많은 죽음이 발생한 후 이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됩니다. 이를 통해 복수의 클론은 금지되며, 복수의 클론이 적발될 경우 가장 나중에 복제된 클론 외에는 모두 폐기한다, 마인드맵을 저장한 뒤 클론에 그대로 이식하여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마인드맵을 수정하는 마인드해킹 행위는 엄금한다, 그리고 클론은 생식능력을 제거하며 재산은 그 자신에게 상속된다는 등의 세세한 법안이 제정됩니다.
이는 단지 설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클론에 대한 설정은 승무원들의 과거와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주선 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클론을 증오하는 엔지니어 폴이 모두를 살해한게 진상이니까요. 

또 이 사실이 밝혀지는 승무원들의 과거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특히 클론에게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던 오르만 신부가 반대파에게 납치된 후 클론으로 재생되었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 속 등장인물의 과거 에피소드로만 놓기 아깝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과연 클론에게 영혼이 있을까? 부터가 흥미로울 뿐 아니라, 해커들이 마인드맵을 해킹하여 대상자의 성격을 비롯하여 모든걸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건, 영혼이 숫자로 치환되어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어서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클론에게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복수심을 불태우는 엔지니어 폴이 복수를 완성한 뒤, 정작 그 자신이 클론으로 복제되어 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아주 괜찮았어요.

이외에도 현재 시점에서 아직 선장은 죽지 않고 혼수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클론이 이전 선장을 폐기해야만 하는 딜레마, AI 이안은알고보니 원래 인간이었는데 마리야가 마인드맵을 해킹하여 만들어낸 인공지능으로 약간의 조작을 통해 다시 인간으로 클론 복제할 수 있었다라는 반전 등 재미난 디테일이 많습니다. 클론 복제를 음식을 만들어내는 음식 인쇄기를 통해 진행한다는 결말도 복선을 통해 잘 설명되고 있고요.
주인공들이 탄 우주선 도르미레 호의 설정도 그럴듯합니다. 도르미래호는 아르테미스라는 머나먼 별로 떠난 일종의 이민선입니다. 여섯명의 승무원들은 수천명의 냉동 클론을 무사히 아르테미스까지 운송하는 대신, 그들이 지은 중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승선한 범죄자들이죠. 이렇게 범죄자들이 사면을 조건으로 거대 계획에 종사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나, 이를 SF로 변주한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추리적으로는 그다지 정교하지 못합니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의 실력자 샐리 미뇽이 거대 이민선을 비롯하여 승무원들, 심지어 인공 두뇌까지 관계자들을 투입한 이유부터가 제대로 설명되고 있지 않거든요 '복수'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는 하는데, 샐리 미뇽은 워낙에 실력자라서 구태여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종의 악취미로 단지 승무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붕괴하기를 바랬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 사이에서 사건이 일어나는데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 그리 효율적이라고 볼 수는 없고요.
아울러 협박과 고문 탓이지만 마리아가 볼프강, 히로를 해킹하여 엉망으로 만든건 사실입니다. 이는 충분히 살해 동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볼프강과 히로가 마리아에게 살의를 품는건 말이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원수로 알고 있는 폴이 마리아 외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인다는 진상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클론이라서 다 죽일거였다면 20년 동안 참을 이유도 없고요. 게다가 폴은 볼프강에게 대적할 수 없는 체형과 체력의 소유자라는게 이미 설명되기도 했거든요.
그 외에도 어차피 죽일거라면 마리아만 왜 독미나리로 중독시켰는지, 히로는 대체 왜 자살했는지도 그렇게 납득이 가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중 인격이 된 히로가 폭주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결론적으로 처음에 여섯 명 모두가 죽게된건 단지 우연이었을 뿐이며, 그들이 클론으로 되살아난 것 역시 즉사하지 않은 마리아가 재생 버튼을 눌렀을 뿐이라는 작위적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마리아가 펼치는 추리쇼 형태 느낌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도 딱히 단서가 탄탄하게 뒷받침된게 아니라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복선을 좀 더 치밀하게 짜 두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폴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공정하게 단서를 얻는것 자체가 힘들었던 것도 나쁜 추리물의 전형이고요. 이야기에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 사람이 알고보니 범인! 이라니, 이건 좀 너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도입부와 여러가지 설정 덕분에 몰입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약간은 용두사미 느낌이라 아쉬웠습니다. SF로는 완벽하나 추리적으로는 더 탄탄한 구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래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이런 류의 장르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9/10/25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구라치 준 / 김윤수 : 별점 2점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4점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작가정신

잘 모르는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흥미로와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기발함, 기묘함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큽니다. 개개의 이야기들 모두 아이디어에 비하면 긴 편이라는 것도 단점이고요. 호시 신이치였다면 10페이지 안 쪽으로 끝냈을, 그런 내용들에 불과하거든요. "사내 연애"와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특히 쇼트쇼트 스타일로 쓰여지는게 어울렸을겁니다. 기발한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는 점에서요.

물론 쓰고 싶은 글을 느긋하게 썼구나 싶은 작품도 있습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애묘인이구나! 싶은 묘사가 가득하여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어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기발함이 추리적으로 잘 포장된 괜찮은 이야기였고요.

하지만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고 아이디어도 괜찮았지만 약간은 어정쩡한 느낌이 컸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 쪽인지, 아토다 다카시 쪽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면 좋겠네요. 호시 신이치 쪽이라면 더 짧게, 아토다 다카시 쪽이라면 아이디어의 보강과 약간의 엽기성(?)이 추가되어야 할 겁니다.

각 단편별 상세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BC

불특정한 희생자를 살해하는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은 우연히 2 건의 살인 사건이 ABC의 규칙을 따른다는걸 알아내고 C에 해당하는 희생자를 찾아내어 살해하려 했다. 이유는 유산을 노리고 동생을 죽일 계획인데 동생이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그 연속 살인ABC 살인 사건의 결합은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에서도 써 먹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마 다른 작품에도 쓰여진 경우가 있을 거에요. 그만큼 유명한 트릭이자 설정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아이디어는 범인이 C 사건을 일으킨 뒤, 곧바로 다수의 D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반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연쇄 살인에 편승하여 저마다 모방 범죄를 일으킨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급작스럽게 자신도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걸 깨달으며 마무리됩니다.

반전과 결말 모두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흔해 빠진 서두를 조금 더 줄여서 쇼트쇼트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내 편애"

인사 관리를 컴퓨터가 전담하게 된 이후, AI 시스템 '마더컴'로부터 편애를 받게 된 주인공이 회사 내에서 이런 저런 황당한 일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공 지능이 인사 관리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지만 '모더레이트 플리커 메소드식 (MFM)' 이라고 불리우는 설정이 아주 기발합니다. 인사 관리를 지나치게 합리적이지 않도록 하는, 인간적인 모호함을 넣은 서브 프로그램으로 덕분에 좀 느슨하고 인간적으로 관리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인 '공정성'이 훼손되는거라 일부러 이런 오류를 집어넣을 이유는 없지만, 상황 자체는 꽤 그럴듯 했습니다.

이 모호함이 주인공 데라시마에게는 '편애'로 작동하여 일으키는 소동들도 재미있습니다. 전무가 직접 커피를 타다 주고, 상사가 허물을 덮어주는 정도에서 마음에 둔 여사원과 억지로 이어주는 민폐 수준의 도움까지 진화하게 되거든요. 심지어 마음을 고백한 것도 아닌데 주인공의 눈빛 등을 분석하여 이런 억지를 이끌어내니 어떻게 보면 무섭지요.

그러나 결국 지긋지긋해진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는데 그 회사 마더컴은 주인공을 그냥 싫어하더라는 결말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상황을 끌어낼 부분이 많았는데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끝낸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살해된 피해자 입에 파가 물려있고, 머리 맡에는 케이크가 놓여있는 기묘한 상황을 그린 단편입니다.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워요. 나카모토 경부의 합리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은 아주 쉽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범행 현장에 대한 아마치 형사의 추리가 전부인데, 진상이 밝혀지지 않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혼잣말과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라 공허합니다. 아마치 형사 본인 스스로도 마음껏 공상한, 상식 밖의 엉뚱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물론 실제 진상이 드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스토킹하면서 피해자가 파를 싫어하고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후,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싫어하는 파가 입을 막고 있어서 먹지 못해 원통해서 마음 편히 성불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불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는 추리는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피해자에게 집착해서 그녀가 죽어서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면 안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건데, 누가봐도 정신병자의 행동입니다. 정신병자의 정신나간 행동을 합리적으로 추리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때문에 추리 소설로의 가치는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

할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에 내려간 주인공 유리에는 할머니의 고양이 미코가 며칠동안 밤에 어딘가를 바라보는걸 알아챈다. 미코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양이 미코에 대한 묘사가 꽉 채워져 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시종일관 느껴져 좋았습니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만지고, 같이 노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고양이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냄새' 때문이며, 이는 이웃집 할머니를 아들이 암매장하기 위해 땅을 판 탓이라는 결말은 좀 억지스럽습니다. 고양이의 후각이 예민한건 맞지만, 이웃집에서 땅을 판다고 밤에 자지 않고 그쪽을 쳐다본다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땅을 판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한 냄새가 날지도 잘 모르겠고요. 실제로 공사 현장 옆에 산다고 해서 고양이가 그곳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양이 묘사는 좋지만 그 외에는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습니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패전 직전인 1944년 겨울, 나가노 현에 위치한 제국 육군 특수 과학 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묘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흉기는 하나도 없는 밀실인 실험실에서 피해자가 후두부를 날카로운 흉기로 얻어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언뜻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사망한 걸로 보이는데 과연 진상은 무엇일까?

밀실 살인물이자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마사키 박사가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력 '공간 전위', 즉 일종의 텔레포트 현상을 인력으로 발생시켜 미국에 폭탄을 투하한다는 연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무 첩보 기관에서 파견 나온 도네 소좌의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공간 전위의 첫번째는 공간 역전 현상으로 공간이 뒤집혀 피해자는 거꾸로 떨어졌고, 우연찮게 지금은 움푹 들어간 천장 모서리에 후두부가 찍히게 되었다는 추리입니다. 공간 역전이 일어나면 움푹 들어간 곳은 반대로 튀어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이런 괴기한 추리는 진상도 뭐도 아니며, 뒤이어 주인공인 이즈카 가쓰오 이등병의 합리적인 추리가 등장합니다. 범인은 도네 소좌이며, 이유는 피해자가 스파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흉기는 벽돌 같은 걸로 범행 후 멀리 던져버렸고, 아침에 문을 열 때 문 앞의 눈이 치워져 있었다는게 증거고요. 밀실은 특무대 소속이면 자물쇠 여는 것 쯤은 식은죽먹기였을거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일 뿐입니다. 근거도 없고, 진상도 결국 밝혀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이 진상이었다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고를 위장하여 연구에 종사하는 병사들을 죽이는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즈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는데, 도네 소좌가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해 가면서까지 가게우라 이등병을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가 스파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 죽여도 괜찮았을겁니다. 그만큼 미친 시대였지요.

그래도 일본의 전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무식한 특수 과학 실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걸 풍자하는 묘사와 내용은 인정할 만 합니다. 공간 전위라는 기묘한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를 추리에 응용한 발상도 좋았고요. 차라리 이 추리가 마지막에 진상처럼 드러나고,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지만 미친 시대에 누가 그런걸 신경이나 쓸까? 라는 형태로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하마오카는 회사 연구소에 극비 신소재 관련 자료를 가져오기 위해 방문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교 선배 네코마루를 만났고, 우연히 연구소 내 산책을 함께 하다가 연구 소장 살인 미수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일종의 불가능 범죄를 다룬 정통 본격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도가 지나친 삼엄한 연구소 경비, 기묘한 연구원과 도저히 알 수 없는 센스의 연구소 마스코트 네코멜론군,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네코마루 선배 등 설정이 만화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건 단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 정도만이었다면 괜찮았을텐데 말이죠. 이래서야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 - 극비 신소재에 대한 정보를 빼돌리는 것 - 와 거리감이 커서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시종일관 장난으로 일관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추리 자체는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추리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으니 이 범행은 소장의 자작극이다! 그리고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던질 수 없으니 빈 양동이를 던져 부딪혔고 물은 그 전에 쏟아 놓았다!는 추리로 아주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극비 신소재 자료를 빼돌리고 이를 하마오카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동기도 좋았고요. 농담같은 철저한 보안은 구급차를 타고 빠져나감으로써 뚫을 수 있다는 발상 역시 보안이 나름 강한 회사에 다니는 제 입장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과연 시리즈 작품에 탐정으로 등장할 만 합니다.

만화적이고 과장된 묘사를 줄이고 좀 더 일상계스러운 작품으로 쓰는게 여러모로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12/08

원더랜드 - 스티븐 존슨 / 홍지수 : 별점 4점

원더랜드 - 8점
스티븐 존슨 지음, 홍지수 옮김/프런티어

"재미와 놀이가 어떻게 세상을 창조했을까" 라는 부제로, 여러가지 대중 오락에 얽힌 역사를 풀어나가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의미있는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냥 재미와 유희, 놀이를 통해 만들어진 무언가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무언가에 이르른 갖가지 사례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줍니다.
재미 외에 특별한 목적이 수반된 경우도 있습니다. 자주색 염료를 만들 수 있는 뮤렉스 달팽이를 찾아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으로 나아갔다는 활동은 명백히 "돈"을 위함이니까요. 책에서는 이 역시 자줏빛 의상이 그것을 걸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요. 즐거움을 주는 물건들은 가치가 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상업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신기술을 개발해서 시장을 개척한다는 논리인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요.

첫번째 단락은 상점을 무대처럼 장식하여 고객을 사로잡고, 구매 행위를 일종의 오락처럼 만드는 과정과 면직물의 유행을 통해 산업 혁명이 촉발된 후 "유행"이 "소비"를 창출하여 "백화점" 이 등장하는 과정, "쇼핑몰"이 도시 계획과 맞물린 후 미래 도시의 비젼을 제시했다는 내용입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로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이는 각종 악기의 발전과 오르골 등을 거쳐 로봇 공학과 자동 방직기로 이어집니다. 방직기는 프로그래밍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요.
악기의 발전은 전문적인 공학의 발전과 맞물려야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 그리고 음악 관련 기술의 발전이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 이르는 과정 모두가 굉장히 설득력있게 설명됩니다.

유희, 즐거움이라면 미식이 빠질 수 없죠. 향신료 교역이 불러온 갖가지 이야기도 소개되는데, 로마 제국이 후추에 너무나 열광해서 아피키우스의 요리책 조리법의 80%가 후추를 사용한다는 이야기 같은 잡학이 가득해서 마음에 듭니다. 프랑스인 푸아브르가 네덜란드가 독점하다시피 한 정향을 빼돌려 재배에 성공한다는 일종의 산업 스파이 이야기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향신료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사치품 지위를 유지한게 바닐라라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네요. 토머스 제퍼슨이 바닐라 아이스크림 조리법을 미국에 도입했다던가, 가루받이가 어려워 퍼지기 어려웠지만 한 노예 소년의 아이디어로 양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이 노예 소년 이야기가 향신료 교역을 상징합니다. "스페인이 지배하는 멕시코에 자생하는 식물을 인도양에 있는 한 섬에서 프랑스인이 재배했고, 프랑스 노예상인들이 그 섬에 데려온 아프리카인의 후손인 한 소년이 그 꽃을 최초로 가루받이 했다" 는 이야기니까요.

다음에는 만들어진 "환영" 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영화의 전신인 특수 효과 공연과 이 중 가장 유명했던 유령 쇼 "팬태즈머고리아", 풍경을 실제처럼 느끼게 해 주는 파노라마 전시, 활동 사진과 월트 디즈니의 혁신, 이윽고 등장하게 된 "유명인들" 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다양한 도판과 함께 설명됩니다. 이러한 시각 효과를 활용한 오락거리가 문화적으로 어떻게 침투했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고찰이 함께 진행되는데,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게임 또한 빠지지 않습니다. 여기 소개된 단락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인데 체스 게임은 "비유"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도입부부터 신선했고, 이를 통해 인공 지능이 발전되는 과정,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게임이 된 보드 게임 (모노폴리) 등 모든 소개 내용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공 놀이"가 고무라는 혁신적인 물질의 역사로 이어지는 과정과 비디오 게임의 등장이 컴퓨터를 재미로 쓸 수 있다는 혁신적인 발상의 시작이었으며, 덕분에 컴퓨터가 일상 생활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마지막은 다양한 놀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선술집에서 시작해서 커피 하우스, 박물관, 동물원, 공원 등의 역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즐거움, 놀라움을 추구하는 인간이 얼마나 새로운 걸 많이 만들어내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혁신을 하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 재미있게 즐기는 마음가짐이 필수일 듯 합니다. "즐기는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옛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닌거죠. 또 단지 혁신에 대해 되새겨 보는 측면 외에도 다양한 놀거리와 즐길거리에 대한 미시사 서적으로도 탁월해서 만족스럽네요.
글의 내용이 통사적 구분이라기 보다는 주제별로 좀 널뛰는 감이 없잖아 있다는건 단점이지만 장점에 비하면 극히 사소합니다. 도판도 충실한 편이고요. 이렇게 취미에 가까운 놀거리, 즐길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최소한 엉망인 제 리뷰보다 훨씬 좋은 책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참고로 책 뒤 "감사의 말씀"을 보니 방송 프로그램을 책으로 만든 듯 싶더군요. 책보다는 방송으로 보는 게 훨씬 나은 내용일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방송으로 봤다면 4점 이상도 줬을 것 같습니다.

2019/06/15

The Box - 마크 레빈슨 / 김동미 : 별점 2.5점

The Box - 6점
마크 레빈슨 지음, 김동미 옮김/21세기북스

컨테이너 화물 운송이 얼마나 세계를 바꾸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경제학 서적입니다. "책장의 정석"에서의 소개가 흥미로와서 절판된 책을 어렵게 구했었는데, 제가 구하고 얼마 안되어 복간되었더군요. 좋은 일입니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시작과 진행 과정, 그리고 현재(물론 책이 발표된 시점이겠지만)까지를 다루는데, 그 깊이가 엄청납니다. 색인을 제외하고 420여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 전부를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책의 초반부는 컨테이너 화물 시장을 처음 개척해서 시장을 주도했던 풍운아 말콤 맥린 사장의 일대기와 거의 겹칩니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 초기에는 말콤 맥린 사장 자체가 시장의 전부이며 또 리더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겠지요. 여튼 초, 중반부는 말콤 맥린 사장이 처음으로 컨테이너와 컨테이너를 나르는 화물선 아이디얼 X호, 그리고 이를 옮기는 크레인을 도입하여 혁신을 일으킨 뒤 맷슨사 등 후발 업체들이 이를 모방하여 속속 컨테이너 화물 사업에 뛰어드는 과정이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기존 대비 얼마나 경제적으로 이익이 일어났는지 등의 데이터들도 확실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고요.
그 뒤 컨테이너 운송과 관련되어 마찬가지로 혁신이 일어난 트럭, 철도 운송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각 해운 회사별로 독자적인 컨테이너 운송 사업을 벌이다가 이를 표준화하면서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 등이 소개됩니다. 각 회사별 이해가 상충된 탓에 협의가 잘 진행되지 않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네요.

후반부는 풍운아 말콤 맥린의 실패 - 기름을 엄청 먹는 빠른 배를 도입했지만 오일 쇼크로 치명타, 다음에는 기름을 적게 먹지만 느린 대형 화물선으로 재기를 노렸는데 석유값 폭락과 너무 커서 이용할 수 있는 항구가 제한된 탓에 파산 - 와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현재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신기했던 건 한진의 조선소가 대형 선박을 수주받았다던가, 한국의 부산이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같이 우리나라 관련된 내용이 가끔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소개와 설명으로 컨테이너 화물 운송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가끔 직구를 할 때, 특히나 중국에서 구입할 때 이 가격에 어떻게 해외 배송까지 무료로 될까? 궁금했었는데 그 해답이 바로 이것,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발달 덕분이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운송 비용이 저렴해졌기 때문으로 심지어는 사방이 육지로 가로막혔거나, 항구에서 내륙으로 운송하는 비용이 더 들 정도라는군요. 예를 들어 미국 볼티모어에서 남아프리카 더반으로 컨테이너 화물을 보내는 비용은 2,500달러인데, 더반에서 남아프리카 수도 마세루까지 보내는 비용은 이보다 7,500달러가 더 든다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가 반도 국가로 3면이 바다로 인접했다는게 행운이란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외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건 하역을 진행했던 부두 노동자 단체들이 컨테이너 화물 사업 앞에서 어떻게 협상하였고, 어떤 항구들이 컨테이너 운송에 적응하여 살아남았으며 어떤 항구들이 몰락했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의 거친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은 결국 무의미했다는 건데(영화에서의 노동자들은 항구 노동자들만은 아니었겠지만) 이는 최근 인공지능이 대두되어 곧 없어질 직업군 리스트가 이런 저런 곳에서 회자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으로 보입니다. 저 역시 빠른 시간 내 도태되지 않으려면 많이 노력해야 할 텐데...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하여튼, 컨테이너 화물 운송에 대해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경제라던가 산업의 흐름, 발전 방향 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도 많고요. 제 전문 분야라던가 핵심 관심사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지 않아서 개인적인 만족도는 높지 않았지만 이런 쪽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06/07/19

삼국지10에 빠져버렸습니다

왠 늦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생각없이 연휴때 잡았다가 헤어나질 못하고 있네요...
삼국지 시리즈는 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인터페이스도 쉽고 게임을 참 재미있게 만든 것 같습니다. 장수 게임의 면모를 잘 보여준달까요?

어쨌건 현재 제가 플레이하고 있는 것은 서량태수 마등! 삼국지 책을 읽었을때부터 좋아한 멋진 사나이라 주저없이 선택해서 현재까지 20시간은 넘게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쪽 동네도 굉장히 암울하네요. 마등 본인도 그렇지만 부하들도 지력쪽이 너무 떨어져서 작전같은것을 쓰기가 까다로울 뿐더러 성들도 거리가 꽤 되는 편이라 세력 확장이 쉽지도 않고, 바로 옆에 동탁이 버티고 있어서 나가지도 못하다가 나가볼까 하니 조조가 중원을 장악한 형국이라 어쩔줄 모르고 있습니다. 마초 하나 믿고 버티고 있는데 두고 봐야 겠습니다. 정 안되면 원소로 한번 해 보려고요.

그래도 너무너무 재미있네요. 역사 시뮬레이션이라기 보다는 육성게임에 가까운 것 같은데 어쨌건 대 만족입니다. 인공지능이 너무 떨어져서 전투가 재미 없다는 고수분들도 많은데 저는 아직 충분히 즐길만 하더군요. 위에 쓴 대로 별다른 계략을 쓸만한 장수가 없어서 더욱 그렇긴 하지만요.
"신장의 야망" 시리즈도 꼭 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혹 하신 분들이 있을까봐 공개 질문 드립니다. 네이버 등을 아무리 찾아봐도 제가 원하는 답이 없어서^^

Q : 특정한 위치에서만 생산하거나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병사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보병을 중보병으로 업그레이드 하고 싶을때 경험치가 쌓은 보병은 내가 통치하는 곳에 있고 중보병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곳은 다른 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태수 임명해서 그 군대를 보내면 태수는 암것도 안해서 그 성에서 높은 레벨 병사들이 퍼져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통치를 바꿔서 그 도시로 가서 업그레이드 하자니 현재 머무는 도시가 공격받을까봐 불안하고....

2004/02/06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로저 젤라즈니 / 김상훈 : 별점 4점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8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열린책들

작가의 초기 중단편들로 구성된 작품집. 원래 집에 사두기는 꽤 오래 되었지만 무언가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 거창한 작가 이름만 보고 지레 기죽어 모셔만 두고 있었던 책입니다. 하지만 형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한 “신들의 사회”가 워낙 괜찮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읽기 시작해서야 알아챘는데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중, 단편집”이더군요. 그것도 무려 17편!이나 되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으며 각 작품들 하나하나마다 일정수준 이상의 즐거움을 주는, 실로 주옥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워낙 수록작품이 많아 전부 소개하는 것은 어려우니 인상적이었던 작품들만 짤막하게 소개해드리자면,

첫 단편 “12월의 열쇠”
“신”이 되어가는 한 피조물과 행성의 장대한 이야기를 짧게 풀어놓은 작품.
“신들의 사회”와 비스무레하게 장대한 시공간을 아우르는 작품이었습니다. 젤라즈니라는 작가에 대해 놀라운 것은, 이 단편의 주인공 캐릭터와 “행성의 환경을 변화시켜야만 하는(!)” 상황에 대한 묘사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충분히 과학적이면서도 현실적이며, 또한 풍자적이라는 것입니다.

2번째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금성에 살고있는 100미터나 되는 “이키”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낚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모험소설 SF로 분위기가 이색적이며 젤라즈니답지 않은 현실적이고 조금 허무주의적인 주인공도 좋았던 작품.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야기의 밀도는 조금 떨어진다 생각되더군요.

3번째 “악마차”
지성을 가진 자동차들이 인간을 습격한다는, 스티븐 킹의 “맥시멈 오브 드라이브”등과 비슷한 설정의 작품.
신선함은 좀 떨어졌지만 여러가지 성격의 인공지능 차량에 대한 묘사와 여운을 남기는 후반부 묘사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4번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표제작이기도 한 걸작 중편.
서두 부분의 고대 화성 문명과의 조우에서부터 결국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고 모든 것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결말까지, 장중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 나가는 젤라즈니의 탁월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러 부분에서 후대에 미친 영향이 상당할 것 같은데, 후대의 모방작들과는 전혀 다른 원전으로서의 품격과 가치를 잘 알려주는군요.

6번째 “이 죽음의 산에서”
외계의 100마일이나 되는 높이의 산을 등반하는 탐험가와 그들을 방해하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2번째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과 같은 모험소설 SF인데 모험소설 쪽으로 더 치중한 느낌의 작품. 약간의 SF적인 설정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냥 산악 모험담으로 보아도 좋을 작품입니다. 그만큼 모험소설로의 가치가 높아요.

9번째 “폭풍의 이 순간”
머나먼 외계의 한 행성을 무대로 한 “재난”드라마. SF적인 설정, 묘사보다는 긴박하고 스릴 넘치는 전개가 돋보이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뒷부분의 후일담은 조금 사족인 듯 싶긴 합니다.

14번째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거대한 인간 냉동 창고의 묘지기(?)역할을 하고 있는 사이보그(?)와 화이올리라는 신화적 존재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독특한 작품.

16번째 “프로스트와 베타”
인류가 멸망한 이후의 새로운 신, 새로운 인류가 되어가는 컴퓨터의 이야기.
설정이나 스토리, 결말까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벽한,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이런 작품을 걸작이라고 하는 것이겠죠.

결론내리자면, 수록작마다 편차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이 많아 전체 평균 별점은 4점입니다.
SF와 환타지를 잘 조화시키며 거기에 나름의 독특한 설정과 이야기를 부여하는 젤라즈니라는 거장의 재능을 한껏 느낄 수 있게해준 좋은 작품집으로, 그간 이런저런 이유로 쉽게 접할 수 없었지만 한번 손을 댄 이후에는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모셔만 놓았던 다른 책들도 한번 손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7/03/01

학생가의 살인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학생가의 살인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헤이는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지 않은채 몰락해가는 학원가 카페 '푸른 나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사에서 소모품은 되기 싫으며, 자신의 길을 찾고 싶다는 바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거리를 탈출하겠다는 말을 달고 살던 아르바이트 동료 마쓰키가 살해당했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고헤이의 연인 히로미마저 피살되고 말았다. 고헤이는 히로미의 동생 에쓰코와 손잡고, 형사 고즈키와 경쟁하듯 사건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들을 비웃듯 학생가에 설치된 크리스마스 트리에 시체가 매달렸다. 피해자는 장애아들을 위한 학교 '수국학원'의 원장 호리에였다. 수국학원은 생전 히로미가 봉사활동을 하던 곳이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 추리소설로 1988년 발표된 초기작입니다.

초기작임에도 흥행 작가의 역량은 충분히 보여줍니다. 방대한 분량임에도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덕분입니다. 세세한 인물과 배경 설정도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특히 인공 지능 관련 신기술을 핵심 소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돋보입니다. 공대 출신이라는 배경을 잘 활용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알파고' 덕분에 화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는 소재인데, 무려 30년 전에 도입해서 이만큼 낡아보이지 않게 풀어낸 솜씨도 정말 대단하고요. 버블 시기, 대학만 졸업하면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상황도 아련하게 시대를 느끼게 해 줍니다. 이러한 시대와 겹쳐진 문란하면서도 대책없는 청춘들의 행동은 80년대 하루키스러웠고요.

추리적으로도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만큼은 괜찮습니다.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며 이 단서들을 바탕으로 의외의 진상 - 모든 범행은 5년전 히로미가 피아노 콩쿨에서 연주를 하지 못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이 모여 진상을 드러내는 점과 결말만큼은 유명 고전 본격물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각 사건 별로는 큰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건인 마쓰키 사건은 트릭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단순한 살인 사건이라 시시합니다. 사건 해결도 피해자가 4년 전 센트럴 전자 주식회사에 근무했던 당시 접촉했던 인물을 찾아낸 경찰의 활약 덕분이라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추리적인 재미는 없습니다.

두 번째 히로미 사건은 밀실 트릭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언급되지만 허술합니다. 죽은 히로미가 6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발견되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출발한 이후 3층에 잠깐 멈췄다가 6층으로 가서 내려오지 않았고, 계단으로는 고스케가 이동하고 있어서 범인이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상황입니다만... 여러모로 완벽한 밀실로 보기 어려운 탓입니다. 작중 에쓰코의 언급대로 3층, 또는 6층에 거주하는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고, 옥상으로 도망친 후 후일을 도모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계단을 올라가면서 층별 복도를 과연 그렇게까지 유심히 볼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칼에 찔린 히로미가 엘리베이터로 도망쳐 6층을 누른 뒤 사망했다는 트릭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루미놀 검사 등의 현장 검증으로 경찰이 범행 장소를 알아내지 못한건 이해하기 어려우며, 구태여 꽃다발을 끝까지 들고 있던 이유도 애매하거든요.

또 첫 번째 , 두 번째 사건을 연결하는 잡지인 "사이언스 논픽션"도 거슬립니다. 잡지 안에 각서가 들어있다는 것을 이하라가 알아챈 이유도 석연치 않고(죽기전에 마쓰키가 실토했을까요?), 각서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아 답답하거든요. 우선 이하라가 히로미에게서 회수하는데 성공했다면, 마지막에 고스케를 죽이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장 유력한 증거가 없어진 것이니까요. 반대로 회수하지 못했다면 잡지 속에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그것도 이상하고요.

그리고 마지막 사건이자 세 번째 사건인 호리에 원장 사건은 이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트릭없이 우연이 개입되어 미궁에 빠졌을 뿐인 탓입니다. 만약 서점 주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준코의 범행은 여기서 드러났을 거에요. 이 사건은 사건의 동기를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며 작위적인 전개도 도가 지나칩니다. 만약 이하라가 히로미를 살해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히로미 살해는 아무리 준코가 안배했다 하더라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이 겹쳐있습니다. 히로미가 도주에 성공했을 수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준코는 대체 어쩔 셈이었는지 알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흥행작가다운 면모는 충분히 과시하는 작품입니다. 킬링타임용으로 권해드립니다.

2012/01/08

UN-GO : 별점 2점

정말 오랜만에 애니메이션 한 시즌을 끝까지 감상했습니다. 추리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관심이 생겨 보게 되었습니다.

사카구치 안고의 오래된 단편집을 원작으로, 배경을 근미래로 각색하여 제작된 작품으로 총 11화 완결입니다. 단편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점차 세계관과 주인공들의 관계 및 정체를 밝혀가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됩니다.

근미래가 무대이긴 하지만, 원작이 워낙 오래된 작품이어서인지 사건 수사는 탐정들의 추리에 의존할 뿐입니다. 이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공권력과 거대 자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잘 각색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거대 자본이 인터넷 기업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터넷 기업의 수장이자 자본과 공권력을 모두 상징하는 인물인 카이쇼 린로쿠의 사상을 비교적 디테일하게 보여준 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전후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분위기가 잘 묻어났습니다. 다만 원작을 읽어보지 못해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네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 애니메이션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에피소드의 길이가 고작 20여 분밖에 되지 않아 정교한 추리 구조를 만들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야기들이 추리물이라기에는 다소 얄팍한 편이었습니다. 20여 분은 등장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단편 에피소드 형태로 진행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긴 호흡의 구조로 바뀝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전체를 하나의 장편으로 그려갔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길었던 마지막 3편의 에피소드가 가장 완성도가 높았던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또한, 탐정 신쥬로의 파트너 인과의 능력이 '그가 물어본 질문에 인간은 반드시 답을 하게 된다'는 설정인데, 이런 능력이 있다면 용의자들에게 "너가 범인이냐?"라고 묻는 것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요? 그나마도 초반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이야기 전개에 크게 필요 없는 판타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했습니다. 차라리 이 설정을 제외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RAI 카자모리 정도의 조력자였다면 훨씬 설득력 있었을 텐데 말이죠.

한마디로, 이 작품을 추리물이라고 홍보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던져놓은 떡밥을 제대로 회수하지도 않고 끝맺었다는 점, 그리고 연출과 작화에서도 다소 저렴한 느낌이 들었던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세간에는 백전백패의 '패전 탐정'으로 알려진 주인공 신쥬로의 추리가 사실은 옳고, 명탐정으로 알려진 IT 거물이자 공권력의 흑막인 카이쇼 린로쿠의 추리가 틀린 것이라는 설정은 정말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권력 집단의 조작으로 인해 카이쇼의 추리가 매번 옳은 것으로 발표된다는 설정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주요 반전 요소로 써먹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설정이었는데, 1화에서 너무 쉽게 소비해버린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 설정 하나 덕분에 감점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추리물로서는 기대 이하였던 만큼, 혹시 다음 시즌이 제작된다면 보다 추리 요소에 진지하게 접근해 주었으면 합니다.

에피소드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화

"당신에게 있어 남편은 뭐야?"

파티장에서 살해당한 부도덕한 기업회장 사건.

캐릭터 소개와 세계관 등을 설명하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카이쇼 리에 - 카이쇼 린로쿠 - 유우키 신쥬로라는 주요 탐정역들의 추리를 연달아 보여주며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입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 탓에 추리가 그냥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구조인 탓에 추리적인 내용은 그닥이었습니다. 트릭도 고전적이라 신선함이 떨어졌고요.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재미는 있었지만 작품의 기본 설정 소개 이외의 가치는 별반 없는 에피소드였습니다.

2화

"정말 네번째 요나가히메는 누구야?"

아이돌 요나가히메의 프로듀서 살해사건을 다룬 에피소드. 요나가히메의 죽었다는 네번째 멤버에 얽힌 동기는 그럴싸했는데 범인이 딱히 변장까지 해 가면서 다른 멤버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은 것이 옥의 티였습니다. 그래도 작품 설정과 이야기가 잘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평작 수준은 되는 듯 싶네요.

3화

"사사 카자모리는 누구?"

사사가문의 당주 카자모리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이야기. 전개는 깔끔하나 7년 전 폭사한 전당주 사사 코마모리가 인공지능의 권위자였다는 것에서 카자모리의 정체가 쉽게 예상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동기가 부실하다는, 아니 아예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입니다. 부유하지만 기괴한 콩가루 집안이라는 일본 본격물의 전통적 설정을 근미래 배경에 걸맞게 각색하고 나름의 트릭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좋았는데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어서 아쉽네요.

4화

"그 시체는 누구?"

3화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 사사 카자모리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 시체는 그럼 누구였는지를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인과의 질문이 효과가 없고 신쥬로의 추리에 의해 사건이 밝혀지는 비중이 높아집니다.

그래도 추리 자체가 워낙에 별볼일 없고(경찰 공조수사였다면 단박에 결판났겠죠), 인간의 욕망에 더해 정의가 무엇인지를 세계관과 믹스하여 보여주는 부분은 지나친 훈계조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화도 이 에피소드부터 뭔가 미묘하게 변해서 그닥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5화

"어젯밤 너는 여기에 돌아왔었지. 거기서 뭘 봤지?"

'일륜의회'라는 우익단체(로 보이는) 리더 시마다 하쿠로우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시마다 하쿠로우의 아들 시마다 지로가 배우라는 것은 뭔가 고이즈미를 연상케도 하지만 내용은 풍자와는 별 관계는 일종의 보물찾기 이야기였습니다.

신쥬로의 최초 추리가 실패하고 인과와 신쥬로의 인연이 살짝 드러나며 인과의 다른 능력 (파워)이 드러나는 등 설정면에서 특이한 부분이 많이 보여지는 에피소드이긴 하나 추리적으로는 정말로 심각할 정도로 별 내용이 없더군요... 외려 카이쇼의 추리가 더 그럴듯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죠. 희생자와 살아남은 자에 대한 정의 이외에는 건질게 없었던 수준 이하의 에피소드였습니다. 덧붙이자면 작화도 여전히 별로였고요.

6화

카이쇼의 옛친구 야지마가 신쥬로에게 카니쇼의 장서 중 한권인 책 속에서 발견된 암호에 대해 의뢰하는 내용으로 야지마가 아내의 잠자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같은 일상계적인 요소가 괜찮았던 소품입니다. 야지마의 아내와 카이쇼간의 불륜을 암시하는 전개에서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도 좋았고요. 마지막 카이쇼의 "진실은... 언제나 하나인 걸까" 라는 모 유명작품 명대사를 비트는 센스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인과의 기묘한 능력을 통한 활약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설득력 측면에서 점수를 줘야하는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이렇게 판타지스러운 설정 없이도 잘 만들 수 있었는데 대관절 왜 인과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켰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7화

신쥬로가 6화 사건의 흑막인 야지마의 동료 죄수인 소설가를 면회하던 중 그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 이야기를 듣고나서 전쟁 전 영화 촬영현장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이야기. 전쟁에 대한 나름의 시각은 있으나 여러 수수께끼같은 설정을 가지고 장난친 느낌만 드는 알 수 없는 에피소드였어요. 뭘 이야기하려는지도 모르겠고 사건도, 추리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어요. 물론 다음 에피소드와 이어지기에 이 에피소드만 놓고 평가하기는 좀 무리이긴 합니다.

8화

전편 마지막에 벌어진 영화 촬영 현장에서의 감독 살인사건과 주요 용의자로 몰린 신쥬로가 추리를 통해 진범을 밝혀내는 이야기.

교도소라는 무대에서 모니터 가능한 수감자 번호를 이용하여 만든 트릭은 작품에 꽤 잘 어울렸고 마지막 추리쇼에서 결정적 단서로 내민 상자에 가린 범인에 대한 피해자의 대사도 제법 디테일이 살아있는 부분이었어요.

그러나 전편에서 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설정들의 떡밥이 해결되지 못하고 범죄 자체가 우발적이기에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설가와 별천왕 (벳텐오우)의 관계라는 핵심 요소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네요.

9화

카이쇼 린로쿠가 적들을 모아놓은 TV토론회에 참석했다가 폭발사고에 휘말리고 그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전편에 등장한 별천왕의 최면술을 주요 트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기억 디테일이 어긋나는 사소한 장치는 돋보이지만 완결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서 에피소드만의 평가는 어렵습니다.

10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데 숨겨야만 하는 것은?"

9화의 사건으로 용의선상에 오른 카이쇼가 TV 청문회로 결백을 증명하려하나 인과에 의해 심복인 코야마 검사가 카이쇼의 비밀인 정보조작을 고백하여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후 자동차 폭발사고로 사망하게 된다는 이야기.

추리는 신쥬로가 별천왕의 존재를 알고 카이쇼의 죽음을 의심하는 것이 전부지만 간만에 등장한 인과의 활약(?)과 함께 주요 인물들의 극적인 행동 등에서 서스펜스가 제법 느껴지기에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의 진실에 만족하는 것은 거기서 사고를 멈추는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카이쇼 린로쿠가 대중이 쉽사리 빠지게 되는 음모론에 대해 설명하며 내뱉는 대사도 인상적이었어요. 이 친구 "하나의 진실" 이라는 말을 꽤 좋아하는 듯 싶군요.

11화

"너의 바람은 뭐지?"

9, 10화에서부터 이어져 카이쇼 린로쿠 죽음과 별천왕 존재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에피소드로 대망의 최종회입니다. 3화에 걸친 장편 에피소드답게 복선도 확실하고 단서도 풍부할 뿐 아니라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확실히 장편답게 디테일했어요. 무엇보다도 별천왕 능력에 대한 설명을 보여줘서 일종의 두뇌게임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러나 하야미가 별천왕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후루써클이라는 조직과 함께 어떻게 인과까지 조종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등 시청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설득력도 함께 놓친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정통 추리물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러한 부분을 좀 더 신경썼어야 했을텐데 말이죠.

아울러 몇몇 설정을 끝까지 밝히지 않는 것은 요사이 유행인 듯 한데 별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혹 시즌 2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같지는 않네요.

2021/06/19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상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여러 단편들에서 엄선했다는 좀비 관련 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여름에는 좀비물이지요. 원래 책으로는 무려 서른 네 편, 모두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 상, 중, 하로 분권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한 번에 읽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양이니까요.

상권에는 모두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 댄 시먼스, 제프리 포드 정도가 제가 아는 작가인데, 다른 작가들도 소갯글만 보면 모두 나름대로 유명 작가들로 보입니다. 좀비라면 바로 떠오를 고어와 액션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비롯하여, SF, 범죄 드라마, 풍자, 블랙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들이 수록되어 있고요. 덕분에 풍성하기는 한데, 작품들 편차는 큽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과 같은, 기존 좀비물 팬을 만족시키는 걸작도 있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거나, 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들도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정 분만" 

스티븐 킹의 단편집 "악몽과 몽상 1"을 통해 이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출산을 앞둔 임산부 시점에서 그려낸 작품이지요. 

그런데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좀비의 기원까지 설명되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 문제였는지 뭔가 누락된 탓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하여튼, 보통은 주인공이 도와주는 역할은 임산부가 주인공이며, 무대가 섬마을이라서 한 개 뿐인 묘지만 사수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상황이 독특했습니다. 버티는 와중에 죽은 남편을 한번 더 죽이는 처절함,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인상적이었고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인공과 무대 설정의 독특함을 더해 스티븐 킹의 필력으로 써 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어설픈 변화구 보다는, 그냥 한가운데 직구 승부가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심지어 그 공을 던지는게 스티븐 킹이라면 더더욱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슴은 무덤까지 가져간다" 

재벌들이 과시용으로 데리고 사는 '트로피 와이프'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뒤 벌어진 일들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좀비로 돌아온 트로피 와이프는 이성은 그대로 갖추고 있고, 사람을 뜯어먹거나 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부활시켰는지를 찾아 헤멜 뿐이지요. 이런 설정은 독특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영 재미가 없더군요.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발생하지 않는 탓이에요. 시체가 되살아난건 충분히 드라마틱한 사건인데, 이를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묘사는 탓입니다. 마지막에 그녀를 부활시켰다는 여동생이 찾아 오는건 아주 뜬금없었고요.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는 말로 끝맺는 마지막 장면은 외모, 돈과 사치품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려주는가 싶은데, 자동차 한 대 값을 들였다는 실리콘 가슴만 쳐지지 않고 영원이 남았다는 묘사에서 '적절한 투자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기도 해서, 뭐가 맞는지는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재미만 놓고 보자면 후자 쪽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만.

하여튼 좀비물로 보기는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고, 쟝르도 모호하며 이야기도 딱히 볼만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 

노년의 가이스 선생은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 혼자 살아남았다. 그녀는 포획한 좀비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노력하는데...

좀비 설정에 뭔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혀 없어요. 그냥 좀비 때문에 세상이 망한 뒤를 그리고 있거든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물입니다. "가정 분만"과 같이, 뻔한 설정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더 급진적입니다. 하지만 '교육' 이라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꽤 잘 그려내고 있기도 하고요. 좀비가 되었지만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는 결말은 깊은 울림을 가져다 주네요. 단지 치킨 너겟 때문에 돌아왔을 수도 있지만, 뭐 그것도 학습이라면 학습이니까요.

"칼리의 노래", "테러호의 악몽" 등의 공포 소설로 유명한 댄 시먼스다운 필력도 돋보였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디테일이 특히 압권이에요. 좀비 아이들을 포획하고, 이들을 교실에 묶어 놓은 뒤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과 학교를 요새처럼 만든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아주 빼어난 덕분입니다. 좀비물로서의 기본 재미도 놓치지 않습니다. 학교로 수백명의 좀비가 몰려오고, 이를 가솔린 해자와 레밍턴 소총, 권총으로 처단하는 가이스 선생의 활약이 그려지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화끈합니다.

뻔하지만 독특한 설정에 더해, 재미도 기본 이상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역시나 작가적 명성은 허투루 얻어진게 아니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유령의 춤" 

커스터 기병대가 좀비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사건을 추격하던 FBI 요원 에드거는 좀비의 습격에 대한 모든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쓰레기 백인 경찰관이 인디언을 몰래 학살하다가 되살아난 좀비 커스터 기병대에게 잡아 먹힌다는 도입부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그냥 에드거 요원이 좀비 기병대의 잔학한 행동을 모두 알게되는 신기한 능력을 얻었다가 전부인 뒷부분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니니까요. 군대식 명령으로 좀비떼를 제어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걸로 좀비떼를 격퇴했다던가 하는 결말도 아니고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제 기준으로 이 작품은 완성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시체" 

아프리카 수용소를 통해 좀비를 대량 생산하여 유통시킬 계획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도널드는 좀비 격투가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좀비 매춘부를 만난 뒤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이에요. AI,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화된 이후,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현재 한참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들과 별다를게 없거든요. 하지만 AI를 좀비로 바꾼 아이디어가 참으로 그럴듯했습니다. 사람의 생명 가치가 폭락하고, 심지어 성적인 노리개로 이용되는 상황에 대해서 더 큰 충격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평이했지만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죽음과 선거권" 

시체가 되살아나 투표를 하기 시작해서, 대통령 선거는 다시 진행되게 되었다. 버튼 후보의 보자관 롭은 지고있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총기 사고로 희생되었던 소녀 데이나 맥과이어가 되살아나 좀비가 된 모습을 광고로 만들어 방영했고, 버튼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시체가 되살아난 이유는 정의가 이루어지는걸 보기 위해서라는 조금은 황당한 설정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주인공 롭이 어린 시절 저질렀던 총기 오발 사고와 가족의 죽음이 함께 펼쳐질 필요는 없어 보였습니다. 솔직히 혼란스러웠거든요. 시체들이 되살아난게 롭 때문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고요. 또 정의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버튼이 대통령이 되는게 왜 정의인걸까요? 좀비물이나 호러물적인 속성이 전무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초원" 

모종의 탐험대가 대륙 횡단을 하면서 괴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항해 시기 쯤, 그러니까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찾아왔을 때를 무대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탐험대가 굶주림과 초현실적인 존재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아주 약간 댄 시먼즈의 "테리호의 악몽"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탐험대는 시체들과 산 사람들을 학살하고 식인까지 저지르는 악당들이라는 차이는 큽니다. 화자인 '나' 조차도 대륙 횡단에만 골몰해서 학살, 식인을 꺼리지 않는 정신병자라서 제대로 된 이야기가 펼쳐지지 못합니다. 디테일도 사뭇 부족하고요. 왜 시체가 되살아나 배회하는지, 시체를 되살린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결말도 모호해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잔혹하기만 할 뿐입니다.

"세 번째 시체"

매춘부를 유혹한 뒤 살해하는 연쇄살인마 리치의 희생자였던 '나'가 되살아나서 리치를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복수극으로 보이기도 하고, 멜로물로도 보이기도 하고, 범죄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그런데 별로 의외성이 없고, 리치가 경찰에 체포되는 결말도 밋밋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무엇보다도 무섭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밤처럼 아름다운" 

성인 모델들 촬영으로 거부가 된 네이선 그라임스는 좀비 사태 발발 후 카리브 해의 섬 요새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모델들과 좀비 사태가 진정될 때 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좀비 사태가 끝나면 아름다운 모델 수요가 폭증할 걸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했고, 모델들은 좀비가 되어버렸으며 심지어 이성이 남아있는 듯 네이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네이선도 생존자를 가장했던 좀비에게 물려 서서히 좀비가 되어 가는데...

플레이보이의 창업자 휴 헤프너를 떠오르게 만드는 주인공과 성인지 모델들이 좀비가 되고, 좀비들이 생전의 목표를 그대로 가지고 행동한다는 설정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전개는 뻔했고, 애매한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리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처럼 죽어봐"

좀비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그리고 있습니다.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습격하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으니 소리나 냄새, 체온 등에 반응한다는게 말이 안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비 떼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네요. 단순하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고, 추울 때 따뜻한 곳을 찾는 정도의 행동만 하면요. 실제로 주인공은 그렇게 좀비 떼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와중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수지를 만나 섹스를 하는 설정도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 모르겠습니다. 삶 자체가 의지인 상황인데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게 말이 될까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설명은 부족합니다. 가족도 모두 죽어버린 상황이니까요.

물론 자기가 인간임을 드러내고 죽어봤자 좀비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나름 와 닿기는 합니다만, 그렇다해도 저라면 진작에 자살을 택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맬더시안의 좀비" 

이웃 노인 맬더시안은 어느날 나에게 자신이 뇌 수슬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좀비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맬더시안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뒤, 나는 그가 숨겨두었던 좀비를 떠맡아서 변화를 관찰하게 되는데...

기존의 '좀비', 즉 부두교 주술로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잘 들어맞는 좀비가 등장합니다. 

뇌 수술처럼 뭔가 있어보이는 장황한 설정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환상 소설에 가깝게 풀어나가는 점이 특징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고 뭔가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탓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라는 환상 소설을 쓴 작가 작품다왔달까요. 결말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점 까지 말이지요. 좀비가 등장해서 급격하게 노화한 뒤, 맬더시안이 되었다는게 결말인데,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멜더시안이 심장마비로 죽은건 명백한 사실인데, 그가 어떻게 젊은 좀비가 되었고, 다시 급격하게 노화해서 멜더시안이 된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목적이 환생이라면 젊은 육체로 있는게 맞을텐데, 이런 일을 벌인 동기도 잘 모르겠고요. 

주인공도 이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는다고 끝맺는데, 작가로서 무책임한 태도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한데, 그런 평가가 가능한 작품은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