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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8

오랑캐의 역사 - 김기협 : 별점 3점

오랑캐의 역사 - 6점
김기협 지음/돌베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역사서입니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를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유목 사회가 농경 사회와 공생하며 '그림자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농경 사회는 생산성이 높아 경제력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덕분에 대규모 정치 조직인 ‘국가’ 형태를 갖추기 쉬웠습니다. 반면, 유목 사회는 느슨한 연합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게 되면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수탈하거나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농경 사회의 제국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저자는 이를 ‘그림자 제국’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한반도가 독립 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설명됩니다. 농사에 유리한 한반도 남부에 국가가 형성되었고, 북부와 만주는 유목 세력의 땅이라 중국과 단절되었지요. 하지만 이 지역에 강력한 유목 세력이 융성했을 때, 한반도 남부 국가는 지속적인 압박과 수탈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 원나라, 청나라 시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재미있지요? 최근 이세계 전생 후 영지, 국가를 성장시키는 내용의 소설과 만화가 많은데,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목민 켄타우로스 부족에게 전생한 주인공이 기술과 병법, 종교 도입으로 오랑캐 정복 왕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요.

중국이 대항해 시대의 유럽과 달리 해양 진출이 적었던 이유도 설명됩니다. 중국은 이미 내륙에서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네요. 이는 대외 관계와 교역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었으며, 유럽이 적극적으로 신대륙을 탐험한 것과 달리, 중국은 상대적으로 대외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청나라 이후 유럽에 비해 문명이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고요.

유럽 중심 사관을 비판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과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은 인상적입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유지한 채 수백 년간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끌며, 특히 ‘중세 암흑 시대’라는 개념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와 닿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중세 시대에도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문명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단지 ‘유럽’만이 그 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저자의 주장들은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시되어 설득력도 높은데, 문제는 주장이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랑캐와 유목민, 그림자 제국 등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유럽 중심주의 비판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슬람 문명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인 구성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글도 어려운 편이고요.

더 큰 문제는 도판의 부족입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각 세력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도 당시의 지도가 거의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유목 세력의 이동 경로, 교역로, 세력권 등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 않다 보니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읽으면서 지도를 수시로 참고할 수 밖에 없었는데, 2만원을 훌쩍 넘는 책 가격을 생각해보면 주요 지도는 도판으로 반드시 추가되었어야 했습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다양한 시각은 흥미롭지만, 이러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구글 맵에서 연도를 입력하면 해당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광고가 많거나 느리거나 조작이 불편한 등 문제가 많았거든요...

2018/03/31

고양이 발 살인사건 - 코니 윌리스 / 신해경 : 별점 3점

고양이 발 살인사건 - 6점
코니 윌리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SF 쪽에서는 명성이 높은 코니 윌리스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중단편집입니다.
코니 윌리스 작품은 처음 읽어보는데 아주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수록작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데다가, 밝고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통 SF라기 보다는 약간의 SF 설정이 가미된 작품들로 일상 - 홈 드라마이자 사회 비판물인 "말하라, 유령", 본격 추리물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로맨틱 코미디 첩보물 "절찬 상영중",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 SF "소식지", 로드무비 "동방박사들의 여정", 일상 드라마인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로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친숙한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익숙한 클리셰, 설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장르문학, 컨텐츠 애호가로서 반가왔던 점이에요. 그만큼 볼거리가 아주 풍성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아래 상세 리뷰에서 처럼 별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저도 크리스마스 관련된 이야기를 몇 번 써 보려고 한 적이 있는데 수준 차이가 엄청나네요. 반성하게 됩니다.

"말하라, 유령" 

이혼남으로 책이 유일한 취미인 서점 직원 그레이의 유일한 낙은 크리스마스에 딸 젬마와 보낼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점의 사인회와 전처 때문에 딸을 만나지 못하게 된 그레이는 서점 직원으로 임시 채용된 크리스마스의 유령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는데...

딸 아이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꾸만 엇나가는 그레이와 사람을 개과천선 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판타지 설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며 묘사도 일품입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때 바쁜 백화점 서점에 대한 무시무시한 묘사가 압권이에요. 이래서야 정말 빠져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캐럴을 비롯해 딸 젬마가 좋아하는 소공녀, 그 외에도 디킨스와 월터 스콧의 작품이 많이 인용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그러나 완벽한 크리스마스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건 의외였습니다. 마지막에 유령들이 뭔가의 슈퍼 파워로 딸 젬마를 그레이에게 데려다 줄 줄 알았는데 그냥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끝나버리거든요. 돈이 최고고(작 중 표현대로라면 유일한 것), 유령들은 힘도 없고, 크리스마스에 기적 따위는 없다는 결말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사회 비판 소설에 가깝습니다. 이게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씁쓸하네요. 디즈니 작품과 비슷한 가족 판타지로 위장된 탓에 이런 갭이 더 크게 느껴지는데,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딸아이 아빠로서 젬마는 최소한 행복해졌어야 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고양이 발 살인사건" 

세계 최고의 탐정 투페는 크리스마스에 친구 브리들링스 대령과 함께 마웨이트 장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사건을 의뢰한 샬롯 발라디 부인이 영장류를 연구하는 인공지능 연구소로 사람의 말이 가능한 고릴라 달타냥, 추리소설도 좋아하는 똑똑한 침팬치 하이디가 하인으로 일하는 등 연구 실적이 빼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동생 제임스는 영장류를 증오하여 자신이 유산 상속을 받으면 모두 쫓아낸다고 공언한 상태. 다행히 그들의 아버지인 억만장자 알리스테어 경은 치매로 난폭한 바보가 되었지만, 앞으로 수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투페 컴비는 다른 손님들, 기자인 루트거스와 폭스양, 지역 경찰 유스티스 경사, 알리스테어 경의 간호사 파치트리 양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고, 이 와중에 의뢰하는 수수께끼가 단지 영장류의 존재에 대한 질문임을 알게 된 투페는 당장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 경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든 정황이 고릴라 달타냥의 범행임을 암시했는데....

포와로와 헤이스팅스 컴비를 빼닮은 탐정 컴비가 등장하고, 전형적인 영국 장원을 무대로 하는 클로즈드 써클 미스테리입니다.

일단, 고전 본격물에 대한 높은 이해가 돋보여요. 탐정 컴비의 묘사는 물론 장원에 머무는 사람들 모두가 모두가 동기가 있고 수상쩍은 등 여사님 작품에서 보았었던 그런 느낌으로 묘사되거든요. 패러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고전 캐릭터를 쏙 빼 닮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전형적입니다. 사건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 그대로에요. 무엇보다도 추리에 있어서 영장류의 지능이 높다는 설정으로 독특함과 재미를 안겨다 주는 부분이 탁월했습니다. 이 설정이 단지 재미 요소가 아니라 진짜 반전의 핵심 요소인 덕분입니다. 영장류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들이 알리스테어 경을 살해하고 제임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약간의 SF가 가미된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물로 추리와 재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시라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으실 거에요. 별점은 5점!입니다.

"절찬 상영중"

"크리스마스 소동" 이라는 고전 영화를 보기 위해 애쓰는 사라와 그녀가 그 영화룰 왜 못 보는지를 설명해주는 전 애인 잭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사라가 방문한 영화관 시네드롬은 온갖 영화 관련 오락거리가 가득차 있는 일종의 테마 파크인데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손님들이 밀어닥친 탓에 난리도 아닌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러한 복잡한 상황 묘사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영화를 보지 못한 이유도 아주 그럴듯해요. 영화를 만든다고 사기를 친 뒤 시네드롬에 돈을 좀 쥐어줘서 아무도 못보는 환상의 상영관을 확보한 후 제작비를 쓴 것처럼 꾸미는 제작사의 음모이고, 이는 백 개도 넘는 상영관을 모두 채우는 건 무리였던 시네드롬에게도 필요했던 사기라는 진상인데 생각도 못했네요.

이러한 내용을 소비자 사기국에서 근무하는 잭의 화려한, 영화를 방불케하는 첩보 작전처럼 풀어나가는 것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라에게 사 준 티셔츠가 카메라 부착형이라는 아이디어 등 디테일도 볼거리이며, "백만 달러의 사랑", "아이 러브 트러블", "위기의 암호명" 등 비슷한 영화들의 장면 장면과 엮이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거든요.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 첩보극이라는 장르 공식에 굉장히 충실하기까지 하니 더할 나위 없지요. 그 외 다수 영화들의 인용, 묘사도 흥미로운데, "디워"가 원작에도 언급되는건지는 좀 궁금합니다.

그런데 망한 영화도 매니아가 따라붙고, 온갖 매체에서 흥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설정같지는 않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잭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즐겁고 유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네요.

"소식지"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착해졌다. 이를 처음 눈치챈 건 주인공 "나"의 직장 동료이자 그녀가 흠모하는 이혼남 게리였다. 둘은 곧 착해진 사람들이 모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다른 악영향없이 착해지기만 한 탓에 이를 밝히고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착해진 사람들의 몸 관절이 이상해지는 부작용을 알아낸 주인공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생수를 박멸하고자 직장과 집의 온도를 올렸다(모자를 벗게). 다행히 기온이 올라 이 소동은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로 변주된 "신체 강탈자의 습격 (바디 스내쳐)" 입니다. 기생수의 부작용이 착해지는 거라니 정말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네요. 이변을 눈치채지만 착해지는 게 과연 무슨 문제인지?를 고민하는 주인공들의 딜레마도 웃음을 자아내고요.

하지만 디테일이 좀 지나쳤습니다. 보다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을텐데, 과유불급이랄까요? 제목이기도 한 가족들 간의 '소식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의 이변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품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등장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지역별 편차가 있고 이유는 기온이다!를 드러내려면 TV나 신문 등의 뉴스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등장인물들도 너무 많은데, 이 역시 주인공과 게리가 잘 되게 만드는 식으로 깔끔하고 단순하게 마무리하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별점은 3.5점입니다.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 

눈보라가 휘몰아쳐 도로가 통제되는 와중에서 자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계시에 따라 예수를 찾아나선 목사 멜과 친구 BT, 그리고 여행 중 만난 여성 캐시 3인의 여정이 그려진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동방박사 이야기를 현대로 가져온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백인 목사, 흑인 과학자, 전직 영어 교사인 여성 3인이라는 파티 구성도 나름 완벽해서 눈길을 끌고요.

그러나 여정에 대해 상세하게 그린다기 보다는, 실제로 동방박사가 겪었음직한 고뇌(이게 계시가 맞는지? 내가 미친건 아닌지? 와 같은)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드라마적 재미는 별로 없어요. 독백과 종교적 고뇌로 가득찬 작품이 애초에 재미있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 계시와 유사한 카니발 조명과 예수일지도 모르는 카니발 운전사 등의 존재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계시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토대로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는, 일종의 추리 과정이라도 동반되었더라면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아쉬웠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결말이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세 명이 카니발을 찾아가 예수(?)를 만나는지, 그들을 방해하는 헤롯왕의 수하들은 누구인지 등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마무리 되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모험이 시작되자마자 이야기가 끝나는, "반지의 제왕" 1부와 같은 수준의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이야기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완성된 이야기냐는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네요.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우리가 알던 이들처럼" 

책 뒤에 작가가 꼽은 크리스마스를 다룬 최고의 영화, 책, TV 시리즈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영화 중 최고는 "러브 액츄얼리"를 꼽고 있더군요. 이 작품은 작가가 나름대로 변주한 "러브 액츄얼리" 입니다. 족 모임을 위해 오리를 구우려는 루크, 이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미구엘의 양육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파일러, 남편과 사별하고 멕시코로 여행온 베브, 아내 마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는 워런, 크리스마스 이브 결혼식을 주장하는 친구 스테이시의 들러리로 여행 온 폴라,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대폭설을 연구하는 네이선 박사와 조수 진성 등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다양한 등장인물이 한 꼭지 씩 이야기를 선보이다가 마지막에 연결되는 결말인데 전개 방식이 똑같거든요. 대부분 해피엔딩이며 감동적인 이야기와 적절한 코미디가 섞여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차이점이라면 이야기들 속 대 소동이 일어나는 원인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 폭설" 이라는 SF적인 설정이라는 것 뿐입니다.

모두 재미있고 따뜻하며,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가정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도저히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어요! 거짓말을 하다가 파멸한 불륜남 워런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아주 속 시원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무엇보다도 대폭설의 원인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이 모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크리스마스다운 발상이 아주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던, 반짝반짝한 작은 소품들이 모인 선물 상자같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도 영화로 꼭 만나보고 싶어지네요

2020/05/24

폐허에 바라다 - 사사키 조 / 이기웅 : 별점 2.5점

폐허에 바라다 - 6점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북홀릭(bookholic)

"에토로후 발 긴급전"의 작가 사사키 조단편집입니다. 홋카이도 도경 경부보 센도 타카시가 이런저런 부탁으로 개인적인 수사를 벌인다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탐정사전"에서 멋지게 소개된 덕에 기억하고 있다가, 우연찮게 읽게 되었네요. 

센도는 이전 사건 때문에 PTSD 장애를 입어 현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장기 요양 중으로, 의사 말에 따르면 "경찰에 관련된 일은 모두 잊어라, 가능하면 신문도 읽지 마라, 책은 읽어도 상관없지만 범죄 소설은 금물이다"라는 상황이지만 주위의 요구에 응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수사를 돕습니다.

니세코 스키장, 홋카이도 동부 토카치 온천 여관, 유바리 시, 삿포로 시내, 히다카 등 북쪽 지방 이곳저곳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며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관련 묘사들이 인상적입니다. 예를 들어, "폐허에 바라다" 속 소도시는 가공의 마을 같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아요. 유바리 시 인근 쿠라야마 초 등 현존하는 곳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덧붙여진 덕분입니다. 마을로 향하는 길에 대한 묘사는, 지금이라도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연어 정치망 어업과 가리비 양식이 주인 오오츠크해 연안 항구 마을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러한 묘사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또 매 이야기마다 실제 사건을 담당한 형사가 등장하는데,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뽐내는 것도 재미요소에요. 사건 해결을 위해 센도를 이용하는 형사가 있는가하면 센도를 방해꾼 취급하면서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형사도 있고, 애주가도 있고 패션 감각이 빼어난 패셔니스타도 있거든요. 무엇보다도 나오키 상을 수상했을 만큼 문학적인 묘사가 돋보입니다. 사회파스럽게 현실에 대한 고발, 비판 의식을 이야기에 잘 담아낸 솜씨도 빼어나고요.

그러나 현실 고발없이 단순 범죄에 대한 이야기로만 끌고간 몇 몇 작품들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냥 멋드러지게 쓴 범죄가 등장하는 드라마일 뿐, 추리 소설이나 범죄, 수사물로 보기에는 영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합한 별점은 2.5점. 문학적으로는 근사하고, 뭔가 품격이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추리적으로 빼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와 같이 추리물에는 어느 정도 수수께끼 풀이나 트릭같은 요소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추리 애호가 분들께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60여 페이지에 불과한 짤막한 단편입니다. 이야기도 대단한건 없어요. 센도 타카시가 휴직 중인 탓에 치밀한 수사를 벌일 수도 없고요. 하지만 고작 하룻밤 조사로 아서에게 쏠린 혐의를 돌릴만한 정황 증거를 담당 형사에게 들이민다는건 너무하다 싶었어요. 그것도 잠깐 관계자 옆자리에 동석했던 정도라면, 현재 담당 경찰들이 수사를 등한시 했다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현지 경찰들이 '오지'에게 한 번 맛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죠. 용의자 아서의 아내는 일본인이고, 그의 자식 역시 일본인일테니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 이유도 없고요. 특별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으며, 인간 관계 및 경제적인 이득 등 동기까지 명확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사토미와 아서가 관계를 맺었다는 등의 설정도 불필요했습니다.

스키장 마을의 묘사라던가, 이야기를 쉽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전개는 나쁘지 않은데 특별히 점수를 줄 만 한 부분도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폐허에 바라다"

지독한 가난으로 어린 시절, 여동생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어머니를 목격한 뒤 범죄에 빠져버린 후루카와의 범행을 건조하게 그려냅니다. 후루카와를 한 때는 융성했지만 지금은 쇠락해버려 폐허가 되어버린 탄광촌 마을에 빗대는게 인상적이에요. 후루카와가 바란건 죽음이었고, 결국 자살로 센도 앞에서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장면은, 제목과 겹쳐지고요. 폐허에 바라는건 결국 흉물스러운 모습을 창피하게 드러내어 명줄을 유지하는게 아니라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는 뜻으로 읽히거든요. 이런 내용으로 본다면, 사회 고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사건이 워낙 명확한 탓이에요. 후루카와와 만나기로 한 센도의 의도를 야마기시가 어떻게 알고 추적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있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아닙니다.

이렇게 형사가 등장하고, 비참한 현실과 그 때문에 생겨난 비극을 범죄 드라마로 그려내었다는 점에서는 김성종"어느 창녀의 죽음"과 비슷합니다. 드라마로서 볼 만하고, 묘사도 특출난 부분이 있지만 추리적 요소는 거의 없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일본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도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일본의 버블 붕괴 및 지방 경기의 몰락을 그렸기 때문에, "어느 창녀의 죽음"만큼이나 우리에게 와 닿기는 힘들지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빠 마음"

'토'라는 어부들의 조합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흉기가 어부들이 쓰는 마키리라는 등 어업과 관련된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지저분한 마을 유력자의 음모, 그와 손을 잡은 폭력단의 만행이 동기라는 점에서 사회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회 고발에만 그치지는 않습니다. 사건 속 수수께끼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용의자 이시마루가 피해자 다케우치를 폭행한건 인정했지만, 칼은 가져가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단지 칼을 가져가지 않았을 뿐, 칼로 찌른건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끝에 그냥 손에 잡힌 칼로 범행을 저지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를 밝히기 위한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시마루의 가족들이 이시마루가 범인이라고 못 박은 이유가 드러나는 과정은 볼 만 했어요. 앞서 이야기한 사회파적인 고발이 함께 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단순한 센도의 추측 - 추리라고 하기는 어려운 - 만으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전개는 너무 뜬금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쉽고 짧게 소비되어 버린 느낌도 들고요. "붉은 수확" 처럼 마을의 실력자,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분투하는, 장편 사회파 하드보일드물로 그려낼만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지요.

센도의 추리에 좀 더 설득력을 부여하고, 좀 더 드라마틱한 세력간 갈등을 그려낼 수 있는 장편이었다면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지금의 결과물은 별점 2.5점입니다.

"사라진 딸"

범행은 강력하게 의심되지만, 시체가 없어서 본격적으로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작품. 경찰이 직접 일을 벌일 수 없어서 경찰 타나베가 미야우치에게 센도를 소개시켜 준 것입니다. 센도가 사건을 해결한 건 타카다 방에서 발견한 평범한 스냅 사진 속 인물에게 주목했던 덕분이고요. 그 인물의 정체를 알아낸 뒤, 전화 한 통으로 시체 은닉 장소를 알아내게 되거든요. 경찰이 수사 중 간과했던 단서에 주목한게 주효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경찰 수사의 디테일 부족으로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꽤 그럴듯했습니다. 추리적으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나름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서 타카다의 과거를 상세하게 조사할 정도로 경찰이 수사를 확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설득력을 더합니다.

아주 빼어나지는 않지만, 실감나는 이야기라는건 분명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쿠로자와의 살인"

저자 후기를 보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아들들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원수로 여기는 젊은이가 살인을 저지르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이 좀 비슷하기는 합니다.
여기에 더해 유언장이 주요 동기 중 하나로 등장하며, 지방 영주의 성 같다는 오하타 목장의 저택 묘사, 말을 키우는 목장 묘사 등이 더해져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을 전해 줍니다. 일본이 아니라 영국 어딘가를 무대로 한 작품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작가의 의도는 러시아였겠지만요.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외에, 추리적으로 건질건 없습니다. 내용을 보면, 17년 전 피해자였던 나가누마의 어린 아들이 장성해서 복수를 한게 뻔해 보이고, 새로 온 잡역부 청년 하라다가 마침 18살이라 수수께끼고 뭐고 이야기할게 별로 없네요. 오히려 하라다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지 않은 경찰의 무능함만 돋보일 뿐이에요.

추리 소설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순문학, 드라마를 그리고 싶었다면 좀 더 길고 풍성한 묘사가 필요해 보였던 작품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복귀 전날"

센도의 PTSD의 원인이 된 사건이 회자되며 센도의 완쾌를 알리는, 단편집의 대단원을 이루는 작품. 그러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추리적으로 대단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유미코의 전화는 도움 요청인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하루카가 진범이라는걸 드러내기 위한 목적의 밀고 전화였다는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이 역시 그렇게 의외의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화 내용이 사실과 달랐다면, 전화를 건 사람이 거짓말을 한게 당연하니까요. 오히려 왜 이렇게 밀고를 하려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라던가, 범행에 무언가 트릭이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내용도 없어서 이게 추리 소설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에요. 유미코의 동기는, 센도가 처음 만났을 때 손에 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라는 디테일과 하루카가 피해자인 나오와 남자 문제로 다투었다는 증언이 순차적으로 드러나니 그리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니거든요. 하루카의 범죄 역시,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나오를 죽이고 불에 태웠는지에 대한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그냥 그녀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정황 증거 정도만 추가될 뿐이라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도 않고요.

물론 이렇게 추리적으로 허술하다는게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차피 이 단편집 수록작 모두가 마찬가지이기도 하고요. 또 아는 사람, 잘 해주는 듯한 사람이 더 무섭다라는 명제를 잘 전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를 위해 억지로 센도를 엮었다는 점입니다.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모두 센도가 사건에 개입되는게 나름 이유가 명확한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미코 본인이 와인바 사장인 유키에가 겪은 일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중요한 단서가 될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걸 그냥 경찰에 제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구태여 센도를 중간에 연락책으로 사용할 이유가 없어요. 오히려 가족을 밀고한다는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람을 만들 필요도 없고요.

이렇게 시리즈를 위한 억지 투성이인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2/01/16

작가 형사 부스지마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윤수 : 별점 2점

작가 형사 부스지마 - 4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북로드

제목처럼 전직 형사이지만 은퇴 후 작가로 데뷰해 인기를 얻으면서, 형사 지도원으로 복귀한 부스지마가 신참 형사 아스카와 함께 작가들이 관련된 여러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단편 모음집입니다. 이런 저런 작품들로 많이 접해 보았었던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이지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극히 만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나가는 작가로 문학계에 정통하며 온갖 냉소와 비난을 사정없이 날리는 작가 형사 부스지마의 설정부터가 만화적이니까요. "부호 형사"와 별다를게 없는 과장된 설정입니다. 등장하는 편집자와 작가들에 대한 설정들도 억지가 느껴질만큼 과장되어 있다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사회파에 가까운, 묵직한 작품들을 선보였던 작가답게 마냥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출판계, 특히 작가들에 대해서 부스지마의 입을 빌어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건 나름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좀 부족했고, 이야기 구성이 대체로 한가지 패턴이라는 단점은 큽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간당간당한)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트릭과 진상, 범인을 모두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라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워너비의 심리 테스트" 소설 스메라기 신인상 1차 심사위원이었던 도메키가 자루없는 날카로운 알루미늄 송곳에 꿰뚫려 살해당했다. 용의자는 도메키가 심사평을 험하게 썼던 신인상 출품 작가들 3명 - 다다노 구스오, 오우미 히데오, 아이카와 시오리 - 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심문에 넌더리가 났던 아소 반장과 이누카이 형사는 신참 아스카에게 형사 지도원 부스지마의 도움을 받아 수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사건 설명을 들은 부스지마는 3명을 각각 만나, 그들 면전에서 더욱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데....

주요 설정과 등장인물들이 소개되는 시리즈 제 1작. 이 시리즈가 어떤 작품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스지마가 얼척도 없이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감만 가득차 있는 신인 작가들을 통렬하게 깨부시는 장면이 가장 핵심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추리적으로 빈약하다는 특징도 두드러집니다. "자루가 없는 알루미늄 송곳"이 화살인건 너무 명백하니까요. 이를 초반에 알아채서 이야기하지 않는게 더 이상했습니다. 부스지마가 용의자들을 도발해서 재차 범행을 시도하도록 만드는데, 범인이 이에 넘어가 부스지마를 죽이려 한다는 전개도 다소 유치했고요. 오우미 히데오가 기계 공작 회사를 다니다가 정년 퇴직했다는 정보를 이용하여 흉기를 추리해 낸 뒤, 가택 수사로 증거를 잡는게 더 추리물다왔을겁니다. 부스지마가 직접 표적이 되어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한다는 과장된 추리쇼는 불필요했을 뿐더러, 억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리 방탄복을 입었다고 한 들, 화살을 머리에 맞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신인 작가들에 대한 비난도 나름 새겨들을 부분은 있지만, 대상자인 3인이 안 좋은 신인 작가의 단점만 극대화하여 합쳐놓은 인물들이라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일관한다는 점에서, 만화적인 느낌을 부각시킬 뿐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편집자(編集者)는 편집자(偏執者)" 

편집자 마다라메 아키라에게 신인 작가들이 연이어 찾아왔다. 하고로모 사야는 데뷰 전 동인 작품의 출간을 막고자, 그리고 그녀 원고 속 트릭 아이디어를 반강제로 중견 작가에게 넘긴걸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덴도 구이치로 역시 항의가 목적이었다. 데뷰작에서 사용하라고 마다라메가 전해 준 트릭과 반전이 인기작가 아야메 작품을 베낀 것이어서, 덴도는 표절 작가로 낙인찍혀 작가 인생을 망쳤기 때문이었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출판, 문학계를 통렬히 비판합니다. 신인 작가들 약점을 쥐고,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폭언을 내뱉는 악덕 편집자 마다라메, 그리고 제대로 된 작가도 아니면서 자기 작품과 소설가라는 직업에 헛된 신념을 품은 신인 작가를 통해서요. 문단에서 라이트노벨 작가는 일회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등의 업계인스러운 이야기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 시선을 보자면, 편집자보다는 작가 문제가 훨씬 큰 것으로 그려져 이채롭더군요. 편집자가 작가와 이인삼각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가면 좋지만, 수익을 중시하는 편집자도 당연히 필요하다는게 나카야마 시치리의 논리거든요. 출판도 시장이니까요. 마다라메도 문제는 있지만,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는 측면으로는 우수한 직원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작가들은 일반인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자의식에만 쩌든 괴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덴도 구이치로는 아예 동정도 가지 않을 정도에요. 소설가라는 놈이 편집자가 제공한 트릭과 반전으로 글을 썼다면, 이건 작가가 아니라 그냥 대필 기계일 뿐이니까요. 이런 주제에 자기가 창작자다 뭐다 운운하며 뭔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욕을 먹어도 쌉니다. 조금 낫기는 하지만 하고로모 사야도 마찬가지에요. 또 이런 작가들이 단순한 비지니스 파트너에 불과한 편집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도 통렬하게 꼬집습니다.

다행히 이 작품은 비판 외에도 추리물로도 볼 만했습니다. 사용된 알리바이 트릭이 꽤 괜찮았거든요. 우선 하고로모가 흉기를 준비하고, 범행 현장인 호텔 지하 주차장까지 마다라메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범행 시각에는 너무나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듭니다. 그리고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던 덴도가 화장실을 가는 척 잠깐 자리를 비운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트렁크 안에 가두었던 마다라메를 찔러 죽이고 바로 돌아온 겁니다. 나중에 하고로모가 차를 회수하면서, 시체도 유기했고요. 꽤 그럴듯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호텔은 CCTV가 완벽하게 존재하는 곳이라는 거지요. 지하로 향하는 모든 입구, 엘리베이터와 주차장 CCTV만 조사해도 트릭이 드러나는건 순식간이었을 겁니다. 덴도가 호텔 바에 있었다는걸 검증하기 위해 경찰이 철저하게 수사했을테니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테고요. 그런 점에서 정교한 계획이라고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는 수사의 문제일 뿐, 트릭을 폄하하기는 힘들고 독자가 추리하기 위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는 만큼 별점은 2.5점 주겠습니다.

"상을 받긴 했지만" 

신인상 수상작가들에게 쓴 소리를 하던 노 작가가 살해된 사건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쓴 소리를 들은 작가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자의식 과잉으로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한 애송이들에 불과하고요. 부스지마가 풋내기들 정신 교육을 시킨다는 전개도 앞서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한마디로 원 패턴으로 일관하는 자기 복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리적으로도 최악이에요. 트릭이나 단서, 증거같은건 등장하지도 않거든요. 부스지마의 정신 공격(?)에 무너진 범인이 스스로 범행을 자백하는게 전부니까요. 작가들을 쓴 소리로 비판하면서, 본인은 이런 작품을 버젓이 발표하는건 무슨 정신머리인지 모르겠네요. 최악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애독자" 

작가 다카모리 교헤이 토크쇼 간담회에 3명의 독자가 참석했다. 한 명은 인터넷에 혹독한 비판만 올리며 즐거워하는 일종의 악플러인 구와에 도모미. 한 명은 다카모리 교헤이에게 강하게 연심을 품은 정신병자 스토커 마키시마 히나코. 마지막 한 명은 다카모리 교헤이에게 어떻게든 자기 작품을 보여주려고 발악하는 작가 지망생 가노 이쿠였다. 그리고 간담회 직후 다카모리 교헤이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여러모로 앞서의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는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작가가 아니라 작가에게 비틀린 애정을 품은 독자들이 주요 용의자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부스지마가 이 독자들에게는 독설을 날리지 않는다는 점이고요. 마지막 세 번째는, 범인이 따로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카모리 교헤이는 여자 관계가 복잡해서, 아내가 그를 살해했던게 진상이었습니다. 최신간 속지 부분을 뜯어내어 현장에 두었던건, 사인을 받았을 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 것이고요. 이 페이지만 뜯어진 채 시체 밑에 책이 놓여져 있던 것, 사인이 번지는걸 막기 위함인 간지가 현장에 없었던 것, 그리고 현장에 있던 책은 2쇄본이었는데, 2쇄본이 작가 서재에 없었던 걸로 보아 서재에서 꺼내온 책이라는 결정적 증거 등으로 진상을 추리해내는 과정도 합리적이었습니다. 이 중 간지가 현장에 없었던게 증거가 되기는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 외 내용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원 패턴이었던 전개를 탈피했다는데 점수를 주고 싶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스포일러 가득한 악담을 리뷰랍시고 올리는 구와에 도모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등장하는데, 살짝 찔리더군요. 저도 거의 모든 리뷰에 스포일러를 가득 담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는 리뷰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다는걸 더 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원작과 드라마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강이 있다" 

부스지마의 트리콜로 시리즈의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듀서 소네는 원작의 인지도만 원했기에, 주인공도 여자로 바꾸고 없던 러브라인, 해피엔딩을 추가했으며 핵심인 보험금 살인도 스폰서 눈치를 보느라 치정 살인으로 바꾸고 말았다. 결국 부스지마와 편집자 신보는 방송사 관계자와 담판을 짓는 자리를 갖고, 부스지마는 언제나의 말투로 이 모든걸 소설이나 기사 형태로 폭로하겠다며 관계자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소네는 살해당했고 부스지마도 용의자로 떠올랐다.

작가 지망생들보다는 TV 드라마 관계자들을 비웃고 비난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비판할 악당의 악행을 먼저 묘사해서 독자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킨 뒤, 부스지마가 면전에서 한 방 먹이는 방식은 전작들과 거의 같습니다. 한마디로 원 패턴이라 식상했어요. 

추리적으로도 건질게 별로 없습니다. 부스지마가 시나리오 작가 후세가 소네를 공격한 방법을 과거 드라마에서 찾아내는 등의 활약은 하지만, 후세와 신보의 발자욱을 현장에서 입수했기 때문에 추리로 범인을 밝혀낼 여지는 전무하니까요. 후세는 단순 폭행이었고, 실제로 질식사하게 만든건 편집자 신보였다는 추리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보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범행을 증명하기 쉽지 않았을겁니다. 기절한 사람을 돌려 놓으면 질식사 할 수 있다는 책을 함께 작업했다는 것 정도가 증거가 될 수는 없을테니까요.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2인 3각으로 작품을 만든 신보를 직접 고발하는 부스지마가 자기는 작가 이전에 형사였다는 멋진 말을 한 직후, 이를 소재로 작품 하나를 쓸 수 있겠다고 하는 장면은 부스지마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드러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져서 별로 자연스럽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4/03/05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엮음/시공사

아사쿠사의 건어물 가게에서 소비세 12엔을 내려 하지 않던 노인이 가게 주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말았다. 범인이 명확해서 사건은 쉽게 종결될 수 있었지만, 노인의 범행 동기에 석연치 않은 점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수사 끝에 사건이 30여 년 전 있었던 기이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시리즈.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사회파 추리소설과 같은 사회 고발 의식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범인인 나메카와 — 여태영이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된 조선인으로 본인과 가족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걸 드러내는게 작품의 핵심이라는 점이에서요. 여태영의 인생은 일본 때문에 그야말로 기구하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될 정도로 꼬일 대로 꼬여서 불행의 극을 달리기에 굉장히 처절한 느낌을 전해줄 뿐 아니라, 작중에서 "전쟁 탓이라고 해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도리에 어긋난 일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은 진정한 일등 국가가 못 될 것이다"라고 일갈하기까지 합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가 심각한 상황인데, 일본인이 사죄해야 한다는 글을 보니 작품 완성도와는 별개로 무척 반갑더군요.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감정이입이 용이하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또 "누명"이란 무리한 질서 유지 혹은 치안 유지의 결과로 경찰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지 않기 위한, 이른바 '일본인의 행복을 위해 행해지는 정의라는 명목의 불합리한 폭력'이며, 데이코쿠 은행 사건, 시마다 사건, 마루쇼 사건, 무레 사건의 범인들은 모두 누명을 썼다고 확신한다고 작중 인물인 하타노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점, 일종의 파시즘적인 광기를 비판하는 점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파적 사회 고발로 볼 수 있습니다. 단체로 광기를 벌이지 않으면 일본인은 타인을 죽이는 전쟁을 거국적으로 행할 기력을 일으킬 수 없는 인종이라고 단정짓는데 상당히 그럴듯했어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다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준다는 게 특이했는데, 홋카이도나 센다이는 물론이고 도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감성으로 접할 수 있으니까요. 첫 사건이 벌어지는 아사쿠사라던가 요시와라, 구레시타 노인의 산책길인 세이로카 병원 – 쓰쿠타오하시 다리 근처에 대한 묘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아사쿠사만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한 번 가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여행도 갔다 온 지 참 오래되었군요.

아울러 거의 50여 페이지에 걸쳐 에도시대 요시와라 유흥 문화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도 현학적인 측면에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요시키 형사가 피해자의 과거 근무처였던 요시와라를 탐문하며 요시와라와 에도시대 유곽 문화에 대해 설명을 듣는 식인데,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었거든요. "에도 일본"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상세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사회파, 여정 미스터리, 현학적 요소 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작가의 명성에서 기대했던 신본격 추리소설로의 가치는 기대 이하라 아쉽습니다. 무려 50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사건만 놓고 보면 스케일 크고 전개도 꽤 흥미롭긴 합니다. 열차 안에서 피에로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권총 자살을 하였는데 그 직후 시체가 사라졌다, 투신 자살로 머리가 잘린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다, 달리던 열차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가 기차가 탈선했다는 등의 상상하기 어려운 불가능 범죄가 연이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가능 상황에 여름벌레의 날갯소리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빨간 색으로 눈이 빛나는 거인이 보였다는 등의 기이함도 더해져 있고요.

하지만 밝혀진 진상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피에로 사건만 해도 여태영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는게 동기라는고 설명되데, 여태영은 그냥 도망쳤어도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여태명과 아라마사의 시체가 함께 발견되면 서로 싸우다 죽은 것으로 사건이 종결되었을 테니까요. 아니면 여태명의 시체만 중간에 숨기고 그냥 삿쇼선을 타고 도주하면 되잖아요? 어릿광대가 여태영이라는 게 밝혀지는 것도 아니고... 여튼 들인 노력에 비하면 얻은 게 별로 없습니다. 실제로 아라마사 사건의 경우 여태영은 용의선상에조차 오르지 않았으니 완벽한 뻘짓이었어요.

게다가 열차의 탈선은 순전히 우연이었고 거인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작중에서 "기발한 발상이 하늘을 움직인 결과"라고 설명될 정도로 우연에 기인한 현상으로, 불필요한 장치였습니다. 이야기의 복잡성을 더하기 위해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이에요. 어차피 독자가 여태영 – 여태명 형제의 존재를 알게 되면 투신 자살한 시체와 트릭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고요.

그 외에도 기차 시간표가 등장하지만 핵심 요소는 아니고, 오히려 공정한 추리를 방해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지도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탓에 핵심 트릭이 뒤늦게 밝혀지는데, 그 동네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법한 트릭이라서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게 외려 더 이상했습니다. 참고로, 조금 이채로웠던 것은 우시코시 형사가 요시키와 만나기 위한 편지에서 기차 시간표를 보고 어떤 기차 몇 호를 타라고 지정하는 문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뼛속까지 기차 시간표 형사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좀 웃겼어요.

마지막에 진상이 밝혀지니 나메카와(여태영)가 처음에 살인 사건을 저지르는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 없어진다는 것도 그닥입니다. 소비세 때문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하거나, 과거 사건의 복수 때문으로 밝혀지거나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아라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라면 어차피 공소시효가 지난 것일 뿐 아니라 당시 상황은 충분히 정상 참작을 받을 만한 것인데... 왜 치매에 걸린 것처럼 위장해서 입을 다물었는지가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습니다. 초절정 미소녀였던 사쿠라이가 30년이 지난 뒤 폭삭 삭아버린 것에 대해서 설명이 없는 것도 조금 의아한 점이었고요.

그리고 일본 연호로 연도를 표시한 것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국내 독자를 위해 모두 현대의 서력을 병기하여 주는 배려가 필요했습니다. 조금은 어색한 문체, 예를 들자면 "신호에 멈추어 섰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빨강이었다. 바람에 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벚꽃 냄새와 비슷했다. 따뜻하지만 희미한 광기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학생처럼 보이는 옆에 선 젊은이의 어깨 밑에 가려질 정도로 키가 작았다"와 같은 묘사는 신호에 멈춘 것과 벚꽃 냄새, 노인의 체구를 두서없이 나열한 느낌이고요. 보다 깔끔하게 "신호가 빨강이라 멈추어 섰다. 따뜻하지만 희미한 광기가 느껴지는 봄 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라는 식으로 정리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뭐 제가 문체를 지적할 수준의 전문성이 있는건 아닙니다만.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사회고발적인 성격은 높이 평가할 만하고 특히 강제 징용 조선인에 대한 부분은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시마다 소지의 또 다른 면을 접한 것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추리적인 요소가 500페이지나 되는 대장편치고는 알맹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그래도 일본인 작가가 반성의 의미로 쓴 "강제 징용된 조선인"에 대한 텍스트로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시마다 소지라는 작가에 대해 다시 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4/05/15

DC : 더 뉴 프런티어 1,2 - 다윈 쿡 / 임태현 : 별점 2점

DC : 더 뉴 프런티어 - 4점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시공사(만화)
DC : 더 뉴 프런티어 2 - 4점
다윈 쿡 지음, 임태현 옮김, 데이브 스튜어트 그림/시공사(만화)

"파커" 시리즈를 통해 기억해 두었던 작가 다윈 쿡이 만들어낸 새로운 DC 히어로 세계관 이야기. 1950~50년대를 무대로, 실제 역사와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섞어 선보이고 있습니다.

다윈 쿡의 작화는 역시나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DC 히어로물을 자신만의 세계에 당시 시대 분위기에 잘 녹아들도록 구현했거든요. 흑백 뉴스, 신문 기사, 심지어 그림책 등을 곳곳에 삽입하는 구성도 일품이었고요.

그러나 내용은 그닥이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와치맨"을 연상케하는 것도 문제고요. '매카시즘'과 같은 당시 정치적인 환경을 주요 배경으로 삼으면서, 정부측 히어로(슈퍼맨과 수어사이드 스쿼드, 챌린저스 오브 디 언노운 | 닥터 맨해튼과 코미디언)와 숨어서 활동하는 히어로(배트맨 | 로어샤크)가 나뉘고, 아에 은퇴 상태로 본업에 종사하게 된다던가(원더우먼 | 2세대 나이트 아울), 정부의 탄압 속에 체포되고 사망하는 히어로(아워맨 |모스맨)와 폭도들에 의해 사망하는 히어로(스틸 | 1세대 나이트 아울)가 생기는 등의 캐릭터 설정은 거의 판박이에요.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적의 침략으로 모든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대항하게 된다는 결말부는 "와치맨"에서 '오지만디아스'의 계획이 이루어진 세계관과 똑같다는 생각만 들었고요. 게다가 "와치맨" 만큼의 정치적인 메시지나 사회 비판 요소는 포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는 판에 박힌 내용이에요.
결론적으로, 약간 팩션 느낌으로 가공한 히어로물의 한 변주일 뿐입니다. 

마션 맨헌터 존 존스와 그린 랜턴 할 조단, 그리고 플래시 배리 앨런의 비중이 높은 편인데, 이 역시 "와치맨"가 비교하면 많이 별로였습니다. 존 존스와 할 조단은 영웅으로 거듭나기 이전의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영웅이 되는 과정에서의 고민이라던가, 현재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의 갈등은 거의 그려지지 않아서 이야기 주제와 따로 노는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플래시 배리 앨런이 히어로를 은퇴하기로 결심한 장면은 너무 뻔했고요.
현재 사회의 가장 큰 갈등 상황 중 하나인 인종 차별로 인해 탄생한 히어로 스틸 존 헨리 이야기가 그나마 주제와 가장 잘 맞아 떨어졌는데,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짤막한 소품일 뿐이라 아쉬웠습니다. 이 이야기만 단편으로 따로 내는게 훨씬 좋았을거에요. 결말까지 완벽한 걸작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은데, 기대만큼 신선하거나 새롭지는 않아서 감점합니다. 애니메이션이나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2021/02/13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레너드 카수토 / 김재성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10점
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뮤진트리

부제는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사"입니다. 말 그대로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의 역사적 변곡점,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고 있는 문학사 서적이지요.

간단하게 정리해본다면, 하드보일드의 통로 역할을 한 작품으로 소개된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입니다. 가족과 신앙이 도덕적 삶의 기초이고 중심이었던 19세기 모델에서 산업화, 도시화로 급변한 20세기 초 지극히 미국적인 범죄 행위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 전통적 가족 모델이 서서히 해체되는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 대쉴 해밋"몰타의 매"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신뢰의 결핍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기업화와 함께 찾아온 사회 경제적 변화 때문이지요. 당시 석유 회사에서 시작된 '트러스트' 체제 등장으로 가족 메타포가 기업 세계로 편입되었고, 기업 관행이 모든걸 지배했던 세계입니다. 그 결과, 전통적 가족 관계는 붕괴하고 이기적 개인들이 가족 유대 관계와 의무에서 벗어나 공감따위는 저버리고 돈만 쫓아 날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돈과 신뢰가 위험한 세상에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고, 샘 스페이드가 매로 상징되는 '투기'를 거부하는 모습은 1929년 주식 시장 폭락을 반영하며, 매 조각상이 가짜라는건 투기 역시 환상이라는걸 의미합니다. 광란의 투기 경제에 대한 해밋의 비판적 시각을 잘 알 수 있지요. 또 주목할만한건 '진짜 남자'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쉴 해밋은 남자를 남자로 만드는건 정당한 보수를 받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페이드는 직업을 잃을 어떤 모험도 하지 않고요. 반대로 부자들은 무르고 기괴하게 여성적입니다. 돈 많은 악당들을 여성화하여 폄하한 겁니다.

그리고 대공황 시대를 잘 드러내는 작품은 제임스 M 케인의 "밀드레드 피어스"입니다. 하드보일드와 감상주의가 결합된 작품이지요. 밀드레드는 감상주의에 빠져 완벽한 가족을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 딸과의 관계가 파괴된 후 술에서 위안을 찾는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결말로 가정사는 더 이상 여성 공동체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걸 알려줍니다.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으로 급작스럽게 모든게 변한 탓입니다. 뉴딜은 현대 복지 국가라는 개념으로 가족이 수행했던 보호 관리 역할을 정부가 맡아 수행했기 때문에 공감과 감성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여성은 뒤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 하드보일드 소설은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 관료주의가 가정과 사회의 도덕적 중심이라는 자리를 차지했고요.

대공황 이후 가족은 위협받고, 남성은 남성상의 기본 토대인 가족 부양자로서의 정체성이 몰락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탄생한게 완벽한 남자 필립 말로입니다. 위협받던 남성상과 파편화된 가족을 구하는 영웅으로, 배트맨과 슈퍼맨 탄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말로는 무너진 의뢰인이나 관계자들 가족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감상적이고 선한 영웅이거든요. 이는 구시대 하드보일드 태동기의 냉혹한 회의주의와는 정 반대 모습이에요. 가정이 중심이 되며,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1950년대에 접어들면, 말로는 더 깊숙이 사건에 개입하고, 더 정서적으로 엮이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기나긴 이별"로 말로는 일이 아니라 일의 수혜자에게도 충성합니다. 이거야말로 감성적인 부분이지요. 이렇게 1950년대에 과도한 남성상을 지닌 폭력적인 마초가 부드럽고 감상적인 영웅으로 변한건 냉전 시기, 강한 미국과 안정된 가정이라는걸 유지하려는 분위기 탓으로 설명됩니다. 가장 끔찍했던건 사회 질서의 붕괴를 뜻하는 여성의 일탈이었고요. 그 덕분에 이 때 진정한 의미의 '요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순위를 매기자면, 일하고 능력있는 여성도 나쁘지만, 동성애자는 전통적 가족의 대립항이라 훨씬 더 나빴고, 무엇보다도 잠재적 어머니 역할을 고의로 방기하는 여성 동성애자는 최악 중 최악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짐 톰슨은 풍요 속 공포와 우려를 표현했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고향에서 뿌리를 잃은 도덕적 불안을 작품에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두 작가 작품 속 주인공들 모두 피해자들에 대한 감상주의적 공감이 최대의 능력으로 묘사되며, 감상주의를 중산층에서 분리해서 상류층에 국한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주의가 위험하다는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특기할 만 합니다.

1960년대 들어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더욱 친절해지고, 범인들은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탐정들은 가정을 중시하는 감상주의자에 심지어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페미니스트이기도 할 정도로요. 이 시기, 로스 맥도널드는 무너지는 가족 관계를 그렸는데, 모자간 결합의 단절을 통해 부모들의 책임 회피와 피해자는 아이들이라는걸 나타내었습니다. 이는 반항하는 자녀와 무력한 부모라는 1960년대 세대간 갈등을 극명하게 투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젊은이들의 신뢰를 받고 파괴된 가족을 복원해주는건, 연민, 공동체적 결속과 공감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폭력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는 사립 탐정이고요. 이렇게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립 탐정 속성의 변화는 여성 탐정들을 등장시킵니다. 반면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이 된 범인들은 결국 연쇄 살인범으로 진화하였습니다. "레드 드래곤"이 연쇄 살인범 소설의 교과서적 캐릭터와 기본 플롯을 제공한 뒤, 포화상태를 넘어서 공급 과잉상태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20세기 후반 미국 정부의 정신질환 정책과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신질환자가 공감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괴물로 변한 뒤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으며, 연쇄 살인범은 이 대상화 작업에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현대 연쇄 살인범 소설까지 큰 흐름을 일람하고 있으며, 흑인 범죄 소설과 같은 특이점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미국 근대사와 범죄 소설의 흐름이 절묘하게 일치하는게 신기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대표작에 대한 소개도 상세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문제라면 저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던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이나 탐정 스펜서 시리즈에 대한 호평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책에서 소개하는, 제가 읽지 못한 다른 작품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할 수 밖에 없지요. 60년대 이후 범죄 소설의 흐름에 대한 소개는 별로 자세하지 않다는 점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장르에 대한 문학사이자 비평서로서 재미와 가치 모두를 충족시키는 좋은 책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와 범죄 소설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리뷰를 쓰기 어려웠어요.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삼아 읽기 시작했던게 문제였습니다. 약간은 공부하듯 분석하고 정리해야 내용 요약이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리뷰로 이 책을 잘 소개하지 못한건 다 제 공부가 부족한 탓입니다....

2021/11/07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5점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소설 자체를 풍자했던 "명탐정의 규칙" 시리즈에 이은, 히가시노 게이고블랙 코미디 풍자 단편 모음집입니다. 이번에는 추리 문단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 즉 작가, 독자, 편집자, 평론가 모두를 비판하고 풍자합니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작가, 잘 팔리기 위한 화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집자, 제목과 약간의 설정만 다른 똑같은 작품을 유명 작가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하는 독자들. 책의 완성도 따위는 관심없고, 쉽게 돈 벌 생각에, 생각과는 다른 평론을 써 제끼는 평론가가 등장하거든요. 2001년 발표작이라는데, 데뷰한지 15년이 지났고 여러 히트작으로 업계에서 탄탄한 지위를 굳힌 히가시노 게이고였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만큼 과격한 풍자가 많습니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작가를 풍자하는건 "세금 대책 살인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추리소설가 '나'가 막대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고액의 영수증을 비용 처리하려고 원래는 홋카이도가 무대인 소설에 하와이를 집어 넣고, 여러가지 옷을 구입한 이유와 골프 비용 등을 집어 넣으면서 작품이 산으로 가게 만든다는 내용이니까요. 소설을 어떻게 바꿔 썼는지가 자세히 등장하는데, 이게 굉장히 웃기더라고요. 결국 '나'의 작품은 망해서 연재마저 끊기고, 세금 대책에도 실패한다는 결말이고요.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블랙 코미디 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서점의 명탐정" 수록작이었던 "일상 업무 탐정단"에 소개되었던 작품인데, 이렇게 읽게 되어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잘 팔리기 위한 화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집자는 "장편소설 살인사건"에 등장합니다. 긴쵸사의 편집자 오기는 그는 '초대작' 이어야만 팔린다고 작가 구주하라 만타로를 꼬드겨서, 800장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2,000 장으로 늘려버립니다. 별 거 아닌 문장을 몇 배로 늘리고, 쓸데없는 묘사를 덧붙이는 식으로요. 게다가 신작 "커브볼"은 3,000장을 목표로 작품과는 상관도 없는 정보를 다수 삽입하여 분량을 늘려가다가, 결국 '무게'로 승부하고 만다는 황당무계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말지요.
구즈하라가 작품 길이를 늘리기 위한 분투를 상세히 묘사한 내용은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알맹이는 없는데, 이상하게 긴 대작 장편이 많은건 저도 불만이었는데, 정말로 이런 짓거리가 벌어진게 아닌가 의심스럽군요. 

"마카제관 살인사건"은 아주 짤막한데, 편집자에게 휘둘려 본의아닌 작품을 쓰게 되었던 작가의 절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편집자를 풍자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작가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자기가 썼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연재 소설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90대 고령 치매 작가 야부시마 기요히코가 등장하는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은, 제목 그대로 '고령화'가 닥친 추리 작가의 비극(?)을 그려낸 블랙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자들을 비판하는 작품이에요. 야부시마 기요히코가 엉망인 작품을 쓰면서도, 심지어 이전에 출간했던 작품과 같은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팔리는 이유는 독자들이 유명 작가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하기 때문이거든요. 독자들도 고령이라 전작을 다 잊었다는 식으로 끝맺기는 하는데, 전작을 잊지 않았더라도 현실에서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독자로서 반성하게 되더군요.
예를 들어 요코미조 세이시의 "삼수탑"은 "여왕벌"의 자가 복제에 불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발표될 수 있었던건, 이름값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소비하는 독자 탓도 분명 크다고 생각됩니다. 

"이과계 살인사건"은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읽은 척, 잘난 척을 해대는 매니아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 역시 추리 애호가로서 많이 와 닿았습니다.

"독서 기계 살인사건"은 책을 읽지도 않고, 편집부 요청대로 호평과 혹평을 써갈기는 평론가 몬마가 주인공입니다. 이는 '쇼혹스'라는 기계를 구입한 덕에 가능했었지요. 쇼혹스를 만든 회사는 쇼혹스를 평론가들과 출판사에 팔아먹은 뒤, 쇼혹스의 비평을 최고 점수로 통과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는 쇼혹스 킬러를 만들어 작가 지망생들에게 팝니다. 마지막 제품은 일반인용의 시타카브릭스로 책의 요약과 재미있고 지루한 부분을 알려주는 장치였고요.
단순히 평론가들만 비판하는건 아니고, 책을 읽지도 않는데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책이 팔리지도 않는데 베스트셀러가 발표되고, 일반 독자는 알지도 못하는 상이 들어나는 등 책은 사라지고 있지만 책을 둘러싼 환상만은 요란한 현 세태를 풍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컨텐츠가 넘쳐나서 사람들이 책을 예전만큼 읽지 않는건 명확한 사실인데 차라리 시타카브릭스같은 장치가 상용화된다면 팔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줄거리는 물론 스포일러까지 가득 담고 있는 제 리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한데, 조회수를 보면 이나마도 안 읽는게 요즘 세태가 아닌가 싶어 좀 씁쓸하기도 하네요.

이런 블랙 코미디나 풍자극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 외에도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이 그러합니다. 유명 작가 시마부쿠로는 직접 쓴 추리 소설 '문제편'을 해결하는 편집자에게 신작 장편을 넘기겠다고 말하고, 각 회사 편집자들의 두뇌 싸움 끝에 긴초샤의 가타기리가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시마부쿠로가 쓴 신작 장편 따위는 없었습니다. 얼마전 죽은 그의 아내가 진짜 작가였기 때문으로, 시마부쿠로는 아내가 남긴 소설 문제편의 해답을 알 수가 없어서 편집자를 동원했던 겁니다. 즉, 어떻게든 돈벌이를 만들기 위해 있지도 않은 장편을 걸고 편집자를 이용한거지요.
악덕 작가의 표본처럼 묘사되는 시마부쿠로를 통한 적절한 풍자도 인상적이었지만, 편집자가 그럴듯한 해답을 추리해 낼 수 있게끔 문제편에서의 단서 제공이 완벽한 덕분에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로 보아도 충분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예고소설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마쓰이 기요후미는 매 화마다 제복을 입은 여자가 살해되는 작품을 연재하는 인기없는 추리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쓴 내용대로 실제로 제복을 입은 여자들이 살해되기 시작하고, 마쓰이의 작품도 덩달아 큰 인기를 얻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마지막 화에 범인이 '자살'한다고 쓴 마쓰이는, 범인과 대결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하는데 그 탓에 범인으로 몰리고 만다는 결말입니다. 마쓰이는 중반 이후. 범인과 결탁해서 원고를 썼기 때문에 돈벌이에 골몰하는 작가를 풍자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풍자보다는 일종의 범죄물에 가까왔던 작품이에요.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코미디이자 풍자극으로도 재미있지만 정통 추리적인 요소도 없지는 않은 만큼, 독특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추리 문학 애호가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9/01/19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 나카야마 시치리 / 김윤수 : 별점 2.5점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엽기적인 살인 범죄가 잇달아 일어났다. 사건 담당 형사 고테가와는 과거 성범죄 등을 일으켰던 우범자 수사 중 알게 된 우범자 도마 가쓰오와 그의 보호 관찰관 우도 사유리와 친분이 생겼지만 우도 사유리의 아들 마사토가 세번째 피해자로 발견되었다. 피해자들의 성이 아-에-이.. 순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급기야는 우범자 명단을 내 놓으라며 경찰서까지 습격했다. 시민의 습격을 막던 고테가와는 시민들이 도마 가쓰오를 노린다는 우도 사유리의 전화를 받고, 그를 구하려 반장 와타세의 도움을 받아 경찰서를 나서는데...

저자인 나카야마 시치리는 2010년 "고노미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대상을 받으면서 데뷰한 작가입니다. 이력을 봤더니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쏟아내었더군요. 하지만 잘 모르는 작가이고 제목도 전혀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던 차에, 어디선가 괜찮은 작품이라는 리뷰를 얼핏 보고 출장 중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괜찮은 부분이 많네요. 우선 엽기적인 범죄극에 형법 39조에 대한 비판이 곁들여져 사회파스러운 느낌을 주는게 좋습니다. 저 역시도 최근 일어나는 흉폭한 범죄에 대해 더 강하게 단죄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심신 미약이었다던가, 단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형을 경감해준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짐승은 짐승답게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이 회복해서 사회에 복귀하는걸 막자는건 아니지만, 그들의 회복을 지원하고 기다려주는건 죗값을 치룬 다음이어야 합니다.
이 작품은 절대로 회복되지 않고 다시 살인마로 돌변하는 정신 이상자와 그들의 끔찍한 범행 묘사를 통해 이에 대한 메시지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줍니다. 참고로 제목의 "개구리 남자"는 범인이 개구리를 잔혹하게 가지고 노는 어린 아이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인데, 그만큼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범행이 이어집니다.

전개도 탄탄하고 세련된 편입니다. 대표적인게 도마 가쓰오와 이름이 비슷한 나쓰오라는 소년의 과거 일화를 조금씩 소개해주면서 도마 가쓰오가 범인이 아닐까? 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주는 과정입니다.
물론 나쓰오가 저지른 미카 살인 사건은 이미 앞부분에서 도마 가쓰오의 범행으로 소개된 '교살'이 아니라서 나쓰오는 도마 가쓰오가 아니라는게 밝혀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미카 사건 직후, 시민의 한노 경찰서 습격이 몰아치기 때문에 고테가와가 도마 가쓰오의 집에서 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증거를 포착한 뒤 도마 가쓰오와 생명을 건 사투로 이어지는 과정은 위화감없이 진행됩니다. 경찰서 습격 장면 묘사는 그만큼 임팩트가 넘쳐서 독자가 딴 생각을 하기는 힘든 덕분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비록 본격물 수준의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건 아니지만 범죄 스릴러물로서의 완성도는 충분합니다. 특히 도마 가쓰오가 범인이었다고 마무리되는게 아니라 이 뒤에도 무려 두 번이나 반전!이 더 있다는게 돋보입니다. 단지 깜짝 반전이 아니라 나름대로 설득력도 높습니다.
첫 번째 반전은 우도 사유리가 진범이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근거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네 번째 피해자 에토 가즈요시가 남긴 물어 뜯은 듯한 상처, 그녀가 과거 범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는 묘사, 보험금 등 받을 수 있는 돈과 그녀의 주택 대출금이 일치한다는 등 여러가지 복선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나쓰오였다는 진상은 살짝 서술 트릭 느낌도 들고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부상을 입은 채 우도 사유리와 맞서 싸우는 고테가와에 대한 묘사는 "검은 집"의 절정부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마지막 반전인 오마에자키 교수가 흑막이었다는 결말도 좋습니다. 이 쪽은 증거보다는 형법 39조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가 와 닿은 덕입니다. 우도 사유리와 같은 단순히 "돈" 이라는 측면 보다는 훨씬 그럴듯했고, 사회파 소설다운 느낌을 전해주어서 괜찮더라고요. 결국 풀려나게 된 도마 가쓰오가 자신이 "개구리 남자" 임을 자각하고 아-이-우-에-오 순으로 오마에자키 교수를 죽이러 가겠다고 결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의 에필로그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경찰서 습격 이후의 묘사가 장황하고 강약조절에 실패하고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경찰서 습격에서 이미 한바탕 클라이막스를 거치고, 다시 도마 가쓰오와 고테가와의 목숨을 건 사투가 이어진 후, 또 다시 우도 사유리와 어둠 속에서 결전을 벌이는 식으로 강-강-강으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덕분에 가장 중요한 우도 사유리와의 결전은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합니다. 목숨도 한 번 걸어야지 세 번이나 연속으로 걸면 값이 싸 보이게 마련이니까요.
오마에자키 교수의 동기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득력은 높지만 그가 우도 사유리를 다시 범죄로 인도했다는 이야기는 영 와 닿지 않아요. 사람의 정신과 기억을 마음대로 복사하고, 집어넣을 수 있다는건 너무 허황된 이야기였어요. 설령 그녀의 악마성을 깨워 아들 살해까지 유도했다 하더라도, 에토 가즈요시를 살해한 이유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결국 도마 가쓰오가 범인으로 드러날 판인데 위험을 무릅쓸 이유는 없잖아요? 사유리가 오마에자키 교수가 지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지 않은 이유 역시 불분명하고 말이죠. 싸이코 연쇄 살인마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도 석연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서스펜스 넘치는 전개에 더해 몇 번의 반전까지 제공한다는 점과 형법에 대한 비판 정신만큼은 괜찮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서스펜스가 지나쳐 표류해 버리는 후반부는 아쉽지만 추리, 스릴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최소한 킬링 타임용으로는 충분한 수준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024/09/07

오렌지와 빵칼 - 청예 : 별점 2점

오렌지와 빵칼 - 4점
청예 지음/허블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벗어나지 않게 순종하며,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따라하며 모든걸 속으로 삭이며 살아가는 유치원 교사 오영아는 심리 상담을 통해 전두엽 기능을 일부 조절하는 시술을 받았다. 그 뒤 영아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고, 억압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모든 금기를 범하며 엄청난 쾌락을 얻는다. 그러나 시술 효과는 4주만 지속될 뿐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금기를 범하는, 도덕에 반하는 행동(배덕의 맛)은 쾌락을 주지만 이는 마약과 같다는 설정의 일상 심리물. 

뇌를 건드려 사람이 변모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많습니다. 전두엽 절제로 멀쩡한 사람을 로봇처럼 만든다던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혹성탈출 1" -, 아니면 바보를 천재로 만드는 - "앨저넌에게 꽃을", "론머맨" - 식으로요. 이 작품처럼 자기 통제를 없애는 설정은 뇌 조작으로 사악한 범죄자를 사회 규범에 충실하게 만드는 "시계 태엽 오렌지"의 반대 버젼이고요. 사회 비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비슷합니다. 다들 자기가 옳다고 믿지만, 그걸 타인에게 강요하는건 잘못되었고 이런걸 추종하지말고 자기 자신의 뜻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용이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자기 통제, 죄의식을 없애는 설정이라면 SF나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에서 완벽한 군인이나 범죄자, 혹은 킬러를 만들 때 써먹음직 한데, 이를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풀어나간건 분명한 차별화 요소입니다. 사회 비판적 요소도 공정무역, 환경보호와 친환경, 기부 등과 같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소소한 것들이라 신선했어요. 이런 작품이 체제와 제도의 비판을 하지 않는건 거의 처음 본 것 같네요.
덕분에 신선한 느낌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온갖 통제에 얽매여 살아가는 오영아의 답답한 모습에서,시술 후 통제를 다 부숴버리고 자신을 힘들게 했던 주변인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묘사는 통쾌했고요.

그러나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서 극도의 쾌락을 느낀다는 핵심 설정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 쾌락을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한 탓입니다. 자기 통제가 강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오영아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상황인지도 모르겠고요. 영아의 연인 수원도 피실험자로 영아를 희생양삼아 공짜 시술을 받은 듯 한데, 평상시에 철저한 자기 관리와 영아에 대한 지극정성을 보여준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수원이 은우의 친부였다는 일종의 반전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의 결말도 아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어딘가의 추천에서 접해서 읽어보았는데, 저는 그닥이었습니다. 기대했던 '장르 문학'은 아니었던 탓이 가장 큽니다.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07/03/25

살육에 이르는 병 - 아비코 다케마루 / 권일영 : 별점 3점

살육에 이르는 병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시공사

가모우 미노루는 우연히 한 여대생을 교살하고 그녀를 범하는 것의 쾌감을 깨닫게 된 이후 폭주해 나가는데 그런 그의 마수에 은퇴한 경부 히구치를 사모하던 간호사 도시코가 걸려든다. 도시코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히구치와 도시코의 동생 가오루는 힘을 합쳐 범인을 잡으려 하는데...

-주의 :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입니다-

일본 신본격 대표 작가중 하나라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대표작. 지인이신 decca님이 고맙게도 도움을 주셔서 받게 된 책입니다.

여러모로 전에 읽었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하고 유사합니다.
일단 두 작품 모두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벚꽃지는..."은 악덕 판매 조직을 파헤치고 이 작품은 "아버지 부재"의 일본 사회를 비판하고 있죠. 또한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작중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입시킴으로서 소재와 이야기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맛이 뛰어나다는 점도 동일합니다.
아울러 주요 캐릭터의 시점으로 단락이 진행되고, 각 단락을 짜맞추어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진행 방식도 유사합니다. "벚꽃지는..."이 2명이라면 이 작품은 살인범 가모우와 어머니 마사코, 은퇴한 형사 히구치 3인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긴 하지만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작품이 닮아보이는 이유는 반전의 존재입니다. 두 작품 모두 그야말로 "반전에 죽고 반전에 사는" 작품이죠. 반전의 성격도 유사해서 "벚꽃지는.."은 주인공 나루세와 사쿠라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이라면 이 작품은 범인인 가모우 미노루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 반전인데 정말로 뜻밖이며 큰 놀라움을 안겨다 줍니다. 사실 살인범의 정체에 대한 반전은 고전 "싸이코"부터 이어져온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이 작품의 마지막 한페이지로 모든 것이 밝혀지는 반전은 다른 비교대상과의 논쟁이 무의미할만큼 워낙 뛰어난 탓에 일본 아마존 서평대로 저도 앞에서부터 다시한번 읽어가며 작가의 장치를 다시금 점검하는 절차를 거쳤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고 복선과 설정이 완벽한 것이 정말 대단하다 생각됩니다. 아울러 두 작품 모두 반전이 묵직하게 작품의 기본적 사회파적인 설정을 웅변하고 있고요.

하지만 단점 역시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반전을 의식한 탓에, 즉 주인공이자 살인범인 가모우 미노루의 정체를 감춰놓았다가 드러내는 것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장치이기에 이것을 설명해 나가는 부분에 있어서 작위성이 드러나며, 또한 전적으로 소설적 장치 (해설에 따르면 "텍스트 트릭") 에 의존하고 있어서 본격 추리적인 요소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은 추리 매니아로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점은 큰 단점은 아닙니다. 정작 문제는 잔인한 묘사에요. 네크로필리아 가모우의 범행에 대한 묘사는 이 책이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받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디테일하고 잔인합니다. 못지않게 잔인한 책도 많이 있다지만 이 책만이 이쪽 쟝르에서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공식적 19금 금서지요. 솔직히 저는 읽으면서 굉장히 역겹기까지 했고, 이러한 파괴적인 범행에 대한 반복된 묘사 때문에 마지막 반전의 충격이 강하게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감각이 좀 둔해졌다고나 할까요?
다른 예를 들자면 제가 이른바 천재라는 클라이브 바커의 책을 싫어하는 이유가 그의 상상속의 지옥을 간접체험하기가 싫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이토 준지의 책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 책은 그들 못지않은 만만찮은 아우라를 뽐내고 있어서 다시 잡기가 많이 꺼려집니다.
번역자조차 이 책의 목적이 "끔찍한 장면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다시금 강조하고 있지만 저는 유감스럽게도 끔찍한 장면묘사가 더욱 기억에 강하게 남네요. 최소한 이렇게 적나라하게 묘사했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전혀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검은집"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해되지만 말이죠.

이러한 잔인성 때문에 재미는 있지만 추천하기도 난감하고, 외려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 수록 추리문학이라는 쟝르에 악영향을 끼치지나 않을까 우려됩니다. 신본격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책을 내고 싶었다면 보다 착하고 안전한 작품을 선정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이 책을 선정하여 발간한 시공사와 decca님의 용기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별점은 3점 이상 주기 어렵네요.

PS : 번역과 주석은 완벽한 수준이라 책의 재미를 더합니다.

2005/08/06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1 - 제프리 디버 엮음 / 홍현숙 : 별점 2점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1 엘러리 퀸 외 지음, 제프리 디버 엮음, 홍현숙 옮김/황금가지

여름 맞이 특별 구입한 책 중 첫번째로 읽은 책입니다. 제프리 디버가 직접 선정한 앤솔로지로 총 3권 시리즈 출간 예정이라고 하는군요.

실린 작품은 연대와 장르, 작가별로 꽤 공정한 편이라 마음에 듭니다. 작가도 유명한 작가는 엘러리 퀸 한명 뿐으로 나머지 작가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많은 작품이 번역된 작가들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수록 작품들 모두 국내 초역된 작품이라는 것도 좋았고요. 개인적인 베스트는 리사 스코토라인의 "숨겨 갖고 들어가다"와 얀윌렘 반 드 비터링의 "힐러리 여사" 였습니다. 두 작품 모두 추리적으로 우월하다기보다는 외적인 재미와 독특함, 신선함을 많이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라 추천할만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작품의 완성도나 수준은 기대 이하였어요. 기대가 큰 탓도 있겠지만 이런저런 장르와 주제를 가지고 작품들을 선정하다 보니 오히려 한 곳에 집중한 결과물 보다 깊이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이런저런 수상작 모음 앤솔로지, 아니면 특정 작가의 대표작을 모아 놓은 앤솔로지들보다는 뒤떨어지는 기획이었다 생각됩니다.
번역에도 약간 문제가 있어서 쉽게 읽히지 않으며 직역에 가까운 느낌도 드네요. 심각한 오류는 없지만 서문에서 에드워드 D 호크를 "호치"라고 번역한 것 같은 것 같은 작은 실수도 눈에 좀 띄고요.

물론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취지와 가치는 변함이 없고 제프리 디버의 취향이 제 취향이 아니었을 수는 있지만 이러한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울러 330여 페이지라면 웬만한 장편 한편 분량인데 너무 두꺼운 종이의 선택, 그리고 큼직한 본문의 행간 탓에 다른 책들보다 크고, 두껍고, 무거운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정도 두께면 종이만 잘 선택한다면 3권으로 출간될 분량을 2권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에드가상 수상 단편집 시리즈와 비교해 본다면 페이지수는 비슷하지만 에드가상 수상 단편집은 두께는 이 책의 2/3 정도이고 실린 작품은 최소 9편에서 최대 13편까지 실려 있는데 이 작품은 달랑 8편만 실려있을 뿐입니다.
종합적인 면에서 황금가지에서 책을 시리즈로 여러권 출판하려는 얄팍한 상술로 밖에는 보이니 않아 씁쓸합니다.

수록 작품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황태자 인형의 모험 - 엘러리 퀸
크리스마스 이브, 입슨양의 유언으로 전시하게 된 인형 컬렉션 중 딸려있는 다이아몬드로 인해 제일의 가치를 지니는 황태자 인형을 유명한 도둑 코모스가 훔쳐가겠다는 예고장을 보내온다. 퀸 경감과 엘러리는 코모스를 막기 위해 직접 전시장을 지키지만 전시회가 끝날때 인형이 가짜로 바꿔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엘러리 퀸 작품에서 괴도가 나오는 것은 처음 접해본 것 같습니다. 김전일과 괴도신사의 대결 같은 작품이네요. 제목만 본다면 "모험" 시리즈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 내용은 어떻게 훔쳤는지, 그리고 방법을 밝혀낸 직후 범인이 누구인지까지 알아내는 전개인데 훔치는 방법이 좀 더 기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읽기에는 약간 시시한 방법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범인을 짐작하기가 쉬웠던 점이 좀 아쉽네요.

사라진 13쪽 - 안나 카타린 그린
저주받은 저택으로 유명한 밴 브루클린 저택에서 중요한 서류가 없어지고 다음날 결혼하게 되는 코넬이라는 인물이 유일한 용의자로 의심받게 된다.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져는 서류가 없어지게 된 방법을 알아내고 저택의 저주받은 방을 지나가 서류를 되찾아 오지만 이 과정에서 저주받은 방에서 일어난 과거의 비극적 사건의 진상까지 알아낸다.
추리소설의 어머니라고 불리운다는 안나 카타린 그린의 작품입니다. 국내에 거의 처음 소개되는 작가와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 내용면으로는 그다지 기발하거나 신선한 부분은 없습니다. 전혀 다른 2개의 이야기를 하나의 단편으로 엮어 놓은 시도는 좋았지만 작품이 전반부는 서류 도난 사건, 후반부는 밴 브루클린의 저주에 대한 진상으로 확연히 나뉘고 있어서 하나로 융합되지도 못했고요. 소품에 가까운 작은 사건인 서류 도난 사건보다는 괴담 분위기의 저주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었었는데 이것만 가지고 보다 보강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딕슨 카 스러운 작품이 하나 나왔을텐데...

숨겨갖고 들어가다 - 리사 스코토라인
변호사 톰은 중요한 사건 재판이 있는 날 아내에게서 쌍동이 딸 중 한명인 브리타니를 억지로 떠안게 되고 여러가지 사건이 겹쳐 딸을 몰래 숨긴채로 재판까지 참석하게 되는데...
이 책에서 저의 베스트 중 하나입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와 작품인데 빠르면서도 긴박한 전개에 유머까지 곁들인 센스가 아주 뛰어납니다. 법정 재판 장면에서의 역전극도 통쾌하고요. 읽는 내내 시종일관 웃음을 놓치지 않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배트맨의 협력자들 - 로렌스 블록
매트 스쿠더는 동료들과 함께 시내 불법 노점상에서 허가받지 않은 불법 복제된 배트맨 상품을 압수하는 일에 투입된다...
매트 스쿠더 (스커더)가 등장하는 로렌스 블록의 단편인데 저는 아무리봐도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사회 비판 의식이 들어있긴 한데 서스펜스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왜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주말 여행객 - 제프리 디버
잭과 토스는 드러그 스토어를 강도질 하다가 실수로 총기를 난사해서 경찰을 비롯한 여러명을 죽인 뒤 인질을 한명 잡아 도주하게 된다. 인질은 웰러라는 세일즈 맨으로 토스까지 죽인 잭을 설득시켜 일종의 게임을 제안하는데...
편집자인 제프리 디버의 단편입니다. 납치범 잭의 심리 묘사는 탁월하나 반전이 좀 시시해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그 여자는 죽었어 - 프레데릭 브라운
부유한 사회학 석사 출신의 하위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LA에 정착한 상태. 그는 접시닦이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매춘부인 여자친구 빌리와 더불어 나름 행복한 삶을 꾸려나간다. 그러나 빌리의 위층에 사는 메이미라는 여성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몰리게 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프레데릭 브라운의 독특한 작품으로 그간의 작풍과는 무척 달라 보이네요. 대작가답게 단편이지만 캐릭터 설정 및 묘사, 그리고 복선이 확실한 편이며 이야기도 제법 탄탄합니다. 하지만 내용 전개가 우연에 기인하는 것이 많고 정통파 추리작품은 아니라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어요.

원칙의 문제 - 맥스 알런 콜린스
전직 킬러로 지금은 은퇴한 쿼리는 파라다이스 호 주변에서 운둔하며 지내지만 우연히 야식을 사러 갔다가 해리라는 전직 범죄자 친구를 알아보고 그를 미행해서 해리와 루이스 컴비가 시카고 언론 재벌의 상속녀를 유괴한 것을 발견한다.
주인공의 카리스마 있는 묘사가 압권인 단편입니다. 내용은 평이하고 반전은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네요.

힐러리 여사 -얀윌렘 반 드 비터링
파푸아 뉴기니의 원주민이고 추장인 주인공이 자신의 동생이 강간 살해당한 과거의 사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파푸아 뉴기니의 추장인 떠벌이 화자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두서없이 떠드는 것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무지하게 독특하고 신선했습니다. 현대 미국을 풍자하는 듯한 묘사도 재미나지만 파푸아 뉴기니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한 것이 묻어나는 현지색깔 넘치는 배경 역시 좋습니다. 그냥 생각없이 떠벌이는 듯한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솜씨가 놀랍네요. 작가는 처음 보는 작가지만 다른 작품도 기대를 갖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베스트로 꼽을 만 합니다.

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2004/11/09

병속의 미녀 - 정태원 엮음 : 별점 1.5점

병속의 미녀 - 4점 정원태/이성

다시 접한 정태원씨가 엮은 단편 앤솔러지. 헌책방에서 몇권 구입한 시리즈 중 마지막입니다. 목차는
  • 존 콜리어: 병속의 미녀 / 무서운 교배 / 잠자는 미녀
  • 클라이브 바커 : 수의의 고백 / 섹스와 죽음과 별빛 / 재클린 에스 / 마돈나
  • 아토다 다카시 : 여난 / 이상한 벌레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제가 "미스터리 에로티카"고, 책 소개도 에로틱한 미스터리 단편을 모아놓았다고 되어 있는데 선정 기준이 의심됩니다. 존 콜리어의 작품들은 그닥 에로틱하지도 않고 미스터리도 아니었고, 클라이브 바커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취향의 작품만 실려 있습니다. 그나마 아토다 다카시 작품들이 비교적 괜찮지만 너무 짧은, 그야말로 꽁트 길이밖에 안되는 소품이고요. 한 마디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아요. 무언가 좀 부족하고 모호하달까요? 여튼 제 판단으로는 절대로(!) 미스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클라이브 바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들었겠지만 저에게는 많이 아쉬운 단편집이었습니다. 그나마 "잠자는 미녀"와 "이상한 벌레"는 독특한 반전과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비교적 추천할만 하지만 나머지 작품은 별로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겠네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병속의 미녀"
지니가 들어있다는 마법의 병을 산 남자가 지니를 이용하여 온갖 향락을 즐기다가 병에 자신이 갇히게 된다는 이야기. 뻔한 동화의 뻔한 패러디죠...
 
"무서운 교배"
농부가 시체를 묻은 밭에서 기괴한 호박을 캐내는 이야기. 약간 섬찟하긴 한데, 무섭지도 않고 그냥 기묘하기만 했습니다.

"잠자는 미녀"
한 부자가 서커스에서 우연히 만난, 몇년째 잠을 자는 여인이라는 존재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동원하여 그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잠에서 결국 깨어나게 만들고요. 그러나 그녀가 깨어난 직후 바로 실망한다는 내용입니다.
외모 지상주의의 현대 사회에 비판을 가하는 듯한 탄탄한 줄거리와 이색적인 반전이 마음에 듭니다.

"수의의 고백"
포르노 사업가의 속임수에 빠져 가족과 생활을 잃은 회계사가 복수를 꾀하다가 살해된 직후, 자신의 수의에 빙의하여 마지막 복수를 완성한다는 내용입니다. 클라이브 바커 특유의 디테일한 묘사는 빛을 발하지만 얄팍한 줄거리와 허무한 결말로 그냥저냥한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섹스와 죽음과 별빛"
클라이브 바커의 다른 단편집 "피의 책"에서 이미 읽은 작품입니다. 연기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는 일종의 좀비물입니다. 평작수준이라 보여집니다.

"재클린 에스"
이 단편집에서 가장 특이한 작품입니다. 섹스에 대한 치밀하고도 기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기이한 초능력을 가진 마녀와 같은 여인 제클린 에스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잔인하고도 엽기적인, 변태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밖에 보이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제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더군요.

"마돈나"
위의 작품만큼은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특이했습니다.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지하철"이 연상되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와 "운명에 휩쓸린 평범한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보면 종교적으로, 하지만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뭐 이것도 그닥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여난"
평생 여자에게 눌려살던 한 소시민이 자살 직전에 군중들의 이목을 끌고 잠시 다른 세상을 꿈꾸지만 군중들은 바로 미인 여성 자살자에게 이목을 돌리게 된다는 이야기. 뭔가 공감이 가는 내용이더군요. 짧지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상한 벌레"
20페이지도 안되는 꽁트입니다. 플라스틱을 갉아먹는 벌레를 발견한 사나이의 이야기입니다. 짧지만 성형수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반전까지 괜찮은 완벽한(!) 작품입니다. 역시 단편의 제왕 아토다 다카시다운 면모를 보인달까요?

2024/11/09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 아사쿠라 아키나리 / 남소현 : 별점 3.5점

여섯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 8점
아사쿠라 아키나리 지음, 남소현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서는 트릭과 진범이 누구인지가 모두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타노, 시마, 쿠가, 하카마다, 야시로, 모리쿠보의 명문대 졸업을 앞둔 취준생 6명은 가장 잘 나가는 신생기업 스피라링크스 최종 전형까지 살아남았다. 한 달 동안 6명은 마지막 관문인 그룹 토론을 준비하여 모두 함께 합격하자며 친해졌는데, 그룹 토론은 그들 중 딱 한 명만 투표로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토론장에서 여섯 명은 각각이 수신인인 수상한 봉투를 발견했고, 그 안에 각자의 과거 치부가 증거와 함께 들어있다는게 밝혀졌다. 이를 통해 투표는 순식간에 요동쳐서 원래 앞서가던 쿠가 등이 봉투 속 내용물로 뒤쳐지고, 하타노가 1위로 부상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봉투를 가져다 놓은게 하타노라는게 드러나 결국 시마가 1위로 스피라링크스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8년 후, 하타노는 지병으로 사망했고 시마는 유품을 건네받았다. 유품은 시마가 진범이라는 일종의 고발이었다. 범인이 아니었던 시마는 충격을 받고, 과거 그룹 토론 멤버들과 다시 연락하여 사건에 대해 재조사에 나섰다. 이는 하타노가 끝까지 숨겼던 자신의 치부가 담겨있던 봉투 속 내용물이 무엇인지 두려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취업 준비생들의 극심한 경쟁을 사회파 범죄 스릴러로 풀어낸 작품. 신입사원 공채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으니 사회파 소설로 보아도 무리가 없겠지요. 얼마전 올렸던 추리 소설 추천 리스트에 있었는데 번역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일단 독자를 흡입시키는 전개가 아주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1부는 화자 하타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그가 범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인으로 몰려 추락하는 상황이 긴장감있게 그려집니다. 또 그룹 토론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매우 흥미로우며, 특히 입사가 어려워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긴장감은 눈부십니다. 단순한 그룹 토론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솜씨가 정말 놀랍습니다. 이와 함께, 치열한 입사 경쟁이라는 현실도 강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2부에서의 입사에 성공한 시마의 시점으로 그녀의 조사를 통해 하타노의 결백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도 무척 흥미롭고요.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캐릭터의 진실을 탐구하는 재미를 더합니다. 

작품 속 여섯 명의 취준생 캐릭터들도 처음에는 능력있고 선한 사람들로만 보였지만 이후 그룹 토론과 시마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약점(?)이 하나, 둘 씩 독자에게 제공되면서 마지막에 복합적인 인물들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좋았어요. 그동안 보아왔던 평면적인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생함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작 중 언급된대로 '달은 지구에서는 표면밖에 보이지 않지만, '뒷면'이 엄연히 존재한다.'는걸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누가 비밀을 폭로하는 봉투를 준비했나?'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본격 추리물처럼 단서를 제공하고 범인을 빵 터트리는건 아니지만, 결정적인 단서로 '하타노가 음주를 하던 사진에서 '스미노프 보드카'가 술이라는걸 알아채지 못한 사람이 범인이다'는걸 독자에게도 알려주고, 이를 통해 술을 못하는 쿠가가 범인이라는걸 드러내는건 본격 추리물 못지 않았습니다. 하타노가 유언처럼 남긴 파일의 '범인, 시마 이오리에게'라는 수신인이 '범인 시마 이오리에게'가 아니라 '범인과 시마 이오리에게'라는 뜻이었다는 착안도 괜찮았고요. 하타노가 파일에 걸어놓은 암호도 범인이 쿠가이므로 '페어'였었죠.

또 괜찮은 서술 트릭물이기도 합니다. 시마의 인터뷰와 하타노, 시마 1인칭 시점으로만 다른 인물들을 묘사하여 야시로가 선뜻 장애인 석에 앉았고, 쿠가가 장애인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하카마다가 야구를 하던 어린 아이들에게 폭언을 하며 혼을 냈다는걸 드러내며 그들을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하고 얄팍한 인물로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야시로와 쿠가는 장애가 있는 시마를 배려했던거고 하카마다도 할머니가 공에 맞을 뻔 해서 아이들을 혼냈고 나중에는 잘 타일렀다는게 드러납니다. 이렇게 독자를 착각하게 만들었다가 마지막에 반전으로 진상을 드러내는건 전형적인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도 깜빡 속았네요.

취준생들이 겪는 압박과 고통, 힘든 취업 과정에 대한 묘사도 빼어납니다. 읽다가 얼마전 제가 근무하는 부서에 입사한 신입사원이 합격 소식을 듣고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기뻐서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만큼 절박한 취준생 들의 심정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신입 공채에 대해서도 사회파 추리 소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 밝히고 있습니다. 단지 사측 입장이 아니라 취준생들도 거짓말쟁이라는걸 밝히고 있어서 균형을 맞추는 것도 좋고요. 물론 사측 문제가 더 커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타노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유품으로 시마의 진상 추적이 시작되는 2부는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쿠가가 신입 공채 시험의 정당성에 의심을 품고 일부러 사건을 일으켰다는 동기가 불공정한 탓이 큽니다. 쿠가의 뛰어난 친구가 스피라링크스 2차에서 떨어졌는데 쿠가 본인은 최종 전형까지 합격한게 불만이라는 동기는 처음에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뛰어난 친구 이야기가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동기를 뒷받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동기 자체의 설득력도 없어요. 쿠가의 말 그대로 치기어린 행동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철없는 아이의 장난과 다를바 없는 사건이라 와이더닛 측면에서는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네요.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쿠가가 하타노를 범인으로 몰아붙인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겁니다. 쿠가가 신입 공채를 망치고 싶었다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최후의 1인이 되든 상관없이 그룹 토론이 엉망이었다는것만 스피라링크스 인사팀이 확인하면 되었으니까요. 각자의 치부를 담은 봉투 안에 작은 협박문을 넣어서 알리바이를 조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모리쿠보가 범인으로 몰리게 된 상황에서, 사진이 이상하다는걸 들먹이면서 각자의 알리바이를 확인하여 하타노가 범인일 수 있다는 식으로 끌고간 까닭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전 술자리에서 술을 못하는 시마에게 술을 강권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쿠가가 시마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지 않는 한, 그렇게까지 큰 잘못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 자리에 하타노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또 시마가 확인한 그룹 토론 당시 동영상을 통해 모리쿠보와 야시로가 협박당했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이 당시에는 모두 취직이 급했으니 비밀을 공개하겠다는 협박은 통했을겁니다. 그러나 8년이 지나 모두 사회인이 된 현재 시점에서 이 시절 협박당했다는걸 드러내지 않은건 말이 안됩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하타노의 알리바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협박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하타노가 범인으로 몰리는걸 방조한 잘못이 있기도 하고요. 모리쿠보는 시마를 의심했고, 쿠가는 진범이었으니 그렇다쳐도 최소한 야시로는 시마를 만났을 때 그 사실을 충분히 밝혔어야 했습니다. 이 점은 이들 모두 알고보면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반전을 약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아울러 '공개되지 않은 시마의 비밀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는 좀 작위적이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시마의 장애가 1부에서 아예 설명되지 않은 것도 탐탁치 않고요. 약간은 노리고 속인 느낌이 드니까요.

신입 공채에 대한 비판도 다소 과장되어 있습니다. 스피라링크스의 인사부장이 말한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서류 전형과 면접, 여러가지 시험 등을 통해 나름 공정하게 사원을 선발하는게 당연합니다. 6명의 최종 입사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그룹 토론해서 1명을 뽑아라? 이건 말도 안되요. 갑자기 성장한 회사라 제대로 체계를 갖추지 않았다는 변명이 실제로 통할리 만무합니다. 작가가 직장 생활은 해 보지 않은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은건 분명합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신입 사원 공채를 소재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데 감탄할 수 밖에 없네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쿠가가 하타노를 범인으로 몰지만 않았어도 별점 4점 이상은 충분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보통 추리소설 추천 리스트는 믿지 않는 편인데,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추천은 믿음이 생기네요. 다른 작품도 번역이 되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당연하게도 영화화가 되었더군요. 곧 개봉이라는데, 서술 트릭 쪽을 어떻게 영상화했을지 궁금합니다. 



2023/10/07

방황하는 칼날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점

방황하는 칼날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번 생긴 ‘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령 가해자가 갱생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악’은 피해자들 속에 남아, 영원히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나가미네가 아내와 사별 후 홀로 키워왔던 딸 에마가 강간 살해당했다. 좌절한 나가미네에게 범인이 도모자키와 스가노라는 메시지가 전달되었고, 메시지 속 주소로 도모자키의 집에 잠입한 나가미네는 에마가 강간당하는 동영상을 확인하고 분노에 휩싸여 도모자키를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스가노가 있다는 나가노 현으로 향했다. 도모자키 살해범이 나가미네라는걸 알아낸 경찰 역시 그의 뒤를 쫓는데....

우연찮게 제 구글 홈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한국 영화 소갯글이 떳길래 잠깐 찾아보았다가 급 호기심이 생겨 구독 중인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무섭다 알고리즘!

작품은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도 가벼운 형을 선고받는게 과연 옳은지를 비판하는 사회파 범죄 소설입니다. 미성년자 범인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극도로 흉악하게 설정한 덕분에 읽는 내내 나가미네에게 감정이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딸이 강간 살해당했다면 어떤 아버지가 가만 있을 수 있을까요? 심지어 그 상황의 동영상까지 보았다면 피가 꺼꾸로 솟는다 정도의 말로는 부족한 분노에 휩싸이는게 당연합니다. 때문에 범인들 - 특히 도주한 스가노 - 이 나가미네에게 합당한 응징을 받기 원하며 응원하면서 읽었습니다. 
미성년자 범죄에 대해 강력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되었네요. 요새처럼 아이들 성장이 빠른 시기에 오래전 잣대를 기준으로 판단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저는 중학생부터는 성인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관용 원칙으로요. 하긴 그래봤자 술을 먹어서 심신 미약이었다던가, 초범이라던가, 깊이 뉘우치고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빠져나올 놈들은 다 빠져나오는게 현실이라는게 더 씁쓸하기는 합니다만.
최근 언론에 언급되는 여러 학부모들의 민원(?)과 같이, 미성년자 범죄자들의 부모들의 눈 뜨고 못 볼 작태들도 잘 묘사됩니다. 이런걸 보면 미성년자 범죄는 그 부모도 함께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 역시 무관용 원칙으로요.

하지만 나가미네가 결국 응징에 실패하고 경찰에게 사살당한다는 결말은 씁쓸했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 그리고 경찰 수사 과정과 경찰들의 생각을 통해 경찰의 자괴감 -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어떤 보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나?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 ‘악’을 벨 힘을 가지고 있나? - 을 잘 드러내기는 하나 독자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어요.
특히 경찰 히사쓰카 반장이 나가미네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는 반전은 최악이었습니다. 자수를 결심했던 나가미네가 사살당한건 히사쓰카 반장이 준 정보 탓입니다. 이렇게 애매한 정보만 전달하고 수사는 수사대로 진행하기 보다는 직접 수사를 뛰는 마노, 오리베와 같은 부하들을 설득해서 더 적극적으로 나가미네를 도와주는게 맞지 않았을까 싶어요. 과거 유사 범행의 수사를 맡았던 경험 때문이었다는 동기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정보를 나가미네의 핸드폰으로 보내는 것도 당황스러웠어요. 잠깐이라도 핸드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하면 현재 위치가 바로 추적되지 않나요? 경찰이 이 정도 수사도 하지 않는다는건 솔직히 억지스러웠습니다.

짜임새도 헐겁습니다. 중간에 매스컴이 단순히 화제와 시청률을 위해 보도를 벌이는 장면은 그냥 뻔한 이야기를 답습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펜션 여주인 와카코가 나가미네에게 협력자가 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나가미네에게 협력자가 필요했던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은신처를 제공받으며 스가노 추적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그녀 없이도 이야기를 풀어갈 방법은 많았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없으면서 하룻밤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찾다가 스가노가 폐업한 펜션에 숨어 있을 수 있다는걸 깨닫는게 훨씬 자연스러웠을거에요.
그리 기대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추리적인 요소도 거의 없습니다. 나가노에 있던 나가미네가 범인 스가노에게 안도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아이치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정도만 약간 머리를 쓸만 했을 뿐입니다.

한국 영화 소개를 보니 제가 언급한 단점들을 인지했는지 보다 명확하게 이야기를 정리한 듯 하더군요. 펜션 여주인 와카코의 존재를 지우고, 직접 수사에 뛰어든 형사가 정보 제공도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결국 나가미네가 사살당하는건 변함이 없던데, 자수해서 집행유예를 받은 뒤, 스가노를 끝없이 추적한다는 결말은 어땠을까 싶네요. 다른 피해자 가족들과 연대해서요. 스가노 같은 녀석 때문에 인생을 망칠 이유는 없습니다. 군자의 복수는 몇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 법이고요. 살아서 스가노와 그 일당, 가족들에게 영원한 지옥을 선사하는게 복수로서 더 의미가 있었을겁니다. 지금의 죽음은 그냥 개죽음이니까요.

하여튼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몰입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완성도와 결말 부분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덧붙이자면, 범죄자 가족이라고 모두 고통받아야 하는지? 에 대해서 히가시노 게이고 자신이 <<편지>>를 통해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범죄의 종류와 범죄자 상황을 다 고려해서 선별적으로 비난하기는 불가능하니, 참 어려운 이야기지요....

2010/12/10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 - 로버트 바 / 이은선 : 별점 3점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 - 6점
로버트 바 지음, 이은선 옮김/시공사

프랑스 총경 출신으로 영국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외젠 발몽이 주인공인 단편집으로, 1907년에 발표된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는 예전에 하서출판사의 "세계추리명작단편선"을 통해 접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이번 국내 출간이 반가웠고, 기대만큼 즐겁게 읽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유쾌한 분위기입니다. 마치 마크 트웨인이 추리 소설을 쓴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고 할까요? 특히 프랑스인 탐정 발몽이 영국 사회에 대해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태도와 유머가 돋보입니다. 그의 허영심과 자의식 과잉이 만들어내는 코믹한 요소도 재미를 더하죠. 이러한 자뻑 탐정의 전형적인 예로는 '에르퀼 포와로'를 들 수 있겠습니다. 물론 발몽은 여성에게 약하다는 점에서 포와로와 차이가 있긴 하지만요.

추리적인 요소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살인 사건보다는 도난과 사기 사건이 중심이 되는데, 단순한 해결 과정뿐만 아니라 범죄 계획 자체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한, 20세기 초반 셜록 홈즈의 라이벌 탐정들이 활약하던 시기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기존 정통 단편 추리 소설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탐정이 사건 해결에 실패하는 이야기나 '추리'보다는 '모험'에 집중한 단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죠.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고, 지금 읽어도 별로 낡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추리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인 '공정한 정보 제공'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본격 추리로서의 완성도도 다소 아쉬웠습니다. 또한, 이야기마다 수준 차이가 큽니다. 마지막에 실린 셜록 홈즈 패러디 단편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요. 특히 "셜로 콤즈의 모험"은 최초의 셜록 홈즈 패러디 단편이라는 자료적 가치는 높지만, 내용 자체는 가벼운 장난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유쾌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고전 추리 단편을 좋아하시거나 유머러스한 추리소설을 원하신다면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이 잘 팔려서 더 많은 고전 추리 걸작들이 출간되면 좋겠네요.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500개의 다이아몬드에 얽힌 수수께끼

외젠 발몽이 프랑스 총경으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

백만달러짜리 마리 앙투아네트 목걸이의 경매와 경매이후 벌어진 목걸이 행방을 뒤쫓는 추격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능한' 발몽이 무능한 부하와 생각못한 방해로 작전에 실패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벌어지죠. 간단하지만 효과적이었던 범인의 다이아몬드 운송 계획도 볼거리지만 무엇보다도 '일반인'에게 주인공 명탐정이 패배하는 생각지도 못한 결말이 등장해서 의외였습니다. 뤼뺑 시리즈 제 1작이 뤼뺑이 체포되는 이야기였던 충격과 버금가더군요.

이 시리즈의 특징, 자뻑 외젠 발몽과 그의 떠벌임, 자의식과잉 묘사와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반전까지 모두 등장하는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2. 두 얼굴의 폭탄 테러범

발몽이 영국으로 온 이후 이중신분으로 무정부주의자 조직에서 정보를 캐 내다가 폭탄투척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막으려 활약하는 모험담.

이 이야기는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첩보 - 모험물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당시 영국에 대한 발몽의 비판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죠. 쉽게 읽히고 재미도 있으며 발몽의 옛 부하 아돌프 시마르가 등장하는 등 시리즈 팬으로 즐길거리가 많기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별로 없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3. 은숟가락에 담긴 단서

벤섬 기브스가 발몽을 찾아와 사건해결을 의뢰한다. 사건은 그와 친구들이 함께 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사라진 백파운드를 찾아달라는 것.

라이오넬 데이커라는 유력한 용의자를 등장시키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이 독특한 소품입니다. 두명의 대화도 맛깔나고 은숟가락을 이용한 마술이라는 단서도 꽤나 유용한 등 소품이지만 풍성한 느낌이 좋았어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라이오넬 데이커가 어떻게 빚을 갚았나?' 에 대해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좀 아쉽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4. 치젤리그 경의 사라진 재산

치젤리그 경이 숨겨둔 막대한 재산을 찾는 이야기.

이 단편집에서 가장 정통 추리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가지 단서와 치젤리그 경의 유언을 토대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합리적으로 그려져 있거든요. 어떻게보면 좀 단순한 발상이기는 하나 다른 곳에서 찾아보긴 힘든 트릭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5. 건망증 클럽

예전 하서출판사의 <세계추리명작단편선>을 통해 접했던 단편. 다시 읽어도 재미있었습니다. 두가지 사건 - 은화 위조와 사기사건 - 이 묘하게 겹쳐져서 하나로 이어지는 전개도 좋았지만 발몽의 런던 경시청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활약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사기꾼에게 한방 맞는 결말도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높이 평가할 부분은 너무나도 기발한 사기꾼의 계획이겠죠. 지금 보기에는 허술하기도 하고 약간 설득력이 처지는 부분도 있긴 하나 아이디어만큼은 정말 대단하거든요. 별점은 4점입니다.

6. 기형 발 유령

랜트림리 경의 저택에 출몰한다는 기형 발 유령의 발소리에 얽힌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 영국 경찰에 대한 발몽의 떠벌임같은 유쾌함은 잘 살아있긴 하지만 초반에 저택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지 않아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며 내용도 지나치게 과장이 심한 듯 싶어서 여러모로 조금은 아쉬운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7. 와이오밍 에드의 석방

와이오밍 에드로 불리우는 미국 무기징역수의 탈옥을 돕는 발몽이 탈옥에 감추어진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

두가지 사건, 즉 와이오밍 에드의 탈옥과 탈옥에 관련된 사기사건이 등장하는데 탈옥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도 않고 가볍게 넘어가기 때문에 '사기사건' 으로 보는게 적당하겠죠.

솔직히 탈옥도 좀 자세하게 묘사되지 않을까 읽으면서 기대가 컸었는데 좀 실망스럽긴 했습니다. 그러나 범인의 사기 계획이 나름 치밀하고 설득력이 있기에 적당한 수준으로 마무리 되지 않았나 싶네요. 물론 마지막 '변장쇼'는 좀 오버라 생각되지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8. 레이디 알리시아의 에메랄드

도난당한 블레어 에메랄드를 되찾고 레이디 알리시아를 만족시키겠다는 발몽의 일념이 빛나는 이야기. 그러나 도난사건 자체가 일종의 장난같고 두 연인의 치기어린 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추리적으로는 빵점에 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여성에게 약한 발몽의 일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점은 즐거웠지만 전체적으로 평균 이하였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셜록 홈즈 패러디

1. 셜로 콤즈의 모험

셜로 콤즈가 페그럼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이야기. 스코틀랜드에 대한 조롱과 더불어 패러디로서 즐길거리는 많으나 결국 셜로 콤즈의 추리와 수사는 치기어린 과대망상이었고 결국 운이 좋아서 단서를 찾았을 뿐이라는 결말은 추리 소설 애독자로서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하더군요. 재미도 있고 자료적 가치도 높지만 개인적으로는 씁쓸함이 더 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 두 번째 돈주머니의 모험

코난 도일에게 홈즈가 원고료를 요구하러 찾아오지만 도일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나름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내용에 알맹이도 없고, 패러디도 아닌 이상한 작품이에요. 저자 로버트 바가 코난 도일의 절친한 친구라는데 친구에게 거는 가벼운 장난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친분이라는 의미 이외의 것을 찾기는 어렵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7/03/25

삼체 - 류츠신 / 이현아 : 별점 2.5점

삼체 - 6점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고호관 감수/단숨

나노 공학자 왕먀오는 경찰에게서 오래전 흠모해왔던 여성과학자 양둥이 자살했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가 속했던 단체 '과학의 경계' 조사를 부탁받았다.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이후 갑자가 왕먀오 눈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이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다. 왕먀오는 이 현상을 밝히기 위해 온라인 게임 '삼체'에 접속하여 플레이하는 한 편, 양둥의 어머니 예원제로부터 과거 중국이 만들었던 '홍안' 시스템에 대해 듣게 되는데..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는 중국산 SF입니다. SF는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호기심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중국산 장르문학 추리물 두 편 -"13 .67", "기억나지 않음, 형사" -이 괜찮았던 기억도 한 몫 했고요.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는 양둥을 비롯한 '과학의 경계'에 소속된 세계 석학들의 잇단 자살 사건, 그리고 눈 앞에 기묘한 카운트다운이 펼쳐진 나노 기술 과학자 왕먀오가 경찰 스창등과 함께 진상을 추적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온라인 게임 "삼체 (theree body)" 플레이가 상세하게 설명되지요.
두 번째는 여성 과학자 예원제를 주인공으로, 그녀가 문화대혁명 기간 박해를 받다가 우연히 '홍안' 시스템에 근무하게 된 후 외계와 교신에 성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 모든 수수께끼가 밝혀지고, 이후 삼체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이 상세하게 드러나며 마무리됩니다.

이 이야기들 모두 탄탄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놀라운 상상력을 담아내고 있으며, 묘사와 깊이가 실로 대단합니다. 특히 수학적으로 꽤 오래된 문제라는 '삼체 문제'를 활용한, 세 개의 태양이 불타는 센타우루스성 알파 삼중성계의 삼체 문명을 그려낸 묘사와, 이 삼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라인 게임에서 각종 해법을 제시하는 부분이 돋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진시황의 3천만 군사를 이용하여 컴퓨터를 만드는 장면을 꼽고 싶네요. 컴퓨터를 인력으로 대체하는 아이디어인데 그야말로 대국적인 발상과 과학이 잘 결합된 어마무시한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상만해도 웅장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압도적이었어요. 영상화가 기대될 정도로 말이죠.
그 외의 디테일들도 실제 과학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예원제가 우연히 태양이 전파 증폭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삼체인과 통신이 가능했다는 핵심 설정 역시 이런저런 과학적 이론을 곁들여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며, 마지막에 큰 활약을 하는 나노 소재 '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중국산 SF답게 중국적인 설정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예원제가 겪은 문화 대혁명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홍위병이 예저타이를 핍박하는 과정의 묘사부터 섬찟합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과학을 철학과 사상으로 포장하려는 헛된 노력도 눈물겹고요(물리학은 잘 모르지만 빅뱅이론이 신의 존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특이한 배경 설명에 그치지 않고, 문화대혁명의 병폐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통해 예원제가 삼체인을 불러들이게 된 핵심 이유인 '인간에 대한 실망감' 이라는 것에 굉장한 설득력을 더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아울러 모든 이야기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위해 1960년대 이미 전파를 송출하는 안테나를 설치했다는 배경 설정도 그럴싸했습니다. 정말 그랬음직하다!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홍위병, 문화 대혁명에 대한 비판이 엄청나다는 것은 좀 신기하네요. 그만큼 엄청난 과오이자 실책임에는 분명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중국 내에서 이렇게까지 비판적인 작품이 나올 정도인지 좀 의문이거든요.

삼체인과 지구인의 관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삼체 반군이 '인류 사회는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자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기에 주께서 강림해야 한다. 주께서 사악한 인류에게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전 인류 멸망이 소망인 강림파와 어떻게든 삼체의 움직임을 밝혀내어 삼체인을 구원하려 하는 구원파로 나뉜다는 설정도 괜찮아요. 사실 강림파 쪽 아이디어는 제법 많이 보아 왔지만(기생수의 히로가와도 비슷한 인물이죠), 구원파쪽은 확실히 신선했어요. '주'라고 불리울 정도로 전능한 존재가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한데, 그들이 벌레로 부르는 미약한 존재들이 '주'가 살아날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니 이래저래 재미있는 관계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체인이 지구의 과학을 무너트리려고 획책한다는 발상도 나쁘지 않아요. 그들의 기술력으로도 지구에 도착하기까지는 400여년 걸리는데, 그 사이에 지구인이 맞서 싸울 수 있는 과학력을 보유할 수도 있으니 그걸 원천봉쇄하자는 생각은 충분히 합리적이지요. 그것을 위해 '지자'를 만들고, 이런저런 작전으로 과학자들이 자살하게 만드는 등의 과정도 특유의 묘사력을 발휘하여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고요.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과 묘사를 뺀다면 좀 별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이야기가 서로 잘 엮여져 있지 않은 탓이 큽니다. 특히 마지막, 삼체인이 '지자'를 만들어 지구 침공에 활용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겉돕니다. 앞부분에서 현재의 지구를 기준으로, 벌어지는 수수께끼에 대한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갑자기 외계인 기준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니까요. 차라리 현재의 왕먀오, 과거의 예원제 이야기를 가지고 현재의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이야기를 1부로, 2부는 삼체인 시점으로 지구 침공 작전을 다룬 이야기로, 3부는 400여년 후 지구에서 두 세력이 자웅을 겨루는 방식의 3부작 구성이 더 나았을 것 같아요. 제목과도 잘 어울리잖아요. '삼체 삼부작'.

또 현란한 설정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이야기가 진부하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핵심 내용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깊숙히 들어가도 '외계인과 통신하며 지구 문명 멸망을 바란 삼체 반군을 처단하고, 400년 후 도착할 삼체인과 맞서 싸우기 위한 결의를 다진다'가 전부입니다. 이게 애니메이션이라면 도입부에 불과하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3부작의 1부에 해당할 뿐이에요.
외계인이 생존을 위해 지구를 침략한다는 내용도 쎄고 쎘습니다. 그들 행성이 모종의 이유로 절멸의 위기를 맞는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이 작품에서 '삼체'를 가지고 조금 더 과학적으로 그럴듯하게 그려내었을 뿐 설정 외의 새로운 점은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삼체인에 대한 설정도 극단적으로 생존만을 위해 모든 것을 억압하고 말살했다는 점에서 진부합니다. 젠트라디와 별로 다를것도 없더라고요. 이래서야 지구에 침공하더라도 민메이 어택에 쓸려나갈지도 모르겠어요.

삼체 게임을 통해 설명되는 알고리즘 역시 현란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와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른바 '구원파'가 삼체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개의 태양 움직임 예측을 어떻게든 밝혀내기 위한 게임이라는 설정인데, 지구보다 과학이 훨씬 발전한 삼체인에게 지구인이 무언가 해결 방법을 내 놓는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같은 물리적 세계관을 지녔다는 설정이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순관계를 그려낸 설정이라고 이해는 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비중이 컸어요.

물론 재미있고 괜찮은, 신선한 SF라는건 맞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자국의 아픈 역사와 하드 SF를 결합한 아이디어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뻔한 이야기를 과대 포장한 느낌도 지우기는 힘드네요. 중국이 무대가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이 무대였다면, 아니면 일본을 무대로 한 애니메이션 작품이었다면 이렇게 신선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을테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2/12/11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 사사키 겐이치 / 송태욱 : 별점 2점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 4점
사사키 겐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뮤진트리

일본의 국어 사전 산세이도와 신메이카이를 현재의 모습으로 이끌었던 편집 책임자 겐보와 야마다의 일생과 갈등에 촛점을 맞춘 논픽션. NHK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듯 하네요.
이전에 읽었었던 <<사전, 시대를 엮다>>처럼 사전의 역사를 그린 일종의 미시사 서적일걸로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전을 어떻게 만드는지 디테일을 알 수 있을 걸로 기대했고요. 하지만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책의 핵심은 순수하게 '단어'에 집착하여 평생을 바친 겐보 선생과, 스스로의 생각과 주장이 더 중요했던 야마다 선생의 갈등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읽다보면 야마다는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그런 사람이라서, 이걸 갈등이라고 표현할 수 있나 싶더군요. 겐보 선생은 '산세이도'와 '신메이카이' 두 권을 동시에 진행하기가 힘들어 부득이하게 조수 야마다에게 '신메이카이'를 맡겼을 뿐입니다. 그러나 야마다는 대뜸 그걸 가로채버리고 말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겐보 선생이 '사고를 당했다'는 거짓 정보를 뿌려 자신이 사전을 빼앗은걸 정당화하고, 겐보 선생이 모았던 용례까지 멋대로 사용했던 인간말종이었으니까요.

실력면에서도 겐보 선생이 한수 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마다는 사전은 문명 비평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본인 시각으로 당시 문명을 비평하는건 신문 사설이라면 모를까, 사전이라는 컨텐츠에는 절대로 맞지 않는 방식입니다. 현재 '신메이카이' 편집 책임자 구라모치 야스오 역시 "흔히 말하는 '사전은 공기(公器)'라는 생각과 '사전은 문명 비평'이라고 하며 주관적인 사상이나 비판을 말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을까요?“라며 이 방침에 동조할 수 없었다니 말 다 했지요. 자기 후임조차 동조할 수 없었던, 그의 세대에서 수명이 끝나버린 신념이었던 셈입니다.
이보다는 사전은 말을 비추는 거울이고, 말을 바르게 하는 귀감이라는 겐보 선생의 '가가미론'이 더 사전에는 어울리는 신념이자 이론임에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 이론을 관철하기 위해 평생 145만 개나 되는 용례를 모은 겐보 선생의 실천력 역시 임기응변과 재미있는 말을 지어내는데 그쳤던 야마다보다 훨씬 사전에 어울렸고요.

하지만 단지 '재미있는 해설이 있다' 며 신메이카이 사전 쪽이 더 인기를 끈다니 좀 억울한 느낌도 듭니다. 그 '재미있는 해설'도 아래와 같은 것들인데,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고 나름대로 문명 비판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저는 이렇게 주관적인 해설이 쓰인 사전을 구입하고 싶지는 않네요.
연애(愛) : 특정한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둘만이 함께 있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합체하고 싶은 생각을 갖지만 평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몹시 괴로운 (가끔 이루어져 환희하는 상태. -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공약(公約) : 정부정당 등 공적인 위치에 있는 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일. 또한 그 약속. [금방 깨지는 것에 비유된다]
정계(政界) : [불합리와 금권이 행세하는] 정치가들의 사회. -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부락(部落) 여러 채의 농가. 어가 등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곳. [협의로는 부당하게 차별당하고 박해받은 일부 사람들의 부락을 가리킨다. 이런 편견은 하루빨리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 -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2판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기대와 전혀 달랐을 뿐 아니라, 내용에 동조하기 힘들어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7/10

퍼즐 - 야마다 유스케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사립 도쿠메이칸 고등학교가 테러범들에게 점거당했다. 최우수 학급인 3-A 반의 담임 야스다와 전학갔던 이전 동급생 미토메가 인질로 잡혔다. 테러범들은 인질들의 목숨을 댓가로 3-A 반 학생들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48시간 내에, 학교에 숨겨져 있는 2,000개의 퍼즐 조각을 찾아 맞추는 게임이었다.  

일본 작가 야마다 유스케의 장편 소설입니다. 만화, 드라마, 영화에 심지어 게임까지 제작되었던 인기작인데 국내에는 아직 정식 소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특징이라면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폐쇄된 곳은 학교, 게임은 학교 안에 숨겨진 2,000개의 퍼즐 조각을 48시간 안에 찾아서 맞추는 것. 게임의 보상은 인질의 목숨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와 비교해 보면, '게임'이 장점입니다. 학교 곳곳에 작은 퍼즐 조각이 숨겨져 있는데, 이를 찾아내서 맞춰야 한다는 현실성도 좋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퍼즐 조각을 발견하는 묘사도 흥미를 자아내는 덕분입니다. 그리고 퍼즐 조각을 찾아서 맞추기 위해 열 세 명의 학생들이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 이 때 서로 각자가 가진 심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묘사도 재미 요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조각을 끝내 발견하지 못해서 게임은 실패하는데, 여기서 테러범들의 정체로 이어지는 결말도 그럴싸 합니다. 마지막 한 조각이 미토메의 얼굴이었고, 퍼즐의 원본 그림이 3-A반 학생들의 입학식 사진이라는 단서도 충실하고요. 테러범들은 입학은 같이 했지만 성적 하락으로 낙오하여 전학갔던 동급생들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입시 학원처럼 변한 학교 비판도 담고 있어서, 약간 사회파스러운 느낌도 전해줍니다. 초반에 이탈했던 이케타의 어머니가 다른 애들이 갇혀 있을 때 공부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게임 외 설정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테러범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경찰이 48시간 동안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학생 두 명이 초반에 돌아가는 등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고요. 또 학생들이 왜 계속 게임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불충분합니다.야스다 선생은 학생들을 성적과 입시 기준으로 대하던 교사입니다. 과거에 낙오한 학생 미토메가 누구인지도 대부분 몰랐고요. 그런데 학생들이 야스다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부자연스럽습니다. 

테러범들의 목적도 불분명합니다. 이들이 낙오한 가장 큰 이유가 야스다 선생 때문이라면, 복수의 대상은 야스다로 한정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학교를 점령하고 학생들에게 퍼즐 게임을 시킨 이유는?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퍼즐을 찾는 과정과 학생들의 심리 묘사를 통한 긴장감은 제법이지만, 설정과 동기 등의 측면에서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