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결혼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결혼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19/11/08

살인의 문 1, 2 - 히가시노 게이고 / 이혁재 : 별점 2점

살인의 문 1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살인의 문 2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재인

다지마 가즈유키는 치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그러나 할머니의 죽음 뒤 들불처럼 번진 소문 탓에 부모가 이혼한 뒤 아버지가 꽃뱀에게 걸려 집안이 파산하고 말았다. 겨우 취직한 다지마는 어린 시절 친구 구라모치 때문에 이런저런 사기 행각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3년 발표 장편입니다. 제목은 주인공 다지마가 마지막에 구라모치를 죽이려다 망설인 순간, 구라모치가 습격당해 식물인간이 된 사건에서 형사가 한 말에서 따 왔습니다. 어떤 계기가 주어짐으로써 살인이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지마에게는 그 계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계기가 있어야 살인자가 되는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작품은 제목만큼 거창한 사건이 벌어지는 추리물이나 범죄물은 아닙니다. 불행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듯한 주인공 다지마가 초등학교 동창이자 친구 구라모치와 악연으로 엮여 보낸 평생을 그리는 대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평생이라고 해도 30대 정도에 불과하지만....
하여튼, 작가의 다른 작품인 "백야행"이나 "비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장기간에 걸친 등장 인물들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환상적인 요소도 없고, 범죄물이나 추리물도 아닌 드라마로 접근하고 있다는게 차이점입니다.

물론 다지마를 정신적으로 옭아매는 구라모치의 사기 행위와 직접적인 살인을 비롯하여 수 차례의 살인 미수, 혼인 빙자 사기와 결혼 사기 등 온갖 범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범죄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특히 사기 행위의 디테일, 그 중에서도 두 번째 사기인 금 예탁 사기의 디테일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다지마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린게 아내 미하루라는걸 밝혀내는 과정도 아주 그럴싸 합니다. 뻔한 트릭이고, 증거도 스토커 행위로 얻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설득력이 높게 느껴졌어요. 

그러나 이러한 범죄는 모두 다지마가 구라모치 때문에 평생 짊어지고 가게 된 불운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범죄 소설 전문가라서 범죄가 소재로 사용되었던 것에 불과하지요. 그래서 아무리 봐도 보조적인 장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야구 이야기였다면 에이스였지만 어깨가 망가져서 선수 생명이 끝나고, 연인은 타 팀 4번 타자와 결혼한다는 "공포의 외인구단" 서두와 다름없는 셈이에요. 오혜성에게는 손 감독이라는 스승이자 멘토, 그리고 엄지라는 목숨을 건 집념의 대상이 있었지만 다지마에게는 불운만 가져다주는 악우 구라모치만 있었다는 정도만 다릅니다.

이렇게 범죄물, 추리물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기대와 살짝 다르지만 흡입력 만큼은 정말 대단합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이혼, 아버지의 파산에 이은 몰락과 전학 등으로 겪게 되는 이지메, 첫사랑 소녀는 구라모치와 사귄 뒤 자살하고 그 뒤 구라모치와 엮여 이런저런 사기 행각에 가담하다가 조금 삶이 나아지나 싶을 때 만난 여자 탓에 비참한 결혼 생활을 거쳐 이혼하는 등 행복이라는 걸 거의 느끼지 못하는 어마무시한 삶이 정말로 파란만장하기 때문입니다. 불행의 수준만 놓고 보면 기리노 나쓰오의 주인공들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에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에서 이렇게 불행한 등장 인물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파란만장하기는 한데,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딱히 알맹이가 없다는 문제는 큽니다. 일단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다지마의 선택이 항상 안 좋은 결과를 낳는게 너무 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실수를 했을까 싶을 정도라 설득력이 떨어지고 답답합니다.

게다가 중요한 실수는 모두 다지마 본인의 실수라서 딱히 구라모치 탓을 할 이유도 없어요. 첫 직장에서 다단계 판매 회사의 사기스러운 아르바이트에 대해 잠깐 만나던 가나에에게 말한 것도 다지마 본인의 실수이고, 미하루와 결혼을 결심한 것도 다지마 본인이니까요. 미하루와의 결혼은 구라모치의 음모가 있었다 하더라도 결혼하라고 등을 떠민건 아니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혼한 뒤 삶이 팍팍했다 하더라도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명백한 본인 잘못이고요.

첫사랑 요코의 자살도 구라모치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려워요. 정황 상 요코의 아이가 구라모치의 아이라는건 증명할 수 없거든요. 결국 진상은 밝혀지지도 않잖아요?
그 외에도 보석을 파는 다단계 회사 사기, 동서 상사의 금 예탁 사기, 마지막의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 모두 본인이 돈 때문에 구라모치와 협력한건 사실입니다. 양심의 가책 어쩌구 해도 무려 3번이나 유사한 범죄에 발을 담근 주제에 정의로운 척을 하는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요. 아무리 바보라도 이 쯤 되면 구라모치를 멀리하는게 당연할텐데, 그런 부분에서의 설득력도 약합니다.

아울러 다지마가 불행에 빠지게 된 계기인 부모님의 이혼은 구라모치가 퍼트린 소문에서 시작되었다는 마지막의 반전도 문제에요. 구라모치가 금수저 다지마에게 열등감을 가진 나머지 그만큼 성공하지 못하면 내 수준으로 떨어트리겠다! 고 결심했다는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맥락을 보면 다지마의 어머니가 시어머니에게 살의를 품었던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시도도 있었고요. 즉, 구라모치가 소문을 낸 건 잘못이라 하더라도 그 소문은 진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운이 좋아 범행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 소문을 내지 않았어도 동일한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모든 원인을 구라모치에게 돌리는 건 무리입니다.
그리고 다지마의 집안이 몰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꽃뱀에 걸려든 탓입니다. 이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꽃뱀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가정일 뿐이지요. 아버지는 결혼 중에도 가정부 아주머니와 불륜을 저지른 호색한이니 별 차이가 없었을 것 같아요.

구라모치가 다지마에게 집착했던 이유로 구라모치의 성공 철학 - 성공하려면 내버릴 돌이 필요하니 버리기에 만만한 인재를 항상 곁에 두어야 하고, 그 인재는 믿을 수 있어야 하는 상대여야 한다 - 이 소개되는데 이 역시 합리적이지 못해요. 구라모치가 다지마를 사기 사업에서 내버린 적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다지마는 월급 한 번 밀리지 않고 잘 빠져나간 편입니다. 특히 마지막 사건인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에서는 구라모치가 마음만 먹으면 다지마를 사기의 책임자, 총책으로 둔갑시키기 어렵지 않았던 점에서 볼 때 더더욱 그러합니다.
수차례 등장하는 다지마의 살해 계획도 반복되어 지루한건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청산가리 등 기껏 구했던 독극물은 다 어쨌는지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요.

캐릭터도 분량에 비하면 별로입니다. 특히나 다지마는 묘사된 양에 비하면 알맹이가 너무 없어요. 대표적인게 어린 시절 독에 탐닉했다는 묘사입니다. 덕분에 이지메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딱히 어울리는 결과를 빚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지마가 반했던 유키도 사기꾼에 대항하던 강단있는 아가씨에서 어느새 구라모치에게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여성으로 전락하고요. 언변좋은 사기꾼 구라모치만 그나마 볼 만 했습니다.
그런데 구라모치의 행각을 보면 다지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었건 간에 액면가만 놓고 보면 평균 이상의 친구가 맞아요. 금전적인 면에서는 확실히 그러합니다. 이전 사기 행각에서의 소소한 도움은 둘째치고라도 마지막에 찬스 메이크 주식 사기에서는 거액의 돈을 댓가없이 빌려주고, 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지급하며 임원 대우로 데리고 있었을 정도니까요.

이렇게 재미는 있지만 설득력없고, 흥미위주의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점에서는 무협지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문제는 무협지는 주인공이 성장이라도 하지, 다지마는 끝까지 제자리 걸음이라는 점이지요. 즉, 무협지보다도 못합니다. 흡입력은 대단해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아주 빼어나나 작가의 최고작으로 보기에는 무리네요. 팬이 아니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04/01/09

초 스피드 결혼~!


제가 다니는 회사는 과 동기들끼리 뭉쳐서 만든 작은 회사입니다. 사장으로 있는 형도 사장님이라는 호칭이 더 어색한 동기 형이죠.
저 말고는 다들 여자친구들이 없어서 회사생활이 좀 괴롭던 차에, 사장형이 소개팅해서 여자를 만난지 30일만에 결혼 발표를 해 버리네요.... 결혼을 두달 뒤에 한다고.
바로 어제 술을 같이 먹었는데 이렇게 암말도 안하다가 폭탄을 터트리다니.. 배신감도 좀 느껴지고 황당하기도 하고, 하여간 일이 손에 전혀 안 잡히네요^^

추진력있는 모습도 모습이지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빨리 결혼하는 경우도 있나요? 이혼율도 거의 50%라는데.. 조금더 사귀어 보고, 서로를 알고 난 후에 결혼을 하는 거 아닌가요? 설마 벌써 사고를 친건가?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행복하게 잘 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직 결혼한건 아니지만) 제가 먼저 할 줄 알고 여유 부렸는데 저도 슬슬 긴장해야 겠네요^^

2004년에 처음으로 들은 황당깜짝 뉴스였습니다.

2006/11/25

미궁과(迷宮課) 사건부 - 로이 비커즈 / 이종수 (자유 추리문고 19) : 별점 2.5점

자유 추리문고로만 접할 수 있는 희귀본이죠. 국내 굴지의 추리 동호회 사이트인 Howmystery.com 회원분의 도움으로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원제는 "The Department of Dead ends". 미궁과는 경시청의 한 부서로 여러가지 미해결 사건이나 증거, 정보들이 모이게 되어 결국 해결하게 된다는 부서로 이러한 설정은 일본 드라마 "케이조쿠"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단편이지만 전 작품이 모두 범인과 범행과정을 치밀하게 묘사, 서술하고 그 사건이 미궁에 빠진 뒤에 미궁과에서 남겨진 몇몇 단서를 가지고 추리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도서 추리 소설 형태로 쓰여져 있다는 점입니다. 도서 추리 단편집은 처음 접해 보았네요. 그래서인지 범행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라 실제 미궁과의 활약, 특히 미궁과의 수장격인 레이슨 경감의 비중은 굉장히 낮다는 것도 이색적이고요.

또다른 특징은 도서 추리물이기 때문에 범행의 치밀함, 특히 완전범죄를 이루려는 범인의 노력이 주가 되어야 이야기 전개가 매끄러울텐데 이 작품집의 거의 모든 범죄는 "우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역시 독특한 부분이었습니다. 전부 10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웃은 부인"과 "보트의 푸른 수염", "장님의 망집" 3편이 그나마 범인의 치밀한 범행 계획을 담고 있으며 다른 작품들은 범행 자체가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작품들의 수준이 딱히 우수하진 않더군요. 기대에는 많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추리"라는 요소가 많이 결여된 느낌이에요. 도서 추리물이기에 범인과 탐정의 두뇌싸움이 보다 치밀하게 그려질 수도 있을텐데 우발적 범행이 주를 이룬다는 특징 때문인지 우연찮게 얻어진 증거로 범행이 드러나게 된다는 구성이 많습니다. 또한 작품마다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도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어요.

결론내리자면 엘러리 퀸 마저도 높이 평가한 미궁과의 제 1작 "고무나팔"은 무척이나 신선하고 새로운, 단편으로서 완성도도 높으면서도 이후 시리즈에 기대를 갖게 하는 수작임에는 분명하나 다른 작품들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기에 전체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직 읽지 못하신 분들도 나중에 "고무나팔" 한편만 읽어보셔도 될 것 같네요.

1. 고무나팔
어머니의 과보호 하에서 성장한 유약한 청년 조지는 에셀이라는 아가씨와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 뒤 노처녀 콜래미어와의 관계 때문에 그녀를 살해한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에셀과 교제했기에 경찰은 그를 찾지 못하고 사건은 미궁과로 넘겨진다.
기념비적인 "미궁과" 시리즈 1작. 추후 시리즈화된 것이 당연할 정도로 매력적인 요소가 많은 수작입니다. 우발적이지만 완벽한 완전범죄, 그리고 그 범죄가 파헤쳐지는 극히 사소한 단서라는 요소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거든요. 미궁과의 특징인 "상상력"이 가장 잘 발휘된 작품이기도 하죠. 마지막 문장까지 인상적인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 웃은 부인
유명한 광대 스펜글레이브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남자로 인식하지 않고 "광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그녀에게 살의를 품게된다.
전작과는 달리 범인이 범행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세워 실행한다는 것이 차이점인 작품인데 미궁과가 등장할 필요가 없는 강력한 단서가 존재하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경찰이 그 차이점을 먼저 깨달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3. 보트의 푸른 수염
조지 매커트니는 알고 지내던 하녀와 보트를 타다가 우연히 일어난 사고 덕에 "완전범죄"의 방식을 깨닫게 된 후 아내에게 보험을 가입하게 하고 그녀를 보트사고로 위장시켜 살해하는 수법으로 재산을 늘려나간다. 경찰은 그의 범행을 확신하지만 증거가 없어 체포하지 못하고 사건은 미궁과로 넘어간다.
이 작품도 범인 이름이 조지네요. 작가가 조지라는 친구한테 사기라도 당했었나? 어쨌건 이번에는 연쇄살인극이네요. 그러나 범행 사실을 입증하기 힘들다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로 범행 수법이 너무나 뻔하고 얄팍한데다가 사건의 해결이 지극히 우연에 기반하고 있기에 좋은 평을 주기 힘들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4. 없어진 두개의 다이아몬드
블렌든 집안의 11대째 백작인 헨리 어시웬 경은 희극 여배우 넬리 해이드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녀가 결혼을 요구한 직후 살해되고 보석을 훔쳐간 건달 짐이 살인 혐의로 교수형을 받는다. 그러나 2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도둑맞은 보석이 새롭게 발견되고 미궁과는 사건 해결을 위해 헨리경을 다시 찾게 된다.
원제는 "속물의 살인", 우발적 범행을 다룬 작품으로 사건 해결 역시 우연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범행 관련 당시의 물품을 그대로 소지하고 있던 범인의 사고 방식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건의 결정적 단서 역시도 납득하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5. 옥스퍼드 거리의 카우보이
앤드류 애머셤은 자그마한 체구의 소심한 사나이로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묵인하고 살다가 어느날 분노가 폭발한다...
제목과 설정에서 뭔가 정교한 트릭이 한번쯤 등장해 봄직한 느낌을 전해주는데 트릭이 너무 간단해서 좀 맥이 빠지네요. 사건 해결의 단초가 되는 시계의 묘사와 설정 만큼은 마음에 들었기에 별점은 2.5점. 문제는 이 설정을 이후 계속 작가가 써먹는다는 것이죠...

6. 빨간 카네이션
변호사 웨이컬링은 한때 자신이 사랑했지만 캐스버트라는 인물과 결혼을 약속한 여성 지니를 10여년 뒤 그녀가 출소하는 교도소 앞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병으로 사망한 후 그는 그동안 만나지 않았던 캐스버트를 찾아가 살해하는데...
역시 우발적 살인을 다룬 작품으로 멜로드라마의 전형같은 범행 동기와 과정이 그려진 것은 특이했습니다. 카네이션과 포장지를 단서화 시키는 식으로 범행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물건을 찾는 이야기도 설득력 있었고요. 그러나 너무 많은 곳에서 범인이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에 구태여 미궁과가 출동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좀 의심스러웠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7. 노랑 잠바
여자 기숙 학교의 선생인 루스 워틀링턴은 같은 학교의 교사 허버트와 이성으로서가 아닌 우정을 오래 지속하던 중 그가 리타 스티븐즈라는 새로 부임한 선생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진심으로 축하를 전하지만 결혼 선물과 관련하여 리타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녀가 자신과 맞지 않는 가치관을 털어놓자 순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데...
역시 순간적 충동에 의한 범죄, 그러나 그 범죄가 완전 범죄에 가깝게 흘러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동기나 범행 과정에 대해 합리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정말 사소하고 작은 단서에 의해 사건이 해결된다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단, 범인이 빠져나가려고 노력했다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긴 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8. 사교계의 야심가
대부호 은행가 스텐틀러는 해디넘경과 어린 시절 기숙 학교에서부터 친분을 유지했던 관계로 서로의 아들 딸이 곧 결혼을 앞둔 사이이기도 하다. 또한 사교계의 정점에 선 인물들만 가입할 수 있는 클럽 가입에 20여년의 세월을 바쳐 결국 딸의 결혼과 클럽 입성이 눈 앞에 보이는, 행복의 정점에 다다랐다고 믿는다. 그러나 해디넘경과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클럽 가입이 거부되었다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원제는 "신분 상승자의 사건" 정도 될까요? 이 작품에서 귀족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최고위층 인물이라는 것이 독특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너무 뻔해서 조금 실망스러웠어요. "극히 사소한 단서" 라는 전제가 있지만 범인의 아주아주 작은 실수를 통해 드러나는 구조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너무 많이 반복되는 방식이라 생각되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9. 공처가의 살인
커머튼은 아내 거트루드에게 꽉 잡혀 사는 공처가로 아내와 전혀 다른 타입의 비서 이자벨과 은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 사실이 들통나고 이자벨에게도 많은 돈을 요구받게 되자 그녀를 살해한 뒤 그 사실을 아내에게 털어놓는다.
이 작품은 그간 보아왔던 "미궁과" 시리즈의 전형을 답습하고 있는 작품으로 그다지 좋은 평을 내리기는 어렵네요.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단서가 너무 뻔할 뿐더러 기존 트릭의 반복일 뿐이었습니다. 평균 이하의 아류작이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10. 장님의 망집
유망한 변호사 로버트는 자신의 변호에 앙심을 품은 여인의 테러로 장님이 되지만 곧바로 성공한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에게 호감을 가진 웨인이라는 인물때문에 자신의 장애를 깨닫게 된 뒤 그를 살해할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역시 비슷한 주제로 비슷하게 써 내려간 전형적 작품. 설정은 두번째 단편 "웃은 부인"의 판박이, 범행 계획 및 실행은 "옥스퍼드 거리의 카우보이", 그리고 해결되는 과정은 "옥스퍼드 거리의 카우보이"와 "사교계의 야심가" 등과 동일합니다. 솔직히 다른 작품으로 보기 힘들 정도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21/09/04

기묘한 러브레터 - 야도노 카호루 / 김소연 : 별점 2점

기묘한 러브레터 - 4점
야도노 카호루 지음, 김소연 옮김/다산책방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즈타니 가즈마는 유키 미호코에게 30년만에 편지를 보냈다. 페이스북에서 그녀의 사진을 찾아서, 페이스북 메신저로 보내는 편지였다. 미호코와 가즈마의 편지 왕래를 통해, 오래전 있었던 그들의 과거가 하나 둘 씩 밝혀지는데....

가즈마와 미호코 사이의 페이스북 메시지로 전개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처음 몇 번의 메시지는 비교적 차분하고 담담하게 과거에 있었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메시지가 오가며 드러나는 과거 이야기들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둘은 결혼을 약속했었지만 미호코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아서 결혼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고아가 된 가즈마를 키워 주었던 고모부가 가즈마와 약혼했던 의붓 사촌동생 유코와 옛날부터 육체 관계를 가졌다는 것, 미호코는 학비를 벌기 위해 소프랜드에서 몸을 팔았었다는 것 등이 하나씩 드러나거든요.

특히 마지막 반전은 놀랍습니다. 미호코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건 가즈마의 책상 서랍에서 실종된 소녀의 머리핀을 발견했던 탓이었습니다. 미호코는 이를 통해 가즈마가 소녀 유괴 살인범이라는걸 알게 되었지요. 가즈마가 30년 동안 연락하지 못했던건 미호코의 신고로 체포된 가즈마가 소녀 살인죄로 복역했기 때문이었고요.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었지만, 모범수였는지 30년만에 출소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 반전을 드러내는 전개는 지나치게, 너무나 심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메시지만으로 이야기를 빌드 업 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애초에 말이 안되요. 처음 메시지를 받았을 때 이미 미호코는 가즈마가 소녀 살인범이라는걸 알고 있는데, 과거 아름다왔던 추억 이야기를 하면서 메시지를 이어나간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메시지를 삭제하고 페이스북을 탈퇴했을 겁니다. 설령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해도, 이 작품과 같이 억지로 비밀과 반전을 숨겨가며 진행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요.

가즈마가 소녀 유괴 살인범이라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반전도 뜬금없었습니다. 앞서 별다른 복선이나 단서도 없었으니까요. 컴퓨터 쓰는데 능숙하지 않다 정도가 단서가 될리 만무합니다. 그냥 충격적이고 놀라운 반전을 위해 만들어낸 설정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 사실이 드러나는 과정도 미호코가 '우연히' 결혼식 며칠 전, 가즈마 책상 속에서 발견한 머리핀을 발견했기 때문이니 작위적이라는 점에서 똑같고요. 전통적인 편지라면 모를까, 페이스북 메신저로 보낸 글로는 보이지 않다는 것도 단점이에요. 훨씬 단문으로 작성되었어야 했습니다. 신기술(?)을 사용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요.

가즈마의 파란만장했던 과거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중학교 때 겪었던 부모님의 교통사고 사망, 자신만 바라보는 줄 알았던 약혼자 사촌 여동생은 아버지같은 고모부와 육체 관계를 진작부터 맺고 있었고, 미래를 걸었던 프로 연극인의 꿈은 부단장격인 미야와키의 자금 횡령으로 무너지고, 결혼을 약속한 연인 미호코는 몸파는 여자였다는 등인데, 이 모든게 한 사람에게 닥친다니, 현실적이지가 않아요. 다른 곁가지 이야기는 다 치우고, 미호코 이야기만을 가지고 풀어나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아울러 미호코가 몸을 판 행위에 대해서 당당한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몸을 팔기는 했지만 사랑이 없었으니 단순한 육체 노동에 불과했다는데, 이게 말이나 되나요? 그녀가 이 사실을 숨기고 가즈마와 결혼하려고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본인이 그렇게 당당했다면 결혼할 사람에게 숨기면 안되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같은 연극부 단원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제가 봤을 때는 가즈마 급은 아니더라도, 미호코도 인성이 쓰레기인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뒈져버려라 변태 새끼!"라는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는, 시원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단점들이 명확해서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한 번에 볼 만한 재미와 짧은 분량을 갖춘, 킬링 타임용으로 적합하지만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0페이지 초반 분량에 12,000원이 넘어가는 가격도 과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04/10/04

발렌타인의 유산 - 스텐리 엘린 : 별점 2.5점

발렌타인의 유산 - 6점 스탠리 엘린/고려원(고려원미디어)

크리스 몬트는 테니스 스타 플레이어였으나 갑작스러운 무릎부상으로 은퇴한 뒤 지금은 이런 저런 범죄에 연루되며 지루하고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신세. 그러던 어느날 위장 결혼의 댓가로 거금 5만달러를 제의받는다. 위장결혼의 이유는 엘리자베스라는 여인이 발렌타인이라는 인물로부터 갑작스럽게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으나 "남편이 있어야 한다는" 상속 조건 때문.
하지만 이 위장 결혼 때문에 크리스 몬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건에 직면하며 여러번의 고비를 넘긴 끝에 배후의 조직과 그 음모의 실체를 알게된다...

집 앞 영풍문고에 나들이 나갔다가 고려원미디어의 추리 문고본을 1,500원이라는 가격에 팔길래 충동구매한 3권 중 한권. "특별요리"의 작가 스텐리 엘린의 소설이고 워낙 "특별요리"를 재미있게 읽어서 먼저 읽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내용만 놓고 본다면 잘 짜여진 헐리우드 스릴러 영화같습니다. 밑바닥 생활을 하는 주인공에게 돈과 여자가 한꺼번에 굴러들어오게 되지만, 서서히 위험에 처하게 되고 결국 음모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사실 그간 흔히 볼 수 있었던 소재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이 소설은 타고난 이야기꾼인 스텐리 엘린의 작품답게 이야기의 재미가 굉장히 잘 살아있어서 지루하다거나 유치하다는 생각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돈 5만달러가 걸린 잠깐의 위장결혼으로 생각했으나 의외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여러 난관을 혼자서 돌파하는 크리스의 활약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 사람은 별로 없을거에요.

하지만 기대했던 스텐리 엘린 특유의 반전이 약해서 좀 아쉬워요. 위장결혼의 조건 중 하나였던 "유언장"과 앞부분에 설정된 몇몇의 복선으로 꽤나 매끄럽게 후반 반전을 이끌어내고 또한 진정한 조직의 우두머리의 정체를 깔끔하게 밝혀내고는 있지만 약간 부족하다... 모자르다..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기대치가 높았던 탓도 있겠지만요.
또 흥미진진한 초, 중반부에 비해 끝부분이 약간 허무한 것도 약점입니다. 주인공의 원맨쇼같은 활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막판에 난데없이 국제경찰이 등장하며 모든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 해 주는 장면은 정말 황당하네요. 너무 이야기를 질질 끈다고 생각했던걸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대중소설 요소를 약간 빼고 진상이 밝혀지는 장면을 보다 강화했다면 역사에 남을 걸작이 될 수도 있었다고 보여집니다만 잘 짜여진 오락물 수준의 작품이었어요. 제가 워낙 "특별요리"라는 작품집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상이 강렬했던 탓인지 저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고요. 물론 워낙 싼 가격에 구입한 만큼 딱히 아깝지는 않습니다만...

2022/12/10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 - 이시모치 아사미 / 김진아 : 별점 2점

한밤의 미스터리 키친 - 4점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진아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전,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와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등으로 접했던 이시모치 아사미의 최신작. 제가 읽었던 전작들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전형적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모두 친한 부부 - 화자인 나 (후유키 나쓰미)와 겐타 부부, 나가에와 나기사 부부 - 가 가족들끼리 술과 맛있는 요리를 먹는 모임을 가질 때 안주와 연관되는 약간의 수수께끼가 있는 이야기와 여러가지 추리를 나누는데, 모두가 생각도 못했던 숨겨진 진상을 나가에가 추리해낸다는 내용으로, 마지막 작품인 <<일석이조>>만 후유키 부부의 아들 다이가 탐정역으로 나올 뿐 구성은 똑같습니다.

수록작 중 두 작품은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루씩 차이난다>>입니다. 아는 쌍둥이 초등학생이 있는데, 부모는 쌍둥이를 같은 학원에, 서로 다른 요일에 보냈습니다. 학원이 꽤 멀어서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는데도 말이지요.
아이들이 게임을 너무 좋아해서 번갈아 실컷 하도록 그랬다는 등의 이런 저런 추리가 이어지지만, 나가에가 쌍둥이가 야무졌다는 말로 상황을 정리합니다. 함께 살던 조부모가 아픈 탓에 둘 중 한 명은 항상 집에 남아 비상 상황에 대비했어야 했던 거라면서요. 추리에도 대한 든거, 단서로 다는건 옛스러운 쌍둥이 자매 이름과 엄마가 너무 바빴다는 것, 그리고 쌍둥이 자매가 초등학생치고는 야무졌다는 것으로 꽤 합리적이었습니다.
<<일단 헤어졌다 다시 합친다>>에서는, 회사에서 미혼모가 되었던 미호 씨가 출산하고 2년 뒤 같은 회사의 노모토 씨와 결혼한 이야기의 진상이 그려집니다. 미호 씨의 아이는 노모토 씨와 똑 닮았고, 그녀도 아이 아빠가 '노모토 씨'라는걸 부정하지 않았는데 왜 출산 후 2년이나 지나서 결혼했을까요? 나가에가 추리한 진상은 노모토 씨는 아이 아빠의 동생이었다는 겁니다. 아이 아빠였던 형이 결혼 직전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그런 형수와 조카를 가까이하며 돕다가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미호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기 전 사흘 정도 회사를 쉬고 초췌한 얼굴로 출근했었다 - 연인이 사망했기 때문 - 는 등의 단서를 깨알같이 배치하여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원서를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노모토 지로의 이름이 한자로 등장하는지 좀 궁금하네요. 나름 결정적인 단서라서요.
마지막 작품인 <<일석이조>>는 본편 추리보다는, 책을 읽기 싫어하고 공작을 좋아하는 초등학생이 방학 숙제용 독서 감상문으로 공작 키트 조립 설명서 감상문을 제출했다는 기상천외한 발상과 결말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더 볼만 했습니다. 두 가족의 아들 딸인 다이와 사키가 알고보니 어른이 된 시점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둘이 결혼을 약속한다는 결말로 이어지는데, 작품의 마무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생각되네요.

그러나 다른 작품들은 추리가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산 넘어 산>>에서는 상사로부터 필요 없다는 안마의자를 받았지만, 기껏 운반한 뒤 현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걸 알게되어 우여곡절 끝에 결국 돈을 내고 재활용 폐기물로 버렸다는 다노이 씨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가에는 이건 모두 다노이 씨 부인의 계획이었다고 추리하지요. 근거는 미니밴을 불러서 옮길 정도면 당연히 치수를 쟀을테고, 현관문 크기도 새로 이사를 갔으면 알고 있었을텐데 그걸 알고도 무리해서 옮겼다는 것, 그리고 집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어서 구식 안마의자는 위험했는데 구태여 받아들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상사가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했지만, 부하직원 입장에서 그걸 거절못해 생긴 해프닝이라면서요. 하지만 이럴거면 미니밴으로 집으로 옮기는 시늉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면 되지요. 분해를 해 가면서까지 집 안에 들이려는 시도는 억지스러웠어요. 상사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해도, 동네 주민들에게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어느새 다 되어 있다>>는 입시에 열을 올렸던 엄마의 아이 마사키는 3지망 학교에 합격했고, 아이를 방치했던 엄마 아이 노아는 1지망 학교에 합격했던 이야기의 진상인데 이건 추리라고 하기 힘듭니다. 애초에 '아이를 집에서 가르칠 자신이 없어 입시 학원에 보냈다'는게 어떻게 '아이를 방치했다'라고 주위에 알려졌는지를 잘 모르겠네요. 입시 학원에 주말에도 열심히 다닌 아이가 1지망 학교에 합격한건 전혀 이상한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야기를 전한 후유키 나쓰미는 자기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인데도 불구하고, 노아와 마사키가 입학한 학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걸로 묘사되는데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그 뒤 이어지는 나머지 세 편의 이야기는 추리적으로는 아예 볼게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로 추리를 쏟아내는 모임도 비현실적이며, 나가에가 한 마디하면 정적에 빠진다는 묘사도 촌스러웠습니다.주위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풀어내는거라, 어차피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는 단점도 크고요.

하지만 추리적인 부분보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건 기대했던 요리, 음식과의 조화가 영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요리나 음식이 추리의 핵심 요소로 사용되는걸 기대했었는데, 사건 이야기를 끌고 오기 위한 소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사건 이야기와 엮는 것도 몇몇 사건은 억지스러웠습니아. <<산 넘어 산>>이 대표적입니다. 로스트비프를 잘 썰지 못한건 다소 아쉬움이 있는 정도일 뿐, '산 넘어 산'이라고 표현하는건 잘못된 경우지요. 무슨 일을 도모하는데 예상못한 어려움이 닥친 상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어 안 든 다코야키>>를 '엘리트인데 속에 든게 없다'는 신지 아빠에게 빗대는건 잘못된 것이었고요. 엘리트라는 것 자체가 문어가 든 다코야키잖아요?
음식, 요리 묘사도 상식적인 수준이며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아서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소소한 일상계로 가볍게 즐길만은 하지만, 추리적으로나 요리 측면으로나 모두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일단 헤어졌다 다시 합친다>>에서 아이 얼굴이 아빠와 닮았다는 표현을 "빼쐈다" 라고 번역했는데, "빼쏘다"가 사전에 있는 말이기는 해도 "빼닮았다"가 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2025/03/08

결혼반지 이야기 1~14 - 메이비 : 별점 2점

[고화질] 결혼반지 이야기 14 - 4점
메이비 지음/학산문화사

고교생 사토는 어디론가 사라지는 소꿉친구 히메의 뒤를 쫓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이세계였다. 그곳에서 사토는 히메의 결혼식에 난입했다. 히메는 이세계 크리스탈 노바티 노카나티의 공주였고, 그녀와 결혼하면 전설의 용사 반지왕이 되어 심연왕의 위협을 물리쳐야 했다. 히메와 결혼한 사토는 반지왕의 힘을 모두 끌어내기 위해, 다른 네 명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다...

이세계 판타지로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내용은 그게 아니더군요. 일본식 하렘물의 모든 요소를 총망라한 므흣(?)물입니다. 질투심 많은 순정파부터 청순가련한 내성적 얌전파, 강한 힘을 앞세우는 무투파, 연상 츤데레, 말없는 인형까지—일본 하렘물에서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유형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서 므흣한 장면을 수시로 선보이는게 내용의 핵심이거든요. 빠진 캐릭터라고 한다면 스쿨드 같은 천재 발명가 정도인데, 이마저도 사피르와 안바르가 캐릭터성을 나누어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캐릭터들을 므흣하게 구현한 작가의 작화력도 상당합니다. 전형적인 러브 코미디 하렘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진중하고 묵직한 그림체이지만, 워낙 뎃셍력이 좋은데다가 이세계 판타지라는 설정과 결합되어 강한 시너지를 보여줍니다. 종족도 인간, 엘프, 수인족에 용족, 드워프의 기계 인형(?) 등 다양하고, 설정 상 안경 소녀는 없지만 그 외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합 - 거유, 로리, 장발, 단발 등 - 이 그려지는데, 색기가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단지 야하기만 한건 아니고, 여러 액션 장면도 볼만합니다. 히메를 비롯한 공주들과 맺어질 듯하면서도 번번이 실패하는, 전형적인 하렘물 특유의 코믹한 전개도 재미를 더해 주고요. 

주인공 사토가 흔한 하렘물 주인공과 차별화되는 점도 좋습니다. 무능하고 유유부단한데도 주변 여성들이 이유 없이 따르는 캐릭터가 아니라, ‘선택받은 영웅’이기 때문에 다섯 명의 공주가 반드시 그를 따라야 한다는, 일종의 강제적인 하렘 구축 설정이 꽤 괜찮거든요. 성격도 밝고 긍정적인 성장형으로, 결국 세계관 최강의 힘을 손에 넣어 영웅답게 활약하는 것도 좋습니다. 미녀를 거느리는 당위성이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렘물로서는 괜찮습니다. 애니메이션까지 제작될만큼의 인기 요소는 충분히 갖추고 있어요. 이세계 판타지물로도 심연의 마물이 전대 반지의 용사였고, 공주들에게 배신당해 죽었다는 설정은 제법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이세계 전생 영웅 판타지로는 낙제점입니다. 설정 자체가 뻔하디 뻔하며, 심연의 마물과 싸워 나가는 과정에서도 별다른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도 없고, 내용 전개가 일사천리인 탓입니다. 오히려 곁가지라 할 수 있는 학교 생활이나 일상 생활을 다룬 하렘물 전개가 더 흥미로왔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므흣한 여성 캐릭터, 액션에 특화된 빼어난 작화에 별볼일 없는 판타지가 결합했다는 점에서는 "스트라바간차"와 비슷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트라바간차" 쪽이 더 좋기는 했지만, 우열을 가리기는 애매하네요. 별점도 같고요.

2018/10/27

비하인드 도어 - B.A. 패리스 / 이수영 : 별점 1.5점

비하인드 도어 - 4점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arte(아르테)

모두가 부러워하는 화려한 부부 잭과 그레이스. 남편 잭은 승률 100%를 자랑하는 유명 가정 폭력 전문 변호사로, 영화배우와 같은 외모까지 갖춘 근사한 남자다. 그레이스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여동생까지 사랑해주는 잭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꿈꾸지만... 그녀는 괴물 같은 그의 손길이 사랑하는 동생 밀리에게 닿기 전에 이 악몽을 끝내려 한다. 닫힌 문 뒤에서,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처절한 심리 싸움이 시작된다...(출판사 제공 줄거리 인용)

책 뒤에 소개된 짤막한 본문 -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공포를 주입할 수 있는 사람. 계속 숨겨 둘 수 있는 사람.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 보는 한 편 내 갈망을 충족시킬 방법도 마련했어. 뭔지 알겠어?" 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잭은 몸을 기울여 내 귓가에 입을 가져왔다. "너랑 결혼했어. 그레이스" - 가 마음에 들어 집어들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지인이 싸이코패스였다'는 책을 읽었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핸섬하고 친절한 신사로, 결혼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잭이 결혼하자마자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돌변한다는 이야기니까요.

이런 류의 이야기라면 범인이 치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자신의 정체를 아는 상대방을 협박하고 죽이려 하는지가 잘 묘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재미 핵심 요소고요. 하지만 이 책은 완벽한 실패작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를 주기 위한 무리한 설정 탓입니다. 잭이 치밀해서 그레이스가 탈출도 못 하고 도움도 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설정인데,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만나고 외출도 하는데 그 어떤 도움도 청할 수 없다는건 솔직히 말이 안되지요.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여 놓기는 했지만 다 핑계로 밖에는 보이지 않있습니다. 여자 화장실 안에는 같이 못 간다는 묘사가 등장하니 화장실에서 거울에 몇 자 쓴다던가 하는 식으로 방법을 생각해 볼 만 한데 절박함이 부족해요. 이래서야 감금과 협박을 즐기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위기 극복, 탈출 과정이 재미있느냐? 아닙니다! 겨우 구한 약을 잭에게 먹이고 탈출한 그레이스가 태국으로 여행간 후 완전 범죄를 꾸민다는 내용인데 과정이 전혀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우 탈출했을 뿐 잭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지하실에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벌일 일은 아니잖아요. 이럴 계획이었다면 최소한 책을 확실히 죽였어야 했습니다. 단지 지하실에 가두었다고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잭이 깨어나 탈출하면 모든게 끝나버리니까요. 실제로 잭이 바로 태국으로 쫓아 왔다면 그레이스가 옭아매인 신혼 여행 상황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뉴질랜드 행을 가장한 죽음을 맞게 되었겠지요.
결말 부분에서 에스더가 그레이스를 도와줘 완전 범죄를 성공시킨다는 것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에요. 그 전까지 에스더와의 친분은 전혀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뜬금없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밝힌 이유인 "빨간 방" 의 정체는 말이 되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세부 묘사가 너무 부족했어요.

다른 부분들도 건질게 없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와 과거가 복합되어 진행되는 진부한 방식의 전개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밀리의 수면제가 현재에 등장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가 깔끔했던 것 정도만 볼거리였습니다만, 이 정도도 수습이 안 됐다면 이야기가 성립하지도 않았을테니 딱히 장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처음에 완벽함을 강요받는 그레이스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완벽에 집착한 나머지 아내의 허술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일상계스러운 특이한 싸이코구나! 싶게 만드는 부분은 독특했기에 차라리 이런 설정을 밀어 붙였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잭이 누군가를 감금해서 공포에 질리게 하는 모습을 즐기는 싸이코패스라는 이야기는 그닥 신선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니, 너무 뻔하죠. 이런 뻔한 내용이니 잭이 남편에게 폭행당한 여자들을 전문으로 변호하는 변호사라는 작위적인 설정은 단점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한 가지 괜찮았던 아이디어라면 잭이 그레이스와 결혼한 이유입니다. 그레이스의 동생 밀리가 다운증후군이라서, 이를 이용해 밀리를 감금하려고 계획했다는 건데 불쌍한 장애우를 학대하는 악당이라는 느낌이 더해져 사악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밀리에 대해 그레이스가 가진 모정에 가까운 애정을 협박의 재료로 쓴다는 것도 그럴듯 했고요. 아울러 사건의 핵심인 공포의 "빨간방" 묘사는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장점은 빈약해서 진부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라는 결론을 뒤집기는 무리에요. 영화도 많이 제작되는 인기있고 유행하는 소재를 억지스러운 설정을 덧붙여 변주한 현실성없는 이야기라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05/08

할로 저택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3)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1.5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3 (완전판)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저에게는 걸작이 아니었습니다. "완전 공략"의 기준과 제 기준이 다르다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은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놀랄 정도에요. "완전 공략"에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살인'에 다다르기까지의 드라마의 정점이며, 등장하는 여성들이 매력적이면서도 무척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데, 뭐 하나 동의할게 없습니다.

특히 시작부터 약 80여 페이지에 이르는 초반 분량은 짜증 그 자체입니다. 루시 앵커텔을 비롯하여 존과 헨리에타, 게르다 등이 등장하여 각자의 푸념을 늘어놓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극에 달한 이기주의자들로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존 크리스토는 그 중에서도 최고봉이고요.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제 옆에 있다면 한 대 때려 주었을겁니다.
베로니카 역시 존 못지 않은 이기주의자에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을 갖춘 인물이며, 루시 앵커텔 역시 존 크리스토가 죽고나서 바로 헨리에타와 에드워드를 이어줄 생각을 하는 등, 자기 가문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고요. 솔직히 존이 살해당하는 순간,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죽어도 싼 놈이 죽은 기분이라서요. 이게 슬픈 이야기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존 크리스토와 베로니카, 루시 앵커텔이 그나마 이 작품에서 가장 생동감넘치고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다른 인물들은 그들의 숭배자거나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는 딱 한명, 여주인공 헨리에타만 비교적 공평한 시각에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될 뿐입니다.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의 이기주의자들과 그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이야기가 재미있을리 없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습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 사건이 미궁에 빠진건 단지 운이 좋았으며 우연찮게 주요 등장인물들이 범인 게르다를 감싸주었기 때문이니까요. 특히나 앵커텔 가문의 정점에 있는 루시 앵커텔이 작정하고 도와준 덕분에, 게르다가 당장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게 사건의 전부입니다.

또한 동기도 문제가 많아요. 게르다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동안의 숭배의 감정이 배신으로 일그러졌다는 것 자체는 말은 됩니다. 그러나 존은 이전에도 바람을 피운걸로 묘사됩니다. 이전의 불륜, 바람은 참고 넘어갔는데 눈 앞의 불륜을 참지 못하고 살의에 휩싸여 계획적인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작 중에서도 이전에 불륜을 저지른 적이 있지만, 별 일 없었기에 게르다는 범인이 아닐거라는 식으로 묘사할 정도인데 말이죠. 이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으니, 제대로 된 동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살의 역시 게르다 시점으로는 한 번도 묘사되지 않아서, "공략"에서 이야기한대로 '살인'에 다다르기까지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이러한 주변 시점의 묘사는 동기를 감추고, 게르다 말고 다른 범인역을 내세우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합리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요. 용의자도 뻔해서 이렇게 다른 범인역을 내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피해자 존을 비롯, 헨리, 에드워드, 데이비드라는 지나가는 행인스러운 이름의 남성들은 모두 주변인이고 곁가지이며, 미지는 존이 죽어버리면 헨리에타가 에드워드와 결혼할 수도 있으니 범행을 저지를 리 없어요.
즉 루시 앵커텔, 헨리에타, 베로니카, 게르다가 유력한 용의자인데 앞서 이야기했듯, 루시와 베로니카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운명과 인생을 스스로 리드해가는 여성들입니다. 헨리에타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들이 타인 때문에 자신의 위험을 감수한다는게 와 닿을리 없지요.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면, 우선 루시의 동기라면 앵커텔 가문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입니다. 에드워드가 헨리에타를 좋아하니, 둘이 결혼하면 만사형통인데 헨리에타가 존과의 관계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지요. 그러나 에드워드의 헨리에타를 향한 마음이 영원할거라 믿는 건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사건 이후 에드워드는 미지와 결혼하죠. 설령 당장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에드워드의 다음 세대인 데이비드가 건재하니 가문 걱정은 너무 이릅니다.
그렇다면 여배우 베로니카가 범인일까요? 그러나 세계적인 여배우인 그녀가 15년만에 만난 존에 대한 질투심을 폭발시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베로니카와 존의 다툼은 널리 알려졌으니 그녀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이유도 없고요.
그나마 헨리에타가 용의자로는 유력한 편입니다. 그녀는 존이 베로니카와 하룻밤을 보낸걸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불륜녀가 불륜남의 또다른 연인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 이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건 마찬가지입니다. 여사님의 묘사도 중반까지는 루시 앵커텔을 독자에게 범인역 먹잇감으로 던져주는걸 보면 현실적으로 헨라에타를 범인으로 몰고가는건 어렵다는걸 알았던게 분명합니다.

아울러 주요 인물들이 모두 게르다를 도와준 이유는 아예 설명되지도 않는 점, 게르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당장은 빠져나갔다손 치더라도 영원히 은폐가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포함하면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할로 저택의 총을 쓴 이상, 외부에서의 침입자 가능성은 없으니 누군가는 죄를 뒤집어 썼을게 뻔하거든요. 과연 다른 누군가가 혐의를 받는데도 루시가 잠자코 있었을까요? 언제가 되었든 진범, 혹은 범인역을 내세웠어야 했을겁니다. 그럴거라면 가문의 사람이나 지인보다는 베로니카를 내세우는게 손쉬웠을텐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여기에 푸아로가 정말로 하는게 아무것도 없다는걸 더하면 이 작품이 정말로 추리 소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푸아로가 진상을 알아챈건, 루시와 헨리에타 들보다도 훨씬 뒤이며,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아요. 푸아로의 유일한 활약이라면 마지막에 게르다와 헨리에타가 만나는 자리를 찾아와 헨리에타가 독살당하는걸 막고 게르다가 죽게 만드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등장인물이 다 모인 자리에서의 추리쇼는 이거에 비하면 극사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게르다가 실제로 멍청하지는 않고 '멍청한 척' 했다는걸 초반부에 드러낸다던가, 헨리에타가 사건에 사용된 총을 조각상 안에 감춘다던가 하는 디테일은 나쁘지 않지만,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기주의자들의 장광설을 참고 볼 만큼 추리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시각이 "완전 공략"과 다르다는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이제 더 이상은 "완전 공략"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책을 골라봐야겠습니다.

2022/03/09

블랙 머니 - 로스 맥도날드 / 박미영 : 별점 2점

블랙 머니 - 4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내용, 진상, 범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촌 몬테비스타를 찾은 루 아처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로 수상쩍은 남자 프란시스 마텔의 조사에 착수했다. 피터의 약혼녀였던 지니가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마텔의 정체는 몬테비스타 테니스 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가난뱅이 불법 체류자 펠릭스 세르반테스였다. 그는 7년 전, 지니 아버지 로이가 자살한 직후 파리 유학을 떠난 뒤 출세해서 첫 눈에 반했던 지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유학은 라스베가스 도박사 케첨 (레오 스필먼)의 도움 덕분이었고, 마텔이 가지고 있던 현금 십만여달러 역시 레오 스필먼의 돈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거를 더듬어 가는 와중에 지니의 어머니 마리에타, 마텔이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하드보일드 3대장 중 한 명인 로스 맥도날드루 아처 시리즈 장편. 제목의 블랙 머니는 라스베가스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레오 스필먼이 탈세로 빼돌린 돈을 의미합니다. 카지노에서 큰 돈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할인된 금액으로 수금을 하는 식으로 빼돌렸던 거지요.

거장의 작품답게 읽는 재미는 상당합니다. 별 것 아닌 듯한 의뢰가 점점 커져가고, 이 와중에 등장인물들이 서로 더럽게 얽히고 섥힌 관계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완급 조절과 흥미를 돋우는 묘사와 전개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솜씨가 빼어난 덕분입니다.

그러나 완성도는 그닥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등장하는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풀어보지요.

  1. 7년 전, 레오 스필먼은 도박 빚 대신 딸을 상납하기로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로이 파블론을 구타했습니다.
  2. 혼절한 로이 파블론을 태블론 교수가 수영장 속에 밀어 넣어 살해했습니다.
  3. 펠릭스 세르반테스는 레오 스필먼을 협박해서 유학을 떠납니다.
  4. 펠릭스는 유학 후 프란시스 마텔이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한 뒤, 파나마 영사관에서 일하게 됩니다.
  5. 마텔은 영사관 직원 신분을 이용하여 레오 스필먼의 블랙머니 세탁을 돕습니다.
  6. 7년이 후, 레오 스필먼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프란시스 마텔은 모든 블랙머니를 들고 달아닙니다.
  7. 마텔은 몬테비스타를 찾아 첫 눈에 반했던 버지니아 (지니) 파블론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합니다.
  8. 지니는 태블론 교수와 불륜 관계로 단지 돈이 필요해서 마텔과 결혼했습니다. 곧바로 이혼하고 위자료를 챙길 셈이었고요.
여기까지가 이야기에서는 후반부에 드러나지만, 전체 시간 순서상으로는 사건의 도입부인 셈인데, 인간들이 서로 엮이게 된 동기가 명확하고 나름 말은 됩니다.

그런데 이 뒤,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게 되는 태블론의 범행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순서대로 써 보자면,

  1. 지니는 마텔과 결혼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2. 이 때 마리에타는 지니로부터 남편 로이 죽음의 진상을 듣게 됩니다.
  3. 마리에타가 무언가 언급하려 하자, 태블론은 그녀를 살해합니다.
  4. 뒤이어 태블론은 마텔을 살해하고 돈을 갖고 도망칩니다.
인데, 우선 태블론은 마리에타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마리에타가 로이의 범행을 폭로할걸 우려했다? 마리에타도 지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은게 전부일 뿐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어요. 경찰도 모두 자살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한 알콜중독자 아줌마의 하소연을 누가 제대로 귀담아 들어주었을리도 없습니다.

지니가 7년이 지나서야 태플론의 범행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은 까닭도 모르겠어요. 마텔로부터 진상을 들었다 한 들, 그걸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요. 마텔을 죽이고 현금을 가지고 도망친 이유 역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텔이 블랙머니를 빼돌려 쫓기고 있었다는건 태블론이 알 턱이 없었으니 이를 위장해 살해한다는건 불가능했으니까요. 로이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마텔을 죽이고, 마리에타를 죽인 범죄를 마텔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였을 수 있긴 합니다. 문제는 그랬다면 마텔의 시체를 숨겼어야 했습니다. 지니의 도움을 받았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살인 하나를 덮기 위해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바로 발각된다는건 바보나 할 범행이지요. 아울러 죄를 뒤집어 씌울 의도였다 한들, 마텔은 이미 지니와 결혼해서 집을 떠났으니 마리에타를 죽일 하등의 동기가 없습니다. 경찰을 속이기는 힘들었을 거에요. 차라리 지니와 함께 도피하기 위한 자금 마련 목적이었다면 말이 되었겠지만, 미적거리며 집에 머물고 있었으니 이 역시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

루 아처가 태블론이 진범이라는걸 깨닫는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추리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태블론이 베스와 결혼한 이야기를 들은 정도로 그가 지니와 깊은 관계였다는걸 깨닫기는 불가능한 까닭입니다. 게다가 지니도 단지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고, 베스는 루 아처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레오 스필먼은 남의 아내 키티를 빼앗아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고, 실베스터 의사의 아내 오드리는 로이 파블론과 불륜 관계인 등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문란하기 때문에, 이를 태블론만의 문제로 돌릴 이유도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전형적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등장인물들이 너무 비밀을 숨긴 탓에 사건이 커져버린다는 뻔한 전개를 답습하는 탓입니다. 예컨데 지니가 태블론과의 관계만 일찍 밝혔어도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겠지요. 지니가 어머니가 살해된 이후에도 태블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건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태블론을 훨씬 더 사랑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도 커요. 

탐정이 들쑤시고 다녀서, 모두에게 지옥문이 열렸다는 결말도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과 차이를 보이지 못합니다. 루 아처가 없었다면, 마텔의 죽음은 블랙 머니를 둘러 싼 악당들의 복수극으로 마무리 되었을 수도 있었을겁니다. 태블론은 10만 달러로 가정의 평화와 불륜을 이어갈 수 있었을테고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는 마텔의 죽음으로 끝난 상황이라서, 루 아처가 사건에 계속 개입할 명분도 없는데 왜 진실을 밝히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캐릭터 설정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남자들은 도박과 여자 때문에 파멸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지요. 미모를 제대로 활용한 여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건 조금 독특하기는 했지만요. 또 첫 사랑을 되찾기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거액을 모은 뒤 살해당하고 마는 프란시스 마텔은 "위대한 개츠비" 설정과 너무 똑같아서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 따르면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 작품만큼은 전통에만 기대고 있을 뿐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비교적 후기작인데, 확실히 초기작들보다는 많이 처지네요. 코엔 형제가 영화화한다고 몇 년 전 언급했던데, 영화 버젼이 차라리 더 기대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감독이 코엔 형제니 기본 이상은 해 줄거라 확신합니다.

2010/01/18

수상한 사람들 - 히가시노 게이고 / 윤성원 : 별점 3점

수상한 사람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으로 어딘가에서 누군가 강추하기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몇번 밝혔듯이 별로 좋아하는 작가는 아닙니다. 그래도 "탐정 갈릴레오"와 같은 단편집과 기타 앤솔러지에서 접한 단편들이 괜찮았었기에 실패해도 데미지가 적을 것 같아 구입한 것이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역시나 일정 수준 이상은 된다 보여집니다.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이 책에 실린 총 7편의 단편들 대부분이 전부 "추리"라는 쟝르에 충실하기 때문이죠. 그것도 퍼즐 트릭 중심의 본격물이 많아 추리 애호가로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아무래도 단편이기 때문인지 작가의 그간 싫어했던 가장 큰 단점인 "러브라인"이 부각되는 작품이 몇개 없다는 것도 좋았고요. 독특했던 점이라면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결혼 보고" 이외의 모든 이야기가 1인칭이라는 것으로,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주인공과 세계관으로 연결된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어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설정인 두번째 작품 "판정 콜을 다시 한번!"만 빼고요^^) 이게 설마 작가의 의도는 아니겠지만요.^^

하지만 추리물과는 거리가 먼 드라마인 "판정 콜을 다시 한번!"과 말랑말랑한 인간관계가 주요 사건보다도 강하게 부각되는 "달콤해야 하는데" 두편이 좀 이질적이라 아쉽네요. 나머지 다섯편으로는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만 요 두편때문에 전체 별점은 3점입니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한 기존의 제 편견을 어느정도 깨 준 작품집임에는 분명합니다.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네요.

자고 있던 여자
나는 입사동기 가타오카의 권유로 집 빌려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낯선 여자가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와 잔 남자를 찾아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 우기며 집에 눌러 앉는데...
잭 레몬 주연의 코미디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경쾌한 도시파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황당한 사건에서 결말에 이르는 구조가 깔끔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참 좋은데 이렇게 영화 같은 곳에서 설정을 따 와서 추리소설을 창작해도 재미있겠더군요.
어차피 톨루엔의 행방 추적을 한다면 간단하게 꼬리가 밟혔을 것이라는 점은 약점이지만 일상계니 너무 딱딱하게 따질 필요는 없겠죠. 별점은 3.5점입니다.

판정 콜을 다시 한번!
나는 노보루의 꼬임으로 노부인의 돈을 강탈하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뒤 쫓기는 신세가 된다.
결단코 추리물은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평이한 드라마로 일종의 성장기랄까.. 싶은 작품인데 야구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더군요. 상식적으로는 해당 판정에 대한 설명은 판정콜 이후 바로 선수에게 해 주는게 정상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설득력도 거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죽으면 일도 못해
하야시다 계장이 휴게실에서 문을 걸어잠근채 시체로 발견된다. 나는 직속 부하라 어쩔 수 없이 사건에 관련되게 되는데...
두가지 트릭이 상호 연계되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밀실 트릭"은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등장해 왔던 트릭이긴 합지만 작품과 잘 어울리게 구성되어 마무리되는 전개가 매끈합니다. 경찰 수사로 결국 진상이 밝혀진다는 현실성 높은 결말도 의외로 놀라웠고요.^^
단, 어차피 범행이 밝혀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인 관계로 완벽한 트릭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약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현실에 기반한 재미있게 읽었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달콤해야 하는데
나는 상처하고 하나뿐인 딸마저 잃은 뒤에 나오미와 결혼하여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 여행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일상계랄까... 과거 "사고"의 진상을 기억에 의지해 밝혀낸다는 작품입니다.
본격물로 보기에는 정보제공이 공정하지 못해 실망스럽고 이후의 전개도 억지스러워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어차피 제가 싫어하는 러브라인이 주인 작품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등대에서
나는 소꼽친구 유스케와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홀로 여행을 계획한다. 이 사실을 알은 유스케 역시 동일한 코스를 역순으로 밟아나가는 여행을 떠난다고 선언한다.
의외의 전개가 연속되는 단편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친구간의 다툼 정도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생각외였어요.
기발한 발상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싶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의표를 찌르는 이런 단편을 써보고 싶네요.

결혼 보고
오래전 소식끊긴 친구 노리코에게서 온 결혼을 알리는 편지. 편지를 받은 도모미는 편지안에 동봉된 사진 속 주인공이 노리코가 아닌 것을 알고 놀라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리코의 고향으로 떠난다.
황당한 시츄에이션이죠? 일반인들은 정말 상상하기 힘든 당황스러운 설정을 토대로 흥미진진하게 전개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우리나라 버젼이라면 "친구가 결혼한다고 해서 갔더니 신부가 내가 알던 그 아가씨가 아니더라" 정도 되겠네요. 물론 이것도 살인을 부르는 설정이긴 하겠죠.^^
하지만 설정에 비해 동기나 시체의 처리 등 범죄에 관련된 내용이 현실적이지 못한 등 아이디어가 매끄럽게 전개된 맛은 약하기에 별점은 3.5점만 주겠습니다.

코스타리카의 비는 차갑다
나는 5년에 걸친 해외근무의 마지막 해를 맞아 아내 유키코와 함께 코스타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2인조 강도에게 습격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국의 풍광 묘사, 주인공들의 배경 묘사가 더 중심인 듯한 이상한 작품. 왜 무대가 코스타리카일까요? 트릭도 구태여 외국이 아니라도 상관없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작가가 코스타리카에 관광갔다가 와서 쓴 글이 아닌가... 하는 의심만 생기네요.
내용에 비하면 쓰잘데 없이 길고 완성도도 그닥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2019/09/01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2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1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겐 가문의 현 당주인 할머니 야요이가 손녀 유카리가 실종된 사건을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맡겼다. 마침 호겐 가문의 본가가 있던 '병원 고개의 목매달은 집' 에서 기묘한 결혼 사진을 찍은 혼죠 사진관의 나오키치도 결혼한 부부의 조사를 요청했고, 긴다이치 코스케는 두 사건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차렸다.
조사 결과 유카리를 유괴했던건 결혼한 신랑 야마우치 도시오였다. 놀라운건 그가 여동생이라고 데리고 다니다가 결혼한 고유키가 유카리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몇일 뒤, 야마우치 도시오의 목이 '병원 고개의 목매달은 집'에 매달린채 발견되는데...

꺄! 완전 취향 저격의 독서였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를 자극하는 고전적인 설정, 전개와 묘사가 아주 감탄스러운 수준이거든요. 각 챕터마다 곁들여진 짤막한 부제같은 단문도 옛스럽지만 참극! 공포! 저주! 악연! 증오와 원한의 불꽃! 배우는 모두 모였다! 같은 진부한 묘사도 눈길을 사로잡아요. 전화기조차 격렬하게 울릴 정도이니 말 다했지요. 비련의 여주인공이 가혹한 운명 때문에 결국 총탄에 맞아 죽고, 그녀의 입으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결말까지 정말로 완벽합니다! 박수가 절로 나오네요.

그야말로 요코미조 세이시다운 설정과 묘사들도 애호가의 팬심을 자극합니다. 전형적인 "대부호 콩가루 집안의 복잡한 가정사가 낳은 비극" 이라는 동기부터요. 진부하다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낡아빠지긴 했지만 이런게 바로 요코미조 작품의 매력이지요.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될 때 까지 1권 분량의 2/3를 사용할 정도로 진행이 느린 것도 고전적입니다. 그러나 이를 원숙한 솜씨로 등장인물과 기묘한 사건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기 힘듭니다. 과연, 짬밥(?)은 날로 먹은게 아닌 셈이에요! 물론 호겐 가문과 이가사리 가문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4대째를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첫 단락은 과하긴 했습니다만... 

특유의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전해주는 묘사도 고전적이기는 한데, 작가 인생의 말년에 발표했던 쇼와 시대의 작품이라 그런지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묘사들이 눈에 뜨인다게 특이했습니다. 피해자인 야마우치 도시오가 재즈 악단 '앵그리 파이러츠'의 리더였다는 등 재즈 콤보 멤버가 사건의 주요 인물이라는 점부터 그러합니다. 또 앵그리 파이러츠의 멤버 중 한 명인 사가와 데쓰야는 애꾸눈인데 그의 안대는 시크하며, 그가 붉은 원색 코트를 입고 지휘를 하면 여자들이 모두 사로잡혔다는 묘사는 처절함마저 느껴질 정도에요. 재즈와 텔레비젼,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젊은 세대를 의식한 탓이겠지요. 그런데 젊은 세대의 방종에 대한 기성세대의 못마땅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도 보이기는 하네요.
 당대 풍광을 잘 느끼게 해 주는 묘사도 좋습니다. 전후 막 복구가 시작되던 분위기가 잘 느껴지거든요. 도쿄가 새롭게 개발되면서 도로가 확장되고 부흥하는 부분의 설명이 특히 볼 만 합니다.

현실성 여부를 떠나 팬으로 즐길 거리도 많아요. 몇 년, 아니 몇 십년이 지났지만 더벅머리에 머리를 긁적이고, 볼품없는 하카마에 낡은 회색 외투와 삿갓 모양 모자를 쓴 긴다이치의 행색이 대표적입니다. 비올 때 쓰는 박쥐 우산마저도 친숙합니다. 도도로키 경부나 와 같은 친숙한 등장인물도 반갑기는 마찬가지고요. 시리즈 마지막 작품인지라 일종의 후일담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도도로키 경부는 은퇴 후 잘 나가는 탐정 사무소 소장이 되었고 그의 아들은 경부보로 경찰에서 일하고 있으며, 거리의 양아치였던 다몬 슈는 잘나가는 나이트클럽의 매니저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요.
여기서 도도로키 경부가 생각 이상의 낭만파 꼰대라는 묘사도 재미있었어요. 지금 하는 불륜 조사같은 일 보다 긴다이치가 가져온 가슴이 뛰는 모험은 흥미로와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건방진 의뢰인과 예전에는 잔챙이 범죄자였던 다몬 슈와 함께 하는건 싫어하는데 이거야말로 꼰대죠. 전형적인 '왕년에 내가' 류의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이런 완전 고전적인 즐거움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다는건 단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추리적으로는 완전 꽝이에요. 모두 3건의 살인 사건이 벌어져서 양적으로는 풍성한데 가장 비중이 높고 중요한, 모든 사건의 발단인 첫 번째의 야마구치 도시오 살인 사건부터가 엽기적인 사건 현장의 묘사 외에는 억지스럽고 엉망입니다. 우선 후더닛 물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야마구치 도시오의 부인 고유키가 실종되었으니까요. 나중에 고유키가 아니라 혼죠 가문의 딸 유카리가 실종되었다는게 밝혀지지만 이 역시 사건에는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이미 둘이 닮았다는걸 앞 부분에서부터 자세히 밝히고 있어서 수수께끼도 뭐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동기와 같은 와이더닛 측면으로는 괜찮은가? 역시나 별 볼일 없어요. 야마구치 도시오에게 농락당하고 분노한 유카리가 반대로 그를 농락하려다 둘 다 죽게 되었다게 진상이거든요. 트릭도 뭐도 아무것도 없는, 젊은이들의 문란한 행각으로 벌어진 사고일 뿐입니다.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목을 풍경처럼 매달은 이유'가 정말 야마구치 도시오의 유언 때문이었다는 이유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고요.
그 외의 괜히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들은 거슬리기만 합니다. 고유키가 야요이를 설득해 시체를 없앤게 대표적입니다. 그 집은 폐가에 가까와서 사건이 바로 발각될 이유는 없었던 만큼 무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둘이 사랑의 도피를 한 것처럼 위장하고 시간을 번 뒤 집을 아예 재건축 하는 형태로 갔어도 무방했을거에요. 야요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고요. 여러모로 사건을 억지로 만들기 위한 무리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세 번째, 요시자와 살인 사건은 추리적으로나 이야기적으로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범인의 분노로 인한 무차별 살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두 번째 사건만 후더닛, 와이더닛 측면으로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파티 참석자들 모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졌는데 이는 일종의 시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범행이 일종의 착각으로 벌어졌다는 의외성도 좋았고요.
문제는 사용한 트릭이 저자의 이전 작품인 "나비 부인 살인 사건"에 등장했었던 트릭이라는건데, 범인이 추리 소설을 통해 트릭을 익혀서 사용했다는 식으로 트릭의 자가 복제를 설득력있게 넘어가는 솜씨는 눈여겨 볼 만 합니다. 날로 먹은 듯 하지만 이 역시 거장의 재치겠지...요. 와이더닛 측면으로도 협박자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동기는 명확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의 등장 인물들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 범위 밖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어요. 우선 범인 시게루부터 보자면, 아들 데쓰야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분노한다는건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살인까지 저지를만한 인물이라는 묘사가 그 전에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너무 갑작스러워요. 분노의 대상에 아내가 포함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요.
데쓰야가 도시오의 아들이라는 비밀을 알게 된 후 방황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에요. 어머니가 유카리, 아니 고유키라도 그가 호겐 이가라시 가문의 후손이라는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유카리는 엄연히 야요이의 손녀이고, 고유키는 데쓰야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까지 방황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혼조 도쿠베에가 과거 유카리의 사체를 숨긴 뒤 이를 통해 호겐 가문을 협박해 왔다던가, 이를 효도 후사타로가 눈치채고 협박을 이어간다는 설정도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제일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무려 백만엔이나 되는 선금과 함께 사건을 의뢰받은 주제에 의뢰인이 죽도록 방관한 긴다이치의 무능함이고요.

이렇게 추리적으로는 너무 별 볼일 없기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캐릭터 설정도 기대 이하인 등 - 예를 들어 사가와 데쓰야는 최초 야마구치 도시오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될 정도로 격한 분노를 품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뮤지션으로 설명되는 식으로 - 솔직히 더 낮은 점수를 주어도 무방하긴 한데, 고전 애호가들은 여러모로 즐길 거리가 많기는 합니다. 최소한 저는 깔깔거리며 즐겁게 읽었답니다. 저 같은 고전 애호가 분들께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이 작품을 즐길 정도의 고전 애호가가 얼마나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2017/02/26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 기타무라 가오루 / 오유리 : 별점 3점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리 옮김/작가정신

일상계 추리소설로 유명한 기타무라 가오루가 출판사에서 일하는 코사카이 미야코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술 때문에 벌어진 온갖 에피소드들을 일종의 만담처럼 써 내려 간 작품입니다. 짤막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연작 단편 소설 느낌도 듭니다. 등장인물들이 한명씩 결혼하고, 마지막은 미야코가 화가 오코조와 결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거든요.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술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 - 술 먹고 상사에게 실수를 한다던가, 중간에 잠들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던가 등 - 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고 뻔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냥 술 먹고 사고치는 이야기만 수록된건 아닙니다. 사건들의 디테일이 좋고 기승전결, 게다가 반전까지 맞아 떨어지는 재미난 이야기들도 많아요. 예를 들면 미야코가 술을 먹고 엔도 편집장에게 와인을 쏟게 되는 사건 이야기가 있습니다. 와인을 쏟는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이는 이야기로 따지면 '기승'에 불과합니다. '전', 즉 극적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은 아내에게 잡혀사는 엔도에게 술취한 다음날 아내가 화를 내면서 와인을 누가 쏟았냐고 물어보는 장면부터입니다. 엔도는 회사 여직원이 취해서 쏟았다고 이실직고하지요. 그런데 아내가 보여준 것은 런닝이었습니다! 엔도는 기겁을 합니다. 셔츠는 전날 술집에서 빨아주어서 얼룩이 없어진걸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술취해서 술을 쏟았는데 셔츠가 아니라 런닝에만 묻었다.... 여기가 '전' 부분입니다. 다행히 셔츠에 묻은 와인도 지워진게 아니라 어두운 조명 탓에 지워진걸로 보였다는 결로 이어지고요. 재미있지 않나요?

추리 소설가다운 에피소드들도 제법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토구치 마리에, 통칭 문 언니가 오랜 동료 이케이의 결혼 축하 회식에서 이케이의 결혼 반지를 잃어버리는 에피소드입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결국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반지를 찾지 못해 우는 문 언니를 이케이가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미야코의 추리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어쨌거나 문 언니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싶었던게 아닐까? 그러면 그 핑계로라도 울 수 있을 테니까...' 일상계다운 멋진 이야기였어요.
다음은 미야코가 친구 사나에와 함께 가루이자와로 출장갔을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함께 술을 먹고 미야코가 깜빡 잠든 사이, 사나에가 사라집니다. 미야코는 한참 찾다가 호텔 방 밖에서 자고 있는 사나에를 발견하지요. 그런데 그녀를 데리고 들어 오려다 호텔 방 문이 닫혀 못 들어 오게 됩니다! 만화 등에서 흔히 보아 온 이야기의 재탕이긴 한데 진상에 대한 추리가 그럴 듯 했습니다. 사나에가 사는 집 구조가 호텔과 비슷했기 때문에, 술에 취해서 집에 온 것으로 착각했던 사나에가 호텔 방 밖에서 뻗었던 겁니다. 집에서처럼 욕실에서 나온 다음, 좌측으로 돌아 문을 열고 난 뒤 바로 쓰러졌는데 방의 배치가 정 반대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묘사도 볼만합니다. 누군가가 이야기 해 주는 듯한 문체도 독특하고요. 특히 코사카이 미야코의 심리묘사와 대사들이 정말로 찰집니다. 정말로 어딘가에 있는, 현실 속 누군가를 그대로 그려낸 듯 생생한 덕입니다. "뭐가 구시렁이고 뭐가 불평인가. 그 기준점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전자에 약간의 유머와 여유가 있다면, 후자는 오로지 암흑의 구렁텅이 같은 이미지다." 같은 식으로 요. 이외에 온갖 맛있는 술과 안주에 대한 소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애주가, 특히 만화 "음주가무연구소"를 재미있게 읽은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취향 저격이실 겁니다.

2021/09/17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설혜심 : 별점 3점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 6점
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

지적인 흥분과 읽는 재미를 동시에 전해주는 여러 미시사 저작물을 발표했던 설혜심 교수의 신작입니다. 책을 펴낸 이유를 설명하는 서두를 보니, 코로나로 인해 여러모로 쌓였던 스트레스 해소 차 썼다고 합니다. 본업과 별개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이만한 책을 쓸 수 있다니, 그 내공이 정말 놀랍네요.

하여튼, 저자 스스로 이 책은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로 요약할 수 있다는데 독자가 보기에는 'B급 문학을 역사 연구의 소재로 활용'해보는 모험적 시도의 결과물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을 통해 당시 '영국의 세계관'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니까요. 그만큼 여사님 작품이 당시의 실재를 잘 반영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사님 작품에 온갖 저택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여사님 본인이 집 보러 다는게 취미일 정도로 열성적인 부동산 투자자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영국인들이 대체로 집에 대한 집착이 어머어마했다는걸 설명해 주거든요. 이 집착이 '대영제국'을 만들었다는 해석도 그럴 듯 했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인들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면 거창하고 복잡한 소유권 선언 의식부터 했는데, 영국인들은 사는 집부터 짓고 자기 영역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랍니다. 점유를 통해 해당 땅을 지배한다는 현대적인 부동산 논리인 거지요. "아무리 낡아 빠진 집이라도 그것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다."푸아로가 말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제야 그 좀 납득이 되네요.

1차, 2차 세계 대전 중 '병역 면제'에 대한 사실과 사회적 인식도 여사님 작품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머랭 살인 사건"의 주인공 보비 존스가 입대 직후 시력 문제로 제대했던 이유부터 볼까요? 1차 대전 때 입대 전 신체 검사를 민간 의사들이 시행했는데, 이들의 수당을 적합 판정을 내린 신병 수만큼 지급했던 탓이랍니다. 그래서 '적합' 판정이 남발되어서 군대에 가면 안되면 보비 존스조차 입대하게 된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건 1차 대전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2차 대전 때는 징집 대상이 여성까지 확대되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직업군은 오히려 병역이 배제되었으며, 여기 농부가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 농과 대학 입학 경쟁이 치열했다는 등의 사실을 "파도를 타고"의 롤리와 린을 통해 알려줍니다. 전쟁 당시 롤리는 일하던 농장에 묶였지만, 약혼녀 린은 징집되어 참전했었다는 설정이거든요. 더불어 롤리가 지옥같다고 묘사한 이 상황으로 당시의 사회적 인식도 쉽게 알 수 있고요. 

또 "쥐덫" 등 여사님 작품들은 대체로 군대에서 복무했던 여성들은 똑똑하고 유능했던 반면, 남성들에게는 군대가 지능이 별로 필요없는 집단이라는걸 드러내는 묘사가 많았다는 걸로 당시 군인에 대한 여사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실패했던 첫 결혼의 상대방이 장교 출신인 탓도 어느정도 있었겠지요? 당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하게 대접받고 경쟁할만한 곳은 전시 군대가 유일했다는 점도 한 몫 했겠지요.

이른바 '영국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다양한 작품에서의 등장인물들 대사로 제국주의, 인종 및 타 국가에 대한 편견과 같은 당시 영국 국민들 의식을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여사님 스스로가 이를 '섬나라 근성'이라며 비꼬는 묘사도 인상적이었고요. 이유보다 현상만 채집하여 선보이고 있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런게 실재하는 역사이자 진정한 사람들 관점의 미시사라는 생각도 듭니다.

"돈" 항목은 이런 관점의 미시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펜스가 "비밀 결사"에서 이야기했던, 오직 세 가지 뿐인 돈 버는 방법에서 시작됩니다. "물려받거나, 결혼하거나, 직접 벌거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사님 작품에 많이 나오는 몰락한 귀족과 미국 부자의 결혼이라는 상황과 실제로 20세기 초반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미국 대부호 딸과 결혼했던 사례를 연이어 소개해 줍니다. 대표적인 "달러 프린세스"로 소개된건 처칠의 어머니 레이디 랜돌프 처칠이었고요. 실제로 돈을 벌어 자수성가한 사람들 이야기가 없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여사님 작품 속 이야기를 실재 역사적 상황과 맞추어 설명한 아주 좋은 사례라 생각되네요.

하녀, 하인들 이야기가 주로 소개된 "계급"도 미시사적인 측면에서 볼 만 합니다. "돈"과 마찬가지로 하녀에 대한 당시 시각과 인식을 여사님 작품은 물론, 여러가지 실제 자료를 통해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식과는 다르게 20세기 초만 해도,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하녀 일을 추천했었다는게 기억에 남네요. 도시의 악덕으로부터 젊은 처녀를 보호하고, 상층 계급의 사회적 규범을 익힐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나요? 운만 좋으면 좋은 혼처를 찾을 수도 있었고, 여사님 작품에서처럼 거액의 돈을 상속받을 수도 있었으니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상류층들도 하인에게 예의를 갖추는게 제 1원칙이었다니 지금보다도 고용살이하기는 더 나은 시대였을걸로 생각도 되고요. 물론 "카리브 해의 미스터리", "주머니 속의 호밀" 등 하녀가 불쌍한 희생자가 되는 작품도 제법 많습니다만....

그 외에도 심령 현상, 강신술과 관상 등으로 대표되는 '미신'에 대한 당시 인식, 미스 마플 이야기와 미시사라는 학문의 핵심이 일치한다는 주장 등도 모두 미시사적으로 볼만 했었습니다. 미시사에 대한 이론은 특히 와 닿았습니다. 저는 그냥 쉽게 특정한 분야, 특정 시기만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게 미시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미스 마플이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처럼, 일반적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일반 사람들과 개인의 삶을 집중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지요. 앞으로 이런 부분을 좀 더 유념해서 책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순수하게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팬으로서 즐길 요소도 많았습니다. 탐정 에르큘 푸아로 캐릭터 유래처럼요. 그가 벨기에인이었던건 여사님이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을 쓸 무렵, 근처에 살고 있었던 벨기에 난민을 떠올렸던게 계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영국인들 도움에도 별로 고마와하지 않고 불평을 늘어 놓았는데, 거기서 푸아로의 까탈스러운 성격이 빚어졌다고 하네요. 푸아로는 벨기에라는 나라가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무시해도 좋을' 나라라서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하는데, 프랑스 인이었다면 지금의 푸아로와 같은 인기는 없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탈 것'을 통해 여사님 작품 속 자동차, 기차, 비행기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이 대표적이에요. 밀실처럼 폐쇄된 공간이고, 승객들은 모두 우연히 모엿으며, 갇혔지만 창 밖을 볼 수 있고 중간중간 정차해서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기차는 추리 소설 무대로 적합하다는 이론도 기억에 남습니다. "부산행"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와 일치했던 덕분입니다.
그런데 탈 것에 '배'가 등장하지 않는건 좀 의외네요. "나일강의 죽음"의 주 무대가 유람선이었는데 말이지요. 외국 여행을 위해 유람선에 모인 영국인들은 미시사 적으로 해석하기 아주 적합한 소재인데 왜 빠졌을까요?

하지만 모든 주제가 여사님 작품으로 당시 영국 세계관, 상황을 돌아볼 수 있다는 목적에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예컨데 "독약"은 당시 영국 상황보다는 애거서 크리스티 개인에 관련된 주제였습니다. "교육"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상황들도 마찬가지에요. 여사님이 사립학교 출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건, 해로 출신이자 난봉꾼이었던 오빠 몬티 탓, 그리고 여사님이 제대로 된 학교 생활 경험이 없다는 탓이 컸으니까요. 

그리고 "섹슈얼리티", "신분 도용"은 여사님 작품 속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잘 분석되어 있는 결과물로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사님 작품 속 동성애, 포와로와 헤이스팅스의 관계 분석은 팬으로서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요. 그러나 이를 당시 시대상과 잘 엮어서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호텔" 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보이 호텔과 리츠 호텔의 간략한 역사와 함께 "버트램 호텔에서"의 버트램 호텔 모델이 어디인지에 대한 해석이 거의 전부로, 일종의 미시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호텔에 국한된 내용이었을 뿐입니다. 

반대로 "배급제"는 전쟁 때 시작되어 1950년대까지 이어진 배급제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만, 정작 여사님 작품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여사님 관련 이야기도 작품보다는 자서전 내용이 중심이고요. 또 앞서 말씀드렸던 미시사적인 부분들도 재미는 있지만, 뒷받침하는 사료와 근거가 많지 않고, 분량도 적어서 깊이있는 내용으로 보기 어려웠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유명 작품, 여사님이 직접 뽑은 베스트 10 과 같은 작품보다 "파도를 타고"와 같은, 특정 작품에 등장했던 상황과 대사 소개가 많은 것도 아쉬웠어요. 여사님의 전작을 둘러본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으니까요. 저자가 소개한 소재도 미시사적으로 좀 더 의미있게 선보였다면 좋았을 겁니다. 예를 들어 "탈 것"에서 다양한 차들을 열거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 차들의 연대 순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아울러 저자의 책 치고는 도판도 딱히 볼만한게 없었습니다. 여사님 소싯적(?) 사진들 정도가 눈에 뜨이는 정도입니다. "탈 것"에서 열거된 차들 사진과 같은 도판은 수록해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역사적인 깊이 측면, 그리고 여사님 작품의 깊이 있는 분석 양쪽 모두에서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여사님 팬이라면 흥미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주제인데다가, 여사님 작품을 미시사적으로 접근한다는 아이디어 만큼은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글도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고요. 추리 소설, 역사 관련 저서를 모두 좋아하는 저에게는 불만없는 독서였어요.

2016/12/27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 루스 웨어 / 유혜인 : 별점 1.5점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 4점
루스 웨어 지음, 유혜인 옮김/예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죄소설가 노라는 오랜 친구 클레어의 결혼 전 싱글 파티 초대 메일을 받았다. 여러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난 후 10년간 연락조차 없었기에 딱히 갈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같이 초대받은 당시부터의 친구인 의사 니나와 함께 파티 장소로 향했다. 싱글 파티 장소는 클레어의 대학 시절부터의 친구라는 플로의 할머니 별장으로, 으슥하고 외진 장소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 체호프의 총(1막에서 총을 복선으로 등장시켰다면 3막에서는 반드시 쏴야 한다) 이야기 들어본 적 없대요?" - 톰. 별장에 장식된 총을 보고.

작가는 근본적으로 썩은 고기를 노리는 새가 아닌가. 죽어버린 연애사와 땅에 묻힌 말싸움을 쪼아 먹고 작품에 재활용한다. 그들의 과거는 우리가 고안한 방법으로 새롭게 변신해 좀비처럼 부활한다. - 톰이 연인과 싸운 이야기를 들으며 노라가 하는 생각. 

사람은 변하지 않아. 전보다 치밀하게 자기의 본모습을 숨길 뿐이지. - 니나. 10년만에 만난 클레어가 착해졌다는 노라의 말을 반박하며. 

"충격이긴 한데 놀랍지는 않다. 그 여자는 생활이 연기였잖아." - 톰의 연인 브루스가 클레어를 평한 말.

주인공 노라 시점에서 2박 3일간의 외딴 곳 파티와, 파티에서 벌어진 사고 이후 병원에 입원한 노라에게 닥친 상황에 대한 묘사가 교차되어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미스테리아 8호"에 수록되었던 멋드러진 리뷰에 혹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뷰만큼 흥미롭거나 재미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설정과 전개 너무 뻔한 탓이 큽니다. 모든 일에 있어 여왕처럼 행동하던, 세상의 중심이 자기라 생각하는 클레어를 축으로 그녀와 관련된 여러 사람이 모인다는 설정과 클레어가 현재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다는 동기 모두 진부해요. 사건의 핵심 인물 노라가 사고로 일종의 단기기억 상실에 빠진다는 설정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테고요.
또 390여 페이지 분량에서 무려 330페이지까지가 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길며, 길이를 늘이려는 불필요한 시도들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반인을 대표하는 멜라니 캐릭터처럼요. 사건 내 전개를 보면 등장할 필요가 없는 분량 낭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진부하고 뻔한 설정, 길고 장황하며 지루한 서술을 극복하려면 최소한 범행이라도 정교했어야 했는데, 이 역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사고가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밝혀진 후의 과정이 엉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범인이 될 만한 사람이 극단적으로 적다는게 가장 큰 문제에요. 싱글 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달랑 5명 뿐이니까요. 게다가 이 중 그녀를 숭배하는 플로, 파트너를 통해 알게된 연극계 지인인 톰, 아기 때문에 이틀째 아침에 귀가해버린 멜라니는 아무리 보아도 범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동성애자라는게 클레어에 의해 폭로되었던 니나와 옛 연인이 이번 클레어의 결혼 상대라는걸 알게 된 노라만 남습니다. 이 중 현재 동성 파트너와 알콩달콩 지내는 안정적 지위의 의사인 니나가 10년도 전에 일어난 일로 범행을 저지를리는 없습니다. 설령 니나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제임스가 아닌 클레어가 타겟이었어야 했고요. 구태여 노라의 폰을 이용하면서까지 제임스를 끌어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작품에서 몰아가는 것 처럼 노라가 범인일까? 이 역시 전개에 의해 부정됩니다. 정말로 클레어의 입을 통해 그녀의 남편될 사람이 제임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묘사가 좋은 예입니다. 그녀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상황에서 아무런 묘사를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전개에 따르면 동기도 모호합니다. 10여년 전 헤어진 연인이 친구와 결혼한다고 살의를 품는다? 말도 안되지요.

범행 자체도 허술하기 그지없습니다. 애초에 누군가 침입했다는걸 미리 파티 참가자들에게 노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총을 쏘기 위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너무 과한 설정이었어요. 게다가 참가자 중 '남자'가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와 닿지 않습니다. 또 작품 내에서는 총을 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주지는 않는데(노라 시점에서는 플로일 것으로 묘사되지만요), 그게 누가 되었건 실패했다면? 즉 제임스에게 명중하지 못해 그가 살아 남았다면?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명사수라고 해도 한 방에 사람이 죽기는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총격 이후 제임스를 차에 태운 후의 묘사 역시 석연치 않습니다. 노라가 운전대를 잡은 것은 우연에 불과하며,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모두 사고입니다. 치밀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요. 게다가 결정적 증인인 플로가 건재하다는 점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빠져나가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플로가 클레어를 숭배해서 입을 열지 않을거라고 확신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결국 사건을 담당한 라마 경장이 플로가 증언했다고 밝힙니다. 그것도 결정적 순간에요. 즉, 범행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는 뜻입니다. 노라가 병원을 탈출한 후 클레어와 벌인 생명을 건 추격전 역시 쓸모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노라가 진상을 눈치채게 되는 제임스가 보낸 메시지를 10년 만에 깨닫는다는 클라이막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늦게 깨달은 것도 문제지만 이름을 이용한 조잡한 트릭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이렇게 허술하게 조작하느니, 마지막 톰의 병문안 때의 이야기처럼 노라가 오지 않는게 클레어에게 더 유리했을거에요. 플로에게 범행을 뒤집어 씌우는게 더 말이 되니까요. 플로가 총을 쏜 것도 사실이고, 탄알을 바꿔치는 것도 손쉬울 뿐 아니라 여신처럼 숭배하는 친구의 결혼을 참기 어려웠으리라는 동기도 그럴듯 하잖아요.

계속 사건이 터지게 만들어 흥미를 잡아끄는 전개, 어딘가 불편한 여자들만의 심리를 제대로 그려낸 묘사는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저와 같은 평범한 남자에게는 좀 지루하고 짜증스러운 묘사라는 점입니다. 영국 출신 여성 작가 - 예를 들자면 미네트 월터스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삐딱한 여성 심리 묘사는 아직까지도 영 와 닿지 않네요. 노라를 비롯한 등장 캐릭터들 대부분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가중시켰고요.

한마디로 단점에 비하면 장점은 미미합니다. 여성 시점의 범죄 스릴러 유행에 편승한 그냥저냥한 결과물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덧붙이자면,  한국과 똑같이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먹는 문화라는건 조금 신기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친구가 곧 결혼한다고 해서 독신 생활 마지막 파티를 벌이는데 뭐 이리 복잡하고 귀찮은 일들이 많은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2019/09/07

세 가닥의 머리카락 - 구로이와 루이코 외 / 김계자 : 별점 1.5점

세 가닥의 머리카락 - 4점
구로이와 루이코 외 지음, 김계자 옮김/이상미디어

과거 이런 책이나 이런 책을 읽을 정도로 추리 소설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래전 작품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작품 모음집이라던가, 아니면 일본 작품으로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 - 주로 페가나 북스로 대표되는 - 들도 여럿 읽어보았고요. 이 책도 추리 소설의 역사를 상징하는 작품들의 모음집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가치 외의 다른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표제작인 구로이와 루이코의 "세 가닥의 머리카락" 정도만 어느 정도의 재미와 완성도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뿐, 다른 작품들은 한 편의 완성된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고 있던데 이래서야 후속권들은 도무지 읽을 생각이 들지 않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소설의 역사까지 관심이 있으시다면 모를까, 평범한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일부 있는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가닥의 머리카락"

표제작으로 구로이와 루이코의 작품입니다. 일본 최초의 창작 추리소설이라고 합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처참한 시체가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단서로 사복 형사 오토모와 다니마다가 범인을 알아낸다는 이야기지요.

두 형사 중 구세대를 대표하는 다니마다는 머리카락이 곱슬머리라는 것, 그리고 피해자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여럿이 그를 죽였으며 옆에 곱슬머리 여자가 있었다고 추리합니다. 이는 여럿이 한 사람을 죽이고 신원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소지품을 빼앗은 곳은 도박장이다! 라는 추리로 이어지고요. 다니마다는 도박장에 있던 곱슬머리 여자는 과거 다른 수사 때 알게 되었던 오콘이라고 단정하고 오콘을 찾아 나섭니다. 누가 봐도 추리의 비약이 심하고 결론이 심히 엉터리라는 점에서 당시 수사가 어땠을지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 수사를 신봉하는 신세대 오토모는 세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이런 저런 실험을 하여서 그 머리카락은 천연 곱슬이 아니라는 것, 세 가닥 중 한 가닥은 역방향이라는 것, 머리카락은 염색했다는 것 등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건장한 남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범인은 남자일 것이며, 긴 머리를 곱슬머리 형태가 되게 틀어 묶은 남자라면 '지나인'이 분명하다고 추리합니다. 피해자 머리의 기묘한 상처는 팽이에 찍힌 것으로, 이를 통해 어린 아이를 둔 중년의 염색한 지나인을 조사하여 범인을 알아내게 됩니다.
주어진 몇 안되는 단서 - 머리카락, 피해자의 상태 - 만 가지고 추리하여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귀납법적 고전 트릭물이 떠오릅니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실험하는건 과학 수사의 원조 손다이크 박사를 연상케하고요. 

그런데 재미있는건 결국 다니마다도 오콘을 통해 오토모와 똑같이 범인을 찾아낸다는 겁니다. 오콘이 사건의 동기가 된 범인의 아내이자 피해자의 정부였기 때문입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법! 구세대 다니마다의 건투에 박수를 보냅니다.

하지만 오래 전 작품이라는 티가 물씬 나는건 단점이긴 합니다. 고색창연한 대사가 난무하고 추리 역시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높다고 보기 어렵고요. 아무리 고전이라도 번역을 이렇게 낡아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을지는 좀 의문입니다.

그래도 앞서 말씀드렸듯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아요. 낡고 고즈넉하지만 왠지 유쾌한 분위기도 괜찮고요. 무엇보다도 한 장르의 시작, 태동을 볼 수 있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큽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두 명의 여인"

구로이와 루이코가 윌키 콜린스의 "두 인연", 그리고 휴 콘웨이(본명 프레드릭 존 풀거스)의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읽은 뒤 "떳떳하지 못한 날들"을 원작과 동일한 내용으로 재 창작한 작품입니다. 본인 스스로 번역물이 아니라고 언급할 정도이니 굉장히 각색이 많이 되었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내용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뭔가 멋진 트릭이라도 사용되었다면 이해가 됐을텐데, 이 정도 내용에 감명을 받아 재창작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알맹이가 없어요. 구로이와 루이코가 재창작한건 고색창연한 메이지 시대 문체로 가득찬 낡아빠진 묘사에 불과해 보입니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영국에 사는 의사 '다쿠조'(!)가 환자의 딸인 '리파'와 사랑에 빠지지만 리파가 '히라야마'(!) 자작과 결혼한 뒤 시름에 잠겨 은둔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리파'가 악랄한 히라야마에게 농락당한걸 전해듣고 그녀의 도주를 돕다가 히라야마가 살해된걸 보고 해외로 도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히라야마 살해범으로 누군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걸 알고 자수하기 위해 귀국하죠. 여기서 모든 사건의 진상은 범인의 자백 뿐입니다. 그 외에 이야기에 추리적으로 가치가 있는 부분은 전무해요. 범죄물이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협력자의 심리를 처절하게 다루어 독자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키려는 목적이라면 메이지 당시에는 먹혈을지 모르니 지금은 개그 요소같은 묘사 덕분에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21세기도 한참 지난 지금 시점에 읽을 이유는 없는 낡아뻐진 고대 유물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유령"

구로이와 루이코의 작품. "두 명의 여인"처럼 기묘한 현지화가 눈에 뜨입니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로메다'라는 마을에 사는 오래된 시골 무인 지쿠부 요시나리의 여동생 오시오가 가로메다의 차남 나쓰오와 결혼을 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거든요. 부부는 심지어 결혼 후 '미국'으로 갔다가, 죽은 오시오를 두고 돌아온 나쓰오가 오토시와 재혼하지만 병사한 뒤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내용입니다.

진상은 나쓰오가 죽은 척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두 명의 여인" 보다는 조금 낫긴 해요. 최소한 의외성은 있고, 죽은 척 했던 이유도 오시오의 오빠 요시나리에게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는 진상도 나름 설득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정도로 좋은 작품이라고 부르기는 힘듭니다. 다른 여러가지 장치들, 특히나 오토시가 사고사하고 다시 오시오와 결혼한다는 억지스러운 결말은 지금 읽기에는 한 없이 유치한 탓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검은 고양이", "모르그 가의 살인"

일본풍 문체가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원작에 충실한 번역이라 별도로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

"탐정 유벨"

빅토르 위고가 영국에 망명했을 때,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공화파 인사들 사이에 나타난 유벨(Herbert)이 사실은 나폴레옹의 탐정(첩자) 였다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로 빅토르 위고가 직접 쓴 르포르타쥬의 번역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 특기할 내용은 전무합니다. 유벨이 나폴레옹의 첩자임이 밝혀지는건 드러난 여러가지 증거 때문이고, 결국 '공복' 때문이었다는 동기마저 유벨이 직접 밝혀서 의외성도 없거든요. 빅토르 위고 시점에서 당대 망명객들의 삶을 그린 묘사는 좋지만 딱히 관심있는 분야는 아니라서 이 역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나마 인상적인건 첩자를 '탐정'이라고 부른다는 점 밖에는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26/05/29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레스토랑 - 유키 신이치로 / 김은모 : 별점 2.5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의 작가 유키 신이치로의 공유 주방을 배경으로 한 연작 단편집입니다. 다양한 음식점 수십 개를 등록해 우버 이츠로부터 배달 주문을 받는 공유 주방의 점장이, 외부 활동을 하는 배달원들이 모아온 정보를 바탕으로 추리를 펼치는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설정은 꽤 좋습니다. 점장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미남이지만, 정의감 넘치는 명탐정이라기보다는 적절한 가격에 추리 결과를 제공하는 냉정한 장사꾼에 가깝습니다. 의뢰인만 알고 지불할 수 있는 거액의 요리를 시스템에 등록해 거래하는 방식도 합리적이고요. 배달 앱과 공유 주방이라는 현대적인 시스템을 추리소설의 장치로 활용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깊은 연구도 돋보이고요.

사건 역시 일상계에 가까운 이야기부터 묵직한 살인까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앞부분 수록작들은 설정도 좋고, 추리적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은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을 잘 보여줍니다. 배달원이 사건 현장에서 직접 뛰어다니고, 점장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구조도 안정적입니다.

다만 뒤로 갈수록 설정이 애매해지고, 추리적으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특히 후반부에서 점장의 정체를 실체적으로 밝혀내려는 시도가 등장하는 점은 영 별로였습니다. 이런 인물은 판타지로 남아 있을 때 더 매력적입니다. 굳이 현실적인 설명을 붙이려는 순간, 앞에서 쌓아둔 쿨하고 냉정한 분위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앞의 수록작 두 편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작가의 전작이 영 아니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자기만의 무언가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로서 성장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체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공유 주방과 배달 앱을 결합한 안락의자 탐정물이라는 설정, 그리고 앞부분 수록작들의 추리적 재미만으로도 읽어볼 가치는 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넘어져도 빈손으로는 일어서지 않는 완두콩 싹 달걀 수프 사건

맨션에서 화재 사건이 벌어졌다. 화재가 일어난 방의 입주민이었던 대학생 가지와라 료마는 팬티 바람으로 입주민들을 깨워 도망치게 하여 대참사를 막았다. 그러나 전소한 료마의 방에서 료마의 전 여자친구 유즈키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경찰은 자살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유즈키가 헐렁한 옷을 입고 화재 현장에 나타나 ‘당해봐라’라는 복수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뒤, 불길이 치솟는 건물 안에 자기 발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연에 따른 극단적 선택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점장의 추리는 다릅니다. 료마는 유즈키를 미리 죽여 자기 방에 놓아둔 뒤, 불을 지르고 유즈키의 옷을 입고 나와 유즈키인 척했습니다. 그리고 밖에 있다가 다시 화재 현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유즈키가 스스로 불길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꾸몄던 겁니다.

근거는 배달원의 조사입니다. 료마가 여성스러운 외모와 체구의 소유자이며, 심한 근시라 잘 때는 렌즈를 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료마는 팬티 바람으로 밖에 나와 있을 때 현장에 있던 현재 여자친구를 알아봤습니다. 이 증언을 통해 점장은 료마가 렌즈를 끼고 있었고, 따라서 자다가 급히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합니다.

시리즈의 설정과 분위기를 알려주는 첫 작품으로는 꽤 좋습니다. 사건 자체도 나쁘지 않고, 여장 트릭과 시력 단서를 결합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결말입니다. 사건을 의뢰해던 료마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진상을 알고 싶어 한게 아닙니다. 그 진상을 가지고 아내를 협박하려 했지요. 점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추리를 들려줍니다. 점장은 음식점의 셰프로서 고객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면 충분하다는 식이거든요. 정의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 추리가 진짜라고 보장하지도 않고요. 이 부분에서 의뢰와 돈에만 충실한 추리를 펼친다는, 이 시리즈만의 독특함이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첫 작품으로서 세계관 소개도 잘하고, 추리적으로도 준수합니다. 무엇보다 점장의 냉정한 캐릭터가 확실하게 각인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잉꼬부부의 갈릭 버터 치킨 수프 사건

남편 다이시로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 아내는 처음으로 남편의 왼손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이시로는 왜 손가락이 절단된 것을 숨겼을까? 그리고 아내는 왜 몇 개월 동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설정부터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손가락이 절단된 남편, 그 사실을 몇 개월 동안이나 모른 아내라는 출발점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배달을 맡은 배달원의 가정사와 연결되며 부부 사이의 애정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는데, 이 드라마가 특히 좋습니다. 배달원은 자기 손가락이 잘렸을 경우, 아내가 그걸 알아챌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 불안과 의심이 마지막 식사 장면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이고요. 사건의 수수께끼와 배달원의 개인사가 따로 놀지 않고, 부부라는 공통된 주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소통 부족이라는 사회파스러운 문제 제기까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깔끔합니다. 남편의 아내가 엄청난 악처로, 결혼반지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는 증언이 핵심 단서입니다. 점장은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남편이 그것을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절단했다고 추리합니다. 극단적인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이는 앞서 쌓아온 부부 관계의 드라마와 맞물리면서 충분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추리에 대한 근거 - 구급차 대신 택시를 탔고, 절단된 손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도 합리적이고요.

반지를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추리도 좋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호스티스 리리카를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아내의 이름을 말했을 리 없지요. 그런데 리리카는 아내 요리코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반지 안쪽에 부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반지를 가져간 사람은 리리카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단순하지만 논리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추리였습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악처의 잔소리가 싫었다 하더라도 손가락을 절단한다는건 너무 극단적이지요. 베란다에 대한 조사 역시 조금 과하게 작위적입니다. 그러나 단점들은 사소합니다. 설정과 전개, 드라마, 추리가 모두 잘 맞물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입니다.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의 양파 토마토 수프 사건

나는 전직 패션모델 출신 싱글맘으로 아들 하루토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유일한 위안은 수시로 X에 올리는 글에 대한 반응이었다.

배달원의 일상이 사건과 연결된다는 전개 방식은 직전 작품과 같습니다. 이번에는 배달원이 SNS, 정확히는 X에 중독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폐해를 직접 알거나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건 역시 같은 상황에서 비롯되고요.

수수께끼는 빈집털이범의 기묘한 행동입니다. 범인은 빈집을 털러 들어왔는데, 그 안에서 무언가에 놀란 듯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붙잡혔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빈집 안에서 갑자기 핸드폰을 확인했을까요?

정답은 빈집털이범이 집을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빈집털이범은 배달원으로 일하며 배달품 안에 집집마다 다른 감사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감사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X에 글을 올리면, 범인은 어느 집인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X에 집을 비운다는 글을 남기면 그때 빈집을 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범인은 그 집을 유명 인플루언서 마루미 짱의 집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는 모두 마루미 짱의 계획이었습니다. 마루미 짱은 자기 고교 동창이자 친구인 고토미의 집을 털게 하려고 일부러 고토미의 집에 놀러 가서 배달을 시킨 뒤, X에 감사 메시지를 올렸지요. 이유는 자신에게 악플을 달던 악플러의 정체가 고토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요. 복수하려 한 것이지요.

동기는 좋고, 추리도 깔끔합니다. SNS를 활용하는 범죄 수법도 재미있습니다. X에 중독된 배달원이 X 때문에 개인 사생활이 드러나고, 대중의 관심을 얻으려 할수록 오히려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과정을 사건과 결합한 부분도 괜찮아요. 소재와 주제가 잘 맞물린 편입니다.

하지만 약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감사 메시지를 보낸 배달원이 반드시 빈집털이범이라는 전제가 없다는 점입니다. 마루미 짱은 빈집털이범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고토미 집에 놀러 가서 배달을 시킬 생각이었을까요? 이 부분은 뭔가 설득력 있는 설정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마루미 짱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점장의 추리는 재미있지만, 지금의 내용만으로는 범행 계획이 지나치게 우연에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 하나 불만이었던 건 점장의 태도입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점장은 사건의 진상이 몰고 올 파장과 무관하게 순수히 돈과 주문에만 추구했습니다. 그게 특징이자 멋있는 점이었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배달원에게 훈계하는 듯한 말을 남겨서 점장만의 카리스마가 깨져버립니다. 때문에 캐릭터의 일관성이 이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SNS와 배달 시스템을 이용한 범죄라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사건의 설득력과 점장 캐릭터 운용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수치가 이상한 수준의 건더기 가득한 육개장 수프 사건

작가인 배달원이 점장에게 수수께끼를 가져왔다. 한 여성에게 열 번이나 똑같은 배달원이 음식을 배달했고, 마지막 배달 때에는 밀봉된 배달 음식 봉투 안에 머플러가 들어 있었다는 사건이었다. 마침 그녀가 머플러를 잃어버린 직후였기 때문에,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상황인데...

점장은 음식을 가져다준 사람이 배달원이 아니라, 잘못 배달된 음식을 받은 다른 건물 입주민이었다고 추리합니다. 오래된 맨션의 1호와 2호가 나란히 서 있어서 배달원이 착각했고, 그 잘못 배달된 음식을 받은 남자가 다시 여성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것이지요. 마침 그는 여성에게 호감이 있었고, 여성을 관찰하다가 머플러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된 뒤 선물로 머플러를 넣었습니다. 이는 가게 포장지가 기성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배달 온 포장을 뜯은 뒤, 기성 포장지로 머플러와 함께 다시 포장해서 배달품을 가져다준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더 좋았던 건 이 표면상의 추리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작가가 점장의 정체를 캐내려고 이런 사건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추리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점장은 작가에게 실제 배달 경로로 배달을 시킨 뒤, 그 동선을 확인해서 오배송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밝혀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장의 정체를 캐내려는 작가 설정은 영 별로였습니다. 물론 이런 수수께끼의 가게와 점장에 대해 궁금해하고, 어떻게든 그 실체를 밝혀내려고 애쓰는 인물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너무 어설프다는 겁니다. 미행도 그렇고, 사건을 의뢰하는 방식도 와 닿지 않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한다고 해서 점장의 정체에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애매하고요.

게다가 작가가 점장의 손에 의해 죽고 만다는 결말은 완전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점장은 만화적이고 판타지 같은 인물이지만, 배달원이 현실을 붙잡고 있는 덕분에 그럭저럭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판타지 속 인물처럼 보였던 점장이 현실에 있는 배달원에게 직접 손을 대는 순간, 그 실감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맙니다.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아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사건과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점장의 정체를 파고드는 방향과 결말시리즈의 매력을 깎아먹었기에 감점합니다.

악령 퇴치 닭봉 삼계탕풍 수프 사건

분명히 비어 있는 이웃집에 계속해서 물건 배달이 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달라는 의뢰가 접수되었다. 

진상은 빈집의 옆집 여자, 정확히는 의뢰인 집 기준으로 옆옆집에 사는 여자가 벌인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허술한 맨션 방범 체계를 개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어 있는 집 앞으로 계속 물건이 배달되는 상황을 만들면, 관리인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CCTV를 설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건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비어 있는 집으로 계속 배달이 온다는 수수께끼는 일상계 미스터리지만 나름대로 기묘함을 전해줍니다. 다른 수록작들보다 범죄의 무게가 덜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하지만 진상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맨션의 방범을 강화하고 싶었다면 이런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직접 CCTV를 사서 맨션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만두 배달만 한가득 시켰는데, 최소한 몇십만 원은 들었을 테니까요. 그 돈과 수고를 생각하면 범행 동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맨션 관리인이 진상 주민을 내쫓기 위해 다른 층에서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는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다른 층에서는 장기 출장 간 집 앞으로 배달이 계속되어 그 이웃집 진상이 이사를 갔다고 하는데, 정작 기분 나쁜 건 배달이 온 집 주민이지 이웃집 주민은 아닐 겁니다. 유명한 진상 세입자가 이 정도 일로 꿈쩍이나 할까 싶기도 하고요.

시리즈의 매력인 배달원의 일상과 사건의 연계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번 배달원은 인기 없는 개그맨입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를 자기 개그 소재로 쓰는 것이 전부이고, 본인의 드라마와 사건이 깊게 엮이지는 않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배달원의 개인사가 사건의 주제와 맞물렸던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약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수께끼의 출발점은 괜찮았지만, 진상과 동기, 배달원 캐릭터 활용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인 완탕 고추장 수프 사건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나(가지와라)’는 죽기 전에 범인의 정체를 확신했다...

첫 번째 사건의 배달원이 점장에게 인간 소실 사건 해결을 의뢰했다. 첫 번째 사건의 의뢰인이었던 가지와라 씨가 실종되고, 그의 자택에서는 강한 루미놀 반응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마지막 수록작인데 연작 단편집의 마무리로는 괜찮은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앞선 단편들의 배달원들이 모두 등장하고, 첫 번째 사건 의뢰인과 관련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작품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마지막 작품으로 돌아오는 방식은 일종의 수미쌍관으로, 확실히 연작 단편집이구나!라는 재미를 전해줍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가지와라가 배달을 시켰을 때, 범인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배달원보다 먼저 찾아가 살해했는지가 핵심입니다. 진상은 특정 상품을 주문하면 안건 상담 비용을 할인해준다는 쿠폰에 있었습니다. 범인은 가지와라에게 그 쿠폰을 전달해두었고, 가지와라가 특정 상품을 주문하자 상담 의뢰가 들어온 것을 알고 배달원보다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살해한 뒤, 큰 우버 이츠 가방에 시체를 넣어 옮겼던 겁니다. 이는 특정 상품이 상담과 관련되어 있다는 앞선 설정과도 잘 연결되고, 쿠폰 전달 같은 소소한 정보도 비교적 공정하게 제공되어 마음에 듭니다. 

배달 앱과 공유 주방 시스템을 이용한 시리즈 특유의 장치도 마지막까지 살아 있고, 모든 추리는 결국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점장의 철학도 잘 드러나서 시리즈 작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이 범인이었다는 결말은 뜬금없었습니다. 가지와라의 전처, 그러니까 가지와라 료마의 어머니로부터 암살 의뢰를 받았다고 해서 실제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전개는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쌓아온 세계관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로 직접적인 살인 실행까지 가는 것은 과했습니다.

배달원들이 합심해서 진상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는 설정도 생각만큼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연작의 마무리로 여러 인물을 다시 모으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인물들의 감정이나 관계가 충분히 쌓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마지막에 점장의 추리 철학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긴 것도 단점입니다.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자체는 이 시리즈와 잘 맞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철학을 길게 풀어 설명하다 보니, 사건의 긴장감보다 작가의 설명 의식이 더 강하게 느껴진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6/08

미로장의 참극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사업가 시노자키 신고의 초대로 후지산 앞에 위치한 저택 ‘명랑장(미로장)’을 방문했다. 이 저택은 본래 구 백작 후루다테 다쓴도의 소유였으나, 시노자키가 이를 구입해 수리한 후 호텔로 개장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과거 20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도주했던 외팔이 남자 오가타 시즈마가 이 명랑장 주변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시노자키는 긴다이치에게 조사를 의뢰하고자 그를 초대한 것이었다. 마침 호텔 개업을 앞두고 후루다테 가문과 관련된 인물들—후루다테 다쓴도, 그의 외삼촌 덴보, 아내 가나코의 여동생 야나기마치 요시에—도 모두 명랑장에 모였다. 시노자키 자신도 후루다테 가문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다쓴도의 아내였던 시즈코와 불륜 관계를 맺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후루다테 다쓴도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이 출동해 수사를 개시했지만,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다가 다음 날에는 덴보마저 살해당했고, 하녀 다마코는 실종되었음이 밝혀졌다. 덴보가 죽은 방은 비밀 통로가 전혀 없는 완벽한 밀실로 확인되며,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긴다이치와 경찰은 명랑장의 구조를 조사하던 중, 비밀 통로와 연결된 지하 동굴에서 다마코의 참혹한 시신을 발견했고, 바로 그 직후에 시노자키의 전처 소생 딸 유코가 중상을 입은 채 비밀 통로 출구 근처에서 구조되었다. 그녀는 기절하기 직전 “아빠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날 밤, 긴다이치는 다하라 경부보와 이가와 형사 앞에서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든 방법을 직접 시연했고, 지하 동굴 속 오가타 시즈마의 묘소로 경찰을 안내했다. 그리고 명랑장에 나타난 외팔이의 정체는 마부 조지였다는걸 밝혔다. 조지는 명랑장의 관리인 이토메와 함께, 다쓴도를 괴롭히기 위해 외팔이 행세를 했던 것이었다. 긴다이치는 이후 연이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냈다. 진상은 다음과 같았다.

시즈코는 관계를 이어가던 다쓴도와 함께 남편 시노자키를 살해하려고 했다. 목적은 유산이었다. 다쓴도는 외팔이로 변장해서 시노차키를 살해할 계획이었는데, 범행 예행 연습을 요시에에게 우연히 목격당했다. 둘은 격투를 벌였는데, 외팔이로 변장한 탓에 다쓴도는 요시에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요시에는 현장을 급히 떠나 알리바이를 만든 뒤, 나중에 도르레를 이용하여 마차 위로 사체를 옮겼다. 그래서 복잡한 형태의 현장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덴보는 다쓴도와 시즈코의 불륜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을 가지고 시즈코를 협박했는데, 시즈코는 이를 빼앗기 위해 덴보를 살해했다. 그 현장을 마침 목격한 다마코 역시 시즈코에 의해 희생당했다는게 진상이었다.

마지막에, 외팔이로 위장해 남편 시노자키를 제거하려던 시즈코의 계획은 요시에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리고 둘은 함께 무너지는 비밀 통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1975년에 발표한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중후반부 작품입니다.‘명랑장(미로장)’이라는 기묘한 저택을 무대로 복잡한 가족사와 잇따른 살인 사건을 그려낸 본격 추리소설이지요.

장점이라면 사건들이 흥미롭고 풍성하다는 점입니다. 명랑장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연쇄 살인이 어우러지는 구성은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고, 특히 덴보가 살해된 밀실 트릭의 완성도가 높습니다. 작품 속에 흩어진 단서들이 수수께끼 해결에 필요한 정보로 작용하는 점 역시 공정한 추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작품 속 핵심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죽은 다쓴도는 왜 외팔이인척 했는가?
  2. 범인은 다쓴도를 왜 번거롭게(둔기로 타격한 뒤 교살하여 마차 위에 올려놓는 식으로) 살해했는가?
  3. 덴보를 살해하고 밀실을 어떻게 만들었나?

여기서 1번 수수께끼의 답은, 다쓴도가 외팔이인척 다른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군가 다쓴도가 외팔이로 보이게끔 조작하지 않았다는건, 그의 복장과 가져온 짐으로 증명되었고요. 2번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역시 도르래와 모래 주머니, 그리고 범인 요시에의 조금 어긋나있는 알리바이 증언으로 증명됩니다.
3번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단서로는 이전에는 다른 곳에 놓여 있던 칠기 접시의 존재, 그리고 시즈코의 프랑스 자수가 지속적으로 언급됩니다. 범인은 접시에 바늘을 꽂은 뒤, 실을 회전창 너머로 넘기고 이 실에 열쇠를 매달아 접시 위로 내려보냈던 겁니다. 바늘은 밖에서 잡아당겨서 회수했고요.

그 외의 수수께끼들에 대한 추리 모두가 논리적으로 제시됩니다. 명랑장에 나타났던 외팔이의 정체가 조지였다는 추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토메가 조지를 외팔이로 변장시켰던건데, 선대 주인 가즌도가 죽은 이유가 다쓴도의 비열한 소문 때문이었으니 이토메가 원한을 품은건 당연합니다. 

긴다이치와 경찰이 탐험해 나가는 명랑장의 미로에 대한 묘사는 모험물을 보는 듯한 느낌도 전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약간 "팔묘촌" 느낌도 나더군요.

그러나 좋은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주요 범행이 일어난 이유가 우연이라서 범행에서 정교함을 느끼기 어려운 탓입니다. 다쓴도가 살해된 것은 요시에에게 살인 모의 장면이 들켰기 때문이었고, 다마코 역시 시즈코가 덴보를 살해한 직후 우연히 방을 찾은 바람에 희생당했으니까요. 이런 전개는 극적이긴 하나, 치밀한 계획 범죄의 인상은 줄 수 없었습니다. 

범행 동기의 설득력도 낮습니다. 시즈코가 신고와 결혼한 뒤에도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갔다는 핵심 동기에 대한 단서가 전혀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쓴도는 돈도, 외모도 특별히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지도 않고요. 재산, 외모 모두 시노자키가 압도적인데 시즈코는 왜 다쓴도와 관계를 이어나가며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걸까요?
이런 동기 부분의 설득력이 약한건 비슷한 설정인 - 위장 결혼 후 재산을 노리고 배우자를 살해하는 - 걸작 "나일 강의 죽음"도 그렇다 치죠. 하지만 다쓴도가 살해당한 뒤, 범행을 이어나간 시즈코의 동기는 아예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우선, 협박자인 덴보를 구태여 살해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불륜의 대상자인 다쓴도가 이미 죽은 상황에서는, 시노자키에게 고백하고 불륜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게 빠른 방법이었으니까요. 어차피 시노자키도 원죄 - 시즈코와 강제로 결혼한 - 가 있으니 괜찮았을거에요. 설령 협박에 대한 앙심을 품고 살인을 저질렀다 치더라도, 덴보의 방을 밀실로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알리바이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시간만 걸리는 무의미한 행동이었으니까요. 이건 독자를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단순한 장치 이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즈코가 신고를 살해하려 했던 계획은, 외팔이 범인의 존재를 조작해 빠져나가려는 원래의 설정과 연결되지만 이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명랑장에는 명탐정 긴다이치와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범행이 성공할 가능성은 애초에 희박했습니다. 게다가 원래의 외팔이가 누구인지 시즈코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누군지 모르는 진짜가 있는데, 그 진짜를 위장해서 경찰이 우글거리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른다? 시즈코의 범행 시도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쓴도와 시즈코의 관계를 알아챈 시노자키가 1,000만엔을 주고 관계를 끊고자 했다는 핵심 동기가 맨 마지막 에필로그에나 등장한건 반칙같이 느껴지네요.

후더닛 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명랑장에 모인 사람 중 비중이 있는건 주인인 시노자키와 시즈코 부부, 다쓴도, 덴보, 요시에와 시노자키의 딸 요코, 비서 오쿠무라, 종업원 이토메, 조지 정도가 전부입니다. 살해당한 사람을 빼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 요코와 오쿠무라, 동기가 없을 조지를 빼면 시노자키와 시즈코, 이토메만 남습니다. 시노자키가 시즈코와 다쓴도의 불륜을 알고 살해하려고 했다는건 있을 수 없고 - 본인도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까 - , 설령 그랬다쳐도 덴보를 살해할 이유는 없으니 시노자키는 범인일리 없습니다. 이토메가 범인이라면, 그녀 역시 덴보는 죽일 이유도 없지만 지난 수십년간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구태여 지금 범행을 벌일리 없고요. 그러니 유력한 범인은 시즈코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침 알리바이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기괴하고 뒤틀린 가족 관계도 뻔하고 식상했습니다. 명랑장이라는 무대 설정 역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감이 떨어졌고요. 그리고 이토메와 조지가 현재 주인인 시노자키에게 품고 있는 과다한 충정의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본격 추리 소설의 구조는 갖추고 있지만 주요 동기와 설정의 설득력 부족, 과도한 우연의 연속, 뻔한 인물 구성 등이 완성도를 낮춥니다. 구태여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1/06/11

범죄 캘린더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5점

범죄 캘린더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엘러리 퀸 단편집으로 비교적 후기작입니다. 엘러리 퀸이 주인공인 라디오 드라마를 책으로 엮은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읽다보니 확실히 라디오 드라마구나 싶었습니다. 설득력있는 동기, 복선으로 뒷받침되는 탄탄한 이야기 구조보다는 극적인 상황을 쉽게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릭도 정교하기 보다는 말로 전달하기 쉬운 트릭들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책으로 읽을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트릭들은 추리 퀴즈 수준이고, 이야기 구조가 단순한 탓에 동기와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낮은 탓입니다. "~ 모험" 이라는 제목 때문에 걸작 단편집이었던 "엘러리 퀸의 모험" 수록작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캘린더'라는 제목답게 1월부터 12월까지 매월 한 편씩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해당 월에 이야기가 진행될 필요가 있었던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3월의 소득세 신고, 5월의 전몰 장병 기념일 정도만 특정 날짜와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 뿐이에요. 10월의 할로윈과 12월 크리스마스에 사건이 벌어지는 두 작품은, 날짜를 사건과 무리하게 연결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망작이었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라디오라면 모를까 책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믾지 않고, 권해드리기도 어렵습니다. 엘러리 퀸의 이름만 믿고 읽으시면 실망하실 거에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부자 모임의 모험" 

이스턴 대학교의 유서깊은 야누스 클럽의 멤버 빌 업다이크가 엘러리 퀸을 찾아왔다. 야누스 클럽은 13학번들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현재 생존자는 7명 뿐이었는데 그 중 3명이 최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업다이크는 야누스 클럽 안에 5명으로 이루어진 내부자 모임이 20만달러라는 돈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자신과 또 다른 멤버 중 생존자가 모든 걸 갖게 될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48시간 뒤, 빌 업다이크는 살해되고 말았다.

1월의 야누스 클럽 정기 모임 날짜에 맞춰 벌어지는 이야기로 야누스 클럽이니, 내부자 모임이니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을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핵심은 암호 트릭입니다. 피해자 업다이크가 내부자 모임 멤버들 이름에 공통점이 있다는 말을 남겼었고, 그 말이 유일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 트릭은 미국인이 아니면 풀 수 없는, 하지만 미국인이라면 쉽게 풀었음직한 트릭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멤버들 이름을 변주하자면, 황연세, 한국민, 양홍익, 김아주, 서인하인 식이지요. 업다이크의 경우는 부부의 이름을 합쳐 윌러임 앤 메리 칼리지라는 약간의 변주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이 역시 우리나라식으로 박성균, 최관이라는 식이니 딱히 정교한 장치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라디오에 적합한, 추리 퀴즈에 가까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전개도 정교하지 못하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3명의 회원이 우연찮게 자연사한 뒤, 살의를 품었다는 동기를 잘 풀어내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대통령의 5센트 은화 모험" 

미모의 아가씨 마사 클라크는 전보로 엘러리 퀸과 죠지 워싱턴 관련 골동품 수집가 패치, 희귀 주화 수집가 체크 남작부인, 희귀 서적 수집가 쇼 교수를 불러모았다. 죠지 워싱턴이 남긴 칼과 은화를 찾기 위함이었다. 이는 오래 전 죠지 워싱턴이 마사의 조상 시미언 클라크를 만났을 때 농장에 묻었던 물건들이었다.

2월 죠지 워싱턴 생일에 맞춰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부분이 전무합니다. 시미언 클라크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워싱턴이 당시 심었던 나무 중 하나 아래에 칼과 은화를 묻었다고 쓰여 있거든요. 이건 암호도 아닙니다. 당연히 별다른 트릭도 없어서 추리의 여지도 없고요.

이 말에 따라 마사 클라크 가족이 워싱턴이 심었다는 나무 12그루 밑을 모두 파 보았지만, 칼과 은화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더 황당합니다. 원래 13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가 죽어 버린 탓이라는데 정삼각형 모양으로 간격까지 정확하게 심은 12그루의 나무는 멀쩡하고, 삼각형 한 가운데 심은 나무만 죽었다는건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게다가 13그루 나무를 심었다는 엘러리 퀸의 주장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미국 건국은 13개 주였기에 나무는 13그루를 심었어야 한다!"라는게 근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아무 것도 없어요. 또 애초에 농장을 잃을 위기였다면, 나무 밑이 아니라 나무 근처 땅을 모두 파 보는게 정상 아니었을까요? 전개도 이상합니다. 이야기 처음에 패치 등 관계자들을 불러 모을 필요는 없었어요.

이런 문제 투성이의 본편 이야기보다는, 엘러리가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게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도입부가 추리적으로 더 볼만했습니다. 돈이 많지만 자동차를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인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엘러리의 비서 니키가 미인인 마사 클라크를 질투하는 묘사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거의 없네요. 추리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이클 마군의 3월 15일 모험" 

퀸 경감의 옛 동료였던 사립탐정 마이클 마군이 엘러리를 찾아왔다. 3월 15일 소득세 신고를 앞두고 관련 서류를 도난당했기 때문이었다. 서류 도난 당시, 사무실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한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엘러리 일행은 다시 사무실에 방문하지만 그곳에서 사무실을 관리하는 카슨 부인이 참혹하게 살해된걸 발견하는데...

이야기 초, 중반부까지는 "왜 도둑은 소득세 신고와 관련된 서류를 훔쳐갔을까?"가 핵심입니다. 이는 마군의 서류 중에 사교계 지배자 벤돔 부인의 딸이 도벽이 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으로 밝혀지고요. 이렇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기묘한 사건이 특별한 강력 범죄와 연결되는 전개는 재미있었습니다. 소득세 신고일이 3월 15일이고, 소득세 신고용 자료가 협박의 근거가 된다는 식으로 3월이라는 날짜와 이야기를 엮은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마군이 화재 소동을 일으킨 뒤 서류가 도난당한걸로 위장했고, 이를 카슨 부인이 눈치채 죽였다는 진상은 여러모로 불합리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엘러리를 찾아와 서류가 도난당했다고 하소연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앨러리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냥 강도가 살해한걸로 무마할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엘러리 말대로 벤돔 부인을 협박할 생각을 버리고 카슨 부인을 죽인거라면, 더더욱 서류가 도난당했다는걸 드러낼 필요는 없었어요. 협박할 생각을 버렸다면, 카슨 부인에게 불을 지른 이유를 둘러대는게 살인보다는 훨씬 나은 해결책이었을겁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게 오피스를 쉐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안일한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했다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마군이 서류가 도난당했다고 주장한 시점보다 나중인 신문지가 들어있었던 증거는 명확했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아주 잘 만든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황제의 주사위 모험" 

퀸 경감은 엘러리, 니크와 함께 오랜 친구 짐 해거드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역으로 마중나온 짐의 아들 마크 해거드는 아버지 짐이 살해당했다며 10년 전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해거드 가족은 아버지를 쏜 건 가족 중 한 명이라며 지난 10년간 지옥처럼 살아왔다고 말했다. 엘러리는 짐이 죽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황제의 주사위'에 주목해서 범인을 알아내는데...

짐이 쥐고 있던 주사위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였습니다. 두 개 중 한개가 항상 6만 표시한다는 의미로, 6번 피스톨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의미했던 거지요. 그런데 이 뒤는 가관이에요. 6번 피스톨은 왼손잡이가 잡기에 용이해서, 가족 중 유일한 왼손잡이인 딸이 범인이라는 추리가 펼쳐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총을 쏘는 것도 아니고, 꺼내는데 왼손잡이냐 아니냐가 뭐가 중요할까요? 중요했다 한 들 이 정도로 딸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그 총은 '왼손잡이만 잡을 수 있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그런 설명은 전혀 등장하지 않거든요. 칼리굴라와 주사위 속임수에 대해 이런저런 소개도 이야기에는 하등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잡지식에 불과했고요.

무엇보다도, 3월 마지막 날에 수수께끼를 풀어내며 이 모든게 퀸 경감과 니키, 해거드 가족이 함께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을 속이기 위함이었다는 반전은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40년 전 결혼식과 10년 전 40번째 결혼 기념일에 선물을 드렸다는 모순은 말장난이면서도,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서 속임수같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게티즈버그 나팔의 모험" 

엘러리가 니키와 함께 한 충동적인 게티즈버그 여행 중에 자동차가 고장나버렸다. 그 때 잭스버그 군수 스트롱이 그들을 도와준 뒤, 마을에서 진행하는 남북전쟁 전몰장병 추모일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날 남북전쟁 생존자가 게티즈버그 나팔을 부는게 전통이었는데, 작년에 생존자 중 가장 고령이었던 케일럽이 나팔을 불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고령이었지만 건강했고, 다른 생존자 2명과 남북 전쟁 중 찾았던 보물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군수는 수상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몰장병 기념일 아침에 또 다른 생존자 애브너 체이스가 뇌졸증으로 사망하고, 기념일에서는 나팔을 불던 마지막 생존자 잭 비글로마저 나팔에 묻힌 독으로 죽고 마는데...

어디선가 읽었던 작품. 4월 전몰장병 기념일에 맞춘 이야기는 깔끔합니다. 노인들이 이야기하던 거액의 보물은 휴지조각과 같은 남부 정부가 발행했던 지폐라는 설정도 좋았고, 애브너 체이스의 손녀 시시가 진범이라는 반전도 그럴듯했거든요. 이를 드러내기 위한 엘러리의 추리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잭 비글로가 마지막 생존자로 남게된건 애브너 체이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우연 덕분이었다는게 핵심이지요.

하지만 이 추리로는 시시가 진범인지, 잭 비글로의 손자 앤디가 진범인지는 드러낼 수 없습니다. 앤디가 할아버지가 남긴 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에, 그 돈을 보다 빨리 갖고 싶어서 할아버지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즉, 엘러리는 그냥 용의자를 한 명 추가한거에 불과합니다. 이래서야 법정에서도 유죄 판결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도 본격 추리물로는 완벽한 얼개를 갖추고 있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전개되는 수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약 손가락의 모험" 

트로이는 딸 헬렌 결혼식에 엘러리를 초대했다. 헬렌을 흠모했던 루즈 때문이었다. 그는 헬렌이 헨리 예이츠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의를 드러내다가, 이후 갑자기 변심해서 사죄하고 신랑 들러리로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심한 불안감을 느낀 트로이의 부탁으로 엘러리는 벨리 경사와 결혼식에 참석해서 루즈를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식 직후 헬렌은 결혼 반지 속 독침에 의해 살해되고 마는데...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엘러리가 범행을 막지도 못했고, 경찰보다 범인을 찾아내는데 늦어버린 완벽한 실패담이라는겁니다. 엘러리는 루즈가 아닌 신랑 헨리 예이츠를 범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거는 결혼만 하면 헬렌의 유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요. 하지만 결혼 반지는 왼손에 끼고, 압력을 가해 독침이 튀어나오게 하려면 왼손으로 악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왼손잡이가 범인이다! 라는 논리로 루즈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흉기인 반지 조사로 경찰이 밝혀내고요. 이렇게 엘러리는 체면만 구긴 셈이며, 사건은 경찰 수사를 통해 종료되기 때문에 추리물로는 볼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추리적으로 별볼일 없고, 이렇게 길게 풀어낼 필요도 없는 졸작입니다.

"추락한 천사의 모험" 

센터 저택에는 기괴한 키마이라 조각이 튀어나와 있었다. 현재 센터 제약 사장인 마일스의 아내 도로시는 니키의 친구로, 그녀가 니키에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걸 고백한 뒤 마일스가 저택 지붕에서 떨어진 키마이라 조각상에 깔려 죽을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조각상은 마일스의 동생 데이비드의 아틀리에 지붕 쪽에 위치했었다. 데이비드를 의심한 마일스는 엘러리 퀸에게 관련된 조사를 의뢰했고, 데이비드 아틀리에를 조사하기 위해 엘러리가 방문한 날 마일스는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데이비드는 실종되었고, 도로시가 범행을 자백하는데...

도로시의 불륜 상대가 밝혀지기 전 까지, 범인은 데이비드 아니면 마일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마일스만 없으면 센터 제약과 그 아내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마일스는 아내의 불륜에 대한 복수심으로 데이비드를 실종으로 위장해서 죽이고, 다친걸로 위장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상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비서 하트가 폭죽으로 알리바이를 만든 뒤 살해했다는 겁니다. 즉, 도로시가 사랑에 빠진게 마일스의 동생 데이비드가 아니라 비서 하트였다는 반전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상식을 깨는 맛은 괜찮았습니다. 7월 4일 독립 기념일과 '폭죽'을 연결한 아이디어도 좋았고요. 캘린더라는 주제에도 잘 맞을 뿐더러, 간단한 트릭이지만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상을 드러내는 핵심 증거 중 하나가 '떨어진 키마이라 조각상'이라는 전개도 마음에 들고요.

물론 편의적인 전개를 위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일스가 총에 맞았을 때, 누가 쐈는지 보지 못했다는게 대표적이지요. 여기서 그가 죽지 않은 것도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작위적이고요. 차라리 죽는게 전개면에서는 더 깔끔했을거에요. 또 45Kg이나 되는 조각상에 데이비드를 죽인 뒤 매달아 물에 빠트리는게 혼자서 어떻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가능했을 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도로시가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이유가, 하트가 총을 쏘는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잘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정통 본격 추리 단편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평작은 충분히 되는, 군더더기가 별로 없는 잘 짜여진 단편이었으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늘 귀의 모험" 

유명 탐험가 에릭슨은 결혼한 조카딸 잉가의 남편과 그 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엘러리 퀸에게 의뢰했다. 잉가의 남편 홉스-왓킨스 부자가 에릭슨이 거주하는 섬에서 잉가와 자기를 살해하지 않을까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섬에는 캡틴 키드가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고, 엘러리는 보물 찾기 핑계를 대고 섬으로 향하는데..

엘러리는 키드가 남겼다는 일종의 암호를 간단히 풀어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그 보물은 키드가 묻은게 아니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그 증거가 보물 상자 속 '백금' 이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백금은 1900년대 이후 보석 셋팅에 이용되었기 때문으로, 박학다식한 엘러리에게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습니다. 보물은 홉스-왓킨스 부자가 훔친 장물로, 장물을 공식적으로 유통하기 위해 키드 전설을 이용했다는 앨러리의 추리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에릭슨이 죽기 전 쏜 총알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롱 존의 의족에 박혔기 때문이라는건 많이 뻔했습니다. 그리고 롱 존이 홉스-왓킨스 부자와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가 에릭슨을 단순한 탐욕으로 죽였다고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어요. 보물을 묻은게 부자라는게 증명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에릭슨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는건 증명이 불가능했습니다. 롱 존이 자백한다 한들, 증거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롱 존을 이용해서 에릭슨을 죽이는 전개만 빠졌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좀 아쉽네요.

"세 개의 R의 모험" 발로 대학 학장 발로 박사는 엘러리 퀸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 문학을 가르치는 칩 교수의 실종 때문이었다. 니키와 함께 미주리 주에 있는 발로 대학을 찾은 엘러리는 칩 교수 방의 핏자국, 그리고 도서관에서 대출 된 책을 통해 교수가 6월 30일 밤에 살해당했다고 추리했다. 그리고 칩 교수가 여름을 보낸다고 알려진 아칸소 주 통나무집에서 칩 교수의 백골화된 사체와 그가 쓰던 추리 소설인 "세 개의 R의 모험" 원고를 발견하는데...

칩 교수가 쓴 추리 소설대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게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건 연극이어고, 엘러리 퀸은 발견된 시체가 백골이었다는걸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고작 10여주 동안 사체가 백골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동기는 칩 교수가 쓴 추리 소설 홍보를 위해서였지요. 유명 탐정이 헛다리를 짚은 이야기를 기사화할 생각이었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추리적으로 깔끔하고, 주어진 단서도 공정한 괜찮은 본격물이에요.

하지만 교수들이 꾸민 계획은 여러모로 부실했어요. 핏자국을 발견한 시점에 경찰을 부르지 않은 이유부터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제가 탐정이라면 먼저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했을 겁니다. 또 백골 사체가 이상하다는 근거도 빈약합니다. 사체를 백골로 만드는 무슨 방법을 썼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죽은 고양이의 모험" 

니키 포터 양은 저주받은 검정 고양이 모임 회합에 엘러리 퀸과 함께 참석했다. 10월 31일의 챈슬러 호텔에서의 비밀 회합은 니키의 친구가 개최한 할로윈 파티였었다. 파티 중 추리 게임을 하다가 참석자 중 한 명인 크롬비가 살해당했고, 동기는 그의 무분별한 여자 관계 때문으로 드러나는데...

핼로윈 파티에 대한 장황한 묘사를 빼면,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파티를 위해 복잡하게 꾸며놓은 호텔 방을, 불이 꺼져 있었던 추리 게임 당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냐는 것이지요. 엘러리 퀸의 추리는 이 방을 꾸민 루시 트렌트가 범인이라는 것이었고요. 

하지만 방을 꾸몄다고해도 과연 어두운 상황에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또 파티가 시작하고 한참 뒤에 추리 게임이 시작되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외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루시 트렌트 범인설은 이렇게 설득력이 약합니다. 복잡한 여자 관계가 동기인데, 정작 당사자가 아니라 그 동생이 복수했다는 설정도 영 와 닿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이런 범행을, 세계 최고의 명탐정을 초대해서 추리 게임을 하는 동안 저지를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용의자가 될 만한 사람도 몇 명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 게임이라는 작 중 소재처럼, 추리 퀴즈 수준의 졸작으로 점수를 줄 여지는 전무합니다.

"비밀을 폭로하는 병의 모험" 

추수감사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배달하던 엘러리 퀸과 니키는 우연히 방문한 프랑스 레스토랑이 마약을 밀매하고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캐리가 마약 밀매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가 누명을 썼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체포하기 전에 마약을 건넨 웨이터가 살해되는데...

우연히 방문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샤토 디켐"을 주문하니 마약이 나오고, 우연히 탄 택시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택시 운전사가 흑막이라서 그가 레스토랑 웨이터를 살해했다는 내용의 작품. 우연으로 점철된 전개로 실소를 자아내는 졸작입니다. 작품이 아니라 입문자용 추리 퀴즈라고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황태자 인형의 모험" 

입슨 양이 30년을 쏟아 부어 만든 인형 컬렉션인 '돌렉션'문제로 변호사 본들링이 퀸 부자를 방문했다. 컬렉션 중 가장 가치가 큰, 49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황태자 인형을 유명한 예술품 도둑 코머스가 훔치겠다고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입슨 양 유언으로 돌렉션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백화점 전시가 예정되어 있었고, 퀸 부자는 직접 경찰과 함께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했지만, 인형은 결국 가짜로 바꿔치기 당하는데...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예고장을 보내는 전설적인 괴도가 등장한다는 만화같은 설정의 작품입니다. 

진상은 간단합니다. 변호사 본들링이 도둑 코머스였던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인형을 직접 바꿔치기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본들링이 예고장을 보내면서까지 사건을 키울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 꾸준히 예고장을 보내왔다면 모를까, 예고장을 보낸건 이번이 처음이라고도 하니 더더욱 불필요한 행동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을 변장시켜 경찰의 시선을 끈 행동 역시, 대역들이 체포되면 금방 드러날 유치한 작전이었고요. 그냥 다이아몬드가 사라진다면 본들링이 무조건 혐의를 받을 테니 그 혐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본들링이 범인이라는 엘러리의 추리는 너무 당연해서, 그의 정체는 어쨌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이런 위험을 짊어질 이유가 있었을까요?

산타클로스로 변장해서 인형을 지켰던 벨리 경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작품다운 왠지모를 유쾌함과 활기는 좋았지만, 추리 퀴즈 수준밖에 안 되는 작품이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중반에 잠깐 라디오 극본을 그대로 옮긴 듯한 부분이 있는데, 의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작품과 잘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라디오 극본이라는걸 알려주기 위한 의도였다면, 극본 전체를 부록처럼 수록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