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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4

Q.E.D Iff 증명종료 30 - 카토 모토히로

"Q.E.D."의 시즌 2라고 할 수 있는 "iff"의 마지막 권입니다. 

이전 권에서 토마가 가나에게 고백하길래 이번 권을 마지막으로 시리즈가 끝날 줄 알았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Q.E.D. UNIV"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합니다. 최근의 폼은 작가의 최전성기가 지났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시리즈가 계속된다는 것은 반갑네요.

이번 권에도 언제나처럼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 편은 비교적 가벼운 입시 부정 사건이고, 한 편은 살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두 편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자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레스티지"

하버드에 합격한 가나는 브라이언 교수와 학장으로부터 입시 부정 관련 사건 조사를 의뢰받았다. 자동차 부품 회사 사장 넬리 게레로가 기부 입학을 위해 천만 달러 수표를 보냈는데, 아들 야엘이 불합격하고 자살했다며 학교를 고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수표를 받지 못했다.

넬리가 마약 카르텔로부터 생명을 위협받자, 입시 컨설턴트 시퍼가 천만 달러 수표를 학교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챙기려고 했던 것이 수표 분실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녀는 야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학교에 수표를 돌려주었지만 들통나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나 진짜 진상은 넬리가 야엘을 마약 카르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죽은 것으로 위장시켰던 것입니다.

진상은 나쁘지 않지만 과정은 영 별로입니다. 야엘의 위장 자살과 시퍼가 학교에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 수표를 반납한 일은 경찰과 학교 측 조사가 미흡한 탓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습격한 마약 카르텔을 가나가 공격해서 물리친다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리즈 특유의 정보 제공도 기부 입학에 대해 약간 알려주고 끝날 뿐입니다. 제목의 "프레스티지"도 명예와 환상을 의미하는데, 작품과 잘 어울리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문이 닫힐 때"

암호화폐 투자 실패로 모든 것을 잃은 간호사 허버트는 투자 회사 사장 체스터 피멜 살해 혐의로 검거되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체스터의 혈액만 낭자할 뿐, 시신은 없었다. 시신 없는 상태로 기소된 허버트의 재판이 시작되는데...

허버트가 체스터의 혈액을 어떻게 확보했는지 풀어내는 추리는 좋습니다. 안티에이징 클리닉에서 허버트와 체스터가 만났다는 것이 단서가 되거든요. 젊은 시절에 채혈했던 피를 주입하는 요법을 위해 확보했다는 것인데, 실제 미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꽤 높습니다. 체스터 살인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한 체스터의 작전이었다는 진상도 괜찮고요.

교살한 체스터의 사체를 숨긴 방법도 앞서 나온 복선과 이어집니다.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키트에 대한 복선으로, 체스터의 사체를 마약 중독 사망자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개에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체스터의 변호사가 노력해서 허버트를 재판정에 세웠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허버트가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체스터의 부재로 인한 암호화폐 폭락이 멈추지도 않을 테니까요.

아무리 길거리 마약 중독자의 시신이라도, 살해당한 시신을 마약 키트로만 검사하여 매장한다는 것도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최소한 근처에 유명 투자자의 시신없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면, 근처 시신들은 철저하게 조사하는게 당연합니다.

허버트가 변호사를 살해하려 한 척 해서 체스터 사건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아요. 두 사건은 관계가 없으니까요. 변호사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해서, 체스터를 죽이지 않았다는건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는 발상은 있지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멍이 많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키스 씬은 마음에 듭니다. 무려 80권의 연재 끝에 결국 성사된 데다가, 토마가 얼마나 괜찮은 녀석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그려진 덕분입니다.

2026/04/24

4의 재판 - 도진기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판사가 문제다. 인간의 한계다.

살인에 걸래?가 형사 재판의 물음이라면, 살인에 걸래, 교통사고에 걸래?가 민사 재판의 물음입니다.

선재는 약혼자 지훈이 살해당한 사건에서, 범인 양길의 유죄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양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정황 증거 외에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길은 형사 재판에서의 무죄 판결을 이유로 19억원에 이르는 보험금 수령에까지 성공했고, 선재는 절망에 빠졌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로 유명한, 검사 출신 작가 도진기의 신작 장편입니다. 그러나 시리즈 작품은 아니고, 정통 추리 소설도 아닙니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과 판결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회파 소설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유명 사건 - 캄보디아 만삭 아내 살인 사건, 여수 금오도 차량 추락 사망 사건 - 의 판례를 바탕으로 한, 독자의 분노를 자극하는 양길의 완전범죄 설정은 흥미롭습니다. 양길은 누가 봐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험금까지 타내게 됩니다. 뉴스를 통해 비슷한 사건들을 접해는 왔었지만 왜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 나오는지는 몰랐는데, 이 작품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검사 출신 작가답게 판사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하는 시선도 분명합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의 차이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 주는 점도 좋았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소재 활용도 돋보입니다. 선재가 양길 측 수사 기록을 복사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복사 현장에서 적발되었지만 복사지가 스스로 구입한 자신의 물건이고, 변호사 사무소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법 침입이 성립하기 어려워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신선했어요.
양길이 지훈의 어머니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죄가 선고된 재판정에서 살인자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의 명예 훼손이 성립한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이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측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금을 줘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양길이라는 인간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양길이 일사부재리가 적용되지 않는 필리핀 현지에서 체포된 뒤, 유죄판결을 받는 반전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다만 소설 자체가 아주 잘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개가 심심한 탓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선재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고요. 형사재판 과정에서 선재는 철저하게 방관자에 머뭅니다. 피해자 측 유족인 이상 법정 공방에 직접 개입할 수 없고, 실제 재판은 검사와 양길 측 변호사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사재판 후에는 문병일의 변호사 사무소에 위장 취업해 사건 자료를 복사해 빼돌리는 활약을 보여 주지만, 그것 역시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이래서야 재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양길의 재판 과정도 분량에 비해 밋밋합니다. 법정극에서 기대해 봄직한 강한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공방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양길의 무죄를 뒤집을 만한 뚜렷한 전환점이 없고, 판사의 판단이 전부인 흐름이 이어져 답답합니다. 

등장인물 묘사도 아쉽습니다. 선재가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이라는 설정은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냥 맥거핀에 불과해요. 심리 묘사 역시 진부하고요. 게다가 장인규나 서찬휴는 작가 대신 법률 이론과 재판의 불합리함을 설명하기 위한 스피커에 불과합니다. 전혀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둘의 이야기는 비슷한게 반복되어 지루하게 느껴지고요.

결말도 신선하지만 갑작스럽습니다. 선재가 불법적으로 총을 손에 넣어 직접 복수를 할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건 불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형식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양길의 체포도 묘사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없고, 결국 양길이 필리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결말도 한 줄 설명에 그치며 양길 시점의 묘사가 전무해서 아이디어에 비하면 잘 쓴 결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네요.

그리고 검사 출신으로 판사의 신성불가침(?)성에 태클을 걸고 싶어한 작가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작품이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소개된 사건처럼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한 판결도 있지만, 시체가 없거나 직접 증거가 없어도 유죄 선고가 내려진 사건도 있으니까요. 부산 시신없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법과 재판의 허점을 드러내는 사회파적인 성격, 형사와 민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보여 주는 점, 그리고 법률가 출신 작가다운 세부 설정은 분명 장점이지만 소설로는 영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대폭 줄이고, 등장하는 사건은 작중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고 뒤에 별도로  소개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의 "4의 재판"은 3심제를 벗어나더라도 네 번째 재판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쓴 게 아닌가 싶네요.


2026/03/27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 찰리 돈리 / 안은주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는 변호사인 아버지 프랭크 무어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장기 복역수의 가석방 절차를 인계받아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도적'이라는 별명으로 40년 전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 토머스 미첼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미첼이 죽였다는 피해자의 시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찰리 돈리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작품은 현재 시점의 로리와 과거 시점의 앤절라 미첼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데, 앤절라 미첼 시점에서 ‘도적(The Thief)’이라 불린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과정이 더 볼만 합니다. 앤절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흐름이, 앤절라의 자폐로 인한 강박적인 심리묘사와 함께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덕분입니다. 앤절라가 헛다리 - 남편 회사의 새 고용인이 범인이다, 친구 남편이 범인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 를 짚어 나가다가 범인이 남편 토머스라는걸 깨닫는 장면까지의 빌드업도 좋습니다.

로리의 아버지 프랭크와 토머스 미첼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토머스 미첼이 60년 형을 선고받은 결정적 이유는 아내 앤절라 미첼의 실종 때문이었습니다. 도적이 저지른 연쇄 살인은 시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하는데 실패했거든요. 선고 후 토머스는 아내를 찾아 달라며 프랭크를 개인적으로 고용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않은 앤절라의 생존이 확인되면 자신은 풀려날 수 있으니까요.
프랭크도 처음에는 의뢰인인 토머스를 믿고 앤절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랭크는 토머스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 그리고 앤절라는 토머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앤절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함과 동시에 토머스를 속여 가며 가석방을 늦춰 왔던겁니다.
이는 현재 시점의 화자인 로리가 바로 토머스와 앤절라의 딸이었다는 그럴싸한 반전으로 이어지며,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만들고요.

하지만 절대로!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연쇄 살인마와 맞서 싸우는, 다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흔해빠진 양산형 범죄 스릴러에 불과한 탓입니다.
특히 주요 화자인 로리와 앤절라의 자폐 성향이나 강박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 묘사는 과할 뿐더러, 최근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캐릭터 유형을 그대로 반복하여 식상합니다. 친절하고 다정해 보였던 남편이 사실은 연쇄 살인마였다는 설정 역시 뻔하고요.

수사 과정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토머스가 증거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거의 십 년 동안 여성들을 수십 명이나 살해했는데 경찰과 검찰이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설정, 그리고 토머스를 체포하는 근거가 되었던 실종 여성의 신분증과 목걸이는 분명한 물증인데 이걸 단순한 정황 증거처럼 취급했던 재판 과정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토머스의 후반부 행동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는 40년 동안 복역한 뒤 가석방되자마자 곧바로 앤절라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캐서린과 그레타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무리한 행동을 해야 할 이유가 작품 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토머스가 시한부라든가 하는 설정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어요.
범행 과정 역시 허술합니다. 그레타를 살해하면서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는 등 명확한 증거를 남기는데, 이런 방식은 40년 전 이야기라면 모를까 2020년대에서는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CCTV도 있을테고요.
마지막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진상을 눈치챈 로리가 토머스의 집을 혼자 찾아가는 행동부터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토머스가 언제나처럼 희생자를 매단 교수대를 만들어 변태적인 놀이를 즐기다가, 숨어 있던 로리의 기습을 받고 죽는 결말은 허무함의 극치였고요.

불필요한 묘사도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 주인공들의 심리적 문제를 강조하는 묘사는 과할 정도로 반복되고, 캐스트너 인형 복원이나 플로이즈 다크로드 맥주 같은 이상한 취미와 집착도 이야기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카밀 버드 관련 설정은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고, 로리의 연인인 레인의 존재 역시 작품 전개에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앤절라가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범죄 전문가라는 로리가 이를 지나치게 늦게 눈치챈다는 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범죄 스릴러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지탱할 만큼의 독특함은 없어요.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7/18

나이브스 아웃 : 글래스 어니언 (2022) - 라이언 존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명탐정 브누아 블랑은 코로나 격리 탓에 지루함으로 몸부림치던 중, 대부호 마일즈의 초대를 받고 그리스의 섬으로 떠났다. 마일즈는 섬의 대 저택에서 친구만을 데리고 자기가 만든 추리극을 선보인 뒤, 범인 찾기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초대받은 친구들은 모두 마일즈의 돈과 후원이 절실해서 그 앞에서 쩔쩔맸지만, 앤디는 동업자 마일즈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회사를 쫓겨난 원한이 있어서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명 작가가 만들었다는 추리극을 블랑이 단번에 풀어내어 김이 빠져버린 그날 밤, 파티에서 듀크가 술을 마신 뒤 질식사했고 뒤이어 앤디마저 저격당해 살해당했다. 곧바로 블랑은 남은 사람들 앞에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내기 시작하는데....

넷플릭스 전용 장편 추리 영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편을 재미있게 보아서 관심이 컸었지만, 2시간이 넘는 시간 탓에 그동안은 손이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더위가 몰아친 지난 주말에, 여름에는 추리 영화지!라는 생각으로 보기 시작했네요.

특징이라면 전편도 그랬지만, 고전 본격물의 문법을 현대에 맞춰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잘난 척이 심하고 까칠한 외국인 탐정 브누아 블랑부터 그러합니다. '에르퀼 푸아로'를 현대에 옮겨놓은 듯한 인물이니까요. 괴짜 억만장자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친구들만을 외딴섬의 대저택으로 초대해 추리 게임을 연다는 설정 또한, 고전적인 클로즈드 서클 추리극을 연상시키고요.
그런데 여기 포함된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현 시점을 반영한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주목받는 정치인, 과학자는 그렇다 쳐도, SNS 중독인 패션 모델과 남성 인권에 대해 떠벌이는 유튜버가 대표적입니다. 마일즈는 아무리 봐도 일론 머스크를 떠올리게 했고요.

이야기도 뚜렷하게 4막으로 나뉘어 시원하게 전개되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1막에서는 마일즈가 준비한 추리 게임이 중심이 되며, 2막에서는 듀크의 죽음이 벌어집니다. 이어지는 3막에서는 섬에 도착한 인물이 사실은 앤디가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헬렌이었다는 사실이 회상을 통해 드러나고, 그녀가 언니의 의문사를 밝히기 위해 블랑에게 의뢰했음이 밝혀집니다. 마지막 4막에서 블랑의 추리와 헬렌의 폭주를 통해 이야기는 마무리되고요. 이렇게 구조적으로 큰 흐름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어 몰입하기 쉬웠습니다.

또 다른 장점은 미술입니다. 마일즈의 섬과 '글래스 어니언'으로 상징되는 대저택의 내외부는 시각적으로도 인상 깊습니다. 뱅크시 조각으로 만들어진 부두나 모나리자 등 여러 미술 작품, 초대장이 담긴 퍼즐 상자도 그러합니다. 인물의 성격과 직업을 반영한 의상과 색상 표현도 뛰어나고요. 한 마디로 보는 즐거움은 넘칩니다.

마지막 헬렌의 폭주도 화끈함만큼은 최고였어요. 모든걸 날려버린 뒤, '모나리자'마저 불태우는건 정말 최고의 마무리였습니다. 마일즈의 평소 입버릇과 절묘하게 연결되는 점도 좋았고요.

그러나 기대했던 추리적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주어진 정보를 통해 그럴듯한 추리를 끌어내는 브누아 블랑의 추리쇼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러모로 헛점이 많이 보이는 탓입니다. 듀크가 마일즈의 차에 치일뻔 했다는 대사로 마일즈가 앤디의 집에 먼저 갔고, 그녀를 살해했다는 근거로 삼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발상은 좋지만 근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지요. 마일즈가 멍청이라는 것과 그가 범인이라는건 아무런 관계가 없고요. 최악은 듀크가 마일즈의 잔을 잘못 알고 잡아서 죽은게 아니라, 마일즈가 듀크에게 잔을 전해주었다는 추리입니다. 관객은 모두 해당 장면에서 듀크가 잔을 잘못 잡는걸 봤습니다. 즉, 이건 관객에게 거짓말을 한겁니다. 공정함 측면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마일즈가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겁니다. 앤디의 사망과 관련해 마일즈의 차를 친구들이 목격했다는 사실은 정황일 뿐입니다. 범행의 동기가 되었던 메모도 이미 재판에서 조작된 증거를 기반으로 결론이 난 상태라, 지금 와서 앤디가 다시 제출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메모는 마일즈가 모두 앞에서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남아 있지도 않고요. 앤디가 이미 자살했다고 알려진 상황에서 그의 재력과 사회적 입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명탐정 브누아 블랑을 통해 고소된다 한들 유죄 판결은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친구들마저 편을 들어준다면 더더욱요.
듀크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범행 도구가 독이 아닌 파인애플 주스 알레르기였기 때문에 사망 원인을 사고로 처리할 가능성이 큽니다. 잔을 바꿨다는 점도 증거를 남기기 어려운 부분이라 수사 과정에서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헬렌이 가지고 있던 녹음기를 활용해서 증거를 잡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좀 의외였어요.

그리고 부실한 동기도 문제입니다. 앤디를 살해한 이유가 메모 때문이라지만, 이미 메모를 누가 썼는지에 대한 법적 다툼은 끝난 상태입니다. 앞서 말했듯 지금 앤디가 '메모 원본을 찾았다!'며 들이미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듀크 살해도 넘치는 재력으로 무마하는게 더 손쉬웠을테고, 헬렌을 저격하려 한 마지막 범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일즈는 그녀가 앤디가 아님을 알고 있었고, 메모를 손에 넣은 상황에서 굳이 헬렌을 해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분을 속인걸 밝히며 듀크를 살해한 범인으로 모는게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마일즈의 동기도 이렇게 부실하지만, 다른 친구들과 손님들은 더 합니다. 그들 중 누구도 앤디를 해칠 이유는 없었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메모는 마일즈의 현재 위치에 영향을 끼치기 힘드니까요. 게다가 듀크를 죽일 이유는 더 없습니다. 듀크 때문에 위험을 느낄 인물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아무도 설득력있는 동기가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범행을 억만장자 마일즈가 직접 벌이는게 가장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것도 세계 제일의 명탐정 앞에서 말이지요. 아무리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벌인 범행이라 하더라도 너무 무모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전작보다 규모가 커졌음에도 이야기의 짜임새와 특히 추리적인 완성도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전편만 보셔도 될 듯 합니다.

2025/05/30

판사 이한영 - 이해날, 문성호 / 전돌돌 : 별점 2점


드라마도 제작될 정도로 인기있는 웹 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기본 설정은 뻔한 회귀물+복수극이지만, 주인공 직업이 '판사'라는 특이한 차별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법정 배경 작품 중에서 검사나 변호사가 아니라 판사가 주인공인건 처음 접해 보네요. 그 덕분에 법정물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한영이 회귀 후, 과거 판결 결과와 사건 진상을 기억하고 있어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면서 승승장구한다는 전개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데, 이게 꽤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선희는 전 연인 박혁준에게 스토킹당하다가 사망했는데 마침 박혁준이 보험금 수령자이기도 해서 유력한 용의자로 부상하지요. 하지만 이한영은 박혁준과 불륜 관계였던 피해자의 사촌 김가영이 진범이라는걸 여러가지 주변 증거를 통해 밝혀냅니다. 살인 미수 누명을 쓴 서민훈 사건은, 서민훈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유성그룹의 음모라는걸 택시의 블랙박스 영상 등으로 증명하고요. 이처럼 추리물에 가까운 구성과 연출이 돋보이는 사건들이 제법 많아서 단순한 법정극 이상의 재미를 줍니다. 이한영의 판결은 대기업 회장이나 강신진 판사같은 빌런에게 무려 '사형선고'를 내릴 정도로  '사이다' 판결이라서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 있고요.

아울러 판사가 재판을 통해 얼마나 판결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부분은, 최근 국내에서도 논란이 되는 ‘접대 판사’ 문제와 맞물려 있어서 더 흥미로왔습니다.

이한영의 복수 서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강신진과 장태진을 무너뜨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박철우 검사, 로펌 에스로펌 소속의 유세희, 기자 송나연 등 각각의 역할이 분명한 조력자들의 도움이 잘 그려진 덕분입니다.

하지만 복수가 구체화되어 갈 수록 긴장감과 개연성은 퇴색되어 버립니다. 대부분 사건들이 녹화나 녹취 파일 한두 개나 주요 인물의 배신으로 쉽게, 뻔하게 증명되는 탓이 큽니다.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이런 증거와 증언 한, 두개에 무너진다는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또한 강신진과 장태진 같은 인물들이 직접 범죄에 가담하고, 치명적인 증거를 남긴다는 전개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검사, 경찰도 아닌 판사가 드러난 증거 외의 것에 간섭한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이한영이 에스로펌의 후계 구도에 간섭하고, 장유린 판사와 손을 잡는 등의 불필요한 서사도 거슬렸습니다. 에스로펌을 몰락시키겠다는 의도와 후계 구도에 간섭해서 유세희를 밀어주는 행동은 아무리 봐도 앞 뒤가 안 맞더라고요.
만화적인 과장도 지나칩니다. 법정 장면은 과장되고 고증이 부족하며, 석정호나 박철우 검사의 전투력 묘사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들도 두서없습니다. 강력한 빌런이자 라이벌로 보였던 김윤혁은 일관되게 찌질함만 보여주다가 별다른 활약없이 퇴장해 버리고, 에스로펌의 유선철은 조력자로 나설 듯 하다가 갑자기 흑화하는데 결말도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러브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한영과 유세희, 송나영, 윤슬혜 간 관계는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김진아 검사는 뜬금없이 박철우와 엮이는 식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깊이 생각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한 티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의 구성력과 법정 내외의 갈등 구조,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성과 논리 전개가 약화되면서 아쉬움을 남깁니다. 앞부분에 여러 가지 사건을 배치해서 흥미를 자아내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흥미를 잃게 만드는 흔한  법정 드라마와 비슷했어요.

2025/04/11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권영주 : 별점 4점

거짓과 정전 - 8점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SF 대상을 수상했던 떠오르는 작가 오가와 사토시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인 "거짓과 정전" 외에도 "마술사", "시간의 문", "한 줄기 빛", "무지카 문다나", "마지막 불량배" 등 현실과 환상, 과학과 감성이 절묘하게 섞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SF적 설정과 기발한 아이디어와 만나 매우 신선한 재미를 준다는 점입니다. 시간 여행을 마술 무대와 연결한 "마술사"부터 그러합니다. 마술에 대해 현실적이며 설득력있게 묘사하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마술을 '타임머신'과 결합시켜 의외의 결말로 이끄는 솜씨가 정말 탁월합니다.

유행이 사라진 세상에서 유행의 의미를 되짚는 "마지막 불량배", 과거로 정보를 보내 세계를 조정하는 냉전 시대의 첩보극 "거짓과 정전"도 모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불량배"는 유행과 취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소비에 대해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예전처럼 하나의 앨범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구입한 뒤, 그 앨범을 반복해 들으며 취향을 만들던 시대를 지나, 지금은 그런 고민없이 모든걸 쉽게 소비하는 세상이 되어 '취향'이라는게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거든요. 지금의 취향은 내가 아니라 인터넷이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SF 외에도, 일상 속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들도 돋보입니다. "한 줄기 빛"은 아버지가 남긴 경주마의 계보를 따라가며 자아를 발견하는 성장물인데, “서러브레드가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생명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깁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안도현 시인의 시 -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지카 문다나"에서는 음악이 화폐인 섬을 배경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냅니다. 다이가의 아버지는 훌륭한 음악(다이가)을 듣기 위해 자신의 최고 걸작을 남겼지만, 다이가를 들은 뒤에는 음악을 포기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이가는, 스스로 '다이가'를 듣기 위해 포기했던 음악을 다시 시작할걸 결심하고요. 음악을 포기한 다이가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면 음악을 다시 시작하리라 여겼던 아버지의 배려(?), 그리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속셈을 알면서도 속는 다이가의 모습이 짠합니다. 이처럼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다루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뛰어납니다. "마술사"에서 시간여행은 실제로 일어났는지, "한 줄기 빛"에서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졌는지, 템페스트, 레티시아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따라가면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추리적인 요소도 흥미롭습니다. "시간의 문"에서 오펜하임이 1932년 7월 31일, 나치당에 투표했을지?를 물어보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전날밤 오펜하임은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켄타우루스 자리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독일 본토로 돌아가 투표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건 교묘한 전개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결합되어 의외의 결론으로 향하는 "거짓과 정전" 처럼요. 작품은 엥겔스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바로 다음에 80년대 CIA 모스크바 지국 정보원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결국 두 이야기가 결합되며 마무리되는데 기발하고 교묘하게 잘 짜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록된 모든 작품이 동일한 수준은 아닙니다. "시간의 문"은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개나 반전이 평이해 다소 뻔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또한 SF적 설정으로 보자면, "거짓과 정전"을 제외하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단지 상징적인 장치로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의 문"에서의 기억 조작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우화적 도구에 가까우며, 인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설정도 설득력 있는 논리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몇 명쾌하지 않은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술사"에서 정말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시간여행의 모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거짓과 정전"의 '정전의 수호자'들이 역사 수정을 방지한다는 진상도 방법적으로는 잘 모르겠고, 설정도 과거 "타임캅"류의 타임 패러독스 방지물과 별다르지 않아서 시시했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SF적인 상상력과 서정적 감성이 잘 결합된 작품들입니다. 일부 아쉬운 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몰입감 있고, 인상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03/23

법정유희 - 이가라시 리쓰토 / 김은모 : 별점 2.5점

법정유희 - 6점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김은모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호토대 로스쿨에는 '무고 게임'이라는 학생들이 진행하는 모의 공개 법정이 있었다. 여기서 판사 역할을 하는건 학교 최고의 천재 유키 가오루였다. 

동급생들이 졸업하고 약 일 년 뒤, 가오루의 친구였던 구가 기요요시는 메일을 받았다. 무고 게임이 다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메일에 적힌 시간에 모교를 찾은 구가는, 가오루의 사체와 피투성이인 동급생이자 친구 미레이를 발견했다. 살인범으로 기소된 미레이는 구가에게 변호를 의뢰했다. 사실 미레이와 구가는 어린 시절 보육 시설에서 함께 했던 친구로 함께 치한 사기를 치고 살았던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일본 신예 작가가 쓴 법정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만장일치로 제62회 메피스토상을 수상했으며, '미스터리가 읽고 싶다!' 3위와 신인상, 2020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4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3위에 랭크되는 등 수상이력이 아주 화려합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 속에서 꽤 많은 사건이 벌어지지만, 핵심은 유키 가오루 살인 사건입니다. 사실 사건은 가오루의 자작극이었어요. '일본 검찰이 실수를 인정하게 만들기 위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법정에서 증거를 공개'하려고 미레이를 끌어들여 자살(?)했던 겁니다. 이 계획 안에 여러가지 법률 이론과 지식을 효과적으로 녹여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고요. 작가가 현직 법조인인 덕분이지요. 특히, ‘동해보복’ 이론이 인상적입니다. 이는 '정당한 죗값'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가오루는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미레이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정당한 재판을 하지 않은 사법기관도 같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죗값은 두 측이 아버지의 무고함을 밝히는 것으로 치러져야 한다고 판단해서 계획을 실행했던 것이지요. 단순히 미레이의 생명을 노리거나 미레이에게만 죄를 묻는 복수를 넘어서는, 진지한 법학도가 생각할만한 타당한 동기였습니다. 법적으로도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을 뿐더러, 작 중 가오루의 언행으로도 동기를 설득력있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진상을 마지막까지 숨기면서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구가가 계획한 ‘무고의 제재’ 전략도 그럴듯 했습니다. '무고 게임'에서 심판자가 부정을 저질렀음이 증명되면 심판자 본인도 벌을 받는다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 가오루가 자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로스쿨 학생들이 즐기는 모의 법정 ‘무고 게임’ 설정이 가오루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도록 잘 짜여진 점도 큰 재미 요소입니다. 미레이를 도청하고 협박한 사람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과정도 추리적으로 나쁘지 않고요. 법정에서의 공방도 긴장감 넘치도록 잘 묘사됩니다.

법정에서 사건 당시 촬영된 영상이 공개되어 미레이의 무죄가 밝혀진 후, 사실 가오루는 죽을 생각이 없었고 미레이가 살해했다는 반전도 강렬합니다. 미레이와 구가가 과거에 저질렀던 치한 치한 사기 및 상해죄에서 구가를 보호하기 위해 미레이는 가오루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앞선 회상과 법정 장면을 통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춥니다. 구가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겠다고 결심하는 결말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요.

그러나 치밀한 계획이 있는 것처럼 진행되지만, 결국 미레이의 무죄는 사건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으로 증명된다는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너무 명확한 증거라서 다른 계획은 어차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또, 비디오 카메라가 사건 현장에 장치되어 있었다는데 이를 어떻게 숨겼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 비디오 카메라에서 뺀 SD 카드에 암호가 설정되어 있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카메라를 치우고, 바로 SD 카드를 빼서 구가에게 전달하면서 암호화를 했다는건데 말도 안돼지요. 더불어, 비디오에 반전을 위한 결정적인 장면인 ‘미레이가 가오루를 살해하는 순간’만 찍히지 않았다는 점도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가오루의 계획에도 허점이 많습니다. 미레이와 구가는 오랜 시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구가가 미레이를 보호하기로 결심했다면 가오루가 남긴 미레이의 유죄를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 - 동영상 외 녹음 파일 등 - 는 무의미해집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구가는 검찰이 기소하기 전에 SD 카드 속 동영상을 검찰에 제공하여 불기소 처분을 받아내려 했을 테니까요. 가오루의 계획은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 증거들은 은사인 나쿠라 교수에게 맡기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오루가 저지른 죄에 적절한 벌을 선택할 수 있는 심판자가 되기 위해서 무고 게임을 만들었고, 패자에게 벌을 선고하면서 죄를 인정하고, 벌을 결정하는 경험을 쌓았다는데 이건 좀 억지였어요. 가오루의 계획은 적절한 벌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사심이 담긴 판결에 가까왔으니까요. 가오루가 법에 미친 천재라는 설정을 선보이기 위한 장치로만 무고 게임을 사용하는게 바람직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 해결이 동영상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단점은 크지만,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들 정도의 강한 흡입력은 충분합니다. 이런 재미 덕분에 영화화까지 되었겠지요. 어떻게 요약해서 영화로 만들었을지도 궁금해집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다면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2025/03/14

기차 시간표 전쟁 - A.J.P. 테일러 / 유영수 : 별점 4점

기차 시간표 전쟁 - 8점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페이퍼로드

이 책은 1914년 7월 위기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원인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전쟁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저자는 전쟁이 단순한 외교적 실수나 강대국들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기차 시간표와 병력 동원 계획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주장합니다. 주장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각국은 철도를 활용한 신속한 군대 동원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동원을 빠르게 마쳐야 했고, 이에 따라 병력과 군수물자를 정해진 시간과 경로에 따라 이동시키는 계획이 점점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병력과 수천 대의 열차가 동원되는 만큼, 계획이 한 번 실행되면 중단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가 암살되면서 유럽 각국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고, 각국은 병력 동원을 상대국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는데, 일종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동원이 시작되면 이를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양면전 가능성을 고려해 먼저 프랑스를 공격해야 했고, 다른 나라들도 부분 동원만으로는 전면전에 대비할 수 없어 연쇄적으로 동원에 돌입했습니다. 결국, 상대를 위협하려던 동원 계획이 오히려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당시의 복잡했던 동맹 및 외교 관계도 전쟁 발발의 한 원인입니다. 유럽 열강 간의 동맹 구도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독일은 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독일과의 타협을 원했으나, 영국이 이를 반대하며 개입했습니다. 결국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이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강조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문제를 놓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다른 열강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명확한 대응 방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러시아는 발칸 문제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독일이 터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점차 기울었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였고, 영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개입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습니다. 세르비아 정부는 발칸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지만, 동시에 러시아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군을 동원하면서 전쟁 위기가 현실화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해야 한다는 압력이 강했습니다. 독일 황제는 세르비아가 제시한 조건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전쟁 준비가 진행된 후였습니다. 결국 1914년의 전쟁 위기는 단순히 사라예보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강대국들의 경직된 대응으로 인해 확대된 것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대규모의 군사 동원이 곧바로 전쟁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 각국의 황당하고 순진했던 생각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탁상공론과 연구만 오갔던 무능했던 각국 군사 작전 계획들도 한 몫 단단히 했고요. 다들 말도 안되는 동원 계획 등으로 꿈만 꾸고 있었다는걸 잘 알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슐리펜이 여러 해 고심했던 슐리펜 계획 -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통과하여 북부 프랑스로 진격하는 계획 - 은 프랑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던가, 슐리펜이 오랫동안 연구를 했음에도 프랑스가 어느 때인가 알아차리고 길을 막을 거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웃음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쟁이 일어난건 외교를 맡은 관료들 책임이 크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연합국이 전범으로 지목했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야말로 '베오그라도 정지'를 제안하는 등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건설적인 시도를 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더라고요. 소위 군국주의 군주들을 온화하고 선의를 가진 이들이었으며, 정치가들이 말한 바를 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모든 결정권이 군주들에게 맡겨졌다면 전쟁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는게 아이러니합니다. 

1차 대전 불씨를 당긴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사건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왜 암살을 시도했는지 - 독일인과 마자르인들이 나머지 민족을 지배했는데, 마침 세르비아가 터키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었기 때문에 - 부터, 세르비아 장교들의 비밀 결사 '검은 손'이 암살범 프린치프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었고 -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의 수상 파시치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 처음 폭탄 투척 사건에서는 암살에 실패했었지만 대공이 부상자들을 방문하려고 병원으로 갈 때 암살당했다는 사건의 진행 과정과 결과는 물론 범인 일당에 대한 재판 결과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일당은 사형당했지만, 미성년자였던 프린치프는 사형을 면했다고 하네요. 수백만 명이 죽은 미증유의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감을 안고 여생을 보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이유를 색다른 시각으로 풀어주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도판도 충실하고, 책의 장정과 디자인 모두 빼어납니다. 다만 '기차 시간표'가 중요한 핵심 소재는 아니고 일종의 키워드로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의 시작까지만 다루고 있어서 관련된 인물들과 국가들의 결말은 다른 경로로 알아 보아야 한다는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1차 세계 대전에 대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네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11/30

최후의 증인 - 유즈키 유코 / 한성례 : 별점 2.5점

최후의 증인 - 6점
유즈키 유코 지음, 한성례 옮김/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사 출신 변호사 사가타 사다토는 요네사키 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재판에서 검사 마오와 대결을 벌였다. 마오는 피고가 불륜 관계였던 피해자를 살해했다는걸 공판 과정 내내 여러 증인과 증거를 통해 착실히 밝혀나갔지만 사가타는 공판 마지막 날, 전직 형사 마루아먀를 증인으로 불러 놀라운 진상을 밝혔다. 피해자 미쓰코는 8년 전, 피고 시마즈의 음주 신호 위반 사고로 외동아들 스구루를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사건을 계획했던 것이었다...

“최후의 증인”은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유즈키 유코의 법정 스릴러이자 복수극입니다. 제7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을 수상했던 작품으로 변호사(검사) 사가타 사다토 시리즈 중 한 권이라고 하네요.  “고독한 늑대의 피”는 하드보일드였는데 이런 작품도 잘 쓰는군요. 

작품은 한 가족의 비극적인 사고에서 시작해 복수, 법정 공방, 그리고 8년 전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까지 세 개의 큰 흐름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순서대로 설명드리자면, 타카세 코지와 미쓰코 부부의 외동아들 스구루는 신호를 위반한 음주운전자 시마즈의 차에 치여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시마즈는 자신의 부와 '공안위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사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지요. 그리고 8년 후, 미쓰코의 시한부 판정을 계기로 부부는 교묘한 복수를 계획합니다. 이후 시마즈는 미쓰코의 의도된 유혹에 빠져들었다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고 맙니다. 이 사건의 변호를 받은 사가타와 마오가 법정에서 대결을 펼치고요.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개는 깔끔하고, 인물 묘사도 돋보입니다. 특히 주요 악역 시마즈는 독자들이 분노를 느낄 만큼 적절히 그려졌습니다. 그의 특권과 오만함, 그리고 본의는 아닌 사악함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상상 가능한 캐릭터로, 독자들이 작품 속 세계에 몰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미쓰코의 복수극도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녀는 자살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시마즈를 함정에 빠뜨리는데, 이 수단이 마지막 순간까지 감춰져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일종의 서술 트릭적인 재미를 제공합니다. 공판 3일째에 피고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까지는, 피고인이 미쓰코라고 생각하도록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전개 상 감추기 쉽지 않은 부분인데, 고민을 참 많이했구나 싶었어요.

법정물로도 볼만한 부분이 많습니다. 변호사 사가타가 검사 마오의 논리를 하나씩 무너뜨리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예컨대, 시마즈가 사건 직후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도망친 행위는 오히려 범죄와 무관하다는 논리로 반박되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불륜 상대로부터 공격받은 뒤 도주하는 상황이라면 사람 많은 호텔 로비를 지나 택시를 탄게 당연하지만,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럴리 없다는 논리인데 그럴싸합니다.
시마즈가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으나, 결국 8년 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 처벌받게 된다는 점도 통쾌함을 안겨주고요.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미쓰코의 복수 계획은 서술 트릭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치밀하지 못합니다. 특히 시마즈가 미쓰코의 단순한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건 설득력이 부족했어요.
또 마지막 공판에서 등장하는 마루야마 형사의 증언도 지나치게 극적이고 억지스럽습니다. 그의 증언이 없더라도 8년 전 사건이 복수극의 동기였다는건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사가타와 마오 검사에게 부여된 설정도 다소 진부하고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사가타가 검사직을 떠나게 된 계기, 마오 검사의 아버지가 묻지마 살인 사건으로 희생당했다는 서사는 작품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불필요하다고 생각될 뿐이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사가타가 '어떤 식으로든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지만, 지은 죄는 반드시 죗값을 치루게 만드는' 변호사라는 설정을 끌고가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깔끔한 전개와 강렬한 악역 묘사, 그리고 법정 스릴러의 묘미를 잘 살렸지만 추리적으로 다소 아쉬우며, 작위적이고 진부한 부분도 많아 감점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8/16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 애거사 크리스티 / 김남주 : 별점 2점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 - 4점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이스팅스는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휴가를 얻은 뒤, 오랜 친구 존 캐번디시의 초대로 스타일스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가족의 돈주머니를 틀어쥐고 있는 존의 어머니는 젊은 앨프리드 잉글소프와 갓 재혼한 상태로, 앨프리드는 존과 로렌스 형제 및 다른 가족들의 미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존의 어머니 잉글소프 부인이 밀실에서 스트리크닌 중독으로 사망했다. 헤이스팅스는 마침 그곳에 머물던 옛 지인이자 뛰어난 탐정 푸아로에게 사건 해결에 도움을 줄 것은 요청했고, 평소 잉글소프 부인에게 도움을 받던 푸아로는 흔쾌히 승락하여 사건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앨프리드 잉글소프의 범행이 명백해 보였지만, 그는 알리바이를 증명하며 혐의를 벗었고 오히려 존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푸아로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어 진범을 밝히고 사건을 해결한다.

"가장 간단한 설명이 언제나 사실에 가장 가까운 법이지."
"모든 살인범은 누군가의 오랜 친구일세. 감정과 이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네."

기념비적인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의 데뷰작. 놀랍게도 저는 이 작품을 처음 읽어봅니다. 대표작으로 꼽히지도 않고, 푸아로도 별로 좋아하는 탐정이 아닌 탓입니다.

데뷰작이지만 거장의 편린은 엿보입니다. 잉글소프 부인의 '급작스러운 유언장 변경'과 '말다툼과 고민'이라는 상황의 시간차를 통해, '더운 날씨에도 방 난로에 불을 피운 이유'는 '방금 만든 유언장을 태우기 위해서'였다는걸 밝혀내는 추리가 특히 백미입니다. 고작 30분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이유는, 우표를 찾다가 남편의 비밀을 알아챘기 때문이며, 이 편지 때문에 메리 캐번디시 부인과 신시아의 수사한 행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는 설명도 합리적입니다. 추리를 위한 모든 보는 독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물론 독자들이 알아채기 어렵도록 잘 숨기는 솜씨, 그리고 이야기를 진해하며 다양한 인물들에게 수상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이야기를 끌고가는 솜씨도 탁월합니다.
누가 보아도 수상한 앨프리드 잉글소프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이유에 대한 진상도 시대를 앞서간 측면이 있습니다. 푸아로는 앨프리드 잉글소프가 마을 약국에서 자기 이름으로 서명을 하여 스트리크닌을 샀고, 아내와 격렬한 말다툼을 한 날 아내를 죽일 정도로 멍청한 바보가 아니라며 그의 체포를 막습니다. 하지만 앨프리드 잉글소프는 체포되어 기소되는걸 노리고 있었습니다. 기소되면 알리바이를 증명할 생각으로요. 왜냐하면 한 번 기소되었다가 풀려난 인물은 똑같은 범죄로 기소될 수 없다는 '일사부재리' 원칙을 이용하여 영원한 안전망을 구축할 생각이었거든요. 이야기 하나는 뚝딱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괜찮았던 아이디어입니다.
잉글소프 부인을 극도로 걱정하는, 진짜 친구였던것 같은 하워드 부인과 잉글소프가 내연의 관계를 맺은 공범이었다는 진상도 놀라왔습니다. 특히 이 캐릭터 구성은 여사의 대표작이기도 한 "나일강의 죽음"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자기 애인을 빼앗아 결혼한 친구를 원망하는 듯 했지만, 알고보니 애인과 공범으로 친구를 죽이고 유산을 독차지하려고 했다는게 똑같거든요. 다만 남들이 바라본 원망의 대상이 결혼한 친구이냐, 그 남편이냐의 차이일 뿐이죠.

그러나 데뷰작답게 부실한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잉글소프 부인이 치사량의 스트리크닌을 먹게 된 건, 스트리크닌이 들어있는 강장제를 먹던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알고 있던 범인들은 강장제에 브룸화물을 넣어 스트리크닌이 침전되게 만들었지요. 그래서 마지막에 치사량 - 한 병 전체 분량- 을 한 번에 복용하게 된 겁니다. 이 트릭 자체는 기발한데 문제는 독자들이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수면제를 복용할 경우, 스트리크닌의 효과가 지연된다는 것 역시 독자들에게 제대로 정보가 제공되지 못합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다른 방법 - 캡슐을 썼다던가 - 을 고민할 수 밖에 없어요. 
결정적 증거인 잉글소프의 편지도 억지스럽습니다. 계획이 어긋나서 쓴 편지를 잉글소프 부인이 갑자기 보게 되었고, 그 편지를 잉글소프가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했던 과정도 억지지만, 기껏 찾은 편지를 바로 없애버리지 않고 점화용 심지로 만들어 숨겼다는건 설득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몸수색이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영장도 없이 아무나 몸수색을 한다는게 말이 되는 시대였던걸까요?

"완전공략"에서는 '본격 추리소설'의 원형인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추리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스토리인 소설'이라면서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인 가치일 뿐, 지금 시점에서는 빛나는 점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여사의 대표작이라고 하기는 무리에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7/06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세기의 재판 이야기 - 장보람 : 별점 2.5점


딸아이 논술용 교재인 청소년용 법 관련 미시사 서적. 제목 그대로 어떤 식으로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12개의 재판에 대해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재판 및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소크라테스의 재판 : 다수결이 과연 옳은 것인지?
  2. 토머스 모어의 재판 : 현행 법과 어긋나더라도, 옳은 양심을 처벌할 수 있는가?
  3. 세일럼 마녀 재판 : 제대로 된 근거 없이 타인을 비방하는 것에 대한 문제
  4. 드레퓌스 재판 : 억울한 상황에서는 여론의 힘도 중요하다
  5. 2차 대전 전범 재판 : 전쟁에서 일어났던 범죄를 어떻게, 그리고 왜 처벌해야 하는가?
  6. 로자 파크스 재판 : 인종 차별 악법 없애기
  7. 미란다 재판 : 법에서는 결과 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하다.
  8. 제인 로 재판 : 낙태는 허용되어야 하는가?
  9. 워터게이트 재판 : 대통령도 탄핵될 수 있다
  10. 카렌 앤 퀸란 재판 :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
  11.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 : 부도덕한 기업과 싸우는 방법
  12. 벌링턴 산업 재판 : 성희롱은 기업도 책임져야 한다.
주요 쟁점들 모두 한 번 생각해볼만한 것들이며, 과거 사례를 현대에 빗대어 현대 재판 설명도 곁들여 주고 있는게 좋았습니다. 이를 통해 형사 소송과 민사 소송의 차이라던가 3심 재판의 기능 및 조건, 중재 등 여러가지 현대 법률 용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미란다 재판 이야기에서처럼 국내 판례를 예시로 들어주는건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음주운전이 의심되는 피의자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강제 연행하여 음주 측정을 한 결과는 위법한 수사이므로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를 통해 '공권력에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걸 알려주는데, 범죄임이 명확한 상황에서도 이런 한계를 두는게 맞는지?에 대한 고민도 생기네요.
에린 브로코비치 사건을 통해 중재 절차에 대해 알게된 것도 수확입니다. 법원의 판결 없이 당사자들끼리 합의하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걸 그동안은 잘 몰랐었거든요. 이런 방식은 크게 조정과 중재가 있는데 조정은 당사자 한쪽 또는 양쪽이 요청해 제3자를 조정자로 선임하여 해결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 중재는 반드시 '쌍방이 요청'한 후 중재인이 판정하면 양 당사자 동의 없이 바로 받아들여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랍니다. 우리나라도 민사 조정 신청 절차가 별도로 있고, 소송 비용도 1/10이라고 하니 필요하다면 적극 고려해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우선 재판보다는 재판 관련 상황에 더 촛점이 맞추어진 사건이 너무 많습니다. 대표적인게 드레퓌스 재판입니다. 이는 누명을 쓰게된 상황, 판결을 받은 뒤 벌어진 일련의 과정 등이 재판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재판 이야기라고 보기 어려워요. '인종 차별', '낙태권', '존엄사' 등도 해당 이슈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재판'이라는 수단으로 설명할 뿐입니다. 
또한 절반 이상의 내용이 현대가 무대라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역사'를 바꾼 재판이라면 과거 이야기부터 소급해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현대 재판을 가지고 설명하더라도, 미국 사건만 가지고 온 것도 불만스럽고요. 재판들도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주었어야 했습니다. '벌링턴 산업 재판'이 여기 사건들과 어깨를 나란히할만한 사건인지는 솔직히 갸우뚱합니다.
소크라테스 재판 이야기에서 '다수결이 과연 옳은지?'에 대한 답이 없이 다른 법적 이론 - 시민 불복종, 저항권 - 을 설명하는 것도 경우에 맞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저런 이슈를 한번 쯤 고민해봐야 하는 청소년이라면 모를까, 제 기대에는 별로 값하지 못했습니다.

2024/06/05

Q.E.D. iff 증명종료 23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5점

Q.E.D Iff 증명종료 23 - 8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오랫만의 수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화"
가나는 캐스터네츠를 돌려주기 위해 플라멩코 댄서 지망생 타케다 사키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한달 쯤 전 사라졌다. 애인 유키토 때문에 엮인 뒤 친해진 부잣집 딸 마츠자와 리카의 별장 파티 직후였다. 리카는 사키에게 매료되어 절친이 되었지만, 강하고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 인물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은폐를 한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던 리카는 가나에게, 자신에게 동화된 사키를 위해 거금을 주어 그녀가 스페인으로 유학가도록 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마는 사키 방에 있던 수상한 인형, 사키가 리카를 협박했던 증거가 담겨있는 스마트폰을 회수하지 않은 것, 유키토에게 더 이상 사키와 리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협박한 것, 사키가 스페인으로 간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마지막으로 캐스터네츠를 누군가 훔쳐간 것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리카가 아니라 사키가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이후 리카로 살아가게 되었다는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진상입니다. 앞서 둘이 닮았다는 묘사도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이를 위한 단서와 설명은 부족했습니다. 유키토만이 둘 모두를 사귀었어서 둘을 구분할 수 있을터라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이에요. 친한 사람이 그 외에 없었을까요? 리카에게는 부하는 물론 가족도 있었습니다. 모아서 파티를 열 정도로 친구도 많았고요. 이들 눈을 모두 속이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사키 자신이 스페인으로 떠난 것으로 소문내고 꾸몄다면 모든게 깔끔했습니다. 구태여 자신이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여지 - 침실에 있던 인형과 현장에 남겨진 스마트폰 - 를 남겨둘 필요는 없었어요. 수사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단순 실종과 살인 사건은 그 수준이 다르잖아요?
가나가 캐스터네츠를 보여주었을 때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플라멩코 방식으로 캐스터네츠를 사용한게 중요한 단서라는 것 역시 설득력이 약해요. 리카는 사키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으니, 캐스터네츠 사용법은 당연히 알 수 있었을테니까요.

그래도 캐스터네츠에 지문이 남겨졌기 때문에 그걸 훔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착안은 좋았고, 마지막에 현장에서 발견한 사키의 핸드폰을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지문인식 해제하도록 만들어 리카가 사키라는걸 밝혀내는 장면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잘 어울리는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덕분에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의 전개만 좀 더 타당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아쉽네요.

"형식적 진실"
우마오이 토비나가의 사후, 유산이 네 형제와 집사에게 고르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막내는 불륜으로 입적한 탓에, 형과 누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유산 분배 현장에서까지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현장을 목격한 토마와 가나는 막내 쇼료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장남, 차남은 피해자가 먼저 화장실에서 폭행을 저질러서 방어한 것이라 주장했다. 가나가 반격했지만, 형제가 다시 입을 맞추고, 증인이 될 수 있는 집사 코바도 사건 이후 행방불명 상태라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합의금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민사의 '형식적 진실주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주는 작품. '형식적 진실주의'는 쌍방 서로 다툼이 없이 합의한 부분은 진실로 다루는 민사재판의 원칙입니다. 반면 형사 사건은 합의에 그치는게 아니라 다각적으로 사실을 분석, 검증하는 '실체적 진실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작 중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형들의 위세에 눌려 합의하고 말았습니다. 아를 통해 형들이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는게 '형식적 진실주의"에 따라 법률적으로 입증되었고요. 하지만 이는 쇼료의 큰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형들과 집사 코바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챈 뒤, 복수에 나섰던 겁니다. 먼저 화장실에서 코바를 살해하고, 형들에게 자연스럽게 폭행 당하도록 설계했지요. 이후 코바의 시체가 발견되고, 형사 사건 수사를 통해 화장실이 범행 현장이라는게 밝혀집니다. 그리고 앞서의 민사 소송 합의 내용을 통해, 쇼료는 알리바이가 생겨나고 형제가 범인이 되어 버립니다. 화장실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범인일 수 밖에 없거든요. 아무리 민사지만, 다른 증거가 없으니 경찰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토마도 형제가 이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벽한 계획입니다!
쇼료의 어머니를 살해한 트릭도 '폭포'라는 현장을 잘 이용하고 있고요.

형제가 화장실에서 쇼료에게 반드시 시비를 걸었으리라는 보장이 부족하다는건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만, 학습 만화로서도 우수한 Q.E.D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추리적으로도 빼어난 오랫만에 보는 수작이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5/26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하마모토 다카시 외 / 노경아 : 별점 1.5점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4점
하마모토 다카시 외 지음, 노경아 옮김/레드리버

제목 그대로 결투에 대한 역사를 설명하는 미시사 서적. 유럽 중심으로 결투사를 개관하고,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발전되었고, 왜 사라졌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책 저자는 근대와 현대의 결투는 '명예 회복을 위한 도전이자 심판'의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전쟁에서의 일기토, 검투사들의 싸움은 결투로 볼 수 없다고 하고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결투가 이렇게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게 중세, 근대까지 왕과 귀족의 법을 따르는 '결투 재판'이 주류를 이루게 된 원인이라는 설명은 와 닿았습니다.
결투 재판은 판결의 신뢰성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반면, 기사도가 확산되는 바람에 명예 결투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과정 설명도 그럴싸 했습니다. 기사들은 사회적인 명예가 존재 기반의 하나였으니, 명예 훼손은 그들의 존재를 뒤흔드는 큰 위협이었겠지요. 그래서 당연히 명예 결투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을테고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건, 명예 결투의 시작이 이탈리아라는 설입니다. 보통 이런 '귀족'의 '결투'는 프랑스를 떠올리기 쉬운데, 왕의 권위가 막강한 프랑스에서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하네요. 왕이 재판을 하는게 당연하고, 또 그래야 권위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이유인데 충분히 납득할 만 했어요. 심지어 루이 13세 때 리슐리외 추기경이 결투를 없애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일화는 놀라왔습니다. "삼총사"에서 달타냥이 하루에 세 번의 결투 약속을 잡을 정도로 결투가 일반화되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배 계급은 정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리슐리외는 눈의 가시였던 총사대 핵심 멤버들을 모두 사형대로 보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군요. 왜 그러지 않았는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결국 기사도와 관련이 깊은 결투를 아예 막는건 불가능했기에, 결국 유럽 대륙 전체에 결투 문화가 전파되었습니다. 심지어 북유럽을 넘어 그린란드까지요. 그런데 그린란드 이누이트족은 결투를 사람들 앞에서 노래 대결로 승부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모욕당한 자는 사람들 앞에서 상대를 비웃는 노래를 불렀고, 혹시라도 가사를 잊어버리면 친구들이 그 대목을 대신 불러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결투 신청을 받은 자가 위트 넘치는 통렬한 가사로 반격했고요. 한 마디로 래퍼들의 디스 프리스타일 랩 배틀인 셈입니다! 

뒤이어 결투가 사라지는 과정이 설명됩니다. 사라진 이유는 당연히 왕들이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왕정 군주들은 앞서 설명드린대로 결투가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으며, 이후 계몽 군주들은 생명을 중시했기 때문에 결투를 금지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신사도'가 유행하고 신사들이 품위를 중시하면서 결투를 야만적으로 여긴 탓도 있지만, 왕권이 약화된 대신 입헌군주제가 확립되며 근대적인 재판 시스템이 갖추어진 덕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로이센은 군국주의의 득세로 장교들이 과거의 귀족처럼 특권을 인정받고, 명예를 중시하는 계급이 되었기 때문에 19세기까지 결투가 만연하였다고 하네요. 확실히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사회가 무식해지는게 사실인것 같습니다.
이런 결투의 전통은 현대에도 약간의 스포츠 형태로 바뀐 '멘주어' 등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결론으로 결투의 역사 서술은 마무리됩니다.

이런 결투의 역사적인 큰 흐름 설명은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목차가 통사적으로, 연대순으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의 결투 설명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의 일화 중심으로 소개되는 등 글의 형식도 통일되지 못했고요. 여러 저자의 글을 모은 탓으로 여겨지는데, 누군가 통일성있게 전체 내용을 정리하고 감수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감수할만한데, 더 큰 문제는 결투와 스포츠를 엮는 후반부입니다. 스포츠는 재미, 오락일 뿐입니다. 오락으로서의 스포츠는 고대에서부터 존재했고요. 그런데 두 개가 어떻게 엮인단 말일까요? "헝거 게임"처럼 나라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시합을 벌인다면야 모를까, 현대의 스포츠를 결투라고 보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언급한다면 칼싸움에서 발전한 펜싱 정도? 하지만 펜싱도 전쟁과 투쟁의 역사를 통해 탄생한 무술일 뿐입니다. 결투라고 보는건 무리에요. 
게다가 앞서 저자는 '심판'의 의미가 없다면 결투가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스포츠는 절대로 결투가 될 수 없어요. '결투와 스포츠는 미적 요소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요소도 매우 중요하다는 특성을 공유하는 표리일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라면서 넘어가는데, 미적,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요소가 중요한 모든게 다 표리일체의 관계가 되는걸까요? 어림도 없지요. 심지어 스포츠가 사람들의 투쟁심과 승부욕을 흡수해서 결투가 사라졌다!는 주장은 앞서의 본인들의 설명, 즉 근대화와 사회 분위기, 제도의 변화로 결투가 사라졌다는 설명에도 맞지 않습니다. 나치의 올림픽을 이용한 국민 통합(?)과 고양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고요. 이는 결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책 부제가 '스파르타쿠스는 어쩌다 손흥민이 되었나'인데, 저자들 스스로 검투사들의 싸움은 결투가 아니라고 했고, 축구가 결투일리는 없으니 이 부제는 애초에 이 책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에요. 이 정도면 사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후반부는 완전히 분량 낭비였습니다. 별로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4/04/24

데드미트 패러독스 - 강착원반, 사토 : 별점 1.5점

데드미트 패러독스 - 4점
강착원반 지음, 사토 그림/놀

친 좀비파 귀족 아르테미아 가문의 외동딸 릴리는 부모님 사망에 따른 생명보험금을 지급받기 직전에 살해당했다. 보험회사 빅베일의 청부였다.
다행히 릴리는 좀비로 되살아났고, 변호사 골드는 그녀를 위해 빅베일에게 보험금 지급 소송을 걸었다. 사망한 그녀에게 그녀 본인의 생명보험금을 지급하라는 소송이었다.
이를 위해 전 왕실의사장 더미로부터 사망증명서까지 받아냈지만, 빅베일이 재판장과 배심원, 의사협회를 매수한 탓에 릴리는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골드의 계획이었다....


좀비와 인간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차별받는 좀비들을 위해 노력하는 변호사 골드의 활약을 그린 단편. 소갯글이 재미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저 그랬어요. 핵심인 재판 과정이 시시한 탓이 큽니다. 릴리가 죽음을 인정받지 못해서 본인의 사망보험금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을 살아있는 상태이니 수령하는건 당연하니까요. 별로 치밀한 계획이나 드라마가 있지 않아서 시시합니다.
좀비와 인간이 공존한다는 세계관도 어디선가 많이 보아왔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좀비가 익히 알고 있듯 사람을 잡아먹는다던가, 사람을 물어 전염시킨다는 설정없이 약간의 공격적 행동만 있는걸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좀비가 좀비답지 않으니, 인간 사회에 이종이 섞여 살아가면서('인간 세계에 섞여 사는 마족'같이) 차별도 받지만 서로 도움도 주며 공존한다는 흔해빠진 판타지 세계관과 변별력을 느끼기 어려워요. 좀비 존재에 따른 긴장감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골드의 동생인 좀비 실버에 대한 드라마도 뻔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작화는 괜찮았지만, 이렇게 단점이 훨씬 많아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별로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3/23

중간의 집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2점

중간의 집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러리의 지인인 변호사 빌의 매제 조가 살해당했다. 현장을 찾은 엘러리는 피해자가 뉴욕 상류층 사람인 조지프 켄트 김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볼은 조 윌슨이라는 가짜 신분으로 빌의 여동생 루시와 결혼했고, 본래 신분으로는 돈많은 과부 제시카 보든과 결혼했던 중혼자였다.
현장에서 조 윌슨의 아내 루시에 관련된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수집되었고, 김볼로 가입했던 10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 수취인이 얼마전 루시로 변경된걸 근거로 경찰은 루시를 체포했다. 빌은 동생의 변호를 맡아 끝까지 분투했지만 루시는 유죄가 인정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엘러리는 현장을 목격했던 김볼의 의붓딸 안드레아의 결정적 증언을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여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데 성공한다.


검은숲의 엘러리 퀸 전집 중 한 권. "도중의 집"이라는 제목의 자유추리문고 버젼도 이미 읽었지만,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기에 겸사겸사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엘러리 퀸 1기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와 3기 라이츠빌 시리즈 사이에 위치한 2기 시기를 연 작품이라고 하는데, "스웨덴 성냥 미스터리"라는 제목을 붙여도 괜찮았을 거라는 언급이 작중에 등장할 정도로 '국명 시리즈'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후더닛'에 충실한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이며, '독자에의 도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명 시리즈'보다는 드라마의 변화 폭이 넓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반부는 아예 법정물로 간주해도 될 정도니까요. 법정물로의 수준도 높습니다. 특히 범인의 다분히 고의적이고 어설픈 행동들을 열거하며, 이는 루시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라는 빌의 마지막 변론은 굉장히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범인이 충분한 휘발유가 있었는데도 구태여 주유소를 방문해 베일을 쓴 얼굴을 보여줄 이유가 없다는 등의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검사 역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만한 좋은 변론을 펼칩니다. '범죄자들은 아둔하며, 뛰어난 지능을 가진 범죄자들은 소설책에서나 볼 수 있다'는 건데 그럴듯했습니다.
거의 빌이 이길 뻔 했지만 흉기에 루시의 지문이 묻어 있있다는 증거를 뒤집는데 실패한다는 결말도 현실적이었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핀치의 만년필에 독특한 초록색 잉크가 들어있었다는 것, 범인이 립스틱을 이용하지 않고 구태여 코르크를 태워 필기구로 쓴 것 등 모든 단서가 '독자에의 도전' 단계 전까지 독자들에게 정말로 공정하게 제공된다는건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이를 통해
  1. 범인은 남자다.
  2. 범인은 흡연자고, 아마도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3. 범인은 자기 정체를 드러낼 내용이 새겨진 성냥갑을 가지고 있다.
  4. 범인은 김볼과 루시에게 적대적인 동기가 있다.
  5. 범인은 필기구를 소지하지 않았거나, 소유한 필기구를 사용하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이 있어 사용하기를 꺼렸다.
  6. 범인은 아마도 김볼 쪽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7. 범인은 앤드레아에게는 우호적이다.
  8. 범인은 오른손잡이다.
  9. 범인은 김볼이 보험 수익자를 변경한 사실을 알고 있다.
라는 추리를 끌어내고, 관계자들 중 이에 해당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런 후더닛 추리 외에도 '중간의 집'으로 명명된 집에 대해서 간단한 조사만으로 그 용도를 꿰뚫어 보는 추리도 볼만한 등, 확실히 '엘러리 퀸'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점은 많았어요.

그러나 완성도는 다소 부족했습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억지가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던, 앞서 안드레아가 목격했던 성냥부터가 그러합니다. 이를 토해 엘러리 퀸은 범인은 담배를 피운게 분명한데, 재와 꽁초와 같은 흔적이 없으니 파이프를 피웠다고 추리하지요. 하지만 애초에 엘러리 퀸 스스로가 범인은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습니다. 파이프로 흡연이 가능했다는걸 초반에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성냥 모두가 코르크를 태우는데 사용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억지이자 반칙같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의 아내 루시가 빌에게 선물하려고 산 문구 세트 칼을 만졌다는 완전한 우연이 재판에서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 것, 핀치의 간단한 변장이 주유소 사장이 루시로 잘못 알아볼 정도였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했고요.

전개 면에서는 수수께끼가 모두 엔드레아의 위증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점이 큽니다. 앤드레아가 중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했던걸 모두 털어놓았더라면 사건은 보다 빨리 해결될 수 있었을 거에요. 앤드레아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었고요.
엘러리 퀸 특유의 장황한 대사들은 여전히 짜증스러웠으며, 빌이 엔드레아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어처구니 없었어요. 무고한 동생이 20년형을 선고받은 상황에서, 동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덕 중혼자의 의붓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설명도 대체로 부족합니다. 빌이 처음에 '중간의 집'에서 발견했던 앤드레아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숨겼던 이유는?(둘이 원래 알던 사이였는지?) 김볼이 빌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고 마음먹은날 앤드레아까지 중간의 집에 부른 이유는? 대체 핀치는 그 날 그 시간에 김볼이 중간의 집에 혼자 있을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결국 끝까지 설명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대부분의 '국명 시리즈'보다는 낫지만, 전체적으로 그냥저냥합니다.

2023/11/18

명작 추리 소설 5선 : 이 서술 트릭이 굉장해!

소설에 대해 안내하고 소개해주는 일본 사이트 '소설마루'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가볍게 소개해 드립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이 노출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23/11/17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유키 신이치로 / 권일영 : 별점 2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 - 4점
유키 신이치로 지음, 권일영 옮김/시옷북스

일본 추리계의 신성이라는 작가의 단편집. 모두 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공정한 정보 제공과 추리의 연계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반전들도 강렬합니다. 뒷맛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는 '기묘한 맛' 류라고 보아도 괜찮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일단 사건들이 일어나는 상황, 동기들이 비현실적입니다. 사건을 저지른 다음의 뒷 수습을 고려하고 있지도 않고요. 여기에 더해 전개가 너무 뻔합니다. 현재 상황이 어떠하며 앞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어요. 추리는 이런 예상을 굳히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추리를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던가 하는건 거의 없습니다. 때문에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그나마 2021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을 수상했다는 마지막 작품인 "#퍼트려 주세요"만이 뻔하지 않은 진상과 결말로 이어지기는 합니다만, 비현실적이라는 단점은 마찬가지고 오히려 '추리' 적인 요소가 별로라는 문제는 도드라지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전체 평균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자면담
가정교사 소개 영업사원 가타기리는 야노 모자와 방문 상담을 진행하던 중, 무언가 수상하다는걸 느꼈다. 야노 부인의 신경질적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여러가지 행동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아들 유의 행동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명문 중학교를 노린다는 아이가 간단한 수학 문제의 답으로 110만 쓰고 있었다....

요약에서 설명한 장점과 단점이 모두 극명하게 드러난 작품.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소년의 이름이 한자를 일반적으로 읽는 발음과 달랐다던가 ('유'가 아니라 '하루카'였음), 소년이 피아노를 배웠다는데 치지 않는다던가, 분명 먼 사립 학교를 다니는데 동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논다고 하고, 무슨 문제를 내어도 110이라는 답을 내 놓는 등 정보 제공은 확실합니다. 심지어 이웃집 부인이 진짜 야노 부인을 살해했던 동기인 쓰레기 봉투 문제까지도 앞 부분에서 설명될 정도입니다. 하루카는 이미 사고로 죽었었으며, 야노 마리가 아직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은 망상 탓에 불거진 일이었다는 반전도 섬찟했고요.
상황도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살인범과 피해자의 아들, 그리고 평범한 일반인이 함께 삼자 면담을 진행하는 과정은 서스펜스 넘칩니다.

하지만 단점 역시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우선 상황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가짜가 가타기리를 만나서 방문 상담을 진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아파서 날짜를 조정하겠다 정도로 이야기하는게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무려 20분이나 걸려 현장을 대충 치워야 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게다가 아이가 아무리 공포에 질려 있었어도 순순히 범인의 협박에 따라 행동한 것도 이상해요. 작중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이면 성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언급할 그런 나이인데 말이지요. 전개도 너무 뻔합니다. 초반부터 야노 부인이 가짜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대 놓고 수상하다는걸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매칭어플
나는 kento라는 가명으로 매칭어플을 통해 마나를 만나 데이트한 뒤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을 관찰하고 샤워를 하던 중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느꼈다.

마나가 원조 교제 남성들을 낚아 협박하는 조직의 멤버였으며, 마나의 자취방은 일당의 아지트였다는 내용은 신선했습니다. 그래서 마나가 데이트 중 했던 말과 방 안 사물들이 일치하지 않았고, 샤워기 높이 등도 잘못 놓여져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 위한 정보 제공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정합니다.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어요.

그러나 딸의 원조 교제를 중단시키기 위해 이런 사건을 저질렀다는 동기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딸이 매칭 어플로 원조 교제를 한다고 딸을 닮은 원조 교제녀들을 여러명 죽이고 다닌다? 이건 비현실적을 넘어서는 미친 설정입니다.
또 주인공이 매칭 어플을 사용하는 딸과 닮은 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는데다가, 마지막에 밝혀지는, kento의 딸 미유키 역시 조직의 멤버였다는 반전도 신선하기는 했지만 작위적이었습니다. 마침 그 때 문자 메시지가 배달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판도라
명문대 출신인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힘들게 딸 마나쓰를 얻은 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자 제공을 하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정자 제공은 딱 한 번에 그쳤다. 그리고 15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자 어린이 연속 유괴 살인사건의 범인 호조지 재판이 잘못되었었다는 뉴스가 나오던 어느날, 나의 딸이라는 아이 쇼코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잔잔한 드라마로 쇼코와의 대화를 통해 마나쓰가 친딸이 아니며, 아내도 다급한 나머지 정자를 기증받았던게 아닐까라는 깨닫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고 두 아이 모두 자기 딸로 인정하겠다는 결말이 괜찮았던 작품.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정자 제공을 한 상대가 호조지의 아내였다는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아니라서 큰 단점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정체는 금방 밝혀지기도 하고요.

그러나 문제는 추리물도 아닐 뿐더러, 그녀가 정자 제공을 받으려 했던 동기가 영 설득력이 없다는 겁니다. 호조지와 마지막 관계를 가진 뒤 그가 체포된 탓에, 혹시 임신되었을 때를 대비해 누구의 딸인지 모르게 하기 위해 기증받은 정자를 주입했다고 합니다. 혹시 딸 쇼코가 아버지의 정체를 눈치채면 딸에게 "너는 살인범의 딸이 아니라 기증받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다"라고 말해주려고요. 그런데 유전자 검사라는 방법이 있으니 이는 결국 자기 만족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임신 중절을 하기 싫었다면,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키우느니 이민을 가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거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삼각간계
나 (기리야마), 모기, 우지하라는 대학 시절 친했던 "이쓰멘" 모임 멤버로 5년 만에 모임을 가졌다. 오사카에 사는 모기의 집 앞으로 우지하라가 전근온 것이 계기였다. 도쿄에 있는 기리야마를 고려해 온라인으로 가진 모임 중, 우지하라는 기리야마에게 모기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 약혼녀가 모기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지하라가 보낸 사진 속 약혼녀는 기리야마가 사귀고 있는 여자 미나미였다...

전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합니다. 우지하라 약혼녀의 불륜 상대가 기리야마라는건 전개 상 당연했거든요. 당연히 우지하라가 죽이려 하는 것도 모기가 아니라 기리야마였고요. 오사카에 있는 척 했던 트릭은 머리를 많이 쓴 것 처럼 설명되지만, 원격 미팅이 잦은 최근 시점에서는 새롭지도 않으며 기리야마가 눈치챈게 아니라면, 우지하라가 장황하게 설명해 줄 이유도 없습니다.
기리야마가 거짓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이렇게 원격 모임처럼 가장해서 속였다는 동기도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약혼녀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살인을 저지르는 우지하라는 몰상식한 인간이라고 쳐도, 친구 모기가 공범으로 살인에 가담하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결혼해서 애도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1점. 수록작 중 워스트입니다.

#퍼트려주세요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외딴 섬 몬메지마로 이사온 와타나베 초모란마는 자기처럼 도쿄에서 오고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구와지마 사데쓰, 안자이 루주, 그리고 유일하게 토박이었던 소녀 린코와 친해졌다. 그러던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느날, 섬에 방문했던 외지인이 나가사키에서 살해당했고 그날 이후 도쿄 출신 아이들에 대해 링크를 포함한 섬 사람들이 모두 서먹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마침 그 날은 린코가 아이폰을 보여주며 유튜버가 되자고 말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6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두고, 린코는 초노를 불러내었다. 린코는 중요한걸 고백하려고 했었지만 실패했고, 절벽에서 추락해 죽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섬에 살며 TV 정도를 제외하면 문명의 이기, 인터넷 등을 전혀 접하지 않던 섬 소년, 소녀들의 부모가 알고보니 인기 최고라는 6인조 유튜버였으며, 그 유튜브 컨텐츠는 섬에 사는 자기 아이들을 몰래 찍은 동영상이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트루먼 쇼의 소규모 개인 버젼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기술력과 장비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섬의 비밀을 밝히려는 외지인이 살해당한건 충성스러운 구독자들 때문이었고,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유튜버 가족들을 피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럴싸 했습니다. 자기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관여하지 말자고 생각한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일단 유튜브를 아이들에게 비밀로 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알려주었어도 상관없었을겁니다. 구독자들만 아이들이 '모르고 있다'고 속으면 되잖아요? 어차피 영원히 속일 수도 없어요. 작 중 묘사처럼 중학교 진학을 위해 섬 밖으로 나가게 되면 바로 알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마을 주민들이 비밀에 동참한 것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심지어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부모가 아이들 몰래 유튜브를 찍어 올렸다는 것도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학교에서 보호되고 통제가 되었을 겁니다. "귀등의 섬" 세계관처럼 고아들을 모아놓은 고립된 섬에서 선생들이 작당하고 학생들을 몰래 카메라로 찍었다면 모를까, 21세기에는 있을 수 없는 설정입니다.
아이 세 명의 부모 중 누군가가 아니라 루주가 린코를 직접 살해하고 알리바이를 조작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자동차도 있고 힘도 좋은 어른들이 6명이나 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 생에게 살인을 저지르라고 시킬 까닭은 없지요. 알리바이 트릭도 상당히 유치했고요. 이 모든걸 알아낸 초모란마와 사데쓰가 루주에 대한 응징을 라이브 방송 투표로 결정하겠다는 마지막 장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