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헤밍웨이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헤밍웨이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16/01/11

헤밍웨이 위조사건 - 조 홀드먼 / 김상훈 : 별점 2.5점

헤밍웨이 위조사건 - 6점
조 홀드먼 지음, 김상훈 옮김/북스피어

헤밍웨이의 분실된 원고를 위조하여 한몫 잡으려 하는 존 베어드 앞에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그만둘 것을 명령했다. 미지의 존재는 시공을 초월한 평행 우주의 관리자로, 존의 작업이 이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지의 존재는 명령을 거절한 존을 죽였고, 존은 다른 모습, 다른 기억을 지닌 채 부활했다. 그가 부활한 세계도 기존 세계와 무언가 조금 다른, 평행 우주 속 세계였다...

SF 작가 존 홀드먼의 중편 SF 범죄 스릴러. 초, 중반부까지는 헤밍웨이의 원고를 위조하여 한몫 잡으려는 전형적인 위조 사기물인데, 관리자에 의해 존이 최초로 죽은 뒤에는 평행 우주 세계관의 SF물로 바뀝니다.

초반부의 위조 사기물 전개는 훌륭합니다. 원고를 위조하는 것보다 그 원고가 가짜임을 증명하는 논픽션을 써서 대박을 치려 한다는 계획부터 아주 참신하거든요. 안전하고 성공 가능성 높은 계획이라 생각됩니다.
진지한 학자 존이 이 사기에 뛰어든 동기(신탁 재산의 투자 실패와 그로 인한 아내의 유혹)도 설득력 높고, 사기꾼 캐슬과 존, 리사 부부, 문학을 공부하는 콜걸 팬지 등 주요 캐릭터가 생생하다는 점도 좋습니다. 원고를 위조할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는 과정의 묘사와 헤밍웨이 관련 디테일도 괜찮은 편(국내 독자가 그 참맛을 느끼기는 어렵긴 하지만)이며, 전체적으로 유머가 묻어난다는 점도 마음에 드네요. 아울러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적나라한 성관계 묘사가 꽤나 빈번하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작품과 꽤나 잘 어울린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캐릭터를 보다 선명하게 만들어 주더라고요.

허나 평행 우주의 관리자가 개입한 뒤부터는 별로였습니다. 존 베어드가 헤밍웨이를 위조하는게 왜 우주에 위기를 가져오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는 탓도 크지만, 마지막이 영 이해가 안 되었던 탓입니다. 헤밍웨이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의 묘사는 압도적이긴 합니다만 결말이 대체 뭔지 모르겠어요. 두 여자를 구하고 죽은 뒤? 헤밍웨이가 되었다가 그를 초월한다? 존이 관리자들과 동일한 수준의 절대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주인공이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으로 결말을 퉁치는 작품은 너무나 많은데 - "타이거! 타이거!", "제 5 도살장" 등등등 - 이들보다 나은 점도 없습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뜬금없고 급작스러운 편이니까요. 여러모로 깊이 고민하지 않고,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의 기억상실증 설정같이 일종의 만병통치약을 사용해서 뻔하고 쉽게 끝낸 느낌입니다.

물론 평행 우주 하나의 존이 죽을 때 그의 기억을 간직한 채 다른 평행 우주의 존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부활할 때마다 조금씩 바뀌어간다는 설정을 통해 캐슬이 호감 가는 잔챙이 사기꾼에서 살인마로 돌변하는걸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등의 디테일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어설프고 대충 넘어간 부분이 많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적당한 길이에 책의 장정과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재미도 충분합니다만 앞서의 이유로 감점합니다. 차라리 위조 범죄물로 마무리하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2020/10/0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 신예용 : 별점 2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4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지음, 신예용 옮김, 박광규 기획.해설/코너스톤

1890년대 후반에서부터 1940년대 까지, 추리소설의 여명기와 황금기까지의 시기에 발표된 여러가지 단편들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이런 류의 앤솔러지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이 접해보았지만, 국내에 비교적 소개되지 않았던 유명 시리즈 작품들 위주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퀸의 정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 외의 다른 가치를 느끼기는 함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전 작품인 탓입니다. 여러모로 설득력도 떨어졌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초창기 추리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저같은 사람이 많이 없는지 재정가로 가격이 3000원 수준으로 떨어져서 가격도 착하거든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터들리 농장의 공포" 

의사인 나에게 스터들리 부인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스터들리 농장으로 찾아가 준남작과 만났는데, 준남작은 자신이 밤마다 유령을 보는 탓에 공포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준남작과 방을 바꾸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는데...

코난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며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즈 단편 연재를 중단했을 때, '스트랜드 매거진'이 구멍을 메꾸고자 투입한게 바로 이 작품이 포함된 '어느 의사의 일기 시리즈' 였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의사'인 핼리팩스 박사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로 '퀸의 정원' 에서는 최초의 '의학 미스터리'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아쉽게도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작품 발표 계기, 그리고 연재 시점을 보면 정통 본격물의 시조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추리 소설의 여명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완성도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스터들리 준남작과 부인의 방은 옷장의 비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저승길 동행을 위해 준남작에게 밤마다 유령쇼를 펼쳤다는게 진상인데, '나' (핼리팩스 박사)가 침실을 바꾸고 유령을 목격한 뒤, 유령이 나타난 옷장을 수색한 것 외에는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가 변장만 하고 추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이를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스터들리 부인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부인은 '나'가 준남작에게 두뇌 질환으로 환영을 보는 걸로 이야기해줄걸 기대했다는데,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가 유령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거라 생각한건 영 납득이 가지 않네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울러 '의학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전무해서 아쉬웠습니다.

본격 추리 소설 초창기 단편 중 한 편을 만나 보았다는 기쁨, 그리고 오스틴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 이전에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 탐정이 있었다는 사료적 가치, 마지막으로 스터들리 부인이 유령을 만들어낸 장치가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이라는 상당한 하이테크 제품이라는 점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금고실의 다이아몬드" 

헤드와 친구 두프라이어는 둘의 세계적인 악녀 마담 콜루치가 다이아몬드 상인 칼튼의 파티에 초대된 걸 알고 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담 콜루치는 칼튼 부인의 전남편이 살아있다며 그녀를 협박하는 것과 동시에, 칼튼 부인을 시켜 빼돌린 로체빌 다이아몬드를 칼튼의 철벽 그곳에서 훔쳐낼 계획이었다....

L.T. 미드와 로버트 유스터스가 합작하여 1890년대 후반 발표되었던 연작 단편집 "일곱왕 연맹" 수록작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악녀로 비밀 범죄 조직 '일곱 왕 연맹'의 총수인 마담 콜루치와 과학자이자 탐정 노먼 헤드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시리즈라고 하네요.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역시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이해가 갑니다. 특히 이 단편은 그 수준이 아주 미흡해요. 내용부터 딱히 건질게 없거든요. 헤드와 마담 콜루치와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큽니다. 헤드의 활약이라고는 고작해야 칼튼 부인을 설득해서 전 남편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거든요. 그나마도 실패하고요.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놓쳐버리기 때문에 이래서야 명탐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못하는게 없는 희대의 악녀인 마담 콜루치 캐릭터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됩니다. 또 열쇠를 돌리면 비상벨이 울리는데, 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칼튼의 열쇠를 조작해서 열쇠의 머리 부분만 헛돌게 만든 거지요. 즉, 열쇠를 돌려도 잠기지 않은거고, 당연히 다시 열어도 벨이 울리지 않은 것입니다. 열쇠를 돌릴 때의 저항감, 소리, 마지막으로 금고가 정말 잠겼는지 확인을 왜 안했는지 등 딴지를 걸자면 끝도 없지만, 열쇠 하나의 조작으로 모든걸 일이루어 낸, 대담한 발상의 트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연작 단편을 이어서 다 읽는다면 모를까,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점수를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더욱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 스페이드" 

맥스 블리스가 협박 받고 있다는 전화를 스페이드에게 남긴 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샘 스페이드는 아는 형사 던디 등이 수사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실 해밋이 쓴 샘 스페이드 단편입니다. 묵직하고 거친 사나이 매력을 담뿍 풍기는 이야기이며, 피해자의 딸이 몰래 만나던 불륜남, 광신도이면서 못생긴 가정부 에피 부인이 묘하게 엮여서 사건이 복잡해 지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과 다를게 없는데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다는게 놀랍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피해자의 동생 시어도어가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며, 시체에 놓여져 있던 '새 넥타이' 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 등은 본격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피해자는 옷을 벗던 중 살해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럴 경우 매고 있던 넥타이가 아니라 새 넥타이가 놓여져 있는건 이상하다는 이유입니다. 이를 발견한 스페이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요. 

샘 스페이드는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4시 5분전 쯤 받았는데, 시어도어는 4시에 법정에서 결혼을 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에 대한 트릭도 간단하고 깔끔합니다. 시어도어는 3시 30분 쯤 피해자를 죽이고 법원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전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고 전화를 걸은 겁니다.

물론 스페이드가 한 추리의 증거가 범인 시어도어 손에 난 상처 뿐이라는건 빈약합니다. 상처가 났다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가정부 에피 부인도 손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특이한 상처도 아니고요. 손의 상처보다는, 법원에서 전화를 건 기록을 찾아서 시간을 대입해 보는 식으로 풀어갔더라면 더 깔끔했을 겁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시어도어에게 협박?의 댓가로 지불한 돈은 2만 5천불일텐데 2'억'으로 기입된 오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와 본격 추리와의 결합에 성공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퀸의 정원'에 소개된 "샘 스페이드의 모험" 수록작으로 이 책은 역사적 중요성, 희소성은 물론 퀄리티까지 인정받고 있네요. 당연합니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시계"

8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로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수록작과 동일합니다. 

당시에는 혹평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점도 많았습니다. 자브라스키 박사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과정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 덕분입니다. 흥분한 자브라스키 박사가 '층을 착각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우연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고요. 번역의 차이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우연에 의한 작위적인 범죄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는 물씬 납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별점 1.5점을 줄 작품은 아니에요. 다시 매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총알"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사장'에게 고용되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립 탐정 바이올렛과, 부유하고 젊은 사교계의 꽃 바이올렛이라는 설정이 재미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해먼드 씨가 자신의 아기와 함께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맞았으며, 아기는 죽은 해먼드 씨의 손에 눌려 질식사했지요. 해먼드 씨 가슴의 총알은 그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근접 거리에서 손 총격은 아니었고, 해먼드 부인인 열린 창문을 통해 누군가 해먼드 씨를 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해먼드 씨 몸 속 총알과 함께 해먼드 씨가 쏜 총알도 발견되었어야 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이 두 번째 총알이 어디있는지 추리해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해먼드 씨 몸속 총알은 해먼드 씨의 총에서 발사된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과학의 수준은 많이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앞서 거의 단언하다시피한 정황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총알을 아기가 삼켰고, 그것 때문에 질식한 것이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해먼드 씨가 아니라 총알이 후두를 막은게 질식사의 원인이 된 거지요. 어디론가 사라진 총알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손 꼽을만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이 진상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참고로, '퀸의 정원'에서는 A.K 그린 (애나 캐서린 그린)의 "미스터리의 걸작들" 이라는 단편집을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성'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아닌 듯 하네요. 가치가 크게 다를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급행열차 안 객실에서 르웰린 부부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권총이 사라진 탓에 자살은 아니었는데, 객실 문은 1인치 정도 열린 채 쐐기로 고정되어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남아 있던 승무원과 승객의 신분도 모두 확실했으며, 그들이 범인일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열차를 떠났을 텐데, 객차의 앞 쪽 침대칸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뒷 쪽 3등칸에는 아이가 울어 달래러 나온 부부가 있었다. 객실 문 옆 승객이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열차를 어떻게 떠났을까?

고전 본격물의 걸작 "통"과 '프렌치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운 내용을 F.W. 크로포츠 본인이 오랜 철도업 종사자라 쓸 수 있었을 상세한 기차 구조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열차의 구조와 얼마나 불가능한 범행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탓입니다. 이런 기차 여행이 흔했던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기차를 별로 타지도 않는 지금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더욱이 역부족이었어요. 차라리 만화라던가, 최소한 삽화 등으로 트릭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범행이 밝혀지는건 추리의 결과가 아니라 범인의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추리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친구 르웰린에게 연인을 빼앗기자 복수심에 저지른 치정 범죄라 트릭은 알 수 없어도 동기만 확인되면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찰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던 작품이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퀸의 정원'에도 소개되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와서 읽을 가치는 별로 없겠지요. "통"이나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살인자" 

서밋 이라는 도시에 찾아온 맥스와 알은 식당에서 식사를 시킨 뒤, 사장 조지와 요리사, 그리고 손님 닉을 협박하며 그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올레 앤더슨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올레 앤더슨은 식당 단골로, 킬러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미국 현대 문학 거장인 헤밍웨이의 작품인데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느낌이 나는 드라마거든요. 킬러가 등장해서 식당 관계자들을 협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추리 애호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운과 죽음을 의인화하여 드라마로 풀어낸 짤막한 꽁트라 생각됩니다. 2인조 킬러는 식당 관계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나기와 다를게 없는 불운, 올레 앤더슨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닉은 불운과 죽음 모두를 맛 본 뒤, 서밋이라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는걸 보면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지요.

짤막하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닥없는 우물" 

전쟁 영웅인 노장 헤이스팅스 경이 고대 아랍 전설이 얽혀있는 오래된 바닥없는 우물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함께 있었던 보일 대위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과 불륜 관계였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체스터튼의 단편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연작 단편 중 한 편으로, 시리즈 제목 그대로인 '너무 많이 아는 남자' 혼 피셔가 주인공입니다. 중동 어딘가에 있는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지요.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던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영국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영국 정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게 인상적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아니라 식민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해 보였어요.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용서와 화해를 권했을테니, 이런 류의 독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을테지요.

추리적으로도 작가의 명성에 값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일 대위가 범인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게 진상인데, 그 이유와 방법이 설득력있게 설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헤이스팅스 경이 먼저 보일 대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가로 산책을 제의했다는게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게 좋았어요. 보일이 죽으면 시체를 우물로 던져넣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보일은 범인이 아니기에 시체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요.
범인이 독을 마신건 순전히 회전식 책꽂이 때문에 찻잔이 뒤바뀌어 일어난 사고라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 물론 충동적인 범행에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고라는건 합리적인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한 솜씨는 과연 거장의 그것이었어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시카고의 여성 상속인" 

롬니 프링글은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이상한 남자가 공들여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본 뒤, 그의 편지 압지를 빼돌렸다. 암호와 같은 압지 문구 해독을 통해 '실링하머'라 자칭하는 남자가 런디 후작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손다이크 박사'로 잘 알려진, R.A. 오스틴 프리먼의 롬니 프링글 시리즈 단편입니다. '퀸의 정원' 분류에 따르면 엄청난 희귀본이라고 하네요. 롬니 프링글은 도둑이자 사기꾼인 안티 히어로인데, 이 작품에서는 협박자 실링하머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이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링하머가 후작을 협박하는게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신문 기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범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당연히 런디 후작이 형들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줄 알았는데, 단지 그들이 '자살'했다는 진상도 협박거리가 될 걸로 보이지 않았고요.

롬니 프링글의 작전 역시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실링하머에게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마지막에 경찰을 자칭하여 그를 잡아서 돈 지갑을 빼앗는 것도 여러모로 어설퍼보였거든요. 압지의 글귀 해독도 논리가 뒷받침 되어있는 암호 해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요.
경찰을 자칭하고 후작을 찾아가, 협박자에게는 현금을 주는게 낫겠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만 조금 그럴듯 했을 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역서적 가치', '희소성'에 '퀄리티' 가치까지 부여받은 3관왕인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03/12/15

마지막 에이스 - 프레드릭 포사이스 : 별점 4점

"자칼의 날"등으로 유명한 첩보/스릴러 작가 F.포사이스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증거", "목격자", "광고번호H331","마지막 에이스", "면책특권","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이하 아일랜드)", "황홀한 죽음", "제왕","재수없는 날" 순입니다.
"목격자"와 "아일랜드.."는 이전에 다른 단편 앤솔로지에서 읽었었던 단편이니, 새롭게 접한것은 7편이네요.
첫 번째 작품인 "증거"는 걸작입니다. 독특한 설정, 계단을 올라가는 듯한 스릴, 반전까지 짧은 분량에서 더 이상의 이야기를 발견하기 힘들정도로 완성도 높은 단편입니다.

"목격자"는 예전에 다른 미스테리 앤솔로지에서 접했었던 이야기로("세계 미스테리 명작여행") 설정과 내용은 조금 뻔하지만 평작 이상은 됩니다. 킬러가 총을 반입하는 과정이 내용보다 오히려 흥미진진했습니다.

"광고번호 H331"은 한 중년남자의 일탈과 그것때문에 협박당하는 과정에서의 심리적 공포, 스릴 등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용이 역시 좀 뻔했다는 것이고요. 그래도 마지막 장면에서의 살짝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마지막 에이스"는 수록 단편들 중 추리 및 스릴러물 성향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처지는데 왜 표제작인지 모르겠네요. 포커에 빠져들게 되는 과정의 묘사는 흥미진진하고 디테일하지만 결말은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너무 익숙한 반전이었어요.

"면책특권"은 신문기사에 의해 명예를 훼손당한 주인공이 법률서적을 뒤진 끝에, 면책특권이라는 법률을 이용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는 이야기인데........., 일종의 콩트로 추리물이나 스릴러물의 요소는 별로 없습니다. 존 그리샴이 쓴 가벼운 단편물 같은 느낌입니다.

"아일랜드.."는 아마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포사이스의 단편이겠죠? 세계 미스테리 걸작선에 수록되어 있는 바로 그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이지요.

"황홀한 죽음"은 자신이 죽은 뒤 유산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인 한 자산가의 이야기인데, 이색적이긴 하지만 그다지 흥미롭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부자들 이야기를 싫어하나봐요. 
그래도 보기싫은 여동생 가족을 골탕먹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국 이루어 낸다는 구성과 마지막 묘사까지 완성도는 대체로 높습니다.

"제왕"은 헤밍웨이를 다분히 의식하고 쓴것이 분명한 "낚시"단편입니다.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이지만 감정의 변화와 막판 뒤집기 (반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모자란)가 통쾌한 나름대로 멋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노인과 바다"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요..

마지막 "재수없는 날"은 그야말로 모든것이 꼬여버린 한 도둑의 이야기인데 코믹한 분위기가 넘치는 소품입니다. 아일랜드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포사이스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범작과 수작이 골고루 섞여있고, 범작에서도 포사이스의 재능은 느낄 수 있는 꽤 괜찮은 단편집입니다. 모든 작품에서 포사이스 특유의 단계적으로 늘어가는 스릴과 반전의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코믹한 요소가 많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이야기가 나름대로 "해피앤딩"인것도 특이합니다.

이 책은 저같이 단편소설 매니아에겐 딱 알맞는 책인것 같아요. 단편 하나하나의 길이도 적당하고 쉽게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다면 강추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PS: 9편이 실려있는데 책 뒷커버에는 "F.포사이스의 전율적인 스릴러 10편이 들어있다"라고 되어있군요. 흠...

2021/10/31

문구는 옳다 - 정윤희 : 별점 2.5점

문구는 옳다 - 6점
정윤희 지음/오후의서재

문구 관련 책은 좋아합니다. 틈나는대로 구해서 읽곤 하지요. 일본 저자의 책 몇 권을 읽었는데, 우리나라 작가 책이 있길래 한 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30개의 문구에 대해 멋진 사진과 관련된 글이 어우러진 구성인데, "궁극의 문구" 보다는 "문구 상식" 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문구와 관련된 개인의 추억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두 권의 일본 책보다 개인 감성이 훨씬 많이 묻어나는 글들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문구는 주인공이지만, 그리고 문구에 대한 소개가 없지는 않지만 일본 책 처럼 디테일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아요. 데이터보다는 감성인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렇게 탐나는 문구는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꼰대 중년 남성인데다가, 필기보다는 입력을 더 많이 하는 직업이라 더 그러했겠지만요. 그래도 몇 가지를 꼽아 보자면, 첫 번째는 '페이퍼 패션' 향수입니다. 말 그대로 '책 향수'로 오로지 나무 성분에서 추출한 4~5가지 재료만으로 만든 우드 계열의 향이라는데, 칼 라거펠트의 하드커버 북 스타일의 멋진 디자인이 기가 막힙니다. 책 안을 파 낸 케이스라니! 빠져들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조금 조사해보니 현재 판매하고 있는 곳이 없더군요. 안타깝습니다.

펜텔 트라디오 수성펜은 만년필의 가격과 사용의 불편함을 보완한 편리한 펜이라니 그렇게 필기를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만 한 번 써 보고 싶었고, 칼 엔젤-5 로얄 연필깎이는 디자인이 아주 클래식하면서 멋져서 탐났습니다. 지금은 전통의 티티 하이샤파 기차모양 연필깎이를 쓰고 있는데, 하이샤파가 퇴역하게 되면 칼 엔젤-5로 바꿔야겠습니다.

그 외에, 몇 가지 정보들도 기억에 남네요. 무언가 구별하거나 잊지않기 위해 표시를 해 두는 것을 순우리말로 '보람'이라고 하며,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람하다'라고 표현한다는 글, 생각을 정리할 때 포스트잇으로 키워드를 적은 뒤 기승전결에 따라 순서를 바꿔가며 정리한다는 생각 수세미 풀이법, 몰스킨은 실제로 헤밍웨이나 고흐가 썼던 노트가 아니라 그들이 썼을 법한 노트의 정신을 잇는다는 묘한 뉘앙스로 포장된 제품이라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피셔 스페이스펜, 즉 우주 공간에서 쓸 수 있는 볼펜의 비법은 극강의 탄화텅스텐 볼과 가압질소를 넣은 볼펜심 덕분이라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무중력에서도 질소 압력으로 잉크가 흐를 수 있던 거지요.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인감도장은 한국 책이라 나올 수 있었겠지요? 왜 벼락맞은 대추나무가 좋나 했더니 대추나무가 다른 나무들에 비해 밀도가 높은 덕분이더라고요. 그래서 벼락을 맞으면 순식간에 발생하는 열로 숯처럼 타버리고, 이때 만들어진 탄소 성분은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어 오랫동안 제 형태를 유지한다고 하네요. 또 붉은색 대추가 나쁜 기운을 밀어내어, 몸에 지님으로써 액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러나 일본 제품이 지나치게 많이 소개된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일본이 문구 강국이라는건 잘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니까요. 국내 제품은 벼락맞은 대추나무를 빼면 모닝글로리의 '리포터스 노트북'과 평화 가위 정도만 소개될 뿐입니다.

그래도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입니다. 감성적인 접근도 좋네요. 책도 아주 예쁘게 만들어져 있고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3/21

문학을 홀린 음식들 - 카라 니콜레티 / 정은지 : 별점 2.5점

문학을 홀린 음식들 - 6점
카라 니콜레티 지음, 매리언 볼로네시 그림, 정은지 옮김/뮤진트리

푸주한이자 전직 페이스트리 요리사이자, 뉴욕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자신의 유년시절, 청소년기, 성인 시절에 읽었던 문학 작품들 속에서 인상적인 요리들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본 레시피와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저자의 경력에 딱 맞는 책이네요.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 속 요리들에 대해 소개하는 책은 제법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소개한 비슷한 책만 해도 "죽이는 요리책", "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가 있지요. 그 외에도 무라카미 하루키, 헤밍웨이의 작품 속 요리에 대해 다루는 등의 많은 책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책들이 그동안 불만스러웠었습니다. 그냥 등장한 요리의 나열일 뿐, 그 요리가 작품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차지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해주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레시피 소개와 재현에 치중할 뿐 그 요리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는 책도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 저 스스로 이 시장에 뛰어들어 추리 소설 속 주요 등장 요리들을 주제로 레시피와 함께 소개하는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이라는 졸저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제 원칙은 작품 속에서 인상적으로 등장한 요리라 하더라도, 중요하게 사용되지 않았다면 주제로 삼아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 그 요리들에 대한 단순 레시피 뿐 아니라 그 요리에 대해 제가 구할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정리하여 해당 요리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했고요.

이 책은 제가 추구한 방향과 어느정도 비슷합니다. 주제로 선정된 요리들이 작품이나 주인공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요. "오만과 편견"에서 "니콜스가 화이트 수프를 흡족하게 만드는 대로" 초대장을 발송하겠다고 한 뜻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저자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화이트 수프는 역사가 깊은 요리로 부유한 가정에서만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미스터 다아시나 미스터 허스트 등 프랑스 요리에 정통한 까다로운 손님들을 초대하려면, 화이트 소스를 만들 준비가 되어야 했다는 뜻인 것이죠.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오만과 편견" 속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주 좋은 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베카"에서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를 음식이 서빙되는 순서로 드러내는 장면이라던가, "안나 카레리나"에서 오블론스키가 굴을 탐식하는 장면을 그의 끝없는 성욕과 연결시키는 부분 등도 마찬가지에요.
정말 핵심 소재라서 등장하는 요리들도 많습니다. 저도 딸 아이가 어렸을 때 읽어주었던 모리스 샌닥의 "깊은 밤 부엌에서"에 등장하는 핫 케이크 반죽이 대표적입니다. "위대한 유산"의 유산을 받게 된 계기가 된 음식 중 하나인 '동그란 돼지고기 파이'도 비중만 놓고 보면 충분히 소개해 줄 만 하고요.

아울러 해당 요리의 역사 등에 대한 자료는 부족하지만 요리사이기도 한 저자의 직업 덕분에, 저자 스스로 만들어 본 상세한 레시피들은 제 책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도 제가 주제로 삼은 요리를 실제로 재현해 봤어야 하지만, 전문 요리사도 아니고 재료와 장비의 수급이 어려워 이런 부분에 힘을 쏟지 못했거든요. 이 차이는 "오만과 편견" 속 화이트 수프 레시피를 당시 요리책에서 찾아보고 직접 만들어 본 결과를 소개해주는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18세기 레시피는 모두 끔찍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현대의 '화이트 갈릭 수프'를 제안하지요.
그 외에도 남부식 비스킷을 만드는데는 라프 라드가 꼭 필요하다는 팁 등의 유용한 정보도 많아요. 곁들여진 일러스트들도 최고 수준이고요.

그러나 소개되는 모든 요리들이 그러한건 아닙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처럼, 작품이 아니라 저자의 인생과 관련된 요리가 소개되기도 하고, 또 해당 작품을 읽었을 때의 저자의 경험에 관련된 요리가 소개되는 등 개인적인 경험이 담뿍 담긴, 개인 에세이에 가까운 글들도 많습니다. 원래 개인 블로그에서 시작되어 책이 출간되었다니 어떻게보면 당연한 일이겠죠. 문제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런 개인적인 글들이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면 갈 수록 제 방향성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감점합니다. 그래도 요리에 대한 전문성만큼은 아주 돋보였습니다. 이런 분과 손잡고 추리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요리에 대해 합작하면 참 좋겠다 싶네요.

2019/05/26

80일간의 칵테일 세계일주 - 채드 파크힐, 앨리스 오 / 성중용 : 별점 2점

80일간의 칵테일 세계일주 - 4점
채드 파크힐 지음, 앨리스 오 그림, 성중용 옮김/아카데미북

제목처럼 80개의 세계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칵테일의 유래와 대표 레시피를 화려한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하는 책입니다. 

무려 80개나 되는 칵테일이 소개되기 때문에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리시 커피'는 아일랜드 서쪽 포이니스가 교통 요지였는데, 1943년 당시 이곳을 방문하는 부유층을 위해(당시 공항 이용 여행객은 부자였으므로) 제공되던 칵테일이었다고 하네요. 공항이 추워서 몸을 데우라는 의미로 뜨거운 커피에 약간의 아이리시 커피를 넣은게 원래 레시피고요.
'트웬티스 센츄리'는 진과 레몬 주스, 아페르티프 와인과 초콜릿 리큐어의 혼합물로 극진한 서비스로 유명했던 철도 회사 '트웬티스 센츄리' 노선에서 이름을 빌려왔다고 합니다. 트웬티스 센츄리 노선은 이른바 '레드 카펫'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을 정도로 고급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군요. 지금 우리나라로 따지면 '호텔 신라' 라는 칵테일을 만든 셈이겠지요.

그리고 클래식 칵테일 레시피들이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것에 조금 놀랐습니다. 칵테일은 비교적 현대적인 음료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요. 예를 들어 '다이키리'는 헤밍웨이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19세기 후반에 쿠바 산티아고 외곽 다이키리 마을에서 시작되었다던가, 피시 하우스 펀치는 조지 워싱턴이 18세기에 이미 마셔보았던 오래된 술이라는 등이 그러합니다.

집에서 쉽게 만듬직한 레시피도 눈에 띕니다. '키르'는 책에서도 간단하기 그지 없다는, 단 2가지 재료만 필요한 칵테일입니다. 추가 얼음이나 가니쉬도 필요없고요. 그러나 매우 세련되고 프랑스 특유의 우아함을 풍기며, 파리의 카페 테라스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니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화이트 와인 150ml에 크림 드 카시스 30ml를 와인 글라스에 넣고 조금만 저으면 된다니까요!
처음 보는 독특한 스피리츠들을 사용하는 칵테일들도 몇 개 있습니다. 브라질의 사탕수수 증류주 카샤사, 볼리비아의 특산주로 숙성하지 않은 투명한 포도 증류주라는 싱가니, 노르웨이의 린냐케비트, 폴란드 보드카 즈브로카가 그러한데 이들로 만든 칵테일들 모두 한 번 맛보고 싶어집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술이 많은건지, 진심으로 기쁘군요.

그러나 전체적인 책의 퀄리티,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글이 이상하게 읽기가 힘든 탓이 큽니다. 칵테일의 유래 등 에피소드를 소개하기에는 딱딱한 문체가 와 닿지 않고, 전문가적인 영역으로 보자면 딱히 깊이도 없어요. 한 페이지에 모든 내용을 넣으려고 압축한 탓인지, 번역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도저도 아닌듯 싶은데, 이럴 바에야 실제 여행하면서 맛본 칵테일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소개하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80개의 지역 대표 칵테일이 무슨 기준인지 애매하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정말로 책 기획 컨셉에 맞는 칵테일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고작해야 싱가폴 래플스 호텔하면 떠오르는 싱가폴 슬링 정도? 그 외에는 특정 지역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시도가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정도를 기대했고, 그 기대에는 값하지만 아주 좋은 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림보다는 글 쪽 문제가 커요.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7/08/12

우아함과 탁월함의 역사 - 윤병권 : 별점 2.5점

우아함과 탁월함의 역사 - 6점
윤병권 지음/상

세계의 명문 호텔들에 대해서 소개하는 책으로 모두 13개의 호텔이 소개됩니다. 익히 잘 알려진 파리의 릿츠 호텔, 홍콩의 페닌슐라 호텔, 싱가포르의 래플즈 호텔, 도쿄의 데이코쿠 호텔, 뉴욕의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 방콕 오리엔탈 호텔, 도쿄 오쿠라 호텔 등 여러 유명 초고급 호텔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관광 안내 서적은 아닙니다. 알라딘의 책 분류로는 문명 / 문화사 서적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각 호텔 별로 상세한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호텔 업계의 큰 흐름을 잘 알 수 있도록 구성이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예를 들어 호텔의 왕 릿츠의 파리 릿츠 호텔을 다루는 첫번째 챕터를 보면, 릿츠 호텔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최초에 오픈하여 현재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릿츠 호텔의 특징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이어지고요. 마지막으로는 릿츠 호텔에 관련된 여러가지 에피소드 - 독일 가수 타코의 노래, 헤밍웨이의 릿츠에 대한 헌사 등 - 들로 마무리 되는 구성입니다. 

이러한 구성에서 특히 호텔의 역사와 에피소드들이 흥미롭습니다. 홍콩의 별 볼일 없는 오지 주룽이 페닌슐라 호텔의 번창 이후 지금의 '침샤초이'가 되었다던가, 런던 사보이 호텔에 관련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 - 모네가 발코니에서 템스 강변의 풍경을 그렸다, 가수 멜바를 위한 '피치멜바'의 탄생지이다, 영국에서 유일하게 우측 통행을 하는 도로가 있다 등 -,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의 초대 총지배인 조지 C. 볼트를 발탁한 에피소드와 조지 C. 볼트가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만들었다는 등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자가 서울 신라 호텔 증축 및 개수부터 참여하여 호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라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소개되는 호텔들에 대해서 창문으로 바라본 경치가 좋다! 집기가 고급스럽다!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전문가적 식견에 기반하여 설명해 주거든요. 호텔 창업자의 철학, 호텔의 역사, 해당 지역에 대한 설명 및 호텔의 방향성 등 여러가지를 통틀어 자세하게 정보를 전달해 주니까요. 또한 모두 저자가 직접 방문하여 호텔에 대해 구석구석 살펴보고, 그 서비스를 접해본 곳들이라 설득력도 높습니다.

그러나 도판의 질이 낮다는 단점은 크게 느껴집니다. 풀컬러도 아닌데다가, 기껏 실린 사진들도 해상도가 낮아서 모자이크 현상을 일으킵니다. 책의 만든 모양새도 별로고요. 최고급 호텔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전혀 꾸미지도, 돌보지도 않은 모양새라 실망스럽습니다.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한데, 수록된 호텔들을 선정한 기준도 모호합니다. 단지 저자의 마음 속 순위로 보이는데, 보다 객관적인 지표로 호텔들 순위를 매겼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래도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문 호텔 안내서라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알 수 있는 정보들이더라도 그 것을 모아서 한 번에 소개한다는 용이성 측면도 간과하기 어려운 장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딸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여기 소개된 호텔들 투어를 떠나고 싶군요. 막대한 돈이 들겠지만...

2011/09/23

대가의 식탁을 탐하다 - 박은주 : 별점 2점

대가의 식탁을 탐하다 - 4점
박은주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13인의 유명인의 소울 푸드가 무엇인지 탐구하며, 이를 통해 그들에 대한 색다른 분석을 시도하는 책입니다. 브리아 사바랭의 말처럼, '그 사람이 평소에 먹는 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죠. 인터뷰 형식을 취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점이나,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도판이 포함된 점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내용은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기획 의도를 제대로 달성했다고 보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책의 핵심인 ‘소울 푸드’라 할 만한 음식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대표하는 특별한 요리가 소개된건 엘비스 프레슬리의 남부 요리 정도거든요. ‘소울 푸드’는 단지 양념처럼 곁가지로 활용될 뿐, 유명 인사들이 평소에 즐겨 먹던 음식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명 인사를 소개하는데 주력합니다. 

유명 인사들 소개에서 등장하는 에피소드들도 헤밍웨이와 게리 쿠퍼의 관계라든가, 호치민과 쌀을 다룬 챕터에서 그의 다채로운 이력, 특히 요리사 경력을 소개한 것 외에는 새로운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또한, 책에 실린 레시피들도 지금 활용하기에는 난감한 것들이 많아 실용적인 가치도 떨어지고요.

결론적으로, 요리보다는 명사들의 에피소드 중심의 독특한 소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원래 기획의도에 가까운 책을 원하다면, "라블레의 아이들"을 추천드립니다. 

2015/11/05

더 스크랩 -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 별점 2.5점

더 스크랩 - 6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비채

무라카미 하루키가 외국 잡지에서 읽은 인상적인 기사를 자신의 감상과 함께 소개하는 짤막한 칼럼 모음집입니다.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기다가,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쓰면 끝이지요.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라고 머릿말에 작가 스스로 밝힐 만큼 거저먹는 기획물입니다. 기획부터가 풍요의 80년대다와요.

그래도 글 자체는 꽤나 재미있습니다. 특유의 고즈넉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여전히 독자에게 푸근함과 편안함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단 몇 줄, 심지어는 딱 한 줄이라도 본인의 감상을 적는 것에서 촌철살인의 묘미가 살아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80년대를 추억하고 자극할 만한 내용들이 제법 있어서 반가왔습니다. 제가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80년대 키드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재미있어 보이는 물건 광고까지 소개해주고 있으니까요.
물론 저의 기억 속 80년대는 본 조비, 안전지대가 동급이었던, 그리고 "오렌지로드"가 현역이었던 80년대 후반에 가깝지만 "록키 3", "쿠조", "소피의 선택", "크리스틴" 같은 영화들이라든가 카렌 카펜터와 말론 브란도, 마리웰 헤밍웨이, 레지 잭슨, 빌 머레이, 휴이 루이스,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같은 유명인들, 스타워즈의 츄바카와 스크래블 게임과 같은 당대의 아이콘 등 제 기억에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들은 읽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뒤에 실려 있는 도쿄 디즈니랜드가 오픈했을 때 방문했던 탐방기나 올림픽과 전혀 상관없는 올림픽 일기는 완전 부록, 사족 느낌이기는 하나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돈 주고 구입해서 읽기에는 아깝지만 잡지에서 한 꼭지 읽기에는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재미있는 글 모음집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콘셉트에 제대로 부합하는 글들이랄까요? 쉽게, 짤막하게 읽을 수 있는 글들로 저와 같이 80년대를 추억하실 수 있는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12/10/03

토로스 & 토르소 - 크레이그 맥도널드 / 황규영 : 별점 2.5점

토로스 & 토르소 - 6점
크레이그 맥도널드 지음, 황규영 옮김/북폴리오

실제 인간을 토르소(torso, 목과 팔이 없는 조각 작품)처럼 만드는 엽기적인 살인극이 1935년부터 1961년까지 30여년의 긴 세월 동안 펼쳐진다. 이 살인극에는 인기 범죄소설 작가 헥터 라시터가 깊숙히 개입해 있는데...

국내 최대의 추리 애호가 커뮤니티 하우미의 이벤트를 통해 읽게 된 작품입니다.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먼저 감사 인사 드립니다.

범죄 소설가 헥터 라시터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 스릴러입니다. 크게 1935년 플로리다의 키웨스트, 1937년의 스페인, 1947년의 헐리우드, 1959년의 쿠바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단락별로 아직까지 육상에서의 중심기압 기록을 가지고 있는 1935년의 태풍 상륙, 1937년의 스페인에서의 프랑코에 대항한 내전, 1947년의 "블랙 달리아" 사건이라는 큰 실제 사건들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초현실주의 토르소 연쇄살인사건과 엮여서 진행됩니다.
굵직한 실제 사건들이 배경인데다가 헤밍웨이와 오손 웰즈, 리타 헤이워드 등 당대 실존인물들이 등장해서 한몫 단단히 하기 때문에 팩션 느낌도 강하게 전해줍니다. 이를 엄청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묘사로 그려내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어요. 미술사적인 시점에서의 그림 묘사들도 디자인 전공자로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그러나 팩션적인 재미 외의 범죄 소설로의 재미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블랙 달리아" 사건에서 작가가 상상한, 이른바 "초현실주의 연쇄 살인사건"의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는 탓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초반의 살인사건은 범인이 현장까지 엄청난 무게의 기계장치들을 옮기고, 나머지 잔해들을 처리하기 위해 굉장한 체력과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거라고 말하는데, 정작 방법은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부실하죠.
게다가 "블랙 달리아" 사건은 팩션치고는 각색이 너무 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쇼트가 배우를 꿈꾸는 화가 아르바이트였다니, 좀 지나쳤어요. 레이첼 - 알바의 1인 2역 트릭도 뻔해서 점수를 주기 힘들었고요.

마지막으로 엄청나게 많은 유명한 초현대미술 작품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도판이 거의 없는 책의 구성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헥터 라시터의 활약도 문제입니다. 권총에 수류탄까지 휘두르는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터프가이 작가라니, 이 자체가 초현실주의가 아닐까요? 또한 현대미술 작가들을 진보주의자에서 최소한 좌파(빨갱이?), 변태에 연쇄살인마 집단으로 묘사한 점과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헥터 라시터가 FBI의 끄나풀 역할도 하면서 이런 집단을 응징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 마초이즘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꼬시려고 협잡질도 마다하지 않는 헥터의 모습은 후반부 현대미술가들의 난교 파티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모습과 부합하지 않아서 어색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귀경길에 한시간이나 비행기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정도로 재미는 넘치지만 크라임 미스터리, 범죄소설로는 애매해서 감점합니다.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터프가이 모험극 느낌도 강했고요. 그래도 읽는 재미 만큼은 확실한 만큼 킬링 타임용으로 추천합니다.

2020/09/13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6)

먹고 자는 마르타 1 - 4점
타카오 진구 지음/대원씨아이(만화)

포르투칼 대학원생 마르타는 석사 논문을 제출한 뒤에도 일본 도쿄가 너무 좋아서 떠나지 않고 머문다. 그러나 항상 가난뱅이 신세. 돈을 아끼기 위해 있는 재료를 최대한 아껴 쓰고, 비싼 재료는 어떻게든 비슷하게 만든다!는 극빈 유학생의 혼밥 + 궁상 먹방 이야기입니다.
최대한 절약해서 먹는게 핵심으로, 고향 어머니가 보내준 바캴라우 (염장하여 말린 대구)로 튀김을 만들어 먹는다던가, 100엔으로 생크림과 요구르트를 구입하여 사워크림을 만들고, 여기에 바칼라우를 미끼로 낚은 가재를 섞어 사워 크림 딥을 만드는 등의 에피소드가 펼쳐집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카레 가게에서 주문할 때의 팁이었어요. 고기를 뺀 카레를 주문하면, 그만큼 카레의 양이 늘어난다고 하네요. 여기에 공짜 락교를 가득 담아 먹는데, 정말 생각도 못한 방법이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자급자족에 가까운 내용이니만큼 레시피도 꽤 많은데, 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가 헤밍웨이를 초대한 파티에서 선보였다는 칵테일 '빌린' 제조법은 눈길을 끕니다. 복숭아를 자르고 씨와 껍질을 제거한 뒤 어항(또는 비슷한 통)에 담고 브랜디 절반, 샴페인 절반을 채워 만드는 칵테일로 맛있을 수 밖에 없어 보이네요.

그러나 있는 재료로 아는 요리를 최대한 비슷하게, 그럴듯하게 만든다는 내용은 "격식 파괴 요리책 한그릇 더!"와 같습니다. 최대한 근검절약해서 아껴 먹는다는 내용은 "빈민의 식탁"이고요. 때문에 그다지 새롭거나 신선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게다가 현대 일본 도쿄에서 자급자족은 말도 안되니 여러모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요. 

작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뒤로 가면 갈 수록 옆집 아가씨가 재료를 준다던가, 도우미로 일하는 그림 교실에서 칵테일을 만든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갑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재미가 없지는 않은데 이래서야 취지에는 어긋나지요.
또 주 재료는 아껴서 산다 쳐도, 온갖 조미료와 도구가 갖추어져 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올리브유나 버터 정도는 포르투칼인이니 구입했다 쳐도, 간장과 미림까지 전부 갖추어 놓는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잖아요. 게다가 바닐라 에센스라니? 이건 정말 말도 안되죠.... 아울러 포르투칼 아가씨 마르타가 귀엽기는 한데, 민폐에 가까운 궁상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후속권을 더 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고화질] 삼국지의 밥상 01 - 4점
혼조 케이/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중화요리집 "누상촌"을 운영하는 삼국지 매니아 아타루와 그의 가족들이 가게를 방문한 신선 '좌자'의 영향으로 삼국지 속 요리를 현세에 재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도원결의' 속 요리를 재현하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 (제민요술)를 찾은 뒤 새끼돼지를 통째로 튀길 수 없어서 돼지고기 덩어리를 사용하고, 천채를 우락으로 볶은 것은 말린 배추 등을 활용하여 재현한다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좋았습니다. 제 기대에도 부합했고요.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에피소드와 요리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일단, 삼국지 본편과 상관없는 요리가 너무 많은 탓입니다. 계륵 (닭갈비)로 만든 닭고기 수프는 삼국지에는 등장하지 않는 아타루의 오리지널이며, 유비가 칼과 바꿨던 낙양의 차는 중요 아이템이지만 마시는 장면이 삼국지에 등장하지는 않으니까요. 조비가 배와 포도로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배와 포도로 디저트를 만드는 등 삼국지에서는 그냥 소재, 재료만 따 온 것도 많습니다. 제갈량의 만두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래서야 제목과 취지에 걸맞는 이야기들로 보기는 힘듭니다.

또 좌자의 등장까지는 이야기 전개상 그렇다 쳐도, 그의 능력으로 삼국지 시대로 이동해서 당시 요리를 실제로 보고 온다! 는 설정, 그리고 심지어는 주인공 아타루가 실제로 전장으로 이동해서 요리를 만든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아타루가 삼국지 당시 재료와 도구로 최대한 현재의 맛을 재현한다는건 "노부나가의 셰프"와 다를 바도 없고요. 좌자의 말을 듣고 아타루와 가족들이 이런저런 고민 끝에 요리를 만드는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이야기 전개도 문제가 많습니다. 삼국지의 내용과 본 편의 이야기를 엮는 부분은 억지스러우며, 전개에서도 등장인물들의 감정 과잉이 수시로 드러나는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때문에 별점은 2점.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이야기 전개와 소재들은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후속권 구입 계획은 없습니다.


전통의 시리즈도 이제 45권째네요. 이번 권에서도 언제나처럼 소소한 일상 속에서 소다츠의 술과 안주에 대한 개똥 철학(?)을 웃으며 즐길 수 있습니다. 꼬치 요리의 재료를 빼야 하는지 그냥 먹어야 하는지? 라던가 왜 이자카야는 월요일에 붐빌까?와 같은 주제에 대한 확고한 견해같은건 나름 그럴듯 했어요. 화이트 와인은 이탈리아, 레드 와인은 칠레 등 남미산이 좋다는 주장은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의견도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는 볼 만했고요.
무엇보다도 소다츠의 절친인 타케노마타가 약혼하고 약혼자를 소개해주는 에피소드는 놀라왔습니다. 소다츠와 카스미도 빨리 진전이 있어야 할텐데 말이지요. 은근하게 분위기만 깔고 가는게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에키벤 투어 관련 이야기나, 오사카 타코야키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많이 보아왔던 소재라 별로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소재 고갈 탓도 있겠지만, 이런 기행문스러운 이야기는 한 권에 한 편 정도로만 수록되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타코야키는 무려 3편에 걸쳐 소개할 내용과 분량도 아니었어요. 다카키 나오코의 작품 어딘가에서 소개되었던 분량 정도 만으로 충분했을겁니다. 그 외의 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이제는 재미보다는 팬심으로 읽는 작품이 되었네요. 그래도 소다츠의 개똥 (?) 철학은 언제나 재미있는 만큼, 다음 권은 그런 이야기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상계 식도락 만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양이 맘마 - 6점
우오노메 산타 지음, 김진희 옮김/애니북스

다른 음식 만화로 접했었던 우오노메 산타의 작품입니다. 메이지 초기를 배경으로 하여, 당시 갓 들어왔던 새로운 음식들과 당대 풍물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단지 메이지 시기를 무대로 한 음식 만화라면 특별할게 없겠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을 미식가 고양이로 하여 고양이 시점에서 묘사한다는 점이 차별화 요소입니다. 주인공인 이름없는 고양이가 소설가 메이지노 씨 집에서 함께 살면서 메이지노 선생님과 그 가족, 그리고 주변 식당 등에서 먹는 음식들을 소개하는데, 미식가라서 음식에 정통하고 심지어 반주를 즐기기까지 하거든요.

이야기들도 굉장히 짤막해서 대단한 내용은 없지만, 훈훈하고 잔잔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어서 마음에 들 뿐 아니라, 모리 소바와 자루 소바의 차이를 알려 주는 등 새로운 내용도 제법 많아서 만족스러웠어요. 참고로 두 소바의 차이는 쓰유에 있답니다. 자루 소바는 처음 우러낸 육수로, 모리 소바는 두 번재로 우려낸 육수로 조리한거라 면 자체는 동일해서, 직원이 잘못 나르지 않도록 자루 소바 위에 김을 뿌린거라는군요. 그 외 중간중간 '메이지 시대 미식 탐방기'라는 짤막한 한 페이지짜리 5편의 컬럼도 볼거리입니다. 미식, 요리 뿐 아니라 꽃놀이까지 소개하는 등 이런저런 소개가 많습니다. 오노메 산타의 포근한 그림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18/05/18

악몽을 파는 가게 1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점

악몽을 파는 가게 1 - 4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최신작 단편집입니다. 원초적인 공포보다는 순문학 쪽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물씬 풍겼던 최근 작풍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전 분실한 초고를 다시 썼다는 "130"만 옛 작품을 연상케하는 자극과 속도감을 보여주며, 이외에는 대체로 자극이 부족합니다. 옛날 작품들이 불량 식품 같았다면, 이 책의 수록작들은 녹즙같은 느낌이랄까요.

물론 "모래 언덕", "못된 꼬맹이"와 같이 기발한 발상과 섬찟함을 겸비한 작품이 없는건 아닙니다. 순문학스러운 느낌이더라도 "죽음" 은 이런 류의 단편에서는 손에 꼽을만한 걸작임에는 분명하고요. 거장다운 깊은 연륜도 작품마다 가득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좀 얌전하고 재미도 별로 없어서 아쉽네요. 최소한의 의외성은 가져갔어야 하지만 좀 쉽게 쓴 느낌으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작품 별로 조금 더 상세하게 소개해 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언제나 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30"

버려진 휴게소에 사람을 잡아먹는 자동차가 나타나 여러 사람들을 해치웠다. 그렇지만 몰래 숨어든 용감한 소년이 돋보기로 불을 붙여 괴물을 퇴치한다!

오래전 분실한 초고를 다시 썼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차의 등장과 묘사는 킹의 초기 크리쳐 단편 느낌 그대로입니다.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생생한 묘사 만큼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에요. 처음 버려진 휴게소로 탐험을 떠난 소년의 묘사,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사람 잡아먹는 자동차와 희생자들에 대한 묘사로 이어지는 속도감도 대단하고요. 끝까지 눈을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운운하며 희생된 첫 번째 희생자를 비롯한 죽은 사람들 모두가 "선의" 때문에 죽었다는 약간의 풍자도 젊은 시절 킹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안이한 결말로 이런 장점 모두가 희석됩니다. 10살밖에 되지 않은 꼬마 소년이 불 좀 붙였다고 사라져 버리다니! 죽어나간 여러 명의 어른들은 대체 뭔가 싶더군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원래 결말도 이러했다면 아무리 마약 중독 등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킹이 이 작품을 분실한 건 별로 아까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다시 썼다면 결말 정도는 고쳤어야 해요. 이렇게 대충 마무리 지을 내용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흑인은 잡아먹지 않는다던가, 여자는 잡아먹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뭔가 차별이나 혐오에 대한 이야기처럼 포장하는 등의 설정과 반전처럼 말이죠. 흑인은 잡아먹지 않아서 흑인 한 명이 살아남지만, 도착한 경찰들에 의해 사살된다! 는 "새벽의 저주" 스러운 이야기였다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프리미엄 하모니" 

부부는 조카 선물을 사러 마트에 들렸는데,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조금 덤덤하고 건조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소개에서 킹이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읽고, 그의 스타일로 썼다고 말하는데, 레이먼드 카버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엄청나게 더운 날, 아내가 죽은 후 주차장으로 돌아오자 애견마저 차 안에서 쪄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결말까지 소소하게 읽을만 했습니다.

문제는 너무 순문학스럽고 의외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죽은 게 애견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조금 나았을지 모르겠네요. 상상하기는 싫지만, 그게 뭐든요.

하여튼 저는 킹의 작품을 읽고 싶지 킹이 쓴 카버 스타일 카피를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배트맨과 로빈, 격론을 벌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식사를 하는 60세 노인이 우연히 일으킨 차 사고로 트럭 운전사에게 구타당하다가, 아버지가 운전사를 칼로 찔러 살아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치매에 걸렸건, 나이가 들었건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 앞에서는 슈퍼 히어로라는 주제 만큼은 정말 마음에 드네요. 저도 끝까지 딸 아이를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좋은 작품은 아니에요. 무언가 복잡한 과거가 있는 듯 변죽을 울리다가, 갑작스러운 사고와 함께 이야기가 바로 절정으로 치닫고 끝나버려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껏 고급차를 쓸고 닦아 광 내어 어렵게 시동을 걸지만 도착한 장소는 집 앞 편의점이랄까요? 그냥저냥한 평범 이하 소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모래 언덕"

아흔살이 넘은 하비 비처 판사는 유언장을 작성하기 위해 변호사 앤서니 웨이런드를 불렀다. 그리고 유언장에 적혀 있는, 한 섬을 영구 야생지로 공표하는 사항을 두고 그 섬에 얽힌 오랜 비밀을 이야기 해 주는데...

짧은 분량, 섬뜩한 느낌, 여기에 반전까지 삼위일체를 이룬 '기묘한 맛', '쇼트쇼트' 계열의 작품입니다.

우선 아주 짧다는 점에서 '짧은 분량' 조건은 충족합니다. 그리고 섬의 모래 사장에 곧 죽을 사람 이름이 쓰여진다는 아이디어에서, 특히 비행기 추락 사고 때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는 묘사의 섬뜩함이 대단해서 두 번째 조건 역시 충족하고요. 마지막 조건도 유언장 작성을 서두른 이유에 대한 반전 때문에 완벽하게 충족합니다. 특히 결말은 아주 좋은 수준으로 킹 역시나 결말이 마음에 든다고 자찬할 정도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기묘한 맛', '쇼트쇼트' 류 장르의 걸작만 모아 놓은 앤솔러지가 있다면 충분히 목록을 장식할만 한 교과서같은 작품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어느 못된 꼬맹이"

사형수 헬러스가 국선 변호인이었던 브래들리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그가 아이에게 총알 여섯발을 쏜 이유를 설명해 주는데...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가 상황에 따라서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색적인 설정에 더해, 이러한 공포가 직접 닥쳤을 때 벌어지는 무간지옥의 묘사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읽는 내내 끔찍했고, 손에서 떼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또 인생을 파멸시키기 위해 악마가 누군가에게 나타난다는 뻔한 설정을 악마가 아이의 모습으로 위장했다는 약간의 변주만으로 차원이 다른 몰입감을 선사해주는건 역시나 거장다웠습니다. 저 역시 악마같은 아이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굉징히 와 닿은 아이디어이기도 해요.

그런데 헬러스에게 이 악마가 나타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점은 좀 문제입니다. 그냥 아픈 것,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대충 넘어가는데, 그건 그렇다 쳐도 브래들리에게 이 꼬마가 나타날 이유는 또 없잖아요? 최소한의 설득력을 보장할 약간의 양념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잘 나가다가 결말을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무리수를 둔 느낌이라 감점합니다.

"죽음"

동네 바보 트러스데일은 한 소녀를 죽이고 은화를 빼앗은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보안관 바클레이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나 형은 집행되고, 이후 유일한 증거인 은화가 교수형당한 트러스데일의 분비물에서 발견되었다...

일종의 '딜레마' 를 다룬 심리 드라마인데 한마디로 걸작입니다. 동네 바보 트러스데일이 무죄일 수도 있다는 분위기로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반짝이는 은화가 분비물 속에서 발견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네요. 수감되어 있는 한 달 동안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똥으로 나올 때마다 다시 삼킨 거라는 진상도 기발하고 말이죠. 무엇보다도 바클레이의 딜레마를 그리는 심리 묘사와 무엇보다도 어차피 교수형 당할거, 왜 자백을 하지 않았냐는 묵직함이 독자를 사로잡는 좋은 단편이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5점. 수록작 중 최고로 치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트러스데일 시점의 번외편이 나와주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납골당"

정글 속 납골당으로 떠난 일행이 하나씩 죽어가는 과정을 술 먹은 사람의 독백으로 들려주는 특이한 작품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과정의 묘사는 킹 답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는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 행진하는 죽음의 윤회 이야기인지? 아니면 술 주정뱅이의 주정에 불과한지? 킹 본인은 산문적 해설을 제거한 형식만 보았을 때 훌륭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지금 보다는 훨씬 더 해설이 필요한 이야기였어요. 말하고 있는 술주정뱅이도 무슨 벌어졌는지는 모르는 듯 하고, 이게 더 현실적이기야 하겠지만 여러모로 일반 독자에게 잘 와 닿을 것 같지는 않네요.

한마디로 소갯글처럼 학교 작문 시간에 발표했음직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습작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도덕성"

가난한 부부에게 아내 노라가 간병하는 부유한 신부 위니로부터 이십만 달러의 유혹이 다가왔다. 죄를 짓는 장면을 촬영해서 보여달라는 유혹에 굴복한 채드와 노라 부부는, 노라가 변장하여 어린아이를 때리는걸 채드가 촬영하여 돈을 받고 말았다. 이후 채드의 작가로서의 미래, 그리고 부부의 결혼생활은 끝장나 버리는데...

일단 재미도 없고 여러가지 문제가 많아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네요. 일단 설득력 없는 등장인물들의 고민이 아쉽습니다. 얼척없는 도덕심보다는 돈이 더 이유를 가진다는 건 당연한 현실인데 이를 뭐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이를 때린 정도로 평생 죄책감을 느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덕분에 위니를 통해 종교적인 시점에서 나쁜 짓, 회개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발상은 좋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데에는 그다지 성공하고 있지 못합니다.

소싯적 피를 팔고 리포트를 대신 써 주는 밥벌이를 했었는데 그 당시 자신을 매춘부라고 생각했다는 창작 비화가 더 인상적이었던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를 유괴하는 등 더 강력하고 심각한 딜레마를 초래하는 범행으로 묘사하는게 훨씬 나았을 것 같네요.

"사후세계"

대장암으로 죽은 빌은 기묘한 공간에서 해리스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과거 공장 문을 잠갔다가 화재로 146명의 여직원을 죽게 한 죄로 끝나지 않는 상담이라는 연옥에 갇힌 인물로, 빌에게 환생과 사라짐을 선택할 수 있지만, 다시 태어나도 변하는 것은 없을 거라 말해 주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게 다섯번 째이며 언제나 똑같은 말을 했다면서. 그러나 빌은 동생의 손가락을 잘랐던 실수 , 어렸을 때의 시계 절도, 성폭행 등의 실수 중 하나라도 막기를 바라며 환생을 선택한다.

사후 세계에 대한 독특한 묘사와 설정, 그리고 동양적인 일종의 "윤회"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인 소품입니다. 단, 묘사와 설정에 비하면 결말은 좀 평이한 편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우르"

구식 영문학과 교수 웨슬리는 농구팀 감독인 애인 엘런과 헤어진 후 반쯤은 복수심에 킨들을 구입했다. 그런데 그가 구입한 킨들은 시판되지 않는 핑크빛 제품으로, '우르' 라는 일종의 평행우주로 접속하여 작품을 찾아 제공하는 능력이 있는 기기였다. 웨슬리 스미스는 헤밍웨이의 미발표작 등을 검색하는데...

아마존 킨들을 위해 집필했다는 소설인데, 한마디로 말해 광고를 위해 쓰여진 수준 이하의 졸작입니다.

이유는 명확해요. 소설을 쓰지 못하는 영문학과 교수가 핑크빛 킨들을 통해 다른 평행 세계에서 유명 작가들이 발표한, 이쪽 세계에서는 발표되지 않은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절반 이상까지 장황하게 펼쳐나가기 때문에 독자는 유명세를 위한 표절같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는데, 정작 이야기는 급작스럽게 "내일 뉴스" 와 같은 이야기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전혀 다른 설정을 하나로 묶어놓은 느낌이라 영 별로입니다.
"내일 뉴스" 이야기라도 재미있었더라면 모르겠지만 뉴스를 어떤 식으로든 미리 알고, 그렇게 알게 된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쎄고 쎈 유사 작품 대비 특별한 부분도 없는 탓에 별다른 흥분과 재미를 불러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킹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지극히 극단적인 해피 엔딩이라는 결말은 특이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거의 없는, 킨들 광고에 불과한 평균 이하의 범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