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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6

사상학 탐정 1 - 미쓰다 신조 / 이연승 : 별점 3점

사상학 탐정 1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레드박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을 보는 특수한 능력이 있는 쓰루야 슌이치로가 탐정 사무소를 개업한 날, 사야카라는 여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청년 IT 재벌 아키라와 약혼했지만, 약혼자가 급작스럽게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한 후 자신의 주변에 떠도는 죽음에 이유가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아무런 사상도 보지 못한 쓰루야는 의뢰를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가 약혼자의 본가인 이리야가에 함께 살게 된 후, 기이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고 그녀는 다시 쓰루야를 찾았다. 쓰루야는 그녀를 뒤덮은 섬뜩한 사상을 확인한 뒤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리야가를 방문했다. 그러나 기이한 사건은 멈추지 않고 아키라의 이복형 나쓰키부터 한 명씩, 차례대로 가족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타인에게 나타난 사상(死相)을 볼 수 있다는 특수 능력의 소유자가 주인공으로, 주인공 쓰루야 슌이치로는 탐정이라는 직함을 걸고 있지만 별다른 추리력은 없습니다. 자신의 특수 능력과 일본 최고의 무녀인 할머니 아이젠에게서 배운 지식과 경험에 의존할 뿐입니다. 사건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이 아니라 ‘주술’의 영역에서 벌어지고요. 이런 점에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일본식 퇴마 판타지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만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뻔한 퇴마 배틀물은 아닙니다. 쓰루야의 능력은 사상을 보는게 전부로 다른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백귀야행"의 리쓰가 탐정 사무소를 열었다고 해도 될 정도에요. 쓰루야와 리쓰는 능력치도 거의 비슷하니까요. 실제 스물스물 움직이는 저주의 실체를 보고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거든요. 주술, 저주가 정말 일상 속에 있을 법한 것으로 그럴듯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 역시 "백귀야행"스럽습니다. 이렇게 설득력 넘치는 괴이 묘사는 민속 탐정 시리즈를 써왔던 미쓰다 신조답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 특유의, "백귀야행"과는 다른 섬뜩한 묘사들도 볼거리이고요.

이러한 설득력 넘치며 섬뜩한 분위기에 더해 작가의 명성과 "탐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추리적인 부분도 나름 볼 만 합니다. 비과학적인 영역이기는 하지만, 주술과 저주에 적용된 일종의 법칙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 덕분입니다. 부제 그대로 '13'에 관련된 법칙인데, 정교하게 짜인 복선과 함께 쓰루야의 메모를 중심으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여 두뇌 싸움을 벌이게 만드는 솜씨가 돋보입니다. 이리야가 전 당주 및 가족들의 취미와 엮은 자잘한 설정들도 흥미로웠고요.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점은 굉장히 빠르게 전개되는 현대적인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지루할 틈 없이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면서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 고작 두 권 읽은 게 전부지만, 어렵고 복잡한 일본 민속 관련 지식을 고풍스럽고 무겁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탓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읽고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흡사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젊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 운운하며 누벨바그 운동(장 뤽 고다르로 대표되는)이 일어났을 때, 거장 르네 끌레망이 정말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겠다며 "태양은 가득히"를 발표한 일화가 떠올랐어요.

이렇듯 독특함과 재미를 모두 갖춘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13'에 관련된 법칙이 재미는 있지만, 합리적인 구조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설정에 맞춰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해 보였어요. 숫자만 들어가면 무엇이든 되기 때문에 단서들의 비약이 심하고, 억지스러운 전개도 제법 있고요. 작중에서도 언급되듯 나이 든 사람들만, 그것도 일본이라는 환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도 쉽게 공감하기 어렵게 만드는 점입니다. 사야카가 쓰루야에게 단서를 전해주려 애쓴다는 설정도 쓰루야의 무능함만 돋보이며, 혹 쓰루야가 정말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했을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단점입니다.

아울러 동기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작품에서처럼 사야카가 모든 저주의 흑막이라면, 그녀는 아키라 재산의 60%로 왜 만족하지 못했을까요? 설령 아키라의 배다른 형제를 모두 죽였다 치더라도 60%가 80%가 될 뿐 - 20%는 죽이고 싶지 않았던 아키라의 어머니 도시코의 몫이기에 - , 예를 들어 유산이 한 40억이라고 한다면 24억이 32억이된다... 본인까지 저주를 걸 정도로 의미가 있는 금액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방법적으로 무리수가 너무 많습니다. 저 같으면 그냥 형제들에게 저주를 걸고 어디 외국이라도 가 있었을겁니다. 사인이야 어차피 급성 심부전이니 수상하기는 해도, 증거는 없었을테니까요. 구태여 같이 저주에 걸려가며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과 동거할 이유는 없습니다.
쓰루야에게 사건을 의뢰한 이유도 사건이 언젠가 쓰루야나 아이젠 귀에 들어갈까봐 의뢰했다는 것인데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설령 귀에 들어갔다손 치더라도, 주인공이나 주인공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이리야 가문의 설정, 판에 박은 의붓형제 캐릭터인 나쓰키, 하루미 등은 고민이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자 미쓰다 시존의 새로운 모습을 알리는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무엇보다도 몰입해서 읽는, 재미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에스프레소라면 달달한 카푸치노같은, 아주 무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은 작품이니 미쓰다 신조의 작품이 궁금하신 입문자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04/02/11

백귀야행 - 교코쿠 나츠히코 / 홍영의 : 별점 2점

백귀야행 - 4점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홍영의 옮김/초록배매직스


이마 이치코의 동명 만화가 아닌 일본에서 날리는 호러+추리 작가 교코쿠 나츠히코의 단편집. 제목대로 귀신을 테마로 한 소설집입니다. 2차대전 직후 일본을 배경으로 일상 속 광기와 어우러진 공포를 모두 10편의 단편을 통해 그려내고 있죠.
대체로 사회적, 개인적으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일상 생활속에서 과거의 트라우마와 관계된 낯선 존재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되고, 결국 서서히 붕괴해 가는 과정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병약한 자기와 동생을 비교하다가 가정과 함께 무너져 가는 여인을 그린 “문고요비”, 전쟁 후 성적으로 불능이 된 주인공이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아내를 훔쳐보다 들켜 아내가 자살한 뒤 사방에서 “눈”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는 “눈,눈,눈”, 가족을 위해 몸을 팔다가 들켜 죽은 누나의 시체와 다락방에서 놀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경찰관이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창녀의 머리카락” 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머지 단편들도 오니라던가 갓파, 깔깔 웃는 여자 같은 여러 일본 귀신들을 일상생활과 결부시켜 표현하는 방식과 문체가 독특해서 여운이 깊게 남네요.

그러나 아무래도 국내 정서에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설정이 그닥 와 닿지 않을 뿐더러 묘사가 너무 어렵고 낯설어서 읽기가 좀 힘들더군요. 묘사는 번역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이토 준지”같은 황당한 상상력의 일본 호러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기대치에도 미치지는 못했으며, "호러", "공포" 소설임에도 별로 무섭지 않다는 것도 큰 단점일테고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이래저래 굉장히 독특하기도 하고, 뭔가 생각하게 하는 단편집임에는 분명합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이 기대되네요.

2014/04/04

마법사의 딸 1~8 - 나스 유키에 : 별점 2.5점

마법사의 딸 8 - 6점 나스 유키에 지음/대원씨아이(만화)

평범한 여고생 스노츠키 하츠네는 아버지 스노즈키 무잔이 일본 최고의 음양사인 탓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기숙사 무대 러브코미디의 금자탑 "여기는 그린우드"의 작가 나스 유키에의 근작입니다. 분위기 자체는 "백귀야행"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실력 있는 음양사라는 점에서 이이지마 료와 스노즈키 무잔이 겹치고, 영감은 있지만 딱히 대단한 능력은 없으며 음양사가 되는걸 싫어하는 주인공 리쓰와 하츠네의 설정도 비슷합니다. 강력한 식신 아오아라시와 고야타는 완전 판박이고요.

그러나 단순한 아류작으로 평가절하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작가 특유의 코미디 터치에 더해, 중반까지는 무잔과 고야타, 그 이후는 무잔과 하츠네의 친아버지 무죠가 얽힌 과거사를 중심으로 한 긴 호흡의 진지한 이야기를 잘 풀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잔과 사제 무이, 제자 효우고 등의 등장인물들이 상당히 화려한 영력을 선보이는 점도 차별화되는 점이고요. 완전 천연이지만 음양사 일에 있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잔, 그리고 무잔 사부의 제자인 자동 영 청소기(?) Jr 캐릭터도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긴 호흡의 이야기보다는 일상계스러운 단편 에피소드들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4권의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삼신할매 에피소드와 5권의 사라진 며느리와 화분에 얽힌 에피소드를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삼신할매 에피소드에서는 삼신할매에게 쫓기던 애엄마가 공포에 사로잡히지만, 삼신할매가 사실은 자기가 아니라 앞에 있던 딸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걸 자각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 후에도 별로 바뀐 건 없더라...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화분 에피소드는 도난당한 화분에서 서스펜스 호러물로 이어지는 전개와 결말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수년 전 사라져버렸다는 며느리가 사실은 집 앞에 내어놓은 화분들에 나누어져 담겨 있었다는 진상은 정말 최고였어요. 이 정도면 가장 좋은 "백귀야행" 에피소드에 근접하는 수준입니다. 상류와 끊어진 하천의 지박령과 얽힌 에피소드가 왜 끼어들었는지는 조금 의문이었지만요.

단편 옴니버스물로 가져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장편으로 전개하면서 무리수를 둔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하츠네와 효우코의 커플링이라는 결말도 너무 급작스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후속작도 있는 듯한데 부디 일상계스러운 단편 옴니버스물로 전개되기를 바랍니다. 뭐, 효우고와 엮인 시점에서 그렇게 되는 건 불가능하겠습니다만...

2016/12/23

화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2.5점

화가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호러영화 같은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 레나. 코타로가 곧바로 이사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자. 

곧 중학생이 되는 코타로는 할머니와 함께 치바에서 머나먼, 도쿄 근방의 무사시 나고이케라는 낯선 지역으로 이사왔다. 코타로의 부모님이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사망한 탓이었다. 코타로는 새 집에서 왠지모를 기시감을 느꼈고, 집 안에서 온갖 이형의 존재와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코타로는 새 친구 레나와 함께 이유를 밝혀내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고, 오래전 신문을 통해 이사 온 집은 10년 전 일가족이 이웃집 정신병자에게 살해당했던 장소이며, 유일한 생존자는 바로 코타로였다는걸 알게 되었다...

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화가 (禍家)'는 한국말로 하자면 '재앙의 집' 이겠지요? '집' 시리즈 답게 '집'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자 장치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새롭지는 않습니다. 설정부터가 진부한 탓입니다. 몰락한 막장 명문가(수많은 작품들...), 잔인하게 일가족이 살해당했던 과거(수많은 작품들...), 이형의 존재가 지나가는 길이나 궤도에 있으면 죽거나 해를 입는다("귀담백경"의 "방울소리" 라던가 "백귀야행" 등등등), 죽음의 연쇄는 막을 수 없고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데스티네이션" 등등등) 등 모두 어디선가 보아왔던 설정들이지요.
뻔한 설정이라도 미쓰다 신조라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작가의 장기인 일본적인 요괴나 주술, 심령 묘사가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역인 시미에의 작전도 허술합니다. 코타로의 양부모를 죽인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레나와 친해진 후 코타로와도 격의없이 지내는 과정은 그렇게 설득력이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코타로와 할머니가 이 곳으로 이사오리라 생각한 것 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 가족이 살해당한 집에 손자를 데리고 다시 이사를 간답니까?

다행히 장점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뻔하지만, 뻔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쓰였다는 뜻이고 많이 쓰였다면 그건 그만큼 효과, 즉 재미가 있다는 의미도 되지요. 이에 더해 극단적으로 말하면 초등학생의 모험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 특징 덕분에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기도 하고요. 특히 코타로에 대한 묘사가 괜찮습니다. 급작스럽게 닥치는 여러 사건과 사고 속에서 의지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돌파해나가려는 전형적인 '점프식' 주인공인데 작품과 잘 어울린 덕분입니다. 아울러 주인공이 어리고 모험물적인 전개를 갖추어서 작가 특유의 장황하면서 복잡한 묘사가 덜하다는 점도 장점이라 할 수 있을 테고요.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시미에가 사실 가미츠케 가의 딸인 시메이로, 오빠의 유지를 받들어 범행을 끝내기 위함이었다는걸 몇몇 디테일로 드러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예를 들면 코로가 화요일, 목요일 낮에 짖은 이유를 가정교사로 레나 오빠의 공부를 봐 주기 위해 오는 시미에의 동선과 일치시키는 식으로요. 물론 개가 짖는다고 지나가는 사람이 다 살인범은 아닐테니, 그렇게 합리적인 설정은 아니기는 하지만요.
마지막 순간에 이러한 디테일들을 통해 시미에의 존재를 눈치챈 두 번의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개 코로까지야 그렇다 쳐도, 레나에게서 받은 부적이 휴대전화였다는 반전은 정말이지 멋졌어요. 

또 정신병자 살인마 카미츠케 군지의 범행은 사당에서 뛰쳐나온 이형 존재의 동선에 위치한 자신의 집 대신, 맞은편 무나카타가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는 진상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신병자나 할 법한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라도 이에 이르는 과정을 나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충분한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더라도 영적인 무언가에 대한 묘사는 충분히 섬찟합니다. 형태를 그리지 않고 분위기와 소리만으로 공포심을 자아내는 묘사력은 여전히 발군이에요. 이들은 살인범 카미츠케 군지를 제외하면 모두 살해당한 코우타의 가족으로 무언가를 코우타에게 전하기 위해 딱 한번만 나타난 것이라는 반전도 나쁘지 않고요. 
물론 반전이 아주 새롭지는 않고, 이 반전 탓에 이후 이들에 대한 공포가 사라져버린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사당에 관련된 그럴싸한 설정과 묘사 - 여기에 있는 건 구제할 수 없는 절망, 불합리할 정도의 우월감, 끝을 모를 악의, 압도적인 광기, 소름돋는 증오, 너무나도 제멋대로의 살의... -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굉장히 무서운 무언가처럼 묘사하다가, 별다른 설명없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어 버리는 탓입니다.
군지가 사당을 박살낸 후 무언가 탈출(?) 했다면 사당은 그냥 빈 껍데기가 되었을텐데 이런 부분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레나와 코타로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결말이(초중반부에 등장했던 정체모를 꼬마 아이로 보이는) 가미츠케 가문의 단 하나남은 소년의 등장으로 마무리 되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소설대로라면 결국 코타로는 죽게 될 것 같은데, 레나와 곧 태어날 아이까지 그렇게 될지... 좀 많이 걱정이 되는군요.

하여튼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과 단점을 모두 적절히 갖춘 평작입니다. 미쓰다 신조 입문으로는 괜찮습니다.

2009/11/05

군청학사 - 이리에 아키 : 별점 4점과 3점들

군청학사 1 - 8점
이리에 아키 글.그림/중앙books(중앙북스)

군청학사 2 - 6점
이리에 아키 글.그림/중앙books(중앙북스)

군청학사 3 - 6점
이리에 아키 글.그림/중앙books(중앙북스)

아. 정말 간만에 재미있게 읽은 단편집입니다. 제목이 왠지 멋있는데 푸르른 청춘들이 모여든 장소를 의미한다네요. 내용은 꼭 그런것만은 아닌데 좀 의아하긴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엠마의 모리 카오루를 연상하신 분들이 많던데 저 역시도 비슷한 화풍과 섬세한 심리묘사를 몇컷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솜씨 등 유사한 분위기를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지 그 정도로만 규정하는 것은 섭섭한 일이겠죠. 여러 작가의 장점들이 많이 떠올랐거든요.

첫 번째로 연상된 작가는 카페 알파의 아시나노 히토시입니다. 왠지 모르게 느슨하고 나른한 느낌과 정적인 분위기. 조용한 와중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끄는 섬세함과 디테일, 그리고 부드럽게 그린 그림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연상된 작가는 카와하라 유미코입니다. "전략 밀크하우스"보다는 단편집에서 선보였던, 전형적인 중세풍 판타지를 비롯해서 로맨틱 코미디, 청춘드라마, 학원물 등 쟝르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면서도 그 수준이 일관되게 유지되는 대단한 능력 때문입니다. 저는 약간 코믹한 분위기의 단편들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허투루 보기 힘들정도의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랍더군요. 

세 번째로 연상된 작가는 백귀야행의 이마 이치코입니다. 이유는 이마 이치코의 오리엔탈 판타지에서 느껴졌던 복잡한 설정과 진한 여운, 그리고 특유의 코믹함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진지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작가가 굉장히 유쾌한 인물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작품들에 짙게 배어있는 유머 덕분에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로 연상된 작가는 아토리 케이코입니다. 단편 중심이라는 것과 밝고 따뜻한 이야기들을 여유있는 화풍으로 그리고 있다라는 것이 정말 놀랄만큼 유사하죠. 아토리 케이코 보다는 조금 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들이 많고 드라마를 강조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말이지 비슷했어요. 아토리 케이코는 이미 고인이 되신지라 더 많은 작품을 접할 수 없다는것이 안타까왔는데 이리에 아키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지 않을까 기대도 많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는 섬세한 심리묘사, 그리고 유머와 더불어 일상속에서 디테일을 잡아나가는 분위기가 왠지모르게 요시나가 후미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었기에 언급하고 싶네요. 작풍과 표현 방식은 전혀! 전혀 다르지만 뭔가 감수성이랄까? 그런게 좀 비슷했던것 같달까요... 

마지막으로 연상된 작가는 TONO입니다. 구태여 작품을 고르자면 "카오루씨의 귀향"인데 기발하고 독특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꾸며나가는 것과 유머가 작품에 전체적으로 녹아있다는 것이 비슷했습니다. 판타지에 강점을 보이는 것도 유사했고요.

하지만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에피소드들이 고르게 완성도가 높다고는 하지만 2권의 "북의 십검"같이 별다른 특색없는 이야기도 있고, 첫 번째 이야기 외에는 그닥 새롭지 않은 핑크 초콜릿 에피소드 연작은 좀 지루했습니다. 

또한 별다른 이야기 전개 없이 특정 상황에만 집중한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보다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압축해서 전달하기도 하지만 여운만 가득할 뿐 이야기가 애매한 에피소드들도 눈에 띕니다. 예를 들자면 1권의 "이계의 창"이나 "숲으로" 를 들 수 있습니다. "박명"도 여주인공이 사실은 장님이었다 정도의 작은 반전이라도 선보이는게 더 좋았을 거에요. 아울러 3권은 전체적으로 1, 2권에 비해 작화나 구성에 힘이 떨어져 보여서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 에피소드로는 1권에서는 "포로공주"와 "선생님 저는"을, 2권에서는 "니논의 사랑"을, 3권에서는 "빨간 지붕의 집"을 들고 싶네요. 별점은 1권은 4점, 2권과 3권은 3점입니다. 2권은 너무 평범했던 "북의 십검"이 절반 이상 분량이라 점수가 깎였고, 3권은 앞서 이야기한데로 1,2권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서 감점했습니다. 

그래도 대체로 평균이상은 하는 작품들임에는 분명한만큼 수수하면서도 여유롭고, 그러면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즐시기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일단 1권부터 챙겨보시기 바랍니다.

2004/04/12

우부메의 여름 - 교코쿠 나츠히코 : 별점 2.5점

우부메의 여름 - 6점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손안의책(사철나무)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작가 세키구치는 친분이 있던 탐정 에노키즈의 조수 역할을 계기로 유서깊은 산부인과 병원 가문인 구온지 의원의 괴사건 - 구온지 가문의 사위인 마키오씨가 밀실에서 행방불명되고 아내인 교코는 20개월째 임신 중인 상태라는 것 - 조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전쟁 때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뒤 일종의 과거-원념을 볼 수 있게 된 에노키즈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남긴 채 사건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그러나 과거 마키오와 학교 동창으로, 교코와 마키오의 연애편지를 전달했던 역할을 했던 세키구치는 잃어버렸던 과거에 쫓기며 사건에 점차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사건은 평소 친하던 고서점 교코쿠도의 주인이자 세이메이의 계보를 있는 신사의 신주인 추젠지 아키히토의 추리로 구온지 가문의 역사와 사건 뒤에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는데….


일본의 유명 인기 작가 교코쿠 나츠히코의 데뷰 장편. 꽤 비싼 가격이지만 괜찮게 디자인된 장정과 작가 이름에 혹해서 바로 집어 든 작품입니다. 좋은 책은 많이 사 주어야 추리장르가 활성화 되겠죠? 물론 저도 헌책방을 애용하긴 합니다만... 하여튼, 손안의 책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디자인과 장정은 정말 괜찮네요.

작가 교코쿠 나츠히코는 추리소설가이기도 하나, 일본 요괴에 대해서도 권위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전에 먼저 접해보았던 단편집 “백귀야행”도 괴담류의 공포소설이었죠. 그래서 그럴까요? 이 작품 역시 “우부메”라는 일본 전통 요괴, 즉 아이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의 집념이 형상화 된 요괴를 테마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러나 단순 괴담은 아니며 20개월이나 임신을 하고 있다는 임산부나 밀실에서 사라진 의사, 그리고 구온지 가문 병원에서 발생한 계속된 신생아 실종 사건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전통 요괴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현대적인 감각의 추리 소설로 재탄생시킨 솜씨는 과연 일품이더군요. 변격물과 유사하지만 그 감각을 따와서 보다 현대적인 작품으로 발전시켰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세간의 호평, 걸작이라고 소문에 비하면 아쉬움이 더 많습니다. 일단 말 많은 주인공인 추젠지 아키히토부터가 별로에요. 똑똑하고 잘난척 하는 탐정의 전형이라 왠지 거부감이 느껴질 뿐더러, 추리의 바탕이 되는 논리를 설명하는 부분들은 짜증이 날 정도로 장황하고 지루하거든요.
해설자역의 실질적 화자 세키구치 역시나 추리소설의 해설자 역으로는 빵점에 가깝습니다. 너무나 심약하고 마음의 병도 있는데다가, 사건에 간접적으로 관여되어있기도 해서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결정적 이유가 세키구치의 오락가락하는 정신 상태 탓이니 더 말을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제가 추리소설에 보아왔던 것 중에 가장 터무니없는 밀실 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감점 요소에요. 이래서야 추리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작가의 논리 - 추젠지의 말을 빌린 - 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수긍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독특하고 감성적인 문체에서 발생하는 흡입력도 상당하며, 현대적 감성의 변격물을 요괴 이야기와 결합한 아이디어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정통 본격 추리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스러웠던 결과물입니다. 
제가 아는 추리 매니아이신 decca님은 집어들고 하루만에 다 읽으셨다고 하는데, 좀 더 추리소설에 가까운 후속작을 기대해 봅니다.

2021/04/29

금빛 눈의 고양이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2.5점

금빛 눈의 고양이 - 6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마야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중간중간에 놓친 권이 있어서 제가 읽은 걸로는 세 권 째네요. 언제나처럼 네 편이 아니라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열리지 않는 방"은 굉장했습니다.. "벙어리 아씨"도 성내에서 벌어졌던 잔혹한 사건에 대한 진상은 꽤 볼 만 했고요.

그러나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덧붙여진 설정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미지로가 이야기를 몰래 듣는 역할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오치카와 함께 듣고 난 뒤, 관련된 그림까지 그린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애초에 오치카가 괴담을 듣게된 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미지로는 부잣집 도련님이자 한량으로 괴담은 재미삼아 들을 뿐이에요. 이래서야 시리즈의 기본 전제가 흔들리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심지어 이번 권 결말에서 오치카가 시집을 가게 되어 도미지로가 공식적으로 괴담을 듣는 역할을 물려받게 되는데, 더 이상 시리즈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도 이전 권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들, 소품들이 많아서 별로 무섭거나 섬찟하지도 않았다는 문제도 큽니다. 이전부터 반복되어왔던 문제인데, 뻔한 설정이 많고 의외성 부족하다는 단점도 여전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열어서는 안 되는 방"은 아주 좋으니,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열어서는 안 되는 방"

인기밥집 돈부리야의 주인 헤이키치가 흑백의 방을 찾아와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철물상인 미요시아의 막내 아들로 부모님과 3남 3녀로 이루어진 대가족이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헤이키치가 10살 때 소박맞고 집에 돌아왔던 누님 오유가 아들이 보고 싶어서 소금을 끊고 애매하게, 하지만 절실하게 기원한 틈에 요물이 파고 들고 말았다. '행봉신'이라 자칭한 요물은 집 골방에 자리잡은 뒤, 소원을 이루려면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가족 일부의 일탈이 시작되고, 행복했던 대가족은 헤이키치를 제외하고 모두 목숨을 잃고 마는데...

악마나 요물이 사람의 욕망을 가지고 논다는 이야기는 많습니다. 바로 전편의 "오쿠라 님"도 비슷한 설정이었지요. 하지만 "오쿠라 님"은 비젠야를 도와준건 맞는 반면, 이 작품의 행봉신은 소원을 빈 사람에게 비참한 말로를 가져다 준다는, 전통적인 재앙신 전개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주 뻔하지만은 않습니다. 디테일이 잘 살아있는 덕분입니다. 행봉신을 통한 소원 성취가 비참한 말로를 맞는 두 가지 이유처럼요. 첫 번째는 '등가교환' 이에요.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걸 포기해야 하는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간과합니다. 두 번째는 '소원이 애매하다'는걸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게 장녀 오유가 이혼당한 뒤, 시댁에 빼앗긴 아이를 보고싶다는 소원입니다. 어떻게 보고 싶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하나도 없이 그냥 아이를 돌려달라고 빌었고, 행봉신을 집 안에 끌어들인 죄책감에 자살하자 아이가 돌아오게 되었다는 결말이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비열하게 이용해서 무조건 최악의 결과를 만드는 술수에 걸려든 셈이죠. 다른 가족들의 소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글을 읽으니 로또 당첨된 사람들 말로가 좋지 않다는 뉴스가 떠오릅니다. 비슷한 이치인것 같아요. 요행을 바라지 말고,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게 맞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네요. 하지만 이왕 살 거라면, 막연히 1등을 바라지 말고 1등이 된 뒤 어떻게 할 지 계획을 잘 세워두는게 바람직해 보이고요.

여튼 오랫만에 괴담이라는 주제에 충실했던 작품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행봉신에 의한 행복했던 대가족의 파멸 과정은 충분히 섬찟했어요. 에도라는 시대 상황과 소원들을 맞물려 묘사한 솜씨도 일품이었습니다. 설정이 뻔하고 결말이 좀 시시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다 용서가 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벙어리 아씨"

데릴 사위인 종이 도매상 미노야의 후사노스케가 친모 오세이를 모시고 흑백의 방을 찾았다. 오세이는 귀신을 부르는 '몬모 목소리'의 소유자로, 자신이 젊었을 때 겪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몬모 목소리 때문에 고향인 아사히 마을을 떠난 뒤, 이런저런 경험 끝에 영주 측실 딸 가요히메의 요강 담당 하녀가 될 수 있었다. 오세이는 성에서 선대 영주의 장자 잇코쿠의 망자와 친해졌고, 잇코쿠가 때문에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잃었다는걸 알게되었다. 그래서 잇코쿠를 둘러 싼 죽음의 진상을 알아낸 뒤, 잇코쿠가 성을 떠나 성불하고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는데....

귀신이 잘 꼬이는 "백귀야행"의 리쓰를 비롯 (몇 권까지 읽었더라....), '귀신을 부르는 체질'이라는 설정에 관련된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목소리'가 귀신을 부른다는 설정으로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목소리는 단순한 설정 수준에 그칩니다. 잇코쿠가 죽은 이유를 알아내고, 성불시키는 과정에서 몬모 목소리의 역할은 별로 없거든요. 오히려 몬모 목소리로 귀신이나 망자, 요괴를 불러내도, 오세이를 도와주는 쪽이라 딱히 저주나 괴로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일종의 수호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 이래서야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그래도 잇코쿠의 죽음을 둘러 싼 진상만큼은 재미있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잇코쿠는 선대 영주의 장자이자, 측실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실이 아들 구니카즈를 낳자, 성은 잇코쿠파와 구니카즈파로 쪼개져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정실은 에도에 거주하고, 측실은 현지 성에 거주하던 탓이었지요. 그런데 다툼 중 잇코쿠가 갑작스럽게 죽어서 이런저런 의혹을 낳았는데, 알고보니 측실의 아버지이자 잇코쿠의 할아버지 센자에몽이 잇코쿠를 독살했다는게 진상이었습니다. 가문의 충신이자 영주의 오른팔로 성주 대리까지 맡았던 할아버지가 가문의 단결을 위해 손자를 죽인겁니다. 그 뒤 사실을 알게 된 딸도 죽고, 스스로도 할복해 버리고 말았고요. 현재 영주는 이렇게 잇코쿠 죽음과 관계가 있는 구니카즈이기 때문에, 잇코쿠가 성을 떠나야 가요히메가 목소리를 되찾을 거라는 설정도 꽤 설득력있게 다가왔습니다. 잇코쿠가 성을 벗어나기 위해 '그릇'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오세이가 백방으로 노력해서 초대 영주의 영웅담을 그린 인형극 인형을 써먹는다는 결말도 괜찮았고요.

그런데 잇코쿠 사건 이야기는 재미는 있었지만, 솔직히 와 닿지는 않았어요. 모시는 가문이 중요하다고 해도, 가족보다 소중한건 없을텐데 말이죠. 측실이더라도 손자는 엄연히 영주의 피를 이었으니, 손자 편을 들어 주도권을 갖는게 당연하지 않나요? 주군의 가문이 자기 피붙이보다 중요하다는건 지극히 일본적인 발상이었다 생각됩니다. 또 잇코쿠 사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개도 지루했습니다. 특히 체질 탓에 어린 시절을 외지에서 보낸 오세이의 파란만장한 청춘은, 성에서 일하게 된 상황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한 빌드업에 불과해서 이렇게까지 길게 묘사할 필요는 없었어요. '요괴를 불러오는 목소리를 타고 났기에 고향에서 더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귀가 먼 노부부의 하녀로 일하게 되면서 그 분들의 수화를 익혔다. 노부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수화 기술 덕분에 벙어리 공주님이 계신 성의 하녀로 뽑혔다.'가 전부니까요.

아울러 도미지로가 그림을 그린 뒤 인상을 그림에 남긴다는 설정도 이 작품에서 첫 등장하는데,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설정이 덧붙여지는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도미지로가 추가된 것 부터가 별로에요. 첫 등장했을 때는 비젠야를 찾는데 남다른 행동력을 보여주면서 나름 활약했지만, 그 뒤는 그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게 전부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면의 방"

어느날, 소녀 오타네가 괴담 이야기를 하겠다며 미시마야를 찾아왔다가 무례를 범한 끝에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다음날, 소녀는 공동주택 관리인에게 끌려와서 오치카와 도미지로에게 '가면의 집'에서 겪었던 경험을 말해주었다. 그곳은 악의 결정체인 가면을 봉인하여 지키는 저택으로 오타네는 하녀로 고용되었었다. 악인만이 가면의 행동을 보고 들을 수가 있어서 좀도둑 오타네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작 석달여만에 오타네는 가면의 꾀임에 넘어가 가면이 도망가는걸 돕고 마는데...

세상에 재앙을 불러 온다는 가면이 쌓여 있는 저택이라는 설정이 신화나 전설을 연상케했던 작품. 그래도 가면을 악당만 볼 수 있다는 설정은 신선했습니다. 덕분에 화재가 일어났던 가게 아들과 주변 사람들이 '사람 얼굴'을 보았다고 주장했다는 결말도 그럴싸 했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재미를 느낄만한 극적 요소는 별로 없었습니다. 가면이 오타네를 유혹해서 도주한 뒤, 화재를 일으켰다는 전개는 예상 가능했거든요. 오히려 가면이 무엇이고 가면을 지키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등에 대한 정보는 쏙 빼 놓고 있으며, 가면이 달아날 수 없게 방에 파수꾼을 세워 놓으면 되지 않나? 와 같은, 설정상 헛점이 눈에 더 많이 뜨여서 별로였어요.

이렇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고, 딱히 에도물일 이유도 없어 보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기이한 이야기책"

다른 무사의 약혼녀와 사랑의 도피를 한 탓에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던 도망 무사 쥬베에는 일류 세책방 잇센도로부터 책 필사를 부탁받았다. 수상했지만 100냥이라는 거금에 홀려 고민 끝에 수락했다. 빚을 갚고 홀로 남은 딸과의 삶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쥬베에는 책 필사를 하면서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게 된 뒤, 자주 왕래하던 세책집 효탄고도의 주인에게 딸의 안녕을 부탁하는데....

세책집 효탄고도의 작은 주인 간이치가 흑백의 방에서 들려준 이야기인데 여러모로 "가면의 방"과 비슷합니다. 구멍투성이라는 점에서요. 잇센도가 필사를 맡긴 책의 정체도 알 수 없고, 책 내용이 무엇인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거든요. 간이치가 잇센도 책 필사를 했었고, 덕분에 스스로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다는걸 암시해 주기는 하지만 이 역시 속 시원하게 드러나지는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 이야기를 들은 오치카가 간이치와 결혼할 결심을 한다는 것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이전에 연심을 품고 있다던가 하는 묘사도 없이, 간이치가 남은 수명을 알고 있고, 그래서 뭔가 세상만사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는게 드러난 이유의 전부라서 당황스럽기만 했습니다. '노안'이나, 조금 원숙해 보이는 사람이 오치카 취향이었나....

하여튼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금빛 눈의 고양이" 

오치카 결혼식으로 미시마야는 분주해졌다. 도미지로의 형 이이치로도 파견나갔던 가게에서 겸사겸사 잠깐 돌아왔고, 그는 도미지로와 함께 한 술자리에서 둘이 어렸을 때 겪었던 기묘한 고양이 마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미시마야에서 일할 뻔 했지만, 손을 다쳐서 포기하고 말았던 여성 삯바느질꾼 오킨의 생령이 고양이 마유가 되었었다는 이야기. 도미지로와 미시마야 가족들의 젊은 시절이 그려지는 소품입니다. 그냥 귀여운 고양이로만 남았다면 나름 훈훈한 추억담이었을텐데, 오사토가 낳았던 갓난 아이를 죽일 뻔 했다는 전개로 이야기가 무거워진건 아쉽습니다. 자기 대신 삯바느질 일꾼 자리를 차지했던 오사토에 대한 원망이 쌓였다면 오사토를 직접 노렸어야죠. 갓난아기를 죽이려고 한 건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잖아요.

이 작품의 존재 의미는 도미지로가 흑백의 방에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는걸 확정하는 것 뿐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6/01/18

엠브리오 기담 - 야마시로 아사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엠브리오 기담 - 6점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서평이 기억에 남아 주말 동안 읽기 위해 집어든 책으로 에도, 아니 메이지로 보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환상 문학 단편집입니다. 온천에 대한 여행기를 쓰는 길치 이즈미 로안과 그의 짐꾼이자 동료인 미미히코가 등장하는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대물 설정, 거기에 전부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괴담이라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이나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 작품들보다는 환상 문학에 훨씬 가깝고, 교코쿠 나쓰히코의 작품들보다는 읽기 쉽고 명확한 내용이라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수록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는 점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나 리처드 매드슨 등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구태여 구분하자면 "엠브리오 기담"은 일상계 크리처물, "라피스 라줄리 환상"은 윤회 판타지, "수증기 사변"과 "끝맺음"은 일상계 괴담, "얼굴 없는 산마루"는 일상계 드라마, "있을 수 없는 다리"는 전형적 괴담, "지옥"은 끔찍한 고어 호러,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는 괴담 분위기의 자살극으로 넓은 장르를 포용하기 때문입니다("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는 그냥 사족입니다). 

이렇게 많은 장르물을 포괄하면서도 대체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인다는 점도 대단합니다. 코미디에서 호러까지 오가는 선배 작가들만큼의 넓은 변화 폭은 아니긴 하지만요. 이 정도면 이름 모를 작가 치고는 제법이라 생각했는데, 후기를 보니 야마시로 아사코는 오츠 이치의 또 다른 필명이더군요. 솔직히 취향이 아니라 많은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팔색조 매력은 여전한 듯 하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초 서평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도 오츠 이치의 이색작이라는 소개 때문이었던 듯 싶습니다. 이놈의 기억력...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제법 있는 등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이 정도면 null괴담물로 기본은 해 주었으며, 오츠 이치의 단점이라 여겼던 만화적인 상상력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좋은 작품입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사족인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한 별점은 3점입니다. 괴담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덧 1 : 앞서 말씀드린 대로 수록 작품들의 장르가 천차만별이지만 절반 이상이 '괴담'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추리 / 호러' 장르로 분류합니다.

덧 2 : 저도 온천을 좋아하는데 딸아이가 좀 더 크면 온천이나 다녀봐야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끔찍한 경험은 사절입니다만 끔찍한 경험을 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가 그래도 온천을 다니는 것을 봐서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게 분명하겠죠.

단편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엠브리오 기담"

미미히코는 갓난아기 전 인간의 모습인 '엠브리오'를 우연히 구했다. 금세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엠브리오는 살아남았고, 도박빚에 시달리던 미미히코는 엠브리오를 이용하여 돈 벌 계획을 세우는데...

인간의 태아(이전 단계)인 '엠브리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엠브리오에 대한 설정 - 하얀 애벌레 같아 허여멀건 몸뚱이에 볼록 튀어나온 배, 발달이 덜 되어 단순한 돌기에 지나지 않는 손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머리에 점을 콕 찍은 듯한 눈, 도마뱀처럼 꼬리 같은 것까지 있고 갓난아기 피부와 내장 표면의 딱 중간 정도 피부로 쌀뜨물을 먹고 미지근한 물을 좋아한다 등등 - 이 실제 존재하는 생물처럼 상세하다는 것이 재미 요소입니다. 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기묘한 상상력'이 크리처에 발휘된 환상 문학이지요.

다만 결말은 아쉽습니다. 아이를 원하는 부부에게 엠브리오를 넘겨 무사히 출산하게 하고, 수년이 지나 미미히코와 그 아이가 재회한다는건데, 공식대로라서 식상했던 탓입니다. 그래도 더 이상의 좋은 결말을 찾기는 어려웠으리라 짐작되며, 전체적으로는 무난한 수준이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라피스 라줄리 환상"

도매 서점에서 일하는 린은 행수 어르신의 지시로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의 여행에 동행했다.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일행은 마침 발견한 마을에서 잠깐 머무는데, 다음날 촌장의 증손자가 고열로 쓰러졌다. 마침 린이 가지고 있던 약으로 아이는 생명을 구했고, 답례로 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라피스 라줄리(유리)'를 선물하는데...

린이 '라피스 라줄리'를 받은 이후, 인생을 되풀이한다는 윤회 판타지입니다. 윤회를 하면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내용도 잔잔하니 읽을 만한데, 작품의 핵심은 반전입니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촌장 노파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죽는 어머니를 위해 뱃속에서 탯줄을 스스로 목에 감는 방법으로 자살을 한다는 결말이거든요. 행복한 결혼 생활도 해 보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공부도 해 보았지만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인데 참 절절했습니다.
다른 수록 작품과는 다르게 미미히코 시점이 아니라 린 시점 묘사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라피스 라줄리의 힘이 어디서 온 것인지 등 세세한 설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린은 이전 기억을 계속 쌓아나가기 때문에 환생할 때마다 강해질 수밖에 없는데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건 설득력이 약해 보였거든요. 미래도 읽을 수 있고, 그에 어울리는 공부도 한다면 세계를 바꿀 만한 재산이나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되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증기 사변"

로안과 미미히코는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뒤 산기슭 온천 마을을 찾아냈다. 둘은 마을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여관에 묵으며, 마을 온천을 밤에 찾아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밤에 온천에 몸을 담근 미미히코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로 죽어버린 유노카를 온천에서 만는데...

저승과 연결되어 있는 온천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 어린 시절의 추억과 유노카의 죽음에 대한 진상 등 이런저런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잔잔한 일상계입니다. 마지막에 미미히코가 유노카의 모습을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문제는 너무 잔잔해서 극적인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유노카의 죽음이 단순 사고보다는 드라마틱했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사실은 미미히코의 잘못으로 죽었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끝맺음"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묵어 가게 된 바닷가 마을. 그곳은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기묘한 곳으로 식재료마저 그랬던 탓에 미미히코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 아사 직전에 놓이는데...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는 이토 준지스러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만화나 영화 같은 시각 매체로 발표되었더라면 굉장히 그로테스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상상의 여지가 더욱 많은 소설이 섬찟함을 느끼게 하는 데 더 좋긴 하겠지만요.

게다가 굶어 죽기 직전의 미미히코가 자신을 끔찍하게 따르던 닭 아즈키를 잡아먹고 살아난다는 결말도 마음에 듭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팔아넘기고 살아남는 왕따물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마을의 정체가 무엇인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조금 감점합니다만,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있을 수 없는 다리"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는 근사한 구름다리를 발견했다. 허나 마을에서는 구름다리는 이미 사십 년 전에 무너졌다고 했다. 둘의 말을 들은 숙소의 노파는 밤중에 넌지시 구름다리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구름다리가 무너졌을 때 아들을 잃었는데, 지나는 여행객들로부터 다리에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미히코는 다리에서 노파의 아들을 발견하고 둘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감동적인 상봉을 기대했지만 실상 소년은 그야말로 '귀신'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는 존재였다는 반전이 돋보입니다. 이전 수록작인 "수증기 사변"과 비슷한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다가 깜짝 놀랐네요. 하긴 이게 귀신의 본모습이겠죠.

반전에 더해 묘사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소설보다는 영상화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귀신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의 묘사도 좋지만, 특히 귀신이 노파를 데려가려고 하자 그녀가 미미히코를 붙잡고, 미미히코는 욕설을 하면서 노파를 어떻게든 떼어 내려 하는 처절한 묘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재미도 있고 반전도 있는, 괴담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작품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얼굴 없는 산마루"

언제나처럼 길을 잃은 로안과 미미히코가 우연히 방문한 마을 사람들은 미미히코를 보고 놀랐다. 이유는 그가 사고로 죽은 마을 사람 모키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미미히코가 자신과 똑같이 생기고 비슷한 인생을 살아간 모키치의 가족을 만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일상계 소품. 잔잔하고 여운을 주는 내용은 좋았습니다.

허나 모키치의 아내 야에의 말을 듣고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뻔한 결말, 그리고 미미히코가 모키치와 모든 면에서 똑같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건 단점입니다. 그냥 닮았다고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흉터까지 같다는 것은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조금 쉬어가는 느낌의 작품입니다.

"지옥"

이즈미 로안과 미미히코는 여행 중 강도를 만났다. 사로잡힌 미미히코는 신혼부부 후지와 요이치와 함께 축축한 구덩이 속에 갇혔다. 셋은 강도 가족이 던져주는 육포 조각을 먹으며 삶을 이어갔는데, 강도들이 한 명을 꺼내 준다고 제안해서 여성 후지를 올려 보냈다...

구더기 그득한 축축한 구덩이 감옥 묘사도 사람 잡는데, '후지가 빠져나간 뒤 육포가 아니라 신선한 고기가 던져진다'에서 시작되는 공포스러운 묘사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핵심은 강도 가족이 사람을 죽여 먹고, 가죽으로 생활용품 등을 만든다는 설정으로 스코틀랜드의 소니 빈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게 분명해 보입니다. 허나 단순히 영감을 얻은 수준은 아닙니다. 아이가 사람 얼굴 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노는 등의 디테일이 잘 살아 있거든요.

이러한 묘사에 더해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미미히코가 머리카락을 엮은 줄을 이용하여 요이치를 끌어 올렸던 밧줄을 회수하고, 구덩이에서 탈출하여 역으로 강도 가족을 구덩이에 쳐 넣는 데 성공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가 보니 강도 가족이 구덩이 속에서 서로를 잡아먹고 있었기에 뚜껑만 덮고 도망쳐 온다는 결말까지 정말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이런 류의 돌직구 고어 호러는 오츠 이치의 특기이기도 하죠. "ZOO - seven rooms"처럼요.

물론 해당 단편과 단점은 동일합니다. 왜 강도 가족이 포로를 잡자마자 죽이지 않고 귀한 육포를 먹여 가며 살려두는지가 설명되지 않는 점 등 세부 설정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제법 있는 탓입니다.

그래도 섬찟함과 독자를 몰입시키는 맛은 수록작 중 최고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전 작품이 쉬어가는 느낌이라 공포심이 더욱 배가된 듯한데, 목차도 작가의 의도인지 살짝 궁금해지는군요.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전편의 경험으로 미미히코가 여행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즈미 로안은 다른 고용인과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로안은 미미히코에게 동행인이 죽었다며,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려주는데...

떨어진 빗을 줍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줍는 것이기에 꼭 빗을 주워야 할 때는 발로 한 번 밟은 뒤 주워야 한다는 설정이 바탕입니다. 빗을 그냥 주웠다는 고용인이 머리카락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데, 입에 들어 있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니 엄청난 양이 나왔다는 부분까지는 평범한 괴담입니다.

그러나 노파가 빗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거짓말로 그가 지어낸 이야기이며, 머리카락은 죽은 어머니의 것이라고 밝혀지는 결말이 아주 독특했습니다. 괴담을 너무 좋아한 청년이 자작극을 벌이면서까지 괴담이 되려 했다는 내용이니까요. 누군가의 이야기가 괴담이 된다는 점에서 "백귀야행"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단순 괴담이 아니라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결혼한 뒤 온갖 괴롭힘을 당하던 여자가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그녀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데...

이즈미 로안이 길치가 아니라 사실은 차원을 이동하는 능력을 가진 텐구의 자식이라는 설정을 알려주기 위한 이야기.

단순한 설정 보강용이라 하나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자를 괴롭히던 시댁에 뭔가 천벌이 내렸다는 이야기라도 있었더라면 완결성이 있었을 텐데요. 별점은 빵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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