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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0

북로우의 도둑들 - 트래비스 맥데이드 / 노상미 : 별점 4점

북로우의 도둑들 - 8점 트래비스 맥데이드 지음, 노상미 옮김/책세상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대공황 직후 약 1930년대까지)까지 기승을 부렸던 책 전문 절도범들, 그리고 그들을 잡아 넣기 위한 도서관 특별 수사관들의 활약을 그린 논픽션입니다. 제목의 북로우는 맨해튼 애스터 플레이스에서 유니언 스퀘어까지 죽 이어진 4번가의 여섯 블록을 의미합니다. 책들이 늘어선 거리, Book Row라는 말에 걸맞게 책방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고 하네요. 도둑들은 북로우 일부 서적상들 및 그들이 지휘하는 도둑들(북 스카우트)을 의미하고요.

북로우에 터전을 잡고 활동하던 악덕 서적상 골드가 뉴욕 공공도서관 소장품인 에드거 앨런 포의 초판본 "알 아라프, 티무르" 초판본을 손에 넣은 뒤(정확하게는 골드 밑에서 북 스카우트로 일한 듀프리가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알 아라프, 티무르와 주홍 글씨 초판본, 백경 초판본을 훔친 뒤), 그를 잡기 위해 활약했던 공공도서관 특별 수사관 버그퀴스트의 노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서적 절도 사건도 다수 언급되며, 희귀본 시장이 어떻게 커져갔는지와 그에 따라 도서관들이 어떻게 책 절도범들에게 노략질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배경 설명도 함께 합니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논픽션다운 디테일입니다. 특히 당대 책 절도에 대한 설명은 타의추종을 불허합니다. 책 절도는 대단한 기술이나 전략이 필요치 않다, 도서관과 사서들의 부주의 탓에 절도가 쉬웠다, 필요한 것이라곤 훔친 책을 집어 넣을 수 있는 커다란 코트와 가끔 가다 쫓길 경우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 정도였다는, 시대를 연상케하는 언급부터 시작하여 책을 훔친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 눈에 띄는 마크나 도장 제거 등 - 와 북 스카우트라고 불리운 도서관 책 절도범들과 책서점 주인이 손을 잡고 사업을 키워가는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참고로, 이렇게 도서관 책 절도범이 기승을 부린 이유는 책 절도범을 잡더라도 치안판사들이 고소를 취하하는 등 심각하게 처벌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하네요. 리스크는 적고 수익은 높아지니 많은 사람들이 뛰어든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네 사고 방식인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과 서울대 출신 책도둑, 공시생 책도둑 등이 선처를 받고 훈방되었다는 뉴스가 떠오르네요.

도둑들을 잡기 위해 뉴욕 공공도서관 설립 된 후 특별 조사관으로 활동한 길야드, 버그퀴스트의 활약의 디테일도 못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을 꼽아보면, 도서를 대출한 후 반납하지 않고 대출자가 사라진 사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길야드는 대출자가 살았던 우체국장에게 우편물을 전송하는 새 주소를 알려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개인정보 유출 방지 목적?), 옛 주소로 먹지 한 장을 숨긴 등기 서류를 보냈습니다. 등기 서류가 우체국에 도착하면 주소록이 고쳐질 것이라 생각하고, 봉투에 이사 간 곳의 새 주소가 쓰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송 되기 전 회수한다는 전략이었지요.
버그퀴스트는 뭐니뭐니해도 핵심 이야기인 골드 체포 작전의 활약이 가장 눈부십니다. 수사 권한이 없었기에 함정 수사를 펼치는 등 노력도 눈물겹지만, 끝까지 노력해서 결국 골드에게 실형을 선고받게 만드는 결말이 아주 통쾌한 덕분입니다. 그것도 싱싱 교도소에 수감시켰던만큼, 기쁨이 더 컸을 것 같네요. 이 과정에서(인간의 갱생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 태도를 갖추고 있는) 버그퀴스트의 진심어린 설득에 넘어가 책 절도 박멸에 동참하는 구 절도범 마호니, 윔스와의 인연은 시대를 느끼게 해 주고요. "자네도 볼장 다 봤잖아. 우리 쪽으로 오지그래?"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의리물이 떠오르는 낭만적인 이야기였거든요. 그런 시대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참고로, 후일담은 조금 씁쓸했습니다. 뻔뻔한 절도범 헤럴드, 절도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골드와 스미스 등 악덕 서적상들 모두 범죄가 밝혀진 이후 짤막한 재판과 수형 생활을 거치고나서 다시 떵떵거리면서 살았다니까요. 그나마 골드 사건이 마무리되고 희귀본과 값진 책들은 도난 당하지 않도록 따로 분리해 이용을 엄격히 제한하게 되었으며, 책을 수집하던 사람들도 죽으면서 소장품과 희귀본을 도서관과 대학에 기증하는 사람이 많아져 시장 자체가 사라진 덕에 현재는 이런 류의 절도가 거의 없어졌다고 하니 다행일 뿐입니다. 최근은 도서관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는 것도 많이 어려워졌지요.

그 외에도 다양한 희귀본 관련 재미있는 이야기도 가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포의 작품 관련 이야기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뭉텅이로 팔린 책 더미에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이 처음으로 발표된,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그레이엄스 매거진이 포함되어 있었다던가, 가난하게 살던 노파가 근방 서적상 존 루미스 씨에게 옛날 책을 팔려다가 포의 첫 시집 "알 아라프"를 팔게 되었다는 등입니다.

이렇게 햇수로는 40 ~ 50년에 걸친, 방대하고 자세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등장 인물과 사건도 많지만 시대 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내용도 재미있어서 쉽게 읽히는 멋진 책입니다. 잘 알지 못했던 20세기 초반 책 절도에 대한 지식도 상세하게 알 수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희귀본을 탐색하던 추억이 떠올라 더 공감이 갔습니다. 그때 구했던 책들 중 다수 - "점성술 살인사건", "불야성""석양에 빛나는 감""얼굴에 흩날리는 비""내가 죽인 소녀" 등등등 - 거진 다 복간되어 이제는 의미가 없습니다만ㅡ 괜히 그 시절이 떠오르네요. 아 그립습니다.

다만 수사관들이 도둑들에 비하면 열세라 밀고 땡기는 맛이 부족하다는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도둑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는 후일담 역시 씁쓸한데 이 모두 실화에 기초한 만큼 어쩔 수 없는 부분겠지요. 논픽션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17/03/18

도서관의 살인 - 아오사키 유고 / 이연승 : 별점 2점

도서관의 살인 - 4점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제가오카 고등학교 기말 고사 기간 중에, 요코하마 시립 가제가오카 도서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이었던 피해자 시로미네 교스케는, 가제가오카 고등학교 도서위원장 시로미네 아리사의 사촌오빠였다. 사건 현장에서 다이잉 메시지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었고, "아노하나" 블루레이를 사기 위해 우라조메 덴마는 경찰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건에 협력하게 되는데...

오타쿠 탐정 우라조메 덴마가 등장하는 '관' 시리즈 제 3권입니다. 이번에는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이 무대인 이유는 잘 설명됩니다. 아리사가 쓴 "자물쇠의 별나라"를 몰래 도서관 책처럼 꾸며놓고 반응을 지켜봤다는, 자그마한 장난 때문으로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덕분에 문이 잠긴 도서관에 피해자 및 다른 인물들이 각자의 목적으로 잠입한다는 전개도 설득력 있고요.

그리고 트릭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차이를 보입니다. 주어진 정보를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하는 후더닛 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안경은 묘사 자체가 아예 노골적으로 "이건 정보야!"라고 알려주는 수준이에요.

라이트 노벨스러운 만화적인 캐릭터들도 여전히 볼거리입니다. 우라조메의 재수없음은 한결같고, 유노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유쾌합니다. 유노의 오빠 하카마다 유사쿠의 한결같은 오해, 우라조메를 타도하기 위한 야쓰하시 지즈루의 작전과 기말고사를 둘러싼 경쟁 등 소소한 이벤트도 즐거웠고요. 개인적으로는 유노의 팬티 엿보기 관련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네요.

하지만 여러모로 이전 작품에 비해 시시하며 완성도도 낮습니다. 트릭이 없는 탓도 크지만, 우라조메의 추리 역시 약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다이잉 메시지가 조작되었을 거라는 추리입니다. 다이잉 메시지를 쓰기 위해서 손을 불빛으로 비추고 있어야 했다는 전제부터 납득하기 어려워요. 일본어 "구"와 동그라미를 그리는데 불빛이 왜 필요할까요? 그리고 "구"가 아니라 숫자 7과 0을 쓴 것이라면 애초에 불빛은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 표지 등장인물에 동그라미가 쳐진 것은 우연일 수도 있는데 이 정도 추리로 조작이라고 단언하는건 잘못입니다. 이를 지적하지 못하는 경찰은 바보고요.

범인을 특정하는 중요한 단서인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추리 역시 문제입니다. 머리카락에 피가 묻었다고 그 자리에서 잘라낼 생각을 한다는 것 부터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걸어서 몇 분 안되는 거리에 집이 있는데, 구태여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머리카락을 현장에서 자른다? 게다가 범인이 현장에 증거를 남기지 않는데 광적으로 집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말도 안됩니다. 대충 물로 씻고 집에 가서 정리하는게 당연합니다. 피묻은 머리카락이 "무선조종 형사"에 흔적을 남긴 정도로 끝냈어야 했는데, 머리카락임을 강조하기 위해 지나치게 억지를 부렸어요.

무엇보다도 동기는 최악입니다. 아니, 동기가 없습니다. 아들이 걱정되어 도서관에 따라간 어머니가 아들을 때려 죽인다? 전혀 상식적이지 않잖아요. 현지에서도 동기 때문에 말이 많았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전작 "수족관의 살인" 리뷰에서 단점으로 어처구니없는 동기를 지적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동기가 없는 후속작을 발표한걸 보면 작가에게 동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네요. 아무리 다른 부분이 논리적이고 잘 쓰여졌다 하더라도 이 점 때문에 본격물로서 합격점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고전 본격물에 흔해빠진 유산 상속복수라는 동기가 반복되는건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동기도 본격물에서는 용의자를 특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니, 흔해빠져도 설득력있다면 쓸 수 밖에 없으니까요.

아울러 모든 추리는 범인이 남긴 흔적을 통해 진행됩니다. 즉, 경찰의 끈질긴 수사로 범인이 밝혀졌어야 합니다. 이렇게까지 단서가 나오지 않고 사건에 미궁에 빠진다는건, 여러모로 현실적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우라조메 덴마의 과거를 캐기 위해 유노가 나선다는 이야기도 별다른 흥미를 자아내지 못합니다. 솔직히 관심도 없어요. 그래봤자 중학생 때 있었던 사건, 뭐 그리 대단한게 있겠습니까. 설령 그럴듯하다고 해도 오타쿠라는 설정 외에 또 다른 설정을 추가하는건 반대입니다. 외려 오타쿠라는 캐릭터가 점점 흐려지고 있는게 문제로 보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쾌하고 즐겁지만 단점도 명확합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를 계속 읽을 자신이 없네요. 이대로라면 구태여 더 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2016/07/22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노리즈키 린타로 / 최고은 : 별점 1.5점

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 4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엘릭시르

신본격의 기수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단편집입니다. 최초의 단편집이며, 데뷔작을 비롯해 "요리코를 위해"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까지 비교적 작가의 초기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은 역시나 초기작답습니다. 완성도에 문제가 많거든요. 신본격 작가다운 트릭, 특유의 논리는 여전하지만 이러한 추리적 요소들이 설득력 있게 사용되지 못한 탓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데뷔작인 "월광게임"도 아주 별로였었는데, 당시(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는 이 정도 수준으로도 데뷔하고 작가가 될 수 있었던게 놀랍네요. 문학계도 버블이 만연했었나 봅니다.

물론 지금의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입니다. 몇몇 장편들은 아주 좋았고, 단편 역시 "녹스 머신"은 제 취향이 아니었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콜 Y의 비극"의 경우 직접 번역하여 소개드릴 만큼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 수록작들은 거장의 편린조차 느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작품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팬이 아니시라면 굳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 아리아케 쇼지가 교수대에 선 직후,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했다. 검시 결과 니코틴 중독사였다. 교도소장은 참관 검사의 동의를 받아 극비리에 노리즈키 부자에게 사형수가 사형 직전 독살당한 해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전형적인 불가능 범죄 설정이 흥미를 자아냅니다. 이전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서 사라진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트릭이 없는 우발적 범행에 불과한 탓입니다. 만약 아리아케가 담배를 피웠다면 이 범행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테고, 차를 아리아케가 마신다는 것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의자들이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경찰 수사가 시작되었다면, 미화원 나카미네가 본인이 아니라는 건 바로 들통났을 테니 사건이라 부르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합니다. 불필요한 장황한 설명은 지루했으며, 고장 난 소각로와 파쇄기의 존재가 용의자를 좁히는 데 큰 도움을 줄거라는게 뻔히 보이는 것 역시 별로였습니다. 이에 바탕을 둔 노리즈키 린타로의 추리는 괜찮지만, 불필요한 요소였어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아들이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절망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동기는 최악입니다. 어찌 되었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제일 바람직했을 테니까요. 설령 아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본인이 된다 하더라도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면 되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끼워 맞춘 것도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았고요. 차라리 영화 "모범 시민"처럼 피해자 중 누군가의 가족이 편안한 죽음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참신한 설정 외에는 건질 게 없는 작품. 별점은 1.5점입니다.

"상복의 집"

도마 가문을 지배하는 어머니 사요에게 장남 야스노리는 꼼짝도 못하지만, 차남 가쓰키는 반항하여 집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이 다시 모였으나 큰 싸움 끝에 가쓰키는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가족과 함께 찾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도마 사요가 독살되고 가문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노리즈키 총경이 수사에 참여하는데...

노리즈키의 친척 가문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데 마음에 들었습니다. 추리 매니아의 첫 작품다운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덕분입니다. 특히 상식을 깨는 "반전"의 매력과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동기, 두 가지가 잘 맞물려 있는게 좋습니다.

반전부터 설명하자면, 범인은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도마 스미오일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서 진범을 찾기 위한 추리를 펼치지만, 사실은 스미오가 범인이 맞다는 겁니다.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아이디어였습니다. 이에 더해 스미오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완벽합니다. 한눈에 반해버린 사촌누나 마리를 다시 보려면 가쓰키가 집에 돌아와야 하고, 그러려면 할머니가 죽어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적절하게 삽입한 복선 — 스미오의 멍한 상태와 시험 점수 등 — 도 탁월했고요.

한마디로 데뷔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카니발리즘 소론"

화자 ‘나’에게 노리즈키 린타로가 찾아왔다. 둘 모두의 지인인 오쿠보 마코토가 동거녀 미사와 요시코를 죽이고 요리해 먹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공부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가 펼치는 고금동서에 걸친 식인론(論) 덕분에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합니다. 그녀를 먹은 것이 변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일종의 극단적인 복수라는 진상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이 전부라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며, 진상에 대한 아이디어는 좋았으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화자인 ‘나’가 사실은 오쿠보 마코토이며, 그가 정신이상자였다는 반전은 무리수에 불과했고요. 앞부분 몇 가지 묘사를 통한 복선을 깔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필요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추리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오쿠보 마코토의 식인 행위를 놓고 화자와 린타로가 그가 왜 그랬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만, 신선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지금 시점에 이 아이디어를 다시 풀어낸다면,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합니다.

"도서관의 잭 더 리퍼"

그보다 더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 — 추리소설에 대한 스포일러를 용서받을 수 없는 모독이라고 하며 노리즈키 린타로가 하는 말.

노리즈키 린타로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 사서 호나미로부터 추리소설의 표제지를 잘라내는 기묘한 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리즈키 린타로가 구립 도서관 사서 사와다 호나미에게 반해 그녀에게 수작을 걸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가 사건에 빠져든다는, ‘도서관 탐정’ 시리즈입니다. 강력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잔잔한 일상계인데, 작중 제공되는 정보로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는게 마음에 듭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현실적 이야기라는 것도 좋았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주얼 서스펙트" 영화 포스터로 스포일러 테러를 당한 적이 있기에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마쓰우라가 범인을 알고 있다면 왜 다른 직원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시설관리과 직원이 범인이라서 고발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건 말이 안 되죠. 다른 직원들도 많은데요.

그래도 나쁘지 않았으며 보기 드문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계이기도 하니 팬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노리즈키와 호나미의 밀당도 볼거리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 문은 위험"

호나미에게 데이트를 신청한 린타로는 그녀와 함께 도서관에 개인 장서를 기증하려는 사람의 미망인을 만나게 되었다. 기증자 스가타 구니아키는 환상문학 매니아이며 사후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미망인이 거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서관 탐정’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의 잔잔함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본격 밀실 트릭물입니다.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되어 자살로 알려진 스가타 구니아키는 사실 살해되었으며,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열리지 않는 녹색 문이 있다는 설정입니다. 

일단 본격물답게 가장 중요한 단서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피해자 스가타 구니아키의 ‘내가 죽으면 녹색 문이 열릴 것이다’라는 예언, 그리고 호나미의 한마디 말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트릭 자체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장서의 무게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현상 자체는 충분히 말이 되지만, 밀실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장서를 하룻밤에 옮기기를 반복한다는 건 비현실적입니다. 사람 한 명을 죽이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들고 위험하기도 하니까요. 주변 사람 눈에 띌 수도 있으며 짐을 나른 사람들 입막음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괜찮은 부분은 있지만 딱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신인의 작품이구나 싶었습니다.

"토요일의 책"

노리즈키 린타로는 [아이카와 데쓰야와 13의 수수께끼]라는 작가 경연 기획에 초대받았다. 작가 마타카케 나나미 여사의 실제 체험이 바탕이 된 수수께끼 풀이에 도전하는 기획으로, 수수께끼는 여사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토요일 저녁마다 한 중년 남자가 오십 엔짜리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꾸어 달라고 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린타로는 사와다 호나미에게 의견을 구하는데, 마침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사건으로 알게 된 추리 매니아 마쓰우라의 동창생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정은 재미있지만 사건은 대단치 않습니다. 구라모리 우타코에게 동전을 바꾸러 온 남자를 미행하는 것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도 전무하고요. 동전 스무 닢을 천 엔짜리 지폐로 바꾼 이유는 린타로의 추리 형태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동전 수수께끼보다 중요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타무라 가오루를 연상케 하는 복면작가 도키무라 가오루의 정체에 대한 것이죠. 이를 위해 일본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반가울 작가와 작품들이 약간 이름이 수정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별점은 1.5점입니다. 재미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추리와 트릭도 없고 추리 소설가에 대한 팬픽에 가까운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지난 날의 장미는"

혼마 시오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기를 반복 중이었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달라는 호나미의 부탁을 받은 린타로는, 그녀가 책을 읽지도 않고 책머리만 보고 고르며 다른 도서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평범한 일상계로 보이지만 진상은 의외로 묵직했던 작품입니다. 혼마 시오리가 불륜으로 임신한 딸을 제대권락(태아가 탯줄에 감겨 사망한 것)으로 잃은 뒤, 갸름끈이 있는 책만 골라 끈을 잘라내고 그 대신 책갈피를 꽂아 넣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하지만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실독증의 원인이 아이를 잃었기 때문이라면 책을 빌린 이유 역시 그 때문일 테고, 그렇다면 아이를 잃은 것과 책을 연결시키면 바로 답이 나오는 탓입니다. 물론 도서관과 책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기는 했습니다. 문제는 소재와 엮기 위한 동기 부분이 작위적이라는 겁니다. 책과 관련된 일상계는 "명탐정 홈즈걸" 쪽이 훨씬 낫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보다 설득력 있는 동기를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2010/05/04

6인의 용의자 - 비카스 스와루프 / 조영학 : 별점 3점

6인의 용의자 - 6점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조영학 옮김/문학동네

인도 내무 장관의 아들이자 재벌 총수이기도 한 비키 라이가 자신의 석방 축하 파티에서 살해당했다. 곧바로 현장에서 6인의 용의자가 체포되었다. 전직 관리이자 간디의 영혼이 빙의된 모한 쿠마르, 인도 최고의 미녀 배우 샤브남 삭세나, 미국 텍사스의 멍청한 촌놈 래리 페이지, 휴대폰 좀도둑 문나 모바일, 소안다만제도 최후의 부족인 옹게족 청년 에게티 옹게, 그리고 피해자의 아버지이자 부정부패의 온상인 내무장관 자간나트 라이 중 범인은 누구인가?

"슬럼독 밀리어네어" 원작자의 두번째 장편 소설입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영화를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감탄했습니다. 이 작가는 정말 대단한 "이야기 꾼"이더군요. 인도의 상류 계층이자 가공할 범죄자들을 비롯해서 인도 최고의 영화배우, 하층민 계급에다가 소안다만 제도 옹게족의 몇 안되는 생존자, 심지어 미국 텍사스 촌놈까지 6명이나 되는 인물들 각각의 이야기를 엮어서 하나의 거대한 장편을 짜낸 솜씨가 정말 대단합니다. 이야기들도 상류층의 부패와 범죄 이야기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옹게족의 보물찾기, 하층민과 상층민의 비극적 사랑, 텍사스 촌놈의 예기치 못한 알 카에다 납치와 같은 이야기들은 그 상상력과 허풍에 흠뻑 빠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정도 스케일과 상상력이라면 거의 호메로스 급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입니다. 어설프고 작위적이긴 해도 정의가 이루어지고 행복해져야 하는 사람들은 거진 다 행복해지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추리적인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감은 있지만, 이 작품은 범죄 그 자체가 인물별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한 작품이기에 애시당초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때문에 추리적으로 점수를 논하기는 어려운데, 그래도 장황한 설명 덕분에 동기는 확실하게 설명되며 사건의 진상이 여러 번의 반전을 거쳐 밝혀진다는 점 덕분에 평균 이상의 점수는 줄 수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몇가지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띕니다. 일단 "간디바바" 이야기는 왜 등장했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상류층의 부패를 다룰 목적이었더라면 자간나트 라이 이야기로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죠. 간디의 영혼이 빙의되었다는 설정도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고요. 또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이 상대적 약자로, 성적인 희롱대상 수준으로 등장하는 것도 조금 걸리는 부분이었습니다. 극단적인 남존여비사상이 인도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내내 만연한 성폭행과 강간에 대한 노골적 언급도 모자라서, 인도 최고의 여배우가 텍사스의 멍청한 촌놈과 결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는 전개는 납득하기 힘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인도의 상황을 고발하며 개혁의 메시지를 전하는 후반부는 좀 뜬금없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재미 하나는 충분한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를 걷어내거나 간략화시키는 등의 각색 작업은 필요하겠지만 "슬럼독 밀리어네어"처럼 영화가 나와주면 좋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판권을 사 와서 박정희 시대를 무대로 각색해서 영화를 만들어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나저나... 막장오브더막장인 인도의 상황이 정말로 이정도인지 궁금해지네요.

덧붙여, 이 책은 제가 이사온 산본 중앙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입니다. 이 책 뿐만이 아니라 최근 읽은 대부분의 책은 도서관에서 읽거나 빌려 읽은 책이죠. 제가 도서관을 통해 읽은 책이 2개월도 안됐는데 벌써 35권정도 되네요. 저는 도서관이 동네에 있어서, 또 도서관이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너무 행복합니다.

2016/12/01

장서의 괴로움 - 오카자키 다케시 / 정수윤 : 별점 3점

장서의 괴로움 - 6점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정은문고

유명한 장서가로 수 만권(2~3만 권 정도?)의 책을 보유한 저자가 장서 보유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입니다. 개인 경험담과 이런저런 생각을 펼쳐보이는 에세이지만, 장서 구입과 관리 등 다양한 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실용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책의 성격만 보면 얼마 전 읽은 "책장의 정석"과 비교됩니다. 차이점이라면 "책장의 정석"은 가지고 있는 책을 '관리'하는 팁을 제공한다면(심지어 관리할 수 있는 분량만 보유하도록 적절한 처분법마저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이 책은 '관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장서가를 위한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관리'를 위해 책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저자 스스로 '책이 너무 많이 쌓이면 지적 생산의 유통이 정체된다. 사람 몸으로 치면 혈액순환이 나빠진다. 피가 막힘없이 흐르도록 하려면 현재 자신에게 있어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일단 손에서 놓는 편이 낫다'고 하는데, 이는 "책장의 정석"과 일치합니다.

다양한 일화가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개인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들은 당연히 아주 실감나고요. 헌책방, 고서를 찾거나 구입하는 것에 얽힌 본인의 경험담, 그리고 책을 정리하는 방법과 팁 등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 합니다.

다른 장서가들과의 인터뷰라던가 그들만의 책 보관 방법, 장서가가 등장하는 여러 가지 영화와 콘텐츠 등 장서에 얽힌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들도 가득합니다.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책이 사는 집"을 지은 장서가 네기시 씨의 인터뷰였습니다. 이유는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죠.

책을 줄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소개하면서도,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책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서관을 잘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에 관련된 원고를 쓰다가 어쩌다 보니 도서관에 대한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는데, 정말이지 저자는 어쩔 수 없는 장서가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자가 소개하는 이 분야의 베스트는 오다 미쓰오의 "도서관 산책"입니다.

그리고 책을 줄이는데 제일 효과적일 수 있는 전자 서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눈에 띕니다. 책은 단순히 내용물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동의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앞으로 전자 서적의 발전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아울러 장서가답게 이런저런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이 역시 눈여겨볼 만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책 정리법(책이 너무 많으면 안 된다)을 송나라 학자 구양수의 시필에 나온 '명창정궤'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햇빛 잘 드는 창 아래 깨끗한 책상, 그 위에 책 한 권이면 충분하지 않냐는건데, 이를 12세기 일본의 가인 가모노 조메이의 움막과 연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걸 보면 학식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어요. 책을 많이 읽으면 저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인용과 연결이 가능할지 궁금해지네요.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인용이 많습니다. 몇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문필가 요시다 겐이치의 말인 "책장에 책이 5백 권쯤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루에 세 권씩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참으로 와 닿습니다.
유명한 장서가 다니자와의 명서 감정술도 비슷합니다. "명저라는 홍보에 넘어가 샀던 책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류 이하 책을 이것저것 찾아 읽지 않았다면 초일류를 초일류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인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당연하지만 이런저런 책들도 제법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영화 속 서점과 도서관이라는, 영화 속에 책이나 책장이 나오는 영화를 엮어놓은 책이 가장 끌립니다. 영화 언젠가 책 읽는 날의 후일담을 엮은 동명의 책에서 영화 속 주인공인 독서가 미나코가 좋아한 10권의 책 목록도 마찬가지예요. 아는 책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과 앤 모로우 린드버그의 "바다로부터의 선물"밖에는 없는데, 저자 역시 극찬하고 있는 "티보 가의 사람들"은 굉장히 방대한 분량이지만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책은 실물 크기 일러스트에 의한 "낙엽도감"이지만요. 수집가로서의 장서가를 다룬 '남자는 수집하는 동물' 챕터에서 소개된 "소년소녀 쇼와 미스터리미술관"이라는 책도 꼭 읽어보고 싶고요.

이렇게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일본' 기준이라는 점입니다. 앞서 이런저런 유용한 팁이 많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한국의 거주 문화와 책에 대한 일반적인 경우를 놓고 보면 그렇게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정말로 책을 좋아한다면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보장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본인이 장서가시라면 한 번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 역시 500권도 안 되는, 장서라고 하기는 초라한 수준의 책만 갖추고 있지만 책을 좋아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더 늘리면 안 될 것 같긴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미나코가 좋아한 10권의 책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티보 가의 사람들 - 마르탱 뒤 가르 (국내 출간)

안녕, 콜럼버스 - 필립 로스 (국내 출간, 굿바이 콜럼버스)

아름다운 여름 - 체사레 파베세 (국내 출간)

바다로부터의 선물 - 앤 모로우 린드버그 (국내 출간)

실물 크기 일러스트에 의한 낙엽도감 - 요시야마 히로시 / 이시카와 미에코

여자 - 카터 브라운

미국의 송어낚시 - 리처드 브라우티건 (국내 출간)

열두 달 반찬 - 고지마 신페이

하늘을 나는 교실 - 에리히 케스트너 (국내 출간)

사이좋은 부부 - 오다 사쿠노스케

2024/05/04

설계자들 - 김언수 : 별점 1.5점

설계자들 - 4점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아 출신 래생은 설계자들의 설계를 수행하는 암살을 업으로 삼고 있다. 래생이 속한 도서관이 신흥세력 한자에게 서서히 밀려나는 와중에, 설계자 중 한명인 미토를 만났다. 그녀는 과거 설계 탓에 부모님이 죽고 동생은 불구가 된 것에 대한 복수로 설계자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려고 비밀 장부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래생에게 한자와 도서관의 비밀 장부, 서류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이라는 목록을 소개해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 유일한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서 관심을 두고 있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래생'이라는 시적인 이름의 암살자가 암살 대상자인 '장군'과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 설계자의 명령을 어긴 동료 '추'와 술잔을 나누는 장면, 래생을 노린 흑막 미토 자매와 처음 만나는 장면, 최고의 암살자 '이발사'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 상대편 보스인 '한자'와 담판을 지으며 생명을 내 놓는 장면 등에서 선보이는 묘사, 분위기는 굉장히 멋드러집니다. 음모와 살인이 난무하는데도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게 인상적이에요. "잭 리처" 시리즈와 같은 미국식 범죄 스릴러는 '화끈함'을 강조하는 선명한 색채의 팝 아트라면, 이 작품은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흑백 수묵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타임지에서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나 싶네요.
애완동물 화장장에서 암살한 사체를 태워 은닉한다는 설정에 대한 묘사도 좋았어요. 화장장 주인 털보가 세 딸의 아버지로 생활고를 겪고 있으며, 사체를 태우기 전에 나름의 제사를 진행한다는 기묘한 현실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위기 외에 건질건 별로 없습니다. 기본 설정이 굉장히 유치하고, 내용이라고 부를만한게 없기 때문입니다.
기본 설정은 기본적으로 '설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완벽한 설계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설계대로 암살을 실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래생이 속한 '도서관'의 관장이 '설계자들'의 사주를 받아 암살을 자행하는 조직의 우두머리였고, 그 자리는 지금 관장의 후계자였던 한자가 세운 회사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유치하지요? 차라리 대 놓고 이건 현실이 아니다, 만화와 다를게 없다는 식으로 독자를 설득시키는게 차라리 나았을텐데, 앞서 설명드린대로 묵직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잡으니 굉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협 영화의 탈을 쓴 예술 영화였던 왕가위의 "동사서독"이 떠오르네요.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고아 출신으로 스스로 한글을 깨우쳤다는 시니컬하고 허무주의적인 암살자 '래생', 설계자들에게 희생된 가족의 복수를 위해 스스로 설계일을 하면서 음모를 꾸미는 '미토' 등의 캐릭터도 비현실적이며 모두 다른 작품에서 너무 많이 봐서 신선한 맛도 없습니다. 대표적인게 반시연의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입니다. 해결사 출신 호우는 래생과 아주아주 흡사하고, 건방지고 무신경한 여성 캐릭터들 성격도 판박이였어요. 친구 추가 대상자 창녀에게 연민을 느끼고 살려주었다가 표적이 된다는건 "장미빛 인생"이고요. 고아들에게 살인 기술을 가르쳐 킬러로 키운다는 '시티 헌터' 류의 설정은 이젠 지겹습니다.

내용도 별다른게 없습니다. 대단한 실력자로 보였던 미토가 하는게 없는 탓이 큽니다. 그녀는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설계의 세계를 없애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하지만 래생의 힘을 빌어 조직의 비밀 장부를 손에 넣는 것 밖에는 하는게 없습니다. 그것도 치밀한 설계가 아니라, 단순하게 정면으로 조직 금고가 있는 곳에 쳐들어가서 빼앗아올 뿐이며, 활용하는 방법도 일반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게 한다는게 전부입니다. 즉, '설계자'라는 명칭에 걸맞는 계획이나 설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400페이지 분량에서 래생과 세계관에 대한 설명에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실제 미토의 계획이 진행되는 분량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뭔가를 풀어낼 분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래생이 죽음을 택하는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죽는다고 미토 일당이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미토의 계획대로 법이 나서서 조직을 수사하고 심판받게 하려면, 그녀의 음모와 존재는 조직에게 발견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한자의 숨통이라도 확실히 끊은 것도 아니고.... 죽기 전에 새 옷을 사고 단장하는 등으로 분위기는 한껏 끌어올리지만, 이건 그냥 개죽음입니다. 작가가 분위기에 취해서 그냥 써내려간 느낌이랄까요.
시대에 뒤처진 도서관이 한자의 세력에 의해 몰락해 간다는 것도 너무 뻔한 이야기라 식상했습니다. 시대 흐름을 타지 못한 깡패들이 신흥 세력에게 무너져버린다는건 "영웅본색" 이후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었죠.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서구권에서는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우리 시각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독특함을 불러 일으킨 요소를 걷어내면 뻔한 설정과 이야기에요.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2/07/02

미스터리를 읽은 남자 - 윌리엄 브리튼 / 배지은 : 별점 3점

미스터리를 읽은 남자 - 6점
윌리엄 브리튼 지음, 배지은 옮김/현대문학
인기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를 답습하는 작품은 많습니다. 탐정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셜록 홈즈의 경우는 작가 사후에도 다른 작가들에 의한 시리즈가 계속되었고, 에놀라 홈즈와 같은 가족이 등장하는 스핀 오프에 각종 패러디와 파스티슈 물까지 합치면 그 수는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저 역시 <<경성 탐정록>>이라는 파스티슈 물로 숟가락을 얹었었지요.
문제는 누구나 다 아는 탐정이 등장하기에 별다른 변주를 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셜록 홈즈가 21세기에 환생을 하든, 이세계로 전생을 하든간에 그는 셜록 홈즈이니까요.

하지만 이 단편 시리즈는 이런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해결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그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 작품을 읽은 누군가가, 자기가 흠모하는 탐정을 따라해서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에 시대와 탐정역에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거든요. 등장하는 탐정들 모두가 고전 정통 본격물 탐정들이라서, 모든 이야기들이 고전 정통 본격물에 어울리는 추리물이라는 것 역시 마음에 든 점이었고요. 작가 취향이 저와 비슷한게 확실해 보입니다.

물론 몇몇 작품들은 원래 탐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고전 정통 본격물 애호가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좋은 시리즈라는건 분명합니다. 뒤이은 수록된, 저자의 다른 시리즈인 스트랭 씨 시리즈 역시 고전 정통 본격물로서 나쁘지 않은 수준을 보여주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덕분에 오랫동안 겪고 있었던 고전 정통 본격물 금단 현상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11편이나 되는 "~를 읽은 남자" 리뷰를 쓰다보니 힘이 빠져서, 스트렝 씨 시리즈는 제일 괜찮았던 한 편만 소개드립니다.

<<존 딕슨 카를 읽은 남자>>
에드거는 존 딕슨 카 소설에 나오는 것같은 밀실을 만들어 삼촌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핵심은 벽난로였다. 삼촌을 살해하고, 깨끗하게 청소한 벽난로 굴뚝으로 빠져나온 뒤 난로에 불을 붙여 밀실로 만들 셈이었다...

아주 오래 전 읽었었던 작품. 존 딕슨 카하면 떠오를 '밀실'을 소재로 만든 작가의 처녀작입니다.
범인이 범행 계획을 앞 부분에 상세하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도서 추리물' 형식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본격 추리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블랙 코미디에 가깝지요. 그래도 재미만큼은 나무랄데 없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엘러리 퀸을 읽은 남자>>
엘러리 퀸의 광팬 아서 민디가 머무는 양로원에서 위책 노인이 애지중지하던 10달러 금화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일한 용의자 데니슨이 그들 앞에서 옷을 벗기까지 했지만, 금화는 찾을 수 없었다...

엘러리 퀸 광팬이 <<퀸 수사국>> 속 <<마약 부서 검은 장부>>라는 작품을 인용해가며 추리를 펼친다는건 시리즈 설정에 딱 맞아 떨어지는데, 사실 아서 민디는 별로 엘러리 퀸같지는 않았습니다. <<검은 장부>>에서의 트릭과도 아무 관련이 없고요.
오히려 원전보다 추리적인 부분은 훨씬 낫습니다. 아서 민디는 데니슨의 뺨 상처가 벌어진 이유, 계단을 끔찍히 싫어하면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긴 이유를 추리하여 진상을 밝혀내는데, 설득력 높은 완벽한 추리였기 때문입니다.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의 교과서같은 작품으로, 제 별점은 5점입니다. Hall of Fame!

<<읽지 않은 남자>>
몬티는 친구 포드에게 벽돌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암실용 방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포드는 몬티의 아내 헬렌이 죽은 교통사고를 일으켰지만, 몬티는 그건 사고였다며 포드를 달랬다. 두 남자는 곧바로 벽을 쌓기 시작했고, 몬티는 포드에게 그가 좋아하는 위스키 코노서스 초이스 반 병을 건넸다...

포드는 헬렌이 갑자기 도로 한 복판으로 뛰어나와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몬티는 집 앞 우편함에 포드 차 페인트가 묻었다는 것, 그리고 현장 근처에서 버려진 위스키 병을 찾아낸 뒤, 포드가 차에서 술을 마시다가 헬렌을 덮쳤다고 추리합니다. 그래서 복수를 위해 포드를 불러 벽을 쌓는 척 하고 암실 안에 가둬 버리고 말지요.

그런데 차 안에서 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고 당시 포드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판단한 수사 결과는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분명 사고를 일으킨게 분명한 포드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몬티를 당당하게 찾아온 경위, 그리고 제 발로 갇힌 방을 만드는데 참여한 것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했고요. 몬티는 포드가 에드거 앨런 포의 <<아몬티야도 술통>>을 읽지 않아서 이 함정에 빠졌다고 말하지만, 이건 책을 읽고 안 읽고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애초에 위험한 상황에 제 발로 들어간게 문제거든요.

읽지 않은 남자라는 변주는 좋은 발상이었는데, 결과물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렉스 스타우트를 읽은 여자>>
카니발에서 "뚱뚱녀" 역할을 맡은 거트루드는 연기를 위해 렉스 스타우트 작품을 탐독하다가 빠져들게 되었다. 쇼 단원 중 거트루드가 딸같이 아끼던 뱀 조련사 릴리가 살해된채 발견되자, 거트루드는 직접 사건을 해결하려 나서는데...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와 뚱뚱하다는 점, 그리고 아치와 같은 조수(?)가 있다는 연결 고리는 가지고 있지만, 내용 자체는 렉스 스타우트, 그리고 네로 울프와 별 관계는 없습니다. 평범한 추리물이에요.
그러나 정통파 본격물로 보기에는 애매했습니다. 핵심 단서인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반쪽짜리 메달에 적힌 BY-BY라는 글귀에 대한 단서 제공이 전무한 탓입니다. '비실이'라는 별명을 들으면 불같이 화낸다는 설정도 너무 후반부에서나 드러나서, 전개 면에서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었고요. 그냥저냥한 작품으로제 별점은 2점입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은 소년>>
시골 마을 라킨스코너에 벨기에 교환학생인 열 살짜리 천재 자크 뒤몽드가 찾아왔다. 자크는 마을 경찰 맥스 코리와 친구가 되는데, 어느날 라킨스코너에 수 명의 대학생들이 찾아와 기묘한 장난을 벌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이 노린건 희귀 우표였는데, 이걸 사다가 혹시 발각될까봐 다른 기묘한 사건을 벌였다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진상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도무지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마을을 들 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여러 명이 서로 모르는 사람인 척, 차례대로 원하는 우표가 나올 때 까지 우표를 그냥 사면 아무 문제 없이 끝났을테니까요. 독자가 뭔가 희귀 우표 관련된 사건이라고 쉽게 짐작 할 수 있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아울러 탐정역인 자크가 벨기에인으로 대화하다가 프랑스어를 섞으며, 심지어 10살 짜리가 있지도 않은 콧수염을 만지는 시늉을 한다는 식으로 포와로를 따라한다는 묘사는 심하게 억지스러웠습니다. 학생들이 노리던 우표는 인쇄 오류로 '콧수염'이 생긴 것 처럼 인쇄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억지 포와로 따라하기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고요. 추리도 별 볼일 없었습니다. 시리즈 최악의 작품으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아서 코난 도일을 읽은 남자>>
테리 왓슨에게 대학 후배 대니얼 블래싱검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던 사이인데다가, 뚱딴지같은 내용이어서 이유를 알기 위해 왓슨은 편지 속에서 언급된 다른 인물에게 전화를 건 뒤, 워싱턴으로 호출되었다. 알고보니 블래싱검은 타국 대사관에서 암약하는 스파이로, 중요한 목록이 담긴 상자의 비밀 번호를 편지 속에 숨겨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왜 테리 왓슨에게 편지를 보냈는지는 모른채 시간은 흘러만 가는데...

왓슨에게 보내진 엉뚱한 편지에 암호가 감추어져 있다는 설정은 흥미로왔습니다. 세개의 이어진 영어 알파벳이라는 암호도 단순해서 좋았고요. 무엇보다도 이 암호 때문에 테리 왓슨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결말이 아주 유쾌했어요. 암호는 "LMN"으로 이는 셜록 홈즈의 유명한 대사 - '엘레멘터리 왓슨 - 그건 기본이야 왓슨' - 를 떠올리면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LMN 테리 왓슨" 이 되니까요.
말장난이기는 해도,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었어야만 풀 수 있는 암호라는 점에서 시리즈 취지에도 잘 부합하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체스터턴을 읽은 남자>>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애독자 케니 신부는 추찹한 사진을 밀매하다가 자살했다는 교구민 팀 해링턴의 장례 미사 문제로 주임 시부 고거티 신부와 언쟁을 벌였다. 그 뒤 고거티 신부는 팀 해링턴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내 보라며 케니 신부에게 하룻 동안의 유예를 주었다. 그리고 케니 신부는 사건 담당인 깐깐한 언셀 형사와 함께 방문한 사건 현장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는데....

브라운 신부 스타일의 탐정물이라기 보다는, 브라운 신부가 가치 있는 작품이라는걸 증명하는 작품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특히 팀 해링턴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드러나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차에 반사되는 햇살을 보고, 추잡한 사진을 슬라이드로 보려면 '커튼'을 쳤어야 했는데 현장이 그렇지 않은걸 눈치채는게 아주 자연스러웠거든요. 깐깐한 언셀 형사가 설득당한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될 만큼 좋은 추리였습니다. 사진 배달부의 실수가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동기도 짧은 분량에 잘 드러나있고요.
여러가지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를 장황하게 펼치며 쉬운 말도 한번 더 꼬아서 말하는 브라운 신부와는 전혀 다른 신세대(?) 신부지만, 애정하는 브라운 신부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케니 신부 캐릭터도 마음에 드네요.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그 작품에 푹 빠졌다는 건 "~를 읽은 남자" 시리즈에 속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재미도 있고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좋은 단편 추리물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대실 해밋을 읽은 남자>>
정년 퇴직 후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잡무를 하게 된 프리처드는 어느날 도서관장 디컨 씨의 부름을 받았다. 추리소설 애호가 패러것이 도서관 이사회 회장 앤드루 킹과 건 내기 때문이었다. 패러것이 도서관 어딘가에 감추어 둔 책을 찾으면 그가 추리소설 초판본 컬렉션을 도서관에 기증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추리소설 매니아 프리처드가 앤드루 킹을 도와 패러것이 준 간단한 단서로 한 시간 안에 책을 찾기 위해 애쓰게 되는데....

아르바이트하는 추리소설 매니아가 자신의 취미를 이용해서 도서관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낸다는,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 추리 소설 매니아 프리처드 씨에게도 행운이 닥치는 결말까지도 아주 환상적이네요.

이야기의 핵심인 보물찾기 게임도 꽤 그럴듯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인 독자는 풀이 과정에 동참하기 어렵다는겁니다. "3.14"가 적힌 봉투 안에 "더블 더즌", 그리고 "몰타의 매"라고 적힌 카드가 한 장씩 들어있는게 힌트였는데, "3.14" -> 파이는 "Pie"로 바꿀 수 있고, "더블 더즌"은 24, "몰타의 매"는 "매"가 소문자라서 말 그대로의 새를 의미하므로 "검은 새"가 되고, 이게 "파이 안에서 구워지는 스물 네 마리 검은 새"라는 동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한국 독자에게는 쉽지 않은, 거의 불가능한 추리인 탓입니다.

그래도 재미도 있고, 추리적으로도 깔끔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조르주 심농을 읽은 남자>>
친구 해럴드와 함께 고가의 화물을 나르는 바니는 조르주 심몽의 메그레 시리즈를 탐독해왔다. 그들은 대저택에서 '라이트풋' 래리 쇼필드라는 고용인 앞에서 싣고 온 화물을 내려놓았다. 그는 별명 그대로 알록달록 화려한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러나 바니는 메그레 경감의 활약을 떠올리며, 래리 쇼필드가 가짜라고 확신하는데...

메그레 경감은 사실 대단한 추리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좀 우직하고, 인간 내면을 성찰하는 부분이 많은 편이죠. 그러나 성실하고 꼼꼼한데다가 관찰력이 뛰어난데, 이 작품 속 바니 역시 관찰을 통해 래리 쇼필드가 가짜라는걸 알아내게 됩니다. 그는 래리 쇼필드가 절대로 다리를 꼬지 않고, 발바닥을 계속 땅에 대고 있는걸 눈치채거든요. 부츠를 갈아신었는데, 새것이라는게 들통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단지 부츠가 새 것이라는게 그가 가짜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래리 쇼필드가 자기 입으로 흙길을 걸어 왔다고 말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부츠는 얼마든지 갈아 신을 수 있잖아요?
바니가 오지랖을 떨어서 쇼필드의 정체를 폭로한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설령 눈치를 챘더라도, 현장을 벗어나 경찰에 신고하는게 당연했습니다. 현장에서 총을 든 상대방을 위협해가며 추리쇼를 펼칠게 아니라요.

이렇게 단점이 더 눈에 많이 뜨이며, 메그레 경감의 특징을 잘 살린 것도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존 크리시를 읽은 소녀>>
에밀 프랫은 오랫만에 겨우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담당하고 있는 도킨스 사건 때문이었다. 영국인 도킨스는 미국으로 여행을 왔었는데,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도박으로 땄던 3천 달러 정도를 노린 범행이었다. 그는 죽기 전 경찰에게 "올드 피싱.."과 비슷한 말을 남겼다. 에밀 프랫의 딸 메릴리는 최근에 읽고 있는 존 크리시의 기디온 경정 시리즈에 나온 영국 코크니 말투가 해결의 실마리라는걸 아빠에게 알려준다....

기디온 경정의 활약보다는, 작품에 등장했던 영국 런던 토박이 코크니들의 은어가 단서가 된다는건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다이잉 메시지라는 억지스러운 설정에 더해 죽어가면서 은어를 써서 단서를 남길 이유가 설명되고 있지 않은 등,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다는건 아쉬웠어요. 당연히 한국인 독자로서는 추리하기도 힘든 내용이었고요. 그냥저냥한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를 읽은 남자들>>
역사 교사 폴 해스킬, 전화선 보수 기술자 재스퍼 지머먼, 대장장이 가브리엘 둔, 은행장 시드니 워윅과 메리 팅커 술집 주인 핀들레이의 다섯 명은 모두 아이작 아시모프 박사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메리 팅커 술집에 모여 "흑거미 클럽" 처럼 수수께끼 풀이 놀이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진짜 작은 마을 홀컴밀스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없어서 놀이 속 수수께끼는 공상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에게 기자 에드거 바시가 진짜 수수께끼를 가져왔다. 마을 최대의 백화점 '밸류 투데이'의 사장인 마케팅 귀재 데이비 로터스가 천 달러가 들어있는 금고를 전시장에 공개하고, 금고를 열면 누구나 돈을 가져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비밀번호가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였다. 아시모프 팬들은 각자 자신만의 추리를 들려주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흑거미 클럽'에 대한 일종의 파스티슈 작품. 참석자들이 각자 내 놓는 추리들이 눈길을 끕니다. 감히 '흑거미 클럽'을 운운할 수 없는, 여러모로 부족한 추리들이었지만 각자의 직업과 전문 분야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잘 와 닿기는 했습니다. 마지막에 집사 헨리의 포지션인 술집 주인 핀들레이가 정답을 맞추고 천 달러를 얻는 결말도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밸류 투데이는 데이비 로터스의 철자를 가지고 만든 애너그램으로, 이를 이용하면 금고 번호를 알아낼 수 있다는 진상에 대한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한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런게 바로 정통 본격 고전 추리물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인 독자에게는 쉽게 추리할 수 없는 내용이기는 했지만요.

여러모로 아시모프의 원전인 걸작을 잘 이해하고 쓴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 2부 스트랭 씨 이야기 -
<<스트랭 씨 여행가다>>

스트랭 씨는 단체 버스 투어로 캐나다 여행을 떠났다. 그의 옆 자리에 앉게 된 건 제리 수녀였다. 그리고 여행 도중 제리는 가판대에서 나무로 된 십자가를 구입했는데, 그 십자가가 사라져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스트랭 씨는 귀국 직전 십자가 사건과 퀘벡에서 일어났던 은행강도 사건의 연관성을 추리해 내고, 버스에서 추리쇼를 벌이게 되는데...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인 고교 과학 교사 스트랭 씨 시리즈의 수록작 중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십자가를 '길포일' 이라는 여행객으로 변장한 은행강도 르클레어가 훔쳤던 이유는, 십자가를 포장했던 신문지 때문이었다는 추리가 특히 좋았습니다. 신문에 르클레어 사진이 실려 있었다는 이유는 십자가를 훔칠 충분한 이유가 되니까요. 비록 프랑스어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있고요. '알맹이보다 포장지가 중요하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은 왠지 "브라운 신부"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해서, "~를 읽은 남자" 시리즈로 썼어도 좋았을 것 같네요.
은행강도가 도주를 위해 미국인 단체 여행객으로 변장한다는 아이디어도 국경에서 어떻게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설득력있게 들렸습니다.

이렇듯 추리물로서 상당한 수작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시리즈가 더 이어지지 못했고, 국내 소개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4편만으로 끝난게 못내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2017/03/19

벙어리 목격자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3점

벙어리 목격자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어리석은 낙천주의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쉽게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는 게 보통이었다. - 에밀리 아룬델이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묘사

살인의 특징은 살인자의 기질을 암시해 주기 때문에 범죄의 실마리를 잡는 데 있어 필수야. - 포와로.

마켓 베이싱의 리틀 그린 하우스에 거주하는 부유한 노부인 에밀리 아룬델은 조카들과 함께 한 부활절 연휴 때 계단에서 떨어져 다쳤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고, 애견 밥이 가지고 놀던 공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걸 눈치챈 에밀리 아룬델은 포와로에게 편지를 보냈고, 무려 두 달 이 지나서야 이를 받은 포와로는 마켓 베이싱으로 향했지만 에밀리 아룬델은 이미 한 달 전에 사망했다...

몸 속 필수 영양소 중 하나인 고전 본격물 성분이 많이 부족해져서 집어든 여사님 장편입니다. 제게는 탄수화물급 영양소거든요. 바로 전 읽었던 "도서관의 살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제대로 된 고전 본격물을 선택했습니다. 의도는 아니었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후더닛물이더군요. "도서관의 살인"과 마찬가지로요.

포와로가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이유인 노부인의 의뢰 편지가 그녀가 사후 발송되었다는 도입부부터 무척 흥미롭습니다. 뒤이어 다양한 등장인물의 증언들로 진상에 접근해 가는 과정 역시 고전 본격물다운 공정함을 자랑하고요. 무엇보다도 고전 본격물의 핵심인 동기 부여와 이에 따라 용의자들이 속출하는 전개가 대단합니다. 주요 관계인인 찰스와 테레사 남매, 벨라와 타니오스 부부 모두 유산 상속에 혈안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누구 한 명 용의선상에서 빠지지 않는 덕분입니다. 심지어 찰스와 테레사의 어머니는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은 사람이라는 설정까지 갖췄으며, 그 외 등장인물 모두 수상한건 마찬가지에요. 이미 유산을 상속받은 로슨 양이 심령술에 빠진 이상한 노처녀로 그려지는 식으로요. "도서관의 살인"에서 가장 부족했던게 바로 이겁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하지만 이러한 점은 본격물이 갖춰야 할 기본 요소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탁월한건 증언과 인물 묘사가 결합되어 독자를 교묘하게 함정에 빠트리는 전개입니다. 놀랍게도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증언은 모두 진실이에요. 하지만 말을 한 사람이 워낙 수상한 탓에 독자들 모두 "이 사람 말은 못 믿겠는데?"라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뒤이은 증언들도 부정하게 되어 결국 진상에 이르지 못하게 되지요.
찰스 아룬델이 한 말이 대표적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에밀리 아룬델을 만났을 때, 그녀가 수정한 유언장을 보여주었다는 증언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모두 찰스가 돈 때문에 심한 짓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에밀리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유언장을 미리 보았다는 증언은 자신이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리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에밀리를 죽일 동기가 없다고 위장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게다가 여동생 테레사와의 다툼은 증언의 신빙성을 더욱 떨어트리고요.
이야기 전체가 이런 구성이라서 저는 함정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런게 본격물이죠!

세세한 디테일로 범인을 드러내는 점도 본격물스럽습니다. 타니오스 부인이 테레사를 따라, 하지만 보다 저렴하게 옷을 구해 입었다는 묘사와 에밀리 아룬델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 주치의 그레이너 박사가 후각을 상실했다는건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단순한 설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뭐 하나 허투르게 활용되지 않아요. 로슨양이 거울로 본 브로치는 이니셜이 반전되어 있을 것이며 그것은 아나벨라 타니오스의 약자다, 브로치는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싸져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테레사 패션을 따라하는 벨라가 서슴없이 구입했다. 벨라는 화학 교수의 딸로 인을 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레이너 박사는 인 중독의 뚜렷한 징후인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모두 추리에 이용되니까요. 심지어 아무 의미 없어보였던 로슨 양의 강령회 관련 증언까지도요. 그녀는 에밀리 양이 강령회 때 빛나는 심령체에 의한 "후광을 둘렀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모두가 정신나간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포와로는 그것이 '인관성 호흡'이라는 것을 간파하거든요. 이런게 본격물이죠!

트릭도 괜찮습니다. 간이 나빴던 피해자에게 인을 투여하여 간견병과 별 차이 없는 예후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건데, 굉장히 현실적이었어요. 로널드슨 의사의 자연사 확진 판정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기는 하나 에밀리가 평소 유사 증상을 오래 앓고 있던 환자라 충분히 걸어볼만 한 도박이었으니까요. 피해자가 자주 먹던 캡슐 중 하나에 투입하여 일종의 시한 장치를 만든 것도 그럴듯했고요.

또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완역판이라 주장하는 판본으로 읽었는데, 확실히 번역도 한층 높은 완성도가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포와로의 프랑스 어를 섞는 말버릇도 맛깔나게 잘 살려 놓았으며, 헤이스팅스와의 재담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거든요. 헤이스팅스가 이렇게나 유머러스하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등장인물들을 모두 수상쩍게 그리는 묘사가 과해서 읽는 내내 짜증이 난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실제 범인은 아니지만 제발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포와로의 추리가 진상에 도달하여 진범을 밝혀내기는 하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심약한 타니오스 부인이 시체를 재검시하자는 포와로의 주장에 겁을 먹고 자살을 하지만, 실제 재검시를 했어도 사인을 밝히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설령 실제 사인이 밝혀졌다고 해도 타니오스 부인이 그랬다는 증거도 없고요. 로슨양이 거울을 통해서 목격한, 타니오스 부인이 계단에 장치를 설치했다는 증언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을거에요. 마침 범인이 딱 좋게 자살했을 뿐, 제대로 범인을 옭아매었다고 보기는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뭐 이런 점도 본격물이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장, 단점 모두 고전 본격물스러운 작품입니다. 저와 같이 고전 본격물 성분(?)이 부족해 지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책 뒤 소개글처럼 "훌륭한 평균작품보다도 잘못 쓴 크리스티 작품이 더 낫다" 이니까요. 이 작품은 잘 못 쓰지도 않았고요.

2023/02/18

책과 열쇠의 계절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책과 열쇠의 계절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요네자와 호노부청춘 학원 추리 단편집. '고전부'나 '소시민' 시리즈와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탐정의 역할입니다. 이 시리즈는 두 주인공인 호리카와와 마쓰쿠라가 각자 추리를 펼치며 서로를 보완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약간 버디물스러운 느낌도 들어요. 뛰어난 관찰력과 독특한 발상의 추리력을 갖춘 호리카와는 뻔한 고등학생 탐정 캐릭터인 반면, 모든걸 의심하면서 추리를 시작하는 마쓰쿠라의 독특함은 나쁘지 않았고요.

또 두 주인공이 도서위원이라서 대부분의 이야기에 주제가 되는 책이 등장한다는 것도 차이점인데, 저 역시 독서 애호가(?)인지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상계로 한 획을 그은 작가답게 평범한 일상계로는 우수한 시리즈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913><913>>
도서위원 호리카와 지로와 마쓰쿠라 시몬은 선배 우라가미로부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금고를 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과거 둘이 에도가와 란포의 <<흑수조>> 속 암호를 풀었던 모습을 눈여겨 보았던 탓이었다.
일요일, 우라가미 선배 집에 방문한 둘은 할아버지 서재 방에 놓여져 있었던, 어울리지 않았던 책들이 단서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마쓰쿠라는 정보를 바로 공개하지 않고 따로 조사가 필요하다며 호리카와와 밖으로 나온 후, 그가 생각했던 의심을 털어놓는데...


등장하는 책은 많지만, 중요한건 할아버지가 남긴 단서가 되는 책들

마쓰쿠라의 의심은 우라가미 선배가 후배 둘에게 금고를 열어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무엇인지에서 시작됩니다. 가족이 정당한 유산 상속인이라면 금고를 여는 전문가를 부르면 됐으니까요. 그래서 마쓰쿠라는 우라가미 선배와 선배의 가족은 금고를 그렇게 쉽게 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추리합니다. 선배 집에서 대접받았던 차는 시판차와 똑같은 맛이었는데 그걸 끓여서 따로 찻주전자에 내 놓은 이유, 화장실을 간다고 했을 때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 이유 등 기묘했던 행동은 그 집이 선배 가족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찻잎이 어디있는지는 모르지만 살고 있는 척을 해야 해서 차를 끓여 내 놓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건 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까봐 걱정했던 것이었지요.
할아버지의 단서는 이상한 책의 분류 번호에 대한 것으로, 그것을 통해 금고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를 이용하여 선배 가족의 정체를 밝히는 작전을 펼친 것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책 4권의 3자리 분류 번호를 50음도로 변환하면 모두 6자, "타스케테쿠레 (살려줘)"라는 말이 된다고 조작하는 방식으로요. 이 작전으로 선배와 선배 가족의 눈을 돌린 틈에, 마쓰쿠라가 집 안을 조사하여 노인을 발견하고 구해내게 됩니다.
금고 안 내용물은 할아버지 그림과 가족 앨범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눈에 뜨이기는 합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건 서재방에 단서가 있고 그건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서재방의 책 중 다른 책들과 사뭇 다른 책이 있다는건 어른이 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금고 번호가 도서 분류 기호라는건 어른이 된다고 알 수 있는건 아니고요. 즉 할아버지가 말했던 단서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선배 가족이 금고를 열기 위해 후배를 부른 것도 이상했어요. 저 같으면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는 정도로 끝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은 아쉬웠습니다.

<<록 온 로커>>
도서위원 컴비 둘은 함께 미용실을 찾았다. 함께 가야 40% 할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점장이 "귀중품은 '반드시' 지참하실 것"을 말했고, 이걸 이발 중 이야기하는걸 저지했다, 그리고 곧 종료 시간이라고 말하고 난 뒤 염색이 필요해 보이는 손님을 받았다는 등의 단서를 조합하여 마쓰쿠라는 미용실에 최근 도난 사건이 있었고, 범인을 잡기 위해 점장이 함정을 팠다는 추리를 펼칩니다. 호리카와는 마쓰쿠라의 도움으로 둘의 예약을 받았던 곤도가 범인이라는걸 알게 되고요. 이 작전을 모르는 사람을 점장이 의심하고 있으니, 그걸 모르고 예약을 받은 곤도가 범인이라는 추리로요. 이는 결국 사실로 밝혀집니다.
마쓰쿠라의 추리에 이어 호리카와의 추리가 이어지는 티키타카가 볼만했고, 마지막에 범인 곤도가 도주하는걸 저지할 수도 있었지만 나서지 않았던건 소시민 시리즈와 비슷한 감성을 느끼게 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평범한 일상계로는 적절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일본의 미용실 모습은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는데 비해 남자 둘이 미용실을 가는게 굉장한 금기인 것처럼 묘사되는게 신기했습니다.

<<금요일에 그는 무엇을 했나>>
기말고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후배 도서위원 우에다 노보루가 호리카와와 마쓰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주 금요일, 학교에 누군가 침입하여 교무실 앞 창문이 깨졌는데 그걸 보고 학생지도부 요코세 선생이 노보루의 형인 불량 학생 우에다 쇼가 시험 문제를 훔치려 했다고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요코세 선생은 이른바 '명탐정' 같은 사람으로, 무슨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학생 누군가를 아무런 근거없이 범인으로 지목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에다 쇼가 그 날, 밤 늦게 돌아왔는데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둘은 우에노 쇼가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형제가 같이 쓰는 방을 수색하는데...


등장하는 책은 <<파랑새>>. 유리창을 깬 원인이기도 한 새와 연결되는 장치. 헌책방에서 산 이름을 알 수 없는 애장판 만화도 중요한 단서 중 하나. 그 외에도 노보루가 관심있어하는 책으로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판타지 시리즈가 언급됨.

추리를 통해 밝혀낸 우에다 쇼의 알리바이는 가족과 별거 중인 아버지 병문안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있어서 그 사실을 숨겼던 것이지요.
우에다 쇼의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라이켄'이라는 라면집 쿠폰을 찾아낸 뒤, 이상할 정도로 좁았던 집 등의 단서를 통해 아버지가 별거 중이라는 노보루의 답변을 끌어내어 우에다 쇼의 그날 행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완벽한 일상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사건을 맡아서 끌어가는 과정과 결말이 다소 석연치 않습니다. 우에다 노보루의 부탁부터 억지스럽습니다. 왜 호리카와에게 부탁했는지 모르겠어요. 작중에서도 우에다 혼자서는 도저히 알리바이를 찾을 수 없어서 그랬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호리카와에게 부탁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호리카와가 딱히 알리바이 찾기로 이름을 떨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친한것도 아니니까요.
호리카와가 부탁을 선뜻 받아들인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에초에 우에다 쇼는 증거가 집에 있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설령 부탁을 받아들인다 해도 집을 뒤지느니 우에다 쇼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게 더 나은 해결책이었어요.

이에 대해 마쓰쿠라의 추리 - 우에다 노보루가 형의 퇴학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도 좁고 어차피 형은 아버지랑 살 터였기에. 그래서 알리바이 증거를 찾아내서 없애려고(형을 퇴학시키기 위해) 호리카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호리카와는 인간 관계가 깨져도 무방한 사람이었으니까 - 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형의 퇴학을 바란다면 알리바이를 증명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이 이상적입니다. 구태여 알리바이를 찾아내고, 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늘린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애초에 학교에서 퇴학당할 정도의 위기에 처한다면, 증거 유무와 관견없이 병문안 당사자였던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도 않았을테고요. 모든 상황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마쓰카와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이전에 보여줬던 추리력과 상반될 정도의 비합리적인 주장이라서 오히려 캐릭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리창을 깬건 마쓰카와였다는 결말도 별로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없는 책>>
3학년 선배 고다가 자살한 뒤, 자살한 선배의 친구 하세가와가 도서실에 나타났다. 그는 고다가 책 사이에 유서를 넣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라며, 빌렸던 책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둘은 하세가와의 빌린 책에 대한 언급을 통해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걸 알아채는데....


등장하는 책은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쇼펜하우어의 <<자살론>>.

극히 적은 정보만 가지고 원하는 책을 찾아준다는 이야기는 서점이나 도서관이 무대인 작품에서는 굉장히 많습니다. 아예 이런 내용이 핵심인 <<서점원 하야미>>라는 만화가 떠오르네요. 이번 이야기는 이런 류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반전과 함께 여운도 남기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하세가와가 찾아달라고 하며 알려준 핵심 정보는 고다가 책을 읽다가 덮었는데 책 등이 보였고, 밑에 바코드 스티커가 있었다는 겁니다. 고다가 좋아했던건 소설책이고요. 그런데 현장 조사를 통해 하세가와는 고다의 오른쪽에 있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일본의 소설책은 대부분 세로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므로, 책을 읽다가 덮으면 하세가와의 위치에서 책 등과 스티커를 함께 보는건 불가능합니다. 즉, 하세가와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지요.
마쓰카와는 고다 선배의 유서를 날조하려는 속셈이었다고 하세가와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호리카와는 고다 선배의 유서는 육필이라 위조할 수 없고, 오히려 유서를 받은 뒤 친구가 자살한 탓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은밀하게 유서를 드러내려고 했던 거라고 추리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묵직한 내용에 추리적으로도 좋았으며, 두 주인공의 차이를 강하게 드러내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고, 무조건 나쁜 의도일 것이라 짐작한 마쓰카와의 잘못과 이를 반박하는 호리카와의 말이 대미를 장식하거든요.
선배 교실에 가서 불필요한 연극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는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옛날 이야기를 해줘>>
마쓰카와는 호리카와에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숨겨두었던 현금을 함께 찾아보자고 부탁했다. 그간 호리카와의 추리력을 눈여겨 보았던 탓이었다.
호리카와는 마쓰카와가 내 놓았던 과거의 단서들를 함께 검토하다가 과거 마쓰카와 가족에게 차가 한 대 더 있었다는걸 추리해내었고, 둘은 결국 그 밴을 찾아내는데...


여러 책이 등장하지만 핵심은 아버지 밴 안에 있었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초점".

보물찾기 이야기인데 마쓰카와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호리카와가 잡아낸 마쓰카와의 이야기 속 단서 - 동생이 멀미를 했다는 것 - 라는 착안점은 좋았습니다. 그때까지 마쓰카와는 당시 탔던 차가 렌트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의 멀미는 담배 냄새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담배 냄새가 나는 차를 렌트할리가 없었다는걸 깨닫게 되거든요. 결국 그 차는 빌린 차가 아닌 아버지 차였다는 추론에 이르게 됩니다. 또 이 추리는 자동차로 여행을 가다가 동생이 심하게 멀미를 했었다는 별게 아닌 추억담이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는 점과 호리카와는 마쓰카와가 잊고있던 기억을 떠오르게끔 도와주는 정도의 도움을 줄 뿐이라는 점에서 완벽한 일상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차를 찾아내는 과정, 그리고 차 속에서 발견한 열쇠의 '501호'가 어디인지를 추리하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책'이 중요 단서로 사용된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차 안에 굴러다니던 헌 책이 도서관 '제적본' 책이라는걸 알아낸 뒤, 도서관이 위치한 도시의 5층 건물을 검색한다는 것으로 도서위원인 아이들의 특기가 발휘된 것은 물론이고, 그 도시는 차로만 갈 수 있다는 등의 설정이 덧붙여져 있어서 여러모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일상계 보물 찾기로는 더할나위 없긴한데 딱 한가지 억지가 있습니다. 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라면 당연히 주차비를 냈을테니, 주차비를 내는 누군가는 차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누군가가 그렇게 했던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 그 누군가가 몇 년 동안 차를 뒤져 그 안의 보물을 가져가지 않았을리도 없겠지요. 즉, 자동차가 주차장에 장기 주차되어 있었다는게 밝혀진 순간 보물찾기는 끝났어야 마땅합니다. 이걸 바로 떠올리지 못한건 이상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친구여, 알려 하지 마오>>
호리카와는 도서관 검색을 통해 마쓰카와의 아버지가 돈을 도둑맞은 피해자가 아니라 돈을 훔쳤던 가해자였다는걸 알아낸다. 단서는 마쓰카와 시몬, 레이몬 형제 이름과 이에 대해서 마쓰카와가 '3/5이다'라고 했던 말이었다. 시와 예 (레이)는 중국 고전 5경에서 따왔으니 아버지 이름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리하여 아버지 이름을 검색했던 것이다.

호리카와도 전편에서 독자가 가졌던 의문을 그대로 가지고, 자신의 추리 결과로 도서관에서 기사를 검색하게 됩니다. 자동차가 월 정액 주차장에 남겨져 있었던건 누군가 돈을 계속 냈다는 의미라는 추리는 저와 같은데요, 호리카와는 왜 돈을 계속 냈을까?에서 또 다른 추론을 얻어냅니다. 주차장에 놓여진 차를 처분할 수 없었던건 그 안의 열쇠 때문이었고, 열쇠를 지금 당장은 회수할 수 없었다는 처지였다고요.
그리고 줄거리 요약처럼 '오경'의 한자를 통해 마쓰카와 아버지 이름을 추측하여 검색한 결과, 마쓰카와의 아버지가 절도범이었다는걸 알게됩니다. 즉, 마쓰카와의 아버지는 지금 구속 수감 중이라 열쇠를 회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여기까지의 추리는 기가 막힌데 그 뒤는 특별히 추리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뒷부분은 마쓰카와가 돈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그에 대해 반론하는 호리카와 사이의 자기 주장 대결이 대부분이에요.
마쓰카와가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평소에 돈을 아끼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 이유 등 약간 사회파스러운 분위기가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 약점이란 건 그런 거야. 약점 하나로 세상은 변해….. - 어차피 고등학교 2학년 생이 하는 이야기니 그렇게 깊이있는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호리카와 역시 이상론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뿐이고요.
이야기는 마쓰카와가 그 돈을 찾으러 후미쿠라 정에 가서 건물들을 뒤졌는지, 그래서 돈을 찾았는지 밝혀지지 않고, 평범한 도서위원으로 마쓰카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호리카와 시점에서 마무리됩니다. 아무래도 마쓰카와가 돈을 찾으면 더 이상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을텐데, 어떻게든 마쓰카와가 평범한 도서위원으로 돌아와 이야기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추리도 괜찮았고, 대단원의 막을 장식하기에는 나무랄데 없는 깔끔한 전개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23/04/01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4. 도넛 시계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4. 도넛 시계

경찰서는 아직 페인트 냄새가 남아있는 새로 지어진 깔끔한 건물이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만 없었다면 실적좋은 최신의 회사 사무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접수처의 여경에게 방문 이유를 밝히자, 한 구석으로 안내되었다. 책상 위에 도면을 펼쳐놓고, 양복을 입은 남자가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여경이 토시오가 찾아왔다는걸 알리자 남자는 일어서서 스테인리스 의자를 끌어당겨 토시오에게 권했다.

"안녕하세요, 일부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이 사고를 담당하게 된 사람입니다."

얼굴이 넓고, 입 안의 이빨은 새하얗지만 치열은 심하게 나빴다.

형사는 사무적으로 토시오의 이름과 주소를 물었다. 직업이 무직이라고 대답하자 형사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워낙 특이한 사고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죠."

책상 위에 펼쳐진 것은 사고 현장의 도면이었다. 맨 처음 차량 두 대가 부딪힌 상태로 그려져 있었고, 한 대를 빼고는 큰 차량이 그려져 있었다. 탱크로리 차량인 것 같았다.

"당신의 차는 여기 있었죠?"

형사는 연필 끝으로 유조차 뒤에 있는 차를 가리켰다.

"맞습니다."

"그럼 사고 전후의 상황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토시오는 자신이 본걸 상세하게 말했다.

그림 위에 마사오가 쓰러진 위치가 새로 그려졌다. 반대편에 사람 모양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토모히로임에 틀림없다.

"이 사람은?"

토시오는 그림의 검은색 사람 모양을 가리켰다.

"방금 전에 연락이 왔어요. 사망했다고 합니다. 유감입니다."

"탈출하지 못했습니까?"

"안타깝습니다. 차 트렁크에서 자신의 짐을 꺼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짐 속에 기름 같은 것이 들어 있었는데, 넘어지면서 그 기름이 몸에 묻어 불이 났다고 여러 목격자가 말하더군요. 이 사람은 장난감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회사에 문의해보니 확실히 그런 장난감을 생산하고 있었고요. '도넛 시계'라고 하더라고요."

"도넛 시계?"

토시오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어떤 장난감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른 담당자가 조사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떨어진 유리 파편은 수거해서 감식반에 넘겼습니다. ……그런데........"

형사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눈빛에 의심의 빛이 보였다.

"당신의 차는 경찰서 주차장에 있지 않습니까?"

"아니요, 두고 왔습니다."

"두고 왔다고? 어디다 두었다고요?"

토시오는 말문이 막혔다.

"두고 온 것이 아니군요. 당신 차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을 거에요."

"그런 건 상관없잖아요."

이 말은 형사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형사는 위협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은 마와리 부부가 집을 떠날 때부터 차를 쫓아다녔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택시 운전기사가 증언하고 있어요. 그는 이상한 차가 미행하고 있다고 마와리씨에게 주의를 주었다는군요. 뚱뚱한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여자는 검문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났고요. 그 여자는 어디로 간 거죠?"

"모릅니다."

"차는 그 여자가 타고 간 것이군요."

"몰라요. 그리고 그 일은 그 사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면허증을 보여 주실래요?"

이를 거부하면 마이코에 대해 더 추궁당할 것 같았다. 토시오는 면허증을 꺼냈다. 형사는 면허증을 열었다. 안에서 명함 한 장이 떨어졌다. 형사는 명함을 집어 들었다.

"우다이 마이코.......? 뚱뚱한 여자........"

형사는 명함의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전화기를 끌어당겨 사무실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 우다이 경제연구회인가요?"

"네, 네." 

니시키 빌딩의 구로사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마이코는 사무실에 없었다.

형사는 명함을 뒤집어 마이코의 집 전화번호를 돌렸다. 벨소리만 길게 이어졌다. 마이코는 집에도 가지 않았다.

형사는 명함을 뒤적거리며 이번에는 내선 번호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이쪽은 교통과 교도(京堂)입니다. 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2~3년 전에 정년퇴직한 요코누마 형사를 알고 계실 겁니다. 요코누마 형사의 현재 회사 전화번호를 알고 계십니까? 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교도 형사는 잠시 기다렸다가 연필을 휘둘렀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아, 다이토(大東) 흥신소군요. 이쪽은 에노키마치 경찰서 교통과 교도라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후지오카 씨였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잠시 의례적인 인사말이 이어지고 나서,

"그런데 우다이 씨도 오셨나요?"

곧이어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울려 퍼졌다.

"어떻게 여기 있다는걸 알았어?"

"감이 좋은 덕이지. 기운 넘치네."

교도 형사의 얼굴이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남편은 어때?"

"변함없어."

"그런데 카츠 토시오라는 젊은이가 여기 있어. 당신 사람이지?"

"어머, 그런 말을 했어?"

"아니, 입이 엄청나게 무겁더군. 그 점에서는 감탄했지만. 다만 면허증 사이에서 마이코의 명함이 나왔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데, 왜 도망쳤어?"

"왜냐면 ...... 잘 알잖아."

"...... 마이코도 마음이 약한 부분이 있군."

"뭐가? 확실하게 말해봐."

"넌 마와리 부부의 뒤를 쫓고 있었잖아"

"알아차렸어?"

"택시 기사가 그렇게 말했어. 무슨 일이야?"

"조금 복잡해. 하지만 사고와는 관계없어."

"아니, 관계없더라도 내가 물어보는 거야."

"교도 씨, 과를 바꾼 건 아니지 않아?"

"그래."

"그럼 왜 관계도 없는 것을 집요하게 물어보지?"

"말할 수 없나?"

"아냐, 얘기할게, 하지만 전화로는 좀 그렇잖아. 내일 갈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너무 이상한 사고라서 마이코의 의견도 물어보고 싶은 것 뿐이라고."

"사고의 원인은 뭐였어?"

"그게, 아무래도 운석이 떨어진 것 같아."

"운석?"

"그래, 유성이야. 대부분의 유성은 지상에 도착하기 전에 대기권에서 기화되어 버리지만, 일부는 다 타지 않고 떨어질 때가 있어. 그게 바로 운석이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공위성의 부품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또 어떤 사람은 제트기가 상공에서 떨어뜨린 물이 얼어붙은 것일 거라고도 하고. 하여튼, 지금 전문가들이 조사하고 있는 중이야."

"운석이 자동차에 부딪히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생각도 못한 재앙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럼 내일 보자고."

"잠깐만, 카츠 군 좀 바꿔줘."

교도 형사는 토시오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뭐 괜찮아.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됐어. 그리고, 차에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마사오의 것이었나?"

"네, 맞습니다. ...... 잊고 있었어요."

"카츠 군, 검은색 넥타이는 있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가져와. 잊지 말아. 내일 토모히로의 철야가 있으니까. 알았지?"

"알겠습니다."

"출근은 10시."

"좋아요."

토시오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교도 형사에게 인사를 했다.

"바쁠 것 같군."

"그런 것 같습니다."

"언제 입사했어?"

"오늘입니다."

"오늘........ 마이코도 힘들겠네. 그게 가장 적성에 맞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교도 형사는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을 지었다.

"우다이 씨는 경찰관이었습니까?"

토시오는 샹보르관에서 여종업원에게 검은 수첩을 흘깃거리던 마이코를 떠올렸다.

"그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어."

"왜 그만두셨습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마이코에게도 묻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고 싶으면 도서관이라도 가서 작년 12월 신문을 찾아봐. 3면 기사에 나와 있어. ......"


에노키초 도서관은 경찰서 근처에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은 몇 년 만일까. 직원에게 이유를 말하자 곧바로 두툼한 신문 축쇄본을 꺼내주었다. 토시오는 그것을 열람실로 가져가 한 장 한 장 넘겼다.

12월 1일자부터 마이코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활자가 너무 작아 가끔씩 먼 곳을 바라보며 눈을 쉬어야만 했다. 12월 중순이 지나자 한 작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여경의 부주의'라는 제목이었다.


16일 오후 3시경, 고모리시 에노키마치의 도로변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에노키마치서 교통과 경사 우다이 마이코는 우회전 금지구역에서 우회전하는 승용차를 정지시켰다. 그런데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우다이 순경의 손에 1만엔짜리 지폐 7장을 쥐어주고 도주했다. 우다이 순경이 그 지폐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려는걸 다른 목격자가 신고하여, 우다이 순경은 출동한 경찰차에 의해 뇌물수수, 범인 묵인 현행범으로 연행되었다. 경찰서장의 담화를 통해 우다이 순경은 뇌물수수 의도는 없었고, 도주하는 차를 쫓기 위해 지폐를 잠시 주머니에 넣었다고 말했지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시민들에게 의심을 살 수 있는 행위가 있었던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글을 읽은 토시오는 마이코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이코가 그런 돈을 주머니에 넣을 리가 없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토시오는 축쇄본을 직원에게 돌려주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아름다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노을빛 하늘이었다.

토시오는 시계를 보았다. 백화점에 들러 도넛 시계의 실물을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시오가 백화점 장난감 매장에 가는 것도 몇 년 만일까. 오늘은 여러가지로 유난히 드문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명의 쇼핑객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도넛 시계는 확실히 수많은 진열된 장난감들 사이에서도 튀는, 이채로운 물건이었다. 40센티미터 남짓한 유리 원통형으로,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모양은 모래시계와 비슷했다. 모래시계라면 위쪽의 모래가 아래로 떨어지겠지만, 이 도넛 시계는 아래쪽의 진홍색 물체가 굴곡을 통해 위쪽으로 떠오르는데, 그 뜨는 방식이 참으로 기이했다.

먼저 유리 원통의 아래쪽 부분에 꽉 차 있는 붉은 물체가 마디 부분에서 조용히 떠오르려고 한다. 처음에는 콩알만 한 크기가 점차 작은 계란 정도로 커진다. 마치 수도꼭지에 고여가는 물방울을 거꾸로 보면 이런 움직임이 될 것이다. 계란만 한 크기의 빨간 그릇은 어느 순간 물줄기에서 벗어나 천천히 떠오르다가 문득 전체가 부르르 떨면서 수평으로 퍼져나가며 원반 모양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곧 얇아진 가운데 부분에 구멍이 뚫리면서 전체가 예쁜 도넛 모양으로 변해간다. 빨간 도넛은 천천히 유리 원통 속을 떠올라 천장에 쌓여 있는 빨간 물체에 부딪혀 부서져 사라진다. 그 사이 다시 마디 부분에 새로운 그릇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

"...... 아래쪽의 빨간 물체가 목을 통과해 완전히 위로 모일 때까지 정확히 십오 분이 걸립니다. 도넛이 하나 만들어지고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정확히 1분입니다 ......"

젊은 여직원이 자신만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래쪽 원통에 붉은 색이 완전히 사라지자 여직원은 원통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원통은 다시 수많은 도넛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직사광선이 닿는 곳에 내놓지 말라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인가요?"

한 중년 남성이 여직원에게 물었다. 이 구매자는 도넛 시계에 붙어 있는 작은 스티커를 읽은 것 같았다.

"아니요, 보통은 햇빛에 노출되어도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부에 특수한 유성 액체가 들어있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고온인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경고문은 안전에 대한 제조사의 배려입니다."

여직원의 말투는 이런 스티커를 붙인 제조업체를 부러워하는 듯했다.

"그렇군요, 기름을 사용했군요."

쇼핑객은 감탄하며 말했다. 여직원은 이 고객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도넛 시계의 구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 유리통은 투명하지만 특수한 표면 장력을 가진 투명한 기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음은 이 빨간 도넛입니다. 이것도 특수한 액체인데, 붉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두 액체는 섞이지 않습니다."

점원은 도넛 시계를 들고 양손으로 흔들듯이 강하게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퍼져나가면서 통이 분홍색으로 변했다. 점원은 그것을 보고 조용히 유리 케이스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통은 아래쪽부터 맑아지기 시작했고, 곧 붉은 액체와 투명한 액체로 깨끗하게 나뉘었다. 그리고 시계는 원래처럼 빨간 도넛을 만들기 시작했다.

"...... 두 액체의 비중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빨간 액체가 조금 더 가볍죠. 그럼 잘 보세요. 빨간 도넛이 통의 목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입니다. ...... 보이시죠? 그리고 방출되는 반동으로 액체 아래가 움푹 패이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튕김이 전체에 전달되어 액체가 아름다운 도넛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액체의 표면장력, 통목의 크기, 지구의 중력 등의 미묘한 균형이 잘 맞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마와리 토모히로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할 수 있는 도넛 시계의 생명체를 닮은 움직임에 토시오는 마음을 빼앗겼다. 유리 안의 반투명한 짙은 붉은색이 점점 커져가는 움직임에서 비현실적인 생생한 탄력이 느껴졌다. 도넛 모양으로 변화하는 움직임은 번데기가 나비로 변태할 때와 비슷했다.

"언제부터 판매되고 있었나요?"

토시오는 여점원에게 물었다.

"재작년부터요. 해외에도 수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토모히로가 위험을 무릅쓰고 불타는 차에서 꺼내려고 했던 것이 이 시계가 아니었나 싶었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판매되고 있었다면 국제 완구 박람회에 출품해 상을 노리는 장난감일리는 없었다.

"마도죠라는 장난감은 없나요?"

"마도죠요?"

여직원은 이상한 표정으로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들어본 적도 없네요."

방금 전의 쇼핑객이 지갑을 꺼냈다. 이를 계기로 토시오는 매장을 떠났다.

가게 안의 마이크가 6시 폐점을 알렸다. 다만 식당가는 9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토시오는 갑자기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집을 나온 이후 샹보르관에서 맥주만 마셨던 것이다.

식당 창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도로에는 자동차 불빛만이 흐르고 있었다.

토시오는 식사 전에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허락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사치.

…… 건배.

마음속으로 말한다. 혼자만의 입사 축하라고. 맥주의 쌉싸름한 맛이 지금의 기분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마이코, 마사오, 토모히로, 소우지, 교도 형사 등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니시키 빌딩, 샹보르관, 키타노 제일의원, 에노키초 경찰서, 도서관, 백화점 …… 지금까지 집과 헬스장만 오가던 토시오에게는 눈사태 같은 경험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이 있었다. 마이코의 일이었다. 신문에서 읽은 마이코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맥주의 취기로 마이코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그녀의 집에 가서 사정을 들어보자.

토시오는 일어섰다. '당신은 생각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기는 남자다'라며 토시오를 비판했던 마이코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의 방문에는 핑계가 있었다. 도넛 시계를 봤다는 보고다. 토시오는 백화점을 나와 어두워진 길을 따라 전철역으로 향했다.


낡은 시영주택이었다. 계단 아래에는 세발자전거 몇 대가 방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방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마이코의 방은 4층 구석에 있었다. 노란 커튼 너머로 창문 빛이 보였다.

토시오는 입구에 놓인 우편함을 둘러보았다. 우다이 쇼조(宇内省三)라고 적힌 우체통에 석간 신문이 꽂혀 있었다.

토시오가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위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느린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작게 딱딱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토시오가 망설이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1층 계단에서 돌아서서 나타났다. 거친 얼굴의 남자로 긴 머리에 무뚝뚝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남자는 몸을 새우처럼 구부려 우다이 쇼조의 우편함에서 신문을 꺼냈다. 그리고 목발에 의지해 다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토시오는 우다이 쇼조라고 생각되는 남자의 모습을 본 뒤, 마이코를 만나서 그 사건을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급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토시오는 아파트를 떠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약한 탓에 금방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별들만 보였다. 그때 시야 가장자리에 작은 별똥별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토시오는 걸어가며 찬란하게 쏟아지는 유성우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