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들 -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임지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추리, 스릴러 소설 100선이라는 목록을 소개해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 유일한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서 관심을 두고 있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래생'이라는 시적인 이름의 암살자가 암살 대상자인 '장군'과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 설계자의 명령을 어긴 동료 '추'와 술잔을 나누는 장면, 래생을 노린 흑막 미토 자매와 처음 만나는 장면, 최고의 암살자 '이발사'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 상대편 보스인 '한자'와 담판을 지으며 생명을 내 놓는 장면 등에서 선보이는 묘사, 분위기는 굉장히 멋드러집니다. 음모와 살인이 난무하는데도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게 인상적이에요. "잭 리처" 시리즈와 같은 미국식 범죄 스릴러는 '화끈함'을 강조하는 선명한 색채의 팝 아트라면, 이 작품은 여백의 미가 살아있는 흑백 수묵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타임지에서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나 싶네요.
애완동물 화장장에서 암살한 사체를 태워 은닉한다는 설정에 대한 묘사도 좋았어요. 화장장 주인 털보가 세 딸의 아버지로 생활고를 겪고 있으며, 사체를 태우기 전에 나름의 제사를 진행한다는 기묘한 현실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위기 외에 건질건 별로 없습니다. 기본 설정이 굉장히 유치하고, 내용이라고 부를만한게 없기 때문입니다.
기본 설정은 기본적으로 '설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완벽한 설계를 하는 사람이 있고, 그 설계대로 암살을 실행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래생이 속한 '도서관'의 관장이 '설계자들'의 사주를 받아 암살을 자행하는 조직의 우두머리였고, 그 자리는 지금 관장의 후계자였던 한자가 세운 회사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유치하지요? 차라리 대 놓고 이건 현실이 아니다, 만화와 다를게 없다는 식으로 독자를 설득시키는게 차라리 나았을텐데, 앞서 설명드린대로 묵직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잡으니 굉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협 영화의 탈을 쓴 예술 영화였던 왕가위의 "동사서독"이 떠오르네요.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고아 출신으로 스스로 한글을 깨우쳤다는 시니컬하고 허무주의적인 암살자 '래생', 설계자들에게 희생된 가족의 복수를 위해 스스로 설계일을 하면서 음모를 꾸미는 '미토' 등의 캐릭터도 비현실적이며 모두 다른 작품에서 너무 많이 봐서 신선한 맛도 없습니다. 대표적인게 반시연의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입니다. 해결사 출신 호우는 래생과 아주아주 흡사하고, 건방지고 무신경한 여성 캐릭터들 성격도 판박이였어요. 친구 추가 대상자 창녀에게 연민을 느끼고 살려주었다가 표적이 된다는건 "장미빛 인생"이고요. 고아들에게 살인 기술을 가르쳐 킬러로 키운다는 '시티 헌터' 류의 설정은 이젠 지겹습니다.
내용도 별다른게 없습니다. 대단한 실력자로 보였던 미토가 하는게 없는 탓이 큽니다. 그녀는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설계의 세계를 없애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하지만 래생의 힘을 빌어 조직의 비밀 장부를 손에 넣는 것 밖에는 하는게 없습니다. 그것도 치밀한 설계가 아니라, 단순하게 정면으로 조직 금고가 있는 곳에 쳐들어가서 빼앗아올 뿐이며, 활용하는 방법도 일반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게 한다는게 전부입니다. 즉, '설계자'라는 명칭에 걸맞는 계획이나 설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400페이지 분량에서 래생과 세계관에 대한 설명에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실제 미토의 계획이 진행되는 분량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뭔가를 풀어낼 분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래생이 죽음을 택하는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죽는다고 미토 일당이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미토의 계획대로 법이 나서서 조직을 수사하고 심판받게 하려면, 그녀의 음모와 존재는 조직에게 발견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한자의 숨통이라도 확실히 끊은 것도 아니고.... 죽기 전에 새 옷을 사고 단장하는 등으로 분위기는 한껏 끌어올리지만, 이건 그냥 개죽음입니다. 작가가 분위기에 취해서 그냥 써내려간 느낌이랄까요.
시대에 뒤처진 도서관이 한자의 세력에 의해 몰락해 간다는 것도 너무 뻔한 이야기라 식상했습니다. 시대 흐름을 타지 못한 깡패들이 신흥 세력에게 무너져버린다는건 "영웅본색" 이후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었죠.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서구권에서는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우리 시각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독특함을 불러 일으킨 요소를 걷어내면 뻔한 설정과 이야기에요.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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